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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괜찮은 詩

다시 읽어 보는 그들의 시-박노해, 백무산

by 이성근 2023. 1. 6.

1957 전라남도에서 태어났다. 16세에 상경해 낮에는 노동자로 일하고 밤에는 선린상고(야간)를 다녔다. 1984 27살에 첫 시집 노동의 새벽을 출간했다. 이 시집은 독재 정권의 금서 조치에도 100만 부 가까이 발간되며 한국 사회와 문단을 충격으로 뒤흔들었다. 감시를 피해 사용한 박노해라는 필명은 박해받는 노동자 해방이라는 뜻으로, 이때부터 얼굴 없는 시인으로 알려졌다. 1989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을 결성했다. 1991 7년여의 수배 끝에 안기부에 체포, 24일간의 고문 후 반국가단체 수괴죄목으로 사형이 구형되고 무기징역에 처해졌다. 1993 감옥 독방에서 두 번째 시집 참된 시작을 출간했다. 1997 옥중에세이 사람만이 희망이다를 출간했다. 1998 76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이후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복권됐으나 국가보상금을 거부했다. 2000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않겠다며 권력의 길을 뒤로 하고 비영리단체 나눔문화(www.nanum.com)를 설립했다. 2003 이라크 전쟁터에 뛰어들면서, 전 세계 가난과 분쟁 현장에서 평화활동을 이어왔다.

 

2010 낡은 흑백 필름 카메라로 기록해온 사진을 모아 첫 사진전 라 광야나 거기에 그들처럼(세종문화회관)을 열었다. 12년 만의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를 출간했다. 2012 나눔문화가 운영하는 라 카페 갤러리에서 상설 사진전을 개최하고 있다. 현재 20번째 전시를 이어가고 있으며, 33만 명의 관람객이 다녀갔다. 2014 아시아 사진전 다른 길(세종문화회관) 개최와 함께 다른 길을 출간했다. 2019 박노해 사진에세이 시리즈 하루, 단순하게 단단하게 단아하게, 을 출간했다. 2020 첫 번째 시 그림책 푸른 빛의 소녀가를 출간했다. 2021 걷는 독서를 출간했다. 감옥에서부터 30년간 써온 한 권의 책, ‘우주에서의 인간의 길을 담은 사상서를 집필 중이다. ‘적은 소유로 기품 있게살아가는 참사람의 숲을 꿈꾸며, 오늘도 시인의 작은 정원에서 꽃과 나무를 심고 기르며 새로운 혁명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

 

노동의 새벽(1984)

참된 시작(1993)

겨울이 꽃핀다>1999, 절판)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2010)

너의 하늘을 보아(2022)

https://www.youtube.com/watch?v=WE4EpDRVFQM 

 

평온한 저녁을 위하여 / 박노해

 

나면서부터인가

노동자가 된 후부터인가

내 영혼은 불안하다

 

새벽잠을 깨면

또다시 시작될 하루의 노동

거대한 기계의 매정한 회전

주임놈의 차가운 낯짝이

어둠처럼 덮쳐 오고

아마도 내가 자살한다면

새벽일 거야

 

잔업 끝난 늦은 귀갓길

산다는 것, 노동자로 산다는 것의

깊은 불안이 또다시 나를 감싼다

 

화창한 일요일

가족들과 오붓한 저녁상의 웃음 속에서도

보장 없는 내일에

짙은 불안이 엄습해 온다

 

이 세상에 태어나

죄진 적도 없고

노예살이 머슴살이하는 것도 아닌데

풍요로운 웃음이 하늘에 닿는

안정과 번영의 대한민국 땅에서

떳떳하게 생산하며 살아가는데

왜 이리 종놈처럼 불안한 세상살이인가

 

믿을 거라곤 이 근육덩어리 하나

착한 아내와 귀여운 딸내미

기만 원짜리 전세 한 칸뿐인데

괴롭기만 한 긴 노동

쪼개고 안 먹고 안 입어도

남는 것 하나 없이 물거품처럼

이러다간 언제 쓰러질지 몰라

 

상쾌한 아침을 맞아

즐겁게 땀 흘려 노동하고

뉘엿한 석양녘

동료들과 웃음 터뜨리며 공장문을 나서

조촐한 밥상을 마주하는

평온한 저녁을 가질 수는 없는가

 

떳떳하게 노동하며

평온한 저녁을 갖고 싶은 우리의 꿈을

그 누가 짓밟는가

그 무엇이 우리를 불안케 하는가

불안 속에 살아온 지난 30년을

이제는,

평온한 저녁을 위하여

평온한 미래를 위하여

결코 평온할 수 없는

노동자의 대도大道를 따라

불안의 한가운데로 휘저으며

당당하게 당당하게

나아가리라

 

 

진짜 노동자

 

한세상 살면서

뼈 빠지게 노동하면서

아득바득 조출철야 매달려도

돌아오는 건 쥐씨알만한지

 

죽어라 생산하는 놈

인간답게 좀 살라꼬 몸부림쳐도

죽어랏 쐿가루만 날아들고 콱콱 막히고

꼴프채 비껴찬 신선놀음허는 놈들

불도쟈처럼 정력 좋은 이윤추구에는 비까번쩍 애국갈채

제미랄 세상사가 왜 이리 불평등한지

 

이 땅에 노동자로 태어나서

생각도 못 하고 사는 놈은 죽은 송장이여

말도 못 하는 놈은 썩은 괴기여

테레비만 좋아라 믿는 놈은 얼빠진 놈

이빨만 까는 놈은 좆도 헛물

 

실천하는 사람,

동료들 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실천하는 노동자만이

진실로 인간이제

진짜 노동자이제

 

비암이라고 다 비암이 아니여

독이 있어야 비암이지

쎈방이라고 다 쎈방이 아녀

바이트가 달려야 쎈방이지

 

노동자라고 다 노동자가 아니제

동료와 어깨를 꼭 끼고 성큼성큼 나아가

불도쟈 밀어제꺼 우리 것 찾아 담는

포크레인 삽날 정도는 되아야

진짜 노동자지

 

 

 

남성편력기

 

시다 시절

훤칠한 미남에다

눈매와 뒷모습이 사슴처럼 쓸쓸해 뵈는

검사반 진수가 좋아

밤늦도록 그 가을을 함께 걸었지만

갈수록 내 가슴은 마른 낙엽이었지

 

미싱사가 되어

미치게 배우고 싶어

셋집 주인네 친절한 대학생을 사모하여

지친 몸으로 새벽까지 책을 읽어도

그와 나 사이엔 메울 수 없는

깊은 강이 흐르고 있었다

 

조장이 되어

돈 잘 쓰고 세련미가 멋져

지시할 때 위엄 있고 인간미 넘치는 김과장이 좋아

경양식집 조명불빛 아래 웃음 지어 봤지만

허망한 한 잔 맥주 거품이었지

 

내 불안한 존재를 듬직하게 안아 줄

남자답고 야성적인 정열이와의 겨울은

상처 입은 고목처럼 거친 아픔이었다

 

반장이 되었을 때

동갑내기들이 결혼에 들뜨고

성실하고 가정적인 영훈씨와의 사랑도

제 한 몸밖에 모르는 이기와 독선에 질려

갈 테면 가라고 떠나 보냈지

 

미싱밥 8년에

백여 명이던 회사가 천오백 명으로

대회사로 늘어났으나

내게 남은 것은 50만 원짜리 월세 한 칸

월부 카세트 하나

그리고 진이 빠진 스물다섯 육신

 

토닥거리는 주임의 격려와 부장님의 회식이 있고 나면

어김없이 조여드는 생산량에

미싱사 시다를 달달 볶으며

정신없이 밟아 대고 악을 쓰다가

잔업 끝난 밤거리를 천근 무게로 지쳐 가면서

이래서는 안 된다

이것이 아니다

이를 깨물며 다짐해 본다

 

점심 후 재단반에 바람이 일어

2년째 얼어붙은 임금 50% 인상하라

주저앉아 제끼고

국만이는 나를 붙들고

 

단결하면 이길 수 있다고, 더 이상 이용당하지 말자고

눈을 빛내면서 설득을 한다

 

나의 두 눈에 눈물이 맺히고

우리는 현장을 돌며

메마른 가슴들을 한 덩어리로

뜨겁게 일으켜 세워

전쟁터 같은 현장은 일시에 긴장된 침묵만이 감돌고

허둥대며 퍼렇게 고함치는 주임 부장의 발악에도

내 가슴은 난생처음 평온한 대지가 되어

생명의 죽순이 파랗게 기운차 오른다

 

연약하고 우스객소리만 잘하는 줄 알았던 국만이가

저렇듯 동료의 깊은 신뢰 속에

확실한 주관과 실천력이 있음이

가진 사장보다 더 당당한 용기와 뚜렷한 소신으로

희생을 각오한 큰 사랑을 키워 가고 있음이

3일간의 싸움 속에서

뜨거운 감명으로 충만되어 젖어 온다

 

참다운 남자란 이런 남자라고

일생을 함께하며 내 모든 것을 다 주어도

기쁨으로 살아날 진짜 남자라고

어떤 고난도 함께 싸워나가리라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으며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나를 가다듬는다

 

 

포장모래에 싹이 텄나

 

사장님이 애를 뱄나

이 좋은 토요일 잔업이 없단다

이태리타올로 기름 낀 손을 닦고서

작업복 갈아입고 담배 한 대 붙여 물면

두둥실 풍선처럼 마음이 들떠

누구라 할 것 없이 한 잔 꺾자며

공장 뒷담 포장마차 커튼을 연다

쇠주파 막걸리파 편을 가르다

다수결 두꺼비로 통일을 보고

첫딸 본 김형 추켜 꼼장어 굽고

새신랑 정형 얼러대어

정력에 좋다고 해삼 한 접시

자격증 시험 붙어 호봉 올라간

문형이 기분 조오타고 족발 두 개 사고

걸게 놓인 안주발에 절로 술이 익는다

새벽에 안 서는 놈은 빚도 주지 말랬는데

잔업에 곯다 보니 요게 새벽까지 기척도 안 해

일주일째 아내 고것 곰팡이 슬겠다고 킬킬거리고,

이제 신혼 한 달째인 정형 새 신부

토실한 히프 모양이 첫아들 날 상이라며

좌우삼삼 일심구천 김형 5단계 노하우 전수에

헤 벌리는 놈, 심각한 놈, 키득대는 모,

한 잔 두 잔 술잔에 돌아올 때마다

우리는 녹아들어 하나가 되어

송형은 문형에게 감정풀이 화해주를 청하고

서씨는 전기과 박형과 찜찜했던 오해를 털어놓고

노씨는 왕년에 광빨나던 시절 타령이 시작되고

장단 맞추는 김형, 만주에서 개장수하며 독립운동하던

뺑까는 야화가 기세를 울리면 부산 자갈치 공형

야야 치라 치라 벌써 백 번째다 마

내 한 곡 뽑제, 니 박수 안 치나

두만강을 노 저어 오륙도 돌아

개나리 처녀 미워 미워

울고 넘는 박달재로 발길을 돌려

젓가락 두들기며 주전자 뚜껑 드럼에도

어깨 우쭐, 방뎅이 들썩

쿵다라 닥닥 조코 좆커

영자야 안주 한 사라 더 주라 잉

 

2차 가자 집에 가자 고고장 가자는 걸

알뜰꾼 신씨가 눌러 앉히고 한 병 두 병 더할수록

거나하게 취기가 올라

좆 같은 노무과장, 상무새끼, 쪽발이 사장놈,

노사협의회 놈들 때려 엎자고

꼭 닫아둔 울화통들이 터져 나온다

문형은 간신자식들 먼저 깨야 한다며

벌겋게 달아오르고

정형은 단계적으로 구내식당부터

시정하자고 나직이 속산인다

상고 나와 기름쟁디 된 회계담당 김형은

외상장부 넘겨 가며

계산을 한다

냉수 한 사발 돌려 마시고

자욱한 연기 속 포장마차 나서면

어깨를 끼고 비틀비틀

일렬횡대로 서 담벽에 오줌 깔기고

씨팔, 내일도 휴일특근 나온다며

리어카 장수 떨이쳐 딸기 천 원 어치씩

옆주머니에 꿰차고

작별의 손 흔들며 잔업 없는 오늘만은

두둥실 토요일 밤을 흥얼거리며

아내가 기다리는 집을 향한다

 

 

천생연분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당신이 이뻐서가 아니다.

젖은 손이 애처로와서가 아니다.

이쁜걸로야 TV탈렌트 따를 수 없고

세련미로야 종로거리 여자들 견줄수 없고

고상하고 귀티나는 지성미로야 여대생년들

쳐다볼 수도 없겠지

잠자리에서 끝내주는 것은 588 여성동지

발뒤꿈치도 안차고

서비스로야 식모보단 못하지

음식솜씨 꽃꽃이야 강사 따르겠나

그래도 나는 당신이 오지게 좋다.

살아 볼수록 이 세상에서 당신이 최고이고

겁나게 겁나게 좋드라.

 

내가 동료들과 술망태가 되어 와도

몇일씩 자정 넘어 동료집을 전전해도

건강걱정 일격려에 다시 기운이 솟고

결혼 후 3년 넘게 그 흔한 세일 샤스하나 못사도

짜장면 외식 한번 못하고

로션하나로 1년 넘게 써도

항상 새순처럼 웃는 당신이 좋소.

 

토요일이면 당신이 무더기로 동료들을 몰고와

피곤해 지친 나는 주방장이 되어도

요즘 들어 빨래, 연탄 갈이, 김치까지

내 몫이 되어도

나는 당신만 있으면 째지게 좋소.

 

조금만 나태하거나 불성실하면

가차없이 비판하는 진짜 겁나는 당신

좌절하고 지치면 따스한 포옹으로

생명력을 일깨 세우는 당신

나는 쬐그만 당신 몸 어디에서

그 큰사랑이 , 끝없는 생명력이 나오는가

곤히 잠든 당신

가슴을 열어 보다 멍청하게 웃는다.

 

못 배우고 멍든 공순이와 공돌이로

슬픔과 절망의 밑바닥을 일어서 만난

당신과 나는 천생연분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과 억압 속에 시들은

빛나는 대한민국 노동자의 숙명을

당신과 나는 사랑으로 까부스고

밤하늘별처럼

흐르는 시내처럼

들의 꽃처럼

소곤소곤 평화롭게 살아갈 날을 위하여

우린 결말도 못보고 눈감을지 몰라

저 거친 발굽 아래

무섭게 소용돌이쳐 오는 탁류 속에

비명조차 못 지르고 휩쓸려갈지도 몰라.

그래도 우린 기쁨으로 산다 이 길을

그래도 나는 당신이 눈물나게 좋다 여보야

 

도중에 깨진다 해도

우리 속에 살아나

죽음의 역사를 넘어서서

이름 봄마다 당신은 개나리 나는 진달래로

삼천리 방방곡곡 흐트러지게 피어나

봄바람에 입맞추며 옛 얘기 나누며

일찌기 일 끝내고 쌍쌍이 산에 와서

진달래 개나리 꺾어 물고 푸성귀 같은

웃음 터뜨리는

젊은 노동자들의 모습을 보며

그윽한 눈물을 짖자 여보야

나는 당신이 좋다.

듬직한 동지며 연인인 당신을

이 세상에서 젤 사랑한다.

나는 당신이

미치게 미치게 좋다.

 

 

 

그리움

 

공장 뜨락에

따사론 봄볕 내리면

휴일이라 생기 도는 아이들 얼굴 위로

개나리 꽃눈이 춤추며 난다

 

하늘하늘 그리움으로 노오란 작은 손

꽃바람 자락에 날려 보내도

더 그리워 그리워서

온몸 흔들다

한 방울 눈물로 떨어진다.

 

바람 드세도

모락모락 아지랑이로 피어나

온 가슴을 적셔 오는 그리움이여

스물다섯 청춘 위로

미싱 바늘처럼

꼭꼭 찍혀 오는

가간에 울며 떠나던

아프도록 그리운 사람아

 

 

통박

 

어느 놈이 커피 한잔 산다 할 때는

뭔가 바라는게 있다는 걸 안다.

 

고상하신 양반이

부드러운 미소로 내 등을 두드릴 땐

내게 무얼 원하는지 안다.

 

별스런 대우와 칭찬에

허릴 굽신이며 감격해도

저들이 내게 무얼 노리는지 안다.

 

우리들이 일어설 때

노사협조를 되뇌이며 물러서는

저 인자한 웃음 뒤의 음모와 칼날을 우리는 안다.

 

유식하고 높은 양반들만이 지혜로운 것은 아니다

일찌기 세상마다 뒹굴며

눈치밥을 익히며 헤아릴 수 없는 배신과 패배 속에

세상 살아가는 통박이 생기드만

 

세상엔 빡빡 기는 놈들 위해서

신선처럼 너울너울 나는 놈 따로 있어

날개 없이 기름바닥 기는 우리야

움츠리며 통박을 굴리며 살아가지만

통박이 구르다 보면

통박끼리 구르고 합쳐지다 보면

거대한 통박이 된다고

 

좆도 배운 것 없어도

돈 날개 칼 날개 달고 설치는 놈들이 무엇인지

이놈의 세상이 어찌된 세상인지

누구를 위한 세상인지

우리들 거대한 통박으로 안다.

 

쓰라린 눈물과 억압과 패배 속에서

거대한 통박으로 구르고 부딪치고 합치면서

우리들의 통박은

점점 날카롭고 명확하게

가다듬어지는 것이다.

우리들의 통박이 거대한 통박으로

하나의 통박으로 뭉쳐지면서

노동하는 우리들이 새날을 향하여

이놈의 세상을 굴려갈 것이다.

 

 

 

그 해 겨울나무

 

1

그 해 겨울은 창백했다

사람들은 위기의 어깨를 졸이고 혹은

죽음을 앓기도 하고

온몸 흔들며 아니라고 하고 다시는 이제 다시는

그 푸른 꿈은 돌아오지 않는다고도 했다.

팔락이던 이파리도 새들도 노래 소리도

순식간에 떠나 보냈다.

잿빛 하늘에선 까마귀떼가 체포조처럼 낙하하고

지친 육신에 가차없는 포승줄이 감기었다.

그 해 겨울,

나의 시작은 나의 패배였다.

 

2

후회는 없었다 가면 갈수록 부끄러움뿐

다 떨궈주고 모두 발가벗은 채

빛남도 수치도 아닌 몰골 그대로

칼바람 앞에 세워져 있었다.

언 땅에 눈이 내렸다.

숨막히게 쌓이는 눈송이마저 남은 가지를

따닥따닥 분지르고

악다문 비명이 하얗게 골짜기를 울렸다.

아무 말도 아무말도 필요 없었다.

절대적이던 남의 것은 무너져 내렸고

그것은 정해진 추락이었다.

몸뚱이만 깃대로 서서

처절한 눈동자로 자신을 직시하며

낡은 건 떨치고 산 것을 보듬어 살리고 있었다.

땅은 그대로 모순 투성이 땅

뿌리는 강인한 목숨으로 변함 없는 뿌리일 뿐

여전한 것은 춥고 서러운 사람들아

산다는 것은 살아 움직이며 빛살 틔우는 투쟁이었다.

 

3

이 겨울이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말할 수 없었다.

죽음 같은 자기 비판을 앓고 난 수척한 얼굴들은

아무데도 아무데도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마디를 긁히며 나이테를 늘리며 부리는

빨갛게 언 손을 세워 들고

오직 핏속으로 뼛속으로 차오르는 푸르름만이

그 겨울의 신념이었다.

한 점 욕망의 벌레가 내려와 허리 묶은

동아줄을 기어들고

마침내 겨울나무는 애착의 띠를 뜯어

쿨럭이며 불태웠다.

 

살점 에이는 밤바람이 몰아쳤고 그 겨울 내내

모두들 말이 없었지만 이 긴 침묵이

새로운 탄생의 첫발임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 해 겨울,

나의 패배는 참된 시작이었다.

 

 

민들레처럼

 

일주일의 단식 끝에

덥수룩한 수엽 초췌한 몰골로 파란 수의에

검정고무신을 끌고 어질어질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굴비처럼 줄줄이 엮인

잡범들 사이에서

 

"박노해씨 힘내십시요."

어느 도적놈인지 조직폴력배인지

노란 민들레 한송이 묶인 내 손에 살짝이 주어주며

환한 꽃인사로 스쳐 갑니다.

 

철커덩, 어둑한 감치방에 넣어져

노란 민들레꽃을 코에도 볼에도 대어보고

눈에도 입에서 ?줘보며 흠흠

포근한 새봄을 애무한 민들레꽃

한 송이로 환하게 번져오는

생명의 향기에 취하여

~ 산다는 것은 정년 아름다은 것이야

 

그러다가 문득

내가 무엇이길래

긴장된 마음으로 자세를 바로잡고

민들레꽃을 바로 봅니다.

어디선가 묶인 손으로 이 꽃을 꺾어

정성껏 품에 안고 내 손에까지 쥐어준

그분의 애정과 속뜻을

정신 차려 내 삶에 새깁니다.

 

민들레처럼 살아야 합니다.

차라리 발길에 짓밟힐지언정

노리개 꽃으로 살지 맙시다.

흰 백합 진한 장미의 화려함보다

흔하고 너른 꽃 속에서 자연스레 빛나는

우리 들꽃의 자존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특별하지 않아도 빛나지 않아도

조금도 쓸쓸하지 않고 봄비 뿌리면 그 비를 마시고

바람 불면 맨살 부대끼며

새 눈과 흙무더기 들풀과 어우러져

모두 다 봄의 주체로

서로를 빛나게 하는

민들레의 소박함으로 살아야 겠습니다.

 

그래요. 논두렁이건 무너진 뚝방이건

폐유에 절은 공장 화단 모둥이

쇠창살 너무 후미진 마당까지

그 어느 험난한 생존의 땅 위에서건

끈질긴 생명력으로 당당하게 피어나는

민들레 뜨거운 가슴으로 살아야 겠습니다.

 

가진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우리는

보호막 하나 없어도 좋습니다.

말하는 것 깨지는 것도 피하지 않습니다.

마땅히 피어나야 할 곳에 거침없이 피어나

온몸으로 부딪치며 봄을 부르는

현장의 민들레

그 치열함으로 살아야겠습니다.

 

자신에게 단 한번 주어진 시절

자신이 아니면 꽃피울 수 없는 거칠은 그 자리에

정직하게 피어나 성심껏 피어나

기꺼이 밟히고 으깨지고 또 일어서며

피를 말리고 살을 말려 봄을 진군하다가

마침내 바람찬 허공중에 수천수백의 꽃씨로

장렬하게 산화하는 아 - 민들레 민들레

그 민들레의 투혼으로 살아가겠습니다.

 

고문으로 멍들은 상처투성이 가슴위에

노오란 민들레꽃 한 송이 받아 들고

글썽이는 눈물로 결의합니다.

- - 동지들,형제들

준엄한 고난 속에서도

민들레처럼 민들레처럼

그렇게 저는 다시 설 것입니다.

 

 

마지막 시

 

거대한 안기부의 지하밀실을

이 시대의 막장이라 부른다.

 

소리쳐도 절규해도 흡혈귀처럼

남김없이 빨아먹는 저 방음벽의 절망

24시간 눈 부릅뜬 저 새하얀 백열등

불어 불엇! 끝없이 이어지는 폭행과

온 신경이 끊어 터질 듯한 고문의 행진

 

이대로 무너져서는 안 된다

더 이상 무너질 수는 없다.

여기서 무너진다면 아 그것은

우리들 희망의 파괴

우리 민중의 해방 출구이 붕괴

차라리 목숨을 주자

앙상한 이 육신을 내던져

불패의 기둥으로 세워두자

 

서러운 운명

서러운 기름 밥의 세월

뼛골시게 노동하고도 짓밟혀 살아온 시간들

면도날처럼 곤두선 긴장의 나날 속에

매순간 결단이 필요했던 암흑한 비밀활동

그 거칠은 혁명투쟁의 고비마다

가슴 치며 피눈물로 다져온 맹세

천만 노동자와 역사 앞에 깊이 깊이 아로새긴

목숨 건 우리들의 약속 우리들의 결의

지금이 그때라면 여기서 죽자

내 생명을 기꺼이 바쳐주자

 

사랑하는 동지들

내 모든 것인 살붙이 노동자 동지들

내가 못다 한 엄중한 과제

체포로 이어진 크나큰 나의 오류도

그대들 믿기에 승리를 믿으며

나는 간다 죽음을 향해 허청허청

나는 떠나간다.

 

이제 그 순간

결행의 순간이다.

서른 다섯의 상처투성이 내 인생

떨림으로 피어나는 한줄기 미소

한 노동자의 최후의 사랑과 적개심으로 쓴

지상에서의 마지막 시

마지막 생의 외침

아 끝끝내 이 땅 위에 들꽃으로 피어나고야 말

내 온 목숨 바친 사랑의 슬로건

 

"가자 자본가세상, 챙취하자 노동해방

 

 

줄 끊어진 연

 

한겨울 바람이 맵찬 어느 날이었어요

창살 너머 어둑한 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줄 끊어진 가오리 연 하나가 뒤척이며

고행중이더군요

 

스스로를 산채로 파묻고 인연 줄도 다 놓아 버려

깊어 가는 감옥이 조금은 적막하지만

한사코 붙잡지 않습니다

탓하지도, 의지하지도, 소망하지도 않습니다.

 

난 지금 줄 끊어진 연처럼

홀로 빈 하늘 떠도는 듯해도

하하, 나는 나대로 고독한 긴장 속에

생명줄 내건 치열한 날들입니다.

 

보이는 줄만 줄일까요

세 손으로 거두어야만 삶일까요

이헐게 날면 되는 것을

줄 없는 줄을 타고

허공 찬바람 속에 몸 던져주며

 

나는 홀로 날았습니다

처절하게 몸부림치며 내 목숨 같은 외줄을 끊고

살아 있는 모든 것과 다시 이어지는 고투의 세월을

참흑한 투쟁과 묵상의 나날이었습니다

 

- 눈 맑게 열리고 마침내 내 인연의 때가 오는 날

 

줄 없는 줄을 통해

아직도 첫 마음 밝혀든 그대에게

나 뜨거운 떨림으로 차전할 것입니다.

 

그래요 희망의 줄은 이미

저마다의 몸 속에 내장되어 있고

좋은 세상은 이미 현실 속에 와 자라고 있고

외줄의 때가 있고 거미줄의 때가 있고

 

밤새 거미 한 마리가

제 몸 속에서 투명한 줄을 뽑아

쇠창살에 잘 짜인 집을 짓더니

아침 햇살에 이른 영롱한 팽팽한

거미 줄망이 그대로 한 우주,

내 삶의 안과 밖이 이어지는 관계

그물 망으로 확 비추어 오더군요.

 

 

거룩한 사랑

 

성은 피과 능이다.

어린 시절 방학때마다

서울서 고학하던 형님이 허약해져 내려오면

어머님은 애지중지 길러온 암탉을 잡으셨다

성호를 그은 뒤 손수 닭 모가지를 비틀고

칼로 피를 뭍혀 가며 맛난 닭죽을 끓이셨다.

나는 칼질하는 어머니 치맛자락을 붙잡고

떨면서 침을 꼴깍 이면서 그 살생을 지켜보았다.

 

서울 달동네 단칸방 시절에

우리는 김치를 담가 먹을 여유가 없었다

막일 다녀오신 어머님은 지친

그 몸으로 시장에 나가 잠깐

야채를 다듬어 주고

시래깃감을 얻어와 김치를 담고 국을 끊였다.

나는 이 세상에서

그 퍼런 배추 겉잎으로 만든 것보다

더 맛있는 김치와 국을 맛본 적이 없다.

나는 어머님의 삶에서 눈물로 배웠다.

 

사랑은

자기 손으로 피을 묻혀 보살펴야 한다는 걸

 

사랑은

가진 것이 없다고 무능해서는 안 된다는 걸

 

사랑은

자신의 피와 능과 눈물만큼 거룩한 거라는 걸

 

 

한계선

 

옳은 일을 하다가 한계에 부딪혀

더는 나아갈 수 없다 돌아서고 싶을 때

고개 들어 살아갈 날들을 생각하라

 

여기서 돌아서면

앞으로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너는 도망치게 되리라

 

여기까지가 내 한계라고

스스로 그어버린 그 한계선이

평생 너의 한계가 되고 말리라

 

옳은 일을 하다가 한계에 부딪혀

그만 금을 긋고 돌아서고 싶을 때

목묵히 황무지를 갈아가는 일소처럼

 

꾸역구역 너의 지경地境을 넓혀가라

 

 

악에 대한 감각

 

안목이 둔감한 자는

값비싼 것과 고귀한 것을

가려보지 못한다

내면의 소리에 멀어진 자는

유명한 노래와 심금의 음악을

가려듣지 못한다

야생의 감각이 마비된 자는

독이 차오르는 실내에서

신나게 웃으면서 죽어간다

악에 대한 감각을 기울여야 한다

악은 달콤하고 친밀하고 잔혹하다

악은 영리하고 세련되고 앞서간다

악은 다수결이며 숨은 극소수다

악의 눈빛을 보았는가

심연을 뚫어보는 섬뜩한 눈빛을

악을 회피하고 외면하면 그 순간,

악의 신비는 내 안으로 파고든다

악을 정면으로 바라보라

나 또한 악과 연루된 시대이니

내 안에 스며든 악을 정성을 다해 다루어라

악에 대한 감각을 길러라

악에 대한 감각이 선에 대한 감각이니

 

 

내 몸의 문신

 

내 몸에는

문신이 새겨져 있다

나는 감옥 독방에서부터

아무도 몰래

문신을 새겨가기 시작했다

고문의 악몽 때문이었다

고문 후유증은 밖으로 표명할 수 없는

나만의 공포,

나만의 치욕, 절망, 추락, 비명,

은근하게 기습하여 악랄하게

몰아대는

생생한 심신의 고통이었다

 

어느 날 나는

철근 토막을 숨겨 들여왔다

그리고

견딜 수 없는 통증이 엄습하면

독방 시멘트 벽에 갈아대기

시작했다

탈옥을 준비하는

자처럼

은밀하고 끈질기게

백일 밤을

갈아

바늘 침을 만들었다

 

그날부터 나는

몰래몰래 내 몸 안쪽의

보이지 않는 곳에다

문신을 새겨갔다

한 땀 한 땀

피가 번지는 고통을 느끼며

 

처음엔

날 이렇게 만든 독재자와

고 문자들을

잊지 말아야 할 자들의 이름을

새기려 했다

그러다

핏줄을 찔러 얼굴에

검붉은 피가 뿜기는

순간

알아챘다

 

그 더러운

이름을 내 몸에 담고 살 순 없다고

 

그들은

살아있어도

이미 죽어버린 자들이고

악의 칼 잘 이였으나

이미 내던져진 도구라고

진정한 복수는

다르게 살아 갚아주는 거라고

 

그리하여 나는

내가 결코 잊어서는 아니 될,

나를 살게 하고

내게 힘을 주고 나를 지켜주는

나보다 앞서 죽었으나

죽어서 살아있는 이들,

내 안에

눈물로 살아있는 이름들을 새겨갔다

 

,

내 몸은

하나의 묘비

내 살아있는

몸은 죽은 자들의 종묘

그이들이 죽는 최후의

순간까지 품어온

비명 같은 유언과 타오르는

불꽃의 성소

 

어둠이 깊어가고

아침이 밝아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아는가

 

밤 사이 내 몸의 검은 문신들이

흰 이부자리에

탁본처럼 새겨져 있다

그렇게 나의 하루 생이 시작되고

나는 그것을 받아쓰고 전해준다

 

오늘도 좌우 양쪽에서

돌이 날아들고

그 돌에 내 몸의 문신이 탁본되어

내가 걸어온 길에는 바람이 서는구나

나는 또다시 추방되어 도는구나

 

국경 너머

분쟁과 가난의 땅에서

내가 만나고 안고 울어주는 아이들이

찰칵, 흑백 필름의 음화처럼

내 몸에 새로운 문신으로 남겨지는구나

 

오는 밤 또

의로운 누군가 죽어가며

내 몸에 비명의 문인을 새기는구나

오래된 악과

새로운 적들에 맞서다

쫓기고 갇히고

밝히고 쓰러지는 이들이

내 몸에 비원의 문인을 새기는구나

 

이 깊은 한의 사랑은

이제 내 몸을 다 덮고도 모자라

내 피부는 검은 대지, 검은 묘비,

 

검은 슬픔,

검은 상처의 몸이다

 

새벽 두시,

몸을 씹고 잠자리에 눕는다

내 몸에 층층으로 새겨진 그이들이 일어나

세상에 타전할 말을 탁본으로 새겨간다

 

내 오랜 통증에 몸서리칠 때

꿈속의 비명이 휘몰아칠 때

악몽의 계시에 소스라칠 딱

내 몸의 문신이 나를 호명하는 순간,

나는 깨어나 묵연히 홀로 앉아

전율하며 퍼지는 검은빛의 파동을,

저기 여명의 푸른빛을

바라다본다

 

, 내 몸은 검어서 빛나는 밤

어둠 속에 빛이 오는 길이다

 

그 약속이 나를 지켰다

 

널 지켜줄게

그 말 한 마디 지키느라

크게 다치고 말았다

비틀거리며 걸어온 내 인생

 

세월이 흐르고서 나는 안다

젊은 날의 무모한 약속,

그 순정한 사랑의 언약이

날 지켜주었음을

 

나는 끝내

너를 지켜주지도 못하고

깨어지고 쓰러지고 패배한

이 치명상의 사랑밖에 없는데

 

어둠 속을 홀로 걸을 때나

시련의 계절을 지날 때도

널 지켜줄게

붉은 목숨 바친

그 푸른 약속이

날 지켜주었음을.

 

 

빌어먹을 신

 

신은 한번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

일곱 살 때 아버지를 빼앗아 갈 때도

노동자로 천대받고 억울하게 짓밟혀도

참혹한 지하 밀실 고문장의 절규에도

사형을 받고 무기징역을 살 때에도

30년을 음해와 비난에 상처 깊을 때도

격려 한 번 행운 한번 주지 않았다

 

신은 기껏해야 내가 울며 기도할 때면

슬그머니 다가와 '나 좀 도와주지' 매달렸고

나는 지옥에나 가보라고 말해주었다

그는 자신이 가진 유일한 권능이

영속성이라는 듯 끈질기게 찾아와서

내가 세상에 현신할 순 없지 않느냐고,

네가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심정을 잘 아니 나 좀 도와달라고,

대신 특별히 아껴둔 선물을 주겠다고,

고난과 고독과 피와 눈물을 주노라고

 

정말 뻔뻔하고 빌어먹을 신이었다

 

평생 누구 한번 때리지 않고 살아온 나는

그 잘난 신을 향해 주먹을 움켜쥔 순간,

그는 이미 피투성이 얼굴이었다

오래전부터, 어쩌면 그를 발견한 역사 내내

 

나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좋아요, 어차피 고난의 인생길에 우리

각자의 싸움을 어디 함께 해보십시다

빌어먹을 신과의 합작은 그렇게 시작됐다

이제 와 문득문득 생각하느니

인생 내내 고생 참 달다

빌어먹을 신의 선물

 

 

그리움이 길이 된다

 

나는 기다리는 사람

그리움을 좋아한다

 

나는 그리움에 지치지 않는 사람

너에게 사무치는 걸 좋아한다

 

이 소란하고 쓸쓸한 지구에

그대가 있어주는 것 만으로도

눈물나는 내 사랑은

 

그리움이 가득하여

나 어디에도 가지 않았다

 

치열한 그리움 속에 너를 담고

텅 빈 기다림으로 나를 지켰다

 

나는 그리운 것을

그리워하기 위해

그리움을 사수하고 있다

 

기다림이 걸어간다

그리움이 길이 된다

 

 

수수수수수

 

해수욕장마다 피서객 숫자 경쟁이다

인파가 많으면 행락의 질은 낮아지는데

 

농촌 마을마다 관광객 유치 경쟁이다

뜨내기가 많으면 삶의 질은 하락하는데

 

개봉 영화마다 천만 돌파 흥행 선전이다

관객이 저리 많다면 감동은 떨어지는데

 

베스트셀러, 좋아요 수, 구독자 수, 댓글 수,

팔로우 수, 검색 수, 클릭 수, 수수수수수

 

무언가 쓸려 나가는 소리

무언가 떨려 나가는 소리

 

수 수수 수수수 수수수수 수수수수수

바람처럼 시간과 함께 사라지는 소리

 

나에게는 그저 단 한 사람이 필요하다

날 바라보고 믿어주고 동행하는 단 한 사람

 

모든 것이 수수수수 팔려 나가는 시대에는

모든 것이 수수수수 뿌리 뽑히는 세계에는

 

제정신으로 살아있는 단 한 사람

자기 자신을 살아가는 단 한 사람

 

 

내 옷을 입고 죽고 싶다

 

그녀가 죽으러 들어갔다

문학 교수로 잘 살아낸 87 나이에

 

젊어서나 늙어서나 아름다웠고

긴장미를 잃지 않던 기품 있는 여자

 

80년대였지

노동의 새벽을 내고 수배자로 쫓기던 나는

강남에 있는 그녀의 집필실로 찾아들었지

그때, 늘씬한 드레스에 하이힐을 신고서

담배를 피워 물고 나를 보던 그녀가 말했지

 

박 시인, 민주화도 혁명도 좋은데요,

난 재수 없게 곱게 자라서 말이에요,

안기부 끌려가고 감옥살이 같은 건 못해요

그니까 당신, 잡히지 마요, 그리고ㆍㆍㆍ

나보다 먼저 죽지 마요!

 

흐르는 상념 사이로

서울 근교의 호텔 같은 요양원으로

꽃을 들고 그녀를 문병한다

 

자식들과 친지한테 민폐 끼치지 않고

고이 마무리하고 싶어서,

여기 들어온 지 1년이 되어가네요

 

공기도 맑고 풍경도 좋고

문화시설과 식사도 좋고

의료진과 서비스도 좋은데

아무래도 내가 질못 생각한 것 같아요

 

뭐가 젤 싫은지 아세요?

다 똑같은 이 요양복을 입는 거요

똑같은 방과 가구와 식사들이요

나란 인간의 취향도 없고 개성도 없는 것들요

 

더 끔찍한 게 뭔지 아세요?

늘 똑같은 얼굴들과 똑같은 일과를 보내는 거요

나른하고 호화롭게 죽어가는 노인들 속에서

하루하루 연명하다 떠나긴 싫단 말이에요

 

난요, 내 옷을 입고 죽고 싶어요!

내 책상과 의자에 앉아 내 분위기 속에서

나다운 모습으로 떠나고 싶다고요

내가 살고 일하고 사랑한 기억이 생생한 장소에서

친구들과 후배들과 제자들과 아이들에 둘러싸여

웃으며 안녕, 죽어가고 싶어요

 

내 인생 전체가 담긴 죽음을,

나 자신에 의한 죽음을 원해요

단 몇 달을 살다 죽어갈지라도

내 인생을 이렇게 살긴 싫다고요

박 시인은 절대로 나처럼 죽지 마요

 

그녀가 내 손을 잡고 흐느낀다

나는 그녀를 안아주고 그녀가 쓴 원고지와

좋은 일에 써 달라며 건넨 봉투를 받아 들고

검은 정장의 경호원들이 지키는 요양원을 나선다

 

모두가 여기 들어와 죽기를 선망하나

그녀는 여기 나와서 죽기를 갈망하는 이곳에

 

 

내 인생의 마지막 계절이 오면

 

내 인생의 마지막 계절이 오면

나는 부드러운 흙에서 보내리라

 

돌을 고르고 흙을 파고

거기에 마지막 나무와 꽃을 심으리라

 

숨이차면 오래전 내가 심었던

나무에 기대앉아 아이들을 바라보리라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키 큰 나무 사이로 난 길을 걸으리라

 

걸으면서 우리가 함께한 노동혁명과

슬픔과 기쁨의 날들을 떠올리리라

 

힘들었다고 좋았었다고 고마웠다고

더 잘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하리라

 

황혼이 물들고 바람이 스치면 나는

나무처럼 천천히 쓰러지리라

 

그 자체로 이미 땅이며 물이며

죽어도 대지 흙을 더할 뿐인 나무처럼

 

내가 떠난 자리에 새로운 나무가 자라리라

계절따라 해가 떠오르고 별이 빛나리라

 

 

1955년 경상북도 영천군 (:영천시)에서 태어났다. 1974년에 주식회사 현대중공업에 노동자로서 입사해 노동하다가 1984민중시1 집에 지옥선을 발표하면서 시인으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노동해방문학편집위원을 지냈고 1992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당한 적이 있다. 1984년에 등단하고서 대기업 공장 노동자 출신 시인으로서 크게 관심받아 왔고 혁명가이자 시인인 박노해 등과 함께 1980년대 노동을 주제로 시를 전문으로 지은 사람들 가운데 한 명으로 손꼽힌다. 보통과 다르게 시집 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노동문학사, 1990)1988년 말에서 1989년 초까지 4개월여에 걸쳐 진행된 울산 현대중공업 대파업 투쟁을 완결된 장시 한 편으로서 엮어 내어 주목받았고정치 조직을 이용한 노동계급의 권력 획득을 선언하면서 노동계급의 투쟁을 바른대로 읊었다고 평가되기도 했다. 백무산은 1990년대 이후에도 꾸준히 활동하면서 노동자가 단순히 생활하는 조건뿐만 아니라 자본의 폭력성을 대상으로 한 근원이 되는 비판이나 생태 문제로 관심의 폭을 넓히면서 자본의 가치를 넘어서 사람의 근원에 천착한 바를 시에 담아 낸다.

 

1988만국의 노동자여, 도서출판 청사

1990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 노동문학사

1996인간의 시간, 창작과비평사

1999길은 광야의 것이다, 창작과비평사

2003초심, 실천문학사

2004길 밖의 길, 갈무리

2008거대한 일상, 창작과비평사

2012그 모든 가장자리, 창작과비평사

2014그대 없이 저녁은 오고,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5폐허를 인양하다, 창작과비평사

2020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 창작과비평사

 

1989년 제1회 이산문학상

1997년 제12회 만해문학상

2007년 제6회 아름다운 작가상, 사단법인 한국작가회의 산하 젊은작가포럼

2009년 제2회 오장환문학상

2009년 제1회 임화문학상

2012년 제20회 대산문학상 시 부문

2015년 제17회 백석문학상

 

 

중중모리 / 백무산

 

당신 뜻 나 알지만 이런 설움 어쩌리오 당신과 살은 탓에 자식에게 죄 갚음 자식까지 앗아간 놈들 이내 몸을 짓밟고 왼갖 닦달 발길질 이런 원한 어쩌리오 차라리 나 또한 남정네로 태어나서 이 산 저 산 횃불을 들고 산마다 산맥마다 불을 질러 마을마다 들마다 원한의 피 뿌릴 것을 북풍한설 모진 바람 거친 들판 당신 찾아 길 나섰소 어디 있소 내 님아 보고지고 내 님아 오랏줄에 묶였는가 보고지고 내 님아 배 곯지나 않았소 죽지는 않았소 성황당 어둔 밤 날아가는 까마귀야 우리 서방 못 보았소 우리 님을 못 보았소 찢어진 치맛자락 자락마다 눈물 얼음 살이라도 터졌는가 보고지고 보고지고 숨이라도 끊겼는가 찬 땅에 묻혔는가 보고지고 내 님아

 

戰死 

 

속았능기라

……

처음부터 우리는 속았능기라

좋다더라 돈 잘 번다더라

우리나라에서 젤 큰 공장이라더라

아파트도 거저 주고 보너스 많다더라

당신과 맞선 볼 때 마을 사람들 한입으로 부추겼지

당신 따라 노고재 넘어올 때 한껏 내 가슴 부풀었지

그러나 당신이 날 속인 건 아니지

누에 집 같은 방 하나 7평 아파트

공장 다니는 것이 아니라 집에 다니는 당신

그래도 무슨 보람이니 역사적이니 오대양 육대주니

희망 섞인 말만 주워듣고 오면서

몇 푼의 봉급을 자위하던 당신도 나도 속았능기라

 

신문에도 텔레비전에도 장엄한 행진곡 깔고

떠들고 시찰단 관광단 견학단 흰 손

흔들며 재일 동포 자수 간첩 먼 나라 대통령

쪽발이 코쟁이 장차관 대동하고

오색 풍선 색종이 비둘기를 날리고

신성일 문오장 연속극 만들고 영화 만들고

민족중흥이 어쩌니 세계가 어쩌니

그러면서 당신의 혼을 뺄 줄

어쩌면 그리도 몰랐는가

 

꼭 맞는 말이지 산업 전사

영광되게 싸우다 죽으라 말이지

자본가를 위해 권력자를 위해

양코뱅이를 위해 죽으라 말이지

저들의 빌딩과 호화 주택과 사치와 탐욕과

팬텀기와 미사일과 항공모함을 위해

가난을 지키며 평생 질병과 싸우다

죽도록 일하다 죽으라 그 말이지

 

속았다는 걸 당신이 알았을 땐 이미 늦었지

머리띠를 두르고 싸웠지만 이미 늦었지

무자비한 군홧발에 돌멩이를 던지고 나섰지만

이미 늦었지 쇠곤봉에 묵사발이 되어 오기 전에도

잠자리에서 흥건히 식은땀 뿌렸지

언제 쫒겨날지 모르는 불안이 겹치고

이미 녹아내리던 몸 위에 무쇠덩이가 덮쳤다지

 

아무렇게나 거적에 싸여 돌아온 당신

결국 저들의 부를 위해 욕되고 욕된

전사를 한 당신 시신 앞에

자선이나 하듯 몇 푼 돈을 던지고 가다니요

당신은 죽어서도 속았지만

당신 자식과 나까지도 속일 순 없지만

기껏 당신을 공장 문 앞에 옮겨 누이고

이렇게 부둥켜안고 울고 있는 것이오

여름 햇살에 푹푹 썩는 당신과 함께

우리가 당한 속임수와 비참함도 함께 썩힐 것이오

숙명처럼 매달린 노예의 사슬도 썩힐 것이오

꽃도 무덤도 없이 떠나는 당신 위에

팔월의 태양은 저렇듯 당당하지만

우리는 저 하늘에서 진눈깨비를 내리게 할 것이오 가엾은 당신

 

 

우리의 가슴이 붉어지기 전에는 진달래꽃은 피지 않는다

 

이 나라 산천 어디에나 진달래꽃이

피지 않는 곳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은

봄이 오면 산에 들에 다시 가보게나

진달래는 그렇게 헤프게 피지 않는다네

화장기 짙은 장미꽃 같거나

채색 입힌 금속성의 튤립 같지 않고

개량한 패션모델 국화꽃 같지 않고

수줍게 웃는 우리들 누이 같고

님을 위해 흘린 눈물방울 같은 진달래는

꼭 그렇게 굽고 못생기고 질기디질긴

이 나라의 소나무 아래에서만 핀다네

소나무의 뿌리에 맞닿아야만 꽃이 핀다네

 

그렇게 헤프게 어디에나 피는 꽃이라

말하지 말게나

금세 시드는 꽃이라 말하지 말게나

아는가 저 수줍은 모습들이 어느 날

남녘에서 백두까지 꼭 한 번씩

휘돌아 굽이치는 이유를

 

진달래꽃은 소나무의 가슴이

붉어지기 전에는 꽃을 피울 수 없다네

우리의 가슴이 붉어지기 전에는

저렇게 휘몰아칠 수 없다네

휘몰다 휘몰다 닿는 곳

이 나라 마지막 진달래 한 송이는

백두에서 핀다네 백두에서 진다네

 

봄이 되면 산에 들에 다시 가보게나

진달래는 함부로 피는 꽃이 아니라네

 

 

 

성지

 

오늘은 꼭 가보리라

산더미 파도가 치더라도

한순간 모든 것을 버리고

착각이나마 깊은 착각에 빠지리라

 

전설도 아니다 역사도 아니다

흰옷을 입고 죽창을 들고

아흐레 영해장 싸전 앞에서

북소리 울리며 깃발을 들리라

일월산 백암산 청송 노귀재

함성을 지르며 피 흘리리라

나는 이 시대의 반역자

가은을 지나 새재를 넘고

태백산맥 골짜기마다 칼날을 세우리라

돌석이 그를 따라 머슴살이 청산하고

오리나무 숲을 지나 일월산에 오르리라

범수 그를 따라 영덕 강구 구룡포

굿판을 따라 날라리를 불리라

오늘은 꼭 가보리라

착각도 아니다 꿈도 아니다

흰옷을 입고 죽창을 들리라

초라한 나의 성지

살아남은 나는 반역자

 

 

지옥선 1

 

하나둘 야근조들이 작업복을 갈아입는 동안

우리는 쇠먼지 바닥에 자리를 폈다

조립 공장 사이에는 좋은 날씨에도 회오리바람이 휘감겨

죽은 인부들이 떠나지 못하고 떠도는 곳이라 했다

싸늘하게 식은 철판들이 괴성을 지르다가

굳어 화석처럼 버티고 선 자리에

우리는 거적을 깔고 풀어진 몸을 말았다

태고처럼 고요한 쇳덩이의 깊은 밤에 빨려들었다

나가봤자 별수 없는 공장 밖 불빛에 속지 않고

야식을 타 먹고 한 시간이라도 더 잠을 벌었다

공장의 깊은 밤은 그래도 평화롭다

간간이 철야조들의 망치 소리만 개 짖는 소리처럼 고요하고

내려앉는 먼지를 눈송이처럼 바라보면서

착한 쇳덩이의 깊은 잠에 한없이 빨려들었다

순하디순한 쇳덩이들

아침이면 칼이 되고 쇠몽둥이가 되어

우리를 짓이기고 가난의 무게로 등짐에 지워져

배고픔 때문에 우리는 못난 꿈을 꾸고

그 희망 때문에 벙어리를 감수하며

돌보지 않은 우리 몸은 갉아먹혔다

이곳이 아라비아 땅인지 모르는 이들

또 아라비아사막으로 떠나고

신기루 같은 월급봉투에 입 닫고 눈 가리고 멱살 잡히고

파도 소리에 잠이 깨어

방파제를 깨어 부수는 파도 소리에 흔들리며

칼이 될 쇠몽둥이가 될 싸늘한 쇳덩이를 베고 눕는다

 

 

 

저녁기도

 

그때 우리는 회당의 낡은 천장만 쳐다보았지

우리의 하나님도 그렇게 낡아 있었다

일용할 양식이라는 구절에서 네 기도가 끊기고

눈물에 잠겨 꺽꺽 너는 울고

창밖 찌푸린 하늘에서 겨울비가 내리고

거리에는 징글거리며 캐럴이 울렸지

네 밥줄의 끊김을 통해

배고픈 모든 배들을 기억했을까

묶인 네 몸을 통하여

갇힌 모든 형제의 시린 살갗을 만질 수 있었을까

낡아빠진 우리의 하나님은 끝내

끝내 한마디 말이 없었지

톱밥 난로가 다 꺼질 때까지

너는 기도를 잇지 못하고

우리는 그저 끝없이 잠겨 흘렀지

되풀이된 절망에 또 한 번의 기원으로

내밀던 우리 손에 하나님 옷자락

움켜쥔 마디마다 끊어지기만 했을 뿐

마침내 우리의 믿음은 이단이었다

끊어진 낡은 옷자락을 잡고서도

식은 밥덩이 말아 먹고

지옥 같은 공장을 향해도

손목이 날아가고 목숨을 잃어도

여전히 말이 없던 낡아빠진 하나님

우리의 믿음은 사탄을 불러왔다

더 이상 낡은 옷자락이나 잡고 뒹굴지 않았다

몸이 곧 말씀이 되길 원했다

믿음이 아니라, 결단이 아니라

찢긴 우리들 몸뚱어리가 곧 말씀이 되길 원했다

우리는 사탄에 맹세헀다

네 눈물의 기도는 꺼진 톱밥 난로에

불씨처럼 다시 타올랐다

 

그대 없이 저녁은 오고

 

모내기를 끝낸 들판에 어둠이 내립니다

저녁뜸에 자던 바람이 문득 우수수 벼를 쓸고 갑니다

국도를 바삐 달리는 키 큰 화물차들의 꽁지에

하나둘 빨간불을 켭니다

논공단지 여공들이 퇴근 버스를 기다리는 길가

들을 가로질러 뜸부기가 울며 납니다

베트남에서 온 여공 하나가 작업복 잠바에 손을 찌르고

고향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어둑한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그 하늘에 주먹별 하나 글썽입니다

 

서녘 먼 곳으로 가 버린 사람아

그대 없는 이곳이 내게도 먼 이국입니다(2012)

 

장작불

 

우리는 장작불 같은 거야

먼저 불이 붙은 토막은 불씨가 되고

빨리 붙은 장작은 밑불이 되고

늦게 붙은 놈은 마른 놈 곁에

젖은 놈은 나중에 던져져

활활 타는 장작불 같은 거야

 

몸을 맞대어야 세게 타오르지

마른 놈은 단단한 놈을 도와야 해

단단한 놈일수록 늦게 붙으나

옮겨붙기만 하면 불의 중심이 되어

탈거야 그때는 젖은 놈도 타기 시작하지

 

우리는 장작불 같은 거야

몇개 장작만으로는 불꽃을 만들지 못해

 

장작은 장작끼리 여러 몸을 맞대지 않으면

절대 불꽃을 피우지 못해

여러 놈이 엉겨붙지 않으면

쓸모없는 그을음만 날 뿐이야

죽어서는 잿더미만 클 뿐이야

우리는 장작불 같은 거야

 

 

돛대도 아니 달고

 

1

생전에 뵙지 못한 권정생 선생께서 가신

안동병원을 찾았지만

나는 곧 빈소를 잘못 찾아왔음을 알았습니다

고인은 아직 집에 계신 듯, 문상객들의 눈치놀음이

데면데면한 것이 민망하여 술자리를 물리고

집으로 조문을 갔습니다

마을 이름 하나만 믿고 마을에 와서도 집을 묻지 않았습니다

집은 곧 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마을을 지나 집의 언저리까지 끌고 온 내 짐작은

지붕이 보일 무렵 그만 빗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마당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나도 모르게 가슴이 사정없이 뛰었습니다

순식간의 일이었습니다

생전에 일면식도 없던 선생의 집에 와서

민망하리만큼 눈물 적셨습니다

헛간채보다 못한 적빈의 살림살이가

눈물겨워서가 아니었습니다

 

2

얼치기 반풍수가 보기에도

이곳은 집이 앉을 땅이 아니었습니다

마을 흉사에나 쓸 물건이나 상여를 넣어둘 곳집이 있거나

역병 든 사람 죽음길 보내는 초막이 있거나

흉한 곳에 흉한 것을 두어 흉을 좀 눌러보자고

복 바랄 일 애당초 가망없고 처절함만이라도 면해보고자

빌고 또 빌어보던 골매기 성황당이나 있어야 할 터였습니다

 

게다가 마냥 열린 북쪽에서 닥치는 칼바람이

수시로 집을 헐뜯고 뒷산 빌뱅이 언덕이

의붓자식처럼 내다버린 곁줄기 하나가

집터에 이르기 전에 이미 숨이 끊어져 사룡(死龍)이 되어 있었고

뒤에서 무력하게 흘러온 개울물은

집을 외면하고 저 가기 좋은 길로만 바삐 가고 있었습니다

땅속은 골수가 빠진 뼈처럼 부스러져 있었고

습한 기운은 집의 아랫도리를 뱀처럼 휘감고 있었습니다

 

3

, 이곳에 누워 얼마나 외롭고 얼마나 아프셨을까

뼈마디 마디 저미는 숱한 밤을 어찌 지새우셨을까

 

음산한 죽음의 그림자가 아랫마을을 범하기 전에

그 길목을 지키며 얼마나 많은 밤을

살을 파고드는 두려움과 싸우신 것일까

 

굳이 흉한 곳에 몸을 두어

대속하신 것일까

 

삶을 대속물로 드린 것일까

 

죄의 대속물 같은

고통의 대속물 같은

대속으로 흘리신 피 같은

 

그것이 선생의 글이었을까

 

세상의 흉한 터가 문학의 본적지일까

 

4

나의 두 눈은 불에 데인 듯 뜨거워져

선생의 집을 더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쩌면 크게 잘못 읽었을까 두려웠습니다

마당 앞에 놓인 범상치 않은 바위에 비친

맑은 기운 하나도 놓치고 있었습니다

 

나는 집을 나와 밭을 가로질러 멀리 나아갔습니다

마을이 한눈에 보일 때까지

개울을 따라 한참 나아가 뒤돌아보았습니다

그곳에서 본 선생의 집은

강아지 꼬리 형국으로 흘러내려온 산줄기 아래에

똥무더기 하나로 놓여 있었습니다

그 똥무더기가 선생님의 집이었습니다

 

 

5

그러자 내가 무엇을 못다 읽었는가를 알았습니다

선생님의 그 철부지 마음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나는 어릴 적 놀던 대로 다리를 벌리고

가랑이 사이로 머리를 집어넣었습니다

그러자,

, 그곳에 선생이 계셨습니다

그건 집이 아니라 작은 쪽배였습니다

낮달 같은 쪽배를 타고 구름 물결에 둥실 뜬

선생이 계셨습니다

 

그 쪽배는 세상을 떠메고 있었습니다

여위고 창백한 뼈 마디마디 다 드러낸 낮달 같은 쪽배에

눈물겨운 세상을 다 떠메고 있었습니다

 

그만 놓아드려야겠습니다

질긴 업장의 밧줄 하나 풀어드려야겠습니다

집을 허물어 배를 띄워야겠습니다

쌀밥 고봉밥 같은 어매 사는 나라로

목화솜같이 따듯한 여인 하나 사는 나라로

그만 훨훨 놓아드려야겠습니다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기특한 여자아이 손이 늘 얼음처럼 차다

몸 불편한 부모 손발 대신하느라고

아직 응석 부릴 솜털 뽀얀 나이인데

어른 몫 하느라 아이 몸짓이 아니다

커서 잘살겠다고 이웃들 덕담들 하지만

그 아이 불길한 미래를 나는 여러번 본 일 있다

아주 여러번

 

부모 동생 짐 덜자 지지리도 못난 남자 만나

습관이 운명을 부르고 사람을 부른다.

그 사람 뒷바라지에 딸린 시부모 시동생 치다꺼리

자식이나 잘 커주면 좋으련만 사고는 쉴 새 없고

남의집살이에 공장일 가는 곳마다

배부른 자들 봉양하느라 마흔 쉰 예순

늘그막에 발 뻗고 자식 며느리 밥상이라도 받을라치면

덜컥 큰 병원에서 오시란다

 

늘 꼼지락대던 어린 우리들에게 어른들은,

- 좀 처연히 있어 버릇하라, 복 달아난다!

- 복이 왔다가 어디 앉을 곳이 있어야 앉지!

그랬다, 나비도 조용한 꽃에 앉고

새들도 바람잔 가지에 앉는다

땀에 절어 일하는 사람들

복 앉을 처연한 어깨 없어 가난하다

 

저 아이 어깨에 나비가 앉게 해야 한다

저건 착한 일이 아니다

아이가 죄를 짓도록 버려둔 것이다.

 

 

회심곡

 

사랑을 잃고 취중에 듣는

유행가 가락도 가락이거니와

 

살가운 사람 싣고 화장터로 가는

영구차 안에서 듣는 회심곡이라니

 

가락인지 흐느낌인지 눈물인지

반음을 뚝뚝 떨구며 부르는

여가수의 기막힌 타령이라니

 

도심을 지나 들판을 달려

새들 나는 강을 건너

가파른 고개 넘는

아스팔트 북망길을

 

울음 닮은 곡조에 흐느끼는

여가수의 낭랑한 슬픔이라니

 

그 옛날 우리 할배 우리 할매

무덤에 가지고 간 그 사설 그 가락이

절절이 가슴을 치게 하네

거역하지 못하게 하네

 

산이 그러데

 

산이 나더러 다녀오라 그러데

스무 살에 벗을 따라 봄산에 올랐더니

초면인 저 산이 내려가는 나더러

 

수삼 년 지나 가을산에 다시 갔더니

산은 내려가는 나더러 역시

다녀오라 그러데

 

십 년을 두 번이나 지나 다시 갔더니

그동안의 일은 하나도 묻지 않고

어제 본 얼굴처럼 어깨를 툭툭 치데

고향집 툇마루처럼 자리를 내어주데

 

그곳은 길이라 하데

이곳은 집이라 하데

내려가는 내 등 뒤에서

 

 

머리 없는 돌부처

 

머리 없는 돌부처는 바위에 앉으셨네

그 무슨 상관이냐고 처연히도 앉으셨네

 

놓아라 전부 내려놓아라 하셨으니

, , , , ,

어느 것 하나 들고 계실까

여섯 도적을 때려잡아라 하셨으니

스스로 머리를 내려놓으셨나

 

그 어깨 위로 밤이면 달이 앉았다가고

구름이 잠시 모였다 흩어지고

봄밤 꽃 향기도 머물다 가고

지나가는 토끼 노루 머리도 잠시 얹히고

아침엔 새들이 앉았다 가더니

저녁엔 흰 눈이 소복이 내리고

나를 내려놓으니 나 아닌 것이 없노라는데

 

내 어쩌다 오가는 산길에 계신

머리 없는 부처님

그 길 지날 때면 나는 조심을 하네

내 머리가 어쩌다 저기 얹히면

몸통이 얼마나 괴로우실까

 

 

강박

 

홍수에 불어난 강을 힘겹게 건너서는

뒤돌아보고 가슴 쓸어내린다

벌건 흙물 거친 물살 저리 긴 강을

 

내게도 지나온 세월 있어

지나오긴 했는지 몰라도

뒤돌아보이는 게 없는 건

아직도 쓸려가고 있는 것인가

내가 언제나 확인하고 확신하는 이 몸짓은

떠내려가면서 허우적이는 발버둥인가

 

내게는 도무지 사는 일이 왜

건너는 일일까

 

한 시대를 잘못 꿈꾼 자의 강박일까

삶은 해결해야 할 그 무엇일까

이 생의 건너에는 무슨 땅이 나올까

많이도 쓸려왔을 터인데 돌아보면,

어째 또 만 그 자리일까

 

 

그 아이 집

 

이제는 낯익은 사람조차 드문 고향

가는 날이 장날이라 장거리 천막 국숫집에서

옛 아버지들처럼 한숨이나 쉬고 앉았는데

맞은편 국밥집 키가 큰 여자

마음 씀씀이 거침없고 몸놀림이 어찌 저리

넉넉하고 천연덕스런 보살인가

 

쇠전 앞길 새로 난 신작로

강을 건너야 닿는 중학교 등굣길

그 길 다시 넓히느라 판자 담장이 헐린 집

안방 아궁이가 큰길에 나앉은 집

군용차들이 일으키는 먼지에 언제나 뽀얗던 그 집

담이 있던 자리 넝쿨장미가 길에 밟히던 그 집

길에 나온 그 아궁이에서 아침밥 차리고

동생들 도시락도 담고 개숫물 홱 길에 뿌리다

학교 가던 내 교복 바지를 적시던 그 아이

초등학교를 같은 반에 다녔지만 두어 살 많았던 그 아이

겨울엔 붉은 내복 바지에 여름치마를 입고 오던 그 아이

 

난 일찍이 세상이 싫어 강둑 풀밭에

머리 처박고 뒹구는 일 많았는데

그럴 때면 그 아이 방천둑 아래 비탈밭

땡볕에 벗은 발등 다 태우도록

수건 쓰고 주전자 물로 배를 채우며 종일토록

콩밭 매던 그 아이, 두 학기도 마치기 전에

대구 어디 방직공장에 갔다던 그 아이

비가 내려 넝쿨장미 붉은 꽃 흙범벅이 되어도

바가지 물 떠다 꽃잎 씻던 그 아이 없는 그 집

 

, 저 아이가 고마워라 가슴 뛰어라

나의 분노는 다시 많은 상처를 만들었구나

뒤집어 지배한다고 이기는 것이 아니야

아직은 짓밟히고 내동댕이친 곳에 있네

더 온전하게 더 푸르게 피어오르는

넉넉한 저항이여

저 아이가 고마워라 가슴 뛰어라

 

 

비에 젖은 바다

 

태풍으로 끊겨 돌아가는 길

바람에 쓸려 다발로 쏟아지는 빗줄기

몰아치는 바람과 치솟는 파도

모습을 드러내었다가가 감추는 정박한 배들

비 오는 바다에 나는 차마 오지 못합니다

 

이곳은 내 젊은 한 시절의 무덤

그 아픈 사랑 비에 젖은 시신들 껴안고

오열하던 사람들 그 얼굴들 허물어진 얼굴들

뱃전의 물보라 찢겨진 때 절은 작업복

무심히 쓸려가던 차디찬 파도

나는 비 내리는 바다를 가지 못합니다

내 젊은 시신이 떠서 일렁이는 저 물결

차마 바라보지 못합니다

 

다시 살아나는 걸 나는 어쩌지 못합니다

분노 같은 파도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나는 어쩌지 못합니다

비 내리는 바닷가에 올 때마다

 

 

마음 한 그루

 

폐사지의 가을

서 있는 것은 오직 돌탑 하나뿐

 

천지 만물은 허물어진다는 걸

뱉고 나면 허물어질 말로 말해야 하고

허물어지기 전에 이미 무상함을

상을 지어 소리쳐야 했던 것은

 

세월의 풍상이란 건 없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허물고

허망을 허망으로 허물고 나서

 

긴 세월

돌탑 하나 남긴 뜻은

 

허망에 머물지 말라고

마음 한 그루 남겼는가

 

 

매화가 지천인데도

 

섬진강 강마을에 매화가 한창입니다

산자락 에워싸도록 지천입니다

매화긴 매화지만 저리 물량으로

지천이다 보니 매화 보던 옛 감흥이

좀체 일지 않아 아쉽습니다

 

돌담에 붉은 매화 한 그루면

천지 가득 매화였습니다

우리들 살림도 꼭 그만큼의

빛과 향으로 족했습니다

동쪽 손님 오시는 길목

담 너머 꽃가지 두엇만 늘어져도

봄은 천지에 가득하였습니다

 

강을 따라 십 리 넘어 꽃길이지만

빛깔과 향기가 모자라

오히려 아쉽습니다

꽃은 한 송이라도 세상 가득함에

모자랄 것이 없습니다

 

 

설날 아침에

 

그믐날까지 연 사흘 눈 내리더니

설날 아침엔 개었다가 흐리다

지붕마다 눈 녹아 처마에 고드름 달고

빈 무밭에 까막까치

깜장 발자국 찍어댄다

새벽 어둑서니에 마당 쓰는 소리 잠을 깨우고

집집이 못 보던 신발들 섬돌이 좁다

어느 찢어질 가난인들 섬길 이 없을까

아랫사람 만나서도 옷깃 여민다

 

아재 아인교, 고샅길에서

이기 누고 당산 앞에서

욕봤데이, 그래 객지서 욕봤데이

뒷산도 눈을 털고 그래그래

앞강도 뽀얀 얼굴로 오냐오냐

 

예전엔 내가 저 풍경 속에 있더니

언제부턴가 풍경을 벗어났네

아무래도 나는 다시 저 풍경으로 가려네

내가 담긴 풍경을 내가 보고 살 궁리 하나

설날 아침에 작정을 하네

 

세한도

 

왜 그렸을까

집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앞서 그랬을까

목수가 보면 웃을 그림을 그렸을까

풍수가 보면 혀를 찰 집을 그렸을까

 

늙은 소나무 부리 위에 집을 짓다니

숲 그늘 습한 땅에 터를 잡다니

방위도 살피지 않고 지형도 살피지 않고

주위 땅이 더 높아 비만 오면 물이 콸콸

집 안으로 쏟아질 참인데

 

그는 아마도 유배지의 겨울 솔숲을

다 그려놓고는 못내 집이 그리워

집 한 채를 끼워넣었던 것일까

그런데 저 집은 살림집이 아니지 않은가

이상하게 크고 긴 건물과 낯선 문

궁궐일까, 그가 그리워한 것은 옛 영화였을까

임금이었을까, 그것이 아니면 왜

저리 기막힌 소나무 아래

저리 한심한 집을 생각했을까

그는 두 가지 욕망에 괴로워했을까

그렇지 않다면 왜 저런 욕망이 깊이 깔린

그림을 그렸을까

 

12

 

늦가을 남은 잎새마저 가져가느라고

바람엔 가시가 돋았습니다

 

길섶 마른 풀들은 손을 흔들고

들은 저 낮게 흐르는 가을강을 따라

한 생의 시간들을 흘려 보내며 여위어갑니다

그들이 외로워 보여 손을 내밀어보지만

내 존재의 경계는 자꾸 허물어져

시간의 상처만 손바닥에 바스락거립니다

 

나에게도 그만큼의 시간이 빠져나가

내 몸에서도 자꾸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잡았던 손이 풀리고 그곳엔 허공이 채워집니다

그럴수록 나는 안간힘을 다해 그대를 떠올립니다

자꾸 그대 따뜻한 이름을 불러봅니다

 

뜨거웠던 날들은

몸이 미치는 곳까지가 나 자신이더니

11월엔

사랑이 미치는 곳까지가 나 자신입니다

 

 

욕망을 생산하는 공장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일 가운데 저 사막을 보아라, 공놀이하자고 숲을 베어 만든 황무지를 보아라, 포클레인으로 찍어 죽이고, 농약으로 태워 죽이고, 땅 속 지렁이 두더지가 공놀이에 걸리적거린다고 독극물로 땅 깊이 절여버린 녹색 사막을 보아라.

 

세상에서 젤 재밌는 일이 누워서는 그 짓이라 하고, 앉아서는 노름이라 하고, 서서 하는 일 가운데는 골프가 제일이라 하는데, 계보를 위해 이 나라 정신나간 각하께서는 허가 남발한 일이 낯뜨거워서 한다는 소리가, 노동자들도 즐길 수 있도록 하겠다는데, 나는 골프를 치게 해달라고 조르는 노동자를 본 적이 없고, 골프 칠 여유있는 노동자가 있다는 소리를 들은 일도 없는데, 그는 왜 그따위 소리를 했을까, 저들은 언제나 야비하게도 피해자를 공범자로 끌어들이고, 그들을 타락시켜 죄를 묻지 못하게 하는 방법을 찾지.

 

오늘도 저들은 국회를 열어 이기심을 생산 유포하고, 말씀의 독극물을 살포하고, 들끓는 아귀다툼의 욕망을 생산하고, 그리하여 온 국민과 공범관계를 끝없이 조작하고, 그리하여 저 사막을 보아라, 저것도 인간이 자신의 존재 방식대로 개조한 것, 그래서 저도 하나의 인격이다, 국가의 토목공학적 인격이다, 배타적 독점 인격이다, 국가의 인격이다, 사막이다.

 

 

소를 끌고

 

눈 덮인 낮은 집이 저 너머에 있다

사방 길은 지워지고 따듯한 섬 같은 집

감나무 한 그루가 돛대처럼 지키고 있는 집

저녁연기가 목화솜처럼 깔리던 집

 

아궁이 곁불에 닭들이 졸고

아랫목에서 메주가 뜨고

설은 다가오고 까치는 마당에 내려와 놀고

들판을 달려온 바람이 몸을 녹이다 가고

 

장독간 가는 길에 눈을 쓸고 김치를 내오고

볼이 튼 아이는 눈밭에서 뛰놀고

입김 불어 손을 녹이며 아낙은

소 없는 외양간 아궁이에 소죽을 쑤고

 

산너머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 밤새 들리고

길을 재촉하는 부엉이 먼 산에서 울고

 

나는 아직도 희미한 그 집에 가고 있다

흙과 짐승과 나무가 주인인 집에

이랴이랴 소 한마리 끌고 돌아가는 중이다

 

갈수록 멀어지는 그 사람들 그 집에

내가 살던 집도 아닌 그 집에

이상한 일이다

수십년 동안 나는 돌아가는 중이다

 

시집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 2020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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