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촌 이구영 선생의 영전에 통곡하며
북한공작원 출신으로 22년 간 복역했던 장기수 출신의 한학자 노촌(老村) 이구영(李九榮) 선생이 지난 20일 향년 86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신영복 성공회대 명예교수의 '옥중 스승'이었던 노촌 선생은 1980년 출소 후 '이문학회(以文學會)'라는 한학 관련 모임을 만들어 후학양성과 작품활동에 힘써왔다. 시인 신경림, 한명숙 국무총리의 남편인 박성준 성공회대 교수, 성균관대 김명호 교수, 문우서림 김영복 대표, 가수 박치음 등이 그의 제자다.
노촌 선생의 제자인 김명호 교수의 추도사를 싣는다. <편집자>
<추도사> "탁류 속에서도 올곧은 선비정신 지켜"
원로 한학자이자 한말 의병사 연구가이신 노촌(老村) 이구영(李九榮) 선생께서 지난 20일 별세하셨습니다. 일부 언론에 '북 공작원 출신 장기수 한학자'로 소개되고,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저자 신영복 교수의 옥중 스승으로 세간에 알려진 바로 그 분이십니다.
아아, 노촌 선생님! 이제 저희들 곁을 정말 떠나시는 겁니까. 외유내강의 강인한 의지로 그동안 병마와의 싸움에서도 몇 번이나 기적적으로 회생하신 선생님이셨기에, 며칠 전 중환자실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시던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볼 적에도 또 한 번의 기적을 믿는 마음 아주 없지 않았는데, 이는 결국 불초제자의 어리석은 희망이었을 뿐입니다.
한국현대사의 거센 탁류 속에서 파란만장했던 팔십여 년 세월을 올곧은 선비정신으로 끝까지 꿋꿋하고 깨끗하게 살아내신 선생님께 충심으로 깊은 존경을 바치며 삼가 영전에 통곡하옵니다.
선생님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 지금은 충주댐으로 수몰지구가 되고만 충북 제천의 산골 마을에서 명문 양반가의 후손으로 태어나셨지요. 남한강의 지류와 월악산의 한 자락이 만나는 선생님의 아름다운 고향은 한말 의병항쟁의 한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선생님은 고향을 각별히 사랑하여 아호도 고향마을 이름을 따서 노촌이라 지으셨지요.
생전에 신영복 교수와의 대담에서 술회하셨듯이 '<시전(詩傳)>과 육혈포'야말로 선생님의 삶을 집약한 상징물이라 하겠습니다. 일찍이 선생님의 선친께서는 두꺼운 <시전>의 책 가운데를 도려내고 그 속에 육혈포를 감추어서 만주로 퇴각한 의병부대에 보내셨다지요. 사서삼경의 하나인 <시경>에 주자의 해설을 붙인 책 '<시전>'이 곧 양반 출신으로 한학을 독실하게 수학하신 선생님의 유학자로서의 일면을 상징한다면, 그 속에 간직한 '육혈포'는 의병항쟁에 헌신한 선친과 작은아버님의 뒤를 이어 항일운동과 통일운동에 떨쳐나섰던 운동가로서 선생님의 실천적인 삶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유학자요 '의병의 후손'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살고자 선비정신으로 당대의 사회운동에 투신한 것이 아니셨습니까.
생전에 선생님은 "그 시대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으로 정직하게 받아들이는 자세"가 당신의 사상적 중심이었노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러한 말씀대로 평생을 살다 가신 선생님의 기구한 인생 역정은 <역사는 남북을 묻지 않는다>는 선생님의 자서전에 소상히 밝혀져 있으니 다시 무얼 덧붙이겠습니까. 아무쪼록 이 책이 잊히지 않고 한국현대사의 소중한 증언으로서 두고두고 널리 읽히길 바랄 따름입니다.
1980년 선생님은 장장 22년의 옥살이를 마치고, 한학을 연구하던 '인생의 원점'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옥중에서 필생의 과제로서 착수했던 한말 제천 지방의 의병 사적 정리를 마무리하는 한편, 한학 연구모임인 이문학회(以文學會)를 결성하여 오늘날까지 열성적으로 이끌어 오셨지요. 선생님께서 편역하신 <호서의병사적(湖西義兵事蹟)>은 한말 의병사 연구에 결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문헌이 되었고, 이와 같이 의병사 연구에 크게 기여한 공로로 선생님은 1998년 제천시 문화상을 수상하셨지요. 그리고 독립기념관에 의병 관련 자료를 기증한 데 이어 다시 제천시에도 무려 6천여 점의 귀중한 자료를 기증하시어, 금년 7월 제천시 장락동에 성대하게 건립된 의병도서관에 소장되기에 이르지 않았습니까.
'글로써 벗을 모으고 벗으로써 어짊을 돕는다'는 <논어>의 한 구절에서 이름을 따온 이문학회는 선생님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이문학회는 나날이 발전하여 2000년대 들어 서울 종로구 낙원동의 고택에 새 둥지를 마련한 뒤부터는 매주 두 차례 강독회를 열고 매월 학회지도 발간하며, 예술인들을 초청하여 공연 마당을 열기도 하는 등으로 더욱 활기찬 활동을 벌여 왔지요. 그리고 2004년에는 선생님의 한시와 산문을 모은 문집이 <찬 겨울 매화 향기에 마음을 씻고>란 제목으로 출간되었고, 작년 5월에는 선생님의 글씨를 모은 서예전도 인사동의 한 갤러리에서 성황리에 개최되었지요.
아아, 그러나 노촌 선생님! 기어코 선생님과 영결할 순간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선생님을 모신 영구에는 신영복 교수가 손수 쓴 명정이 덮였습니다. 선생님의 단아하신 모습, 해맑고 천진하신 미소, 조용조용 말씀하시던 음성을 다시 어디서 뵙고 어디서 들을 수 있겠습니까. 장차 '국내 최초의 한문대학'을 창설하려던 원대한 포부는 이루지 못하셨지만, 선생님을 진심으로 사모하는 제자들에 의해 이문학회는 굳게 지속되고 발전할 것입니다. 분단으로 인해 끝내 만나지 못한 북의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과 책임감도 부디 잊으시고, 천민자본주의에 찌든 추악한 인간들로 인해 받으셨던 고통에서도 놓여나서 편히 잠드소서.
김명호 성균관대 교수 | 프레시안 2006.10.22.
역사는 남북을 묻지 않는다 심지연 저 | 소나무 | 2001년 04월
1948년 대전에서 출생하여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서강대학교 대학원 정치외교학과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동아일보사 기자와 한국정당학회 회장(2001~2002년),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2003년), 한국정치학회 회장(2004년)을 역임하고 1982년부터 경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한국민주당연구 1, 2』, 『조선신민당연구』, 『인민당연구』, 『허헌연구』, 『김두봉연구』, 『미소공동위원회연구』 등이 있다.
목차
1. 삶을 돌아보며
2. 의병의 후손
3. 암수바위굴에서 놀던 어린 시절
4. 상경
5. 해방 전 활동
6. 해방 후의 조직활동
7. 전쟁이 일어나고
8. 험난했던 후퇴길
9. 제34호 병원과 회복대학교
10. 중앙당의 소환
11. 특수교육
12. 서울, 좌절된 월북
13. 22년간의 감옥생활
14. 다시 원점에서 서서
출판사 리뷰
역사라는 긴 시간의 눈으로 볼 때, 남북 분단의 한국 현대사는 어떻게 기록될 것인가? 더 나아가 그 안에서 치열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실존적인 개인들의 삶은 어떻게 평가될 것인가? 역사는 과연 어떤 삶이 정당했고 어떤 삶이 비겁했다고 기록할 것인가? 아니면 남의 편에 섰든 북의 편에 섰든 가리지 않고 그들 삶의 진실성만을 평가할 것인가?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온 몸으로 살아낸 노촌 이구영
여기 그러한 질문에 답할 만한 역경의 80년 삶이 있다. 신간 {역사는 남북을 묻지 않는다}는 그 삶의 궤적을 좇아가는 숨가쁜 여정이다.
충청도 땅에서는 이름만 대면 다 알아주는 양반의 후손이자 의병의 후예로 태어난 이구영. 그는 철저한 유학 교육과 반일 의식을 이어받은 유생의 마지막 세대였다. 열여섯에 결혼을 한 이구영은 같은 해 처음으로 상경 길에 오른다. 그러나 서울에 살던 친척들이 만나자마자 그를 이발소에 데려가 상투를 자르게 할 정도로 구식이었다. 완고한 유학자이신 아버님에게 죄를 지었다는 생각으로 그는 한동안 고향에 내려갈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순박한 청년 선비였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의 조류는 거스르기 어려운 힘이었다. 어쩌면 유유자적한 은둔자의 삶을 살았을지도 모를 그가 격동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것은 그 거스를 수 없는 시대 조류의 힘이라고밖에는 달리 표현할 수가 없다. 서울로 유학 온 그는 자연스레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게 되었고, 오히려 그 속에서 유학에서 추구하는 대동大同 세상에 이르는 현실적인 통로를 발견하게 된다. 그에게 유학은 죽어 있는 훈고학이 아니라 살아 숨쉬면서 늘 새로운 피를 수혈 받기 원하는 이상주의 그 자체였던 것이다.그는 철저하고 활동적인 사회주의 실천가가 되었고 독서회 사건으로 일제의 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받다가 일년만에 반죽음이 되어 나온다. 이러한 형무소와의 악연은 그의 인생에 유달리 자주 그리고 길게 등장한다.
이구영은 1980년 5월 가석방으로 출소 했다. 열일곱 나이에 부부연을 맺은 후 남편은 월북과 남파공작원 체포, 옥바라지로 한 세상을 보냈다. 북에 다른 부인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도 원망하지 않았다. ... 오랜세월 간첩의 딸이라는 멍에를 져야했던 딸도 이제는 아버지를 이해한다. 북에서 내려온지 ... 이구영은 북에 있는 가족의 생사를 전혀알 수 없었다.
언제 어디서 북쪽의 가족들을 만날 줄 몰라 늘 금반지 하나를 끼고 있다는 이구영. 그의 반지는 이구읭의 마지막 소원을 상징한다.
해방이 되자 이십대 중반의 청년 이구영은 새 조국 건설에 온갖 정열을 기울인다. 동지들과 삐라를 제작하고, 조직 활동을 벌이고, 가문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중 선동에 나서는 등 물을 만난 고기처럼 난생 처음 빛나는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황금 시대는 너무나 짧았다. 몽양 여운형, 백범 김구, 박헌영 등 당파를 초월하여 건국 구상을 함께 나눌 만큼 열린 그였지만 빨치산 사건으로 이제는 대한민국의 적이 되어 다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된 것이다. 이 때 그를 고문했던 형사는 그의 인생에 악연 중의 악연으로 다시 등장한다.
한국 전쟁이 터지자 그에게 남겨진 유일한 선택은 가족과 헤어져 홀홀 단신 북쪽으로 향하는 것뿐이었다. 무수한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살아남자 그 앞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사회주의 시대가 펼쳐져 있었다. 나름대로 북한의 발전을 위해 열심히 일하던 그는 새로 결혼도 하고 어느 정도 북한에서의 생활에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 즈음 중앙당의 호출을 받게 된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간첩을 해!"라는 의혹의 소리를 지금도 자주 들을 만큼 어울리지 않는 명령이었지만, 그는 당의 명령에 순종하게 된다. 혹독한 남파 공작 훈련을 마치고 드디어 남파 공작원으로 서울 땅을 밟았지만, 그의 간첩 생활은 참으로 짧았다. 남파 두 달만에 남녘 항구 부산을 헤매다 역 앞에서 우연히 10년 전 그를 고문했던 형사의 눈에 띄어 붙잡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22년간의 옥살이. 전향 공작과 고문, 중구금으로 점철된 피눈물나는 옥살이는 이제 일반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그는 그 살벌한 감옥에서도 자신의 가문이 소장하고 있던 호서湖西 의병들의 활약상을 번역 정리하는 등 선비로서의 자세를 잃지 않았다. 이러한 생활 태도는 폭압적인 정권에 의해 구금된 양심수들에게 감화를 주어 이른바 감옥 제자들이 생기게 된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이 책을 쓴 심지연 교수와 대담을 한 신영복 교수이다.
스승의 날에 삶의 스승께 바치는 책
감옥에서 나온 후 선생은 이문학회以文學會를 설립하고 한문 및 전통 교육에 전념하여 많은 제자들을 키워오셨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이문학회의 제자들을 비롯해 많은 성원과 지지가 있었다. 80세를 맞는 노 스승에게 스승의 날을 맞아 제자들이 바치는 이 책은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고스란히 자신의 삶에 새겨 놓은 스승에 대한 존경의 표시다. 또한 남과 북에 따라, 정치적 입장의 차이에 따라 선생의 삶은 다르게 평가할 수밖에 없겠지만, 과연 역사는 그리고 우리 동시대인들은 그 삶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서 진정으로 얻고자 하는 목적은 오직 하나이다.
이 시대를 온몸으로 살아온 노촌 이구영 선생의 ― 오랜 꿈에서 깨지 못하던 조선 봉건 시대, 굴욕에 찬 일제 식민지 시대, 새로운 희망으로 용트림하던 해방 후 건국 시대, 광포한 전쟁 시대를 거쳐 잠시 동안의 안정기였던 사회주의 시대, 그리고 끝없는 어둠의 세월인 22년간의 옥살이. 마침내 세계화된 자본주의 시대를 횡단하고 있는 ― 삶을 우리들은 어떻게 평가하고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바로 이 물음에 대한 답이 모든 독자들에게서 얻고자 하는 바이다.
추천평
이 책에서 술회하시는 노촌 선생님의 이야기는 역사를 과거의 화석 같은 존재로부터 깨워서 피가 통하고 숨결이 이는 살아 있는 실체로 복원하고 생환하게 한다. 이러한 복원과 생환이 진실로 역사를 배우기보다 역사에서 배우는 자세일 것이다. 역사를 생환하고 역사에서 배운다는 것은 그 시절을 정직하게 맞서서 걸어간 사람들의 이야기로 그 시절이 채워질 때 비로소 가능하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노촌 선생님이 이 책으로 여러 사람들과 만나게 되는 것이 참으로 잘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여러 사람들의 생각을 열어 저마다 역사를 생환하도록 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신영복
책 속으로
그 당시는 나라 안 전체가 기쁨에 들뜨고 흥분으로 들끓는 분위기였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그 동안 일제로부터 갖은 압박을 다 받아 오다가 드디어 해방이 되었으니 누군들 무덤덤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 분위기 속에서 새롭게 뜻을 펼치려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그것은 비단 좌익이나 우익뿐만이 아니었다. 그 동안 산 속에서 지내던 도사라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는데 몇백 명씩 산에서 내려오기도 했다.
이복영이라고 하는, 나보다 20년이나 위인 사촌이 한분 계셨는데 그분은 나를 많이 돌보아 주셨다. 그분은 일제시대 미두회사 사장인 김익동의 초청으로 인천에 가 있으면서, 그곳에서 서몽암과 가깝게 지냈다. 서몽암은 당시 우리 나라에서 관상이나 점,사주 등에서 제일인자라는 소문이 나 있던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사촌에게서 들었던 모양인지 우리 집을 한번 다녀갔다.--- p.118
1958년 7월 북에서 내려온 나는 그해 9월 체포된 후 22년이라는 세월을 감옥에서 보냈다. 그리고 1980년 5월 가석방으로 출소하여 또 이렇게 2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지금 21세기를 맞이하면서 돌이켜보니 세월은 참으로 유수와 같아서 지나온 시간들이 모두 꿈 속의 일들처럼 느껴진다. 그 숱한 사연들이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던가 도무지 믿기질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은 엄연한 현실이었고 또한 우리 나라가 겪지 않을 수 없었던 냉엄한 역사였다.
나는 부유한 양반집의 9대 종손으로 1920년 태어났다. 귀한 집의 귀한 아들로 태어난 나는 세상에 부러울 것 없는 아이였지만 우리 민족의 현실은 나를 그냥 그 품에서 곱게 자라도록 두지를 않았다. 1920년대는 조선 봉건 사회의 어두운 면들이 쌓이고 쌓여 이 나라의 민중들이 숨쉬기조차 버거운 시절이었는데다가,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까지 더해져 온 국민이 고통 속에서 신음하던 시기였다.
일제와 타협하지 않고 당신 나름의 방법으로 지조를 굳게 지키면서 한 평생을 살아내신 아버님. 풍찬노숙, 얼어붙은 이 산하와 만주벌을 누비며 일제의 총칼에 맞서 싸우다가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작은아버님. 이분들의 삶은 내 인생의 가장 가까운 곳에 세워진 분명한 좌표가 되었다.--- p.25
찬 겨울 매화 향기에 마음을 씻고 이구영 저 | 바움 | 2004년 05월
이구영 1920년 3월24일 충북 제천에서 출생하여 6세부터 한문공부를 시작하였다. 영창학교에 입학하여 3년만에 졸업하였고 황한의학원에 입했고, 합천독서회 사건으로 1년간 수형생활을했다. 동양의학전문학교에서 강사생활을 했고 1950년 9월에 북으로 넘어갔다가 1958년 7월에 남으로 내려왔다 9월에 부산에서 체포되었다. 1980년 5월에 가석방으로 출소하여 1984년 '이문학회'를 창설 했다.
저서 및 역서로는 『역사는 남북을 묻지 않는다』, 『李康秊先生文集』, 『湖西義兵事蹟』 등이 있다.
출판사 서평
실천가로서 쓴 한시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변화하는 사회와 생활이 담겨 있다
신영복 교수의 감옥 동기이자 스승인 한학자 노촌 이구영 선생이 개인문집을 냈다. 그동안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자료들을 그가 이끄는 ‘이문학회’의 제자들이 모아서 책으로 내게 된 것이다. 이 책에는 평소 사회를 바라보며 느꼈던 단상을 적은 산문 32편과 한시 150여 수 정도가 실려 있다. 한시(漢詩)는 이즈음 우리의 생활과 멀어진 장르라 접할 기회도 적고 감상할 한자실력을 갖춘 사람도 드물지만 제자의 깔끔한 번역으로 문자향을 느끼는 데 별다른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젊었을 때부터 썼던 글들은 오랜 감옥생활 탓에 다 유실되고 이 문집에 실린 글은 감옥에서 나와 쓴 글만 모아놓은 것이다. 평생 자신의 신념을 위해 올곧게 살아온 삶이 글 속에 녹아 있다. 그래서 노촌의 한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고답적이고 격식에 얽매이지 않았다. 대통령 선거나 청계천 복원사업, 남북경협 등 시사적이고 격동하는 현실의 중심에 서 있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고 새겨볼 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의병운동가의 후손으로, 이 시대 마지막 선비이자 신영복 교수의 스승
장장 22년의 옥고를 치르시는 동안에도 노촌은 ?호서의병사적?을 편역하는 지난(至難)한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 책은 의암(毅庵) 유인석(柳麟錫) 장군의 종사관이었던 중부(仲父) 관의재공(寬毅齋公 : 諱 肇承)의 의병 항쟁 기록을 바탕으로 한 것인데, 방대한 분량의 희귀 자료들을 정연하게 편찬하고 완벽하게 번역해놓아 한말 의병 항쟁사 연구에 결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문헌이 되었다. 옥에서 나오신 뒤 선생은 ?호서의병사적?의 완간(完刊)에 심혈을 기울이신 한편으로, 한문 고전을 강독하는 모임인 이문학회를 결성하고 오늘날까지 후진(後進) 양성에 힘쓰고 있다. 회고록에서 술회한 대로, 40여 년 동안 다른 길을 걷다가 이제 다시 한학으로, 인생의 ‘원점(原點)’으로 돌아온 것이다.
한말(韓末) 의병 항쟁에 참여한 선친의 뒤를 이어 항일운동과 통일운동에 헌신한 노촌의 민족운동가로서의 면모는 세간에 잘 알려져 있으며, 또한 선생의 회고록 ?역사는 남북을 묻지 않는다?에도 소상히 밝혀져 있다. 그에 비해 ‘우리 시대의 마지막 선비’이자 한학의 대가(大家)인 선생의 또 다른 면모는 충분히 알려져 있지 않은 듯하다.
노촌 선생은 조선조의 유명 문인 학자들을 허다히 배출한 연안(延安) 이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직계 조상은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문호(文豪) 월사공(月沙公 : 諱 廷龜)이다. 월사공과 그의 아들 백주공(白洲公 : 諱 明漢), 손자 청호공(靑湖公 : 諱 一相) 삼대가 모두 문형(文衡)을 역임한 것은 조선조 오백년 역사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었다.
청년 시절 이후 노촌 선생은 격동하는 우리 민족사의 한가운데로 투신하여 온갖 고초를 겪었지만, 그러한 와중에서도 한학을 아주 놓아버리지는 않았다. 그 시절 선생이 교유한 사람들 중에는 후일 남과 북에서 학자로 대성한 사람들도 있다. 우리 한문학계(漢文學界)의 태두(泰斗)로서 몇 년 전 작고한 연민(淵民) 이가원(李家源) 선생과는 일제 말에 명륜학원(明倫學院)에서 수학하던 무렵부터 친교를 맺었으며, 해방 직후에는 한문 고전을 번역하여 우리 역사의 대중화에 기여하고자 결성한 사서연역회(史書衍譯會)에서 함께 활동하기도 했다.
벽초 홍명희의 영향으로 신학문의 길에 들어서
‘파란만장’, 노촌 이구영의 삶을 표현하는 데 이보다 적절한 단어는 없을 것이다. 대도로 한학을 하는 양반가의 자식으로 태어나 유학을 공부했지만 홍명희의 영향으로 더 넓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신학문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때의 많은 지식인이 그렇듯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게 되고 ‘모두가 고르게 잘 사는 세상’에 대한 이상을 삶의 커다란 지표로 삼았다. 노촌 선생과 감옥 동기이자 한학의 제자인 신영복 교수도 노촌 선생이야말로 진정한 선비라 일컬은 바 있다. 의를 지키고 나라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릴 줄 알았던 조선 의병의 후손다운 삶을 살아왔다.
선생은 여러모로 벽초 선생과 흡사한 삶을 살았다. 둘 다 명문 양반가에서 태어났음에도, 안온한 삶을 거부하고 민족운동의 외길을 걸었다. 벽초 선생이 부친 홍범식(洪範植) 선생의 순국(殉國)을 계기로 그 같은 험난한 길로 나섰듯이, 노촌 선생 역시 “의병의 후손으로 그 핏줄을 이어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매진하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전통적인 한학의 세계로부터 근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사상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사상을 혁신해나간 점에서도 두 삶은 일치한다. 또한 두 분은 모두 문학과 학문에 남다른 재능을 타고났음에도, 그 재능을 애석하게도 한껏 발휘하지 못하였다. 벽초 선생은 민족의 고전 ?임꺽정?을 남겼으나, 만년에 “좋은 시대에 났었던들 나도 문학에 전심할 수 있었을 것을, 나라도 없는 놈이 어느 하가(何暇)에 문학을 골똘히 할 수도 없고 해서 못하고 말았”다고 술회한 바 있다. 노촌 선생 또한 청년 시절 문학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실제로 시를 짓는 것을 즐겼다.
노촌 선생의 문집 간행은 문하생들만의 경사일 수 없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남과 더불어 살고자 원하는 이들에게 선생의 시문(詩文)들은 깊은 울림을 줄 것이다.
早朝端坐暫眉敍 조조단좌잠미서
有志無成一老余 유지무성일노여
이른 아침 단정히 앉아 잠시 돌이켜보니
품은 뜻 이룬 바 없이 어느듯 늙은이 되었네
책 속으로
보이는 것만 보려하고 말하는 것만 들으려 하는 순진무구함에 기대어 나의 안위를 꾀했던 그 시절이 죄송할 따름이다. 백 선생이 나를 대하는 경계심 없는 태도와 순수함 덕분에 오늘의 관계를 이를 수 있었다.
그녀가 누구를 미워하고 남의 허물을 탓하는 것을 한 번도 들을 적이 없다. 그녀의 부군은 유명한 '바위고개' 작사자인 이서향 씨다. 극작가이면서 신극을 하던 첨단문화인이었던 그가 다른 여인과 이북으로 갔는데도 미움이나 원망의 감정이 없다. 그로 인해 백선생의 사회활동에 적잖은 불이익이 있었음에도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지 않았다. 신앙심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타고난 천성이 부드럽고 긍정적이기 때문이리라. 언제나 책임을 자신의 부족함으로 돌렸고 늘 감사하는 평온한 마음으로 세상을 아름답게만 본다.
나보다 몇 살 위지만 그녀는 아직도 내일을 꿈꾸며 바쁘게 사는 사람이다. 들고 다니는 가방이 항상 셋 정도는 된다. 그 속에는 없는 것이 없어 어릴 적 방물방수의 보따리를 연상케 한다. 책과 원고, 신문 스크랩, 메모철은 그분답다 하겠으나 하찮은 일용품, 옷가지, 사탕, 과자, 떡 무게가 만만찮다. 그 가방을 들고 불우한 아이들, 노인, 이웃을 찾아 분주히 다닌다.---p. 481
“내 평생 신앙이라곤 가져본 일이 없다.” 이 무신론자에게 천국의 기쁨을 전한 이가 있었다. 노촌은 그 전도자를 이렇게 설명한다.
“자신을 위해서는 과일 하나 사는 것도 주저하는 사람이 형무소 수인을 위해 매달 돈을 보내고 겨울이 되면 털양말을 차입하기 위해 동대문시장을 찾아 헤맨다. 주위에서 아무리 성화를 대도 생활의 고단함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눔의 철학을 실천한다. …그는 기도회가 있을 때마다 나를 인도하려고 무진 애를 쓴다. …나의 무반응에도 불구하고 나를 좋은 곳으로 인도하려는 그의 노력은 그칠 줄 모른다.”
백란영은 경기고녀와 이화여전 영문과를 졸업했다. 학창 시절 그의 영적 아버지는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1889~1970·독립운동가)였다. 스코필드가 노구에도 한국인을 위해 헌신하는 것을 보고 왜 편히 사시지 않느냐고 물었다. “내가 죽어 하늘나라 가면 ‘어찌 너만 편히 살다 왔느냐’ 하실 것 같아 한국 사람들과 살고 있지”라고 답했다. 백란영은 숙명여고 교사 시절 노벨문학상 수상자 펄 벅의 통역을 맡기도 했다.
노촌과는 어머니 때문에 이어져 남매처럼 살았다. 부모 없는 아이를 거둔 어머니가 해방 후 미군이 설립한 제천 보육시설에서 키웠는데 이때 장사를 하며 노촌 집안과 연을 맺은 것이다. 어느 날 백란영은 ‘남자 사람 친구’ 노촌을 북한산성의 손양원 목사(순교자) 집회에 참석시켰다. 일주일 철야기도였다. 노촌의 회고. “…구원받으려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설교와 기도는 내게 낯설었고…졸다 깨다를 반복했다. 백 선생은 어이없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백 선생의 끝 없는 신뢰에 가장 큰 빚을 진 사람이 나였다…기회 있을 때마다 나를 인도하려고 무진 애를 쓰셨다.” 서로가 단 한 번의 실례가 없었다.(국민일보 2020.12.28 전정희 논설위원 )
대장부란 변방에서 죽어 말가죽에 싸여 돌아와야 한다"
노촌 이구영, 그는 누구인가? 남파공작원 출신의 장기수인가? 우리 시대 마지막선비인가? 우리는 그를 무엇으로 불러야 하는가? 간첩죄로 22년 만에 감옥을 나왔지만 고향에 가서야 출옥이 실감나게 다가왔다. 전기가 들어오고 라디오 텔레비전이 보급되었다는 게 제일 신기했고, 고향산천을 다시 바라보게 된 것이 제일 기뻤다.
집안은 3대 대제학과 부자 대제학을 배출한 바 있기에 자연 사서삼경을 통달하고 이를 실천하는 선조들이 많았지만 그 체화된 선비정신이란 인의예지일 것이었고, 그 모두는 수신지침이었기에 '의(義)'라 해서 불의를 참지 말라보다 자기 잘못을 광구(匡求)하잔 강조였다.
남아가 죽을지언정 불의에 굽혀서는 안 된다(不可以不義屈), 선비는 천하의 근심을 먼저 근심한다(先天下之憂而憂) 등이 선비의 덕목으론 거론되기는 하지만, 꼭 궁행(躬行)이 권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일제 침략을 당하여 우리 집안 어른들이 다수 의병에 가담하여 간고한 세월을 보내게 된 일은 자랑이라면 자랑이고 불가사의라면 또 그렇기도 하려니와, 그러나 자연 왜놈이라면 치를 떠는 집안 분위기에서 나는 처음부터 학교와는 거리가 먼 사서삼경이었다.
3.1 운동 이듬해에 태어난 내가 열여섯에 결혼하고 상투에 갓을 쓴 채 두루마기를 휘날리며 처음 서울 구경을 왔다. 허나 오히려 큰 구경거리가 됐었다. 다시 내려가 2 년 동안 한문을 배우다가 우연치 않게 학교 선생을 만나 세상 물정 돌아가는 얘기를 자세히 듣고 부모 몰래 상경하여 YMCA 중등반에 입학한다. 민족이 처한 현실에 눈뜨면서 자연 피 끓는 청년들과 교유하게 되었고, 또 우연치 않게 접한 '인류사회 발전사'를 통해서 사회주의에 심취하게 된다.
동지들과 어울려 당 외곽에서 공작원으로 활동하다 해방을 맞는다. 탄압이 심해지자 공작을 중단하고 한의학원 설립을 지원하면서 연구에 몰두한다. 6·25가 터지자 다시 세상 만난 듯 신바람을 일으키다 월북하게 된다. 그리고는 38세, 당명에 의하여 남파된다. 북에도 처자가 있는 현실. 아내가 울고 특히 노모가 눈물로 간청할 때 가슴은 찢어졌으나 전향은 어려웠다.
꼭 명문이어서 망국의 치욕을 견딜 수 없었을까. 아니면 덕행의 서목(庶目)이었던 의사(義死)가 때를 만나 분출(憤出)하는 것일까. 또 아니면 의병이 그리 봉기(蜂起)하고, 군자금 심지어는 수천 억 재산을 팔아 무관학교를 세웠겠는가. 또 아니면 양명학을 눈치 챈 경주이씨요 진화론에 빠져든 고성이씨가 일냈단 말인가. 항일을 숙명이라 했지만 학자의 길이 내 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보다 더 보장된 부귀영화를 포기한 인사가 어디 한둘인가.
그러나 일을 해가다 보면 결코 사람은 집안의 내력이나 외관만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당로자의 투지가 얼마나 강한지를 살피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걸 여러 번 체감하게 된다. 조상이 무얼 했는지 형제가 무얼 하는지는 그저 참고일 뿐이었다. 단순히 식민지 청년들의 고민을 나누는 선에서 출발하여 독립운동에 뛰어든 이래 어느 듯 속셈은 사회주의로 달렸지만 출발선에서 보여준 동지들의 강한 의지가 끝까지 동행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 노촌(老村) 이구영(李九榮, 1920년 ~ 2006년 10월 20일) 선생. 2004년 7월 9일에 방송된 KBS <인물현대사> '찬 겨울 매화향기에 마음을 씻고' 중 한 장면.
가야만 하는 길(노촌 자서전, 269~271쪽, 1998)
출옥을 한 뒤로 어느덧 18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나는 지금 집사람과 둘째 딸, 그리고 손자 손녀들과 함께 살고 있다. 두 딸에게서 난 일곱 명의 손자 손녀들도 벌써 이십대의 젊은이들이 되었다. 이 정도면 그래도 복 받은 사람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꽃피고 새가 운다고 해도 마음 한 구석이 시린 것은 여전하다. 남쪽에 있는 가족들과 서로 간에 따뜻한 정을 느끼며 오순도순 살면 살수록 북에 있는 가족들에 대한 생각도 간절해진다.
내가 남으로 내려올 때 북에 두고 온 아들은 네 살, 딸은 갓난아기였다. 감옥에 들어간 뒤 처음 한 10년 동안은 거의 날마다 그 쪽 가족들을 생가하다시피 했다. 꿈에도 많이 나타났다. 북에 있는 아내에게 잘못했다는 생각과 함께 그와 비례해 나는 집사람에 대한 죄책감도 컸다. 집사람은 북에 아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대를 이을 자손이 있다고 즐거워했지만 마음의 가책은 지워지지 않았다.
지금은 북에 있는 가족들의 얼굴조차 희미하다. 일생에 두 번이나 양쪽 가족들에게 상처를 주게 되어 못할 노릇을 많이 했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이제 내가 바라는 꿈이라면 남북통일밖에 없다.
내 나이 이제 여든이 가까웠으니 살 만큼은 살았다고 생각하면서도 조금 더 살 수 있다면 하고 바란다. 돈도 명예도 어느 것 한 가지 가지지 않았었건만, 굳이 그 모진 시절에도 연연하지 않던 목숨에 욕심을 내는 것은 언제고 통일이 되는 날을 맞고 싶기 때문이다. 그날이 오면 북의 가족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버리지 않고 있다.
뒤돌아보면 굽이굽이 풍파도 심했다. 그것은 내가 유별나게 살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역사가 그만큼 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조 봉건사회, 일제 식민사회, 6.25전쟁. 남북의 이념 대립, 사회주의 사회와 22년간의 감옥살이, 그리고 지금 1990년대의 자본주의 사회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많은 일들을 겪었다. 수도 없이 죽을 고비를 넘겼고. 육체적인 고통과 함께 마음고생도 그에 못지않았다.
그렇지만 지금도 후회는 없다. 그것 때문에 인생을 버렸다거나 내 젊음을 되찾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해본 적이 없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도 모른 채 덮어놓고 돈만 벌다 가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일이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젊었을 때 좋아했던 러시아 작가 톨스토이는 부잣집 출신이면서도 진보적인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는 끝내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에 비해 같은 시대를 살았던 고리키는 정신이 깬 사람이었다. 민중과 함께 호흡했던 고리키의 정신을 나는 높이 평가한다. 그와 같은 삶을 살려고 내 나름대로는 노력했다.
지금은 무슨 '주의'니 하는 이념을 떠나서 사람은 고루 잘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그리고 세상을 안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알아야 변화도 시킬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알고, 무엇보다도 내가 남에게 죄 짓지 않고 조금이라도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데 이바지 할 수 있었다는 것이 그저 고마울 뿐이다.
얼마 전에 지하철역에 붙어 있는 글을 보게 되었다. 사람들이 읽을 만한 글들을 액자 형식으로 만들어 걸어둔 것을 우연히 읽게 된 것이다. 그 글에는 프로스트의 <눈 내리는 저녁 숲가에 서서>라는 시가 몇 구절 인용되어 있었다.
숲은 아름답고 어둡고 깊기만 한데
내겐 지켜야 할 약속이 있다
잠들기 전에 가야 할 몇 십리 길이
잠들기 전에 가야 할 몇 십리 길이….
시라는 것이 다 그렇듯이 읽는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느낌이나 생각이 다 제각각이겠지만, 그날따라 내게는 그렇게 마음에 와 닿을 수가 없었다. 시인이 본래 말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게는 그 시의 구절이 내 인생을 말해주고 있는 듯했다. 내가 지나온 길을 다시 한 번 차근차근 더듬어 보던 무렵이라 더욱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지금 앉아있는 자리가 아무리 안락할지라도, 그리고 떠나야 할 길이 아무리 춥고 어두울지라도 가야 할 길이라면 가는 것이다. 사람들 다 잠든 밤중에라도 깨어 일어나 길을 가야 하는 것이다.
내가 처음으로 세상을 알기 시작했을 때, 그리고 모든 사람이 다 함께 잘 살 수 있어야 옳은 세상이라고 믿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미 나는 스스로에게 약속을 한 셈이다. 내가 알고 느낀 만큼 세상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약속을.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지금까지 애써 온 지난날들에 대해 아무런 후회도 없다. 오히려 지금 생각해보면 가시밭길 가운데서 행복을 느꼈다고도 말할 수 있을 듯하다. 가시밭에 핀 꽃은 더 아름답고, 소중한 법이 아니겠는가.
백범 인품에 감복(노촌 자서전, 104~111쪽 요약)
노촌 선생((25세)은 1945년 말 백범 김구 선생(69세)을 찾아뵙는다. 집안 의병 내력을 말씀드리니 아주 반가워하시면서 황해도 어딘가에서 유인석 장군의 종사관이셨던 선생의 숙부님을 만난 듯하다시며, “형편이 펴이면 사당이나 기념관 정도는 꼭 해드리려는 분이야”하셨다. '정권을 쥐면' 안 하시는 것을 듣고 남달리 권력에 대한 욕심이 많지 않은 분이란 걸 느꼈다. 백범은 나를 성실한 젊은이로 받아드리시고 자주 들리라고 말씀하셨다.
산업을 발전시켜야 하기 때문에 진보적으로 살아야 할 때라 하시면서 노동문제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가지라고 하셨다. 자주 찾아오라 하시면서 여기서 열리는 토론회에도 꼭 참석하라 하신다. 다만 요즘 청년들이 잘못 나데는데 행여 그런데는 휩쓸리지는 말라하시니 가슴이 뜨끔하기도 했다. 이어서 영국같이 왕정을 하잔 얘긴 아니지만, 그렇다고 옛것을 아주 버려서는 안 된다시며 온고지신을 여러 번 강조하셨다.
알고 보면 이 박사는 당시의 인지도나 인기 면에서 대통령이 될 수 없었는데, 공산당이 백범과 한민당을 갈라놓는 바람에 어부지리를 얻은 것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백범이나 우사가 되었더라면 좋은 일을 많이 했을지도 모르지만 누가 돼도 어려운 때였다고 생각한다. 백범이 피격 당했을 때 '대장부란 변방에서 죽어 말가죽에 싸여 돌아와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정치인은 살아서 잘할 수 없으면 차라리 잘 죽는 이만 못하단 생각을 했었다.
마당쇠(필명)
가시밭에 핀 꽃은 더 아름답고, 소중한 법 아니겠는가“
0.75평 독방에 8명의 비전향수들을 몰아넣었다. 앉지도 못하고 서지도 못한 채 쓰레기처럼 구겨넣어진 자신들 모습
노촌 선생과 김구학회
인사동에 자주 들려 민주인사 양심적 지식인들과 어울리면서 노촌 선생의 한문서당(以文學會)도 알게 되었지만, 막상 선생의 자서전 <산정에 배를 매고>-노촌 이구영 선생의 살아온 이야기- 곧 '잔잔한 어조의 속 깊은 말씀 속에 묻어나는 모순과 질곡 투성이의 비극적 한국 현대사! 그 역사를 용서와 화해 그리고 사랑의 장으로 돌리려 애쓴 한학자 노촌 선생의 진솔한 이야기!'를 입수한 것은 2002년 11월 14일 선생의 단아한 모습을 뵈온 후였다.
마침 한 사람의 백범이 아니라 수십 명의 백범이라 할 만한 선생의 역정을 묶어 <김구열전>을 펴내기로 마음먹고 준비하는 중에 또 다른 <노촌일지>를 대하면서 몇 번이나 눈물을 쏟았는지 모른다.
노촌의 경교장 세미나와 산수 이종률의 증언을 토대로 김구 선생 글방이 열리고, 남북평화 협력과 자립 경제가 강조되는 가운데 백범이 부활하여 이를 건사한다. 많이들 탄압받아 구속되고 처형되고 옥사하기도 했으며, 끝내 학생들의 민주화운동으로 승화되어 오늘에 이른다. 1903년 기독교에 입문하여 청년회 대표로서 상동교회에 다녀오면서 백범이 지녀온 전통신앙은 훨씬 진화한다. 지금 백범은 유불선 삼교를 넘어 국교 창달에 여념이 없으시다.
김구학회와 백범의 부활
이 나라 백성들은 지금 십자가에 매달린 백범의 부활을 본다. 빌라도는 부귀를 위하여 백성을 죽일 수 있는 권력이지만, 예수는 사랑하기 위하여 스스로 죽을 수 있는 권력이다. 예수가 죽은 후 다시 공의로운 세상을 만들라는 명을 받으니 곧 부활이다. 여기에서 악인을 심판하고 의인을 구원하는 예수의 권능이 샘솟는다. 그러나 그 구원과 심판은 너무 멀리 있다. 의에 죽은 자를 따라 십자가를 지는 자가 적기 때문이다. 백범이 그 모범을 보인다.
백범은 양반들과 자주 싸움을 벌이는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계방(稧房-돈으로 권력자와 연줄을 맺는 것)을 만들어 가며 양반들의 천대와 억압을 피하려 했다. 창암(백범의 초명)이 동학에 입도한 것은 진주(眞主)를 모시고 빈부귀천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든다는 종지에 끌렸기 때문이다. 상놈으로 태어난 그의 원한은 골수에 사무치고 있었다. 그는 드디어 동학군의 선봉에 선다. 탐관오리와 그 배후세력인 왜놈들을 처단하기 위해서였다.
권비 토벌과 국권 회복은 그의 일관된 신조였다. 그에게 국권은 민족공동체의 생명이며, 이를 빼앗긴 것은 권비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양반들이 충신과 공신을 실컷 우려먹다가 나라를 빼앗겼는데도 부끄러움을 모른다고 질타했다. 상민들에게는 그들이 주권자로서 양반 행세를 할 수 있는 세상이 온다고 격려했다. 1903년 기독교 입문, 1905년 신민회 가입을 계기로 그의 꿈은 공화국 건설로 굳어진다.
그의 가문은 상놈이었지만 기와집이 즐비했고 선산에는 석물도 많았다. 계부 준영은 술망나니에서 깨어나 큰 재산을 모았다. 계부는 처음 교육 사업에 투신한 창수(창암의 개명)를 하나의 난봉으로 보았다. 그러나 나중에는 "네가 남에게 그렇게 존경받을 줄 몰랐다"며 크게 놀랐고, 이어서 안악사건 때는 김구의 옥바라지를 도맡아 하게 된다. 창수는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지방 부호들의 지원을 받았고, 처신 잘못으로 생기는 가난도 눈여겨보았다.
자연 그의 빈부관은 억강부약으로 굳어져 갔다. 명예는 시절에 따라 부인될 수 있지만, 부는 어떠한 경우에도 소중히 여겨져야 한다는 것이 백범의 주장이었다. 어려운 가운데 의연히 임정을 지키면서도 그는 공산당의 지나친 분파투쟁을 반대했다. 그들에게 먼저 민족공동체를 복원하는 것이 급선무요 민생의 방법은 그 다음이라 했다. 특히 백범은 국제주의를 반대하고 시류에 영합하는 사회주의 대신 우리의 국성과 민도에 맞는 제도를 원했다.
그는 백성이 굶주리지 않고 누구나 교육을 받으며 병이 나도 걱정이 없는 사회를 꿈꿨다. 그 꿈은 1934년 임정건국강령으로 채택된 조소앙의 삼균주의로 더 구체화 되었다. 또 백범은 젊어 한때 동학군을 이끌었고, 왜놈 장교 쓰지다를 타살하기도 했으나 이후로는 의병들이 적개심만 가지고 날뛰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분혈용출하는 청년들의 격발"을 만류하고 독립군의 무모한 습격도 반대했다. 인재 양성, 조직 확대, 치밀 작전 등 실력 강화를 중시했다.
"대소 권력을 쥐고 축재한 자는 권비다. 석개오는 가진 것의 반, 뺏은 것의 네 배를 물어내고야 용서를 받았다."(누가 19-2) 권력의 비호를 받은 재산은 이를 비호한 권력에 더 문제가 있다. 재산을 모으는 것은 어느 시대나 백성의 본업이기 때문이다. 공산당은 재산을 무조건 적대시하고 자산가를 모두 증오하는 것이 탈이다. 좌우합작 때도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주장했고, 또 그것이 당시의 열망이기도 했지만 결코 옳은 일은 아니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어렵다면 현실적으로 최대 다수의 최소 고통을 지향해야 한다. 그러려면 그 당로자인 공권력을 바로 세워야 한다. 먼저 권비를 몰아내고 권비가 되려는 출셋길을 차단해야 한다. 권력을 부각시켜 그 위세에 가담하려는 지식인도 출새 떼들이다. 이들이 소위 반칙문화를 조장한다. 흔히 개혁을 앞세우지만 그 개혁이 공권력 내부를 겨냥하지 않으면 또 하나의 선동이 된다. 백범은 죽어 그 헤매는 권력을 개탄하고 있는 것이다.
달아난 목신(木神)
백두산 상상봉에 나무 한 그루 솟아 있고, 그 위에 환한 신선이 휘영청 내려앉으니 박달(밝은 달)이라. 그 나무가 박달나무요 그 밑에서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할 방도를 터득한 출중한 인물이 태어나거늘, 박달(배달)겨레가 그를 상좌에 모시어 임금을 삼으니 박달임금 단군이라. 아침 저녁 밝은 나라(아사달)는 목신(檀樹神-帝王韻紀)을 모시고 장장 4200년을 견딘 끝에 이제 모든 백성을 다 살릴(다스릴) 일꾼으로 창암을 점지하기에 이른다.
창암(김구의 초명)은 처음 과거 공부를 시작했으나 설령 나랏일을 본다 하더라도 탐관오리들 틈에서 뜻을 펴기란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손을 댄 것이 천문지리서요 병서였다. 창암은 마의상서(麻衣相書), 지가서(地家書), 황석공소서, 통감, 사략을 읽으며 조선의 목신이 수천 년간 오랑캐들의 도끼질을 견뎌내며 오늘에 이른 것을 알게 된다. 비록 만신창이가 됐으나 천지의 도수가 변해서 불원간 거목으로 우뚝 서게 될 날이 온다고 내다보았다.
창암의 사상은 개벽으로 흘렀고 동학에 끌리면서 무장봉기에 앞장선다. 실패 후 안 진사(중근의 아버지)에 의지하여 고 능선의 사사를 받는다. 10년 간 광복기지를 마련할 방도를 찾다가 기독교에 입문하여 16년간 계몽활동을 펼친다. 마침내 스스로 자신의 십자가를 지라는 하나님의 명을 받고 상해로 건너가 임정을 세운다. 26년이 지나 왜놈들이 물러간 조국 땅을 밟은 백범의 가슴은 안개로 자욱했다. 역시 우려했던 대로 너도나도 감투싸움이었다.
그래도 백범은 독립 우선이었다. 점령군을 먼저 물리쳐야 한다는 생각에서 반탁을 지지했으나 오히려 단정(單政)을 세우려는 이승만에게 이용만 당했다. 소련의 지시를 받아 찬탁에 나섰던 공산당도 단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민족 분열과 상잔을 막으려는 백범의 노력은 허사로 끝났다. 백범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토해낸다.
"내가 백성의 공화국을 세우기로 마음먹은 것은 신민회에 참석하고부터였다. 황실과 친일고관들의 영화와 안녕을 보장받고 친일 인재들의 관리 등용을 허용 받는 조건으로 나라의 통치권이 완전 영구히 일본 황제에게 넘어간 직후였다. 일제를 떠받드는 새로운 사대부적 특권사회의 형성이었다. 그래서 백성의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는 사회는 백성의 힘으로 나라를 세우고, 그 백성이 나라의 주인으로 되는 길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었다.
그런데 그럴 때가 왔는데 우리 스스로 우리의 거목을 찍어내다니. 놀란 목신이 우리를 버리고 달아나지 않는가. 삼무고(食苦, 學苦, 病苦)의 동아줄로 단단히 붙들어 매어 깊숙이 뿌리내리게 하려던 내 꿈은 산산조각 났으니, 이제 살아있어 내가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시절은 나를 다시 절(寺)로 가라니 누가 있어 목신을 모셔오겠는가. 차라리 썩어 밀알이 되리라. 자살을 결심할 때마다 날 깨우셨던 하나님. 이제 그만 날 거두어 가소서."
백범은 마지막 연설에서 산적을 피하려면 떼 지어 가야 한다고 외쳤으나 이미 남북은 서로가 스스로 산적이 되어가고 있었다. 백범은 그래도 독립운동가들이 나라를 찢어 가질 만큼 욕심을 부릴 줄은 몰랐다. 백범이 떠난 후 1년도 안 되어 피비린내 나는 대살육전이 벌어졌다. 백범이 예상한 대로였다. 백범은 죽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예수님이 죽어 사랑이 넘치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듯, 나는 죽어 권력을 고난으로 짊어질 새로운 인재를 양성하리라."
조선조만 하더라도 인재들의 목표는 특권층에 진입하는 소위 출세였다. 특권의 내용이 결과적으로 수탈과 억압이었는데도 인재란 인재는 500년간이나 그리(과거제도)로 몰려갔으니, 그리고 지금도 그 물줄기가 도도하니 어느 인재가 귀족을 마다하고 자유와 평등을 백성에게 찾아주고자 험난한 길을 걷겠는가. 서양에서는 평민들이 하나님의 귀한 자녀가 되고자 이 일을 해냈으니 바로 근대화요 민주주의 아닌가.
공화국이라 해도 조선의 인재들은 곧 많이 귀족공화국을 꿈꿨다. 그래서 많은 분파와 분쟁이 있었다. 백범은 이들 모두를 임정 품에 안으려 애썼다. 그러나 해방정국에서 다시 치솟은 부와 명예욕은 백성의 공화국을 가로막았다. 빌라도의 형통과 예수의 고난을 멈추기에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은 너무 멀리 계셨다(시편 10-5). 이제 부패특권에 쓰러진 원혼들이 직접 나서서 그 권좌를 꾸짖어야 한다. 조령(祖靈)의 우렁찬 목소리로 권비를 내쳐야 한다.
백범 목신 앞에 무릎 꿇다
조선의 수호신은 박달(밝은 달)나무다. 박달 신이 내려앉았다 해서 조선족들은 그렇게 믿었고, 그래서 스스로를 박달신의 보호를 받는 박달(배달)겨레라 했다. 조선의 박달목신(檀樹神-帝王韻紀)이 주변국으로부터의 온갖 도끼질을 견뎌내고 4300년 만에 거목으로 우뚝 솟을 기회를 맞았는데 이 때를 당하여 겨레가 한마음으로 뭉치지 못하고 남북으로 갈리어 피범벅이 되도록 싸우니 목신은 크게 노하여 어디론가 행방을 감추고 만다.
김구가 뒤를 밟는다. 어디로 가셨단 말인가. 고향으로 가셨나. 그게 어딘가. 백범은 동학에 입도하기 전 역서와 사서를 통해서 조선의 수호신을 알게 되었고 왜놈들만 물러가면 국운만세라 생각했다. 10년 후 기독교를 믿게 된 김구는 바빌론의 태양신전 에사길의 위압을 벗어나 달의 도시 하란에 도착한 아브람을 읽는다. 간과주차(干戈舟車)로 중원을 통일한 황제를 버리고, 달뜨는 요하를 건너 부스랑(평양-저울대라는 뜻)에 도착한 배달족을 떠올렸다.
옛날부터 사람들은 태양을 숭배하고 혹은 달을 사랑했다. 태양은 권력과 군림을 상징하고 달은 자유와 평화를 사랑한다. 권력을 휘두르는 자는 오늘 존경을 받을지라도 내일 반드시 조롱당할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박달가와 아브람 가는 달을 따라 나섰다. 배달족이 정착한 곳은 송화 강가 아사달이며, 아브라함이 정착한 곳은 가나안 땅 헤블론이었다. 아사달 아득한 거목 위로 박달신이 내려앉고, 헤브론 상수리나무에 사랑신 아쉬타르테가 둥지를 틀었다.
김구가 먼저 찾아간 곳은 아사달이었다. 그러나 거기에 박달님은 계시지 않았다. 다음으로 부스랑을 찾았다. 거기에도 박달나무신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 계시단 말인가. 아니 거기까지 가셨단 말인가. 아틀란티스 대륙이 가라앉은 대홍수 때 용마가 그림을 지고(負圖) 나온 곳. 남북으로 미친 듯 나대던 황하가 동쪽 발해로 순순히 방향을 틀은 곳. 용문의 한성(韓城)이니 박달님이 복희씨에게 그 용마의 등그림(河圖)을 풀어 보이신 땅이다.
그러나 박달님은 한성에도 계시지 않았다. 김구는 참회의 기도를 드린다.
"제가 분단을 막기 위하여 양군 철수를 주창했지만, 해방정국을 선제하지 못하고 전란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바로 이듬해 이시영의 성재학계(省齋學稧)를 중심으로 총무 박영덕이 전선을 뚫고 최익환을 밀파하여 휴전협상을 벌였으나 쉽게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1952년 이시영을, 1956년 신익희를 평통 대통령 후보로 내세워 전쟁의 불씨를 제거하려 했으나 좌절되었습니다."
"1960년 학생 178명이 목숨을 바친 끝에 이승만이 물러나자 다시 김창숙을 중심으로 민자통(民自統)의 전열을 가다듬었으나 군사혁명이 일어나 일이 더 어렵게 되었습니다. 기약 없이 남북이 대치하고 원한과 증오의 골이 깊어 갈 조짐이 뻔한데 이를 어떻게 수습해야 하올지…." 박달님의 말씀이 멀리서 아련하게 김구의 귓전을 맴돈다. "너는 조선 백성을 다 살릴(다스릴) 적자로 점지되었음을 잊지 말라. 내 이미 지부인(地符印) 셋을 내렸다."
"곧 남한에 금영(金營)국이 서고 북한에 병영(兵營)국이 서리니, 네가 나서서 남북을 모두 민영(民營)화하라." 김구의 어깨는 천근만근으로 내려앉았다. 김구가 두려워 박달님을 연호하니 "이제는 상생의 세계라 민영화가 되면 구월산과 금강산 사이가 가운데 땅(土)이 되리라. 내가 먼저 남한에 불을 지피고(木生火) 이 불로 가운데 땅을 데운다(火生土). 가운데가 서쪽 요하로 시장을 확대하고(土生金) 다시 송화강 흑룡강으로 북진한다(金生水)."
"합방 100년, 분단 60년, 2010년에 이르러 남북협의회가 성립된다. 장차 조선이 하나 되어 북상할수록 동방의 힘은 점점 커진다(水生木). 문제는 또 일본이다. 나는 조선이 일본을 이끌고 올라갈 때까지(木生火) 동해를 떠돌며 연안국을 지켜보리라. 그 때가 되면 내 백두산에 좌정하여 참 가운데 땅(한성)을 삼으리라. 동쪽으로 일본 미국을, 서쪽으로 중원 유럽을, 남쪽으로 동남아 인도를, 북쪽으로 러시아를 평정(平正)하여 평화와 번영을 구가하리라."
김구가 깊은 잠에서 깨어나듯 일어나니 민족일보 조용수가 뒤따르고 비서 장준하가 수발을 든다. 다들 비명에 가 원혼 되어 만나니 민주·자주·통일을 외치다 쓰러진 넋이 어디 이 뿐이랴. 그 중에도 박종철이요, 이한열이요, 강경대가 꽃다운 나이에 맞아죽으니 피어나지 못한 채로 떨어져간 젊음이 어찌 천추 한을 품지 않겠는가. 이제 그 민주화운동이 시민운동으로 대하되어 흐르니, 민영화가 눈에 보이는지라 백범은 서둘러 그 요원 양성에 들어간다.
2001.09.11. 미국 뉴욕의 110층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과 워싱턴의 국방부 건물에 대한 항공기 동시 다발 자살테러 사건
노촌 두 날개 달다 노촌 선생, 마이크 잡다 ③
1. 구로정
--기중난 영감의 텃밭은 탑골공원이었다. 탑골공원이 완전 보수에 들어 간 후 신변잡담이나 무용담을 즐기는 패들 그리고 옛날 얘기를 그럴듯하게 꾸며대는 축들은 가까운 종묘공원으로 옮겨갔으나 나라를 걱정하고 정치의 잘잘못을 따지는 영감들은 뿔뿔이 헤어졌다. 더 이상 애국이니 정치니 하는 넋두리가 먹혀들지 않고 공소하게 들릴 정도로 세태는 변해가고 있었다.
--젊을 때 기중난은 이승만 독재와 북진통일에 반대하고 나섰다. 5·16이 나자 민족적 민주주의에 희망을 걸고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짜는 데 뛰어들었으나 역시 독재는 부패하고 있었고, 군사문화적 외형 성장은 안으로 인권 탄압과 자유창의 말살, 밖으로 외채 누증과 경제 종속을 강화함으로서 국민경제를 끝없는 차입 경영과 고비용 저효율의 나락으로 몰고 갔다.
--나라 전체가 물량 성장의 허구성에 빠져드는데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한국 지성은 박수를 치며 자기들의 명예, 자기들의 소득, 자기들의 일자리를 높이고자 허질러 다녔다. 나라의 백년대계는 고사하고 경제의 초석을 이루는 국민들의 총체적 삶은 황폐화되었다. 공동체는 무너지고 공동체를 가꾸겠다는 의욕은 어디에서도 찾기 힘들게 되었다.
중년 기중난은 감연히 직장을 버리고 탑골을 찾았다. 그는 영국의 하이드 팍을 생각했다. 한 10년을 떠들고 나면 무엇인가 손에 잡힐 역사가 만들어지지 않겠는가. 주로 민주화요 자유화요 기술화였다. 그러나 80년의 신군부는 그 희망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또 다른 10년이 더 무거운 억압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문민시대. 그러나 모든 것이 부정부패와 전례 답습에 젖어 있었고, 모든 지성은 문민시대의 청사진을 내놓을 수 없는 자폐증에 걸려 있었다.
노년 기중난은 실의에 빠졌다. 예상했던 대로 환란이 왔다. 그러나 김 도령의 대중경제론은 무용지물이었다. 오히려 대중의 밥줄을 끊는데 앞장서야 했다. 그랬어도 부정부패만 척결했으면 중간이나 갔다. 그러나 대통령은 부정부패의 실체를 잘 몰랐고, 논공행상이 부정부패와 맥락을 같이 한다는 인식은 더 없었다. 자기들이 해야 할 정치개혁을 뒤로하고, 애꿎게 독선 부패관료가 내놓은 행정 개혁에만 매달렸으니 성공할 수 있겠는가.
기중난 영감은 생각했다. 이 나라 지도자들의 인생 설계가 바뀌지 않는다면, 이제 농업의 파탄 속에 수많은 실업자가 땅을 칠 것이고 우리의 공동체는 결국 선진에서 탈락할 것이다. 새로운 지도자를 키워야 한다. 조선의 명예와 재산을 몽땅 팔아 무관학교를 세운 이회영·이상룡 선생과 오로지 기개와 적성(赤誠)으로 나라를 세워 스스로 그 청소부가 되려 했던 김구 선생 그리고 그 세 분의 총체적 상징인 상해임시정부의 건국이념을 본받을 새로운 인재를…….
기영감은 탑골이 일시 폐쇄된 후 주유천하를 결심했다. 500년 조선사를 되씹어 보는 300일 장정이었다. 그는 절망하며 기도하며 깨달으며 태백산맥을 훑어내려 갔다. 기영감이 지령(地靈)에 이끌리어 명산대천을 섭렵할 때 조선 풍수의 모든 기운이 어디론가 몰려가는 것을 보고 그 맥을 따라가 보니 천진암이었다. 용두호미(龍頭虎尾) 천진암에 이르러 온 정기가 뭉쳤으니, 황운(皇運) 승붕(乘鳳)에 단학(丹鶴) 비상(飛翔)이 이 아닌가.
기영감이 꿇어앉아 큰절을 올린다. 서둘러 내려온 기영감은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구로정에 올랐다. 예부터 늙은이들이 모여 나라 걱정을 한 곳이다. 탑골의 정치 영감들이 이곳으로 많이 옮겨 와 있었다. 그러나 다들 여전히 고집불통이었다. 기영감은 결심했다. 먼저 오는 3월 1일에 조선조를 이끌어 온 가짜 군자들, 아직도 한국을 이끄는 이들 군자들을 단죄하리라. 이들을 양산한 군자론을 불사르고 제2독립을 선언을 할 것이다.
기중난 영감이 조선조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나라 집을 새로 지을 지위들과 함께 천진 계곡을 오를 때 깨어난 물소리가 요란하고, 연둣빛 꽃망울이 나무 가지를 맴돌며 밝아 오고 있었다. 조선조를 망가뜨린 가짜 군자를 잡도리하고 그들이 즐겨 읽은 군자론을 불사르자, 많은 노인들이 침침한 눈물을 흘리며 야윈 주먹으로 만세를 부른 것이 어제런 듯 기 영감을 설레게 했다. 열 명이 넘는 노인들이 100일 기도를 작정하고 기 영감을 따라 나선 것이다
바로 뒤에 장인귀, 차법대 영감 그 뒤에는 안나리, 신방패, 모리천 영감, 그 뒤로는 조금복, 민운동, 한우리 영감, 또 그 뒤로는 고루주, 남사랑 영감,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구하라 영감이었다. 계곡 중턱에 이르자 멀리 천진암이 양옆으로 각선미를 뽐내며 환한 웃음으로 열두 영감을 맞이하니 벌써 영감들의 정기가 단전으로 무게를 잡으며 새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이윽고 흰 도포에 검은 뿔 관을 쓴 장정이 영감들 앞으로 나아와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그는 영감들이 천진암 굴속으로 들어갈 때까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두 손을 모아 올리며 읍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천진암 터줏대감 엄 도사였다. 영감 일행을 맞아 엄 도사는 영감들을 먼저 용소(龍沼)로 안내하여 상탕에 세수하고 중탕에 몸 담그고 하탕에 발 씻도록 했다. 새 옷을 갈아입은 열두 영감들은 천진암에 들어가 옥천(玉泉) 양옆으로 가부좌를 튼 채 좌정했다. 모두들 산란(散亂)을 버리고 선정(禪定)에 들어갔다. 엄 도사가 축문을 읽어내려 간다.
유세차 을유년 3월 1일 천진암 대주 기중난 감소고우
천지신명이시어. 조선이 국권을 일본제국에 헌납하자 500년 조선 지혜와 조선 교범의 가치도 함께 소진되었음을 깨달은 이회영·이상룡 선생은 조선의 명예와 재산을 모두 팔아 무관학교를 세웠고 한미(寒微)에서 기신한 김구는 나라를 세워 그 청소부가 되기를 다짐하였습니다. 세 분의 뜻을 받들고 오직 봉사하는 마음으로 나랏일을 맡을 새로운 인재들을 많이 점지해 주소서. 여기 뜻을 같이한 열두 늙은이가 엎드려 100일기도 드립니다.
백일기도에 들어갔던 영감들은 많은 튼실한 아들들을 기원했으나 오히려 키울 일이 더 걱정이었다. 기중난 영감의 제의에 따라 각 영감이 계자 훈 하나씩을 지어내기로 했다. 기 영감이 먼저 수범을 보였다.
새 정치는 별난 군자(君子)가 아니라 보통사람 가운데 그 중 난 사람이 맡아야 한다. 모인 중의 한 사람(one of them)이면 족하고, 그 위로 군림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좌상(座上)이나 동임(洞任)이라는 말이 예부터 있었다. 면장이 모여 군수 뽑고, 군수가 모여 도지사 뽑는 식이다. 지역의 내용을 잘 파악하고 매사를 정직하게 이끄는 사람이면 된다. 국회의원도 그렇게 뽑고, 내각수반도 그렇게 뽑으면 대충 무난한 살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인가 특권을 바라지만 않는다면 모든 것이 순리대로 풀릴 것이다. 지난 날 그 야단법석을 떨고 뽑은 정치인이 무엇을 했는가. 대기(大機)를 맡을 인재부터 잘 키워야 하네.
장인귀 영감이 나섰다. 새 나라는 장인이 귀한 나라다. 자식들을 장인으로 키워야 한다. 어느 분야에서나 전문 지식과 전문 기술을 가진 자들의 세상이 되어야 한다. 특히 첨단기술과 기능을 닦기 위해 공대(工大)를 보내야 한다.
차법대 영감이 거들었다. 옳아요 자식들이 머리가 좋다고 법대를 보내면 안 된다. 법대 출신, 유명대 출신들이 부패 특권을 쌓고 있는데 거기를 또 보낸단 말인가. 법대를 보낸 부모 교사들은 우쭐대지 말고 반성해야 한다.
안나리 영감은 한술 더 뜬다. 공무원은 종인데 주인 행세하는 녀석들은 쫓아내야 한다. 자식들을 오히려 그런 일에 앞장서도록 키워야 한다. 뇌물이나 술대접, 어떤 청탁도 배척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되는 사업은 하지도 말며, 또 그렇게는 사업을 키울 생각도 말아야 한다.
신방패 영감도 급하다. 나리뿐 아니라 한통속으로 돌아가는 신문 방송도 쳐내야 한다. 사설은 주청(主淸)인데 광고는 작탁(作濁)이요 관변에 붙어 사니 호랑이를 가장한 여우 아닌가.
모리천 영감은 그것보다 더 급한 게 있다고 한다. 모리(謀利)를 천시해야 한다. 모리는 부정부패의 온상이며 인성을 파괴한다.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짓, 공해산업, 유해식품, 전월세, 고리대금, 투기 등을 멀리하고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영리(營利)에 힘써야 한다. 이윤은 소비자의 아름다운 격려금이다. 더 좋은 제품, 더 기찬 서비스를 만드는데 써야 한다.
조금복 영감이 중요한 교훈을 준다. 복을 적게 받은 사람은 더 노력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민운동 영감은 다수의 민초들이 잘 살아야 한다. 적어도 그들의 불편(食苦, 學苦, 病苦)은 없애야 한다. 아무리 팔자가 늘어져도 늘 이 점을 명심해서 잘 늙었어도 할 일은 해야 하며 희희낙락해서는 안 된다.
한우리 영감은 북한은 오랜 동안 우리와 같은 공동체였다. 외세에 의하여 찢겨져 나간 것이다. 이제 정세도 많이 바뀌었으니 우리의 적대도 끝내야 한다. 그것은 공동체의 복원인 동시에 현실적으로는 재난에 빠진 북한을 구하는 길이다.
남사랑 영감은 역시 사랑만이 접착제라고 주장했다. 이웃을 사랑하는 자세야말로 공동체의 가장 요긴한 덕목이라는 것이다.
고루주 영감도 한 수 한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산, 지식, 기술을 골고루 나누는데서 사랑이 꽃핀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구하라 영감이다. 기도로 하루를 열고 기도로 하루를 닫아야 한다. 어렵더라도 욕심과 원망을 버릴 때 하나님이 창의력을 주신다. 최선을 다한 만큼의 보수로 살아야 하며 딴 데 한눈을 팔지 말아야 한다.
원로들은 벌써 자식들을 얻은 듯 기뻐하며 하산했다. 이제는 각 가정에 돌아가 자식들을 공권력에 덕 보거나 이를 이용할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말게 하며 나아가 부당한 권력을 고발하고 부정부패를 파헤치는 일에 앞장서도록 키우자고 다짐하면서.
--경쟁에 지더라도 의를 구하는 사람, 불의를 못 참는 사람, 희생을 감수하는 사람, 자세를 낮추는 사람, 사업을 하나님의 심부름으로 여기는 사람, 나누는 데서 기쁨을 찾는 사람--
원로들은 이미 장성한 자식들이 걱정이었다. 못된 버릇을 어찌 고칠꼬. 기중난 영감은 정치 지망생들의 봉사정신을 제일 큰 문제로 삼았다. 작건 크건 어떤 집단의 지도자는 그 집단의 이익을 실현할 수 있는 적임자라야 한다. 그런데 그 적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의 봉사정신과는 관계없이 금력·인력 선전을 동원하여 뽑히고 있으니, 시민단체가 나서서 선거제도의 개혁을 요구해야 한다. 나아가 직접 나서서 그 후보들을 검증해야 한다는 것이다.
각종 비자금으로 불거진 정치권 부패는 가히 ‘프렌치 커넥션’을 연상시킨다. 저러고도 어깨를 으쓱대며 의사당을 드나들었단 말인가. 왜 저런 깡패들을 버젓하게 행세토록 밀어줬단 말인가. 부끄럽고 한심하기 짝이 없다. 검찰, 국세청 더 나아가 그 철통같은 안기부는 뭘 하고 있었단 말인가. 아니 언론은 또 목탁을 어디에 두고 바가지만 두드렸는가. 이러고도 어찌 나라 걱정을 하는 냥 국민에게 헛기침을 해댔단 말인가.
나라가 이 나마라도 굴러가는 게 여간 신기하지 않다. 제대로 굴러가는 게 아니지, 엉망이 돼가고 있는 게지. 제대로라면 이상하지 않은가. 그렇게 해 먹는데, 그렇게 도둑들이 금테를 두르고 기고만장한데 제대로 돌아간다면 두려울 게 없고 탈날 일 없지 않은가. 하기야 조선조만 해도 그렇게 굴러왔고, 또 아무리 개탄 발분의 소리가 높아도 해먹을 재주 없는 놈의 씨나락 까먹는 소리로밖에 안 들리지 않았는가.
그러나 도탄에 빠진 민생이 있었고 또 못 견딘 반란이 있었다. 종당 간에는 나라가 망했다. 지금은 식민지 시대가 아니라서 나라가 망하기야 하겠는가. 실업자가 생기고 노동자가 성내고 젊은이들이 사회에 애착하지 못하고 겉돌다 도적이 되고 그 하수인 되고 아니면 그 그늘에서 희망 없는 인생을 설계한다. 기술 경쟁이 아니라 뇌물 경쟁이니 국민의 창의력은 메마르고 나라의 경쟁력이 있을 리 없다. 나라의 알맹이가 다 빠져나가면 그게 지금 나라가 망하는 길이다.
이왕(李王)을 모시며 경성제대(京城帝大) 나온 놈만 잘 살아도 나라가 망한 게 아니라고 우길 수 있다. 월급이 갈급 되고 원전(原電)이 원전(怨電)되어도 수출만 되면 경제가 돈다고 박수 칠 수 있다. 정치가 썩어도 질긴 민생은 늘 그렇게 고달픈 것이라고 너스레를 떨 수 있다. 하지만 그러면 나라는 무엇이고 그 안에 사는 국민은 누구란 말인가. 옛날엔 나라가 망해도 산천은 의구하다 했지만(國破山河在) 지금은 잘 사는 냄새에 못사는 코뼈도 녹는다.
이왕 곪아 터졌으니 대수술을 해야 한다고 야단들이다. 정치권이 기다렸다는 듯이 개혁안을 쏟아내고, 언론은 이제야 알았다는 듯이 개나발을 분다. 순진한 국민은 검찰 격려하기 바쁘다. 곧 개명 천지에 청풍이 불고 산골짝마다 옥류가 흐를 듯하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한 걸 왜 못 고치고 있었는고. 각종 집단, 동창회, 번영회, 향우회, 종친회, 동호회 심지어 시민운동, 가족 모임까지도 돈 칠갑을 해야 되는 세상으로 바뀌지 않았는가. 뭘로 정치하자는 건가.
뿌린 대로 거두는 법. 오래 으르릉 거렸으면 화해가 어려운 것. 오랜 독재는 민주화가 쉽지 않다. 오래 썩은 정치·경제·사회 덜 썩게 하기도 어렵다. 방부제가 되자고 한 정치가 한 술 더 뜨니 여기부터 고쳐야 하는데 그 조치가 단호하고 과감해야 한다. 똑똑한 사람 뽑으려고 기를 썼지만 결과는 도둑이었다. 이제 맑은 사람 뽑아야 한다. 조직 선거 집어치고 우편 선거(부재자처럼)해야 한다. 좀 엉성하면 어떤가. 그래도 도둑보다 나은 사람 뽑히지 않겠는가.
차법대 영감과 장인귀 영감 그리고 안나리 영감은 나리들 세상이 바뀌었는데, 아직도 모든 가정에서 자식을 나리로 키우고 싶어 하는 게 더 문제라는 것이다. 공부 잘 하면 모두 법대요 장인이 귀한 세상에 공대는 안 보낸다. 아니 공대를 지망했다가도 모두 법대에 와서 강의를 들으니, 법대 강의실과 도서관은 오히려 비법대생들로 더 만원이다. 아직도 개나리들이 판을 치고 있으니 어떻게 보고 배우겠는가. 진정한 나리꽃 구경 이렇게 어려운가.
먼저 각자 자기 가정부터 관변을 부패특구로 지정하여 자식들이 관을 외면토록 하는 것이다. 산업혁명을 일으킨 것은 귀족이 아니었다. 평민이 귀족이 되려는 반란이었다. 최근 인도의 IT혁명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시험과 당선 그리고 연줄을 통하여 누구에게나 귀족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기에 수재들의 반란은 한 번도 없었다. 이제는 수재들이 그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반란을 일으켜야 한다. 먼저 청관선언부터 해야 한다.
지난 시절 뜻 있다는 사람들이 노상 개탄만 하다가 세월을 다 보냈지 않았는가. 과거에 흥분하고 분노하는 사이 똑같은 부패는 계속되고 있다. 선거를 전후해서 출마자의 대부분이 범죄자가 되는데도 아무 개선책 없이 무슨 역병처럼 선거는 반복된다. 당선자에게 무슨 존경심이 가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부끄러움을 모른다. 이것들이 조선조 이래 600년의 부끄러움이지만, 고작 송사리만 잡히고 큰 고기는 안전지대에서 더 큰 영달을 꿈꾸는 게 현실이다.
영수증 써 줘서 합법화 되었다지만 도둑놈 돈 먹고 깨끗한 정치 할 수 있는가. 또 영수증 안 주고 뒤탈 안 나면 깨끗한 정치인가. 민운동 영감이 열을 올린다. 그래서 시민운동밖에 없다는 것 아닌가. 이제까지 안 해본 게 이것밖에 없으니 말이다. 장인귀 영감이 또 나선다. 공권력에 침을 뱉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다들 장인을 키워야 한다.
농업사회와는 달리 산업사회 특히 정보사회는 창의력이 판치는 세상이다. 동양에서는 원래 창의력이 없었다. 아니 있어도 짓눌렀다. 고분벽화, 석굴암, 봉덕사종에서는 우리도 얼개를 엮고 그림을 그리며 주물을 끓여 붓는 재주가 탁월했었다. 그러나 부패특권층의 득세와 가렴주구가 그 싹을 도려 낸 것이다. 서양문명이 들어 올 때까지 우리 농업은 지게, 쟁기, 볏, 두레박으로 겨우 명맥을 이어왔고 초보적인 탈곡기, 풍구, 펌프, 우마차도 없었다.
많은 수재들은 양반이 되기 위하여 고시과목인 사서삼경에 매달렸다. 과거가 없어지자 이들은 한성영어학교로 뛰었고, 이것이 법관양성소로 개편되자 우르르 이리로 몰려왔다. 지금도 별반 달라진 게 없으니 겨우 모사품 대량생산으로 사람이나 싸게 팔아먹는 저부가가치 세상이 된 것 아닌가. 민운동 영감은 재차 목청을 돋운다. 부패특권을 몰아내지 않으면 총체적 생산성이 주저앉고 저임지대가 광범하게 확산될 것이다.
세계화는커녕 매우 혼란한 사회로 전락할 것이 뻔하다. 부패 청산은 이 나라의 생존을 위한 절체절명의 과제다. 시민운동도 젊은이들에게만 맡겨선 안 된다. 원로들도 앞장서야 한다. 젊은 사람들은 또 다른 욕심으로 번지기 쉽다. 거리로 나서기 어려운 원로들은 네티즌을 활용해서라도 가정에 파고 들어야 한다. 피괄어 영감이 어디 있다 왔는지 격한 말을 쏟아낸다. 영감들이 걱정하는 그런 새끼들 다 쏴 죽여야 해. 박살 내야해. 영감의 해결 방법은 늘 이랬다.
기질 탓이라고나 할까, 피가 뜨겁다고나 할까. 하기야 옛 독립군들은 폭풍한설에 아혈즉열(我血則熱)로 기개를 드높였으니, 이런 의혈청년 가운데서 열사·의사가 나오는 게 아닌가 생각하면 반드시 영감의 피를 타기(唾棄)할 것도 아니지 않는가. 권력이 썩는 냄새가 코를 찌르고 붉은 주먹질이 하늘을 가르는 현실에 그는 분노했다. 영감은 연신 쿠데타가 나와야 한단다. 쿠데타가 난다고 무엇이 달라지는가하며 민운동 영감이 피괄어 영감의 작살주의를 나무란다.
나의 할아버지는 천필주지(天必誅之)를 자주 들먹이셨다. 다른 할아버지들은 또 주리를 틀어야 한다, 곤장(棍杖)을 쳐야 한다고 곧잘 흥분하셨다. 나도 그 피를 받아 여간 과격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싹 쓸어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시골 사는 한 인텔리가 시대를 뛰어넘는 천금 같은 발언을 한 것을 기억한다. 오늘의 범죄는 권력과 부를 누리는 자들의 잘못이 크지만 독설에 쉽게 수긍하는 사람들의 격정성도 이에 한몫 단단히 끼어든다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 그분의 이름을 잊었다. 그러나 그 한 마디가 나를 재생시킨 것만은 분명하다. 나는 요즈음 루쉰(魯迅)의 작품을 읽어가며 권비(權匪)를 내쫓아봐야 여전히 또 다른 권비가 나올 뿐이라고 한 얘기에 귀를 기울인다. 권비의 양성 양산이 문제라는 것이다. 운봉에서 왜구를 대파한 이성계가 고향에 들려 유방(漢高祖)의 대풍가(大風歌)를 외친다. ‘대풍 불어 구름 흩날릴 제 큰 세력 떨치며 고향을 찾는다. 어찌 용장을 끌어 모아 국토를 지키지 않겠는가.’
이성계를 맞으러 온 정몽주가 한 걱정을 한다. 나라가 어지러우니 백년 묵은 호기(豪氣)가 또 많은 선비를 그르치겠구나(誤書生). 이성계는 왕씨 가문을 도륙 내고 그 피비릿내와 원성을 견디다 못해 한양천도를 서두른다(實錄). 그 후 왕자의 난, 계유정난, 또 무슨 무슨 난, 무슨 사옥, 찍어내기 연속 상영이다. 우리 할아버지들은 박수를 치셨다. 암 그놈들 오래 못 간다고 했지 않나. 민심은 천심이여. 그러나 달라진 게 없었다.
큰 말 나가면 작은 말 들어오고 이런 식인데도 민심은 그걸 원했고 천심은 잽싸게 그걸 받아 챙겼다. 암행어사를 시켜서 재수 없는 관비(官匪) 몇 놈을 치면 성은은 언제나 망극한 법이다. 세월은 잘도 잊게 잘도 간다. 무엇을 고치기보다 자식을 급제시켜 오래오래 해먹기를 바라는 편이 나을 것이었다. 민 영감이 피 영감에게 다시 얘기한다. 영감은 지금 조선조만 따져도 600년이 묵은 소리를 한다. 그런 소리 아직도 다방구석 저자거리에서 얼마나 많이 들리는가.
물론 아무 소리도 안 내는 사람들이 더 많다. 세상은 다 그런 것 떠든다고 뭐가 되겠는가 하며. 밥 먹고 똥 싸고 새끼 치고 그러다 한 세상 가는 거지하며. 또 관리 가운데도 소임을 다하는 공복이 얼마나 많은가. 누가 뭐래도 각자 이도(吏道)를 지키면 되는 것인데 하며 말일세. 물론 바꾸어야 하네. 아무 소리 안 하면 권비, 관비 좋은 일만 되지. 그러나 이 놈 치고 저 놈 치는 야경(夜警) 소리에 도둑은 다 놓치네. 피 영감이 대든다. 그러면 가만 있으란 얘기인가.
민 영감이 손을 내 젓는다. 도둑을 놔두면 백성이 피로하고 제일 중요한 창의력이 짓밟히네. 도둑질 잘하는 창의력이란 없네. 도둑 세상에선 창의력이 없다는 얘길세. 요즈음 그런 벤춰 잘 터지지 않는가. 피 영감은 사뭇 답답하다는 쪼다. 민 영감은 얼마 전에 들은 어느 목사의 설교를 소개한다. 세상을 보고 손가락질하는 것은 오만이라는 것이었다. 모두 내 탓으로 돌리자는 게 아니라 그 자리에 갖다 놓으면 별수 없으면서 안 그럴 듯한다는 얘기였다.
민 영감은 그 얘길 이렇게 옮겼다. 누구라도 그렇게밖에 할 수 없다면 그 사람 탓으로 돌리기보다 그 판을 바꿀 궁리를 해야 바뀌지 않겠는가. 우리 조상들은 성군이나 충신을 갈망하는 방법으로 비성군 비충신을 씹어대기만 했다. 자신들은 늘 입사(入仕)의 길을 달리면서 권도에 나가면 자신들은 안 그럴 것 같이. 어찌 입헌이나 공화를 꿈꾸었겠는가. 우리 정치인들 똑똑하고 나름대로 노력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은 왜인가.
이제는 정치인이 자라는 토양을 바꾸어야 한다. 부귀를 쫓는 패거리 정치판을 엎어야 한다. 그것은 누굴 찍어낸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 시민의 민주 역량을 여기에 쏟아 부어야 되는 일이다.
피 영감은 한숨을 쉬었다. 영 성이 안 차는 모양이었다. 곁에 있는 영감들이 다가와 그의 양 팔을 주무르며 피를 삭이고 있었다.
2. 두날개 노인
열두 영감들이 각자 약조대로 궁행(躬行)에 들어가면서 한 달에 한 번씩 만나 서로의 성과를 헤아려 보기로 했다. 첫 모임이 있던 날 깔끔하게 차려 입은 노신사가 불청객을 자처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선다. 일흔을 넘어서까지 구로정을 지키다 다시 사서삼경밖에 없다고 자리를 떴던 구부정 영감과 고부랑 영감의 한문 선생 두날개 노인이었다. 노인이 처음 의병의 후예라고 했을 때는 모두 숙연했으나 25년 미전향 장기수라 할 때는 모두들 켕기는 눈치였다.
명문가에서 태어나 사서삼경을 섭렵한 두날개는 스무 살이 다 되어 상경했다. 신학문을 배우다 우연히 ‘인류사회 발전사’ 한 권을 읽고 곧 바로 사회주의 운동에 뛰어들었다. 권력을 잡아보겠다는 생각은 없었고 그저 노동자·농민과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자는 결심뿐이었다. 늦둥이로 태어났지만 그의 몸속에는 의병 막료였던 아버지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거의 독학으로 완성된 그의 공산주의 이론은 꿀리지 않을 정도로 단단해졌다.
해방이 되었을 때 심산유곡에 숨어 살던 도사들이 상투를 틀고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진천으로 모여들었다. 후천 개벽을 믿는 강증산의 후예들과 정도령의 출세를 믿는 유생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차력(借力)과 둔갑술(遁甲術)로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아침에 서울로 떠나 저녁에 돌아와서는 축지법을 과시했다. 1946년 늦은 봄 서울 남산에서 조각(組閣)을 선포하려다 신장(神將)이 동하지 않자 다음을 기약하며 뿔뿔이 헤어졌다.
장년의 두날개는 모든 것이 가소로웠다. 축지법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겨우 진천서 서울, 서울서 공주 아닌가. 지금 두날개의 사회주의 건설은 하나의 역사 법칙이요, 온 세상이 이를 필연으로 받아드릴 날이 오고 있지 않는가. 그는 희망과 자신에 벅차 있었다. 두날개는 군정의 공산당 탄압이 시작되자 근신에 들어갔다. 6·25를 맞아 월북했고, 10년 만에 당 중앙의 부름을 받는다. 남파되었다가 접선 실패로 체포되었으나 그는 전향할 수 없었다.
청춘을 바친 항일운동이요 혹독한 고문을 견딘 사회주의 아닌가. 거기다가 그는 이북에도 아내가 있고, 두 얘들이 있었다. 어느 가족이나 소중하기는 매한가지였다. 헤어지던 날의 애잔했던 아내의 모습. 막 말을 배우던 아들과 겨우 태어난 둘째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수감 중 면회 온 가족들이 여러 번 전향을 호소했지만 그의 마음은 처연하기만 했다. 노모가 와서 대성통곡할 때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그 모습 그대로 꿈에도 자주 나타나셨다.
그 때마다 그는 크게 울었다. 남에 내려가라는 지시가 떨어져 아내와 부둥켜 앉고 또 크게 울었었다. 조국이 부르니 할 수 없다며. 교도소에서 그는 10여 년 간 사회주의를 지켰다. 그러나 미제의 식민지 남반부가 연이어 개발 계획에 성공하고, 국민생활이 활기를 띠자 그는 회의에 빠졌다 ‘고향 마을에 모여 들었던 축지법을 나도 모르게 믿었던 게 아닌가.’
그는 어느새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1930년 생떽쓰와의 운명적 만남을 위해 대서양을 건너던 콩쉬엘로는 남미의 사치에 혀를 둘렀다. 여자들은 파리의 보석과 향수를 자랑했고 죽은 자의 이빨로 보철을 했다. 배 안에서도 그들은 비만치료를 받으며 지루한 여행기간 동안 내내 변해 가는 몸매를 자랑했다. 나이 먹은 부인들이 더 극성을 부렸고 코와 눈 성형에 열을 올렸다. 관세를 덜 내려고 매일매일 새 옷을 입고 나와 헌 옷을 만들었다.
두날개가 열 살 때였다. 사람의 욕심은 이런 것인데 어떻게 이것을 죄악시하고 사람의 힘으로 막는단 말인가. 사회주의도 좋고 공산주의도 좋다. 누가 모든 사람에게 이런 사치를 균등하게 줄 수 있단 말인가. 두 날개는 양의 동서를 넘나들며 여러 가지 생각들을 파악하고 비교했다. 동으로 가면 서에, 서로 가도 동에 이른다. 하늘은 동서로 갈려 있지 않다. 높은 정신, 큰 지혜, 큰 생각은 동서양이 같다.
공자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정확히 아는 것이 진실로 아는 것이라 했고, 소크라테스는 내가 오직 아는 것은 모른다는 것이라 했다. 솔론은 도를 넘지 말라 했고, 논어는 지나친 것은 모자람과 같다고 했다.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기독교의 황금률은 논어에도 중용에도 나온다. “남이 싫은 것을 행하지 말라.” 두날개는 축지법을 황당하게 여기고 그에 비하면 자기는 축천법을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의 축천법은 또 하나의 축지법이었다. 그렇다고 이것들이 죄다 허망한 것이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런 것들이 기초가 되어 새로운 법이 세워지기 때문이다. 무어나 시몽의 이상향, 프루동과 바쿠닌의 무정부가 그랬듯이. 문학예술에 있어서나 또 철학에 있어서나 심지어 모든 문명의 이기까지. 또 특히 오늘의 우리 정치사상이라 할 자유와 평등과 민주, NGO, 노동운동에 이르기까지 사람의 생각이란 이렇게 끊임없이 적립 변화된다.
공산주의가 있었기에 자본주의는 강해졌다. 해방공간에서 많은 사람들이 단정(單政)을 반대했다 “일본에 아부하던 놈들이 또 미국에 붙어먹다니.” 많이 죽었고 많이 북으로 갔다. 또 많이 남아 시장경제와 민주를 일구어냈다. 이제 미수를 바라보는 두 노인은 지금 북한을 바라본다. 남침을 했으니 용서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1950년 그때로 돌아가자. GNP 50불도 안 되었던 땅. 남한도 북한도 미·소의 꼭두각시였다.
소련이 무기를 대주고 남침하라 했다. 통일이 된다고 했다. 조급한 투사들이 많이 모였던 곳 아닌가. 북한은 북침으로 가르쳤다. 북한은 언젠가 사과할 것이다. 그러나 다그쳐서는 안 된다. 낙원을 건설한다고 반백년을 설친 땅 북한. 사회주의는 고작 빵이었고, 그것조차 참담하게 무너진 이제 남은 것은 알량한 자존심뿐이다. 그걸 가지고 무얼하겠는가. 그러나 그들이 매달린 것은 축지법이었다. 나름대로 고쳐먹고 또 고쳐먹을 것이다.
노인이 다 된 두날개는 다시 서양을 난다. 유럽은 다른 민족끼리도 통합한다고 법석이다. 미주로 가자. 다른 인종끼리도 이리저리 손잡는다. 세계화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진행되고 있는가. 누가 밑그림을 그리는가. 미국인가. 아니면 그 배후에 프리메이슨이 있는가. 문명의 충돌을 기독교와 이슬람으로 보지만 두 가지는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 그래서 두 노인은 진정한 문명 충돌이 동·서양 간에 일어난다고 본다.
그러나 아직은 세계화 시대다. 이는 메이슨의 오랜 꿈이다. 9·11테러는 무엇을 겨냥했는가. 쌍둥이 빌딩에는 이스라엘의 모사드와 프리메이슨의 일루미나티가 있었다. 이들은 모두 호루스(광명 또는 全視眼)의 제자들이다. 그들을 아마데라스(동방의 빛)가 친 것이다. 그 도꼬다이(特攻隊) 수법이 그랬다. 제정 러시아의 예언자 블라바츠키는 아마데라스가 중국에 있다고 했다. 두 노인의 생각은 다르다. 천자(天子)의 나라가 아니라 천황(天皇)의 나라다.
북한은 오래 동안 여길 노려보고 있었다. 메이슨이 지배하는 세계화 시대는 일본과 중국이 손잡는 날까지 간다. 북한도 뒤늦게 이를 눈치 챘다. 미국과 일본을 업어야 한다. 한 1조 달러 정도는 울궈 내야 한다. 그게 자존심을 지키는 길이다. 먼저 북이 38도선을 팔려고 내놓아야 한다. 남도 BUY KOREA 38로 호응해야 한다. 그럴려면 먼저 비슷하게나마 하나의 정신 하나의 문화로 연결돼야 한다. 남은 것은 38도선의 값을 올리는 일이다.
누가 이일을 할꼬. 두 노인은 애원하듯 기중난 영감을 바라본다. 눈시울에 눈물이 가득 채워진다. 나머지 영감들이 두 노인의 충정을 읽어가며 마른 주먹에 힘을 준다. 두날개 노인은 북에 있을 때 가까이 지낸 남일 장군을 떠올렸다. 남일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공을 세운 소련군 장교였다. 해방 후 소련군을 따라 북에 온 그는 조국해방전쟁 시기에 참모총장을 지냈으며, 정전회담 북측 대표를 거쳐 두 노인이 남하할 때까지 외무상으로 활약했다.
남일은 가끔 두 노인을 집으로 불러 남조선 사정 듣기를 좋아했다. 그 때 남 장군의 아들이 두 노인을 삼촌이라며 잘 따랐고, 두 노인도 자기 아들같이 퍽 귀여워했었다. 남 장군의 아들은 아버지가 정전협정에 서명하던 날 백두산대피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미제의 간섭으로 남조선을 해방시키지 못한 것을 늘 한스러워 했으며, 그에게 대를 이어 미제를 몰아내고 조선의 독립을 확고히 하는데 앞장설 것을 교시했다.
그는 미제의 콧대를 꺾고 그들로부터 강화조약을 받아내는 꿈을 키우며 장장 30년의 출세가도를 달려왔다. 두 노인이 출소하기 전 갓 들어 온 간첩으로부터 들은 얘기였다. 7·4 공동성명이 발표된 것은 그의 나이 스무 살이 다 되어서였다. 그는 그의 꿈이 무산되는 듯한 아쉬움에 잠기기도 했지만, 백전백승의 영장 김일성 수령이 싸우지 않고 미제를 굴복시킨다고 생각하니 그의 할 일은 아직도 창창했다.
그러나 그가 모스크바 유학에서 돌아왔을 때 그는 차츰 공화국을 지키는 일도 어려워진다는 불안에 휩싸였다. 그는 당 국제부에서 일하면서 김일성 주석이 극비리에 추진하고 있는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을 눈치 채게 된다. 그렇다. 바로 이거다. 성공만 한다면 미제가 어찌 공화국을 넘보랴. 인민생활이 어렵게 되겠지만 통일이 앞당겨지는 날 그들은 배불리 먹으리라. 소련이 여러 가지로 흔들리고 있을 때도 그는 당황하지 않을 만큼 자신감이 붙었다.
당과 그 두리에 뭉쳐 있는 500만 명만 굶어 죽지 않는다면 무엇이 두려우랴. 그는 차츰 광기에 들떠 20년의 장한몽을 꾸고 있었다. 그의 장한몽은 이러했다. 미제에게 핵무기를 비싸게 팔아먹는 꿈.
“나는 기내에 올라 자리를 잡자마자 쓰러질 듯 주저앉았다. 순간 참았던 피곤이 엄습해 왔다. 그러나 어찌 피곤 따위가 들어 올 틈이 있겠는가. 촘촘히 온몸은 이내 희열과 만족과 안도로 충만해가고 있었다. 강화조약, 그것도 미제의 수도 워싱턴에서 오랜 숙원사업의 대미를 장식하니 얼마나 통쾌하고 뿌듯한가. 양팔을 활짝 펼쳐들고 달려 나와 안아주실 김일성 주석의 듬직한 가슴속으로 나는 벌써 빨려들고 있었다.”
“얼마나 오래 기다렸으며 얼마나 괴로운 와신상담, 절치부심의 나날이었던가. 미제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을 지키는 간고한 싸움에서 빛나는 승리로 되는 정전회담을 아버님이 마무리 지으신 지 40 년. 나는 혼신의 노력을 다한 끝에 이제 일본의 조선병탐을 실질적으로 끝장내고 만 것이다.”
“실로 김일성 주석께서는 단군 이래 조선이 낳은 가장 걸출한 영웅이시다. 그 분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일제의 침략과 그 뒤에 도사리고 있는 미제의 콧대를 꺾을 수 있었겠는가. 생각하면 저절로 머리가 숙여질 뿐이다. 어떻게 우리 힘으로 미사일과 핵무기를 개발하여 정전 40년 만에 미제로 하여금 우리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단 말인가.”
“오늘 나는 공화국 특사로서 미·일과의 장구한 전쟁을 끝낸 것이다. 우리는 전쟁배상금으로 5000억불(남한 GNP)을 거머쥐고, 일로 경제건설에 매진할 수 있게 되었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창밖의 광활한 미주대륙을 내려다보는 나에게 홀연히 우리가 건설할 강성대국의 모습이 겹쳐왔다.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건설하려는가.”
열두 영감과 여러 가지 약조를 끝낸 두 노인이 그의 꿈을 깨운다. 주석의 시대는 공산주의와 조국 해방의 열정으로 불탔었다. 조국이 완전 해방되는 오늘 공산주의는 이미 신기루였다. 새로 된 김정일 주석과 동시대인인 너는 무엇으로 미쳐야 하는가. 또 하나의 남조선을 이 땅에 건설하자는 것인가. 희한한 생각 아닌가. 그렇다면 새로운 길이 보이지 않는가.
그 길로 가야지 않겠는가. 아랫배에 힘을 주고 김정일 장군을 만나 얘기해라. 북조선 건설을 남조선에 위임하자고. 그리하여 합방 100년, 분단 60년, 2010년에 조국의 완전한 통일을 이룩하자고. 항복으로 생각하지 말고 남조선의 시나리오를 따르자고. 우리가 지켜 온 민족불기의 자존심과 우리가 달군 민족정기는 통일조국을 관류하는 만고불변의 진리로서 뻗어나갈 것이니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하자고. 두 노인의 꿈도 덩달아 야무져 갔다.
3. 석날개
두날개 노인이 천진암에서 구로정 영감들을 만나 너무도 반갑고 대견해서 오랫동안 속마음에 묻어두었던 북한의 남한화 구상을 밝히고 내려온 지 얼마 안 되어 목신의 부름을 받는다. 구로정 영감들은 두 노인의 절절한 바람에 크게 감명되어 있던 차여서 그날의 두 노인 말씀을 유언으로 간직하고 사태 추이를 주의 깊게 관찰하며 여러 차례 토론모임을 가졌었다.
목신을 모시고 있던 백범이 두날개를 반갑게 맞이한다. 민족분열의 한을 품고 근 60년간을 노심초사하시는 백범을 뵙는 순간 두날개는 황급히 그간 갈고 닦은 남한화를 말씀드린다. 백범은 뜻밖에 머리를 저으신다. 북한이 핵무기를 쉽게 팔겠느냐 하시면서. 아마도 미국을 위협하여 기세를 올리려 할 것이다. 이어서 북한의 한국화보다 한국의 세계화가 더 필요하다시는 게 아닌가.
방향을 잘 잡아야 한단 말씀이다. 순간 두날개는 미익(尾翼)을 의식한다. 한국이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한다. 지난 시기 20여 년 간 장기수로 있을 때 10여 년 가까이 사서삼경을 가르쳤던 제자의 주장이었다. 20년 아래였지만 통일 혁명의 의지가 남달랐던 그는 항상 통일에 급급한 나에게 방향을 틀라고 여러 번 간청했었다. 나는 다시 장고에 들어갔다. 그 방향으로 장시간 토론했던 내용을 복기해서 백범 선생께 보고 드리기로 한 것이다.
작성자 김구학회
북한 조선중앙TV가 잠수함탄발사도미사일(SLBM) 시험 발사 장면. 김정은이 잠수함에 탑재되는 미사일을 바라보고 있다.
반석 한국의 방향
1. 손쉬운 공안정국
가) 더 이상 공안정국으론 안 된다.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희생되었고 희생되고 있는가. 그래도 여전히 공안정국 불가핀가. 소위 유신 전 많은 정치인들이 공산 북한이 있는 한 불가피하다고 서명했으며, 그들이 아직도 여야정치의 핵으로 잠재하고 있지 않은가. 공안정국을 데모나 야당 탄압으로만 알고 있지만, 공안정국이면 모든 행정기관 특히 권력기관은 때를 만난 듯 기승을 부리며 끽소리 못하는 국민 위에 부패특권은 온존번창하게 마련이다.
나) 지금 국민의 입 속에 넣어야 하는 것은 복지를 비롯한 재분배뿐인데, 달리 배불릴 방법이 있는 듯 전문가들이 날뛰고 정부가 기업편만 들어 주면 경제가 나아질 듯 설치고 있다. 경제가 원천적인 재단 잘못(모방 기술에 의한 수입원기자재가공활용, 대 물량시설 과잉투자 등)으로 성장한계점에 와 있는데 정치권은 오히려 국제 분업이라 자랑하기 바쁘다. 제국과 식민의 분업인가. 부국과 빈국, 기술종주와 저임종속, 기업주와 노동자의 분업 말인가.
다) 당장 부를 헐어 가난한 국민을 살리고 권력을 둘러싼 검은 돈벌이를 차단해 정상 소득으로 살아가는 많은 국민들의 불만과 분노를 삭여야 한다. 전문직·기술직·연구직에 희망을 거는 인재들이 몰리도록 해 신기술, 신제품 개발을 서둘러 성장 동력을 새로 확보해야 한다. 기초가 든든하다니. 펀더멘탈이란 무엇인가. 국민 고통의 안보적 방색으로 부패특권은 만만세란 말인가. 우승열패의 시대착오적 오기들이 만연해서는 나라 경제의 회생은 불가능하다.
라) 자칫 3포, 5포 끝에 우울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젊은이가 점점 늘어나는 지옥세상이 다가올까 겁이 난다. 겨우 살아난 인재들도 적성에 안 맞는 직장 또는 불안한 임시직으로 끝내 좌절하게 된다면, 또한 승자들의 갑질이 약자들의 살맛을 앗아간다면, 나아가 인문직 우대 이공기술직 하대 등의 구태가 젊은 시야를 가로막는다면 오늘의 난국은 헤어나기 힘들 것이다. 실로 유능한 지도자들이 갈망되는 이유다.
마) 과거에도 반복되었듯이 위기의식 대오각성이 절실한 때 어김없이 나타나 증오열기를 부추기는 애국단체들, 우국세력들 그리고 은근히 이들 우군을 의지하고 힘을 얻는 소위 보수정치인 지식인들. 대저 이들은 어디에서 비롯되어 여기까지 왔으며, 또 어떻게 또 언제까지 나라의 앞날을 가로막을 것인가 지극히 우려된다. 한 세기 이상 세상을 휘젓고 다닌 공산 망령 탓인가. 형제간 피를 부추긴 지도 어언 70년 아닌가.
바) 한마디로 망령이 불러들인 미군 주둔 때문이다. 주둔군의 정당성 확보는 적대지속강화다. 그 하부구조에 우리 군부가 자리 잡는다. 또 그 하부구조로 무찌르자 공산당, 국민개병제가 순혈 충성을 고창한다. 이 공고한 안보체제를 흔들기는 불가능하다. 이 나라의 모든 의식구조 특히 엘리트들의 탁월한 판단력은 모두 이 기초 위에 서식하거나 기식한다. 개성공단 폐쇄가 있자 바로 미국무성 지지성명이 나오지 않나.
사) 우리는 패전국이다. 아니 그보다 못한 그 속국에 불과하다. 승전국에 점령당한 우린 그 군사 연습장이 되었다. 해방의 감격은 우릴 청맹관으로 만들었다. 동족상잔은 우릴 까맣게 덧칠하고 재를 뿌렸다. 민주화의 요구를 끊임없이 좌절시키는 기제도 바로 이에 연유한다. 끊임없는 군사문화의 보급이요 군사통치의 유혹이다. 이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기에 어떤 천운조화를 기다려야 할 판이다. 이 운명을 어찌 극복할 것인가.
아) 이렇게 한국의 파시즘은 배냇병이다. 아니 제일 생각 없는 편한 선택의 길을 열어준다. 지금 평택기지 주변은 희망과 기대가 넘쳐난다. 연일 투자 안내와 투기 안내가 열병합이다. 노다지 환락과 퇴폐가 독버섯처럼 기고만장해도 누가 이를 부타할 수 있겠는가. 길지 않은 세상 짧은 인생인데, 한 번 쪼(죄)는 맛도 있어야 하고 현란한 조명발에 벌어지는 화끈한 스트립을 마다할 도사 드물다. 파시즘은 빛난다.
자) 한국이 더 이상 외골수 극우로 가면 엉뚱한 길로 빠질 수 있다. 전혀 생각도 못하게 일본에 먹히든지 북한에 먹히든지. 안 그러려고 안간힘을 쓰는 지사들이 곧 많이 용틀임을 하고 있는데 다 잡혀갈까 걱정된다. 그게 파시즘이니까. 애써 살 길을 찾아줘도 자꾸 죽는 길로 가는 게 파시즘 아닌가. 조선은 충신이 많이 나는 지령이라 했다. 유령을 쫓고 나라를 구해주지 않겠는가. 그 막연한 기대가 또 고작인가.
차) 낙동강 오리알이 안 되려면 스탠스를 180도로 바꾸어 북한과 독자적인 딜을 할 각오가 되어야 한다. 결국 한국의 그 많은 브레인들이 헛똑똑이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벗어나야 한다. 지금이라도 해방 이래의 한반도 정세 변화에 대한 근본적 인식전환이 있어야 그나마 뒷북치는 짓이라도 면할 수 있다. 지금이라도 북핵 미사일 시비 걸지 말고, 그 시간에 백성을 편히 먹여 살려 기술 개발 전념토록 해야 한다.
카) 옛날 평화통일이 사형감이었다. 사형은 간첩죄라는 공안 죄목이었지만서도. 정치 보복으로 죽임을 당하는 일은 자가가 마지막이길 유언했던 죽산의 기대와 달리, 이어서 나온 반공국 시제일의 5·16은 민주·자주·통일꾼들을 줄줄이 처형했다. 연기 깔린 저녁 길 도깨비 그림자들이 죽산의 장례행렬을 뒤따르는 모습을 전봇대 뒤에 숨어보던 시인은 소리 없이 울었지만 민자통 때는 그런 눈물조차 말라버렸다. 그리고는 경제개발 신호탄이 쏴 올랐다.
2. 쉽지 않은 창의력
가) 지금이라도 북핵 미사일 시비 걸지 말고 그 시간에 기술 개발 전념해야 한다. 공단 폐쇄라니 이 무슨 19세기적 대거린가. 우린 그럴 시간적 여유가 없다. 북한 꿈쩍도 않는다. 나란데 돈 몇 푼으로 그 엄청난 짓을 그치겠는가. 또 북풍인가. 그래서 표 끌어 모으면 뭐하겠는가. 문제는 경제다. 신기술 신제품이라야 경제 살고 자살공화국을 면한다. 옆 사람 픽픽 쓰러지는데 매일 북한 위협만 들먹이며 고대광실에서 축포만 터뜨리는가.
나) 신기술이란 정신적 자유 즉 안심·안정·안전 보장 등이 필수조건이다. 장래 불안 지시명령식 사회구조나 단기이익중시 독촉 경영 가지고는 안 된다. 기술연구원들이 공동체에 기여한다는 자부심·자족심 갖고 기도로 하루를 열게 해야 한다. 하다못해 구소련도 GE·GM의 연구 매뉴얼로 군사과학자들을 관리해서 미국과 경쟁할 수 있었다 하잖나. 에디슨의 왕성한 발명도 영리회사 설립 후에는 한 건도 없었다 하잖나.
다) 우리식이여야지 북한식으로 넘어가면 안 된다. 깨놓고 얘기하자. 오늘 북한이 핵 딜레마에 빠진 것도, 남한이 남의 자본 남의 기술을 허겁지겁 들여다 불공정하게 배급한 업보로, 오늘의 허약한 경제가 된 것도 민족공동체 과소평가 때문이다. 창의력 기업가 정신 모두 공동체 정신이다. 그간 우리 기업인은 그런 훈련 받지 못했다. 줄 잘 잡고 돈 잘 지르는 수법이 대재벌 요령이었다. 협잡이었다. 권력 눈치 보느라 장래 내다볼 경쟁력 엄두나 냈겠는가.
라) 이젠 산업적 치열성이다. 기술 개발 창조 경제라지만 구호로 될 일은 아니다. 응원으로 될 일은 더 아니다. 국민을 줄로 세워 행진 시키는 경제 운용은 끝났다. 각자 자기 집(정신적·정서적·안정적·자존적 울타리)에서 입맛에 맞는 밥 먹으며, 그 소속감과 인정감 속에서라야 창조가 만발한다. 주변에 눈꼴틀리는 일도 적어야 한다. 얼마나 어려운 과업인가. 거기에 그간의 조성된 생산재(소재·부품·장비) 도입 타성까지 있으니 어쩌랴.
마) 그런데 지금 창조를 말하면서 전쟁이라니. 재갈을 물려 망한 경제에 다시 수갑을 채우는 격이다. 진보요 통일이요가 다 공동체를 바로 세우자는 부르짖음인데, 그래서 그들이 다 재심 무죄된 오늘인데, 다시 일사불란 공작 통일(북한 전복 궤멸)을 내세우면 거꾸로 가자는 얘긴가. 어떻게 해서든지 화합이 절실한 시점에서 총칼을 빼드니 안타깝다. 우리 경제 국민 모두의 창의성 쟁발이 절실한데, 그러려면 모든 긴장 풀어야 한다.
바) 창의력이란 총칼로는 안 된다. 집념만으로도 안 된다. 정신력을 그렇게 챙기는 일본의 열혈 청년 노구찌도 노벨상에 초조하다 결국 천 엔 권의 초상화로 만족해야 했다. 죄수 노예 해방 시켜준대도 어림없다. 각자 능력을 최고로 발휘케 하는 환경 조성. 나라 가족 같은 공동체를 생각하며 그 소속감 인정감으로 늘 연구열을 충전시켜야 한다. 전화위복이랄까. 우리 경제 살 길은 민주·평화·평등이니 말이다.
사) 6·29가 필요한 게 아니라 그 열 배 60/29가 필요하다. 공동체의식은 이제 서막에 불과하다. 또 천만다행인 것은 북한 사정이다. 기를 써 봤지만 도리 없이 개방이다. 대미수교 후 들뜬 쿠바를 보자. 남북도 지금 혼인 적령기를 맞고 있다. 우리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 바야흐로 남북이 진정한 공동체를 향해 달려갈 때가 온 것이다. 떳떳하게 세계와 어깨를 겨룰 기회다. 여기에 아직도 큰 장애가 되는 게 반공 이데올로기다. 반공으로 뭘 먹겠단 말인가.
아) 창조 경제는 공동체를 바탕으로 해야 만발한다. 우리의 최대 과제 99:1도 공동체의식 없이는 그 완화가 불가능하다. 누가 순순히 내놓겠는가. 파이만 먼저 키우면 안 된다는 경고가 있었지만 우린 이를 무시했다. 우리 사회의 점점 예민해지는 대립각은 이 때문이다. 증오 적개심이 창조력을 갉아먹는다는 영성대가 에버그리오스의 단언을 상기하자. 남북 간에 조성된 적개심 말고 그만한 적개심 어디 또 있는가. 특히 동족간이니 천추의 한 아니겠는가.
자) 그래도 용서·화해·배려가 꿈꾸는 공동체는 민족공동체가 제일 첩경이다. 세계 여러 나라가 민족을 기반으로 하는 이유다. 독일이 통일을 그렇게 열망했고, 베트남은 민족이 궤멸할 정도로 수난을 겪었다. 잡탕들이 모여 양질의 공동체를 이룩한 나라는 미국이 유일하다. 그래도 모국의 힘, 종교의 힘이 바탕이었다. 그러나 아직 실험은 끝나지 않았다. 더욱이 우린 민족을 놔두고 더 헤매다가는 공도동망일 뿐이다.
3. 북핵 미사일
가) 북한 위협은 상존해왔다. 북핵 미사일로 우리 안보 더 위협받지 않는다. 북한이 또 남침하겠는가. 설마하지 말라지만 이것은 과학이다. 디포르마시옹이라고나 할까. 현실 되돌아보지 않고는 속내 안개가 껴 있다. 먼저 미국의 군사적 민낯을 보려면 목숨을 각오해야 한다. 혼자 탐사보도 전문지를 발행했던 스톤은 다행히 살아남아 많은 언론인의 사표가 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역작 '한국전쟁비사'는 아직도 의문이 밝혀지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나) 정보기관과 관계가 있던 이리유카바와 하리마오가 다시 야담 수준으로 뒤를 밟았지만 아직도 진실은 많이 묻혀 있는 듯하다. 일본 전문가들은 스탈린의 동서균형전략, 즉 서구에 대한 미국의 압력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남침을 계획했다. 반대로 소련의 베를린 봉쇄를 뚫기 위해 미국이 극동에 불을 질렀다 등등. 또 개전 책임은 서로 전가하기 마련. 전쟁 손익계산상 이득을 많이 본 측이 주범이다(오오모리의 ‘전후비사’)
다) 요즘 밝혀진 대로 북한 수뇌부는 미국 개입 과소평가했다. 미국이 참전하자마자 허겁지겁 소련고문단의 증파를 간청했다니 속은 것 아닌가. 미국을 잘 아는 한국이 오히려 일본에 망명정부를 준비했다니 웬일인가. 약소국은 늘 가루거치는 게 강대국이다. 지금 한반도는 미·중 사이에 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형국이다. 북은 핵미사일로, 남은 사드로 으르렁거리는 사이 피 보는 것은 백성들이다. 북은 피폐해지고 남은 무기 사오기 바쁘다.
라) 그래서 북핵을 재평가하게 된다. 곪아야 터진다 또는 저질러 놓고 보자는 심보일 수 있다. 그러나 저 세 끼도 어려운 실정인데 저걸 만드는 걸 단지 무모한 명 재촉으로만 봐야 할까. 처음엔 미국과 짜고 치는 고스톱으로도 점쳐 봤다. 언젠가 북한을 끌어들여 손 안 대고 중국 턱 밑에 핵을 장치할 수 있다는 생각 말이다. 아니면 미·중이 고강도로 압박할 때는 극동평화의 교두보를 자임하고 나서지 않겠는가.
마) 하루 빨리 남북이 자주성을 확보해야 한다. 사드에 대하여도 할 말은 하자. 북핵은 우리 책임 아니다. 미국의 봉쇄정책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든 미국이 해결해야 한다. 한반도 평화는 남북협상 대상이 아니다. 우리 운명이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순 없다. 먼저 강대국에 놀아나 서로 원수가 되었음을 통탄해야 한다. 우리는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차원 높은 민관 외교전 펼쳐야 한다. 민족문제를 놔두고는 어떤 형태의 공동체 시도도 허사임이 증명됐다.
바) 분단이 남북발전에 도움이 된다거나 부정부패가 경제 발전에 윤활유 역할을 한다고. 또 고도성장을 위해 민주가 유보돼야 한다는 헛소리가 있었다. 그러나 사람은 자유·평등·평화 공동체 내에서 살아야 제대로 능력을 발휘하고 행복하다. 어떤 탁월한 지도자도 자유 정의가 넘치는 그런 공동체 만들기 쉽지 않다. 민족공동체 건설은 오랜 문화 전통을 함께 하기에 가장 적은 비용으로 많은 사람이 만족하는 공동체를 달성할 수 있는 첩경이다.
|작성자 김구학회
노촌 선생, 마이크 잡다 ⑤
4. 의열지사
가) 의열지사는 가장 설득력 있는 정론이다. 살아있는 사설이요 논설이다. 때론 호외요 전단이다. 의회주의에서의 선거란 인기인이 선발되듯 대중 영합적 선전선동이 판을 치고, 막대한 선거자금 등으로 인해 어떤 인재가 정치적 소신과 주장만으로 정치무대에 오르기 매우 힘들다. 우리의 오랜 관존 출세문화에서는 자연 고관 검·판사와 그들을 끼고 치부한 상인들의 독차지가 된다. 이 나라에 정치를 정도로 몰고 갈 강력한 여론이 절실한 이유다.
나) 해방 전 우리 민족의 최대 관심사는 독립이었다. 많은 독립투사들이 활약했다. 해방이 되자 조국의 운명은 다시 풍전등화였다. 분단 방색을 위해 독립 투쟁은 재연되었다. 백범, 우사, 몽양이 앞장섰다. 6·25 이후에는 다시 남북 화해 평화 통일이었으니, 죽산이 대표로 희생된 이래 민자통 인사들이 된서리를 맞았다. 미완의 통일을 열망하며 청년 학생들의 투쟁이 민주화를 연결고리로 면연이 이어지면서 희생도 적지 않았다.
다) 평화통일이 사형감이었던 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통일부도 건재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정치 보복으로 죽임을 당하는 일은 자기가 마지막이길 유언했던 죽산 이후 30년이 지나서였다. 그간에도 반공국시제일의 5·16은 민주 통일꾼들을 줄줄이 탄압했다. 북한에 대한 증오심은 줄곧 미만해왔지만, 군부 통치는 통일 논의를 간접 침략으로 형해화하는 여러 가지 기제를 작동시켜 오늘까지 숨을 죽이게 한다. 민주화는 상미 성공이다.
라) 혁명가는 탄생하고 혁명아는 육성된다. 혁명가는 혁명정신의 궁극적 승리를 믿지만 당대 혁명의 성공을 자신하지는 않는다. 혁명아는 오히려 당대 혁명을 완수하려 최선을 다한다. 혁명가는 목숨을 잃을 준비가 돼 있지만 혁명아는 불편한 출세를 감수한다. 다들 영웅주의로 매도당할지라도 그들은 드높은 혁명정신을 자랑한다. 빨치산은 혁명가를 부르며 죽는다고 했다. 혁명아가 잘못 걸려 형장으로 들어갈 때 하늘을 보고 땅을 본다 했다.
마) 죽산이 사형당한 지 2년. 민족일보를 발행하다 겨우 서른한 살에 목숨을 잃은 조용수는 도피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는 데를 아쉬워하며 숨을 쉽게 거두지 못했다. 억울한 죽음이니 어찌 하늘 원망 안 들겠으며 땅이라도 치고 싶지 않겠는가. 무심한 죽음은 계속됐고 수십 년 만에 많은 사법 살인이 신원되었다. 몇 푼 보상금으로 그 억울한 죽음이 풀리겠는가. 또 누가 죄 값을 대신하랴. 쉽게 후진적이라 하지만 또 누가 알랴. 반복되지 말란 법 있는가.
바) 대저 사람 몸의 세포는 수십 억 개나 된다. 그 많은 세포들이 한 사람의 혁명가를 내기 위해 정렬하기까지는 여러 의열지사들의 외침이 교직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러나 어느 특수한 시기, 특수한 사람들에겐 혁명정신이 기질적으로 단순 빠르게 정합된다. 열혈청년이다. 북풍이 살을 에는데 내 피는 끓어오른다신 안중근. 동학 패잔장 백범이 보기에 안진사댁 장남은 열다섯에 이미 동내 청년들과 총을 쏘고 다녔다.
사) 명문 출신 이범석. 자기를 업어 키운 칠복이가 군대 해산 때 일군 총에 맞아 죽자 항일 결의가 불붙는다. 상륙작전 중 찢겨진 살점 하나라도 조국 해안에 닿는다면 여한이 없겠다고 토로한 철기장군. 장군의 연설집 <민족과 나>. 그 머리에 필리핀 독립 영웅 리잘의 초개같은 절명시가 소개되기도 한다. 열 살 남짓에 해방을 맞은 소년들 가슴 가슴에도 애국심은 들끓었다. 쏟아지는 독립혈루사가 젊은이들을 조국의 방패로 주조하고 있었다.
아) 그러나 조국은 끝내 분단되고 우려했던 동족상잔이 있었다. 처음 평화로운 강토를 피바다로 만든 공산당을 증오했으나 차츰 그들이 소련과 중공의 지시를 거역할 수 있었겠나. 초토화된 북한을 들으면서 약소민족의 비애를 거두지 못한다. 대학에 들어와 탁 트인 하늘로 무엇인가를 크게 외치고 싶은 충동. 통일은 언제 어떻게 이룰 것이며, 민족 간 증오 대결은 누굴 위한 것인가. 삼삼오오 항일 선배들처럼 독서회도 가지며 오늘에 이른다.
자) 평화통일만이 살길이다. 더러는 사화주의다 아니 사회민주주의다. 모두 혁명가가 돼가고 있었다. 해방 때 대여섯 살이었지만 주위 환경 탓으로 독립 열기에 민감했던 사람들도 꽤 되었다. 사형을 당하거나 감형되어 사회활동을 재개한 의인도 있다. 재심 무죄가 되었으나 이미 폐인이 된 의인도 있다. 의인이라 꼭 거창할 필요는 없다. 자유·민주·평등·평화·통일로 가기만 하면. 그러나 끈질겨야 뒤끝이 있다.
차) 모두 풀릴 수 없는 문제를 꿈꾸고 있는가. 감옥은 예편이요 출옥은 현역이라 했던 혁명가. 처형장으로 가면서도 우는 후배에게 원수를 증오하라 호통쳤다. 열혈청년을 일깨울 거리가 있는 한 혁명가는 끊임없이 생산된다. 사람들이 사람답게 사는 길을 모색하다 보면 이런 저런 공동체로 향하게 마련이다. 가장 쉽고 비용이 적게 드는 민족공동체. 같은 언어 같은 문화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역사가 일천하면 기둥을 세우기 더 어렵다.
카) 그래서 통일이요 통일을 위한 의열지사가 계기한다. 조선의 지령이 많은 충신을 배출한다잖는가. 오늘도 우리에게 가르침은 범람한다. 그 가르침은 유장하고 유구하다. 배운 게 죄란 말이 있다. 의를 구하려면 때론 죄도 감수해야 한다. 100여 년 전 매천은 지식인으로 견디기 어려운 상황을 죽음으로 버렸다. 버린다고 버려지는 게 아닌 줄 알면서도. 합방을 주도한 사람들에겐 별 미친 짓이었다. 지금도 합방이 여전하다면 어쩔 건가.
타) 민주화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학생들, 사법 살인당한 지식인들, 육체적·정신적 고문으로 후유증에 시달리거나 시달리다 죽은 지식인들. 쉽게 극복할 수 없는 엄중한 상황임에 생각이 못 미칠 수도 있었다. 그 많은 희생을 생각하면 왜 회한이 없겠고 가슴 아프지 않겠는가. 우린 패전국이다. 패전국만도 못한 그 속국이다. 결과적으로 미군 점령지가 되었고 본토보다 못한 군사 연습장이라는 인식에 이르지 못할 만큼 해방의 감격은 컸다.
파) 우리의 순진한 민주화 요구. 그 욕구를 끊임없이 위협하고 좌절시키는 기제가 바로 남북 원한 적대 관계. 그 국민개병제. 강력히 구축된 군사 요새 또 이와 직간접으로 연계된 주둔사령부. 알기도 어렵거니와 쉽게 발설할 수도 없는 기제에 그저 감탄 탄복하고 그 오묘미묘 복잡하게 얽힌 상황을 탄식할 길 밖에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이를 풀지 않고는 우리끼리 아무리 발버둥쳐도 남북문제 해결 불가능하고 또한 민생 경제도 가망 없으니 어쩌랴.
하) 일제 때 일제가 쉽게 또는 언제 물러가느냐 기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독립운동에 뛰어든 선열들도 매한가지였다. 지식인들, 동경 유학생들 2·8 독립선언을 열창하면서도 그걸로 일제가 조선을 풀어 주리라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다. 일부 사회주의계가 해방까지 감옥을 지켰지만 차라리 감옥에서 최후를 기다렸을 뿐이다. 춘원은 일본이 이렇게 쉽게 물러날 줄 몰랐다고 실토했고, 많은 운동가들도 한때의 결기를 후회했다.
햐) 그래도 끊임없이 젊은 지식인을 부추긴 것은 역사였고 의열지사였다. 독립이 쉽게 된다는 게 아니다. 죽어 조상의 얼굴을 떳떳이 보기 위해 우리의 선열을 부끄럽게 대하지 않기 위해 아니 또 쉽게 인간답게 살기 위해.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의를 구하고 구하다 죽임을 당한 사람들은 계기한다. 물론 지내놓고 되물으면 어찌 후회와 회한이 없는가. 그러니 이걸 하느님의 뜻이라고 할 밖에. 독립운동을 계산으로 했다면 천천재 아니겠는가.
허) 우리의 자유·평등·민주화 요구는 우리만의 요구가 아니라 인류 발전 단계의 한 국면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만의 질곡이 있으니 끊임없는 군사문화의 보급이요 군사 통치의 유혹이다. 일제 패망 같은 대사변이 없이는 극복되기 어려운 상황이기에 어떤 그런 천운의 조화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지만 위안의 말씀이다. 일제 야욕이나 나치 만행을 삼제하고 나선 정의의 사도이기에 더 어렵다.
혀) 지난 민주정권을 잃어버린 10년으로 치부하고 나설 때부터 이미 군사정권의 유혹이 날름거렸다. 박근혜의 대북 압박, 종북세력 척결, 반공역사교육 강화 뭐 뻔한 수순 아닌가. 요즘 야당이 무슨 정권 교체를 호소하지만 철이 지난 대중사거나 아니면 뭘 모르거나. 아니 북한 현 정권이 망해도 또 다른 적을 내세울 것이며, 자연 미군이 또 뒷받침되지 않겠는가, 지식인이 할 일이 천운을 기다리는 것이라면 자존심 상하겠지만 어쩌랴.
호) 그러나 과학은 과학이다. 괴로워도 불치병이라면 믿어야 한다. 오히려 과학이 아니라면 달리 과학을 내세워 솟아날 구명을 찾는 게 현명할 것이다. 무슨 민란을 생각하기는 쉽지만 기대하긴 어렵다. 군부통치와 같은 독재 하에서도 민생을 보듬는 여러 계책을 꾸리는 것이 필요한 이유다. 혁명가와의 끊임없는 교감이 있을 터이니 말이다. 혁명가도 혁명의 성공을 꿈꾸기보다 그 심복들의 범람이 꿈일 것이기 때문이다.
효) 조국을 버리려는 젊음을 한 줌도 안 되는 불만 세력으로 몬다. 민생고를 외면한 소영웅들이 해결사를 자처하고 다니며 하는 소리다. 그래서 혁명가들이 나서야 한다. 여러 모습으로 강화되는 공안정국과의 대결을 선언해애 한다. 다수 행복의 길은 공동체요 그 민족공동체가 첩경이다. 우릴 둘러싼 대결과 증오의 전운을 걷어내야 한다. 대선에 기대하지 말자. 혁명은 꾸준히 준비하는 자의 몫이다. 꿈꾸는 자여 현명할지어다.
5. 공동체
가) 국민이 골고루 행복해야 한다는 생각이 바로 공동체의식이다. 오늘의 주저앉은 경제에 더하여 99 : 1의 빈부 격차까지 겹친 걸 보면 경제개발의 목표가 어디에 있었는지 의심하게 된다. 좀더 먼 장래를 내대봤다면 결코 빠질 수 없는 수렁에 빠지고 만 것이다. 일본식이라지만 일본은 공동체의식 강했고 권력 또한 우리보다 정직하고 청렴했다. 분단과 대결이 최대의 걸림돌이었다. 결과적으로 남한만의 공동체는 불가능했다는 얘기다.
나) 하루 빨리 남북이 자주성을 확보해야 한다. 먼저 강대국에 놀아나 서로 원수되었음을 통탄해야 한다. 이런 민족문제 의식을 바탕으로 차원 높은 민관외교전을 펼쳐야 한다. 민족문제를 놔두고는 어떤 형태의 공동체 시도도 허사임이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분단이 남북 발전에 도움이 됐다는 것은 꼭 부정부패가 경제발전에 윤활유 역할을 했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앞뒤 가리지 않고 탐욕 하나로 올라선 부유층에서 내려다 본 관전평이다.
다) 국가 권력이 공동체에 소홀하면 경제가 침체해도 희망 없는 국민들의 삶이 널려 있어도 성공 신화를 구가하는 부귀영화 세력과 한통속이 되게 마련이다. 고도성장을 위해 민주가 유보돼야 한다는 소리 맞지 않았나 하면서 말이다. 자유 평등 평화란 이상에 불과하다면서 말이다. 그게 결국 애써 이룩한 성공 질서를 흔들고 파괴하려는 불순한 동기라고 말이다. 사람은 공동체 내에서 살아야 신나게 능력을 발휘한다고 해도 말이다.
라) 물론 어떤 탁월한 지도자도 그런 공동체를 만들기 쉽지 않다. 그러나 민족공동체는 오랜 문화 전통을 함께 하기에 가장 적은 비용으로 달성할 수 있는 공동체다. 경쟁이 한층 치열해질수록 국민의 창의력을 쟁발시켜야 하며, 이웃을 배려하고 서로 손잡는 공동체라야 그게 가능하다. 그런 공동체 민족끼리 이웃끼리의 증오를 부르짖으며 설립할 수 없다. 지금까지 우리가 걸어 온 길을 되짚어보면 보이는 너무나 뚜렷한 결론이다.
마) 우린 지금 개성공단 폐쇄 같이 아직도 으르렁거린다. 민족통일, 민족공동체 복원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잡탕들이 모여 번영하는 나라는 미국이 유일할 뿐이다. 잡탕들이 집단 아닌 공동체를 만들어나가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고 본다. 그러기에 독일도 월남도 그 비용을 감수하면서 통일을 일궈낸 것 아닌가. 우리나라도 민족 있기에 그 문화(농업적, 정직, 열성, 자존심) 덕으로 이만큼 성장했다. 남북평화공동체 건설이 한국 근대화의 남은 과제다.
[그리하여 痛惜不禁을 聲明한다]
고도 성장기는 유엔이 종전 15년을 맞아 개발연대를 선언할 정도로 후진국들이 승전국, 특히 미국의 부를 의지하여 개발에 박차를 가하자는 지성인들의 외침이 거셌던 시기로 우리도 이에 적극 호응하여 고도성장에 매진했다.
그 시절 권부의 핵심인 청와대에서 또는 주요 경제부처에서 나아가 각부 각처에서 나름대로 압축 성장을 이끌고 거들며 숨 가쁘게 달려온 우리들은 잘 먹고 잘 살며 이제 희수를 넘어 미수를 바라본다. 그러나 이제 돌아보니 회한과 통석을 금할 수 없다. 그간에 지나쳤던 많은 신음들이 이제 더 크게 우리의 귓전을 맴돌고 놓쳤던 함정들이 더 크게 입을 벌리고 우리 앞으로 다가서기 때문이다.
첫째, 걷잡을 수 없이 벌어진 빈부격차—노동인구 2500만(인구의 절반) 중 2000만의 생활고
둘째, 극단적인 이익집단화로 공동체(이익공동체, 혈연지연공동체, 신앙공동체) 와해
셋째, 급속모방경제(기계시설, 부품, 원자재를 수입 충당고 가용재원을 재벌 중심으로 배정)로 외형에 걸맞은 기술
경영 경쟁력 취약
넷째, 특권 부패(불법소득) 만연으로 창의력 왜소화(정치권력 및 관권 추구 등 이권 개발에 소진)
다섯째, 부패청산 민족공동체 복원을 용공으로 몰아 공동체 경시풍조 조장(이기집단화 가속)
여섯째, 저 기술에 무역의존도 100%로 경제규모에 비해 구조적으로 내수경제 부진 및 고용효과 저조한데다 수출경쟁 심화로 고용절벽 임박
일곱째, 결과적으로 이 나라에서 인류의 이상인 공동체는 붕괴되고 있고, 극단적 이기주의로 사회는 점점 혼돈에 빠지고 있다. 최소한의 법치도 설 땅을 잃는다.
[그러하니 또 급선무는 정의평화공동체 복원이다]
--날로 증가하는 최고자살율, 최고흉악범죄율, 최고산재율을 억제하기 위한 최선 대책
첫째, 북한과의 평화공존 노력이 끽긴하다. 민족공동체는 가장 복원하기 쉽고 또 가장 비용이 적게 드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모든 나라가 민족공동체를 우선시 한다.
둘째, 나라의 창의력을 총 가동할 수 있는 정의평화공동체 구현을 통해 신기술 신제품 신산업이 태동할 때까지 신규 건설토목사업을 중지하고, 튼튼이 10만, 싱싱이 10만, 디딤이 10만을 양성하여 적폐공화국을 청산하고 아울러 고용절벽을 뛰어넘는다.
가. 급속성장으로 사회 구석구석에 안전사고가 도사리고 있다. 10만 명의 점검단을 가동해야 한다.
나. 그간의 성장 동력이었던 부패특권 대신 싱싱한 권력을 탄생시켜야 창의력 솟아난다. 10만 명의 청산 요원을 동원해야 한다.
다. 궁지에 몰린 노약자 무의탁자는 10만 명의 디딤이가 부축한다.
셋째, 농업 농촌은 우리 민족공동체의 뿌리이며 이를 평화산업공동체로 꽃피워야 한다.
농업을 입체화(기계화, 전산화, 실내화)해서 새 일자리를 만든다. 농지를 복원 가능한 산업(태양, 풍력, 발전 등)으로 적극 전용하고, 식용동물의 사육장으로 활용한다. 말 목장을 활성화하여 고급 스포츠로 육성하고 승마 특기생을 우대한다.
농민에 대한 감사헌금과 자녀교육비 면제 등으로 생활안정을 보장한다.
이상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그간 잘 먹고 잘 살아온 잘먹산이들이 밀알이 되기를 다짐한다.
작성자 김구학회 2020. 7. 17
노촌의 욕은 '사람 못될놈’
19년10월22일 밤 7시 서울 종로구 익선동골목 레스토랑 오마래에서 ‘노촌 이구영 추모음악회’가 열렸다.
일제와 분단사의 고통을 한몸에 안고 현대사 격랑을 헤쳐온 이구영(1920~2006)은 신영복에게 감옥에서 한학과 서예를 가르친 스승으로 유명하다.
이구영은 충북 제천에서 조선의 문장가 월사 이정귀의 후손이자 의병활동가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한학을 배우다 청년시절 상경해 기독교청년회(YMCA) 청년회 학교 중등부를 거쳐 연희전문학교에서 잠시 수학한데 이어 황한의학원에서 한의학을 공부하면서 사회주의를 접한 뒤 항일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고향의 친구들과 함께 ‘월악동지회’를 조직해 독서 토론을 하면서 항일 운동을 시작해 서울 영등포에서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경기도 포천군 백운동을 근거지로 조직한 빨치산 활동에도 가담했다. 일제 치하였던 1944년엔 독서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8개월간 옥살이를 하며 고문을 당했다.
이구영은 한국전쟁 때에는 서울에서 토지조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다가 패주하는 인민군과 함께 월북했다. 이어 평북 강계의 피난지에 세워진 병원에서 환자들을 치료하고 회복된 환자들을 가르쳤으며, 휴전 후에는 도서관에서 일하다가, 중앙당에 소환되어 대남 공작원 교육을 받고 1958년 7월 남파되었다가 체포되었다. 이구영은 접선에 실패하고 부산의 여인숙에 숨어있던중 일제 시대 그를 잡아 고문했던 형사에게 발각돼 체포됐다.
이구영은 22년간 감옥에 있다가 1980년 출소했다. 이어 이문학회를 설립해 한학을 가츠쳤고, 호서의병사적과 의병운동사적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사망 전 소장하고있던 독립운동 관련 자료를 충북 제천의 의병도서관에 기증했다. 감옥에서 이구영에게 서예를 배운 심지연 교수는 <역사는 남북을 묻지 않는다-격랑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살아온 노촌 이구영 선생의 팔십년 이야기>라는 책에서 노촌의 파란만장한 삶을 조명한 바 있다.
이날 추모음악회가 열린 오마래는 이구영이 생전에 살던 집으로, 지금은 외손자 이식열씨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이다. 또한 이구영의 제자들이 여전히 이문학회 주최의 서당을 운영하는 곳이다. 오마래에선 매주 월요일 저녁 7~9시엔 고교교사인 배기표 선생님의 지도로 <장자> 원문을 읽고, 매주 목요일 저녁 7~9시엔 김영복 케이옥션 고문의 지도로 <자치통감>을 읽는다. 둘은 모두 이구영 생전에 한학을 배운 제자들이다. 김영복 고문은 <케이비에스>의 <진기명기>에 출연해 명품들을 감정하고 있고, 배기표 선생님은 신영복을 따르는 이들이 만든 <더불어숲> 대표이기도 하다.
제사는 이문학회 공부방에서 봉행됐다. 이 공부방은 더불어숲의 산파였던 고 이승혁이 ‘더불어숲’이란 1인 출판사를 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 방엔 방엔 이구영이 쓴 서예 글씨 강건중정(剛健中正·강직하고 건전하고 중립하고 공정할 것)과 금성옥진(金聲玉振· 지혜와 덕을 조화롭게 갖추라), 신영복이 쓴 춘풍추상(春風秋霜·남을 대할 때에는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하고, 자신에게는 가을 서리처럼 엄격하게 한다) 등 세점의 편액이 걸려 있었다.
이날 추모 음악회에선 제자들이 제사를 지낸뒤 음악회가 이어졌다. 찬조 출연한 음악회엔 가수 김광석이 자신의 노래와 고 김광석의 구슬픈 곡조를 이어불러 참석자들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또 이구영의 제자인 허만석 전 여행사 대표는 스승을 눈물로 회고하며 섹스폰을 연주했다. 이어 소프라노 섹스폰 윤맹전, 기타를 곁들인 김상현의 노래, 권혜진의 노래 공연이 이어졌다.
이구영의 제자들은 10여년간 기일에 제사만 지내다가 지난해부터 기일에 맞춰 추모음악회를 하고 있다. 이날 음악회엔 이문학회 회원인 윤창원 서울디지털대 교수, 이성용 유브레인 대표와 더불어숲 회원들과 더불어이승혁의 정한진 대표 등 50여명이 함께 했다. 조붕구 코막중공업 대표는 추모제 참석자들에게 먹거리 제공을 자청하기도 했다.
추모제가 무르익자 고인에 대한 추모담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오랫동안 스승을 가깝게 모신 제자들의 회고담들은 아직도 다 드러나지않은 ’현대사 인물’에 대한 퍼즐 조각을 맞추었다. 제자들은 남에서 두딸을 두고 월북한 뒤 남쪽의 가족들과 헤어진 뒤 이산의 아픔을 안고 살았고, 북에서 다시 아내와 아들 딸을 두고 남하해 다시 북의 가족과 이산의 아픔을 겪으며 북의 가족들이 고통을 겪을 것을 두려워해 전향하지 않은 이구영의 안타까운 삶을 이야기하며 눈시울을 적셨다. 스승의 아픔을 알기에 허만석과 이승엽 등 제자들이 스승의 생전에 연길까지 가서 북의 가족과 접촉을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김영복 고문은 “노촌 선생님은 어려서 독선생을 아예 모셔와 집에서 한학을 공부했는데, 혼자 공부할 수가 없어서 동네 아이들을 데려와 함께 배웠다”며 “당시는 정해진 범위를 다 암송하면 나가서 놀 수 있었는데 노촌 선생님은 영민해서 스무번 정도 읽으면 다 외워 늘 일찍 혼자 나가놀곤했는데, 훗날 그 때 머리가 둔해 100번씩 읽고서야 외웠던 친구들이 더 오래도록 글귀를 기억하는 것을 보고, 공부란 빠르게 하기보다는 그렇게 우직하게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셨다”고 말했다. 김 고문은 또 “노촌 선생님은 평생 ’민중’을 이야기했지만, 자신은 양반의 자제로서 귀족적인 면모를 감출 수 없었다”며 “많이 가진 집의 자제로서 어려서부터 보고 배운 바가 있어서 이재에도 밝았고, 미래를 읽는 눈도 있었다”고 말했다. 배기표 교사는 “노촌선생님은 책에 나와있지않은, 옛어른들로부터 전해들은 숱한 이야기를 해주곤했다”면서 “형가가 진시황을 암살하려던 대목을 이야기할때는 마치 눈앞에서 그 일이 벌어지는듯 생생하게 말하곤 했다”고 전했다.
이구영의 외손자 이식렬 오마래 대표는 이구영의 출소후 한집에 모시고 살면서 직접 보고 들은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해주었다. 그는 “외할아버지는 15살때 부모님 몰래 하천부지를 개간해 과수원을 만들어 마을의 못하는 사람들이 벌어먹고 살 수 있게 도왔다”면서 “훗날 박정희가 새마을운동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헌마을운동을 했다’고 한다”고 전했다. 이구영의 호 노촌은 충주호를 만들 당시 수몰됐던 고향마을이 이름이다. 그는 또 “외할아버지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는 땅들은 있었지만,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부유했다고 볼 수 없는 반면 안동김씨인 외할머니가 부자여서 시집을 오면서 귀한 그림과 도자기들을 가져와 홍제동 집에 살때까지 있었는데, 사찰을 나온 형사가 그 귀중품들을 자기 마음대로 들고나가면 외할머니가 부르르 떨곤했다”고 말했다. 대학 91학번인 그는 “외할아버지에게 ‘왜 사회주의자가 됐느냐’고 물었더니, ‘일본놈들 잡으려고 그랬지’라고 답했다”며 “한번은 김일성이 어떤 사람이냐고 묻자, ‘미쳤지. 전쟁을 일으켜 그많은 사람을 죽게했으니’라고 답했다”고 전했다. 그는 “외할아버지는 일제 시대 때 어깨를 뒤로 꺽어 공중에 매달아놓고, 물고문을 하고, 손톱 밑을 날카로운 것으로 찌르고, 성기까지 찌르는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면서 “남한에서 잡혔을 때 다시 그런 고문을 당하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담요에서 밤새 실을 뽑아 목을 맸으나 실들이 끊어지는 바람에 자살에 실팼다고 한다”고 전했다. 제자들은 조선의 마지막 선비였던 이구영이 한 가장 큰 욕은 ‘사람 못될 놈’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한겨레 2019.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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