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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길에서

부산은행 부울경 대학생 국토종주 첫째날, 출정식 그리고 첫걸음(11.7.11)

by 이성근 2013. 6. 9.

 

 

7월11일 송정 청소년 수련원에서 국토종주 참가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O/T가 있었다.  뭉개구름 솟아있는 하늘이 불볕더위를 예고하고 있다.

7월12일 오전 11시 부산은행 본점에서 이장호 부산은행장이 출정식에 참가 대원들로부터 신고를 받고 있다.

출발에 앞서 구호를 외치고

부산길은 대부분 도심 교차로를 건너 뛰는 길의 연속이다.  

종주단이 진시장을 지나 성남초등학교를 돌아 좌천교차로를 향하는 중이다.  첫날 걷기에는 부산은행장을 비롯하여 임직원 50여 명도 같이 호홉을 맞추었다.

중식지인 구덕실내체육관  처음으로 밥차가 선을 보였다.  대장정에 경험이 있는 부산은행 직원들이 대원들을 향해 행열의 유지와 안전을 위한 단도리가 이어진다.  

오후 코스는 하단오거리까지가 도심관통이며 이후는 본격적인 국도따라 걷기에 들었다.  사실 2번국도의 시작점은 구 부산시청(현재 롯데 광복점)이다.  

대오 1열 우로 밀착 !  하구둑을 앞두고 있다. 

땡볕 아래  선두 스탭의 표정이 벌써 부터 지친듯 하다. 이들은 이렇게 17일을 걸었다.  붉은 조끼를 입은 스텝 대부분이 부산은행  홍보대사들이다.  이 친구들도 같은 학생이다.  그렇다고 행군 내 특별 대접을 받은 것도 없다. 좀은 안쓰러워 표나지 않게 그들을  배려하고자 했다.     

반면 대원들은 아직은 얼굴에 웃음기가 묻어 난다.  물론 이때부터 발에 이상을 호소하는 친구들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아쉬운 일은  자료집이 제작되었다면 휠씬 좋았을 텐데 ... 예컨데 어떤 지역을 지나거나 앞두고 있을 때  그 곳의 지명유래와 사회적 의미를 공유하면서 이해도 높였을 텐데 하는 것이다.  하구둑을 지나고 있는  종주단,  종주단 평균 나이가 22~23세  하구둑이 준공되는 시점에 태어 났다.   하구둑이 만들어 지게 된 배경과 낙동강의 어제와 오늘을 나누고 싶었다.  

MB정부가 일방적으로 추진중인 4대강사업 역시 마찮가지다.  국토종주는 방관자가 아니라 그 속을 헤집고 들어가는 일이다.   오래된 책이지만 문태순의 '국토와 민중'(한길사1985)를 권한다. 물론 시대상황과 국토의 환경과 상황은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다.  그러나 변화돤 국토의 모습이라고 할지라도  "생의 사실과 지리의 사실이 고통스럽게 엉켜있는 오늘의 한반도... 찾지 않는 한 현장은 어디에도 없으며 깨닫지 않는 한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는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을숙도 하구둑 보조수문이 있던 일운도와 염막 일원의 장면.  1년 전만 하더라도 이런 풍경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이미 이곳은 하구둑을 만들 때 한 차례 지형의 변화가 강요되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을숙도는 세개의 모래섬으로  수로가 발달한 사주였다.  일명 을숙이와 일웅이의 애틋한 사랑에 관한 전설이 강물처럼 흐를 때 였다.  그러나 하구둑은 이들을 하나로 만들었고, 주변 둔치며 모래톱을 지워 버렸다.  살던 사람은 쫒겨났고,  소비도시 부산의 온갖 폐기물들이 을숙도 뱃속으로 들어 갔다.  생태 환경적 고려를 통한 을속도의 변화는 90년대 말부터 였다.   그 결정판이 에코센터의 등장이긴 했으나 남단의 을숙도대교(구 명지대교) 건설을 비롯하여 갖가지 개발사업들로부터 을숙도는 잠시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시방도

명지 IC와 신포를  지나 진목1교에서 평강천으로 연결된 수로, 평화롭지만 일대의 예고된 개발이 이 그림을 어떻게 바꿀지 궁굼하다

 

일대의 음식점들은 오리고기를 많이 다룬다. 사육한 청둥오리는 인정하지만 기러기요리까지 안내하는 간판은 처음이라 한컷 남겼다.  사육한 청둥오리는 사료냄새가 나지만 야생청둥오리 고기는 파래냄새가 난다.  ^^

보차분리가 있지만 보행로는 가다가 뚝뚝 끊긴다.  사람의 통행이 거의 없기도 하지만 중요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안전한 종주가 되기 위해 차도를 피할 수 있는 구간은 곁길을 탔다.

사취등과 녹산 2수문 사이에 있는  순아 수로  물의 흐름이 거의 없다보니 정수식물인 부들과 줄이 우점하고 있다.  

귀한 장면을 만났다.  옛 순아 포구의 흔적이다. 2번 국도인 8차선 낙동남로와 주변 경지정리를 하며 포구는 이렇듯 갇혀 버렸다.  대신 낙동종합 사회복지관 앞에 접안시설을 새로 만들었다.

1934년 만들어진 녹산수문 앞을 지난다. 소화  구년 4월 준공이라 새겨져 있다. 명치(明治 메이지 1868~1912) 와 대정(大正 다이쇼우 1912~1926)에 이은 일제강점기시절이다.  일제의 수탈이 극에 달하여 온나라가 만신창이가 될 무렵이다. 한편으론 김해평야가 녹산수문으로 인해 등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전에 갈밭이 대부분이었고 무수히 많은 수로가 실핏줄처럼 나 있었다.

녹산수문은 서낙동강의 하류부 노적봉과 성산사이를 흐른다.   녹산수문의 동쪽 강 가운데 있는 독뫼로서  높이 50m 정도 된다. 1933년 녹산수문이 건설되기 전까지만 해도 노적봉은 서낙동강 하구 바다에 떠 있던 작은 갯바위 섬으로 크기가 녹두처럼 작다고 하여 ‘녹도’로 불리기도 했다. 현재 능엄사란  아담한 사찰이 있다.  임진왜란 때 왜의 수군이 쳐들어오기 전에 이 섬 전체를 노적더미처럼 갈대와 짚으로 덮어 위장하였다고 전하므로 노적봉 이라하며,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나오는 독사리목(禿沙悧木)이 이곳 일대이며 형산진(荊山津)이라고 부르는 나루터가 있었기 때문에 남도식 사투리 발음에 따라 지금은 성산 (星山)으로 변한 것이라 한다 

수문 아래 명지주거단지와 신호대교가 보인다. 

대원들이 지쳐갈 무렵 제1숙영지인 녹봉초등학교에 도착했다.

같이 걸었던 부산은행 직원들이 대원들을 박수로 맞이한다.

아담한 녹봉초등학교,  대충 씻고 자리에 들자 어둠속에서 소쩍새와 개구리가 번갈아 울었다.  종주 1일차가 그렇게 지날 라 할 때

밥차 사계가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대원들은 텐트를 설치하고  인원점검에 들었다.    대충 씻고 자리에 들자 어둠속에서 소쩍새와 개구리가 번갈아 울었다.  종주 1일차가 그렇게 지날 라 할 때

큰아들이 문자를 보냈다.  "거기 비 안와요?" 문자 확인과 동시에 후두둑 소나기가 지나고, 부랴부랴 텐트에  플라이를 덥느라 부산을 떨었다.   조별 불침번들이 밤을 새기 시작했다.  

아참 이때부터 물질 발생자들이 치료를 받기 위해 줄을 서기 시작했다.  신발이 문제였다.



California Dreamin'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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