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은 이야기한다 20세기 한국 민중 서사김경일 지음 l 성균관대학교출판부 l 2024년 08월
김경일: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거쳐 동 대학원 사회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덕성여대 교수, 미국의 뉴욕주립대 Binghamton와 프랑스의 파리 인간과학연구소Maison des Sciences de L'Homme에서 후기박사과정, 일본 동경대학 경제학부 객원연구원, 미국 버클리대학, 워싱턴대학 교류교수 등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사회과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사회사와 사회사상, 역사사회학, 동아시아론 등에 관심이 있으며, 주요 저서로 《일제하 노동운동사》(1992), 《이재유연구》(1993), 《지역연구의 역사와 이론》(1998), 《한국의 근대와 근대성》(2003), 《동아시아의 민족이산과 도시: 20세기 전반기 만주의 조선인》(공저, 2004), 《한국노동운동사 2, 일제하의 노동운동: 1920-1945》(2004), 《한국 근대 노동사와 노동운동》(2004), 《여성의 근대, 근대의 여성》(2004), Pioneers of Korean Studies(편, 2004),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2007), 《제국의 시대와 동아시아 연대》(2011) 등이 있다.
중상층 위주의 주류 근대화 서사 너머
한국 근대화의 심층을 관통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
한국 근대화의 주인공은 누구였을까. 산업화 전선에서 미래를 개척하고 민주화 대오에서 과거의 악습을 척결하는 데 앞장섰던 이들일까. 이들은 근대화의 적극적 추진자, 최대 수혜자 그리고 사회 주류층으로서 발전되고 민주화된, 지금 우리에게 익숙하고 굳건한 한국 근대화의 주류 서사를 만들어놓았다. 그러나 이 책은 근대화로부터 일방적으로 배제되었다고 볼 수 있는 기층 민중들의 자아 인식과 자의식 문제를 탐구한다. 전통 시대에는 백성이나 민(民), 서민이나 서류(庶流), 하층, 기층 그리고 최근에는 이른바 서발턴(subaltern)이나 소수자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름으로 역사에서 호명되어온 이들이다. 대체로 생애 주기 전반을 통해 생존에의 집요한 의지나 삶에 대한 능동성을 가지고 근대를 살아간 실체였으되, 억압과 한으로서의 민중 지향은 있을지언정, 일정한 목적의식과 가치가 함축된 민중 개념에 흔히 따르는 사회 현실 비판이나 저항의 양상을 찾아보기 어려웠던 존재들이다. 가난하고 고되며, 소외되고 억압받던 주변인의 일상이 늘 이들을 지배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민중자서전’이나 ‘민중열전’ 등으로 기획된 르포, 인터뷰 속 민중 구술 자료들을 전거 삼아 평범한 사람들이 털어놓는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들로 근대화 이면의 서사를 재구축한다. 그리고 세대ㆍ성ㆍ계급/계층이란 세 변수를 주요 지표로 상정해, 근대화의 시기를 살아온 민중 각자가 어떠한 방식으로 그것을 경험하고 구현해왔는지, 그러한 경험과 기억이 투사하는 시대상과 사회상의 실제는 어떠했는지 심층 분석해나간다. 무엇보다 이렇게 재구성된 대안의 민중 서사는 기존의 주류 서사 및 연구들과는 다른 차원에서 우리가 걸어온 근대화 과정을 되짚어보게 할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한국 근대화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였는지.
출판사 리뷰
기층 민중에 의한 대안의 근대화 서사
주류 서사와 다른 20세기 한국 민중 서사의 재구성은 한국 근대화의 성격과 의미를 심층 차원에서 이해하는 단서가 될 수 있다. 무엇보다 근대화와 사회 변동의 와중에 사회 하층민으로서 민중의 현실에 대한 재인식 작업은 역사에 대한 대안의 시각과 통찰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지금껏 한국 근대화 서사는 중상층이 주축인 주류 서사 중심이었다. 유감스럽지만 이러한 주류 서사가 사회 하층민의 현실과 내부 경험을 억압하거나 은폐ㆍ무시해온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재구성되는 기층 민중의 서사는 주류 서사에 대한 대안 서사이자, 흔히 단선적으로 이해되어온 근대화 서사에 균열을 내는 도전적 시도이기도 하다. 이렇게 주류와 다른 차원을 준거 삼는 대안적인 근대화 서사의 발굴과 검토는 한국 근대화 과정의 다양성과 복합성 그리고 그 모순과 갈등의 양상을 여실하게 드러낸다.
이 책은 근대화의 최저변에서 생활해온 민중이 특정한 시대 맥락에서 당면했던 여러 쟁점과 문제들을 검토함으로써 하층민의 시각에서 본 당대 현실과 사회 상황을 함께 드러내 보이고자 했다. 근대 한국 사회라는 드라마는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과 일제의 식민 지배, 민족 이산과 해방, 전쟁과 혁명 그리고 군사 쿠데타와 독재처럼 수많은 사건들이 압축된 채로 숨 가쁘게 전개되어왔다. 그리고 각 시기별 사건들은 그 시대에 고유한 문제들과 쟁점들 그리고 과제를 함께 제시해왔다. 따라서 시간에 따른 민중 생활의 변동을 추적하면서 각 시대 현실의 고유성과 독특함까지 동시에 파악해볼 수 있었다.
아울러 한국 근대의 민중 개념이 진보와 변혁 및 지배와 독재라는 두 계보의 흐름으로 이어져왔다면, 이 책은 이러한 지배와 저항이 교차하는 시공간에서 경합하기도 하고 중첩하기도 하면서 점차 진화해온 민중의 삶과 의식의 현상태(現象態)에 주목하고자 했다. 역사 속에서 지배와 저항이 교차하고 경합하는 시공간을 살아온 민중 개념의 복합성과 모순을 염두에 두는 차원에서다.
민중은 ‘이야기한다’
문자에 의거한 공식 역사를 통해 기록되거나 보존 혹은 성화(聖化)되는 지배 계급의 서사와 달리, 민중 이야기는 역사가 아닌 기억과 구술에 주로 의존해왔다. 사실 지배 계급의 역사 서술과 구분되는 민중 구전이나 구술 전통은 일찍부터 주목받아왔다. 해방 이후에 한정해보면, 한국 사회의 최저변에 위치한 민중에 대한 관심은 본격적인 근대화가 시작된 1960년대 중후반 이후 르포나 논픽션, 수기 혹은 다큐멘터리 등의 기록 서사, 구술이나 심층 인터뷰 등을 통한 생애사 형태로 구체화되어 나타났다.
연구 방법론 차원에서 이 책은 근대 형성기 민중에 의해서거나 민중에 대해 산출된 구술 자서전, 민중 자서전, 르포, 심층 인터뷰 자료처럼 사사(私事)로서 개인의 내면 의식을 드러내는 자료들을 분석 대상으로 삼는다. 그리하여 이러한 미시 자료들에 등장하는 인물의 행위와 상호작용, 관계, 사건들, 에피소드 등을 그것이 배태된 역사ㆍ사회 구조의 맥락에서 이해하고 해석함으로써 거시적인 사회 구조의 궤적 안에서 그것이 지니는 역동성을 함께 분석해나갔다. 이론과 방법론 차원에서 이 책은 이러한 시도들을 적극 활용함으로써 기존 연구에서 공식화ㆍ정형화된 형태로 제시되어온 민중에 대한 인식을 재정향하고, 그에 대한 대안 서사를 탐색하고자 했다.
이 책에서 다루는 구술 생애사의 주요 자료는 1960년대 서민 생활에 대한 르포의 하나로 기획된 「오늘을 사는 한국의 서민」 연속 기획(「서민 연재」)과 1980년대 나온 『뿌리깊은나무 민중자서전』(『민중자서전』) 그리고 2000년대에 간행된 『한국민중구술열전』(『민중열전』)이다. 제1부에서는 『민중열전』과 『민중자서전』의 전체 인물을 분석 대상으로 삼아, 나이와 성 그리고 계층/계급 변수에 따른 차이를 고려한 생애사 연구를 통해 한국의 민중 서사를 재구성하고자 했다. 제2부에서는 주로 계급/계층 변수에 초점을 맞춰 「서민 연재」를 분석해나가면서 근대화 캠페인에서 배제되거나 무시되어온 기층 민중들의 빈곤과 가계, 기술 등의 쟁점에 주목하고자 했다.
이들의 내면과 한국 근대화의 심층
무엇보다 이 시기 기층 민중은 가난과 궁핍에 지배당했다. 가난 이야기는 거의 모든 민중 구술에서 빠지지 않는다. 가난은 민중의 삶의 모든 차원에 스며들어 있었으며, 어떤 형태로든 이들의 일상과 의식의 많은 부분을 지배하고 있었다. 민중은 시대의 밑바닥에서 그 결핍의 고통을 견뎌내야 하는 존재였던 셈이다. 그렇게 민중 서사의 중심엔 늘 가난과 빈곤의 서사가 가로놓여 있었다.
빈곤은 간단없는 노동의 시련으로 고스란히 이어졌다. 민중은 빈한한 가계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절박함 속에 연고나 우연을 통해 일자리로 들어서곤 했다. 전통적 분야였든 근대적 분야였든, 영세한 환경에서 별다른 기술 없이 되풀이되는 단순한 작업들로 채워진 곳이었다. 그마저도 짧게만 유지되는 불안정성 탓에 대부분의 민중은 전 생애 주기를 걸쳐 다양한 직업을 경험하며 살았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수많은 일자리를 계절 따라 전전해야 했다. 이들에게 노동은 죽음이 아니고서는 피할 수 없는 고통의 굴레였는지도 모른다. 더구나 그 시련은 자신에게서만 그치는 것도 아니어서 생계 활동에 가족 전 구성원을 동원시키면서 다음 세대로까지 이어지곤 했다. 이토록 고단한 삶의 여정은 민중의 자아 정체성에 어두운 그늘을 드리울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 기층 민중에게 아버지의 부재는 곧 가족의 빈곤을 의미했다. 그 아버지들은 가족 자체를 돌보지 않거나 아예 버리곤 했던 탓에, 생계는 남은 구성원인 아내와 자식들이 도맡아야 했다. 이 와중에도 가부장제의 권능은 굳건해서 부재하는 아버지의 다른 한편에 군림하는 아버지의 전제(專制)마저 엄존했다. 이러한 가부장의 권위에 대한 인정과 존중, 조상 숭배와 가계의 계승, 남아, 특히 장자에 대한 선호와 우대, 부모 역할의 전통과 유지, 아내의 시집살이와 수절 등과 같이 다양한 쟁점들을 포함하는 가족주의의 영향력은 지대했다. 민중의 빈곤과 비참한 노동 현실은 그대로 교육 기회의 불평등으로까지 이어졌다. 세대에 따른 차이가 있긴 하지만, 이 책의 주인공인 대부분의 민중 구술자들은 공식적으로 무학이거나 초등학교 중퇴나 졸업 정도의 학력에 머물렀다.
애당초 지식과 교육으로부터 배제된 예외의 존재였기에 알다시피 한국 사회가 교육에 대해 강한 열망을 분출해간 만큼 이들의 좌절과 갈등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교육 기회의 박탈로 빈곤이 대물림되고 계층 상승의 가능성마저 차단당하는 악순환이 지속되었다. 가망 없는 배움에 대한 한을 품고서 이들은 노동 현장으로 이끌려 들어갔다. 그리고 노동과 기술을 통해 생존을 도모하고 빈곤에 대항하려 했다. 결국 피지배 하층민, 육체노동, 산업화의 영역에 속한 노동과 기술의 이러한 삶의 과정은 상층 엘리트, 지식인, 정신노동, 민주화로 표상되는 지식과 교육에 의한 지배와의 지난한 만남과 포섭 그리고 예속과 갈등을 반영하기에 이른다.
복합적인 민중 의식 너머
이 시기 민중 의식은 복합적이었다. 책에서는 그 형태와 층위를 여섯 가지 유형으로 구분해보았다. 개인의 전 생애 과정 차원에서 바라보면, 각 유형에 대한 태도나 평가가 일관되지 않으며, 모순되고 복합적인 양상을 보였다. 적어도 자료에서 드러난 바로는 미신, 억견, 팔자, 운명처럼 전근대적ㆍ수동적ㆍ보수적인 내용이 우세해 보수/체제를 옹호하는 사례가 많았다. 지속된 전쟁과 냉전으로 극소수의 목소리만 살아남아 전해졌기에, 이른바 민중론의 주류로 표방되어온 주체, 진보, 저항, 혁명 같은 요소들은 드물었다. 지배, 수탈, 억압에 상응해 강인한 생명력, 현실 비판, 풍자, 해학처럼 민중 의식으로 흔히 지목되어온 속성들과도 일정한 거리가 있었다.
이렇게 방어적인 의식은 직접적으로 그 자신과 가족의 생존이 주목적인 경제적 동기가 작용한 결과였다. 산업화의 문턱에서 혹은 근대화의 혜택으로부터 소외된 불안정한 가계 상황에서 다수의 기층 민중은 오직 생존을 위한 일상에 매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처지는 장기적으로 바라보아 식민 지배와 군사 독재 같은 수탈과 억압의 경험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민족해방운동과 반독재운동처럼 특정 계기를 통해 분출된 사례가 없지는 않지만, 이들의 불만은 일상에서 극도로 억압당할 뿐이었다. 그리하여 민중은 생존 전략의 하나로,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때로는 가장되기도 한 정치적 무관심을 행사했다.
저자는 책을 이렇게 맺는다. “역사 국면에서 실체 자체가 모호한 현실에 맞선 저항이 다시 민중의 이름으로 호명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 민중 아닌 다른 형태와 양상의 저항 주체가 새로 등장한다면, 민중은 역사적 개념이 되어가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근대의 불평등과 모순과 혼란을 온몸으로 겪어낸 이들이 추구했던 다양한 삶의 전략과 경험, 자기 정체성 모색 그리고 삶의 이상에 대한 기억과 전통은 살아남아 이어질 것이다.”
책 속으로
한국의 경우를 보면, 예컨대 전통 시대에 대한 역사 서술의 주류는 지배 계급과 양반 문화 혹은 유교 같은 사회 상류층에 주로 초점을 맞추어왔다. 공식 역사나 지배 계급의 역사 서술에서 긍지와 자부심을 부여하기 위해 선별하여 강조하는 ‘빛나는 과거 유산’이나 전통은 이들 상류층에 속하는 것이었지, 결코 민중이나 하층민의 것은 될 수 없었다. 오늘날도 예외는 아니다. 해방 이후 한국 사회에서 가장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 두 가지 주요 계기, 즉 근대화(산업화)와 민주화란 거대 서사에 등장하는 이야기와 주요 인물들에서 이들 민중의 역할이나 그에 대한 의미 부여는 사실 찾아보기 어렵다.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경향은 전 지구 차원에서 한류가 융성하고, 팬데믹 이후 도리어 한편에선 자본의 풍요가 온오프 미디어 세계를 지배하는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인간의 생존 조건은 시공간의 특정 맥락에 제약 받는 숙명을 지닌다. 민중 구술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개인에게 주어진 사회ㆍ경제 조건에 따라 자신이 위치한 시공간 범위와 성격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제1장 시대 배경과 공간 조건」 중에서
이처럼 가난은 정치 영역에 대한 본능적인 기피와 무관심을 초래하였다. 보통 특정한 시대 조건은 그 시대 정치 무관심을 결정하며, 거꾸로 그 시대의 정치 무관심은 그 시대의 현실을 반영한다. 이 시기 정치 무관심은 정치 과정으로부터의 소외와 그에 따른 일정한 피해의식을 반영하여 정치에 대한 고의적인 외면과 회피를 수반했다는 점에서 다분히 회의와 부정과 도피로서의 성격이 짙었다. 무엇보다 이 시기의 정치 무관심은 개체와 그 가족의 생계와 생존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경제 동기에 압도되었다. 산업화 문턱에서 가계 기반 자체가 정착되지 않은 상태에서 다수의 기층 민중은 생존 전략의 하나로,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때로는 가장되기도 한정치적 무관심을 행사했다.--- 「제5장 근대화 초기 기층 민중의 현실과 빈곤」 중에서
그러나 이제 이 시대의 민중은 혼란스러울 정도로 복잡한 대상들과 마주하고 있다. 국가의 억압은 더 이상 명시적이지 않으며, 자본은 분화ㆍ변용되거나 계열화ㆍ중층화하면서 전 지구적 차원의 복잡성을 더해가고 있다. 더구나 기후 위기, 자연 재해, 감염병 팬데믹처럼 계급 중립의 부정형 도전들이 출현하고 있다. 불평등, 차별, 수탈, 배제 등이 짐짓 가상의 풍요 뒷전으로 사라져버리는 것처럼 보이는 가운데 대상 자체에 대한 인식이 파편화하고 다기화하고 있다.--- 「맺음말」 중에서
가난하고, 죽어라 일하는 민중이 보수적이라는 역설
20세기 민중 구술 자서전에 투영된 민중상
가부장제 만연, 성차별, 직업 자긍심 희박
“지식인의 이상적 민중상 재검토해야”
시국강연회에 참석한 인파(1965). 국가기록원 소장. 성균관대학교출판부 제공
‘민중’은 백성, 서민, 인민 등과 그 뜻이 적잖이 포개지는 말이다. 민초, 기층민 또는 학술 용어인 서발턴 같은 말들과도 비슷한 관계를 지닌다. 특히 1980년대 이후 민중은 착취와 억압의 희생자이면서 동시에 그런 질곡을 깨부수고 자유와 해방을 쟁취하는 투쟁의 주체로 부각되었다. 민중사관, 민중문학, 민중신학 등은 모든 사안을 민중의 관점에서 다시 보고 새롭게 실천하려는 의지의 표출이었다.
그렇지만 민중 개념이 처음부터 이렇게 진보적이고 저항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일제 통치 당국은 ‘경찰의 민중화’ ‘민중 보건’ 등을 통해 식민 지배를 합리화했고 1930년대 이후에는 ‘총후 민중’ ‘반도 민중’ 같은 말들로 전시체제 대중 동원을 꾀했다. 한편으로는 1925년에 기획된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에서 보듯 사회 운동권에서 민중이라는 말이 사용되기도 했다. 해방 공간에서 좌파가 민중보다는 ‘인민’을 자주 사용하자 ‘민중’은 자연스럽게 우파의 전용어가 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 이후 대학가를 중심으로 민중의 재발견이 이루어진 뒤에는 진보와 좌파에서 이 용어를 전유하여 1980년대의 민중주의로까지 이어졌다.
수색공민학교 천막 학교 성금품 전달식(1961). 서울역사아카이브 소장. 성균관대학교출판부 제공
그렇다면 한국 현대사에서 민중의 실제 삶은 어떠했을까. 사회학자 김경일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가 쓴 ‘민중은 이야기한다’는 구술 자서전과 인터뷰 기사를 토대로 민중의 삶을 재구성한다. 1960~70년대 잡지 신동아에 100회에 걸쳐 연재된 ‘오늘을 사는 한국의 서민’ 시리즈, 1980년대의 ‘뿌리깊은나무 민중자서전’(전20권, 1982~1991), 그리고 21세기에 나온 ‘한국민중구술열전’(전47권, 2005~2011)과 ‘20세기 한국민중의 구술자서전’(전6권, 2005)을 일차 자료로 삼고 다른 자료들을 참조했다.
석산섬유공업주식회사 여공들(1956). 국가기록원 소장. 성균관대학교출판부 제공
민중을 민중이게 하는 양대 축은 가난과 노동이다. 경제적으로 빠듯하고 교육 혜택을 받지 못해 전문 지식이나 기술을 지니지 못한 이들이 몸을 쓰는 고된 노동으로 생계를 이은 것이다. ‘한국민중구술열전’(민중열전)의 주인공 47명 중 유일한 일본인을 뺀 나머지 한국인 46명의 경우 무학에서 초등학교 졸업까지의 학력이 전체의 70%가 넘는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신동아 ‘서민’ 시리즈에 나오는 기술자 56명 가운데에서도 무학이거나 초등학교 중퇴 또는 졸업 학력을 가진 사람이 역시 70% 정도였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이들은 그야말로 돈이 될 만한 일이라면 가릴 처지가 안 되었고, “비교적 짧은 시기 동안만 지속되는 불안정한 성격”을 지닌 다양한 노동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민중열전 제26권 주인공 황태순은 각종 농사일을 필두로 군에서 제대한 뒤에는 막노동과 하역 작업 인부를 거쳐 1970년대에는 사우디에서 항만 하역 작업을 했으며 돌아와서는 농기구상, 섬유공장, 가구공장, 자동차 부품회사, 건설 현장 등의 영세 사업장에서 막일과 경비일을 전전했다.
삼척탄광 광부(1976). 국가기록원 소장. 성균관대학교출판부 제공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온종일 “질통 메고 운반하는” 일을 하다가 빨라야 밤 10시에 도착해서 잠자는 시간도 제대로 없었을 정도로 “죽자 사자 일해”도(민중열전 제24권 홍성두) 생계를 유지하기는 어려워서 부인과 어린 자식들까지 가족 모두가 부업 전선에 나서는 경우가 흔했다. 밖에 나가면 “길거리에서 쇳덩어리라도 주어오는 그런 버릇”(민중열전 제9권 정원복) 또는 “신앙과 같은 낭비 혐오증”(‘서민’ 시리즈 기록자)은 이런 지독한 가난이 남긴 흔적이라 하겠다. ‘서민’ 시리즈의 기술자 주인공들은 대체로 “이제 염전이라면 지긋지긋”(염수장 김재순)하다거나 “모래밭에 혀를 박고 죽어도 내 아들을 통꾼(=종이 뜨는 기술자)은 안 만들겠”다고 다짐할 정도로 자신의 기술에 대한 긍지와 애착이 희박하다.
충청남도 도지사 초청 합동 회갑연(1962). 공공누리
결혼은 연애가 아닌 중매결혼이 대부분이었고, 그 가운데에는 당사자의 의사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강제 결혼에 가까운 경우가 많았다. ‘민중자서전’ 제4권 주인공 이규숙은 남편과 서로 이야기하는 법이 없었고 시어머니를 통해 의사소통을 했으며, “시어머니가 날짜를 봐서 들여보내는 날에나 (남편과) 잠자리를 함께할 수 있었”다. ‘민중자서전’ 제9권 주인공인 최소심은 열일곱 나이에 열두 살 더 많은 남자의 첩으로 들어간 것을 비롯해 세번의 결혼 모두 첩의 신분이었는데, 법률상으로는 첫번째 남편의 부인으로 되어 있어서 그 남편과 다른 여성 사이에서 나온 아이들이 자신의 자식으로 호적에 올라 있고, 실제로는 세번째 남편과 해로하면서 역시 자기 소생이 아닌 이 남편의 아이들을 손수 키우며 가족과 같은 친밀감을 유지했다.
가내 수공업(1960). 공공누리
가부장제와 아들 선호 의식은 확고해서 “아내보다는 부모나 형제를 우선시”하기 일쑤였으며, 자식들 가운데 한둘을 택해 고등 교육을 시킬 때에도 “거의 언제나 장남에서 시작하여 다음 아들들로 이어졌다. 여성은 여기에서 배제되는 것이 상례였다.” 여성은 교육 이전에 사람다운 대접에서부터 소외되기 일쑤여서 ‘뿌리깊은나무 민중자서전’(민중자서전) 제6권 주인공 김점호는 “옛날엔 어른이라 카마는 하늘이고 미늘(=며느리)이라 카는 거는 땅바닥에, 진짜로 고만 벌거지(=벌레)보다 쪼매” 나은 존재로 취급했다고 말한다.
이렇게 경제적으로 쪼들리고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이 정치적으로는 오히려 체제 순응적이며 보수적인 성향을 보인다는 것은 매우 역설적이다. 정치 같은 건 “알 수도 없고 관심도 없다”(‘서민’ 시리즈의 유리공 최용배)는 식의 태도가 흔했고, 이승만과 박정희를 높이 평가하기 일쑤였다. 김경일 교수는 “오랜 시간에 걸친 수탈과 지배, 식민 지배와 민족 이산, 전쟁과 군사 독재 같은 역사의 톱니바퀴가 민중론의 주류를 이루는 주체와 진보, 급진의 요소들을 서서히 갈아내버렸다”고 상황을 해석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에서 그것은 지식인의 기대나 이상의 투영이거나 어긋남일 수도 있다”며 기존의 민중 인식을 재정향하고 그에 대한 대안 서사를 탐색할 필요가 있다고 쓴다.
한겨레 기자최재봉
독일 청년들은 왜 히틀러에 열광했는가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82] 독일의 전쟁범죄-홀로코스트 ⑩ 2024.08.17.
제2차 세계대전 때 전선으로 나아가는 독일 병사들의 배낭 속엔 2권의 책이 넣어지곤 했다. 하나는 아돌프 히틀러의 <나의 투쟁>, 그리고 다른 하나는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의 책이었다. 히틀러는 "나는 책 내용을 다 기억하고 있다"며 으스대면서 이탈리아 파시스트 무솔리니에게 양장본으로 만든 <니체 전집>을 선물로 주었다. 병사들에게는 양장본 전집이 아닌 보급판 낱권으로, 특히 히틀러가 즐겨 읽었다는 두 권의 책(<도덕의 계보>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가운데 하나가 주어졌다. 히틀러는 특히 니체의 이런 문구를 좋아했다고 한다.
[싸움터에 나가 있는 나의 형제들이여! 나, 너희들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너희들과 같은 부류의 존재다](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세상, 2000, 76쪽).
히틀러는 독일의 젊은 병사들이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를 읽으면서 예언자(선지자)가 말하는 초인(超人, Übermensch)의 이미지를 다름 아닌 히틀러 자신에게서 발견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여기서 니체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어떨까. 죽음의 전선으로 떠밀려가는 젊은이들에게 히틀러가 니체의 책을 나눠준다는 사실을 '무덤 속의 니체'가 들었다면, 그는 기뻐하며 히틀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을까.
▲ 1933년 어느 집회에 참석한 히틀러-유겐트 대원들. 이들은 히틀러를 지지하는 '예비 나치'로 키워졌다. ⓒ위키미디어
니체는 반유대 인종주의자였나
이 대목에서 니체 연구자들 사이에선 견해가 엇갈린다. 니체를 찬미하는 이른바 '니체주의자'들은 "니체는 인종주의를 반대했지만 나치 히틀러가 니체의 이름을 훔쳤다"는 주장을 편다. 그렇지만 다른 견해를 펴는 이들도 있다. 니체는 그야말로 인종주의자에다 반민주적 논리를 신념으로 지녔다는 것이다. 박홍규(영남대 명예교수, 법학)는 그런 비판적 소수 의견을 펴는 국내 연구자다(박홍규, <반민주적인, 너무나 반민주적인>, 필맥, 2008 참조 바람).
니체가 남긴 원고의 분량이 워낙 많고 추상적이고 해석이 어려운 대목들이 곳곳에 있기에 전체적으로는 혼란스럽게 비쳐질 수 있다. 연구자들이 보기에, 대체로 생애 전반기의 니체는 유대인을 독일의 적으로 보고 혐오감을 드러냈다. 히틀러가 좋아했던 니체는 전반기의 니체였던 셈이다.
실제로 히틀러는 니체에 한동안 푹 빠져 지냈다. 1923년 11월 뮌헨 폭동 뒤 감옥에 갇혀 9개월쯤 지내는 동안 히틀러는 니체 전집을 갖다놓고 열심히 읽었다. 특히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고 또 읽었다. 그가 감옥에 있을 때 초고를 쓴 <나의 투쟁>이나 다른 연설문에서 '초인'이란 용어가 자주 나오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니체가 '초인은 세상을 아름답게 본다'며 삶을 찬양했던 용어인 '인생의 긍정'도 히틀러는 연설문에서 베꼈다. '20세기 독일 국민은 인생의 긍정에 새롭게 눈뜬 국민입니다'라는 식이다.
니체의 '피의 희생'이란 문구도 마찬가지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공격 나흘 뒤인 1941년 12월11일 히틀러는 제3제국 의회에서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때 히틀러는 "의원 여러분이야말로 피의 희생의 규모를 판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자리에 있다"고 했다. 1941년 무렵까지만 해도 전황은 히틀러에게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곧 전쟁의 운동장이 패전 쪽으로 기울었고 독일인의 '피의 희생' 규모는 570만 명(군인 325만, 민간인 245만)에 이르렀다.
니체는 살아 있을 때 14권의 책을 썼고, (매독의 후유증으로 말미암아) 1890년 정신이상 증세를 보일 무렵에 쓴 원고를 포함한 많은 미출간 유고들을 남겼다. 니체가 죽은 뒤 20세기 초 독일에서는 판본이 다른 <니체 전집>이 여러 차례 출간됐다. 1920년부터 1929년까지 23권짜리 전집이 뮌헨에서 완간됐고, 1933년엔 또 다른 <니체 전집>이 '고증판'이란 이름으로 나왔다. 히틀러가 무솔리니에게 줬다는 전집이다.
(한국에서는 1961년 5권짜리로 <니체 전집>이 나왔다. '전집'은 아니고 니체의 주요 책자들을 골라 펴낸 '선집'이었다. 1970년대 철학과 학부 학생 때 시간제 가정교사를 하면서 받은 돈으로 그 5권을 사들고 하숙집으로 들어가니, 책읽기를 좋아했던 집주인이 몹시 반겼다. 하지만 우리 둘 다 제대로 니체를 읽질 못했다. 세로글씨의 번역본 문장은 엄청난 인내심을 강요했다. 한국에서 문자 그대로 전집이 나온 것은 2003년에서 2005년에 걸쳐 '책세상'에서 펴낸 21권짜리였다. 지금은 절판 상태다).
"유대인 박해만 빼면, 그는 뛰어난 정치인"
많은 니체 연구자들이 말하듯이 "나치가 니체를 악용했다"는 지적이 맞는다면, 그만큼 나치 히틀러 정권의 선전술이 뛰어났음을 보여준다. 침략전쟁과 그에 따른 전쟁범죄, 인권침해를 저지르면서 엄청난 희생자를 냈던 히틀러가 죽은 뒤에도 적지 않은 독일 사람들이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는 것은 나치 선전의 승리를 뜻한다. 그 사람들 가운데는 지난날 전선으로 떠날 때 배낭 속에 넣어준 니체의 책을 읽은 군 출신도 있을 것이다.
[1949년 서독에서 행해진 여론조사에서 10명 가운데 6명이 나치즘이 생각은 좋았지만 실행방식이 나빴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1989년 독일인 10명 가운데 4명은 유대인 '박해'를 빼면, 히틀러가 독일의 가장 뛰어난 정치인에 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클라이브 폰팅, <진보와 야만>, 돌베개, 2007, 407-408쪽).
윗글은 영국 역사가 클라이브 폰팅의 역저(원제목 Progress and Barbarism, 1998)에서 옮긴 것이다. 폰팅은 지구 환경을 주제로 삼아 인간 문명사를 정리한 <녹색 세계사>(A New Green History of the World, 2007)로 이름을 널리 알렸다. 역사를 지구 환경, 나아가 우주 전체로 넓혀 바라보는 이른바 '빅 히스토리'의 개척자란 평가를 받는다.
폰팅에 따르면, 적지 않은 독일인들의 기억 속에 히틀러가 긍정적인 이미지로 남았다. 전쟁 중 보도 검열과 입단속으로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나치의 전쟁범죄 사실은 패전 뒤 알려질 만큼 알려졌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1945년 11월20일~1946년 10월1일)을 언론 보도로 지켜봤고 재판 바로 뒤 나치 지도부의 처형 사실도 알았다. 그런 기억이 생생할 무렵(1949)의 여론조사나 그 40년 뒤의 여론조사 결과는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보통사람들에게 부정적으로만 자리매김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흔히 독일을 '전범(戰犯)국가'로 만든 책임이 있다는 비판과는 사뭇 다른 평가다.
히틀러를 긍정적으로 보는 또 다른 여론조사 결과를 보자. 영국의 전쟁사 연구자 매튜 휴즈(브루넬대, 역사학), 크리스 만(서리대, 유럽사)은 둘이 함께 써낸 책(Inside Hitler's Germany: Life under the Third Reich, 2010)에서 패전 뒤 독일인들이 히틀러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를 살폈다. 이들에 따르면, 적지 않은 숫자의 독일인들이 히틀러 집권 전반기(1933-1939)를 '독일의 황금기'(golden ages)로 여긴다고 했다.
[독일인 대부분은 1930년대를 테러, 살인, 억압보다는 질서, 평온함, 고용안정, 번영의 시기로 기억했다. 이 때문에 1951년 독일연방공화국(서독) 국민들에게 물었을 때 거의 절반가량은 1933년부터 1939년까지를 독일의 황금기라고 답했다. 1949년 독일 여론기관은 조사결과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안정적인 봉급, 질서유지, '기쁨을 통한 힘', 원만한 국정 운영.... 따라서 사람들은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나치즘)가 고용을 창출하고 충분한 먹을거리와 여가생활을 보장해주며 정치적 혼란을 해결해 주었다고 여겼다](매튜 휴즈, 크리스만, <히틀러가 바꾼 세계>, 플레닛미디어, 2011, 141쪽).
<나의 투쟁>에서 유대인을 '기생충' 또는 '유대인은 페스트'라 쓰여 있듯이, 히틀러의 정치 이념은 매우 위험한 인종적 민족주의였다. 문제는 그런 통속적인 반유대주의와 ('독일 아리안족의 우수성'을 내세운) 조악한 사회다윈주의적 세계관에 많은 독일 젊은이들이 열광했다는 점이다.
위대한 음악가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즐겨 듣던 이른바 '문명 민족'인 독일 사람들이 히틀러를 지지했고 패전 뒤에도 그를 긍정적으로 봤던 데엔 △대공황으로 600만에 이르렀던 실업자를 없애 독일 경제를 일으켰고 △라인란트 진군, 오스트리아 합병 등으로 (1919년 베르사유 강화조약으로 상처 받았던) 독일인의 민족주의적 자긍심을 되살린 측면이 크다. 그 바탕에 나치 정권의 줄기찬 선전 선동이 있었다.
▲ 1920년대 나치당의 전위 폭력조직원으로 움직였던 돌격대(SA) 대원들. ⓒ위키미디어
히틀러 운명을 바꾼 맥줏집 연설
히틀러는 다른 무엇보다 연설 솜씨가 뛰어났다. 청중을 사로잡는 데에 히틀러는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히틀러 자신도 어렴풋이나마 느끼고 있던 그 재능을 확인한 것은 1919년 9월12일 뮌헨의 한 맥줏집에서 열린 독일노동자당 집회에서였다(그 맥줏집 상호는 호프브로이하우스. 지금도 맥주를 팔고 있다. 몇 년 전에 가보니 규모가 제법 컸고 천정 벽화가 인상적이었다).
그 무렵 아직 군인 신분이었던 히틀러에게 그의 상사가 "정당 집회에서 어떤 말이 오가는지 살펴보라" 했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 때 보안사 요원이 사복을 하고 재야단체의 모임 자리에 슬며시 간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히틀러는 사찰이라는 자신의 임무를 잊고 모임 막판에 토론에 끼어들어 한바탕 정치연설을 했다. 그런 히틀러를 인상적으로 본 당직자가 입당을 권유한 것이 결과적으로 그의 운명을 바꾸었다.
히틀러의 <나의 투쟁>에 따르면, 독일노동자당 조직이 너무 좀스럽고 '너무 기본이 안 되어 있는 모임'이라서 며칠 동안 입당을 망설였다고 썼다. 그럴 만했다. 그날 그가 가본 정당은 패전 뒤 독일에서 이렇다 할 직업 없이 불안정한 생활을 이어가던 사람들이 모여 만든 숱한 극우정당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래도 입당을 결심한 것은 '(히틀러) 개인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도 그만큼 클 것'이란 판단에서였다고 한다.
[이제 나에게는 한꺼번에 많은 청중 앞에서 이야기할 기회가 주어졌다. 내가 전부터 언제나 알고 있지는 못했지만 순수한 느낌만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것이 이제 사실로 드러났다. 다시 말해 나는 '연설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자신의 강연을 통해 수백 명, 아니 수천 명의 동지를 다시 민족과 조국으로 이끌고 돌아왔다](아돌프 히틀러, <나의 투쟁>, 동서문화사, 2014, 342쪽).
히틀러와 나치 연구를 인정받아 영국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은 이언 커쇼(Sir Ian Kershaw, 영국 셰필드대, 현대사) 같은 이는 히틀러가 자신의 젊은 날들을 돌아보며 쓴 <나의 투쟁> 내용은 '잘 새겨서 받아들여야 할 곳이 많다'고 했다. 같은 맥락에서 커쇼는 히틀러가 독일노동자당에 들어간 이야기도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선 안 된다'고 했다. <나의 투쟁>에 적힌 내용들이 (미화하거나 부풀려지는 등) '이미 지도자의 신화에 걸맞게 의도적으로 다듬은 일화'라는 것이다(이언 커쇼, <히틀러 1>, 교양인, 2010, 209쪽).
"돌격대(SA)는 히틀러의 걸작품"
히틀러는 독일노동자당에 들어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당권을 장악하고 당명을 나치당(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당, NSDAP)으로 바꾸었다. 뮌헨의 군소정당이었던 나치당은 히틀러가 지도권을 쥔 뒤로 세력을 급격히 불려갔다. 나치의 탄압을 피해 1938년 약혼자와 함께 영국으로 갔던 유대인 저널리스트 제바스티안 하프너(본명은 라이문트 프레첼)는 "히틀러가 연설 재능뿐 아니라 조직 능력이 뛰어났다"고 했다. 히틀러의 조직 솜씨가 나치 세력을 키우는 결정적 요소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하프너는 히틀러 조직능력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나치당에 이어 돌격대(Sturmabteilung, 약칭 SA)를 꼽았다(원서명은 Anmerkungen zu Hitler, 1978).
[1920년대 히틀러의 두 번째 작품은 내전용 군대인 돌격대다. 당시의 다른 모든 정치적 전투기구들은-민족주의 기구인 철모단(Stahlhelm), 사회민주당 기구인 제국기(Reichsbanner), 심지어는 공산당 기구인 붉은전사단((Roter Frontkämpferbund)까지도-돌격대에 견주면 절뚝거리는 속물 단체처럼 보일 정도였다, 돌격대는 전투 열의와 돌격 능력에서 다른 모든 단체를 훨씬 앞섰으며, 잔인성과 살인 의욕에서도 당연히 앞섰다. 오로지 돌격대만이 진짜로 두려운 대상이었다](제바스티안 하프너, <히틀러에 붙이는 주석>,돌베개, 2014,63쪽).
히틀러의 조직 능력은 나치당을 '씩씩하게 행진하는 선거전의 기계'로 바꾸었다. 독일 사람들이 그전까지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는 모습이었다. 돌격대가 앞장섰다. 나치당 집회가 열리는 곳마다 먼저 달려가 정치적 훼방꾼들을 쫓아내 히틀러가 안정적으로 연설할 수 있도록 했다(다른 얘기지만, '위안부' 소녀상 가까이에서 열리는 수요집회 때마다 바로 옆에서 큰 소리로 악을 쓰는 훼방꾼들을 어찌 몰아내야 할까. 그렇다고 히틀러의 돌격대를 소환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대학생은 히틀러의 첨병"
히틀러는 특히 독일의 20대 남성들을 사로잡았다. 1920년대만 해도 히틀러가 속했던 나치당의 지지도는 매우 약했다. 여성들은 나치당의 남성중심적 폭력성을 경계했고, 노동자들은 사회민주당(SPD) 또는 공산당을 지지했다. 나치의 주요 지지기반은 청년층이었다. 1932년, 그러니까 히틀러가 독일 총리에 오르기 한 해 전 나치당원의 40% 이상이 30세 이하였다.
젊은이들이 나치당에 많이 가입한 까닭은 무엇일까. 히틀러가 행동을 앞세우고 연설 때마다 유대인과 베르사유조약을 싸잡아 비난하고 독일의 재무장과 영토확장, 독일민족의 부흥을 통해 일자리를 약속한 것이 매력으로 꼽혔다. 1923년 11월8일 뮌헨에서 이른바 '맥주홀 폭동'으로 (무솔리니의 '로마 진군'처럼) '베를린 진군'을 꾀하려 했던 쿠데타 시도는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바이마르공화국의 불안정한 현실에 불만을 지녔던 많은 독일 젊은이들에게 인상적으로 다가갔다.
지난 주 글에서 '예비 나치'들을 키운 19세기말 반유대주의자들을 살펴봤었다. 이들의 반유대 독설을 듣고 읽으며 자란 젊은이들 가운데 학교 선생이 된 사람들은 그들의 반유대주의를 고스란히 학생들에게 옮겼다. 반유대적 민족족의를 강조한 교과서도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히틀러의 나치당이 세력을 키운 데엔 젊은이들, 특히 대학생들이 한 몫을 했다. "대학생은 히틀러의 첨병"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1920년대에 조직된 '나치 학생동맹'은 히틀러가 내뱉는 반유대주의, 독일 재무장 등 과격한 정치구호를 외치며 길거리 투쟁에 온 몸을 내던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치의 폭력 시위 현장엔 어김없이 대학생들을 포함한 젊은이들이 갈색 셔츠를 입은 돌격대(SA)와 함께 앞장섰다.
[나치와 학생들을 이어주는 중요한 끈은 유대인에 대한 폭력 시위였다. 정부 요직과 교직 같은 전문직에서 유대인을 추방하기 위해 보이콧 운동과 서명운동을 처음 벌인 것도 학생들이다. 이런 행동은 실제 폭력으로 발전했다. 1922년에는 베를린대학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던 유대계 외무장관 발터 라테나우의 추도 집회가 학생 폭동에 대한 염려로 무산되었다. 세계대전 이전에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폴 존슨, <유대인의 역사>, 포이에마, 2014, 798쪽).
히틀러를 지지하는 학생들의 폭력행위가 갈수록 심해지자,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는 나치 학생동맹을 불법단체로 못 박았다. 이런 조치가 '젊은 나치'들의 폭력성을 누르지 못했다. 역사가 폴 존슨은 "목표한 바를 이루기 위해 폭력을 일삼는 학생들만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압력에 너무 쉽게 굴복한 대학 당국의 나약함이 더 큰 문제"라고 잘라 말했다.
[유대인 학생과 유대인 교수진에 대한 공격은 날로 결렬해져서 많은 교수가 대학에서 쫓겨났다. (중략) 교수들이 친나치 세력이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에 맞설 용기가 없었을 뿐이다. 이것은 독일 국민의 나약한 정신에 대한 일종의 예시였다. 알고 보면 나치는 국가권력을 탈취하기 2-3년 전부터 대학 캠퍼스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던 셈이다](폴 존슨, 798쪽).
▲ 1935년 뉘른베르크 제7차 나치당 전당대회에서 유겐트 대원들을 사열하는 히틀러. 이 젊은이들은 히틀러의 전쟁 소모품으로 희생됐다. ⓒRobert Sennecke
'예비 나치'로 키워진 유겐트 청소년들
대학가를 장악한 히틀러는 대학생이 아닌 청소년들도 '예비 나치'로 키우려 했다. 히틀러-유겐트(Hitler-Jugend, 약칭 HJ)를 통해서다. '히틀러의 아이들'(Hitlers Kinder)이란 별명이 가리키듯이 유겐트는 나치 독일에 대한 충성도 충성이지만 다른 무엇보다 히틀러 개인숭배의 성격이 짙다.
유겐트의 출발은 1922년 2월에 만들어진 '나치 청소년동맹'(Jugendbund der NSDAP)이 다. 유겐트는 크게 3개 집단으로 조직됐다. △유겐트 지도부들로 구성된 단체(Ring) △ 15세에서 18세의 청소년 집단(Scharen) △7세에서 15세 사이의 청소년 집단(Jungvolk) 등이다. 유겐트는 처음엔 나치당의 폭력 전위대 성격을 지닌 돌격대의 지휘를 받는 청소년 조직이었다. 돌격대의 산하 조직으로 철저하게 준군사훈련을 기본으로 하는 군사스포츠 클럽의 성격을 지녔다.
점차 덩치가 커지면서 유겐트는 돌격대에서 떨어져나가 1932년 4월부터 독자 조직을 꾸렸다. 유겐트 단원들은 나치 당의 정치적 승리를 위해 선전집회를 열고 홍보활동과 행진, 가두시위, 모금활동을 펼쳐 히틀러의 권력 장악 과정에서 나름의 중요한 역할을 해냈다. 권형진(건국대, 사학) 교수는 "나치의 청소년 조직은 돌격대와 함께 1933년의 나치 집권이 가능하도록 만든 일등공신의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고 했다. 그 무렵 유겐트 구성원의 특징은 10명 가운데 7명이 청소년노동자였다는 점이다.
[당시 유겐트에 가담한 청소년들의 사회출신별 통계를 통해 이들의 전투적인 행동방식을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1931년과 32년 사이 전체 히틀러 유겐트 중 69%가 청소년노동자 또는 견습생이었고, 10%가 판매직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12%가 학생이고 나머지는 다양한 사회계층에 속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실업자였다. 사회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인 청소년들에게 다가올 미래의 (장밋빛) 비전을 제시하는 히틀러가 그들의 우상으로 비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권형진, '나치정권의 소년들에 대한 통제-히틀러 유겐트를 중심으로', <대구사학> 89집, 2007).
1933년 1월30일 히틀러가 독일 총리에 오르면서 유겐트의 덩치는 덩달아 커졌다. 히틀러는 "나치당은 청소년의 당이다. 당의 청소년은 그 정예이다"라면서 국가조직 차원으로 유겐트를 키웠다. 나치당이 모든 정적들을 제거하고 유일 정당으로 올라선 것과 같은 과정을 유겐트도 그대로 밟아나갔다. 유겐트가 '독일 청소년연맹'을 장악하고, 다른 청소년 단체에 속했던 청소년들이 새로이 유겐트에 가입하면서 1933년 초 10만 명쯤이었던 단원은 1934년 말 36만 명으로 늘어났다.
유겐트는 1년에 크게 두 차례의 캠프를 조직했다. 밤에는 거대한 모닥불을 지피고 뮌헨 폭동 때 죽은 16명의 '순교자'들과 전쟁 영웅을 위한 화환을 불 속에 집어넣는 의식을 치렀다. 행사가 끝나면 횃불 행진을 하면서 게르만 전통과 민족의식을 청소년들에게 불어넣었다. 행사에 참석한 히틀러는 유겐트 단원들에게 "운동과 체조로 자신의 육체를 단련하여 그레이하운드같이 날렵하고, 가죽처럼 끈질기며, 강철처럼 강인한 청소년으로 미래의 영광된 독일제국을 건설할 전사가 되는 것이 독일 소년의 목표"라고 강조했다(권형진, 위 논문 참조).
1936년 12월 히틀러는 모든 독일 청소년은 유겐트 단원이 돼야 한다는 법령을 만들고 군사훈련을 의무화하였다. 1939년 독일이 전쟁의 불길 속으로 뛰어들면서 유겐트도 함께 움직여야 했다. 전쟁의 운동장이 이미 패배 쪽으로 기울어진 1944년에는 '자원입대의 해'로 정하고 나이에 관계없이 유겐트 대원의 참전을 재촉했다.
1943년 1월부터 대부분의 독일 대공포 진지에서 야간 서치라이트를 맡은 것도 청소년 단원들이었다. 그 숫자는 약 20만 명에 이르렀다. 연합군의 거듭된 공습으로 많은 독일 청소년들이 죽었다. 심지어 동부전선이 밀리자 1943년 10월 유겐트 대원들로 제12SS기갑사단을 만들기도 했다. 1944년 9월 16세에서 60세까지의 남자들로 '국민방위군'(Volksstrum)이 구성될 때도 유겐트 단원들이 동원됐다. 히틀러의 바람대로, 유겐트에서 독일 청소년들은 궁극적으로는 나치의 세계관으로 무장한 병사로서 키워졌다. 하지만 끝내 히틀러의 전쟁 소모품이 돼버렸다.
패배로 막 내린 나치 선전
데이비드 웰시(영국 켄트대, 유럽근대사)는 정치 선전 연구자로 이름이 알려져 있다. 그가 펴낸 책(The Third Reich: Politics and Propaganda, 1993)은 왜 많은 독일인들이 나치를 지지했는가를 살펴본 역저로 평가 받는다. 엘시는 다른 연구자들처럼 성공적인 선전 덕분에 나치당의 약진이 가능했고 독일의 젊은이들이 나치를 지지하도록 이끌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엘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나치 선전이 1920년대부터 1945년까지 큰 이탈 없이 독일 사람들의 마음을 붙잡아둔 요인으로는 나치가 '생각이 다른 사람들' 또는 '생각이 바뀐 사람들'을 기술적으로 공략하려 했음을 지적한다.
[(나치 선전장관) 괴벨스는 선전 부처의 간부들에게 국민의 분위기를 정기적으로 측정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끊임없이 강조했다. 괴벨스는 보안대(SD)를 통해 국민의 분위기를 전하는 극히 상세한 보고를 받았고, 그 내용을 일기장에 기록해두었다. 히틀러도 그 보고내용을 잘 알고 있었다](데이비드 웰시, <독일 제3제국의 선전정책> 혜안, 2000, 83-84쪽).
엘스에 따르면, 나치의 선전은 대중이 어떤 쟁점에 대해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를 파악하고 있다는 전제 아래 이뤄졌다. 나치가 원하는 그림이라면 어떤 것이든 독일 국민의 머릿속에 그려넣을 수 있는 백지 상태로 보지 않았다. 앞에서 살펴본 나치 대학생들과 유겐트 등 '젊은 나치들'과 돌격대, 친위대, 게쉬타포(비밀경찰)과 같은 폭력도구를 휘두르면서도, 독일 국민을 바보처럼 취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히틀러의 뛰어난 연설이나 괴벨스의 선전 마법도 독일의 패배를 막진 못했다. 공허한 선전이 지닌 한계다. 1943년 2월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군의 궤멸적인 항복 뒤로 히틀러가 연설하는 모습을 보긴 힘들었다. 히틀러는 연합군의 공습을 피해 베를린의 벙커에 머물면서 대중 앞에 나서는 것을 피했다. 라디오로 대국민 연설을 하는 것도 마다했다.
'히틀러의 나팔수'였던 괴벨스가 '총력전을 통한 승리'(Sieg Heil)를 부르짖었지만, 전쟁의 흐름을 거스르진 못했다. 다만 나치가 줄기차게 세뇌 시켰던 젊은이들을 포함한 독일 국민들이 패전 뒤에도 히틀러를 훌륭한 지도자로 여기게끔 만들었다. 이는 히틀러 집권 전반기(1933-1939)가 '독일의 황금기'였다는 좋은 기억과 더불어 나치 선전의 부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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