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시 / 김홍준
투쟁 시를 참 아름답게 쓰네요
누군가 말한다
요즘 시는 노동 시 같지 않고 부드러워
어느 노동자의 시집 출판기념회에서
문학계 인사가 말한다
모르는 게야
노동시는 언제나 아름다웠다는 걸
기계를 지키며 파업하는 노동자의 팔뚝이
거칠기만 할까
동료의 영정을 끌어안은 사내의
웅크린 등에 떨어지는
연대의 눈물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진정 모르는 게야
시를 쓰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들이 내 마음에 걸어놓은 달이라는 걸
일하지 않는 메마른 노래에
눈이 먼 눈에는
보이지 않는 달인 것을
바람이 거세 어지러운 날
가라앉는 나를 일으켜 주는 건
걸려 있는 달의 무게라는 걸
별들이 하나씩 터져 나와
자꾸 빛내는 바람에
달빛이 아름답다는 것을
동지
나는 날이 좀 선 사람이 좋다
그저 시비만 붙자하는 것이 아니라
깊이 뿌리내린 사상으로
세상을 섬뜩하게 가를 줄 알아야 한다
나는 가난한 사람이 좋다
철없이 거진 것 많아 눈길이 허망한 사람보다
의복은 남루하여도 가슴이 넓어
사연이 있거나 아픈 놈 보면 품을 빌려주는
그런 이가 좋다
난 밥그릇이 큰 사람이 좋다
조막만한 그릇에 제것만 담고
돌아앉아 먹는 사람은 재미가 없다
푸지게 담아 일없이 들른 누구라도
숟가락을 꽂을 수 있게끔
큰 그릇을 가진 이가 좋다
난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이 좋다
멍청하게 퍼마시는 게 아니라
눈치보고 저울보고 엉덩이 떼는 게 아니라
눈에 한가득 눈물을 준비하고
없는 놈 눈물나는 주사에 펑펑 눈물 쏟아주는
술꾼이 좋다
그리고 나는
나보다 좀 냉정한 사람이어야 좋다
텃밭
도시에서 나고 자라
흙벌레에도 기겁을 했는데
손에 호미를 쥐고 보니
세상사가
땅에 다 있다
상추 어린잎은
비올 때 옮겨야 하니라
일전 마른 날
빼곡히 모여 있길래
좀 너른 공간에서 살라고
몇 포기 덜어 꽁꽁 심었더니
모두 말라 죽어 있더라
터전을 바꾸려면
아무나 잡아 내치는 게 아니라
하나라도 살아 남도록
단비 촉촉히 내리는 날을
기다려야 한다는 진리
봄비 오는 날 깨우쳤네
토마토 곁가지
아끼지 말고 쳐내야 덤불이 안되니라
잎사귀 하나까지 아끼다가
몸통이 두 개 되어
기여 뿌리가 견뎌내지 못하더라
살면서
내 것이라 아까워 버리지 못한 것이
어디 한 둘일까
곁가지에 휘둘려
몸통을 아득히 잊고 살아왔음을
흙고랑에 주저앉아 깨우치고 있네
외로운 사람들
처음부터 외로운 사람들은 좀처럼
상처를 받지 않는다
거센 바람도 뭇 발길질도
온몸으로 받으며 오늘까지 온 사람들은 좀처럼
포기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가진 것이 없었던 사람들은 좀처럼
두려워 떨지 않는다
믿을 것이 단단한 땅과 맑은 바람과 푸른 하늘뿐인 사람들은 좀처럼
물러설 줄을 모른다
처음부터 사랑을 알고 실천하는 사람들은 좀처럼
변할 줄을 모른다
때론 도시의 먼지를 먹으며 거리에서 잠들고
때론 하늘에 집을 짓고 태양을 향해 팔뚝질을 한다
그리고 그 아래
똑같이 미련한 아름다운 사람들이 모이면 도무지
흩어질 줄을 모른다
이제는 ‘노동시’ 대신 ‘현장시’
“못난 놈들은 서로 가방만 봐도 안다/ 복도나 휴게실 앞에 서서 얼쩡거리고/ 그늘 벤치에나 앉아 애매한 시간을 죽이다 보면/ 어느새 남 같지 않은 얼굴들”(이동재 <대학강사무(舞)> 첫 연)
“오빠는 시간 강사,/ 몰락한 집안의 기둥이다// 경기가 없는 날에도/ 어김없이 도서관에 들러/ 무거운 책을 상대로/ 가볍게 몸을 풀어주는/ 오빠는 주먹보다 입이 세다// 지방 원정경기도 마다하지 않는/ 오빠가 믿을 것은/ 맷집밖에 없다”(박후기 <오빠> 앞 세 연)
이동재의 시는 ‘신경림의 <파장(罷場)>조로’라는 부제처럼 신경림의 시 <파장>과 <농무>의 가락을 빌려왔고, 박후기의 시는 시간강사를 권투선수에 견주었다. 농부에 포개든 권투선수에 빗대든 시간강사의 처지가 옹색하고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다. 석박사학위며 외국 유학 같은 뜨르르한 ‘스펙’, 그리고 학생들이 불러 주는 ‘교수님’ 호칭에도 불구하고 시간강사는 경제적으로나 사회적 지위에서나 불안하고 주변적인 존재임에 틀림이 없다.
“어떤 인간은 총장처럼 허허거리고/ 또 어떤 인간은 거지처럼 굽실거리지만/ 이까짓 차비도 안 나오는 강사질이야 자꾸 해 무엇하랴/ 박사들도 일용직 잡부처럼 부려먹는 통 큰 나라/ 하늘에 대고 연신 엿이나 먹일꺼나”(<대학강사무> 셋째 연 부분)
“싸움을 기다리는 시간이/ 막상 싸우는 일보다 더/ 막막하고 두렵다는 것을/ 대기실에서 청춘을 보낸/ 오빠는 알고 있다// 늦은 밤,/ 취한 주먹을 툭툭 허공에 던지며/ 문을 열고 오빠가 등장한다”(<오빠> 마지막 두 연)
계간 시 전문지 <시인동네> 여름호는 ‘새롭게 읽는 현장시’ 특집에서 이 두 시를 소개했다. ‘노동시여, 안녕’이라는 총론의 제목이 시사적인데, 필자인 문학평론가 고봉준은 “‘노동시’ 개념의 해체”를 주장했다. “노동의 형태가 바뀌었고, 노동과 자본의 대립 양상이 변했으며, 진보세력에서 ‘노동’이 차지하는 위상과 역할이 크게 후퇴”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특집은 이에 따라 농민, 이주노동자, 편의점 아르바이트, 탈북자 등을 다룬 최근의 시들과 그에 대한 짧은 평론을 통해 현장시의 가능성과 방향을 모색했다.
“나는 왜 나처럼 되었나/ 나의 마음은 아프다/(…)/ 너는 나를 버린다 나를 바보라고/ 그래도 나는 왔다 당신의 사랑을 위해/ 당신은 나를 모른다/ 하늘은 있지만 구름이 없다/ 나는 어디에도 없다/ 바람은 있지만 나는 어디에도 없다”(하킴 <아무도 모른다, 나를> 부분)
“나는 아르바이트 소녀,/ 24시 편의점에서/ 열아홉 살 밤낮을 살지요//(…)// 가끔은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러 이 세상에 온 것 같아요/ 엄마 아빠도 힘들게/ 엄마 아빠라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지 몰라요// 죽음조차 아르바이트-생을 구하네요/ 아, 아르바이트는/ 죽을 때까지만 하고 싶어요”(박후기 <아르바이트 소녀> 첫 연과 마지막 두 연)
하킴은 방글라데시에서 온 이주노동자였다고 한다. 그는 인도네시아에서 온 같은 처지의 여성과 사랑을 했으나 그 사랑은 단속과 추방으로 깨져 버렸다. “아르바이트는/ 죽을 때까지만 하고 싶”다는 편의점 아르바이트 소녀의 슬픈 소망이 그 아픔에 포개진다. 맨홀 작업을 다룬 노동자 시인 임성용의 시 <감사>에 대한 평론에서 시인 송경동이 쓴 표현마따나 “비정규직이라는 맨홀” “실업이라는 맨홀”, 심지어는 “죽음이라는 맨홀”이 컴컴한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시대, 시인들의 시선이 가닿아야 할 현장은 어디이겠는가. /한겨레 최재봉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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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위기에 처했다'는 것은 식상할 정도로 많이 회자된 말이자 부정할 수 없이 뚜렷해진 현상이다. 그중에서도 시의 몰락은 '시의 시대'로 불린 1980년대의 영광이 무색할 정도다. 서정시인들의 시는 물론 노동자들의 시들 역시 화제를 모으곤 했던 시대에서 이제는 시를 쓰는 사람만 시를 읽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이런 무관심 속에서도 꾸준히 시를 쓰고 있는 노동현장의 시인들이 있다. 백무산, 김해화, 송경동, 황규관, 김해자 시인 등이 그들이다. 정확히 말하면 이들은 시를 '쓰는' 게 아니다. 시속의 삶을 살고 있다. 현실에 기초해 있기에 이들 노동시인들의 시는 무른 살과 달리 X레이를 되쏘아 하얗게 필름에 찍히는 단단한 뼈처럼 격하고, 다부지다.
이념의 몰락을 목도해야 했던 1990년대를 지나 열린 21세기는 뭔가 대단한 세기가 될 듯이 시작됐다. 이념 대신 풍요로운 문화와 교양의 세기가 열릴 것처럼. 하지만 십여년 살아본 21세기는 풍요롭기는 커녕 보통사람들 특히 노동자들에게 가장 잔인하고 혹독한 시기다.
그러나 이미 정신은 양처럼 순해지고 애완견처럼 비루해져서 보통사람들을 대변해서 누구도 분노를 함부로 내지르지 않는다. 하지만 물러설 곳이 없기에 노동시인들은 길들여지지 않는다. 길들여지지 않는 이들의 목소리는 힘있다.
백무산 아홉번째 시집 '폐허를 인양하다'(창비)
"나는 그 신화를 읽으면서 인류가 왜 그 전통을 넓게 이어가지 못했는지 오년마다 새 대통령을 뽑기 전에 대통령의 목을 따는 의식을 치르는 훌륭한 제도가 왜 정착을 못했는지 궁금했다"('피의 대칭성' 일부)
"이 나라는 명령이 있어야 움직인다는 걸 기억하라/열정도 진정성도 없는 비열한 정부, 입신출세와/대박 챙길 일밖에 아무 관심도 없는 국가,/ 선장은 단순잡부 계약직, 장관은 단순노무 비정규직/ 그들이 내릴줄 아는 명령은 단 한가지뿐/가만있으라, 명령에 따르라"('세월호 최후의 선장' 일부)
외박 -최영숙
그대 오래 집을 비워 본적이 있으신가
멀리서 바라보는 내집의 불빛은
아슬아슬 허공에 매달려 흔들리고
나를 기다리는 식솔의 얕은 잠이
처마밑 모퉁이까지 나와 서성일때
너무 멀리 나갔다 돌아왔는지
차려 놓은 식탁 한덩이 밥이 뜨겁고
식구들조차 먼나라 백성같고
오래 비워둔 방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대,
무너질듯 내리 잠들지 않겠는가
그잠이 나를 깨워 다시 시작하기 않겠는가
비망기(備忘記) 1
- 마을버스를 기다리며
누가 남겨놓았을까
정거장 옆 낡은 공중전화에는
통화는 할 수 있으나 반환되지 않는 돈
60원이 있다
어디로 가야 하나, 나는
어디로도 반환되지 않을 것이다
이 봄
긴 병 끝에 겨울은 가고
들판을 밀고 가는 황사바람을 따라
부음은 왔다 어느 하루
민들레 노란 꽃이
상장처럼 피던 날 너는
어지러이 마지막 숨을 돌리고
나는 남아 이렇게 안 오는 버스를 기다리며
떠도는 홀씨 환한 손바닥으로
받아보려는 것이다
저 우연한 단돈 60원이
생의 비밀이라면
이미 써버린 지난 세월 속에서
무엇과 소통하고 무엇이 남아
앞으로 남은 시간을 견디게 할 것인가
산다는 것이 통화는 할 수 있으나
반환되지 않는다는 것을
반환되지 않는 것조차 남기고 간다는 것을
너는 알았을 것이다
나만 몰랐을 것이다 호주머니 속의 두 손처럼
세월이 가고 다시 이 자리에 섰을 때
무엇이 달라져 있을 것인가
나 또한 바람 속에 흩어져 있을 것이고
흩어진 자리에 민들레꽃 한두 송이
너를 기억할 것이다 안녕, 사랑아
감자싹
검은 비닐봉지에 싸여
찬방 속에 박혀 있던
세 개의 감자에 싹이 났다
먹으면 식중독을 일으킨다는 감자싹의
성분은 솔라닌이다 물에 녹지 않아
호흡중추나 운동중추를 마비시킨다고 사전에는
씌어 있다 햇빛도 양분도 없는 곳에서
감자는 어떻게 싹을 틔울 마음이 들었을까
슬픔도 때로는 힘이 된다,
침묵도 어느 땐 필요한 법이다, 그런 것이었을까
비죽이 솟은 노란 싹이 꼭 뿔 같다
제 몸에 뿌리를 박고라도 번식하고 싶은 발아 그
슬픈 정수리
무엇을 찌를 마음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보는
내 마음이 나쁘다 이를테면 찬물에 온통 머리를 처
박아도
빠지지 않는 사랑 같은 것 추억 같은 것
다 잊어도 나만은 안 잊는다 그런,
잊혀지고 낡아진 꿈을 밀어올리느라 품게 된
독 같은 것 질겨진 혓바닥 같은 것
그 다음에 오는 눈물이라는 것……
감자싹을 도려내는 손길이 아리다
깜깜중에도 눈뜨고 싶은 덩굴 속마음, 내가 너를
버리다니
사랑 평화 그리움 무엇보다 손 뻗어 잡아보고 싶
은 푸른 하늘
주섬주섬 싹눈을 주워 흙에 옮긴다 잘 자라 다시
만나자
바람든 무
몸을 빠져나간 바람은 어디로 갔을까 얇은 흰뼈에 공명하는 소리 우 우 바람이 든다 귓바퀴가 돈다 뼈에 바람이 지나가 속이 텅빈 무의 생은 얼마나 가벼운 것인가 바람이 지날 적마다 바람을 껴안아 바람이 없으니 이제 무는 아무 것도 아닌 무가 되었다 생을 완성하였다 도마 위에 무 한토막 형광등 불빛아래 고요하구나
용미리 어머니 무덤 이제는 육탈해 거기 아니 계시겠지
어느 개의 죽음
잘못 보았을 것이다 차창 밖으로 얼핏 스친 그것은 내 마음의 밑그림이 아니다 월요일부터 자욱한 안개 때문에 흩어져가는 은행잎 때문에 그러나...... 아무도 거두지 않는다 차고 딱딱한 대로변에 잠실 거리에 무슨 글자를 새기려다 만 것처럼 ㄷ자로 쓰러진 짐승 한 마리 한때 빛났을 다갈색의 부드러운 가슴털과 지금이라도 손을 대면 살아날 듯한 까만 콧등의 숨결 들숨과 날숨 사이로 실날 같은 영혼은 빠져나가는 중일까 많은 추억이 감겨진 망막 위로 흐르고 부르고 싶은 이름의 힘으로 그는 마지막 온기름 모으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음은 승객을 비집고 앞으로 나아가지만 차의 반대편으로 생각은 달려거지만 후두둑, 울대를 분지르는 낙엽 차장을 비껴 간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지닌 것이라고 영혼밖에 없는 거리의 사랑이여, 그날의 내 뜨거운 사랑이여 미안하다 나는 잘못 살았다 <골목 하나를 사이로>
바구니 속의 계란
나는 아름다운 장기수 탈출을 꿈꾸지 결혼해 일년 반, 임신 육개월의 배를 끌어안고서 주위를 둘러싼 소리 없는 장막 저 찬란한 가을햇살을 찢고 달아나는 탈출을 꿈꾸지
꿈꾸는 성 꿈꾸는 태아 문지방에 기대앉아 대문 밖을 보노라면 나가자고, 자꾸만 머얼리 저어가자고 뱃속의 태아가 툭툭 발을 차네 소싯적 내 젊은 어머니, 가을 마당 햇빛 속에 물끄러미 서 계시네
나는 치밀한 탈옥수 냉정을 가장하네 뒷덜미를 끄는 햇살, 파도를 밀고 나가면 어디가 될까 갈대방석 위에 양팔 벌리고 누워 두웅-둥 나 누더기 되어 난바다로 떠내려가네 파란 하늘 파아란 구름 힘껏 들이마시며 뱃속의 아이에게 들릴 만큼 놀랄 만큼 소리질러야지 “계란 사시오, 계란 사시오오-”
깨지는 건 순간이야 앞뒤 구멍 내서 날계란 후루룩 마실 때의 비릿한 뒷맛 손에서 미끄러지면 끝장인 껍질 삶의 껍질을 끝까지 벗겨본 적 있던가 바구니 속의 계란 삼십개 고이 들고 온 이것이 인생의 황금기였나 미끈, 바닥으로 떨어뜨리면 한꺼번에 계란프라이 해먹어도 좋을 잘 달구어진 가을햇살, 햇살
옷 벗는 여인
오래전 일이다 그날 온몸으로 악쓰는 소리 지나간 후 한 여인이 옷을 벗기 시작했다 한 겹 두 겹 발목까지 오는 긴 치마가 길바닥으로 흘러내렸을 때 까만 브래지어와 팬티 한 장 먹잇감을 포획한 거미처럼 서서히 죄어드는 시선 속에서 여인은 스타킹을 벗어내렸다 숨죽인 저 알몸의 저항 내 일찍이 부끄러워했던 벼랑 끝 말없는 절규, 그렇구나 저게 내 몸인걸, 어느날 목욕탕 뿌연 거울 앞에서 깊고 검은 음부와 물기 없는 유방과 아이를 낳은 칼자국이 선명한 주름진 뱃살의 중년여인이 남자도 여자도 아닌 아줌마가 저렇게 서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거리에 알몸으로 선 내게 돌을 던져라 기꺼이 그 돌을 맞으리니 모든 여자의 이름은 쓸쓸하고 가없이 슬픈 몸이라서 천지간에 바람 어지러울 때면 마구 소리치고 싶다 옷 벗고 싶다 하니 그것이 욕되다면 돌로 쳐라, 네 상처 위에 내 간을 포개놓으마 최영숙 유고시집 <모든 여자의 이름은>
무릎들에게 바치다 문성해
슬하라는 말 참 애틋하지요
몸의 상체나 얼굴이 생략된
다소 원시림 같은 이 말은
종이 종을 낳듯 하늘에서 뚝 떨어진 말 같아요
그 곳을 거쳐 오지 않은 이 땅의 뭇 것들이 어디 있겠냐고
종이 종을 생각하는 새벽이에요
남들 두 무릎 쭉 펴고 자는 시각에
먹이를 구하러 나온 늙은 개처럼
슬금슬금 무릎으로 기어 나온 저이들
계절이 바뀌는 공원에서
쪼그린 무릎걸음으로
붉은 흙을 조금씩 조금씩 낳으며 걸어가고 있어요
일개미 무릎 같은 그들이 한번 지나가면
마술처럼
페추니아나 칸나같은 서양의 꽃들이 생겨나고
도라지과나 미나리아재비과 같은 토종의 꽃들이 생겨나니
쏴아 쏴아 용소같은 오줌이 철철 쏟아져 나오듯
아름드리 나무들이 기어 나오고
금수산 칡넝쿨이 뭉게뭉게 새어 나오는
사철 무른 산과 들판을 낳는
저 무릎과 무릎의 주인들에게
일당 삼 만원은 아무래도 너무 야박한 게 아닌가요
<시와창작> 2008, 봄호
오빠라는 이름의 오바 김민정
서울역 계단에서 다다다다 굴렀던 날 일으켜준다더니 그 손으로 자빠뜨리는 오빠를 만났다. 안 그러면 뼈가 상한단다. 이 오빠만 믿어. 코맹맹이 소리로 지나가는 세 번째 앰뷸런스, 해가 지기전에 집에 가야 하는데 오빠, 자꾸 부르니까 코 막히는 오빠, 오빠는 붕대 대신 두루마리 휴지로 깁스를 해준다고 풀럭거리는데 비가 와 퉁퉁? 불은 휴지들이 고름처럼 내 몸에서 솟아나잖아요. 안 그러면 뼈가 상했을 거야, 이 오빠만 믿어. 코맹맹이 소리로 지나가는 다섯 번째 앰블런스, 달이 뜨기 전에 집에 가야 하는데 오빠, 자꾸 부르니까 코막히는 오빠, 오빠는 식염수 대신 정액으로 소독해준다고 싸대고 앉았는데 빨아들이지 말아요 그날의 둘째 날이라 창자가 내 피로 흥건하잖아요 안 그러면 뼈가 상해버렸을거야, 이 오빠만 믿어. 코맹맹이 소리로 지나가는 일곱 번째 앰블런스, 수만 별이 떴다 지기 전에 집에 가야 하는데 오빠, 자꾸 부르니까 코 막히는 오빠, 오빠는 목발 대신 제 허벅다리로 내 다리가 되어 준다고 도끼를 들고 설쳐대는데 믿는 도끼에 발등이라더니 아이쿠 무거워라, 지게처럼 내 등뼈가 휘고 포대기 같은 내 자궁이 터지려 하잖아요. 안 그러면 뼈마저 상해버리고 없을 걸, 이 오빠만…… 에그 철딱서니야 믿긴 뭘 자꾸 믿으라는 거야. 아무도 찍어먹지 않아 배달시킨 그대로의 춘장처럼 시꺼먼 살점의 오빠가 왕따 당해서는 안 돼 절뚝거리며 사막 너머 아프리카로 향해 가는 길 위의 나는 벌써부터 극성스런 엄마라는 무한대.
2006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시
오래된 냉장고 저 여자 김영희
이십년 함께 산 저 여자 이혼하고 싶다 만나기만 하면 가슴 열어보고 싶던 그녀
언제부터인지 누르팅팅 추레하게 보이는 여자 찬바람 서릿발로 돌던 냉정함
어디로 가고 맘 내키는 대로 얼었다 녹았다 변덕만 늘어가는 여자 그 큰 덩치
좁은 주방 차지하고 앉아 목소리만 커지는 건망증 까지 심한 여자 배추김치 총각김치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던 식탐 툭하면 신트림 게워내는 여자 위하수증 만성위염
골다공증 요실금 들여다보면 어느 한 곳 멀쩡한 곳 없는 저 여자 살다보면
고운 정 미운 정 사랑 없어도 산다고 쌓인 정은커녕 정나미 떨어져 가는 여자 이십년
함께 살았으면 많이 참았지
요즘 내 심사 눈치 챘는지 날마다 질질 우는 모래된 냉장고 저 여자
시집 <젖무덤은 가슴에 없다>
삼십세 최승자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시큰거리는 치통 같은 흰 손수건을 내저으며
놀라 부릅뜬 흰자위로 애원하며.
내 꿈은 말이야, 위장에서 암 세포가 싹트고
장가가는 거야, 간장에서 독이 반짝 눈뜬다.
두 눈구멍에 죽음의 붉은 신호등이 켜지고
피는 젤리 손톱은 톱밥 머리칼은 철사
끝없는 광물질의 안개를 뚫고
몸뚱어리 없는 그림자가 나아가고
이제 새로 꿀 꿈이 없는 새들이
추억의 골고다로 날아가 뼈를 묻고
흰 손수건이 떨어뜨려지고
부릅뜬 흰자위가 감긴다.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기쁘다우리 철판깔았네
마흔 최승자
서른이 될 때는 높은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지.
이 다음 발걸음부터는 가파른 내리막길을
끝도 없이 추락하듯 내려가는 거라고.
그러나 사십대는 너무도 드넓은 궁륭 같은 평야로구나.
한없이 넓어, 가도가도
벽도 내리받이도 보이지 않는,
그러나 곳곳에 투명한 유리벽이 있어,
재수 없으면 쿵쿵 머리방아를 찧는 곳.
그래도 나는 단 한 가지 믿는 것이 있어서
이 마흔에 날마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다.
자화상
나는 아무의 제자도 아니며
누구의 친구도 못된다.
잡초나 늪 속에서 나쁜 꿈을 꾸는
어둠의 자손, 암시에 걸린 육신.
어머니 나는 어둠이에요.
그 옛날 아담과 이브가
풀섶에서 일어난 어느 아침부터
긴 몸뚱어리의 슬픔이예요 .
밝은 거리에서 아이들은
새처럼 지저귀며
꽃처럼 피어나며
햇빛 속에 저 눈부신 天性의 사람들
저이들이 마시는 순순한 술은
갈라진 이 혀 끝에는 맞지 않는구나.
잡초나 늪 속에 온 몸을 사려감고
내 슬픔의 독이 전신에 발효하길 기다릴 뿐
뱃속의 아이가 어머니의 사랑을 구하듯
하늘 향해 몰래몰래 울면서
나는 태양에의 사악한 꿈을 꾸고 있다.
십년 후 이수명
아침이 와도 두통은 가라앉지 않았다.
머리맡에서 희미하게 알전구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빛을 태우는 필라멘트는 얼마나 짧은 것인지.
거기 내장된 과거의 구불구불한 정보는 이제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것인지.
아침에 맞는 이 불그스름한 동상은 또 얼마나 어두운
빛깔인지.
과거가 되지 못하는 과거의 밖으로 흘러나오기 위해
밤새워 눈이 내리듯
내 고통의 파지가 필요했는가.
들판 가득 하얗게 쌓인 파지 위를
이 아침의 흙발들과 영하 사십도의 추위가 내려앉았는가
밧줄 이수명
어느 날 건물 아래로 밧줄이 드리워지고 사람들이 하나씩 건물을
빠져나갔다. 밧줄은 아주 오래 매달려 있었다. 가느다란 외줄이 부르
르 떨고 있는 것을 멀리서도 볼 수 있었다. 그 후 그 건물이 완전히
철거되었을 때 밧줄은 사라졌다. 더 이상 밧줄을 타고 내려갔던 사람
들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누군가 그 밧줄에 매달려 있는 것을 날마다 보았다. 움
직이지도 않고 딱정벌레처럼 등을 웅크린 채 그는 허공에서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이 건물 저 건물에 그 밧줄을 번갈아 걸었다.
밧줄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짧아졌다.
어느 날 새로 불켜진 창에서 한 사람이 떨어졌다
제2회 박인환문학상 수상작
간결한 배치 신해욱
그에게는 언제나 내가 있었다.
약간 기운 담벼락이 길게 이어져 있었고
그의 말은 자꾸 두 쪽으로 갈라졌다.
재빨리 기록하고 싶었지만
나에게는 하필 두 개의 귀가 있었고
똑같은 말이란 있을 수 없었다.
마른 묘목이 규칙적으로 서 있었다.
해가 절반쯤 기울면
담벼락과 묘목 사이를 그는 서성이며
낮고 또렷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나에게도 입술은 있었지만
귓속에 남은 소리들이 사라질 수는 없었다.
무언가 비슷했지만 자꾸 부딪쳤다.
규칙적인 그림자가 담벼락에 비스듬히 드리웠고
그림자와 담벼락의 사이를
그는 유유하게 나를 두고 거닐었다.
그렇다고 대칭은 아니었다.
입속에는 침이 가득 고였다.
"2004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시"
베껴먹다 마경덕
어머니는 할머니를 베껴 먹었고 나는 어머니를 베껴 먹고 내 딸은 나를 베껴 먹는다. 태초에 아담도 하나님을 베껴 먹었다. 아담 갈비뼈에는 하와가 있고 내가 있었다. 지구에 사는 모든 여자들은 하와의 사본이다. 금성 목성 토성 화성… 모두 지구의 유사품이다,
바람개비는 풍차를 국자는 북두칠성을, 너훈아는 나훈아를 슈퍼는 돈 한푼 내지 않고 구멍가게를 베껴먹었다. 귤나무는 탱자나무를 오렌지는 자몽을 베껴 먹고 별은 불가사리를 탁본했지만 한번도 시비에 걸린 적이 없다. 하이힐은 돼지발의 본을 떠서 완성되었다. 복숭아는 개복숭아를 표절하고 드디어 팔자를 폈다. 아직도 개복숭아인 것들은 눈치가 없거나 지능이 떨어진 것들이다.
나는 수년 간 산과 바다를 베껴 먹었다. 그러므로 내 시는 위작이거나 모작이다. 나는 오늘도 늙은 어머니와 맛있는 당신을 즐겁게 베껴먹는다.
덕장 김초영
옛날,
그러니까 내가 아주 어릴 적
우리 집에는 비린내가 둥둥 떠다녔다.
옷장을 열면 식구들의 겨울 코트 너머에서
비린내가 스멀스멸 올라오곤 했다.
밤이 되면 옷장 안에 푸른 심해가 펼쳐졌고
잠자는 내 발등 위로 바닷물이 뚝뚝 떨어졌다.
햇빛이 좋은 날이면 엄마는 온 마당에
생선을 깔아 놓고 말리기 시작했다.
파리 떼들 극성을 부리면 엄마는 하루종일
쭈그리고 앉아 파리들을 잡기도 햇다.
누렇게 변한 신문지 위에 죽은 파리들이
쌓여 가면서 생선들은 축축한 목숨을 허공에
증발시키고 바삭하게 마르고 있었다.
겨울이 되자 머리 위로 잔뜩 생선을 올리고
시장으로 나가던 엄마
생선의 무게에 엄마의 목이 몸 속으로
조금씩 파고 들었다.
묵직한 생선의 살점들이 벌긋벌긋한 엄마의
몸을 난쟁이로 만들고 있었고
마당 안에는 질척대는 주검들이 미로처럼 펼쳐졌다.
끝내,
바다는 사라졌고 떼지어 헤엄치던
생선들은 길을 잃고 파닥댔다.
공자처럼 드러누워 생을 말리던
생선들은 짜디짠 소금물이 그리워
3밀리미터의 두께로 압축된 몸을 이끌고
저마다의 우주로 하향하고 있었다.
엄마는 더 이상 난쟁이가 되지 않았고
나는 그렇게 그해의 파삭한 여름을 통과하고 있었다.
가끔 우리 집 마당에 해끔하게 차려입은 생선들이
다시금 찾아와 바싹 마른 엄마를
먼 바다로 조용히 데려가 적셔주고는 했다.
그러니까, 아주 옛날에.
스트랜딩 증후군 김초영
파일럿 고래들이피아노의 검은 건반처럼 일렬로 누워 있다.그들은 바다가 아닌 육지에서 자살을 시도하려고 했다.
중앙병원 307호실,누워있는 엄마의 팔뚝에 옅은 햇빛이 스며든다.오늘도 멍이 하나 더 늘었다.의사는 건조한 표정으로 엄마의 굳어가는관절들을 만져보곤 했다.스스로 돌아오려 하지 않는 겁니다.일종의 무의식 상태의 자살이죠.의사는 녹음테이프를 재생하듯 또박또박 말한다.녹색 페인트칠이 벗겨진 산소통이조용한 병실의 오후를 조금씩 갉아 먹고 있다.
결국 대부분의 고래떼는 죽고 말았다, 고 보도 되었다.중장비를 동원해 바다로 돌려보내는 작업을 감행했지만 전부 살려 내지는 못했단다.파일럿 고래들은 하늘로 날려던 것이었을까.자살하기 위해 육지까지 올라온 고래들처럼엄마가 가는 물줄기를 내뿜는다.밀린 병원비가 불어나듯투명한 오줌비닐이 노랗게 부풀어 올랐다.
신문에 죽어있는 고래들의 사진이 실렸다.죽은 고래들의 미약한 주파수가 좁은 병실 안을 맴돌다 사라진다.엄마도 저 주파수를 쫓아 육지로 가고 있을지 몰라.흑백의 고래 사진을 오려 엄마의 머리맡에 붙여두었다.고래의 순한 눈이 감기고 있다.눈알이 오랫동안 따끔거렸다.
-2007년 대구매일 신춘문예 시 당선작
달성상회 김초영
어두운 밤하늘 위로 커다란 달 하나 뜬다.
문 닫은 지 오래
간간이 바람에 부딪치는 문짝에서
가래 낀 쇳소리가 흘러나와 골목길을 들쑤신다.
오늘 밤,
달 한 덩이 둥실 떠 있고
달성상회 앞에는 눅눅한 향 타들어 가는 냄새가
밤새 기찻길을 덮어주고 있다.
안쪽으로는 앙상한 가시 같은 철근과 녹슨 고철들이
밤하늘에 무더기로 박혀 있는 별자리처럼
정성을 다해 반짝이고 있었다.
등이 굽은 달성상회 할머니는
한 덩이의 달이 되기 위해
온몸을 그렇게 둥글게 모으고 떠다녔다.
그럴 때면 사람들은 모두 지나던 길을 멈추고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불게 핀 달 한 덩이
가슴 속으로 꾹꾸 눌러 받아 두곤 햇다.
요란한 기차의 기적 소리 뒤로
덜컹이는 바퀴를 보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니
곱사등 둥근 할머니가 두둥실, 달성상회가 지고 있다.
길었던 밤이 지나고
비로소,
달의 몰락이었다.
자반 고등어 김초영
고등어 한 마리를 사왔다.
얼음이 잘게 부서진 진열대 위에서
고등어는 비릿한 바다 냄새를 풍기고 있다.
미처 바꿔 놓지 못해 녹기 시작한 얼음들이
가는 물줄기를 만들어 바닥으로 굴러떨어진다.
물줄기가 계속해서 더해지자
커다란 마트 바닥에 작은 바다가 생긴다.
등뼈를 잃고 누워 있던 고등어 떼들,
푸른 등을 곧추세우고 바다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만선을 기대하던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힘들게 돌아온 배는 잡아온 고등어로 가득했다.
여자들은 급히 고등어의 배를 가르고
소금을 뿌리며 아버지에 대해 함구했다.
물 좋은 고등어를 잡았다며 회를 쳐
소주잔 부딪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칼을 대자 터지듯이 갈라지는 고등어의 붉은 속살.
보름 뒤 떠내려온 아버지의 불어터진 얼굴이
싱싱한 고등어의 붉은 살을 닮아 있었다.
집에 돌아와 고등어를 굽는다.
프라이팬 안으로 떠다니는 비릿한 바다.
식용유로 코팅된 고등어가 하얗게 익어간다.
여기저기 물어뜯긴 아버지의 흐물거리던 얼굴이
지글대는 프라이팬 안으로 스며든다.
몇 차례씩 뒤집히며 익어가는 고등어를 보며
이빨 자국 같은 아버지의 흉터를 젓가락질하자
그물 속에 교차된 아버지와 고등어가 바삭하게 튀겨지고 있다.
잘 익은 고등어, 묵직한 프라이팬은 만선이었다.
<2007 젊은시>
안경을 벗은 당신, /이민하
참 아름답군요 딱 한 번 스쳤을 뿐인데 양파 같은 눈이 보기 좋군요 끝없이 즙을 짜는 세월의 물컹한 살점이 도려내기 좋군요 당신은 안경을 벗고 나는 창문을 벗어요 당신은 바지를 끄르고 나는 계단을 끌러요 당신은 가랑이를 벌리고 나는 활주로를 벌려요 당신은 혀를 내밀고 나는 비행기를 내밀어요 당신은 내 몸을 올라타고 나는 구름숲을 올라타요 구름숲에는 녹색 투명한 산들이 거꾸로 매달려 자라고 오렌지를 눈에 낀 태아들이 골짜기마다 우글거리고 오백 년 묵은 짐승들의 비명이 으스러져 보드라운 밀가루처럼 날려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천릿길을 온몸의 발굽으로 숨가쁘게 내달리는 안경을 벗은 당신, 나는 잘게 다져져 물푸레 잎사귀처럼 하늘거려요 구름숲보다 더 멀리 날아다녀요 끝없이 찢어져 날리는 나의 메마른 살점이 당신의 콧잔등을 핥아주기 좋군요 유리알보다 가벼운 나를 쓰고 어디 한번 웃어 봐요 안경을 벗은 당신, 양파 같은 눈이 보기 좋군요
시집 <환상수족> 열림원, 2005
손금 심인숙
대숲 흔들리는 밤이었다
갈까마귀들이 안개 속을 부딪치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하늘로 마악 떠오른 별 하나가 발밑으로 떨어져다
별을 움켜쥔 채 도망쳐 나왔다
손바닥에서 별이 울었다
별을 쥐고 사람들과 어울릴 수 없어
외딴방으로 숨어들었다
손바닥에 피가 돌자 별은 점점 환해졌다
손금을 따라 운명의 골짜기를 파고드는 별빛들
호랑가시나무가 달빛에 허리를 꺾었다
낮과 밤이 느릿느릿 흘러갔다
굽은 몸 위로 우주의 오르막이 산수화처럼 펼쳐졌다
어디선가 대꽃이 피고 있을 것이다.
외딴방의 문을 밀치고 나왔을 때
손바닥에는 상한 별 하나, 박혀 있었다
숭어
한밤, 봉숭아꽃 가득한 마당에서 숭어들이 튄다. 다닥다닥 붙어사는 셋방 여인들이 마당 수돗가에서 목욕을 한다. 청상과부 선아엄마, 집 나간 서방을 기다리는 애경엄마, 그냥 이모라 불리던 사투리 걸죽한 부안댁이다. 아침이면 식당이나 병원, 공사판으로 마른 꽃씨처럼 흩어졌다가 밤이 되면 물오른 입을 들고 돌아오던 여인들. 한바탕 얘기꽃을 피우며 한 겹씩 옷을 벗고 있다. 빨랫줄에 걸린 이불호청 사이로 달빛이 든다. 보초 세운 어둠이 슬쩍 돌아서 있다. 좁은 수돗가에서 미끈한 숭어들이 비늘을 떼고 있다. 찬물을 끼얹을 때마다 저절로 한숨 같은 비음이 흘러나온다. 지느러미처럼 간드러지는 웃음소리가 깔깔, 허공을 질러 담을 넘어간다. 숭어들이 별빛을 따라 밤하늘을 헤엄치고 있다. 몰래 숨어든 달의 이마가 붉게 물들었다.
-2006, 전북중앙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붉은 달 /고은강
달이 얼굴을 뭉개며 미숙아처럼 떠오른다 저 일그러지 달 하나 먹고 고구려처럼 광활해지는
여자는 욕망의 수녀인가 금욕의 창녀인가 한껏 게을러진 피가 눈부식 격정으로 회전하고
세상이 반대하여 첫 남자와 살을 섞지 못한 나는 더럽고 비루하다 아주 오래된 곳으로부터
내 영혼의 소란(騷亂)이었던 이 수치를 누가 좀 시원하게 부숴주렴
헛된 것 하나 걸어두고 얼굴이 지워지도록 치열하게 밤을 문댄다 자기 고독에 벌겋게 열광하다가
이쯤에서 등을 떠밀어 모퉁이 저쪽으로 너를 넘겨주겠지만 하지만 저 달, 여러해살이풀
바람이 허리께를 기관차처럼 그으며 지나가면 입속의 알싸한 능선, 터뜨리고 싶어
네 일그러진 뺨 위에 한 장의 손을 화르르 얹고서
월광 소나타-Adagio sostenuto
내 마음인데 내가 가질 수 없는 마음 위다 끊임없이 무늬를 놓아주는 게 물의 업이듯 나도 발무늬를 지우며 그 위를 걸어본다 천천히, 고통이 헐린 뒷면을 매혹적으로 풀어헤치며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열세 번째 은유를 끌어안고 자결한 묵음들이 수면 위로 올라와 하얗게 입을 벌리고 모든 불투명들은 제 그림자를 닦으며 저문다 불빛 하나 꺼뜨려 더 큰 어둠으로 환해지는 꿈속의 잠을 열고 파문도 없이 내가 스며든 것일까 아름답게 눈을 뜬 무명의 시신들이 나른하게 헤엄쳐 와 어느새 나를 노닐고 저승 냄새 살가워진다 마음 없음이 마음이라 덜그럭거리지도 않고 마냥 아름다운 이여, 부디 내게 비명 없는 키스를 오 열렬히
삼나무떼 /이영옥
한때 모든 길들은 흘러간다고 생각했다
삼나무떼들이 떠나려는 길의 양켠을 붙들고 있었다
뜬금없이 머리채 잡혀 있던 삼나무 사이로
바람의 일행들이 절뚝거리며 자나갔다
술 취한 아버지가 삼나무 옆구리에 자전거를 박았다
큰 언니가 가방을 꾸려 객지로 떠나던 날
내 안에서 우는 마른 바람 소리를 들었다
흔들고 있던 손바닥이 삼나무 잎처럼 버석거렸다
때를 지어 막아도 잡을 수 없는 게 있었다
그것은 모두 한때라고
나는 우두커니 서서 흘러가는 것들을 지켜보았다
삼나무들은 그림자를 이곳에서 저곳으로
키를 줄였다 늘이면서 제 외로움을 견디고 있었다
바람이 몹시 불던 날 소식없던 작은 언니 꿈을 구었다
삼나무는 밤새 한 뼘이나 키를 더 키웠다
세상의 바람이 다 불어간 다음에는
곤두세우고 있던 검은 머리채를
삼나무는 어디로 둘 건지 궁금했다
하루에 두 번 완행버스가 지나가면
변함없이 온몸을 일으켜 달려가는 것은 흙먼지뿐이었다
흘러간 것을은 망가져 돌아오거나 아예 오지 않았다
늘 떠나기만 하던 길들도 가끔 다리쉼을 했다
그때마다 삼나무떼들은
평생을 키워온 그늘을 말없이 내려주었다
언더그라운드/ 이기성
그리고 여긴 아득하다
우린 대화하지 않는다
밤의 거친 입술을 지나
뜨겁게 춤추다 깨어지는 유리 구두처럼
유쾌하게 깜빡이다
불빛같이 흩어지는 불안의 초침들처럼
차가운 공기의 벽돌을 발로 차면서
비어 있는 내부를 쭈욱 관통할 수도 있다
빗물이 톡톡 떨어질 때의
여긴 고요의 언더그라운드
어둠에 스며드는 비의 흰 얼굴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흔적 없이 속삭이는 혓바닥처럼
그들은 때때로 출몰하고
아름다운 유리창을 두들겨 부수고
물방울처럼 조용히 폭발하지만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한
낯선 구름의 이름은
당신의 어두운 주머니 속에서 터질듯 부풀어 오른다
두꺼운 공기의 벽을 텅텅 울리며
잠깐 멈추었던 자정의
엘리베이터가 다시 추락하기 시작할 때
장례식의 광대들처럼
우린 이미 영원한 하루를 관통하였다
아득한 터널의 입구에서
공기보다 빠르게 우린 흩어진다
구름의 맹렬한 입술처럼 뜨겁게 몰려와서
검은 폭탄처럼
때늦은 눈물처럼
내부순환도로 이기성
자, 이제
나를 밟고 멀리 가세요
슬픔의 바퀴여
착한 아이가 되어 비단벌레의 노래처럼
아름다운 혀처럼 나는 드러눕겠어요.
나는 눈보라의 딸,
새벽마다 뒤꿈치를 땅에 박고
둥글게 회오리치겠어요.
수정의 보랏빛 이마처럼
냉정히 빛나겠어요.
천천히 일그러지는 새하얀 얼굴
아까부터 바퀴는 헛돌고 있는데요
핸들을 바짝 끌어당기며
사내는 이를 악물고 있는데요
의심 없이 흩어지는 눈송이처럼
허공을 단단히 부여잡았는데요
이제 나는 희게 얼어붙은 입김,
식어가는 눈물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겠어요.
천천히 기억의 입술이 닫힐 때 슬쩍,
빠져나온 검은 바퀴
털컹거리며 나는하염없이 달려가겠어요.
2005, 제6회 박인환문학상 수상시집
마트로시카 나이테/ 이영주
모스크바로 간 그는 돌아오지 않고 있다. 침엽수림 사이에서 그는 머리칼을 자르고 공중으로 떠오르는 이마의 나이테를 세어보고 있었지. 숲으로 떠나간 그에게 나는 머리카락을 부친다. 네가 묻힌 폭설 속에 검은 무늬를 새기고 싶었어. 뾰족한 피뢰침 같은 이국의 글자들을 천천히 만지는 새벽, 흰 눈이 창문을 스쳐가는 도둑 고양이 꼬리처럼 빠르게 회전한다. 나는 여기 있으면서 죽은 사람이나 만나게 되는 거 같아. 횡단 열차 같은 건 타지 않았다고 그는 내게 엽서를 썼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빽빽한 이 숲에서 옷을 벗고 또 벗었다. 사랑을 해보고 싶었지만 죽은 애들은 감당하기 어려웠어. 밤마다 창백하게 식어가는 내 머리통을 너는 기억할 수 있을까. 나는 찢어진 지도를 접어 창밖으로 던진다. 그에게 온 엽서들이 사라진 이 골목의 나무들은 나이테를 잃엇다. 그러니 돌아오는 길을 잃은 그는 오랜 시간을, 모스크바에서 나무인형처럼 버려져 있었어. 그는 마지막 옷을 벗지 못하고 너와 구름 속에서 같이 잔 날, 네가 시험에 합격한 날, 연예인에서 연에인으로 사라진 날, 이라고 엽서에 쓴다. 너라는 사람 때문에 미칠것 같은 두려움, 이라고 쓴다. 혹독한 바람처럼
얼음 밑으로 흘러가는 얼굴들을 보고 싶지 않아서 그는 머리를 자른다. 차가운 몸을 빠져나간 영혼은 긴 머리칼을 몸에 두르고 숲을 떠도는 종족이라고 읽은 적이 잇어. 사랑은 해보고 싶었지만 삭발한 그는 숲에서 돌아오지 않고 있다. 나는 창문을 열고 공중에서 나이테처럼 자라나는 머리칼을 만진다.
[문학들] 2007
KTX / 강해림
나는 세상의 모든 일방통행을 사랑한다
좌익이냐 우익이냐
흔들리지 않고
시간의 화살표가 지시하지 않는
역방향에 몸을 실어 아주
오래 전 그래왔던 것처럼
커피를 마시며 책장을 넘기듯 통과해 갈 것이다
꿈의 속도가 날 실어 나르느라 멍멍하겠지만
내 꼬리뼈가 퇴화하던 고생대나 신생대 그 어디쯤,
내 아득함이 아득함을 불러
그리운 진원지로
공룡의 아가리 속 같은
터널을 지날 때마다
오지 않는 종말,
캄캄함의 서늘한 진동을 허파 가득 느낄 것이다
아기 공룡의 울음 같은
이명耳鳴을 들을 것이다
어느 환승역에선가
환幻이라는 이름의 그대가 합승해주리라
환상만이 내 엔진 오일이요
연료라 믿으면서
잘 있거라
내 생의 일방통행으로 날 밀어 넣었던 것들아
창밖의 딱 한 번 눈 마주치고 이별했던
들꽃들아
시간에 대한 나의 몇 가지 편집증/ 강해림
벽과 벽 사이에 시간의 집이 있다 시간은 아무도 없는 집에 홀로 남아 늘 혼자 논다 똑딱똑딱 외롭지 않다
결국 자기 꼬리를 물고 돌고 돌았을 뿐인데, 어느 날 문득 저 높은 유리 담벽을 넘어 달아나는 탈옥의 꿈을 꾸었는데,
시간의 집은 전망 좋은 집 바라보기에 좋은 처소에 있다
한 번도 내 품에 든 적 없는, 그러나 내가 고요에 들 때 내 몸에 장전된 너를 느낀다 눈도 코도 귀도 없는 부재의, 사랑스러운 너라는 괴물!
한밤중에 깨어나 혼자 듣는 네 숨소리 째깍째깍 금속성의 검은 수의를 짜는,
내 목을 죄고 두개골을 갉아먹으며 파고드는 째깍째깍 우리는 하나가 되어 사라진지 아주 오래
시간은 힘이 세다 썩지 않고 붕괴되지 않고 벌레의 밥이 되지 않는다 죽을 것 같이 쓰리고
아픈 상처도 거뜬히 들어올린다 내 망각의 늪 속엔 영원히 늙지 않고 죽지 않는 시간이라는 이름의 푸른 악어가 산다
만물 수리상 김씨네 가게는 숲이다 뻐꾸기 소리 사라진 숲 속의 그 많은 시계바늘이 가리키던
시간들은 다 어디로 갔나 동상이몽의 톱니바퀴들 근친상간적 소망으로 시간은 광합성 작용을 일으키고 재생산될 것이다
태양과 달의 아들, 대지가 너를 젖먹이고 바람이 길들여 키웠다 영원을 믿기에,
딸랑딸랑 유랑마차를 타고 한 번 집 나갔다 하면 찾아올 줄 모르는 바보
누가 그를 본 적 있나요?
<시와반시> 2007,봄호
도마에는 오선지가 없다/ 강해림
아가미를 떼어내고 비늘을 털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죽음을 완성하는 그는 명연주자다
뼈를 발라내고 살을 저미는
칼날이 지나갈 때
아직 막소금을 뿌리지 않은 신선한 주검의 신음을
연금술의 악보를 연주한다
도마는 사라진 나이테, 딱딱한 귀로
천길 땅속
수액이 찾아오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청음을 가졌다
스민다
핏빛 레퀴엠, 경쾌한 음이 토막난다
저 도마소리
검은 연미복 대신에
검정 바지에 검정 고무신, 그는 늘 같은 곡만 연주한다
난바다 헤엄쳐온
슬픈 어족들 내장이 빠져나간 뱃속처럼
움푹 패인, 도마에는 오선지가 없다
어느덧 어둠의 변주가 시작되고
도마소리 멈춘
생선가게엔 파리가 윙윙
도마 옆 쓰레기통 속엔
생선대가리가 수북
비릿한 주검의 口音이 흘러나온다
어둠이 천천히 막을 내리고 있다
門/ 강해림
모텔 아테네는 숲 속의 궁전 같다
나무들 수문장처럼 서 있는 그 곳은
스물 네 시간 불빛이 꺼지지 않는다
입구는 신성하다
신의 입김이 아니곤 누구든 통과의례 없이
저 안 스며들 수 없어
문을 열고 나오면 세상은 여전히 안일뿐인데
창들 근엄한 웃음으로
이쪽과 저쪽 경계를 그리며 홀로 두꺼워지지
내 안의 뫼비우스 띠 줄줄
풀어진 숲길
세상의 모든 러브 모텔로 가는 길들이 사라지고
무인출입구의 보이지 않는 눈들이 아흔 아홉 개 욕망의
꼬리를 감춘 계단들이 사라지고
해와 달이 깨진 시간의 유리조각 위에서
하룻밤 통정을 위해
검은 커튼을 드리우는 곳
오늘 밤 여행에서 막 돌아오는가
오래 지치고 피곤한 영혼
음란한 냄새 맡는 순간 열리는
저 문은 더 이상 문이 아니다
안개포옹 /이해리
외로움에 사무치면
안개도 사람인가하여 안아보는 밤이 있습니다
안아도 안아도 실감이 없는 사람,
뼈도 살도 없이
푸르스름 분위기만 있는 그를 품는 밤엔
내가슴에 한 겹 더 허무의 지층 쌓이지만
그가 보여주는 수묵담채빛 선경은
길을 잃어도 좋은 피안입니다
멀리 無憂寺 연등물결
수풀의 눈물처럼 가물거리고
사십 리 복사꽃밭은
분홍꽃잎만 공중에 둥둥 떠내려 보낼 때
어디선가 귀촉도귀촉도 두견이 울어
그도 나처럼, 살고싶은 누구 입니까
마음은 자욱하나
드러낼 수 없는 실체를 가진 누구입니까
그의 가슴을 만지면 순정 순결 사랑 고독,
잠시 사랑했다 버린 이름 생각나고
천하게 버림 받은 이름 끌고
골짜기 배회 하는 고귀한 누군가가 느껴 집니다
어쩌면 너무 귀해서 쉽게 드러낼 수 없는 슬픔의 입자들과
하룻밤 뺨 대고 싶어 길을 잃는 밤이 있습니다
길을 잃고서야 무릉도원을 만나는 그런 밤이 있습니다
계간 <시와반시> 2007,가을호
왜가리/천향미
방게들 소풍 떠난 하구언 개펄, 뾰루지가 송송한 소녀 가장들철새와 몸 섞는다
나는 단체사진 뒷줄 키 낮은 언니처럼 뒤꿈치를 고아올리고 캔버스 뒤에 섰다
할머니를 졸라 문방구 전자게임기 쪼고 있을 동생 닮은 도요,한복 곱게 차려입고 먼 길 떠난 엄마의 초상화 닮은 큰오리, 잽싸게 생선토막 물고 달아나는 검정 고양이 닮은 개리
소녀는 차곡차곡 부엌설거지 하듯 화구에 철새를 담는다
때마침 대각선으로 비껴나는 청둥오리의 물방구질에 노을이 엎질러져 불타는 개펄
모가지를 비틀고 한쪽만 바라보고 선 왜가리, 는 왜 그리지 않느냐고 물새처럼 조용히 물었는데
소녀는 돌연 부리보다 예리한 붓끝으로 왜가리 머리에 피가 나도록 쪼아댄다
계절이 바뀌어도 엄마는 오지 않는다고 했지 않느냐, 허구한 날 한쪽다리 가슴에 묻고 갈대울음으로 섰느냐’
캔버스위로 솟구친 소녀의 붓끝이 놀빛보다 붉다
부끄러운 오독
천전리각석<♂♀§◇∵???≪≫∞??¤?‡> 앞에서
암반에 새겨진 선사시대의 기호를
친구들에게 떵떵거리며 읽어준 적 있었다
대곡리 공순이를 두고 내곡리 공돌이와 본동 공탁이가
삼각관계였는데
종내 양가의 싸움이 패거리싸움으로 발전하고
와중에 쫒고 쫒기는 혼란이
맑은 개울을 공룡지난 흔적처럼 핏빛으로 찍어 갔는데
무려 그 기간이 장장 했다
각석의 파손 부분은 해독이 어렵고
특히 <작은 일에 목숨 걸지 말라>는 족장의 당부가
간곡하게 새겨져 있음을 설명해준 적 있었다
그로부터 십년 후 나는 천전리각석 앞에 다시 서서
과거의 오독 앞에서 굴신중이다
대곡리 공순이와 내곡리 공돌이의 뜨거운 사랑이
활화산으로 솟구쳤으며
시인이 시를 짓고 노래할 때 굽은
달빛이 출렁출렁 강물을 견인함으로써 늘 화려했다고
씌어져 있는 것을 본 것이다
특히 <사랑은 바위에도 홈을 판다>는 성기가
큰 부족장의 언명이고 보면, 파손부분이 복구되는 날
나는 다시 새로운 해석을 하게 될 것을
아무도 모르게 속으로 읊조려 보았다
2007 계간「서시」가을호 신인상에서
만리포연가 박미라
멀어서 아름다운 것들이 있다
마른 모래 바람이 가슴을 쓸고 가는 날이면
만리포 바다를 보러 오시라
오래된 슬픔처럼 속절없는 해무 속에서
지워진 수평선을 가늠하는 붉은 등대와
닿을 수 없어서 더욱 간절하다고
아득히 잦아드는 섬이 있다
누군들 혼자서 불러 보는 이름이 없으랴
파도 소리 유난히 흑흑 대는 밤이면
그대 저린 가슴을 나도 앓는다
바다는 다시 가슴을 열고
고깃배 몇 척 먼 바다를 향한다
돌아오기 위하여 떠나는 이들의 눈부신 배후에서
고단한 날들을 적었다 지우며 반짝이는 물비늘
노을 한 자락을 당겨서 상처를 꽃으로 만드는 일은
아무렴, 우리들 삶의 몫이겠지
낡은 목선 한 척으로도
내일을 꿈꾸는 만리포 사람들
그 검센 팔뚝으로 붉은 해를 건진다
천년 전에도 바다는 쪽빛이었다
봄날, 버스를 타다 김승해
막 읍을 지나 온 버스에
어린 것 들쳐업은 할매, 탄다
너 댓은 업어 키웠을 포대기 풀어
무르팍에 어린 것 돌려 앉힌다
옆자리 더 쪼글한 할매가
덩달아 깍궁 어르면
저 솜털 순한 애벌레의 웃음 터진다
버스는 순간 볕 잘드는 배추 밭이 되고
ㅉㅉ꿍 ㅉㅉ꿍 손장단 맞추는 할매들
보드랍게 살 오른 배추벌레 되어
늙은 몸들이
새 몸 받는
이른 봄날의 버스 안
또 누가 탄다
눈이 부신지 찌푸려도 잔주름 하나 없다
안부 김승해
몇 달, 안 찾으면 쓸 때 없는 거라고
정리 할 건 좀 하고 살라던 사람이
벌써 몇 달째 연락이 없다
뭐든 선뜻 내다버리지 못하는 나를
그는 한참을 찾지 않는다
이미 나는 버려진 사람이거나,
쓸모없는 사람인 모양인데,
그의 전화기에 남았을 발신번호의 조바심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다시 처박아 둔다
잊혀진 것의 몰골을 본다
계간 <시와인식> 2007, 여름호
소리 절벽 김승해
흐리고 흐린 물이 돌아
맺힌 물
등 아프게 게워 낸 고인 울음에
검은 환약 쓴맛으로 남은 절벽
돌연 살 맞은 짐승처럼
저 절벽 쥐어뜯으며 소리소리 지르면
바랜 꽃창살문 흔들며
내소사 목어가 길게 운다
부처님 없는 수마단에
빈 방석만 삼천 개 놓인
채석강
저 절벽 기어 내려오던 울음은
목어 하나 먼 바다로 돌려보낸다
가끔은
저 바다 옆구리에서
보리수 열매 서말이나 굴러나와
그 소리 주우러 뛰어드는
달빛이 있다던가
비디오 아트 신지혜
ㅁㅁㅁㅁㅁ
ㅁㅁㅁㅁㅁ
ㅁㅁㅁ
대형 아파트 단지똑같은 규격의 스크린 속 똑같은 거실의 TV가 수백편 동시방영된다 위태롭게 쌓인 칸칸 비디오 화면 보면서 한 얼굴 위에 또 다른 얼굴 포개고 웃는 얼굴 보면서 한 눈물이 다른 눈물 전염시키는 걸 보면서 한 말이 다른 말에 침투하여 무섭게 포자증식되는 걸 보면서 나는 불온한 일탈을 꿈꾼다 규격품 영혼들 하단 부분, 때때로 名士들의 팝업광고가 번뜩인다. 오래 전부터 이미 생사가 각본된 길고도 지루한 드라마 속, 그 캄캄한 벽속 전선을 송두리째 뜯어내고 내 생의 원본이 내장된 마이크로칩마저 남김없이 소거한 채 훨훨 부나비로 날아오르고 싶은 저녁, 내가 아파트 앞에 홀로 서성거린다 내가 빠져나온 화면하나 텅 비어 있지만 밤새도록 내 부재가 절찬리 상영되고 있다[문학과 창작]2007년, 가을호.
색의 경계를 넘다 신지혜
맨해튼 타임스퀘어 앞에서
내 발걸음 멈춘다
다인종 색색 얼굴들이 내곁을 지나간다
한때 내 억겁 전생이였을 사람들
이제 나를 황인종이라 부르지 마라
나는 한때 흑인이였고 백인이였으므로
色과 色의 경계도 없이 국적도 없이
무한 시간의 구멍을 통해
자유자재 생을 왕래하였으므로
이제 나를 한 이름의 감옥에만 가두지 마라
나는 한때 쿠푸였고 투탕카멘이였고
셀리템플이였고 許黃玉이였다
이제 나를 지구인이라 일컫지 마라
나는 수억만년전 밤하늘 은하계 돌고 돌아
마침내 이 지구에 내려선 우주인이므로
저 도심 불빛속 끈끈히 엉겨붙는,
인파 한가운데 고요한 시선을 꽂아보면 안다
얼핏 현란한 색의 계보아래 깔려있는
천연색 밑그림들
나 色의 무궁(無窮) 두루 넘어
이제 마악 이곳에 당도했다
나 한 철책 안에 가두지 마라계간
[애지]2007년.봄호.
푸른 칼날 신지혜
새벽 뒤뜰에서 보았습니다
이슬 한 방울 제 등짝에 짊어지고
온몸에 잔뜩 힘을 모은
풀잎 한 가닥 보았습니다
어찌나 안간힘을 쓰던지
이파리 온몸이 풀 먹인 듯 빳빳합니다
제 이슬 한 방울이 대체 무엇이길래
제 몸 휘는 것도 모자라
온 아침을 팽팽하게 다 휘게 하는 걸까요
나 가만히 짐작해 보았습니다. 언제나
날 떠받치고 온몸으로 견디고 있는
그의 마음도 그렇겠지요
나 오늘은
저 조용한 이슬 속에 들어
둥글고 편안한 그의 등짝에 납작 엎드려
그의 숨막히는 긴장을 가늠해야 겠습니다
계간 <애지> 2007, 봄호
나는 사유한다 비전을 접수한다
-롱 아일랜드 해안에서
잠언 같은 저녁놀이 피었다진다 꽃이파리처럼 내 사유 몇 잎이 뚝뚝, 떨어진다 바다가 쏘아올린 둥근 달, 그 질긴 달빛이 나를 포승 지어 우주 어디로 끌고 간다 지금 이 밤을 통째로 압송중이다
나는, 천천히 인적 없는 달빛 해안을 끼고 걷는다 내 속은 텅 비어있다 내가 유리잔이다 노오란 달빛이 찰랑거린다 흰 파도와 다투어 잔을 부딪힌다 몇 천년을 두터이 껴입고 반가사유하는 희고 단단한 저 돌들처럼, 내 안에 시퍼런 불이 켜 진다 쓸쓸함의 미세한 알갱이들 텅텅 마알간 공명이 울린다
잠시, 물거울에 날 비춰보고 돌아섰는데 금세 나를 잊어버린다 나는 누구일까, 그런 물음표같은 발자국들이 듬성듬성 모래해안을 끌고 바다로 들어간다 나는 허리 굽혀 심해를 가만 들여다본다 세상이 그 안에 들어있다 우리는, 마치 서로 가 배경이듯, 필연에 의해 마주친, 산란한 눈빛이다 서로가 그리워 흐려진다
쓸쓸한 행성처럼, 내가 허공 중심에 걸린다 푸른 한숨을 뿜어낸다 예서제서, 숨은 존재들이 앞다퉈 사유를 켠다 막막한 우주의 관제탑에 오늘, 내가 비로소 행성의 이름으로 등록된다 나는 반짝반짝 쇠줄보다 더 강한 사유의 뿌리를 저 우주 물밑에 늘어뜨린다 가끔씩, 찌가 들썩거린다 나는 사유한다 비전을 접수한다
바람부는 저녁에는 나도 함석지붕처럼 흐르고 싶다 신지혜
무늬진,
저녁 뼈마디에 내 이름을 꽂는다. 무슨 무인도 깃발같은 붉은 창문을 달고 지나가는 바람을 간절히 부른다. 늦은 구름이 태연히 지나간다. 목 울음 삼키는 먼 산등성이 툭, 붉어져 나온 심장에도 투명한 유리창이 달려 있을까. 셀로판지 같은 허공에 뺨을 부비는 함석 지붕들이 흐르고 싶어 안달이었다. 길가, 거꾸로 선 나무들이 맨 뿌리로 서로를 더듬는 저녁, 이따금씩 빈 인스턴트 캔들이 골목을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자꾸만 눕혀도 다시 일어선 길들이 녹슨 철문의 문고리를 잡아 흔든다. 깜깜한 어둠이 공중에 낳은 새알 하나가 허공을 더 높이 밀어 올리고 있었다. 주름진 어둠의 표피 속에서 수련처럼 천 년을 훌훌 벗어버린 채 푸른 붓꽃이 다투며 피고 있었다. 잘 망치질 된 함석지붕처럼 나도 흐르고 싶었다. 바스락, 귀를 달싹거리며 무엇인가, 두터운 어둠의 표피를 파열시키며 수수 꽃다리 같은 꽃불을 밀어올렸다. 가느다란 소리의 실 핏줄이 죽죽 어둠에 칼금 그었다. 그러자 검붉은 소리알들이 저 공중에 솟아올라 물총새처럼 오래도록 떠 있었다.
왕버들 상회 이영옥
왕버들의 깊은 그늘에
발을 담그고 늙어가는 구멍가게
예전부터 주인이던 여자는 이제 노파가 되었다
선반을 비추는 형광등의 눈은 침침해졌고
가는귀가 먹어 버린 이 집은 웬만한 기척에는
밖을 내다보지 않는다
바람이 왕버들의 어깨를 주무르는 걸 보면
가게의 실제 주인은 나무인지 모른다
내가 어쩌다 가겟집 앞으로 지나갈 때면
노파는 산도과자가 기다린 헝클어진 시간을
정돈하거나 빨랫비누 위에 내려앉은 사각의 고요를 털어내고 있었다
저녁이 되면 노파는 소리 없이 움직여
연탄가스로 매캐해진 어두컴컴한 가겟방을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푸른빛으로 물갈이를 했다
동네 사람들은 노파가 끓여주는 라면과 신김치조각에
몇 백 년도 더 된 그림자처럼 붙들려 있었다
가끔 유리창에 찍힌 실루엣들은
산소가 부족한 금붕어처럼 입을 쩍쩍 벌렸다
왕버들의 그늘은 몇 십 년을 팔아내도 줄어들지 않았고
그 집은 더 이상 시간 밖으로 걸어나오지 않았다
누구든 왕버들 상회에 붙들리기 좋은 달밤
세상을 건너갔다고 생각하는 것은 제자리에 있는 것들이다
겨울 과메기 이영옥
바람을 무던히도 되받아치며
너는 그렇게 견디고 있었다.
단련된 맷집으로도 견딜 수 없는 것은
추억이 사라지는 일,
마른 아가미 속에 감추어둔 언약
바람 속에 뱉어내고
내장까지 훑어낸 뱃가죽에
행여 한 점 애간장이 묻어있다 해도
이젠 덮어두자
온 몸에 하얗게 소금 꽃 핀다
붙잡아도 갈 걸 뻔히 알면서도
하얀 손가락 흘리던 파도
아픈 듯 뒤돌아보면
가늘게 떨며 따라오던 구룡포 눈썹 달
줄에 묶인 과메기처럼 매운 바람을 헤엄쳐
스스로 깊은 맛을 품을 때까지
혹한의 중심부로 나를 밀어넣어야 했던 그해 겨울
진눈깨비 뿌려대는 국도를 따라오며
나는 뜻하지 않게 너와의 약속을 깨던 적이 있었다
시집 <사라진 입들> 2007, 천년의시작
안동 간고등어 김종미
한 생이 생살에 소금을 치고 가는 거라면
내게 없는 두 페이지를 보았다
침을 묻혀 넘겨도 끈끈하게 같이 붙어 넘어갈 두 페이지가
옛날에는 그토록 파닥거렸을 심장을
딱 떼어내고
하나의 배가 하나의 등을 받아 안아 왠지 눈물겨운 체위로
눈물만큼 투명한 밀실에 갇혀 있다
그동안 살아온 생에 식욕 없는 허기가 밀려와
대형마트의 식품부를 빈 카트로 돌고 돌 때
그만 내 눈에 들켜버린
내게 없는 두 페이지
누군가의 따뜻한 재 속에
내 시린 등을 끼워넣을 수 있다면
소금도 단맛을
내며한 사내의 혓바닥을 황홀하게 할까
이와 같은 삶
남은 페이지로도 그럴 수가 있을까
마음 아픈 낮* /정영
장례식장은 짐승떼들의 조용한 식탁
창문 아래로 망자가 지나가는 줄도 모르고
친구들은 몰려와 식사를 하느라 바쁘고나
마을 아이들은 묏등을 뛰노느라 바쁘고나
친지들의 때 절은 손바닥은 지폐를 펴느라 바쁘고나
나그네들은 사진을 찍느라 바쁘고나
옆집 이발소에선 손님맞이 할 큰 아들의 머리칼이 잘려지고
옆집 푸줏간에선 소의 창자가 잘려지느라 바쁘고나
폭염의 대낮인데도
살덩이 같은 안개가 불 탄 교회를 껴안다
시장 골목으로 흘러들어 새 신을 신어보다
가장 친했던 친구의 눈을 멀게도 하는 걸 보면
죽음은 죽어서야 안다는 듯
망자는 길 끝에 나와 앉아 제 장례식장을 구경 하느라
땀 흘리며 말이 없는 거고나
* 파를로 네루다의 시 제목
시집 <평일의 고해> 창작과비평사, 2006
중독/ 김점미
-내뱉어진 입들의 추억에 대하여
문학 모임에 가면 사람들은 슬슬 문학적 인간이 된다. 그들의 입에서 내쉬어지는 숨들은 모두 낱말들로 구성되고 낱말들은 곧 공간을 점령하여 모두가 열정으로 들끓는 문학도가 된다. 글쓰기의 진한 테두리선을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은 불법이다. 조직적인 인간은 누구라도 법망을 피해갈 수 없다.
그 문학 모임에서
L시인은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면 시에 취해 눈물을 흘린다고 말한다
시 때문에 설친 잠으로 퉁퉁 부은 눈 속에 세상으 고통이 다 흡수되어
떠오르는 태양을 단숨에 들이마신 긴 호흡이
강하게 피어오르는 태양의 칼날에 베인 채
허공으로 사라지는 낱말을 잡을 수 없음이란다
그의 입 속으로 몽는 열정을
협소한 이 공간이 버거워한다
첫 번째 모임을 벗어나 영화 모임에서
P감독은 밤마다 뒤바뀌는 미장센 덕분에 아직 한 편의 영화도 완성하지 못했다
수많은 프레임으로 가득 찬 무거운 머리로 인해 점점 기욹가 낮아지는 그의 두상에
커다란 혹이 생겼다고 챙이 큰 모자를 뒤집어쓰고
밤새 벌인 모노드라마의 엽기적인 자세로
이 공간을 다 흝어내리며 새로운 대사와 포즈에 침 튀기고 있다
그의 눈으로 모아지는 우리 모두는
슬로 모션의 엑스트라가 된다
두 번째 모임을 빗겨나 미술 모임에서는
K 평론가는 사시미 칼을 들고 우리에게 왔다
그의 서슬 푸른 날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순 없는 듯
칼춤을 추는 독설에 휘둘러 쳐지는 붓 사위는 자못 성스럽기까지 하다
예전에 그도 붓춤을 수없이 췄던 것을 기억한다
그럼에도 그는 편집의 명수다
그의 눈과 입은 잠시도 쉬지 않는다
명상은 그를 위해 붙여진 이름이 아니다
그의 가는 칼날을 피해갈 수 있는 작품은 어디에도 없다는 듯
타인이 흘리는 피를 꺼억꺼억 잘도 들이마시는 그의 혀끝 미소는
우리들 심장에
얼음송곳을 꽂는다
그러나‘
중독은 독이다’라고 내뱉은 우리들의 낯선 입에서도
중독된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것은 왜일까?
잠시도 쉬지 않는 입과 눈과 두뇌의 말초에 머뭇거리는
우리들의 어설픈 삶이
정말로 원하는 것이
각자의 인생을 걸고 디뎌야 하는 다이빙대 끝에 매달린 발가락의 중력일까?
만약 그렇다면,
자, 머뭇거리지 말고 저 아래로, 저 억겁의 세월 아래로
단숨에 뛰어내리시라,
우리들의 내뱉어진 중독을 벗어날 비상구는
세상 그 어디에도 없을 테니!
명함첩 김점미
명함첩이 떨어지자
갈피에 수북이 쌓여 있던 사람들이
함께 떨어져 내린다
이 많은 사라들이 언제,
나와 연을 맺었던가
나도 모르게 나는
그들과의 인연을
가을날 낙엽처럼 밟고 지나친 건 아닌가
세월이란 붙인 우표 속에 가둬놓고
빛바랜 봉투
아무렇게나 끼워둔 건 아니었나
때론 마음의 태풍을 견디지 못해
하나 둘은
갈가리 찢어서 쓰레기통에 버리기도 한 거 같은데
인연은 그렇게 끝나는 게 아닌가 보다
쓸고 난 낙엽 위에 다시 낙엽 쌓이듯
그렇게 또다시
마음 위에 마음으로 집을 짓는 일인가 보다
이곳 집을 허물면 저곳에서
지구의 반을 돌아서도 그 자리에는
세월만 먹어치운
인연이 살고 있다
벼룩시장 김점미
벼룩시장을 걷다가 누군가 나를 부르고 스쳐 지나던 나 뒤돌아보면 추억의 친구 서 있었다 먼 세기의 끝이 우리 사이를 지나는 통에 서로의 얼굴조차 눈에서 지워졌나 추억은 아름다운 그림자를 끌며 반갑게 다가왔지만 이미 마음 속 눈은 저만치 앞서 걷고 있었다 날씨는 맑았고 아름다운 미풍의 계절이었다 마음 속으로 옛 그리움이 고여 흘러내렸으나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내딛지 못했다 전선은 거기까지였다 서로 바라보지 못하는 전투의 끝에서 위태롭게 살았던 시간들이 날려갔다 아이가 있는 친구와 그 자리가 비어 있는 나 사이에 어떤 다리도 없었다 가판에 놓인 친구의 손을 들어 올리며 그녀가 뿌려놓은 부재의 시간을 바라보았다 또다시 우리는 여기까지다 더 이상 내놓을 그리움이 있을까, 우리가 쓰던 중고 그리움을 잘 닦아 또 언제 이 가판에서 만날 때가 있을까 생각하며 쓸쓸한 시간을 지불했다 앞으로 걸어가는 발자국이 자꾸 머뭇거렸다
<시작> 2007, 가을호
작게 작게, 하마 이윤설
하마야, 잘 잤니?
출렁출렁 거대한 궁둥이가 뱃살 주름을 밀며
내가슴 물 깊은 웅덩이 밖으로 쿵쿵
발바닥이 내딛고 떼는 자국마다
방 안에 산재된 슬픔은 압착되어 그의 발바닥에 흡수된다.
나는 안다, 얼마나 자잘한 눈물알갱이까지도 그가
자신의 육질로 살찌우고 있는지.
하마가 웃고 있다. 물 먹은 가슴이 왈칵 터질 것 같아
우리 둘이 산책가자, 햇빛이 따가운 그늘 없는 거리로
너랑 나랑 출렁대는 엉덩이를 좌우로
호른 협주곡같은 방귀소리 뿡뿡 울리며 나란히 걸으면
먼 밀림숲에선 외로운 마음의 사냥꾼들이 밧줄을 버리고
악어들은 우울했다가 배를 움켜잡고 껄껄 웃겠지.
언덕을 타오르는 초록잎들과
꽁무니 터질듯 용 쓰는 마를버스 사이로
바람의 혀가 습습하게 얼굴을 핧는 우기도
열대치어같은 종아리 하얀 여자애들이 어머어머 길을 멈춰서도
우리 둘이 정류장 앞에서 탈 듯 말 듯
운전수아저씨 헷갈리게끔 멀꼼히 서 있는 거, 참 웃길거야 슬퍼서
궁둥짝을 철썩 치며 골을 내도 가만 웃고 서 있는 너를
나라면 껌벅 죽는 너를 개장국 냄새나는 너를
그 뚱한 몸속으로 흘러가 고인 내 눈물의 수위를 교체할 때가 온다면,
집으로 돌아오는 길 담장에 활짝 핀 장미꽃을 찾아가
우리 가슴에다 가시를 깊이 끌어안고 박아
그동안 모든 슬픔의 총량을 장미의 정수박이에 부어주자.
우리는 뻥 터진 풍선의 쪼그라든 고무처럼
경비아저씨가 화단을 돌다가
집게로 쓰레기통에 넣을 수 있게
작게 죽자 작게
그동안 너무 거대한 슬픔의 몸을 받았으니,
아무도 우리가 한 쌍이었던 걸 몰라보게
홀가분하고 텅 빈 풍선껍데기이게
작게 작게
잘자라, 하마야
<열린시학> 2007, 겨울호
좋은 손, 남자들의 이진명
내민 그 남자들의 손을 골똘히 들여다보았지
손은 얼굴일 수 있을까, 있겠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 존재의 한때를 펴 보여주니
그 남자들의 손을 맛본 이후
묵묵하던 성감이 돌올히 일어서고 깊게 물밀어갔다
한 남자는 장년의 중
젊어 중 시절 산 밖이란 모르고
공양간에 파묻혀 매일 가마솥에서
200명분의 국수를 삶고 말아냈다고
당신보다 국수 잘 삶고 장국 간 잘 맞출 거라고
핫바지에 저고리 고름 만지며 쭈그려 앉은 채 말했다
어디 그 손 좀 보여 주세요 하니
두 손등을 애들처럼 쭈욱 펴 내밀었다
한 남자는 장년의 산악인
결혼생활이 까닭 모르게 싫다고
어린애 둘 놓고 가버린 애엄마 대신 홀로 애들 키웠다고
아침이면 애들이 시간 늦는다고 밥 안 먹고 갈까 봐
옷 갈아입으며 가방 챙기며 쉽게쉽게 집어 먹을 수 있게
애들이 왔다갔다하는 그런 곁에
빨리빨리 충무 김밥 말아 김치랑 함께
옆에 또 사골 국물 떠놓고
매일이다시피였지만 햄야채계란말이 반찬으로
도시락 꼬박 싸 대학 마쳐 놓았다고
어디 그 손 좀 보여 주세요 하니
두 손등을 애들처럼 쭈욱 펴 내밀었다
할미 어미들처럼 부엌의 일을 알고 부엌 맛을 아는
새로운 인간의 신기한 性別만 같은 그 남자들
그들이 펴 내밀던 두 손 왜 그리 색스러웠는지
지금토록 내 성감대는 떨리고, 가라앉지를 않고
좋은 손, 또 좋은 손
외롭고 높고 쓸쓸한 좋은 얼굴, 얼굴
뇌까리며 감싸 지금도 쓸고 있다* 백석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에서 따옴.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류외향
가시거리 0미터, 그런 안개가 있다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는 길 위에
서환하게 불 밝힌 그대 자꾸만 놓쳤다
불현듯 망명이라는 말 떠오른 뒤부터
그 말, 참 아득하고 서러워
서쪽 바다 보러 가던 길이었다
사랑도 쌓이면 무겁다 했던가
물방울이 물방울을 끌어안는 힘으로 저리 뻑뻑하니
그대에게 다가가고 또 멀어지는 동안
그대 모르게 마음 내려놓고 싶은 적 많았던가
이 길 끝나고 앞서 간 그대 흔적 밟힌다 해도
짐짓 모르는 척 다른 길로 접어든 뒤때때로 사랑이 사무쳐지도에도 없는 외진 길 위에서망명객처럼 서성거리는 날 있으리니가시거리 0미터, 그런 길이 정말 있기는 했던가의심스러워도 뼛속으로 스며든
차갑고 투명한 물방울들
끝끝내 내 몸속을 떠돌고 있으리니
훗날, 길 잃고 돌아오지 못하는 날 많아도
차마 아프지 않겠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끝없이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에서 제목을 빌어옴.
푸른 손들의 꽃밭 류외향
들판에 손이 자라고 있었다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에 먹는 일에 열중했고 읽은 수 없는 책들이 쌓여가던 봄날이었다 정찰병처럼 한 잎 두 잎 연둣빛 손톱이 흙을 뚫고 솟아나더니 들판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갔다 쑥쑥 자라난 손가락들의 마디가 굵어질 때쯤 손목께에서 성장을 멈춘 푸른 손들이 지천이었다 마른 모래바람이 창틈으로 기어이 흘러들어오는 날이면 손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날벌레처럼 잠든 귓속까지 파고들었다 손을 뻗어 그 손들과 악수하고 싶었으나 도무지 알아들을 길 없었기에 등 돌리고 누웠다 꿈속에서 손목이 자꾸만 가려워왔다어느 하루, 서럽게 비 내리고 간 뒤 잎맥처럼 선명하게 지문이 돋아났으며 저마다 깊고 굵은 이랑이 소용돌이쳤다 수천수만의 손들이 한꺼번에 흐느끼며 마른 땅 위로 눈물을 떨어뜨렸다손을 뻗어 그들을 어루만지려 했으나 오, 왜 몰랐을까 내 손도 진즉에 저 들판 어딘가에 떨어뜰고 온 것을 잘린 손목으로 밥 먹는 일에 열중했던 나날이었음을수많은 손 잘린 사람들이 푸른 손들의 꽃밭을 헤집다가 제각기 빈손으로 피난길을 떠났다 아무도 자신의 손을 알아볼 수 없었다 그들의 등 뒤에서 무리를 잃은 재두루미 홀로 먹을 것 없는 땅을 한사코 헤집던 봄날이었다
<시인시각> 2007년 가을호
꽃 지는 소리 최명란
꽃만 피면 봄이냐
감흥 없는 사내도 품으면 님이냐
준비할 겨를도 없이 다가와서는
오래된 병처럼 나가지 않는 사내 가슴에 품고
여인을 벌거벗은 채 서 있다
가랑이와 겨드랑이와 가슴과 입술에서 동백꽃이 피어나
그만 고목의 동백이 되어버린 여인
가슴 도려내듯 서러운 날이면 입으로 동백꽃을 빨았다는
수많은 날들 소리없이 울며울며 달짝한 꽃물을 우물우물 빨았다는
장승포에서 뱃길로 이십분 거리
동백섬 지심도 동백꽃 여인
육지를 버리고 부모 손에 이끌려 섬으로 와
시집살이 피멍든 여인의 가슴은 검붉은 동백기름이 되어버렸다
시든 것이 오히려 더 질긴 법
꽃답게 피었다가 꽃답게 떨어지는 일 쉽지 않구나
지난밤 내린 비에 무참히 떨어진 동백여인의 시들한 몸이
밀물 때린 갯바위처럼 차다
가슴을 파고드는 파도의 냉기가 무리지어 달려와
또 한번 매섭게 여인을 내리치고 뒷걸음질친다
아하! 부러진 가지에도 꽃은 핀다
여인의 가랑이에 겨드랑이에 가슴에 입술에
다시 붉은 동백꽃이 핀다
꽃만 피면 봄이냐
붉기만 하면 꽃이냐
<창작과비평> 2006, 겨울호
초가을 최명란
지리산 뱀사골 졸참나무 아래
풍욕하는 한 사내가 太자로 누워 있다
맨몸을 낙엽 깔린 땅에 바싹 붙이고
하늘 향해 사지를 척 벌리고 드러누워 있다
아버지가 임종 전까지 꼭 쥐고 계시던 거
오줌 호스를 끼우기 위해 간호사가 건드릴 때마다
어설픈 한손으로 가리기를 먼저 하시던 거
그 늙은 소년의 수줍음이
거기 그 졸참나무 아래 솟아 있어
산다는 건 결국 사타구니에 점 하나 찍는 일
점이 무너지면 大자로 뻗어버리는 일
깨벗고 꽈당 드러눕기만 하면 꼿꼿이 일어서는
풍욕도 도를 넘으면 성욕이 되는 건가
단단히 점 하나 콕 찍고 누웠다가도
낙엽 하나 툭 떨어지다 건드리면
太자는 大자가 되고 마는
모기들 이경림
막 잠들려는 내 면상을 향해 돌진하는 강력한 프로펠러 소리에 놀라
나도 모르게 나, 나의 뺨을 후려치다
넓적한 나의 손바닥의 괴력이 놈을 타살시키다
놈은 나의 얼굴에 나와 또 누군가의 피가 섞였을 피를 조금 남기다
그걸 닦으려고 얼굴을 더듬는데 엉킨 실오라기 같은 것 만져지다
그의 몸?
실오라기 같은 그것을 잡으려고 내 뺨을 후려친 나!
그러나··· 이제 놈은 소탕된 것인가?
피 묻은 얼굴과 손을 씻으러 막 일어서는데 또
웽-웨에에에엥,
소리 요란하다 이번엔 떼로 몰려온다. 일테면 한 소대의 진군
.선잠 든 식구들의 얼굴로 殺身成仁하는 저 실오라기들의 포효!
세상모르고 잠든 이 허황한
꿈의 家禽들인 나의 식구들아
어서 일어나 잽싸게 제 뺨을 후려 쳐라
너희와 또 누군가의 피가 지금 너희를 부른다
『시인시각』2007년 가을호
거울 속의 門 신미나
흉한 꿈 물어다 누구 베갯머리에 부려 두려고 까마귀는 날으나
치맛자락 작대리고 들추면 히득 히드득 손가락 빨며 웃던 그 여자
야산으로 데리고 간 사내들 무슨 구슬 꺼내 보여 줬길래 낯빛을 붉혔나
달맞이꽃 헐한 꽃낱 바람에 시달려 마저 지고 나면
이 몸이 서러운 줄이야 발등 찢는 도깨비풀만 알았지
그녀 이제 세상에 없는 거울 하나 품었으니 밤이면 저 홀로 실금 긋는 거울 속 門이 열러
손거울로 제 얼굴만 골똘히 비춰 보나니
귀가 아파, 징소리 울리는 귓병이 도져 홀린 듯 우스운 듯 징소리 끌고 사라졌나니
거울 속 門 닫혀 아무도 모르네 그녀 왜 사내들 뒤를 밟으며 생쌀 한 줌씩 뿌려 두었는지
그 뒤꿈치 따라 오늘은 뉘 집 지붕위로 까마귀 내려와 자꾸 울어 예는지
꼬막각시의 노래 신미나
어물전 양푼에 떨이로 남아 너를 기다리네
십리 물길도 못 미치는 후렴구로나 너를 불러 보네
피조개 그릇 삼아 찬거리 올리고
더는 보탤 것 없는 소꿉살림을 들여 진밥 지어놓고
너랑 나랑 몸 붙어 살고지고
영원 없을 거짓도 내 귀에는 달았던가
십리 물길이 거둬갈 줄을 너는 몰라서
꿈 없는 낮잠처럼 잘못 든 꿈길처럼
마당에 질걱찌걱 물새는 고무장화 소리
생기 같은 꿈길에서나 들린 듯도 했나
그림자 없는 기척으로만 너는 나를 부르나
곰보바람 드잡이 하며 뱃머리를 돌리던 사내야
거머리 심줄 돋아 장딴지 딴딴했던 내 사내 어데 갔나
『현대시』2007년 11월호
여보, 띠포리가 떨어지면 무슨 재미로 살죠 성미정
유일한 재미라야 가끔 맥주를 마시는 것과
재미라곤 약에 쓸려고 해도 없는 남편을
골려주는 재미로 사는 35살의 가정주부 성모 씨가
어느 날 띠포리라는 멸치 비슷한 말린 생선을
만난 후 다양한 재미에 빠져드는데
띠포리에서 깨끗한 국물을 뽑기 위해선
대가리와 내장을 발라내는 게 필수
그런데 이 띠포리란 놈은 멸치와 달리 납작하고
뼈가 센 것이 특징이라 잘 벗겨지지 않는
재미와 손가락을 찔리는 재미
게다가 금방 손질을 끝낼 수 없는 재미까지 있는데
35살의 주부 성모 씨는 띠포리를 손질하는 게 재미있을수록
띠포리가 줄어드는 만큼 불안 또한 켜져 가는데
급기야 띠포리를 다 손질하지 않고 심심할 때마다
조금씩 아껴 손질할 생각까지 하게 되고
어느 적막한 밤 성모 씨가 남편에게 묻기를
여보 띠포리가 떨어지면 전 무슨 재미로 살죠
남편 배모 씨는 너무나 비장한 아내의 질문에
화들짝 놀라 혹시 띠포리가 떨어지면
아내가 자살할까 봐 내심 걱정이 되길래
띠포리가 떨어지기 전에 미리미리 사서 채워놓으리라
그날 이후 35살의 주부 성모 씨의 인생엔
근심 걱정이 없다는데 세상이 아무리 지루해도
띠포리가 있고 띠포리를 사 주겠다는
남편이 있으니 더 이상의 행복은 욕심이라며
자신을 타일러가며 띠포리를 손질한다는데
꽃이 피는 시간 정끝별
가던 길 멈추고 꽃 핀다
잊고 가거나 되돌아갈 수 없을 때
한 꽃 품어 꽃 핀다
내내 꽃 피는 꽃차례의 작은 꽃은 빠르고
딱 한 번 꽃 피는 높고 큰 꽃은 느리다
헌 꽃을 댕강 떨궈 흔적 지우는 꽃은 앞이고
헌 꽃을 새 꽃인 양 매달고 있는 꽃은 뒫
나보다 빨리 피는 꽃은 옛날이고
나보다 늦게 피는 꽃은 내일이다
배를 땅에 묻고 아래서 위로
움푹한 배처럼 안에서 밖으로
꼬르륵 제 딴의 한소끔 밥꽃
백기처럼 들어 올렸다 내리는 일이란
단지 가깝거나 무겁고
다만 짧거나 어둡다
담대한 꽃 냄새
방금 꽃 핀 저 꽃 아직 뜨겁다
피는 꽃이다!
이제 피었으니
가던 기 마저 갈 수 있겠다
당신의 파업 정끝별
21세기는 파업의 시대가 아니라고
세계를 바꾸던 파업의 시대는 갔다고 나는 말했다
파업 백 일을 맞아 서울역 광장에서 거리축제를 열던 저녁 택시는 좀체 무악재를 넘지 못했다
금요일이었고 퇴근 시간이었고 비까지 내리고 있었다
저녁 늦게부터 비가 그칠 것이라고 기상 캐스터가 말했다
황사도 좀 씻겨 내리겠다고 택시 운전사가 말했다
너무 막힌다고 나는 말했다
지금은 실업천만이니
아카시아나 파업을 하는 시대라고
아카시아가 꿀을 만들지 않으면 꿀벌이 사라지고 꿀벌이 사라지면
농산물 대란이 일어날 것이니 파업을 하려면 아카시아쯤은 해야 한다고
얼마 전에는 꿀벌이 파업을 했는데
꿀벌 유충이 곰팡이를 뒤집어쓴 채 줄줄이 죽어나가 꿀벌이 멸종될지 모르고
아카시아 파업도 꿀벌 파업과 연대되어 있을 것이니 파업은 꿀벌이나 하는 거라고 나는 말했다
폐쇄된 직장 앞에서 오지 않는 기자들을 향해 기자회견을 할 때
당신의 명분이 너무 옳은 것이어서사장 집 앞에서 샌드위치맨이 되어 1인 시위를 할 때 당신의 요구 조건이 너무 당연한 것이어서
낡은 메가폰을 들고 정의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 다짐할 때 당신의 외침이 너무 오래된 말이어서
당신의 파업은 위험천만이라고 나는 말했다
가다 서다 무악재를 넘어 서울역 광장에 도착했을 때
빗속의 로커가 목이 마르도록 사막의 갈증을 외칠 때덜 젖으려는 사람들이 빠른 걸음으로 광장을 빠져나갈 때
축제의 무대가 우산에 가리고 마이크까지 젖어버렸을 때
당신의 파업은 파업 중인 거라고차마 말할 수 없었던 밤, 거리 행진을 뒤따르다
손에 든 촛불을 꺼뜨리지 않으려 비를 가리다
기어코 헛발을 내딛고 말았던
삔 발목을 주무르다 택시에 우산을 두고 내렸던
세기의 상현달이 반괄호처럼 먹구름에 꽂혀 있었던
당신의 파업이 늦은 밤이었다
<문예중앙> 2007,가을호
자존심 김상미
세계지도를 펼친다
서로 죽인 자, 서로 죽임을 당한 자들이 만든
서로 죽이는 자들을 갖지 않으면 안 되었던
살아남은 자들이 만든무수히 많은 피의 강을 건너왔지만
앞으로도 무수히 많은 피의 강을 건너가야 하는 자들이 만든
지금도 한창 살육이 계속되고 있는
핏물로 뒤덮인 세계지도
그 위에다 나는 쓴다
잘 지내고 있냐고요?
그럼요, 총도 칼도 가진 게 없지만
내게는 아직 힘이 있어요
인간을 믿고 인간을 사랑하는 자존심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가장 아름답다는 인간의 자존심이!
『문예중앙』2007년 가을호
즐거운 사랑 김상미
난 참 낮게 낮게 사랑에 빠졌다
참 평안하게
언젠가는 질 꽃인 줄 알았기에
허망하듯
부드럽게 옷을 벗었다
잠자지도 않고 밤에도
생각하는 사람
꿈꾸는 사람
있다는 것을 알기에
난 참 낮게 낮게 사랑에 빠졌다
참 아득하게
값싼 집일수록 불친절하므로
구월의 밤바다에선
모래 위에 집을 짓지도 않았다
아무도 내게서 떼어놓지 않고도
남극의 빙산처럼
조금씩 조금씩 나를 녹였다
투명한 높은 생각들은
절대 건드리지 않았다
낮게 낮게 마주치는 사고와
그 사고 밑의 욕심을 탐하지도 않았다
헛되이 웅크리지 않고
내사랑, 매달리는 그 아래
즐겁게 즐겁게 누워만 있었다
참 순진하게
참 겸허하게
유산(遺産)김상미
새우깡에 길들여진 갈매기
뻥퀴기에 환호하는 비둘기
밤마다 쓰레기통 뒤지며 눈 번득이는 고양이
개발지역 푯말 앞에서 뿔뿔이 흩어진 맹꽁이 가족
달리는 도시 고속도로 바퀴에 깔려 죽은 사슴
구멍 숭숭 뚫린 산비탈에서 배고파 죽은 멧돼지
점점 더 내려앉고 도려내지는 산과 들
점점 더 기름때 묻은 소금물로 변해가는 바다
별들을 다 삼키고도 더 높이 더 빨리 올라가는 빌딩숲
그 아래
유산당한
하얀 배를 하늘로 향한 채
둥둥 떠내려가는
나
들키지 마라 이혜미
바람을 피울 거면 들키지 않게 하라고 愛人은 말했다
알겠노라고 흔쾌히 답하고 나는 꽃 보러 간다
대놓고 바람과 내통 중인 꽃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나무, 꽃 매달고
멀뚱히 선 나무와 간지럼 장난치다가
꽃에게는 너, 들키지 마라
가만 속삭였던 것인데
저를 죽이러 오는 손가락의 체온을
사랑하게된 하루살이처럼
내가 하루하루 시간과 내통한다는 것도
언젠가는 들키겠지만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愛人에게
들키지 마라
그렇게 흔적만 남을 것,
흔적조차 오래 남지 않을 것
<문학.선> 2007년 가을호
등 서안나
등이 가려울 때가 있다
시원하게 긁고 싶지만 송이 닿지 않는 곳
그곳은 내 몸에서 가장 반대편에 있는 곳
신은 내 몸에 내가 결코 닿을 수 없는 곳을 만드셨다
삶은 종종 그런것이다, 지척에 두고서도 닿지 못한다
나의 처음과 끝을 한눈으로 보지 못한다
앞모습만 볼 수 있는 두 개의 어두운 눈으로
나의 세상은 재잔 되었다
손바닥 하나로는 다 쓸어주지 못하는
우주처럼 넓은 내 몸 뒤편엔
입도 없고 팔과 다리도 없는 눈 먼 내가 살고 있다
나의 배후에는 나의 정면과 한번도 마주보지 못하는
내가 살고있다
알타미라의 소 김수우
1
고대이집트에서 나는 창조신 누트였고 길고 짧은 신화를 수없이
건넜으며 인도에선 지금도 성자이다 이중섭의 손끝에선 아름다운
눈을 가진 식구였으며 알타미라 동굴에서 매일 지축 울리고 오늘도
허공을 넘는 尋牛인데 2 냉이꽃 듬성한 다리 밑 액체질소통 -196°C로 동결된 수소의 정액이 거래된다 전기자극
으로 뽑아낸 정액을 분양받은 가축인공수정사들, 몸에 바람 든 암
소를 안는다 수태시킨다 산도 바다도 애비 없는 단백질덩이로 태
어난다 채권과 채무로 절룩거리는 생명의 流轉, 일상은 신상품과
재고로만 유통된다 下水에 무심히 젖는 봄 신은 이제 번식 관리되는 중이니 신화도 식구도 푸른 허공도 배합사료일 뿐이니 3 뼈와 살을 뜯어 먹이는 일 가죽구두를 신기는 일 그저 사랑이었
거늘 찬란한 제의였거늘 내 눈이 수평선이었거늘 수평선 너머 네
집, 네 아침이었거늘 너희가 냉이꽃보다 쓸쓸한 이유를 안다 까닭없이 절망하는 이유를 안다 이 영악한 슬픔들아, 영원한 슬픔들아
<내일을 여는 작가> 2007, 여름호
은사시의 종교 김수우
우시장 한가운데 기우뚱한 운사시,
쇠뿔에 찍히고 찍혀 아랫둥치가 다 패인 절뚝발이 은사시는
새잎을 깨웁니다
새잎을 밀어냅니다
팔려간 새끼, 늙은 소로 돌아와 다시 도축에 끌려가던 눈망울들
용달차 앞에서 버퉁기던 뒷발굽들
위태한 우듬지마다 푸른푸른 돋아납니다
새끼소 어미소 첩첩 울음으로 뿌리 굵은 은사시는
쇠털로 하늘의 부피를 재어온 은사시는
돈다발 속 생과 죽음의 무게를 보아온 은사시는
강물이 흘러흘러 제 자리에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늘 제 자리를 흘러 사는 것임을 압니다
제 몸 패이는 슬픔쯤 가볍게 여기며 여름이면 지어야 할 그늘만 기억합니다
우걱뿔 무릎 찍을 때마다 왈칵, 연두를 내지릅니다
새잎이 끔벅거른데
새잎이 절름거리는데
평생 그랬듯 제 그늘이 소를 사랑하는 마지막 방식이라고 믿는 은사시의 종교에
첫봄이 새떼로 퍼덕입니다.<<현대시학>>,2006 5월호
나비경첩 권현형
무쇠로 만든 나비경첩이
금방이라도 동백숲으로 날아가려다가
문짝이 제 오랜 화두인 양
경인양 손을 놓디 못하는 봄날
대웅진 섬돌 위 군화가 수북하다
어떤 애띠고 비릿한 예감에
삼배나 하려던 마음이 삼천배로
깊어진다 무거워진다
명복을 빌던 스무 살 얼굴들은
방금 세수라도 한 듯 맑다
사라진 한켤레의 젊은 군화,
청신한 죽음을 위해
스님의 염불은 하염없고
중년 부부는 피가 다 빠져나간
창백한 얼굴로 불경의 이면과 저면을
이승과 저승인 듯 간절히 맞잡고 앉아 있고
나비경첩은 때로 날개의 좌우를 찟어지도록
펼쳐 이승과 저승을 잇는다.
밥이나 먹자, 꽃아 권현형
나무가 몸을 여는 순간
뜨거운 핏덩이가 뭉클 쏟아 지듯
희고 붉은 꽃떨기들이
허공을 찢으며 흘러나다
봄 뜨락에 서서 나무와 함께
어질머리를 앓고 있는데 꽃잎 하나가
어깨를 툭 치며 중심을 흔들어 놓는다
누군가의 부음을 만개한 꽃 속에서 듣는다
오래 전 자본론을 함께 뒤적거리던
모임의 뒷자리에 말없이 앉아 있던 그
큰 키가 어떻게 베어졌을까
촘촘히 매달려 있는 꽃술들이 갑자기
물기 없는 밥알처럼 푸석푸석해 보인다
입안이 깔깔하다
한 번도 밥을 먹은 적 없이
혼자 정신을 앓던 사람아 꽃아
모를 일이다 누가 아픈지
어느 나무가 뿌리를 앓고 있는지
꽃아, 일 없이 밥이나 먹자
밥이나 한 끼 먹자
젖은 생각 권현형
마른 빨래에서 덜 휘발된 사람의 온기,
달큰한 비린내를 맡으며 통증처럼
누군가 욱신욱신 그립다
삼월의 창문을 열어 놓고 설거지통 그릇들을
소리나게 닦으며 시들어가는 화초에 물을 주며
나는 자꾸 기린처럼 목이 길어진다
온 집안을 빙글빙글 바람개비 돌리며
바람이 좋아 바람이 너무 좋아 고백하는 내게
어머니는 봄바람엔 뭐든 잘 마르지 하신다
초봄 바람이 너무 좋아 어머니는
무엇이든 말릴 생각을 하시고
나는 무엇이든 젖은 생각을 한다
눈 먼 물고기와 꽃의 창세기 권현형
남자들의 뜨거운 이마를
짚어주었을 것이다 여자들은
수세기에 걸쳐
남자들은 눈 먼 물고기처럼
헤엄쳐 들어갔을 것이다
꽃 속으로, 울음의 흰 등이 꺼지지 않도록
여자와 남자가 오랜 이야기를 나누며
차곡차곡 다져 쌓았을 바람막이 벽은
몽땅 허물어지고 기둥만 앙상하게 남아
크고 휑한 구멍으로 밖을 내다본다
제 안을 들여다본다
수위가 낮아지며 사그라진 몸을 다시 드러낸
안동 수몰 지역의 사백 년 된 고택
차가운 빗발을 고스란히 맞고 서 있던
그 한없는 슬픔의 검은 눈
오래된 몸을 가끔 떠올리게 된다
그 집을 보고 온 후 그때의 단발머리가
다시 긴 머리가 되고
긴 머리가 다시 단발머리가 될 때까지
난 생의 수위를 낮췄다 높였다 스스로 조절하며
몇 번의 사랑을 얻었다가 잃곤 했다
사백 년 동안의 고독이 막 시작되었다
독한 연애가 생각나는 밤 권현형
함부로 슬픔을 내보이지 않는 자의
혀가 저리 흰가
독한 연애의 끝이
저리 무심한가
어둠 속 흰 박꽃 같은 눈송이는
어떤 내성(內省)을 닮아 있다
백두산 어느 골에 산다는
우는 토끼의 눈망울이 생각나는 밤
우는 토끼라는 서글픈 학명처럼
눈 내리 퍼붓는 깊은 산골짝서
이승의 한 철을 홀로 견뎌야 하는
순한 짐승의 독한 발자국을
따라가 보느라
잠이 오지 않는 밤
진짜 연애는 칼날을 삼킨 듯 아파도
혀끝으로 나불거리는 게 아니라던가
선배의 연애론이 생각나는
함박눈 내리는 밤
명치 끝이 저려 와
불도 켜지 않고
뜬 눈으로 가만 앉아 있다
이스라지 권현형
이스라지 꽃단인 줄만 알았다고 무심히 건네받은
사소한 위로를 고백한다면 당신은 날더러
花냥기 있는 여자라고 놀리겠는지, 이슬이 맺혔다
스러질 만큼의 그 짧은 시간을 말해 보라고
눈물의, 이슬의 이유를 대라고 다그치겠는지
겨울밤 얼어붙은 육교까지 고작 올라가 발아래 불빛을
먼 곳인 듯 바라보고 있는데 섬처럼 주저앉았는데
흰 와이셔츠 하나 어둠 속 후레쉬 불빛으로 다가와
엄지인가 검지로 젖은 눈시울을 말없이 닦아 주었을 때
뭐랄까 그때의 기분은 언젠가 발을 담갔던 바다
심곡(深谷)에서 깊은 수렁에서 손두레박으로 누군가
나를 길어 올려 준 듯한 그런
눈물의 허리를 일으켜 세워줄 때까지
길가에 앉아 사소한 위로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면
누군가 지나간 후 비로소 지상에 이르는 계단을
다시 내려 갈 힘이 생겼다면 그 힘으로
내가 놓친, 놓아버린 빛이 흘러간 반대쪽으로
당신이 있는 곳 또 다른 어둠 속으로 천천히
걸어갈 수 있었다면 그 말이 당신에게도 연분홍 빛
이스라지만큼의 사소한 위로가 될는지 어떨는지
한계령 권현형
사막의 대상(隊商)들처럼 마지막 빛 속으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사라져가는 겨울나무들의
긴장이 신경쇠약이 멀리서도 숨결로 느껴진다
볕 짧은 겨울 해가 이승의 끝자락으로
내려앉기 전 능선을 넘어야 한다
저녁산을 넘어가는 나무들의 대오가 어쩐지
치아의 신경이 지나가는 길과 닮은 듯하다
언젠가 치과 의사가 생니를 뚫으며
머리맡에서 설명해주던 마취제 냄새나는 길
두번 씩이나 자기 앞의 생을
가위질했던 아버지 극약처방이 필요했던
그리고 끈으로 다시 묶어 봉합해버린,
그가 그토록 지키고 싶어 했던 비밀을
어깨에 높이 떠메고 나무들이 점차
어둠의 모래 구덩이 속으로 꺼져 들어간다
마음이 여린 사람들이 독한 몸을 지우고
남은 형해, 앙상한 뼈가 사라져가는 빛 속에
다가오는 어둠 속에 검게 인화되어 드러난다
"인간은 죽을 수 있어도 패배할 순 없다."
패배하지 않기 위해 제 관자놀이를 폭파시킨
헤밍웨이가 생각나 코트 안 차갑게 식어버린
내손을 진저리쳐지도록 내가 꼭 그러쥔다
아금니처럼 손을 앙다물어본다
중독성 슬픔
그녀의 두개골 속엔 반쯤 닫히다만 검은 서랍이 끼어 있는 듯 했습니다
아구가 맞지 않아 바람불 때마다 낡은 풍금을 켜대던 서랍
그 덕에 어릴 적 나는 약방문을 닳도록 들락거렸지요
골이 울린다고 날카롭게 쇳소리가 골을 긁는다고
눈깔사탕 사러 보내듯 심심찮게 보내시던 할머니 두통약 심부름길
주머니 속 동전을 잘그락거리며 댕동댕동 잘도 뛰어 다녔지요
어느새 심부름 길은 저물어
할머니도
끝없이 뇌신을 채워넣던 서랍도
그 길 위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어쩌지요 할머니? 어쩌자고
이젠 ...뇌신이 ...제게 뇌신이 ...필요해요
어릴 때부터 닦아 놓은 길
악마같은
슬픔에 중독되어 버렸거든요
나무부처 이미산
- 목조미륵보살반가사유상*에 부쳐
나를 부처라 부르지 마라
나는 부처를 모른다
빛나는 가문의 족쇄를 차고 삶도 아닌 죽음도 아닌
종교가 되어 미라가 되어
누군가 새겨 넣은 자비 가공의 미소
천 년 넘도록 푸른 피 흘리고 있다
날마다 중생들 몰려오지만
내 생각의 뿌리를 바라보지 못한다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솔향기
엉덩이에 남겨진 옹이자국
나뭇가지 팔뚝의 근질거림을 모른다
내부는 썩지 않는 나무의 살 나무의 뼈
나무의 기억들로 술렁거린다
백로 떼 내 품에서 사랑하며 새끼를 키웠다
벌레들 내 살 비듬 먹고 다산의 꿈을 꾸었다
겨울이면 사방천지 폭설의 순박한 구애로 뒤덮이는 곳
나 돌아갈 곳은 소백산 등성이 소나무 숲이니
꼼짝없이 앉아 천년을 사유하고 또 사유해도
나는 끝내 부처가 될 수 없다
*일본의 국보1호, 7세기 초 신라로부터 일본에 전해졌으며 경북봉화지역의 적송으로 만들었음.
아랫도리의 기억 이미산
아버지는 한동안 기저귀를 찼다
스며든 햇살에 현장이 드러나고 살이 다 빠져나간 그곳은 서로가 이물스러운 듯 뼈와 껍질의 분리가 한창이었다
유택을 검열 당한 비듬이 가늘게 저항했다 한껏 늘어진 껍질들은 이미 몸의 출구를 변형시켜 어디론가 숨겨놓았다
몇 겹의 껍질을 따라 등허리나 엉덩이쯤에 웅크리고 있는 출구, 구부라진 허리처럼 제 위치에 세워도 후미진 구석으로 자꾸만 흘러내렸다
수직으로 뿜어내던 배설의 길은 곳곳이 허물어지고 골목에 버려진 검은 봉지들의 독백처럼 밀려난 질서의 부속품이 흘리는 구정물은 느릿느릿 기어가다 이내 멈춘다
퇴색된 기능 앞에서 외설의 퇴색된 이미지만은 부정하고 싶었을까 섬광처럼 스치는 발기의 잔상은 껍질의 몸피에 들러붙어 여전히 전율했을까 생생한 기억들 늙지 않는 의식을 숨 막히게 조였을까 아버지는 희미한 기척으로 낡은 뼈를 자주 들먹였다
명료한 시간 앞에서 육체는 몰락을 예감한다 눈치 빠른 내장의 깊은 한숨이 뽀얀 기저귀로 흘러들고 그 생의 퇴적물들 다 빠지기도 전에 출구는 온전히 지워졌다 한 사내의 아랫도리에 관한 상징도 그렇게 지워졌다
봄밤 이미산
추적추적 봄비 내리는 밤
동해횟집 대형유리창 너머엔 손님들 만원이다
수족관 속 어류들 떼 지어 몰려다니고
방금 저며진 이른 봄꽃 같은 생살이
너른 식탁으로 분주히 옮겨진다
지상의 바다를 건너와 수족관속에 모인 사람들
구겨진 무늬로 앉아 등짝의 소금기를 털고
심장 깊숙이 박힌 해금을 토해낸다
빗줄기 식은땀처럼 흐르는 밤
소리는 익어가고 주방구석의 빈 껍질도 쌓여간다
다시 돌아갈 바다, 곤히 잠든 창문 안을 들여다보는
빚쟁이의 차가운 미소를 흘리는 안개의
안개 같은 내일의, 전신에 돋은 소름 같은 비늘이
담배연기로 피어난다
목구멍에 달라붙는 잔기침을 밀어내며
필요이상의 목청을 높이고
빗물을 훔쳐내듯 빠르게 술잔을 비운다
수족관 속 어류들 동그란 눈으로
구석을 향해 몰려다니고
누군가의 생살이 또 다른 누군가의 생살로 부활하는 밤
언제일지 모를 그날의 완벽한 알리바이를 위해
유리창엔 흐트러짐 없는 차분한 눈물
*주상절리(柱狀節理) 이미산
뜨거운 심장 어찌할 수 없어
당신 차가운 가슴으로 무작정 뛰어들었네
가장자리에 놓인 내 불구
당신은 너무 차갑고 너무 멀어 내 탄식은 깊어 가네
어깨춤을 추며 끼룩 끼룩 소리를 지르며 깊고 깊은 속내 그 한 꺼풀 벗겨들고 나를 향해 달려오는 당신
살덩이 뚝 뚝 떼어 던지며 사랑이라고? 농담이라고?
파멸로 피워내는 우리의 꽃
내겐 너무 어려운 질문들
허옇게 피고 지는 불꽃은 차갑고 차갑네
태양은 온종일 착란을 쏟아내네
달은 입술을 지우고 서늘한 눈빛이네
질문은 밤새 까맣게 타들어가네
차가운 오르가즘에 길들여져야 한다면
아프게 묵묵히 받아내며 단단해지는 거라면
이것이 우리의 방식이라면 얄라리 얄라
채찍으로 까만 맹세는 빛나네
철썩 철썩 고통이 하얗게 부서지네
*1100도의 용암이 화구로부터 흘러나와 물을 만나 급격히 식으면서 발생하는 수축작용의 결과로서 형성. 우리나라엔 제주도 주상절리가 규모면에서 최대이다
어지럼증 이미산
창문,
너 울고 있구나 나 모르게 울고 있구나
너를 통과하는 것들 모두 울음이 되는구나
나무가 울고 꽃이 울고 바람이 몰래 울고 가는 동안
적요한 오후가 흔들리며 네 몸을 통과하는구나
전등불,
너 미쳐가고 있구나
영혼의 핏덩어리 달달 볶아 가루로 부서지고 있구나
낄낄거리며 네 발등에 뿌려대고 있구나
뿌릴수록 맑아지는 정신의 줄기 하나 숨기고 있구나
아가리 찢고 나오는 허연 광기가 내 어둠을 불러내는 몸이었구나
구석으로 밀려난 것들 한순간 존재의 중심이 되는구나
낯선 절규도 잠시 낭만이 되는구나
벽은 수직을 거부하며 등뼈를 뽑아 흔들고
바닥과 천장이 껴안고 막춤을 추며 허공을 조롱하고
주머니마다 뿌리지 못한 씨앗들 장마철 독버섯처럼 부풀고
무료한 시간이 시계 밖으로 흘러넘치고
허공이 분열된 시계 침들에 찔려 픽픽 쓰러지고
저 힘찬 목탁소리 산을 흔들며 뚝뚝 부러지고
질긴 뿌리 하나가 나를 매달고 훨훨 날아다니는 구나
내가 한 겹 한 겹 벗겨지고 있구나
소녀와 핸드폰 이미산
전동차 안으로 햇살이 쏟아진다
햇살에 밀려온 소녀는 핸드폰에 빠져있다
능숙한 엄지손가락으로 친구를 불러낸다
문자로 전환된 소녀들이 액정 속에서 재잘거린다
잠에서 깬 구름이 싱싱한 빗방울을 준비하는 동안
승객들 나른한 눈길로 소녀를 지켜본다
분주한 버튼을 따라 소리 없이 젖망울이 부푼다
엉덩이에 살이 오른다
승객들 저마다 오래된 장난감 하나씩 불러내
소녀의 몸뚱이에 걸어놓는다
스커트의 경쾌한 무늬 속에서 무수한 목소리가 새어나온다
종아리가 밀어내는 스타킹의 올과 올 사이로
탱탱한 맥박을 느낀다
둥글게 등을 구부리며 소녀는 놀이에 빠져들고
익명의 시선들 몽상의 더듬이를 한껏 뻗어
제 기억의 형태와 빛깔로 소리와 크기와 움직임으로
소녀의 몸을 덧씌운다
전동차가 덜컹거리면 장난감들 여기저기로 툭 툭 떨어지고
잠깐 흩어졌다 돌아온 소녀가 훌쩍 자란 모습으로 앉아있다
소녀는 분주히 손가락을 움직여 시간을 되새김질 해낸다
서로 다른 시선들 한 방향으로 모아간다
생생한 액정 속에 흠뻑 빠진 승객들
재상버튼에 고요히 매달려 간다
아파트에서 1 이원
한 남자의 두손이 한 여자의
양쪽 어깨를 잡더니 앞 뒤로
마구 흔들었다 남의 손이
여자의 살 속으로 쑥쑥 빠졌다
여자가 제 몸속에 뒤엉켜 있는
철사를 잡아 빼며 울부짖었다
아파트에서 2
사람들이 층층의 정육점에서 뛰쳐나온다
갈고리가 몸의 여기저기에 박힌 채였다
몸의 지퍼를 올리지 못한 채였다
그림자기 몸을 만들기도 전에
몸의 사방에 불빛이 대못처럼 박힌다
뛰어가는 그들의 몸속에서
쇠붙이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난다
아파트에서 3
늙은 여자 여럿이
한 낮의 주차장에 쭈구리고 앉아
그림자를 낳는다
어느 여자는 진득진득한 돌을 낳는다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 문학과지성사
몸 밖에서 몸 안으로 이 원
새벽은 어둠의 녹슬어가는 몸이다 사람들은 이 몸을 희망이라고 믿는다 믿음은 오해일수록 좋다 믿음이라는 허방은 사방에 널려 있다
몸이 닿았던 자리는 썩어 들어간다 남김없이 썩어 들어간 허공을 사람들은 하늘이라고 부른다 높은 곳을 찾아가는 것은 하늘에 좀더 가까워지고 싶은 몸 썩은 냄새에 이끌리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몸은 죽음이 썩히고 있는 삶이다 무엇이 간절해질 때 사람들은 잊었던 그 냄새를 찾는다
길은 낯선 곳으로 못 나간다는 비명이다 사람들은 빈 땅마다 보도블록을 깔고 더 이상 그곳을 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래서 불빛이 아래 더 이상 길인 곳은 없다
죽음은 끝가지 관념이다 제 품에서 죽어간 몸도 마지막 숨을 넘기는 제 몸도 관념이다 관념을 벗은 몸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에 사람들은 먼저 제 죽음을 만난다
몸이 썩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타일을 몸에 붙인다 사람들끼리 몸을 만지면 단단하고 미끄럽다
손은 바닥에 지도를 감추어 두고 있다 사람들은 만나면 서로 은밀한 길을 맞대어 본다 그러나 서로의 길이 보일까 봐 손을 위아래로 세차게 흔든다 몸의 길은 쏟아지지도 뒤엉키지도 않는다
뼈가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어 살은 어두워지는 법이 없다 살이 어두워지려면 오랫동안 뼈와 함께 흐르는 물에 씻겨야 한다
입: 몸을 벗어버리고 싶은 간절한 구멍 몸 : 입을 메워버리고 싶은 간절한 무덤
시집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 문학과지성사
골목에도 길이 있다 최형심
골목에 들어서면
사각사각 칼날에 길게 늘어나는 껍질
누군가 골목을 깎고 있다
껍질처럼 벗겨지는 물 젖은 좌판 여인들
일수를 찍으러 대머리가 지나가고
길가에 쪼그린 고추 배추 시금치 헐값에 베어져나간다
야반도주한 계주 때문에
부글부글 속이 끓어
소금을 치며 버틴다는 새우젓장수
등이 시린 고등어 장수
와르르, 고등어 상자에 얼음을 쏟아 붓는다
몇 년째 변비를 앓고 있는 순대장수
도마에 썩썩 순대를 써는 동안
과부의 전대를 입질한 제비 한 마리
휘파람 불며 지나간다
떨이 수박 한 통을 내놓은 광주댁
쩍, 배 가른 수박을
한쪽씩 베어 문 아낙들
푸념처럼 퉤퉤 수박씨를 뱉는다
막다른 골목
껍질 벗겨진 해가 떠있다
옆에 산다는 것 이운진
이삿짐을 싸다가 수세미가 자라던 화분을 넘어뜨렸습니다
아직 그 누구의 허리도 감아보지 못한 어린 녀석을
같이 데려가지 못하는 미안함에
땅 내음이라도 맡으려무나
아파트 화단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러고는 찬찬히 나무들을 쳐다봅니다
제일 큰 벚나무는 귀찮아할까
라일락의 목을 죄면 향기를 잃고 말겠지
산수유나무에서는 우리 집 창문이 보이지 않을 거야
마치 고해성사를 하듯 나무마다 찾아다니며 밑둥을 만져 봅니다
나무에게도 눈물 같은 것이 있어서
손을 대면 뿌리의 체온이 전해집니다
뜨겁지도 먹먹하지도 않은 나무 곁에 수세미를 심어주고
이제 막 허공 한 줌을 움켜 쥘 만한
덩굴손으로는 상처 난 나무껍질을 감아주었습니다
나무와 수세미의 그림자는 이미 하나였습니다
옆에 산다는 건 이런 일이었습니다
실로 우연히라도 그림자를 포개어 놓고 싶은 일 말입니다
먼 곳에서 당신이 보낸 대숲의 소식을 받는 순간
내 안에 당신이라는 심장이 생기는 그런 일 말입니다
『문학마당』2007년 가을호
나무와의 一泊 이운진
아름다운 독을 가진 나무가 있었다
오래된 집터의 내력을 알아버려서
몇 백 년째 늙고 있는 나무
늙어도 늙어도 잎은 떨어지지 않고
나비와 새와 풀벌레와 바람의
거처였다가 비밀이 되는
나무에게 간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새로 생긴 심장소리에
거친 숨결을 맞추는 중이었고
내게 남은 날이란 고작
서쪽으로 뻗은 가지도 다 세지 못할
그런 며칠뿐이었으므로
나이테의 무늬에 대해서랄까
나뭇잎의 각질이랄까 하는 것은
도무지 물을 수가 없었다
며칠 뒤에는 기필코 몇 백 년 나무의 잎이 진다고 해도
나는 서른일곱 걸음 쯤 떠나왔을 무렵이므로
그의 손금을 쓰다듬다 젖꽃판이 간지러워지던 그날에
나는 어떤 독한 죄라도 무릅쓰겠노라고
나무의 가지를 가슴에 지르고는
푸른 독에 취해 하룻밤을 자고 왔다<문학마당> 2007년 가을호
착시 고은강
가령 우리는
연애시보다 더 간절했지만
정말 꽃이 아름다운 건지
상투적으로 피고 지는 일에
너무 많은 감탄사를 허비해서
서른도 채 되기 전에 주머니가 털린
허무처럼,
뽀개면 줄줄 쏟아졌다
잡음뿐인 턴테이블 위에서
우물쭈물 한쪽 발을 빠뜨린 채
휑하니, 한소절은 돌아가고 돌아오고
휘파람 부르며 즐겨찾기로
아무튼 사랑했지만
가령, 아무튼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씰크絲 화려한 내 이불 속의 남자들과
연극적으로 부둥켜안고
눈꺼풀에 푸른 성에를 덮은 채
토실토실 부어오른 낭만적 엉덩이를
한껏 흔들어대면서
오기처럼 시야를 벗겨먹던
구불구불 공복의 시간
곰보유리 고은강
오톨도톨 영혼의 피부가 만져져
계집아이를 낳으면 생리 없는 여자로 키워 세상의 우두머리로 세우고 싶었어요 하지만 나는 불임의 태초, 고독의 구설에 입덧은 해도 쉽게 통속을 지분대지 않아요 언제나 나를 무겁게 하는 삶의 방식들, 가로질러 왔으나 아무런 내용도 가질 수 없었고 열대우림이에요 무성한 어깨 위로 잔설처럼 시름이 돋아 혼자서 훌쩍이는 어스름이에요
나는 왜 지평(地平)이 되지 못하는 소문뿐인가 갑피동물처럼 단단한 선잠을 깨뜨리면 부끄러워요 세속의 마음, 삶이란 단지 첫인상의 의미를 환유하는 운동 같아 울울창창 말발굽을 몰아서 환유의 겹을 달려갑니다
직설적, 아주 직설적인 손한옥
어머니는 시인이었다
직설적인 시인이었다
백석보다 향토적이고 정지용보다 활유적이었다
행위에 가장 적절한 언어를 장치하고 오장육부를 도려내 굵은 소금을 뿌리고 바늘로 찔렀다
安東孫家 문중에 연애결혼은 내가 처음이었으니 이 일은 벼락을 칠 일이기도 했지만
나를 키운 구 할은 어머니의 욕이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에 독설의 항아리는 어디에 숨겨뒀을까
언니는 이렇게 말한다
ㅡ팔 남매로 자라면서 나는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욕이다, 라고 하지만
이건 우리 마을 어귀에 서있는 당나무에 맹세코 거짓말이 아니다
ㅡ사당패같이 돌아 다니는 년
ㅡ머리 피도 안 마른 것이 머슴아 만나는 년
ㅡ쌔가 만발이나 빠질 년
ㅡ주딩이가 열 닷 발이나 나온 년
ㅡ조둥이가 염포창날 같은 년
ㅡ갈롱 부리다 얼어 죽을 년
ㅡ지 에미 잡아먹을 년
ㅡ엄발이 돋을 데로 돋은 년
ㅡ어른이 나무랄 때 한 마디도 안 지고 아바리 총총 하는 년
ㅡ제 어미 알기로 발가락새 때만도 안 여기는 년
ㅡ양탈비탈 둘러대고 돌아다니는 년
이런 년, 나를 두고 어머니는
고렇게 사람 말 안 들으면 눈에 밍태 껍데기 붙이고 영남루 다리 밑에 있는 너거 엄마한테 데려다 줄거라고
ㅡ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니 닮은 딸 하나 낳으라고
축원하고 또 축원하셨다
어머니, 수 년을 산문産門 닫고 사시다가 새삼스런 마흔에 나를 낳고
한풀이란 한풀이는 다 하셨네
달도 없는 그믐밤, 대숲이 으스스 흔들리던 밤, 갈가지 자갈 던지는 밤
밤똥을 눌 때마다 엄마는 한 겨울에도 속옷 바람으로 따라와 앉아 있다가
닭장 앞에 데려가서 절 시키고 말 시켰다
ㅡ달구님요 달구새끼님요 닭이 밤똥 누지 사람이 밤똥 누능교
인심 좋은 달구님요 우리 아, 밤똥 가져 가이소
누가 죽여도 모를 캄캄한 밤 이런 날이 잦았지만 그때 엄마는 한 마디도 욕하지 않았다
나는 정말 명태 껍데기를 붙인 엄마가 다리 밑에 살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런 어느 날 몸살로 낮잠 자고 있을 때 내 이마를 짚으며
ㅡ우찌하꼬, 이래 열이 펄펄나서…맨날 지엄마를 다리 밑에 있다 했더니 참말로 여기고 쯔쯔…
나는 다 들었지 다 듣고 말았지
참말로 좋았다 할머니 같은 우리엄마, 펄펄 열이나도 좋았다
어머니의 축원은 영험이 없었다
결국 나는 아들만 둘 낳았다
단 한 번도 나는 두 아들 앞에 직설적이지 못했다
정말로 지랄할까봐 못했고
정말로 미칠까봐 못했고
혀가 빠질까봐 못했고
남사당패가 될까봐 못했고
말대로 될까봐 못했고, 못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 욕을 주시면서
내가 건너지 않아야 할 강을 보여 주셨고
나에게 마르지 않는 눈물샘을 주셨고
어머니의 우량한 시 종자를 주셨다.
- 『시평』 2007년 가을호-
버스 정류장/김혜순
손톱으로 누르면
무른 한낮이 복숭아처럼 으깨진다 나는
여전히 연애는 신파라고 생각하지만
떠나간 남자가 신문을 펼치면
전단지처럼 몰래 눈물을 끼워넣을 줄도 안다
버스는 늦게 온다 진부한
깨달음이 그러하듯
흙탕물이 얼룩진 사월의 평상에게썩어가는 꽃들에게
안녕! 나는 꽃피는 폐허야
이제는 인사도 건넬 수 있는데구
월에 떠나간 남자가 커피를 쏟고
칠월에 떠나간 남자가 무릎을 닦아준다
꽃피는 시절은 누구나 눈물겹지만
마른 빗물 자국처럼 곧 희미해지지
운전기사는 검은 안경을 쓰고 페달을 밟는다
내가 모든 정류장에 설 줄 알았니?
우리들의 시들한 연애가 휘청거리는 동안
나는 괜한 허공에 삿대질을 해댄다
마침내 먼 곳으로, 아끼던 풍경들이모두 달아날 때까지
수레국화/ 이규리
오늘 이곳엔 한 사람만 빼고 다 왔습니다
마당엔 옛 주인이 피운 꽃들 한창이네요
그 중 파란 수레국화를 보셨나요
누구 왜 안 왔는지 아무에게도 묻지 못했는데
파란 꽃, 문득 빈 자리의 빛깔 같습니다
관계는 참 자주 밟히곤 합니다
멀리 있는 음식을 집을 때 누군가 접시를 가까이 옮겨 주었는데
잠깐,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누가 유심히 본다면 내 얼굴에 수레국화를 볼까요
그 빛깔을 가지려면
꽃만큼이나 고단했을 겁니다
오늘 이곳엔 한 사람만 빼고 다 있습니다
눈에 밟힌다는 말,
밟는 사람이 더 아픈 이런 장면도 있네요
잡담이나 웃음소리들이 겉도는 저 아래쪽은 축축한
그늘파란 수레,
그 바퀴에 이미 추운 생이 감겨버린 듯감겨서
굴러간 듯
오늘 이곳엔 나만 빼고 다 있습니다
사막 편지 2 이규리
사막은 남성성을 지녔다 잊을 만하면 돌아와 앞섶을 여는 회오리, 사막이 우는 날은 내가 한없이 유순해 진다 비로소 그를 안을 수 있는 때이기도 하다 평원의 한 곳, 모래를 파고 만든 내 방에 한번 와 보시라 나는 점점 단순해지고 방안엔 명호청보다 부드런 깔개만 하나 있다 어떤 울음, 혹 콜로라도 강줄기를 따라 갔던 여행자들 중 만의 하나 다시 이곳을 들르는 사람은 보겠지 내가 사막의 페니스를 물고 기꺼이 혼절하는 것을,사막에서 재는 온도는 일생 중 가장 붉다 그건 울음의 온도이다시집 「 앤디 워홀의 생각 」중에서
홀딱새 손세실리아
숲해설가와 함께 방태산 미산계곡에 들었다
낱낱의 사연과 생애가 사람살이와 다를 바 없어
신기하기도 뭉클하기도 하다 하지만 발을 떼는 족족
소소한 것들까지 시시콜콜 설명하려드는 통에
골짜기 깊어질수록 감동이 반감되고 만다 게다가
비조불통 기막힌 풍광 앞에서는 소음과 진배없다
상호간 불편한 기색 감추기에 급급할 즈음
새 한 마리 물푸레나무 허공을 뒤흔들어댄다
검은등뻐꾸기라며 강의를 재개하려하자
누군가 볼멘소리로 막아선다
딴 건 몰러두 갸는 지가 좀 알어유 홀딱새여유
소싯적부텀 그렇게 불렀슈 찬찬히 함 들어봐유
홀딱벗꼬 홀딱벗꼬... 어떠유 내 말이 맞쥬?
다소 남세스럽지만 영락없다
육담이려니 흘려들었는데 아니다
기막힌 화두다
생의 겹겹 누더기 훌훌 벗어던지고
가뿐해지라는
아름다운 것이 서러운 것인 줄 봄밤에 안다
미루나무 꼭대기의 까치둥지
흔들어 대던 낮바람을 기억한다
위로 솟거나 아래로 고꾸라지지만 않을 뿐
바이킹처럼 완급하게 흔들리던 둥지
그것이 의지대로 살아지지 않는 삶이라고
의지 밖에서 흔들어대는 너
내 몸에 피어나던 목련꽃잎 뚝뚝 뜯어내며
기어이 바람으로 남을 채비를 한다
너는 언제나 취중에 있고
너는 언제나 상처에 열을 지피는 내 종기다
한때 이 밤, 꽃이 벙그는 소리에도 사랑을 하고
꽃이 지는 소리에도 사랑을 했었다
서러울 것도 없는 젊음의 맨몸이 서러웠고
간간이 구멍난 콘돔처럼 불안해서 더욱 사랑했다
목련나무는 잎을 밀어 올리며 꽃의 시절을
어떻게 기억하는 것일까
이 밤도 둥지는 여전히 위태롭고
더욱 슬퍼서 찬란한 밤 또 어디서
꽃잎 벙그는 소리 스르르,
붉은 낙관처럼
너는 또 종기에 근을 박고 바람으로 불어간다
꽃 진다, 내가 한고비 진다
납작납작 / 김혜순
-박수근 화법을 위하여 드문드문 세상을 끊어내어 한 며칠 눌렀다가 벽에 걸어 놓고 바라본다. 흰 하늘과 쭈그린 아낙네 둘이 벽 위에 납작하게 뻗어 있다. 가끔 심심하면 여편네와 아이들도 한 며칠 눌렀다가 벽에 붙여 놓고 하나님 보시기 어떻습니까? 조심스럽게 물어 본다.발바닥도 없이 서성서성. 입술도 없이 슬그머니. 표정도 없이 슬그머니. 그렇게 웃고 나서 피도 눈물도 없이 바짝 마르기. 그리곤 드디어 납작해진 천지 만물을 한 줄에 꿰어놓고 가이없이 한없이 펄렁 펄렁. 하나님, 보시기 마땅합니까?
자미원 간다 조용미
내가 이 세상에 살아 있다는 것, 오늘 하루 이 시간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은저 바위가 서 있는 것과 나무의자가 놓여 있는 것과무엇이 다를까
나를 태운 기차는 청령포 영월 탄부 연하 예미를 지나자미원으로 간다그 큰 별에 다다라서도 성에 차지 않는지무한의 너머를 향해 증산 사북 고한 추전으로 또 달린다명왕성 너머에까지 가려 한다
검은 탄광지대에 펼쳐진 하늘,태백선을 타면 원상결 같은 작자와 시대 미상의 천문서를 탐하지 않아도紫微垣에 닿을 수 있다탄광 속에는 백일흔 개의 별이 깊숙이 묻혀 있을 것이다
그 별에 이르는 길은 송학 연당 청령포 영월 예미......
오늘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것, 북두칠성과 자미원의 운행을 짚어보는 것은 저 엄나무가 우뚝 서 있는 것과 새털구름이 지나는 것과무엇이 다른 것일까
기록 조용미
청주에서 들에 있는 볏단들이 하늘로 딸려올라가 음성으로 흩어져 떨어지고 시커면 구름에서 붕어, 메기, 미꾸라지들이 섞인 고기비가 쏟아졌다는 기록이 있다 회오리 때문이었다
먼 나라에서는 붉은 비, 붉은 눈이 내렸다
나무나 들짐승 고깃배도 불어올린다는 바람, 용오름
고기비가 쏟아져 지붕이며 마당에 투둑투둑 물고기들이 내리는 걸 보라보고 있었다
붉은 눈은 숲과 들과 머리카락을 온통 장미빛으로 물들이고 마을은 용광로처럼 고요해졌다
재앙이 아닌 축복의 힘으로 세상의 한쪽이 붉게 물든다
물고기는 허공을 가르며 하늘로 빨려올라간다
구름의 힘으로 바다 한가운데서 용이 올라간다
불개가 달을 잡아먹었다 죽은 달이 다시 살아났다
불개가 또 해를 잡아먹었다 해는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
이 사실은 기록되지 않았다 다만 우리가 보는 해는 불개가 잡아먹은 그 해가 아니다
2006,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시
바람의 행로/ 조용미
폭풍이 지나가고 있다
바람을 못이기고 쓰러져 누운 나무들
사이에 우두커니 서 있다
나무들이 증명하는 바람의 행로
심지가 곧은 것들은
저렇게 生을 다해 단한번
꺽어지는 것
사원을 뒤덮어 폐허를 구축한 케이폭 나무는
폐허의 뒤에도 살아남으려는 욕망으로
뿌리의 긴 발톱을
사원의 지붕 위에 박아넣고 있었다
탑을 웅켜쥐고 있는 나무의 욕망이
사원을 지탱한다
깨어진 돌의 새겨진 범어처럼
문 하나하나마다 또 다른 세상이 나타나는
새로운 폐허인,
어느 먼 유적지에서처럼 나는 중얼거린다
삶의 미망에서 깨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팔만의 장경과 일천칠백의 선의 공안이
필요한 것은 아니리라
폭풍이 지나갔다
부러진 나뭇가지의 잎들이 말라가고 있다
바스락 바스락 숲속에서
염소들이 먹을 것을 찿아다니고 있다
흙 속의 잠 조용미
붉은 흙방에서 며칠 잠을 자려 한다
온돌 위에 흙을 바르고 다듬고 말리고 또 흙을 바르기를 여러 번.
그 위에 얇게 콩기름을 칠한 다음
다시 여러 날 마르기를 기다려서 완성했다는 흙방
그 방에서 오래 이루지 못한 동그란 잠을 자려 한다
종이 한 장 깔지 않은 흙바닥을 이토록 매끈하게 만든 사람은
어떤 연장보다 빛나는 손을 가졌을 것이다
나는 자꾸 흙바닥을 만져본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종이 한 장의 두께도 허락할 수 없는 결곡함을
정신의 가파름으로만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일이어서
거죽이 없는 것이 불편함은 아니냐고 물어보는 어리석은 짓을 하느라 몸을 오래 뒤척인다
부드러운 흙은 단단한 바닥이 되어 나를 기다린다
몸을 누이고 따스하고 붉은 흙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와
빈틈없이 몸을 받쳐준다
단단한 속은 또한 겉이기도 한 것을,
나는 거죽이나 껍질이 어디 있느냐는 두꺼운 장판같은 물음 한 장 걷어버리고
흙 속을 파고드는 뿌리같이 희고 깊은 잠을 오래도록 자려 한다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 2007, 문학과지성사
탄소나무 계산기* 안효희
한 사람이 978그루의 나무를 심어야
지구에게 미안하지 않다는
그래야만 지구를 한 번 안아줄 수 있다는
탄소나무 계산기처럼
당신을, 안아 드려요
남포동 광장
사람과 사람의 등과 등 사이
프리 허그(free hugs) 글자판 가슴에 달고
만면에 미소 띤 양팔 벌린 청년
여고생 다가가
수줍게 움츠려 안긴다 오랫동안,
우는가! 싶더니 살며시 자리 떠나고
사람도 나무처럼
당신을, 안아 드려요
웃고 있는 그 아래의 얼굴
우물 속으로 뿌리내린 그 나무의 소리
그 나무의 전생을 애무하는
작은 탄소나무 계산기
*국립산림과학원이 홈페이지에 만든 코너
<리토피아>2007년 여름호
복분자 술병 안효희
나는 여자의 S라인을 닮았다
전혀 속이 보이지 않는 내가 속을 다 비우고 나자 마침내 거실에서 장미꽃 한 송이를 낳는 꽃병이 되었다 그리고는 나날이 그 꽃 바라보는 여자를 낳았다 장미 한송이 국화 한 송이...매일 단 한 송이 꽃을 사는 여자를 낳았다 여자는 자신의 몸속에서 달의 은근한 빛깔과 뱀의 구불구불한 몸 짓과 끊임없는 바깥으로의 눈길을 사향처럼 피워냈다 내가 발효를 기다리며 웅크린 시간을 그녀도 웅크려 있었던 것, 이제 저 꽃은 훨훨 날아가는 새가 될 일만 남았고, 여자는 다시 내가 될 일만 남았다 우리는 다시 그 무엇이 되어 세상을 낳을 것인가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낳으며, 살아있는 것은 죽어가는 미래를 낳았다 낳아지는 "무엇" 이 아닌 낳고 있는 "무엇" 이 되려고 단 한송이 꽃을 사는 여자는 자꾸 뚱뚱한 몸을 비틀었다
편 지 최문자
가는 길이 어두워 내 편지는 네게 닿지 못한다. 어둠 위에 육필의 자모가 나가고 어둠이 뜯어버린 단어들이 하던 말을 멈추고 있다. 어두워 못 가는 편지 그대, 모든 촉수 터질 듯 높여 반짝이는 그리움의 자모를 맞춰보라. 가슴털 뽑힌 우표 한 장 붙이고 네 이름의 외곽에서 쓰러져 잠든 내 언어들을 해독해보라.
입이 큰 모녀 최문자
시간을 달라고 하던 어린 딸에게 돈을 주었다 천 원짜리 한 장 들고 울려고 하다말고 학교로 가던 딸
시간을 달라고 하면 돈을 주는 딸 만 원짜리 한 장 들고 울려고 하다말고 마트로 간다
우리는 입이 컸었는데 꿀꺽거리며 패트병으로 하나쯤 서로를 단숨에 들이켜고 싶었는데 너무 뻣뻣한 종이 너무 목마른 지폐로 목을 축이고 눈물 어린 눈을 가리고 둘 다 학교로 갔었다
시간은 참지 못하고 우리를 들이마시고 우리는 시간의 뱃속에 들어가 그 뒤틀린 내장을 지나는 동안
커피 한 잔을 타서 반씩 나누고 마들렌 과자봉지를 뜯어놔도 잠깐만, 잠깐만 딸은 외출하고 모래밭에 혼자 남는다
우리는 입이 컸었는데 큰 입에서 슬슬 나오던 타액처럼 하고 싶은 말이 혀 밑에 그렇게 고였었는데 그래서 죽어라고 목말랐었는데 시간의 生木 자른 자리 모래만 수북하게 남아 있다
<서정시학 >2007년 봄호
지나치게 푸르러서 김경린
지나치게
푸르러서 슬픈 것은 물론 아니다
잊었던 기억들이
재생되어 오는 것처럼
황사 현상이 당신 얼굴마저 흐리게 하는 날에도
길가에 길게 늘어선 가로수의 잎사귀와
마천루처럼 높은 담벼락 사이로
팔을 길게 내미는 라일락의 끝마디에서도
푸름이 크레파스처럼 흘러내리는 아침
저기 앞이하늘에 내려와 머물고
습기가 피부에 잦아드는 날이면
신경을 자극하는 전류들이
팔을 아프게 한다는 그 사람에게
푸름이 담긴 시집을 남긴 채내려오는 언덕 길에도
푸름은 동반자처럼 따라오고
참으로 우연하게도
언젠가 사랑 때문에
푸름과 자주색을 무척 좋아한다던
그 여인을 그날 만나게 된 것은
그 무슨 인과 관계인지 모를 일이기도 한데
거리의 사람들은오늘의 바람을 아킬레스건으로
비유도 하지만
지나치게
푸른 계절 때문에 슬픈 것은 물론 아니다.
당신 발바닥 쓰시마섬 같애/ 최정례
이불 밖으로 삐죽이 빠져나온 당신 한쪽 발
엎어져 자고 있는 발바닥이 바다 위에 섬 같애
숨도 쉬지 않고 조용히 조용히 자고 있는 쓰시마섬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지자 태종은 대마도 정벌을 명하였대
토요또미 히데요시도 쓰시마에 기지를 구축하였고
왜 그 생각이 나나 모르겠네
젊어 징용가서 다시는 못 돌아온 고모부
절벽 위에 고사목처럼 살다 이제는 죽은 지 오래된 고모
바다 한가운데 엎어진 배처럼 조용히 떠서 자고 있었네
새벽에 혼자 깨어 들여다보니참 멀리도 떨어져 나간 당신 발바닥이
네나라 잃은 설움을 안고 왜(倭)의 물은 한모금도 안 마신다며
생으로 굶어 죽은 최익현의 발자국도 그 섬에 떠돈다는데
그로고 보니 혼자 방황하는 당신 발바닥이네
당신의 몸 가장 궁벽한 곳, 가장 쓸쓸한 곳
회사는 넘어가고 친구들의 부고장은 하나둘 날아오고
술도 담배도 끊었지만 잠이 안 온다고 뒤척이더니
그 나라에서도 쫓겨나 갈 곳 없는 자들이 모여 살던 곳이 쓰시마래
작은 섬 앞바다에 역관 백여명을 돌풀에 휩쓸려 보내고도
대마도는 우리 땅이라고 조선사람들은 믿었다는데
당신 발바닥은 영 딴 나라 같네
동떨어져서 낯설기만 하고
당신의 쓰시마, 쓰시마섬
불 꽃/ 유현숙
- 달의 뒤편이 궁금하다
황토방에 누워 군더더기 살점 위에 굵은 막소금 한 웅큼 뿌린 일밖에 없는데오장육부가 쓰라리다
당신은 온 몸에 금계랍을 바른 채이유理由없는 이유離乳를 선언하고나는 통째로 소금에 절여진 한 마리 굴비 된다밖은 찬바람 휘몰아칠 이제 막 시작되는 겨울강은 속속들이 얼어들고내 지느러미는 두릅에 꿰어져 금계랍 발린 쓰디쓴 당신에게 갈 수가 없다
왜 그 때 달의 뒤편이 궁금했던 걸까?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며나는 소금을 한 주먹씩 삼켰다소금보다 더 짠 눈물을 흘렸다저 달의 정면만 보기에도 턱없이 모자랐을 그 시간들이 지금 환한 슬픔으로 부서져 내려도당신과 나아직은 목숨처럼 보관하고 싶다목숨 같은 불꽃으로 타오르고 싶다
사는 일이 알고 보면 죄다 제 목숨 태우는 일이라 하지 않던가*
* 박제영 시 <어디 촛불뿐이랴> 전문
검은 안마사/ 유현숙
-태국전통 안마를 받으며
그녀는 깊은 우물을 가지고 있다
수직으로 몸을 세우고 앉아 몸 속 수 백 마디 매듭을 주물러 풀며
겹겹이 지른 빗장을 허문다
닳고 삐걱거리는 온 몸의 뼈마디와 기혈,그 부실과 불통을 들여다 본다
부식된 파이프 속 군데군데 막힌 울혈을
맨 손의 송곳 같은 열기로 뚫는다
붉고 뜨거운 피가 그녀의 검은 살갗 아래로 흐른다
반들거리는 다갈색의 손가락이
사람 속에 묻힌 흰 뼈들을 하나씩 추려 세우고
뚝. 뚝. 경직된 사고가 해체되는,
바닥과 바닥이 부딪는,
대화가 은밀하게 시작된다
나는 깊게 파인 그녀의 우물 속으로 서서히 빨려든다
,블랙홀이다
가위를 주세요 마경덕
이게 전부요? 이력서가 되물었다. 쓰윽, 가윗날이 스쳤다. 가방끈이 짧구먼, 입이 큰 쓰레기통이 말했다. 창밖에… 비가 오고, 빗줄기가 꽃모가지를 치고 피다만 꽃이 발에 밟혔다. 소식 끊긴 애인이 대문 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꼭 와줄 거지? 애인이 보낸 청첩장이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나는 나에게 선물을 받고 싶었다. 실반지는 얼마죠? 화려한 금은방은 대꾸도 없었다. 생일선물이 나를 비웃었다. 손님, 사실 거예요? 친절한 백화점이 정중히 물었다. 나는 들고 있던 옷을 내려놓았다. 가격표가 킥킥, 코웃음쳤다.
그만 일어나요. 성질 급한 미용실이 말했다. 다리를 꼬고 앉은 사모님에게 동네 미용실이 달려가 허리를 굽혔다. 애인이 결혼을 하는 그 시간, 머리카락을 털며 팁이 나를 비웃었다. 나는 오래된 애인을 싹둑 자르고 일어섰다.
죽지 않는 책 김상미
이따금 사람들은 책 밑에서 토론을 한다. 나무 그늘 밑에서 토론을 하듯. 그럴 때 책 속의 언어들은 바람처럼 우리들 내부로 시원하게 불어오기도 하고 태풍처럼 비바람을 몰고 오기도 한다. 대부분의 삶이 책 속에서 이뤄지는 사람들은 제 자신을 얘기하듯 책을 읽고 읽은 책들로 은밀히 자신만의 정원을 꾸민다. 이따금 나는 그들의 정원에 초대되어 햇빛이 아닌 다른 빛에 열광하는 꽃과 나무들 사이로 어렴풋이 보이는 그들만의 비탄을 탐색한다. 아직도 그들 속에 숨쉬는 자연의 일부인 그들을 훔쳐본다. 그들에게 책은 큰 평화이기도 하고 가장 큰 불안이기도 하고 끝끝내 이기고 싶은 敵이기도 하지만 책읽기란 맨 얼굴로 산소를 들이마실 때처럼 자연스러워야 하는 법. 운명을 씹듯이 책들을 씹으며 자꾸만 작아지는 사람들. 그들의 타는 입술은 무덤 같아 혀 밑에 파묻힌 죽은 자들의 얼굴이 보이는 듯 하지만 책에 대한 경의는 책에 빠진 그 사람만의 행복. 때로는 행복한 책 한 권 때문에 임종을 앞둔 수술대 위에서도 죽지 않는 책을 꿈꾸고 공유하고 싶은 법. 내 속에도 그런 책들이 있다. 부싯돌처럼 서로를 비비며 불꽃을 만들어내는 책.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이 방 저 방에서 불이 켜지는 책. 그들에게도 있고 내게도 있는 책. 죽지 않기 위해 자꾸만 창백해지는 새하얀 책!
멋진 결론 김상미
서부에서 한 사나이가 왔다 누구나 다 갖고 다니는 칼이나 총 대신 커다란 지우개를 가진 한 사나이가 나는 첫눈에 그에게 반해 버렸다 한 번만 문지르면 모든 게 다 지워지는 지우개 지우개를 갖고 다니는 사나이, 얼마나 멋진가! 나는 매일매일 그 사나이를 기다렸다 오늘이 다 가기 전에 나를 지워 줄 사나이 척추 깊이 찍힌 내 존재의 바코드까지 흔적도 없이 지워 줄 사나이 지우고 싶다는 건 삶을 바꾸고 싶다는 것 근본으로부터 아주 더 멀리 나가겠다는 것 세월이 키워 준 근사한 이빨들을 다 뽑아 버리겠다는 것 1인칭도 2인칭도 아닌 비인칭이 되어 점점 더 자신을 백지화시키겠다는 것 나는 매일매일 그 사나이를 기다리며 커다란 지우개가 내 몸을 핥고 지나갈 꿈에 부풀어 내 몸 속 동사 하나하나 부사 하나하나 형용사 하나하나까지 빼놓지 않고 그 사나이를 기다렸다 커다란 지우개를 기다렸다 나의 없어짐이 비로소 나의 있음이 되고 나의 있음이 비로소 나의 없어짐이 될 투명한 반사광, 거울 속 내 사랑을!
세종대왕을 만나다 최영
세종대왕이 나를 빤히 쳐다보신다
지체 높으신 분이
어쩌다 가랑잎 이불 삼아
길바닥에 누워 계시는지
분식집 아줌마 쟁반 위에서 뛰어내리셨나
심부름 가는 아이 주머니에서 흘러내리셨나
이 눈먼 돈
어쩌다 내 눈에까지 띄었을까
담쟁이 넝쿨 소란스런 시월
바람의 숨결 한 호흡 조차
백지에 옮기지 못하는 풋내기 시인이
왕을 일으켜 세우려니 가슴이 뛴다
낙엽 한 장 주울 때와
어이 이리도 다를까
책갈피 속에서 일년을 마름질된 단풍잎은
사랑을 무릎꿇게 했는데
이 한 장의 지폐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오동나무 변비를 앓고 있다 최영애
가수 김광석은 '거리에서'라는 노래를 불러 오동나무 침대에서 편히 잠자게 되었다 한다 허지만 한동안 이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슬픈 노래를 자꾸 부르면 다시금 바닥에서 잠자게 될까봐, 생이 슬퍼질까, 부러 외면했단다 꼭 한 번만 이라는 그 한 번인 것으로 운명에 갇힐 수 있는 것일까 오동나무 침대가 청춘의 그를 버렸다 그러나 여러 귀와 입으로 옮겨져 거리 곳곳에서 흘러나왔다
높은 곳으로 물길을 퍼 올려여름 내 보랏빛 향기를 피우더니그 꽃자리 누렇게 뜬 낯빛으로덤불처럼 매달린 마른 오동꽃
습하고 어두운 뿌리의 기억을 잊고 싶었는지귀를 바짝 세우고 끙끙댄다바닥에 떨어져야꽃으로 피어난다는 것 모르는오동나무 변비를 앓고 있다
어느 가난한 섹스에 대한 기억 김나영
온 동네가 가난을 식구처럼 껴안고 살던 시절 언니와 나는 일수(日收)심부름을 다녔다. 우리 집의 유일한 생계수단이었던 일수(日收), 월곡동을 지나 장위동을 거쳐 숭인동까지 카시오페아좌처럼 뚝뚝 떨어져 있는 다섯 집을 다 돌면 일수 수첩 사이에서 돈의 두께가 부풀어 오르고 내 가슴에 도장밥 빛깔의 별들이 철없이 떠올랐다. 일수 수첩 속에는 각각 다른 여러 겹의 삶들이 붉은 도장의 얼굴을 하고 칙칙하게 접혀져 있었다. 어느 날 추위를 툭툭 차며 집에 도착했을 때 벌써 갔다 왔니?' 하던 엄마의 이마에 송송 맺혀있던 땀방울과 아버지의 헝클어진 머리칼과 파도처럼 널브러진 이불, 들킨 건 나였다. 아무 것도 못 본 척 문을 닫고 나오던 내 뒤통수를 쌔리며 사춘기는 내게로 다급하게 휘어들었다. 삼십 대 후반의 젊은 부모에게 꼭 묶어두어도 터져나오던, 때론 밥 생각보다 더 절박했을, 한 끼의 섹스가 가난한 이불 위에 일수 도장으로 찍혀있던, 겨울 그 단칸방.
언니와 나는 일수(日收) 심부름을 다녔다.
길일(吉日) 김나영
외삼촌의 파산이 오빠의 발 앞에 엎질러진 후오빠의 청춘에 붉은 차압 딱지가 붙었다. 늘 생물도감 속에 숨어서 지내던 길거리 꽃 한 송이도 꺾지 못했던 오빠가환갑이 다 되어 수백 송이 꽃 속에 파묻혀 있다.멀리 사는 친척들까지 모두 한 자리에 불러 모아 놓고 밥과 떡과 술을 멕인다, 하루는 부족하다고2박 3일 밤낮없이 밥과 떡과 술을 멕인다.에그머니나 오빠 망령 들었나 보네나는 떡을 먹다가 목이 메고 마는데내 등 두드리던 외숙모, 걱정 말란다 오늘은 길일이란다.이렇게 큰 잔치 배설(排設)해 놓고정작 오빤 부끄러워졌을라나사진 속에서 빠져나오질 않는다.하객들 불러 모아 놓고 꽃 속에 파묻혀 빠져나오질 않는다.오빠의 생을 통 털어 오늘은 이 지상에서 가장 화려한 날.
뿌리의 안부 김나영
시들시들한 오줌줄기 같은 연락이 왔다. 죙일 집에만 틀니처럼 박혀 계시다는 아버지 하루 한번 텃밭에 물 뿌리러 갈 때만 외출 하신다는데요즘 뿌리에 이상이 생겼다는데 몇 번 독한 약 뿌렸는데 통 약발이 받질 않는단다. 지난 번 통화 땐 열무씨, 배추씨 실한 놈으로 사서 부치라고 하셨는데 팔십 평생 한 밭에서 수확한 소출들 씨앗 팡팡 멀리 퍼트리는 힘으로제뿌리 죽죽 내리고들 살고 있으니 니들은 네 아버지가 일궈놓은 다모작 아니냐, 울궈 먹어도 몣 번이나 울궈 먹은 게냐써먹을 만큼 써먹었으니인제 그 뿌리 부실해질 때도 되았지인제 갈 시간 되았지내 염려에 무게를 보태 얹는 어머니기저귀 갈 시간이라고 그만 전화를 끊자신다.링거 선을 타고 전해온 뿌리의 안부에잊고 있었던 요의가 탱탱하게 쳐들어온다.
납골당 도서관 김나영
질기게 하품을 하고 있는 시계 아래, 늙은 사서(司書)가 정물처럼 앉아 있다. 투덜투덜 동어반복만 늘어놓는 선풍기는 지루하게 피어오르는 도서관의 고요를 좌우로 흔들고 있다. 읽히지 않는 책들과 빈 의자가 부동자세를 한 채 졸고 있는 이 곳에서 나는 한 권의 책을 빼든다. 세련되지 못한 겉표지에 드문드문 곰팡이가 묻어있다. 책장을 펼치는 순간,거미 한 마리 황급히 줄을 거두며 사라지고,입 냄새가 울컥 쏟아진다. 1978년 9월 25일 이후 아무도 말을 걸어주지 않았던 그 입. 누군가의 눈빛을 기다리던 그 입. 눈이 맵다. 그걸 눈치 챈 선풍기가 재빨리 공중으로 냄새를 흩어 버린다. 책꽂이에 꽂힌 책들의 제목이 위패(位牌)처럼 선득하다.
여름의 문장 김나영
공원에 앉아서 책을 읽는다.곁에서 서성거리던 바람이 가끔씩 책장을 넘긴다. 길고 지루하던 산문(散文)의 여름날도 책장을 넘기듯 고요하게 익어가고 오구나무 가지 사이에 투명한 매미의 허물이 붙어있다.소리 하나로 여름을 휘어잡던 눈과 배와 뒷다리의 힘,저 솜털의 미세한 촉수까지도 생생하게 붙들고 있다.매미의 허물 속으로 입김을 불어 넣어주면 다시 한번 여름을 공명통처럼 부풀려 놓을 것만 같다. 한 떼의 불량한 바람이 공원을 지나고 내 머리 위로 뚝 떨어지는 저 텅 빈 기호 하나,정수리에서부터 등까지 북 내려 그은 예리한 저 상처.
아찔한 향기, 그 나락(奈落)속으로 김나영
빈곤은 인류 역사와 더불어 나타난 오래된 현상이며…치자꽃 독한 향기다…지금도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용어지만 엄밀하게 정의를 내린다는 것은…아찔한 향기 속에 떠오르는 그리운…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입술을 꼭깨물어도 여전히 떠오르는 K, 그를 잊는다는 건…쉬운 일이 아니다. 어지럽게 흩어지는 치자꽃잎 사이로 하얗게 번지는 그의 미소…예컨대 현재 미국 빈민의…예컨대 현재 미국 빈민의…머리를 흔들면 흔들수록 뚜벅뚜벅 걸어오는 K. 가늘고 긴 그의 손가락, 체크무늬 남방, 사막을 막 빠져 나온 듯한 메마른 입술, 그를 생각하면 배가 고파, 내 혀가 점점 까맣게 타들어 가, 왜 이렇게 배가 고픈 걸까…생활수준은…생활수준은…생활수준은인도인의평균생활수준을…생활수준은인도인의…와락와락 덤벼드는 치자꽃 향기… 어지러운 이 꽃빈혈 속에서 그만 잠들고 싶어…세상이 이대로 멈춰버렸으면 좋겠어…인도인의생활수준을…그래, 그와 함께 인도로 떠나고 싶어, 코끼리 등에 올라타고 그의 이름을 맘껏 불러보고 싶어, 갠지스 강물 속으로 첨벙 뛰어들고 싶어, 그리고 나락(奈落)같은 그의 눈동자를 파서 내 눈에 옮겨 심고 싶어…훨씬 능가하…훨씬능…치자꽃, 독한 꽃향기가 행간과 행간 사이로 자꾸 쏟아진다. 감당하기 힘든,…행간과 행간 사이에 떨어져 휘날리는 하얀 꽃잎들. 무더운 바람이 불어온다.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 박서영
일몰 무렵이던가
아이를 지우고 집으로 가던 길
태양이 내 손을 잡고 어디론가 갔다
그 후론 내 몸에 온통 물린 자국들이다
칸나를 보면 그때가 생각난다
칸나 잎사귀 사이에 투명한 거미집
불룩한 배에 노란 줄무늬의
거미가 천천히 허공으로 빨려 들어간다
저, 불룩한 배를 터뜨리고 싶다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물고 사라진다
거미는 무거운 배를 끌어안고 천천히
태양의 산부인과로 들어간다
집게로 끄집어낸 태아들이
여름대낮 칸나로 피어난다
관 뚜껑이 열리듯 꽃이 피면
내 몸은 쫙쫙 찢어진 꽃잎이 된다
귀 박서영
이것은 얼마나 고집 센 구멍인지요 정신의 행려병자인지요 검은 머리카락 속에서 단 한 번도 나온 적 없는 몸의 일부인지요 토막인지요 소문의 자루인지요 바람인지요 들어도 듣지 못하는 캄캄한 귓구멍인지요 진흙탕도 이런 진흙탕이 없을 겁니다 툭툭 손가락 끊어져 들어온 소문들과 어디에선가 죽은 햇빛들과 가버린 시간들이 뒤엉켜 있는 이곳은 얼마나 깊은 무덤인지요 내 귀는 나팔이 될 수 없어요 소리를 낼 수 없어요 은색 냄비의 손잡이처럼 얼굴 양쪽에 매달려 있을 뿐이지요 어떤 날엔 그 손잡이를 들고 내 얼굴
에 가득 찬 오물을 쏟아버리고 싶어지지요 두개골의 꼭지가 떨어지는 날 귀는 제 역할을 다 하겠지요 지금은 너무 무거워서 얼굴을 조용히 감싸고만 있습니다 이것은 정말 얼마나 고집센 구멍인지요 제대로 태양을 본 적 없어도 태양을 향해 조준된 총에 대해 생각하고 있어요
무덤 박물관 가는 길 박서영
아무도 살지 않는 무덤이 점화한다
복제보다 아름다운 기억들이 펑펑 터진다
누가 태초에 봄여름가을겨울의 이름으로 저 제비꽃을
민들레를 엉겅퀴를 개망초를 세상에 꽂기 시작했을까
무덤의 콘센트가 은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땅의 배꼽이 열린다
누가 소멸한 기억에 똥물을 주고 햇볕을 주고
바람을 주며 그들을 불러내는가
빈집 뚜껑을 열고 불쑥 한 덩어리 기억을 끄집어내고
봄여름가을겨울을 떠돌아다니게 하는가
생각해보면, 생은 모두
낯선 집게에 걸려 파닥거리다가 멈추는 것
내 등을 집어 올리는 묵직한 고통을 느끼며
여기저기 불룩불룩 솟구쳐 있는 무덤 옆을 지난다
저것들은 땅의 상처, 아물지 않은 물혹들이다
저 푸르디푸른 문을 열어라
이제 내가 열고 들어가야 할 문은
저것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으므로
빈집의 책/ 박서영
쥐똥이 수북이 쌓인 헌 책을 훔쳐왔네
비 내리는 날 창녕 길곡의 어느 빈집에서
읽지도 못하는 한문 투성이의 필사본 몇 권
쥐똥이 진동하는 추억을 훔쳐왔네
당신은 온몸이 가려워 북북 긁어대고
추억의 힘으로 온몸이 가려운 건지도 모른다고
나는 매운 비빔국수를 먹으며 생각했네
이걸 박물관에 기증할까
문화원에 기증할까
집주인마저 버리고 간 빈집의 서책(書冊)
추억은 참으로 망연자실한 것
비 젖은 잡풀들을 지나 이 방 저 방을 기웃대다가
문득 내려다본 신발이 참담하구나
내 신발은 여기저기 헤매 다녔네
잡초들과 들짐승과 벌레의 집을 기웃거리며
빈집이 저자(著者)인 누런 책 몇 권을 훔쳐보다가
온 몸에 반점이 돋는 세월이네
봄날은 가는데
당신의 온몸이 가려워지는 세월이네
시집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 천년의시작
일요일은 참으세요/ 김민정
1.서른, 좆도 아닌 나이라지만 그 좆이야말로 슬픔의 심로라 시방 그녀의 등뼈는 불붙은 심지처럼 타고 있는 거다. 청첩장이거나 부고장이거나 일요일, 化粧하거나 火葬하거나 일요일, 섹스하거나 미사보거나 일요일의 우리들은 용각산 같은 그녀의 뼛가루로 시방 목을 풀거나 목이 메는 거다. 앙코르! 앙코르! 야 이놈의 까-까-마귀들아, 시방 니들의 그 주둥이는 웃자고 씨불대는 거니 울자고 씨부렁대는 거니
.2.내 안에서 나를 쪼는 까-까-마귀들의 입냄새에 나는 눈을 뜬다. 꿈이야 뭐야. 청담웨딩프라자에서 신부의 들러리로 나는 기념촬영을 하고 있었는데 영정사진 앞 그녀의 흰 국화와 들꽃사랑 내 부케가 뒤엉켜 썩고 있는 거다. 향수의 절반이 시취인 꽃들이여… 꿈이 아니라면 또 뭔데. 결혼식장에서 스테이크를 써는 하객들이 장례식장에서 육개장을 퍼먹는 조문객들로 양복이 반반 재단되어 있는 거다. 몸의 절반이 검은 반점인 사람들이여… 까꿍.
3. 알아들을 수 없는 화교들의 말 속에 알아들을 수 있는 내 말은 저 혼자 맴맴 원을 그렸고 아지랑이 어지러이 피어오르는 쇠창살을 물어뜯으며 까-까-마귀들이 날아오른다. 그녀의 봉분을 등에 짊어진 채 다시금 하강하는 순간의 바싹, 오름처럼 폭신폭신한 곡선을 베개로 받쳐주며 편안한 잠 되셨나요? 되묻는 니들의 그 앙큼한 앙코르! 앙코르! 죽거나 자거나 일요일은 그래서 틀려도 맞는 거다.
겨울, 그네처럼 /박연준
내 젖꼭지에 매달린 그의 입술이 떨어지지 않아 무거워, 내 몸에 주렁주렁 달린 그의 몸 걸을 때마다 출렁이는 고통 바람을 좀 쐴까, 그러나 바람마저 내 몸에 매달려와 무거워, 사내같이, 불어오는 것들은 죄다 무거워 시간의 허리에 삐죽이 튀어나온 못, 기어코 나를 흘기고 내 심장 아래서 잠자던 그의 눈썹이, 투두둑 떨어지면 나는 앙상한 겨울나무가 되어 춤을 춰 이리저리 기울어지며 하늘을 만져, 가시 같은 손으로 무거워, 이 허공과 바람, 끝내 무거워 나는 빙글빙글 돌면서 시간을 오독해 지난밤 속삭이던 그의 입술을 오독해
겨울, 점점 여리게 / 박연준
창문 밑에 매달린 고드름 사이로,
흐린 하늘에 목매달아 죽은 가오리연을 본다
하늘을 휘젓는 연의 시체는 부드럽다
까만 바람, 겨울은 낙타를 타고 걷는다
이따금, 땅바닥에 흩어진
겨울의 부러진 발톱을 몰래 줍는다
주워들고는 죽은 구상나무 뿌리에 기우뚱 심어놓는다
구상나무는 아무것도 모르고 순하게 죽어 있다
뿌리에서 또다른 슬픔이 자라는 줄도 모르고
죽은 몸과 자라나는 슬픔 사이의 여백이 차갑다
애인은 겨울을 건너, 봄으로 갔다
내 발가락 사이사이 틈
꼬아진 다리 사이
멀리 돌아온 입술과 입술의 포개짐에도
서글픈 여백이 맺히고,
갈변한 사과를 반으로 쪼개면
속살은 여전히, 잊혀진 듯 희다.
고통도 잘 튀겨지면 맛있다 정채원
극장 뒤 모퉁이에는 뻥튀기를 파는 두 내외가 있다 강냉이를 한 줌 튀김통에 집어넣고 돌려가며 볶는다 바람 매운 날에도 콧등에 땀이 맺히도록 한참을 돌리고 나면 뻥! 소리 없이 튀겨지는 삶도 있을까? 그 내외는 빠른 손놀림으로 뻥튀기를 크고 작은 자루에 담아 죽 늘어놓는다 알갱이가 찌그러진 것, 귀가 떨어져나간 것, 때깔이 뽀얗지도 윤이 나지도 않는 것들도 튀겨지고 나면 얼굴이 훤해진다 모두 풍성해진다 불지옥을 한 번 겪고 나면 너 나 할 것 없이 삶이 몇 길씩 깊어져 있다 집으로 돌아가면 늘 튀겨지지 않은 삶이 그들을 기다리건만 오늘도 쉬지 않고 튀겨대는 그 부부 앞을 사람들이 지나간다 외마디소리 지르던 기억들을 저마다 한 봉지씩 들고 극장으로 들어간다 화면에서는 스릴 넘치는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 삶이 절찬리에 뻥 뻥 튀겨지고 사람들은 눈물을 글썽이거나 한숨을 쉬며 강냉이를 씹듯 튀겨진 생을 씹는다 고통도 튀겨지면 맛있다는 듯
원 사(怨詞) 조 정
말은 사람보다 피를 많이 흘려요
여자는 말보다 피를 많이 흘려요
달이 찰 때
달이 기울 때
달맞이꽃은 여자보다 피를 많이 흘려 얼굴이 노랗죠
말은 목이 베이고
목은 심장이 베이고
말 못하는 말은 울지도 못하고
치마폭에 떨어진 말 머리는 삽시간에 시들어갔어요
내 어린 치마는 붉게 젖었어요
피를 쏟는건 한 달에 며칠
짙기도 해요
살을 찢고 피는 명랑한 석류꽃이어요, 나는
사람을 사랑하고 또 사랑하기 위해 상처가 많아요
머리 없는 말을 타고 서슬도 푸르게 떠났으나
그는 사랑을 못하게 되었죠 다시는
그를 그려 내가 울었다고
거짓말쟁이 책이 말하거든 믿지 마셔요
*원사 [怨詞] 신라 진평왕 때 기녀(妓女)인 천관(天官)이 지은 노래. 가사는 전하지 않는다. 김유신(金庾信)이 젊었을 때 천관에게 놀러다니다가 어머니의 엄한 훈계를 받고 다시는 천관의 집 앞을 지나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하루는 김유신이 술에 취하여 집으로 돌아오는데, 말이 잘못하여 전일에 다니던 길을 따라 그만 천관의 집에 이르렀다. 천관이 울며 나와 반겼으나, 김유신은 타고 온 말의 머리를 베고 안장을 버린 채 집으로 돌아갔다. 이에 천관이 이 노래를 지어 불러 그 원망스러움을 하소연하였다고 한다.
꽃담 / 김승해
오랜만에 만난 너와 옛 궁터 걷는데
어찌 사냔 물음에
세상, 담쌓고 산다했지
담쌓고 산다고?
흙 속에 단단히 박힌
기와조각 같은 네가 쌓은 것이
한 채 에두른 담이라면
덧나기 쉬운 것들은 흙으로 개어
꼭꼭 눌러 박은 이파리 붉음 한
자경전, 저 꽃담 같은 거겠지
베롱나무 꽃 지고 여름 다 가는 날,
너는 깊이 담쌓아 감춘 것을
내게 들켰으니
저 담 끝에 문 하나 두어도 좋겠다
문 끝에 이파리 하나 돋을 새겨도 좋겠다
담이 높아도 꽃은 넘는다
나무무덤 / 김승해
ㅡ 수림장(樹林葬)에서
봐라 저기
새로 온 목숨 봐라
더운 살점 먹고 생기 도는 저것들
넓다 막한 산허리 도래솔밭
봉분없는 무덤가, 수림장 능선
오래 전 마른 대궁에
새로 꽃이 핀다
흰 뿌리 자잘하게 퍼질러 놓고
귀때기 새파란 어린 것이
종일토록 분내 풍기는
숲의 신접살림
새로 돋은 꽃자리,
저 꽃의 무게로 수림장, 숲이 환하다
*<현대시>11월호
냉이의 꽃말 김승해
언 땅 뚫고 나온 냉이로 된장 풀어 국 끓인 날 삼동 끝 흙빛 풀어진 국물에는 풋것의 향기가 떠 있는데 모든 것 당신에게 바친다는 냉이의 꽃말에 찬 없이도 환해지는 밥상머리 국그릇에 둘러 피는 냉이의 꽃말은 허기진 지아비 앞에 더 떠서 밀어 놓는 한 그릇 국 같아서 국 끓는 저녁마다 봄, 땅심이 선다
퍼주고도 다시 우러나는 국물 같은 냉이의 꽃말에 바람도 슬쩍 비켜가는 들, 온 들에 냉이가 돋아야 봄이다 봄이라도 냉이가 물어 주는 밥상머리 안부를 듣고서야 온전히 봄이다 냉이꽃, 환한 꽃말이 밥상머리에 돋았다
나를 맛 보였다/ 마경덕
강원도 깡촌, 줄창 시퍼렇게 서있는 여름산의 무르팍이 싱싱했다.산비탈에서 굴러온 바람이 달리는 차창을 디밀었다.발바닥에서 서늘한 그늘내가 났다. 떡대 좋은 산 하나를 끼고돌자풋내가 질펀했다. 산딸기를 만지고 온 농익은 바람이 딸기물 든 손으로 내 머리칼을 연신어루만지고 버스는 투덜투덜 돌밭을 달렸다. 툭, 탁, 다급한 돌멩이가 계곳으로 뒤고 물 젖은바람이 벼랑을 타고 기어 올랐다. 강바람은 이끼빛 수건을 목에 걸치고 있엇다곳곳에 바람의 모에 맞는 바람집이 있엇다. 마을에 사는 바람은 미간을 찡그리고 밭두렁에 쪼그리고 있었다. 바람에게도 마음이 있나는 걸 그때 알았다.
뒷죄석에 마음을 눕히고 찬찬히 바람을 맛보기 시작했다. 개울에 발 담근 물소리를 집어 먹으니박하사타을 깨문 듯 후련햇다. 눈을 감고 바람의 뒷다리를 흠흠, 들이마셨다. 동시에 누군가 나를 맛보고 있었다익었나, 설었나, 뒤집고 있었다. 나 라는 맛에 대해 생각하는 순간, 나를 한 입 베어 문 바람이 퉤퉤! 나를 뱉어버렸다.
시로여는 세상 2006 여름호
바다는 귀소 본능이 있다/ 마경덕
물이 마르자 꽃이 사라졌다. 따글따글 돌 구르는 소리, 물새울음도 들리지 않는다
저 주먹만한 몽돌의 나이는 아무도 모른다. 흐르고 흘러 먼 섬에 닿았다가 수천 년 파도에 굴렸다어느 바람이 손이 헐도록 바위를 쪼개고 다듬어 둥글었다. 따글따글 물에 부딪혀 모난 성질 다독여, 꽃을 피웠다
그냥 두고 와야 했다. 저 돌멩이가 바다의 살점인 줄 몰랐다.얼마나, 천천히, 천첞,...품고 어르고 한 숟갈 , 두숟갈, 짠물을 떠 먹여 키웠는지 미처 몰랐다.그 라음다운 돌무늬가 돌의 마음이었다. 물이 마르니 마음도 거두어 갔다
(바다는 방파베까지 걸어와서 언제나 다시 되돌아 간다. 함부로 마을에 들어서거나 넘치지 안흔ㄴ 다늘 그 자리, 그 만큼 걸어와 걸음을 멈춘다바다는 회기성이 있다. 억지로 길을 막고 바다의 머리를 틀면앓다가 서서히 죽어간다
거기/ 조말선
모두가 술을 마시고 있을 때
정성스레 커피를 만들어 마시는 사람은 미쳤다
그런 사람이 떠난 곳은 아닐 것이다
어두운 창밖의 나뭇잎들이 혼란스레 안면을 뒤바꾸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나는 어둡고 저곳은 더 어둡다
나뭇잎의 익숙한 앞면보다 뒷면이 더 선명해진다
전화에다 대고 거기라고 했으니 사람이 무슨 장소도 아니고
졸지에 장소가 된 그는 우뚝 멈춘다
나뭇잎의 앞면과 뒷면처럼 여기와 거기는 한 몸이다
그래서 우리는 몹시 멀다
여기에 내가 있을 때 왜 나는 거기에 있고 싶을까
바람이 아무리 세게 불어도
나뭇잎의 앞면과 뒷면은 섞이지 않는다
내가 여기 있을 때 거기를 가질 수 있는 것은 흡족하다
다만 여기와 거기는 섞이지 않는 것이다
열심히 노력하다 보면 아득히 시점이 달라져 있다
커피 잔을 씻지도 않고
영정 속에 든 사람이 간 곳은 아닐 것이다
나는 여기 있어서 거기가 그립다
벽이라는 기의에 대한 벽이라는 기표 조말선
벽에 부딪힌다
높고 단단하다
욕설로 못박아도 무너지지 않는다
기댄다
그것은 예정대로 나를 등진다
어떡하든 요리해야 한다
벽 요리는 전문가가 없다
부딪치자마자 실습이다
부딪친 사람이 요리해야 한다
벽은 요릿감으로 부적합하다
게다가 내가 가진 조리기구들은
식사용이다
벽이 비유라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벽에 기댄다
벽난로, 벽시계, 벽장, 벽지, 벽걸이 TV
벽에 액자부터 거는 것은 부실하다
벽난로는 고전적이다
벽시계는 무한하다
벽장은 더욱 깊이를 가질 테지
벽지로 골라 벽을 지운다
벽이 사라진다
나는 처음으로 벽을 더듬는다
어둠 속에서도 벽은 더듬기 좋다
벽이 사라지고 벽을 안는다
벽 속에 말랑말랑한 구름들이 떠다닌다
스위치를 누른다
빛의 모퉁이/ 김소연
어김없이 황혼녘이면 그림자가 나를 끌고 간다 순순히 그가 가자는 곳으로 나는 가보고 있다 세상 모든 것들의 표정은 지워지고 자세만이 남아 있다 이따금 나는 무지막지한 덩치가 되고 이따금 나는 여러 갈래로 흩어지기도 한다 그의 충고를 따르자면 너무 빛 쪽으로 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 개의 불빛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다 다산(茶山)은 국화 그림자를 완성하는 취미가 있었다지만 내 그림자는 나를 완상하는 취미가 있는 것 같다 커다란 건물 아래에 서 있을 때 그는 작별도 않고 사라진다 내가 짓는 표정에 그는 무관심하다 내가 취하고 있는 자세에 그는 관심이 있다 그림자 없는 생애를 살아가기 위해 지독하게 환해져야 하는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지금은 길을 걷는 중이다 순순히 그가 가자는 곳으로 나는 가보고 있다
나무 그림자 안에 내 그림자 김소연
누군가 두고 간 우산처럼
공원 벤치에 앉아
저녁을 기다리자니
몸 늙는 대로
마음 늙기를 원해 보네
마음 가는 곳에 몸이 가 있어야 했던
청춘은 그러나 노예처럼
멀찌감치 서 있던 나무 하나
그림자 끝을 뻗어 내 그림자에게로 와 있네
한 걸음만 자리를 옮겨도
나무 그림자 안에 내 그림자
이 서늘함 속에 쪼그리고 앉아 있네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도
여기에서 이 자세로
몸 썩는 대로 마음 썩겠네
몇 날 며칠
햇볕 짱짱하고 바람 칼칼하면
개처럼 휙, 날려서
나는 흔적 없겠고
나무 그늘 아래 벗어둔
운동화 한 켤레는 남겠지만
펼쳐둔 경전처럼 펄럭일 거네
노예처럼 한 청춘
경솔하게 읽었던 성구들이
쟁쟁쟁 음악처럼 놀고 있겠네
母女의 저녁식사 윤진화
배추김치.... 파김치.... 상추겉절이.... 오이소박이.... 어머니..... .... 어머니.... 우리 집 식탁에는 온통 풀뿐이네요 우리의 저녁 식사는 말들이 좋아하겠어요 보세요? 하얀 접시 위에 그려진 말이 우리보다 먼저 우리의 저녁 식탁에 와 있잖아요. 그래요. 거기요. 가만히, 아이처럼 귀를 기울이면, 어디선가 또 다른 말이 들길을 지나 마을 건너 가난한 우리 식탁으로 달려와요. 들리세요? 주인을 버리고 달려오는 말울음 소리요 저기 먼 곳에서는, 젖가슴 하나 달린 여자들이 안장도 없는 말을 타고 드넓은 대지를 흔들며 산다던데... 히잉! 어머니 주홍빛 하늘이 몰려와 대지를 덮으면 동그랗게 몸을 웅크린 여자들이 말갈기 같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우리 식탁을 향해 자신의 말들을 찾아 고단한 하루치 태양을 쉬게 하고 달려와요 ... 히잉! 어머니 당신이 좋아하는 딸기 아이스크림이 녹을 때처럼 하늘이 물들어갈 때, 그녀들이 달려와요 가슴 하나를 도려낸 그녀들이, 자꾸만 자꾸만 초대받은 손님처럼 달려와요 어머니, 유방암에 걸린 아마존의 여왕, 히폴리테여 듣고 계신가요? 전사들이 우리의 밀림으로 몰려오는 소리, 그 침묵의 소리들이요 … 히잉! 어머니.
-2005,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히말라야시다 구함 윤진화
봉제공장 박 사장이 팔십만 원 떼먹고 도망을 안 가부렀냐 축 늘어진 나무 맹키로 가로수 지나다 이걸 안 봤냐. 히밀라야믄 외국이닝께 돈도 솔차니 더 줄 것이다, 안 그냐. 여그봐라 아야 여그 봐야, 시방 가로수 잎사구에 히말라야 시다 구함이라고 써 잉냐 니는 여즉도 흐느적거리는 시 나부랭이나 긁적이고 있냐 그라지말고 양희은의 여성시대나 글 보내 봐야, 그라믄 대학고 사년 대학원 이년 글 쓴다고 독허게 징했으니께 곧장 뽑힐 거시다 거그는 김치냉장고도 준다니께 그나저나 아야 여그 전화 좀 걸어 봐야 누가 시다 자리 구했음 어찌냐 히말라야도 조응께 돈만 많이 주믄 갈란다, 아따 가스나 전화 좀 해 봐야 포돗이 구해온 것이랑께 여그여 여그 볼펜 놔두고, 그려
*히말라야시다 - 세계 3대 공원수에 속하는 나무
옛날의 금잔디 동산/정채원
요추 골절 압박통으로
진통제를 맞고도 아파 아파
중환자실에서 칭얼대던 팔순의 아버지
어느 틈에 코를 고신다입을 반쯤 벌린 채
배냇짓하듯 빙그레 웃기도 한다
코를 찡긋 찡긋 하다가
깜짝 눈을 뜨고 묻는다
엄마는 어디 갔어?
엄마는 왜 아직 안 와?
조르다가 떼쓰다가
다시 코를 고신다
진통제 없이도 아픔 없는나라에
긴급구원을 타전하고 있다
관계 정채원
뭉그러진 복숭아를 골라 낸다
저마다 단단한 씨앗을 아집처럼 품고도
가슴 부빈 자리마다 단물이 흥건하다
서로 밀착된 만큼 깊이 멍드는
사이를 조금씩 벌려 놓는다
너와 나 너무 가까워
그 누구두 끼여들지 못하는 사이
나는 네 그늘에 가려
너는 내 솜털가시에 찔려
소리 없이 신음하고 있었으리라
그 동안, 몇 번의 천둥이 울고 비바람이 쳤는가
무너진 봉분 위에 복사꽃 지듯
가슴엔 붉은 기억 흩어져 있다
어미의 젖꼬지를 문 신생아처럼
진한 초유의 젖냄새 온몸에 퍼져 나가던 시절
초산의 젖몸살에 눈물 흘리던 시절은 이미
늙은 어미의 뭉그러진 젖무덤이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흠 없는 영혼으로 남을 수는 없을까
몇 발짝 떨어져 서로를 바라다본다
너와 나 사이로 빠져 나가는 바람이
아직 단단한 추억의 개수를 헤아린다
어디선가 뽀얀 젖냄새 실어 오는 바람 속
허공에 기댄 生이 너를 향해 기우뚱
가슴 잠시 탱탱해진다
문을 닫다/문성해
우리 집이 이곳으로 이사 와서 사는 동안 참 많은 집이 문 닫았다
맨 먼저 맥주 맛이 이 골목에서 제일이던 쿠바*가 문 닫자
그곳에서 새벽까지 떠들던 술꾼들이 문밖으로 다 뿔뿔이 사라졌다
술꾼들의 지린 오줌을 받아먹고 무성하던 공터의 잡풀들도 문을 닫고
잡풀들 사이 걸린 거미집도 문 닫았다
오겹살 맛이 기막히던 고그리*도 어느새 문 닫았고
그 커다란 냉동고에 누워 있던 수많은 오겹살들이 구름 위로 사라졌다
오렌지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오렌지마트가 문 닫자
그 많은 상상 속의 오렌지들도 다 문밖으로 사라졌다
쌩쌩복권방이 문 닫고 신나라노래방이 문 닫고 조은약국도 문 닫았다
문 을 닫 았 다라는 말 곰곰 되새겨보니영 끝장은 아니라는 희망의 신 침이 입 안에 고인다
그 집의 추억은 계속 문을 열고 있기 때문인가
식탁이 몇 개며 변기 커버의 색깔까지도 기억하는 내추억 속의 그 집은 오래오래 성업 중이다
보이지 않는 문 안에서 영원히 영업을 하는 사람들
거리에서 만난 그 얼굴들은 아직도 성업 중인 듯
예전보다 더 하얗고 조금은 태양을 부끄러워하는 듯 보였다
훗날 그 집의 기억마저 문을 닫았을 때무거운 눈꺼풀을 모두 내린 그 집은
그제야 영원한 잠에 빠져들게 된다
*쿠바와 고그리는 내가 사는 동네의 맥주집과 고기집 이름인데 얼마 전에 다 문 닫았다.
석 류 /고 경 숙
발정기에 들어선 원숭이떼가 엉덩이를 까고 놀리는 줄 알았다.빨간 석류, 아니 차도루 쓴 여자의 은밀한 곳처럼 검붉다는게 정확하겠지'이란産' 딱지 하나씩 엉덩이에 붙이고 위장한 여전사들어쩌면 저속엔 투명한 탄환알갱이들이 가득 숨겨져 있을지 몰라허름한 시장통 경계 느슨한 그 곳에서미제에 물든 내 뱃속을 향해 기습테러를 계획하고 있는 낯선 무리들.
휴전선 두루미 고 경 숙
시베리아에 유배된 내 조상에 대해 묻지 말라 여기는천적의 눈을 피해
필사적인 짝짓기로 실체를 확인하는
아나키스트들만이 사는황무지
지뢰밭에 발 담그고도
나는 글을 몰라 철조망만 흔든다
잿빛 긴 목은 곡사포처럼 태양을 조준한 채 휴면하던 풀들이 일제히 사열을 시작하고
죽음처럼 숨죽인 비열한 독수리떼
몇 알의 곡기로 목구멍을 어른다
숨통을 조이지 마라
절대 강자는 없다
수십령 생애동안
오직사랑했던 것들만 기억하련다
북을 두드려라 두드려
마지막 힘을 다해
부리로 철조망을 갉으며진격이다
하늘이 원무한다 여기는고립된 육지속의 섬
농약먹고 박제되어
화려한 부활을 꿈꾸는두루미 한 마리
자동소총에 머리를 기대고
신새벽자유를 지킨다.
[수주문학상 수상작
]
붉은골목 /조정
길을 잘못 들기는 흔한 일이어서
별수 없이 다음 골목으로 꺾어들어도 길은 이어지기 마련인데
그 골목에서
늙은 개가 내 차의 브레이크를 밟은 건 아니었다
번호 붙은 유리문들이
홍등 아래 딸 하나씩 담고 사열 중이었다
나는 남대문시장 지하에 앉아
아무도 내가 파는 물건을 사가지 않는 헐벗은 밤을 생으로 삼켜가며
오장육부를 조금씩 헐어 빚을 갚을 때였는데
길을 잘못 드는 사내도 없는 대낮 골목에 차를 세우고
생수 한 병 사들고
편의점 의자에 앉아버렸다
와이드 판탈롱 밑 이십 센티 통굽 샌들에 저마다 잘못 접어든 길을 끌고
딸들이 흔들흔들 걸어 나와
내 간과 쓸개와 가래가 잡히기 시작한 허파를
뚝뚝 떼어 먹었다
기도한 지 오래되어 약도 되지 않는 나는 미안할 뿐이었다
A-6호 유리를 닦고 난 여자가 A-7호, A-8호 앞으로
출렁거리며 앙동이를 옮겨가는 동안
생수를 마셨다
남자 없이 아이를 배고 싶었다
내 자궁에 무릎 꿇고 앉아
낳고 낳아야 할 딸들을 담고 나오는 골목이 붉었다
<이발소 그림처럼>실천문학, 2007
안좌 등대/조정
걸어서 물 위로 오 리쯤 가는 길에 그가 있다
고집 센 사랑니처럼
별 쓸모도 없는
안도나 휴식이나 평화나 위로 같은 말을 중얼거리는
그의 음성을 듣지 않으려면
주전자에 물 끓여놓고
그와 마주 보는 창가에 차까지 한 통 내려놓고
앉지 말아야 하는데
알면서도 빚진 여자처럼 그 앞에 앉는다
그는 빚이 없다
아쉬울 때만 저를 알은체하는 배들을 위해
밤마다 불을 켜고
나팔을 부우부 불어 다 갚았다
오타 전태련
컴퓨터 자판기로 별을 치다 벌을 치고사슴을 치다 가슴을 친다.
오타 투성이 글내 수족에 딸린 손이지만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을마음은 수십 번 그러지 말자 다짐하지만남의 마음같이 느닷없이 끼어드는 오타
어찌하랴,어찌하랴,입으로 치는 오타는여지없이 상대의 맘에상처를 남기고 돌아오는 것을한번 친 오타 바로잡는 일 이틀, 사흘그 가슴에 흔적 지우기 위해얼마나 긴 세월 닦아야 할지
숱한 사람들 맘에 쳐날린 오타들더러는 지우고 더러는 여전히 비뚤어진 채못처럼 박혀 있을 헛디딘 것들
어쩌면 생은 그 자체로 오타가 아닌가그때 그 순간의 선택이 옳았는가곧은 길 버리고 몇 굽이 힘겹게 돌아치진 않았는가돌아보면내 삶의 *팔할은 오타인 것을
*서정주의 시 <자화상>에 있는 단어
푸른글 사족 최영미
밤늦게 내 방에 있는 모든 시집을 꺼내 늘어놓고
시인들이 쓴, 시인들이 썼다고 주장하는 시를
하나하나 타이핑을 하면서 시집을 읽으니 참으로 재미있다.
자신이 발가벗었다고 주장하는 사람
좀 더 벗어야 한다고 하는 사람
우리는 벗기 위해 태어났다는 사람
하늘나라에 가서 벗는 것이 좋다고 하는 사람
지상에서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 벗어야 한다는 사람
게다가 아름다운 옷으로 겹겹히 자신을 꾸미고
그 옷으로 남까지 꾸미고 싶은 사람까지..
사랑이 넘쳐서 독약이 된 이 시대에
남자 시인, 여자 시인, 늙은 시인, 교수가 된 시인,
죽은 시인, 시인을 꿈꾸는 시인, 자칭 시인, 시인이라고 우기는 시인,
시인이 아니라고 하는 시인, 시인인체 하는 시인,
자기 선생이 시인이라서 시인이 된 시인, 시인 학교를 나와서 시인이 된 시인,
자기들끼리 모여서 시인이라고 주장하는 시인, 자칭 아웃사이드 시인,
중 벼슬도 닭벼슬보다 못하다고 했는데 그보다 못한
등단이란 닭벼슬을 높이 들고 지붕위에서 목청을 높이는 시인,
슬픈 시인, 행복에 겨운 시인, 괴로운 시인, 아픈 시인, 배고픈 시인,
글쓰기는 괴롭다고 능청을 떠는 시인, 사랑타령에 날 새는 줄 모르는 시인,
모두 한 자리에 모아 놓고 한 겹씩 옷을 벗겨가며
사랑타령을 늘어놓게 하고는 바라보니 그 모습들이 참으로 가관이다.
달 밝고 별 좋은 날에 시인들이 모두 모아서
은모래 펼쳐진 강가에 발가벗겨 놓고 합창을 시켜보면
누가 누구인줄 그제서야 알게 되겠지만
그래도 가을 밤에는 역시 사랑타령이 제격이다.
그리고 죤스타인 벡이 노벨문학상 시상식장에서
<글은 평범한 사람들이 쓰는 것이며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에게 필요하며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존재한다> 하였다니
우리 같이 무식한 자들도 용기를 내 볼일이다.
진정 우리가 사랑을 안다면 누구나 글 한자 쓰지 않아도 시인이 되려니...
돼지들에게 최영미
언젠가 몹시 피곤한 오후
,돼지에게 진주를 준 적이 있다.
좋아라 날뛰며 그는 다른 돼지들에게 뛰어가
진주가 내 것이 되었다고 자랑했다.
하나 그건 금이 간 진주.
그는 모른다.
내 서랍 속엔 더 맑고 흠 없는 진주가 잠자고 있으니.
그가 가진 건 시장에 내다 팔지도 못할 못난이 진주.
철없는 아이들의 장난감으로나 쓰이라지.
떠들기 좋아하는 돼지들의 술안주로나 씹히라지..
언젠가 몹시 흐리고 피곤한 오후
,비를 피하려 들어간 오두막에서우연히 만난 돼지에게
(그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나도 몰래 진주를 주었다..
그날 이후 열 마리의 배고픈 돼지들이 달려들어
내게 진주를 달라고 외쳐댔다..
" 진주를 줘. 내게도 진주를 줘.
진주를 내놔."정중하게 간청하다
뻔뻔스레 요구했다.
나는 또 마지못해, 지겨워서,
그들의 고함소리에 이웃의 잠이 깰까 두려워
어느 낯선 돼지에게 진주를 주었다
.(예전보다 더 못생긴 진주였다).
다음날 아침,
해가 뜨기도 전에스무 마리의 살찐 돼지들이 대문 앞에 나타났다
.늑대와 여우를 데리고 사나운 짐승의 무리들이 담을 넘어
마당의 꽃밭을 짓밟고 화분을 엎고,
내가 아끼는 봉선화의 여린 가지를 꺾었다..
어린 늑대들은 잔인했고,
세상사에 통달한 늙은 여우들은 교활했다…
나는 도망쳤다.
나는 멀리, 그들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도망갔다.
친구에게 빌린 돈으로 기차를 타고 배에 올랐다.
그들이 보낸 편지를 찢고 전화를 끊었다.
그래도 그 탐욕스런 돼지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긴 여행에서 돌아온나는 늙고 병들어,
자리에서 일어날 힘도 없는데
그들은 내게 진주를 달라고
마지막으로 제발 한 번만 달라고……
돼지의 변신 최영미
그는 원래 평범한 돼지였다
감방에서 한 이십 년 썩은 뒤에 그는 여우가 되었다
그는 워낙 작고 소심한 돼지엿는데
어느 화창한 봄날, 감옥을 나온 뒤
사람들이 그를 높이 쳐다보면서
어떻게 그 긴 겨울을 견디었냐고 우러러보면서
하루가 다르게 키가 커졌다
그는 자신이 실제보다 돋보이는 각도를 알고
카메라를 들이대면 (그 방향으로) 몸을 틀고
머리칼을 쓸어 넘긴다
무슨 말을 하면 학생들이 좋아할까?
어떻게 청중을 감동시킬까?
박수가 터질 시간을 미리 연구하는
머릿속은 온갖 속된 욕망과 계산들로 복잡하지만
카메라 앞에선 우주의 고뇌를 혼자 짊어진 듯 심각해지는
냄새나는 돼지 중의 돼지를
하늘에서 내려온 선비로 모시며
언제까지나 사람들은 그를 찬미하고 또 찬미하리라.
앞으로도 이 나라는 그를 닮은 여우들 차지라는
변치 않을 오래된 역설이...... 나는 슬프다.
시집 <돼지들에게> 실천문학사
분리수거최영미
너를 향한 나의 애증을 분리수거할 수 있다면
원망은 원망끼리
그리움은 그리움끼리
맥주 깡통 따듯 한꺼번에 터트릴 수 있다면
2주마다 한번씩 콱! 눌러 밟아 버린다면
너를 만나 오월과 너와 헤어진 시월을 기억의 서랍에 따로 모셔둔다면
아름다웠던 날들만 모아 꽃병에 꽂을 수 있다면
차라리, 홀로 자족했던 지난 여름으로 돌아가
네가 준 환희와 고통을 너에게 되돌려줄 수 있다면
여름에 가을을, 네가 없어 끔찍했던 겨울을 미리 앓지 않아도 되리라
늦기 전에, 아주 더 늦기 전에
내 노래가 너를 건드린다면
말라 비틀어진 세상의 가슴들을 흔들어 뛰게 한다면
어느날 문득 우리를 깨우는 봄비처럼
아아 - 우우 - 허공에 메아리칠 수 있다면 ------
시집 <꿈의 페달을 밟고> 창작과 비평사
마지막 섹스의 추억 최영미
아침상 오른 굴비 한 마리
발르다 나는 보았네
마침내 드러난 육신의 비밀
파헤쳐진 오장육부,
산산이 부서진 살점들
진실이란 이런 것인가
한꺼풀 벗기면 뼈와 살로만 수습돼
그날 밤 음부처럼 무섭도록 단순해지는 사연
죽은 살 찢으며 나는 알았네
상처도 산 자만이 걸치는 옷
더이상 아프지 않겠다는 약속
그런 사랑 여러번 했네
찬란한 비늘, 겹겹이 구름 걷히자
우수수 쏟아지던 아침햇살
그 투명함에 놀라 껍질째 오그라들던
너와 나누가 먼저 없이,
주섬주섬 온몸에차가운 비늘을 꽂았지
살아서 팔딱이던 말들
살아서 고프던 몸짓
모두 잃고 나는 씹었네
입안 가득 고여오는
마지막 섹스의 추억
봄은 소주를 마신다 이은채
납죽납죽 받아 마신 낮술에,취기가,물오르듯
내 아랫도리를 은밀히 더듬고 있다
봄은 소주를 마신다
저기, 저, 먼 데 산골짜기 아래복사꽃 불콰히 부풀어오르는 구릉이 구렁이 같이산의 가랑이 속으로 꿈틀, 꿈틀,기어들고 있다
위험한 그림 이은채
그때 느닷없이 해안의 한끝이 기울기 시작했네
기슭을 떠돌던 바람이 달려와
철 이른 동백숲 벼랑을 사정없이 후려치고는 사라져버렸지
나는 사뭇 근심스러워져 욱신욱신 몸살 앓는 벼랑 근처를 서성였다
네평일 낮 두시의 벤치가 늙은이마냥 다리를 벌리고 앉아
꾸벅, 꾸벅, 졸고 있더군
자꾸 막막해져서 더듬더듬 소주를 마셨네
꽃이야 피든 말든
나 다시는 태어나지 말아야지 말아야지……
해안의 한끝이 마저 기울자
이른 동백숲 피멍든 벼랑 아래
붉게 물든 그림자 하나 절룩이며 돌아섰네
해조음, 뻘밭마저 허전했던 그해
봄은 아무래도 내겐 영 위험한 그림이었네
푸른 감나무가 있는 집 이은채
이제 감나무가 주인이 된 빈집
어린 감꽃 매단 가지 하나가 슬그머니 부엌쪽을 기웃거린다
누진 부뚜막을 말리며 피어오를 매캐한 저녁연기와
뜸이 들기 시작하는 밥냄새와
굽은 허리로 소담스레 밥을 푸는 어머니와
빈 빨랫줄을 악착스레 물고있는 녹슨 집게도
저리 끈질긴 굴뚝도
잔뜩 버티고 선 저 문살도
목숨보다 슬픈 일이 또 있을까
감나무 어린 감꽃 글썽이며
더러 죽은 사람과 떠난 사람을 부르고 있다
시집 <봄은 소주를 마신다> 2004, 시와시학사
뻔뻔스런 장밋빛 유방 이윤설
부끄러워할 것은 없어, 허나
드러내놓고 자랑할 만한 것은 아니지
달력 속 되바라진 장밋빛 유방
천박한 것 같으니라구.
여름엔 얼음팝니다
겨울엔 기름팝니다
얼음과 기름, 물과 불의
음양의 오묘한 조화가
사이좋게 한 집서 배달되는
달동네 그 가게
웃통 벗은
시꺼먼 근육질
가랑이 찢어지게 벌려 앉아
턱 쳐들어 짬뽕면발 감아 먹고
건더기처럼 소파에 눌어붙어 자던 사내
본데 없는 녀석 같으니라구.
지날 때마다 후덥지근 공기에 목졸린 선풍기가
덜덜덜 꼭 숨 끊어질 듯 돌아가던
여름엔 얼음을
겨울엔 기름을
물불 안 가리는 이율배반의 야합을
집집이 배달하던 그 사내
눈 한번 마주쳐도 자줏빛으로 붉어지던
보일라구멍에 기름호스를 넣느라 내리뜬 속눈썹
눈꼬리 끝이 말려 올라간
분홍 입술이 살짝 벌어진
몸 난 미소년
아 나는 장밋빛 유방을 질투하였네
잠든 미소년의 얼굴을 뒤덮은 뻔뻔스런 장밋빛 유방을.
문학과경계 2006, 봄호
꽃굿에 들다 박라연
영취산
진달래, 화섬 같다
저 화력이면
한 집안의 어두운 내력쯤은
거뜬히 물어갈 기세다
세상의 야윈 종아리들을 만져본다
상처가 탄력인데
어두운 내력 죄다 줘버리면
무엇으로 세상을 건너지?
딴 몸의 지체까지 이고지고
산 순간들이
숨어 자라는 암(癌)꽃씨 되는지
너무캄캄해서 오래오래 비워낸 시(詩)
선경을 불러내는지
복숭아꽃 살구꽃 도라지꽃 이 세상 꽃들
다 불러낼 때쯤
내장 속 암꽃마저 불러낼 때쯤
아! 나는 잠이 들고 잠든 몸에
꽃불 난다
불탄 자리에 걸린 희귀한 거울
거울이 피워낸 꽃
섬굿이 치는 최대의 선경이라면
화섬 16번지는( )속 이름들로
등기내주고 싶다
시집 <우주 돌아가셨다> 랜덤아우스중앙
화두냐 화투냐 김민정
-작은 사건들1
눈이 먼 뒤에도 할머니, 손에서 화투장을 놓지 않으시다 자거나 먹거나 싸거나 할 때나 살짝 꼭 쥔 주먹이시고 보통은 가부좌를 튼 채로 패를 쫙 펼친 채 살짝 꼭 졸고 계시다 어디 어디보자 그렇게나 뒤집혀 내게로만 빤한 패라지만 할머니, 이매조냐 풍이냐 임이 곧 근심이거늘 할머니, 흑싸리냐 빨간싸리냐 죽음이 곧 천복이거늘 숨이 멎은 뒤에도 할머니, 끝끝내 손에서 화투장을 놓지 않으시다
[한국문학] 2007, 가을호
고등어 부인의 윙크 김민정
한밤중에 목이 말라 냉장고를 열어보니 밤의 푸른 냉장고는 고장이 났고 나는 거기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어둠으로 불 밝히는 캄캄한 대낮, 갈퀴 달린 내 손톱은 빙산처럼 희게 빛나는 검은 저 삼각주를 박박 긁어대는데 내 음부에서 철철 피 흘렸다. 달콤 쌉싸래한 시럽, 붉은 고 촛농에 젖어 살빛 카스텔라는 곰팡 난 매트리스로 푹 번져가는데 그 위로 삐걱, 삐걱 소리를 내며 꿈틀, 꿈틀거리는 이봐요 고등어 부인 씨…… 그녀는 한창 자위중이었다.
대지의 손을 빌려 뜨거운 혀와 같이 현란한 손놀림으로 그녀의 속속곳 속곳 속에 물살을 일으키는 그녀, 출렁출렁 밀려갔다 밀려오는 파도를 이불처럼 덮어쓰고도 푸들푸들 살 떨어대는 그녀, 그녀가 내게 윙크하는데 새까만 그녀의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러오더니 가속도가 붙은 볼링공처럼 삽시간에 날 쓰러뜨리며 말했다. 너 하고 싶지? 에이 하고 싶으면서 뭘. 아뇨, 나는 아?n. 순간 나는 하이힐 벗어 그녀의 양쪽 뺨을 후려찍고 말았다. 거짓말! 분명 넌 하고 싶은 거야! 이런 씨발, 아니, 아니라잖아. 참다 못한 내가 그녀의 알주머니를 싹둑싹둑 가위질하자 김말이 속 당면처럼 빼곡히 들어찬 그녀들이 잘린 입 밖으로 일제히 폭소를 터뜨렸다. 이봐 고등어 부인 씨, 난 단지 갑갑증이 나서 살짝 따고플 뿐이라고!
나는 브래지어를 벗어던졌다. 나는 팬티도 벗어던졌다. 나는 콘택트렌즈와 치아교정기에 인조 속눈썹까지 자꾸만 벗고 또 벗어던졌다. 곤약같이 껍질 벗긴 흰 살점 덩어리, 이마저도 체증이 일어 나는 펄펄 끓는 기름 솥단지 안으로 다이빙해 들어갔다. 백살 노파의 미주알처럼 겹겹의 허물이 벗겨졌다 입혀지고 까졌다가 딱지 앉더니 유면 위로 샛노란 튀김옷의 그녀가 솟구쳐오르는 것이었다. 그녀가 딸깍, 층층서랍으로 계단이 난 제 문을 따고 들어가자 화살표처럼 질주해나가는 앙상한 들개들이 있었다. 그녀가 출렁, 젖꼭지를 새순 삼아 양팔 벌린 젖나무가 되었을 때 까지마다 치렁치렁 늘어진 포대자루처럼 젖을 빨아대는 투실투실한 들개들이 있었다. 그리하여 어느 날 아침 손이 없는 고등어 부인이 날개 같은 지느러미로 비질을 끝냈을 때 쓰레받기 위에는 말린 고추처럼 꼬부라진 황금빛 열쇠들로 수북하였다.
시집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열림원, 2005
뜨거운 상상 한혜영
누구는 이름만 들어도 플로리다, 플로리다 황홀하다고 밀봉된 꿀단지 어루만지듯 은근하게 발음을 내었지만 실은 옛날엔 여기가 바다였다고... 헌데도 왠지 나는 어느 거인의 등짝 위에다 살림을 차린 것만 같네 뜨겁게 달아오른 사내의 몸뚱이를 휘까닥 뒤집으면 고 밑에 땀 쫑알쫑알 흘리며 숨어 있던 계집의 얼굴 하나가 배시시 웃으며 드러날 것 같아 진주에 산호 액세서리를 주렁주렁 걸친 계집, 요 비릿한 바람의 지느러미만 봐도 바다였던 것은 확실한데... 뜨거워, 뜨거워 정념의 플로리다는 훅훅거리며 꽃을 피운다네 사철 들썩이는 대지, 지칠 줄 모르는 사내 발바닥이 마이애미쯤 된다고 치고 간지럼이나 한바탕 먹여 볼까? 큭큭거리다가 이몸 은근슬쩍 달아오르는 뜨거운 상상
태평양을 다스리는 세탁소 한혜영
공무원을 하던 동생이 그 짓을 때려치우고 태평양을 건너 뉴욕으로 이주, 세탁소 주인이
되어버린 뒤 일년 내내 태평양 주름살과 씨름을 하고 있다 눌러도 눌러도 좀처럼 펴지지
않는 태평양 그 시퍼런 치마폭 다려야할 물굽이는 첩첩이 밀려오고, 질 나쁜 가루비누처럼
시원찮은 영어는 좀처럼 거품이 일지 않아
다 때려치우고, 돌아갈까?
니 맘 내 다 안다,
안다 하면서도 치마폭 솔기 하나 잡아주지 못하는 이 누나도 사실은 엉망진창으로 구겨진
바다를 입은 채 십년 내내 미친것처럼 출렁거렸다
어차피 이쪽과 저쪽 끝에서 팽팽하게 잡아주지 못할 바에야, 동생아 바다는 구겨
진 채로 펄럭일 수밖에 없으니
펄럭이게 내버려두거라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다리미 바닥에 쩍쩍 들러붙는 바다가 있
어 오히려 다행한 일
아니겠느냐아니겠느냐
이런 소리를 내며 물결이 밀려온다는 거, 머지않아 듣게 될 것이니
고스란히 듣게 될 터이니
똥끝 한혜영
임종이 가까워지면 제일 먼저 활짝 열리는 것이 항문이라고 하네 열고 채우기를 반복했던 둥근 괄약근의 열쇠를 찾을 수 없는 세상 바깥으로, 아주 던져버리는 일이라 하네 어머니의 똥끝은 왜 그리 자주 탔는지 다급한 일 겨우겨우 해결을 보고 나면 어느 틈에 불씨 되살아나 바짝바짝 타들어갔던 '당신의 항문을 페쇄합니다' 의사는 매정하게도 각께를 땅땅! 쳐버렸다네 캄캄한 절망 곳곳을 다 뒤져가며 癌, 癌, 癌 전부 캐내고 말거라고. 날카로운 불면 끝으로 후벼 파낸 것들을 들고 달려갔지만 턱 하니 가로 막는 각께 앞에서 울부짖다가 도리없이 급하게 벽을 뚫어서 만든 인공 문으로 울컥울컥, 그 서러운 것들을 내놓았다네 둥근 손잡이도 자존심도 없이 활짝 열려있던 무시로 죽음이 들락거렸던 인공항문 그 중심에 기정사실로 꽂혀있던 저승의 빨대는 참말로 입심 한 번 무서웠네 누구나 산다는 것은 똥끝 태우는 연속이겠지만 어쩌다 똥끝을 다 태워먹고 자신의 몸속에 갇혀 전전긍긍하며 절규했던 아아 내 어머니! 똥끝이 땅끝과 같다는 말을 그때 나는 깨달았네
시집 <태평양을 다리는 세탁소>
단추를 달다가 한혜영
나뭇잎 하나가 까딱이 없는 말간 대낮에 단추를 달다가 농담처럼 부음을 듣습니다 기가 막혀 앞섶에 바늘을 꽂고 고개 천천히 길어 올리니 삼베옷을 걸친 누런 허공이 징소리를 징징 내며 목을 놓기 시작을 합니다 한번 떨어진 목숨은 절대로 달아 올릴 수가 없는 단추라네요 부음 하나에 내 앉은키가 폭삭 무너져버린, 이런 날은 귀신 눈빛이 분꽃 씨처럼 또렷하고 모가지 조금만 길게 뽑아도 저승길이 훤히 보인다고 십수 년을 그림액자 속에서 나랑 같이 늙어가던 목련꽃이 하얗게 쇤 소리로 두런거립니다 죽음이란 방금 전에 내가 그랬듯이 앞섶에 꽂아두고 까맣게 잊어버렸던 바늘과도 같은 거라네요 언제 심장을 찔릴지 모르는
민달팽이들 문성해
지하 사우나 앞을 지나는데 환풍기에서 훅 끼쳐 나오는 열기, 살 냄새들 지금 내가 밟고 선 깊고 깊은 땅 속 나라에 벌거숭이들이 버글 버글하다는 상상을 해 본다
헬스에서 PC방에서 식당까지 그곳에는 없는 게 없다 아침부터 한 밤까지 내처 사는 여편네들도 있다 지상은 이제 피곤한 싸움터일 뿐, 그곳은 수술자국 남겨진 아랫배를 다 드러내어도 부끄럽지 않은 해방 터가 된지 오래,
들어갔다 나오는 얼굴들이 다 하얗다 눈부신 나자로의 얼굴도 저랬을까 죽음 이후가 제발 그렇다면 먼저 가신 부모 형제들과 아기 때처럼 발가벗고 앉아 오로지 득도에만 골몰한 민달팽이로 모여 사는 것도 행복한 일
오늘 무언가를 잊고 싶다면
활엽수림 영화관 문성해
그 건물의 옥상에는
뿌리를 비좁은 화분 속에 쑤셔박은 나무들이
오늘도 시퍼렇게 자라고 있다
그 옥상 바로 밑에 있는 오래된 상영관엘 간 적이 있다
그때 화면 위로 심하게 내리던 뿌리들은
실은, 옥상에 있던 나무들 뿌리였지 않았을까
뿌리들은 시멘트를 뚫고 내려와
영화 속 우주선이나 항공모함을 타고
이 시간에도 유유히세계를 누비고 있지나 않을까
그래서일까
그 건물의 옥상에는사철 시퍼런 이파리들이
지겹지도 않은 듯 팔 벌리고 서 있다
뿌리들은 어느새
영화를 보고 나오는 사람들 흰자위에도 가늘게 뻗어 있다
그들은 언제부턴가 눈에서 눈으로
푸른 상영관을 하나씩 늘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건물의 옥상에는뒤엉킨 영화필름 같은 활엽수림이 있다
바람이 불 때면
어둠을 횡단한 뿌리들 모험담들로
무수한 이파리들이 술렁거린다
숯내가 나는 꽃밭 이운진
때 없이 바람에 씌인 듯 울 일이 생겨서 꽃밭에 든 날이었는데 아픈 숨소리도 없이 가슴 펼쳐놓은 꽃처럼 내 시가 쓴 물이라곤 올라오지 않는 꽃잎은 아닐까 문득 근심하다가 한 시절 가꾼 꽃밭을 모두 뭉개고 싶어졌다 바람의 냄새로 부푼 꽃송이들 찢어버리고 나비도 불러들였을 꽃의 입술도 뜯어버리고 어떤 계절에도 꿰맬 수 없는 상처를 만들고 싶었다 달처럼 커다란 멍을 파놓고 싶었다 그러면 뜯긴 살점에 들숨 날숨이 뒤엉켜 진물 질질 흐르기도 할 테고 제 멍을 밟지 않고서는 꽃의 뼈를 다시 세우지도 못 할테니 꽃밭의 숨결이 격렬해 질 것 아닌가 성냥불을 그어 붙이면 활활 타오르는 숨결이 몸 속의 열을 밀고 내려가 실한 뿌리를 다시 박아줄 것 아닌가 땅 속의 캄캄함을 끌어올린 울긋불긋한 상처들 기껏해야 봄날을 두드리고 말지라도 그 위를 한 번 날아간 나비는 전할 것 아닌가 숯내가 나는 꽃밭이 있다고, 때 없이 꽃 타는 냄새에 씌여 꽃밭에 든 날 나는 내 시를 태우고 싶었다
『시인시각』 2007년 봄호
당신이라는 창문 이운진
늘 보던 집의 창문이 닫혀 있다 담쟁이가 몰려온다 심장에 심장을 잇대어가며 할딱거리고 와글거리며 기어이 창문까지 올라오는 저 악착의 힘에 집이 시퍼렇게 질려 있다 한 가지 생각만으로 창문은 닫혀 있다 젊음의 막바지에 이르면 아픔을 들추는 잔인한 방법 하나쯤은 알기 마련이어서 창문이 스스로 금을 내어 담쟁이의 손을 움켜쥘 것이라는 걸 담쟁이는 톱니를 달고 기울어진 창틀의 틈새기를 뚫을 것이라는 걸 맞부닥뜨린 몸들끼리는 알고 있어서 누구도 쉽게 서로를 넘어뜨리지 못한다 그저 집은 벽을 내어주고 담쟁이는 창문을 피하기로 한다 어느 쪽도 뒷걸음 없이 팽팽하다 그 위태로운 균형을 유지하며 창문은 닫혀 있다 창문 그림자를 끌어다 덮고 꽃이 핀다 담쟁이들의 잎겨드랑이가 누르끄레해진다 안으로 들이치고 오래 그리워한 흔적은 무엇으로든 남아서 다시 시절을 견딘다 허물어지면서 묻히면서 벽도 함께 견딘다 그러나 그 창문, 참혹한 기다림에 있는, 반듯하게 앓고 있는, 당신이라는 창문 또한 그 여자의 가슴에 달라붙은 담쟁이였으니
<시와상상> 2007년 여름호
갑사 가는 길 이운진
누구나 한 번은 길을 잃는다면
그래서 한 자리에 오래 서 있어야 한다면
거기, 서 있고 싶네
일주문 넘어가는 바람처럼
풍경소리에 걸음 멈추고
그곳에서 길을 잃고 싶네
산그늘 물소리 깊어져서
늙고 오래된 나무 꽃이 지고
꽃 피운 흔적도 지고 나면
말言까지 다 지우는 마음처럼
수만 개의 내 꿈들 떨구어 내는 일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저, 먼 길 끝나지 않았으면
계간 시인시각 2006년 봄호
弔燈이 있는 풍경 문정희
이내 조등이 걸리고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아무도 울지 않았다어머니는 80세까지 장수를 했으니까우는 척만 했다오랜 병석에 있었으니까하지만 어머니가 죽었다내 엄마, 그 눈물이그 사람이 죽었다저녁이 되자 더 기막힌 일이 일어났다내가 배가 고파지는 것이었다어머니가 죽었는데내 위장이 밥을 부르고 있었다누군가 갖다 준 슬픈 밥을 못 이긴 척 먹고 있을 때고향에서 친척들이 들이닥쳤다영정 앞에 그들은 잠시 고개를 숙인 뒤몇 십 년 만에 내 손을 잡았다그리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아니, 이 사람이 막내 아닌가? 폭 늙었구려. 주저 없이 나를 구덩이 속에 처박았다이어 더 정확한 조준으로 마지막 확인 사살을 했다 못 알아보겠어.꼭 돌아가신 어머니인 줄 알았네
성공시대 문정희
어떻게 하지? 나 그만 부자가 되고 말았네
대형 냉장고에 가득한 음식
옷장에 걸린 수십 벌의 상표들
사방에 행복은 흔하기도 하지
언제든 부르면 달려오는 자장면
오른발만 살짝 얹으면 굴러가는 자동차
핸들을 이리저리 돌리기만 하면
나 어디든 갈 수 있네
나 성공하고 말았네
이제 시만 폐업하면 불행 끝
시 대신 진주목걸이 하나만 사서 걸면 오케이
내 가슴에 피었다 지는 노을과 신록
아침 햇살보다 맑은 눈물
도둑고양이처럼 기어오르던 고독 다 귀찮아
시 파산 선고
행복 벤처 시작할까
그리고 저 캄캄한 도시 속으로
몰고 폭탄같이 강렬한 차 하나
미친 듯이 질주하기만 하면
<현대시> 4월호
아무 것도 아닌 실금들이 박옥순
나는 왜 그렇게 자주 금을 밟았을까다른 아이들은 폴짝폴짝 잘도 뛰어넘고깨금발 딛고도 사뿐사뿐 잘도 넘어가는데아무 것도 아닌 검은 고무줄이 바닥에 그려 놓은 투박한 금이 왜 그리 두려웠을까학교 문턱을 밟으면서 금 밟지 않는 것을 배웠다정사각형 안에 넘치지 않고 한글을 채우는 일책상에 그어진 금 너머 짝궁의 자리를 넘보지 않는 일매번 정해진 자리에 앉고 정해진 자리에서 일어서는 일출가외인出嫁外人이 된 언니들은호적에 붉은 줄 긋고 제각기 남의 집안으로 들어갔다딸들은 무덤에 가도 오르지 못할 박씨 집안 족보에김씨, 이씨, 강씨, 정씨 성을 가진 남자들이 차례로 들어섰다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세상 모든 일들이 아주 작은 금에서 비롯하는 것임을아무 것도 아닌 듯 보이는 실금들이완강한 금기의 벽이 된다는 것을그리고 그 벽을 넘어서지 못해때로 허옇게 속이 터져스스로 금이 가는 이들도 있다는 것을
개신고물상 박옥순
1충대우 6로 29번지언제부턴가 이곳에버려진 꿈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냉매가 지나던 혈관이 터져 버린 후감옥 같던 마음의 빗장을 열어둔문짝 떨어진 냉장고가난한 사람의 소박한 꿈으로바퀴 탱탱하게 부풀었을젊음이 짐스럽지 않던페달 부러진 늙은 자전거굴착기의 굉음에 허리 끊어지기 전까지어느 건물, 어느 다리의 튼튼한뼈대였을 등 굽은 철근조각지상에서의 마지막 눈물인 듯눈 질끈 감고 삼키던 독한 시름제 허리 꺾어가며 위로해주던 소주병그리고, 불개미 같은 세월의 녹을 달고달동네의 겨울을 기억하는 연탄집게까지2맞은 편엔 몇 달이 멀다고간판이 바뀌는 상점고물상 옆 커피숍이 어울리지 않았는지어제는 뼈다귀 해장국 간판을 달았다이 골목의 상점들이 어느새폐허처럼 버티고 선고물상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한 것일까한 자리에서 십여 년 넘게 버텨온 뚝심이제 더 이상 떨어질 바닥은 없다고세상의 낮은 곳 쉬지 않고 살피는 눈저녁에는 낡은 호미자루 같은 등으로수레 가득 폐지를 싣고 오는 노인들
그녀의 바닥 박옥순
김신영저 늙은 여자의거웃 하나 없이 어두운 음부를 곁눈질한다샤워기는 안중에도 없다이따금 바가지로 물을 끼얹을 뿐그때마다 목욕탕 바닥이 철퍼덕 철퍼덕 울어댄다그녀의 삭정이 같은 몸엔 섬이 하나 있다한 삶이 떨어져 나온 흔적과 또 다른 생을 잉태했던 곳언제부터인가 그 아스라한 경계가 혹처럼 불거졌다깊어진 주름에 가려 배꼽은 보이지 않는다한때 삶의 오르가슴을 향해 부풀어 오르던 자궁은이젠 캄캄한 주름의 계곡이다저 주름들, 나무들이 나이테를 그려왔다그 푸른 줄무늬 실핏줄처럼 온몸에 번질 때주름은 비로소 옹송그려 깊어지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중심으로 향할수록 점점 조밀해지는 등고선기억하는가, 활화산처럼 타오르던 한 생애의 봉우리그러나 이젠 고통의 분화구만 남은 잊혀진 섬 하나보아라, 늙은 여자의 슬픈 민둥산겹주름이 사방연속 무늬처럼 이어진저 비리고 캄캄한 구멍이나와 너 그리고 세상이 일어선 곳이다.
냇물이 풀릴 때 박옥순
날이 풀린다어머니 개울가에서 빨래를 한다방망이를 휘두를 때마다 들썩이는 둥근 엉덩이언제 터질지 모를 울음 꼭꼭 참아온봉숭아 씨방처럼 부풀어 오른다
열아홉 녹의홍상 도망치듯 이끌려온 시집구멍 뚫린 창호지 사이로 바라보던동짓달 스무 이튿날, 초야의 서늘한 달무리바람 잘 드는 서향집 기울어진 사랑채용마루를 넘어온 예각의 햇살이장지문 돌쩌귀를 파고들 때고무신 돌려놓고 하늘바라기 하던 어머니밤새 하얀 신발 속에 흥건히 고이는 별빛들그리고 어둠의 탯줄 끌고몇 구비의 강을 건넌 뒤에야희붐한 아침빛에 얼굴 내밀던 아이들
어머니, 그 정결한 이슬 맺혔던 붉은 소청을 빤다쩡쩡 마른 기침으로 호령하는 얼음장 밑으로올올이 풀리는 둥근 방의 기억들오래 웅크리고 앉아 얼어붙은 세월 담금질하던 어머니그 모습 아랫입술 깨물고 바라보던 단발머리 계집애
날이 풀린다어느 등 푸르던 물고기의 비늘눈 시린 박꽃처럼 둥 둥 둥 물줄기 따라간다나는 까치발 뜨고 점점 씨방에서 멀어지는 길을가늠해본다그러나 저 부풀어 오르는 비린내가 언젠가내 등에 푸른 작살을 꽂으리라
문 밖에는 봄 유행두
지구 끝에서 아내가 붕어빵을 굽고 있다. 파닥거리는 지느러미에서 비늘이 떨어진다. 지구를 한참이나 돌다 온 듯한. 퇴계 선생 지폐 위에 가볍게 흩어진다. 산달 아내. 배가 부푼다.
중환자실. 어머니는 링거병에서 떨어지는 눈물을 한 알씩 세고 계신다. 끼니 때마다 가는 호스 타고 내려가는 미음. 포르말린 먼지 반짝. 휠체어 힐끔 훔쳐보신다.
-저녁마다 어둠이 먼저 눕던 달셋방. 도란도란 웃음을 젓가락질하던 밥상에서 어머니와 아내가 번갈아 등을 토닥거리고
몇 개월 전 신문처럼 할 일 잃고 누운 내 옆에서 아내는 낮은 기도 소리를 쥐어준다. 가끔씩 지구는 벌떡벌떡 몸을 세워 링거병을 흔들고 아내를 병실 바닥까지 내려 앉히지만 아내는 언제나 가지런히 웃는다.
모둠발을 해 본다. 날개가 돋은 휠체어. 휠체어가 대기권을 향해 바퀴를 힘차게 굴린다. 지구가 뒤로 밀리고 있다.
<2007년 경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솟골 유행두
솟골엔 재수 없이 둘이만 산다광대뼈 골 높은 서황댁이랑뻐드렁니도 없어 밥알 녹여먹는 모동댁이랑앙살스런 과부 이가 서 말이라고서황댁 흉보는 모동댁마늘밭 고랑에서 무릎 시리다 푸념하고모동댁 아들 없다 무시하는 서황댁박힌 우물 차지하고 파뿌리 다듬는다솟골에솥단지 하나씩 걸어놓고바람소리에 개 짖으면 서황댁이민 간 아들 같아 삽작문 밀어보고구름 내려앉아 도둑고양이 처마 밑 기웃거리면모동댁미운 척 밥 한 술 던져준다아랫동네 염쟁이영감 새끼 꼴 힘이라도 남아 있을 때죽어야 한다고속없는 아랫배에 쪼글쪼글한 말 집어넣고서황댁 모동댁먼저 죽기 내기한다메아리도 꼴딱 넘어가지 않는 솟골서황댁 모동댁징글징글 산다.
<16회 신라문학대상 당선작>
백양나무 유행두
허연 뼈 드러낸 둥지 무릎에 콩새가 집을 짓는다 밤낮 쉴 새 없이 쪼아대더니 연골을 파내고 들어앉았다 아직 머언 먼 닿지 않을 봄인데 서리 오는 소리라도 들은 것일까 도무지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기억한다 옹이 간질이고 돋은 잎 더듬이며 둥지 찾던 소리와 되돌아 허공 맴돌던 날개의 애처로운 몸짓 그때엔 늑골 떼어 쉬게 해 줄 빈 마음 한 켠 없었다는 것을 살점 하나 남지 않은 시린 어깨에 하늘이 내려 앉는다 쓰린 마음 가만히 무릎에 대어본다 깃털이 따스하다.
<2007년 서정과 현실 봄호 신인당선작>중
사랑방 함순례
울 아부지 서른, 울 엄니 스물 셋 꽃아씨, 아부지 투덕한 살집만 믿고 신접살림 차렸다는디, 기둥 세우고, 짚과 흙 찰박찰박 벽 다져, 오로지 두 양반 손으로 집칸 올렸다는디, 부쳐먹을 땅뙈기가 없는 기라 내사 남아도는 게 힘이여 붉은 동빛 박지르며 집을 나서면, 이윽이윽 해가 지고, 어둠별 묻히고야 삽작을 밀고 들어섰다는디, 한 해 두 해 불어나는 전답, 울 엄니 아부지 얼굴만 봐도 배가 불렀다는디...... 늘어나는 것이 어디 그뿐이랴 울 엄니 이태가 멀다 실제 배가 불렀다는디, 갈이질에, 새끼들 가동질에, 하루 해가 지는지 가는지 하 정신 없었다는디, 울 아부지 저녁밥 안치는 엄니 그대로 부엌바닥에 자빠뜨린 거라 그 징헌 꽃이 셋째 딸년 나였더란다 첫국밥 수저질이 느슨할밖에...... 임자 암 걱정 말어 울 아부지 구렛나룻 쓰윽 훑었다는디, 스무날을 넘기자 사랑방 올린다고 밤새 불을 써 놓고 퉁탕퉁탕 엄니 잠을 깨웠드란다 모름지기 사내 자슥 셋은 되야혀 그때 되믄 계집애들이랑 분별하여 방을 줘야 않겄어! 그렇게 맨몸으로 생을 일궜던 울 아부지, 성 안 차는 아들 두 놈 부려놓고 이젠 여기 없네.
청사포 사진관 손순미바다가 전용 배경인 사진관은 비어 있다 가끔 파도가 들렀다 가고 벽에는 찾아가지 않은 사진들이 유물처럼 걸려 있다 그들은 추억을 포기한 것이다 점포세가 놓인 사진관은 종일 손님이 들지 않는다 그들 삶은 다시 인화하고 싶지 않은 것일까 밀물다방 오토바이 커피 대신 레지를 날라대는 소리 포구를 밀고 간다 해의 긴 렌즈가 사진관을 포착한다 활어차가 지나가고 생선장수가 지나가고 술취한 사내들이 지나가고 저녁 어스럼도 그 앞에서 포즈를 취하다가 고무대야에 얹혀 간다 어디에도 정박되지 못한 사람들이 뱃머리를 돌리며 사진관쪽을 건너다 본다 삶은 더 이상 배경이 아니다 해의 긴 렌즈가 남아 있는 빛 마저 찍어간다 깜깜한 포구는 거대한 암실이다 사진관은 그 암실에 맡겨진다 밤새 현상된 풍경은 사진관에 다시 내걸린다 아무도 그 풍경을 찾아가지 않는다
고등어 파는 사내 손순미
저, 소금을 칠까요? 내가 지긋이 눈을 감아주자 남자의 눈이 고등어 눈처럼 우울하게 빛났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남자의 손등을 물결쳐 나갔다. 당신을 믿을 수 없어요! 끔찍한 추억이, 집 나간 아내를 향해 고등어 푸른 목을 향해 칼을 내리친다. 어디, 얼마나 잘 사나 두고.... 남자는 노련한 검객이다. 순간, 고등어 영혼이 바다로 건너가는 소리를 빗소리가 삼켰을 것이다.
사내는 익숙한 솜씨로 철철, 눈부신 소금을 뿌렸다. 잠깐 동안 메밀꽃이 피는가 했다. 검은 봉지를 받아들자 사내의 생애가 훅, 풍겨 나왔다. 바다는 하늘에 떠 있고 빗물은 소금처럼 짜다. 사내와 비 사이에 서 있는 어둠이 무겁다, 우우 어둠의 무게가 버거워 비는 다시 한 번 난전 바닥을 치기 시작한다. 비의 파편을 피해 처마 밑에 어둠처럼 깃든 사람들, 그 때, 무기력한 눈을 미안하게 켜는 알전구가 어둠을 지워 가는 시각.
청춘 여관 손순미
열 일곱의 머릿결 같은 비의 떨림을 들으며 나는 旅館여관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집에 누웠다어두운 편지 한 통을 던져두고 내가 도망쳐온 세상에서 가장 먼 집은 여관이었다 어머니를 뒤지고 아버지를 뒤지고 아무리 뒤져도 집은 빈털터리비는 박음질하듯 신작로를 뛰어가고 있었다 기차와 비둘기와 그림자와 알 수 없는 중얼거림 속에나는 아무 곳에나 운반되어졌다 내가 제대로 도착할 곳이 없었다 위험한 평화는 계속되었다 세상 바깥을 걷는 듯 독한 방황을 가방 메고 내가 도착한 한 사나흘 여관의 시절 나를 말없이 꼬옥 덮어주던 여관이라는 따뜻한 이불 내 청춘의 바슐라르가 은신하고 있는, 시멘트 바닥을 가슴 치는 비의 현絃이 골목을 돌아나가고 연보라 등꽃의 여관이 비에 젖는다 저 여관이 외로울 때는 누가 안아주지?
칸나 손순미
찬물에 밥을 말아먹었다 더운 바람이 불어오고 마당에 칸나가 피었다 소스라치게 피었다 체한 것이 아닐까 아닐까 했을 때 붉은 꽃의 성대에서 칸나가 피었다 터져 나오는 자궁의 홍등紅燈을 어쩌지 못한 나는 주근깨가 많은 소녀였다 달은 아예 뜨지도 않은 밤에 수돗가에서 몰래 팬티를 빨았다 공포와 수치심이 온몸에 스멀거리는 꽃의 향기는 어두웠다 야광의 안구를 갈아 낀 고양이가 뒤꼍으로 돌아나가고 나는 자궁이 쏘아대는 꽃폭탄에 배를 싸쥐고 누웠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식구들은 밥을 먹고 있었다 칸나가 피었다 배가 아프다 칸나만 보아도 배가 아프다 뜨거운 태양의 여름이 칸나를 지진다 칸나의 음순이 붉어졌다 십만 볼트의 전류가 내 자궁을 지지는 고통을 지나 나는 새끼를 낳은 어미가 되었다 칸나가 어둡다 새끼를 낳은 공포의 추억이 몰려온다
화투(花鬪) 최정례
슬레이트 처마 끝에서
빗방울이 뚝 또 뚝 떨어지구요
창에 기울은 오동꽃이 덩달아 지네요
종일 추녀물에 마당이 파이는 소리
나는 차배달 왔다가 아저씨와
화투를 치는데요
아저씨 화투는 건성이고
내 짧은 치마만 쳐다보네요
청단이고 홍단이고
다 내주지만
나는 시큰둥 풍약이나 하구요
창 밖을 힐끗 보면
오동꽃이 또 하나 떨어지네요
집 생각이 나구요
육목단을 가져오다
먼 날의 왕비
비단과 금침과 황금 지붕을
생각하는데
비는 종일
슬레이트 지붕에 시끄럽구요
팔광을 기다리는데
흑싸리가 기울어 울고 있구요
아저씨도 나처럼 한숨을 쉬네요
이매조가 님이란 건 믿을 수가 없구요
아저씨는 늙은 건달이구요
나는 발랑 까진 아가씨구요
한심한 빗소리는 종일 그치지를 않구요
냇물에 철조망 최정례
우리 모두는 사랑하는 이를 위하여 흐르는 강물이다
어제는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아닌 것 같다
조금 바람이 불었는데
한 가지에 나뭇잎, 잎이
서로 다른 곳을 보며 다른 춤을 추고 있다
저 너머 하늘에
재난 속에서 허덕이다가 조용히 정신을 차린 것 같은 모습으로
구름도 흘러가고 있다
공중에서 무슨 형이상학적 추수를 하는 것 같다
시구문屍口門밖, 봄 안현미
착란에 휩싸인 봄이 그리워요, 비애도 회한도 없는 얼굴로 당신들은 너무나 말짱하잖아요, 착란이 나를 엎질러요, 엎질러진 나는 반성할까 뻔뻔할까, 나의 죄는 가난도 가면도 아니에요, 파란 아침이고 시구문 밖으로 나가면 끝날 이 고통도 아직은 내 거에요, 친절하지 않을래요 종합선물세트처럼 주어지는 생을 사는건 당신들이지 나는 아니에요, 나는 착란의 운명을 타고난 빛나지 않는 별, 빛나는 별도 언젠가는 늙고 죽어요, 우리 모두는 그런 운명을 갖고 태어나지만 영원을 살 것처럼 착란 속에서 살며 비애도 회한도 모르는 얼굴로 우리들은 너무나 말짱해요, 착란에 휩싸인 봄이에요, 사랑 받을 수 있다면 조국을 배신하겠어요, 친구도 부정할 거에요, 전세계가 어떻게 되든 내 알 바가 아니죠, 에디뜨 삐아프의 말이지만 그녀는 조국을 배신하지도 친구를 부정 하지도 않았어요 같은 이유로 나는 착란에 휩싸여요 죽은 사람들 만 불러모아 사망자 주식회사를 만들고 영원히 죽고 싶은 나는, 시구문 밖, 봄 활짝 핀! 착란이 그리워요
산벚나무에 이력서를 내다 최정란
잎 지으랴 꽃 빚으랴 바쁜 나무 봄이 주문한 꽃들의 견적서를 쓰고 잎들의 월간 생산 계획을 짠다 가장 알맞은 순서도에 따라 발주 받은 꽃들을 완성한다 납기에 늦지 않게 꽃들을 싣고 좁은 가지 끝까지 빠짐없이 배달하려면 손이 열 개라도 모자란다 안으로 굳은 옹이를 쓰다듬는 나무 연말 결산은 붉은 낙엽으로 다 턴다 대차대조표에 빈 가지만 남아도 봄이면 다시 꼼꼼하게 부름켜를 조인다 제 몸의 스위치를 올려 가지와 뿌리를 닦고 기름친다 나도 나무공장에 출근하고 싶다 숙련공 아니어서 정식으로 채용이 안 된다면 꽃 지고 난 뒷설거지라도 나무를 거들고 싶다 첫 월급봉투처럼 두근거리며 봄인 나무와 딱 한 번, 접 붙고 싶다 가난한 축제 우은숙
우리 동네 과수원에 봄마다 피는 배꽃
올해도 어김없이 허리 휠 듯 피었는데
고딕체
영농금지가
개발구역 통보한다
숨 막히게 피워낸 눈부신 절정의 행렬
시리도록 폭죽 터진 저 축제 언제 끝날지
아찔한
고요의 시간
화두처럼 번져갈 쯤
난 재빨리 몸 안으로 배나무를 가지고 와
거친 내 몸 구석에 정성 다해 심는다
입안은
금방 배꽃으로
가득 찬 수레다
그 때, 과수원 앞 좁은 길 사이로
천천히 자전거를 밟고 오는 사내 아이
스르륵
흰 꽃잎 열고
배꽃으로 들어온다
바다파는 아낙 우은숙
보길도 예송리에 미역 파는 아낙 있다
오-메 후딱 사소, 좋은 미역 있어라
젖은 꽃 가득 핀 얼굴에 바다가 내 비친다
예순 생의 고리들을 우려낸 짠 미역은
질긴 햇살 닻을 올려 바람처럼 휘돌고
섬보다 깊어진 주름 이마 위에 내린다
차르르 차르르 음표 없는 집을 짓는
예송리 바닷가의 흑자갈 소리 소리들
아낙의 눈시울만큼 붉은 동백꽃을 부르고,
어느 새 미역은 눈물이 되었다가
엽서가 되었다가 하늘이 되었다가
내가 든 봉지 안에서 바다 되어 출렁인다
밤에 눈 뜨는 江우은숙
검푸른 이마 위에 별빛을 따서 담고물결 따라 일렁이는 오늘의 발자욱들 총총히 물을 건너며 하나·둘 깨어난다.
계절의 뜰 안에서 혼절한 목마름물굽이 돌아돌아 밤으로 향하는데 스며라 깊은 숨소리, 밤의 허울 속으로
달빛에 아롱지는 등 시린 환한 속살 어둠을 마시며 끝없이 달려가는 숨쉬는 강물 사이로 내 비치는 숨은 내력.
투명한 거울 속에 또 다른 내일 위해 길게 누워 서성이다 허공 가른 기침소리 밤에만 눈을 뜨는 강, 그 강에 내가 있다.
1998년 동아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꼴림에 대하여 함순례
개구리 울음소리 와글와글 여름밤을 끌고 간다 한 번 하고 싶어 저리 야단들인데 푸른 기운 쌓이는 들녘에 점점 붉은 등불 켜진다 내가 꼴린다는 말 할 때마다 사내들은 가시내가 참, 혀를 찬다 꼴림은 떨림이고 싹이 튼다는 것 무언가 하고 싶어진다는 것 빈 하늘에 기러기를 날려보내는 일 마음속 냉기 당당하게 풀면서 한 발 내딛는 것 개구리 울음소리 저릿저릿 메마른 마음 훑고 간다 물오른 아카시아 꽃잎들 붉은 달빛 안으로 가득 들어앉는다 꼴린다, 화르르 풍요로워지는 초여름 밤
시집『뜨거운 발』(애지, 2006)
문장 함순례
가문의 위용 표지를 문장(門帳)이라 한다 신혼방에 가문의 문장을 새긴 가구를 배치하고 그들만이 볼 수 있는 가구 안쪽에는 누드의 비너스로 사랑의 분위기를 돋우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위 대한 가문들, 벨리니 가문의 문장에는 개 한 마리 들어앉아 있다 뒷발 든 채 영역을 표시하고 있는 것 같다 퉁퉁거리며 냄새를 뿌리는 짐승들. 나무 밑동과 풀숲 전봇대에서 식탁 밑까지, 멀고도 가까운 곳을 파고드는 시인들의 서늘한 문체와 닮아 있다 시의 눈과 문체는 스스로 내려치는 회초리, 발정에 멈출 길 없는 그대도 오늘, 수캐처럼 헐떡이고 계시는가
장님굴 새우 함순례
이만 번 출세하라고 붙여진 이름 이만출, 그는 갓 스물 내 첫 직장의 면접 관이었다. 희고 투명한 얼굴빛, 은근히 풍겨오는 비릿한 문답 끝 남자친구 있어요? 장난처럼 묻던...개구리알을 싸고 있는 한천질이 흘러내리는 듯 마음 휘었는데, 초짜인 내가 어둔 바닥을 더듬어 가는 동안 그는 물길에 편승하여 승승장구했다. 훤칠한 다리, 유려한 사냥 실력은 누구나 겁낼 만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였던가. 깊은 지하 구렁에선 끈적끈적하고 역한 냄새가 물큰 풍겨 나오기도 했다. 그가 살고 있는 물웅덩이는 아주 미끄러워서 돌아 나오는 데만도 한참이나 걸렸다. 백색 투명하여 귀엽지만 성질은 난폭한 육식성의 장님굴 새우, 그의 눈이 퇴화된 건 이미 오래 전의 일이라 했다. 굴 밖으로부터 들이닥친 물살의 폭력에 요직과 좌천을 반복했으나, 그는 부활 의 전사였다. 최소한의 물만으로도 번들대며 한 시절 거뜬히 버틸 수 있었지만, 어느 날 불현듯 그가 물 속 생활에서 은퇴를 했다. 어둠의 촉수가 그의 눈을 열어주었을까. 그렇다고 평화가 온 것은 아니었다. 사실 그동안 고약스레 외면하던 그의 허공을 베 물으며 이만, 출세하라는 이름인가보다! 처음인듯 그의 등뒤에 대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함순례기 함순례
그러니까, 술래라 부른 적 있다 기일게 수울래 부르면 달빛 강변에서 강강수울래 춤추는 듯, 좀 짧게 부르면 술래야술래야 머리카락 보일라 숨은 동무들 찾느라 해거름 길어졌다 해례야 달례야 부르는 벗들도 있다 벗들에게 빛 같은 존재가 되라는 의미겠는데 온몸 붉어지는 호명이다 함수라고도, 수레라고도, 순네라고도, 첩첩산골 가시내가 되었다 미소가 둥글어졌다 글냄새 물씬 나는 필명도 잠깐 생각했지만 지금 나는 태앗적 이름으로 돌아와 있다 들판을 한없이 걸어야 하는 순례에 서 있다 충북 보은군 회북면 용촌리 백삼십육번지 일천구백육십육년 일월 스무여드레 그 하늘에 다시 예를 갖춰야겠다 슬픈 낙타 발굽 소리와 모래바람의 숨통을 열어봐야겠다 순례야 순례야 삼보일배, 다시 돌아와야 하는 그 길엔 철없는 가시나무들이 촘촘했다
무에 그늘이 들었다 조정인
어쩌다 사 들고 온 실팍한 무가 낭패다 토막 난 몸통 깊숙이 그늘이 들었다 혜순아, 어디 가? 조무래기들이 아는 체하면 뭔가 두고 온 게 있다는 듯 먼 데를 가리키던 떠돌이 여자 치마 밑으로 대가리 내민 검정 오줌발이 설레설레 무밭을 적셨다 무밭 둔덕에 우두커니 서 있던 노랗게 횟배 앓는 아이와 마주치면 주위를 둘러보다 씻어 놓은 무처럼 흰 허벅지를 보여주던 여자 그이 눈 속에 그윽한 불꽃이 일렁이고는 했다 끈끈한 바람 두엇이 번갈아 밤 깊은 움집에 들어 새벽녘이면 거적문을 나서더라고, 무청처럼 짙푸르던 소문이 여자를 끝내 방죽으로 밀어 넣었다 별빛 촘촘한 작은 골에 쉬쉬… 물 밖으로 드러난 젖은 머리칼 갓 씻은 얼굴이 초저녁 달덩이 같더라는, 그 해 여름 다 털린 기분이던 아이는 맵고 지린 냄새로 휘감아오는 그이에게서 힘껏 내달렸다 보랏빛 무 꽃밭이 윙윙 귓가에 어지러웠다 토막 난 무, 검푸른 그늘이 들어선 몸통을 집어드는데 시큰한 치정이 아는 체한다
지하드 조정인
포인세티아 손톱 만한 속엣것이
이상하다 바닥에 뚝. 선혈처럼 진다
어제 밤새에도 뚝뚝 앳된 꽃잎을 흘려놓더니
초겨울 임시보호텐트 새우잠에서 눈뜬
차도르 속 겁먹은 검은 눈동자 젖어온다
새로 깐 요 홑청을 적시던
초경의 아침은 그렇듯 문득 찾아오질 않던가
오늘 무슬림의 한 소녀 홀로 해 뜨나보다
울컥울컥 꽃잎을 쏟아내다 보다
꽃을 통과하는 한 발 총성
펄럭, 들쳐지는 지구의 속엣것에
점점이 붉은 체온 번진다
좌욕 김지유
이쁜이 수술을 끝내고 돌아온 그녀가
펄펄 끓는 물로 소독을 한다
막 탯줄을 끊긴 아기가 목욕하듯
새로 태어난 그녀의 가랑이
넓어지고 늘어진 인생 바싹 죄어
떠나간 젊은 애인을 부르려나
열기에 움찔 놀라 두 눈 질끈 감고
다리에 돋는 소름에 담배 한 가치 빼문다
뜨거움에 찔끔 눈물을 삼키며 이를 악물고
하얀 엉덩이를 주저앉힌다
아랫도리가 익어가며 죄어올수록
얼굴의 주름까지 잘라낸 듯 착각도 드는데
몇 모금 깊게 빤 꽁초를 좌변기에 던져 넣으며
좁은 대야에 엉덩이를 들이민다
맹렬한 뜨거움의 첫맛만 참고나면
덧난 사랑마저 소독 돼 새살이 돋을 듯한데
새로운 몸으로 맞이할 첫 사내 곁에
오래도록 머물고 싶은 마음마저 들어
그렇게 속고도 심장의 하초를 벌리려는
마음만은 늘 팽팽하게 조이는
정마저 질기게 탄력이 붙어 탱탱한
그녀가 피맺힌 사타구니를 좌욕 중이다
웹진 시인광장 2007년 겨울호 발표
내 마음의 지도 김경미
천천히 심장 속을 들여다보니요
끊어질 듯 이어지는 단풍길과
거기, 리아스식 해안과 아픈 톱니들 사이 다도해 어둠들
제풀에 섬이 되어
주먹밥 크기들로 놓여 있는 눈물도 보여요
너무나 오래 헛되고 외로웠으며
어찌 다스릴 수 없었던 몇채의 무너짐,
그리움들은 많이도 줄 끊어져 나부끼고
사랑
아파서 아름답다니요
자꾸 무릎을 다치면서 깊이 돌아보니
행복은 왜 꼭 그렇게 나와 멀리 떨어져 앉아 서먹했던 것일까요
언덕 위의 베란다 김경미
언덕 꼭대기 낡은 아파트 14층 베란다 문을 열 때마다 기차 소리가 우르르 나고, 아래를 내려다보면 지붕들 모두 철교 밑 강물처럼 보이지 수천의 꽃잎들이 폭신거리며 방석처럼 안성맞춤, 안성맞춤, 외치는 소리 들리지 그래 이제는 박하향처럼 화아ㅡ날아올라야 할 때 더이상 부모 같은 세상을 힘들게 하지 않도록 발뒤꿈치를 한 번 박차기만 하면 나도 비로소 날개가 되리라 허공 속 검정 머리카락들이 망토처럼 시원스럽게 펼쳐지면서 전혀 다른 종(種)이 되리라 종소리가 되리라 손 닿지 않던 하늘도 온통 솜사탕처럼 입에 묻히며 부리 끝에 물고 저 수평선 너머까지라도 맘껏 펼쳐지리라 아주 다른 육체와 언어를 시작하리라 마음을 바꾸는 마음 을 보리라 생을 바꾸는 생을 보리라. 너무도 큰 그 날개와 노래 누구도 감히 알아보지 못하리라 아주 잠깐 생의 한 발만 헛디디면 아침 나팔꽃처럼 한 번도 못 겪은 몸과 마음이 활짝 되살아나리라
커다란 사춘기* 서안나
오전 내내 그녀는 울고 있었다. 냉장고처럼 잘 우는 그녀를 열었다. 박쥐들이 날아올랐다. 그녀 안에서 한 사내가 조금씩 부패하고 있었다. 사랑이란 부패하기 위해 존재하죠. 얼굴이 조금 짓무른 그녀가 루즈를 바르며 중얼거렸다. 냉장고는 사랑을 지연시켜요. 냉장고는 거짓이에요.
남자는 지퍼를 내리고 있던 중이었는지도 모른다. 여자가 손을 뻗어 사내의 몸을 어루만지고 있다. 유서 같은 액체가 사내에게서 무책임하게 흘러나왔다. 사내가 아끼던 노래와 비밀스런 서약이 천천히 지상으로 흘러나왔다. 그녀가 느리게 화장을 하는 동안 지상의 열매들이 부패하고 서투른 사랑이 익어가고 있었다. 누군가 깔깔거렸다. 누군가 종이를 찢기 시작했다. 누구의 책임도 아니었다.
그녀를 열었다. 새로운 거짓말이 시작되고 있었다. 우리들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다워요. 그녀가 마지막 눈 화장을 하며 노래를 불렀다. 사랑도 일종의 혁명이라 구요. 누군가를 사랑하기 시작했을 때 부패들은 지연되죠. 모두 다 냉장고가 되는 거죠. 그때부터 나는 천천히 익기 시작했어요. 어깨까지 짓무른 그녀가 푸른 입술로 거짓말을 시작했다. 비가 내렸고 그녀는 부패하는 진실이 되었다. 냉장고를 열 때마다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박민규 소설<카스테라>2005.10. (문학동네 출간)를 패러디 함.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05년 가을호
자작나무 내인생 정끝별
속 싶은 기침을 오래하더니 무엇이 터졌을까 명치끝에 누르스름한 멍이 배어 나왔다 길가에 벌(罰)처럼 선 자작나무 저 속에서는 무엇이 터졌길래 저리 흰빛이 배어 나오는 걸까 잎과 꽃 세상 모든 색들 다 버리고 해 달 별 세상 모든 빛들 제 속에 묻어놓고 뼈만 솟은 저 서릿몸 신경줄까지 드러낸 저 헝큰 마음 언 땅에 비껴 깔리는 그림자 소슬히 세워가며 제 멍을 완성해 가는 겨울 자작나무 숯덩이가 된 폐가(肺家) 하나 품고 있다 까치 한 마리 오래오래 맴돌고 있다
시집 <자작나무 내 인생 >세계사, 1996
칼레의 바다 정끝별
1347년 영국 군대가 칼레를 점령했다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칼레 시민의 목숨을 구하려면, 여섯명의 시민이 시의 열쇠를 가지고 와 사형을 받을 것을 요구했다
1. 나는 밤이면 달팽이,
달이 될까 별이 될까
쑤물쑤물 방 한구석에서 빨래감이 썩어가고
내가 처음 바다를 만난 것은 오월이었고
아이들이 해당화와 함께 뒹굴던
칼레의 해변, 바다가 함성을 지르고 일어나
내 가슴 속에서 자라고 있었다
칼레의 오월, 내 가슴 속에 자라던 바다
나는 그 오월 매일밤 바다를 만나러 갔다
2. 우울한 전진,
목에 밧줄을 걸고 시의 열쇠를 든 맨발의 제1인이
두 손을 부르르 떨며 분노하는 제2인이
가야만 한다,동지를 이끄는 빛나는 제3인이
아직도 결심할 수 없는 제4인이 너무 빠르게
아내와 딸 생각에 머리를 파묻고 5인이
확고한 걸음걸이로 제6인이 걷는다,
3. 가자, 바람 속을 가야만 한다, 가자,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고 돌팔매
기름 먹인 솜에 불을 붙여 던지기도 하지만
어떤 외침도 돌도 기름병도
우리를 가두는 총과 방패 앞에
수북히 쌓일 뿐, 다시 새벽이면
새끼 몇 발을 꼬아들고 떠나는 이웃들
4. 시민이여, 무기를 들라,
그때 그리고 그때마다
화해와 용서로 평화를 말했을 때
실은 야합과 기회를 말한 것이었다
필사적으로 이상적으로
현실을 위해서라고, 그러나 여긴 여전히
무서운 밤 밤마다 또아리를 틀고
내 가슴을 묶는 밧줄이 보였다
5. 해당화, 청어가 많이 나는 칼레,
오월 바다는 청어들의 세상
해마다 바다의 생살을 째고
두 손에 묻어나는 청어의 비린내
그게 참, 안개 젖은 풀밭을 깨우는
햇빛은 아니었을까
내 모래 가슴을 파고드는
해당화는 아니었을까, 몰라
칼레의 해당화는 피처럼 피고
6. 솨솨솨 칼레의 바다가,
짭짜름한 소금기로 밀려왔다
밤이면 심한 어둠이 내리는, 여기의
청어는 아직 작고 비릿하지만
꽃이 될까 새가 될까
청어떼처럼 波紙들이 밀려다니는 웃목
칼레 바다의 길목에 서서
나는 바다 밖에 있었다
수평선이 가슴까지 덮쳐오는 오월에
- 1988년 「문학사상」당선시 -
그녀는 프로다 이기와
그녀의 어머니가 투명 랩을 뜯지 않은 채 자장면 위에 장을 붓는 순간 단칸방은 이내 시커먼 바다로 번들거린다 치마에 쏟아진 걸쭉한 바다를 치대며 단무지처럼 기억이 노란 어머니가 싱글싱글 웃는다 그러자 그녀의 삐뚜름히 돌아간 입에서도 길고 쫀득쫀득한 면발의 웃음이 쏟아진다 얼떨결에 멀쩡한 나도 따라 웃어보지만 내 웃음은 가짜, 속이 덜 익은 만두, 영 서툴다 그녀는 프로다 장애로 인한 난감함과 눈물나는 결핍을 웃음으로 커버할 줄 아는 노련한 선수다 화석처럼 굳어진 손이 삐뜰삐뜰 입을 찾아가는 길 보기에 아슬아슬 멀고도 험하다 그러나 그녀는 프로다 불완전하면서 완전하다 외줄타기 곡예사처럼 조마조마함을 연출하지만 실수하는 법이 없이 면발을 입으로 가져간다 형제나 이웃, 신의 가호도 없이 의연하면서도 정확하게 밥의 길을 찾는다 그녀는 지체장애자 그녀의 어머니는 치매다 수족관만큼 좁고 어두운 지하실 단캄방 물갈이 없이 수십 년을 혼탁한 수질 속에 살았어요 아직 산소 결핍 한 번 없었다는
누각淚閣 이기와
공원 산책로를 가벼이 날고 있는데
봄볕 짱짱한 세상을 등지고
여자는 반쯤 허물어진 누각의
그늘진 자리를 골라 앉아
산비둘기처럼 목을 갈아 울고 있고
그녀의 속 깊은 어린 딸이
저보다 큰 등치의 삶을 익숙하게 감싸 안고
제발 못 본 척 그냥 지나가세요
울 엄마의 슬픔은 제가 돌볼테니
아는 척 마세요
앙팡진 눈빛으로 다른 눈빛을 밀어내는데
그녀의 발뒤꿈치에 깔린 멍빛 이끼처럼
무엇엔가 짓밟힌 것일까
나와는 무관한 눈물과 멀어지고 싶어도
창창한 봄날은 가고
뻘밭같이 질퍽한 눈물의 의미를
아는 나이어서
애를 낳아 본 처지여서
그녀가 반쯤 울다 떠나간 누각(淚閣)에 들어
마저 울고
시집 <그녀들 비탈에 서다> 2007년 서정시학
언니네 이발소 김이듬
내리막길에서 급정거를 한 건
순전히 한 사내 때문이었죠
흙먼지 뒤집어 쓴 머리를 쑥 내밀며
막 땅 속에서 솟아오르는 죽순 같았어요
나는 도로 묻히려는 그 사내를 다독거려
백일홍 가지에 약속을 걸어두고
맞은 편 이발소로 데려갔어요
육계 머리칼을 뜯어 비눗물에 담그고 문질렀지요
뻣뻣했던 머리칼이 파래처럼 부드러워졌어요
의자에 누워 있던 사내의 튀어나온 눈이
따가울까 봐 나는 출렁이는 젖가슴으로 닦아냈지요
매일 머리를 감겨 달래면 어쩌나 화를 내면 어쩌지
내가 도로 사내의 팔을 부축해서
밖으로 나왔을 땐 어느새 노을지고
백일홍 꿈결같이 졌네요
푸른 수염의 마지막 여자 김이듬
나의 열쇠는 피를 흘립니다 내 사전도 피를 흘립니다 내 수염도 피를 흘리고 저절로 충치가 빠졌습니다 내 목소리는 굵어지고 주름도 굵어지고 책상 서랍의 쥐꼬리는 사라졌습니다 소문대로 난 일 년의 절반 지하실과 지상을 공평하게 떠돕니다 나의 눈에서 물이 흐릅니다 한쪽 눈알은 말라빠졌습니다 두 다리의 무릎까지만 털이 수북합니다 음부의 반쪽에선 생리가 나오고 오른쪽 사타구니엔 정액이 흘러내립니다 백 년에 한 번 있는 일입니다만 하하하 농담 그냥 여자도 남자도 아니고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니라는 말을 요즘 유행하는 환상적 어투로 지껄인 겁니다 말도 하기 귀찮다는 예 바로 그 말입죠 자자 내게 제모기와 쥐덫은 그만 보내시고요 이가 들끓는 가발도 처치곤란입니다 도려서 얹어놓은 과일들 이 모든 쓰레기는 충분해요 머리맡에 양초든 향이든 피우지 마세요 죽겠네 정말 꽃무더기 따위 묶어오지 말라니까요 죽은 장미가 그랬죠 너는 아름답구나 지금은 뼈만 남은 늙은이와 놀다 쉬는 참입니다 매일 한두 명과 그러고 그러지만 어떤 날은 여자애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쳐 정신이 나갑니다 공동묘지로 허가 났나요 전기가 끊어지고 수도관이 막힌 지도 한참 됐어요 하긴 정신차린다는 말의 뜻도 모르지만 제발 축언은 닥치고요 축복도 그만 좀 주세요 지하실엔 매달 공간이 없답니다 정원에도 파묻을 자리가 없구요 누군 나더러 불러들였다는데 제 발로 찾아와 발가벗는데 난들 별 수 있나요 공평하게 대할 수밖에 내게 없는 걸로 주세요 가령 고통이니 절망 허무랄까 뭐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사전에만 있는 그 말의 뜻이 통하게요 안 될까요 그럼 견딜 수 없는 같이 흔해빠진 문구를 써먹을 수 있는 어쩌구 저쩌구 혹은 질투라는 단어에 적합한 대상을 보내주세요 누가 봤을까요 나도 못 봤는데 그러나 나는 아름답네요
벚꽃이 지기 전에 김지녀
떠나야겠다, 몇 번의 짐을 챙기고 푸는 동안 사랑은 몸을 옮기고
떠나야겠다, 입버릇처럼 말하던 아버지는 하얀 꽃그늘 을 아주 거두어갔다
무릎걸음으로 달려가지만 당신은 저 멀리 검은 자루처럼 앉아 있네 내게 손짓을 하네 깨진 유리 같은 당신의 자리 그러니까 당신은 지나가는 휘파람이었겠지 여운처럼 남아 있는 구름이었겠지 아무리 불러도 잡히지 않는 길 건너 나무였겠지
내 안에서 앙상해진 나뭇가지뒤돌아보면 제자리인 꽃잎들
나를 배웅하는 벚나무 저편으로하늘이 천천히 문을 열고 있네
떠나야겠다, 사라지는 저녁으로부터 이 넓은 꽃그늘로부터
벚꽃이 다시 피기 전에
그. 조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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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의 이미지 사이에는 쓸쓸함이라는 벌판이 있네
돌연 여자의 복판에 허공이 뚫리더니 벌판으로 가 걸리네
여자에게서 여릿여릿 하늘이 비쳤던가 찌르레기 울음소리 들렸던가
그의 이미지는 여자가 사는 집이 되었네
리넨천으로 지은 낡고 부드러운 집
여자가 그곳에서 일용하는 양식은 햇살과 그늘 조금
그것은 다른 벌레들이 쓰는 만큼이면 족하네
쥐며느리가 등허리에 오소소 햇살을 받고 마루틈새를 기어가네
아휴, 귀여운 것 하마터면 손바닥에 받혀 젖무덤 사이에 넣을 뻔했지
지붕위로 키 큰 해가 서뿐 뛰어내려 안마당을 거쳐 곧장 안채로 들어서네
해가 만지는 모든 것은 햇살이 되어 반짝이고 지즐대기 시작하네
그. 라고 여자가 입을 열자
-난 본시 들판의 갈빛 바람이었다네
과묵한 갈색 티크 피아노가 중얼중얼 입을 열고
-떡갈나무 잎사귀에 뛰어내린 최초의 빗방울은 나였다니까!
수돗물이 우쭐대기 시작하네
깔깔대며 향나무 숲으로 내달리는 4B연필을 불러 세우네
-거기 서!
여자가 머리채를 틀어 올려 은 세공품 빗핀을 낮달처럼 거네
벌판 끝에선 민트향 치약냄새가 나고
햇살의 모포에 싸인 집이 아련아련 기어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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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소리는 그늘로 가 지난날이 되고 싶네
그늘은 추억이 움트기 좋은 모판
집이 우물처럼 깊었네 우물 안은 모차르트가 가득 차 오르네
집의 눈이란 눈에는 그늘이 고이네 집은 그늘에 잠긴 자귀꽃
그늘은 사위를 적시고 벌판으로 흘러가네 쓸쓸한 순례
그늘이 적시고 간 모든 것은 그늘이 되네 풀포기란 이름 나무라는 이름의
그늘, 집 앞 전나무 꼭대기에 저녁새가 날아앉네
저녁새가 그의 이미지, 웅덩이에 들어앉아 알을 품는 여자를 내려다보네
봉인된 그.
그와 교신이 안 되네 저녁이란 미궁 쪽으로
여자의 어깨가 설탕처럼 사르륵사르륵 허물어지네
그곳은 모든 시간이 흘러가는 곳 혹 시간의 사금들이 쌓여 있는 곳?
여자가 풀씨를 털 듯 치미를 털고 일어서 방마다 전등을 켜네
어둠 속으로 텀벙 불빛 떨어지는 소리 화아 풀씨가 꽃 여는 소리
여자의 미세한 움직임 소매끝에서 쩔렁쩔렁 열쇠 소리 들리는
그 집은
한 그루 사과나무, 추억 두볼이 발갛네
지평 위 집들이 앉거나 서거나
제각기 다른 이름의 추억이 싹튼 창문을 이고 가물가물 떠가네
벌판 끝에서 울음 짧은 아이처럼 전화벨이 울리다 그치네
낙수 조정인
무겁고 느리게 구르던 수차가 덜컹, 깊은 바퀴자국을 남깁니다 사랑하는 동안
이곳은 늪지입니다
낙수, 빗방울 하나가 제게 다가오는 때를 기다리며 망설이는 동안
수밀도 익어가듯 깊어집니다 눈동자처럼 말갛게 바닥을 탐색하던 물방울이
깜박, 눈꺼풀을 내리듯 제 무게를 떨굽니다
물방울 하나가 제 자리로 돌아오는 데는 삼천년이 걸린다니 삼천년 너머 하늘이
내게는 다녀간 셈 인데 늦게 파종된 물의 씨앗에게 말간 젖줄을 잇대고 있는 건
전선에 걸쳐진 저 푸르른 허공 물방울 하나가 깊어진 시간의 밀도는
실과가 익어간 것과 맞먹을 테지요 툭, 서슴없이 저를 놓는 속도는 또 어떠한가요
마찰의 광휘가 일생인 섬광 같지는 않은가요
언젠가는 이 긴 기다림도 더 감당키 어렵도록 그득해지면 당신께 가 닿을 테지만
당신의 시계가 충만해진 물방울 하나 떨어뜨려 한 점을 칠 때 내 조급한 물시계는
방울방울…
절기는 연일 차고 소소한 바람이 많아진 때, 비 갠 후 ‘나뭇잎이 웅성거린다.’라고
종이에 쓰자 사락사락 숨을 토하는 흑연의 살갗이 연둣빛 수액을 흘립니다
무한히 깊어진 여백으로 잎사귀 너른 나무 한 그루 들어섭니다
셀 수 없는 마음입니다
<열린시학 2007,겨울호>
그리움이라는 짐승이 사는 움막 조정인
우후우우우―
헛간 깊숙이서 그 짐승이 앓고 있습니다
앓을 만큼 앓는 것이 차선의 치유라고는 합니다만
그 짐승 밤낮으로 제 병을 울부짖는 한
집은 형편없는 움막일 수밖에요
짐짓 그 짐승 가버리기를 바라기도 하지만
창호를 찢고 방문을 젖히고 울타리를 무너뜨리고
피 묻은 사금파리, 깊은 외침을 뱉으며
아주 나가버리면
움막은 형편없이 주저앉고 말 것임에
어쩌면 생이란 것은 간신히
제 병을 쥐어뜯는, 산발한 놈의 털을 곱게 빗질하고
문살을 뜯던 발톱을 깎아
잠재우려는 데 소모되는 세월일겁니다
온 집이 그리움으로 흔들리다 깨어나는 고적이란
입가에 묻은 거품을 닦고
방바닥에 떨어뜨린 제 아기를 안아 올리는 여자,
탈진으로 잦아드는
간질을 앓는 질병과도 같아서요
시집 <그리움이라는 짐승이 사는 움막 >천년의시작
얼어붙은 모자 이규리
주인이 포기한 수백 포기 배추밭갈아엎을 마음조차 없었던지밭 한떼기 16열종대가 차렷,송두리째 얼어붙어 부동자세다전송도 받지 못하고 떠나는마지막 자이탄 부대원들의 바랜 모자,꼭 그 빛깔이다폭락은 왜 그렇게 얼어 터지나수능 마치고 교문을 나서던 새파랗게 언 아이들전략에 떨어 온 파병 직전의 아이들배추나 모자나 자신의 뜻도 아니게 금값이다가, 똥값이다가,반복은 사람을 강하게도 하고분노하게도 하고그리고 얼어붙어 말 못하게도 한다주인은 어디 갔을까얼어붙은 배추들의 침묵,시위를 피해자진하는 아들을 말리지도 못하고등뼈처럼 앙상하게 드러난 길을 따라 간슬픈 자이툰처럼, 반복되는 전략처럼씨앗은 자신의 주검 위에 다시 슬슬 뿌려질 텐데
<문학.선 2007 봄호>
저수지 이규리
무심히 산과 나무, 고요까지 수면이 복사한다 한 생을 거꾸로 박아 넣는다 해도 대저 말이란 게 없다 몸이 조금씩 마르는 걸로 대답은 충분한 거지 물 위에 젖어 엉긴 나뭇잎 건지려 집게로 수면을 집어 올리자 일가(一家) 잘 다려 놓은 긴장이 집게 끝에 쭈욱 딸려 나온다 일사불란, 통념이란 그렇게 움직이는 거다 산이 슬쩍 박아놓은 외눈동자 백내장 젤라틴 엷은 막 걷히자 참 맑은 김칫국 한 솥 잘 식어 하늘 푸겠다 뒷모습 이규리어떤 스님이 정육점에서 돼지고기 목살 두어 근 사들고 비닐봉지 흔들며 간다 스님의 뒷목이 발그럼하다 바지 바깥으로 생리혈 비친 때처럼 무안해진 건 나였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분홍색 몸을 가진 것 어쩌면 우리가 서로 만났을까 속세라는 석쇠 위에서 몇 차례 돌아누울 붉은 살들 누구에겐가 한 끼 허벅진 식사라도 된다면 기름 냄새 피울 저 물컹한 부위는 나에게도 있다 뒷모습은 남의 것이라지만, 너무 참혹할까 봐 뒤에 두었겠지만, 누군가 내 뒷모습 본다면 역시 분홍색으로 읽을 것이다 해답은 뒤에 있다
젖는다 이규리
웃어도 찔끔, 걸을 때도 찔끔, 긴장하면 주룩 샌다는 일흔 어머니 요즘 우울하시다 세상에는 비도 새고 날도 새고 비밀도 새지만, 새는 것은 분명 누군가를 뭔가를 젖게 하지만, 오줌이 새는 일은 치사하게 김새는 일이다 집안의 틈 모두 막아내다가 생고무 같던 어머니의 막 너덜해졌다 모로 누운 저 축축한 잠이 가파르고, 아무도 막아주지 못한 생애의 저음부, 수고는 꼭 따뜻하게 되돌아오는 것만은 아니다 어머니 숨어 기저귀 차다가 화들짝 놀란다 나, 저 물컹한 자리 닿지 않았음 좋겠다 짓무른 아랫도리처럼 눈가가 불그레한 어머니, 혼자 오래 젖는다
불혹의 묵시록 김신영-
혹부리여인이 되어 불혹을 가지 끝에 달아 놓고 오래도록 흔들린다. 흔들리다 잠이 들면 꿈결에도 흔들리는 벼랑에 내가 부둥켜안았던 사회들이 불의 혹처럼 즐비하다 연어알, 날치알, 투구게의 알, 그리고 떼꾼한 너의 알까지 해변에서 통통한 알을 먹느라 정신이 없었고 강가 나루터에서 빙어, 피라미, 각시붕어, 꺽지, 가시납지리를 끓이느라 너를 알아보지 못했고 개굴창에 이름없는 풀이 되어 몹시 흔들리다 이리저리 밟혀 나뒹굴었다. 그리고 가끔 산 위의 구름들은 무지개 빛을 실어와 나의 양풍이 될 때가 있었고 길 위의 집들은 홍등을 안고 춤을 추었지 또 가끔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적 단편을 읽어 내려가다 끓어 넘치는 술병들과 아침나절 앉아 있었고 버섯들이 자라나 계산기를 두드리는 걸 보았지 마당 깊은 집에 가는 일은 금세기 내내 화석이 되어 너의 꼬리표에 가끔씩 드러날 뿐이었다. 너무 자란 바오밥나무를 뽑아낼 수는 없다면서 불혹은 내 삶을 통째로 흔들어 대었지. 어디쯤 왔는지 혹을 떼어버린 불혹이 있을 따름인지 여러 개의 혹들이 다시 불독처럼 붙어 불혹인지 혹들이 저마다 말을 하고 나는 혹을 떼어내려다 혹을 붙인 혹부리여인이 되어 오오 나의 불혹을 가지 끝에 달아 놓고 잣나무 가지가지 구석구석까지 흔들고 있다.
화려한 망사버섯의 정원 김신영
척박한 땅을 밀어올리며 영양을 섭취하였다 엽록소 없는 구차한 기생으로 나의 생존을 이루어간다 동물도 식물도 아닌 균류의 일종으로 살아가는 내 치졸하고 왕성한 분해 능력을 그대 혹시 보았는가 낙엽과 땅과 그대의 생살,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나무를 무너뜨리고 땅을 갉아먹고 그대를 불태우는, 그대가 모르는 나의 뒷면 비가 오나 해가 비치나 사람들 모르게 세상을 변절시키는 것이 내 생이라면 그대 내게서 멀리 떠나 내가 없는 곳에 살라 내 화려한 망사나 필수 비타민보다 질긴 생존 능력을, 그리고 나의 균사, 뻗어나가 숲을 침식시키는 부당함을 강력하게 논하여다오 나의 자실체 공간을 배회하지 못하도록, 나를 겨울 같은 눈 속에 가두어다오 아니 아니 저 건조한 사하라 사막에, 티벳의 고원에 나를 두어 사방에 뻗어가는 나의 썩음증 나의 물질 분해 끝이 나도록 거듭되는 순환의 고리 끊어다오 큰 나무도 단순히 부후* 일으키는 죽음의 나락 왕성한 나무의 니그린 제로로스, 헤민 제로로스를 힘없이 부수어내는, 너의 인대 백색 갈색으로 우주의 숲에 쓰러뜨리는 이 망할 것 나의 이율배반, 녹아내릴 것 같은 운명의 비는 유기물 형성하고 산소를 부르고 나의 생명을 부르고 그만 또 너의 호흡을 부른다 고요한 아침마다의 부후, 나의 정원, 화려한 망사. *부후 : 버섯이 일으키는 썩음증
느릅나무 숲 김신영
너와 키스를 할지 내내 생각을 했다.
바람이 휩쓸어 온다.
너의 머리칼을 휩쓸어 온다.
오후의 태양이 쏟아지고
너의 그늘 옆에 하늘을 우러러 눕는다.
하늘가를 흐르는 구름에 태양을 싣고
이리로 저리로 이야기를 턴다.
푸른 풀밭 위에
끄덕끄덕 사람들이 눕는다.
그리고 내 키스의 욕망이 희미해질 때
다시 바람이 휩쓸어온다
너의 머리칼을 휩쓸어온다.
하여, 조심하여라.
나는 양의 탈을 쓴 늑대, 포식자이다.
절여진 슬픔 강기원
곤이젓, 창란젓, 아가미젓
저게 창자와 벌름거리던 숨구멍과
대구의 생식기였단 말이지
내 끊어진 애와
벙어리 가슴과
텅 빈 아기집도 들어내
한 말 굵은 소금에 절여 볼까
컴컴한 광 속에서
한 오백 년 푹 삭아 볼까
마늘, 생강, 고춧가루
듬뿍 뿌려 맛깔스레 무쳐 볼까
그대 혀 끝에
올려진다면
그게 나인 줄도 모르고
삼켜진다면
그리운 그대 속내
알아보는 거야
원 없이 들여다보는 거야
시집 『바다로 가득한 책』민음사.2006
위대한 암컷 강기원
한때 그녀는 명소였다
살아 있는 침묵
하늘을 낳고 별을 낳고 금을 낳는
신화였으므로
범람하는 강이며 넘치지 않는 바다
빛 없이도 당당한 다산성이었으므로
바람의 발원지
바람을 재우는 골짜기
제왕도 들어오면 죽어야 나가는
무자비한 아름다움이었으므로
요람이며 무덤
영혼의 불구를 치유하는 성소
꺼지지 않는 지옥불 이었으므로
만물을 삼키고 뱉어내는 소용돌이의 블랙홀
곡신(谷神), 위대한 암컷이여
여전히 그녀는 명소다
수 많은 자들의 탐험이 있었으나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
은밀한 문
바다로 가득 찬 책 강기원
네가 한 권의 책이라면 이러할 것이네
첫 장을 넘기자마자 출렁, 범람하는 물
너를 쓰다듬을 때마다 나는 자꾸 깎이네
점점 넓어지는 틈 속으로
무심히 드나드는 너의 체온에
나는 녹았다 얼기를 되풀이하네
모래펄에 멈춰 서서 편지처럼 매번 되돌아올 뿐이네
네가 베푸는 부력은 뜨는 것이 아니라
물밑을 향해 가는 힘
자주 피워 올리는 몽롱함 앞에서 나는 늘 눈이 머네
붉은 산호(珊瑚)들의 심장 곁을 지나
물풀의 부드러운 융털 돌기 만나면
나비고기인 듯 잠시 잠에도 취해 보고
구름의 날개 가진 슴새처럼
너의 진동에 나를 맡겨도 보네
운이 좋은 날,
네 가장 깊고 부드러운 저장고, 청니(靑泥)에 닿으면
해골들의 헤벌어진 입이 나를 맞기도 하네만
썩을수록 빛나는 유골 앞에서도
멈추지 않는 너의 너울거림
그 멀미의 진앙지를 찾아 그리하여
페이지를 펼치고 펼치는 것이네, 그러나
너라는 마지막 장을 덮을 즈음
나는 보네, 보지 못하네
네, 혹은 내 혼돈의 해저 언덕을 방황하는
홑겹의 환어(幻魚) 지느러미
*라니 마에스트로(Lani Maestro)의 사진집 제목
<제25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
빛의 염을 하다 강기원
아무도 날 건드리지 마
조각나
유리옷을 입고 있어
난 불붙지 않아
빌나는 것에 속지 마
내게로 와
입술을 대면 그게 겨울이라면
네 입술이 찢어지기 전
내게서 떠날 수 없어
네가 내게로 와
알몸으로 안겨 오면, 그게 여름이라면
내 몸에 스미지 않는 너의 땀
분비물로 얼룩진 네가 있을 뿐이야
내 안에 흐르는 찬 피
아무도 곁에 두지 않은 채
깊은 겨울잠에 빠졌다 나오곤 하지
내가 더 이상 깨어나지 않을 때
봄이 날 흔들지 못할 때
알지?
옴몸을 깨뜨린 후 버려둬
햇살이 날 염하도록
서울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
1997년 <<작가세계>> 신인상에 「요셉 보이스의 모자」외 4편의 시가 당선되어 등단
2005년 시집 <고양이 힘줄로 가는 하프> 세계사
2006년 시집 <바다로 가득 찬 책> 민음사
2006년 제25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치워라, 꽃! 이 안
식전 산책 마치고 돌아오다가 칡잎과 찔레 가지에 친 거미줄을 보았는데요 그게 참 예술입디다 들고 있던 칡꽃 하나 아나 받아라, 향(香)이 죽인다 던져주었더니만 칡잎 뒤에 숨어 있던 쥔 양반 조르륵 내려와 보곤 다짜고짜 이런 시벌헐, 시벌헐 둘레를 단박에 오려내어 톡! 떨어뜨리고는 제 왔던 자리로 식식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식전 댓바람에 꽃놀음이 다 무어야? 일생일대 가장 큰 모욕을 당한 자의 표정으로 저의 얼굴을 동그랗게 오려내어 바닥에 내동댕이치고는 퉤에! 끈적한 침을 뱉어놓는 것이었습니다
유고시
마당 가 돌무더기에 흰 끄나풀 같은 것이 어른거린다 뱀 허물이다 머리를 땅에 박고, 이리로 저리로 요렇게 조렇게 들어가셨소 내가 그 증거요! 온 허물로 가리킨다 이건 단순한 허물이 아니라 뱀에 의한, 뱀이 썼던 허물이 분명하다 한마디로, 이 안에 뱀이 있었다는 것 저 안 어디쯤 진짜가 있다는 것 울고불고 마지막까지 뒤집어쓰고 살아온 시를 놓아주고 생것이 사라져간 쪽을 향해 입 꽉 다물었다
겨울 부석사 이영옥
소백산 품에 깃들어 사는
능선을 모두 쓸어안고
절은 무슨 생각으로
저녁 어둠을 발라 제 얼굴 지우고 있는가
깊은 바다에서 도망쳐 온
커다란 목어 한 마리 범종루 천장에 매달려
어둠을 뻐끔뻐끔 피우고 있다
맞배지붕을 이고 있던 안개기둥은
스스로 몸을 헐어 바람이 된다
퀭한 눈으로 바라보는 저 석등은
따뜻한 불빛 글썽거려본 지 언제였을까
고개 숙이고 오르다 보면 극락이라지만
안양루 마룻바닥에는
빈 바람이 쓸고 간 흔적뿐이었다
자리 잡지도 떠나지도 못하는 마음이
돌 하나로 떠 있는 부석사
헛된 시간도 오래 견디다 보면
그대에게 닿을 수 있을런지
당간지주에 내 그리움 펄럭이게 내버려두고
범종루 떠받치고 있는 마른기둥 옆에
한자리 슬그머니 끼어들고 싶었다
아득히 눈 감고 있는 허공으로
눈발 점점 굵어지더니 사하촌의 밤이
한 이불을 덮고 하얗게 잠이 들었다
계간『시작』2006, 가을호
개미에 대한 상상 전정아
숲이 매력을 잃은 걸까 달기만 한 꽃의 꿀 똑같은 진드기만 키우는 엉겅퀴 신생의 것을 열망하는 개미는 고층 건물도 마다하지 않는다다양한 인스턴트 식품과 최신유행이 드나드는 집 언젠가 돈에 반한 개미가 사람의 금고에 구멍을 낼지도 모를 일개미가 마음만 먹으면불가능한 일도 아니리라 미래엔 무언가 잃어버렸을 때 분실물센터보다 개미의 창고에 먼저 가보라 만물상 주인이 된 개미가 웃음을 철철 쏟으며 당신을 맞더라도놀라지 말지어다쉬지 않고 움직이는 개미 가야 할 길이 벽이라면 뚫어서라도 간다 개미는 어디서 제 생의 화룡점정을 찍고 싶은 걸까 버스에서 지하철로 지하철에서 KTX로멀지 않아 비행기 좌석에 앉아 있는개미와 마주칠지도...... 어쩜 개미는 미래 도시 계획을 설계하며숲 주식회사의 최대 주주를 꿈꾸고 있는지 모른다부엌을 기웃거리던 개미가갓 차려진 식탁 위로 방향을 틀기 시작한다 좌 아 악 ......순식간에 도착한 개미의 전대
그새 나는 페르몬 발자국을 많이도 찍어 놓았다
꽃의 전갈 전정아
이른 아침, 빛 줄기 하나가
창 틈 사이로 전단지 한 장을 보내왔다
뒷집 뒤란 빨랫줄에 걸려있던
열여섯 먹은 미자 분홍색 브래지어를 닮았다
지면 가득 무료 개업을 시작했다는
마을 복덕방에 대해 쓰여 있다
눈꺼풀에 붙은 잠을 뚝뚝 떼어내며 걷고 있는데
나비 떼들이 골목 구석구석 쌓여있는
묵은 먼지를 털어내고 있다
태풍으로 작년 벼농사를 망쳤다며 가계부 구석에
채무 고지서처럼 쭈그리고 앉아 있던 태수 아버지
치매 걸린 시어미 수발에 볕 뜰 날 없이
헝클어진 머리 손 빗으로 빗어 올리는 영희 엄니
저마다 일렬로 나란히 서서
계약서에 적어야 할 내용에 대하여 생각한다
한 참을 고심하다 서툰 마음 일으켜 세워
또박또박 소망을 적어가는 사람들
복덕방 주인들은 표정하나 일그러뜨리지 않고
환한 웃음 풀. 풀. 풀 날려준다
세든 집의 벽마다 꽃잎 벽지의 숨구멍이 심어지고
고주파의 향기가 전구 스위치처럼 내장된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지천 가득
무료 복덕방이 성대하게 차려질 것이라는
꽃의 전갈이 왔다 한다
2007년 리토피아 여름호
블루침대 전정아
방 한 귀퉁이에 놓인 침대에 몸을 눕힌다 세상의 모든 벽은 내 몸에 노동의 무게를 얹어 나를 누른다 몇 시간의 단잠 난 외출을 준비한다 지상 180센티미터*, 영혼의 거처라는 높이에서유영하는 또 다른 나 노곤한 숨소리로 벽에서 벗어나 히말라야 산 양털매트리스에 누운 나를 본다 꿈의 블루침대!나는 벽 밖을 날고 있다 총천연색 꿈들로 가득 찬 침대에서 나의 무게는 이미 사라졌다 새벽 다섯 시, 자명종이 잠을 흔들면소란한 노점의 거리로 나가야 된다 눈꺼풀을 비비며 나를 밟고 뛰어 노는 노동과 인간 사이 튼튼한 스프링을 숨긴 벽과 부딪치며 좌판 위에서 튕겨져야 한다
*스위스의 제네바 대학교 교수인 올라프 블란케의 연구결과
진달래 화전을 기억하다 전정아
앞산이 뜨겁게 달아오른다꽃봉오리마다 불씨가 들어있었던 모양이다성냥을 확 그은 듯 꽃망울이 탁탁 터진다나는 상비약처럼 보관하고 있던녹빛 프라이팬을 꺼낸다기꺼이 화로가 될 수 있을 거 같다진달래와 나 사이에 흐르는 기름 우리는 끈적끈적했던 날들을 프라이팬에 붓는다지지지직, 지지지직산 하나, 마을 하나가 향기 주머니를 푼다꽃술마다 점점이 박혀 있는 흑점 같은 기억들앞으로 철썩 뒤로 처얼썩뒤집기를 반복한다내가, 산이, 작은 동네가퍼져 나오는 향기에 노릇하게 익어간다반죽 위로 편편하게 꽃잎을 띄운다곧 구순기의 몸을 더듬거릴 진달래 화전딱! 이만큼만 하겠다기억이 너무 뜨거워졌다
물의 집 최광임
사랑은 전신을 훑고 지나는 소주 한 잔의 떨림으로 온다
도도한 강물로 굽이쳐 포구에 몸 푸는 물과 같이
첫 잔을 기울일 때 목젖을 적시며 물길 굽이굽이
몸 가장 아래에서 번지는 짜릿함이다
술 마시며 취할 것을 미리 염려하지 않는 것과 같이
사랑보다 이별 뒤를 염려하는 이는 드물다, 다만
첫 잔을 꺾어 마시듯 사랑하기에 주저하는 것은
술은 잔이 넘치도록 따를 수 없는 법이어서
언제나 2할이 부족한 잔의 속성을 알기 때문이다
나를 다 비워 누군가를 채워본 사람은 안다
누군가가 나를 다 채워 주기를 기다린 사람은 안다
언제나 2할의 차가운 알몸을 드러낸 채 흔들리는 불
마치 내 늑골 어디쯤을 드나드는 허허로운 바람 같은
사랑이 올 때도 사랑이 지나갈 때도 아닌
누군가와 사랑하고 있을 때, 안다 우리는
먼 강을 굽이쳐 흘러온 말랑말랑 한 물의 집
얼마나 간절히 만조의 바다를 꿈
꾸는지
<시선 >2007년 봄호
애인아 놀자 최광임
장맛비 주춤한 사이로 저녁이 온다낮동안 빗속에 갇혀있던 개구쟁이 두엇 고샅으로 나와 고립된 정적을 흔든다 애 인 아 노 올 자 호방한 소리로 공중을 흔들고 다니는 뻐꾸기처럼 턱을 아래로 당기고 배 힘을 꽈악 준 사내아이 소리 애인아는 대답이 없다, 보송보송 흰 빨래 같은 거리와 거미줄 위 물방울의 정적을 가르는 애인아 그 흔한 까치조차 깍깍거리지 않는 저물녘, 쿵 쿵 태초의 소리다 그러고 보니 장맛비 잠시 개인 薄明의 거리에서 애인이라 불러도 흠 되지 않을 사람 만나고 싶은 시간이다 겹겹이 빗나가는 눈빛과 죄 없이 목소리 낮추거나 높여야 하는 시간 말고 어스름을 휘어잡고 흔드는 스스럼없는 누구 자꾸만 빠진 이 사이로 새어나오는 예 인 아 노 올 자
칸나꽃 분서(焚書) 신미나
절명을 꿈꾼들 저 꽃 같이는 심장을 내걸 수 없었네 계절은 매번 色 다른 변절을 꿈꾸어 왔으므로 이제 나를 거쳐 간 연애는 미신이 되었다 돌아본들 유산 후에 돋는 입덧 같은 것이었나 꽃 진 자리 火氣가 남아 피 더운 까닭은 용서하라, 눈 매워 혈서 한 잎 흘려 쓰지 못하는 것을 오로지 그대, 한 올 그림자마저 태우고 높이 떠나라 이 여름 다 가고 붉은 두근거림 마저 지면 당신 눈짓과 살내를 곁에 두고 오래 잊을 것이라 화대처럼 받아든 이 시간에 불붙이고 연기도 없이 紙燈 타는 소리를 나는 듣고 있을 것이라
그러나 석류꽃은 피고지고 신미나
풍문은 늘 대문 밖에서만 떠돌았다 삼복에 애 낳다 숨진 처녀애가 살았다는 집 담벼락 거기, 어금니 금가도록 아득바득 이 갈던 사랑이 있었나 끝내 숨 놓지 않으려는 핏발 터진 눈동자 있었나 알알이 탯줄 마른 애기들이 줄기 타고 살아서 돌아오는 대낮 천길 만길 무서운 하늘길이 있어, 산목숨 데려가는 소리가 있어 하늘이 데려가는 목숨은 어디로 가는가 혀를 차도 모를 일 귀가 넷이어도 들을 수 없는 일이라 짹짹 피는 저 꽃은 철없이 붉은 주둥이 벌려쌓는데
상처가 스민다는 것 강미정
모든 꽃은 흔들리며 뿌리로 간다봄비를 받아내고 있는 작은 제비꽃의 흔들림은 꽃을 들여다보기 위해 쪼그리고 앉던 당신의 등처럼 외롭고 넓다는 것, 그러므로 꽃피어 흔들리는 세상 모든 꽃은 흔들리지 않으려고 땅을 움켜쥔고단한 뿌리의 일그러진 얼굴이라는 것, 그러나 흔들림이여, 제 필생이 가진 파란만장의 중심을 꿰뚫고 흔들어야 흔들림이라 이름 붙일 수 있지 않겠는가작은 제비꽃 한 포기가 필생을 흔들어 세상의 침묵 위에 얹어놓는 저 파열하는 자주빛 몸부림도고단한 뿌리가 가졌던 일그러진 얼굴이었음을 뿌리가 더듬고 나간 그 처음의 길에서 모든 흔들림은 오직 제가 가진 경계의 폭으로 흔들린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시 제 필생을 흔들어 깨운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흔들리는 모든 꽃은 뿌리에게로 간다 맨 처음에게로 간다
밥물 끓는 냄새 강미정
모르는 집 창문 아래에 앉아 있었다창문 안에서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틀어놓은 물소리에 섞여들렸다가 들리지 않았다가 하는 모르는 여자의 가늘고 긴 흐느낌 여자의 울음소리가 고요해질 때까지 모르는 집 창문 아래에 웅크리고 앉아 울었다마음의 첩첩산중에서 자란 울음은 혼자 저렇게 울겠구나, 혼자 저렇게 울었겠구나, 울었다 잘 크라고 말해주는 목소리가 가만히 들리고 천천히 물 붓는 소리가 가만히 들리고 쌀 씻는 소리가 가만히 들리는 내가 모르는 집의 밥물 끓는 냄새, 싸우고 나온 일을 잊고 벌떡, 일어나 집을 향해 막 바쁘게 걸어갔다 어디로 멀리 혼자 가고 있는 길을 거두어 찾지 못하는 곳으로 가던 길을 거두어 밥물 끓는 냄새로 간절해진 집으로 막 걸어갔다 마음이 급해졌다
참 긴 말 강미정
일손을 놓고 해지는 것을 보다가 저녁 어스름과 친한 말이 무엇일까 생각했다저녁 어스름, 이건 참 긴 말이리엄마 언제 와? 묻는 말처럼 공복의 배고픔이 느껴지는 말이리마른 입술이 움푹 꺼져있는 숟가락을 핥아내는 소리 같이죽을 때까지 절망도 모르는 말이리이불 속 천길 뜨거운 낭떠러지로 까무러지며 듣는의자를 받치고 서서 일곱 살 붉은 손이숟가락으로 자그락자그락 움푹한 냄비 속을 젓고 있는 아득한 말이리잘 있냐? 병 앓고 일어난 어머니가 느린 어조로 안부를 물어오는 깊고 고요한 꽃그늘 같은 말이리해는 지고 어둑어둑한 밤이 와서 저녁 어스름을 다 꺼뜨리며 데리고 가는 저 멀리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집 괜찮아요, 괜찮아요 화르르 핀 꽃처럼 소리없이 우는 울음을 가진 말이리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저녁 밥상 앞 자꾸 자꾸 자라고 있는 너무 오래 이어지고 있는 엄마 언제 와? 엄마, 엄마라고 불리는 참 긴 이 말 겨울 냇가에서 맨손으로 씻어내는 빨랫감처럼 손이 곱는 말이리 참 아린 말이리
끝방 강미정
너, 아니? 가슴에도 끝방이 있다는 것 말이야불꺼진 방 모서리를 지나 어두운 계단을 딛고 올라서서다시 수많은 어두운 방을 돌고 돌아가 끝방, 막다른 골목 같은 방어둠을 담았던 쓰레기통을 씻어 말리고어두운 방을 닦았을 걸레가 겹쳐져 널려 있는 옆,고독하고 긴 복도를 닦은 밀대 걸레가 세워져 조용히 말라가는 그런 방, 난 그 방 앞에서똑똑, 문을 두드리려고 손을 들었다간 가만히 내려 무슨 소린가 끊임없이 들리다가도 귀를 갖다대면 고요해지지문을 열면 환하게 텅빈 방이 되어버리지 너 아니? 가슴에도 끝방이 있다는 거 말이야여러 개의 어둔 방 모서리를 돌고 돌아가면맨 끝에야 다다르는 막다른 골목 같은 방수많은 빈 방 지키며 부르는 노래 간혹간혹 들리는그 끝방, 가장 많이 아픈 아픔이 가장 많이 기다린 기다림이 산다는 방, 난 그 방을 들여다 볼 수가 없어 너무 화안해서눈을 감고 말아, 눈을 감고 말아
소리나는 추억강미정
음식을 담기 전 빈 그릇을 한 번 두들겨 본다 버릇이다그릇도 소리나는 추억을 가지고 있을까 분명, 존재하는 모든 것은 추억이 있다 따뜻한그릇에 음식을 담으면 맛있다고 생각한 오래된 믿음처럼나는 그릇이 내는 그 소리에다 음식을 담는다음 하나 고르는데 평생을 거는 사람을 만난다면세상의 어떤 죽음을 맞이해도 슬프지 않을거다아버지는 피리를 자주 문질러 주셨다 좋은 소리가 나려면 악기가 따뜻해야 돼온 가족이 다 모여서 먹는 따뜻한 음식처럼요?그래, 천천히 천천히 바람을 밀어 넣어봐 내가 부는 피리는 차가운 바람 새는 소리만 반복했다너무 추워요 아버지, 떨려서 눈물이 나요아름다운 것을 보고 있는 상상을 하며 바람을 담아 봐라마음을 따뜻하게 해야지그때도 난 따뜻하게 데운 그릇에 따뜻한 음식을 담아야지 생각했다따뜻한 소리를 담는 아버지의 피리, 차가운 바람이 따뜻한 노래가 되고 싶어 마구 몸을 일으키지자신을 읽어 달라고 피리 속으로 뛰어들어와 출렁이고 있어 나는 아직도 그릇이 따뜻하면좋은 음식맛이 난다는 것을 믿고 있다온 가족이 함께 모여서 먹는 따뜻한 음식!양파껍질을 까며 매운 고추를 썰며음식을 담기 전에 그릇을 한 번 두들겨 본다
<상처가 스민다는 것>
언어물회 안현미
말린 물고기만 씹으며 겨울을 난 사내가물고기를 물에 말아 알뜰하게 소주 한 병을 비우고 있다사랑할때 애인의 몸을 뜯어 먹는 여자처럼시든 언어만 씹으며 늙어가는 여자가언어를 언어로 꿰어 멸망한 부족의 목걸이를 만들고 있다죽을때 스스로의 몸을 깊은 숲에 두는 족장처럼사위어가는 것들의 모든 우울함으로 꽃은 피고우울한 물고기의 이름은 우울한 물고기다그것이 한계다한계와 임계사이에 언어가 있다언어는 우울한 물고기 이름이다이를테면 제대로 실패한 자만이 실패를 싱싱하게 맛볼수 있다
거짓말을 타전하다
여상을 졸업하고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아현동 산꼭대기에서 살았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사무원으로 산다는 건 한 달 치의 방과 한 달 치의 쌀이었다 그렇게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 살았다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도 슬프지 않았다 가끔 대학생이 된 친구들을 만나면 말을 더듬었지만 등록금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던 날들은 이미 과거였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비키니 옷장 속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출몰할 때도 우우, 우, 우 말을 더듬었다 일요일엔 산 아래 아현동 시장에서 혼자 순대국밥을 먹었다 순대국밥 아주머니는 왜 혼자냐고 한번도 묻지 않았다 그래서 고마웠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여상을 졸업하고 높은 빌딩으로 출근했지만 높은 건 내가 아니었다 높은 건 내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 꽃다운 청춘을 바쳤다 억울하진 않았다 불 꺼진 방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나 대신 잘 살고 있었다 빛을 싫어하는 것 빼곤 더듬이가 긴 곤충들은 나와 비슷했다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 불 꺼진 방 번개탄을 피울 때마다 눈이 시렸다 가끔 70년대처럼 연탄 가스 중독으로 죽고 싶었지만 더듬더듬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내 이마를 더듬었다 우우, 우, 우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 꽃다운 청춘이었지만 벌레 같았다 벌레가 된 사내를 아현동 헌책방에서 만난 건 생의 꼭 한 번은 있다는 행운 같았다 그 후로 나는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진짜 가족이 되었다 꽃다운 청춘을 바쳐 벌레가 되었다 불 꺼진 방에서 우우, 우, 우 거짓말을 타전하기 시작했다 더듬더듬, 거짓말 같은 시를!
고백 김상미
용서해다오
나는 내가 누구이며, 누구의 딸인지 잊어버렸다
발밑에 밟히는 너무나 많은 죽음들 때문에
나는 땅 대신 종이를 밟고 다녔다
종이 위로 비치는 햇살 속에 마음 너무 노출시켰다
확대경으로 들여다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한 시대의 진실 혹은 비밀스런 사랑까지도
나는 종이 앞에 제물로 바쳤다
용서해다오
나는 자유를 가지고도 아무 일도 못하였다
반짝거리며 사는 사람들을 의심하고
갈증에 죽어가는 나무밭 단숨에 빠져나왔다
온몸 다 바쳐 절절 사랑 끓인 것 같아도
실은 사랑 자체에 아주 적막하였다
한 번도 사람들을 내 집에 초대하지 않았다
나는 유다이며 베드로이며 불신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용서해다오
나는 강철같은 믿음으로 예술을 사랑하지도 않았다
진정한 예술은 몇 천 년 전에 이미 다죽어버렸다며
허벅지 사이에서 다시 환생한 예술가들을 경멸하였다
나에겐 어떤 운무곡도 필요치 않았다
참으로 헤어지기 힘든 사람들은 지우개로 빡빡 지워버렸다
아무도 나를 울리지 못했다
산하 대지를 뒤흔드는 심술궂고 광폭한 바람의 습격 외에는
용서해다오
나는 너무 많은 것들 집어삼키고
너무 많은 유희에 길들여졌다
세상의 모든 붉은 것들 속에 너무 오래 머리 집어넣고 있었다
자신을 비웃는다는 건 정말 치사한 일이다
내 이름 위에 앉아 있는 온갖 모욕들과 헌신들
더 이상 가로채지 말아라
시간이여, 세월이여,
다 너에게 돌려주겠다
내가 원하는 건 행복도 평화도 아니다
돌아가는 것,
세상 모든 신선함의 상징인 펄떡거리는 송어처럼 돌아가는 것
내 정신, 내 몸이 노닐던 그곳,
깊은 골짜기 물 속
내가 태어난 곳으로
종국에는 내 모든 것들 한 입에 다 삼켜버릴 어머니,
거대한 모성으로 돌아가는 것!
황금빛 수리를 기다리며 서연정
깊디깊은 어둠 속 등불 하나 못 켜고무릎까지 쌓여버린 세월을 밟으며단 한 벌 초라한 목숨그림자로 짙어진다가슴 속엔 언제나몇 다발의 비애(悲哀)갓 꺾은 꽃처럼 핏자국이 선명하다겹겹의 옷을 입어도 가릴 수 없는 흔적줄거리에 연연하는 부끄런 심장 아래한 자 한 자 짚어가며더듬더듬 읽어온 삶파랗게, 싱싱한 후회 알알이 박혀 있다기억 저편 졸고 있는 황금빛 수리여,발톱이며 겨드랑이 굳어버린 관절들즈믄 밤 벼린 비수로 획을 친다, 일어나라
길 위에서 서연정
쉬지 않고 피어나는 색색의 상처는 들여다보면 그것은 또 색색의 길이어서 보여요, 씨방 속에서 옹글게 견딘 시간 어느 쪽으로 갈까 알 수 없어 서성이다가 살며시 손가락을 뻗어보는 나팔꽃 줄기 물을 수 있는 길이란 사실 몇 개 안되지요 약도의 실핏줄에 성냥을 그어보지만 어둠은 천 겹 만겹 비켜나질 않는데요 희미한 주소 속에서 더욱 얽혀 캄캄한데요. 튿어진 봉지에서 쏟아져 나온 꽃씨처럼 어리둥절 혼자 가는 발길을 밝혀줍니다 누구의 상처일까요, 내가 받은 이 길목
人 권 정일
Ⅰ
섬 섬이 섬을 만나면 흘러간다 시절들, 돛단배의 눈물 한 잔 물고기의 악수 날개 부러진 괭이갈매기의 바리톤 노래가 해후 하는 저녁, 낮은
처마를 끌고온 안개가 물결무늬 물집을 터트린다 섬들은 부
딪치지 않을 만큼의 거리를 두고 가장 커다란 닻을 가진 고래를 찾아 흐른다 날마다 같은 바람 날마다 다른 노래
Ⅱ
섬이 섬을 만나면 숙박계 같은 서로의 몸을 줍는다 왼쪽 섬에 강퍅한 마음 풀고 오리 쯤 외로운 섬에 딱딱한 눈물 던져놓고 문득 마주한 산호초에 한 쪽 어깨를 걸치고 골 깊은 모서리에 정박하는 섬, 녹슨 갑판에 옹송그린 몹쓸 청춘을 竹簡 (죽간)
한다 아로새겨지는 몸의 기호 언어가 죽는다 시절이 죽는다 Ⅲ 지상에서 가장 작은 섬이 섬을 만나면 불빛 어룽대는 심해에 지느러미를 드리운다 실없는 어둠이 먼저 입질 하는 사이, 태풍의 눈을 피해 후다닥 찌를 물고 야단법석 사랑을 집어넣는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타액처럼 고여드는, 깊게 눌러 찍은 말줄
임표로 떠다니는 섬
섬이 섬을 만나면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최승자
한 숟갈의 밥, 한 방울의 눈물로 무엇을 채울 것인가, 밥을 눈물에 말아먹는다 한들.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해도 혹은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 하고 나는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 한다. 그러므로 이젠 비유로써 말하지 말자.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 모든 것은 콘크리트 벽이다. 비유가 아니라 주먹이며, 주먹의 바스러짐이 있을 뿐, 이제 이룰 수 없는 것을 또한 이루려 하지 말며 헛되고 헛됨을 다 이루었다고도 말하지 말며 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내 몸을 분질러 다오. 내 팔과 다리를 꺾어 네 꽃병에 꽂아다오
담배 한 대 피우며 최승자
담배 한 대 피우며 한 이십 년이 흘렀다 그동안 흐른 것은 태평양도 아니었고 대서양도 아니었다 다만 이십 년이라는 시간 속을 담배 한 대 길이의 시간 속을 새 한 마리가 폴짝 건너뛰었을 뿐이다 (그래도 미래의 時間들은 銀가루처럼 쏟아져 내린다)
마른 수수깡의 연가 김영현
철자법이 틀린 너의 편지를 읽는다
뜰에는 난초가 피어 있고,
마른 수수깡 속으로
빈 바람소리만 지나간다
친구여,
너의 편지를 읽으면 까닭없이 외롭다.
세월이란 물 흘러가듯
조용조용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렇듯,
문득 흘러가는 것이란 걸
나는 지금에사 깨닫는다.
너의 편지와 뜰에 핀 노란 난초를 보며......
마른 수수깡 같은 내 가슴 속으로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린다.
철자법이 틀린 너의 편지 위로
빈 바람이 스쳐간다.
무릉지도 武陵之圖 이윤설
가파른 산동네 구름 높은 골목 꼭대기 백 년 묵은 할마시 햇빛 가생이를 쪼이며 가느스름 홀리는 여우꼬리 담배연기, 뭉글뭉글 두어걸음 내려가면 반모시메리 백발눈썹 영감탱이 걀걀걀 이빨 빠진지팡이 앙앙불락 똥파리 골리기 취미, 꼬부랑꼬부랑 더 내려가면 함지박궁둥이 할망구들 민화투 삼광 꽃밭 팔광 달뜨는 소리 부채 주름살같이 화들짝 펼친 산동네 골목 지형지물 곳,곳, 곳엔 따로 여투어둔 임자 있어 문패 없이도 아무도 범접치 않고, 강물에 떠내려가는 양은 대야처럼 사람들 벙글 둥글 흘러가는 골목엔, 짐칸에 다라이 싣고 오토바이 기똥차게 빠꾸하는 언덕배기 골목엔, 헌옷 수거함 옆 솜이불 자주 목단꽃 휘영창한 노인네들 오는 님 가는 놈 앞꼭지 뒷태 곱아보고 수군대고 혀를 차며 킥킥 공기놀이하는 신선들 세월의 수염이 길고 길게 흘러가도록 자꾸 자꾸 늙어도 못다 늙어 뽀얗고 분홍빛 도는 뺨으로, 나팔꽃 오므린 입술로 무릉도의 비밀을 알면서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까마귀
먼 하늘 꿍떡 꿍떡 땅 빻는 공사장 부근, 눈 내리던 저녁밥 때였다. 골목마다 까악까악 우산쟁이 노인 목쉰 소리가 맴돌기 시작했다. 망가진 우산들이 모여들고 노인의 연장가방 아가리가 쩍 벌어졌다. 오래 굶은 듯 빠진 쪽가위와 침침한 바늘들이 옴츠린 눈을 찡긋거릴 동안 흰 눈가루가 뽀얗게 쌓인 노인의 어깨틈이 녹슨 연장처럼 삐걱이기 시작했다. 짓눌려 버둥대는 우산귀에 실 끝이 닿을락 말락 애달토록 달달 떨리는가 싶었다. 그때였다. 비틀린 그의 어깻 죽지를 이탈한 날개가 큰 호를 그리며 부챗살처럼 쫘악 펄쳐졌다. 순간 놀란 노인의 입이 홀랑 뒤집혔다. 눈이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밥통 뚜껑을 막 열어젖혔을 때, 그가 나타났다. 한 소끔 펑, 훈김이 솟구치더니 아무도 밟지 않은 흰 눈 같은 밥 한가운데 오목한 사기주발모양 노인이 옹크리고 있었다. 쑥스러운 듯 입가에 붙은 밥풀을 떼어먹던 노인이 웃었다. 망가진 우산이나 양산 고쳐요. 반쯤 드러난 틀니에서 살그러미 밥물이 흘러나왔다. 나는 고대 빗살무늬토기를 파내듯 조심히 밥을 퍼담고 다시 밥통 뚜껑을 닫아주었다.
우산쟁이 노인은 커다란 연장가방을 챙겨 들고 구부적 구부적 날개가 몹시 거북한 것처럼 멀어지고 있었다. 지상의 힌밥 위를 천천히 날아오르는, 까마귀
소나무 조용미
나무가 우레를 먹었다우레를 먹은 나무는 암자의 산신각 앞 바위 위에 외로이 서 있다암자는 구름 위에 있다우레를 먹은 그 나무는 소나무다번개가 소나무를 휘감으며 내려쳤으나나무는 부러지는 대신번개를 삼겨버렸다칼자국이 지나간 검객의 얼굴처럼비스듬히소나무의 몸에 긴 흉터가 새겨졌다소나무는 흉터를 꽉 물고 있다흉터는 도망가지도 없어지지도 못한다흉터가 더 푸르다우레를 꿀꺽 삼켜 소화시켜버린 목울대가툭 불거져나와 구불구불한저 소나무는
스, 타, 카, 토 내 영혼 김정란
한참 잘 나가고 있는 시인이 나에게 말했다. 넌 호흡이 너무 짧아. 난 집으로 돌아왔다. 종이쪼가리마다 괴발쇠발 써놓은 내 시들을 읽었다. 가슴이 제멋대로 흘러나온 내 시들. 내 가슴에 문고리는 달려 있지 않다. 그러나 열고 닫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난 가슴을 감시하고 싶지 않아. 난 멋대로 쓰고 싶어. 난 위대해질 생각이 없어. 문들이 덜컹거렸다. 너무 쓸쓸해서 나는 울지도 못했다.좋아, 딴 것으로 프로가 될 수 없다면, 쓸쓸함에서나 그래 보지.난 스. 타. 카. 토. 로 내 영혼을 자른다.당신이 쉼표와 쉼표를 건너뛸 수 없다면 그건 내 탓은 아니다.오월의 나뭇잎들이 그러듯, 나도 햇빛 그네를 타고 싶다. 스. 타. 카. 토. 로.
雪國 김정란
ㅡ 발광체인 먼지들
마음속엔
하루종일 고적한 나라의 눈만 내리고
나는 삶의 줄기를 놓치고 자꾸만
흔들려요 발 밑에선 빠직빠직 살얼음
갈라지고 내 육체는 한없이
가벼워 거기 한 조각 위태한 유리조각 위에
지푸라기처럼 얹혀 있지
눈감아도 떠도 여긴 고향이 아니야
내 가볍고 투명한 뼈다귀들
벌써 가루처럼 폴폴 부서지지
마음의 갈피들 이따금 조심조심
펼쳐져요 내가 너무 막막해
삶의 끈을 가만히 놓아버릴 때마다
그럴 때 앙금처럼 내 인내의 골짜기에
얌전히 머물고 있던 먼지들 살꺼풀처럼
풀썩풀썩 일어서지, 그래, 그, 먼지들, 거기,
여전히, 언제나, 숨겨져, 눈 꼭 감고, 숨어, 있었던,
내가, 삶의 돌로, 꼭꼭, 눌러 두었던,
누군가가 그것들을 데려다 빛 속에
자유롭게 풀어 놓아요 하느님 당신일까?
내 위태한 삶을 지켜보시는?
내가 텅 빈 육체 속에서 그것들을
바라보아요...... 구원받은...... 발광체인...... 먼지들
내 생의 단정하게 숨겨진 작은 기미들
시집<그 여자, 입구에서 가만히 뒤 돌 아 보 네>에서
노래 이경림
나 세상에 안 가본 길 많아 몸이 아픕니다그 길들 자꾸 내 몸에 휘감기어 숨이 막힙니다문득 눈떠 보면 낯선 길 만발하고 어질머리처럼 세상 도는데나 아직 안 해본 짓거리 너무 많아 눈이 어둡습니다해지면 남몰래 이야기를 만드는 불빛 빤한 집들메밀꽃처럼 피어나는 도시의 불빛들아우트라인만 너무 환한 저 유곽들나 그것들에 눈멀어 자꾸 몸이 상합니다시도 때도 없이 우우우 관절이 일어납니다나 아직 안 울어본 울음 많아 목젖이 붓습니다꺼이꺼이 울 일 아직도 많아 미리 목젖이 붓습니다아 그런 날은 내 몸이 화로입니다
新 山海經 이경림
-獨, 寡, 法, 이라는 짐승에 대한 몇 가지 생각
獨이라는 숫새가 살았다. 獨은 뭇 짐승들을 싫어해 평생 바위굴에서 혼자 살았는데 언제 부턴가 그는 지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대신 시멘트 굴에서 혼자 사는 <사람>이라는 짐승이 늘어나 밤마다 獨의 소리로 울고 獨의 소리로 앓는다고 한다.
寡라는 암새는 수컷의 접근을 피하여 동굴 깊이에서 평생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寡 역시 오래지 않아 그만 없는 새가 되었다. 대신 시멘트 굴에 혼자 살며 사라진 獨의 그림자를 씹다가 밤이면 마치 공작 같은 날개를 펴고 어둠을 날아다니며 온갖 짓을 다 하는데 혼자서도 새끼를 낳아 기르지만 그것들은 모두 제 모양대로 자라지 못하고 이상한 모양을 하고 있다.
鱞이라는 물고기는 홀아비인데 시멘트의 바다에 산다. 이 고기는 온갖 근심으로 밤잠을 못 이루는 성질이 있다. 시멘트의 바다에는 온갖 들이 웅크리고 근심에 싸인 밤이 있어 공황장애라는 신종 병이 생기고 물고기들의 병원에는 온갖 들이 줄을 선다고 한다. 알프라졸람 이라는 작은 새알 같은 것을 먹으면 8시간은 잘 수 있다고 한다.
法이라는 짐승은 시냇가 푸른 초장에서 말과 사슴들과 뛰놀며 물 흐르듯 살고 있는데 이 짐승은 옳은 것을 물으면 아래 위로 끄덕이고 그른 것을 물으면 좌우로 고개를 흔든다고 한다. 그런데 언제 부턴가 이 짐승을 옳은 것은 좌우로 흔들게 하고 그른 것은 아래위로 끄덕이게 하는 기술을 가진 외과의들이 출몰해 초장이 자꾸 흉흉해 진다고 온갖 짐승들은 처럼 근심으로 밤잠을 못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현대시학 '신작소시집 (2007년 8월호)
사라진 입들 이영옥
잠실 방문을 열면 누에들의 뽕잎 갉아먹는 소리가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어두컴컴한 방안을 마구 두드리던 비, 눈뜨지 못한 애벌레들은 언니가 썰어주는 뽕잎을 타고 너울너울 잠들었다가 세찬 빗소리를 몰고 일어났다 내 마음은 누가 갉아먹었는지 바람이 숭숭 들고 있었다
살아있는 것들이 통통하게 살이 오를 동안 언니는 생의 급물살을 타고 허우적거렸고 혼자 잠실 방을 나오면 눈을 찌를 듯한 환한 세상이 캄캄하게 나를 막아섰다 저녁이면 하루살이들이 봉창 거미줄에 목을 메러 왔다 섶 위의 누에처럼 얕은 잠에 빠진 언니의 숨소리는 끊어질 듯 이어지는 명주실 같았다
허락된 잠을 모두 잔 늙은 누에들은 입에서 실을 뽑아 제가 누울 관을 짰지만 고치를 팔아 등록금으로 쓴 나는 눈부신 비단이 될 수 없음을 알았다 언니가 누에의 캄캄한 뱃속을 들여다보며 풀어낸 희망과 그 작고 많은 입들은 어디로 갔을까 마른 고치를 흔들어 귀에 대면 누군가 가만가만 흐느끼고 있다 생계의 등고선을 와삭거리며 종종걸음 치던 그 아득한 적막에 기대
행방 이영옥
어디에서 날아왔는지 꽃잎 한 장이 방충망에 붙어 어깨를 떨고 있다 아무도 없는 여기서 한참이나 울었던 것 같다 저 슬픔은 어디에서 출발한 것일까 읽던 책 속으로 다시 시선을 내리는데 아까보다는 조금 더 위쪽으로 자리를 옮겨 눈물을 찍어대고 있다 꽃이 열매에게 제 자리를 내어줘야 할 때 어디로 뛰어내려야 할지 도무지 방향을 알 수 없을 때 꽃이 고운 제 빛깔을 거두며 어두워지려할 때 옆에서 아무도 다독여 준 이가 없었구나 이쪽 철망에 걸러진 삶이 저쪽 철망으로 몸을 끼워 보지만 세상은 빈틈없이 촘촘한 봄날이었다
시집 <사라진 입들> 천년의시작, 2007
길이 아닌 길 이선영
저렇게 잘 닦인 길이 왜 내 길이 아닌가? 하고 눈에 한참 밟히던 길이 있었다 아마 원주나 제천 가는 길목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때 줄지어 가는 차들의 행렬에 끼여 있었다 세상엔 내가 알거나 모르는 수많은 갈래의 길이 있지만 그 길들은 그저 멀거나 조금 가까운 갈랫길일 뿐 내가 밟고 가는 길은 늘 하나의 길일 수밖에 없다 흔한 발자국들 찍힌 세상의 흔한 길들 중 하나가 될지라도 저 의젓한 길은 어디로 향하는가, 여직껏 나와 다른 길을 밟아온 길, 내게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으면서 그러나 나와는 다른 곳을 향해 가고 있는 저 길은 어떤 까닭으로 이리로 이어져서 어떤 추억과 상처의 바퀴를 굴리기 위해 뻗어 있는가, 저 길을 통해 다다를 수 있는 곳은 낯선 천국이라는 것인가 아니면 낯선 오지라는 것인가, 저 길은 가는 길이 아니라는 것이다 단 한걸음도 들여놓지 못할 그 길을 나는 한동안 가슴에 담았었다 내 갈 길이 아닌 그대를
<일찍 늙으매 꽃꿈 > 창비, 2003
때늦은 예감 김미령
참기름병이며 보리쌀 등속이 가득 실린 짐보따릴 두고 화장실을 다녀와서보니 방금 전에 있던 버스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터미널 바닥엔 무심한 검은 기름때 검표원은 딴 데 알아보라는 듯 멀뚱히 쳐다보고 차를 기다리며 조는 사람들 희멀겋게 분 어묵 같다 다시 나와도 차는 없다 오줌내 지린 컴컴한 화장실에서 몸 떨고 나와보니 바뀐 하늘 막대걸레 뒹구는 짐칸에 한쪽 귀퉁이가 축축이 젖은 펼치기 민망한 나의 보따리 저 혼자 멀리 가고 있다 어이없이 맑은 저녁이다 금방 가버린 것은 아직 떠나지 않은 것이다 너무 멀리 가버린 것은 이제 떠나고 있는 것이다 저만치 풀을 뜯던 소가 뒷다리를 끌어다 귀 뒤를 긁고 있었다 배추 속잎같이 아득하고 희부연 저녁이었다 아버지가 병원에 실려갔다는 전화를 받고도 왠지 담담했던 이른 저녁, 그 희미한 경계 너무 멀리 가버린 것들이지만 이제야 알 것 같은 때늦은 예감들이 잔잔한 슬픔으로 밀려온다
2005 서울신문 신춘문예 등단작품
낡음에 대한 예의
창으로 내다보이던 풍경 속을 걷고 있습니다
비온 뒤 말끔해졌지만
풀숲에 버려진 잠잠 청소기는 거기 그대로입니다
한삼덩굴이 무덤처럼 감싸서 이제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부스럼처럼 하얀 따개비가 뒤덮은 작은 철선도 그대로입니다
물이 고였던 자리에 소금기가 반짝입니다
저걸 누가 끌고 가진 않을 것 같습니다
물과 햇볕이 아주 조금씩 데려갈 거라고 그냥 둔 모양입니다
내일도 변함없이 견고할 이 푸르름
그러나 조금은 부식의 공간을 비워두기로 합니다
저쯤에서 울던 매미가 여기서도 웁니다 쎄릉쎄릉
스테레오로 울어대니 논밭이 파랗게 질립니다
가끔씩 있는 일이지만 모든 걸 지켜보고도
푸른 벼잎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바람에 흔들리고만 있지요
우연히 버려진 폐타이어가 들고양이 집이 되고
임시로 지은 판잣집이 슬그머니 이웃이 됩니다
하늘엔 빨랫줄처럼 늘어진 검은 전선들
웬만해선 바뀔 것 같지 않지만
잠시만 허락된 누추가
다들 그렇게 고향이 되는 것을요
창으로 보면 언제나 완벽한 정원입니다
어버 씨氏의 바다 김미령
1
안경테 너머로 점점 굵어지는 빗줄기
손님이 뚝 끊겼다
TV를 보는 어버 씨氏의 뒤통수가 눈썹 위에 무겁게 얹혀
카운터에서 시를 읽는 나의 강박증을 짓누르고 있다
촉촉한 문장 사이로 비린내가 더듬거리며 기어다니고
미간을 만자작거리는 횟수가 잦아질수록
양동이에 빗물 받는 소리 똑 똑 커진다
2
음소거된 여자 아나운서의 미소에는 묘한 데가 있다
그녀를 이렇게 뜯어본 적은 한번도 없었다
입술을 움직일 때마다 병아리같은 낱말들이 튀어나오다
브라운관 안에서 압사하고 있었다 내 가슴은 먹먹해졌지만
파리처럼 그는 흡반을 붙이고 무언가를 열심히 빨아들인다
엄마는 좌천댁과 고스톱을 치고
장어들은 서로의 등에 기대 구석에 서서 졸고
등 뒤로 짚은 그의 붉은 손등에 일없이
굵은 힘줄이 솟아있다
3
그는 가슴으로 말을 때린다
소리없는 북처럼 공중엔 떨림만 남지만
입밖에 나와 결코 다칠 일없는 말들의 따뜻한 품을
그는 컴컴한 입속에 가지고 있다
도마를 쾅, 내리쳐도 장어들은
어버 씨氏 안녕! 하며 통 속으로 뛰어내린다
어떤 폭풍도 칼금처럼 무늬만 남는 그의 가슴속엔
함부로 어획되지 않는 눈부신 바다가 있다
최초의 말들이 있다
흔한 풍경 김미령
시청 앞 연못에 기억상실증에 걸린 비단 잉어가 산다몰락한 귀족 처럼 느릿느릿 헤엄 치면양귀비 꽃 수면에 비쳐온다우리는 그걸 주홍빛 슬픔이라 부른다
허기진 햇살이 정수리 위에 어른거린다
메마른 광장의 오후 2시가 아가미속을 들락날락하는
지루한 염천炎天 의 대낮
살아있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 벽을 두드려보듯
지느러밀 움직이며 물의 파동을 느껴본다
배에 와닿는 물의 감촉이 따스하다
눈앞이 침침해지고부터는 소리에 집착하게 된다
좁고 가늘어진 바람소리
공중에 박음질하듯 이따금 지저귀는 새소리
무수한 소문들이 물기를 머금고 부풀었다
사라진 벤치에 빈 종이컵이 실신할 듯 입벌리고 있다
새우깡을 무심히 던지던 손이 오래 들여다보고 있었던 건 무엇일까生의 마지막 들숨을 쉬듯 물위로 솟구칠 때 무심코돌아서던 누군가의 하얘진 귓불을 보았을 수도 그때 잠깐 흔들린 듯눈을 깜빡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서로가 엿본것은 아무것도들킨것 또한 아무것도 없다 다만 그동안에도애초에 누구의 관심거리도 아니었다는 듯개미들이 떨어진 여치 다리를 십자가처럼 옮기고 있었고체인을 오래 매만지고 있던 자전거 옆으로 은색 승용차가서류뭉치를 신생아처럼 안고 급히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모두 외로움을 흙먼지처럼 껴입고 있지만삶의 균형을 유지하는 법을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다벤치 밑에 조금 구부러진 쇠뜨기풀이 다시 일어 서는 동안내 어슬렁거림은 어떤 사소함에 비유될 수 있을지 생각해 본다보이지 않게 어긋나도록 돼 있는 정교한 교차로 같은 일상속에서도무언가에 열중하는 순간 누구나제 몸에 딱맞는 표정을 찾을수 있을 것이므로모두 서로에게 그림속 배경일 뿐이라는 듯과자 부스러기들이 바람에 흩어진다
200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작품
바람의 동거인 김경선
낙원떡집 옥상엔
한 장의 계약서도 없이
바람과 동거하는 사내가 있네
문틈으로 밀린 세금고지서가 빗물처럼 스며들고
슬픔이 찰랑거리며 받쳐놓은 고무다라이를 넘치곤 하네
마지막 남은 오천 원으로 복권을 사들고
어젯밤 폭포수처럼 울던 사내
헛도는 피댓줄 같은 헐거워진 생 앞에
짜거나 질척한 떡 반죽이 되는 사내
희망을 섞어 재 반죽을 시도하네
온몸으로 생을 걸쭉하게 치대며
철썩 처 얼 썩 두들겨 맞네
떡 시루에 사내의 눈물이 콩고물처럼 사이사이가 채워지네
찰진 아픔들이 차곡차곡 떡시루에 앉혀지고
뜨거운 수증기가 안개 같은 눈속임으로
상처들을 켜켜이 쪄내고 있네
조각조각 잘라져 포장되어 가판대에 놓이는 사내
낙원떡집에선 무지개떡이 불티나게 팔려나가네
<우리시>2007, 7월호
비눗방울 /강기원
짐 설커스는 사망 후 2년 만에 자신의 아파트에서 미라로 발견되었다 건강상의 이유로 복용하던 다량의 약물이 시신의 부패를 막았던 것이다 정부에서 받은 장애 연금은 인터넷을 통해 은행 계좌에 자동 입금됐고 전기, 전화, 텔레비전 시청료 등은 인터넷을 통해 자동 지불되었다 사이버 공간 속에서 그는 공과금을 꼬박꼬박 지불하는 착실한 망령으로 2년 동안 살아 있었던 것이다
당신의 체취 없이도, 손길 없이도 난 당신과 황홀한 섹스를 하지 배신할 리 없고 병들 리 없는 늙지 않을 애인 클릭 한 번이면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얻을 수 있어 흑마법사, 연금술사, 궁수, 도둑, 왕,,,,,수없이 많은 내가 수없이 많은 얘기의 주인공이 되는 거야 블로그 속 내 방은 마법의 양탄자 북극과 열대 사이, 대서양과 지중해를 순식간에 횡단하지 사라진 도도새와 놀다가 마이아사우루스의 등에 올라타기도 해 친구? 이름? 쓸데없는 일 클릭 한 번이면 그뿐 비눗방울 세상, 중력 없는 백색 가루의 세상 그러나 판타지도 때론 지루해지는 법 그런 날이면 충직한 마우스에서 손을 떼고 가벼이, 방울이 터지듯 사라지는 거야 없었던 나인채로 물론 악취도 소음도 없이.....
껍데기에 대한 은유 윤준경
사과를 깎다가 문득, 껍데기의 존재를 깨닫는다 달콤한 과육을 한치의 소홀함도 없이 탄탄히 싸고 있는 껍데기 껍데기가 없었다면 이 새콤하고 달콤한, 사과의 맛을 사과가 간직할 수 있었을까 껍데기가 아니면 귤이 그 얇은 살 속에 오묘한 비밀들을 품을 수 있었을까 낱알의, 과일의 모든 열매의 껍데기 - 그것을 깎는 귀찮은 노동이 새삼 경건하다 가득 차 본적도 없이 다 빠져나간 쿨렁한 가죽에 화장 발 붙어 청단홍단 치는 나를 자주, 나는 이렇게 불렀다, 껍데기 나를 헐하게 본 것만은 아니었던가
시집 <나 그래도 꽤 괜찮은 여잡니다> 우이동사람들
고독한, 프리랜스 김상미
그와 동거하고 싶다
함께 산다는 것
그런 맛을 맛본 적이 없다
탐하는 눈도 손가락도 입도 없이
골똘하게 페이지를 넘긴 무수한 세월
사냥개가 없으면 들고양이라도 데리고
밤새도록 그를 사냥했어야 했는데
봄밤은 가고
아카시아 꽃잎도 지고
쓸쓸함에 몸 둘 바 모르는 태양만이
한결같은 내리사랑 내 안에 퍼붓고 있다
지금은 가을은 가슴을 찢는다*
그와 함께 이 가을의 쓰라린 열매가 되고 싶다
따기만해도 주르륵 슬픔이 온 세상을 적시는
목적도 계략도 안식도 없이
그와 함께 날아 오르고 싶다
천상의 별자리가 아닌
깊고 깊은 땅 속
불타는 한 몸 씨앗으로!
*프리드리히 니체의 시 <가을> 중에서
2007 현대시학 10월호-
담배연기 김상미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미하일 바흐찐은 자신의 책으로 담배를 말아 피웠다.
그 담배 연기를 오늘날 내가 마시고 있다.
헤어지자 말하는 남자의 등뒤로 담배는 만병의 시작이다 쓰여진 커다란 플래카드가 펄럭이는 평원이 보인다. 헤어지기엔 평원이 너무 넓다. 큰 키의 나무라도 몇 그루 있었으면...그러나 자신이 쓴 책으로 담배를 말아 피울 수 있는 남자라면 이별의 독초에도 금방 익숙해지겠지.
그 담배 연기를 받아 마시며 천천히 평원의 입구로 들어선다.
푸드륵 몇 마리 비둘기들이 적막을 깨며 담배 연기처럼 흩어진다. 가지마, 남자의 심중이 마지막 총알처럼 날아와 뒤통수에 박힌다.
그러나 이별은 섬광이 아니다. 섬광이 빠져나간 껍질이다. 그 껍질 때문에 우리는 세계는 어디나 똑 같음을 배우게 된다. 참으로 끊기 힘든 담배, 그를 위해 자신이 쓴 책을 기꺼이 찢은 남자. 그 위에 찍히는 립스틱 자국.
아무래도 이곳은 이별의 장소가 못 된다. 이별은 철근을 깔고 시멘트를 바른 곳에서 이뤄져야 한다. 평원은 너무 넓고, 내리쬐는 햇살은 눈부시게 따뜻하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평원을 가로지르는 내게 더 이상 눈물 따윈 흘리기 싫다며 평원의 푸른 눈들이 일제히 소리친다. 참으로 이별은 사람으로서 차마 못할 짓이다. 자신이 쓴 책으로 담배를 말아 피우며 그 남자는 얼마나 아팠을까?
그러나 이곳만 통과하면 나는 그와 헤어진다. 꿈 같은 현실에 꿈 같은 이별이 살해당하는 장소에서 벗어나, 또 다시 담배에 불을 붙이며
내면으로, 내면으로 내려앉는 그늘진 공기처럼 무소부재의 함정 속으로, 폐허 속으로,
담배 연기처럼...
2006 <<젊은 시인들 동인지 2집 >>
숨어있는 동굴 함순례
엄마의 입안엔 누구도 드나들 수 없는 동굴이 있다
어느 날 수저질 느슨한 엄마
고기를 씹지 못하신다
고름 뿌리로 남은 이, 하나 둘 셋,
빛도 바람도 없이 습기만 눅눅한
십수 년 불 들이지 않은 검은 아궁이
그 깊은 자궁을 들여다 본다
청상 시절 중심이 흔들릴 때 있었다
털어놓으시던 엄마
차암 의젓한 이였는데, 차마 니들을 두고 갈 수 없어서...
풀이 자랄 수 없는 동굴
허나 칠남매는 엄마의 살을 뜯어먹고 자란
육식동물이었으니
내일 당장 죽더라도 오늘 맛나게 드시고 가시요!
나의 완력에 뿌리 뽑아낸 엄마
비로소 곤한 잠에 드신다
내가 발견한 동굴은 고작 세 개뿐
몸 어딘가 숨겨놓은 동굴이 있는지 나는 모른다
신도여인숙 함순례
남들 다 내 같지 않제 걱실걱실한 뱃사람들 상대하기가 좀 에려운 기라 고만
둬뿔라 몇 번을 맘 묵어도 쪼매 두고 보제 했던기 이날이라카이 지금사 일 놔
뿔기도 궁시럽고마 뱃사람들 월세방으로나 돌리뿐 기라 그라도 한 밤만 재와
주소, 및칠 굶었는데 밥 좀 주소, 하믄 맴이 아퍼가 재와주고 믹인 사람, 빛도 없는 밤에 디리닥쳐가 날마새마 홀랑 도망간 넘들 쌨다 우째다가 방세 줄라꼬 다시 온 넘은 한 분도 못 봐가 속이도 속아주고 함시로 사람이 독해지제 아 이것? 예전 꽁치잡이배 그물에 쓰던 기라 열쇠가 하 쪼매니께 안경집만한 여어 다 잡아매놓으이 십상 좋다 주무이 뿔룩해징께 아참 하고 놓고 가는 기라,
여는 낯 씻는 데고 저 끝짝이 볼일 보는 데라 영화배우도 여그 많이들 왔제
요샌 시인이라는 작자들도 더러 찾아오더만, 근디 시인이 대체 뭐하는 사람잉가? 시악시는 알어?
함순례시집 <뜨거운 발>
밥에 대한 예의 문성해
폭설 내리고 한 달 나무들은 제 그늘 속에 아직도 녹지 않은 눈을 매달고 있다 나중에 먹으려고 남겨둔 식은 밥처럼
인근 취로 사업장에서 이곳 공원으로 찾아든 아낙들이 도시락을 먹는다 그동안 흰 눈밥이 너무 싱거웠던가 물씬 피어나는 파김치와 깻잎 장아찌 냄새에 조용하던 나뭇가지가 한순간 일렁인다
어서 흰 밥덩이를 모두 해치우고 또 보도블럭을 교체하러 가야 하는 저이들 밀어넣는 밥 숟갈이 너무 크다 크고 헐렁한 위장은 또 얼마나 위대한가
그러나 나무들은 천천히 눈밥을 녹여가며 먹는다 저번 눈밥보다 맛이 어떤가 음미하면서, 서서히 뿌리가 가지로 맛을 전하면서, 제 몸의 기관들 일제히 물오르는 소릴 들으면서 나무들은 할 수 있는 모든 예우를 갖추어 눈밥을 떠 먹는다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04년 3-4월호
단단한 씨 문성해
파란 바구니마다복숭아를 소복이 얹어두고늙은 여자는 오늘도 터미널 노점에 나와 앉아 있다누군가 항상 떠나고 오는 터미널봄이면 왁자하게 딸기들이 흘러가고여름에는 참외며 수박이 늦게까지 막차를 기다리다 떠났고추석을 앞둔 지금은 분홍빛 복숭아들이관절염의 무릎 앞에 잠시 머무르고 있다울긋불긋한 과일들 속에 둘러싸인나날은 그런 대로 향기로웠으리라파리며 벌들이 덤벼드는 반생도그런 대로 달콤하였으리라오래 머무는 것이 없는 터미널에서늦게 온 매미들이 악을 쓰며 울고구름은 어딘 가로 빠르게 몰려가고 어제의 복숭아 하나가 벌써 짓물러 흘러내린다익숙한 칼질로 그것을 베어먹는 볼이팽팽하게 차오르는가 싶더니 이내 꺼져버리고복숭아만큼의 동그란 허공 하나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바쁜 걸음들 속에여자가 단단한 씨 하나로 박혀 있다
홍어 문혜진
내 몸 한가운데 불멸의 아귀 그곳에 홍어가 산다 극렬한 쾌락의 절정 여체의 정점에 드리운 죽음의 냄새 오랜 세월 미식가들은 탐닉해왔다 홍어의 삭은 살점에서 피어나는 오묘한 냄새 온 우주를 빨아들일 듯한 여인의 둔덕에 코를 박고 취하고 싶은 날 홍어를 찾는 것은 아닐까 해풍에 단단해진 살덩이 두엄 속에서 곰삭은 홍어의 살점을 씹는 순간 입안 가득 퍼지는 젊은 과부의 아찔한 음부 냄새 코는 곤두서고 아랫도리가 아릿하다 중복 더위의 입관식 죽어서야 겨우 허리를 편 노파 아무리 향을 피워도 흐르던 차안(此岸)의 냄새 씻어도 씻어내도 돌아서면 밥 냄새처럼 피어오르는 가랑이 냄새 먹어도 먹어도 허기지는 밥 붉어진 눈으로 홍어를 씹는다
< 2000년대 주목받는 젊은 시인들 >생각의나무, 2007
표범약국 문혜진
청담동 표범약국에는 표범약사가 있지. 멸종된 줄로만 알았던 표범약사가 하얀 가운을 입고 인터넷을 하다가 귀찮은 듯 인공눈물을 던져주지.
호랑이연고도 팔고 낙타거미의 독이 든 마취제도 팔지만 새끼표범 칩으로 만든 구강청결제라든가 호피로 만든 무좀 양말 따위는 팔지 않아.
인간의 육체를 포장해온 무수한 환상을 제거하고 오로지 생물학적으로만 본다면 인간은 맹수의 공격 본능으로 학살을 일삼고 모피를 찬양하며 발정제를 사러 약국에 가지.
청담동에는 루이비통이 있고 구찌, 프라다, 진도모피가 있고 표범약국이 있지. 이 겨울 다국적 패션거리에는 베링해 섬 출신의 북극여우털로 만든 자켓이 있고 덫에 걸리면 다리를 자르고 도망간다는 밍크쥐의 가죽을 수백 개 이어 만든 코트가 있지. 내가 만약 난파선의 선원으로 북극여우의 섬에서 겨울을 보내게 된다면 내 가죽은 도대체 어디에 쓰일 것인가?
물어버리기 위해 이빨을 아끼는 것이 아니라 이빨이 없어서 물지 못하는 것이라고, 청담동 표범약사는 밤이면 긴 혀로 유리창을 핥으며 우아하게 내리는 눈을 바라본다.
문신 문혜진
사람들은 죽겠다고 시를 쓰지시에 대한 시가 얼마나 촌스러운지도 모르고시를 천 편쯤 써서 여기저기 뿌려야루이비통 가방 하나쯤 살 수 있을까?시를 써서 부자가 될 수 없어그것은 교복 입은 전인권과자갈 언덕 위에서 섹스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지지우고 싶어도 지워지지 않는다친 신경 세포 속 문신 토할 것 같아죽을 것만 같아나는 지금 문신을 새기고 있어전기의자에 앉아 온몸에 침을 꽂고 고문 당하는 기분이야나부랭이들은 이걸 두고"몸시"라고 하겠지그래 나는 몸으로 시를 쓴다그것도 "벌거벗고"춤이라도 추고 싶군파우스트가 빨래를 널고백설공주는 거울을 보며 면도를 해대고 있어마돈나가 앉아서 아인슈타인의 검을 머리털을 젓가락으로 참을성 있게 뽑아주고에미넴이 "나인 인치 네일수"로 뻑큐를 하다가자기 코를 찔러 코피를 질질 흘리는 동안당신을 뭘 했는데?남 얘기가 아니지이런 토할 것 같은 세상에서 도망쳐!무거운 뇌의 하수인이 되지 말고내치지 못한 지긋지긋한 그에게서 도망치자고!그것만이 살길이야
질 나쁜 연애 문혜진
이 여름 낡은 책들과 연애하느니불량한 남자와 바다로 놀러 가겠어잠자리 선글라스를 끼고낡은 오토바이의바퀴를 갈아 끼우고제니스 조플린의 머리카락 같은구름의 일요일을 베고그의 검고 단단한 등에얼굴을 묻을 거야
어린 시절 왜 엄마는 나에게바람도 안 통하는긴 플레어스커트만 입혔을까?난 다리가 못생긴 것도 아닌데
회오리바람 속으로비틀거리며 오토바이를 몰아 가는불량한 남자가 좋아머리 아픈 책을지루한 음악을 알아야 한다고지껄이지도 않지오토바이를 태워줘바다가 펄럭이는바람 부는 길로태풍이 이곳을 버리기 전에검은 구름을 몰고나와 함께 이곳을 떠나지 않겠어?
시집 <질 나쁜 연애> 2004
침묵, 바닷가에서 주운 칼날 김정란
나는 이제 망설이지 않는다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으므로
나는 내면의 신전에 내려갔었다
신탁은 분명했다 그것은 쓰여진 글자였다, 이번엔
당당하라, 너를 죽여라, 그리고 너 자신이 되라
나는 거대한 침묵에 휩싸여 무섭게 조용해진다
어제 새벽에 내가 찾아갔던 푸르고 검은 바다,
바닷속 어느 숨겨진 지역에서 낮게 빛나는
적의에 가득 찬 빛의 아름다움에 놀라서
나는 맨발로 모랫벌을 오랫동안 헤매어다녔다
무엇인가가 내 발을 찔렀고, 나는 그것이
녹슨 칼날들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것들을 주워 가슴에 품고 집에 돌아왔다
어제 오후 무렵부터 명치끝이 뻐근히 아파 왔다
나는 알고 있었다 칼들이 가슴속으로 천천히
그러나 명확하게 파고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내 가슴 어느 오래된 지역에선가
녹이 씻겨나가고 새파란 제 색깔을 회복하고 있다는 것을
오늘밤, 보름달이 뜨고
그것들 달빛 아래에서 신성한 푸른 빛으로 날카롭게 벼려진다
나는 더이상 흔들리지 않는다
흔들림으로 흔들림을 다스리는 방식을 익혔으므로
나는 흔들리는 내 안에서 단단하다
나는 사물들의 뿌리에 나의 쇠붙이를
가만히 가져다놓는다
그리곤 낮게 배를 깔고 바라본다
그것들 체계의 사이와 사이를 조용조용
그러나 날렵하고 가볍게 헤집고 다니는 것을
그리고 제3의 형식을 만들어내는 것을
꿈꾸는 자들은 다른 방식으로 진화한다
시집<그 여자, 입구에서 가만히 뒤 돌 아 보 네>
결핍으로서의 존재 김정란
-어두움의 기록 1
나는 어떤 어두움에 얻어맞은 것인가.
어떤 결핍에 의하여
내 실존은, 본질에 대해,
이토록 민감하게, 거의, 물리적으로
感을 잡으면서도,
어떤 형식의 不在에 의하여
이토록 그것으로부터 늘
이반되는가, 대체,
세계의 밝음, 세목의 즐거움에서
놓치지 않고 그림자, 결핍의 예감을
감지하는 이-존재의 뻐그러짐.
나는 머리를 쳐든다, 알 수 없다
이 절망의 뿌리에서 나를 지켜주는
이 지독한 갈증, 그것의
성실성이 얼마나 끝난 데를
모르는가를.
나는 세목의 확인에서 빛의 예감에까지
철저히 움직인다. 일단은,
그 수밖에 없다. 얻어맞은 자아여
치유 너의 아이덴티티를
꿈꾸며. 눈을 뜬 채. 세계의
세목으로부터 절대로
눈돌리지 않은 채로.
길 또는 그물 이원
길은 그물이다 몸을 가진 것들은 걸린다 걸려본 발이 길을 알리라
길 가운데 선 청동의 동상에도 그물의 그림자가 비친다 허리에 찬
위풍당당한 칼도 예외는 아니다 공기가 포장지처럼 바스락거린다
길 밖의 키작은 채송화는 다른 길을 만든다 간간히 꽃망울 잎망울까지도
물과 흙을 담은 길이다 길의 무너지는 무덤들이 꽃속으로 스며든다
이파리와 아파리 사이에서 조금씩 벌어지는 하늘이 새하얗게 바랜다
공기는 얼룩이 져 있다 어김없이 하늘을 따라가는 길 가파른 매듭을
보여주고 매듭은 깊은 골짜기를 몰고온다 높은 곳의 웅덩이에서
몇 개의 자루를 지고 가는 구름 구름속으로 지상의 그물이 삭아내린다
목잘린 부처는 하루 종일 힙합만 듣는다 이원
목이 잘린 불상의 얼굴 하나가 내게 왔다. 화두를 붙들고 있었을 몸은 다른 곳에 두고, 아래로 내려뜬 눈과 공기를 가두고 있는 코와 살며시 다문 입과 잘린 목까지 펄럭이며 내려오는 귀만 가지고 왔다. 부처를 동백나무 옆에 놓아두었더니 부처가 없는 왼쪽으로만 꽃이 핀다. 요즘 접시에 깔린 명사산 모래 속에 겨우 목을 담그고 있는 부처는 스피커와 모니터 사이에서 산다. 하루 종일 힙합만 듣는 부처를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보니 왼쪽 관자놀이에 흰색 플러그가 꽃혀 있다 목 잘린 부처는 힙합을 들으며 러시안룰렛 게임 중이다
2003년 현대문학상 수상시집 -중-
방점을 찍었던 거미 한혜영
거미 한 마리 시위를 하듯이 뚝 떨어진다 제 기구한 삶을 한번은 가까이서 봐 달라는 것이다 더도 덜도 할 것 없이 꼭 내 눈높이까지 내려와 대롱거리는 거미 눈 찔끔 감고 죽었다 복창을 하면서 허공에 몸 날렸다는 것이다 대대손손 번지점프를 업으로 삼는 종족이지만 백번이면 백번 모두 목숨 거는 일에 대해서 사람이 알면 얼마나 알겠느냐고 보리밥풀 한 개 똘똘 뭉친 것처럼 가난한 몸으로 내려왔으니 공양이라도 받으려면 소반부터 마련해야겠다는 것이다 욕심 부릴 것도 없이 꼭 한 끼 분량의 끼니가 놓일 조촐하고 겸손한 소반에 대해서 한참이나 골똘하던 거미는 발바닥의 안전을 확인하고 혹시라도 엉킨 실이 있는지 꽁무니 움찍거려보기도 하면서 또 한번의 점프 준비를 하고 있다 벽이든 난초 이파리든 낙관을 찍듯 실 가닥 하나 꾹 눌러놔야 육각이든 팔각이든 맘에 드는 상판 하나를 짤 수가 있다는 것이다 헌데 웬 난데없는 인간거미가 돌풍에 휘말려 바람개비 팽팽 도나? 무심코 올려다봤던 허공에서 그 남자를 봤던 것은 스무 살 때다 삼일빌딩 새카만 유리를 닦다가 말고 대책도 없이 바람에 휘둘리던 그날 이후 그는 내게 있어 모든 거미의 상징이 되었다 스무 살 철부지 동공에 온몸으로 방점을 찍어 생의 처연함을 보여줬던
퓨즈가 나간 숲 한혜영
퓨즈가 나간 숲은 깜깜하다. 나무 꼭대기 새집조차 어둡다. 길이란 길은 모두 지워지고 온전한 것이 있다면 푸르던 기억에 항거하는 단단한 그리움이다.
한계절 사랑의 불 환하게 밝혔던 나무들, 열매들, 그리고 새들, 그 사랑의 흔적을 罪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물론 그냥 상처다. 이 겨울의 어둠 아니 한줄기 빛을 참고, 그래 빛이야말로 얼마나 많은 것들에게 상처가 되었나. 눈부신, 찬란한,
아름다운 따위의 형용사와 눈이 맞아 저지른 빛의 횡포, 가지마다 넘치는 축복인 양 위선의 잎새 덕지덕지 달아주며 오늘의 상처를 마련했었다. 누구라도 헛발 자주 내딛고 나뒹굴던시절, 쌈짓돈마냥 숨겨둔 사랑의 잎새 하나만 있어도 가슴은 이리 훗훗한 그리움이다.
어딘가에 한 뭉치 퓨즈가 분명 있을 것이다. 계절과 계절의 끈을 잇고 명치 끝을 꾸욱 누르면 혼곤한 잠의 머리 절레절레 흔들며 숲은 그날처럼 홀연히 일어날 것이다. 때문에 새들은 이 겨울 떠나지 않고 하늘 받들어 빈 숲을 지키고 있다.
1996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가령 최명란
가령 내게 암내가 난다면
넌 내 겨드랑이에 코를 박아 자반고등어처럼 몸을 포개고 나붓이 누울 수 있겠니
가령, 두 길 사이 양다리를 턱 걸치고 서 있는 육중한 육교가 갑자기
바람에 휙 날아간다면
너도 육교를 따라 바람처럼 날아갈 수 있겠니
가령 뚱뚱한 몸으로 비좁은 두 이빨 사이에 몸을 걸치고 이 곳 저
곳 자리를 옮겨가며 쑤셔대는 이쑤시개를 반려로 맞으라면 넌 그럴 수 있겠니
가령 날마다 바람으로 내통하는 앞 베란다와 뒤 베란다의 내막을
뻔히 아는 거실인 네가 아버지라면 베란다를 며느리 삼을 수 있겠니
가령 비오는 날 주점에서 미니스커트 미끈한 다리의 만취한 아가씨
가 우산꽂이에 거꾸로 박혔다면 오감이 흩어진 사내인 네가 온전히
바로 세워줄 수 있겠니
가령 할머니에게도 올라타고 엄마에게도 올라타고 딸에게도 올라
타는 수탉의 내막을 뻔히 아는 부화장인 네가 그런 수탉을 사위 삼을 수 있겠니
가령 차가 밀리는 곳은 관세청 사거리만이 아니라 햇살이 쫑알
쫑알 차들의 정수리를 쪼아대는 곳이라면 다 밀리는 줄 아는 네가
알을 깨고 나오기만 하면 다른 암탉들이 쪼아 죽이는 닭장으로 광
화문의 뻑적지근한 어깨들을 불러들일 수 있겠니
가령 31일을 넘어본 적이 없는 달력을 붙들고 32일에 만나자는 사람과 약속하라면 넌 그럴 수 있겠니
가령 물난리 난 곳에 가장 필요한 건 물이며 불난리난 곳에 가장
필요한 건 불이라며 물난리에 물을 퍼 붓고 불난리에 불을 지르는
사람이 간장 종지의 소금 사리라면 넌 그를 부처로 모실 수 있겠니
웹진 시인광장 2007년 겨울호 발표
내 친구 야간 대리운전사 최 명 란
늦은 밤 야간 대리운전사 내 친구가 손님 전화 오기를 기다리는 모습은 꼭 솟대에 앉은 새 같다 날아가고 싶은데 날지 못하고 담배를 피우며 서성대다가 휴대폰이 울리면 푸드덕 날개를 펼치고 솟대를 떠나 밤의 거리로 재빨리 사라진다 그러나 다음날이면 또 언제 날아와 앉았는지 솟대 위에 앉아 물끄러미 나를 쳐다본다그의 날개는 많이 꺾여 있다 솟대의 긴 장대를 꽉 움켜쥐고 있던 두 다리도 이미 힘을 잃었다 새벽 3시에 손님을 데려다주고 택시비가 아까워 하염없이 걷다 보면 영동대교그대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참은 적도 있다고 담배에 불을 붙인다 어제는 밤늦게까지 문을 닫지 않은 정육점 앞을 지나다가 마치 자기가 붉은 형광등 불빛에 알몸이 드러난 고깃덩어리 같았다고 새벽거리를 헤매며 쓰레기봉투를 찢는 밤고양이 같았다고 남의 운전대를 잡고 물 위를 달리는 소금쟁이 같았다고 길게 연기를 내뿜는다 아니야, 넌 우리 마을에 있던 솟대의 새야 나는 속으로 소리쳤다 솟대 끝에 앉은 우리 마을의 나무새는 언제나 노을이 지면마을을 한 바퀴 휘돌고 장대 끝에 앉아 물소리를 내고 바람소리를 내었다 친구여, 이제는 한강을 유유히 가로지르는 물오리의 길을 물과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물새의 길을 함께 가자 깊은 밤 대리운전을 부탁하는 휴대폰이 급하게 울리면 푸드덕 날개를 펼치고 솟대를 떠나 밤의 거리로 사라지는 야간 대리운전사 내 친구오늘밤에도 서울의 솟대 끝에 앉아 붉은 달을 바라본다 잎을 다 떨군 나뭇가지에 매달려 달빛은 반짝인다
2006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푸른 꽃 고은강
1
점자처럼 두둘두둘, 지문으로 만져줄게요
서투른 척 해드릴까요
깨물어드릴까요
도시 냄새, 하얗게 질리겠어요
내일은 당신 아버지와 이 숨막히는 통사를 써볼까 해요
통사는 밤으로 흐르고 우리는 고독하니까
참을 수 없는 불면의 생 어딘가에서 멋지게 뒹굴어봐요
질척거리는 입술, 말라죽을 때까지
당신만 모르죠
우리가 함께 저지른 아름다운 불경죄,
난 선생님 곁에 누워 선생님의 아내를 가졌어요
우리가 낳은 불순한 아이를
당신은 목숨 바쳐 섬기게 될 거예요
그게 평등이랍니다
또,
침 뱉으시게요?
가슴을 까발릴까요
뒤통수에 달린 음부를 보여드릴까요
별로 가진 것도 없는데
침 뱉으시오, 라고
이름을 개명할까봐요
일수쟁이처럼 꼬박꼬박 잘도 처먹는 당신,
연민의 면죄부나 드리게요
확,
미끄러질까요?
절박했었다고 말할까봐요
덜렁덜렁 한쪽 어깨를 다 드러내놓고 더 열심히,
주둥이로 죄짓자고 꼬드길까봐요
내 애증을 지불해서
한 생의 치부를 조용히 덮어줄 수 있다면,
거리에서 제일 잘 팔리는 절망이 되어
여기저기 평등하게 열어줄까봐요
백성 없는 나라의 주인처럼
고독한 수염이나 무럭무럭 길러
그 밀림국의 첫번째 거짓말로
열망보다 가볍게
사랑한다니까요, 자기
2
나는 밤의 서식자,
당신의 오만한 지붕 위에서
보들레르의 고양이처럼 갸릉갸릉, 울겠어요
당신의 애완동물처럼 기르고 있는 독설의 여인과 함께
티끌처럼 뒹굴겠어요
썩은 비늘을 털며
전염병처럼 이 남자 저 남자 옮아다니겠어요
아이를 낳을 거예요
탄탈로스의 사생아 같은 아이를 낳아 통째로 잡아먹고
또 아이를 낳아 또 잡아먹고,
당신의 비루한 주머니를 털어
내 모반의 냉장고 속 꽉꽉 채우면서,
더럽게 뚱뚱해지겠어요
내 허구의 눈시울이 자꾸 가려워요 파랗게,
꽃잎이 지네요
2006, <창비> 신인시인상 당선작
호텔 캘리포니아 고은강
오늘밤 당신은 자전거를 버린 아이, 아리를 버린 엄마, 엄마를 버린 아빠
첫사랑의 둥지가 머나먼 기억으로 실족되어 떨어진, 그 남자 그 여자의 뒷이야기가 자막처럼 흘러서 내리는 밤이니까요
불충분한 가난과 설익은 연애 때문에 난 어쩌면 시인이 될 수 없을지도 몰라요 가끔은 헤프게 첫인상 흘리며 다 닳아빠진 절개로 활활 접속하고 싶은 서정도 있었지만 서정시보다 더 빨리 부패하는 건 없다고 내 안의 박테리아가 딱따구리처럼 쪼아대요 그러니 사랑이여,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이 '시적'인 거리감을 위해, 이혼해드릴까요
오늘밤 나는, 차라리 혀를 꽉 깨물고 싶었던 첫키스의, 찢어진 청바지의, 노랑브리지의 호텔 캘리포니아
혹시라도 쓸쓸한 그대, 측츤측은 어둠으로 젖어드는 이 거리의 호텔 캘리포니아로 오세요 뒷문 열면 보이는 당신의 구멍가게처럼 나는 있어요 한 남자의 새애 투숙해 살면서 세상에 도청당하는 여자들이 그물처럼 떠다니는 황혼의 거리에서 365일 영화는 상영하지요 주홍글자는 불황이 없어요
그러니 그대, 호텔 캘리포니아로 오세요
오늘밤 당신은 아빠를 버린 엄마, 엄마를 버린 아이, 아이를 버린 자전거
광고지 돌리는 여자 문성해
신종 아파트 분양 광고지를 돌리는 늙은 여자의 뒤에서 플라타너스 한 그루나무 밑동에 삐죽이 새파란 잎사귀 몇 개를 달고 서 있다
어서 어서 삐라를 뿌리듯 광고지를 돌리는 일일 노동자 여자의 뒤에서 아무도 받지 않는 나뭇잎 몇 장을 간절히 내밀고 서 있다
점심도 굶은 채수 천 장의 광고지를 돌린 여자는 저녁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간다광고지 속의 아파트가 아닌 허름한 대문간 속으로
한번도 제대로 읽히지 못한 광고지들이 서부영화 속인 양 휘날리는 보도 위로아직도 나뭇잎 몇 장을 흔들고 서 있는나무 앞에서
누구인가 푸른 죽순 물이 뚝뚝 듣는 손으로 그것을 받아 읽어줄 사람은,
귀로 듣는 눈 문성해눈이 온다시장 좌판 위 오래된 천막처럼 축 내려 앉은 하늘허드레 눈이 시장 사람들처럼 왁자하게 온다쳐내도 쳐내도 달려드는 무리들에 섞여질긴 몸뚱이 하나 혀처럼 옷에 달라붙는다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실밥을 따라 떨어진다그것은 눈송이 하나가 내게 하고 싶은 말길바닥에 하고 싶은 말들이 흥건하다행인 하나 쿵, 하고 미끄러진다일어선 그가 다시 귀 기울이는 자세로 걸어간다소나무 위에 얹혀 있던 커다란 말씀 하나가철퍼덕, 길바닥에 떨어진다뒤돌아보는 개의 눈빛이무언가 읽었다는 듯 한참 깊어 있다개털 위에도 나무에도 지붕에도 하얀 이야기들이 쌓여있다까만 머리통의 사람들만 그것을 털어내느라 분주하다길바닥에 흥건하게 버려진 말들이시커멓게 뭉개져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다그것이 다시 오기까지 우리는 얼마를 더 그리워해야 하나
-200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내 황홀한 묘지 이기와
낡은 서랍 가득 낡은 브래지어가 쌓여 있다 어느 야산의 공동묘지처럼 구슬피 쌓여 있는 봉분들 제 명대로 세상을 누려보지 못하고 어느새 황홀하게 망가진, 가끔은 한없이 우스꽝스러운 욕정의 쭉정이 같은 것들 더 이상의 수치심도 없이 거실 바닥이나 욕실 세면대 위에 상스럽게 나앉아 있는 한때 어떤 것은 에로틱한 우상이었다 매력 없는 이 박색의 세상도 추근덕거려 보고 싶은 그렇게 실제보다 몽상의 사이즈를 더 부풀리는 몽실몽실한 마력의 봉우리였다 쾌락의 육질을 감싸 안은 황금빛 실루엣이었다 이제는 터지고, 해지고, 뭉개진 탄력의 감촉을 잃은 짓무른 송장에 불과한 , 시골 어느 삼류화가의 싸구려 춘화처럼 흥분시킬 그 어떤 상징도 메타포도 없이 골방 구석지기에 천박한 자태로 누워 있는 흉물 단 한 번도 희비의 오르가즘에 도달해 보지 못하고 생매장당한 내 젊음의 불쾌한 흔적인 저 젖무덤들, 푹푹 썩어드는 저 황홀한 관짝들
시집 <바람난 세상과의 블루스>
침대는 가구가 아니다 이기와
그의 속은 공갈처럼 비어 있었다 스프링도 스펀지도 안락을 제공할 그 어떤 소재도 내장돼 있지 않았다 바로크 문양의 유혹으로 겉치장을 했을 뿐 속을 들춰보면 널빤지 하나뿐인 부실한 골격이 내내 그의 영혼을 지탱하고 있었다 그의 잘 깎인 무르팍에 앉아봐도 그의 가슴에 내 가슴을 합체해봐도 밤마다 몇 시간씩 부둥켜안고 서로를 탐색해봐도 느껴지는 건 킹 사이즈의 허탈함뿐 내 생의 삼분의 일을 고스란히 바치고도 내 고절한 알몸을 통째로 상납하고도 단 한 번도 푹신한 꿈을 대접받지 못했다 날마다 무섭게 쏟아지는 졸음의 세계가 갈망한 건 서로의 시장기를 보충시킬 육체였을 뿐 탄력 있는 정신도 영구적 파트너도 아닌, 오직 깨어날 수 없게 서로를 마취하는 몽상의 침구였을 뿐 그의 관절 하나가 삐걱이기 시작한 것도 그의 몸 중앙이 맥없이 꺼져들고 내 욕망의 척추가 휘어져 고통이 시작된 것도 수면을 위한 단순한 용도가 아닌 그 외에 탁월한 용도로 서로를 탐미하려 했던 것 그렇게 오용하지 않으면 순순히 잠들 수 없는 워낙 속 재질이 부실한 싸구려 마네킹들이었던 것
자판기 혹은 그녀/ 서안나
이 해안가 소읍 터미널에서 그녀는 마음을 다 써버렸다.
그녀의 몸에 몇 개의 버튼이 단추처럼 달려 있다.
누군가 단추를 풀면 그녀는 온몸을 열어 종이컵 가득 소읍의 내력을 따라 준다.
자신을 스쳐간 이야기들을 한 스푼씩 잘 풀어놓는다.
너무 아픈 것들은 본래 몸에 쌓인 야그들을 다 풀어내야 쓰는 법이제.
우리 같은 것들이야 멀 알것소. 그냥 몸으로 견디는 것이제.
간밤에 한 줄의 녹슨 문장이 그녀의 몸에 더 첨가되었다.
사내가 술기운 가득 찬 발로 그녀를 걷어찼기 때문이다.
낯선 손길이 그녀의 몸에 머물다 갈 때면 새겨지는 낙서 같은 사랑.
슬픔을 알아버린 몸에 슬픔은 더 이상 독이 되지 못한다.
떠나가는 만큼 새로운 사랑이 들어서는 소읍의 터미널.
인생이란 그런 것이제. 퍼줄수록 넘치는 법이제.
녹슨 눈길로 터미널의 저녁을 밝히는 화장발이 뜬 부석한 얼굴.
누군가 그녀의 몸을 누른다. 그녀는 이 바닷가 소읍 터미널에서 다 자라버렸다.
<출전 플롯 속의 그녀들> 문학과 경계사, 2005
마지막 봄날에 대한 변명 이영옥
낯익은 집들이 서 있던 자리에
새로운 길이 뚫리고, 누군가 가꾸어 둔열무밭의 어린 풋것들만까치발을 들고 봄볕을 쬐고 있다
지붕은 두터운 먼지를 눌러 쓰고지붕아래 사는 사람들은 이제 서로의 안부조차 묻지 않았다떠난 자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이유를 알고있는오래된 우물만 스스로 제 수위를 줄여 나갔다붉은 페인트로 철거 날짜가 적힌금간 담벼락으로 메마른 슬픔이 타고 오르면기억의 일부가 빠져 나가버린 이 골목에는먼지 앉은 저녁 햇살이 낮게 지나간다넓혀진 길의 폭만큼삶의 자리를 양보해 주었지만포크레인은 무르익기 시작한 봄을몇 시간만에 잘게 부수어 버렸다지붕 위에 혼자 남아있던 검은 얼굴의 폐타이어가돌아오지 못할 시간들을 공연히 헛 돌리고타워 크레인에 걸려있던 햇살이누구의 집이었던쓸쓸한 마당 한 귀퉁이에 툭 떨어지면
윗채가 뜯긴 자리에무성한 푸성귀처럼 어둠이 자라나고등뒤에서는 해가 지는지신도시에 서있는건물 유리창의 눈시울이 붉어지고 있었다2002년 경남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하산 최정례
그때 나는 숲에서 나와 길에 올랐다
검은 떡갈나무 숲 한 뼘 위에
초승달 눈 흘기고 있었다
숲에서 나오자 세상 끝이었다
우리 밑에 잣눌려 부스럭대던 잎사귀들
아이처럼 지껄이던 산 개울 물소리
아무 생각 없이 나눈 악수는
흘러 흘러 흘러서 바위틈으로 스며들고
숲애서 나오자 깜깜했다
허공중에 피었다 곤두박질 치는 것
깨진 접시 조각처럼 잠시 멈춰 있던 것
보았느냐고, 묻고 싶은데
갑자기 숲은 아득해져서
지나간 잎사귀들만 매달고 흔들리고
외곽의 힘/ 문성해
도시의 외곽으로화훼단지가 펼쳐져 있다견고한 비닐하우스 아방궁 속에서천적도 없이 비대해진 꽃들이 사철 피어 있는 그곳얼마나 신나는 일인가외곽에서 총이나 대포가 아닌꽃들이 쳐들어온다는 것, 트럭을 타고꿀과 향기로 중무장한 그들이
아침마다 톨게이트에 진을 치고 기다린다는 것은, 꽃집마다비장하게 피어 있는 저 프리지아들그 빛깔과 향기가 필사적이란 것을가까이 사는 벌 나비들은 안다매연 속에서암수술을 꼿꼿이 세워 꽃잎을 펼치고 있는 것이치열한 전투가 아닌 쓰레기 더미에저리도 비참하게 말라비틀어진 꽃들을어찌 설명해야 하나매일 수만톤의 꽃들이 도시에서 학살되어도내일이면 또 수많은 꽃들이 태어나는 외곽,꽃들은 아직 젊고 혈기왕성하다도시를 삥 둘러싸고핵실험실이 아닌꽃들이 진을 치고 있다는 것은대체로 희망적이다그들은 매일 핵폭발하듯 꽃을 피운다
'유토피아' 정마담의 하루 6 이 기 와
급히 소변을 보려다 속옷에 끼워 둔 화대를 변기통에 빠뜨렸다 (제기랄, 하필...) 똥통에 빠진 찜찜한 만원권 과거를 건져 올린다 사내와 여인, 계집아이, 그렇게 세 명의 조난자들은 안개가 뒤덮인 심해에서 항해 지도를 펼쳐 들고 고혹의 섬으로 가는 최단거리를 구하고 있었따 그날 밤, 큰 해일이 일고 배의 상판까지 으르렁대는 파도의 이빨이 들이닥쳤다 사내의 거센 호흡 소리가 폭풍 쳐 오고 뒤따라 여인의 흐느끼는 신음소리가 표류했다 암흑의 대양 한복판에 구명 튜브처럼 떠다니는 그 절박한 교성을 어린 아이가 이해하기엔 너무도 난해한 기호였기에, 대체 어디까지 왔는지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이 항해의 목적은 애당초 무엇이었는지 아이로선 종잡을 수가 없었다 여인의 몸이 찢긴 돛처럼 밤새 퍼덕이는 동안 사내의 몸이 여인의 수면 위에서 연신 노를 젓는 동안 아이는 악착같이 두 눈만은 꼭 감고 모르는 척, 아무런 참극도 목격하지 못한 척, 다만 이 고통의 방관 후에 배불리 얻어먹을 따끈한 순대국밥만을 냉정하게 떠올리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 모녀는 빈민촌 똥물의 저잣거리를 항해하면서도 한사코 숟가락질만은 포기 하지 않았다
비.풍.초 2 이기와
마음이 흐린날 젖은 시간을 접어 방바닥에 깔아놓고 어머니는 마흔 여덟장의 근심을 그위에 진열한다 오늘에서 어제로 아픔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그녀의 눈앞이 침침해 있다 폐가처럼 허물어진 등을 내보이고 하나 둘씩 과거의 그림을 뒤집는 제주에서 목포에서 서울 외진 공사판까지 박씨 김씨 이씨의 품을 몇 바퀴 돌고 돌아 이제 삶보다도 죽음 쪽에 가까이 가 있는 그녀가 밤마다 두 손에 움켜쥐고 놓지 못하는 패는 무얼까 철없는 나의 손목을 끌고 철없이 여인숙을 들락거리던 사내와 동거한지 삼년이 못가 도로 과부가 되던 그 박복한 젊음을 섞고 또 섞고 남들이 모르게 자기 자신조차 모르게 뒤섞고 있는 미련은 무얼까? 달밤의 님 소식도 돈벌 횡재수도 손님이 올 기쁨의 알림조차도 마음에 내키지 않는지 매번 떨어진 운세를 빡빡 밀어버리는 굳은 손마다 박씨 김씨 이씨의 새 아버지들과 아버지라 부르지 않은 세 아저씨들과 그 자식들과 한 이불속에서 마음의 등지고 자던 동거한지 삼년이 못가 도로 후레자식이 되던 과거의 나를 바닥에 깔아 놓고 밤마다 뒤집는 어머니는 연거푸 새 패를 떼고 또 떼고 그런 식으로 파투난 과거를 수정하고 싶은 것이다 그립다는 말도 없이
지하역 이기와
지하 30미터, 한때는 만개한 꽃처럼 구김 없는 선명한 모양의 화석들이 이곳 어디엔가 오랜 비밀로 박혀 있었음직도 한, 수천 수만 년 동안 지하 어둠의 사슬에 묶여 미동도 없던 영혼들이 길이 뚫리고 빛이 스며들면서 하나 둘 마법에서 푸려나 지금은 내가 서 있는 언저리를 휙휙 날아다닐 것도 같은, 지하역, 아직 콘크리트로 덮이지 않은 시간이 벽과 천장의 구석진 곳에 은밀히 흐르고 있다 (열차가 도착하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안전선 안으로 한 걸음 물러나주시기 바랍니다 육체 없이 영혼만 타고 내리는 열차도 있을까? 요즘 들어 내 영혼보다 비대해진 몸뚱어리가 거추장스럽다 공복의 허전함으로 비롯된 심약한 생각의 끈을 자르고 안전선 안으로 한 걸음 물러선다 충족되지 못한 뱃속의 허기처럼 보호구역 안에서도 늘 불안함을 느끼는, 206개의 뼈마디로는 지탱하기 힘든 지상의 무게가 선로 위에 앉은 빛 한줌까지 파르르 떨게 한다 희끗희끗 색이 바랜 벽화의 인물처럼 창백한 얼굴들이 승차구에 모여든다 어쩌다 땅 속까지 추방당한 아침 거추장스러운 그림자를 하나씩 끌고, 언젠가 화석으로 남을 시간들을 등에 지고, 깜깜한 터널 속을 유심히 살피고 있는 저 눈동자들 어두의 틈새로 열차의 헤드라이트가 번쩍이는 순간 닫혀 있던 마음의 동공이 환히 열린다 언젠가는 출구 없는 지하역에서 영원히 맴돌지라도 아직은 살아 지상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파도여인숙/ 안시아
나는 버림받을 여자가 아니에요 창문마다 네모랗게 저당 잡힌 밤은 가장 수치스럽고 가장 극적이에요 담배 좀 이리 줘요 우리 어디선가 본 적 있지 않아요? 여기는 바다가 너무 가까워요 이 바다가 정원이라면 당신은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부자로군요 이 정도면 나, 쓸만하지 않나요? 이렇게 말하는 것이 우스워 다 이해하는 것처럼 고개 끄덕이지 말아요 밤 밖으로 수평선이 넘치고 아 이런, 술잔도 넘쳤나요 지금 걱정하고 있군요 취하지 않았을 때가 가장 위험할지 몰라요 *오래될수록 좋은 건 술 밖에 없어요 갈곳도 없고 돈도 없다고 내가 유혹하는 것처럼 보여요? 당신 마음은 어떤가요 죽고 싶어 보지 않은 사람은
살았던 게 아니에요 부서지기 위해 바다 끝으로 밀려온 파도처럼
이곳까지 떠나온 게 아니던가요 사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여긴 정말 파도말고는 아무도 없군요 그런데 왜 자꾸 아까부터 그 큰 눈을 그리 꿈벅대는 거예요 파도처럼 이리 와 봐요 나는 섬이에요
*영화 '마리아와 여인숙'에 나오는 대사
참좋은 풍경 박라연
우리는 안방이 서재이네.아랫목엔 오래된 책장이 장롱처럼 서 있네.아이는 다리가 있는 책상에 앉아서서 사는 모습을 훈련하고그 사람과 나는 작은 상을 끼고 앉아다정히 앉아 사는 모습을 훈련한다네.그때엔 이 세상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부럽지 않아.이런 날이, 이런 좋은 풍경이우리 가족의 미래가 되어준다면.......두 눈을 아기처럼 뜨고 휘이 둘러보네.문득 지나온 날들이 사방에서 불쑥불쑥 솟아올라힘센 불행이힘없는 행복을 끌고 다녀도나는 아무의 편도 될 수 없네.모두가 한 시절 내 목숨이었는걸?지금 이 좋은 풍경의 씨앗이었는걸?이제 다시는 가기 싫은 길이 있네.그 길이 내 앞에 놓여 내 길을 막으면감히, 날아오르려네.땅 속에도 길을 내는 한 톨 물방울이 되어감히 흘러갈 것이네.참 좋은 풍경을 잃고 싶지 않는 나는
가을 화엄사 박라연
그리움에도 시절이 있어 나 홀로 여기 지나간다 누군가 떨어뜨린 부스럼 딱지들 밟히고 밟히어서 더욱 더디게 지나가는데 슬픈 풍경의 옛스승을 만났다 스승도 나도 떨어뜨리고 싶은 것 있어 왔을 텐데 너무 무거워서 여기까지 찾아왔을 텐데 이렇게 저렇게 살오온 발바닥의 무늬 안 보이는 발그림자 무게를 내 다 알지 하면서 내려다보는 화엄사의 눈매 아래서 우리가 흘리는 눈물은 무엇인가 탁탁, 탁탁, 탁탁 모질게 신발을 털며 가벼웁게 지나가려 해도 안 떨어지는 낙엽 화엄사의 낙엽은 무엇의 무게인가
질량보전의 법칙 .6 박라연
- 소록도 -
소록도에는 사슴이 없었다
조금씩 죽어가기 위해 살아 있어야 했던
강제로 이송된 스물 서른 마흔이
먼지의 무게로 창틀 사이에 끼여 있을 뿐
정관 수술을 강제로 받은 후에 남긴
모래알처럼 번성하라, 라는 聖句를 인용한
문장이 모래알로 날아와 눈을 찌를 뿐
환자들의 비애가 흐르는 것들의 기운마저
삼켜버렸는지 물도 구름도 바람도
좀처럼 제 육체를 안 보여준다
바라만 보아도 뜨거워야 할
원불교의 천주교의 문패만 초라할 뿐
못 박힌 예수의 초상만 외로울 뿐
등꽃마저도 보라를 못 보여준다 팔도
달리도 코도 눈도 잠시 어디에 맡긴 것처럼
없는 책로 웃는 자치 구역 내의 나병 환자의
웃음이 우리 성한 것들을 곯아터지게 할 뿐
밟는 땅조차 육체의 무게를 안 보여준다
내 모든 것까지 나를 빠져나가버린 것 같아
뼈 속까지 뒤지며 내 떨어져나간
무게나 채우려고 허둥댈 뿐이다
정류장 안시아
귀 밑 머릿결처럼 비가 내린다 시골 정류장 처마 밑 쪽진 머리 노파 몇이 쪼그려 앉아 있다 굽은 허리, 처진 가슴 하얗게 새고도 여전히 조금씩 시간을 밀어내고 있을 머리칼, 굴곡진 세월이 은비녀에 가로질러 있다 좀처럼 펴지기 힘든 것은 시름뿐이 아니다 남은 生같은 차편을 기다리는 노파들 표정마다 둥근 웃음이 패여 있다 노인 몇이 더 처마 밑에 씨감자처럼 모인다 옹이같이 불거진 무릎에 손아귀를 포개며 이야기 싹을 낸다 세월은 저 빗줄기처럼 공중에 가장 빠른 길을 내며 지나왔다 환한 불빛을 앞세운 완행버스가 어둠을 가로질러 들어온다 노파의 은비녀가 봇짐 쪽으로 기운다 사선의 빗줄기가 점점 굵은 결을 늘어뜨리고 있는 승강장,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려는 듯 노인들 하나 둘 차 앞문을 힘겹게 오른다
다도해 조정
산불이 지나간 자리에 어린 솔이 돋았다 몇 번이나 바다 곁으로 너울거리던 불이 솔씨 몇 톨을 남기고 갔다
섬 뒤에 섬이, 또 섬이 발을 구르며 우는 동안
죽은 개처럼 그슬려 버린 산 엎드렸다가 내다보면 옥색 바다 울다가 내다봐도 옥색 바다 그 얇디얇은 눈물이 흘러 겨우내 칠량 바다가 반짝였다 오늘도 너를 보고 있어 한정 없이 긴 침묵 끝에 다가와 귓속말을 전하고 섬들이 고요히 제 자리로 헤엄쳐 갔다 노인이 어린 솔을 피해 염소를 맨다 되돌아와 가만히 솔잎을 쓰다듬은 노인이 자전거를 타고 돌아간다 광주행 버스가 먼지를 일으키고 지나간다
고수부지 /유현숙
내 몸은 저장물을 다 비워낸 고수부지이다
큰물이 날 때에나 강은 내 어깨를 잠시 빌리며
저 혼자 도도히 하루를 흘러간다
물이 빠져나간 그 자리엔 밀려 온 세월 하나가
상흔처럼 뒹굴고 있다
급하게 달려 온 저 물길은 이제
강의 하류 어디쯤에서 노곤한 몸 풀고 싶은 것일까
제 몸에서 흘려놓은 것들 미처 쓸어 담지 못하고
서둘러 떠난다
내 전신을 훑고 지나간 물길은 저기 어디
산하를 지나다가 그리운 안부 하나쯤 부쳐 줄는지
때로 급류에 떠밀린 적이 있었다해도
한때 신세졌던 내 어깨 한 짝을 기억하기를
욕심내 보는 이 청맹과니 같은,
그대가 빌려 쓴 건 어깨뿐이라는데
나는 왜 가뭄에 배 터진 논배미처럼
쩍쩍 갈라진 채 전신을 앓고 있는가
동양일보 2002년 신춘문예 당선작
길 위의 사람 안시아
그는 절뚝거리는 걸음을 옮기며
광고전단을 떼어내고 있다
골목마다 햇살이 창가로 향하고
누군가 그 끝을 잡으며 기지개를 켠다
채 녹지 않은 눈 속 발자국은 아직 발이 시리다
빅토리아나이트를 소문내느라
밤새 퍽이나 후끈했을 벽 한켠,
잘 떨어지지 않는지 한참을 긁어내고 있다
종이 한 장도 버티기 위해
벽에 오래 배기는 부분이 있듯
발을 디딜 때마다 그의 한쪽 다리가
바닥을 지긋이 밟는다
햇살이 햇살을 끌어당길 무렵
계단에 걸터앉아 그가 담배를 꺼낸다
태어나 한걸음도 떼어보지 못한
눈사람 하나가 묵묵히 그 앞에 서 있다
보일러 연통이 날숨을 피워올릴 때마다
숭숭 뚫린 중심을 온기로 채우는 눈사람,
계단 아래로 천천히 녹아내린다
비로소 온몸으로 길을 걸어간다
그의 발이 서서히 땅에 젖는다
허불허불한 김언희
막차를 놓치고
저녁을 떼우는 역 앞 반점
들기만 하면 하염없이 길어나는 젓가락을 들고
벌건 짬뽕국물 속에서 건져내는 홍합들…… 불어터진
음부뿐이면서 생은, 왜
외설조차 하지 않을까
골수까지 우려준 국물 속에서
끝이 자꾸만 떨리는 젓가락으로 건져올리는
허불허불한 내 시의
회음들, 짜장이
더글더글 말라붙어 있는 탁자 위에서
일회용 젓가락으로 지그시
빌려보는, 이
상처의
모독의
시, 시, 시, 시울들………
비 갠 후 안시아
나무는 뿌리로 받아 적는다 흙은 오래된 공책 땅벌레 자음모음으로 기어다니고 나무는 밑줄 그어 길을 만든다 우리가 밟고 지나는 수많은 문장 아래 더 많은 길이 있다 보도 위를 기어가는 개미 한 마리조차, 모든 것이 길이다 하늘이 요약된 흙은, 오랜 시간 읽혀왔으리 나무가 미처 쓰지 못한 말들 낙엽으로 뒹굴고 바람이 책장을 넘기면 햇살이 제일 먼저 다가와 읽는다 비 갠 후, 길은 제 몸 위에 필독해야할 거대한 책 한 권, 여러 갈래로 터 놓는다 '현대시학' 2003년 4월호
마지막 주유소 권정일
물새를 따라온 눅눅한 바다가 대여섯 차례 잔 돌린다 딸꾹질에 대한민국이 꼬부라지고 이순신 장군이 꼬부라지고 빌딩이 꼬부라지고 첨탑 끝 십자가 불빛이 꼬부라지고 비에 젖은 그녀 꼬부라진다 그녀 잔 속에 꼬부라진 바다비는 그저 오는 게 아니다화무십일홍 떨어지는 꽃잎으로 온다한두 사람씩 떠나가면 헐렁해져 몸 안에 거푸집을 짓는 그녀, 기억력 떠난 낡은 구두들만 산다 새 구두 한 켤레만 선반에 올려 놓는다 그 구두, 가끔 새들새들 죽어가는 희망을 가져다 준다 그녀는 그 구두를 마지막 주유소라 부른다비는 그저 오는 게 아니다가버린 이름과 남은 몇 개의 이름 사이로 온다
시집 - 마지막 주유소 (2004년 현대사)
바깥 풍경 진은영
1
강의 상류에 살았다
살았지만 더러웠다 시작답지 않게
첫발부터 진창이었다
딴 아이들 놀다
돌아오는 먼 하루
강물 위로 공장의 그림자가
진다고 했다 그 어디쯤
아버지 무얼 낚고 계실까
소문만 무성하던 그빛 고기떼
어디로 갔는지, 흐르는 폐수 사이
언뜻 본 듯 만 듯
2
유년의 깨진 창 틈으로 할머니
들어오신다
망할년, 밤에 무슨 휘파람이야
뱀 나오라구요 뱀아 제발
나오렴 독 품은 이빨로 뒤꿈치 좀 물어줘
당신이 던진 술병에
아침 산산이 빛나던 마당의 햇빛
3
엄마 일하러 갔다 나만 남기고
일렬종대로 서봐, 동생들 구령을 붙였다
하나
둘
셋
엄마 가슴에 훈장처럼 매달려 있어야 해
우리 모두 명예롭게
퐁당퐁당 돌을 더언지자, 돌멩이 같은 동생들
누이 몰래 던져졌으면, 몹쓸
계집애 넌 큰 언닌데
걱정 말아요 다시는 수면위로 못 떠올라도
매달고 가라앉아 그 애들
엄, 마, 제, 발, 독, 촉, 하, 지, 마, 세, 요,
슬쩍 흘겨보면 강풍에도 플라스틱 꽃처럼
잎사귀 하나 떨구지 않던 어머니, 이상도 하지
내 어린 숨결에도 시드시네
4
어디로 숨어야 할까, 나는
자꾸 기어 들어갔다
동화책 크기만 한 꿈 속으로
집에 꽂힌 책은 다 읽었다 단 세 권만
읽혀지지 않았다 아버지, 엄마
아버지의 엄마
아무 때나 덮고 치울 수 있다면
이제 나는
숨을 곳도 없는 스물세 살
오래도록 보고 있으면 눈물났다
풍경, 내 마음의 바깥
물의 상처 윤준경
밤에 냇가를 걷다보면 하염없이 흐느끼는 물의 울음소리 들린다 차르륵 차르륵 제 살갗을 찢으며 낮게 엎드려 우는 소리 저 맑은 물에 누가 상처를 내었나 누가 돌을 던져 물을 울게했나 풀잎들 선 채로 잠이 깊고 별빛 자부룩히 물 위에 떠오를 때 혼자서 냇가를 걷다보면 내 속의 상처 하나 둘, 아물어간다 금간 가슴을 어루만지며 나에게 귀 기울이는 물 알것 같다, 물이 우는 이유 누군가의 상처를 씻어주다 보면 아파서 물은 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체滯 내는 여자 /손세실리아
마흔의 어머니는 소다와 부채표 까스활명수를 입에 달고 사셨다.
무명실로 손가락 끝을 칭칭 감고 콧김 쐰 바늘로 자흑빛 걸쭉한 피 몇 방울 짜내는 일도 예사였고,
탱자나무 성난가시 울울한 체 내는 집으로 직행하는 일도 허다했다.
똥색 페인트칠이 거북등처럼 쩍쩍 갈라져 괴괴한 집.
등짝과 가슴을 두드리고 문지르다 염탐꾼같은 손가락 목구멍으로 쑥 들이밀어 깔짝거리면
신기하게도 석달 전 먹은 닭 가슴살, 달포 전 제사 음복으로 집어먹은 생율,
보름날 들깨 풀어 볶아 먹은 거뭇한 고사리가 쭉 딸려 나왔다.
달거리하듯 그 짓을 해치우고 나서야 비로소 양 볼에 화색이 돌던 어머니 무르지도 삭혀지지도 않는 게 어디 음식뿐이었으랴. 가슴 한복판 해묵은 연민도
때론 묵은 체증으로 얹히거늘, 어깨 걸고 살아온 인연들도 가끔은 내려놓고 싶을 때가 있거늘 그 집 앞을 지난다. 읍소재지 체쟁이 중 최고라던 틀니 할멈은 죽고 구전시술은 파했다.
탱자꽃 말간 이마에 홀린 일벌 한 마리 꽃밥 속으로 파고들다 가시에 찔리고 만다.
너덜거리는 날개 반쪽 눈에 얹힌다, 마흔이다
미꾸라지 숙회 김언희
희망, 희망 하시니까 드리는 말씀인데요
미꾸라지 숙회라는 음식을 잡숴보셨는지요
산청 생초 명물이죠
기름 둘러 달군
백철솥 속에
펄펄 뛰는 미꾸라지들을 집어넣고
솥뚜껑을 덜썩이며 몸부림치고 있는
미꾸라지들 한가운데에
생두부 서너 모를 넣어주지요
그래 놓으면
서늘한 두부살 속으로
필사적으로 파고들어간 미꾸라지들이
두부 속에 촘촘히 박힌 채
익어나오죠
그걸 본때 있게 썰어
양념장에 찍어 먹는 음식인데요
말씀하시는 게, 그
두부모 아닌가요
우리 모두 대가리로부터 파고들어가
먹기 좋게 익혀져 나오는
허연 두부살?
비망록 김경미 햇빛에 지친 해바라기가 가는 목을 담장에 기대고 잠시 쉴 즈음. 깨어 보니 스물 네 살이었다. 神은, 꼭꼭 머리카락까지 졸이며 숨어 있어도 끝내 찾아 주려 노력하지 않는 거만한 술래여서 늘 재미가 덜했고 他人은 고스란히 이유 없는 눈물 같은 것이었으므로. 스물 네 해째 가을은 더듬거리는 말소리로 찾아왔다. 꿈 밖에서는 날마다 누군가 서성이는 것 같아 달려나가 문 열어 보면 아무 일 아닌 듯 코스모스가 어깨에 묻은 이슬발을 툭툭 털어내며 인사했다. 코스모스 그 가는 허리를 안고 들어와 아이를 낳고 싶었다. 유잣속처럼 붉은 잇몸을 가진 아이. 끝내 아무 일도 없었던 스물 네 살엔 좀더 행복해져도 괜찮았으련만. 굵은 잇몸을 가진 산두목 같은 사내와 좀더 오래 거짓을 겨루었어도 즐거웠으련만. 이리 많이 남은 행복과 거짓에 이젠 눈발 같은 이를 가진 아이나 웃어 줄는지. 아무 일 아닌 듯. 해도,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 강물 위인들 걷지 못하랴. 문득 깨어나 스물 다섯이면 쓰다 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오래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했읍니다. 실낱처럼 가볍게 살고 싶어서였읍니다. 아무것에도 무게 지우지 않도록.
1983 신춘문예 중앙일보 당선작
임진강이 말하기를 김경미
보름달빛이나 덮으며 초승달빛이나 고르며 바늘귀에 스산한 풍문만 꿰차니 하 좋더냐 내라면 한달음에 산맥 넘고 평야 질러 갈 길 두발 짐승 두손 짐승으로 태어났거든 무거운 그림자 벗어 땅 속에 묻고 머리끝 하늘 닿기 전 쿵쿵 땅 꺼지기 전만큼만 가랭이 돋우어 뛰어라 오가는 철새들 깃털이라도 빌려 입어라 친형제들끼리 눈흘김 미친 행각 그리 즐겁더냐 말로 말할 수 없거든 울부짖음으로 말하며 오라 이복 유복 서자 사고무친 아닌 누가 있어 끄잡거든 잡힌 옷 벗고 가로서거든 메다꽂아 오너라 발톱 검은 때 누가 흉보랴 시궁창 진흙에 신발 들러붙거든 던져버려라 오물이란 똥오물 끼얹겨도 그대로 오라 숨결만 묻힌 바람이 전할 수 없어 바람 탄 풀씨 몇 점이 피울 수 없어 견우별 직녀별 오작교별로 이을 수 없어 뼈를 가져와 살을 묻혀와 따뜻한 혈맥 심긴 흙발로 몸소 와 어린 실개천들 갈 길 몰라 목타하거든 오종종 앞길 물길도 파주며 데불고 집짐승들아 여기도 생솔 타는 구들방 있으니 들짐승들아 이녘에도 손발 넓은 논밭 있으니 가슴짐승들아 이 언덕들도 헤어짐을 시시철철 해후로 바꾸며 살았노니 친형제 살아낸 또 하루 덧없음을 생각해보라
이 깊은 폐토를 어이 나 혼자 건너라고
늙은 암소의 식사 - 김연숙
울면서도 밥을 먹는다 우물거리는 볼을 타고 더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씹고 넘기고 다시 넣어 씹는 슬픈 역사(役事) - 왜 먹고 있는지 왜 지금 먹어야 하는지, 그 모든 이유를 왜 모르는 것인지 생각의 주제를 자주 바꿔 모으면서도 되새김질은 계속된다 왜 이 시간 먹고 있는가 먹는 일밖에는 할 일이 없어서? 아니 배가 고픈 것이다 한 알의 프로작은 인간의 존엄성을 돌려줄지도 모른다 숟갈을 내던지고 다시 인간이 되어 떠날 차비를 할지도 모른다 그가, 그녀가 인간이라면 정말 인간이었을까? 한 마리 살진 암소가 아파트 안에서 물 말은 밥에 김치를 씹고 있다 이 식사를 하기 위해-날마다 이 식사는 계속되었다-황무지를 지나고 개울을 건너 느릿느릿 여기까지 암소 걸음한 것이다 오다보니 암소가 된 것이다 자신이 암소였다는 걸 발견한 것이다 울타리 밖에서는 아무도 모르는 늙은 암소 혼자만의 여물질. 축축한 점액질의 우울증 한 사발깊은 하늘 알지 못할 어느 자리에선가 아직도 그의 별자리는 돌고 있을까?눈이 젖은 암소는 조금 더 슬픔을 씹기 위해 느릿느릿 밥통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런데, 오늘은 /한영옥
싸구려 미장원에 가서
촌스럽게 머리 자르고
굴러다니는 눈썹연필로
눈썹 긑 조금 올려붙이고
불량 주택이 대책없이 늘어선
뚝방길을 일없이 걷다보면
들러붙은 눈길들 무서웠지만
그렇게나마 쏘다니며
얼굴없이 스며드는 오랜 한 사람
훅, 끼쳐오는 방향을 킁킁거려야 했던,
그것이 내 청춘의 애절한 이력
향기 없는 질 나쁜 청춘 이후로
날마다 양질의 삶을 다짐했건만
어째서 하루 한 번씩은 흙탕물을 썼을까
오늘 쓴 흙탕물은 너무 아뜩했다
나는 요긴하게 쓰일 데가 있는가
물음이 집요해지더니, 어떤 중요한 일에
나 자신도 나를 개입시키지 않으리라는
앙다짐이 백주대로에서 쏟아지는 것이었다
질 좋은 삶을 그리지 않은 적 없었건만.
어떤 며칠
사랑 아니면 원수만 어른거리는
서슬 퍼른 며칠의 일기를 찢고
사랑 찾아
사랑하는 동생 찾아
맑은 동네 청주까지 가서
동생이 사주는 오리탕 먹는데도
원수만 또렷하여
사랑의 얼굴 바로 볼 수 없었다
돌아오는 겨울 산 그늘 아래서도
무참하게 원수의 서슬만 빛났다
산, 하얗고
산 너머 산
겹겹 하얗고
등성이마다 어루만져가며
부드러이 해는 넘어가는데
사랑이랄 것도
굳이 원수랄 것도 없을
그냥 저 풍경 부러웠다
적막을 고요히 깔변서 솟아나는
저 풍경 옆구리에 달고 얼마를 달리면
무심한 종이 한 장 마음에 덮일까
종착역 다 와가는 것 으시시하였다.
그날
그날 그곳의 마을버스 정류장은
기다리는 사람조차 없이
무서운 폐허 위에 내던져져 있었다
나 혼자 벌판에 있다고 중얼거리며
오지 않는 마을버스 기다리다가
울음 터질 것만 같아 뒤돌아 섰는데
어느샌가 등뒤로 늘어선 사람들이
푸근하게 눈 맞고 있었다
사람들이 하얗게 피어 있었다
오후 세시쯤,
연한 바람자락 스치고
포근한 폭설이 있던 그날
나의 기다림이
다른 사람의 기다림 속에도
앉아 있는 걸 보았다
나의 그리움이
다른 사람의 그리움 속에도
스멀대는 걸 보았다
깨달음이 솜사탕 같았던 그날
동여맨 목도리 풀고
폭설 꽃밭에 한참을 잘 서 있었다
불룩한, 봄 / 강미정
반으로 가른 봄배추 속에는 꽃대가 꽃망울을 송송송 단 채로 쪼개져 있다 눈물을 흘리며 썰던 대파도 꽃대 속에 꽃망울을 알알이 박아 놓았다
뱃속에 이렇게 많은 알이 슨 것을 보니, 죽어서도 눈감지 못하고 뚜룩뚜룩 쳐다보는
것을 보니, 몸 속, 무늬가 졌겠어, 아득하고 아득해져서 깊은 길이 났겠어,
생선 배를 가르며 하시던 어머니 말씀이 생각났다
봄에는 왜 이렇게 알 밴 것들이 많을까, 배란기 때마다 체온이 올랐겠지, 입덧으로 신 음식이 먹고 싶었을 거야,
낳을 때까지 먹고 싶던 홍옥 한 알처럼, 입이 달았을 거야, 생각했다
그래서 봄만 오면 바람이 단가, 살갗이 툭툭 갈라지며 저렇게 꽃이 피고 몸 속,
지울 수 없는 무늬가 지는가, 배가 불룩해지는가, 목이 메어왔다
산더미 만한 배를 안고 다리가 퉁퉁 부은 임신중독증의 그 여자가 신발 밑창 자르는
일을 부업으로 한다면서 끓여내오던, 그, 야, 배고프면 잠도 안 오잖아, 물기 고인 눈으로 웃던, 그, 봄,
낙타가 있는 陸橋(육교) 김미영
그 육교 위에는 손수건 만한 사막 하나 있다 하모니카 부는 늙은 낙타와 눈먼 여자
혼자 온종일 노래 부르는 사막이 있다 다 낡은 스피커 한 대와 동전 담긴 찌그러진
양은 냄비 하나와 냄새 나는 마이크를 들고 노래를 부르는 검은 선글라스 낀 여자와
등 굽은 낙타 한 마리 있다 이미자의 <열풍>이 휘몰아치는 그 사막을 온종일 걸어
가는 카라반 행렬들은 이따금 우그러진 냄비에 어린 빗물을 오아시스처럼 들여다보
고 지나간다 높은 빌딩들 선인장처럼 우거진 육교 위, 공중 높이 매달린 전광판 사
막 속으로 벤츠 한 대 사라지는 오후 즈음이면 온종일 사막을 걸어온 지친 두 사람들
황사바람 날리는 육교에서 사라지고 길 건너편 타클라마칸 노래방 속으로 비틀거리는 두 사내가 등굽은 낙타처럼 어두운
지하 階段(계단) 속으로 사라진다
제8회 <지용문학상> 당선작
배추 파는 여자 이진명
시장통 입구에서 배추 파는 여자
이미 늙고 더없이 뚱뚱하다네
양은자배기에 얼마의 배추 담아올리고
나무토막 받침에 종일 엉덩이 눌러붙이고 있다네
앞자락에 찬 때 절은 전대 반들거리고
전대 깊숙이 검붉은 두 손 찔러넣고 있을 때 많다네
쉴새없이 오가는 다리들 그 허한 치맛바람 속에서
이따금 졸기도 한다네
오랜 나날 바람과 햇빛이 그냥 가지 않고
한 켜씩 앉어준 두꺼운 살갗
얼굴은 반나마 굵은 주름 안은 돌의 모습이라네
이미 늙고 더없이 뚱뚱해진 여자
졸다가 한낮의 햇살이 못내 모여와 깨우면
뻐끔히 눈을 연다네
바짓가랑이가 지나간다 치맛단이 지나간다
통통한 핸드백이 지나간다 그러나
그 여자가 연 뻐끔한 눈 속엔
어떤 세계도 담겨 있지 않다네
어쩜 양은자배기에 올린 배추 한 통 담겨 있지 않다네
일생 수많은 배추를 통으로 팔고 접으로 팔고
푸르고 싱싱하세 살진 배추들 날랐지만
시들어가는 배추잎 끄트머리 이젠 뜯어내지 않는다네
(죄 있다면, 시들어가는 배추잎 끄트머리 뜯어내면서
판 죄 있을까)
열린 눈 느릿 닫히기 전
어느 어여쁘고 미끄러운 손이 들어와
배추 한 통 괜히 들었다 놓는 시늉한다네
시장통에서 햇살이 제일 늦도록 머무는 자리
이미 늙고 더없이 뚱뚱해진 여자
한없는 먼지내와 묵은내를 풍기면서
눈감고 눈뜨고 그냥 있다네
광에서 내다가 바깥에 꿍쳐논 오랜 부대자루처럼
시집 - 집에 돌아갈 날짜를 세어보다
슬픈식욕 서 안 나
그녀는 조선족이라고 한다 얼굴만 보아서는 알 수 없지만 그녀의 말 한마디로 출신성분이 정확히 간파되고 만다
전국을 떠다니며 산다고 했다 잔뿌리 같은 열 손가락으로 허공이라도 움켜쥐고 싶다는 그녀 음식을 제대로 먹지 않아도 아랫배가 왜 부풀어오르는지 지퍼가 벌어질 때도 있다고 했다
슬픔을 배가 부르도록 먹어본 적도 있다 했다 쓰레기통을 뒤지며 배를 채우는 슬픈 식욕의 힘으로 공중부양하는 것을 믿느냐고도 물어왔다.
온 몸 가득 바람을 불러들여 부레옥잠이 되고 싶다는 여자 빚을 갚기 전에 땅에 발붙일 수 없노라고 보라빛 눈물 흘리며 천형天刑을 받고 있다 말하는 여자
허공에서 지느러미를 퍼덕이며 배가 터지도록 세상의 온기를 퍼먹고 있는 식욕이 슬픈 풍어風魚 한 마리
접기로 한다 박영희
요즘 아내가 하는 걸 보면 섭섭하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하지만 접기로 한다 지폐도 반으로 접어야 호주머니에 넣기 편하고 다 쓴 편지도 접어야 봉투 속에 들어가 전해지듯 두 눈 딱 감기로 한다 하찮은 종이 한장일지라도 접어야 냇물에 띄울 수 있고 두 번을 접고 또 두 번을 더 접어야 종이비행기는 날지 않던가 살다보면 이슬비도 장대비도 한 순간, 햇살에 배겨나지 못하는 우산 접듯 반만 접기로 한다 반에 반만 접어보기로 한다 나는 새도 날개를 접어야 둥지에 들지 않던가
- 『팽이는 서고 싶다』(창착과비평)
돛배 제작소 이영옥
그의 좁고 어두운 창고는
바다를 낀 비탈길에 매달려 있다
작업대 위에는 선풍기 한 대가
성능 떨어진 스큐르처럼 꺽꺽 거리고
가끔 죽은 생선을 입에 문 갈매기들이 힐끔거렸다
저녁이면 그는 절벅거리는 석양에 전신을 담그고
초판 인쇄본인 낡은 해부학 책을 탐독한다
그가 읽은 해부학 책의 대부분은
휘어진 척추와 절망에 눌린 늑골을
잘라내는 방법이 기술되어 있었다
노련한 마도로스가 되고 싶었던 그는
통나무를 파낼 때마다 깊어지는 허공을 밟고 내려갔다
설계도면에는 오래된 고뇌까지 꼼꼼히 그려져 있었고
돛배가 하나씩 완성될 때마다 그의 환멸은 정교해져 갔다
번번히 출항이 연기되었던 이유는
자로 잴 수 없었던 용기의 오차 때문이었고
환기통을 찾지 못한 공기들은 녹슨 바람 소리를 냈다
그는 드라이버로 세상의 귀퉁이에
임시로 꽂혀있던 자신을 풀어낸다
완전한 조립은 언제나 해체를 의미하는 걸까
톱밥같은 날들을 훌훌 날려보내고
그의 돛배는 오늘밤 어디론가 흘러갈 것이다
통나무에서 밀려나온 나무껍질은
시멘트 바닥에서 알몸을 검개 말았다
함정 속의 함정 김상미
갑자기 유년의 뜨락이 그리워져 앨범을 뒤지는 건 함정입니다. 지나간 시간에 새 옷을 입혀 함께 외출하는 것도 함 정입니다. 책꽂이에 꽂힌 당신의 시집을 빼내 읽지도 않고 다 시 꽂는 것도 함정입니다. 루이 암스트롱의 목소리에 마음이 울컥해져 창문을 활짝 여는 것도 함정입니다. 누군가가 당신에게 실망했다고 말할 때마다 먹은 나 이를 게워내는 것도 함정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너무나 잘 읽으면서도 모르는 척 침 묵하는 것도 함정입니다. 들어줄 귀가 없고, 보아줄 눈이 없고, 품어줄 가슴이 없다면 아무도 사귀지 마십시오.외로움 때문에 누군가 의 어깨에 기대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함정입니다. 아무리 친한 사람도 당신의 정신적 고통은 결코 함 께 하지 않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슬픔만을 조금 나눠 가질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보다 더 많 은 걸 요구하는 건 함정입니다. 당신의 마음에 꽃이 피고 꽃이 지는 것도 함정입니다. 함정인 줄 알면서 그곳에 아낌없이 뇌를 빠뜨리는 것도 함정입니다. 함정들로 가득 찬 당신 머리 속 서재에 앉아 좌절한 펜으로 쓰는 사랑과 미움, 파멸의 서(書) 또한 함정입 니다. 당신과 나, 우리 모두는 그 꽃잎 위에 앉아 있습니다. 함정 속의 함정! 그 외 달리 무엇을 꽃다운 인생이라 부르겠습니까? 천변 지이(天變地異)가 모두 그 꽃잎 하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을!
법문을 쏘다 이화은
스님과 자장면 먹으러 가네면발처럼 어둡고 질긴 길을 구불구불 가네중도 가끔 별식을 하고 싶다고겉으로 그렇게 말은 하지만한 이레 절밥에 진력 난 내 속내를염주알처럼 꿰뚫고 계시네배운 대로 스님은자장면 곱빼기를 만나자장면 곱빼기를 쳐 죽이네마주 앉은 자리가 민구하여 나는단무지와 양파에 두 번이나 식초를 뿌리네초를 치네스멀스멀이빨 사이에서 시큼한 시간이 흘러내리네보통 한 그릇을 앞에 놓고떡을 치는 내 꼴을몇 겁의 세월 저켠에서 건너다보시는스님 입가에연꽃 피네 자장면 자죽이 쓱! 크리넥스 한 장에연꽃 지네
봄편지 1신 이화은
목 쉰 까치 소리동봉합니다따뜻한 아랫목에잘 펴 말린다고 말렸지만제 젖은 손끝 더러더러묻어 있을지 몰라 염려됩니다마음 자락 젖기 전 그대밝은 눈에 잘 털어내시길어젯밤엔 제가 당신께그 여자로 불리는 꿈을 꾸었습니다그 여자 아득한 그3인칭의 여자 갑자기우리의 촌수가 궁금해졌습니다꿈은 다 그런 거라지만마음의 빈틈을 보이지 말아야겠습니다문 하나 열면 바로 거기가바람의 길목이라 이 봄도조심해야겠습니다꿈은 다 그런 거라지만
아름다운 도반 이화은
눈 내린 산길 혼자 걷다 보니앞서 간 짐승의 발자국도 반가워그 발자국 열심히 따라갑니다그 발자국 받아 안으려 어젯밤이 산 속엔 저 혼자 눈이 내리고외롭게 걸어간 길화선지에 핀 붓꽃만 같습니다까닭없이 마음 울컥해그 꽃 발자국 꺾어가고 싶습니다짐승 발자국 몇 떨기가슴에 품는다고 내가사람이 아니되겠습니까내 갈 길 다 알고 있었다는 듯내 갈 데까지 데려다 주고그 발자국 흔적조차 없습니다모든 것 주기만 하고내 곁을 소리없이 떠나가버린어떤 사랑 같아나 오늘 이 산 속에 주저앉아숲처럼 소리 죽여 울고 싶습니다
* 9회 시와시학상 젊은시인상 *
시집 『절정을 복사하다』
살림의 입 신유아
이사하기 삼일 전 미리 빈집을 둘러보았다 물은 잘 나오는지 보일러는 잘 돌아가는지 일행과 나누는 소리가 벽에 튕겨져 되돌아 왔다 이사를 하고 살림의 자리를 정해주고 소리는 되돌아오지 않는다 살림들이 소리를 먹고 있었다 집들이 손님의 왁자한 소리를 먹고 소리 몇 개는 아랫층으로 흘러 경고를 듣기도 했다 살림들이란 주인의 소리를 삼키며 둥글어지는가 어떤 밤이면 내 말이 맞다며 딱, 무릎 치는 낡은 장롱 어릴 때는 이 소리가 무서워 어머니 가슴팍을 파고 들었는데 언제부턴가 어머니 무릎에서도 이 소리가 난다 어머니 쓰시던 문갑에 등을 대고 잠들면 겨울날 옷 속에서 훅 솟구치는 살내 같은 것이 이마를 가만히 짚어 오기도 하고 살림의 틈서리, 수천의 입으로 삼킨 소리는 어디로 간 것인가 30년 후 내 딸아이의 이마를 짚고 있는 것인가 구들장처럼 식지 않는 몸의 온기 나이기 이전의 생부터 천천히 데워 온 어머니의 장작같은 손바닥을 찾아 간 것인가 새 집에서 쉽게 잠들지 못하고 20년 전의 어머니와 10년 후 딸아이 지금은 세상에 없는 두 사람을 생각한다 잠든 척 가만히 오래 묵은 살림의 그림자 길게 목을 빼고 내 가슴에 귀를 대고 있는 줄도 모르고.
메주 박라연
생콩의 시절은 이제 잊은 지 오래 혼자서 가고 싶었던 길도 놓은지 오래 우리는 이름을 잃고 함께 삶아져서는 함께 섞어져서는 함경도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복자네 아랫목에서 다시 태어났다 해탈의 곰팡이 피어날 때까지 몸을 썩히는 일 공중에 매달려서 햇살과 바람 시간의 일부가 될 때까지 몸을 말리는 일을 배운다 즐거운 입맛을 위해 이름을 잃고 어디선가 매달려 살았을 비릿한 내 사랑, 콩 우리들의 안 잊히는 이름, 의 생무덤
해거리 박라연
해걸이를 아시는지요? 감나무, 배나무, 사과나무....... 지난해에 주렁주렁 탐스럽게 열매 열린 나무는 빈 나뭇가지에 바람만 일렁일 뿐 감도, 배도, 사과도 좀처럼 제 친구들을 만날 수 없다는 것, 그 지루한 그 쓸쓸한 한 해를 짐작해보신 적
있으신지요?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 말을
하지만 콩과 팥이 만나 살다보면 콩도 팥도 아니고 콩의 근심과 팥의 오만만을 고스란히 물려받을 수 있다는 것 근심과 오만 덩어리인 채로 이리 데굴, 저리 데굴, 굴러 다니는 한평생을 생각해보신 적 있으신지요? 해거리하는 해에 태어난 감, 사과, 배 그저 이름만 감 사과 배일 뿐 제 이름 다정하게 불러주는 이 쉽게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아시는지요?
몸값 마경덕
가스렌지 위에 석쇠를 올려놓고 쥐포를 굽는다. 연탄불에 구워야 제 맛인데 연탄화덕이 어디 흔한가. 아궁이가 보일러에 밀리더니 기름도 가스에 밀려난 시대. 헐하던 쥐포값 껑충 올랐다. 쥐치어는 불가사리와 거름으로 쓰이던 놈. 바다가 펄펄 살아 민어, 돔, 넙치가 흔한 시절, 통구멩이 아귀 까치복 쏠뱅이, 못생긴 녀석들 생선 축에도 못 끼던 때, 주둥이 뾰죽, 몸통이 회갈색쥐 닮은 하, 바다의 쥐새끼쯤으로 치던 쥐치가 오징어 보다 비싸다. 그 흔한 것도 마구잡이로 씨가 말라 이제 베트남에서 수입해 온다니 몸값이란 더러 뛰기도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나도 기다려 봐야겠다. 쓸모 있어 불러 줄 이 있으려나
신발論 마경덕
2002년 8월 10일
묵은 신발을 한 보따리 내다 버렸다.일기를 쓰다 문득, 내가 신발을 버린 것이 아니라 신발이 나를 버렸다는 생각을 한다.
학교와 병원으로 은행과 시장으로 화장실로, 신발은 맘먹은 대로 나를 끌고 다녔다.
어디 한번이라도 막막한 세상을 맨발로 건넌 적이 있는가.
어쩌면 나를 싣고 파도를 넘어 온 한 척의 배. 과적(過積)으로 선체가 기울어버린.
선주(船主)인 나는 짐이었으므로,일기장에 다시 쓴다.짐을 부려놓고 먼 바다로 배들이 떠나갔다.
고로쇠나무 / 마경덕
백운산에서 만난 고목 한 그루. 밑둥에 큼직한 물통 하나 차고 있었다. 물통을 반쯤 채우다 말고 물관 깊숙이 박힌 플라스틱 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군가 둥치에 구멍을 뚫고 수액을 받던 자리. 시름시름 잎이 지고. 발치의 어린 순들, 마른 잎을 끌어다 푸른 발등을 덮고 있었다.
주렁주렁 링거를 달고 변기에 앉은 어머니. 기저귀를 갈아주는 자식놈에게 부끄러워 얼른 무릎을 붙이는, 옆구리에 두 개의 플라스틱 주머니와 큼직한 비닐 오줌보를 매단 어머니. 호스를 통해 세 개의 주머니에 채워지는 어머니의 붉은 육즙肉汁. 오십 년 간 수액을 건네준 저 고로쇠나무.
호텔 자유로 김승희
자유로는 이제 호텔이 되었다 자유로에서 자유는 이렇게도 많이 밀리고 있다. 싱싱한 브로콜리 같은 아침의 얼굴이여 누가 이 아침 얼굴을 식물인간으로 눌러 놓았나 자유로에서 밀리는 것은 정말 자유만이 아니다 때묻은 얼굴에 머리카락을 풀어헤친 맨발로 조그만 베개를 가슴에 안고 아가야, 아가야, 젖 줄까, 베개를 토닥이며 돌아다니던 그 미친년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붉은 그리움을 상상할 수 있는가, 그리움이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없을 때 그리움이 앞으로도 뒤로도 다 막혀 있을 때 나도 얼마든지 그렇게 미칠 수 있을 것 같다 미치거나 식물인간이 되어서 반쯤 졸거나 반쯤 자는 길. 서울로 가는 전봉준도 그랬으리라. 깃발을 들었고 자유는 밀리고. 황토재 떠나 황룡촌 지나 첩첩 그리움은 막혀가고. 보은 지나 금강이여. 서울로 가는 길목마다 그렇게도 어려웠으리라 자유로에 점점 떨어진 푸른 잎들이여 녹두 꽃잎들이여...... 호텔 자유로. 인디언 담요를 몸에 두르고 김밥과 샌드위치를 찬합에 놓고 먹으며 그렇게도 싫어했던 실려가는 삶에 대해 실려갈 수밖에 없는 삶에 대해 밀려 있는 자유에 대해 밀고 가는 자유에 대해. 그리고 또다시 언젠가 피어날 녹두꽃에 대해 피기도 전에 탄환에 스러진 카불 소녀의 녹슨 녹두빛 눈동자에 대해......
옛 집 조용미
나와 동생이 탯줄을 잘랐다는 이십년도 넘게 내버려진 폐가에 아침 안개를 걷고 올라가보면 잡풀과 도꼬마리 옷에 쩍쩍 들러붙어 마당 어귀에서부터 발목이 잡힌다 안으로 들어서려는 그 어떤 힘도 완강하게 거부하는 폐허의 성, 깨진 옹기 뒹구는 장독대를 바라보며 폐허와 내가 반대편에서 자라고 있었음을 알겠다 메주를 매달아놓아 늘 쾨쾨한 냄새가 가시지 않던 사랑방 문짝까지 닿으려면 허리까지 오는 잡풀들만 걷어내면 되는 것일까 길을 낼 한치의 빈틈도 내주지 않는 잡풀들과 나 사이의 경계가 산맥처럼 멀다 폐허를 더듬으려면 내 몸 구석구석을 만져보면 된다 동생이 구운 참새 다리를 물고 서 있다 작은아버지가 타작을 한다 할머니가 애호박을 삶는다 고모는 보이지 않는다 장독대 옆에 참나리가 핀다 뒤란에 까마중이 까맣게 익는다 내가 그걸 탁탁 터뜨린다 옛집이 잠시 붐빈다 죽어 한가로운 앞마당의 감나무, 아시터 옛집과 내가 헤어지고 나면 서로 어디까지 치닫을지 모른다 옛집은 낙타의 걸음걸이로 세월을 향한다
자리 조용미
무엇이 있다가 사라진 자리는 적막이 가득하다 절이 있던 터 연못이 있던 자리 사람이 앉아 있던 자리 꽃이 머물다 간 자리 고요함의 현현, 무엇이 있다 사라진 자리는 바라볼 수 없는 고요로 바글거린다
물 의 달 조용미
메타세쿼이아가 달빛에 검게 빛나는 밤의 국도변 마곡사쯤에서 길 놓아버리고 달 따라간다 달을 지나가는 여행, 멀리 불빛 휘황한 저 도시에 그가 잠들어 있다 달이 나를 데리고 천천히 가는, 들의 비닐하우스가 밤바다처럼 빛나는 황악산 지날 때 막 내 곁을 떠나 뒤로 가는 저 물 속의 달 메타세쿼이아가 검게 출렁이는 밤의 국도변
진눈깨비 /강은교
진눈깨비가 내리네 속시원히 비도 못 되고 속시원히 눈도 못 된 것 부서지며 맴돌며 휘휘 돌아 허공에 자취도 없이 내리네 내 이제껏 뛰어다닌 길들이 서성대는 마음이란 마음들이 올라가도 올라가도 천국은 없어 몸살치는 혼령들이 안개 속에서 안개가 흩날리네 어둠 앞에서 어둠이 흩날리네 그 어둠 허공에서 떠도는 허공에서 떠도는 피 한 점 떠도는 살 한 점 주워 던지는 여기 한 떠남이 또 한 떠남을 흐느끼는 여기 진눈깨비가 내리네 속시원히 비도 못 되고 속시원히 눈도 못 된 것 그대여 어두운 세상 천지 하루는 진눈깨비로 부서져 내리다가 잠시 잠시 한숨 내뿜는 풀꽃인 그대여.
구름 일기 /백미혜
당신 떠돌다 멈추시는산 골짜기에나도 멈춥니다흰구름에 이끌려 다시 떠돌고이쪽에서라면저 골짜기 너무 깊습니다저쪽에서라면 구부러진 이 길도너무 짧겠지요그쪽 풀숲에서라면 하나, 둘, 셋, 넷, 다섯...... 한가로이 찾아 헤아리는 봉긋한 무덤. 사납던 바람 겹겹의 소용돌이 지긋이 눌러앉히며 당신 곁에 호젓이 누워봅니다. 크고 아늑한 무덤가에서 누구라도 이렇게 목백일홍 새빨간 제 꽃망울 터지도록 그냥 두고 싶을 거예요 여름 하루 밝은 새털구름 부풀려 피어올리다가 암호처럼 후두둑 빗방울 뿌리도록 그냥 두고 싶을 거예요. 당신 그 안에 손 담그고 있는 동안 사방천지 햇빛과 메뚜기떼 뛰었답니다 왠지 내 가슴도 세차게 뛰어서 처음엔 치마 밑에 무서운 송장메뚜기가 든 것일까 생각했어요 가만 들추어보니 몸이 자고 가느다란 초록빛 때때였어요. 때때때때 소리 내며 나는 금빛 시간 골라 때때에게 입히고 가을 오길 기다리면 나도 당신도 이윽고 방아개비가 될 거예요. 초록 때때 폴짝 빠져 나간 뒤 도라지꽃 휘도는 여름언덕 오르니 아른아른 바람이 터놓는 풀잎 길이 두번째 큰 무덤과 세번째 작은 무덤 사이로 언뜻 열리는 듯했어요눈이 부셔요구름이 만들고 또 기록하기도하는 노래 속에는당신의 이름 적혀 있지 않아요그 골짜기 이름도 길도나이도 직업도사실은, 구름이 바로 당신이니까요
비 오는 날 / 백미혜
새벽 잠결에 빗소리
듣는다 폭우가 쏟아지고 있나
보다 그 깊은 골짜기 기암 절벽 아래
산허리에, 지금 누가
비 맞으며 서 있나 보다
옛날에는 이 열두 구비 산길도 걸어 올라왔겠지. 자동차를 몰고 어쩌면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한 채 떠날 수도 있었을 이 어여쁜 강산 소백 산맥 골자기로 내가 간단없이 찾아든 것은 기암 절벽으로, 폭우로, 내 삶의 바깥을 짐짓 감싸보려는 것일까. 절벽의 또는 시간의 겹을 만드는 흑연빛의 바위이끼들 장대비에 씻겨 7월 숲 속으로 흘러내리는 동안 잠시 자동차를 세우고 호주머니를 뒤져 담배갑 위에 꺼내놓은 초록 먼지, 얼룩이라고 마음 글썽이며 말한다. 지나간 일상과 때없이 휘감기는 격정과 응시와 배반과 또다시 시작되는 사랑까지도.
새벽 잠결에 빗소리
듣는다. 아직 폭우는 그치지
않고 그 깊은 골짜기 저수지 아래
땅 위에, 누가 빗물로
그리움으로 차갑게 드러눕는다.
이팝나무 고봉밥/ 이영옥
육중한 그 집 대문 한 번도 열린 적이 없어
누가 사는지 본 사람이 없었다
겨울바람이 가랑이를 늘이며 높은 담을 올라갔다
술 취한 사내가 담벼락에 욕설을 퍼부어도
그 집은 끝내 묵묵부답이었다
동네 사람들이 그 집 앞을 지나갈 때면
옷깃을 한 번씩 더 여미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보안등은 수상한 눈빛을 흘려보냈다
꽃샘추위가 물러가고 그 집의 산수유나무가
물집이 툭툭 불거진 가려운 팔뚝을 긁적였다
개나리는 조롱조롱 노란 궁금증을 매달았다
그 집의 대문이 열린 것은 혼자 살던 노인의
부음이 꽃씨처럼 떨어진 날이었다
외국에 사는 아들내외는 너무도 담담하더란다
석 달이나 지나 발견된 해골의 구멍 안에는
캄캄한 외로음이 그렁거렸다고 한다
목련나무가 꽃등을 내리고 조문을 끝내자
대신 이팝나무가 하얀 고봉밥을 가득 담아
담 위로 고개를 쭈욱 내밀고 있더란다
잘 먹어야 그리움도 훤히 켤 수 있다는 듯이
Cissy Houston-Be My Baby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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