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이 길이 되려면-정의로운 건강을 찾아 질병의 사회적 책임을 묻다/김승섭 지음/동아시아·
저자 김승섭은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하버드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조지워싱턴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강사로 일했으며, 2013년부터 현재까지 고려대학교 보건과학대학 보건정책관리학부와 동 대학원 보건과학과에서 부교수로 일하고 있다. 2016년에 고려대학교 최우수강의상인 석탑강의상을 수상했다.
천안소년교도소에서 공중보건의사로 일한 이후, 재소자 인권에 대한 관심을 이어가다 국가인권위원회의 ‘구금시설 건강권 실태조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사회역학자로서, 차별경험과 고용불안 같은 사회적 요인이 결혼이주여성이나 비정규직 노동자, 성소수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의 건강을 어떻게 해치는지를 주로 연구하고 있다. 2014년 ‘인턴/레지던트 근무환경 연구’, 2015년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건강 연구’, 국가인권위원회의 ‘소방공무원의 인권상황 실태조사’, 2016년 ‘한국 성인 동성애자/양성애자 건강 연구’, 세월호 특조위의 ‘단원고 학생 생존자 및 가족 대상 실태조사 연구’를 책임연구원으로 진행했다. 한국성소수자연구회(준) 발기인이고, 한국 성소수자의 건강을 연구하는 ‘레인보우커넥션 프로젝트’의 책임연구원으로 연구를 진행 중이다. 삼성반도체 직업병 소송, 동성결혼 소송, 트랜스젠더 병역면제 소송, 군형법 위헌 소송에서 법정 증언을 하거나 전문가 소견서를 제출하며 참여한 바 있다. 환자를 치료하는 것만큼 사람들이 아프지 않도록 예방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이 자기 삶에 긍지를 갖지 못한다면 그것은 사회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목차
들어가며
1. 말하지 못한 상처, 기억하는 몸
말하지 못한 내 상처는 어디에 있을까
-차별 경험에 대한 ‘같은 응답, 다른 의미’
불평등한 여름, 국가의 역할을 묻다
-시카고 폭염으로 배우는 공동체가 재난불평등에 대처하는 법
낙태를 금지하면 벌어질 일들에 관하여
-루마니아 사례로 살펴본, 평등하지 않은 낙태금지법
성인이 되어도 몸에 남겨진 태아의 경험
-몸에 새겨진 사회환경, 절약형질 가설
가난은 우리 몸에 고스란히 새겨진다
-가난한 몸과 해부학의 역사
당신은 거미를 본 적이 있나요
-질병의 ‘원인의 원인’을 추적하는 사회역학의 역사
[지극히 개인적인, 과학적 합리성의 세 가지 요소]
2. 질병 권하는 일터, 함께 수선하려면
해고노동자에게 국가란 무엇인가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건강 연구’를 하며
누군가는 그들 편에 서야 한다
-삼성반도체 직업병 소송과 IBM 직업병 소송, 연구자가 거대 기업에 맞선다는 의미
위험한 일터는 가난한 마을을 향한다
-직업병 만드는 공장, 원진레이온과 제일화학은 어디로 갔나
아파도 일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
-고용불안과 ‘저성과자 해고’라는 함정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하는 의사들
-연구자가 되어 다시, 전공의 근무환경과 환자 안전을 묻다
안전을 지키는 사람들, 그들이 아프다
-‘소방공무원 인권상황 실태조사’를 하며
[건강한 일터를 위한 올바른 숫자 읽기]
3. 끝과 시작, 슬픔이 길이 되려면
재난은 기록되어야 한다
-‘세월호 참사 생존 학생 실태조사’를 하며
사회적 고통을 사회적으로 치유하려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설명 없는 치료’의 딜레마
[아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제도가 존재를 부정할 때, 몸은 아프다
-동성결혼 불인정과 성소수자 건강의 관계
동성애를 향한 비과학적 혐오에 반대하며
-동성애, 전환치료, 그리고 HIV/AIDS
[쏟아지는 비를 멈추게 할 수 없다면, 함께 그 비를 맞아야 한다]
수술대 앞에서 망설이는 트랜스젠더를 변호하며
-비수술 트랜스젠더의 현역 입영처분 소송
한국을 떠나면 당신도 소수자입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우리 사회 인종차별
교도소 의사로 일한다는 것
-‘재소자 건강 연구’를 하며
4. 우리는 연결될수록 건강한 존재들
연결될수록 오래 사는가
-사회적 관계망과 건강 연구의 역사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면, 우리는 안전해질까
-총기 규제, 공동체는 어디까지 책임져야 하는가
위험사회에서 함께 생존하려면
-가습기 살균제 사망사건, 규제를 위한 충분한 증거를 묻다
당신의 공동체는 안녕하신지요
-로세토 마을에서만 심장병 사망률이 낮은 이유
[우리 이기심을 뛰어넘는 삶을 살아요]
주
▲ 위기에 처했을 때 내가 속한 공동체가 나를 보호해 줄 수 있다는 믿음이 아픔과 질병을 치유할 수 있다. 사진은 2014년 세월호 침몰로 숨진 단원고 희생자를 위한 추모 발길. 비가 내리는 날씨에도 추모객들의 발길은 긴 줄을 만들었다. 연합뉴스
출판사 서평
혐오발언, 구직자 차별, 가난, 참사…
사회적 경험은 어떻게 피부 밑으로 스미는가
“말하지 못한 상처도 몸은 기억한다!”
흡연은 폐암의 원인이고, 벤젠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백혈병에 걸린다. 역학자(epidemiologist)들은 이러한 질병의 원인을 찾는 일을 한다. 메르스와 같은 전염병이 나타나면, 최초 발병자는 어디에 있었는지, 병의 원인은 무엇인지, 어떻게 전파되었는지를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해낸다. 바이러스나 인체에 위험한 물질들이 질병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건 당연하다. 그렇다면 타인에게 혐오 발언을 듣거나 구직 과정에서 차별을 겪거나 회사에서 정리해고를 당했을 때, 이러한 경험도 우리가 병에 걸리는 원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역학자 중에서도 ‘사회역학자(social epidemiologist)’들은 이러한 사회적 경험이 어떻게 우리 몸에 스미고, 병이 되는지를 추적한다.
사회역학자인 김승섭 고려대학교 보건과학대학 교수는 자신의 연구를 통해 차별 경험이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이야기한다. 취업 과정에서의 차별을 측정하기 위한 연구의 설문에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새로운 일자리를 경험할 때 차별을 겪은 적이 있습니까?” 대답은 ‘예, 아니요, 해당사항 없음’ 3개 항목 중 선택이 가능하다. ‘해당사항 없음’은 구직 경험이 없는 응답자를 위해 만들어둔 항목이다. 이미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예’ 혹은 ‘아니요’의 응답이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직장인 상당수가 ‘해당사항 없음’이라고 응답했다. 어떻게 된 일일까? 김승섭 교수는 ‘해당사항 없음’이라고 대답한 사람들의 건강 상태를 조사했고, 놀라운 결과를 확인했다. 남성의 경우, ‘해당사항 없음’이라고 응답한 사람은 차별이 없었다고 응답한 사람들과 건강에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여성들의 경우 달랐다. ‘해당사항 없음’이라고 답한 여성들의 경우 차별을 받았다고 응답한 사람보다도 건강상태가 더 나쁘게 나타났다.
비슷한 또 다른 연구에서, 이번에는 다문화가정 청소년을 상대로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학교폭력을 경험한 뒤 어떻게 대응했습니까?” 김승섭 교수가 주목한 것은 응답자 중 “별다른 생각 없이 그냥 넘어갔다”라고 답한 학생들이었다. 이 학생들의 건강 상태를 조사했더니 이 경우에도 남녀 간에 극명한 차이가 드러났다. 이번에는 남학생들에게서 차이가 나타났다. “별다른 생각 없이 그냥 넘어갔다”라고 대답한 남학생들의 정신 건강이 가장 나쁜 것으로 조사된 것이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넘겨버렸던 경험이 실제로는 몸을 아프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차별이나 폭력을 겪고도, 말조차 하지 못할 때, 혹은 애써 괜찮다고 생각할 때 실은 우리 몸이 더 아프다는 것을 이 연구들은 보여준다. 저자 김승섭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몸은 정직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고용 불안, 차별 경험, 혐오발언 등 사회적 상처가 어떻게 우리 몸을 아프게 하는지, 사회가 개인의 몸에 어떻게 반영되는지를 사회역학의 여러 연구 사례와 함께 이야기한다.
데이터가 말해주는 우리가 아픈 진짜 이유
“사회와 단절된 병이란 없으며, 몸은 사회를 반영한다!”
2000년에 남아프리카공화국 콰줄루나탈 시골 지역의 성인 기대수명은 52.3세였다. 남아프리카공화국 국민의 성인 기대수명은 61.4세로, 9년이나 차이가 났다. 당시 콰줄루나탈 시골 지역의 인구 중 29퍼센트는 HIV 감염인이었고, 빈곤한 그 지역주민들은 비싼 치료약을 대부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2004년, 콰줄루나탈 시골 지역의 기대수명이 49세로까지 떨어졌고 남아프리카공화국 보건국은 공공 의료보험으로 HIV 치료약을 무상으로 제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변화가 생겨난다. 7년 만에 평균 기대수명이 12년이나 증가한 것이다. 김승섭 교수는 이 연구를 소개하며, 질문한다. 그렇다면 이 마을에서 사람들이 죽었던 것은 개개인이 감염되었던 바이러스 때문이 아니라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치료약을 제공하지 못한 시스템 때문인 것이 아니겠냐고 말이다. 개인의 건강에 공동체의 책임을 질문한 것이다.
비슷한 관점에서 두 번째 사례를 볼 수 있다. 소련이 해체되면서 극심한 경제위기를 겪던 동유럽의 국가들은 IMF를 통해 구제 금융을 받는다. 그리고 이 시기에 동유럽 국가들의 평균수명은 급격히 감소한다. 결핵 사망률을 비교한 연구에서, IMF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이행한 국가들은 결핵 사망률이 상승 곡선을 탔다. 한편, IMF에서 구제 금융을 받지 않았던 슬로베니아에서만 결핵 사망률이 감소했다.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이행하면서, 공공 의료 시스템과 사회안전망에 투자하는 비용이 감소했기 때문이라고 책에서는 말한다.
김승섭 교수는 “사회적 환경과 완전히 단절되어 진행되는 병이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인간의 몸과 건강을 어떻게 바라보고, 개개인의 삶에 대한 공동체의 책임은 어디까지”여야 하는지에 대해 묻는다. 최첨단 의료 기술의 발전으로 유전자 수준에서 병을 예측하고 치료하는 게 가능해지더라도, 사회의 변화 없이 개인은 건강해질 수 없다고 말이다.
책에는 저자가 직접 연구를 통해 수집하고 분석한 데이터를 다양한 그래프와 표로 정리해 수록했다. 기존 문헌에 있는 자료들의 경우 재가공해 실었다. 다양한 연구 사례들을 독자들이 한눈에 살펴볼 수 있게 돕는다.
소방공무원, 쌍용차 해고노동자, 세월호 생존 학생, 동성애자…
현장에서 이루어진 연구들, 함께 생존하고 함께 건강해지는 법을 말하다
“사회적 원인을 가진 질병은 사회적 해결책이 필요하다”
1. 해고노동자들에게 국가는 무엇이어야 할까
2009년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후, 직장점거 파업에 참가했던 노동자들의 50.5퍼센트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걸프전 참전 군인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유병률이 22퍼센트인 것을 감안하면, 그 심각성이 더 확연히 드러난다. 김승섭 교수는 쌍용차 해고노동자와 그 가족의 연이은 죽음을 지켜보면서, 해고노동자들의 건강 연구를 시작한다. 국내에서는 제대로 작용하지 못하는 ‘적극적 노동시장 프로그램’에 주목하면서, 실업이 왜 죽음으로 이어져야 하는지 국가를 향해 질문을 던진다. 해고 이후 적금이나 보험 등 사적 안전망마저 붕괴되면서, 공적 안전망이 부재한 한국사회에서, 고용불안이 개인의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이야기한다.
2. 세월호 생존 학생 실태 조사부터 성소수자 건강 연구까지
책은 공중보건의사 시절부터 김승섭 교수가 걸어온 치열한 고민의 흔적들과 연구의 발자취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천안 소년교도소에서 재소자들을 만나면서 했던 고민들은 이후에 인권위원회의 ‘재소자 건강 연구’를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의과대학 시절, 인턴/레지던트의 수면 부족, 병원 내 폭력으로 대표되는 열악한 근무환경에 대한 문제의식은 연구자가 된 이후, ‘2014 전공의 근무환경 조사’로 이어졌다. ‘건강하지 않은 의사들이 진료하는 환자는 안전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의식을 담고 있으며, 의료과실 등 예민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이루어진 전공의 근무환경과 환자 안전에 대한 연구이기도 하다.
2016년에는 세월호 참사의 단원고 생존 학생들과 가족들의 건강 연구를 하면서 안산에 상주했고, 심층 면접을 진행했다. 올해 동성애자 군인이 <군형법> 제92조의 6에 의해 유죄 판결을 받던 날에는 집회 현장에 서기도 했다. 글로 정리된 집회 발언이 책에 수록되어 있다. 최근에는 ‘레인보우 커넥션 프로젝트’라 불리는 동성애자 건강 연구와 트랜스젠더 건강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동성결혼 법제화가 동성애자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도 책에서 말하고 있다. 또한, 동성애를 질병으로 보거나 치료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는 것에 반대하며, 명확한 과학적 근거를 제시한다. 트랜스젠더가 한국사회에서 쉽사리 성별 전환 수술을 할 수 없는 맥락을 짚기도 한다. 그 밖에 우리 사회의 인종차별이나 동성애자, AIDS 환자에 대한 혐오의 정도를 OECD 국가 간 비교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한국사회의 주요한 문제들을 합리적 근거와 함께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어떤 방향으로 우리 사회가 나아갈지에 대한 질문도 던진다. 서로 돕는 공동체 문화가 심장병 사망률을 낮췄던 로세토(Roseto) 마을의 사례, 사회적 연결망이 기대수명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사회역학의 연구 사례 등을 소개하며, 함께 건강하기 위해 공동체는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저자 김승섭 교수의 치열한 고민과 사유가 잘 묻어난 몇몇 문장들은 의미 있는 보도사진이나 한국 화가들의 작품과 함께 배치되어 있어 읽는 재미를 더한다.
책속으로
구직 과정의 차별에 대해 ‘해당사항 없음’이라고 답한 여성 노동자와 학교 폭력에 대해 ‘아무 느낌 없다’라고 답한 남학생은 모두 자신이 경험한 것을 있는 그대로 인지하거나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차별을 겪고도 자신은 해당사항이 없다고 말한 여성 노동자들은 차별을 경험했다고 스스로 말할 수 있는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아팠습니다. 학교 폭력을 겪은 후에 아무렇지도 않다고 이야기했던 다문화가정 남학생들 또한 학교 폭력을 경험하고 그 경험을 말할 수 있었던 학생들을 포함해, 다른 누구보다도 더 많이 아팠습니다. 사회적 폭력으로 인해 상처를 받은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경험을 말하지 못합니다. 그 상처를 이해하는 일은 아프면서 동시에 혼란스럽습니다. 그러나 우리 몸은 스스로 말하지 못하는 때로는 인지하지 못하는 그 상처까지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몸은 정직하기 때문입니다. 물고기 비늘에 바다가 스미는 것처럼 인간의 몸에는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의 시간이 새겨집니다.--「말하지 못한 내 상처는 어디에 있을까」중에서
그렇다면 누가 그 폭염에 취약할까요? (…) 폭염으로 인한 사망 위험을 증가시키는 또 다른 원인이 드러납니다. 바로 사회적 고립이었습니다. 혼자 사는 사람들, 폭염에도 집을 떠나지 않은 사람들, 교회에 나가거나 봉사활동에 참여하는 등 사회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이 숨졌던 것입니다. (…) 하지만 그 질문은 왜 누군가는 에어컨이 있는 시설로 갈 수 없었는지, 왜 누군가는 사회활동을 활발히 하지 못했는지에 대해서는 답하지 못합니다. 개인적 수준의 원인을 지적할 뿐, 그 원인 배후에 있는 사회적 환경은 조사하지 않거나 언급하지 않았으니까요. 그것은 어떠한 정치·경제적인 힘들이 특정 개인을 폭염에 취약하게 만드는지, 그러한 사회구조는 어떻게 역사적으로 형성되었는지, 그 과정에서 공동체와 국가의 역할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질문할 때만 얻을 수 있는 답입니다.--「불평등한 여름, 국가의 역할을 묻다」중에서
사체절도에 대한 두려움이 사회에 만연하던 시기에, 부유한 사람은 죽음 이후에도 안전한 시간을 보장받을 수 있었습니다. 훨씬 더 단단하고 열기 어려운 비싼 관을 구입했던 것이지요. (…) 그러나 해부용 시체가 가난한 사람들의 몸이었던 현실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19세기 영국을 기준으로 당시 의과대학에서 해부학 실습에 사용되었던 시체의 99퍼센트 이상이 가난한 사람들을 수용하던 구빈원에서 나온 것이었으니까요. (…)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살아 있을 때의 경제적 불평등이 죽음 이후에도 지속된다는 점 외에도 중요한 함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시체만 해부되고 기록되면서 해부학의 역사에는 여러 오점이 남습니다. 왜냐하면 가난은 인간의 몸을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가난은 우리 몸에 고스란히 새겨진다」중에서
동성 관계를 보호하는 법을 제정한 지역의 경우, 1995년 설문에서 이성애자라고 응답했지만 2009년에는 스스로를 동성애자나 양성애자라고 응답한 사람의 비율이 그러한 법이 없는 지역에 비해 30퍼센트 높게 나타난 것입니다. 동성 관계를 법적으로 인정하는 사회적 변화와 함께, 과거 자신의 성적 지향을 숨기던 이들이 스스로의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지요. 동성결혼 불인정과 같은 제도적인 차별이 한 개인의 삶과 자존감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잘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도가 존재를 부정할 때, 몸은 아프다」중에서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건강연구 결과를 발표하고 있는 사회역학자 김승섭. 그는 현장에서 얻은 데이터를 바탕으로 우리 사회가 건강한 사회냐고 되묻는다. 동아시아 제공
병든 사회가 사람을 병들게 한다
보건학 분야에서 오래된 질문이 있다. “태아기의 경험이 사람의 일생에 얼마만큼 영향을 끼치는가?” 태아기의 성장 환경을 조작할 수 없다는 윤리적 장벽과 수십년의 연구 기간 때문에 좀처럼 과학적 답변을 내놓지 못하던 이 질문에 대한 답이 1990년대 이후 역학자들을 통해 하나둘 제출되기 시작한다. 역사 속에선 전쟁이나 지리 등의 영향으로 특별한 환경이 조성되는 때가 종종 있기 때문이었다. 아프리카 잠비아에선 7~10월 우기가 과거 한국의 보릿고개처럼 식량은 바닥나고, 말라리아 같은 병은 창궐하는 시기다. 연구자들은 우기에 태어난 잠비아인들과 식량이 넉넉한 건기에 태어난 잠비아인들에 주목했다. 연구 결과 40살이 넘어가자 이들 간의 생존율 차이가 2배 넘게 났다. 또 다른 사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독일 나치 군대의 봉쇄작전으로 네덜란드에선 6개월간 식량과 연료가 끊기는 일이 있었다. 이 기간 어머니 배 속에 있던 이들은 심장병에 걸릴 위험이 다른 시기에 태어난 아이들에 비해 3배, 조현증은 2.6배가 늘어났다고 한다.
이처럼 “질병의 사회적 원인을 찾고 부조리한 사회 구조를 바꿔 사람들이 더 건강히 오래 살 수 있는 길을 찾는 학문”을 ‘사회역학’이라고 한다. 이 학문의 역사는 짧아서 2000년에야 처음으로 교과서가 나왔고, 불과 10여년 전부터 하버드대 등 세계 유수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주기 시작한 신생 학문이다. 1953년 발견된 유전자(DNA) 이중나선 구조로 질병의 원인을 유전자같이 개인 단위에서 찾는 연구가 주류를 이뤄왔고, 미-소 냉전 시기 매카시즘 등의 영향으로 인간을 병들게 하는 사회구조적 원인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었기 때문이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인 최성국씨가 2014년 11월8일 저녁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한 공장 구석에서 저녁 식사를 마친 뒤 담배를 태우고 있다. 최씨는 원래 담배를 피울 줄 몰랐지만, 2009년 8월 쌍용차에서 해고된 뒤 담배를 시작했다. 화성/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인 최성국씨가 2014년 11월8일 저녁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한 공장 구석에서 저녁 식사를 마친 뒤 담배를 태우고 있다. 최씨는 원래 담배를 피울 줄 몰랐지만, 2009년 8월 쌍용차에서 해고된 뒤 담배를 시작했다. 화성/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이 때문에 한국에도 사회역학자는 손으로 꼽을 정도다. 그중에서 김승섭(38) 고려대 보건과학대학 보건정책관리학부 부교수는 2013년 고려대에 부임해 2015년 ‘쌍용차 해고노동자 건강’, ‘소방공무원 인권상황’, 2016년 ‘동성애자/양성애자 건강’, ‘세월호 특조위 단원고 학생 생존자 및 가족 대상 실태조사’ 등 굵직한 사회역학 연구를 주도한 신진 연구자다. 그가 쓴 <아픔이 길이 되려면>은 사회역학이라는 흥미롭고도 중요한 학문에 대한 대중 입문서다.
김 교수가 이런 사회역학의 시선으로 본 한국은 어땠을까. 한국 노동자가 겪는 차별 경험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의 한 대목을 보자. 설문조사에서 구직 과정에서 차별을 경험했는지 묻는 말에 ‘해당 사항 없음'이라고 답한 여성 노동자들이 ‘차별을 경험했다'고 답한 이들보다 오히려 건강 상태가 더 나빴다(2.07 대 1.63). 예상과 다른 이런 답변에 김 교수는 그 이유를 이렇게 짐작한다. “여성 노동자가 구직 과정에서 혹은 일터에서 차별을 경험했다고 말하는 것이 남성에 비해 더 어렵고 예민한 일임을 보여준다.”
흥미롭게도 그는 2012년에 진행됐던 전국 다문화가정 실태조사 결과를 분석하다가 다시 비슷한 상황에 대면한다. 다문화가정 청소년 3627명에게 학교폭력에 관해 물었을 때, ‘별다른 생각 없이 그냥 넘어갔다’고 답한 남학생들은 ‘학교폭력 경험 후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고 답한 남학생들보다 우울 증상 유병률이 높았다(8.34 대 7.05). 김 교수는 “상처받았고 괴롭지만, 자신에게 ‘별거 아니야’라고 말하면서 애써 노력했던 것이 오히려 더 큰 아픔의 원인이었다”며 “한국처럼 남자가 힘든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남자라면 자신의 문제는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회에서 어쩌면 그들은 ‘강한 남자’로 보이기 위해 자신을 속인 것일 수 있다”고 말한다.
김 교수의 연구는 한국 사회가 겪은 큰 아픔을 비켜 나갈 수 없었다. 2015년 쌍용차 노조 김득중 지부장의 요청으로 정리해고 6년 만에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2009년 77일간의 ‘옥쇄파업’에 참여한 노동자 208명이 참여한 설문조사에서 105명(50.5%)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앓는 것으로 분류됐다. 같은 도구를 사용해 측정한 1990년 제1차 걸프전에서 전방에서 전투에 참여한 쿠웨이트 군인(22%)만이 아니라 이라크군에게 포로로 잡힌 쿠웨이트 군인(48%)보다 더 높은 수치였다. 이 잔인한 숫자가 오류가 아님을 증명하듯, 쌍용차에선 현재까지 29명이 가장 많게는 자살로, 그다음으론 뇌출혈, 심장마비 등으로 사망했다.
이런 이전의 연구를 토대로 김 교수가 집중해 연구한 부분은 국가가 실업자들에게 한 역할이었다. 정리해고 이후 구직활동을 한 이들 중 62%가 취업 등 교육이나 직업훈련을 받은 적이 없다고 답했다. 구직 과정에서 정부고용센터의 도움을 받은 이는 8명(9.1%)뿐이었고, 대부분은 친구, 동료 해고자, 가족의 도움을 받았다. 김 교수는 “쌍용차 해고노동자의 삶은 해고로 직장을 잃었을 때 기댈 사회적 안전망이 부재한 한국 사회에서 그 짐을 해고자와 그 가족이 온전히 떠안게 된다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줬다”고 지적한다.
세월호 참사에서 살아 돌아온 학생들의 실태조사를 그가 맡은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세월호 특조위)에서 2016년 1월부터 진행한 실태조사의 책임연구원으로 활동하면서 만난 생존학생들은 “마치 거미줄에 얽혀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정부가 생존학생을 모아 진행한 중소기업연수원 치유 프로그램에선 오전에는 참사 경험을 이야기하고, 오후에 그 아픔을 희망으로 승화하자고 하는 식의 프로그램을 8주간 반복했다. 정부는 피해자와 협의 없이 대학 특별전형을 발표했고, 사람들은 기사에 ‘친구는 죽었는데 너는 좋은 대학 가서 좋겠다’고 댓글을 달았다. 김 교수는 “정부 지원은 내용과 방식에 상관없이 항상 감사히 받아야 하고, 가끔 웃을 일이 생겨도 미소 짓지 말아야 하고, 화내면 안 되는 선량한 피해자 모습을 강요받고 있었다”고 전했다.
이런 한국에 그가 소개하는 ‘로세토 마을 연구’는 울림이 크다. 1960년대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모인 ‘로세토’ 마을은 같은 이탈리아 이민자 마을인 ‘방고’에 비해 심장병 사망률이 절반도 되지 않았다. 이 마을의 특별한 점은 니스코 신부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공동체 문화였다. 니스코 신부는 극도로 적은 임금을 받는 채석장 근로자들을 모아 노조를 만들고 스스로 노조위원장이 돼서 파업을 이끌기도 한 열정적 인물이었다. 이 마을에선 누군가가 죽으면 모든 주민이 애도하며 남겨진 자녀들을 함께 돌보는 문화가 있었다. 자신의 쾌락만을 위해 돈을 쓰고 공동체에 관심 없는 이들은 무시했다. 하지만 60년대를 기점으로 점점 자본주의 이념이 마을에 들어오고 공동체가 해체되면서, 심장병 사망률은 결국 방고 마을과 비슷해진다. 김 교수는 “로세토 이야기는 개인이 맞닥뜨린 위기에 함께 대응하는 공동체, 타인의 슬픔에 깊게 공감하고 행동하는 공동체의 힘이 얼마나 거대하고 중요한지 질문을 던진다”고 말한다. 한겨레9.15
Time Flies - Vaya Con D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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