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총-박정애
내 안의 외뿔소- 이은봉
잠든 됫박-이운룡
감자가 뿔났다 1-이옥근
티벳에서-이성선
봄- 이성부
고독한 무덤- 이생진
무명도 無名島- 이생진
도반道伴- 이상국
어둠과 놀다- 이상국
감자떡- 이상국
국수가 먹고 싶다- 이상국
열반-이상국
진부령 -이상국
우리는 읍으로 간다- 이상국
가라피의 밤-이상국
비 맞는 사람- 이덕규
객지밥- 이덕규
밥그릇 경전- 이덕규
야경- 이대의
달의 약력 - 이대의
언제 삶이 위기 아닌 적 있었던가- 이기철
밤기차를 타고 -이기철
나는 악당이다 - 윤제림
그녀는 돌아오지 않는다 윤제림
(敵)-유종순
매미-유종순
겨울 적소(謫所) 유재영
적막-유재영
쓸쓸한 화답-유재영
딱따구리가 아침을 열다- 유승도
살구나무-유금옥
오리(五里) -우대식
사라진 역- 우대식
산밭에서 -오탁번
별다방- 오탁번
폭설- 오탁번
눈물-오탁번
낙향을 위하여-오탁번
아름다운 파업- 오석륜
한 잎의 여자 2 - 오규원
바라밀다(波羅蜜多)- 안직수
모과- 안명옥
내 안의 외뿔소- 이은봉
내 안에도 남들처럼 여러 놈의 내가 살고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는 잠시 혼란스러웠다
몇 마리의 나, 몇 놈의 나, 몇 개의 나, 몇 포기의 나, 몇 자루의 나…… 심지어는 낯 뜨겁게 몇 새끼의 나까지도 내 안에 살고 있었다
아무리 따져 봐도 내 안의 저 많은 나들 가운데 어느 놈이 진짜 나인지 알기 어려웠다
시간에 따라, 장소에 따라 수시로 얼굴을 바꾸는 나를 지켜볼 때마다 나는 내가 싫었다
내가 무슨 카멜레온이라도 되는가 함부로, 제멋대로, 뻔뻔하게, 아무데서나 얼굴을 바꾸게!
한편으로는 이렇게 많은 나를 내가 크게 미워하지 않으며 잘 살고 있는 것이 대견하기도 했다
대견하다니? 정작 대견한 것은 내 안의 또 다른 나 가운데 외뿔소라는 놈이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외뿔을 들이밀며 제 생의 평원을 향해 불쑥불쑥 걸어 나가는 외뿔소라는 놈!
이놈은 인내심과 성실을 상표로 삼아 제게 주어진 역사를 향해 언제나 뚜벅뚜벅 잘도 걸어 나갔다
너무도 느려터진 이놈으로 하여 나는 내 안의 수많은 나와 크게 다투지 않으면서도 그런대로 잘 살 수 있었다
가끔은 어디서든 불쑥불쑥 제 주둥이를 열어젖히는 놈이 있어 마음이 상할 때도 있기는 했다
내 안의 나와 심하게 다투고는 내 안의 또 다른 나의 목에 동아줄을 걸고 싶어 안달복달하던 내가 얼마나 많았던가
이런 나는 끝내 고통을 견디지 못해 훌쩍 이 세상에서 저 자신을 지워버리고 싶어 우울해하고는 했다
그러니 내가 어찌 내 안의 수많은 나와 잘 놀기 위해 서로를 다독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 안의 저 싸가지 없는 나들을!
시간의 불수레를 타고 종종대며 달려가다 보면 더러는 꽤 괜찮은 나를 만날 때도 있기는 했다.
잠든 됫박-이운룡
쌀뒤주는 구경도 못한 우리 집 뒤란에
채워도 채워도 배고픈 빈 항아리 하나
그 속에 너를 가두어 놓고
어머니는 노상 한숨만 퍼내셨다
상반신을 구부려야 손이 닿는 밑바닥
도둑맞을 쌀이 어디 있다고
숨겨 두면 내 아니 모를라고
세상없어도 뚜껑만은 열어 놓지 않으시고
때가 되면
인기척하고 드나드는 뒤란 길
어머니 검정 치맛자락만
슬프도록 어른거렸다.
감자가 뿔났다 1-이옥근
추운 창고에
겨우내 같혀
쭈글쭈글 늙어버린 감자
따스한 봄날
햇살 한 자락 못 받아
감자가 뿔났다
어두운 상자 속에서
눈 부릅뜨고 괴물처럼
바깥만 노려보고 있다
티벳에서-이성선
사람들은 히말라야를 꿈꾼다
설산
갠지즈 강의 발원
저 높은 곳을 바라보고
생의 끝 봉우리로 오른다
그러나
산 위에는 아무것도 없다
생의 끝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가기 위하여
많은 짐을 지고 이 고생이다
봄- 이성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고독한 무덤- 이생진
고독한 무덤
살아서 고독했던 사람
그 사람 무덤이 차갑다
아무리 동백꽃이
불을 피워도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그 사람 무덤이 차갑다
무명도 無名島- 이생진
저 섬에서
한 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뜬 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그리운 것이
없어질 때까지
뜬 눈으로 살자
도반道伴- 이상국
비는 오다 그치고
가을이 나그네처럼 지나간다
나도 한때는 시냇물처럼 바빴으나
누구에게서 문자도 한 통 없는 날
조금은 세상에게 삐친 나를 데리고
동네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사 준다
양파 접시 옆에 묵은 춘장을 앉혀 놓고
저나 나나 이만한 게 어디냐고
무덤덤하게 마주 앉는다
사랑하는 것들은 멀리 있고
밥보다는 짜장면이 끌리는 날
그래도 나에게는 내가 있어
동네 중국집 데리고 가
짜장면을 시켜 준다
*도반道伴 : 함께 도를 닦는 벗
어둠과 놀다- 이상국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골목길에서 누가 덥석 손목을 잡아끈다
새로 온 저녁이었다
자기네 집에서 쉬었다 가라는 거였다
집에서 아내가 아이들이 기다린다고 했지만
이런 날이 날마다 있는 건 아니라며
한사코 잡아끌었다
나는 새우깡 한봉지와
소주를 받아가지고
학교마당 나무 아래 저녁의 집에서
한 시간이나 놀았다
그리고 그가 데리고 가라는
새로 온 어둠의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르며 돌아왔다
감자떡- 이상국
하지가 지나면
성한 감자는 장에 나가고
다치고 못난 것들은 독에 들어가
가을까지 몸을 썩혔다
헌 옷 벗듯 껍질을 벗고
물에 수십번 육신을 씻고 나서야
그들은 분보다 더 고운 가루가 되는데
이를테면 그것은 흙의 영혼 같은 것인데
강선리 늙은 형수님은 아직도
시어머니 제삿날 그걸로 떡을 쪄서
우리를 먹이신다
국수가 먹고 싶다- 이상국
국수가 먹고 싶다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삶의 모서리에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을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
열반-이상국
불탄 낙산사 범종에 대하여
그도 힘들었던 것이다
천년이나 제 몸을 때리고
하늘과 땅 사이를 오가느라 지쳤던 것이다
날마다 제 몸을 비우던 공양도
이제는 더 퍼낼 게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마침내 집에 불을 지르고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진부령 -이상국
내 스무살
저 지랄 같은 새벽,
아버지 소 판 돈 몰래 들고
서울 가는 디젤버스 기름 냄새에
개처럼 헐떡이며 넘던 영.
그 큰 소 다 털어먹고
추석명절 달그늘만 믿고 돌아오던 날
먼지 낀 차창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면목없는 얼굴을 비춰보다가
고개말량 이르면 눈물나던 영.
우리는 읍으로 간다- 이상국
우리는 읍으로 간다
한때는 슬픈 식민지 백성으로
또는 인공의 인민이 되어서,
자유당 공화당 지나 세상이 자꾸 바뀌어도
읍에서 부르면 우리는 간다
할아버지 지게 지고 부역 가던 길
볏가마 실려 나가고
아이들 공장으로 떠나던 그 길
머나먼 유엔 사무총장에게 메세지를 보내고
반나절이면
혁명과 쿠테타에도 도장 찍어 주고 오던 길로
오라면 우리는 간다
읍에서 오라면 우리는 간다
걸핏하면 프레카드 앞세우고 가
그렇게 손을 흔들어 주었음에도
세상이 뒤숭숭하고
나라가 위험하면
오늘도 우리는 읍으로 간다
가라피의 밤-이상국
가라피의 어둠은 짐승 같아서
외딴 곳에서 마주치면 서로 놀라기도 하고
서늘하고 퀴퀴한 냄새까지 난다
나는 그 옆구리에 누워 털을 뽑아보기도 하고
목덜미에 올라타보기도 하는데
이 산속에서는 그가 제왕이고
상당한 세월과 재산을 불야성에 바치고
어느날 앞이 캄캄해서야 나는
겨우 그의 버러지 같은 신하가 되었다
날마다 저녁 밥숟갈을 빼기 무섭게
산을 내려오는 시커먼 밤에게
구렁이처럼 친친 감겨 숨이 막히거나
커다란 젖통에 눌린 남자처럼 허우적거리면서도
나는 전깃불에 겁먹은 어둠들이 모여 사는
산 너머 후레자식 같은 세상을 생각하고는 했다
또 어떤 날은 산이 노루새끼처럼 낑낑거리는 바람에 나가보면
늙은 어둠이 수천 길 제 몸속의 벼랑에서 몸을 던지거나
햇어둠이 옻처럼 검은 피칠을 하고 태어나는 걸 보기도 했는데
나는 그것들과 냇가에서 서로 몸을 씻어주기도 했다
나는 너무 밝은 세상에서 눈을 버렸고
생각과 마음을 감출 수 없었지만
이곳에서는 어둠을 옷처럼 입고 다녔으므로
나도 나를 잘 알아볼 수가 없었다
밤마다 어둠이 더운 고기를 삼키듯 나를 삼키면
그 큰 짐승 안에서 캄캄한 무지를 꿈꾸거나
내 속에 차오르는 어둠으로
나는 때로 반딧불이처럼 깜박거리며
가라피를 날아다니고는 했다
* 양양 오색에 있는 산골마을.
비 맞는 사람- 이덕규
들판 한가운데서 비를 만났다
피할 곳이 없었다
사나운 비였다
굶주린 비였다
죽일 듯이 오는 비였다
잘 만났다 제대로 걸렸다
작정한 듯 내리꽂는 비였다
속수무책 젖었다
속속들이 젖기 시작했다
빗물이 맘 놓고
몸 구석구석으로 들어왔다
깊숙이 들어왔다 마침내
지금껏 단 한 번도
젖지 않은 자리가 젖었다
흥건히 젖었다
눈에서 몸속을 한 바퀴
돌아 나온 뜨거운 빗물이 흘렀다
좀체로, 걸려들지 않더니
실로 오랜만에 사람이 걸려들었다
객지밥- 이덕규
빈 그릇에 소복이 고봉으로 담아놓으니
꼭 무슨 등불 같네
한밤을 건너기 위해
혼자서 그 흰 별무리들을
어두운 몸 속으로 꾸역꾸역 밀어넣는 밤,
누가 또 엎어버렸나
흰 쌀밥의 그늘에 가려 무엇 하나 밝혀내지 못한
억울한 시간의 밥상 같은
창밖, 저 깜깜하게 흉년든 하늘
개다리소반 위에
듬성듬성 흩어져 반짝이는 밥풀들을
허기진 눈빛으로 정신없이 주워 먹다
목 메이는 어둠 속
덩그러니, 불 꺼진 밥그릇 하나
밥그릇 경전- 이덕규
어쩌면 이렇게도
불경스러운 잡념들을 싹싹 핥아서
깨끗이 비워놨을까요
볕 좋은 절집 뜨락에
가부좌 튼 개밥그릇 하나
고요히 반짝입니다
단단하게 박힌
금강(金剛)말뚝에 묶여 무심히
먼 산을 바라보다가 어슬렁 일어나
앞발로 굴리고 밟고
으르렁그르렁 물어뜯다가
끌어안고 뒹굴다 찌그리진
어느 경지에 이르면
저렇게 마음대로 제 밥그릇을
가지고 놀 수 있을까요
테두리에
잘근잘근 씹어 외운
이빨 경전이 시리게 촘촘히
박혀 있는, 그 경전
꼼꼼히 내려가다 보면
어느 대목에선가
할 일 없으면
가서 '밥그릇이나 씻어라'* 그러는
* 조주선사와 어느 학인과의 선문답.
야경- 이대의
자정이 넘은 밤길.
눈발은 그치고
마실꾼들 이야기를 밝히는 불빛은
차가운 바람을 달랜다.
불꺼진 방에, 사람은
잠들었을까
조용하다.
개짖는 소리도 잠 못드는 이 밤
우리들은, 마실방에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남겨두고
야경을 돈다.
북을 두드리며 마을을 돈다.
달의 약력 - 이대의
법고루의 북은 지상의 달이다
저녁 예불 때면
노을빛 물결에 물고기가 하늘을 날고
저무는 산천에 종소리 울려 퍼질 때
떠오르는 북
북소리 하늘로 날아가 달이 된다
보고 있어도 들리고
보지 않아도 들리는 저 달빛
선승 홀로 밤하늘을 걷고 있다
언제 삶이 위기 아닌 적 있었던가- 이기철
언제 삶이 위기 아닌 적 있었던가
껴입을수록 추워지는 것은 시간과 세월뿐이다.
돌의 냉혹, 바람의 칼날, 그것이 삶의 내용이거니
생의 질량 속에 발을 담그면
몸 전체가 잠기는 이 숨막힘
설탕 한 숟갈의 회유에도 글썽이는 날은
이미 내가 잔혹 앞에 무릎 꿇은 날이다
슬픔이 언제 신음 소릴 낸 적 있었던가
고통이 언제 뼈를 드러낸 적 있었던가
목조계단처럼 쿵쿵거리는, 이미 내 친구가 된 고통들
그러나 결코 위기가 우리를 패망시키지는 못한다
내려칠수록 날카로워지는 대장간의 쇠처럼
매질은 따가울수록 생을 단련시키는 채찍이 된다
이것은 결코 수식이 아니니
고통이 끼니라고 말하는 나를 욕하지 말라
누군들 근심의 힘으로 밥 먹고
수심의 디딤돌을 딛고 생을 건너간다
아무도 보료 위에 누워 위기를 말하지 말라
위기의 삶만이 꽃피는 삶이므로
밤기차를 타고 -이기철
쓸쓸한 사람들은 밤기차를 탄다
삯바느질 같은 삶의 헌옷을 기워 입으며
그래도 아직은 토닥여 잠재울 내일이 있음이 위안인 사람들이 함께
앉아
김밥을 사먹는다
오가는 방언의 부딪침이 도계(道界)를 넘었음을 말해주지만
손잡으면 경상 충청의 체온이 다를 게 없어
눈빛 마주치면 모두 민들레 같은 이웃이 된다
삶이란 언제나 식었다 데워먹는 국밥 같은 것이지만
그래도 살아있음이 아름다움임을
자주 깜박이는 간이역의 불빛을 보면 알 수 있다
배추잎 같이 오그리고 잠을 쫓는 사람들은
손때 묻은 제 세월을 아파하면서도
서울역에서 멎어야 하는 기차의 운명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
모두들 조금씩 졸고 조금씩은 외로워하며
일회용 차표처럼 구겨진 채 소백을 넘고 있다
추풍령은 잠시 떠난 계절과 돌아올 인연들을 묶어놓지만
꽃 진 자리만큼 후둑후둑 떨어지는 잠의 부스러기를 만지며
쓸쓸한 사람들은 오늘밤도
밤기차를 탄다
나는 악당이다 - 윤제림
별들이 저렇게 철야를 하고 있었는데,
잠이나 자고 있었다는 것은 얼마나
무심한 일인가
하늘이 저렇게 밤새 쇼를 하고 있었는데,
지상의 객석이 텅텅 비었다는 것은 얼마나
무례한 일인가
입때껏 불을 훤히 밝히고 있는 저 천상의 가옥이
누구를 기다리는지 알면서
당신을 돌려보낼 생각조차 없는 나는 얼마나
무자비한 인간인가.
그녀는 돌아오지 않는다 윤제림
0시 5분에 들어왔어요. 요즘 들어 야릇한 몸내를 풍기는 게 수상쩍었지만, 언감생심! 구실도 못하는 병든 늙은이 곁으로 꼬박꼬박 돌아와 누워주는 것만도 고마웠지요. 가면 또 어딜 가겠어요. 수천 수만 구멍 속의 새끼들을 두고, 별의 수만큼은 되는 식구들의 허기를 두고.
새벽같이 붕붕대는 방조제 공사 트럭 소리에 선잠이 들다 깼는데 안 보입디다, 첫 배 따라서 일 나갔겠거니 했지요. 상보 덮어 아침상까지 봐놓고 간걸요. 12시 좀 지나서 점심상 보러 오겠다고, 저녁나절 한 번 더 다녀와야 한다고 편지까지 적어놓고요.
아직은 길 막지 말아요. 오늘은 아주 먼 데까지 갔다 오는가 봐요. 지금 몇 시지요?
서해 네 이년!
(敵)-유종순
그것들은 온다
치열함을 잃어버릴 때마다 온다
원칙을 잃고 방황하는 우리에게
싸움의 불투명함에 지쳐 자빠진 우리에게
노동의 허기에 지쳐 마른 신음 흘리는 우리에게
고단한 일상 속 깊은 잠 헤매는 우리에게
온다 교활한 덫과 올가미를 들고서
그것들은 거짓이며
그것들은 폭력이며
그것들은 타락이며
그것들은 유혹이며
그것들은 협박이며
그것들은 타협이며
그것들은 기회주의이며
그것들은 기존 기성의 형식들이며
그것들은 모든 부정한 존재들이다
그것들은 온다
치열함을 잃어버릴 때마다 온다
한 뭉치의 현금을 들고서
간사한 혀로 정신을 홀리면서
한나절 편안한 일상을 맛보이며
죽음의 공포 시퍼런 칼날을 들이대며
찾아온다 치열함을 잃어버릴 때마다 어김없이
매미-유종순
나 십수 년을 지하감옥에서 썩었다
그 세월이 너무도 분하고 원통해서
불볕더위 이 여름 한 철을
나 원 없이 울다간다 이 자식들아
겨울 적소(謫所) 유재영
밤새 내린 폭설에 팔뚝 선뜻 내어 준 깨끗해서 두려워라 허리 굽은 조선 솔, 찢어진 허공에 내건 얼어붙은 절명시(絶命詩)여
더 이상 갈 곳 없이 먹바위 벼랑 끝에 누군가 벗어 놓은 수직의 빙폭(氷瀑) 한 필, 막혔던 마음 문 열면 물소리도 들릴까
적막-유재영
오래 된 그늘이
지켜보고 있었다
나뭇잎 하나가
툭! 떨어졌다
참 조용한
하늘의 무게
쓸쓸한 화답-유재영
중년의 나이 앞에 툭! 하고 떨어지는
신갈나무 열매 하나 가만히 주워 본다
화두란 바로 이런 것 쓸쓸한 화답 같은,
마른 꽃 흔들다가 혼자 가는 바람처럼
등 뒤로 들리는 가랑잎 밟는 소리
가벼운 이승의 한때, 문득 느낀 허기여
딱따구리가 아침을 열다- 유승도
심심산골, 외로움에 지친 중이 화풀이 삼아 연달아 두드리는 목탁소리가 산과 산 사이를 울린다 아 씨이바알, 해탈이 왜 이리 어려우냐 딱따다다 다다 다다다다닥
살구나무-유금옥
노암동사무소 입구에
‘바르게 살자!’라고 쓰인 바위 옆에
나무 한 그루 서 있다
허리는 구부정하고
한쪽 팔은 부러졌다
다른 한쪽 팔은 비비 비틀렸고
다리는 작달막하고
무릎은 툭 튀어나왔다
술 냄새가 나는 나무다
화투판을 뒤집어엎는 나무다
태풍에는 비굴하게 굽실거리는 나무다
누런 이빨 같은 살구가 듬성듬성 달리는 나무다
나를 보면 반가워 나무 밖으로 걸어 나오는 나무다
누가, 아는 나무냐고 물으면
모르는 나무라고 말하는 나무다
오리(五里) -우대식
오리(五里)만 더 걸으면 복사꽃 필 것 같은
좁다란 오솔길이 있고,
한 오리만 더 가면 술누룩 박꽃처럼 피던
향(香)이 박힌 성황당나무 등걸이 보인다
그곳에서 다시 오리,
봄이 거기 서 있을 것이다
오리만 가면 반달처럼 다사로운
무덤이 하나 있고 햇살에 겨운 종다리도
두메 위에 앉았고
오리만 가면
오리만 더 가면
어머니, 찔레꽃처럼 하얗게 서 계실 것이다
사라진 역- 우대식
카스테라 봉지를 뜯던 여자가 있었다
주홍빛 망에 담긴 계란이 빛나던 시절
허기진 시간 속에서
자그마한 사람들이 모두
조금씩 먹고 있었다
역에서 사람들은 나누어 먹는 연습을 했던 것
부자들은 역을 줄였다
더 빨리 가기 위해
역을 폐쇄했다
나누어 먹는 연습을 할 곳이 사라졌다
산밭에서 -오탁번
가파른 산밭을 매면서 아낙네들은 말했다
매일 이 지경으로 일을 하면
밑구녁도 아예 비뚤어지겠다
건너 산에선 뻐꾸기가 울다 졸다 하였다
밭두럭에선 암소가 제 새끼의 사타구니를
뜨거운 혀로 자꾸자꾸 빨았다
가파른 산밭을 매면서 아낙네들은 말했다
서방이 제 구멍을 못 찾으면 낭패다
밤눈 밝기는 그중 밝으니 괜한 말이다
옥수수 자루가 수염을 날리며 웃었다
돌멩이와 불탄 나무 그루터기에 부딪치는
호미 소리에 뻐꾸기도 암소도 웃었다
별다방- 오탁번
시골 장터 골목이나
역전 거리에 있는
간판도 다 떨어진
호젓한 별다방을 보면
그냥 쑥 들어가고 싶다
대덕산 임야도 보여주며
한 오천평쯤
희떱게 뚝 떼어주면
낙낙한 마담은
자늑자늑 내 품에 안겨올까
살별처럼 흘러간
옛사랑 다시 만난 듯
'그냥 커피' 홀짝 마시면서
눈흘레나 하고 싶다
폭설- 오탁번
삼동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천지가 흰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님이 행성만한 떡시루를 뒤엎은 듯
축사 지붕도 폭삭 무너져내렸다
좆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은
윗목에 놓인 뒷물대야를 내동댕이치며
우주의 미아가 된 듯 울부짖었다
-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겠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대버렸쇼잉!
눈물-오탁번
울고 싶을 때 울 수 있었던 나이가
그러한 맹랑한 자유가
흔하디 흔한 눈물만일 줄 알았다
쓸데없는 배설인 줄만 알았다
어젯밤 사랑하는 여자와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도
울 수 없었을 때
툭툭털며 그냥저냥 일어섰을 때
눈물이 숨기고 있던 크나큰 자유를
순수를 알았다
울고 싶을 때 울 수 없는 나이가 되면서
이 시대의 밤은 높기만 했다
죄를 짓고도 죄인 줄 모르는
개똥같은 지성을 미워했다
눈물을 기구하며
개처럼 하루 한낮을 기어다녔다
낙향을 위하여-오탁번
까마득하게 흐려져 버린
내 사랑의
호적등본만 한 빈터가
실은 내 생애의 전부였음을
이제야 알겠다
술지게미 먹고
깨금발로 뛰어놀던
내 사랑의 빈터에
말 안 해도 마음 다 알아 줄
아주 예쁜 사람이
살고 있음을
이제야 알겠다
지에밥에 누룩 풀어 담근
술항아리에
상강 날 해거름쯤
술이 익으면
첫서리 내린 들창문
반쯤 열어 놓고
마주 앉아 잔 비우고 싶은
내 마음의 노른자위가 될
아주 예쁜 사람을
전생의 꿈을 꾸듯
찾아가야겠다
아름다운 파업- 오석륜
밤새 떨어진
은행잎이
누워 있던 빗자루를
덮어버렸습니다
그날
아무도
빗자루가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 잎의 여자 2 - 오규원
(언어는 겨울날 서울 시가를 흔들며 가는 아내도 타지 않는 전차다)
나는 사랑했네 한 여자를 사랑했네. 난장에서 삼천 원 주고 바지를 사입는 여자, 남대문시장에서 자주 스웨터를 사는 여자, 보세가게를 찾아가 블라우스를 이천 원에 사는 여자, 단이 터진 블라우스를 들고 속았다고 웃는 여자, 그 여자를 사랑했네. 순대가 가끔 먹고 싶다는 여자, 라면이 먹고 싶다는 여자, 꿀빵이 먹고 싶다는 여자, 한 달에 한두 번은 극장에 가고 싶다는 여자, 손발이 찬 여자, 그 여자를 사랑했네. 그리고 영혼에도 가끔 브래지어를 하는 여자.
가을에는 스웨터를 자주 걸치는 여자, 추운 날엔 팬티스타킹을 신는 여자, 화가 나면 머리칼을 뎅강 자르는 여자, 팬티만은 백화점에서 사고 싶다는 여자, 쇼핑을 하면 그냥 행복하다는 여자, 실크스카프가 좋다는 여자, 영화를 보면 자주 우는 여자, 아이 하나는 꼭 낳고 싶다는 여자, 더러 멍청해지는 여자, 그 여자를 사랑했네. 그러나 가끔은 한 잎 나뭇잎처럼 위험한 가지 끝에 서서 햇볕을 받는 여자.
바라밀다(波羅蜜多)- 안직수
나이만큼 번뇌의 숫자도
줄어든다. 그저,
잘 죽을 걱정만 하면 된다.
단 하나
다음 생에 또다시 이 짓을
반복해야 한다는 염려에
조그만 복이라도 지어봐야지
생각만 짓다가 또 하루
석양을 맞는다.
모과- 안명옥
땅의 살이 굳어지면
길이 된다.
많이 밟힐수록
좋은 길이 된다.
어머니 굳은 손으로
뜨거운 냄비를 덥석 집어 올리나
난 아직 뜨거운 밥그릇 하나 들지 못한다.
굳는다는 건
수많은 길들이
내 안으로 천천히 들어오는 것
착상 위 모과가 굳어가면서
향기가 더 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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