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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괜찮은 詩

쑥부쟁이 사랑

by 이성근 2023. 12. 25.

11월-나태주 / 11월의 노래 - 김용택/ 1 1이서린/ 시월의 마지막 밤엔 손종일/시월의 마지막 밤 최영희/ 시월에 문태준/ 10- 오세영 / 10월에 꿈꾸는 사랑 이채/ 10- 오세영 / 귀가 예쁜 여자 - 나태주/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조치원역 - 오철수 / 바람은 그대 쪽으로, 388번 종점 - 기형도

진주 저물녘-허수경/ 즐거운 편지 황동규/ 간헐한 사랑 안상학/ 마지막 사랑 - 장석주

사랑 오봉옥/ 사랑 나희덕/ 쑥부쟁이 사랑 정일근/ 시인의 사랑 김윤희/ 철새들 사랑 이덕규/ 더딘 사랑 이정록/ 돌쩌귀 사랑 정일근/ 눈 먼 사랑 허형만/ 어쩌다 사랑 박라연/ 벼랑 위의 사랑 김해자/ 시정잡배의 사랑 허연/ 그대에게 가는 길 김은숙/ 그대에게 가는 길 1 임영조/ 불면에 관하여 허형만/ 다시 누군가를 김재진/ 백두산 꿈을 꾸었다 - 박정대

 

https://www.youtube.com/watch?v=KgbhLZXgDEE

11/ 나태주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많이 와버렸고

버리기에는 차마 아까운 시간입니다.

 

어디선가 서리 맞은 어린 장미 한 송이

피를 문 입술로 이쪽을 보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낮이 조금 더 짧아졌습니다.

더욱 그대를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11월의 노래 / 김용택

해 넘어가면 당신이 더 그리워집니다.

잎을 떨구며 피를 말리며

가을은 자꾸 가고

당신이 그리워 마을 앞에 나와

산그늘 내린 동구길 하염없이 바라보다

산그늘도 가버린 강물을 건넙니다

 

내 키를 넘는 마른 풀밭들을 헤치고

강을 건너 강가에 앉아

헌옷에 붙은 풀씨들을 떼어내며

당신 그리워 눈물납니다

못 견디겠어요

아무도 닿지 못할 세상의 외로움이

마른 풀잎 끝처럼 뼈에 스칩니다

 

가을은 자꾸 가고

당신에게 가 닿고 싶은

내 마음은 저문 강물처럼 바삐 흐르지만

나는 물 가버린 물소리처럼 허망하게

빈 산에 남아 억새꽃만 허옇게 흔듭니다

해 지고 가을은 가고 당신도 가지만

서리 녹던 내 마음의 당신 자리는

식지 않고 김납니다

 

11/ 이서린

낙엽처럼 불면이 쌓이는 날이 많아졌다

종종 새벽녘에 비가 흩뿌리는 날

생각보다 오래 살았다는 느낌에

유서 같은 일기를 두서없이 쓰기도 한다

 

가끔 안주도 없이 술을 털어 넣듯 마시다

미친 듯이 밤길을 휘적휘적 걷다가

한 사람 안에 웃고 있는 또 한 사람을 생각하다

모든 걸 게워내듯 오래오래 울기도 하는

 

아침이면 퉁퉁 부은 눈으로

식구들의 밥을 차리고

빨개진 눈으로 배웅을 하고

꾸역꾸역 혼자 밥 먹는, 이 슬픈 식욕

그래도 검은 커피를 위로 삼아

마당에 빨래를 넌다

 

조금씩 말라가는 손목은 얇은 햇빛에 맡기고

흐르는 구름을 보다 눈을 감으면

, 떨어지는 감나무 잎

세상은 저렇게 떠나야 하는 것

조만간 가야 할 때를 살펴야 하는 것

 

길어지는 그림자를 보며

지는 해는 왜 붉은가 생각하다가

흉터는 왜 붉은가를 생각해보는

이대로 증발하고 싶은 저무는 하늘

아직 살아 있는 내가

찬물에 손을 담고 쌀을 씻는다

 

시월의 마지막 밤엔 / 손종일

시월의 마지막 밤엔

부치지도 못할 긴 편지를 쓰겠습니다.

사랑하며너도 이별해야 했던

그리운 당신에게

넘치는 사랑만 써서

보내드리겠습니다.

 

시월의 마지막 밤엔

한 잔의 블랙커피를 마시겠습니다.

압 안 그득히 쓴맛을 물고

당신 때문에 느껴야 했던

그 고통의 쓴맛을

가중되게 느껴보고 싶습니다.

 

시월의 마지막 밤엔

우울한 음악을 듣겠습니다.

기쁠 때 들어도 슬퍼지는

멜라니사프카의 노래와

시월의 마지막 밤을 기억한다던

어느 남자 가수의 노래와

묘비명을 들으며

당신과의 슬픈 인연에

못을 박겠습니다.

 

시월의 마지막 밤엔

추억의 그 스낵에 가겠습니다.

한 잔 술에도 얼굴이 붉어지던

당신께서 즐겨 마시던

베네딕틴 두 잔을 시켜놓고

한 잔은 당신을 위해 마시고

남은 한 잔은 당신을 위해 남겨두고

그 스낵을 나오겠습니다.

 

시월의 마지막 밤엔

바람 부는 거리를 걷겠습니다.

당신과 자주 걸었던 그 길을

그때 그 밀어들을 새기며

주홍빛 가로등 아래를

당신만을 생각하며

고통의 그 길을 걷겠습니다.

 

시월의 마지막 밤엔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

안개꽃을 좋아하던,

한여름의 빗줄기를 좋아하던,

병아리 색을 좋아하던

당신과

밤새도록 사랑을 하겠습니다.

 

시월의 마지막 밤 / 최영희

생각에 잠긴 가을이

, 한 잎의 낙엽을 지우고 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닮은

()한 가슴으로 돌아눕는 가을아

, 오늘 밤 네게

한 편의 시를 보내고 싶다

 

풀벌레 소리마저

잦아드는,

누군가 낙엽 밟는 소리도

이제는 차라리 평화롭지 않은가

어둠마저 평온한 창 밖엔

고요가 내리고 있다

 

! 이제는 떠나는

내게서 떠나는 사랑까지도

사랑하고 싶다.

 

시월에 / 문태준

오이는 아주 늙고 토란잎은 매우 시들었다

산밑에는 노란 감국화가 한 무더기 해죽, 해죽 웃는다

웃음이 가시는 입가에 잔주름이 자글자글하다

꽃빛이 사그라들고 있다

들길을 걸어가며 한 팔이 뺨을 어루만지는 사이에도

다른 팔이 계속 위아래로 흔들리며 따라왔다는 걸

문득 알았다

집에 와 물에 찬밥을 둘둘 말아 오물오물거리는데

눈구멍에서 눈물이 돌고 돌다

시월은 헐린 제비집 자리 같다

, 오늘은 시월처럼 집에 아무도 없다

 

10월에 꿈꾸는 사랑 / 이채

운명이란 걸 믿지 않았기에

인연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영원을 알 수 없었기에

순간으로 접었습니다

 

스치는 바람인 줄 알았기에

잡으려 애쓰지도 않았습니다

머문다는 것 또한

떠난 후에 남겨질 아픔인 줄 알았기에

한시도 가슴에 담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숨바꼭질하듯

그대가 나를 찾지 않아도

만날 수 있는 10월의 거리로 가겠습니다

꿈을 꾸듯

그대를 부르며 달려가겠습니다

 

추운 겨울이 오기 전에

가슴을 활짝 열고

가을숲 그대 품에서

10월의 사랑을 꿈꾸고 싶습니다

아름다운 인연으로 말입니다

 

10/ 오세영

무언가 잃어간다는 것은

하나씩 성숙해간다는 것이다

지금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데

돌아보면 문득 나홀로 남아있다

 

그리움에 목마르던 봄날저녁

분분히 지던 꽃잎은 얼마나 슬펐던가

욕정으로 타오르던 여름한낮 화상 입은

잎새들은 또 얼마나 아팠던가

 

그러나 지금은 더이상

잃을 것이 없는데 이지상에는

외로운 목숨하나 걸려 있을 뿐이다

낙과여 네 마지막의 이별이란

이미 이별이 아닌 것 빛과 향이 어울린

또 한 번의 만남인 것을

 

우리는 하나의 아름다운

이별을 갖기 위해서

오늘도 잃어가는 연습을 해야한다

 

 

귀가 예쁜 여자 나태주

맞선을 본 처녀는 별로였다

살결이 곱고 얼굴이 둥글고

눈빛이 순했지만

특별히 이쁜 구석이라고는 없었다

두 번째 만나던 날

시골 다방에서 차 한 잔 마시고

갈 곳도 마땅치 않아

가까운 산 소나무 그늘에 앉아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산길을 내릴 때

앞서가는 처녀의 뒷모습

조그맣고 새하얀 귀가 예뻤다

, 귀가 예쁜 여자였구나

저 귀나 바라보며 살아가면 어떨까?

 

그렇게 살아, 나는 이제

늙은 남자가 되었고

아내 또한 늙은 아낙이 되었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조치원역 오철수

모든 사랑은 멀리서 오고

가장 가까이서 멀어져 가나니 거기

조치원 역 있다

만나기 위해 갔던 곳

떠나기 위해 다시 있던 곳

역광장 시계탑 위로 제비꽃빛 같은 시간이 머물 때면

그대 저 만큼서 조금씩 커져 내게로 왔던가

아는가, 꽃불로 타오르던 사랑

하지만 싣고 가는 기차에겐 경유지만 있는 것

멈춰 선 곳에 이별도 있어 거기

사랑은 지고 조치원 역 있다

오늘 문득 저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는

아득한 이름이여! 거기쯤

아직도 돌아가지 못한 사내 서성인다, 눈부신

그 자리

가버린 시간이 있었으니

오는 추억도 있어

새잎 나는 버드나무처럼 밝고 선한 여인

늙지도 않는 거기 조치원 역

 

바람은 그대 쪽으로 기형도

어둠에 가려 나는 더 이상 나뭇가지를 흔들지 못한다. 단 하나의 靈魂을 준비하고 발소리를 죽이며 나는 그대 窓門으로 다가간다. 가축들의 순한 눈빛이 만들어내는 희미한 길 위에는 가지를 막 떠나는 긴장한 이파리들이 공중 빈곳을 찾고 있다. 외롭다. 그대, 내 낮은 기침 소리가 그대 短篇의 잠속에서 끼여들 때면 창틀에 조그만 램프를 켜다오. 내 그리움의 거리는 너무 멀고 沈默은 언제나 이리저리 나를 끌고 다닌다. 그대는 아주 늦게 창문을 열어야 한다. 불빛은 너무 약해 벌판을 잡을 수 없고, 갸우뚱 고개 젓는 그대 한숨 속으로 언제든 나는 들어가고 싶었다. 아아, 그대는 곧 입김을 불어 한 잎의 불을 끄리라. 나는 소리없이 가장 작은 나뭇가지를 꺾는다. 그 나뭇가지 뒤에 몸을 숨기고 나는 내가 끝끝내 갈 수 없는 僻地를 조용히 바라본다. 그대, 저 고단한 燈皮를 다 닦아내는 薄明의 시간, 흐려지는 어둠 속에서 몇 개의 움직임이 그치고 지친 바람이 짧은 휴식을 끝마칠 때까지.

 

388번 종점

구겨진 불빛을 펴며

막차는 떠났다.

 

寂寞으로 무성해진 가슴 한켠 空地에서

캄캄하게 울고 있는 몇 점 불씨

가만히

그 스위치를 끄고 있는 한 사내의 쓸쓸한 손놀림.

 

진주 저물녘-허수경

기다림이사 천년같제 날이 저물셰라 강바람 눈에 그리메지며 귓불 부콰하게 망경산 오르면 잇몸 드러내고 휘모리로 감겨가는 물결아 지겹도록 정이 든 고향 찾아올 이 없는 고향

문디 같아 반푼이 같아서 기다림으로 너른 강에 불씨 재우는 남녘 가시나

주막이라도 차릴거나

승냥이와 싸우다 온 이녁들 살붙이보다 헌출한 이녁들

거두어나지고

밤꽃처럼 후두둑 피어나지고

 

즐거운 편지 / 황동규

1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背景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 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姿勢를 생각하는 것 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간헐한 사랑 / 안상학

심장이 그러하듯이

일정한 시간 일정한 간격을 두고 되풀이되는 일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살아가는 방식이지요

 

, 퐁 솟는 샘이 그러하듯이

살아 있는 모든 것이 간헐한 법이지요

 

꽃이 간헐적으로 이 세상에 다녀가듯이

좀 길기는 하지만 우리 사랑도 간헐적으로

이 세상에 다녀가는 것이 아닐는지요

전생과 이생과 내생한 번씩 말이지요

 

해가 간헐적으로 뜨고 지듯이

달이 간헐적으로 차고 이우듯이

사랑도 간헐적으로 틈틈이 사이사이

쉬었다 이었다 하는 것이 아닐는지요

 

영원한 것이 있다면 아마도 간헐한 것이 아닐는지요

 

나는 요즘 언제 있었나 싶은 내 사랑이 간헐하게 이우는 소리는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마지막 사랑 / 장석주

사랑이란

아주 멀리 되돌아오는 길이다

나 그대에게 취해

그대의 캄캄한 감옥에서 울고 있는 것이다

 

아기 하나 태어나고

바람이 분다

바람 부는 길목에 그토록 오래 서 있었던 까닭은

돌아오는 길 내내

그대를 감쌌던 내 마음에서

그대 향기가 떠나지를 않았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그렇게

아주아주 멀리 되돌아오는 길이다

 

사랑 / 오봉옥

사람이 위대한 건

사랑이라는 등불을 발명해서다

이 세상

어떤 빛이

그보다 환할 수 있겠는가

사랑이 꺼지면

나도

세상도

암흑천지가 된다

 

그러니 그대여

젊어선 젊어서 사랑을 하고

늙어선 늙어서 사랑을 하자

살아있어서

살아있어서

우리 죽도록 사랑을 하자

 

사랑 / 나희덕

피 흘리지 않았는데

뒤돌아보니

하얀 눈 위로

상처 입은 짐승의

발자국이

나를 따라온다

 

저 발자국

내 속으로

절뚝거리며 들어와

한 마리 짐승을 키우리

 

눈 녹으면

그제야

몸 눕힐 양지를

찾아 떠나리

 

쑥부쟁이 사랑 / 정일근

사랑하면 보인다, 다 보인다

가을 들어 쑥부쟁이 꽃과 처음 인사했을 때

드문드문 보이던 보랏빛 꽃들이

가을 내내 반가운 눈길 맞추다 보니

은현리 들길 산길에도 쑥부쟁이가 지천이다

 

이름 몰랐을 때 보이지도 않던 쑥부쟁이 꽃이

발길 옮길 때마다 눈 속으로 찾아와 인사를 한다

이름 알면 보이고 이름 부르다 보면 사랑하느니

사랑하는 눈길 감추지 않고 바라보면,

꽃잎 낱낱이 셀 수 있을 것처럼 뜨겁게 선명해진다

 

어디에 꼭꼭 숨어 피어 있어도 너를 찾아가지 못하랴

사랑하면 보인다, 숨어 있어도 보인다

 

시인의 사랑 / 김윤희

헤어져 돌아와 시를 쓰다니

질병처럼 불행하다

 

보이지 않는 너와 시를

바꿔먹고

장수한들 무엇에

쓰리

 

시를 잃을 터이니

너를 찾고 싶다

 

철새들 사랑 / 이덕규

대책 없이 뛰쳐나온 불륜이

먼길을 돌아 이제 막

숨차게 들어선 곳,

허름한 여인숙 같은 둥지 속에

살림이랄 게 뭐 있나요

 

솔직히 우리

부끄런 몸사랑 가려줄

펄렁이는 나뭇잎

몇 장이면 족하지요

어차피 다 한철인데요 뭐

 

그래요

이 무성한 여름 지나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면

문득 몸살처럼

머나먼 남지나해 건너

또다른 사랑이 그립겠지요

 

벌써부터

오며 가며

눈 맞은 옆집 여자에게

도망가자! 버릇처럼 속삭입니다

 

더딘 사랑 / 이정록

돌부처는

눈 한 번 감았다 뜨면 모래무덤이 된다

눈 깜짝할 사이도 없다

 

그대여

모든 게 순간이었다고 말하지 마라

달은 윙크 한 번 하는 데 한 달이나 걸린다

 

돌쩌귀 사랑 / 정일근

울고 불고 치사한 이승의 사랑일랑 그만 끝내자

다시 태어나 우리 한 몸의 돌쩌귀로 환생하자

그대는 문설주의 암짝 되고 나는 문짝의 수짝 되어

그 문 열리고 닫힐 때마다 우리 뜨겁게 쇠살 부비자

어디 쇠가 녹으랴만 그 쇠 다 녹을 때까지

우리 돌쩌귀 같은 사랑 한번 해 보자

 

눈 먼 사랑 / 허형만

한 방울 한 방울 물방울이 모여

강을 이룬 동굴이 있습니다

그 동굴에는

눈이 먼 사랑이 살고

그리움이 살고 아픔도 살고 있습니다

그리움은 눈 먼 사랑을 잡아먹고

아픔은 그리움을 잡아먹고 삽니다

눈 먼 사랑이여

한 방울 한 방울 물방울 떨어질 때마다

그 파동으로 울음 우는

서러운 짐승이여

 

어쩌다 사랑 / 박라연

어떻게

그 큰 보름달을

오직 손바닥만으로 굴려서 훅 저쪽으로 밀어내 버렸니?

그날의

너의 밝음과 둥긂이 보름달을 잠시 이겼던 것처럼

 

사실은, 사실은 보름달이 널 위해 잠시 져준 거야

널 아주 잠시 사랑해버린 거야

 

벼랑 위의 사랑 / 김해자

ㅡ 크림트의 그림 '키스'를 보다

 

꽃밭이다 찬란한 햇살과 따스한

바람이 빚어낸 바닥에서 꽃이 된

남자의 황금빛 가슴 속에 묻혀 시간을 잊은

여자의 몸에서도 황금 잎사귀가 돋고

 

찰나의 시간에도 덩굴은 자라는데

여자의 발끝이 벼랑 끝에 걸려 있다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와 여자의 눈은 감겨 있고

벼랑 위의 키스는 끝나지 않는다

 

사랑은 벼랑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듯

벼랑은 사랑을 위해 존재한다는 듯

사랑은 필사적이고 벼랑은 완강하다

살아가는 일이 벼랑이라면 모든

사랑은 벼랑 끝에서만 핀다 지금

안전한 자여 안전한 사랑은 완전하지 않다

저 심연을 보아라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벼랑 끝에서 벼랑을 잊은 채 우리는

이 순간 영원이다 말하는

저 백척간두의 사랑

 

시정잡배의 사랑 / 허연

시정잡배에겐 분노가 많으니 용서도 많다.

서늘한 바위 절벽에 매달려 있는 빨갛게 녹슨 철제 계단 같은 놈들.

 

제대로 매달리지도,

끊어져 떨어지지도 못하는 사랑이나 하는 놈들,

사연 많은 놈들은 또 왜들 그런지.

 

소주 몇 병에 비 오는 날 육교 밑에 주저앉는 놈들.

그렁그렁 한 눈물 한 번 비추고 돌아서서 침 뱉는 놈들.

그러고도 실실 웃을 수 있는 놈들.

그들만의 깨달음이 있다.

시정잡배의 깨달음.

 

술국 먹다 말고 울컥 누구의 얼굴이 떠오른다.

가물가물하지만 무지 아팠다. 죽을 만큼 아팠다.

그 술국에 눈물 한 방울 떨어뜨리고 또 웃는다.

 

잊어버리는 건 쉽지만

다시 떠오르는 건 막을 수가 없다.

그게 시정잡배의 사랑이다.

 

마지막으로 십팔번 딱 한 번만 부르고 죽자.

 

그대에게 가는 길 / 김은숙

하늘 끝 부서지는 바람이거나

저린 숨으로 내려앉는 낮은 가락이거나

서늘한 가슴 바닥

협곡 휘도는 바람울음 종일 윙윙거리거나

 

그대여

저무는 시린 들녘

쓸쓸한 한 잎 추억으로 저미어오거나

마른 노래 몇마디 눈물바람 데리고 와

불현듯 참혹한 슬픔의 강으로 가라앉아도

 

그대 소중한 이름 하나

이 가슴 굽이치는 빛으로 살아

그대에게 가는 길 짚어 볼 수 있다면

 

그대 사는 하늘로 뻗는

그리움의 산

깊게 깊게 조용히 강물로도 흘러

그대 따스한 이름으로 한 몸 온전히 덮으며

푸근한 하늘로 끌어안고 싶네

 

그대에게 가는 길 1 / 임영조

내 하던 말 마감하면

그대에게 가리라

영화 속을 빠져나온 주인공처럼

영욕과 슬픔과 대사(臺詞)도 버리고

그대 중심으로 들어가 쉬리

89년식 르망 몰고 소백산 넘어

부석사 들러 소조여래와 눈 잠깐 맞추고

풍기 봉화 영양 스쳐 길을 계속 당기면

나 홀로 세 들다 뜨고 싶은 곳

갯마을의 고요가 나를 당기네

침엽수들 냇물에 그림자 씻는

불영계곡 백 여 리 길 돌고돌아

그대 찾아가는 길 내내

뙤약볕에 목 타는 하루를 건너

저물녘 내가 당도한 곳은

그대 자궁 속같이 아늑하고 감감한

, 아름다운 환멸이었네

 

불면에 관하여 / 허형만

한 삶이 무거운지 때로는

이렇게 잠 못 이룬다

 

먼 길 온 것 같지도 않고

먼 길 남은 것 같지도 않은데

 

이 한밤 적막 속에 들리는

뒷산 계곡 달빛 흐르는 소리

 

다시 누군가를 / 김재진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아픔을 사랑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햇볕과 그 사람의 그늘을

분별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두운 밤 나란히 걷는 발자국 소리 같아

멀어져도 도란도란

가지런한 숨결 따라 걸어가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아픔 속에 가려있는 기쁨을 찾아내는 것이다

창문을 활짝 열고 새 바람 들여놓듯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 전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백두산 꿈을 꾸었다 / 박정대

나의 사랑하는 여자야

어제는 백두산 상상봉에 올라

단풍나무숲을 달리는 호랑이를 보았다

숲을 빠져나온 호랑이가 나는 좋았다

그 놈의 거칠 것 없는 질주가 나는 좋았다

나의 사랑하는 여자야

네가 내 꿈으로 달려오면

나는 단풍나무숲이 되어

나의 잎사귀를 떨구어도 좋겠네

나의 사랑하는 여자야

어제는 백두산 꿈을 꾸었다

너는 부드럽고 세찬 백록담이 되어

뜨겁고 뜨거운 사랑으로 내게 달려오고

나는 천지의 문을 열어

너와 한바탕 뒹굴 꿈만 꾸고

나의 사랑하는 여자야

만주벌판을 휘달려

바이칼까지 가 닿는

불타는 눈의 호랑이

우리들의 새끼를 낳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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