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 누워 / 박해수
도꼬마리씨 하나/ 임영조
세한도/ 백무산
반쯤 깨진 연탄/ 안도현
호라지좆/ 김중식
소주 한 병이 공짜/ 임희구
길/ 정희성
그 집을 생각하면/ 김남주
파문 / 이은봉
어머니는 아직도 꽃무늬 팬티를 입는다 / 김경주
딸을 기다리며-고3 아이에게/ 박철
빈들/ 강연호
물고기에게 배우다/ 맹문재
우화의 강/ 마종기
작명의 즐거움/ 이정록
식민지의 국어시간/ 문병란
가을/ 송찬호
코스모스는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다/ 이규리
애기똥풀 꽃의 웃음/ 권달웅
친정 / 조정숙
해남에서 온 편지/ 이지엽
그리운 남풍 2/ 도광의
고향길 / 신경림
흰 웃음소리/ 이상국
비 듣는 밤/ 최창균
고쳐 말했더니/ 오은영
개 두 마리/ 이동순
소규모 인생 계획/ 이장욱
나를 열받게 하는 것들/ 안도현
송도 앞 바다를 바라보면서/ 장기려
세상이 달라졌다/ 정희성
패배메시지/ 박노해
밥알 하나/ 이안
어느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 B. 브레히트
숲의 정치―똘레랑스에 대하여/ 조기조
깡통/ 곽재구
망종芒種/ 홍해리
오뉴월/ 이문구
너 갈 데로 가거라 / 김규동
이런 내가 되어야 한다/ 신경림
관심을 끌기 위해서였다/ 이성복
거위의 꿈/ 박제영
아름다운 동행을 위하여 / 송해월
회향 / 박노해
젊은 사랑- 아들에게/ 문정희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 정채봉
나의 마음은 뛰노라/ w. 워드워즈
뜨거운 돌/ 나희덕
겁나게와 잉 사이 / 이원규
고구마를 삶으며 / 서안나
쇠똥구리가 사라진 까닭/ 이정인
봄날/ 오세영
홀딱새/ 손세실리아
노신(魯迅)/ 김광균
그 사람을 가졌는가/ 함석헌
자작나무(白樺) / 백석
사평역(沙平驛)에서 / 곽재구
단추를 채우면서/ 천양희
연리지 생각/ 박시교
날아오른 발자국/ 박방희
새해 첫 기적 / 반칠환
벗 하나 있었으면 / 도종환
시인 선서/ 김종해
막스 에르만의 잠언시
형제 / 김준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
내 안의 적들/ 이재무
천년 은행나무의 말씀/ 김영선
목계장터 / 신경림
똥파리/ 김상미
돌/ 손진은
머나먼 돌멩이/ 이덕규
은행나무 부부/ 반칠환
은행나무 연가/ 윤준경
방황하는 호수 / 박명보
낮술 한잔을 권하다/ 박상천
반장엄마/ 정이랑
왕피천, 가을/ 김미정
바다에 누워 / 박해수
내 하나의 목숨으로 태어나
바다에 누워
해 저문 노을을 바라본다
설익은 햇살이 따라오고
젖빛 젖은 파도는 눈물인들 씻기워 간다
일만(一萬)의 눈초리가 가라앉고
포물(抛物)의 흘러 움직이는 속에
뭇 별도 제각기 누워 잠잔다
마음은 시퍼렇게 흘러 간다
바다에 누워 외로운 물새가 될까
물살이 퍼져감은
만상(萬象)을 안고 가듯 아물거린다.
마음도 바다에 누워 달을 보고 달을 안고
목숨의 맥(脈)이 실려간다
나는 무심(無心)한 바다에 누웠다
어쩌면 꽃처럼 흘러가고 바람처럼 사라진다
외로이 바다에 누워 이승의 끝이랴 싶다.
- 시집『바다에 누워』(심상사, 1980)
도꼬마리씨 하나/ 임영조
멀고 긴 산행길
어느덧 해도 저물어
이제 그만 돌아와 하루를 턴다
아찔한 벼랑을 지나
덤불 속 같은 세월에 할퀸
쓰라린 상흔과 기억을 턴다
그런데 가만! 이게 누구지?
아무리 털어도 떨어지지 않는
억센 가시손 하나
나의 남루한 바짓가랑이
한 자락 단단히 움켜쥐고 따라온
도꼬마리씨 하나
왜 하필 내게 붙어 왔을까?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예까지 따라온 여자 같은
어디에 그만 안녕 떼어놓지 못하고
이러구러 함께 온 도꼬마리씨 같은
아내여, 내친 김에 그냥
갈 데까지 가보는 거다
서로가 서로에게 빚이 있다면
할부금 갚듯 정 주고 사는 거지 뭐
그리고 깨끗하게 늙는 일이다
- 시집 『귀로 웃는 집』(창작과비평사, 1997)
세한도/ 백무산
왜 그렸을까
집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앞서 그랬을까
목수가 보면 웃을 그림을 그렸을까
풍수가 보면 혀를 찰 집을 그렸을까
늙은 소나무 부리 위에 집을 짓다니
숲 그늘 습한 땅에 터를 잡다니
방위도 살피지 않고 지형도 살피지 않고
주위 땅이 더 높아 비만 오면 물이 콸콸
집 안으로 쏟아질 참인데
그는 아마도 유배지의 겨울 솔숲을
다 그려놓고는 못내 집이 그리워
집 한 채를 끼워넣었던 것일까
그런데 저 집은 살림집이 아니지 않은가
이상하게 크고 긴 건물과 낯선 문
궁궐일까, 그가 그리워하던 것은 옛 영화였을까
임금이었을까, 그것이 아니면 왜
저리 기막힌 소나무 아래
저리 한심한 집을 생각했을까
그는 두 가지 욕망에 괴로워했을까
그렇지 않다면 왜 저런 욕망이 깊이 깔린
그림을 그렸을까
- 시집『초심』(실천문학사,2003)
반쯤 깨진 연탄/ 안도현
언젠가는 나도 활활 타오르고 싶은 것이다
나를 끝닿는 데까지 한번 밀어붙여보고 싶은 것이다
타고 왔던 트럭에 실려 다시 돌아가면
연탄, 처음으로 붙여진 나의 이름도
으깨어져 나의 존재도 까마득히 뭉개질 터이니
죽어도 여기서 찬란한 끝장을 한번 보고 싶은 것이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뜨거운 밑불 위에
지금은 인정머리 없이 차가운, 갈라진 내 몸을 얹고
아래쪽부터 불이 건너와 옮겨 붙기를
시간의 바통을 내가 넘겨받는 순간이 오기를
그리하여 서서히 온몸이 벌겋게 달아오르기를
나도 느껴보고 싶은 것이다
나도 보고 싶은 것이다
모두들 잠든 깊은 밤에 눈에 빨갛게 불을 켜고
구들장 속이 얼마나 침침한지 손을 뻗어보고 싶은 것이다
나로 하여 푸근한 잠자는 처녀의 등허리를
밤새도록 슬금슬금 만져도 보고 싶은 것이다
- 시집『외롭고 높고 쓸쓸한』(문학동네,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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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라지좆/ 김중식
난 원래 그런 놈이다 저 날뛰는 세월에 대책 없이 꽃피우다 들켜버린 놈이고 대놓고 물건 흔드는 정신의 나체주의자이다 오오 좆같은 새끼들 앞에서 이 좆새끼는 얼마나 당당하냐 한 시대가 무너져도 끝끝내 살아남는 놈들 앞에서 내 가시로 내 대가리 찍어서 반쯤 죽을 만큼만 얼굴 붉히는 이 짓은 또한 얼마나 당당하며 변절의 첩첩 山城 속에서 나의 노출증은 얼마나 순결한 할례냐 정당방위냐 우우 좆같은 새끼들아 면죄를 구걸하는 告白도 못 하는 씨발놈들아
- 시집『황금빛 모서리』(문학과지성사, 1993)
‘호라지좆’은 욕이 아니라 식물의 이름이다. 그 뿌리는 ‘천문동(天門冬)’이라는 귀한 이름의 약재이고 호라지좆죽을 쒀먹으면 피부미용에도 탁월한 효능이 있다고 들었다. 부지깽이 나물이라 하여 반찬으로 무쳐먹기도 한다.
소주 한 병이 공짜/ 임희구
막 금주를 결심하고 나섰는데
눈앞에 보이는 것이
감자탕 드시면 소주 한 병 공짜란다
이래도 되는 것인가
삶이 이렇게 난감해도 되는 것인가
날은 또 왜 이리 꾸물거리는가
막 피어나려는 싹수를
이렇게 싹둑 베어내도 되는 것인가
짧은 순간 만상이 교차한다
술을 끊으면 술과 함께 덩달아
끊어야 할 것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 한둘이 어디 그냥 한둘인가
세상에 술을 공짜로 준다는데
모질게 끊어야 할 이유가 도대체 있는가
불혹의 뚝심이 이리도 무거워서야
나는 얕고 얕아서 금방 무너질 것이란 걸
저 감자탕 집이 이 세상이
훤히 날 꿰뚫게 보여줘야 한다
가자, 호락호락하게
- 시집『소주 한 병이 공짜』(문학의전당, 2011)
길/ 정희성
아버지는 내가 법관이 되기를 원하셨고
가난으로 평생을 찌드신 어머니는
아들이 돈을 잘 벌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어쩌다 시에 눈이 뜨고
애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어
나는 부모의 뜻과는 먼 길을 걸어왔다
나이 사십에도 궁티를 못 벗은 나를
살 붙이고 살아온 당신마저 비웃지만
서러운 것은 가난만이 아니다
우리들의 시대는 없는 사람이 없는 대로
맘 편하게 살도록 가만두지 않는다
세상사는 일에 길들지 않은
나에게는 그것이 그렇게도 노엽다
내 사람아, 울지 말고 고개 들어 하늘을 보아라
평생에 죄나 짓지 않고 살면 좋으련만
그렇게 살기가 죽기보다 어렵구나
어쩌랴, 바람이 딴 데서 불어와도
마음 단단히 먹고
한치도 얼굴을 돌리지 말아야지
- 시집『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창작과비평사,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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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을 생각하면/ 김남주
이 고개는
솔밭 사이사이를 꼬불꼬불 기어오르는 이 고개는
어머니가 아버지한테
욱신욱신 삭신이 아리도록 얻어맞고
친정집이 그리워 오르고는 했던 고개다
바람꽃에 눈물 찍으며 넘고는 했던 고개다
어린 시절에 나는 아버지 심부름으로
어머니를 데리러 이 고개를 넘고는 했다
고개 넘으면 이 고개
가로질러 들판 저 밑으로 개여울이 흐르고
이끼와 물살로 찰랑찰랑한 징검다리를 뛰어
물방앗간 뒷길을 돌아 바람 센 언덕 하나를 넘으면
팽나무와 대숲으로 울울한 외갓집이 있다
까닭 없이 나는 어린 시절에
이 집 대문턱을 넘기가 무서웠다
터무니없이 넓은 이 집 마당이 못마땅했고
농사꾼 같지 않은 허여멀쑥한 이 집 사람들이 꺼려졌다
심지어 나는 우리 집에는 없는 디딜방아가 싫었고
어머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갈 때
외할머니가 들려주는 이런저런 당부 말씀이 역겨웠다
나는 한번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아버지가 총각 머슴으로 거처했다는 이 집의 행랑방을
- 시집『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창비,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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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문 / 이은봉
애초에 돌을 던지지 말아야 했다
돌에 맞은 호수는 이내 파문을 일으켰다
애써 마음 가다듬고 있는 호수를 향해
돌을 던진 것 자체가 문제였다
파문은 둥근 물결도 품고 있었지만
날카로운 파도도 품고 있었다
파도는 세상을 떠도는 한 자루 칼!
칼을 품고 있는 파문이 문제였다
칼은 어떤 것이든 찌르기 마련!
아무데서나 상처를 만들기 일쑤였다
매번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다
한바탕 곪아 터지고 나서야 겨우 아물었다
누군들 아프지 않으랴
누군들 반란을 꿈꾸고 싶으랴
공들여 마음 가라앉히고 있는 호수를 향해
돌을 던진 것 자체가 문제였다
애초에 돌을 던지지 말아야 했다
돌을 맞고 어찌 파문을 일으키지 않으랴.
― 계간『시안』2009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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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아직도 꽃무늬 팬티를 입는다 / 김경주
고향에 내려와
빨래를 널어보고서야 알았네.
어머니가 아직도 꽃무늬 팬티를 입는다는
사실을
눈 내리는 시장 리어카에서
어린 나를 옆에 세워두고
열심히 고르시던 가족의 팬티들
펑퍼짐한 엉덩이처럼 풀린 하늘로
확성기 소리 짱짱하게 날아가네, 그 속에서 하늘하늘한
팬티 한 장 어머니
볼에 문질러보네. 안감이 붉어지도록
손끝으로 비벼보시던 꽃무늬가
어머니를 아직껏 여자로 살게 하는 무늬였음을
오늘은 그 적멸이 내 볼에 어리네
- 시집『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문학과지성사, 2012)
딸을 기다리며-고3 아이에게/ 박철
늦은 밤이다
이 땅의 모든 어린 것들이 지쳐 있는 밤
너만 편히 지낼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지구상 어느 나라에 우리처럼
가난은 곧 불행이다, 라는 공식을 외우며
걸식하듯 밤하늘을 쳐다보는 바보들이 있을까
오늘도 뉴스에는
여성들의 80%가 결혼조건의 최우선으로
경제능력을 꼽는다지만
막상 부자로 사는 이들은 열의 둘이란다
그러니 가난을 물리치는 대신 행복을 찾는 게 낫지 않겠느냐
하는 의연함을 키우다가도 옆집 갓난아이
슬픈 울음소리에 화들짝 놀라
빈 주머니를 쑤셔본다 너를 기다리며
딸아 가여운 아이야
많은 이들이 옳다면 옳은 것이겠지
지지 말고 살아라
이민 가며 친구가 남긴 한 마디
악하게 살아야 오래 산다는 말도 되살아오는 밤
어서 돌아와 잠시라도 깊은 잠 마셔봐라 숨소리 예쁘게-
반쪽의 달이 외면하며 구름 뒤에 숨고
밤이 어둔 것조차 내 죄인양 송구스런 밤
너의 행복을 쌓으며 몇 자 쓴다 아이야
- 웹진『시인광장』2009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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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들/ 강연호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누구도 그립지 않은 날
혼자 쌀을 안치고 국 덮히는 저녁이면
인간의 끼니가 얼마나 눈물겨운지 알게 됩니다
멀리 서툰 뜀박질을 연습하던 바람다발
귀 기울이면 어느새 봉창 틈새로 기어들어와
밥물 끓어 넘치듯 안타까운 생각들을 툭툭 끊어놓고
책상 위 쓰다만 편지를 먼저 읽고 갑니다
서둘러 저녁상 물려보아도 매양 채우지 못하는
끝인사 두어줄 남은 글귀가 영 신통치 않은 채
이미 입동 지난 가을 저녁의 이내 자욱이 깔려
엉긴 실꾸리 풀듯 등불 풀어야 합니다
그래요. 이런 날에는 외투 걸치고 골목길 빠져 나와
마을 앞자락 넓게 펼쳐진 빈들에 나가지 않으렵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누구도 그립지 않은 날
웅크린 집들의 추위처럼 흔들리는 제 가슴 속
아 이곳이 어딥니까, 바로 빈들 아닙니까
- 시집『비단길』(세계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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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에게 배우다/ 맹문재
개울가에서 아픈 몸 데리고 있다가
무심히 보는 물 속
살아온 울타리에 익숙한지
물고기들은 돌덩이에 부딪히는 불상사 한번 없이
제 길을 간다
멈춰 서서 구경도 하고
눈치 보지 않고 입 벌려 배를 채우기도 하고
유유히 간다
길은 어디에도 없는데
쉬지 않고 길을 내고
낸 길은 또 미련을 두지 않고 지운다
즐기면서 길을 내고 낸 길을 버리는 물고기들에게
나는 배운다
약한 자의 발자국을 믿는다면서
슬픈 그림자를 자꾸 눕히지 않는가
물고기들이 무수히 지나갔지만
발자국 하나 남지 않은 저 무한한 광장에
나는 들어선다
- 시집『물고기에게 배우다』(실천문학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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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의 강/ 마종기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물길이 튼다.
한 쪽이 슬퍼지면 친구도 가슴이 메이고
기뻐서 출렁거리면 그 물살은 밝게 빛나서
친구의 웃음소리가 강물의 이 끝에서도 들린다.
처음 열린 물길은 짧고 어색해서
서로 물을 보내고 자주 섞여야겠지만
한 세상 유장한 정성의 물길이 흔할 수야 없겠지
넘치지도 마르지도 않는 수려한 강물이 흔할 수야 없겠지
긴 말 전하지 않아도 미리 물살로 알아듣고
몇 해쯤 만나지 못해도 밤잠이 어렵지 않은 강
아무려면 큰 강이 아무 의미도 없이 흐르고 있으랴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 오래 좋아하는 것이
죽고 사는 일처럼 쉽고 가벼울 수 있으랴
큰 강의 시작과 끝은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물길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다
내 혼이 잠잘 때 그대가 나를 지켜보아 주고
그대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싱싱한 강물이 보이는
시원하고 고운 사람을 친하고 싶다.
- 시집 『그 나라 하늘빛』(문학과지성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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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명의 즐거움/ 이정록
콘돔을 대신할
우리말 공모에 애필(愛必)이 뽑혔지만
애필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결사적인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중 한글의 우수성을 맘껏 뽐낸 것들을 모아놓고 보니
삼가 존경심마저 든다
똘이옷, 고추주머니, 거시기장화, 밤꽃봉투, 남성용고무장갑, 정관수술사촌, 올챙이그물, 정충검문소, 방망이투명망토, 물안새, 그거, 고래옷, 육봉두루마기, 성인용풍선, 똘똘이하이바, 동굴탐사복, 꼬치카바, 꿀방망이장갑, 정자지우개, 버섯덮개, 거시기골무, 여따찍사, 버섯랩, 올챙이수용소, 쭈쭈바껍데기, 솟아난열정내가막는다, 가운뎃다리작업복, 즐싸, 고무자꾸, 무골장군수영복, 액가두리, 정자감옥, 응응응장화, 찍하고나온놈이대갈박고기절해
아, 시 쓰는 사람도 작명의 즐거움으로 견디는 바
나는 한없이 거시기가 위축되는 것이었다
봄 가뭄에 보리누룽지처럼 졸아붙은 올챙이 눈
그 작고 깊은 끈적임을 천배쯤 키워놓으면
그게 바로 콘돔이거니, 달리 요약 함축할 길 없어
개펄 진창에 허벅지까지 빠지던 먹먹함만 떠올려보는 것이었다
애보기글렀네, 짱뚱어우비, 개불장화를 나란히 써놓고
머릿속 뻘구녕만 들락거려보는 것이었다
- 시집『정말』(창비,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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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의 국어시간/ 문병란
내가 아홉 살이었을 때
20리를 걸어서 다니던 소학교
나는 국어 시간에
우리말 아닌 일본말,
우리 조상이 아닌 천황을 배웠다.
신사참배를 가던 날
신작로 위에 무슨 바람이 불었던가,
일본말을 배워야 출세한다고
일본놈에게 붙어야 잘 산다고
누가 내 귀에 속삭였던가.
조상도 조국도 몰랐던 우리,
말도 글도 성까지도 죄다 빼앗겼던 우리,
히노마루 앞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말 앞에서
조센징의 새끼는 항상 기타나이가 되었다.
어쩌다 조선말을 쓴 날
호되게 뺨을 맞은
나는 더러운 조센징,
뺨을 때린 하야시 센세이는
왜 나더러 일본놈이 되라고 했을까.
다시 찾은 국어 시간,
그날의 억울한 눈물은 마르지 않았는데
다시 나는 영어를 배웠다
혀가 꼬부라지고 헛김이 새는 나의 발음
영어를 배워야 출세한다고
누가 내 귀에 속삭였던가.
스물다섯 살이었을 때
나는 국어 선생이 되었다.
세계에서 제일 간다는 한글,
배우기 쉽고 쓰기 쉽다는 좋은 글,
나는 배고픈 언문 선생이 되었다.
지금은 하야시 센세이도 없고
뺨 맞은 조센징 새끼의 눈물도 없는데
윤동주를 외우며 이육사를 외우며
나는 또 무엇을 슬퍼해야 하는가.
어릴적 알아들을 수 없었던 일본말,
그날의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았는데
다시 내 곁에 앉아 있는 일본어선생,
내 곁에 뽐내고 앉아 있는 영어선생,
어찌하여 나는 좀 부끄러워야 하는가.
누군가 영어를 배워야 출세한다고
내 귀에 가만히 속삭이는데
까아만 칠판에 써놓은 윤동주의 서시,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는
글자마다 눈물을 흘리고 있다,
오 슬픈 국어시간이여.
- 국어시간에 시 읽기 2(나라말,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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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송찬호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가슴을 스치자, 깜짝 놀란 장끼가 건너편 숲으로 날아가 껑, 껑, 우는 서러운 가을이었다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엉덩이를 때리자, 초경이 비친 계집애처럼 화들짝 놀란 노루가 찔끔 피 한방울 흘리며 맞은편 골짜기로 정신없이 달아나는 가을이었다
멧돼지 무리는 어제 그제 달밤에 뒹굴던 삼밭이 생각나, 외딴 콩밭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치는 산비알 가을이었다
내년이면 이 콩밭도 묵정밭이 된다 하였다 허리 구부정한 콩밭 주인은 이제 산등성이 동그란 백도라지 무덤이 더 좋다 하였다 그리고 올 소출이 황두 두말 가웃은 된다고 빙그레 웃었다
그나저나 아직 볕이 좋아 여직 도리깨를 맞지 않은 꼬투리들이 따닥따닥 제 깍지를 열어 콩알 몇 낱을 있는 힘껏 멀리 쏘아 보내는 가을이었다
콩새야, 니 여태 거기서 머하고 있노 어여 콩알 주워가지 않구, 다래넝쿨 위에 앉아 있던 콩새는 자신을 들킨 것이 부끄러워 꼭 콩새만한 가슴만 두근거리는 가을이었다
- 시집『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문학과지성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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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는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다/ 이규리
몸이 가느다란 것은 어디에 마음을 숨기나
실핏줄 같은 이파리로
아무리 작게 웃어도 다 들키고 만다
오장육부가 꽃이라,
기척만 내도 온 체중이 흔들리는
저 가문의 내력은 허약하지만
잘 보라
흔들리면서 흔들리면서도
똑같은 동작은 한 번도 되풀이 않는다
코스모스의 중심은 흔들림이다
흔들리지 않았다면 결코 몰랐을 중심,
중심이 없었으면 그 역시 몰랐을 흔들림,
아무것도 숨길 수 없는 마른 체형이
저보다 더 무거운 걸 숨기고 있다
- 시집『뒷모습』(랜덤하우스코리아,2006)
애기똥풀 꽃의 웃음/ 권달웅
꽉 막힌 추석 귀향길이었다
참아온 뒤를 보지 못해
다급해진 나는 갓길에 차를 세우고
산골 외진 숲 속을 뛰어 들었다
벌건 엉덩이를 까내리자
숲 속에 숨었던 청개구리가 뛰어올랐다
향기로운 풀내음 속에서
다급히 근심거리를 풀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소리를 듣고
풀벌레들이 울음을 뚝 그쳤다
(쉿! 조용해! 무슨 소리가 났지?)
이 삼라만상의 갖가지 일에 부딪치면서 살다보니
더러운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닌데
참으며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처럼
참으로 힘드는 건 똥 참는 일이다
참으로 시원한 건 똥 싸는 일이다
숲속의 애기똥풀 꽃이 노랗게 웃었다
- 시집『달빛 아래 잠들다』(모아드림, 2009)
친정 / 조정숙
나 가끔 친정으로 돌아가면
금세 엄마의 어린 딸이 되어
먼 여행에서 돌아온 것처럼
몸도 마음도 녹신녹신해져서
결혼하고 아이 낳고 한 일들
그만 까마득해지고
길을 가다 지나쳐 만난 사람처럼
남편 얼굴도 서먹서먹해져서
엄마 손에서 익은 물김치
호록호록 떠먹어가며 밤새도록
친구 같은 수다를 떨었네.
엄마도 참, 고생이 많수
서로 마음을 만지작거리다가
니, 사는 게 그리 호락호락 한 줄 아나
좀 더 살아봐라 내 맘 알끼다
엄마를 관통한 바람이
목적도 없으면서
천천히 나에게 불어오는
내 속엔 작은 엄마가 있어서
가는 허리가 자꾸 허청거린다.
- 다음카페 '시와시와'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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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에서 온 편지/ 이지엽
아홉배미 길 질컥질컥해서
오늘도 삭신 꾹꾹 쑤신다
아가 서울 가는 인편에 쌀 쪼간 부친다 비민하것냐만 그래도 잘 챙겨묵거라 아이엠 에픈가 뭔가가 징허긴 징헌갑다 느그 오래비도 존화로만 기별 딸랑 하고 지난 설에도 안 와브럿다 애비가 알믄 배락을 칠 것인디 그 냥반 까무잡잡하던 낯짝도 인자는 가뭇가뭇하다 나도 얼릉 따라 나서야 것는디 모진 것이 목숨이라 이도저도 못하고 안 그냐.
쑥 한 바구리 캐와 따듬다 말고 쏘주 한잔 혔다 지랄 놈의 농사는 지먼 뭣 하냐 그래도 자석들한테 팥이랑 돈부, 깨, 콩, 고추 보내는 재미였는디 너할코 종신서원이라니… 그것은 하느님하고 갤혼하는 것이라는디… 더 살기 팍팍해서 어째야 쓸란가 모르것다 너는 이 에미 더러 보고 자퍼도 꾹 전디라고 했는디 달구똥마냥 니 생각 끈하다
복사꽃 저리 환하게 핀 것이
혼자 볼랑께 영 아깝다야
- 시조집『해남에서 온 편지』(태학사, 2000) ※ 1998년 한국시조 작품상 수상작
비민하것냐만→ 어련히 알아 하겠냐만, 징허긴 징헌갑다→ 심하긴 심한가보다, 너할코→ 너마저, 제금 나고→ 결혼해서 떠나고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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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남풍 2/ 도광의
잔치가 끝나도 큰방에 둘러앉아 밤늦도록 놀았다. 잠잘 데가 모자라 마루에서 베개 없이 서로 머리 거꾸로 박고 자면서도 소고기국에 이밥 말아 먹는 게 좋았다
"언니야, 엊저녁 남의 입에 구린내 나는 발 대고 잤는 거 알기나 아나?"
"야가 뭐라카노, 니 코 고는 소리 땜에 한숨도 못 잤데이"
주고받는 말이 소쿠리에 쓸어담을 수 없는 헌것이 돼버린 지금, 등 너머 흙담집 등잔마다 정담은 밤비에 젖어가고 있었다
멀리 시집가서 사는 누님을 하룻밤이라도 더 자고 가라고 이 방 저 방 따라다니며 붙잡던 솔잎 냄새 나는 인정을 어디서 볼 수 있겠는가
해산한 딸 구안(苟安)하고 돌아오는 동리 앞 냇가에 눈물 흔적 말끔히 씻고 가없이 펼쳐진 하늘 쳐다보고는 마음 안에 갇힌 막막한 울음을 걷어내고 마을 안으로 발걸음 옮기는 뼈아픈 가난의 설움을 저승의 번답(反畓)에서나 만나볼 수 있을 것인가
- 시집『그리운 남풍』(문학동네,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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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길 / 신경림
아무도 찾지 않으려네
내 살던 집 툇마루에 앉으면
벽에는 아직도 쥐오줌 얼룩져 있으리
담 너머로 늙은 수유나뭇잎 날리거든
두레박으로 우물물 한 모금 떠 마시고
가위소리 요란한 엿장수 되어
고추잠자리 새빨간 노을길 서성이려네
감석 깔린 장길은 피하려네
내 좋아하던 고무신집 딸아이가
수틀 끼고 앉았던 가겟방도 피하려네
두엄더비 수북한 쇠전마당을
금줄기 찾는 허망한 금전꾼되어
초저녁 하얀 달 보며 거닐려네
장국밥으로 깊은 허기 채우고
읍내로 가는 버스에 오르려네
쫓기듯 도망치듯 살아온 이에게만
삶은 때로 애닯기만 하리
긴 능선 검은 하늘에 박힌 별 보며
길 잘못 든 나그네 되어 떠나려네
- 시집 『달넘세』(창작과비평사,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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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웃음소리/ 이상국
내가 한 철 인제 북천 조용한 마을에 살며
한 사미승을 알고 지냈는데
어느 해 누군가 슬피 울어도 환한 유월
그 사미는 뽕나무에 올라가 오디를 따고
동네 처자는 치마폭에다 그걸 받는 걸 보았다
그들이 주고받는 말은 바람이 다 집어 먹고
흰 웃음소리만 하늘에서 떨어졌는데
북천 물소리가 그걸 싣고 가다가
돌멩이처럼 뒤돌아보고는 했다
아무 하늘에서나 햇구름이 피던 그날은
살다가 헤어지기도 좋은 날이었는데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온몸이 환해진다
- 시집『뿔을 적시며』(창비,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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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듣는 밤/ 최창균
그칠 줄 모르고 내리는 빗소리
참으로 많은 생을 불러 세우는구나
제 생을 밀어내다 축 늘어져서는
그만 소리하지 않는
저 마른 목의 풀이며 꽃들이 나를
숲이고 들이고 추적추적 세워놓고 있구나
어둠마저 퉁퉁 불어터지도록 세울 것처럼
빗소리 걸어가고 걸어오는 밤
밤비는 계속해서 내리고
내 문 앞까지 머물러서는
빗소리를 세워두는구나
비야, 나도 네 빗소리에 들어
내 마른 삶을 고백하는 소리라고 하면 어떨지 몰라
푸른 멍이 드는 낙숫물 소리로나
내 생을 연주한다고 하면 어떨까 몰라
빗소리에 가만 귀를 세워두고
잠에 들지 못하는 생들이 안부 묻는 밤
비야, 혼자인 비야
너와 나 이렇게 마주하여
생을 단련 받는 소리라고 노래하면 되지 않겠나
그칠 줄 모르는 빗소리 마냥 들어주면 되지 않겠나
- 시집 『백년 자작나무숲에 살자』(창비,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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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쳐 말했더니/ 오은영
사다리가 전봇대를 보고 놀렸어요.
"넌 다리가 하나밖에 없네."
전봇대도 사다리를 보고 놀렸어요.
"넌 다리가 두 갠데도 혼자 못 서지?"
사다리가 말을 바꿨어요.
"넌 대단해!
다리가 하난데도 혼자 서잖아."
전봇대도 고쳐 말했어요.
"네가 더 대단해!
사람들을 높은 데로 이끌어 주잖아!"
- 월간『아동문예』2007년 3월호
개 두 마리/ 이동순
지난 여름 장에 가서
암수 강아지 한쌍을 사왔다
이놈들이 커서 이젠 제법 개 구실을 한다
어느날 과자 하나씩을 주었더니
제각기 자기 과자 앞에서 과자를 지키며
서로 으르렁거리기만 한다
두 시간이 지나고 오전이 다 가도록 서로
눈치만 보며 먹지를 못한다
등털 곤두세우고 침만 질질 흘리는
이 어이없는 긴장!
나는 늦게사 그걸 알고
가서 과자를 멀리 던져버림으로써 팽팽한 긴장을 깨뜨렸다
이놈들은 그제사 고개 들고 하늘도 보고
또 서로 핥아주기도 한다
- 시집『가시연꽃』(창비,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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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규모 인생 계획/ 이장욱
식빵가루를
비둘기처럼 찍어먹고
소규모로 살아갔다.
크리스마스에도 우리는 간신히 팔짱을 끼고
봄에는 조금씩 인색해지고
낙엽이 지면
생명보험을 해지했다.
내일이 사라지자
모레가 황홀해졌다.
친구들은 하나 둘
의리가 없어지고
밤에 전화하지 않았다.
먼 곳에서 포성이 울렸지만
남극에는 펭귄이
북극에는 북극곰이
그리고 지금 거리를 질주하는 사이렌의 저편에서도
아기들은 부드럽게 태어났다.
우리는 위대한 자들을 혐오하느라
외롭지도 않았네.
우리는 하루종일
펭귄의 식량을 축내고
북극곰의 꿈을 생산했다.
우리의 인생이 간소해지자
달콤한 빵처럼
도시가 부풀어올랐다.
- 시집『생년월일』(창비,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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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열받게 하는 것들/ 안도현
나를 열받게 하는 것들은,
후광과 거산의 싸움에서 내가 지지했던 후광의
패배가 아니라 입시비리며 공직자 재산공개 내역이 아니라
대형 참사의 근본원인 규명이 아니라 전교조 탈퇴확인란에
내손으로 찍은 도장 빛깔이 아니라 미국이나 통일문제가
아니라 일간신문과 뉴스데스크가 아니라
아주 사소한 것들
나를 열받게 하는 것들은,
이를테면,
유경이가 색종이를 너무 헤프게 쓸 때,
옛날에는 종이가 얼마나 귀했던 줄 너 모르지?
이 한마디에 그만 샐쭉해져서 방문을 꽝 걸어 잠그고는
홀작거리는데 그때 그만 기가 차서 나는 열을 받고
민석이란 놈이 후레쉬맨 비디오에 홀딱 빠져있을 때,
이제 그만 자자 내일 유치원 가야지 달래도 보고
으름장도 놓아 보지만 아 글쎄, 이 놈이 두 눈만 껌뻑이며
미동도 하지 않을 때 나는 아비로서 말못하게 열받는
밥 먹을 때, 아내가 바쁘다는 이유로 시장을 못 갔다고
아침에 먹었던 국이 저녁상에 다시 올라왔을 때도 열받지만
어떤 날은 반찬가지수는 많은데 젓가락 댈 곳이 별로 없을 때도
열받는다 어른이 아이들도 안 하는 반찬투정하느냐고
아내가 나무랄 때도 열받고 그게 또 나의 경제력과 아내의 생활력과
어쩌고 저쩌고 생활비 문제로 옮겨오면 나는 아침부터 열받는다
나는 내가 무지무지하게 열받는 것을
겨우 이만큼 열거법으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나 자신한테 열받는다
죽 한그릇 얻어 먹기 위해 긴 줄을 서 있는 아프리카 아이들처럼
열거는 궁핍의 증거이므로
헌데
열받는 일이 있어도 요즘 사람들은 잘 열받지 않는다
열받아도 열받은 표를 내려고 하지 않는다
요즘은 그것이 또한 나를 무진장 열받게 하는 것이다
- 시집『외롭고 높고 쓸쓸한』(문학동네,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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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 앞 바다를 바라보면서/ 장기려
수도꼭지엔 언제나 시원한 물이 나온다.
지난겨울엔 연탄이 떨어지지 않았다.
쌀독에 쌀을 걱정하지 않는다.
나는 오늘도 세끼 밥을 먹었다.
사랑하는 부모님이 계신다.
언제나 그리운 이가 있다.
고양이 한 마리 정도는 더 키울 수 있다.
그놈이 새끼를 낳아도 걱정할 일이 못된다.
보고 듣고 말함에 불편함이 없다.
슬픔에 울고 기쁨에 웃을 수 있다.
사진첩에 추억이 있다.
거울 속의 내 모습이 그리 밉지만은 않다.
기쁠 때 볼 사람이 있다.
슬플 때 볼 바다가 있다.
밤하늘에 별이 있다.
그리고…… 세상에 사랑이 있다.
- 사랑의 의사 장기려 박사 이야기(한국일보, 1994)
세상이 달라졌다/ 정희성
세상이 달라졌다
저항은 영원히 우리들의 몫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가진 자들이 저항을 하고 있다
세상이 많이 달라져서
저항은 어떤 이들에겐 밥이 되었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권력이 되었지만
우리 같은 얼간이들은 저항마저 빼앗겼다
세상은 확실히 달라졌다
이제는 벗들도 말수가 적어졌고
개들이 뼈다귀를 물고 나무 그늘로 사라진
뜨거운 여름 낮의 한때처럼
세상은 한결 고요해졌다
- 시집『詩를 찾아서』(창작과비평, 2001)
패배메시지/ 박노해
나는 안다
이 패배는 뭔가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하려 했다는 걸
패배로 위축되거나 자포자기하길 바란 게 아니라는 걸
한쪽이 무너졌다고 반대쪽으로 외눈 이동하거나
나는 안 무너졌다고 그대로 머리 밀고 나가거나
여전히 부정과 비판만 일삼기를 바란 게 아니라는 걸
다시 생각하고 다시 돌아보고
허리 숙여 바탕 뿌리부터 하나하나 보살펴
오늘은 다르게 시작하기를 촉구한 거라는 걸
나는 안다
이 참혹한 패배가 무얼 말하는지
세계를 변화시키려면 먼저
자기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용기를
삶으로 보일 수 있어야 한다는 걸
긍정을 통한 부정
오늘 다시 시작하자
- 시집『겨울이 꽃핀다』(해냄,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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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알 하나/ 이안
할머니한테 들은 고조할아버지 이야기
얼마나 가뭄이 지독했던지 먹을 게 없었다
어느 날 마루에 놓인 물동이 속에
밥알 하나 가라앉은 게 보였다
가난해도 양반 체면에
밥알 하나만 달랑 건져 먹는 건 욕이 될까 봐
물 한 동이를 통째 들이키셨다는,
목까지 차오르는 물속에
밥알 하나 가만히 떠올라 오는 이야기
- 동시집『고양이와 통한 날』(2008,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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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 B. 브레히트
성문이 일곱 개인 테베를 누가 건설 했던가?
책에는 왕들의 이름만 적혀 있다.
왕들이 손수 바윗덩어리들을 끌고 왔을까?
그리고 몇 차례나 파괴된 바빌론
그 때마다 그 도시를 누가 일으켜 세웠던가? 건축 노동자들은
황금빛 찬란한 도시 리마의 어떤 집에서 살았던가?
만리장성이 완공된 날 밤
벽돌공들은 어디로 갔던가? 위대한 로마에는
개선문이 많기도 하다. 누가 그것들을 세웠던가?
로마의 황제들은 누구를 정복하고 개선했던가?
끊임없이 노래되는 비잔틴에는
시민들을 위한 궁전들만 있었던가? 전설적인 아틀란티스에서도
바다가 그 땅을 삼켜 버린 날 밤에
물에 빠져 죽어가는 자들이 그들의 노예를 찾으며 울부짖었다.
젊은 알렉산더는 인도를 정복했다.
그가 혼자서 해냈을까?
시저는 갈리아를 토벌했다.
적어도 취사병 한 명쯤은 데려가지 않았을까?
스페인의 필립왕은 자신의 함대가 침몰 당하자
울었다. 그 말고는 아무도 울지 않았을까?
프리드리히 2세는 7년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 말고도
또 누군가 승리하지 않았을까?
역사의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승리가 하나씩 나온다.
승리의 향연은 누가 차렸던가?
십 년마다 한 명씩 위대한 인물이 나타난다.
그 비용은 누가 지불했던가?
그 많은 사실들.
그 많은 의문들.
- Chris Harman의『민중의 세계사』첫머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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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정치―똘레랑스에 대하여/ 조기조
어느 산에서든
아름답게 숲이 우거진 골짜기를 두고
나무들은 서로 힘겨루기라도 하듯
북사면엔 활엽수들이
남사면엔 침엽수들이
자신들만의 영토를 이루듯 군집(群集)하고 있다
나무도 서로 닮은 것들끼리 살고 싶은 것이다
닮은 것들끼리 함께 산다는 것은
닮지 않은 것들과는 함께 살지 않겠다는 것
이 단호함
함께 살고 싶지 않은 것들에게
함께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침엽수가 활엽수에게 그렇듯
활엽수가 침엽수에게 그렇듯
차이를 미워하며 서로 경계를 짓고
군집을 이뤄 살아가는 힘
이 팽팽한 사랑과 증오의 긴장이
숲을 넉넉하게 만든다.
- 시집『기름美人』(실천문학,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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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통/ 곽재구
아이슬랜드에 가면
일주일에 한 번
TV가 나오지 않는 날 있단다
매주 목요일에는
국민들이 독서와 음악과
야외 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국영 TV가 앞장을 서
세심한 문화 정책을 편단다
하루의 노동을 끝내고 돌아와 앉은
우리나라 TV에는
이제 갓 열여덟 소녀 가수가
선정적 율동으로 오늘밤을 노래하는데
스포츠 강국 선발 중진국 포스트모더니즘
끝없이 황홀하게 이어지는데
재벌 2세와 유학 나온 패션 디자이너의
사랑 이야기가 펼쳐지는
주말 연속극에 넋 팔고 있으면
아아 언젠가 우리는
깡통이 될지도 몰라
함부로 짓밟히고 발길에 채여도
아무 말 못 하고 허공으로 날아가는
주민증 번호와 제조 일자가 나란히 적힌
찌그러진 깡통이 될지도 몰라
살아야 할 시간들 아직 멀리 남았는데
밤하늘 별들 아름답게 빛나는데.
- 시집『서울 세노야』(문학과지성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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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종芒種/ 홍해리
고향집 텃논에 개구리 떼 그득하것다
울음소리 하늘까지 물기둥 솟구치것다
종달새 둥지마다 보리 익어 향긋하것다
들녘의 농부들도 눈코 뜰 새 없것다
저녁이면 은은한 등불 빛이 정답것다
서로들 곤비를 등에 지고 잠이 들것다.
- 시집『愛蘭』(우이동 사람들. 1998)
이문구 오뉴월
엄마는 아침부터 밭에서 살고
아빠는 저녁까지 논에서 살고
아기는 저물도록 나가서 놀고
오뉴월 긴긴 해에 집이 비어서
더부살이 제비가 집을 봐 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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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갈 데로 가거라 / 김규동
아들아이는 빈 책가방에 도시락만 달랑 넣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가 어디로 가는 걸까요
학교에 가도 수업시간에 알아들을 수 있는 건 없고
한 시간이 천년 같다고 했어요
수학과 영어는 1학년 때부터 공부했어야 하는데 어느새 3학년
기초가 없으니 어느 과목도 다 모를 것뿐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복도에 나가 벌을 서는 편이
마음 편하다 했지요
몰래 시간에 빠진 다음 뒷산에 올라가 낮잠을 자거나
거리를 여기저기 걸어다녔어요
막노동하는 아버지는 이런 사정도 모르고
아이의 장래를 생각하며 일만 열심히 했어요
뒤늦게 이 일을 알게 된 아버지는
분통이 터져 당장 아이를 붙잡아 때려죽이려 했어요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아이 어깨를 짚더니
조용히 이야기 했어요 참으로 조용히 말했어요
용식아, 알았다. 그렇구나, 너 갈 데로 가거라
너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거라 이 애비도
그래서 일찍이 집을 뛰쳐나와 이렇게 평생을 살았단다
용식아 알았느냐 그러면서 참았던 눈물을 쏟으며
아버지는 그만 통곡하고 말았어요
- 계간『사람의 문학』2006년 가을호
이런 내가 되어야 한다/ 신경림
일상에 빠지지 않고
대의를 위해 나아가며
억눌리는 자에게 헌신적이며
억누르는 자에게 용감하며
스스로에게 비판적이며
동지에 대한 비판도 망설이지 않고
목숨을 걸고 치열히
순간순간을 불꽃처럼 강렬히 여기며
날마다 진보하며
성실성에 있어
동지들에게 부끄럽지 않고
자신의 모습을 정확히 보되
새로운 모습을 바꾸어 나갈 수 있으며
진실한 용기로 늘 뜨겁고
언제나 타성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며
모든 것을 창의적으로 바꾸어내며
어떠한 고통도 이겨낼 수 있고
내가 잊어서는 안 될 이름을 늘 기억하며
내 작은 힘이 타인의 삶에
용기를 줄 수 있는 배려를 잊지 말고
한 순간도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는 역사와 함께 흐를 수 있는
그런 내가 되어야 한다.
- 시집『가난한 사랑 노래』(실천문학,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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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을 끌기 위해서였다/ 이성복
왜 나는 자꾸 40대의 소작인의 처가 허리를 꼬부리고
걸어가는 것만 이야기 하는가
처녀들의 젖가슴은 예나 이제나 따스한데.
- 베르톨트 브레히트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 시집『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열림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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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위의 꿈/ 박제영
1997년 김동률이 작곡하고 이적이 작사하여 그 둘이 발표한 노래를 2007년 인순이가 리메이크하였는데 크게 유행했겠다 이에 박제영이 판소리 사설조로 개사하여 안산의 소리꾼 정유숙 선생에게 소리를 부탁하였으니,
여보게들! 내 이바구 한 번 들어보소 인순이가 요즘 노래를 부르는데, 그 노래 좋다고 찡하다고 장안에 지금 난리가 났는데, 뭔고 하니 꿈이 있다고, 벽을 넘고 하늘을 날아오르는 거시기 뭐냐 거위의 꿈이 있다고 (얼쑤!) 헛된 꿈은 독이야! 정해진 운명은 돌이킬 수 없는 겨! 온 세상이 비웃어도 마침내 운명의 벽을 넘을 거라고! 하늘로 날아오를 거라고! 혼혈 가수 인순이가 무대 위에서 온몸으로 온몸으로 노래하는데 (잘한다!) 무대 아래 김씨 이씨 박씨 최씨 할 것 없이 남자 여자 젊은이 늙은이 할 것 없이 죄다 눈물 콧물 흘리는 것인데 (얼씨구! 조오타!) 아뿔싸, 김동률도 모르고 이적도 모르고 인순이도 물론 모르는 게 있었으니 지금부터 잘 들으소, 그 거위가 말이여 지 놈 혼자만 벽을 넘은 거라 새가 빠지게 고생한 것 모르는 거 아니고, 죽는 한이 있어도 넘겠다는 불굴의 의지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지 혼자 벽을 넘고 하늘로 날아 간 거라 (얼씨구!) 보라 말이여, 혼자서는 도저히 벽을 넘지 못하는 거위새끼들이, 달구새끼들이, 오리새끼들이 꿔억궈억 삐약삐약 꽥괙 벽에 대고 울음을 토해내고 있는 것이여 (얼쑤!) 그러니까 여보게들! 어찌 해야겠나? 지 혼자서 벽을 넘을 것이 아니라 이놈저놈 다 뭉쳐서 이놈저놈 다 어깨동무해서 저 벽이란 벽 모두 부숴야지! 아무렴 부숴버려야지! (잘한다!) 지금부터 벽을 늘어놓을테니 다 같이 부숴보세, 한 번 가난은 영원한 가난이니 가난벽, 대학 안 나오면 사람도 못 되니 학력벽,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편갈라 싸움질이니 출신벽, 여성이라 안돼 장애인이라 안돼 혼혈인이라 안돼 늙어서 안돼 어려서 안돼 그 놈의 편견벽, 차별벽, 중이랑 목사랑 싸워대는 종교벽, 뭐니뭐니 해도 여의도에서 욕질 주먹질 뒤로 호박씨 까면서 툭하면 국민타령 해대는 저 국회의원들 정치벽, 비정규직 대량해고 정경유착 지 배만 불리는 재벌벽 (얼씨구! 조오타!) 에고 숨차네 여보게들! 오늘은 여기까지 끝내고 남은 벽들은 다음에 또 부수세 꿔억궈억 삐약삐약 꽥괙
- 시집『뜻밖에』(애지,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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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동행을 위하여 / 송해월
천천히 가자
굳이 세상과 발맞춰 갈 필요 있나
제 보폭대로 제 호흡대로 가자
늦다고 재촉할 이, 저 자신 말고 누가 있었던가
눈치 보지 말고 욕심 부리지 말고 천천히 가자
사는 일이 욕심 부린다고 뜻대로 살아지나
다양한 삶이 저대로 공존하며
다양성이 존중될 때만이 아름다운 균형을 이루고
이 땅 위에서 너와 내가 아름다운 동행인으로
함께 갈 수 있지 않겠는가
그 쪽에 네가 있으므로
이 쪽에 내 선 자리가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 것처럼
그래서 서로 귀한 사람
너는 너대로 가고, 나는 나대로 가자
네가 놓치고 간 것들
뒤에서 거두고 추슬러 주며
가는 일도 그리 나쁘지는 않으리
가끔은 쪼그리고 앉아 애기똥풀이나
코딱지 나물이나 나싱개 꽃을 들여다 보는
사소한 기쁨도 특혜를 누리는 사람처럼
감사하며 천천히 가자
굳이 세상과 발맞추고
너를 따라 보폭을 빠르게 할 필요는 없다
불안해하지 말고 웃자라는 욕심을
타이르면서 타이르면서 가자
회향 / 박노해
부처가 위대한 건
버리고 떠났기 때문이 아니다
고행했기 때문이 아니다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다
부처가 부처인 것은
회향(廻向)했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을 크게 되돌려
세상을 바꿔냈기 때문이다
자기 시대 자기 나라
먹고 사는 민중의 생활 속으로
급변하는 인간의 마음속으로
거부할 수 없는 봄기운으로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욕망 뒤얽힌 이 시장 속에서
온몸으로 현실과 부딪치면서
관계마다 새롭게 피워내는
저 눈물나는 꽃들 꽃들 꽃들
그대
오늘은 오늘의 연꽃을 보여다오
- 시집 『겨울이 꽃핀다』(해냄,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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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사랑- 아들에게/ 문정희
아들아
너와 나 사이에는
신이 한 분 살고 계시나보다
왜 나는 너를 부를 때마다
이토록 간절해지는 것이며
네 뒷모습에 대고
언제나 기도를 하는 것일까?
네가 어렸을 때
우리 사이에 다만
아주 조그맣고 어리신 신이 계셔서
사랑 한 알에도
우주가 녹아들곤 했는데
이제 쳐다보기만 해도
훌쩍 큰 키의 젊은 사랑아
너와 나 사이에는
무슨 신이 한 분 살고 계셔서
이렇게 긴 강물이 끝도 없이 흐를까?
-시집 『어린 사랑에게』(미래사, 1991)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 정채봉
하늘나라에 가 계시는
엄마가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아니 아니 아니 아니
반나절 반시간도 안 된다면
단 5분
그래, 5분만 온대도 나는
원이 없겠다.
얼른 엄마 품속에 들어가
엄마와 눈맞춤을 하고
젖가슴을 만지고
그리고 한 번만이라도
엄마!
하고 소리내어 불러보고
숨겨놓은 세상사 중
딱 한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
-시집『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현대문학북스,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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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마음은 뛰노라/ w. 워드워즈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면
나의 마음은 뛰노라.
내 철없던 어린 시절에도 그러했고
어른이 된 지금도 그러하며
늙어서도 그러하리.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죽으리라!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
나의 생애가 자연에 대한 경건한 마음으로
하루하루 이어지길 바라노라
뜨거운 돌/ 나희덕
움켜쥐고 살아온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놓고 펴 보는 날 있네
지나온 강물처럼 손금을 들여다보는
그런 날 있네
그러면 내 스무살 때 쥐어진 돌 하나
어디로도 굴러가지 못하고
아직 그 안에 남아 있는 걸 보네
가투 장소가 적힌 쪽지를 처음 받아들던 날
그건 종이가 아니라 뜨거운 돌이었네
누구에게도 그 돌 끝내 던지지 못했네
한번도 뜨겁게 끌어안지 못한 이십대
火傷마저 늙어가기 시작한 삼십대
던지지 못한 그 돌
오래된 질문처럼 내 손에 박혀 있네
그 돌을 손에 쥔 채 세상과 손잡고 살았네
그 돌을 손에 쥔 채 글을 쓰기도 했네
문장은 자꾸 걸려 넘어졌지만
그 뜨거움 벗어나기 위해 글을 쓰던 밤 있었네
만일 그 돌을 던졌다면, 누군가에게, 그랬다면
삶이 좀더 가벼울 수 있었을까
오히려 그 뜨거움이 온기가 되어
나를 품어 준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하네
오래된 질문처럼 남아 있는 돌 하나
대답도 할 수 없는데 그 돌 식어 가네
단 한 번도 흘러 넘치지 못한 화산의 용암처럼
식어 가는 돌 아직 내 손에 있네
- 시집 『그곳이 멀지 않다』(민음사,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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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나게와 잉 사이 / 이원규
전라도 구례 땅에는
비나 눈이 와도 꼭 겁나게와 잉 사이로 온다
가령 섬진강변의 마고실이나
용두리의 뒷집 할머니는
날씨가 조금만 추워도, 겁나게 추와불고마잉!
어쩌다 리어카를 살짝만 밀어줘도, 겁나게 욕봤소잉!
강아지가 짖어도, 고놈의 새끼 겁나게 싸납소잉!
조깐 씨알이 백힐 이야글 허씨요
지난 봄 잠시 다툰 일을 얘기하면서도
성님, 그라고봉께 겁나게 세월이 흘렀구마잉!
궂은 일 좋은 일도 겁나게와 잉 사이
여름 모기 잡는 잠자리 떼가 낮게 날아도
겁나게와 잉 사이로 날고
텔레비전 인간극장을 보다가도 금세
새끼들이 짜아내서 우짜까이잉! 눈물 훔치는
너무나 인간적인 과장의 어법
내 인생의 마지막 문장
허공에라도 비문을 쓴다면 꼭 이렇게 쓰고 싶다
그라제, 겁나게 좋았지라잉!
- 시집『옛 애인의 집』(솔,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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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를 삶으며 / 서안나
고구마를 삶다 보면 제대로 익는지
젓가락으로 고구마를 쿡쿡 찔러보게 된다
나의 어머니도
열 달 동안 뱃속에서 키워
세상에 내놓은 잎사귀도 덜떨어진 딸년
잘 익고 있는지를
항시 쿡쿡 찔러보곤 하신다
밥은 잘 챙겨 먹고 다니느냐?
차 조심해라 겸손해라 감사해라
고구마 푸른 줄기처럼
휴대폰 밖으로 넝쿨 져 뻗어 나오는 어머니
세상에 사나운 일 벌릴까 봐
40이 넘어도 설익은 딸년
마음과 영혼 병들지 말고 제대로 익으라고
핸드폰 속에서 쿡쿡 찔러보는 어머니
뜨거운 아랫목에서 뒹굴 거리며
알았다고요 귀찮은 듯 대답하는
뜨뜻하게 잘 익어가는 딸년
- 계간『다시올문학』2008년 봄호(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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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똥구리가 사라진 까닭/ 이정인
소가 일하는 논밭에
힘센 트랙터가 나타났다.
소는 그만 할 일이 없어졌지.
먹고 놀고 자고 먹고 여물만 축났지.
그러더니 한 마리 두 마리
점점 소가 사라졌어.
소가 사라지니까
쇠똥이 사라졌지.
쇠똥이 사라지니
쇠똥구리도 사라졌어.
쇠똥구리가 사라진 건
쇠똥 때문이 아니라니까!
- 동시집 『남자들의 약속』(푸른책들, 2012)
...............봄날/ 오세영
사립문 열어 둔 채 주인은 어디 갔나
산기슭 외딴 마을 텅 빈 오두막집
널어 논 흰 빨래들만 봄 햇살을 즐긴다.
추위 물러가자 주인은 마실 가고
한 그루 벚나무만 덩그러니 꽃 폈는데
뒷산의 뻐꾹새 울음 마당 가득 쌓인다.
-계간『유심』2007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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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딱새/ 손세실리아
숲해설가와 함께 방태산 미산계곡에 들었다
낱낱의 사연과 생애가 사람살이와 다를 바 없어
신기하기도 뭉클하기도 하다 하지만 발을 떼는 족족
소소한 것들까지 시시콜콜 설명하려드는 통에
골짜기 깊어질수록 감동이 반감되고 만다 게다가
비조불통 기막힌 풍광 앞에서는 소음과 진배없다
상호간 불편한 기색 감추기에 급급할 즈음
새 한 마리 물푸레나무 허공을 뒤흔들어댄다
검은등뻐꾸기라며 강의를 재개하려하자
누군가 볼멘소리로 막아선다
딴 건 몰러두 갸는 지가 좀 알어유 홀딱새여유
소싯적부텀 그렇게 불렀슈 찬찬히 함 들어봐유
홀딱벗꼬 홀딱벗꼬... 어뗘유 내 말이 맞쥬?
다소 남세스럽지만 영락없다
육담이려니 흘려들었는데 아니다
기막힌 화두다
생의 겹겹 누더기 훌훌 벗어던지고
가뿐해지라는
- 계간 <시에> 2007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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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신(魯迅)/ 김광균
시(詩)를 믿고 어떻게 살아가나
서른 먹은 사내가 하나 잠을 못 잔다.
먼― 기적 소리 처마를 스쳐가고
잠들은 아내와 어린것의 베개맡에
밤눈이 내려 쌓이나 보다.
무수한 손에 뺨을 얻어맞으며
항시 곤두박질해 온 생활의 노래
지나는 돌팔매에도 이제는 피곤하다.
먹고 산다는 것,
너는 언제까지 나를 쫓아오느냐.
등불을 켜고 일어나 앉는다.
담배를 피워 문다.
쓸쓸한 것이 오장을 씻어 내린다.
노신(魯迅)이여
이런 밤이면 그대가 생각난다.
온―세계가 눈물에 젖어 있는 밤.
상해(上海) 호마로(胡馬路) 어느 뒷골목에서
쓸쓸히 앉아 지키던 등불
등불이 나에게 속삭어린다.
여기 하나의 상심(傷心)한 사람이 있다.
여기 하나의 굳세게 살아온 인생이 있다.
- 잡지『신세계』3호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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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을 가졌는가/ 함석헌
만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不義)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며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시집「수평선 너머」(한길,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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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白樺) / 백석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모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그리고 감로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산 너머는 평안도 땅도 뵈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 「정본 백석 시집」 (2007,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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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평역(沙平驛)에서 /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 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 시집『사평역에서』(창작과비평,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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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추를 채우면서/ 천양희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세상이 잘 채워지지 않는다는 걸
단추를 채우는 일이
단추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잘못 채운 첫단추, 첫연애 첫결혼 첫실패
누구에겐가 잘못하고
절하는 밤
잘못 채운 단추가
잘못을 깨운다
그래, 그래 산다는 건
옷에 매달린 단추의 구멍찾기 같은 것이야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단추도 잘못 채워지기 쉽다는 걸
옷 한 벌 입기도 힘들다는 걸
- 시집『오래된 골목』(창작과비평사,1998)
1995년 제10회 소월시문학상 수상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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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리지 생각/ 박시교
나무가 나무에게 기대어
푸릅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기대어
정겹습니다
눈물이
내게 기대어
따뜻했으면 합니다
- 시집『아나키스트에게』(고요아침,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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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오른 발자국/ 박방희
물에서 나온 황새
발자국을 찍으며
자분자분 걸어가다
후루룩 날아오른다.
새가 날아오르자
발자국도 날아올라
더 이상 찍히지 않는다.
- 동시집『날아오른 발자국』(청개구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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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 기적 / 반칠환
황새는 날아서
말은 뛰어서
거북이는 걸어서
달팽이는 기어서
굼벵이는 굴렀는데
한날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 시집『웃음의 힘』(지혜,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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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 하나 있었으면 / 도종환
마음이 울적할 때 저녁 강물 같은 벗 하나 있었으면
날이 저무는데 마음 산 그리메처럼 어두워 올 때
내 그림자를 안고 조용히 흐르는 강물 같은 친구 하나 있었으면
울리지 않는 악기처럼 마음이 비어 있을 때
낮은 소리로 내게 오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 노래가 되어 들에 가득 번지는 벗 하나 있었으면
오늘도 어제처럼 고개를 다 못 넘고 지쳐 있는데
달빛으로 다가와 등을 쓰다듬어주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라면 칠흑속에서도 다시 먼 길 갈 수 있는 벗 하나 있었으면.
- 시집『당신은 누구십니까』(창작과비평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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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선서/ 김종해
시인이여.
절실하지 않고, 원하지 않거든 쓰지 말라.
목마르지 않고, 주리지 않으면 구하지 말라.
스스로 안에서 차오르지 않고 넘치지 않으면 쓰지 말라.
물 흐르듯 바람 불듯 하늘의 뜻과 땅의 뜻을 좇아가라.
가지지 않고 있지도 않은 것을 다듬지 말라.
세상의 어느 곳에서 그대 시를 주문하더라도
그대의 절실함과 내통하지 않으면 응하지 말라.
그 주문에 의하여 시인이 시를 쓰고 시 배달을 한들
그것은 이미 곧 썩을 지푸라기 시詩이며, 거짓말 시詩가 아니냐.
시인이여, 시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대의 심연을 거치고
그대의 혼에 인각된 말씀이거늘, 치열한 장인의식 없이는 쓰지 말라.
시인이여, 시여, 그대는 이 지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위안하고
보다 높은 쪽으로 솟구치게 하는 가장 정직한 노래여야 한다.
온 세상이 권력의 전횡專橫에 눌려 핍박 받을지라도
그대의 칼날 같은 저항과 충언을 숨기지 말라.
민주와 자유가 억압당하고, 한 시대와 사회가 말문을 잃어버릴지라도
시인이여, 그대는 어둠을 거쳐서 한 시대의 새벽이 다시 오는 진리를 깨우치게 하라.
그대는 외로운 이, 가난한 이, 그늘진 이, 핍박받는 이,
영원 쪽에 서서 일하는 이의 맹우盟友여야 한다.
- 시집『바람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문학세계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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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에르만의 잠언시
세상의 소란함과 서두름 속에서 너의 평온을 잃지 말라. 침묵 속에 어떤 평화가 있는지 기억하라. 너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서도 가능한 한 모든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라. 네가 알고 있는 진리를 조용히 그리고 분명하게 말하라. 다른 사람의 얘기가 지루하고 무지한 것일지라도 그것을 들어주라. 그들 역시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으므로. 소란하고 공격적인 사람을 피하라. 그들은 정신에 방해가 될 뿐이니까. 만일 너 자신을 남과 비교한다면 너는 무의미하고 괴로운 인생을 살 것이다. 세상에는 너보다 낫고 너보다 못한 사람들이 언제나 있기 마련이니까.
네가 세운 계획뿐만 아니라 네가 하는 일이 아무리 보잘 것 없는 것일지라도 그 일에 열정을 쏟으라. 변화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것이 진정한 재산이므로. 세상의 속임수에 조심하되 그것이 너를 장님으로 만들어 무엇이 덕인가를 못 보게 하지는 말라. 많은 사람들이 높은 이상을 위해 노력하고 있고 모든 곳에서 삶은 영웅주의로 가득하다. 하지만 너는 너 자신이 되도록 힘쓰라.
갑작스런 불행에 자신을 지킬 수 있도록 정신의 힘을 키우라. 하지만 상상의 고통들로 너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지는 말라. 두려움은 피로와 외로움 속에서 나온다. 건강에 조심하되 무엇보다 너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 너는 우주의 자식이다. 그 점에선 나무와 별들과 다르지 않다. 넌 이곳에 있을 권리가 있다. 너의 일과 계획이 무엇일지라도 인생의 소란함과 혼란스러움 속에서 너의 영혼을 평화롭게 유지하라. 부끄럽고, 힘들고, 깨어진 꿈들 속에서도 아직 아름다운 세상이다. 즐겁게 살라. 행복하려고 노력하라.
- 막스 에르만 문집 중에서 *막스 에르만의 잠언시는 1692년 볼티모어의 성 베드로 성당 생활규칙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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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 김준태
초등학교 1,2학년 애들이려나
광주시 연제동 연꽃마을 목욕탕
키가 큰 여덟 살쯤의 형이란 녀석이
이마에 피도 안 마른 여섯 살쯤 아우를
때밀이용 베드 위에 벌러덩 눕혀놓고서
엉덩이, 어깨, 발바닥, 배, 사타구니 구석까지
손을 넣어 마치 그의 어미처럼 닦아주고 있었다
불알 두 쪽도 예쁘게 반짝반짝 닦아주는 것이었다
그게 보기에도 영 좋아 오래도록 바라보던 나는
"형제여! 늙어 죽는 날까지 서로 그렇게 살아라!"
중얼거려주다가 갑자기 눈물방울을 떨구고 말았다
- 육필시집『형제』(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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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 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이십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앞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 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 원 때문에 일 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일 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이것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 김수영 전집 (민음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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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적들/ 이재무
고양이의 폭정에 시달려 온 쥐들이 모여
숙의를 거듭한 끝에
다른 고양이를 자신들의 대표로 선출하였다
다음 날부터 쥐들은 다시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보통의 인간은 엇비슷하던 이웃이
자신보다 잘나갈 때 고통과 불안을 느낀다
노예들은 주인을 경원하거나 질투하지 않는다
그들을 참기 힘들게 하는 것은
천출 벗은 자가 무리 앞에 우뚝 서 있을 때다
이때 이들은 모욕을 넘어 분노를 느낀다
열 마리 백 마리 천 마리 만 마리 누떼가
한 마리 사자를 당해 낼 수 없듯이
수백 수천만 노예가 주인 몇을 쓰러뜨리지 못한다
역사는 기록에 대한 수사를 발전시켜 왔을 뿐이다
진보 유전자를 지니고 산다는 일은
그 자체로 멍에이며 스스로 불행지수를 높이는 일이다
민중론자들 중에는 자신들보다 열등한 자들을
은근,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배제하려는
못된 버릇과 심리를 지닌 이들도 있다
내 안의 불편부당한 적들과 싸워 이기지 못한다면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책 속에서나
반짝일 뿐 끝내 맨 얼굴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 계간「시작」2013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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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은행나무의 말씀/ 김영선
무겁고 화급할 때 그 부처님 찾아가면
그저 놓으라고만 하시더니
천태산 영국사 부처님도 하냥 같은 말씀이시라
본전도 못한 어설픈 장사꾼처럼
터덕터덕 내려오다 마주한
천년 은행나무,
멀거니 한참을 올려다보고 섰는 나에게
눈주름살 같은 가지 가만가만 흔들어 하시는 말씀,
견뎌라,
사랑도 견디고 이별도 견디고 외로움도 견디고
오금에 바람 드는 참혹한 계절도 견뎌라
밑 드러난 쌀통처럼 무거운 간난도 견뎌라
죽어도 용서 못할 어금니 서린 배신과
구멍 뚫린 양말처럼 허전한 불신도 견디고
구린내 피우고도 우뭉 떨었던
생각할수록 화끈거리는 양심도 견뎌라
어깨너머로 글 깨우친 종놈의
뜨거운 가슴 같은 분노도 꾹 누르고
싸리나무 같은 가슴에 서럽게 묻혔던
가을 배꽃처럼 피어나는 꿈도 견뎌라
들판의 농부가 작은 등판으로 온 뙤약볕을 견디듯
가느다란 외등이 눈보라 치는 겨울밤을 견디듯
너의 평생이 나의 천년 아니겠느냐
- 시 모음집『천년 은행나무도 운다』(시와에세이,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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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계장터 / 신경림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새우 끓어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 시집『농무』(창작과비평사,1975)
시집 <농무>는 초판으로 고작 300부를 무허가 출판사에서 자비로 찍은 것이기에 그 출발은 얼핏 초라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이듬해 이 시집으로 신경림 시인은 제1회 만해문학상을 수상하였고, 그 다음해 창작과비평사의 '창비시선' 첫 번째 시집으로 이 시집의 증보판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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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파리/ 김상미
영화 '똥파리'를 보았다. '똥파리'속에는 '시발놈아'라는 말이 셀 수 없이 나온다. 그리고 그 말은 보통 영화의 '사랑한다'는 말보다 훨씬 급이 높고 비장하다. 지랄맞게 울리고 끈질기게 피 흘리는 그 영화를 다 보고 나와 아무도 없는 강가에 가 소주 한 병을 마셨다. 그리고 목이 터져라 '시발놈아'를 스무 번쯤 소리쳐 불렀다. 그랬더니 내 가슴 안 피딱지에 옹기종기 앉아 있던 겁 많은 똥파리들이 화들짝 놀라 모두 후두둑 강물 위로 떨어졌다. 시발놈들!
- 계간 『시작』2009년 2009년 여름호
돌/ 손진은
노당리 뒷산
홍수 넘쳐 물살 거친 계곡 밑으로
쪼그만 돌들
물길에 휩쓸려 떠내려 간다
노당리의 산과 들
지난 수십년의 계절과 햇빛 바람 다져넣고도
동으로 혹은 서으로 머릴 누이고
낯익은 백양나무 강아지풀 개구리 울음 뒤로 한 채
이 마을 사람들 대처로 대처로 나가듯
물살의 힘 어쩌지 못하고 떠내려 간다.
떠내려 가서
형산강 하구나 안강쪽 너른 벌판
낯선 땅에서 발붙이며
지푸라기 다른 돌들과 섞여 부대끼거나
길이 막히면
구비진 어느 구석 외진 도랑에서 비를 긋거나
구름자락 끌어 덮으며 길들여지다가
비가 오면 또 떠밀려 갈 것이다.
만났다가 혜어지고
그냥 안주하기도 하는 돌들의 행려(行旅)여.
몇몇 친숙한 식구가 떠난 뒷산 계곡의 남은 돌들
더 깊은 시름에 잠기고
세찬 여름비의 며칠이 지나고 햇빛 쨍쨍한 날
가슴에 이끼날개 달고
밤 속으로 은빛공간 열며
별이 되는 꿈을 꾸는
조약돌 몇이 얼핏 보인다.
- 시집 『두 힘이 숲을 설레게 한다』(민음사,1991)
이 시는 시인의 198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다
머나먼 돌멩이/ 이덕규
흘러가는 뭉게구름이라도 한번 베어보겠다는 듯이 깎아지른 절벽 꼭대기에서
수수억 년 벼르고 벼르던 예각의
날 선 돌멩이 하나가 한순간, 새카만 계곡 아래 흐르는 물속으로 투신하는 걸 보았네
여기서부터 다시 멀고 험하다네
거센 물살에 떠밀려 치고받히며 만신창이로 구르고 구르다가
읍내 개울 옆 순댓국밥집 마당에서
다리 부러진 평상 한 귀퉁이를 다소곳이 떠받들고 앉아 있는 닳고 닳은 몽돌까지
- 시집『밥그릇 경전』(실천문학사,2009)
은행나무 부부/ 반칠환
십 리를 사이에 둔 저 은행나무 부부는 금슬이 좋다
삼백년 동안 허운 옷자락 한 번 만져보지 못했지만
해마다 두 섬 자식이 열렸다
언제부턴가 까치가 지은 삭정이 우체통 하나씩 가슴에 품으니
가을마다 발치께 쏟아놓는 노란 엽서가 수천 통
편지를 훔쳐 읽던 풋감이 발그레 홍시가 되는 것도 이때다
그러나 모를 일이다
삼백 년 동안 내달려온 신랑의 엄지발가락이 오늘쯤
신부의 종아리에 닿았는지도
바람의 매파가 유명해진 건 이들 때문이라 전한다
- 월간「현대시학」2004년 10월호
은행나무 연가/ 윤준경
우리 집 은행나무는 혼자였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짝이 없던 은행나무는
연못 속에서 짝을 찾았다
그것이 제 그림자인 줄 모르고
물속에서 눈이 맞은 은행나무
물에 비친 제 그림자에 몸을 포개고
만 명도 넘게 아기를 가졌다
물방개는 망을 보고
연잎은 신방을 지켜 주었다
해마다 가지 사이에 돌멩이를 얹고
그림자에게 시집간 은행나무
한 가마니씩 은행이 나와도
그것이 그리움의 사리인 줄 몰랐다
바람이 세게 불 때마다
연못이 걱정되는 은행나무는
날마다 그쪽으로 잎을 날려 보내더니
살얼음이 연못을 덮쳤을 때 은행잎은,
연못을 꼭 안은 채 얼어 있었다
-시집 『'다리 위에서 짧은 명상』(도서출판 옴, 2009)
방황하는 호수 / 박명보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에 우물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쌩떽쥐뻬리 「어린왕자」중에
타클라마칸 사막에는 떠도는 호수가 있었다지
천 년도 훨씬 지나서야 제자리로 돌아오는 그리움의 주기
너무 많아 아무것도 아닌
잉여의 집합, 그 체적의 무게가
물의 길을 바꾸고
사막에 우물을 만든다지
발화되지 못한 슬픔이 출구 없는 쪽으로 몸을 밀 때
한 뼘 한 뼘 도착한 곳은
기어이 피하고 싶던 생의 저층부
상처를 가진다는 건 우물 하나 갖는 일
베이고 스친 흉터자국 늘어갈수록
우물의 깊이가 더하고
눈매 깊어지는 일
그리하여 오늘
나를 치고 가는 말도, 등 돌리는 사람도
내 이기利己의 변방에서
흉벽의 마른 흙들 우수수 긁어내는 일임을
버석거리는 어깨 맞대며
낮은 곳으로 함께 흐르는 일임을
길을 버리고서야 우물이 된
사막의 순례자 로프노르*
이제 다시 우물을 버리고
천 년의 잠 속으로 고여 들어
지구에 불시착한 영혼들, 그 마른 꿈을 적신다
* 몇백 년 만에 한 번씩 크기와 장소를 바꾸며 이동하다 1500년 만에 처음의 자리로 돌아온다는, 1962년 이후 사라진 타클라마칸 사막의 호수.
- 계간《미네르바》2011년 가을호
낮술 한잔을 권하다/ 박상천
낮술에는 밤술에 없는 그 무엇이 있는 것 같다. 넘어서는 안 될 선이라거나, 뭐 그런 것. 그 금기를 깨트리고 낮술 몇 잔 마시고 나면 눈이 환하게 밝아지면서 햇살이 황홀해진다.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은 아담과 이브의 눈이 밝아졌듯 낮술 몇 잔에 세상은 환해진다.
우리의 삶은 항상 금지선 앞에서 멈칫거리고 때로는 그 선을 넘지 못했음을 후회하는 것.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라. 그 선이 오늘 나의 후회와 바꿀 만큼 그리 대단한 것이었는지.
낮술에는 바로 그 선을 넘는 짜릿함이 있어 첫 잔을 입에 대는 순간, 입술에서부터 ‘싸아’ 하니 온몸으로 흩어져간다. 안전선이라는 허명에 속아 의미 없는 금지선 앞에 서서 망설이고 주춤거리는 그대에게 오늘 낮술 한잔을 권하노니, 그대여 두려워 마라. 낮술 한잔에 세상은 환해지고 우리의 허물어진 기억들, 그 머언 옛날의 황홀한 사랑까지 다시 찾아오나니.
- 시집『낮술 한잔을 권하다』(책 만드는 집, 2013)
반장엄마/ 정이랑
초.중.고등학교 12년 생활
반장은 한 번도 되지 못했다
올해 6학년 아들은 반장이 되었다
내 이름은 정은희, 평상시는 승현엄마
반장엄마는 오늘 하나 더 붙여진 수식어
공개 수업이 있는 날
잘 하지도 않은 화장을 하고
즐겨 신지 않는 구두를 꺼내 닦았다
옷장을 뒤져 머플러도 이것 저것
거울 속의 나는 누구인가
낯설어서 다시 한 번 쳐다보게 된다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살아왔던 날들이 수두룩하다
아이가 뒤로 힐끔거리며 쳐다본다
엄마가 왔다는 것을 확인하고
신나서 손 들고 발표를 한다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살아온 날들
되돌릴 수 없지만 오늘, 나는 저 아이의 엄마다
- 계간「스토리문학」2013 여름호
왕피천, 가을/ 김미정
돌아오는 길은 되레 멀고도 낯설었다
북위 삼십칠도, 이정표 하나 없고
피멍든 망막 너머로 구절초 곱게 지는데
귀 익은 사투리에 팔다리가 풀리면
단풍보다 곱게 와서 산통은 기다리고
한세상 헤매던 꿈이 붉게붉게 고였다
숨겨온 아픔들은 뜯겨나간 은빛 비늘,
먼 바다를 풀어서 목숨마저 풀어서
물살을 차고 오르는 연어들의 옥쇄玉碎 행렬
건듯 부는 바람에도 산 하나가 사라지듯
끝없이 저를 비우는 강물과 가을 사이
달빛에 길 하나 건져 온몸으로 감는다.
- 시조집 『고요한 둘레』(동학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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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박용하 달 호텔에서 지구를 보면 우편엽서 한 장 같다. 나뭇잎 한 장 같다. 훅 불면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연약하기 짝이 없는 저 별이 아직은 은하계의 오아시스인 모양이다. 우주의 샘물인 모양이다. 지구 여관에 깃들어 잠을 청하는 사람들이 만원이다. 방 이 없어 떠나는 새· 나무· 파도· 두꺼비· 호랑이· 표범· 돌고래· 청개구리· 콩새· 사탕단풍나무· 바람꽃· 무지개· 우렁이· 가재· 반딧불이…… 많기도 하다. 달 호텔 테라스에서 턱을 괴고 쳐다본 지구는 쓸 수 있는 말만 적을 수 있는 엽서 한 잎 같다
- 시집『영혼의 북쪽』(문학과지성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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