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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괜찮은 詩

다시, 먼산

by 이성근 2023. 1. 7.

우울한 날의 사랑, 송해월

양들의 침묵, 이현호

우주의 어느 일요일, 최정례

나의 사랑은 강렬했으나, 이정하

나에게 주는 시, 류근

달의 왈츠, 박서영

홀수의 방,

교차로에서 잠깐 멈추다, 양애경

마지막의 들판, 김선재

자목련, 도종환

https://www.youtube.com/watch?v=CP4XoW2UEs4 

봄편지, 목필균

마음을 지우던 날, 허열웅

가을날의 내 마음, 황지우

편백나무 숲에서 보낸 편지, 한미영

힘을 아껴봐, 기형도

내가 너를 너라고 부를 수 없는 곳에서, 최승자

간섭자, 황경신

still, 황경신

상처 입은 혀, 나희덕

마치 꿈꾸는 것처럼, 허수경

 

깊은 슬픔, 신경숙

당신은 가끔 여기에 있다, 김혜진

작은 엽서 8 기다림, 김선태

우리의 생애가 발각되지 않기를, 허연

반성, 김상미

커다란 창, 이규리

이별 이후, 문정희

백야, 김창균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않는다, 조진국

우리는 사랑을 사랑해, 김종완

 

해괴한 달밤, 김선우

봄날은 간다, 구양숙

나를 잡아, 나를 놔, 신현림

반음계, 고영민

어느 날, 원태연

국경의 도서관, 황경신

사랑, 이정하

밤 속에 누운 너에게, 허수경

마지막은 왼손으로, 이제니

붙박이창, 이현호

 

얼룩, 이준규

상처받는 것을 허락하는 사랑, 공지영

바람처럼 떠나고 있는 생애, 손종일

run & run, 황경신

[]의 말, 이현호

아무도 아무도를 부르지 않았다,

달로와요, 이은규

다시 봄비는 내리고, 이승희

아무도 살지 않아서 좋았다, 김선우

사랑에 빠진 자전거 타고 너에게 가기,

https://www.youtube.com/watch?v=0KAxak15UlA 

 

다른 이야기, 김소연

숨길 수 없는 노래 4, 이성복

이별 1,

어느 여름날, 이승희

-ㄴ지 모르겠어, 윤병무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정희성

수박, 허수경

레몬,

네가 아니면 나는 어쩌지, 황경신

숲에 관한 기억, 나희덕

 

다시, 이선명

그럴 수 있을까, 주인자

사랑이란 짐승김왕노

궤나

아나키스트의 사랑

한 사람을 보내다 곽효환

달에 대하여 권혁웅

쑥대머리

첫사랑 박남철

빈틈 강세화

 

환절기 박준

발톱

미인처럼 잠드는 봄날

찔레꽃 송찬호

먼 산-김용택

어쩌다 이렇게 - 나태주

기다림 - 김영일

보고 싶은 한사람이 있습니다- 김대규

너 보고픈 날은- 나태주

당신이 그리운 것은- 이근대

 

창 밖에 쌓인 그리움 - 이상진

공중전화부스 안에서 - 김설하

즐거운 편지 - 황동규

그리워한다는 건 이상진

누군가가 그리워질때 - 원성 스님

멀리 있어도 사랑이다 정윤천

너를 알고 난 후 정우경

사랑하는 사람은 언젠가 또 만난다- 이근대

당신을 기다리는 동안- 김민소

한 사람을 잊는다는 건- 김종원

사랑했던 마음- 장태평

한번은 보고 싶습니다 - 오광수

 

 

우울한 날의 사랑, 송해월

 

사람의 마음에 온도가 같을 수 없듯

내가 네게로 가는 몸짓으로

너도 그렇게 내게 오라 할 수 없겠지

 

사람이 사람을 욕심내는 일이

부질 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바보같이 욕심을 내었구나

 

내가 너를

처음 사랑하기 시작한 날

무엇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가난한 여자가 되어

맨발로

네 가슴 속에 걸어 들어가고 싶었다

 

잎을 채 떨어내지 못한

싸리나무 위를 불어가는 바람이

발 밑으로 구슬처럼 쏟아질 것 같은 저녁

 

오늘도 나는 너의 이름으로

내 심장을 종잇장처럼

얇게 저며낸다

 

베이는 줄도 모르게

붉은 심장 예리하게 베이고 나면

그제야 서늘해져 몸서리 치고

 

심장으로부터

전신으로 스며 나오는 투명한 피

소름 돋는 세포마다 흐느끼는 소리

 

온 몸에 귀를 닫는다

 

 

 

양들의 침묵, 이현호

 

그대가 풀어놓은 양들이 나의 여름 속에서 풀을 뜯는 동안은

삶을 잠시 용서할 수 있어 좋았다

 

기대어 앉은 눈빛이 지평선 끝까지 말을 달리고

그 눈길을 거슬러오는 오렌지빛으로 물들던 자리에서는

 

잠시 인생을 아껴도 괜찮았다 그대랑 있으면

 

그러나 지금은 올 것이 온 시간

꼬리가 긴 휘파람만을 방목해야 하는 게절

 

주인 잃은 고백들을 들개처럼 뒤로하고

다시 푸르고 억센 풀을 어떻게 마음밭에 길러야 한다

 

우리는 벌써 몇 번의 여름과 겨울을 지나며

 

두 발로 닿을 수 있는 가장 멀리까지

네 발 달린 마음으로 갔었지

 

살기 위해 낯선 곳으로

양들이 풀을 다 뜯으면 유목민은 새로운 목초지를 찾는다

 

지금은 올 것이 오는 시간

양의 털이 자라고 뿔이 단단해지는 계절

 

 

우주의 어느 일요일, 최정례

 

하늘에서 그렇게 많은 별빛이 달려오는데

왜 이렇게 밤은 캄캄한가

에드거 앨런 포는 이런 말도 했다

그것은 아직 별빛이

도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우주의 어느 일요일

한 시인이 아직 쓰지 못한 말을 품고 있다

그렇게 많은 사랑의 말을 품고 있는데

그것은 왜 도달하지 못하거나 버려지는가

 

나와 상관없이 잘도 돌아가는 너라는 행성

그 머나먼 불빛

 

 

내 손을 잡아줄래요?, 허수경

 

어느 날 보았습니다

먼 나라의 실험실에서 생의학자가 내가 가진 인간에 대한 기억을 쥐가 가진 쥐의 기억 안에 집어넣는 것을

 

나와 쥐는 이제 기억의 공동체입니다 하긴 쥐와 나는 같은 별에서 오랫동안 함께 살았습니다

사랑을 할 때 어떤 손금으로 상대방을 안는지 우리는 오랫동안 생각했지요 쥐의 당신과 나의 당신은 어쩌면 같은 물음을 우리에게 던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손을 잡아줄래요?

피하지 말고 피하지 말고

그냥 아무 말 없이 잡아주시면 됩니다

 

쥐의 당신이 언젠가 떠났다가 불쑥 돌아와서는 먼 대륙에서 거대한 목재처럼 번식하는 고사리에 대해서 말을 할 때 나의 당신은 시간이 사라져버린 그리고 재즈의 흐느낌만 남은 박물관에 대해서 말할지도 모릅니다

 

쥐의 당신이 이제 아무도 부르지 않는 유행가를 부르며 가을 강가를 서성일 때

나의 당신은 이 계절, 어떤 독약을 먹으며 시간을 완성할지 곰곰히 생각합니다

 

푸른 별에는 당신의 눈동자를 가진 쥐가 산다고 나는 말했지요, 당신, 나와 쥐의 공동체를, 신화는 실험실에서 완성되는 이 불우한 사정을 말할 때

 

내 손을 잡아줄래요?

피하지 말고 피하지 말고

내가 왜 당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지

그 막연함도 들어볼래요?

 

이건 불행이라고, 중얼거리면

모든 음악이 전쟁의 손으로 우리를 안아주는 그런 슬픈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건 사랑이라고, 중얼거리면

모든 음악이 검은빛으로 변하는 그런 처참한 이야기도 아닙니다

 

다만 손을 잡아달라는 간절한 몸의 부탁일 뿐입니다

내가 하지 않으면 내 기억을 가진 쥐가 당신에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내 손을 잡아줄래요?

 

 

 

나의 사랑은 강렬했으나, 이정하

 

강한 것이, 열정적인 것이 좋은 걸로 알았다

특히 사랑에는

광화문 네거리에 걸려 있는 전광판처럼 화려하고 거창해야

나는 내 사랑이 너에게 당도할 줄 알았다

나의 그러한 강렬함에

너는 내 손을 잡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너는 너무도 쉽게 피해갔던 것이다

하기사 한 순간 짧게 퍼붓는 소낙비야

잠시만 몸을 피하면 그 뿐 아닌가

대신 나는 네가 뿌려놓은 가랑비에 몸이 흠뻑 젖었다

너의 은은한 눈빛에

너의 조용한 고개 끄덕임에

너의 단아한 미소에

내 몸과 영혼까지 다 젖고 말았다

너는 나를 피해갔지만

나는 언제까지나 너에게 머물렀다

 

 

나에게 주는 시, 류근

 

우산을 접어버리듯

잊기로 한다

밤새 내린 비가

마을의 모든 나무들을 깨우고 간 뒤

과수밭 찔레울 언덕을 넘어오는 우편배달부

자전거 바퀴에 부서져 내리던 햇살처럼

비로소 환하게 잊기로 한다

 

사랑이라 불러 아름다웠던 날들도 있었다

봄날을 어루만지며 피는 작은 꽃나무처럼

그런 날들은 내게도 오래가지 않았다

사랑한 깊이만큼

사랑의 날들이 오래 머물러주지는 않는 거다

 

다만 사랑 아닌 것으로

사랑을 견디고자 했던 날들이 아프고

 

그런 상처들로 모든 추억이 무거워진다

 

 

달의 왈츠, 박서영

 

당신을 사랑할 때 그 불안이 내겐 평화였다. 달빛 알레르기에 걸려 온몸이 아픈 평화였다. 당신과 싸울 때 그 싸움이 내겐 평화였다. 산산조각나버린 심장. 달은 그 파편 중의 일부다. 오늘밤 달은 나를 만나러 오는 당신의 얼굴 같고. 마음을 열려고 애쓰는 사람 같고. 마음을 닫으려고 애쓰는 당신 같기도 해. 밥을 떠넣는 당신의 입이 하품하는 것처럼 보인 날에는 키스와 하품의 차이에 대해 생각하였지. 우리는 다른 계절로 이주한 토끼처럼 추웠지만 털가죽을 벗겨 서로의 몸을 덮어주진 않았다. 내가 울면 두 손을 가만히 무릎에 올려놓고 침묵하던 토끼.

 

당신이 화를 낼 때 그 목소리가 내겐 평화였다. 달빛은 꽃의 구덩이 속으로 쏟아진다. 꽃가루는 시간의 구덩이가 밀어올리는 기억이다. 내 얼굴을 뒤덮고 있는 꽃가루. 그림자여. 조금만 더 멀리 떨어져서 따라와줄래? 오늘은 달을 안고 빙글빙글 돌고 싶구나. 돌멩이 하나를 안고 춤추고 싶구나. 그림자도 없이.

 

 

홀수의 방, 박서영

 

잊겠다는 말 너머는 환하다. 그 말은 화물열차를 타고 왔고 꽃나무도 한 그루 따라왔다. 꿈이었나봐. 흩어지는 기억들. 슬픈 단어들은 흩어진 방을 가진다. 너는. 나를. 그녀를. 누군가를. 사랑은 없고 사랑의 소재만 남은 방에서 너는 긴 팔을 뻗어 현관문에 걸린 전단지를 만진다. 잊겠다는 말은 벼랑 끝에 매달린 손. 이미 그곳에 있었지만 도대체 그곳은 어디인가. 떠나면서 허공에 던져놓은 너의 단어들. 흩어져있는 너의 단어들이 흰 배를 드러내놓고 날아가는 걸 본다.

 

서로에게 익숙해지기 시작할 때 우리는 등을 돌렸다. 이제 내 몸에서 돋아나는 그림자를 이해하기 위해 계절의 밤을 다 소비해야 한다. 우리의 그림자는 한패가 아니다. 그림자는 암호처럼 커진다. 씻어도 투명해지지 않는다. 젖어서 흐물흐물 찢어지면 내부를 들여다볼 텐데. 이젠 버려야 하나. 어차피 한패도 아닌데. 우리는 오로지 나였을 한 사람과, 너였을 한 사람이 되기 위해 붙어 있다. 인정하자. 그러지 않으면 사랑에 빠져 완벽하게 사라질 수 있으니. 가로등 불빛 아래 쭈그리고 앉아 그림자의 윤곽을 돌멩이로 그려준다. 내가 떠나도 바닥에 남을 뭔가를. 기억은 순간순간 그림자들의 방을 뺏는 놀이 같아.

 

그 와중에 잊고 싶다는 말이 개미처럼 우왕좌왕한다. 그 와중에 미안과 무안(無顔)은 깊은 방을 만들고 있다. 나는 방을 잃고 현관문에 덜렁덜렁 매달려 있는 너의 손목을 붙잡고 있다. 오로지 너였을 한 사람을 발굴하듯이. 그래서 발굴된 영혼이 다른 영혼을 찌를 듯이 기억하고 있는 시간 속에서. 연인들은 부지런히 서로를 잊으리라.

 

 

교차로에서 잠깐 멈추다, 양애경

 

우리가 사랑하면

같은 길을 가는 거라고 믿었지

한 차에 타고 나란히

같은 전경을 바라보는 거라고

 

그런데 그게 아니었나 봐

 

너는 네 길을 따라 흐르고

나는 내 길을 따라 흐르다

우연히 한 교차로에서 멈춰 서면

 

서로 차창을 내리고

-안녕, 오랜만이네

보고 싶었어

라고 말하는 것도 사랑인가 봐

 

사랑은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영원히 계속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그렇게 쉽게 끊어지는 끈도 아니고

 

이걸 알게 되기까지

왜 그리 오래 걸렸을까

오래 고통스러웠지

 

, 신호가 바뀌었군

다음 만날 지점이 이 생이 아닐지라도

잘 가, 내 사랑

다시 만날 때까지

잘 지내

 

 

 

마지막의 들판, 김선재

 

내 다정한 안부를 전해요

둘이 듣는 혼잣말처럼, 한 번도 들린 적 없는 속삭임처럼

 

여기는 지구의 첫 별이 뜨는 곳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모서리를 접는 곳

이상하게 부풀었다가 기쁘게 사라지는 곳

 

그러니 잊어도 좋아요 구름을 구획하는 바람이 우리를 거둘 때까지

둥글게 둥글게 여행을 떠나요

기억할 필요 없어요

뚫린 천장 위로 날아간 새가 자신의 곡선을 기억하지 않듯이

처음 태어난 지도를 따라

 

단종(斷種)될 말들의 사막을 건너가요

 

모래의 책을 건널 때마다, 넓어서 캄캄할 때마다

깊은 구름이 달려왔다

나는 절망을 절정으로 바꿔 적기 시작했다.

 

내가 건넌 것은 구름의 푸른 웅덩이

내가 지나야 할 곳은 푸른 웅덩이 속 검은 구름

 

나는 어제보다 느려졌고 나는 내일보다 조금 길다 그래서

모르는 것이 슬프거나 아는 것이 부끄럽지 않을 때까지

언제나 처음인 저녁 쪽으로

마지막의 들판 쪽으로

 

그러니 이제,

당신의 안부를 묻지 않아요

묻은 것과 묻지 못한 기억 밖으로

여행을 떠나요

돌고 돌아 돌아오지 않을 쪽을 향해

당신의 짧은 눈썹에서 햇빛이 사라지기 전에

 

곧 흩어질 내 인사를 전해요

그러니까 나는

다음이라는 말과 연애하였지

다음에, 라고 당신이 말할 때 바로 그 다음이

나를 먹이고 달랬지 택시를 타고 가다 잠시 만난 세상의 저녁

길가 백반집에선 청국장 끓는 냄새가 감노랗게 번져 나와 찬 목구멍을 적시고

다음에는 우리 저 집에 들어 함께 밥을 먹자고

함께 밥을 먹고 엉금엉금 푸성귀 돋아나는 들길을 걸어 보자고 다음에는 꼭

 

당신이 말할 때 갓 지은 밤에 청국장 듬쑥한 한술 무연히 다가와

낮고 낮은 밥상을 차렸지 문 앞에 엉거주춤 선 나를 끌어다 앉혔지

당신은 택시를 타고 어디론가 바삐 멀어지는데

나는 그 자리 그대로 앉아 밥을 뜨고 국을 푸느라

길을 헤매곤 하였지 그럴 때마다 늘 다음이 와서

나를 데리고 갔지 당신보다 먼저 다음이

기약을 모르는 우리의 다음이

자꾸만 당신에게로 나를 데리고 갔지

 

 

자목련, 도종환

 

너를 만나서 행복했고

너를 만나서 고통스러웠다

 

마음이 떠나버린 육신을 끌어안고

뒤척이던 밤이면

머리맡에서 툭툭 꽃잎이

지는 소리가 들렸다

 

백목련 지고 난 뒤

자목련 피는 뜰에서

다시 자목련 지는 날을

생각하는 건 고통스러웠다

 

꽃과 나무가

서서히 결별하는 시간을 지켜보며

나무 옆에 서 있는 일은 힘겨웠다

스스로 참혹해지는

자신을 지켜보는 일은

 

너를 만나서 행복했고

너를 만나서 오래 고통스러웠다

 

 

봄편지, 목필균

 

가슴에 청진기 대고

네 심장소리 듣고 싶다

 

안개 같은 그리움

전해져 있는지

 

수없이 수신확인 하며

오늘도 금빛 햇살로

편지를 쓴다

 

진달래가 능선을 타고

달려오는 것처럼

너도 그렇게 왔으면 좋겠다고

 

 

마음을 지우던 날, 허열웅

 

열쇠도

자물쇠도 없이 갇혀버린 마음

 

네 속에 묶여있던 나

 

미움을

지우던 날

 

내 생을

흔들어대던

 

너를 내가 보낸다

 

 

 

가을날의 내 마음, 황지우

 

 

그대에게 이르기 위해

나에게서 뻗쳐 나오는 온갖 마음,

길을 만들어 놓았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그대의 자국이었지

 

어느 특별한 날씨에 대한 기록, 황경신

늘 당신을 생각하던

그 여름, 가을, 겨울과 봄

 

당신으로 인해 내 마음에는

한여름에도 폭설이 내렸지만

세포들 하나하나 살아 숨 쉬며 당신을 헤매던

그토록 풍요롭던 그날들은 이제 다시 오지 않을 테니

 

아주 먼 훗날에라도 우연히 당신을 만난다면

이 말만은 꼭 해주고 싶었어

 

고마워

당신을 보내고, 나는 이렇게 살아남았어

 

 

편백나무 숲에서 보낸 편지, 한미영

 

안녕 당신, 우리가 못 본 지도 한참 됐군요 난 지금 편백나무 울울한 숲에 와 있어요 편지를 받고 아직도 내가 그립거든 답장은 하지 마세요 나는 다만 욕망을 연기하는 신경증 환자처럼 기다릴 뿐이에요 이곳 나무들은 팔을 치켜들거나 앞으로 뻗은 채로 배고픈 향기를 뿜어요 배가 고플수록 당신이 그리워요 당신은 입을 크게 벌린 나무 사이로 포도주처럼 흘러내려요 새벽이면 늙고 주름진 슬픔이 부드러운 흙 속에서 불쑥 솟아올라 나는 나무보다 더 새파랗게 기절하곤 해요 이곳에선 당신을 사티로스라고 부른답니다 사랑의 수정주의라 해두죠 한 집 건너마다 유령처럼 텅 빈 뉘앙스가 당신을 덮쳐요 팔을 늘어뜨리고 잠든 나무 위로 내 몸을 덮칠 수 있을까요 잠을 잃은 건 백 년도 지났어요 피톤치드는 불면증 치료에 효과가 좋은 듯해요 봉투에 봉함해서 보낼게요 사티로스 이만 안녕, 당신을 사랑해요 나도 라는 부족한 말로 답장은 하지 마세요 나는 다만 끝없이 사라질 뿐이에요

 

 

힘을 아껴봐, 기형도

 

이상하지, 비가 오는 날씨에는 모든 사물들이 검게 보인다. 철저한 감각론자는 아니지만 인간의 내면을 언제나 새로운 느낌으로 채우는 외면적 실체는 존재할 것 같다. 얼마 전에는 길거리에 뛰어노는 작고 귀여운 애들을 보고 갑자기 네 생각이 났었다.

 

너를 생각하면 항상 무슨 구름 생각이 나. 가끔씩은 약간의 생각들이 나를 괴롭히기도 하고. 옆 좌석에서는 두 명의 사내가 역사를 얘기하고 있다. 기다림이란 얼마나 파괴적일까. 몇 개의 구름들이 지상으로 내려오기 위하여 얼마나 작은 몸들로 찢기워져서 후드득 떨어지는지. 비가 개인 숲으로 올라가 보면 좋겠다. 사랑은 서로의 그림자를 나눠 갖는 것일까.

 

 

내가 너를 너라고 부를 수 없는 곳에서, 최승자

 

1

어느 한순간 세계의 모든 음모가

한꺼번에 불타오르고

우연히 발을 잘못 디딜 때

터지는 지뢰처럼 꿈도 도처에서 폭발한다.

 

삼억 이천만 원짜리 선글래스를 낀 것은 그젯밤의 꿈.

 

어두운 밝음 속에서

우리가 서로를 껴안은 것은

어젯밤의 꿈,

네가 떠나고

바람 불고

내가 죽는 것은

오늘 한낮의 꿈.

 

2

또 다시 한세월이 끝났을 때

나의 무릎은 절단되어 있었고

너의 문은 닫혀 있었다.

 

네가 없는 그 거리,

나침판이, 운명 지침서가 헛돌고

한 평생이, 온 인류가 헛돌고

 

헛도는 그 깊이로

흩어져 내리는 내 꽁지의

마지막 깃털이 보였다.

 

3

내가 너를 너라고 부를 수 없는 곳에서

흐르는 물은 흐름을 정지하고

 

이제 눈 감는 자는 영원히

다시 눈 떠 헤매지 않으리니

 

말없이 한 여자가 떠나가고

바다의 회색 철문이 닫혀진다.

 

애도의 습관, 이은규

없는 목소리

 

너라는 소음에 시달리지 않기 위해 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네 벽을 코르크로 도배한 침실 속으로 숨어든 한 사람

애도의 습관은 존중되어야 한다

 

그때의 방은 방일까, 무덤일까

너라고 쓰고 나라고 읽는다

기억의 납골당에 너를 안치하고 입구를 봉인하는 일

 

아직 내 것인 열망들을 말해야 할 때

네 것인 의심들을 이미 들어야 할 때

비유는 과연 올바른 방법일까

쓴다, 소음에 시달리지 않기 위해 너라는

 

목소리가 없다

 

 

간섭자, 황경신

 

나는 그대의 삶에서 떨어져 나왔다고 믿었는데

그 어느 한 자락에 여태 매달려 있었구나

그 매달려 있음이 나의 습관이나 의미가 되어

혹은 그보다 사소하고 그보다 촘촘한 결이 되어

나의 모든 시간으로 비집고 들어오는구나

 

그러고 보니 그대는 어디에나 있었구나

불 꺼진 영화관 홀로 떠오르는 눈부신 영상 속에

깊은 밤 뒤적이는 책의 모든 갈피에

골목길을 돌 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낮은 피아노 소리 속에

지나가던 아이의 작은 손 안에

하루 종일 나뭇가지를 옮겨 다니며 부지런히 씨앗을 찾아내는

새의 날개 위에

 

손바닥만 한 화분 안에

화분 안에서 고른 숨을 내쉬고 있는 식물의 엽록체 안에

엽록체를 둘러싼 이중막의 스트로마와 라멜라 안에서도

살아 펄떡펄떡 뛰어오르는 그대는

나를 붙들고 있는 끈을 놓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구나

 

그리하여 그대는 나의 온 세상이 되었구나

수없는 이별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수없는 눈물로 하늘 같은 성을 지었구나

 

어쩌나, 나의 목숨이 그대의 삶 한 자락에 매달려 있으니

밝아지거나 어두워지는 일들이 다 한 줄기에 얽혀 있으니

나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그대의 간섭으로 끝없이 꽃을 피워 올려야 하는구나

 

그대의 이름은 내게

황홀하고 찬란한 빛이었으니

 

 

 

still, 황경신

 

너를 생각하면,

흘러가던 것이 멈춰 선다,

문득 바람이 멎고,

문득 시간이 정지한다,

마음속에 단단히 고정된,

너의 노래들은 하나의 음표 안에,

고스란히 발이 묶인다,

 

함께 있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던 사람들끼리,

만나버렸으므로,

나는 네게로 너는 내게로,

가고 와야 했던 날들이,

있었다, 언젠가 내가 있었던,

그러나 지금은 없는,

그 카페에서 아직도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편지를 받고 나는,

울기도 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멈춰 섰던 것들은 흘러간다,

 

가슴에 튼튼한 풍경 하나 걸어두고,

나는 여기서 너는 거기서,

함께 있지 못해도 헤어질 수는 없는 사람들끼리,

이리저리 흔들리고 휩쓸리며,

 

낮은 라 플랫을 닮은 너의 목소리가,

흐르다 멎을 때마다,

멎다가 흐를 때마다,

 

문득 걸음을 멈추고,

아직도

 

 

 

상처 입은 혀, 나희덕

 

혀와 입술 대신

눈이 젖은 말을 흘려 보내는 밤

손이 마른 말을 만지며 부스럭거리는 밤

 

너에게 할 말이 있어

아니, 더 이상 할 수 있는 말이 없어

이생에서 우리가 주고받을 말은 이미 끝났으니까

 

그러니 네 혀가 돌아오더라도

끝내 그 아픈 말은 들려주지 말기를

 

그래도 슬퍼하지 말기를,

끝내 하지 못한 말은 별처럼 박혀 있을 테니까

 

 

마치 꿈꾸는 것처럼, 허수경

 

너의 마음 곁에 나의 마음이 눕는다

만일 병가를 낼 수 있다면

인생이 아무려나 병가를 낼 수 있으려고……,

 

그러나 바퀴마저 그러나 너에게 나를

그러나 어리숙함이여

 

햇살은 술이었는가

대마잎을 말아 피던 기억이 왠지 봄햇살 속엔 있어

 

내 마음 곁에 누운 너의 마음도 내게 묻는다

무엇 때문에 넌 내 곁에 누웠지? 네가 좋으니까, 믿겠니?

 

내 마음아 이제 갈 때가 되었다네

마음끼리 살 섞는 방법은 없을까

 

조사는 쌀 구하러 저자로 내려오고 루핑집 낮잠자는 여자여 마침 봄이라서 화월지풍에 여자는 아픈데

조사야 쌀 한줌 줄테니 내게 그 몸을 내줄라우

 

네 마음은 이미 떠났니?

내 마음아, 너도 진정 가는 거니?

 

돌아가 밥을 한솥 해놓고 솥을 허벅지에 끼고 먹고 싶다 마치 꿈처럼

잠드는 것처럼

죽는다는 것처럼

 

 

깊은 슬픔, 신경숙

 

바보가 되어간다는 얘기지. 너에게 가까이 가고 싶은 마음 그 외에는 모두 공허하니까, 네가 전화를 걸어주거나 네가 나에게 와주거나 그것밖에는 중요한 일이 없으니까.

...

 

전화를 하겠다고 하고선 전화를 못 받고 몇 시간이 지나면 나는 그대로 죽는 거 같아. 알어? 수화기가 잘못 놓였나, 들었다 놔보고 혹시 벨소리를 듣지 못하게 될까봐 소리나는 일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한 번은 어쨌는 줄 알어? 전화를 기다리는데 오로지 전화벨 소리를 기다리는데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거야. 그래서 냉장고 플러그를 빼놓았지. 너를 기다리는 동안은 다른 일은 조금도 할 수가 없어. 벨이 울렸는데 네가 아니면 너무나 낙담을 해서 전화를 한 다른 사람을 경멸하고 싶은 심정이야.

 

난 그래. 그렇게 되어버렸어.

난 그렇게 되어버렸지. 너에 의해 죽고 싶고 너에 의해 살고 싶게 되어버렸지.

 

 

 

당신은 가끔 여기에 있다, 김혜진

 

다음 생엔 너로 태어나 나를 사랑해야지.

 

어디선가 누군가로부터 들었던 문구다. 나는 이 문장대로 다음 생에는 너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푸른 하늘에 녹색 빛이 돈다든가, 초록 불이 아닌 빨간 불에 횡단보도를 건넌다든가, 하늘의 별이 서로의 눈에 있다든가. 말도 안 되는 얘기에도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줄 수 있게 나는 네가 되어서 나를 사랑하고 말 거다. 이번 생, 우리의 사랑은 잘못됐으니 다음 생이 있다면 꼭 너로 태어나 나를 사무치도록 사랑할 것이다.

 

 

작은 엽서 8 기다림, 김선태

 

어떤 날은 네가 무섭도록 보고팠다

그러나 가장 절실할 때 널 찾지 않기로 했다

그 숱한 그리움으로 여러 날을 앓고

물빛 투명한 심상으로 너를 떠올릴 때도

못내 널 찾지 않기로 했다

어느 외진 바다 기슭에서

수없이 파도에 씻겨 닳아진 차돌처럼

견고하게 다져진 외로움 그대로

끊어질 듯한 기다림의 목울대 그대로

혼자서 살아가는 날의 그 공허한 행복감

쨍쨍 맑은 어느 날 높고 외딴 봉우리에

흰 한숨처럼 감기는 구름인 듯

사랑이여, 그때 홀연 내게 오려나

 

 

우리의 생애가 발각되지 않기를, 허연

 

사랑이 끓어넘치던 어느 시절을 이제는 복원하지 못하지. 그 어떤 불편과 불안도 견디게 하던 육체의 날들을 되살리지 못하지. 적도 잊어버리게 하고, 보물도 버리게 하고, 행운도 걷어차던 나날을 복원하지 못하지.

 

그래도 약속한 일은 해야 해서

재회라는 게 어색하기는 했지만.

 

때맞춰 들어온 햇살에 절반쯤 어두워진 너. 수다스러워진 너. 여전히 내 마음에 포개지던 너.

 

누가 더 많이 그리워했었지.

오늘의 경건함도 지하철 끊어질 무렵이면 다 수포로 돌아가겠지만

서로 들고 왔던 기억. 그것들이 하나도 사라지지 않았음을. 그것이 저주였음을.

 

재회는 슬플 일도 기쁠 일도 아니었음을.

오래전 노래가 여전히 반복되고 있음을.

 

그리움 같은 건 들키지 않기를. 처음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기를.

지금 이 진공관 안에서 끝끝내 중심 잡기를.

 

당신. 가지도 말고 오지도 말 것이며

어디에도 속하지 말기를.

 

그래서 우리의 생애가 발각되지 않기를.

 

 

반성, 김상미

 

깊이깊이 후회해 너를 사랑했던 것 너를 친구라고 생각했던 것 너에게 내 시를 보여주었던 것 너랑 영화관에 갔던 것 너에게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사주었던 것 네 앞에서 알몸이 되었던 것 아무렇게나 던져진 텅 빈 우주에 너를 초대했던 것 너와 함께 장미를 사러 꽃집에 들어갔던 것

 

너와 함께 비엔나의 숲속에서 치즈버거를 먹었던 것 너에게 가장 친한 내 친구를 소개했던 것 너 때문에 비 내리는 센 강에서 울었던 것 너 때문에 불같이 타오르는 꽃잎 하나가 내게로 떨어졌던 것 너의 모든 말이 거짓인 줄 알면서도 환하게 웃었던 것 네가 한 모든 약속을 모래로 가득 채워 흘려버렸던 것 너를 떠나보내기 위해 나보코프를 읽으며 모나크 나비를 찾아 헤맸던 것 그러고도 네가 사주는 커피 한 잔에 온몸이 따뜻했던 것 그러고도 네 꿈을 자주 꾸는 것 그러고도 너와 함께 잘 먹던 꼬투리 완두콩을 아직도 좋아하는 것

 

그러고도 이런 시를 쓰고 있는 나

그 모든 것을 후회해 깊이깊이 후회해

 

 

커다란 창, 이규리

 

그리운 것들은 다 죽었는데

누가 이렇게 커다란 창을 냈을까

 

해피투게더, 안현미

 

그녀와 그는 잠깐 행복하고 오래도록 함께 불행했다.

그래도 그들은 그게 사랑이라고 믿는 눈치였다.

 

 

서시, 한강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

라고 말하게 될까.

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

라고.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

 

 

이별 이후, 문정희

 

너 떠나간 지

세상의 달력으론 열흘 되었고

내 피의 달력으론 십 년 되었다

 

나 슬픈 것은

네가 없는데도

밤 오면 잠들어야 하고

끼니 오면

입 안 가득 밥을 떠 넣는 일이다

 

옛날 옛날적

그 사람 되어가며

그냥 그렇게 너를 잊는 일이다

 

이 아픔 그대로 있으면

그래서 숨 막혀 나 죽으면

원도 없으리라

 

그러나

나 진실로 슬픈 것은

언젠가 너와 내가

이 뜨거움 까맣게

잊는다는 일이다

 

 

백야, 김창균

 

가장 뜨거웠던 한 시절이 지나가고

내 생의 한 때였던 당신이 지나가고

막막했던 순간들 지나간 뒤

화산재들은 먼먼 과거를 빙하에 퇴적한다.

 

꼬박 이틀을 내리고도 아직 내릴 눈이 있고

꼬박 이틀을 침묵하고도 더 침묵할 날들이 있었으나

내 눈물은 유목민의 음식처럼

짜고 낯설고 딱딱했다.

 

어둠이 긴 계절에 너를 만났으나

백야의 환한 고독도 알듯해

오래 견디기 위해 온몸을 염장하는 소금 창고 곁에서

녹지 않는 슬픔을 알아버린 후 가진 절망과

극지의 눈물 또한 다르지 않으니

오래 아주 오래

말 대신 하얀 입김을 뱉어내는 북극의 말()들 곁에서

영하를 잠입하는 기막힌 날들.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않는다, 조진국

 

나는 겨울에 서 있는 편이 더 익숙하다. 네가 봄의 편에 서 있는 것이 더 어울리듯이. 아무리 다정하게 손을 잡고 걸어가는 두 사람이 있다고 해도, 들여다보면 봄과 겨울이라는 사랑의 계절로 나뉜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온기를 주는 쪽과 온기를 받는 쪽의 구별을 말하는 것이다. 겨울 속에 사는 사람은 늘 상대의 차가운 손에 익숙해 있다.

 

타인을 대하는 듯 무심한 말투, 상대에게 집중하지 않고 잡지를 뒤적이는 산만함, 한발 늦게 보내는 문자 메시지의 답, 일방적으로 잡는 다음 약속. 그렇게 한없이 섭섭해 하다가도, 상대 쪽에서 한 번씩 견딜 수 없다는 듯 도톰하게 열정이 오른 입술로 키스를 걸어오거나, 자상한 눈길로 만져주면 바로 감격한다.

반대로 봄에 사는 사람은 온기로 가득한 상대의 따뜻한 손에 익숙해져 있다. 기념을 챙기는 쪽도, 눈길을 먼저 맞추는 쪽도 상대이기 때문이다. 시계를 보는 쪽도, 전화하는 쪽도 물론 상대다. 봄에 사는 사람이 시계를 볼 때도 있지만, 이유는 다르다. 겨울에 사는 사람은 상대가 몇 분이나 늦게 오나 보는 것이지만, 봄에 사는 사람은 다음 약속까지 상대에게 할애된 시간이 몇 분이나 남았나 재는 식이다. 그러다 어느 날 그 역할이 한 번이라도 역전되면 섭섭함을 견디지 못하고 사랑이 식었다고 재단한다. 싹둑. 사랑하는 마음이 자투리로 잘려나간다.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겨울에 사는 사람은 가슴에 굵은 글씨로 상처를 쓴다. 기다리지 않겠다. 원하지 않겠다. 그리워하지 않겠다. 마음을 꾹꾹 눌러 밟으며, 겨울의 한기에서 벗어나려고 뒷걸음친다. 하지만 쾅, 아무리 세게 마음을 닫아도 봄이 온다는 소식이 들리면 스르르 문이 열리고, 제아무리 차갑게 얼었던 마음도 결국 봄에게로 흐르게 된다는 것을 안다.

겨울 끝에는 항상 봄이 오듯이.

내 끝에는 항상 네가 있다는 걸 부인할 수 없다.

 

 

우리는 사랑을 사랑해, 김종완

 

말없이 울기만 해서

말없이 안아주기만 했지.

 

그림 같은 달

밤이었어.

 

 

 

해괴한 달밤, 김선우

 

왜 네 빛은 나만 비추지 않는 거야

왜 나만 사랑하지 않는 거야

왜 외간 것들에게도 웃어주는 거야

왜 따뜻한 거야, 왜 모두에게 다정한 거야

 

 

봄날은 간다, 구양숙

 

이렇듯 흐린 날에 누가

문 앞에 와서

내 이름을 불러줬으면 좋겠다

 

보고 싶다고 꽃나무 아래라고

술 마시다가

목소리 보내오면 좋겠다

 

난리 난 듯 온 천지가 꽃이라도

아직은 니가 더 이쁘다고

거짓말도 해주면 좋겠다

 

 

나를 잡아, 나를 놔, 신현림

 

사는 게 별거겠니

추억하며 잊어 가는 일

죽고 싶다가 살고 싶은 일

감정의 시소 타며 하늘 보는 일

사는 데 가장 큰 고통은 욕망이야

 

나를 안아 줘

안전벨트처럼 안아 줘

불안한 술잔처럼 기울지 않게

돈 걱정과 죽음에 짓눌리지 않게

나를 잡아, 나를 놔

, 우린 일하고 깨치며 가야지

네 입과 내 입에 사랑의 떡을 처넣고

입 깊숙이 슬픔 들끓게 내버려 두고

쌀과 물을 사람들과 나누고

오늘은 다르게 살기 위한 시도잖니

 

이 도시만큼 괜찮은 무덤도 없을 거야

너만큼 편안한 수갑도 없을 거야

네 안에 있으니 따뜻해졌어

날 조이지 마 나한테 매달리지 마

그렇다고 날 떠나면 되겠니

나를 잡아, 나를 놔

나를 잡아

 

 

반음계, 고영민

 

당신이 그리운 오후,

꾸다만 꿈처럼 홀로 남겨진 오후가 아득하다

잊는 것도 사랑일까

 

수몰지구, 전윤호

자꾸 네게 흐르는 마음을 깨닫고

 

서둘러 댐을 쌓았다

툭하면 담을 넘는 만용으로

피해주기 싫었다

 

막힌 난 수몰지구다

불기 없는 아궁이엔 물고기가 드나들고

젖은 책들은 수초가 된다

 

나는 그냥 오석처럼 가라앉아

네 생각에 잠기고 싶었다

 

하지만 예고 없이 태풍은 오고 소나기 내리고

흘러 넘치는 미련을 이기지 못 해

수문을 연다

 

콸콸 쏟아지는 물살에 수차가 돌고

나는 충전된다

 

인내심에 과부하가 걸리지 않기를

꽃 피는 너의 마당이

잠기지 않기를

 

전화기를 끄고 숨을 참는다

때를 놓친 사랑은 재난일 뿐이다

 

 

어느 날, 원태연

 

정말 보고 싶었어 그래서 다

너로 보였어 커피잔도

가로수도 하늘도 바람도

횡단보도를 건너가고 있는 사람들도

다 너처럼 보였어

그래서 순간 순간 마음이 뛰고

가슴이 울리고 그랬어

가슴이 울릴 때마다

너를 진짜 만나서 보고 싶었어

라고 얘기하고 싶었어

 

 

국경의 도서관, 황경신

 

우리는 어쩌자고 그렇게 많은 것들을 함께 나누었을까

그 순간은 행복했고 모든 추억은 지나고 나면

아름다워지는 거라고는 제발 말하지 마

 

나 없이 잘 살지 마, 내가 말했고

그럼 너도 나 없이 행복해지지 마, 네가 말했다

사랑이 다시 내게 말을 거네, 류근

어쩌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

이 삶 이토록 아무것도 아닌 건가

 

어쩌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

어디로든 아낌없이 소멸해 버리고 싶은 건가

 

 

사랑, 이정하

 

마음과 마음 사이에

무지개가 하나 놓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내 사라지고 만다는 것은

미처 몰랐다

아직도 너를 사랑해서 슬프다

 

 

밤 속에 누운 너에게, 허수경

 

가끔 너를 찾아 땅속으로 내려가기도 했단다

저 침침하고도 축축한 땅속에서 시간의 가장자리에만 머물러 있던

너를 찾으려 했지

 

땅속으로 내려갈수록

저 뿌리들 좀 봐, 땅에는 어쩌면 저렇게도 식물의 어머니들이

작은 신경줄처럼 설켜서 아리따운 보석들을 빨랫줄에 걸어두는데

저 얇은 시간의 막을 통과한 루비나 사파이어 같은 것들이

땅이 흘린 눈물을 받은 양 저렇게 빛나잖아

 

가끔 너를 찾아 땅속으로 내려가기도 했단다

사랑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세월 속으로 가고 싶어서

머리를 지하수에 집어넣고

유리처럼 선명한 두통을 다스리고 싶었지

 

네 눈에 눈물이 가득할 때

땅은 속으로 그 많은 지하수를 머금고 얼마나 울고 싶어 하나

대양에는 저렇게 많은 물들이 지구의 허리를 보듬고 안고 있나

 

어쩌면 네가 밤 속에 누워 녹아갈 때

물 없는 사막은 너를 향해 서서히 걸어올지도 모르겠어

사막이 어쩌면 너에게 말할지도 몰라

사랑해, 네 눈물이 지하수를 타고 올 만큼 사랑해줘

 

불필요한 기도, 박진홍

당신이 나보다 못한 사람을 만나

 

그 사람과 사랑하는 동안에도

종종 내 생각에 빠져 죽길 빈다

 

나는 다 잊었다 말하는 지금도

이따끔씩

당신의 아류에 목을 메고는 하니까

 

 

 

마지막은 왼손으로, 이제니

 

우리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사랑할수록 죄가 되는 날들. 시들 시간도 없이 재가 되는 꽃들. 말하지 않는 말 속에만 꽃이 피어 있었다. 천천히 죽어갈 시간이 필요하다. 천천히 울 수 있는 사각이 필요하다. 품이 큰 옷 속에 잠겨 숨이 막힐 때까지. 무한한 백지 위에서 말을 잃을 때까지. 한 줄 쓰면 한 줄 지워지는 날들. 지우고 오려내는 것에 익숙해졌다. 마지막은 왼손으로 쓴다. 왼손의 반대를 무릅쓰고 쓴다. 되풀이되는 날들이라 오해할 만한 날들 속에서. 너는 기억을 멈추기로 하였다. 우리의 입말은 모래 폭풍으로 사라져버린 작은 집 속에 있다. 갇혀 있는 것. 이를테면 숨겨온 마음 같은 것. 내가 나로 살기 원한다는 것. 너를 너로 바라보겠다는 것. 마지막은 왼손으로 쓴다. 왼손의 반대를 바라며 쓴다. 심장이 뛴다. 꽃잎이 흩어진다. 언젠가 타오르던 밤하늘의 불꽃. 터져 오르는 빛에 탄성을 내지르며. 나란히 함께 서서 각자의 생각에 골몰할 때. 아름다운 것은 슬픈 것. 슬픈 것은 아름다운 것. 내 속의 아름다움을 따라갔을 뿐인데. 나는 피를 흘리고 있구나. 어느새 나는 혼자가 되었구나. 되돌아보아도 되돌릴 수 없는 날들 속에서. 쉽게 찢어지고 짓무르는 피부. 멍든 뒤에야 아픔을 아픔이라 발음하는 입술. 모래 폭풍은 언젠가는 잠들게 되어 있다. 다시 거대한 모래 폭풍이 밀려오기 전까지. 너와 나라는 구분 없이 빛을 꽃이라고 썼다. 지천에 피어나는 꽃. 피어나면서 사라지는 꽃. 하나 둘. 하나 둘. 여기저기 꽃송이가 번질 때마다. 물든다는 말. 잠든다는 말. 나는 나로 살기 위해 이제 그만 죽기로 하였다.

 

 

붙박이창, 이현호

 

그것은

투명한 눈꺼풀

 

안과 밖의 온도 차로 흐려진 창가에서 "무심은 마음을 잊었다는 뜻일까 외면한다는 걸까" 낙서를 하며 처음으로 마음의 생업을 관둘 때를 생각할 무렵 젖는다는 건 물든다는 뜻이고 물든다는 건 하나로 섞인다는 말이었다 서리꽃처럼 녹아떨어질 그 말은, 널 종교로 삼고 싶어. 네 눈빛이 교리가 되고 입맞춤이 세례가 될 순 없을까 차라리 나는 애인이 나의 유일한 맹신이기를 바랐다

 

잠든 애인을 바라보는 묵도 속에는 가져본 적 없는 당신이란 말과 곰팡이 핀 천장의 야광별에 대한 미안함이 다 들어 있었다 그럴 때 운명이란 점심에 애인이 끓인 콩나물국을 같이 먹고, 남은 한 국자에 밥을 말아 한밤에 홀로 먹는일이었다 거인의 눈동자가 이쪽을 들여다보는 듯 창밖은 깜깜 보풀인 옷깃 여미며 서둘러 떠나갔을 애인의 거리는 막막하고 사물은 저마다의 품속으로 어둠에 잠기는데

 

어디서 온 것일까

환기한 적 없는 집안의 먼지들은

어떤 경우, 이문재

어떤 경우에는

내가 이 세상 앞에서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내가 어느 한 사람에게

세상 전부가 될 때가 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다.

 

 

얼룩, 이준규

 

당신은 갑자기 얼룩의 소용돌이고 지문이고 옛날의 유리창이다. 당신은 유리창이라는 단어보다 어떤 책의 제목인 유리문이라는 단어를 더 좋아했다

 

지금 창밖엔 귀뚜라미 울고 아직 여름의 얼룩은 남아 당신의 여름을 떠올리게 하는 순간이다. 당신은 모든 계절이었다. 당신은 그러나 점점 깊어지며 커지고 번지는 소용돌이로 다시 텅 비었다. 내가 당신을 너라 부르거나 당신이라고 부르거나 여보라고 부르거나 어떤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당신의 부재는 더욱 깊어져 이미 볼 수 없고 볼 수 없음으로 나와 함께 있다. 당신은 끈적거리고 더럽고 감미롭고 깨끗하고 부드럽고 질퍽거리며 떼어낼 수 없고 늪이고 죽음이고 또 사랑이고 그리움이다. 그리하여 당신은 끝내 여기에 없다. 당신의 웃음이 가라앉고 있다. 웃음의 반점을 남기며.

 

문득 드러나는 상처. 하얀, 드리워지는 것.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 당신의 부사를 싫어했고 나는 비유를 싫어했다. 당신은 관사를 싫어했고 나는 모국어가 미웠다. 우리 저 더러운 늪으로 들어가자, 병든 물고기가, 처음 본 괴물이 되어 다시 만나자, 했던가. 나는 지금 당신이 마시던 차를 마시고, 당신이 듣던 음악을 듣는다. 당신의 책에선 당신 방의 냄새가 아직도 나고, 나는 당신의 책을 펼칠 때마다 울음을 참는다. 당신은 저 아래 있고 나는 이 위에 있다. 당신의 번지는 얼룩, 나는 그것을 잊지 않는다. 당신의 부재가 나의 부재가 될 때까지.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지극히 단순한 그 과정이 지난 이십일 년 동안 나를 괴롭혔던 고통과 고독과 절망과 분노를 말끔히 치유했다. 넌 대단해. 넌 멋져. 넌 아름다워. 넌 소중해. 난 네가 너무나 좋아.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 세상 전부와도 바꿀 수 없어. 평생 너만을 사랑할 거야. 난 너의 모든 걸 다 가지고 싶어. 말들이 그렇게 달콤할 수가 있을 줄이야. 그 달콤함 때문에 내 몸이 촛농처럼 완전히 녹아버릴 줄이야. 나란 존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마치 죽음처럼. 그런데 그 일이 나를 살렸다.

 

네 눈을 빤히 쳐다보고 싶지만, 너를 바라볼 눈동자가 내게는 없네. 너를 안고 싶으나, 두 팔이 없네. 두 팔이 없으니 포옹도 없고, 입술이 없으니 키스도 없고, 눈동자가 없으니 빛도 없네. 포옹도, 키스도, 빛도 없으니, 슬퍼라, 여긴 사랑이 없는 곳이네.

 

 

 

상처받는 것을 허락하는 사랑, 공지영

 

J, 저는 사랑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사랑했다고 믿었던 사람들은 나에게 아픔만 주고 떠났다고 생각했지요. 남는 것은 허망함과 자신에 대한 씁쓸한 기억들뿐. 저는 사랑이 두려웠고, 저 자신에게 남겨진 사랑의 몫은 이 세상에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마음을 굳게 닫기도 했지요. 일부러 쌀쌀하게 대했고,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고, 일부러 그를 스쳐 지나가기도 했습니다. 혼자 있을 때,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시간 틈틈이, 옷깃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처럼 마음이 추워질 때, 나 스스로에게 사랑할 수 있을까? 하고 묻고는 얼른 아니, 라고 대답했습니다. 내가 나를 믿을 수 있을까, 내가 과연 한 인간을 있는 그대로 존경하고 사랑할 수 있을까? 멀리서라면 혹시, 짧은 기간이라면 혹시, 그러나 가깝고 길게······. 나는 자신이 없었던 겁니다. 내가 사랑할 수 없었음이 절망적이었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착각을 사랑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받아들여서 사랑해보려고 노력은 했지만, 많이 했다고 나는 생각하지만, 결국 저는 할 수가 없었던 거였습니다. 너무도 가까운 그 거리들이 제게는 숨이 막혔습니다. 나를 가두고 새장 속에 구겨진 채로 집어넣으려고 했던 그들을 나는 결국 용서하는 데 실패했던 것입니다. 용서할 필요도 없지만, 아니 그것은 용서의 문제는 아니었던가요?

 

J, 어제는 몹시 술이 마시고 싶었습니다. 제 마음속에서 무슨 싹인가가 돋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설레는 싹 같은 것을 느껴버린 것입니다. 빠진 이가 돋는 것처럼 나는 고통스러웠습니다. 거부하고 싶었지요. 세상 모든 사람에게는 아니라고 해도 내게 사랑은 무모하지 않았다면 순진했었고, 빠져들어가지 말아야 할 늪처럼 생각되어졌음을 고백합니다.

 

그래도 당신은 내게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군요. 그것은 두려운 일이 아니라고, 상처받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키스도 침대도 빵을 나누는 것도, 보내주는 것도 사랑이라고. 다만 그 존재를 있는 그대로 놔두는 것이 사랑이라고. 제게는 어려운 그 말들을 하시고야 마는군요. 그래요, 그러겠습니다. 그렇게 해보겠습니다. 상처받는 것을 허락하는 사랑을 말입니다.

 

 

바람처럼 떠나고 있는 생애, 손종일

 

오늘은 너를 만나 실컷 울고 싶다.

내가 이렇게 미치도록 보고플 때는

정말이지 아무라도 잡고 엉엉 울고 싶다.

하지만, 그 아무에게도 털어 놓지 못하는

절박한 가슴에의 사랑이라

타는 설움만 고난으로 타오르고

오늘도 역시 네가 보고 싶다.

다시 만날 예고 없이

무작정 기다림의 세월을 살다 보니

가슴만 울컥 저려오고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같은 속만 허우적댔다.

친한 친구에게로 보냈던 편지가

'반송'이라는 붉은 딱지와 함께

힘없이 돌아왔을 때의 기분처럼

가졌어도 가진 것 없는 슬픔이 하도 커서

낯선 이의 등에서

너를 닮은 모습을 보거나

너를 닮은 하이얀 손을 보아도

슬픔은 봇물처럼 터져 버린다.

 

 

run & run, 황경신

 

너를 만난 이후로

나의 인생은 세 가지로 축약되었다

너를 향해 달려가거나

너를 스쳐 지나가기 위해 달려가거나

너로부터 도망가기 위해 달려간다

 

무엇이 행복이고 무엇이 불행인지 알 수 없다

풍경은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갈기갈기 찢어지는 그리움의 색채를 보니

지금은 아마 이별의 초입이겠구나

 

너와 헤어진 이후로

나의 인생은 두 가지로 요약되리라

멈추거나 혹은

사라지거나

 

 

그곳에서 그곳으로, 이제니

후회하지 않기로 하면서 후회한다. 눈 어두워 보지 못했던 것을 보면서. 다시 보면서. 나무가 있고. 거리가 있고. 벤치가 있고. 공허가 있고. 어둠이 있고. 고요가 있고. 바람이 있고. 구름이 있고. 들판이 있고. 묘비가 있고. 꽃이 있고. 시가 있고. 눈물이 있고. 네가 있고.

 

너의 얼굴은 지워져간다

어둠의 어둠 속의 희미한 빛처럼

그믐의 달처럼

 

있었던 없었던 것

없었던 있었던 것

 

목마름이 있고. 달무리가 있고. 거울이 있고. 겨울이 있고. 이해하지 못하는 말이 있고. 저주처럼 되돌아오는 말이 있고.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 위에서 듣는 너의 목소리가 있고. 너는 그곳에서 그곳으로 가고. 깃발이라도 있다면. 깃발이라도 흔들면서. 깃발이라도 흔들 텐데.

 

떠다니면서 흩어지는 것

흩어지면서 내려앉는 것

 

이것은 누구의 목소리입니까. 사라진 줄 알았던 목소리가. 녹색을 띤 그늘 속 이끼처럼. 둘로 나뉜 하나의 물방울처럼. 밤과 낮의 경계 너머로 되살아나. 낱말을 발명하는 사람의 입술 주름 위로. 천천히. 손가락 하나를 가져가듯이. 어떤 간격. 어떤 틈. 접힌. 닫힌. 시간 혹은 장소의. 영원과도 같은 한순간을. 펼쳐보려는. 열어보려는.

 

숨기는 동시에 드러내는 것

드러내는 동시에 숨기는 것

 

너의 얼굴은 다시 떠오른다

그림자에 그림자를 더한 검은 윤곽처럼

그늘의 입처럼

 

이해하지 않기로 하면서 이해한다. 가지 못한 그곳으로 가면서. 그곳으로 다시 가면서. 계단이 있고. 창문이 있고. 강물이 있고. 잿빛이 있고. 희망이 있고. 한낮이 있고. 침묵이 있고. 춤이 있고. 노래가 있고. 하늘이 있고. 숲이 있고. 새가 있고. 내가 있고. 다시 네가 있고.

 

 

 

[]의 말, 이현호

 

밤이 오는 길목에 목련꽃 간판으로 내어 결코 침묵의 난전(亂廛)을 열면 좋겠네

이곳을 모든 기대로부터 떠나온 발길들 알고 찾아

서로의 눈동자 가만가만 들여다보며 거기 쓰인 비밀한 밤의 문장들 물물교환 한다면

말 못할 것들 겹겹 쌓여 빚어진 눈빛, 그 눈의 말 눈으로 들으며

고개 끄덕거릴 일도 없이

눈 깜박이는 몸짓말로 알아들었다는 말 이해한다는 말 용서하라는 말 다 할 수 있으면

 

미래 없는 연애를 하는 두 사람이 포옹할 때 연인의 어깨 너머로 펼쳐진 허공을 발견하듯이

이미 우리들은 이 밤의 문법을 문득 알고 있어

스륵 닫혔다 열리는 눈꺼풀은 어깨를 토닥이는 손보다 그윽하고

싸리비 같은 속눈썹은 눈동자에 덮인 물기를 쓱 쓸어낼 수 있다면

좋겠네 이 극진한 침묵이 북적거리는 가게로

어둑발 내리는 길가에 달빛 네온사인 매어놓은 우리들의 난전으로 오늘밤은

 

침묵의 거부(巨富)인 귀신들과 울음 울 곳 찾는 당신도 온다면 좋겠네

나와 너의 침묵 주고받으며 더불어 서로의 침묵 안으로 침몰하여

그 너른 침묵의 해저에서는 깊어가는 숨소리만 들리고

인젠 가고 없는 수많은 당신들의 발걸음이 들숨 타고 왔다가

발자국만이 날숨에 쓸려가고

남은 발소리들 차곡차곡 눈동자에 모여 살며 퇴고할 것 없는 눈빛 이룬다면

 

우리가 사랑하지 않아도 늘 우리를 애틋하게 껴안고 있는 침묵이라는 비문(非文)과 침묵이라는 귀신들의 회화(會話)를 배운다면

새의 죽지가 가장 높이 올라갔다가 가장 낮게 내려가는 그 찰나의 퍼덕임이 어떻게 허공을 업고 가는지

죽은 사람의 눈을 손바닥으로 빗어 감기는 건 다 읽은 책을 침묵의 도서관에 돌려주는 것뿐임을 알게 되겠지

침묵은 모두의 비문(碑文)이라는 것을 기억하겠지

 

목련 지고 달빛 시들어 침묵도 폐한 백주대낮에는

떠나간 사람도 떠나온 사람도 반도네온같이 첩첩한 눈빛도 귀신처럼 투명한 눈빛도

침묵의 난전이 입소문 덕에 성황이라는 실없는 농담이나 던지며

모이는 곳마다 돗자리 깔고 평상 펴고 긴 발이라도 내걸면 좋겠네

홀로 있을 때도 침묵을 데리고 왁자지껄하면 좋겠네

우리 죄 사라진 뒤에도 침묵은 남아서

 

 

아무도 아무도를 부르지 않았다, 이현호

 

세상에는 사람 수만큼의 지옥이 있어."

귀밑머리를 쓸어올리듯이 네가 말했을 때

아름다운 네 앞에 서면 늘 지옥을 걷는 기분이니까

그 어둠 속에서 백기같이 흔들리며 나는 이미

어디론가 투항하고 있었다

 

네 손금 위에 아무것도 놓아줄 게 없어서

손을 꼭 쥐는 법밖에는 몰랐지만

신이 갖고 놀다 버린 고장난 장난감 같은 세상에서

퍼즐처럼 우리는 몸이 맞는다고 믿었었고

언제까지나

 

우리는 서로에게 불시착하기로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우리가 비는 것은 우리에게 비어 있는 것뿐이었다

삶은 무엇으로 만들어지나? 습관

우리는 살아 있다는 습관

살아 있어서 계속 덧나는 것들 앞에서

삶은 무엇으로 만들어지나? 불행

그것마저 행복에 대한 가난이었다

 

통곡하던 사람이 잠시 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를 때

그는 우는 것일까 살려는 것일까

 

울음은 울음답고 사랑은 사랑답고 싶었는데

삶은 어느 날에도 삶적이었을 뿐

 

너무 미안해서 아무 말 않고 떠났으면서

너무 미안하다 말하려 너를 서성이는 오늘 같은 지난날

아름다운 너를 돌아서면 언제까지나 지옥을 걷는 기분이니까

조난자가 옷가지를 찢어 만든 깃발처럼 그 어두움 속에서 펄럭거리며 나는 벌써

무조건항복 하고 있다, 추억을 멈추고 잠시 삶을 고른다

 

아무도 아무도를 부르지 않아서

아무 일도 없었다, 지옥과 지옥은

 

 

달로와요, 이은규

모퉁이를 돌아 달로와요 제과점을 지날 때 오늘의 달은 몇 시에 뜹니까, 달빵은 언제 나올지 모릅니다 보이지 않아도 어딘가 떠 있을 달로와요

 

달에 구름이 머물면 달빵의 부스러기, 달빵을 나눠 먹다 올려다본 어둠에 눈이 멀어도 좋았을 우리 달빛의 촉수만으로도 알맞던 그 밤

 

어느 천문학자가 아픈 연인을 위해 달의 부스러기를 훔쳤다, 깊은 무모함은 미신, 오래된 기침은 흰 봉투에 든 달을 한입에 털어넣었을 것 창백한 새벽의 가루약처럼

 

달은 어둠의 부분입니까, 전체입니까 부분과 전체를 넘어 배후가 있을 뿐입니다 달의 뒤편으로 사라진 사람을 위로하지 말 것

 

달 표면이 뼈처럼 말라 있다는 기록을 읽다 뼈의 실루엣, 한 줌 재가 된 세계를 추억하지 말 것 달은 잿빛 얼굴입니까, 재입니까 사라진 연인의 안부가 차오르다 기울다

 

달로와요 달의 뒤편으로 와요 연인은 일종의 배후이니까 날마다 달빵의 부스러기를 서로의 입술에 묻힐 수 있는 그곳으로, 어느 날 제과점 모퉁이를 돌다 밤의 눈을 찌르고 싶을 때 달빛의 촉수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다시 봄비는 내리고, 이승희

 

봄비라는 말 속에서 너를 만났다. 지친 뒤척임만 가득한 눈을 보며 그 속으로 살러 가고 싶었다. 낭떠러지 같은 말 봄비 속에서 너와 사랑을 했다. 비명도 없이 절벽을 뛰어내리던 꿈. 너와 살고 싶은 저녁이 봄비라는 말 속에 있다. 천국이 있다면 봄비라는 말 속에서부터 시작될 거라고 나무들이 키를 키우며 책처럼 펼쳐지던 날 있었다. 아주 오래전 거짓말처럼 또다른 생이 시작되었고, 단절은 나를 멈추게 하지만 절벽은 나를 뛰어내리게 하였다고 나는 기록한다. 나의 절망은 비루하였고, 꽃이 피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날들이 네가 떠나간 흔적처럼 남았다.

 

봄비를 맞으며 골목을 지나가는 연인들. 저들은 서로를 버티느라 또 얼마나 힘겨울 것인가. 내가 없이 봄비가 내리는 저녁.

 

 

아무도 살지 않아서 좋았다, 김선우

 

번개 친다, 끊어진 길 보인다

 

당신에게 곧장 이어진 길은 없다

그것이 하늘의 입장이라는 듯

 

번개 친다, 길들이 쏟아내는 눈물 보인다

 

나의 각도와 팔꿈치

당신의 기울기와 무릎

당신과 나의 장례를 생각하는 밤

 

번개 친다, 나는 여전히 내가 아프다

천둥 친다, 나는 여전히 당신이 아프다

 

번개 친 후 천둥소리엔

 

사람이 살지 않아서 좋았다

 

 

사랑에 빠진 자전거 타고 너에게 가기

 

자전거 바퀴 돈다 바퀴 돌고 돌며

 

숨결 되고 있다 풀 되고 있다 너의 배꼽에서 흐르는 FM 되고 있다 실개천 되고 있다 버들구름 되고 있다 막 태어난 햇살 업고 자장가 불러주는 바람 되고 있다 초록빛 콩꼬투리 조약돌 되고 있다 바퀴 돌고 돌며

 

너에게 가는 길이다

 

무엇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모두 무언가 되고 있는 중인 아침

 

부스러기 시간에서도 향기로운 밀전병 냄새가 난다 밀싹 냄새 함께 난다 기운차게 자전거 바퀴 돌린다 사랑이 아니면 이런 순간 없으리 안녕 지금 이 순간 너 잘 존재하길 바래 그다음 순간의 너도 잘 존재하길 바래

 

자전거 바퀴 돌리는 달리아꽃 빨강 꽃잎 흔들며 인사한다 다음 생에 코끼리 될 꿀벌 자기 몸속에서 말랑한 귀 두짝 꺼낸다 방아깨비들의 캐스터네츠 샐비어 꿀에 취한 나비의 탭댄스 사랑에 빠진 자전거 되기 전 걸어온 적 있는 오솔길 따라 숲의 모음들 홀씨처럼 부푼다 아, , , , , , ,

 

만약에 말이지 이 사랑 깨져 부스러기 하나 남지 않는다 해도 안녕 사랑에 빠진 자전거 타고 너에게 달려간 이 길을 기억할게

 

사랑에 빠져서 정말 좋았던 건 세상 모든 순간들이 무언가 되고 있는 중이었다는 것

 

행복한 생성의 기억을 가진 우리의 어린 화음들아 안녕

 

 

다른 이야기, 김소연

 

처음 만났던 날에 대해 너는 매일매일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가 어떤 용기를 내어 서로 손을 잡았는지 손을 꼭 잡고 혹한의 공원에 앉아 밤을 지샜는지. 나는 다소곳이 그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가 우리가 우리를 우리를 되뇌고 되뇌며 그때의 표정이 되어서. 나는 언제고 듣고 또 들었다. 곰을 무서워하면서도 곰인형을 안고 좋아했듯이. 그 얘기가 좋았다. 그 얘기를 하는 그 표정이 좋았다. 그 얘기가 조금씩 달라지는 게 좋았다. 그날의 이야기에 그날이 감금되는 게 좋았다. 그날을 여기에 데려다 놓느라 오늘이 한없이 보류되고 내일이 한없이 도래하지 않는 게 너무나도 좋았다. 처음 만났던 날이 처음 만났던 날로부터 그렇게나 멀리 떠나가는 게 좋았다. 귀여운 병아리들이 무서운 닭이 되어 제멋대로 마당을 뛰어다니다 도살되는 것처럼. 그날의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마다 우리가 없어져버리는 게 좋았다. 먹다 남은 케이크처럼 바글대는 불개미처럼. 그날의 이야기가 처음 만났던 날을 깨끗하게 먹어치우는 게 좋았다. 처음 만났던 날이 아직도 혹한의 공원에 앉아 떨고 있을 것이 좋았다. 우리가 그곳에서 손을 꼭 잡은 채로 영원히 삭아갈 것이 좋았다.

 

 

숨길 수 없는 노래 4, 이성복

 

내 그대를 떠난 날부터 그대는 집을 가졌네 오직 그대만이 들어갈 수 있는 집, 그대의 무덤

난 그대의 집으로 들어갈 수 없네 오직 그대만이 들어갈 수 있는 집, 내 떠나므로 불 밝은 집

내 그대를 떠난 날부터 그대는 집을 가졌네 상처처럼 푸른 지붕과 바람처럼 부드러운 사면의 집

내 그대를 떠남은 그대 속에 나의 집을 짓기 위해서라네 상처처럼 푸른 지붕과 바람처럼 부드러운 사면의 무덤

 

 

이별 1, 

 

당신이 슬퍼하시기에 이별인 줄 알았습니다 그렇지 않았던들 새가 울고 꽃이 피었겠습니까 당신의 슬픔은 이별의 거울입니다 내가 당신을 들여다보면 당신은 나를 들여다봅니다 내가 당신인지 당신이 나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별의 거울 속에 우리는 서로를 바꾸었습니다 당신이 나를 떠나면 떠나는 것은 당신이 아니라 나입니다 그리고 내게는 당신이 남습니다 당신이 슬퍼하시기에 이별인 줄 알았습니다 그렇지 않았던들 우리가 하나 되었겠습니까

 

 

발바닥에 관하여, 내가 모르고 있는, 이승희

 

날마다 몇 채의 사원을 짓고 허물며 살았다고 비가 내린다. 아직도 물속에 알을 낳는 오랜 습관처럼 세상에 발바닥이란 말보다 아픈 말을 나는 알지 못한다. 세상의 모든 풍경들이 참회의 마음으로 비를 맞는 동안 아킬레스건을 지나 발바닥 멀리 끝으로 다섯 개의 행성이 고요하다. 일요일도 없는 세상, 꽃 피지 않는 사계절을 스물네 시간씩 걷는 일, 살이 아파오는 오르가슴을 나는 사랑하기로 했다. 나를 깨우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 가끔 당신의 몸속에서 잠드는 꿈, 코를 맞대고 문질러오는 당신의 밤이 가장 정직한 울음이었다는 걸. 내가 당신의 몸 위를 걸어가도록 서로의 입속에서 손가락을 꺼내주었듯이, 얼룩은 무늬가 되어 나는 몸에 잔뜩 얼룩을 묻힌 채 뛰어갔다. 초식의 세계를 지나 지구의 심장 소리가 들리는 곳까지 고요하게 무너졌다. 멈출 수 없음으로 목매다는 일이 어려웠다고 늦은 고백을 하는 너를 나는 죽도록 사랑한다.

 

 

어느 여름날, 

 

구름이 연신내역을 지나가다 말고 가만히 내 방을 들여다본다

고요한 물처럼

막막한 마음을 오래도록 밀어온다

 

혼자 밥을 먹는다는 것은

너무 멀리 왔다는 말

 

쓰러질 곳을 찾지 못해

비가 되지 못한 바람 같은 거라고

우체국 소인처럼 찍힌다

 

오래도록 서 있는 구름의 끝으로 내 마음이 조금씩 어두워진다

 

넌 왜 버려진 거니

내가 이마를 짚어주던 그리운 것들은 모두 구름이 되었다

 

푸르른 것은 그것뿐이었던 어느 여름날

잘 지내요,

그래서 슬픔이 말라가요

 

내가 하는 말을

나 혼자 듣고 지냅니다

아 좋다, 같은 말을 내가 하고

나 혼자 듣습니다

 

내일이 문 바깥에 도착한 지 오래되었어요

그늘에 앉아 긴 혀를 빼물고 하루를 보내는 개처럼

내일의 냄새를 모르는 척합니다

 

잘 지내는 걸까 궁금한 사람 하나 없이

내일의 날씨를 염려한 적도 없이

 

오후 내내 쌓아둔 모래성이

파도에 서서히 붕괴되는 걸 바라보았고

허리가 굽은 노인이 아코디언을 켜는 걸 한참 들었어요

 

죽음을 기다리며 풀밭에 앉아 있는 나비에게

빠삐용,이라고 혼잣말을 하는 남자애를 보았어요

 

꿈속에선 자꾸

어린 내가 죄를 짓는답니다

잠에서 깨어난 아침마다

검은 연민이 몸을 뒤척여 죄를 통과합니다

바람이 통과하는 빨래들처럼

슬픔이 말라갑니다

 

잘 지내냐는 안부는 안 듣고 싶어요

안부가 슬픔을 깨울 테니까요

슬픔은 또다시 나를 살아 있게 할 테니까요

검게 익은 자두를 베어 물 때

손목을 타고 다디단 진물이 흘러내릴 때

아 맛있다,라고 내가 말하고

나 혼자 들어요.

 

 

-ㄴ지 모르겠어, 윤병무

 

어쩌면 우리는 이미 사라진 태양계를 살고 있는지 모르겠어

아득한 별이 수명을 다하기 일만 년 전

이만 광년을 내달려와 우리에게 별빛으로 존재하듯

우리는 한때 지구라는 행성에서 밤하늘을

노래할 줄 알았던 직립보행 생물이었는지 모르겠어

공간이 시간을 떠날 수 없듯

시간이 공간을 지울 수 없어서 우리는

당시 생생했던 날들을 재생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그때 그곳에는 잠시도 멈추지 않는 바다가 있었고

그럴 거면 아예 끝장내라고 목 놓다가

이젠 운명을 치워달라며 무릎 꿇었다가

모래톱에 쓴 이름 삼킨 파도를 응망하다가

혼잣말 발자국만 남기고 떠났던 겨울 바다

길고 혹독한 빙결만 차곡차곡 쌓여

끝내 세상이 얼어붙었던 대사건이 있기 전의 현장을

우리는 당장인 줄 알고 살아내는지 모르겠어

 

그리하여 우리는 어떤 불행이 걸어간 시절에

슬픈 옛사람이 꾸었던 악몽의 등장인물인지 모르겠어

질려 소리친 가위를 흔들어 깨운 손에 이끌려

불쑥 무대 뒤로 퇴장한 건지 모르겠어

여명에만 꺼지는 무대 조명ㅡ서녘 달빛이,

무릎으로 세운 홑이불 산맥에 그림자 드리워

흉몽의 능선을 조감도로 보여주고 있는지 모르겠어

하얀 히말라야에 파묻은 얼굴인지 모르겠어

 

웬 목맨 귀신이 떠났던 대들보 찾아오는 소리냐며

후려치는 바람에 얼얼한 뺨이 벌게져도

손자국은 백 년 후 겨울날 홍시인지 모르겠어

앙상한 당신의 이름을 머리에 이고

겨울이 닳도록 탑돌이 하는지 모르겠어

 

당신과 나의 시간이 엇갈려 지나가도

당신은 나의 옛날을 살고

나는 당신의 훗날을 살고 있는지 모르겠어

 

당신은 나의 이름을 부정한 지 오래

나는 당신의 이름에 집 지은 지 오래

빗장 건 대문에 얼비친 얼굴이

바로 당신이자 나인지 모르겠어

잡풀 웃자란 마당이 무심한 자손의 묘소인지 모르겠어

행인이 서성이던 자리의 족음이 당신인지 모르겠어

새끼 기린을 뒤따른 바람이 나인지 모르겠어

당신인 줄 알고 밤길에 잘못 부른 이름인지 모르겠어

 

당신을 고인 물이라 명명한 이는 당신의 여름을 보았는지 모르겠어

당신을 달이라 명명한 이는 당신의 그믐을 울었는지 모르겠어

당신을 사자라 명명한 이는 당신의 포효를 들었는지 모르겠어

나를 구렁이라 명명한 이는 나의 허물을 주웠는지 모르겠어

시간의 개울을 건너본 이들은 우리를 살아보지 않아도

우리가 살아버릴 시간의 돌다리에서

굽이치는 물결을 만진 건지 모르겠어

그래서 살음을 生人이라 하지 않고 人生이라 하는지 모르겠어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정희성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남아 있네

그대와 함께한 빛났던 순간

지금은 어디에 머물렀을까

어느덧 혼자 있을 준비를 하는

시간은 저만치 우두커니 서 있네

그대와 함께한 빛났던 순간

가슴에 아련히 되살아나는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나부끼네

 

 

수박, 허수경

아직도 둥근 것을 보면 아파요

 

둥근 적이 없었던 청춘이 문득 돌아오다 길 잃은 것처럼

 

그러나 아휴 둥글기도 해라

저 푸른 지구만 한 땅의 열매

 

저물어가는 저녁이었어요

수박 한 통 사들고 돌아오는

그대도 내 눈동자, 가장 깊숙한 곳에

들어와 있었지요

 

태양을 향해 말을 걸었어요

당신은 영원한 사랑

태양의 산만한 친구 구름을 향해 말을 걸었어요

당신은 나의 울적한 사랑

태양의 우울한 그림자 비에게 말을 걸었어요

당신은 나의 혼자 떠난 피리 같은 사랑

 

땅을 안았지요

둥근 바람의 어깨가 가만히 왔지요

, 수박 속에 든

저 수많은 별들을 모르던 시절

나는 당신의 그림자만이 좋았어요

 

저 푸른 시절의 손바닥이 저렇게 붉어서

검은 눈물 같은 사랑을 안고 있는 줄 알게 되어

이제는 당신의 저만치 가 있는 마음도 좋아요

 

내가 어떻게 보았을까요, 기적처럼 이제 곧

 

푸르게 차오르는 냇물의 시간이 온다는 걸

가재와 붕장어의 시간이 온다는 걸

선잠과 어린 새벽의 손이 포플러처럼 흔들리는 시간이 온다는 걸

날아가는 어린 새가 수박빛 향기를 물고 가는 시간이 온다는 걸

 

 

레몬

 

당신의 눈 속에 가끔 달이 뜰 때도 있었다 여름은 연인의 집에 들르느라 서두르던 태양처럼 짧았다

당신이 있던 그 봄 가을 겨울, 당신과 나는 한 번도 노래를 한 적이 없다 우리의 계절은 여름이었다

시퍼런 빛들이 무작위로 내 이마를 짓이겼다 그리고 나는 한 번도 당신의 잠을 포옹하지 못했다 다만 더운 김을 뿜으며 비가 지나가고 천둥도 가끔 와서 냇물은 사랑니 나던 청춘처럼 앓았다

가난하고도 즐거워 오랫동안 마음의 파랑 같을 점심 식사를 나누던 빛 속, 누군가 그 점심에 우리의 불우한 미래를 예언했다 우린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우린 그냥 우리의 가슴이에요

불우해도 우리의 식사는 언제나 가득했다 예언은 개나 물어가라지, 우리의 현재는 나비처럼 충분했고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그리고 곧 사라질 만큼 아름다웠다

레몬이 태양 아래 푸르른 잎 사이에서 익어가던 여름은 아주 짧았다 나는 당신의 연인이 아니다, 생각하던 무참한 때였다, 짧았다, 는 내 진술은 순간의 의심에 불과했다 길어서 우리는 충분히 울었다

마음속을 걸어가던 달이었을까, 구름 속에 마음을 다 내주던 새의 한 철을 보내던 달이었을까, 대답하지 않는 달은 더 빛난다 즐겁다

숨죽인 밤구름 바깥으로 상쾌한 달빛이 나들이를 나온다 그 빛은 당신이 나에게 보내는 휘파람 같다 그때면 춤추던 마을 아가씨들이 얼굴을 멈추고 레몬의 아린 살을 입안에서 굴리며 잠잘 방으로 들어온다

저 여름이 손바닥처럼 구겨지며 몰락해갈 때 아, 당신이 먼 풀의 영혼처럼 보인다 빛의 휘파람이 내 눈썹을 스쳐서 나는 아리다 이제 의심은 아무 소용이 없다 당신의 어깨가 나에게 기대오는 밤이면 당신을 위해서라면 나는 모든 세상을 속일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 온 여름에 다시 생각해보니 나는 수줍어서 그 어깨를 안아준 적이 없었다

후회한다

지난여름 속 당신의 눈, 그 깊은 어느 모서리에서 자란 달에 레몬 냄새가 나서 내 볼은 떨린다, 레몬꽃이 바람 속에 흥얼거리던 멜로디처럼 눈물 같은 흰 빛 뒤안에서 작은 레몬 멍울이 열리던 것처럼 내 볼은 떨린다

달이 뜬 당신의 눈 속을 걸어가고 싶을 때마다 검은 눈을 가진 올빼미들이 레몬을 물고 향이 거미줄처럼 엉킨 여름밤 속에서 사랑을 한다 당신 보고 싶다,라는 아주 짤막한 생애의 편지만을 자연에게 띄우고 싶던 여름이었다

 

 

네가 아니면 나는 어쩌지, 황경신

 

네가 아니면 나는 어쩌지

내가 아니면 너는 어쩌지

삶은 이렇게 간절한데

어떤 이름에 기대어야 하지

마음은 이토록 한순간에 무너지는데

영원 같은 시간 동안 누구를 기다려야 하지

내가 아니면 너 홀로 어떻게 살지

네가 아니면 나 홀로 어떻게 죽지

나는 꽃처럼 흔들리고 안개처럼 흐린데

너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지

 

 

숲에 관한 기억, 나희덕

 

너는 어떻게 내게 왔던가?

오기는 왔던가?

마른 흙을 일으키는 빗방울처럼?

빗물 고인 웅덩이처럼?

젖은 나비 날개처럼?

숲을 향해 너와 나란히 걸었던가?

꽃그늘에서 입을 맞추었던가?

우리의 열기로 숲은 좀더 붉어졌던가?

그때 너는 들었는지?

수천 마리 벌들이 일제히 날개 터는 소리를?

그 황홀한 소음을 무어라 불러야 할까?

사랑은 소음이라고?

네가 웃으며 그렇게 말했던가?

그 숲이 있기는 있었던가?

 

그런데 웅웅거리던 벌들은 다 어디로 갔지?

꽃들은, 너는, 어디에 있지?

나는 아직 나에게 돌아오지 못했는데?

 

 

다시, 이선명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잊어버렸다

더 크게 부를수록 고요해지는

거짓이 되어버린 말들과

그리움이 되어버린 시간들

 

불현듯 너는 떠났고

허락도 없이 그리움은 남았다

앉거나 걷거나 혹은 서 있을 때도

내 안에 투명한 방울들이 맺히고 있었다

 

산다는 것은 죽어가는 것이 되었고

기억하는 것은 떠난 것이 되어 있었다

내 삶에 낙서 되어버린 한 사람의 이름

어디로 가야 다시 도착할 수 있는 걸까

 

나는 물들기 쉬운 어리석은 사람

한 번의 입맞춤을 위해

힘없이 떠나보낸 시간들을 기억해본다

쓸쓸히 왔던 길은 돌아서듯 너를 생각한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혹 당신이 아니라는 착각

하지만 그래도 후회할 수 없다

뼈가 부서지도록 아픈 이름을 안고

너라는 끝없는 절망을 사랑했다

 

 

그럴 수 있을까, 주인자

 

너를 내 머릿속에서 밀어내고도

지나가는 바람을 무심히 안을 수 있을까

 

너를 내 가슴 가장자리로 밀어내고도

내리는 달빛에 무심하게 젖을 수 있을까

 

켜켜이 쌓아놓았던 사랑을

먼지로 만들어 허공으로 보낼 수 있을까

 

이제 우리가 무심한 눈빛을 스치던

행인1과 행인2로 살아갈 수 있을까

 

정말 우리, 그럴 수 있을까

정말 우리, 그럴 수 있을까

 

 

너의 의미, 최옥

 

흐르는 물 위에도

스쳐가는 바람에게도

너는

지워지지 않는

발자국을 남긴다

 

한 때는 니가 있어

아무도 볼 수 없는 걸

나는 볼 수 있었지

 

이제는 니가 없어

누구나 볼 수 있는 걸

나는 볼 수가 없다

 

내 삶보다 더 많이

널 사랑한 적은 없지만

너보다 더 많이

삶을 사랑한 적도 없다

 

아아, 찰나의 시간 속에

무한을 심을 줄 아는 너

 

수시로

내 삶을 흔드는

설렁줄 같은 너는, 너는

 

천년동안 고백하다, 신지혜

내가 엮은 천 개의 달을 네 목에 걸어 줄게

네가 어디서 몇만 번의 생을 살았든

어디서 왔는지도 묻지 않을게

 

네 슬픔이 내게 전염되어도

네 심장을 가만 껴안을게

너덜너덜한 심장을 봉합해 줄게

 

들숨으로 눈물겨워지고 날숨으로 차가워질게

네 따뜻한 꿈들을 풀꽃처럼 잔잔히 흔들어줄게

오래오래 네 몸 속을 소리 없이 통과할게

고요할게

 

낯선 먼먼 세계 밖에서 너는

서럽게 차갑게 빛나고

내가 홀로 이 빈 거리를 걷든, 누구를 만나든

문득문득 아픔처럼 돋아나는 그 얼굴 한 잎

 

다만

눈 흐리며 나 오래 바라다볼게

천 년 동안 소리 없이 고백할게

 

 

 

사랑이란 짐승김왕노

 

사랑은 짐승입니다.

사랑이 사랑을 잃어버렸을 때는 어둠이고 빛이고 물어뜯으면서 미쳐 날뛰는 짐승입니다.

사랑 앞에서는 사랑만 말해야 합니다. 사랑 외에 어떤 주제나 담론이 있을 수 없습니다.

피골이 상접해도 사랑으로 연명하고 사랑으로 별을 끄고 사랑으로 환히 켭니다.

사랑에 빠져 곧 익사해도 지푸라기 잡으려고 허우적거리지도 않습니다.

사랑은 사랑을 위하여 기꺼이 간까지 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위험한 짐승입니다.

사랑이란 짐승이 되었을 때는 사랑을 찾기 위해 아무리 험준한 산맥이라도 넘습니다. 아무리 사나운 바다도 건넙니다. 사랑이 사랑에 빠졌을 때는 고양잇과 어느 짐승보다 더 사나운 짐승입니다. 사랑에 빠진 짐승을 본 적이 있습니까. 밤 이어 서기가 이는 그 눈, 바람보다 더 부드러운 털, 제 살을 파고듣도록 감춘 발톱. 사랑을 위해 골똘히 모은 그 푸른 힘, 아무 방정식이나 계산이 없는 사랑은 영혼이 맑은 짐승입니다.

 

그대는 지금 사랑을 잃은 사랑이란 짐승입니다.

그대는 지금 눈물 속에 드러누운 눈물이란 짐승입니다.

털이 눈물에 젖었고

눈물의 가쁜 숨 몰아쉬면서 눈물의 호흡을 합니다.

그대의 눈물로 안드로메다가 은하수가 우주가 흠뻑 젖는 것 같습니다.

내 곁에 없는 내 사랑마저

그대 눈물에 흠뻑 젖어서 끝없이 축축 처져 내리는 밤입니다.

 

 

궤나

 

정강이뼈로 만든 악기가 있다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그 정강이뼈로 만든 악기

 

그리워질 때면 그립다 그립다고 부는 궤나

그리움보다 더 깊고 길게 부는 궤나

들판에 노을을 붉게 흩어놓는 궤나 소리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짐승을 울게 하는 소리

 

오늘은 이 거리를 가는데 종일 정강이뼈가 아파

전생에 두고 온 누가

전생에 두고 온 내 정강이뼈를 불고 있는 보다

그립다 그립다고 종일 불고 있나보다

 

 

아나키스트의 사랑

 

꽃이 내게 정부였다. 꽃 그림자가 나의 당국이었다. 꽃밭이 내게 블루 하우스였다.

물봉선화라는 꽃, 달맞이꽃, 달개비라는 꽃, 상사화라는 꽃, 함박꽃, 너라는 꽃

꽃의 정책으로 내 사랑은 흘러가고 꽃의 향기로 내 사랑은 달아오르고

꽃의 기억으로 내 꽉 다문 영혼의 아랫도리가 후끈 열리고

내 영혼의 처녀시절은 그렇게 마감하고 꽃의 흔들림으로 내 그리움이 물결치고

낙화유수라는 화무십일홍이라도 내 사랑은 꽃과 함께 피고 지고

내 영혼의 아랫입술과 윗입술로 부드럽게 문 너라는 꽃의 이름

꽃이 내게 전부였다. 꽃 그림자가 나의 자궁이었다. 꽃밭이 내게 러브 하우스였다.

 

 

한 사람을 보내다 곽효환

 

지난 여름, 한 사람을 보냈다

오랫동안 사랑했으나

함께웃고 울고 뒹굴며 부비고

더러는 행이었고 더러는 불행이었다

혹은 그 경계를 넘나들던

그를 보내고 오랫동안 아팠다

 

그여름 늦계까지 무더웠고

잠시 가물었다가

지루하게 많은 비를 뿌렸다

그리고 두 개의 태풍이 하루차이로 지나갔다

그 흔적은 폐허였다

 

그 여름 초입

라오스 국경마을에서 만난

맨발의 아이들 얼굴이 내내 어른거렸다

 

 

달에 대하여 - 권혁웅

 

나는 감옥이었네

둥근 사랑 속에 백지처럼 얇은

한 여자를 가두었네 그 여자 몸둘 바 모르고

내 마음속을 떠돌다 지쳐

세상을 떠돌러 갔네 너무 가벼웠네

그 여자 산 너머 산, 들판 지나

들판을 만날 텐데, 구겨질 텐데...... 울면서

달빛은 촘촘히 세상을 가두네

이제 나 야위어 아무나 할퀼 지경이지만

애초에 모르진 않았다네

그 여자,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어렵게 어렵게

나를 무단 횡단한 거였네

 

 

쑥대머리

 

제가 다니던 삼선교회엔 유난히 숙이 많았죠

은숙(恩淑), 애숙(愛淑), 양숙(良淑), 현숙(賢淑), 경숙(京淑), 남숙(南淑), 난숙(蘭淑), 미숙(美淑), 정숙(貞淑)……

그야말로 쑥밭이었죠 제일 믿음이 좋았던 애는 은숙이,

애숙이는 잠시 나를 사랑했고

양숙이와 현숙이는 정말로 현모양처가 되었죠

경숙이는 지금도 서울에 살지만, 남숙이는

먼 데로 이사 갔답니다

난숙이는 청초했고 미숙이는 예뻤는데

지금도 제일 기억나는 애는 정숙이에요

어렸을 때 귤껍질 넣은

뜨거운 주전자 물을 뒤집어썼지만

한 올의 흐트러짐도 없던 아이,

그러던 어느 성탄절에 성극을 하다가

두건과 함께 가발이 홀랑 벗겨진

울지도 않고 끝까지 마리아 역할을 하고는

그 길로 교회를 떠난 아이, 지금도 어디선가

단정한 자세로 앉아

거지꼴을 한 동방박사를 기디리는 거나 아닌지요

 

 

첫사랑 - 박남철

 

고등학교 다닐때

버스 안에서 늘 새침하던

어떻게든 사귀고 싶었던

포항여고 그 계집애

어느 날 누이동생이

그저 철없는 표정으로

내 일기장 속에서도 늘 새침하던

계집애의 심각한 편지를

가져 왔다.

 

그날 밤 달은 뜨고

그 탱자나무 울타리 옆 빈터

그 빈터엔 정말 계집애가

교복 차림으로 검은 운동화로

작은 그림자를 밟고 여우처럼

꿈처럼 서 있었다. 나를

허연 달빛 아래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밤 얻어 맞았다.

 

그 탱자나무 울타리 옆 빈터

그 빈터에서 정말 계집애는

죽도록 얻어맞았다 처음엔

눈만 동그랗게 뜨면서 나중엔

눈물도 안 흘리고 왜

때리느냐고 묻지도 않고

그냥 달빛 아래서 죽도록

얻어맞았다.

 

그날 밤 달은 지고

그 또 다른 허연 분노가

면도칼로 책상 모서리를

나를 함부로 깎으면서

나는 왜 나인가

나는 왜 나인가

나는 자꾸 책상 모서리를

눈물을 흘리며 책상 모서리를

깎아댔다.

 

 

빈틈 강세화

 

내 마음에 한 자리는 호박*처럼 비워놓고

계산하지 않고 들어오실 그대를 기다린다

그대 안에도 어느 한 틈이 있어

내가 거기 무작정 들어가 앉을 수 있으면 좋겠다

 

*호박 : (절구의 파인 부분)

 

 

 

환절기 - 박준

 

나는 통영에 가서야 뱃사람들은 바닷길을 외울 때 앞이 아니라 배가 지난온 뒤의 광경을 기억한다는 사실, 그리고 당신의 무릎이 아주 차갑다는 사실을 새로 알게 되었다

 

비린 것을 먹지 못하는 당신 손을 잡고 시장을 세 바퀴나 돌다보면 살 만해지는 삶을 견디지 못하는 내 습관이나 황도를 백도라고 말하는 당신의 착각도 조금 누그러들었다

 

우리는 매번 끝을 보고서야 서로의 편을 들어주었고 끝물과일들은 가난을 위로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입술부터 팔꿈치까지 과즙을 뚝뚝 흘리며 물복숭아를 먹는 당신, 나는 그 축농 같은 장면들을 넘기면서 우리가 같이 보낸 절기들을 줄줄 외워보았다.

 

 

발톱

 

중국 서점이 있던 붉은 벽돌집에는 벽마다 죽죽 그어진 세로균열도 오래되었다 그 집 옥탑에서 내가 살았다 3층에서는 필리핀 사람들이 주말마다 모여 밥을 해먹었다 건물 2층에는 학교를 그만둔 아이들이 모이는 당구장이 있었고 더 오래전에는 중절수술을 값싸게 한다는 산부인과가 있었다 동짓달이 가까워지면 동네 고양이들이 반지하 보일러실에서 몸을 풀었다 먹다 남은 생선전 같은 것을 들고 지하로 내려가면 어미들은 그새 창밖으로 튀어나가고 아비도 없이 자란 울음들이 눈을 막 떠서는 내 발목을 하얗게 할퀴어왔다.

 

 

미인처럼 잠드는 봄날

 

믿을 수 있는 나무는 마루가 될 수 있다고 간호조무사 총정리 문제집을 베고 누운 미인이 말했다 마루는 걷고 싶은 결을 가졌고 나는 두세 시간 푹 끓은 백숙 자세로 엎드려 미인을 생각하느라 무릎이 아팠다 어제는 책을 읽다 끌어안고 같이 죽고 싶은 글귀를 발견했다 대화의 수준을 떨어트렸던 어느 오전 같은 사랑이 마룻바닥에 누워 있다 미인은 식당에서 다른 손님을 주인으로 혼동하는 경우가 많았고 나는 손발이 뜨겁다 미인의 솜털은 어린 별 모양을 하고 어린 별 모양을 하고 나는 손발이 뜨겁다 미인은 밥을 먹다가도 꿈결인양 씻은 봄날의 하늘로 번지고 나는 손발이 뜨겁다 미인을 생각하다 잠드는 봄날, 설핏 잠이 깰 때마다 나는 몸을 굴려 모안둔 열을 피하다가 언제 받은 적 있는 편지 같은 한기를 느끼며 깨어나기도 했던 것이다

 

A Place In The Sun- Stevie Wonder- 1966

 

찔레꽃 송찬호

 

그해 봄 결혼식 날 아침, 네가 집을 떠나면서 나보고 찔레나무숲에 가보라 하였다.

나는 거울 앞에 앉아 한쪽 눈썹을 밀면서, 그 눈썹 자리에 초승달이 돋을 때쯤이면

너를 잊을 수 있겠다, 장담하였던 것인데,

읍내 예식장이 떠들썩했겠다, 신부도 기쁜 눈물 흘렸겠다,

나는 기어이 찔레나무숲으로 달려가 덤불 아래 엎어놓은

하얀 사기 사발 속 너의 편지를 읽긴 읽었던 것인데, 차마 다 읽지는 못하였다.

세월은 흘렀다. 타관을 떠돌기 어언 이십 수년 삶이 그렇데,

징소리 한 번에 화들짝 놀라 엉겁결에 무대에 뛰어오르는 거.

어쩌다 고향 뒷산 그 옛 찔레나무 앞에 섰을 때, 덤불 아래 그 흰 빛 사기 희미한데,

예나 지금이나 찔레꽃은 하얬어라, 벙어리처럼 하얬어라,

눈썹도 없는 것이 꼭 눈썹도 없는 것이 찔레나무 덤불 아래서

오월의 뱀이 울고 있다.

 

 

먼 산-김용택

 

저물녁

그대가 나를 부르면

나는 부를수록 멀어지는 서쪽 산이 되지요

그대가 나를 감싸는 노을로 오리라 믿으면서요

하고 싶은 말을 가슴에 숨기고

그대의 먼 산 되지요

 

 

어쩌다 이렇게 - 나태주 

있는 듯 없는 듯

있다 가고 싶었는데

아는 듯 모르는 듯

잊혀지고 싶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그대 가슴에 못을 치고

나의 가슴에 흉터를 남기고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나의 고집과 옹졸

나의 고뇌와 슬픔

나의 고독과 독선

그것은 과연 정당한 것이었던가

그것은 과연 좋은 것이던가

 

사는 듯 마는 듯 살다 가고 싶었는데

웃는 듯 마든 듯 웃다 가고 싶었는데

 

그대 가슴에 자국을 남기고

나의 가슴에 후회를 남기고

모난 돌처럼 모난 돌처럼

혼자서 쓸쓸히

 

 

 

기다림 - 김영일 

 

한 사람을 기다린다는 것은

삶의 길 가운데서도 가장

어려운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대를 사랑한 내 잘못인지

운명의 장난인지

난 요즘 허수아비가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그대를 기다린다는 것은

내 운명의 또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바다의 출렁임에 내 마음 출렁이며

그대에게 주고픈 편지 손에 들고

갈매기에게 조그만하게 말합니다.

 

 

가고 싶다고... 그대에게

 

하지만 너무 멀리 있는 그대에게는

나의 마음이 닿지를 않나 봅니다...

 

 

 

보고 싶은 한사람이 있습니다- 김대규 

 

기억이 떠 올라

희미하게 그려지는 얼굴이라도

내 생애 끝나는 날까지

단 한번이라도 보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 잊은지 오래지만

그래도 살아가노라면

영상처럼 떠 오르는

내 곁에서 맴도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이면

발자국 자국마다 새겨지는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싶어

어두운 창가에 몸을 내밀고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로 그대 음성 들으려합니다.

 

그런 한 사람이 있습니다

잊혀질만 하면 떠 오르는 한 사람

마치 끊어지지 않는 밧줄처럼

영원히 사랑해야 될 한 사람인데

떠나버린 그 사람을

보고 싶어하는 내가 여기 우뚝 서 있습니다.

 

살아 가노라면

너무나 가슴이 아파

두 눈이 멀어지는 고통속에

미치도록 보고 싶어하는

그런 한 사람이 있습니다.

 

추억을 먹고

그냥 떠나버린 사람이

오늘은 왠지 더 많은 그리움되어

그 사람 보고 싶음에

나를 더욱 더 사무치게 물 들이는 밤입니다.

 

보고 싶습니다

너무나 보고 싶습니다

차라리

내 영혼마져 죽어 그 사람에게 갈수 있다면

나는 그렇게라도 날아가고 싶습니다

 

 

 

너 보고픈 날은- 나태주 

 

너 보고픈 날은

바람이 불고

나뭇잎이 바람에 날린다

먼지가 바람에 날린다

 

너 보고픈 생각 때문에

바람은 불고

산은 푸르고

햇빛은 밝고

하늘 또한 끝없이

높다 해 두자

먼지 또한 날린다 해 두자

 

너 보고픈 날은

창문을 닫고

안으로 고리를 잠그기로 한다

 

 

 

당신이 그리운 것은- 이근대 

 

당신이 그리운 것은

내 안에

당신이 너무 깊이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한 잔 술을 먹고 잠에 들어도

혹은 수많은 사람들에 섞여 걸어봐도

오직 그대 밖에 없는

, ,

 

소용돌이치는 거센 파도가 그러했겠습니까.

깊은 밤에 내리는 장대비가

내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그리움 같겠습니까.

 

당신이 그리운 것은

내 안에서

당신을 잡아두고 싶다는 소망의 눈물인 것입니다.

 

오세요, 당신 올 때까지

365일을 문 활짝 열어놓고 살겠습니다.

 

옷가지만 챙겨오지 마시고

당신 눈물까지도 가방에 넣어서 오세요.

 

당신이 그리운 것은

내 안에

너무 많은 당신이 살림 차리고 있습니다.

 

 

 

창 밖에 쌓인 그리움 - 이상진 

 

그리움 하나 쌓일 때마다

별 하나 꼬리를 그리며 떨어지더니

별 하나 볼 수 없는 밤이 되었습니다.

 

까만 밤

하얀 창밖에 떨어진 별들이

도시의 불빛으로 다시 태어나고

 

나만 홀로 오도카니 앉아

창밖에 쌓인 그리움을 바라보다

나직이 그대 이름 불러봅니다

 

까만 밤을 하얗게 새운

외로운 아침에 창문을 여는 것은

창밖에 쌓인 그리움 때문입니다

 

그리움은 모두 창밖에 있습니다

 

 

공중전화부스 안에서 - 김설하 

 

손가락 얹어 놓고

한참을 망설였지

마지막 번호를 누르고

뎅그렁 동전 떨어지는 소리에

방망이질하는 가슴

신호가 가고 낯익은 목소리

귓바퀴 타고 온몸으로 스며들어

그대로 숨이 멎을 것 같았어

당신으로 채워진 작은 공간

떨리는 목소리 내 안에 감길 때

잊었을까봐

기억하지 못할까봐

보고 싶었다는 말보다

눈물이 앞선 공중전화부스 안에서

내게 쏟아지는 당신 때문에

빗소리보다 더 큰 소리로 울어버렸어

 

 

 

즐거운 편지 - 황동규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속을 헤매일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언제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 뿐이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그리워한다는 건 - 이상진

 

그리워한다는 건

내 마음의 풍향계가

그대에게 고정되었다는 것

 

그리워한다는 건

그대가

내 마음의 주인이라는 것

 

그리워한다는 건

내 마음이

그대에게 옮겨 가는 것

 

그리워한다는 건

나의 삶이

그대 곁으로 옮겨 가는 것

 

 

 

누군가가 그리워질때 - 원성 스님

 

보고 싶은 만큼 나도 그러하다네

하지만 두 눈으로 보는 것만이 다는 아니라네

마음으로 보고

영혼으로 감응하는 것으로도

우리는 함께일 수 있다네

 

곁에 있다는 것은...

현실의 내 곁에 존재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이미 한 그늘아래, 저 달빛을 마주 보며

함께 한 호흡을 하며 살고 있다네

 

그리하여 이 밤에도 나는 한 사람에게 글을 띄우네

그리움을 마주 보며 함께 꿈꾸고 있기 때문이라네

두 눈으로 보고 싶다고 욕심을 가지지 마세

내 작은 소유욕으로 상대방이 힘들지 않게

그의 마음을 보살펴주세

한 사람이 아닌 이 세상을 이 우주를 끌어안을 수 있는

넉넉함과 큰 믿음을 가지세

 

 

 

멀리 있어도 사랑이다 - 정윤천

 

눈 앞에 당장 보이지 않아도 사랑이다

어느 길 내내, 혼자서 부르며 왔던 어떤 노래가

온전히 한 사람의 귓전에 가닿기만을 바랐다면,

무척은 쓸쓸했을지도 모를 서늘한 열망의 가슴이 사랑이다

고개를 돌려 눈길이 머물렀던 그 지점이 사랑이다

 

빈 바닷가 곁을 지나치다가 난데없이 파도가 일었거든 사랑이다

높다란 물너울의 중심 속으로 제 눈길의 초점이 맺혔거든,

거기 이 세상을 한꺼번에 달려온 모든 시간의 결정과도 같았을,

그런 일순과의 마주침이라면,

이런 이런, 그렇게는 꼼짝없이 사랑이다

오래전에 비롯되었을 시작의 도착이 사랑이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헝클어진 손가락빗질인 양 쓸어 올려 보다가,

목을 꺾고 정지한 아득한 바라봄이 사랑이다

 

사랑에는 한사코 진한 냄새가 베어 있어서,

구름에라도 실려오는 실낱같은 향기만으로도

얼마든지 사랑이다

 

갈 수 없어도 사랑이다

혼이라도 그쪽으로 머릴 두려는 그 아픔이 사랑이다

멀리 있어도 사랑이다

 

너를 알고 난 후 정우경

 

어떤 날은

내 마음을 온통 다

네가 가져버린 때도 있었다

내 생각보다

네 생각이 많아

내가 너인 때도 있었다

 

비울래야 비울 수 없어

오히려 가득해지는 그리움

버릴래야 버릴 수 없어

안으로만 자라난 그리움

 

아무리 불러도 울리지 않는 음성

아무리 내밀어도 닿지 않는 손길

 

내 안에서 나보다 더 커버린

나라는 또 다른 너는

서러운 눈물일 때도 있었다

그저 머언 하늘일 때도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은 언젠가 또 만난다- 이근대

 

울지 말아라

그리운 사람은 언젠가는 또 만난다

 

지구가 수천 번을 돌고

수천 번을 뒤척여도 사랑하는 사람은

언젠가는 또 만나는 법이다

 

잊으려고 안간힘을 쓰지도 마라

애쓰면 쓸수록

더욱 죽을 것만 같은 것이 사랑이다

사랑의 그리움이다

 

떠난다고

아주 떠나는 것이 아니다

 

수천 번 세상이 바뀌어도

수많은 밤이 수천 번을 뒤척이며 울어도

가슴 속의 사랑은 살아 있다

 

그 사랑이 살아있는 한

세상은 사랑의 편에 서 있다

 

오늘은

죽을 만큼 보고 싶어 눈물이 나도

지금은 웃으며 그를 보내야할 때

 

사랑하는 사람은 언젠가 또 만난다

 

 

 

당신을 기다리는 동안- 김민소

 

마지막 버스를 놓쳐버렸습니다

어쩌면 집에 갈 수 없을 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삶의 시간도 잃어버릴 거라고

 

제동장치가 파열돼버린 생각은

이미 통제구역을 벗어나 버리고

이국 땅 해거름을 헤매고 있습니다

 

간간이 들리는 발자국 소리마다

폭풍이 지나간 풀잎의 상처마다

빛살머리 풀어헤친 가로등 풀빛마다

 

타인이었다가, 그대가 되었다가

절망이었다가, 희망이 되었다가

삶의 절반을 도려낸

그리움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을 잊는다는 건- 김종원

 

바람이 스쳐가면

머리카락이 흔들리고

 

파도가 지나가면

바다가 흔들리는데

 

하물며 당신이 스쳐갔는데

나 역시 흔들리지 않고

어찌 견디겠습니까?

 

 

 

사랑했던 마음- 장태평

 

검게 타버린 내 마음아,

너는 타다가 남은 재가 아니다

언젠가,

연기도 불꽃도 내지 않고,

다시 뜨겁게 타오를

참숯 한 덩이

 

 

 

한번은 보고 싶습니다 - 오광수

 

한번은 보고 싶습니다.

먼발치에서라도 보고 싶습니다.

사는 모습이 궁금해서 그런 게 아닙니다.

내 가슴속에 그려진 모습 그대로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인제 와서 아는척해서 무얼 합니까?

인제 와서 안부를 물어봐야 무얼 합니까?

어떤 말로도 이해하지 못했던 그때의 일들도

오묘한 세월의 설득 앞에 고개를 끄떡였습니다.

그저 웃는 모습 한번 보고플 뿐입니다.

 

한번은 보고 싶습니다.

내 가슴속에 그려져 있는 얼굴 하나가

여느 아낙네보다 더 곱게 나이 들어가도

환하게 웃고 있는 미소는 그때 그대로

그렇게 남아있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삶이 혹시나 고단하시면

당신의 모습에서 그 미소가 사라졌다면

나는 가슴이 아파서 어찌합니까?

그래도 한번은 보고 싶습니다.

 

 

안 부 - 정병근

 

언제 한번 만나자는 말

조만간 한잔하자는 말

믿지 말자 전화를 끊으면서

그것은 내가 한 말이기도 했으므로

약속은 아직 먼 곳에 있고

나는 여전히 동문서답의 헛바퀴를 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일이

어디 약속뿐이랴 뱉은 만큼

못다 한 말들 입속에 바글거리고

만나면 만날수록 결별만 수북수북 쌓인다

그런 게 다 인생이라고 나는 제법

늙어서 흰머리를 툭툭 털면서

발톱을 깎으면서 안경알을 닦으면서

생각하건데, 나는 죄의 신봉자였으니

일기장은 날마다 내게 반성을 촉구했고

지키지 못했으므로 반성은

더 많은 반성을 몰고 왔다

, 이윽고 죄 많아 빼도 박도 못하겠으니

그대 어디쯤 잘 계시는가 제법 늙었는가

이 꽃이 지기 전에

우리, 폐단처럼 꼭 한잔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