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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그 사람

광부화가 황재현

by 이성근 2021. 8. 21.

 

40여년 천착한 현실, 내 그림은 낭만 너머에 있다

제 큰어머니 얼굴입니다. 그 자체로 역사가 됐어요.”

 

황재형(69) 작가가 가리킨 건 작업대 위 늙은 여인의 거대한 얼굴 그림이었다. 파마한 머리칼이 덮은 이마 위쪽에 살이 뭉개진 자국이 보인다. 남편인 큰아버지가 던진 목침에 맞아 함몰된 흔적이다. 큰아버지는 1948년 여순사건 당시 반란군의 고문을 받아 정신이 오락가락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여인 얼굴 곳곳이 상처 나고 봉합된 흉터투성이다. 물감 대신 진짜 머리카락을 한올 한올 붙여 형상을 만들었다. 얼굴 아래와 목 부분은 공백으로 남겨 머리만 떠있는 인상이다.

조금 떨어진 벽에는 늙은 남자의 인물상이 있었다. 수심이 깃든 고대의 현자 같은 주름투성이 얼굴과 벗은 가슴팍이 푸른 빛 배경 속에 흐물흐물 녹아들듯한 그림. 바로 자화상이다. 황 작가는 자화상을 올려다보면서 회상했다. 그림이 좋아 전남 보성 고향 집 앞 해변에 나무작대기로 풍경 그리는 것이 유일한 일과였던 소년 시절과, 여순 사건 당시 반란군의 고문을 견디며 거처를 숨겨준 형 덕분에 죽을 고비를 넘긴 검찰청 직원 출신 아버지의 기억을 떠올렸다. 크레용을 뺏으며 그림을 못 그리게 막았던 아버지가 말년 사업에 실패하고 세상을 버리자 대가 오지호와 강연균의 화실에서 고학하며 결사적으로 배웠던 중고생 습작기, 미대 졸업 무렵 인간사의 본질과 의미를 알고 싶어 광부로 투신했던 청년 화가의 도전 시대, 탄광이 망했는데도 광산촌 사람들을 미술 교육으로 부여잡은 도시문화활동가로 나선 이력도 스쳐간다. 그렇게 40여년간 황 작가의 리얼리즘 회화 속에서 죽음과 삶은 엉클어져 덩어리 혹은 상흔 같은 흔적들로 날아와 화폭 위에 박히곤 했다.

 

연화산 아래 작업실에서 전시를 떠올리다

지난 25일 옛 광산촌이었던 강원도 태백시 문예1길에 자리한 황 작가의 작업실을 찾았다. 연화산 아래 2층 아틀리에 작업실에서 맨 처음 눈을 때린 것은 영계에 머물러 있을 법한 그의 자화상. 그리고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을 대번에 떠올리게 하는 큰어머니의 머리카락 그림이었다. 작업실을 찾아간 건 지난 430일부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2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는 그의 초대전 회천’(回天)에 얽힌 궁금증 때문이다. 화가 황재형은 19829월 태백 광산촌에 내려간 이래로 지금까지 40년 가까이 자신의 작업과 현장 미술활동을 하면서 한국 현대 사실주의(리얼리즘) 회화의 우뚝한 봉우리가 됐다.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 이제 생태와 문명, 역사로 눈돌리며 원숙한 리얼리즘의 경지를 추구하는 황 작가는 이른바 광부 화가’ ‘탄광촌 회화등으로 불리며 큰 울림을 일으켰던 1980년대 명작들을 비롯해 2010년대 이후까지의 주요 작품들을 국립현대미술관에 내걸었다. 1980년대 태백, 사북, 고한 등 탄광지대의 탄부들과 가족들의 모습, 그들의 거처인 사택촌과 탄광촌이 당대 그림과 2000년대 그림으로 복기됐다. 그 일대의 아름다운 백두대간, 산하 등과 어울린 풍경화들은 반향이 컸다. 관객 가운데 우는 사람과 현기증을 일으키는 사람, 심지어 절하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다.

1982~83년 태백시 태영광업소에서 광부로 일할 당시 황재형 작가. 막장으로 들어가는 탄차 앞에 앉아서 찍었다. 처음 공개되는 사진이다.

탄광 입구에서 동료들과 대화하고 있는 1980년대 초반 광부 시절의 황재형 작가(왼쪽에서 세 번째).

탄광 막장에서 석탄 원석을 퍼내고 있는 청년 시절의 황재형 작가. 허리춤에 헬멧 랜턴의 전지 상자를 차고 있다. 작가가 처음 내보인 사진이다.

1980년대 초반 태백 탄광촌 어귀에서 간이 캔버스를 놓고 풍경화를 그리고 있는 황재형 작가의 모습.

 

<백두대간> <탄천의 노을> 같은 작품들에서 보이듯 작가는 태백 광산촌 인근의 사람들과 자연 풍경에 바탕을 두고 그린다. 화폭의 세부에 서린 색과 필선은 광기에 가까운 기운을 업고 바로 지금 우리의 눈앞에 칼날 같은 현실의 느낌을 담아 휘몰아치는 기세로 육박해온다. 극사실적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지극히 표현주의적이고 추상적이기도 한 그의 회화적 특징은 어떻게 형성됐을까? 작품의 현장은 실제로 어떤 모습일까? 그는 어떻게 바라보고 형상화했는가? 넉달여 만에 급조한데다, 판화와 걸개그림 등의 현장 양식은 쏙 빠진 이번 전시에서 잘 드러나지 않아 더욱 주체하기 어려운 궁금증을 안고 찾아간 길이다. 두리번거리는 기자에게 황 작가는 작업실의 구조와 작품들을 대략 소개한 뒤 나가자고 했다. “백두대간이 꿈틀거리는 곳으로 갑시다.” 답사의 시작은 10년 걸려 완성한 걸작 <백두대간>의 배경이 된 통동 통리재 고갯마루부터였다.

 

황재형의 풍경그림 작업을 대표하는 수작인 &lt;백두대간&gt;(1993~2004). 일제강점기 자원 수탈을 위해 만들어진 인클라인 산악철도가 지나갔던 통리~도계 일대의 통리협곡과 겹쳐지는 백두대간의 장쾌한 능선들, 멀리 동해바다까지 하나의 구도 안에 조망되고 있다. 전통수묵산수화의 경쾌한 필획과 유화 특유의 두꺼운 마티에르(질감) 기법을 각고의 고뇌 끝에 한데 융합시켜 펼친 황재형 회화의 기념비에 해당할 만한 작품이다.

 

황재형의 풍경그림 작업을 대표하는 수작인 <백두대간>(1993~2004). 일제강점기 자원 수탈을 위해 만들어진 인클라인 산악철도가 지나갔던 통리~도계 일대의 통리협곡과 겹쳐지는 백두대간의 장쾌한 능선들, 멀리 동해바다까지 하나의 구도 안에 조망되고 있다. 전통수묵산수화의 경쾌한 필획과 유화 특유의 두꺼운 마티에르(질감) 기법을 각고의 고뇌 끝에 한데 융합시켜 펼친 황재형 회화의 기념비에 해당할 만한 작품이다.

 

눈보라 몰아치는 백두대간을 만나다

19891월 어느 겨울밤 황 작가는 태백 시내에서 20여분 거리의 외곽에 위치한 통리재 고개에 올랐다. 시내에서 동료와 술을 마시고 돌아가던 길이었다. 안개가 자욱한 가운데 눈보라 몰아치던 통리협곡의 굽이치는 능선 속에서 백두대간의 진경을 눈과 피부로 함께 체험했다. 그 뒤로 마음이 외로울 때면 숱하게 통리재 고갯마루를 찾아가 사다리를 세우고 올라가 눈의 허기를 달래며 사생했다. 작가의 1990년대 풍경화 작업을 대표하는 <백두대간>은 이때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1993~200410여년간 공 들여 덧칠한 작품이다. 여러겹 겹친 능선들이 동서 양쪽에서 위쪽 동해로 빠지는 협곡 아래로 치달리는 산세의 기운을 형상화했다.

<백두대간>의 배경인 통리재에서 황재형 작가가 멀리 동해까지 펼쳐진 백두대간의 산줄기와 능선들을 응시하고 있다.

 

이날 통리재에 설치된 스카이스테이션 전망대에서 백두대간 산줄기와 능선들을 응시하던 황 작가는 우리 한반도 산하의 능선 줄기에서 뻗쳐나오는 내재적 힘을 형상화하려 애쓴 작품이라고 했다. “단순한 선의 표현이 아니라 능선 사이, 능선 내부의 숲과 나무들의 율동을 주목했어요. 고향인 전남 보성의 판소리 선율이 들리는 듯했지요. 그걸 표현하려고 현대미술 화집을 뒤져보다 수묵화의 경지와 만나 선과 색이 기발하게 조응하는 중국 작가 저우춘야의 유화를 보고 공명했어요. 색선을 휘둘러도 붓자국이 어긋나지 않게 조화를 이루는 법을 찾은 거지요.”

탄광촌 사택을 그린 2017년 작 <하모니카 나고야>. 2000년대 이후 사택촌 단지는 모두 철거돼 이런 풍경을 더는 찾아볼 수 없다.

 

붓질거리를 찾은 게 아니라 영혼이 다가왔을 뿐

2000년대 이후 그린 <하모니카 나고야> <아랫목> 연작 등은 태백 광산촌 사택의 정경을 그렸다. 두툼한 물감 붓질로 핍진하게 묘사한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다. 일고여덟개의 출입문이 작고 좁아 하모니카 같은 건물이 줄줄이 이어진다고 해서 일본말로 하모니카 나고야라고 불렸던 태백 사택촌은 그에게 영감의 텃밭이 됐다. 사택촌은 고한, 사북, 장성 일대에 두루 퍼져 광산을 둘러싼 인근 산야를 가득 덮고 있었으나, 2000년대 이후 철거돼 더는 찾아볼 수 없다. 황 작가는 2017년 작 <하모니카 나고야>와 머리카락을 붙여 과거 사택촌 풍경을 묘사한 2018년 작 <나의 천국>(In My Heaven), 2004~2006년 그린 <아랫목2>를 통해 과거 탄광촌의 인간 풍경을 화폭에 아련하게 풀어놓았다.

 

머리카락을 붙여 과거 탄광 사택촌의 풍경을 묘사한 2018년 작 <나의 천국>(In My Heaven).

<아랫목2>. 2004~2006년 그린 것으로 탄광촌 주거지의 질박한 풍경을 물감층을 두껍게 발라 화폭 위에 풀어놓았다.

 

지난 26일 태백시 장성동 변두리 화신촌에 극히 일부만 남은 광산촌 자취를 황 작가, 그의 제자 박치형씨, 태백시도시재생지원센터장 권상동씨와 찾아갔다. 국내 최대 석탄광산이던 장성탄광영업소를 끼고 거대한 광부 주거단지를 형성했던 곳이다. 황 작가가 19829월 내려가 정착하기에 앞서 1979년부터 드나들면서 화구를 들고 작업하거나 눈을 붙였던 각고의 공간 중 하나가 바로 이곳이었다. 이 집들이 온전히 서 있던 1980년대 초 그는 지독한 추위에 떨면서도 여기 나고야 가옥의 좁은 방 안에서 붓질을 거듭 놀리면서 광부 동료들과 손을 비비며 한 인간임을 확인했다고 기억했다. 지붕이 삭고 문틀만 남은 벽체 폐허의 들머리에 앉은 황 작가는 집들의 문과 지붕이 유난히 낮고 좁은 건 탄가루와 한기가 조금이라도 적게 들어오게 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고 했다. “단순히 작품감을 찾으러 돌면서 드로잉했던 게 결코 아니에요. 그 집의 낮은 지붕 자락에서 나와 다가오는 인간 영혼의 숨결과 호소를 몸으로 받아들여 바로 작품에 담아내려 온 신경을 집중했던 것이죠.”

태백시 장성동 일대에 폐허처럼 남아 있는 옛 광산촌 사택들.

장성동 옛 광산촌 골목의 계단에 앉은 황재형 작가가 주변 풍경을 사생하고 있다.

 

일행의 답사는 장성동의 도로 끝 카페에서 시작해 나고야 사택촌 흔적이 남은 화신촌 폐허 같은 흔적들을 지났다. 흥청거렸던 자취의 일부만 남은 부근의 옛 상가 골목 일대와 굴을 낀 술집이 있었던 용굴로 이어졌다. 황 작가는 이곳의 벗겨진 판자와 벽체는 내 피부가 벗겨진 것과 같다며 기자의 취재수첩에 직접 자신의 마음에 닿았던 상념과 감정들을 담아 골목길 어귀에서 즉석 풍경 드로잉을 하기도 했다.

황재형 작가의 걸작으로 널리 알려진 <작은 탄천의 노을>(2008). 고한읍 연탄공장 주변의 탄가루와 오물 뒤섞인 천에 비친 노을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자신의 그림 배경이 된 탄천 일대를 찾은 황재형 작가. 13년 전 마지막으로 탄천 그림을 그렸을 때와 풍경이 크게 바뀌어 황 작가는 내내 어색해했다.

 

이날 오후 찾은, 걸작 <탄천의 노을>의 실제 배경인 북쪽 고한읍내의 탄천 물길은 실망감을 안겼다. 오물과 거뭇한 석탄물이 뒤섞였던 천의 물은 맑아졌으나, 배경이 됐던 연탄공장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육중한 콘크리트 다리가 엇갈리게 건립돼 옛 풍경을 실감할 수 없었다. 황 작가는 천을 보며 외마디처럼 소리 질렀다. “그릴 때 (우리 광부들은) 살아 있다고, 존재한다고 외쳤던 거야. 태아 시체가 떠내려왔던 그 물결을 황금빛 노을로 칠하면서 생명의 희망이 있다고 절규했던 거라고! 제기랄!” 기록보고 문학의 대가이자 소설 <동물농장> <1984>로 유명한 영국의 문인 조지 오웰은 1936년 영국 북부지역 노동계급의 생활상을 취재한 뒤 르포르타주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탄광노동자들의 노동을 다룬 꼭지 글에 이렇게 썼다. “광부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노라면대다수 사람들은 그런 곳 얘기는 안 듣는 게 좋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세계는 지상에 있는 우리의 세계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나머지 반쪽이다.” “탄광에 대한 모든 낭만적 해석을 넘어선 자리에 내 그림 본래의 자리가 있다고 강조하는 황 작가의 견해나 그가 생각하는 작업의 의미 또한 오웰의 생각과 그리 멀지 않아 보인다.

 

동행한 일정 내내 도록과 전시에 표제어로 나온 광부 화가란 말에 진저리가 난다고 황 작가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고희에 다가선 지금도 그는 당당하고 거친 현장의 화가임을 자부한다. 자신의 작품을 광산촌의 슬픈 향수나 못 가진 자의 낭만 등으로 값싸게 치환시키거나 노동미술의 극점 등으로 전형화하는 시장과 평단, 대중의 선입관과 맞서며 세상 보는 사람들의 눈을 새롭게 바꿔보겠다는 결기가 여전해 보였다.

 

노년에 접어든 그가 과거의 철저한 실천가적 삶대로 능히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황 작가는 왜 인간이 죽도록 고통받으며 일하면서도 인권을 빼앗기고 희생당하는 현실이 지금도 비정규직 노동현장에서 이어지고 있느냐고 언성을 높이며 항변했다. 과거 탄광촌 사람과 풍경의 도상을 2010년대 이후에 창을 읊듯 율동치는 머리카락의 윤곽선으로 되살리는 이유는 그렇게 절박하고 필연적이다.

서울관 전시장 모습. 탄광촌의 풍광을 작품들 사이로 전시에 내놓은 그의 유일한 신작인 설치작품 <메탈지그(가짜 미끼)>가 보인다. 대중을 현혹하는 상품자본주의의 덫을 섬뜩할 만큼 과장된 가짜 미끼의 모습으로 상징한다.

2018년 작 <사탄의 맷돌>.

 

소품이지만 황재형 작품세계의 진수를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는 2004년 작 &lt;우부&gt;(愚夫). 생활고와 실직, 피폐해진 몸 등의 시련을 안고 정처 없이 터덜터덜 걸어가는 남자의 뒷모습과 그의 마음보를 일러주듯 솟구치는 길 위의 불꽃 같은 색선들이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소품이지만 황재형 작품세계의 진수를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는 2004년 작 <우부>(愚夫). 생활고와 실직, 피폐해진 몸 등의 시련을 안고 정처 없이 터덜터덜 걸어가는 남자의 뒷모습과 그의 마음보를 일러주듯 솟구치는 길 위의 불꽃 같은 색선들이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개인전 회천의 들머리에 놓인 작가의 1983년 작 <목욕>.

 

그는 이번 서울관 전시에 신작을 단 한점 냈다. 인간을 나락으로 빠뜨리는 상품 경제의 탐욕을 전시장 중간에 섬뜩할 정도로 큰 가짜 미끼인 메탈지그의 설치조형물을 놓아 상징화했을 뿐이다. 나머지는 1980~90년대 태백 광산촌의 사람들과 대자연의 모습을 희망과 가족의 의미를 담아 형상화한 구작들로 채웠다. 특히 명품 신발을 안 사준다고 학교에 안 가고 버티는 아이와 그를 지켜보는 부모의 줄다리기를 담은 광산촌 풍경 구작은 작지만 강렬한 감흥을 남긴다. 인문학자 칼 폴라니가 돈과 상품의 비인간적 탐욕성을 지칭하며 명명한 사탄의 맷돌을 작품 제목으로 붙인 것도 절묘하다. 27일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서울 전시장까지 황 작가는 동행했다. 격렬한 비판과 호통을 섞으며 기자를 길라잡이 하던 그는 관람 말미 전시장 중앙 공간 벤치에 앉아 말판을 펼치기 시작했다. 출품작들에 대해 새로운 바로크적 상상력의 산물이란 해석을 내놓은 기획자·평론가인 이영철 계원예술대 교수가 마침 현장에 찾아와 이야기 동무로 끼어든 것이다. 두 사람의 눈길은 한쪽 벽에 내걸린 <사탄의 맷돌>(2018)에 이어 부인의 외도를 눈치채고 절망에 휩싸여 걸어가는 광부의 뒷모습과 그의 뒤켠에 피어오른 불꽃 같은 감정의 색 덩어리를 그린 <우부(愚夫)>(2004) 앞에서 한동안 떠나지 않았다. 황 작가는 사람에 대한 사랑과 믿음, 희망을 일깨우는 그리기의 태도를 끝내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며 굳게 이를 앙다물었다.

태백/·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광기와 윤리

1982년 서른 살의 젊은 화가 황재형은 서울을 버리고 강원도 태백으로 거처를 옮겼다. 스물일곱 살의 아내와 갓 태어난 아들이 그를 따랐다. 그는 광부가 돼 탄광촌을 그리고 싶었다. 막장, 더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이 위험한 공간에 투신하겠다는 생각은 실로 어처구니없는 기획이었다. 그는 태백에서 태백 이외의 세상을 스스로 봉쇄하고 광부로 일하면서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삶과 예술의 주체자로서 자신을 세우기 시작했다는 뜻도 된다. 서울이 중앙이 아니라 태백이 그에게 중앙이었던 것.

 

태백에서 작업이 중요한 건 남다른 치열한 현장성도 있지만, 그만의 지속성과 몰두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음속의 허영과 사치를 철저하게 떼어내고 침묵과 철저한 고독 속에 자신을 가두는 것, 이것이 오늘날 황재형의 예술을 만든 방법적 고투였다. 태백에서 황재형은 그동안 주변부로 취급되던 탄광촌과 탄광촌 사람들을 향한 존경과 애정을 바탕으로 그들을 생의 주체로 부각시켰다. 그는 그들을 관찰과 관조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막장은 생계를 위한 직장이면서 그가 지향하고자 했던 예술의 공부방이었다.

 

황재형의 작품이 갖는 의미는 가장 참혹한 현실을 가장 회화적인 기법으로 재현했다는 데 있다. 세상의 끝에 은폐돼 있던 풍경을 이른바 리얼리즘에 기초한 화면으로 길어 올린 것이다. 황재형에 의해 지하의 풍경은 지상으로 올라왔고, 대중이 막연하게 알고 있던 사실은 끔찍하게 아름다운 진실이 됐다.

 

그의 그림을 지배하는 검은 어둠은 탄광촌과 그 주변부의 풍경과 맞물려 있다. 그 어둠 속에 등장하는 인물상들은 자신의 존재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다. 이 이름 없는 사람들이 작가의 그림에 소환되는 순간 놀라운 역설이 발생한다. 아무도 부여하지 않았고 아무도 불러 주지 않던 자신만의 이름을 획득하는 것이다. 가려지고 숨겨져 있던 존재를 드러내는 일을 표현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표현된 것이 본래 지니고 있던 성질을 회복할 때 예술적 성취는 완성된다. 황재형의 예술은 40년 동안 그 과정을 줄기차게 쫓아왔다.

 

황재형이 광부로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갱도에서 빠져나와 목욕하러 가는 길이었는데 어디선가 여자들이 깔깔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료에게 물었더니 퇴근하기 위해 몸을 씻는 선탄부 직원들이라 했다. 선탄부, 석탄이 컨베이어벨트에 실려 오면 쓸모없는 잡석과 나무토막 등의 불순물을 골라내는 일을 하는 부서. 그의 몸이 어느 틈에 널빤지를 잇대어 붙여 만든 가건물 샤워실 가까이 가 있었다. 판자 틈으로 목욕하는 여자들이 보였다. 바가지에 물을 떠서 부으면 검은 탄가루 섞인 물줄기가 목에서 가슴으로, 배로, 굴곡마다 흘러내렸다.

 

그는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여성의 신체라서 신비한 게 아니었다. 그 어떤 욕망이 꿈틀대는 것도 아니었다. 대학을 다니면서 수없이 누드를 그렸지만 이렇게 자신을 정직하고 숭고하게 드러내는 몸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이 황홀한 그림을 놓치기 싫어 샤워실의 둥근 손잡이를 잡았다. 그때 불현듯 그의 몸이 얼음처럼 굳어졌다. 너 거기서 뭐하고 있는 거냐! 그의 심연에서 천둥 같은 고함이 들렸다. 너 무엇을 대상화해서 그림을 그리려는 것이냐? 그 그림으로 뭔가 이득을 취하려고 손잡이를 돌릴 것이냐? 이런 짐승 같은 놈! 양심이 진동하는 소리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그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혈관이 뜨거워지고 땀구멍이 분화구처럼 뜨거운 김을 분출하는 것 같았다. 광기와 윤리가 그의 마음속에서 서로 충돌하고 있었다. 오도 가도 못하고 30분이 지나갔다. 누군가가 그를 부르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 주저앉아 통곡했을지도 모른다. 만약에 문을 열었다면, 그 여자들이 목욕하는 장면을 카메라에 담고 그것을 그림으로 그렸다면, 정말 그랬다면 그는 더 진정한 것을 찾아 나서지 못했을 것이다.

 

황재형의 그림은 태백이라는 쇠락한 탄광촌의 폐허에서 발원해서 한국 현대 회화의 한 정점에 도달했다. 보편적이면서도 충격적인 감동의 에너지를 대중에게 선사한다.

2021-05-04 서울신문/ 안도현의 꽃차례

황재형

1983년 화가 황재형은 태백의 탄광촌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갔다. 스스로 신입 광부 햇돼지를 자처한 것. 그는 낮에는 탄광에서 직접 곡괭이를 들었고, 일이 끝나고 쉬는 시간에는 붓을 들었다. 탄광은 막장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절망적인 곳이며 더 이상 갈 데 없는 이들이 다다르게 되는 곳. 그는 생의 막장을 직접 눈으로 보고 겪어야만 예술의 돌파구가 생긴다고 믿었다. 탄광이라는 현장에 밀착하면 할수록 생생한 예술의 본질에 닿을 수 있을 것이었다.

 

황재형은 화가로서 승부를 건 것이다. 그는 탄광을 타자의 시선으로 보지 않기 위해 무려 3년간 산업전사로 일했다. 그것은 일시적이고 단순한 현장체험이 아니었다. 깊은 밤에 눈보라처럼 달려드는 고독과의 싸움이었을 것이고, 질척질척한 생의 비의를 캐내는 참혹한 마음공부였을 것이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그를 광부화가로 부르기 시작했다. 헤드랜턴을 쓰고 도시락을 먹는 외눈박이의 식사나 검은 개울물이 흐르는 탄천의 노을등의 작품은 그렇게 태어났다.

 

이제는 그의 이름 앞에 광부라는 말을 빼고 우리 시대에 가장 감동적인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불러야 한다. 나는 그의 작품 연탄의 이글거리는 불꽃을 좋아하고, 눈 쌓인 산줄기를 위에서 허공에서 내려다보는 백두대간도 좋아한다. 황재형의 그림은 평면이지만 그의 손에 의해 풍경과 사물은 하나같이 꿈틀거린다. 이 겨울, 가슴 쿵쾅거릴 일이 없다면 황재형의 그림을 보라./안도현 시인·우석대 교수 / 경향 2013-11-25

 

황재형_ 도시락 Coal iner’s Lunch Box(1981)

선탄부 (1985)

 

쥘흙과 뉠 땅

: 쥘 흙은 있어도 누눌 땅은 없다 는 뜻으로 1984년 첫 개인전 이후 줄곳 쓰는 전시제목

 

기적소리

누룽지

눈과 마른고추

어머니전상서 2004-2007

퇴근버스

검은 산 검은 울음

산허리 베어물고

빛나는 남루

한숟가락의 의미

멍애

 

10만개의 머리카락

황재형 작가는 자신이 살고 있는 강원도 태백의 미용실을 돌아다니며 머리카락을 모았다. 캔버스에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접착제로 붙였다. 손이 망가지고 눈의 실핏줄이 터졌다. 고달픈 작업이다.

머리카락은 힘의 상징이면서 사랑의 징표이기도 하다. 황재형은 대학 졸업 이후 광산촌에 살면서 직접 광부로 일했고, 폐광 이후에도 광산촌의 자연과 인물을 그려왔다. 작가는 전시에서 광부의 머리카락으로 광부의 모습을 담으니 작품에 힘이 생겼다고 고백한다.

지금 이 순간 1996-2010

강주룡, 을닐대에 오르다 2017

변매화 2017

내땅을 딛고 서서 2016

 

드러난 얼굴 2017

선탄부 권씨 1996

검은 눈 2017

별바라기 2017

새우깡 들놀이 2016

떠나가는날 2017

나한정에 부는 바람 2017

기다리는 사람들 2016

고드름 2016

태백에서 2017 hair on canvas

새벽에 홀로 깨어 (세월호 어머니) 2017

바리캉 2016

원이 엄마 편지 2016

아직도 가야할 땅이 남아 있는지() 2017 hair on canvas

아직도 가야할 땅이 남아 있는지 2013 oil on canvas

子正水와 같던 날들 2017

봄소풍 2017

둔덕고개 2017

숨비소리 2016

썰물(고향바다) 2013 graphite on canv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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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네 삶 그린 박수근과 황재형

시대의 암울함을 자연관에 입각한 정신으로 풀어내 그 어떤 화가들보다 한국적인 독창성을 일궜다는 평을 받고 있는 박수근 화백(1914~1965)은 가난하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우리네 삶을 화폭에 심었다.

 

박수근이 유독 애착을 가진 것은 멀리 있는 대상이 아니라 바로 나와 우리 주변에 있는 이웃이었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아야 할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 가까이에서만 느낄 수 있는 소박하며 절절한 생의 리얼리티는 박수근이 지향한 예술세계였다. 그런 점에선 광부화가로 불리는 황재형도 박수근과 닮았다. 한 시대 보통사람들의 삶의 전형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 질곡의 시대를 힘겹게 걸어가는 고단한 이들을 품는 자비적인 태도와 채록을 가졌다는 점에서 그렇다.

흙길 1998 캔버스에 흙과 혼합재료

 

실제로 작가 황재형은 현실의 하중과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버둥거리며 살고 있는 우리의 초상을 그림 속에 녹여냈다. 민중 내부로 들어가 보고 느낀 삶의 주름과 무게를 퍼뜨렸고, 산업화 이면에 놓인 고독한 노동의 모습, 소외 받는 서민들의 현실, 자본주의가 낳은 비인간화를 직설적으로 파전함으로써 인간의 실존과 해방을 말했다.

 

그것은 관조자의 자세가 아닌, 비관과 좌절이 부유하는 세상의 끝자락에 직접 몸을 의탁한 채 더 이상 갈 데 없는 이들의 치열한 생을 사실적으로 위로하고 보듬는 선의의 언어였다. 한편으론 현장의 중요성을 알리는 보고서이자 어디에도 누울 곳 없는 자들의 이야기였다. 그러길 어느새 30여년의 세월이 흘렀고, 그 긴 시간의 흔적은 최근 박수근미술상최초 수상자라는 영예의 꽃으로 만개했다.

황재형, In my heaven, 91x116.5cm, 1997 겨울, 캔버스에 유채

 

지난 420일 발표된 제1박수근미술상은 박수근 화백의 예술정신을 기리기 위해 박수근의 고향인 강원도 양구군이 제정했다. 심사위원단은 33명의 후보를 놓고 오랜 토의 끝에 황재형을 수상자로 선정했으며, 그의 작품에 대해선 내적 가난함에 시달리고 엄혹한 자본주의 시대에서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 서민들의 무던한 마음을 매우 현실적인 관점 아래 감동적으로 조형화했다며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황재형은 겸손하게도 나보다 더 노력하는 작가들이 많다는 말로 미술계 이면에서 삶의 진실을 향한 자유롭고 창의적인 세계를 걷고 있는 여타 작가들에게 수상의 몫을 돌렸다. 몇몇 인터뷰를 통해 박수근미술상은 우리 땅에서 우리 삶의 서사를 묵묵히 그려내고 있는 이들에게 돌아갈 공동의 모가치임을 강조했다.

 

허긴, 그의 말마따나 시대가 변해도 예술의 본질, 땀의 무게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작가들은 적지 않다. 김구림·이승택 등 변함 없는 창작의지로 새로운 예술세계를 개척하고 있는 작가들, 힘들지만 독자적인 길을 모색하고 있는 김승영·노순택·임흥순·박승예·조해준·장지아·디황·이갑철과 같은 포스트 박수근역시 곳곳에 포진해 있다. 물론 황재형도 그 중 한 명이다.

 

황재형의 수상은 상업주의에 물든 채 돈만 좇는 미술세태에서 참된 예술과 예술가란 무엇인지 몇 번이고 곱씹게 한다. 예술이란 어쩌면 모진 세월을 묵묵히 견뎌온 내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것, 거칠고 험악한 현실의 광풍 속에서도 한 줌의 기대와 바람을 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이들의 그릇이어야 함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그리고 그 실현이야말로 생전 박수근이 원했던 예술의 가치와 맞닿는다.

<홍경한 미술평론가>/주간경향 2016.04.27.

 

 

광부가 예수인 까닭은? 황재형 작가의 '광부예수'

...한겨레신문 미술담당 기자 출신인 임종업 기자가 쓴 <작품의 고향> '스스로 광부가 된 화가-태백과 황재형'편에서 제자들이 기록한 작품평이 소개된다. 황 작가의 작품 '광부예수'(1985)에 대해 그의 제자 김은하가 쓴 글을 보자.

"이 그림은 광부 옷, 게다가 속까지 비어 있어서 이상했습니다. 왜 이렇게 그렸을까 의아했어요. 나의 아버지도 광부인데 그러면 아버지도 예수가 될 수 있는가. 너희 아버지는 가족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뺏긴 채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지 않느냐는 말씀이셨습니다. (중략)

우리는 아버지가 노동자인 것을 부끄러워하며 내다 팔았는데, 이를테면 노동자 차람의 아버지를 길거리에서 만나면 모른 체하고, 슬리퍼에 몸뻬 차림으로 학교르 찾아온 엄마를 창피해하며 보고 싶어 하지 않았는데, 자식들이 내다 버린 아버지를 선생님은 예수의 자리에 그려넣어 주셨습니다. 이렇게 정직하게 사는 게 바로 예수라고 그림을 통해 말없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황재형의 작품 'in myheaven' (1997)에 대해 제자 하은영이 쓴 글을 보자.

"처음 이 그림을 보았을 때 그냥 사택촌에 지나지 않았어요. 제가 탄광촌 출신이 아니어서인지 내 삶과 동떨어져 있다고 느껴져 공감하기 쉽지 않았어요. 그런데 몇 년 뒤 그림이 불쑥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끊임없이 욕망이 부추겨지면서 진득하게 엮어나가는 게 아니라 단숨에 확인하고 단숨에 품어버리고 싶은 저였기에, 충동적이고 소비적인 사람을 만나 사랑을 하고 그것은 파탄에 이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고 홀로 되었을 때 바라본 그림은 삶 그 자체였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덕지덕지 진흙길. 한 걸음 뗀 것이 짐이 되고 속박이 되어 떼려야 뗄 수 없는 삶이 연결되어 하늘 밑까지 이어집니다. 제발 볕이 들기를 바라지만 어디에도 없습니다. 집들은 모양은 다르지만 연결돼 있는 것이 삶의 질곡을 이고 있는 듯합니다. 윗집 아랫집 모두 연결되어 하늘빛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그림이 만약 시멘트길이고 양철지붕이었다면 어떤 희망도 위로도 못 받았을 것입니다. 그림은 어떤 허영도 어떤 환상도 없이 그 자체인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질곡 속에 희망이 있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CBS노컷뉴스 김영태 기자 2016.12.25.

 

 

산업전사 1982

줄다리기 1991

 

황재형의 아버지의 자리

화폭에 옮긴 삶의 고뇌와 땀의 무게

아버지의 자리’, 캔버스에 유채,162.1×227.3

 

노동의 양과 질이 평화로운 삶과 온전히 비례하진 않는다. 노동의 가치가 곧 부의 가치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요, 정의로운 삶의 대물림과도 무관하다. 현실에서 노동의 정의는 인간생활의 영구적인 자연조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 눈앞의 실제는 그저 약간의 희망에 버무려진 천근처럼 무거운 고뇌, 괴로운 삶의 중량만 확인시킬 따름이다.

작가 황재형은 현실의 하중과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버둥거리며 살고 있는 우리의 초상을 그림에 담아 왔다. 민중의 삶의 주름과 무게를 옮겼고, 산업화 이면에 놓인 고독한 노동의 모습, 소외 받는 서민들의 현실, 자본주의가 낳은 비인간화를 직설적으로 담음으로써 인간의 실존과 해방을 말해왔다. 관조자의 자세가 아닌, 비관과 좌절이 부유하는 세상의 끝자락에 직접 몸을 의탁하며 더 이상 갈 데 없는 이들의 치열한 생을 사실적으로 위로했고 보듬었다. 그러길 어느새 3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1981년에 발표한 황지 330’은 자신의 인생마저 변화시킨 작품이면서 동시에 황재형이 이 땅과 민중의 모습, 절망과 소생의 몸부림이 교차하는 현실의 풍경을 다룬 첫 작품이다. 황지탄광에서 갱도 매몰사고로 사망한 한 광부의 사연을 접한 작가는 그가 남긴 유품인 작업복을 담담히 화면에 옮겼다. 얼굴이 새겨진 출입패찰과 명찰번호 330을 통해 부재한 주인을 상징했고 낡고 해어진 작업복은 팍팍했을 망자의 삶을 증언하는 기호였다. 소재는 단순했지만 지근거리에 있는 타인의 생을 표현의 화두로 삼았다는 점에서 미술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긴 작품이다.

현장의 중요성을 알리는 보고서이자 본질은 있어도 그것이 누울 수 있는 장이 없는 자의 이야기에 방점을 둔 황지 330’ 이후 황재형은 아예 서울을 떠나 태백에 정착한 뒤 가장 고달프고 어렵다는 막장으로 들어선다. 그러곤 시대의 삶과 정면으로 마주하려 했던 작가의 신념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작품들을 연이어 선보인다. 갱도 내에서 작은 헤드 랜턴 아래 식사하는 광부를 묘사한 외눈박이의 식사’(1984), 힘겹고 버거운 세상을 응시하는 듯 눈만 드러낸 모습의 선탄부 권씨’(1996), 허름한 판잣집을 무채색과 황토색으로 거칠게 표현한 삶의 무게’(1999)고한의 볕’(2006) 등의 그림들이다. 모두 쥘 흙만 있을 뿐 뉠 땅 하나 없는 사람들과 생의 보금자리를 연민과 애정으로 빚은 작품들이다.

 

2000년대 황재형의 대표작은 단연 아버지의 자리’(2013)이다. 우리 시대 평범한 아버지의 얼굴을 그린 작품은 존재하지만 부재한 자리를 가리킨다. 권력과 권위는 거세된 채 의무와 희생만을 떠안은 한 인간의 자리를 대리할 뿐만 아니라 고달픈 아버지라는 배역을 평생 다하고도 주변인일 수밖에 없는 아버지의 자리를 지목한다. 그래서일까, 굵게 팬 주름살과 꽉 다문 입술은 세월의 흔적을 되새기게 하고, 그렁그렁한 눈망울은 그리움과 아련함을 넘어 울컥함마저 낳는다.

 

노동으로 실현된 인간화, 삶의 진실을 향한 자유롭고 창조적인 세계를 밝혀온 황재형은 인간 삶의 서사를 그려냄으로써 위안과 안식을 준다. 따뜻한 인간애를 배경으로 한 그의 작품은 시대가 변해도 이 땅과 민중의 본질, 땀의 무게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분명한 공감이 자리하는 이유는 그것이 곧 우리 이웃의 이야기, 모진 세월을 묵묵히 견뎌온 내 어머니·아버지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광풍의 시간 속에서도 그 한 줌의 희망을 버리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초상을 담고 있는 탓일 것이다.

홍경한 | 미술평론가·월간 경향 아티클편집장 2013.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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