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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괜찮은 詩

산이 나를 들게 한다

by 이성근 2020. 4. 18.



김홍도   <병진년화첩 丙辰年畵帖>중  <소림명월도 疏林明月圖>    조선 1796년   종이에 수묵담채

26.7x31.6cm   삼성미술관 리움소장    보물 제782호


산이 나를 들게 한다 -천양희

높은 산은 오른다 하고

깊은 산은 든다고 하네

오른다는 말보다 든다는 말이 좋아

산에 든 지 이십 년이 넘었네

산은 오래 들어도 처음 든 것 같고

자주 든 길도 첫길 같은데

나는 나이 들어도 단풍 든 것 같지 않고

눈에 든 풍경도 절경이 아니네

높은 자리에 든 사람도

깊은 산에 든 것은 아닐 것이네

산에 들어 내가 감탄하는 것은

산에 든 눈먼 돌은 죄가 없다는 것

갈등 속에 든 사람들은 고통의 고리를 잡는다는 것

든다는 것과 오른다는 것이

산만의 일이 아니라서

바람 든 나무 밑에 엎드려 나는

오래 일어나지 않았네

 

-계간시인동네』(2012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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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산에 올라보면 -황진성

 

큰 산에 높이 올라 보면 안다

나무는 모두 계곡을 굽어보고 있다는 것을

깊은 계곡일수록 나뭇잎을 켜켜이 담아두고

그 은밀한 장소를 살짝 열어둔다

이두박근을 실룩이며 드나드는 다람쥐 품어주고

오소리도 호기심에 눈을 껌뻑이며 다녀가고

밤이면 퇴근한 늑대도 찾아올지 모른다

계곡의 음부는 사시사철 열려 있어

나무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나무들은 불구를 다스려온 궁궐 속 내시같이

이른 새벽 모두 깨어 한 곳을 바라본다

새들이 산의 공기를 팽팽하게 쥐었다 편다

뾰족한 부리로 공기방울을 콕콕 뚫어 놓는다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잎사귀가 눈을 반짝이면

또로록 눈알로 떨어져 내리는 아침

부지런한 다람쥐가 두리번거리고 나오며 합장을 하다

등에 떨어진 찬 이슬방울에 깜짝 놀라 냅다 줄행랑친다

봄이 오는 이른 아침 산,

가만히 귀 기울이면 땅을 뚫는 풀씨의 가냘픈 신음소리

흙들이 서로 몸을 밀치고 움찔거리며 숭숭 창을 내는 소리

나뭇잎이 쉬하며 손가락을 입에 대는 동안

햇살은 가만히 계곡을 훑어 주며 천천히 빠져 나간다

 

반년간시에티카(2010. 하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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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성

 

가까이 갈 수 없어

먼발치에 서서 보고 돌아왔다

내가 속으로 그리는 그 사람마냥

산이 어디 안 가고

그냥 거기 있어 마음 놓인다

 

시집 돌아다보면 문득 (창비,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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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나오며

 

 

권정우 산처럼

 

자기자리에 서서

남들을 위로해 줄수 있을까

얼마나 오래 서 있어야 그럴 수 있을까

위로받지않아도

 

산처럼

항상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얼마나 위로 받아야 그럴 수 있을까

 

어디 있어도

있는것만으로 위로가 되는

산처럼,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진다 해도

누구도 탓하지 않을

산처럼

 

격월간시를 사랑하는 사람들(2009.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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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도

 

나는 둥그런 산에 산다

나무와 밭으로 뒤덮인 산,

숲에서 나온 물줄기는 밭을 가로질러 산 아래 들판으로 흐른다

가끔은 구름이 내 오두막을 감싸기도 한다

 

내 산엔 산 같은 무덤들이 있다

아버지 어머니도 산에 묻혔다

아버진 말이 없는 분이셨다

얼굴을 본 기억이 없는 어머닌 노래를 잘 부르셨다고 한다

 

이제 출산 날이 다가온 아내의 배를 보니

무덤을 참 많이도 닮았다

 

시집작은 침묵들을 위하여(창작과비평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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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든다는 것은 이태관

 

물의 온기로

차의 향내를 풀어내는 일처럼

산에 드는 것은

마음의 어혈을 풀어내는 일이다

산 꿩 울음소리가

우듬지 사이로 길을 내고 있다

 

산의 탯줄은 질기기도 하여

길은 무덤까지 이어져 있다

 

물소리 끊기어

더욱 낮아지는 하늘

산에 드는 것은

온몸을 비우는 일이다

산수유 꽃 진 자리

진달래 피고

그 꽃 위로 산벚꽃 온몸으로 흩날리는

 

산에 드는 것은

하늘과 더욱

가까워지는 일이다

 

시집사이에서 서성이다(문학의전당,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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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조

 

아직도 이 땅에 이름없는 산이 있다 지도에도 없다 이름이 없으니 얼마나 좋으랴 내 고향귀현리에도 이름 없는 봉오리가 있다 마을 뒤에 있다고 뒷동산이고 동구 앞에 있다고 앞산이다 그것도 이름이다 이름 없이 그냥 산이고 나무고 사람이면 어떠리 이름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이 한둘 아니다 하나도 모자라 호도 있고 자도 있고 아명도 있고 필명도 있다 이름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들은 비석에 이름과 호와 자를 음각으로 깊이깊이 파서 남긴다 이름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많다 나는 이 이름 없는 산이 더 좋다 산이 이름 없으니 산이다 그래서 이름 없는 사람들만이 산에 즐겨온다 이름이 없으면 그것만으로 기쁘다 "우리가 어떻게 하늘과 어머니인 대지와 공기와 시냇물을 팔 수 있단 말인가?" 내가 가장감명 받은 이 말도 실은 이름 없는 인디언 추장이 한 말이다 이름이 없으니 땅과 하늘을 편견 없이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건청 외 지음, 한국시인협회 엮음장수하늘소는 그 산에 산다』(굿글로벌,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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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성부

설 자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산을 찾아 들어간다

 

그 산에

너르고 착한 다른 세상이 있구나

 

시집도둑 산길(책만드는집, 201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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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딱고개 이성부

 

내 몸의 무거움을 비로소 알게 하는 길입니다

서둘지 말고 천천히 느리게 올라오라고

산이 나를 내려다보며 말합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

이리 고되고 숨 가뿐 것 피해 갈 수는 없으므로

이것들을 다독거려 보듬고 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나무둥치를 붙잡고 잠시 멈추어 섭니다

내가 올라왔던 길 되돌아보니

눈부시게 아름다워 나는 그만 어지럽습니다

이 고비를 넘기면 산길은 마침내 드러누워

나를 감싸 안을 것이니 내가 지금 길에 얽메이지 않고

길을 거느리거나 다스려서 올라가야 합니다

곧추선 길을 마음으로 눌러앉혀 어루만지듯이

고달팠던 나날들 오랜 세월 지나고 나면 모두 아름다워

그리움으로 간절하듯이

천천히 느리게 가비얍게

자주 멈춰 서서 숨 고른 다음 올라갑니다

내가 살아왔던 길 그때마다 환히 내려다보여

나의 무거움도 조금씩 덜어지는 것을 느낍니다

편안합니다

 

시집도둑 산길(책만드는집,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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