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길에서/길에서

부산은행 부울경 대학생 국토종주 둘째날 진해, 허황후를 만나다

by 이성근 2013. 6. 9.

 

월13일(수) 간간이 후둑이다 가는 비에 운동장이 젖어 있고, 종주 2일차가 열리는 아침이다. 

조별 인원점검을 끝내고 대강의 코스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답사때 논란이 많았던 코스다.  처음 잡았던 길은 망산도를 경유 안골  도미의 묘로 하여 웅동으로 빠지는 길로 하였다가   그냥 확장된 2호선 국도를  내지르는 것이 되었는데 마지막 답사를 통해 현재의 코스로 수정되었다.  최대한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였고, 나름 행진의 맛을 더하기 위해서였다.

녹산지역은 나대지가 많다. 조만간 공단 등의 개발이 이루어 지기 때문이지만 이런 곳일 수록 귀화식물들이 살판 난 곳이다.   

화전을 거쳐 산양으로 가는길 일대의 옥수수밭에서 갓따온 찰옥수수가 노상에서 판매되고 있다.

이때부터 빗방울이 설핏 드나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비가 지나간다.  비옷을 입었지만  금새 차오른 열기로 더욱 불편하다. 비에 젖는 것이나 땀에 젖는 것이나 매 일반이라 차라리 비가 좋다

조별 구호가 성고개에 걸린다.

송정초등학교로 하여 용원으로 가는  옛2번  국도,  그나마 운치가 있다.    녹산  보배산이 대숲머리 운무에 싸여 낯선 풍경을 연출한다.

유난히 안전에 신경이 많이 썼던 사)걷고싶은부산의 박재정이사. 연신 무전을 날린다.

용원 망산도에 닿았다.  가는길에 그냥 있다는 것 정도로만 하려했지만  전날 밤 스탭들과 논의를 하며 코스로 넣었다.  하지만 당연히 가 봐야 할 곳이었다.

망산도,  멀리 아유타국에서 허황옥이 김수로왕의 신부가 되기 위해 뱃길로서 처음 닿은 곳이다.  흔히들 삼국시대 곧 고구려, 백제, 신라가 각축을 벌이던 시대로서 삼국시대를 말하지만 가야가 포함된 사국시대가 먼저 있었다.  그 시절 김해평야는 없었다. 김해만이 있던 시절 가야는 발달한 철기문화로 일본과 남중국 등과 국제교류가 활발했던 나라였고 망산도는 그 흔적이라 할 수 있다.   (길에서 -부울경 2차 답사 진해-창원-마산   참조바람)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의하면 수로왕과 허황후의 만남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건무 24년 무신(戊申) 7월 27일에 구간(九干) 등이 수로왕에게 배필을 구할 것을 권한다. 그러나 수로왕은 "천명(天命)이 있을 것이니 경들은 염려 말라."라고 대답한다. 그러던 어느 날 허황옥을 태운 배가, 붉은 돛에 붉은 기를 휘날리면서 바다 서쪽으로부터 온다. 수로왕이 마중을 나가, 대궐 서남쪽 산기슭에 장막을 쳐서 임시 궁전을 만들어 놓고 기다린다. 허황옥은 별포(別浦) 나루터에 배를 대고 육지에 올라, 입은 비단바지를 벗어 산신령에게 폐백으로 바친다. 허황옥이 수로왕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수로왕이 나아가 맞아서 함께 장막 궁전으로 들어간다. 수로왕이 허황옥과 함께 침전에 들었을 때 허황옥은 자신이 아유타국(阿踰?國) 공주이며 나이는 16세라고 밝힌다. 그리하여 수로왕은 허황옥과 함께 두 밤, 하루 낮을 지낸 후, 8월 1일 한 수레를 타고 대궐로 들어오는데 오정(午正)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그 만남으로부터 이 땅에  김씨와 허씨가 생겨났고, 가야의 역사는 실꾸리처럼 풀려나기 시작했다.  용원 그리고 망산도, 허황훙의 의미를 엑기스만 공유한 다음 주변을 청소한 다음 웅천으로 향했다.

공지곡소류지를 지날 지음 소나기 한판 길을 막는다.  쉬어가라는 뜻이려니 

굴암산과 학산, 마봉산 안 분지에 형성된 웅동 시가지를 관통하는 대장천이 한바탕 소나기로 불어난 물을 흘려 내리고 있다.

 

소사생태길 입구를  지나 3.1 독립운동기념비 앞에서 한차례 다리쉼이다. 그 사이 부산은행 임과장은  일대 마트를 돌며 신발이나 발에 이상이 생긴 대원들을 위해 물품구입에 나섰다. 

스탭들의 얼굴을 담아 본다. 대원 각각이 개성이 있듯 이들의 개성도 남달랐다.  이중 심보희양은 기억에 남는 친구다.   행군이 끝나고 히후를 마감할 무렵이면 늘 생수합병을 챙겨다 주었기 때문이다.  옆에 있는 연주 또한 분위기 메이커다. 늘 쾌할하며 씩씩했다. 

빗속 행군이 좀은 힘들었는 듯

대원들은 다리 펴고 등을 기댈만한 장소가 있으면 드러눕기 시작했다. 

 

계절적으로 이 시기 타라난이 꽃을 열기 시작한다.

다시 걷기 위해 몸을 추스린다.

웅천으로 향하는 길, 얼추 30~40년 다 되가는 기억이지만 옛날 마산 고성으로 가기 위해 이 길이 유일했다.    

언뜻언뜻 아파트가 들어서긴 했지만 국도변 마을은 대개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워낙 통행량이 적다보니 보도블록 위에 이끼가 수북하다.

진해예술촌 뒷마당 거기 퍼질고 앉아 점심 허기를 지운다.  볕이 났다면  마냥 쉬고 싶은 그늘 깊은 뒷마당인데 비가 그런 기회를  없앴다.

그 와중에도 박민정 대원  부상자(?) 치료에 여념이 없다. 

다시 길을 가기 전 웅천 향토박물관에서 민속자료를 관람한다.

출발 시 같은 디자인의 신발이었지만 신발이 바뀌고 있다.  

 

제일고를 나와 웅천(熊川) 을 빠져나갈 즈음  이곳 출신 제일교포 들이 세운 애향비가 인도에 서 있다.   웅천은 일본과 관련이 많은 곳이다.  진해 웅천은 3개의 지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현재 진해 중심가와 웅천지역으로 진해의 옛 중심지였던 중부 진해, 그리고 소사,마천,두동,안골,용원으로 구성된 동부 웅동권 이다. 고려말부터 왜구의 노략질이 잦았던 곳이다.  특히 여몽 연합군에 의한 일본 침입 이후 더욱 빈번했다. 

강경책 보다는 회유책의 일원으로 부산포와 울산의 염포를 비롯 웅천의  내이포(乃而浦<濟浦>)를 1407년 개방하기도 했다.  삼포왜란  이후 폐쇄와 재개항이 되풀이 되었다. 일본인이 머물렀던 곳을 웅천왜관이라 한다.  이후 웅천과 울산 왜관은 폐쇄되고 부산포 초량왜관만 남있는데 왜관의 존재는 한일문물교류와  국방의 최전선으로 기능했다.   

 점심을 먹었던 제일고 앞이 웅천초등학교로 흑백사진 속의 기와건물이며 1674년 (숙종1) 지어진 웅천현 객사건물이다.  1968년 헐렸는데 객사 천정 상량에 붙어 있던 쌍룡상이다.  일찌기 보지 못했다.  저같은 아름다움을 ... 

웅천을 빠져 나와

비석군을 지난다. 비석은 총 9기가 있으나 비문 조차 읽어볼 시간이 없었다.  문득 답사때는 뭐했는고 싶다. 

죽고을 넘어 대발령 쉼터가 있는 고개를 넘어 왔다.

한국전쟁 참전비기 있는 쉼터에서 다리쉼에 약간의 오락이 곁들여 졌다.

조별 단결력을 구축하고 경쟁심을 유발하기 위해 어떤 내기가 걸렸다.

서먹서먹한 얼굴들이 하나둘 동료로서  각인되기 시작했다.  흔히 몸을 이용한 이런류의 레크레이션은 친밀도를 급속히 증가시킨다고 했든가.  암튼 저들끼리 그렇게 재미나게 놀고 있다.  부산은행 박영봉 홍보실장이 아이스크림을 준다고 했든가  

진해구청을 거쳐 청소년수련원으로 이동한다.

급 경사의 비탈길을 오르는데 숨이 차다

남녀 방이 지정되고  잠시 한가한 틈

밥차 사계가 저녁밥을 푼다

이날 밤 강당에서는 강당이 떠나갈 듯  대원들의 장기자랑과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 장면들은 보지 못했다. 쉬느라 아니 빨래하느라

 

House of the Rising Sun  / Bob Walsh

출처: 다음 블로그 홍이 아뜨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