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詩)/괜찮은 詩

즐거운 일

by 이성근 2023. 12. 25.

천국의 - 임보/ 천국의 계단 이준관/ 천국 가는 길 유홍준/ 내가 버린 예수 이승하/ 줄포 여자-김명인/ 대설주의보- 이종형/ 그해 대설주의보 허연/ 북어北魚 - 김중일/북어 이재무/ 연가·2, 셋째 형님-고운기/ 가끔, 그럴 때가 있다 윤희상/ 쓰러진 나무에 대한 경배 황규관/ 쓰러진 것들을 위하여-/ 신경림

세속도시의 즐거움 1,2, 바퀴벌레 一家, 밥숟갈을 닮았다, 때밀이수건 최승호/

공부 김사인/ 공부 기계 박성우/ 안골 가는 길-박형권 / 지문, 집으로 가는 길, 내가 던진 물수제비가 그대에게 건너갈 때 -권혁웅/ 결이라는 말 문성해/ 이슬의 전쟁- 김승희/ 어떤 통화 박성우/ 어떤 마을 도종환/ 즐거운 일 이동순/ 즐거운 빚잔치 정낙추/ 즐거운 세탁 박영희/ 즐거운 추억 고광헌/ 벽 너머 남자- 김해자

설해목雪害木,가로등, 뿌리도 가끔 날고 싶다, 박일만/ 옛날 우표 이대흠/ 옛날 애인 류근/ 옛날 사람 곽효환/ 옛날의 그 집- 박경리/ 밑닦이에 대한 유감 이중기/ 이상한 여자 김인육/ 외할머니 서정홍/ 외할머니 나태주/ 외할머니 마종기/ 외할머니 박경리/ 환한 죽음 이대흠/ 등잔불 아이들 맹문재/ 당신의 운명 송경동/ 슬픈 운명의 노래 최종천/ 국밥 이재무/ 불면의 일기 최영미/ 위험한 사람 이성선/ 향기로운 집들이 길 되어 사라지다-고재종

https://www.youtube.com/watch?v=lglk3utO6v4

천국의 / 임보

 

세상의 종말이 왔다

이 지상에서 제일 소중한 것 하나씩만 가지고 저 세상에 가도록 허락했다

 

어떤 자는 무거운 황금 뭉치를 낑낑대며 지고 간다

어떤 자는 애인의 손을 잡고 시시덕거리며 간다

어떤 농부는 씨앗 주머니를 소중히 안고 가기도 하고

어떤 어부는 큰 그물을 메고 가기도 한다

말을 타고 가는 자도 있고

수레를 끌고 가는 자도 있다

 

당신은 무엇을 가지고 가겠는가?

 

그런데

천상의 입구에 이르렀을 때

한 사람에게만 문이 열렸다

 

그는

병든 노모를 업고 온 가난한 등대지기였다.

 

 

천국의 계단 / 이준관

 

짐을 들고 가는 여자가 언제 이 지긋지긋한 동네를 떠나노 하고

투덜대며 올라가는 계단이 많은 동네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 계단에서 하늘과 가위 바위 보 놀이를 한다

하늘이 이기면 한 계단 내려오고

아이들이 이기면 한 계단 올라가고

 

계단을 올라가면 그 계단 끝집에는 해바라기 핀다

해바라기에게

금빛 시간의 태엽을 감아주는 태양

아이들은 가을이면 손에 해바라기 씨를 받아

태양에게 돌려준다

태양은 그 꽃씨를 골고루 동네에 뿌려준다

 

일숫돈을 받으러 올라가는 사람의 구두에는

씹다 버린 껌처럼 찰싹 붙어 떨어지지 않는 계단이지만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 이름을 외우며 올라가는 아이들에겐

침이 꿀떡 넘어가는 무지개떡이다

 

강아지가 배를 깔고 엎드려 잠을 자고 간 계단에 앉아

아이들은 무릎에 턱을 괴고 머언 하늘바라기를 한다. 그리고 저녁에는 다 닳은 몽당 크레용으로

친구에게 줄 생일 카드처럼 서쪽 하늘을 빨갛게 색칠한다

 

아이들이 탈 썰매를 끌고 온 순록의 뿔처럼

전봇대가 서 있는 눈 오는 날에는

아이들은 계단 옆에 눈사람을 세워둔다

그러면 방울 모자를 쓴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하이얀 양초 같은 집집마다 불을 켜 주러 계단을 올라온다

 

아이들이 아침에서 저녁까지 신나게 불어대는

구멍이 뿅뿅 뚫린 하모니카 같은 계단

그 계단에 나도 발을 올려본다

해바라기나 강아지나 아이들만이 만질 수 있는

하늘을 만지러

 

 

천국 가는 길 / 유홍준

 

택시기사 박원호 씨는 고달픈 사람

저승에 당도하지 못한 영혼처럼 헤맸네 이승의 거리

안마소 앞 네거리에서 세 사람의 승객을 태웠네

천국으로 가는

짙은 썬글라스 낀 안마사들

반듯한 콧날에 가지런한 차림새지만 소경이라네

마귀의 옷과 귀신의 음식을 파는 백화점 거리를 지나자

천국까지의 거리 물어왔다네

헤매도는 영혼이 측량할 수 없는 거리……

택시기사 박원호 씨 길라잡이 되지 못해 얼버무리는데

직진하다가 좌회전 두 번 하면 닿는다는 장님 안마사들

천국으로 가는 길 빤히 알면서 공연히 물은 듯하네

장님이 아니었나요? 룸미러 속을 들여다보며 되물으면

그럼요 우리가 정말 못 보는 줄 아셨어요! 웃음 화사한 대답

사람이 어찌 눈으로만 보나요 먹어보고 입어보고 만져보고

느껴보잖아요 그리고…… 믿어보잖아요 택시기사 박원호 씨

천국 갔다 돌아오는 길

그 길 잊어먹지 않으려고 마음속 이정표들 꼭꼭 새겨두었네

그곳 그다지 먼 길 아니었다네

 

내가 버린 예수 / 이승하

 

귀갓길 지하철에서 예수 만난다

졸고 있는 내게 다가와 종이 내민다

자필로 또박또박 쓴 사연이 아프다

믿으시오 믿는 자는 천국에 가리니

 

한밤중 뒷골목에서 예수 만난다

서 있는 내게 다가와 손 내민다

배고파요 천 원만 주세요 만 원밖에 없어 손사래 친다

적선하시오 베푸는 자는 천국에 가리니

 

집 없는 이들은 어디로 가나

저마다 몸무게보다 더 나가는 리어카 끌며

올라가는 가파른 골고다 언덕

땀 흘리는 예수들이 겨울엔 더 많다

 

내가 버린 예수

매일 만났었구나 매일 헤어졌었구나

정신병원에 면회 가도 교도소에 면회 가도

만날 수 있는 수많은 예수 그리스도여

 

 

줄포 여자-김명인

 

낡은 유행가 좇아가느라 나 거기 주저앉았다

희망이 숨차느냐고 놀고 먹는 지 벌써 이태째,

포장 친 간이 주점에서 보면 바다는

넘을 고개도 없는데 보리 고랑 가득 펴고 있다

남녘엔 봄 지나가고, 몇 년 만의 외출이냐고

한 가족이 아직은 시릴 모래톱에 맨발을 적신다

짧은 봄날에는 채 못 피우는 꽃봉오리도 많다

시절이 저 여자에게는 유독 가혹했을 것이다

접시에 담겨서도 꼼지락거리는

잘린 낙지발 중년이 입 안에서 쩍쩍거릴 때

목포에서는 한창 잘 나갔지요, 거름을 파고들었던

홍어찜이 이제서야 콧속을 탁 쏜다

여기도 예전의 줄포 아니라요, 어느새 경계 넘어버린

세월에도 변하지 않는 것 입맛이라고

저 여자, 버릇처럼 손장단으로 이길 수도 없을 붉은

봄꽃 피워 문다

 

 

대설주의보/ 이종형

 

종일 바람이었다

까치밥 하나 남기지 않은 감나무

잠시 앉았다 일어서는 바람의 무게만으로도

흔들리고 휘어지던 빈 가지들이 먼저

우드득거리며 허기진 몸을 곧추세우는 시간

 

간드락삼거리 골목길

집집마다 촉수 낮은 온기를 나누어 줄 전선들이

나지막이 웅웅거렸다

바람도

이 저녁엔 귀가를 서두르고 싶었던 것일까

 

아직 가로등이 켜지지 않은 골목길들이

조금씩 밝아지며

풍경들이 따스해지기 시작했다

순간,

아주 가벼운 것들이

서두르지 않고

지상으로 가만가만 내려앉았다

 

허기에 흔들리던 감나무 빈 가지 위에도

어린싹들이 하나씩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해 대설주의보 / 허연

 

망했다고 생각했던 날들이 떠올랐다

당신,

그렇게 등 돌리고 가서는

어떻게 그 눈[] 많은 날들을 견뎌냈는지

 

세찬 물소리가 혼을 빼 가던

강변 민박집에서 눈을 감으면

누군가 떠나가는 소리들이 들리곤 했다

이른 새벽 구절리로 가는 젊은 영혼이거나

아니면 영월로 야반도주 짐 꾸린 산판 인부이거나

 

그게 벌써 언제지……

막걸리 잔에 맺힌 이슬이 아래로

미끄러지는 걸 보며 나는 자꾸만

궂은 생각에 체머리를 흔들었다

 

차부에서 십 리는 걸어야 한다는

고향집 큰언니는

20여년 전 그날

돌아온 너를 안아주었는지

 

여기서 멀지 않았었지

칠 벗겨진 이순신 동상 서 있는

2층짜리 교사가 있었고

별이 막 달려든다고

운동장에서 너는 외쳤지

 

가뭄 끝은 있어도 홍수 끝은 없다고

우리가 나무배에 잠시 태웠던 것들은 이제

어디로 쓸려 갔는지 알 수 없고

자꾸 눈을 감는 내게

훅하고 집어등 불빛 같은 게 지나갔다

 

눈발은 두렵게 날리고

체인 걱정을 잠시 하다가

막걸리 잔을 다시 든다

 

춥게 살았던 날들

춥게 살았던 내 옛 애인에게

차갑게 식은 파전을 집어먹으며

이제서야 말한다

그날이 진경이었음을

 

 

북어北魚 / 김중일

 

비전향이 누워있다

짠물 오르지 못하는 강좁다란 기슭에

대가리를 위쪽으로 향한 채

길게 누워있다

움푹 팬 눈에 한 움큼 모래를 담고

앙칼진 주둥이 쩍 벌린 채

야위어 가고 있다

 

비나리 비나리 징소리와 함께

풍문으로 들리는 야로를 뒤집어쓰고

지나온 길을 기억하려 애쓰는 듯한데

큰 물결이 밀려오면 훌훌 털고 일어나

힘찬 지느러미 펼칠 꿈을 꾸는 듯한데

잡놈의 파리 몇 마리 구린내를 찾아

희꺼멓게 갈라진 꿈속으로 들락거린다

 

 

북어 / 이재무

 

양파, 마늘, 감자와 섞여

국이 될 줄은

살았을 적엔 꿈도 꾸지 못했다

그것들은 그것들대로의, 뭍에서의

생이 있듯 나는 그저 푸른 바다를

어눌하게 살았을 뿐이다

따로 욕심을 챙긴 적이 없어도

세월은 맘 같지가 않다

나는 이미 죽어 있고

누군가의 즐거운 입 속에 들어가

그의 살이 되기 위해

순치된 얼굴로 처분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죽은 것들이 한몸으로 섞여

섭씨 100도 안에서

더욱 부드러워지기 위해

펄펄펄 뛰고 있다

 

 

연가 · 2 고운기

 

울 밑의 봉숭아 같던 그 애를

아이들은 내 여자라 놀렸다

그러나 나는 담벼락 같은 사내

더러 비를 막아 주고

바람을 피해 가게 했지만

 

네가 피고 진들

때로 병들어 꽃잎을 뚝뚝 떨어뜨린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덧없는 세월만 보내고

나는 늘 내 무능에 가슴 아픈 것인데

멀어진 사람 다시 가까울 수 없네

언젠가 네 손짓에 설레어

얼굴만 돌려 주어도

환한 모습에 그리움 태우고 달려왔을 것을

그러나 나는 담벼락 같은 사내

부서져 내리지 못한

완고한 .

 

 

셋째 형님

 

집이 좁아 설날 아침이면

우리는 매년 이사 갈 생각을 했지만

그대로 이십 년을 살아왔다

집은 그대로 둔 채

형들은 장가를 가고

누님은 시집을 가

조카들까지 셈하면 식구는 충분히 한 소대

이렇듯 피붙이가 늘었으니

이렇게라도 부자가 된 것 아닌가

설날 아침, 소대가 모여 차례를 지내고

소대장께 세배를 드리고

떡국 한 그릇씩 돌리면 푸지고 푸지다

셋째 형수는 마음 약한 형님 때문에

작년에도 몇 번 속고 몇 번 손해보았다고

소대장 앞에서 낱낱이 일러바치는데

알고 보니 천성이 착한 우리 형제들

모두 다 한 번쯤 속은 경력을 갖고 있을 줄이야……

언제나 쾌활하게 말을 꺼내 분위기를 잡는

셋째 형님도 이쯤에선 풀이 죽지만

그래도 나는 형님이 좋다

속았기에 우리집은 올해도 비좁지만

속이지 않았기에 설날 아침

떡국 한 그릇이 이렇게 입맛 당기고

착하게 살았기에 형제들 서로 얼굴 보며

떳떳하고 반갑지 않은가

그래도 올해만큼 속지만은 말자고

지난 경험을 서로 나누며 먹는

설날 아침 떡국 한 그릇.

 

 

가끔, 그럴 때가 있다 / 윤희상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었는데도

길을 건너지 않고 있다

횡단보도를 앞에 두고 한참을 그대로 서 있다

지금, 레코드 가게 스피커에서 들리는 가수의 노래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싱싱한 폐허 / 이대흠

 

이곳은 깨끗합니다 오래전에 버린 약병도 무사합니다 깨진 장독은 이따금 하늘을 담아냅니다 삽자루는 잘 썩었고 벌레들의 양식 창고로 용도가 변경되었습니다 삽날에 거점을 정한 녹은 더욱 영역을 넓혀갑니다 곤충과 풀들은 자유롭고 떠돌던 고양이는 돌아왔습니다 쥐와 뱀들은 건강합니다 안심하십시오 당신의 집이 아닌 순간부터 폐허는 더욱 싱싱해졌습니다

 

 

쓰러진 나무에 대한 경배 / 황규관

 

세상을 같잖게 보고 나서부터

내 안엔 녹슨 철근더미만 무성했다

휘어지지 않는 게, 말하자면 내 이념이어서

당신이 나를 떠나고 나자

내 삶의 절반이 망가져 버렸다

후회되는 사랑은

항상 몹쓸 흔적만 남기는 법인데

이제, 어디를 향해 무릎을 꺾을 것인가

폭풍우 그치자 처참하게 드러누운 나무 한그루에

잠시 진저리를 치는 아침,

나무는 무엇을 위해 제 삶을 바쳤던 걸까

모든 게 지나고 나면 덧없다지만

덧없는 것을 위해 제 삶을 던지는 일도

눈부실 수 있다는 것을 나무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몰아치는 폭풍우를 전신으로 맞다

휘어질 만큼 휘어져 뿌리가 막 뽑혀질 때,

그 때가 나무의 영원이었을까

내 안에 노란 나비떼가 모였다

 

쓰러진 것들을 위하여 / 신경림

 

아무래도 나는 늘 음지에 서 있었던 것 같다

개선하는 씨름꾼을 따라가며 환호하는 대신

패배한 장사 편에 서서 주먹을 부르쥐었고

몇십만이 모이는 유세장을 마다하고

코흘리개만 모아놓은 초라한 후보 앞에서 갈채했다

그래서 나는 늘 슬프고 안타깝고 아쉬웠지만

나를 불행하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

나는 그러면서 행복했고

사람 사는 게 다 그러려니 여겼다

 

쓰러진 것들의 조각난 꿈을 이어주는

큰 손이 있다고 결코 믿지 않으면서도

 

 

세속도시의 즐거움 1-최승호

 

일류배우가 하기엔

민망한 섹스신을

그 단역배우가 대신한다

은막에 통닭처럼

알몸으로 던져지는 여인

얼굴 없는 몸뚱이로 팔려 다니며

관능을 퍼덕거리는

 

하여 극장의 어둠 속엔

, 관객이 있다

으로 배 불러오는 욕정과

이 불러일으키는 흥분이 있다

눈 앞의 시간이

토막난 채 흘러가는 필름이고

텅 빈 은막 위에 요동치는 것들이

인 줄 알면서 나는 에 취해

실감나게 펼쳐지는 을 끝까지 본다

내 망막의 은막이 텅 빌 때까지

눈에서 나온 혓바닥이 멸할 때까지

 

세속도시의 즐거움 2

 

상복 허리춤에 전대를 차고

곡하던 여인은 늦은 밤 손익을

계산해 본다.

 

시체냉동실은 고요하다.

끌어모은 것들을 다 빼앗기고

(큰 도적에게 큰 슬픔 있으리라)

누워 있는 알거지의 빈 손,

죽어서야 짐 벗은 인간은

냉동실에 알몸거지로 누워 있는데

 

흑싸리를 던질지 홍싸리 껍질을 던질지

동전만한 눈알을 굴리며 고뇌하는 화투꾼들,

그들은 죽음의 밤에도 킬킬대며

잔돈 긁는 재미에 취해 있다.

 

외로운 시체를 위한 밤샘,

쥐들이 이빨을 가는 밤에

쭉정이 되는 추억의 이삭들과 침묵 속에서

냄새나는 이쑤시개를 들고 기웃거리는

죽음의 왕.

 

시체냉동실은 고요하다.

홑거적 덮은 알몸의 주검이

혀에 성에 끼는 추위 속에 누워 있는 밤,

염장이가 저승의 옷을 들고 오고

이제 누구에게 죽음 뒤의 일을 물을 것인지

그의 입에 귀를 갖다댄다

죽은 몸뚱이가 내뿜는다 해도

서늘한

 

바퀴벌레 一家

소비자의 욕망을 언제든지충족ㅡ­소비시켜주는 자동판매기에 바퀴벌레 一家가 산다

 

매춘부 안에 포주의 식구들이 살듯이

그들의 껍질은 윤택하다 구멍이

돈을 삼키며 시작되는 홍등의 아침

커피와 밀크의 향기는 훈훈하게

설탕과 꿈은 무한하게

그리고 마지막 동전 떨어지는 소리 뒤에

밤이 온다 밤의 고요는

밤잠 없는 욕망에 찢어진다

고무호스가

창녀의 방광에서 뻗는 尿道처럼

물통에 매달려 종이컵에 뜨신 물 붓는

자동판매기에 바퀴벌레 一家가 산다

그 옹기종기한 식구들이 지닌 사랑의 한계를

우리들 또한 지니고 있다

 

밥숟갈을 닮았다

 

움푹해라 내 욕망은

밥숟갈을 닮았다

천 만개의 숟갈이 한 냄비에 덤비듯

꿀꿀거리고 덜그럭대는 서울에서

나도 움푹한 욕망 들고 뛰어가고

보름달 뜨면 먹고 싶어라

둥근 젖

움켜쥘 그때부터 나는 아귀였던가

부르도자가 움푹한 입 벌리며 굴러 가고

기름진 돼지 머리가

웃고 있는 좌판 위의 서울

움푹해라 뒤뚱거리는 영혼도

밥숟갈을 닮았다

죽어서도 배가 부르게 해주십사

거위 주둥이를 벌린다

 

때밀이수건

 

1

살이 얼마나 질긴지

때밀이수건에 먼저 구멍이 났다.

無明은 또 얼마나 질긴지

돌비누 같은 으로 문질러도

無明에 거품 일지 않는다.

主日이면

꿍쳐둔 속옷 같은 죄들을 안고

멋진 옷차림으로 간편한 세탁기 같은 교회에

속죄하러 몰려가는 .

세탁비를 받으라, 성직자여

때 밀어 달라고 밀려드는 게으른 떼에게

말하라, 너희 때를 이젠 너희가 씻고

속옷도 좀 손수 빨아 버릇하라고.

제 몸 씻을 새 없는 聖者들이 불쌍하다.

그들의 때 묻은 聖衣를 누가 빠는지.

 

2

죽음이 우리들 때를 밀러 온다.

발 빠지는 진흙수렁 늪에서

해 저무는 줄 모르고 진탕 놀다온 탕아를

씻어주는 밤의 어머니,

죽음이 눈썹 없이, 아무말 없이

우리들 알몸을 기다리신다.

때 한 점 없을 때까지

몸이 뭉그러져도 말끔하게 때를

문지르고 또 문지르는 죽음,

죽음은 때를 미워해

청정한 중의 해골도 씻고 또 씻고

샅샅이 씻어 몸을 깨끗이 없애버린다.

그렇다면 죽음의 눈엔 온몸이 다 때란 말인가?

-----------------------------------------

 

공부 / 김사인

 

'다 공부지요'

라고 말하고 나면

참 좋습니다.

어머님 떠나시는 일

남아 배웅하는 일

'우리 어매 마지막 큰 공부하고 계십니다'

말하고 나면 나는

앉은뱅이책상 앞에 무릎 꿇은 착한 소년입니다.

 

어디선가 크고 두터운 손이 와서

애쓴다고 머리 쓰다듬어주실 것 같습니다.

눈만 내리깐 채

숫기 없는 나는

아무 말 못하겠지요만

속으로는 고맙고도 서러워

눈물 핑 돌겠지요만.

 

날이 저무는 일

비 오시는 일

바람 부는 일

갈잎 지고 새움 돋듯

누군가 가고 또 누군가 오는 일

때때로 그 곁에 골똘히 지켜섰기도 하는 일

 

'다 공부지요' 말하고 나면 좀 견딜 만해집니다.

 

 

공부 기계 / 박성우

 

알람 시계가 울린다

 

고등학교 이 학년인

공부 기계가 깜빡깜빡 켜진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졸린 공부 기계는

책가방을 메고 학교로 간다

 

공부 기계는 기계답게

기계처럼 이어지는 수업을

기계처럼 듣는다

 

쉬는 시간엔 충전을 위해

책상에 엎드려 잠시 꺼진다

 

보충수업을 기계처럼 듣고

학원수업을 기계처럼 듣고

공부 기계는 기계처럼 집으로 간다

 

늦은 밤 돌아온 공부 기계는

종일 가동한 기계를 점검하다,

 

고장 난 기계처럼 껌뻑껌뻑 꺼진다

 

 

안골 가는 길-박형권

 

가덕 선창에서 정기도선 타고 용원에서 내리면 어느새 해는 기울고 대관절 어디인지 모르겠는 안골 고모집

 

처마에 앉아 섬새들 깃털 고르는 그곳으로 엄마 손 잡고 밤길 걸으면 사락사락 서리 내리는 다섯살 가을밤도 어느새 젖어 캥캥 앞길을 가로막는 여우도 나처럼 손 시린가보다

 

엄마의 이야기 속에서는 언제나 휘리릭 휘릭! 간 꺼내달라고 공중제비를 넘던 여우도 다섯살의 밤길 앞에서는 길 열어준다

 

여우야 고맙다

 

다음 날 아침부터 큰고모집 마당은 왁자하고 고종사촌 큰누나는 연지곤지를 발랐다 합환주 살짝 입에 대보는 여우 큰아버지 큰어머니 오촌당숙 숙모 고모와 사촌들 사이에서 부비고 치대며 살고 싶었던 그 여우 안골 가는 길에서는 늙지도 않고 선뜻 앞장서 길을 잡는다

 

아프다, 내 아이들 속에는 여우를 넣지 못해 간 맛도 뼈 맛도 보여줄 수 없고, 터벅터벅 허전한 안골 가는 길

박형권 - 전당포는 항구다|2013 가덕도 탕수구미 시거리 상향(2017),

 

 

지문-권혁웅

 

내가 모르는 일이 몇 가지 있으니

바위에 뱀 지나간 자리와 물 위에

배 지나간 자리와 하늘에 독수리가 지나간 자리

그리고 여자 위에 남자가 지나간 자리* 내가

도무지 알 수 없는 한 가지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일**

 

도무지 도무지, 손가락마다

소용돌이를 감추어두고 사는 일

손잡을 때마다 타인의 격정에 휘말리는 일

내 삶의 알리바이가 여기에 없다고

생각할 때마다 개들은 짖고

먼지는 손에 묻고

버스는 떠나고

비행기는 하늘에 실금을 그으며 날아간다

 

나는 개를 먹고 개처럼 짖고

개털은 날리고 나를 따라

먼지는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옮겨다니고

내가 손을 흔들어도

버스는 떠나가고 비행기는 활주로에

길고 긴 타이어자국을 남긴다

 

누웠다 일어난 자리에 흩어진 머리카락,

여기에 내가 아니면

네가 누워 있었을 것이다

 

*전도서 30:19

** 양희은의 노래에 나오는 구절

 

집으로 가는 길

 

우리 집은 골목과 골목 , 다시 골목과

골목을 지나쳐야 해 머리와 목을 늘어뜨리고

천천히 걸어야 해

구불구불 늘어선 담장들을 걷다 보면

거대한 짐승의 내장을 지나치는 느낌이야

내가 소화되고 있다는 거

하루하루가 녹아서

내 뒤에 젖은 발자국을 만들고 있다는 거

집으로 가는 길은 누구에게나

內面이야 헐어버린 위벽을 훑어간 듯

담모퉁이에는 범퍼가 긁은 자국이 있어

나는 이탈리앙 베이커리에서 식빵,

방학 약국에서 겔포스, 버드나무 슈퍼에서

디스 플러스를 사가는 중이야

이미 골목과 골목에 관해서는 말했군

머리와 목을 늘어뜨리고 천천히

걷는 것에 관해 이야기했군

골목과 골목은 길이 아니야 그건

집들이 비워놓은 울짱 바깥이야

내 안의 구멍으로 식빵과 겔포스,

담배 연기가 천천히 흘러가듯

나는 다시 골목과 골목을 지나치고 있어

저기가 내 집이야 나는 문을 닫고

양변기처럼 구부려 잠들 거야

 

 

내가 던진 물수제비가 그대에게 건너갈 때

 

그날 내가 던진 물수제비가 그대에게 건너갈 때

물결이 물결을 불러 그대에게 먼저 가 닿았습니다

입술과 입술이 만나듯 물결과 물결이 만나

한 세상 열어 보일 듯했습니다

연한 세월을 흩어 날리는 파랑의 길을 따라

그대에게 건너갈 때 그대는 흔들렸던가요

그 물결무늬를 가슴에 새겨 두었던가요

내가 던진 물수제비가 그대에게 건너갈 때

강물은 잠시 멈추어 제 몸을 열어 보였습니다

그대 역시 그처럼 열리리라 생각한 걸까요

공연히 들떠서 그대 마음 쪽으로 철벅거렸지만

어째서 수심은 몸으로만 겪는 걸까요

내가 던진 물수제비가 그대에게 건너갈 때

이 삶의 대안이 그대라 생각했던 마음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없는 돌다리를

두들기며 건너던 나의 물수제비,

그대에게 닿지 못하고 쉽게 가라앉았지요

그 위로 세월이 흘렀구요

물결과 물결이 만나듯 우리는 흔들렸을 뿐입니다

 

 

결이라는 말 / 문성해

 

결이라는 말은

살짝 묻어 있다는 말

덧칠되어 있다는 말

 

살결 밤결 물결은

살이 밤이 물이

살짝 곁을 내주었단 말

와서 앉았다 가도 된단 말

 

그리하여 나는

살에도 밤에도 물에도 스밀 수 있단 말

쭈뼛거리는 내게 방석을 내주는 말

 

결을 가진 말들은

고여 있기보단

어딘가로 흐르는 중이고

 

씨앗을 심어도 될 만큼

그 말 속에

진종일

물기를 머금는 말

 

바람결 잠결 꿈결이

모두모두 그러한 말

 

 

이슬의 전쟁 / 김승희

 

이슬은 죄 많은 죄 많은 세상 속으로 조간신문처럼 온다

이슬도 뭐 그리 깨끗한 것도 아니다

깨진 손톱이나 핏방울, 찢어진 눈동자나 이빨 같은 것,

이슬 안에 그런 생지옥이 산다

 

이슬로 세수를 하고 발까지 다 씻을 수는 없다

이슬은 육체의 계획 속으로 오는 것은 아니다

이슬 안에 스러지는 영원의 햇빛 속으로

이슬은 차갚게 죽으러 온다

이슬은 이슬을 애도하러 온다

 

이슬로 와서

이슬로 구르다가

이슬의 전쟁을 마치고

이슬로 지는 사람들이여

 

신이 눈꺼풀을 한번 깜박일 때마다

순간의 슬픈 보석은 밭으로 굴러떨어진다

전쟁이 끝난 밭에는

풀잎마다 영롱한 이슬의 유언이 반짝반짝 묻어

막 깨어날 듯한 기운으로 충만하다

 

어떤 통화 / 박성우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정읍행 고속버스에 몸을 ​​싣는다 버스에 오르고 보니 어딘지 모르게 닮은 노인들 몇만 듬성듬성 앉아 있다 안전벨트 안허면 ​​출발 안헐 팅게 ​​알아서들 하쇼잉, 으름장 놓던 버스기사가 운전대 잡는다

 

차가 출발하기 무섭게 휴대전화 소리 들려온다 어 닛째냐 에미여 선풍기 밑에 오마넌 너놨응게 아술 때 쓰거라잉, 뭔 소가지를 내고 그냐, 나사 돈 쓸 데 있간디

 

버스는 시큰시큰 정읍으로 가고, 나는 겨울에도 선풍기 하나 치울 곳 없는 좁디좁은 단칸방으로 슬몃슬몃 들어가본다

 

,자두나무 정류장(창비, 2011)

 

 

어떤 마을 / 도종환

 

사람들이 착하게 사는지 별들이 많이 떴다

개울물 맑게 흐르는 곳에 마을을 이루고

물바가지에 떠담던 접동새소리 별 그림자

그 물로 쌀을 씻어 밥짓는 냄새 나면

굴뚝 가까이 내려오던

밥티처럼 따스한 별들이 뜬 마을을 지난다

사람이 순하게 사는지 별들이 참 많이 떴다

 

 

즐거운 일 / 이동순

 

오래 묵은 산길에

키 큰 억새와 가시덤불이 잔뜩 우거져

인간의 흔적을 거의 지우고 있는 광경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바람에 넘어진 고목이

도로를 완전히 가로막고 있어서

그대로 꼼짝달싹하지 못하고 길게 늘어선 자동차를 바라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묶인 개를 풀어놓고

늑대처럼 등털을 바람에 나부끼며 온몸으로 질주하는

개의 감격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즐거운 빚잔치 / 정낙추

 

아무도 슬퍼하거나 위로하지 않았다

슬레이트지붕 골골마다 푸른곰팡이 끼고

금 간 블록 담장 너머 개복숭아나무

진딧물 눌어붙은 볼썽사나운 집구석

빚 덩이가 주인이다

 

땅 뒤져 나오는 것보다

빠져나가는 게 많은 살림살이

이제 농사도 자본론을 읽으며 씨앗을 뿌리고

투자의 마당에서 타작을 해야 한다

땅은 돈푼깨나 있는 놈들 쪽으로 모이고

근력 놓친 눈 침침한 사람들은 끼리끼리 모여

쑥부쟁이 잡초들과 함께 세월이나 탓하다가

빚 얻어 공부시켜 도시로 머슴살이 보낸 자식에게

임종 전화를 거는 것 뿐

 

살아생전 간 떨어지게

빚 쪽지 날아오던 빈 대문간

하얀 국화 다발 몇 개 세워 놓고

씨알 굵던 감자밭에 차일을 치면

빚잔치는 절정이다

 

제 놈들이 아무리 지독해도

송장에게 빚 딱지는 못 붙이겠지

막걸리 기운으로 큰소리 탕탕 치며

웃고 떠드는 잔치 마당

오랜만에 마을이 환하게 살아난다

 

 

즐거운 세탁 / 박영희

 

마지막 헹굼에 피죤을 넣다 말고

물끄러미 안을 훔쳐본다

그저께 벗어두고

어저께 벗어둔

속옷들, 너울너울 춤을 춘다

가느다란 어깨끈이 달린 피노키오 런닝구는

손바닥만한 분홍색 팬티와 한 조 되어

나란히 손잡고 빙글빙글 돌고

체크무늬 사각팬티는

초록색 수건과 허리 꼭 껴안고

휘엉휘엉 회전목마를 탄다

지난 가을 해운대 아쿠아리움에서 본

물고기들의 춤이 저러했던가

땟국물 쪽 빠진 마알간 수족관에서

지느러미를 한껏 흔들어대는 것이

참 싱그럽기도 하다

 

 

즐거운 추억 / 고광헌

 

1

체육시험에서 미() 한번 받아보지 못한

여학생에게

방과 후 배구수업을 했네

 

활짝 펴지 못한 손가락 끝에 약속처럼

꼭 한번 닿은 뒤 공은 떨어지네

협심증 가진 그애의 심장박동처럼

 

첫술에 배부르지 않는다는 말, 알지?

하루, 사흘, 일주일

한 달을 받아올리네

 

어느날, 이마 위에 반듯하게 올려놓은 하늘

활짝 핀 열 개의 분홍 꽃가지

부풀어오른 목련송이 툭툭 받아올리네

 

몸이 아주 천천히

시간을 지배하는 것을 보았네

 

2

난생 처음 수()를 받은 그애가

어머니와 교무실에 들어오네

나는, 수줍음을 감추고 거침없이

화사한 촌지를 받네

 

이 시대의 사랑

철없는 서른살 선생이 서른이 꽂혀있는

최승자 시인을 촌지로 받았네

 

내 몸이

최루탄이 산발하던 시간 속으로 달리기 시작했네

 

3

가르친다는 것

누구 앞에 선다는 것은

배우는 일이라는 걸 알았네

 

 

벽 너머 남자/ 김해자

가끔 공동 수돗가에서 만나면 사알짝 웃기도 했는데, 마당 끝에 있는 변소 앞에 줄 서 있기라도 하면

출근길 그 남자 미안한 듯 고개 숙이고 지나갔는데, 어느 차가운 밤 골목 입구에서, 고구마 냄새나는 따뜻한 비닐봉다리 안겨주고 도망가기도 했는데, 충청도 어디 바닷가에서 왔다던가 사출공장 다닌다던가

기침 소리, 라면 냄새 다 건너오던 닭장 집, 얇은 벽 너머 함께 살았지. 벽 하나 사이 두고 나란히 누웠던 그 남자 느닷없이 죽어, 하얀 보자기 씌워져 실려 가고서야 알았지. 세상에 벽 하나 그리 두터운 줄 벽 하나가 그리 먼 줄

말이나 해보지, 벽이나 두드려 보지, 죄 없는 벽만 쥐어박다 손때 묻은 벽 앞에 제상 하나 차렸다네. 고봉밥에 무국 고사리 도라지나물 해서 떡 사과 배도 얹고, 밥상 걸게 바쳤다네 이왕 가는 길 힘내서 가라고, 그 겨울 내내 벽 앞에 물 한 그릇 올렸다네

추석이 낼 모레, 십이야 고운 달빛 아래

마른 고사리 데쳐놓고 도라지 흰 살 쪼개며

삼십 년 되어가는 옛 이야기 풀어놓는 여자

 

웃어나 줄 걸 따듯하게 손이나 잡아줄 걸

그까짓 여자남자가 뭐라고 죽고 나면

썩어문드러질 몸땡이 그까짓 게 다 뭐라고

 

그 때 그 더벅머리 어미뻘 되어가는 여자

나잇살 차곡차곡 채워가며

산골짝 처녀귀신으로 늙어가네

 

설해목雪害木-박일만

 

아버지는 벌목꾼이셨다

산판을 누비며 가파르게

몸피 벗겨진 뼈마디로 사셨다

세상 저물도록 바람처럼 사셨다

식솔들 모두 대처로 내보내고

홀로 저녁을 차려 드시고

무시로 가지를 흔드는 바람에도

말없이 먼 산 바라보며 깊어지셨다

문풍지에 칼을 들이대는 찬바람 견디며

기울어진 그림자로 사신 지 수십 해,

살다 보면 누구나 한번쯤 마음 꺾인다지만

깃털 같은 세월에도 산중을 고집하시며

실향의 한파 옹골차게 견디며 살아오셨다

어느덧 얼굴도 계곡을 닮아가고

손등에 핏기도 사라지고

잔가지 툭툭 꺾여 나간

아흔 살의 아버지

머리 흰 고목으로 서 계셨다

 

 

가로등

 

버섯 모양 고깔 대신

밀짚모자 즐겨 쓰시던 아버지

밤낮을 땅만 지켜보던 몸이었다

허리 한 번 펼 날 없이

평생을 땅만 일구셨다

허리띠 조여 매는 시절을 견디는 일이란

엄동에 묵정밭을 일구는 거나 매한가지

전봇대에 간신히 매달려 사는 아찔한 몸으로

키 낮은 잡초와 가족들을 돌보셨다

옷 한 벌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한 채

돌밭을 개간한 근성도

쌓이는 연륜에 어찌할 방도 없이 낡아갔다

허름한 옷차림, 덕지덕지 붙은 전단지

고단한 노동 뒤에 오는 관절통에도

잠시 눕지 못하는 직립형 태생,

하늘로 가시는 길을 몸소 닦아 놓은 것일까

바닥을 일궈낸 무수한 씨앗들이 비상하듯 솟아났다

그 좋은 하늘을 버리고 바닥을 택한 아버지

끈질긴 외눈으로 손수 일구시던 밭가에 누웠다

지금도 어둠과 밝음의 시대 주변에서 떠나지 못하고

안구 하나로 여전히 서 계신다

 

 

뿌리도 가끔 날고 싶다

 

1

봉분 속에서는 강이 흐르고

숲이 자라고 바다가 일렁입니다

오래도록 내력을 풍기며 지내 오는 동안에도

핏줄들은 크고 넓은 잎에

꿈을 실어 나르며 만개하는 집안 이루었습니다

당신의 생은 열매 맺는 찬란함이었습니다

 

푸르고 따듯한 바람이 부는 일도

당신이 흙속에서 생산하는

맑고 큰 그늘로부터 시작됨을,

뜨거운 혈맥들의 선명한 족보임을 알겠습니다

 

2

기일에 찾아간 아버지 무덤, 언덕에서 함부로 자라난 뿌리들, 저마다 내력을 자랑삼아 길을 간다. 지하 심연 물줄기거나 지상 가득한 길이거나 조상들 기억 찾아 후손의 눈빛 반짝이며 툭툭 젖은 발 털며 뻗어 간다. 들판과 강을 지나 하늘의 계단참으로 당당히 간다

 

툭 불거져 산 옆구리를 뚫고 나온 아버지 손등 핏줄 같은 뿌리, 이정표가 되어 믿음직한 바위 얼싸안고, 빛이거나 어둠이거나 누대에 걸쳐 먼 길 달려가는 뿌리, 뿌리도 가끔은 하늘을 날고 싶다

 

 

 

버드나무 한그루가

긴 머리를 감고 있네

 

크고 깊은 눈의 호수는

제 속을 들여다보는 나무의 촉수를

이리저리 출렁이며 마다해 보네

 

어쩌랴!

끝내 속내를 감출 수 없네

 

해 뜨고 지고 별과 달이 다녀가는 동안

수백 년 숨겨온 마음 죄다 들켰네

당신이 지척에 와 날리는 머릿결이

나를 빗어 내리네

 

배회하는 나를 향해 물 냄새를 풍기네

 

그 촉수에

내 속도 모두 들켰네

 

옛날 우표 / 이대흠

 

혀가 풀이었던 시절이 있었지

먼 데 있는 그대에게 나를 태워 보낼 때

우표를 혀끝으로 붙이면

내 마음도 찰싹 붙어서 그대를 내 쪽으로

끌어당길 수 있었지 혀가 풀이 되어

그대와 나를 이었던 옛날 우표

 

그건 다만 추억 속에서나 있었을 뿐이지

어떤 본드나 풀보다도 더 단단히

서로를 묶을 수 있었던 시절

 

혀가 풀이어서

그대가 아무리 먼 곳에 있더라도

우리는 떨어질 수 없었지

 

혀가 풀이었던 시절이 있었지

사람의 말이 푸르게 돋아

순이 되고 싹이 되고

이파리가 되어 펄럭이다가

마침내 꽃으로 달아올랐던 시절

 

그대의 손끝에서 만져질 때마다

내 혀는 얼마나 달아올랐을까

그대 혀가 내게로 올 때마다

나는 얼마나 뜨거운 꿈을 꾸었던가

 

그대의 말과 나의 꿈이 초원을 이루고

이따끔은 배부른 말떼가 언덕을 오르곤 하였지

세상에서 가장 맑은 바람이 혀로 들고

세상에서 가장 순한 귀들이 풀로 듣던 시절

 

그런 옛날이 내게도 있었지

 

 

옛날 애인 / 류근

 

이젠 서로 팔짱을 낄 일도 없고

술 먹다 눈 마주치면 그 눈빛 못 견뎌서

벽이나 모텔로 벌겋게 숨어들 일도 없고

심야택시 잡을 일도 없고

친구 생일 따위에 따라가 고깔모자 쓸 일도 없고

비 오는 날 우산 들고 기다릴 일도 없고

괜히 등산복 사 입고 산에 갈 일 없고

벅찬 오페라에 돈 쓸 일 없고

웃어줄 일 없고

편지 쓸 일 없고

꽃 이름 나무 이름 산 이름 골목 이름 하물며

당신 초등학교 단짝 이름 암기할 필요 없고

슬프고 아픈 척할 일 없고

군대 태권도 1단증 갖고 강한 척할 일 없고

미래에 대해 설명하거나 설득할 필요 없고

사랑한다 거듭 고백할 필요 없고

없으나

우리가 살아서 서로의 옛날이 되고

옛날의 사람이 되어서 결국 옛날 애인이 될 것을

그날 하루 전에만 알았던들

 

아내여,

 

 

옛날 사람 / 곽효환

 

때론 사랑이 시들해질 때가 있지

달력 그림 같은 창밖 풍경들도 이내 무료해지듯

경춘선 기차 객실에 나란히 앉아 재잘거리다

넓은 어깨에 고개를 묻고 잠이 든 그 설렘도

덕수궁 돌담길 따라 걷던 끝날 것 같지 않은 그 떨림도

북촌마을 막다른 골목 가슴 터질듯 두근거리던 입맞춤도

그냥 지겨워질 때가 있지

그래서 보낸 사람이 있지

 

세월이 흘러 홀로 지나온 길을 남몰래 돌아보지

날은 어둡고 텅 빈 하늘 아래 드문드문 가로등불

오래된 성당 앞 가로수 길에 찬바람 불고

낙엽과 함께 뒹구는 당신 이름, 당신과의 날들

빛바랜 누런 털, 눈물 그렁그렁한 선한 눈망울

영화 속 늙은 소 같은 옛날 사람

시들하고 지겨웠던, 휴식이고 위로였던 그 이름

늘 내 안에 있는 당신

 

이제 눈물을 훔치며 무릎을 내미네

두근거림은 없어도 이런 것도 사랑이라고

 

 

옛날의 그 집 / 박경리

 

빗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휭덩그레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꾹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히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 끝의 끝으로 온 것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 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나를 지켜주는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밑닦이에 대한 유감 / 이중기

 

요즘은 똥구멍도 호강하는 세월이라고

짜증 섞어 뭉텅뭉텅 신문지를 자르며

할마시는 많이 섭섭한 모양이다

 

빚진 애비 적에는 정낭 구석자리에

새끼줄 걸어놓고 돌려가며 밑을 닦았다

슬픔에 밥 말아먹던 시절 칙간에는

물 뿜어 두드린 짚단 세워놓고

그 중 몇 개 겹겹 접어 뒤를 닦……

할마시의 분기는 가위에 손을 다친다

 

오늘, 못자리하다말고 똥누러 갔다 온

네놈 짓거리는 가히 포스트모더니즘이다

냇가의 그 많은 돌멩이 풀들 놔두고

버들치 지느러미 힘을 키우는 맑은 물이며

청개구리 혓바닥 같은 나뭇잎도 버리고

팬티 벗어 닦고는 버리고 왔다니……

, 과타

 

 

이상한 여자 / 김인육

 

이상한 여자가 죽었다

이 세상 나를 가장 사랑했던 여자

저보다 나를 더 사랑했던 여자

이해할 수 없는 여자

그 여자, 이 별을 떠났다

 

생각해보면

나도 그 여자를 조금은 사랑했었다

내 마음 바쳐 사랑한 여자는

젊은 딴 여자였지만

그런 나를 아껴 사랑했던 여자

이상한 여자

 

그 여자, 이 별 떠나며

비밀히 품었던 서간 하나 있었지

70년 넘게 장롱 깊숙이 간직했던 혼서지

그 여자, 그게 있어야 먼저 떠난 사내

저 아득한 밤하늘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제 관속에 꼭 넣어 달라 신신당부했던

이상한 여자

 

그 여자

그 사내보다 날 더 사랑한다고

날마다 내게 고백하곤 했었지

이제 그 예장지 가슴에 품고

활활 관 속에서 불타며

그 사내에게로 떠나며

끝까지 나를 울던 여자

이상한 여자

 

그 여자

저 아득한 별나라 그 사내 다시 만나

기어이 나를 다시 잉태하려는 여자

나를 죽도록 사랑했던 여자

죽어서도 나를 사랑했던 여자

 

독종의 여자, 불멸의 여자

두고두고 내 심장 아리는

눈물의 여자

참 이상한 여자

 

 

외할머니 / 서정홍

아이고오, 오랜만에 네 어미가

옷 한 벌 사 준다 캐서

억지로 백화점에 따라 갔는데 말이다

할인했다 카는데 30만 원이라!

가슴이 벌렁거려서 그냥 왔다 아이가

집에 와서 혼자 가만 계산해 보이

30만 원이모

감자가 서른 상자

들깨가 사십 되

쌀이 몇 말인데……

그 비싼 옷을 몸에 걸치고 다니모

우찌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겄노

 

 

외할머니 / 나태주

시방도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

외할머니는.

 

손자들이

오나오나 해서

흰 옷 입고 흰버선 신고

 

조마조마

고목나무 아래

오두막집에서.

 

손자들이 오면 주려고

물렁감도 따다 놓으시고

상수리묵도 쑤어 두시고

 

오나오나 혹시나 해서

고갯마루에 올라

들길을 보며.

 

조마조마 혼자서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

시방도 언덕에 서서만 계실 것이다,

 

흰옷 입은 외할머니는.

 

외할머니 / 마종기

온천장 금정사 밑 우리 외할머니,

마당 끝 치자나무 드문 흰 꽃 옆에

노방 깨끼저고리 맵시 있게 입으시고

낮은 사투리로 나를 찾으시던

외할머니 그 은근한 손짓이 매해

내 어린 여름방학을 치장해주셨네.

넓게 열린 푸른 별밭의 수박 잔치도

반딧불 어지러워 잠이 오지 않던 밤도

외할머니 신명난 다듬이 소리같이 그립네.

치자 열매 다 익기 전에 서둘러 돌아가시고

해운대 보이는 조그만 산소 가에서

오늘은 외할머니 모시 치마 입으실까

, 내 부끄러움의 감빛 치자 열매 익는다.

여름만 되면 사방에 계신 외할머니

낮은 사투리로 나 부르시는 목소리 듣네.

 

 

외할머니 / 박경리

몸매는 깡마르고 자그마했다

약간의 매부리코

그 코끝에 눈물방울이 달리곤 했다

눈에는 이상하게 푸른빛이 감도는

외할머니의 모습이다

 

말씨는 어눌했다

돈을 셈할 줄 몰랐고

장에 가서 물건 흥정도 못했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곧잘 다투었다

주로 어머니의 원망과 한탄이었다

대거리할 말을 찾지 못한 할머니는

입술만 떨었다

 

어머니의 원망과 한탄은 뿌리가 깊었다

혼인 때 신랑 집에서 보내온 예물을

외삼촌 장가드는 데 써 버렸다는 것에서부터

아버지가 새장가 들 때

갈라서는 조건으로 사 준 집을

외삼촌 노름빚으로 날렸다는

대강 그런 내용의 원망이었다

 

어머니가 늑막염으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

간병하러 왔던 외할머니는

죽을 쑤고 빨래를 하기도 했으나

만사가 서툴고 얼씨년스러웠다

어린 나는

병원의 복도와 계단을 오르내리며 놀았다

 

딸들 집을 전전하던 외할머니

말년에는 아들네 옹색한 셋방에서

진종일 긴 담뱃대만 물고 있었다

인생을 노름판에서 탕진한 아들

그 외아들을 도와주지 않는다고

딸들 앞에서 울던 외할머니

해방 직후

그분 역시 팔십 장수 누리다가 떠났다

 

 

환한 죽음 / 이대흠

 

술안주로 먹으려고 사 온 조개를

수돗물에 담그자

그것들 일제히 입을 다문다

 

몸 밖은 죽음

 

제 안의 어둠을 파먹으며

이승의 삶을 잠시 버티는,

 

불에 닿자 퍽 소리를 내며

다 놓아 버리는

온몸을 환히 열어 보이는

 

악착같이 잡고 있던 것이

이라는 암흑이었구나

 

 

등잔불 아이들 / 맹문재

 

아이들은 겨울바람이

앞산을 온통 꽝꽝 얼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등잔불 앞이기에 무서워하지 않는다

등잔불이 타오르는 저 문지방 너머 앞산에

창꽃이 피고

산벚이 새카맣게 익고

살구꽃이 나비처럼 날리는 것을 본다

병아리들이 뒤뜰을 개울물처럼 바쁘게 뒤지고

덕석을 벗은 소가 자주 밤꽃을 뒤흔드는 것도 본다

그리하여 겨울바람이 자꾸 문풍지를 흔들어도

아이들의 말장난은 화로 속의 고구마처럼 익어간다

살무사에 물릴 뻔한 일이나

장날마다 도지는 아버지의 주정이

간장에 부침개를 찍어 먹듯 즐거워지는 것이다

할머니로부터 들은 아기 잡아먹는 호랑이 얘기를

숭늉처럼 마실 때쯤이면

등잔불은 언 강물을 문 앞에 갖다 놓는다

아이들은 그 강을 밟고 동구 밖으로 나가

밤 기차에 올라

연애 편지를 쓰는 도회지의 청년과 처녀가 된다

 

 

당신의 운명 / 송경동

 

어머니는 밤 기도를 드리고

나는 두 칸짜리 미닫이문 너머에서

바퀴벌레를 잡는다

 

어머니의 구원은 언제쯤 이루어질까

어머니는 한때 팥알을 씻어 절간엘 다녔다

아카시아향 번지는 개척교회 돌계단도 올랐고

생활이 더 말라가는 말년엔

미사포를 넣고 성당엘 다닌다

 

그런 어머니를 비꼬기도 했지만

난 어머니의 그 천연덕스러움이 좋다

곤궁한 생활을 피게만 해준다면

설탕이 아닌 사카린이면 어떻고

꿀 아닌 물엿이면 어떤가

 

어머니에게 절대적인 것은 생활이어서

바퀴벌레처럼 어두운 이 삶이 펴지지 않으면

저 신의 운명도 오래가지 못하리라

 

 

슬픈 운명의 노래 / 최종천

 

나는 믿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세상을 구원하리라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사람을 돕는다 했던가

강한 사람은 더욱 강하고 약한 사람은 더욱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과 함께 도태되어간다

내가 노동을 하여 만드는 모든 것들이

우리를 도태시키고 착취하고 경쟁하게 하고

먼 미래에는 강한 자들만 살아남아

포식자가 되어 서로를 낙오시키고 먹고 먹히리라

시집가고 장가가는 처녀 총각들은 명심하라

그대들의 二世들은 그들 포식자들의 소모품으로 제공되리라

노동계급의 유전자는 특히 약하다

자식들을 가르치고 양육하기 위해

죽도록 고생하며 살지 마라,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빨리 도태되고 소모될 것이다

나는 사랑하는 그녀에게 이 사실을 말해주었다

그녀는 눈물을 머금고는 손가락을 꼽아 헤아렸다

지금 우리가 사랑을 해도 二世가 생기지는 않을 거라고

 

 

국밥 / 이재무

 

매번 고인께는

면목 없고 죄스러운 말이지만

장례식장에서 먹는

국밥이 제일 맛이 좋더라

시뻘건 국물에 만 밥을 허겁지겁

먹다가 괜스레 면구스러워 슬쩍

고인의 영정 사진을 훔쳐보면

고인은 너그럽고 인자하게

웃고 있더라

마지막으로 베푸는 국밥이니

넉넉하게 먹고 가라

한쪽 눈을 찡긋, 하더라

늦은 밤 국밥 한 그릇

비우고 식장을 나서면

고인은 벌써 별빛으로 떠서

밤길 어둠을 살갑게 쓸어주더라

 

 

불면의 일기 / 최영미

 

어떤 책도 읽히지 않았다

어떤 별도 쏟아지지 않았다

 

고독은 이 시처럼 줄을 맞춰 오지 않는다

 

내가 떠나지 못하는 이 도시

끝에서 끝으로 노래가 끊이지 않고

십년보다 긴 하루가 뒤돌아 제 그림자를 지워나갈 때

지상에서 마지막 저녁을 마시려 버스를 탄다

밤은 멎었지만 밤보다 더 어두운 저녁에

차창가에 닻을 내린 한숨이 묻어둔,

그 의미를 해독하지 못해 아직도 낯선 과거를 불러낸다

서로 빠져나오려 싸우는 기억들이 서로를 삼키는 시간

? 지나간 것들은…… 지나간 것들을…… 용서하지 못하는가

잃어버린 삶의 지도를 찾아 그리는

눈동자 속에 흔들리며 떠 있는 나무 한그루, 병든 잎들이

바람에 몸을 떨며 아우성친다

얼마나 더 흔들려야 무너질 수 있나

 

우리가 변화시킨 세상이, 세상이 변화시킨 우리를 비웃고

총천연색으로 시위하는 네온사인 불빛들이 멀리 하늘의 별을 비웃고

딸꾹질하듯 저녁해 어이없이 넘어가는데

지난날의 들뜬 노래와 비명을 매장한 뒷골목을 순례하며

두리번거린다

조각난 상념들을 꿰맞추며 두리번거린다

 

, 차라리, 온전히 미치기라도 했으면……

읽고 싶지 않은 이 세상을 웃어, 넘기라도 할 텐데

이해받지 못한 가을이 저 혼자 깊어가고

아무에게도 향하지 않는 시가 완성되었다

 

 

위험한 사람 / 이성선

 

멀리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위험하다

 

산은 멀리 있고

마음의 산은 더 멀리 있는데

 

그곳에 네가 있고

네가 있는 곳에

그리고 그 너머에

다시 내가 있는데

 

먼산을 바라보는 것은

사랑하는 것보다 위험하다

 

먼곳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자신을 버린 사람보다 더 위험하다

 

 

향기로운 집들이 길 되어 사라지다-고재종

 

어느 날 새벽 기침하니 옆 사람이 사라져

그 휑하고 스산한 것이 뒷골 산판 같던 빈자리처럼

자식이 한 다스나 되던 살구나무집은 헐려

살구 더는 매달지 않고 삼인산길 7-3번지로만 남다

 

마을 집들의 주소가 길 번지로 바뀐 뒤

거북 구에 바위 암자라서 천수만수 할 거라던

마을 이름 구암리도 이제 불리지 않고

사람들 배앓이며 체증을 용케 잡다가는

거년에 후산 간 송약방집은 노마드펜션으로 바뀌다

 

흐드러지게 대추가 열려 손 깨나 타는데도

되레 쥔 영감은 한 움큼씩 따서 꼬맹이들에게 나눠주던

대추나무집이 치매요양원을 가자 문짝만 펄럭이고

 

초여름이면 넝쿨장미의 붉은 함성이 이제 막

가슴은 봉긋봉긋, 코밑은 거뭇거뭇하던 이팔청춘들을

뜨겁게 뒤흔들던 장미울집은

서울 아들 빚에 넘어져 망초만 출무성한 7-5번지가 되다

 

집이란 집이 죄 삼인산길 7번지로 바뀐 뒤

아래뜸, 위뜸과 고샅의 돌담이 사라지고

모내기 마친 집들이 나앉던 정자 그늘엔 그늘만 쌓일 뿐

 

상엿집 자리에 성업한 그린장례식장은

돈 벌자 군의원 출마 끝에 세 표차로 떨어지다

참고로 그즈음 마을에서 후산 간 노인이 세 명이어서

죽으려거든 표나 찍고 가지, 했다나 뭐라나

 

대숲아래 한숨과 탄식만을 솎던 불면의 밤을

소나기 말 달려 더욱 깨우고 말던 양철지붕집은

무슨 귀농인가 뭔가 했다며 된장이건 뭐건

앞뒷집에서 듬뿍듬뿍 퍼 가고는

마을 울력 한 번 안 나오는 요란한 도회내기를 받았는데

 

탱자울 둘러 그 너머로 까치발 세우면

탱자가시처럼 눈빛을 세우더니 어느 가을엔 향내 탱탱한

노란 탱자를 건네주며, 니 것도 한번 만져보면 안 돼?

그러던, 정이네 탱자나무집은 또 어디로 갔나

 

이제는 담장마다 파란 아크릴판에 하얀 글씨로

7-1, 7-2, 7-7, 숫자만 붙은 마을의 집들이 평생 잡순

고기보다 더 많은 고기를 굽는 가든정이며

구암제 옆 무인텔은 갈봄여름 없이 세단들만 들이는데

항간엔 저수지 물이 희뿌연 것은 모텔 때문이라고 하다

 

향기로운 이름의 집들이 죄 길이 되었는데도

그 길로 하루에 두 번 오던 버스 더는 오지 않고

이따금 척추 꺾인 집 몇몇이 유모차를 밀고 나와서

동구 밖의 한 오백 년, 느티나무를 우수수 흔들다

 

 

'시(詩) > 괜찮은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똥바다  (0) 2024.01.15
쑥부쟁이 사랑  (0) 2023.12.25
임화(林和)의 詩  (0) 2023.12.14
곽재구시인의 詩  (0) 2023.11.04
9월 마지막 밤에 읽는 이상국의 詩  (0) 2023.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