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詩)/괜찮은 詩

2020년 신춘문예 당선작

by 이성근 2020. 1. 1.


2020 경향 신춘문예]시부문 당선작 -

세잔과 용석박지일

 

세잔의 몸은 기록 없는 전쟁사였다

나는 용석을 기록하며 그것을 알게 되었다

 

세잔과 용석은 호명하는 방법의 차이만 있을 뿐

하나의 인물이었다

 

나는 세잔을 찾아서 용석의 현관문을 두들기기도 하고 반대로 용석을 찾아서 세잔의 현관문을 두들기기도 했다

 

용석은 빌딩과 빌딩의 높이를 가늠하는 아이였고

세잔은 빌딩과 빌딩의 틈새를 가늠하는 아이였다

세잔과 용석 몰래 말하려는 바람에 서두가 이렇게 길어졌다

(세잔과 용석은 사실 둘이다)

 

다시,

 

세잔의 몸은 기록 없는 전쟁사였다

나는 세잔과 용석을 기록하며 그것을 모르게 되었다

 

세잔은 새총에 장전된 돌멩이였다

세잔은 숲의 모든 나무를 끌어안아 본 재였다

세잔은 공기의 얼굴 뒤에 숨어있는 프리즘이었다

 

용석아

네게서 세잔에게로 너희에게서 내게로

전쟁이 유예되고 있다

 

용석아

네 얼굴로 탄환이 쏘아진다 내 배후는 화약 냄새가 가득하다

 

세잔과 용석은 새들의 일회성 날갯짓, 접히는

세잔과 용석은 수도꼭지를 타고 흐르는 물의 미래, 버려지는

세잔과 용석은 공중의 양쪽 귀에 걸어준 하얀 마스크, 아무도 모르는

 

나는 누구를 위해 세잔을 기록하나

용석을 기록하나

 

도시의 모든 굴뚝에서

세잔과 용석이 솟아난다 수증기처럼 함부로

 

한국일보

침착하게 사랑하기 차도하

 

몸에 든 멍을 신앙으로 설명하기 위해 신은 내 손을 잡고 강변을 걸었다 내가 물비린내를 싫어하는 줄도 모르고

 

빛과 함께 내려올 천사에 대해, 천사가 지을 미소에 대해 신이 너무 상세히 설명해주었으므로 나는 그것을 이미 본 것 같았다

 

반대편에서 연인들이 손을 잡고 걸어왔다

 

저를 저렇게 사랑하세요? 내가 묻자

신은, 자신은 모든 만물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저만 사랑하는 거 아니시잖아요 아닌데 왜 이러세요 내가 소리치자

 

저분들 싸우나봐, 지나쳤던 연인들이 소곤거렸다

 

신은 침착하게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는 신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고 강을 보고 걷는다

강에 어둠이 내려앉는 것을, 강이 무거운 천처럼 바뀌는 것을 본다

 

그것을 두르고 맞으면 아프지만 멍들지는 않는다

 

신의 목소리가 멎었다 원래 없었던 것처럼

연인들의 걸음이 멀어지자 그는 손을 빼내어 나를 세게 때린다  

 

 

부산일보

도서관의 도서관 -임효빈

 

한 노인의 죽음은 한 개의 도서관이 사라지는 거라 했다

누군가 한 권의 책을 읽을 때 나는 열람실의 빈 책상이었다 책상은 내가 일어나주길 바랐지만

누군가의 뒤를 따라갔으나 나의 슬픔은 부족했고 무수한 입이었지만 말 한마디 못했고 소리 내어 나를 읽을 수도 없었다

대여 목록 신청서에는 첨언이 많아 열람의 눈이 쏟아지고 도서관은 이동하기 위해 흔들렸다

당신은 이미 검은 표지를 넘겨 놓았고

반출은 모퉁이와 모퉁이를 닳게 하여 손이 탄 만큼 하나의 평화가 타오른다는 가설이 생겨났다

몇 페이지씩 뜯겨나가도 도서관 첫 목록 첫 페이지엔 당신의 이름이 꽂혀 있어

책의 완결을 위해 읽을 수 없는 곳을 읽었을 때 나는 걸어가 문을 닫는다

도서관의 책상은 오래된 시계를 풀고 있다

 

 

대전일보

봄날 문나원

 

아침 열시, 여자는 '주름'하고 입속으로 뇌까린다

블라인드로 스며든 몇 장 햇살이 일렁임조차 없이 마룻바닥에 고인다

여자의 삶은 곧 삶은 빨래처럼 표백되곤 한다

주름 팽팽하게 당겨 올라가 집게에 집힌 채 집게발을 들곤 한다

세 아이를 키우며 꼭두서니처럼 잘게 썰린 여자는 더 이상, 흘러내리지 않는다

여자는 이제 너무 많이 읽힌 문장이어서 시들 수도 없다

 

청소기 안 먼지들이 머리끄덩이를 잡고 실뱀처럼 엉긴다

부엌에서, 여자는 알약을 삼킨다

"이것 좀 봐!"

아이가 유리병을 흔든다

병속의 벌이 붕붕거린다

쓰레기통 옆 죽어가는 생쥐 위로

우울증 환자의 머리에 덧씌워진 비닐봉지 같은 햇살이 고인다

 

값싼 비닐처럼 추억은 야윈다

여자를 잘 따르던 비숑 프리제는 이유 없이 밥을 굶기 시작하더니 보름도 채 안되어 죽었다

 

남편의 사업은 말린 고사리처럼 불어나고 아이들은 옥수수처럼 자란다

비교적 순조로운 날들이다, 여자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단단했던 어제의 눈망울들은 어디서 물기를 버렸는가

 

그러나 저 살찐 햇살은 그늘의 혈연이다, 햇살은 그늘을 살찌운다

여자는 다시금 뇌까린다, 그나마 다행스런 날들이지 않은가

병속의 벌처럼 숨이 조금씩 차오르는 것만 빼면,

 

 

불교신문

폐사지에서 이봉주

 

부처가 떠난 자리는 석탑만 물음표처럼 남아 있다

귀부 등에 가만히 귀 기울이면 아득히 목탁소리 들리는 듯한데

 

천 년을, 이 땅에 새벽하늘을 연 것은

당간지주 둥근 허공 속에서 바람이 읊는 독경 소리였을 것이다

 

천 년을, 이 땅에 고요한 침묵을 깨운 것은

풍경처럼 흔들리다가

느티나무 옹이진 무릎 아래 떨어진 나뭇잎의 울음소리였을 것이다

 

붓다는 없는 것이 있는 것이다, 설법 하였으니

여기 절집 한 칸 없어도 있는 것이겠다

 

그는 풀방석 위에 앉아 깨달음을 얻었으니

불좌대 위에 풀방석 하나 얹어 놓으면 그만이겠다

 

여기 천년을 피고 진 풀꽃들이

다 경전이겠다

 

옛 집이 나를 부르는 듯

문득 옛 절터가 나를 부르면

 

천 년 전 노승 발자국 아득한데

부처는 귀에 걸었던 염주 알 같은 생각들을

부도 속 깊게 묻어 놓고 적멸에 드셨는가

발자국이 깊다

 

 

 

세계일보

오른쪽 주머니에 사탕 있는 남자 찾기 / 김지오(김임선)

 

그때 오른쪽 주머니에

사탕 있는 남자가 내 앞을 지나간다

 

혹시, 당신의 오른쪽 바지 주머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아세요? 어머,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마세요 도둑 아니고 강도 아니에요 당신의 왼쪽 바지 주머니라 해도 상관은 없어요 당신의 왼쪽 심장이라 해도 상관없지요

 

혹시, 사탕 있으면 한 개 주실래요? 에이, 거짓말! 나는 당신의 주머니를 잘 알아요 한 번 만져 볼까요? 꽃뱀 아니구요 사기꾼 아니에요 그렇게 부끄러워 할 것 없어요 그럼 당신 손으로 당신 주머니에 손 한 번 넣어 보세요 어머, 그것 보세요 사탕이 남아 있다니 당신에게 애인이 없다는 증거예요

 

그것이 어떻게 당신의 주머니에 들어갔는지 당신은 모를 수 있어요 누구에게나 주머니에 사탕 한 개씩은 들어 있어요 사랑 말이에요 세균처럼 바이러스처럼 그 사탕 나한테 주시면 안 될까요? 나는 달콤한 것을 좋아해요 유난히,

 

망설이지 마세요 그 사탕 내게 주면 당신 주머니에는 또 다른 사탕 생길 거예요 사랑처럼 말이에요 경험해 보지 않으면 믿을 수 없는 일 맞아요

 

사탕 대신 꽃은 어때요?

어머, 꽃 피우는 당신 마법사였군요

 

꽃을 나눠 가진 우리

이제 달콤해집니다

 

 

매일신문

남쪽의 집수리 -당선인 최선 (본명 최란주)

 

전화로 통화하는 내내

꽃 핀 산수유 가지가 지지직거렸다.

그때 산수유나무에는 기간을 나가는 세입자가 있다.

얼어있던 날씨의 아랫목을 찾아다니는 삼월,

나비와 귀뚜라미를 놓고 망설인다.

 

봄날의 아랫목은 두 폭의 날개가 있고

가을날의 아랫목은 두 개의 안테나와 청기聽器가 있다.

뱀을 방안에 까는 것은 어떠냐고

수리업자는 나뭇가지를 들추고 물어왔지만

갈라진 한여름 꿈은 꾸고 싶지 않다고 거절했다.

 

오고 가는 말들에 시차가 있다.

그 사이 표준 온도차는 5도쯤 북상해 있다

천둥과 번개 사이의 간극,

스며든 빗물과 곰팡이의 벽화가

문짝을 7도쯤 비틀어지게 한다.

 

북상하는 꽃소식으로 견적서를 쓰고

문 열려있는 기간으로 송금을 하기로 한다.

 

꽃들의 시차가 매실 속으로 이를 악물고 든다.

중부지방의 방식으로 남쪽의 집 수리를 부탁하고 보니.

내가 들어가 살 집이 아니었다.

종료 버튼을 누르면서 계약이 성립된다.

산수유 꽃나무가 화르르

허물어지고 있을 것이다.

 

광남일보

, , , -한병인

 

계단을 오르다가 놓고 온 키를 생각 한다

 

키는 어딘가의 구멍에 꽂힌 채로 계단 하나 정도의 높이에 매달려 있을 것이고

 

키는 구멍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고 구멍 하나의 길이로 밖을 가늠하고 있을 것이라고

 

나는 오늘이라는 높이에 매달려 있는 작은 새 한 마리를 상상한다

 

새의 감정은 한사코 키와는 무관한 것이지만 아무래도 구멍을 물고 있는 저 키의 속성이 새의 부리에서 왔다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키와 새의 부리가 키, , , 웃음을 만들어낸다 서로 너무 꽉 맞아 떨어지는 속내를 키는 키 만큼의 길이로 유희하고 전유하는 까닭이다 쪼는 저들의 관성에서 부리는 점 점 더 높은 구멍으로 향하고, 그러나 언제고 다시 풀리는 키와 구멍들, 키를 닮은 수많은 부리들이 구멍을 통해 일제히 날아오르는 환상에 갇힌다 허공 어디쯤에서 키, , , 잠시 웃음을 만들어 낼 때에도 웃음이 울음에서 왔다는 소리의 의혹을 키, , , 웃음으로 떨쳐버릴 수 있을 것이라고, 키들은 단단한 부리를 부비며 한껏 오므려 보이는 것이다 오늘은 너무 뾰족하게 발음되는 키의 모양새를 제외하면 키, , , 웃음 몇 개는 여전히 내일에 남겨질 것이고, , , , 더 완벽한 웃음을 위하여 계단을 오를 것이고, 이제는 키, , , 울음에도 섞이고 키, , , 조금은 숨죽이다가 키, , , 낮게 흥얼거리다가 키, , , 울먹이다가 키, , , 소리 지르다가... 드디어는

 

,

 

,

 

,

 

더 깊은 구멍으로, 천천히 내려가는 것이다

 

 

무등일보

나의 나침판 -하정미

 

풀잎하고 부르면 화살표가 나옵니다 당신이라는 낭떠러지는

나를 늘 그런 곳으로 이끌어 세웁니다

 

잠시 방위를 빌려보기로 하자 방향에 굴하지 않고

유연하게 나아가는 선택의 길에서 나는 늘 진로를 망설였고

우리의 목표는 정말 높고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후 3시가 목표라면 그 안을 보는 일에

그는 늘 바깥 방향을 서성이고 있었다

나는 한번은 밀어내고 한번은 끌어당긴다

자성 강한 잡념들도 나의 몸이 끌어당긴다

누군가를 밀어내면서 누군가의 어둠을 끌어안는다

어둠의 강한 자성에 내 방은 결국 자력을 잃었고

나는 그의 자기장에서 일 년을 붙어살았다

 

기울어진 힘점이 있다

나는 하루에 한번 넘어지며 균형을 잃는다

힘점에서 나를 빼냈다 공평함이 사라졌다

힘점에서 기울어진다는 건

누군가를 믿지 못한다는 증거

 

복잡한 머리를 용서하면

나의 좌표는 간결해 질 수 있다

여행은 마음의 풍경을 향해 가는 것

저녁의 산책이 걸음을 이해 할 때

나침판은 내 가슴에 와 박힌다

 

 

농민신문

풀씨창고 쉭쉭- 이주송

 

멧돼지 한 마리

그 커칠한 털 속에는 웬만한 풀밭이나

산기슭이 들어 있다

 

노루발, 뻐국새, 지칭개, 복수초, 현호색, 강아지풀,

질경이, 벌개미취, 금낭화, 산자고, 쇠별꽃

멀리 가고 싶은 풀씨들은 멧돼지 등에 올라타면 된다

 

제 몸에 눈 녹은 묵은 봄이 가려워

멧돼지는 부르르 온몸을 털어낼 터

씨앗들은 직파방식으로 파종될 것이다

 

북극의 스피츠베르겐섬에는 국제종자보관창고가 있다

먼 훗날의 구호(救護)를 위해 멧돼지 한 마리

그 쉭쉭거리는 씨앗창고를 기르고 싶다

 

이 산과 저 산

이쪽 풀밭과 저쪽 풀밭이라는 말

다 멧돼지의 등짝에서 떨어진 말일 것이다

그러니

너나들이로 섞이는 산

번지는 초록들은 멧돼지의 숨결

국경도 혈연도 지연도 없다

 

멧돼지 꼬리에서 반딧불이 날아오르고

꺼칠한 오해 속에서도

극지에서도 풀씨들이 움튼다

 

 

조선일보

바이킹-고명재

 

선장은 낡은 군복을 입고 담배를 문 채로

그냥 대충 타면 된다고 했다

두려운 게 없으면 함부로 대한다

망해가는 유원지는 이제 될 대로 되라고

배를 하늘 끝까지 밀어 올렸다

모터 소리와 함께 턱이 산에 걸렸다

쏠린 피가 뒤통수로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원래는 저기 저쪽 해 좀 보라고 여유 있는 척

좋아한다고 외치려 했는데

으어어억 하는 사이 귀가 펄럭거리고

너는 미역 같은 머리칼을 얼굴에 감은 채

하늘 위에 뻣뻣하게 걸려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공포가 되었다

나는 침을 흘리며 쇠 봉을 잡고 울부짖었고

너는 초점 없는 눈으로 하늘을 보면서

무슨 대다라니경 같은 걸 외고 있었다

삐걱대는 뱃머리 양쪽에서 우리는

한 번도 서로를 부르지 않았다

내가 다가갈 때 너는 민들레처럼

머리칼을 펼치며 날아가 버리고

네가 다가올 땐 등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즐겼다

뒷목을 핥는 손길에 눈을 감았다

교회 십자가가 네 귀에 걸려 찢어지고 있었다

내리막길이 빨갛게 물들어 일렁거렸다

네가 나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그 순간 알았다 더는 바다가 두렵지 않다고

이 배는 오래됐고 안이 다 삭아버려서

더 타다가는 우리 정말 하늘로 간다고

날아가는 기러기의 등을 보면서

실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너를 보면서

눈 밑에서 해가 타는 것을 느꼈다

벌어지는 입을 틀어막았다[출처] 2020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작성자 시처럼살기

 

한국경제

릴케의 전집 - 김건홍

 

그 집의 천장은 낮았다.

천장이 높으면 무언가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했다.

 

그 집에 사는 목수는 키가 작았다.

그는 자신의 연인을 위해 죽은 나무를 마름질했다.

목수보다 키가 큰 목수의 연인은 붉은 노끈으로 묶인 릴케 전집을 양손에 들고 목수를 찾아갔다.

 

책장을 만들려고 했는데 커다란 관이 돼버렸다고

목수는 자신을 찾아온 연인에게 말했다.

천장에 머리가 닿을지도 모르겠다고 연인은 답했다.

 

해가 가장 높게 떴을 때 마을의 무덤들이 흐물흐물 무너져 내렸다.

 

목수는 연인이 가져온 책 더미를 밟고 올라서 연인과 키스를 했다.

목수의 입에서 고무나무 냄새가 났다.



Si Te Contara - Ibrahim Ferrer 

 

'시(詩) > 괜찮은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산이 나를 들게 한다  (0) 2020.04.18
선물 外  (0) 2020.04.18
무엇보다 그리운 外  (0) 2019.08.15
김기홍 外  (0) 2019.08.09
이상국의 시  (0) 2019.08.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