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평범성/ 이산하 지음/창비·9000원
“‘한라산’은 내게 평생의 멍에였다”
한라산’의 이산하 시인 신작시집 출간
“내가 시를 쓰는 이유는 잘 지기 위해서다”
시인 이산하(61)는 약관 스물일곱이던 1987년 제주 4·3의 비극적 진실을 담은 서사시 <한라산>을 발표한 일로 붙잡혀가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1년 남짓 옥살이까지 해야 했다. 담당 검사가 황교안 전 국무총리였다. 당시 미국 펜클럽 회장이었던 수전 손택은 이산하를 미국 펜클럽 명예회원으로 위촉하고 이듬해 서울에서 열린 국제 펜대회에 참석차 방한해서도 구치소로 그를 면회하려 했으나 정보 당국에 의해 차단당하기도 했다.
4·3항쟁 70주년을 기념해 2018년에 복간한 <한라산> 후기에서 이산하는 “<한라산>은 비명이자 통곡 (…) 내 27살 청춘의 암약”이었다며 “<한라산> 이후 내 삶은 죽은 자가 산 자를 운구하는 것 같은 삶이었다”고 썼다. 2일 오후 서울 마포구 출판사 창비 사옥에서 만난 그는 “<한라산>은 내 평생의 멍에였다”고 잘라 말했다. 그 멍에는 동시에 ‘명예’이기도 하지 않았겠냐는 질문에는 “그 때문에 덕 본 건 하나도 없다”고 되받았다. “8년 전에는 서북청년단으로 추정되는 자에게 백색 테러를 당해 서른 바늘이나 꿰매고 몇 달간 입원을 해야 했고, 그 때문에 오랫동안 애써 잊고자 했던 고문의 악몽도 되살아났다. 아직도 수시로 우울증 약을 먹는다. 지난 10여년간 거의 자폐아처럼 살았다”고 부연설명했다.
“요즘 ‘다음 차례는 너’라는 듯 지인들의 부고문자가 쌓인다./ 내 눈에는 내 잉여목숨의 고지서로 보인다./ 허공이 초점 없이 나를 내려다본다./ 40대 중반 서교동 골목길의 교통사고와/ 50대 초반 합정동 골목길의 백색테러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반품된 후 모든 게 허망해지고/ 오랫동안 애써 부정하고 망각했던 고문의 악몽마저 되살아나/ 날마다 피가 하늘로 올라간다./ 우울증 알약으로 버티며 내 살점을 베어 멀리 이송하지만/ 그마저 반품되자 벼랑의 꽃처럼 더욱 조급하고 초조해진다.”
제주 4·3항쟁을 다룬 서사시 <한라산>으로 고문을 당하고 옥고를 치른 이산하 시인이 22년 만에 신작 시집 <악의 평범성>을 내놓았다. 2일 오후 서울 마포구 창비 건물에서 만난 그는 “시를 쓰는 일은 흩어진 유골을 모아서 온전하게 만드는 일과 같다. 나는 여전히 유배 상태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그가 <천둥 같은 그리움으로> 이후 22년 만에 낸 새 시집 <악의 평범성>에 실린 작품 ‘버킷리스트’ 앞부분이다. 이 독특한 시의 뒷부분은 “수배 4년 동안 나를 ‘은닉’ 혹은 ‘묵인’해준 119명의 실명”을 가나다 순으로 적었다. “고마움을 잊지 않고자” 해서라고 시인은 덧붙였다. 여기에는 나병식, 박영근, 박종철, 전우익, 채광석 등 작고한 이들도 여럿 보이는데, 시인 기형도의 이름이 유독 눈길을 끈다. 기형도 이야기는 ‘멀리 있는 빛’이라는 별도의 시로도 시집에 들어 있다. 그가 감옥에 있을 때 박경리 소설 <토지> 한 질을 넣어 주었으며, 석방 뒤 그가 속한 동인 시운동이 마련한 환영회에서는 김영동의 노래 ‘멀리 있는 빛’을 축가로 불러주었다는 내용이다. 2일 인터뷰에서 ‘친구 기형도’에 관해 좀 더 청해 들었다.
“동갑인 기형도와는 대학 신입생 때 친구의 친구로 처음 만나 친해졌다. 짙은 눈썹에 기타도 잘 치고 목소리도 좋아서 노래를 정말 잘했다. 술은 잘 못했지만, 자신도 글을 쓴다는 사실을 수줍어 하면서 알려주더라. 내가 그에게 박상륭 선생의 소설 <죽음의 한 연구>를 권해주기도 했다. 수배 시절에는 당시 중앙일보 기자이던 그와 비밀 인터뷰를 했는데, 신문에는 나가지 못하고 나중에 내가 구속된 뒤에야 기사로 실렸다.”
<악의 평범성>은 20여년 세월을 두고 쓰인 작품들을 모은 시집이지만, 그 기조는 일관되게 무겁고 어둡다. 알다시피 악의 평범성이란 유대인 학살에 가담한 나치 장교 아이히만을 가리켜 한나 아렌트가 쓴 표현. 홀로코스트와 같은 악의 집행자들이 성격 이상자들이나 반사회적 악인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하고 심지어 모범적이기까지 한 시민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시집에는 이 제목을 지닌 연작 세 편과 아우슈비치 등 유대인 수용소 이야기를 다룬 시들, 6·25 전쟁과 5·18 광주학살, 세월호 참사 등 현대사의 아픔을 천착한 작품들이 실렸다. “요즘 시집은 가볍고 달콤한 시구 같은 제목을 많이 쓰던데, 나는 우리가 그동안 감춰왔던 어둠에 대한 직격탄 같은 묵직한 제목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했다”고 이산하 시인은 설명했다.
“세상은 불치병에 걸렸다. 못 고친다. 인간과 구조 자체가 불치병에 걸렸다. 내가 2014년과 2018년 두 차례에 걸쳐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나치 수용소들을 답사했다. 가서 보니, 나치 간부들이 모두 집에 가면 평범한 가장으로서 자식들을 걱정하고 가정의 행복을 중요시했던 착한 사람들이더라.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저 가끔씩 인간이 될 뿐이다.”
22년 만에 신작 시집 <악의 평범성>을 낸 이산하 시인. 시집에 실린 시 ‘대나무처럼’에서 “60년 만에 처음으로/ 단 한 번 꽃을 피운 다음/ 숨을 딱 끊어버리는/ 그런 대나무가 되고 싶다”고 썼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5월 광주에서 희생된 주검들 사진과 함께 ‘에미야, 홍어 좀 밖에 널어라’ ‘육질이 빨간 게 확실하네요’ 같은 댓글을 올려 놓거나, “세월호 아이들이 하늘의 별이 된 게 아니라 진도 명물 꽃게밥이 되어 꽃게가 아주 탱글탱글 알도 꽉 차 있답니다~”는 글을 꽃게 사진과 함께 올려 놓은 페이스북 글 그리고 그에 동조하는 ‘좋아요’와 댓글을 보며 시인은 절망한다.
“사진을 올리고 글을 쓰고 환호한 사람들은/ 모두 한 번쯤 내 옷깃을 스쳤을 우리 이웃이다./ (…) / 가장 보이지 않는 범인은 내 안의 또다른 나이다.”(‘악의 평범성 1’ 부분)
시인은 “4·3 막바지에 죽을 줄 알면서도 산으로 올라갔던 청년들처럼, 내가 시를 쓰는 이유도 잘 지기 위해서다. 이길 가능성은 없다. 조문하듯 시를 쓰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를 찍어라./ 그럼 난/ 네 도끼날에/ 향기를 묻혀주마.”(‘나무’ 전문)
노무현 전 대통령 1주기 추모시로 청탁 받았지만 너무 짧다는 이유로 채택되지 못했다는 시 ‘나무’는 패배와 죽음에서 건져올릴 수 있는 최소한의 희망의 근거를 보여준다. 지금 이산하 시인은 박정희 유신 시절 사법살인으로 악명 높은 인혁당 사건을 다룬 서사시를 쓰는 한편, <한라산> 필화 사건 재심을 준비하고 있다. 상처는 정면으로 보지 않으면 낫지 않는다는 정신과 의사의 조언에 따른 결정이다. 인터뷰를 끝내고 돌아온 날 밤, 시인이 시 같은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내가 20년째 사는 반지하 집의 부엌 쪽창을 열면 행인들의 발만 보이고 바닥에 떨어진 꽃만 보인다. 집 앞에 커다란 목련나무가 있어서 그 뿌리를 베개 삼아 베고 잔다. 집에 들어가다가 멀리서 보면 목련나무 꽃이 꼭 조등처럼 보인다. 꽃이 동백꽃처럼 툭툭 떨어지는 소리도 들린다. 봄이면 나는 매일 상주가 된다. 불쑥불쑥 ‘이륭’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본명이 이상백인 그는 <죽음의 한 연구>의 소설가 박상륭을 흠모해 ‘이륭’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한 적이 있다. ‘이산하’의 이름으로 <한라산>을 쓰기 전, 시운동 시절이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60년 경북 영일 출생 ▶87년 제주4.3사건 다룬 장시 '한라산' 필화사건으로 구속된 뒤 절필
경희대 국문과를 나온 시인은 82년 동인지 「시운동」으로 공개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99년 첫시집 '천둥 같은 그리움으로' 출간 ▶현 도서출판 이레 주간.국제인권센터 편집위원장
한라산
고사목
악의 평범성
동백꽃
스타 괴물
히야신스
숨은 꽃
바닥을 친다는 것
나는 물방울이었다
'시인의 경지에 이른 과학자상’
돌탑
우리를 과연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가?
장례식의 민영화
수행
행복의 그늘
붉은 립스틱
유언
지난번처럼
멀리 있는 빛
페르시아의 흠
크리스마스 선물
디지털 촛불
이 모든 것은
아우슈비츠 오케스트라
햇빛 한줌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종소리
강
서로 괴물이 된다-불편한 과거사
토끼훈련
마지막 연주
아우슈비츠의 생존비결
비유의 상처
영혼의 목걸이
노란 넥타이
찢어진 고무신
엥겔스의 여우사냥
이것이 인간이다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
인디언에게 없는 말들
촛불을 패러디한 시
친구
용서
너에게 묻는다
사람이 된 강
혈서
E=MC2
인생목록
열흘 붉은 꽃 없다
먼지의 무게
마당을 쓸며
산수유 씨앗
벽오동 심은 뜻은
가장 먼 길
미자의 모자
한라산
-서시
혓바닥을 깨물 통곡 없이는 갈 수 없는 땅
발가락을 자를 분노 없이는 오를 수 없는 산
백두산에서
한라산에서
지리산에서
무등산에서
그리고 피어린 한반도의 산하 곳곳에서
민족해방과 조국통일을 위하여 싸우다
장렬히 산화한 모든 혁명전사들에게
이 시를 바친다.
1.
지금으로부터 어언 120여 년 전
미국과 유럽 제국주의가 세계의 약소국들을 침략해
식민지쟁탈전을 벌이던 약육강식의 19세기 후반
프랑스 해적선이 대동강을 붉은 피로 물들이고
미국 해적선이 먼 훗날 한국현대사의 무덤을 파듯
평양의 왕릉을 도굴해 조선국왕의 수염을 뽑고
일본이 다시 강화도까지 침략해 쇄국의 빗장을 부수자
이제 조선반도는 영국, 독일, 러시아까지 몰려와
마지막 동북아의 교두보로 치열한 각축장이 되어
서양제국주의 맹수들에게 온몸을 물어뜯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목에 이빨이 박혀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아플 권리도 약탈당하고 죽을 권리도 약탈당하고
슬플 권리마저 약탈당한 긴 긴 세월 동안
무당에게 홀린 ‘붉은 여우’의 국정농단으로
나라살림은 거덜 나고 민초들은 내일을 기약할 수 없었다.
앉으나 서나 고통밖에 잃을 게 없는 민초들은
이왕이면 벌떡 일어나 서서 죽기로 결심했으니
황토현에서 치솟아 우금치 고개에서 장렬하게 꺼져버린
동학농민혁명의 불길이 그것이요,
멀리 바다 건너 제주도 산방산의 들녘을 삽시간에 불태운
‘이재수 난’의 들불이 그것이다.
그러나 외국 군대를 끌어들여 장수들이 참수되고
민초들이 총탄에 겹겹이 쓰러져 겹겹이 포개지자마자
한일합방으로 나라 잃고 하염없이 피눈물만 삼키다가
어느 날 도둑처럼 불쑥 찾아온 1945년 불볕 여름
일제식민지 36년의 치욕과 악몽이 끝나기도 전에
한 손엔 빵과 또 한 손엔 해방군의 탈을 쓰고
발톱까지 무장한 채 이 땅을 점령한 미제국주의자들은
마침내 순결한 조선의 푸른 산하를
두 토막으로 분질러 놓았다.
그리고 다시 40여 년의 기나긴 세월이 흘렀건만
일본총독부가 미국대사관으로 바뀌었을 뿐
미제의 창살 없는 감옥
이 식민지 산하는 조금도 변한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미제국주의 침략사 120여 년
다시 써야 할 피어린 민족해방투쟁의 한국현대사
압제의 사슬을 이빨로 뚝, 뚝 끊으며
붉은 피로 얼룩진 그 장엄한 역사의 수레바퀴를
우리 어찌 잊을 것인가.
바람 부는 대로 쓰러지는 풀잎이 아니라면
결코 그들의 노예가 아니라면
우리 어찌 보고만 있을 것인가.
2.
이 땅은 아메리카의 한 주(州)
그들의 병영에서 짐승처럼 사육되었던 수많은 날들
그 수많은 신음의 밤들을 누가 잊을 것인가.
누가 잊으라고 하는가.
1948년 4월 3일 ‘제2의 모스크바’
밤마다 먼저 간 동지들의 피를 묻고
살을 묻고 뼈를 묻는 혹한의 한라산
그 눈 덮인 산하
붉은 피를 흘리며 끝내 숨져간
이름 없는 혁명전사들의 끊어질 듯 끊어질 듯
끝내 이어지는 저 붉은 핏자국을 누가 잊는가.
누가 잊을 것을 강요하는가.
동상으로 썩어문드러진 발가락을 자르고
뼈를 깎는 모진 고문과 추위에
여성전사들의 생리마저 얼어붙는 밤
그들은 기어이 갔다.
총알 박힌 다리를 절룩거리며
동지들의 어깨에 매달려
진지로 돌아가다
진지로 돌아가다
끝내 쓰러져버린 그들은 갔다.
아-
기어이 갈 곳으로 가고야 마는가.
혓바닥을 깨물 통곡 없이는 갈 수 없는 땅
발가락을 자를 분노 없이는 오를 수 없는 산
제주도의 혁명전사들은 그렇게 갔다.
미제의 각을 뜨다가
적들의 심장에 불을 지르다가
끝내 다 뜨지 못한 채
끝내 다 지르지 못한 채
한줌 피 묻은 뼛가루로 날아갔다.
적과 더불어 싸워서 죽은
우리의 죽음을 슬퍼 말아라.
깃발을 덮어다오.
인공(人共)의 깃발을
그 밑에 죽기를 맹세한 깃발
….
3.
검은 상복을 입고 40년만에 처음 찾은 한라산
내가 나를 운구하듯 걷는 이 학살의 숲은
조금도 변한 것이 없다.
산등성이마다 뼛가루처럼 쌓여있는 흰 눈이며
나뭇가지마다 암호를 주고받는 새들의 울음소리며
삐라처럼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에도
깜짝 놀라 피했던 새가슴이며
어머니의 젖가슴 같은 오름과 무덤마다
자지러질 듯 반짝이는 별들이며
청보리 일렁이는 생가슴마다 차곡차곡 돌 쌓아
멀리 수장하러 배 떠났던 바다며
굶주린 배를 움켜쥔 채 허겁지겁 땅을 파헤쳐
씹고 또 씹었던 이 풀뿌리와 나무껍질이며
마지막 남은 낙엽마저 가솔린 냄새를 풍기며 불탔던
이 학살의 숲은
그러나 아직도 총소리로 가득하다.
움직이는 것은 모두 우리의 적이었지만
동시에 그들의 적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보고 쏘았지만
그들은 보지 않고 쏘았다.
학살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날
하늘에서는 미군 정찰기가 살인예고장을 뿌리고
바다에서는 미군 함대들이 경적을 울리고
지상에서는 미군 장교들과 토벌대가 총칼을 휘두르며
모든 처형장을 진두지휘하던 그날
한국판 ‘KKK단’인 서북청년단이 아편에 취한 채
한림의 금악리를 빨갱이 마을로 지목해
80여 명의 남녀 중학생들을 금악벌판으로 끌고 가
집단총살을 하고 바다에 수장한 다음
서귀포 정방폭포와 천지연폭포로 몰려가
빨치산의 젊은 아내와 딸들을 발가벗겨
나무와 바위에 묶어 표창연습으로 삼다가
마침내 모두 대검으로 젖가슴을 하나씩 천천히 도려내
폭포 속으로 던져버린 그날
석양에 물든 사라봉 봉수대 동백숲에서는
서청에 뒤질세라 더 포악해진 반공청년들이
하나님을 외치며 열아홉 살 처녀들을 윤간해 생매장하고
서귀포 임시감옥에서는 친일경찰이
빨치산과 그 가족들의 손톱과 발톱 밑에 못을 박고
일제 뺀찌로 혓바닥 뿌리까지 뽑아버린 그날
바로 그날 관덕정 인민광장에서는
온몸이 총탄에 맞아 벌집으로 변한 사람
머리가 돌과 소총 개머리판에 맞아 함몰된 사람
복부가 대검에 찔려 창자가 삐져나온 사람
음부에 긴 쇠꼬챙이가 꽂혀 있는 사람
손톱과 발톱과 이빨과 혓바닥이 모두 뽑힌 사람
손바닥과 발등에 대못이 박혀 있는 사람
두 젖가슴이 모두 잘려나간 사람….
그런 사람들이, 한때는 사람이기도 했던 그런 빨치산들이
십자가 나무기둥에 묶여 나란히 전시되어 있었다.
“이 간나새끼들과 에미나이들이 바로 빨갱이들이다!”
“폭도 빨갱이들의 종말은 이렇다!”
강제로 끌려나와 광장에 운집한 도민들을 향해
서북청년단과 대동청년단 같은 미친(美親)놈들이
팔짱 낀 미군 장교들에게 서로 충성이라도 하듯
니뽄도로 시체들을 쿡쿡 쑤시며 소리쳤다.
처참한 모습에 여기저기서 도민들이 말을 잃고 실신했다.
부모들은 손바닥으로 아이들의 두 눈을 가리기 바빴고
간신히 숨을 몰아쉬며 속으로 속으로만 어림잡았다.
저건 김운민
저건 박남해
저건 김병남
저건 양미선
저건 남 진
저건 현애란
저건 이덕구….
통곡도 오열도 없었다.
도대체 사람이어야 통곡이라도 하지,
그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결코 죽은 사람도 아니었다.
그것은 한낱 푸줏간에 걸린 고깃덩어리에 불과했다.
한 개의 총알이 가슴에 박힌 것은
차라리 행복한 죽음이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모래바람이
한라산을 미친 듯이 뒤흔들었다.
“미군은 즉각 철수하라!”
“이승만 매국도당을 타도하자!”
“조국통일 만세!”
“제주 빨치산 만세!”
붉은 저녁노을이 꽃상여 따라 관덕정 위로 지고
붉은 파도가 바람 따라 만장기처럼 출렁이며
사라봉 지나 성산 일출봉을 돌다가 피를 토하고
산방산 지나 송악산을 돌다가 다시 피를 토하고
그렇게 제주바다를 한 바퀴 돌면서 피를 토한다.
40년 전의 산은 다시 한 번 빈산이 되고
그 빈산에 그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살아도 흘러가고
죽어도 흘러가고
마침내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흘러갔다.
죽은 자들은 말이 없고 산 자들은 더 말이 없는
이 참혹한 한라산
마지막 몇 사람이 기적처럼 살아
이젠 상주가 되어 걷는 이 학살의 숲
옆에서 동지들이 쓰러져 시체가 쌓이고 쌓여도
오래 슬퍼할 시간이 없었던 이 겨울 숲
이제 이 숲은 누가 지키며
지키는 자는 또한 누가 지킬 것인가.
빨갱이라서 죽은 게 아니라 죽어서 빨갱이가 되었던 세월
앞으로도 갈 수 없었고 뒤로도 물러설 수 없었던 세월
죽은 자가 산 자를 운구하듯
운구 된 자가 마지막 생의 수순을 밟듯
걷고 또 걷지만 여전히 맴도는 한라산
동지들이 토벌대의 삽자루에 생매장 당한 이 숲속
동지들이 토벌대의 작두에 목이 잘린 이 숲속
동지들이 토벌대의 총칼에 쫓겨 몸을 던진 이 절벽
이 아득한 숲을 내 어찌 벗어나리.
이 지극한 절벽을 내 어찌 벗어나리.
생의 절벽은 곧 나의 궁극이요
나의 궁극은 곧 생의 절벽일지니
그 백척간두에서 내가 나를 위해 살지 않는다면
그 백척간두에서 내가 나를 위해 죽지 않는다면
과연 누가 나를 위해 한 발짝 진일보할 것인가.
내가 또한 나 자신만을 위해 진일보한다면
과연 나의 존재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과연 나의 존재근원은 어디서 비롯된 핏자국이란 말인가.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
압록강 굽이굽이 피어린 자욱….
올해도 한라산의 물길은 여전히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고
흘러가면서 스스로 부서져 길을 만들 것이니.
그렇게 낮은 방향으로만 흘러흘러 길을 만들 것이니.
능히능히 그러할 것이니.
해마다 꽃 필수록 아픈 4월은 어김없이 다시 오는데
누가 그날의 제주바다를 기억하지 않는가.
누가 그날의 한라산을 추억으로만 기억하는가.
4.
돌려주자.
오늘도 노란 유채꽃이 칼날을 물고 잠들어 있는
아- 피의 섬 제주도, 그 4․3이여.
우리의 심장에서 피어나는 이 진달래꽃을
그 누가 꺾을 수 있으랴.
돌려주자.
친일매국노의 대를 이은 친미매국노들을 죽창에 꽂아
친일자본가의 대를 이은 친미자본가들을 횃불에 태워
그들에게 돌려주자.
그리고 꽃 피는 광주코뮌의 전사들을 학살한
저 피 묻은 5월의 원수들을 찢어서
갈가리 찢어서
‘조국 아메리카’의 후예들에게 돌려주자.
그리하여 역사가 고발하듯
태생부터 수천만의 인디언들을 학살하더니
태생부터 수백만의 흑인노예들을 학살하더니
그것도 모자라 태평양 건너 한반도까지 서부개척을 하더니
멀쩡한 땅을 남북으로 갈라 늙은 허수아비를 조종하더니
늙은 김구를 시켜 젊은 김일성을 폭탄테러로 없애려하더니
수백만의 양민들을 빨갱이로 몰아 무차별 살상하더니
평양 상공을 날며 움직이는 것들은 모조리 총질을 해대더니
대동강에서 압록강까지 네이팜탄으로 불태워버리더니
나치 같은 홀로코스트로 북녘을 병영국가로 만들더니
마침내 성조기의 51번째 별을 그리듯 휴전선을 그어
자유와 평화라는 이름으로 남한을 반공인질로 잡아
우리가 간신히 다시 일어나 간절히 다시 꽃 피울 때마다
가차 없이 민주주의의 동맥을 끊어온 너희 양키들은 들어라.
우리 한반도 인민들의 피가 더욱 붉은 것은
우리의 사상이 빨갱이에 물든 탓이 아니라
바로 너희 학살의 원흉들 때문임을
바로 너희 학살의 부역자들 때문임을
그리고 침묵하라.
어둠과 야만의 20세기, ‘자비로운 학살’을 주장하며
세계 곳곳의 전쟁터와 대량학살의 현장을 지휘하고도
국제법상 단 한 번도 전범으로 재판 받지 않은
세계 악의 축이자 근원인 우리의 가증스런 ‘혈맹우방’이여.
당신들이 발톱을 감춘 채 인간의 정의를 외치는 한
당신들이 총구를 감춘 채 인류의 평화를 외치는 한
우리는 잠들 수가 없다.
당신들의 춤추는 칼날 위에서
우리는 결코 잠들 수가 없다.
그 누구도 잠들 수 없는 이 해방의 산하에
아직도 펄펄 끓는 노동자 농민들의 붉은 피가 있어
아직도 미제와 맞짱 뜨는 세계 유일의 동지가 있어
민족해방의 이름으로
조국통일의 이름으로
저 간악한 미제의 각을 뜨고
저 미친(美親) 매판자본의 심장에 불벼락을 안겨주자.
가슴에 폭탄 한 다발씩 품고 적들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아직도 눈 감지 못한 동지들의 원한을 갚아주자.
그리하여 노동자 농민들의 여윈 손들이
마침내 혁명의 숲을 이룰 때까지
결코 용서하지도 말고 결코 잊지도 말자.
5.
거듭 말하노니
한국현대사 앞에서는 우리는 모두 상주이다.
오늘도 잠들지 않는 남도 한라산
그 아름다운 제주도의 신혼여행지들은 모두
우리가 묵념해야 할 학살의 장소이다.
그곳에 뜬 별들은 여전히 눈부시고
그곳에 핀 유채꽃들은 여전히 아름답다.
그러나 그 별들과 꽃들은
모두 칼날을 물고 잠들어 있다.
고사목
바로 저기가 정상인데
그만 주저 앉고 싶을 때
거기 고사목 지대가 있다
무성했던 가지와 잎 떠나 보내고
몸마저 빠져나가 버린
오직 혼으로만 서 있는
한라산의 고사목들
천둥 같은그리움인 듯
폭설 같은 슬픔인 듯
죽어서도 썩지 앉는다
악의 평범성
“광주 수산시장의 대어들”
“육질이 빨간 게 확실하네요.”
“거즈 덮어 놓았습니다.”
“에미야, 홍어 좀 밖에 널어라.”
1980년 5월 광주에서 학살된 여러 시신들 사진과 함께
어느 인터넷 사이트에 올라 있는 글이다.
“우리 세월호 아이들이 하늘의 별이 된 게 아니라
진도 명물 꽃게밥이 되어 꽃게가 아주 탱글탱글
알도 꽉 차 있답니다~.”
요리 전의 통통한 꽃게 사진과 함께
페이스북에 올라있는 글이다.
이 포스팅에 ‘좋아요’는 500여 개이고
감탄하고 부러워하는 댓글은 무려 1500개가 넘었다.
‘좋아요’보다 댓글이 더 많은 경우는 흔치 않다.
사진을 올리고 글을 쓰고 환호한 사람들은
모두 한 번쯤 내 옷깃을 스쳤을 우리 이웃이다.
문득 영화 ‘살인의 추억’ 마지막 장면에서
비로소 범인을 찾은 듯 관객들을 꿰뚫어보는
송강호의 날카로운 눈빛이 떠오른다.
범인은 객석에도 숨어 있고 우리집에도 숨어 있지만
가장 보이지 않는 범인은 내 안의 또다른 나이다.
동백꽃
내가 태어나 처음 받은 저자 사인본은
고교 시절 법정스님이 직접 준 ‘무소유’였다.
그때 순천 조계산 중턱의 불일암 사립문 옆에는
작은 가지에 붉은 동백꽃들이 피어 있었다.
“지리산에서 내려온 물이 화개에서 섬진강을 만나는데
강폭이 좁아져 소용돌이치는 지점을 여울이라고 하지.
그런데 그 여울이 가장 격렬하게 소용돌이 칠 때가
햇빛이 가장 찬란하게 빛난다네.
문득 햇빛에 부서지는 그 찬란한 순간이 바로
백척간두에서 한 발 내딛는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지.
대하장강이 파란만장한 우리의 현대사라면
여울은 피와 뼈가 가장 많이 묻힌 통곡의 현장이겠지.
몇 해 전에 떠난 젊은이들도 거기 묻혀 있을 테고.”
다가올 듯 다가올 듯 멀어져가는 얘기들을 엿들은 것 같았다.
그러나 스님의 살얼음 같은 은유들이
스님의 무덤 같은 눈물에 압도되었던 것만큼은 확실했다.
얼마 전 서초동에서 오래 전 동시에 떨어진
8개의 동백꽃들이 호명되었다.
"피고 도예종, 서도원,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송상진, 우홍선, 여정남에 대해 판결한다.
원심을 모두 파기하고 피고들 전원무죄를 선고한다."
고교 때 언뜻 본 그 동백꽃들의 의미를 나는
30여 년이 지나서야 깨달았고
스님이 숨지기 전 마지막으로 본 꽃도 그 동백이었다.
* 계간지 <황해문화> 게재(2020년 봄호)
스타 괴물
초보운동권 시절 한 국방색 야전잠바 선배가
담배연기 자욱한 카페 밀실에서
여러 낯선 선배 ‘동지’들을 가리키며
이쪽은 ‘투스타’ ‘쓰리스타’이고
저쪽은 ‘아직 완스타’라고 엄숙하게 소개했다.
나는 두 번 놀랐다.
한 번은 깜빵 갔다 온 횟수에 따라
평소 경멸하던 육사 출신 장군들의 계급장대로
‘완스타’ ‘투스타’로 부른다는 것과
또 한 번은 ‘아직’이라는 표현 때문이었다.
세상이 적당히 좋아진 수십 년 뒤
난 그 야전잠바들의 선견지명에 또 놀랐다.
별의 숫자만큼 입신양명이 증명되었던 것이다.
멀리 내다보고 일찍부터 스펙을 쌓은 그들에게
영화 속의 ‘기생충’이 외쳤다, ‘리스펙-!’
어렴풋이 기억을 독점한 상이군인들이 떠오른다.
수많은 추모제마다 펄럭이는 기억투쟁은
처음엔 점이었다가 선을 그어 면으로 확장되더니
마지막엔 말뚝을 박아 깃발 대신 별들을 달았다.
촛불을 삼킨 스타 괴물들이 지상을 배회하고 있다.
* 인문교양 월간지 <유레카> '이산하 시인의 짧은 시' 연재(2020년 3월호)
히야신스
이라크에서 원시인들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고대 문명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의 한 동굴이었다.
네안데르탈인 소년들과 여자들의 유골이 나왔고
유골 주위를 둘러싼 먼지 같은 꽃가루도 나왔다.
뼈들은 모두 양손으로 자기 머리를 감싼 형태였다.
얼핏 조만간 다시 태어날 태아의 자세 같기도 했고
얼핏 더 이상 슬프지 않을 영혼의 자세 같기도 했고
얼핏 죽어서도 가장 안전할 어머니의 자궁 같기도 했다.
먼지로 변한 꽃가루는 하얀 히야신스 꽃이었다.
원시인들도 사람이 죽으면 꽃을 같이 묻어
먼저 떠난 자의 상처를 향기로 핥으며 애도했다.
죽음으로써 불멸할 죽음은 어쩌면 살아서 다시 오지 않을
인간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 가운데 하나지만
오랜 세월이 흘러도 그것은 단지
하얀 히야신스를 하얀 국화로 바꿔놓았을 뿐이다.
* 인문교양 월간지 <유레카> '이산하 시인의 짧은 시' 연재(2020년 1월호)
숨은 꽃
40대 후반의 J 변호사는 어느 날
지인의 장례식장 문상을 마치고 나오다가
다른 방 빈소에 유치원생 같은 아이의 영정사진을 보았다.
조문객은 아무도 없었고 아이의 부모 같은 젊은 부부만
상복을 입은 두 개의 섬처럼 적막하게 앉아 있었다.
J변호사는 조용히 들어가 아이의 영정에 분향하고
절을 한 뒤 상주인 부모에게 말했다.
“지나다가 모르지만 너무 가슴 아프고 안타까워
아이의 명복이라도 빌어주려고 들어왔습니다.”
50대 중반의 K 프리랜서는 어느 날
자기 아내가 갑자기 긴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버렸다.
아내의 친구가 항암치료 때문에 삭발한 다음
창피해서 외출을 못하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자
‘머리 깎은 한 사람은 쳐다보지만 두 사람은 안 쳐다본다’며
자신도 긴 머리카락을 친구처럼 빡빡 깎아버린 것이다.
그 뒤로 시장이든 백화점이든 늘 함께 다녔다.
비구니가 되는 줄 알고 매일 좌불안석이었던 K 프리랜서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50대 중반의 중견 출판사 H 대표는 어느 날
골목에서 남루한 행색의 ‘걸인’ 같은 사내를 보고
지폐를 꺼내 적선하려다가 멈칫했다.
돈을 불쑥 내미는 것은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
잠시 고민하다가 사내의 등을 향해 말했다.
"아저씨, 이거 흘리고 가셨어요."
바닥에 떨어진 돈을 주워 주인에게 돌려주는 척하며 적선했다.
마치 톨스토이의 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의 한 장면처럼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이 세 사람의 따뜻한 일화는
우리 주변에 흔할 것 같으면서도 흔하지 않은 얘기들이다.
생면부지의 빈소에 분향하고 헌화했다는 얘기를 아직 들어본 적 없고
암투병중인 친구를 위해 같이 삭발했다는 얘기를 아직 들어본 적 없고
적선은 하되 ‘걸인’을 돈의 주인으로 만들어 명분을 세워주고
자존심을 배려하는 방법까지 고민했다는 얘기를 아직 들어본 적 없다.
요즘처럼 ‘공감’과 ‘배려’가 크게 강조되는 시대도 드물다.
그러나 대부분 먼발치에서 잠시 눈물짓고 잠시 슬퍼하는 것으로
공감과 배려를 ‘소비’해 버린다.
커피를 마시는 게 아니라 커피 브랜드를 마시는 것과 같다.
공감과 배려는 브랜드가 아니다. 소비도 아니다.
값싼 동정은 더욱 아니다.
그것은 작은 감동의 생산이고 그 생산이 모여 감동의 연대를 이룬다.
아이의 엄마는 낯선 조문객 하나만으로도 세상이 따뜻했을 것이고
암투병 환자는 삭발한 친구 하나만으로도 이미 절반은 나았을 것이고
‘걸인’은 일부러 자신의 ‘떨어진 자존감’을 세워주는 것 하나만으로도
긴 터널 같은 일상에 잠시나마 빛 같은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내가 가슴에 화상을 입는 것은 영화 속의 거창한 영웅담이 아니라
이처럼 숨어있는 꽃들의 작은 감동들 때문이다.
이 세 분의 인품과 마음이 진짜 생산적인 공감과 배려의 씨앗이다.
그 씨앗이 자라 꽃을 피우고 열매를 거둔다. 그리고 다시 봄이 온다.
-이산하(시인, <유레카> 편집위원장)
* 인문교양 월간지 <유레카> '생각의 틈' 연재(2019년 12월호)
바닥을 친다는 것
누군가 인생의 바닥까지 내려가 봤다고 말할 때마다
누군가 인생의 바닥의 바닥을 치고 올라왔다고 말할 때마다
오래 전 두 번이나 투신자살에 실패했다가
수중 인명구조원으로 변신한 어느 목수의 얘기가 떠오른다.
어떤 이유로든 사람들이 강에 투신자살하면
거의 '99대 1 현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시신의 99%는 강물 속으로 가라앉다가 그대로 흘러가버리고
1%는 투신한 자리에서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다는 것이다.
흘러간 시신은 강의 바닥까지 가라앉지 못한 시신이고
떠오른 시신은 강의 바닥까지 완전히 가라앉은 시신이란다.
물론 잠시 머문 뒤 떠내려가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시신들은 한결같이
반쯤 눈 감은 채 미소를 머금어 마치 불상처럼 보인다고 했다.
어떤 생이든 막다른 벼랑에서 떨어져 바닥에 이르면
그곳이 정말 더 이상 떨어질 수 없는 바닥의 바닥이라면
관짝을 부수고 나온 부처의 맨발처럼 오히려 고요해질지도 모른다.
고요해지면 더 이상 두렵거나 더 이상 취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난 바닥을 쳤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숨이 멎는다.
물론 욕망과 탐욕의 덩어리가 되어 바닥에 이르기도 전에 흘러간들
바닥을 치고 다시 떠올라 잠시 세상을 애도하고 흘러간들
시신을 염하고 운구하는 강물의 숨결은 한결같을 것이다.
언젠가 내 몸도 바닥에 이르지 못한 채 흘러가겠지만
언제나 가벼운 생일수록 바닥을 쳤다고 더욱 강조하겠지만
이제는 강물의 색깔만 봐도 수심을 안다는 목수의 말만큼은
바닥의 바닥을 치고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를 것을 믿는다.
* 문학계간지 <시와경계> 2019년 가을호
나는 물방울이었다
깊은 밤 내 이마 위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천정에서 약 2분 간격으로 일정하게 똑, 똑 떨어졌다.
누수현상이 장마 탓인지 윗집 탓인지는 알 수가 없었고
내 몸은 이상하게 사지가 묶인 듯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물방울이 톡, 톡 튀어 시원했다.
이미 잠은 달아나 어둠속을 가만히 응시했다.
어디선가 종소리가 아득히 들려왔다.
한동안 종소리에 실려 먼 여행을 떠났다.
고향으로 가는 길은 가장 멀었다.
얼굴과 머리맡이 촉촉해졌다.
한 시간쯤 지나자 물방울의 강도가 바뀌었다.
작은 돌이 이마에 떨어지는가 싶더니
3시간쯤 지나서는 망치로 못을 박았고
5시간쯤 지나서는 도끼로 이마를 꽝, 꽝 내리찍었다.
이제 이마는 물방울이 떨어지기 전에 이미 도끼에 찍혔다.
이때부터 난 환청과 환시에 시달렸다.
한 장수가 젊은 포로를 잡아 눈도 가리고 손발도 묶어
적군의 매복지를 실토할 때까지 막사 추녀 밑에 세워 놓았다.
정수리에 빗물이 일정하게 떨어지는 물방울 고문이었다.
한 젊은이가 큰 소금독에 묻혀 목과 머리만 위로 내놓았다.
절인 생선처럼 그의 몸에서 천천히 물방울이 빠져나갔다.
염소들이 차례차례 의자에 묶인 여자의 발등을 핥고 있었다.
옆에서 남자가 웃으며 계속 상처에 소금을 뿌렸다.
낡은 수도꼭지에서 똑, 똑 떨어지는 물방울을 서로 먹으려고
사투를 벌이는 아우슈비츠의 비명이 들려왔다.
시골집 추녀 밑의 바닥이 움푹 패여 있었다.
실성한 포로와 젊은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날 이후 세상의 모든 것들은 물방울로 보였다.
자세히 보면 맑고 투명한 물방울 속에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물어 고요해지는 그 무엇이 숨어 있다.
자신을 적당히 허물어 절반의 미련을 남기는 법도 없고
비루한 생의 잉여까지 저물도록 방치하는 법도 없다.
언제나 자신의 형체를 완전히 파괴해 완전히 증발시켜 버렸다.
내가 물방울 앞에서 물방울보다 먼저 무너지는 이유였다.
나는 여전히 다른 세상으로 가는 입구를 찾지 못했고
내가 찾을 때쯤이면 입구는 이미 출구로 바뀌었다.
그러므로 나는 여기서 계속 물방울을 맞으며 부서져야 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그 무엇이 도끼처럼 내 정수리를 찍었다.
실은 내 자신이 물방울이 아니었던가.
물방울의 모순과 분열을 애써 숨기지 않았던가.
부정하고 싶어도 내가 물방울이 아니란 것을 증명할 길이 없었다.
늘 똑같은 것이 반복되면 똑같지 않은 것이 전복되므로
무수히 많은 세계들이 그 물방울에 부서져 증발했을 것이다.
오늘도 물방울은 여전히 일정한 간격으로 똑, 똑 떨어졌고
그 속에는 예기치 않은 그 무엇이 숨어 있다.
그러나 아무도 그 무엇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도 그 무엇을 증명하려 하지 않았다.
내 눈에는 모두 물방울이었는데 아무도 물방울이 아니었다.
* 문학계간지 <시와경계> 2019년 가을호
'시인의 경지에 이른 과학자상’
언뜻 형용모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미국에 이런 상이 있다.
과학 분야에서 문장력이 탁월한 저자에게 주는 상이다.
그것도 오래 되었고 노벨상 수상자도 4명이나 받았다.
아는 것을 표현하는 것
이것을 위해 미국의 대학들은 글쓰기 교육이 기본이다.
그리스·로마시대 교육의 필수과목도 문장수사학이었다.
글쓰기는 기술이 아니라 생각의 근육을 키우는 일이다.
생각하는 힘을 키워야 바라보는 눈의 깊이와
받아들이는 마음의 넓이가 생긴다.
많은 인문철학서에서 보듯 현실을 꿰뚫는 통찰과 깊은 성찰은
글쓰기를 통해 숙성된 사유의 깊이에서 비롯된다.
하버드 등 미국의 대학생들은 학기당 여러 편의 에세이를 쓰고
또 일일이 교수가 첨삭지도를 한다.
에세이는 미국의 의대 시험에서도 중시된다.
미국의 리더들은 사회적 성공요인으로 대부분 ‘글쓰기’를 꼽았고
여러 능력 가운데 하나만 선택할 경우에도 역시 '글쓰기' 를 꼽았다.
물론 앞으로는 초고속으로 진화하는 '신인류' 시대인만큼
그 글쓰기도 AI가 대필할 게 분명하고
꼭 현생인류 본인이 직접 쓸 경우에도 차기 신인류 AI에 의해
첨삭지도를 받을 것이다.
또 장기적으로는 AI의 작품이 노벨문학상까지 받을지도 모른다.
한국에서는 최근 들어 글쓰기가 강조되지만 여전히 미흡하다.
생각의 근육을 키우는 게 아니라 글쓰기 기술만 번식한다.
오늘 어느 석좌교수가 쓴 과학책을 읽다가 암에 걸릴 뻔했다.
조악한 비문의 장례행렬이 이어지자 암세포가 더 번식하기 전에
책을 조용히 쓰레기통으로 운구했다.
비록 신인류 AI의 '문장교본'이 나오기 전이긴 하지만,
‘시인의 경지에 이른 과학자상’이 유난히 부러운 하루다.
-이산하(시인, <유레카> 편집위원장)
* 인문교양 월간 <유레카> 연재(2019년 10월호)
돌탑
절로 가는 오솔길
가파른 모퉁이마다
돌탑들이 쌓여 있다.
나도 빌어볼 게 많아
돌 하나 얹고 싶지만
하나 더 얹으면
금방 무너질 것 같아
차마 얹지 못하고
그냥 지나친다.
나를 하나 더 탐하는 게
이렇게 어렵구나.
*인문교양 월간 <유레카> '이산하 시인의 짧은 시' 연재(2019.10)
우리를 과연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가?
2011년 1월, 한국 선박이 아프리카 소말리아 해적들에게 납치됐다.
해군특수부대가 투입돼 8명의 해적을 사살하고 5명을 생포했다.
우리 해군은 다행히 사망자 없이 21명의 선원들을 전원 구출했다.
보수언론에서 한국 국민의 생명을 구출한 ‘성공적인 쾌거’라고
연일 샴페인을 터뜨리며 대서특필한 ‘아덴만 여명’ 작전이다.
해적 불법납치사건이라 언론의 호들갑을 꼬집기가 그리 쉽지 않다.
그 때문인지 인도주의적 측면에서 한번 짚어볼 법한데도
평소 진보언론의 목청 높던 양심적인 지식인들마저 거의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박노자 교수가
‘우리를 과연 인간이라 부를 수 있나?’ 라는 신문칼럼에서
아픈 부분을 건드렸다.
“어쩔 수 없이 해적이 된 가난뱅이 8명을 ‘성공적으로’ 죽였다고
기뻐서 난리치는 우리를 과연 계속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가?
인간에게 태생적으로 있어야 할 자비심이나 생명에 대한 경외,
피부색과 무관한 이웃사랑은 우리에게 과연 남아 있는가?
대한민국 국적 소유자임이 그저 부끄러울 뿐이다.”
생명은 국적을 초월해 누구나 소중하고 존중되어야 한다는
극히 상식적이고 인도주의적인 지적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폐부 깊숙이 송곳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
보편적 인문학자의 자세와 양심을 보여준 뼈아픈 충고였기 때문이다.
여전히 한국의 양심적 지식인들은 세간의 눈치를 보며 침묵했다.
상황논리에 의해 보편논리가 진압된 것이다.
민족주의와 국수주의 앞에서는 최소한의 인권마저
샴페인 거품 속으로 사라진다.
바로 이런 점이 일정 부분 한국 인문교양의 한계인지도 모른다.
-이산하(시인, <유레카> 편집위원장)
*인문교양지 <유레카> 연재 '생각의 틈'(2019년 9월호)
장례식의 민영화
‘철의 여인' 혹은 ‘신자유주의의 마녀’로 불리는
전 영국 수상 마거릿 대처가 2013년 사망했을 때였다.
시민들의 자존감을 모욕하고 약자들을 노숙자로 만드는
국가제도의 저열한 폭력성을 그린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켄 로치 감독이 이렇게 말했다.
“대처의 장례식을 국장으로 하는 것은 예우가 아니다.
그것도 민영화해야 한다.
경쟁입찰에 붙여 최저가에 낙찰된 업체가
장례식을 치르는 걸 그녀도 원했을 것이다.”
영국에 신자유주의 악마를 몰고 와 빈부격차를 조장하고
전기와 가스, 물, 교통 등의 사회적 공공재를 민영화해
살인적 물가폭등을 부채질한 주범이 대처 수상이었다.
또 ‘자유의 상징’ 넬슨 만델라를 '테러리스트'라고 비난했다
국민의 75%가 반대한 장례식의 국유화(국장)를
대처 수상이 평소 그렇게 애용한 민영화로 하지 않는 것을
이처럼 재치 있게 풍자하기도 쉽지 않다.
켄 로치 감독은 2006년 칸느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자였다.
그런데 한국 영화계에서는 유명감독으로 등극만 하면
마치 침묵의 카르텔처럼 사회정치적 발언을 자제해
기득권 유지의 걸림돌을 스스로 알아서 제거한다.
그래서 켄 로치 감독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같은
감성과 지성이 더욱 부러운지도 모른다.
-이산하(시인, ‘유레카’ 편집위원장)
* 인문교양지 <유레카> '생각의 틈' 연재(2019.8)
수행
마당에 풀들이 무성하다.
처음에는 몇 주마다
쑥쑥 자라있는 게 보이고
2,3년쯤 지나니
며칠마다 보이고
한 10년쯤 지나니
매순간마다
쑥쑥 자라나는 게 보인다.
* 인문교양지 <유레카> '이산하 시인의 짧은 시' 연재(2019.6)
행복의 그늘
전 국토가 금연이고 동물과 가축도 천수를 누리는 나라
낚시 미끼로 고기를 속여 잡는다고 종신형을 받는 나라
전 국민의 병원비도 공짜고 대학까지 교육비도 공짜인 나라
신혼부부에게는 결혼축의금으로 4천 평의 땅을 공짜로 주는 나라
첫눈 오는 날은 첫사랑을 만나라고 권장이라도 하려는 듯
전국의 학교와 직장이 의무적으로 쉬는 나라
전체 영토는 남한의 절반이고 인구는 제주도 인구쯤 되는 나라
3%를 제외한 국민의 97%가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나라
국가 정책이 Small(작은 것), Slow(느림), Smile(미소)
Simple(단순함) 등 4S인 나라
‘국내총생산’보다 ‘국민총행복’이 더 중요하다고 선언한 나라
이 나라가 바로 국민들의 행복지수가 세계 1위인 부탄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은 여기까지인데 좋은 것만 안다.
부탄도 70만 국민이 일하고 먹고 사는 한 국가이다.
공장이나 철도, 고속도로, 터널, 신호등이 없는 은둔왕국이지만
길도 있고 밭도 있고 건물도 있고 아득한 절벽의 사원도 있다.
그러니까 의식주 생활을 기본으로 경제 종교활동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소박한 규모지만 부탄의 가장 위험한 노동은 누가 하는가.
바로 인도에서 돈 벌러 온 불가촉천민들과 힌두교도들이다.
오래 전 네팔계 부탄인 10만여 명이 강제추방되기도 했다.
세상을 놀라게 한 ‘네팔난민’들이다.
현재 부탄의 험준한 산악 도로공사나 건물공사, 절벽의 사원 등
위험한 건설현장의 노동자들은
거의가 네팔의 빈민들이나 인도의 불가촉천민들이다.
그들은 선거권도 없고 국민 자격도 없는 부탄의 노예들일 뿐이다.
그러니 아예 국민행복지수의 조사 대상에도 끼지 못한다.
부탄의 거룩한 국민행복지수는 노예들의 피로 쌓은 노트르담 대성당처럼
인도, 네팔 노예들의 등을 밟고 세는 허수다.
어쩌면 행복지수에서 비토를 놓은 3%가 97%의 허구성을 꼬집는
양심의 소리인지도 모른다.
국민의 행복을 자본의 더러운 돈이 보장해주지 않는다며
일부러 ‘자발적 고립’을 택한 부탄이 결코 나쁘다는 얘기가 아니다.
이 지구상에는 그만한 나라도 없고 완전한 개인의 자유로운 연대도 없다.
그러나 행복해도 불행을 알고 행복해야 한다.
그게 행복에 대한 예의다.
-이산하(시인, 유레카 편집위원장)
* 인문교양지 <유레카> ‘생각의 틈’ 연재(2019.6)
붉은 립스틱
1945년 봄 유럽의 나치수용소들이 일제히 해방되었다.
수용소마다 오물과 시체들이 썩어 흘러넘쳤다.
연합군의 확성기가 “You are Freedom"이라고 외쳤고
전투기들이 공중에서 수용소 위로 구호품들을 투하했다.
구호품 중에는 다량의 붉은 립스틱 박스가 들어 있었다.
남자 죄수들이 지금 굶주리고 아파서 죽어가는 마당에
이런 게 무슨 소용이냐며 야유하고 비난했다.
그런데 립스틱은 식품과 의약품보다 먼저 동나버렸다.
다음날 아침 마침내 수용소 철문이 활짝 열렸다.
립스틱 짙게 바르고 팔의 죄수번호를 지운 여자들이
한껏 턱을 치켜들고 세상속으로 행진했다.
그녀들의 팔과 붉은 입술이 아침햇살에 반짝이고 있었다.
-이산하(시인)
* 월간 <시인동네> 4월호 게재
유언
“너희들 다 구하고 난 나중에 나갈게.
우리 승무원은 마지막이야.”
-고 박지영 승무원
“빨리 여기서 빠져나가.”
-고 남윤철 단원고 교사
“내 구명조끼 니가 입어.”
-고 정차웅 단원고 학생
“지금 빨리 아이들 구하러 가야 되니
길게 통화 못해. 끊어.”
-고 양대홍 사무장
“걱정하지 마.
너네들 먼저 나가고 선생님 나갈게.”
-고 최혜정 단원고 교사
‘세월호 사건’에 대해 여러 번
시 청탁을 받았지만 결국 쓰지 못했다.
이 이상의 시를 어떻게 쓰겠는가.
* 인문교양지 <유레카> 5월호
지난번처럼
제주도 예멘 난민문제로 강자의 숨은 발톱이 드러나고
약자를 추방시키는 국민청원에 수십만 명이 달려들 때
난 동유럽의 나치 강제수용소들을 성지순례 중이었다.
어느 날 독일의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소를 찾아 헤매다가
중앙광장 근처 거의 텅 빈 마트의 진열장이 눈에 띄었다.
마트 유리문에 붙은 독어 공고문을 친구가 번역해 주었다.
친애하는 고객 여러분
어제 갑자기 갓난아기와 어린애들이 포함된
200여 명의 난민을 실은 버스들이 도착했습니다.
저희들은 난민들을 돕기 위해서
그들이 필요로 하는 매장의 모든 식료품들을
구호품으로 보냈습니다.
너무나 긴급한 상황이었습니다.
새로운 물품들은 이미 주문해놓았으며
거듭 양해를 바랍니다.
지난번처럼 고객 여러분들의 마음을 믿습니다.
* 인문교양지 <유레카> ‘이산하 시인의 짧은 시’ 연재(2019.4)
멀리 있는 빛
친구가 감옥에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 한 질을 보냈다.
책을 전부 바닥에 펼쳐놓자 작은 독방이 토지로 변했다.
난 그 광활한 토지에 씨앗 대신 나를 뿌리며 장례식을 치렀다.
대학시절 시인지망생이었던 그에게 난
박상륭의 소설 ‘죽음의 한 연구’를 선물한 적이 있었다.
연쇄살인 뒤 나무 위에서 자진하는 주인공의 최후를 보며
그 도저한 비장미에 우리는 실성한 것처럼 얼마나 압도되었던가.
‘한라산 필화사건’ 수배 때도 인터뷰로 여러 번 은밀히 만났다.
내가 석방되자 ‘시운동’ 동인들의 ‘이륭 석방환영회’에서
그가 축가로 김영동의 노래 ‘멀리 있는 빛’을 불렀다.
어둠은 가까이 있고 빛은 멀리 있는 처연한 노래였다.
깊은 강 같은 노래의 행간이 진짜 노래였다.
29살 그의 눈빛은 심야극장에서 어둠보다 더 어두워졌다.
무엇을 본다는 것은 가만히 눈을 허용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에게 이 세계는 처음부터 폐허였고
산다는 것은 폐허 속의 마지막 잔해를 몇 줌 거두는 일이었다.
모두 꿈과 희망의 복선을 적당히 깔며 정서적 타협을 할 때
그는 그런 위선과 기만을 거부했다.
우리 시대의 꿈과 희망은 90%가 자본의 덫이다.
이번 기일에는 희망고문의 덫에 걸린 모든 영혼들을 불러 모아
그 광활한 토지에서 다시 장례식을 치르고 싶다.
그날의 상주는 ‘입 속의 검은 잎’이고 문상객은 잿더미들이다.
* 인문교양지 <유레카> ‘이산하 시인의 짧은 시’ 연재(2019.3)
페르시아의 흠
페르시아 카펫에는 화려하고 암울한
인생의 온갖 무늬들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한쪽에 좌우대칭이 깨어져 있거나
작은 흠집이 눈에 띄기도 한다.
'신의 경지'로 불리는 진짜 고수들은
일본의 뛰어난 도자기 장인들처럼
가끔 일부러 상처 같은 흠집을 낸다.
악마의 질투를 받으면
이유 없이 손이 마비된다는 미신보다도
상처 있는 것이 상처 없는 것보다
오히려 더 아름답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흠집이 없다.
* 인문교양지 <유레카 > '이산하 시인의 짧은시' 연재(2019.1)
크리스마스 선물
80살의 베버는 노인요양원 옆방에 들어온 뮐러라는 사람을
이름은 달랐지만 얼굴은 금방 알아보았다.
그러나 백발의 치매노인 뮐러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들의 인연은 먼 아우슈비츠 시절로 거슬러 올라갔다.
휠체어를 탄 베버는 틈날 때마다 뮐러를 만나 추억을 더듬었다.
특별한 뇌의 손상이 없는 그의 해리성 기억상실을 회생시키려고
베버는 나치 시절의 사진책과 상징물들까지 구해 설명했다.
6개월쯤 지나자 뮐러의 기억이 조금씩 돌아오는 듯했다.
누구나 그렇듯 상처 준 것들보다 상처 받은 것들을 먼저 기억했다.
이때부터 베버는 요양원 주변 골목에 쌓인 쓰레기들을 가리키며
누가 먼저 저기에 몰래 버리니 너도나도 같이 버린 것처럼
사소한 혼란을 방치하면 곧 큰 범죄로 확산된다고 강조했다.
어디선가 본 ‘깨진 유리창 이론’이 어렴풋이 기억났던 것이다.
얼마 후부터 두 노인은 방문을 잠그고 밀담을 나누었다.
아직도 은신 중인 아우슈비츠 나치 전범의 처형 모의였다.
그리고 성탄절 전야에 베버가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지폐뭉치와 권총을 주며 약도를 자세히 설명했다.
이튿날 여전히 기억이 오락가락하는 뮐러는 먼 여행을 떠났다.
그는 열차와 버스 속에서 품속의 권총을 만지작거리며
난 깨진 유리창도 치워야 하고 쓰레기도 치워야 한다고
혼자 속으로 중얼거리곤 했다.
마침내 뮐러가 헤맨 끝에 겨우 목적지에 도착했다.
하얀 눈에 덮인 넓은 저택의 정원을 산책하던 백발 노인이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가 언젠가는 한 번쯤 찾아올 줄 알았네.”
“그럴 테지 골드만. 그동안 잘도 숨어 있었군.
이제야 내가 베버의 선물을 전하러 왔네.”
“베버? 아…….”
뮐러가 품속에서 천천히 권총을 꺼내 골드만에게 쏘았다.
“아니, 베버도 아닌 자네가 어, 어떻게 나를…….”
이때 뮐러는 뭔가 큰 충격으로 갑자기 기억이라도 돌아온 듯
한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천천히 자기 머리에 권총을 쏘았다.
오래 전 베버의 가족이 모두 웃으며 가스실로 행진한 것은
어느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 날이었다.
* 이번 계간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발표된 신작시 2편('아우슈비츠 오케스트라') 중 나머지 1편이다.
디지털 촛불
지난 촛불시위에서는 아날로그 양초촛불이
디지털 LED촛불로 바뀌었다.
아날로그 촛불은 자기 온몸을 다 태우고 녹지만
디지털 촛불은 장렬하게 전사할 심지와 근육이 없다.
나는 그것이 노동자에서 소시민적 인텔리로
우리 사회변화의 동력이 바뀐 신호로 보였다.
땅을 갈아엎어 토양을 바꿀 근본적인 변화 없이
나무를 골라 옮겨 심는 정도의 기회주의적인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다시 점령한 것이다.
그래서 촛불도 계속 광화문 광장에 갇혀 있었고
세월호의 노란 리본도 광화문 광장에 갇혀 있었다.
촛불의 시작은 창대했으나 끝은 미미했다.
30년 전 박종철, 이한열의 시체를 거름으로 피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꽃은 피자마자 졌다.
30년 후 세월호 아이들과 백남기의 시체를
거름으로 피운 불꽃도 피자마자 졌다.
6월항쟁에 벽돌 한 장씩을 얹었던 청춘들은
노동 없는 디지털 촛불에 눈이 멀어 모래알처럼 흩어졌다.
이제 광화문광장은 텅 비었다.
독재의 무기는 칼이고 자본의 무기는 돈이다.
칼은 몸을 베고 돈은 정신을 벤다.
우리는 몸도 베였고 정신도 베였다.
우리는 아직 이것밖에 안 된다.
앞으로도 우리의 입은 여전히 진보를 외칠 것이고
발은 지폐가 깔린 안전한 길을 골라 걸을 것이다.
촛불의 열매를 챙긴 소수 민주주의적 엘리트들 역시
노동대중을 벌레처럼 털어내며 더욱 창대할 것이다.
대한민국은 여전히 민주공화국이 아니라 의회공화국이며
모든 권력도 국민이 아니라 자본과 소수 좌우엘리트들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심지 없는 촛불이 아무리 타올라도
우리의 비정규직 민주주의는 여전할 것이고
세상도 적당히 바뀔 만큼만 바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촛불이 곁에 있어도 촛불이 슬프다.
이 모든 것은
가을단풍처럼 질 것을 알면서도
거품처럼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파도가 치솟아 비명을 지르는 것은
단숨에 등뼈를 꺾어 부서지는 것은
동백의 피가 천천히 칼등을 타고 넘어
칼날 끝에 눈물로 맺히는 것은
이미 패색이 짙은 한라산 위로
청년들이 계속 올라가는 것은
그리고 지금 이 모든 것은….
* 제주 <4.3 70신문> 5호(2018.12.16.) 게재
아우슈비츠 오케스트라
오늘은 전체 단원들의 정기 건강검진일이다.
우리는 모두 병동 앞으로 나가 나체로 줄을 서서 대기했다.
텅 빈 마당에는 낡은 피아노 한대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대기시간이 길어지자 길게 하품하던 친위대 장교 하나가
누가 피아노를 한번 멋지게 연주해보라고 했다.
K가 천천히 걸어나가 나무의자에 앉더니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는 지난해 프라하의 테레진수용소에서 온 젊은 작곡가였다.
잠시 후 우리는 모두 얼굴이 사색이 되고 말았다.
그의 연주는 장교들이 좋아하는 흥겨운 왈츠곡이 아니라
평소 내 영혼이 작곡했다고 자랑한 자신의 피아노독주곡이었다.
다음날 새벽
기차 타고 노동현장으로 출근하는 '수감자 행진곡' 연주가 끝나자
단장이 갑자기 오후에 특별공연이 있다고 했다.
얼마 전 부임한 악단장 겸 지휘자는 작곡가 말러의 조카인데
죽음에는 리허설이 없다며 단원들을 카포 이상으로 혹독하게 다뤘다.
우리 유태인 단원들의 공연 실수는 바로 지옥행이었다.
모두 악보와 악기를 목숨처럼 닦고 조이기에 정신이 없었다.
점심 때 우리는 묽은 감자수프를 먹고 공연장으로 갔다.
어린 아이들과 머리 깎은 어른들이 손을 잡은 채 웅성거렸고
창백한 얼굴에 붉은 비트즙을 발라 건강하게 위장한 병자들도 보였다.
모두 목욕에 대한 기대 탓인지 아주 즐거운 표정들이었다.
늘 그렇듯 악단은 밝은 표정으로 막사 무대를 정돈했고
난 악보와 트럼펫을 꺼내 다시 점검했다.
마침내 유태인 카포가 샤워실 회색 철문을 열자 우리는
베르디의 「개선 행진곡」과 스트라우스의 「푸른 도나우강」을 연주했고
카포에게 ‘선발’된 수백 명이 경쾌한 행진곡에 발맞춰 행진했다.
그런데 그 긴 행렬 중간에는 어제 연주하다 사라진 K도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난 숨이 가빠져 트럼펫 선율이 흐트러졌다.
단장과 카포의 눈빛이 비수처럼 내 가슴에 꽂혔다.
얼마 후 행진이 끝나고 회색 철문이 닫히자 지휘봉이 치솟았다.
단원들은 얼른 뒤돌아 앉아 다른 막사에 비명이 들리지 않도록
주페의 「경기병 서곡」을 더욱 힘차게 연주했다.
이 곡은 트럼펫 독주여서 난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허리가 휘어지도록 혼신을 다해 불었다.
오늘도 우리의 ‘샤워심포니’ 공연은 무사히 끝났다.
막사로 돌아와 낡은 수도꼭지를 트니 물방울이 똑, 똑 떨어졌다.
모두 떨어지는 물방울 같은 하루 분의 생명이 연장되었다.
물론 난 예정대로 우리 악단의 행진곡에 발맞춰 행진할 것이다.
멀리 트럼펫 같은 굴뚝 위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제는 새들도 굴뚝의 연기를 피해 날아가고
태양도 막간을 이용해 잠깐씩 뜨고 질뿐이었다.
햇빛 한줌
그는 사형수로 3년 6개월을 살다가 무기로 감형되었다.
사형수 때는 하루라도 더 살고 싶었고
무기수 때는 하루라도 더 사는 게 오히려 고통스러웠다.
평생을 좁은 독방에 갇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때마다
검은 그림자가 찾아와 구석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어느 날 그는 무심코 자기 무릎 위의 햇빛을 보았다.
북서향의 독방에 두 시간쯤 가만히 머물다 떠났다.
날마다 눈꺼풀 같은 창문으로 스며든 시한부 햇빛
그 햇빛이 무릎 위에 한상 가득 차려져 있을 때가
마치 어린 딸이라도 보듯 그의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오늘 죽으면 내일은 이 햇빛을 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햇빛은 또 찾아와 가만히 머물다 떠날 것이다.
어쩌면 그가 수시로 찾아온 자살의 유혹을 물리친 것은
날마다 무릎 위에 눈물방울처럼 맺혀 고요히 반짝이던
두 시간짜리 한줌 햇빛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 인문교양잡지 <유레카> ‘이산하 시인의 짧은 시’ 연재(2018.12)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종소리
“새벽 종소리는 가난하고
소외받고 아픈 이가 듣고
벌레며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도 듣는데
어떻게 따뜻한 손으로 칠 수 있어.”
안동 일직교회 종탑 아래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이 이 교회 종지기로 있을 때 남긴 글이다.
작고 낮고 가벼운 존재들을 따뜻하게 품는 동화를 썼던
그는 종을 치는 순간에도 세상의 버려진 것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10년 전에 떠난 권선생은 평생 가난과 병에 시달렸다.
심한 결핵으로 콩팥 한쪽과 방광을 떼어내기도 했다.
평생 몸무게가 37㎏을 넘지 못했다.
교회 단칸방에 살며 15년 동안 새벽마다 빠짐없이 종을 쳤다.
또 틈틈이 '강아지 똥'이나 ‘몽실언니’ 같은
뛰어난 동화들을 써서 수백만 독자들의 가슴을 울렸다.
종지기를 그만둔 뒤에도 교회 근처에
8평짜리 흙집을 짓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았다.
밤에 쥐가 방에 들어오면 내쫒지 않고 먹거리를 찾아주었다.
베스트셀러 작품이 많아 돈도 많이 벌었지만
'한 달 생활비가 5만원이면 좀 빠듯하고
10만원이면 너무 많은 소박한 삶'을 놓지 않았다.
그렇게 평생 모은 돈 12억원을 아프고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
써 달라며 고스란히 남기고 눈을 감았다.
"이 돈은 어린이가 사 보는 책에서 나온 인세이니
어린이에게 되돌려주는 것이 마땅하다"는 게 그의 유언이었다.
오래 전 인사동에서 <혼자만 잘 살면 무슨 재민겨>의 저자인
전우익 선생과 함께 만났던 권선생의 모습이 아련히 떠오른다.
동시에 봉화 청량사 여행 때 전우익 선생이 한 말도 떠오른다.
“권정생 형은 진짜 훌륭한 성자지. 그런데 우리 문단에는
왜 권정생 같은 걸출한 작가가 다시 안 나오지?”
-이산하(시인, 유레카 편집위원장)
* 인문교양잡지 <유레카> ‘생각의 틈’ 연재(2018년 12월호)
강
모난 돌과 바위에
부딪혀 다치는 것보다
같은 물에 생채기
나는 게 더 두려워
강물은 저토록
돌고 도는 것이다.
바다에 처음 닿는
강물의 속살처럼 긴장하며
나는 그토록
아프고 아픈 것이다.
* 인문교양지 <유레카> ‘이산하 시인의 짧은 시’ 연재(2018.11)
서로 괴물이 된다
-불편한 과거사
2차대전 때 독일한테 5년 동안 점령당한 덴마크는
해방이 되자 즐거울 새도 없이 큰 고민에 빠졌다.
문제는 나치가 덴마크 해변에 묻은 220만 개의 지뢰를
과연 누가 위험을 무릅쓰고 제거하느냐는 것이었다.
나라가 쫄딱 망한 독일은 그럴 능력도 그럴 경황도 없었다.
한동안 서로 눈치를 보다가 마침내 영국군이 제안했다.
독일군 포로들에게 제거작업을 시키자는 것이었다.
전쟁포로에 대한 제네바협정 위반이지만 모두 눈감았다.
약 3,000명의 포로들을 사지로 몰아넣었다.
대부분 소년병과 노인병, 그리고 부상병들이었다.
나치는 전쟁 막바지에 13살 아이들도 대거 징집했다.
긴 해안 곳곳에서 어린 소년병들이 지뢰제거 작업을 했다.
총기사용법도 서툰 아이들에게 정교한 지뢰제거는 곧 자폭이었다.
겁 먹고 도망가는 병사들은 그대로 총살이었다.
곳곳에서 지뢰가 터져 울부짖고 팔다리가 날아갔지만
바다는 잔잔했다.
지뢰는 보이지 않고 움직이지 않아서 적군보다 더 두렵다.
덴마크 입장에서는 다행히 성공해 무사고라도 지뢰는 제거되고
설사 실패해도 함께 폭사해버리니 역시 지뢰제거 목적은 달성된다.
덴마크는 독일의 노인과 소년 포로들을 자살폭탄부대로 만들었다.
폭행과 굶주림과 공포감에 자살하는 병사들이 늘어났다.
이미 전쟁이 끝났지만 포로들에게는 다시 전쟁의 시작이었다.
참혹했지만 아무도 보지 않고 아무도 듣지 않았다.
다 보고 다 듣고 있지만 바다는 여전히 침묵했다.
덴마크는 2012년에야 비로소 ‘지뢰 없는 나라’가 되었다.
지뢰 사상자가 전쟁 사상자보다도 더 많았다.
전쟁이 끝난 평화 시에 어리고 병든 포로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것은
나치가 저지른 만행에 못지않을만큼 잔인했다.
그래서 이 지뢰제거를 다룬 영화 <랜드 오브 마인>이 개봉되자
덴마크 국민들이 자신들의 ‘불편한 진실’에
그토록 당혹스러워했는지도 모른다.
선진 복지국가 덴마크는 이런 추악한 과거사를 오랫동안 감춰왔다.
사과 받는 것만 능사가 아니다.
남의 허물 열 개보다 내 허물 하나가 삶의 벼랑을 만든다.
이쪽 인간의 벼랑 끝과 저쪽 인간의 벼랑 끝이 마주본다.
그리고... 서로 괴물이 된다.
-이산하(시인, 유레카 편집위원장)
*인문교양지 <유레카> '생각의 틈' 연재(2018.10)
토끼훈련
넓은 운동장에 신참 훈련병들이 예쁜 토끼들과 놀고 있는데
갑자기 교관들이 뛰어들어 칼로 토끼들의 목을 잘랐다.
그리고는 토끼들의 껍질을 벗겨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내 훈련병들에게 던졌다.
어린 병사들이 내장을 장난감으로 갖고 놀도록 명령했다.
명령은 날마다 반복되었고 나중에는
훈련병들 스스로 토끼들의 뱃속에 칼을 담가 노를 저었다.
미군병사들이 베트남전쟁 투입 전에 받은 이 담력훈련을
‘토끼훈련'(rabbit lesson)이라고 불렀다.
베트남의 수많은 학살은 우연도 실수도 아니었다.
* 인문교양잡지 <유레카> '이산하 시인의 짧은 시' 연재(2019.9)
마지막 연주
밤마다 바이올린 선율이 수용소에 울려 퍼졌다.
죄수들은 고향과 가족을 그리워하며 위안했다.
어느 날
죄수들은 모두 자기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태인에게는 연주가 금지된 베토벤의 곡이었다.
모두 눈물을 흘리며 조용히 들었다.
달빛처럼 은은하게 흐르던 선율이 갑자기 멈췄다.
다음날 아침 굴뚝 옆의 교수대에
어린 소년과 바이올린이 매달려 있었다.
* 인문교양 잡지 <유레카> '이산하 시인의 짧은 시' 연재(2018년 8월호)
아우슈비츠의 생존비결
한 평범한 유태인 청년이 나치 아우슈비츠로 끌려갔다.
수감되자마자 위생상 불결하다며 머리는 삭발되었고
쓸데없이 질문한다며 곡괭이로 구타당했고
호시탐탐 탈출을 노린다며 소리 나는 나막신을 신었고
벌레처럼 꾸물거린다며 채찍을 얻어맞았고
또 수시로 노동력 없는 쓰레기라며 아픈 동료들이
어디론가 질질 끌려가는 것을 보았다.
어디론가 사라진 그들은 한 번도 돌아오지 않았다.
조금 지나자 동료들이 매일 보던 성경책을 불태웠다.
지옥은 무신론이다.
얼마 후 청년은 이처럼 지옥 같은 환경을 탓하기 전에
먼저 자기 몸가짐부터 단정하게 추스르기 시작했다.
예전과는 달리 비누가 없어도 늘 몸을 깨끗이 씻었고
나막신을 신고 걸을 때도 질질 끌지 않고
몸을 꼿꼿이 세운 채 또박또박 걸었고
침도 아무데나 함부로 내뱉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폭넓은 독서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인간의 존엄성을 확인하며 삶의 경각심을 일깨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내일 갑자기 죽음이 마중 나올지도 모르는
도축장 같은 수용소 생활이지만
이처럼 하나씩 자신의 존재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다.
자신의 존재의미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 인간이기를 거부하는 것과 똑같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 걸음씩 자기존재를 깨달아가다 보니
어느덧 자신도 모르게 이미 성찰의 길로 접어들었다.
한때는 이토록 고통스럽게 목숨을 부지하며 사느니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젠 나막신을 신고 또각또각 걸어도
그것은 천둥 같은 각성의 소리였고
허리가 휘어지도록 곡괭이로 흙을 파도
그것은 성찰의 깊이를 파는 것이었고
누군가 굴뚝의 연기로 피어올라도
그것은 분신한 나의 피가 하늘로 가는 것이었다.
신이 없는 아우슈비츠에서 나의 고통은
곧 타인의 고통이었고
타인의 고통은 곧 나의 고통이었다.
그러므로 이 두 고통이 만나 서로 애틋하고 간절한
눈빛으로 어루만지고 쓰다듬는다면,
그때야 비로소 나도 뜨거워지고 세상도 뜨거워지는 것이다.
청년은 그렇게 생각했고 그렇게 생각하며 살았다.
1년 10개월 후 청년은 마침내 도축장 같은 수용소에서
단테의 지옥을 통과한 오디세우스처럼
정말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갔다.
수십 년 뒤 나치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유태인들의 생활태도에 대한 통계가 나왔다.
이 청년처럼 극한상황에서도 자포자기 하지 않고
언제나 인간의 존엄성을 성찰하며 확인한 사람들이
일상을 나태하고 방기한 사람들보다
생존확률이 훨씬 높았다는 것이다.
무인도에 표류했지만 아침마다 면도하고
풀잎으로 엮어 넥타이를 만들며 늘 단정하게 생활한
로빈슨 크루소가 떠오른다.
출근이 재택근무로 바뀐 것만도 어디인가.
홀로 섬 하나를 통째로 사무실로 쓰는 것은 크루소밖에 없다.
인간의 고통과 고독은 화룡점정이다.
-이산하(시인, 유레카 편집위원장)
* 인문교양 잡지 <유레카> '생각의 틈' 연재(2018년 8월호)
비유의 상처
내가 무심코 쓴 글의 비유에 타인은 큰 상처를 받는다.
지난해 여름의 인터넷은 작가 마광수 교수의 자살에 이어
베스트셀러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최영미 시인이
실시간 검색 1위에 오를 만큼 뜨거운 화제였다.
‘고급호텔 1년 무료투숙’ 제안에 대한 찬반양론 때문이었다.
도발적이고 상큼한 발상이라는 응원도 많았지만
갑질하는 시인의 천박한 발상이라는 비난도 많았다.
특히 한 시인의 영혼을 찢고도 남을 독화살 같은 비난들이
계속 쏟아지자 한 유명 평론가가 나서서
최 시인을 단호한 어조로 옹호하는 글까지 발표했다.
“…성실하게 노동하지 않고 허황한 소리나 한다고 질타하는 것은
젠더적 관점에서 본다면 매우 폭력적인 것이다.
그들은 훌륭한 시인이자 전문가로서 합당한 사회적 역할을 하고,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
그들에게 출판사 번역일이나 시키고 심지어 이를테면
곰인형 눈알붙이기 같은 수준의 막노동일 같은 거라도 하며
'성실하게' 먹고 살라는 건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오죽하면 천하의 최영미가 월 50만원 근로장려금 수급사실을 밝히고
월셋방을 전전하는 게 끔찍해 자신을 호텔홍보요원으로
'판매할' 생각까지 했을까 싶다.
그것은 한 부황기 든 여성시인의 헛소리가 아니다.
내겐 그 소리가 지금 이 순간에도 헬조선의 최저점을 통과하고 있는
이 땅의 거의 모든 여성들이 타전하는 SOS 신호로 들린다.”
이 글을 보자마자 난 공감여부를 떠나 ‘가시’ 같은 대목 하나가
자꾸 목에 걸려 지인인 평론가에게 알릴까 말까 잠시 망설였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얼마 후 한 독자의 아래와 같은 댓글이 달렸다.
“불편한 지점이 있어 몇 자 남기려 했습니다만,
저의 심정에 공명하는 글이 있어 반갑네요.
'곰인형 눈알붙이기'로 저를 키운 어머니가 생각나서요.
그런 제 어머니가 모욕당했다 생각했습니다.
시인의 삶 못지않게 제 어머니의 삶 또한 존중받아 마땅하다 봅니다.”
내 목에 걸린 가시도 바로 이 대목이었다.
“곰인형 눈알붙이기 같은 수준의 막노동일 같은 거…”
누가 봐도 비하하는 비유이고 당사자가 들으면 속이 쓰릴 것이다.
다행히 평론가의 사과댓글도 곧바로 달려 오해가 풀어졌지만
난 이 같은 비유들이 일반 작가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로 보였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면서도 작중 인물들의 대립각을 강조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계급적 위화감을 조장하는 비유들을 예로 든다.
청소부 주제에… 노가다 주제에… 아파트경비 주제에… 등등
작품 속의 이런 비유들은 남산에서 무심코 던진 돌과 같아서
그 돌에 맞은 계급적 약자들은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다.
강자를 공격하는 뜻이 아무리 정의로울지라도
약자를 희생시킬 권리까지 있는 것은 아니다.
작가의 가장 큰 약점은 자신이 약자임에도 강자로 착각하는 것이다.
작가가 유일하게 강자가 될 때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글을 쓰는 결기의 순간뿐이다.
사회적 민주화에는 익숙하지만 자신의 언어적 민주화에는
너무 인색한 오늘이다.
-이산하(시인, <유레카> 편집위원장)
* 인문교양지 <유레카>(2018.5) 산문 '생각의 틈' 연재
영혼의 목걸이
내 눈에는 ‘큰 것’보다는 ‘작은 것’이 먼저 보인다.
작은 것이 큰 것을 겸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래 전에 본 아마존 인디언의 한 다큐가 떠오른다.
아이들과 어른들의 목에 전부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자세히 보니 모두 구슬이 하나씩 깨어져 있었다.
깨어지지 않은 구슬들 사이에 깨어진 구슬 하나를
살짝 끼워 넣어 목걸이를 완성한 것이었다.
인디언들은 그 깨어진 구슬을 '영혼의 구슬'이라고 불렀다.
여러 개의 완벽한 구슬들 사이에 한 개의 불완전한 구슬을
서로 동등하게 배열해 함께 평등한 존재로 거듭 태어난다는 것
어쩌면 인디언에게는 처음부터 완벽한 것은 존재하지 않았고
그 완벽 속에는 영혼이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어떤 것이든 상처가 있어야 완전하고
가장 인간적인 것이 가장 완벽할 뿐이었다.
이 세상은 어느 곳이나 인디언의 구슬 같은 상처가 있다.
그 상처가 하나라도 존재하는 한
그들에게 이 세상은 결코 완전할 수가 없었다.
그 목걸이를 본 이후 내 영혼은 완벽한 잿더미로 변했다.
* 인문교양지 <유레카>(2018.6) '이산하 시인의 짧은 시' 연재
노란 넥타이
넥타이공장 안은 크레졸 소독약 냄새가 진동했다.
젊은 사형수의 유언이 끝나고 목에 넥타이가 걸렸다.
얼굴에 흰 천이 덮이자 죄수의 숨소리가 거칠어지면서
코와 입에 닿은 부분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내렸다.
낡은 넥타이는 목기름에 쩔어서 노란 색으로 변했다.
무표정한 교도소장이 손가락 하나를 까딱하자
5명의 교도관들이 동시에 집행 버튼을 눌렀다.
정상작동 버튼은 5개 중 1개이다.
‘쿵’하는 소리와 함께 죄수의 발밑이 푹 꺼졌다.
의자가 떨어지면서 넥타이가 끊어질 듯 팽팽해졌다.
얼마 전에는 줄이 끊어져 죄수가 추락하는 바람에
부러진 발목을 응급처치해 다시 매달아 집행하기도 했다.
신부의 기도소리가 뚝 멈췄고 성경책은
죽음을 먹고 자란 듯 지난해보다 더 두꺼웠다.
죄수는 자신이 살아온 삶의 무게만큼 목이 조여졌다.
넥타이가 잠시 낚싯줄처럼 부르르 떨다가 잦아졌다.
이번엔 목이 부러져 즉사하는 대신 질식사했다.
질식사는 완전한 사망까지 10분쯤 걸렸다.
커튼 너머 집행교도관들의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갔어?”
“아직….”
실내에 한동안 건조한 침묵이 흐르다 다시 들렸다.
“아직도?”
“이번엔 좀 오래 걸리네.”
살아온 시간이 짧아 가는 시간만이라도 연장하는 듯했다.
한 생이 지는 시간은 불과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사형집행 후 아침마다 넥타이를 골라 목을 매는 참관인들이
모두 퇴실하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다음부터는 새 넥타이로 바꿔야 될 것 같아.”
* 문학계간지 <시작> 여름호 게재
찢어진 고무신
감옥의 독방에 살 때 내 옆방에 젊은 사형수가 들어왔다.
세상을 충격과 공포 속으로 몰아넣은 연쇄살인범이었다.
그는 한겨울에도 사각팬티만 입고 운동장을 뛰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혼자 운동장을 달렸다.
우리는 서로 얼굴은 보지 못하지만 가끔 통방을 했다.
“오늘은 몇 바퀴 뛰었어요?”
“어제보다 한 바퀴 덜 뛰었어요.”
대답은 늘 똑같았다.
그게 몇 바퀴인지 나는 한 번도 묻지 않았다.
아마도 ‘덜 뛰는’ 날이 없을 때가
마지막 날일지도 모른다고 막연히 짐작만 했다.
멀리 구치소 담장 위로 낙엽이 직각으로 떨어지는
어느 날 아침이었다.
평소 수런거리던 복도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유난히 큰 교도관의 발자국 소리가 옆방에 멈췄다.
“수번 5046번 접견!”
“오늘 면회 올 사람 없는데요?”
“….”
갑자기 내 온몸에 전율이 일어났다.
옆방의 철문을 따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난 얼른 내 하얀 고무신의 뒤축을 이빨로 물어뜯어
벽 밑에 뚫린 작은 식구통으로 내밀며 말했다.
“그 신발 내 주고 이거 신고 가요.”
긴 복도로 걸어가는 그의 넓은 등을 끝까지 보았다.
그는 걷다가 자꾸 신발이 벗겨져 멈추곤 했다.
필시 먼 길 떠나는 줄도 모를 그가
조금만이라도 햇볕을 더 쬐고 가라고
난 일부러 신발이 헐렁하도록 찢어놓았다.
옆방에 새로운 사형수가 들어왔다.
* 문학계간지 <시작> 여름호 게재
엥겔스의 여우사냥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애인이 런던의 맑스 무덤으로 가서
혼자 촛불을 들고 찍은 셀카사진을 보내왔다.
사진 밖으로 엥겔스가 개를 데리고 여우사냥을 떠나고 있었다.
난 슬며시 해방 직후에 나온 맑스의 ‘자본론’을 뒤적거렸다.
맨체스터 방직공장에서 착취당하는 10살 소녀에게
한 노동위원이 종이에 신(God)의 글자를 써보라고 하자
소녀가 거꾸로 Dog(개)이라고 썼다는 대목이 각주에 나왔다.
때마침 신을 조롱한 맑스의 풍자에 맞춰 옆집 개들이 짖었다.
촛불이 꺼진 광장 위로 멧돼지의 유령들이 배회했다.
다윈은 맑스가 보낸 ‘자본론’ 친필사인본을 읽다가 던져버렸다.
진화론은 공산주의와 아무 관계가 없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맑스는 이미 다윈의 생존경쟁과 적자생존에서
‘계급투쟁’이라는 결정적인 아킬레스건을 찾아냈다.
맑스가 숨지자 엥겔스는 그의 이론에 진화론을 삽입했다.
제1바이올린을 보조하는 제2바이올린의 엥겔스는
한때 낭만주의 시와 고급와인에 젖어 살던 문학청년이었다.
그에게 인간본성은 계급 이전의 진화였을까.
그에게 자본론과 진화론은 두 개의 수레바퀴였을까.
자본주의는 위기 때마다 새로운 가면을 쓰며 폭주하고 있다.
맑스의 자본론이 오히려 예방주사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엥겔스는 다윈의 장례식 조문 1년 뒤
맑스의 장례식에 가서 담담한 표정으로 추도사를 낭송했다.
"그는 모든 것에 앞서 진화론적 사고를 했다.
비록 다윈이 그 내용을 몰라서 거절했지만
맑스는 자본론의 일부를 다윈에게 바치려고 했다."
폐렴으로 숨진 맑스는 런던의 하이게이트 공동묘지에 묻혔다.
몇 년 후 엥겔스도 숨졌지만 제1바이올린의 화려한 선율을
가리지 않기 위해 맑스 옆에 눕는 대신 화장되었다.
유골도 신을 개라고 쓴 방직공장 소녀가 투신한 강에 뿌려졌다.
얼마 후 맑스의 딸 라우라도 남편과 함께 동반자살했다.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다”는 이유였다.
조문 온 레닌의 추도사를 들으며 맑스는 반쯤 눈을 감았다.
“라우라 부친의 꿈은 예상보다 빠르고 거침없이 실현될 것이다.”
그 꿈은 7년 뒤에 이루어졌고 70년 뒤에 무너졌다.
개를 데리고 여우사냥을 떠났던 엥겔스는 멧돼지를 잡았고
애인은 여전히 맑스 무덤에서 혼자 중얼거리며 촛불을 들고 있었다.
아마도 엥겔스가 사진 안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 문학계간지 <시작> 여름호 게재
이것이 인간이다
내가 번역한 시집 가운데 <살아남은 자의 아픔>이라는
프리모 레비의 시집이 있다.
가슴에 화상을 입으며 번역한 탓이지 늘 애틋하다.
이탈리아 화학자이자 파시즘에 저항한 유태인 레지스탕스인 그는
24살 때 체포돼 아우슈비츠로 끌려갔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지만
1987년 68세 때 토리노의 고층아파트에서 투신자살했다.
몇 년 전에 난 이 번역시집을 가슴에 품고
‘평균 생존기간 3개월’인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가서
그가 매일 보았던 시체소각 ‘굴뚝’을 보며 비통한 영혼을 위로했다.
그의 시집 가운데 ‘나치 전범재판’이라는 시가 있다.
유태인의 머리카락을 원단으로 사업해서 성공한 한 기업가의
전범재판 기록이다.
나치 전범재판
-증인심문
증인의 이름은?
알렉스 징크라고 합니다.
태어난 곳은?
화려한 고대도시로 유명한 뉘른베르크입니다.
그런데 재판장님,
먼저, 일사부재리 원칙에 입각해
이미 나치전범 재판에서 다뤘던 것들은
여기에선 더 이상 효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논쟁의 여지가 많을수록 더욱 그렇구요.
셋째, 참고로 이 세상 최고의 카펫들은
바로 제가 만든 펠트제품이라는 사실입니다.
허허- 증인이 쓸데없는 것까지 걱정하는군.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나 말해 보시오.
물론 위증의 대가에 관해선 잘 알 테고….
재판장님,
전 진짜 피땀 흘리며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돌 위에 돌을 쌓고, 상처 위에 상처를 쌓으며
제 이름을 딴 ‘징크 컴퍼니’ 공장을 설립해
최고로 아름다운 펠트 카펫을 만들었습니다.
저는 직원들의 봉급도 후하게 주는
자비롭고 근면성실한 사장인데다가
고객들도 절대로 불평하는 법이 없었어요.
한마디로 유럽 최고의 제품만 생산했죠.
카펫 제조기술이 아주 좋은 모양이군.
근데 그 훌륭한 솜씨는 어디에서 배웠소?
예? 그, 그건….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고 했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머리카락으로…
카펫을 짜면서 배웠습니다….
양모와 머리카락 중 어떤 게 더 품질이 좋던가요?
아무래도… 머리카락이….
그래, 그동안 꿈자리는 편안하던가요?
뭐, 대충은 꿀 만했는데… 간혹 슬픈 영혼들이
자꾸 흐느끼는 것 같이 꿈이 뒤숭숭하긴 했죠.
증인은 이제 돌아가서 기다리시오.
- 프리모 레비 시집 <살아남은 자의 아픔> 중에서
나치는 ‘위생’이라는 미명 아래 가스실로 보내기 전
유태인들의 머리카락을 잘라 카펫과 담요를 짰고
시신소각 뒤에는 금니로 금괴를 만들어 전쟁자금을 마련했다.
또 시신 잿더미는 정원의 꽃밭과 전시 작물밭의 비료로 사용했다.
유태인을 인간이 아니라 짐승으로 취급했기에 가능한
나치의 '알뜰하기 그지없는' 실용주의다.
특히 머리카락으로 짠 카펫과 담요는
양모재료보다도 더 따뜻하고 더 윤기가 잘잘 흐른다고 해서
당시 주문생산이 밀릴 만큼 최고의 인기상품이었다.
그 VIP고객들은 나치와 연합군 간부들을 비롯해
전쟁물자를 생산해 이익을 챙기던 기업가들과
사회의 소수 특권층 인사들이었다.
그들은 주로 사업로비용이나 가정선물용으로 앞다퉈 구입했다.
물론 최대 납품처는 나치 병영이었다.
특히 날씨가 쌀쌀해지는 가을이면 따뜻한 방한용 담요가 필요한
동계전투를 대비해 수용소의 머리카락 삭발식이 더욱 분주해졌고
굴뚝도 그만큼 바빠졌다.
대표적인 단골주문 고객들은 독일의 히틀러, 괴링, 히믈러, 헤스
괴벨스, 아이히만, 나치장교의 정부인 향수디자이너 코코 샤넬 등과
연합군의 아이젠하워, 패튼, 브레들리, 몽고메리, 롬멜 장군
전설의 명사수 바실리 자이체프, 앨런듀링 등이다.
마지막 앨런튜링은 인류 최초의 컴퓨터를 만든 천재로서
나치의 암호체계인 이니그마(Enigma)를 해독했다.
동성애자인 그는 경멸과 조롱을 당하다가
스스로 독을 넣은 사과를 먹고 자살했다.
애플의 스티브잡스가 이 비운의 천재를 추모하는 뜻에서
'한입 베어문 사과'를 애플의 로고로 사용했다는 얘기도 있다.
그런데 같은 유태인들도 상당수가 이 카펫을 주문했다.
여기서 2차대전 중 일부 특권층 유태인들이
가난하고 힘없는 서민 유태인들을 아우슈비츠로 보내기 위해
게슈타포한테 팔아넘긴 사실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일찌감치 전시 안전지대로 피신해
자기 형제들의 머리카락으로 짠 따뜻한 이불을 덮고 자며
안락한 삶을 누렸다.
또 그것도 모자라 전후에는 희생자들의 가족서류를 위조해
사망보상금까지 가로챘다.
우리의 일제 식민지 역사도 그와 다르지 않다.
다른 게 있다면 우린 아직도 참된 사과나 보상 같은 것들을
전혀 받아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모두 친일잔재가 청산되지 않아서 겪는 우리의 수모이지만,
그런 수모를 겪을수록 난 나치의 그 ‘알뜰한 실용주의’를
더욱 본받고 싶어진다.
- 이산하(시인, 유레카 편집위원장)
* 인문교양 월간지 <유레카> 연재(2018.6)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
뜻밖으로 나이 드는 게 불편하고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수록
아무리 자신을 부숴도 인생이 그다지 특별해지지 않을수록
두 선배 작가들의 얘기가 떠오른다.
대하소설 ‘토지’로 폭염 속의 내 여름감방을 서늘하게 만든
박경리 작가는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이렇게 썼다.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
모진 세월 가고… 아- 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렇게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
나와 몇 번 인터뷰를 한 박완서 작가도 타계 전에 이렇게 썼다.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안 하고 싶다고 말 할 수 있는
자유가 얼마나 좋은데 젊음과 바꾸겠는가….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
…
한 겹 두 겹 어떤 책임을 벗고
점점 가벼워지는 느낌을 음미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한국 문단의 대표적인 두 여성 소설가는 원주와 구리의 시골집에서
홀로 텃밭을 가꾸며 조용히 글을 쓰다가 삶을 마감했다.
그런데 두 작가의 글에서 서로 묵계라도 한 듯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는 말이 똑같이 나온다.
한 번 흘러간 물이 다시 돌아오지 않듯 인생도 그렇다.
결코 삶이 남루하거나 덧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다시 돌아오지 않고 다시 돌이킬 수 없다는 것
그것만큼 공평한 것도 없고
그것만큼 자유인 것도 없다.
그동안 얼마나 아프고 힘들게 살아왔는데 다시 돌아가겠는가.
위의 글처럼 두 분은 젊어서 얻지 못한 자유로움을 늙어서 얻었다.
이제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으로 홀가분한 노년의 삶
더 이상 무엇을 얻으려고 자신을 부수거나 꿈꿀 필요가 없는 삶
가을에 꽃 핀 아름다움을 버림으로써 열매도 맺었고
겨울에 그 열매마저 버림으로써 다가올 봄의 꽃을 준비하는
그런 겨울나무처럼 삶의 모든 잔가지들을 걷어내고
마지막 버린다는 생각까지 버리며 홀로 여위어가다 눈을 감았다.
그것이 자유로움이고
그것이 아름다움이다.
잘 늙은 절 같은 두 분의 삶을 그리며
내 마음 속에 단청 없는 절 하나 짓는다.
-이산하(시인, <유레카> 편집위원장)
* 인문교양잡지 <유레카> 연재(2018.3)
인디언에게 없는 말들
인디언에게는 ‘잡초’라는 말이 없다.
백인들이 침략했을 때 가장 놀란 말도 잡초란 말이었다.
인디언에게는 존재이유가 없는 풀은 하나도 없고
모든 풀들은 신성하고 존중되어야 했다.
인디언에게는 ‘소유’라는 말이 없다.
나무든 돌이든 물이든 땅 위의 모든 것들은 공동재산이고
필요한 경우 일시적으로 점유할 뿐이다.
개인은 자기가 먹고 살만큼의 땅만 경작해야 하고
야생동물도 배고프지 않을 정도만 사냥해야 한다.
인디언에게는 ‘고용’이라는 말이 없다.
혼자 버거우면 서로 협력해 경작하거나 사냥할 수는 있지만
남을 머슴처럼 고용해 부려먹어서는 안 된다.
사냥과 경작의 양도 생존을 해결할 정도만으로 그치고
그 이상의 축적은 낭비이므로 금지했다.
혹 사냥하다가 너무 많이 죽여 공동재산을 낭비하는 자는
죄의 경중에 따라 몇 주씩의 음식물 금식 형벌을 받는다.
인디언에게는 ‘구속’이라는 말이 없다.
모든 사람은 자유롭고 평등하며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또 타인이 신성하게 여기는 것은 무조건 존중해야 하고
모든 노약자들은 부족으로부터 보호 받을 권리가 있다.
이 부족 모두 의무적으로 외우고 다니는 음유시에는
그들의 인생관과 세계관이 집약되어 있다. 삼엄하다.
내 앞에서 걷지 말라.
난 그대를 따르고 싶지 않다.
내 뒤에서도 걷지 말라.
난 그대를 이끌고 싶지 않다.
다만 내 옆에서 걸어라.
그래야 우리는 나란히 걸을 수 있다.
-이산하(시인, <유레카> 편집위원장)
* 인문교양 월간지 <유레카> '생각의 틈' 연재(2018.2
촛불을 패러디한 시
2016년 가을부터 2017년 봄까지 대한민국은
장엄한 촛불의 화력을 실감하고도 남았다.
여러 예술 분야에서 촛불을 패러디한 작품들이 쏟아졌고
문학 분야에서도 유명 시인의 작품을 패러디한 시가 나왔다.
이문재 시인의 시 ‘촛불의 노래를 들어라’가 대표적이다.
"불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불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불이 눕는다.
바람보다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우리가 불이 되어 만난다면
젖은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화르르 화르르 불타오르는 소리로 흐른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물로 만나려 한다.
벌써 물줄기가 된 물방울 하나가
물바다가 된 세상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물 지난 뒤에 타오르는 불로 만나자…."
첫 번째 시는 김수영 시인의 ‘풀’을 살짝 바꿨고
두 번째 시는 강은교 시인의 ‘우리가 물이 되어’를 바꿨다.
김수영의 풀과 강은교의 물을 모두 ‘불’로 바꿨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다.
쓰러져도 다시 일어서는 풀과 바람에 꺼져도
다시 켜지는 촛불이 서로 잘 포개져 있다.
또 물방울이 모여 물줄기가 되고
그 물줄기를 쏘는 물대포에 대한 촛불의 응징도 자연스럽다.
이 시가 적힌 광화문광장의 입간판 옆으로는
다른 유명 작품들을 패러디한 시들도 많았다.
"촛불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희는
언제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안도현 시인)
"흔들리지 않고 피는 촛불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촛불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도종환 시인)
"촛불이 곁에 있어도
나는 촛불이 그립다."(류시화 시인)
이제 세상은 ‘적당히’ 바뀌었고 촛불은 꺼졌다.
길이 다시 어두워지면 불씨도 다시 살아날 것이다.
지난 촛불시위에서는 아날로그 양초촛불이
디지털 LED촛불로 바뀌었다.
아날로그 촛불은 자기 온몸을 다 태우고 녹지만
디지털 촛불은 장렬하게 전사할 심지와 근육이 없다.
나는 그것이 노동자에서 소시민적 인텔리로
우리 사회변혁의 중심이 바뀐 신호로 보였다.
땅을 갈아엎어 토양을 바꿀 근본적인 변혁 없이
나무를 골라 옮겨 심는 정도의 기회주의적이고 개량주의적인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마침내 다시 착륙한 것이다.
촛불이 계속 광화문광장에 갇혀 있었던 것도 그런 탓이고
세월호의 노란 리본이 광화문광장을 벗어나지 못한 것도
그런 탓일 것이다.
촛불의 시작은 창대했으나 끝은 미미했다.
30년 전 박종철, 이한열의 시체를 거름으로 피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꽃은 피자마자 졌다.
30년 후 세월호 아이들과 백남기의 시체를 거름으로 피운
불꽃도 피자마자 졌다.
6월항쟁에 벽돌 한 장씩을 얹었던 청춘들은
노동 없는 디지털 촛불에 눈이 멀어 모래알처럼 흩어졌다.
광화문광장은 텅 비었다.
독재의 무기는 칼이고 자본의 무기는 돈이다.
칼은 몸을 베고 돈은 정신을 벤다.
우리는 몸도 베였고 정신도 베였다.
우리는 아직 이것밖에 안 된다.
우리는 앞으로도 입은 여전히 진보의 깃발을 흔들며 외칠 것이고
발은 지폐가 깔린 안전하고 편한 길을 골라 걸을 것이다.
촛불의 열매를 챙긴 소수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주인공들 역시
노동대중을 벌레처럼 털어내며 더욱 창대할 것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 아니라 의회공화국이며
모든 권력은 국민이 아니라 자본과 소수 엘리트들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촛불이 아무리 풀과 물을 불로 바꿔놓아도
우리의 비정규직 민주주의는 여전할 것이고
세상도 적당히 바뀔 만큼만 바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촛불이 곁에 있어도 촛불이 슬프다.
-이산하(시인, 유레카 편집위원장)
* <유레카> ‘이산하의 시인의 생각의 틈’ 연재(2017년 12월호)
친구
시골의 초등학교 2학년 때 지각을 할 것 같아
열심히 달리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팔과 무릎이 까져 아파서 울려고 하는데
뒤따라 달려오던 아이도 내 옆에 넘어졌다.
그러자 울음 대신 웃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우리는 서로 손잡고 벌떡 일어나 함께 달렸다.
40년 뒤 내가 친구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그때 고마웠어.”
“뭐가?”
“어릴 때 니가 내 옆에 일부러 넘어져 준 거.”
“짜식, 뭐 그런 걸 아직도. 하하하….”
* <이산하 시인의 짧은 시>(유레카 11월호 연재)
용서
어릴 적 새벽마다 옆집의 달걀을 몰래 훔쳐 먹었다.
어른들이 이빨에 톡톡 쳐서 먹는 게 너무 멋있어서
나도 계속 훔쳐서 흉내를 냈다.
1주일 후 옆집 아저씨가 알도 못 낳는 게
모이만 축낸다는 이유로 암탉을 잡아 삶았다.
우리 집에도 맛보라며 삼계탕 한 그릇을 가져왔다.
아버지가 장남이 먹어야 한다며 나한테 주었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난 삼계탕을 먹은 적이 없다.
영문도 모른 채 억울한 누명으로 목숨을 잃은
50년 전의 암탉에게 용서를 빈다.
* <이산하 시인의 짧은 시>(유레카 10월호 연재)
너에게 묻는다
꽃이 대충 피더냐.
이 세상에 대충 피는 꽃은 하나도 없다.
꽃이 소리 내며 피더냐.
이 세상에 시끄러운 꽃은 하나도 없다.
꽃이 어떻게 생겼더냐.
이 세상에 똑같은 꽃은 하나도 없다.
꽃이 모두 아름답더냐.
이 세상에 아프지 않은 꽃은 하나도 없다.
그 꽃들이 언제 피고 지더냐.
이 세상의 모든 꽃은
언제나 최초로 피고 최후로 진다.
-이산하(시인)
* <유레카>(청소년 인문교양 잡지 9월호 게
사람이 된 강
사람에게만 사람답게 살 권리가 있는 게 아니다.
강에게도 맑게 흐르고 아름답게 살 권리가 있다.
강 속에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숨 쉬고 있는가.
몇 년 전 많은 여행객들로 강산이 오염되는 뉴질랜드에서는
세계 최초로 강에게 ‘인간의 지위’를 부여했다.
원주민 마오리족이 신성시하는 북섬의 황거누이강에
인간과 동등한 법적 권리와 책임을 주는
'강의 권리에 대한 법률'이 만들어졌다.
누구든 그 강을 더럽히거나 해치는 등의 폭력을 행사하면
사람처럼 '강권법'에 의해 처벌을 받는다는 것이다.
마오리족은 이미 160년 전부터 강도 사람과 똑같은
인격체로 대우하라고 정부에 호소해왔다.
그것이 마침내 이루어졌다.
마오리족 공동체는 지금도 황거누이강을
‘코아우테 아우아, 코테아우아 코아우’라고 부른다.
‘나는 강, 강은 나’라는 뜻이다.
인디언들이 나무나 바위, 구름, 바람 같은 것을
자신의 살과 영혼으로 생각하듯 마오리족도
자신과 강을 똑같은 형제로 보고 있다.
자연을 대하는 그들의 마음이라도 읽은 듯
얼마 전 인도에서도 갠지스강에
인권을 부여하는 법을 만들었다.
이들 법대로 하자면 우리나라 아름다운 4대강에
국민세금 22조원으로 16개의 댐을 세워 물을 썩게 만들고
해마다 유지보수 관리비만 5천억 원에 이르는 등
천문학적 국민혈세를 낭비하게 만든 주범은
4대강 폭행 및 살인죄로 최소 사형에다가
다시 무덤을 파헤치는 부관참시도 모자랄 것이다.
또 앞장서서 국민과 강을 기만하고 모독한 학자와
교수, 국회의원, 공무원, 건설재벌, 방송언론 등의
공범들도 평생 무기수로 감옥에서
4대강 녹조라떼 물을 먹으며 썩어야 할 것이다.
-이산하(시인, 유레카 편집위원장)
혈서
어릴 적 공책에
글씨를 쓸 때마다
연필심에 침을 발라
코와 입술을
오묘하게 비틀어가며
한 자 한 자
꼭, 꼭 눌러 썼다.
요즘 컴퓨터 자판을
톡, 톡 두드릴 때마다
난 어릴 때의 그 침이
실은
공책 속의 허공을 뚫는
검은 피라는 걸
거듭거듭 깨닫는다.
* 계간 <문학마당> 2013 가을호
E=MC2
옛날 수첩을 보다가 고개가 빛처럼 굴절된다.
아인슈타인의 ‘E=MC2’
내가 보기에 유사 이래 세계 최고의 시!
현실은 빛이라는 상상력에 의해
혁명적 에너지로 전환된다는 것을
이처럼 간명하게 보여준 시는 아직 없다.
현실은 그 자체가 거대한 에너지고
그것이 빛을 만나 이 세상을 폭발시킨다.
그러나 광속은 초속 30만 킬로가 한계이지만
역설적으로 우주에 대한 속도제한이기도 하다.
그런데 과연 인간의 무한한 상상력은
새들보다야 더 높이 날 수 있겠지만
이 빛의 제한속도보다 더 빠른 것이 가능할까?
* 계간지 <문학의 오늘> 2013년 여름호
인생목록
흙으로 돌아가기 전
눈물 외에는
모두 반납해야 한다는
어느 노승의 방
구름 같은 이불
빗방울 같은 베개
바람 같은 승복
눈물 같은 숟가락
바다 같은 찻잔
낙엽 같은 경전
그리고
마주 보는 백척간두 같은
두 개의 젓가락과
허공의 바닥을 두드리는
낡은 지팡이 하나...
* <우리시> 2012년 11월호
열흘 붉은 꽃 없다
한 번에 다 필 수도 없겠지만
한 번에 다 붉을 수도 없겠지.
피고 지는 것이 어느 날 문득
득음의 경지에 이른
물방울 속의 먼지처럼
보이다가도 안 보이지.
한 번 붉은 잎들
두 번 붉지 않을 꽃들
너희들은 어찌하여
바라보는 눈의 깊이와
받아들이는 마음의 넓이도 없이
다만 피었으므로 지는가.
제 무늬 고운 줄 모르고
제 빛깔 고유한 줄 모르면
차라리 피지나 말지.
차라리 붉지나 말지.
어쩌자고 깊어가는 먼지의 심연처럼
푸른 상처만 어루만지나.
어쩌자고 뒤돌아볼 힘도 없이
그 먼지의 무늬만 세느냐.
먼지의 무게
복사꽃 지는 어느 봄날
강가에서 모닥불을 피워 밥을 지었다.
쌀이 익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저녁노을 아래 밥이 뜸 들어갈 무렵
강 건너 논으로 물이 천천히 들어가고 있었다.
문득 네팔의 한 화장터가 떠올랐다.
'퍽!'
'퍽!'
여기저기 불길 속으로 머리들이 터졌다.
사방으로 흩어진 뇌수를 개들이 핥아 먹었고
아이들은 붉은 잿더미를 파헤쳐 금붙이를 찾았다.
인간이 재로 바뀌는 건 두 시간이면 충분하지만
가난한 집의 시신들은 장작 살 돈이 부족해
절반만 태운 채 강물에 버려지기도 했다.
그들은 언제나 머리를 가장 먼저 불태운 다음
마지막으로 두 발을 태웠다.
나는 한동안 생각을 지탱한 머리와
세상을 지탱한 발을 비교하며
삶의 무게를 저울질하다 재처럼 풀썩이고 말았다.
인간이 어떤 것의 마지막에 이른다는 것
그 지점에 도달해서야 비로소
먼지의 무게를 재며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는 것
밥이 뜸 들어가는 저녁마다 난 여전히
시를 짓듯 죄를 지었고
죄를 짓듯 시를 지었다.
오늘따라 논물이 강물보다 더욱 깊어가는 것도
단지 먼 길을 돌아온 세월 탓만은 아니리라.
-<문학동네> 2013년 봄호
마당을 쓸며
옛날 할아버지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마당부터 쓸었다.
매일 쓸지만 어느새 또 어지럽다.
오랜만에 집 청소를 한다.
잠시 두 가지 방법을 놓고 고민한다.
빗자루로 쓰레기를 밖으로 밀어내는 것과
진공청소기로 쓰레기를 안으로 빨아들이는 것이었다.
먼저 밖으로 배척하는 것은
오랜 시간 빗자루만 자꾸 닳고 부러질 뿐
예전의 낡은 방식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일단 먼지 한 점 남김없이
모두 내 품속으로 흡수해
다시 뱉어내는 새로운 방식을 택했다.
첫번째 방법과는 달리 아주 시끄러웠지만
방도 마당도 깨끗했다.
그런데 너무 지나치게 깨끗했다.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없듯
방바닥은 내 신경이 비칠 만큼 아찔했고
마당은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할 만큼 패였다.
싹쓸이는 너무 황량해 고립을 자초했다.
게다가 먼지깔때기를 자주 갈지 않으면
자기 내부가 쓰레기로 넘쳐
스스로 악취를 풍기며 썩거나 질식했다.
다시 청소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오늘도 여전히 새로운 쓰레기들이 쌓인다.
밖에서 들어오는 것들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들
또 수시로 안팎을 넘나들어 구분하기 어려운 것들
눈만 뜨면 방과 마당을 쓰는 자들이여
눈을 감아도 세상의 쓰레기들을 청소하는 자들이여
먼저 자기 안의 깔때기부터 조심하라.
먼저 자신의 빗자루부터 썩지 않았는지 조심하라.
- <녹색평론>(2013년 1~2월호)
산수유 씨앗
-전우익 선생의 휠체어를 밀며
2003년의 뜨거운 여름,
전 선생이 사고로 대구의 한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난 며칠 동안 그늘만 찾아다니며 휠체어를 밀었다.
예전 봉화 청량사를 오를 때는 그의 등을 밀었다.
선생은 질문이 곧 성찰에 이르는 길인 듯 줄곧 물었다.
왜 한국에는 도연명 같은 혁명적인 시인이 없는가.
왜 권정생 같은 동화작가가 다시 나오지 않는가.
왜 쌀알 한 톨이 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가.
왜 벼꽃이 피는 걸 개화라 하지 않고 ‘출수’라 부르는가.
왜 포도나무는 자꾸 사막 멀리 뿌리를 뻗어가는가.
왜 솔개는 바위에 부리를 부수고 발톱을 뽑아버리는가.
왜 큰 것은 작은 것을 겸하지 못하는가.
왜 세상은 인간이 직립한 이후부터 비극이 생기는가.
….
9년 전 세상을 떠난 선생의 질문이 아직도 귀에 맴돈다.
그의 책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에도 나오지만
무슨 선거 때만 되면 노란 산수유 이야기가 떠오른다.
어느 날,
전 선생이 산수유 묘목을 밭에 심고 있는데
이웃들이 그게 언제 커서 돈이 되겠느냐며 혀를 찼다.
5년 후 심은 나무에서 노란 꽃이 몇 개 달리더니
10년이 지나자 노란 숲으로 변해 향기가 마을에 진동했다.
선생은 산수유 묘목을 가꿔 이웃들에게 나눠주었다.
간혹 묘목 대신 씨앗을 달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대목에서 전 선생이 빙긋이 웃으며 내게 물었다.
자네는 씨앗과 묘목 중 어느 것을 받겠느냐고….
나도 빙긋이 웃으며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토양이 너무 나빠 먼저 땅부터 완전히 갈아엎지 않으면
아까운 산수유 씨앗만 버리게 될 거라고 덧붙였다.
전 선생이 다시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 뜨락의 그늘에 저녁 어스름이 깔린다.
어둠과 빛이 교차하자 모든 것들이 지워져간다.
생사의 안팎이 이 한순간의 박명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이젠 어제 씨앗이었던 저 나무들도 내일은 재로 변하리라.
그 잿더미에서 쌀알 같은 벼꽃들이 피어나기도 하리라.
두 바퀴를 두 손으로 직접 굴리는 이 휠체어는
천천히 손에 힘을 주는 만큼만 바퀴자국을 남긴다.
- <녹색평론>(2013년 1~2월호)
벽오동 심은 뜻은
처음 강을 건너갈 때
나는 그 강의 깊이를 알지 못했다.
물론,
그 깊이가 내 눈의 깊이라는 것도 알지 못했고
수심이 얼마나 되든 끝까지 가본 자만이
가장 늦게 돌아온다는 법도 알지 못했다.
그 강 한가운데에는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늙은 벽오동 한 그루가 지키고 있었다.
가지 위에는 일생동안
부화할 때와 죽을 때만 무릎을 꺾는다는
백조 한 마리가 살며
생채기마다 부지런히 단청을 하고 있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허기지도록 적막한 지금도
나는 여전히 그 강의 깊이를 알지 못하고
또 백조가 왜 벽오동을 떠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다만,
내 삶의 무게가 조금씩 수심에 가까워질수록
수면 위에서 반짝이고 있을 내 여생의 무늬가
강 가장자리로 퍼져나가며 단청이라도 한다면
내 비록 끝내 바닥에 이르지는 못할지라도
백조처럼 기꺼이 두 번 무릎을 꺾을 수는 있겠지.
-<실천문학> 2011. 여름호
가장 먼 길
숟가락은 수직으로 떨어지는
한 방울의 눈물 같고
젓가락은 마주 보는
두 개의 백척간두 같다.
숟가락이 밥 속으로
수직으로 깊이 찔러 들어가
바닥을 긁고 나면
젓가락은 수평을 이룬다.
눈물이
백척간두에서 한 발 내딛는다.
나는 흩어진 밥알처럼
바닥에 바싹 붙은 채
숟가락과 밥그릇 사이가
가장 먼 길임을 깨닫는다.
-<실천문학> 2011. 여름호
미자의 모자
.
시를 쓸 때마다 이창동 감독의 명화 ‘시’가 떠오른다.
잔잔한 강물 위로 엎어진 시체 하나가 떠내려 온다.
하늘을 바로 보지 못하고 죽어서도 엎어져 있다.
멀리서 내 앞으로 운구하듯 천천히 다가오면
마침내 영화 제목이 수면 위에서 잔잔하게 일렁거린다.
시와 그리고 시체….
언제든 예기치 않은 것들이 내 앞으로 떠내려 온다.
진실은 수면 아래에 숨어있다는 듯 얼굴을 가리고
시는 생사가 같은 날이라는 듯 강물이 운구하고
그렇게 얼굴이 사라져야 비로소 실체가 드러난다는 듯
마지막으로 나에게 천천히 다가와 무심히 흘러간다.
처음부터 끝까지 강물이 표정을 바꾸지 않을지라도
단지 떠내려가는 것만 보여주는 게 시는 아닐지라도
결국 세상의 모든 시도 수면 아래로 내려가지 못하고
미자의 모자처럼 물에 새기듯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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