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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괜찮은 詩

마음이 사라지지 않아서―조금 센치한

by 이성근 2023. 1. 6.

말 달리자 아버지, 역발산 아버지 김왕노

아버지

어머니 나를 낳으신다

그리운 파란만장

나의 국적

갈대본색

오래된 독서

 

 

劉伶 / 박정대

그대의 私有地

, , 정전

카바레 드 자사생

 

악마를 위하여 / 장석원

한 여자가 있다

세상이 끝날 때까지 / 최지인

마음이 사라지지 않아서조금 센치한 / 이다희

검정코트의 어려움

시 창작 스터디

늦게 오는 자장가

 

Bucket List / 진은영

지난해의 비밀

그 머나먼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비가 2붉은 달 / 기형도

포도밭 묘지 2

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

죽은 구름

없는 사랑에 대한 에스키스

 

https://www.youtube.com/watch?v=HVk4GyjPZmI 

 

 

말 달리자 아버지, 역발산 아버지 김왕노

 

아버지 저승에서 이제 잘 있는지 몰라

아버지 좋아하시던 막걸리 앞에 두고

멸치 안주를 찾을 때 수국 꽃이 저승 마당에

아버지 측근으로 다소곳이 수발드는지

아버지가 저승 푸른 초원에 방목한 말이

지금은 몇 마리 새끼를 쳐서 돌아오는지

집문 밖으로 귀를 기울이시는지도 몰라

아버지 술기운 아니어도 역발산 같으셔서

못 치우거나 못 갈아엎으시는 것이 없으셔

아버지 만물박사라 못 고치는 것 없었는데

아버지, 아버지 이제 저승에서 난봉꾼으로

고무신 끝 살짝 들어 올리시는 춤사위로

청사포 끝자락 살짝 감아올리는 춤사위로

저승 한 시절 그렇게 보내셔도 좋은데

아버지 그래도 이승에 한 번 와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북벌의 말 한 번 달리자니까,

가쁜 숨 몰아쉬며 부자지간 진한 혈육으로

장백산으로 발해로 말 달리자니까?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저승에서도 역발산인 아버지

 

 

아버지

 

줄 것 다 주어 버리고도

발에 걷어차이는 게 개밥그릇이다.

뺏길 것 다 뺏기고 노리개로

개가 잘근잘근 씹어대는 것이

개밥그릇이다.

밤이 늦어 귀가하다보니

세월에 걷어차여 개밥그릇으로

어둑한 구석에 나뒹구는 아버지

평생 허기진 개밥그릇 아버지

세상의 모든 아버지

 

폐닭

 

저기 밑이 빠진 어머니 홀로 살고 있다. 케이지 식 닭장에서 다산성을 강요받아 밤낮 알을 낳다 밑이 빠진 어머니, 자식 줄줄이 낳다가 삭아진 어머니, 꼬끼오 울 힘도 없는 어머니, 이제 저기 눈곱 낀 채 해바라기 하고 있다. 오가는 사람에게 초점을 맞춰 바라보려 안간힘을 쓰지만 자꾸 초점이 흐려지는 어머니, 이제 어떤 요리법으로 요리를 해도 맛이 없는 폐닭 기름기가 다 빠진 어머니, 자식도 그 무엇도 찾지 않는 어머니, 버려진 어머니, 여린 햇살의 온기만으로도 졸리는 어머니, 세상의 모든 어머니, 지팡이 하나 의지하여 밤을 만나고 저녁을 맞이하고 꼬부랑 허리로 꿈속을 가는 폐닭 어머니, 그 좋던 청춘 자식으로 쑥쑥 낳고 골병 든 어머니, 버려진 듯 세상 구석에 웅크려 부들부들 떠는 어머니

 

 

어머니 나를 낳으신다

 

어머니 주름진 얼굴로 삭아 내린 몸으로 다시 나를 낳으신다. 제발 이렇게 살지 말라고 다시 새롭게 살라고 어머니 다시 나를 낳으신다. 밖에는 비가 오는데 세상은 질척거리는데 미역국을 끓여줄 그 누구도 없는데 어머니 혼자서 다시 나를 낳으신다. 착하게 살라고 후회하지 않는 사람이 되라고 어머니 내 탯줄을 끊어주실 힘이 없는데도 어머니 촛불 하나 켜놓으시고 정화수 한 사발 떠놓으시고 어머니 다시 나를 낳으신다. 고령이어서 위험한 데도 어머니 다시 나을 낳으신다. 뜨거운 눈물로 비린 눈물로 이놈아 제발 인간답게 살라면서 이 신 새벽 내가 훔쳐보는 것도 모른 채 다시 나를 낳으신다. 두 손 삭삭 부비면서 미운 털 박힌 며느리처럼 어머니 차디찬 부엌에서 다시 나를 낳으신다.

 

 

그리운 파란만장

 

고맙다 파란만장아

네가 아니면 어떻게 그렇게 출렁였고

네가 아니면 어떻게 그렇게 슬퍼했겠고

네가 아니면 어떻게 그렇게 아파했겠고

네가 아니면 어떻게 그렇게 헤매다가

 

꽃을 보고 새를 만나고

그 먼 강둑에 앉아 흐르는 강물을 보았을까.

 

파란만장하니 인생이다.

파란만장하니 노래한다.

파란만장하니 사랑한다.

파란만장하니 그립다.

파란만장아 고맙다, 파란만장하니 고맙다.

 

 

나의 국적

 

누구에게나 국적이 있지만 나의 국적은 너다.

한 때 나의 국적은 풀꽃이었고

한 때 나의 국적은 내리는 봄비였지만

지금 나의 국적은 너로 바뀌었다.

지금껏 내가 걸은 길은 네게로 가는 망명의 길

푸른 봉분을 가진 내 무덤을 쓸 곳은 바로 너다.

이중국적이니 국적불명도 아닌 나의 국적은 너다.

 

 

갈대본색

 

20142월 초입 살 얼음 낀 임진강변에

아직도 바람을 업고서 강 건너 편을 향해

허리를 반 쯤 찬 물에 담그고 선 갈대는

우리가 달래서 집으로 데려오지 못한 실향민

 

그 강물 얼마나 깊고 세찬지

아직도 배 띄워 그가 건넌 적 없다.

 

 

오래된 독서

서로의 상처를 더듬거나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는 게

누구에게나 오래된 독서네.

일터에서 돌아와 곤히 잠든 남편의 가슴에 맺힌 땀을

늙은 아내가 야윈 손으로 가만히 닦아주는 것도

햇살 속에 앉아 먼저 간 할아버지를 기다려보는

할머니의 그 잔주름 주름을 조용히 바라보는 것도

세상 그 무엇보다 중요한 독서 중 독서이기도 하네.

 

하루를 마치고 새색시와 새신랑이

부드러운 문장 같은 서로의 몸을 더듬다가

불길처럼 활활 타오르는 것도 독서 중 독서이네.

아내의 아픈 몸을 안마해주면서 백년 독서를 맹세하다

병든 문장 문장으로 쓰진 아내여서 눈물 왈칵 쏟아지네

 

 

 

 

劉伶 / 박정대

 

유령이 내게 말하길, 시가 잘 씌어지지 않을 때는 술을 마셔라

태풍의 한가운데서라도 술은 너를 위로하리니 사랑이 오지 않을 때도 한세월 술을 마셔라

살아서 네가 마시는 술은 굳건한 너의 , 너의 생을 생으로 빛나게 하는 것도 술이었나니

술이 다 떨어지는 시간이 오면 그때 시를 써라

사랑이 다 떨어지는 시간이 오면 그때 시를 써라

 

시를 쓰고 또 쓰다가 그래도 시가 되지 않을 땐 술병에서 출렁이는 까만 밤의 머루주를 마셔라

 

살아 있는 것들이 내게 말하길, 시가 잘 씌어지지 않을 때는 月下獨酌 스스로 빛나는 시가 돼라

 

 

 

그대의 私有地

 

바닷가 길을 따라 오래도록 걸었네

山東의 갈매기들이 넘나드는 중국식 해변에서

걸을 때마다 내 발자국 속에서는 한 왕조가 생겼다

사라지고, 내 발걸음은 여전히 추웠네

그대는 저 해송 너머

노나라이거나 제나라

그 어느 햇살 자욱한 平原

한 나라를 꾸리고 있었던 것이냐

그 나라의 신민들은 그대의 품 안에서

여전히 사랑처럼 따뜻했던 것이냐

바닷가 길을 따라 항구도 없는 해변을 오래도록 걸었네

내가 걸어가는 해안의 사막으로는 겨울이 와서

뒤뚱거리며 나와 함께 걸어가고 있었네

태양은 딱딱한 밀떡처럼 하늘에 걸려 나를 내려다보고

어느 왕조의 흥망처럼 나는 절뚝이며 걸었네

내가 걸어가던 산뚱 반도의 끝에

그대는 파도에 깎인 와불처럼 그렇게 누워 있었던 것이냐

내 마음의 밀울이 끝내 파도치며 가 닿는 곳에 그대는

내가 꿈꾸는 만큼만 그렇게 누워 있었던 것이냐

威海, 바닷가 길을 따라 오래도록 걸었네

가끔씩 내 외투 속 마음만이 항구가 되는 위해에서

딱딱한 햇살에 부딪히며 나는 걸었네, 그대가 없는

그대의 사유지에서

그대 허락도 없이 꿈꾸던

위험한 사랑의 行步

 

 

, , 정전

 

아주 늦은 저녁

다시 아비정전을 보네

늘상 그렇듯이, 불을 끄고 누워

저 홀로 반짝이는 화면을 보네

야자수 정글 사이로 기차가 지나가면서 영화는 시작되네

코끼리도 보이지 않는 그 야자수 정글은 필리핀이었을까

두만강변이었을까, 아니면 내 마음속 비 내리는 숲이었을까

아주 늦은 저녁

아비정전을 보며 나는 끝내 코끼리처럼 말이 없네

비 내리는 화요일의 기억들, 기억들이 부슬부슬 비 내리는 화요일

화요일에 비가 내리는데 존 레논은 왜 오노 요코를 사랑했던 걸까

존 레논을 어디에서 죽었지, 정글이었나

삼류 영화 같은 내 기억의 한구석

내가 사랑했던 그녀는 어디에서 죽었지

필리핀의 야자수 정글 속이었나

햇살 가득한 내 청춘의 뒤뜰이었나

아주 늦은 저녁

아비정전을 보며 한 잔의 술을 홀짝거리네

왜 죽었지, 취하지도 않는 저녁 아비는 열차에서 죽어가고

열차는 야자수 정글 사이를 통과해 가는데

불 꺼진 내 마음이 멀리서 반짝이는 혹성 하나를

아득히 바라보고 있는

, 비 내리는

정전이 씌어지는 음악의 밤이다

 

 

카바레 드 자사생

 

지구의 한 켠에 가로등이 켜지면 카바레 드 자사생이 조심스럽게 돋아난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누군가 혹한의 생을 지나 가까스로 당도한 곳, 어둠이 밀사처럼 당도해 먼저 간판의 불을 켜는 곳, 내 상상의 가장 어둡고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카바레 드 자사생

공간이 때로는 삶을 지배하므로, 삶이 때로는 고독을 풀어놓는 테르트르 광장에 저녁이 오면 나는 또 무거운 침묵의 그림자를 끌고 석양 속을 걸어서 암살자의 주점으로 간다

질투가 끌고 온 삶이 이제사 암살자의 주점에 당도했으니 나를 끌고 온 질투의 생을 끝장내지 않는다면 나 다시는 생을 사랑할 수 없으리라

처음에는 고독이 나를 구원하리라 생각했지만 고독은 궁극의 병, 고독에 사로잡힌 영혼은 아주 비좁은 생을 살다갈 뿐이다

두꺼운 책들을 뒤집어쓰고 잠들던 날들이 많았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건대 내가 사랑했던 것은 이 세계의 허무, 내가 더 이상 나를 그리워하지 않는 날들 속에서 저녁은 너무 일찍 내 창문 곁으로 당도하곤 하였다

그런 저녁의 날들 속에서 술을 마시지 않는다면 내가 어떻게 견딜 수 있었겠는가? 내가 알코올 중독자로 세계의 변방을 떠도는 이유를 이제 그대는 알겠는가?

지구의 한 켠에 가로등이 켜지면 카바레 드 자사생이 조심스럽게 돋아난다

지난여름 그대를 만나 나는 수없이 그대를 죽였으므로 이제는 그대를 만나도 더 이상 암살할 그대가 없다

생은 저만치 흘러가버렸는데 우리는 아직도 여기에 이렇게 머물러 있는 것이다

얼마나 혹독하겠는가? 암살자의 주점에 앉아 술만 퍼마시며 인생을 탕진한다는 것은!

한때는 글을 쓰면서 고상하게 인생을 탕진하려고 한 적도 있었다

이 세계가 글로 씌어진 한 편의 픽션일 거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세계는 결코 씌어지지 않는다

세계는 겨롴 한 편의 아름다운 글로 완성되지 않는다

 

세계를 물들이는 온갖 흉흉한 소문들, 쾌락과 질투에 날뛰는 짐승들의 아비규환, 뒤틀린 우주의 사지, 변형된 영혼들의 사악함, 습기로 가득한 이 낯선 우주의 시간 속에서 이제 나는 내가 기르던 세계의 아름다움에 복수하려 한다

 

이 세계는 고양이들의 발톱에 너무 긁혔다

드디어 욕망의 고양이들에 대한 대학살의 시간이다

지구의 한 켠에 가로등이 켜지면 카바레 드 자사생이 조심스럽게 돋아난다

지난여름을 잊기 위해 나는 참 많이도 걸어왔다

 

무수한 불면의 밤들과 갸륵한 촛불들의 희생 속에서도 추억은 쉽게 암살되지 않았다

추억은 강력한 최음제와도 같은 것, 추억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거리를 방황할 때면 또 얼마나 많은 눈물들이 내 눈동자 속으로 쳐들어왔던 것인가

눈물의 거리를 다 젖으며 지나와 나 이제 사막의 생 앞에 서 있다

 

이곳은 안개도 없고 회한도 없고 작열하는 태양 아래 오로지 낮과 밤의 그림자만이 교차하는 곳

생의 지평선에 걸린 막막한 모래알들의 영사막 위로 단 하나의 생애만이 상영되는 곳

나는 이곳에서 추억의 암살을 꿈꾼다

내 영혼의 지도를 온통 강점했던 추억의 시간들에게 나는 필사적으로 대항한다

 

나는 이제 영혼을 꺼버리고 내 손끝과 내 눈끝에 발전소를 세우려 한다

자가발전의 삶, 그렇게 또 다른 삶이 시작되고 시작된 적도 없는 듯 고요히 소멸해 가리라

지구의 한 켠에 가로등이 켜지면 카바레 드 자사생이 조심스럽게 돋아난다

 

대낮의 열기를 그대로 간직한 마로니에 잎사기 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말들이 소리의 껍질처럼 놓여 있다

선반처럼 추억을 쌓아두는 마로니에 잎사귀 아래에서는 거리의 악사들이 그들의 음악으로 멀리 있는 별들의 묘지를 추억한다

 

포도밭 너머 묘지로 가는 길 위에 나는 잠시 주저앉아 지구의 반대편에 낮게 떠 있을 태양을 생각한다

그대의 머리 위에서 빛나고 있을 그대의 태양을 생각해 본다

그대의 태양이 빛나던 어느 추억의 거리에서 페스트 같은 욕망이 밀려와 그대 생의 아름다운 그림자마저 학살했음을 나는 알고 있다

 

내 욕망의 고양이들이 질주하던 그 거리에서 나는 페스트처럼 그대를 사랑했으나 오 욕망의 잔인함이여

내가 기르던 욕망의 고양이들에 대한 대학살

내가 지금 암살자의 주점으로 가고 있는 가장 은밀한 이유이다

 

더 이상 생을 숨길 곳 없는 자들이 추억을 암살하여 모여드는 곳, 추억이 없으므로 미래도 없는 곳, 그리하여 대낮에도 어둠만이 지배하는 곳

포도밭 너머 별들의 묘지가 있는 곳으로 나는 지금 가고 있는 것이다

지구의 한 켠에 가로등이 켜지면 카바레 드 자사생이 조심스럽게 돋아난다

푸가처럼 밀려오는 어둠

레퀴엠처럼 빛나는 달빛

비에 젖어 있던 날들이 오래되었으므로 이제는 달빛마저도 눅눅하다

그 눅눅한 달빛의 공기를 마시며 나는 암살자의 주점으로 간다

추억의 대학살 뒤에 끝끝내 새롭게 밝아오는 아침이 있을 것인가

그러나 나는 지금 왜 이렇게 추억처럼 졸리운 것인가

죽음처럼 무겁게 졸리운 것인가

 

아 헛되도다, 헛되도다, 죽음마저도 헛도도다, 중얼거리며 이 모든 횡설수설의 끝에서 나는 죽음처럼 곤하게 잠들 테지만

지구의 한 켠에 가로등이 켜지면 카바레 드 자사생이 조심스럽게 돋아난다

 

내가 너를 만나던 그 시간

지구의 한 켠에 가로등이 켜지면 카바레 드 자사생이 조심스럽게 돋아난다

내가 너를 사랑하던 그 시간

지구의 한 켠에 가로등이 켜지면 카바레 드 자사생이 조심스럽게 돋아난다

내가 너를 끊임없이 질투하던 그 시간

지구의 한 켠에 가로등이 켜지면 카바레 드 자사생이 조심스럽게 돋아난다

네가 끝끝내 나를 떠나던 그 시간

지구의 한 켠에 가로등이 켜지면 카바레 드 자사생이 조심스럽게 돋아난다

내가 고요히 세계의 뒤편에서 죽어가던 그 시간

지구의 한 켠에 가로등이 켜지면 카바레 드 자사생이 조심스럽게 돋아난다

(, 나를 그냥 죽게 내버려다오)

 

모두가 어디론가 떠나고 텅 빈 파리의 여름밤 나는 왜 이 낯선 곳에서 혼자 걸어가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 오늘이 도대체 무슨 요일이지, 카바레 드 자사생은 문을 열었나

 

잠들지 못한 추억의 암살자들이 어슬렁거리며 모여드는 지구의 한 켠

지구의 한 켠에 가로등이 켜지면 카바레 드 자사생이 조심스럽게 돋아난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아무르 강과 예니세이 강과 그 광ㄹ할한 자작자무 대평원을 다 지나가면 당도할 수 있는 곳, 어둠이 밀사처럼 먼저 당도해 간판의 불을 켜는 곳, 내 상상의 가장 어둡고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카바레 드 자사생

―――――

*카바레 드 사사생 '암살자의 주점'이라는 뜻을 가진, 파리 18구 몽마르트르에 있던 주점의 이름. 지금은 '라펭 아질' 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악마를 위하여 / 장석원

 

번들번들한 살갗에서 시작된 그것을 나는 모른다.

 

누구의 눈물과 누구의 체액이 나를 슬프게 했는지

알고 싶지 않다

 

나의 일부였던 것이 사라지고 있다

시원은 어두운 주름이었다

 

그것이 나를 왜곡시키고 나를 해석한다

나는 노예이므로 굴종에 쾌감을 느낀다

미래에 사랑이 이루어지고 행복엔 날개 돋을까?

 

개좆 같은 진보, 개좆 같은 진보주의

미래라구?

 

(confusion will be my epitaph. I'll be crying......)

 

 

과거에 묶이는 일이 죄인가

몸 바쳐 사랑할 수 있다면 권력의 노예가 되어도 좋다

 

사랑의 노예가 되는 일이 벌 받을 일인가(사랑이 하룻밤의 꿈이라면 차라리 눈을 감고 뜨지 말 것을) 심봉사라면 눈을 뜨리라 공양미 삼백석

그것도 자본이란 말인가

 

사랑 앞에서 눈 감는 자 나는 부속품이다 나는 기계의 일부이며 지금

녹슬고 있는 과거의 일부이다

 

무릎 꿇는 자의 행복을 거부하지 않겠다

천천히 부서지겠다

5월의 아카시아처럼

 

추억을 향해 후진하는 탱크로리, 운전석의 사내, 과거가 조립한 사내, 어디선가 본 듯한, 현재 속의 과거

 

거기에 아무도 없었다

어둠 속의 흰 바람

 

그림자 없는 아득한 옛 땅, 이득이 없는 옛날

찬란하여 부서지기 쉬웠던

어떤 날의 불안, 부란

태양의 시절 돌아오지 않는다

 

 

사람 위에 해가 있다, 해 위에 풀이 있다, 풀 위에

빨간 피막을 걸치고 뒷걸음치는 석양

촛불 꺼지기 전에

금지되기 전에

황금의 기율 무너지기 전에

긴 사랑을 나누어야 할 밤

 

 

사람 위의 해, 해 위의 풀, 풀 옆에

길게 눕는 달그림자

 

바람의 손가락 피막을 찢는다

 

 

물 밖에 사람과 해와 풀

나무가 녹아내리고, 빌딩이 엉겨붙고, 아스팔트는 물컹거린다

점막은 따갑고, 눈은 충혈되고, 입속의 모래가 뜨거워진다

모래 혓바닥 위에는

 

 

지금의 나와 옛날의 나 사이에 사막 같은 동형성

복제 인간의 벌어진 입을

 

오동나무 잎으로 틀어막을 수 있다면

미역 같은 혓바닥으로 조롱할 수 있다면

차라리 질병으로 도피할 수 있다면

 

선언하리라 나를 파괴할 권리

셀프 킬러, 킬링 필드, 올드 필드

 

그곳에 옛날의 나

오늘은 오늘의 병든 나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나에게 내리꽂히는 불꽃

예광탄처럼 빠져나가는 타액, 정액, 림프액

그리고 신선한 분비액

방울 남지 않았다

 

내 몸의 크레바스, 빙하의 눈썹

그 순결한 틈으로

어둠이 빨려든다

 

새로운 돌연변이가 태어나는 구멍

잡종이여 번성하라

광합성하는 동물이여 지복을 누려라

나의 미토콘드리아는 외계가 고향

나는 흑체, 나의 흑체 복사, 플랑크의 상수

불변하는 나, 불꽃 속의 과거, 내 안의 불꽃

 

그대 따스한가, 그대 어디에서나 나를 느낄 수 있는가, 빙하 속에 어둠이 있는가

결빙된 어둠의 결의처럼 내 혀는 아직 따스하다

 

날이 밝아온다

사랑이 끝난 후

 

아파트에서 뛰어내린 질이 말했다: white male american

울부짖던 에디가 말했다: white male american

 

나는 백인이 아니었지 미국인이 아니었지 남자가 아니었지

아니 남자였지 나는 헝그리 코리안

살아남기 위해 코메리칸이라도 되고 싶었던

어머니 표정 없이 말하네

 

죽을 때까지 선하게 살아라

아들아 나의 아들아

고난이 널 찾아올 테지만 이겨내라

아픈 몸과 더 아픈 몸을 네 몸처럼 사랑해라

아름다운 남자가 되어라 나의 작은 악마야

이룰 수 없는 욕망을 버리고 포기를 배워라

이제 잠들거라 사랑하는 아들아

69년부터 지금까지 나는

네 정맥 속의 뱀을 느낄 수 있단다

 

96년의 나는 늑대인간이었을까

 

안락의자에 앉아 뜨개질하는

엄마 얼굴을 들어 날 봐요

웃어봐요 담배에 불을 붙여줘요

어둠 속에서 할렐루야

한 땀 한 땀 세월을 읊조리는

엄마의 목소리 자꾸 가벼워져

나는 웃다가 울기도 하지만

똥구멍에 털이 돋기도 하지만

엄마 오늘 밤엔 울지 말아요

대신 우는 나를 쓰다듬어줘요

따스하게 발톱 내밀고 고양이처럼

상처를 핥아줘요 이건 열상이에요

내가 모르는 아주 먼 곳의 전염병이에요

나를 잣는 엄마 이제 풀어줘요

할렐루야 울지 말아요

한 번도 없었던 사랑 때문에

저 푸른 초원의 그림 같은 약속 때문에

 

쓸쓸하게 흔들리는 엄마

 

69년의 나는 늑대 새끼였을까

그때 암스트롱이 달에서 손을 흔들었다

슈메이커-레비는 흰 눈썹 같았다

눈썹 한 올 하늘에 심어두고 흰 눈물 흘리면서 그는 말했다

홀로 있는 자 사죄하리라 결국 하나가 되리라 한 덩어리 비애가 되리라

 

그가 입을 다물자

하늘의 눈썹 같은 새 나에게 왔다

 

나는 기원했다

내 몸에 둥지 틀고

알을 낳아다오 검은 새여

사이프러스 언덕 넘어 밀밭을 휘감는 바람 밑에서

나는 무릎 꿇고 기도했다

 

(save me)

 

양질의 상품이 필요해라 불태환지폐는 소용없어요

목덜미를 꽉 물어줘요 바람의 턱에 돋은 수염처럼

내 몸을 할퀴고 지나가는 불꽃이여

 

(kill me)

 

황혼에 물든 저녁 연기, 가을비, 논 가운데의 허수아비

이 모든 이미지들의 가치를 교환해줘

예순아홉번 소멸된 후에, 선라이즈 선셋, 또 하루 지나가는데

 

(forgive me)

 

입속의 손가락이여

바람을 맛봐라

내 몸에 뿌리내린 그의 지문을 더듬어라

번들번들한 살갗에서 시작되어

텁텁한 숨결로 종말을 맞이한 나의 애인이여

나는 볼 수 있으나 내 눈은 볼 수 없고

볼 수 있으나 나는 어두워

입속의 손가락은 피 흘리는데......

 

옛날에 나는 한열이를 위해 혈서 썼고

불사파는 형님을 위해 단지했다가

단지 했을 뿐이라네, 단지 해 있을 뿐이었네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하였기에

단지 소멸할 뿐이라네

사랑뿐이네

 

69년에

아버지의 정자와 어머니의 난자는 나를 만들기 위해 어떤 운명을 결탁했나

나는 모종의 비리 아닌가 나는 음범한 계약 아닌가

너에게 나를 주마 이리로 오라

누워 입을 벌리라

달 뜰 때 내가 보이리라

 

695월에 암스트롱은 고중력 실험실에서 눈물을 흘렸다

호텔 캘리포니아에는 69년의 핏빛 와인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으로

38구경 권총, 러시안 룰렛

한 발의 총알이 나였다

 

양막을 뚫고

탄두에 피를 묻히고 날아가는 은빛 총알

탄착점에 한 남자가 있다

 

그의 일기ㅡ나를 전달해줄, 나를 실어갈 콘베이어 벨트. 거리에 그대의 냄새. 광교 건너 종로 쪽으로 방향을 틀 때, 수갑과 올가미는 도처에서 나를 노린다. 그대가 쇠붙이라면 나는 숫돌이 되겠다.

 

그를 증오한다

 

한 여자가 있다

 

그녀의 일기ㅡ나를 구해줘요. 그대의 사랑이 나를 만들었으므로, 잠시 후의 적막을 위해, 이제 문을 닫아줘요. 성동구 송정동과 성수동의 경계를 비추는 새벽 240분의 가로등. 나는 곧 잊혀질테지만, 성동 소방서 송정 지소의 불빛이 그대의 얼굴을 비추는 순간, 그대의 배면으로 스며드는 것, 도무지 알 수 없는 것.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일. 사랑이 끝난 뒤, 날 위해 빛나던 그도 빛을 잃어버리겠지, 새벽 240분의 가로등은 꺼지겠지. 당직 서는 젊은 소방교의 하품. 성동구 송정동과 성수동의 경계를 비추는 새벽 240분의 가로등. 목덜미를 어루만지는 불빛. 나를 점령하고 있는 환한 악마여.

 

그대가 나를 순식간에 죽이리라

 

목적 없는 목적성이여

작고 애달픈 나의 연인이여

눈구멍에 내려앉는 나비여

흙과 번들번들한 살갗에서 시작된 나의 아름다운 날들이여

 

저주 받으리 한 마리 도마뱀에게 위로 받으리

 

개좆 같은 추억, 진보하는 과거, 진보하는 상처와 함께

 

 

세상이 끝날 때까지 / 최지인

 

급정거한 버스가 경적을 울릴 때

우리는 알았다

잘못된 길이었다

반대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사차선 도로에서

끝과 끝으로

핸들을 돌리며

전진과 후진을 계속했다 비상등을 켜고

생각했다

이 길은 올바른가

무엇을 향해 달리고 있는가

우리는

유혈사태로 가득한 주말을 목격했다

 

시민의 삶은 고독하고 궁핍하며 짧다

이를테면

언젠가 쓸모 있을 거라며

버리지 않은 서랍 속

너절한 잡동사니처럼 그것이

우리의 삶을 밀어내고 있다

무엇을 버려야 하나

수도복 입은 수녀가

소총 든 군경들 앞에서

무릎 꿇고 있다

핏자국이 길게 이어졌고

아내가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깼다

 

군경들은 시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혁명의 법칙

생각만 하지 말고, 당신은 피처럼 용감해야 합니다*

군부는 시민에게 죄를 물었다

외할머니는 죽기 전 이런 말을 남겼다

자주 절망하되 희망을 잃지 말거라

아주 오래전 일이다

가장 약한 자부터

외로워질 것이다

공장을 불태우고

악은 물러가라

악은 물러가라

세상이 끝날 때까지

북을 치는

사람들

 

그사이 나는

은행에서 대출을 받았고

부모에게 돈을 빌려

스물한평짜리 아파트를 전세로 얻었다

견고해 보이던 일상은

빛과 어둠처럼

무너져버렸고 얼마 되지 않아

무너진 세상이 일상이 되었다

누구나 죄인으로 태어나므로

누구도 악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신은 이 세상을

 

온 힘 다해

브레이크 페달을 밟았다

앞을 가로막은 현실

내일의 일과 이번 주의 일

나는 누구지?

잠에서 깬 아내를 쓰다듬으며

이젠 괜찮다고

말했다

 

시민들은 군부의 공격에 맞섰다

달리는 오토바이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모든 것을 빼앗는

불한당에게,

손을 높이 들고

거리를 행진하며

세상이 끝날 때까지

북을 쳤다

악은 물러가라

악을 물러가라

 

*202133일 미얀마 모니와 지역에서 시민 불복종운동이 전개됐다. 이날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한 목소리로 '군부 타도'를 외쳤다. 두개골에 대하여라는 시를 쓴 시인은 군부에 의해 살해당했다. 머리에 총을 맞고 쓰러진 시인을 군인들이 어디론가 끌고 갔다. 그가 지나간 자리는 피로 물들었다.

 

 

 

마음이 사라지지 않아서조금 센치한 / 이다희

 

여기까지 온 당신에게 줄자를 하나 줄게. 어떤 깊이도 잴 수 있는 줄자를. 너무 깊어서 어두워 보이는 것들에 대해 이제 걱정할 필요가 없지. 어떤 어둠도 잴 수 있는 줄자가 있어.

 

당신이 나뭇잎 한 장 어둠을 가지고 있다면 그래서 떨어지는 나뭇잎들을 멍하니 쳐다보게 된다면.

나뭇잎이 쌓인 거리를 걸어갈 때 애인과 당신이 다른 기분에 휩싸인다면.

애인이 당신을 알아주지 않아서 내심 안도한다면.

밥도 지어먹고 잠도 같이 자는데 당신의 나뭇잎 한 장 어둠에 조금도 변동이 없다면.

밥도 지어먹고 잠도 같이 자는 사람이 바뀌어도 나뭇잎 한 장 흔들리지 않는다면?

 

줄자로 당신 옆을 말없이 지나갔던 나뭇잎들을 재볼 수도 있곘지. 풍족하게. 아주 평평하게. 단추를 눌러 줄자를 감아도 돼. 줄자를 가지고 있으면 당신이 시작이니까.

 

나뭇잎 떨어지는 게 아름답다고 말할 것 같은 애인에게.

오늘은 그만하자고 말해야지. 밥을 다 먹어도 잊어버리지 말아야지.

당신은 이렇게 생각했지. 때맞춰 나오는 눈물에 묻어서 먼 곳까지 가야지.

전속력으로 돌아오는 줄자의 진동이 당신 왼손에서 계속 요동치게.

 

요동치게.

 

줄자의 끝이 어둠 속을 해치면서 당신의 왼손을 찾고 있어. 전속력으로.*

그래도 당신 우니까 계속 울어보니까 슬퍼졌지.

겨우 벌어진 틈으로 뭐가 보여?

 

*깨끗이 닦아낸 바닥 위를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조심히 걸어갈 때 생각하지. 더러운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 어디에 숨겨두었을까. 숨겨졌을까.

 

 

검정코트의 어려움

 

최근에 나는 검정코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것은 정말 깨달았다고 할 수밖에 없는데 지금껏 검정코트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친구에게 같이 검정코트를 사러 가자고 했지만 지금 자신이 입고 있는 코트가 검정코트라고 말하면서 나를 가만히 올려다본다

 

너도 언젠가 검정코트를 입어본 적이 있을 것이라고 친구는 말한다 나는 지금껏 검정코트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대꾸한다 검정코트는 기본이지 그런데 원래 기본을 찾기 힘들어 친구는 위로한다 아니 나는 기본이 아니라 검정코트를 사야 하는데 나는 중얼거린다

 

길을 건널 때 손을 번쩍 들어야 해 우리 유치원 때 다 배웠던 거야 나는 유치원 때부터 밤하늘에 떠 있는 별자리를 이해할 수 없었어 아무리 봐도 그냥 애매한 사각형 하나 있을 뿐인데 날개 달린 말이라고 우기다니

 

나는 친구의 검정코트의 어깨를 털어줬다 친구가 웃었다 나는 참지 못하고 페가수스가 실은 잘린 메두사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해줬다 친구 얼굴에 웃음기가 가셨다 어째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야 너 메두사랑 친해? 물어봤고 나는 날개 달린 말을 타는 자식들은 왜 그렇게 재수없냐고 따졌다 나는 밤의 틈 사이로 친구의 얼굴과 손이 튀어나와 있는 것을 확인하고 교차로에서 헤어졌다

 

난 아무래도 검정코트를 사기 어려울 것 같다 내 관심사는 분명 다른 색으로 바뀔 것 같다 만일 검정코트를 입고 어두운 밤을 건너려고 한다면 위험할 것 같아 밤과 검정코트를 구별하지 못한 차가 돌진한다면 아스팔트 도로 위에 누워서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나인지 깨달아야 한다면…… 나는 황급히 폰을 꺼내서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시 창작 스터디

 

토스트를 사먹다가 알던 선배와 마주쳤다. 다희야 내가 너 걱정돼서 하는 소린데 시 그렇게 쓰는 거 아니야. 나도 예전에 시 진짜 열심히 썼거든. 너도 알지? 나는 적당히 대답하면서 토스트를 먹는다. 오늘 점심은 차라리 굶을 것을. 굳이 먹겠다고 내려와서 선배랑 마주쳤다.

 

다희야 소문 들었어. 그 형이랑 왜 헤어졌어? 아니 욕하지는 말고…… 네가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서 그래. 선배는 토스트를 먹는 입으로 자꾸 내 근황을 물어본다. 나는 선배가 그냥 토스트만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난 처음부터 네가 아깝다고 생각했어. 나는 앞으로 볼 일 없으니 그냥 참자고 생각했다.

 

다희야 오빠가 하는 말 다 시 이야기거든. 그러니까 오해하지 마. 그리고 넌 신춘문예는 내지 마. 너랑 안 어울려. 그런데 너 만나는 남자는 있니? 난 토스트를 입에 욱여넣었다. 빨리 먹고 도망칠 생각이었다. 그래도 네가 시인이 되면 좋겠다. 너 진짜 멋있겠다. 선배는 자기 토스트를 다 먹고 나를 쳐다본다. 나는 입에 토스트가 가득 들어 있어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 너 시인 되면 어디 가서 매일 자랑할게. 시집 나오면 많이 살게. 넌 끝까지 써야 돼. 선배는 씩 웃었다. 선배는 어색하게 내 어깨를 두 번 두드리고 토스트 가게를 나갔다. 처음엔 무겁게, 나중엔 가볍게. 나는 토스트가 입에 가득 들어서 고개만 끄덕거렸다.

 

 

늦게 오는 자장가

 

태양은 오늘 조금 늦게 일어났다

세계에 조금 지각한 것이다

이상하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얼음이 옆에 있던 얼음과 붙었다

아주 낮은 온도로 붙었다

얼음과 얼음이 붙어 얼음이 되는 장면은

태양의 꿈이었다

태양이 계속 되감아 보는 좋아하는 장면이었다

눈을 감아도 계속 들려오는 자장가였다

자장가 속에서 계속 살아가는 뜨거운 휴일이었다

휴일 첫날 포기한 자식이었다

큰 개가 꼬리를 잡겠다고 원을 그리며 빙빙 돈다

돌다가, 돌다가 계속 돌다가

갑자기 주저앉는 바로 그 자리였다

하루는 내 옆에 붙어 마지막이 된다

나는 하루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었다

큰 개가 공을 물고 뛰어온다

나는 축축하고 뜨거운 공을 하늘 높이 던졌다

이를 악물었다

지각하지 않으려고 눈을 떴다

 

 

Bucket List / 진은영

 

이보오 스물한살의 용접공 아가씨

다섯 손가락에 불꽃을 달고 강철의 굳은 표정을 멋대로 자르고 이어대는

사랑스런 당신

당신은 먼 후일

더 높은 곳에 오르게 될 것이오

 

이봐요 아가씨

삶은 정말 주머니들로 가득찬 옷 같소

이렇게 많은 감정을

이렇게 많은 사람을 전부 담을 수 있다니

 

이것은 마야콥스키의 말투라오

나는 당신과 닮은꼴인 시인들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여럿 번역했지

물론 감옥에서 말이오

죽음의 발길질이 언제 시작될지 모른 채

가장 빛나는 은빛 양동이에 모든 노래와 소망을 다 담으려 했지

가장 낡은 변두리에서 흘러나오는 더운 하수 같은 노래를

미로처럼 생긴 거리들에서 일제히 떠오르는 빨간 풍선 같은 소망을

 

거짓 없는 흰 발로 올라선 나의 양동이가 차이기 전

내가 마지막으로 작은 수첩에 적은 말은

해방

제국으로부터의 해방

모든 제국으로부터의 해방

이보시오 영리한 아가씨

당신은 서로 다른 풍경 뒤에 놓인 동일한 원인을 잘 알고 있다오

 

수빅의 노동자를 착취하려는 손길이

()제국의 노동자를

제국과 아()제국의 이 어두운 거리들에 물끄러미 세워 놓는다는 것을

장난감 병정처럼

모두 떠나간 놀이터 모래밭

팔다리가 부러진 채 간신히 꽂혀 있는 파란 병정처럼

 

금지된 일터로부터 망명한 당신

다시 돌아가기 위해 26년을 기다리게 될 당신

이보오 올해가 그 마지막 해라오

힘을 내요 당신은 꼭 돌아가게 될 것이오

 

이봐요 환하게 웃는 반백의 아가씨

당신의 삶은 정말 주머니들로 가득한 옷 같소

얼마나 많은 슬픔

얼마나 많은 기쁨

얼마나 많은 분노

얼마나 많은 영혼을 한꺼번에 담을 수 있는지

 

당신을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사람들은 점점 높아가는 가을의 고요하고 무거운 하늘을

올려다볼 것입니다

당신이 야윈 목에 매달고

찰랑이며 올라가는 슬픔과 기쁨의 양동이를

 

나는 그들과 함께 올려다볼 것입니다

그것이 마지막 나의 할 일

마지막 나의 소망

 

19942, 어느 병실에서

 

 

지난해의 비밀

 

구름이 물방울들, 발 없는 영혼들의 몽유병이라는 거

청춘의 고통이 끝나지 않는다는 거

청춘이 끝난 뒤에도 고통이 끝나지 않는다는 거

어떤 싸움이 끝난 뒤에도 끝나지 않는다는 거

나무들, 나무들의

회색 밑둥 아래로 슬픔의 기름이 흐른다는 거

 

인쇄소의 거대한 소음 속에서

감리 보는 사람에게 소리 없이 시가 새겨진다는 거

내가 너를 이미 떠났다는 거

봄이 오고 구름이 지나가고

꽃들은 시를 떨어뜨리고, 거리에서

 

어느 한 줄의 문장을 읽을 무렵

붉은 윤전기가 돌아간다는 것

다시 돌아가기 시작한다는 것

어디선가

고요한 침묵 속에서, 모두 떠나간 자동차 공장에서

 

아이들은 유리로 된 껌을 씹고

아 아 아 웃으며 지나가는 아가씨의 순결한 옆구리에서

창이 튀어나오고

필름을 넣지 않은 사진기의 눈빛으로

네가 그 풍경을, 나를 철컥철컥

찍어댄다는 거

 

배고픈 아이와

죽은 사람의 흰 달을

비 갠 거리, 핏방울

싸움꾼이 잠시 후면 늙어간다는 거

 

종이의 깊은 속에서 가래가 끓고, 그 거품들

너의 왼뺨이 오른뺨보다

따듯하다는 거

내가 네 연인의 연인을 사랑했다는 거

벼락 맞은 한밤의 나무처럼

 

태양이 동그랗고 노란 나뭇잎이라는 거

그래서 매일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새삼 5월을 노래할 필요가 없다는 거

1월에도 12월에도 평등하게, 사이좋게

 

죽음이 흰 유방 열두개를 전부 드러낸 채 거리를 뛰어가고 뛰어갔으니

 

 

그런 날에는

 

산책을 나갈 수 없는 것이다 눈물을 흘리며

가다가 만난 친구에게 다정하고 소소한 안부를 물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함께 걷다가 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자리를 바꾸어

계속 가듯이 그렇게 날씨를 바꿀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왜 마음은 어린 날 좋아했던 음료수병 같지 않을까

아무리 아껴 마셔도 투명한 바닥을 드러내던 그거

마지막 한 방울의 아쉬운 미학을

내가 다 기억하고 있는데

아무리 쏟아도 계속 흐르며 죽은 종이를, 칫솔들, 걔진 구들을

적시는 게, 갈비뼈 사이로 깨진 간장독처럼 줄줄 흐르는

그런 게 내 속에 있는 것일까

이사 트럭처럼

이집 저집 옮겨다니며 소중한 세간살이며 거기에 담겨온 기억을 내려놓고

잘 사세요 애인들이여

 

출발하는 매일의 노동을 나는 모르는 것일까

그런 날엔

네 잠의 허파 속을 가시복어들이 빠르게 헤엄치고 있다고

붉은 얼음 위에 너의 손목들이 길게 놓여 있다고

네가 있는 곳에서 고개를 슬쩍 돌리며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날엔 실례를 무릅쓰고

열다섯살까지 엄마가 나에게 기워 입힌 아버지의 낡은 팬티나

그 떳떳한 바느질 솜씨에 대한 정신분석학이나, 식당에 딸린 방 한 칸을 노래한 시인에 대한 지울 수 없는 연대감, 그가 겸비한 용기와 솔직함에 골몰하느라

나는 솔직하지 않은 게 아니라 용기가 없는 거라고,

용기가 없는 게 아니라 사실의 씨앗을 부드럽게 덮어줄 유머가 없는 거라고,

나에겐 도망칠 수 없는 지리멸렬의 미학이 있을 뿐이라고

 

산책을 나갈 수 없는 것일까

불이 바뀌면 움직이기 시작하는 행인들처럼

금세 건너지 못하고 길게

배를 깔고 누워, 흐릿해져가는 횡단보도처럼

경쾌한 차들이 휭휭 지나쳐가는 굉음의 무게를

모든 세포의 사슬들로 잡아끌면서, 울음도 아니고 웃음도 아니고 그저 무게일 뿐인,

질병도 못되고 회복도 못되고 모종의 이동일 뿐인,

어느 무념의 입술이 책 위의 먼지를 훅 불어버리듯

흩어지고 싶은, 그런 날

 

 

 

그 머나먼

 

홍대 앞보다 마레 지구가 좋았다

내 동생 희영이보다 앨리스가 좋았다

철수보다 폴이 좋았다

국어사전보다 세계대백과가 좋다

아가씨들의 향수보다 당나라 벼루에 갈린 먹 냄새가 좋다

과학자의 천왕성보다 시인들의 달이 좋다

 

멀리 있으니까 여기에서

 

김 뿌린 센베이 과자보다 노란 마카롱이 좋았다

더 멀리 있으니까

가족에게서, 어린 날 저녁 매질에서

 

엘뤼아르보다 박노해가 좋았다

더 멀리 있으니까

나의 상처들에서

 

연필보다 망치가 좋다, 지우개보다 십자나사못

성경보다 불경이 좋다

소녀들이 노인보다 좋다

 

더 멀리 있으니까

 

나의 책상에서

분노에게서

나에게서

 

너의 노래가 좋았다

멀리 있으니까

 

기쁨에서, 침묵에서, 노래에게서

 

혁명이, 철학이 좋았다

멀리 있으니까

 

집에서, 깃털 구름에게서, 심장 속 검은 돌에게서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맑은 술 한 병 사다 넣어주고

새장 속 까마귀처럼 울어대는 욕설을 피해 달아나면

혼자 두고 나간다고 이층 난간까지 기어와 몸 기대며 악을 쓰던 할머니에게

 

동네 친구, 그애의 손을 잡고 골목을 뛰어 달아날 때

바람 부는 날 골목 가득 옥상마다 푸른 기저귀를 내어말리듯

휘날리던 욕설을 퍼붓던 우리 할머니에게

 

멀리 뛰다 절대 뒤돌아보지 않아도

"이년아, 그년이 네 셋서방이냐"

깨진 금빛 호른처럼 날카롭게 울리던

 

그 거리에 내가 쥔 부드러운 손

"나는 정말 이애를 사랑하는지도 몰라"

프루스트 식으로 말해서 내 안의 남자를 꺠워주신 불란서 회상문학의 거장 같은 우리 할머니에게

 

돈도 없고 요령도 없는 작곡가 지망생 청년과 결혼하겠다고

내 앞에서 울 적에 엄마 아버지보다 더 악쓰며 반대했던 나에게

 

"너는 이 세상 최고 속물이야, 그럴 거면서 중학교 때 크리스마스 선물은 왜 물려주었니?"

내가 읽다 던져둔 미국단편소설집을

너덜거리는 낱장으로 고이 간직했던 여동생에게

 

"나는 돼도, 너는 안돼"

하지 못한 말이 주황색 야구잠바 주머니 속에서 오래전 잘못 넣어둔 큰 옷핀처럼 검지손가락을 찔렀지

 

엄밀한 공()의 논리에 대해 의젓하게 박사논문까지 써놓고

이제 와 기억하는 건

용수스님이 예로 드신 무명 옷감에 묻은 얼룩

그 얼룩은 무슨…… 덜룩

시인 김이듬이 말한 것처럼

그거 별 모양의 얼룩일라나, 오직 그 모양과 색이 궁금하신 모든 분들께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를 보여드립니다

 

십년 만에 집에 데려왔더니, 넌 아직도 자취생처럼 사는구나, 하며 비웃음인지 부러움인지 모를 미소를 짓던 첫사랑 남자친구에게

 

이 악의 없이도 나쁜 놈아, 넌 입매가 얌전한 여자랑 신도시 아파트 살면서

하긴, 내가 너의 그 멍청함을 사랑했었다 네 입술로 불어 넣어 내 방에 흐르게 했던 바슐라르의 구름 같은 꿈들

 

여고 졸업하고 6개월간 9급 공무원 되어 다니던 행당동 달동네 동사무소

대단지 아파트로 변해버린 그 꼬불한 미로를 다시 찾아 갈 수도 없지만,

세상의 모든 신들을 부르며 혼자 죽어갔을 야윈 골목, 거미들

"그거 안 그만뒀으면 벌써 네가 몇 호봉이냐" 아직도 뱃속에서 죽은 자식 나이 세듯

세어보시는 아버지, 얼마나 좋으냐, 시인 선생 그 짓 그만하고 돈 벌어 우리도 분당 가면, 여전히 아이처럼 조르시는 나의 아버지에게

 

아름다운 세탁소를 보여드립니다

잔뜩 걸린 옷들 사이로 얼굴 파묻고 들어가면 신비의 아무 표정도 안 보이는

내 옷도 아니고 당신 옷도 아닌

이 고백들 어디에 걸치고 나갈 수도 없어 이곳에만 드높이 걸려 있을, 보여드립니다

위생학의 대가인 당신들이 손을 뻗어 사랑하는

나의 이 천부적인 더러움을

 

반듯이 다려놓을수록 자꾸만 살에 눌어붙는 뜨거운 다리미질

낡은 외상장부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미국단편집과 중론(中論), 오래된 참고문헌들과

물과 꿈 따위만 적혀 있다

여보세요, 옷들이여

 

맡기신 분들을 찾아 얼른 가세요. 양계장 암탉들이 샛노랗게 알을 피워대는 내 생애의 한여름에

다들, 표백제 냄새 풍기며 말라버린 천변 근처 개나리처럼 몰래 흰 꽃만 들고

몸만 들고 이사 가셨다

 

 

 

비가 2붉은 달 / 기형도

 

1

그대, 아직 내게

무슨 헤어질 여력이 남아 있어 붙들겠는가.

그대여, ×자로 단단히 구두끈을 조이는 양복

소매끈에서 무수한 달의 지느러미가 떨어진다.

떠날 사람은 떠난 사람. 그대는 천국으로 떠난다고

장기 두는 식으로 용감히 떠난다고

짧게 말하였다. 하늘나라의 달.

 

2

너는 이내 돌아서고 나는 미리 준비해둔 깔깔한 슬픔을 껴입고

돌아왔다. 우리 사이 협곡에 꽂힌 수천의 기억의 돛대, 어느 하나에도

걸리지 못하고 사상은 남루한 옷으로 지천을 떠돌고 있다. 아아 난간마다 안개

휘파람의 섬세한 혀만 가볍게 말리우는 거리는

너무도 쉽게 어두워진다. 나의 추상이나 힘겨운 감상의 망토 속에서

폭풍주의보는 삐라처럼 날리고 어디선가 툭툭 매듭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내가 떠나기 전에 이미 나는 혼자였다. 그런데

 

너는 왜 천국이라고 말하였는지. 네가 떠나는 내부의 유배지는

언제나 푸르고 깊었다. 불더미 속에서 무겁게 터지는 공명의 방

그리하여 도시, 불빛의 사이렌에 썰물처럼 골목을 우회하면

고무줄처럼 먼저 튕겨 나와 도망치는 그림자를 보면서도 나는

 

두려움으로 몸을 떨었다.

떨리는 것은 잠과 타종 사이에서 비틀거리는 내 유약한 의식이다.

책갈피 속에서 비명을 지르는 우리들 창백한 유년, 식물채집의 꿈이다.

여름은 누구에게나 무더웠다.

 

3

잘 가거라, 언제나 마른 손으로 악수를 청하던 그대여

밤새워 호루라기 부는 세상 어느 위치에선가 용감한 꿈 꾸며 살아 있을

그대. 잘 가거라 약 기운으로 붉게 얇은 등을 축축이 적시던 헝겊 같은

달빛이여. 초침 부러진 어느 젊은 여름밤이여.

가끔은 시간을 앞질러 골목을 비어져 나오면 아,

온통 체온계를 입에 물고 가는 숱한 사람들 어디로 가죠? (꿈을 생포하러)

? 누가요 (꿈 따위는 없어) 모두 어디로, 천국으로

 

세상은 온통 크레졸 냄새로 자리 잡는다. 누가 떠나든 죽든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였다.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

턱턱, 짧은 숨 쉬며 내부의 아득한시간의 숨 신뢰하면서

천국을 믿으면서 혹은 의심하면서 도시, 그 변증의 여름을 벗어나면서.

 

 

포도밭 묘지 2

 

아아, 그때의 빛이여. 빛 주위로 뭉치는 어둠이여. 서편 하늘 가득 실신한 청동의 구름 떼여. 목책 안으로 툭툭 떨어져 내리던 무엄한 새들이여. 쓴 물 밖으로 소스라치며 튀어나오던 미친 꽃들이여. 나는 끝을 알 수 없는 질투심에 휩싸여 너희들을 기다리리. 내 속의 모든 움직임이 그리고 탐욕을 향한 덩굴손에서 방황의 물기가 빠질 때까지.

 

밤은 그렇게 왔다. 포도 압착실 앞 커다란 등받이의자에 붙어 한 잎 식물의 눈으로 바라보면 어둠은 화염처럼 고요해지고 언제나 내 눈물을 불러내는 저 깊은 공중空中. 기억하느냐, 그해 가을 그 낯선 저녁 옻나무 그림자 속을 홀연히 스쳐가던 천사의 검은 옷자락과 아아, 더욱 높이 흔들리던 그 머나먼 주인의 임종. 종자從者, 네가 격정을 사로잡지 못하여 죽음을 환난과 비교한다면 침묵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 네가 울리는 낮은 종소리는 어찌 저 놀라운 노을을 설명할 수 있겠느냐. 저 공중의 욕망은 어둠을 지치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종교는 아직도 지상에서 헤맨다. 묻지 말라, 이곳에서 너희가 완전히 불행해질 수 없는 이유는 신이 우리에게 괴로워할 권리를 스스로 사들이는 법을 아름다움이라 가르쳤기 때문이다. 밤은 그렇게 왔다. 비로소 너희가 전 생애의 쾌락을 슬픔에 걸듯이 믿음은 부재 속에서 싹트고 다시 그 믿음은 부재의 씨방 속으로 돌아가 영원히 쉴 것이니, 골짜기는 정적에 싸이고 우리가 그 정적을 사모하듯이 어찌 비밀을 숭배하는 무리가 많지 않으랴. 밤은 그렇게 노여움을 가장한 모습으로 찾아와 어두운 실내의 램프불을 돋우고 우리의 후회들로 빚어진 주인의 말씀은 정신의 헛된 식욕처럼 아름답다. 듣느냐, 이 세상 끝 간 곳엔 한 자락 바람도 일지 않았더라. 어떠한 슬픔도 그 끝에 이르면 짓궂은 변증의 쾌락으로 치우침을 네가 아느냐. 밤들어 새앙쥐를 물어뜯는 더러운 달빛 따라가며 휘파람 부는 작은 풀벌레들의 그 고요한 입술을 보았느냐. 햇빛은 또 다른 고통을 위하여 빛나는 나무의 알을 잉태하느니 종자從者, 그 놀라운 보편을 진실로 네가 믿느냐.

 

 

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

 

어는 영혼이기에 아직도 가지 않고 문밖에서 서성이고 있느냐. 네 얼마나 세상을 축복하였길래 밤새 그 외로운 천형을 견디며 매달려 있으냐. 푸른 간유리 같은 대기 속에서 지친 별들 서둘로 제 빛을 끌어모으고 고단한 달도 야윈 낫의 형상으로 공중 빈 밭에 힘없이 걸려 있다.

 

아느냐, 내 일찍이 나를 떠나보냈던 꿈의 짐들로 하여 모든 응시들을 힘겨워하고 높고 험한 언덕들을 피해 삶을 지나다녔더니, 놀라워라. 가장 무서운 방향을 택하여 제 스스로 힘을 겨누는 그대, 기쁨을 숨긴 공포여, 단단한 확신의 즙액이여.

 

보아라, 쉬운 믿음은 얼마나 평안한 산책과도 같은 것이냐. 어차피 우리 모두 허물어지면 그뿐, 건너가야 할 세상 모두 가라앉으면 비로소 온갖 근심들 사라질 것을. 그러나 내 어찌 모를 것인가. 내 생 뒤에도 남아 있을 망가진 꿈들, 환멸의 구름들, 그 불안한 발자국 소리에 괴로워할 나의 죽음들.

 

오오, 모순이여, 오르기 위하여 떨어지는 그대. 어느 영혼이기에 이 밤 새이도록 끝없는 기다림의 직립으로 매달린 꿈의 뼈가 되어 있는가. 곧이어 몹쓸 어둠이 걷히면 떠날 것이냐. 한때 너를 이루었던 검고 투명한 물의 날개로 떠오르려는가. 나 또한 얼마만큼 오래 냉각된 꿈속을 뒤척여야 진실로 즐거운 액체가 되어 내 생을 적실 것인가. 공중에는 빛나는 달의 귀 하나 걸려 고요히 세상을 엿듣고 있다. 오오, 네 어찌 죽음을 비웃을 것이냐 삶을 버려둘 것이냐, 너 사나운 영혼이여! 고드름이여.

 

 

 

죽은 구름

 

구름으로 가득 찬 더러운 창문 밑에

한 사내가 쓰러져 있다, 마룻바닥 위에

그의 손은 장난감처럼 뒤집혀져 있다

이런 기회가 오기를 기다려온 것처럼

비닐백의 입구같이 입을 벌린 저 죽음

감정이 없는 저 몇 가지 음식들도

마지막까지 사내의 혀를 괴롭혔을 것이다

이제는 힘과 털이 빠진 개 한 마리가 접시를 노린다

죽은 사내가 살았을 때, 나는 그를 몇 번인가 본 적이 있다

그를 사람들은 미치광이라고 했다, 술과 침이 가득 묻은 저

 

엎어진 망토를 향해, 백동전을 던진 적도 있다

아무도 모른다, 오직 자신만이 홀로 즐겼을 생각

끝끝내 들키지 않았을 은밀한 성욕과 슬픔

어느 한때 분명 쓸모가 있었을 저 어깨의 근육

그러나 우울하고 추악한 맨발 따위는

동정심 많은 부인들을 위한 선물이었으리

어쨌든 구름들이란 매우 조심스럽게 관찰해야 한다

미치광이, 이젠 빗방울조차 두려워 않을 죽은 사내

자신감을 얻은 늙은 개는 접시를 엎지르고

마루 위엔 사람의 손을 닮은 흉측한 얼룩이 생기는 동안

두 명의 경관이 들어와 느릿느릿 대화를 나눈다

어느 고장이건 한두 개쯤 이런 빈집이 있더군,

이따위 미치광이들이 어떻게 알고 찾아와 죽어갈까

더 이상의 흥미를 갖지 않는 늙은 개도 측은하지만

아무도 모른다, 저 홀로 없어진 구름은

처음부터 창문의 것이 아니었으니

 

 

 

없는 사랑에 대한 에스키스

 

있다고 하고서 안으면 안기지 않는 사랑, 없다고 하고서 돌아서면 멀리서 안기려 달려오는 사랑, 하나 안을 수 없는 사랑, 불러도 대답 없는 사랑, 부르지 않으면 귀 기울이다가 부르면 멀어지는 사랑, 있으나 없는 사랑, 없으나 늘 내게 있는 사랑, 보려고 하면 보이지 않는 사랑, 보지 않으려 하면 어느 새 어렴풋이 떠오르는 사랑, 안드로메다 어느 별에서 만날 것 같은 사랑, 이제 영영 이별일 것 같은 사랑, 소행성 B 25를 걷다가 만날 것 같은 사랑, 하나 만날 수 없는 사랑, 내 사랑이라면 내 사랑이 아니고 내 사랑이 아니라면 내 사랑이라고 우기는 사랑, 어떻게 해야 하나, 내 사랑, 내 몰락에의 사랑*

* 이 연주의 시 제목

시 창작 스터디

늦게 오는 자장가

 

Bucket List / 진은영

지난해의 비밀

그 머나먼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비가 2붉은 달 / 기형도

포도밭 묘지 2

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

죽은 구름

없는 사랑에 대한 에스키스

 

 

말 달리자 아버지, 역발산 아버지 김왕노

 

아버지 저승에서 이제 잘 있는지 몰라

아버지 좋아하시던 막걸리 앞에 두고

멸치 안주를 찾을 때 수국 꽃이 저승 마당에

아버지 측근으로 다소곳이 수발드는지

아버지가 저승 푸른 초원에 방목한 말이

지금은 몇 마리 새끼를 쳐서 돌아오는지

집문 밖으로 귀를 기울이시는지도 몰라

아버지 술기운 아니어도 역발산 같으셔서

못 치우거나 못 갈아엎으시는 것이 없으셔

아버지 만물박사라 못 고치는 것 없었는데

아버지, 아버지 이제 저승에서 난봉꾼으로

고무신 끝 살짝 들어 올리시는 춤사위로

청사포 끝자락 살짝 감아올리는 춤사위로

저승 한 시절 그렇게 보내셔도 좋은데

아버지 그래도 이승에 한 번 와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북벌의 말 한 번 달리자니까,

가쁜 숨 몰아쉬며 부자지간 진한 혈육으로

장백산으로 발해로 말 달리자니까?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저승에서도 역발산인 아버지

 

 

아버지

 

줄 것 다 주어 버리고도

발에 걷어차이는 게 개밥그릇이다.

뺏길 것 다 뺏기고 노리개로

개가 잘근잘근 씹어대는 것이

개밥그릇이다.

밤이 늦어 귀가하다보니

세월에 걷어차여 개밥그릇으로

어둑한 구석에 나뒹구는 아버지

평생 허기진 개밥그릇 아버지

세상의 모든 아버지

 

폐닭

 

저기 밑이 빠진 어머니 홀로 살고 있다. 케이지 식 닭장에서 다산성을 강요받아 밤낮 알을 낳다 밑이 빠진 어머니, 자식 줄줄이 낳다가 삭아진 어머니, 꼬끼오 울 힘도 없는 어머니, 이제 저기 눈곱 낀 채 해바라기 하고 있다. 오가는 사람에게 초점을 맞춰 바라보려 안간힘을 쓰지만 자꾸 초점이 흐려지는 어머니, 이제 어떤 요리법으로 요리를 해도 맛이 없는 폐닭 기름기가 다 빠진 어머니, 자식도 그 무엇도 찾지 않는 어머니, 버려진 어머니, 여린 햇살의 온기만으로도 졸리는 어머니, 세상의 모든 어머니, 지팡이 하나 의지하여 밤을 만나고 저녁을 맞이하고 꼬부랑 허리로 꿈속을 가는 폐닭 어머니, 그 좋던 청춘 자식으로 쑥쑥 낳고 골병 든 어머니, 버려진 듯 세상 구석에 웅크려 부들부들 떠는 어머니

 

 

어머니 나를 낳으신다

 

어머니 주름진 얼굴로 삭아 내린 몸으로 다시 나를 낳으신다. 제발 이렇게 살지 말라고 다시 새롭게 살라고 어머니 다시 나를 낳으신다. 밖에는 비가 오는데 세상은 질척거리는데 미역국을 끓여줄 그 누구도 없는데 어머니 혼자서 다시 나를 낳으신다. 착하게 살라고 후회하지 않는 사람이 되라고 어머니 내 탯줄을 끊어주실 힘이 없는데도 어머니 촛불 하나 켜놓으시고 정화수 한 사발 떠놓으시고 어머니 다시 나를 낳으신다. 고령이어서 위험한 데도 어머니 다시 나을 낳으신다. 뜨거운 눈물로 비린 눈물로 이놈아 제발 인간답게 살라면서 이 신 새벽 내가 훔쳐보는 것도 모른 채 다시 나를 낳으신다. 두 손 삭삭 부비면서 미운 털 박힌 며느리처럼 어머니 차디찬 부엌에서 다시 나를 낳으신다.

 

 

그리운 파란만장

 

고맙다 파란만장아

네가 아니면 어떻게 그렇게 출렁였고

네가 아니면 어떻게 그렇게 슬퍼했겠고

네가 아니면 어떻게 그렇게 아파했겠고

네가 아니면 어떻게 그렇게 헤매다가

 

꽃을 보고 새를 만나고

그 먼 강둑에 앉아 흐르는 강물을 보았을까.

 

파란만장하니 인생이다.

파란만장하니 노래한다.

파란만장하니 사랑한다.

파란만장하니 그립다.

파란만장아 고맙다, 파란만장하니 고맙다.

 

 

나의 국적

 

누구에게나 국적이 있지만 나의 국적은 너다.

한 때 나의 국적은 풀꽃이었고

한 때 나의 국적은 내리는 봄비였지만

지금 나의 국적은 너로 바뀌었다.

지금껏 내가 걸은 길은 네게로 가는 망명의 길

푸른 봉분을 가진 내 무덤을 쓸 곳은 바로 너다.

이중국적이니 국적불명도 아닌 나의 국적은 너다.

 

 

갈대본색

 

20142월 초입 살 얼음 낀 임진강변에

아직도 바람을 업고서 강 건너 편을 향해

허리를 반 쯤 찬 물에 담그고 선 갈대는

우리가 달래서 집으로 데려오지 못한 실향민

 

그 강물 얼마나 깊고 세찬지

아직도 배 띄워 그가 건넌 적 없다.

 

 

오래된 독서

서로의 상처를 더듬거나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는 게

누구에게나 오래된 독서네.

일터에서 돌아와 곤히 잠든 남편의 가슴에 맺힌 땀을

늙은 아내가 야윈 손으로 가만히 닦아주는 것도

햇살 속에 앉아 먼저 간 할아버지를 기다려보는

할머니의 그 잔주름 주름을 조용히 바라보는 것도

세상 그 무엇보다 중요한 독서 중 독서이기도 하네.

 

하루를 마치고 새색시와 새신랑이

부드러운 문장 같은 서로의 몸을 더듬다가

불길처럼 활활 타오르는 것도 독서 중 독서이네.

아내의 아픈 몸을 안마해주면서 백년 독서를 맹세하다

병든 문장 문장으로 쓰진 아내여서 눈물 왈칵 쏟아지네

 

 

 

 

劉伶 / 박정대

 

유령이 내게 말하길, 시가 잘 씌어지지 않을 때는 술을 마셔라

태풍의 한가운데서라도 술은 너를 위로하리니 사랑이 오지 않을 때도 한세월 술을 마셔라

살아서 네가 마시는 술은 굳건한 너의 , 너의 생을 생으로 빛나게 하는 것도 술이었나니

술이 다 떨어지는 시간이 오면 그때 시를 써라

사랑이 다 떨어지는 시간이 오면 그때 시를 써라

 

시를 쓰고 또 쓰다가 그래도 시가 되지 않을 땐 술병에서 출렁이는 까만 밤의 머루주를 마셔라

 

살아 있는 것들이 내게 말하길, 시가 잘 씌어지지 않을 때는 月下獨酌 스스로 빛나는 시가 돼라

 

 

 

그대의 私有地

 

바닷가 길을 따라 오래도록 걸었네

山東의 갈매기들이 넘나드는 중국식 해변에서

걸을 때마다 내 발자국 속에서는 한 왕조가 생겼다

사라지고, 내 발걸음은 여전히 추웠네

그대는 저 해송 너머

노나라이거나 제나라

그 어느 햇살 자욱한 平原

한 나라를 꾸리고 있었던 것이냐

그 나라의 신민들은 그대의 품 안에서

여전히 사랑처럼 따뜻했던 것이냐

바닷가 길을 따라 항구도 없는 해변을 오래도록 걸었네

내가 걸어가는 해안의 사막으로는 겨울이 와서

뒤뚱거리며 나와 함께 걸어가고 있었네

태양은 딱딱한 밀떡처럼 하늘에 걸려 나를 내려다보고

어느 왕조의 흥망처럼 나는 절뚝이며 걸었네

내가 걸어가던 산뚱 반도의 끝에

그대는 파도에 깎인 와불처럼 그렇게 누워 있었던 것이냐

내 마음의 밀울이 끝내 파도치며 가 닿는 곳에 그대는

내가 꿈꾸는 만큼만 그렇게 누워 있었던 것이냐

威海, 바닷가 길을 따라 오래도록 걸었네

가끔씩 내 외투 속 마음만이 항구가 되는 위해에서

딱딱한 햇살에 부딪히며 나는 걸었네, 그대가 없는

그대의 사유지에서

그대 허락도 없이 꿈꾸던

위험한 사랑의 行步

 

 

, , 정전

 

아주 늦은 저녁

다시 아비정전을 보네

늘상 그렇듯이, 불을 끄고 누워

저 홀로 반짝이는 화면을 보네

야자수 정글 사이로 기차가 지나가면서 영화는 시작되네

코끼리도 보이지 않는 그 야자수 정글은 필리핀이었을까

두만강변이었을까, 아니면 내 마음속 비 내리는 숲이었을까

아주 늦은 저녁

아비정전을 보며 나는 끝내 코끼리처럼 말이 없네

비 내리는 화요일의 기억들, 기억들이 부슬부슬 비 내리는 화요일

화요일에 비가 내리는데 존 레논은 왜 오노 요코를 사랑했던 걸까

존 레논을 어디에서 죽었지, 정글이었나

삼류 영화 같은 내 기억의 한구석

내가 사랑했던 그녀는 어디에서 죽었지

필리핀의 야자수 정글 속이었나

햇살 가득한 내 청춘의 뒤뜰이었나

아주 늦은 저녁

아비정전을 보며 한 잔의 술을 홀짝거리네

왜 죽었지, 취하지도 않는 저녁 아비는 열차에서 죽어가고

열차는 야자수 정글 사이를 통과해 가는데

불 꺼진 내 마음이 멀리서 반짝이는 혹성 하나를

아득히 바라보고 있는

, 비 내리는

정전이 씌어지는 음악의 밤이다

 

 

카바레 드 자사생

 

지구의 한 켠에 가로등이 켜지면 카바레 드 자사생이 조심스럽게 돋아난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누군가 혹한의 생을 지나 가까스로 당도한 곳, 어둠이 밀사처럼 당도해 먼저 간판의 불을 켜는 곳, 내 상상의 가장 어둡고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카바레 드 자사생

공간이 때로는 삶을 지배하므로, 삶이 때로는 고독을 풀어놓는 테르트르 광장에 저녁이 오면 나는 또 무거운 침묵의 그림자를 끌고 석양 속을 걸어서 암살자의 주점으로 간다

질투가 끌고 온 삶이 이제사 암살자의 주점에 당도했으니 나를 끌고 온 질투의 생을 끝장내지 않는다면 나 다시는 생을 사랑할 수 없으리라

처음에는 고독이 나를 구원하리라 생각했지만 고독은 궁극의 병, 고독에 사로잡힌 영혼은 아주 비좁은 생을 살다갈 뿐이다

두꺼운 책들을 뒤집어쓰고 잠들던 날들이 많았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건대 내가 사랑했던 것은 이 세계의 허무, 내가 더 이상 나를 그리워하지 않는 날들 속에서 저녁은 너무 일찍 내 창문 곁으로 당도하곤 하였다

그런 저녁의 날들 속에서 술을 마시지 않는다면 내가 어떻게 견딜 수 있었겠는가? 내가 알코올 중독자로 세계의 변방을 떠도는 이유를 이제 그대는 알겠는가?

지구의 한 켠에 가로등이 켜지면 카바레 드 자사생이 조심스럽게 돋아난다

지난여름 그대를 만나 나는 수없이 그대를 죽였으므로 이제는 그대를 만나도 더 이상 암살할 그대가 없다

생은 저만치 흘러가버렸는데 우리는 아직도 여기에 이렇게 머물러 있는 것이다

얼마나 혹독하겠는가? 암살자의 주점에 앉아 술만 퍼마시며 인생을 탕진한다는 것은!

한때는 글을 쓰면서 고상하게 인생을 탕진하려고 한 적도 있었다

이 세계가 글로 씌어진 한 편의 픽션일 거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세계는 결코 씌어지지 않는다

세계는 겨롴 한 편의 아름다운 글로 완성되지 않는다

 

세계를 물들이는 온갖 흉흉한 소문들, 쾌락과 질투에 날뛰는 짐승들의 아비규환, 뒤틀린 우주의 사지, 변형된 영혼들의 사악함, 습기로 가득한 이 낯선 우주의 시간 속에서 이제 나는 내가 기르던 세계의 아름다움에 복수하려 한다

 

이 세계는 고양이들의 발톱에 너무 긁혔다

드디어 욕망의 고양이들에 대한 대학살의 시간이다

지구의 한 켠에 가로등이 켜지면 카바레 드 자사생이 조심스럽게 돋아난다

지난여름을 잊기 위해 나는 참 많이도 걸어왔다

 

무수한 불면의 밤들과 갸륵한 촛불들의 희생 속에서도 추억은 쉽게 암살되지 않았다

추억은 강력한 최음제와도 같은 것, 추억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거리를 방황할 때면 또 얼마나 많은 눈물들이 내 눈동자 속으로 쳐들어왔던 것인가

눈물의 거리를 다 젖으며 지나와 나 이제 사막의 생 앞에 서 있다

 

이곳은 안개도 없고 회한도 없고 작열하는 태양 아래 오로지 낮과 밤의 그림자만이 교차하는 곳

생의 지평선에 걸린 막막한 모래알들의 영사막 위로 단 하나의 생애만이 상영되는 곳

나는 이곳에서 추억의 암살을 꿈꾼다

내 영혼의 지도를 온통 강점했던 추억의 시간들에게 나는 필사적으로 대항한다

 

나는 이제 영혼을 꺼버리고 내 손끝과 내 눈끝에 발전소를 세우려 한다

자가발전의 삶, 그렇게 또 다른 삶이 시작되고 시작된 적도 없는 듯 고요히 소멸해 가리라

지구의 한 켠에 가로등이 켜지면 카바레 드 자사생이 조심스럽게 돋아난다

 

대낮의 열기를 그대로 간직한 마로니에 잎사기 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말들이 소리의 껍질처럼 놓여 있다

선반처럼 추억을 쌓아두는 마로니에 잎사귀 아래에서는 거리의 악사들이 그들의 음악으로 멀리 있는 별들의 묘지를 추억한다

 

포도밭 너머 묘지로 가는 길 위에 나는 잠시 주저앉아 지구의 반대편에 낮게 떠 있을 태양을 생각한다

그대의 머리 위에서 빛나고 있을 그대의 태양을 생각해 본다

그대의 태양이 빛나던 어느 추억의 거리에서 페스트 같은 욕망이 밀려와 그대 생의 아름다운 그림자마저 학살했음을 나는 알고 있다

 

내 욕망의 고양이들이 질주하던 그 거리에서 나는 페스트처럼 그대를 사랑했으나 오 욕망의 잔인함이여

내가 기르던 욕망의 고양이들에 대한 대학살

내가 지금 암살자의 주점으로 가고 있는 가장 은밀한 이유이다

 

더 이상 생을 숨길 곳 없는 자들이 추억을 암살하여 모여드는 곳, 추억이 없으므로 미래도 없는 곳, 그리하여 대낮에도 어둠만이 지배하는 곳

포도밭 너머 별들의 묘지가 있는 곳으로 나는 지금 가고 있는 것이다

지구의 한 켠에 가로등이 켜지면 카바레 드 자사생이 조심스럽게 돋아난다

푸가처럼 밀려오는 어둠

레퀴엠처럼 빛나는 달빛

비에 젖어 있던 날들이 오래되었으므로 이제는 달빛마저도 눅눅하다

그 눅눅한 달빛의 공기를 마시며 나는 암살자의 주점으로 간다

추억의 대학살 뒤에 끝끝내 새롭게 밝아오는 아침이 있을 것인가

그러나 나는 지금 왜 이렇게 추억처럼 졸리운 것인가

죽음처럼 무겁게 졸리운 것인가

 

아 헛되도다, 헛되도다, 죽음마저도 헛도도다, 중얼거리며 이 모든 횡설수설의 끝에서 나는 죽음처럼 곤하게 잠들 테지만

지구의 한 켠에 가로등이 켜지면 카바레 드 자사생이 조심스럽게 돋아난다

 

내가 너를 만나던 그 시간

지구의 한 켠에 가로등이 켜지면 카바레 드 자사생이 조심스럽게 돋아난다

내가 너를 사랑하던 그 시간

지구의 한 켠에 가로등이 켜지면 카바레 드 자사생이 조심스럽게 돋아난다

내가 너를 끊임없이 질투하던 그 시간

지구의 한 켠에 가로등이 켜지면 카바레 드 자사생이 조심스럽게 돋아난다

네가 끝끝내 나를 떠나던 그 시간

지구의 한 켠에 가로등이 켜지면 카바레 드 자사생이 조심스럽게 돋아난다

내가 고요히 세계의 뒤편에서 죽어가던 그 시간

지구의 한 켠에 가로등이 켜지면 카바레 드 자사생이 조심스럽게 돋아난다

(, 나를 그냥 죽게 내버려다오)

 

모두가 어디론가 떠나고 텅 빈 파리의 여름밤 나는 왜 이 낯선 곳에서 혼자 걸어가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 오늘이 도대체 무슨 요일이지, 카바레 드 자사생은 문을 열었나

 

잠들지 못한 추억의 암살자들이 어슬렁거리며 모여드는 지구의 한 켠

지구의 한 켠에 가로등이 켜지면 카바레 드 자사생이 조심스럽게 돋아난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아무르 강과 예니세이 강과 그 광ㄹ할한 자작자무 대평원을 다 지나가면 당도할 수 있는 곳, 어둠이 밀사처럼 먼저 당도해 간판의 불을 켜는 곳, 내 상상의 가장 어둡고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카바레 드 자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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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바레 드 사사생 '암살자의 주점'이라는 뜻을 가진, 파리 18구 몽마르트르에 있던 주점의 이름. 지금은 '라펭 아질' 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악마를 위하여 / 장석원

 

번들번들한 살갗에서 시작된 그것을 나는 모른다.

 

누구의 눈물과 누구의 체액이 나를 슬프게 했는지

알고 싶지 않다

 

나의 일부였던 것이 사라지고 있다

시원은 어두운 주름이었다

 

그것이 나를 왜곡시키고 나를 해석한다

나는 노예이므로 굴종에 쾌감을 느낀다

미래에 사랑이 이루어지고 행복엔 날개 돋을까?

 

개좆 같은 진보, 개좆 같은 진보주의

미래라구?

 

(confusion will be my epitaph. I'll be crying......)

 

 

과거에 묶이는 일이 죄인가

몸 바쳐 사랑할 수 있다면 권력의 노예가 되어도 좋다

 

사랑의 노예가 되는 일이 벌 받을 일인가(사랑이 하룻밤의 꿈이라면 차라리 눈을 감고 뜨지 말 것을) 심봉사라면 눈을 뜨리라 공양미 삼백석

그것도 자본이란 말인가

 

사랑 앞에서 눈 감는 자 나는 부속품이다 나는 기계의 일부이며 지금

녹슬고 있는 과거의 일부이다

 

무릎 꿇는 자의 행복을 거부하지 않겠다

천천히 부서지겠다

5월의 아카시아처럼

 

추억을 향해 후진하는 탱크로리, 운전석의 사내, 과거가 조립한 사내, 어디선가 본 듯한, 현재 속의 과거

 

거기에 아무도 없었다

어둠 속의 흰 바람

 

그림자 없는 아득한 옛 땅, 이득이 없는 옛날

찬란하여 부서지기 쉬웠던

어떤 날의 불안, 부란

태양의 시절 돌아오지 않는다

 

 

사람 위에 해가 있다, 해 위에 풀이 있다, 풀 위에

빨간 피막을 걸치고 뒷걸음치는 석양

촛불 꺼지기 전에

금지되기 전에

황금의 기율 무너지기 전에

긴 사랑을 나누어야 할 밤

 

 

사람 위의 해, 해 위의 풀, 풀 옆에

길게 눕는 달그림자

 

바람의 손가락 피막을 찢는다

 

 

물 밖에 사람과 해와 풀

나무가 녹아내리고, 빌딩이 엉겨붙고, 아스팔트는 물컹거린다

점막은 따갑고, 눈은 충혈되고, 입속의 모래가 뜨거워진다

모래 혓바닥 위에는

 

 

지금의 나와 옛날의 나 사이에 사막 같은 동형성

복제 인간의 벌어진 입을

 

오동나무 잎으로 틀어막을 수 있다면

미역 같은 혓바닥으로 조롱할 수 있다면

차라리 질병으로 도피할 수 있다면

 

선언하리라 나를 파괴할 권리

셀프 킬러, 킬링 필드, 올드 필드

 

그곳에 옛날의 나

오늘은 오늘의 병든 나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나에게 내리꽂히는 불꽃

예광탄처럼 빠져나가는 타액, 정액, 림프액

그리고 신선한 분비액

방울 남지 않았다

 

내 몸의 크레바스, 빙하의 눈썹

그 순결한 틈으로

어둠이 빨려든다

 

새로운 돌연변이가 태어나는 구멍

잡종이여 번성하라

광합성하는 동물이여 지복을 누려라

나의 미토콘드리아는 외계가 고향

나는 흑체, 나의 흑체 복사, 플랑크의 상수

불변하는 나, 불꽃 속의 과거, 내 안의 불꽃

 

그대 따스한가, 그대 어디에서나 나를 느낄 수 있는가, 빙하 속에 어둠이 있는가

결빙된 어둠의 결의처럼 내 혀는 아직 따스하다

 

날이 밝아온다

사랑이 끝난 후

 

아파트에서 뛰어내린 질이 말했다: white male american

울부짖던 에디가 말했다: white male american

 

나는 백인이 아니었지 미국인이 아니었지 남자가 아니었지

아니 남자였지 나는 헝그리 코리안

살아남기 위해 코메리칸이라도 되고 싶었던

어머니 표정 없이 말하네

 

죽을 때까지 선하게 살아라

아들아 나의 아들아

고난이 널 찾아올 테지만 이겨내라

아픈 몸과 더 아픈 몸을 네 몸처럼 사랑해라

아름다운 남자가 되어라 나의 작은 악마야

이룰 수 없는 욕망을 버리고 포기를 배워라

이제 잠들거라 사랑하는 아들아

69년부터 지금까지 나는

네 정맥 속의 뱀을 느낄 수 있단다

 

96년의 나는 늑대인간이었을까

 

안락의자에 앉아 뜨개질하는

엄마 얼굴을 들어 날 봐요

웃어봐요 담배에 불을 붙여줘요

어둠 속에서 할렐루야

한 땀 한 땀 세월을 읊조리는

엄마의 목소리 자꾸 가벼워져

나는 웃다가 울기도 하지만

똥구멍에 털이 돋기도 하지만

엄마 오늘 밤엔 울지 말아요

대신 우는 나를 쓰다듬어줘요

따스하게 발톱 내밀고 고양이처럼

상처를 핥아줘요 이건 열상이에요

내가 모르는 아주 먼 곳의 전염병이에요

나를 잣는 엄마 이제 풀어줘요

할렐루야 울지 말아요

한 번도 없었던 사랑 때문에

저 푸른 초원의 그림 같은 약속 때문에

 

쓸쓸하게 흔들리는 엄마

 

69년의 나는 늑대 새끼였을까

그때 암스트롱이 달에서 손을 흔들었다

슈메이커-레비는 흰 눈썹 같았다

눈썹 한 올 하늘에 심어두고 흰 눈물 흘리면서 그는 말했다

홀로 있는 자 사죄하리라 결국 하나가 되리라 한 덩어리 비애가 되리라

 

그가 입을 다물자

하늘의 눈썹 같은 새 나에게 왔다

 

나는 기원했다

내 몸에 둥지 틀고

알을 낳아다오 검은 새여

사이프러스 언덕 넘어 밀밭을 휘감는 바람 밑에서

나는 무릎 꿇고 기도했다

 

(save me)

 

양질의 상품이 필요해라 불태환지폐는 소용없어요

목덜미를 꽉 물어줘요 바람의 턱에 돋은 수염처럼

내 몸을 할퀴고 지나가는 불꽃이여

 

(kill me)

 

황혼에 물든 저녁 연기, 가을비, 논 가운데의 허수아비

이 모든 이미지들의 가치를 교환해줘

예순아홉번 소멸된 후에, 선라이즈 선셋, 또 하루 지나가는데

 

(forgive me)

 

입속의 손가락이여

바람을 맛봐라

내 몸에 뿌리내린 그의 지문을 더듬어라

번들번들한 살갗에서 시작되어

텁텁한 숨결로 종말을 맞이한 나의 애인이여

나는 볼 수 있으나 내 눈은 볼 수 없고

볼 수 있으나 나는 어두워

입속의 손가락은 피 흘리는데......

 

옛날에 나는 한열이를 위해 혈서 썼고

불사파는 형님을 위해 단지했다가

단지 했을 뿐이라네, 단지 해 있을 뿐이었네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하였기에

단지 소멸할 뿐이라네

사랑뿐이네

 

69년에

아버지의 정자와 어머니의 난자는 나를 만들기 위해 어떤 운명을 결탁했나

나는 모종의 비리 아닌가 나는 음범한 계약 아닌가

너에게 나를 주마 이리로 오라

누워 입을 벌리라

달 뜰 때 내가 보이리라

 

695월에 암스트롱은 고중력 실험실에서 눈물을 흘렸다

호텔 캘리포니아에는 69년의 핏빛 와인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으로

38구경 권총, 러시안 룰렛

한 발의 총알이 나였다

 

양막을 뚫고

탄두에 피를 묻히고 날아가는 은빛 총알

탄착점에 한 남자가 있다

 

그의 일기ㅡ나를 전달해줄, 나를 실어갈 콘베이어 벨트. 거리에 그대의 냄새. 광교 건너 종로 쪽으로 방향을 틀 때, 수갑과 올가미는 도처에서 나를 노린다. 그대가 쇠붙이라면 나는 숫돌이 되겠다.

 

그를 증오한다

 

한 여자가 있다

 

그녀의 일기ㅡ나를 구해줘요. 그대의 사랑이 나를 만들었으므로, 잠시 후의 적막을 위해, 이제 문을 닫아줘요. 성동구 송정동과 성수동의 경계를 비추는 새벽 240분의 가로등. 나는 곧 잊혀질테지만, 성동 소방서 송정 지소의 불빛이 그대의 얼굴을 비추는 순간, 그대의 배면으로 스며드는 것, 도무지 알 수 없는 것.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일. 사랑이 끝난 뒤, 날 위해 빛나던 그도 빛을 잃어버리겠지, 새벽 240분의 가로등은 꺼지겠지. 당직 서는 젊은 소방교의 하품. 성동구 송정동과 성수동의 경계를 비추는 새벽 240분의 가로등. 목덜미를 어루만지는 불빛. 나를 점령하고 있는 환한 악마여.

 

그대가 나를 순식간에 죽이리라

 

목적 없는 목적성이여

작고 애달픈 나의 연인이여

눈구멍에 내려앉는 나비여

흙과 번들번들한 살갗에서 시작된 나의 아름다운 날들이여

 

저주 받으리 한 마리 도마뱀에게 위로 받으리

 

개좆 같은 추억, 진보하는 과거, 진보하는 상처와 함께

 

 

 

세상이 끝날 때까지 / 최지인

 

급정거한 버스가 경적을 울릴 때

우리는 알았다

잘못된 길이었다

반대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사차선 도로에서

끝과 끝으로

핸들을 돌리며

전진과 후진을 계속했다 비상등을 켜고

생각했다

이 길은 올바른가

무엇을 향해 달리고 있는가

우리는

유혈사태로 가득한 주말을 목격했다

 

시민의 삶은 고독하고 궁핍하며 짧다

이를테면

언젠가 쓸모 있을 거라며

버리지 않은 서랍 속

너절한 잡동사니처럼 그것이

우리의 삶을 밀어내고 있다

무엇을 버려야 하나

수도복 입은 수녀가

소총 든 군경들 앞에서

무릎 꿇고 있다

핏자국이 길게 이어졌고

아내가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깼다

 

군경들은 시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혁명의 법칙

생각만 하지 말고, 당신은 피처럼 용감해야 합니다*

군부는 시민에게 죄를 물었다

외할머니는 죽기 전 이런 말을 남겼다

자주 절망하되 희망을 잃지 말거라

아주 오래전 일이다

가장 약한 자부터

외로워질 것이다

공장을 불태우고

악은 물러가라

악은 물러가라

세상이 끝날 때까지

북을 치는

사람들

 

그사이 나는

은행에서 대출을 받았고

부모에게 돈을 빌려

스물한평짜리 아파트를 전세로 얻었다

견고해 보이던 일상은

빛과 어둠처럼

무너져버렸고 얼마 되지 않아

무너진 세상이 일상이 되었다

누구나 죄인으로 태어나므로

누구도 악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신은 이 세상을

 

온 힘 다해

브레이크 페달을 밟았다

앞을 가로막은 현실

내일의 일과 이번 주의 일

나는 누구지?

잠에서 깬 아내를 쓰다듬으며

이젠 괜찮다고

말했다

 

시민들은 군부의 공격에 맞섰다

달리는 오토바이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모든 것을 빼앗는

불한당에게,

손을 높이 들고

거리를 행진하며

세상이 끝날 때까지

북을 쳤다

악은 물러가라

악을 물러가라

 

*202133일 미얀마 모니와 지역에서 시민 불복종운동이 전개됐다. 이날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한 목소리로 '군부 타도'를 외쳤다. 두개골에 대하여라는 시를 쓴 시인은 군부에 의해 살해당했다. 머리에 총을 맞고 쓰러진 시인을 군인들이 어디론가 끌고 갔다. 그가 지나간 자리는 피로 물들었다.

 

 

 

마음이 사라지지 않아서조금 센치한 / 이다희

 

여기까지 온 당신에게 줄자를 하나 줄게. 어떤 깊이도 잴 수 있는 줄자를. 너무 깊어서 어두워 보이는 것들에 대해 이제 걱정할 필요가 없지. 어떤 어둠도 잴 수 있는 줄자가 있어.

 

당신이 나뭇잎 한 장 어둠을 가지고 있다면 그래서 떨어지는 나뭇잎들을 멍하니 쳐다보게 된다면.

나뭇잎이 쌓인 거리를 걸어갈 때 애인과 당신이 다른 기분에 휩싸인다면.

애인이 당신을 알아주지 않아서 내심 안도한다면.

밥도 지어먹고 잠도 같이 자는데 당신의 나뭇잎 한 장 어둠에 조금도 변동이 없다면.

밥도 지어먹고 잠도 같이 자는 사람이 바뀌어도 나뭇잎 한 장 흔들리지 않는다면?

 

줄자로 당신 옆을 말없이 지나갔던 나뭇잎들을 재볼 수도 있곘지. 풍족하게. 아주 평평하게. 단추를 눌러 줄자를 감아도 돼. 줄자를 가지고 있으면 당신이 시작이니까.

 

나뭇잎 떨어지는 게 아름답다고 말할 것 같은 애인에게.

오늘은 그만하자고 말해야지. 밥을 다 먹어도 잊어버리지 말아야지.

당신은 이렇게 생각했지. 때맞춰 나오는 눈물에 묻어서 먼 곳까지 가야지.

전속력으로 돌아오는 줄자의 진동이 당신 왼손에서 계속 요동치게.

 

요동치게.

 

줄자의 끝이 어둠 속을 해치면서 당신의 왼손을 찾고 있어. 전속력으로.*

그래도 당신 우니까 계속 울어보니까 슬퍼졌지.

겨우 벌어진 틈으로 뭐가 보여?

 

*깨끗이 닦아낸 바닥 위를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조심히 걸어갈 때 생각하지. 더러운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 어디에 숨겨두었을까. 숨겨졌을까.

 

 

검정코트의 어려움

 

최근에 나는 검정코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것은 정말 깨달았다고 할 수밖에 없는데 지금껏 검정코트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친구에게 같이 검정코트를 사러 가자고 했지만 지금 자신이 입고 있는 코트가 검정코트라고 말하면서 나를 가만히 올려다본다

 

너도 언젠가 검정코트를 입어본 적이 있을 것이라고 친구는 말한다 나는 지금껏 검정코트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대꾸한다 검정코트는 기본이지 그런데 원래 기본을 찾기 힘들어 친구는 위로한다 아니 나는 기본이 아니라 검정코트를 사야 하는데 나는 중얼거린다

 

길을 건널 때 손을 번쩍 들어야 해 우리 유치원 때 다 배웠던 거야 나는 유치원 때부터 밤하늘에 떠 있는 별자리를 이해할 수 없었어 아무리 봐도 그냥 애매한 사각형 하나 있을 뿐인데 날개 달린 말이라고 우기다니

 

나는 친구의 검정코트의 어깨를 털어줬다 친구가 웃었다 나는 참지 못하고 페가수스가 실은 잘린 메두사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해줬다 친구 얼굴에 웃음기가 가셨다 어째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야 너 메두사랑 친해? 물어봤고 나는 날개 달린 말을 타는 자식들은 왜 그렇게 재수없냐고 따졌다 나는 밤의 틈 사이로 친구의 얼굴과 손이 튀어나와 있는 것을 확인하고 교차로에서 헤어졌다

 

난 아무래도 검정코트를 사기 어려울 것 같다 내 관심사는 분명 다른 색으로 바뀔 것 같다 만일 검정코트를 입고 어두운 밤을 건너려고 한다면 위험할 것 같아 밤과 검정코트를 구별하지 못한 차가 돌진한다면 아스팔트 도로 위에 누워서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나인지 깨달아야 한다면…… 나는 황급히 폰을 꺼내서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시 창작 스터디

 

토스트를 사먹다가 알던 선배와 마주쳤다. 다희야 내가 너 걱정돼서 하는 소린데 시 그렇게 쓰는 거 아니야. 나도 예전에 시 진짜 열심히 썼거든. 너도 알지? 나는 적당히 대답하면서 토스트를 먹는다. 오늘 점심은 차라리 굶을 것을. 굳이 먹겠다고 내려와서 선배랑 마주쳤다.

 

다희야 소문 들었어. 그 형이랑 왜 헤어졌어? 아니 욕하지는 말고…… 네가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서 그래. 선배는 토스트를 먹는 입으로 자꾸 내 근황을 물어본다. 나는 선배가 그냥 토스트만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난 처음부터 네가 아깝다고 생각했어. 나는 앞으로 볼 일 없으니 그냥 참자고 생각했다.

 

다희야 오빠가 하는 말 다 시 이야기거든. 그러니까 오해하지 마. 그리고 넌 신춘문예는 내지 마. 너랑 안 어울려. 그런데 너 만나는 남자는 있니? 난 토스트를 입에 욱여넣었다. 빨리 먹고 도망칠 생각이었다. 그래도 네가 시인이 되면 좋겠다. 너 진짜 멋있겠다. 선배는 자기 토스트를 다 먹고 나를 쳐다본다. 나는 입에 토스트가 가득 들어 있어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 너 시인 되면 어디 가서 매일 자랑할게. 시집 나오면 많이 살게. 넌 끝까지 써야 돼. 선배는 씩 웃었다. 선배는 어색하게 내 어깨를 두 번 두드리고 토스트 가게를 나갔다. 처음엔 무겁게, 나중엔 가볍게. 나는 토스트가 입에 가득 들어서 고개만 끄덕거렸다.

 

 

늦게 오는 자장가

 

태양은 오늘 조금 늦게 일어났다

세계에 조금 지각한 것이다

이상하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얼음이 옆에 있던 얼음과 붙었다

아주 낮은 온도로 붙었다

얼음과 얼음이 붙어 얼음이 되는 장면은

태양의 꿈이었다

태양이 계속 되감아 보는 좋아하는 장면이었다

눈을 감아도 계속 들려오는 자장가였다

자장가 속에서 계속 살아가는 뜨거운 휴일이었다

휴일 첫날 포기한 자식이었다

큰 개가 꼬리를 잡겠다고 원을 그리며 빙빙 돈다

돌다가, 돌다가 계속 돌다가

갑자기 주저앉는 바로 그 자리였다

하루는 내 옆에 붙어 마지막이 된다

나는 하루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었다

큰 개가 공을 물고 뛰어온다

나는 축축하고 뜨거운 공을 하늘 높이 던졌다

이를 악물었다

지각하지 않으려고 눈을 떴다

 

 

Bucket List / 진은영

 

이보오 스물한살의 용접공 아가씨

다섯 손가락에 불꽃을 달고 강철의 굳은 표정을 멋대로 자르고 이어대는

사랑스런 당신

당신은 먼 후일

더 높은 곳에 오르게 될 것이오

 

이봐요 아가씨

삶은 정말 주머니들로 가득찬 옷 같소

이렇게 많은 감정을

이렇게 많은 사람을 전부 담을 수 있다니

 

이것은 마야콥스키의 말투라오

나는 당신과 닮은꼴인 시인들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여럿 번역했지

물론 감옥에서 말이오

죽음의 발길질이 언제 시작될지 모른 채

가장 빛나는 은빛 양동이에 모든 노래와 소망을 다 담으려 했지

가장 낡은 변두리에서 흘러나오는 더운 하수 같은 노래를

미로처럼 생긴 거리들에서 일제히 떠오르는 빨간 풍선 같은 소망을

 

거짓 없는 흰 발로 올라선 나의 양동이가 차이기 전

내가 마지막으로 작은 수첩에 적은 말은

해방

제국으로부터의 해방

모든 제국으로부터의 해방

이보시오 영리한 아가씨

당신은 서로 다른 풍경 뒤에 놓인 동일한 원인을 잘 알고 있다오

 

수빅의 노동자를 착취하려는 손길이

()제국의 노동자를

제국과 아()제국의 이 어두운 거리들에 물끄러미 세워 놓는다는 것을

장난감 병정처럼

모두 떠나간 놀이터 모래밭

팔다리가 부러진 채 간신히 꽂혀 있는 파란 병정처럼

 

금지된 일터로부터 망명한 당신

다시 돌아가기 위해 26년을 기다리게 될 당신

이보오 올해가 그 마지막 해라오

힘을 내요 당신은 꼭 돌아가게 될 것이오

 

이봐요 환하게 웃는 반백의 아가씨

당신의 삶은 정말 주머니들로 가득한 옷 같소

얼마나 많은 슬픔

얼마나 많은 기쁨

얼마나 많은 분노

얼마나 많은 영혼을 한꺼번에 담을 수 있는지

 

당신을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사람들은 점점 높아가는 가을의 고요하고 무거운 하늘을

올려다볼 것입니다

당신이 야윈 목에 매달고

찰랑이며 올라가는 슬픔과 기쁨의 양동이를

 

나는 그들과 함께 올려다볼 것입니다

그것이 마지막 나의 할 일

마지막 나의 소망

 

19942, 어느 병실에서

 

 

지난해의 비밀

 

구름이 물방울들, 발 없는 영혼들의 몽유병이라는 거

청춘의 고통이 끝나지 않는다는 거

청춘이 끝난 뒤에도 고통이 끝나지 않는다는 거

어떤 싸움이 끝난 뒤에도 끝나지 않는다는 거

나무들, 나무들의

회색 밑둥 아래로 슬픔의 기름이 흐른다는 거

 

인쇄소의 거대한 소음 속에서

감리 보는 사람에게 소리 없이 시가 새겨진다는 거

내가 너를 이미 떠났다는 거

봄이 오고 구름이 지나가고

꽃들은 시를 떨어뜨리고, 거리에서

 

어느 한 줄의 문장을 읽을 무렵

붉은 윤전기가 돌아간다는 것

다시 돌아가기 시작한다는 것

어디선가

고요한 침묵 속에서, 모두 떠나간 자동차 공장에서

 

아이들은 유리로 된 껌을 씹고

아 아 아 웃으며 지나가는 아가씨의 순결한 옆구리에서

창이 튀어나오고

필름을 넣지 않은 사진기의 눈빛으로

네가 그 풍경을, 나를 철컥철컥

찍어댄다는 거

 

배고픈 아이와

죽은 사람의 흰 달을

비 갠 거리, 핏방울

싸움꾼이 잠시 후면 늙어간다는 거

 

종이의 깊은 속에서 가래가 끓고, 그 거품들

너의 왼뺨이 오른뺨보다

따듯하다는 거

내가 네 연인의 연인을 사랑했다는 거

벼락 맞은 한밤의 나무처럼

 

태양이 동그랗고 노란 나뭇잎이라는 거

그래서 매일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새삼 5월을 노래할 필요가 없다는 거

1월에도 12월에도 평등하게, 사이좋게

 

죽음이 흰 유방 열두개를 전부 드러낸 채 거리를 뛰어가고 뛰어갔으니

 

 

그런 날에는

 

산책을 나갈 수 없는 것이다 눈물을 흘리며

가다가 만난 친구에게 다정하고 소소한 안부를 물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함께 걷다가 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자리를 바꾸어

계속 가듯이 그렇게 날씨를 바꿀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왜 마음은 어린 날 좋아했던 음료수병 같지 않을까

아무리 아껴 마셔도 투명한 바닥을 드러내던 그거

마지막 한 방울의 아쉬운 미학을

내가 다 기억하고 있는데

아무리 쏟아도 계속 흐르며 죽은 종이를, 칫솔들, 걔진 구들을

적시는 게, 갈비뼈 사이로 깨진 간장독처럼 줄줄 흐르는

그런 게 내 속에 있는 것일까

이사 트럭처럼

이집 저집 옮겨다니며 소중한 세간살이며 거기에 담겨온 기억을 내려놓고

잘 사세요 애인들이여

 

출발하는 매일의 노동을 나는 모르는 것일까

그런 날엔

네 잠의 허파 속을 가시복어들이 빠르게 헤엄치고 있다고

붉은 얼음 위에 너의 손목들이 길게 놓여 있다고

네가 있는 곳에서 고개를 슬쩍 돌리며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날엔 실례를 무릅쓰고

열다섯살까지 엄마가 나에게 기워 입힌 아버지의 낡은 팬티나

그 떳떳한 바느질 솜씨에 대한 정신분석학이나, 식당에 딸린 방 한 칸을 노래한 시인에 대한 지울 수 없는 연대감, 그가 겸비한 용기와 솔직함에 골몰하느라

나는 솔직하지 않은 게 아니라 용기가 없는 거라고,

용기가 없는 게 아니라 사실의 씨앗을 부드럽게 덮어줄 유머가 없는 거라고,

나에겐 도망칠 수 없는 지리멸렬의 미학이 있을 뿐이라고

 

산책을 나갈 수 없는 것일까

불이 바뀌면 움직이기 시작하는 행인들처럼

금세 건너지 못하고 길게

배를 깔고 누워, 흐릿해져가는 횡단보도처럼

경쾌한 차들이 휭휭 지나쳐가는 굉음의 무게를

모든 세포의 사슬들로 잡아끌면서, 울음도 아니고 웃음도 아니고 그저 무게일 뿐인,

질병도 못되고 회복도 못되고 모종의 이동일 뿐인,

어느 무념의 입술이 책 위의 먼지를 훅 불어버리듯

흩어지고 싶은, 그런 날

 

 

 

그 머나먼

 

홍대 앞보다 마레 지구가 좋았다

내 동생 희영이보다 앨리스가 좋았다

철수보다 폴이 좋았다

국어사전보다 세계대백과가 좋다

아가씨들의 향수보다 당나라 벼루에 갈린 먹 냄새가 좋다

과학자의 천왕성보다 시인들의 달이 좋다

 

멀리 있으니까 여기에서

 

김 뿌린 센베이 과자보다 노란 마카롱이 좋았다

더 멀리 있으니까

가족에게서, 어린 날 저녁 매질에서

 

엘뤼아르보다 박노해가 좋았다

더 멀리 있으니까

나의 상처들에서

 

연필보다 망치가 좋다, 지우개보다 십자나사못

성경보다 불경이 좋다

소녀들이 노인보다 좋다

 

더 멀리 있으니까

 

나의 책상에서

분노에게서

나에게서

 

너의 노래가 좋았다

멀리 있으니까

 

기쁨에서, 침묵에서, 노래에게서

 

혁명이, 철학이 좋았다

멀리 있으니까

 

집에서, 깃털 구름에게서, 심장 속 검은 돌에게서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맑은 술 한 병 사다 넣어주고

새장 속 까마귀처럼 울어대는 욕설을 피해 달아나면

혼자 두고 나간다고 이층 난간까지 기어와 몸 기대며 악을 쓰던 할머니에게

 

동네 친구, 그애의 손을 잡고 골목을 뛰어 달아날 때

바람 부는 날 골목 가득 옥상마다 푸른 기저귀를 내어말리듯

휘날리던 욕설을 퍼붓던 우리 할머니에게

 

멀리 뛰다 절대 뒤돌아보지 않아도

"이년아, 그년이 네 셋서방이냐"

깨진 금빛 호른처럼 날카롭게 울리던

 

그 거리에 내가 쥔 부드러운 손

"나는 정말 이애를 사랑하는지도 몰라"

프루스트 식으로 말해서 내 안의 남자를 꺠워주신 불란서 회상문학의 거장 같은 우리 할머니에게

 

돈도 없고 요령도 없는 작곡가 지망생 청년과 결혼하겠다고

내 앞에서 울 적에 엄마 아버지보다 더 악쓰며 반대했던 나에게

 

"너는 이 세상 최고 속물이야, 그럴 거면서 중학교 때 크리스마스 선물은 왜 물려주었니?"

내가 읽다 던져둔 미국단편소설집을

너덜거리는 낱장으로 고이 간직했던 여동생에게

 

"나는 돼도, 너는 안돼"

하지 못한 말이 주황색 야구잠바 주머니 속에서 오래전 잘못 넣어둔 큰 옷핀처럼 검지손가락을 찔렀지

 

엄밀한 공()의 논리에 대해 의젓하게 박사논문까지 써놓고

이제 와 기억하는 건

용수스님이 예로 드신 무명 옷감에 묻은 얼룩

그 얼룩은 무슨…… 덜룩

시인 김이듬이 말한 것처럼

그거 별 모양의 얼룩일라나, 오직 그 모양과 색이 궁금하신 모든 분들께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를 보여드립니다

 

십년 만에 집에 데려왔더니, 넌 아직도 자취생처럼 사는구나, 하며 비웃음인지 부러움인지 모를 미소를 짓던 첫사랑 남자친구에게

 

이 악의 없이도 나쁜 놈아, 넌 입매가 얌전한 여자랑 신도시 아파트 살면서

하긴, 내가 너의 그 멍청함을 사랑했었다 네 입술로 불어 넣어 내 방에 흐르게 했던 바슐라르의 구름 같은 꿈들

 

여고 졸업하고 6개월간 9급 공무원 되어 다니던 행당동 달동네 동사무소

대단지 아파트로 변해버린 그 꼬불한 미로를 다시 찾아 갈 수도 없지만,

세상의 모든 신들을 부르며 혼자 죽어갔을 야윈 골목, 거미들

"그거 안 그만뒀으면 벌써 네가 몇 호봉이냐" 아직도 뱃속에서 죽은 자식 나이 세듯

세어보시는 아버지, 얼마나 좋으냐, 시인 선생 그 짓 그만하고 돈 벌어 우리도 분당 가면, 여전히 아이처럼 조르시는 나의 아버지에게

 

아름다운 세탁소를 보여드립니다

잔뜩 걸린 옷들 사이로 얼굴 파묻고 들어가면 신비의 아무 표정도 안 보이는

내 옷도 아니고 당신 옷도 아닌

이 고백들 어디에 걸치고 나갈 수도 없어 이곳에만 드높이 걸려 있을, 보여드립니다

위생학의 대가인 당신들이 손을 뻗어 사랑하는

나의 이 천부적인 더러움을

 

반듯이 다려놓을수록 자꾸만 살에 눌어붙는 뜨거운 다리미질

낡은 외상장부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미국단편집과 중론(中論), 오래된 참고문헌들과

물과 꿈 따위만 적혀 있다

여보세요, 옷들이여

 

맡기신 분들을 찾아 얼른 가세요. 양계장 암탉들이 샛노랗게 알을 피워대는 내 생애의 한여름에

다들, 표백제 냄새 풍기며 말라버린 천변 근처 개나리처럼 몰래 흰 꽃만 들고

몸만 들고 이사 가셨다

 

 

 

비가 2붉은 달 / 기형도

 

1

그대, 아직 내게

무슨 헤어질 여력이 남아 있어 붙들겠는가.

그대여, ×자로 단단히 구두끈을 조이는 양복

소매끈에서 무수한 달의 지느러미가 떨어진다.

떠날 사람은 떠난 사람. 그대는 천국으로 떠난다고

장기 두는 식으로 용감히 떠난다고

짧게 말하였다. 하늘나라의 달.

 

2

너는 이내 돌아서고 나는 미리 준비해둔 깔깔한 슬픔을 껴입고

돌아왔다. 우리 사이 협곡에 꽂힌 수천의 기억의 돛대, 어느 하나에도

걸리지 못하고 사상은 남루한 옷으로 지천을 떠돌고 있다. 아아 난간마다 안개

휘파람의 섬세한 혀만 가볍게 말리우는 거리는

너무도 쉽게 어두워진다. 나의 추상이나 힘겨운 감상의 망토 속에서

폭풍주의보는 삐라처럼 날리고 어디선가 툭툭 매듭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내가 떠나기 전에 이미 나는 혼자였다. 그런데

 

너는 왜 천국이라고 말하였는지. 네가 떠나는 내부의 유배지는

언제나 푸르고 깊었다. 불더미 속에서 무겁게 터지는 공명의 방

그리하여 도시, 불빛의 사이렌에 썰물처럼 골목을 우회하면

고무줄처럼 먼저 튕겨 나와 도망치는 그림자를 보면서도 나는

 

두려움으로 몸을 떨었다.

떨리는 것은 잠과 타종 사이에서 비틀거리는 내 유약한 의식이다.

책갈피 속에서 비명을 지르는 우리들 창백한 유년, 식물채집의 꿈이다.

여름은 누구에게나 무더웠다.

 

3

잘 가거라, 언제나 마른 손으로 악수를 청하던 그대여

밤새워 호루라기 부는 세상 어느 위치에선가 용감한 꿈 꾸며 살아 있을

그대. 잘 가거라 약 기운으로 붉게 얇은 등을 축축이 적시던 헝겊 같은

달빛이여. 초침 부러진 어느 젊은 여름밤이여.

가끔은 시간을 앞질러 골목을 비어져 나오면 아,

온통 체온계를 입에 물고 가는 숱한 사람들 어디로 가죠? (꿈을 생포하러)

? 누가요 (꿈 따위는 없어) 모두 어디로, 천국으로

 

세상은 온통 크레졸 냄새로 자리 잡는다. 누가 떠나든 죽든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였다.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

턱턱, 짧은 숨 쉬며 내부의 아득한시간의 숨 신뢰하면서

천국을 믿으면서 혹은 의심하면서 도시, 그 변증의 여름을 벗어나면서.

 

 

포도밭 묘지 2

 

아아, 그때의 빛이여. 빛 주위로 뭉치는 어둠이여. 서편 하늘 가득 실신한 청동의 구름 떼여. 목책 안으로 툭툭 떨어져 내리던 무엄한 새들이여. 쓴 물 밖으로 소스라치며 튀어나오던 미친 꽃들이여. 나는 끝을 알 수 없는 질투심에 휩싸여 너희들을 기다리리. 내 속의 모든 움직임이 그리고 탐욕을 향한 덩굴손에서 방황의 물기가 빠질 때까지.

 

밤은 그렇게 왔다. 포도 압착실 앞 커다란 등받이의자에 붙어 한 잎 식물의 눈으로 바라보면 어둠은 화염처럼 고요해지고 언제나 내 눈물을 불러내는 저 깊은 공중空中. 기억하느냐, 그해 가을 그 낯선 저녁 옻나무 그림자 속을 홀연히 스쳐가던 천사의 검은 옷자락과 아아, 더욱 높이 흔들리던 그 머나먼 주인의 임종. 종자從者, 네가 격정을 사로잡지 못하여 죽음을 환난과 비교한다면 침묵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 네가 울리는 낮은 종소리는 어찌 저 놀라운 노을을 설명할 수 있겠느냐. 저 공중의 욕망은 어둠을 지치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종교는 아직도 지상에서 헤맨다. 묻지 말라, 이곳에서 너희가 완전히 불행해질 수 없는 이유는 신이 우리에게 괴로워할 권리를 스스로 사들이는 법을 아름다움이라 가르쳤기 때문이다. 밤은 그렇게 왔다. 비로소 너희가 전 생애의 쾌락을 슬픔에 걸듯이 믿음은 부재 속에서 싹트고 다시 그 믿음은 부재의 씨방 속으로 돌아가 영원히 쉴 것이니, 골짜기는 정적에 싸이고 우리가 그 정적을 사모하듯이 어찌 비밀을 숭배하는 무리가 많지 않으랴. 밤은 그렇게 노여움을 가장한 모습으로 찾아와 어두운 실내의 램프불을 돋우고 우리의 후회들로 빚어진 주인의 말씀은 정신의 헛된 식욕처럼 아름답다. 듣느냐, 이 세상 끝 간 곳엔 한 자락 바람도 일지 않았더라. 어떠한 슬픔도 그 끝에 이르면 짓궂은 변증의 쾌락으로 치우침을 네가 아느냐. 밤들어 새앙쥐를 물어뜯는 더러운 달빛 따라가며 휘파람 부는 작은 풀벌레들의 그 고요한 입술을 보았느냐. 햇빛은 또 다른 고통을 위하여 빛나는 나무의 알을 잉태하느니 종자從者, 그 놀라운 보편을 진실로 네가 믿느냐.

 

 

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

 

어는 영혼이기에 아직도 가지 않고 문밖에서 서성이고 있느냐. 네 얼마나 세상을 축복하였길래 밤새 그 외로운 천형을 견디며 매달려 있으냐. 푸른 간유리 같은 대기 속에서 지친 별들 서둘로 제 빛을 끌어모으고 고단한 달도 야윈 낫의 형상으로 공중 빈 밭에 힘없이 걸려 있다.

 

아느냐, 내 일찍이 나를 떠나보냈던 꿈의 짐들로 하여 모든 응시들을 힘겨워하고 높고 험한 언덕들을 피해 삶을 지나다녔더니, 놀라워라. 가장 무서운 방향을 택하여 제 스스로 힘을 겨누는 그대, 기쁨을 숨긴 공포여, 단단한 확신의 즙액이여.

 

보아라, 쉬운 믿음은 얼마나 평안한 산책과도 같은 것이냐. 어차피 우리 모두 허물어지면 그뿐, 건너가야 할 세상 모두 가라앉으면 비로소 온갖 근심들 사라질 것을. 그러나 내 어찌 모를 것인가. 내 생 뒤에도 남아 있을 망가진 꿈들, 환멸의 구름들, 그 불안한 발자국 소리에 괴로워할 나의 죽음들.

 

오오, 모순이여, 오르기 위하여 떨어지는 그대. 어느 영혼이기에 이 밤 새이도록 끝없는 기다림의 직립으로 매달린 꿈의 뼈가 되어 있는가. 곧이어 몹쓸 어둠이 걷히면 떠날 것이냐. 한때 너를 이루었던 검고 투명한 물의 날개로 떠오르려는가. 나 또한 얼마만큼 오래 냉각된 꿈속을 뒤척여야 진실로 즐거운 액체가 되어 내 생을 적실 것인가. 공중에는 빛나는 달의 귀 하나 걸려 고요히 세상을 엿듣고 있다. 오오, 네 어찌 죽음을 비웃을 것이냐 삶을 버려둘 것이냐, 너 사나운 영혼이여! 고드름이여.

 

 

 

죽은 구름

 

구름으로 가득 찬 더러운 창문 밑에

한 사내가 쓰러져 있다, 마룻바닥 위에

그의 손은 장난감처럼 뒤집혀져 있다

이런 기회가 오기를 기다려온 것처럼

비닐백의 입구같이 입을 벌린 저 죽음

감정이 없는 저 몇 가지 음식들도

마지막까지 사내의 혀를 괴롭혔을 것이다

이제는 힘과 털이 빠진 개 한 마리가 접시를 노린다

죽은 사내가 살았을 때, 나는 그를 몇 번인가 본 적이 있다

그를 사람들은 미치광이라고 했다, 술과 침이 가득 묻은 저

 

엎어진 망토를 향해, 백동전을 던진 적도 있다

아무도 모른다, 오직 자신만이 홀로 즐겼을 생각

끝끝내 들키지 않았을 은밀한 성욕과 슬픔

어느 한때 분명 쓸모가 있었을 저 어깨의 근육

그러나 우울하고 추악한 맨발 따위는

동정심 많은 부인들을 위한 선물이었으리

어쨌든 구름들이란 매우 조심스럽게 관찰해야 한다

미치광이, 이젠 빗방울조차 두려워 않을 죽은 사내

자신감을 얻은 늙은 개는 접시를 엎지르고

마루 위엔 사람의 손을 닮은 흉측한 얼룩이 생기는 동안

두 명의 경관이 들어와 느릿느릿 대화를 나눈다

어느 고장이건 한두 개쯤 이런 빈집이 있더군,

이따위 미치광이들이 어떻게 알고 찾아와 죽어갈까

더 이상의 흥미를 갖지 않는 늙은 개도 측은하지만

아무도 모른다, 저 홀로 없어진 구름은

처음부터 창문의 것이 아니었으니

 

 

 

없는 사랑에 대한 에스키스

 

있다고 하고서 안으면 안기지 않는 사랑, 없다고 하고서 돌아서면 멀리서 안기려 달려오는 사랑, 하나 안을 수 없는 사랑, 불러도 대답 없는 사랑, 부르지 않으면 귀 기울이다가 부르면 멀어지는 사랑, 있으나 없는 사랑, 없으나 늘 내게 있는 사랑, 보려고 하면 보이지 않는 사랑, 보지 않으려 하면 어느 새 어렴풋이 떠오르는 사랑, 안드로메다 어느 별에서 만날 것 같은 사랑, 이제 영영 이별일 것 같은 사랑, 소행성 B 25를 걷다가 만날 것 같은 사랑, 하나 만날 수 없는 사랑, 내 사랑이라면 내 사랑이 아니고 내 사랑이 아니라면 내 사랑이라고 우기는 사랑, 어떻게 해야 하나, 내 사랑, 내 몰락에의 사랑*

* 이 연주의 시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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