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규의 ‘세월호 3년의 기록’ 한겨레21 414
뷰파인더와 가슴으로 바라본 참사 당일부터 인양되던 날까지
2014년 4월16일 저녁 7시 58분 54초, 전남 진도 동거차도에서 바라본 세월호 침몰 모습.
2014년 4월16일, 오전 9시를 조금 넘긴 시각. 자동차는 기계가 낼 수 있는 최대 속도로 전남 진도 팽목항을 향해 달렸다. 사고 해역에 도착했지만, 현장에 접근할 수 없었다. 근처 진도 쉬미항에서 출항하는 해경 배에 힘겹게 올랐다. 뱃길 2시간30분을 달려 도착한 사고 현장에서 해는 이미 저물고 있었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그때 해군 수송기가 하늘로 발포한 조명탄이 터졌다. 컴컴한 동거차도 앞바다가 순간 카메라 뷰파인더에 들어왔다.
세월호는 어둠 속에서 실종자들과 함께 침몰하고 있었다. 대한민국은 세월호에 살아 있던 생명 304명을 구조하지 못했다.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은 도주했다. 무능하고 부패한 박근혜 정부도 세월호를 내버렸다.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조직은 마비됐고, 누구도 세월호 참사를 나서서 막지 못했다.
이 사진들은 비극의 현장을 카메라 뷰파인더로 바라본 고통스럽고 슬픈 감정의 시각적 표현이다. 기자이기에 앞서 갓 쉰을 넘긴 이 시대 보통의 아버지로서 찍은 것이기도 하다. 기자도 그저 한 인간, 힘없는 50대 아버지다. 그러나 슬퍼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사고 뒤 진도 팽목항과 사고 해역에서 가장 가까운 동거차도 앞바다를 셀 수 없이 다녀왔다.
2014년 7월9일 전남 진도 팽목항.
2014년 6월6일 진도 팽목항.
2016년 5월11일 경기도 안산 단원고에 모인 희생 학생 어머니들.
기자 초년 시절부터 카메라 앞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을 기록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셔터를 눌러왔다. 그래야만 훌륭한 기자인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지난 27년 동안 수많은 사건과 사고를 기록했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는 달랐다. 컴컴한 바닷속에서 아이들이 ‘엄마’ ‘아빠’를 부르며 숨져갔다. 나도 또래 아이를 키우는 부모였다. 좀처럼 카메라를 들이대기 어려웠다.
내 손에 쥔 카메라로 무엇을 전달해야 할까. 그 참혹한 모습 앞에 한 인간의 능력으로 거대한 참사의 진실을 보여주는 게 과연 가능한가, 아울러 그렇게 하는 것이 합당한지 스스로 질문하며 괴로워했다. 내겐 용기와 지혜가 없었다.
당시 팽목항 부두엔 희생자 주검을 옮겨와 신원을 확인하는 시신 확인소가 있었다. 부모들은 바닷속에서 퉁퉁 부은 채, 물 위로 떠오른 자식의 주검을 마주했다. 엄마는 통곡하며 피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팽목항을 서성거리며 가슴으로만 그 모습을 담았다.
이 사진들은 참사 당일부터 세월호가 인양될 때까지 3년의 기록을 힘겹게 추린 것이다. 우리 아이들은 별이 됐다. 밤이 되어도 외롭거나 무서워하지 말기를, 꿈속에서나마 따뜻한 엄마 품에 잠들기를 기도한다.
2017년 1월4일 청와대 부근 촛불집회에 참석한 시민.
2014년 9월9일 세월호 희생 단원고 학생들이 안치된 안산 하늘공원. 엄마가 건우 사진에 ‘추억’을 새겼다.
세월호 ‘다이빙벨’ 이종인… 자유와 진실을 갈구하는 눈물 많은 구난자 주간경향 1222호
알파잠수기술공사 이종인 대표는 ‘다이빙벨’을 처음 일반에 소개한 사람일 것이다. 그의 다이빙벨은 세월호 참사에서 하나의 고유명사로 굳어졌다. 그 고유명사는 죽어가는 학생들을 구조하지 못한 (오히려 방해하는) 정부의 무능과 부정을 질타하는 ‘반정부’로 어의가 발전했다.
기자는 세월호 참사 이전부터 다이빙벨을 알고 있었다. 기자는 1904년 러일전쟁 때 울릉도 앞바다에 침몰한 러시아 순양함 돈스코이호 탐사과정, 즉 한국 수중고고학의 실체를 정리한 <보물선 돈스코이호를 쫓는 권력 재벌 탐사가>라는 책을 썼다. 기자는 이 책 서문에서 “다이빙벨은 해저탐사에서 가장 초보적인 첨단장비였으며 지금도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는 과학장비”라고 썼다.
이 대목을 읽은 이종인 대표는 얼굴에 환한 웃음을 지었다. 다이빙벨의 가치를 이해하는 사람을 만났다는 그런 반가움이었다. 그러나 그 표정은 곧 노한 표정, 아니 원망스런 표정으로 바뀌면서 “알면서 그때 기자로서 왜 말하지 않았나, 기자로서 의무를 방기한 것 아니냐”고 따져 물었다. 이 대표의 이런 추궁에 기자는 할 말이 없었다.
정부의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를 오래 취재해 나름 ‘재난전문기자’ 소리도 들어본 기자는 세월호 참사에서 품은 몇 가지 의문이 있다. 하나는 중대본으로부터 8번이나 보고를 받고도 7시간 동안 박근혜 대통령은 뭘 했느냐다. 이는 특별검사를 통해 일부 진실이 드러났지만 상당 부분 베일에 싸여 있다. 다른 하나는 세월호와 국가정보원 관계다. 이는 세월호를 둘러싼 음모설의 주요 기반이다. 사실 이는 세월호에 부과된 재산세와 그 납부내역만 따지면 쉽게 알 수 있다. 만약 국정원 직원의 공제회(양우공제회)가 투자한 배라면 공제회 예·결산 내역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예·결산 내역은 공제회원에게 공개된 것으로 국정감사와 조사, 세월호 조사특위가 이를 밝히지 못하는 것도 의외다.
마지막 의문은 왜 신속한 구조작업이 이뤄지지 않았나이다. 물론 이는 해경과 구조업체(언딘)의 계약 혹은 유착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다이빙벨 구조작업을 방해한 행위는 이해되지 않았다. 이종인 대표를 만난 것은 그 의문을 풀기 위해서다.
이종인 대표가 세월호 구조상황을 말하다 감정에 북받쳐 말을 잇지 못하고 있다.
■“세월호 침몰 원인은 침수다”
“수심 30m이면 기압은 4배로 늘어난다. 산소가 4분의 1로 압축됐다는 얘기다. 대기중 21%의 산소로 호흡하다 배가 침몰하면서 갇힌 아이들은 4배로 압축된 산소를 마신다. 나중에 시신이 인양돼 대기 중에 나오면 압축된 질소가 팽창하면서 시신이 불어난다. 부모들은 부패로 훼손됐다고 하는데 그게 아니다. 훼손된 시신은 불어난다. 부모들은 부패로 훼손됐다고 하는데 그게 아니다. 훼손된 시신은 수중에서 압축된 공기로 호흡했다는 증거다. 이것은 과학이다.”
그런 학생이 몇 명이나 되나.
“학부형이 확인한 시신 중 부풀어 오른 시신이 200여구다. 얘들은 마지막까지 숨을 쉬었다. 엄마·아빠를 기다리며 살아있었다. 구조 안 하고, 못하게 한 것 이것은 굉장한 범죄다. 끝났다고 끝난 것이 아니다.”
그는 구조문제가 나오자 흥분했다. 슬픔을 머금은 눈에서 노기 어린 분노의 눈빛이 발광했다. 3년 전 다이빙벨을 철수해 팽목항으로 나오면서 “한마디로 개 같다, (작업을) 막는 놈들 개 같다. 그러면 안 되는 거야”라고 울면서 소리치던 바로 그때 표정이었다.
그는 세월호 참사가 났을 때 자비를 들여 다이빙벨을 싣고 팽목항에 갔지만 해경은 구조작업을 허용하지 않았다. 가족들의 거센 항의에 겨우 한 귀퉁이에서 구조작업에 동참했다. 해경 11분, 해군 26분, 민간잠수사가 33분 작업할 때 다이빙벨을 이용한 수색작업은 1시간 넘게 계속했다. 그러나 해경의 고의적인 충돌 등 구조 방해와 위협으로 그는 다이빙벨을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3년 만에 처음 말하는 얘기’라며 이렇게 말했다.
“해군 소장이 배를 빼라고 해서 나오면서 난 걱정을 안 했다. 너희들 겨우 5~7분 바닥에서 작업했지만 나는 70분 작업했다. 이 엄청난 가능성을 유족들도 다 봤다. 그래서 장군이 쫓아내면 유족들이 말릴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유족 대표가 내 멱살을 잡고 패대기 치더라. 유족 대표는 ‘아이들을 못 데리고 나왔으니 실패 아니냐’고 따졌다. 나는 ‘다이빙벨은 성공했고 구조는 지금부터다’라고 강변했다. 그러나 그 유족 대표는 ‘다이빙벨은 실패’라고 강요했다. 마지막으로 ‘내가 그렇게 말하기를 원하냐’고 했더니 ‘그렇다’고 대답하더라.”
그 유족 대표는 정부 측 사주를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나.
“유족 중 일부는 정부 입장을 강요했다. 나는 그 유족 대표에 쫓겨 나왔다. 게다가 다이빙벨의 성과를 확인했으면서 거두절미하고 실패했다고 쓰는 언론들…. 나는 죽일 놈, 국민 사기꾼이 됐다. 그래서 철수한 것이다.”
세월호 조사특위에서 구조를 방해한 세력에 대해선 조사를 받지 않았나.
“그런 거 안 했다. 나중에 특조위 간사가 상하이셀비지에 가서 뭘 봐야 하나 물어보기 위해 자문을 구해 온 적이 있다.”
■다이빙벨 구조작업에 1억 2000만원 써
의외였다. 세월호 특조위는 침몰과정은 물론, 구조과정의 적정성도 조사할 권한이 부여돼 있었다. 구조과정에서 위협을 받은 이 대표를 조사하지 않은 것은 이해되지 않는다. 그는 “업자로부터 칼로 찔러 죽이겠다는 협박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필리핀에서 한 달간 숨어 지냈다.
세월호 침몰 원인은 무엇으로 보나.
“침수다. 어떤 원인이든 초기부터 배에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는 간단하면서도 명료하게 말했다.
물론 사고는 하나의 요인으로만 발생하지 않는다. 배를 불법 증축하고, 과적하고, 평형수를 빼고, 고박을 부실하게 해 화물이 한쪽으로 쏠리고, 조류가 센 곳에서 속도를 줄이지 못하고, 조타도 미숙하고 등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그 순간 발생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C데크 벽을 비닐로 개조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정부의 얘기는 말이 안 된다. 화물선이 과적을 했어도 실을 만해서 실었을 것이다. 세월호만의 문제가 아니다. 배가 한쪽으로 기울어지면서 물이 들어와 메인 엔진이 물에 잠겨 침몰한 것이다. 닻을 내린 것은….”
닻을 이용한 고의 침몰설 말인가.
“앵커(닻)를 내린 것은 배의 속도를 통제하지 못하니까 앵커로 슬로다운(감속)시킨 것이다. 배를 세우려고 했을 것이다. 승객 증언에 따르면 배가 갑자기 제동이 걸리며 사람들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확 쏠렸다고 하는데, 그 정도 관성이 발생했다면 충돌 아니면… 앵커가 확 잡힌 것이다. 침몰 원인을 따지는 것은 내 분야가 아니다. 내 전문분야는 ‘왜 배가 뒤집힌 후에 구조를 안 했냐’는 것이다. 그게 내 분야다.”
그렇다. 잠수함 충돌설 역시 기자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다. 길이 145m, 폭 22m, 무게 7000톤이 나가고 2000톤이 넘는 화물과 평형수를 실은 세월호와 충돌해 침몰시킬 잠수함은 세계적으로 별로 없는 것으로 안다. 미국 최대 핵잠수함도 세월호보다 조금 길지만 폭은 훨씬 작다. 게다가 수중에서 빠른 속도를 내기 어렵다. 에너지는 질량보다 속도의 제곱에 비례한다. E=mc²로 속도가 중요한데 잠수함의 속도는 시속 수십㎞ 수준이다.
“(허~ 허~)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까지 나오네.”
이건 중학교 2학년 물리시간에 배우는 기본 상식이다.
“맞다. 맞다. 만약 잠수함이 해저에서 충돌했다면 세월호 이상 데미지(손상)를 입었을 것이다.”
이런 각종 설이 난무하는 것은 정부가 진실을 숨긴 탓이다.
“그렇다. 정부의 책임이다. 정부가 사실을 밝히지 않으니 이런 각종 설이 나오고 통제도 안 된다.”
그의 말대로 구조전문가에게 침몰 원인을 묻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그는 다이빙벨을 싣고 팽목항에 달려가 구조작업에 1억2000만원을 썼다.
독점 계약한 구난업체가 올 때까지 구조를 안 했다. 그래도 구조작업 방해는 말아야지. 왜 방해했을까.
“아니까. 다이빙을 하는 놈이면 다이빙벨의 효용을 안다. 자기들 능력으로 구조할 수 없는데 다른 사람이 구조하면 안 되니까. 새 정부에서는 구조를 안 하고 못하게 한 것을 조사해야 한다.”
그는 한국해양구조협회가 설립될 때 참여해 달라는 요구를 거절했다. 그는 “해양구조협회에 가입한 업자에게만 일자리를 주겠다는 것인데, 이는 정부가 일감을 나눠주겠다는 것으로 불공정 거래”라며 “협회는 관료들의 퇴직 후 자리를 마련하는, 결국 국민의 세금을 뜯어먹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정부에 대해 극도의 불신감을 드러냈다.
이 대목에서 왜 그를 구조에서 배제했는가에 대한 의문의 실마리가 잡히는 듯했다. 해경은 해양구조협회에 가입하지 않은 것을 빌미로 그를 구난업체 대상에서 제외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천안함 참사는 좌초”라고 소신 발언을 했다. 만약 그의 다이빙벨이 세월호 구조에 효과를 거뒀으면 천안함 구조 문제도 다시 제기될 것이다. 이종인과 다이빙벨은 세월호를 넘어 천안함으로까지 이어지는 뇌관이었던 셈이다. 이런 추론은 해군 소장이 겁박하며 다이빙벨 철수를 요구했던 이유도, 집요하게 영화 「다이빙벨」의 상영을 저지한 이유도 설명된다.
■해난 구조와 배의 안전분야에 전념
그는 1953년 인천에서 태어나 인천중·제물포고·인하대 조선공학과를 나온 온전히 인천 토박이다. 대학 졸업 후 네덜란드 요트회사에서 2년간 근무하다 잠수회사에서 8년간 잠수를 배웠다. 미국에 두 번이나 가 해양구조 교육도 받았다. 그리고 1990년 이 회사를 설립해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그는 잠수분야에서 돈이 되는 토목·설비공사는 않고 해난구조와 배의 안전점검 등 안전분야만 했다. 그는 “해난사고는 사건마다 달라 현장에서 즉시 해결해야 한다”면서 “배가 침몰하는 순간 구조하는 것아 기술”이라고 말했다.
사실 그가 평범하게 말하는 이 대목도 재난사태에서 매우 중요하다. 세월호 참사 때 수없이 나온 말이 컨트롤타워다. 사실 조정·관리라는 의미의 컨트롤은 재난을 관리할 수 있다는 정부 관료적 발상이다. 그러다 보니 대형참사가 나면 컨트롤타워만 높였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가 나자 내무부(현 행정자치부)에 재난관리과가 생겨 본부장급인 민방위재난통제본부로 커졌다. 2003년 대구지하철 참사로 차관급인 소방방재청으로, 박근혜 정부에서는 장관급인 안전행정부로 커졌다. 2015년 세월호 참사가 나자 정확한 원인도 규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국무총리 소속 국민안전처로 키웠다.
그러나 예기치 않게 발생하는 재난상황에서 컨트롤타워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분초를 다투는 현장의 대응이다. 바로 세월호 참사가 그 점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안전은 컨트롤타워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재난 발생 현장에서 문화로 정착돼야 한다. 그런 면에서 세월호 참사와 현장을 중시하는 이종인은 안전에 대해 컨트롤타워에 매달리는 지금까지의 관료적 발상을 바꾸는 계기가 돼야 한다.
그는 마지막으로 “누가 대통령이 되든 (공무원들은) 조금만 해먹어라. 그리고 최소한의 의무를 다하라”면서 “나는 해병대를 나와 말하는 것이 무식하다”고 말했다. 그는 무식한 것이 아니다. 무서움이 없는 것이다. 칠흑 같은 바닷속에서 사람을 구조하는 일로 평생을 산 그가 무엇이 무섭겠나. 그는 강자에게 굴종하지 않는 자유인이며, 불이익이 있더라도 진실을 말하는 용기와 눈물도 많은 그런 남자일 뿐이다.
"3주기가 무슨 의미있나. 아직 애들도 못 찾았는데…" 414 내일
세월호, 3년의 기다림은 아직 진행 중 … 미수습자 수습, 진상규명 이제부터 시작
지난달 31일 반잠수선에 올려진 세월호가 목포신항에 거치돼 내부수색을 기다리고 있다. 군데군데 찢기고 녹이 슨 선체는 3년 전 참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철망 너머 세월호의 모습에 할 말을 잇지 못하는 추모객들 옆엔 미수습자 가족들과 유가족들도 있다. 이번 주말이면 참사 3주기가 되지만 그들에게 3년간의 기다림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12일 목포신항에서 미수습자 가족인 허흥환씨를 만났다. 허씨는 9명의 미수습자 중 한명인 허다윤(참사 당시 17세) 학생의 아버지다. 움푹 들어간 눈으로 세월호를 응시하고 있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허씨는 "3주기에 대한 의미가 있겠나. 아직 애들을 찾지 못했는데… 배를 올려놓고 일은 안 된다"며 "팽목항 때와 변한 게 없다. 가까이서 지켜보는 게 달라진 것일 뿐"이라고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세월호에는 단원고 학생 325명을 포함해 총 476명의 승객이 타고 있었다. 참사 당시 172명이 구조됐고 295명은 주검으로 돌아왔다. 2014년 10월 28일 단원고 여학생이 마지막으로 수습된 이후 3년 동안 9명은 여전히 미수습자로 남아 있다. 미수습자 가족들은 보안구역인 목포신항 안에서 지낸다. 그들의 안부를 묻자 허씨는 "안에서 서로 특별한 얘기는 없다. 누가 누굴 위로하겠느냐. 서로 얼굴보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빨리 찾아서 갑시다' 정도의 말을 주고받는다"고 전했다. 실제 미수습자 가족들의 하루는 세월호의 모습을 지켜보는 게 전부다. 오전 10~11시, 오후 2~3시 각각 1시간 동안엔 세월호에 근접해 관련 작업이 진행되는 것을 지켜볼 수 있다. 12일 오후에도 세월호 외부 장애물 제거 작업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허씨는 현장을 보러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실제 수색작업이 진행되지도 않는데 지켜볼 게 있겠나. 가까이 가서 (세월호) 선미 쪽의 터지고 찢어진 모습을 보면 참기 힘들기도 하고…"라며 말을 줄였다.
미수습자 가족들은 기자들의 인터뷰 요청이나 추모객들의 방문이 있을 때 목포신항 밖에 마련된 컨테이너 박스로 나온다. 그는 "직접 위로하는 분들도 많다. 많은 국민들이 도왔고 지금도 도와주고, 힘이 되는 말 해주고, 위로가 된다"고 답했다.
대화 도중에도 두명의 추모객이 다가와 그에게게 인삼음료를 전달하며 위로의 말을 전했다. 하지만 허씨도 세월호 참사와 미수습자 가족 및 유가족들에 대한 도를 넘은 비난과 막말이 있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지금 뿐이었겠나. 예전부터 수많은 말들이 나왔다. 개인들마다 보는 눈이 다르니까 다 똑같을 수는 없겠지. 그런데 부모 입장에서 본다면 이해를 해줄 수 있지 않을까? 부모 마음이라면 그런 말 못할 거다"라고 안타까운 마음을 표했다.
2014년 말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내고 딸의 수습 문제에만 매달려 있다는 허씨는 "끝날 때까지 떠날 수 없다. 장소만 변경된 기다림의 연속이다. (세월호가) 올라오는 과정도 너무 오래 기다렸고 지금도 답답하다. 버티고 있을 뿐이다"라고 말을 맺었다.
세월호는 끝나지 않았다
‘제발, 조금만 더 빨리…’ 잊힌 세월호, 신고전화 18통 한겨레21 4.10
참사 당일 피해자의 122 신고 내용 전문 공개
3년. 아이가 자라 세상을 뛰놀 때다. 아이들은 심통을 부리다가도 어느새 천금을 주고도 못 바꿀 미소를 지으며 우리 품에 안긴다.
2014년 4월16일, ‘그날’까지 우리에게도 행복한 시절이 있었다. 그날 이후 아이들은 자라지 않았다. 몸집을 키운 것은 우리들의 슬픔뿐. 아이들을 잃은 우리도 자라지 못했다. 조은화·허다윤·남현철·박영인·고창석·양승진·권재근·권혁규·이영숙.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목이 메는 미수습자 9명이 모두 돌아올 때까지, 그리고 이 거대한 비극의 진실을 밝혀낼 때까지, 우리는 이 슬픔과 공존해야 할 것이다. 세월호로 인해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이 집단적 죄의식은 아마도 우리 세대 안에선 해결되지 않을지 모른다.
<한겨레21>은 세월호 참사 3주기를 맞아 참사 당일 해경과 소방방재청으로 걸려온 신고전화 18통의 내용을 전문 그대로 옮겨 싣는다. 우리가 아직 응답하지 못한 목소리들이다. 깊은 바다 속에서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세월호가 마른 땅을 디딜 목포신항도 찾았다. 그리고 대선 후보 5명에게 세월호를 물었다. 그들의 대답에서 희망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기다린다
정용일 기자
세월호 참사 3주기를 앞둔 지금까지도 잊어선 안 되는 목소리들이 있다. 2014년 4월16일 오전 8시52분부터 세월호에서 걸려온 18통의 신고전화다. <한겨레21>은 세월호 3주기를 맞아 2014년 4월16일 세월호 참사 당일 소방방재청(119)과 해양경찰청(122)으로 걸려온 신고전화 내용 전체를 소개한다. 3년 전 울린 신고전화들을 다시 살펴보는 것은 한국 사회가 아직 그 간절한 목소리에 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월호는 3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지만, 아직 미수습자 9명은 가족의 품에 안기지 못했다. 통화 내용은 각 기관이 국회 등에 제출한 녹취록을 참고해 정리했다. 녹취록이 정확하지 않은 경우 음성파일을 여러 차례 다시 듣고 바로잡았다. 녹취록이 없는 통화 내용은 새로 정리했다. 정확하게 들리지 않는 부분은 ‘확인 불가’로 표시했다. 참사의 진실을 밝히려는 시도를 번번이 방해해온 박근혜 정부는 국민의 심판을 받았다. 이제 그날의 그 간절한 목소리에 답해야 할 때다.
세월호 신고 첫마디 “살려주세요”
오전 8시46분, 맹골수도를 빠져나오던 세월호는 오른쪽으로 5도 방향 전환을 하려 했다. 하지만 배가 계속 오른쪽으로 돌았다. 세월호가 크게 기울기 시작한 것은 8시49분. 당시 조타수 조아무개씨는 사고 직후 배의 경사계가 30도를 가리켰다고 검찰에서 진술했다. 세월호가 30도 기울었다는 의미다. 가천대학교 초고층방재융합연구소가 2014년 9월 작성해 검찰에 제출한 ‘세월호 탈출 소요시간 연구’(탈출 시간 연구)는 배 기울기가 30도일 때 전원 탈출에 걸리는 시간을 5분5초로 추산했다. 사고 4분 뒤 첫 신고가 있었다. 경기도 안산 단원고 최덕하 학생이 119로 전화를 걸었다. 첫 신고는 174명의 승객과 선원을 구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하지만 최덕하 학생은 뭍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1. 08:52:32/ 단원고 학생/ 119
소방 119상황실입니다.
신고자 살려주세요.
소방 여보세요.
신고자 여보세요.
소방 예, 119상황실입니다.
신고자 여기 밴데 여기, 배가 침몰되는 것 같아요.
소방 배가 침몰해요?
신고자 예, 여기 제주도 가고 있었는데….
소방 예.
신고자 여기 배가 지금 (확인 불가)
소방 잠깐만요, 잠깐만요. 지금 타고 오신 배가 침몰한단 소리예요, 아니면 옆에 있는 다른 배가 침몰한단 소리예요?
신고자 타고 있는 배가요, 타고 있는 배가요.
소방 여보세요? 지금 타고 있는 배가 침몰한다 이 소리예요?
신고자 예.
소방 잠깐만요. 제가 해경으로 바로 연결을 해드릴게요. 거기 배 이름이 뭐예요, 혹시?
신고자 선생님 바꿔드릴까요?
소방 네, 선생님 바꿔줘보세요. 여보세요?
선생님(추정) 여기 배가 침몰했어요.
소방 배가 침몰했어요? 배 이름이 뭐예요? 혹시, 여보세요. 배 이름이 뭐예요? 제가 해경으로 바로 연결해드릴게요.
신고자 세월호요, 세월호.
소방 네?
신고자 세월호요, 세월호.
소방 잠시만 기다려보세요, 제가 해경으로 바로 연결할게요.
(연결음)
해경 감사합니다.
소방 예, 수고하십니다. 여기 119상황실인데요.
해경 예.
소방 배가 지금 침몰하고 있다고 저희한테 신고가 들어왔거든요.
해경 예? 배가 침몰요? 위치가 어디예요, 위치요?
소방 핸드폰 기지국 위치가 진도 조도.
해경 진도 조도로 나온다고요?
소방 서거차도리, 서거차도리로 뜨고 있거든요. 신고자 전화번호 드릴게요. 010-****-****, 지금 3자 연결되어 있거든요. 신고자분 해양경찰 나왔습니다. 바로 지금 통화 좀 하세요
해경 여보세요? 목포 해경입니다. 위치 말해주세요.
신고자 잘 안 들려요.
“위치를 잘 모르시겠다고요? 거기 GPS 경위도 안 나오나요, 경도와 위도.”
-해경
해경 위치. 경위도 말해주세요.
접수자 경위도는 아니고, 배 탑승하신 분이세요. 탑승하신 분.
신고자 핸드폰이오?
해경 여보세요, 여기 목포 해경상황실입니다. 지금 침몰 중이라는데 위치 말해주세요, 위치? 배가 어디 있습니까?
신고자 위치를 잘 모르겠어요, 지금 여기가.
해경 위치를 잘 모르시겠다고요? 거기 GPS 경위도 안 나오나요, 경도와 위도.
신고자 여기 섬이 몇 개 보이기는 하는데 그걸 잘 모르겠어요.
해경 섬이 보이는데 잘 모르겠다고요? 어디서 출항하셨어요?
신고자 어, 어제 어제.
해경 어제 출항했다고요?
신고자 어제 8신가 그때 출발한 것 같아요.
해경 어제 8시에 출항했다고요. 어디서 어디서?
신고자 인천항인가 거기서 출발했을걸요.
해경 인천항에서 출항했다고요?
신고자 예.
해경 배 이름이 뭡니까, 배 이름?
신고자 세월호요, 세월호.
해경 세월?
신고자 예.
해경 세월호? 세월호? 이게 상선인가요, 뭔가요?
신고자 예?
해경 이 배 종류가 뭐예요? 배 종류. 여객선인가, 아니면 어선인가요?
신고자 여객선일 거예요.
해경 여객선이오?
신고자 예.
해경 여객선이고, 세월호고, 지금 침몰 중에 있다고요?
신고자 예?
해경 침몰 중에 있다고요, 배가?
신고자 예, 그런 것 같아요. 한쪽으로 기울어져….
해경 한쪽으로 기울어져가지고 운항하고 있다고요? 옆에 혹시 누구 있습니까?
신고자 선생님 계시긴 하는데 선생님이 정신이 없으셔가지고 제가 대신 전화드렸어요.
해경 선생님이 정신이 없으시다고요? 지금 전화하시는 분 전화번호가 010-****-**** 맞죠?
신고자 예.
해경 예, 지금 보니까 8시에 인천항에서 출발.
소방 여보세요? 해경요. 여기 119상황실인데요.
해경 예.
소방 전화가 계속 들어오거든요? 다른 전화도. 아까 제가 서거차도라고 말씀드렸죠?
해경 예.
접수자 다른 분은 동거차도 쪽으로 해서 신고가 계속 들어옵니다.
해경 계속 들어와요?
소방 예.
해경 예, 알겠습니다. 저희가 하나 컨택했습니다.
수학여행 가고 있어요, 배가 더 기울어요
2014년 4월16일, 해양경찰청은 구조에 실패했다. ‘실패’라는 말로 온전히 설명할 수 없는 처참한 비극이 벌어졌다. 검찰은 해경을 상대로 한 수사에 나섰다. 하지만 청와대와 법무부는 해경 수사를 막으려 애썼다. 구조 실패의 불똥이 해경에만 머물기를 바랐다. 결국 처벌받은 건 당시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한 해경 123정 정장뿐이었다. 연합뉴스/ 목포해경
첫 신고전화 이후 3분23초 만에 두 번째 신고전화가 119로 걸려온다. 3분23초라는 짧은 시간 동안 배에서는 세 차례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현재 자리에서 움직이지 마시고” “손님이 계시는 위치에서” 등의 내용을 단원고 학생들이 찍은 동영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세월호가 가라앉을 때까지 이런 안내방송은 12차례나 집요하게 이어졌다.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을 거듭 들으며 두 번째 신고전화를 건 단원고 학생의 첫마디는 “살려주세요”였다.
2. 08:55:55/ 단원고 학생/ 119
소방 예, 119입니다. 119입니다.
신고자 지금, 아 여기 살려주세요. 배가 기울었어요.
소방 배가 어쩐다고요?
신고자 배가 기울었어요.
소방 배가 기울었어요?
신고자 예.
소방 지금 배 타고 있어요?
신고자 예, 제주도 가고 있어요?
소방 아, 제주도 가고 있어요?
신고자 네, 수학여행이에요.
소방 수학여행이에요?
신고자 배가 점점 더 기울어요.
소방 수학여행이에요?
신고자 네, 수학여행 가고 있어요.
소방 수학여행 가고 있는데 그 배가….
신고자 배가 기울었어요.
소방 배가 기울었어요?
신고자 세월호? 세월호.
소방 선생님, (지금 연락했어요?) 여기요 해경에, 해경에 연결했으니까 해경에서 도움을 줄 거예요.
신고자 예, 세월호요.
소방 사람이 혹시 빠져 있거나 그런 사람 있어요?
신고자 예. 한 명 아까 빠진 것 같아요, 사람이.
소방 한 명이 빠진 듯해요?
신고자 살려주세요. 점점 더 기울어요.
소방 예, 어쨌든 그 해경에, 저희가 도움을 줄 수 있는 건 없고 해경에서 갈 거예요.
신고자 예, 빨리 해주세요.
소방 예예.
신고자 살려주세요.
소방 예, 알았어요.
본선 위험, 본선 위험
8시55분10초, 세월호 1등 항해사는 제주 해상교통관제센터(VTS)와 교신을 한다. “저기 해경에다 연락 좀 해주십시오. 본선 위험합니다. 지금 배 넘어가 있습니다.” 승객보다 늦은 신고였다. 같은 시각 세월호 조타실 선원들은 배의 가장 밑바닥에 있던 기관실에서 탈출하기 시작했다.
3. 08:56:18/ 중·장년 남성/ 119
소방 예, 119입니다.
신고자 119죠? 예, 인천에서 제주도 가는 페리호인데요.
소방 인천에서 제주도 가는 페리호요?
신고자 예, 지금 배가 바다에 기울었어요.
소방 아, 그래요. 선생님, 저쪽 저희가 그 해경에 방금 전화를 받고 통보를 해드렸어요. 선생님, 상황이 배가 어디에 충돌을 했는가요, 아니면 갑자기 그런가요?
신고자 갑자기 기울어서 지금 난리 났어요.
소방 아, 그래요. 배 이름이 뭣이던가요?
신고자 이게 배 이름이 뭐지? (세월호요.) 세월호요, 세월배요.
소방 아, 인천에서 제주도 가는 페리호요?
신고자 예. 엊저녁 9시에 출발해가지고요. 지금 여기 흑산도 옆인데요, 아직도 지금….
소방 예, 그래요. 선생님 걱정 말고, 제가 해경에 바로 연결해드릴게요.
신고자 예, 빨리 좀 해주세요.
소방 예.
4. 08:56:41/ 중·장년 남성/ 119
소방 예, 119입니다.
신고자 여보세요?
소방 예예.
신고자 여기 저 흑산도랑 진도 사이에 제주도 가는 배요, 세월호. 저 배가 기울어졌어요.
소방 배가 지금 기울어졌다고요?
신고자 예, 배가 기울어졌어요, 지금.
소방 예, 지금 저희 신고는 받았는데. 지금 배 안에 몇 명이나 탑승돼 있는가요?
신고자 배 안에 지금 한 500명 돼요.
소방 아, 500명 정도 탑승하고 있어요?
신고자 아, 학생들 수학 학생들하고 일반하고 해서 한 500명가량 돼요.
소방 아, 학생들 수학여행 가는 학생들이 500명 정도 탑승하고 있어요?
신고자 예.
소방 지금 배가 어디 좌초된 거 같나요? 그냥….
신고자 배가 좌초된 것 같아요, 배가. 여기 빨리 좀 와주세요. 배가 기울어요, 지금.
소방 예, 지금 저희가 해경에 통보를 했어요. 지금 어디쯤인가요, 거기가?
신고자 지도상으로는 진도하고 흑산도 사이예요. 진도하고 흑산도 지나는데.
소방 진도하고 흑산도에 있어요?
신고자 예.
소방 지금 배가 어느 정도 기울었나요?
지금 빨리 좀 해경을…
2014년 4월17일, 당시 대통령이던 박근혜씨가 세월호 참사 현장에 나타났다. 박씨는 실종자들을 만나 “철저한 조사와 원인 규명으로 책임질 사람은 엄벌토록 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 약속은 물론 지켜지지 않았다. 청와대사진기자단
8시57분, 해경 목포상황실은 업무 메신저인 이메이트(E-mate)로 세월호 침몰 사실을 전파한다. “현재 여객선 침몰 중이라는 신고 관련입니다” “세월호 여객선 300여 명 승선. 인근 함정, 진도파출소 이동 지시” 등의 내용이 담겼다.
5. 09:00:33/ 중·장년 남성/ 119
소방 예, 119입니다.
신고자 119죠?
소방 예, 119입니다.
신고자 해경을 띄우든지 지금 헬기를 띄우든지 띄워줘요.
소방 예, 지금 통보해가지고 가고 있습니다.
신고자 아, 지금 빨리 배가 지금 점점 기울고 있어요.
소방 물에 빠진 사람 있는가요?
신고자 예?
소방 물에 혹시 빠진 사람….
신고자 사람 지금 물에 떨어진 거 볼 수가 없어요, 배가 기울어져서.
소방 배가 혹시 세월호예요?
“해경을 띄우든지 지금 헬기를 띄우든지 띄워줘요.”
-다섯 번째 신고자
신고자 세월호요, 세월호요.
소방 세월호요.
신고자 거기 레이더망에 안 떠요?
소방 예?
신고자 거기 레이더망에 안 떠요?
소방 아, 여기는 그거예요. 여기는 지금 전남 119상황실이고요. 지금 해경에 저희가 통보해서 해경 그쪽으로 통보, 구조를 하라고.
신고자 근데 해경은 어떻게 된 거요?
소방 해경 전화번호는 하나둘둘입니다.
신고자 지금 빨리 좀 해경을, 그 우리가 지금 119 신고하면 거기서 통보를 해야지, 연락을 해야 될 것 아니에요.
소방 바로 했어요.
신고자 빨리 좀 와서 상황을 봐보시라고요.
소방 지금 조치는 하고 있습니다.
신고자 빨리 좀 와주세요.
선내 방송은 “움직이지 말라, 그대로 있어라”
9시4분에야 해경 신고전화인 122가 울렸다. 첫 신고보다 12분 늦었다. 18통의 신고전화 중 122로 걸려온 전화는 5통에 불과했다.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머지 13통은 해양사고 대처 능력이 떨어지는 119가 받았다.
6. 09:04:40/ 세월호 선원/ 122
해경 예, 목포 해양경찰입니다. 말씀하십시오.
신고자 예, 여기 진도하고.
해경 예, 진도하고.
신고자 진도하고 그 추자도 사이에 지금 운항 그….
해경 세월호요?
신고자 세월호. 예, 세월혼데요.
해경 세월호 누구십니까? 세월호에?
신고자 세월호 그 안내소 직원입니다.
해경 세월호, 세월호 직원이에요? 예? 직원이에요, 직원?
신고자 예.
해경 그 혹시 그 사람 같은 거, 사람이 빠졌습니까? 지금 현재?
신고자 예. 지금 사람이 한, 배가 기울어서 사람이 한 명이 바다에 빠졌고요.
해경 사람이 한 명 빠졌어요? 지금 구명동의나 그런 거 빨리 다 여객선….
신고자 지금 저희가 배가 40도, 45도 지금 기울어서 도무지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 안 돼요.
해경 움직일 상황, 그러면 지금 빠진 사람은 어떻게 됐습니까? 지금 현재?
신고자 일단은 저희가 볼 순 없어요. 빠진 상황만 알아요, 지금.
해경 아, 빠진 상황만 안다고요?
신고자 예, 지금 어떻게 되셨는지?
해경 지금 경비정 이동하고 있거든요. 지금 전속으로.
신고자 예.
해경 그 상황을 지금 최대한 빠진 그 사람을 그래도 좀 구조해야 되지 않습니까? 지금?
신고자 예.
해경 그거 좀 조치 좀 취해주십시오. 그 어떻게 파악을 하셔가지고.
신고자 지금 저희가 움직일 수 있으면 상황 파악을 하겠는데 움직일 수가 지금 없어요. 지금 배가 45도 정도 기울어 있어서, 지금.
해경 그런데 왜 지금 배 속력은 없었습니까? 속력은?
신고자 지금 엔진은 다 쓴 같아요. 엔진 돌아가는 소리는 안 들리거든요.
해경 아, 그래요? 근데 속력이 지금 저희가 파악했을 때는 속력이 좀 많이 나오고 있거든요. 여보세요?
신고자 지금 가고 있진 않아요, 엔진이 꺼져서.
해경 예, 알겠습니다. 지금 저희 경비정 있는 대로 다 이동하고 있거든요. 좀만 참으시고 다들 구명동의 입으시라고 입으라고 다 전파를 해주십시오.
신고자 지금 입을 수 있는 상황이 안 돼요. 배가 기울어서 움직일 수가 없어요.
해경 움직일 수가 없어요? 예, 알겠습니다. 그러면 최대한 안전할 수 있게 그쪽 그 언제든지 하선할 수 있게 바깥으로 좀 이동할 수 있게 그런 위치를 잡고 계세요, 일단은. 여보세요?
신고자 지금 선내에서 움직이지 마시라고 계속 방송하고 있고요.
해경 예예, 그렇게 해주세요. 예예.
신고자 예예. 지금 밖으로 이동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 안 돼요. 배가 많이 기울어져 있어가지고.
해경 예예, 알겠습니다. 지금 경비정이 다 이동하고 있습니다. 좀만 참으세요. 이 번호로 전화하면 된다고요?
신고자 예, 이 번호나 아까 그 따로 신고하신 분 있잖아요.
해경 예.
신고자 그분 전화 같이 하셔도 되고요.
해경 이게 지금 전화하신 분이 세월호 선원이신가요? 선원?
신고자 예, 여객 여객영업 직원이에요.
해경 여객 직원이오. 예, 알겠습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신고자 강○○입니다.
해경 강○○이오? 강○○씨. 예, 잘 알겠습니다. 예.
신고자 예.
“애들아, 다 용서해줘. 사랑한다”
2016년 9월1일,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는 3차 청문회를 열었다. 청문회에선 세월호 참사 당시 119로 걸려온 두 번째 신고전화가 재생됐다. 한 참석자가 끝내 울음을 참지 못하고 청문회장을 나와 비상계단에서 흐느꼈다. 참사의 진상을 밝히는 과정에는 항상 눈물과 고통이 동반됐다. 세월호 참사 피해 가족들은 진상 규명이 필요하다며 단식을 하고 수백km를 걸었다. 그렇게 특조위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정부는 특조위의 조사를 줄곧 방해했다. 특조위는 2016년 9월30일 ‘강제종료’ 당했다. 김봉규 선임기자
9시5분, 단원고 연극부 카카오톡방에 “애들아 진짜 내가 잘못한 거 있으면 다 용서해줘. 사랑한다.”라는 글이 올라온다.
7. 09:05:07/ 단원고 학생 추정/ 119
소방 예, 119입니다.
신고자 여기 지금 저희 제주도 가는 배 세월혼데요. 바다 한가운데서 배가 기울었거든요. 좀 많이 기울었어요.
소방 예, 지금 알고 있습니다. 지금 그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좀 기다리십시오.
신고자 빨리 와주세요. 빨리요.
8. 09:06:30/ 단원고 학생 추정/ 119
소방 예, 119입니다.
신고자 네, 저희 지금 배가 점점 기울어요.
소방 배가. 예, 지금 가고 있습니다. 조금 기다리십시오.
“어느 정도 걸리실것 같아요? 저희 구명조끼 하나도 없어요.”
-여덟 번째 신고자
신고자 어느 정도 걸리실 것 같아요? 저희 구명조끼도 하나도 없어요.
소방 뭐가 없다고요?
신고자 구명조끼도 없고요.
소방 배 안에 구명조끼가 없어요?
신고자 있기는 있는데 지금 1층에 내려와 있어서. 잠시만요.
9시6분33초, 또다시 ‘가만있으라’는 안내방송이 울렸다. “선내 단원고 학생 및 여러분께 다시 한번 안내 말씀 드립니다. 현재 위치에서 절대 이동하지 마시고 대기해주시기 바랍니다. (중략) 구명동의가 착용 가능하신 승객 여러분께서는 구명동의를 착용해주시고, 승객 여러분들께서는 절대 이동하지 마시고 대기해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배가 기울어져 승객들이 구명조끼를 찾아 입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탈출용 고무보트인 구명벌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세월호에 있던 총 46개 구명벌 중 제대로 작동한 것은 1개뿐이었다. 구명벌을 펼치려면 안전핀을 뽑아야 하는데, 선원들이 부식을 막기 위해 그 위에 페인트칠을 했기 때문인 것으로 확인됐다.
9. 09:06:38/ 중·장년 남성/ 122
해경 예, 목포해양경찰서입니다.
신고자 제가 지금 인천에서 제주도 가는 배 세일호를 타고 있는데요.
해경 아, 세월호요. 신고받아서 지금 저희가 조치하고 있습니다.
신고자 아니 지금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데 빨리 좀 오셔야 될 거 같은데.
해경 지금 경비함정이랑 가고 있습니다. 지금 환자도 있는가요?
신고자 예예, 지금 선체가 기울어 물에 잠기기 일보 직전.
해경 예, 알겠습니다. 지금 저희 경비함정 가고 있습니다.
신고자 여기 사람이 한두 명 탄 거 아니거든요.
해경 예, 알고 있어요. 알고 있어요. 지금 저희가 조치하고 있습니다. 구명동의 입고 구명동의 입고 최대한 차분하게 선장의 지시를 따르고 계십시오.
신고자 구명동의 입을 지금 상황도 못 돼요.
해경 예, 알겠습니다.
신고자 예예예예.
빨리, 빨리 와주세요
지난 3월10일, 서울 재동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박근혜씨가 탄핵됐다. 사필귀정. 이제 미수습자를 수습하고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히는 일은 다음 정부의 몫이 됐다. 사진공동취재단
10. 09:07:02/ 중·장년 남성/ 119
소방 예, 119상황실입니다.
신고자 예, 여기 무슨 세월혼데, 제주도 가는 배가 침몰했어요.
소방 자, 지금 배가 기울었는가요, 안 그러면 지금 침몰을 하고 있는 건가요?
신고자 예, 지금 하고 있어요.
소방 아, 얼마나 침몰이 된 거 같아요? 배가 지금?
신고자 지금 기울었어요. 3시간, 제주도 가면 3시간 정도면 갈 수 있는데, 지금 신고가 왔는지 안 왔는지 모르겠네.
소방 아, 신고는 많이 들어왔는데요. 저희들이 해경에 연락해서 조치를 취하고 있는데요, 배가 얼마 정도 기울어진 것 같아요?
신고자 한 완전히 45도 정도 기울었어요.
소방 45도로 기울었어요? 자, 혹시 바다에 빠진 사람도 있는 것 같아요?
신고자 없어요, 바다에는. 지금, 물이 아직 안 들어온 것 같으니까.
소방 아, 배에는 아직 물은 들어오지 않고, 지금 옆에 방송하는 게 뭐예요?
신고자 지금 방송하고 있는 거예요, 거기서.
소방 아, 현장에 방송하고 있는 거예요?
신고자 배에서.
소방 배에서 방송하고 있는 거예요? 45도 정도 기울고 제주도 가려면 한 3시간 남았어요?
신고자 예.
소방 혹시 거기에 수행여행 학생 인솔 교사인가요?
신고자 예, 수행여행.
소방 학생들은 몇 명이나 돼요?
신고자 모르겠어요. 한 열 반이니까 무슨 고등학교 일반학교 열 반이니까 한 500명 정도 되겠죠.
소방 열 반 정도 돼요?
신고자 아, 지금 배터리가 없어가지고. 이제 아, 끊겨요.
소방 아, 아니요. 다른 분들 전화 와서 그 전화번호는 알고 있습니다. 일단 바다에 빠진 분은 없고 45도 정도 기울어 있다고요?
신고자 네네, 45도인가 몇 도인가 완전히 기울어져 있어요. 넘어지려고 해요.
소방 예, 알겠습니다.
9시10분, 해양경찰청이 세월호 사고 구조 활동을 위해 중앙구조본부를 꾸렸다. 본부장은 김석균 당시 해양경찰청장이 맡았고, 현장 지휘자는 김수현 서해지방해양경찰청장과 김문홍 목포해경서장으로 정해졌다. 하지만 이들은 구조 실패의 책임을 모두 피했다.
11. 09:10:37/ 단원고 학생/ 119
소방 여보세요, 119입니다.
신고자 저기요, 여기요 여기 세월인데요. 여기 제주도 가는 방향인데 저희가 지금 완전 기울, 배가 기울었거든요.
소방 예, 지금 알고 있습니다. 지금 혹시 학교 수학여행 지금 학생이에요?
신고자 예, 학생도 있고요, 여기 다른 분들도 계셔요.
소방 그 혹시 그 어디 학교인지는 혹시 아시는가요?
신고자 안산 단원고등학교요.
소방 안산 무슨 고등학교요?
신고자 거의 1천 명 가까이 되는데 배가 거의 기울고 있어요, 지금.
소방 예, 알고 있습니다. 안산 무슨 고등학교라고 하셨어요?
신고자 단원, 단원고등학교요.
소방 잠원고등학교요?
신고자 예.
소방 안산에 있는 잠원고등학교 학생들인가요? 전부 다?
신고자 네, 거기다가 다른 분들도 계셔요.
소방 1천 명 정도 타셨다고요?
신고자 네, 1천 명 정도 탔어요.
소방 저기 해군이랑 해경이 지금 그쪽으로 구조 요청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좀 기다려….
신고자 빨리 와주, 빨리 와주세….
소방 혹시 다치신 분 있는가요? 지금 현재?
신고자 지금 그냥 조금 멍드신 분 계시고, 다른 건 없는, 머리에 피나는 사람도 계세요. 빨리 와주세요.
소방 예, 알겠습니다.
신고자 많이 다쳤어요.
소방 네.
신고자 예.
9시12분, 진도 VTS는 세월호에 승선원들이 탈출 가능하냐고 묻는다. 세월호 선원은 “지금 배가 많이 기울어가지고 사람이 움직일 수가 없어가지고 탈출 시도가 어렵다”고 답한다. 하지만 당시 왼쪽 갑판에는 아직 물이 들어오지 않아 탈출이 가능했다. 세월호 선원은 법정에서 ‘빨리 구조 세력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이야기했다’는 취지의 주장을 했다.
12. 09:12:41/ 단원고 학생/ 122
해경 해양경찰입니다, 여보세요.
신고자 세월혼데요, 제주도 가는 배인데 배가 기울어서 그러는데.
“기다려주세요. 해경이, 헬기가 가고 있어요”
13. 09:14:21/ 단원고 학생/ 122
해경 예, 해양경찰입니다. 말씀하세요. 여보세요.
신고자 여기 세월혼데요.
해경 예. (잠시만요, 좀 끊을게요.) 예예, 말씀하세요.
신고자 저희 지금 배가 기울어져가지고 갇혔거든요.
해경 예? 어디에 갇혔다고요?
신고자 저, 지금 세월호요. 세월호. 인천항, 제주도 가는 건데요.
해경 예, 지금 저희 경비정이 다 가고 있습니다. 현재 세월호 쪽으로.
신고자 예, 감사합니다. 빨리 와주세요.
해경 예, 알겠습니다. 지금 전화 주신 분 승객이신가요? 승객?
신고자 네?
해경 승객이세요? 승객?
신고자 네, 저희 지금 고등학생이에요.
해경 아, 고등학생이오? 예, 알겠습니다. 예, 지금 빨리 가고 있습니다. 예예.
신고자 네.
14. 09:14:51/ 단원고 학생 추정/ 119
소방 예, 119입니다.
신고자 네, 지금 어느 정도 왔는지가 너무 알고 싶어서요. 지금 저희 많이 급한 것 같아요.
소방 지금 어느 정도 왔는지 알고 싶다고요?
신고자 네. 지금 어느, 구급차가 어느 정도 왔나요?
소방 지금 그 지금 저희가 그 지금 구급차가 그쪽으로 못 가죠. 지금 배 안이잖아요?
-열네 번째 신고자
신고자 네.
소방 네, 저희가 그쪽으로 구급차가 갈 수가 없어요. 저희 해경에서 지금 가고 있거든요.
신고자 네네.
소방 해경이 가고 있으니까, 그리고 헬기도 가고 있으니까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신고자 네, 빨리 와주세요.
소방 예예예. 네, 여보세요?
50도 기울어진 세월호, 해경은 “아직 8마일”
둘라에이스호 제공
세월호에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유조선 둘라에이스호였다. 9시15분, 둘라에이스호는 사고 이후 처음 세월호를 영상에 담았다. 배는 기울고 있었고 화물이 바다 위에 떨어진 모습이 보인다.
15. 09:17:18/ 중·장년 남성/ 119
소방 예, 119입니다.
신고자 (확인 불가)
소방 여보세요, 예?
신고자 여기 좀 와서 좀 구해주셔.
소방 네, 저희 지금 가고 있습니다. 소방헬기하고 배하고 다 가고 있어요.
9시19분. 청와대 국가안보실이 세월호 사고 소식을 처음 확인했다. 2014년 6월 세월호 국정조사에 나온 김규현 청와대 국가안보실 제1차장은 “YTN 뉴스 자막 방송을 통해 상황을 최초 인지”했다고 밝혔다. 당시 YTN에는 “진도 부근 해상 500명 탄 여객선 조난 신고”라는 자막이 나왔다.
16. 09:21:55/ 단원고 학생 추정/ 119
소방 예, 119입니다.
신고자 여기, 여기 세월혼데요. 어느 정도 왔어요?
소방 잠깐만요. 저기 해경, 해경에다 한번 저희가 위치를 한번 물어보고 그쪽으로 연락을 드릴게요.
신고자 위치는 확인되었다는데….
소방 네, 위치는 확인됐는데 지금 배가…
신고자 도착했대요, 도착했대요. 감사합니다.
소방 아, 해경 도착했다? (해경 도착했어.)
신고자 도착했다고 방금 소리 들렸어요
소방 아, 배 도착했다고요? 알았습니다.
신고자 아, 그래도 확인 한번 해주세요.
소방 네네. (해경 배 도착했…)
17. 09:22:53/ 세월호 선원/ 122
해경 예, 해양경찰입니다. 말씀하세요.
신고자 여보세요. 여기 지금 좀.
해경 세월호죠?
신고자 예.
해경 예, 말씀하세요. 예, 지금 저희 경비정이 거의 지금 한 7~8마일 남았거든요.
신고자 지금 좀.
해경 전속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지금 현재.
신고자 배 지금 바로 넘어갑니다. 지금 좀 저.
해경 예예예, 알겠습니다. 지금 전화, 여보세요 상황을 좀 얘기를, 말씀을 해주세요. 지금 현재 상황.
신고자 배가 지금 50도 이상 저저….
해경 50도 이상 기울었다고요. 예예예, 여보세요? 예, 알겠습니다. 지금 상황 계속 신고를 받고 있거든요. 지금 이동 중이니까요,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지금 뭐 좀 안정, 최대한 앉을 수 있게 어딜 좀 잡고 계세요. 여보세요?
신고자 예예.
해경 예예, 여보세요? 예.
“해경이 갈 겁니다” 거듭했지만
18. 09:23:56/ 단원고 학생 추정/ 119
소방 예, 119입니다.
신고자 여기 세월혼데요, 어느 정도 오셨어요?
소방 지금 그쪽에 도착한 걸로 지금 보고를 받았는데요.
신고자 아, 제가 아까 잘못 말했는데 도착을, 아직 안 왔대요.
소방 아, 아직 도착한 게 아니에요? (지금, 지금 해경이 도착한 게 아니랍니다. 잘못 알고 얘기한 거랍니다.) 예, 알겠습니다. 지금 여기가, 저희가, 저희가 출동하는 건 아니에요. 지금 해경에서 지금 가고 있거든요.
신고자 해경이 지금 오고 계신대요?
소방 예, 지금 가고 있으니까.
신고자 해경 번호는 못 알죠?
소방 예, 이제 그 저희가 다 신고를 했어요. 한 지가 오래됐어요. 따로 신고해도 어차피 가고 있으니까.
신고자 한 지 얼마, 출발한 지 얼마 만에 와요 여기로.
소방 아까 배가 기울었다고 했을 때 바로 신고했거든요.
신고자 아, 저희 제주도랑 거의 3시간 거리인데, 언제쯤에 도착.
소방 뭐 그건, 아니 그러니까 그건 저희가, 저희가 해경이 아니라 알 수 없고. 어쨌든 지금 혹시 급한 환자 같은 사람 있어요?
신고자 지금 많이 좀 다친 것 같아요, 사람들이.
소방 어디가 다친 거 같은가요?
신고자 머리도 막, 머리에서 피도 나시고.
소방 머리에 피나는 환자도 있고. 배가 기울면서 뭐가 떨어졌어요?
신고자 배가 기울면서 다 떨어졌고요, 이미.
소방 물건들이 다 떨어졌다고, 위에서.
신고자 예. 지금 소파로 그 밖에 보는 그 거기를 문을 좀 살짝 막아놓긴 했는데, 이 여기 문을 소파로요.
소방 예예, 머리에서 피나는 환자하고 또 누구 어디 다친 환자 있습니까?
신고자 눈, 눈을 다친, 눈을 박아서 눈이 지금 잘 안 떠지는 애도 있고요.
소방 눈, 눈을 다친 사람도 있고 또? 대충 몇 명 정도 돼요, 환자가?
신고자 그건 잘 모르겠어요. 저희가 지금 1층인가 2층에 있어가지고 3층에 있는 사람들도 모르겠고 그래가지고.
소방 아, 1층, 2층, 3층이 있군요.
신고자 네, 다 층이 있어요.
소방 아 1층, 2층, 3층이 있는데 지금, 지금 저기 신고자가 지금 계신 층은 몇 층이에요?
신고자 (여기가 몇 층이야? 여기 몇 층이지? 여기 몇 층이에요?) 여기 3층이에요.
소방 3층이오. 네, 알겠습니다. 그 저희가 계속 지금 그쪽에서 신고가 들어오니까 접수하고 있으니까요,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신고자 네.
소방 해경이 곧 갈 겁니다.
신고자 네.
단원고 학생의 카톡을 끝으로
배 밖으로 나온 마지막 메시지는 “지금 더 기울어”였다. 오전 10시17분, 단원고 학생이 카카오톡을 이용해 보낸 것으로 확인됐다. 13분 뒤인 10시30분 세월호는 침몰했다. 그리고 1073일이 지난 2017년 3월23일에야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선체는 사고 해역에서 목포신항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여전히 뭍으로 올라오지 못하고 있다. 인양한 지 보름 가까이 지났지만 미수습자 수습은 시작도 하지 못했다. 세월호의 진실을 품고 있는“” 선체는 여러 곳이 훼손됐다.
‘세월호 추모공원’ 3주기 되도록 부지도 못 정해 주간경향 12221호 4.18
인천시 부평구 인천가족공원 안에는 조그마한 세월호 일반인 희생자 추모관이 있다. 전태호 세월호 일반인 희생자 가족대책위 위원장은 “참사 직후 가족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조감도부터 추모관 안팎의 전시물까지 꼼꼼히 토론해가며 만들었다”면서 “설날 이후 날씨가 풀리면서 주말마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준다. 2∼3월 각각 1000명 이상의 추모객들이 찾아주셨다”고 설명했다.
추모관이 위치한 인천가족공원은 인천시가 조성한 묘역이다. 공동묘역이기 때문인지 인천시 부평구에서도 구석진 산 속에 자리잡고 있다. 추모관에 가려면 공원 입구에서 왼쪽 길을 따라 15분가량 걸어야 한다. 공원 입구의 표지판 하나 외에는 이곳에 세월호 참사 추모관이 있다는 별다른 설명도 찾기 어려웠다. 추모관 때문에 공원을 온 사람이 아니라면 추모관의 존재 자체를 파악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인천가족공원 추모관 한때 전기도 끊겨
추모관 한편에는 세월호 일반인 희생자들의 위패가 담긴 방이 있다. 반대편 방에는 세월호 당일과 이후 진행상황을 재현한 조형물과 전시품들이 있었다. 참사 당일의 CCTV 화면과 희생자들의 유품도 볼 수 있다. 이렇게 작은 추모관 하나 세우는 데 2년이 걸렸다. 인천 세월호 추모관은 참사 2주기인 지난해 4월 문을 열었다. 그러나 정부에서 운영비를 지급하지 않아 9월까지 다섯 달간 휴업 상태였다. 올해 1월에는 정부의 예산 지급이 늦어져 추모관의 전기가 끊기는 일까지 벌어졌다. 보다 못한 유가족들이 추모관 정문에 ‘정부의 무능함으로 추모관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란 글귀를 붙이고 여러 언론에서 이 사실을 다룬 이후에야 해양수산부 예산으로 운영비 1억9000만원이 지급됐다.
인천 세월호 추모관에 설치된 세월호 모형. / 백철 기자
정부 운영비 지급 안 해 5달간 휴업
세월호 일반인 유가족 전체가 추모관의 현재 위치에 만족해하는 것도 아니었다. 세월호 일반인 유가족 ㄱ씨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곳은 진도 팽목항과 세월호가 출발한 인천 연안부두 아닌가. 저도 연안부두에 추모관을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추모관 건립 이야기가 나올 때부터 (반대하는) 말이 많았다”며 “추모관 건립 이후 유가족들도 일상으로 돌아가고 저희를 위로해주신 국민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차원에서 가족들이 인천가족공원에 동의한 것”이라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3년이 지났다. 참사 직후 정부는 피해자, 가족들과 국민들에게 안전사회 건설을 위한 여러 가지 조치들을 약속했다. 참사 이후 세월호 참사를 제대로 기억하자는 여론에 따라 제정된 여러 가지 법 중에 4·16세월호참사 피해구제 및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이 있다. 이 법에 따라 정부는 피해자 지원과 추모사업 추진을 약속했다. 특별법에 의거해 설립된 국무총리실 산하 세월호 추모위원회 회의 결과에 따라 인천 세월호 추모관 건립도 확정된 것이었다.
반면,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경기도 안산시에서는 오랜 기간 동안 세월호 추모공원(4·16 안전공원)이 부지 선정조차 못하고 있다. 애초 세월호 추모위원회는 지난해 6월 5차 회의를 통해 추모사업 기본계획에 대한 연구용역을 늦어도 올해 3월에 마무리하고, 이 연구용역 결과를 토대로 시설물 설계를 추진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전체적인 일정 자체가 늦어졌다. 세월호 추모사업지원단 관계자는 “안산 추모공원의 경우 유가족들은 합동분향소가 있던 화랑공원을 원한다. 하지만 화랑공원 주변에 사는 주민들은 또 반대를 하고 있어서 정부가 일방적으로 정할 순 없다. 안산시장을 비롯해 지역사회에서 우선적으로 부지를 결정할 문제”라고 말했다.
세월호 유가족 ㄴ씨는 “3월까지 연구용역이 마무리된다는데 3개월 정도 연장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추모공원이 생기면 특별법에 따라 4·16재단이 운영해야 하는데 부지 선정에만 이렇게 시간이 걸려서야 언제쯤 재단이 생길지 알 수가 없다”고 말했다.
특별법은 40조에 따라 세월호 관련 추모시설의 운영·관리를 정부가 출연하는 4·16재단이 맡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정부는 4·16재단이 민간재단인 만큼 재단의 구성에 정부가 개입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고 있다.
세월호 추모사업지원단 관계자는 “재단에 국비가 지원되지만 운영은 민간에서 해야 한다. 재단 설립부터 정부가 아니라 세월호 유가족 단체가 주도가 되어서 이러한 사업들을 하겠다고 설립 신청을 하면 주무부처에서 이것을 승인하는 것”이라며 “아직 미수습자들이 있다 보니 유가족들도 재단에 관해 논의하기가 좀 그런 게 아닌가”라고 말했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추모공원 부지 선정이나 4·16재단 설립에 대해 보다 발빠른 대처를 주문했다. 특별법도 재단을 세우는 것은 정부의 몫으로 보고 있다. 특별법 37조 2항 3호는 4·16재단 선정에 관한 사항을 심의, 의결할 기관을 세월호 추모위원회로 적시하고 있다.
4월 6일 전남 목포 신항 울타리 앞에서 세월호 미수습자 가족들이 미수습자 9명의 귀환을 염원하는 조형물 앞에 서 있다. / 연합뉴스
세월호 유가족 ㄷ씨는 “정부 예산으로 만드는 재단인 만큼 정부에서 어느 정도 틀을 마련해줘야 하는데, 유가족들이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만들고 자신들은 아무것도 안하겠다는 게 언제나 정부의 태도였다”며 “추모공원 부지 선정에 있어서도 정부는 지역사회의 의견수렴을 이유로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결국 유가족들이 갈등의 현장에 직접 내몰리고 있고 3주기가 다 되도록 부지 선정조차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전태호 세월호 일반인 유가족 대책위원장은 정부뿐만 아니라 정치권과 언론에 대한 아쉬움도 토로했다. 전 위원장은 “인천에도 야당 의원들이 있는데 세월호 인양과 이후 과정 속에서 일반인 유가족들의 의사를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언론도 평소에는 우리들에게 큰 관심도 안 주다가 3주기처럼 무슨 일이 생겨야만 이렇게 찾아온다”며 지속적인 관심을 촉구했다.
세월호 피해지원 특별법은 추모사업뿐만 아니라 세월호 참사 피해자들에 대한 배·보상의 법적 근거이기도 하다. 3년이 다 되도록 피해자들에 대한 배·보상도 제대로 마무리되지 않았다. 2015년 1월 특별법이 제정된 이후 세월호 참사 피해자들에 대한 배·보상이 본격적으로 논의됐다. 특별법 시행 직후인 2015년 4월 1일 세월호 참사 배·보상위원회는 1차 회의를 열었다. 위원회는 이후 6개월간 피해자들로부터 배·보상 신청을 접수받았다.
세월호 배·보상위원회에 따르면 신청 종료일까지 희생자 신청대상 304명 중 208명, 생존자 신청대상 157명 중 140명이 배상을 신청했다. 이들은 이후 절차를 거쳐 법적으로 정해진 일실수익, 장례비, 위자료를 받았다. 세월호 피해자 가족들은 과거 성수대교 붕괴, 대구 지하철 화재, 천안함 침몰 등 대형 사고에 준하는 배상금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월호 미수습자 가족들 중에는 배상금을 신청했으면서도 정부의 태도를 불신해 아직까지 배상금을 수령하지 않는 이들도 있다. 2015년 10월 1일 세월호 배·보상 지원단은 미수습자 9명의 가족들이 모두 정부의 신속한 세월호 인양작업에 협조하는 차원에서 배상 신청서를 작성했다고 발표했다. 이후 정부는 미수습자 가족들에게 배상 결정서를 보냈다.
세월호 참사 피해지원 특별법에 따르면, 배상금 등을 받기 위해서는 신청인이 결정서를 받은 지 1년 이내에 배·보상 심의위원회에 직접 배상금 지급을 신청해야 한다. 미수습자 가족들 중 최종적으로 배상금 신청을 한 6명의 지급 기한은 올해 6월에서 9월 사이에 걸쳐져 있다.
2015년 4월 2일, 세월호 유가족들이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정부의 배·보상 절차 전면 중단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강윤중 기자
“유가족이 재단 만들어라” 정부 방관
미수습자 가족들이 배상금을 받지 않은 이유는 이렇다. 세월호 인양 전에 배상금을 받으면 이미 돈을 받았다는 이유로 세월호 인양을 제대로 하지 않고, 인양 후에 배상금을 받으면 미수습자 수색을 하지 않을까봐 걱정이 되기에 보상 신청을 진행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행히 미수습자 가족들이 좀 더 편하게 배상금 문제를 생각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3월 20일 김현권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발의한 세월호 참사 피해지원 특별법 개정안이 3월 22일 국회를 통과했다. 이에 따라 미수습자 가족들의 보상금 신청 기한은 결정서를 받은 이후 1년이 아니라 3년으로 늘어났다.
세월호 유가족 347명과 생존자 가족 77명은 세월호 배·보상 접수가 끝나기 직전인 2015년 9월 정부와 청해진해운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에 참여한 유가족 ㄷ씨는 “소송에 참여한 유가족들 가정은 대부분 나중에 자녀 교육비로 쓰려고 모아둔 적금을 해지해서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다. 그래도 살림이 힘들어서 부모 중 한 명은 일하고 한 명은 진상규명 활동을 하고 있어서 거의 가족생활이라는 게 없을 정도”라고 말했다.
ㄷ씨는 424명의 세월호 가족들이 배상을 신청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했다. ㄷ씨는 “소송에 참여한 가족들은 세월호 참사에 대한 정부와 기업의 책임을 판결문에 적어서 후세에 남겨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했다”며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등의 활동도 중요하지만 재판 과정에서 세월호 침몰 원인이 규명되고 정부와 청해진해운이 승객들을 제대로 구조하지 못한 이유가 규명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재판이 너무 느리게 진행돼 답답하다”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 가족들의 손해배상소송 재판은 소송을 제기한 지 1년여가 지난 지난해 11월 22일에야 시작해 지난 3월 21일까지 3차 변론을 마쳤다.
ㄷ씨는 “우리 유가족들은 세월호 침몰과 구조 과정에 대한 진상규명을 위해 활동한 것이지 돈을 보고 온 게 아니다. 소송으로 청구한 배상금도 법적으로 받을 수 있는 액수보다 훨씬 적은 1억원”이라며 “우리 유가족들은 보상 문제는 진상규명이 다 끝난 뒤에 해도 된다고 누차 강조해 왔다. 특별법에 의해 배상을 신청하면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소송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어 신청하지 않은 것뿐”이라고 말했다.
“세월호 조사, 정부 방해로 무기력” 주간경향 1221호 4.11
지난해 6월 말, 정부는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기간이 끝났다며 특조위의 활동을 강제 종료시켰다. 예산을 정식으로 배정받은 것으로 치면 채 1년도 안 되는 기간이었다. 지난해 6월은 특조위가 229건의 진상규명 조사 사건을 확정하고, 본격적인 조사에 들어가던 시점이었다. 정부는 특조위에 조사활동을 중지하고 종합보고서 및 백서만 작성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특조위는 정부의 지원도 받지 못한 상황에서 3차 청문회를 개최했고, 종합보고서가 아닌 중간점검 보고서를 남겼다.
3월 31일 세월호가 침몰 1080일 만에 전남 목포시 목포신항만으로 들어오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유가족 추천 받아 다시 조사위원 위촉
지난해 11월 서울시 중구 저동 특조위 사무실에서 권영빈 변호사를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세월호 특조위 상임위원이자 진상규명분과장을 지낸 권 변호사는 책상 외엔 아무 것도 없는 차가운 회의실에서 전화를 받으며 열심히 메모를 하고 있었다. 세월호 선체 인양이 무기한 연기된 이유를 묻는 여러 기자들의 전화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기자와 인터뷰가 끝난 다음 권 변호사는 특조위 사무실 이곳저곳 쌓인 짐들을 보며 “저 안에 여러 가지 자료들이 있을텐데 제대로 정리도 하지 못하고 가게 됐다”며 아쉬워했다. 권 변호사는 특조위가 사실상 해체된 지난해 10월부터 원래 소속된 법무법인으로 돌아갔어도 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는 특조위원들이 주장하는 특조위 종료기간까지는 특조위 깃발을 지키는 것이 옳다며 장비도 인력도 없는 사무실로 곧잘 출근했다. 이제 그는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 위원으로 세월호 유가족들의 추천을 받았다. 다시 한 번 세월호 진상규명의 선봉에 서게 된 것이다.
기자와 만났을 당시 권 변호사는 특조위가 공식 보고서와 백서를 남기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167페이지에 달하는 특조위의 중간보고서만 봐도 그동안 특조위가 어떻게 활동해 왔는지 대략적으로 알 수는 있다. 하지만 이 보고서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 빠졌다. 229건의 진상규명 과제의 결론이다.
권 변호사는 자기 손으로 세월호 특조위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로 했다. 2015년 여름부터 권 변호사는 특조위 정례브리핑을 담당했다. 기자들, 유가족들과 질의응답을 나누는 과정에서 진상규명분과뿐만 아니라 특조위 전체의 활동 내용에 대해 알게 됐다. 특조위가 강제 해산된 이후에는 그동안 특조위가 발표해온 각종 자료들을 차례차례 읽어가며 2년 가까이 유지되어온 세월호 특조위를 기록했다. 그 결과가 <머나먼 세월호>라는 책자로 묶여 나왔다.
<머나먼 세월호> 속의 특조위는 조사활동보다도 정부의 방해에 더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2014년 세월호 참사가 터진 후 국회는 세월호 특별법을 제정했다. 특별법 제정 과정도 쉽지 않았다. 당시 여당인 새누리당이 특조위에 지나치게 많은 권한을 주면 안 된다고 버틴 끝에 세월호 특조위는 있으나 마나한 조사권, 자료요청권만 갖게 됐다. 권 변호사는 특조위가 출범하기 전부터 박근혜 정부가 특조위를 백안시했다고 봤다.
“2016년 말 청와대 전 민정수석 김영한의 업무수첩이 공개되었다. 이 비망록에 따르면, 청와대는 ‘세월호 특별법’이 국난을 초래하는 근원이고, 특조위는 좌익들의 집합소라고 생각했다. 청와대의 이런 인식은 여당이던 당시 새누리당과 해양수산부 등 정부기관 내에서 상당 부분 공유된 것이 분명하다.”
세월호 특별법은 2015년 1월 1일 시행됐다. 하지만 임명장은 3월이 되어서야 받았고, 특조위가 제시한 예산안은 절반 이상이 깎여나갔다. 법이 시행되고 7개월이 지난 2015년 8월 4일에서야 특조위는 예산을 받게 됐다. 특히 정부는 진상규명을 집요하게 방해했다. 진상규명 실무를 총괄해야 할 진상규명국장은 2015년 8월에 인사가 완료됐다. 하지만 정부는 특조위가 해체될 때까지 임명장을 주지 않았다. 권 변호사는 국가기구인 특조위가 정부의 방해와 비협조 속에 얼마나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는지 에피소드를 제시했다. 2015년 11월 19일의 일이었다.
청와대선 좌익들의 집합소로 생각
“세월호 특조위 진상규명소위원장과 조사관들은 당일 새벽 3시40분쯤 진도 팽목항을 출항했다.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위해 현재의 수중 세월호 선체 상태를 확인하고 촬영하기 위한 일정이었다. 임차한 낚싯배 2대에는 미수습자 가족, 세월호 유가족, 기자들과 함께 수중촬영을 위한 잠수사 일행도 승선했다. 새벽 5시쯤 동거차도에서 약 1.5㎞ 떨어져 있는 세월호 인양작업 현장에 도착했으나 파도가 높아서 잠수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다음 물때에 다시 오기로 하고 잠시 서거차도에 피항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는 이미 정부가 세월호 인양업체로 선정한 상하이 샐비지의 인양작업이 한창이던 때다. 해양수산부가 진작에 세월호 선체 촬영에 협조했다면 특조위 조사관들과 유가족들이 파도가 치는 가운데 위험하게 낚싯배를 띄울 일도 없었을 것이다. 또한 특조위 조사관들은 기상상태가 좋지 못한 상황에서 상하이 샐비지의 바지선 등 훨씬 우월한 장비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했다. 그들은 인근의 섬으로 배를 숨길 수밖에 없었다.
같은 날 여당 추천 특조위원 5명은 특조위가 박근혜 당시 대통령의 ‘세월호 7시간’ 조사에 매달린다며 전원 총사퇴도 불사하겠다는 취지의 기자회견을 했다. 그런데 그날 공교롭게도 해양수산부가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세월호 특조위 관련 현안 대응방안’ 문건이 보도됐다. 이 문건에는 ‘여당 추천위원 전원 사퇴의사 표명’, ‘특조위 운영을 비판하는 성명 발표’ 등 정부가 특조위 활동에 개입하려는 정황이 담겨 있었다. 여당 추천 특조위원들의 사퇴 기자회견도 이 문건의 계획에 따른 것 아니냐는 논란이 생겼다. 전명선 4·16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은 추천사에서 “이 책은 국민들이 만들어낸 특별법이 어떻게 국정농단의 주범인 정부·여당에 의해 왜곡되고 농락당하며 위헌·위법적으로 사라지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고 썼다.
<머나먼 세월호>의 마지막 장에서 권 변호사는 2기 세월호 특조위의 출범을 주장했다.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 법이 시행된 3월 21일, 권 변호사와 짧게 통화했다. 그는 “선체조사위가 빨리 구성이 돼서 1기, 2기 특조위 사이 징검다리 역할을 잘해야 한다. 2기 특조위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세월호 참사 이후 검찰, 감사원, 국회 등에서 진상을 밝히려 여러 차례 노력을 했지만 합리적 결론을 도출하지 못했다. 세월호 참사 관련 조사대상자들이 정부 소속이라는 점에서 강력한 조사권한을 가진 독립기구가 나와서 제대로 된 기록을 남겨야 한다”고 말했다.
인양 과정에서도 배제된 유가족 주간경향 1220호 4.4
ㆍ수면 위로 모습 드러내기까지 1073일간 무슨 일이 있었나
세월호 선체가 시범 인양되기 시작하자마자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참사 3년 만, 일수로는 1073일 만이다. 인양작업이 예상보다 빠르게 진척을 보이면서 ‘왜 이렇게 인양이 늦어졌느냐’는 반응이 생겨났다. 우선 인양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2015년 8월부터다. 그 전까지는 정부의 늑장과 실종자 수습 등의 이유로 인양이 진행되지 못했다. 2014년 가을에 접어들면서 실종자 가족들도 선체 인양에 동의하기 시작했다. 그해 10월 27일, 실종자 아홉 가족은 선체 인양 동의 여부를 논의했고, 네 가족이 인양에 동의했다. 다음날 선체 수색에서 기적적으로 단원고 실종자 여학생의 시체가 수습됐다. 같은 해 11월 10일, 실종자 가족들이 선체 수색을 더 이상 요구하지 않겠다고 발표하자 정부도 수색 종료를 공식화했다.
지난해 4월, 전라남도 진도군 해역에서 상하이 샐비지 소속 선박들이 세월호 인양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 김정근 기자
동거차도에 감시초소 설치도
세월호 참사 피해자 가족모임인 4·16 가족협의회는 세월호 인양과정을 크게 3단계로 보고 있다. 1단계는 세월호 참사부터 김진태 자유한국당(당시 새누리당) 의원이 비용문제 등을 들어 세월호 인양을 반대한 2015년 4월 5일까지다. 가족협의회는 1단계 기간 동안 정부의 인양 노력이 미온적이었다고 보고 있다. 2014년 11월 24일 해수부는 선체 인양 등을 논의하기 위한 선체 처리기술 태스크포스(TF)를 가동했다. 세월호 가족들은 조속한 선체 인양을 요구했지만 선체 처리 TF의 논의 진행상황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채 몇 달이 흘렀다. 김 의원의 세월호 인양 반대 입장 발표로 여론이 악화되자 그 다음날인 2015년 4월 6일,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세월호 인양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대통령의 말이 나오자 해수부도 발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체 처리 TF의 기술검토 결과가 발표됐고, 2015년 4월 22일 해수부는 세월호 인양 계획을 발표했다.
가족협의회는 상하이 샐비지가 인양업체로 선정된 2015년 8월 4일까지를 2단계로 보고 있다. 가족협의회는 이 기간 동안 세월호 특별조사위와 유가족들의 인양과정 참여가 배제됐다고 봤다. 세월호 특조위는 인양업체가 확정된 2015년 8월에서야 정부로부터 예산을 배정받아 본격적 활동을 시작했다. 인양업체 선정과정도 논란이었다. 해수부 기술평가에서 최고점을 받은 스마트 컨소시엄은 상하이 샐비지보다 600억원 비싼 가격을 제시했고, 결국 입찰에서 탈락했다. 최근 상하이샐비지가 세월호 인양에 2000억원 이상 쓴 사실이 드러나면서 정부가 예산 절감을 이유로 기술력이 부족한 업체를 선정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다시 나오고 있다. 본격적인 인양이 시작되고부터가 가족협의회가 본 인양 3단계다. 가족협의회는 3단계 과정 동안 세월호에 대한 훼손이 이뤄졌고, 인양작업도 비밀리에 진행됐다고 지적한다. 2015년 8월 29일, 가족협의회는 세월호 인근 동거차도에 감시초소를 설치했다. 세월호 특조위는 세월호 수중촬영 협조 등을 해수부에 요청했지만 모두 거절됐다. 인양 준비작업은 예상보다 늦어져 지난해 4월 14일이 돼서야 7월까지 인양한다는 계획이 나왔다. 인양 시기마저도 당초 지난해 7월에서 9월, 10월로 계속 연기된 끝에 기상조건 등의 이유로 아예 무산됐다. 그런데 박 전 대통령이 파면된 지 5시간 만에 해수부는 세월호 인양 재개를 기자들에게 알렸다.
인양업체가 선정된 이후에야 특조위 예산이 편성되고, 대통령 말 한마디에 갑자기 인양이 결정됐다. 또한 대통령이 사라지자 멈췄던 인양작업이 재개됐다. 한 세월호 유가족은 “지난 3년간 세월호와 관련해 우연이 너무 많았다. 진짜 우연인지 의도적인 것인지 우리들로서는 설명할 길이 없다”고 말했다.
2014.4.16 “주검 앞에 돈타령 가슴 아팠죠” 경향
ㆍ“지겹다니요, 달라진 게 없는데” 2017.4.16
ㆍ단원고 박성호군의 누나 보나씨가 말하는 ‘유가족의 3년’
박보나씨(23)는 세월호 참사로 숨진 단원고 2학년5반 박성호군의 큰누나다. 지난 3년간 진실을 밝히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탐욕과 무능으로 점철된 한국 사회의 부끄러운 민낯을 목도했다. ‘세월호 세대’를 자처하는 그의 기억을 통해 세월호 3년을 돌아봤다.
그날…, 수업 중에 친구가 휴대폰으로 뉴스를 보여줬어요. 단원고 학생들이 탄 배가 침몰하고 있다고. 그 친구도 사촌 동생이 세월호에 타고 있었어요. 바로 강의실을 나와서 가족들과 연락하며 안산으로 내려왔어요. ‘전원 구조’ 소식에 안심했다가 오보라는 말에 다시 오열하고…. 동생 성호 이름은 생존자 명단에 들어갔다 빠졌다 했어요. 밤새 뜬눈으로 성호를 기다렸죠. 바다는 차가운데, 우리만 따뜻하게 있는 게 미안했어요. 보일러도 차마 못 켰어요. 성호가 돌아온 것은 일주일 만인 23일이었죠. 그날이 제 영명축일이어서 올라와달라고 기도했는데 정말로 올라왔어요. (시신이라도 찾은 게) 고맙더라고요.
참사 직후엔 아무도 믿을 수가 없었어요. 진도에서만 해도 별일이 다 있었잖아요. 가짜 유가족이 가족들을 염탐하러 다녔고, 언론은 거짓 보도를 했죠. 휴학계 내러 학교에 갔는데 학생처장님이 저를 보자 물었어요. “어른들한테 화나지?” “유족들은 박근혜 퇴진을 요구하나?” 위로가 아니었어요. 그저 궁금한 것들을 물었죠. 그러더니 “힘없으면 그런 일을 당하니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도 했어요. 어른에 대한 불신과 실망이 엄청 컸죠.
처음엔 가족대책위에서 인터넷 비방글 모니터링하는 일을 했어요. 유가족을 모욕하는 말도 힘들었지만 ‘돈타령’만 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어요. 우리 가족이 나가던 성당에서도 ‘그 정도면 많이 받은 거 아니냐’ 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정말 많은 사람들이 그런 말을 스스럼없이 했어요. 정부가 (보상금 많이 요구한다는) 프레임을 만들고 언론 플레이를 해도 그렇지요. 이런 사회가 정상인가요?
성호는 4남매 중 제일 착하고 순했어요. 어렸을 때 몇 번 큰 사고를 당하고도 멀쩡해서 ‘주님이 지켜주시는 아이’라고들 했어요. 고등학교 가서 신부가 되겠다고 했을 땐 좀 놀랐어요. 사회의식 있는 정의로운 사제를 꿈꿨던 거 같아요. 지금도 성호가 정말 하고 싶었던 게 뭘까, 내가 그걸 해야 하는데 생각해요.
작년 여름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가 강제 해산될 땐 참 막막했어요. “세월호 지겹다” “가족들 그만하라”는 소리가 많았잖아요. 그 와중에 단원고 기억교실도 사라졌어요. 매번 지기만 했죠. 우리가 이 싸움에서 과연 이길 수 있을까…. 두렵고 지치더라고요. 애초 20년, 30년 걸릴 싸움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세월호 단원고 희생 학생 박성호군의 누나 박보나씨가 10일 안산 고잔동 세월호 희생자 형제·자매 쉼터 '우리함께'에서 지난 3년 동안의 소회를 밝히고 있다. /강윤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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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인양…걱정돼요, 사람들이 다 끝났다고 생각할까봐”
한번은 ‘치유공간 이웃’의 정혜신 원장님이 집단상담을 했어요. ‘유가족’으로만 살면서 다들 너무 감정을 눌러왔던 거예요. 부모님 앞에서 울 순 없잖아요. 보는 사람마다 ‘부모님 잘 돌봐라’ ‘네가 형제 몫까지 잘 살아야 된다’ 하니, 부담스럽죠. 그런데 원장님이 “너 자신의 삶을 잘 살아야 누구의 누나로도 잘 살 수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나를 돌아보고 세월호도 알릴 겸 다른 유가족 언니 등 몇 분과 함께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 다녀왔죠.
순례길에서 세월호 참사를 설명한 영어·스페인어 전단을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눠줬어요. 그런데 사람들 반응이 한국이랑 다른 거예요. 이미 2년이 지난 일인데 거기 청년들이 다들 자기도 그 사건 기억한다고, 서로 노란 리본 달라고 했죠. 위로해주더라고요. 도착지인 스페인 산티아고 성당에선 세월호를 기억하는 미사를 봉헌해줬어요. 산티아고 시장님이 저희를 만나고 싶다고 해서 시청에도 갔어요. 전단이랑 노란 리본 배지를 드리니까 그 자리에서 배지를 가슴에 다는데…. 안산시장도 리본 배지 안 하거든요. 오히려 한국에선 아직도 리본 달고 다니냐고 사람들 타박하던 때인 데. 남의 나라에서 모르는 사람들이 이렇게 기억해주고 위로를 해준다는 게 정말 큰 힘이 됐어요.
지난겨울엔 촛불집회에 여러 번 나갔어요. 사람들 시선이 좀 달라졌다는 걸 느꼈어요. 저희가 행진할 때 박수 쳐주고 같이 우는 분들도 계시고. 조금은 희망도 느꼈어요. 하지만 그런 마음은 잠깐이고, 사람들은 지치고, 이 모든 게 금방 끝나버리면 어떡하지? 걱정이 더 컸어요. 탄핵이 되고도 마음을 놓지 못했어요. 사람들이 탄핵됐다고 이제 끝이라고 할까봐. 지금도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구속됐지만 그 사람만 죄지은 게 아니잖아요. 책임자 처벌은 이제 시작인데, 사람들이 다 끝났다고, 잘 해결됐다고 생각할까봐…, 걱정돼요. 오히려 지금 가족들에게 많은 힘이 필요한 상황인데….
인양된 세월호를 보는 것은 힘든 일이에요. 정말, 제 동생이 ‘학살당한’ 장소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똑바로 보지 않을 수 없어요. 진상규명 할 수 있게 선체를 온전히 인양하라고 3년 동안 얘기했는데, 올라오자마자 배에 구멍 뚫고, 선미 램프 자르고…. 펄 안에 유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데 그냥 밟고 지나다닌다는 기사를 보면서 지난 3년간 내내 지켜본 모습이지만 정말 한국은 아직 멀었구나 생각했어요. 부모님들이 목포신항에 다시 천막 치고 노숙하는 거 보면 2014년 4월16일이랑 달라진 게 하나도 없잖아요.
너무 힘들어서 도망가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런데 그게 안돼요. 세월호 참사 이전의 다른 참사 유가족들이 모여서 단체를 만든 걸 알게 됐어요. 그분들이 그때 “우리가 제대로 했으면 이런 일이 안 일어났을 텐데 미안하다”고 말씀하시는데, 제게는 그게 크게 다가왔어요. 내가 지금 힘들다고 한국을 떠나거나 외면해버리면 나중에 더 큰 사건이 또 일어날지 모르잖아요.
세월호 이후에도 많은 죽음들을 또 마주해야 했는데, 그때마다 너무 가슴이 아프고 죄책감이 들었어요. 내가 제대로 하지 못해서 또 이런 일이 일어났구나…. 그때가 세월호 아이들에게 미안했던 것 이후에 가장 미안한 순간들이었어요. 끝까지 안산에 남아 하나하나 바꿔가면서 안산 시민들과 같이 사는 게 의미가 있을 거 같아요.
‘용산참사’ 같은 국가 폭력의 발생지를 찾아 해당 사건에 대해 배우고 우리 고민도 넓히는 기행을 다니려고 해요. 가능하다면 그곳에서도 유가족 형제자매들을 만나고 싶어요. 유가족으로 사는 건 어떤 일인지 여쭙고, 그걸 통해 미래를 더 잘 준비하고 싶어요
“잊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 세월호 3주기 맞아 출간된 책들 415민중
전남 목포시 목포신항 철제부두에 올라온 세월호ⓒ김철수 기자
세월호는 침몰 3년만에 뭍으로 떠올랐다. 세월호가 녹슨 몸체를 드러내면서 지난 3년 동안 밝혀내지 못한 이번 사건과 관련한 진실이 밝혀지고, 미수습자들의 조속한 귀환을 바라는 마음들이 커져가고 있다.
세월호 참사 3주기를 맞이하는 전 국민의 마음은 그렇게 그날의 아픔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기원으로 가득하다. 이런 마음들을 담아 출판계에서도 세월호 참사 3주기를 맞아 많은 책들이 출간되고 있다. 세월호 참사 등 대형 참사가 반복되는 현실을 꼬집으며 국가의 책임을 묻는 책 등 세월호 참사 3주기를 맞아 출간된 책들을 이곳에 소개한다.
책 ‘재난을 묻다’ⓒ기타
“그때 국가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책 ‘재난을 묻다’
대구지하철 화재참사, 태안해병대캠프 참사, 씨랜드 화재참사 등등 비극이 일어날 때 마다 우리는 다시는 이런 참사가 없기를 다짐했다. 하지만 국가의 무책임과 시간의 망각 속에서 비극이 잊혀질 즈음 참사는 또 다시 반복됐다. 우리는 반복되는 재난과 참사를 보면서 “그때 국가는 어디에 있었습니까?”라고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세월호 참사 이후엔 다른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다짐을 담아 일곱건의 재난 참사를 통해 오늘의 사회를 바꿀 수 있기를 희망하며 만든 책 ‘재난을 묻다’가 출간됐다.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만들어져 참사작가기록단은 ‘금요일엔 돌아오렴’과 ‘다시 봄이 올 거예요’를 펴낸 뒤, 이와 같은 재난참사가 반복되는 현재의 사회구조를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가 생각해 이번 책을 기획하게 됐다. 세월호 이외에도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대책 이행, 책임자 처벌이 제대로 되지 않은 수많은 재난참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우리 기억 속에 사라져가고 있는 재난참사 일곱 건을 다시 꺼내왔다.
저자들은 이 책을 통해 피해자와 유족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고, 맥락이 왜곡되거나 축소되어 알려진 해당 사건의 전말과 처리 과정을 재구성했다. 그리고 그 사건이 참사가 되고, 또 다른 참사로 이어지게 된 구조적 원인을 밝혀내고자 했다. 재난참사를 둘러싼 문제점은 우리 사회 거의 모든 영역과 맞닿아 있고, 그렇기 때문에 재난참사를 제대로 기억하고 기록하며, 재발방지를 위한 구조적 대안을 모색하는 일은 한국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어가는 일임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국가와 자본이 규정한 프레임을 넘어, 피해자와 국민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보게 되면서 우리 사회는 세월호 참사 이외에도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대책, 책임자 처벌이 제대로 되지 않은 수많은 재난참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이 참사들이 하나같이 생명보다 이윤을 중시하는 풍토, 정부와 해당 기업의 무책임한 대응 등 우리 사회가 낳은 구조적 재난이며, 이제는 이 구조적 원인을 명확히 규명해야 한다는 점에도 국민적 공감대가 만들어졌다.
남영호 침몰참사(1979), 씨랜드 청소년수련의집 화재참사(1999), 대구지하철 화재참사(2003), 춘천봉사활동 산사태참사(2011), 여수국가산단 대림산업 폭발참사(2013), 태안해병대캠프 참사(2013), 장성효사랑요양병원 화재참사(2014). 저자들이 추적한 일곱 건의 재난참사들을 보면 한국 사회 곳곳에 숨어 있는 구조적 문제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 책은 말한다. “참사를 둘러싸고 누구는 정의와 단죄를 말하고 누구는 회복과 화해를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무엇보다 기억과 기록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기억이 기록되지 않는 이상 진실에 닿을 수 없다. 기억과 기록이 가능할 때만, 그래서 진실이 드러날 때만 합당한 치유와 보상, 유사사건이 재발방지, 용서와 화해를 통한 공동체의 회복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재난참사를 기록하는 일은 권력과 구조가 은폐한 재난참사의 궤적을 그려내는 일이다. 피해자라는 명명 속에 '숫자'로만 남은 이들의 삶을, 우리처럼 울고 웃었던 사람의 이야기로 복원하는 일이다. 또한 동료시민으로서 참사의 피해자와 유가족의 곁에 서는 과정이며, 반복되는 재난을 멈추기 위한 동시대인으로서의 책임감을 확인하는 자리다.”
책 ‘머나먼 세월호’ⓒ기타
세월호 특조위와 함께한 시간
책 ‘머나먼 세월호’
세월호 참사는 우리 사회에 많은 충격과 과제를 던져줬다. 생명보다 돈과 이윤을 중시하는 기업가의 탐욕, 참사를 야기한 각종 잘못된 제도와 함께, 재난에 임하여 능동적으로 대처하기보다는 이를 회피하거나 적정한 대응에 실패한 국가의 무책임하고 무능한 민낯이 총체적 부실로 드러났다. 이런 과거를 청산하고 진실을 찾기 위해 국회에선 ‘세월호 특별법’을 제정하였고, 이에 근거하여 세월호 특조위가 만들어졌다. 그 책무는 세월호참사의 원인을 규명하고 안전사회 건설을 위한 제도적 대안 등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월호특조위는 활동 내내 박근혜 정권의 방해와 저항에 시달려야 했다. 박근혜 정권은 집요하게 관변 단체를 동원해 세월호 진상 조사를 세금 낭비라고 몰아부쳤다. 그리고 결국 참사 원인 규명과 제도적 대안 마련은 성공하지 못했다.
2014년 말부터 2016년 9월 말까지 세월호 특조위의 ‘진상규명소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한 권영빈 변호사가 세월호 특조위 활동과 관련한 책 ‘머나먼 세월호’를 출간했다. 현재에도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의 유가족 추천 상임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세월호 특조위 조사 과정에서 드러난 정부의 행태 등을 적나라하게 꼬집고 있다.
이 책에서 관련 자료와 기록 등을 통해 확인되는 바와 같이, 정부가 세월호 특조위의 조사 활동을 사사건건 방해하고 끝내 강제 해산시키면서 정부는 진실을 묻으려했다. 이와 같은 정부의 위법 부당한 조치는 ‘세월호 특별법’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 근거한다. 그 행태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이른바 ‘세월호 7시간’에 대한 조사 방해와 무관하지 않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해야 할 최종 책임자인 대통령이 이를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경우, 얼마나 큰 재난에 이를 수 있는지 세월호참사가 보여준다.
아울러 그 재난의 원인을 제대로 밝히지 못하고 그 대안 마련에도 실패하는 경우, 또 다른 커다란 재앙에 직면할지 모른다는 교훈을 이 책을 통해 확인하게 된다. 세월호 참사 이후 ‘달라져야 할’ 우리 사회는 아직 그 시대적 과제를 다하지 못했다. 세월호 특조위가 이루지 못한 세월호참사의 진상규명을 위해서는 새로운 입법을 통해 2기 세월호 특조위가 하루 속히 나와야 한다는 이 책의 결론이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책 ‘잊지 않고 있어요, 그날의 약속’ⓒ기타
진실을 밝히기위해 행동에 나선 이웃들
책 ‘잊지 않고 있어요, 그날의 약속’
2017년 4월 16일, 세월호참사 3주기를 맞아, 세월호를 잊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켜온 시민들의 이야기를 엮은 책 ‘잊지 않고 있어요, 그날의 약속’이 나왔다. 세월호참사대구시민대책위원회는 대구에서 지난 3년간 세월호 활동을 해온 시민들과 함께하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사진을 남겼다. 이 책은 미수습자가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고 세월호의 진실을 밝혀 책임자를 처벌하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 때까지 끝까지 함께하겠다는 약속을 지켜온 기록이며, 동료 시민으로서 세월호 가족들의 아픔을 앞으로도 함께하겠다는 다짐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 담긴 열 편의 이야기에는, 세월호 계기 수업으로 받게 된 교육청의 탄압에 꿋꿋이 맞서는 교사, 수학여행에서 돌아오지 못한 친구들의 이야기를 뮤지컬로 만들어 공연한 고등학생들, 캠퍼스에서 친구들을 모아 리본을 만들고 팽목항을 다녀온 대학생, 지하철역 앞에서 세월호 피켓을 들고 매일 출근길을 지키는 부부, 동네에서 이웃들과 함께 세월호 리본을 만드는 주부들이 등장한다. 평범하게 살아왔지만 세월호를 만나 자신이 생각지도 못했던 삶을 살게 되었다는 이웃들의 이야기는 소박하지만 또한 쉽지 않은 실천이라 감동적이다.
이렇게 ‘세월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시 기록하는 작업은 세월호 가족들의 아픔을 함께하고 나누는 의미를 넘어, 공감하고 연대하며 사회의 변화를 이끄는 시민들의 힘을 역사에 남기는 소중한 일이다. 시대의 아픔과 불의를 모른 척하지 않고 뛰어들어 실천하는 시민들이 없다면 감추어진 진실을 밝히고 세상을 바꾸어 나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격월간 문학잡지 ‘Littor(릿터) 5호’ⓒ기타
4월 16일 그날 이후
우리에게 남은 일 그리고
문학이 해야 하는 일
격월간 문학잡지 ‘Littor(릿터) 5호’
격월간 문학잡지 ‘릿터’ 5호가 나왔다. 릿터 5호 커버스토리는 ‘4월 16일’이다. 2014년 4월 16일 발생한 세월호 침몰 사고는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적 장면으로 각인되어 있다. 우리는 그날 내내 가라앉는 배와 이상할 정도로 구조에 소극적이거나 무능력한 정부의 움직임을 지켜봐야 했다. 그 참담했고 이상했던 날은 진상 규명을 방해하고, 유가족을 폄하하는 방식으로 무한히 늘어졌다. 그렇게 거의 3년이 지나서야 대통령은 탄핵되었고 세월호는 바다 바깥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플래시픽션은 그날의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자정까지 기계적으로 등분하여 실었다. 사건과 관련 없어 보이는 인물들의 삶에 슬픔이 틈입하는 과정을 최은영, 김혜진, 백수린, 이혁진, 유재영 작가의 다섯 시선으로 에둘러 재구성한다. 이슈는 여섯 필자의 글을 실었다. 사회 공동체를 붕괴시키는 데 주저함이 없었던 권력, 이를 방기하거나 이에 동조한 언론, 진상 규명을 잔혹하게 방해한 정권 등 4월 16일 이후 비상식적 난맥상을 짚는다. 여기에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식으로서 문학과 영화, 문학 운동, 애도 조형물의 역할도 살펴본다.
이번 호 소설은 우연히도 모두 죽음과 기억에 대한 이야기다. 2015년 퓰리처상 수상작 ‘우리가볼 수 없는 모든 빛’으로 국내에 첫 선을 보인 앤서니 도어의 초기 단편을 소개한다. 자연과학적 상상력과 기적에 대한 믿음이 신비롭게 어우러지는 이야기다. 임성순의 소설은 보다 직접적이다. 우리에게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의 기억이 여태 아득한 과거가 아닌 이유를 발설한다. 윤성희의 소설은 개인에게 부여된 기억의 겹침을 따스하게 풀어놓는다. 황인숙, 신해욱, 박준, 김유림의 시를 싣는다. 삶과 문학의 전위에 서 있는 시의 분투가 아름답다.
최초공개] 美국무부 문서로 본 세월호 참사(1)- “세월호 부실 대응, 박근혜 입지에 영향줄 것” 뉴스타파 4.14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뉴스타파는 세월호 참사 3주기를 맞아 주한 미국대사관이 본국에 보고한 세월호 관련 비밀전문 등을 입수해 최초로 공개합니다. 뉴스타파는 미국 국무부를 상대로 정보공개를 청구해 이 문서들을 입수했습니다.
이번에 입수한 미국 국무부 문서는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발생 당일부터 2015년 9월 4일까지 1년 5개월 동안 생산된 46건의 외교전문입니다. 아쉽게도 문서의 상당 부분은 삭제된 채 공개됐습니다. 아직 전면 공개하기엔 민감한 부분이 많았기 때문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공개된 내용만으로도 미국이 세월호 참사를 얼마나 세밀하게 관찰했고, 박근혜 정부의 대응을 얼마나 면밀하게 살폈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뉴스타파는 미국정부로부터 공개받은 주한 미대사관의 전문을 모두 3차례에 걸쳐 연재합니다. 1편은 세월호 참사 발생 후 한달 간, 2편은 한달 이후부터 100일까지, 3편은 100일 이후부터 나머지 기간까지 생산된 전문의 주요 내용을 다룹니다. 각 편 마다 외교전문 원본과 번역본을 전부 첨부합니다. 뉴스타파는 앞으로 미국 정부가 삭제한 채 공개한 전문 내용에 대해서도 지속적으로 정보공개를 요청해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기록을 찾는 노력을 계속 기울이도록 하겠습니다.
세월호 참사는 미국도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는 초대형 이슈였다. 2014년 4월 16일 참사 발생 첫날부터 한달째인 5월 15일까지 주한 미대사관은 세월호 참사를 다룬 외교전문 13건을 본국에 보냈다. 2,3일에 한 건 꼴이었다. 주한 미대사관은 이 전문을 통해 세월호 참사가 한국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예의주시하며 여론 동향과 언론의 오보, 박근혜 대통령 지지율 추이, 6.4 지방선거 변수 여부 등을 상세하게 보고했다. 13건의 전문 중 9건이 일일보고(Seoul Daily) 형식이었고, 나머지는 박근혜 대통령 입지와 지방선거 동향을 주제로 한 특별보고서같은 형식이다. 특히 주한 미대사관은 세월호 침몰 이틀만에 “세월호 부실 대응이 박근혜 대통령의 향후 입지에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는 결론을 담은 전문을 보낸다. 박근혜 탄핵 이후인 현 시점에서 보면 상당히 의미 심장한 대목이다.
2014년 4월 16일 ~ 17일
2014년 4월 16일 세계표준시로 07시 44분, 우리나라 시간으로 오후 4시 44분 주한 미대사관은 ’서울 일일보고(Seoul Daily)’라는 제목 하에 본국 국무부에 세월초 침몰 사실을 처음으로 보고한다. 3급비밀(confidential)로 분류된 이 전문은 첫 문단에 미 해군이 한국해군사령관의 ‘공식요청(official request)을 받고 미 7함대 소속 강습상륙함 본험 리처드함 전단을 급파해 현지 시각 오후 5시 쯤 사고해역에 도착할 예정이라는 사실을 보고한다. 전문은 이어 통신사 뉴스를 인용해 당시까지의 사망자 및 실종자 현황과 구조 현황 등을 알린다. 이어 (주한 미대사관) 영사부가 세월호 승객 명단에 미국 시민권자는 없는 것으로 확인했다는 내용도 덧붙였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중대본에 도착한 시각이 오후 5시 15분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미국대사관은 자국민의 안전 여부를 빨리 확인해서 사고 1보에 담아 본국에 알렸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이 전문은 전체가 3페이지 분량이지만 이 문단만 빼고는 전부 삭제된 채 공개됐다.
주한 미대사관은 세월호 침몰 다음날인 4월 17일에도 일일보고를 통해 사고 해역의 수색작업 재개 소식을 전하며 언론보도를 인용해 9명이 사망하고, 287명이 여전히 실종 상태라는 상황을 본국에 보고했다.
4월 18일
참사 발생 이틀 뒤인 4월 18일자 전문은 ‘일일보고’가 아니라 “높은 박근혜 지지율과 휘청거리는 야당…여객선 침몰 비극이 시험대가 될 것인가?(Park’s Approval High as Opposition Stumbles; Ferry Sinking Tragedy a Challenge?)”라는 제목이 달렸다. 제목 그대로 세월호 참사가 박근혜와 여야 정치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분석하고 있다.
이 전문은 세월호 참사 발생 이전까지 박근혜 대통령이 높은 지지율을 받는 이유로 외교안보 정책,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의 혼란스러운 상황, 그리고 ‘부정적인 영향을 노련하게 피하는 박 대통령의 능력’을 꼽았다. 이 보고서는 ‘박 대통령은 과거 논란들에 대한 책임을 피해 왔으나, 당선과 동시에 공공의 안전을 우선시하겠다는 공약에 비춰 볼 때 이번 여객선 침몰사고 및 이에 대한 정부의 부실한 대응이 박 대통령의 입지에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는 결론을 내렸다.
주한 미대사관은 한국정부가 세월호 구조 상황을 거짓으로 발표한 게 드러났다는 점도 언급했다. 이날 전문은 4월 17일 ‘성난 희생자 가족들과 만난 박근혜 대통령은 (중간 부분 삭제) 정부 관계자들에게 희생자 가족들이 구조작업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도록 조치할 것을 주문’했다고 서술하고, 바로 다음 부분에서 같은 날 세월호 선체 내에 공기를 주입한다는 해경의 발표가 거짓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는 대목을 추가해 박 대통령의 지시가 말뿐이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꼬집었다. 또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와 경기도교육청이 구조된 승객 숫자 발표를 번복하면서 여론의 분노를 샀다는 점도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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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8일 자 보고서에는 뉴스타파의 세월호 참사 보도와 관련된 내용도 들어있다. 이 전문은 ‘한 온라인 뉴스채널은 4월 17일 정부가 안전기준 준수여부를 제대로 감독하지 않았고, 해수부 문서를 통해 안전점검에 선박 한 척 당 고작 몇 분씩만 할애한 사실을 보도했다. 소셜미디어에 이 보도가 널리 알려지면서 해당 언론사의 웹사이트가 다운되기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2014년 4월 17일 뉴스타파는 ‘정부 재난관리시스템 불신 자초‘라는 제목의 보도로 정부의 미흡한 대처와 세월호에 대한 점검 시스템의 문제점을 보도하며 큰 주목을 받았고, 실제 서버가 다운되기도 했다.
4월 21일 ~ 28일
주한 미대사관은 미국 측의 세월호 수색 작업 지원 현황을 본국에 지속적으로 보고했다. 4월 21일 자 전문은 ‘2014년 4월 21일 현재 본험 리처드함은 여전히 세월호 침몰 해역에 머물며 한국 해군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다.’, ‘미 해군 구난함 세이프가드함은 한국 해군이 이번 작전에 세이프가드함이 할 역할이 없다고 밝히면서 철수한 상태’라고 보고한다. 다음날인 4월 22일 자 전문은 ‘한국 해군작전사령관과의 긴밀한 협의와 합의에 따라 주한미군사령관은 4월 22일 본험 리처드함의 수색과 구조작전을 종료할 것을 지시했다. 본험 리처드함의 임무 종료는 한국군 사령관들이 한국(군) 소속 선박과 항공기만으로도 향후 수색과 구조를 하기에 충분하다는 판단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내용을 본국에 알린다.
주한 미대사관은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한국 정부의 움직임과 여론 동향을 지속적으로 관찰했다. 4월 21일 전문은 정부의 세월호 사고 대응을 비판하며 박근혜 대통령에게 항의하려는 희생자 가족의 행진을 경찰이 막았다고 기록했다. 일부 국회의원들이 재난대응 절차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미국 연방재난관리청(FEMA) 방문을 요청했고, 여성가족부는 대형 재난사고 생존자 및 가족에게 제공하는 상담서비스와 관련된 미국 측의 경험에 대해 문의했다는 사실도 체크해 본국에 알렸다. 4월 22일 자 전문은 금융감독원이 청해진해운 조사에 착수했음을 전하고 있다.
4월 28일 자 전문은 정홍원 전 국무총리의 사임 소식과 박 대통령의 지지율 추락 사실을 담고 있다. 주한 미대사관은 정 전 총리의 사임이 ‘세월호 대응에 대한 책임을 자신이 지고 박 대통령의 지지율이 더욱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려는 의도’로 해석했다. 또 정 총리의 사임에 대해 ‘한국의 대통령제는 총리보다 대통령에게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하기 때문에 박근혜 정권의 활동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으로 예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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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30일
4월 30일자 전문은 하루 전인 4월 29일 박근혜 대통령이 세월호 합동분향소를 방문했을 때 터져나온 유가족들의 격한 반응을 상세히 기록했다. 미 대사관은 유가족들이 박 대통령 조문 시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는 등의 현장 분위기와 함께 유가족의 거센 항의에 박 대통령이 잠시 머뭇거리다 답했다는 것도 함께 전했다. 이날 전문은 또 한국의 방송통신위원회가 세월호 참사 관련 보도에 대해 보도통제를 시도했다는 내용이 담긴 방통위 내부보고서가 공개되었다는 사실과 더불어 방통위 측의 해명도 함께 담았다.
5월 2일 ~ 15일
2014년 5월 2일부터 15일 사이에 본국에 보낸 외교 전문에서 주한 미대사관은 한 달 앞으로 다가온 6.4 지방선거에 세월호 사건이 미칠 영향을 주로 분석했다. 또 방한이 예정된 미국 고위 관료들 위한 사전 참고자료로 세월호 사건 이후 나타난 한국의 국가적 추모 분위기와 여론 동향을 보고했다.
주한 미대사관은 5월 2일 자 전문을 통해 ‘ 6.4 지방선거를 앞둔 현재 세월호 사건의 정치적 영향력은 계속 진화하고 있다’고 전한다. 5월 12일 자 전문은 각종 여론조사 결과를 인용하며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이 하락했음에도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이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오히려 정치인 전체에 대한 시민들의 반감만 증가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주한 미대사관은 ‘세월호 참사에 대한 국가적 반성의 시기에 다가온 지방선거(Local Elections Coming at Time of National Reflection over Tragedy)’’라는 제목의 5월 15일 자 전문에서 세월호 참사가 6.4 지방선거에 미칠 영향을 상세히 분석해 본국에 보고한다. 주한 미대사관은 정치권에 대한 시민들의 환멸이 낮은 선거율로 이어지고, 새누리당의 보수 지지 기반의 경우 과거에도 선거 당일 높은 투표율을 보여온 것으로 볼 때 여러 핵심 경쟁지역에서 새누리당 후보가 유리할 것이라고 전망을 국무부에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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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 미대사관은 특히 세월호 참사 이후 거세진 비판 여론이 박 대통령에게 어떤 정치적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웠다. 이날 전문은 ‘박근혜 정부가 세월호 참사에 뒤늦게 대응하고 초기에 사고의 심각성에 대해 잘못된 정보를 배포했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조심스럽게 쌓아온 박 대통령의 결단력 있고 유능한 이미지도 손상됐다’고 평했다. 또 익명의 정보원을 인용하며 ‘이공계 출신인 박 대통령이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을 준비하는 것을 좋아하는 꼼꼼한 스타일의 지도자이지만, 사람들은 애도의 시기에 공감해 줄 수 있는 리더를 원한다’며 박 대통령의 공감 능력 부족을 우회적으로 지적했다. 이 5월 15일 자 보고서는 총 4페이지 분량으로 미국 국무부가 뉴스타파에 공개한 46건의 전문 유일하게 비교적 온전히 공개된 전문이다.
*세월호 참사 발생 한달 동안 생산된 미 국무부 문서 13건의 원본과 번역본은 아래 링크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번역 정리 : 임보영
정보공개청구 : 김수린
‘세월호 입법 활동’으로 본 대선후보 413 뉴스타파
세월호 참사 3주기를 앞두고 대선 후보들의 세월호 관련 행보도 바빠졌다. 목포신항을 찾아 유가족들을 만나고, 재발 방지를 위한 안전 공약을 발표한다. 하지만 후보들의 ‘세월호 벼락치기’를 바라보는 유권자들의 시선은 곱지 않다. 정치권은 이미 수차례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를 약속했지만 현실은 크게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가족들은 길 위에 서있고, 국민은 여전히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가를 원한다.
※ 관련 기사 : [대선후보검증] 세월호로 달려간 대선후보들, 지난 3년은 어땠나?
뉴스타파는 국회에서 논의된 세월호 관련 의안에 주목했다. 단순히 말과 보여주기 식 행동에 그치지 않고, 입법과 정책 영역으로 나아가 세월호 문제를 다루는 것이 정치인의 본분이라고 봤다. 지난 3년간 ‘카메라 플래시’ 앞에서가 아닌, 정치 현장에서 세월호의 의미와 해법을 고민해온 대선후보는 누구였을까.
기대 못미친 ‘세월호 의안’ 성적표…본회의 통과 법안은 279건 중 12건
취재진이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을 통해 입수한 세월호 관련 의안(이하 ‘세월호 의안’)은 총 279건이다. 19대, 20대 국회에서 발의된 의안 가운데 의안명이나 의안의 ‘제안이유 및 주요내용’에 ‘세월호’라는 키워드가 포함된 의안을 추린 것이다.
세월호 의안의 면면은 다양했다. 세월호 참사가 단순한 사고가 아닌 우리 사회의 총체적 문제점을 드러낸 ‘사회적 참사’였다는 지적과도 상통하는 대목이다. 취재진은 각 의안을 성격에 따라 △진상규명, △피해구제, △가치법안, △방송개혁, △구제대책, △시스템 개선, △안전대책, △미분류 등 8개 항목으로 분류했다. 각 항목의 분류 기준은 다음과 같다.
진상규명 세월호참사와 직접 관련된 진상규명
피해구제 세월호참사와 직접 관련된 피해구제
가치법안 세월호참사 관련, 가치와 지향의 문제를 법제화한 가치법안
방송개혁 세월호참사 오보 등 관련 언론에 대한 개선 대책
구제대책 세월호참사 관련, 추후 발생할 수 있는 안전사고에 대한 의료 및 경제적 구제대책 마련, 차별 방지와 의사자 포상 등 포함
시스템개선 세월호참사 당시 문제됐던 안전 관련 국가/정부 시스템 개편, 컨트롤타워 조정 등
안전대책 세월호참사 관련, 일반인, 학생, 아동 등에 대한 안전 교육, 해양, 선박, 선원, 운항 등에 대한 제도 확충 전반 (규제, 비정규직 등)
미분류 세월호참사와는 무관하나, 세월호참사를 인용한 의안, 유병언사건 관련 의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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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의안 가운데는 안전 관련 의안이 가장 많았다. 40%에 가까운 의안(110건)이 △안전교육, △안전관련 제도 개선, △선박운항 관련법 개선 및 안전 규제 강화에 집중됐다. 세월호 참사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안전, 부정부패 등의 문제를 다루며 세월호를 인용한 미분류 의안(14%, 39건)이 다음으로 많았다. 진상규명(13.6%, 38건)과 정부 시스템 개혁(7.9%, 22건)을 담은 의안도 상당수였다.
이 가운데 실제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 실제 입법으로 이어진 의안은 12건에 불과하다. 대체입법으로 자연히 폐기된 의안이 대부분이지만, 계류중이거나 임기만료로 인해 폐기돼 빛을 보지 못한 의안도 102건에 이른다. 세월호 참사 이후 정치권이 세월호를 두고 이른바 ‘말잔치’를 벌여온 점에 비춰볼 때, 실제 정치권의 의정 성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대선후보들의 세월호 의안 성적표…1등 심상정, 꼴찌 안철수
대선 후보들은 세월호 문제 해결을 위해 어떤 입법적인 노력을 기울였을까. 취재진은 문재인, 안철수, 심상정, 유승민 4명 대선 후보의 세월호 의안 발의 건수와 세월호 의안이 상정된 본회의 투표 참여 횟수를 분석했다. 세월호 참사 당시 원외에 있었던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는 제외됐고, 20대 총선에 불출마했던 문 후보는 19대 국회의 의정활동만 반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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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발의와 공동발의 모두를 포함한 세월호 의안 발의 횟수에서는 심상정 후보가 독보적이었다. 대표발의는 없지만 총 17차례 공동발의자로 참여했다. 본회의 표결에도 7차례 참여했다. 심 후보를 제외한 나머지 대선후보자들의 의안 발의 실적은 동료 국회의원들의 평균 발의 건수에 못 미쳤다. 세월호 의안을 한번이라도 발의한 의원(394명)은 평균적으로 9번 세월호 의안 발의에 참여한 것으로 나타났다.
세월호 관련 의정 활동에서 가장 뒤쳐진 후보는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였다. 지난해 말 대표발의한 세월호특별법 개정안을 포함해도 발의 횟수가 2차례에 불과했다. 본회의 표결 참여 횟수도 6차례로, 7차례를 참여한 다른 후보자들보다 뒤쳐졌다. 문재인 후보와 유승민 후보는 각각 발의 4건, 투표 참여 7건으로 나타났다.
‘양강’ 후보표 세월호 의안…’사회적 가치 실현’ VS ‘강력한 진상규명’
대선 후보들 가운데 세월호 의안을 대표발의한 후보는 문재인, 안철수 두 후보뿐이다. 이른바 ‘양강 구도’ 후보로 평가되는 두 후보가 내놓은 세월호 의안 성격은 판이하게 달랐다.
문 후보는 세월호 참사 직후인 2014년 6월 ‘공공기관의 사회적 가치 실현에 관한 기본법안'(이하 ‘사회적가치기본법’)을 발의했다. 19대 국회 임기동안 발의한 총 3건의 대표발의 의안 중 하나다. 이 의안의 제안이유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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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는 사람의 생명과 안전보다 이윤을 앞세웠던 우리 사회의 민낯을 직시하게 함.이제는 이윤과 효율이 아니라 사람의 가치, 공동체의 가치를 지향하도록 국가시스템을 바꾸어야 할 때임.”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사회적 가치 실현’을 국가시스템 전반의 기본 원칙으로 삼아야한다는 내용이다. 사회-경제적인 가치 지향을 다룬 ‘가치법안’으로 분류된다. 문재인캠프의 정책부본부장을 맡고 있는 홍종학 전 의원은 이 의안이 ‘문재인 후보의 국정 철학이자 공약 설계의 토대’라고 평가했다. 홍 전 의원은 “이 법안이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발의됐다는 점을 두고 볼 때, 문 후보가 내놓는 모든 공약이 ‘세월호’ 위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의안을 검토한 기재위 검토보고서는 의안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사회적 가치’라는 말이 추상적 개념이어서 입법으로 이어질시 업무에 혼란이 초래될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다른 대선 후보인 유승민 후보가 앞서 발의한 사회적경제기본법과 내용이 중첩된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안철수 후보는 지난해 12월4·16세월호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 일부개정법률안(이하 ‘세월호특별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이 의안의 제안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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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조위가 진상규명에 관한 조사를 원활히 진행할 수 있도록 활동기간을 보장하고, 특조위가 행정기관, 정보기관 등에 출석요구 및 진술청취, 자료 수집을 요구하는 경우 반드시 따르도록 하고, 이를 거절하는 경우 징역 또는 벌금에 처하도록 함으로써 특조위의 조사권을 실질화하고 진상규명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것.”
세월호특조위의 활동기간을 보장하고 처벌 규정을 강화해 실질적인 조사권이 갖도록 하겠다는 내용이다. 대통령과 대통령비서실, 국가안보실이 조사대상으로 명기됐고, 특조위의 활동임기를 올해 말일 혹은 인양이 완료된 날로부터 6개월이라고 못박았다. 또한 국정원 등 정보기관이 특조위의 조사활동에 협조하도록 하고 이를 거부할 시 3년 이하의 징역, 3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했다.
하지만 의안이 발의된 시점을 두고 대권을 의식한 행보가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이 의안이 발의된 지난해 12월 27일은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12월 9일)돼 조기 대선이 가시화된 이후였다.
두 후보는 정작 자신이 대표발의한 세월호 의안을 통과시키기 위한 노력에는 소홀했다. 문재인 후보는 사회적가치기본법안이 상정된 4차례 상임위 회의에 모두 불참했다. 19대 국회 임기 만료와 함께 폐기됐던 이 법안은 20대 국회 들어 김경수 의원에 의해 다시 발의됐다. 안 후보 역시 자신이 발의한 세월호특별법개정안이 상정됐던 지난 2월 상임위 전체회의에 불참했다.
세월호 의안 절반은 ‘더민주’표 의안…’한국당’은 진상규명 소극적
세월호 의안에 대한 각 정당의 태도도 대선 이후 세월호 문제의 향배를 가늠하는 중요한 잣대다. 취재진은 각 세월호 의안 대표발의 의원의 소속정당을 분석했다. 2017년 4월 현재 당적이 확인되는 전현직 국회의원이 대표발의한 세월호 의안 217건만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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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의 건수에서는 더불어민주당의 비중이 압도적이었다. 121건을 발의해 전체 발의 건수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홍준표 후보가 소속된 자유한국당이 38건, 국민의당이 30건, 바른정당이 19건, 정의당이 9건으로 뒤를 이었다.
하지만 국회의원 1명당 발의한 의안 수로 따져보면 순위가 달라진다. 정의당이 국회의원 한명당 평균 1.5건을 발의해 가장 많았고, 이어 민주당(1.0), 국민의당(0.7), 바른정당(0.6), 자유한국당(0.4) 순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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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정당이 중점을 둔 의안의 성격에도 차이가 있었다. 정의당을 제외한 4개 정당은 모두 안전 분야의 재발방지 대책에 중점을 뒀다. 정의당은 안전 분야에 대해 발의한 의안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심상정 캠프측은 뉴스타파에 보낸 별도의 답변서에서 세월호 참사 이후 학교안전사고예방법과 선박안전법, 해운법 등 안전관련 의안을 발의해왔다고 밝혔다. (관련기사 : [서면인터뷰]세월호, 대선후보에게 묻는다 ) 세월호 의안 선별 기준상 이번 분석대상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자유한국당은 다른 정당에 비해 유독 진상규명 부분에 대한 의안 발의에 소극적이었다. 92개 의석을 가진 원내 제2정당임에도 불구하고 진상규명 관련해 발의한 의안수는 단 2건에 불과했다.
세월호로 달려간 대선후보들, 지난 3년은 어땠나? 뉴스타파413
박근혜 정부 4년 간 우리 사회를 관통한 주요 이슈는 무엇이었을까? 뉴스타파는 19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지난 4년 간의 주요 이슈를 정리하고, 대선후보들이 어떤 행보를 보였는지 알아봤다. 이를 위해 주요 일간지의 사설 키워드 분석 작업을 시도했다. 2013년 1월1일부터 2017년 3월27일까지 4개 종합일간지(조선, 동아, 한겨레, 경향)의 사설 제목 키워드를 분석했다.
그 결과 대통령(1,117건), 정부(626건), 국정(537건), 정치(473건) 등의 단어가 가장 많이 나왔는데, 이 같은 보통명사를 제외하고 고유명사 형태의 단일 이슈로는 세월호(335건)가 가장 많이 언급된 것으로 나타났다. 그만큼 세월호는 우리 사회 핵심 이슈였다는 방증일 것이다.
이에 따라 뉴스타파는 19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한 5개 원내 정당 후보들이 그동안 세월호와 관련해 어떤 말과 행동을 했는지 살펴봤다. 각 후보들의 페이스북, 트위터 등 SNS, 기사검색, 법안 발의 실적 등을 다각도로 분석해 대선후보들의 지난 3년 간 세월호 행보를 추적했다.
“이제 선체가 나타나 하루하루 작업이 빨라지니 최선을 다해 가족들의 품에 미수습자가 돌아가고 진실도 규명하게끔 하겠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2017년 4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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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분의 미수습자들이 모두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길 간절히 기도하겠다, 제가 발의한 세월호 특별법을 통과시켜서 다시는 이러한 불행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겠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후보(2017년 4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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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전 대통령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이제 세월호 미수습자 아홉 가족들이 제자리를 찾을 차례다.”
—심상정 정의당 후보(2017년 3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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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시간이 오래 걸려 죄송하다. 미수습자 아홉 분 수습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2017년 4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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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 기간 중에 배가 떠올랐다. 하필 왜 이 시점에 인양을 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세월호사고와 관련해 수사했고, 재판했고, 보상했다. 이제 끝날 때가 안 됐나.”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2017년 3월 26일)
침몰 3년 만에 세월호가 인양되면서 대선후보들은 세월호와 관련된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홍준표 후보를 제외하고 4명의 원내정당 후보들은 차례로 세월호가 거치돼 있는 ‘목포신항만’을 방문해 미수습자 수습이 최우선이라는 데 한 목소리를 냈다. 홍준표 후보만 유일하게 세월호 인양 이후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세월호 문제는 이제 끝낼 때가 됐다”고 말해 시각차를 보였다.
그렇다면 세월호가 인양되기 이전에는 어땠을까? 지금처럼 4명의 후보가 모두 세월호 문제에 큰 관심을 보였을까? 뉴스타파는 지난 3년간 세월호 인양과 진상규명이 난항을 겪었던 총4개 국면을 설정하고, 각 국면마다 대선후보들이 어떤 말과 행동을 했는지 살펴봤다. 각 후보의 SNS, 기사검색, 정당 홈페이지 등을 참고해 주요 국면 15일 전후의 발언과 행보를 취합했다.
1)세월호 특별법 제정 국면(20140714~20141107) : ‘현장파’ 문재인, 심상정 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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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와 관련된 첫번째 국면은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던 시기. 세월호 참사 유가족이 수사권, 기소권을 보장하는 세월호 특별법을 주장하며 2014년 7월14일, 광화문 광장에 처음 농성장을 차린 뒤부터 세월호 특별법이 본회의를 통과한 11월7일까지다. 이 기간 유가족은 100리 도보행진, 국회와 광화문 광장에서 단식농성 등을 벌였다. 특히 광화문 광장에선 유민 아빠 김영오 씨가 46일 간의 단식농성을 벌이며 특별법 제정을 촉구했으나 결국 수사권, 기소권이 빠진 특별법이 2014년 11월7일 통과됐다.
이 시기 문재인 후보는 8월19일부터 29일까지 유가족 단식 중단을 촉구하며 광화문 광장에서 동조단식을 벌였다. 당시 당내 직책이 없었던 문 후보는 유가족 동의를 받지 못한 여야의 특별법 합의를 비판하며 수사권이 보장된 특별법이 제정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냈다. 심상정 후보도 8월 20일부터 정의당 의원단과 함께 29일까지 청와대 앞에서 단식농성을 했다. 심 후보는 양당을 모두 비판하며 “무늬만 특별법을 폐지하라”고 주장했다.
2014년 3월부터 2014년7월까지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였던 안철수 후보는 당시 대표라는 직책에 비해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안 후보는 광화문 유가족들의 광화문 농성장을 방문하지 않았다. 그가 유가족을 방문한 것은 7월 16일 국회 본청 앞 유가족 농성장 방문 한 차례뿐이다. 이 자리에서 “진상규명을 위해 모든 걸 걸고 최선을 다하겠다고”고 약속했다.
이후 7.30 재보선 패배를 책임지고 대표에서 사퇴하면서 별다른 발언이 없다가 9월 1일 페이스북을 통해 “대표로 있을 때 세월호 문제를 잘 마무리 짓지 못해 죄송하다”며 “현장 목소리를 많이 듣겠다”는 글을 남겼다. 유승민 의원의 경우 이 시기 세월호 특별법 제정과 관련한 입장을 밝힌 발언이나 글을 찾을 수 없었다. 홍준표 후보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특별법이 유족 반대로 통과 못 돼 유감”이라며 책임을 유족에게 돌리는 발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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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정부의 ‘특조위 무력화’ 시행령 공포와 인양 결정(20150201~20150804) : 박근혜 전 대통령에 ‘세월호 인양’ 촉구 유승민 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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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인양에 대한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던 2015년 2월1일부터 인양업체 ‘상하이샐비지’가 선정되던 8월4일까지의 시기다. 2014년 11월 11일 세월호 수색 종료 이후 정부는 선체 인양 계획을 밝히지 않았고, 오히려 특조위 기능을 약화시키는 시행령을 만들어 입법예고 했다. 이 때문에 유가족 52명이 시행령 폐기를 촉구하며 2015년 4월 2일 광화문 광장에서 삭발식을 했다. 이석태 특조위원장도 2015년 4월27일 시행령 폐기를 주장하며 광화문에서 단식 농성에 돌입했다.
이 시기에는 당시 박근혜 대통령에게 건의를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당시 새누리당 원내대표 유승민 후보의 행보가 눈에 띈다. 유승민 후보는 원내 대표 시절 내내 세월호 인양을 강조했다. 특히 2015년 4월 8일, 교섭단체대표연설을 통해서 세월호 인양을 공개적으로 촉구해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 폐기 요구와 관련해서는 “정부의 영역”이라며 선을 그었고, 이날 대표연설에서도 시행령과 관련된 발언은 하지 않았다. 문재인과 심상정 후보는 모두 시행령 폐기에 한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안철수와 홍준표 후보의 경우 이 시기 세월호 인양이나 시행령 폐기와 관련해 발언한 것을 찾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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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특조위 방해 및 특별법 개정안 촉구 국면(20151119~20160630) : 세월호 참사 2주기 추모행사 홀로 참석한 심상정 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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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세월호 조사활동을 방해했던 시기다. 특조위는 11월 18일, 상임위에서 참사 당일 박근혜 대통령의 7시간 행적 조사를 개시하는 내용의 안건을 통과시켰다. 그러자 여당 추천 특조위원들은 반발하며 5명 전원이 총사퇴를 경고하는 등 특조위 조사활동을 방해했다.
그 뒤 이러한 반발이 해수부 지침에 따른 것이었다는 보도(2015.11.19 머니투데이)가 나오면서 파장이 크게 일었다. 여야가 약속했던 세월호 특검이 새누리당의 반대로 무산된 것도 이 시기다. 특검이 무산되고 여당 추천 위원들의 특조위 활동 방해로 진상규명이 난항을 겪던 상황에서 4.13 총선이 치러졌다. 총선 결과 여소야대의 정국이 형성된 상황에서 세월호 참사 2주기를 맞이했다.
이 시기 관심을 끌었던 것은 정치인들의 세월호 참사 2주기 추모식 참여 여부였다. 대선 후보들 가운데 2016년 4월16일 당일 추모식에 참석한 것은 심상정 후보가 유일했다. 문 후보는 불참했지만 당일날 선친 제사가 있어 일주일 전 안산에서 열린 합동 추모미사에 참석했다고 밝혔다. 안철수, 유승민, 홍준표 후보는 추모행사에 참여하지 않았고 불참에 대한 별다른 해명도 없었다. 1주기 추모식에 홍준표 후보를 제외한 모든 후보가 참여했던 것과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이 시기 후보들의 발언을 보면 참사 초기에 비해 온도차가 확연히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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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세월호 특조위 강제 종료 국면(20160630~20160930) : 지속적인 세월호 특별법 개정 요구 심상정 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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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위한 특조위 활동이 강제로 종료됐던 시기다. 세월호 특별법에 명시된 특조위 활동기간 1년 6개월의 해석을 두고 정부와 특조위의 해석이 엇갈린 가운데, 정부가 2016년 6월 30일로 공식 활동 종료를 통보하면서 논란이 됐다. 특조위는 보고서 발간 기간인 9월30일까지 조사활동을 계속하며 특조위 연장을 촉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유가족과 시민단체의 요구에 따라 야당들은 특조위 활동기간 연장을 골자로 한 세월호 특별법 개정안을 추진했으나 새누리당의 반대에 부딪혔다. 2016년 7월27일 이석태 특조위원장은 조사활동을 보장하라며 지난해 4월 ‘특별법 시행령 폐기’ 촉구 단식농성에 이어 두번째로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8월 17일부터 416가족협의회 유경근 집행위원장도 단식농성을 벌였고, 이어 8월 25일엔 416가족협의회 유가족 12명이 단식농성을 했다. 여당 뿐만 아니라 특별법 개정에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 못한 야당에 대한 비판도 컸던 시기다.
이 시기에는 대선후보들 모두 세월호 관련 발언 숫자가 많지 않았다. 홍준표 후보는 세월호 관련 발언이 없었고, 안철수, 문재인, 유승민 후보는 세월호 관련 글을 자신의 SNS에 올리긴 했지만, 특조위 연장과 관련된 발언은 아니었다. 후보들 가운데 당시 세월호 현안이었던 특조위 연장을 언급한 후보는 심상정 후보 뿐이었다. 심 후보는 2016년 8월25일 단식농성 중인 유가족들을 방문해 특조위 연장을 위한 특별법 개정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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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에선 누가 세월호를 가장 많이 언급했을까?
뉴스타파는 대선후보 가운데 누가 SNS에서 세월호를 가장 많이 언급했는지를 조사했다. 이를 위해 2014년 4월16일부터 2017년4월13일까지 대선후보들의 전체 페이스북 게시글을 전수 조사해 세월호 관련 글의 건수와 세월호 관련 글이 전체 게시글에서 차지한 비중을 계산했다.
그 결과 심상정 후보의 세월호 관련 글이 가장 많았고 전체 게시글 대비 비중도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게시글 178건 가운데 세월호 관련 글이 67건이었다. 문재인 후보(전체 189건 중 60건)와 안철수 후보(전체125건 중 33건)가 그 뒤를 이었다.
유승민 후보는 전체 72건 가운데 5건이 세월호 관련 글이었다. 하지만 2015년 11월부터 페이스북을 시작해 다른 후보와 동일한 비교가 어려웠다. 홍준표 후보는 세월호 관련 발언량이 가장 적었다. 전체 273건 중 9건이 세월호 관련 글이었는데, 그나마도 6건은 세월호 정쟁을 중단하라는 내용이었다.
전국에서 펼친 노란우산 얘들아, 하늘에서 잘 보고 있니? 415 오마이뉴스
▲ 운동장에 뜬 세월호 노란우산 배_in 인천 석남중 '우리는 같이 있고, 우리는 가치있다.' 인천 석남중학교 학생들과 선생님, 학부모님들과 함께 만든 세월호 노란우산 배모양입니다.ⓒ 서영석
저는 세월호 기억 노란우산 프로젝트 제안자입니다. 지난 2014년 5월 8일 유가족들이 KBS에 항의 방문을 했을 때부터 유가족과 함께 새벽을 맞이하고, 주말마다 가족과 광화문에 가고, 생업도 뒤로 한 채 싸워 왔습니다. 누군가는 1000일 넘게 1인시위를 이어 왔습니다. 세월호를 온전히 인양하여, 아홉 분의 미수습자를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고, 세월호의 온전한 진실 규명을 바라는 마음에서였습니다.
그 사이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세종시로 이사도 했습니다. 초등학생 막내가 사춘기를 맞았고, 큰 아이가 '세월호 새내기'(16학번)가 됐습니다. 그런데 그 무수한 시간 동안, 하나도 변한 게 없었습니다. 여전히 세월호는 바다 속에 있고, 권력은 진실 규명을 가로막고 있고, 사람들은 도리어 '그만해라, 지겹지도 않냐'고 말했습니다. 여전히 생각만 하면 입에 고구마를 잔뜩 문 것처럼 답답하고, 찬 겨울 바람에 살이 에이듯 가슴 아픈 이야기가 바로 세월호인데 말입니다.
"진실규명을 막는 그들이 변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기억도 꿋꿋이 변치 않았습니다. 잊지 않고 있습니다. 0416 "
그들이 변하지 않은 것처럼, 우리도 변하지 않은 게 있습니다. 권력을 가진 그들이 억지로 우리에게 '망각'을 강요해도, 우리는 결코 잊지 않았다는 겁니다. 저처럼 거리로 나와 세월호를 기억하는 이들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어쩌면 잊은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를 키워야 해서, 취업을 해야 해서, 학업 때문에, 미래를 생각해서, 살아야 해서... 많은 분들이 삶의 전선으로 뛰어 갔지만 그럼에도 모든 분의 마음 속에 세월호는 여전히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노란 우산을 들어주는 시민들의 응원을 보면 아주 확실한 걸요!).
그리고 지난 11일 마침내 세월호가 인양되었지만, 여전히 아홉 분의 미수습자는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침 흘리며 졸고, 춤추며 놀고, 공부하고, 낙서하던 책상과 의자는 사라졌습니다. 한여름 폭염을 보내는 것조차 버거웠는데, 유가족들의 사계절은 얼마나 힘들었을지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세월호를 잊지 말아야 할 이유는 너무 많습니다.
아주 우연한 시작
세월호 노란우산 프로젝트_in 팽목 '사람먼저' 아직 돌아오지 못한 미수습자 9분이 기다리는 가족들 품으로 돌아오길 기도하며 노란우산을 들었습니다
▲ 세월호 노란우산 프로젝트_in 팽목 '사람먼저' 아직 돌아오지 못한 미수습자 9분이 기다리는 가족들 품으로 돌아오길 기도하며 노란우산을 들었습니다ⓒ 서영석
세월호 기억 노란 우산 프로젝트는 아주 우연히 시작됐습니다.
2016년 4월 27일 수요일 해수부 앞에서 1인시위를 하는데 갑자기 비가 와서, 2년 전 구입했던 노란우산을 씌워주려고 펼쳤더니, 손잡이가 고장이 나 있던 겁니다. 그때, '함께 하는 분들과 세월호 기억 노란우산을 만들어 볼까?'라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그렇게 시작했습니다.
공장에 문의해 보니(정말 이런 것 처음 해 봤어요) 기본 제작 수량이 100개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는 고작 10명뿐인데... 어떻게든 해 보자는 마음으로 주문서를 만들고, SNS에 공동구매 글을 올렸습니다. 100개나 팔리면 다행이구나 생각했죠. 그런데 다음날, 주문서를 보고 좌절했습니다. 왜냐고요?
깜짝 놀랐습니다. 마음 속에 세월호를 간직하고 사는 분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이! 무려 주문이 1000개나 들어 왔으니까요! 말이 1000개죠. 이렇게 많은 사람이... 정말 놀랐습니다. 주문 내역을 찬찬히 살펴보니 전국에서 한두 개씩 구매하는 사람들이 모여 1000개가 된 것이었습니다.
한 쪽에서는 잊으라 하지만, 여전히 세월호를 기억하고, 진실규명을 위해 행동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구나, 생각하니 감동이었어요. 세월호를 잊지 못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는 걸 실감을 하고, 희망을 갖게 됐습니다.
아래는 노란 우산에 기억 메시지를 받으러 다니다 저를 뭉클하게 만든 문구입니다.
"힘내세요! 옆에서 응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힘내세요!함께하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노란 우산에 기억 메시지를 받으러 다니다 저를 뭉클케한 문구입니다. “힘내세요!함께하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기억에서 기적으로_in 제주 기억에서 기적을 만드는 노란우산 프로젝트 누군가 한 명이라도 함께 우산을 들어주고 싶다면 그곳이 어디든 달려가겠습니다.
▲ 기억에서 기적으로_in 제주 기억에서 기적을 만드는 노란우산 프로젝트 누군가 한 명이라도 함께 우산을 들어주고 싶다면 그곳이 어디든 달려가겠습니다.ⓒ 서영석
노란우산을 보급하는 것도 힘이 되는 일이지만, 노란우산을 가지고 아이들이 가고자 했던 제주와 광화문, 그리고 안산에서 사진과 영상을 만들어서 더 많은 사람들이 기억할 수 있도록 '노란우산프로젝트'를 하자고 주변에 이야기하였습니다.
그 첫 시작은 지난해 6월 18일, 제주였습니다. 노란우산을 판매한 금액으로 다시 우산을 사서, 국회의원을 만나고 시민들을 만나면서 우산 위에 저마다의 기억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SNS뿐 아니라, 제주에 직접 가서 시민들과 단체들을 만나 시민들과 함께 노란우산을 들자는 홍보도 했습니다.
바람도 돌도 많다던 제주... 행사 당일까지 과연 사람들이 노란우산을 들기 위해 올까 생각했습니다. 200여 명의 시민들이 성산일출봉이 바라보이는 신양섭지코지 해변에서 노란우산을 들었습니다. 아장아장 엄마의 손을 잡고 걸어온 아이, 노란우산을 들어주기 위해 파주에서 오셨다는 모녀, 게스트하우스 주인장의 아들까지. 모두 자기 일처럼 노란우산 프로젝트에 참여해 주시더군요. 제주에서의 노란우산프로젝트는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그 후 인천에서, 광주에서, 대전에서, 경주에서, 안산에서, 저 멀리 캐나다에서 노란 우산을 들고 기억행동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자발적인 시민들이 늘어나며 희망을 보았습니다. 매일 '4월 16일'을 사는 우리에게, 노란 우산이 위로와 기다림, 기억, 분노, 그리고 다시 희망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올해 진행한 (27개)노란우산프로젝트 사진들입니다. 별이 된 아이들이 하늘에서 보면, 잘 보이겠죠? 아니, 잘 보고 있겠죠?
세월호 광화문 집회 "다음 생엔 헤어지지 말자" 프레시안 4.15
세월호 3주기 전야 문화제…"잊지 않겠습니다"
"성호야 안녕, 너를 못본 지 3년이나 지났어. 네가 아직 우리랑 같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사실 누나는 거리를 걸으면서,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너를 봐. 염색한 너를, 여자친구 손을 잡고 있는 너를.
세월호가 얼마 전에 뭍으로 올라왔어. 너랑 선생님들이 웃으면서 같이 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직도 거기에는 미수습자 분들이 있어. 세월호가 올라온 것처럼 이분들도 오실 수 있게 해줘. 짧은 시간이었지만 함께 해서 행복했어. 다음번 생에서는 헤어지지 말자"
세월호 참사로 숨진 단원고 2학년 5반 박성호 학생의 큰 누나인 박보나 씨가 세월호 3주기를 하루 앞둔 15일, 동생에게 편지를 보냈다. 3년이나 시간이 지났고 세월호도 인양됐지만, 유가족들과 시민들에게 세월호 참사는 여전히 확실히 해결되지 못한 현재진행형이었다.
이날 저녁 서울 광화문광장에는 '세월호 참사 3년, 서울 수도권 전야 기억 문화제-4월 16일의 약속, 함께 여는 봄' 행사가 열렸다. 문화제에 참석한 세월호 생존자 김성묵 씨는 "한동안 욕심내며 일도 하고 약으로 버텼다"면서 지난 3년이 괴로운 시간이었다고 고백했다.
▲ 세월호 참사 3주기를 하루 앞둔 15일, 광화문 광장에서 '세월호 참사 3년, 서울 수도권 전야 기억 문화제-4월 16일의 약속, 함께 여는 봄' 문화제가 열렸다. ⓒ프레시안(최형락)
김 씨는 "그 날의 악몽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하루하루였다.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약으로 버텼는데도 쉽지 않았다"며 "그렇게 2년 가까운 시간을 외부와 단절하고 숨어 지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내가 살아 나온 이유를 찾아야 했고, 살아내야 했고, 이겨내야 했다"면서 "사고 이후 2년 만에 용기를 내서 밖으로 나왔고 부모님들(세월호 유가족) 뒤에서 늦게나마 1년 남짓 활동을 같이 했다"고 밝혔다.
김 씨는 "세월호 선체가 육지 위에 힘겹게 올려졌지만 아직 무엇도 온전히 인양되지 못했다. 인양 완료가 아니라 거치 완료"라며 "세월호 진상규명과 미수습자 수습, 그리고 적폐 청산 중에 어느 것도 하지 않겠다면, 그 어느 것도 못해낼 거라면 감히 (다음) 대통령이 될 자격이 없다"고 외쳤다. 그는 "국민이 집을(청와대) 비워드렸으니 찌든 때와 고약한 냄새가 나는 그곳을 깨끗이 청소하고 들어가시라"라며 "무엇이 중요한지를 국민들 앞에서 정확히 말할 수 있는 대선 후보의 모습을 보여달라"고 호소했다.
▲ 문화제에 참석한 시민들 ⓒ프레시안(최형락)
안순호 4.16 연대 공동대표는 "세월호가 돌아왔지만 아홉 분의 미수습자 분들이 아직 돌아오지 못하셨고 세월호 사고 원인을 조사할 독립적 기구는 부재한 상황이다"라며 "해수부가 여전히 세월호 인양과 수습 및 조사를 좌지우지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4.16 가족협의회 유경근 집행위원장은 "미수습자를 찾고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히고 책임자들을 가장 강력하게 처벌하는 것은 국민 여러분들의 힘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며 "세월호가 우리 눈 앞에 돌아왔다고 해서, 새로운 대통령이 들어서고 정부가 들어설 것이기에 이제는 좀 믿어도 되지 않느냐고 하는데 저희들은 그럴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진상규명의 주체는 대통령도 정부도 아닌 피해자들과 국민들이다. 정부는 세월호 참사의 법적 책임을 져야 할 조사 대상자"라며 "조사 대상자로서, 책임져야 할 책임자로서 성실히 조사에 응하고 그에 따른 처벌을 피하지 말고 받으라"라고 말했다.
유경근 집행위원장은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가 미수습자 수습과 선체 침몰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활동을 시작했지만 아직 직원도 채용하지 못했고 예산도 없다"며 "내년 초로 예정돼있는 제2기 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 활동도 너무 늦다. 선체조사위 활동 전까지 특조위가 구성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문화제에 참석한 박원순 서울시장은 "이제야 우리는 진정 깨닫게 되었다. 세월호가 아직도 다른 이름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는 것을, 사람이 만든 모든 시스템은 그 사람 다움을 잃어버릴 때 사람에게 다시 재앙이 되어 돌아온다는 것을"이라며 "어쩌면 대한민국 전체가 세월호라는 것을. 그래서 이제는 우리가 나서서 이 낡은 집을 허물고 새로운 집을 지어야 한다"고 호소했다.
이날 문화제에는 가수 이승환 씨와 한영애, 권진원 씨가 나와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사람들을 추모하고 유가족을 위로하기도 했다. 또 시인 신경림 씨는 지난 1월 7일 세월호 1000일을 앞두고 발표한 본인의 작품 <언제까지고 우리는 너희를 멀리 보낼 수가 없다>는 제목의 시를 직접 낭독하기도 했다.
또 문화제에는 4.16 가족 합창단이 출연, 부활의 <네버엔딩스토리>, 안치환의 <내 가는 이 길 험난하여도> 등을 부르며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고 위로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어 참사의 희생자 이름이 적힌 304개의 풍선이 어둠이 내려진 광화문 광장을 가로질러 무대를 채우는 퍼포먼스를 끝으로 문화제는 마무리됐다.
▲ 오른쪽 희생자들을 상징하는 풍선을 들고 무대를 채운 참가자들. ⓒ프레시안(최형락)
앞서 이날 오후에는 '박근혜정권퇴진 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 주관으로 '세월호 참사 미수습자 수습과 철저한 선체조사, 책임자 처벌, 철저한 박근혜 수사와 처벌‧공범자 구속‧적폐청산 세월호 3주기 22차 범국민 행동의 날'이 열렸다. 집회에는 백남기 농민 사망, 사드 배치 등 박근혜 정권에서 벌어졌던 사안들에 대한 성토가 이어졌다.
최석환 백남기투쟁본부 사무국장은 "지난 겨울 박근혜 퇴진 촛불이 타올랐을 즈음 장례를 치렀다. 1년 반이 다 되어 가고 있지만, 그 누구도 처벌받지도 않고 있다"면서 "이런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게, 집회에 참가했다고 물대포에 맞아 목숨을 잃는 일이 없도록 재발 방지를 위한 집시법 개정 운동과 경찰관 직무집행법 개정을 위한 입법 청원 운동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 15일 오후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시민들과 학생들이 희생자와 미수습자들의 이름이 적힌 검은 천을 들고 '기억 다짐 행동'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이강태 사드 배치 철회 성주 투쟁 평화지킴이는 "앞으로 이 나라의 지도자가 될 사람들에게 명령한다. 이 나라는 당신들의 나라가 아니다. 두 번 다시 무능한 권력자로 인해 이유 없이 희생되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라며 "평화를 부수는 사드 배치를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 문화제에 앞서 이날 오후에는 제22차 범국민 행동의 날이 열렸다. ⓒ프레시안(최형락)
세월호 3주기 위로한 이승환, 작심한 듯 말 쏟아내 415 오마이뉴스
▲ 기억문화제 인사말하는 박원순 시장박원순 서울시장이 세월호참사 3주기를 하루앞둔 15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4월 16일의 약속, 함께 여는 봄’ 기억문화제>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권우성
"미안하고 또 미안합니다. 사랑하고 또 사랑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아이들아,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아, 이제 그만 긴 여행에서 돌아와 우리 함께 같이 집으로 갑시다."
광화문 북측광장 무대에 선 박원순 서울시장은 간곡히 호소했다. 그러면서 미수습자 9명의 이름을 하나하나 목 놓아 불렀다. 그러면서 박 시장은 "제발 이제 그만 우리 곁으로 돌아와 달라"고 부탁했다. 또 "다시는 너희들을, 당신들을 잃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다짐했다. "미궁에 빠져있는 그 날의 진실을 반드시 지켜"내자고, "우리가 이 세상을 바꿔내겠다"고. 광화문광장을 찾은 유가족들도, 생존자들도, 시민들도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지난 3월 3일 출항한 지 1089일째, 세월호가 뭍으로 올라왔다. 하지만 인양된 세월호의 모습은 처참했다. 미수습자도 아직 찾지 못했다. "박근혜가 내려가자 세월호가 올라왔"다고는 하지만, 세월호의 진상 규명은 아직 요원하다. 그렇게 2017년 4월, 대한민국은 세월호 참사 3주기를 맞았다.
눈시울 붉힌 권진원 "3년이 지나도 아프다"
기억문화제 공연하는 권진원 가수 권진원이 세월호참사 3주기를 하루앞둔 15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4월 16일의 약속, 함께 여는 봄’ 기억문화제>에서 ‘사월 꽃은 피는데’와 ‘아름다운 사람’을 열창하고 있다.
▲가수 권진원이 ‘사월 꽃은 피는데’와 ‘아름다운 사람’을 열창하고 있다.ⓒ 권우성
참사 3주기 하루 전인 15일 오후 7시, 서울 광화문광장 북측 광장에서 세월호 참사 3주기 추모문화제 '4월 16일의 약속, 함께 여는 봄 기억문화제'가 열렸다. 박원순 시장의 추모로 시작한 이 날 문화제의 첫 공연은 가수 권진원이 열었다. 권진원은 세월호 참사 3주기를 맞아 지난 6일 공개한 '사월, 꽃은 피는데'와 가수 김민기의 곡 '아름다운 사람'을 열창했다.
"다시 아침이 오네 / 꿈이 아니었네 / 어제와 똑같은 하루를 / 또 보내야 하네 / 어느덧 거리의 나무에 새순이 돋았네 / 푸른 잎 사이 햇살이 눈물로 반짝이네 / 사월, 꽃은 피는데 / 그댄 없네 / 내 곁에 없네/ 사월, 꽃이 필 때에 / 그대 생각해/ 내 온 마음 다해" - 권진원, '사월, 꽃은 피는데' 중에서
공연 중간중간 눈시울을 붉힌 권진원은 "3년이 지난 오늘도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라며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음악인으로서, 딸을 둔 엄마로서 여러분과 늘 함께하겠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소감을 전했다.
한영애 "네 편, 내 편 나누지 말고 '조율'"
기억문화제 공연하는 한영애 가수 한영애가 세월호참사 3주기를 하루앞둔 15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4월 16일의 약속, 함께 여는 봄’ 기억문화제>에서 공연하고 있다.
▲ 기억문화제 공연하는 한영애가수 한영애가 세월호참사 3주기를 하루앞둔 15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4월 16일의 약속, 함께 여는 봄’ 기억문화제>에서 공연하고 있다.ⓒ 권우성
"네 편, 내 편 나누는 거 아니다. 사랑의 편, 정의 편, 흐려진 희망의 편, 약한 자의 편, 나는 너의 편이라고 노래했다."
이미 지난 촛불집회 무대에 두 번이나 올랐던 가수 한영애가 이번엔 세월호 추모문화제에서 공연을 펼쳤다. 한영애는 먼저 6집 앨범 <샤키포>에 담긴 '너의 편'의 의미를 되새겼다. 이어 작년 12월 6차 촛불집회 무대에서 불렀던 '조율'을 다시 열창했다. 한영애는 최근 <오마이스타> 인터뷰에서 "정말 많은 분이 함께 듣고 싶다고 해서 '조율'을 부를 예정"이라 밝힌 바 있다. 한영애는 이날 공연에서 "이제는 조율이 조금씩 될 거야"라며 세월호 희생자들에게 추모의 마음을 전했다.
"오늘 세월호 참사로 하늘로 먼저 간 친구들, 아직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친구들을 추모하면서, 저절로 봄이 되면 하늘을 쳐다볼 거라는 마음이 안 없어집니다. 저절로 생각이 납니다. 그들에게 말하고 싶어요. 이제는 조금 좋아질 거야. 조율이 조금씩 될 거야. 그렇게 얘기하고 싶습니다."
'성호누나' 박보나씨의 편지글 낭독 세월호참사 희생자인 단원고 박성호군의 누나 박보나씨가 3주기를 하루앞둔 15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4월 16일의 약속, 함께 여는 봄’ 기억문화제>에서 편지글을 낭독하고 있다.
▲ '성호누나' 박보나씨의 편지글 낭독세월호참사 희생자인 단원고 박성호군의 누나 박보나씨가 3주기를 하루앞둔 15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4월 16일의 약속, 함께 여는 봄’ 기억문화제>에서 편지글을 낭독하고 있다.ⓒ 권우성
세월호참사 생존자의 편지글 낭독 세월호참사 생존자 김성묵씨가 참사 3주기를 하루앞둔 15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4월 16일의 약속, 함께 여는 봄’ 기억문화제>에서 편지글을 낭독하고 있다.
▲ 세월호참사 생존자의 편지글 낭독세월호참사 생존자 김성묵씨가 참사 3주기를 하루앞둔 15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4월 16일의 약속, 함께 여는 봄’ 기억문화제>에서 편지글을 낭독하고 있다.ⓒ 권우성
한편 앞서 무대에 오른 세월호 생존자 김성묵씨와 세월호 유가족인 '성호누나' 박보나씨는 '대선 후보에게 보내는 편지'와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를 낭독했다. 특히 김성묵씨는 "국민의 머슴이 되겠다는 대선후보들에게 전하고 싶다"며 "세월호 진상규명, 미수습자 수습, 적폐 청산, 그 어느 것도 하지 않겠다면, 그 어느 것도 못해내겠다면 감히 국민의 대통령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고 호소했다. 이어 신경림 시인이 무대에 올라 자작 추모시를 낭독했다.
"올해도 4월은 다시 오고 아름다운 눈물로 너의 꽃이 핀다.
너의 재잘거림을 흉내 내어 새들도 지저귄다.
아무도 우리는 너희가 우리 곁을 떠나 아주 먼 나라로 갔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바로 우리 곁에 우리와 함께 있으면서 뜨거운 열망을 느끼는 것을 어찌 모르랴.
우리가 살아갈 세상을 보다 알차게 우리가 만들어갈 세상을 보다 바르게 우리가 꿈꾸어갈 세상을 보다 참되게
언제나 우리 곁에 있을 아름다운 영혼들아 별처럼 우리를 이끌어줄 참될 친구들아
추위와 통곡을 이겨내고 다시 피게 한 진정으로 큰 이 땅의 사랑아."
- 신경림 시인의 추모시 중에서
이승환 "2주기때보다 따뜻해 뭉클..."
기억문화제 공연하는 이승환 가수 이승환이 세월호참사 3주기를 하루앞둔 15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4월 16일의 약속, 함께 여는 봄’ 기억문화제>에서 공연하고 있다.
▲이승환은 "3년이라는 지난한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세월호의 진실은 인양되지 못했습니다"라며 세월호의 온전한 인양을 주장했다.ⓒ 권우성
"2주기 때보다 많이들 와주셔서 많은 분에게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지난해는 더 춥고 더 쓸쓸해 보이는 광장이었는데 오늘은 지난해 다 몇 배는 더 많이 와주신 것 같아서 뭔가 모를 따뜻함 때문에 뭉클해집니다."
작년 11월 촛불집회 무대에서 선보였던 '물어 본다'를 첫 곡으로 부른 이승환은 지난해 2주기 추모문화제의 소회를 떠올렸다. 이어 이승환은 "3년이라는 지난한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세월호의 진실은 인양되지 못했습니다"라며 세월호의 온전한 인양을 주장했다.
"특조위를 세금도둑이라고 했던 어떤 이는 얼마 전 또다시 국회의원이 되었고 세월호 책임 당사자들은 줄줄이 승진되었습니다. 해수부의 의혹투성이 행태들은 또 어떻습니까.
많은 국민들이 아직도 분노와 먹먹함으로 매일 아침을 맞습니다. 머지않은 훗날 진실이 밝혀지고 관련자들이 처벌받아 기꺼이 온전한 그리움으로 그분들의 넋을 어루만져 드릴 수 있었음 좋겠습니다. 다시 한번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이어 지난 2015년 발표한 세월호 추모곡 '가만히 있으라'를 불러 광장을 찾은 시민들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기억문화제 공연하는 416합창단 416합창단이 세월호참사 3주기를 하루앞둔 15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4월 16일의 약속, 함께 여는 봄’ 기억문화제>에서 공연하고 있다.
▲416합창단은 <네버엔딩스토리>와 <내가 가는 길이 험난하여도>를 합창했다.ⓒ 권우성
마지막 무대에 오른 이들은 이날 추모문화제의 주체이기도 한 416합창단이었다. 416합창단은 '네버엔딩스토리'와 '내가 가는 길이 험난하여도'를 합창했다. 이날 무대에 오른 유경근 416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은 진상 규명의 구체적인 출발 중 하나로 "416 안전공원에 국민 여러분들이 힘을 모아달라"고 호소했다.
섣부른 애도 거부한 세월호 유가족 416 오마이뉴스
세월호에 대한 철학의 헌정 <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
2014년 4월 16일, 전라남도 진도군 해상에서 여객선 세월호가 전복되어 침몰했다. 이 참사로 304명이 사망했으며, 희생자의 대부분은 안산 단원고등학교 학생이었다. 정부는 생명을 구하는 일에 대단히 무능했으며, 생존자 172명 중 절반 이상은 민간 선박에 의해 구조되었다.
많은 희생자가 난 끔찍하고 충격적인 사고였다. 그런데 정부는 제대로 된 조사와 책임자 처벌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고, 오히려 국가 권력을 최대한 동원해 세월호에 관한 모든 것을 적극적으로 억눌렀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한동안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조차 지켜지지 않는 어둠의 시절을 견뎌야 했다. 그리고 시민들도 슬픔을 마주하는 고통을 감내하기보다는, 일상 속에 파묻혀 이 일을 잊어가고 있었다. 세월호 참사는 사람들의 의식 속에 언뜻언뜻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마지막 저항의 수단 '슬퍼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
▲ 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 백상현 지음 ⓒ 위고
'세월호에 대한 철학의 헌정'이라는 부제를 단 <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백상현 지음)가 최근 출간되었다. 저자 백상현은 정신분석학자이자, 라깡 철학 전문가다. 그는 정신분석학자답게 '슬픔'을 세심하게 들여다본다. 보통 슬픔을 수동적이거나 패배적인 감정으로 여긴다. 그러나 저자 백상현은 세월호 유가족들이 흘리는 눈물에서 숨어 있는 힘을 읽어낸다. 그는 책의 도입부에서 슬픔에 주목할 것을 제안한다.
"세월호 참사의 슬픔이 모두에게 잊혀가고 있을 즈음, 유가족들이 선택할 수 있었던 남겨진 저항의 수단이 단지 '슬퍼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는 사실에 주목해보자."(21쪽)
슬픔과 상처는 어루만지는 애도로 서서히 치유될 수 있다. 그러나 유가족들은 정당하지 못한 섣부른 애도의 절차를 거부했다. 상실을 봉합할 정당한 법과 규범이 없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다. 온갖 위협과 협박, 조롱, 이간질 등이 계속되어도 여전히 눈물이 멈추지 않아 고통스러워했다. 이 멈추지 않는 눈물은 이 땅에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실한 메시지였다. 따라서 슬픔은 결코 자포자기의 상태가 아니라, 부당함을 항변하는 마지막 저항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떠도는 이들의 나약한 흐느낌, 지금 여기에 없는 정의 요구해
세월호 유가족들은 '슬퍼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으로 새로운 정의와 새로운 세상을 요구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효과를 낳았다.
"유가족들이 요구한 투명한 조사와 책임자 처벌은 박근혜 정부가 의존하고 있던 한 줌의 유사-정의를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진리 효과를 산출했던 것이다. (…) 그리하여 우리는 미래의 정의를 예감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는 없는 어떤 것, 미래의 시간에 속하는 정의이다."(13쪽)
그렇지만 권력자의 거짓말에 속지 않고 지금 이곳에 없는 정의를 요구했기에, 유가족들은 불의한 권력에 의해 사회 밖으로 추방되었다. 결국 유가족들은 깊고 강렬한 슬픔을 품은 채 일상을 거부하고 유령처럼 떠도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상처를 아물게 할 수 없었던 그들은 벌어진 균열을 떠안고 우리 사회의 표층을 떠다니게 되었다."(28쪽)
유령처럼 떠도는 그들은 간혹 우리를 찾아왔다. 그리고 유가족들의 나약한 흐느낌은 우리의 현재를 흔들며 안온한 일상에 의문을 품게 만들고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유령 같은 표류와 방황, 낮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나약한 흐느낌은 그 자체로 사회의 주류적 담화에 대항하는 힘이 되어 갔다.
진실한 슬픔은 존재를 흔들어 객석에서 일어나게 해
'슬픔의 힘'은 생각보다 크다. 사람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오히려 나약해 보이는 슬픔이 될 수 있다. 세월호와 함께 사라져간 어린 학생들이 우리에게 전한 슬픔은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고, 결국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게 하는 특별함이 있었다. 2016년 끝자락에 시작된 광화문 광장 촛불 집회는 슬픔의 힘 때문인지도 모른다.
"슬퍼하기를 멈추지 않는 투쟁은 2016년 11월의 혁명을 가능하게 만들어준 근원지, 눈물의 수원이었다."(46~47쪽)
우리는 광화문 광장에서 슬픔을 마주하는 고통을 함께했다. 촛불 집회 단상에 올라 말을 잇지 못하고 그저 눈물만 흘리는 세월호 유가족의 모습에, 청와대로 행진하는 맨 앞 대열 유가족의 외침에, 우리는 슬픔을 다시 마주했다. 그리고 유가족의 슬픔은 함께하는 이들의 슬픔으로 반복되며 더욱 커졌다.
"유가족들의 슬픔을 보존하려는 투쟁은 이후 우리의 마음속을 찾아와 다시 반복되었다. 단지 반복될 뿐만 아니라 수동적인 관객에 불과했던 우리를 광장으로 나서게 하는 기적을 가능하게 만들었다."(56쪽)
흐르던 눈물이 언젠가 강이 되고 바다가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광장에서 함께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슬픔의 정체를 헤아리며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아나서는 방황의 여정을 시작하게 되었다.
"세월호 참사와 그에 대한 국가권력의 대응에서 야기된 깊은 슬픔과 절망 그리고 분노는 우리가 속했던 공동체의 허상을 폭로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삶과 존재를 흔든다. (…) 방황이 시작되는 최초의 양상은 우리 자신의 자아에 대한 불신이다. 학교에서, 회사에서, 가정에서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각자에게 찾아온다."(69쪽)
라깡 철학의 혁명성을 드러낸 의미 있는 저작
철학자 백상현이 세월호 참사를 주목하고 해석한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철학의 역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평온해 보이던 세계의 이미지가 흔들리는 순간, 우리를 찾아오는 조난의 사건, 방황의 흔들림은 비로소 진리의 여정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리는 메시지다. 그래서 철학은 진리의 상실을 함께 슬퍼하며, 그로부터 비롯된 조난에 동참하고, 그들의 방황이 말해지고 긍정되고 지속될 수 있도록 언어를 세공한다. (…) 진리의 효과인 슬픔과 조난의 고독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철학은 그렇게 친구가 되어야 한다. 그들에 의해 발명되는 미래의 시간을 해석하고 증언해야 한다."(12쪽)
이 책은 그렇게 '철학의 역할'을 수행한다. 권력의 억압을 뚫고 진리가 발생한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덕분에 <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는 '슬픔 속에 깃든 진리'를 밝혀낸다. '라깡 철학의 혁명성'을 우리 현실 속에서 드러냈다는 점에서도 의미 있는 저작이다.
한편, 대통령 선거가 한창 진행 중이다. 저자는 선거가 주는 기이한 환상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대통령 선거와 지역선거의 사지선다형 선택만이 주어지는 유한성의 공동체, 그러니까 새로움의 도래가 원천봉쇄된 기이한 민주주의의 공동체인 것이다. 바로 이곳에서 우리는 '마치 정치가 존재하는 듯', '마치 정의가 존재하는 듯', '마치 민주주의가 실현된 듯' 살아가는 마담 보바리가 된다."(78쪽)
제한된 유사-민주주의는 군사독재보다 더 가증스런 환상이다. 선거는 갖가지 신화를 만들어 내는 스펙터클한 환상이다. 그 스펙터클이 슬픔에 깃든 진리를 덮으려 하고 있다. 저자는 이 환상에 속지 말 것을 당부한다.
▲ 세월호 특조위 부활 손팻말 광화문 촛불집회에서 한 시민이 세월호 특조위 부활을 주장하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 서상일
우리가 한때 참사의 상처를 마치 잊은 듯 살아가려 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이제 우리, 슬픔을 마주할 용기‧흔들림을 견딜 용기를 갖고 다시 제대로 우리 사회의 공허함을 직시하자.
"세월호의 유령은 자신들의 죽음이 만들어낸 텅 빈 허무의 공동을 새로운 삶의 가능성으로 채워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단원고 학생들의 죽음이 남긴 허무의 공간을 살아남은 아이들의 보다 충만한 삶으로 채워달라는 요구, 정의의 부재를 정의의 실현으로 대체해 달라는 진리의 요구가 그곳에 있다."(85쪽)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독일 소녀 합창단의 세월호 추모곡 416 한겨레
독일 요하네스 네포묵 고등학교 소녀합창단이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한국 가곡 향수를 불렀다. 유튜브 영상 화면 갈무리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독일의 한 고등학교 합창단이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부른 가곡이 세월호 3주기를 맞는 아침 슬픔을 잔잔히 위로한다.
참여연대는 15일, 페이스북에 독일 요하네스 네포묵 고등학교 소녀합창단이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부른 한국 가곡 <향수>를 소개했다. 영상을 보면, 검정색 옷을 입은 20여명의 학생들은 왼쪽 가슴에 희생자를 추모하는 노란 리본을 달았다. 손목에는 노란색 기억 팔찌를 착용했다. 합창단이 나란히 서있는 무대 뒤로 세월호가 노란색 풍선에 묶여 날아올랐다. 참여연대는 “세월호가 바다에서 떠오르고, 진실이 한걸음 앞서 나간 것은 모두의 뜨거운 마음이 있어서”라고 설명했다.
독일에서 세월호를 추모하는 노래는 어떻게 울려퍼지게 됐을까?
참여연대는 이날 영상을 공개하면서 “지난 2월 독일의 한 교민한테 노란리본과 팔찌를 보내달라는 요청이 왔다”면서 “그 교민은 요하네스 네포묵 고등학교 소녀합창단의 지휘를 맡고 있었다”고 밝혔다. 이어 “교민은 합창단에게 세월호의 아픔을 설명했고, 노란리본의 의미를 말했다. 그 뒤로 합창단 모두가 노란리본을 가슴에 달고 무대에 오르게 됐다”고 덧붙였다.
콜드플레이 “한국 아픔 공감하며 연주할 것” 415 한국
'세월호 3주기' 공연에 위로... 탄핵 때 울린 ‘비바 라 비다’엔 “영광”
15일과 16일 서울에서 공연하는 영국 밴드 콜드플레이. 콜드플레이 SNS
영국 밴드 콜드플레이가 내한 공연을 하는 16일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꼭 3년이 되는 날이다. 콜드플레이는 평소 난민 구호 등 인권 및 사회 현안에 대해 꾸준히 목소리를 내온 만큼, 이들이 어떤 무대로 한국 관객들에 위로를 전할지 관심이 쏠렸다. 2000년대를 대표하는 치유의 노래로 꼽히는 ‘픽스 유’ 등 의미 있는 히트 곡들이 많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의 아픔에 공감하며 연주를 하겠다.” 15일 오후 4시 40분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 공연 직전 국내 취재진과 만난 콜드플레이의 드러머 윌 챔피언은 “‘픽스 유’는 상실에 대한 노래”라며 이같이 말했다.
홍준표, ‘세월호 막말’ 물의 빚은 명성교회 부활절 예배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선 후보가 원내 5당 대선 후보 중 유일하게 16일 오후 3시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정부합동분향소에서 열리는 ‘세월호 참사 3년, 기억식’에 불참한다. 대신 홍 후보는 오후 4시 서울 강동구의 대형교회인 명성교회에서 열리는 부활절 예배에 참석할 예정이다. 공교롭게도 이 교회의 개척자인 김삼환 원로목사는 2014년 5월 주일예배에서 “하나님이 공연히 이렇게 (세월호를) 침몰시킨 게 아니다. 나라를 침몰하려고 하니 하나님께서 대한민국 그래도 안 되니, 이 어린 학생들, 이 꽃다운 애들을 침몰시키면서 국민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다”라고 설교해 물의를 빚었다.
홍 후보는 이날 오전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국가대개혁 비전’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세월호 추모식에 불참하는 이유에 대한 질문을 받자 “세월호 사건을 정치권에서 얼마나 많이 울궈(우려)먹었습니까”라고 반문하며 “더이상 정치인들이 거기에 가서 얼쩡거리면서 정치에 이용하는 것을 안 했으면 한다. 저는 그래서 안 가기로 했다”고 밝혔다. 또 홍 후보는 명성교회 목사가 세월호 관련 발언으로 논란이 있었는지는 “몰랐다”고 짤막하게 답했다.
홍 후보는 기자회견장에서 자리를 옮겨 당사 엘리베이터를 타면서도 기자들에게 “세월호 가지고 3년을 해먹었으면 됐지. 이제 더 이상은 안 된다”고 말했다.
세월호 3년, 눈물바다 된 진도 앞바다 416 오마이뉴스
[현장] 팽목항 세월호 참사 3주년 추모행사
▲ 세월호 참사 3주년을 맞이한 16일 오전 진도 팽목항 등대 앞에서 학생들이 고개 숙여 묵념하고 있다. ⓒ 정민규
세월호 참사 이후 세 번째로 맞는 4월 16일 진도 팽목항에는 아침부터 짙은 해무가 내려앉았다. 해무에 휩싸인 분향소로 향하는 발걸음이 이어졌다. 분향소 밖에서부터 손수건을 꺼내 꾹꾹 눈을 찍어 누르던 여성이 어린 학생들의 사진을 바라보고는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오전 10시 반부터 시작한 추모행사에서 지난 3년간의 영상이 상영되자 곳곳에서 낮은 흐느낌이 들렸다. 세월호 참사 희생 학생들의 모습이 나오자 교복을 입고 참석한 진도 지역 중·고등학생들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반성과 다짐이 반복됐다. 이동진 진도군수는 "세월호의 진상이 명명백백하게 규명되기를 간절히 기대한다"면서 "우리 사회 어디서든 세월호와 같은 사고는 두 번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되고, 세월호 참사가 잊혀서도 안 된다"고 말했다. 이낙연 전남도지사도 "세월호 사건은 대한민국이 위선의 허울 뒤에 얼마나 추악한 진실을 감추고 있었는지를 상징한다"면서 "사람 목숨을 하찮게 여길 만큼 자본과 권력이 심각하게 부패하고 타락했다는 사실을 충격적으로 입증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지사는 "세월호 진상규명은 그런 타락과 부패를 청산하고, 그 바탕에 안전하고 공정한 대한민국을 건설하는 일로 귀결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수습자 가족 "세월호 끝난 게 아니라 이제 시작"
▲ 세월호 참사 3주년을 맞이해 16일 오전 진도 팽목항에서 열린 추모행사에 참석한 학생이 눈물을 닦고 있다. ⓒ 정민규
세월호 미수습자 허다윤양의 아버지 허흥환씨를 비롯한 미수습자 가족들도 팽목을 찾았다. 허씨는 감사를 표했다. 미수습자 가족들은 세월호를 인양해 목포로 옮기기 전까지 팽목항에 머물렀다. 허씨는 "2014년 4월 16일 사고 이후 진도체육관을 비롯해 팽목항에서 많은 국민들과 많은 자원봉사자님들이 있었기에 저희들이 버텨왔고 저희들이 있을 수 있었다"면서 "가족들을 많이 보살펴 주고, 3년간 버티게 해주신 데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허씨는 "세월호는 끝난 게 아니라 이제 시작"이라면서 "지금까지 지켜주고 함깨 해준 관심과 격려를 9명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때까지 함께 해달라"고 호소했다.
▲ 세월호 참사 3주년을 맞이해 16일 오전 진도 팽목항에서 열린 추모행사에서 참가자들이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의미로 305개의 풍선을 하늘로 날려보내고 있다. ⓒ 정민규
추모행사의 본행사 끝자락에 참석자들은 세월호 참사 희생자를 뜻하는 305개의 노란색 풍선을 하늘로 날려 보냈다. 손을 떠난 풍선은 바닷바람에 이끌려 사고 해역 쪽을 향해 날아갔다. 현재 세월호 침몰 해역에서는 수중 수색 작업이 펼쳐지고 있다.
한편 세월호를 거치한 목포신항에서는 내부 수색을 위한 막바지 사전 준비 작업을 계속 진행한다. 지난 15일 선체 외부 세척과 내부 방역을 마친 세월호 선체 위에서는 작업자들의 안전을 위한 안전난간 설치 작업이 진행 중이다. 이 작업은 일주일 정도 걸릴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수색 작업을 위한 워킹타워 2대도 설치에 들어갔다.
“보고 싶습니다, 참다운 선생님” 416 한국
세월호 희생 교사 12인 스토리
침몰하는 배 안에서 공포에 질린 아이들이 “선생님”하고 불렀을 때, 교사들은 자신을 버려서라도 학생을 구해야 한다는 ‘초월적 의무’에 순응했다.
“사고일 뿐 내 책임은 아니다”라며 지위를 부지해 왔던 권력자들의 안하무인에도 이 사회가 불신의 벼랑으로 굴러 떨어지지 않도록 힘을 준 사람들. 밝혀야 할 진실은 아직도 많은데 벌써 3년이다. “선생님, 보고 싶습니다.”
▦강민규
교감이었던 강민규(당시 52)씨는 침몰 당시 배 안에서 단원고 학생을 구하기 위해 분주하게 뛰어다녀 학생과 시민 20여명의 탈출을 도왔다. 구조 후 저혈당 쇼크가 왔지만 체육관에 남아 구조 상황을 지켜봤다. 그러나 혼자 살아남았다는 자책감 탓에 그는 진도 실내체육관 인근 야산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지갑에 있던 유서엔 “200명의 생사를 알 수 없는데 혼자 살기에는 힘에 벅차다. 나에게 모든 책임을 지워달라. 내가 수학여행을 추진했다”고 적혀 있었다.
▦김응현
2학년8반 담임교사였던 김응현(당시 44)씨는 학생들을 갑판 출입구까지 인솔해 대피시켰다. “큰 배는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며 다시 학생들이 있는 배 안으로 들어간 김씨는 스승의날을 하루 앞둔 14일, 학생들이 머물던 4층 선실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제자들은 그를 “아빠”라고 부르며 따랐고, 그만큼 김씨도 학생들을 아꼈다.
▦ 김초원
2학년 3반 담임교사였던 김초원(당시 26)씨는 세월호 침몰 당시 가장 탈출하기 쉬웠던 5층 객실에 머물렀지만, 배가 기울자 곧장 4층으로 내려가 제자들의 구명조씨를 일일이 챙기고 겁먹지 않고 탈출할 수 있도록 학생들을 다독였다. 그날은 김씨의 스물여섯 번째 생일이었다. 18일 새벽 주검으로 발견된 김씨는 제자들이 용돈을 모아 생일선물로 마련한 귀고리와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김씨는 ‘기간제교사’라는 이유로 3년 째 순직인정을 받지 못했다.
▦ 남윤철
2학년 6반 담임이었던 남윤철(당시 35)씨는 급격히 기울어진 세월호에서 제자들에게 구명조끼를 챙겨주고, 끝까지 학생들의 대피를 도왔다. 배 안에 남은 학생들과 함께 비상구 쪽으로 향하다 실종돼 끝내 자신은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당시 학생들은 “남윤철 선생님이 구명조끼를 벗어 학생에게 줬다”고 증언했다. 남씨의 가족들은 “팽목항에서 아들이 끝까지 남아 아이들을 탈출구로 내보냈단 얘기를 전해 듣고 ‘윤철이답다’며 아들의 의로운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박육근
2학년 부장교사였던 박육근(당시 52)씨는 침몰 당시 학생들을 데리고 갑판 출입구로 올라왔다. 그러나 이내 “죽더라도 학생들을 살리고 내가 먼저 죽겠다”고 외치면서 다시 물이 가득한 선내로 들어갔다. 기우는 배 안에서 박씨는 학생들에게 구명조끼를 입는 방법을 지도했다. 박씨는 5월 5일 세월호 4층에서 구명조끼를 입은 채 학생들과 함께 발견됐다.
▦유니나
2학년1반 담임교사였던 유니나(당시 28)씨는 다른 교사들과 함께 학생들을 구하러 4층으로 내려갔다. 2학년1반은 10개 반 가운데 구조율이 가장 높았다. 유씨는 2012년 단원고를 첫 부임지로 교사 생활을 시작했지만, 2014년 마지막 부임지가 됐다. 임용 직후 담임을 맡았던 반 학생들에 따르면 유씨는 항상 제자들에게 용기와 믿음을 주는 이였고, 인생의 길잡이였다.
▦이지혜
2학년7반 담임교사였던 이지혜(당시 31)씨는 1년마다 계약을 갱신해야 하는 기간제교사였음에도 5년이나 단원고에서 근무했다. 이씨는 배가 기울자 4층 객실로 한달음에 달려가 우왕좌왕하는 제자들을 챙겼다. 목이 쉬도록 “갑판 위로 올라가”라고 소리지르던 것이 생존자들이 기억하는 이씨의 마지막 모습이다. 이씨는 ‘민간근로자’라는 이유로 인사혁신처에서 순직 인정을 거부당했다.
▦이해봉
2학년5반 담임교사였던 이해봉(당시 33)씨는 침몰 당시 난간에 매달린 학생 10여명을 구조했다. 그 해 2월부터 단원고에서 교편을 잡은 이씨는 첫 수업 때 자신의 이름이 바다 ‘해(海)’ 봉황 ‘봉(鳳)’이라며 ‘바다의 킹왕짱’이라는 농담으로 소개했다. 참사 후 제자 중 1명이 단원고 2학년 교무실 앞에 ‘왜 소식이 없나요, 빨리 돌아오세요’라고 적은 쪽지를 붙여뒀지만, 제자들을 보내고 기운 배에 갇힌 킹왕짱 선생님은 차가운 시신으로 뭍으로 돌아왔다.
▦ 전수영
2학년2반 담임교사였던 전수영(당시 25)씨는 세월호 침몰 34일만인 5월 19일, 3층 주방과 식당 사이 출입문 근처에서 구명조끼를 입지 않은 채 발견됐다. 전씨가 있던 곳 가까이에서 일 하다 구조된 한 선사 직원은 “학생들을 다 올려 보내고 힘이 빠져 모든 것을 포기한 듯이 주저앉아 있던 여교사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했다. 전씨의 어머니는 “그 날 수영이가 아침식사 당번이어서 혹시나 식당에 학생들이 남아있을 까봐 내려가 봤을 거에요”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최혜정
2학년9반 담임교사였던 최혜정(당시 24)씨는 배가 기울자 “너희들 내가 다 책임질 테니까 다 갑판으로 올라가”라고 외쳤다. 학생들과 함께 하는 카카오톡 단체대화방에 ‘너희부터 나가고 선생님 나갈게’라는 메시지를 남기며 학생들을 안심시켰다. 최씨는 참사 당일 “조심히 올라와”라는 아버지와의 대화를 끝으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고창석
인솔교사였던 고창석(당시 40)씨는 미수습자다. 또 다른 인솔교사 양승진씨와 함께 5층 객실에 머물렀지만 기우는 배에 학생들을 두고 먼저 탈출할 수 없었다. “빨리 배에서 탈출하라”고 목놓아 외치던 게 생존자가 기억하는 고씨의 마지막 모습이다. 아내사랑이 끔찍했던 고씨가 세월호 참사 당일 아침 아내에게 남긴 ‘애들을 돌보느라 고생했다, 미안하다’는 짧은 메시지는 그의 유언이 됐다.
▦양승진
고씨와 함께 인솔교사로 세월호에 올랐던 양승진(당시 57)씨도 미수습자 신분으로 남아있다. 양씨는 배가 기울자 자신이 입고 있던 구명조끼를 제자에게 벗어줬다. 4층 객실을 뛰어다니며 일일이 구명조끼를 챙기고 “탈출하라”고 소리쳤다. 사람들은 학교 뒤 텃밭에서 키운 채소로 김치를 담가 어려운 가정에 선물하자는 계획을 세웠던 양씨를 ‘따뜻한 사람’으로 기억한다.
God Bless The Child - Billie Holi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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