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체란 무엇인가-운동적 과정 객체 론카이로스총서 102토머스 네일 저자(글) · 김효진 번역 · 2024년 05월
Thomas Nail, 1979~ 미합중국 포틀랜드 출신의 철학자이며 현재 콜로라도주에 위치한 덴버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2011년에 오리건대학교에서 질 들뢰즈와 펠릭스 과타리의 정치철학을 주제로 하는 논문으로 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 논문을 저본으로 하여 2012년에 저서 Returning to Revolution : Deleuze, Guattari, and Zapatismo를 출판했다. 현대철학의 신유물론적 사조를 선도하는 인물로서 과정철학과 신유물론의 통찰들을 버무려서 독특한 운동철학을 전개한다. 역사적·경험적 연구에 깊이 뿌리박은 방법론을 바탕으로 과정과 흐름을 중시하는 들뢰즈주의적 사유를 맑스주의적 접근법과 결합하여 운동유물론을 부각하려고 시도한다. 지난 십 년 사이에 이주 정치에서 운동의 존재론에 이르기까지 십여 권의 책을 펴낸 다작의 저술가로 유명하다. 주요 저서로는 Lucretius I·II·III(2018, 2020, 2022)을 비롯하여 The Figure of the Migrant(2015), Theory of the Border(2016), 『존재와 운동』(2018 ; 2021), Theory of the Image(2019), Marx in Motion : A New Materialist Marxism(2020), Theory of the Earth(2021), Matter and Motion : A Genealogy of Kinetic Materialism(2024) 등이 있다.
목차
그림 차례 6
한국어판 지은이 서문 8
감사의 글 11
서론 : 객체들의 세계 13
1편 운동적 객체
1장 물질의 흐름 42
2장 수의 주름 54
3장 지식의 장 76
2편 객체들의 역사
1부 서수적 객체 102
4장 구심적 객체 103
5장 선사 객체 117
2부 기수적 객체 138
6장 원심적 객체 139
7장 고대 객체 I 155
8장 고대 객체 II 177
3부 강도적 객체 200
9장 장력적 객체 201
10장 중세 객체 I 213
11장 중세 객체 II 238
4부 잠재적 객체 262
12장 탄성적 객체 263
13장 근대 객체 I 274
14장 근대 객체 II 298
3편 현대 객체
5부 고리 객체 322
15장 방행적 객체 323
16장 현대 객체 I : 양자론 333
17장 현대 객체 II : 범주론 361
18장 현대 객체 III : 혼돈 이론 386
결론 419
참고문헌 424
인명 찾아보기 436
용어 찾아보기 439
출판사 서평
1. 『객체란 무엇인가』 간략한 소개
우리는 객체들의 시대에 살고 있다. 과학과 기술의 역사 전체에 걸쳐서 객체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되었지만, 지식을 생산하는 데 객체가 능동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이해된 적은 거의 없다. 토머스 네일은 객체 자체가 지식의 행위주체가 되는 매우 새로운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객체론에 역사적으로 접근한다. 이 책은 객체의 행위성과 이동성을 중시하는 서구 과학과 기술의 역사를 최초로 이야기한다. 흔히 객체를 수동적이고 정적인 어떤 것으로 간주하는 생각에 맞서 토머스 네일은, 양자론, 범주론, 혼돈이론, 신유물론, 사변적 실재론 등에 대한 세밀한 독해를 통해 객체가 이산적인 사물이 아니라 준안정한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토머스 네일에 따르면 이 책의 목표는 ‘운동적 과정 객체론’을 제시하는 것이다.
현대 과학자들이 주장하듯이 과학적 관찰이 언제나 그 대상에 영향을 미쳤다면 그것은 객체성에 관한 우리의 이해를 어떻게 바꾸는가? 한 객체가 다른 객체들과 주체들에 의해 끊임없이 수정되거나 변환된다면 객체란 무엇인가? 저자에 따르면 『객체란 무엇인가』의 주요 동기는 이런 관찰자-의존성을 진지하게 여기고서 객체들을 창출하고 유지하는 데 관여하는 감춰진 과정들과 수행들을 탐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과학의 과정철학이다.
2. 『객체란 무엇인가』
신유물론 : 위계적이고 인간중심주의적인 서양 근대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우리는 기후위기, 생태위기, 경제위기, 정치위기, 사회위기 등 다양한 위기가 동시다발적으로 진행 중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현재 우리의 시대는 ‘탄소자본주의’에 역사적 기반을 둔 인간 활동에서 비롯된 극심한 기후변화로 특징지어지는 시대, 이른바 ‘인류세’ 시대로 일컬어진다. 현재의 국면에서 이 시대는 인간 문명의 종말과 생물의 대멸종으로 귀결될 소지가 다분하다. ‘인간의 시대’를 지칭하는 인류세라는 용어는 인간을 중대한 지질학적 행위자로 자리매김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실제로 드러나는 현실은 비인간 자연이 독자적인 역능과 행위성을 갖추고 있음을 보여준다.
최근 들어 이런 현대적 위기들의 근원이 위계적이고 인간중심주의적인 이원론에 기반을 둔 서양 근대성에 자리하고 있다는 반성적 성찰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브뤼노 라투르가 강조한 대로, 서양 근대성은 인간 정신과 비인간 물질, 인간 문화와 비인간 자연, 또는 인간 주체와 비인간 객체 사이, 즉 통칭하여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구분이라는 이분법적 구상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게다가 서양 근대성은 비인간에 대한 인간의 우월성을 전제함으로써 ‘비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위계적이고 인간중심주의적인 심성 구조와 태도를 낳게 되었다. 우리 인간이 세계를 단지 ‘우리에-대한-세계’로서만 파악함으로써 비인간들의 존재 자체를 도외시하게 된 이런 경향은 데카르트 이래로 칸트를 거쳐 20세기의 문화적 비판 이론에 이르기까지 지속하는 인간중심주의적인 ‘인식론적 헤게모니’를 뒷받침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현대 사회들이 직면하는 중요한 위기들에 대처하지 못하는 사상적·정치적·사회적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이런 역사적·이론적 이중 교착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즉 비-인간중심적인 비근대적 구상을 정립하기 위해 최근에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위계를 제거하고 비인간 존재자들의 ‘물질성’과 그 ‘행위성’을 부각하는 철학적 운동이 ‘신유물론’이라는 기치 아래 전개되고 있다. 신유물론자들은, 물질 자체가 수동적이고 활성이 없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능동적이고 역동적인 것으로 구상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개진한다. 신유물론자들은 문화와 자연, 정신과 물질,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분열을 비롯한 서양 근대 사상의 중추적인 이원론들을 재구상할 것을 제안한다. 물질의 활력과 역동성에 대한 신유물론자들의 강조는 자연, 여성, 식민지를 지배와 수탈의 대상으로 삼는 온갖 차별주의적 실천들과 연관된 불변의 영원한 형상/본성 개념에 이의를 제기한다. 또한 신유물론자들은 자연과학의 발전을 수용하거나 또는 심지어 그 발전에 기반을 두는 경향이 있다.
토머스 네일과 움직임의 철학
토머스 네일(Thomas Nail, 1979~ )은 현대 과학의 발견 결과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활용하는 신유물론 사상가이다. 네일은 미국 오리건 대학교에서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와 펠릭스 과타리의 작업에 나타난 정치 혁명과 멕시코 치아빠스의 사빠띠스따 봉기를 주제로 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그것은 네일의 첫 번째 저서로서 『혁명으로의 귀환: 들뢰즈, 과타리, 그리고 사빠띠스모』(Returning to Revolution: Deleuze, Guattari, and Zapatismo)라는 제목으로 2012년에 출간되었다.
토머스 네일의 독특한 점은, 운동을 어떤 부동의 것에서 파생된 것으로 간주해온 서양 전통에 맞서, 정지 상태에 대한 운동의 수위성을 방법론적 출발점으로 수용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토머스 네일은 자신의 철학을 ‘움직임의 철학’으로 명명한다. 물질의 흐름과 과정을 강조하는 ‘움직임의 철학’에 따르면 세계는 ‘비결정적’ 과정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 과정들의 준안정한 반복들이 우리 주변의 현상들을 생성한다. 사물들은 비결정적 운동의 창발적인 준안정한 패턴들이다. 그리하여 네일의 ‘움직임의 철학’을 특징짓는 세 가지 주요 개념은 ‘흐름,’ ‘주름,’ 그리고 순환 ‘장’이다. 그의 철학에서 세계는 물질적 흐름, 주름, 순환 장의 재귀적 운동의 준안정한 구성체로 간주된다. 네일의 ‘움직임의 철학’은 들뢰즈와 화이트헤드와 유물론의 통찰을 참조한 일종의 ‘운동유물론’으로 간주될 수 있다.
지금까지 토머스 네일은 두 개의 시리즈(총서)라는 구상 속에서 저서 집필 작업을 해왔다. 첫 번째 총서는 ‘움직임의 철학’의 핵심 개념들과 운동 패턴들을 방법론적 틀로 사용하여 인간 지식의 다섯 가지 주요 차원(정치, 존재론, 미학, 과학, 지구)을 다루는 여섯 권의 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두 번째 총서는 ‘움직임의 철학’의 역사적 선구자들(루크레티우스, 맑스, 울프)에 관한 다섯 권의 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총서의 세 번째 책 『존재와 운동 : 움직임에 대한 철학의 역사』는 2021년에 한국어로 번역이 되었고, 이 책에서 네일은 운동에 관한 독창적인 역사적 존재론을 전개한다. 이번에 도서출판 갈무리에서 출간된 『객체란 무엇인가 : 운동적 과정 객체론』(2024)은 첫 번째 총서의 다섯 번째 책으로, 이 책에서는 객체들과 객체들을 연구하는 과학에 관한 운동적 과정 이론이 전개된다.
객체 : 운동 중인 물질의 준안정한 구성체
네일의 세계상에 따르면, 이 세상은 마치 끊임없이 흘러가는 강물 속에서 잠깐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다양한 소용돌이의 회집체와 같다. 감각되고 감각하는 이산적인 객체는 “소용돌이처럼 비교적 안정한 패턴 또는 사이클로 ‘접힌’ 물질의 흐름”이다. 각각의 객체는 운동 중인 물질의 순환적 흐름에 의해 재귀적으로 생산되는 운동적 주름이다. 물질은 끊임없이 흐르기에 객체들은 연속적으로 생산된다. 이런 물질의 흐름들은 쉼 없이 반복적으로 접혀서 준안정한 객체들의 순환 장을 생산하고 재생산한다. 그러므로 세계의 존재자들은 물질적 과정을 통한 상호의존성과 공-생산의 관계들 속에서 함께 엮인다. 다시 말해서, 세계는 자체적으로 내부작용하고 객체들은 서로 조명한다.
요컨대, 운동적 과정 객체론에 따르면, 내부작용하는 객체들의 생성과 존속은 물질적·운동적 삼중 과정에 의해 조건 지어진다. 첫째, 운동 중인 물질의 흐름이 있어야 한다. 세계가 정적인 것이라면 생성은 불가능하고, 그리하여 생성은 운동을 전제로 한다. 둘째, 물질의 흐름이 접혀서 주름을 형성하지 않고 그냥 흘러가기만 한다면 국소적이고 이산적인 객체의 생성과 잠정적인 존속은 불가능할 것이다. 셋째, 세계 속에서 객체들이 서로 영향을 미칠 수 있으려면 물질의 흐름과 주름 들이 공-변환과 공-생산의 관계들을 맺고 있는 객체들 사이에서 순환하는 장을 형성할 수 있어야 한다. 요컨대, 객체들의 세계는 물질적 흐름과 주름과 순환 장의 재귀적 운동의 준안정한 구성체이다. 객체들의 외관상 개별성은 객체들을 생산하는 연속적인 물질적 과정들에 의해 형성된 주름들의 국소적이고 잠정적인 준안정성에서 비롯된다. 이는 객체성의 토대가 형이상학적이고 보편적인 실체가 아니라 역사적이고 물질적인 과정임을 뜻한다. 그리하여 특정한 종류의 객체는 특정한 유형의 역사적 운동 패턴에서 생겨난다.
과학 : 운동 중인 객체들의 창출과 분배의 실천
이 책의 핵심 특징 중 하나는 운동유물론적 견지에서 과학에 관한 새로운 과정철학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네일은 과학과 철학 사이의 위계를 구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역사, 철학, 그리고 과학을 가로질러 서로 관련지음으로써 각각의 분과학문이 대개 독자적으로 제시하는 것보다 더 큰 그림을 추구하고자” 하며, 그리하여 과학을 통해서 만들어지게 되는 객체들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네일은 “운동 중인 객체들의 창출과 분배로서의 과학과 지식에 관한 과정 이론”을 전개한다. 다시 말해서 네일은 “ ‘과학’을 상당히 광범위하게 양(量)으로서의 객체들의 창출과 정렬”로 정의한다.
네일은 객체들과 그 관계들이 물질의 흐름들로부터 직조된다는 운동유물론적 관점을 바탕으로, 개별적인 과학적 지식과 객체들이 상이한 운동 패턴들에서 나타난다는 점을 역사적 실례들을 통해서 예증한다. 과학적 지식은 “복잡한 한 점의 자수 작품처럼 객체들과 그 관계들의 반복적인 조율”이다. 그리하여 과학적 지식은 “세계를 재현하지 않고 오히려 세계의 일부”이다. 그것은 “세계가 자신을 직조하고 정렬하는 방식”이다. 이런 의미에서 과학과 세계는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재귀적으로 서로 공-생산하는 되먹임 고리를 형성한다. 또한, 과학은 예술 및 철학과 다르다. “좋든 나쁘든 간에 과학은 객체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제작하고 배열하기 위해 사물들의 양적 차원에 집중하는 인간의 실천이다. 예술은 사물들의 질적 차원에 강렬히 집중함으로써 유사한 작업을 수행하는 경향이 있고, 정치는 사물들 사이의 관계적 차원에 집중함으로써 유사한 작업을 수행하는 경향이 있다.”
네 가지 지배적인 역사적 운동 패턴 = 네 가지 지배적인 과학적 객체
지금까지 토머스 네일은 여러 권의 저서에서, 현대 이전의 서양 역사에서 순차적으로 나타난 네 가지 지배적인 운동 패턴에 의거하여 서양사를 구분했다. 그 네 가지 지배적인 운동 패턴이란 구심적 운동, 원심적 운동, 장력적 운동, 탄성적 운동이다. 네일은 이 네 패턴이 역사 속에서 각각 선사 시대, 고대 시대, 중세 시대, 근대 시대에 나타났다고 보고, 이러한 역사 구분을 토대로 정치, 존재론, 예술, 과학, 그리고 지구의 지배적인 양식들과 그 역사적·물질적 조건들을 탐구했다.
예를 들어, 운동존재론(kinology)에 관한 『존재와 운동』이라는 책에서는 네 가지 운동 패턴에 따른 물질의 흐름과 조율된 네 가지 지배적인 존재론적 관념, 즉 공간, 영원성, 힘, 시간이 상세히 탐구되며, 운동미학(kinesthetics)에 관한 『이미지의 이론』이라는 책에서는 네 가지 지배적인 이미지, 즉 기능적 이미지, 형식적 이미지, 관계적 이미지, 변별적 이미지가 탐구된다. 이와 유사한 취지로, 운동측정학(kinemetrics)에 관한 『객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는 각각의 지배적인 물질적 운동 패턴에 조율된 네 가지 지배적인 과학적 객체, 즉 서수적 객체, 기수적 객체, 강도적 객체, 그리고 잠재적 객체들이 예시된다.
서수적 객체는 선형적 순서열을 통해서 전개되는 객체이고, 기수적 객체는 완전체 또는 단위체를 창출하고 조직하는 객체이다. 강도적 객체는 고도로 분화된 내부 구조를 갖추고 있는 객체이며, 잠재적 객체는 특정되지 않거나 아직-결정되지-않은 다양한 가능성을 지닌 객체를 가리킨다. 당연하게도, 역사적으로 발흥한 이런 객체들은 존속하면서 새로운 종류의 객체들과 혼합되었다. 이런 역사적 고찰을 통해서 네일은 “객체의 종류가 단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과 객체가 불변하는 형상이 아니라 오히려 물질적 역사의 창발적 특성이라는 점”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리하여 관념과 이미지와 객체는 그것들이 출현하게 되는 국소적인 역사적·물질적 조건들과 결코 분리될 수 없으며 오히려 서로 재귀적으로 순환의 장을 형성함으로써 공-생산하게 된다는 점이 부각된다.
현대 객체 = 고리 객체 = 방행적 객체 = ‘비결정적’ 객체
네일은 혼종성, 방행, 그리고 되먹임의 현상들을 연구하는 양자(장)론, 범주론, 혼돈 이론이라는 세 가지 현대 과학에 의해 창출된 운동 패턴에 따라 생성된 현대 객체를 고리 객체 또는 방행적 객체라고 일컫는다. 전적으로 무작위적이지도 않고 전적으로 결정적이지도 않은 ‘비결정성’으로 특징지어지는 이 새로운 객체 종류는 우리로 하여금 “객체들의 핵심에 자리하는 비결정적 움직임을 대면하게” 하면서 이전의 모든 객체의 세 가지 감춰진 차원, 즉 혼종성, 방행, 그리고 되먹임의 차원들을 부각한다. 이를 통해서 네일은 비결정성, 관계성, 과정을 중시하는 자신이 운동적 과정 객체론이 “최근의 과학적 발전과 정합적”인 이론으로서 현대의 역사적·물질적 조건을 파악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희망한다. 게다가, 이런 역사적 탐구를 통해서 네일은 “과학이 기존 객체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객체들을 공-창조한 다음에 사물들의 세계를 재조직하는 데 사용하”는 활동임을 보여준다.
객관주의, 구성주의, 관계적 객체론, 객체지향 존재론의 한계
토머스 네일은 ‘움직임의 철학’이 객체를 정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이론들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 네 가지 이론은 객관주의, 구성주의, 관계적 객체론, 객체지향 존재론이다.
저자에 따르면 객관주의는 객체를 발견과 관찰로 인해 변화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 견해는 객체의 역사와 관계, 행위성을 무시하면서 객체를 철저히 수동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객체가 수동적인 것에 불과하다면 객체들은 어떻게 서로 영향을 미치고 자신과 상호작용하는 관찰자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겠는가?
구성주의의 문제는 객체가 인간이 그것에 관해 생각하거나 진술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봄으로써 객체는 자신의 행위성과 다른 객체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역량을 모두 빼앗기게 된다는 것이다. 객체가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고 참신성을 생성할 수 없다면 그것은 어떻게 해서 창발하고 변화하는가? 저자에 따르면 구성주의는 인간이 자신의 세계에 갇힌 채로 남겨 두는, 인간 주체와 자연적 객체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상정한다.
관계적 객체론들은 이런 분리를 거부하고 객체들이 자신의 관계들을 통해서 작용한다고 인식한다. 그렇지만 문제는 이 관계들이 객체들에 선행하고 객체들을 넘어섬으로써 객체들을 완전히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객체의 행위성과 운동은 어디에 있는가? 관계적 객체론에서 변화는 네트워크에서 일련의 돌연한 ‘정지 화면’처럼 생겨난다.
마지막으로, 객체지향 존재론은 객체를 불변하는 본질, 사회적 구성물, 또는 관계들로 환원하지는 않으려고 하지만, 객체를 완전히 희생함으로써만 그것을 구한다. 결국에 객체의 본질은 궁극적으로 세계를 초월하고 그것이 맺은 모든 관계로부터 차단된다. 핵심 모순은 객체의 본질이 모든 변화의 원천이지만 절대 작용하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객체지향 존재론은 궁극적으로 부동성과 정적 변환의 철학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 네 가지 객체론은 모두 다르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움직이지 않는 무언가(본질, 심적/사회적 표상, 평평한 관계성, 또는 전적으로 불활성의 본질)로 객체의 움직임을 설명하고자 한다. 여기서 문제는 네 가지 이론이 모두 주체와 객체 사이의 분열 또는 객체와 관계 사이의 분열로 시작한다는 것이다.
움직임의 철학, 운동지향 객체론
서양 문명의 위대한 정신들은 진짜 부동의 것을 찾아내는 데 헌신해 왔다. ‘부동의 원동자’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관념, 고정된 ‘점’이라는 아르키메데스의 관념, ‘확고부동한’ 확실성이라는 데카르트의 관념, 신성한 시계공이라는 뉴턴의 관념, 그리고 심지어 블록 우주라는 아인슈타인의 관념은 모두 이런 거대한 노력의 일부이다. 그런데 이들로 하여금 이러한 탐구를 하도록 고무한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이 책은 이런 물음에 응답하는 한 가지 관점을 제시한다. 달리 말해 이 책은 지금까지 과학적 지식과 수학적 지식이 객체들을 통해 이런 물음에 응답한 방식에 관심이 있다.
움직임의 철학은 무엇이 다른가? 저자에 따르면 중대한 차이는 그 철학이 무언가 다른 것으로 움직임을 설명하는 대신에 오히려 모든 것은 운동 중에 있다는 역사적 지식에서 시작한다는 점이다.
움직임은 비결정적이고, 관계는 비결정적 관계이다. 저자가 보기에 물질의 움직임은 더 상위의 인과적 설명도 없고 외부의 인과적 설명도 없다. 또는 적어도 지금까지는 실험적으로 검증된 것도 없고 그에 대한 암시도 없다. 저자는, 비결정적 움직임의 진행이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야 할 자연의 근본적인 면모라는 실제적 가능성을 철학적으로 선택하겠다고 말한다. 서기전 1세기에 루크레티우스가 물질의 비결정적 클리나멘(clinamen)을 자기 철학의 핵심에 둔 후에 수 세기 동안 주해자들이 주저했지만, 이제는 이 관념이 강력히 귀환했다. 저자는 이 전통을 되살리고자 한다고 말한다.
정지 상태에서 움직임으로 이행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낸다. 『객체란 무엇인가』는 정지 상태에서 시작하여 움직임과 과정을 설명하고자 하는 대신에 오히려 이 논리를 뒤집는다. 이 책은 양자 유동의 역사적 발견에서 시작하여 안정한 과학적 지식의 창발을 설명하려고 한다.
3. 『객체란 무엇인가』 책의 구성
객체에 관한 책이자 객체 창조의 실천으로서의 과학에 초점을 맞춘 책인 『객체란 무엇인가』는 서론과 세 개의 편(Part)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론」에서 네일은 이 책을 저술하게 된 동기와 지향점을 제시한다. 여기서 네일은 “우리는 객체들로 넘쳐 나는 세계에 살고 있지만, 현대 물리학의 가장 혁명적인 발견은 객체성의 토대가 결코 객체가 아니라 과정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여기서 저자는, 움직임의 수위성에 근거하여 “객체를 정적 형태로 간주하는 대신에 오히려 준안정한 과정으로 간주”하도록 고무하고자, 이른바 과정유물론 또는 운동유물론에 기반을 둔 운동적 과정 객체론의 윤곽을 제시한다. 특히 저자가 추구한 목표 중 하나는 “관찰자-의존성을 진지하게 여기고서 객체들을 창출하고 유지하는 데 관여하는 감춰진 과정과 수행 들을 탐구”함으로써 과학의 과정철학을 제시하는 것임을 밝힌다. 그리고 이 책에서 저자는 운동적 과정 객체론을 통해서 객체들의 철학, 역사, 그리고 과학에 세 가지 주요한 기여를 했다고 주장한다.
1편 ‘운동적 객체’에서 저자는, “객체를 정적이거나 이산적인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움직임의 과정으로 간주하자고 제안”하기 위해, 객체들이 생성되고 변화하는 방식을 설명하는 세 가지 개념, 즉 흐름, 주름, 그리고 장의 개념들을 세 개의 장(Chapter)에 걸쳐 소개한다. 또한 여기서 저자는 수, 지식, 준거, 그리고 관찰 같은 중요한 과학적 개념들에 대한 운동 기반 해석을 제시함으로써 과정 기반 과학론의 윤곽을 제시한다.
2편 ‘객체들의 역사’에서 저자는 1편에서 전개된 운동유물론적인 개념적 틀을 사용하여 “선사 시대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과학적 지식의 역사를 재해석”한다. 여기서 저자는 “과학을 독특한 이론적 실천으로 더 진지하게 간주”하면서 다양한 과학적 객체들의 창발을 역사적 접근법을 통해 해명한다. 그리하여 현대 이전의 서양에서는 네 가지 고유한 운동 패턴을 따르는 네 가지 주요한 객체 종류가 발명되었음을 보여준다. 저자의 고찰에 따르면, 선사 시대에는 구심적 운동 패턴을 따르는 서수적 객체들이 발명되었고, 고대 시대에는 원심적 운동 패턴을 따르는 기수적 객체들이 발명되었고, 중세/초기 근대 시대에는 장력적 운동 패턴을 따르는 강도적 객체들이 발명되었으며, 근대 시대에는 탄성적 운동 패턴을 따르는 잠재적 객체들이 발명되었다. 각각의 역사적 시대에 발흥하여 지배적인 것이 된 네 종류의 운동 패턴과 객체들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네 개의 부(Section)에 걸쳐 이루어진다. 여기서 이루어진 역사적 고찰을 통해서 저자는 “객체의 종류가 단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과 객체가 불변하는 형상이 아니라 오히려 물질적 역사의 창발적 특성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3편 ‘현대 객체’에서는 혼종성, 비결정성, 그리고 관계성으로 특징지어지는 다섯 번째 종류의 객체, 이른바 ‘고리 객체’ 또는 방행적 객체의 기원이 된 세 가지 주요한 현대 과학, 즉 양자론, 범주론, 그리고 혼돈 이론에 대한 해석이 네 개의 장에 걸쳐 제시된다. 여기서 저자는 현대 객체에 대한 고찰을 통해서 “역사는 선형적이지도 않고 점진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공존하고 중첩하는 객체 형성 패턴들을 나타낸다”라는 사실을 파악하고자 시도한다. 만약 우리가 현존하는 객체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다면 그 객체들이 “앞서 나타난 객체들의 역사와 구성적으로 뒤섞이는 방식을 이해해야 한다”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특히, 저자는 운동적 과정 객체론이 ‘비결정론적’ 해석에 의거한 최신 과학들에 부합하는 동시에 과학적 실천들이 모두 ‘비결정적’ 운동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객체란 무엇인가』에서 토머스 네일은 그레이엄 하먼의 객체지향 존재론을 ‘정적 객체론’의 하나로 비판하면서 독특한 운동지향 객체론을 전개한다. 객체지향 존재론의 창시자 그레이엄 하먼은 『사변적 실재론 입문』(갈무리, 2023)의 한국어판 지은이 서문에서 토머스 네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젊은 세대의 가장 반(反)-객체지향존재론적인 사상가는 최근에 이주 정치에서 운동의 존재론에 이르기까지 여러 권의 책을 저술함으로써 돌연 눈에 띄는 인물이 된 미국인 신유물론자 토머스 네일임이 확실하다. 또한 대체로 들뢰즈주의적 경향을 좇는 네일의 과정과 흐름에 대한 애호는 멕시코의 사빠띠스따 운동에 관한 그의 특별히 정통한 지식으로 채색된, 정치에 대한 일반적으로 맑스주의적인 접근법과 결합하여 있다.”
요컨대, 이 책은 “인간이 번성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인간이 소멸하는 데 이바지할 수도 있”는 과학과 그 객체들에 대하여 운동유물론적 움직임의 철학에 기반을 둔 해석을 제시하고 있는 책
책 속으로
인간이 사물을 주로 양(量)의 관점에 바라볼 때, 나는 이것을 ‘객체’라고 일컬었다. 과학은 객체들에 관한 연구이다.- 한국어판 지은이 서문, 8쪽
우리는 객체들로 넘쳐 나는 세계에 살고 있지만, 현대 물리학의 가장 혁명적인 발견은 객체성의 토대가 결코 객체가 아니라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런 매혹적이고 기이한 사태가 이 책을 고무한 동기이다 - 이 책의 목표는 운동적 과정 객체론을 제시하는 것이다.- 서론, 15쪽
모든 객체가 물질 흐름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주름은 상대적 정지 상태 또는 안정성의 운동적 구조물이다. 주름은 나선형의 폭풍 체계와 같다. 주름은 물질의 흐름을 자신으로 되돌아오도록 방향을 돌림으로써 고리를 형성하는 과정이다.- 2장 수의 주름, 61쪽
물질은 알려지거나 현존하기 위해 자신을 관찰할 인간이 필요하지 않다.- 3장 지식의 장, 98쪽
인간이 도구를 제작하기 시작한 시기와 같은 시기에 기호를 표식하기 시작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두 기법은 모두 동일한 구심적 운동 패턴을 따른다.- 5장 선사 객체, 127쪽
객체가 자신의 운동과 변화의 원천이라면 그 형태는 고정되어 있지도, 영원하지도, 불변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내부적으로 역동적이다.- 9장 장력적 객체, 209쪽
자연은 진공을 혐오하지 않는다. 자연은 진공을 경애한다.- 16장 현대 객체 I : 양자론, 338쪽
객체(Object)= 속성 (Attribute)+ 기능 (Function)
객체는 이름 있는 사물
객체들의 역사, 새로운 역사로서의 객체들
더 이상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계속 살아갈 수는 없다. 더 많이 벌어서 더 많이 소비하려고 하는 그런 쾌락주의적인 삶의 방식과 태도를 계속 이어갈 수는 없다는 말이다. 이른바 근대적인 생활의 양식은 알고 보니 재앙과 공멸을 향한 자각 없는 질주였다. 개발과 성장이라는 명분으로 자연을 자원화하고 또 상품화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했다. 해방과 풍요라는 달콤한 거짓말로 과도한 소비의 죄의식을 둔감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근대적인 것은 온갖 신화와 환상의 뒷받침 속에서 비윤리적인 낭비를 자극하는 체계였고, 잔혹한 약탈들을 통해서 탐욕적인 누군가들의 이익에 복무하는 체계였던 것이다.
근대문명에서 비롯된 위기의 목소리들은 숱한 대안의 담론들을 불러왔다. 위기에 대한 자각은 그 타개책을 촉구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근대라는 역사적 시대의 선도자였고 그 문명의 개척자였던 서구에서 먼저 그 대안의 사상과 철학들이 쏟아져 나오게 되었던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위기의 진앙지인 서구에서 근대와 근대성에 대한 비판과 성찰이 이루어졌고, 사상과 문화의 그런 잡다한 흐름을 포괄하여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모호한 이름을 가져다 붙였다. 그것의 모호성은 역사적 근대에 대한 발본적인 해체와 극복을 외치는 목소리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수정과 보완을 통해 그 근대를 더 급진적으로 밀고 나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뒤섞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제의 중핵은 근대문명을 세계적인 체제로 정착시킨 서구가 그 역사적 근대의 주체로서 부각시킨 독립적이고 자율적이라고 여겨지는 '개인'이라는 이념이었다. 요컨대 근대의 인간은 개인이었고 그 개체적인 독립의 근거는 세계를 탈주술화하는 역능 즉 ‘이성’이었다. 그로써 유기적인 전체의 일부로 여겨졌던 인간은 그 연결의 망을 빠져나오는 것을 자유라고 여겼고, 그 전체에 대한 부담으로부터의 해방을 권리라고 여겼다. 그렇게 독존의 자리에 오른 근대의 인간은 바로 그 유기적인 전체를 산산조각으로 파열시켰고 섬세하게 연결된 생명의 망을 교란하였다. 따라서 근대문명의 어떤 한계와 더불어 위기에 이르렀다고 했을 때 가장 우선적인 타격의 대상은 바로 그 인간이라는 관념이었다. 순식간에 오랜 전통의 휴머니즘은 알량한 것이 되어버렸고, '주체의 죽음'이라는 자극적인 표현으로 반인간의주의의 구호들이 복창되었다.
근대의 인간을 어떻게 넘을 것인가. 이 어려운 질문이 인간 너머의 또 다른 존재들, 즉 비인간을 새롭게 발견하도록 이끌었다. 그리고 마치 그 옛날의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모호한 이름처럼 '포스트휴먼'이라는 이름이 학지(學知)의 장 안팎으로 빠르게 번져나갔다. 인간중심주의가 벌여놓은 이 행성적 위기의 시대를 건너기 위해서는, 결자해지의 차원에서 바로 그 문제의 원흉인 근대의 인간에 대한 공고한 관념을 탈구축해야만 했던 것이다. 여기서 가장 극적인 대목은 그 탈구축의 거대한 기획을 위해 기존의 학문적 패러다임 자체를 비판적으로 갱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고루한 분과학문의 체계, 특히 인문학과 자연학을 대립적으로 보는 관성적인 시각으로는 이 복합적이고 총체적인 인류세의 문제에 제대로 접근할 수조차 없었다. 그래서 온갖 근대적 이분법의 원조인 주관과 객관의 이항대립을 융합적 혹은 상호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중요하게 부각하였으며, 그 둘의 관계에 중점을 두게 됨으로써 그 각각을 본질적인 실체로서 상정하는 사유의 관성이 타파되었다.
인문사회학과 과학기술학이 관계를 맺으면서 인간에 대한 새로운 관점, 즉 인간 역시 다른 비인간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행위자’라는 사실이 강조되었다. 나아가 이제는 위계적인 혐의가 짙은 주체나 주관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나 인간과 비인간을 비롯한 세상의 모든 물질을 객체로 바라보는 시각이 강력하게 제기되었다. 인간중심주의적 시점의 고착에서 벗어나 이 세계의 모든 것을 물질로서 이해하되 전통의 학지인 유물론과는 결정적으로 다른 시각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물질 즉 객체를 정적인 대상으로 여겼던 유물론과는 달리 신유물론에서는 그것들이 서로 관계성을 맺고 이어져 능동적으로 활동하는 행위자로서 이해되었다. 브뤼노 라투르의 '행위자-네트워크-이론'은 바로 이러한 관점을 포괄하는 가장 널리 알려진 담론이었다.
토머스 네일(김효진 옮김)의 <객체란 무엇인가>(갈무리, 2024)는 신유물론에서 다루어왔던 객체의 문제를 통시적으로 개괄하는 가운데서 저자 나름의 독창적인 관점을 도출하고 있는 저작이다. 그래서 이 책은 무엇보다 그 포괄적인 서술을 통해 객체에 대한 정밀한 이해를 돕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충실한 객체학 교과서 내지 개론서로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특히 모두 3편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2편인 '객체들의 역사'는, 선사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객체에 대한 갖가지 논의들을 '과정 이론'이라는 저자 나름의 관점에 입각하여 자세히 논구하고 있다. 이를 통해 객체에 대한 지식의 역사를 통시적인 맥락 속에서 거시적으로 조망할 수 있게 된다. 한편으로는 이 부분에서 저자인 토머스 네일이 자기만의 객체론을 정립하기 위해서 객체에 대한 기존의 논의들을 얼마나 방대하게 또 세밀하게 독해하였는가를 확인할 수가 있다.
이런 구분이 구태의연할 수도 있겠지만 토머스 네일은 과학자라기보다는 철학자이다. 이 책은 객체에 대한 논의이면서 동시에 객체를 논의하는 지식과 그 역사에 대한 논의이기도 하다. 요컨대 저자는 이 책에서 철학자와 과학자와 역사가의 역할을 서로 융합하고 있다. 객체에 대한 과학적 논의는 그것에 대한 지식과 앎에 대한 인문학적 논의와 더불어서 전개된다. 그러나 그 논의는 단순히 통섭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철학적 관념이 과학을 이념으로 굴절시키는 왜곡에 대한 경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저자는 철학적 이념과 같은 가상적 경계들이 과학의 지식을 고형화된 것으로 환원시킬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일이관지하여 저자가 강조하는 핵심의 키워드는 '운동'이다. 그러나 정태적인 것에 대해 운동적인 것을 선호하는 일관된 관점 역시 철학적 관념의 소산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행위와 이동이라는 과정의 양상에 대한 철학적 소신이 객체의 능동적 운동에 대한 신유물론적 논의들과 적절하게 결합하고 있다는 말이다.
자연은 유동하고 객체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이라는 그 역동성과 비결정성의 개방성에 대한 강조는 그 자체로 특별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 책은 그런 '과정철학'의 관점을 그저 소개하려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그 관점에 입각해 객체의 창발을 위한 일반 조건을 이해하는 것, 즉 객체와 순환의 패턴을 만들어내는 데 있다. 그것을 저자는 '객체 창조의 실천으로서의 과학'이라는 말로 집약하였다. 객체에 대한 지식은 그것이 단지 선험적이거나 정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이고 관계적이라는 것에 대한 앎의 문제로 국한되지 않는다. 진정한 운동은 그 지식을 통해 객체의 운동성을 관계들 속에서 역사적인 과정으로 실현해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저자가 한국어판의 서문에서 "과학은 인간이 번성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인간이 소멸하는 데 이바지할 수도 있다"고 한 것의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운동은 말 그대로 동적이고 개방적인 과정이다. 그런데 이 책의 독특한 논지는 그 운동이 드러내는 나름의 패턴에 주목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운동이라는 비결정성의 예외를 패턴이라는 일관된 규범의 양상과 더불어서 논의하고 있다. 저자 스스로도 이 책의 의미를 "과학의 역사에서 운동 패턴으로서의 객체의 행위성에 관한 최초의 연구서"라고 분명하게 꼬집어서 밝혀 놓았다. 그리고 그 요지는 이렇게 정리된다. "객체는 단지 거시적 층위에서 근사적으로 동일할 따름이고, 한편으로 미시적 층위에서는 점점 더 차이가 나게 된다." 역사는 목적론적 서사에 따라 펼쳐지는 일방적 과정이 아니라 혼성적이고 비결정적이고 관계적인 성격을 갖는 객체들이 흐름과 주름의 운동 속에서 어떤 준안정적인 패턴을 펼쳐 보이는 장으로 드러난다. 달리 말하자면 객체의 역사는 무질서한 예외의 흐름(미시적 차이화) 가운데서도 준안정적인 패턴이라는 나름의 규범화된 질서(거시적 동일화)를 창발하는 복합적인 과정인 것이다.
객체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비결정적인 운동의 과정을 통해서 가치를 창출해내는 유동과 변이의 양상이라고 보면서도, 그렇다고 그것이 규정될 수 없는 무작위적인 것이 아니라 나름의 안정된 질서를 표현하는 '준 안정한 복합체'라고 하는 토마스 네일의 객관론은, 무책임한 상대주의와 고답적인 규범주의를 넘어 창발적인 실천의 세계관을 제시하려는 의욕적인 시도이다. 문명에 대한 비판이 그 반대급부로서의 자연에 대한 당연한 회귀를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만큼 안이한 도식주의도 없을 것이다. 세밀하고 정치한 이론적 탐구를 건너뛰고 거시적인 반대급부의 제안들만으로 새로운 역사의 가능성을 열어낼 수 없다는 말이다. 이 책은 안이한 비판과 나태한 급진을 넘어 정치한 이론의 탐색이라는 성실함을 통해 실천 가능한 대안의 밑그림을 그려 보인다. 이 행성적 위기의 시대에 우리는 어떤 패턴으로 객체의 능동성을 창발하게 만들 것인가.
전성욱 동아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 프레시안
'세상과 어울리기 > 서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 행동이 대양의 작은 물방울에 불과할지라도 (0) | 2024.07.14 |
---|---|
폭염 살인-폭주하는 더위는 어떻게 우리 삶을 파괴하는가 (0) | 2024.07.14 |
이상한 동물원의 행복한 수의사 (0) | 2024.06.24 |
불로소득의 시대, 부자들의 정체 (0) | 2024.06.11 |
강요된 소멸 (0) | 2024.05.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