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애시인의 초청으로 언양 반구대 안쪽 대곡리 한실마을을 다녀 왔습니다. 금요일 저녁에 들어갔습니다. 길이 대략난감이었습니다. 어떤 이는 구곡양장이라 표현하기도 하더군요. 이렇듯 오지로 남을 수 있음은 길 때문이라 여겨졌습니다.
운전을 했던 서정원 시인이 조마조마 차를 몰았습니다. 한 10년 만에 기억을 더듬어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땐 비포장이었습니다. 용케 마을 입구로 내려왔습니다. 재수가 없으면, 어느 쪽이든 차량 한대는 뒤로 물러설 수 밖에 없는 노폭이기 때문에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고, 거기다 장난이 아니게 비가 쏟아져 내심 마음을 쪼리게 했습니다
시내 끝에 사연호가 몸을 불리고 있었습니다.
민박집입니다. 조용한 곳을 찾아오는 이들이 더러 묵고 가나 봅니다. 다음 카페 반구대암각화 한실 민박집을 찾으면 정보를 알려 줍니다.
비가 그치고 물안개가 서린 골짜기를 둘러 봅니다. 본래 한실(一室)은 순 우리말로는 '한골'입니다. '한'은 '크다'는 뜻으로, 한실은 큰 골짜기를 의미하는데, 한실마을은 골짜기처럼 '많은 것들이 모이는 곳'이었는데, 대곡천이 막하면서 '모일 수 없는 곳'으로 변했습니다. 한실마을을 둘러싼 산은 연화산(蓮花山: 532m) 대곡리와 두동면 은편리, 법서읍 사연리의 경계를 이루는 '연꽃이 핀 형상'입니다.
월성박씨(月城朴氏) 문중의 재실로서 이 마을 입향조인 절충장군(折衝將軍) 행용양위부호군(行龍槐衛副護軍) 죽와(竹窩) 박희정(朴禧貞 : 일명 禧榮)은 고려 중직대부(中直大夫) 예조전서(禮曹典書) 박유(朴瑜)의 9대손으로 영천(永川)에서 태어나 임진왜란시 이곳으로 낙남피거(落南避居)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후손들이 그를 추모하여 1974년(갑인) 10월에 세웠는데 청사(靑蓑) 이종운(李鍾運 : 1904∼1981)이 쓴 <백순재기(百順齋記)>가 있다고 전합니다.
오후 8시 경 도착했습니다만 아직은 날이 밝습니다. 여름임을 실감합니다.
어다 갔다 오냐고 밥먹자는 표정입니다.
서서히 어둠이 내리고
오리백숙에 간 천렵, 찌짐(부침개) 한 상 푸집합니다. 희안하게도 술이 취하지 않았습니다. 술판을 연 다음 혼자서 소주 3병을 먹을 때 쯤인데도 취기가 돌지 않았습니다. 분위기 탓도 있겠지만, 필시 간을 안주 삼아 집중 공략했기 때문이리라 판단합니다.
빗줄기가 한차례 지나갑니다. 국제신문 박창희 부국장이 기타를 들었습니다 . 그리고 이어지는 노래들... 봄날은 간다, 북한강에서, 임진강으로 넘어가다 저의 애창곡 꽃등들어 님오시면 과 송학사가 보태어 지고 분위기는 흐드러져 질퍽해집니다.
박국장의 성화에 못이겨 고금란 내외가 어둔 밤길을 달려와 가락을 보태니, 부러울 것이 없는 밤이 됐습니다.
모두들 눈 지긋이 감고 빗소리 장단에 오카리나의 청아한 선율을 듣습니다.
서정원 시인 내외입니다. 지난밤 과음으로 술을 멀리하던 서시인,
돌아가며 한 자락씩 보탭니다.
.
박국장이 밤이 이슥하여 일어 섰습니다. 짬을 내어 기타를 매고 온 그가 고마웠습니다.
얼마전 새로 만든 아래채에 깃들어 잠을 청했습니다. 천장을 바러보나 싶었는데, 시나브로 잠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봉창문을 여니 빛이 쏟아져 들어 왔습니다. 그 사이 서시인 내외는 새벽같이 떠났고...
세수도 안했는데 한 컷 했습니다. 기념으로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냉장고 앞으로 가니
이 집 이용수칙이 깨알같이 적혀 있었습니다.
오리백숙 죽으로 아즘을 먹고, 마을 순례를 해봅니다.
방은 아래채 두칸, 위채 두칸입니다.
이웃집 영감님이 일터로 나가고 있습니다.
빗속에서 보았던 시내와 비 그치고 보는 시내가 그림을 달리 합니다.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시냇물 소리가 경쾌합니다.
민박집 구경을 해 봅니다.
칡넝쿨로 만든 울타리가 인상적입니다.
그리고 간만에 보는 텔레비젼 안테나
대문이 열려 있길레 문밖에서 집구경을 하자니, 이 집 주인장 백씨(박씨인듯도 하고)가 선뜻 커피 한잔하고 가라고 부릅니다.
60을 갓 넘긴 백씨는 귀가 잘 들리지 않는데다 몸이 많이 불편해 보였습니다. 그로부터 이 마을의 내력과 그의 지나온 세월을 듣습니다. 그의 입향조로부터 시작해서 이것 저것 들려주었습니다. 인상은 밝은데 그간의 세월이 녹녹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가 기거하는 방에 낡은 테레비 한대와 시계, 선풍기, 밥통이 세간살이의 전부인듯 했습니다만 그렇다고 아쉬운 자락도 없어 보였습니다.
정지(부엌)로 들어 가보았습니다.
아궁이며 시렁 그리고 뒷문이 새삼 고향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장독대며 뒤울이 깨끔(정갈)합니다. 사철나무로 가꾼 울타리를 자랑하기도 했습니다.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한실마을은 댐 건설 당시 80여 가구가 있었지만 대부분 수몰지역에 편입되고 한쪽 모서리가 아직도 동네를 이루면서 남아 있습니다. 사연댐 수몰 후 40여년 이상 지리적·경제적으로 고립된 마을이라 볼 수 있습니다. 현재 한실마을은 15세대 26명(남15,여11)의 주민이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을 들여다 보면 원주민과 유입주민 사이에 생각들이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7월5일자 울산여성신문의 보도에 의하면 " 지난 2009년 12월 울주군이 경원대학교 산업협력단에 의뢰, 그 결과를 발표한 ‘울주군 사연댐 상류지역 종합정비계획 수립 용역’보고서에 따르면, 상수원보호구역 안에 있는 한실마을 주민들은 먼저 주민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에 대한 보상차원의 매입을 요구하고, 토지보상 매입이 불가할 경우 생활기반애로 사항의 개선을 요구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또 반구대마을에서 한실마을까지 마을진입로의 편도 2차선도로 규모로 보수 및 보강과, 농토 경지정리와 농로정비, 마을버스 및 도선용 선박 운영, 노후 주택의 주거여건 개선, 한실마을 원주민에 대한 금전적 지원, 경로당 건립, 텔레비전 수신여건 및 이동전화 통신환경 개선, 하수처리시설 등 기타 생활기반 시설설치 등을 요구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한실마을 원주민들의 요구에 반해 새로 주택을 마련하고 입주를 한 유입주민들은 이주하기를 거부하면서 생활기반시설 설치와 지역개발을 통해 더 살기 좋은 마을로 발전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고 나서 대립양상을 띄고 있다. 결국 한실마을의 원주민 이주와 마을개발을 놓고 현재 살고 있는 주민들의 의견이 서로 상충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경원대학교 용역보고서는 주민요구 1안(매입보상)에 대해 토지보상비용에서 255억원의 예산이 소요될 것으로 분석했다. 그러나 생활편의시설의 정비와 신설에 필요한 예산으로 301억원이 들어갈 것으로 분석해 논란의 여지를 남겼다. 이는 토지매입을 통해 주민을 이주시키면 255억원이라는 상대적으로 적은 예산으로 사연댐의 식수원을 환경피해로부터 보호하고, 울산시민들이 그만큼 깨끗한 물을 먹을 수 있다는 주장과, 마을의 생활기반개선 사업을 통해 맑은 식수원확보가 가능하고, 살기 좋은 한실마을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이에 대해 울산시민들과 지역 정치권에서는 마을의 개발보다 토지보상을 통한 주민이주에 동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불과 15세대 26명(남15,여11)의 주민이 모두인 한실마을에 막대한 국가예산을 투입해 보상과 개발 등, 어떠한 논리에 따라 집행하더라도 그 실효성에 대해 의문을 나타내는 시민들이 많아 관계기관의 결정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고 전하고 있습니다.
논은 거의 없고 대부분 밭 농사 중심입니다.
그 하늘에 맹금류가 보이길레 눈여겨 보지만 구별이 쉽지 않습니다. 참매같기도 하고 ...
이전에 대곡분교 터 입니다.
반곡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대곡분교는 본시 사연댐 수몰전에는 백순재(百順齋) 건너편(서쪽)인 마을 당산(堂山: 堂祀木이 있는 산) 밑 들판 냇가(334번지)에 있었다고 합니다. 사연댐 축조공사로 1964년 윗마을로 이전했다가 1984년 폐교, 울주교육청에서 개인에게 불하(拂下)하였다고 합니다. 학교는 일제시대인 1934년 1월 1일 언양공립보통학교(彦陽公立普通學校 : 현 언양초등학교) 간이학교(簡易學校)로 설립되어 꽤나 오랜 역사를 간직했음에도, 이제 흔적도 없이 사리졌습니다. 다만 은행나무 몇 그루가 이전에 학교였다는 사실을 간직하고 있을 뿐입니다.
심심할 즈음에 박재정이사가 택시를 타고 왔습니다. 양주를 두 병이나 들고 ...
벚나무 그늘 평상에 앉아 7월 한낮의 하늘과 지나가는 바람을 구경합니다. 지붕위에 다람쥐 한 마리도 동참합니다.
오리를 대여섯 마리 구했는데, 세번째 오리 백숙의 등장입니다.
매미울음 속에 심심함을 즐길 따름입니다.
그러다가 내키는데로 마실길로 나섭니다.
전화도 안되고, 텔레비젼도 나오지 않습니다. sk는 그런대로 연결됩니다. 옛날에 그렇게 살았습니다. 해가 서편으로 갈 즈음 마을 사람들은 밭으로 일하러 나갑니다. 땡볕에 일하기란 고역이기 때문에 좀 선선한 오후 시간을 이용해 일을 합니다. 그러다 박꽃이 피면 여기 저기 저녘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오르고, 그 연기가 마을 하나를 자욱하게 드리웁니다. 시인 고은은 그런 풍경을 숨막히게 표현했습니다. "저녁연기 피어 나는 마을 , 엎드려 절하고 싶다" 기막힌 시입니다. 요즘은 그런 풍경을 만나기 쉽지 않습니다.
옛날 이 지방에서는 옛날 농소면(農所面) 달천리(達川里 : 현 북구 농소3동)에 대규모 철장(鐵場 : 鐵店에서 쇠를 불리는 곳)이 있었고 합니다. 당시 거기에서 사용하는 땔감의 대다수가 산림이 울창한 언양 한실(大谷)에서 공급하였는데 수시로 수십명의 장정들이 며칠간 태산험로를 무릅쓰고 소바리에 싣고 지게로 져 날랐다고 합니다. 이때 불매질(풀무질: 풀무로 바람을 일으켜 쇠를 부리는 일)을 하면서 피곤과 지루함을 달래기 위하여 부른 노동요(勞動謠)가 곧 옛날 할머니들이 심심할 띠나 애기들을 달랠 때 입버릇 처럼 잘 부르던 저 유명한 〈불매가〉라고 합니다.
한편 건너편 산라락 계곡지대를 사학골로 부르는데, 반구대에서 한실로 흐르는 대곡천(大谷川)과 합류하는 지점까지의 계곡을 고하골(庫下谷) 또는 사학골(死鶴谷)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 하류가 1960년대 중반 사연댐의 축조로 수몰되었지만 예전에는. 고하마을에서 동남쪽인 반구대로 가는 골짜기 왼쪽(계곡의 북쪽) 산이 풍수지리설로 볼 때 흡사 학(鶴)의 형국이라 하여 사학골(死鶴谷)이라 하였다고 합니다. 이 산은 왼쪽 날개가 없는 학의 형상이라, 학이 한 쪽 날개가 없으니 자유롭지 못하여 죽은 학과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 곧 사학골입니다. 이 사학골에는 여러 가지 전설이 있으나 그 중 대표적인 것의 하나는 옛날 이 부근에 미영(목화)이 잘 자라는 밭이 있었는데 이 밭에서 어느 해 젊은 각시가 목화를 따다 '각시골'로 호랑이에게 물려갔고, 마을사람들이 동원되어 찾아보니 '묵은등(嶝)'에서 사람을 잡아 묵(먹)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이 묵은등에 가면 작은 묵묘(陳墓)가 하나 있는데 이것이 그 때 그 호랑이에게 잡혀 먹힌 사람들의 뼈를 모아 묻어 둔 묘라고 합니다.
사연호의 수위가 높아 졌습니다.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잉어가 풀쩍 뛰어 올랐다 철퍼덕 하고 떨어지는 소리로 간간이 수면의 적막이 깨어지기도 합니다.
다음 카페 나이스 산악회에서 이곳을 다녀갔나 봅니다.
그리고 다음 지도에서 캡쳐한 인공위성입니다. 수몰되기 전의 마을, 집터며 담장, 우물을 확인합니다. 물에 잠겨 고향을 잃는 다는 것은 슬픈일입니다.
대곡리는 한때 광복(1945. 8) 전후부터 사연댐 축조 직전인 1962년 7월까지 대곡리(본동인 한실)와 반구리(반구대가 있는 마을)의 2개의 행정리로 분리되어 있은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수몰직전 당시 한실은 85호 정도가 되었는데, 그중 시내를 중심으로 서쪽(건너각단)이 15호, 남쪽이 20호, 중간마을이 10호, 동쪽마을이 30호 정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저 바닥 어딘가에 서당마실, 지통(닥<楮>을 가공해서 종이를 뜰 때 나무통으로 된 지통(紙沂)에 풀어서 담구어 떴으므로, 이와같은 제지업소(製紙業所)가 있던 마을) 마실이 있다고 하며, 지금도 겨울 갈수기 때면 마을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다음 카페 반구대 암각화 한실 민박집에서 촬영한 수몰 집터
소울음 골짜기에 울려 퍼집니다. 아마도 주인을 찾는 듯합니다. 소 키우는 집이 몇 집 없는데다 반갑기도 하여 한 컥 담아 보았습니다. 하기사 이맘때면 꼴 망태 메고 소 몰고 냇가에 가서 놀 시간입니다. 소는 소대로 배불리 먹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신나게 놀다가 밥 때 맞취 귀가하겠지요. 잊혀진 일상입니다.
길 걷기를 하는 마니아들이 좋아하는 그림입니다. 주로 중장년층이 주된 층임을 고려한다면 그들은 잃어버린 것에 대한 향수를 찾거나 보상받고 싶어 합니다. 잘되거나 못되거나 나름 열심히 살았습니다. 어느 정도 애들 다 크고, 시간적 여유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요즘 애들 노는 문화를 따라 갈 수도 없는 나이입니다.
다들 저런 흙집에서 부족하게 자랐습니다. 아마도 일제시대의 공출과 그에 뒤이은 세월이 그렇게 허급지급 굶주림을 면하는데 바쳐졌는지도 모릅니다. 기실 우리네는 쌀밥이 주식이었습니다. 진공 청소기로 먼지를 빨아들이듯 빼앗가다 보니, 주식은 턱없이 부족할 수 밖에 없고, 그러다 보니 보리나 감자, 옥수수가 주식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고약한 세월이었습니다. 실제 일제 말기 조선 미곡 생산량의 3/2를 일제가 수탈해 갔습니다. 경술국치 무렵 생산량의 5%를 일제가 가져갔던 것에 비하면 엄청난 양입니다.
모깃불을 피웠습니다. 그리고 평상에서 저녁을 먹습니다. 그 사이 경주에서 송담월 보살이 왔습니다.
그녀가 닭도리탕과 오리 주물럭을 만들었습니다. 초면이었지만 금새 친해졌습니다.
또 밤늦도록 술입니다. 그리고 울산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로 있는 김장용씨가 가까이 있다는 이유로 호출되어 자리에 합석했습니다. 그 역시 근방 지리는 꽤나 밝은편인데도, 한실은 처음이라며 밤길 구비구비 돈 이야기부터 꺼집어 냅니다. 그런 곳입니다.
박시인 얼굴이 발갛습니다. 날이 밝으면 또 혼자가 되기에, 섭섭한 가 봅니다. 누님 같은 분입니다.
나이 차이가 얼마 안나 술김에 김대표와 저, 그리고 송보살이 친구하기로 합니다. 이래저래 술 마시다 보니 또 자정이 훌쩍 지나고, 송보살은 피곤에 겨워 먼저 아웃하고 남은 술 마저 비우고 이틀째 밤을 넘깁니다.
깨우기 없기 라는 약조 아래 늦이막이 자고 일어나 아쉽지만 점심 전에 귀가길에 올랐습니다.
꼬불꼬불 산길을 넘어 반구대로 향합니다.
방문자 대부분이 길이 이쯤에서 끝난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무조건 길 따라 끝까지 오라 입니다.
반구서원이 있는 반구교 에서 거리상으로 4km 남짓한 거리이지만, 일반인들은 한실까지 올 일도 없거니와 알려지지 않았기에 있는 지 조차 모릅니다. 요즘들어 카페나 블로그를 통해 서서히 알려지고 있긴 하지만, 그냥 이정도이기를 희망해봅니다. 그래서 진짜 조용하게 지내다 가는 곳이었으면 합니다.
이왕 온 김에 반구대 암각화는 보고 가야하지 않겠냐는 김대표의 제의에 그러자 하고 테크를 따라 갑니다.
인근에 밤나무 밭이 있는데, 방문자들이 한 주머니씩 주워 가나 봅니다. 해서 내걸은 경고 문구인듯 싶습니다.
지역 문인들이 반구대며 암각화를 노래하였습니다.
암각화는 1년중 8개월을 물 속에 잠겨 있다고 합니다. 이 문제로 울산을 비롯한 학계의 관심과 보전 논쟁이 비등합니다. 국보 285호 반구대암각화입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잠겨 있었습니다.
하여 안내판에 있는 그림을 찍어 왔습니다.
웹사이트에 있는 글입니다. " 암각화란 선사시대의 사람들이 생활 주변에서 일어난 갖가지 일들을 주제로 삼아 그것을 바위에 새겨서 그린 그림이다. 주로 커다란 바위 등 집단의 성스러운 장소에 그렸는데, 사람들은 그곳에 모여서 각종 의례를 거행하였다고 추측된다.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는 태화강의 한 지류인 대곡천의 소위 '건너 각단' 이라고 부르는 곳에 그려져 있으며, 그림이 집중된 곳의 바위면의 크기는 너비 10m, 높이 3m이다. 그러나 그 좌우에서도 적지 않은 형상들이 확인되고 있어 암각화가 새겨진 바위는 모두 10여개에 이른다.
이 암각화는 신석기 시대부터 여러 시기에 걸쳐서 제작되었으리라 여겨지며 시대별 양식의 차이를 살필 수 있는데, 표현 대상의 내부를 모두 쪼아낸 면쪼기 (面刻, 모두쪼기) 기법과 윤곽만을 쪼아낸 선쪼기(線刻) 기법으로 나눌 수 있다. 새겨진 물상은 크게 바다동물과 육지동물, 사람, 도구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바다동물로는 고래, 물개, 거북등이, 육지동물로는 사슴, 호랑이, 멧돼지, 개 등이 많이 보인다. 사람은 얼굴만 그려진 경우와 바로 선 모습, 옆으로 선 모습, 배에 탄 모습 등을 볼 수 있다. 도구로는 배, 울타리, 그물, 작살, 노(弩)와 비슷한 물건 등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선사인들의 사냥 활동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사냥감이 풍성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바위에 새긴 것으로 여겨지는데, 동물과 사냥 장면을 생명력있게 표현하고 사물의 특징을 실감나게 묘사한, 사냥미술인 동시에 종교미술로, 선사시대 사람의 생활과 풍습을 살필 수 있는 최고 걸작품으로 평가된다"
시간이 충분치 못해 주마간산 격으로 들러 보고 차창으로 몇 컷 담으며 2박3일 한실 나들이를 마감합니다.
반구대는 언양에서 동북쪽으로 약 10㎞ 떨어진 대곡리의 반구마을 입구에 있습니다. 대곡천변(大谷川邊)의 남안(南岸)에 기암절벽이 우뚝 솟아 올라 놓은 대(臺)를 이룬 곳으로 그 앞에 거북의 목과 같이 낮게 뻗어 동쪽으로 길게 머리를 들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반구대라 명명(命名)됐다 합니다. 고려 말의 포은 정몽주(鄭夢周)가 언양 요도(蓼島 : 어음리)에 귀양와서 적소(謫所 : 귀양살이 하는 곳)에서 우거(寓居 : 남의 집이나 타향에서 임시로 몸을 의탁하여 삶)할 때 자주 와서 경관을 즐겼으며, 그를 찾는 많은 이 지방 유생(儒生 : 선비)들에게 교훈을 남겼다. 그리고 조선조의 성리학자 회재 이언적(李彦迪), 한강 정구(鄭逑) 같은 고명한 학자들이 이곳을 찾아 경관을 즐기며 문풍(文風)을 진작시키고 명시를 남겼는데, 여기를 가리켜 포은대(圃隱臺)라고도 합니다. 또 여기에는 반고서원유허비(1901)가 있는데, 위의 삼현(三賢)을 모신 반구서원을 비롯하여 집청정(集淸亭), 모은정(慕隱亭) 등이 있어 주변 경관과 어울려 절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특히 제암(霽巖) 최종겸(崔宗謙 : 1719∼92)은 그의 문집「제암집」에 집청정(集淸亭)·비래봉(飛來峰)·향로봉(香爐峰)·옥천동(玉泉洞)·포은대(圃隱臺)·선유대(仙遊臺)·관어석(觀魚石)·망선대(望仙臺)·완화계(浣花溪)·청몽루(淸夢樓) 등 오언절구(五言絶句) 8수를 읊어 이른바 <반구십영(盤龜十詠)>이라 하여 전하고 있습니다.
반구서원
대곡리(반구) 길가에 있는 경주최씨의 집청정(集淸亭) 입니다.
담장 넘어 참나리가 구경하고 가라고 유혹하지만, 그냥 스칩니다.
한실을 벗어나자 말자 여유가 없어졌습니다.
출처: 다음 블로그 홍이 아뜨리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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