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 마크 릴라 저/전대호 역 | 필로소픽 | 2018. 06
마크 릴라 (Mark Lilla) -컬럼비아대학교 인문학 교수이며 서구 사상사, 특히 정치와 종교의 관계, 근대 서구 계몽주의를 연구하는 세계적인 정치철학자이다. 1990년에 쓴 박사학위 논문 『비코에 붙이는 서문: 회의론, 정치학, 신정론』으로 미국 정치학회의 레오 스트라우스상을 받았다. 「뉴욕 타임스」, 「뉴욕 서평」을 비롯한 전 세계 여러 매체에 기고하는 저술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2015년에는 미국 오버시즈 프레스 클럽Overseas Press Club of America의 국제 뉴스 최우수 논평상을 받았다. . 저서로는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 『분별없는 열정』 『사산된 신』 『G. B. 비코』 등이 있으며, 공저로 『이사야 벌린의 지적 유산』이 있다. 그의 저서들은 십여 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목차
들어가는 말: 기권
제1장 반정치
맑스가 남긴 한마디/기본입자들/해돋이/해넘이
제2장 사이비정치
정체성의 형태들/우리에서 나로/사이비정치의 기초/맑스가 남긴 또 다른 한마디
제3장 정치
리셋/시위 참가자와 시장/민주주의에서 민중과 민주당에서 민중/시민으로 하나 되기/진보주의자들의 교육
감사의 말
해설: 트럼프 패러독스_유창오
출판사 리뷰
미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사상가 마크 릴라 교수가 진보 지지자들에게 보내는 긴급 메시지
현실 정치의 커다란 실패는 때로 훌륭한 정치적 통찰을 불러온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막스 베버의 소명으로서의 정치,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이 고전들은 저자들이 정치 참여에 실패하고 쓴 저작이다. 최근에 나온 조지 레이코프의 코끼리는 생각하지마는 2004년 미국 민주당의 대선 패배 이후에 쓰인 문제작이다. 마크 릴라의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 역시 2016년 대선에서 미국 민주당이 트럼프에게 믿기지 않는 참패를 당한 이후 나온 가장 탁월한 성찰이다.
마크 릴라는 2016년 11월 뉴욕타임스에 힐러리의 패배를 분석한 ‘정체성 정치의 종말’이라는 칼럼을 기고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정체성 정치를 비판한 마크 릴라의 글은 프린스턴대 정치학 교수 앤 메리 슬로터의 말대로 진보 진영의 “많은 사람들을 화나게” 했지만, 분열되는 진보의 위기를 극복하고 미래 비전을 계획하는 데 “매우 유익”한 메시지를 남겼다. 그 칼럼을 토대로 2017년에 출간된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는 미국의 진보가 어떻게 위기를 타개할 수 있을지 처방전을 제시하고 있다. 마크 릴라의 진단은 비단 미국뿐 아니라 페미니즘, LGBT 등 정체성 정치 이슈가 점차 부상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정치 담론에도 중대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이런 진보는 사양합니다: 정체성 정치의 함정
마크 릴라는 진보가 패배한 주된 원인을 분석하기 위해 루스벨트부터 레이건까지 20세기 미국 정치 체제의 변화를 살핀다. 그는 미국 정치사를 뉴딜 시대부터 1970년대까지의 루스벨트 통치 체제(dispensations), 1980년대 이후의 레이건 통치 체제로 구분한다. 루스벨트 체제의 민주당은 시민이 위험과 곤경으로부터 서로를 보호하고 기본권의 부정에 맞서는 활동에 함께 참여하는 나라를 그렸고, “연대, 기회, 공적 의무”를 표어로 내세운 국가적 비전을 제시했다. 그러나 60년대 후반 유럽의 신좌파 운동에 영향을 받은 미국 진보세력은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라는 슬로건을 앞세운 정체성 정치를 내세우며 점차 공동체의 가치에서 멀어졌다.
인종, 성별, 성적지향 등 개인의 특정한 정체성을 바탕으로 정치 세력을 구성해 그들의 이익과 관점을 대변하는 정체성 정치는 소외받는 흑인, 여성, 성소수자의 권리를 옹호했다. 원래는 민중 계층을 위한 것이었던 정체성 정치는 1980년대 즈음에 점점 더 협소하고 배타적으로 자신을 정의하는 사이비정치에 자리를 내주었다. 그 결과 전통적 진보에서 중추 역할을 하던 남성 노동자 계급이 이탈하게 된다. 이즈음 향후 미국 정치를 40년간 지배할 레이건 체제가 등장한다. 레이건은 국가의 속박에서 벗어난 가정과 소규모 공동체, 기업이 번창하는 더 개인주의적인 미국을 그렸다. “작은 정부, 낮은 세금, 자립적 개인주의”로 요약되는 레이건의 비전은 미국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었고, 이후 클린턴, 오바마로 민주당이 집권에 성공했지만, 진보 진영은 레이건의 반정치적 비전을 넘어서는 경쟁력 있는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
소수자를 돕는 유일한 길을 막는 소수파 진보의 사이비정치
레이건의 이념이 지배하는 동안 민주당은 그에 상응하는 확신을 주는 비전을 제시하기는커녕, 오히려 ‘너’와 ‘나’의 차이를 강조하면서 ‘더 작은’ 진보를 추구하는 정체성 정치에 몰두해왔다. 다수파를 만들어서 선거 승리로 권력을 잡으려는 노력은 지극히 민주주의적인 사고인데도 정체성 정치는 다수파 진보가 아닌 소수파 진보를 지향한다. 소수파 진보는 자신이 타인보다 더 진보적이라는 차별성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며, 그들에게 진보란 세상을 바꾸기 위한 수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기만족을 위한 수단이다. 이들은 선거에서 승리하고 정권을 장악하고 법령을 바꾸어 현실적 변화를 꾀하는 정당 정치를 불신하고, 대학의 워크숍과 세미나, 항의 시위와 퍼포먼스 같은 운동 정치에 몰두한다는 점에서 사이비정치라고 마크 릴라는 비판한다. 소수자의 권익을 진정으로 향상시키는 유일한 길은 선거에 승리해서 지방정부와 연방정부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끈기 있게 선거운동을 벌이고 법안을 만들고 협상을 통해 법안을 통과시키고 관료들을 감독하면서 법이 집행되는지 감시하는 제도권 정치가들과 공직자들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클린턴과 오바마가 대통령으로 있던 민주당 집권 시절에도 사람들의 삶에 직접 영향을 행사하는 지방정부에서 연방 법원까지 현실 정치 영역은 공화당에게 빼앗겼다. 극우적 세력이 점령한 일부 지방정부는 연방법과 헌법적 보호장치조차 사문화시키고 말았다. 결국 이런 정치 혐오적인 소수파 진보로는 진보의 가치와 신념을 사회에서 실현하지 못한다.
트럼프가 준 기회: 개인주의 시대 진보가 나아갈 길
마크 릴라는 정체성 정치를 비판하지만, 억압 받는 소수자 집단을 대변하는 일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은 아니다. 정체성 정치가 공동선 추구를 제쳐두고 민중을 편 가르고 자극하여 진보진영을 고립시킨다는 데서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정체성 정치가 트럼프의 당선을 불러왔지만 마크 릴라는 미래를 낙관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트럼프의 등장은 레이건 체제의 종말을 의미한다. 레이건의 비전이 사라지자 공화당은 트럼프에게 안방을 허용했고, 트럼프는 권력 공백 상태에서의 과도기 대통령인 셈이다. 트럼프로 인해 공화당이 수십 년간 구축한 시스템은 엉망으로 흐트러졌고 반면 트럼프에 자극 받은 진보주의자들은 비축된 에너지를 방출하고 있다. 그는 이 기회를 긍정적인 변화로 전환시켜 ‘더 나은 진보‘로 나아간다면 진보적인 미국이 탄생할 것으로 생각한다. 마크 릴라는 정체성 정치가 등한시했던 시스템 안에 자리 잡은 민주 정치의 요구와 제약들을 다시 익히고, 모두가 공유했던 ‘시민의 지위(citizenship)’를 바탕으로 새로운 비전을 개발할 것을 제언한다. 그것은 진정으로 진보적 가치관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모든 시민이 시민으로서 호응하는 미국의 비전이다. 그리고 그런 비전의 개발은 무엇보다도 정체성의 시대를 과거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우리가 마크 릴라의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 사태로 붕괴된 보수진영이 갈피를 못 잡는 한국의 정치 상황에서는 진보의 실패가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하지만 마크 릴라의 메시지는 최근 페미니즘, LGBT(성소수자) 등의 정체성 정치의 의제들이 점차 부상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가뜩이나 대화와 타협에 미숙한 우리 사회 진보 세력의 어깨에 극단적 정체정 정치의 짐 하나를 더 짊어지게 된 상황은 진보의 미래에 커다란 도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진보 진영이 집권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노동에 관심을 기울이는 정당과 노동당은 다르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여성에 관심을 기울이는 정당과 여성당도 다르다. 우리는 소수 정당이 되지 않으면서도 소수자들에 관심을 기울이는 정당일 수 있으며 그런 정당이어야 한다. 우리는 우선 시민이다.”
책 속으로
미국 진보주의는 21세기에 위기를 맞았다. 그 위기는 우리 편에서는 상상력과 야망의 위기, 더 광범위한 대중의 편에서는 애착과 신뢰의 위기다. 미국인의 과반수는 우리가 지난 몇 십 년 동안 전달해온 그 어떤 거창한 메시지에도 더는 호응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충분히 명확하게 밝혔다. 심지어 우리 후보에게 투표하는 사람들도 우리가 (특히 그들에 대해서) 발언하고 글을 쓰는 방식에, 우리가 정치적 운동을 하는 방식에, 우리가 정권을 운용하는 방식에 점점 더 강한 반감을 품는다. --- p.10
진보의 중대한 기권은 레이건 시대에 시작되었다. 루스벨트 체제가 끝나고 야심 찬 통합 우파가 부상하면서, 미국 진보주의자들은 심각한 과제에 직면했다. 미국 사회의 새로운 현실에 적합하게 과거 시도들의 실패에서 얻은 교훈을 반영하여 미국민이 공유할 미래에 관한 신선한 정치적 비전을 제시하라는 과제에 말이다. 진보주의자들은 이 과제를 수행하지 못했다. 대신에 그들은 우리가 시민으로서 공유하는 바와 우리를 한 나라로 묶는 것에 대한 감각을 완전히 잃은 채 정체성 정치 운동에 몰두했다. 루스벨트 진보주의와 이를 지지하는 노동조합들을 상징하는 이미지는 서로 악수하는 두 개의 손이었다. 정체성 진보주의를 표현하는 흔한 이미지는 프리즘이 단일한 광선을 색깔 성분들로 분해하여 무지개를 만드는 모습이었다. 이 두 상반된 이미지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p.12~13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으로 미국 진보주의는 리셋 단계에 도달했다. 우리가 우리의 시스템 안에 자리 잡은 민주 정치의 요구들, 가능성들, 제약들을 다시 익힐 때가 된 것이다. (…) 처음 제시할 세 개의 교훈은 우선순위에 관한 것이다. 운동 정치보다 제도 정치가 먼저고, 목표 없는 자기표현보다 민주적 설득이 먼저고, 집단 정체성이나 개인 정체성보다 시민의 지위가 먼저다. 넷째 교훈은 개인주의와 원자화가 점점 더 심해지는 상황에서 시민 교육이 긴요하다는 점과 관련이 있다. (…)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와 미국 대중 사이에, 또 우리와 미래 사이에 쌓아놓은 온갖 장벽들을 주목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출발점은 그 장벽들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막아온 금기들을 의문시하는 것이어야 한다. 미국은 무엇이고 진보 정치 활동을 통해 무엇으로 될 수 있는가에 관한 고무적이고 낙관적인 비전을 개발하는 것이 우리의 공통 목표여야 한다.--- p.107~108
정체성 진보주의는 우리라는 단어를 고상한 정치 담론의 변방으로 추방했다. 그러나 그 단어가 없으면, 진보주의의 장기적 미래도 없다. 역사적으로 진보주의자들은 평등한 권리를 보장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해왔다. 진보주의자들은 우리가 불운한 이들과의 연대감을 느끼고 그들을 돕기를 바란다. 우리는 모든 것이 시작되는 자리다. (…) 반면에 정체성 진보주의자들은 그 단어를 버림으로써 전략적 모순에 빠졌다. 정체성 진보주의자들은 그들 자신에 대해서 말할 때 자신들의 차이를 단언하고 싶어 하고 자신들의 특수한 경험이나 욕구가 배제되는 조짐만 보여도 성마르게 반응한다. 그러나 그들이 속한 집단을 돕는 정치적 행동을 촉구할 때 그들은 자신들이 비로 규정한 사람들에게 그 행동을 요구한다. 그 사람들의 경험은 그들 자신의 경험과 비교할 수조차 없다고 스스로 말하면서 말이다. (…) 이 난국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우리 모두가 미국인으로서 공유한 무언가에 호소하는 것이다. 그 무언가는 우리의 정체성과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우리 정체성의 존재와 중요성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그 무언가는 ‘시민의 지위’이며, 진보주의자들이 시민의 지위를 다시 거론하기만 한다면, 시민의 지위는 엄연히 존재한다. --- p.124~125
또 한 세대의 시민을 이전 세대와 유사하게 시민으로 키우는 것은 그리 끔찍한 일이 아닐 것이다. 약간의 수정을 거친다면, 옛 모형은 본받을 가치가 있다. 열정과 헌신뿐 아니라, 지식과 논쟁도 그러하다. 당신의 머리 바깥의 세상에 대한 호기심, 당신과 비슷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 미국과 미국의 모든 시민들을 위하는 마음, 그들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각오를 본받을 가치가 있다. 우리 모두를 위한 공통의 미래를 상상하는 야심도 그러하다. 이것들을 가르치는 부모나 교육자는 정치 활동-구체적으로, 시민을 육성하는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오직 시민이 있을 때만, 우리는 그들이 진보적 시민으로 되는 것을 바랄 수 있다. 그리고 오직 진보적 시민이 있을 때만, 우리는 미국을 더 나은 궤도에 진입시키는 것을 바랄 수 있다. 당신이 도널드 트럼프와 그가 대표하는 모든 것에 저항하고자 한다면, 이것이 당신의 출발점이어야 한다. p.145~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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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실베니아, 미시간, 위스콘신, 아이오와는 선거인단이 52명인 4개주이다. 이곳은 전통적으로 민주당의 텃밭이었다. 이곳은 러스트 벨트로 5대호 주변의 쇠락한 공장지대이다. 미국의 제조업이 점차 사양화 되는 과정에서 불황을 겪는 지역이라고 보면 된다. 민주당의 텃밭이었던 이곳이 어떻게 공화당의 트럼프 손을 들어 주었는지가 아주 중요한 점으로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러스트 벨트의 블루칼라 백인 노동자들이 트럼프와 공화당을 지지했다는 사실은 정말 충격적이다. 여기서의 극적인 반전으로 인해 트럼프는 대통령이 되었고 대통령이 된 트럼프는 세계적인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지지를 놓치지 않기 위해 세계 각국과 무역전쟁을 치르고 있다. 이 방법은 러스트 벨트에서 높은 지지를 이끌어 내는 방법으로 강력하다.
시험을 치르고 나면 학생들이 오답을 정리하듯 선거가 끝나고 나면 패배에 대한 분석을 담은 이론서들이 발표된다. 민주당이 공화당 부시에게 패한 이후 조지 레이코프의 책 <코끼리는 생각하지 않는다>와 토머스 프랭크의 책 <캔자스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가 대표적이다. 2016년 대선에서 민주당의 패배를 분석한 마크 릴라의 이 책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는 미국 정치가 만들어 낸 역작이다.
마크 릴라의 진단에 따르면 2016년 미국 대선의 민주당 패배의 원인은 정체성 정치에 있다고 한다. 아울러 진보세력의 위기에도 정체성 정치가 원인이라고 진단 한다. 보수의 레이건 주의는 복지국가를 해체하기 위해 정치를 했다. 정치 혐오를 확대시켜 국민들로 하여금 정치참여에 거리를 두게 하고 그로 인해 민주주의를 퇴보시켰으며 사회적 불평등을 더욱 심하게 만들었다. 그런 까닭에 저자는 레이건 주의를 '반정치'라고 정의한다. 그에 반에 진보의 정체성 정치는 '사이비정치'라고 비판한다. '정체성 정치'는 인종, 성별, 성적지향 등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정치세력을 구성해 그들의 이익과 관점을 대변하는 정치를 말하는데, 주로는 흑인, 여성, 성소주자를 대변하는 정치를 뜻한다. 152쪽
정체성 정치는 진보의 무기라고 할 수 있는 연대와 공동체 그리고 공적 의무를 무력화 시킨다. 민주당의 대선 패배와 진보의 위기 원인이 이것이라고 저자는 진단한다. 전통적인 진보에서 노동자들이 자치했던 자리를 신좌파에서는 흑인, 여성 , 학생이 대체하고 이어서 동성애자에게 넘겨주었다. 이렇게 바뀌게 되면서 개인만을 강조하고 개인만을 강조하다 보니 나와 다른 사람에게는 배타적인 면이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목표를 공유하는 공동체 의식을 찾기 어려워지고 정치는 조각조각 나눠지게 된다. 자신에 초점을 맞추고 자신들이 속한 집단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점차 민주정치를 외면하게 된다. 자신과 다른 의견을 듣기 보다는 높은 교단에서 다른 의견의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기 시작한다.
저자는 이런 상황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시민'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시민교육을 활성화 시켜야 한다고 한다. 또 한 가지는 운동 정치보다 제도 정치가 우선되어야 하며 자기표현보다는 민주적 설득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정치'라고 표현한다. 서로 동일시하고 개별적인 정체성이 아닌 모두가 공유하는 그 무엇이 시민의 지위이고 시민의 지위가 연대를 제공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민주주의에서는 다양한 의견이 존재할 수 있다. 그리하여 경청하며 상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노동자들의 표를 획득하는 것이 진보가 제일 먼저 해결해야 하는 일임을 언급한다. 이런 것들이 여전히 이뤄지지 않는다면 진보의 미래는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 저자의 일침이다. 운동정치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정당과 제도정치가 뒷받침 되어야 한다.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정치는 반드시 필요하다. 정치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운동을 높이 평가하는 경향을 버리고 정당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정체성 정치의 핵심인 여성과 인종 그리고 성소주자의 문제를 개별적인 정체성에 머물지 않고 우리와 시민의 지위로 함께 연대하는 것이 더 나은 진보를 이끄는 중요한 일이다.
미국의 정치 상황을 이야기 했지만 우리나라 현재의 정치 상황에도 충분히 적용할 수 있기에 이 책은 가치 있다. 우리나라의 진보 상황 역시 미국 사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미국의 상황이 어찌 보면 우리보다 좀 더 진전이 있어 보인다. 그렇기에 이렇게 정체성 정치를 넘어서자고 말하는 것일 수 있다. 문재인 정권에서는 이제 한발 대딛는 단계이긴 하지만 보수 종교계의 반발로 차별금지법 조차 제정되지 못하는 상황이다. 더 나은 진보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많이 쌓여 있는 것은 자명하다. 공동 체 의식과 정치의 파편화를 막아 민주주의 사회가 이뤄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c*****1 | 2018-07-02
지난 2016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의 당선은 내게 충격에 가까웠다. 오바마 집권에도 불구하고 몇 년 사이 미국 정치가 저렇게 후퇴했나 의심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역시 미국의 진보 정치에 실망한 저자가 미국 진보정치의 문제점을 살펴보고 문제의 중심에 정체성 정치가 있다고 진단한 이 책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정체성 정치가 진보 정치를 가로막는가.
미국 제도권에서 진보정치를 이끌어온 민주당은 어쩌다 위기를 맞게 되었을까. 지난 2016년 대선 결과를 살펴보면, 민주당 후보인 힐러리 클린턴은 공화당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보다 총 득표율에서 2.1% 앞섰다. 그럼에도 트럼프가 당선된 건 선거인단 확보에서 304명을 얻어 227명을 얻은 클린턴을 앞섰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러스트 벨트로 알려진 5대호 주변의 쇠락한 공장지대 유권자들이 박빙의 차이로 트럼프를 지지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전통적으로 민주당 강세지역이었던 만큼 이 지역에서의 민주당 표의 상실은 차기 선거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하다는 걸 암시한다.
저자는 지난 대선 패배와 미국 진보 정치세력의 위기를 불러온 요인으로 수십 년간 진행된 정체성 정치의 문제를 지목한다. 정체성 정치는 "인종, 성별, 성적 지향 등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정치세력을 구성해 이익과 관점을 대변하는 정치"다. 주로 흑인과 여성, 성소수자를 대변한다. 정체성 정치는 1960년대 후반 유럽에서 시작된 운동으로,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슬로건을 표방한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제한 없이 표현할 자유가 있으며 이러한 권리가 사회적으로 존중받고 제도화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정체성 정치가 민주당에 흡수되며 공동체의식이 퇴조하고 진보정치가 소수파 정치로 전락하며 파편화된 것이 가장 큰 패배 요인이라고 분석한다.
이에 대한 위기 극복 방안으로 저자는 정체성 정치로 잃어버린 '시민의 지위'를 되찾을 것을 주장한다. 정체성 정치의 중심인 여성과 인종, 성소수자 문제가 '우리'와 '시민의 지위'를 공유할 때 개별적인 정체성을 뛰어넘어 연대를 가능하게 할 것이란 전망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시민으로 하나되는 '시민 교육'의 필요성과 선거에서의 승리를 통해 법적 권리 획득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 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민주적 설득' 활동을 할 것을 제시한다.
한국의 상황이 미국과 크게 다르지 않아 정체성 정치를 뛰어넘자는 저자의 주장을 우리 상황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미국 민주당이 낙태금지법에 반대하는 등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해 일관되게 옹호하는 입장인 반면 우리는 이제 논의 단계에 있다는 점 등 차이가 있다. 또 <지금 여기의 페미니즘 민주주의>에 자세히 나와 있듯 문재인 정부가 보수 종교계의 압박으로 차별금지법을 공약으로 채택하지 않은 점과 현재 진행형인 미투 운동도 한국적 상황이 여성의 민주주의에 더욱 열악하다는 걸 보여준다. 한국의 진보정치가 정체성 정치를 넘어서 나아가기 위해서는 해야할 일이 미국보다 훨씬 많은 것 같다. e*******7 | 2018-07-06
2016년 11월 스마트폰 뉴스 알림으로 온 미국 대통령 선거 결과를 보면서 ‘뭐야…트럼프네? 트럼프야..’라고 탄식할 때 영화 <타짜>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서로의 손목을 건 도박판에서 아귀(김윤석)가 들고 있던 사쿠라 화투장만큼이나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은 제게 충격이었습니다. 트럼프가 대통령 후보자 경선에 참여해 후보자로 결정될 때까지도 그가 대통령까지 되리라는 예상을 거의 보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트럼프가 공화당 후보가 되었을 즈음 강준만 교수의 <도널드 트럼프: 정치의 죽음>이란 책을 통해 트럼프가 지지를 받게 된 당시 미국의 정치 상황과 트럼프라는 인물에 대해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에 충격이 더욱 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자한당 보수 더민주 진보? 아니올시다!
미국의 정치철학자 마크 릴라가 쓴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 정체성 정치를 넘어>를 보면 스스로 진보진영에 속한다고 한 저자 역시 트럼프의 승리에 충격을 받았을 것 같습니다. 그는 책에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은 ‘최고의 정치적 스캔들’이라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저자는 크게 보수와 진보로 나눠진 미국의 정치 환경에서 진보진영이 왜 실패를 거듭했는지 진단하고 앞으로의 전략을 제안했습니다.
우리나라 정치집단들의 싸움에도 신물이 나는데 무슨 미국 정치얘기까지 알아야 하나 할수 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지난 6월 한국의 지방선거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압승했으니 진보가 승리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한국에선 진보가 승리했다라는 단순한 도식에 빠지기 쉬운 시기에 마크 릴라의 책은 한국의 진보정치를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게 도와줍니다.
공화당-보수, 민주당-진보로 구분할 수 있는 미국과는 달리 사실 우리나라에선 자한당-보수, 더민주-진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자한당을 보수라 하는 것은 진정한 보수주의자들을 모욕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 정당 역사와 지형을 고려할 때 더민주는 보수에 가깝고 진보진영이라 할 수 있는 그룹은 정의당, 민중당, 노동당, 녹색당 정도라고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지방선거에서 녹생당 후보 몇몇이 약진하며 선전했고 최근 정의당 지지율이 10%를 넘었다는 고무적인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되기도 했지만 이번 지방선거 결과를 냉정하게 보면 진보정당들은 전체적으로 실패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미국 진보진영의 실패를 진단하고 향후 권력 획득을 위한 전략을 제안한 마크 릴라의 책은 우리 나라 진보진영에서도 참고할 만한 점들이 있습니다.
미국 진보진영의 실패 원인
마크 릴라는 20세기 미국 정치사를 ‘연대, 기회, 공적 의무’로 상징되는 1970년대까지의 ‘루스벨트 체제’와 ‘자기신뢰, 최소정부’로 상징되는 1980년대부터의 ‘레이건 체제’로 구분합니다. 저자는 루스벨트 체제 이후 미국 진보주의자들이 ‘민중의 감정을 일으키고 신뢰를 얻는 일에 무관심’했기 때문에 대중의 지지를 잃었다고 진단합니다.
미국 진보진영의 패배 원인으로 저자가 지목한 것은 ‘정체성 정치’입니다. 정체성 정치는 초기에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 등 민중의 권리를 보장하려는 노력으로 시작되었으나 점차 자기존중과 자기정의를 내세우는 사이비정치에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고 마크 릴라는 주장합니다. 한마디로 진보주의자들이 진보적 정치의식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정체성 정치: 인종, 성별, 성적지향 등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정치세력을 구성해 그들의 이익과 관점을 대변하는 정치를 말하는데, 주로는 흑인, 여성, 성소수자를 대변하는 정치를 뜻함)
“민주주의에서 소수자들을-공허한 인정과 찬양의 몸짓에 머물지 않고-유의미하게 돕는 유일한 길은 선거에서 승리하여 장기적으로, 정부의 모든 층위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성취하는 유일한 길은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하는 메시지로 그들을 한데 모으는 것이다. 그런데 정체성 진보주의는 정반대의 일을 한다.”(16쪽)
‘유일한’, ‘정부의 모든 층위’와 같은 극단적인 표현이 거슬리기는 하지만 선거 승리를 통해 권력을 획득하는 것과 민중을 결집시킬 수 있는 호소력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우리 나라 진보주의자들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뿐 아니라 마크 릴라가 말하는 보수진영의 이데올로기(레이건주의)가 오랫동안 미국인들을 설득할 수 있었던 이유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레이건 체제속에서 미국 보수진영은 대다수 미국인의 삶과 사고 방식에 맞서 전쟁을 선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당시 미국인들의 관심이 사회의 필요보다는 개인의 필요와 욕망, 자유와 권리 추구로 옮겨가고 있음을 보수진영은 간파하고 이를 적절히 활용하여 민중의 지지를 받았던 점을 저자는 언급합니다.
레이건 당시 공화당은 주 선거, 지방선거, 연방의회 선거, 대통령 선거 승리를 위해 당의 뿌리를 튼튼하게 하는 전략을 취했습니다. 하지만 민주당은 지역 수준에서 사람들을 설득하는 대신 전국적 미디어에 집중하면서 4년마다 있는 대통령 선거에 집중했습니다. 저자는 이 지점에서 미국 진보진영의 패배 원인을 찾았습니다. 민주당이 두 차례 대통령 선거에서 이기기는 했지만 결국 미국 민중들이 트럼프를 선택한 점을 보면 저자의 주장은 일리가 있습니다.
또한 저자는 기층 민중과의 분리, 타인에 대한 관심이나 의무보다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탐구 우선시, 사회의 현실을 담아낼 수 있는 정치적 비전의 부재를 진보진영이 가졌던 문제점으로 지적합니다. 반면 대중 선동에 탁월한 트럼프는 인종차별, 여성혐오, 폭력 조장, 언론 및 법 경멸 등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지지자를 확보했습니다. 그만큼 진보진영이 민심을 잃었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승리를 위한 진보진영의 전략 제안
보수진영에 내준 권력을 되찾기 위해 마크 릴라는 운동정치보다 제도정치, 목표없는 자기표현보다 민주적 설득, 집단 정체성이나 개인 정체성보다 시민의 지위를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제도 정치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선거에서의 승리가 필수적이라고도 주장합니다. 그가 주장하는 핵심은 “운동 정치의 그 어떤 성취도 제도 정치를 통해 무효화될 수 있다”(113쪽)는 말에 담겨있습니다.
“공화당 지지자들의 들끓는 분노와 파괴 욕구를 감안할 때,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기타 소수자, 여성, 동성애자를 보호하기 위해 최근에 쟁취한 제도들의 존속을 보장하는 유일한 길은 선거 승리다. 워크숍과 대학 세미나는 그 제도들의 존속을 보장하지 못한다. 온라인 동원, 플래시몹, 항의 시위, 일탈 행동, 퍼포먼스도 마찬가지다. 현실을 직시하라! 운동 정치의 시대는 지나갔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행진 참가자들이 아니다. 우리는 더 많은 시장들이 필요하다. 더 많은 주지사들, 주 의원들, 연방의원들이 필요하다.”(114쪽)
극우정당이라 해도 손색이 없는 자한당의 방해로 다양한 운동으로 모이는 변화의 동력이 법제화로까지 이어지지 못하는 우리나라의 현실과도 일맥상통하는 상황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운동 정치의 시대가 끝났다는 것은 미국 진보진영에만 해당되는 주장일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엔 여전히 다양한 사회운동을 통해 성장한 운동가들이 진보정당들과 연합하여 제도권 정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 보다 적절한 전략이라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우리 나라 진보정당들은 다수의 지지를 얻는데 계속해서 실패해 왔습니다. 일정 부분은 선거제도의 문제도 있지만 그것으로 지금까지의 패배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진보정당들 사이의 ‘정체성’ 다툼과 그로 인한 분열, 민중들의 마음보다는 자신들의 신념을 우선시하는 태도 등에 문제의 핵심이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책에서 정치를 낚시에 비유한 대목을 읽으며 우리 나라 진보정당들에도 저자가 말한 정체성 진보주의자들의 모습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정체성 진보주의자들의 낚시 방법은 물가에 서서 물고기를 향하여, 바다가 물고기의 역사적 잘못으로 판정한 바들을, 그리고 바다 생태계를 위하여 물고기가 자신의 특권을 내려놓을 필요성을 소리 높여 외치는 것이다. 그러면서 물고기들이 집단적으로 죄를 고백하며 물가로 올라와서 뜰채 속으로 들어가기를 바란다.”(121쪽)
우리 나라 진보정당과 진보주의자들은 초기 운동때의 단결력과 결속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선거때마다 얼마 되지도 않는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정파간 갈등을 반복해서는 지금 이상의 지지를 받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운동정치의 시대가 끝났다는 마크 릴라의 선언은 어쩌면 우리 나라 진보정당들이 새겨들어야 하는 말일지 모릅니다. 시민사회의 운동성과 조직력이 향상된 촛불의 시대엔 진보정당들은 정파의 벽을 넘을 뿐만 아니라 시민사회와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시민의 지지를 얻어야 할 것입니다.
책을 통해 마크 릴라가 소개한 진보진영에 대한 문제 진단과 대응책을 우리 나라의 진보 정치에 직접 대입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를 돌아볼 만한 시사점들은 충분합니다. 진보적 철학을 가진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를 진보의 승리라 착각하는 우를 범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마크 릴라가 한 것처럼 실패의 원인을 성찰하고 우리나라 진보의 미래 전략을 세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7 | 2018-07-06
https://blog.naver.com/890707korea 이상과 현실사이에서 꿈을 꾸다 :에에니스
분별없는 열정
출판사 서평
유럽 최고의 철학자들이 전제 정치를 옹호한 까닭은?
20세기 철학과 정치 현실의 잘못된 만남
지식인의 심층 심리를 살피는 전기적 탐구 방법론
권력의 위협이 없는 자유로운 상황에서도 지식인들이 전제를 찬미하는 경향을 보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마크 릴라는 이 질문에 대해 사상사의 측면에서 접근하는 방법을 소개한다. 이 접근법에는 두 가지 유력한 해설이 있다. 하나는 계산적 합리성을 앞세운 근대 계몽주의 철학이 필연적으로 소련 계획경제의 무자비함, 나치의 섬뜩할 정도로 효율적인 유대인 절멸 계획 같은 현대 전제정의 잔혹성으로 귀결된다는 이사야 벌린의 관점이다. 다른 하나는 혁명적 천년왕국의 건설이라는 종교적 충동을 현대 전제정의 근원이라고 보는 노먼 콘과 야콥 탈몬의 비합리주의적, 메시아주의적 해석이다.
마크 릴라는 이런 사상사적 해석이 현실의 일면만 설명할 뿐이라며 거부하고 양면을 입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지식인 자신의 사회사를 탐구하는 길을 선택한다. 이것은 폴란드의 시인 밀로츠가 『사로잡힌 정신』에서 구사한 방법론이다. 밀로츠는 주인공의 젊은 시절에 드러난 성격의 일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훗날 주인공의 저술과 정치 참여 행위에 그 모습이 나타나는 과정을 보여주는 약식 전기적인 방법을 사용한다.
마크 릴라는 이 방법이 인간 심리의 심층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고 보고, 20세기 유럽의 정치 사상계를 풍미한 철학자들의 전기적 삶과 그들 사상의 교차점을 면밀히 파고든다. 그리하여 명성과 열정에 비해 분별이 모자라는 어리숙한 지식인이 냉혹한 현실 정치와 만났을 때 어떤 우스꽝스러운 비극이 벌어지는지 능란한 솜씨와 유려한 문체로 생생히 그려낸다. 2차대전이 끝나고 얼마 안 돼 사르트르가 낭만적 이상 때문에 스탈린의 집단수용소를 옹호하는 냉혹한 변호사로 전락한 데서 보듯, 중대한 정치 사안에 직면할 때 이른 바 참여 지식인이 얼마나 무능하고 바보 같아지는지 입증해 보인다.
하이데거의 경우
첫 번째로 호출된 『존재와 시간』의 철학자 하이데거를 보자. 마크 릴라는 하이데거가 명성을 얻도록 도와준 여섯 살 연상의 선배이자 친구인 야스퍼스와의 묘한 긴장이 흐르는 우정과, 거의 스무 살 연하의 한나 아렌트와의 위태로운 불륜을 즐기는 중년의 하이데거의 유치한 연애편지를 살피면서 그의 내면을 탐색한다. 친구와 제자는 마치 플라톤의 환생을 보는 듯한 경이감 속에서 하이데거의 철학적 천재성을 찬탄한다. 야스퍼스는 경탄과 좌절이 뒤섞인 감정으로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독일 대학의 철학은 자네 수중에 있는 듯하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치가 권력을 잡았을 때 하이데거의 경이적인 철학적 재능은 유치찬란한 개인적 작태와 어리석은 정치적 나이브함으로 색이 바랜다. 하이델베르크 총장 자리에 오르기 위해 유대인 스승 에드문트 후설의 등에 칼을 꽂고, 유대인 제자 바움가르텐을 나치 관료들에게 밀고한다. 독일 전역을 돌며 체제 선전 강연을 하고 말미는 “히틀러 만세!”로 장식한다. 그리고 정치와 거의 관계없어 보이는 『존재와 시간』의 실존적 개념들이 어떻게 자신의 정치 참여를 고무했는지 견강부회식으로 떠벌인다. 2차대전 후 많은 사람들은 그가 총장직을 마지못해 수락했고, 학문이 피해보는 일을 최대한 줄이려고 노력했으며, 유대인들을 보호하다가 때가 되자 기꺼이 그 직책을 사임한 것이라는 하이데거의 변명을 믿고 싶어 했지만 사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이데거의 하이델베르크대학 총장 취임연설을 들은 야스퍼스가 하이데거에게 유대인 문제에 관해 나치의 견해에 동조하지 않을 것으로 확신한다면서 그의 의중을 살폈을 때, 하이데거는 “위험스러운 유대인들의 국제 조직망이 존재한다네”라고 말한다. 야스퍼스가 “히틀러 같은 교양 없는 자가 독일을 다스릴 수 있는가?”라고 묻자, 하이데거는 “독일을 통치하는 일과 교양은 아무 상관이 없다네”라는 대답으로 친구를 경악시킨다.
이제 하이데거의 철학을 경애했던 친구 야스퍼스와 연인 아렌트는 마크 릴라가 궁금해한 질문을 던져야 했다. 하이데거가 내린 정치적 결정을 인성의 결함 때문으로 보아야 하는지, 아니면 아렌트가 나중에 하이데거의 “열정적인 사유함”이라고 지칭한 것에 의해 예고된 사태로 보아야 하는지. 야스퍼스는 전후 하이데거를 위한 변론까지 했지만 최종적으로는 하이데거가 인간적으로나 사상적으로 구제불능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아렌트는 하이데거가 나치즘에 기운 이유가 “한편으로는 웅장함에 관한 환상과 다른 한편으로는 절망감에서 비롯된 일종의 정신적 치기” 즉 교정할 수 없는 낭만주의 때문이라고 보았다. 하이데거의 소름끼치는 결단을 아렌트는 ‘직업적 습벽’의 결과로 치부했는데, 그 직업적 습벽이란 철학이 생겨날 때부터 수반된 “전제적인 것에 대한 매료”이다.
이러한 습벽은 플라톤의 시라쿠사 일화에 그 원형이 나타나는데, 플라톤이 흉포한 젊은 전제자 디오니시오스 2세를 철학적으로 감화하기 위해 세 번이나 시칠리아 여행을 감행한 것을 가리킨다. 하이데거의 희비극적 실수의 핵심 역시 철학이 정치를, 특히 국가사회주의의 저급한 정치를 인도할 수 있다고 순진하게 믿은 데 있다는 것이다.
시라쿠사의 유혹: 지식인의 정치 참여의 딜레마
기원전 368년경 플라톤은 시칠리아의 그리스 식민도시 시라쿠사를 방문한다. 젊은 참주 디오니시오스 2세의 관심을 철학과 정의로 돌려보려는 희망을 품고. 그러나 고집불통의 전제자는 필요한 자제심과 신념을 결여했다는 것이 곧 드러났다. 결국 교육은 실패했고 플라톤은 실망한 채 시칠리아를 떠나야 했다. 그로부터 6~7년 뒤 디오니시오스 2세가 철학 수업에 복귀했다는 소문을 들은 플라톤은 다시 시라쿠사를 찾는다. 그러나 그가 시라쿠사에 도착해서 발견한 것은 더욱 오만해진 전제자였다. 디오니시오스 2세는 자신을 철학자로 간주했으며 책도 한 권 썼다고 알려져 있었다. 물론 그 책은 플라톤이 단호하게 거부할 만한 종류의 책이었다. 이번에도 교육은 실패했고, 디오니시오스 2세는 전제 군주로 남았으며, 플라톤은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채 도망쳐야 했다. 플라톤이 떠나고 3년 뒤 디오니시오스 2세는 폭정을 일삼다가 쿠데타로 축출된다.
19세기 지식인들은 현대 사회에는 과거와 같은 전제정이 불가능할 거라고 오판했다. 현대 사회는 냉정한 관료제와 잔인한 작업장처럼 여전히 권위주의 사회일 수 있을지언정, 고대 시라쿠사와 같은 유형의 전제정일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지금 이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알고 있다.
지난 세기 동안 디오니시오스 2세는 여러 이름으로 환생했다. 레닌과 스탈린, 히틀러와 무솔리니, 마오쩌둥과 호찌민, 사담 후세인과 호메이니 같은 이름은 나열하기도 힘들 정도다. 디오니시오스 2세의 문제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역사는 항상 독재자들을 탄생시켰을 뿐 아니라, 그 독재자들의 정당성과 아름다움을 찬미한, 마크 릴라가 ‘전제 애호 지식인’이라는 이름을 붙인 인물 유형을 탄생시켜 왔다.
전제 애호라는 철학적 질병
모든 철학에는 불가피하게 전제 애호의 씨앗이 숨겨져 있다. 진리에 대한 사랑에는 “도시와 가정의 올바른 질서”에 공헌하고 싶은 욕망 또한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사상 또는 사상가와 사랑에 빠지든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종류의 광기를 통제하기 어렵다는 것을 안다. 철학자와 전제 애호 지식인을 구별하는 차이점은 바로 이 욕망이 분별없는 열정으로 바뀔 수 있는 파괴적 잠재력에 대한 경각심이다.
상당수의 지식인은 어리석고 무지한 상태로 어설프게 정치에 데뷔한다. 독재자가 자신의 웅대한 철학을 현실에 실현시켜 줄 수 있을 거라는 더없이 순진한 기대에 찬 채로. 그러나 학문과 교양이라는 마魔의 산에서 한물간 학문을 탐구하며 살던 고매한 지식인에게는 현실 정치의 전제정의 유혹에 맞설 수 있는 면역력이 없다. 나치의 이론적 정당화에 어정쩡하게 가담했던 하이데거와 적극적으로 찬미했던 슈미트만 그런 게 아니다. 좌파 노선을 걸은 벤야민, 코제브, 푸코, 데리다까지도 지적, 정치적 냉철함을 결여한 채 현대의 디오니시오스에게 봉사한 어리숙한 지식인으로 탄핵당한다.
하이데거처럼 어설프게 정치에 참여하면 곡학아세하는 어용 지식인이 되고, 반대로 어두운 시대에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순수 지식인은 현실을 외면한다고 비난받는다. 그렇다면 지식인의 올바른 정치 참여는 어떠해야 하는가? 마크 릴라는 플라톤의 실패한 정치 참여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플라톤은 자신의 철인 정치를 실현하려는 열망이 실패했을 때 절제하고 물러설 줄 알았다. 지적, 정치적 냉철함이야말로 진정한 철학자와 무책임한 지식인을 가르는 기준이다. 무책임한 지식인은 철학자와 달리 그 열정을 다스릴 수 없다. 자기 내부의 악마에 휘둘리고 변덕스러운 대중의 승인에 갈증을 느끼는 이 사이비 지식인은 섣불리 정치적 토론에 뛰어들거나 책을 쓰고 강연하며 자신의 무능함과 무책임을 다 드러내는 광란의 활동을 통해 사람들에게 함부로 충고를 던진다. 통제력을 잃은 정의감에 사로잡혀 절제를 표명하는 지식인에게 역사의 소명에 따르지 않는 배신자라는 악의에 찬 저주를 퍼붓는다. 그러나 마크 릴라는 플라톤의 말을 빌려 열정을 다스릴 수 없는 자는 철학자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지식인의 책임은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전제자를 극복하는 것”이다. 영혼의 전제정에서 자유로운 한, 정치를 하면서 겪는 실패나 죽음은 결코 수치가 아니다.
20세기 서유럽 지성인들 다수가 군국주의와 공산주의 정권들이 등장하는 것을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이런 전제 정권들은 수많은 “민족해방”운동이 이내 전통적인 전제정으로 돌변한 경우였으며, 지구상의 불운한 민족들에게 참혹한 상황을 초래하였다. 극단적인 표현을 쓰자면, 20세기에 서구 자유민주주의는 전제정의 실질적인 본거지로 묘사되었다. (…) 뭔가 내밀한 것이 유럽 지식인들의 정신 속에서 작동하고 있었다. 어떤 분별없는 것. 사실 우리는 그런 분별없는 정신들이 작동하는 방식에 관심이 있다. 그 정신들은 정치 속에서 무엇을 찾고자 하는 것일까?pp.7~8
디오니시오스 2세는 우리와 동시대인이다. 지난 세기 동안 디오니시오스 2세는 여러 이름으로 환생했다. 레닌과 스탈린, 히틀러와 무솔리니, 마오쩌둥과 호찌민, 카스트로와 트루히요, 아민과 보카사, 사담과 호메이니, 차우셰스쿠와 밀로셰비치 같은 이름들은 나열하기도 힘들 정도로 많다. 19세기의 낙관론자들은 전제정이 과거지사라고 믿었다. 결국 유럽은 현대로 넘어왔고, 세속적인 민주주의의 가치들이 첨가되어 복잡해진 현대 사회를 낡은 폭정의 수단으로 지배할 수 없다는 단순한 사실을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 (…) 근대화가 진행됨에 따라 유럽 밖의 나라들 역시 탈전제의 미래로 진입할 것으로 믿어졌다. 우리는 지금 이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지 알고 있다. 고대의 규방과 음식 독 감별사가 사라지기는 했지만, 그 자리를 선전장관과 혁명수비대, 마약왕과 스위스 은행가들이 채웠다. 전제자들은 교묘하게 살아남은 것이다.p.226
하나의 이념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실천하고 있는 것 이상을 이해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오늘 우리는 가능한 한 많은 것을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 자체를 포기한 듯이 보인다. 우리는 예전의 걸출한 사상가들이 가졌던 교만과 다른 유형의 교만 때문에 고생한다. 우리의 교만은 우리가 더 이상 힘들게 사유를 하려고 하거나 연결고리들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들을 찾아보려고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민주적 가치들”에 매달리고, 경제모델과 개인을 신뢰하면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이라는 믿음에 매달리는 것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냉전 종식이 서구에 아직까지 남아 있었던 위대한 근대적 이념들에 관한 그 어떠한 자신감도 전부 다 파괴해버렸다. 또한 그것은 우리를 호기심 부재의 자아몰입 상태에 빠뜨렸다.pp.256~267
난파된 정신 - 정치적 반동에 관하여
원제 : The Shipwrecked Mind: On Political reaction
중동의 이슬람 근본주의, 유럽의 극우 민족주의, 미국의 신정(神政)보수주의 등 시대착오적 사고로 비웃음을 당하던 반동이 거침없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저자는 반동이 그저 무지와 반발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은 편견일 뿐이며, 반동은 혁명 못지않게 시대에 대한 통찰과 정교한 이론을 갖추고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역사의 합리적 진보를 예언한 헤겔 철학에 반발하여 다시 유대인 전통의 원천으로 돌아가려 했던 프란츠 로젠츠바이크, 철학에서 소크라테스의 전통을 회복하려 했던 레오 스트라우스, 근대 정치혁명사를 초월적 질서에 대한 그노시스주의의 반란으로 인식한 에릭 뵈겔린 등 3명의 온건한 반동사상가를 소개하면서 반동 정신의 근원을 추적한다
마크 릴라가 파악한 반동 정신의 뿌리는 정치적 노스탤지어다. 그것은 지금보다 더 나은 황금 세상이 과거 어딘가에 있었다는 상상과 역사적 신화의 결합물이다. 반동이 위험한 것은 그것이 현재에 대한 파괴적인 절망감 속에서 혁명만큼이나 급진적인 방식으로 역사의 도로를 역주행하여 상상 속 노스탤지어를 향해 돌진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동은 혁명보다 수명이 길다. 미래에 대한 희망은 사라져도 과거에 대한 향수는 영원하기 때문이다.
반동주의자들은 신자유주의 사회의 울타리 바깥에 밀려난 현대인들의 분노와 절망감을 포착하고 그들의 호전적 노스탤지어를 강력한 정치적 동력으로 전환하여 영국의 브렉시트, ISIS, 트럼프의 당선 등 현대 정치에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비주류 좌파인 묵시록적 심층생태주의자, 세계화 반대론자, 성장 반대 운동가도 21세기 반동주의자의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이 책은 종교혁명에서 현대 신자유주의까지 훑어보며 서구 사회에서 반동 사상이 어떻게 발현되어 왔는지, 현실 정치의 범위를 넘어 사회, 문화, 역사적 차원에서 성찰한다.
반동주의자들은 보수주의자가 아니다. 이것이 그들에 관해 가장 먼저 알아두어야 할 점이다. 그들 역시 혁명가들 못지않게 나름대로 급진적이며 역사적 상상의 산물들에 단단히 사로잡혀 있다.P. 11
반동의 정신은 난파된 정신이다. 다른 사람들은 늘 원래 모습 그대로 흐르는 시간의 강물을 보지만, 반동주의자들은 천국의 파편 더미가 눈앞에서 둥둥 떠내려가는 것을 본다. 반동주의자는 시간의 망명자다. 혁명가의 눈에는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찬란한 미래가 보이며 그 미래에 감전된다. 지금 시대의 거짓말에는 아랑곳도 하지 않고 온갖 광채를 발하는 과거만을 바라보는 반동주의자 역시 그런 과거에 감전된다. 반동주의자는 자기가 적수보다 더 강력한 입장을 갖고 있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자기는 벌어질 수 있는 일들의 예언자가 아니라 실제로 일어났던 일들의 수호자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것이 반동 문학에 면면히 흐르는 그 기이하게도 신명 나는 절망감, 그 선명한 사명감을 설명해준다. P. 13
그리고 우리 시대의 반동주의자들은 노스탤지어가 강력한 정치적 자극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쩌면 노스탤지어는 희망보다 더 강력할지도 모른다. 희망은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 노스탤지어는 퇴치불가다.P. 14
나는 20세기 정치사상가들의 상상력과 이념 운동을 구체화한 색다른 힘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 힘은 바로 정치적 노스탤지어였다. 노스탤지어는 프랑스 혁명 이후 유럽 사상에 흐린 안개처럼 내려앉았고 여태껏 결코 완벽하게 걷힌 적이 없다. 노스탤지어는 특히 ‘우리가 아는 바로 그 문명의 종말’이라는 절망감을 자극한 1차 세계대전의 여파 속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이 절망감은 1789년 이후 혁명 반대자들이 느꼈던 감정과 거의 다를 바 없었다. 2차 세계대전, 폭로된 유대인 대학살, 그리고 핵무기의 배치 및 뒤이은 확산 이후 그 절망의 고통은 오로지 강도를 더해갈 뿐이었다. 이 연이은 재앙은 설명이 절실했다. P. 16~17
사람들은 어째서 여전히 그런 신화들이 필요하다고 느낄까? 사람들이 항상 갖고 있는 바로 그 똑같은 이유 때문이다. 우리는 현재가 아무리 냉혹하더라도 그것을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으로부터 위안을 얻고 싶어 하는 반면, 동시에 미래에 대해 져야 할 온전한 책임은 회피한다. 서구의 신화화된 역사들을 그것들이 쓰인 시대들 및 다른 시대에 그것들이 성취한 사회·심리학적 과업과의 관계 속에서 다룬 책이 한 권 있다고 하자. 그런 책이라면 과거에 관한 고색창연한 신학적 서사들이 19세기 초부터 시작해 어떻게 현대화되었고, 그리하여 어떻게 현재를 차지하기 위한 지적 대리 전쟁 속 논쟁으로 대체되었는지 그 사연을 추적할 것이다. (…) 이런 신화들은 ‘가보지 않은 길’로 다시 돌아가는 데에 정치 활동이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식의 더 음험한 몽상에 자양분을 제공하는 일 밖에는 하지 못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교훈은 15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때 못지않게 시의적절하다. 우리는 우리가 가는 대로 우리의 길을 포장해야 할 운명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신의 소관이다. P. 125~126
“에마의 고통은 플라톤적이다. 그녀는 온통 잘못된 장소에서 온통 잘못된 사람들과 오로지 상상의 산물로서의 이상理想을 탐색한다. 그녀는 끝까지 자기가 받아 마땅한 사랑과 인정을 정말로 받을 것이라고 믿는다. 돈키호테의 고통은 기독교적이다. 그는 옛날에는 세계가 정말로 그것이 의도한 그대로 존재했으며, 육신을 갖고 등장했던 이상적인 존재는 자취를 감추었다고 확신한다. 개연성은 떨어지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은 것을 동경하는 에마의 고통에 비해 천국을 미리 맛본 그의 고통은 더욱 격심하다. (…) 돈키호테는 자신이 인식한 그 간극이 단지 삶속에 깊이 뿌리내린 진실일 뿐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역사적 파국에 의해 야기되었다고 생각하는 망상에 빠져 있다. 그는 자신의 상상 속 사막에서 방황하는 희비극적인 메시아다. P. 181
반동의 정신은 난파된 정신이다. 다른 사람들은 늘 원래 모습 그대로 흐르는 시간의 강물을 보지만, 반동주의자들은 천국의 파편 더미가 눈앞에서 둥둥 떠내려가는 것을 본다. 반동주의자는 시간의 망명자다. 혁명가의 눈에는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찬란한 미래가 보이며 그 미래에 감전된다. 지금 시대의 거짓말에는 아랑곳도 하지 않고 온갖 광채를 발하는 과거만을 바라보는 반동주의자 역시 그런 과거에 감전된다. 반동주의자는 자기가 적수보다 더 강력한 입장을 갖고 있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자기는 벌어질 수 있는 일들의 예언자가 아니라 실제로 일어났던 일들의 수호자라고 믿기 때문이다P.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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