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식민지 트라우마>(유선영 지음, 푸른역사 펴냄)
유선영-이화여자대학교를 거쳐 고려대학교에서 석박사 학위 과정을 이수했다. 현재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HK교수로 재직 중이다. 1960년대 청소년기를 보내고, 1970년대 청년기를 보낸 세대로서 경험한 군사독재, 권위주의 공권력, 물질주의, 개발우선주의, 집단주의, 학력주의, 비교 콤플렉스, 국가폭력, 가부장주의, 자기주도성의 상실 등의 문제들에 민감하다. 그런 만큼 인간의 자기 통제력을 방해하거나 훼손하는, 이러한 사회적?문화적?정치적 압력들에 대한 감수성이 연구의 동력이었다. 식민지 시기에 천착하는 것은 이 같은 한국 사회의 집합적 문제들에 대한 불편한 심사의 소산이다. 〈홑눈정체성의 역사〉, 〈편쌈 소멸의 문화사〉, 〈육체의 근대화: 아메리칸 모더니티의 육화〉, 〈근대적 대중의 형성과 문화의 전환〉 등 다수의 연구를 수행했다.
책소개
‘민족감정’으로 꿰뚫어 본 식민사회 조선인의 민낯
“피식민지 민족은 힘의 격차가 불러온 폭력적 사태들에 직면해 열등감, 히스테리와 공격성, 수치와 죄의식, 나르시시즘의 보상 욕망에 휘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식민지배가 아니었다면 겪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이 감정, 정신의 상흔들이 민족의 심연에 그리고 역사의 심연에 켜켜이 쌓여 있다. 식민지 시기의 역사는 표면의 현실 역사와 심연의 역사를 동시에 바라볼 때 비록 완전하지 않을지라도 전체의 윤곽선을 그려볼 수 있다.”
‘일제 36년’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나
역사는 승자의 기록?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도 한다. 당연하다.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진 이들은 ‘기록’을 남기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영웅과 위인 중심으로 서술되는 것이 보통이기도 하다. 시대의 흐름을 끌고, 흔적을 남기는 것은 이들의 몫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제도와 조직 같은 유형의 변화에 주목하는 것이 예사다. 그러나 이 같은 주역과 서술방식?대상에만 주목해서는 역사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미시사며 문화사 등에 눈길을 돌리는 경향이 갈수록 두드러지는 것은 그런 점에서 타당하다.
우리 역사에 깊은 상처를 남긴 일제 식민시기의 역사를 다루는 태도 역시 마찬가지다. 일제의 폭력과 억압 그리고 독립투사와 친일파의 투쟁과 부역에만 주목해서는 식민지의 역사를 온전히 그려낼 수 없다. 정치적 억압, 경제적 착취, 사회적 불의와 민족차별 그리고 독립과 해방을 염원하는 민족주의 저항과 투쟁은 식민지 역사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민족모욕이라는 집단경험을 축으로 재구성한 식민지배의 상흔
그 시대를 살아간 조선민족은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반응했을까. 오늘날 정치, 경제, 사회, 학술 등 각 분야에 여전히 남아있는 일제의 잔재는 어떻게 봐야 할까. 혹 시쳇말로 “엽전은 안 돼” 하는 자조의 말 역시 식민지배의 잔재 아닐까.
지은이는 근대 문명의 충격과 제국주의의 힘에 휩쓸린 식민지민의 ‘감정’에 주목했다. 그는 식민지배의 경험이란 본질적으로 트라우마, 외상外傷의 경험으로 보았다. 이민족에 의한 폭력과 모욕이 반복되는 과정에 자신의 전통과 문화, 정체성이 온통 부정당하는 정신적 외상을 집단적으로 겪었다고 파악한 것이다. 여기에 식민화를 문명화라 정당화하는 사태를 맞아 집단 불안과, 자신을 보호가기 위한 방어기제가 발현되면서, 힘에 대한 열망, 비교에 집착하는 열등감, 히스테리와 공격성, 수치와 죄의식, 나르시시즘의 보상 욕망 등을, 다양한 자료를 섭렵해 꼼꼼히 그려냈다.
이 과정에서 서구인의 외모에 대한 열패감, 중국인에게 ‘이등신민’으로서 우월감을 과시하는 얼궤이즈二鬼子, ‘평양사건’에서 터져 나온 히스테리컬한 공격성, 속물주의에 가까운 서양문물 숭배 등 차마 마주 대하기 꺼려지는 식민지 조선인들의 생생한 민낯이 드러나기도 한다.
책에 담긴 식민지 풍경
다시 보는 민족주의의 실체
식민지민의 트라우마는 근대성 그리고 식민지배의 두 가지 집단경험이 뒤섞인다. 그러나 외상은 ‘역사’가 되지 못했다. 외상은 정신분석의 영역이지 증거, 기록, 실증의 역사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식민지민의 트라우마를 역사화하기 위해 식민지민에게 가해진 외상들을 재구성해 식민지민의 민족주의는 사실 민족적 감정의 다른 이름이며 식민지민의 진정한 자아는 그의 말도, 행동도, 스타일도 아닌 감정으로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이를 위해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개념과 프란츠 파농의 비판을 수용했다. 그리하여 민족모욕과 국치의 경험이 민족감정을 도발하고 민족감정은 다시 경제성장과 근대화를 목표로 흘러갔음을 보여준다.
‘업수이 여김’을 벗어나기 위한, 힘을 향한 욕망
식민지배는 2등, 3등의 하위민족이라는 사회적 지위와 민족적 위치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통제력 부재와 결여, 그로 인한 모욕과 수치, 불안이 가중될수록 힘에 대한 욕망도 깊이 뿌리를 내린다. 이는 서재필이 1898년 미국으로 돌아가며 한 고별연설에서 “나라를 도와 부강케 하고 용맹한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죽기를 작정하고 앞으로 나아가 세계 만국에 동등 대접을 받고 다시는 외국 사람들에게 업수이 여김을 받지 말지어다”한 데서 엿볼 수 있다.
폭력을 동반한 문명화 세례
공진회가 전시하고 있는 것은 문명과 야만의 경계선이다. 1920년대 문화적 민족주의, 실력양성주의, 인격주의, 개조주의는 식민지민의 저주받은 죄의식과 공격성의 산물이다. 근대는 적들의 저주받은 문명이므로 공격해야 하지만 동시에 피할 길 없는 모욕과 수치에서 벗어나게 해 줄 근대였다.
그런가 하면 콜레라 예방을 위한 위생계몽도 민족차별의 경험을 더해 우발적인 콜레라 소요가 벌어지기도 했다. 의사도, 병원도 아닌 (위생)경찰이 주도하는 방역에서 빚어지는 억울하고 비참한 죽음들, 비위생이 공개리에 까발려지는 모욕과 수치, 방역관계자들의 천시와 협박, 경찰과 순사의 칼과 몽둥이에 의한 매질과 피범벅이 되어 유치장에 갇히고 격리된 채로의 죽음이 위생계몽의 실상이었기 때문이었다.
인정투쟁과 아메리카 짝사랑
“서울 시골 할 것 없이 모든 조선 사람들은 미국의원단을 천사단과 같이 알고 고대하는 중.” 1920년 중국을 거쳐 조선을 방문한 미국 의원단을 영접하기 위해 특파된 《매일신보》 기자 백대진이 미국의원단에게 전한 말이다.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등에 기대어 독립을 호소하려던 조선민중의 열망은 ‘자모慈母를 기다리는 유아幼兒의 마음과 애인을 고대하는 정인情人의 가슴’에 비견되었다. 이를 두고 일제 식민 당국은 이를 뇌미賴美사상이라 일축하기도 했다.
왜곡된 민족감정, 약자를 겨냥한 공격성
서구 열강의 근대성과 문명 앞에서 스스로의 열등성을 충격적으로 자각한 이래 식민지민의 모욕과 수치심은 이민족과의 관계에서 분노, 공격성, 그리고 자기파괴적인 무력감을 야기했다. 물질적 부를 향한,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향한, 학력과 명예를 향한 열망 역시 이러한 공격성의 표출이다. 100여 명의 애꿎은 중국인이 살해된 ‘평양사건’은 자기파괴적 공격성에 포획된 식민지민의 또 다른 집단불안 징후를 보여준다.
자기 존재를 인정받기 위한 나르시시즘의 표출
식민체제는 민족차별과 서열구조에 의존하는 체제이기 때문에 식민지민은 자기보호를 위해 방어기제로서 나르시시즘에 의존한다. 나르시시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근대성이다. 근대교육과 고등학력, 근대적 지식, 근대적 생활방식과 취향, 영어 등 외국어의 구사, 그리고 서구와 일본에서 수입된 상품의 소비이다. 이화여전을 중퇴하고 《개벽》 기자 등을 역임하며 1930년대 다수의 소설을 썼던 장덕조(1915~?)는 〈내 이상理想하는 스윗트홈〉이라는 글에서 “남편이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가정, 햄 샌드위치를 만들며 피크닉 준비로 소란한 가정, 한강 상류에서 피크닉, 연애감정으로 한 결혼, 월급쟁이 남편, 가난하지만 (미국여배우들과 같은) 아름다운 웃음을 짓는 (자신의) 얼굴, 계란 하나와 버터 칠한 빵 한 조각이 진수성찬인 식탁, 명랑과 쾌활함’이 있는 가정이다”라고 했다. 이것이 식민지 지식인이 꿈꾸던 근대였다
목차
들어가며
1장 민족모욕과 감정의 역사
세기말과 식민 지배기를 규정한 4가지 힘|역사를 추동하는 감정구조|민족모욕과 수치의 장기 역사|민족주의에 침습한 모욕감정과 ‘근대 트라우마’|모욕 받은 민족의 탈식민화
2장 ‘업수이 여김’과 분노 감정의 계몽
이민족의 모욕에 직면한 세기말|문명인의 ‘업수이 여김’이 촉발한 자기부정|분노공동체로서 민족이라는 감각
3장 문명의 트라우마, 민족의 스티그마
트라우마에서 시작된 문명화 노선|물질문명의 경이를 실감하며 입문한 근대|자연정복의 의지를 결여한 민족이라는 스티그마|식민지민의 비교 콤플렉스|타자의 시선과 신체 이미지에 갇힌 식민지민
4장 모욕을 합리화하는 식민지 사회
일본 오리엔탈리즘의 간지奸智|경찰의 전지적全知的 감시망에 포획된 식민지 사회|문명화에 동원된 합법적 폭력|신체에 새긴 모욕과 처벌|식민지 군중의 저항, ‘콜레라 소요’
5장 식민지민이라는 저주
〈경찰범처벌령〉이 규정한 식민지민의 죄와 벌|문명화에서 소외된 식민지민의 흔들리는 자의식|‘조선인스러움’을 소환하는 호명, “요보”|저주의 주문 ‘배일排日 조선인’|불의와 모욕에 분노하는 식민지민의 거리 소요|풍속과 도덕의 규율 공간, 극장|식민지라는 ‘비참Les Miserables’의 공동체
6장 식민지민의 인정認定투쟁과 아메리카니즘
3·1만세운동 직후의 불온 정서|독립 역량을 가진 민족으로 인정받기 위한 투쟁|미국에 보내는 구조 요청 신호, 제2차 독립운동|식민지민의 오판, ‘상상의 아메리카’
7장 동정과 연예의 민족주의
상호부조의 민족주의|식민지민의 불온한 동정열同情熱|연예를 매개로 한 동정의 민족화nationalization|온 겨레가 거든 ‘해삼위 학생연예단’ 전국순회공연|식민지 동정의 감정역학
8장 친일과 매판 협력의 존재양식
‘쫓겨 간 조선인’ 이등신민이 되다|오갈 데 없는 재만 조선인의 생존법|소수민족이자 일본국적자, 민족 갈등의 뇌관|친일의 얼굴, 얼궤이즈二鬼子|‘善良な 鮮人’ 혹은 ‘나쁜 선인鮮人’
9장 모욕과 폭력의 악순환
식민지민의 허위의식, 의사제국주의|‘일본의 개’ 간주, 구축운동 벌이기도|모욕 받은 자들의 폭력, 중국인 집단학살(과장, 왜곡된 오보가 불질러|평양선 갓난아기까지|서둘러 사죄, 구제금품 모금도|1,300여 명 검거 600여 명 기소)|식민지민의 민족주의, 히스테리 그리고 공격성
10장 폭력과 호환된 소비 그리고 나르시시즘
비교의 욕망에 사로잡힌 식민지민|근대성이라는 근원적 공포와 히스테리|혼란스러운 ‘근대 레시피’|타인의 시선에 과민한 식민지민의 인상학
에필로그-모욕 받은 민족의 감정구조
주석
찾아보기
▲ 1941년 진주초, / 경남교육청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전반까지 외부자에게 한국은 조선Chosen이었고, 조선을 소개한 서구의 여행가, 학자, 관리들의 저작들에서는 '은자隱者의 나라the Hermit kingdom'이라는 별칭으로 알려졌다.
“조선 사람끼리 싸우고 시기하며 강한 자가 약자를 압제하고 업수이 여기면서 외국 사람을 대하면 ‘병신들 같이 행신行身하는’ 까닭에 외국 사람이 조선을 업수이 여긴다.”-문명인의 ‘업수이 여김’이 촉발한 자기부정 P. 40
“제일 못나고 제일 가난하고 산천도 남만 못하고 시가市街도 남만 못하고, 가옥도 의복도, 음식도 남만 못하고 과학도, 발명도, 철학도 예술도 없고 일을 할 줄도 모르거니와 할 일도 없고 아마 이러케 불상한 백성은 다시 업슬 것”-타자의 시선과 신체 이미지에 갇힌 식민지민 P. 75
청결 여부 판정은 순전히 현장에 출동한 경찰의 판단에 맡겨졌으므로 무조건 복종하고 순응하는 것은 물론 없는 살림에 음식 접대, 뒷돈도 챙겨야 했다. 머리에 먼지가 앉았다고 몽둥이로 먼지 털듯이 실컷 두들기는 것을 경찰은 ‘청결한다’고 했고 이런 식으로 70대 노인도 ‘청결하고’ 부녀자도 두들겨 팼다.-신체에 새긴 모욕과 처벌 기P. 107
요보 호명은 하등민이라는 낙인이었다. …… 요보는 일제가 지배하는 제국 안에서 정상인이 아니라는 낙인stigma이고 민족적 범주였다. 요보라는 호명은 개개인의 개성, 신분, 인격의 차이는 삭제되고 다만 ‘요보 조선인’으로, 즉 조선인이라는 민족범주로만 존재하게 하는 장치였다.-‘조선인스러움’을 소환하는 호명, “요보”P. 140
“인도주의와 정의를 완전히 결여한 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를 동정하는 미국 의회의 일원이고 위대한 미국 인민의 대표들에게 우리의 자유를 위하여 두 눈에 피눈물을 머금고 감사를 표한다.”-식민지민의 오판, ‘상상의 아메리카’P. 188
1920년대 민족주의는 동정-감정에 의해 추동되었고, 연예에 의해 매개되고 실감되었다. …… 무대와 관객은 구분되지 않았고 그들은 나라를 잃은 망국민이고 식민지민이었다. 이 일체감이야말로 식민지민이 향유한 가장 강력한 카타르시스이고 쾌락이었을 것이다.-식민지민의 불온한 동정열P. 221
‘센료나 센징’은 중국과 일본,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서 이간질, 밀고, 정탐, 앞잡이, 친일매판 협력행위로 혐오와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또 일본의 비호하에 유흥업, 마약류 취급, 인신매매와 성매매업에 종사하는 자가 많았다.-‘善良な 鮮人’ 혹은 ‘나쁜 선인鮮人’P. 239
패거리를 이룬 장정들이 핏물 떨어지는 곤봉을 든 채 앞에서 선도하고 그 뒤를 200~300명의 무리가 따르면서 피에 주린 이리떼처럼 중국인을 찾아 다녔다-평양선 갓난아기까지 살해 266
인텔리 여성 89명을 대상으로 ‘미래의 남성상’을 설문조사한 결과를 보면 “고전으로는 괴테의 파우스트, 셰익스피어의 햄릿, 톨스토이의 부활을, 현대작품으로는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 등 작품의 개요와 주인공 이름쯤은 알아야 하고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을 감상할 귀, 야구?정구?럭비 경기규칙 정도는 알고 있는 남성”이라 했다.-타인의 시선에 과민한 식민지민의 인상학 P. 312
우리 사회 대부분의 문제는 일제강점기를 겪은 PTSD다.개인이건 집단이건 폭력에 장시간 노출이 된다면 뇌의 기질적 문제는 물론 집단 의식도 변화하게 된다.‘착하면 손해‘라거나 편법과 반칙을 융통성으로 치부하는 행태들이 대표적이다.심각한 건 이게 절대 저절로 치유되지 않는다 데 있다. Ajna 2017-07-04
한반도 민중은 마침내 비참의 공동체가 되었다
한국은 빛과 어둠이 동시에 강한 사회다. 수준 높은 문화상품으로 세계의 찬사를 받지만 그 상품의 내용은 어두움 투성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상품이었던 기생충, 오징어게임, 더글로리 셋 모두가 빈부격차, 폭력과 뒤틀린 욕망이 투영된 사회를 묘사한 것이다. 한국의 성공의 이면에는 어두움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한국 사회를 직조해낸 빛과 어둠의 기원을 찾아나선 책이 있다. 전 성공회대 교수 유선영의 <식민지 트라우마>(유선영 지음, 푸른역사 펴냄)이다.
저자는 책을 쓰게 된 계기가 "왜 우리는 이렇게 살고 있는가?"란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사회 모든 부문에 침투한 권위주의, 부정과 부패, 국가와 제도에 대한 국민의 불신, 학벌주의와 서열주의, 한 인생의 성공이 물질로 환전되는 물질주의, 경쟁위주의 사교육, 성형한국의 외모주의, '갑질'이 만연한 폭력과 착취의 아비투스에 시선이 머물렀으며 의문은 힘을 얻었다."(상기책 인용 인용미기재시 동일) 어느 사회에나 권위주의, 부정부패, 서열주의, 폭력은 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그 양상이 다르다. 유선영은 먼저 프랑스 사회학자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개념을 소개한다. 아비투스란 특정한 환경과 조건에 의해 형성된 성향이나 사고, 인지, 판단과 행동의 체계를 의미하는 개념이다. 한 사회의 사람들이 가진 독특한 감정구조 즉 아비투스가 한 사회를 특정한 형태로 주조한다. 한번 형성된 아비투스는 특별한 계기를 만나 변화하기 전까지 지속된다. 유선영은 한국인의 감정의 기원으로 일제강점기 전후를 주목한다.
비교적 안정적 사회를 오래 유지했던 조선이 급격히 와해된 것은 서세동점이란 국제적 흐름 때문이었다. 이런 세상에서 한국인이 제일 먼저 맞닥뜨린 감정은 '업수이여김'이었다. 19세기말 독립신문을 만들고 독립협회를 주도하던 서재필은 미국으로 추방당하게 된다, 그는 떠나기 전 대중을 향해 고별연설을 한다. "나라를 부강케 하고 용맹한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죽기를 작정하고 앞으로 나아가 세계 만국에 동등 대접을 받고 다시는 외국 사람들에게 업수이 여김을 받지 말지어다." 그는 눈물에 목이 메어 연설을 다 마치지 못했다. '업수이여김'이라는 감정은 조선 민족의 일상 경험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일본의 조선지배가 본격화된 이후 일본 경찰의 조선인에 대한 폭력과 모욕은 흔한 일이었다. 그야말로 경찰은 무소불위의 존재였다. 경찰의 폭력은 반일혐의가 있는 이들에게만 향하지 않았다. 특히 위생행정을 핑계로 폭력은 불특정 다수 대중을 향했다.
총독부 산하 경무국 소속 위생경찰의 활동에 대한 유선영의 설명이다. "일제는 식민지민의 일상, 신체, 의식주, 생활방식을 규율하고 직간접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합리화,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근대적 위생 개념·제도·담론을 활용했다." 문제는 위생경찰의 활동이 지극히 폭력적이었던 것에 있다. "청결을 빌미로 매년 몇 차례 정기적, 부정기적으로 농민에게 가하는 구타와 모욕은 다른 경관이나 헌병이 인민을 억압 멸시하는 정도 이상으로 감정을 상하게 했다.", "여자, 노인, 아이 할 것 없이 경찰의 매질, 구타, 무시와 조롱, 협박으로 공포 분위기가 연출되는 것이 청결검사, 검병 호구조사였다. 그러나 두려움보다 더 괴로운 것은 일본인 경찰과 조선인 순사들이 한집안의 어른인 노인을 자식들 앞에서 쥐어박고 더럽다고 비난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특히 일상의 청결상태를 순사에게 검사받는 과정은 말 그대로 모욕의 시간이었다." 현장에서 경찰의 재량권은 무제한에 가까웠기에 70대 노인이나 부녀자를 두들겨 패는 것은 비일비재했다. 폭력을 당하고도 항의 한번 못하고 그들에게 음식을 접대하거나 뒷돈을 바쳐야했다. "1924년 함경남도 홍원에서는 일본인 순사부장이 추계청결을 잘못했다고 한마을 40여 가구의 호주를 모두 구타했으며 칼을 휘둘러 상해를 입히기도 했다." 칼을 휘두른 경찰에게 내려진 처분은 고작 '면직'이었다.
위생이 목적이라기 보다 조선인을 폭력에 순치시키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총독부는 조선인들을 보호하고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만들었다면서 '경찰범처벌규칙'을 공포했다. 87개 항의 행위를 규정했는데 이중 1항의 요주의자가 생업없이 각 지방을 배회하는 자 즉 '부랑자'였다. 87개나 되는 항목은 거의 모든 측면에서 조선인을 전지적으로 감시할 수 있게 만들었다. 법령위반자에게는 일본에서는 벌금이 주였으나 조선에서는 태형(매질)과 구류처분이 많았다. 1920년 태형이 폐지될 때까지 매해 3~4만 명의 조선인이 경찰에게 매질을 당했다. '부랑자'라는 명목으로 특정한 범죄행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일본은 '풍속경찰'이라는 직분을 만들어 요리집, 매음장, 예배소, 신문과 출판물도 풍속관리대상으로 관리했다. 특별한 곳도 아니었다. 연극장에 모인 관중조차도 수시로 단속의 대상이 되고 체포되었다. 체포되어 매질을 당하고 길거리에서 포승줄에 묶인 채 끌려다녔다. 레닌 추도식을 조직한 진보조직의 청년들도 부랑자로 지목되어 처벌되었다. 모든 조선인이 경찰 폭력의 대상이 되었다.
아무런 범죄요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행해진 풍속경찰에 의한 단속은 숨겨진 의도가 있었다. 잠재적 불안요소가 될 인물들을 부랑자로 호명하며 처벌하는 것은 적지 않은 효과를 가져왔다. "우선 부랑자는 일본이 조선을 식민화해야 하는 이유로 내세워 선전했던 조선 민족의 야만성과 열등성을 방증하는 상징적 존재들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구악과 오랜 적폐인 상류층 부랑자를 단속하고 징치하는 총독부는 풍속교화와 민족성제도라는 문명화 사명을 실행하는 것으로 포장될 수 있었다." 자신들의 행위를 문명의 세례로 선전하며 폭력을 통해 조선인을 완벽히 순종시키는 것이 일본의 진짜 의도였던 것이다.
모욕을 벗어나기 위해 조선인들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교육열이 조선 전역을 뜨겁게 달궜다. 조선인들은 근대가 가져온 교육시스템에서 승리해서 자신들이 모욕받아 마땅한 존재가 아님을 증명해야 했다. 또한 모욕의 가해자는 일본이었고 그들은 근대적 물질문명을 상징하는 존재들이었기에 조선인은 물질적 성공을 미친 듯이 추구하기 시작했다. 신분제가 급속히 이완되는 틈을 타 물질적 성취를 통한 신분 상승을 꾀했다. 교육열, 물질숭배 이 모든 것들이 하나처럼 맞물려 있었다. 그러나 모욕감, 수치심이 출구를 찾지 못할 때 자기모멸감은 증폭되었고 타인과 자신을 향한 공격성으로 전변한다.
알제리 혁명전쟁에 참가한 정신과 의사 프란츠 파농은 식민지민의 정신을 분석했다. 파농은 책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프란츠 파농 지음, 남경태 옮김, 그린비 펴냄)에서 식민지민의 피부 아래에는 히스테리 증상인 공격성이 자리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알제리 흑인에게 나타나는 귀신들림과 춤에 대한 열광은 파농에 따르면 공격성의 정신질환적 표출이었다. "장기간 모욕과 폭력에 노출된 사람들은 (중략) 수치감을 극복하기 위해 허세를 부리고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면서 남과 비교하여 우월하다는 자기확신에 집착하기도 한다." 수치감이 촉발한 장기간의 무력감은 공격성을 강화시킨다. "장기간 무력감을 경험한 사람은 공격적으로 될 여지가 큰데 이는 자신을 무력상태에 밀어넣은 트라우마를 정복하기 위해, 수치심으로 인한 고통을 완화하고 자신의 가치를 증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애적 분노에 사로잡혀 공격적 행동을 하는 것이다. 공격성과 순응성은 장기간의 모욕과 수치에 대한 심리적 반응이다."
모욕감과 수치심은 사람을 극단적으로 몰아간다. 수치심을 극복하기 위해 나르시시즘이란 방어기제가 작동된다. 식민지민의 정체성은 현실적 지반을 확보하지 못한 채 흔들린다. 그 흔들림은 마음을 더욱 어수선하게 만든다. 식민지민의 삶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나아지지 않는다. 남은 유일한 길은 스스로를 식민지민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식민지민이 아닌 채 살아가는 것이 열패감에 시달리는 식민지 지식인들의 출구가 된다. 결국 일단의 무리는 정신적 친일파가 된다. 우리의 비참함도 '결국 우리가 못난 탓'이라 생각하는 분열적 정체성을 파농은 식민지형 지식인의 전형으로 보았다.
당대 신문의 사회면은 식민지민중의 비참한 처지를 알리는 기사들로 가득했다. "사회면을 보면서 입게되는 상감(感傷)은 배가 부를 정도로 충분하고도 넘치는 상태였다. 빈민굴, 떼죽음, 파멸해가는 농촌, 학생들의 동맹휴학, 염세자살, 끊이지 않는 검거로 하루하루가 반복되는 '비참한 현실'에 감정을 이입하고 분노하고 좌절하는 고통을 경험하는 일상인 것이다" "사회면은 '항상 검거, 징역, 자살, 기근 등이어서 참혹해서 볼 수가 없는' 식민지 사회의 거울이었다." 서로의 절망과 비참함에 공감하면서 한반도 민중은 마침내 '비참의 공동체'가 되었다.
책을 읽으며 외할머니를 떠올렸다. 어린 시절 필자는 외할머니 손에 자랐다. 외할머니는 "순사 온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어린 나이여서 순사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책을 읽고난 후 식민지 시절을 살아내신 외할머니에게 순사가 어떤 존재였었는지 이제야 이해할 것만 같다. 한반도 민중은 순사라는 괴물에 내맡겨진 수인(囚人)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 시기를 다룬 탁월한 책을 이미 갖고 있다. 최정운의 책 <한국인의 탄생>(미지북스 펴냄)이다. 유선영의 책은 최정운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절창'이다. 절창이되 슬픈 절창이란 의미에서. 김창훈 칼럼니스트 |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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