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래군씨, 왜 그렇게 사세요? 이름대로 살았습니다
[길을 찾아서-박래군의 인권의 꿈] 1화 연재를 시작하며
나만의 이야기 아닌 동료와 함께했던
인권운동 기록 진솔하게 써 나갈 것
박래군과 ‘4월16일의약속국민연대’ 소속 시민사회단체 대표 등이 2016년 9월6일 오후 서울 광화문 ‘4·16광장’에서 시국기자회견을 열어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개정과 특검 의결을 촉구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박래군씨, 왜 그렇게 사세요?”
12년 전, 이세영 한겨레21 기자가 나를 인터뷰한 뒤 내보낸 기사의 제목이다. 내가 사는 방식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투의 제목이다. 마냥 기분 좋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같은 취지의 질문들을 종종 한다. 왜 아직도 그러고 사냐고? 이런 질문의 의도는 왜 아직도 힘든 일을 하며 사느냐는 취지이리라. 내가 하는 일이 무척 힘들게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인권단체들을 만들고, 인권현안이 터지면 대책기구를 구성하고, 집회와 시위, 기자회견을 하고, 단식농성도 자주 하고, 그러면서 사회적 이슈를 만들고, 그러다가 재수 없을 때는 감옥도 다녀오면서. 살아온 인생이 평범한 이들의 눈높이에선 이상할 것도 같다.
왜 그렇게 사느냐고 묻는다면, 딱히 답할 말이 없다. 내가 해야 할 일이니까, 인권운동 하는 사람으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니까 한다는 생각 정도이다. 억지로 답을 말한다면 “사람들 때문”이다. 힘들게 하는 사람도 있지만, 힘을 주는 사람이 있고 그들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다. 또 하나 꼭 지켜야 할 약속이 있어서다. 사실 나는 먼저 간 동생(박래전)과 한 약속이 있다. 스물여덟 살에 두 살 어린 동생을 땅에 묻으면서 피눈물로 했던 약속이었다.
그런데 더 근원적으로는 내 이름 때문이다. 아버지가 이름을 잘못 지어주셨기 때문이다. 사실 내 생일도 문제다. 나는 1961년생인데, 그해 양력 5월1일에 태어났다. 5월1일이 어떤 날인가. 세계적으로 데모하는 노동절 아닌가. 생일도 그런데다가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은 박래군. 한자로는 朴來群이다. 눈 밝은 분들은 눈치채셨을 듯하다. ‘올 래’에 ‘무리 군’이라니. 무리가 온다? 그러면 무얼 해야 할까? 데모해야지. 나는 아버님이 지어주신 이름대로 살아왔을 뿐이다.
스물여섯이었던 1986년에 처음 감옥에 갔다. 그러다가 6월 항쟁 덕분에 1987년 7월 초 대전교도소에서 가석방으로 나왔다.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아버님은 복학하라고 요구하셨다. 노동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갔고, 평생 노동운동하며 살 생각이었던 나는 아버지 요구를 거절했다. 화가 난 아버지는 약주를 거나하게 드신 다음에 나를 앉혀놓고 다짐을 받으려고 했다.
“넌 왜 그렇게 사냐? 데모만 하고 살 거냐?” 금방이라도 주먹이 날아올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때 나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님, 제 이름 누가 지어주셨죠?”
“네 이름? 그거야 내가 지었지.” “아니, 이름에다가 무리 군 자를 써서 지어주신 건, 무리와 어울려서 데모하면서 살라고 지어주신 거 아닙니까? 저는 아버지가 이름 지어주신 그 뜻대로 사는 거거든요.”
이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아버지는 벌떡 일어나셨고, 위험을 감지한 나는 그 길로 집에서 도망쳤다. 이럴 때는 삼십육계만이 살길임을 여러 해 길거리 데모에서 체득했다. 나는 간단히 아버지의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 요구대로 학교에 복학해서 대학을 졸업했다. 당장 노동현장으로 돌아가 노동운동으로 복귀하고 싶었지만, 몸 상태가 허락하지 않았다. 13개월여 감옥생활 중 여러 번 끌려가서 묶이고, 밟히고, 매 맞았던 탓이었을 것이다. 앉아 있기도 힘들어서 당분간은 공장 일을 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할 때 아버지와 타협했다. 대학 졸업만 하면 내가 하고 싶은 거 다 해도 좋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복학은 했지만, 학교생활에 충실할 수는 없었다. 첫 감옥 출옥한 다음 해가 1988년이었다. 1988년에 내 인생의 최대의 사건을 겪었고, 그 일로 나는 인권운동에 입문했다. 그로부터 36년이 지난 지금까지 인권운동가로 살아오고 있다.
박래군은 1981년 연세대학교 국문과에 진학해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하다가 9년만에 대학을 졸업했다. 1990년 2월 그의 졸업식에 함께한 아버지 박순순(왼쪽)과 어머니 김근순. 필자 제공
매주 연재를 이어간다는 게 여간 부담이 아니다. 걱정도 많다. 과연 해낼 수 있을까? 글을 매주 써야 하는 부담도 있지만 그보다 ‘사람들이 읽어줄 만한 글을 쓸 수 있을까?’라는 부담이 크다. 한 인권운동가의 삶의 여정을 누가 재미있다고 읽어줄 것인지, 연재 중에 그만하자는 얘기를 신문사에서 듣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재미있게, 인권운동의 언어가 아니라 대중의 언어로 쉽게 얘기하고 싶다. 하지만 이 연재에서 다루게 될 일들은 나 혼자 한 게 아니다. 그러므로 많은 일들이 성과가 있었다면 그건 모두의 덕이다. 하지만 잘못도 얼마나 많았겠는가. 처음 시도하고, 닥치는 일들이 수없이 많았다. 성과 있게 마무리 짓지 못한 일들도 부지기수다. 그런 일의 상당 부분은 내 책임이다. 그런 부분도 솔직하게 얘기하려고 한다.
연재는 대체로 다섯 부분으로 나눠서 진행해볼 생각이다.
먼저 내가 어떻게 사회운동에 뛰어들었는가를 말하려고 한다. 1980년대 초반 전두환 정권에서 문학을 꿈꾸던 청년이 학생운동권이 되고, 강제징집 당하고, 그러다가 노동운동에 뛰어들었고 이후 감옥에 가게 된 사정을 얘기할 것이다. 소심하고 겁 많았던 한 청년이 혁명운동을 꿈꾸고, 혹독한 탄압 속에서 어떻게 단련되어 갔는지 얘기하고 싶다.
두 번째 시기는 유가협 시절이다. 나는 유가족이 되어 인권운동을 만났다. 인권운동을 한다는 의식도 없이 존재의 변화에 따라 만나게 된 인권운동이었다. 한때는 ‘재야의 장의사’란 별칭까지 얻었다. 나는 그때부터 죽음의 현장에 가까이 있었다. 내가 장례를 치러주었던 많은 열사들, 그리고 억울한 죽음들에 대한 얘기이고, 유가족으로 살아온 젊은 날의 비망록이다.
세 번째 시기는 인권운동사랑방 시절이다. 인권운동사랑방에서는 15년 넘게 일했다. 그곳에서는 매체의 편집자로, 다양한 사건 현장에 뛰어들었다. 인권운동가로서 정체성이 굳어졌던 시기이기도 하다. 연대사업도 참 많이 했다. 표현의 자유에서부터 사회권, 평화권까지 내가 참여했던 연대사업의 지평은 넓었다. 많은 일을 시도했으나, 실패도 많이 했고, 뒷날의 과제로 남겨둔 일도 많다.
네 번째 시기는 ‘인권재단 사람’ 시절이다. 서울 마포구 성산동에 최초의 민간 인권센터를 지었고, 인권단체와 활동가들을 지원하는 일을 주로 했다. 그러면서 무언가 새로운 모색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도 시달렸다. 인권운동의 지평을 넓혀야 한다는 생각도 많았다. 그런 고민을 하다가 세월호참사를 맞았다.
다섯 번째 시기는 2014년 세월호참사 이후의 시절이다. 세월호참사 이후 지금까지와는 다른 인권운동의 궤적을 그렸다. 피해자의 곁을 지키는 활동가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본격적으로 실천해왔던 기간이었다. 그러다가 대통령 탄핵 촛불집회를 주도하였고, 비교적 최근에는 노란봉투법 입법운동과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을 본격적으로 해보았지만, 모두 실패했다. 가장 최근의 활동이지만, 여전히 미완인 일들이 넘쳐난다. 나는 현장 활동에서 한 발 빠지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고 있다.
누구처럼 논리적이지도, 똑똑하지도 못하다. 다만 사건 현장에 좀 더 가까이 가려고 했다. 어려운 사안일수록 도망가지 않으려 했다. 답이 보이지 않는 현실에 부딪히면서 조금이라도 틈을 내고, 공간을 열어보려고 했다. 내가 헤쳐온 수많은 사건들, 그곳에는 사람들이 있었고, 슬픔과 분노, 열정과 환호가 있었다. 그 시대에 그 현장에서 함께 겪었던 일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내가 하지만,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함께 나누는 인권운동기록, 그런 마음으로 연재를 시작한다.
박래군은 올래(來)에 무리군(群)을 쓴다. 자신의 이름을 두고 ‘아버지가 데모꾼 되라며 지어준 이름’이라며 웃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박래군 | 36년째 인권운동가로 살고 있다. 유가협,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재단 사람을 거쳐서 현재는 4·16재단 운영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 ‘사람 곁에 사람 곁에 사람’, 공저서 ‘이따위 불평등’ ‘새로고침’ ‘살아남은 아이’ 등이 있다.
짧았던 ‘문청’의 길…그날의 시위가 내 운명 바꿨다
‘소설가 꿈’ 안고 연세대 진학했지만
1981년 11월 학내 대규모 시위 이후
사회과학 공부하고 열혈 운동권으로
1981년, 연세대학교에 입학했다. 집안에서는 4년제 대학에 처음 입학한 나에게 큰 기대를 갖고 있었다. “절대 데모하지 말라”는 부모님 당부대로 대학에 들어왔을 때 나는 오로지 소설가가 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데모나 학생운동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학교 안에 전경들이 가득하고, 사복경찰과 안기부 요원들이 학교 강의실, 도서관, 건물 곳곳에 진을 치고 있어도 별 상관하지 않았다.
신촌에서 학교 정문으로 들어서면 곧게 뻗은 길이 있다. 이름은 백양로지만, 길옆의 가로수들은 크지 않은 은행나무들이었다. 은행나무들을 사열하면서 올라가다 보면 계단이 나오고, 계단을 올라서면 학교 설립자인 언더우드가 두 팔을 벌려 환영하고 있었다. 언더우드의 환대를 받으면서 나는 곧바로 연세문학회 써클룸(동아리방)으로 직행했다. 그 동상 양옆으로 근대식 석조건물이 있고, 동상 뒤로는 그때는 ‘학관’(지금은 본관)이라고 부르는 3층짜리 석조 건물이 있었다. 학교 안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 그 입구 오른편에 ‘연세문학회’ 써클룸(동아리방)이 자리 잡고 있었다. 좁고 지저분한 방이었지만, 그곳에서 나는 ‘문청’(문학청년)의 길을 걸었다.
학교 수업에는 관심이 없었다. 특히 나는 영어와 외국어에는 젬병이었다. 그럼에도 교양영어의 첫번째 챕터 “The show must go on”이란 제목은 지금도 기억이 난다. 학교 수업도 종종 빼먹으면서 써클룸을 드나드는 생활을 이어갔다. 당시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던 소설가 최인호가 습작 시절에 자신 키 높이의 원고지를 메우는 글을 썼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나의 목표도 키만큼 습작 원고지를 쌓는 것이었다. 수업 시간에도, 써클룸에서도 나는 원고지에 뭔가를 끄적였다.
‘소설가 꿈’ 안고 문학동아리로…데모엔 관심안둬
당시 연세문학회에는 대단한 선배들이 있었다. 소설가 성석제와 원재길이 있었고, 지금은 고인이 된 기형도 선배도 문학회였다. 1주일에 한 번씩 열리는 시합평회는 살벌했다. 돌아가면서 시를 써오고 시에 대해 비평을 하는 것인데 신랄한 평가가 이어졌다. 그렇지만 나는 소설 쓰는 놈이었고 다행히 소설 비평 같은 것은 없었다. 내 동기 중에 가장 유명한 이는 소설가 공지영일 것이다. 고영범은 시와 희곡을 쓰고 있었고, 숙명여대 교수하는 시인 김응교도 문학회 출신이다. 그만큼 연세문학회에는 쟁쟁한 문학 지망생들이 드나드는 명문 서클이었다. 후배 시인 나희덕도 문학회 출신이다. 문학의 길을 가지는 못하고 나중에 정치인의 길에 들어섰던 우상호는 한때 “시는 우상호, 소설은 박래군” 하면서 호기를 부렸다.
문청 시절 내 별명은 ‘배추장사’였다. 장발에 매일 비슷한 잠바를 걸쳐 입어 촌티가 풀풀 났지만, 친구들과는 잘 어울렸다. 학과 친구들끼리 공부 모임도 했다. 그러다가 학교에서 매년 문학상을 공모한다는 걸 알았다. 선배들은 문학상을 준비하고 있었다. 여름방학 중에 단편소설을 써서 응모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소설 쓰기에 몰입했다. 농촌 청년이 죽어라고 땅만 파고 일하면서 좌절해가는 이야기였다. 내 고향의 현실을 담아내는 소설이었다. 땅만 파면서 일하는 모습에서 ‘땅강아지’를 떠올렸고, 그 제목으로 단편소설을 써서 마감 직전에 겨우 접수했다.
작품 쓰는데 너무 몰두해서일까? 단편소설을 접수하는 그날은 정말 술이 고팠다. 학교 밖에서 이미 술에 취했는데도, 학교로 숨어들어가 2차를 하기로 했다. 학교 굴다리 앞 신호등에서 신호가 바뀌는 순간 길을 건너다 큰 충격을 받고 정신을 잃었다. 나중에 친구 영범에게 들었는데, 건너편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학교 정문 앞에서 누군가 택시에 받혀 붕 떴다가 떨어지더라고 했다. 달려와서 보니 내가 쓰러져 있었고, 그 길로 나를 업고 세브란스 병원으로 뛰었다고 했다. 거기서 응급치료를 받은 뒤 영등포의 한 병원에서 2주를 있었는데 좀이 쑤셨다. 간호사 몰래 병원을 탈출해 학교 가서 놀다가 들어오고는 했다. 그러다가 문학회가 매년 주최하는 ‘연세문학의 밤’에 선배들이 작품을 내라고 했다. 문학회 회원이면 모두 작품 하나씩은 내야 했다. ‘문학의 밤’ 내 순서 때 처음엔 뒤로 돌아서서 글을 읽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상황을 암시했다. 그러다가 앞으로 돌아서서 나머지 글을 읽었다. 병원 생활과 외출 상황을 수필로 썼던 것이다.
기형도·성석제 등 같은 서클…1학년 때 교내문학상 받아
택시에 치이는 큰 교통사고였지만 운이 좋았다. 퇴원하고 얼마 뒤 문학상 당선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전혀 예상도 못했던 일이다. 문학회 선배들도 응모했는데, 겨우 1학년인 내가 당선이라니…. 덤덤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다. 이제 등단을 준비하자, 학생 때 등단하겠다는 목표가 생겼다.
박래군은 대학 1학년 재학 중 농촌 청년의 좌절을 그린 단편소설 ‘땅강아지’로 연세문화상 박영준 문학상을 받았다. 사진은 문학상 상패. 필자제공
그렇지만 늘 인생은 내 마음먹은 대로 되는 법이 없었다. 시대의 운명이라고나 할까? 문청에서 학생운동권이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시위를 보고야 말았다. 지금도 그 날짜를 기억한다. 1981년 11월25일. 그날 학교 전체를 전쟁터로 만든 큰 시위가 오후부터 저녁때까지 이어졌다.
오후 수업시간에 교실 밖이 시끄러웠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백양로 끝으로 달려갔다. 백양로 곧은 길에 학생들이 전경들을 향해 돌을 던지고, 이어 최루탄이 터졌다. 전경들이 학생들을 쫓고 학생들은 쫓기면서도 싸웠다. 학생회관 4층에서 시위를 하던 여학생이 1층 콘크리트 바닥으로 떨어졌고, 그 여학생을 병원에 옮기려던 학생들을 경찰이 마구잡이로 연행하면서 학생들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자욱한 최루탄 연기 속으로 친구들이 하나둘 뛰어들어갔다. 그들은 내게도 어서 오라고 손짓을 했지만, 나는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저녁 어스름이 내릴 때까지 시위를 지켜보며 갈등했다. 겁이 많아서기도 하지만, 시골 부모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선택받은 시대의 지식인으로 데모 대열에 합류해야 한다는 생각과 “데모하면 집안 다 망한다”, “내가 널 어떻게 해서 대학을 보낸 줄 아냐”는 말이 내 안에서 싸우고 있었다.
학내서 대규모 시위…내 비겁함에 괴로워하다가
다음날 오전, 문학회에 갔더니 한 해 선배인 송 아무개가 시위 중 잡혀갔고, 아침에 강제 입대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너무도 괴로웠다. 그렇게 군대에 끌려갈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지만, 그건 곧 내게도 닥칠 운명이었다. 데모하다가 잡히면 두들겨 맞고, 고문당하고, 제적되고, 감옥 가고, 군대 끌려가는 게 현실이었다. 그 선배가 나 때문에 잡혀간 것만 같았다. 나의 비겁함을 탓하며 매일 술을 마시며 괴로워했다. 그럴 때 운동권의 ‘마수’가 뻗쳤다.
“소설을 쓰려면 사회를 알기 위한 공부 좀 해야 하지 않냐?” 같은 과 여학생이 내민 손을 나는 잡았다. 궁금하기도 했다. 그해 겨울부터 나는 학생운동권이 되기 위한 공부에 매진했다. 잘못된 역사를 알아갔고, 분노해갔다. 일본 사회과학 책을 읽기 위해서 일본어를 배웠고, 자본주의의 모순과 세계 혁명의 역사를 배웠다. 그해 겨울 학습 과정을 거친 나는 속성으로 운동권이 되었다. 대학 2학년 때 이미 나는 학내외 시위에는 빠짐없이 참가하는 열혈 학생운동권이었다. 지하 학습모임과 학과에서 학회를 조직하고 후배들을 지도하는 역할도 했다. 하루하루가 너무 바빴다.
나는 왜 그렇게 빨리 학생운동권이 되었을까? 광주를 빼놓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광주시민들을 학살하고 권력을 잡은 전두환과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고 재수에 빠져 있던 나란 놈, 그건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편하게 글만 쓰고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굳어져 갔다. 흔들리지 않게, 전두환 파쇼정권을 타도하고, 사회주의 혁명을 해야 한다는 신념의 강자가 되어갔다.
박래군의 운명을 바꾼 1981년 11월25일 연세대 시위는 당시 연세대 가정대 아동학과 3학년생이던 양경희씨가 도서관 4층에서 “반파쇼 구국 투쟁선언”을 낭독한 뒤 투신하면서 비롯됐다. 1982년 2월 작성된 이 문서는 신원 미상의 인물이 양씨를 면회한 뒤 작성한 보고서로 한국기독교사회문제원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기증한 것이다.
박래군의 운명을 바꾼 1981년 11월25일 연세대 시위는 당시 연세대 가정대 아동학과 3학년생이던 양경희씨가 도서관 4층에서 “반파쇼 구국 투쟁선언”을 낭독한 뒤 투신하면서 비롯됐다. 1982년 2월 작성된 이 문서는 신원 미상의 인물이 양씨를 면회한 뒤 작성한 보고서로 한국기독교사회문제원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기증한 것이다.
2024-05-13
누구라도 끌려가 죽을 수 있었다
1980년초 대학가 정보기관이 장악
전두환의 탄압 더욱 거세졌지만
그럴수록 학생운동은 더욱 성장
이념 써클에서 학과 중심으로 변모
1983년 4·19 다음날 경찰에 연행
선배 거취 추궁당하며 두들겨 맞아
신체검사도 생략된 채 강제징집
어이없게도 전두환의 용병으로
강원도 양구에서 휴전선 철책 근무
대학 다니다 왔다고 하니 모진 구타
엉덩이 피 터져 팬티에 달라붙어
서러움 몰려와 화장실에서 울어
맷집 부족했다면 군에서 죽었을지도
영하 30도 이하 대암산 격고지 근무
군 생활 막바지 노동자 파업 소식에
민중 깨어난 현장으로 달려가고파
3화 강제징집
1980년대 서울 신촌 연세대학교에서 전두환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교문 밖으로 진출하려는 학생들과 이를 저지하는 전투경찰 간에 투석전이 벌어지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1980년대는 공포의 시대였다. 광주에서 시민을 학살하고 집권한 전두환은 폭력통치로 일관했다. 서울대학교에서는 1981년 5월27일 김태훈이 도서관에서 “전두환은 물러가라!”고 외치며 몸을 던졌다. 1982년 10월12일에는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이었던 박관현이 5·18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40일간의 옥중투쟁 끝에 사망했다.
학교와 학교 주변은 경찰과 정보기관 사람들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되도록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곳을 찾아가서 학습 세미나를 했다. 언제고 미행이 붙을 수 있었다. 늘 뒤를 조심해야 했다. 불시에 잡혀서 고문당할 수도 있고, 그러다가 조직을 불 수도 있으므로 우리는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했다. 아무리 빡센 학습을 통해서 사상 무장이 되었다고 해도 늘 긴장하며 살아야 했다. 그래서인가? 우리는 더 강해져야 했고, 더 자주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며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앞서간 열사들의 뒤를 따르겠다고 맹세했다. ‘민주주의여 만세’를 노래하면서 광주에서 죽어간 이들을 기억하려고 했다.
도서관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오던 선배도, 대강당의 지붕 아래 아슬아슬하게 발 겨우 딛고 올라서서 “전두환은 물러가라!” “군사파쇼 타도하자!”고 외치던 시위 주동자도 피투성이가 되어 끌려갔다. 매번 학내외의 시위가 시작되기 직전 맥박과 호흡은 빨라졌다. 그러다가 시위가 시작되면, 나도 모르게 선두에 서서 스크럼을 짰다. 최루탄 연기 자욱한 서울의 거리와 연세대학교 백양로에서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과 싸우는 시위가 잦아졌다. 운 좋게 나는 시위현장에서 잡히지 않았다. 1학년 때 도서관 화장실에서 광주 5·18의 진실을 알리는 유인물을 바들바들 떨면서 읽은 적이 있었지만, 이미 그런 시절의 내가 아니었다.
1980년대 초반, 전두환의 탄압은 더욱 거세졌지만, 그럴수록 학생운동은 더욱 성장했다. 1970년대의 학생운동은 이념써클 중심이었다고 한다면, 1980년대부터는 학과 중심이었다. 학과에 다양한 학회를 만들어나갔다. 1983년에 나는 국문과 학회장(지금으로는 학생회장)이 되었다. 학생들과 두루두루 관계가 좋고 부드러운 이미지(사실은 편한 분위기)가 있어서 대중적인 과 학회장에 적임자라고 했다. 신입생들이 들어왔고, 다양한 종류의 학회에 75명 중 60명이 가입해서 활동했다. 나는 학회장으로 그들의 집 전화번호를 모두 외웠다. 그들과 학습세미나도 같이 하고 점심을 같이 먹었고, 노천극장에 가서 공동체 놀이를 즐겼다. 그러다가 신촌의 운동권 아지트 술집인 ‘훼드라’에 신입생들을 몰고 찾아갔다. 그럴수록 훼드라에는 외상 술값이 쌓여갔다. 이런 활동을 하면서 연세대 학생운동 내에서는 국문과 학회가 가장 모범적이라는 얘기도 들었다. 매일매일이 신나는 날들이었다.
1984년 5월10일 대학생들이 서울시내 중심가를 행진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국문과 학회장이 되어
1983년 4월19일, 4월 혁명 23주년이었다. 그날 점심 학생회관 식당에서 우리 과를 지도했던 홍미선 선배가 시위를 주동하기로 했다. 우리는 점심을 먹는 척 식탁에 앉아 있었다. 선배가 식탁에 올라서면서, 구호를 외쳤다. 우리는 순식간에 스크럼을 짜고, 백양로로 나갔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었고, 백양로에는 23년 전 이승만 독재에 맨손으로 맞서다 죽어간 선배들의 선혈처럼 진달래가 붉게 피어 있었다. 그러다가 경찰이 우리를 진압하기 위해 덮쳤고, 우리는 흩어졌다. 모이고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게릴라성 시위가 계속 됐다. 백양로 주위에는 학생들이 시위에 참가하지는 못하고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들은 박수를 치고, 구호도 따라 외치기도 했다. 경찰이 뛰어오면 군중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런 사이에 선배는 잡히지 않고, 유유히 학교 정문을 빠져 나갔다.
다음날 아침, 나는 고민에 빠졌다. 그렇지만, 당시 도서관에서 학회 총무를 맡고 있던 친구와 약속이 있어서 시간에 맞춰서 학교로 갔다. 도서관에 들어가는데, 서대문경찰서 담당이 나를 잡았다. 그 길로 서대문경찰서 조사실에서 선배의 거취를 추궁 당했다.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그렇게 1주일 동안 경찰서 조사실에서 두들겨 맞았다. 그 시위로 같이 연행됐던 남자 4명은 4월28일 아침에 강제징집됐다. 신체검사 등 모든 절차는 생략된 채 나는 병무청에서 마련해온 입영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그중에는 고등학교 친구 노항래도 있었다. 그와는 소양강에서 헤어졌다. 노항래는 22사단으로 나는 21사단으로. 학교동기 정성희가 앞서 말한 1981년 11월25일 시위로 강제징집됐다가 첫 휴가를 마치고 귀대한 1982년 6월, 의문의 죽음으로 돌아온 뒤였다. 우리는 감옥에는 가더라도 절대 군대는 가지 말자고 다짐했는데, 어처구니없이 전두환의 용병으로 끌려갔다.
1980년대 서울 신촌 연세대학교 정문 앞에서 시위에 나선 학생들과 이를 저지하는 전투경찰 간에 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전방에서 보낸 2년 3개월
‘특수학적변동자’로 분류된 강제징집자(강제징집과 녹화사업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들은 모두 예외 없이 전방에 배치됐다. 나는 강원도 양구의 휴전선 철책을 지키는 소대에 배치됐다. 오전에는 취침을 하고, 오후에는 경계근무와 작업 등을 한 다음, 해가 질 무렵부터는 야간 철책근무에 들어가는 생활이었다.
철책 근무 첫날, 철책 앞에서 신고식이 있었다. 고참이 사회에서 뭐하다가 왔냐고 물었다. 대학교 다니다가 왔다고 했더니 기가 차다는 듯이 나를 두들겨 팼다.
“그래, 어느 대학 다니다 왔는데?”
“연세대학교 다니다 왔습니다.”
군기 바짝 든 이등병은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그게 거짓말이라고 흠씬 두들겨 맞았다. 다음날 아침 점호를 마친 다음 화장실로 급히 달려가서 큰일을 보려고 했다. 하지만 팬티가 내려가지 않았다. 전날 두들겨 맞은 엉덩이가 터져서 팬티가 달라붙어 있었다. 얼마나 아프던지, 참고 참았던 서러움이 몰려왔다. 냄새나는 푸세식 화장실에서 소리를 죽여가며 울었다. 울다가 약해져서는 안 된다, 다시는 울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어금니를 깨물었다.
당시 전방에는 중졸, 고졸 출신이 대부분이었고, 가난한 집안의 청년들이었다. 가장 험하고, 보급이 가장 시원치 않은 전방, 거기에 폭력은 일상이었다. 한때 ‘말죽거리 잔혹사’란 영화가 있었다. 주인공이 우리 또래 청년이었다. 영화처럼 우리는 맷집이 부족했다면 군대에서 죽었을지 모른다.
그 군대 생활 중에 가장 기억이 남는 사람이 있다. 박주재 병장이다. 그는 마산의 오뎅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였고, 두 기수 위의 고참이었다. 그가 일병 고참일 시절에 우리는 모아놓고 다짐을 받았다.
“우리는 고참들한테 맞더라도, 밑에 애들 안 때린다. 맞는 건 우리 대로 끝내자.”
그 다짐을 그는 실천했다. 고참들이 애들 교육(기합과 구타)을 안 시킨다는 이유로 그와 우리들을 두들겨 팼지만, 우리는 그 약속을 실천했다. 우리 소대는 구타가 없는 소대로 바뀌었다.
여름철 전후로는 지오피(GOP)에서 근무했고, 가을부터 봄까지는 해발 1304m의 대암산에서 격고지 근무를 했다. 한겨울에는 영하 30도 이하로 떨어졌고, 눈은 막사 지붕까지 쌓였다. 1983년 10월 아웅산테러 때는 군화도 벗지 못하고 비상근무를 서는 날도 있었다.
그런 속에서도 바깥소식을 들었다. 대우자동차 노동자파업(1984) 소식도 들었고, 군 생활 막바지에는 구로동맹파업(1985) 소식도 들었다. 노동운동이 살아나고 있었다. 민중들이 깨어나고 있었다. 그 현장으로 빨리 가고 싶었다.
1985년 8월1일, 나는 전방에서 죽지 않고, 살아 돌아왔다.
노동해방의 꿈 안고 ‘학출’ 노동자가 되다
1985년 부평지역 목장갑 공장 취업
새 사회 만들 노동자 조직화 위해 대학생활 포기하고 노동운동 투신
무더기 해고에 동료와 일일파업 대응
하루만에 복직했지만 결국 쫓겨나 해고자투쟁위원회 소속으로 활동
1986년 5월3일 인천의 노동자·학생 민주화 조처 요구하며 격렬 시위
‘고물장수로 위장’ 직접 화염병 운반
광주학살 묵인한 미국에 항의하러 그달 말 영등포 한미은행 점거 시위
반미구호 외치다 연행돼 첫 구속
4화 위장취업과 5·3항쟁
1986년 5월3일 오후 인천시민회관 앞에 모인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하고 있다. 연합뉴스
1985년 2학기에 우상호는 학교에 남아 학생운동을 하기로 했고 나는 공장으로 가기로 했다. 집에는 복학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인천 부평지역에 갔다. 그렇다고 전적으로 노동운동에 투신한 건 아니었다. 지금은 ‘오마이뉴스’ 대표로 있는 오연호의 부탁으로 국문과 후배들의 민속문화반 학회 지도도 겸했다. 1주일에 한 번 세미나를 지도한다는 명분이었지만, 세미나보다는 주로 술 먹고 재미있게 놀았다. 그래서인지 그때 만난 후배들과의 인연은 지금까지 이어진다.
역사의 주인인 노동자, 자본주의 착취체제를 부수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갈 주역인 노동자, 그들을 조직해서 노동자 군대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갖고 공장으로 갔다. 선택받은 지식인이 아니라 기득권을 포기하고 존재 자체를 이전하기로 한 것이었다. 나는 다시는 대학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각오로, 공장에 뼈를 묻겠다는 각오로 노동현장으로 갔다. 다른 ‘학출’(대학생 출신, 반면 ‘노출’은 노동자 출신)들은 외모가 노동자스럽지 못하므로 일부러 노가다판에도 가고, 용접 일도 배우고 했지만 나는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군대에서도 ‘어디서 농사일하다가 온 것 같은 놈이 대학 다니다 왔다’고 해서 두들겨 맞았던 것처럼 나는 별도의 준비가 필요치 않았다. 출중한(?) 외모 덕분이었다.
부평 지역의 교회들을 찾아다니면서 노동야학을 열 수 있는 곳을 알아봤지만 허탕이었다. 그래서 1986년부터는 노동현장에 직접 취업하기로 했다. 몇 곳을 알아보다가 작전동의 목장갑 공장에 들어갔다. 120명 정도가 일하는 이곳은 한 달 13만원의 월급에, 하루 12시간씩 맞교대로 일하는 저임금·장시간 작업장이었다.
15~20대 정도의 기계를 2명의 노동자가 맡아서 실을 걸어주고 기계를 돌리면 실장갑이 만들어졌다. 실이 바늘에 엉키지 않게 해주고, 불량을 골라낸 뒤 물량이 쌓이면 다른 부서로 넘겼다. 눈썰미가 있다는 칭찬을 받으면서 노동자들과 금방 친해졌다. 몇몇과는 12시간 일을 하고 근처 술집에 가서 돼지껍데기를 놓고 소주를 마시며 친분을 다졌다. 슬슬 그들을 만나 학습을 하려던 때였다.
하루는 출근했는데 작업자들 이름을 불렀다. 나만이 아니라 거의 절반 가까운 사람들을 부르더니 오른편에 따로 서라고 했다. 호명당한 이들은 내일부터 회사에 나오지 말라고 했다. 말 한마디로 해고를 당했다. ‘뭐 이런 일이 있나’ 했더니, 그 계통 공장에서는 매년 반복되는 일이었다. 가을에서 겨울 사이에는 인력을 왕창 뽑아서 물량을 대량 생산한 뒤 재고로 쌓아놓고, 봄이 되면 인력을 대폭 줄이는 관행이 당연한 것처럼 행해졌다. 그날 저녁, 내 사수를 비롯해 친하게 지내던 노동자들과 공장에서 꽤 떨어진 술집에 모여서 다음날 대응 행동을 의논했다.
이튿날 아침, 사람들이 공장에 들어가지 않고 운동장에 모였다. 10명 정도를 빼고는 모두 기계를 세우는 데 동참했고, 우리는 사장 면담을 요청했다. 사장이 나오지 않자 인천노동청으로 몰려갔다. 한 시간이나 지났을까, 담당 근로감독관이라는 사람이 나와서 회사와 얘기가 됐다면서 해고는 없던 일로 하겠다고, 내일부터 다시 출근하면 된다고 했다. 별로 한 일도 없고, 파업 같지도 않은 집단행동이었지만 하루 만에 이뤄낸 승리였다. 그날 저녁 술집에 모인 우리는 모두 신이 나서 술을 거나하게 마셨다.
문제는 다음날부터였다. 회사 쪽에서 노동자를 한명한명 불러 회유했고, 불려갔던 이들은 모두 회사를 떠났다. 집단행동을 주도했던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서 학출인 것이 드러나 부평경찰서로 신병이 넘겨졌다. 마침 고향 선배가 그 경찰서 소속 경찰이어서 훈방으로 풀려날 수 있었다. 당시 위장 취업한 학출을 색출하느라 난리였는데 그나마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뒤부터는 해고자투쟁위원회 소속으로 활동했다. 밤에 ‘피세일’(유인물 돌리기)을 하고, 낮에는 현장 투쟁 지원을 나가거나 가두투쟁에 전투조로 참가하는 게 주된 일이었다. 그해 3월에 구로공단 신흥정밀에서 일하던 박영진이 분신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살인적인 부당노동행위 철회하라, 노동3권 보장하라”는 요구 뒤였다. 그의 시신은 경찰에 의해 벽제화장터에서 화장된 뒤 뿌려졌다. 나중에 노동자들이 유골을 수습했고, 이소선 어머님이 보관하다가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하기로 했다고 했다.
4월 중순쯤이었고, 해고자투쟁위원회에서 활동한 지 오래되지 않았을 때였다. 마석역에 도착하니 역 앞에서부터 경찰과 노동자들 사이에 투석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겨우 경찰 저지선을 뚫고 마석 모란공원에 도착했는데, 모란공원 주위도 경찰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거기서도 싸움이 벌어졌고, 오후가 되어서야 겨우 유골을 안장할 수 있었다. 먼발치에서 이소선 어머님을 뵐 수 있었다. 어머니와의 첫 만남이었다.
정국은 요동치고 있었다. 전두환 정권의 탄압은 거셌지만, 제1야당이었던 신민당은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면서 전국에서 개헌추진위원회 현판식을 열었다. 4월28일에는 서울대생 김세진, 이재호가 신림사거리에서 분신했다. “미제용병 교육, 전방입소 철폐”를 주장했던 그들의 분신은 충격이었다.
1986년 5월3일 오후 인천시민회관에서 열릴 계획이던 신민당 개헌추진위 인천·경기지부 결성대회장 주변에 모인 시위대. 연합뉴스
1986년 5월3일, 인천에서 개헌추진위원회 현판식 일정이 잡혔다. 이날 당시 모든 운동권이 “인천을 해방구로!”를 외치며 집결했다. 경찰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화염병을 반입할 방법을 고민하다가 고물장수로 위장해 리어카를 이용해 운반하기로 했다. 딱 알맞은 외모를 지닌 내가 그 역할을 맡았다. 예상대로 인천 시민회관 주변은 경찰의 경비가 삼엄했다. 태연하게 리어카를 밀고 들어갔다. 10m쯤 전진했을까? 별 의심 없이 길을 터줬던 경찰이 갑자기 “저거 뭐야?” 하고 소리치자 경찰들이 우리를 잡으려고 몰려들었다. 다행히 주변에 있던 동지들이 경찰들을 밀어내면서 화염병 운반에 성공했다.
인천시민회관 주위는 격렬한 전쟁터와 다름없었다. 경찰과 투석전이 벌어졌고 여기저기서 내가 반입한 화염병이 날아다녔다. 그 와중에 시민회관 앞에서 동생을 만났다. 아주 오랜만에 만난지라 기쁨에 서로 부둥켜안았다. 투쟁 중에 만나니 더 반가웠다. 거기서 우상호도 만났다. 경찰에 밀리면서 오전에 시작된 투쟁이 저녁 무렵까지 이어졌다. 이날 시위로 총 319명이 연행됐고 그중 129명이 소요죄로 구속되었다. 해고자투쟁위원회 소속 노동자들은 화염병 반입과 폭력투쟁 주도 혐의로 비공개 수배를 당했다.
1986년 5월3일 오후 인천시민회관에서 열릴 계획이던 신민당 개헌추진위 인천·경기지부 결성대회장 주변에 모인 시위대가 화염병, 벽돌 등을 던지며 격렬한 시위를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던 중 미제국주의를 반대하는 노동자의 목소리를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지도부 방침에 따라 1986년 5월30일 한미은행 점거 시위에 참여했다. 인천지역 해고자들이 중심이 됐다. 학출도 있었고, 노출도 있었다. 영등포 한미은행에 청소부가 청소하느라 문을 열어둔 틈을 타고 우리는 은행 2층을 점거한 뒤 바리케이드를 쳤다. 경찰은 소방차를 동원해 유리창에 소방호스로 물을 쐈다. 압력이 얼마나 센지 유리창이 모두 깨졌다. 일부는 해머로 벽을 부수고 거칠게 진입했다. 나는 “노동자, 농민 피땀 짜는 미제국주의 몰아내자!” “광주학살 원흉 군부독재 양키 처단하자!”는 현수막을 내걸고 창에 매달려 계속 구호를 외쳤다. 그러다가 밀고 들어온 경찰에 떠밀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미처 땅에 닿기도 전에 경찰 군홧발이 내 얼굴을 짓밟았다. 그길로 영등포경찰서로 연행되었고 구속됐다. 내 생애 첫 번째 구속이었다. 깨어진 유리창에 올라가 구호를 외치는 내 사진이 다음날 신문에 실렸다.
1986년 5월30일 서울 영등포 한미은행을 점거한 뒤 창에 매달려 반미 구호를 외치고 있는 박래군 사진이 경향신문에 실렸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 2024-05-27
감옥에서 대중투쟁을 배우다
[길을 찾아서-박래군의 인권의 꿈] 5화 옥중 투쟁
1986년 10월28일 전국 26개 대학 2천여명의 학생들이 건국대에 모였다. ‘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 투쟁연합’ 발족식을 하던 중 경찰이 진입해 점거 농성을 하게 됐다. 사진은 이튿날 건국대 본관건물을 점거한 학생들로, 폭력 진압에 나선 경찰은 학생 1525명을 연행해 1288명을 구속했다. 연합뉴스
한미은행 점거 농성으로 구속되자
면회온 가족들 “반성문 쓰라” 읍소
다짐 무너질까봐 이 악물며 거부
징역 2년6개월 선고받고 교도소행
감옥서 양심수들과 함께 정치투쟁
공안탄압 거세져 구속자 늘어나자
고문 당한 뒤 징벌방에 갇히기도
옆방에 서울대생 고문 경관도 투옥
사실 알리려 감옥 안에서 규탄시위
상한 두부 등 열악한 배식 항의 위해
일반 재소자 등과 함께 ‘부식 투쟁’
결국 교도소장 사과 받아내고 승리
서울 영등포 한미은행을 점거 농성했던 16명의 해고자는 모두 구속되었다. 경찰 조사를 받은 뒤 노량진경찰서 유치장을 거쳐서 영등포구치소로 넘어갔다. 유치장에 있을 때 부모님과 형, 동생이 소식을 듣고 들려왔다. 가족들 입장에서는 너무 기가 찬 노릇이 아닌가. 군대를 제대한 지 겨우 10개월 만에 구속이라니….
부모님과 형은 눈물로 호소했다. ‘반성문을 쓰면 감옥에서 나갈 수 있다’는 경찰의 거짓말을 듣고는 제발 반성문을 쓰라며 울먹였다.
“래군아, 반성문 좀 쓰면 안 되겠냐. 나와서 운동하면 되잖니. 너 대학 보내고 부모님이 얼마나 좋아하셨니. 부모님 생각해서라도 눈 딱 감고 반성문 쓰고 나오자.” 노량진경찰서 유치장에 있을 때 형이 갈아입을 옷과 함께 넣어준 엽서의 글씨가 번져 있었다. 눈물로 쓴 편지다. 여기서 무너지면 안 된다, 전두환 독재에 굴복하면 안 된다, 노동해방을 위해, 민중을 위해 이 한 몸 바치기로 했던 나의 다짐이 무너질까 봐 이를 악물었다. 참으려고 했지만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1986년 10월28일 전국 26개 대학 2천여명의 학생들이 건국대에 모였다. ‘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 투쟁연합’ 발족식을 하던 중 경찰이 진입해 점거 농성을 하게 됐다. 이튿날 건국대 학생회관 모습. 연합뉴스
눈물 번진 편지
영등포구치소로 넘어가 지내면서 느낀 사실은 세상에 억울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감옥엔 힘없고, 빽 없고, 가난한 사람들로 넘쳐났다. 그들이 민중이었다. 나는 여러 명이 함께 쓰는 혼거방에서 그들이 살아온 삶에 관해서 묻고 들으려 애썼다. 내 방에는 ‘범털’(가족들이 면회 와서 영치금이나 사식을 많이 넣어주는 재소자를 부르는 은어)보다는 ‘개털’(면회 오는 가족마저 없어서 영치금도 없는 가난한 재소자)이 대부분이었다. 어머님이 바쁜 농사일을 하면서도 꼬박꼬박 면회를 오시니 그 방에서 나는 범털에 속했다. 경찰에 구타당한 몸이 천천히 회복되자 구치소 생활에도 적응했다.
영등포구치소와 영등포교도소는 참으로 열악했다. 서너평 되는 방에 10명 가까운 재소자들이 부대끼며 살다 보니 사소한 일에도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새우잠과 칼잠은 기본이었다. 여름은 찜통더위였고 겨울엔 물통에 얼음이 꽁꽁 얼었다. 여름엔 푸세식 변소에서 구더기가 기어 나왔다. 변기 입구를 아무리 틀어막아도 구더기를 어찌할 수 없었다. 그렇게 열악한 마루방에서 밥그릇을 늘어놓고 밥을 먹었다. 겨울엔 최전방에서 겪은 것처럼 살을 파고드는 추위에 새벽이면 잠이 깨고는 했다.
1심 재판에서 2년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1986년 11월초 영등포교도소로 이감되었다. 내 방은 3사상 10방. 저녁 점호를 마치고 나면 매일 ‘민중의 소리’ 방송을 했다. 쇠창살을 잡고 저렁저렁한 목소리로 창밖을 향해서 바깥세상 소식을 전했다. 마지막은 언제나 전두환 정권을 규탄하는 구호로 끝냈다. 전국의 교도소에 정치범인 양심수들이 넘쳐 나던 때였다. 감옥에 갇힌 양심수들은 옥중투쟁위원회(옥투위)를 만들어 그 안에서도 정치투쟁을 이어갔다. 옥투위는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양심수 가족들로 구성된 인권단체로 1986년 12월 설립되었다)을 통해서 다른 교도소 양심수들과 연락을 했고, 감옥 안에서 전국 동시 행동에 돌입할 정도로 강력했다. 내가 저녁마다 큰소리로 시국연설을 하고 구호를 외쳐도 교도소 측에서는 크게 제지하지 못했다.
1984년에 총학생회가 부활한 뒤 학생운동은 전두환 정권을 더욱 거세게 압박했다. 노동운동, 빈민운동, 재야운동 등도 급성장하고 있었다. 거기에 개헌을 요구하는 야당 공세도 계속됐다. 전두환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공안탄압의 강도를 높여갔다. 1986년 내내 공안사건이 터졌고, 구속자는 급증했다. 그 과정에서 ‘부천서 성고문 사건’(부천경찰서 경찰 문귀동이 부천 지역에 위장취업했던 여성 노동자를 조사하면서 성고문을 저지른 사건)이 폭로돼 국민의 분노를 샀다. 그러다가 1986년 10월28일부터 31일까지 나흘 동안 민족해방 계열 학생운동가들이 건국대에 총집결해 대정부 투쟁을 벌이는 일이 일어났다. 정권은 헬리콥터와 최루탄, 물대포를 쏘며 폭력으로 진압했다. 이 사건으로 1525명이 연행되었고, 1288명이 구속됐다.
갑자기 구속자들이 대거 밀려들어 오자 교도당국의 태도가 돌변했다. 걸핏하면 양심수들을 보안과 지하실로 끌고 갔다. 나도 그해 겨울 몇 번이나 거기로 끌려가 구타와 함께, 일종의 비녀꽂기 고문(무릎 꿇은 상태에서 손을 머리 뒤로 묶은 뒤 다리와 연결해 팽팽하게 당기고 머리 뒤로 각목을 끼우는 방식)을 당했다. 이 고문을 당하면 어깨며 팔, 허리가 끊어지는 듯한 극심한 고통이 따른다. 시간이 지날수록 포승줄이 살을 파고들고 통증은 심해진다. 이를 악물고 버텼고 끝내 항복하지 않은 채 징벌방으로 넘겨지곤 했다. 나는 독한 놈이었다. 그렇지만 옥투위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1988년 5월17일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의 첫공판이 끝난 직후 구속자 가족, 학생들 3백여명의 방청객이 법정을 나서면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박종철을 살려내라!
해를 넘겨 1987년 1월이었다. 세상과 단절된 감옥 안에까지 서울대생이 고문을 당하다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소문은 곧 사실로 확인되었다. 옥투위는 결사투쟁을 결의했다. 1월17일경 저녁 시간에 우리는 일제히 감옥 문짝을 걷어차며 “박종철을 살려내라!” “살인정권 타도하자!”는 구호를 외쳤다. 곧바로 경비교도대가 출동했고 우리는 여지없이 끌려가 보안과 지하실에 묶여있다가 ‘먹방’(징벌방의 일종으로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다)에 던져졌다. 일명 돼지묶음(포승줄로 팔을 뒤로 묶어서 다리와 연결해 팽팽하게 당기는 방식의 포박) 당한 채. 깜깜한 방에서 한참을 버둥대고 있는데, 그 방에는 앞서 다른 한 명이 들어와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밧줄을 풀어주었고 나는 수갑마저 빼냈다. 손발이 자유로워지면 배변을 스스로 할 수 있어서 옷에 똥오줌을 지리지 않아도 된다. 그 곳에서 하룻밤을 보내면서, 이번에는 오래 머물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런데 다음날, 교도소 측에서 우리를 모두 풀어준 뒤 각자의 방으로 돌려보냈다. 어안이 벙벙했다. 곧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우리가 들어갔던 먹방 바로 옆이 특별사동인데 그곳에 서울대생 고문 경관들을 수용한 것이다. 이들의 존재를 들킬까 봐 바로 옆 방에 있던 우리를 풀어준 것이었다. 고문 경관이 지척에 있다는 사실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이었다.
영등포교도소 양심수들은 운동을 가거나, 면회를 나갈 때면 고문 경관들이 수감 중인 특별사동을 향해 질주하면서 외쳤다. “여기 고문경찰이 있다. 살인마를 처단하자!” 그때마다 교도관들은 우리를 붙잡아 입부터 틀어막았다. 교도관들이 ‘제발 소리지르지 말라, 우리 사정도 좀 봐달라’며 통사정 했지만, 우리는 막무가내였다.
그러던 중 배식받은 국에서 쥐꼬리가 나왔다는 소문이 돌았다. 실제 우리가 받은 음식은 사람이 먹을 수 없을 정도였다. 옥투위는 부식투쟁을 하기로 했다. 불만이 고조되던 어느 날, 아침 반찬으로 나온 두부조림에서 역한 냄새가 심하게 났다. 나는 두부를 방 밖으로 내던지면서 투쟁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양심수들만 싸우는 게 아니었다. 교도소의 전 사동에서, 모든 방에서, 모든 재소자가 양심수들의 투쟁에 합세해 문짝을 걷어차고 구호를 외쳤다. 결국 교도소장이 사과 방송을 했고, 옥투위는 부식 개선 약속을 받아냈다. 재소자와 함께 한 이 투쟁은 승리로 끝났다. 역시 감옥은 ‘정치대학’이었고, 나는 그곳에서 활동가로 단련되고 있었다.
2024-06-03
“네 몫까지 싸울게”…동생 박래전을 모란공원에 묻다
7화 동생 래전의 분신
1988년 6월 분신한 숭실대 박래전 열사의 장례행렬. 한겨레 자료사진
숭실대 인문대 학생회장이던 동생
‘광주학살 원흉 처단’ 등 요구하며
학생회관 옥상서 구호 외치며 분신
‘제발 살려달라’는 간절한 기도에도
전신 화상 탓에 가망 없다는 답변만
‘동생과 가족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흔들리지 않으려 이 악물며 애써 침착
분신 30분 전 내게 전화 걸어왔지만
의문사한 선배 조문하느라 통화 못해
“독하게 마음먹고 네 몫까지 싸울게”
모란공원서 관 위에 흙 덮으며 다짐
래전이가 분신이라니. 듣고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택시를 잡아탔다. 서울 영등포 한강성심병원까지 가는 동안에 평소 믿지도 않는 신에게 기도했다. 제발, 래전이를 살려 주세요, 간절하게 기도했다.
병원 곳곳에 대자보가 붙어 있고, 학생들로 보이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뭐가 뭔지 정신이 없었다. 국문과 최병현 선배가 나를 발견하고는 중환자실로 데려 갔다. 침상 위에 온몸을 붕대로 칭칭 동여맨 동생이 있었다. 링거를 주렁주렁 달고 동생은 쉑, 쉑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기계장치들도 여럿 있었다. 심전계는 녹색 그래프를 급하게 그리고 있었다. 동생은 눈을 뜨지 못했고 나를 알아보지도 못했다. 붕대로 감은 손을 잡았는데,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숨을 쉬고 있으니 아직 살아 있는 건데…. 차가운 손을 놓으며 아마 휘청였던 것 같다.
그러자 최 선배가 나를 부축해 병실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병원 계단에 앉아 담배에 불을 주었다. 담배를 빨 수가 없었다. 목울대가 너무도 아팠다. “네가 정신을 차려야 한다”면서 래전이가 쓴 유서를 건넸다. 눈물이 앞을 가려 도저히 읽을 수 없었다.
병원에서 통곡하시는 부모님. 필자 제공
악몽 같은 나날들
부모님과 가족, 친척들은 1층 보호자 대기실에 있었다. 방으로 들어서자 아버지가 대성통곡을 했다. “래군아, 어떡하냐. 이놈들아. 내가 니들을 뭐하려고 공부시켰냐! 운동이 뭐라고!” 어머니는 내 손을 꼭 잡고 울기만 하셨다. 전날 래전이 병실에 들어간 어머니는 래전이 손을 잡고는 “래전아, 장하다! 정말 장하다! 어서 일어나라! 일어나서 엄마와 같이 싸우자! 이 에미는 너를 다 이해할 수 있다. 엄마도 이제부터 너랑 같이 싸우마! 어서 일어나라!”고 말씀하셔서 주위 사람들을 울렸다고 했다.
믿을 수 없는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학생들이 병원에서 집회를 한다고 해서 가족 대표로 말을 하긴 했지만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오로지 ‘내가 흔들려서는 안 된다, 래전이를 지키고 가족들을 지켜야 한다’고 이를 악물었다. 침착하자, 냉정하자고 몇번씩 마음을 다져 먹었다. 나는 중환자실 주위에서 줄담배를 피워대며 서성였다.
1979년 박래전(가운데)의 중학교 졸업식 직후 기념사진을 찍은 박래군(왼쪽). 박래전 기념사업회 제공
사람들은 동생이 가망이 없다고 했다. 병원 벽에 붙은 속보에는 전신 80%에 3도 화상을 입었다고 적혀 있었다. 병실에 들어갈 때면 심전계의 녹색 그래프를 유심히 봤다. 점점 그래프가 수평에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몇 번의 위기가 왔는데 그때마다 의사며 간호사들이 심폐소생술을 시도했다. 운명의 시간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래전의 몸에 매달렸던 심전계가 삑삑 경고음을 울리고, 녹색 그래프가 높낮이 없이 수평으로 직선을 그리고 있었다. 의사가 더는 호흡기로도 생명을 연장할 수 없다고 했다.
1988년 6월6일, 낮 12시23분. 호흡기를 떼어냈다. 동생은 화상의 고통에서 벗어났다. 만 25년을 같이 살았던 내 동생이 운명했다.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가슴은 미어지고, 뜨거운 눈물이 솟았지만, 눌러서 참고 참았다.
입관하는데 동생 몸이 숯덩이였다. 내 동생이라고 믿을 수 없었다. 입관을 하고, 드라이아이스를 관에 가득 채웠다. 시신은 숭실대로 옮기기로 했다. 6월 초인데도 태양은 이글이글 타올랐다. 아스팔트 열기는 숨 막힐 듯이 뜨거웠다. 운구차를 에워싸고 학생들이 행진을 해서 병원에서부터 학교로 이동했다. 학교 채플실에 제단이 마련되어 있었고, 거기에 래전이를 안치했다. 학교에서는 매일 결의대회가 열렸고 장례 준비로 분주했다.
장례는 ‘민중해방열사 고 박래전 민주국민장’으로 하기로 했다. 장례일이 6월12일로 정해졌다. 7일장이었다. 장례위원회 위원장은 백기완 선생님이, 부위원장은 문익환 목사님 등이 맡아주셨고, 민주화운동 인사 거의 모두가 장례위원회에 이름을 올렸다. 장례집행위원장은 서울대 총학생회장이었던 전상훈이 맡았다. 같은 정파를 대표하는 학생 대표였기 때문이다. 장례의 온갖 일을 책임지고 보살피는 ‘호상’은 숭실대 인문대 부학생회장을 하던 윤은경이 맡았다. 지금도 윤은경이 흰 상복을 입고 래전이 영정을 들었던 애처로운 모습이 기억난다. 장지는 ‘전태일 선배가 있는 곳으로 하자’는 이소선 어머님의 권유를 받아들여 마석 모란공원으로 정했다.
동생 박래전은 그해 6월4일 오후 4시 직전에 세계출판사로 전화를 걸어 나를 찾았다고 한다. 그때 나는 의문사 당한 연세대 선배 고정희 씨 빈소(강남 가톨릭성모병원)에 조문을 가느라 통화를 하지 못했다. 분신을 결행하기 약 30분 전이었다. 생의 마지막이었을 전화를 받지 못했다. 오후 4시20분께, 래전이는 숭실대 학생회관(현재의 미래관) 옥상에서 “광주는 살아 있다! 끝까지 투쟁하라. 청년 학도여, 역사가 부른다. 군사 파쇼 타도하자!”고 외쳤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이 구호 소리를 들었다. 곧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불길이 치솟았다. 학생들이 옥상으로 뛰어 올라와서 소화기로 불을 껐지만, 이미 래전이는 온몸에 화상을 입은 뒤였다. 병원으로 옮기는 중에도 “광주는 살아 있다. 내가 죽더라도 끝까지 투쟁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병원에서 통곡하시는 부모님. 필자 제공
광주는 살아 있다!
장례를 치르는 중에 비로소 래전이가 남긴 유서를 읽었다. 유서는 “어머님, 아버님께”,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백만 학도에게” 등 3통이었다. 비공개 유서도 한 통 있었다. 유서 끝에는 “광주민중항쟁 8년 6월2일”이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6월1일이 스물다섯 번째 생일이었으니, 생일 다음 날 작성한 것이었다. 유서에서 래전이는 광주학살 주범들을 역사의 심판대에 올려야 하고, 보수야당들이 광주의 진상규명을 정치적으로 타협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에 더해 서울올림픽을 이유로 민중생존권을 탄압하는 노태우 정권을 강하게 규탄했다. 양심수의 전원 석방과 자유로운 통일 논의의 보장도 요구했다. 그리고 대통령 선거 이후 극심한 분열상을 보이는 운동진영에 무조건 통일단결을 위한 작업에 착수할 것을 요구했다. 부모님 앞으로 쓴 유서에서 “어머님, 아버님. 이 시대의 군부독재는 우리의 손으로 깨부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또한 미국 놈들을 몰아내지 않으면 통일은 불가능합니다”라고 말하고, 마지막에는 “아버님, 모질게 먹은 마음이라 눈물조차 흐르지 않아요. 어머님, 아버님, 안녕히”라고 적었다.
6월12일, 장례행렬은 아침 일찍 학교를 나섰다. 동생 모교였던 고향의 송산고등학교를 들러 서신중학교를 찾았다. 아무도 없었다. 텅 빈 학교 운동장에 우리만 있었다. 나는 악에 받쳐서 소리를 질렀다. 제자가 죽어서 왔는데 맞아주는 선생 한명 없다는 게 너무 속이 상했다. 시골집에도 들렀다. 동네 어른들이 모두 나와서 우리를 맞아주었다. 래전이는 그해 부처님 오신 날인 5월23일 마지막으로 집에 들렀다. 20일 만에 래전이는 저세상 사람이 돼 집을 찾아왔다.
서울로 돌아온 장례행렬은 경희궁터(지금의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영결식을 마친 뒤 서울시청을 거쳐서 마석 모란공원으로 향했다. 그사이 내 머릿속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하관할 때 어머님이 관을 붙잡고 놓지 않으셨다. “나도 같이 가자. 래전아, 엄마도 같이 가자”고 울부짖으셨다. 그 어머님을 간신히 떼어놓고 관 위에 흙을 덮으면서 다짐을 했다. ‘래전아, 네 몫까지 내가 할게. 네가 바라던 민중의 새 세상 만들 때까지 독하게 맘먹고 싸울게’ 하고 다짐했다. 그때 동생 박래전은 스물여섯이었고, 나는 스물여덟이었다.
서신중학교 노제에서 발언하는 박래군. 필자 제공
2024-06-17
‘부재의 시간’ 견뎌내고 인권운동에 들어서다
8화 상실의 고통과 운명적 순간
마석모란공원 박래전 묘지. 왼쪽 추모비엔 박래전이 쓴 시 ‘동화’의 후반부가 신영복 선생의 글씨로 새겨져 있다. 필자 제공
동생 장례를 마치고 나니 모든 게 달라져 있었다. 술만 드시면 “래전이 불쌍해서 어떡해” 하며 우는 아버지, 내놓고 울지도 못하고 눈물만 흘리는 어머니가 계셨다. 사람들은 그랬다. “막내 잃은 부모님을 네가 잘 보살펴야 한다”고. ‘너 때문에 래전이가 죽었다’는 얘기를 직접 대놓고 하는 친척도 있었고, 뒤에서 수군대는 소리도 들렸다. 화도 나고 억울했다. 그때 내가 래전이의 마지막 전화를 받았다면 분신을 말릴 수 있었을까? 래전이 얼굴에 검은 반점이 피어날 때 돈 몇 푼 던져주고 말 게 아니라 직접 병원을 갔더라면 달랐을까? 뭐가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걸까? 분신은 나와 상관없는 일인 줄 알았다. 막상 내가 당해 보니 마음을 다잡기가 어려웠다.
사실 나는 래전이의 앞길을 방해해왔다. 군대 제대하고 복학해서 운동을 다시 시작한 1986년, 내가 노동운동을 하다 감옥에 가는 탓에 래전이는 부모님 손에 이끌려 고향으로 내려가야 했다. 래전이는 복학 뒤 학생운동을 제대로 하고 싶었지만 부모님 걱정에 무척 괴로워했다. 유서에도 “올해로써 대학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두 분을 모시면서 고향에서 올바른 뜻을 펴고자 했습니다”라고 썼다. 그런데 왜 갑자기 분신을 했을까? 혼자 있는 시간이면, 이런저런 생각이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장례 기간에는 생각도 못했는데, 모든 공간에 래전이가 있었다. 래전이 동료들의 충격도 무척이나 컸다. 그 후배들과 만나 래전이 얘기를 들었다. 그들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형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몰랐다”며 자책하고 울었다. 숭실대학교와 인근에서 그리고 시골집을 찾아온 그들 등을 다독였다. 너희 잘못이 아니라고…. 후배들은 래전이가 5월 투쟁에 나서서 단식을 하고, 혈서를 쓰고, 거리 투쟁을 할 때 온힘으로 함께하지 못했던 일들을 후회했다. ‘형이 너무 과격하다, 조급하다’고 비판했던 몇몇은 죄책감에 시달렸다.
한동안 나는 혼자만의 시간이 두려웠다. 그래서 더 래전이의 숭실대 후배들과 어울렸던 것 같다. 혼자 있으면 지나간 모든 일이 후회로 돌아왔다. 조성만(서울대생으로 1988년 5월15일 명동성당 가톨릭회관에서 할복 후 투신 자결), 최덕수(단국대 천안캠퍼스에서 1988년 5·18광주민중항쟁 기념일에 분신 자결)의 장례식에 가지 못했던 것도 회한으로 남았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최덕수의 아버지와 백기완 선생님은 그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래전이가 덕수 장례식에서 누구보다 슬픈 표정으로 마지막 날까지 함께 했던 모습을 말이다.
돌아보면 동생은 보이지 않고
거리에 나서면 “형”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면 아무도 없었다. 한번은 내 앞에 마르고 키가 껑충하게 큰 청년이 가는 걸 보고는 급히 달려가 팔을 잡으며 “래전아!” 하고 불렀다. 동생이 아니었다. 내가 왜 이러지, 자꾸 헛것이 보이고 환청이 들렸다. 뜨거운 불길에 휩싸여 숯덩이가 되어 죽었는데, 마지막에는 밥 한 끼 먹이지 못하고 세상을 뜨게 했는데. 배가 고파 밥을 먹어도 죄를 짓는 것 같았다. 가슴이 조여 오면서 숨 막히는 고통이 몰려오고는 했다. 지금에야 트라우마니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PTSD)이니 하지만, 그때는 그런 걸 몰랐을 뿐더러 알려주는 이도 없었다. 나의 슬픔과 분노는 감추어야 하는 것이었고, 말해야 하는 게 아니었다.
장례 기간에는 느끼지 못했던 ‘부재의 시간’을 지나고 있었다. 나는 외로웠다. 사람들 속에 있어도 내 마음 속 얘기를 하지 못하고, 나보다 더 슬퍼하는 이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안아주어야 했다. 나는 ‘울어서는 안 된다, 부모님, 후배들도 내가 챙겨야 하는데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어느 순간 갑자기 울컥했고, 그리움이 밀려오곤 했다. 아버지는 술과 농사일로 자신을 몰아세웠다. 상념에 젖어들까 더욱더 일을 벌이고 집착했다. 점차 래전이에 관한 이야기는 집안의 금기가 됐다.
박래전 유고시집. 필자 제공
동생은 시인이었다. 세계출판사 윤후덕 선배가 시집을 내자고 했다. 래전이가 쓴 시들을 찾아서 정리했다. 52편의 시편들을 정리할 수 있었다. “아직도 시만 쓰고 앉아있어야 하는가?/ 아직도 헛소리나 지껄이는 우리이어야 하는가?/ 뜨거운 가슴 감추어 두고/ 핏발 선 눈빛도 가리워두고/ 종잇장이나 메우면서 이 세월을 보내야 하는가?”(‘시인에게-모독∙1’ 중에서) 자책을 하면서도 그는 꾸준히 시를 썼다. 가까운 후배들에게는 읽어보라며 보여주기도 했다. 래전이는 숭실대 국문과생이자 다형문학회 회원이었다. 시집에는 래전이가 남긴 52편의 시를 4부로 나눠 수록하고, 5부에는 래전이가 참여했던 다형문학회 집단창작시를 실었다. 부록으로 래전이의 유서 3통을 실었고, 발문을 대신한 나의 글은 학교 동기인 심산(본명은 심종철)이 많이 고쳐주었다. 서문은 백기완 선생님이 써 주셨다. 그렇게 해서 “어두운 시대에 태어나/ 참인간이고자 했던 작은 사람의 아들” 박래전의 유고시집이 49재에 맞춰 ‘반도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어떡할려고 그러니 이노무 새끼들아/ 난 어떡하라고 두 형제가 다 유치장에 있어/ 나와라/ 나와서 이야기 좀 하자/ 어떡하란 말이냐 얘들아// 노량진 유치장에 면회 오신 어머님/ 나이 오십에/ 칠십 나이 겉늙은/ 할머니 주름 가득한/ 어머님 (‘어머니 말씀’ 전문)
‘반도의 노래’ 육필 원고. 필자 제공
시인 박래전이 남긴 유고시들
백기완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몇 년 전, 래전의 시집을 읽다가 내 생각이 났다며 어느 날 전화를 걸어오셨다. 백 선생님은 전화로 저 시를 낭송하며 소리 내 우셨다. 1986년 내가 감옥에 있을 때, 동생은 시골에 있다가 잠시 학교에 다니러 왔었다. 그러다가 시위현장에 화염병을 운반하던 중 경찰에 잡혀서 노량진경찰서에서 15일간 구류를 살았다. 하필이면 그때가 추석 때였다.
래전이는 시만 쓰지 않았고, 자신이 배우고 생각한 것을 실천으로 옮겨야 하는 사람이었다. 심성은 여렸지만 불의 앞에는 유난히 고집이 셌다. 그가 남긴 시 곳곳에서 자신의 목숨을 걸어서라도 시대의 아픔을 넘으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너희들이 원한다면/ 내게 불을 붙여다오/ 조각나고 야위었을지라도/ 마른 장작이 더 잘 타는 것/ 내 배를 탄 백성들이 원한다면/ 자! 불을 붙여다오(‘반도의 노래’ 중에서)
대표작은 ‘동화’(冬花)다. 동화는 겨울꽃인데 자신의 필명으로도 썼다. 다음은 이 시의 후반부다.
겨울꽃이 되어버린 지금
피기도 전에 시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진정한 향기를 위해
내이름은 冬花라 합니다
세찬 눈보라만이 몰아치는
당신들의 나라에서
그래도 몸을 비틀며 피어나는 꽃입니다.
지금은 겨울, “내 발의 사슬 때문”에 봄에도, 여름에도, 가을에도 꽃을 피우지 못하고, 지독한 겨울에 온몸을 비틀며 피어나는 겨울꽃, 바로 자신이었다. 죽음을 결심한 자의 시였다. 이 시의 후반부를 학교 추모비 뒷면에, 모란공원 묘지 앞 비석에 새겼다. 신영복 선생님의 글씨로.
신영복 선생이 쓴 박래전의 시 ‘동화’. 필자 제공
방황하는 나에게 이소선 어머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유가협(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 현재의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월례모임을 하는데 나와 보라고 하셨다. 1988년 8월12일, 처음으로 유가협 모임에 나갔다. 청계노조 사무실로 기억나는데, 유가족들이 모여서 총회를 하는 자리였다. 회의가 제대로 되질 않았다. 도떼기시장이라고나 해야 할까? 아버지들이 화를 내듯 큰 목소리로 자기 얘기만 늘어 놓는 중에도 이소선 어머니는 회의를 진행해갔다.
어머니들은 래전이의 형이 왔다며 반겨주셨다. 그렇게 유가협에 한 발을 들여놓았다. 살다보면 찾아오는 한 순간이 있다. 아마도 운명적인, 피할 수 없는 순간. 그때가 그런 순간이었음을 나는 몰랐다. 운명은 내 의지와 무관하게 나를 인권운동의 길로 이끌었다.
숭실대 인문대학생회장 시절 시위를 이끌고 있는 박래전. 필자 제공
2024-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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