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의 힘으로 이룩한 해방구의 꿈, <광주, 뜨거운 부활의 땅>
[기고] 5·18 광주 항쟁 40주년 기념 시선집을 읽고
올해로써 5·18 광주 항쟁이 발발한 지 만 40주년이 되었다. 한국 현대사상 온 국민의 염원이 집약된 민주화운동이 벌어진 지 장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여기에는 단순히 기억의 문제만이 아닌 참다운 역사를 일으켜 세워가려는 국민들의 숭고한 피와 땀이 각인되어 있다. 광주는 지역을 넘어 한반도 전체의 문제이며, 수백명의 억울한 희생자를 떠안은 광주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닌 온 국민이 함께 풀어나가야 할 극복 과제이다
5·18 광주 항쟁은 몇몇 재야 인사나 운동권 학생들이 주도한 시위가 아니라, 평범하고 무구한 시민들이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말살하고 사리사욕을 채우려 드는 세력에게 국민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주장하며 나선 시민 혁명이었다. 또한 민주시민이라면 당연히 짊어져야 할 책무에 입각하여 자신들의 땅이 권력욕으로 점철된 군홧발에 짓밟히는 걸 거부하고 인간다움이 말살되는 걸 온몸으로 막아냄으로써 시민 행동 규범을 올곧게 지켜낸 민주 수호 의거였다.
5·17 전국 계엄 확대와 함께 전두환 신군부는 전국 주요 도시에 무장한 군대를 파견하였는데, 광주에 투입된 3, 7, 11 공수여단 병사들은 투입에 앞서 몇 달 동안 산골짜기에 고립된 채, 광주에는 빨갱이들이 득실거리니 투입되는 대로 무차별 가격하여 거리에서 몰아내야 한다고 매일 반복되는 세뇌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광주 투입 작전을 일러 ‘화려한 휴가’라고 명명하면서 빨갱이들을 몰아내면 달콤한 휴식과 마음껏 먹고 마실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며 사병들을 유혹했다고 한다.
군부 세력이 중심이 된 유신 독재 체제가 1979년 10·26 사건을 극한점으로 막을 내리면서 국민들은 참다운 민주 정부가 들어설 것을 기대했다. 그해 12월 7일 오직 일인 독재를 공고하게 할 목적으로 국회의 동의도 없이 발동되었던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되고, 많은 민주인사들이 투옥되어 있던 감옥 문을 박차고 나와 활발하게 민주화 논의를 이어가던 기억이 새롭다. 하지만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은 이른바 체육관 선거로 최규하를 허수아비 대통령으로 내세운 세워놓고 정권 찬탈 계획을 은밀하고도 집요하게 밀고 나갔다. 민주정부 수립을 위해서 박정희 체제하에서 보신주의로 일관한 관료들이 아닌, 참신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과도정부를 세우자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지만 당시 정부는 최규하 국무총리를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내세운 채 국민들의 요구를 묵살하는 것으로 일관했다.
최규하는 박정희가 사망함으로써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고, 같은 해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정식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그는 권한대행 시절이던 1979년 11월 10일 특별담화를 통해, ‘대통령 궐위 시 3개월 이내 후임자를 선출한다’는 제4공화국 헌법에 따라 대통령을 우선 선출하되, 새 대통령은 가능한 한 빠른 기간 안에 민주헌법으로 개정한 후 이에 따라 다시 선거를 실시하여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담화문은 야당 정치인을 포함해 모든 국민들로부터 환영을 받았으며, 이 선언으로 인해 최규하 권한대행이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데 대내외적으로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국민들의 신망을 등에 업은 재야 인사들은 물론 흔히 삼김으로 불리던 당시 유력 대권주자들까지 최규하 씨가 민주 정체를 세우는 데 협력할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같은 온 국민들의 여망은 당시 막후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의 12·12 군사반란으로 여지없이 물거품이 되었다. 최규하 정부는 개헌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그에 따라 국민의 직접 선거를 통한 민주 정부 수립의 꿈은 기약없이 미루어졌다. 민주 정부 수립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1980년 들어서는 각계각층으로부터 민주화 요구가 봇물 터지듯이 분출되었다. 흔히 ‘서울의 봄’으로 불리듯 서울에서는 재야 지식인들과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민주화 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광주에서도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서울의 봄 운동에 발맞춘 민주화 요구 시위가 지속적으로 벌어졌다. 초기에는 전남대 등 대학 내에서 학원 민주화 요구 시위가 산발적으로 벌어지다가 이내 민주화 요구 시위로 발전되었다. 당시 독재정권에 부역하여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을 제적시키고 교수들을 해직시키는 등의 행동을 일삼은 어용교수들을 축출하자는 등의 학내 민주화 운동은 필연적으로 민주 정부 수립이 되지 않고서는 달성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4월 들어서는 교내만이 아닌 금남로로 진출하여 시민들과 힘을 합쳐서 민주화 요구를 범사회적으로 확산해야 한다는 생각이 넓은 공감대를 형성하였다. 여기에는 박정희 독재 정권의 몰락은 김재규의 거사만이 아닌, 1979년 10월에 벌어진 학생과 재야 지식인들은 물론 일반 시민이 하나 된 ‘부마 항쟁’이 결정적인 촉진제 역할을 하였다는 교훈이 큰 역할을 하였다. 5월 들어서는 전남대생들이 교문을 박차고 나와 금남로까지 진출한 데 이어 5월 15일에는 교수들이 학생들과 함께 도청 분수대 앞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도도한 민주화의 물결을 이루었다.
하지만 국민들 사이에 큰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던 민주화 열망은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의 공공연한 방해와 시민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민주화운동 세력의 치밀하지 못한 대응으로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였다. 김대중, 김영삼 등의 정치인들은 분열된 채 통일된 의견과 행동을 보이지 못하였다. 또 서울대생들을 중심으로 한 학생운동권은 이른바 ‘서울역 대회전’으로 불리는 민주화운동을 벌이던 중 시민들의 열화 같은 호응에 찬물을 끼얹는 행동을 하였다. 시민들의 큰 호응 속에 광화문으로 진출하던 중 군부의 심상찮은 움직임을 둘러싼 괴소문이 나돌자 5월 15일 서울역 앞에서 심재철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 등 주도층이 시민 학생들을 버려둔 채 자신들만 몸을 피해 버리는 등의 난맥상을 노출했다.
급기야 은밀히 군부 개입의 명분을 축적하고 있던 신군부는 1980년 5·17 내란으로 권력을 모두 장악한 후 전국에 걸쳐 계엄령을 선포했다. 대학 문은 일제히 계엄군의 총칼로 막혔으며, 야권 정치인, 유력 재야 인사들 및 학생회 간부 등이 대거 예비 검속되는 등 신군부는 본격적으로 국민들의 여망을 저버린 채 권력 장악에 나섰다.
이러한 형국 속에서 서울을 비롯한 주요 도시의 재야 운동권이 동력을 상실한 채 와해된 데 비해 광주는 군부의 발호에 굴하지 않고 정치 군인들이 즉각 물러날 것을 요구하는 등 민주화 운동 시위를 지속적으로 벌였다. 당시 운동권에서는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보수반동 세력 중심의 군부가 머지않아 대학 문을 닫고 시민들의 집회와 시위를 원천 봉쇄하는 계엄령을 선포할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5월 15일 시민과 교수·학생들이 혼연일체가 된 전남도청 앞 시위에서도 계엄령이 내려질 경우에는 모든 학생들이 전남대 정문 앞에 모이자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시민과 함께 하기 위해 금남로로
전남대생들은 5월 18일 새벽 최규하 정부의 계엄 선포와 함께 군대가 정부를 장악하고 주요 대학이 봉쇄되었다는 심란한 방송 뉴스를 듣고 날이 밝자마자 전남대 정문 앞으로 갔다. 정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문 앞에는 착검한 계엄군이 지키고 있었다. 이날 9시가 되자 수백 명의 전남대생들이 모여 교내 진입을 시도하였지만, 변변한 대화 한 번 해볼 틈도 없이 계엄군은 착검을 한 채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그때까지 전투경찰과 대치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살벌한 진압이었다. 심지어 몇몇 학생들은 계엄군의 총칼을 피해 민가의 높은 담을 넘다가 크게 상처를 입기도 하였다.
이 같은 사태를 지켜보면서 몇몇 전남대생들은 교문 앞에서 계엄군들과 공방을 벌이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며, 광주의 중심지인 금남로로 진출하여 시민들에게 진상을 알리고 힘을 합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하였다. 그렇게 판단한 데에는 1979년 10·26의 도화선이 된 부마항쟁에서 보듯 시민들과 힘을 합하는 것이 민주 회복의 열기를 확산하는 데 첩경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었다. 필자는 몇몇 후배들과 상의한 결과 금남로로 진출하여 시민들과 합세하자는데 합의하였다. 200여 명 남짓의 전남대생들은 그날 10시경에 전남대 정문을 출발하여 광주역과 대인동 종합터미널을 경유하는 2km 남짓 되는 거리를 스크럼을 짠 채 “전두환은 물러가라! 민주화를 이행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구보한 끝에 금남로로 진출하였다. 우리는 금남로에서 기다리던 적잖은 청년학도들과 힘을 규합하였고, 우리의 뜻을 전달 관철하고자 독재 타도, 계엄령 철폐 등의 구호를 외치며 도청 쪽으로 진출을 시도하였다. 초기에는 전투경찰대와 밀고 당기는 공방을 서서히 벌였을 뿐 별다른 충돌은 없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시민들은 거리를 가득 메울 만큼 불어났다. 그런데 정오 무렵이 되어 계엄군이 투입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더니 급기야 전투경찰대가 물러가고 계엄군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시민 학생들은 미증유의 사태를 맞이하였다. 공수부대 출신의 계엄군들은 군용 트럭에서 내리자마자 서슴없이 시위대를 향하여 무자비하게 쇠심이 박힌 70cm 길이의 장봉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심지어 금남로 2가 가톨릭센터 일대 거리에서는 시위에 참가하지 않은 시민들을 향해서도 인정사정없이 곤봉을 휘둘러 대규모 부상자가 발생하였고, 계엄군은 무차별로 시민들을 체포해 갔다. 이것이 곧 광주민중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금남로를 빼앗긴 시위대는 계림동과 산수동, 광주공원 일대 등 광주시내 전역으로 흩어져 진종일 계엄군과 사투를 벌이게 되었다.
실제로 5월 18일 정오 무렵 광주 금남로에 모여 계엄 철폐를 외치던 시민들은 트럭에서 내리는 계엄군이 질서 유지 차원에서 투입되었거니 하며, 자식이나 동생을 대하듯 했다. 그때까지 도청 앞에서 맞닥뜨린 경찰은 기껏해야 최루탄 몇 발을 날렸을 뿐 시민들이 관공서로 진입하는 걸 소극적으로 막는 데만 주력했고, 상당수의 경찰들은 시민들에 동조하는 입장을 보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계엄 초기 시민들을 강경 진압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당시 안병하 전남경찰청장이 계엄 당국에 불려가 고초를 당하고 즉각 직위해제되기도 했다.
심지어 계엄군들은 이를 말리던 경찰들마저 무차별로 구타하는 등 시민들을 부모나 형제가 아닌 오열로 돌리면서 실로 전시의 적에게나 보이는 차갑고 비인간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이날 계엄군들은 금남로를 비롯해 광주 공원, 광주역 등 시내 전역에서 시민들을 무차별로 구타하고 찌르는 등 실로 미증유의 만행을 저지른 끝에 실로 단 하루 만에 수백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렇듯 인면수심의 만행을 자행한 쿠데타 세력들은 5월 18일 수백명의 사상자를 내고 수천명의 시민들을 연행하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의도가 관철되고 소위 진압 작전이 성공리에 끝날 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이 되자 금남로 3가 한국은행 광주지점 사거리를 중심으로 시민들은 어제 억울하게 죽은 이웃들의 넋이라도 기릴 생각으로,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마침 계엄군은 주력 부대가 공수 특전단에서 광주 인근 31사단 병력으로 바뀌어 전날처럼 무자비한 진압에 나서는 대신 시민들을 지키러 왔다는 등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날은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을 추모하듯 봄비마저 내리고 있었다.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수만명으로 불어난 시민들은 책임자를 처벌하라, 계엄군을 물러가라고 외치며 금남로를 비롯 광주 시내 전역을 메운 채 계엄군과 공방전을 벌이기에 이르렀다. 이날부터 20일 밤까지 한치도 물러서지 않으며 중무장한 골리앗 계엄군에 다윗처럼 돌팔매 등으로 맞선 끝에 마침내 5월 21일 광주시내 전역에서 계엄군을 물러나게 만들었다.
실로 하늘이 무섭다는 것을 만천하에 보여준 민심의 승리였다. 그리고 그 승리의 주역은 유명 재야 인사나 운동권 출신들이 아닌 그야말로 하루하루를 땀으로 엮어가는 무구한 시민들이었다. 지금도 망월동 5·18 국가 묘역에 가보면, 광주 항쟁 과정에서 희생된 이들 대부분이 평범한 시민들임을 알 수 있다. 3월에서 5월까지 민주적 정권 교체를 외치던 학생 운동권 사람들은 대부분 예비 검속되거나 체포와 무자비한 고문을 피하여 대피하였고, 운동권 인사들도 어떤 이는 미국으로 밀항하였고 시골로 몸을 숨는 등 22일 광주 해방구가 만들어지기까지 제자리를 지킨 이들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제 애비에미 가슴 앞에 착검한 채 달려드는 계엄군에 맞선 이들은 광천동 야학 출신 구두닦이 박용준, 광주역 앞에서 계엄군에 맞서서 행진 대열 앞에 섰다가 절망한 부랑아, 일자리를 잃은 채 주먹밥으로 때우며 시민군 대오를 이룬 날품팔이 노동자 등 무구하고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이들은 비록 비조직 노동자들이었지만 자신의 밥그릇이 놓여 있는 땅을 지키기 위하여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제자리를 지켰고 그것은 광주 해방구를 이루는 밑거름이 되었다.
21일 계엄군의 무차별 발포에도 불구하고 시민군을 조직하여 계엄군에 맞선 일군의 젊은이들 역시 지역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조직 출신들이거나 부랑인 및 심지어 고등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도청 일대에 저격수를 포진시키고 경기관총,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계엄군이 손을 들고 물러나게 한 데는 광천동 소재 아시아자동차 공장 노동자들 및 택시 운전사, 버스 운전자들이 목숨을 걸고 계엄군 앞으로 치달은 것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특히 군용 트럭이며 장갑차를 생산하고 있던 아시아자동차 공장을 장악한 시민들은 장갑차며 군용 지프들을 징발하여 계엄군에게 맞서서 더 이상 무력 진압이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렇듯 광주 항쟁에서는 우리 사회를 이루는 노동자들의 힘이 크게 부각되었고, 이후 단순히 반정부 투쟁이 아닌 노동자들을 조직화해야 사회가 근본적으로 바뀔 수 있다는 인식을 심화시키는 기회가 되었다. 또한 22일에서 27일에 이르는 광주 해방구 기간 동안 광주 대인시장 상인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주먹밥 만들기 운동에서 보듯 무엇보다 시민들과 함께 하는 것이 진정한 민중 혁명의 원천임을 보여 주었다.
이제 시민들의 구호는 ‘전두환은 물러나라’에서 ‘계엄 철폐!’, ‘민주 회복’ 등 보다 적극적이고 민주 시민다운 구호로 바뀌었다. 이날부터 21일 저녁 계엄군이 철수하기까지 시민들이 보여준 희생정신과 투지는 실로 눈물겨운 것이었다. 필자는 21일 구름같이 몰려든 시민들이 금남로의 끝 도청으로 치닫는 광경을 뜨거운 눈물로 지켜보았다. 이날 시민군은 계엄군이 장갑차를 타고 시위대 사이를 무차별로 누비는 것을 볼 수 없었던 나머지 군 장비를 납품하던 광천동 소재 아시아자동차 공장에서 장갑차를 징발해와 계엄군에 맞섰다. 당시 필자는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 전반의 청년들이 장갑차 위에 타고 태극기를 가슴에 안고 도청을 향해 나아가다가 계엄군의 저격병에게 사살당하는 장면을 몇 번이고 보았다. 필자는 뒷날 그 장면장면을 「십자가의 꿈」 연작으로 쓴 바 있는데, 그 가운데 한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눈물개스가 공중에 가득 배어 안개를 이루고 있었다
뜨거운 눈시울 위에
갑자기 납덩이에 맞아 떨어지는 새처럼
장갑차 위로 가슴을 내밀고 나아가던
어린 소년의 죽음이 얹혀졌다
그때마다 바위에 찢긴 파도가 갈라지듯
총소리도 아랑곳없이 이내 다시 달려들어
완강한 바다를 이루어버렸다
다시 장갑차 위로 깃발이 담긴 가슴을 내밀고
나아가던 소년의 목이 하나 더 떨어졌다.
사람들은 쓸쓸한 섬처럼
선지피 낭자한 소년 하나만 남긴 채
다시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다가는 얼마 안 가 다시 장갑차에
깃발을 든 새로운 소년이 오르고
분노로 벌건 얼굴들이
죽은 소년의 일가처럼 바다를 이루었다
죽음의 공포도 사람들을 더 이상 갈라놓지는 못했다
바닷물은 어디서 몰려드는지 몰라보게 불어났다
고향을 버렸던 형들도
방안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던 사람들도
무엇에 이끌렸는지 모두 흘러들어
퍼내도 퍼내도 마르지 않는 바다가 되었다
몇 사람의 제물로 바다의 분노를
잠재울 수 없는 새벽
무기는 마침내 거꾸러지고
사람들은 빼앗긴 땅을 되찾을 수 있었다
-「십자가의 꿈 5 - 금남로 탈환의 대낮」 전문
젊은 청년들의 이 같은 희생이 잇따른 뒤 금남로 3가 소재 한국은행 광주지점 등지에서 화순 탄광 등에서 징발해온 카빈 소총 등으로 무장한 시민들이 계엄군을 향해 총기로 응사하기 시작하면서, 계엄군은 수세에 몰렸고 마침내 그날 밤 조선대학교 뒷산을 넘어 후퇴하고 말았다. 1930년대 스페인 내전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내걸고 프랑코의 독재 정권에 항거하여 해방구를 일구었듯, 자발적인 시민들로 구성된 시민군은 이른바 공권력이 부재한 상황에서도 약탈이나 방화 등 일체의 질서 파괴 행위 없이 시민 자치로 이끌어가는 해방구를 이룩해냈다. 5·18 광주 항쟁 당시 중동에 순방을 나갔던 최규하는 소식을 듣고 급히 귀국했고, 귀국 후에 신군부로부터 상황을 보고받은 뒤, 5월 25일 ‘냉정과 이성을 되찾고, 총기를 반환하고 집으로 돌아가라’는 요지의 담화문을 발표하는 등 말 그대로 신군부의 허수아비 노릇만 했다.
이렇듯 광주 시민들의 어떤 난관에도 굴하지 않는 민주화 요구 열기에도 불구하고 5·18 광주 항쟁은 5월 27일 새벽 탱크와 대포를 앞세운 계엄군의 재진입으로 엄청난 희생을 치른 채 미완의 혁명으로 저물었다.
추념에서 새 세상 여는 동력으로
5·18 광주 항쟁 40주년을 맞는 오늘, 이 시선집은 우리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고, 역사의 오욕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점검해 보기 위하여 기획되었다. 시를 쓰는 사람들로서 광주 항쟁 과정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에 대한 작은 추모의 마음을 표시하는 데서 출발하여, 묻혀진 항쟁의 진실을 추적하는 데서 나아가 다시는 이 같은 반인륜적인 행위가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는 문제 의식을 함께 하는 이들이 모였다.
광주 항쟁은 지역의 문제를 넘어온 국토 온 국민의 문제였음에 공감하면서 지역을 가리지 않고 전국의 시인들이 두루 참여하였다. 또한 계엄군의 강고하고 차가운 무력을 제압하고 해방구를 이룬 이들이 무구하고 평범한 시민들이었듯이, 이 시선집에 참여한 이들은 시적 경향이나 유파를 가리지 않고 두루 참여하여 각기 다른 시각으로 광주 항쟁의 진실을 파헤치고 계승 방안을 모색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이 시선집은 크게 네 갈래로 나누어서 편집되었다. 제1부에서는 광주 항쟁에 이르기까지 전사를 다룬 시들을 모았다. 당시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가 계엄군에게 조속히 평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광주만이 계엄군에게 반기를 들지 않고 끝까지 민주 회복을 외치고 항쟁의 횃불을 높이 든 데는 역사 사회적 요인이 깃들어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광주는 백제의 고토로서 통일신라 이래 천년 넘게 정치적 핍박을 받아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 또한 광주를 비롯한 전라도 지역은 다른 지역보다 예로부터 소작농이 유난히 많은 땅으로 늘 잘못된 지배 구조를 타파하여 참다운 대동세상을 이루고자 하는 열망이 뿌리 깊게 잠재된 지역이었다. 일제 강점기에도 암태도 소작쟁의를 비롯 소작농들의 쟁투가 빈번하게 발생한 역사를 갖고 있다.
서로의 심장에 총탄을 재던 그해 六月, 고향 갯가로 끌려 나온 무수한 유령들이 광목천에 묶이어 역사 저편으로 수장되었다는 어른들의 음계 낮은 목소리를 들으며
문득 남도의 외로운 섬 하나가 떠올랐다
(중략)
한 치의 틈도 내주지 않은 고향의 날 선 목소리 속에, 태어나 단 한 번도 바뀌지 않은 사진 속의 인물을 용의자로 지목하자 낯선 국방색 표지들이 두더지처럼 시월十月의 마음을 도굴하는 장면을 눈으로 지켜보며
그 하도리의 불턱이 자꾸 스쳐갔다
골다공증을 앓는 아낙들의 숨비소리가 쌓아 올린 부도 ,
매일같이 저승의 문턱을 닳아 없앤 물질을 제쳐두고
한지보다 메마른 젖가슴을 아이에게 물리며
한라에서 불어오는 四月의 냉기 어린 들숨마저 화톳불로 이겨내는
-김요아킴, 「불턱 방담」 부분
김요아킴의 위의 작품은 한국 현대사를 가로지르는 아픔을 소재로 삼고 있다. 이 시에 등장하는 ‘불턱’은 ‘제주 해녀들이 물질하기 위해 옷을 갈아입거나 물질 후 몸을 녹이기 위해 불을 지피는 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도리는 성산일출봉이 멀지 않은 바닷가 마을로 제주에서 해녀들이 가장 많이 산다. 시인은 불턱을 제재로 함으로써 제주 해녀들이 고달픈 물질 가운데서도 얼마나 따스한 봄볕을 그리워하며 살아가고 있는가를 드러낸다. 그는 제주 해녀들의 삶을 환유의 고리로 하여, ‘서로의 심장에 총탄을 재던 그해 유월六月’을 통해 동족상잔인 한국전쟁, ‘한라에서 불어오는 사월四月의 냉기 어린 들숨’을 빨갱이로 몰려 민초들이 억울하게 진 제주 4·3사건 등 현대사의 아픔을 되새기며 아직 역사의 봄은 오지 않았다고 천명하고 있다. 그는 5·18 광주 항쟁을 직접적인 소재로 택하지 않았지만 5·18이 간직하고 있는 아픔은 광주만의 것이 아니며 한국 현대사가 공유하고 있는 것이라는 인식을 환기하고 있다.
어떤 감시의 눈 하나 없어도
상점의 물건 하나 손대지 않은
대문에 빗장을 걸지 않아도
어느 누구도 담을 남지 않은 채
오손도손 봄밤을 보내던 광주에서
백제의 무구한 마음을 읽는다
삼남만을 아프게 싹둑 자를 게 아니라
멀리 만주 벌판까지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오랑캐도 바다 멀리 미국의 검은 손도 뿌리치고
갈라진 대륙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제 몸을 악기 삼아 외치는
광주는 불 같은 희망의 땅
평양성 넘어 만주 벌판으로 가지고 외치던
천년 전 신돈이 채 다 하지 못한 말
식민의 굴레 벗어던지고
우리끼리 하나 되어야 한다고
다시 뜨겁게 통일의 희망을 달구던
광주에서 백제의 꿈을 읽는다
-박몽구, 「광주, 불같은 희망의 땅」 부분
위의 시는 광주를 백제의 강토로 제유堤諭하면서 외세를 끌어들인 신라의 반쪽짜리 통일의 상처를 천년 동안 앓아온 땅으로 설정하고 있다. 광주를 중심으로 한 전라도 일대는 예부터 보길도, 강진, 창평 등 고려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중앙 권력에서 배제된 사람들이 위리안치되어 살아가는 유배지였다. 또한 봉건시대에서 일제 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천민과 소작농이 다른 지역에 비하여 많은 곳이었다. 동학 농민혁명군의 근거지가 되었고 일제 강점기에는 끈질기게 소작쟁의가 벌어졌다. 김지하는 이런 전라도를 가리켜 ‘남쪽은 뜨거운 반란의 나라’라고 적기도 했다. 위의 시에서는 ‘백제의 무구한 마음을 읽는다/ 삼남만을 아프게 싹둑 자를 게 아니라/ 멀리 만주 벌판까지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오랑캐도 바다 멀리 미국의 검은 손도 뿌리치고/ 갈라진 대륙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제 몸을 악기 삼아 외치는/ 광주는 불같은 희망의 땅’이라고 노래함으로써, 이같이 소외와 왜곡으로 일관된 역사의 저변에는 반쪽의 통일과 외세에 개입으로 초래된 분단으로 이어지는 아픈 역사가 자리잡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즉, 5·18의 아픔 저변에는 외세와 매판 세력의 결탁으로 초래된 분단의 역사가 숨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렇듯 적잖은 시인들은 5·18 광주 항쟁은 어느 날 갑자기 벌어진 일이 아니며 그 저변에는 왜곡된 역사의 아픔이 뿌리 깊게 배어 있으며, 광주라는 특정 지역만의 문제가 아닌 온 국토가 앓고 있는 역사의 상처라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있다.
1980년 압제에 굴하지 않고
광주에서 시민항쟁이 일어났다
그때도 하나님은 침묵하였다
신군부 계엄령 하의 전남대 학생들이 일어섰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광화문광장 촛불 시민혁명의 승리는 없었다
피로 세워진 혁명정부 그들만의 정권도 끝나간다
십자가도 없는 무덤
민들레 봄꽃의 바람만이 쓸쓸하다
민중은 여전히 생계에 허덕이고
판문점 백두산 통일의 꿈은 무참하게 짓밟히고
아메리카의 식민지 남쪽은 십자가만 가득하다
하나님 없는 교회 예수 없는 교회
벌레 같은 착취자들
광주의 40년 전 언덕의 들리는 소리
참혹한 십자가 하나뿐이었다
-김창규, 「십자가」 부분
오월광 주는 아직 진행형이다
잔을 쥔 손등에 푸르딩딩 돋는 핏줄하며
왼쪽 손마디의 뚝뚝 부러지는 관절 소리 따라 일어서는
이 분노를 만든 몹쓸 이들은
꼭꼭 숨어라 숨바꼭질 중인가 수십 년 동안을, 그러고도
아무 일 없음?
보수保守의 이름으로 위장한 무리들
몰염치한 가면극
언제 발가벗은 오월 광주의 민낯을 보게 될 것인가
-김태수, 「오월, 남광주시장 시인 희자네 가게」 부분
김창규는 1980년 광주 항쟁을 승리의 역사가 아닌 ‘하느님의 침묵’으로 해석하고 있다. 역사는 단번에 정의의 장을 열어 보이는 법이 없으며 늘 시련과 도전을 반복하며 하느님의 정의를 향해 간다고 시인은 말한다. 그는 광주 항쟁에 이룩하지 못한 미완의 혁명이 최근 세월호의 억울한 희생자들을 신원하고 진상 규명을 염원하면서 벌어진 광화문 촛불 혁명으로까지 이어진다고 파악하고 있다. 나아가 시민들의 열화 같은 열망과 단결로 세워진 문재인 정부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려움에 처해 있는 민중 생존권과 먼 통일에의 길을 지적한다. 그는 ‘판문점 백두산 통일의 꿈은 무참하게 짓밟히고/ 아메리카의 식민지 남쪽은 십자가만 가득하다’고 적음으로써, 외세에 의하여 초래된 분단 현실의 청산과 미국 등의 간섭 없이 민족의 자력으로 곧게 일어서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5·18이 6.29를 거쳐 오늘의 촛불 혁명에 이르도록 저변에서 넉넉한 밑거름이 되어 왔으며, 앞으로도 더욱 큰 연대 속에 역사의 발전을 선도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김태수는 ‘오월 광주는 아직 진행형이다’라고 언명한다. 희자네 가게는 5·18의 현장 가운데 하나인 광주 남광주시장에 있는 작은 횟집으로 김준태, 나종영, 백수인 등 광주의 재야 예술가들이 집결하는 요람이다. 울산 사람으로 광주를 방문한 그는 허름하고 비좁은 시장 안 횟집이 광주 예술가들의 요람이 되었는지를 돌아본다. ‘꼭꼭 숨어라 숨바꼭질 중인가 수십 년 동안을, 그러고도/ 아무 일 없음?/ 보수保守의 이름으로 위장한 무리들/ 몰염치한 가면극’이라는 구절을 통하여, 광주의 진실을 규명하는 일은 서로 모여서 지치지 않는 가운데 묻혀 있는 진실을 끈질기게 파헤치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하석, 강영환, 이승은 등 중진들의 작품은 지역과 계층의 차이를 넘어 5·18 광주 항쟁을 새롭게 들여다보는 눈을 선사하고 있다. 즉 5·18이 남긴 뿌리 깊은 아픔은 함께 풀어가고, 살신성인으로 겨레붙이들을 감싸면서 꽃피운 민주 정신은 온 나라 온 국민이 계승해야 갈 유산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세상은 시나브로 40년 전으로 역행하네
끊임없이, 다 큰, 옳게 산 죄 따져
국가가 죽여서 버린다면
그냥 파묻어서 버린 세월의
그런 죽음 더 살수록
한결 되살아나는 자장가여
내 아가야 그래그래
우는 혼으로만 떠돌지 말고 집에 와서
기어이 국가보다 더 큰 어미 품에서
자장자장
-이하석, 「자장가」 부분
내가 그때 타는 들불이 되었다면
정신대에 끌려가는 소녀들 가슴에 불 지펴
손대는 짐승들마다 화상을 입히고
불로 만든 울타리 되어 줄 수 있었을까
뒷날 빼앗겨버린 모국어로
가을 하늘을 노래할 수 있었을까
학도병에 지원하라고 부추기는
어둠이 되지는 않았겠지
그때 내가 스물세 살이었다면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궁금해지는 백 년
-강영환, 「내가 그때」 부분
사실 이 물고기는 눈에 열이 없다 한다 제 알을 지키려는 타고난 모성으로 급물살 솟구쳐 넘는 몸부림이 있을 뿐
을수계곡 칡소폭포 펄펄 뛰다 휘말려도 끝까지 펼쳐 드는 황갈색 지느러미 물보라 소용돌이를 거침없이 받아내지
그럴수록 짙어 오는 돌배꽃 꽃말처럼 흐린 눈 씻어가며 다시 꺼내 읽는 오월 슬어 논 핏덩이들이 꼬물꼬물 다 살았다
-이승은, 「열목어-헌시」 전문
이하석은 오늘의 세태를 가리켜 ‘세상은 시나브로 40년 전으로 역행’한다고 진단한다. 국민의 생명을 무엇보다 소중한 가치로 지켜야 할 정부가 세월호 진상 국면의 무마 등으로 제대로 신원하지 못하고 있는 문제의 배후에 주목하는 시선이다. 그는 그것을 40년 전 5·18 광주 항쟁 때 무구한 이들이 억울하게 희생되고도 여지껏 제대로 신원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과 연결 짓고 있다. 하지만 시인은 절망의 언어를 내뱉기보다 ‘그냥 파묻어서 버린 세월의/ 그런 죽음 더 살수록/ 한결 되살아나는 자장가여’라고 노래함으로써 죽음을 넘어 역사는 진실을 기록하기 마련이며, 그 신원은 우리 모두 어머니의 정신으로 끌어안아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강영환 역시 5월의 희생을 한 지역이나 세대에 국한하지 않고, 그 연원을 억울하게 ‘정신대에 끌려가는 소녀들’과 제 뜻과는 관계 없이 매국노들에게 등 떠밀려 일제의 총알받이가 된 학도병들에게까지 확장하고 있다. 시인은 국민의 뜻을 거스른 채 민초들을 죽음과 고난의 질곡에 밀어넣은 반민족이며 매국적인 행위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묻고 있다. 그것은 시인 개인의 자문자답을 넘어 우? 모두의 숙제일 것이다.
이승은은 ‘제 알을 지키려는 타고난 모성으로 급물살 솟구쳐 넘는’ 열목어의 몸부림을 통하여 제 땅과 피붙이를 지키기 위하여 떨쳐 나섰던 5월 영령들의 모성애를 환유하고 있다. 열목어가 ‘칡소폭포 펄펄 뛰다 휘말려도 끝까지 소용돌이를 거침없이 받아내’며 맑은 상류로 나아가듯, 역사는 바른 길을 향해 나아간다고 시인은 확언하고 있다. 시인은 결구에서 ‘돌배꽃 꽃말처럼 흐린 눈 씻어가며 다시 꺼내 읽는 오월 슬어 논 핏덩이들이 꼬물꼬물 다 살았다’라고 그려냄으로써 겉으로는 흐려서 잘 안 드러나지만 핏덩이로 환유된 5월 영령들의 죽음은 역사의 바른 좌표로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인식을 담아내고 있다.
제2부 ‘끝에서 시작으로’에서는 5월 광주 항쟁의 국면국면을 돌아보는 시편들을 모아 보았다. 계엄군에 비해서 너무나 보잘것없이 맨손으로 나서게 한 힘은 무엇이었는지, 여느 도시와 다름없이 이내 잠잠해질 수도 있었음에도 투쟁의 불씨가 커져 마침내 민주 혁명이라는 치열한 불꽃을 피운 계기는 무엇이었는지 살피는 시들을 모았다.
광주·전국의 시민·학생들을
20,000여 명 불법체포하여
軍감옥에 구금, 구타·고문으로
시나리오를 만들어
(계엄군의 시나리오는 학살에 맞서
분노하는 시민들에게 먹혀들지 않았다)
12.12사태→ 5.17쿠데타→ 광주 학살을 자행한
대죄주범大罪主犯 전두환全斗煥을 참수하고
이를 만천하에 공포하노니
위대한 조국 Korea의 역사 속에서
그 싸움과 정신은 불사조不死鳥처럼 영원할지어다.
-김준태, 「단두대시-전두환을 참수하다!」 부분
김준태는 위의 시를 통해 5·18은 일부 정치 군인들이 철저하게 짠 시나리오에 따라 진행된 반역사적 반인륜적 사건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시인은 그러나 광주 시민들의 이웃을 피붙이처럼 사랑하는 정신에 따라 ‘계엄군의 시나리오는 학살에 맞서/ 분노하는 시민들에게 먹혀들지 않았다’고 단언한다. 그래서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분연히 일어섰다가 미완의 혁명으로 끝나기까지 하나가 되어 거대한 무기로 위장한 권력에 맞서 싸운 광주 시민들의 불굴의 참다운 역사를 지키기 위한 투쟁은 ‘위대한 조국 Korea의 역사 속에서/ 불사조(不死鳥)처럼 영원’하다고 말한다. 실로 시인으로서 광주 항쟁 기간 내내 시민들과 함께 한 시인의 예언자적인 목소리이다.
태극기 부대 사람들 다 우리나라 사람이야
된장국 먹고 김치찌개 먹어
미국이 우리나라 통일 도와줄 거라 믿어?
택도 없어 일본도 미국도 중국도
우리나라 통일 바라지 않아
그러니 우리가 미국 이기지 않으면 안 돼
그래서 내가 미국 국기 꽂고 다니는 거야
미국을 이기자!
매일 미국 국기 보며 다짐하는 거야
우리나라 지금 미국 눈치 보느라 정신없어
이게 자주 국가야 식민지야?
태극기 부대 사람들 욕하지 마
미국처럼 강한 나라 만들고 싶은 거야
미국에 기대지 않고
자주 국가 민주 국가 만들고 싶은 거야
-곽재구, 「덕칠 아재」 부분
곽재구는 5·18에 참여하였다가 이제 나이가 든 한 평범한 인물을 시적화자로 하여 광주가 품고 있는 금기사항을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미국의 존재이다. 5·18 광주 항쟁 기간에 즈음하여 미국은 부산 앞바다에 항공모함을 띄워 광주 시민들로 하여금 우방인 미국이 우리들을 이대로 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라는 환상을 심어주었다. 하지만 광주 시민들이 일부 정치군인들에게 조종받은 계엄군에게 무참하게 학살당하는 것을 보면서도 미국은 끝내 이른바 우방국 국민들의 생명과 존엄을 지켜주지 않았다. 나중에 밝혀지기로는 북한만을 경계하면서 전두환 군부의 등장을 묵인하는 등 우방국 국민을 기만했다.
시인은 덕칠 아재의 입을 빌어 ‘태극기 부대 사람들 다 우리나라 사람이야/ 된장국 먹고 김치찌개 먹어/ 미국이 우리나라 통일 도와줄 거라 믿어?’라고 우리들에게 캐묻고 있다. 1980년에 벌써 우방국 국민을 등진 미국이 오늘도 여전히 자신의 이익에 따라 움직일 뿐 우리 국민들은 염두에 두지 않고 있다고 단언한다. 성조기를 앞세우고 광화문에서 시위를 일삼는 이른바 태극기 부대들이 얼마나 허상에 휘둘리고 있는가 묻고 있다. 그는 ‘태극기 부대 사람들 욕하지 마/ 미국처럼 강한 나라 만들고 싶은 거야/ 미국에 기대지 않고/ 자주 국가 민주 국가 만들고 싶은 거야’라는 아이러니를 통하여 우리 스스로 자강력을 기를 때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확립되고 밝은 미래는 올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장미여, 오월 장미여,
탄흔 자국 무성한 도시의 입술에 태양의 빛깔을 입혀주렴 흐드러진 향기에 죽음을 문지르고 말과 말이 통하지 않는 우리들의 계절을 붉게 물들여주렴
꽃과 가시가 대립하는 오월이네
줄줄이 끌려나오는 장미 넝쿨 따라 형형색색의 향기가 돋아나네 형형색색의 입술이 어두워지네 송곳니가 뾰족이 솟은 너무 환한 밤이라네
-강영은, 「오월, 광주」 부분
위의 작품에서 강영은은 ‘오월 장미’와 ‘탄흔 자국’을 대비시키고 있다. 광주 항쟁 진압 당시 전남일보 빌딩에 쏟아진 캐리버50 기관총 총알은 건물 벽에 장미 꽃잎 같은 탄흔을 만들었지만 그것은 ‘향기에 죽음을 문지르’는 슬픈 일이었다. 나아가 그것은 ‘말과 말이 통하지 않는 계절’을 만들었다. 그는 장미가 함께 지닌 ‘꽃과 가시’를 환유로 하여, 대립을 그치고 ‘줄줄이 끌려나오는 장미 넝쿨 따라 형형색색의 향기가 돋아나’는 세상이 되기를 염원하고 있다.
5월 18일 광주, , , , ,
아, 그 날 대구에도 낮 2시 반월당에서 시위를 하자는 말이 있었다.
그날 햇살은 너무나 따갑게 아스팔트 위를 때렸다.
시위하자던 학생들은 길 위에 없었다.
인도 위에서는 더러 무리 지은 학생들이 웅성거리기도 했다.
길가에 경찰차와 늘어선 경찰만 있었다.
친구들과 길가에 오래 서서 따갑게 내려쪼이던 햇살만 바라보았다.
5원 24일 반월당에서 시위를 하자는 말이 다시 있었다.
그날 오후 광장에는 침묵의 고요가 따가운 햇살에 맞서 있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아스팔트 위에 반짝이고 있었다.
길가에는 진압대들이 무장을 한 채 줄을 지어 앉아 있었다.
시위하자던 학생들은 나오지 않았다.
(중략)
석간 매일신문 첫 면에
광주에서 사람들이 시위를 하다가 ‘세 명 죽었다’고 실렸다.
그 글자가 주먹만 하게 보였다.
그 글자가 망치가 되어 내 머리를 때렸다.
그날 향촌동에서 폭음을 했다.
1980년 5월 30일 김선배 자취방에서
우리도 자주 만나 책도 읽고 다음 준비를 하자고 했다.
그렇게 모이던 어느 날
광주에서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고
유인물을 만들어 뿌리자고 했다.
철필 대신 다 쓴 볼펜심으로 등사원지를 쓰고 또 썼다.
6월 그믐날쯤 통금 직전 만촌동 효목동 일대에
담장 너머로 ‘알려드립니다’를 뿌렸다.
캄캄한 시대의 절벽 앞에 서서 계란 몇 방울 묻혀 보았다.
-정대호, 「1980년 5월 그때 대구에서 나는」 부분
정대호의 위의 시는 광주와는 멀리 떨어진 대구에서 5월에 벌어진 일들을 담고 있다. 5월 18일 당일 계엄령에 맞서서 뜻있는 학생들이 시위를 조직하기도 했지만, 거대한 진압 무력 앞에서 무위로 끝난 안타까움이 절절하게 담겨 있다. 폭음으로 안타까움을 달래던 시인은 ‘석간 매일신문 첫 면에/ 광주에서 사람들이 시위를 하다가 ‘세 명 죽었다’고 실렸다’는 기사가 주먹만 하게 실린 걸 보며 같은 땅에 사는 겨레붙이로서 침묵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걸 깨닫는다. 그러면서 어려운 가운데서 ‘1980년 5월 30일 김선배 자취방에서/ …(만나)… 광주에서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고/ 유인물을 만들어 뿌리자고’ 뜻을 모은다. 그리하여 5·18이 미완의 혁명으로 저문 5월 30일 전국 최초로 ‘철필 대신 다 쓴 볼펜심으로 등사원지를 쓰고’ 인쇄해서 통금 직전 만촌동 효목동 일대 담장 너머마다 <알려 드립니다>라는 제하의 유인물을 뿌리게 된다. 시인은 ‘캄캄한 시대의 절벽 앞에 서서 계란 몇 방울 묻혀 보았다’고 겸손하게 밝혔지만, 이는 5월 정신은 광주만의 전유물이 아니고 온 삼천리가 함께 고민하고 어려움을 넘어 실천해간 산물이라는 점을 잘 각인시켜 준다. 5월에 군부 독재의 아성을 허물고 국민들의 힘으로 만들어진 해방구가 특정 지역이나 계층을 넘어 은밀하게 온 국민들의 마음속에 넓게 펼쳐졌음을 잘 말해주고 있다.
40년이 넘어가는 그 일이 있는 때
나는 마산 어느 여학교 기숙사에 있었고
매일 밤 10시가 되면 등화관제가 시작되었다
고향이 광주인 학생들은 가족과 연락을 하려
어린새처럼 동동거리며 광주행 차표를 구하려 다녔고
밤이면 복도 구석에 걸린 비상등 흐린 불빛으로
광주의 소식을 들으려 라디오를 끼고 기다렸다
꼬리에 꼬리를 물었던 긴 의문부호
이해 못 할 빈 신문의 공간이 있었다
자정, 캄캄한 학교 운동장으로 탱크 불빛들이 길게 들어가면
두근거리며 커튼을 들치고 지켜보았기에
광주가 폭도들의 천지가 되었다고
밑도 끝도 없이 믿던 사람들 생생하다
민주의 문 지나니 봉분들 나란하다
물놀이 하던 어린아이, 퇴근길 이유 없이 추격받았던 회사원,
공부하다 머리 식히려 나가 난사 당한 학생 … 헌혈하던 여학생
무구한 이팔청춘 내 또래 소녀의 묘비 앞에서
봄날을 잃어버린 나를 본다
-김두례, 「묘비 속 소녀에게서 나를 보다」 부분
김두례는 위의 시에서 먼 타지의 학교에 다니면서 한밤중 등화관제 속에 ‘꼬리에 꼬리를 물었던 긴 의문부호’로 가득 찬 라디오 뉴스와 ‘이해 못 할 빈 신문의 공간’ 앞에서 가슴 아파하던 기억을 되새기고 있다. 이 같은 일들을 통해 5·18 속에는 광주만의 문제가 아닌 온 국민을 눈 멀고 귀 멀게 하려는 음모가 숨어 있음을 투시하고 있다. 나아가 그는 ‘공부하다 머리 식히려 나가 난사 당한 학생 … 헌혈하던 여학생/ 무구한 이팔청춘 내 또래 소녀의 묘비 앞에서’ 잃어버린 자신의 봄을 새삼스럽게 되돌아본다. 이 같은 일련의 알레고리를 통해 5·18은 온 국민의 눈을 속이고 이웃에게 다가가는 길을 끊은 사람들에 맞서서, 은폐된 세계를 읽어내고 서로에게 다가가는 기회라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있다.
제3부 ‘살신성인으로 역사를 만든 사람들’에서는 작은 개인을 버리고 온몸을 던져 승리의 역사를 써나간 이들의 삶의 드라마를 추적한 시편들을 모았다. 실제로 5·18 주역들 가운데에는 거리에서 계엄군의 총탄에 쓰러지는 시민들을 보며 적십자 완장을 찬 채 구하러 가다가 허리에 관통상을 입고 불구가 된 이도 있고, 제헌 국회의원 이성학 선생은 무작정 재진압하려 드는 계엄군 탱크 앞에 엎드려 시민들의 무고한 희생을 막기도 하였다. 시민과 계엄군을 화해시키려는 그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면서, 70대의 고령으로 수배자의 처지가 된 그는 풍찬노숙하다가 절명하는 비극을 맞기도 하였다.
경적을 울리며 진격하는 버스와 택시
대학노트 팽개쳐버리고 철모를 쓴 청년들
영문도 모른 채 돌멩이를 집어 든 중고생
눈물을 훔치며 주먹밥을 나눠주는 아주머니
가녀린 팔뚝마다 혈꽃이 피는 누이들
막노동 공사판에서 뛰쳐나오던 아버지
두려움도 없이 군부대를 향해 항의하던 노인들
(중략)
군홧발 속에서 피어나는 녹두꽃
우리가 조국의 의병義兵이다
피와 살이 녹아내리는 최후의 다비식
우리가
우리가 오월의 혁명 전봉준이다
-강경아, 「우리가 오월이다」 전문
강경아는 위의 시에서 광주 항쟁을 누구나 함께 나누고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평등 세상이 구현된 해방구를 만든 사람들은 누구인지 주시하고 있다. 그는 광주 항쟁의 주인공은 잘 배운 사람들, 배가 든든한 사람들 아닌 ‘경적을 울리며 진격하는 버스와 택시/ 대학노트 팽개쳐버리고 철모를 쓴 청년들 … 눈물을 훔치며 주먹밥을 나눠주는 아주머니/ 가녀린 팔뚝마다 혈꽃이 피는 누이들/ 막노동 공사판에서 뛰쳐나오던 아버지’라고 적시하고 있다. 차가운 무기의 그늘의 숨지 않고 가슴 열고 나아간 그들이야말로 역사의 주인공, 즉 ‘조국(을 구한) 의병’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오월이 미완의 혁명으로 저무는 과정을 가리켜 ‘피와 살이 녹아내리는 최후의 다비식’이라고 노래함으로써 광주 항쟁의 주역들은 옥쇄를 당하였지만, 그것은 죽음이 아닌 숭고한 희생이자 윤회를 통해 또 다시 푸른 생명으로 살아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시민 장례식장 모퉁이에서 아비의 초상화 받들던
광주의 상고머리 소년, 그해 오월 흰 옷자락에서
숨 막히던 사내 있었다 항아리 그늘로
먹머루 눈망울 아슴거리던 흑백 한 장
출렁출렁 흔들리던 어둠들
노여움의 사연들 목숨 걸고 끌안으며
눈물 흘리던 청년의 시국 분명히 있었다
절명의 숨소리 쨍그랑쨍그랑 잦아지고
태극기 흔들며 목숨 거는 소리
기총소사 우레 소리까지
빛의 속도로 사십 년 흐르더니, 어느새
불안을 먹고 성장하는 자본주의에 편승한 채
아랫목 행복에 취하던 초로
하필 오늘 너를 만나서 기어코 무너지다니
참으로 다행이구나
-강병철, 「그 소년은 지금」 부분
강병철은 광주 항쟁의 와중 무고하게 희생된 한 시민의 어린 아들의 모습을 ‘시민 장례식장 모퉁이에서 아비의 초상화 받들던/ 광주의 상고머리 소년’으로 그리고 있다. 그는 나아가 ‘오월 흰 옷자락에서/ 숨 막히던 사내 있었다’고 언술함으로써 광주 항쟁 참여자들의 희생은 개인의 아픔이 아닌 광주 시민, 나아가 온 국민의 슬픔이었으며 바른 역사를 열기 위한 지난한 몸부림으로 이어졌음을 투시하고 있다. 그는 시의 말미에서 ‘빛의 속도로 사십 년 흐르더니, 어느새/ 불안을 먹고 성장하는 자본주의에 편승한 채/ 아랫목 행복에 취하던 초로/ 하필 오늘 너를 만나서 기어코 무너’진다고 밝힘으로써 광주 항쟁의 주인공들의 정신은 시민 정신으로 계승되어 천민 자본주의에 편승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인간다운 삶을 지속하게 한다고 밝히고 있다.
꽃샘바람 뿌리치며 휑한 묘역을 둘러보다
한 묘비석 앞에서 발을 멈춘다
차가운 오석에 새겨진 숫자 1966,
나와 동갑내기
곁에 있는 듯
미소를 건네 오는 흑백사진
계엄군의 거인 같은 장갑차
차갑게 눈을 가린 기총소사에 맞서
투지로 똘똘 뭉친 돌 던지는 투사들만 생각했더니
동갑내기 친구를 사지에 버려둔 채
거짓으로 가득 찬 교과서를 외웠구나
형체 모를 부끄러움이 나를 물들인다
-주선미, 「열다섯 동갑내기의 묘비명」 부분
주선미 시인은 망월동 5·18 민주 묘역을 참배하다가 만난 한 무명 희생자의 묘비에 주목하고 있다. 그는 ‘차가운 오석에 새겨진 숫자 1966,/ 나와 동갑내기/ 곁에 있는 듯/ 미소를 건네는 흑백사진’이라고 말하고 있다. 5·18 과정에서 희생된 열다섯 살 소녀가 자신과 동갑이라는 사실에 한편 놀랍고 한편 미어지는 가슴을 가눌 길 없음을 밝히고 있다. 당시 중3 학생으로 5·18에 관하여 폭도들의 난동이 벌어진 것으로만 알고, 때로 신문 방송의 거듭되는 세뇌로 붉은 물마저 씌웠던 광주에서 자기 또래의 무구한 소녀가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한다. 그 자각을 ‘차갑게 눈을 가린 기총소사에 맞서/ 투지로 똘똘 뭉친 돌 던지는 투사들만 생각했더니/ 동갑내기 친구를 사지에 버려둔 채/ 거짓으로 가득 찬 교과서를 외웠구나’라는 구절에서 드러낸다. 이를 통해 광주 항쟁은 이른바 폭도들이나 투사들이 아닌 무구하고 평범한 이들이 묵묵히 인간다움을 실천한 드라마라는 인식을 담아내고 있다. 이 시집이 우리에게 갖는 의미도 이와 같은 지평에 있음은 물론이다.
광주 시민군 항쟁지도부 홍보부장은
20개월 수배 끝에 극단 토박이를 창단
<금희의 오월> <모란꽃> <청실홍실> 등의 제작에 참여
윤상원상, 민족예술상을 받는다
광주 시민군 항쟁지도부 홍보부장은
오월 비디오 영화 <RED BRICK>를 제작하다
건강이 악화되어 일구구팔년 구월 이승의 삶을 접는다
영원한 홍보부장, 그 이름은 박효선이다
-김수열, 「영원한 홍보부장」 부분
김수열은 5·18 항쟁에 참여한 사람들의 면면을 그린 연극 <금희의 오월>로 널리 알려진 연극 연출가 박효선의 삶을 시로 간결하게 옮겨놓고 있다. 박효선은 22일 광주 해방구가 이루어진 국면에서, 장시간 무기를 쥐고 싸우다 지친 시민군들 대오가 흐트러질 조짐을 보이자 분연히 일어서서 시민군 홍보부장으로 참여한 사람이다. 그는 당시 전남대 국문과 재학중이었는데, 소설가 황석영으로부터 한국 제일의 연출가로 평가받는 등 촉망받는 연극인이었다. 시민들의 단합된 힘으로 막상 해방구가 조성되었지만 계엄 해제, 민주 회복 등의 목표는 좀처럼 이루어질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시 외곽을 중심으로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던 시민군들이 지치면서 무기를 반납하자는 목소리도 나오고, 시민군에 스며든 프락치 사건도 벌어졌다. 이렇게 어지러운 때 박효선은 개인의 안녕을 던지고 시민군에 투신하여, 중동무이한 상태에서 무기를 반납하는 것은 항쟁 정신에 어긋난다며 시민군 강화에 나섰다. 그는 도청 앞 분수대에 올라 범시민궐기대회를 주도하고, 광주 시민들과 시민들의 입장을 내외신 기자들을 상대로 제대로 전하는 일에도 나섰다. 그는 5월 27일 새벽까지 도청을 사수하다가 간신히 도피하였다가 20개월의 수배 끝에 재판을 받고 광주 사회로 복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소시민으로 복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이 체험한 광주 항쟁의 진실을 연극 등으로 담아 국민들에게 알리는 데 진력하였다. 교직을 버리고 ‘극단 토박이를 창단/ <금희의 오월> <모란꽃> <청실홍실> 등의 연극을 제작’하여 광주의 진실을 온 나라에 널리 알리는 일에 앞장섰다. 건강을 돌보지 않고 광주의 진실 알리기에 동분서주하던 그는 ‘오월 비디오 영화 <RED BRICK>를 제작하다’ 지병이 악화되어 마흔넷 한참 활동할 나이에 아깝게 절명하였다. 이처럼 5·18 광주 항쟁은 그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살신성인 끝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신문과 방송을 넘어 그 진실을 드러낼 수 있었다. 이번 사화집에 참여한 여러 시인들의 작품 속에서 우리는 그 같은 숨은 진실을 생생하게 재회할 수 있다.
제4부 ‘깨끗한 새벽을 위하여’에서는 5·18 광주 항쟁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여 밝은 미래를 여는 길은 무엇인지를 생각게 하는 시들을 모았다. 5·18은 우리 사회를 둘러싼 계층간의 모순을 극명하게 읽도록 만들었다. 5월 이후 수많은 젊은이들이 노동사회에 투신하였고,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민주노총이 결성되고, 전교조가 결성되어 민주 교육 논의를 활발하게 펼치는 지렛대가 되었다. 미국은 당시 전두환 등 정치군인의 쿠데타를 묵인하고, 5·18 기간 중 항공모함을 부산 앞바다에 파견하였으면서도 동맹국 국민들이 무참한 운명에 처하는 것을 방기하였다. 광주 항쟁 과정에서 이 같은 미국의 민낯이 드러나면서 미국을 제대로 보자는 움직임이 크게 일어났다. 또한 지역 이기주의를 넘어 민족이 통일로 나아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인식이 크게 제고되었다. 호남과 영남의 벽을 뛰어넘고, 남북이 평화 공존해야 된다는 생각이 큰 흐름을 탄 것도 광주 항쟁이 끼친 긍정적 영향이다.
그날 이후 남처럼 나도
마음 깊이 총 한 자루 숨겼다
무엇을 향해 쏘아야 하나
누구를 향해 쏘아야 하나
꼬집어 알지는 못했다
그렇게 내 운명은 바뀌었다
-이은봉, 「그날 이후」 부분
골진 밭떼기도 이젠 너를 필요로하지 않는다
너의 호신용 작은 뿔을
단김에 빼지 못했다고
너를 아끼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오래오래 말을 할까?
침묵의 설법을 듣지 못하는
고독의 뿔이여!
-최도선, 「쇠뿔」 부분
이은봉과 최도선 두 시인은 5·18 광주 항쟁의 현장에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억울한 일들에 대한 신원의 마음을 함께 하고 이후 삶 속에서 내면화한 채 살아왔음을 고백하고 있다.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서정시를 쓸 수 있는가?’라고 시인들에게 물었지만, 두 시인들은 5·18은 개인의 안일을 넘어 공동체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한편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거울이 되고 있음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은봉이 ‘마음 깊이 총 한 자루 숨겼다’는 것은 억울하고 힘든 사람들을 지켜주려는 마음일 것이다. 최도선이 ‘침묵의 설법을 듣지 못하는/ 고독의 뿔이여!’라고 일갈하고 있는 것도 부러 말로 옮기지는 않지만, 살아있는 정신을 가진 시민이라면 누구나 침묵 가운데 연민과 신원의 마음을 넉넉하게 담고 있음을 보여준다.
구 묘역이라 부르는 망월동 제3묘역
백남기 농민과 이웃한 이들이 누워있네
5·18 광주민주화항쟁 이후 민주화·통일
평화·노동운동을 하다 쓰러진 열사들
박관현 열사, 이한열 열사, 정광훈 전 의장
오종렬 의장, 김남주 시인도 함께 있네
망월동 묘역에 빼곡한 빗돌들
너무 많은 사람들 죽었네 가슴 미어지네
언제나 그들이 바라는 세상이 올 것인가
뿌려진 씨앗은 뜨거운 여름을 품고 있다네
-김 완, 「아스팔트 위에 뿌린 씨앗-생명과 평화의 일꾼 백남기 임마누엘」 부분
김완은 위의 시에서 ‘2015년 11월 14일 민중총궐기대회에서 “쌀값 21만원을 보장하라” 외치다 물대포에 맞아 절명한 백남기 농민의 삶을 살피고 있다. 그는 이를 통해 광주 항쟁의 정신이 농민 운동 등 민중 생존권 투쟁으로 확대 계승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는 ‘5·18 광주민주화항쟁 이후 민주화·통일/ 평화·노동운동을 하다 쓰러진 열사들/ 박관현 열사, 이한열 열사, 정광훈 전 의장/ 오종렬 의장, 김남주 시인도 함께 있네’라고 노래함으로써 광주 항쟁은 민주, 통일, 평화, 노동 운동으로 더욱 깊이와 폭을 더하면서 펼쳐지고 있음에 주목하고 있다. 나아가 오월에서 무구하게 죽음을 맞이한 이들의 삶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이한열, 정광훈, 오종렬, 김남주 등 민주화 운동 제단에 기꺼이 몸 바친 이들의 삶으로 계승 발전되어 간다는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머슴 아비의 아들 김남주가
금판사 아니면 면서기라도 해주기를 원하던
부친의 기대를 박차고 혁명의 뜻으로
잿더미 진혼가의 시인이 되고, 혁명강도가 되어
재벌의 집, 높은 담을 넘고 털어 세상을 엎으려 하였지
6.25 전쟁에서 가족이 몰살당한 아픔을 지닌
김상윤이 남주의 카프카에 이어 녹두서점을 열었지
그 작은 서점들에 드나들며 타오르던
무수한 발길들, 눈빛들, 일렁이던 심장들
광주 변두리 산동네 성당 한 구석에 자리한
들불야학, 그곳에 윤상원과 박기순이
강학 스승과 제자로 운명처럼 만났지.
그리고 죽음까지, 죽음 너머 이어진 사랑으로 만났지
한알의 불꽃이 들불이 되어 광야를 태우듯이
그 한반도의 엄혹한 겨울 동토와 계절에도
자유의 햇살, 새 봄 천지를 꾸꾸던
사랑과 혁명의 작은 꿈은 위대한 페치카로
남녘 빛고을에서 활활 타올랐지
-최자웅,「광주 연가2-그 전야의 심장과 눈빛들...」부분
최자웅의 위의 시 역시 광주 항쟁의 정신은 단지 며칠에 걸친 미완의 혁명에 그치지 않고 면면이 계승 발전되어 간다는 사유를 담지하고 있다. 민족 시인 김남주의 경우 ‘금판사 아니면 면서기라도 해주기를 원하던/ 부친의 기대를 박차고’ 혁명의 대오에 몸을 던진 것은 작은 나를 버리고 민족 구원의 대의에 몸을 던진 것이리라. 그 같은 김남주의 정신은 일신에 그치지 않고 그의 카프카 서점을 인수한 김상윤, 들불야학을 함께 한 윤상원과 박기순의 뜻으로 확산되어 간 데 주목하고 있다.
윤상원은 광주 항쟁 당시 시민군 기획부장으로 활약하다가 절명한 사람이지만, 그는 이 같은 살신성인이 헛되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즉, 뒷날 영혼 결혼으로 다시 맺어진 두 사람의 삶을 가리켜 최자웅은 ‘한알의 불꽃이 들불이 되어 광야를 태우듯이/ 그 한반도의 엄혹한 겨울 동토와 계절에도/ 자유의 햇살, 새 봄 천지를 꿈꾸던/ 사랑과 혁명의 작은 꿈은 위대한 페치카’로 지펴진다고 것을 투시하고 있다.
이번 시선집에 모인 이들은 5·18 광주 항쟁은 지나간 역사적 사건이거나 망각의 강으로 흘려 보내고 말 일이 아니며, 시간이 갈수록 새로운 의미를 띤 채 확대 재생산되어 간다는 데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아울러 5월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인간다운 삶이 펼쳐지고, 작은 이익을 넘어 갈라진 땅이 하나 되는 통일 세상이 되어야 한다고 한목소리로 노래하고 있다. 시인들의 이 같은 한결같은 염원에 힘입어 아직도 베일에 싸여 있는 광주 항쟁의 진실이 제대로 밝혀지고, 무구한 이들을 죽음으로 내몬 학살의 진범이 명명백백하게 가려지기 바란다. 아울러 이 같은 반인륜적인 일이 다시는 벌어지지 않도록 민주 시민 정신을 고양하는 데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 같은 일련의 부단한 노력을 통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한결 발돋움하여 모든 겨레붙이들이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 믿는다. 우리 모두 하나가 되어 그날을 앞당길 것을 5월 영령들께 다짐한다.
박몽구 : 한양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하였다. 1977년 월간 <대화>지로 등단하여, <수종사 무료찻집>, <칼국수 이어폰>, <황학동 키드의 환생> 등의 시집을 상재하였다. 한국크리스찬문학상 대상 수상. 순천향대 객원교수. 계간 <시와문화> 주간.
박몽구 문학평론가, 순천향대 객원교수/ press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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