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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괜찮은 詩

낯설은 시인들이 2022년 발표한 시들

by 이성근 2023. 1. 23.

https://www.youtube.com/watch?v=427eJBuYRoU 

서울 안개 /임찬일

라면을 보면

라면 하나

여명

바짝 붙어서다> 김 사 인

절룩 박숙경

나는 허정虛靜이라는 말을 좋아해 김정숙

삐딱한 계절의 빨강 김밝은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

서쪽을 보다 최금녀

즉석복권 박은영

그릇 최병근

모처럼

먼지

2021, 치매 걸린 여름 임유행

부풀어지는 한낮 명인아

아픔의 원경 박판석

꼭대기 집 정정화

호수의 책 강익수

파랑과 파란 성은주

내 눈치도 좀 보고 살걸 그랬다 이명선

 

넷플릭스 문정영

소나기

사주에 도화살이 있다는 말을 듣고 이대흠

소만 안영희

노자의 무덤을 가다 이영춘

어쩌나 박봉준

관솔 윤영권

꽃을 수령하다 김성희

문턱 이돈형

미래파? 아니, 미래형 이선정

새의 역사 나영순

반곡지* 황명자

환갑 유승도

풀독 최금녀

아침 배한봉

벌초 김희정

빈 우체통 유승도

사구의 발달 최지온

죽방렴 어부 김승필

죽방렴

목을 감는 일 김승필

그냥, 그렇다고 이순

숲의 알리바이 조온윤

잠적 안국현

조만간 사라질 말들을 위하여 서봉교

오월보다 먼저 오는 새 박봉준

가슴에서 핏빛 꽃이 피어나다 강대선

윤슬 김채운(김혜경)

얼레지 그녀 정선희

출입구 전영관

 

 

 

서울 안개 /임찬일

 

나는 여태 시간이 사람을 죽이는 줄로만 알았지 뭐야

시간도 사람을 잘못 만나면 허옇게 죽는가 봐

사람과 동반자살한 한 무리 시간의 시체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눈이야 벌써 멀었지

더듬더듬 기어가는 저 서울특별시 좀 보아!

시간을 함부로 쓰고 버린 얼굴 없는 사람들

정신이 몸을 잃으면 귀신이 되는가 봐

유리처럼 시간을 깨는 사람들의 느린 동작

절망은 슬로우 비디오로 새벽부터 틀고 있다

마른 꽃 한 묶음이 물구나무서고 있다

썩지 않는 비닐봉지가 낮게 떠서 날고 있다

비만한 살을 빼려다 목숨까지 빼고 있다

 

 

라면을 보면

 

차마 말하지 못했습니다 추운 겨울날 고기 파는 어머니를 따라다니며 조르고 졸라

라면을 끓었습니다 비싸다고 라면 하나와 그만한 양의 국수를 넣어서 끓인 라면을

그릇에 담을 때쯤, 어머니는 추운 바깥 날씨에 김이 무럭무럭 생각한 나는 더러워서 못

먹는다고, 세로 사서 끓여달라고 뗑깡을 부렸습니다. 안 빠뜨렸다고 아들에게 사정하는

어머니는 결국 동태 열 마리를 팔아야 사는 라면 하나를 새로 끓였습니다

 

사십오 년이 지난 지금 라면 하나를 끓일 때마다 생각이 납니다

생선 한 마리 구우면 목에 걸릴까 봐 가시를 입으로 오물오물 없애고 주는 고기를 어떻게

그리 맛있게 날름날름 잘도 받아먹었는지,

부끄러움이 푸른 멍으로 가슴에 남았습니다

 

 

 

라면 하나

 

라면 하나 끓여 딸내미와 먹는

휴일의 늦은 오후

아빠가 끓여주는 라면은

언제나 맜있어

그 소리에 주마등으로 소환되는 기억들

골방에서 라면 하나로 셋이 먹던 날

냄비에는 국물 하나 남지 않았습니다

한놈은 세상 바꾸는 꿈을 꾸다가 하늘 나라에 있고

한놈은 여직 현장과 변해버린

달셋방을 기웃거리고

남은 한 놈은 여기저기 글을

염탐질이나 하고 있습니다

 

먹먹한 날

니끔 곤론에 눈물, 콧물로 끓인

라면 하나에

남은 건더기가 보고 싶은 날도 있습니다

 

 

여명

 

새벽은

어둠 너머에서 옵니다

새벽은

노동자의 붉은 피에 젖어 해가 뜹니다

 

 

바짝 붙어서다  김 사 인

 

굽은 허리가

신문지를 모으고 상자를 접어 묶는다

몸빼는 졸아든 팔순을 담기에 많이 헐겁다

승용차가 골목 안으로 들어오자

벽에 바짝 붙어 선다

유일한 혈육인양 작은 밀차를 꼭 잡고

저 고독한 바짝 붙어서기

더러운 시멘트벽에 거미처럼

수조 바닥의 늙은 가오리처럼 회색벽에

낮고 낮은 저 바짝 붙어서기

차가 지나고 나면

구겨졌던 종이같이 할머니는

천천히 다시 펴진다

밀차의 바퀴 두 개가

어린 염소처럼 발꿈치를 졸졸 따라간다

늦밤에 그 방에 켜질 헌 삼성테레비를 생각하면

기운 싱크대와 냄비들

그 앞에 서 있을 굽은 허리를 생각하면

목이 메인다

방 한 구석 힘주어 꼭 짜놓은 걸레를 생각하면

 

 

절룩 박숙경

 

절룩절룩 책 부치고 오는 길

접질렸던 왼발에 무게가 더 실려요

 

시든 장미 옆으로 유모차가 지나가요

쌍둥이 중 한 아기가 손가락을 빨아요

나의 절룩과 아기의 손가락 사이엔 결핍이란 말이 있어요

 

소공원 벤치에 노인 몇 나란히 앉아

폭염보다 더 뜨거운 고독을 뜯어내는 중이에요

고독의 꼭짓점에 서로의 눈길이 닿으면

어디선가 소낙비 한 줄기 달려와요

절룩이 모여 여름을 견디는 풍경이라고나 할까요

 

신호등이 초록으로 바뀌면

절룩을 감추고 하나도 안 아픈 사람처럼 걸어요

아직 절룩을 꺼낼 용기가 내겐 없는거죠

나에게 절룩이 나타나기 전에는 누구의 절룩이 보이질 않았어요

 

나의 절룩을 내가 읽었을 때

비로소 우리의 절룩이라는 문장이 완성된다는 걸

수많은 절룩 속에서 혼자 절룩여 보고 나서야 깨닫는 오후예요

 

화단의 치자꽃이 마지막 향기를 토해요

잠시 절룩을 잊고 그 옆에 쪼그려 앉아요

 

 

나는 허정虛靜이라는 말을 좋아해 김정숙

 

책을 보다가 죽음이라는 단어가

마음속으로 들어왔어

 

참 허무한 것, 참 허약한 것

참 보잘것없는 것이 인생이라는 생각이

나를 늪 속으로 내던졌어

 

나는 허정虛靜이라는 말을 좋아해

매일매일 모든 것으로부터

고요해지고, 차분해지고 싶지

 

붓 가는 대로 세상을 껴안지 못하는

마음의 부산함이여 소란함이여

내 안의 나의 부재不在

 

삶의 규율들이 모가지를 뚝뚝 분지르는군

리듬에 맞추어 리드미컬하게

고통의, 고뇌의 춤이라도 출거나

 

습관적으로 또 죽음을 생각하는 나여

전류처럼 흐르는 산화散化의 파장이여

꽃불을 환하게 밝히고 싶어

 

어리석고도 불쌍한 바퀴벌레여

동굴 속 어둠이여 허름한 골방이여

언어言語여 책이여

나를 사정없이 내동댕이쳐 다오

 

 

삐딱한 계절의 빨강 김밝은

 

올가을엔 동쪽에서 오는 사람을 꽉 잡아!

틀림없이 귀인일 테니

 

나의 훗날쯤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심술궂은 사월의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초년고생은 심했구만

이젠 마음만 먹으면 다할 수 있겠어

(어딜 가든 똑같은 희망고문이지)

 

사과에 들여야 할 붉은 향기를 품기 위해

마음속 적심(摘心)은 쉽지 않아서 다만

아직 삐딱한 계절이 덮인 흙을 발로 꾹꾹 눌러주었다

 

빨강을 좀 더 주세요

아니, 그냥 빨강으로 나를 덮어줄래요

 

어둠처럼 고이는 잡념의 시간을 내 안에서 파내고

점괘에 맞추듯 붉은 색을 들이부어야 하나

 

꼼꼼한 솜씨로 그려 넣은 부적의 붉은 샛길은

어디로 가닿는 절박한 소식인지

 

붉은 속옷을 입으라니까,

아브라카다브라!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

-대흥사 초의매

 

터져 나오는 신음을 꼬집으며

손등에 떨어지는 눈물로

몰래 훔쳐둔 소식을 그리는 중입니다

 

세상의 벽은 너무 가팔라서

퉁퉁 부은 손으로 오르기엔 뼈저린 곳인데

 

꿈꾸는 한 발, 내딛는 건

차마 욕심일 뿐이라고

적묵당 담벼락 아래 쪼그리고 앉아

경전의 향기를 붙잡고 있어요

 

막막한 예언에 갇혀서도 간절해지는,

만개한 당신 얼굴

 

어느 시절의 안색으로 그토록 눈부신가요

 

*조선 후기 화가 조희룡이 그린 산수화.

 

 

서쪽을 보다 최금녀

 

우리는 동쪽에 있다

 

남편은 늘 동쪽 벽에 기대어 앉아

서쪽 벽을 보고 있다

 

액자 속 인물들은 표정을 바꿀 생각이 없다

40년 된 소철은

현관문 열리는 소리에도 놀라지 않는다

 

반가운 적이 없는 기억들이

꽃 진 화분에서 기어 나와

틈새를 찾아다니며 핀다

 

르누아르의 여자는 그림 속에서도 르누아르를 사랑한다

꼭 하고 싶은 말은 냉동실에 넣어두고

죽음은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매일

정장 차림으로 날씨를 읽는다

 

서쪽 벽은 늘 춥고 어둡다

바라보는 중이다

 

 

 

즉석복권 박은영

 

가능성은 긁지 않았을 때 일어나는 사건

 

우리는 서로의 등을 긁어줬다 꽝인지, 행운인지 손닿지 않는 곳을 긁어주는 사이가 되었지만 잔소리를 하며 바가지를 긁을 때가 많았다 긁을수록 앞날은 보이지 않고 마른 등판만 눈에 들어왔다 일확천금의 불가능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눈으로 보지 않고 믿는 것이

가장 쉬운 일

 

긁지 않고 그대로 두는 편이 나을 뻔했다 우리는 꽝이란 것을 안 뒤 즉석요리를 먹듯 뭐든지 쉽게 화를 내고 아무것도 아닌 일로 찢어지자며 언성을 높였다 어떤 날은 긁다가 혈흔을 남기기도 했다

 

손톱은 피를 먹고 자랐다 우리의 관계에서 남은 건 피밖에 없다는 생각을 할 때, 등골은 물론이고 이마와 미간, 손등…… 온몸은 그야말로 손톱자국으로 이글거렸다

 

그래도 한 가지

 

우리가 낳은 자식은 가능성이 많은 아이라고 여겼다

 

그 희망을 간직하고 살았다

 

 

 

그릇 최병근

 

쓸모는 밥상을 부른다

수저도 대기 전에

진즉부터 포만해져서

놓여 있는

그릇들

 

그릇된 자들은

입이 젤로 크다

 

여섯 살 적

할머니 흰 귀밑머리 아래서

 

큰 그릇 될 거여

 

배부를수록

그릇은 빈다

 

 

모처럼

 

풍경소리 들으러 갔다 거기

한바탕 싸움이 있었다

와중에 누군가 대장간에라도 다녀왔는지

사천왕 작두 창칼이 춤추고

목이 잘린 말들

 

말들이 히힝 울었다

경마장이 아니었는데

재갈을 물리고

오도 가도 못하는

첩첩산중

 

결가부좌로 포박당한 부처가

유리안치 되었다

 

일곱 걸음만 걸을 수 있게 해다오

연꽃 위에서 이슬과 노는

개구리나 되게

 

누구의 명이던가

붉은 장삼을 두른 나무들이

대웅전 지붕 위에

단지한 손가락을 불쏘시개로 던져

불을 질렀다

 

발치 사하촌에서

방아 찧는 소리가 났다

 

 

먼지

 

어둠의 그늘에서 잠자던,

뿌리도 없이 자라난 너는

어디서 왔을까

저 침묵은 어느 전생인가

현생은 찰나의 빛이라고

아침마다 눈을 뜬다

창틈으로 새어든 햇살로 바라본다

내 이름 새긴 먼지 하나

 

 

 

2021, 치매 걸린 여름 임유행

태양이 통유리 두 겹을 뚫고

나의 인내심을 실험하러 왔나 보다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의 여인처럼

 

아침 7시 여기 12층 칸막이 속에는

아직도 열대야에서 깨어나지 못한 늘어진 사지와

혼몽한 브레인이 있다

정면에서 쏘아 대는 햇빛이 하품을 하며

온 천지를 달구는 중이고

장난치기 좋아하던 바람은 기척도 없다

 

폭염과 싸울 나의 낡은 지체를 점검한다

하루를 지탱하는 하체는 이상이 없나

식탁의자 등받이를 잡고 발꿈치 들기 쉰 번

학다리 서기 서른 번 그저 흉내를 낼 뿐이다

 

사는 것도 모두 남의 뒷모습만 따라가는

마스크 공화국

내 몸의 안부를 묻다가

문득 천둥 번개로 머리를 꽝 치는

고향 마을을 돌아본다

 

젊은 나이 탈곡기에 팔 하나 잘리고도

치매 어머니를 수발하던

뚝방 아래 오두막 노총각 휘원이

그의 어깨에서 황금 날개가 돋았었지

불구가 되고도

한 점 부끄럽지 않은 길

 

유령 같은 에어컨 바람 앞에

정신마저 부서진 코로나 여름

내 안의 늙은 사원 속에 내가 있다

 

 

 

부풀어지는 한낮 명인아

 

할머니의 울부짖음이 복어탕 그릇을 엎었고 이제 막 새 색시가 된 수줍음 많은 숙모의 어깨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엄마의 우는 모습이 낯설었던 날, 자리를 같이했던 삼촌들이 가슴을 치고 어쩌나 어쩌나

 

햇살 따스한 한낮이었다 새색시 배 속에 앉아 있었던 사촌 동생은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는 채 태어나야 했고 눈물로 갓난아이를 씻어 주던 숙모도 이제는 삼촌이 가신 나라로 따라가셨다 어쩌나 어쩌나

 

다시 보면 이승이고 다시 볼 수 없으면 너머인 것을 일찍 세상을 달리한 아버지보다 더 일찍 알게 됐다는 사촌, 아버지 세상보다 두 배 넘게 살아온 세상에서 복어만 피하면 되는 것인지 알 수 없어서 어쩌나 어쩌나

 

깊음에 젖은 지리산 골짜기로

밥상이 오른다

 

 

아픔의 원경 박판석

 

모든 아픔은

자리를 상실한 부품들이

제자리를 찾기 위한

몸부림이다

 

제 가슴을 붉게 찢어버리는 화산

고요하고자 하나 강풍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하루 칠십만 번씩 제 가슴을 치는 파도

 

흔들리는 모습이

아무렇지 않게 보였던 이유는

내가 그들의 아픔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음일까

 

적막을 깨뜨리며 구르는

모든 부품에는

제자리를 잃은 것들의

몸부림이 들어 있다

 

 

꼭대기 집 정정화

 

어쩌다 우린 이십 층까지 힘겹게 올라와

이곳에서 아침을 먹는 걸까

홍콩야자 잎사귀들과 선인장 빈 화분, 책상들도 줄줄이 따라 올라와

의자를 놓고 창문을 열어둔 걸까

 

케일 주스를 갈아 테이블 위에 놓아두면

염소같이 가느다란 얼굴로 침대에 누운 찡그린 햇살

암막 커튼을 가리면 다시 눈을 감고

냄비 바닥이 까맣게 다 타도록 질문과 대답은 영원히 끝나지 않겠지만

 

공원의 사람들은 뒤로도 앞으로도 뛰어다니며 피구를 하고 있다

모두 죽어야 끝나는 게임을

찬물을 끓이며 바라보고 있다

죽어도 웃으면서 죽을 수 있어야 할 텐데

우연히 흘린 커피 몇 방울이 수첩에 스며들어 얼룩을 남기고

이름이 아름다웠지 이곳을 그냥 내려서 살고 싶었던 곳이었어

무작정 내려 물래를 돌리고 사랑한다고 믿었던 것들을 구었지만

서로 깨지기 쉬워 자주 울고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고 나면

이불 속은 왜 무밭 같았을까

발바닥에서도 푸성귀 냄새가 가득했고

치마에도 머리핀과 노트 속에서도 아이 이름이 적혀 있었지만

해가 뜨고 해가 지는 풍경은 얼마든지 멀리 달아날 수 있었다

 

냉장고에서 꺼낸 얼음을 아주 조금씩 녹이면서

타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베고니아 문양을 그릴 것이라고 말했지만

오늘은 목도리 감는 법을 이해하면 훨씬 더 따뜻해지겠지

 

우린 언제부터 여기 같이 있었을까

아주 가까이 확대한 시간들을 오려 기차에 붙이지

눈과 발이 달린 기차는 어디로 가게 되는 걸까

여전히 우리는 나란히 앉아 있긴 하는 걸까

 

 

호수의 책 강익수

 

맑고 물큰한 호수는 오늘도 제본 중이다

부치지 못할 편지를 쓰고 싶거나 새와 구름의 말을 읽고 싶은 날

지나온 발자국만큼 긴 편지를 써도 좋을 여백과

새와 구름의 말이 있는 호수로 간다

 

운동장이자 학교이자 도서관이기도 한 그곳엔

청둥오리가 새끼들에게 한가로이 책을 읽고 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햇살이 아침의 빗장을 열자

갈대는 호수의 이야기 하늘에 써 내려간다

구름은 그림자 놀이하듯 상형문자로 화답하지만

막 도착한 철새 몇 마리

하얀 설원과 늑대의 이야기 펼쳐 놓기 바쁘다

먼 데 산은 바위와 소나무와 옹달샘이 호수의 뿌리가 아니냐며

제 그림자로 조곤조곤 서툴게 쓴다

 

호수의 독서광은 물고기인 것을 호수를 보면 안다

자면서도 책을 읽고 책에 빠져 밖으로 나올 생각이 없으니 다리조차 없다

제아무리 위대한 사람도 스스로 책이 되지는 못하지만

왕버들은 호수로 들어가 단단한 책이 되어 중심을 잡고 있다

 

부치지 못할 편지는 오늘도 출렁이는 물결로 지우고 돌아선다

넘치면 흘려보내고 부족하면 채워가는 호수엔

날렵한 소금쟁이가 먼지를 털며 새로운 여백의 공포를 즐기고 있다

 

 

 

파랑과 파란 성은주

 

동그라미를 친다 당신은

내가 살고 싶은 나라

 

들숨과 날숨 반복하듯천문대 옥상에 불던 바람, 나란히 걷던나무 계단의 삐걱거림, 그럴수록 꽉 잡아주던

싱싱한 과일을 꺼내는 손

껍질을 까는 손가락

당신의 입술

 

한 뼘 더 가까이 미풍에 펄럭이고 싶어서, 우린 북쪽 하늘 별자리에 같은 소원을 빈다 별 볼일 없이 살다가 별일 없이 사라진, 뒤돌아보다가 미끌어진, 미아 찾기 전단 속 이목구비 뚜렷한 아이가 떠오른다 꽃으로 변명하는 계절이 오고 어릴 덕 부모님 손잡고 걷다 자주 멈춰 선 길

 

그곳에 놓아 버린

손목시계

체크 셔츠의 단추

내 곁에 머물던 얼굴이 지워질 차례

당신은 거기서 파랑을 낳고 난 여기서 파란을 낳겠지

 

안부가 궁금할 때쯤 로마식 화장실에 동그랗게 앉아

불행하지 않게

부끄럽지 않게 간격 좁히며

 

울고 있는 당신은 파랑새 혹은 오래전 잃어버린 파란 스웨터

네 이름 부르고 싶어, 라고 마음껏

짙고 질긴 발음 누르는 목소리

축하해 줄 수 있을까, 라고 홀로

이미 저지른 질문 쏟아내는 새벽

 

다른 사람이 사는 나라

당신이라는 말은

이젠 파랑 일어나 파란 일으키는 타국의 말

 

 

내 눈치도 좀 보고 살걸 그랬다 이명선

 

마음이 마음 같지 않아 천천히 병을 얻었다

 

생각날 때 밥을 먹고 너와 함께 골목을 걸어 봐도 내 골목은 끝으로 갈수록 말수가 적어졌다

 

아무 날엔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사랑을 이어 불렀지만 엄마의 딸이라 말 못 하는 헛꿈만 꾸곤 했다

 

나를 앞질러 가는 세상에 적의가 있었던 건 아니다

 

어림없는 이야기를 어림잡아 보려는 사람처럼 한 발 뒤로 물러나 나 같은 사람을 쳐다보았다 아무 날은 아무렇지 않길 바라며

 

겪지 말아야 할 일을 일찍 겪은 사람과 겪을 일을 먼저 겪은 사람에게도 남은 미래가 있어 나를 보면 조바심이 난다는 엄마의 말을 수긍하기로 했다

 

이 골목에 비가 그치면 반짝 낮 더위가 시작되겠지만 늘 그렇게 무엇엔가 홀려 왔던 것처럼 나를 넘겨짚다가 골목의 끝과 마주한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눈치 말고 내 눈치나 좀 보고 살걸 그랬다

 

 

 

넷플릭스 문정영

 

꽃을 꽃으로만 보던 절기가 지났다

계절이 꽃보다 더 선명하게 붉었다

그때 당신은 열리는 시기를 놓치고,

나는 떨어지는 얼굴을 놓쳤다

되돌려볼 수 있는 사랑은 흔한 인형 같아서

멀어진 뒤에는 새로운 채널에 가입해야만 했다

언제든 볼 수 있는 당신은 귀하지 않았다

공유했던 풍경은 채널 뒤로 사라져 갔다

어느 날에는 두근거림이 달아나 버렸다

나는 캄캄한 시간을 스크린에 띄우고

당신에 대한 기억을 하나씩 지우기로 했다

사랑을 자막처럼 읽는 시절이 왔다

눈에 잡히지 않은 오래전 사람처럼 자꾸 시간을 겉돌았다

나를 의자에 앉혀두고

당신은 생각에서 벗어난 생각을 보고 있었다

느슨해진 목소리가 사랑을 끝내고 있었다

툭 툭 우리는 같은 의자에서 서로 다른 장면을

몸 밖으로 밀어내는 중이었다

 

 

소나기

 

소나기가 불현듯 내리면 나는 가벼운 당신을 업을까.

풀빛 물든 늦여름 개울가를 건너려면 당신과 먼저 먼 여행을 가야 하는데

거기서 우리는 소나기를 만나고, 소나기는 당신을 내 등에 업히게 하고

내 등은 먼저 젖어서 부끄러운 내력 내보일 텐데,

그래도 등에 가만히 몸 접어 업히는 당신이 하늘에 비추어지고

나는 듬성듬성한 길을 당신의 신발 크기만큼 걷고 싶은 것이다.

어느 별에서 떨어진 비가 여기까지 도착하기까지는 소나기만큼 고운 것이 없다.

떨어진 이후 맑은 빛으로 바뀌어 젖은 마음들 말리기에 얼마나 좋은가.

비 그친 뒤에도 젖은 등과 가슴 맞대고 오래 풀향을 맡을 수 있다.

그 오래전부터 나는 당신에게 먼 여행을 가곤 했다.

그 오래전부터 당신은 없고 무성한 풀만 울고 갔다.

 

 

 

사주에 도화살이 있다는 말을 듣고 이대흠

사주에 도화살이 있다는 말을 듣고 처음에는 겁이 났습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내 운명에 복숭아꽃이 피어있는 것만 같아서 복숭아꽃 피는 봄을 내내 살것 같아서 어디서나 꽃밭일 것만 같아서 기뻤습니다

 

도화살 매화살 이 화살이 꽃살 무늬로 새겨진 방 안에 머물면

당신은 또 꽃 그림자처럼 스미겠지요

 

묵화로 그린 댓잎 같은 바람이 불어도 좋겠습니다

국화향이 창호지에 스며 내내 달빛인양 고이면

당신의 도화살과 나의 도화살이 나란히 누워

 

꽃잎처럼 부드러운 서로의 살을 만지고

봄밤 같은 세월을 바위에 꽃잎 떨구듯 한 잎 한 잎 흘리면

 

바닥은 얼마나 놀랄까요?

꽃을 입게 될 줄 몰랐을 겁니다

 

사주에 도화살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세상의 모든 봄이 내 것이 된 것만 같아서

비 온 뒤 꽃 뿌리처럼 몰랐던 내가 돋아나는 것만 같아서

웃기만 해도 몸속에서 꽃향기가 출렁거렸습니다

 

 

소만 안영희

 

홍천 가는 국도 아래

남실남실 물이 찬 논배미들과

이내 모내기로 실려 나갈 못자리들이

눈에 묻어올 듯한 초록이네

 

모내기 날 고모 집의 툇마루

다져 올린 고봉밥과 간 고등어 한 토막씩이 올라앉은 감자 졸임의

밥상이

걷어붙인 일꾼들의 종아리와 햇목화 빛 햇빛이 보이네

 

지금은 폐가가 된 집, 지금은 죽고 없는 사람들의

충만한 생의 풍경들이

부시게 깃을 쳐대고 있네

 

저녁이 오면

저 물찬 논배미마다 개구리들이 영원처럼, 영원처럼

울겠지

뭐 하자고 찾아왔는지 저어만큼서 바라만 보다가 가던

소년들이 있었던 열일곱, 그 저녁들처럼

 

소만(小滿),

믿을 수 없이 차오른 이 물의 절기는 얼마나 많이

죽은 자리들을 다시 채우려나

 

-갑시다, 거기!

수화기 저쪽으로부터 너무 쉽게 녹슨 빗장 젖히는 소리

약속 방기한 동안

그 가슴 자리 되돌릴 수 없는 천수답이 되어있는 줄도

모르고,

 

 

노자의 무덤을 가다 이영춘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사람을 보았다

한 줌 바람으로 날아가는 사람을 만났다

 

지상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지상은 빈 그릇이었다

 

사람이 숨 쉬다 돌아간 발자국의 크기

바람이 숨 쉬다 돌아간 허공의 크기,

뻥 뚫린 그릇이다, 의 그릇,

 

살아 있는 동안 깃발처럼 빛나려고

저토록 펄럭이는 몸부림들

 

그 누구의 그림자일까?

누구의 푸른 등걸일까,

 

온 지상은 문을 닫고

온 지상은 숨을 멈추고

 

아무것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

그릇,

 

빈 그릇 하나 둥둥 떠 있다

 

 

 

어쩌나 박봉준

 

생전에 콜레라에 놀란 적 있는

저승에 계신 우리 아버지

코로나19는 또 무슨 뚱딴지 같은 말이냐고

기겁하실라

 

세 살배기 손자 초등학교에 들어가 아침마다 마스크 안 쓰면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엄마 치맛자락 붙들고 징징거리면 어쩌나, 맞선 보고 첫날밤 마스크를 벗은 서로를 못 알아보면 어쩌나, 다시 상투를 틀고 갓 쓰고 무슬림 여자들처럼 니캅이나 부르카를 착용해야 하나 어쩌나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호랑이보다 곶감이 무섭고 곶감보다 콜레라가 무서운 줄 알았는데 핵무기보다 무서운 코로나, 코로나19를 물리치고 나면 또, 어쩌나*

 

문밖에 나가지 마라

대문을 잠그고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르던 사람들

 

이번 전쟁은

흩어지면 살고 뭉치면 죽는다

 

* 출애굽기 11

 

 

 

관솔 윤영권

 

썩지 않은 상처는 관솔이 된다.

바람이 찍어 두고 간 상처가 아물어

그 위에 적셔지던 송진이

나무의 아름다운 비밀이 된다.

그 위에 불꽃 올리면

 

관솔은 오래도록 어둠을 쓸어내는

빗자루가 된다.

 

 

꽃을 수령하다 김성희

 

읽을 수 없는 글자를 꽃으로 읽습니다

피울 수 없는 꽃을 활자로 읽습니다

보낸 적 없다는 어둠을 택배로 받습니다.

 

세상은 온통 불통의 책

언어를 갈망하는 새 울음이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옮아갈 때

두근두근 앞 문장을 뒷받침해 주지 못한 연둣빛이 봄을 추락시킵니다

 

누구를 위해 피는 꽃도 아닌데

맥락 없이 읽어버린 빛깔이 분분합니다

 

세상은 온통 불안의 책*

서로를 스캔해도 완벽한 타인이고

집요한 일상은 이데아에 가깝습니다

지금 여기를 수령하면 안개 너머의 그림자가

꽃으로 몰려드는 아침입니다

 

*페르난도 페소아의 불안의 책

 

 

 

문턱 이돈형

 

네 영혼과 하룻밤 잤다

불빛을 죽이고 나서야 우리가 양떼처럼 하얗게 몰려다니며 저지른 실패한 혁명들이 보였다

그러니까 쿵쿵거리는 심장소리가 검게 그을린 노래가 눈을 뜨지 않고도 사방을 돌아다니며 피를 뿌리는 것이다

네가 사랑한 날엔 내가 없었고 내가 사랑한 날엔 네가 없었으니 실패는 끝나지 않은 것이다 그런 밤에

내 영혼은 한겨울 폭설 위를 뒹굴다 빗나간 생애처럼 손바닥을 비비다 눈앞에서 사라진 소도시의 거룩한 밤에 갇혀있고

뜨거운 피가 식은 피에 가닿는 것이 추억인 것처럼 나는 네 영혼을 핥으며 뜨거운 몸을 식힌다

이불을 끌어 덮으며 네 영혼이 달아오르길, 오늘이 가고 내일이 가도 실패한 혁명이 끝나지 않길, 이 컴컴한 방의 문턱에 걸려 넘어지길

나는 네 영혼과 하룻밤 잤다

 

 

미래파? 아니, 미래형 이선정

-시는 경험의 산물인가 상상의 산물인가*

 

알고리즘 풀가동!

내게 특별한 외래어를 데려다줘요

엔터(Enter),

아무도 쓰지 않은 독특한 것이어야 해요

엔터(Enter),

 

화려한 아카이브가

얄팍한 지식으로 춤을 춰요

 

나는 그곳을 한 번도 못 가 봤는데

까짓것 상상을 조금 주입하면 뚝딱 시가 되지요

 

두 다리를 자르고 가슴과 손바닥이 온기를 잃어도

AI는 얼마나 친절하게요

 

어이 거기, 부딪히고 깨지고

삶을 죽도록 파헤치며 인간을 쓰는 시인님

어차피 AI가 대세랍니다

 

간단해요, 궁둥이는 딱 무겁게,

신선하고 다양한 소재를 찾아

열심히 엔터(Enter)만 누르시면 됩니다

새로운 방식입니다

 

미래형입니다

 

*워즈워드와 릴케, 가스통 바슐라르를 생각하다

 

 

 

새의 역사 나영순

 

인류 이전의 비행들

이름 없이도 날아간 부표들

순간에서 영원으로

허공을 할퀴고 지나간 발톱들

 

구름은 안 가 본 계곡이 없고

내려앉지 않은 언덕이 없다

 

아프리카는 아직도 지구인가

사자와 하이에나와 코끼리의 대륙에서

인도양에 뜬 난민들의 배가 기운다

 

총알의 이름으로 날아가는 비극들

살기 위한 삶은

살아남은 자들의 몫일 뿐

 

허공의 길은 참 멀고

깊다

 

집을 떠메고 이주하는 철새 떼가

실종된 난민들의 주소지를 찾아 날아간다

 

 

 

반곡지* 황명자

 

길의 감정이 들어와 눈물을 만들어낸다지

이른 아침 인적 없는 고갯길을 넘어보지 않으면 모를 일,

그래서 이른 아침이면 온갖 산짐승들이 늑대울음으로

우짖는 것인가,

누군가를 떠나오는 길

또 보내고 오는 길

그리고 누군가의 뒷모습이 마지막인 줄도 모르고

손 흔들고 돌아오는 길

반곡지 노목 옆에 숨어 길이 흘리는 눈물 보았다

안개라고도 하고 이슬이라고도 하는데

길이 흘리는 눈물이다

슬프단 생각이 울렁울렁 올라노는 걸 보니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걸 보니

길이 눈물임이 자명하다

못은 이미 여러 차례

슬픔을 걷어내고 있다

뿌옇고 습기 찬 안개 같은 눈물 흩뿌리면서

 

* 경산시 남산면에 있는 못

 

 

환갑 유승도

 

봄이 오면 보리 물결이 생각난다

제주도 모슬포 바다의 침묵을 배경으로 철조망 밖 들판을 채운 보리가 일

렁였다 이따금 철조망 가까이 보리 물결에 실려 오는 여자아이가 있어 군복

에 몸이 갇힌 청년들이 건빵을 내밀면 치마를 펄러덩 걷어 올렸다

침묵에 감싸인 바다와 보리 물결과 검은 치마 아래의 살덩이와 실실 웃음

을 흘리던 군인들과 그것들을 바라보던 내가 지금도 봄바람에 실려 온다

바람이 부는 한 끊이지 않을 거다

 

 

 

풀독 최금녀

 

흰 구름 아래서 새파란 풀을 죽였다

꽃보다 풀을 더 사랑하는 남편이 잠들었을 때

가만 가만 걸어가 제초제를 뿌렸다

 

풀들은 나에게 화를 냈다

풀들은 거품을 흘리며 독해질 거야, 말했다

 

풀들은 죽기 살기 하다가 정말 살아서 일어났다

독보다 더 독한 독의 힘으로

 

남편은 풀들이 죽는 게 아니라

잠깐 넘어지는 거라고 했다.

잠깐 눕고 싶은 거라고 덧붙였다

 

풀들은 죽었다가도 햇빛 아래에서 남편과 잘 지냈다

한참 일하다 돌아보면

어디선가 풀들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저희들끼리 낄낄거렸다

괜찮아, 괞찮아,

 

다시 햇볕 아래 일어서서 풀들은 더 크게 웃었다

나는 잠시 황홀했다

 

 

 

아침 배한봉

 

흐르는 물은 쉬지 않는다.

 

이제 막 바다에 닿는 강을 위해

먹빛 어둠 뒤에서

지구가 해를 밀어 올리고 있다.

 

너의 앙다문 입술과 너의

발등에서 태어나는 시간과 사랑과 눈물이

가 닿는 세계도 그러할 것이다.

 

오늘 하루치의 바람 잊지 않으려고

나뭇잎들이 음표를 던진다. 새가 하늘을 찢는다.

 

새카맣게 젖은 눈빛 꺾이던 골목에도

쿠렁쿠렁, 힘찬 강 열리고

푸른 햇발 일어서는 소리 들린다.

 

흐르는 물은 반드시 바다에 가 닿는다.

 

 

 

벌초 김희정

 

올해도 벌초를 하지 못했다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벌초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버지는 행방불명이다

형은 어디에 묻혀있을까

억울하다는 말 피맺힌다는 말

가해자는 그 뜻 모른다

수천 명이 학살당했는데

, 죽어야 했는지

국가는 유가족 마음 외면하고 있다

몇몇 정치꾼들

빨갱이라서 죽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꿈에서도 만날 수 없다

형은 동생이 보고 싶어도

이 땅에 오지 못하고 있다

처음에는 억울해서

혼이 되어서도 집에 올 수 없었다

아니었다, 내 가족이 당신처럼 끌려가

무참한 주검이 될까 봐

울타리 밖에서도 서성일 수 없었다

추석이면 이 산 저 산에서

예초기 소리 요란하다

산내 골령골엔 65년째

정적만 숨이 겨우 붙어 있다

 

 

빈 우체통 유승도

 

우체통은 대부분 비어 있다

입을 벌린 채

늘 배가 고프다

오늘은 고라니 한 마리가 숲에서 튀어나와 집 앞길을 가로질러 갔다 땅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나뭇가지와 풀을 스치는 소리가 들려, 포도에 봉지를 씌우다가 돌아본 내 시선을 쓰윽 밀치며 가버렸다

고라니는 우체통 앞도 스쳐 지나갔다 쓰윽, 무엇에 쫓기듯이 살아간다 놀러 다니는 사람들은 노느라 바쁘다 일하는 사람은 일하느라 바쁘다

그리고 우체통은 대부분 비어 있다

가만히 보면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사구의 발달 최지온

 

죽을 듯이 살아내는 사람들이 있어 그렇게 쌓인 얼굴이 사구라고 믿었다

발아래 갇혀 있던 모래들이 바람처럼 쏟아질 때

 

달라지는 얼굴의 각도들

 

그 안에서 푸른 유리조각처럼

제 울음을 삼키는

 

해란초와 해당화 통보리사초와 순비기나무를 보았다

 

뿌리가 깊어서

 

어떤 얼굴은 끝내 알 수 없고

아파 보이지 않으려는 마음에 대해

 

이곳에서라면 길을 잃어도 좋겠다 나는 조금씩 죽어가지만 이미 죽은 냄새를 맡으면서 죽어가는 식물에 입을 맞추는 게 사구라면

 

모래의 무게로 쌓인 얼굴은

누군가와 함께 아팠으면 하는 마음

 

더 바랄 게 없을 때까지

사구는 층층이 쌓여 조금씩 마모될 것이다

 

힘없이 누운 식물들이 많았다

 

누군가 내 옷깃을 잡아 당겼다

 

돌아보면서 웃는 얼굴이

터지는 플래시처럼 서늘해지면서

 

이제 굳어져야 할 시간

마음끼리 팔짱을 끼고 꽤 오래 멈춰 있었다

 

 

죽방렴 어부 김승필

 

남해 손도 죽방렴 바닥이 민낯을 보일 때

도다리 가족이 물살 센 날을 골라 어청어청 발창 안을 엿본다

사목 문짝 저절로 여닫히기를 몇 번,

물 깊이가 그리 깊지 않은 바닷가 개펄 발통 안,

갈치 멸치 삼치 가자미 숭어 돔 메기

장어 복어 문어 게 오징어

나는 물때에 들고나는 바다 물살이 바쁘게 움직여

중복中伏쯤 윤슬을 만들어 내는 적막함 앞에,

물발이 세고 얕아야 고기가 채여 들어온다는 걸 알았다

한밤중 지족해협을 쳐다볼 때면

내 너무 보아

혹여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가는 고기는 두고, 드는 고기만 잡느니

한창 멸치가 들 때면 오밤중이라도

문득문득 어장에 나가야 한다

양심 없는 세상에 간을 맞추어 삶고 삶기를,

발막 앞마당 죽방멸치

소금에 절은 발로 상형문자를 새기는 중이다

 

죽방렴

 

남해군 삼동면과 창선면 사이

손도*지족해협知足海峽

여덟물에서 열무새

하루 두 번 물살이 센 사리

발쟁이 물 보러 간다

아홉물만 해도 물이 죽는다

이때 겉살은 세도 속살은 약하다

객기신사리가 산짐신사리보다 물살이 더 세다

스무사흘 조금과 여드레 조금은 물때 계산의 필수 고정점이 된다

학꽁치 까나리 문절망둑 배도라치 주둥치

노래미 도다리 볼락 전갱이 붕장어 멸치 삼치 갈치

수망장 박는 배에서 육지와 어장 사이 왕복하기를 몇 번,

쇠두껍을 씌운 참나무 말목에 메를 쳐 지겁을 판 뒤

성천**을 쌓는 길,

쐐발, 사목死目, 굽이 있는 부챗살 발통 속 작밭 무슨 엄숙한 산란장 같다 소등여 저런,

발창부 대나무발 발통 고기 극약 같은 유영을 보라

고정목에 멍줄 꼿꼿함 내내,

조류가 셀수록 육질이 단단하구나, 등판이 홀쭉하다

 

*손도: 지역민들이 좁고 길다란 것을 지칭할 때 솔다라고 부르는 데서 유래한, 지족 1리 농게섬에서 전도 백빙까지의 지족해협의 별칭.

**성천: 말목 바닥 주위에 작은 제방 혹은 뚝을 이르는 말.

 

 

 

목을 감는 일 김승필

우리는 종종 추상적인 통계와 무심한 정책 논쟁으로

다루곤 하는 국경 위기 속 인간의 현실을 본다*

두 살 난 발레리아가

스물다섯 살 아빠 오스카르 라미레스의 목을 감싼 채

리오그란데 강가에 머리를 묻고 어푸러져 있었다

 

아침 출근길

우리 아파트 세 살배기 쌍둥이 여아가

엄마 뒤를

되똥되똥 가방 메고 갈 무렵이었다

 

가족은 더 나은 삶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

* 미국 CNN방송 뉴스(2019. 6. 27) 논평.

** 멕시코 일간지 라호르나다의 홀리아 레두크 사진기자의 말.

 

 

그냥, 그렇다고 이순

 

바로 이 사람이구나

얼굴도 모르면서 오래오래 좋아했지

읽기도 아까워 조금씩 떼어 먹던,

그 시를 쓴 사람

사진 속에서 그는

햇빛 소나기에 바싹 익은 모과 같기도 하고

마주치면 고개만 꾸벅하는

뒷집 홀아비 같기도 하다

 

시 한 됫박 꺼내 돈사는 시농부

청탁받은 원고에 얹을 사진을 찍는 동안

멋쩍게 웃고 있다

이제 지천명에 닿았으니

누군지도 모르는 한 여자가 자기를 사랑한다 한들

그냥 웃어넘기겠지

 

나는 상상에서 내려와 현실에서 그를

사랑하기로 했다

처음 그의 시를 만나던 그때처럼, 덜컥

 

 

숲의 알리바이 조온윤

 

우리가 등 돌린 곳에서

식물들은 자란다

 

아무도 달을 보고 있지 않을 때

당신은 달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나요?

 

이건 세상의 모든 뒷모습을 연구하던 한 과학자의 질문

 

보고 있는 곳보다

보이지 않는 곳이 더 많아서

이곳에는 숲이 자란다

조용한 방에 식물처럼 누워 있는

당신은 식물이 아니라서

내가 보고 있을 때만 웃고 말을 한다

그걸 알리바이라고 부르지

 

내가 당신을 볼 수 없어도

당신이 웃으며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증명하라고

돌아누워 말할 때면 월식이었다

 

지금 내 등에는 숲이 자란다

발소리에 놀라 돌아보는 순간 희미하게 사라지는

 

물관 대신 기도로 호흡하는 숲

하얀 포자들이 내려앉은

하얀 숲

 

보이지 않아서 거기 있다고 믿는다

 

 

잠적 안국현

- 성곡리에서

 

허름한 농가에 들어섰더니

어린 날 고향에서 봤던 감나무가 와 있다

수십 년이 지났군, 이끼까지 낀 채로

옆에는 풍채 좋은 도요도 와 있다

컴컴한 대숲 안처럼 안 보였던 것들

바람이 쓴 마당에 어린 감이 툭,

떨어지는 푸른 소리를 이제야 본다

 

텃밭에 상추도, 마당에 참새도 안 떠났는데

그동안 내 것이 아닌 저녁을 너무 많이 돌아다녔다

아니, 내 것이었던 저녁을

내 것이 아니라고 너무 많이 돌아다녔다

 

깨진 항아리며 장롱이 엎어져 있는 시간을 지나오면서

안 보는 것이었지 그쪽으로는

시누대 무성한 뒤안 마냥 안 가보는 것이었지

빈 속으로 바람을 보내면서 우는,

깨지고 엎어진 것들이 있어도

 

흰 고요로 깔려,

들어선 것들이 제 소리로만들끓다가 나가거나

남아서 같이 고요해지는,

호수의 수면 같은 마당이 내겐 없었다

 

해서, 낡은 팔걸이 의자 하나 갖기가 이렇게 오래 걸린다

나는 다른 불을 피우고 싶었던 모양이다

 

나는 이제부터 아무것도 아니다

겉옷을 벗어놓듯이 방심이 있어야겠다

늦봄 저녁과 온도가 같아져서 밥 한끼 차려야겠다

 

측광처럼 다 늦어서야

그동안 치워두었거나, 이제야 보이는 배롱나무 같은 것들과 마주 앉는 저녁이 있다

 

 

조만간 사라질 말들을 위하여 서봉교

 

봉당, 구들 , 아랫목, 웃목, 지게, 지게작대기, 바지랑대, 이엉, 멍석, 소여물통, 묵낫, 양낫, 소죽가마, 소두방, 소죽부엌, 소여물, 보고래, 도리깨, 콩깍지

 

댑싸리비, 싸리비, 댐박, 접때, 갯따가, 물래, 메했다, 깍지깡, 묵구구덩이, 손칼국수, 홍두깨, 국시안반, 국수꼬리, 문풍지, 창호지, , 수수엿, 수수부꾸미, 묵구시래기, 들기름, 벌초, 성묘, 상여, 선소리, 제사, 세배, 차사, 곡소리, 상옷, 이장

어디 이뿐이랴

부모, 형제, 아부지, 어머니, 오빠, 언니, 동생, , 누나, 사촌, 오촌, 육촌, 사돈까지

수천 년 내려온 말들의 부스러기가 살고 살아서

여기까지 왔는데

얼마나 귀한 언어들이 빠르고 각박한 시간들의 핑계에 쫓겨 사라질까?

사형선고를 받은 시한부 생명들처럼

2010년을 살고 있는 우리는

 

오늘도 시퍼렇게 날이 선 작두 위를

맨발로 살고 있다

 

 

오월보다 먼저 오는 새 박봉준

 

뻐꾸기 새끼에게

쉼 없이 먹이를 잡아다 먹이는

붉은머리오목눈이 뱁새를 보고 있자니

울화가 치밀었다

 

뱁새 새끼를 모두 밀어내 죽이고 염치없이 입을 벌리는 덩치 큰 뻐꾸기 새끼 뱁새는 탄생의 비밀을 아는지 모르는지 해마다 되풀이되는 이 모순을 사람들은 섭리라고 하겠지

 

어쩌다 제 손으로 혈육을 키우지 못하고 심청이 아비 젖동냥하듯이 이곳저곳 탁란하여 눈도 채 뜨지 못한 어린 새끼 손에 악의 피를 묻히는

 

뻐꾸기의 생도 참 기구하다 싶어 그 소리 다시 들어보니 녹음 짙어가는 들녘이 다 평화로운 것만이 아니다

 

천치 같은 뱁새도

피를 묻힌 뻐꾸기도 함께 살아야 하는

푸른 오월

 

 

가슴에서 핏빛 꽃이 피어나다 강대선

 

눈물 바람 남겨놓고 바람에 혼을 실어 박재영 님에게 굽이굽이 넘어가자

 

할머니의 손에서 사랑받고 자랐어요 부모 없는 외로움이 컸지만, 목포에서 결혼을 앞두고 있었어요 처남 될 사람이 광주 집에 숨어서 꼼짝할 수 없다는 연락을 받고 서둘러 광주로 올라가던 길이었죠 운전석에 앉아 있다가 총격을 받아 눈앞이 캄캄해졌어요 소누 며느리 밥상 한 번 받지 못한 할머니가 손자 간 뒤에 고향집을 지키며 늙어가고 있어요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고 싶었는데, 계엄군 총질로 모든 게 날아갔어요 아들딸 낳아서 잘살고 싶었는데 핏빛으로, 핏빛으로 깨지고 말았어요

 

이고 온 밥상을 내려놓고 서만오 님에게 굽이굽이 넘어가자

 

시민군의 터럭에 올라탄 동생은 날이 저물어도 돌아오지 않았어요 청각장애 동생을 찾으러 나섰어요 총탄이 내 몸을 비집고 들어왔어요 내 주검은 리어카로 옮겨져 교도소 건너편 야산에 가매장되었어요 집에서 동생과 젖을 짜야 하는데 왜 이곳에 묻혀 있을까요? 참말이지, 참말이지, 저는 모르겠어요 속병이 든 청각장애 동생도 죽고 가슴에 대못이 박히신 어머니 마저 막냇동생 뒤를 따라 저승으로 서럽게 오시니 둘째만 오늘도 젖소를 지키고 있어요 형제들이 모여 젖을 짜야 하는데, 젖소들이 우리를 부르는데,

 

젖소를 데리고 왕태경 님에게 굽이굽이 넘어가자

 

조수석에 앉아 있다가 머리와 어깨에 총을 맞았어요 일주일을 구덩이 속에서 기다렸어요 피로 범벅된 얼굴이 부어올랐어요 누가 피로 범벅된 내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열흘이 되던 날, 아버지는 군대에서 잘렸던 내 약지를 보신 후에 말을 잃고 통곡하셨어요 잘린 약지가 나였어요

 

잘린 약지를 묻어주고 이매실 님에게 굽이굽이 넘어가자

 

어여쁜 손주들을 돌보고 있었는데 총소리가 들렸어요 순간, 총알이 칠순의 내 몸을 꿰뚫었어요 그 총알이 손주들을 맞혔으면 어쩟을까요 그 총알이 신혼부부 맞혔으면 어쩟을까요 생각만 해도 끔찍하구만요 차라리, 나에게 와줘서 고마워요 나주 선산에 서리서리 돌아가 손주들 잘 크도록 기도해야겠어요 남겨진 내 아들들 건강하고 행복하라고, 해 보며 달 보며 두 손을 모으겠어요

 

두 손을 모으고 임정식 님에게 굽이굽이 넘어가자

 

골방에서 기도하다 밖으로 나갔는데 들려온 총소리에 놀란 어머니가 서둘러 나를 찾아 나섰어요 멀리서 어머니를 발견하고 뛰어갔어요 어머니는 아들을 아들은 어머니를 계엄군의 총탄에서 구하고 싶었어요 이 땅에 억압받은 사람들을 위해서 주님께 기도로 간절히 간구하고 싶어요 총알에 맞아 쓰러지는 순간에 붉은 피 흘리시는 예수님을 보았어요 내 몸을 붙들고 오열하는 어머니가, 피 흘리는 광주가, 못다 한 기도가, 예수님의 품에 안겨 피를 흘렸어요 부디 저들을 용서하십시오, 주님, 저들은 자신이 하는 짓을 모르고 있습니다

 

기도하는 마음 안고 정민구 님에게 굽이굽이 넘어가자

 

아들의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어요 가슴에 '정민구'라고 적혀 있었지만, 입과 코에서 흘러내린 그놈의 피 때문에 아들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었었어요 친구들이 민구가 맞다고 손으로 가리켰어요 일신방직에서 전기기사로 열심히 일하던 순진하고 얌전했던 우리 집 장남이었어요 시민군의 트럭에 올라타고 나간 아들은 새벽 순찰하다가 계엄군의 총알이 어깨를 관통했다고 했어요 아내는 아들 앞에서 정신을 놓았어요 심장병을 얻고서도 다시 울어요

꿈에 나타난 우리 아들은 총을 들고 광주를 지키고 있어요

 

순찰을 끝내고 조규영 님에게 굽이굽이 넘어가자

 

벽돌공장 안에 방을 빌려 남편과 살았는데 헬기가 날아오고 방송 소리 시끄러웠죠 사방에서 총소리가 허공에서 들리자 겁에 질린 저는 아이들을 데리고 이웃집으로 피했지만 남편은 상황을 보기 위해 남아 있었어요 헬기 소리가 들리고 총소리가 났어요 리러카에 남편을 실었지만 길이 막혀 병원까지 갈 수 없었어요 이름과 전화번호 적어서 꽂아놓고 약국 앞에 리아카를 세워 두었어요 나중에 시체가 사라진 리아카를 보았어요 남편 대신 묻으려고 리아카 나무판자를 뜯었어요 사격장에서 남편의 시신을 찾았어요 목놓아 울었어요 아이들과 놀았던 벽돌공장 방에서 헬기 소리, 총소리가 지금도 들려와요

 

헬기 소리에 귀를 막고 최승희 님에게 굽이굽이 넘어가자

 

오빠는 자전거 타고 도청으로 나갔어요 목포에소 올라 온 엄마의 신신당부도 오빠가 가는 길을 막지 못했죠 배와 다리 그리고 가슴에 총을 맞고 오빠가 수술 도중 사망했다는 소식을 철도청 비상 연락망으로 전화를 받았어요 중간중간 트럭을 타고서 광주로 가는 길 오빠에게 가는 길은 서럽고 힘든 길 엄마도 오빠 따라 서둘러 산에 드시고 혼자 남았어요

오톨이가 되었어요 하지만 나같이 혼자된 사람들이 모여 생활을 꾸렸어요 아픔을 보듬는 가족이 되었어요

 

윤슬 김채운(김혜경)

 

긴 강줄기 따라

하루치의 그리움 깊어가네

사금파리 하나 건져내어

백사장 끝닿은 데까지 품고 가네

이젠 더 이상 따라 갈 수 없네

깊고 먼 강물이 한사코 나를 등지고

저만치 홀로 떠나네

흐르고 흘러도 외롭지 않을

뒤미쳐 오는 물살 그 고요한 떠밀림으로

아프게 드러나는 바람의 늑골들

위에 햇빛무리 내려앉아 한들거리네

그윽이 떠다미는 환한 떨림을 바라보네

널출넌출 오늘도 눈부신

깊고 오래된 꿈을 촘 촘 촘 빗질하네

 

 

얼레지 그녀 정선희

 

올해만 피는 것도 아닌데

무엇에 홀린 듯 보였다

 

땅에 빨래집게를 물려 놓은 듯

날개를 하늘로 치켜들고

틈이 없도록 땅을 사뿐 들어 올리고 있다

 

내가 모를 때는 이름조차 없던 꽃

한 송이만으로도 벅찬데 무더기로 피어나 있다

 

부소암까지 그녀를 업고 왔다고 한다

심장이 약한 그녀가 금산을 오르고 싶어 했고

동기 몇이 들것으로 나르다 결국 그가 업고 왔다는 것이다

그는 키가 크고 넓고 탄력 있는 역삼각형 등을 갖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심장이 얼마나 두근거렸을까

등은 또 날갯죽지가 얼마나 간지러웠을까

감히 그녀를 미워할 수도 없었다

너무 일찍 저세상으로 가버린 그녀를 질투할 수도 없었다

 

다른 곳에 옮겨 심으면 죽는다는 꽃

땅에 씨앗을 떨어뜨리면 1년 후에 꽃대가 형성되고

2년째 잎 하나, 3년째 잎 둘, 그렇게 6년을 지내다가 7년째 꽃을 피운다고 한다

왜 지금까지 그녀를 보지 못했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꽃말이 질투라고 했다

얼레지 군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출입구 전영관

 

안부 따위는

서로가 제 힘겨움을 교환하는 방식이다

좋아 보인다는 인사말에 엄살 부렸다

그게 예의라고 생각했다

 

선택이 버거운 나는 전생에 문이었을까

내부의 뜨거움을 감춘 채 겉은 무표정할 것 같은

지옥문은 사양하겠다

한 종류만 선택해야 한다면

돌아보며 탈출해 안도하는 비상구를 자청하련다

갇혀 있다는 느낌에 갇힌 사람들의 침실 문을

남태평양 출입구로 바꿔주고 싶다

 

미처 알려 줄 틈도 없이

벌레 빠진 국물을 퍼먹은 사람에게

짜겠다며 사이다를 앞에 놓았다

달라질 것 없겠지만

고기 많이 넣었다고 새로 덜어주었다

이미 삼킨 벌레를 알려주면 선량한 악마인지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니까 외면하면 타락한 천사인지

또 다른 선택과 맞닥트렸다

생애란 신의 서재에 쌓여 있는 시집 같은 것들

눈에 띄어 펼쳐보는 한 편이 하루겠다

누군가의 이름을 따뜻하게 데워놓는 한 행에 따라

그날의 행불행이 엇갈릴 것이다

 

제라늄을 양지로 옮겨 심으며

벌과 나비를 먹여 살리다가 사위지 말고

아름다움만 뽐내라고 다독였다

애쓰지 말자고 충고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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