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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그 사람

언론인 송건호

by 이성근 2022. 12. 28.

청와대행 거부한 언론인의 일갈 "사실 알리는 건 자유 아닌 의무

 

송건호(宋建鎬, 1927927~ 20011221)는 대한민국의 언론인 겸 저술가이다. 호는 청암(靑巖).1960~1970년대 언론인으로서 민주화 투쟁에 이바지 하였고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에 참여하여 초대 대표이사를 지내다 사장 재직시절 성유보 편집국장과 한겨레신문의 기틀을 만들었다.

옥천=뉴시스이성기 기자 = 충북 옥천군 군북면 증약리에 있는 대한민국 대표 언론인 청암 송건호 선생 생가 터의 목조 슬레이트지붕 단층주택. 옥천군은 이 건물을 매입한 뒤 철거하고 생가 터 정비사업을 벌일 예정이라고 16일 밝혔다.2018.02.16(사진=옥천군 제공)

 

본관은 은진(恩津), 출신지는 충청북도 옥천군(沃川郡) 군북면(郡北面)이며, 1956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과를 나왔다.

 

대학 재학(1955) 시절부터 대한통신의 기자생활을 시작한 이래 1950년대에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의 수많은 언론사의 기자와 논설위원을 역임하고 1974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에 취임하였다. 1975년 동아일보의 정론직필을 못마땅하게 여긴 유신체제는 광고주들을 압박하여 동아일보의 광고를 중단하였고(백지광고사태), 신문의 광고를 재개하기 위해 사주측이 문제 기자들을 해직하자 그는 이에 책임을 느끼고 사직하였다. 이후 씨알의 소리편집위원을 맡고 각종 저술활동과 민주화운동에 종사했다.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받았으나 그해 풀려났다. 1984년 해직기자들을 모아 민주언론운동협의회를 결성하고 기관지인 월간을 발행하였다. 월간은 군사독재 통제하의 언론사들과는 달리 당시 진행되고 있던 민주화운동을 왜곡없이 보도했다. 또한 독재정권의 언론통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던, 이른바 보도지침을 폭로하여 민주화에 큰 기여를 하였다.

 

1988년 독재치하 제도권 언론의 한계를 느낀 민주인사들과 국민들이 6월 항쟁 이후 새로운 언론의 필요성을 느끼고 국민주로 자금을 모아 한겨레신문을 창간하자 그는 사장과 회장을 맡았다. 1990년부터 고문후유증으로 생긴 파킨슨병이 발병하여 활동이 뜸해졌고 수년간 투병하다 2001년 사망했다.

 

언론인으로뿐만 아니라 저술가로서도 많은 저작을 남겼고, 1991년 제7회 언론상, 1994년에는 호암상을, 1999년에는 금관문화훈장을 수상하였다. 사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주요 저서

민족지성의 탐구(창작과비평사, 1975)

현실과 이상(정우사, 1979)

민중과 민족(명진사, 1979)

서재필과 이승만(정우사, 1980)

한국민족주의의 탐구(한길사, 1984)

한국현대인물사론(한길사, 1984)

의열단(창비, 1985)

한국현대사(두레, 1986)

분단과 민족(지식산업사, 1986)

해방전후사의 인식(공저, 한길사, 1989-90)

드골: 프랑스의 영광(탐구당, 1992)

한국언론 바로보기 100(공저, 다섯수레, 2000)

 

상훈

1991년 제7회 언론상

1994년 삼성 호암상

1999년 금관문화훈장

2002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

 

추모

2001년 송건호 기념 '청암언론문화재단' 설립

2001년 송건호언론상 제정

 

언론탄압 맞서며 재야활동, <>지 창간... 20세기 최고 언론인 청암 송건호 선생의 생애

20세기 최고 언론인으로 평가 받는 청암 송건호 선생은 1927927일 충북 옥천에서 태어났다. 기자로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던 중에 군사정권 시절 언론탄압에 맞서며 재야 활동을 시작했고 해방전후사의 인식 등을 출간하는 등 한국현대사 연구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은평시민신문 창간 18주년을 맞이해 우리 곁에 함께 계셨던 청암 선생을 만나보고자 한다. 다음은 청암 송건호 선생의 장남 송준용씨와의 인터뷰 내용과 책 <청암 송건호>(한겨레출판, 2018.12)를 참고해 재구성한 글이다.

 

"저들이 다 맞다, 죽으면 죽었지 못하겠다"

역촌동 자택 지하실에서. 두 번 침수되면서 책이 상해서 청암의 상심이 컸다. (사진제공 : 청암언론문화재단)은평시민신문

 

서울 은평구 역촌동은 청암 송건호 선생이 1972년부터 9월부터 20011221일 돌아가실 때까지 지낸 곳이다. 한창 기자로서 맹활약을 펼치던 시기부터 언론탄압에 저항하며 재야에서 활동했다. <>지 창간, <한겨레신문> 창간 등 언론사에 남길 굵직한 업적을 남긴 모든 시기를 역촌동에서 보낸 셈이다.

 

현재 청암언론문화재단 상임이사를 맡고 있는 송건호 선생의 장남 송준용 이사는 역촌동으로 이사 오던 순간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19729월에 은평구 역촌동으로 이사를 왔어요. 저는 대조초등학교 6학년으로 전학을 왔죠.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가 아버지가 일선 기자로서 최전성기를 달릴 때였어요. 동아일보 수석 논설위원, 통일문제 연구소장으로 계시면서 남북적십자 회담을 두 차례 갔다 오셨어요. 일선 기자로서 전성기 때 은평으로 이사를 온 셈이죠. 그 당시 역촌동은 그냥 비만 오면 진흙탕이었는데 거기 단독주택으로 와서 거의 20년 가까이 계신 거죠. 돌아가신 날까지."

 

1974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에 오른 송건호 선생은 서슬 퍼런 유신체제 아래에서도 민주화운동을 보도하고 사회의 부조리와 병폐를 고발했다. 하지만 정권에 불리한 보도를 했다는 이유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돼 폭언을 듣고 뺨을 맞는 수모를 겪기도 했고 문화공보부가 언론사에 내린 '보도한계지침'을 어겼다고 연행되기도 했다.

 

민주화를 열망하는 시민들의 활동이 이어지고 이런 움직임을 적극적으로 보도하려고 나선 기자들이 사측과 대립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청암은 1975년 초 "사실을 국민과 정부에 알리는 것은 언론의 자유가 아니라 의무"라고 밝히며 자유언론운동을 지지했다.

 

동아일보는 19753월 경영난을 이유로 기자 18명을 해임했다. 회사의 강경책에 맞서 제작거부에 들어갔던 기자들은 강제해산 되고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가 결성됐다. 청암은 눈물로 사태해결을 호소하며 수습에 나섰지만 회사는 그의 사표를 수리했다.

 

송준용 이사는 "아버지가 '죽으면 죽었지 (기자들 해고는) 못하겠다. 저 사람들 얘기가 다 맞고 옳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사표를 내셨다"고 전했다.

 

재야로 나와서도 계속된 정론직필

동아일보를 떠난 건 역촌동으로 이사 온 지 3년 만의 일이었다. 당시 6남매의 아버지였고 가장이었던 그가 느꼈을 암담함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지만 실제 그가 만난 현실은 더 참담했다.

 

재야로 나온 청암이 할 수 있는 일은 글쓰기와 강의였다. 하지만 그마저도 녹록지 않았다. 원고료는 턱없이 작았고 정권 눈치를 보는 학교는 그에게 오랜 시간 강의를 맡기지 않았다. 기본적인 생활고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면서 청암은 일종의 공황장애를 겪게 되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어지러워 토하고 일어서지도 못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순간을 버티게 해 준건 부인 이정순 여사였다.

1973년 동아일보 논설위원이던 시절, 정계를 은퇴한 박순천 여사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제공 : 청암언론문화재단)은평시민신문

1972년 가족사진. 그의 생애에서 비교적 평온하던 시절이다. (사진제공 : 청암언론문화재단)은평시민신문

 

"어머니는 아버지하고 성격이 완전히 다르셨어요. 여장부 스타일이셨어요. 어머니가 버텨주셨기 때문에 아버지도 활동할 수 있으셨죠."

 

송준용 이사가 기억하는 이버지는 내향적이고 꼼꼼한 선비 같은 반면 어머니는 외향적이고 씩씩하고 대범한 분이다.

졸지에 직업을 잃고 재야로 나온 당시 상황을 청암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한 달에 20만 원 봉급으로도 힘겨울 판인데 그나마 한 푼도 안 들어오게 되었으니 장차 생활대책을 어떻게 세워야 하는가.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면 밤에 잠이 오지 않았다. 생활에 대한 불안감이 끊임없이 엄습해왔다. 어느 날 갑자기 두려워지곤 했다. 이럴 때면 나는 미친 듯이 서오릉 쪽으로 달려갔다. 숨이 차 헉헉하면서도 두려움은 떠나지 않았다." - <청암 송건호> 중에서

 

재야활동을 하는 청암에게 박정희 정권은 몇 차례나 청와대에 와서 일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그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청암은 "나는 행정가가 아닌 언론인"이라 말하며 뿌리쳤다. 하지만 어느 날은 제안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전봇대를 붙잡고 울었다 한다. 편한 길을 앞에 두고 험난한 길을 선택한 그도 힘든 생활에 대한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유혹이 굉장히 많았죠. 청와대에서 이제 그만큼 했으면 됐으니까 6개월 정도 세계일주 하다 청와대로 들어오라고요. 그런데 아버지는 거절하셨어요. 몇 번이나 거절하셨죠. 아버님 성격이 워낙 꼬장꼬장하셔서 나중에 정보부 사람이 존경한다고 그러더군요."

 

송준용 이사는 늘 집 근처에는 아버지를 감시하던 정보요원들이 있었다고 전했다.

 

청암의 별명이 '형광등'인 이유

1980년 짧았던 민주화의 바람 속에 청암은 편집권 독립, 언론개혁을 주장하고 나섰다. 또한 장을병, 백낙청 등과 만나 '나라가 나아갈 방향은 제시하는 것은 지식인의 책무'라는 인식을 같이하고 모임을 만들어 시국선언을 하기로 했다. 선언문에서는 비상계엄령 해제, 학문과 발표의 자유보장, 대학 자율성 보장, 언론의 독립과 자유 보장 등을 촉구했다. 하지만 그 선언문은 청암을 옭아매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송준용 이사가 전하는 이야기다.

"저도 서울역 앞에서 막 휩쓸려서 같이 데모를 하는데 유인물이 뿌려졌고 그 134인 지식인 시국 선언이 떨어져서 봤어요. 나중에 보니 아버지하고 몇 분이 모이셨고 아버지가 그 초안을 잡아서 발표한 거였어요. 그게 빌미가 돼 며칠 후에 끌려가셨죠."

 

1980520일 남영동 치안본부로 끌려가 19일간 가혹한 취조를 받은 청암은 정치인 김대중의 돈을 받아 동아투위에 전달했냐고 묻고 그가 거짓 자백을 할 때까지 매질을 퍼부었다.

 

"원고 청탁 받은 거 써서 줘야 한다고 막내 고모집에 있다가 잡히셨어요. 남영동 치안본부에 끌려가서 엄청난 고문을 받고 중앙정보부로 가셨죠."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이 열리자 남한적십자대표단 자문위원으로 두 차례 북한을 방문했다. 판문점 내 북측 지역인 판문각 앞에서 (사진제공 : 청암언론문화재단)은평시민신문

<창작과 비평>에 실린 '1980년대를 맞이하며' 좌담회 중. 이 좌담은 비상계엄 아래서 삭제된다. 강만길, 백낙청, 서남동과 함께 했다. (사진제공 : 청암언론문화재단)은평시민신문

 

가족을 다시 만난 건 7월이 되어서였다. 당시의 고통스런 기억을 송준용 이사는 이렇게 전했다.

"처음 한두 달은 정말 고통이었어요. 어디에 계시는지 살아 계신지, 돌아가신 건지 아무것도 몰랐으니까요. 서대문구치소에서 아버지를 만난 기억이 지금도 선명한데 완전 백발로 바뀌셨더라고요. 몸도 한 십키로는 빠져 있는 것 같고 체구도 왜소한데 더 빠지신 거죠. 그때 가족들이 붙잡고 울었던 기억이 나네요."

 

당시 상황을 청암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어느 날 담당관한테서 기쁜 소식이 왔다. 가족과의 연락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내가 넣어준 담요도 들어왔다. 담요를 어루만지며 나는 울었다. 2개월간 생사조차 모르던 가족들이 그간 얼마나 궁금해 했을까." - <청암 송건호> 중에서

 

"서대문구치소에서 6개월 계시다 육군 교도서에서 나오셨어요. 12월 말에 나오셨는데 큰누나 결혼 며칠 전에 나오셔서 결혼식 참석은 하셨죠."

 

송준용 이사는 평소에 메모를 많이 하던 아버지가 출옥 후에는 달라졌다고 한다.

"기자 생활할 때 수첩에 기록을 다 하셨어요. 일일이 누구를 만나고 무슨 일을 했는지 기록하셨는데 그렇게 끌려갔다 나오신 뒤로는 안 쓰셨어요. 그 수첩이 빌미가 돼 많은 사람들이 고초를 받았기 때문이죠."

 

김대중 내란음로 사건으로 구속된 인사들 중에는 한승헌 변호사와 이호철 작가도 포함돼 있었다. 두 분 다 은평구에 거주하면서 청암과는 친분을 유지하는 관계였다.

"생전에 교류를 많이 했죠. 한승헌 변호사님께는 제가 청암언론문화재단 이사도 부탁드려서 도와주시기도 했고요. 수십 년간 교류가 있었어요. 이호철 선생님도 마찬가지고요."

 

이호철 선생은 청암 선생을 보고 형광등이라는 별명을 선물했다고 한다.

"아마 아버지 본인의 관심사 외에는 좀 둔감하신 편이어서 그런 별명을 붙였을 거예요. 대신 글을 쓰거나 자료를 모으는 건 정말 꼼꼼하셨죠."

 

송준용 이사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늘 손에 뭔가를 들고 읽는 모습이다.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책을 구입하는 일은 늘 우선순위였다. 그렇게 모은 책과 자료는 역촌동 주택 지하에 공간을 마련해 보관했다.

 

"역촌동 집 지하에 두 번이나 물이 찼어요. 아버지 책이 지금은 국회도서관에 있는데 가서 보면 아마 얼룩덜룩한 책들이 많을 거예요. 그걸 가족들이 한 권 한 권 다 펴서 말렸죠. 그러다 또 비가 오면 난리가 나고 그러기를 몇 달 했어요. 그래서 책이 좀 상한 것도 있는데 아버지는 되게 가슴 아파 하셨죠."

대외활동에 제약을 받으며 감시와 생활고로 암울하던 80년대 초반, 청암은 '거시기산악회'에서 재야인사들과 산행을 하며 위로를 얻었다. 이돈명, 리영희, 백낙청, 이호철, 변형윤 등과 산에 올랐다. (사진제공 : 청암언론문화재단)은평시민신문

 

술과 담배를 입에 대지 않은 청암에게 책을 읽고 등산을 하는 시간은 건강과 마음을 챙기기에 더없는 시간이었다. 청암은 매주 일요일이면 교수·화가·언론인 등이 함께 하는 '거시기산악회'에 참여했다.

 

"등산을 좋아하셨는데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이셨다고 해요. 아버지 혼자 새벽에 봉산에 가서 약수터 물도 떠오시고 그날 쓸 글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고 집에 와서는 스크랩을 하시거나 뭘 쓰시거나 그냥 가만히 계실 때는 없었어요."

 

출옥 후 건강상태가 좋지 않았던 청암은 모임이 있을 때마다 졸아 가족들이 '고사리'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고 한다. 종합 진찰을 받았지만 옥고를 치를 때 골병 든 몸은 엑스레이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허리와 팔이 아파 생활하는 데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지의 시작

신군부가 들어선 이후 언론인을 강제 해직시키고 언론사의 편집과 제작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청암은 언론기업이 권력과 결탁한다면 언론자유는 침해될 수밖에 없다는 문제의식을 드러냈다. 1984년 봄 새로운 언론운동 단체를 만들기 위해서 해직기자와 출판인들이 모여 청암을 찾았다.

 

그 해 12월 민주언론운동협의회(언협)를 창립하고 19856월 언협 기관지인 <>을 창간했다. <>지는 제도권 언론이 보도하지 않던 국내외 사건을 알렸지만 의장이던 청암이 경찰서로 연행되기도 했다. 19869<> 특집호에서 보도지침 사건을 폭로하면서 정권의 비도덕성과 반민주성이 드러났고 정권의 강경대응은 그 수위가 높아져만 갔다.

 

당시 잡지 발행을 두고 소나기를 피하자는 의견과 굴복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갈렸다. 모두 일리 있는 말이었지만 청암은 단호하게 발행을 이어갔다. <>지는 19876월 항쟁까지 민주화진영의 홍보물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민주언론운동협의회창립총회에서 의장으로 추대 받은 청암이 실무진을 소개하고 있다. 19841219, 서울 장충동 '성 베네딕도 왜관 수도원 피정의 집'. (사진제공 : 청암언론문화재단)은평시민신문

19871030일 한겨레신문 창간 발기 선언대회에서 각계각층의 참석자들에게 창간을 선언하며 지지를 호소하는 송건호 새 신문 창간위원회 위원장(왼쪽), 공덕동 사옥 신축 현장에서. 사옥을 마련하여 경영안정화를 이룰 수 있었다. (오른쪽) (사진제공 : 청암언론문화재단)은평시민신문

 

해직기자들은 새 신문을 준비하며 청암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자유언론을 향한 신념이 투철하고 민주언론운동을 이끌던 그를 적임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1988년도에 한겨레 창간하고 5년 정도 계시다 물러나셨죠. 참 고생하시면서 신문 창간을 했는데 갈등도 많았던 것 같아요. 창간 주역, 중간에 들어온 이들 간의 갈등, 노선 차이, 편집 방향 등에서 의견이 달랐죠. 제가 재단을 만든 이유도 한겨레 갈등 속에서 아버지가 너무 힘든 모습을 봤고 아버지는 내가 지켜야겠다는 생각이었어요. 돌아가시기 몇 달 전에 재단을 만들었고 돌아가시고 난 다음해부터 언론상 시상을 했어요. 아버님이 쓰신 책을 전집으로 꾸며보고 평전도 만들었고 몇 년 전부터는 대학 사진전도 하고 있어요."

 

창간 초기부터 청암의 건강상태는 좋지 못했다. 회의 중에 졸기도 하고 기억력도 예전 같지 않았다. 19936월 그는 대표이사에서 물러나 비상임 고문으로 추대됐고 병세는 빠르게 나빠졌다.

 

"아버지가 파킨슨병 증후군으로 몸이 굳어가니까 몇 년 동안 좋다는 데는 다 모시고 다녔는데 점점 안 좋아지셨어요. 음식도 잘 못 넘기고 하니 병원에 입원했는데 병원비도 비싸고 하니 집에서 간병을 했어요. 어머니가 참 대단하신 분이죠. 어머니가 안 계셨으면 더 일찍 돌아가셨을 거예요."

 

2001년 청암이 세상을 떠나자 장례위원장 한승헌 변호사는 "청빈의 어려움, 박해·수난의 어려움 등 이 세상의 온갖 고난 풍파를 이겨내시고, 선비의 길, 지사의 길, 언론인의 길, 의인의 길을 걸어오셨다"고 청암의 일생을 평했다.

국립 5.18 민주묘지에 잠들어 계신 청암 송건호 선생 (사진 : 유지민)은평시민신문

은평시민신문 박은미(epnews)/ 오마이뉴스

 

 

언론 자유란 상식 지키기 위해 투사가 된 아버지, 송건호

나에게는 자식으로서 아버지께 해드릴 마지막 과제가 있다. 이는 아버지의 삶을 정리하고, 아버지의 참된 삶과 정신이 사람들에게 기억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20003. 병상에 누운 송건호 선생을 간호하던 장남 송준용 씨가 적은 글이다. 민주언론시민운동연합이 발간하던 격월간지 시민과 언론에 실렸고, 2018년에 발간된 청암 송건호에 다시 전재됐다. 20011221, 송준용 씨는 아버지를 떠나보냈다. 그로부터 딱 20년이 흐른 즈음 그를 만났다. 송준용 씨는 송건호 선생을 기념하는 청암언론문화재단의 상임이사로 그 20년을 보냈다. 송건호 선생의 참된 삶을 정리하고 그 정신이 사람들에게 기억될 수 있도록 하는데 보낸 시간이다.

 

이게 제가 여유가 있어서 하는 건 아니거든요. 가족이 할 수밖에 없고. 오래 지속되기 위해서는. () 저는 그냥 제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하자, 무리하지 말고. () 그래서 여태껏 오게 된 거고, 앞으로도 그냥 살아있는 한은 이 정도까지만 유지하자, 이게 목표예요.”

 

사람들은 무슨 재단에 상임이사를 한다고 말하면, 돈깨나 깔고 앉아번듯한 사업을 벌이지만 딱히 바쁘거나 힘들 것도 없는 한직(閑職)을 떠올린다. 말마따나 재물 덩어리’, 재단(財團) 아닌가. 그러나 우리나라의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던 이들을 기념하는 재단의 현실은 대개 그렇지 못하다. 부귀영달을 거부하고 나섰던 저항의 길에서 후손에게 남겨줄 만한 물적 유산을 축적하기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을 테고 그와 함께했던 이들 역시 거금을 희사할 만큼의 부유함과는 거리가 먼 게 일반적이다. 송건호 선생을 기리는 청암언론문화재단 역시 다르지 않다. 어쩌다 보니 꼬장꼬장한 아버지를 갖게 됐을 뿐인 장남 송준용 씨에게 떨어진 몫이었다. 송건호 선생이 잊히지 않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몇몇 사람들의 헌신, 그리고 송건호 선생이 초대 사장을 맡았던 한겨레의 지원 덕에 송건호 선생 사후 20년을 무리하지 말고기념해올 수 있었다고 그는 말한다.

 

투사 같지 않던, 자상한 아버지

제 아버님은 전혀 투사같지 않으셨어요. 어떻게 보면 너무 정직해서, 고지식하다고 할까. 남들이 보면 좀 어리숙하다고 할까. 그러니까경제적인 면 이런 것들에서 상당히 어리숙하신 면이 있었어요. 또 자애지정(慈愛之情)이 매우 많으셔서 (저희 어릴 적에 찍어주신) 사진도 많아요. 저희가 육 남매인데 애들 데리고 옛날에는 동작동 국군묘지라고 불렀던 곳(지금의 국립현충원 근처에 있던 산과 계곡)에 매주 가시고. 산에도 애들 꼭 데려가고.”

 

대한민국의 언론 자유 투쟁을 상징하는 강건한 인물, 학자적이면서도 비타협적인 신념이 배어 나오는 저술로 기억되는 송건호 선생에게 어리숙한면이 있고 자녀들을 향한 자애가 넘쳤다니. ‘의외라고 말하면 실례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송건호 선생 생전에 인간적으로 깊은 교분이 있었던 사람이 아니라면 선뜻 떠올릴 수 있는 인상은 아닐 듯했다. 이런 기억을 회상하는 송준용 씨의 얼굴엔 아련함과 함께 소년의 미소 같은 것이 비쳤다. 마스크 위로 드러낸 두 눈망울에 말 그대로 주마등(走馬燈)’처럼 과거가 스쳐 가고 있음이 내게도 보였다.

 

사진 취미가 있으셨어요. 옛날에 조선일보 있으실 때 독일에 한 5개월 가 계셨는데 그때 라이카 카메라를 사신 것 같아요. 그래서 그걸로 사진을 굉장히 많이 남기셨거든요. 슬라이드 필름으로 저희 어린 시절을 많이 찍어주셨죠. 녹음기랑 영사기 같은 것도 사셨는데, 매년 말에 육 남매 다 앉혀놓고 녹음기에 대고, 왜 그런 것 있잖아요, ‘올해 1231일이 저물고 있습니다이런 거 이야기하면서 한마디씩 말하게 하고. 노래도 시키고, 그랬죠. 그리고 운동회나 이런 데 빠짐없이 나오셨어요. 제 운동회에 오셔서 막 달리기도 하고. 그때는 한강이 아직 개발 안 됐을 땐데, 거기도 가족 데리고 가고 그런 경험은 많이 있죠.”

 

자식을 사랑하는 평범한 아버지의 모습. 아니 어쩌면, 누구나 가난하고 혼곤했던 그 시절, 삶에 지쳐 가족에게 무심하거나 무뚝뚝하기에 십상이었을 수많은 아버지들과는 달리, 소소한 잔정을 아낌없이 보여줬던 송건호 선생의 모습이 새롭다. 여기까지만 보면 꽤 다복하고 단란했던 한 중산층 가정을 연상시키는 기억이지만, 송건호 선생의 역정은 가족에게 행운보다는 불운을 더 많이 안겨줬을 법하다.

 

“(그렇게 자식들에게 자애롭게 대해주셨지만) 외식은 거의 한 적이 없어요. 저희가 육 남매인데, 돈이 없잖아요. 참 힘들었죠. 제 어머니는 (아버지와는) 180도 성격이 달라요. 굉장히 외향적이고 명랑하고 하시기 때문에 그 애들 여섯 명을 다 옷도 만들어서 입히고 그러셨거든요. 사실은 아버지가 어머니 덕분에 (대외활동을) 그렇게 하실 수 있었어요. () 19753월에 (동아일보의 기자 강제 해직에 항의해) 그만두시게 되죠. 그때부터 힘든 일이 계속됐죠. 자식들이 성장해서 자기 직장을 갖기 전까지는 계속. () 제 셋째 누나는 대학을 못 갔어요. 그 위에 둘이 대학을 다니고 있어서, 그 누나는 고등학교만 나오고. 생활이 많이 어려웠죠.”

 

송준용 씨는 앞서 언급했던 글에서 당시의 일을 회상하며 어려운 경제적인 삶 속에서도 끝까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걸으셨던 아버지도 대단하셨지만, 그에 못지않게 그러한 지조 있는 삶을 아버지가 사실 수 있도록 내조한 어머니의 희생적인 삶 또한 가려져서는 안 될 것이라고 적은 바 있다. 어찌 보면 가족의 입장에서는 시쳇말로 행복 끝 불행 시작의 기점이랄 수도 있었던, 그러나 우리 사회의 입장에서는, 민주주의의 수혜자이기만 했던 한국 언론의 자존심을 지켜준 그 역사적 장면이 송준용 씨에게는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을까?

 

저는 솔직히 잘 몰랐어요. 그때 저는 중학교 3학년이었는데, 신학기 즈음이어서 교실에 들어갔는데, 국사 선생님이 딱 들어오셔서는 누구누구 아무개 있냐?’ 그러시더니 일어나보라고 하시더군요. 저는 제가 뭘 잘못했나 생각하며 일어났더니 다 박수 쳐라.’ 그러시는 거예요. 그래서 다들 박수를 치면서도 왜 치는 건지 몰랐죠. 물론 저야 집안 분위기는 알고 있었어요. 만날 아버지와 어머니가 말씀 나누시고 그러면서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긴 것 같다는 정도로) 알고 있었죠. 국사 선생님이 나중에 (아버지 관련된 내용을) 쭉 설명을 하는 거예요. 또 담임선생님이 정치·경제 선생님이셨는데,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걸 설명하시면서 그 사건을 빗대서 얘기를 해주시더라고요.”

 

상식적으로 사고하고 자신의 상식에 충실했던 사람

서슬 퍼런 유신 치하에서도 정권에 의한 언론 탄압의 부당함과 그에 저항하는 언론인들의 정의로움에 대해 민중들은 교감하고 있었던가 보다. 당시 시대 분위기상 교사들이 대놓고 정부에 반한 이야기를 하긴 어려웠을 법도 한데, 송준용 씨의 선생님들은 악화가 누구고 양화가 누구인지 알려주며,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정확히는 깨닫지 못했을 중학교 3학년의 송준용 씨를 추켜세웠고 그 부친의 정의로움을 상찬했다. 박정희 체제는 그렇게 밑으로부터 부정되고 있었다. 19791026일에 유신 독재는 종막을 내리고, 1980년 서울의 봄이 찾아왔다. 세상이 바뀌는 듯해선지, 송건호 선생의 집에는 별안간 사람들이 들끓었다. 자칭타칭 민주인사에서부터, 집안 어른이 혹시나 영전이라도 하면 조금이나마 얻어먹을 게 있을까 엿보는 먼 친척들까지. 하지만 그 시간 역시 오래가지는 못했고, 사람들도 이내 흩어졌다.

 

지식인 134인 선언인가 그걸 (아버지께서) 쓰셔서 유인물로 뿌렸고, 저도 현장에서 봤거든요. 그러고 나서 그다음 날인가, 긴급 전국 계엄이 나오고 그러니까 누가 전화를 해주셨어요. ‘빨리 피하시라. 그래서 그때 피하셨다가 며칠 뒤에 제 막내 고모네 집에서 잡히셨어요. 이 사람들은 (아버지가) 어디 멀리 도망치셨을 거라 생각하고 사돈에 팔촌부터 해서 좁혀오느라 이틀 걸린 거예요. 근데 아버지는 마감되기 전에 글을 넘겨야 한다고 (멀리도 안 가고) 여동생 집에 가서 글을 쓰시다가 잡히신 거죠. (웃음)”

 

그토록 급박하게 정세가 변하는 와중인데도 마감을 넘기지 말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고작해야 등잔 밑에 숨었지만 그 어둠은 그리 짙지 않았던 것 같아, 나도 모르게 공감하는 웃음이 나왔다. 그래, 글쟁이에게 글만큼 중요한 게 또 어디 있으랴.

송건호 전 경향신문 편집국장은 반독재, 민주주의의 길을 걸은 언론인이자 올곧은 삶의 지표를 보여준 지성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제 아버지는 무슨 교과서적인 이야기를 많이 하세요. 무슨 특출나게 엄청난 이론이 나올 거라고 생각하는데 안 그렇거든요. 만나서 이야기하다 보면 상식적인 얘기죠. 근데 상식이 지켜지지 않는 사회다 보니까, 그리고 본인이 말만 앞서는 게 아니라 그 상식적인 이야기를 지키는 사람이다 보니까. 서울의 봄 때 아버지께서 목이 쉴 정도로 강연을 많이 다니셨는데, 아버지께서 말년에 파킨슨병을 앓으실 때 담당해주시던 서울대 의사 선생님이 학생 때 그걸 들으셨던가 보더라고요. 아버지 강연이 예정돼 있으니까 형사들이 쫙 깔리고 당시 교무처장이 엄청 긴장했었다고 해요. 근데 거기서 아버지께서 의사들은 공부해야 된다시면서 여기서 의사 되려는 학생은 이렇게 데모하고 그러면 안 된다, 공부 열심히 해서 나중에 사람 살리고 이런 일을 하는 게 의미 있는 일이다그러니까 듣던 학생들이 약간 실망을 하죠. 학교 측에서는 되게 좋아하는 거고요. (웃음) 글만 보면 되게 과격하고 그럴 줄 알았는데 만나보면 좀 샌님 같은 그런 스타일이세요. 남산 중앙정보부에서도 막상 만나보니 너무 다르니까 좀 놀랐다는 얘기도 했다더군요.”

 

지극히 상식적으로 사고하고 자신의 상식에 충실했던 사람. 그랬기 때문에 그 상식을 위배하는 일에 대해선 온몸으로 저항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던 인물, 송건호. 그를 단순히 이상주의적 지식인으로서의 언론인이었다고 해야 하는 걸까? 그와 같은 말속에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순수함이라는 뉘앙스가 들어가 있고, 따라서 현실에서는 구현되기 어려운 언론인상이라 치부하는 문제가 있다. 언론인이 언론인으로서의 소명을 다하는 것에 충실히 하고자 하는 게 비현실적인 이상이 되는 그런 현실 자체가 정작 비상식적인 것 아닐까?

 

아버지는 (민주화 운동의 대부이기는 하셨지만) 언협(언론협의회) 회장으로서 이름만 걸어두신 거예요. 오로지 언론에 연관된 테두리 안에서만 하신 거죠. 혈기왕성한 지 기자들에게도 항상 사실 확인하고 기사 써라, 눈으로 보지 않은 걸 상상해서 쓰지 말아라 말씀하시니까 (성에 차지 않았을 거예요). 항상 책을 읽고 공부를 해라, 그런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신 거예요. 그리고 정치하지 말라고 하신 거고. 정치를 하면 자기 소신을 지킬 수 없는 경우가 많고,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 정치를 해도 욕을 먹을 수밖에 없고, 사람 다 망가진다. 그런 어떻게 보면 상식적인 얘기만 계속 강조하신 거예요. 그게 (옆에 있는 이들에겐) 좀 못마땅했을 수도 있죠. 언론 운동하다가도 정치로 가서 더 사회 개혁을 해야 한다 이런 주장을 펴는 사람도 있는데, 고리타분하게, 상식적으로, 언론에 관련된 정도(正道)만 이야기하시니까.”

 

넘기 어려웠던 언덕, 한겨레신문 창간

언론인이 언론인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언론 현실에 저항해서 사표를 던졌던 송건호 선생은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까지 역사적 저술을 남기는 데 매진했다. “춥고 배고파야 좋은 글이 나온다. 배부르면 글도 안 쓰게 된다. 쫓기고, 막 원고 독촉받고 그러면서 좋은 글이 나온다라고 아들에게 이야기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송준용 씨는 또렷이 회상한다. 그러던 와중에 1987년 민주화가 이뤄졌지만, 민주 정부 수립의 꿈은 좌절됐고, 상심한 이들의 희망은 한겨레신문이라는 국민 신문의 창간으로 모였다. 다시 한번 시대의 부름을 받은 송건호 선생은 펜을 놓고 한겨레신문 창립 발기인으로, 그리고 다시 초대 사장에 임했다.

 

한길사에서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내신 다음 그 이후 작업을 하려고 하시던 중에 나가시게 된 거죠. 그때부터 시간도 없으시다 보니까 글을 못 쓰셨고, (건강이) 안 좋아지셨어요. 고문 후유증이 나타나고, 또 경영이란 게 해본 사람도 어려운데, 워낙에 잘 맞지 않은 일을 감당하셔야 해서 힘드셨던 것 같아요. 6만 명 넘는 (강한 열망과 의견을 지닌) 주주들이 당신 보고 주식을 샀는데 이렇게 운영하면 되겠냐며 개별적으로 항의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래서 그 스트레스가 굉장했거든요. 글은 거의 못 쓰셨죠.”

 

어찌 보면 한국 민주화운동의 가장 중요한 소산 가운데 하나이자, 언론 자유 투쟁의 상징인 송건호 선생의 이상을 집약시킨 산물이었다고 할 만한 한겨레신문의 창간이, 고문으로 인해 상처 입은 그의 정신과 육신에는 가장 넘기 어려운 언덕이 됐던 셈이다. 결국 파킨슨증후군이 찾아왔다. 몸을 가누기 어려웠다. “나는 오늘도 병상에 누워 계신 아버지와 얼굴을 대하고 아버지 눈을 바라보며 대화를 한다. 그렇게 날카롭고 반짝거리던 눈빛은 어디로 가고 힘없는 아버지의 눈동자 속에서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본다고 썼던 송준용 씨는 그런 아버지의 간병을 위해 아주 먼 곳에 있는 한의원까지 모시고 다녔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곳이라, 나날이 여위어가는 아버지를 업고 계단을 오르내렸다. 수전증으로 원고 집필조차 어려워지자, 아버지의 구술을 받아 적으며 후일 유고가 될 글을 어렵사리 남겼다. 물욕이 거의 없다시피 했던 아버지가 유일하게 아끼던 물건인 책과, 일생을 바쳐 수집하고 정리해둔 자료를 모아 한겨레신문사 서고로 옮기던 날, 휠체어에 앉은 아버지는 멀어져 가는 자신의 책더미를 한참이나 바라다보고 계셨단다. 송준용 씨는 아버지의 병상 옆에서 이렇게 적었다.

 

나는 다시 희미해져 가는 아버지의 눈동자를 바라본다. 아버지의 눈을 바라보면서 나는 스스로 중요한 결심을 하게 된다. 자식들에게 떳떳한 아버지를 재산으로 남기신 아버지께 나 또한 떳떳한 아들로서 아버지 이름을 부끄럽게 하지 않고 자식들에게도 당당한 아버지로서 살아갈 것을 말이다.”

그렇게 송준용 씨는 부친의 마지막을 지켰고, 사후 20년에 이르는 시간을 송건호 선생에 대한 기억과 그 자취를 정돈하는 데 썼다.

 

청암언론문화재단은 그냥 제가 생각했던 것 이상은 했어요. 처음에는 아버지의 저술을 정리해서 전집을 만들자. 그리고 아버지의 이름으로 언론사는 하나 만들어야 하겠다. (아버지가 창립하신) 민언련(민주언론시민연합)하고 세미나든 뭐든 작은 사업을 정기적으로 하자. 그 정도 생각했죠. 어느 정도 된 것 같아요. 그리고 이제는 아버지의 고향인 옥천 분들이 기념사업회를 만들어 주시고 공동체라디오를 개설하면서 훨씬 더 든든해졌죠. () 옥천에서 새로운 희망을 봤어요. 옥천신문을 비롯해서 최근 만들어진 공동체라디오까지, 다 주민 주도로 하고 있어요. ‘옥수수라고 하는 방송도 있는데 거기 청소년들이 만들어요. 뭔가 젊은 사람들이 직접 하면서, 희망을 줄 수 있는 거. 만날 이론적인 걸 얘기하는 게 아니라, 옥천에서 시작된 것처럼, 자발적으로, 미래 세대와 함께 하는 것. 저는 이제 힘닿는 데까지 그걸 지원해주면 되겠다 생각을 하죠.”

 

내가 아버지 나이가 되면 어떤 모습이 돼 있을까, 그때 아버지는 어떤 모습으로 계실까를 상상하곤 했다던 송준용 씨. 어느덧 그는 송건호 선생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연배 이상으로 훌쩍 나이를 먹어버렸고, 그토록 자애로우면서도 강건하던 아버지는 유명을 달리했다. 대담을 요청했을 때 자신은 언론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며 손사래를 치던 그는, 자신을 내세우기보다 가능한 한 아버지의 이름으로말하려 했고, 현재까지 올 수 있도록 곁에서 도왔던 많은 이들을 수시로 언급했다. 어떤 아름답고 위대한 인물의 정신과 실천은 이렇게 또 다른 아름다운 인물들을 통해 영속한다. 그게 우리가 굳이 누군가를 기념하려 애쓰는 이유다.

<신문과방송> 20221월호/ 정준희 한양대 언론정보대학 겸임교수

 

어디 있는가? 민중 언론은

한국인들이 시나브로 망각하고 있지만, 본디 망자와의 소통은 우리 겨레의 아름다운 전통이다. 2001년 거처를 국립 518민주묘지로 옮긴 뒤부터였다. 심장이 두근대는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말들이 지하에서 속절없이 맴돌았다. 바리공주의 세상에서 나를 불러내 옹근 스무 해 만에 소통할 마당을 마련한 당신이 고마운 까닭이다.

 

유신체제에서 언론자유를 지키려다가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후배들과 조촐한 식당에 둘러앉아 민주민족민중 언론을 세우자고 다짐하는 자리였던가. 당신과 처음 인사를 나눈 기억이 생생하다. 덕분에 지금 여기 있지만, 오래 머물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다. 짧은 시공간을 사사롭게 보내고 싶진 않다. 손쉽게 상생이나 해원을 호소하지도 않으련다. 언론인으로 살며 늘 그랬듯이 내가 파악한 진실을 차분하게 공유하고 싶을 따름이다.

 

2001년에서 2021년 사이, 대한민국은 괄목할 성과를 거뒀다. ‘30-50클럽7개국으로 들어선 사실은, 인구 5,000만 명을 넘으면서도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이상인 미국일본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와 견주어 제국주의 침략의 더러운 과거가 없는 유일한 나라라는 사실은 영예로운 성취임이 틀림없다.

 

한국은 짧은 시간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모두 일궈냈다는 주장은 흔히 보수 언론의 담론이라고 이야기하지만, 나는 공감한다. 이제 선진화를 이뤄야 할 때라는 주장에도 동의한다. 기실 진실을 생명으로 하는 저널리즘을 놓고 보수와 진보로 구분하는 것은 옳지 않다. 저널리즘의 품격은 보수냐 진보냐가 아니라 진실 여부에 있다. 대한민국이 선진화를 이뤄야 한다는 명제에 굳이 반대할 까닭이 없다. 문제는 어떤 선진화인가에 있기 때문이다.

 

무릇 언론의 본령은 단순한 사실 보도가 아니다. 미국 저널리즘 연구의 초석을 놓은 월터 리프먼도 강조했듯이 숨겨진 사실을 드러내고 사실과 사실 사이의 연관성을 밝혀내는 것이 진실 보도이다. 산업화와 민주화 모두 성공했다며 권력과 자본이 강조할 때, 언론이 거기에 부닐며 박수를 치면 언론이 아니다. 언론은 숨겨진 사실을 찾아내고 부각해야 옳다.

 

산업화와 민주화 성공 담론에 가려진 진실들은 어떤 선진화를 이루냐의 과제와 직결되어 있다.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객관적 지표인 통계를 짚어보자. 솔직히 나로선 한국이 자살률 1, 출산율 꼴찌라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그뿐인가. 산업재해와 노동시간, 비정규직 비율이 모두 세계 최고 수준이다. 자살률 1, 출산율 꼴찌의 살풍경은 유아 시절부터 노인들까지 국민 대다수가 각자도생의 살인적 경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과연 그래도 좋은가. 잘사는 20%는 눈덩이처럼 재산을 불려가고 80%는 점점 생활이 어려워지는 을씨년스런 세상에 우리 후손들이 살아도 좋은가. ‘잘 사는 20%’에 이미 안착했다고 안도할 일은 아니다. 자신의 자녀, 손주들이 80%나락으로 추락하지 않으려고 매몰차게 앞으로만 나아가야 한다면, 그 삶은 얼마나 황폐해지겠는가.

 

승진에서 누락된 뒤 우울했다던 삼성전자 부사장, 고는 물론 서울대와 미국 스탠퍼드 대학원까지 1등을 놓치지 않았던 그의 자살은 시사해주는 바가 많다. 한국 경제의 성격을 자살 친화적 성장으로 규정하는 경제학자까지 나오는 상황은 나를 영면에 들지 못 하게 한다.

 

통계가 차가운 숫자로 증언하는 살풍경을 한국 언론은 얼마나 지면과 화면에 담아냈는지 오늘의 언론인들에게 정말이지 묻고 싶다. 선진화 담론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과 견주어 공공 사회 복지비, 정부 신뢰도, 사회 구성원들 사이의 신뢰도가 뚜렷하게 낮다.

첨암 송건호 선생

 

그래서 문제는 다시 언론이다. 왜 언론은 산업화민주화선진화의 도식 아래 숨은 사실들을 의제로 설정하는 데 무심한가. 어둠 속에 잠겨 있다가 20년 만에 마주한 풍경은 낯설기만 하다. 생전에 언제나 그랬듯이 생각을 정리할 겸 서점을 찾아 책을 들춰보다가 눈길이 쏠리는 문장을 발견했다.

 

서울 사람들 대부분은 조그만 스마트폰 화면을 끊임없이 들여다본다. 삼성과 LG의 나라에서는 길을 걸을 때도, 커피숍에 앉아 있을 때도, 서 있을 때도, 지하철역에서 열차가 들어오기를 기다릴 때도 접속이 끊어지는 일이 없다. 그들의 손은 스마트폰과 태블릿 위를 바삐 돌아다니고 손가락은 스크린 위를 미끄러지며 무한한 소용돌이를 그린다.”

 

외국인이 묘사한 서울은 스무 해 만에 내가 마주친 풍경과 어금버금했다. “도처에 스크린이 있다. 고층빌딩 벽에 달린 대형 스크린, 기차역 로비에 있는 중형 스크린, 하지만 차분하게,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 도시를 지나쳐가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몰두하는 것은 자기만의 소형 스크린이라는 유럽 비평가의 눈에 들어온 광경을 그 안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은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듯하다.

 

베라르디는 한국사회의 특성을 끝없는 경쟁, 극단적 개인주의, 일상의 사막화, 생활 리듬의 초가속화로 꼽았다. 번역자의 말 그대로 죽음의 스펙터클에 몰입한 모습이랄까.

 

문득 그리스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떠올랐다. 박정희 정권과 손잡은 신문 사주의 잘못을 경고하며 사표를 던진 뒤였다. 당신도 알다시피 생계가 몹시 힘들던 그 시절에 적잖이 위안을 준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밝은 대낮에 등불을 들고 수많은 사람이 걸어 다니는 길에서 진실한 사람을 찾는다고 두리번거렸다.

 

박정희의 유신체제에서 천직으로 여긴 언론계를 떠나 외로움에 젖어있던 내게 디오게네스의 물음은 심장에 다가왔다. 나 또한 마른 가슴으로 묻고 있었다. ‘어디 있는가? 참된 사람은이라고. 그 연장선에서 미디어들이 넘쳐나는 요즈음 오늘 나는 묻고 싶다. ‘어디 있는가? 민중 언론은.’

 

오랜만에 둘러본 스크린 도시서울에선 민중이란 말조차 찾아보기 어려웠다. 참으로 의아했다. 1970년대 유신체제에서 언론자유를 지키려다가 해직된 동아일보 후배들과 이야기 나눌 때마다 우리가 다짐한 것이 민주민족민중 언론이었다.

 

전두환 체제가 들어서며 1980년에 해직된 기자들과 함께 동아투위, 조선투위가 힘을 모아 1984년에 세운 민주언론운동협의회의 창립선언문에도 또렷이 선언했다.

 

초대 의장으로 내가 마지막까지 손질한 창립선언문에서 우리는 민중의 표현 수단이 소수의 반민중적인 언론기관에 의해 독점되어 있다라고 비판했다. 언론이 사실 보도라는 언론의 기본적 책무를 포기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진실의 왜곡조차 서슴지 않음으로써 사회 전체의 인식능력과 이성을 마비시켜 이 사회와 민족의 운명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무지와 환상의 세계를 조성해 놓고 있다라고 단언했다.

 

나는 그때 우리 역사가 민족과 민중의 주체적 각성과 힘에 의해 참다운 민족·민중 언론을 쟁취·구현해 보지 못한결과가 오늘의 종말적 양상을 빚어냈다고 개탄했다. 당시 우리는 절망도 실망도 하지 않았다. “언론의 죽음 속에서 새로운 민주·민족언론이 탄생되고 있음을 믿었기 때문이다. “표현 수단을 빼앗긴 민중으로부터 자기의 삶을 스스로 표현하려는 민중 언론이 태동하고 있는 것을 놓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80년대 중반에 오늘의 거짓된 지배문화를 거부하고 진정한 민족·민중문화를 건설하려는 새로운 문화운동과 더불어 민중 언론은 도처에서 광범위하게 확산되고있었다. 우리의 진단과 전망은 틀리지 않았다. 그로부터 4년도 안 되어 우리는 한겨레신문을 창간했다. 그것은 민언협 창립선언문이 밝힌 우리의 민중적·민족적 요구에 굳건히 선 새로운 언론의 창조를 뜻한다.

말지 보도지침 특집호(1986.9.6)표지 그림. 달밤, 궈녁, , , 가화假花 그리고 언론. 그믐달이 스러져가는 말기적인 이 시대의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진정한 민중언론(펜대)을 칭칭 감은 사악한 제도 언론()이 갖가지 교언영색의 가화로 건력이 저지르는 온갖 부정과 불의의 똥무더기를 은폐하고 있다.

 

비단 한겨레만이 아니다. 내가 군부독재의 고문 후유증으로 병석에 누운 뒤 병상을 지켜준 아내와 아들로부터 나는 평화적 정권 교체 소식도 들었고, 공영방송도 땡전뉴스수준을 넘어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인터넷 신문들이 곰비임비 창간되고 있으며 누구나 언론 활동을 펼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는 말을 아들로부터 전해 듣고는 해직기자 후배들과 1984년 민언협을 창립할 때 내세운 민중 언론 시대가 마침내 꽃피었다는 행복감에 젖어 들었다.

 

하지만 어인 일인가. 내가 몸담았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민중이라는 말을 아예 기피하거나 좌파 용어로 몰아치고 있었다. 그 흐름 탓일까. 민중 언론을 다짐하며 출범한 한겨레에서도 민중이란 말은 현저히 줄어들고 있다.

 

하지만 민중1980년대의 운동권 용어라는 주장은 명백한 사실 왜곡이다. ‘민중은 그보다 훨씬 이전, 일제 강점기는 물론 조선왕조 시대에도 쓰인 말이다. 내가 일제강점기에 가장 돋보이는 운동으로 의열단을 부각해 책으로 낼 때 밝혔듯이, 신채호가 쓴 의열단의 조선혁명선언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민중을 주체로 강조하고 있다.

 

심지어 대한민국 제헌헌법 초안도 모든 권력은 인민으로부터 나온다였다. 제헌국회의 헌법 심의과정에서 정치 부라퀴들은 인민북괴가 즐겨 쓰는 말이라며 공격해댔다. 헌법 초안을 작성했던 보수적 헌법학자 유진오는 회고록에서 “‘국민은 국가의 구성원으로서의 인민을 의미하므로, 국가 우월의 냄새를 풍기어, 국가라 할지라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자유와 권리의 주체로서의 사람을 표현하기에는 반드시 적절하지 못하다. 결국 우리는 좋은 단어 하나를 공산주의자에게 빼앗긴 셈이라고 한탄했다.

 

우리가 익히 들어온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 미국인의 영원한 대통령링컨이 말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의 원문이 바로 “the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이다. 처음 한글로 옮겨졌을 때는 그것을 인민으로 옮겼다. ‘국민이라는 번역어는 말 그대로 국적을 지닌, 또는 국가에 귀속된 모든 사람을 뜻하기에 피플의 번역어로 적절하지 않다.

 

대한민국 헌법이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선언할 때, 논리상 그 국민은 권력을 지닌 사람일 수 없다. ‘권력이 없는 사람들에게서 권력이 나온다로 해석해야 옳다. 대한민국 헌법 제 1조의 모든 권력은 말 그대로 정치 권력만이 아니라 경제 권력이나 사회권력, 문화 권력을 포함한다. 그 권력은 지금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이 아닌 국민, 곧 민중으로부터 나온다는 명제가 민주공화국의 헌법정신이다.

 

그럼에도 민중을 좌파니, 계급이니 운동권 개념으로 몰아간 결과가 바로 통계가 증언해주는 민중(people) 개개인의 고통스러운 삶이다. 미국 사회에서도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단어 ‘people’을 기존 질서에 가둔 국민으로 통용시킴으로써, ‘인민에 이어 민중이란 말까지 시나브로 사라짐으로써, 국민 대다수인 민중의 삶을 대변할 언론은 물론 정치에서도 경제에서도 민중을 배제하는 체제가 뿌리내려가고 있다. 살풍경의 통계는 그 표면이다.

 

그렇다면 희망은 없는가. 아니다. 민중을 잃어가는 언론부터 되살려야 한다.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언론사의 편집권 독립이다.

나는 1980서울의 봄을 맞아 새로운 헌법을 논의할 때 편집권 독립을 명문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주장은 전두환 일당이 517쿠데타를 일으키며 묻히고 말았지만, 나의 변함없는 믿음이다.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맡기까지 여러 신문사를 다닌 나는 사주가 있는 신문사마다 편집권이 근본적으로 훼손됨으로써 독재 권력에 아부하는 기자들이 양산되는 상황을 목격했다. 신문사든 방송사든 권력이나 자본으로부터 독립한 언론인들이 자율적 판단으로 보도와 논평을 한다면, ‘민중이라는 말을 색안경 끼고 바라보는 언론은 존재하기 어려울 터다. 바로 그만큼 민중의 생존권을 의제로 설정하는 언론이 늘어남으로써 민중의 고통도 해소될 수 있다. 뜻있는 후배들이 편집권 독립을 줄기차게 입법화하라고 운동을 벌여온 것은, 비록 내가 주장한 헌법 조항으로 넣자는 것은 아니지만 그나마 다행이다.

 

20215월에도 전국언론노조가 편집권 독립을 주요 투쟁 과제로 삼고 있는 모습은 대견스럽다. 청와대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이는 후배에게 다가가서 어깨를 두드려주었지만, 새삼 나는 육체가 없음을 깨달았다. 편집권 독립은 현업 언론인들뿐이 아니라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을 위해 절실한 과제다. 기자들을 기레기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언론노조의 편집권 독립 투쟁에 자신이 지닌 다양한 힘을 보태주길 촉구한다. 언론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1988년 514일 오후, 윤전기를 빠져나온 한겨레 창간호를 받아들고 감격해하고 있다.

 

둘째, 민중 스스로 민중 언론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

21세기에 빠르게 퍼져가며 지구촌을 하나로 이은 인터넷으로 민중(네티즌)들은 온 세계를 드나들면서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자유롭게 활용하고 그것을 남에게 전달할 수도 있다. 바로 그 점에서 네티즌의 언행은 전통적 의미의 언론인 활동과 다르지 않다.

 

언론기관에 몸담고 있지 않을 뿐 인터넷에서 취재한 지식이나 정보는 물론, 자신의 주장을 남에게 전달하는 순간, 그는 원하든 원치 않든 언론인이 되어 있는 셈이다. 정보의 생산능력과 발신능력을 모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론기관의 기자가 직업 기자라면, 네티즌은 직접 기자라고 명명할 수 있다. 21세기 민중의 언론활동바로 그것이 민중 언론이다.

 

들머리에 인용한 디오게네스는 세상에서 훌륭한 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무엇이든 말할 수 있는 것이라며 언론의 자유를 꼽았다. 민중 개개인이 언론자유를 누리며 무엇이든 말할 수 있는 세상이 열린 것은 새로운 시대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민중 언론 시대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나는 생전에 기자교육에서 역사의식과 인문사회 교양을 강조했고, 대학의 신문방송학과에서도 역사와 사회를 보는 눈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교수들은 거의 모르쇠를 놓았고, 어쩌면 그 결과가 기자정신의 실종으로 이어진 것일 수도 있다.요컨대 역사의식과 폭넓은 인문사회 교양을 지닌 민중이 진정한 민중 언론 시대를 열어나갈 수 있다.

 

2021년 우리 현실을 냉철히 살펴볼 일이다. 민주주의는 아직 성숙하지 못했고, 민족 문제도 남북 사이의 갈등이 커 평화적 해결이 쉽지 않아 보이는 상황이다. 민주주의 성숙과 민족의 평화적 통일을 일궈갈 주체인 민중들 가운데는 생존권을 위협받는 사람들도 적잖다.

 

자살률 1, 출산율 꼴찌, 산업재해 1위 따위처럼 줄줄이 슬픈 통계들이 더는 나의 귀에, 518민주묘지 영령들의 가슴에 들려오지 않을 때까지 우리 언론이 벅벅이 앞장서주기를 간곡히 호소한다. 그 참담한 통계들과 선진화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당신과 종종 만나 시국을 걱정할 무렵 우리가 민주민족민중 언론을 목표로 내건 까닭은 반민주적이고 반민족적인 언론이 여론을 지배하고 있어서였다. 그때 우리는 민주와 통일을 바라는 민중과 더불어 올곧게 나아가려는 꿈을 함께 꾸었다.

 

민주와 통일의 주체가 바로 민중이기에 민주민족민중 언론의 줄임말은 민중 언론이다. 민중 언론의 절박성, 그 시대적 과제는 변함이 없다. 그래서 이 땅의 언론인들, 싱그러운 피가 돌고 있는 후배들에게 묻고 싶다. 왜 민중 언론 구현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가.

 

아쉽게도 어느새 돌아갈 시간이 다가왔다. 당신이 불러온 마당을 떠나기 전에 21세기의 다채로운 미디어로 왕성하게 언론 활동을 벌이고 있는 모든 민중에게 정중한 당부로 글을 맺으련다. 언론계 후배들에게 종종 건넸던 말이다.

청암 송건호 선생(19262001)의 고향인 충북 옥천군 군북면 비야리 생가에 세워진 송 선생의 흉상.충북 옥천군 제공

 

글을 쓸 때마다 30, 40년 뒤에 과연 이 글이 어떤 평가를 받은 것인가라는 생각과 먼 훗날 욕을 먹지 않는 글을 쓰겠다고 다짐하곤 한다. 크게는 이 민족을 위해, 작게는 내 자식들을 위해 어찌 더러운 이름을 남길 수 있겠는가.”

 

돌아가는 길목에서 모든 민중이 언론인으로 활동할 수 있는 눈부신 시대를 다시 둘러보며 나는 희망에 잠긴다. 사랑하는 후대의 건강과 건필을 기원한다.

청암(송건호) 선생, 마이크 잡다| 손석춘_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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