然
비천의 형식
클리나멘
도움의 돌
동세포 생물
사랑의 역사
가능세계
유리도시
https://www.youtube.com/watch?v=dCKeXuVHl1o
백은선 198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12년 [문학과사회]로 등단하였다. 시집 『가능세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장면들로 만들어진 필름』, 『도움받는 기분』, 산문집 『나는 내가 싫고 좋고 이상하고』 등이 있다. 2017년 김준성문학상 그리고 2021년 제11회 문지문학상 수상했다
然
형상은 두드림 없이 연마된다
붉은 손, 잘린 혀, 초록이 무성해지는 여름 한가운데서
이렇게 끔찍한 것은 또 없을 거야
그것이
주어진
일이라면
눈물만큼 쉬운
손을 엮은 다발을 들고/작열하는 빛 속에서
물이라는 생각과 물이라는 무수의 겹을 바라보며
소란스러운 사랑의 형태에 대해
파도치는 밤공기의 범람에 대해
노래하는 슬픔의 기이한 운율에 대해
두눈을 감자
한 번도 알았던 적 없는 것처럼 등 돌리고
멀어지자
형상은 떠오르고
깊이를 알 수 없는 겁 속에서 잃어버리고 말았지
두 손
두 손이 사라지는
혀가 잘리는
순간의
반복, 반복 속의 반복
파도
파도와 파도가 만나 거대한 물이 되는 밤
공기가 끝없이 요동치는 것을 바라보며
끝없이 바라보며
갈수록 멀어지는 것
갈수록 가까워지는 것
다르지 않다고
멜로디는 상자 속에 갇혀 끝없이 돌고 있을 뿐이라면
침몰하는 이름을 되뇌며
나의 아름다운 창이 부서집니다
산산조각 나는 것이 있습니다
새의 날개를 듣어 물 위에 띄워 보낸 적 있다
연마된 것이 과거라면 무엇을 되찾을 수 있습니까
찾고 싶어
붉게 물든 두 뺨 뒤로 켜지는 알전구들
사과처럼
미래에 대한 기억을 갱신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들을 메시지였고
그대로 전원 오프되는 것이 수순이었지
찾고 싶어
경고 단말마
받아 적을 수 없는 소리
눈물은 얼굴을 긋고 사라진다
티브이에 대통령이 나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라의 안녕과 국민의 건강에 대해
쇄도하는 슬픔…… 당신은
이야기할 수 있구나
그렇다면 인간은 더 짙은 테두리 속에서도 숨 쉴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인간은 더 이상 표면의 아래를 감각하지 못한 채 살 수 있겠다
그것이
주어진
일이라면
* 마침내 몸을 얻은 형상은 전파의 형태를 육체로 가집니다 당신의 어느 곳에도 쉽게 속할 수 있습니다 맞이할 것도 떠나보낼 것도 없이 기기들 사이를
떠도는 동시에 머물고 있습니다
숲속에서는 버섯이 자라고
숲속에서는 버섯이 자라고
왜죠? 왜 어느 날 아침에는 미친 사육사가 거실을 배회하며
화분을 가꾸는 거죠?
나는 끓고 있는 물속에 양파, 파, 마늘, 감자, 두부 그리고 눈물 두 숟갈을 넣고
비스듬해지곤 하지만
당연한 시간들 믿기지 않아서
눈을 비벼요
손을 닦고
입을 훔쳐요
떠내려가는 종種 속 피의 행렬이 알전구처럼 반짝일 때
사람의 뺨을 내려치고 싶어
찢어진 얼굴을 주워 냄비에 담고
천년 동안 삶고 싶어
곤죽이 된 얼굴을 저으며 거울 속 나를 내려다보는
그것은 여름이 가진 다른 이름이었고
끈기를 갖고 생활을 영위해야 건강을 되찾을 수 있다는 말
나는 믿지 않습니다
*
무서워요
피가 맺힌 살갗은
살갗의 방식으로
가지게 되고
나는 미치지 않았다
말할수록 내가 미친 것같이 느껴졌습니다
관람
관람하며
형상은 천천히 몸을 불려나가고 있었습니다
주어진 일을
계속해서
수행하는 것에
골몰하며
여름의 태도로 뾰족해지고 있습니다
받아 적을 수 없는 소리
그것을 다 말할 수 있다면
더 이상
밤새 서성이지 않아도 될 것 같았어
하지만 그럴 수 없었지
심판은 경기장 바깥에서
호각을 불며 손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초록은 점점 무성해지고
여름
꿈과 계절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오래된
농담일 뿐이지만
예각
*
갈수록 비좁아지는 길의 끝에서
너는 손을 펼쳐 끈적끈적하게 녹아내린
바클라바 한 조각을 건네준다
할머니가 만들어주던 거야
내가 흉내 내봤어
찐득해진 덩어리를 입속에 밀어 넣으며
나는 생각한다 형상을
채워지지 않는다는
끝없는 감각을
얼음에 혀가 달라붙던 순간의 아릿함
유리잔 안에서 천천히 녹고 있던 투명
계속해서 미끄러지는
계속해서 미끄러지는
언젠가 그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도살자가 짐승을 해할 때에
가장 먼저 칼을 대는 곳이 어디인지 아느냐고
머리가 찡하던 단맛
질문을 다시 불러오고
천천히 불타는 중
불 속에서
관함하는
텅 빈 공허 속
산산조각나버린
날개
고막이 찢어질 것처럼 조용한 오후였다
*
육체 없이 육체를 가진다는 게
이토록 쉬운 일인 줄은 몰랐다
輕
신을 만나 화분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던 날
난독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세상이 왜 이 모양인지 쉽게 납득할 수 있었다
너무 아름다운 것은 왜 자주 비어 보이는지
결국 훼손되고 마는지
고작 산세비에리아와 천리향 재스민에 대해
짧은 대화를 주고받았을 뿐인데
먼 것과 가까운 것의
맞닿은 지점까지
예각으로 둔각을 획득하는 일은
사람의 일
폭설처럼 잠이 쏟아졌다
輕
*
거짓말을 하고 있어
떠돌며 전파로서 받아들이는
영속에 관한 일
끔찍하다
피를 가질 수
있었다면 나는
부서질 수도 있었어
끊임없는 발화는 해독 불가
오직 하나의 존재만 사용하는 언어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물결에 지나지 않는
거짓을 말하고 있어
일순간
정전
이제 어둠으로 이야기하자
침묵 속에서
천천히 돌며
부서지는
창백한 지구가 빛날 떄
증폭되고 있었다
傳
Études, Op. 10: No. 3 in E Major, Tristesse
비천의 형식
혀끝에서 무성한 갈기가 돋아나
두근대는 불안 목요일이 싫어 저 눈을 동그랗게 뜬 의자들이 싫어
종말의 창 빛바랜 책등의 색
……차가운 손을 내미는 그림자
……차가운 손을 거두는
꿈속에서 만난 노란 돌은 화를 냈다 너는 왜 그 모양이냐고 너는 왜 돌이 아니냐고 왜 그렇게 어둡고 뾰족뾰족하냐고 혼을 냈다 나는 내가 이렇게 돼먹지도 못하게 돼먹은 게 죄라고
책상에 책이 잔뜩 쌓여 있는데 그 책들은 다 옳은 말해도 될 만한 근사한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고 난 물질로만 물질로만 여기 놓여 오로지
생각이라는 것을 할 뿐인데
이게 존재하는 걸까 존재하는 것에 가까운 걸까 확신 없이
모래시계를 뒤집고 모래가 내려앉는 걸 한참 동안 봤어 아파
그렇지 않니
파도를 눈앞에 두고 할 수 있는 말이 없어서 그렇지 않니, 자꾸 말했다 대체 뭐가 그렇다는 건지도 잘 모르는 채 파도 소리는 철썩철썩이 아니구나 쏴아아쏴아아도 아닌데 그렇지 않니 만약 그렇다면
쓸 수 없다고 믿길 땐 죽은 사람들 책 읽었어 선생님들 언니들 시집 읽었어 진짜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은 순간도 왔어 해가 질 무렵 구름은 분홍밫이고 꼭 울기 직전의 눈 같고 구름에게 표정이 있다면 지워진 다음 오는 표정이겠지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은 것 같고 편지를 쓰고 싶었는데 답장을 받지 못할 것 같아 쓸 수 없었다
이 자리에 직유 하나 넣으면 좋을 것 같지 않아? 원했던 것과 유사하고 멀리 있는 것 가령 돈과 사랑 혹은 감정을 감각화해줄 빛이나 숲에 관한, 웃으면서 울고 있는 푸른 입술 그런 수법은 다 배반해버리자 이미 많이 저질렀으니까
그렇지 않니
나는 종말에 관한 시를 쓰고 유서를 새로 썼다 Nine Pound Shadow의 「Bridge」를 듣고 읽고 울었다
당신 방에서 당신은 혼자 한다 괜찮아 나도 충분하니까
그 시는 슬픔에 관한 시가 아니다 그 시는
슬픔을 주장하고 슬픔으로 사람을 공격하는 시 나는 그런 시는 마냥 싫고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만 읽고 있는 게 지켜워 지겨워서 그만
화가 났다 화가 나도 무엇에 화가 났는지 어디에 화를 내야 하는지 알 수 없어 모래시계를 뒤집으며 한 시간이 또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일에 왜 이렇게 환장할까 생각하다 나도 그렇다는 사실에 조금 슬퍼졌다 그렇지,
묻고 싶었다
물을 수 없어서
책을 읽었어 크고 무거운 것이 마음을 꾹 짓누르는 내 성분은 오로지 분노뿐인 것 같고
아들은 내 마음 안에 빨강이 있다고 사랑이고 약한 거라고 했다 얘가 뭘 아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하루는 엄마가 싫다고, 이상해서 싫다고, 몇 시간이나 울었다 이상해서, 이상해서, 이상해서 싫어 그 말이 그토록 나를 찌르는 말이었고
지구가 돌고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 밥 먹고 지하철을 탄다는 게 매일 오후 여섯 시면 서부간선도로가 교통체증에 시달린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렇게 마음을 기울여도 세상은 하나 달라지는 게 없고 그런 면에서 시 같다는 생각도 들어 네가 말한 것처럼 사랑은 기다리는 거지 사실 그건 내 시에 나오는 한 구절이었고 장난처럼 그 말을
너는 자주 인용했고 시간은 차곡차곡 흘러 매일 입속에 밥을 집어넣으며 이게 비천이 아니면 뭐가 비천인가 사람이 사랑을 하는 게 이렇게 어려울 수 있다는 게 절망 한 발짝 떨어져 보면 아무것도 아닌
사실은 그게 아닌게 사실은 그런 게 아닌데
어린 시절 쓴 시들을 읽었어 작은 방, 옷장, 화장실, 상자, 벽, 관, 침대, 새장, 병실, 나무책상, 탑, 벌집, 빛다발…… 세계, 세계, 세계
모두 갇혀 있었다
빛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
「대 푸가」를 지을 당시 베토벤은 꿈을 꾸었다
실은 두 손으로 눈두덩을 꾸욱 누른 채
오래도록 누워 있던 것뿐이지만
그는 청력이 상실될 무렵
하일리겐슈타트에 가서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썼다
음악의 삶을 살겠다는 기이한 결의
영원히 귀머거리가 될지 모른다는 고백 새파란 공포
그는 모든 음을 턱으로
공명판의 진동으로 느끼며
오래도록 앉아
검은 새들은 자신의 색을 알지 못한 채
검정에 가까워질 수 있다
동생들과 조카
함부로 악보를 팔아넘기는 손들
난도질되는 음 찢기는 음
말할 수 없는 비천
음악가의 음악가의 자식으로 태어나 건반에 서서 음악 속에서 울면서 음악 속에서 전율했다 음악이 뭔지 모를 때부터 어린 베토벤은 떨었고 누가 함부로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시인이고 음악가의 삶을 생각한다
내 아이의 마음도 알지 못하면서
오래전 죽은 사람의 슬픔을 고독을
이해하려고
삶 전체가 거대한 진동이었다고
그게 너무 이상해
그렇지 않니
끈적거리는 손을 쥐었다 폈다 주머니 속에 넣어 숨기고
말할 수 없어서 그냥, 그냥……
고통을 그럴싸하게 전시할 방법에 몰두하며
새벽 고속도로를 달릴 때 최대 볼륨으로 음악을 들으며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 있나 점멸하는 빛과 끝없이 뻗은 텅 빈 도로 떠오르는 도로 허공 찢기는 허공 이것을 시로 쓸 수 있나 생각했고 속력은 참 아름답다 눈물이 날 것 같다 그렇지 않니
씨발 다 죽어버려,라
쌀 씻으며
죽은 몸들이 거리에 칸칸 방에
사무실에
자동차에
지하철에
흩어져 조개처럼 얌전히 썩어가는 장면을
쌀을 씻으며 손을 저어 알갱이들을 만지며
죽은 화분에 물을 주어도
화분은 살아나지 않아
매일 오백 밀리리터의 물을 쏟아부으며
어쩌면 살아날지도 몰라
어쩌면
그런 잔인한
실낱같은
희미한 얼굴
작은 눈 작은 코 작은 잎
잘 못 써서 이해할 수 없겠지 미안해
자꾸 잘못한 것 같은 마음
눈앞의 나무를 발로 차 몽땅
쏟아지고
끌어안고 어둠을 고백하고
미안들이 사는 미안의 나라에서
끝도 없이 서로 사과하며
미안해 아니야 내가 미안해 미안하긴 내가 미안하지 아니야 내가 미안하다니까 화를 내려던 건 아니었어 미안 내가 예민했지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들의 행렬에 참여하고 싶었고
우주에 울려 퍼지느 교향곡을 생각해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그게 다 소용이라는 마음과
모래 알갱이들
모래 알갱이들
아름다운 것만 주고 싶었는데 내 손은 온통 검정이라 움켜쥐는 순간 새도, 물도, 접시도, 식물도, 단숨에 검어지고 말아 시들어버린 잎사귀만 가득 쌓인 두 손을 어쩌지 못해 우물쭈물거리며 네 등만 보고 있어 이 모양이라서 이렇게 어둡고 뾰족뾰족해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결코 발음할 수 없는 그게 내 이름이라서
단 한 번도 몸속에서 꺼내본 적 없는
심장이 내가 가진 유일한 증거라서
이미 돌아선 날개가 너무 높아서
모래시계를 뒤집고 다시 뒤집고
그렇지 않니
더 이상 쓸 수 없을 거 같아 여기서부터는
더 이상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고)
(나흘이 지나고)
작은 마을이 있다면 수신자가 없는 편지들만 모아둔 아무도 찾지 않는 박물관, 편지들의 무덤이 있다면 거기 취직해 평생 편지를 훔쳐볼 수 있다면 그렇게 늙어 죽으면 어떨까
가끔 수신자가 없는 척하는 내게 온 편지도 있을까
그렇지 않니,라는 말은 이제부터 끝날 때까지
다시 쓰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고
다짐 같은 게 얼마나 쉽게 손상되는지 너도 아지
사랑을 해봐서 알지
눈물에 관한 영화를 세 편 사랑에 관한 소설을 두 편 죽음에 관한 시를 열 편 이별에 관한 노래를 여섯 곡
노란 돌과 영화관에 갔고
스크린을 잘 볼 수 있도록
돌을 어깨높이로 들어 올렸다 내 쓸모가 조금 기뻤고
이 차가움 쏟아지는 빛 눈부신 빛무리 그러나 도무지 알 수 없다는 생각 속에서
영화관을 빠져나올 때는 쫓겨나는 기분이 들어 어둠 속에서 걸어 나가는 다리들을 묵묵히 따르며 줬다 뺏는 거 같다 영화라는 형식 자체가 사랑과 유사하다고 그게 너무 좋아 너무 무서워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고
어둠을 어둠이라고 써놓고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둠과 어둠이라는 글자는 썩 잘 어울리고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내게는 남아 있는 숙제가 있고
진실
사랑
진실
사랑
도래하는 매일의 절박
우리는 함께 누워 전생 체험을 하다 잠이 들었고 동생은 발치에 서서 돌아와 돌아와 외치고 있었다
구체성을 잃은 말들 담담히 적어 내리며 괜찮다고 괜찮다고
사랑은 보라색일 것 같다
드라이아이스처럼. 나는 나무에 올라가는 법을 잊었다. 멀리서 시작된 것이 점점 가까워질 때, 그런 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 생각한다. 문득 펼친 책의 첫 문장. 사라진 것들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그것을 잊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선명해진다. 배후를 지우고 떠오른다. 기억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지루하고 모두를 고통스럽게 한다. 한 가족의 연대기처럼. 목줄에 묶인 나무 아래 개처럼.
나는 운동하지 않는다. 나는 읽지 않는다. 나는 종이접기 하지 않는다. 나는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 나는 땀을 흘리고 나는 먹는다. 어두운 방의 가장 어두운 부분. 가장 어두운 부분의 가장 밝은 부분. 그런 것 생각 안 한다. 계속 걷는다. 나무를 올려다보면 나뭇잎, 나뭇잎, 나뭇잎, 나뭇잎…… 현기증이 난다. 나는 나무에 올라가는 법 잊었다.
초여름, 초가을, 초겨울. 초봄은 어색하고. 동어반복 같아서 잘 쓰지 않는 걸까. 초정리광천수, 초능력, 초인, 초침, 초단, 초등학교, 초죽음, 초월. 초초초초 하면 초초초 하면 온몸에 힘을 주고 있게 된다. 어쩐지 드래곤볼 같은 것도 생각난다. 처음과 넘어서는 것과 그런 것들 사이에서 가장 이상하게 등 돌린 그런 의미에서부터
내가 지구를 걷는다. 내가 걷는 모든 곳은 지구다. 당연한 것도 이상해지는 그런 사이. 뭐라고요? 사랑이요?
여기 사랑 하나 주세요. 사랑 있어요? 그런 얘기들은 듣도 보도 못했지만. 사랑이라니. 제가 한번……
겨울에 시작된 것이라고 해서 겨울에 끝나라는 법은 없지.
그래도 눈은 겨울 안에 있을 거야.
아름답고 온전하게.
눈,눈,눈.
이렇게.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말하려고 할 때 주저하지만, 오히려 잘 아는 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 더 주저하게 된다. 나는 인도 여행 중에 만난 M의 얘기를 하고 싶다. 우리는 바라나시에서 만났다. 우리는 너무 관광객처럼 여행을 했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마주쳤다. 결국 네가 먼저 다가와서 한국인이세요? 물었다. 점심을 같이 먹고 맥주를 마시며 저녁을 같이 먹고 며칠이 지나 숙소도 같은 곳으로 옮겼다.
그렇지만 이런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M은 백화점이나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트는 음악을 분위기와 계절에 맞게 선별하는 일을 한다고 했다. 공간에 맞는 음악을 고르는 숨은 디제이고 아무도 존재를 모르는 직업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혼자 일을 할 수 있고 시공간의 제약이 없기 때문에 좋다고. 가끔은 봄에 어울리는 따듯하고 화사하면서 여유로운 기분이 들게 하는 구매욕을 증진시키는 노래 따위를 선곡하기 위해 사나흘 동안 음악만 들은 적도 있다고 했다.
우리는 함께 지내는 동안 거의 아무것도 듣지 않았다. M은 빈 시간에 음악을 듣는 일이 싫어졌다고 했다. 음악이 너무 좋아서 하게 된 일인데 가끔을 꿈속에서 음악을 끌 수가 없어서 괴롭다고 어떤 구간은 미친 듯이 머릿속을 떠다니며 반복 재생된다고 그걸 몰아낼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했다. 나는 음악이 듣고 싶을 때 소리 내서 책을 읽었다. M은 그걸 참 좋아했다.
눈, 눈, 그다음 살짝 녹았다가 다시 얇게 얼은 눈, 그 위로 다시 눈.
이렇게. 눈, 눈.
혼자 어둠을 지키고 서 있을 때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나뭇가지가 둑둑 둑 부러지는 소리.
가끔은 지금부터 죽을 떄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살면 어떨까, 그러고 싶다고 죽도록 원할 때가 있다.
초식동물. 초심자. 초연. 초절정. 초유기. 초자아. 초진. 초크. 초합금. 초초초초 그리고 초초초. 계속 이렇게 적어나가다 보면 초현실을 만날 수 있게 될 것 같다. 두리번대며. 망설이며. 그러다가 단번에 뛰어나가고 솟아오르며. 목을 움켜쥔 손처럼. 눈물과 고백의 밤을 지나온 창백한 두 사람처럼. 서로를 동일시할 때마다 서로를 가장 멀리 밀치면서.
눈송이가 눈송이를 만나 눈 위로 떨어지는 소리.
기쁨도 슬픔도 아닌 커다랗고 검붉은
마음의 눈.
나는 아그라로 M은 델리에서 인천으로 가면서 우리의 여행은 끝났다. 혼자 카주라호를 둘러보다가 나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메일 주소도 전화번호도 교환했지만 나중에 한국에서 연락하거나 만난 적은 없다. 백화점에서 느긋하고 어딘가 분열된 듯한 연주곡이 들리면 나는 M을 생각하곤 한다. 음악에 갇힌 M을.
그러니까 나는
나무에 올라가는 법을 잊었다.
반복과 나숲은 빛으로 부푼다 검은 글씨로 검은 것을 파란 글씨로 파란 것을 쓴다 숲은 빛으로 부푼다 나선의 계단을 오른다 숲은 빛으로 부푼다 책을 펼친다 숲은 빛으로 부푼다 숲은 빛으로 부푼다 파랑새가 가득한 캔버스에서 파랑새를 지운다 숲은 빛으로 부푼다 눈이 내린다 숲은 빛으로 부푼다 눈을 온 도시를 뒤덮고 흔들고 울부짖고 웃고 움켜쥐고 나뭇가지를 뚝뚝 부러뜨리고 유연할 수 없는 것들 휘어지다 깨져버릴 때 가장 어려운 침묵이 발생할 때 숲은 빛으로 부푼다 계란 두 알 식빵 한 봉지 베이컨 숲은 빛으로 부푼다 거짓말을 한다 숲은 빛으로 부푼다 진실을 말한다 숲은 빛으로 부푼다 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본다 숲은 빛으로 부푼다 ;= 펭귄을 봤네 부리가 뾰족했네 눈이 까마네 이름을 지어줬네 인사를 했네 안녕 못 알아듣네 눈 위에 배를 대고 미끄러지는 펭귄
숲이 빛으로 부푼다
죽은 사람을 만났네 똑바로 볼 수 없었네, 나였네
나와 내가 마주 보는
소실점 속에서
숲은 빛으로 부풀고
숲은 빛으로 부푼다를 빼고 이 글을 다시 읽어보세요 이상합니다
이제 내가 소녀와 소년 얘기를 해줄까
휘파람 소리
슬레이트 지붕 위로 비 쏟아지는 소리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소리
네가 머리를 쓸어 넘기는 소리
죄를 고백하는 나의 목소리
갑자기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
낭독이 끝난 뒤의 박수 소리
경적 소리
오래된 나무가 한밤중 삐걱하고 틀어지는 소리
침묵에 가까운 네 숨소리
어째서 내가 숲이 빛으로 부푼다고 끝이 없을 것처럼 적어댔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유리창이 깨지고 눈발이 마루에 들이치던 밤을
심장이 뛰는 소리가 온몸을 뒤흔들던 고요를
피와 피가 뒤섞이고 눈물이 비명의 앞을 가리던
용서의시간
기도의 시간
귓속에서 날갯짓 안쪽으로 파고들던 나방
사각사각
팽창하며 뒤틀리며 열어젖혀지는 감각을
말로 할 수 없는 절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가 그린 그림 내가 지운 그림 내가 나의 허물 속에서 상상한 그림 끝없이 미끄러지며 녹고 있는 그림 다정한 그림 맞잡은 손에 관한 그림 눈이 만드는 고요를 호흡처럼 내재한 그림 아름다운 세 사람이 각자의 세계 속에서 온전히 홀로인 그림
숲은 빛으로 부푼다
숲은 빛으로 부푼다
밤이 끝나고 아침이 오듯
정전된 도시를 가장 높은 탑에서 바라볼 때
차례로 무너지듯 건물의 불이 나가는 것
도미노처럼 쓰러지는 빛을 볼 때
낭독 중인 시인의 입속에서
흘러나오는 문장이 흔들리며
청중의 귀에 가닿는 것
그림 속에서 영원히 한 곳을 응시하는
여섯 개 눈동자의 방향처럼
열리는 것
열리는 것
숲은 빛으로 빛으로
¿
이 시의
숲은 빛으로 부푼다 대신
새의 날개를 찢는다
혹은
벽에 못을 박는다
혹은
절벽이 쏟아진다
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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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ㅈ달라지는 것은 없겠지요
가장 빠른 속도로 뜀박질하는 상상을 합니다
심장 박동은 점점 빨라집니다
비밀의 개수를 세어보세요
적어보세요
검은색으로 파란색으로
가장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세요
창문이 깨질 때까지
그런 가능을 염두에 두세요
¿
펭귄
달력
스테이플러
미끄럼틀
펭귄
인간의 존엄과 인간의 악의
기도의 시간
용서할 수 없는
숲
¿
많아집니다 점점 불어납니다 당신을 잊지 않겠습니다 나를 망치며 당신을 증오하겠습니다 맹세합니다 불처럼 타오르겠습니다
숲은 빛으로 부푼다
숲은 빛으로 부푼다
¿
얼마나 얼마나 깊은 구멍인가요 나는 들여다봅니다 영혼이라는 것의 투명을 어둠을 빛을 파도를 들여다봅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나를 죽여주면 용서해줄게 약속할게 그을린 얼굴을 찢어 편지봉투에 넣었습니다 계속 하나의 노래를 반복해 들었습니다 밤새도록 터널 속을 걸었습니다 검지와 중지를 목구멍 깊숙이 집어넣어 전부 토해냈습니다 잊히지 않는 장면을 반복해서 생각하다 보면 장면은 조금씩 변하고 거기서 나는 사물처럼 웃고 있습니다 반복적으로 신경질적으로 나무가 되고 나무가 되고 나무가 되고 있습니다 얼마나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느낄 수 없습니다 나무 나무 나무 나무 나무 나무 나무 나무 나무 오로지 나무로써 나무인 채 나무가 되어 나무의 자세로 나무의 호흡으로 나무나무나무나무나무나무나무나무나무나무나무나무나무나무입니다 그렇게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무의 언어로
클리나멘
어두운 강의실에 앉아 그런 것을 떠올렸다
천 미터 상공에서 천 장의 종이를 뿌린 다음,
서로 겹쳐진 부분만 남긴다면
색색의 스프레이
분홍이나 파랑 초록 보라 빨강 빨강
포개진 영역만 표시한다면
가장 높은 건물 옥상에 올라가
내려다본다면
어떤 무늬일까?
우연을 실험하는 것
재미있지 않겠니
그런 생각을 했다
스물한 살의 여자들이 고통받는 것을 보며
세계는 정방형의 빛이고
빛 속에는 어둠뿐이라서
벌어진 틈으로 잠깐 훔쳐본
돌 같은 것을 말한다
망가지는 과정을 고스란히 찍어
가장 어두운 상자 속에 전시한다면
네 손가락을 하나씩 자르는 과정에 대한 작업
죽은 너의 살을 발라내 온몸의 뼈를 포개 쌓는 작업
죽은 연인을 가장 안전하게 만드는 공동생활
세계의 비밀에 가까워질 수도 없는데
끝없이 두들긴다
단단해질 것도 없는데 두들긴다
으스러질 때까지 두들긴다
단련…… 단련…… 단련……
유효할까
미치도록 아름다운
새가 될까
나는 어두운 바다를 앞에 두고 앉아
소리에 대해
소리를 만드는 힘에 대해
그걸 듣는 귀에 대해
멈춰 선 채 입술을 꿰맨다
말할 수 없는 것은 전부 겹쳐진 영역에 칠해진
색을 의미한다고 믿어
무늬와 무늬
네 꿈을 꾼 적은 없단다
네 꿈을 꾼다면
빨강뿐인 나무로 가득한 숲을 산책한다
네가 잊은 것들로 가득한 숲을
컨테이너가 산적한 부둣가처럼
어둠이 내리는 늦은 오후 창에 반사되는 아슬한 빛처럼
절박한 것이 전부 사라져서
이제 작업을 계속할 수 없다고
고백하는 사람에게 등을 돌리고
쉽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죄를 지었다
안개로 향하는 긴 터널이었다
재미있지 않니
모든 여자가 스물한 살이었거나
스물한 살이 될 거라는 게
고통받을 거라는 게
보는 눈이 그것을 예술이라고 부르는 게
생각을 한다
나는 생각을 한다는 말을 더 이상 적고 싶지 않다고 계속 생각했는데 또 생각한다고 쓰고 말았구나 생각을 한다 생각을 한다는 생각을 생각 위에 생각을 생각 위에 생각을 돌처럼 돌을 본 눈처럼 검은 동자 속의 뿌연 상想을 하양 속 깊고 깊은 그림자를 그림자 속에서 호흡하는
집
섬
불
겹과 겁
괜찮다고 말해줘서 고마워 그런데 실은 괜찮지 않아 미안해
그런 말을 했고
잠든 얼굴을 내내 바라보며
천 미터 상공에서 종이가 내려앉기까지의 시간
분포와 확률에 관한 예감
포개진 것들은 아름답고
경험
경험이 있습니다
경험을 주고 싶어
아름다움을 갖는 것
아름다움을 잊지 않는 것
아름다움을 만드는 것
여러 개의 손으로
여러 개의 눈으로
어두운 시골 마을처럼
겹과 겁
겹과 겁
파도가 쳐
도움의 돌
우리는 모든 쓸모없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기로 생각을 한다. 시장 앞 골목에 서서 고등어와 갈치 매달려 있는 돼지의 몸통과 잘린 머리를 본다. 차곡히 쌓여 있는 백합향 비누와 반쯤 돌아선 여배우의 얼굴이 늘어선 샴푸를 본다. 이것을 아무것도 아니다. 오토바이가 지나가고 포터 트럭이 시동을 건다. 나는 너무 느린 스스로를 원망하지만 이것은 애초에 어떤 흐름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수간이나 미러볼 혹은 죽음과 사랑을 소재로 삼았다. 특별한 것 센 것이 근원에 가까이 갈 수 있는 통로가 될 것 같았다. 나도 그랬다. 실종된 형제에 대해 쓰고 폭력과 근친에 대해 썼다. 수치스럽고 즐거웠다. 파란 트럭의 속력처럼. 마침내 불을 밝힌 가로등 아래 연인들의 포개진 어깨처럼. 거대한 것 또한 아무것도 아니므로. 사랑한다고 죽어버리라고 했다.
강바닥에는 무엇이 있을까. 나는 찢어진 타이어 속을 오가는 민물고기나 오래전에 투신해 앙상해진 몸을 생각했다. 이제 우리는 세 번씩 반복해서 말해야만 하고 그것은 의미 없는 일이지만 중요하다. 잘린 머리들은 모두 다른 표정이라서 끔찍하고 남의 글을 훔쳐볼 때 쉽게 느끼곤 하는 자괴처럼 단순하다. 나는 바람이 부는 방향에 따라 흔들리는 긴 머리카락, 뼈에서 유추할 수 없는 원래의 모습, 마지막 목소리 같은 것에 몰두해야만 한다.
혼종에 대해 말하거나 쓰는 것 그런 담론 속으로 이끌려가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혼종은 없으므로. 우리는 혼종에 대한 혼종, 일종의 갈망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 것 같다.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겠지만 이것은 사라진 마을에 대한 복기이고, 그 마을의 나무 아래 있던 돌에 대한 나의 생각이다.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돌은 어디에나 있고 우리는 그것을 안다.
동세포 생물
멀리 두번째 달이 떴다
너는 통속적인 말로 이루어진 시를 쓰고 싶다고 했다 새벽 두 시, 커다란 음악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아무도 웃지 않았다 갑갑하고 편안했다 근사한 기분을 찾을 수 있었다
달은 커지지도 작아지지도 않았다
꿈을 꿨다고 자주 썼지만 쉬운 시작이 필요했을 뿐 나무가 있고 내가 있는 우리의 세계는 없다 흑점 뭉툭한 얼굴로 너는 시, 시시, 하고 웃는다 있잖아 마음이라는 것이 있다면 뭐든 마음대로 할 수 있을까
거절의 밤들 허락보다 거절이 쉬우니까 거절을 택했을 뿐이야 흑백 화면 속 여자가 싸늘하게 읊조리며 된장국을 뜨고 밥을 퍼 식탁에 올린다 이상한 여자다 그치 빨리 감기 버튼을 누르며 너는 뒤척인다
새벽 세 시, 첫차가 뚫리면 바다에 가자, 순식간에 약속한 듯 모두 동의를 표했고 디제이는 백판을 돌리며 손을 흔들었다
수면 위에서
달은 수없이 부서지지만 그대로
해와 달처럼 자연스러운 온도 자연스러운 청력 자연스러운 기분 불과 행 절과 망 누운 몸들 눕힌 몸들
아가미가 벌어지는 물 밖의 마음으로
이제, 이제라고
먼지야 먼지 너는 정액을 삼킨 여자애처럼 얼굴을 찌푸렸다 아무도 듣지 않았다
디제이는 여보세요 춤을 추세요 하고
말하겠지 빗금처럼
바다는 무슨 바다
더 먼 쪽으로
커다란 손이 너무 커
달 같다
말할 뻔했어
옛날
첫번째 두번째 언덕의 그림자 뒤로
가늘고 뾰족한 눈들
기침하듯 왈칵했어
남자와 여자는 마주 앉아 말없이 밥과 국을 퍼 먹는다 남자는 신문을 보고 여자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남자를 곁눈질한다 남자는 고개를숙인 채 작게, 국 좀 더 줘 할 뿐
조금씩, 깎여나가, 아무 일도, 없었는데…….
배를 가른 붕어의 부레를 손끝으로 만져봤던 날
얇은 막이 불안하고 이상했다
신물이 난다 더 근사한 맛이 없었다 바위도 단풍도 첫눈도 여름 바다의 정지와 반복 빛도 소금도 어둠도 설탕도 아무것도 아니니까
아무도 웃지 않는다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는다 이런 게 통속인데 이게 시 같니 이게 시가 되니 맞은 편의 입이 벌떡 일어나 크게 벌어진다
그래 시다
손들 손을 아끼는 손목들
불가해하다
외출을 할 때마다 모자를 잃어버렸다 몇 년간 바다에 간 적 없다 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쉬웠다 술을 마시면 취하고 누우면 잠이 들었다
모든 밤이 흔들렸다
그대로
*
모든 클럽의 모든 무대에서 불이 꺼지면 디제이들
은 다 어디로 갈까
더러운 행주를 쥐고 어깨를 들썩이는 여자
짧은 치마를 입고 베란다에서 코피를 흘리는 여자
너와 함께 영원히 걷고 싶어 웃으며 몸을 배배 꼬는
여자
어떤 장면에서든 남자는 옆에 있다
어쩌면 말하고 싶었을 거다 춤 따위 그만두라고
전부 나가 소리 지르고 싶었을 거다
마음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마음이다
들켜버리고 싶다고 네가 울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교대로 화장실에 다녀왔고 거리로 나가 택시를 잡기
로 했다 알 것 같지만 웃음은 여전히 여기
남자가 여자를 눕히고 옷을 하나씩 벗기면서 여자
의 살갗을 핥는다
나는 시에 대해 말하는 일이 잦아졌다 말할수록
내 말이 진짜 같아서 더 많이 말하게 되곤 했다
빛들, 넘치는, 검은 빛들
이를 딱딱거리는 거리의 개들
시, 시시
욕을 잔뜩 갈기고 싶다
남자는 구름처럼 이 여자 저 여자 다시 이 여자 다
시 저 여자 그리고 새로운 여자들 사이를 오고 갔다
한 여자는 애를 지웠고 두 여자는 죽었다
바다 위에서 흔들리는 달
사라진 투명한 얼굴
흔한 이미지에 사로잡힌 마음을 감추기 힘들다
새벽 거리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시, 시시, 시……
소리를 내며
우리는 가까운 편의점으로 우르르 뛰어들어갔다
우산은 이미 동이나 있었다 번개가 쳤고 천둥이 울
렸다 굵은 빗방울이 빗금을 그으며 창 위로 흘렀다
코트를 뒤집어쓴 커플들
맞닿은 어깨들
멀리
달은 모습을 감춘다
한밤중 남자는 초를 들어 올려 죽은 여자의 얼굴
을 비춰보았다 붉은 립스틱을 입술에 칠해주었다
마음이 마음을 향해 기울어지는 것
빛 속을 유영하는 은빛 빗금들
엔딩크레디트가 올라간 후 돌아보니 너는 리모컨
을 쥔 채 잠들어 있었어 아버지처럼 소년처럼
*
이제 영원이라고 말하지 말자 안녕이란 말도 사랑해란 말도 하지 말자 우리는 금기를 견고히 하려 애쓴다
어떠니
물 밖과 물 안이 동시에 여기
개헤엄을 치듯 몸을 뒤틀며 토하고 먹고 토한다
이 밤은 너무 길다 아니 너무 멀다
한때는 무언가를 마구 써놓은 다음 아니, 하고 부정하는 수법도 꽤 괜찮다고 생각했지 여자가 매 끼니를 준비하는 것과 같다 식탁 위의 대칭을 이루는 식기들
가만히 들썩이는 어깨
음 그러지 말고 돌아 누워봐 음소거된 방 안에서 너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키득거렸다
멀리서 누가 나를 부르는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혔다 너에게 그 느낌을 이해시킬 수 없었다 여자와 남자가 하듯 밥을 먹고 밥을 먹고 밥을 먹었다
가만히 있어봐 다리 좀 벌리고 허리를 들어봐
그대로, 그대로
물속인 것처럼
시, 시시
아무것도 아니니까 실은
바닷속 깊은 동굴에는 차가운 몸이 불을 끌어안고 있대 그거 알아? ……나는 일어날 타이밍을 엿보며 얼굴들을 둘러보았다 비스듬히 펼쳐진 손바닥 차가운 월면
어떤 사람은 말을 더듬었다 그래서 사랑하게 되었다
각자의 가방을 나눠 갖고 각자의 육체를 데리고 흩어지는 물과 고기 가장 투명한 것은 가장 어두운 것 나는 우리가 삭제한 문장들을 우리가 기억도 하지 못하는 문장들을 모두 모아 상자에 집어넣고 손을 넣어 하나씩 꺼내보고 싶었다 그 조각들을 맞춰 시를 쓰면 어떨까 궁금해졌다
그게 네가 말한 통속적인 말로 이루어진 시일까, 근사할까
남자의 부인이 죽기 전에 한 말은 밥,이었다
빌어먹을
밥
파헤쳐진 땅의 흙냄새……
나는 너에게
전부 다 털어놓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어
시가 되니, 묻고 싶었어
울음을 그친 네가 난감해하며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병신
더러운 날개들
심도가 얕은 밤의 창
마침내 얼굴을 드러낸 사람
시, 시시
아무렇지도 않았다
나이트 크루징
우리의 낡은 자물쇠, 회색빛 건물에 들어섰을 때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인사를 했고 우리, 관절은 큰 키 때문에 자주 휘어졌지. 식별할 수 없는 줄기들, 불투명한 공기. 그거 알아? 목에 점이 없으면 귀신이래.
활동하기 좋은 청각을 찾아냈어. 놀라지 마. 너도 갖게 될 거야. 관 뚜껑을 망치질하는 소리, 네 몸속에서 물 흐르는 소리, 거울이 간직한 날숨의 흔적. 우리는 봤지. 쇼케이스에 진열된, 가죽을 벗겨낸 소머리들. 동그란 눈, 감기지 않는 빛. 나는 그걸 찍었다.
우리는 서로의 굴뚝, 척추는 점점 더 많은 각도를 분실했어. 기상관측소의 구름과 계기판처럼. 천장에 매달린 유리잔은 왜곡을 즐겼고, 가까워지는 불이 나를 돕는다. 놀러가고 싶은 날씨야. 쌓여 있는 머리통들. 삼켜지는 머리통들. 망각, 망각, 떨어지는 잎처럼 결사적으로. 멀리 있는 것들.
네 팔에는 기다란 지팡이 문신, 발끝에서 끝나는 별. 내가 네게 어떻게 죽고 싶냐고 물었을 때 넌 복상사라고 대답했지. 난 네 팔다리가 내 위로 축 늘어지는 걸 상상했다. 반인반수처럼, 우리는 날뛰며 건물의 모든 창을 들락거렸다. 회색빛을 통해서만 가능해지는 각, 숙련공의 아침과 밤.
상점들의 셔터가 내려간다. 다음 구역은 어디지? 눈으로 볼 수 없을 만큼 작은 것들을 생각해. 수은을 주물러 만든 근육, 페인트가 벗겨진 비스듬한 벽, 온도를 흉내 내는 혈관의 기후. 어떤 것은 위험하지. 나를 관통하는 회색의 놀라운 번식력. 연기처럼. 겁에 질린 얼굴. 점, 점. 물속에는 뒤집힌 도시. 우리, 창백한 목덜미들.
사랑의 역사
너랑 나는 화단에 앉아 사랑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람의 목소리를 녹음해서 틀고 그걸 다시 녹음하고 녹음한 걸 다시 틀고 다시 녹음하고 또 틀고 또 다시 녹음하고 이런 식의 과정을 계속해서 거치면 마지막에 남는 건 돌고래 울음소리 같은 어떤 음파뿐이래. 그래 그건 정말 사랑인 것 같다. 그걸로 시를 써야겠다. 그렇게 얘기하며 화단에 앉아 옥수수를 먹었다.
너는 내가 진통할 때 전화를 했다. 나는 죽을 거 같아 전화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너는 내기에서 이겼다고 그럴 줄 알았다고 좋아했다. 도무지 어떤 일도 끼어들 수 없는 비좁은 벽 사이에서. 혼자 주먹으로 벽을 내리치며 울었다. 윤은 소파에 앉아 안절부절 핸드폰을 보고. 나는 오늘 유 캔 네버 고 홈 어게인을 다시 읽었다. 그 시가 제일 좋다. 나는 그렇다.
옥수수는 은박지에 싸여 있었다. 김밥인 줄 알았다. 그런데 옥수수였고 옥수수를 먹는 일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썩 잘 어울리니까. 그런데 거꾸로, 돌고래 울음을 녹음하고 틀고 녹음하기를 반복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건 모른다. 모르지만 너무 슬플 것 같다.
오늘은 너랑 소파에 앉아 시간이 길게 길게 늘어지다가 뒤집혀버리는 순간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쩔 때는 림보에 갇혀 있는 기분도 든다. 그치만 행복한 무엇이 무형의 뿔처럼 조금씩 자란다. 나는 현상과 감정에 무연해지고 있다. 너도 그렇다고 했다. 그 이후에 무엇을 쓸 수 있을지 생각환다고. 나도 생각해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그 이후와 이후에 씌어진 시와 그 시의 이후에서부터 다시 씌어진 이후와…… 이것을 무수히 반복한 다음.
바다에서 떠내려온 닳고 반짝이는 유리조각을 주웠다.
사랑에 대해 말하고 싶다.
외계인이 있다고 생각했다.
밤과 낮이라고 두 번 말하지
이 글은 자신이 삼차대전으로 핵이 터진 후 남겨진 사람들과 공동 셸터에서 지내고 있다고 믿었던 소녀의 기록이다. 그녀는 아홉 살이 되던 해, 반복적인 망상과 발작으로 처음 내원했고 열다섯이 되던 해 병동에서 투신했다. 우리는 그녀의 일기를 발견했고 병증의 이해를 목적으로 훼손되지 않은 부분을 발췌하여 보관한다.
2086년 3월 5일 연구소장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한단 말이야?
작아진 페니스를 쥐고 흔들며
이건 꿈이구나
꿈인 줄 알지만 그래도 묻고 싶다
철창 너머에는 잘린 손과 유리병이 있다
종이 울리고
이렇게 깊은 창 속으로
이렇게 어두운 겁 속으로
빛과 유사한 소리가 흐르고
나는 내 귀를 의심했어
사냥꾼이 잡아온 두 아이를
철창에 가두고
아름다움에 대해 토론할 때
나는 입이 없는 것처럼
엘리베이터가 오 층을 향하고 있었다
떠오르는 느낌도 가끔 들어
얼마나 더 써댈 수 있을까 얼마나 더 써낼 수 있냐고 스스로 묻는다 스스로 묻고 여기에도 적어놓는다 아이들은 말을 할 수 없었고 우리는 추위를 대비해 열매와 땔감과 마른풀을 모았다 얼마간은 이렇게 생존할 수 있을 거야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철창은 방 한가운데 놓여 있다
누가 무엇을 하는지 잘 지켜볼 수 있도록 잘 보고 서로가 자리를 비웠을 때에도 누군가 이야기를 전해줄 수 있도록
너는 밤과 낮이라고 한다
너는 그게 사랑이라고 한다
아니야 사랑은 기다리는 거지
기다릴 것이 없어질 때까지
고층 건물이 세찬 바람에 조금씩 흔들리는 것을 본다고
네 비밀을 내가 다 알면
내 비밀을 네가 다 알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그래도 우린 잠든다 그르렁거리는 숨소리를 들으며 서로의 꿈에서 등을 돌린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천막 위로 빗줄기가 쏟아진다 투둑투둑 천장과 바닥이 호응하고 우리는 그 사이에 누워 기다린다 열매가 떨어지기를 땔감이 모자라기를 마른풀이 전부 젖어버리기를 우리를 관통하는 물방울들
모두 서로 배반할 거라고 맨 뒷장에 씌아져 있었지
우리는 기다린다
우리가 서로를 죽이기 전에
너희가 서로를 죽이기를
떠오를 때는 가라앉는 느낌도 들곤 해
저 산산이 부서지는 아름다운 창들을 보렴
이토록 커다란 텅 빔을
끝과 끝이 연쇄하는 꼴을
다 지워버릴 것을 계속해서 적어 내려가는 저 불쌍한 손들을 이미 씌어진 것들을 다시 반복하는 아무도 붙잡아주지 않는 차가운 마디를 아름다운 것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구나 그렇지 않니 네가 나를 죽이는 꿈을 꿨고 그 꿈을 믿어 그래서 더 큰 기다림도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
그렇게 사랑해
이것은 언어가 아니고 이것은 빛이 아니고
이것은 거울이 아니고 이것은 칫솔이 아니고
이것은 향기가 아니고 이것은 십자가가 아니고
엎드린 너희가 포개져 있을 때
나는 인생이란 뭘까 생각해
빨간 십자가가 멀리 깜박거리고
아무도 엿듣지 않았지만
계단 위로 계단을 구기며
들통난 거짓을 다시 꾸며 말하려고 해
아무 의미 없이
의미 없는 표정을 지으며
너희가 발악하며 철창을 쥐고 흔들 때까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네 옆에 누워
마지막 말은 뭘까 마지막 말은 뭘까 생각해
철창 안에 철창이 있고
철창 밖에 철창이 있고
이런 것도 있고
갑자기 눈이 먼 늙은 여자도 있지
배운 적 없지만 우리는 보살펴야 하지
철학적이고 무심한 듯
철창에 대해 이야기하고
거울 뒤에 숨어 얼굴을 훔쳐본다
내 눈을 의심했어
왜 나는 이것을 손에서 놓지 못할까
끝을 안다고 적어놓고서
의미 없다고 말해놓고서
끝도 없이
가라앉는 섬들을 옥상에 올라가 지켜봤어
등대가 하나둘 마지막으로 반짝, 잠겨버릴 때
나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어
모든 것을
미친 듯 비가 내리기 시작한 지 정확히 두 달이 되었다 노래는 빛을 이길까 네가 물었어 그건 나도 모르지 그래도 모르는 일을 질문해보는 건 나쁘지 않을 것 같아 나는 운명을 믿는 사람의 눈을 쳐다볼 수가 없다는 생각을 했어 가라앉을 때도 떠오르는 느낌이 들어서, 첫 장을 펼쳐 다시 읽어본다
너는 내게 진실만을 말했으면 좋겠어
진실만은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철장을 가운데 둔 채 벽에 등을 붙이고 마주 앉아 우리는 두 아이에 겹쳐진 서로의 모습을 바라볼 뿐이다
우리는 사랑에 관한 비유들로 낱말 놀이를 하기로 했어
너는 치즈, 소금, 얼음이라고 말했어
나는 입이 없는 것처럼
조용히 웃었어
왜 사라진 것들 뿐이니
구름, 바람, 비라고 내가 대답했어
그렇다면 도처에 사랑이 있겠네
빈정대며 네가 말했지
나는 끝까지 말하지 않았어
우리라고
사냥꾼이 두 아이를 철창에서 꺼냈어 이 녀석들은 한입거리도 안 되겠군 더 마르기 전에 끝장을 내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러자 눈먼 여자가 웃었어 차라리 나를 먹지 그래요 아니면 그 눈을 내게 줘요 그 눈을 내게 줘요
그 눈
여자가 점점 크게 눈, 눈, 눈 하고 외쳐댔어
너는 가만히 무릎을 끌어안고 있었지
나는 귀를 틀어막고 옥상으로 갔어
엘리베이터는 오 층에 있다
영원히 머물 것처럼 매 층을 스쳐 지나가고
영원히 올라갈 것처럼
나는 물에 잠긴 어두운 도시를 바라봤어
검은 눈이 내린다
우리는 사랑을 나눈 적이 없어
우리는 단지 비유로만
눈발을 뒤흔드는 비명
내 귀를 의심할 수 없었어 더 이상
의심할 것이 남아 있지 않으면 그때 우린 어떻게 될까
나는 무섭다 나는 나라는 말이 무섭고
네 서툰 다정함이 무섭고
서로를 끌어안고 울던
두 아이가 미친 듯이 서로를 두들겨 패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한다는 게
그걸 적어놓기 위해 일지를 펼치는 나의 두 손이
가능세계
이게 끝이면 좋겠다 끝장났으면 좋겠다
젖은 솜처럼
해수어와 담수어의 사이만큼
이미 실패했지만 다시 실패하고 싶다
천체의 운행 손을 잡아도 기분이 없는 밤 밤을 떠올리는 빈 나무 의자 의자가 되기 전 나무가 가졌을 그림 바지 자비 자비라는 오타 이야기 할 입과 듣지 않을 귀 남겨진 손 다시 남겨진 천체의 어마어마 그냥 다 끝장났으면 그랬으면
가장 많은 말과 한 번도 하지 못한 말
(0)에 가까워지는 줄무니 뱀 허물을 벗을수록 비대해지는 이상한 몸
없었어 처음부터 없었어
비늘과 새로 배운 칼 놀이
굴러간다 저기 굴러간다, 무엇이?
가파른 창들이 와장창 단숨에 부서지는 상상을 해 기억은 잘 나지 않고 관람차와 가족과 분홍색 솜사탕이 멀리 있던 것 같고 겁먹은 동물들의 파란 혓바닥 맛있는 것을 먹고 싶다 먹고 또 다시 먹고 싶다 줄무늬 뱀과 젖은 솜에게 전해줄 큰 가방이 필요해
없어도 없고 싶은 없는 것, 이런 문장은 위험하니 쓰지 말라고 충고해줄 선배 혹은 드럼을 치는 전 애인과 일면식도 없는 사진사 우리는 좁은 방에 무릎을 맞대고 앉아 고도와 조수간만의 차와 형이상학에 대해 밤새 떠들고 떠들다 지쳐
야 창문 좀 열어봐
귀찮아 니가 해
우주는 커다란 소리굽쇠다 이 명제는 백 년 뒤에 증명된다
창문은 열리지 않고
숲과 숲을 구성하는 작은 숲들과 작은 숲들을 구성하는 마음과 마음을 구성하는 뿌리 뿌리라는 물질과 물질을 구성하는 성분 성분의 원형은 숲
우리는 모두 열쇠를 갖고 있다
한 박자와 두 박자 사이 비좁게
아, 하고 터져 나오는
실연을 당하고 노스캐롤라이나에서 낚시를 했지
잡으면 놔주려고 했지만 한 마리도 못 잡고 내가 본 모든 물고기가 공장에서 만들어진 수중로봇들이 아닐까 생각했어
염기성의 그림들
사진사에게
본 적도 없는 빛을 주세요
빛바랜 인화지 위 가장 긴 노출을 담아
끝장이라고 다 끝이라고
불러주세요 나를
그런 방식으로 그림
우리는 사각 대리석 테이블에 앉아 점성과 배우와 작업실을, 소설을 쓰겠다고 선언한 길드 애호가를, 어떤 경향과 어떤 경향을 이야기하려는 경향을, 우유와 치즈 우유와 치즈처럼 조용한 돌들
제목은 뱀의 죽음…… 죽음의 뱀…… 뱀과 죽음…… 뱀을 죽이는 스무 가지 밤…… 죽은 뱀……죽도록
뱀………………………………………………………………………………………………………………등등
왜지? 왜 잊히지 않는 걸까
이것은 첫 문장
어쩌면 끝 문장
남발을 하지
나는 유리창 위에 앞발이 잘려 주저앉은 기린을 그리려 하였다 주저앉음을 관망하며 주저앉음을 관통하는 빛을 보고 싶다 반복과 반복 사이에서 우왕좌왕하고 싶다
해러터스 곶에는 끝내주는 가슴! 굽은 낚싯대! 흰머리들! 이런 것을 다 알게 되다니!
……
끝장날 것 같은
모래 알갱이를 내려다본다
숲이 떠오르고 떠오르다 못해 거대하게 융기한다 광경, 광경이라고 단호하고 체계적으로 흰 옷과 검은 옷을 번갈아 입는다 실패하고 싶어도 실패할 수 없는 의복 같은 기분 호스텔의 청각 실험이 가능한 공간은 분위기를 엎지른다
가만히 누워 가만히 벤치에 누워 하늘을 보면 하늘은 터무니없이 낮고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워 날씨는 어이없구나 총력을 다해 할 일 없는 하루하루, 하루, 하루 지나가는 손목들 붙들고 싶다 터무니없는 것을 시작하고 싶다
부피와 탈부피 사이 홀연히 떠오르는 열쇠 꾸러미 열쇠 꾸러미를 움켜쥔 가느다란 뿌리들 뿌리였던 차가운 물질
왜냐고? 끝장나라고
됐어 다 필요 없어
말로 할 수 없는 말이
말뿐인 말로
앞발이 잘린 채 뒤틀릴 때
온도와 함께 혓바닥을 잃을 때
침대로 가득한 방에서 방의 한계를 체감하며 사진과 정해지지 못한 角 나는 하고 싶어 하다가 죽고 싶어 그런 것을 무어라 해야 할까
지팡이와 함께 저녁을 먹는다 저녁은 참치와 딱딱한 빵 저녁은 로봇과 건전지 저녁은 흘러넘쳐 어려운 음차와 너무 어려운 음차 위험한 식탁 위험한 전기 위험한 범람, 속에서 우리는 단단함을 되새긴다
나는 담아내고 싶어 숲의 창백과 바다의 권태 손목은 병렬 비 내리는 음가 지워질 광경들 광경이라는 말을 달아주겠다 밀봉해서 꼭 끌어안아 터뜨려버리고 싶다 뾰족
왜 잊히지 않는 걸까
뱀들이 교활을 뽐내는 법
장님 고양이의 보은
열쇠를 돌리는 풍선
끝장난 걸 알고도 끝장나고 싶어
등등
낭만이라고 말해봐라 또 말해봐라 사진사의 프레임 안으로 파고드는 별들 하나와 하나를 더하고 둘과 둘을 더해도 변하지 않는 그런 그림
크랭크인 크랭크아웃 완성된 소설을 줄래? 자꾸 고치지 말구 그만 내놔 이 자식아
킥 드럼이 부서질 때까지 달리는 숲
오해받고 싶다 하염없이 넘어지고 싶다
이것은 뒤집힌 나무의 전언
핸들을 쥐고 바다를
그는 파조를 듣는다 파조를 친다 파조를 부른다 그는 소설을 쓰지만 소설을 지운다 지우기 위해 쓰고, 다시 지운다
낚싯대 끝에 매달린
엉덩이
왼쪽 오른쪽 왼쪽 오른쪽
마지막에는 뭐가 남을까
전파를 찾아 다리들이 온다
말하겠지 하고 싶다고 하고 싶다고
결국 하겠지
어떻게든
드럼통 안에는 기름
물에 뜬다 예쁘게
차원은 닫혀 있어서
한 번 두 번
더하기 곱하기
물에 뜬다 못과 망치 못과 망치 목과 만치 그런 그림으로 그림 사진사를 찍어줘야지 끝없이 잊히는 그림 있지도 않은 그런 그림
거스르는 것이 회귀인지 도주인지 봄의 식물이 싹을 내미는 공포인지 하고 싶다 하고 또 하고 하다가 분류하거나 생각할 필요도 없이 구들장인 어깨와 효과와 없는 반복으로 가득 차고 싶다
유리도시
이제 세계를 말해볼까
그르렁대는 고양이의 리듬으로
엉성하게 엮인 직물의 모양으로
입술이 입술에 닿을 것 같다
담장 아래 두 다리가 있다
막 연주를 끝낸 피아니스트의
침묵에 가까운 숨소리
나는 나쁜 기억력을 소망한다
세계는 흐르는 창이다
바깥도 안도 아니다
외국어처럼
호의적인 눈물로 가득 차 있다
구급차의 일인용 침대처럼
빛 속에서
관절이 모두 녹아내리는 기분이다
침묵을 깨며 삐걱이는 철제의자처럼
시작부터 시작만을 반복하는 세계
엎질러진 소독약처럼
사이렌이 울려 퍼지는 거리에 서서
다시 직물의 형태로
다시 뜯긴 귀의 청력으로
나는 나쁜 기억력을 소망한다
건반을 내려치기 직전
잠시 공중에 뜬 두 손
링거액이 천천히 몸속으로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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