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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그 사람

변절(變節)과 전향(轉向)

by 이성근 2023. 1. 16.

 

안도현 김지하, 변절이라기보다 오판

뉴라이트, 학부모연합 등 보수단체로 구성된 범시민사회단체연합 주최로 26일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열린 김지하 선생 시국강연회가 열렸다. 김지하 선생이 대한민국 어디로 가야하는가?’라는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후보 캠프의 안도현 공동 선대위원장은 29많은 분들이 김지하 선생이 변절헸다고 하는데 저는 변절이라기보다 오판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안 위원장은 이날 BBS 라디오방송에 출연해 박정희 군부독재와 유신에 항거한 대표적 시인이 김지하 선생이라며 이 같이 말했다.

 

그는 제가 보기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유신의 망령이 사라지지 않은 나라라고 생각한다면서 “(김 시인이) 그런 사람의 딸한테 지지를 표했다는 점에서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안 위원장은 박근혜 후보의 부모가 왜 총에 맞아 죽었나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면서 박정희 대통령은 20여 년간 권력 중심에서 분단이라는 체제를 끌어왔고, 또 장기집권에 따라 권력 누수 현상이 생겼다. 그 장본인이 박정희라는 점을 놓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여성 지도자는 언제든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박근혜 후보가 과연 여성을 대표할 인물인가라고 했다.

<조미덥 기자 zorro@kyunghyang.com>2012.11.29.

 

 

변절-자기 배반의 역사

1987년 대선에서 양김 분열로 인한 참혹한 실패는 남한 민주주의 성장을 왜곡한 천추의 한을 남겼다. 노태우는 정당한 절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1212 쿠데타의 원죄에서 벗어날 수 없어 긴 군사정권 동안 억제되었던 민주화 요구에 밀리는 나약한 모습을 보였다.

김영삼은 평생 라이벌 김대중과 도저히 봉합할 수 없는 깊은 골을 가졌기에 나약한 노태우와 노회한 김종필과 함께 3당 합당을 감행했다. ‘민주투사김영삼은 가장 위험한 방법으로 추악한 쿠데타세력의 주역과 밀착하여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정치적 변절을 했다.

노태우의 또 하나의 정치적 승리는 김영삼이 순순히 갖다 바친 것이었다. 그토록 고도로 왜곡된 지역주의적 투표 패턴으로는 3자 경쟁(김영삼은 김대중이 매번 출마할 것이라고 가정했다)에서는 결코 당선되지 못할 것을 염려한 김영삼은 자신의 쪼개진 당을 이끌고 여권과 김종필 개인의 추종자들과 함께 합쳐서 ‘3당 통합을 이뤄냄으로써 1990년 초에 민주자유당(민자당:현 국민의힘)이 탄생했다.

 

조선 초 수양대군(세조)은 아버지 세종대왕의 유언을 어기고 어린 조카 단종을 아무런 명분 없이 폐위시키고 총명한 유학자들에게 자기를 따르도록 칼로써 강요했다. 극소수인 사육신과 생육신을 제외하고 대다수의 유학자들은 유교의 도덕과 명분과 대의를 내팽개치고 수양대군의 칼날에 무기력하게 무릎을 꿇었다.

 

세조의 치세에는 위대한 업적이 많이 있다지만, 명분과 대의가 생명인 유학자들을 강압으로 변절하게 한 것은 그 후 조선시대 내내 지배층에게 유교 도덕 권위를 세울 수 없게 만든 세조의 씻을 수 없는 죄악이었다.

 

일본의 식민지배가 시작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일제에 완강하게 저항했지만 36년이 지나자 부유한 지주와 자본가들은 물론 대다수 똑똑한 지식인과 언론인은 어느새 일본 천왕의 충직한 신하가 되었다. 이 변절자들은 나라와 민족뿐만 아니라 자신의 영혼마저 팔아 일제에 바쳤다.

 

이해(利害)는 항용 변절(變節)을 요구하는 것이다. 절만 변하면 해를 면한다. 절만 잠깐 변하면 수가 난다 하는 것은 사람의-더구나 지도자급인 인물의 일생에 매양 오는 유혹이다. 그래서 자칫하면 그 유혹에 넘어가 그의 공인적 생명은 영영 멸절하고 마는 것이다. 민중이란 이런 점에서 대단히 엄정한 재판관이다. 그리고 이 재판은 대역죄의 재판과 같이 일심(一審)이 곧 종심(終審)이다. 그 판결은 영원히 번복될 기회가 없는 것이다. 곤궁이나 생명의 위험은 결코 변절을 정당화하는 이유는 못되는 것이다.-이광수의 조선 청년에 아뢰노라글의 일부

 

변절을 가혹하게 비판한 이 짧은 글에서 춘원 이광수의 천재다운 필적은 예리했다. 이런 글을 남긴 이광수(18921950)는 어떠한 인물인가? 1917년 장편소설 <무정>으로 전조선 여성의 연인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명성을 얻은 당대의 천재였다. 1919‘31 독립선언하기 바로 전에 도쿄에서 ‘28 독립선언문을 썼다. 이광수는 민족주의자인체 하다가 일제에 검거된 적이 있다.

 

이때의 이광수 모습을 문학이론가 김동석 선생의 위선자의 문학에서 잘 나타나 있다.

민족주의자로서 일제의 공판정에 선 춘원이 눈물을 좔좔 흘리며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듯한 말로 와다꾸시와 텐노헤이카노(天皇陛下) 세끼시(赤子)데쓰라고 하니까 일인(日人) 검사가 이놈아, 네가 어찌 천황폐하의 적자냐, 노서아 사람 앞에선 공산주의자라고 하겠지. 이놈아, 너는 이때까지 민족주의자로 행세하지 않았느냐. 그러니까 네가 그렇게 지도한 청년들에 대한 책임으로 보더라도 어떻게 뻔뻔스럽게 천황폐하의 적자라고 하느냐.’고 호령호령하였다고 한다. 그랬더니 춘원은 더욱 많은 눈물을 흘리며 목소리를 더욱 간절하게 하여 천황페하의 적자라는 것을, 몇 번이고 되풀이 하여 맹서하였다고 한다.

 

그때의 춘원을 당할 만한 연극배우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이 그 청년(당시 춘원에게 사숙하던 문학청년)의 감상이오, 그렇게 좋아하던 춘원에 대하여 환멸의 비애를 느꼈다는 것이다.

 

이광수는 조선이 독립할 가망성이 없고 근대화한 일본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자 조바심을 느꼈다. 이광수는 천하에 대고 한 말을 잊고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로 창씨 개명하여 말과 글과 행동으로 민족을 배반하고 일제의 주구 노릇을 충실히 했다.

더럽고 모멸스러운 필적을 휘날리며 화려하고 세속적인 출세가도의 길로 들어섰다. 문학에서만 아니라 변절에서도 천재적인 기질을 발휘했다.

 

천재 배우 채플린은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 했지만, 어떤 배우도 연기 못할 천재적인 변절을 보면 이광수의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비극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세계 최고의 과학 문자인 한글을 창제한 집현전의 양대 천재이며 둘도 없는 친구였던 성삼문(14181456)과 신숙주(14171475)는 세조의 칼날 앞에 운명의 방향을 극단적으로 달리했다. 유교의 대의명분을 지키려고 세조의 도발에 저항한 성삼문은 벌겋게 달군 쇠에 다리가 타들어 갔고 한 쪽 팔이 잘리는 가혹한 고문 끝에 온 몸이 갈기 찢기는 거열형(車裂刑)으로 처형당했다. 여자 식구들은 노비로 팔려나갔고 아들과 남자 동생 식구들도 몰살당하여 집안의 대가 완전히 끊겼다. 하지만 성삼문은 유교에서 최고 가르침인 충()이란 절개와 지조를 지켜 역사에 명예를 남겼다.

 

세조에게 곱게 순종한 신숙주는 성삼문보다 19년을 더 살며 천재적인 학식과 문장 재주를 통하여 조선 초기의 문물을 정비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신숙주는 좌의정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을 지냈다.

그러나 신숙주는 여느 벼슬아치와 달리 재물을 탐하지 않는 검소한 생활을 했고 권력을 누리지 않고 정치적 술수를 부리지 않았다. 신숙주는 인간적인 삶에 모범을 보였지만 세종이 임종할 때 그토록 당부한 단종에 대한 의리를 모른 체하여 역사에서 정치적 변절자란 오명을 얻으며 명예를 잃었다.

 

현실을 대처하는 태도에 따라 성삼문과 신숙주의 삶은 이렇게 달랐다. 실리와 명예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으면 좋으련만 인간사에서 한 가지만 반드시 선택하여야 할 때 인간적 고민과 혼란은 여간이 아닐 것이다. 더구나 재능이 있는 사람에게서야. 그러나 말과 글이 행동과 다를 때 민중은 그들을 존경하지 않는다.

 

조선의 지배층이 민중에게 존경을 받지 못하니 역사가 제대로 진행할 리 만무했다. 신숙주처럼 대의명분을 갖추지 못한 조선왕조의 집권층은 웅대한 국가적 미래(비전)이나 틀(프레임 워크)을 짜지 못하고 그저 눈앞의 권력 획득에만 연연하며 자질구레한 관념을 떠벌리는 당쟁에만 몰두했다.

 

전두환 정권이 부르짖은 정의사회구현가 얼마나 기만적이었나를 보면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국무위원급 국회 청문회 대상 가운데 거의 대부분 위장전입, 부동산 투기, 병역기피, 세금탈루, 논문표절 투성이 인물들에게 국민들이 직위에 맞는 도덕적 존경을 표하겠는가?

 

민중의 삶을 파탄으로 몰아넣은 2번의 왜란(임진왜란, 정묘재란)을 겪은 지 40년도 안 돼 남한산성에서 청나라 장수에게 민족의 우두머리인 임금이 무릎 꿇고 목숨을 부지한 병자호란이 있었다. 이 엄청난 사태에 분명 누군가에 책임을 묻고 책임을 져야 함에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그것은 집권층이 역동성을 잃어버리고 보수적 권력 고착화에만 몰두했기 때문이다. 변절이 일상화한 도덕 상실이 낳은 결과였다. 결국 18세기부터 시작된 세계의 근대화 조류를 읽지 못하고 재빠른 변신을 한 일본에게 굴욕을 당한 것이다. (변신이 변절과 다르다는 것은 중학생 수준이면 잘 알 것이다.)

 

완고한 조선왕조는 서구 열강이 아닌 왜놈이라고 그토록 업신여기며 깔보던 이웃 일본에게 망했다. 일본은 옛 중국의 지배자들처럼 허세를 부리는 지배자가 아니었다. 일제는 서구 식민주의자와 달리 조선인을 완전한 일본인으로 동화하려 반만년 이어온 한민족의 혼을 우선 파괴해야만 했다.

 

일제는 민중을 수탈하기 위해 무자비하게 채찍을 휘둘렀지만 순종적인 지식인, 지배층이었던 양반 그리고 대지주들에겐 당근으로 유혹해서 변절케 했다. 일제는 당근을 잘 받아먹는 자를 앞장세워 민족혼을 빼버렸다. 이런 방법은 일본인 스스로 나섰을 때 보다 더 안정적이고 효과적이라는 것을 일본은 잘았다. 당근을 먹은 자들은 채찍질 당하는 민중에 대해 애써 눈을 감고 일본이 근대화를 우리에게 선물했다고 얼토당토않은 믿음을 민중에게 주입했다.

 

당근을 먹고 민족을 팔아먹은 역적은 이완용 같은 몇몇 사람만이 아니었다. 생각하기만 해도 수치스러운 정신대를 위해 앞장선 대부분의 사람들이 조선인이었다. 일제는 출신 배경이 서민이나 천민에게도 완장을 채워주고는 그들의 협력으로 악랄한 수탈행위를 일삼았다.

 

조선에서 민중을 착취하고 학대한 일본 경찰의 절반이 조선인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위안부문제의 진정한 참상, 즉 왜 일본이 그것을 은폐했고 또 왜 그토록 오랫동안 남한 정부가 이를 방치했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이 성적 노예에 대한 조사를 개시하게 되면 한국여성들이 한국 남성들에 의해 동원되었다는 것을 밝혀지게 될 것이다. 일본은 한국인끼리 싸우게 만듦으로써 한국의 민족정신을 파괴했고 그 결과 오늘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조선의 마지막 총독이었던 아베 노부유키는 조선 총독부의 마지막 업무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하는 데 사실은 아니라고 한다. 누가 지어냈건 현재 친일세력의 정신 상태를 잘 나타내며 이 문장에서 식민지의 참혹한 유산을 쉽게 엿볼 수 있다.

 

우리는 패했지만 한국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장담컨대, 조선인이 제정신을 차리고 찬란하고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년이라는 세월이 훨씬 더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인에게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놓았다. 결국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보라! 실로 조선은 위대했고 찬란했지만 현재 조선은 결국은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온다.

 

해방 후 남한의 비극은 변절자들이 응징을 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변절자들의 더러운 손에 남한의 권력과 돈이 쥐어졌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명예까지 충분히 누리고 산 사람이 적지 않았다. 이광수는 한국전쟁 중에 납북 당하여 생사가 불명확하지만 이광수 못지않은 친일문학자 서정주는 갖은 명예와 천수를 누렸다.

 

기개 높은 시 광야'를 쓴 이육사는 일제에 저항하다가 17번이나 투옥 당하였고 결국 일제의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약삭빠른 변절과 웅혼한 절개를 남한의 역사는 기어코 구분하지 않았다.

 

김용옥 교수의 견해를 들어보자.

왜 우리는 지금 우리의 위대한 계몽주의 문학가 이광수를 정죄해야 하고 왜 그 위대한 시정을 우리민족에게 선사한 시인 서정주를 단죄해야 하는가? 아무리 그들의 문학이 위대하더라도 그들의 도덕성으로서는 우리민족의 앞길이 보장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을 증오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우리 삶의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다는 것을 확실히 역사에 남겨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의식이 우리 조선의 젊은이들에게는 아직도 살아있는 것이다.

 

양김의 분열은 쿠데타 세력에게 숨통을 틔워주고 결국은 3당 합당이라는 변절의 오욕을 되풀이 하는 길을 마련했다. 이것을 어찌 김영삼 탓만으로 돌릴 수 있겠는가. 김대중도 김영삼 다음 대통령 선거에서 김종필의 협조를 얻어야 했으니 누가 누구를 탓할 수 있으랴!

3당 합당은 수양대군의 칼날과 일제의 총칼처럼 이 땅의 괜찮은 정치인과 지식인들을 대거 변절케 하였다.

 

199439, 나는 김문수가 급진좌파인 민중당에서 민자당(지금 국짐당)에 입당하자 엄청난 충격과 절망감으로 포장마차에서 그다음 날이 밝도록 술을 마신 기억이 아직도 또렷하다. 민중당 동료인 이재오는 그렇고 그런 사람이었지만 김문수의 변절은 청천벽력으로 다가왔다. 김문수는 열사 전태일의 가장 모범생으로 알고 있었고 실제 실천적 노동운동가로 명망을 쌓은 사람이어서 존경하고 있었다.

 

포장마차에서 김문수와 같은 서울 상대 출신인 절친한 선배와 밤새 격정적인 논쟁을 했다. 그 선배는 김문수를 선의로 해석하여 호랑이 굴에 들어간 것에 비유했지만, 나는 김문수가 이제까지는 처녀의 순결을 간직하였으나 놈팽이와 접촉하자마자 매춘부로 돌변할 것이라 강변했다.

 

잇따른 변절의 회오리바람은 상상을 초월했다. 1980서울의 봄주역인 심재철과 김부겸, 동아일보 해직 기자로 상징되는 대표적 언론인 이부영, 서울대 수석합격자이며 80년대 대표적 학생운동가 원희룡과 같은 한때 운동으로써 존경을 받은 사람들이 김문수 처럼 쿠데타 세력이 만든 민자당의 품에 안겼다.

 

변절의 일상화는 이들 뿐만이 아니라 세월이 가면서 죽 이어졌다. 2002년 대선에서 1970년대 대표적인 학생 운동가였던 이철은 보수 냄새가 풀풀 나는 정몽준 후보의 똘마니로 전락했다가 정몽준이 노무현과 결별하자 노무현 정부에 안겨 철도청장이란 고위직을 따먹었다. 87년 현대 노동자 대투쟁의 상징적 인물이었고 민주노총 초대 사무총장이었던 권용묵 역시 대재벌 정몽준 후보의 품에 안겨있었다. 이광수가 천황폐하의 품에 안긴 것과 별로 다를 바가 없으니 친일의 변절을 응징하지 못한 치욕의 역사는 하염없이 돌고 도는 물레방아인 듯 싶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서 호랑이를 잡겠다고 맹서하며 변절한 김문수는 경기도지사 시절 허튼 억지 부리는 조갑제와 다정하게 어울렸다. 같이 이야기한 것을 책으로 펴내고 수구층에 더욱 가깝게 다가가기 위해 이승만을 우상으로 떠받들었다. 기어이 대통령 후보로도 거론되었다. 김문수가 보여주는 삶의 원칙을 손바닥 뒤집듯, 사쿠라 꽃잎 떨구듯 너무도 수월하게 변절해버리는 지혜(?)는 똑똑한 동시에 정직하게 살지 않아야 정치로 성공할 수 있다는 씁쓸함을 잘 대변하고 있다.

 

전태일의 모범생에서 조갑제의 동지로 더럽고 모멸적으로 돌변한 이런 자에 대해 더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아까운 시간을 엄청나게 낭비하는 꼴이다. 노무현 정부는 우리 역사에서 기득권층의 거센 반발과 서민의 환호 속에 적법하게 탄생한 첫 정권이었다. 우리는 노무현을 대통령이란 최고 권력에서 권위를 빼버린 다시 말해 스스로 탈권위한 최초의 집권자로 기억해야 한다. 대통령이란 최고 권력자 노무현이 남긴 여러 가지 소박한 면모는 우리 정치사에서 소중한 유산으로 남겨야 할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은 대통령으로서 인간적인 면모보다 더 중요한 정책에서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후보 시절에 대통령이 되면 미국에 사진이나 찍으러 가지 않겠다는 자주적 발언은 누구에게도 들어보지 못한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러나 취임하고 얼마 되지 않아 미국을 방문했고 교포들의 환영 연회 연설에서 미국이 없었다면 나는 아오지 탄광에 갔을 것이라는 농담을 경박하게 해버렸다.

 

미국의 현실적인 힘을 우리가 극복하기 힘들다고 하지만 미국의 압력에 이라크 파병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결정한 일, 신자유주의란 거센 바람 앞에 촛불 같은 노동자농민과 대화 한번 하지 않은 일, 열린우리당이라는 거대 여당(김대중 정권의 국민회의는 참으로 왜소한 여당이었다)을 파트너로 두고도 개혁입법을 제대로 못한 점, 40번의 지방선거에서 한 번도 이겨보지 못한 점, 그러다가 느닷없이 한나라당에게 대연정을 구걸한 점 그리고 한 치의 준비도 없이 불쑥 한미FTA에 정권의 목숨을 건 점은 노무현이 남긴 고통스러운 유산이었다.

 

남의 행위는 불륜으로 조롱하고 자신의 행위는 로맨스로 미화하는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의 태도는 우리 역사에서 오래되었다. 비비꼬며 발칙한 발언을 하다가 시류가 바뀌면 안이하게 타협하는 모습 말이다.

 

이완용에게도 매국의 변은 있었다. “때에 따라 마땅한 것을 따를 뿐, 달리 길이 없다.”

이런 변명은 한계가 빤한 현학적 궤변일 뿐이다. 변절의 역사를 끝맺으려면, 올바른 역사를 세워 엄중한 응징을 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Facebook 송필경 20211223

 

황석영 변절논란정부 중도실용평가에 궤변비판

이명박 대통령의 중앙아시아 순방에 동행한 소설가 황석영씨(사진)가 이명박 정부를 중도실용 정부로 평가하면서 큰 틀에서 동참해서 가도록 노력하겠다고 한 것을 두고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진보 진영은 14일 정치권, 문화계, 학계를 망라해 일제히 궤변이라고 비판했다. 보수 진영에서조차 이명박 정부의 국정운영에 대해 민주주의 위기를 거론하는 상황에서 그동안 진보적 소설가로 평가받아온 황씨의 발언은 현실을 호도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지식인의 변절이란 비판도 제기된다. | 관련기사 2

 

민주노동당 강기갑 대표는 이날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이런 정권을 중도실용주의로 규정한다면, 극우 보수는 어떻게 해야 극우 보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인지 참으로 궁금할 정도라고 말했다.

 

진보논객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는 진보신당 게시판에 올린 글에서 2007년 대선 당시 황씨가 이명박 후보를 부패 정치세력으로 비난한 사실을 거론한 뒤 욕도 웬만해야 한다. 이 정도의 극적인 변신이라면 욕할 가치도 없다고 황씨의 발언을 변절로 평가절하했다.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김용태 회장은 경향신문과의 통화에서 광주민주화항쟁은 역사적 비극이고 명백한 국가 폭력이라며 진보적 색깔을 갖고 현 정권에 협조하는 것을 자랑처럼 얘기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비판했다. 황씨는 13일 기자간담회에서 광주사태 같은 사건이 우리에게만 있는 줄 알았으나 1970년대 영국 대처 정부는 시위 군중에 발포해 30~40명의 광부가 죽었고 프랑스도 마찬가지라며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사회가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논란의 논점은 두 가지다. 과연 이명박 정부에 대한 중도실용 정부평가가 타당하냐는 것과, 이로 인한 현실 호도변절의 문제다.

 

우선 보수·진보를 떠나 이명박 정부 이후 한국 민주주의의 후퇴를 지목하고, 최근 여당 내부에서도 부유층 중심정책에 대한 국정기조 변경을 요구하는 상황을 감안하면 중도실용 정부평가는 현실과 동떨어진다는 지적이다.

 

실제 이명박 정부 이후 언론인 구속, 집회·시위 불허 및 강경진압, 교과서에 대한 우편향 수정 등 정치적 의사표현을 제한하고 사상·양심을 통제하는 공안통치의 양상이 지속돼 왔다. 정책 면에서도 종합부동산세 완화 등 부유층 중심 정책과 대대적 수도권 규제 완화, 노동 유연화 등 각종 불균형 정책으로 인해 우리 사회는 지역·계층·세대간 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 같은 우경화·일방독주식 국정운영의 결과 지난 1월에는 모두 6명이 숨지는 용산 철거민 참사가 빚어지기도 했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는 이명박 정부는 중도실용주의가 아닌 강경보수였다. 이는 강한 이념 지향성을 뜻하고, 반실용이라고 진단했다.

 

따라서 이명박 정부의 실상과 괴리된 황씨의 발언에 대해선 현실 호도변절이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홍성태 참여연대 집행위원장(상지대 교수)황씨의 무지와 무능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발언이라며 “MB(이 대통령) 정책을 실증적으로 보면 부자감세·비정규직 양산·촛불탄압 등 극우정책이라고 비판했다. 보수 진영의 윤여준 전 의원도 어느 좌표에서 봤기에 이명박 정부가 중도실용이 되는가 싶다. 우익도 극우가 보면 중도라고 지적했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진보운동을 계속한 사람이라기보다 돌출 이벤트를 보여줬던 사람이라며 정권으로서는 좌파도 우리가 포용한다는 식의 그림을 보여준 셈이고, 황씨도 새 영역 개척에 나선 셈이라고 공박했다.

경향 김광호·장관순·이영경기자 2009.05.14.

 

 

나는 왜 이재명을 지지하는가?

지금까지 지도자를 선택하는 데 있어 존경할 만한가,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고 있는가 하는 점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해온 것 같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그랬고 해방정국을 주도했던 여운형이 그랬고 그 뒤를 잇는 김대중에게도 그랬다. 독립운동, 시간이 지나 민주화운동의 유무는 지도자로서의 삶을 평가하는 중요한 지표였다. 여기에 하나 덧붙여지는 것이 있다면 측은지심과 수오지심을 아는 인간적인 매력이 아니었을까 싶다. 학력이나 학벌은 역사와 민중, 그리고 삶에 대한 태도보다 더 중요한 요소로 판단되지는 않았다. 이것은 재야의 리더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자랑할 만한 학력과 학벌을 가진 이들이 국민이 선출한 리더를 우습게 보는 이유다.

 

해방정국과 두 번의 쿠데타를 거치면서 우리는 강력하고 영웅적인 리더를 주문해왔다. 특히 권위주의 시대에는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상이 대세였다. 대중이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지고 있는 능력자에게 권력을 쥐어줄 테니 제발 우리는 관심을 끄고 격양가를 부르며 살 수 있게 해달라 읍소했다. 그 이후로 우리는 끊임없이 민주주의 사회에 어떤 리더십이 적합한가 학습하는 중이고 리더십에 대한 질문을 품게 만든 공신들은 단연 노무현과 문재인이다.

 

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후 대통령의 권력을 민주적으로 창출하는 데에만 관심 있었지 대통령의 권한을 어떤 사람에게 맡길 것인가, 그 권력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대통령에게 시민들은 무엇을 주문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빈한했다. 뽑아만 주면 다 알아서 하겠지, 혹은 정치는 당신들에게 맡기고 나는 일상에 충실한 사람으로 돌아가겠다, 이런 태도였다. 말로만 민주주의를 외쳤지 일종의 과두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비싼 수업료를 내고 배운 교훈은 민주주의는 한시도 눈을 떼서는 안 된다는 것과 선출권력에게 맡겨두는 것만큼 무책임하고 어리석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에 기후위기, 게다가 팬데믹까지 새로운 시대적 전환기에 놓인 지금시기 우리는 어떤 리더를 원하는가. 김대중 대통령은 그의 학식과 통찰력에 탄복한 전 세계인들의 존경을 받았고 노무현은 국내에서는 잡놈 취급을 받았지만 적어도 밖에서는 민주주의를 잘 이해하는 수평적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로 존경받았다. 그리고 인품으로 흠잡힐 데 없어 모두가 친하게 지내고 싶어하는 민주주의자 문재인을 거쳐 지금 우리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유형의 지도자를 요구받고 있다. 지도자가 꼭 존경받아야 할 이유가 있는가 하는 질문도 하게 된다.

 

김대중에 대해서는 수직적 존경의 대상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는 자신의 삶을 한국 정치와 민주주의 발전에 고스란히 제물로 바친 인물이다. 많은 이들이 김대중을 선생님이라 칭하는 이유다. 하지만 노무현은 권위를 거부하고 지상으로 내려온 첫 번째 지도자다. 지도자는 저 위 발코니에 서서 명령하고 지휘하고 손 흔드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와 같은 눈높이에서 고민하고 기뻐하고 때로 아파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그는 자신을 위에 두지 말고 제발 수평적인 눈높이로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동료로 보아달라며 끊임없이 의견을 묻고 구하고 연구해서 알려달라고 피드백을 강요했다. 다 알아서 하라고 뽑아놨는데 뭘 자꾸 성가시게 묻냐고 볼멘소리를 하는 국민에게 네 알겠습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가 다 알아서 합지요 하지 않고 그게 당신들의 역할이고 의무가 아니냐 왜 나에게만 다 맡겨놓고 책임을 방기하느냐 오히려 큰소리쳤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고 설파하며 국민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다하라고 채근했다. 그래서 양쪽 모두에게 미움을 받았다.

 

그런 과정을 거쳤기에 탄핵정국에서 촛불시민들은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고 본다. 내가 판단하면 된다는 것, 내 판단과 결정이 곧 권력이 된다는 것을 경험한 것이다. 이젠 몇 번의 집회나 시위만으로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지지선언하고 거리에서 구호외치는 것으로 할 일 다 했다고 생각하던 시대는 갔다. 민주주의는 소위 명망가들이 만드는 게 아니라 수많은 들이 모여 세상을 바꾸는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시민들 각자 누가 가르치지 않았음에도 부단한 학습을 통해 어떤 세상이 좋은 세상인지 나름대로의 기준과 눈높이를 가졌고 상황을 객관적 비판적으로 보는 눈을 키워왔다. 후진적인 한국정치, 무능한 정치인, 부패한 엘리트집단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수준 높은 한국의 민주주의가 이를 방증한다. 나는 이것이 노무현이 남기고 간 유산이라고 생각한다.

 

이제야 비로소 10년 보수정부를 몰아내고 문재인이 닦아놓은 국가기강의 토대 위에 시민과 함께 호흡하고 함께 역할을 나누는 진화된 노무현식 정치를 할 수 있는 때가 온 것 같다. 의회권력과 한층 성숙해진 시민의식, 노무현 때는 없었던 다양한 대안적 매체가 우리가 가진 강력한 힘이다. 언론지형이 기울었다고 한탄하지만 이는 노무현 때도 똑같았다. 지금은 부족하나마 우리의 스피커를 갖고 있으며 스스로 언론이 되고 발화자가 되며 전령들이 된다는 것, 그때에 비하면 엄청난 무기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언론카르텔의 마타도어 총공세에도 문재인 지지율이 고정적인 이유이고 이재명의 도덕성 논란이 사위어가는 힘이다.

 

노무현은 시민들과 소통하고 싶어 했고 소통하는 방법을 알았던 리더였다. 소통수단의 부재로 답답해하던 그는 실시간으로 쌍방 소통하는 이 시대를 미리 내다본 것 같다. 늘 시민과 함께 하려 했으나 그렇지 못해서 성공하지 못한 노무현의 한계를 뛰어넘게 만든 것은 그가 확충하고 간 IT 인프라 덕분이다. 노무현은 새 시대를 여는 맏형이 되고 싶다고 했는데 어쩌면 비로소 새 시대를 열게 된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시민의 요구를 이행할 수평적 리더십, 수직적 존경이 아니라 수평적인 연대를 통해 나를 대신할 수 있는 대리인으로서, 일머리를 갖추고 문제해결능력, 실행능력까지 갖춘 실무자로서 리더의 자격을 재정립하고 있는 것이다.

이재명을 노무현에 비유하면 화를 내는 분들이 많을 것 같다. 하지만 시대정신을 제대로 읽지 못하면 그것이 오히려 노무현을 욕보이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노무현은 남 탓하지 말고 자신이 실력을 키워 끊임없이 진보하고 성장할 것을 주문했다. 그것이 자신을 버리라 한 이유이고 밟고 가라는 의미이다. 국민의 수준에 맞는 국가지도자를 얻는 법이고 지지자의 수준에 맞는 리더가 키워지는 법이다. 노무현이든 문재인이든 그들을 신격화하고 절대시하는 것은 민주주의자답지 못한 태도이다. 이것은 이낙연 지지자들에게도 똑같이 하고 싶은 말이다. 우리는 문재인과 공과 과를 함께 나누어야 할 동료들이고 이는 다음 시대의 리더가 될 이재명도 마찬가지다. 세상에 완벽한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민중이란 다정하게 대해주거나 아니면 철저하게 파멸시켜버려야 한다. 무릇 인간이란 작은 모욕에는 반격하지만 크게 짓밟히면 반격할 엄두를 못 낸다

 

마키아벨리 군주론의 문제의식이다. ‘민중기득권으로 바꾸면 완벽하게 동의하게 된다. 그는 군주가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통치술과 군사력, 판단력, 자유의지를 꼽았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통찰이 돋보이는 두 번째 덕목인 분별있는 잔인함, 신중한 잔혹함을 요구하는 판단력이다. 문재인에게 없지만 이재명은 갖고 있는 것으로 기대되는 덕목이 바로 이것이며 기득권 카르텔이 이재명을 악마화해온 이유다. 싸움판에서 초월한 위치에 있는 듯 지켜만 보다 겨우 협치하라 한마디 하는 지도자가 아니라 필요하다면 직접 링 위에 선수로 올라가 손에 흙과 피를 묻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경험한 것이다.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책임감, 의무감, 도덕성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지도자도 불완전한 존재이며 모든 면에서 완전하게 도덕적일 수도 없을뿐더러 청렴할 필요도 없다고 보았다. 적어도 암묵적으로 합의된 정도의 도덕성이란 늘 있게 마련이니 그 정도의 기준이면 충분하다. 우리는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마다 대통령을 잘못 뽑아서 그렇다고 하늘에 사죄하라고 요구하는 전근대적인 신민들과 동시대를 함께 살고 있다. 외교무대에서 대통령 만큼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영부인 역할에 대한 천박한 인식을 드러내는 사람들, 국민을 피지배계층으로 보고 대통령을 아직도 권위주의 시대 리더십의 인식에서 한발짝도 걸어나오지 못한 시대착오적인 세력들은 마키아벨리식으로 말하면 잔혹하게 쓸어버려야 하는 적폐들이다.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늘 손해보는 법이다. 하지만 사랑이 저울질하여 반반 분담하는 것이 아니듯 세상을 바꾸고 싶은 욕망이 큰 사람들이 더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변화를 거부하는 이들은 자신의 목숨을 좌지우지할 것임을 잘 알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저들이 솔솔 피워올리는 정치 무관심과 정치혐오에 빠지는 것은 저들의 이익에 내 삶을 갖다 바치는 것이며 내 삶의 개선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가 본 이재명은 협상할 뿐 그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민으로서의 자격이 없는 이들에겐 단호한 태도를 취했다. 이것이 분별있는 잔혹함으로 비춰진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리더로서 필요한 덕목이 아니겠는가. 시민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지 않아도 유권자라는 이유로 굽신거리는 리더는 이 시대에 맞지 않다. 때로는 계몽군주로서 때로는 자애롭고 포용력있는 리더로, 때로는 국익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기회주의적 실용주의자가 될 수 있어야 하며 반사회적, 반민족적 행위에 대해서는 비타협적이고 잔혹한 면모를 보일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필요로 하는 시대다.

 

또하나 그는 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정치를 하는 인물이다. 자신이 밑바닥 생활을 하며 살아오는 과정에서 체득한 원하는 세상의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정치하는 인물이다. 이것이 기득권과 비타협적으로, 오히려 그들을 역으로 이용할 줄 아는 전략적 사고를 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많은 진보인사들이, 가깝게는 신지예가 금을 넘어간 것은 한심한 일이지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들은 운동을 더 나은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자신의 욕망에서 출발하지 않고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성폭력 피해여성을 위해 일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있었기에 쉽게 자신을 배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신들이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는데도 고마워하지도 않고 알아봐주지도 않는다고 생각하기에 억울한 것이다. 정통좌파 지식인을 자처하는 자칭 B급 좌파 지식인들도 마찬가지다.

 

아무것도 아닌 내가 글을 쓰는 것도 조국이나 추미애를 위해서, 이재명을 위해서가 아니라 더 나은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나의 욕망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보다 성숙한 사회에서 시민권을 행사하며 살고 싶다는 욕망, 아픈 사람들을 좀 덜 보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욕망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으로 이재명을 선택한 것이니 이는 나를 위한 이기적인 행위인 것이다. 나의 욕망을 충족시켜줄 대리인으로 내세운 리더, 세상을 머리나 명분이 아니라 가슴으로 체득한 리더, 시민과 함께 호흡하는 것의 막강한 힘을 아는 리더, 노무현이 꿈꿨던 수평적 정치를 실현시킬 수 있는 때가 온 것이다. 이름하여 시민과 함께 하는 노재명, 그래서 나는 이재명을 지지한다.

facebook 강미숙 20211222

 

변절자들이 잘 나가는 세상

박정희는 남로당 군사담당 책임자였다. 한국전쟁 직전 발생한 여순사건의 주모자로 체포됐으나 곧바로 전향했다. 자신의 세포전원을 밀고해 조직을 일망타진한 공을 인정받아 군으로 복귀했다. 황국신민이 될 것임을 맹세하는 혈서를 써 만주군 장교가 되었던 그는 일제 패망으로 세상이 바뀌자 남로당 간부로 변신했고, 여순사건 후에는 다시 전향해 국군 장교로 둔갑했다. 그가 시현한 전향과 변절 과정은 일반의 상상을 절한다. 쿠데타로 최고 권력자가 된 뒤에는 북에서 특사로 보낸 자신의 맏형 박상희의 절친 황태성까지 잡아 죽였다. 황은 그가 친형처럼 따르던 한 고향 출신의 이념적 형님이었다.

 

정신의학자들은 변절한 인간은 쉽게 저열한 욕망의 노예가 되어 주지육림에 빠져드는 특성을 지닌다고 진단한다. 가치와 신념을 내던지고 변절할 경우 인간으로서 정체성을 잃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남 부끄러운 과거를 잊으려고 했는지 모르나 박정희는 살아 있을 때 술을 엄청 마셔댔다. 심복의 총탄에 맞아 죽은 마지막 순간에도 여자들을 곁에 두고 술판을 벌였다.

 

우리는 뜻이 맞은 친구를 동지라고 부른다. 옳은 일에 대한 변치 않는 신념과 실천을 공유하는 동반자를 뜻하는 이 말이 아무한테나 붙여지진 않는다. 독재에 저항한 사람들의 강한 동지애는 엄혹한 시절에 비밀경찰과 공안검찰의 감시와 탄압을 받으면서도 그 극한의 역경을 이겨낸 큰 힘이 되었다.

 

그 시절에는 구타와 몽둥이질은 기본이고 물고문과 전기고문, 통닭구이를 비롯한 별의별 지독한 고문이 공공연히 자행되었다. ‘인간백정으로 불린 고문 기술자들은 사람을 짐승 다루듯 했다. 최고의 기술자이근안이 고위직까지 출세한 것도 민주 인사들을 상대로 갖은 악랄한 고문 수법을 구사해 정권의 입맛대로 허위 자백을 잘 받아냈기 때문일 것이다. 민청련 활동가인 김근태, 이을호 뿐 아니라 언론인 송건호, 김태홍 등도 그들의 무자비한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을 이기지 못해 일찍 세상과 작별해야 했다. 고문자들은 심지어 참고인으로 끌고 간 박종철을 물고문하다 숨지게도 했다.

 

하지만 이 끔찍한 어둠의 시대에도 불의를 이기는 힘은 동지에 대한 강한 믿음과, 역사가 진보하리라는 굳은 신념에서 나왔다. 부정의하고 부패한 세력은 필경 인간의 선한 의지로 종말을 맞게 되리라는 믿음이 그것이다. 이곳이 변절자와 동지의 행로가 갈리는 지점이다.

 

한번이라도 배신한 적이 있는 자는 반드시 또 배신하게 돼 있다. 신뢰를 저버리는 일이 되풀이되는 까닭은 이들이 이미 인격분열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인격이 무너진 자들은 사익을 위해 한 순간 서로 돕다가 배신하기도 하는데, 결국 다툼 끝에 공멸하는 법이다. 정부가 신임 경찰국장으로 노동운동 프락치 출신으로 특채된 의혹이 있는 인물을 발탁했다. 그가 과거 무슨 짓을 얼마나 했는지는 공직 수행에 앞선 필수 검증대상이 돼야 한다. 검찰개혁을 철썩 같이 믿게 하고 검찰총장에 임명된 뒤에는 그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던진 윤석열 대통령의 선례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고위 공직자의 공적 마인드는 전체 공직사회의 기준이 된다.

김형배 전 한겨레 논설위원 /경기신문 2022.08.11

 

[변절의 추학1] 철통경호 속에서 피값을 치른 바이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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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절의 추학2] 변절자 처단자로부터 변절자로 된 꾸순장 | 2016/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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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절의 추학3] 지조가 기생보다도 못했던 최고영도자 샹중파 2016/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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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절의 추학4] 추접하기 그지없으나 천수를 누린 꿍추 201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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