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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서평

탄소 민주주의

by 이성근 2017. 9. 1.




<탄소 민주주의: 화석연료 시대의 정치권력> 저자 티머시 미첼|역자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생각비행 |2017.08.01 원제 Carbon Democra

 

저자 티머시 미첼은 중동 정치경제학, 경제학의 정치적 역할, 대규모 기술시스템의 정치학, 그리고 근대화 시기의 식민주의 장소를 연구하는 정치학자이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퀸스 칼리지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후 1984년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정치학·중동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25년간 뉴욕 대학교에서 강의했으며 동 대학 중동연구센터 소장을 역임하였다. 2008년에 컬럼비아 대학교로 옮겨 현재 중동·남아시아·아프리카학과 교수 겸 학과장을 맡고 있으며, 중동연구국제저널〉〈미국정치학회보〉〈중동리포트〉〈소셜텍스트〉〈사회와 공간〉〈역사사회학저널〉〈문화경제학저널〉〈발전과 변화등 여러 학술지 편집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이집트 식민화(1991)는 식민주의 시대에 근대 국가가 출현하는 과정을 추적한 저서로, 근대성을 보여주는 이성, 권력과 지식의 형태들을 탐구하였다. 편저자로 참여한 모더니티의 문제(2000)에는 남아시아와 중동의 학자들의 논문과 함께 유럽 근대성의 특성을 고찰한 그의 논문이 실렸다. 아울러 그는 이집트 등을 대상으로 하여 농지개혁, 경제개혁과 개발 정치학에 대한 논문들을 지속적으로 작성하였다. 전문가의 지배: 이집트, 기술-정치, 근대성(2002)은 이집트에서 수행한 작업에서 비롯된 책으로, 경제 지식의 창출과 20세기 정치의 대상으로서의 경제시장의 형성, 현대 국가 형성 과정에서 전문 지식의 역할, 국가 형성 과정에서 법과 사적 소유와 폭력 간의 관계, 현대 정치를 지구화 혹은 자본주의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는 방식의 문제점과 같은 방대한 주제를 다룬다. 경제 형성에 대한 연구는 뉴욕 대학교 고등연구국제센터에서 그가 총괄한 글로벌 시대의 지식의 역할이라는 4년짜리 프로젝트로 이어져 사회과학의 과거와 현재에서의 중동〉〈시장의 속성〉〈경제 다시 생각하기〉〈경제학 작업: 학문은 어떻게 세상을 만드는가등의 연구 논문으로 제출되었다. 이 과정에서 과학기술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로 관심사를 넓혔다.

 

탄소 민주주의프로젝트를 통해 과학기술학과 포스트식민주의 이론을 결합하여 화석연료의 역사를 재구성하고 근대 에너지 네트워크를 확대거하거나 폐쇄할 수 있는 민주 정치의 가능성을 연구한 결과 탄소 민주주의(2011)가 탄생하였다.

 

역자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은 2009년에 창립한 에너지·기후 분야의 진보적 싱크탱크이다. 우리 사회의 에너지 전환 방향을 선도하고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며, 특히 노동자, 농민, 서민 등 사회적 약자의 처지에서 기후변화와 에너지 위기에 대응하는 정책을 생산하고 있다. 펴낸 책으로는 착한 에너지 기행》《탈핵》《초록발광》《나쁜 에너지 기행》《밥상의 전환》《착한 에너지 나쁜 에너지 다른 에너지》《에너지 전환과 에너지 시민을 위한 에너지 민주주의 강의가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기후정의에너지 안보가 있다.

 

감사의 말

서론

 

1장 민주주의의 기구

2장 요정 나라의 선물

3장 피통치자의 동의

4장 호의의 메커니즘

5장 연료 경제

6장 사보타주

7장 결코 일어나지 않은 위기

8장 맥지하드

결론 더 이상 석유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페이퍼백 개정 후기

해제

역자 후기

 

출판사 서평

 

에너지와 민주주의의 관계에 관한 근원적 성찰

20세기 들어서 중동이 세계의 화약고가 됐을까? 왜 신자유주의는 1970년대에 스태그플레이션과 함께 시작됐을까? 미국과 영국이 민주주의를 내세우며 21세기의 첫 국제 전쟁을 시작한 곳이 왜 하필 이라크일까? 국제 유가가 요동치고 나서 2008년 월스트리트 투자은행들이 무너진 이유는 무엇일까? 왜 미국은 금융 위기의 돌파구를 셰일가스 개발에서 찾았을까? 이슬람 근본주의가 서구 민주주의의 가장 큰 위협으로 떠오르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 복잡한 질문에 대한 답을 탄소 민주주의는 단숨에 제공한다. 석탄과 석유라는 탄소 연료민주주의 정치와 어떤 연관을 맺고 있는지를 상세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 티머시 미첼은 탄소 연료와 특정한 종류의 민주적 또는 비민주적 정치 사이에 만들어진 일련의 연결점을 면밀히 추적하여 석유와 민주 정치 사이의 관계를 탐구한다. 이를 위해 자연과 사회, 인간 행위자와 비인간 행위자를 구분하지 않는 브뤼노 라투르의 관점을 빌려와서 우리가 속한 사회-기술적 세계가 석유의 등장으로 어떻게 재조직되고, 이 과정에서 어떻게 특정 종류의 민주주의 혹은 비민주주의가 발현되는지를 보여준다.

 

나는 민주주의와 석유의 관계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듯이 석유와 민주주의를 별개의 것으로 여겼고, 하나가 다른 하나에 악영향을 끼치는 이유를 더 잘 이해하고 싶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떻게 석유를 찾고, 송유관과 석유 터미널을 건설하고, 석유를 열에너지와 수송에너지로 변환하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소득을 이윤으로 전환하고, 그러한 돈의 흐름을 순환시키고 지배하는 방법을 모색해왔는지를 탐색하면서 석유 산업이 중동에 세워진 방식을 추적해보니 탄소 에너지와 근대 민주주의가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점이 점차 명확해졌다. 그러다 보니 석유와 민주주의에 관한 연구가 아니라 석유로서의 민주주의(democracy as oil)’에 대한 책이 되었는데, 그것은 탄소 에너지를 생산하고 사용하는 과정을 수반하는 다층위적 기제들을 가진 하나의 정치 형태이다.” (본문 16~17)

 

석유 자체의 생산과 흐름을 추적하여 이해하지 못하면, 석유의 저주를 석유가 이동하고 에너지, 이윤, 정치권력으로 전환되는 네트워크 중 일단의 접속점(node)-개별 산유국의 의사 결정 기구들-에만 위치하는 병폐라고 진단하게 된다. 이러한 진단은 비산유국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산유국에서만 발견되는 징후들을 분리해내는 작업을 수반한다. 그런데 만일 민주주의가 복사되는 것이 아니라 탄소에 기초하는 것이라면? 민주주의가 탄소 연료의 역사와 특정한 방식으로 엮여 있다면? 산유국과 관련된 문제를 탄소 민주주의의 다른 한계들에 연결해보기 위해 탄소 자체, 즉 석유를 추적해보면 어떨까?

 

탄소 민주주의에 대한 사회-기술적 이해가 왜 중요한가?”

중동을 다룬 여러 글에 따르면 민주주의의 부재는 석유와 관련되어 있다. 석유 자원에 의존하고 석유 수출을 통해 상당한 수익을 올리는 나라들은 비민주적인 경향을 보인다. 막대한 석유 수익과 더욱 민주적이고 평등한 삶에 대한 점증하는 요구 사이의 관계는 지난 2011년 아랍 곳곳에서 일어난 봉기의 물결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체로 석유 생산이 적은 나라일수록 그리고 석유 생산이 급감하는 나라일수록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 더 활발하게 전개된다. 봉기의 진원지였던 튀니지와 이집트, 그리고 금세 봉기가 확산된 예멘과 바레인, 시리아는 중동에서 석유 생산이 가장 적은 나라들이며, 그마저도 줄고 있는 형국이다. 중동의 주요 산유국 8개국 중에서는 생산량이 가장 적은(게다가 최근에는 생산량이 감소하고 있는) 리비아에서만 비슷한 성격의 정치적 투쟁이 가속화되었지만, 폭력과 외국의 개입으로 가장 빠르게 충돌이 종식되었다.

 

석유의 저주라 불리는 이 문제에 대해 글을 쓰는 대다수가 석유의 본질에 대해서, 그리고 석유가 어떻게 생산되고 분배되고 사용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석유’(oil)가 아니라 오일 머니’(oil money)만 논한다. 석유가 반민주적 재화라고 주장하는 논거들은 오일 머니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오일 머니라는 잉여 수익이 정부가 반대 의견을 억압하고, 공적 지원금과 가격 보조금을 통해 정치적 지지를 사거나 부의 평등한 분배를 주장하는 압력을 완화하는 데 쓰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은 석유를 채굴하고 정제하고 운송하고 소비하는 방식, 농축된 에너지원인 석유가 갖는 권력, 석유를 부와 권력으로 변환하는 기구(apparatus) 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들은 석유의 저주를 수입을 석유에 의존하는 정부들에 국한된 문제로만 다룰 뿐, 그보다 더 넓은 세계가 물질적·기술적 생활을 추동하는 에너지를 획득하는 과정의 문제로 취급하지 않는다.

 

탄소 민주주의는 이 지점을 깊고 넓게 파고든다. 제목 그대로 화석 자본주의의 현실과 민주주의의 관련성을 주목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민주주의는 인간 세상의 이야기이고, 에너지 자원이나 기후 변화는 이를 에워싼 자연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티머시 미첼은 이러한 익숙한 상식을 뒤집는다. 탄소는 민주주의의 에서 그것을 지탱하고 또한 제약하는 요소라는 것이다.

 

보통 선거 제도 쟁취에 앞장선 노동운동의 주력은 광산과 철도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었다. 즉 석탄을 캐고 운송하는 사람들이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유럽과 북아메리카 등지에서 광산, 철도 노동자들은 전투적 노동조합 운동을 전개한다. 지배 엘리트들이 이런 움직임을 불편해할 즈음 마침 세계 대공황이 터졌다. 사회경제사 교과서들은 대개 그다음 장에 뉴딜과 케인스를 등장시키면서 위기 극복과 민주주의의 승리를 말한다. 하지만 탄소 민주주의가 조명하는 또 다른 요소 없이는 그러한 전환이 불가능했다. 바로 석유이다.

석탄에서 석유로 동력원이 바뀌었기에 케인스주의 경제 정책이 가능했다. 아니, 탄소 민주주의의 주장에 따르면, 이때 비로소 경제가 실체로 대두했다. 1970년대 이전만 해도 석유는 저렴하고 무한한 자원처럼 보였고 이를 바탕으로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국민 경제라는 관념이 등장할 수 있었다. 경제성장을 측정할 지표로 국민 총생산(GNP) 개념도 이때 처음 등장했다. ‘경제가 잘 돌아가야만 정치’(민주주의)도 지탱될 수 있다는 생각은 새로운 시대의 상식이 되었다.

 

석탄과 달리 석유는 지구의 특정 지역에서만 채굴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채굴, 정제, 운송, 소비의 흐름이 적절히 통제되어야 했다. 석유가 돈의 흐름으로 바뀐 뒤 산유국들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자 그때부터 송유관 건설, 정유소 위치, 로열티 협상 등에 관한 처리 방식은 조직화된 노동력의 요구를 피하려 한다는 점에서 탄소 민주주의의 질문과 직결된다. 석유가 정부의 막대한 소득원으로 바뀌는 것은 민주주의와 석유라는 문제의 원인이 아니라 에너지의 흐름으로부터 정치적 관계를 만들어내는 특정 방식의 결과이다.

 

과거 탄광 노동자들이 파업 투쟁과 탄광 국유화 요구로 힘을 과시한 것처럼 산유국들의 민중 또한 유전의 국유화를 추진했다. 이는 민주주의의 전진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전 지구적인 탄소 민주주의 체제는 이를 치명적인 위협으로 간주했다. 이 때문에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은 안정적인 석유 공급과 통제를 위해 산유국, 그중에서도 유전이 밀집한 중동 국가들의 내정에 끊임없이 간섭했다. 자국의 탄소 민주주의를 유지하려고 중동 인민의 민주주의를 유린한 것이다.

 

이는 민주주의적 가치보다 이익과 효율을 중시하는 경제전문가들이 민주주의의 안위를 좌우하는 권력자의 지위에 올라선 것과도 연관되어 있다. 케인스주의 시기에는 이 전문가의 자리에 고위 관료가 앉아 있었으나 신자유주의 시기에는 금융가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이들은 석유 주권을 지키려 한 중동의 민족주의 흐름을 짓밟은 반면 아랍 반동의 거점 사우디아라비아는 지금껏 비호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에게 익숙한 민주주의의 모습이다. 이 모든 역사 과정의 이면에 다름 아닌 석유가 흐르고 있다. 바로 이런 역사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테러로 부메랑이 돼 돌아오고 있다. 민주주의의 종주국을 자저하는 나라들(미국, 영국, 프랑스 등)이 하나같이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반민주적 조치에 나서는 형편이다. 석유로 흥한 탄소 민주주의가 결국 석유에 발목 잡혀 흔들리는 중이다.

 

화석연료의 굴레에 갇힌 민주주의

석탄과 석유가 희소해지고 채굴이 어려워질수록 채굴에 필요한 비용과 에너지 소비가 증가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결과를 동반하면서 화석연료 시대는 끝나게 될 것이다. 사르트르(Jean-Paul Sartre)다른 생명체로부터 인류가 물려받은 자본이라고 묘사한 화석연료의 비축량은 놀랄 만큼 짧은 기간에 소비되었다. 석유는 가장 손쉽게 채굴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공급을 늘리기가 가장 곤란해진 화석연료가 되었다. 석유 산업이 시작된 1860년대부터 2010년까지 150년 동안 소비된 석유 중 절반이 넘는 양이 1980년 이후 30년간 연소되었다. 인류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보면, 화석연료 시대는 짧은 막간처럼 보인다.

 

탄소 민주주의의 내적 한계 때문에 그간 정치 체제는 기후 변화 해결에 무력했다. 그러나 전 지구적인 위협 앞에서 화석 에너지는 오늘날 국제정치 협상의 주요 대상으로 부상했다. 1995년 베를린에서 시작한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에는 매년 190여 개국 대표들이 모여 이산화탄소를 비롯한 온실가스를 감축하기 위한 국제적 노력을 협상하고 있다. 1997년 교토 의정서 채택으로 구속력 있는 협정 체결에 성공한 이후 201512월 파리에서는 무려 196개국 대표단이 만장일치로 파리 협정을 체결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196개국에서 화석 에너지 사용을 줄여 지구 평균 기온 상승을 섭씨 1.5도 이하로 제한하는 노력에 동참하기로 약속한 것이다. 국지적 분쟁과 경제 전쟁으로 반목하던 국가들을 화합시킨 요인이 온실 효과를 일으키는 탄소화합물이었다. 세계의 그 어떤 위대한 정치가도 못 한 일을 탄소화합물이 해낸 셈이다.

석유의 굴레에 갇힌 우리 시대 민주주의의 모습에서 우리는 에너지 전환의 가장 강력한 이유와 마주하게 된다. 화석 에너지에서 재생 가능 에너지로 전환해야 하는 것은 석유가 고갈되고 있기 때문만도 아니고 기후 변화 때문만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민주주의가 병들어 있기 때문이다. 현대 민주 정치의 한계는 화석연료와의 관계 속에서 규명될 수 있다. 보다 민주적인 미래의 가능성은 화석연료 시대를 끝내는 과정에서 우리가 발전시킬 정치적 수단에 달려 있다.

 

민주주의에서 기름을 걷어내야 할 때다. 석탄으로서의 민주주의, 석유로서의 민주주의를 거쳐 재생 에너지로서의 민주주의라는 문제 제기는 우리에게 자연과 사회, 정치와 경제, 지상과 지하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프레임을 제공한다. 탄소 민주주의는 인간 사회가 그간 얼마나 두꺼운 기름얼룩에 덮여 있는지 폭로하며, 에너지와 노동이라는 측면에서 오늘날의 민주주의를 들여다보게 한다.

 

석탄이 만든 민주주의, 석유가 만든 민주주의

<탄소 민주주의: 화석연료 시대의 정치권력>

에너지 민주주의가 성큼 다가온 것 같다. 원자력계가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를 집요하게 공격하고 있지만 시민들의 의견에 기초해 공사 중단 여부를 결정한다는 원칙은 흔들리지 않고 있다. 공론화위원회에서 에너지 전문가가 배제되었다는 볼멘소리도 있지만 시민 참여를 옹호하는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듯 하다. 에너지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곳곳에서 분출하고 있는 만큼 앞으로 논쟁적인 사안을 시민 참여없이 결정하는 것은 더욱 더 어려워질 것이다.

 

그런데 이것으로 충분할까? 시민들의 정책 결정 과정 참여가 늘면 에너지 민주주의가 실현된다고 할 수 있을까? <탄소 민주주의: 화석연료 시대의 정치권력>(티머시 미첼 지음,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옮김, 생각비행)는 에너지 민주주의를 더 넓고 더 깊게 보라고 말한다. 그리고 석탄과 석유의 시선으로 근대 민주주의의 가능성과 한계를 파헤친다. 에너지 민주주의가 논쟁 사안에 대한 시민 참여로 국한되지 않기 위해, 에너지 민주주의에 잠재된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이 책을 펼쳐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책을 덮을 즈음이면 에너지 전환이 시작되는 곳, 다시 말해 석유가 무너트리고 새롭게 쌓아올린 민주주의의 실체가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석유가 무너트린 민주주의

석유는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뜬금없는 소리 같지만 석유 수출로 얻은 오일머니가 독재 정권을 지탱하는 자금으로 쓰여온 것을 생각하면 생뚱맞은 이야기는 아니다. 또한 석유는 강대국의 먹잇감이 되어 시시때때로 외세의 개입을 초래한다. 중동 지역의 석유 통제권을 놓고 서구 열강이 다투는 내내 중동 지역의 민중들은 전쟁과 내전, 테러의 위협에 시달려야했다. 오랜 기간 중동 지역을 연구해온 만큼 저자는 '석유의 정치'를 세밀하게 파고든다. '석유의 저주'에 대해서는 비교적 많이 알려진 만큼 익숙한 이야기의 반복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20세기 초중반 중동 지역에서 펼쳐진 영국과 미국의 석유 패권 경쟁을 국제금융시장의 주도권 다툼 속에서 파악하고 이것을 다시 송유관의 경로·직경을 둘러싼 갈등과 연결시키는 것은 다른 곳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흥미로운 분석이다. <탄소 민주주의>는 다소 익숙한 석유의 정치를 다각도로 접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읽어봄직하다.

 

하지만 이 책의 초점은 석유 통제권이나 석유 이익의 배분에 맞춰져있지 않다. <탄소 민주주의>는 에너지와 민주주의의 관계를 보다 근원적인 차원에서 접근한다. 이 책의 시각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 중 하나는 석탄에서 석유로의 전환을 민주주의의 시각에서 재해석하는 지점이다. 잠시 머릿속으로 석탄으로의 전환이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지 상상해보자. 아마도 가장 큰 변화는 더 이상 자연의 재생 속도에 구애받지 않는 사회가 된 것일 게다. 석탄은 증기기관, 철과 결합하여 삼림과 축력의 재생 속도로부터 해방된 산업사회의 기틀을 닦았다. 탄광에서 캐낸 석탄이 철도와 운하를 따라 도시와 공장으로 대량 운송되지 않았다면 도시화와 산업화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탄소 민주주의>는 노동계급이 석탄의 흐름을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을 확보한 것에 주목한다. 자본가의 감시는 땅 속 깊은 곳까지 미치지 못했고, 땅 위로 올라온 석탄은 철도 및 운송 노동자들의 파업에 취약했다. 덕분에 에너지 부문의 노동자들은 강력한 교섭력을 확보할 수 있었고, 이들의 전략적 행위는 투표권 쟁취와 복지제도 도입 등 20세기 초반 서구의 민주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석탄 네트워크에서 노동계급이 차지한 전략적 위치를 이해하면 2차 세계대전 이후 마샬플랜이 유럽의 전후 복구를 외치며 석유로의 전환을 강조한 이유도 새롭게 보인다. 석유는 석탄과 달리 감독자가 통제할 수 없는 탄광과 같은 대규모 작업장이 없었다. 또한 석탄을 실어 나르던 철도는 '저항 없는' 송유관으로 대체되었다 나아가 석유는 유전 탐사에서 채굴에 이르기까지 석탄에 비해 전문지식의 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노동과정에서 기술자와 관리자의 역할이 더 컸다. 이로 인해 석유로의 전환과 함께 에너지 네트워크에서 조직화된 노동의 힘은 크게 약화되었고, 그만큼 노동계급의 정치적 요구에 덜 취약해졌다. 즉 석탄에서 석유로의 전환은 단순히 에너지원이 바뀐 게 아니라 사회적 세력관계의 재편을 동반한 정치적 사건이었다.

 

혹여 오해는 없어야한다. 이 책이 석탄 또는 석유 그 자체가 민주주의의 형태를 결정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탄소 민주주의>는 에너지 결정론이나 기술 결정론을 배격한다. 하지만 동시에 민주주의를 사상이나 사회운동의 역사로 국한시키는 것도 비판한다. 민주주의는 물질과 관념, 경제와 정치, 자연과 사회, 인간과 비인간의 연결망 구성을 둘러싼 갈등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 <탄소 민주주의>의 기본 시각이다. 민주주의의 역사는 석탄의 역사, 석유의 역사와 겹쳐져있다.

 

석유로 쌓아올린 민주주의

그렇다면 20세기 인류는 석유를 통해 어떤 민주주의를 쌓여 올렸을까? <탄소 민주주의>는 여러 갈래로 논의를 진행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가장 눈길이 간 곳은 '경제'의 형성이다. 이 책은 다소 도발적으로 석유의 부상과 함께 비로소 현대적인 '경제' 개념이 형성되었다고 주장한다. 20세기 초중반 유가는 계속 하락했다. 더구나 석유는 비교적 풍부했고 운송이 용이했기 때문에 고갈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석탄보다 훨씬 편리하게 원하는 곳 어디서는 석유를 이용할 수 있는 사회가 도래한 것 같았다. 나아가 석유에 기반을 둔 농업의 산업화, 석유를 활용한 합성화학물질의 개발은 식량과 천연자원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된 미래를 상상하게 해주었다. 에너지 사용량과 식량 소비량, 자원 사용량이 계속 늘었지만 '한계'를 고민할 이유는 없어보였다. 불과 한세대만에 석탄 고갈을 우려하던 제본스같은 경제학자들은 자취를 감췄다. 다시 말해 값싸고 풍부한 석유는 경제학에서 자원고갈의 문제를 제거했고, ‘경제는 물리적 한계를 고려할 필요가 없는 화폐의 순환시스템으로 사고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한한 경제성장이 가능하다는 생각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에 기초한 정치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다. 저자의 말처럼, "석유를 기반으로 한 경제의 탄생은 탈물질화되고 탈자연화된 정치 형태를 가능케했다."

 

경제와 정치의 탈물질화를 고려할 때, 1970년대 석유위기와 함께 환경정치가 부상한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한계적 사고'의 부활은 시장의 부상과 함께 찾아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탄소 민주주의>는 생태적 사고와 신자유주의적 사고의 동시 부상을 '석유 정치'의 시각에서 추적한다. 이 책에 따르면, 미국의 석유기업들은 1970년대로 넘어오면서 돌연 석유를 무한한 자원으로 간주해오던 계산 방식을 폐기하고 석유의 고갈, 석유 시대의 종말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정치적 의도가 숨어있었는데, 석유의 고갈이 가시화될수록 유가 상승을 쉽게 정당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석유기업들은 석유 보존의 필요성을 역설함으로써 환경운동의 시선을 핵발전으로 돌리고자 했다. 동시에 석유기업들은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싱크탱크를 대대적으로 지원하여 국가의 개입을 공격하는 데 나섰다. 보다 구조적인 측면에서 보면, 오일달러의 순환이 증가하면서 국제금융시장의 통제가 한층 더 어려워졌다. 그렇게 석유위기로 시작된 1970년대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개막을 알리며 끝났다.

 

석유 이후, 에너지 민주주의는 어디로 갈 것인가?

이제 '풍요로운 석유'의 시대는 끝났고, 기후변화는 가속화되고 있다. 기세를 떨치던 신자유주의 역시 임계점에 도달한 듯하다. <탄소 민주주의>는 석유위기와 환경위기, 금융위기가 마주치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점을 직시하라고 말한다. 고탄소 생활양식은 신자유주의 국면에서 소비자 부채 증가를 야기했고 주택담보대출로 수명을 연장해왔다. 금융화는 파생상품 거래를 활성화시켰고, 투기적 금융자본의 손길은 석유를 피해가지 않았다. 주택담보대출 시장의 붕괴가 금융위기를 촉발하고 유가 및 곡물가 급등과 연결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월스트리트는 셰일가스 붐을 조성하여 다시금 값싼 화석연료의 시대를 꿈꾸고 있지만 전망은 불투명하다. 전망이 불투명한 것은 민주주의도 마찬가지다. 전 세계 곳곳에서 민주주의는 위협받고 있다.

 

석유 이후, 에너지 민주주의는 어디로 갈 것인가? 점점 더 많은 이들이 에너지 전환을 꿈꾸고 있지만 에너지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나 <탄소 민주주의>가 재차 강조하는 바, 에너지 전환은 에너지 민주주의와 분리되지 않는다. 다만 인지하지 못할 따름이다. 따라서 사회-기술체계로서 새로운 에너지체계를 구성하기 위한 각축은 민주주의를 새롭게 구축하는 과정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에너지 민주주의의 미래 역시 에너지 전환과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한 인식 수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탄소 민주주의>는 에너지 전환과 에너지 민주주의를 상상하는 이들에게 영감을 주는 책이다. 덤으로 화석연료의 눈으로 20세기 정치경제사를 꿰뚫는 즐거움을 준다. 책장을 넘길수록 에너지와 민주주의, 기술과 정치, 경제의 연결고리에 대한 고민거리도 늘게 될 것이다.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흥미로운 연결지점이 많지만 엄밀하고 정교한 설명을 기대한다면 눈에 밟히는 곳이 군데군데 존재한다. 또한 미국, 유럽, 혹은 산유국과 다른 한국사회의 맥락 속에 대입하려면 추가적인 '번역''연결망'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보편적 공급, 사회적 소유, 지역에너지, 시민참여 등 에너지 민주주의와 관련된 최근 쟁점들을 구체적으로 다루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에너지 전환이 단순한 에너지원의 변화가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기술, 문화의 포괄적 변화라는 점을 <탄소 민주주의>만큼 잘 보여주는 책도 드물다. 재생에너지3020 계획, 탈핵 로드맵 등 에너지 전환이 피해갈 수 없는 현실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는 만큼 '민주적 에너지 전환'을 모색한다면 이 책이 던지는 메시지를 곱씹지 않을 수 없다. 에너지 전환 없는 민주주의는 위험하고 민주주의 없는 에너지 전환은 공허할 수 있다./ 홍덕화 서울대학교 SSK 연구단 전임연구원

 

에너지 민주주의 바람과 물과 태양 그리고 사람이 만드는 녹색미래

저자 이이다 데쓰나리|역자 제진수|이후 |2002.07.23

원제 北歐の エネルギ-デモクラシ

 

"미래는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는 것이다."

중앙 정부는 모든 에너지를 '석유로 환산'함으로써 지역의 다양한 자연에너지를 고려 대상에서 제외했다.정치문화적 측면에서 지역을 독점해 온 전력회사 역시 안정된 전력 공급이라는 '신화'를 위해 원자력발전을 확대하는 데 매달려 왔다. 이런 현실을 상징하는 것이 '장기 에너지 수급 전망'이라는 경직되고 일면적인 에너지 미래상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들은 모두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에너지 미래상에 의해 지배받게 된 것이다.우리의 에너지정책에 결여된 것은 본래 의미의 '공공 公共'이며, 시민과 지역이 자신의 에너지와 미래를 선택할 수 있는 새로운 민주주의, 이른바 '에너지 민주주의'라는 사상이다

 

저자: 이이다 데츠나리(飯田哲也) 일본의 환경·에너지정책 전문가다. 교토대학 공학부(원자핵공학)를 마치고 동경대학 첨단연구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2년부터 지금까지 일본종합연구소 주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현재 ()자연에너지 대표이사, 교토여자대학 현대사회학부 강사, 환경 엔지오 <자연에너지촉진법 추진 네트워크> 대표를 맡고 있으며, 1996년부터 스웨덴 룬드대학의 객원연구원으로 있다. 1998년에는 한국에서 열린 <아시아의 지속가능하고 평화로운 에너지 미래에 관한 국제 워크숍>에 참석하기도 했다. 지은 책으로 현대 일본 문화론: 사사의 창조(공편저, 1997)환경 지성의 시대(공저, 1999) 등이 있다.

유럽의 선진적 실험들을 우리와 사정이 비슷한 일본에서 실현하기 위해 강단과 현장을 분주히 뛰어다니고 있다.

 

책머리에 10

1'풍력전차'가 달린다 17

녹색전력의 등장과 스웨덴의 전력시장 개혁

2'화석연료 제로'를 선언한 마을 37

스웨덴의 <지방의제 21>

3장 탈원자력발전에 도전하는 스웨덴 63

4장 스웨덴의 에너지 미래상 93

5장 원자력발전을 거부한 덴마크의 민주주의 121

6장 덴마크의 에너지 미래상 147

7장 풍차를 공유하는 사람들 171

8장 자연에너지 자급을 지향하는 섬들 191

섬 네트워크와 유럽의 재생가능 에너지 전략

9장 불안의 시대를 넘어 221

'생태적 민주화'를 향해

후기 232

참고문헌 235

옮긴이 글 243 


Moon River - Jacinth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