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날 밤 대원들이 오락을 즐기는 시간, 3일차 구간을 사전 답사했다. 7월14일(목) 진해~창원 구간
다시 출발이다. 출발에 앞서 전체 인원파악과 개략적 코스 설명이 있고 스트레칭이 있었다.
천자암으로 가는 길. 처음이자 마지막 오솔길을 빠져나와
천자암으로 오른다. 급경사 지역이라 숨이 가쁠텐데도 역시 젊음이란 거침없다. 오르는 길은 무성한 가지로 인해 그늘이 져 어둡기까지 했다
진해구와 창원시 삼림과에서 차량출입 차단기를 내려 놓았다. 행열 맨 뒷편 엠블런스가 동행하기 위해서다. 모제약 회사가 주관했던 국토대장정에서 참가자 1인이 행군도중 사망하는 일이 발생한 이후 주최측의 안전사고 예방은 눈물겹다. 그 바람에 다소 맥이 빠지기도 한 적이 있지만 ...
이날 오전도 비는 골골이 쏟아 졌다.
하지만 대원들의 발 걸음은 경쾌했다. 아스팔트와 산길의 차이가 극명하게 나타났다.
진해 드림로드는 맑은 날보다 흐리고 비오는 날이 더 멋있다.
시선을 들어 전방은 늘 안개가 산자락을 감싸고 숲 내음이 진하게 감지된다.
한사코 베낭을 짊어지고자 했던 이 조는?
그 길에서 정말 간만에 산토끼를 보았다. 안타깝게도 이 시간부터 카메라의 상태가 좋지 못하다. 어느 순간 뭔가를 잘 못 건드린 상테에서 찍혔기 때문이다.
진해(鎭海) 시가지가 보인다. 진해란 이름은 일제가 붙였다. 원 이름은 웅천, 제포 였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왜군이 이곳에 왜성을 쌓고 주둔했는가 하면 그로부터 300여년이 지난 후에는 일제가 우리나라 최초의 계획도시이자 해군기지를 건설해 오늘날 진해의 모태를 만들었다. ‘진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 ‘옛 마산시 진동면 일대’의 ‘진해현’에서 비롯된 것으로 대한제국시대에는 ‘통합 이전 창원시(옛 의창군)와 옛 마산시 진동면·진전면·진북면 일원’을 ‘진해군’이라 불렀다. 이후 독립된 시로 승격한 것은 1955년인데 지난 2010년 마산,창원과 통합되면서 진해구가 됐다.
" ...일본은 진해만을 동양 제일의 대군항으로 키우기 위해 한반도 최초로 조직적·계획적 도시계획을 입안한다. 진해라는 말부터가 일인에 의해 처음 쓰여졌고, 옛 웅천읍성과 무관하게 신도시로 재탄생했으니 식민지 항구도시 건설의 전형이라고 할 만하다. 당시 비동 현동 좌천 등 여러 마을을 합해 진해라 부르고 진해만 군항지를 편의상 진해만이라 칭한 것이다. 군항지 경영에 당시로서는 대단히 큰 돈인 800만원을 퍼부어 10개년 사업으로 공사를 시작했다. 바닷가 염습지와 황무지를 매립하여 땅을 얻고 농민들의 땅을 강제수용했다.
러일전쟁 직전인 1904년 1월12일에는 해군 함정을 거제도 송진포 연안에 대놓고 주민들을 강제로 쫓아내기도 했다. 송진포에 ‘일본제국 해군 가근거지 방비대’를 설치하고 러시아와의 전쟁준비에 돌입한다. 일제는 1905년 러일전쟁의 여세를 몰아 웅천지역의 토지를 강탈하기에 이른다.
당시 시가지는 12만평이었으며, 계획도시답게 모범적 시가를 만들기 위해 도로는 방사형으로 설계했다. 그래서 오늘날 진해의 중원로터리 등을 보면 사방팔통으로 도로가 교체하는데, 여타 도시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모습이다. 미관을 엄격히 고려하고 토지를 1∼3등으로 3분하여 건축을 제한했다. 건물은 2∼3층을 원칙으로 하고 4층 이상은 허가를 받아 짓도록 했다.
이곳 토지를 불하받은 일인은 히로시마 후쿠오카 도쿄 사세보 사가 조슈 나가사키 출신이 주류를 이뤘다. 한국에 오래 전에 나와있던 용산, 마산, 부산 등지의 일본인들도 이곳으로 몰려 왔다. 이로써 ‘일본인에 의한, 일본인을 위한, 일본인의 신도시’가 탄생한 것이다. 여기에는 그 어떤 조선인도 참여할 수 없었으며, 목포나 군산처럼 본래의 조선인촌과 병존하게 하지도 않은 식민도시였다. 그리하여 일제 해군본부가 들어서고, 한국뿐 아니라 극동의 군항으로 자리잡아 오늘날까지 한국 해군의 본거지로 자리매김했다..." (다음 아고라 . 한국해군의 본거지 `진해(鎭海)` 되돌아보기 -니덜입민나블나블님의 글
안민고개로 들어서는 대원들. 진해시 태백동과 창원시 안민동을 이어주는 9km의 고개로 만날재라고도 한다. 옛날 진해에서 창원으로 시집간 부녀자들이 명절 사흘째 되는 날에 고갯마루에서 가족들을 만난데서 유래한 명칭이다. 앞에 보이는 다리는 장복산과 웅산 사이 에코브리지다.
안민고개 아래 폐기물매립장이 보인다. 침출수 발생을 방지하기 위해 차폐막이 겹겹으로 깔리긴 했을테지만 창원지역에서 발생한 폐기믈들이 일부는 소각장으로 가고 일부는 재활용이 되고 난 뒤 갈곳이 없어 묻힌 곳이다. 그 면적이 방대하다. 180,402 평방 미터
창원으로 진입하는 대원들
안민초등학교 앞 삼거리 횡단보도를 건넌다. 교통경찰의 지원이 없을 때는 작전을 편다. 선두 지휘차량과 엠블런스가 진출입부의 동선을 차단하고 스텝들이 두겹으로 대원들의 통과를 도모 한다. 이때 행군 중 대원들에게 내려지는 명은 밀착! 뛰어! 등이다. 도심구간에서는 이런 장면이 많이 연출된다.
길에서 만난 등꽃이 새롭다
창원의 얼굴인 공단의 정경
삼성 테크원 옆 야촌유적지. 창원이 공업도시로 개발되는 과정에서 옛 창원군 일원의 창원면, 상남면, 웅남면 일원에 산재한 묘지며 가옥들이 철거당함에 무연고 영령들을 위로하고 조상의 얼을 추모하기 위해 마을이 있던 곳 마다 마을 이름을 남기고 기리기 위해 유허비를 건립했다. 야촌유적지는 목리, 상북, 반송, 창고 . 신덕 등 19개 마을 중의 한 곳이다
남지, 야촌, 가음정사거리를 지나 인근 장미공원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날 밥차의 오이미역 냉국이 등장했다. 얼음 띄워 만든 냉국은 해단식이 있는 날까지 인기음료(?)가 되었다.
창원 도심 걷기, 어떤 도시가 인간을 위한 도시인가. 적어도 보행환경에서 만큼은 창원은 높은 점수를 받을 것이다.
예정에 없던 창원시청 앞 광장을 관통하다. 원래대로라면 롯데백화점을 돌아 한국은행> 농업교류센터로 하여 KBS사거리로 진출할 계획이었는데 경찰은 그럴 경우 3~4회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따른 신호차단 보다는 두번의 신호차단으로 도심 정체를 방어히고자 한 것으로 풀이 된다. 덕분에 대원들은 푸른 녹지를 활보하는 맛을 보았다.
창원의 도로환경은 보다 시피 차로와 인도, 그리,고 자전거 길이 잘 분리되어 있을 뿐 아니라 보행환경으로서는 가로수가 많아 보행자의 쾌적도는 높다.
경남도청을 앞두고 마지막 걸음에 힘을 더하는 대원들
경남도청에서 다리를 풀다.
그 와중에도 거울울 보는 여유? 이런 모습들은 보다 빡신(?) 행군을 요구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다시말해 국토대장정에서 손거을을 보며 화장한 얼굴을 손본다는 것은 그만큼 수월하다는 뜻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이날 오후는 몹시 더웠다. 그래서 가능한 그늘을 이용했다.
창까치아파트삼거리에서 횡단하여 창원천을 따라걸었다.
명곡교차로를 지나 롯데마트 시티세븐 옆 대형서점이었던 '반디앤루니스' 앞 조형물. 유감스럽게도 반듯한 생각을 펼쳐, 반듯한 사회를 만들고, 반듯한 문화를 세우는 인생의 친구를 모토로 설립된 이 서점(주.서울문고) 역시 지난해 말 폐업하고 말았다. 이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크고 작은 서점이 장사가 안되는 현실은 예외없다. 얼핏 백화점에서 세운 조형물인줄 알고 단박에 '소비의 꽃'이라 했는데 사실 누구의 작품이며 제목이 뭔지 알 도리가 없다.
3차 숙영지 늘푸른 회관이 기다리고 있다.
황야의 무법자OST(방랑의 휘파람) - Ennio Morricone
출처ㅣ 다음 블로그 홍이 아뜨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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