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중의 함성 (commune de Paris, Pariser Kommune, Paris commune) 자크 타르디 지음, 장 보트랭 원장, 홍세화 옮김, 서해문집 펴냄) ⓒ서해문집
1871년, 프로이센과의 보불전쟁에서 프랑스가 패한 뒤 프랑스 임시정부의 행정장관 티에르는 프로이센과의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으려 했다. 이에 반발해 파리 곳곳에서는 민중 봉기가 일어났지만 대대적인 탄압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같은 해 3월, 티에르 정부의 무장한 군인들은 국민방위군의 대포를 빼앗기 위해 비열한 기습작전을 벌였다. 시민들은 격렬히 저항했고, 파리는 혁명의 기운으로 가득 찼다.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코뮌 혁명’의 시작이었다.
저자 자크 타르디는 프랑스의 국민 만화가이자 그래픽노블 작가. 1970~80년대를 풍미한 프랑스 그래픽노블의 가장 걸출한 인물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타르디의 만화 가운데 대중적으로 가장 크게 성공을 거둔 작품은 1976년부터 발표하기 시작한 《아델 블랑섹의 기이한 모험》 연작이다. 이 시리즈는 뤼크 베송 감독이 2010년 같은 제목으로 영화화하기도 했다. 여기서 파리는 아주 사실적이면서도 동시에 불가사의한 미스터리로 가득 찬 환상적 공간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설국열차]의 원작자 뱅자맹 르그랑과 함께 《바퀴벌레 죽이는 사람》(1984)을 발표하기도 했다.
타르디의 또 하나의 기념비적 걸작으로, 1914~1918년의 제1차 세계대전을 소재로 한 《그것은 참호전이었다(C’?TAIT LA GUERRE DES TRANCH?ES)》(1993, 한국어판 출간 예정)가 있다. 이 작품으로 그는 만화계의 오스카 상으로 불리는 아이너스 상 두 개 부문을 차지하는 영광을 누렸다.
한편 타르디는 2013년 1월 ‘레종도뇌르’ 훈장을 거절해 화제가 된 바 있다. 그가 《리베라시옹》을 통해 밝힌 거절 이유는 다음과 같다.
“사상과 창조의 자유를 무엇보다 중요시 여기는 나는 현 정권이든 어떤 종류의 정권으로부터든 아무것도 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큰 각오를 하고 이 훈장을 거절한다.”
타르디는 아나키스트인 자신이 어떻게 국가가 주는 훈장을 받을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전쟁의 참혹성을 고발한 작품들로 칭송받아온 그로서는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최근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 포로였던 부친의 경험을 토대로 한 그래픽노블 《내 이름은 르네 타르디-포로수용소(MOI REN? TARDI, PRISONNIER DE GUERRE)》(2012, 한국어판 2014)를 출간했다. 또 2015년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개막작이었던 [에이프릴과 조작된 세계]의 시나리오를 직접 쓰고 캐릭터를 그렸으며, 배경 디자인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역자 홍세화는 194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72년 ‘민주수호선언문’ 사건을 비롯해 1977년부터 ‘민주투위’, ‘남민전’ 활동에 참여했다. 1979년 근무차 프랑스 체류 중에 ‘남민전’ 사건으로 귀국하지 못하고 파리에 정착, 택시 운전 등 여러 직업에 종사하면서 20여 년간 망명생활을 했다. 2002년 귀국 후 활발한 사회 활동을 펼치며 《한겨레》 기획위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인, 진보신당 당대표, 《말과 활》 발행인 등을 역임했다. 현재 사유·실천의 공동체인 ‘협동조합 가장자리’ 이사장, 장발장은행 은행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빨간 신호등》 《생각의 좌표》 등이 있다.
목차
장 보트랭의 서문
옮긴이 서문
주요 등장인물
출판사서평
1871년 3월 18일, 새벽 3시. 무장한 군인들이 몽마르트르의 가파른 언덕을 오르며 공격한다. 이 고요한 밤, 지저분한 파리의 포석돌 위로 눈송이들이 조용히 떨어져 사라지기가 무섭게, 이 무리들은 국민방위군(시민군)의 대포를 손에 넣기 위해 기습작전을 펼쳤다. 정부 수반인 티에르의 명령이었다.
혼돈스런 시대였다. 프로이센과의 보불전쟁(1870~1871)에서 프랑스가 패한 뒤, 프로이센군이 베르사유 궁을 점령하고 파리까지 입성한 터였다. 나폴레옹 3세가 체포되고 프랑스 임시정부의 행정장관으로 임명된 티에르는 프로이센과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으려 하고 있었다. 이에 반발해 파리 곳곳에서 민중 봉기가 일어나지만 잇달아 진압당하고, 민중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급기야 티에르 정부는 시민들의 손에서 대포를 빼앗기 위해 비열한 기습작전을 펼친 것이었다. 하지만 시민들은 이에 격렬히 저항했다. 동이 트자, 파리는 혁명의 기운으로 눈을 떴다. 함성, 반란, 불끈 쥐어지는 주먹…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이날 ‘코뮌 혁명’은 시작되고 있었다.
이 책은 1871년의 파리 코뮌을 무대로 한 장 보트랭(Jean Vautrin)의 역사추리소설 《민중의 함성》(1999)을 프랑스의 국민 만화가인 자크 타르디(Jacques Tardi)가 그래픽노블로 각색한 작품이다. 보트랭의 소설은 거친 호흡의 작가가 그려낸 활기와 숨결, 열정으로 가득한, 19세기 신문 연재 소설에 대한 오마주였다. 그 표지를 맡아 그리게 된 타르디는 이 생동감 넘치는 시대에 대한 광대한 묘사에 반해버렸다. 게다가 이미 오래 전부터 파리 코뮌을 만화로 이야기하고픈 마음을 갖고 있었으니 소설을 만화로 각색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2004년 전4권으로 완간된 이 장대한 그래픽노블은 2001년 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에서 데생 부문 최우수상을 받았으며, 2011년 합본된 장정으로 재탄생했다.
어느 날 밤 파리의 알마 다리에서 의문의 여인 변사체가 발견되는 사건으로 시작되는 이 책은, 젊은 코뮌 전사 지케와 릴리가 페르 라셰즈 담을 넘어 사라지는 5월 28일로 막을 내리기까지 두 달여 시간 동안, 파리 코뮌의 성립에서부터 마지막 바리케이드가 무너질 때까지의 하루하루를 숨차게 그리고 있다. 1871년 3월 18일부터 5월 28일까지의 코뮌 시기를 주무대로 그렸지만, 코뮌의 배경이 된 보불전쟁을 비롯해 코뮌 정부와 티에르의 베르사유 정부와의 갈등, ‘피의 일주일’ 동안 폭풍처럼 몰아친 살육과 저항의 풍경이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타르디는 이 책에서 파리에 대한 사랑, 서민들에 대한 애정과 함께 여성 혁명가 루이즈 미셸이나 당시 저널리스트였던 쥘 발레스와 같은 인물들에 대한 존경심 등을 한껏 펼친다(실존 인물들이 이 책 곳곳에서 등장한다). 또한 권력에 맞서는 아나키스트적인 성향을 숨기지 않고 코뮌의 잊혀진 전사들과 함께한다. 그리고 스산한 거리와 음침한 골목을 무대로 넝마주이, 혁명가, 공증인, 밀정, 불량배, 탈영병, 창녀들이 뒤엉킨 대서사가 펼쳐지면서 코뮌의 파리, 그 시대의 기쁨과 수탈, 무절제와 사랑, 억압된 에너지를 강렬하게 되살려내고 있으며, 사회 정의에 대한 환상적인 희망의 출현, 인간 사이의 우애, 자유의 절대적 가치를 호소력 있게 웅변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문학을 통해 파리 코뮌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길잡이일 뿐만 아니라, 타르디 특유의 아나키스트적이고 민중적인 해석을 음미할 ‘작품’이기도 하다.
또한 가로로 긴 독특한 판형은 우연한 선택이 아니다. 이 판형 덕분에 타르디는 이야기가 전개되어감에 따라 ‘피의 일주일’과 같은 거리 전쟁 장면을 광대한 더블 페이지의 형태로 표현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자크 타르디, 레종도뇌르 훈장마저 거부한 아나키스트
타르디는 1970~80년대를 풍미한 프랑스 그래픽노블의 가장 걸출한 작가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타르디의 만화 가운데 대중적으로 가장 크게 성공을 거둔 작품은 1976년부터 발표하기 시작한 《아델 블랑섹의 기이한 모험》 연작이다. 이 시리즈는 뤼크 베송 감독이 2010년 같은 제목으로 영화화하기도 했다. 여기서 파리는 아주 사실적이면서도 동시에 불가사의한 미스터리로 가득 찬 환상적 공간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설국열차]의 원작자 뱅자맹 르그랑과 함께 《바퀴벌레 죽이는 사람》(1984)을 발표하기도 했다.
타르디의 또 하나의 기념비적 걸작으로, 1914~1918년의 제1차 세계대전을 소재로 한 《그것은 참호전이었다(C’?tait la Guerre des Tranch?es)》(1993, 한국어판 출간 예정)가 있다. 이 작품으로 그는 만화계의 오스카 상으로 불리는 아이너스 상 두 개 부문을 차지하는 영광을 누렸다.
한편 타르디는 2013년 1월 ‘레종도뇌르’ 훈장을 거절해 화제가 된 바 있다. 그가 《리베라시옹》을 통해 밝힌 거절 이유는 다음과 같다.
“사상과 창조의 자유를 무엇보다 중요시 여기는 나는 현 정권이든 어떤 종류의 정권으로부터든 아무것도 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큰 각오를 하고 이 훈장을 거절한다.”
타르디는 아나키스트인 자신이 어떻게 국가가 주는 훈장을 받을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전쟁의 참혹성을 고발한 작품들로 칭송받아온 그로서는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최근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 포로였던 부친의 경험을 토대로 한 그래픽노블 《내 이름은 르네 타르디-포로수용소(Moi Ren? Tardi, prisonnier de guerre)》(2012, 한국어판 2014)를 출간했다. 또 2015년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개막작이었던 [에이프릴과 조작된 세계]의 시나리오를 직접 쓰고 캐릭터를 그렸으며, 배경 디자인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1871년 3월 18일 파리, 1980년 5월 18일 광주
1871년의 파리 코뮌을 다룬 이 책이 오늘날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책을 우리말로 옮긴 홍세화 선생은 ‘옮긴이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정규부대에 의해 궤멸될 숙명이 예정된, 민중 전사들로 이뤄진 비정규부대. 이것이 광주항쟁과 파리 코뮌을 연결하는 열쇳말의 하나일 것이다. 벼랑 끝 전망 속에서도 낮에는 토론하고 밤에는 춤을 추었던, 두 달 남짓의 대동(大同) 세상. 하지만 그것은 ‘피의 일주일’로 치닫고 있었다. 그 일주일이 광주항쟁의 일주일과 그대로 포개지는 것은 역사의 우연일까. (…중략…) 우리는 어쩌면, 이미 새로운 세상을 향한 더듬이 자체를 잃어버린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파리 코뮌의 좌절된 꿈과 이상은 더 소중한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와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에게 ‘마지막 바리케이드’라는 건 있을 수 없다고 믿는 독자라면 그 꿈과 이상에 동의해주지 않을까. 그런 독자들이 적지 않기를 바란다.”
"무기를 들어요! 시민 여러분, 무기를 들어요!" [작은책]
책이 이끄는 여행…'민중의 함성'과 '코뮌 전사의 벽'
누구였던가. "노예의 반란은 성공하기 어려운데, 설령 성공한다고 해도 주인만 바뀔 뿐 노예는 노예로 남는다"고 말했던 이는. 그래서 과거의 노예는 물론이고 현대의 노예들도 주인 되는 꿈을 꾸어선 안 되는 것일까? 어차피 노예의 처지에는 변화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어쩔 것인가. 자유를 지향하는 게 인간의 본성인 것을! 그리하여 굴종의 사슬을 끊고 해방 세상, 대동세상을 실현하고자 했던 것 또한 인간 역사의 큰 줄기였음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파리 코뮌도 마찬가지였다. "자유로운 삶, 아니면 죽음을!"이라고 외치며 반권위주의, 반교권주의, 반군국주의, 반자본주의의 기치로 싸운 코뮌 전사들, 이들에 대한 베르사유 정부군의 잔인한 '피의 보복'은 해방 세상, 대동 세상을 맛본 사람들을 살려 둘 수 없다는 지배 질서의 반동 그 자체였다.
▲ '코뮌 전사의 벽'에는 "코뮌의 죽은 이들에게 (1871.5.21~28)"라고 새겨져 있다. ⓒ홍세화
1871년 3월 26일 화요일, 파리 민중들은 투표를 통하여 코뮌을 성립시켰다. 사회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 그리고 노동자들은, 부르주아 지배 체제의 노예의 자리에서 "심판자이면서 저항자, 파트너이면서 자신의 힘의 주체적 행위자"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코뮌 성립의 의식은 엄숙한 의전이나 새로운 체제의 허례로 가득 찬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소박했고 담대했으며 즉흥적이었다. 행복한 웃음처럼 짜릿했으며 정돈된 게 아니었고, 붉은 마음들로 들끓었다."
그렇게 "코뮌은 불행한 사람들, 투기에서 배제된 사람들, 공장에서 착취당하는 사람들, 빈민가 사람들과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결집시켰다". 그들은 이렇게 외쳤다. 코뮌 만세! 사회 공화국 만세!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불온한 비정규군들'이었고,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마오쩌둥의 말이 세상에 알려지기 전이었지만, 패배는 이미 예정돼 있었다. 9주 동안 이어진 해방의 순간들이, 그 찬란한 광휘가 그들에게서 패배의 숙명과 그 이후의 시간들에 대한 상념을 삼켜버렸던 게 아니었을까. 그리하여 5월 21일 '피의 일주일'이 시작될 즈음 코뮌 위원회의 포고문은 1980년 5월 어느 날 광주의 밤거리에서 울려 퍼졌던 절절한 목소리를 돌이키게 한다.
"무기를 들어요! 시민 여러분, 무기를 들어요!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가 승리하느냐, 아니면 프랑스를 프러시아에 팔아넘기면서 저지른 반역 행위의 대가를 우리에게 지불하라고 요구하는 파렴치한 베르사유 반동분자들과 성직자들의 수중에 떨어지느냐의 갈림길에 있습니다!"
그렇게 파리 코뮌은 두 달 남짓 존속한 뒤 5월 28일 일요일 아침 몰리에르, 라퐁텐 등 수많은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파리 최대의 공동묘지 페르 라쉐즈의 동북쪽 벽에서 마지막 코뮌 전사들이 총살당하면서 막을 내렸다. 티에르 정부는 코뮌 전사들에게 총살당한 인질 100여 명과 전투에서 죽은 베르사유군 877명의 "원수를 갚으려고" 파리 시민과 코뮌 전사들 2만 명을 학살했다. 바로 '피의 일주일'이다. 아직 기관총이 없던 시절이었다. 전투에서 죽은 사람보다 총살형으로 희생당한 사람들이 더 많았다. 어깨에 탄약 자국이 있으면 가차 없이 즉결 처분되었다. 센 강은 강물보다 시체 더미로 채워졌고 붉은 피로 물들었다. 그렇게 파리는 "평화를 회복하였"지만, 4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군법 회의에 회부되었고 수천 명이 국외로 추방되었다. 지금도 애창되는 <체리의 계절(Le temps des cerises)>의 작가 장 바티스트 클레망은 '피의 일주일'에 이렇게 썼다.
▲ '코뮌 전사의 벽' 전면에 있는 장 바티스트 클레망의 묘지. ⓒ홍세화
내일이면 다시 경찰 나부랭이들이
거리에서 활개를 칠 것이다.
자기들의 복무를 뽐내듯
목줄에 권총을 차고서.
빵도 일자리도 무기도 없이
우리는 지배당할 것이다.
밀정과 경찰과
폭력적인 권력과 성직자들에 의해.
하지만…
그것은 흔들리고
최악의 날들은 끝날 것이다.
그리하여, 설욕전을 조심하라.
가난한 자들이 모두 함께할 때.
공포 정치기가 포함된 프랑스 대혁명기 1793~1794년의 2년 동안보다 '피의 일주일' 동안 더 많이 희생된 코뮌 전사들은 지금 무엇으로 남아 있을까? 페르 라쉐즈 벽에 걸린 표지판은 38년 전 처음 보았을 때 그대로 '코뮌의 죽은 이들에게(1871.5.21~28)'라고 간단히 적혀 있었다. 이젠 교과서에서조차 잊혀가는 변화상을 반영한 것일까? 아니면 5월이 아니기 때문일까? 순례자들이 남겨놓곤 했던 장미꽃이 이번에는 보이지 않았다. <민중의 함성> 원작자인 장 보트랭이 말하듯, 그들은 "프롤레타리아와 함께 하는 역사의 약속 시간에 너무 일찍 찾아온" 잘못을 저질렀던 것일까. 아니면 그들은 다만 이름 없는 민중들이었기 때문일까?
독자들은 이번 '책이 이끄는 여행'지로 페르 라쉐즈의 '코뮌 전사의 벽'을 택한 것을 양해해 주기 바란다. 장 보트랭이 원작 소설을 쓰고 자크 타르디가 그린 그래픽노블 <민중의 함성>을 한국어로 번역한 사람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나는 옮긴 이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썼는데, 다소 길게 인용하면서 이 글을 마감하는 것 또한 독자들은 이해해 주기 바란다.
"사람에 따라 그 속에 살고 싶은 역사적 사건이 각자 있을 수 있는데, 나에겐 그런 사건들 중 광주항쟁과 함께 파리 코뮌을 빼놓을 수 없다. 1871년 봄, 자유의 가치를 절대화하여 그 무엇에도 양도할 수 없는 '해방 사회'를 꿈꾸었던 파리의 민중들과 함께 숨 쉬고 분노하고 싸우고 좌절하면서 가녀린 희망이나마 다시 품어 보는 경험을 어찌 마다하겠는가.
스산한 거리와 음침한 골목을 무대로 넝마주이, 혁명가, 공증인, 밀정, 불량배, 탈영병, 창녀들이 뒤엉켜 서사를 펼치는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만나야 했던 비속어들을 우리말로 옮기기에 무척이나 어려웠는데 그럼에도 무엇인가에 취한 사람처럼 매달렸다. 그 날것의 생생함을 한국의 독자들에게 제대로 전달할 수 없다면 그것은 순전히 내 능력의 부족 탓일 터인데, 내 머릿속에 그려지는 파리 거리의 윤곽을 옮기지 못하는 진한 아쉬움까지 독자의 풍부한 상상력으로 대신 채울 수 있기를 바란다.
3월 17일 파리의 알마 다리에서 의문의 여인 변사체가 발견되는 사건으로 시작되는 이 책은 젊은 전사 지케와 릴리가 페르 라쉐즈 담을 넘어 사라지는 5월 28일까지 파리 코뮌의 성립에서부터 무너질 때까지 하루하루를 숨차게 그리고 있다. 정규 부대에 의해 궤멸될 숙명이 예정된, 민중 전사들로 이뤄진 비정규 부대. 이것이 광주 항쟁과 파리 코뮌을 연결하는 열쇳말의 하나일 것이다. 벼랑 끝 전망 속에서도 낮에는 토론하고 밤에는 춤을 추었던, 두 달 남짓 동안 대동 세상, 하지만 그것은 '피의 일주일'로 치닫고 있었다." / 홍세화 협동조합 가장자리 이사장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뮌까지, 1789~1871 저자 노명식|책과함께 |2011.06
저자 노명식(盧明植)은 1923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서양사를 전공한 후 경희대학교 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 대학교 옌칭 연구소 객원교수를 거쳐, 경북대학교, 경희대학교, 성균관대학교, 한림대학교에서 교수를 지냈다. 지은 책으로는 《프랑스 제3공화정 연구》(1976), 《현대역사사상》(1978), 《전환의 역사》(1978), 《현대사의 길목에서》(1978), 《민중시대의 논리》(1979),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뮌까지, 1789~1871》(1980), 《자유주의의 원리와 역사》(1991, 《자유주의의 역사》의 초판본), 《함석헌 다시 읽기》(2002)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는 《현대세계사》(1964), 《역사의 연구》(축약본 전2권)(1976), 《서구문화와 종교》(1977) 등이 있다. 대표 저서 《자유주의의 원리와 역사》는 1992년 한국출판문화상 저작상을 수상했다.
목차
개정판 서문
초판 서문
제1장 18세기의 프랑스
1. 경제적 변동
2. 사회적 모순
3. 통치 체계의 모순
4. 계몽사상
제2장 대혁명의 원인과 국민의회
1. 귀족의 반동과 왕의 무능
2. 재정 문제와 귀족의 혁명
3. 혁명의 제1막
4. 8월의 성과
5. 혁명의 중심이 파리로
6. 재정과 교회
7. 왕의 도망 실패와 그 전후
8. 1791년 헌법
제3장 입헌의회와 국민공회
1. 전쟁과 왕권 정지
2. 9월 학살과 상퀼로트
3. 공화정의 수립과 왕의 사형
4. 지롱드파의 몰락
5. 에베르와 당통의 몰락
6. 산악파의 혁명 이념
제4장 부르주아 공화국
1. 테르미도르파의 반동
2. 총재정부의 동요
3. 브뤼메르 18일 쿠데타
제5장 나폴레옹 시대
1. 통령 정부
2. 전승과 평화와 종교 협약
3. 종신 통령에서 황제로
4. 나폴레옹 제국의 절정
5. 나폴레옹의 몰락
제6장 복고 왕정
1. 1814년의 사회 정황
2. 제1차 왕정복고
3. 나폴레옹의 백일천하
4. 제2차 왕정복고
5. 중도 정책의 파탄과 샤를 10세
제7장 7월 왕국
1. 동요의 전반기
2. 기조의 보수 정책
3. 왕국 말기의 위기
제8장 제2공화국과 제2제국
1. 공화정과 그 좌절
2. 샤를 루이 나폴레옹
3. 제2제국
제9장 보불전쟁과 파리코뮌
1. 혁명과 패전
2. 파리의 분노
3. 코뮌 혁명의 발발
4. 코뮌 내란과 그 의의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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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뮌까지,
1789~1871
프랑스 혁명은 가장 전형적인 시민혁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프랑스는 왜 영국이나 미국처럼 순조롭게 시민 혁명의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피로 얼룩진 혁명과 반혁명의 역사를 한 세기나 되풀이해야 했을까? 이 책은 혁명의 전범이라 불러도 손색없는 프랑스 혁명사 100년의 과정을 명쾌하게 풀어낸 입문서이자 격동의 1980~90년대 한국 대학생들이 반드시 읽어야 했던 ‘혁명사의 고전’이다. 혁명과 반혁명을 되풀이한 프랑스 혁명, 21세기 한국사회에 어떤 메시지를 전달해줄까? 1980년 출간 이후 31년 만에 새로 펴낸 노명식 교수의 역작.
프랑스 혁명은 프랑스만을 근대국가로 전환시킨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낡은 전제주의 유럽 여러 나라에 자유와 평등, 국민주의와 자유주의, 공화주의와 민주주의의 새 씨앗을 뿌렸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은 그 자체로서는 성공하지 못했다. 입헌 군주주의의 시도도 민주 공화주의의 실험도, 심지어 나폴레옹 제국마저도 다 실패하고 말았다. 프랑스는 어째서 영국이나 미국처럼 순조롭게 시민혁명의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피로 얼룩진 혁명과 반혁명을 되풀이해야 했을까?
이 책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뮌까지, 1789~1871》는 1789년 혁명과 복고 왕정, 1848년 2월 혁명과 나폴레옹 3세의 제2제국, 그리고 파리 코뮌의 발발과 실패까지 100년에 가까운 프랑스 혁명사를 알기 쉽게 풀어쓴 입문서이자, 프랑스 근세사가 영국이나 미국과 다른 노정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원인을 추적한 역작이다.
1980년에 처음 출간된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뮌까지, 1789~1871》는 격동의 1980~90년대 당시 한국 대학생들이 반드시 읽어야 했던 ‘혁명사의 고전’이자 한국의 시대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거울이었다. 31년의 시간이 흐른 후 개정판으로 다시 선보이는 이 책이 21세기 한국사회에 어떤 메시지를 전달해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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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으로
제3신분의 혈세로 만들어진 베르사유 궁정
삼부회 대의원 1,214명이 1789년 5월 초 프랑스 왕국의 방방곡곡 원근 각지에서 베르사유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대부분 베르사유는 물론이고 파리도 처음 보는 시골뜨기 유지들이었다. 특히 제3신분 대의원들이 그랬다. 그들은 우선 베르사유 궁정의 호사함에 놀랐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베르사유 궁정이 넓고 아름답고 호화롭다는 말은 들었지만, 눈앞에 전개되는 궁정은 실로 놀라움을 감출 수 없는 호사와 장대의 극치였다. …… 베르사유의 장대하고 호사한 궁정과 궁중 생활의 비용은 어디서 나왔던가? 바로 제3신분의 혈세가 아닌가! 국가재정 파탄의 원인이 어디 있는가를 그들은 이제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된 것이다. 삼부회의 회의 장소를 파리로 하지 않고 베르사유로 한 것은 왕이 그토록 즐기던 사냥의 편의를 위함이었는데, 이것은 왕의 첫째 실책이었다. -p.68~69 중에서
파리 코뮌의 실권자로 등장하는 상퀼로트
8월 10일 사건은 파리 시의회 즉 파리 코뮌을 프랑스의 실권자로 만들었다. 입법의회는 파리 코뮌의 요구대로 왕권의 일시 정지를 선언하고 보통선거에 의한 새 국회인 국민공회의 소집을 가결했다. 왕권은 우선 잠정적으로 정지되었지만 결국 영원히 폐지될 터였다. 왕은 탕플에 유폐되었다. 그는 거기서 다섯 달을 더 살다가 처형되고 만다. 라파예트는 8월 10일 사건에 반격을 시도하여 일선 군대를 파리로 회군시키려다 실패하여 벨기에로 도망했다. 왕정을 수호하여 입헌군주 체제의 테두리에서 혁명을 성취하려던 사람들은 이제 라파예트와 함께 몰락하였다. 8월 10일 사건의 주동 세력은 온건한 부르조아가 아니라 파리의 노동자와 빈민과 영세 상인이었다. 이들이 앞으로 혁명을 한결 더 과격하게 만든다. 이들은 귀족이 입는 퀼로트라는 바지를 입지 않는다고 하여 상퀼로트라 불렸는데, 이제 이 상퀼로트가 파리 코뮌의 실권자로 나타났다. -p.126~127 중에서
나폴레옹의 브뤼메르 18일 쿠데타
돌격을 알리는 북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무장 군인이 의사당을 점령하였다. 총검이 500인회 의원들을 쫓아냈다. 저녁 7시경 원로원은 앞서 500인회가 결의한 나폴레옹의 추방을 취소하는 조건으로 보나파르트, 시에예스, 뒤코스의 3인으로 구성되는 임시 통령정부의 조직을 공포하였다. 총재정부는 폐지되고 새 통령들에게 행정권이 위임되었다. 루시앵은 30~40명의 500인회 의원들을 긁어 모아놓고, 원로원의 결정을 승인하고 62명의 자코뱅파 의원을 제명하고 12월 22일까지 6주일간의 휴회를 결의하였다. 밤 2시, 세 사람의 통령이 의회에서 공화국에 대한 충성을 선서하였다.
이 나폴레옹의 쿠데타를 브뤼메르 18일 쿠데타라고 한다. 지난 1792년에, 혁명정부가 전쟁을 시작하면 혁명은 결국 군인 독재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리라던 로베스피에르의 말이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10년간의 혁명은 이제 한 군사 모험가의 지배로 그 막을 내렸다. --pp.207 중에서
“쓰러진 용사들이여, 나는 패하고 내 제국은 유리처럼 깨졌다”
한편 전후 처리 문제로 옥신각신하고 있던 빈의 열국 회의는 나폴레옹의 탈출 소식을 듣고 황급히 이견을 조정하여 불의의 도발자에게 대비하였다. 3월 25일 4대 연합국은 쇼몽 조약을 재확인하고 전쟁 준비를 서둘렀다. 나폴레옹은 기선을 제압하기 위하여 벨기에에 주둔하고 있던 웰링턴 휘하의 영국군 9만 6,000명과 블뤼허 휘하의 프로이센군 12만을 먼저 치기로 하였다. 그는 6월 6일 군사행동을 개시하였다. 6월 18일 워털루에서 결전이 벌어졌다. 결과는 나폴레옹의 참패였다. 그는 두 빈 손을 내밀며 “쓰러진 용사들이여, 나는 패하고 내 제국은 유리처럼 깨졌다”고 소리 질렀다. 파리로 돌아온 그는 결국 22일 퇴위하고 29일 파리를 떠나 미국으로 망명할 계획이었으나 영국군의 포로가 되어 10월 15일 남대서양의 외딴섬 세인트헬레나에 유배되었다. 그는 거기서 5년 반을 더 살다가 1821년 5월 5일에 죽었다. pp.288~289 중에서
7월혁명과 부르봉 복고 왕정의 몰락
7월 27일부터 파리 시민은 시내 요소요소에 바리케이트를 쌓기 시작했다. 국민 방위대는 1827년에 해산되었으나 대원들은 아직도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무기를 들고 나섰다. 왕정을 타도하고 공화정을 수립해야 한다는 과격한 노동자, 학생, 시민이 이제 모두 반정부 운동에 한데 뭉쳤다. 낭만적인 혁명의 물결이 순식간에 전 시가를 휩쓸었다. 당시 파리의 수도 사령관은 마르몽 장군이었는데 그는 나폴레옹을 배신한 군인으로서 파리 시민이 몹시 싫어하였다. 마르몽의 군대는 비좁은 골목에서 행동의 자유를 잃고 사상자만 더 냈다. 7월 29일 두 연대가 폭동 쪽에 가담하였다. 그렇잖아도 병력이 모자란 마르몽은 결정타를 맞았다. 완미한 샤를도 이제는 사태의 진상을 깨달았던지 30일 폴리냐크를 파면하고 4개조로 이루어진 칙령을 철회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사냥터에서 왕이 긴급히 파견한 사절이 파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의회가 샤를의 퇴위와 루이 필리프의 즉위를 가결한 뒤였다. 이제 샤를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군대의 힘으로 의회를 항복시키는 것이었는데,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에게는 그럴 만한 군대가 없었다. 그는 센 강을 건너지도 못하고, 왕의 목숨을 노리는 폭도들을 피하여 생애 세 번째 망명길에 올랐다. 부르봉 복고 왕정은 워털루 이후 15년 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_ 311쪽
1871년 파리 코뮌의 시작
3월 28일 정식으로 파리 코뮌이 선포되었다. 약 2만 명의 방위대와 수만 명의 시민이 운집한 시청 광장에서 의원으로 선출된 방위대 중앙위원회의 랑비에가 “인민의 이름으로 코뮌을 선언한다”고 외치자 “공화국 만세! 코뮌 만세!”의 함성이 하늘을 찔렀다. 방위대의 행렬이 프랑스 국가 ‘라마르세예즈’의 주악에 맞추어 의원들의 사열대 앞을 보무도 당당히 행진하면 민중의 미친 듯한 갈채가 우뢰처럼 터져 나왔다. ……
분명히 파리의 민중은 이제 자신이 자신의 생활과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감동과 의욕에 넘쳐서 코뮌 선포의 날을 축제의 날로 지샜다. 민중의 소박하고 약동하는 해방감이 코뮌의 파리를 뒤덮었다. _ 417~418쪽
프랑스 혁명 역사의 변혁을 이룬 극약 저자 지즈카 다다미|역자 남지연|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2017.06.10 원제 フランス革命 歷史における劇藥
저자 지즈카 다다미는 1932~2010년. 도쿄 출생. 도쿄대학 문학부 서양사학과 졸업. 홋카이도대학 조교수, 도쿄도립대학 교수, 도쿄대학 교수, 오차노미즈여자대학 교수 등을 역임. 주요 저서로 『로베스피에르와 돌리비에 ―프랑스 혁명의 세계사적 위치(ロベスピエ?ルとドリヴィエ ―フランス革命の世界史的位置)』, 『사학개론(史??論)』, 『프랑스 혁명을 살아간 ‘테러리스트’ ―르카르팡티에의 생애(フランス革命を生きた「テロリスト」―ルカルパンティエの生涯)』 등이 있다.
프랑스 혁명은 민중의 위대한 도약이었던 동시에 수많은 사람들을 단두대에 장사 지낸 어두운 일면을 지닌다. 하지만 혁명이 남긴 유산은 여전히 생명력을 이어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현대 복지국가의 이상으로 자리잡으며, 전세계 사람들의 지지를 받게 된다. 빛과 어둠이 교차하며 굴곡 가득한 혁명기를 거쳐왔지만, 그 높은 이상은 훼손되는 일 없이 후세에 전해진 것이다. 혁명을 몸소 겪으며 다양한 이상과 실패의 소용돌이 속에서 꿋꿋이 버티고 살아갔던 당시 사람들의 번민과 고뇌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책속으로
역사를 배운다는 것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여 현재 우리의 삶을 반성하는 것이 그중 하나입니다. 또한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변화해온 과정을 학습하여 현재를 이해하는 데 참고하기도 합니다. 역사를 배우는 다양한 의미에 대해서는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예정입니다. 다만 여기에서 미리 말해두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역사 속에 살았던 인간들의 번민과 실패와 괴로움, 그리고 그러한 고뇌가 있었기에 얻은 위대함을 알고 거기에 공감하며 감동하는 것에도 또한 역사를 배우는 커다란 의미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p.7
로베스피에르는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도 실종되면서 6살의 나이에 고아나 다름없어지지만, 장학생으로서 학업에 힘써 고향 아라스에서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성직자에게 도둑질을 이유로 고발당한 남자의 변호를 맡게 되고 놀랍니다. 그 성직자는 남자의 여동생을 유혹하려다 거절당한 앙갚음으로 오빠에게 누명을 씌웠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건을 접하면서 로베스피에르는 까닭 없이 학대받는 인간의 권리를 지키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사명이라고 믿게 됩니다.--- p.58
혁명의 주도 세력으로는 부유한 부르주아와 빈곤한 민중 및 농민이라는 두 개의 사회층이 있었습니다. 이 ‘빈곤한 민중 및 농민’을 앞으로는 간단히 ‘대중’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부르주아와 대중은 구체제를 변혁하려는 점에서는 일치했습니다. 그러나 구체제의 정체에 대해 어떠한 대책을 강구 할 것인가, 어떠한 약제를 먹을 것인가 하는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구체제의 철저한 파괴를 위해 극약의 복용을 추구한 것은 이 두 사회층 가운데 어느 쪽이었을까요. 그것은 부르주아가 아닌 대중이었습니다.--- p.84
민중운동과 농민운동 가운데서는 소유권(재산권) 그 자체를 공격하면서 ‘대토지 소유를 분할하라’거나 ‘재산의 최고한도를 설정하라’는 목소리도 나왔습니다. 하지만 그런 목소리에 부르주아가 귀를 기울일 리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대중운동의 대변인들은 소유권을 직접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소유권에 대항하여 제동을 걸 수 있는 무언가 새로운 권리를 고안하고 그것을 주장해야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그 새로운 권리란 ‘굶주리지 않을 권리’였습니다.--- p.147
1793년에 로베스피에르가 제창한 ‘생존권의 우위’라는 원리는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가지고 인간답게 살기를 요망하는 목소리였습니다. 그의 동지 생쥐스트는 그가 남긴 단편 속에서 ‘인간은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고 살아야 한다’라고 적었습니다. 이 이념은 20세기 중반이 되어 다시 부활합니다. 1948년 12월 국제연합 총회가 채택한 ‘세계인권선언’은 그 제1조에서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평등한 존엄과 권리를 가진다’라고 규정하였으며, 나아가 제3조에서 ‘생존할 권리(right to life)’를 인권의 필두에 놓았습니다. --- p.203
버니 샌더스, 우리의 혁명 저자 버니 샌더스|원더박스 |2017.08.07
원제 Our Revolution ; A Future to Believe in
작은 시골 주 출신의 무소속 상원의원. 낮은 인지도에 돈도 정치 조직도 전무해 기성 정치권과 미디어는 ‘비주류’ 후보로 취급하며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2016 미국 대선 민주당 경선에서 미국 현대사에 이정표가 될 만한 특별한 선거운동으로 돌풍을 일으키며 저소득층과 청년층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이끌어낸, 한평생 일관된 소신과 철학으로 걸어온 백발의 정치인, 버니 샌더스.
경선을 끝내고 집필에 착수한 『버니 샌더스, 우리의 혁명』에서 그는 미국 정치 역사상 유례없는 돌풍을 일으킨 2016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전이 어떻게 치러졌으며 그 성과는 무엇인지 자세하게 검토하고 회고하고, 우리 자녀와 손주 세대를 위해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총체적으로 진단하고 정책 과제를 도출한다.
2013년 10월부터 샌더스는 선거운동에 뛰어들지 판단하기 위한 전국 투어에 나섰다. 그의 전국 투어는 대선 출마를 위한 가능성 점검 작업이기도 했지만 그 자체로 새로운 정치 세력을 일깨우고 조직화하는 과정이었다. 1년 6개월 이상 전국 투어를 마친 뒤 마침내 버니 샌더스는 그의 정치적 고향인 벌링턴 시에서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고, 비록 힐러리 클린턴에게 후보 자리를 내줬지만 경선 과정에서 그는 진보적 의제들을 미국 정치 한복판으로 옮겨놨고, 민주당은 그의 공약을 최대한 받아들여야 했다.
저자 버니 샌더스(BERNIE SANDERS)는 1941년 뉴욕 시 브루클린에서 가난한 페인트 판매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시카고 대학교 재학 시절부터 진보적 학생운동에 참여하고 1981년 버몬트 주 벌링턴 시장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된 이후 벌링턴 시장 4선, 미국 연방 하원의원 8선을 연임하고 현재 재선으로 미국 연방 상원의원직을 수행 중이다. 정치 인생 내내 민주사회주의자(DEMOCRATIC SOCIALIST)를 표방하며 일관되게 중산층과 빈곤층, 노동 계층과 소수자들을 대변하고 거대 자본과 과두제 정치 구조를 비판해 왔다. 민주당과 공화당의 타협으로 2010년 12월 부자 감세 연장 법안이 상정되자 상원에서 8시간 35분 동안의 의사진행방해 연설을 펼쳐 일약 전국적인 진보 정치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 민주당 후보 경선에 참여해 일반적인 관측을 뒤엎고 힐러리 클린턴 후보와 마지막까지 박빙의 승부를 펼쳐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목차
프롤로그 12
1부. 우리는 어떻게 우리만의 방법을 만들어내는가 18
| 1장 | 청년 진보운동가의 탄생 21
브루클린에서의 유년 시절 21
시카고 대학교에서 세상에 눈뜨다 34
버몬트 주에 정착하다 42
| 2장 | 버몬트 주에서의 정치 생활 46
벌링턴의 사회주의자 시장 53
워싱턴으로 진출하다 68
상원에서의 활동 72
| 3장 | 대선 출마를 고민하다 78
사전 점검 90
아이오와 주와 뉴햄프셔 주 110
2014년 중간선거 121
출마하기로 결단하다 123
| 4장 | 어떻게 선거운동을 할 것인가? 134
가장 중요한 것은 메시지 135
나는 집회를 사랑한다 139
보좌진을 꾸리는 방법 144
아내 제인과 아이들 149
소셜 미디어를 활용한 진보 정치 151
자발적 지지자 155
후원자와 조직적 지지 156
유명인사들의 지지 161
조직적 지지를 얻기 위한 노력 166
유료 미디어 광고 169
선거자금 모금 172
| 5장 | 출마를 공식 선언하다 176
낯선 모험의 출발점 176
오늘 우리는 정치 혁명을 시작합니다 179
| 6장 | 유권자를 위한 선거운동 194
힐러리 클린턴을 바짝 쫓다 205
정치에 새로 눈뜨는 사람들 214
가장 큰 환경단체의 지지 216
풀뿌리 행동주의의 위력 218
보수주의자들과의 점심 식사 223
자발적 기부 230
총기 규제에 관한 딜레마 235
대통령 후보 TV 토론과 SNS 237
이슈 정면돌파 246
경선의 시작, 첫 패배와 첫 승리 251
누구도 예상치 못한 접전 256
뉴욕 주, 최후의 결전 264
왜 포기하지 않느냐고? 268
변화의 시작 272
2부. 무엇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288
| 1장 | 과두정치 타파하기 291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 293
돈의 위력 295
자본이 의회를 지배할 때 299
유권자 자격 제한 없애기 304
코크 형제 309
이 모든 것이 중요한 이유 315
정치에서 거대 자본 제거하기 317
| 2장 | 미국 중산층 되살리기 322
| 3장 | 부정한 경제에 마침표 찍기 340
최저임금은 생활임금이어야 한다 340
동일 노동에 대한 동일 임금 356
노조 가입이 수월해야 한다 362
진정한 가족의 가치 365
일자리, 일자리, 일자리 374
세제 개혁 406
새로운 무역정책 432
월스트리트 개혁 458
| 4장 | 전 국민을 위한 건강보험제도 489
세계에서 가장 비싼 처방약 501
치과 치료 서비스 504
방치된 정신건강 문제 506
의료 서비스 수준 508
건강한 사회가 국민을 건강하게 만든다 509
선택은 지금 해야 한다 511
| 5장 | 누구에게나 고등교육의 기회를 517
공립대학 등록금 폐지 530
학생들을 빚더미에서 구하기 533
영리 학교에 단호한 조치를 535
저소득층 학생들 지원하기 536
초중등 교육 개선 538
| 6장 | 기후변화에 맞서자 540
에너지 효율 장려하기 554
화석연료 기업 보조금 지원 철폐 557
탄소와 메탄가스 배출에 세금 부과 558
프래킹 공법 사용 금지 559
그냥 땅속에 놓아두자 560
더 이상의 키스톤 송유관 건설은 없다 561
재생에너지에 투자하자 562
전력망 현대화와 배터리 성능 강화 564
누군가는 더 큰 타격을 받는다 566
기후변화 문제에 앞장서기 568
| 7장 | 형사사법제도 개혁하기 570
경찰 개혁 572
‘마약과의 전쟁’ 종식 575
정신이상자의 교도소행은 정답이 아니다 579
민영 교도소는 필요없다 581
사형제도 폐지하기 583
제도적 인종차별 혁파 584
고장 난 형사사법제도 개혁하기 588
| 8장 | 이민제도, 이대로는 안 된다 592
포괄적인 이민제도 개혁안을 통과시키자 607
| 9장 | 보호가 필요한 사람들 614
노인을 보호하는 나라 624
장애인 편에 서다 627
퇴역군인을 진심으로 대우하기 629
북미 원주민에게 자주권을 632
더 나은 미래를 향해 635
| 10장 |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미디어 637
누가 미디어를 소유하고 있나? 665
에필로그 677
감사의 글 683
출마 결심 이전 1년 6개월간의 전국 투어
전국적 정치인으로 떠오르기 이전 한국은 물론 미국 언론조차 그의 정치관과 철저한 풀뿌리 정치 활동에 주목하지 않았기에, 민주당 경선에서 샌더스의 인기는 ‘돌풍’, ‘이변’, ‘기성 정치에 대한 반란’ 등으로 소개되곤 했다. 하지만 이 회고록을 읽어보면 샌더스가 대선 출마를 결심하는 과정부터 얼마나 기존 정치인들의 행태와 달랐는지 알 수 있다.
버몬트 주 상원의원 샌더스는 2010년 부자 감세 법안을 반대하는 8시간 27분에 걸친 유명한 필리버스터 이후 진보의 아이콘으로 떠올랐고 이후 2016년 대선 민주당 경선에 출마할 것을 주위로부터 여러 차례 종용받았다. 하지만 버몬트 주 인구는 63만 명. 50개 주에 3억 2천만 명이 살아가는 복잡한 나라 미국에서 버몬트는 어느 한 대도시 규모에도 미치지 못한다. 게다가 그는 벌링턴 시장 시절부터 단 한 번도 정당에 몸담지 않고 무소속으로 풀뿌리 정치 활동만 전개해온 인물이다. 2014년 초까지도 전국 여론조사에서 그에 대한 지지율은 1%에 불과했다. 사실상 일반적인 미국인들은 샌더스의 존재 자체를 거의 몰랐다는 이야기다.
심지어 미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집단도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다. 2014년 4월 [루틀랜드 헤럴드]에 실린 기사를 보자. “올해 초 무브온 회원 10만여 명이 참여한 온라인 여론조사에서 샌더스는 이름이 거론된 후보 중 6퍼센트의 지지율로 3위를 기록했다. 힐러리가 32퍼센트의 지지율로 1위였고, 워런이 15퍼센트의 지지율로 2위에 올랐다.” 진보주의자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 결과마저 이랬다! (87쪽)
2013년 10월부터 샌더스는 선거운동에 뛰어들지 판단하기 위한 전국 투어에 나섰다. 일종의 사전 점검이었다. 그는 버몬트 주에서 그랬듯이 낮은 자세로 전국을 돌았다. 수행원도 공보비서도 경호원도 전혀 없었다. 장거리 버스, 렌터카를 타고 전국에서 열리는 온갖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각 주의 유력인사나 민주당 수뇌부를 만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샌더스는 주로 노동조합 행사, 인종과 인권 문제를 다루는 집회, 대학생과 지역민이 개최한 모임과 타운 미팅을 집요하게 찾아다녔다.
공화당의 영향력이 강해 민주당 지지율은 10퍼센트도 되지 않는 미시시피, 앨라배마, 조지아, 사우스캐롤라이나 등 남부 벨트는 여러 차례 반복해 방문했으며 그때마다 조합 간부들, 민권운동가, 흑인이나 히스패닉계 등 소수 인종 활동가, 영세 사업자와 퇴역 군인들, 가난한 서민들을 만나 자신이 꿈꾸는 정치의 모습을 설파했다. 정치에서 소외되고 자신들을 대변할 정치 세력이 없는 이들이 샌더스의 주장에 깊이 공감하고 진심어린 지지자로 변모하는 과정이 결국 그의 출마를 이끌었다. 샌더스의 전국 투어는 대선 출마를 위한 가능성 점검 작업이기도 했지만 그 자체로 새로운 정치 세력을 일깨우고 조직화하는 과정이었다. 1년 6개월 이상 전국 투어를 마친 뒤 마침내 버니 샌더스는 2015년 5월 26일 그의 정치적 고향인 벌링턴 시에서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이렇게 시작된 샌더스의 선거 운동이 미국 사회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하버드 정치연구소 여론조사 책임자 존 델라 볼프는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버드 대학교의 연구자가 수집한 자료에 따르면 샌더스의 선거운동은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전을 예상치 못한 경쟁으로 몰아넣었을 뿐 아니라 밀레니엄 세대가 정치를 바라보는 관점도 바꿔놓았다. 샌더스는 민주당만 왼쪽으로 옮겨 가게 하지 않았다. 한 세대 전체가 왼쪽으로 옮겨 가게 했다. 그가 이기건 지건 미국 역사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세대가 정치를 생각하는 관점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13쪽)
버니크래츠와 샌더스 키즈는 미국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버니 샌더스, 우리의 혁명』의 이례적인 베스트셀러 행진을 두고 일부 미국 언론은 ‘트럼프로 다친 마음 샌더스로 치유한다’는 해설을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마음의 위안을 위해 샌더스의 책을 샀다는 분석으로는 채 설명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이 미국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다.
경선 과정에서 그리고 샌더스가 민주당 경선 패배를 선언한 이후에도 그의 정치 노선에 대한 계승을 밝히며 공직 선거에 출마하는 이른바 버니크래츠(버니 샌더스 + 데모크라츠) 수백 명이 나타났다. 기존 민주당 테두리 내에 존재하지 않았던 흐름이다. 조직화도 다양하게 이어지고 있다. 월스트리트 점령 운동처럼 민주당을 점령하자는 ‘민주당 점령’(The Occupy Democrats), 2018년 중간선거에서 상하원에 대거 진출해 샌더스의 정책을 입법화하려는 ‘완전히 새로운 의회’(Brand New Congress), 샌더스 대선 캠페인을 정치 운동으로 점화시키기 위한 ‘피플스 서밋’(People’s Summit)과 ‘노동하는 가정당’(The Working Families Party) 등이다.
정치에 직접 뛰어든 이들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젊은 세대에 깊숙이 자리잡은 샌더스 지지 현상이다. 샌더스는 경선이 치러진 모든 주에서 20대 유권자 지지율 1위였다. 30대까지로 넓혀도 한두 주를 제외하고는 힐러리에 비해 압도적인 지지를 확보했다. 최근에도 2020년 대선 예비 주자들에 대한 지지를 묻는 여론조사에서 샌더스는 꾸준히 1, 2위를 기록하고 있다. 그 저변에 샌더스 키즈들이 있다. 왜 정치에 무관심하던 2030 세대가 백발의 노인에게 이처럼 전폭적인 지지를 보낸 것일까. 이들은 앞으로 미국 사회와 정치 지형도를 그려나갈 세대이다. 향후 미국의 행보 그리고 민주주의의 변화는 이들 샌더스 키즈에게 달려 있다.
『버니 샌더스, 우리의 혁명』의 2부는 이러한 버니크래츠와 샌더스 키즈들을 위한 샌더스의 정치 구상이며 미국 사회를 아래로부터 근본 혁신하기 위한 정책 과제들이다. 모두 10개의 장을 통해 샌더스는 타운 미팅에 참석한 주민들에게 말하듯이 침착하고 알기 쉬우면서도 열정을 가득 담아 정치 혁명 과제를 설명한다. 정치와 사회 개혁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일독하고 참조할 만한 사회적 어젠다의 총집합이자, 진보의 지향을 대중에게 전달하고 공감을 구할 때 표본으로 삼을 만한 꼼꼼한 분석과 설득력 높은 화법이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
공화당 동료들은 세상에 나와 용돈 몇 푼이라도 벌기 위해 가장 낮은 임금을 받으며 일하는 노동자들이 청소년들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 거짓 주장을 계속 고집하면서 수천만 성인 노동자들이 빈곤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막고 있다. 최저임금을 시급 15달러로 인상하면 평균 17년간 직업 전선에 있었던 서른여섯 살의 평범한 노동자가 가장 큰 혜택을 본다. 반면 10대들은 이 제안으로 임금이 인상되는 노동자의 7퍼센트도 안 된다.
최저임금을 시급 15달러로 인상하자는 제안은 지나치지 않다. 1968년 이후로 물가상승률과 평균 노동생산성 지수와 보조를 맞추어 최저임금을 인상했다면 지금쯤은 시급이 26달러를 넘어야 한다. (342쪽)
나는 이 나라 전역에서 사람들이 현금 입출금기를 사용할 때마다 3~5달러의 수수료를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이 용납되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이 사용하는 신용카드의 이자율이 20퍼센트나 30퍼센트라는 것도 말이 안 된다.
기독교를 비롯해 사실상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주요 종교에는 이런 행동을 칭하는 용어가 있다. 바로 고리대금이다. 단테는 『신곡』에서 고금리를 청구한 인간들을 위해 지옥에 특별한 자리를 마련해두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지옥불이나 쇠스랑, 펄펄 끓는 피가 흐르는 강은 필요 없지만, 신용카드와 소비자 대출의 이자율 한도를 최고 15퍼센트로 정하는 고리대금법이 필요하다.(483쪽)
오늘날 미국에서 빈곤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은 4310만 명에 이른다. 이는 미국 전체 인구의 13.5퍼센트다. 빈곤율은 1968년보다 지금이 더 높은데, 이 공식 빈곤율은 보육이나 직업 관련 지출을 계산에 넣지 않는 50년도 더 전에 개발된 공식을 바탕으로 산출되었다. 만약 빈곤율에 이 나라에서 생활하는 데 필요한 실질적인 비용이 반영되었다면 더 많은 사람이 빈곤하다는 결론이 나왔을 것이다. 그것도 수백만 명이나 더.
빈곤한 삶이 어떤 삶인지 알아보자. 3인 가구의 공식 빈곤선은 1만 8,871달러다. 이 돈으로 한 가족이 생활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아는가? 많은 저소득층 가구가 소득의 절반 이상을 집세에 낸다. 이 말은 음식과 옷, 교통수단, 보육, 공과금, 건강보험, 약품, 자녀들을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 등 생활에 필요한 다른 모든 일을 처리하기 위해 남은 돈이 한 해에 9,000달러라는 의미다. 오늘날 컴퓨터와 초고속 인터넷, 휴대폰이 생활에 차지하는 비중은 더 커지고 있다. 전화 없이 어떻게 일자리를 구하고, 면접 날짜를 정하고, 세상과 연결될 수 있겠는가? 고용주가 당신과 연락이 되지 않는다면 일자리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 (615쪽)
우리 자녀와 손주를 위한 미래 구상이 필요한 시점
『버니 샌더스, 우리의 혁명』은 이처럼 한때 관심을 모았던 유력 정치인의 회고록에 그치지 않는다.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에 더욱 많은 지면을 할애한 책이다.
이 책은 역사를 만든 우리의 선거운동을 설명한다. 하지만 우리의 선거운동이 어땠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간절한 마음으로 미래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면 경제적·사회적·인종적·환경적 정의라는 원칙을 토대로 미국이 나아갈 새로운 길이 펼쳐질 것이다. 그 길은 우리의 자녀와 손주를 위해 반드시 가야 할 길이다. 싸워서 반드시 얻어내야 할 길이기도 하다. 투쟁은 계속되어야 한다. (17쪽)
지난해 가을부터 우리는 한국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은 적폐에 항의해 촛불을 들었고 그 결과 새 정부의 조기 출범이 이루어졌다. 수개월간 주말마다 광화문 광장을 가득 메운 촛불의 힘은 앞으로 어디를 향해야 할까. 이제야말로 우리 사회의 근본적 개선을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자녀와 손주들을 위한 큰 구상과 사회적 합의를 위해 치열하게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닐까.
버니 샌더스의 정치 혁명 버니 샌더스 공식 정치 자서전 저자 버니 샌더스|원더박스 |2015.12.01
원제 Outsider in the White House
1972년 첫 공직 선거 출마 득표율 2%, 40년 후 2012년 상원의원 선거 득표율 71%,
벌링턴 시장 4선, 연방 하원의원 8선, 연방 상원의원 2선,
샌더스는 1941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가난한 페인트 판매원의 아들로 태어나 시카고 대학의 학생운동과 인종차별 철폐 운동, 시민운동에 몸을 담고 1981년 버몬트 주 벌링턴 시장에 출마하여 단 10표 차이로 당선된 이후 시장 4선, 연방 하원의원 8선, 연방 상원의원 2선을 역임하고 있다. 이 책은 이 모든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남북전쟁 이후 100여 년간 공화당만 지지해온, 미국 내에서도 가장 보수 성향이 강했던 버몬트 주를 버니 샌더스가 어떻게 미국 진보정치의 진원지로 탈바꿈시켰는지 세밀하게 회고하고 있다.
1퍼센트가 모든 것을 소유하고 99퍼센트는 정치 참여에서마저 소외되고 있는 상황에서 샌더스는 선거 승리보다 중요한 것은 ‘정치 혁명’이라고 역설한다. 평생의 일관된 소신과 원칙으로 마침내 국민의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한 한 정치인의 유장한 회고와 정치 혁명의 길은, 정치가 국민에게 희망을 주지 못하고 있는 한국 현실에서 많은 공감과 메아리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목차
* 추천의 글 : “이 사람은 진짜로구나”─ 이재명(성남시장)
* 추천의 글 : “한국의 ‘버니 샌더스’는 어디에 있는가” ─ 조성주(정의당 미래정치센터 소장)
* 개정판을 펴내며
프롤로그 / 투쟁과 낙관에 관한 기록
1. 정치 혁명의 출발점
상대 후보의 때 이른 도전 / 돈줄과 기교가 좌우하는 선거판 / 페인트 판매원의 아들, 상원에 도전하다 / 양당체제 벗어난 관점 전파하기 / 제3정당의 역할과 한계 / 행동하지 않는 노동자들 / 벌링턴 시장 출마: 연대란 이런 것이다! / 선거운동 전 체크리스트 / 기적 같은 10표 차 당선
2. 공화당 텃밭에서 진보 정치 구현하기
출마 선언 / 지긋지긋한 언론의 행태 / ‘벌링턴 인민공화국’의 탄생 / 시 의회의 훼방 놓기 / 우리는 눈부신 시정을 펼쳤다 / 벌링턴 시장의 외교 정책 / 진보연합의 약진 / 풀뿌리 소액 기부로 맞서다
3. 무소속의 외로운 행군
‘벌링턴 혁명’을 확산시켜라 / 연이은 낙마 / 뭐야, 또야? / 버몬트 주, 역사를 만들다 / 의회에 입성한 아웃사이더
4. 우리도 이길 때가 있다
최저임금 법안 통과 / 선거 앞두면 당론보다 여론 / 흥미로운 좌우 연대: 샌더스-스미스 수정안 / 나를 지지해 주는 사람들 / 누가 전쟁에 찬성하는가 / 자취를 감춘 반전론 / 버니, 목소리가 왜 그래요? / 버몬트 농부들을 위한 싸움
5. 의회는 희생양을 찾는다·
없는 자끼리 싸우게 하라 / 보수의 필승 카드, 호모포비아 / 민주당의 급격한 붕괴 / 투표는 생각하지도 마 / 스위처, TV 광고 돌입하다 / 샌더스식 선거운동의 목표 / 프로그레시브 코커스를 결성하다 / 회기 마지막 순간의 만장일치
6. 지역구에서 발품 팔기
민주당은 왜 버니를 지지하나 / 전당대회, 각본 있는 쇼 / 거리집회와 지역축제에서 어울리기 / 건강보험, 특권에서 권리로 / 시민에게 알려라, 그들이 반대하게 하라 / 가까스로 3선 의원 /“그건 버몬트답지 않아”/ 공화당 인베이전
7. 버니 샌더스를 떨어뜨려라
버니가 세금을 천 달러 올렸다고? / ‘미국과의 계약’의 정체 / 시민 교육, 정치의 역할 / 기업으로 흘러들어가는 세금 / 네거티브 선전에 대응하는 자세 / 진흙탕 싸움을 벌여야 하나
8. 무엇을 할 것인가
빈부격차 해결하기 / 민주주의를 회생시킬 묘책들 / 노동자에 정당한 보상을 / 국가 정책 우선순위 재조정 / 국가건강보험 도입과 공교육 강화 / 99퍼센트, 아웃사이더에서 국가의 주인으로
에필로그 / 대통령 선거에 뛰어든 아웃사이더
공화당의 아성을 뒤엎다 / 마음을 얻는 비결 / 월스트리트 합의를 거부하다 / 미국을 감동시킨 8시간 35분의 연설 / 원내 전략과 원외 전략 / 함께하는 정치 혁명
* 고마운 사람들
* 버니 샌더스 연표
책속으로
-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이 책은 총선에서 승리하기 위한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 아니다. 정치적 전기다. 나와 내 동료들이 버몬트에서 이룩한 몇 번 안 되는 값진 승리의 기록도 담겨 있지만, 수많은 선거운동 실패와 좌절된 시도 역시 담고 있다. (미국에서 정치적 좌익의 입지를 고려하면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책은 경제적 사회적 정의라는 비전을 간직하기 위해 벌이는 투쟁에 관한 책이요, 그 비전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낙관주의에 관한 책이다. (본문 37~38쪽)
나는 뉴욕 주 브루클린에 거주하는 중하위 계층 집안에서 자랐고 경제적으로 쪼들리면 집안에 긴장감과 우울한 분위기가 끊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는 페인트 판매원으로 날이면 날마다, 달이 가고 해가 가도 열심히 일했다. 먹고 살기에는 모자람이 없었지만, 방 세 개 반짜리 월세 아파트에서 나와 우리 집을 장만해 이사하는 어머니의 꿈을 이루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 p.49
규모가 작은 자유연합당에서 딱히 너도나도 이 두 의석에 출마하겠다고 나서지는 않았다. 무엇이 옳고 정의로운지에 대한 신념과 열정으로 가득 차 있던 나는 손을 번쩍 들고 교육, 경제, 베트남전쟁에 대한 내 의견을 밝혔다. 한 시간 후 나는 상원에 출마할 자유연합당 후보지명을 따냈다. (중략) ‘따냈다’라는 말은 지나치게 관대한 표현이다. 사실 나 말고 나서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만장일치로 선택되었다. --- p.53
미국에서 제3의 정당은 끊임없이 소멸하는 게 현실이었다. 토론이 끝난 후 항상 청중 가운데 누군가가 내게 전화를 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곤 한다. “버니, 당신이 한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오. 하지만 제3당 후보에게 투표해서 내 표를 사표(死票)로 만들고 싶지는 않소.” 나는 그런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 p.56
미국 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정치적 위기는 노동자들이 행동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노조원 5퍼센트만 정치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해도 우리는 이 나라의 경제 사회 정책을 대대적으로 전환할 수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저소득층 노동자는 투표를 하지 않고, 정치가 자신의 삶과 어떤 관계를 갖는지에 대한 이해도가 매우 낮다. --- p.66
경찰노조의 지지 표명은 내 선거운동에서 기념비적인 사건이었고 매체에서 비중 있게 다루었다. 베트남전쟁 반전 운동가였던 좌익 민중주의자가 법과 질서를 책임지는 경찰노조의 지지를 얻다! 저소득층, 경제적으로 쪼들리는 주택 소유자들, 환경보호주의자들, 임차인들, 노조원들, 대학생들, 교수들, 이제 경찰들까지, 우리가 결성한 연합 세력은 함께 힘을 합하면 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을 서로에게 다져 주었다. 우리가 ‘정치적 연합’을 결성했다는 사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중요하다. 미국에서 희망의 불씨를 다시 살리는 길은 여럿이 힘을 모으는 것임을 우리는 뉴잉글랜드 지역에 있는 작은 도시에서 깨달았다. --- p.75
선거에 임박해서 출간되는 정치인 전기라는 것이 후보의 명분과 업적을 포장하기 위한 지루하고 의례적인 이야기를 잔뜩 포함한 경우가 없지 않은데, 이 책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솔직하고 직설적이며 유머러스하다. 민주사회주의자임을 자처하여 평생 색깔론에 시달렸을 74세 정치인의 표정이 저리도 맑은 이유가 짐작된다.
- “의회에서 유일한 무소속 의원의 선거총괄본부장 구함. 민주사회주의와 무소속 정치에 대한 식견을 지닌 사람. 반드시 버몬트와 시골에서의 삶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어야 함. 주 80시간 근무. 대단한 책임감의 소유자. 형편없는 급여.” (본문 79쪽)
두 달 후 시장이 공식적으로 내각 조직을 발표하는 날, 시 의회는 내가 임명한 사람들을 모두 거부했다. 어불성설이었다. 방금 치열한 선거 끝에 내가 패배시킨 사람이 이끌던 행정부와 내 정치적 목표를 강력하게 반대하던 사람들을 데리고 시정을 이끌라는 말인가. 우리가 중요한 결단을 내릴 때마다 시 의회는 사사건건 발목을 잡았다. 시 의회 표결 결과는 늘 같았다. 11대 2. 민주당 여덟 명과 공화당 세 명이 한편이 되고 테리와 새디가 다른 한편이 되었다. 민주당의 전략은 그리 복잡한 게 아니었다. 내 손발을 묶어서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하게 한 다음 내 무능을 주장하면서 시장직을 도로 낚아채는 것이었다. --- p.112
나에 대한 선호도가 매우 높고 강력한 경쟁자도 없는 것으로 여론조사에 나타났지만, 나는 1989년 4월 시장에서 물러났다. 8년이면 충분했다. 4월 말, 벌링턴 시장으로서 마지막으로 시 의회 회의에 참석했다. 시 의회와의 첫 만남보다 마지막 만남이 훨씬 훈훈하게 마무리되어서 정말 기뻤다. 민주당, 공화당, 진보 진영 시의원들은 내가 시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있었던 주요 사건이 실린 기사들로 아름다운 콜라주를 만들어 나에게 헌정했다. --- p.127
선거 때마다 버몬트 주민들로부터 받은 개인 소액 기부 건수는 내가 훨씬 많지만 전체 모금액에서는 늘 경쟁자들에게 뒤졌다. 내가 받은 기부금 평균액은 35달러에 못 미친다. 나와 경쟁하는 공화당 후보의 기부금 평균액은 항상 훨씬 높다. 이를테면, 스위처는 버몬트 주 최고 부자들로부터 1,000달러짜리 수표를 긁어모은다. 딕 아미가 참석한 500달러짜리 모금 행사에서 조성한 3만 달러는 말할 나위도 없고 말이다. --- p.129
역시 매체를 상대로는 절대 이길 수 없다. 나중에 내가 하원의원에 당선된 후 《AP》 버몬트 지국 편집장이 워싱턴으로 가서 내가 능력 있는 의원인지 여부에 대해 긴 시리즈를 만들었다. 그가 어떤 결론을 내렸을지 상상해 보라. 하지만 이제 끝난 일이다. 다 지나간 일이다. 되새길 가치도 없는 일이다. 《AP》와 나는 이제 화해했고 진정으로 정치인과 언론으로서 철저히 공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럴까? 정말로? 나 참. --- p.142
벌링턴 시에서는 진보 진영이 민주당을 밀어내고 정권을 차지했기 때문에 모두가 나를 두 팔 벌려 환영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정통 민주당 지지자 상당수가 내가 연설할 때 일어나 돌아서서 침묵시위를 하기도 했다. 연설을 마치고 내 자리로 돌아왔을 때 청중 가운데 한 여성이 내 따귀를 갈겼다. 흥미진진한 밤이었다. --- p.145
아미는 혼신을 다해 최저임금 인상을 막겠다고 공언했다. 그리고 실제로 행동에 옮겼다. 공화당 지도자는 표결을 최대한 지연시켰다. 하원 공화당 콘퍼런스 의장 존 베이너는 최저임금 인상안이 통과되면 자결하겠다고 협박까지 했다. 물론 그는 자살하지 않았다. 공화당의 명예를 정말로 지켜야 할 때나 좀 나서지 않고. --- p.169
전쟁을 정당화하고 칭송하는 매체의 선동이 점점 확대되고 강화되는 상황에서 반대표를 던지기란 어려웠다. 얼마 전 183명의 의원이 전쟁을 반대하고 경제제재를 계속 가한다는 데 찬성표를 던졌었다. 그런데 집계 결과를 알리는 전광판을 보니, 하나같이 찬성표를 던지고 있었다. 카드를 기계에 꽂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하원의원 경력은 오래가지 못하겠구나.” 나는 반대 버튼을 눌렀다. 나 외에 반대 투표한 의원은 겨우 다섯 명이었다. 집계 결과는 399대 6이었다. 그 투표 기록은 이후 끈질기게 나를 따라다녔다. 선거 때마다 경쟁자들은 나를 다음과 같이 비난했다. “전쟁 와중에 버니 샌더스는 미군을 지지하는 데 찬성하지 않았다.” 새빨간 거짓말이자 현실 왜곡이지만 30초짜리 라디오 광고에서는 잘 먹혀들어 간다. --- p.189쪽
나는 벌링턴 시장이 됐을 때 투표율을 거의 두 배로 끌어올렸다. 왜일까? 우리가 저소득층과 중산층을 위해 맞서 싸우겠다고 분명히 말했고 또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 저소득층은 이 사실을 알았고 그래서 우리를 지지했다. 투표를 하면 변화가 생긴다는 걸 믿게 되면 그들은 투표를 한다. 이 나라의 지배 계층은 투표율을 억누르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다. 미국은 선진국들 가운데서 유권자의 투표 참여율이 가장 낮다. --- p.225쪽
우리 다섯 명은 합심해 ‘프로그레시브 코커스’를 결성했다. 세월이 가면서 우리 코커스는 꾸준히 성장했고 우리 코커스 사상 최대의 결전, 즉 뉴트 깅리치와 그가 밀어붙이는 반동적인 의제 ‘미국과의 계약’에 맞선 투쟁에 임할 때 즈음해서는 회원 52명이 소속된 막강한 코커스로 성장했다. 나는 1991년 프로그레시브 코커스 의장에 선출된 이후 계속 의장직을 유지해 왔다. --- p.241
비보가 들려 왔다. 우리가 예측하고 우려한 일이 일어났다. 스위처가 부정적인 TV 광고를 하고 있다. 대대적으로. 정치에서는 매체 컨설턴트들이 사용하는 효과가 입증된 공식이 있다. 추악하지만 이따금 먹혀들기도 한다. 후보에 대한 비호감도가 높고 아무리 애써도 지지가 답보 상태에 머무르면, 이길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경쟁자의 신뢰도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유권자들에게는 달갑지 않은 선택지 두 개만 남게 된다. 유권자들이 최악과 차악 가운데 양자택일해야 하는 상황을 만들면 이길 승산이 생긴다. 지금 스위처 진영은 바로 그 점을 노리고 있다. --- p.297
부의 분배가 점점 불평등해지는 추세를 뒤집으려면 지난 20년에 걸쳐 부유층에게 제공한 세금 혜택을 철폐해야 한다. 1971년부터 1981년까지의 기간 동안 중위소득 가구가 지불하는 사회보장세와 소득세의 합이 329퍼센트 급증했는데, 소득 100만 달러 이상인 개인과 가구가 내는 세금은 34퍼센트 감소했다. 민주당의 지원을 받은 레이건 대통령은 미국 최고 부유층에 적용하는 연방세율 상한선을 70퍼센트에서 28퍼센트로 낮췄다. 1953년, 기업들은 총 세수의 33퍼센트를 부담했다. 오늘날에는 10퍼센트가 채 안 된다. 1980년대에는 수십억 달러를 버는 기업들 가운데 세금을 땡전 한 푼 내지 않은 기업들도 있었다. --- p.334
미국인들은 뉴스의 85퍼센트를 TV로부터 얻는다. 그리고 그 뉴스들 대부분은 주요 방송국 여섯 군데에서 제공한다. NBC는 제너럴일렉트릭(GE), CBS는 웨스팅하우스, ABC는 디즈니, 폭스(FOX)는 우익 성향의 억만장자 루퍼트 머독이 소유하고 있다. CNN은 최근 세계 최대의 연예사업복합체인 타임워너가 사들였다. ‘공영’ TV 역시 점점 다양한 기업 이익집단에서 장악력을 강화하고 있다. --- p.342쪽
20년 전 미국 노동자들이 임금과 수당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었던 것도 노조가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순위가 오늘날 세계 13위로 떨어진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1954년, 노동자 3명 가운데 1명은 노조원이었다. 오늘날에는 6명 가운데 1명이 채 되지 않는다. --- p.350쪽
우리가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미래로 나아가 수천만 명의 미국인이 적극적으로 정치적 절차에 관여하고 그들의 권리와 그들 자녀의 권리를 당당히 주장하는 날이 오면, 의회 의원 대다수는 비로소 부유층이 아니라 보통 사람의 이익을 대변하게 된다는 희망이 나를 지탱한다.
20세기에도 버니 샌더스가 있었다 17.1.12 한겨레
[20세기 사람들]냉전과 핵전쟁에 맞서 평화운동 펼친
미국 사회당 대통령 후보이자 차세대 대중정치가
노먼 토머스(가운데)는 20세기 초반 사회당 대선 후보로 나서 주류 정치권력과 맞섰다. 그는 사회주의자로서 일찌감치 평화, 흑인 민권, 부자 증세, 노동권 확대를 말했다. AP 연합뉴스
몇 월에 치를지 알 수 없지만 올해는 한국에 대통령선거가 있는 해다. 촛불시민 혁명의 여파로 어느 때보다 개혁의 기대가 높을 것이다. 정당 가운데 늘 앞장서서 개혁을 이야기해온 것은 진보정당들이다. 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오히려 진보정당은 화제에서 멀어진다. 결선투표조차 없는 대통령중심제 국가에서 개혁은 기성 보수정당들 가운데 조금이라도 더 합리적인 쪽의 집권과 동일시되기 때문이다.
우리만 그런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한국 정치의 교과서였던 미국 정치도 마찬가지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는 무소속 진보파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민주당 대선 후보 예비경선에 뛰어들어 판을 좀 바꿔보나 싶었지만, 결국 투표용지에 올라온 이름은 최악의 공화당 후보와 그만큼 최악인 민주당 후보였다. 미국에서는 이미 두 세기 넘게 반복되는 광경이다. 이 역사적 숙명을 뒤집으려고 노력한 이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샌더스의 선배들이 있었다. 노먼 토머스(1884~1968)도 그중 한 사람이다.
출세가 보장됐던 사회주의자
미국에서 공화당-민주당 양당 구도에 가장 진지하게 도전한 흐름 중 하나는 사회당(SPA)이다. 1901년 창당한 사회당은 이름 그대로 사회주의를 추구했다. 그래서 미국에 오기 전 이미 유럽 대륙에서 사회주의 운동의 세례를 받은 동부 대도시 이민자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이들만이 아니었다. 대도시 독점자본에 쌓인 게 많았던 중서부 소농 중에도 상당한 지지자가 있었다. 한 세기 뒤에는 공화당 텃밭이 될 이들 지역이 당시엔 미국식 사회주의의 활기찬 실험장이었다.
사회당이 초기에 대중에게 뿌리내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은 유진 데브스(1855~1926)였다. 철도노동조합 지도자였던 데브스는 1900년 대선부터 다섯 차례나 사회당 대통령 후보로 나섰다. 독점자본 개혁 여론이 비등했던 1912년 선거에서는 거의 100만 표(6.0%)를 얻었다. 데브스는 미국 노동자들에게 친숙한 개신교 전도사의 말투로 사회주의를 설파하고 진보정당을 선전했다.
그러나 제국주의 전쟁이 사회당의 전진을 가로막았다. 유럽의 자매 정당들과 달리 미국 사회당은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초지일관 반대했다. ‘개혁’을 약속하며 집권한 우드로 윌슨 민주당 정부는 이를 빌미로 사회당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데브스는 감옥에 갇히기까지 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러시아 10월혁명 여파로 반사회당 공세는 끊일 줄 몰랐다. 게다가 사회당의 얼굴인 데브스의 나이는 70대에 접어들었다. 당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차세대 대중 정치가가 간절히 필요했다. 이때 떠오른 사람이 바로 노먼 토머스였다.
토머스는 중서부 오하이오주 장로교 목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명문 프린스턴대학을 졸업하고 1911년부터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회 활동을 시작했다. 훤칠한 키에 매력적인 얼굴로 학벌까지 좋았으니 출세가 보장된 젊은이였다. 그가 사회당의 문을 두드린 것은 역시 제1차 세계대전 때문이었다. 평화주의가 신념이던 토머스는 앞뒤 재지 않고 반전운동에 뛰어들었다. 교회는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사회당은 동지로 반겼다.
사회당의 단골 대선 후보
처음에는 입당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사회당이 반전운동으로 탄압받자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토머스는 1918년 사회당에 입당했을 뿐만 아니라 전업 활동가가 됐다. 그의 임무는 외곽조직인 산업민주주의연맹을 이끄는 것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프래그머티즘 철학자 존 듀이, 사회주의에 동조한 신학자 라인홀드 니부어 등 당대 뛰어난 지식인들과 교유했다. 그러면서 기독교 윤리와 프래그머티즘이 결합된 독특한 사회주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토머스의 이런 면모에 사회당 집행부가 주목했다. 그들은 토머스 같은 전형적인 미국 토박이가 당의 새 얼굴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토머스보다 이에 더 부합하는 사람은 없었다. 뉴욕시장 선거에 사회당 후보로 출마했던 모리스 힐퀴트가 토머스에게 1924년 뉴욕주지사 선거 출마를 권했다. 토머스는 고심 끝에 이 제안을 수락했다. 이후 (데브스보다 더 많은) 여섯 차례 대선을 포함해 10번 넘게 사회당 후보로 공직 선거에 출마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한 채 말이다.
처음 뉴욕주지사 선거에 나설 때는 나름 희망이 있었다. 주지사에 바로 당선되리라 기대하진 않았다. 당시 사회당은 미국 정치판 전체를 뒤흔들어보려는 야심찬 계획을 추진 중이었다. 주지사 선거와 함께 실시된 1924년 대선에 공화당 개혁파였다가 탈당한 로버트 라폴레트 상원의원을 출마시킨다는 계획이었다. 실제로 라폴레트는 사회당 후보는 아니지만 사회당과 노총(AFL)이 함께 지지하는 무소속 후보로 대선에 뛰어들었다. 사회당은 이 선거의 성과를 발판 삼아 미국에도 영국 노동당처럼 노동조합의 지지를 받는 진보정당을 새로 만들려 했다.
이 선거에서 정치 초년생 토머스는 9만 표를 얻어 양대 정당 후보에 한참 뒤졌지만, 라폴레트는 483만 표(16.6%)라는 상당한 득표를 기록했다. 그러나 노동 진영은 이 성과조차 독자 정당을 창당하기에 부족하다고 평가했다. 게다가 라폴레트 후보마저 선거 직후 사망하고 말았다. 사회당의 원대한 재창당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미국의 보수 일변도 정당 구도를 바꿀 최대 호기가 무산되고 만 것이다.
이제 막 40대인 토머스가 이끌어야 할 당은 출구가 봉쇄된 상태였다. 토머스는 말년까지도 사회당의 확대 재창당 구상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새로운 기회가 오기만 기다릴 수 없었다. 그는 첫 선거 도전지인 뉴욕주에서 공직 선거가 있을 때마다 거듭 출마해 당을 알리고 조금이라도 지지층을 넓히려 했다. 이런 노력이 통했는지 1934년 상원의원 선거에서 거의 20만 표를 얻었다.
1928년 대선부터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첫 번째 도전 결과(26만 표, 0.73%)는 라폴레트 운동은 물론 데브스 시절에 비해서도 크게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뉴딜의 지렛대 됐지만
노먼 토머스는 마지막 저작 <사회주의 재검토>(왼쪽 세 번째)에서 시민기본소득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모든 시민에게 기본소득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1932년 선거는 조금 달랐다. 대공황이 발발한 뒤 치른 선거여서 사회당 후보의 주장에 좀더 많은 사람이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다. 이 선거에서 토머스는 88만 표(2.23%)의 지지를 받았다.
단지 득표수만 의미 있는 게 아니었다. 더 중요한 것은 사회당 후보가 정치 지형 전반에 끼친 영향이었다. 이 선거에서 토머스는 대공황 정책으로 다음을 공약했다. 실업자 구제를 위한 실업보험과 대규모 공공근로, 노동시간 단축으로 일자리 창출, 아동 노동 폐지, 공공연금 도입, 저렴하고 쾌적한 공공주택 대량 공급, 대기업과 부유층 증세, 기간산업 국유화 등.
1932년 대선 당선자는 바로 프랭클린 루스벨트였다. 집권 이후 그가 실시한 뉴딜은 토머스의 대선 공약과 상당 부분 겹쳤다. 몇몇 복지제도를 신설했고 공공근로 사업을 실시했으며 노동조합의 권리를 확대했다. 사회주의 후보의 공약을 받아들여 대공황에 대처한 것이다. 루스벨트 자신이 이를 의식해서 토머스를 백악관에 자주 초청해 의견을 구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민주당의 ‘개혁’ 대통령과 ‘사회주의’ 정당 후보 사이에는 여전히 커다란 간극이 있었다. 무엇보다 토머스는 루스벨트 정부가 월스트리트 개혁을 내세우면서도 은행을 국유화하지 않는 점을 비판했다. 혈세로 은행을 살려준 뒤 경제위기의 원흉인 은행가들에게 돌려준 꼴이라는 것이다.
토머스가 루스벨트 정부에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때문이었다. 물론 토머스는 미국에서 가장 먼저 유럽 파시즘의 위험을 경고한 인물이다. 그러나 전쟁 참여가 결국 뉴딜을 사회민주적 개혁이 아니라 파시즘과 별반 차이 없는 엘리트 통제 체제로 변질시킬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참전에는 끝내 동의할 수 없었다.
이와 함께 토머스의 현실정치 이력도 막바지에 치달았다. 그는 세상의 방향과 동떨어진 사람으로 취급받았고, 1948년 그의 마지막 대선 도전 결과는 14만여 표(0.29%)를 얻는 데 그쳤다.
미국 사회주의자의 마지막 메시지, 기본소득
사회당 일선에서 물러난 토머스는 평생 신념에 따라 냉전과 핵전쟁의 공포에 맞서는 평화운동에 앞장섰다. 사회당은 점점 더 비주류로 밀려났지만, 토머스 노인만은 늘 꼿꼿했다. 흑인시민권운동을 비롯해 새로운 대중운동이 등장할 때마다 그곳에는 전 대통령 후보 노먼 토머스가 있었다. 죽기 직전까지 그는 사회당 동지 에리히 프롬(<사랑의 기술>의 저자인 그 사람!)에게 마틴 루서 킹 목사를 1968년 대선에 공화당과 민주당에 맞서는 좌파연합 후보로 내자는 편지를 띄웠다.
세상의 눈에는 영락없이 실패한 인생이었다. 20세기에 토머스와 미국 사회당의 사회주의는 끝내 기회를 얻지 못했다. 어느 뉴딜 비판가는 “사회주의자가 수영하는 동안 벗어놓은 옷을 뉴딜파가 들고 튀어버렸다”고 표현했다.
정작 토머스는 끝까지 자기 인생보다 세상을 더 걱정했다. 마지막 저작 <사회주의 재검토>(1963)에서 그는 미래에 자동화로 일자리가 사라지지 않을까 우려했다. 그는 이에 대응하려면 뉴딜식 복지를 넘어 정부가 모든 시민에게 충분한 소득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민기본소득, 이것이 20세기 ‘미국 사회주의자’가 마지막으로 남긴 메시지였다.
장석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버니 샌더스 53년 전 사진 보니…"약자 대변 그때도 똑같았네 16.2.22 국민
시카고 트리뷴(Chicago Tribune) 페이스북 캡처
미국의 유력지 시카고 트리뷴이 홈페이지와 페이스북 등 소셜 미디어에 한 장의 사진을 공개했다. 1963년도에 찍은 흑백사진은 한 청년이 경찰관 2명에게 끌려가는 모습을 담고 있다. 시카고 트리뷴은 이 청년이 현재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 참가하고 있는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라고 20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시카고 트리뷴에 따르면 이 사진은 1963년 8월 12일 인권시위 도중 끌려가는 한 대학생의 모습을 찍은 것이다. 시카고 트리뷴은 당시 이 사진과 관련 ‘이 대학생은 경찰의 체포에 저항했고, 이 때문에 25달러의 벌금형에 처해졌다’고 보도했다. 시카고 대학에 따르면 버니 샌더스는 1960년 8월 3일 입학했고, 1964년 6월 학사학위를 받고 졸업했다.
시카고 트리뷴은 최근 자사의 사진 보관소에서 이 사진을 발견하고 버니 샌더스 측에 확인을 요청한 결과 ‘사진 속 인물이 버니 샌더스가 맞다’는 답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버니 샌더스 경선캠프 측은 “이 사진을 본 버니가 ‘내가 맞다’고 확인했다”고 시카고 트리뷴에 설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네티즌들은 “이 사진만 봐도 버니 샌더스는 표를 위한 길이 아니라 그가 걸어왔던 그 길을 계속 걷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며 그의 진정성에 높은 점수를 줬다. 세력도, 돈도 부족한 75세의 무소속 의원에 예상외로 많은 지지가 쏠리는 이유는 바로 50여년이 지나도록 변함없이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What A Difference A Day Made - Jamie Cull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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