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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괜찮은 詩

30주기 혁명시인 김남주를 다시 읽는다

by 이성근 2024. 2. 16.

혁명시인 김남주를 다시 읽는다

시와 혁명으로 성찰이 필요한 시대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이다/ 피 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김남주 '자유' 중에서

1980년대 사회변혁운동의 이념과 정신을 온몸으로 밀고나간 '전사(戰士)시인' 김남주! 그가 우리 곁을 떠난 지 벌써 30주년이 되었다. 일찍이 염무웅 선생이 "70년대의 한국문학을 김지하가 버텨냈다면 80년대를 버티고 있는 것은 김남주"라고 지적했듯이, 그는 80년대 우리 민족문학의 한 정점이었다.

그의 시가 우리 문학사의 전통 위에서 빼어난 점은 1980년대라는 한 시대를 대표하면서도 동시에 고난에 찬 우리 역사로부터 민중적·민족적 전통을 올곧게 이어받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한용운, 이상화, 심훈, 이육사, 윤동주 등 식민지 시대의 진보적이고 양심적인 시인들의 유산을 소중한 것으로 간직하고 그것을 물려받고 있다는 것이다. 문학을 공부 한 사람뿐만 아니라 80년대 이후 소위 운동권이었다면 김남주의 시적 자장(磁場) 안에서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 시대의 / 불행한 아들로 태어나 / 고독과 공포에 결코 굴하지 않았던 사람 /암울한 시대 한가운데 / 말뚝처럼 횃불처럼 우뚝 서서/한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한몸으로 껴안고/피투성이로 싸웠던 사람// (중략)// 누구보다도 자기 시대를/가장 정열적으로 사랑하고/누구보다도 자기 시대를/가장 격정적으로 노래하고 싸우고/한 시대와 더불어 사라지는데/기꺼이 동의했던 사람. -'황토현에 부치는 노래' 중에서

이 시는 김남주 시인이 녹두장군 전봉준을 추모하며 쓴 시이다. 그런데 나는 이 시를 읽을 때면 늘 전봉준과 김남주 시인의 생애가 오버랩된다.

김남주는 19451016일 전남 해남군 삼산면 봉학리에서 해방둥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30여 년 동안 남의 집 머슴이었고, 어머니는 그 아버지가 머슴을 살던 주인집의 딸이었다. 훗날 시인이 된 김남주는 정직하게 자신의 가계를 시로 썼다.

그는 이름 석자도 쓸 줄 모르는 무식쟁이였다 / 그는 밭 한 뙈기 없는 남의 집 머슴이었다 / 그는 나이 서른에 애꾸눈 각시 하나 얻었으되 /그것은 보리 서너 말 얹어 떠맡긴 주인집 딸이었다 -'아버지' 중에서

김남주 시인의 모습. 기념사업회 제공.

예나 지금이나 세상으로부터 천대받고 무시당하는 농민들의 가장 큰 꿈은 자식 중 누군가가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김남주가 뺑돌이 의자에 앉아 펜대만 까닥까딱하고도/ 먹을 것 걱정 안 하고 사는 그런 사람이 되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김남주는 끝내 아버지가 바라던 그런 사람과는 너무도 먼 길을 선택했다. 호남의 명문이라는 광주제일고 2학년 때 오직 일류대를 가기 위한 전쟁터 같은 학교가 싫다는 이유로 덜컥 자퇴서를 내버린 것이었다. 그 후 검정고시를 거쳐 전남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한 후, 3선 개헌 반대투쟁, 교련반대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반독재 투쟁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72년 대학 4학년 때. 박정희 정권이 유신헌법을 선포하자 친구 이강과 함께 전국 최초로 반유신투쟁 지하신문 '함성'을 제작 배포하여, 세칭 함성지 사건으로 구속되어 8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고 이 사건으로 전남대에서 제적당했다.

내가 처음/ 시라는 것을 써 본 것은/ 감옥에서였다/ 연필도 없고/ 종이도 없고 / 둘러보아 사방이 벽뿐인/ 그 벽에 하얀 벽에/ 나는 새겨 놓았다/ 이빨로 손톱을 깨물어 / 피의 문자로 새겨 놓아다” -'그 방을 나오면서' 중에서

김남주는 1974년 석방 후 해남으로 낙향하여 농사일을 거드는 한편 옥중생활에서 겪은 가혹한 고문 체험과 농민들의 생활상을 시로 쓴 '진혼가' '잿더미' 8편의 시를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그러나 김남주는 시를 쓰는 일로 만족하지 않고 1977년 지역활동가들과 광주에서 민중문화연구소를 개설하여 사회문화운동의 구심 역할을 하다 수배되었다. 1978년 서울에서 도피 생활 중 당시 가장 강력한 반유신 지하조직인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에 가입한다. 이때부터 김남주는 혁명을 꿈꾸며 전사(戰士)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다 19791080여 명의 동지들과 체포되어 60일 동안 가혹한 고문 수사를 받고, 이듬해 1980년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광주교도소로 이감된 후, 198812월 전주교도소에서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될 때까지 93개월 동안을 감옥 안에서 전사 시인의 삶을 살았다.

그의 삶과 문학은 세상의 불의와 불펑등을 상대로 한 치열한 싸움으로만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김남주에게 있어서 '싸움'의 대상은 정치적 독재와, 반통일, 착취, 외세 따위였다.

시인이여 /누구보다 먼저 그대 자신이 /싸움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시인이여/ 누구보다 먼저 그대 자신이 /압제자의 가슴에 꽃히는 /창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 -'시인이여' 중에서

김남주에게 감옥은 창작의 산실이자 투쟁의 현장이었다. 감옥은 김남주 시의 출발점이었으며 옥중시가 그의 대표시가 되었다. 그는 칫솔을 못처럼 갈아서 우유곽 안의 은박지에 시를 새겼으며, 교도관의 은밀한 도움을 받아 밑씻개용으로 나오는 손바닥만한 크기의 똥색 종이에 볼펜으로 쓰기도 하고, 인쇄되지 않은 책의 페이지를 뜯어서 그 위에 시를 썼다.

김남주 시인이 감옥안에서 우윳곽 은박지에 쓴 시(왼쪽)와 갱지에 쓴 시. 기념사업회 제공.

김남주는 생전에 모두 510여 편의 시를 남겼는데 그중 360여 편이 옥중에서 씌어진 것이다. 그가 감옥에서 쓴 시들은 당시 대학생들의 의식화 교재가 되었고, 노래패는 그의 시를 노래로 만들어냈다. 암울했던 시대, 그의 시만큼 강한 무기는 없었다. 그의 시는 가장 선동적인 격문이었고 가장 투쟁적인 노래였다. 시가 물리적 힘의 전환되는 신화를 탄생시켰다. 감옥에 있는 동안 그는 어느새 하나의 전설이 되었다. 안치환이 부른 '노래(죽창가)'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자유' 등은 이때 쓰여진 시들이다.

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 / 꽃이 되자 하네 꽃이 / 피어 눈물로 고여 발등에서 갈라지는/ 녹두꽃이 되자 하네// 중략 // 되자 하네 되고자 하네 / 다시 한 번 이 고을은/죽창이 되자 하네 죽창이 -'노래' 중에서

김남주는 감옥에서 나온 옥중에 얻은 지병(췌장암)으로 투병하다 1994213, 향년 4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민중이 해방되기를 바라는 혁명의 노래를 남긴 채 그는 하나의 역사가 되었다. 김남주의 생애는 부당한 세계를 향해 날아가는 화살촉 같은 자유인이었으며, ‘피로 씌어진 언어의 화살'인 그의 시에는 '피묻은 진실'이 담겨 있었다.

그가 감옥 안에 있건, 밖에 있건 그는 우리 시대의 중심에서 타는 가장 뜨거운 불이었다. 그의 시가 힘을 갖는 것은 바로 꾸밈없는 그의 순결성과 정직성 때문이었다. 우리가 김남주를 통해 배울 것은 바로 이것이다.

김남주가 제기하고 투쟁했던 문제들은 오늘 이 시간에도 여전히 우리 앞에 거대한 담론으로 살아 있다. 재빠른 변종과 개종으로 얼굴을 바꾸고 있지만, 그가 싸움의 대상으로 삼았던 적들은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 있다. 더욱 교묘하고 교활하게 신자유주의의 얼굴로 분장하고 우리의 숨통을 조여 오고 있는 형국이다.

남북분단이 존재하는 한, 자본주의의 모순이 그대로 살아 있는 한, 김남주의 시는 여전히 우리 앞에 칼날로 살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 시대에 김남주의 삶과 시를 다시 읽는 것은 단지 그를 기념비화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시와 혁명의 통일을 온몸으로 실천했던 한 인간의 순결한 고투를 통해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이 필요한 까닭이다

지난해 '김남주 평전'을 펴낸 김형수 작가는 그 책의 뒤에 남기는 이야기에서 내가 김남주의 생애에서 가장 크게 감동한 점은 그가 이웃들과 힘겨루기를 해야 하는 일상의 경쟁에서 언제나 자발적 무능의 길을 선택했다는 점이었다고 말 한 바 있다.

생태위기의 시대인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자발적 무능이라는 화두를 던진 김형수의 문제 제기는 함께 성찰할 때이다./김경윤 시인·김남주기념사업회장/ 시민언론 민들레

지난해 열린 제29주기 추모제

시대가 침몰함에도 시만 쓰는 문인들이 많았던 군부독재 시절, 자신의 안일을 뒤로 한채 역사의 질곡에 맞서 싸운 시인이 후배 세대로부터 조명받고 추앙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분들의 투쟁으로 민주화 시대가 도래했지만 오히려 이분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세대가 많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흐름으로 받아들여지면서도 이들에 대한 삶과 문학정신을 배양하려는 전문단의 노력 부족 또한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광주전남 출신 중 민주화 투쟁에 나선 문인들은 많지만 그처럼 확고한 투쟁정신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간 문인은 몇 되지 않는다. 더욱이 갈짓자 정국으로 인해 민주주의가 위협받는 시국이라고들 이야기되는 시대 더욱이 문인을 뛰어넘은 전남 해남 출생 김남주 시인(1946~1994)의 시대 정신은 다시 호출되는 형국이다. 이런 김남주 시인이 올해 30주기를 맞아 추모제와 학술제 등 다양하게 그를 새기는 행사와 프로그램들이 잇따라 열릴 계획이다.

먼저 학술제와 함께 첫 선을 보이는 행사로 그의 30주기(213) 제사다. 그의 추모제를 지칭하는 것이다. 추모제는 김남주기념사업회(회장 김경윤)와 광주전남작가회의 등의 주최로 그의 묘소가 있는 광주시 북구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구 묘역)에서 오는 17일 오전 11시 거행된다. 추모제는 별세한 날짜를 중심으로 가능한 토요일을 선택해 열렸던 관례에 따라 13일 대신 17일 거행된다.

김경윤 회장은 김남주 시인 30주기 추모제에 앞서 기성세대들에게는 그를 각인시켜야 하는 동시에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김남주 시인을 알려야 하는 상황을 맞고 있다. 그에 앞서 이 시대의 상황이 다시 김남주를 부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전체적으로 사회가 반민주적으로 역행하고 있어 이를 기점으로 반민주를 걷어내고 민주주의를 외치면서 남북 문제를 상기하는 등 김남주 정신을 되살리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김남주 시인은 전남대 영문과에 입학했으나 1973년에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돼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는 후 8개월 만에 출소했지만, 이 사건으로 제적당했다. 출소 후 낙향해 농업에 종사하던 중 1974창작과 비평여름호에 진혼가7편의 시를 발표, 문단에 데뷔했다. 1979남민전 사건으로 체포돼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광주교도소에 수감된 이후 198812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나 93개월 만에 석방됐다. 첫 시집 진혼가는 그가 감옥 안에서 우유팩에 날카롭게 간 칫솔대로 눌러 써서 감옥 밖으로 몰래 내보낸 것들이 실린 작품집으로 의미를 더했다.

시집 나의 칼 나의 피사상의 거처등 다수의 작품집을 남겼으며, 1990년 민족문학작가회의 민족문학연구소장이 됐으나 1992년 건강이 악화돼 사퇴한 뒤 췌장암으로 투병하다 1994213일 별세했다. 현재 광주 망월동 5·18 묘역에 안장돼 있다./고선주 기자 rainidea@gwangnam.co.kr

김남주 내 마음 속 살아있는 시인 대통령

강대석 지음 <김남주 평전>을 읽고

내가 살고 있는 읍내에는 언제나 심심치 않게 찾아가는 서점이 있다. 이 서점 가장 높은 곳에 언제부턴가 <김남주 평전>(강대석 지음) 1권이 꽂혀 있다. <문익환 평전> <장준하 평전> <전태일 평전> <단재 신채호 평전> <여운영 평전>이 진열 되어 내 길눈에 밟혔다. 머지않아 <노무현 평전>도 나오겠지.

올 한해도 정신 없이 지나간 것 같다. 더욱 갈 곳이 많아진 가을이다. 한가하게 책 읽고 있을 시간이 없다. 위에 열거된 평전 내용들은 대충 알고 있기에 내년 초에나 읽어볼까. 아니 책값도 만만치 않다. 당장 15천원을 주고 구입해 읽어야 할 만큼 절박한 것도 아니다. 나는 이미 김남주 시인의 이력을 대강 알고 있기 때문이다.

1988515. 한겨레신문 창간과 더불어 나는 읍내에서 19년 동안 신문배달을 하면서, 그동안 신문에 남민전사건기사나 책 광고 속에서 김남주 시인에 대해 읽은 게 적지 않다. 그러다가 어느 날 대학 국문과를 졸업한 고향 후배가 서울의 문학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다더니 뜻밖에도 김남주 시인을 모시고 왔다.

첫 만남의 밤은 읍내의 한 음식점에서 네 명이 자정이 넘도록 술을 마시면서 초면의 인사를 나누었다. 내가 문학이나 시를 알고 있지 못하니 아무 것도 물어보지 못했다. 그저 듣는 것만으로도 족했고, ‘훌륭한 인물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키가 작은 나 보담은 조금 크고 웃음 띤 얼굴 표정이 온화하기만 했다. 꽃에 비유하자면 해바라기가 아니라 목단 꽃 같았다.

일 년 후엔가 여름에 또 혼자 찾아왔다. 이곳 자연풍경이 해남처럼 좋고 산들이 정겹다면서. 이번에는 농고를 졸업하고 농사를 짓고 있는 나의 친구 중학 동기 농민시인 박운식 집에 가고 싶다고 하여 나는 프라이드로 황간면 용암리까지 데려다주고 돌아왔다.

나는 새벽 3시경에 일어나 신문배달을 하기 때문에 어딜 가도 평일엔 날밤을 지새울 수 없었다. 아무리 귀한 손님이 와도 할 수 없다. 토요일이면 가능했다. 이러한 처지 아니면 김남주 시인과 많은 대화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만난 이후로 <조국은 하나다> 시집을 구해 읽어 봤고, 시가 이런 것이란 걸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시를 쓴다는 것은 상상도 안됐고 엄두도 못 냈다. 시를 쓰려면 김남주처럼 대학도 다니고 감옥 정도는 살고 나와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하지 않았든가.

그런데 왜 김남주의 시들은 내 마음에 감동을 주는데 다른 유명하다는 시인들의 시를 가끔 신문에서 보면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 머리가 좋지 않기 때문일까. 이렇게 어려운 시를 애써 알려고 할 필요가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신문배달이다. <한겨레>가 창간되기 전에 나는 농사 짓고, 농민운동을 한다면서 돌아다녔다. 전두환 군부독재에 맞서 싸우는 농민시위를 하다가 집회시위법에 걸려 구속되어 6개월간 청주교도소에서 옥살이를 하고 19873월에 나왔다.

이때까진 김남주란 이름은 몰랐다. 이 시점에 이미 김남주는 대법원에서 징역 15년 실형을 받고 감옥에서 장기수로 열심히 책 읽고, 시를 쓰고, 가족에게 편지 쓰고 있었을 것이다. ‘남민전 사건투옥 이후 만 93개월 만인 19881221일 형집행정지로 전주교도소에서 석방된 것을 한겨레 보도로 나는 읽었다.

만일 김남주가 청주로 이감해 왔었더라면 감옥 안에서 만날 수도 있었다. 실제로 문익환 목사는 청주교도소 안에서 만났고, 설날엔 집시법과 국가보안법 위반 수감자 20여명의 대학생들과 함께 문목사 방으로 가서 세배를 드린 적도 있다. 이때 김민석(나중에 국회의원 됐지만)도 옆방에 있었다. 고령의 통일운동가이신 문목사께 세배 드린다는데 누가 감히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어쨌든 김남주가 내가 살고 있는 영동으로 두 번씩 와서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다. 한겨레가 창간 된 그해에 석방되었기에 그 후의 활동소식을 보도에서 읽었고, 시집도 구입해 읽어 보았지만 정독을 못했다. 계속해서 김남주를 만날 수 있었더라면 모르는 것을 많이 물어보고 관심을 갖게 되어 나도 시 공부 좀 일찍부터 했더라면 지금쯤 알려진 시인이 되지 않았을까.

그저 나는 신문 배달이나 열심히 하고, 대한민국 45백만 인구 중에 5백만 명 정도만 진실을 보도하는 한겨레 애독자가 된다면 세상은 변하고 바뀔 줄 알았다. 이렇게만 되면 조국통일도 멀지 않으리라.

그러나 이건 쉽지 않았다. 단연코 농민,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해주는 한겨레를 빨갱이신문이니 김대중 신문이라고 헛소문도 퍼뜨리는 자들은 누구일까. 반민족 반통일 세력들이 아닐까. 조중동(조선. 동아. 중앙) 독자들은 아마도 김남주 이름 삼자를 그 신문에서는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시인, 작가란 작자들이 노동자 농민 시위를 비방하는 글들을 조중동에 써 주고 원고료 받아먹는 걸 보면 솔직히 나는 그들의 얼굴에 오줌을 갈겨주고 싶었다. 김남주의 눈에는 보수언론의 하는 짓들이 얼마나 역겹고 저주스러웠을까. 어쩌면 저것들은 언론이란 미명아래 보수기득권 특정집단의 밥벌이 도구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도 내가 살고 있는 영동이 좋다고 찬탄하더니 어느 날인가부터 발길이 뚝 끊어졌다. 투병중이라는 소문도 들렸다. 석방된 지 6년째 되는 1994213일 새벽 230분에 췌장암으로 운명했다.

청천벽력 같았다. 신문배달 때문에 달려가지 못한 나는 새벽에 배달을 하는데 하염없이 눈물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장례식장에도 참석 못하게 된 나 자신이 미웠다. 내가 김남주의 마지막 얼굴을 본 기억은 평생 잊을 수 없다.

늘 존경해온 통일운동가 문익환 목사가 통일맞이 사무실 개소식을 하고 바쁜 중에 1994118일 오후820분에 자택에서 갑자기 떠나셨다. 수유리 옛날 한신대 교정으로 달려가 영결식장에서 눈물로 추도사를 하는 김근태(나중에 국회의원이 됐다) 를 봤다. 운구차행렬이 동대문까지 이어졌는데 갑자기 진눈개비마저 퍼부었다. 장지인 모란공원까지 따라 갈 수 없다. 내일 새벽에 신문배달을 해야 한다.

발길을 돌려 김남주가 입원해 있는 고려병원 620호로 찾아갔다. 문에 면회금지라고 씌어있다. 그렇다고 돌아설 수 없다.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더니 열렸다. 무조건 한 발짝 들어섰다. 처음 보는 아내 박광숙. “아는 분이시냐고 물었다. 마침 화장실을 가려는 듯 서서 나를 보곤 분명한 발음으로 영동모기소리처럼 작게 들렸다. 수수깡처럼 말랐는데도 내가 영동에서 온 걸 기억하는 정신력을 보았다.

나는 울음이 나오는 걸 억지로 참았다. 더 이상 대화할 수도 없다. 돌아나오면서 소중히 간직해온 흰 봉투 하나 아내에게 줬다. 10만원. 이 봉투는 사연도 많다. 제주도에서 12일 한겨레지국장 세미나를 했는데, 1994116일 한겨레신문사 대표이사가 내게 보내준 모범지국 상장 및 상금으로 받은 것이다. 어디에 쓸까. 곰곰이 생각하며 아내에게도 알리지 않고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기회를 만나게 됐다.

그 후 장례식도 못 가고, 김남주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10년 만에 나는 고등학교 2학년 아들을 데리고 망월동 묘역을 찾아갔다. 하얀 조팝나무 꽃이 활짝 핀 날이다. 물어물어 묘비석 앞에 섰다. 유난히 작아 보이는 봉분 하나. 바로 옆에 있는 많은 봉분과 다르지 않았다. 조그만 유리상자 속에 사진과 책이 몇 권 있다. 봉분 곁에서 하룻밤을 자고가고 싶어도 그 놈의 신문배달 때문에 돌아가야 한다. 언제 또 찾아 올 수 있을까 기약이 없다.

그런데 5년 후, 뜻밖에도 2009518일 나는 광주 망월동으로 가게 되었다. 두번째 찾아온 김남주 묘비 곁에서, 이슬비가 부슬부슬 내려 비옷을 입고 둘러서서 묵념을 올렸다. 서울에서 단체로 관광버스로 온 민언련 회원들이다.

나는 예정에 없는 <조국은 하나다>를 낭송하겠다고 자칭 나섰다. 낭송하지 않고 돌아가면 두고두고 후회가 될 것 같았다. 휴대용 마이크를 잡고 두 눈을 감고 차분하고도 힘껏 낭송을 했다. 허공으로 날아간 내 목소리가 두 귀로 들려왔다. 곁에 영원히 잠들어 있는 김남주 시인도 들어주고 있는 것 같았다. 끝날 쯤에는 나의 두 다리가 후들 후들 떨렸다. 긴장감이 전신에 감돈다. 마지막까지 실수 없이 마쳤다.

마침 지나가던 광주 KBS 방송국기자가 카메라로 찍고 있었다. 사방에서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시종일관 지켜본 평생정민이 작은 소리로 형 잘 했어!”라고 칭찬을 해준다. 내 스스로의 시낭송 체험이다. 첫번째 찾아왔을 때 왠지 고인에게 빚을 진 것 같았다. 그 후 나는 김남주 시인에게 바치는 졸작 한편 쓰지 못해 부끄러웠다. 차라리 <조국은 하나다>를 암송하기로 작심하고 외웠다. 그리하여 모임이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시를 낭송하여 조국통일의 마음을 일깨웠다.

이 시를 책 속에 문자로 잠재워 둘 수는 없다. 이 시야말로 분단조국에 바치는 절창이고 살아있는 시다! 몇 년 전 남북의 문인들이 만나 백두산 정상에 올라 천지를 바라보며 어느 여자 소설가가 <조국은 하나다>을 낭송했다는 신문보도를 읽었다.

그런데 대구의 어느 대학교수며 시인이신 분이 망발을 까댔다. “어떻게 조국은 하나다가 시가 되느냐고 떠벌리고 비난하는 글을 인터넷에서 나는 읽었다. 곁에 있다면 그 잘난 얼굴에 침이라도 뱉어주고 싶었다. 그래 당신 같은 부로주아 학자시인이 어찌 혁명시인의 작품을 이해할 수 있으랴. 당신 같은 분들은 처음부터 아예 <김남주 평전>은 겉표지도 보기 싫겠지.

5민족 민주 열사 의인을 만나다’ -역사와 삶 독서대회-에 응모, 감상문을 써 보기로 했다. 이건 참 좋은 기회다. 무슨 책을 읽을 것인가? 당연히 <김남주 평전>이 떠올라 서점으로 달려가 펼쳤다.

처음 보는 강대석 지은이 약력을 보았다. 김남주 시인보다 두세 살 위 같다. 이 책 첫 장의 일러두기에는 김남주의 시집과 단행본 번역서까지 모두 18. 참 많이도 썼구나. 그러나 내가 갖고 있는 것은 문학에세이 <불씨 하나가 광야를 태우리라>와 고작 시집 3권이다.

이렇게 많은 책들을 다 읽어 보고 평전을 썼을 지은이의 약력도 책 맨 뒷장에 있다. 독일에서 독문학을 스위스에서 철학 미학연구를 했고 현재는 철학과 교수. 저서, 편저, 역서 모두 25. 논문 중에는 자본주의 사회의 대중매체와 예술의 자율성이 내 맘에 든다.

여기 자본주의란 뭔가? 평전 지은이는 이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자유민주주주의 허상제목의 글부터 읽어 보았다. 170쪽이다. “자유민주주의를 거부하는 김남주의 입장을 일반 독자들은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특히 자유민주주의만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가장 잘 실현할 수 있다는 식으로 제도화된 교육 안에서 길들여진 사람들은 김남주의 주장에 대해서 곧 바로 거부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민주주의의 본질이 무엇이며 왜 김남주가 자유민주주의를 거부했는가를 비교적 자세하게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계속해서 읽어 보았다. 180쪽으로 이어지는 인용문을 읽고 크게 눈을 떠 보자.

자본주의의 모순을 어느 정도 간파한 서구에서는 사회보장제도를 통해 그 모순을 극복하려 한다. 예컨대 독일에서는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수업료가 없다. 사립대학이 없고 모든 대학을 주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대학간의 격차도 없기 때문에 학생들은 학기별로 대학을 옮길 수 있다. 부모의 수입이 적은 대학생들에게는 오히려 국가에서 생활비를 지원해 준다. 또 돈이 없어 병원 앞에서 죽어 가는 환자는 없다. 실업자에게는 일정 기간 실직 보조금이 국가에서 지급되며 연금이나 국가 보조금에 의해서 노인들은 자식들에게 의존하지 않고도 여생을 보낼 수 있다. 한국은 어떠한가? 일본, 미국으로부터 세계에서 가장 나쁜 자본주의를 받아 들였다. 아니 강요되었다. 돈이 있으면 안 되는 일이 없고 돈이 없으면 되는 일이 없다. 유전무죄요 무전유죄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심적인 시인 김남주가 어떻게 침묵을 지킬 수 있었겠는가? 김남주의 자본주의 비판은 두 방향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는 자본가에 의한 노동자들의 착취를 겨냥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인간소외를 겨냥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나라는 언제쯤 독일사회의 대학처럼 발전할 수 있을까? 몇십년 아니 50년 후엔 가능할까? 이명박 정부 하는 걸 보면 백 년도 더 걸릴 것 같다.

지금까지 나는 이 지은이의 책 한 권 읽어보지 못한 나야말로 허풍쟁이랄까. 단 한 권인 이 <김남주 평전>을 읽어보지 않을 수 없다. 당장 구입해 봐야겠는데 15천원이 없다. 2년 전 과로로 병원에 입원 두 달 넘게 치료받고 나온 후로 백수가 된 나로서는 용돈을 아내나 아들로부터 얻어 써야 한다. 눈치가 보인다.

그나저나 우선 외상으로 갖다가 읽고 볼 일이다. 한때 김남주도 광주에서 서점을 운영했다는 이력을 알고 있는 서점주인 후배는 형 그냥 가져가라고 할 게다. 일단 나는 이 책 갖고 간다!” 하고 들고 나온 후로 일주일 동안 꼬박 다 읽었다. 연필을 들고 밑줄을 그어가며. 열차를 타면 차 속에서 읽었다. 펴낸 지 5년이 지난 책이다.

나는 언제나 신간을 즉시 구입해 읽지 못하고 뒷북치듯 읽게 되니 늘 남의 뒤만 따라간다. 그래서 늘 경쟁력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선진지 견학 같은 건 모르고, 돈을 벌지 못하니 신간과 비싼 책은 못 읽는 패잔병신세다.

며칠 전에도 대전의 헌책방에서 처음 본 책인데 1993년에 나온 <우리 시대의 시 읽기>(임헌영 평론집)2천원에 구입. 이 책 속에 김남주론이 들어있지 않았더라면 외면했을 거다. 이 평론에 의하면 80년대와 더불어 김남주는 “10년의 옥중생활로 전사의 단계를 지나 이젠 영웅쯤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의 호연지기를 느끼게 하는 이런 구절은 대륙풍의 이육사를 감탄시키고도 남으리라했다. 이 책 나온 지 일 년도 되지 않고 떠났으니, 90년대를 맘껏 살아보지도 못하고 정말 안타까웠다.

평전 지은이는 머리말에서 김남주의 삶과 문학을 사랑했던 필자는 김남주에 관한 전기를 써 보고 싶은 어떤 사명감과 의무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실천활동을 게을리한 한 지식인이 느끼는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이 책은 일종의 철학적 전기이다. 김남주에게 있어서 삶과 예술과 세계관은 하나로 통일되어 있으므로 그것들을 불리하여 어느 한쪽만을 기술한다는 것은 김남주의 본질을 비켜가는 일이 될 것이다.” 또한 예술과 철학의 본질이 무엇이며 그것이 인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알고 싶어 하는 독자들은 이 책에서 흥미로운 논쟁거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김남주는 49세에 부인과 아들 토일을 남겨두고 떠났다. 문학에세이<불씨 하나가 광야를 태우리라> 외쳤고, 고인이 된 지 6일째 민족예술상 수상자가 된 김남주 시인은 철학자요 사상가라는 것을 나는 이번에 읽고 깨달은 게 많다.

역시 철학교수가 쓴 평전은 인간은 시대의 산물이다라고 했다. 김남주가 태어나고 성장해 온 배경들을 주요 연보속에 보여주고 쉽게 읽히는 구체적인 일대기다. 1970년대 박정희 독재정권의 치부를 드러내주는 청계천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 분실자살 사건을 비롯한, 박정희에 대해서도 그는 일제 때 우리 독립군을 잡으러 다니고 죽이는 것을 일삼았던 일본군 장교였다. 이런 자가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 앉아 있다는 사실은 나에게 치욕이었다. 그는 또 수많은 청년 학생들의 희생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들어선 지 얼마 안 되는 민주당 정권을 폭력으로 때려눕힌 자였다. 그는 쿠데타로 정권을 강탈하면서 사회가 안정되면 다시 군인으로 돌아가겠다고 약속해 놓고 그것을 깨뜨린 자였다. 그는 정권의 부당성과 정치의 잘못에 대해 야당이나 학생들이 항의한다거나 저항하면 그것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위수령, 비상사태 선포를 밥 먹듯이 했으며 걸핏하면 휴교령, 조기방학 등을 통해 학생들의 시위를 중단시켰다. 그는 영구집권을 위한 3선 개헌을 국회별관에서 날치기 통과시키고 죽이기까지 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는 한 나라의 대통령이기 이전에 민족의 반역자였고 정치인이라기보다는 사기꾼, 협잡꾼, 폭력배의 두목 격이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불씨 하나가 광야를 태우리라>며 일갈했다.

이러한 박정희와 대결하기 위해 결단을 내렸다. 농민동학 혁명군의 전승지인 백산에 올라 기념탑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녹두장군의 노래를 부르며 자신들의 죽창이 될 것을 다짐. 마침내주저와 공포를 이겨낸 위대한 결단과 결의를 간직한 채 우리는(친구이강과) 마이산으로 들어가 천지신명에게 우리의 소망, 민족의 염원을 빌었다.” 이후 친구 이강과 반파쇼투쟁의 일환으로 우선 지하신문을 만들기 위해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 당시의 지하신문과 러시아혁명기의 지하신문을 연구하고 <함성>을 만드는 실천 작업에 착수했다.

신문제작에 필요한 경비는 이강의 전세방을 사글셋방으로 바꾸어 남는 차액으로 충당하였고, 남주가 재학시절 친하게 사귀던 2명의 여대생과 만나 우리는 이제 무덤을 팔 것이다. 무덤을 팔 도구가 필요하니 뭐든지 도와 달라고 말해 그 여학생들은 남주의 말뜻을 알아차리고 즉석에서 지니고 있던 용돈과 졸업기념 금반지 등을 아낌없이 풀어주었다는 것이다.

여기 평전을 읽으면서 나는 울먹거렸다. 김남주와 나의 공통점을 발견하고서였다. 우리 둘은 나이가 비슷하다. 그리고 아버지도 모두 농민. 일찍이 해남농민회(1977) 결성을 주도했다. 해남의 농민 윤기현을 내가 알게 된 것도 이 농민회의 불씨가 전국기독교농민회로 조직이 확대 되면서였다.

김남주 아버지는 남의 집 머슴살이. 우리 아버지도 13살적부터 꼴머슴노릇 했다. 남주가 197328세 때, 전국적인 반유신 투쟁을 전개, <고발>지 제작,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 8개월 만에 석방. 전남대에서 제적. 다시 34세 때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조직원으로 서울에서 활동 중 구속. 15년형 선고받고 광주교도소로 수감.

나 역시 떠돌이 생활을 잠시하다 노부모님 모시고 농사를 지었다. 나는 34세 결혼. 40세 때 농민시위현장에서 집시법으로 청주교도소 수감. 그러나 나의 중졸과 비교하면 대학을 다니 남주와 비교는 하늘과 땅차이다. 더구나 10년 옥살이에 비해 나의 6개월은 도저히 잽이 되지 않는다.

처음 남주를 만났을 때 나는 똥강아지 같았고 그는 큰 호랑이처럼 느꼈다. 인생의 대선배 같았고, 스승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남주가 49세에 이 세상을 떠나고부터 내 마음속에 남주의 못다 이룬 꿈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비록 부족하지만 조국이 통일되는 그날까지 남주가 살아있다는 것을 나는 시낭송으로 입증해 주리라.

감옥에서 불우의 명시들을 하나하나 써 나간 남주가 위대한 시를 쓸 수 있게 만든 감옥은 하나의 학교였다. 남주에게 시를 알게 해준 선배가 박석무(교사출신으로 국회의원이 됐다.)였다면 나에게 시를 알게 해주고, 죽어서 내게 조국은 하나다를 외우게 한 선배로서의 김남주는 혁명시인이었다.

남주의 아내가 교사였다는 것도, 소설을 쓰고 싶다는 것도 이 평전을 읽고 나는 알았다. 감옥에서 종이와 연필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칫솔을 못처럼 갈아 우유팩에 시를 새겨 썼고 그것을 간수의 눈을 피해 밖으로 내보냈다. 아니 간수가 눈치를 채고 모르는 척 눈을 감아 준 것일 게다. 10년 동안 감옥에서 250여편의 시를 썼다. 시를 통한 감옥 속의 투쟁은 상당히 관념적이었지만,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 관념은 커다란 무기가 될 수 있었다.

그는 감옥에서도 외롭지 않았다. 감옥에는 많은 동지가 있었고 감옥 밖에는 민중이 있었다. 감옥에서 안정된 마음으로 시를 열심히 쓴 것도 그의 동지이며 연이이었던 박광숙의 정성어린 사랑의 옥바라지가 힘이 되어 준 것이다. 평전 지은이의 서술이다.

김남주는 자신의 건강에 대해서도 육체가 생각대로 의지대로 움직여 주지 않으면 어떤 일을 다부지게, 효과 있게 과감하게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육체적으로 나약한 사람은 무슨 일을 끈질기게 하지 못합니다. 행동도 나약하고 신경질적입니다. 바른 인식에 기초하여 바르게 실천하는 데 있어서 아무래도 한계가 있습니다. 육체적으로 건강한 사람에 비해서 말입니다. 사회에 좋은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의 건강을 소홀히 해서는 아니 됩니다” <옥중연서>에서 강조하였건만 어찌하여 췌장암에 걸렸을까. 애통하다.

고문과 후유증으로 쇠약해진 몸을 아끼고 돌봐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석방되고서 영동은 물론이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강연하고 글 쓰고 하였으니 얼마나 자신의 몸을 도구처럼 사용한 걸까. 고등학교 다닐 때 벌써 미국문화원에서 훔쳐온 <들어라 양키들아>를 원서로 읽었다는 것을 시속에 표현한 걸 보면 육체가 무척 건강했음을 직감케 한다.

그러면서도 영어 공부에 정열을 쏟으면서 시간을 허비할 때마다 스스로에게 물었다. 도대체 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외국말에 정열을 쏟아야 하는가?” 가장 좋아했던 과목은 국어와 역사. 글쓰기. 또 감옥에선 얼마나 공부했던지 일어, 독일어, 중국어, 러시아어, 5개 국어를 능통하게 했다는 것이다. <자기의 땅에서 유배당한 자들>(프란츠 파농)등을 비롯한 4개의 번역서를 내는데 얼마큼 심혈을 기울였을까.

박광숙에게 보낸 편지에서 문제는 생애를 어떻게 무엇을 하고 사느냐에 있소. 짧고 길게 사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단 한 순간이라도 인간답게 사느냐에 있소. ‘지금 이곳에서 다시 말해서 이방인과 그 꼭두각시들 때문에 썩고 병들고 짓밟혀 만신창이가 된 조국의 산과 들, 거리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것인지 광숙이는 잘 알 것이오. 이 조국에, 날 낳아주고 날 키워준 이 조국의 논과 밭에 나는 시인으로서, 한 여인의 지아비로서 부끄럼 없이 내 순결을 바치고 싶다오. 이 순결은 본능적으로 혁명적인 민중의 의식을 잠재우는 아편으로서의 종교에 물들지 않아야 하고, 가정이라고 하는 편협한 울타리 안에서만 인간적인 기쁨과 행복을 찾으려고 하는 소시민적인 에고이즘에 길들여지지 않아야 하고, 특히 나의 경우에는 인텔리겐차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무정부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생활과 퇴폐적인 작품에 유혹되지 않아야 할 것이오. 한 마디로 말해서 내가 말하는 순결성은 혁명적인 휴머니스트로서의 그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전투적이고 조직적인 인간이어야 하는 것이오.”<옥중연서>

이렇게 확고부동한 자세로서의 영원한 혁명가였고, 그는 부르주아 지식인들의 가슴 속에 언제 내려칠지 모르는 무서운 칼로서 살아 있다. 뚜렷한 세계관을 갖고 있는 위대한 시인이다. 평전을 읽고 나는 생각하건대 지금까지 남주가 살아있었다면 온 세계에 알리고픈 시인 대통령이 되지 않았을까. 우리 강토 위에 조국은 하나다를 쓰면서 일생을 바쳤고 그의 글씨가 지금도 삼천리 방방곡곡에 수놓여 있다고 평전 지은이는 칭송했다.

김남주는 0.7평 정도밖에 안 되는 좁은 공간의 감옥에서 체계적인 독서를 해냈다. 그리하여 자본주의 국가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었고, 자본가들은 거머리들이고, 소의 뒷다리에 붙어 쇠의 피를 빨아먹고 있는 진드기며 이러한 징그러운 흡혈귀들이 농민, 노동자들의 피를 빨아먹는다. 이 자본가들에게 피와 땀을 빨리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야 산적과도 같은 독재자들도 없어질 것이라고 어머니에게 얘기해 드리라고 동생 덕종에게도 편지를 썼다.

내가 감옥에서 9년이나 15년씩이나 갇혀 있어야 하는 것은 이 진드기들, 거머리들, 흡혈귀들을 증오하고 저주했기 때문이라고. 꼬챙이로 이놈들을 찔러 죽이라고 노동자와 농민들에게 호소했기 때문이라고. 이놈들 때문에 우리 민족은 남의 나라의 식민지가 되어 치욕의 대상이 됐고, 이놈들 때문에 통일이 안 되고, 이놈들 때문에 민주주의가 안 되고 있다고 했다. 인간은 그 노동 때문에 동물과 구별이 된다. 특히 육체노동이야말로 인간을 인간이게 하고 인간의 자질을 높여 준다고. 나는 그래서 주문처럼 외우고 있단다. ‘노동에서 멀어질수록 인간은 동물에 가까워진다.’는 말을. 노동이 고역이 아니고 생활의 으뜸가는 기쁨인 사회를 만드는 게 내 유일한 희망이란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남의 노동으로 기생충 생활을 하고 있는 거머리와 진드기를 지상에서 없애야 한다. 이들 기생충들은 자연의 고질일 뿐만 아니라 사회의 고질인 것이다. 박멸하자!” <불씨 하나가 광야를 태우리라>에서.

이 평전은 철학적 시각으로 쉽고도 명쾌하게 정리해준다. 누구를 위한 예술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땅에 자본주의가 정착되면서 부르주아 예술가들은 대부분 자본주의를 직간접으로 옹호하는 예술을 발전시켰지만 그 중 일부는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예술 방향을 우리는 비판적 사실주의라고 말 한다이것은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된 19세기에 나타난 시민계급의 사실주의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김남주는 시를 쓰기 위해서 문예 이론을 학습하지 않았다고 했다. 특별히 문장론, 수사학, 문예이론 서적 따위를 일부러 읽은 적은 없단다. “정평이 나 있는 고전을 읽음으로써 시작의 도움 같은 것을 얻곤 한다. 나는 표현 능력, 기발한 발상법, 완벽한 형식 따위가 뛰어난 문학작품을 생산해 내는 기본적인 요인이라든가 시적 재능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위대한 작품을 창조해 내는 유일한 길은 위대한 삶인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그 길이란 적어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의 비인간성, 부패와 타락에 대한 전면전에 시인 자신이 몸소 참가하는 길밖에 없는 것이다. ‘위대한 고전위대한 삶이 그의 시를 탄생시키는 두 근원이다. 예술 작품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은 형식과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 만사의 아름다움은 형식과 내용의 통일에 있다. 내용과 형식 중 어느 것을 더 중시하고 어느 것을 덜 중시할 수 없는 것이다. 문제는 내용과 형식의 변증법적인 관계이다. 내 경우에 있어서 내용이 먼저 있고, 형식은 나중에 있다. 상식적인 이야기지만 물론 그것은 상호 침투한다” <시와 혁명>.

무엇보다도 김남주는 문학하는 사람은 올바른 역사관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올바른 세계관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옥중연서>

다시 평전 지은이는 말하길 올바른 내용과 올바른 형식이 유기적으로 결합될 때만 불후의 예술이 탄생한다. 유기적인 결합은 유기적인 삶으로부터 발생한다. 김남주는 항상 예술이 발생하는 토대가 민중의 삶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올바른 예술은 삶으로부터 저절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본질과 과정을 올바르게 파악하는 작가만이 올바른 작품을 창작할 수 있다또한 내용 없는 형식은 공허하고 형식 없는 내용은 산만하다. 예술의 독특한 특성이 형식의 아름다움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형식의 아름다움이란 결국 내용과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움이다. 내용이 빈약한 시는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분명히 지적해야 할 것은 순수예술이라는 개념이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발생한 범주에 속하며 원래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다. “예술은 원래 순수하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성서는 하늘에서 떨어진 진리다라고 믿는 사람처럼 맹목적이고 우둔하다. 역사적으로 자본주의사회가 정착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다시 말하면 고대나 중세에서 순수예술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스에서는 예술이 인간 도야의 한 수단이었고 중세에는 신의 섭리를 더 잘 표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예술가를 자본가의 심부름꾼으로 만들면서 예술의 고유한 특성을 짓밟으려 하였고, 이러한 위험을 벗어나려 한 것이 순수예술운동의 커다란 동기였다. 그러나 이 운동은 처음부터 환상적이었음을 밝혀주고 있다. 평전 지은이의 지적이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빈부의 차이가 늘어나고 자본가에 의한 노동자들의 착취가 심화됨에 따라 인간 해방을 부르짖는 노동운동이 일어나고 그것을 뒷받침해 주는 과학적 유물론이 체계화되어 가자 부르조아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은 스스로의 기득권을 방어해야 될 처지에 직면하였다. 이들은 종교, 관념론철학, 순수예술을 무기로 사용하였다. 처음에 어느 정도 긍정적인 의미를 지녔던 예술의 자율성 운동이 이제 반동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하였다. 자본의 덕분으로 주관적인 자유만이라도 향유할 수 있다고 생각한 부르조아 예술가들은 예술을 정치, 사회문제로부터 분리시키면서 자본주의를 간접적으로 옹호하기 시작하였다. 심미주의도 순수예술의 한 주류를 이룬다. 많은 사람들이 서정시를 거부한다.”

김남주의 고백이다. “나는 시라는 것을 내가 헤쳐 가야 할 길을 위한 무기 이외의 것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가능하다면 내 시에서 소위 서정성을 빼버릴려고 의식적으로 애를 쓰기도 했는데 그것이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되었는지 모릅니다. 특히 내가 제거하려고 했던 서정성은 소시민적 서정성, 자유주의적인 서정성, 봉건사회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고리타분한 무당굿이라든가 판소리 가락에 묻어 나오는 골계적, 해학적 서정성이었습니다.” <옥중연서>

그렇다고 김남주가 모든 서정성을 배제한 것은 아니다. 인간 해방을 위한 투쟁의지를 도색하거나 민중의 관심을 오도하고 역사의식을 희석화하는 서정성을 지탄한 것일 뿐. 민중이나 혁명 투사에게도 서정성은 있다. 예컨대 죽음을 앞에 둔 빨치산의 사랑 같은 것이나 김남주의 시 대표적인 조국은 하나다를 눈감고 직접 암송하거나 낭송해 보면 서정성을 느낄 수 있는 절창의 시임을 알 수 있다.

여기 참여문학순수문학으로 분류할 때 엄밀한 의미에서 순수문학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그 시대의 지배 세력을 간접적으로 옹호입장과 거기에 간접적으로 저항하는 입장이다. 사실은 순수라는 모습의 가면을 쓰고 있기 때문에 그 정체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친일 문학가들이 시세가 불리해지자 순수문학가로 둔갑하여 은신하는 경우도 있고, 반독재 투쟁에 열렬했던 참여문학의 기수들이 가족 등 일신상의 이유로 체념에 빠져 감상주의나 신비주의로 기우는 경우도 있다. 아시아 민족을 파멸로 몰아넣은 전범자 히로히토가 순수시를 썼다고 하여 그 작품을 높이 평가할 사람 어디 있나 손들어 보라. 유신 독재자 박정희가 새마을 노래를 짓거나 시골 농촌의 아름다움을 시로 표현 한다해서 거기에 감동할 사람이 있다면 손을 들고 200911월 오늘 광화문 네거리에서 새마을노래를 자랑스럽게 불러보라! 지나가는 사람들이 쳐다보고 무엇이라 말하겠는가?

절대적으로 현실 속에서 순수한 예술이란 있을 수 없다. 순수한 학문이나 순수한 철학이 있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인간은 사회를 떠나 존재할 수 없다 순수란 많은 경우 스스로의 정체를 숨기기 위한 은폐이고 위장일 뿐이다. 순수예술이라는 이름 아래 민중을 배반하는 예술가들이야말로 숭악한 사기꾼이다.

이들에게 속지 말자! 우리 주변을 다시 한 번 돌아보자. 가진자, 권력자, 엘리트 등을 직접, 간접으로 옹호하는 입장에 서서 현상을 유지하려 할 때 우리는 그것을 반휴머니즘적인 예술로 질타하게 된다. 예술 지상주의를 비판한 다음과 같은 김남주의 시 <예술지상주의>를 음미해 보자.

예술지상주의 그것은 애초에

이승은 떠남의 세계였고 현실은 네미씹이었다

그에게는 예술지상주의자에게는

문명은 파괴되어야 할 적이었고

자학과 광기와 절망이 삶의 전부였다

그에게는 나이도 없었다

예술이라면 제 애비도 몰라보는 후레자식이 예술지상주의였다

염병할! 그놈의 사후의 명성이란 것도

그에게는 부질없는 무덤이었다

예술이라면 예술 아닌 모든 것이

저주해야 할 대상이었다 쓰레기였다

부르조아 새끼들의 위선이 거만이 구역질나서 보들레르는

자본의 시궁창 파리 한복판에 악의 꽃을 키웠다

랭보는 꼬뮌 전사의 패배에 절망하여

문명의 절정 빠리를 떠났다

시에 똥이나 싸라 침을 뱉고

대한민국의 순수파들 절망도 없이

광기도 자학도 없이 예술지상주의를 한다

수석과 분재로 예술지상주의를 한다

학식과 덕망의 국회의원으로 예술지상주의를 한다

자르르 교양미 넘치는 입술로

자본가의 접시에 군침을 흘리면서 예술지상주의를 한다

에끼 숭악한 사기꾼들

죽으면 개도 안 물어가겠다

그렇게 순수해가지고서야 어디 씹을 맛이 나겠느냐

-사상의 거처-

이렇게 작품 속에서 구체적인 삶과 이념 사이의 변증법적인 연관성을 김남주만큼 날카롭게 파헤친 시인은 흔하지 않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는 미지근한 시들이 결코 인간을 해방시키는 무기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김남주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거목 시인이었기에 평전 저자는 사명감으로 집필하면서 옷깃을 여미고 지금 우리 곁에 없는 김남주가 얼마나 그립고 보고팠을까?

혁명시인 김남주 평전을 쓴 지은이 강대석 교수는 누구일까. 이 책의 제2부 투쟁의 무기, 차례에서 제목들을 열거해 보는 것도 독자들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고, 지면도 줄일 수 있겠다. 민족시인과 민중시인, 자유민주주의의 허상, 유물론과 관념론, 종교의 본질, 누구를 위한 예술인가? 이론과 실천, 나는 투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조국은 하나다, 세계의 민중문학, 욕의 미학, 자주민주통일.

이처럼 좋은 책을 한 번 읽고 감상문을 쓰겠다고 덤벼든 것 자체가 무모한 짓 같다. 깊이 생각하고 최소한 3번은 읽고 써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응모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그저 5년 전에 나온 이 책을 모르고 있는 독자들에게 권유하고 상기시켜 준다는 생각으로 이렇게 적어 보는 것이다.

이 책 맺는말첫머리에 김남주는 비평가들을 위해서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을 위해서 시를 쓴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 말은 그의 시가 비평이나 해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그의 시 속에 이미 해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뺑뺑 돌리거나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화끈하게 표현한다.”

그리고 저자는 이 책을 남한의 제한된 독자들을 겨냥해서가 아니라 북한, 아시아 그리고 세계적인 민중들을 염두에 두고 썼다는 것을 강조했다. 70년대에 김지하, 80년대에 황석영, 노동자 시인 박노해 등도 짚어보면서, 김남주는 그의 시와 투쟁을 통해서 수미일관한 세계관과 역사관을 갖는 것이 시인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얼마나 중요한가를 생생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를 ‘20세기의 가장 완전한 한국인혹은 한국의 체 게바라라 불러도 될 것 같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가 사라지는 세상을 실현하려 하였다. 그가 염원했던 해방의 날이 올 때까지, 우리 모두 밝은 미소를 던지며 자연과 인간과 사회의 아름다움을 노래할 수 있는 날이 올 때까지, 이 땅에 자주민주통일이 실현될 때까지 우리는 항상 그의 이름을 되새기며 <김남주 평전>은 쉽게 읽혀지는 사학 입문서’ ‘철학 입문서’ ‘사회과학 입문서를 한 권 속에 통합 시켜 놓은 느낌을 받았다. 누구에게나 감동을 안겨 줄 것이다. 나는 앞으로도 열 번을 더 읽고 싶은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읽고 나니 김남주와 나의 관계는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해 6월의 촛불시위 때 광화문 교보빌딩 뒷골목에서 늦은 밤 잠시 쉬면서 덥고 갈증이 나서 대여섯 명이 길바닥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데 누군가 내게 시낭송을 했다. 나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일어나 조국은 하나다를 유행가를 부르듯 힘껏 소리쳐 낭송했다.

지나가던 낯선 사나이가 걸음을 멈추고 끝까지 듣고 있더니 다가와 사인을 해달라고 했다. 별일 다 보겠네. 돌팔이 시낭송가에게 내가 사인을 해달라니, 한사코 요구하여 명함은 없고 전화번호와 이름을 적어 주었다. 그리고 서로 연락이 되고 안부를 묻고, 그가 사는 곳은 경기도 포천에 놀러 오라고 하여 갔다.

올해 추석 전에는 붙잡고 놓지 않아 사흘 밤은 자고 왔다. 그는 내게 친형처럼 되어 달라고 했다. 이리하여 우리는 임꺽정 속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의형제를 맺게 되었다. 그의 나이 52. 이 동생도 김남주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고, <조국은 하나다> 시집을 갖고 있었다. <한겨레>를 오래도록 구독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겐 철없던 20대의 순정 어린 불장난으로 말 못 할 마음의 상처를 갖고 있었다. 어떤 종교의 힘도 치유시켜 줄 수 없는 집착속에 딸이 하나 있었다. 생부가 되었는데 키워주지 못했고 해외입양을 보냈다. 그리곤 30여년을 죄책감에 빠져 살았다. 그 딸아이가 25세가 됐다. 꼭 찾아가 잘못을 뉘우치겠다고 했다. 그는 지금 혼자 살고 있다. 그 딸을 나와 함께 만나러 가지면서 최근에 여권을 발급받았다고 보여주었다. 아메리카 쪽이 아닌 유럽 쪽이다. 그 딸도 아버지를 보고 싶어 하고 있다고 입양기관이 알려왔단다.

조국은 하나다시는 이렇게 또 다른 만남의 연결고리가 되어 주고 있다. 금강산이나 개성공단에 가게 되면 나는 힘차게 낭송하리라. 때마침 김남주의 고향 해남에서는 김남주문학제가 10회째 행사가 열린다는 소식이다. 전남해남군 삼산면 봉학리 535번지, 시인의 생가 흑백 사진 속의 방에 책꽂이에는 책이 가지런히 꽂혀있다. 이곳에서 농민회를 결성했다지. 달려가 동생 덕종이 손을 잡아 보면 내 눈에 눈물이 펑펑 쏟아질 것 같다.

16년 전 살아있을 적에 <우리 시대의 시 읽기> 속의 23명 시인들은 작고하신 분도 여럿 있다. 아직도 아흔 살 청년이란 이기형 시인(93)을 뵌 지 2년이 지난 것 같다. 근황이 궁금하다. 김남주 시인이 생존해 있다면 지난해 촛불항쟁때 안방에 들어앉아 있지 않고 투쟁의 깃발을 들고 나왔다가 지금쯤 다시 감옥에 들어가 있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실제로 통일운동가 늦봄 문익환 목사는 칠순에도 불구하고 거듭 감옥에 수감되지 않았든가.

이렇게 독재와 싸우다가 끝내 기필코 대한민국의 시인 대통령이 되지 않을까. 어디로 봐도 지금의 이명박 대통령보다 못하진 않으리라. 우리의 위대한 시인, 혁명가 김남주 시인의 품성일진대 그 누가 빨갱이타령으로 색깔을 뒤집어씌우려 할 것인가? 올해 오월, 눈앞의 더러운 권력들 보기 싫어 미련 없이 떠나가신 노무현 대통령이 남긴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라고 하신 말씀은 어쩌면 김남주 시인이 일찍이 농민회 조직하며 일어섰던 마음과 똑같다.

두 분 모두 동갑내기 때문일까. 편협한 고정관념의 종교가 말하는 천국이 아닌 저세상 하늘나라가 있다면 아마 두 분은 그곳에서 분명히 만났을 거다. 서로 얼싸안고 우리는 이겼다면서 환희에 벅찬 눈물을 흘리며 엉엉 소리쳐 울지 않을까. 이렇게 두 분은 죽어서 더욱 나와 가까워지는 영원한동지여, 친구 같다.

인터넷시대라더니, 이 감상문을 쓰다가 응모마감을 사흘 앞두고 우연히 발견했다. 10회째 맞는 김남주 문학제가 열린다. 이 기회를 잡아야겠다. 7(토요일) 오전에 해남에 도착하기 위해 조치원서 목포행 호남선 밤열차 무궁화호를 탔다. 이 나라 정치 권력자들은 통일이란 이름마저 싫은 건지 통일호 열차 이름마저 없애버렸다. 내가 만일 대통령이라면 박정희 독재자를 떠올리게 하는 새마을호 열차는 이미 바꾸었을 것이다. 아니 다시 통일호 열차 이름을 부활시키련만. 이제 통일은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일까.

나로서는 교통비도 적지 않아 KTX는 안탄다. 느리게 가더라도 사라진 통일호를 생각하며.... 3시 넘어 목포에 도착. 여기서 해남까지는 또 1시간 넘게 버스를 타야 한다. 또 해남터미널에 내리면 어떻게 길도 모르는데 생가까지 갈 것인가? 초행길은 두 눈 뜨고도 장님처럼 물어물어 가야 한다. 택시를 타면 몇 천원이면 잘 데려다 주겠지. 그러나 그렇게 찾아가고 싶지는 않다. 그런 돈 모우면 헌책을 몇 권 살 수 있다.

마침내 낯선 해남땅 처녀지첫 발걸음을 옮기면서 전화를 걸었다. 그는 농민운동 출발로 나와 알게 된 건 30년 지기, 윤기현. 지금은 유명해진 동화작가 됐다. 그는 바쁜 일이 있어 서울에 머물고 있다면서 우선 해남 교육청 정문 앞 건물 3층에 농민회 사무실이 있다고 알려 줬다. 멀지 않아 걸어가면서 생각이 떠올랐다. 김남주 생가가 어떻게 생겼을까.

지난 주 토요일 나는 김해 봉하마을을 찾아 갔다. 첫 번째 찾아간 건 노 대통령 당선된 첫해 취임식하기 전이었고, 두 번째 간 것은 서거 후였고, 이번은 가을걷이 행사에 참석하고 묘역을 참배하기 위해서였다. 버스가 자주 없어 한 시간 정도 물어물어 생가까지 걸어갔다. 참 어처구니없는 건 경비들이 이제는 생가도 못 들어가게 했다. 생가라지만 옛 가옥은 아니고 마당만 옛날 그대로다.

그 동안 내가 살고 있는 영동에서 가까운 보은의 오장환 시인 생가도 옛집은 없고 복원된 새집이다. 마당만 생가인데 쓸데없이 담장을 쌓아 답답한 풍경이다. 옥천의 정지용 생가도 옛날 가옥이 아닌 어색한 풍경이다. 기념관은 그럴 듯하다. 여기서 박정희 생가는 내가 가 볼 필요가 없다. 그런데 육영수 생가는 정지용 문학제 행사 참석하고 가 보았지만 이곳도 생가는 없고 옛 마당에 연자방아만 옛 것이다. 생가 복원 공사로 구중궁궐처럼 번듯하게 지어놨는데 앞으로 관리비만 많이 들지 않을까. 그래서 애물단지가 될지도 모른다.

각설하고, 해남농민회 사무실을 찾았다. 문이 잠겨 있지 않다. 들어가 사방 둘러봤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김치 통에는 김치가 가득 채워져 있다. 9시가 넘었는데 아무도 없다. 난감하다. 다시 전화를 걸었다. 강진의 농민운동가 김규식은 세월 따라 지금은 강진 문화원장이 됐다. 바쁜 일정 때문에 해남까지 올 수 없다면서 김남주 시인의 동생 덕종에게 연락해 주겠다고 했다.

잠시 후 농민회 사무실 전화가 울렸다. 덕종이다. 처음 듣는 목소리. 반갑다. 지금 목포에 있는데 오후 2시에 생가 행사장으로온다는 것이다. 다시 나의 손전화가 울렸다.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농민운동을 하다가 해남에 눌러 앉아 YMCA 활동을 해온 민인기 동지였다. 그리고 곧 농민회 사무실로 와서 만났다.

이제부터 장님 노릇 안 해도 되겠다. 해남은 대한민국의 행정단위지역으론 가장 넓은 땅이다. 제주도 크기랑 같단다. 26년 전에는 16만이었는데 지금은 8만이라고 했다. 내가 사는 영동군 5만 명과 비교해 보았다. 해남군청 앞에는 마침 해남 문화예술제가 23일 열리는 축제분위인데, 한편의 군청 정문 앞에는 농민들이 수확한 벼를 쌓아 놓았고, 펼침막에는 쌀값은 농민의 목숨 값이다라고 빨간 글씨로 씌어 있다. 해남농민들은 정부대책을 촉구하며 농성을 하고 있다. 또 읍에서 4킬로 떨어진 분교에서는 당국이 폐지시키려고 하는 분교를 읍 사람들이 단결된 힘으로 살려냈다. 6회 용전분교 새날 문화축제가 열리고 있다.

여기서 점심밥과 막걸리를 몇 잔 마시고 오후 2시 김남주 생가로 갔다. 이미 덕종이 와 있었다. 한 눈에 봐도 남주보다 키가 컸다. 얼굴빛이 검다. 수염을 깎지 않았다면 소설 임꺽정에 나오는 꺽정이 같다. 첫인사로 덕종의 가슴에 포옹을 했다. 형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 어쩌면 농사 짓고 농민운동 하느라 장가를 들지 못한 것은 아닐까. 살고 있는 집이 어디냐고 물었다. 목포에 살며 아내가 중학교 교사로 전교조 간부 일 때문에 오늘 문학제도 참석 못 한다고 했다.

나는 최근에 읽은 <김남주 평전>에서 본 생가 사진에 대해 물었더니 옛집은 허물고 새로 지은 초가집은 낯설고 정겹지가 않았다. 오색 깃발에 쓴 시들이 춤을 춘다. 골목길 앞 넓은 밭에는 초록의 감자 잎이 싱싱하고, 마늘잎이 푸르다. 생가 뒤는 대나무 숲이 우거져 바람에 흔들리는 대숲 소리가 함성처럼 들린다. 여기 저기 돌 시비엔 노래등이 새겨져 있다. 놀라운 사실은 돌로 0.7평 감옥을 체험할 수 있도록 되어있고, ‘조국은 하나다긴 시를 내 키보다 훨씬 높은 철판에 구멍을 낸 글씨는 세로로 새겨져 있다.

이 시비를 구상한 사람의 글씨체도 독특하다. 나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묘사 할 수가 없다. 직접 찾아와 두 눈으로 목격하지 않고선 그 누구도 설명할 수 없는 철의 시비는 김남주 시인의 조국의 하나다는 세계 어디에도 없을 조형 작품이다. 나도 여기선 장담하건대 대한민국에서 조국은 하나다시를 외우는 이가 있으면 직접 이곳에 와서 대결해 보자.

나는 또 두 발로 해남 땅에 찾아와 새롭게 알게 된 또 하나의 사실은 <김남주 평전>을 쓴 강대석 교수가 덕종이의 손위 처남이라는 것. “어떻게 연애 결혼했느냐, 나는 덕종에게 물어보았다. 그는 반반이라고했다. “저녁 6시경. 김남주 기념사업회가 준비해 온 저녁식사는 푸짐했다. 당연히 막걸 리가 나왔다. 서로 인사 나누며 술을 권한다. 종이컵으로 석잔 마셨다. 소주보다 백번 더 좋은 농주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풍물패의 길굿과 시춤, 시낭송이다. 군수도, 노인회장 할아버지도 김남주의 시를 낭독했다.

중간에 사회자는 내 이름을 불렀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인사를 했다. 일어난 김에 시낭송을 하겠다고 했다. 예정에도 없는 순서다. 나는 이 때다 싶어 앞으로 나가 마이크를 손에 빼들고 조국은 하나다를 어눌하게 시작했다. 왼손으로 들고 하다가 팔이 무거워지는 것 같아 오른 손으로 바꾸며 들고 했다. 좌우를 둘러보며, 무대를 비추는 강열한 조명에 눈이 부셔 옆으로 피하면서 했다. 지루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듣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로 집중되었다. 나는 점점 감정이 복받쳤다. 마지막 대여섯 행을 이어가지 못했다. “좀 흥분이 되어 여기서 마치겠습니다박수가 터져 나왔다. 누군가가 하이라이트였다고 했다. 어떻게 긴 시를 다 외웠느냐고 했다. 다행이랄까. 기분 좋다고 막걸리를 마구 마셨다면 못했을 거다. 그리고 밤차 타고 오면서 설레이는 마음에 책을 읽고 하다가 잠을 제대로 못자고 피곤했고 막걸리도 몇 잔하여 몽롱했고, 자꾸만 졸리는 상태였다.

나의 시낭송을 듣고 난 어느 시인이 한 권 남아 있는 자신의 시집이라며 사인을 해 주었다. 시낭송을 마치고 나니 막걸리 한 잔 더 하고 싶었다. 생각 같아선 두 병 정도 마시고 싶다. 그러나 절제해야 한다. 술 취해 쓰러지는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 앞에 마주 앉은 분이 책속에서 알고 있던 이강 친구라고 했다. 초면 인사였다. 그는 감옥을 3번 갔다 왔다고 옆에서 덕종이 알려줬다. 또 경찰서 수사과 팀장도 옆에 앉았다. 서울의 촛불집회에서라면 감히 얼굴도 얼씬 못하겠지. 그러나 여기선 모두 한 동지다.

이곳 해남에선 <한겨레>빨갱이 신문’ ‘김대중 신문이라는 말은 듣도 보도 못한 정신병자나 하는 소리다. 12시쯤 정리가 되면서 읍내로 나가 한 잔 더 하고 노래방을 가는 듯. 나도 따라가고 싶지만 포기했다. 피로한 덕종이 동생과 행랑채 방에서 담소를 나누다 자야겠다. 그런데 일흔 한 살이신 백장노장의 정광훈 형님 역시 이 고장 출신으로 전국 농민대회를 휩쓸고 다니셨는데, 여전히 오늘도 만날 수 있었고, 읍내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내 곁에서 함께 자게 되었다.

이튿날 오전 덕종은 텃밭에 심은 생강을 뽑고 마늘과 배추 밭에 물을 주었다. 10마리 큰 닭이 닭장에 있어 음식물 쓰레기를 모이로 준다. 그리고 밭 옆의 컨테이너 창고에 들여다보니 살림살이와 예전의 창작과 비평등 많은 책들이 있다.

여기에 <시와 철학>이 있어 펴보니 첫 장에 ‘1973531박광숙이렇게 적혀 있다. 남주가 <양키들아 들어라>를 훔쳐 왔듯이. 내는 가져왔다. 덕종이 말에 생가 복원 공사 하느라고 책이 사방 흩어져 제대로 보관이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행랑채에 있고, 또 강화에서 중학교 교사인 형수님 댁에도 있다.

성공회대학 영문과에 다니고 있는 토일을 나는 아직 한 번도 못 봤다. 올해가 가기 전에 볼 수 있을까? 나는 조국은 하나다시비 앞에서 나이가 나보다 한 살 많은 남주 시인의 영원한 아우가 되어 주겠다고 맹서했다. 김남주는 내 마음 속에 살아있는 시인 대통령으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이주형 전 한겨레신문 영동지국장 ./사람일보 http://www.saramilbo.com/1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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