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현金始顯
영화 아나키스트의 주인공 상구(김인권 扮), 밀정의 주인공 김우진(공유 扮)
독립운동가(1883~1966). 자는 구화(九和). 호는 하구(何求)ㆍ학우(鶴右).
1883년 경상도 안동부(현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현애리)[1]#에서 태어났으며 일본 메이지대학 법과를 졸업했다.
김시현 항일투쟁에서 반독재투쟁까지 안동독립운동기념관 인물총서 9
김희곤 지음 | 지식산업사 | 2013년 12월
목차
책을 펴내며 4
1 김시현, 그는 누구인가 10
2 3·1운동 뒤에 상하이를 거쳐 만주로 망명하다 18
3 극동민족대회에 대표로 참가하다 25
4 모스크바로 옮겨 열린 회의 38
5 신여성 권애라와 결혼하다 43
6 적 기관을 파괴하고자 국내에 무기를 대량 반입하다 49
7 아내 권애라의 자유연애론과 위장 결혼 74
8 가족 이야기 80
9 의열단 베이징지부장이 되어 장교를 기르다 83
10 배신자를 처단하다 92
11 한동안 지켰던 침묵, 정치에 나서지 않고 104
12 드디어 정치활동에 나서다 108
13 국회의원이 되다 112
14 가난에 허덕이다 최후를 맞다 128
맺음말 139
김시현 연보 143
참고문헌 147
찾아보기 148
3.1 운동 후 만주에서 의열단에 속하면서 독립 운동을 했다. 김원봉과 동지로 활동하였다. 1920년 김규식, 여운형 등과 함께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혁명 단체 대표자 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석하였다. 1923년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하기 위해 국내에 폭탄을 반입하려다 경상북도 대구부(현 대구광역시)에서 체포되어 대구 형무소에서 징역 1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이후로도 독립 운동으로 인하여 일제에 의해 몇 차례 투옥되었다. 상하이 고려공산당, 조선공산당의 정치인이었다.
중국 베이징 시에서 투옥 중이던 1945년 8.15 광복을 맞았다. 광복 이후 귀국하여 고려동지회 회장, 전보통신사 회장을 역임하다. 그리고 민주국민당에 입당하여 고문으로 있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경상북도 안동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2년 발췌 개헌 등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 정치에 반발하여 유시태와 함께 이승만 암살을 시도했으나, 유시태가 겨눈 권총이 불발하는 바람에 미수에 그치며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이승만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 참조. 이후 1960년 4.19 혁명 이후 석방되었다. 같은 해 치러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부인 또한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권애라 지사다. 유관순 열사 등과 함께 서대문 8호 감방에 수감됐었으며, 그 당시 불렀다는 '8호 감방의 노래'의 작사자로 추정된다. 1920년대 애국 강연으로 유명했고, 1922년에는 김규식 등과 함께 러시아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대회에 한국여성대표로 참석한 적도 있다. 취조하는 형사의 뺨을 때렸다는 소리가 있을 정도로 강직했다고 한다.
3. 그 외
1919년 3ㆍ1 운동 후 만주에서 의열단에 가입하고, 국내와 만주ㆍ중국을 왕래하며 독립운동을 벌였다. 1952년에 이승만 대통령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쳐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4ㆍ19 혁명으로 석방되었다.
묘비도 없는 '밀정' 주인공 김시현 묘... 그는 왜 서훈 못 받았나
1952년 이승만 대통령 저격 미수사건으로 무기징역... 상훈법 제8조 때문에 번번이 탈락
▲ 경북 예천군에 자리한 독립운동가 김시현 선생의 묘. 비석 머릿돌만 덩그러니 놓여있다.ⓒ 김종훈
"그런데 그건 왜 묻는가?"
지난 2일 오후, 경상북도 예천군 호명면 직산리에서 만난 노인은 경계의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 알고 여기에 찾아 왔냐"라며 "이름난 독립운동가의 묘는 맞지만 나라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저 너머에 모셔졌다"라고 말을 이었다. 그러면서 노인은 "혼자서는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며 "아무런 표식도 없고 이름도 새겨져 있지 않다"라고 설명했다.
노인의 말은 사실이었다. 기자는 '저 너머 큰 소나무 뒤쪽에 홀로 있는 묘소'라는 설명을 듣고 찾아 나섰지만 무덤으로 향하는 길에는 아무런 표식도, 설명도 없었다. 수풀을 헤치고 들어가 다다른 무덤 역시 다르지 않았다. 묘소 앞에 제단만 덩그러니 놓인 채 비석도 없이 비석 머릿돌만 무덤 오른쪽에 박혀 있었다. 무덤 아래쪽엔 세우지 못한 비석 받침대인 귀부석만 무덤을 향해 머리를 돌린 채 기울어져 있었다.
<밀정> 속 공유. <부산행>과 <밀정> 두 작품만으로도 관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 <밀정> 속 공유. ⓒ 워너브러더스코리아(주)
황옥과 김시현, 송강호와 공유/한국학중앙연구원, 영화 <밀정> 스틸이미지
무덤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2016년 개봉해 관객 750만 명을 동원한 영화 <밀정>의 실제 주인공인 독립운동가 김시현 선생의 묘다. 이 작품에서 배우 공유는 김시현 선생을 모델로 한 의열단원 김우진을 연기했다.
영화에서처럼 선생은 1923년 초 독립운동사상 최대 규모의 무기밀반입 거사를 준비한다. 그러나 목숨을 걸고 무기를 반입해 국내에 들어왔지만 거사를 진행하기도 전에 체포된다. 밀정 때문이었다. 그 과정에서 검거된 선생은 10년형을 선고받았다. <밀정>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지만, 선생의 독립운동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1923 경성을 뒤흔든 사람들 : 의열단, 경성의 심장을 쏘다
저 : 김동진ㅣ 출판사 : 서해문집ㅣ 발행일 : 2017년 09월08일 | 종이책 발행일 : 2010년 08
1920년대 식민지 조선, 식민 통치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려면 암살과 파괴, 테러라는 과격한 방법뿐이라고 생각한 항일 비밀결사 단체가 있었다. 지금은 잊힌 이름, 김상옥, 김시현, 이태준, 황옥이 있었다. 1923년 경성에서 기획된 의열단의 2대 투쟁, 김상옥의 장렬한 죽음과 2차 폭탄암살 투쟁을 위한 폭탄 반입 작전. 그들이 보여준 항일 투쟁과 치열했던 삶을 당시 신문기사와 잡지, 관련 자료와 논문 등을 찾아내 재구성, 긴박감 넘치는 논픽션 극장으로 만들었다.
1923년 1월 12일 일제 강압통치의 상징 중 하나인 종로경찰서에 폭탄이 떨어졌다. 의열단원 김상옥이 혐의자로 물망에 오르고 악질 고등계 형사 미와가 그를 쫓는다. 만주와 상해에서 활약하던 독립운동가 김상옥은 암살단을 조직해 경성에 잠입한 상태. 사이토 조선총독이 목표였다. 종로서 체포대와 삼판통에서 총격전을 시작으로, 눈 덮인 남산 포위망을 뚫고 귀신같이 탈출한다. 하지만 은신처인 효제동 이혜수의 집에서 1000여 명의 무장경찰과 맞닥뜨리고, 이에 맞서 극렬하게 저항하는 김상옥. 무수한 총격전 끝에 결국 자기 머리에 방아쇠를 당겨 최후를 맞는다.
고성능 폭탄 개발 비사秘史!
몽골의 '슈바이처' 이태준, 푸른 눈의 마자르를 소개하다
이어지는 '2차 폭탄암살투쟁'을 위한 의열단의 야심찬 계획! 의열단장인 약산 김원봉은 고성능 폭탄을 만들 사람을 찾기 시작한다. 몽골의 '슈바이처'로 불리는 독립운동가 이태준은 헝가리인 마자르를 소개하지만, 그 와중에 정작 이태준은 러시아백군에게 살해당해 몽골에서 짧은 생을 마친다. 우여곡절 끝에 약산을 만난 마자르는 상해 비밀폭탄제작소에서 고성능 폭탄 개발에 성공한다. 상해 앞바다의 섬에서 폭탄성능 시험까지 마친다. 더불어 의열단의 혼을 불어넣는 작업,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도 완성된다.
폭탄 반입 루트를 찾아라!
악질 형사로 알려진 황옥과 의열단 김시현이 펼치는 비밀 작전
조선인 출신 고등계 형사이면서 의열단의 활동을 은밀히 돕고 있는 황옥이 마침내 약산 김원봉을 만났다. 김상옥 사건의 배후를 캐기 위해 상해에 파견된 황옥이 의열단원 김시현과 함께 폭탄반입 작전에 나선 것이다. 대형 폭탄 여섯 발, 소형 폭탄 서른 발, 폭발장치용 시계와 뇌관 각각 여섯 발을 상해에서 천진까지, 이어지는 만주 안동현, 신의주, 경성을 잇는 비밀 루트, 거기에는 기발한 폭탄반입 작전이 있었다. 푸른 눈의 의열단원 마자르의 위장술, 기생과 인력거를 동원한 국경 넘기, 자금 확보를 위한 경성 부호 털기, 일본 고등계 경찰 가방 안에 들어 있는 대형 폭탄까지.. 드디어 강력한 폭탄을 경성에 무사히 들여온 의열단, 이제 한판 싸움을 예고하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실패 그러나
불멸의 기억으로 남았다!
의열단으로서는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폭탄 상자 일부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진 꼴이 되어 일본 경찰한테 넘어간 것이다. 내부 밀고였다. 황옥과 김시현의 체포로 2차 암살폭탄 투쟁에 가담한 18명 전원이 체포됐다. 의열단과 고려공산당의 합작품인 이번 거사에서 예상치 못한 보안의 허점이 문제였다. 그러나 조선 천지를 뒤흔들기에는 충분했다. 김상옥의 장렬한 죽음이 남긴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이어진 폭탄 거사 계획, 그 규모와 담대함에 조선인들은 강렬한 충격을 받았다. 1923년 경성에서 기획된 의열단의 2대 투쟁은 비록 실패했으나 불굴의 항일 정신을 심어준 역사적 사건으로 남았다.
의열단을 변호한 후세 다츠지
2004년 후세 다츠지는 일본인 최초로 대한민국 정불부터 건국 애종장을 수여받았다.
일본 미야기현 동부 이시노마키시에 있는 기념비
1929년 출소한 선생은 곧바로 중국 만주로 망명해 그곳에서 독립군양성소 설립을 추진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중국 관헌에 체포돼 고초를 겪는다. 이후 중국 본토로 이동해 약산 김원봉을 다시 만나 의열단원으로서 재결합한다. 1932년 의열단이 난징에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설립하자 선생은 베이징에서 학생을 모집하며 배신자를 처단하는 활동을 이어갔다. 그의 손에 이끌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학한 이가 '광야'와 '청포도'의 주인공 시인 이육사다. 두 사람은 모두 안동 출신이다.
후배들을 양성하고 밀정을 처단하는 과정에서 선생은 다시 한 번 일제에 체포돼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나가사키형무소에 수감된다. 1939년에야 출옥한 선생은 이듬해인 1940년 다시 베이징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전개한다. 하지만 1941년, 선생은 다시 체포돼 일본영사관 구치감에서 1년간 미결수로 생활해야 했다. 이후 병보석으로 겨우 풀려난 선생은 다시 베이징으로 탈출했고 항일민족전선군을 조직하고 노력하다 1944년 베이징 헌병대에 다시 체포돼 수감생활을 이어가야만 했다. 그리고 1945년 해방과 동시에 자유의 몸이 됐다. 당시 그의 나이는 이미 환갑을 훌쩍 넘긴 63세였다.
의열단원 김시현, 이승만에게 총을 겨누다
▲ 미서훈 독립운동가 김시현 선생ⓒ 자료사진
1883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난 선생은 1911년 스물아홉 나이에 일본 최고 명문 중 하나인 메이지대학 법학과에 입학했다. 1917년 졸업한 그는 귀국 후 고향 일대에서 활동하다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경북 예천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한다. 그러나 상주헌병대에 붙잡혔고 이때부터 선생의 '독립운동-체포-투옥-석방-독립운동' 패턴이 1945년 광복까지 26년간 이어진다. 김시현 선생은 그 기간 동안 일곱 차례나 일제 경찰에 붙잡혔고, 무려 16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이때 선생은 일제 겅찰에 모진 고문을 받는다. 하지만 동료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혀를 깨물어 독립을 향한 자신의 의지를 대신 표현한다.
선생은 해방 직후 재일 및 재중 동포들을 위한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면서 조선독립운동사 편찬 발기인으로도 활동했다. 의열단 동지이자 일본의 심장 도쿄에 폭탄을 던졌던 김지섭 지사의 사회장 장의집행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1947년 선생은 민족자주연맹과 좌우합작위원회에 각각 중앙위원과 확대추가위원으로 가입하기도 했다. 1950년 제2대 민의원 선거에 고향 안동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출마, 당선됐다.
그리고 1952년 6월 25일이 됐다. 임시수도 부산에서 '6·25 2주년 기념 및 북진촉구 시민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오전 11시께 이승만 대통령의 연설이 중간쯤에 이르렀을 무렵 단상 귀빈석에 앉아 있던 양복 차림의 한 노인이 갑자기 연단을 향해 뛰어나가며 이 대통령의 등을 향해 권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은 발사되지 않았다. 노인은 현장에서 체포됐다. 그는 대구 출신 의열단원 유시태였다. 다음날인 6월 26일 당시 이범석 내무장관은 유씨의 배후인물로 의열단 출신 국회의원 김시현을 체포했다. 당시 선생의 나이는 칠순에 달했다.
1952년 제2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1952년 1월 절대 다수의 반대로 부결되자 이승만은 백골단 등 폭력조직과 관제 데모대를 동원해 연일 시위를 벌였다. 같은해 7월에는 국회의원을 연금시키고 테러를 벌이면서 이미 부결된 대통령직선제를 골자로 한 '발췌개헌안'을 끝내 통과시켰다. 앞서 1948년 10월에 결성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도 1949년 6월 6일 이 대통령에 의해 반민특위 특별경찰대가 강제 해산당하면서 사실상 기능을 상실한 뒤 같은해 10월에 완전히 해체됐다.
당시 선생은 "민족을 버리고 간 놈이 무슨 대통령이냐, 역적"이라면서 "처단해야 한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노구의 의열단원은 결국 이 일을 결행했던 것. 하지만 이 일로 인해 선생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다시 감옥에 갇힌다. 그리고 8년 뒤인 1960년 4.19혁명을 거친 뒤에야 석방됐다. 선생의 나이 78세에 있었던 일이다.
직업이 독립운동가... 왜 비석 하나 없나
▲ 독립운동가 권애라 김시현 부부ⓒ 자료사진
선생은 1966년 서울 불광동 자택에서 향년 84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그러나 그의 말년은 가난의 연속이었다. 1964년 6월 <동아일보>에 '가난에 허덕이는 독립투사'라는 제목으로 실린 선생의 기사 중 일부다.
"옥고 30년, 팔순의 김시현옹이 전셋돈을 마련하지 못해 쫓겨나게 생겼다. 그는 무상배급 밀가루로 연명하고 있다. 불광동 산비탈 단칸방에 전세 들어 살고 있으나 이달 말 그 셋방마저 내놓게 되었다. 기거가 부자유해 누워서 지낸다는 김옹은 '아직 정부의 별다른 혜택을 받은 건 없으나 오는 8월쯤 원호대상에 든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그날만 기다리고 있다."
스스로를 원호대상에 들 것이라 기대했던 선생은 2021년 현재까지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일생을 조국의 독립과 민주화를 위해 싸운 인물이건만 이승만 대통령 저격미수 사건의 관련자라는 이유로 번번이 서훈 심사에서 탈락하고 있다. 상훈법 제8조에 "사형, 무기 또는 1년 이상의 징역이나 금고의 형을 선고받고 그 형이 확정된 경우에는 서훈이 취소된다"라고 명시돼 있기 때문이다.
이후 선생의 후손이 수차례 보훈처에 서훈을 요청했지만, 선생에 대한 심사는 단 한 번도 통과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전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관장이자 책 <김시현>을 쓴 안동대 김희곤 명예교수는 6일 <오마이뉴스>와 한 통화에서 "현재의 상훈법이 바뀌지 않는 이상 선생에 대한 서훈은 불가능한 일"이라면서 "나도 여러 차례 이의를 제기했지만 혹여 보훈처 심사를 통과한다 해도 행안부 신원조회에서 걸려 바로 취소될 수밖에 없다. 민주화 유공자가 될 수 있는 방법도 모색해 봐야 한다"면서 아쉬움을 표했다.
2017년 선생의 묘를 찾아 '묘비가 없다'는 사실을 온라인 상에 알린 홍순두 충북교육청 장학관도 <오마이뉴스>에 선생의 묘소에 비석과 알림판 등을 세우는 문제에 대해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지 못한 상태니 정부나 단체로부터 경제적인 지원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며 "후손들이 비석과 표지판 등을 자체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니 어려움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더 많은 분들이 선생에 대해 알고 찾아와야 현실을 바꿀 수 있지 않겠냐"라고 설명했다.
<오마이뉴스> 확인 결과 해당 군청은 선생이 서훈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선생이 떠난 지 7년 뒤인 1973년 부인 권애라 지사는 사망했다. 권 지사는 1919년 3월 1일 유치원 교사로 근무하며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권 지사는 이화학당 후배 유관순과 함께 수감생활을 했다. 출소 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간 그는 1922년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서 김시현 선생을 만나 불꽃같은 연애를 한 뒤 결혼한다. 선생은 아내 권애라를 평생토록 '동지'라고 불렀다. 마지막 가는 길에도 "권 동지, 미안하오. 내가 조국독립을 위해 몸바쳐 투쟁했는데 반쪽 독립밖에 이룩하지 못했소. 남은 생을 조국통일 사업에 이바지해주오"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겼다.
권애라 지사는 1990년에야 서훈됐고 1995년 10월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 464번 무덤에 안장됐다.
오마이뉴스l김종훈(moviekjh)
두 노인은 왜 이승만에게 방아쇠를 당겼나
얼마 전 1952년 6월25일 일어난 이승만 대통령 암살시도 사건의 장면을 포착한 사진이 공개됐습니다. 6·25 2주년을 맞아 부산 충무로 광장에서 연설 중이던 대통령의 뒤에서 62살 유시태 노인이 총을 겨누기 직전의 사진이었습니다. 물론 사건은 권총불발로 미수에 그쳤습니다. 사건의 배후에는 역시 69살의 노인 김시현이 있었습니다.
의열단 출신의 독립투사 두 사람이 벌인 저격사건이어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의문이 생깁니다. 피 끓은 젊은이들도 아니고…. 호호백발 두 노인은 왜 이 대통령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 것일까
최근 매우 흥미로운 사진 한 장이 공개됐다.
미국 뉴저지에 사는 수집가(김태진 국제지도수집가협회 한국대표)가 미군 첩보부대(CIC)의 사진첩에 수록된 사진을 언론에 배포한 것이다.
1952년 6월25일 부산 충무로 광장에서 일어난 이승만 대통령 암살시도 장면을 포착한 찰나 사진이다. 6·25 2주기 행사에서 연설 중이던 대통령의 바로 뒤에서 한 노인이 나타나 권총을 겨누기 직전의 극적인 순간이 담겨 있다. 범인은 일제강점기 때 의열단원으로 활약했던 독립투사 출신의 호호백발 노인 유시태(당시 62)였다. 하지만 이 저격사건은 미수에 그쳤다. 유 노인이 방아쇠를 당겼지만 발사되지 않은 것이다. 63년 만에 공개된 사진과 관련된 뉴스는 이렇게 과거의 가십거리 쯤으로 거론된 뒤 마무리됐다.
의열단원 출신 유시태가 연설중인 이승만 대통령을 향해 권총을 겨누려는 순간의 장면을 포착한 사진.
범인은 62살 노인이었다. 또 그와 함께 저격사건을 일으킨 김시현 역시 의열단원 출신의 69살 노인이었다.|연합뉴스
■두 노인의 거사
그런데 필자는 사진을 보면서 한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이 사진 밑에 타이핑된 일종의 사진설명이었다. ‘62세인 유시태가 이승만 대통령을 저격하려 하고 있다. 이번 암살 시도는 김시현 의원이 이끄는 12명의 반정부 조직이 선동했다.’
권총을 쥐고 대통령을 저격하려던 사람은 ‘유시태’인데, 12명의 반정부 조직은 무엇이고, 그 조직을 이끈 ‘김시현 의원’은 과연 누구인가. 대체 이 저격사건의 실체는 무엇인가. 필자는 급히 사건 당시의 신문을 검색해보았다.
경향신문 1952년 6월27일자를 보자.
“부산 충무로광장에서 거행된 6·25기념행사에서 이대통령이 훈화하는 도중 돌연 고관석에서 62세의 한 노인이 튀어나와 3미터 거리에서 이대통령을 향하여 권총을 발사했으나 불발로 이대통령은 상해를 입지 않았으며…, 범인의 배후관계는 방금 취조 중에 있다한다.”
그런데 잠시 뒤 발표된 저격사건 2보는 충격적이었다.
“저격현행범 유시태를 취조한 바 전 민국당 국회의원 김시현이 유시태에게 권총사용법을 8회나 교습시켜 권총을 수건에 싸서 모자 속에 넣어 기다리고, 국회의원의 신분을 이용하여 귀빈석에 함께 자리를 잡고 앉아있다가…, 대통령 훈화 도중 유시태는 배후 약 3미터 거리에서 저격하고자 휴대한 권총(독일제 엘프르트)의 방아쇠를 두번이나 당겼으니 불발로 인해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채포됐다. 김시현은 소형권총을 얻어 ‘하수인’인 유시태에게….”(<경향신문> <동아일보>)
이 사건으로 민국당(민주국민당) 집행위원인 서상일과 민국당 국회의원 백남훈·노기용 등이 체포됐다. 또 김시현이 대통령 저격을 위해 처음으로 접촉했던 최양옥(인천소년형무소장)과 저격을 모의한 장소를 제공한 안동한약방 주인 김성규, 권총을 김시현에게 판매한 정용환 등을 합해 모두 13명이 붙잡혔다.
1923년 의열단원으로서 폭탄을 국내로 밀반입하려다 잡힌 김시현(왼쪽). 오른쪽은 현역
경찰로서 밀반입에 가담한 황옥. 김시현은 이 사건으로 10년형을 선고받는다.|동아일보
■할복자살해도 시원치 않을…
한 달 여가 지난 8월 22일 세인의 이목이 집중된 저격사건의 첫번째 공판이 열렸다.
당시의 공판 분위기를 전한 신문기사를 보자.
“모여든 방청객으로 입추의 여지없이 초만원을 이뤘다. ‘하수인’인 유시태는 ‘대한민국은 법치국가이니만큼…’ 운운하여 앞으로 거듭될 공판이 적지않은 파란을 일으키리라는 인상을 주었다.…김시현은 70세 노인이라면 거짓으로 밖에 보이지 않을 듯한 정정한 기력이 엿보이면서 명쾌하게 응수했다.”<동아일보> 1952년 8월23일
“머리를 빡빡 깎은 피고 김시현은 나즈막한 키에 누르스름한 신사복에 흰 모시노타이를 입고 태연히 재판장 앞에 나섰다.”<경향신문> 8월24일)
김시현은 이 공판에서 범행동기에 대해 분명하게 진술했다.
“언제부터 죽이려 했나.”(재판장)
“과거에도 대통령의 인사행동에 불평이 많았지만 별반 그런 생각은 없었다. 사변이 일어난 후에 용납할 수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다.”(김시현)
“그 불평이란?”(재판장)
“괴뢰들이 남침하는 것도 모르고 있다가 6·25를 당하고는 허위보도만 하고 맹랑한 녹음방송만을 국민에게 하고 저이들만 도망질하고 그후 한마디 사과도 안하는 그런 사람이고….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젊은 사람을 많이 죽이고….”
김시현은 이 대목에서 “대통령은 할복자살하기 전에는 대중의 원한을 풀지 못할 것”이라 극언했다. 그러면서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많은 젊은이들이 죽었는데, 김윤근과 김종원만 희생시키고 신성모를 살려두어 주일대사까지 시킨 것은 무엇이냐”고 질타했다. 그는 또 “국회의원 소환 같은 헌법무시행위가 많았다”고 주장했다.
“언제부터 살의(殺意)를 가졌나?”(재판장)
“지난해(1951년) 10월부터 그냥 두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내 한 몸 희생하면 일반국민은 편안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김시현)
재판정에 선 김시현(오른쪽에서 세번째)과 유시태.(두번째)
■‘대통령을 없애야겠어.’ ‘내가 할게’
김시현의 진술을 토대로 이승만 저격사건의 전말을 복기해보자.
김시현은 전쟁의 참상을 목격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을 제거하려는 마음을 품는다.
북한의 도발이 예상됐는데도 전혀 준비하지 않았고, 전쟁이 발발하자 혼자 살자고 도망갔으며, 끝내 사과 한마디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국민방위병 사건과 거창양민학살사건 등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사실에도 불만을 품고 있었다.
김시현은 1951년 10월 쯤 일제강점기에 군자금 모집 등 독립운동을 함께 했던 최양옥(당시 인천소년형무소장)을 만나 거사의 뜻을 밝힌다. “민족을 위해 일하려면 정복을 벗으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최양옥은 “정복을 입고서도 민족을 위해 일할 수 있다”고 답했다. 완곡한 거절이었던 것이다. 김시현은 최양옥의 집 방안에 ‘낙(樂)’이라는 글씨가 걸려있는 것을 보고는 그와 함께 거사를 일으킬 계획을 완전히 접었다.
김시현은 대신 일제강점기에 같은 의열단원으로 활약한 유시태(당시 62살)를 대구 모여관에서 만났다. 유시태는 “대통령을 제거해야 겠다”는 김시현의 말에 “내가 하겠다”고 했다.
1952년 5월26일 벌어진 부산정치파동. 국회의원 50여명이 탄 통근버스가 국제공단상과의 연류혐의로 연행되는 수난을 당했다. 이들은 구속됐다. 이것이 부산정치파동이었다.
■불발로 끝난 거사
그 사이 부산의 정치상황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혼란에 빠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간선제로는 절대 재선할 수 없으리라 여겼다. 이승만 정권은 결국 대통령직선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 직선안이 1952년 1월 압도적인 표차로 부결되자 이승만 정권은 개헌안을 일부 수정해서 다시 국회에 제출했다. 이것이 발췌개헌안이다.
민국당도 대통령의 정권연장을 저지하고 자신들의 집권을 위해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양측 모두 장담할 수 없었다. 1950년의 5·30 총선에서 무소속이 62.9%의 득표를 할 정도로 반이승만과 반민국당 세력이 대거 국회에 진출해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양측은 한 명의 국회의원이라도 확보하려고 혈안이 돼있었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은 금품을 살포하고 백골단과 땃벌레와 같은 깡패와 청년단을 동원해서 국회의원들을 협박·포섭했다. 이 대통령은 급기야 친위세력을 요직에 포진시킨 뒤 부산·경남·전라 지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한다.(5월25일)
다음 날에는 국회의원 50여 명이 탄 통근버스를 헌병대로 끌고가 국회의원들을 구속시키는 사실상의 쿠데타를 일으킨다. 이것이 바로 ‘부산정치파동’이다.
이 대목에서 김용식 재판장과 김시현이 나눴던 첫번째 공판 장면으로 돌아가보자.
“6·25 2주년 행사장에서 거사를 하겠다고 최후결정한 때는?”(재판장)
“한참 민의(民意)니 뭐니 하고 데모로 떠들썩하고 그 민의들은 돈에 팔려오고 할 때였다. 하루에 10만원씩 받고 어떤 이는 3만원도 받고 했단다.”(김시현)
그러면서 김시현은 “나는 개헌안에 대해서는 이승만 편도, 민국당 편도 아니다. 그래서 민국당을 탈당한 것이다.”라 진술했다. 그러나 김시현과, 그의 사주를 받은 유시태의 거사는 총탄 불발로 미수에 그치고 만다.
4 19혁명 뒤 석방된 김시현
■의열단 동지들
여기서 한 가지 착안점이 있다.
김시현(1883년생)이나, 그의 사주를 받은 유시태(1890년생)나 당시로서는 호호백발 노인들이었다. 이들은 왜 노구를 이끌고 저격이라는 가장 과격한 방법으로 대통령을 처단하려 했을까.이를 위해서는 두 사람이 활약한 의열단이 어떤 조직이며, 두사람은 어떤 임무를 맡았는지 알아봐야 한다.
김시현과 유시태가 활약한 의열단(義烈團)은 1919년 민주에서 결성된 항일 무장독립운동단체였다.
국내외 일제관공서의 파괴와 요인암살 및 테러 등이 주요투쟁활동이었다. 조국독립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끼지 않았다. 비폭력 투쟁으로 펼친 3·1운동이 좌절되자 ‘광복을 위해서는 폭력 대응이 필수적’이라고 여겨 암살과 파괴, 태러라는 과격하지만 직접적인 독립운동을 지향했다. 그에 따라 ‘공약 10조’와 ‘파괴대상(5파괴)’ ‘암살대상(7가살)’이라는 행동지침을 채택한다.
‘공약 10조’의 골자는 정의로운 일을 실행하고,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해 목숨을 희생한다는 것이다. 한 사람은 다수를 위해, 다수는 한 사람을 위해 헌신하며, 의열단의 뜻에 배반한 자는 척살한다는 내용도 담고 있다.
‘5파괴’는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 매일신보사, 경찰서, 기타 주요 기관이다.
‘7가살(可殺)’은 총독부 고문과 군 수뇌, 타이완 총독, 매국노, 친일파 거물, 밀정, 반민족적 토호열신(土豪劣神)이다.
이처럼 희생정신과 폭력투쟁을 강조한 의열단은 폭탄제조법까지 배웠다. 박재혁의 부산경찰서장 폭사(1920년)와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이상 1920년), 조선총독부 청사 폭탄 투척(1921년),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폭탄투척사건(1923년), 나석주의 동양척식주식회사 및 조선식산은행 습격 사건(1926년) 등은 의열단이 행한 대표적인 의거들이다.
이대통령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던 의열단원 유시태.
그는 만약 불발탄인줄 알았다면 저격사건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라 했다.
■의열단원 김시현·유시태
유시태(1891~1965)은 1920년대 초 국내에서 활약했다.
의열단은 제2차 국내암살·파괴활동을 계획하면서 필요한 자금을 국내에서 마련하고자 했다.(1922년)
당시 의열단원 유시태는 권정필·남영득·유병하 등과 함께 서울 내자동의 부호 이인희 집을 찾아가 권총으로 위협하며 군자금 8000원을 요구했다. 유시태는 결국 이인희의 밀고로 경찰에 붙잡혀 7년형을 선고받았다.
김시현의 의열단 경력은 더할 수 없이 화려하다.
일본 메이지대 법학부를 나온 김시현은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6차례 체포와 15년 옥고’를 기록한 전형적인 의열단원이었다. 특히 1923년 다량의 폭탄을 국내로 밀반입시키다가 붙잡혀 10년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1929년 대구형무소에서 출감한 김시현은 곧바로 지린(길림)으로 떠났다.
“좀 쉬라”는 가족들의 간청에 김시현은 딱 잘라 말했단다.
“나의 섭생(攝生·건강관리)은 독립운동 뿐이다.”
이후에도 김시현은 의열단이 추진하던 군사간부학교 설립에 참여한다. 국내외 청년들을 모집하는 학생 초모관으로 활약했다. 김시현은 특히 베이징에서 일본경찰의 보호를 받고 있던 밀정 한삭평(박준빈이라고도 함)을 처단했다.
그는 이 사건으로 징역 5년을 선고받는다. 1939년 출소한 김시현은 중국과 국내를 오가며 군자금 조달과 동지 규합에 나서다 체포와 석방을 거듭했다. 해방 후 김시현은 좌우합작으로 통일국가를 수립해야 한다는 인식아래 좌우합작운동을 벌였다. 남북총선거를 통해 통일국가 수립의 노선을 지지하는 민족자주연맹의 간부로 활약했다.
남한 만의 단독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민국당(민주국민당)에 참여했고, 1950년 5월 선거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그러나 불과 한 달 뒤 6·25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이승만은 죽어야 해”
이처럼 김시현과 유시태는 불의를 보면 권총을 빼어들어 쏴버리는 철저한 의열단원이었다. 특히 김시현은 ‘나쁜 놈 총쏘아 죽이는데 일가견이 있었던 의열단원’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의열단을 만든 김원봉보다 더 피가 끓었던 의열단이었다고 한다. 6·25 전쟁 중에 평화운동을 벌인 박진목의 회고를 들어보자.
“김시현 선생은 안동약방에서 동지들과 모여 나라 일을 걱정하면서 늘 술을 마셨다. 선생은 늘 전쟁처리를 잘못 해 젊은 청년들을 다 죽게 한다고 분개하시면서 ‘대통령을 죽이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한번은 박진목이 “선생님, 술자리에서 이대통령을 죽이겠다는 말씀 안하시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김시현은 분함을 참지못하고 대꾸했다.
“하도 괘씸하고 너무 독선적이고 전쟁에 지고 부산으로 쫓겨온 대통령이…무슨 군왕처럼 날뛰고, 법을 무시해가면서 대통령을 더 해보겠다는 그 태도가 옳지 않아. 그래서 그만 없애버리는 것일세. 그 자는 해외있을 때부터 파벌을 조성하고 사욕에 치우친 일이 많았어.”
김시현은 이승만을 선고로 몰아내자는 주장에 대해 “그것은 이승만을 전연 모르는 사람”이라고 일축했다. 일각에서는 “김시현이 젊었을 때부터 폭탄과 총을 가지고 독립운동을 했던 행동파였기에 진짜 거사를 해치울 지 알 수 없다”고 보기도 했다. 김시현과, 그의 사주를 받은 유시태 두 사람 모두 ‘불의 타도’를 위해서라면 암살·테러를 주저하지 않았던 ‘의열단 기질’을 발휘한 것이다. 그러나 총탄이 불발됨으로써 계획이 엉클어진 것이다.
유시태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권총을 겨누기 직전 사진을 부분확대한 것.
■여전히 남는 미스터리
어쨌든 김시현과 유시태는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다른 피고인들은 모두 무죄 및 공소기각으로 풀려났다. 옥고를 치르던 김시현과 유시태는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뒤 석방된다. 1960년 4월 28일 부산형무소에서 출옥한 유시태는 “저격사건 당시 경찰관(정용환)으로부터 구입한 권총을 미리 검사해보지 못한 것이 큰 실수였다”고 저격불발의 아쉬움을 표했다.
김시현은 훗날 회고록에서 이승만 저격 성공 이후의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즉 이승만을 제거하고 내각책임제 개헌추진 의원들과 힘을 합쳐 내각 책임제를 관철시킨다는 것. 그와 함께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을 대통령으로 옹립하여 명실상부한 민주애족정권을 수립한다는 것….
이것이 암살 이후의 계획이었다고 술회했다.
물론 이 사건을 둘러싸고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는 남아있다.
총탄은 왜 불발됐을까. 김시현은 8월 22일 첫번째 공판에서 “총탄 4발이 불발된 것은 이대통령에게 경각심만 불어넣기 위해서 일부러 그런 것이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죽이려던 마음을 돌이켰다는 것이다.
그러자 유시태가 분통을 터뜨렸다.
“그날 행사장에 가기 직전까지 ‘탈환은 완전하냐고 김시현에게 물었다. 그는 ‘염려말라’ 했다. 만약 불발탄이었다면 나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김시현이 자신의 형량을 줄이려고 진술을 번복했을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단지 이승만에게 경각심을 불어넣기 위해 30년 지기 동지(유시태)에게 불발권총을 건네줬을까. 김시현은 이후 진술에서 일관되게 이승만을 죽이려고 했다고 주장했다. 또하나, 이 사건에 민국당(민주국민당)은 어디까지 관련돼있을까.
김시현은 처음에 민국당과의 관련성을 부인했다. 이 사건을 조사했던 김창룡 특무대장은 미국 대사관 측과의 면담에서 이대통령 저격사건의 주범은 김시현·유시태 두사람이라고 밝혔다. 그를 뒷받침하듯 두사람을 제외한 모든 관련자들은 공소기각이나 무죄로 풀려났다. 미국의 현지조사단도 민국당과의 관련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훗날 김시현은 신익희, 서상일, 조병옥 등 민국당 고위인사들과 상의해서 꾸민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진술들은 나중에 번복된 것이어서 신빙성을 100% 담보하기는 쉽지 않다.
어쨌든 최근 공개된 한 장이 사진엔 이렇게 파란만장한 현대사의 곡절이 담겨있다.
이런 생각도 해본다. 만약 유시태의 저 총탄이 실제로 발사됐다면 역사는 어떻게 흘러갔을까.
<참고자료>
허종, <김시현의 통일국가 수립운동과 이승만 대통령 저격사건>, ‘한국인물사연구’
제10호, 한국인물사연구소, 2008
박진목, <내 조국 내 산하:지금은 먼 옛 이야기>, 계몽사, 1994
양형석, <김시현(1883~1966)의 항일투쟁>, 안동대학원 석사논문, 1998
이기환 경향신문 논설위원 2016.5
'세상과 어울리기 > 그 사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언론인 송건호 (0) | 2022.12.28 |
---|---|
노촌 이구영 (0) | 2022.09.17 |
광부화가 황재현 (0) | 2021.08.21 |
전몽각 -윤미네 집, 아버지 (0) | 2021.08.18 |
게리 스나이더 “함께 머물고 꽃을 배우며 가벼이 떠나라” (0) | 2021.03.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