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詩)/괜찮은 詩

선물 外

by 이성근 2020. 4. 18.

아버지의 쌀 / 우대식

 

아버지가 쌀을 씻는다

쌀 속에 검은 쌀벌레 바구미가 떴다

어미 잃은 것들은 저렇듯 죽음에 가깝다

맑은 물에 몇 번이고 씻다 보면

쌀뜨물도 맑아진다

석유곤로 위에서 냄비가 부르르 부르르 떨고 나면

흰쌀밥이 된다

아버지는 밥을 푼다

꾹꾹 눌러 도시락을 싼다

빛나는 밥 알갱이를 보며 나는 몇 번이나 눈물을 흘렸다

죽어도 잊지는 않으리

털이 숭숭 난 손으로 씻던

,

, ,


선물/ 윤이산

 

늙은 두레상에 일곱 개 밥그릇이

선물처럼 둘러앉습니다

밥상도 없는 세간에

기꺼이 엎드려 밥상이 되셨던 어머닌

맨 나중 도착한 막내의 빈 그릇에

뜨거운 미역국을 자꾸자꾸 퍼 담습니다

어무이, 바빠가 선물도 못 사 왔심니더

뭐라카노? 인자 내, 귀도 어둡다이

니는 밥심이 딸린동 운동회 때마다 꼴찌디라

쟁여 두었던 묵은 것들을 후벼내시는 어머니

홀몸으로 감당해야 하는 비바람이 귓속을 막았는지

추억으로 가는 통로도 좁다래지셨습니다

몇 년 만에 둥근 상에 모여 앉은 남매는

뒤늦게 당도한 안부처럼 서로가 민망해도

어머니 앞에선 따로국밥이 될 수 없습니다

예전엔 밥통이 없어가 아랫목 이불 밑에 묻었지예

어데, 묻어둘 새나 있었나 밥 묵드키 굶겼으이

칠 남매가 과수댁 귀지 같은 이야기를

손바닥으로 가만가만 쓸어 모으다가

가난을 밥풀처럼 떼먹었던,

양배추처럼 서로 꽉 껴안았던 옛날을 베고

한잠이 푹 들었습니다

 

문밖에는 흰 눈이 밤새

여덟 켤레 신발을 고봉으로 수북 덮어 놓았네요

하얗게 쏟아진 선물을 어떻게 받아야 할지 모르는 어머니

아따, 느그 아부지 댕겨가신 갑따

푸짐한 거 보이, 올핸 야들 안 굶어도 되것구마이

 

미역국처럼 뜨끈한 목소리를 싣고

일곱 남매가 또 먼 길을 떠나는 새벽

 

- 2009년 영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저문 강에 삽을 씻고 / 정희성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 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 시집저문 강에 삽을 씻고(창작과비평사,1978)

......................................................................

개싸움/ 권기호

 

투전꾼의 개싸움을 본 일이 있다

한 쪽이 비명 질러 꼬리 감으면

승부가 끝나는 내기였다

도사견은 도사견끼리 상대 시키지만

서로 다른 종들끼리 싸움 붙이기도 한다

급소 찾아 사력 다해 눈도 찢어지기도 하는데

절대로 상대의 생식 급소는 물지 않는다

고통 속 그것이 코앞에 놓여 있어도

 

건들이지 않는다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개들이 지닌 어떤 규범 같은 것을 보고

심한 혼란에 사로 잡혔다

 

이건 개싸움이 아니다

개싸움은 개싸움다워야 한다(개판 되어야 한다)

개싸움에 무슨 룰이 있고 생명 존엄의 틀이 있단 말인가

나는 느닷없는 배신감에 얼굴이 붉어왔다

.........................................................

아버지의 귀로/ 문병란

 

서천에 노을이 물들면

흔들리며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

우리들은 문득 아버지가 된다.

 

리어커꾼의 거치른 손길 위에도

부드러운 노을이 물들면

하루의 난간에

목마른 입술이 타고 있다.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또한 애인이 된다는 것,

무너져가는 노을 같은 가슴을 안고

그 어느 귀로에 서는

가난한 아버지는 어질기만 하다.

 

까칠한 주름살에도

부드러운 석양의 입김이 어리우고,

상사를 받들던 여윈 손가락 끝에도

십원짜리 눈깔사탕이 고이 쥐어지는

시간,

 

가난하고 깨끗한 손을 가지고

그 아들딸 앞에 돌아오는

초라한 아버지,

그러나 그 아들딸 앞에선

그 어느 대통령보다 위대하다!

 

아부도 아첨도 통하지 않는

또 하나의 왕국

주류와 비주류

여당과 야당도 없이

아들은 아버지의 발가락을 닮았다.

 

한줄기 주름살마저

보랏빛 미소로 바뀌는 시간,

수염 까칠한 볼을 하고

그 어느 차창에 흔들리면

시장기처럼 밀려오는 저녁 노을!

 

무너져가는 가슴을 안고

흔들리며 흔들리며 돌아오는

그 어느 아버지의 가슴 속엔

시방

따뜻한 핏줄기가 출렁이고 있다.

 

- 시집땅의 연가(창비, 1981)

........................................................

/ 김명인

 

한때 나는 대학 입학금을 마련 못해 사흘 밤낮을

꼬박 울며 지샌 적이 있다

비웃지 마라, 그땐 그게 절박했었다

그렇다. 두 형들이 포기한 대학을

끝까지 마쳤던 것은 돈에 대한

맹목의 복수심 때문이었을까

선탄부로 가정교사로 마침내 내 대학이 끝이 났을 때

 

배운 것이야 무엇이든 어떻게 해서라도

돈을 모으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선생이 되었다

이 나라에서 돈 버는 길이란 투기거나 사기라고

일깨워준 저 7,80년대의 경제를 지나와

내가 집칸이나 장만한 것은 그 길에

밝아서가 아니라 아내의 맞벌이 덕이었다

 

그러나 돈이 돈을 거둬들인다고 뒤늦게 한탄한 아내여

남편은 백면의 여전히 주변머리 없는 서생일 뿐

무슨 주제로 헐거운 돈을 만났겠는가

그대의 눈썰미가 마련한 방 한 칸 차지하고 난 뒤로는

자주 목이 말랐고 자꾸만 부끄러웠다

 

그렇게 한번도 널 풍족히 누릴 수 없었다 해도

돈이여, 어느새 너는 내 발목을 잡고 있지만

나는 제게서 철저히 배반당하는 꿈을 요즈음도 꾼다

너를 돈이라 말하면 네가 돈이겠느냐

그게 인생의 목표쯤은 아니라 해도

 

- 시집따뜻한 적막(문학과지성사, 2006)

............................................................

 

역을 놓치다/ 이해원

 

실꾸리처럼 풀려버린 퇴근 길

오늘도 졸다가 역을 놓친 아빠는

목동역에서 얼마나 멀리 지나가며

헐거운 하루를 꾸벅꾸벅 박음질하고 있을까

 

된장찌개 두부가 한껏 부풀었다가

주저앉은 시간

텔레비전은 뉴스로 하루를 마감하고 있다

핸드폰을 걸고 문자를 보내도

매듭 같은 지하철역 어느 난청지역을 통과하고 있는지

연락이 안 된다

하루의 긴장이 빠져나간 자리에

졸음이 한 올 한 올 비집고 들어가 실타래처럼 엉켰나

헝클어진 하루를 북에 감으며 하품을 한다

 

밤의 적막이 골목에서 귀를 세울 때

내 선잠 속으로

한 땀 한 땀 계단을 감고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

현관문 앞에서 뚝 끊긴다

안 잤나

졸다가 김포공항까지 갔다 왔다

늘어진 아빠의 목소리가

오늘은 유난히 힘이 없다

 

- 2012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198711월의 新川 / 안상학

 

신천교가 보이는 길목을 지켜 선

가로수는 하나 둘 가을 흔적을 지우고

팽팽하게 바람을 안고 있는 선거 현수막은

가지를 붙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강남약국 앞 버스정류소 무인 판매대에서

문득 주워든 때 지난 조간신문

사람들이 표표히 떠도는 모습을 배경으로

현수막에 붙박힌 무표정한 이름들이 웃고 있다.

순간 사회면에서 비상하는 철새들

왜가리 청둥오리 두루미 고니떼 무리

을숙도에 잠시 머물다 북상할 거라는 단신(短信)

저 썩어 흐르는 신천에도 철새는 날아올까

 

검은 물만 흐르는 신천 가득

철새는 날아올 수 있을까 날아와

저렇게 시린 발목을 담그고 있어낼까

신천을 가로지른 철교 아래

신천동 산동네 사람들이 모여 나와

영세민 취로 사업을 벌이고 있다. 철새무리

장화를 신고 오물을 건지는 아저씨, 철새

수건 머리 쓰고 돌 나르는 아줌마, 철새

허접쓰레기 소각하는 할머니 철새, 할아버지

철새, 매캐한 연기는 바람부는 방향으로 누워 흐르고

하천둑에 붙박힌 녹색 깃발은 제자리 펄럭임을

하고 있다 정오 한때

낮은 하늘에 걸린 전투기 한 대 여전히

철새는 날아오지 않고 사람들이

식어버린 밥을 먹고 모닥불 가에 모여든다

천변 봉제공장 여공들은 잠시 은행잎처럼

몇몇은 담장 밑에 옹송거리며 앉아 있고

더러는 노점 떡볶이를 먹으며 재잘대고 있다

늦가을 바람에 날리는 햇살 속에서

낙엽들만 철새처럼 와그르르 몰려다니는

저 썩어 흐르는 신천은 무사해도 되는가

무사해도 되는가

-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

 

FM 99.9/ 윤성택

 

육십 촉 전구가 긴 하품처럼 흔들린다

목젖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골목 어귀 바람은

기댄 리어카 헛바퀴로 다이얼을 맞춘다

주파수를 잃은 낙엽이 쓸려간 후미진 끝

별들의 소음이 가득하다 엉켜있던 전깃줄도

식솔들 따라 전봇대 너머로 건너가고,

온기는 두꺼비집으로 몰려다닐 것이다

불빛이 기둥 거미줄에 슬어 있을 때

보안등은 파닥거리는 나방처럼 해쓱하다

먼지 덮인 채 뜨겁게 달아오르는 집들,

산다는 건 어쩌면 먼 곳에서 불빛 하나

끌어오는 것이다 그리하여 켜진 창과 창은

서로를 잇대며 지상의 별자리를 이루리라

밤새 불빛 구멍에 꽂혀진 불면의 잭은

사소한 라디오 사연에도 눈물겹다

붉은 막대채널 같은 가로등이 길 위를

밀려가고 가끔씩 개 짖는 소리가 잡힌다

거미줄은 이제 스피커처럼 웅웅거린다

볼륨을 높이며 오토바이 한 대

언덕을 오르고 있다

 

- 시집리트머스(문학동네, 2011)

..................................................................


이호신 화백 남명매


남명매(南冥梅)를 찾아서 2/ 송수권

 

보게나

저 천석들이 종을 누구 있어 치겠는가

천왕봉에서부터 화살처럼 꽂혀오는

시천강(矢川江)가 덕천서원에 와서

그 기둥에 꽂힌 화살 한 개를 뽑으며

한 시대의 삶을 다시 읽는다

 

머리에 칼끝을 세우고 글을 읽으며

허리에 찬 쇠통방을 흔들어 세상을 깨운다

낮은 소리가 세상을 깨우는 것이지 큰 소리가

세상을 깨우는 게 아니라고 타이른다

 

그는 임진왜란 이태 전에 갔다

홍의장을 걸친 망우당 곽재우를 비롯한 정인홍 등

사십여 명의 제자들은 낮은 소리 따라

우리 의병사의 첫머리를 장식한다

 

경의당 마루에 누워 뜰 앞의 매화 난분분

천석들이 종을 치고 간 무지렁이들 한 속에

하늘이 울어도 결코 울지 않은 산

구구빨치 구빨치 신빨치들이 가슴에 품고 넘었을

오늘 저 큰 산봉우리들 말없이 들여다 본다.

 

- 시집 빨치산(고요아침,2012)

.............................................................

 

널배/ 이지엽

 

남들은 나무라는데

내겐 이게 밥그륵이여

다섯 남매 갈치고

어엿하게 제금냈으니

참말로

귀한 그륵이제

김 모락 나는

다순 그륵!

 

너른 바다 날 부르면

쏜살같이 달리구만이

무릎 하나 판에 올려 개펄을 밀다 보면

팔다리 쑤시던 것도 말끔하게 없어져

 

열일곱에 시작했으니 칠십 년 넘게 탄 거여

징그러워도 인자는 서운해서 그만 못 둬

아 그려, 영감 없어도 이것땜시 외롭잖여

 

꼬막만큼 졸깃하고 낙지처럼 늘러붙는

맨드란 살결 아닌겨

죽거든 같이 묻어줘

 

인자는

이게 내 삭신이고

피붙이랑게

 

- 격월간 <유심> 20123~4월호

...............................................................

 

 

소싸움/ 황인동

 

자 봐라!

수놈이면 뭐니뭐니 해도 힘인기라

돈이니 명예이니 해도 힘이 제일인기라

허벅지에 불끈거리는 힘 좀 봐라

뿔따구에 확 치솟는 수놈의 힘 좀 봐라

소싸움은 잔머리 대결이 아니라

오래 되새김질한 질긴 힘인기라

봐라, 저 싸움에 도취되어 출렁이는 파도를!

저 싸움 어디에 비겁함이 묻었느냐

저 싸움 어디에 학연지연이 있느냐

뿔따구가 확 치솟을 땐

나도 불의와 한 판 붙고 싶다.

 

- 시집 비는 아직 통화중(만인사, 2006)

..............................................

생명보험/ 김기택

 

병원마다 장례식장마다 남아도는 죽음,

밥 먹을 때마다 씹히고

이빨 사이에 고집스럽게 끼어 양치질해도 빠지지 않는 죽음이

오늘 밤은 형광등에 다투어 몰려들더니

바닥에 새카맣게 흩어져 있다.

 

삶은 언젠가 나에게도 죽음 하나를 주리라.

무엇이든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내 두 손은

공짜이므로 넙죽 받을 것이다.

무엇이든 손에 들어오는 것은 일단 움켜쥐고 볼 일이다.

걱정은 나중에 해도 된다.

 

그렇잖아도 죽음에 투자하라고

부동산 투자보다 훨씬 안전하고 수익성도 확실하다고

투자만 해놓으면 다리 쭉 펴고 맘 놓고 죽을 수 있다고

보험설계사가 수상한 제안을 해왔다.

죽자마자 억!만금이 쏟아져 나오는 신상품이 카탈로그에 가득하였다.

 

죽음에는 다리들이 다닥다닥 참 많이도 달려 있다.

이젠 길이 땅에서 하늘로 바뀌었다는 듯

하나같이 다리들을 하늘을 향해 높이 쳐들고 있다

저렇게 많은 다리들을 갖고 이제 어쩌자는 것인가.

세상 모든 죽음을 낱낱이 겪어 알고 있으면서도

허공은 아무 대책이 없다.

 

죽음은 공짜인데 언제부터 선불이 되었느냐 따지는 나에게

보험설계사는 확신에 찬 웃음으로 대답했다.

생명보험은 가족에 대한 사랑이라고

보장성과 수익성이 풍부할수록 사랑도 진실해진다고

견적이 나오지 않는 사랑을 무엇에 쓸 거냐고.

 

죽음에다 돈과 사랑이 쏟아져 나오는 투자를 하고 나면

어서 죽고 싶어 온몸이 근질근질해질 거라고.

 

- 월간현대시20101월호

...................................................................

경사傾斜저울/ 송경애

 

중부고속도로의 어느 휴게소화장실

휴지걸이 바로 아래 숨죽이고 숨어 있는 말

 

신장 15천에 삽니다

연락처 016-882-****“

 

온몸의 수만 세포들을 얼어붙게 한 말

매직펜으로 싹싹 지우고 싶었네

 

급전의 올가미에 단단히 걸린 이 땅의 가난한 아버지와

병든 홀아비의 청이 같은 딸이 볼까 밤늦도록

눈 못 붙이고 불 밝혔네

시퍼렇게 눈 뜬 사람의 장기와 돈 15천이 양팔저울 접시위에서

나란히 수평을 이루는 환영에 밤새 쫓기었네

팍팍한 삶의 낭떠러지 끝에 내몰린 사람들의 눈에

신장 하나쯤과 15천의 무게가 삶의 비탈길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네

가파른 비탈 끝에 겨우 서있는 사람들에게 경사저울처럼

그들의 신장과 저 돈이 수평을 이루는 무게가 되어질까

한없이 초라한 빈 가슴으로 동동거렸네.

 

- 시집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말(지혜,2012)

.......................................................

   

서문시장 돼지고기 선술집/ 배창환

 

고등학교 다닐 때였지.

노가다 도목수 아버지 따라

서문시장 3지구 부근,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할매술집에 갔지.

담벼락에 광목을 치고 나무의자 몇개 놓은 선술집

바로 그곳이었지 노가다들이 떼서리로 와서 한잔 걸치고 가는 곳

대광주리 삶은 돼지다리에선 하얀 김이 설설 피어올랐고

나는 아버지가 시켜주신 비곗살 달콤한 돼지고기를 씹었지.

벌건 국물에 고기 띄운 국밥이 아닌, 살코기로 수북이 한 접시를(!)

 

꺽꺽 목이 맥히지도 않고

아버지가 단번에 꿀떡꿀떡 넘기시던 막걸리처럼

맥히지도 않고, 이게 웬 떡이냐 잘도 씹었지.

뱃속에서도 퍼뜩 넘기라고 목구녕으로 손가락이 넘어왔었지.

식구들 다 데리고 올 수 없어서

공부하는 놈이라도 한번 실컷 먹인다고

누이 형제들 다 놔두고 나 혼자만 살짝 불러 먹이셨지.

얼른얼른 식기 전에 많이 묵어라시며

나는 많이 묵었으니까 니나 묵어라시며

스물여섯에 아버지 돌아가시던 날 남몰래 울음 삼켰지.

돼지고기 한 접시 놓고 허겁지겁 먹어대던 그날

난생 처음 아버지와의 그 비밀잔치 때문에

왜 하필이면 그날 그 일이 떠올랐는지 몰라도

지금도 서문시장 지나기만 하면 그때 그 선술집에 가서

아버지와 돼지고기 한번 실컷 먹고 싶어 눈물이 나지.

그래서 요즘도 돼지고기 한 접시 시켜놓고 울고 싶어지지.

 

- 시선집서문시장 돼지고기 선술집(작은숲,2012)

...............................................................

맞구나 맞다/ 이선영

 

엄마 아빠 만나서

내가 태어나기 전에

 

아빠네 엄마 아빠는

아빠를 낳고

엄마네 엄마 아빠는

엄마를 낳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못 만나셨다면

어디 계셨을까

우리 아빠 엄마

 

우리 엄마 아빠가

못 만났다면

어디 있었을까

나와 동생은

 

세상에

내가 있다는 건

아슬아슬한 행운이야

 

난 정말로

준비된 귀한 선물이

맞구나 맞다

 

- 동시집맞구나 맞다(청개구리,2012)

..................................................................

그해, 담쟁이/ 김숙경

 

벽이 험난해도 가야만 한다

거기에 나의 길이 있기 때문이다

물 한 방울 없는 가시밭길에선

가시마저도 사다리가 된다

꿈은 언제나 그저 따 담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손톱에 든 피멍도 내겐 꽃이다

쉼없이 서로의 삶을 동아줄로 엮어 부대끼며 일어선다

회색 벽을 허물며 오르고 또 오르면

가난한 손 서로 맞잡고 엉켜 사는 달동네

내 가난이 가장 풍요로웠던 하늘 아래 첫 동네

 

- 시집 백지 도둑(순수문학, 2012)

...............................................................

직선의 방식 / 이만섭

 

직선은 천성이 분명하다 바르고 기껍고

직선일수록 자신만만한 표정이다

이는 곧 정직한 내력을 지녔다 하겠는데

현악기의 줄처럼 그 힘을 팽창시켜 울리는 소리도

직선을 이루는 한 형식이다

나태하거나 느슨한 법 없이

망설이지 않고 배회하지 않으며

좋으면 좋다고 싫으면 싫다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단순한 정직이다

밤하늘에 달이 차오를 때

지평선이 반듯하게 선을 긋고 열리는 일이나

별빛이 어둠 속을 뻗쳐와

여과 없이 눈빛과 마주치는 것도

직선의 또 다른 모습이다

가령, 빨랫줄에 바지랑대를 세우는 일은

직선의 힘을 얻어

허공을 가르며 쏘아대는 직사광선을

놓치지 않으려는 뜻이 담겨있다

그로 인하여 빨래는

마음 놓고 햇볕에 말릴 수 있을 것이다

바지랑대는 빨랫줄로 말미암고

빨랫줄은 바지랑대 때문에 더욱 올곧아지는

그 기꺼운 방식

 

- 2010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

남몰래 오줌을 누는 밤/ 안명옥

 

놀라워라, 호프집에서 술을 마시고 늦은 밤

집으로 돌아간다 참지 못할 만큼 오줌이 마려워

걸음이 평소보다 급하다 오줌 마려운 것이,

나를 이렇게 집 쪽으로 다급하게 몰고 가는 힘이라니!

오줌이 마렵지 않았다면 밤 풍경을 어루만지며

낮엔 느낄 수 없는 밤의 물컹한 살을 한 움큼

움켜쥐며 걸었을 것을 아니 내 눈길이

보이지 않는 어둠 저편, 그 너머까지

탐색했을 지도 모를 것을

지금 내게 가장 급한 것은 오줌을 누는 일

지나가는 사람들 없는 사이

무릎까지 바지를 끌어내리고 오줌을 눈다

오줌을 누는 것은 대지와의 정사 혹은

내 속의 어둠을 함께 쏟아내는 일,

그리하여 다시 오줌이 마려워오는 순간이 오기까지

내 속이 잠시나마 환해지는 일

변기가 아닌, 이렇게 아파트 단지의 구석에 쭈그려 앉아

몰래 오줌을 누는 일이

 

일탈의 쾌감이 내를 이뤄

이렇듯 밤의 대지를 뜨겁게 적실 수 있다니,

어둠 속에서 남몰래 오줌을 누는 밤

내 엉덩이가 달이 되어 공중으로 둥둥 떠오른다

 

- 시집 (천년의 시작, 2008)

........................................................................

 

여정/ 김금하

 

서산 해 저무는 간이역

등불 켜는 역부의 굽은 등위로

주마등처럼 흘러 가버린 꿈같은 세월

산촌 두멧길 구불구불한 노구로 옛 고향 찾는가

 

뜬구름 섬이 되어 떠있는 하늘가

소식 잃은 추억은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맑던 모습 아득히 차창에 얼비치어

지천에 대고 부르다가 목이 쉰 기적소리

 

- 詩文會 37<사임당문학> (대한주부클럽연합회,2012)

....................................................

아버지의 마음/ 김현승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 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 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 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아버지의 동포(同胞).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英雄)이 될 수도 있지만…….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 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로…….

- 시집 <절대 고독> (1970)

...................................................................

부엌의 불빛/ 이준관

 

부엌의 불빛은

어머니의 무릎처럼 따뜻하다.

저녁은 팥죽 한 그릇처럼

조용히 끓고,

접시에 놓인 불빛을

고양이는 다정히 핥는다.

수돗물을 틀면

쏴아 불빛이 쏟아진다.

부엌의 불빛 아래 엎드려

아이는 오늘의 숙제를 끝내고,

때로는 어머니의 눈물,

그 눈물의 등유가 되어

부엌의 불빛을 꺼지지 않게 한다.

불빛을 삼킨 개가

하늘을 향해 짖어대면

하늘엔

올해의 가장 아름다운 첫 별이

태어난다.

 

- 시집부엌의 불빛(시학사, 2005)

.............................................................

신부 / 서정주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40년인가 50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 방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 시집 <질마재 神話>(일지사, 1975)

.......................................................................

연애 발전 5단계설/ 권순진

 

1.원시단계: 태초에 빛이 생겨 밝음과 어둠으로 나뉘어졌으되,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며, 너는 너였고 나는 나였다

 

2.선행조건단계: 만원버스에서 발을 밟았을 때 서로 화성과 금성에서 온 사실을 이실직고하되, 결혼을 전제로 연애를 시작해 보겠다는 따위의 허튼 계산은 소설책을 거꾸로 읽어도 좋다는 수작과 같다.

 

3.도약단계: 밟고 지나가면 디딤돌이 되고, 걸려 넘어지면 걸림돌이 된다. 박차고 나아가면 어느새 분홍빛 구름 위를 날고 있다.

 

4.성숙단계: 허물이 벗겨지고 촉감에 익숙해지며 선택과 집중으로 꽃은 활짝 피어나고, 새들은 일제히 날아오른다. 하지만, 가끔 날개짓에 일찍 권태를 느끼는 새는 추락하기도 한다.

 

5.대중소비단계: 나는 새도 둥지는 필요하다. 연착륙이 필요한 시기다. 같은 바이올린 줄에 나란히 묶일 것이다. 너는 나의 가락으로 나는 너의 리듬으로 오랫동안 음악이 연주될 것이다.

 

- 시집落法(문학공원, 2011)

A-attractive(매력에 끌려) I-interest(흥미를 갖게 되고) D-desire(갈망하게 되어) A-act (결국, 행동) ‘AIDA법칙

....................................................................

 

정든 병 / 허수경

 

이 세상 정들 것 없어 병에 정듭니다

가엾은 등불 마음의 살들은 저리도 여려 나 그 살을 세상의 접면에 대고 몸이 상합니다 몸이 상할 때 마음은 저 혼자 버려지고 버려진 마음이 너무 많아 이 세상 모든 길들은 위독합니다 위독한 길을 따라 속수무책의 몸이여 버려진 마음들이 켜놓은 세상의 등불은 아프고 대책없습니다

정든 병이 켜놓은 세상의 등불은 어둑어둑 대책없습니다

 

- 시집 혼자가는 먼 집(문학과 지성사,1992)

...............................................................................

산초나무에게서 듣는 음악/ 박정대

 

사랑은 얼마나 비열한 소통인가 네 파아란 잎과 향기를 위해 나는 날마다 한 통의 물을 길어 나르며 울타리 밖의 햇살을 너에게 끌어다 주었건만 이파리 사이를 들여다보면 너는 어느새 은밀히 가시를 키우고 있었구나

 

그러나 사랑은 또한 얼마나 장렬한 소통인가 네가 너를 지키기 위해 가시를 키우는 동안에도 나는 오로지 너에게 아프게 찔리기 위해, 오로지 상처받기 위해서만 너를 사랑했으니 산초나무여, 네 몸에 돋아난 아득한 신열의 잎사귀들이여

 

그러니 사랑은 또한 얼마나 열렬한 고독의 음악인가

 

-시집 아무르 기타(문학사상사,2004)

..........................................................

모닥불/ 백석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랑잎도

머리카락도 헝겊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왓장도

닭의 짗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門長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시도 땜쟁이도 큰 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쌍하게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 시집 사슴1936

모닥불에는 세상에서 버림받고 소외된 것들이 모여 작지만 따뜻한 불을 피우고 있다. 새끼 오리, 헌신짝, 소똥, 갓신창(부서진 갓에서 나온 말총으로 된 끈의 한 종류), 개니빠디(개의 이빨), 너울쪽(널빤지쪽), 짚검불, 헝겊조각, 개터럭(개털) 등 시 속에 등장한 모든 생물과 무생물들이 하나의 가족 개념을 이룬다. 모닥불은 세상으로부터 업신여김 당하고 쓸모없는, 그래서 더욱 보잘 것 없는 것들을 받아서 불을 피웠다. 그리고 모닥불 주위에는 버려진 물건들만큼이나 초라한 인간 군상들과 강아지까지 누구나 와서 따뜻함을 분배받으면서 온몸을 쬐고 녹인다. 모닥불은 어느 것도 거부하지 않고 받아서 타닥타닥 불을 피웠다.

 

재당(재종. 육촌), 초시(초시에 합격한 사람으로 늙은 양반), 문장늙은이( 문중에서 항렬과 나이가 위인 사람), 더부살이 아이, 갓사둔(새사돈), 나그네, 주인, 땜쟁이, 큰개, 강아지 등 모닥불을 쬐고 있는 이들은 신분의 높낮이, 나이나 가족 나아가 인간과 동물간의 구분도 없다. 모닥불이라는 구심점을 향해 둥글게 모여 앉은 모두가 상하좌우 경계 없이 평등하다. 얼어붙은 몸과 마음을 어루만져 주며 가슴 속의 서러움마저도 녹아내리게 하는 것이 바로 모닥불이다. 고통스럽고 서러운 몽둥발이(딸려 있던 것이 다 떨어져 나가고 몸뚱이만 남아 있는 사람)가 된 할아버지의 슬픈 역사마저 내적 화해로 녹여버리는 것이다.

.................................................

아버지 풀 되어/ 김미선

 

불초여식

이 핑계 저 핑계로

찾아뵙지 못하고

세월 넘겨 찾아뵈오니

아버지 풀 속에 누워 계시더라.

 

풀들과 아주 친해져

본척만척 하시더라

풀세상에서 이생의 모든 업

다 풀고 풀되어 사시더라

, 나비, , 온갖 꽃들과 놀고

바람하고도 아주 친해지셨더라.

 

못내 섭섭하여

모퉁이 돌아서서 훌쩍거리며 울었더라

이제 걱정 안 해도 되겠더라

소복소복한 풀들 울타리 되어

이웃 하고 계시더라.

 

- 계간 <하늘> 2011년 겨울호

...........................................................

 

우리에게 더 좋은 날이 올 것이다 / 장석주

 

너무 멀리 와버리고 말았구나

그대와 나

돌아갈 길 가늠하지 않고

이렇게 멀리까지 와버리고 말았구나

 

구두는 낡고, 차는 끊겨버렸다.

그대 옷자락에 빗방울이 달라붙는데

나는 무책임하게 바라본다, 그대 눈동자만을

그대 눈동자 속에 새겨진 별의 궤도를

 

너무 멀리 와버렸다 한들

어제 와서 어쩌랴

 

우리 인생은 너무 무겁지 않았던가

그 무거움 때문에

우리는 얼마나 고단하게 날개를 퍼덕였던가

 

더 이상 묻지 말자

우리 앞에 어떤 운명이 놓여 있는가를

묻지 말고 가자

멀리 왔다면

더 멀리 한없이 가버리자

 

- 시집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 갈수 있다면>(세계사, 1998)

.......................................................................................................

눈물도 모른 채/ 김상윤

 

달걀 공장 하루에

두 번 불 끄지, 두 번 알 낳으라고

깻잎 공장 밤에도

불 안 끄지, 깨꽃 피지 말라고

닭들이 죽을 똥 살 똥 알만 낳다 두 배 빨리 늙는 걸

하우스 들깨 꽃 못 피워 시집 못 가는 걸

그런 걸 모르고

달걀 프라이, 삼계탕. 돼지고기에 깻잎

잘도 먹었네 서러운 누군가의 눈물도 모른 채

 

- 동인지 <대구기독문학> (대구경북 기독문인회, 2009)

.................................................................................

이도백하에 내리는 눈/ 임윤

 

기차 바퀴는 눈보라 가르며 절룩댔다

먹먹한 가슴 덜컹대며

압록강 혈류 따라

구불구불 닿은 이도백하

어스름에 몇 남은 봉창의 등불에 이끌려

조선족 식당이란 미닫이를 민다

집 나간 한족 며느리 대신

어눌한 모국어 발음의 손녀딸이 음식을 나른다

된장찌개가 반갑고

짜디짠 김치가 달다

노파는 서울 종로에서 태어났지만

젖먹이 때 만주로 이주해온 뒤

한 번도 가보질 못했단다

서울 어디선가 막노동한다는

아들 소식은 묘연하단다

키보다 한 뼘쯤 짧은 뒷방에 누우니

맨발이 문턱에 걸린다

새우등으로 웅크린 이도백하의 겨울밤

소나무에 소복한 컹컹 개 짖는 소리

우지직 부러지는 가지에 관절이 시리다

눈발에 묻어온 차가운 얼굴들이

밤새도록 봉창으로 날아들었다

 

- 시집 레닌 공원이 어둠을 껴입으면(실천문학사,2011)

.................................................................................................

별국/ 공광규

 

가난한 어머니는

항상 멀덕국을 끓이셨다

 

학교에서 돌아온 나를

손님처럼 마루에 앉히시고

 

흰 사기그릇이 앉아 있는 밥상을

조심조심 받들고 부엌에서 나오셨다

 

국물 속에 떠 있던 별들

어떤 때는 숟가락에 달이 건져 올라와

배가 불렀다

 

숟가락과 별이 부딪치는

맑은 국그릇 소리가 가슴을 울렸는지

 

어머니의 눈에서

별빛 사리가 쏟아졌다.

- 시집소주병(실천문학사,2004)

..............................................................

옛집/ 김성찬

 

먼 숲에서 온 원목기둥이 헌 기와지붕을 떠받쳤다

페타이어로 덮어둔 헤진 꿈들이 바람 불 적마다 들썩거렸다

방안에 바께스가 서넛 모여 떨어지는 빗물을 받아냈다

개 고양이 토끼 닭들이 한식구로 살았고

마당에 땅벌레가 기어 다녔다

개미가 마루까지 올라와 낮잠을 방해했다

여름 어느 날

텃밭에서 검은 뱀이 갈지자로 기어 나와 고양이와 싸웠다

아내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고 119에 실려 갔다

그해 가을 끝내 영정 사진으로 돌아와

마당 한 바퀴 돌며 가족들에게 눈물 뿌리던,

이사 나오면서 몇 번이나 돌아보던 아내 앓던 방

구부러진 그 골목 무너진 담벼락 안마당 한켠

다리 부러져 주저앉은 평상 아래

아직도 신발 한 짝 옛 주인 기다리고 있다

 

- 계간 <스토리문학> 2011 겨울호

..................................................................................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 이가림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모래알 같은 이름 하나 불러 본다

기어이 끊어낼 수 없는 죄의 탯줄을

깊은 땅에 묻고 돌아선 날의

막막한 벌판 끝에 열리는 밤

내가 일천 번도 더 입맞춘 별이 있음을

이 지상의 사람들은 모르리라

날마다 잃었다가 되찾는 눈동자

먼 부재의 저편에서 오는 빛이기에

끝내 아무도 볼 수 없으리라

어디서 이 투명한 이슬은 오는가

얼굴을 가리우는 차가운 입김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물방울 같은 이름 하나 불러본다

 

- 시집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창비,1981)

..............................................................................

수선화에게/ 정호승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 시선집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랜덤하우스중앙,2006)

..............................................................................................

사각의 링/ 문정희

 

뉴욕 7번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그때

옆자리 백인 남자가 읽고 있는 뉴욕타임스를

곁눈으로 읽다가 순간에 날아든 강펀치에

나는 쓰러졌네

사우스 코리아 헝그리 복서! 김득구 사망!

인간은 고깃덩이가 아니다!

복싱은 스포츠가 아니다!

뉴욕타임스는 소리 질렀지만 나는 보았네

내손에도 네 손에도 피 묻은 권투 글러브가 끼워져 있었지

링에 올라가 싸우게 해줘

적어도 누가 때리는지는 알 수 있잖아

14세에 무작정 상경, 껌팔이구두닦이빵공장을 거쳐 올라간

사각의 링

패하면 살아 돌아오지 않겠어

아예 관을 짜가지고 떠났던 스물세 살

그는 라스베가스에서 챔피언 맨시니의 주먹에 쓰러졌네

아니야, 나를 쓰러뜨린 건 맨시니의 주먹이 아니었다구

 

링에서 글러브를 낀 채 맞아 죽은 선수가

현재까지 6백 명이 넘는다고 활자는 말했지

하지만 이 스릴 넘치는 열광적인 게임을 중지할 생각은

누구에게도 없었지

헝그리 복서의 시신 위에는 대머리 독재자의 훈장이 수여되고

피 묻은 글러브가 날아다니는 사각의 링은

지금도 인간의 세상 어디에든 있지

물론 오늘 여기에도 있지

힘이 없는 것은 죽어야 하니까

하지만 적어도 누가 무엇이 때리는지는 알고 싶어!

알고 싶다구!

 

- 문학사상 20083월호

.................................................................................

그 여자가 할 수 있는 일/ 황영숙

 

종합검진을 받으러 가자고

친구가 전화를 했다

건강을 위해서 한 번쯤 꼭 해야 하는 중요한 일이라고

중요한 일인 줄은 알지만 병원의 이곳저곳은

언제나 두려움으로 기억되므로 잠깐의 갈등을

지우고 단호히 거절했다

 

재산증식을 위해 명품아파트나 우량주식을

사두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경제생활이라고

친구가 열변을 토했지만

그것도 가만 생각해 보니 보통 부담되는 일이

아니라서 그만두었다

 

두려움도 없고 부담도 없는 너무나 행복한 일은

방금 싹튼 풀꽃 화분에

신나게 물주는 일

그 작은 풀들이 꽃대를 내밀면

같이 눈 맞추며 웃어주는 일

 

어스름 달빛 속에 오래오래 별똥별을 기다리다

지치는 밤이면

달빛과 더불어 밤이 이슥하도록

시를 쓰는 일

 

- 시집은사시 나무숲으로/ (한국문연, 2011)

................................................................................

함양 군내버스/ 조향미

 

함양 백전 녹색대학 가는 버스는 오십분 간격이다

버스가 떠나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았다

일찍 차에 오르니 할머니만 다섯 먼저 타고 계시다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노친네들은 서로 거리낌 없다

할매는 올해 나이가 몇이오

나는 아직 얼마 안돼요 칠십서이

아직 젊구마 한참 농사 짓것네

그래도 오만데가 아푸고 쑤시오 할매는 얼마요

나는 칠십아홉 저 할매하고 동갑이오

칠십 셋은 아직 괜찮소 여섯 넘기면 영 힘에 부치요

손수레와 도리깨를 옆에 둔 할머니가 칠십, 제일 젊다

중년 아낙들이 상자 보따리를 들고 새로 탔다

저기 뭣이꼬 삼이까

삼은 아닌 거 같은데 더 무거버 뵈는데

젊은 할머니가 호기심을 참지 못한다

새댁이 그기 멋이요

친정 엄마가 싸주는 거라요

아이고, 추석도 하마 지냈는데 친정어마씨가 꼭꼭 챙기놨구마

자식들한테 저래 싸주마 맘이 시원하제

하모요, 오목조목 싸주면 묵을 놈이 묵으니께 주는 마음 좋고

싸갖고 가먼 어매가 주는 거니께 묵으면서 좋고 안 그러요

할매는 콩도리깨를 샀구마 올해는 콩이 질어서 타작 좀 하겄네

콩이 잘 되야제 팥 없이는 살아도 콩 없이는 못 사니께

할머니는 도리깨로 마당 가득 콩타작을 하여

둥글둥글 메주 띄워 간장 된장 청국장 단지 단지 담아

전국 각지 오남매에게 또 오목조목 싸 부칠 것이다

묵을 놈이 묵으니께 주는 마음 시원하제

 

- 시집그 나무가 나에게 팔을 벌렸다(실천문학사, 2006)

....................................................................

3/조은길

 

벚나무 검은 껍질을 뚫고

갓 태어난 젖빛 꽃망울들 따뜻하다

나는 문득 대중 목욕탕이 그리워진다

뽀오얀 수증기 속에

스스럼없이 발가벗은 여자들과 한통속이 되어

서로서로 등도 밀어주고 요구르트도 나누어 마시며

볼록하거나 이미 홀쭉해진 젖거슴이거나

엉덩이거나 검은 음모에 덮여 있는

그 위대한 생산의 집들이 보고 싶다

그리고

해가 완전히 빠지기를 기다렸다가

마을 시장 구석자리에서 날마다 생선을 파는

생선 비린내보다

니코틴 내가 더 지독한 늙은 여자의

물간 생선을 떨이해 주고 싶다

나무껍질 같은 손으로 툭툭 좌판을 털면 울컥

일어나는 젖비린내 아

어머니

어두운 마루에 허겁지겁 행상 보따리를 내려놓고

퉁퉁 불어 푸릇푸릇 핏줄이 불거진

젖을 물리시던 어머니

 

3월 구석구석마다 젖내가 어머니

그립다

 

(중앙일보 신춘문예당선작. 1998)

-시집노을이 흐르는 강(서정시학. 2010)

------------------------------------------------

가뭄에 꾸는 꿈 김주관

 

가끔 마루 밑으로 추락하는 꿈을 꾸었다.

고샅을 살피는 돌배 감잎이 배들배들한 유월, 헛광 시렁에는 구렁이가 들곤 했는데 마늘쫑 끝대는 탱탱도 하여라, 꼬부라진 불쏘시개 되어 화덕아래 지글거리는 날, 머리카락과 실파가 닭나무 살처럼 풀어져 진이 빠지면 돌덩이 되어버린 된장을 풀어서 아욱국 끓여 골목길에 뿌리는 거라는데, 설핏한 해거름에 나타난 긴 그림자, 미끈덕한 몸에서는 소름이 착착 목덜미에 감기고, 날숨이 막히고 숨통이 조여 와 서늘하기도 했어라, 구슬처럼 박혀있는 고요한 심지, 내 눈에 기쁜 섬광이 꽂힐 때 댓싸리나무 그늘 아래에 몸뚱아리를 숨긴 구렁이는 허연 옷 한꺼풀 벗어 말리는 중이었던가. 오솔길 휘적거리며 안골밭둠덤에서 왔으리라. 뻐꾹새 울음은 느릿느릿 콩포기에 내려 앉고 정적은 땡볕에 푹 익다. 밭고랑에 축 늘어진 유방을 말아 올린 소낙비 기다리다 뒤늦게 벗는 허물이련만 땅강아지처럼 흙에 붙어사는 우리엄마의 베적삼 냄새를 기억하고 십리 길 꽁무니 따라와 비단 옷 한 벌 갈아입으면 아, 하늘은 붉기도 했어라. 둠벙에서는 잠자리 날개처럼 투명한 잠짓이 미지근한 오후의 수면을 데우고 얼굴이 까만 나는 마루 밑으로 굴러 떨어져 가위눌린 심장을 쑥으로 문지르고, 엄마는 지킴이 우는 소리 들으려 자주색 하늘에다 대고 가없는 주술을 풀다. 날름날름 낮잠 끝에 찾아온 꿈이 내 머리맡에 깊숙한 또아리를 틀면, 얇은 헛껍데기 위에서 수파리들은 을 찾고 붉은 해는 서산에서 마른 을 태우고

 

2004년 제6회 수주문학 대상

----------------

버드나무 장례식 이종섶

 

두 팔을 벌려야 겨우 안을 수 있었던

동네 어귀 버드나무 한 그루

길을 넓히기 위해 베어낼 수밖에 없었다

아무런 연고조차 없어 애를 태웠으나

밑동이 잘려 우지끈 넘어진 나무를

운구하기 알맞게 자르기 시작했을 때

하나 둘 나타나는 유족들

가족들의 뿌리였던 할머니 위로

든든한 기둥이었던 남편이 먼저 내려왔고

그 위에 있던 자식들도 차례로 도착했다

평생 살을 맞대고 살던 남편이

허공으로 뻗어가는 어린 가지들 뒷바라지가 힘겨워

노모를 돌볼 생각조차 못했던 아들과 딸들이

기계톱의 부음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온 것이다

잠시 후면 트럭을 타고 떠나갈 가족들

유품으로 남긴 나에테 편지를 읽었을까

언제나 동구 밖을 바라보며 살았던 할머니

떠나간 가족들이 보고 싶을 때는

땅속을 헤집는 뿌리 끝에서 그리움이 사무쳤는데

자를 건 자르고 뽑을 건 뽑으면서

가족들에 대한 추억을 하나씩 수습한 후

마침내 지상에서 그 흔적을 완전히 지웠다

움푹 파인 집에 남겨진 뿌리들은

간혹 할머니의 기억을 틔우기도 하겠지만

빈집을 헤매다 숨을 거둘 것이다

 

2008년 제10회 수주문학상 우수상

--------------------------------

바늘 끝에서 피는 꽃 이사랑

청석골의 단골 수선집 늙은 재봉틀 한 대

아마, 지구 한 바퀴쯤은 돌고도 남았지

네 식구 먹여 살리고 아들 딸 대학까지 보내고

 

세상의 상처란 상처는 모조리 퀘매는 만능 재봉틀

실직으로 떨어진 단추를 달아주고 이별로 찢어진 가슴과 술에 멱살 잡힌 셔츠를

감쪽같이 성형한다

 

장롱 깊숙이 개켜둔 좀먹은 내 관념도 새롭게 뜯어 고치는 재봉틀

작은 것들은 가슴을 덧대어 늘리고

막힌 곳은 물꼬 트듯 터주고 불어난 것들 돌려 막으며

무지개실로 한 땀 한 땀 땀구슬을 꿰어 서러움까지 깊고 있다

 

무더운 여름 낡은 그림자를 감싸 안고 찌르륵 찌르륵

희망은 촘촘 재생 시키고 구겨진 자존심은 반듯하게 세워 돌려준다

일감이 쌓일수록 신나는 재봉틀 오늘도 허밍허밍 즐겁다

 

별별 조각난 별들을 모아 퀼트 하는 밤

바늘 끝에서 노란 달맞이꽃들이 환하게 피어났다

 

2009년 제11회 수주문학상 우수상 > 대상

------------------

봄날의 부처님 김애리나

 

, 부처님 주무시는 중이세요

햇살이 부처님의 이마에 키스하고파

법당 안을 기웃대는 봄날이었지요

 

졸립지요 부처님? 그래도 봄인데

나들이는 못 갈망정 마당 가득 피어난 꽃나무 좀 보세요

산사나무 조팝나무 매자나무 꽃들이 치마를 올리고

벌서 바람을 올라탈 준비를 하는 걸요

꽃가루 가득 실은 바람과 공중에서 한바탕 구르다

주워 입지 못하고, 흘린 치마들이 노랗게 땅을 수놓는 걸요

화나셨어요 부처님? 왜 오롯이 눈은 내리깔고 침묵하세요

이 봄에 관계하지 못한 이란 울기만 하는걸요

보세요, 대웅전 계단 옆 고개 숙인 한 그루의 불두화를

향기 많은 꽃에 벌과 나비가 꾜여 열매를 맺는 모습은

수도승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하여 성불코자 심었다는 불두화가

관계를 나누다 쓰러진 것들을 보며, 눈물을 찍어내고 있어요

 

천년이 넘게 한 세상 굽어만 보시는 부처님

오늘처럼 법당에 둘이만 있는 날에는

당신 한번 넘어뜨리고 싶은 마음 아시는지,

, 헛 기침하시네요 토라져 눈감으시네요

긴 손 뻗어 몇 날 며칠 불두화의 눈 감겨 주시니

, 그제야 봄 저무네요 절름발로 지나가네요

 

[2005년 진주신문 가을문예 당선작]

------------------------------

 

 

퍽 오래된 집 윤승범

 

동학난도 대동여지도도, 그런 것들도 지나쳐 간 집

습기없는 이엉에는 이제 구렁이도 참새 떼도 들지 않는다.

삭고 삭아 저절로 부서져 내리는 흙담

돌아서면 키 낮춘 뒷간, 항아리 엎어 놓은 굴뚝

허리 굽히고 살았던 작은 방 두칸

양철 깡통을 주워 만든 화로

말라붙은 담쟁이 넝쿨 밑에

피골이 상접한 노파가 오래된 풍경으로 어울려 있다

 

보이는 것 없는 눈에 진물이 흘러 다섯걸음만 걸어도

숨을 헐떡거리는 할멈 물기 한 방울 없어 오뉴월 땡볕을

잘도 견뎠다 싶은, 그래서 훅 불면 할멈이나 옹기 모두 묻혀 흙이 될 그런, 한내 불쪽 작은 집 한 채

 

(2회 지용신인문학상 당선작.1996)

--------------------------------

작은戀歌 박정만

 

사랑이여, 보아라

꽃초롱 하나가 불을 밝힌다.

꽃초롱 하나로 천리 밖까지

너와 나의 사랑을 모두 밝히고

해질녘엔 저문 강가에 와 닿는다.

저녘 어스름 내리는 서쪽으로

流水와 같이 흘러가는 별이 보인다.

우리도 별을 하나 얻어서

꽃초롱 불 밝히듯 눈을 밝힐까.

눈 밝히고 가다가다 밤이 와

우리가 마지막 어둠이 되면

바람도 풀도 땅에 눕고

사랑아, 그러면 저 초롱을 누가 끄리.

저녁 어스름 내리는 서쪽으로

우리가 하나의 어둠이 되어

꽃초롱 앞세우고 가야 한다면

꽃초롱 하나로 천리 밖까지

눈 밝히고 눈 밝히고 가야 한다면.

 

(3회 정지용문학상.1991)

--------------

 

 

龜龍寺詩篇. 겨울노래 오세영

 

산자락 덮고 잔들

산이겠느냐.

산 그늘 지고 산들

산이겠느냐.

산이 산인들 또 어쩌겠느냐.

아침마다 우짖던 산까치도

간 데 없고

저녁마다 문살 긁던 다람쥐도

온 데 없다.

길 끝나 산에 들어섰기로

그들은 또 어디 갔단 말이냐.

어제는 온종일 진눈깨비 뿌리더니

오늘은 하루 종일 내리는 暴雨

 

빈 하늘 빈 가지엔

홍시 하나 떨 뿐인데

어제는 온 종일 을 치고

오늘은 하루 종일 물소리를 들었다.

산이 산인들 또

어쩌겠느냐.

 

(4회 정지용문학상.1992)

---------------------------

구들방에서의 마지막 밤 김남용

 

행랑으로 건너왔다

군고구마 냄새가 자욱하다

아버지가 군불을 때시나보다

 

"춥지야? 기다리그라"

 

구들을 등지고 있으려니

참나무숯 같은 졸음이 밀려온다

방바닥은 황토빛깔로 달아오르고

갑자기 오줌이 마려운 나는

마당에 서서

뚝뚝 떨어지는 새벽별을 샌다

 

밤새 사령이를 품은 안개가

무지개빛을 띠기 전 나는

행랑을 비우고

약속처럼 떠나야한다

 

머지 않아 아버지는

이백년 묵은 구들을 들어내리라

 

"이제 니들도 다 컸은께 입식 해야제"

 

내년 고향길

구들방에 살 익을 걱정은

비오는 날 하늘을 나는 가오리연처럼

한가롭기만 하다

 

(5회 신인지용문학상 당선작.1999)

-----------------------------------

만춘 장재성

 

아무 때나 오지 마세요.

찬바람으로

성급히 다가서지 마세요.

당신이 좀 한가로워진다면

부드러운 바람으로

푸르른 보리 물결치는

밭둑을 타고 오세요.

그리고 기분이 좋으면 휘파람을 부세요.

언덕바지 황금빛 나는

누런 황소를 보셨나요.

그런 몸짓으로 그런 눈빛으로

곤륜산을 바라보듯 천천히

세상이 밝은 날 큰 빛으로 오세요.

당신이 정하신 날 꼭 오세요.

활짝 핀 노란 꽃잎으로

아무도 모르게

곤룡포 한 벌 펼쳐 놓지요.

 

(6회 신인지용문학상 당선작.2000)

-----------------------------------

마음의 고향.6

-初雪 이시영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참새떼 왁자히 내려앉는 대숲마을의

노오란 초가을의 초가지붕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토란 잎에 후두둑 빗방울 스치고 가는

여름날의 고요 적막한 뒤란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추수 끝난 빈 들판을 쿵쿵 울리며 가는

서늘한 뜨거운 기적소리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빈 들길을 걸어 걸어 흰옷자락 날리며

서울로 가는 순이 누나의 파르라한 옷고름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아늑한 상큼한 짚벼늘에 파묻혀

 

나를 부르는 소리도 잊어버린 채

까닭 모를 굵은 눈물 흘리던 그 어린 저녁 무렵에도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마음의 고향은

싸락눈 홀로 이마에 받으며

내가 그 어둑한 신작로 길로 나섰을 때 끝났다

눈 위로 막 얼어붙기 시작한

작디작은 수레바퀴 자국을 뒤에 남기며

 

(8회 정지용문학상.1996)

------------------------------------------

생의 철학 김은정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

.

.

 

오늘 갑자기 이 시가 계속 되뇌어졌다.

 

밖에는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나는 겨울의 한 가운데서……그리고 인생의 반토막 쯤 되는 곳에서 시를 쓴다.

살고 죽고, 싸우고 웃고 하는 것들이 다 남의 일만 같고, 나는 영악하지도 무르지도 못한 채

세상을 애초에 던져진 모습 그대로 살아내고 있다.

 

어떤 날은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따스한 날이거나,

구름 그득 끼어 흐린 날이거나, 비나 눈이 마른 뜰 앞으로 휭 지나가는 날이면은

이대로 살아주자, 그냥 이대로 살아주자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다.

 

볕도 쨍하게 차가운 날 저녁이나 밤, 따뜻한 이불을 펴고 누워 말없는 천장을 보며

'나는 나의 주인인가' 하고 묻는 때도 있다. 그런가하는 생각이 떠오를 때 쯤,

묵묵히 벽을 지나가던 무늬들이 "아니야"라고 진실같은 소리를 내곤 하는데

그만 나는 울컥해져서 혼자 울기도 그렇고, 가만히 있기도 겸연쩍어져서는 그냥 잠을 청한다.

 

밖에는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나는 검은 밤의 한가운데서……그리고 내 생의 마지막 날 같이 느껴지는 어둠 속에서

잠을 잃은 두 눈을 껌뻑거린다.

지나간 날들은 다 용서하고 잊어주고 하라는 어른들의 말씀에 예예 고개를 조아리다가도,

나는 아직 용서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또 혼자 시큰둥한 마음인데,

조그만 방 안 나만 홀로 누워, 보는 사람도 없는데 울기도 그렇고 하여 맥없이 다시 잠을 청해 본다.

 

새벽은 길고도 멀리 있고, 나는 아무 할 말 없이, 밤이 외로운 신발을 신고 떠도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9회 신인지용문학상 당선작.2003)

----------------------------------------

나무는 김점순

 

나뭇잎이 흔들릴 때

가만히 그 속으로 따라가 본다

이파리가 흔들리기까지

먼저 가지가, 줄기가

뿌리를 묻고 있는 저 땅이

얼마나 많은 날을 삭아내려야 했는지

가볍게 흔들리는 것 뒤에는 언제나

아프게 견딘 세월이 감춰져 있는 것을

 

푸르게 날을 세우고 있다고

외로움이 없었겠는가

허풍으로 길 하나 내기 위해

초승달 돌은 하늘에 가슴을 풀어놓고

얼마나 몸서리를 쳤는지

돌아앉아 숨 고르는 소리에

발 아래가 술렁거리고, 서쪽 하늘로

수만 마리의 새가 한꺼번에 날아오른다

 

그러면 나무는

제 한숨을

나이테 속에 꼭꼭 태워 넣고 섰을 뿐

 

(10회 신인지용문학상 당선작.2004)

-----------------

세한도 가는 길 유안진

 

서리 덮인 기러기 죽지로

그믐밤을 떠돌던 방황도

오십령(五十領)고개부터는

추사체로 뻗친 길이다

천명(天命)이 일러주는 세한행 그 길이다

누구와 눈물로도 녹지 않는 얼음장길을

닳고 터진 알발로

뜨겁게 녹여 가라신다

매웁고도 아린 향기 자오록한 꽃진 흘려서

자욱자욱 붉게붉게 뒤따르게 하라신다

 

(10회 정지용문학상.1998)

---------------

나비가 돌아오는 아침 허영둘

 

젖은 잠을 수평선에 내거니 새벽이다

밤사이 천둥과 함께 많은 비가 내렸다

예고된 일기였으나 어둠이 귀를 키워

여름밤이 죄처럼 길었다

생각 한쪽을 무너뜨리는 천둥과 간단없는

빗소리에 섬처럼 엎드려 나를 낭비했다

 

지난봄, 바다로부터 해고통지서가 날아왔다 세상은 문득 낯설어졌고 파도는 사소한 바람에도 신경을 곤두세웠다 코발트블루 바다는 손잡이 없는 창, 절망보다 깊고 찬란했다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나의 슬픔도 그토록 찬란했을까 나는 구름 뒤에 숨어 낮달처럼 낡아갔다 들판의 푸른 화음에 겹눈을 빼앗긴 나비를 기다리며 나는 오지 않는 희망에 날개를 달아주고 싶었다

 

바다가 깨어난다

졸려도 감을 수 없는 희망

돌아서는 파도의 옷자락을 따라가면

거룩한 경배처럼 엎드린 섬들

나는 존엄을 다해 아침 바다의 무늬를 섬긴다

 

희망이란 소소한 풀잎이거나

날 비린내 풍기는 고깃배의 지느러미 같은 것

풀잎도 계단도 허리까지 젖어 궁리가 깊다

밤새운 탕진에도 하늘이 남아 드문드문한

구름 송이들은 젖은 마음을 문지르는 데 요긴하겠다

마루 끝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동안

담장 아래 칸나의 방에 볕이 붉게 들고

거미는 방을 훔치는 수고를 덜겠다

느슨하던 수평선도 다시 팽팽해져 나비를 부르고

고깃배 한 척 안개를 젖히며 희망처럼 돌아오고 있다

 

2012 부산일보 신춘문예

--------------------------------

귀화(歸化), 혹은 흑두루미의 귀환(歸還) 정영희

 

아무르 강 소인이 찍힌 항공우편이 도착했다

우표 네 귀마다 고드름이 박혀있는 흑갈색 편지에는

온난화 현상도 이곳에선 세계대백과사전에서나 읽어보는 호사라며

한낮에도 발가락을 날개 안쪽 깊이 파묻고 지낸다는 이야기였다

 

순천만에서 담근 농게 장을 벽돌 빵에 치즈대신

발라먹고 끼니를 때운다는 이야기며

새끼들로 인한 궁기窮氣때문에 늦은 저녁까지 시베리아 벌판에서

발품을 팔고 돌아온다는 행간에는 한숨이 진하게 배어났다

 

철새라고 부르는 비아냥 때문에 눈자위 진물이 마를 날이 없다는

대목에서는 먹빛 하늘을 갈기처럼 찢고 싶었다

허기로 눈밭에 시리도록 발자국을 남기는 일이 이젠 지쳐

순천만의 텃새로 귀화를 결심하고 있다는 추신에 이르러서는

철 이른 폭설이 자작나무 숲을 이루고 있었다

 

갯가 짱뚱어의 눈알이 봉분처럼 튀어나온 이유를 알겠다

망둥어는 왜가리 공습을 기어코 막겠다며 전망대까지 벌써 올라와 있었고

칠게들은 뻘 구멍 속에 흑두루미의 식량을 비축하느라

열 발톱이 문드러질 정도였다

 

흑두루미의 귀환 아닌 귀화를 위해 탄탄한 움집이라도 예비해야 한다며

풍속을 온몸으로 가늠하고 있는 갈대의 심지도 깊었다

너울은 먼 바다에서 싱싱한 먹잇감을 데리고 오느라

하루에도 몇 번씩 지그재그로 물길을 오르내렸다

 

냉기가 옷깃을 쓸며가자 사람들이 탐조대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깃털 스쳐가듯 달이 구름을 밀어 올리자

쿠르르, 쿠르르, 카아오, 카아오!

회색 부리를 비틀며 북쪽 하늘에 까만 점들이 펄럭거렸다

이백 스물여덟마리 대가족의 귀환 아닌, 귀화였다

 

2012 광주일보 신춘문예

------------------------------

노숙 이영종

 

열차와 멧돼지가 우연히 부딪쳐 죽을 일은 흔치 않으므로

호남선 개태사역 부근에서 멧돼지 한 마리가

열차에 뛰어들었다는 기사를 나는 믿기로 했다

 

오늘밤 내가 떨지 않기 위해 덮을 일간지 몇 장도

실은 숲에 사는 나무를 얇게 저며 만든 것

활자처럼 빽빽하게 개체수를 늘려온 멧돼지를 탓할 수는 없다

 

동면에 들어간 나무뿌리를 주둥이로 캐다가

홀쭉해지는 새끼들의 아랫배를 혀로 핥다가

밤 열차를 타면 도토리 몇 자루

등에 지고 올 수 있으리라 멧돼지는 믿었던 것이다

 

사고가 난 지점은 옛날에 간이역이 서 있던 자리

화물칸이라도 얻어 타려고 했을까

멧돼지는 오랫동안 예민한 후각으로 역무원의 깃발 냄새를 맡아왔던 것일까

 

역무원의 깃발이 사라진 최초의 지점에

고속철도가 놓였을 것이고 밝은 귀 환해지도록 기적소리 들으며

멧돼지는 침목에 몸 비벼 승차 지점을 표시해 두었으리라

콧김으로 눈발 헤쳐 숲길을 철길까지 끌고 오느라

다리는 더욱 굵고 짧아졌으리라

 

등에 태우고 개울을 건네줄 새끼도 없고

돌아갈 숲도 없는 나는 오랜만에 새 신문지를 바꿔 덮으며

그때 그 역 근방에서 떼를 지어 서성거렸다는

멧돼지 십여 마리의 발소리를 믿기로 했다

 

2012 전북일보 신춘문예

문장 김명인

1

이 문장은 영원히 완성이 없는 인격이다

 

2

가을 바다에서 문장 한 줄 건져 돌아가겠다는

사내의 비원 후일담으로 들은들

누구에게 무슨 감동이랴, 옆 의자에

작은 손가방 하나 내려놓고

여객선 터미널 유리창 너머로 바라보면 바다는

몇 만 평 목장인데 그 풀밭 위로

구름 양 떼, 섬과 섬들을 이어 놓고

수평선 저쪽으로 몰려가고 있다

포구 가득 반짝이며 밀려오는 은파들!

 

오만 가지 생각을 흩어 놓고

어느새 석양이 노을 장산 갈아입고 있다

법사는 문장을 구하러 서역까지 갔다는데

내 평생 그가 구해온 관주(貫珠) 꿰어 보기나 할까?

애저녁인데 어둠 경전처럼 밀물져

수평도 서역도 서둘러 경계 지웠으니 저 무한대

어스름에는 짐짓 글자가 심어지지 않는다

 

3

윤곽이 트이는 쪽만 시야라 할까, 비낀 섬 뿌리로

어느새 한두 등 켜 드는 불빛,

방파제 안쪽 해안 등의 흐릿한 파도 기슭에서

물고기 뛴다, 첨벙거리는 소리의 느낌표들!

순간이 어탁되다, , 맥을 푼다

끝내 넘어설 수 없었던 상상 하나가

싱싱한 배태로 생기가 넘치더니 이내 삭아버린다

 

쓰지 않는 문장으로 충만하던 시절 내게도 있었다

볼만했던 섬들보다 둘러보지 못한 섬

더 아름다워도

불러 세울 수 없는 구름 하늘 밖으로 흐르던 것을,

두 개의 눈으로 일만 파문 응시하지만

문장은 그 모든 주름을 겹친 단 일 획이라고,

한 줄에 걸려 끝끝내 넘어설 수 없었던 수평선이

밤바다에 가라앉고 있다

 

4

시원(始原)에 대한 확신으로 길 위에 서는

사람들은 어느 시절에나 있다

시야 저쪽 아련한 미답(未踏)들이

문득 구걸로 떠돌므로 미지와 만난다는

믿음으로 그들은 행복하리라

타고 넘은 물이랑보다 다가오는 파도가 더 생생한 것,

그러나 길어 올린 하루를 걸쳐 놓기 위해

바다는 쓰고 지운다, 요동치는 너울이라 고쳐 적지만

부풀거나 꺼져 들어도 언제나 그 수평선이다

 

5

일생 동안 애인의 발자국을 그러모았으나

소매 한 번 움켜잡지 못해 울며 주저앉았다는 사내,

그의 눈물로 문장 바다가 수위를 높였겠는가

끈태 열지 못한 문 앞에서 통곡한

사내에게도 맹목은, 한때의 동냥 그릇이었을까?

 

6

어둠 속에 페리가 닿고 막배로 건너온

자동차 몇 대, 헤드라이트를 켜자 번지는 불빛 속으로

승객들이 흩어진다, 언제 내렸는지

허름한 잠바에 밀짚모자, 헝겁 배낭을 맨 사내 하나

어두운 골목길로 사라진다

, 문장을 구해 서역에서 돌아오는 법사가 아닐까

그가 바로 문장이라면?

 

허전한 골목은 닫혔다, 바다 저쪽에서

또 다른 사내들이 해맨다 한들

아득한 섬 찾아내기나 할까?

일생 처녀인 문장 하나 들쳐 업으려고

한 사내의 볼품없는 그물은 펼쳐지겠지만

어느새 너덜너덜해진 그물코들!

나는 이제 사라진 것들에 대한 행방을 묻지 않는다

원래 없으므로 하고많은 문장들,

아직도 태어나지 않은 단 하나의 문장!

 

구름에 적어 하늘에 걸어 둔 그리움 다시 내린다

수많은 아침들이 피워 올린 그날치의 신기루가 가라앉고

어느새 캄캄한 밤이 새까만 염소 떼를 몰고 찾아든다

그 염소들, 별들 뜯어 먹여 기르지만

애초부터 나는 목동좌에 오를 수 없는 사내였다!

 

-(2011 웹진 시인광장 선정 올해의 좋은 시 수상)

--------------------------------------------

거울 속 거미줄 정 용 화(안양)

 

덕천마을 재개발 지역

반쯤 해체된 빈집 시멘트벽에 걸린

깨진 거울 속으로 하늘이 세들어 있다

무너지려는 집을 얼마나 힘껏 모아쥐고 있었으면

거울 가득 저렇게 무수한 실금으로 짜여진

거미줄을 만들어 놓았을까

구름은 가던 길을 잃고 잠시 걸려들고

새들은 허공을 물고 날아든다

거미줄에 무심히 걸려있는 지붕 위

주인도 없이 해가 슬어놓은 고요를

나른한 오후가 갉아먹는다

간절함은 때로 균열을 만든다

한 때 두 손 가득 무너지는 인연 하나

잔뜩 움켜쥐고 있었던 적이 있다

그럴 때마다 가느다란 손금이 조금씩 깊어졌다

심경, 마음을 들여다볼 때 마주치는 거울 속으로

손금이 흘러들어 무수한 실금을 남겼다

균열은 어떤 부재를 품고 갈라진 틈 속마다

허기진 풍경을 흘려 넣는 것인가

무너짐이야말로 더 큰 열림이기에

거울 속 거미줄은 어떤 것도 붙잡아 두지 않는다

나를 흘리고 온 날

서까래 같은 갈비뼈 사이로 종일 바람이 들이쳤다

그러고 보면 깨진 거울은 무너지는 것을

움켜쥐고 있던 집의 마음이었음을

 

14회 수주문학상 당선작

-------------------------------------------------

저녁의 비행운飛行雲 함기석

 

아픈 아이를 안고 창밖을 본다

내일이 어린이날인데 하늘엔 어두운 핏줄만 뻗어가고

내가 가꿔온 꿈이 사마귀처럼 사각사각

내 내장을 파먹고 아이의 웃음을 파먹고 있다

옆집 무화과나무 아래 싹튼 상추들이 모두

만 원짜리 지폐로 보인다 저 싱싱한 지폐에 구름과 삼겹살을 싸

배터지게 먹고 돼지가 되고 싶은 날이다

대문가 목발을 짚고 올라온 어린 나팔꽃이

환하게 웃으며 나를 쳐다본다

저녁의 눈동자는 점점 커져 서녘하늘 전체가 붉은 갯벌로 변해가고

벼랑이 보이는 해안으로 새들이 날아간다

햇살 하나가 가만히 다가와 아이의 상처 난 뺨을 혀로 핥아준다

흰 이가 막 돋아난 햇살의 빨간 잇몸

공기들이 만드는 투명한 파도가 쉼 없이 일렁이고

아이는 약에 취해 잠든다

나는 아이의 등을 다독거리며 놀이터 모래밭을 바라본다

아침부터 온종일 허공을 날다 저녁에

모래밭에 떨어져 죽은 새

새가 남긴 마지막 무늬와 추상의 발자국들이

사람의 문장보다 아픈 저녁이다

나는 잠든 아이를 꼭 안고 속으로 울음을 삼킨다

점점 붉게 지쳐가는 하늘과 대지

저 두 장의 입술 사이로 터져 나오는 검붉은 침묵들

거미의 입으로 들어간 벌레와 빗방울과 어둠이

환한 허공의 집이 되기까지

삶의 습한 저지대를 비행하는 아픈 비행운들

멀리서 석양에 젖은 새들이 하늘을 돌고

나무의 혼들이 죽은 나뭇가지 끝에서 빠져나와 찬 물결처럼 고요히

허공 저편으로 퍼져가는 것이 보인다

 

2012년 제10회 애지문학상 수상작

-----------------

이정훈, '쏘가리, 호랑이

 

나는 가끔 생각한다

범들이 강물 속에 살고 있는 거라고

범이 되고 싶었던 큰아버지는 얼룩얼룩한 가죽에 쇠촉 자국만 남아

집으로 돌아오진 못하고 병창[i] 아래 엎드려 있는 거라고

할애비는 밤마다 마당귀를 단단히 여몄다

아버지는 굴속 같은 고라댕이[ii]가 싫다고 산등강으로만 쏘다니다

생각나면 손가락만 하나씩 잘라먹고 날 뱉어냈다

우두둑, 소리에 앞 병창 귀퉁이가 와지끈 무너져 내렸고

손가락 세 개를 깨물어 먹고서야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갔다

아버지가 밟고 다니던 병창 아래서 작살을 간다

바위너덜마다 사슴 떼가 몰려나와 청태를 뜯고

멧돼지, 곰이 덜걱덜걱 나뭇등걸 파헤치는 소리

내가 작살을 움켜쥐어 물속 산맥을 타넘으면

덩굴무늬 우수리 범이 가장 연한 물살을 꼬리에 말아 따라오고

내가 들판을 걸어가면

구름무늬 조선표범이 가장 깊은 바람을 부레에 감춰 끝없이 달려가고

수염이 났었을라나 큰아버지는,

덤불에서 장과를 주워먹고 동굴 속 낙엽잠이 들 때마다

내 송곳니는 점점 날카로워지고

짐승이 피를 몸에 바를 때마다

나는 하루하루 집을 잊고 아버지를 잊었다

벼락에 부러진 거대한 사스레나무 아래

저 물 밖 인간의 나라를 파묻어 버렸을 때

별과 별 사이 가득한 이끼가 내 눈의 흰창을 지우고

등줄기 가득 가시가 돋아났다 심장이 둘로 갈려져,

아가미 양쪽에서, 퍼덕,

,,,,,,

산과 산 사이

와 여울, 여울과 가 끊일 듯 끊일 듯 흘러간다

坐向 한번 틀지 않고 수 십 대를 버티는 일가붙이들

지붕과 지붕이 툭툭 불거진 저 산 줄기줄기

큰아버지가 살고 할애비가 살고

해 지는 병창 바위처마에 걸터앉으면

언제나 아버지의 없는 손가락, 나는

 

[i]'절벽'이란 뜻의 강원도 사투리

[ii] '골짜기'란 뜻의 강원도 사투리

 

2013 한국일보 신춘 당선작

-----------------------------------------------------------------------------

이해존 /녹번동

 

1

햇살은 오래전부터 내 몸을 기어다녔다 문 걸어 잠근 며칠, 산이 가까워 지네가 나온다고 집주인이 약을 치고 갔다 씽크대 구멍도 막아 놓았다 네모를 그려 놓은 곳에 약 냄새 진동하는 방문이 있다 타오르는 동심원을 통과하는 차력사처럼 냄새의 불똥을 넘는다 어둠 속의 지네 한 마리, 조정 경기처럼 방바닥을 저어간다 오늘은 평일인데 나는 百足으로도 밖을 나서지 않는다

 

2

산이 슬퍼 보일 때가 있다 희끗한 뼈마디를 드러낸 절개지, 자귀나무는 뿌리로 낭떠러지를 버틴다 앞발이 잘리고도 언제 다시 발톱을 세울지 몰라 사람들이 그물로 가둬 놓았다 아물지 않은 상처가 곪아가는지 파헤쳐진 흙점에서 벌레가 기어나온다 바람이 신음소리 뱉어낼 때마다 마른 피 같은 황토가 쏟아져 내린다 무릎 꺾인 사자처럼 그물 찢으며 포효한다

 

3

저마다 지붕을 내다 넌다 한때 담수의 흔적을 기억하는 산속의 염전, 소금꽃을 피운다 옷가지와 이불이 만장처럼 펄럭이며 한때 이곳이 물바다였음을 알린다 흘러내리지 못한 빗줄기를 받아내는 그릇들,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방안에 고인 물을 양동이로 퍼낼 때 땀방울이 빗물에 섞였다 오랫동안 산속에 갇혀 있던 바다가 제 흔적을 짜디짠 결정으로 남긴다 장마 끝 폭염이다 살리나스*처럼 계단을 이룬 집들을 지나 더 올라서면 산봉우리다 계단 끝에 내다 넌 내 몸 위로 햇살이 기어다닌다

 

* 페루 고산의 계단식 염전.

 

2013 경향 신춘문예

------------------------

히말라야시다 신은숙

 

나무는 그늘 속에 블랙홀을 숨기고 있지

 

수백 겹 나이테를 걸친 히말라야시다 한 그루

육중한 그늘이 초등학교 운동장을 갉아먹고 있다

 

흰눈 쌓인 히말라야 갈망이라도 하듯 거대한 화살표

세월 지날수록 짙어가는 초록은 시간을 삼킨 블랙홀의 아가리다

 

빨아들이는 건 순식간인지도 모르지, 그 속으로

 

구름다리 건너던 갈래머리 아이도 사라지고

수다 떨던 소녀들도 치마 주름 속으로 사라지고

유모차 끌던 아기엄마도 사라지고

반짝이던 날들의 만국기, 교장 선생님의 긴 훈화도 사라지고

 

삭은 거미줄 어스름 골목 지나올 때

아무리 걸어도 생은 막다른 골목을 벗어나지 못할 때

부싯돌 꺼내듯 히말라야시다 그 이름 나직이 불러본다

멀어도 가깝고 으스러져도 사라지지 않는 그늘이 바람 막는 병풍처럼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다

 

해마다 굵어지고 짙어지는 저 아가리들

쿡쿡 찌르고 찌르면 외계서 온 모스부호처럼 떠돌다 가는 것들

멍든 하늘을 떠받들고 선 나무의 들숨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삼켜지지 않는 그늘 속엔 되새떼 무리들

그림자 하나씩 물고 석양 저편으로 날아오른다

2013 세계일보 신춘

------------------------

, 이유 / 김유경

이 섬에선 사람이 죽으면 바람에 묻는다

그건 섬의 풍토병 같은 내력이어서 여자는

바다로 떠나 돌아오지 않는 아비의 아이를

박주가리 씨앗처럼 품은 채 바람에 묻혔다

은행나무가 여자의 무덤이며 묘비명이었다

남은 여자들이 제 주검을 보듯

길게 울다 돌아갔다, 섬에서 여자가 죽으면

살아서 뜨겁고 애달팠던 곳이 먼저 젖는다

바람은 젖어 있는 것부터 시나브로 말린다

소금에 간이 밴 깊이를 모두 말려

눈물의 뿌리가 마른 우물처럼 바닥을 드러내면

영혼을 바다로 돌려보내는 것이 바람의 법이다

하루 두 번 물마루 끝이 어물어물 붉어지고

꼭 쥐고 있던 바람의 손아귀가 스르르 풀리면

섬은 귀를 열고 듣는다, 먼 바다에서 들려오는

돌아오지 않는 아비들의 빈 배가 웅웅 우는 소리를

죽은 여자는 그 소리에 기대어 바람 몰래

혼자서 아이를 키운다, 뭉텅뭉텅 사라지는 몸에서

눈동자는 빛을 잃고, 머리칼은 제멋대로 자라나온다

아이를 품은 움 같이 보드라운 궁륭, 그 곳에선

바다 밑바닥에서만 나는 해초 내음이 나날이 짙어졌다

마침내 바람이 여자를 온전히 데려갈 때

죽은 여자는 아이를 은행나무 잎 속에 묻어두고

떠난다, 홀로 누워 있었던 자리에

노란 은행잎이 수북수북 쌓인다, 가을 한 철 내내

바람의 장례가 제 열매 다 익도록 잎을 물들이지 않는

은행나무의 사랑 같은 것인지 아무도 몰랐다

바람이 먼 바다 부표를 향해 치솟아 올라 길을 잡고

여자의 푸른빛 인광은 그리운 바다를 향해

따뜻하게 흘러간다, 아이는 그 바다 어디쯤에서

돌아오지 못한 제 아비를 그대로 빼닮았지만

섬도 바람도 그 아이를 알아보지 못했다.

 

2013 국제신문 신춘

---------------------------------

목련꽃 지다 / 권행은

 

저 집, 독거노인이 보이지 않는다

 

목련꽃 져 내리고

조문하듯 비가 지난다

 

꽃은 새의 깃털처럼 허공에 기대었을 때에도

신의 영역을 탐하지는 않았다

그 때문인지

맨 땅에 누워 듣는 하늘의 말씀이 희다

 

, 떨어질 때

공기가 잠시 출렁했을 뿐

저 꽃은 첫 번째 고백부터

쪽방 밑에 버려진 마이너리티

 

뒤척이는 바람이

한 계절 백발이 성성하던 꽃의 외로움을 뒤집고

풍문처럼 누르스름하게

해묵은 발자국도 잠시 석양에 문지른다

 

한 때 속절없이 눈부시던 봄빛에

하얗게 저항하던 그녀의 몸짓을

그 누가 아름답다고 했을까

 

붓을 들어 마지막 유서를 쓰듯

혼신으로 써내려간 꽃의 낙화를 안다면

어둑어둑 밤의 담장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내리는

한 장 어둠이 이불인

저 독거의 노추老醜를 함부로 밟지는 못할 것이다

 

2013년 영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

등불 한경옥

야간자습 끝난 늦은 밤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멀리 사립문에서 깜박이던

별 하나

 

겁에 질려

땀이 흥건하도록

내달리던 발걸음을,

왈칵!

울음으로 바뀌게 하던 그

불빛

 

종종걸음치시던 어머니는

마중 대신

호롱불을 걸어놓으셨다.

 

머리 희끗한 딸이, 아직도

마음 놓이지 않는 듯

당신의 산소 앞에 환하게

불 밝혀 놓으신

원추리 꽃 한 송이

 

2013 월간 유심신인문학상

-----------------------------

오래된 책상 외 박해련

 

할아버지가 아빠에게

아빠가 나에게 물려준

주름살 많은 책상

 

먼 옛날

아름드리 커다란 나무였을 적

노루가 들국화 같은 눈망울로

기대앉아 다리쉼한 자리

 

볼테기 볼록 베어 물다 떨어뜨린

도토리 주우러

언덕 아래로 내달린

다람쥐 발자국 찍힌

뿌리에서 잎사귀로

영양분 길어 올리던

나무의 맑디맑은 숨결 묻은

 

할아버지의 주름살 같은

나이테 동그랗게 감긴

오래된 책상

-------------------

개개비 동네

 

사그락사그락 몸 비비는

갈대 숲 사이로 흘러나오는

개개비의 풀빛 지저귐

 

누구네 집은 아빠가

벌레를 물어 와 나누어 먹이고

 

어느 집에선 엄마가

머루 알 같은 마알간 눈망울로

낭창낭창 그림책 읽어 주는

 

개개개 개개개개 개개개 개개개개

대대포구 갈대 숲 개개비 동네

 

문득,

갈대 숲 둥지 속

아기새가 보고 싶어졌다

 

*대대포구 - 순천만의 바닷물이 드나드는 개의 어귀

황금펜 2013(계동아동문학회, 2013)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미시령 이상국

 

영을 넘으면 동해가 보이고

그 바닷가에 나의 옛집이 있다

나도 더러 대처에서 보란 듯이 살고 싶다

그러나 바다가 섭섭해 할까 봐

눈 오는 날에도 산을 넘고

어떤 날은 달밤에도 넘는다

 

속으로 서울 같은 건 복잡해서

거저 준대도 못 산다며

한사코 영을 넘는 것이다

 

바다도 더러 울고 싶은 날이 있는데

내가 없으면 그 짐승 같은 슬픔을 누가 거두겠냐며

시키지 않은 걱정을 하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동해는

네가 얼마나 심심하면 그러겠냐며

남모르게 곁을 주고는 하는데

 

사실 나는 이런 말을 입 밖에 내지는 못하고

바람이나 나무뿌리에 묻어둔 채 영을 넘고는 한다

 

계간불교문예(2014년 봄호 제19회 현대불교문학상

--------------------------------------------

Paris sisters/ I love how you love me.1974

 

Paris sisters / I Love How You Love Me

'시(詩) > 괜찮은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 집을 생각하면 外  (0) 2020.04.18
산이 나를 들게 한다  (0) 2020.04.18
2020년 신춘문예 당선작   (0) 2020.01.01
무엇보다 그리운 外  (0) 2019.08.15
김기홍 外  (0) 2019.08.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