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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괜찮은 詩

사랑하기 때문에 늘 거기 있다.

by 이성근 2021. 1. 3.

2021.1.1

시계는 사과나무의 사랑을 모르고 / 김혜영

다리와 물/황유원

손톱 / 전윤호

밤눈 /전윤호

바람 /장석주

에 부침 /장석주

절터 / 장석남

낙화 /이형기

寂寞江山 / 이태수

절망의 빛깔은 아름답다 /이태수

감자꽃 /이재무

선운사/ 전연옥

무엇이 너를 키우니/이은봉

역설-/이운룡

뒷모습/이운룡

명중/ 이용헌

8/이외수

더 깊은 눈물 속으로-/이외수

장마전선/ 이외수

그리움도 화석이 된다 /이외수

사랑은/이민원

꽃 이우는 시간 /이기철

홀로 등불을 상처 위에 켜다 /윤후명

확인/ 윤후명

너를 기억하다 /윤성택

표리부동 /오은

비가 와도 젖은 자는/오규원

한 잎의 여자 1 / 오규원

기다림의 시/ 양성우

와유(臥遊-) /안현미

양파 - 안명옥

가을 엽서/안도현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안도현

 

시계는 사과나무의 사랑을 모르고 김혜영

 

사랑이 식어갈 때는 수상한 냄새가 난다. 식은 밥은 향기가 사라진다. 먹다 남은 밥그릇에 덕지덕지 붙은 밥알의 감정이 딱딱하게 말라간다.

 

생일날 아침, 분홍 수국이 식탁으로 왔다. 케이크는 부풀어 오른다. 고집을 부리다 혼난 아이는 울먹이고

 

사랑이 타오를 때 노을은 붉은 심장을 감추느라 어쩔 줄 몰랐지. 영글어가는 사과는 미래의 계절로 떠난다. 내일로 걸어가는 시계를 모르는 아이는 사과나무에 올라 사과를 딴다.

 

수녀원은 고요했지. 아무도 깨지 않은 새벽에 난 가만히 누워 있었어. 책상 위의 조그만 램프에 불이 켜졌지. 무한한 사랑이 심장을 관통하듯 언어 너머의 세계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어.

 

내 마음 속 블랙홀이었을까

나의 실재였을까

우주였을까

 

생일날 저녁, 잠시 우울한 러시아 민요가 들린다. 어쩌면 이 곳은 태어나기 전에 내가 선택한 삶인지도 몰라요. 서로 어긋나는 말, 비켜나는 시선, 날카로운 비명을 감싸는 에너지는 어디서 오는가.

 

사랑이 익어가는 냄새를 풍기면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는 사물들. 수국 화병에 물을 준다. 꽃에게 인사를 하고 식탁 의자에게 문득 말을 건넨다. “고마워요.”

 

 

 

다리와 물-황유원

 

다리 아래로 지금도 물은 힘차게 흘러가고 있고

흘러가고 말하는 사이에도 다른 물이 밀려와 저 너머로 다시

흘러가고 있고

흘러가고 있고 흘러가고 있고 모든 게 흘러가고 있고

다리는 굳건하고

다리는 흘러가는 물과 함께 늙어가고

아래로 흘러가는 물을 굽어보며

늘 처음인 듯

오랫동안 서로 얼굴을 맞댄 사이인 듯

아무려면 어떠냐는 식으로 흘러가는 물을 쳐다보고

물은 각자 다르지만 모두가 저 다리를 쳐다본 적이 있고

저기서 미련하게 자리를 지키며

멍청할 만큼 제자리를 지키며 물만을 바라보는

다리를 물은 사랑할 것도 같고

증오할 것도 같고

하지만 그런 생각조차도 모두 흘러가고 흘러가고 흘러가

다리는 마침내 늙어서 무너지고

물은 부서진 다리의 조각들을

자신의 깊은 곳에 가라앉히고

흘러가고 흘러가고 흘러가며

쓰다듬고 쓰다듬고 쓰다듬어

다리가 물과 섞여

더는 어느 게 다리고 어느 게 물인지

물도 다리도 이제는

알 수가 없고

 

 

 

손톱 전윤호

 

나 같은 얼간이에게

사랑은 손톱과 같아서

너무 자라면 불편해진다

밥을 먹다가도 잠을 자다가도

웃자란 손톱이 불편해 화가 난다

제 못난 탓에 괴로운 밤

죄 없는 사람과 이별을 결심한다

손톱깎이의 단호함처럼

철컥철컥 내 속을 깎는다

아무 데나 버려지는 기억들

나처럼 모자란 놈에게

사랑은 쌀처럼 꼭 필요한 게 아니어서

함부로 잘라버린 후

귀가 먹먹한 슬픔을 느끼고

손바닥 깊숙이 파고드는 아픔을 안다

다시 손톱이 자랄 때가 되면

외롭다고 생각할 것이다

 

 

 

밤눈 전윤호

 

오래 참아온 말들이 굳어

화석이 되는 밤

추억도 공소시효가 있어

사랑한다고 언제까지 잡아둘 순 없겠지

포승줄에 묶여 실려 가는 시간들

변호인도 없이 유죄가 되고

종신형 받을 후회는 어쩔까

불타는 겨울 여윈 눈 내리네

 

 

 

바람 장석주

 

바람은

저 나무를 흔들며 가고

난 살고 싶었네

 

몇 개의 영원불멸의 아이들이 자전거를 달리고

하늘엔 한 해의 마른풀들이 떠가네

 

열매를 상하게 하던 벌레들은 땅 밑에 잠들고

먼 길 떠날 채비하는 제비들은 시끄러웠네

 

거리엔 수많은 사람들의 바쁜 발길과 웃음소리

뜻없는 거리로부터 돌아와 난 마른꽃같이 잠드네

 

밤엔 꿈 없는 잠에서 깨어나

오래 달빛 흩어진 흰 뜰을 그림자 밟고 서성이네

 

여름의 키 작은 채송화는 어느덧 시들고

난 부칠 곳 없는 편지만 자꾸 쓰네

 

바람은 저 나무를 흔들며 가고

난 살고 싶었네

 

 

 

에 부침 장석주

 

1

누이여, 오늘은 왼종일 바람이 불고

사람이 그리운 나는 짐승처럼 사납게 울고 싶었다.

벌써 빈 마당엔 낙엽이 쌓이고

빗발들은 가랑잎 위를 건너 뛰어다니고

나는 머리칼이 젖은 채

밤늦게까지 편지를 썼다.

자정 지나 빗발들은 흰 눈송이로 변하여

나방이처럼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유리창에 와 흰 이마를 부딪치곤 했다.

나는 편지를 마저 쓰지 못하고

책상 위에 엎드려 혼자 울었다.

 

2

눈물 글썽이는 누이여

 

쓸쓸한 저녁이면 등을 켜자.

저 고운 불의 모세관 일제히 터져

차고 매끄러운 유리의 내벽에

밝고 선명하게 번져 나가는 선혈의 빛.

바람 비껴 불 때마다

흔들리던 숲도 눈보라 속에 지워져 가고,

조용히 등의 심지를 돋우면

밤의 깊은 어둠 한 곳을 하얗게 밝히며

홀로 근심 없이 타오르는 신뢰의 하얀 불꽃.

등이 하나의 우주를 밝히고 있을 때

어둠은 또 하나의 우주를 덮고 있다.

슬퍼 말아라, 나의 누이여

많은 소유는 근심을 더하고

늘 배부른 자는 남의 아픔을 모르는 법,

어디 있는가, 가난한 나의 누이여

등은 헐벗고 굶주린 자의 자유

등 밑에서 신뢰는 따뜻하고 마음은 넉넉한 법.

돌아와 쓸쓸한 저녁이면 등을 켜자.

 

 

애인 장석주

 

누가 지금

문 밖에서 울고 있는가.

인적 뜸한 산언덕 외로운 묘비처럼

누가 지금

쓸쓸히 돌아서서 울고 있는가.

 

그대 꿈은

처음 만난 남자와

오누이처럼 늙어 한 세상 동행하는 것

작고 소박한 꿈이었는데

왜 그렇게 힘들었을까.

 

세상의 길들은 끝이 없어

한번 엇갈리면 다시 만날 수 없는 것

메마른 바위를 스쳐간

그대 고운 바람결

그대 울며 어디를 가고 있는가.

 

내 빈 가슴에 한 등 타오르는 추억만 걸어놓고

슬픈 날들과 기쁜 때를 지나서

어느 먼 산마을 보랏빛 저녁

외롭고 황홀한 불빛으로 켜지는가.

 

 

절터 장석남

 

절터엔 오롯이

탑 한기만 남아 있었습니다

빈 절터에서 밤이 올때 까지

오래 앉아 있고 싶을때가 있었습니다

주춧돌만 남은 절터는

사랑이 지나간

가슴과도 같습니다

 

 

 

낙화- 이형기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 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寂寞江山- 이태수

유등 연지·1

 

한여름, 마음이 먼저 간 뒤

발길도 슬며시 따라가 닿은 유등 연지.

비 그친 오후 한때

어깨 부딪히는 초록 저희 우산들 사이

연꽃들 환하다. 무더기로 환하다.

왜가리 떼 날아 내려 긴 부리 세우고

물 밑을 쪼아 대는 동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온몸으로 밀어 올리는

불길, 불꽃들, 진흙 물 위를 밝히는

연등들은 그러므로 그윽하게 아프다.

햇살 뛰어내릴 때보다

해거름에 다가갈수록 환해진다.

그 아픈 언저리. 왜가리도, 내 마음도

마냥 붙박이가 되고 있다.

등 뒤에는 누군가의 아득한 독경 소리.

허공을 흔들고, 연꽃잎을 흔든다.

 

 

 

절망의 빛깔은 아름답다 이태수

 

이룰 수 없는 꿈은 아름답다.

팔을 뻗고 발을 구르는

이 목마름은 아름답다.

뜬눈으로 밤을 건너거나

입술 깨물며 돌아서도

가눌 수 없는 이 눈물은 아름답다.

저만큼 가고 있는 네 등 뒤에

눈길을 주며, 강의 이쪽에서

돌이 되는 가슴은 아름답다.

지워도 지워도 되살아나는

아픔과 상처, 강의 저쪽과

이쪽, 그 사이의 하늘에 번지는

절망의 빛깔은 아름답다.

 

 

감자꽃 이재무

 

차라리 피지나 말걸 감자꽃

꽃피어 더욱 서러운 여자.

자주색 고름 물어뜯으며 눈으로 웃고

마음으론 울고 있구나 향기는,

저 건너 마을 장다리꽃 만나고 온

건달 같은 바람에게 다 앗겨버리고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비탈

오지에 서서 해종일 누구를 기다리는가

세상의 모든 꽃들 생산에 저리 분주하고

눈부신 생의 환희 앓고 있는데

불임의 여자. 내 길고긴 여정의

모퉁이에서 때묻은 발목 잡고

퍼런 젊음이 분하고 억울해서 우는

내 여자. 노을 속 찬란한 비애여

차라리 피지나 말걸, 감자꽃

꽃피어 더욱 서러운 여자

 

 

 

선운사-전연옥

 

시간이 좀 늦었지만 우리 모두 선운사에나 가지요

삶이란 무엇인가 따위로 심사가 사나와 있는

중년의 애인을 데리고

마음은 한결같으나 의견은 한다발로 묶여지지 않는 저녁날

우리 모두 선운사에 가

마음 고생에 헐벗은 영혼을 달래며

좀 늦은 저녁 공양이나마 청해 들지요

 

막차를 타고 선운사에 가보면 모두 다 알게 되지요

남의 상처도 내 것처럼 아프고

별스러운 게 다 슬프고

서러워 밤새도록 불면의 베개에 이마를 파묻을 때

그것이 바로 삶의 방식이 아니겠냐고

아득히 물어오는 동백꽃이 있다는 것을

선운사 붙박이 식구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그 애절한 사연을 알고 있었지요

 

 

 

무엇이 너를 키우니-이은봉

 

버들잎 하나, 네 마음 속 뾰쭉뾰쭉 버들잎 하나 이슬처럼, 아침 이슬처럼 아프게 맺히는 그리움 하나 그리움이 너를 키우니

 

둑방길 옆, 낮은 풀더미를 흔들며, 귀또리가 울고 휘파람이 울고 무엇이 너를 키우니 서러움이 너를 키우니 첫 사랑이.

 

 

 

역설- 이운룡

 

오래된 슬픔은 향기를 품는다

슬퍼서 소금이 된 알갱이는 빛을 머금어 투명하지만

썩은 슬픔은 검은 흙이 될 것이다

하지만, 썩어서 흘러나온 눈물이 마음을 적시고

마음을 키우는 거름이 된다면 나 또한

그렇게 푹 썩은 슬픔에 젖어

뒤돌아 훔쳐낸 눈물이고 싶다

덜 썩어 비린 풋냄새 나기 전에, 혹시는

썩다가 원색의 악의 꽃이 번져 중독되기 전에

아랫목 술항아리 불룩하고 따뜻한 뱃속

사랑과 미움이 보글보글 끓다가

마침내 승자도 패자도 없는 몸싸움을 다 끝내고 나면

참 조용하게도

온전히 숙성된 슬픔의 향기로 말갛게 발효되어

한 세상 걸쭉하게 물들일 때

내 몸 어딘가에서는 생수 터져 솟아나고

조만간 슬픔의 향기에 취해 쓰러질

어떤 늙은 사랑도 있을 것이다.

 

 

 

뒷모습-이운룡

 

뒤돌아보지 않고

말 한마디 없고

홀로 갈 길을 가야 하는

그대의 뒷모습

 

뒤돌아볼 것만 같고

말 한마디 남길 것만 같고

홀로 길을 잃고

물어올 듯

 

눈물 안 보이려 돌아서 있지만

온몸 파도쳐 출렁이는 뒷모습

 

눈 감고 아주 잊자 하면

얼굴 돌려 바라볼 것만 같아

 

눈 감고 아주 잊자 하면

얼굴 돌려 바라볼 것만 같아

 

눈 크게 뜨고 자세히 보자 하면

어느 지경 밖 아득한 저승길

그대의 뒷모습.

 

 

명중- 이용헌

 

빗방울이 툭,

정수리에 떨어진다

가던 길 멈추고 하늘 쳐다본다

 

누구인가

저 까마득한 공중에서

단 한 방울로 나를 명중시킨 이는

 

하기야

이 많고 많은 사람 중에

단 한 번의 눈빛으로

나의 심장을 관통해버린

그대도 있다

 

 

 

8-이외수

 

여름이 문을 닫을 때까지

나는 바다에 가지 못했다

흐린 날에는

홀로 목로주점에 앉아

비를 기다리며 술을 마셨다

막상 바다로 간다해도

나는 아직 바람의 잠언을 알아듣지 못한다

바다는

허무의 무덤이다

진실은 아름답지만

왜 언제나 해명되지 않은 채로

상처를 남기는지

바다는 말해 주지 않는다

 

빌어먹을 낭만이여

한 잔의 술이 한잔의 하늘이 되는 줄을

나는 몰랐다

젊은 날에는

가끔씩 술잔 속에 파도가 일어서고

나는 어두운 골목

똥물까지 토한 채 잠이 들었다

소문으로만 출렁거리는 바다 곁에서

 

이따금 술에 취하면

담벼락에 어른거리던 나무들의 그림자

나무들의 그림자를 부여잡고

나는 울었다

그러나 이제는 어리석다

사랑은

바다에 가도 만날 수 없고

거리를 방황해도 만날 수 없다

단지 고개를 돌리면

아우성치며 달려드는 시간의 발굽소리

나는 왜 아직도

세속을 떠나지 못했을까

흐린 날에는

목로주점에 앉아

비를 기다리며 술을 마셨다

인생은

비어 있음으로

더욱 아름다워지는 줄도 모르면서

2020.12.31

 

 

더 깊은 눈물 속으로- 이외수

 

흐린 날 바다에 나가 보면

비로소 내 가슴에 박혀 있는

모난 돌들이 보인다

결국 슬프고

외로운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라고

흩날리는 물보라에 날개 적시며

갈매기 한 마리

지워진다

흐린 날 바다에 나가 보면

파도는 목놓아 울부짖는데

시간이 거대한 시체로

백사장에 누워 있다

부끄럽다

나는 왜 하찮은 일에도

쓰라린 상처를 입고

막다른 골목에서

쓰러져 울고 있었던가

그만 잊어야겠다

지나간 날들은 비록 억울하고

비참했지만

이제 뒤돌아보지 말아야겠다

누가 뭐라고 해도

저 거대한 바다에는 분명

내가 흘린 눈물도 몇방울

그때의 순순한 아픔 그대로

간직되어 있나니

이런 날은 견딜 수 없는 몸살로

출렁거리나니

그만 잊어야겠다

흐린 날바다에 나가 보면

우리들의 인연은 아직 다 하지 않았는데

죽은 시간이 해체되고 있다

더 깊은 눈물 속으로

더 깊은 눈물 속으로

그대의 모습도 해체되고 있다

 

 

 

장마전선- 이외수

 

흐린 날

누군가의 영혼이

내 관절 속에 들어와 울고 있다

내게서 버림받은 모든 것들은

내게서 아픔으로 못박히나니

이 세상 그늘진 어디쯤에서

누가 나를 이토록 사랑하는가

저린 뼈로 저린 뼈로 울고 있는가

대숲 가득 쏟아지는 소나기 소리

 

 

 

그리움도 화석이 된다 이외수

 

저녁비가 내리면

시간의 지층이

허물어진다

허물어지는 시간의 지층을

한 겹씩 파내려 가면

먼 중생대 어디쯤

화석으로 남아있는

내 전생을 만날 수 있을까

그 때도 나는

한 줌의 고사리풀

바람이 불지 않아도

저무는 바다쪽으로 흔들리면서

눈물보다 투명한 서정시를

꿈꾸고 있었을까

저녁비가 내리면

시간의 지층이

허물어진다

허물어지는 시간의 지층

멀리 있어 그리운 이름일수록

더욱 선명한 화석이 된다

 

 

 

사랑은-이민원

 

눈독 들일 때, 가장 아름답다

하마,

손을 타면

단숨에 굴러 떨어지고 마는

토란잎 위

물방울 하나

 

 

 

꽃 이우는 시간 이기철

 

꽃 지는 것 보면 사랑도

짧아야 아름다움을 안다

 

아침에 붉다가 저녁에 검게 닫은 꽃

그 짧은 개화를 위해

여린 몸으로 한 해를 견뎠다는 것

사랑도 그처럼 붉었다가 쉬이 어두워져

씨앗처럼 흙에 묻혀 오래 견디는 일

이운 뒤 아름다움을 깨닫는다

 

 

 

홀로 등불을 상처 위에 켜다 윤후명

 

이제야 너의 마음을 알 것 같다

너무 늦었다

그렇다고 울지는 않는다

이미 잊힌 사람도 있는데

울지는 못한다

지상의 내 발걸음

어둡고 아직 눅은 땅 밟아가듯이

늦은 마음

홀로 등불을 상처 위에 켜다

모두 떠나고 난 뒤면

등불마저 사위며

내 울음 대신할 것을

이제야 너의 마음에 전했다

너무 늦었다 컴컴한 산 고갯길에서 홀로

 

2020.12.25

 

확인= 윤후명

 

너 가고 있는 길

나도 간다

길 가는 사람은 많고 많으나

둘만이 아는 길은

따로 있음을 믿는

길이다 믿어야 한다

머나먼 세상 끝

아득한 남해섬

마늘 싹과 보리 싹 파아랗게 밟으며

가고 있는 길

비린 술 한 잔에 영혼을 달래면서

세상 미련 죄다 떨쳐 버리면서

가고 있는 길

그러므로 사랑이

삶을 확인한다

 

 

 

너를 기억하다 윤성택

 

기억이란 그런 것이다

모든 종료된 과거에

전구하나 켜 놓고

그 밝아오는 영역만큼

시간의 내력을 읽는 것

 

가느다란 필라멘트가

끊어지지 않았다면

기억이 환해질 때까지

마음을 보내보는 것이다

 

 

 

표리부동 -오은

 

어젯밤 꿈에는 네가 나왔다. "잘 지내?"라고 차마 묻지 못했다 "잘 지내."라고 서슴없이 대답할까 봐. 누구보다 네가 잘 지내기를 바라면서도 나는 이렇게나 나쁘다. 꿈속에서도 나아지지 않는다.

 

 

 

비가 와도 젖은 자는-오규원

 

강가에서

그대와 나는 비를 멈출 수 없어

대신 추녀 밑에 멈추었었다

그 후 그 자리에 머물고 싶어

다시 한번 멈추었었다

 

비가온다, 비가 와도

강은 젖지 않는다. 오늘도

나를 젖게 해놓고, 내 안에서

그대 안으로 젖지 않고 옮겨 가는

시간은 우리가 떠난 뒤에는

비 사이로 혼자 들판을 가리라.

 

혼자 가리라, 강물은 흘러가면서

이 여름을 언덕 위로 부채질해 보낸다.

날려가다가 언덕 나무에 걸린

여름의 옷 한자락도 잠시만 머문다.

 

고기들은 강을 거슬러올라

하늘이 닿는 지점에서 일단 멈춘다.

나무, 사랑, 짐승 이런 이름 속에

얼마 쉰 뒤

스스로 그 이름이 되어 강을 떠난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젖은 자는 다시 젖지 않는다.

2020.12.20

 

한 잎의 여자 1 - 오규원

(언어는 추억에 걸려 있는 18세기형 모자다)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여자, 눈물 같은 여자, 슬픔 같은 여자, 病身 같은 여자, 詩集 같은 여자,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여자.

 

 

기다림의 시- 양성우

 

그대 기우는 그믐달 새벽별 사이로

바람처럼 오는가 물결처럼 오는가

무수한 불면의 밤, 떨어져 쌓인

흰 꽃 밟으며 오는

그대 정든 임 그윽한 목소리로

잠든 새 깨우고,

눈물의 골짜기 가시나무 태우는

불길로 오는가 그대 지금

어디쯤 가까이 와서

소리없이 모닥불로 타고 있는가

 

 

와유(臥遊-) 안현미

 

내가 만약 옛사람 되어 한지에 시를 적는다면 오늘밤 내리는 가을비를 정갈히 받아두었다가 이듬해 황홀하게 국화가 피어나는 밤 해를 묵힌 가을비로 오래오래 먹먹토록 먹을 갈아 훗날의 그대에게 연서를 쓰리

 

'국화는 가을비를 이해하고 가을비는 지난해 다녀갔다'

 

허면, 훗날의 그대는 가을비 내리는 밤 국화 옆에서 옛날을 들여다보며 홀로 국화술에 취하리

 

 

양파 - 안명옥

 

여자만이 내려다보이는 창가

 

양파 몸을 벗길 때마다

양파는 나 대신 운다

 

미끌미끌한 것은 양파의 유머다

요리조리 빠져나가려는 양파의 자유다

 

양파는 칼날을 순순히 받아들인다

수많은 실핏줄을 감추고

 

몸 속 깊이 자궁을 숨기며

파란 싹을 피워내고 있다

 

양파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해맑은 표정 속

매운 향기가 쟁여있다

 

연애 한번 하자고 옷을 벗기다가

내 속을 들여다보고

당신은 자꾸 울었다

 

 

 

가을 엽서-안도현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 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 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안도현

 

속을 보여주지 않고 달아오르는 석탄난로

바깥에는 소리없이 내리는 눈

 

철길 위의 기관차는 어깨를 들썩이며

철없이 철없이도 운다

사랑한다고 말해야 사랑하는 거니?

울어야 네 슬픔으로 꼬인 내장 보여줄 수 있다는 거니?

 

때로 아무것도 아닌 것 때문에

단 한 번 목숨을 걸 때가 있는 거다

 

침묵 속에도 뜨거운 혓바닥이 있고

저 내리는 헛것 같은 눈, 아무것도 아닌 저것도 눈송이 하나하나는

제각기 상처 덩어리다, 야물게 움켜쥔 주먹이거나

 

문득

역 대합실을 와락 껴안아 핥는 석탄난로

기관차 지나간 철길 위에 뛰어내려 치직치직 녹는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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