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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근 .현대사 이야기

국가 폭력 -최규화 전 진실화해위원회 이야기

by 이성근 2023. 9. 16.

그날 건빵을 나눠주지 않았더라면

흰 단추 - 그날이 아버지와의 마지막 포옹이었다

다시는 펼쳐보지 못한 그날의 교과서

태극기 휘날리던 피란선, 미군은 왜 폭격했을까

방패연타고 날고팠던 선감도 소년들

국수 먹다 끌려간 삼청교육대···영겁 같은 ‘318

보도연맹 학살과 고무신’···애도에 자격이 필요한가

을 달라가창골에 묻힌 외침

환영 대신 장작매질이 어부들에게 국가란

코발트광산 도장에 적힌 3500개 이름 중 하나

또렷한 은반지와 서산 부역혐의자 학살

비석 파편이 품은 그해 여름

식어버린 생일밥머리 센 소년들은 괭이바다가 서럽다

 

 

그날 건빵을 나눠주지 않았더라면

1962년 서산개척단원들이 저수지를 만들기 위해 도비산에서 돌을 나르는 모습. 국가기록원 제공

 

아이들이 건빵을 먹고 있었어. 내 건 어디 있냐고 했더니 니 아버지가 가지고 갔다하는 거야. 그래서 왜 내 걸 아버지에게 주냐고 소리를 질렀어. 그러자 성인 남성들이 아버지를 데리고 와서는 왜 아들 걸 먹었냐고 다그치며 때리는 거야. ()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개 패듯이 팼어.”

 

건빵이 문제죠, 건빵. 배고픈 게. () 내가 (서산개척)단본부를 찾아가 내 건빵을 달라고 안 했으면 우리 아버지가 그 많은, 수백명에게 몽둥이로 안 맞고 결국은 안 돌아가셨을 텐데, 내가 죽일 놈이지. 내가 죽인 거야, 아버지를.”(대전 MBC <모월리의 진실> 2020. 11. 28)

 

화면 속 송순표씨의 눈이 젖는다. 55년 세월이 흘렀지만, 어제 일처럼 선명한 기억. 그날 이후로 건빵은 그에게 씻을 수 없는 후회와 원한으로 남았다.

 

송순표씨와 아버지의 비극은 1962년 시작됐다. 아홉 살 순표는 아버지와 함께 대전역에 갔다. 경찰 제복을 입고 어깨에 카빈총을 멘 두 사람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조사할 것이 있다며 파출소로 데려간 그들은, 순표 부자를 부랑인 수용시설로 보내버렸다.

 

영문도 모른 채 서산개척단으로

새까만 천이 둘러쳐진 버스에 실려서 먼저 대전갱생원으로 갔어요. 거기서 2~3일 묵고 또 같은 버스에 실려서 몇시간을 달려간 곳이 바로, 지금은 입에도 꺼내기도 싫은 서산개척단입니다.”(송순표 증언, 비마이너, <‘납치·강제노역으로 일군 농토, 국가 빼앗았다서산개척단원들의 절규>, 하금철 기자, 2018. 3. 22)

 

196111월 박정희 정권은 충남 서산에 대한청소년개척단을 설립했다. 사람들은 그곳을 주로 서산개척단이라 불렀다. 정권은 사회정화를 명분 삼아 경찰과 군인을 동원해 전국에서 고아와 부랑인으로 의심되는이들을 잡아들였다. 그렇게 서산개척단에 강제수용된 인원이 1700여명. 순표 부자도 그들 틈에 섞여 있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일은 폐염전을 농토로 개간하는 것. 맨손으로 돌을 날라 둑을 만들고 집을 지었다. 24시간 감시 속에 새벽부터 저녁까지 하루 12시간 고된 노동이 이어졌다. 간부들이 몽둥이를 들고 단원들의 뒤를 따라다니는 것이 어린 순표의 눈에도 보였다. 아이들이라고 강제노역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순표도 돌을 들어 나르거나 손수레를 밀며 일했다.

 

행여나 도망치다 잡히거나, 간부들의 명령을 제대로 따르지 못한 사람들은 곡괭이 자루로 죽을 만큼매를 맞았다. 강제노역과 감금 그리고 폭행이 매일같이 반복됐다. 밥이라고 제대로 줬을 리가 있겠나. 굶주림에 지친 단원들은 산에서 뱀과 개구리를 잡아먹으며 버텼다.

 

순표 부자가 끔찍한 날들을 견디는 동안 세 해가 지났다. 어느 날 순표가 잠시 없는 사이 단원들에게 건빵이 배급됐다. 지긋지긋한 굶주림에 시달리던 단원들에게 그보다 반가운 일이 또 있을까. 하지만 그 반가운 건빵이 순표 부자의 운명을 영영 갈라놨다.

 

아이들이 건빵을 먹고 있었어. 내 건 어디 있냐고 했더니 니 아버지가 가지고 갔다하는 거야. 그래서 왜 내 걸 아버지에게 주냐고 소리를 질렀어. 그러자 성인 남성들이 아버지를 데리고 와서는 왜 아들 걸 먹었냐고 다그치며 때리는 거야. ()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개 패듯이 팼어. 그 기억은 나. 결국 실신해 의무반으로 가셨는데 그 이후로 못 봤어.”(송순표 증언, <서산개척단 사건 피해상황 실태조사 최종보고서> 서산시, 2019)

 

아버지를 찾는 순표에게 간부들은 아버지가 아파서 일을 못 하니 귀향 조치를 시켰다고 했다. 여기서 착실히 일하고 있으면 언젠가 아버지가 찾으러 올 거라고도 했다. 순표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살았다. 아버지도, 아버지의 편지 한장도 순표에게 오지 않았다.

 

아버지의 소식을 다시 들은 건 50여년이 지난 2017년쯤. 서산개척단 행정반에서 일했던 단원의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아버지가 그날 죽어서 공동묘지에 묻혔다고 했다.

 

맞아 죽고, 병들어 죽고, 일하다 사고로 죽었다. 정확한 수는 알 수 없지만 약 250명이 죽었다는 증언도 있다. 단원들이 죽으면 장례도 없이 가마니에 싸서 공동묘지에 묻었다. 1978년 서산시는 관내 무연고 묘지와 서산개척단 단원들이 묻힌 공동묘지를 개장해 무연총으로 합장했다. 송순표씨도 뒤늦게 무연총을 찾아가 절을 올리고 50년 묵은 울음을 토해냈다.

 

아버지가 (꿈에) 딱 나타나는데 여기서(머리)부터 여기까지 피를 철철 흘리고 나타나는 거야. 그리고 말이 없어. () 그런 꿈을 꿨어, 계속. 그럴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라 잠도 못 자고. 그 고통을 누구한테 말해요.”(송순표 증언, 대전 MBC 특집 다큐멘터리 <모월리의 진실>, 2020. 11. 28)

 

61년 만에 진실 밝혔지만

19669월 서산개척단은 공식적으로해체됐다. 많은 이들이 떠나갔지만 어떤 이들은 에 남았다. 처음부터 정부가 약속한 게 있었기 때문이다. ‘개간으로 만들어진 농토를 단원들에게 나눠주겠다는 것. 그 모진 날들을 버티고 견딘 것은 모두 그 약속때문이었다.

 

그러나 땅 한평 손에 쥐어본 사람은 결국 아무도 없었다. 토지 무상분배에 대한 내용을 담은 자활지도사업에 관한 임시조치법, 시행령도 만들어지지 못한 채 1982년 폐지됐기 때문이다. 60년 전의 폐염전은 지금 황금 들판으로 바뀌었지만, 그 땅은 모두 국유지가 돼버렸다. 서산개척단 단원들의 지난 세월은 맨손으로 시작해 빈손으로 끝났다.

 

지난 510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서산개척단 사건을 위법한 공권력에 의한 중대한 인권침해로 보고 진실규명결정을 내렸다. 강제수용과 강제노역, 폭력과 사망, 강제결혼 등 인권침해에 대해 국가의 사과와 함께 피해구제 및 명예회복 조치를 권고했다. 토지 무상분배에 대해서도 보상 및 특별법 제정 등 조치를 취하라고 권고했다.

 

61년 만에 비로소 국가가 서산개척단 사건의 진실을 밝혔지만, 이 소식은 송순표씨에게 닿지 못했다. 그는 지금 폐암으로 투병 중이다. 이미 세상을 떠난 피해자들도 많다. 진실은 너무 더디게 왔다. 정의 또한 이들을 오래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된다. 대한민국이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원한의 시간을 멈추고 정의의 시계가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

 

지금 순표 아우가 병원에서 생사가 왔다 갔다 하는데 치료비가 없어가지고. () 한사람이라도 더 상하기 전에 빨리 보상이 돼서, 우리 순표 아우 치료비라도 보태줬으면 하는 마음이야.”(정영철 서산개척단진상규명대책위원회 위원장, 진실화해위원회 소식지 진실화해’ 6, 2022. 6. 17)

 

서산개척단 사건 1960년대 정부는 충남 서산에 개척단을 설립해 전국에서 고아, 부랑인 등을 적법 절차 없이 단속해 강제 수용했다. 단원들은 폐염전 개간에 강제로 동원됐고 폭행, 사망, 강제결혼 등도 일어났다. 강제노역의 대가로 제시된 토지분배 약속은 결국 지켜지지 않았다

최규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언론홍보팀 주무관 22.07.04ㅣ주간경향

 

 

 

흰 단추 - 그날이 아버지와의 마지막 포옹이었다

전미경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 회장은 방에 모셔진작은 상자를 열어 보였다. 그가 유해발굴 현장에서 주워온 작은 뼛조각, 치아, 탄피 그리고 흰 단추하나가 보인다.

전미경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 회장이 골령골 유해발굴 현장에서 모은 뼛조각들과 흰 단추하나 / 최규화 제공

 

대전 동구 골령골에서는 지금도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유해발굴이 진행 중이다. 흰 단추는 골령골에서 가장 많이 나온 유품이라고 한다. 희생자 대부분이 같은 단추가 달린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는 뜻이다. 아마도 대전형무소 재소자들의 죄수복이었을 거다.

 

골령골은 한국전쟁 당시 대전형무소 재소자와 국민보도연맹원들이 경찰과 헌병대 등에 의해 학살된 곳이다. 20101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희생자 수가 최소 1800명을 넘어설 것으로 봤고, 그중 500여명의 신원을 확인 또는 추정했다.

 

민간에서는 최대 7000명이 희생됐을 것으로 가늠한다. 암매장 추정지만 8. 모두 이으면 그 길이가 약 1에 달해,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으로 불린다.

 

불귀의 객이 된 아버지

정말 가슴이 녹아내리는 아픔입니다. 아버님을 저런 구덩이에 방치해두고 제가 밥을 넘기고 살았다는 게 죄스러울 뿐입니다. () 개인의 일이라면 제가 밥을 굶을망정 아버님을 70년 동안 저 땅속에 방치했겠습니까?”(진실화해위원회 소식지 <진실화해> 2, 20218)

 

전 회장의 집은 충남 서천에 있었다. 19506월 전쟁이 일어나자, 가족들은 얼른 삼촌부터 숨겨야 했다. 삼촌은 해방 후 대학에 다니며 좌익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삼촌은 결국 월북을 선택했고, 아버지는 삼촌을 도망시켰다는 이유로 역시나 도망자 신세가 됐다.

 

그때 전 회장은 두 돌쯤 됐을까. 집안 어른들이 줄줄이 고초를 겪는 통에 돌보는 사람이 없었던 미경은, 그때가 되도록 서지 못했다. 아버지는 산에 숨어 지내면서도 늘 막내 미경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미경이 언제나 서려나, 이 난리통에 어떻게 살려나 마음에 걸렸다.

 

어느 날 자정이 다 된 시각, 가만가만 발소리를 죽여가며 미경의 집 마당에 들어서는 남자가 있었다.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자던 미경을 깨워 손 위에 세워봤다. 미경은 다리를 발발 떨면서도 넘어지지 않고 섰다. 아버지는 미경을 안고 오랜만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때 방문이 벌컥 열렸다. 경찰이 구두도 벗지 않고 뛰어들었다. 아버지의 멱살을 잡고 일으켰다. 어린 미경은 바닥에 떨어져 뒹굴었다. 아버지의 손목에 수갑이 채워졌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아버지는 대전형무소에 수감됐고, 골령골에서 불귀의 객이 됐다.

 

어릴 때 저기서 놀다가도 우리 동네로 어떤 남자 어른이 들어가면 막 달려 쫓아가는 거예요. 우리 집으로 들어가는가 보려고. 그러다 다른 집으로 가면 우두커니 섰다 돌아오고. 할아버지가 백 밤만 자면 아버지 온다고, 꼭 온다고 했으니까.”(616일 필자와의 인터뷰)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를 매일 기다렸다. 약속한 백 밤이 훨씬 지나도 아버지는 오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어머니를 개가시켰다. 그래도 미경은 조부모님 사랑으로 살았다.

 

때마다 집으로 경찰이 찾아왔다. 미경은 경찰인지도 몰랐다. ‘아버지 친구라는 그 아저씨마저 반가워서, 할아버지 어디 가셨느냐는 물음에 있는 대로 대답만 했다. 다음날 경찰은 조부모님을 잡아갔다. 월북한 작은아들과 접선하고 온 게 아니냐고 매를 휘둘렀다. 간신히 돌아온 할아버지는 그때부터 정신을 놓아버렸다. 이제 어린 미경이 할아버지를 돌봐야 했다.

 

끝나지 않은 고통

미경은 언젠가 아버지를 만나면 일러주고싶은 이야기들을 차곡차곡 일기장에 써내려갔다. 70년 세월 동안 차곡차곡 쌓인 그리움의 낱말들은 어느새 그를 시인으로 만들었다.

 

저 하늘에 뭉게구름을 헤치면/ 아버지가 있을까/ 친구들은 학교에 가고 나는 나무하러/ 천방산에 올라/ () / 저 구름을 헤치면 아버지가 있으려나/ 아버지 보고 싶고 그리고 미워” (전미경 시집 <진실을 노래하라> 저 구름을 헤치면’)

 

20101기 진실화해위원회는 대전·충청지역 형무소 재소자 희생사건의 진실을 규명했고, 전 회장의 아버지도 골령골에서 억울하게 희생됐음을 밝혀냈다. 전 회장은 아버지에 대한 재심을 신청해 2013년 무죄 판결을 받아내고, 국가로부터 보상금을 받을 수 있었다.

 

이제야 아버지의 원통한 죽음에 대한 진실이 밝혀졌지만, 고통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2016년 육군본부와 검찰이, 보상금이 잘못 지급됐다며 뒤늦게 보상금 반환 소송을 제기했다. 이들은 환수금을 보전한다는 명목으로 전 회장의 집과 토지를 가압류하기도 했다.

 

아버지 목숨값으로 받은 돈까지 내놓으라고 온 집 안에 빨간 딱지를 붙여놨어요. 그래 내 전 재산을 다 내놓을 테니까, 우리 아버지 여기다 도로 살려놔유.”(616일 필자와의 인터뷰)

 

5년간 이어진 법정 싸움 끝에 202111월 대법원은 전 회장이 받은 보상금은 부당이득으로 볼 수 없다며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억울한 죽음에 대한 사과를 기다려온 유족에게 소송을 안겨준 국가. 전 회장은 소송에는 이겼지만 도무지 웃을 수가 없었다.

 

골령골에서는 지난해까지 약 1250구의 유해가 수습됐다. 유해발굴이 마무리되면 정부는 이곳에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전국단위 위령시설과 평화공원을 조성할 계획이다.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는 골령골에 사무실을 구했다. 전 회장은 집과 이곳을 며칠씩 오가며 지낸다. 저녁이면 유해발굴 현장을 혼자 둘러보며 걷는다. 그러다 흙무더기 같은 곳에서 뼛조각이며 치아며 보이는 것이 있으면 주워다 흰 종이에 싸서 작은 상자에 담는다.

 

그리고 상자에 주워 담은 흰 단추 하나. 혹시 그것이 아버지가 마지막 입은 옷에 달려 있던 단추일까. 단추의 개수만큼 많은 아버지, 또 그만큼 많은 원한이 골령골에 남아 있다.

 

저녁에 제가 여기서 자면 이런저런 생각이 나서 잘 못 자요. 창문을 열어놓고 밖을 이렇게 보면, 아버지가 묶여서 끌려가시는 게 눈앞에 선하다니까요.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은) 제가 흙 속에 들어가야 잊어버리지, 못 잊어버려요.”(616일 필자와의 인터뷰)

 

대전산내학살사건은 한국전쟁 당시 대전형무소 재소자와 충청지역 국민보도연맹원 등이 경찰과 헌병대 등에 의해 대전 동구 골령골에서 학살된 사건이다. 희생자 수는 1800~7000명으로 추정된다. 지난해까지 약 1250구의 유해가 수습됐으며, 유해발굴이 완료되면 평화공원을 조성할 예정이다.

최규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언론홍보팀 주무관 22.08.01ㅣ주간경향

 

 

다시는 펼쳐보지 못한 그날의 교과서

교과서

황해도 용연읍 용정리 바닷가 외딴집. 일찍이 아버지를 여읜 김주삼은 어머니와 동생 4명과 함께 살고 있었다. 동급생들보다 나이는 많았지만 용정제1중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읍내 병원에서 일하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어머니는 밤늦게까지 일하는 날이 많았다. 19561010일 그날 밤에도 김주삼이 어린 동생들을 돌보고 있었다.

공군 첩보대의 북한 민간인 납치 사건피해자 김주삼씨(85)가 지난 810일 서울 서초동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대회의실에서 사건 이후 66년 만에 직접 자신의 삶에 대해 말하고 있다. / 최규화 제공

 

같은 시각 백령도에서는 남한의 북파공작원 3명이 조용히 공작선에 오르고 있었다. 황해도 연안에 도착한 그들은 소형 목선인 뗏마로 갈아탔다. 어느 해변에 배를 대자, 불 켜진 작은 집 한채가 눈에 들어왔다. 발소리를 죽여 집으로 다가가 벌컥 문을 열었을 때, 그곳에 바로 김주삼이 있었다. 그들은 김주삼에게 총을 겨누고 말했다.

 

남조선 무장대가 오늘 침투한다는 연락을 받고 왔다. 네가 동네 지리를 안내해라.”

 

남한 군인에게 납치된 북한 중학생

열아홉 살 김주삼은 어린 여동생들의 얼굴부터 떠올렸다. 동생들에게 화가 미칠까 걱정한 그는 순순히 따라나서기로 했다. 김주삼의 방을 살펴보던 남자들은 교과서몇권을 챙겼다. 그리고 김주삼을 데리고 집을 나서서 다시 배를 타고 백령도로 돌아왔다.

 

백령도에서 다시 배를 타고 인천으로, 인천에서는 자동차로 서울 오류동까지 왔다. 도착한 곳은 공군 첩보부대였다. 군인들은 김주삼에게 인민군 부대 위치나 동향 등 군사정보를 캐물었다. 바닷가 외딴집에 사는 중학생이 그런 정보를 알 턱이 없었다.

 

아무리 조사해도 소득이 없자, 내가 사는 마을 근처에 다리가 몇개인지, 학교는 어디에 있는지, 논밭은 어디에 있는지, 산세는 어떻게 생겼는지 모조리 그리라고 했다. 조사자 마음에 안 들면 계속 퇴짜를 맞으며 쥐어짜기 식으로 한 달간 조사를 받았다.”(‘시사IN’ ‘납치 소년 김주삼의 60년 망향가정희상 기자, 2022. 8. 11.)

 

국군과 미군 첩보대를 오가며 조사가 계속됐다. 김주삼은 조사만 끝나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여기고 두려움의 시간을 버텼다. 그 바람은 이뤄지지 못했다. 조사를 마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건 노역의 시간이었다. 그 시간은 약 4년이나 이어졌다.

 

김주삼은 부대 내 수송부에서 차량 수리 일을 돕고 잡다한 심부름을 했다. 밤에는 부대원들의 막사 안에서 같이 잤다. 당시 부대원 임중철(89)은 김주삼의 모습을 기억했다.

 

밤에 자다가 이놈(김주삼)이 혼자 살살 기어나와. 뭐 하나 보면 북쪽에다 대고서, 철망을 붙잡고서 소리 안 나게 우는 거야. 그거 내가 여러 번 봤어요. 항상 고향 생각하고, 형제 생각해서 그러는지, 울음으로 세월을 보냈어.”(2022. 8. 10. 임중철 인터뷰)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 무엇이든 시키는 대로 했다. 그사이 부대 주소를 등록기준지로 해서 호적도 만들어졌다. 그리고 1961년쯤 “4년 동안 겪은 일을 발설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줄 알라”(‘시사IN’, 2022. 8. 11.)는 협박과 함께 혈혈단신 부대 밖으로 내보내졌다.

 

부대 근처 면도날 공장에 취업했지만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과거 그를 불쌍히 여기던 부대원들의 도움으로 몇차례 일자리를 얻었지만 결과는 비슷했다. 돈도, 기술도, 학벌도, 인맥도 없이 홀로 맞닥뜨린 막막한 삶. 김주삼은 벗어날 수 없는 가난과 평생을 싸워야 했다.

 

가난만큼 그를 괴롭힌 것은 정부의 감시와 사찰이었다. 정부는 그것을 북한이탈주민에 대한 보호관리라 여겼겠지만, 김주삼에게 그것은 공포이자 폭력이었다.

 

“(부대를 나온 뒤) 처음에는 하우스에 살았어요. 비닐하우스. 거기다 집을 짓고 살았는데, 어떤 형사는 신발을 신고 방에 들어와 다 훑어보고 그랬거든.”(2022. 8. 10. 김주삼 인터뷰)

 

이제 김주삼이 대한민국에 묻는다

가난과 싸우고, 차별과 의심의 시선과 싸우고, 가족을 향한 그리움과 싸우는 동안 세월은 잔인하게도 흘렀다. 80대 노인이 된 김주삼에겐 죽기 전에 꼭 물어야 할 질문이 있었다.

 

20202, 김주삼은 대한민국에 물었다. 엉망이 돼버린 자신의 인생에 대한민국의 책임은 없느냐고.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그리고 그해 12월에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진실규명 신청접수를 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지난 89일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중대한 인권침해로 판단했다. 국가는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명예회복 조치와 함께 가족 상봉 기회를 제공하라고 권고했다.

 

진실규명의 결정적 근거는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지원단의 보상금 신청 기록이었다. 김주삼을 납치한 북파공작원들은 2008년 그 공로를 인정받아 보상금을 받았다. 또한 2012년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지원단은 재조사 과정에서 납치 피해자김주삼의 진술을 확보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김주삼의 존재를 증거 삼아 보상금을 지급한 것이다. 이미 그때 김주삼의 존재를 알았으면서도, 정부는 10년이 더 지나도록 김주삼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가족들과) 연락만 할 수 있으면 더 좋을 게 어디 있어? 지금도 밤을 꼬박 새울 때가 있어요. (가족들을) 생각하기 시작하면 지금도 밤을 꼬박 새워요.”(2022. 8. 10. 김주삼 인터뷰)

 

66년 전 그날, 북파공작원들은 김주삼의 집에서 교과서를 몇권 챙겨갔다. 하지만 그날 이후 김주삼은 다시는 교과서를 펼쳐보지 못했다. 빼앗긴 시간, 어긋난 세월을 어디서 어떻게 되찾을 수 있을까. 이제 대한민국이 김주삼의 오래된 질문에 대답해야 할 때다.

 

뼈아프게 생각하는 것은 내가 여기 대한민국에 와서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도 못 들어갔어. (못 배워서) 먹고사는 데 그렇게 힘이 드니까 그게 제일 어려웠지.”(2022. 8. 10. 김주삼 인터뷰)

 

공군 첩보대의 북한 민간인 납치 사건

1956년 첩보 활동을 명목으로 북한 민간인을 무단으로 납치해 정보를 취득한 후, 필요성이 없어진 대상자를 첩보부대에서 무보수로 노역을 시키고 북한으로 돌아갈 권리도 부정하고 남한에 평생 억류한 사건이다.

최규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언론홍보팀 주무관 22.08.29ㅣ주간경향

 

 

태극기 휘날리던 피란선, 미군은 왜 폭격했을까

당시 배를 보니 배 위에 태극기를 그려놓았어요. 태극기가 그려진 배를 때리니까(폭격하니까) 적 비행기인 줄 알았는데, 직접 보니까 호주기(미군기)였습니다. 왜 태극기 그려진 배를 때렸는지 지금도 모르겠어요.”(<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호남지역 미군 관련 희생 사건조사보고서)

조근자씨에게 그날의 기억은 60년이 지나도록 물음표로 남아 있다. 195083일 전남 여수시 남면 안도리. 스물한 살의 조씨는 이야포 해변에 정박한 피란선 한척을 봤다. 조씨의 집에서도 태극기가 보일 만큼 가까웠다. 집보다 큰 배에 사람들이 가득했다.

 

배 위에는 태극기가 달려 있었다. 배 위를 맴돌던 비행기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걸까. 무차별 기총사격이 시작됐다. 총탄에 맞아죽고, 바다에 떨어져 죽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비참한 광경이 펼쳐졌다. 대체 왜 피란선을 향해 폭격을 했는지, 조씨는 알 수 없었다.

 

이야포 미군 폭격 사건으로 150여명이 사망하고 50여명이 부상당했다. 당시 배에 타고 있던 이들은 모두 350여명. 국군의 지시에 의해 부산에서 배에 오른 피란민들이었다.

 

폭격이 끝나자 마을 사람들은 뗏목과 배로 생존자들을 날랐다. 생존자들은 마을 사람들의 집에 머물면서 치료를 받고 가족의 시신을 찾았다. 시신을 찾은 사람들은 해안 주변에 묻고 육지로 나갔다. 며칠 뒤 남은 시신들을 모두 배에 실어 배 전체를 불로 태웠다.

 

어인 날벼락인가? 아군기가 피란민을

누가 배에 탔는지, 누가 죽고 누가 살았는지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안도리 주민들이 아니라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피란민들이었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마을 사람들의 기억에만 존재하던 이야포 미군 폭격 사건은 20101기 진실화해위원회에 의해 진실이 규명됐다.

 

그날의 진실을 밝혀달라고 2005년 진실화해위원회의 문을 두드린 신청인은 단 한명, 사건 당시 열두 살이던 이춘송씨였다. 서울 마포에 살던 이씨의 일곱 식구는 전쟁이 일어나자 부산까지 피란을 갔다. 그곳에서 함께 피란선을 탔지만, 부모님과 두 동생은 이야포에서 폭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겨우 살아남은 누나 역시 사건 후유증으로 3년 뒤 숨을 거뒀다.

 

폭격 당시 소년 이춘송은 선장실 뒤쪽 물통 뒤에 숨어 아비규환의 현장을 직접 목격했다. 총소리가 날 때마다 일고여덟명씩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바다는 온통 피로 물들었다. 죽은 사람들의 피가 머리 위에서 흘러내려 이춘송의 온몸도 피에 젖었다.

 

아버지는 배 위에서 총에 맞고, 여동생을 껴안고 바다로 뛰어들었다가 목숨을 잃었다. 어머니와 남동생은 마을 사람들의 배를 얻어타고 오다 뭍에 도착하기 전에 숨을 거뒀다. 이춘송과 형, 누나만 다른 배를 타고 육지에 도착한 뒤, 수수밭에 숨어서 살아남았다.

 

이춘송씨도 그날 배에 달려 있던 태극기를 기억했다. 그는 2009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당시, 태극기가 달려 있던 피란선과 미군 비행기의 모습을 그림으로 또렷이 그려냈다. 심지어 폭격 전 피란민들은 미군 비행기를 알아보고 손을 흔들며 반겼다고 한다.

 

폭격이 휩쓸고 지나간 직후에도 미군 비행기를 향해 태극기를 흔들던 사람이 있었다.

 

어떤 아저씨가 태극기, 태극기하고 소리쳤다. 어떤 사람이 조그마한 태극기 수기 하나를 갖다주었다. 이 아저씨는 태극기를 미친 듯이 흔들었지만 비행기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고 사라져버렸다. 이 어인 날벼락인가? 아군 비행기가 피란민을 폭격하다니. 피란민을 죽이다니.”(생존자 윤학재의 수기 <아리랑 그림자>,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에서 재인용)

 

72년 지난 지금 마지막 생존자의 태극기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는 어떠한 경고도 받지 못하고 무방비의 민간인에 대한 폭격은 사건경고의 원칙은 물론이고, ‘전시의 약자에 대한 공격금지인 제네바협약 제16조에 위반하고, 측정된 군사 목표물이 아닌 민간인과 민간시설을 공격한 행위로 헤이그규칙 제24조 및 미군 교범 제19, 45조 위반에 해당한다고 사건의 불법성을 확인했다. 그리고 “(희생자들은) 정부의 소개명령에 따라 임시수도 부산에서 사건 현장까지 이동하다 사망한 것이므로, 한국 정부 역시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실규명 이후 8년이 지난 2018, 사건 이후 68년 만에 첫 희생자 추모제가 여수 시민들에 의해 열렸다. 2020년에는 사건 현장인 이야포 해변에 평화탑을 세웠고, 지난해에는 희생자 위령사업에 대한 조례안이 여수시의회를 통과했다. 올해 83일에는 처음으로 여수시가 주최하는 추모제를 열었다. 사건 이후 72년 만이다.

 

이야포의 진실이 사회적 기억으로 자리 잡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사이 이춘송씨도 세상을 떠났다. 1950년 피란길에 오른 일곱 식구 중 당시 열여섯 살이던 형 이춘혁씨만이 살아남았다. 진실과 함께 올 줄 알았던 화해는 아직도 닿지 않았다. 아무도 사과하지 않았고, 누구도 보상하지 않았다. 이름 모를 생존자와 유족들은 어딘가에서 조용히 사라지고 있다.

 

지난 818이야포 미군폭격사건 위령사업 추진위원회와 이춘혁씨는 2기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규명 신청서를 접수했다. 이들은 희생자 추가 신원 확인, 이야포 해저 피란선 추정 잔해 인양 조사, 희생자 유해 매장지 확인 및 발굴을 요구했다. 17년 전 동생 이춘송씨가 그랬듯이, 이번에는 형 이춘혁씨가 다시 한 번 진실화해위원회의 문을 두드렸다.

 

72년 전 그날 피란선 위에는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대한민국은 그들을 지켜주지 못했다. 2022년 마지막 생존자 이춘혁씨가 다시 한 번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여기 대한민국 국민이 있다고, 그날 다하지 못한 국가의 책임을 이제는 다하라고 외치고 있다.

 

여수 이야포 미군 폭격 사건은 195083일 전남 여수시 남면 안도리 이야포 해상에서 정부의 소개명령에 의해 부산에서 출발한 피란민 350여명이 타고 있던 피란선이 미군 전투기에 의해 폭격당한 사건이다. 150여명이 사망하고 50여명이 부상당했다.

 

최규화 전 진실화해위원회 언론홍보팀 주무관 2022.10.03ㅣ주간경향

 

 

방패연타고 날고팠던 선감도 소년들

그 섬의 작은 나루터는 내게 바람으로 기억된다. 지난해 이맘때였다. 초겨울 바다에서 불어오는 날쌘 바람이 머리카락을 흩날리게 했던 날. 방패연 하나 하늘로 줄을 풀어놓는다면 훨훨 잘도 날겠다 싶은 바람이었다. 하지만 40년 전 섬에 살던 소년들에게 그 바람은 그렇게 낭만적으로 기억되지 못했다. 이제는 노인이 돼버린 소년의 몸이 덜덜 떨렸다.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감동 옛 선감학원 터에 예술가와 시민들이 세운 위령비. 선감학원에 불법 구금됐다가 목숨을 잃은 아동들이 가족 품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위령비 가운데에는 방패연을 새겼다. /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제공

 

여기만 오면 원래 몸이 떨려.”(2021. 11. 23. 인터뷰)

김영배 선감학원아동피해대책협의회 회장. 그가 선 선감나루터는 영문도 모르고 끌려온 아동들이 배에서 내려 처음으로 섬에 발을 디디는 곳이었다. 지금은 간척지 위에 펜션촌이 가지런히 자리 잡은 섬, 선감도. 이 섬이 이름을 잃어버린소년들로 가득하던 때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1941년 경기도 사회사업협회는 기부금 50만원으로 선감도 전체를 사들였다. 이듬해 조선감화령 등에 근거해 부랑아 수용시설의 문을 열었다. 바로 선감학원이다.

 

해방 이후 미군정은 선감학원을 경기도로 이관했다. 1957년 경기도는 선감학원 조례를 제정하면서 제1부랑아의 수용보호 및 직업보도를 위하여 선감학원을 둔다는 규정을 통해 경기도가 선감학원의 설립 주체임을 밝혔고, 1982년까지 선감학원을 직접 운영했다.

 

선감학원이 폐쇄될 때까지 40년간 수용된 아동 수는 최소 5000여명으로 추정된다.

저는 거기(선감학원)다 분명히 이야기를 한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 형에 대한 정보를 줬어요. 천안시 신구동이라고 주소도 알려줬어요. 동네 인근에 화약고가 있어서 그것까지도 이야기했어요. 그래서 아버지한테 보내달라고 했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죠.”(○○, 진실화해위원회 진술. <선감학원 아동 인권침해 사건> 조사보고서 인용.)

 

1968년 작성된 정○○의 선감학원 원아대장에는 부모와 사별했다고 적혀 있다.

부랑아 단속은 엿장수 마음대로였다. 그냥 그래 보이는아이들을 잡아들일 뿐, 경찰과 경기도는 명확한 기준 없이 단속을 벌였다. 신원을 확인하기도 전에 부랑아로 분류했다. 일반 아동시설에 이미 수용 중인 아동을 부랑아로 분류해 선감학원에 보내기도 했다.

 

단속 이후에도 원아대장에 인적사항을 잘못 기재하는 사례가 많았고, 보호자에게 수용 여부를 통지하지 않는 등 아동복리법상의 절차를 제대로 지키지 않고 강제 수용했다.

 

수용 이후의 인권침해도 심각했다. 강제구금, 강제노역, 폭행, 가혹행위, 성폭력, 과밀수용, 부실급식. 아동들은 보수도 없이 농사일과 양잠, 축산, 염전일 등 노역에 투입됐다. 단체기합과 폭행도 일상적으로 일삼았다. ‘원산폭격’, ‘나룻배’, ‘줄빠따’, ‘한강철교’, ‘비행기등의 가혹행위가 기숙사의 사(), 반장은 물론 공무원들에 의해서도 자행됐다.

 

방패연을 타고 엄마 품으로 돌아가기를 장충당(별명)이라는 친구가 있어요. 특이해서 이름을 잊지 않아요. 서울시립아동보호소에서도 같이 있었어요. 의정부에서도 만나 구걸도 같이했어요. 내가 여기서 탈출하면 죽는다고 말해줬는데 그다음 날 이놈이 탈출하다 죽어서 떠내려왔더라고요.”(○○, 진실화해위원회 진술.

<선감학원 아동 인권침해 사건> 조사보고서 인용.)

 

강제노동과 폭력, 굶주림 등에 시달리던 아동들은 목숨을 걸고 탈출을 시도했다. 지금은 간척이 이뤄져 이웃 섬들과 길이 이어졌지만, 그때는 어디로든 나가려면 바다를 건너야 했다. 탈출을 시도한 아이 중 상당수는 다시 살아서 뭍을 밟지 못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지난 9월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감동 일대 선감학원 사건 피해자 유해 매장 추정지를 시굴한 결과 아동의 치아 68개와 유품인 단추 6개가 발굴됐다. / 진실화해위원회 제공

 

살아남은 아이들도 제대로 삶의 뿌리를 내릴 수 없었다. 많은 수가 퇴소 후 수십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정신질환, 인지기능 저하, 스트레스에 대한 비적응적 반응, 신체적 장해를 겪고 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가 선감학원 피해자 99명을 대상으로 한 트라우마 관련 설문조사 결과, 51%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선감학원이 만들어지고 사라질 때까지 걸린 시간 40. 선감학원이 사라지고 그 진실이 국가에 의해 밝혀질 때까지 걸린 시간 역시 40년이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지난 1018선감학원 아동 인권침해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고 국가의 책임을 확인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무분별한 단속 정책을 주도한 법무부, 행정안전부, 보건복지부와 부랑아 단속의 주체였던 경찰, 선감학원을 운영했던 경기도에 공식 사과를 권고했다. 또 피해자와 유족들에 대한 피해 회복 조치와 특별법 제정 등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고 권고했다.

 

선감도 내 아동 희생자 유해매장 추정지에 대한 유해발굴을 신속히 추진하고, 추모공간을 마련해야 한다는 점도 권고사항에 포함됐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지난 9월 진행한 시굴 조사에서는 치아 68개와 유품인 단추 6개가 나왔다. 조사단은 암매장 유해를 모두 15~18세 남성으로 추정했다. 수습된 단추 역시 선감학원 아동이 입었던 원복의 단추로 확인됐다.

 

선감학원이 있던 자리에는 지금 경기창작센터가 들어서 있다. 2014년 예술가와 시민들이 십시일반 마음을 모아 한쪽에 작은 위령비를 세웠다. 위령비 가운데 선명하게 새겨진 방패연’. 어린 영혼들이 방패연을 타고 날아가 엄마 품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선감나루터에는 여전히 바람을 맞으며 소년들이 서 있다. 그들의 이름은 바람에 흩어져버렸지만, 원통한 마음은 여전히 나루터에 남아 있을 것이다. 빼앗긴 인생을 뒤늦은 진실로 되찾을 수 있을까. “이 비루한 역사를 누구에게 용서받을 수 있을까.

 

삼가 오늘 무릎 꿇어/ 그대들 이름 호명하나니/ 선감도 소년들이시여/ 어머니 기다리시는 집으로/ 밀물치듯 어희 돌아들 가소서/ 이 비루한 역사 용서하소서”(위령비에 새겨진 홍일선 시인의 시 한 역사중에서)

 

선감학원 아동 인권침해 사건은 정부의 부랑아 정책에 따라 경찰 등 공권력이 불특정 아동을 법적 근거와 적법 절차도 없이 단속한 후, 선감학원에 구금한 사건이다. 또한 시설운영 과정에서 강제노동, 가혹행위, 성폭력, 생명권의 침해, 실종 등이 발생했다.

최규화 전 진실화해위원회 언론홍보팀 주무관 2022.12.26.ㅣ주간경향

 

 

국수 먹다 끌려간 삼청교육대···영겁 같은 ‘318

스무 살 임철원(가명)은 마산시외버스터미널 앞 포장마차에서 국수를 먹고 있었다. 터미널을 오가는 승객들에게 신문과 잡지를 파는 청년이었다. 그날도 포장마차에서 국수로 한끼 식사를 때우려는 그때, 갑자기 누군가 그의 팔을 낚아챘다. 경찰관들이었다.

조교가 지켜보는 가운데 두 팔로 통나무를 받쳐들고 훈련을 받고 있는 삼청교육대 피해자들 / 경향신문 자료사진

 

그는 마산경찰서로 연행됐다. 경찰관들은 버스 승객들에게 껌을 강매했다는 내용의 자술서를 쓰라고 강요했다. “그런 적 없다며 저항하는 임철원에게 주먹이 연거푸 날아들었다. “4주만 갔다 오면 되는데 그거 하나 못 쓰나하고 회유하기도 했다.

 

어디로 왜 가야 하는지 알지도 못한 채 매를 맞았다. 결국 거짓 자술서를 썼다. 그리고 다음 날로 어느 군부대로 끌려갔다. 그곳이 바로 삼청교육대’. 19808월의 일이었다.(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삼청교육 피해사건 조사보고서> 중 진술 일부 재구성)

 

흔히 연병장 가득 모인 사람들이 군복을 입고 목봉체조와 원산폭격을 하는 장면으로 기억되는 삼청교육대.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것처럼 깡패 같은 사람들을 잡아다 힘든 군사훈련을 시켰다는 것이 삼청교육대의 진실은 아니었다.

 

1980729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가 입안한 삼청계획 제5호 및 계엄포고 제13호에 따라 계엄사령부 지휘 아래 군경은 8월부터 약 6만명의 대상자를 검거했다. 그 가운데 약 4만명을 198112월까지 순차적으로 군부대에 설치된 삼청교육대에 수용했다.

 

순화교육, 근로봉사, 보호감호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구타 등 가혹행위가 발생했다. 교육 중 사망자 54, 출소 후 후유증 사망자 최소 367명 등 확인된 사망자만 421명에 이른다.

 

삼청교육대 검거는 전국적인 작전이었다. 19808월부터 약 6개월간 총 5회에 걸친 일제 검거에 군·경 약 80만명을 투입했다. 모두 6755명을 법관의 영장 발부 없이 검거했다. ‘불량배 소탕이라는 명분이 무색하게, 전체 피검자 중 35.9%가 전과 사실이 전혀 없었다.

 

검거된 사람들에게는 A-B-C-D 등급을 매겼다. B-C등급 약 39742명을 대상으로 26개 부대에서 모두 11차례의 순화교육을 실시했다. 새벽 6시부터 하루 16시간씩, 육체훈련과 자아반성 등 정신교육을 진행했다. 개선이 없는 자는 특수교육대에 입소시켜 더 심한 훈련을 받게 했다. 학생, 여성, 노동조합 간부 등에 대해서도 별도의 순화교육을 시행했다.

 

보통 삼청교육이라고 하면 떠올리는 장면이 바로 순화교육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순화교육이 끝난 뒤에 미순화자로 분류된 약 1만명은 전방 20개 사단에 수용돼 근로봉사를 해야 했다. 19809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9차에 걸쳐 전술도로공사와 방어시설 보강공사에 투입했다. 3개월간 계속된 근로봉사 중에도 순화교육을 병행 실시했다.

 

근로봉사가 끝나면 또 보호감호가 기다리고 있었다. 국보위는 198012월 사회보호법을 제정했다. 이듬해 1월 삼청교육생들이 이 법의 최초 피적용자가 됐다. 이른바 미순화자로 분류된 8000여명은 각각 1년에서 5년까지 보호감호 처분을 받았다. 이들은 재판도 없이 군부대나 감호소에 계속 수용돼 순화교육과 근로봉사를 또다시 겪어야 했다.

 

마산시외버스터미널 앞에서 국수를 먹다 끌려간 스무 살 임철원도 198084일부터 군부대로 끌려가 순화교육을 받았다. 이어 근로봉사와 보호감호도 피해가지 못한 그는 1983822일 출소했다. 그가 사회로 돌아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만 3년 하고도 18일이었다.

 

“4주만 갔다 오면 된다던 경찰관의 말은 틀렸다. 318일이면 지옥이 끝날 거라는 임철원의 생각도 틀렸다. 그 뒤로 4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삼청교육대라는 족쇄에 발목이 잡혀 있다. 이웃과 사회의 왜곡된 시선은 끝나지 않는 형벌이었다.

 

삼청교육대를 다녀왔다는 사실을 (주변에서) 다들 어떻게든 알게 되니 아이들을 키우기가 힘들어 스물몇 번 이사를 했다. () 회사에 다니고 싶어 이력서도 많이 냈지만 중범죄자 취급을 받아 번번이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지 못했다.”(연합뉴스 <“40년 지났어도 도망가는 꿈끝나지 않은 삼청교육대 악몽> 김치연 기자, 2022. 7. 24.)

 

지난 67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삼청교육 피해사건의 진실을 규명했다. 과거 정부는 삼청교육 피해자의 범위를 상이·사망한 자로 제한했지만, 진실화해위원회는 이번 결정을 통해 강제입소한 모든 사람을 피해자로 인정했다.

 

대법원은 2018년 삼청교육의 법적 근거였던 계엄포고 제13호가 해제 또는 실효되기 이전부터 위헌·무효라고 결정한 바 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계엄포고 제13호에 근거해 이뤄진 순화교육 및 근로봉사는 헌법상 보장된 신체의 자유를 침해했고, 국제·국내 규범이 금지하는 강제노역을 동반한 인권침해였다고 판단했다. 계엄포고 제13호 및 구 사회보호법에 의해 이뤄진 보호감호도 신체의 자유뿐 아니라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한 인권침해라고 봤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삼청교육대 입소자 전원에 대한 배상 방안 마련, 피해자 트라우마센터 설치, 계엄법·사회보호법 유죄 확정판결 피해자에 대한 재심 등을 정부에 권고했다.

 

계엄포고 제13호를 발령한 198084, 임철원은 삼청교육대로 끌려갔다. 단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그들의 어긋난 인생을 바로잡으라는 권고는 그렇게 빨리 이행되지 않을 것이다. 4만명의 인생을 지옥으로 끌고 가는 데 주저함이 없던 국가는 진실앞에서는 법이니, 예산이니, 사회적 합의니 하는 말들을 앞세우며 무심히 시간을 흘려보낸다.

 

스무 살 신문팔이 청년 임철원에게 너무나 긴 ‘318이 계속되고 있다.

 

삼청교육 피해사건은 1980년 계엄사령부 지휘 아래 군경이 약 6만명의 대상자를 검거하고 그중 약 4만명을 순차적으로 군부대에 설치된 삼청교육대에 수용해 순화교육, 근로봉사, 보호감호를 시행했으며, 다수의 사망·부상자를 발생하게 한 대규모 인권침해 사건이다.

최규화 전 진실화해위원회 언론홍보팀 주무관 2022.10.31ㅣ주간경향

 

 

보도연맹 학살과 고무신’···애도에 자격이 필요한가

2007년 충북 청원군 분터골유해발굴 현장. 57년 만에 땅 위로 나온 고무신 한짝에 사람들의 눈길이 집중됐다. 밑창에 선명하게 찍힌 세 글자 大同江(대동강)’. 고무신의 상표였다. 이 상표를 추적하면, 57년 전 이 고무신을 신고 분터골까지 와서 이곳에 삶의 마지막 발자국을 남긴 그 사람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 수 있을 터였다.

19507월 청주·청원지역 국민보도연맹원들이 학살된 충북 청원군(지금의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고은리 분터골에 사망자들을 기리는 원혼비가 박혀 있다. / 최규화 전 주무관

 

대동강의 정체는 1956년 발간된 <충북연감>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당시 청주에 있던 청주합동고무신공업사의 상표. 1948년 개업한 이 공업사는 직원 약 160명 규모의 큰 공장이었다. ‘大同江세 글자가 찍힌 고무신 한짝은 분터골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이 청주 주민이거나 그 가까이에 살았을 거라는 점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물증이 됐다.(<청원 국민보도연맹 사건 조사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2008)

 

충북 청원군(지금의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고은리에 있는 분터골. 한국전쟁 초기인 195074일부터 11일까지 청주경찰서와 청주형무소에 수감된 재소자들과 청주·청원지역 보도연맹원들이 경찰과 헌병대, CIC(방첩대) 등에 의해 이곳 분터골에서 학살됐다.

 

후퇴하기 전에 죽였어. 옛날 트럭이야. 하얀 윗도리를 입었는데 형무소에서 끌려나온 것 같더라고. 경찰들이 장총 들고, 정장 모자(턱에 끈이 달린 모자) 쓰고, 죄 엮어서 오더라고. 줄로 엮어서 20명씩을 한데다 묶었어. 그러니까 앞에 있는 사람 허리를 묶으면, 또 묶고, 또 묶고 해서 도망을 못 갔어.”(<2007년 유해발굴 보고서> 2·진실화해위원회·2008)

 

학살 목격자 이재우 옹(가명·당시 15)이 기억하는 1950그날의 풍경이다.

 

2006년 한국전쟁전후민간인학살진상규명 충북대책위원회는 300~400명의 청주형무소 재소자들이 트럭에 실려가 분터골에서 희생됐을 것으로 추정했다. 또 청주·청원지역 보도연맹원 약 700명도 같은 곳에서 학살당했고, 시신을 흙으로 덮어 가매장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청주·청원지역에서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희생자 수는 약 1500. 그중 분터골에서 희생된 수만 약 1000명에 이른다. 분터골은 충북지역 최대의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지다.

 

추정 희생자 1000충북지역 최대 학살지

1949년 좌익 전향자를 바른길로 이끈다는 명목으로 만들어진 국민보도연맹. 가입자 중에는 실제 남로당원도 일부 있었지만, 당국의 강요로 강제 가입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보도연맹의 성격을 제대로 알지 못했고, 그 때문에 자신이 죽을 거라고도 짐작하지 못했다. 그래서 소집명령에 바로 응했고, 구금 중에도 탈주하지 않고 석방을 기다렸다.

 

거기(분터골) 가니께 경찰관들이 보초를 서 있어. 고 언저리에 수천명이 피란민이 서 있어. 못 가게 막았나봐. 하거나 말거나 자전거를 타고 고개 7부쯤인가 8부쯤에 올라갔더니, GMC 자동차 두 대가 청주 쪽을 앞을 두고 서 있더라고. 그래 어떻게 되었느냐고 하니까, ‘다 끝났어요하길래, ‘하이고 살릴 사람이 있는데그랬더니 할 수 없죠그래. 드문드문 총소리가 나는데, 저게 확인사살 하는 거라고 그래.”(<2007년 유해발굴 보고서>)

 

당시 청주에서 우익 청년단체 활동을 한 장풍연 옹(가명·당시 25)분터골에 가봤느냐는 조사관의 물음에 위와 같이 답했다. 57년이 지났지만 그날의 기억만은 생생했다.

 

그날의 총소리가 남긴 참상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2007년과 2008년 진행한 유해발굴을 통해 세상에 드러났다. 2007118, 2008214구의 유해가 발굴됐다. M1·카빈총 소총의 총탄과 옷감, 단추, 고무줄, 신발 등이 출토됐다.

 

2008년 진실화해위원회는 분터골 학살 조사결과를 포함해 청원 국민보도연맹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조사보고서를 발표했다.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165. 92%20~30대였다.

 

여기(분터골)가 충북 도내 최대의 학살지라면 저거(안내판) 달랑 하나 세워놓는 게 아니라 역사의 아픔이 서려 있는 현장이라는 걸 알 수 있게 만들어놔야 하는데. 몇십억 들여 위령비를 세우자,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시민들에게 알리는 일을 전혀 안 하는 거예요. (돈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예요, 의지의 문제.”(박만순 충북역사문화연대 대표, 유튜브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 허락되지 않은 기억을 찾아서-분터골’ 2022. 1. 14.)

 

직접 분터골을 찾아가 보니 박만순 대표의 분노가 이해됐다. 지난 1030일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가 주최한 예술과 함께하는 한국전쟁 기억여행답사에 함께했다. 국도변 식당 앞에 차를 대고, 차가 갈 수 없는 좁은 길을 걸어 올랐다. 200m쯤 걸으니 좁은 길조차 아예 사라졌다. 펜션촌을 짓느라 세워놓은 낮은 옹벽을 타고 올라 현장에 도착했다.

 

무성히 자란 풀밭 사이 진실화해위원회 안내판이 보였다. 그 발치에는 높이가 두뼘 정도 될까,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 전국유족회가 세운 작은 원혼비가 살짝 기울어진 채 박혀있었다. 보이는 건 그게 전부였다. 분터골의 오늘은 너무도 초라하고 쓸쓸했다.

 

마침 그날은 1030. 자고 일어난 사람들의 귀에 이태원 참사의 소식이 들려온 날이었다. 답사에 참가한 사람들도 충격과 놀라움, 추모와 애도의 말들을 서로 나눴다. 그리고 다시 이곳 분터골로 눈을 돌렸을 때, 우리는 한없는 비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을 다룬 기사에는 늘 빨갱이라서 죽었는데 무슨 애도를 하고 무슨 보상을 하나하는 댓글이 달린다. 학살의 가해자인 국가의 태도 또한 다를 바 없다는 점은 충북 최대 학살지, 분터골의 폐허가 말해주고 있다. 아직도 이 사회는 분터골의 원혼들을 향해 애도 받을 자격을 의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난 72년간 그래왔듯이.

 

1950년 당시에는 없었을 것 같은 어린나무에 가지고 간 실을 걸어두고 왔다. 죽음의 땅을 뚫고 올라온 새로운 생명. 실은 기억과 감정을 엮고 잇는다. 분터골, 그날의 참극과 오늘의 애도가 이어지기를. 그리고 마침내 그날의 원한과 내일의 화해가 이어지기를.

 

청원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19506월 말부터 충북 청주·청원지역 보도연맹원을 포함한 예비검속자들이 청주경찰서 경찰과 헌병대, 청주CIC에 의해 경찰서와 각 지서, 형무소 등에 소집·구금됐다가 7월 초부터 7월 중순까지 청원군과 보은군 일부 지역에서 사살된 사건이다.

최규화 전 진실화해위원회 언론홍보팀 주무관 2022.11.28ㅣ주간경향

 

 

 

을 달라가창골에 묻힌 외침

대구 달성군 가창면 용계리에 들어선 민간인 희생자 추모 위령탑 / 대구시 제공

 

배고파 못 살겠다! 쌀을 달라!”

대구부청(지금의 대구시청) 앞을 가득 메운 시민들이 소리쳤다. 그중에는 여성과 어린이들도 있었다. 1946년 초부터 이어진 이 처절한 행렬에는 기아(飢餓)시위또는 기민(飢民)시위라는 이름이 붙었다. ‘쌀을 달라는 외침이 바로 10월항쟁의 출발이었다.

 

19469월 하순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전국적으로 일어난 뒤, 101일과 2일 대구에서 주민봉기의 형태로 10월항쟁이 발생했다. 시위는 106일까지 경북으로 번졌고, 12월 중순까지 남한 전 지역으로 확산됐다.

 

당시 대구·경북 인구의 4분의 1인 약 77만명이 시위에 참여했고, 남한 전체에서는 약 230만명이 동참한 것으로 추산되는 10월항쟁. 그 출발점에는 이 있었다. 영천성당의 프랑스 출신 신부 루이 델랑드(한국명 남대영)가 쓴 일기에도 당시 상황이 이렇게 기록돼 있다.

 

공출 때 가혹하게 굴었던 경찰이 피살되고, 수많은 집이 약탈을 당했다. 이 시위의 원인은 미 군정의 과도하게 강요된 미곡 공출, 식량 배급이 이루어지지 않음, 철도운행의 열악한 노동조건, 그리고 독립에 대한 전적인 열망에 있다.”(매일신문 ‘[대구 시월] “더는 쌀을 구할 방법이 없다그해 10월은 민생고가 빚어낸 폭풍’ 2022. 10. 11. 재인용)

 

식량 부족이 부른 10월항쟁과 빨치산 토벌

미 군정은 1946102일 계엄령을 선포해 시민들을 진압했다. 대구와 경북에서 검거된 이들만 약 7500. 검거한 사람들을 다 수용할 수 없어 곳곳에 임시수용소를 설치해야 할 정도였다. 진압에는 다른 지역에서 파견된 경찰, 미군, 국방경비대, 우익청년단 등도 투입됐다. 이들은 10월항쟁 참여자들을 체포하거나 사살하는 임무를 맡았다.

 

군경의 진압이 강경해지자, 10월항쟁 참여자 일부는 잠적하거나 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됐다. 이들에 대한 토벌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시기까지 이어졌다. 경찰은 이 과정에 빨치산뿐 아니라 주거지역에 있던 10월항쟁 관련자, 또는 남로당 가입자와 그 가족들을 살해했다. 때로는 10월항쟁과 무관한 지역 유지와 주민들을 살해하기도 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10월항쟁 관련자들을 향한 척결은 멈추지 않았다. 10월항쟁 관련자로 분류돼 형무소에 수감된 이들, 마을 대표나 지역 유지, 고학력 지식인 등 요시찰 대상자들이 그 대상이었다. 194610월항쟁 이후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시기까지 10월항쟁 관련자라는 낙인은 토벌과 척결 그리고 학살의 명분이 됐다.

 

오빠 박태덕(1919년생)은 대구 10월사건 당시 구장(시골 동네의 우두머리. 지금의 이장에 해당)으로 상부의 지시에 의해 사람들을 소집하는 일을 했다. 이후 그는 피신해 있다가 자수해 귀가했으나 195071일 경찰에게 강제연행된 뒤 돌아오지 않았다. 피신해 있던 오빠는 오랜만에 집에 온 뒤 당시 일곱 살이던 나와 함께 동구 밖으로 나갔다가 경찰에게 연행됐으므로 오빠가 연행되는 모습은 내가 직접 목격했다.”(<대구 10월사건 관련 민간인 희생 사건 조사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 2010)

 

동생 박태자(1944년생)가 기억하는 오빠의 마지막 모습이다. 오빠 박태덕의 최후는 제4대 국회 자료(1960)“10·1사건 혐의로서 본인이 자수 도중 경찰관에 연행, 195071일 대구 가창에서 피살이라는 한 줄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같은 보고서에 실린 당시 대한청년단단원의 증언에도 가창골이 등장한다.

 

대구 10월사건 때는 사람을 죽이지 않고 잡아다 가두었다가 징역 살리고 나온 뒤에 6·25 나고 나서 경찰에서 다 잡아 죽였다. 당시 경찰관 친구들에게 얘기 듣기로는 명부를 보고 경찰서에서 잡아서 주로 가창면으로 갔다고 했다. 대한청년단이 6·25 때 역할을 많이 했다.”

 

10월항쟁 관련자라는 이유로 가창골에 끌려와 학살된 민간인은 최대 1만명까지 추정된다. 그밖에도 경산 코발트광산, 청도 곰티재 등 여러 곳에서 학살이 이뤄졌다.

 

막연한 연관성으로 학살, 국가가 인정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는 10월항쟁 관련자들을 향한 학살을 국가폭력으로 인정했다. 10월항쟁과의 막연한 연관성만으로 적법절차 없이 희생된 민간인의 존재를 약 60년 만에 국가의 이름으로확인한 것이다. 2016년 대구시의회는 대구시 10월항쟁 등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사업 지원 등에 관한 조례를 제정했다. 오랜 세월 폭동으로, 때로는 사건으로 불리던 194610월을 항쟁이라는 이름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2020, 대구 달성군 가창면 용계리 가창골에 ‘10월항쟁 등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이 들어섰다. 10월항쟁뿐만 아니라 군위·경주·대구지역 국민보도연맹사건, 대구·경북지역 형무소 재소자희생사건 등 진실화해위원회가 권고한 총 6개 사건의 민간인 피해자를 추모하는 의미를 담아, 신원이 확인된 728명의 민간인 희생자 이름을 새겼다.

 

무덤도 묘비도 없이 버려진 이름들을 70년 만에 호명하는 탑. 남겨진 딸들과 아들들은 벌써 80~90대 노인이 됐다. 더러는 한을 풀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제삿날도 모르던 아버지들에게 제삿밥을 지어올리고 큰절을 하며, 유족들은 삼키지 못한 울음을 다시 한 번 토해냈다.

 

위령탑 건립과 동시에 아버지의 유택이 마련됐다는 점에서 진짜 아버지를 보고 간다는 마음이 들어 눈물이 난다.”(강호재 대구 10월항쟁유족회 간사 인터뷰, 영남일보 대구 10월항쟁 위령탑서 희생자 넋 기려이명주 시민기자, 2020. 10. 14)

 

올해 가창골에서는 70년 전의 진실에 한 발짝 더 다가가기 위한 노력이 이어질 전망이다. 지난해 1227일 진실화해위원회는 민간인 희생자 유해발굴 용역 착수보고회를 열고 전국 6개 지역, 7개소에 대한 유해발굴에 착수했다. 그 가운데 가창골이 포함됐다.

 

1959년 가창댐 건설로, 대부분의 학살지는 수몰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나마 남아 있는 유해매장 추정지 한 곳에서 발굴이 진행된다. ‘쌀을 달라는 처절한 목소리에서 시작된 항쟁과 학살, 은폐와 왜곡의 70년 세월. 가창골 땅이 소리 없이 품고 있던 진실은 어떤 모습일까.

최규화 전 진실화해위원회 언론홍보팀 주무관 2023.02.06ㅣ주간경향

 

 

 

환영 대신 장작매질이 어부들에게 국가란

1972년 강원 속초시청 앞 어느 여관. 방 입구에는 참나무 장작개비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아직 여름 더위가 채 가시지 않은 9. 겨울이었다 한들 군불을 지필 리도 없는 여관방에 장작이 왜 있을까. 여닫이문을 열고 방에 들어서자마자, 그 많은 장작의 용도를 알게 됐다.

2009년 남북 이산가족 상봉행사 당시 남측 노순호씨가 납북어부인 동생 성호씨를 만나 어깨를 붙잡고 울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무릎을 꿇고 앉으니 다짜고짜 무릎을 발로 짓밟았으며, ‘이 빨갱이 같은 새끼야라고 욕설을 퍼부었다. () 장작개비로 수없이 맞았다. () 북한에서 있었던 일을 있는 그대로 다 이야기했다. 지령을 받은 게 없다고 이야기했다. 그래도 거짓말을 한다고 계속 구타가 이어졌다.”(설악신문 납북귀환어부 진실규명 이야기 13’, 엄경선 전문기자, 2022. 6. 27)

 

그는 어부였다. 조업 중 납북됐다가 197297일 속초항으로 돌아온 납북귀환어부 160명 중 한명. 정부는 이들이 속초항에 도착하기도 전에 꼼꼼한 신문계획부터 세웠다.

 

어부들을 신문 및 신변경비에 용이한 장소에 수용한 뒤, “경찰 정보요원으로 신문반을 편성해일주일간 신문하고, “간첩 지령 사항과 전략정보를 알아내라고 지시했다. 그렇게 여관방으로 끌려간 어부들은 장작개비로 매질을 당하며 간첩취급을 받았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어로작업 중 북한 경비정에 의해 납북되는 어부가 많았다. 그들은 짧게는 3일에서 길게는 1년 이상 북한에 억류됐다가 대부분 귀환했다.

 

하지만 환영받지 못했다. 그들은 수사관들에 의해, 월선 조업과 탈출, 군사기밀 누설, 지령 사항 수수 등 혐의에 대해 조사를 받았다. 영장 없는 불법 구금과 가혹행위도 흔했다. 그 결과 대다수 납북귀환어부는 반공법과 국가보안법, 수산업법 등으로 처벌받았다.

 

납북됐다 돌아온 열다섯 살 소년들에게 국가보안법 위반죄를 뒤집어씌운 이 나라는 대체 어떤 나라인가, 생각을 참 많이 했어요. 정신적인 피해와 고통, 심리적인 상처는 정말 아직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예요.”(김춘삼 동해안납북귀환어부피해자진실규명시민모임 대표, 2022. 2. 23 필자와 인터뷰)

 

고통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귀환 직후 처벌을 받고 난 뒤에도, 국가는 이들을 향한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납북귀환어부들은 1차 처벌 이후에도 길게는 수십년 동안 감시와 사찰을 받았다. 당사자는 물론 그 가족들까지 감시의 대상이 됐고, 취업과 거주 이전에도 제한을 받았다. 심지어 이들을 대북공작에 활용하기 위한 시도도 있었다.

 

19695월 강원 고성군 거진항으로 어선 23척과 150명의 납북어부가 돌아왔다. 7개월 전 북한에 끌려갔다가 풀려난, 스물일곱 살 강모씨도 그중 한명이었다. 그의 증언에도 장작이 등장한다. 물론 이번에도 본래의 용도와는 완전히 다르게 쓰였다.

 

“1년 실형 선고를 받고 대전교도소에서 복역했다. 출옥 후에도 10년간 형사들이 매일 찾아오다시피 했다. () 한번은 20명의 납북귀환어부가 한꺼번에 속초 검찰청 지하실로 불려가 하루 동안 구타와 고문을 받으며 조사를 받았다. 무릎 사이에 장작을 넣어 짓밟고 무차별 구타를 가했다.”(설악신문 납북귀환어부 진실규명 이야기 2’ 엄경선 전문기자, 2021. 9. 6)

 

귀환 이후 수년이 지나, 다시 공안사건에 휘말려 2차로 처벌받은 경우도 많다. 김춘삼 동해안납북귀환어부피해자진실규명시민모임 대표 역시 그랬다. 그는 귀환 이후 11년이나 지난 1983년 다시 경찰에 끌려갔다. ‘고무찬양의 죄를 뒤집어쓰고, 2년간 옥살이를 해야 했다.

 

20년 지날 때까지 교도소에 있는 꿈을 꿨어요. ‘내가 왜 여기 와 있지?’ 꿈속에서 허우적거리다 깨는 거예요. 혹시 또 그런 일이 있으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을 평생 떨칠 수가 없어요.”(김춘삼 대표, 2022. 2. 23 필자와 인터뷰)

 

분단과 권위주의 통치가 만들어낸 국가폭력. 반공을 명분 삼아 만들어낸 공포의 희생자는 하루하루 먹고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바다로 나가야 했던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1987년 치안본부(지금의 경찰청) 자료에 의하면, 당시까지 파악된 납북어부의 규모는 459, 3648명이었다. 그중 약 90%3200여명이 남측으로 귀환했다. 그 가족까지 포함하면, 납북귀환어부 사건의 직·간접 피해자는 1만명을 훨씬 넘길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납북귀환어부 사건의 진실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이후였다. 2005년 출범한 1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는 납북귀환어부 사건 17건의 진실을 규명했다. 50명의 관련자가 재심을 통해 무죄 선고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2020년 다시 출범한 2기 진실화해위원회는 지난해 2월 풍성호·건설호 사건의 진실을 규명했다. 같은 달 납북귀환어부 982(109)에 대한 직권조사도 시작했다. 지난 27일에는 직권조사를 통한 첫 진실규명 결과도 나왔다. 1968년 납북됐다가 이듬해 귀환한 대양호 등 23150명의 납북귀환어부가 불법적인 수사를 받고 처벌받은 사건의 진실을 밝힌 것이다.

 

납북귀환어부들에 대한 개별적인 재심 무죄 판결이 이어지고 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지난해 2월 진실을 규명한 풍성호·건설호 사건 피해자들도 11월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판결은 뒤집어졌지만 시간마저 뒤집을 수는 없다. 이미 많은 이가 세상을 떴다. 한명 한명 재심을 신청하고 결과를 기다리기에는 피해자가 너무 많고 세월은 너무 빠르다. 진실을 찾을 길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과거의 그림자 속에 갇혀 있는 이도 여전히 많다.

 

피해자가 재심 신청서를 들고 찾아오길 기다려선 안 된다. 국가는 모든 피해자를 알고 있고, 모든 증거를 갖고 있다. 국가가 먼저 그들을 찾아서 진실의 세계로 이끌어야 한다.

 

소설가 김훈은 납북귀환어부를 소재로 단편 명태와 고래를 썼다. 작가는 명태와 고래가 실린 소설집 <저만치 혼자서>(문학동네, 2022)에 이런 군말을 덧붙였다.

 

남쪽과 북쪽의 폭력에 의해 번갈아 짓밟히고 제 땅에서 추방되는 사람들에 대하여 쓰려고 했다. 짓밟힌 사람들이 다시 삶을 추슬러나가는 모습은 겨우 조금밖에 쓰지 못했다. 고통과 절망을 말하기는 쉽고 희망을 설정하는 일은 늘 어렵다.”(<저만치 혼자서> 253)

 

다시 삶을 추슬러나가는 모습은 겨우 조금밖에 쓰지못한 것은 김훈 작가의 탓이 아니다. “고통과 절망을 지우고 희망을 설정하는 일은바로 국가의 몫이기 때문이다. 반성문을 써야 할 사람은 김훈 작가가 아니다. 국가의 반성문은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다.

최규화 전 진실화해위원회 언론홍보팀 주무관 2023.03.20ㅣ주간경향

 

 

출석부속 결석 학생이 간첩교사증언했다고?

1989725일에 열린 강성호 교사의 재판을 보도한 신문기사. 당시 강 교사는 법정에 들어서면서 손바닥을 펼쳐 진실·승리라는 글자를 내보였다. / 진실탐사그룹 셜록

 

출석부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출석부를 본 경찰과 검찰도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모른 체했다. 그들이 원한 건 진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임무는 오직 간첩교사를 만들어내는 일이었을 뿐. 그렇게, 강성호에게 32년간의 악몽이 시작됐다.

 

1989524, 스물일곱 살 햇병아리 일본어 교사 강성호는 그날도 교실에서 수업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를 찾는 사람이 있으니 교무실로 와보라는 전갈이 왔다. 교무실에는 덩치 좋은 남자 2명이 교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의 정체는 대공과 형사들이었다.

 

그들은 강성호에게 경찰서로 같이 가자고 말했다. 놀란 강성호를 학생 일 때문에 그렇다. 잠깐이면 된다고 안심시켰다. 강성호가 수업 중이라 못 간다고 하자, 교장 허락도 다 받아뒀다고 못을 박았다. 강성호는 꿈에도 몰랐다. 그를 고발한 장본인이 바로 교장이라는 사실을.

 

교문 앞에는 검은 지프 한 대가 서 있었다. 선생님이 수상한(?) 차에 타는 모습을 학생들은 웅성대며 지켜봤다. 차에 오르자마자 강성호의 손목에는 수갑이 채워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선생님, 선생님하던 경찰들의 입에서는 이 새끼하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에 강성호는 더 이상 교사가 아니었다. 국가보안법 피의자, ‘빨갱이가 됐다.

 

그에게 씌워진 혐의는 수업시간에 북한 찬양 발언을 했다는 것. 특히 ‘6·25 때 남한이 먼저 북한을 침략했다’, 즉 북침설을 주장했다는 것이었다. 다음 날 신문에는 좌경 의식화 교사라는 수식과 함께 강성호의 얼굴이 실렸고, 교육청은 즉각 그에 대한 징계에 나섰다.

 

경찰은 북한 찬양 발언을 들었다는 일부 학생의 증언을 증거로 내세웠다. 1심 법원은 그해 10, 강성호에게 징역 1년을 선고했다. 199012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 자격정지 1년을 받고 석방됐지만, 같은 해 6월 대법원은 최종 유죄 판결을 확정했다.

 

이런 일은 그에게만 일어난 게 아니었다. 강성호 사건은 거대한 탄압의 신호탄이었다.

 

1980년 중반부터 본격화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결성 움직임은 1989년 현실화를 눈앞에 두게 됐다. 노태우 정권은 이들을 의식화 교사로 규정하고, 엄정 대응을 천명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1989112일부 급진 성향의 교사들은 초··고교 학생들의 의식화까지 기도하고 있다면서 이들에 대해서는 철저한 조치와 함께 특별지도대책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그해 425일에도 중·고교생에 대한 의식화 활동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긴박한 실상이라며, 사례가 발견되는 경우 교단에서 물러나게 하라고 지시했다.

 

지시는 곧 구체화됐다. 514일 문교부는 노조 결성 주도 교사에 대해 형사처벌 방침과 함께 중징계 계획을 발표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정권에게는 전교조 교사=좌경 의식화 교사라는 등식을 증명하기 위한 결정적인 한 방이 필요했다. 사학재단의 비리를 폭로하고, 교사협의회에 가입하는 등 전교조 결성 운동에 참여해온 강성호가 그 표적이 된 것이다.

 

정권의 바람과 달리, 1989528일 전교조 결성대회는 강행됐다. 간부들에 대한 사전구속영장 발부, 직위해제 등 징계 조치, 결성대회 불허 방침에도 불구하고 대회 개최를 막을 수는 없었다. 527일부터 28일 사이 연행된 교사의 숫자는 1082명에 달했다. 이후 6월 내내 개최된 전교조 지부 및 지회 결성식에서도 대규모 연행 사태가 속출했다.

 

교육 당국은 전교조에 가입한 교사는 모두 중징계에 처하되, 탈퇴 교사는 일체 불문에 부치라고 지시하며 징계와 회유에 나섰다. 19897월 당시에만 전교조 활동과 관련해 처벌·징계 등을 받은 교사가 구속 41, 중징계(파면·해임) 267명 등 모두 941명에 달했다.

 

최종적으로 전교조 결성과 관련해 해직된 교사의 규모는 무려 1500여명에 이른다.

 

이 시기 전교조를 와해시키기 위한 작업에는 국가기관이 총동원됐다. 청와대가 그 정점에 서고, 안기부가 주도하며 감사원, 경제기획원, 내무부, 치안본부, 법무부(대검찰청), 문공부, 총무부, 서울시 등 전 국가기관이 동원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 과정에서 광범위한 민간인 사찰도 이뤄졌다.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보안사의 진드기 공작’. 지난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는 보안사 내부문건인 진드기 공작철을 입수해 전교조 창립 직후인 19896월부터 이듬해까지 전개된 민간인 사찰의 실상을 확인했다.

 

보안사는 전교조 관련자는 물론, 그 가족과 거주지 이웃 주민 등에 대한 미행, 내사, 가택수색, 접촉 등을 시간별로 상세히 기록했다. 민간인에 대한 정보수집이 금지된 보안사가 1990년대까지 민간인 사찰을 지속해왔음을 보여주는 진드기 공작은 그 자체로 중대한 불법행위다.

 

지난해 12월 진실화해위원회는 1989년 전교조 출범 전후로 교사들에게 가해진 사찰, 탈퇴공작, 사법 처리, 해직 등의 탄압은 현저히 부당한 공권력의 행사로 인해 발생한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임을 확인했다. 33년이 지나 국가 조사기구로부터 나온 결론이었다.

 

강성호에게도 뒤늦은 진실이 찾아왔다. 20219월 재심 재판부는 그에게 국가보안법 무죄를 선고했다. 수업시간에 ‘6·25 북침설을 들었다고 증언한 학생은 그날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출석부에 분명 결석이라 적혀 있었지만, 경찰도 검찰도 눈을 감았다. 그렇게 강성호는 빨갱이 교사로 만들어졌고, 누명을 벗기까지 인생의 절반이 필요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지난해 12노동의 자유, 사생활의 자유, 직업의 자유, 행복추구권 등 중대한 인권을 침해하였으므로 () 공식적으로 사과해야 한다고 정부에 권고했다. 돌아온 것은 사과가 아니었다. 지난 523일 국가정보원과 경찰은 전교조 강원지부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압수수색했다. 언론은 기다렸다는 듯 전교조에도 간첩이 있다는 보도를 쏟아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묘한 기시감. 1989년 강성호의 그날과 닮았다.

 

강성호가 진실을 밝히고 재심 무죄 판결을 받기까지 32년이 걸렸다. 1989년 그와 비슷하게 연행되고 해직된 교사들이 국가폭력 피해자로 확인받는 데까지는 33년이 걸렸다. 앞으로 또 그만큼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오늘날의 이 장면 역시 한 편의 촌극으로 기억될 수 있을까. ‘지연된 정의로 훼손된 피해자들의 인생을 그때는 또 무엇으로 돌이킬 수 있을까.

최규화 전 진실화해위원회 언론홍보팀 주무관 2023.06.12ㅣ주간경향

 

 

코발트광산 도장에 적힌 3500개 이름 중 하나

단서는 도장 하나, 이름 석 자뿐이었다. 이름 박봉우(朴奉羽). 아마도 대구나 경북 경산, 청도 어딘가에 살던 사람. 그리고 1950년 여름 갑자기 사라져 영영 아무도 본 적이 없는 사람. 그를 기억하는 사람을 찾아야 했다. 비극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열쇠가 거기 있었다.

 

2007년 경북 경산시 평산동 폐()코발트광산. 유해발굴 조사단의 눈에 도장 하나가 들어왔다. 진흙과 돌, 유해 조각들이 뒤엉켜 있는 곳에서 발견된 길이 3.4의 나무도장. 도장집의 가죽은 이미 썩어 사라졌고, 도장집의 금속 테만 남아 있었다. 도장에 새겨져 있던 글자가 바로 朴奉羽(박봉우)’. 1950년 그곳에서 숨을 거둔 누군가의 이름이었다.

 

일제강점기 자원 수탈을 목적으로 만든 코발트광산은 폐광 뒤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 장소로 활용됐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7월부터 9월 사이, 이곳 코발트광산 갱도와 인근 대원골에서 최대 약 3500명의 민간인이 적법절차 없이 희생됐다.

 

국민보도연맹원과 재소자들 트럭에 실려와 희생된 사람들은 경북 경산·청도, 대구, 멀게는 충북 영동 등지에서 끌려온 국민보도연맹원들과 요시찰 대상자들, 그리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재소자들이었다. 이들에게 총을 쏜 사람들은 경산·청도 지역 경찰과 경북지구 CIC(방첩대) 파견대, 국군 제22헌병대였다.

 

코발트광산은 과거 광부들이 드나들던 수평굴과 그들이 캐낸 광물을 올려보내던 수직굴로 이뤄져 있다. 군과 경찰은 사람들을 묶어 수직굴 입구에 일렬로 세웠다. 따다당! 총에 맞은 사람들은 수직굴로 떨어졌다. 그렇게 무수한 시신이 갱도 안에 쌓여갔다.

 

당시 상황은 목격자들의 증언을 통해 더 구체적으로 전해졌다. 당시 코발트광산 부근에는 일제강점기 때 사용하던 2층짜리 광산 사무실과 연병장이 있었고, 광산 사무실에는 CIC 경산 파견대가 주둔 중이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대구 방향에서 트럭들이 올라왔다. 한 대에 30~40명을 실은 트럭이, 많게는 하루에 8대 이상 왔다는 증언도 있다.

 

사람을 실은 트럭이 광산으로 올라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총성이 들렸다고 한다. 여름에 시작된 학살은 초가을까지 이어졌다. 광산 내부가 아닌 주변 계곡에도 시신이 집단으로 매장됐다는 증언이 전해지지만, 그곳엔 지금 골프장이 들어서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친구들하고 노는데 아주머니들이 나와서 애비 없는 놈하고 놀지 마라, 빨갱이 자식하고 놀지 마라하면서 데려가더라고요. () ‘니는 마 공부해봤자 취직 못 한데이. 느그 아버지가 빨갱이가 돼갖고그런 소리 참 많이 들었습니더.”(코발트광산 사건 유족 인터뷰, 프레시안 지금도 물속 어둠에 잠겨 있는 영령들강변구 작가, 2022. 4. 30)

 

시간이 흘렀다. 코발트광산은 거대한 빨갱이 무덤으로 남았다. 빨갱이라 거기서 죽었는지, 거기서 죽었기 때문에 빨갱이라 하는 건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죽음을 알고도 말하지 못하는 세월이 길었다. 죽은 자의 주검들은 광산에 묻혔고, 산 자의 원한은 가슴에 쌓였다.

 

2001년 수평굴 문을 열자 쏟아져 나온 유해 수평굴 입구는 두꺼운 콘크리트로 막혔다. 그 벽을 터트리고 진실의 문을 연 것이 2001. 무려 51년이 지난 뒤였다. 유족과 시민들의 힘으로 다시 수평굴 문을 열었다. 긴 세월 침묵 속에 잠들어 있던 진실을 마주할 시간. 굴속에서 유해들이 말 그대로 쏟아져나왔다.

 

2001년과 2005년에는 민간 주도로, 2007, 2008, 2009년에는 국가 조사기구인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가 유해발굴 조사를 벌였다. 진실화해위원회가 3년간 발굴한 유해만 약 370. ‘박봉우도장도 그때 다시 세상의 빛을 봤다.

 

도장만 발굴된 것이 아니었다. 많은 수의 허리띠도 발굴됐다. 죄수복에는 허리띠를 찰 수 없었을 테니, 아마도 허리띠의 주인공은 재소자가 아닌 일반 시민이었을 거다. 고급 가죽 허리띠도 발견된 것으로 미뤄, 높은 계층의 사람들도 학살을 피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단추도 많이 발견됐다. 그중에는 와이셔츠, 특히 여성용 블라우스에 다는 단추도 있었다. 양복을 입은 시민들, 남성만이 아니라 여성도 이곳으로 끌려와 희생됐다는 증거다.

 

광산에서 무수히 발견된 매듭진 삐삐선(군용전화선)은 아마도 희생자들의 손목을 묶는 데 쓰였을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탄피가 누가 이들에게 총을 쐈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유해발굴은) 그동안 공식적 기억에서 제외되었던 비공식적 담론을 활성화시켜 사회적 기억을 회복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 이러한 사회적 기억 회복역할은 결과적으로 죽은 자억압된 기억에 대한 기념과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한 영혼을 정상적 궤도로 돌려놓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게 한다.”(진실화해위원회 <유해매장 추정지 실태조사 및 유해발굴 중장기 로드맵 수립 조사용역 최종보고서>, 2022. 7. 19, 19~20)

 

지난 3, 14년 만에 유해발굴 조사 재개 지난 323일 경산 코발트광산에서는 14년 만에 유해발굴 조사가 재개됐다. 과거 유해발굴 작업을 하면서 굴속에서 퍼낸 흙을 3000여개 포대에 담아뒀다. 그 안에 뒤섞여 있는 유해들을 골라내는 작업. 불과 일주일 만에 약 430점의 사람 뼈가 발견됐다고 한다.

 

짧은 시간에 사람 뼈 수백 점이 포댓자루에서 쏟아졌다. 알고는 있었지만 눈앞에 우리 부모님들 뼈가 펼쳐지니 눈물이 난다. () 그렇지만 이제라도 빛을 봐 다행이다.”(나정태 코발트광산유족회 회장 인터뷰, 평화뉴스 민간인 학살 경산 코발트광산, 유해 430여점 발견신원미상, 수습 6개월 더”’, 김명화 기자, 2023. 3. 31)

 

2007년 경산 코발트광산에서 발굴된 도장 하나에서 시작된 박봉우 찾기’. 조사관들이 백방으로 그 이름의 흔적을 쫓았지만, 그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끝내 만나지 못했다.

 

흙무더기 속에 뒤엉켜 있다가 이제야 세상의 빛을 보는 저 뼛조각들 역시 원래는 모두 누군가의 이름으로 불리던 것들이다. 3500개의 이름이 사라지고, 73년의 세월이 흘렀다. 흙무더기 속에서 뼛조각을 꺼내듯, 원한 속에서 그들의 이름을 꺼내 불러줘야 한다.

최규화 전 진실화해위원회 언론홍보팀 주무관 2023.05.08ㅣ주간경향

 

 

또렷한 은반지와 서산 부역혐의자 학살

충남 서산시 봉화산 교통호 서산 부역혐의 희생사건유해발굴 현장에서 은반지가 발견됐다. / 진실화해위원회 제공

 

세월이 흘렀지만, 그 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73년 만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비록 그 옛날의 반짝임은 사라졌지만, 흙도 아니고 도 아닌 빛깔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은반지. 어느 집 여인이었을까. 상류층 집안 아니었을까. 어쩌다 이곳까지 와서 땅속에 묻혔을까. 은반지가 끼워져 있던 손가락은 이미 뼈까지 썩어 사라졌다. 남아 있는 은반지의 주인은, 사라진 손가락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대답할 리 없는 질문을 마음으로 던져본다.

 

충남 서산시 갈산동 176-4번지, 봉화산 교통호 현장.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는 지난 510일부터 약 20일간 이곳에서 유해발굴 조사를 진행했다.

 

1950년 한국전쟁 중 인민군 점령기에 인민군이 전투를 대비해 파놓은 교통호. 하지만 군·경이 서산 지역을 수복한 뒤, ‘부역혐의자로 지목된 민간인들이 이곳에서 학살됐다.

 

모퉁이에 호(교통호)를 파논 데가 있어요. 신작로서 끌고 올라가 하나 갖다 놓고 하고 총 쏘고 또 하나 놓고 하고 총 쏘고 몇 번을 그랬어요. 경찰들이 쐈지요. (중략) 처음에 뜨르르르갈기고, 도망간 사람이 있으니께 나중에 하나씩 세밀하게 죽이더구만요.”(참고인 이○○ 진실화해위원회 진술, 이하 <서산 8228; 태안 부역혐의 희생 사건 조사보고서> 2008. 인용)

 

현장에서 발굴된 유해의 모습은 당시의 생지옥을 떠올리게 했다. 폭과 깊이가 1도 안 되는 좁은 교통호를 따라 유해가 빽빽하게 발견됐다. 오랜 시간이 흘러 작은 뼈들은 썩어 없어졌지만, 굵은 다리뼈뿐만 아니라 척추뼈와 갈비뼈까지 남아 있는 상태였다.

 

희생자들은 주로 옆으로 눕거나 고꾸라져 있었다. 학살 당시 희생자들을 고개 숙이게 한 뒤, 총으로 머리 뒤를 쐈으리라 추정된다. 일부 구역에서는 유해 다리 사이에 다른 유해가 또 발견돼 과거 시신이 위아래로 겹겹이 쌓여 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이번에 발굴된 유해는 약 60. 유해뿐만 아니라 총살의 흔적인 탄피와 단추, 고무줄 그리고 은반지도 발견됐다. 이것들은 죽은 자와 죽인 자를 밝히는 중요한 증거다.

 

“(경찰이) ‘고개 다 땅에 대라고 하더만. (중략) 요기다가(손가락으로 뒤통수를 가리키며) 그러니까 짹소리 못하지. ‘하면 그만이여. 한 명씩, 한 명씩 해야지. M1. 아이! (머리가) 없어요. 그 양반 나중에 시체 찾아가라고 해서 도장집 보고 찾았어. (머리가) 아주 쫙 뻐그러졌어. 아주 윷가락처럼. 피 한 모금도 없어.”(당시 면 치안대원 최○○ 진실화해위원회 진술)

 

이들을 끔찍한 죽음으로 몰고 간 부역혐의란 대체 뭐였을까. 말 그대로 하면 인민군이 지역을 점령했을 때 인민군과 내통해 도운 혐의라는 뜻. 그런데 그 실체가 참 허망했다.

 

인민군에게 밥 한번 해줬다고, 사랑방 한번 내줬다고 부역혐의자가 되기도 했다. 이웃사람 부탁으로 뭔지 모를 서류에 도장 한번 찍어줬다가 좌익 명단에 이름이 오르기도 하고, 그냥 어느 집안과 사이가 나빠서 일가가 모두 빨갱이로 몰리기도 했다.

 

흑백을 분류하려니까(실제 부역행위자와 아닌 자를 구분한다는 뜻-필자 주) 함장이 오더니 지금 무엇을 하는 거지?’ 내가 흑백을 대별하려고 합니다하니까. ‘흑백? 흑백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전부 일어서하면서 다 끌고 나가는 겨. () 조금 지나니까 탕탕소리가 나더라고.”(당시 면 치안대장 최○○ 진실화해위원회 진술)

 

부역혐의자에 대한 학살은 어느 날 갑자기 터져나온 사건이 아니었다. 하나의 죽음이 또 하나의 죽음을 낳고, 그 죽음이 결국 참혹한 학살로 이어지는 증오의 고리가 존재했다.

 

전쟁 초기인 1950712, 서산 지역 경찰들은 인민군에 밀려 후퇴하면서 보도연맹원들을 집단 살해했다. 그들이 향후 인민군에 협조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 것이다. 718일 인민군이 서산을 점령하자, 이번에는 좌익세력에 의한 학살이 일어났다. 하지만 전세가 또 뒤집어져 108일 군·경이 서산을 수복하자, 부역혐의자에 대한 학살이 일어난 것이다.

 

전쟁 발발 직후의 보도연맹 학살과 인민군 점령기 좌익세력에 의한 학살을 거치면서 주민들 사이에 갈등과 반목은 크게 쌓여갔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다시 저쪽에서 이쪽으로 학살이 반복되면서 보복성이 더 강해졌다. 이런 성격은 수복 이후 경찰의 부역자 처리 과정에 그대로 반영됐고, 부역과 관계없는 불특정 다수의 민간인이 희생되는 원인이 됐다.

 

좌익들 잡아다가 면사무소 창고에 가득가득 잡아다 놓았지. (중략) (경찰) 지서 직원이나 근흥면 유지들을 앞에 놓고서 내가 이 사람은 어떻게 할 거냐? 이렇게(손가락으로 총을 쏘는 모양을 하면서) 할 것이냐, 아니면 석방을 할 것이냐?’라고 하면 (지서 경찰과 유지들이) ‘이렇게 하자라고 (후략).”(참고인 최○○ 진실화해위원회 진술)

 

빨갱이라 믿으면 빨갱이가 됐다. ‘손가락총한 번으로 살고 죽는 것이 갈라졌다.

 

학살 현장은 이번에 유해발굴이 이뤄진 봉화산 교통호 등 최소 30여 곳. 2008년 진실화해위원회는 희생자 977명과 희생추정자를 포함한 1865명의 신원을 확인했다. 기록에 누락된 다수 희생자가 있기 때문에 실제 희생자는 2000명을 웃돌 것으로 진실화해위원회는 추정했다.

 

73년 만에 지상으로 나온 은반지의 주인 역시 그중 하나일 것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질문할지도 모르겠다. 주인이 누군지도 모르는 그깟 반지 하나 꺼낸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왜 거기에 아까운 국민의 세금을 써야 하냐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대신해준 이가 있다.

 

발밑에 그분들(희생자들)을 두고,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됐다고 자랑하고 있잖아요. 그분들을 밟고 선 대한민국이 과연 자랑스럽나요? 저는 별로 자랑스럽지 않아요. 그런 비극들을 억지로 지워버리고 없는 척했기 때문에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소위 빨갱이담론이 망령처럼 우리를 괴롭히고 있잖아요.”(진실화해위원회 소식지 진실화해’ 4, 2021. 12)

 

다큐멘터리 영화 <206: 사라지지 않는>(2023. 6. 21 개봉)을 만든 허철녕 감독의 말이다. 시민들의 힘으로 이끌어온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의 발걸음을 기록한 영화다.

 

세월이 흘렀지만, 반지의 은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땅속에 잠들어 있던 진실 역시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그들을 지워버리고 없는 척하고 싶었던 부끄러운 우리가 있을 뿐.

최규화 전 진실화해위원회 언론홍보팀 주무관 2023.07.17ㅣ주간경향

 

 

 

비석 파편이 품은 그해 여름

5·16 군사정권이 파괴한 백조일손지지위령비 조각을 담아놓은 보관함 / 전호일 제공

 

조각난 돌무더기가 들어 있는 유리함. 그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한자가 새겨진 돌덩이들도 보인다. 오른쪽에는 멀쩡한 모습의 위령비가 서 있고, 유리함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5·16군사정권에 의해 파괴된 百祖一孫之地(백조일손지지)’ 묘비의 파편.”

 

1950625일 한국전쟁 발발 직후부터 예비검속(혐의자를 미리 잡아 놓는 일)과 민간인 학살이 자행됐다. 적에게 부역할 잠재적 가능성이 있는 자들을 미리 정리한다는 명분.

 

하지만 좌익 활동과 아무 관련도 없는 사람들도 의심만으로, 때로는 사적인 원한이나 복수심만으로 희생됐다. 구금에서 처형까지 이어지는 과정 역시 적법절차를 무시한 채 진행됐다. 조직적이고 전국적인 전쟁범죄로 희생된 민간인의 수는 100만 명까지 추산된다.

 

제주도 역시 피바람을 피하지 못했다. 예비검속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한 제주 섯알오름’(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학살은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1차 총살은 1950716~20일경. 2차 총살은 그로부터 약 한 달이 더 지난 1950820일 집행됐다. 2007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가 신원을 확인한 희생자만 218명에 이른다.

 

빨갱이로 몰려 목숨을 잃은 사람들. 유족들은 그 시신도 제때 수습하지 못했다. 학살이 일어난 지 6년 만인 19565월에야 132기의 유골을 수습해 분묘를 세웠다. ‘조상이 다른 100여명의 뼈가 서로 엉켜서 하나가 됐다는 의미로 백조일손지지라는 이름이 붙었다.

 

2년밖에 서 있지 못한 위령비

3년이 더 지난 1959년에는 희생자들의 이름과 처형 경위를 새겨넣은 위령비를 세웠다. 그것이 바로 지금 유리함 안에 들어 있는 돌무더기의 정체. 위령비가 위령비로 서 있었던 시간은 고작 2년밖에 되지 못했다. 1961516쿠데타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517용공분자 색출을 지시했다. 이철희 육군방첩부대장은 다음 날인 518일부터 전국 경찰과 군(헌병)의 협조를 통해 18개 정당 및 사회단체 등 당시 혁신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예비검속을 단행했다. 그 타깃 중 하나가 바로 피학살자유족회였다.

 

한국전쟁 당시 예비검속으로 끌려간 뒤 학살당한 가족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 전국에서 모인 유족들. 그들 역시 5·16 쿠데타 이후 용공세력으로 몰려 예비검속을 당했다. 억울함을 풀어달라던 그들의 활동은 어느새 반국가행위가 돼 있었다.

 

억울한 유족들 용공세력 내몰아

“‘젊은이는 무슨 죄를 지었노?’ 묻길래 죄지은 거 없습니다그랬습니다. 푯말에 보니, 반공법도 집시법도 아니고 반국가행위라고 써놨어요. 반국가행위라니! 조선시대 같으면 역적이나 받을 죄명 아닙니까?”(진실화해위원회 소식지 진실화해’ 32021. 10.)

 

김하종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경주유족회 회장의 회고다. 19618월 당시 28세의 나이로 구속된 김하종은 경찰서 지하에 40일 동안 구금된 뒤, 서울형무소 즉 서대문형무소로 옮겨졌다. 그는 법정에서 김하종의 죄는 극형에 처할 것이로되 청춘이 아까워서 무기징역을 구형한다라고 하던 검사의 말을, 구순의 노인이 된 지금까지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김하종은 옥중에서 혈서까지 쓰면서 줄곧 무죄를 주장했다. 혁명재판소는 재판에 넘겨진 피학살자유족회 주요 인사들에게 북한을 이롭게 하려는 목적이 있다며 사형과 징역 15년 등 중형까지 선고했다. 김하종도 19621혁명재판소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예비검속과 처벌의 정당성은 쿠데타 세력이 세운 혁명재판소에서조차 논쟁거리가 됐다. 당시 주임검찰관이었던 이○○은 훗날 이렇게 진술했다.

 

“‘전쟁 중에 억울하게 가족을 잃고 신원(伸寃)을 요구한 것인데 또 그 가족들마저 잡아들여 구속하고 반국가행위자로 만들면 그 자손이 그 일을 되풀이할 것 아닌가라고 말한 이□□ 심판관이 속한 심판부 제5부는 일부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했고, () 무죄가 선고되자 박창암 혁명검찰부부장과 심판부 제5부 재판장이 혁명재판소 건물 복도에서 치고받으며 싸웠습니다.”(2009년 진실화해위원회 ‘5·16 쿠데타 직후 인권침해 사건 조사보고서’)

 

쿠데타 세력은 사람부터 먼저 잡아들여 놓고, 이들을 처벌할 법을 만들었다. 쿠데타 세력은 불법기관인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설치하고, 스스로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을 제정했다. 그 법에 따라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면서 36개월 전의 일까지 소급해 처벌하도록 정했다. 이는 헌법상 소급효금지의 원칙에 정면으로 위반되는 것이었다.

 

먼저 잡아들이고, 후에 법 만들고

반대세력에 대한 예비검속은 5·16 쿠데타 직후인 518일부터 진행됐지만,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이 공포된 것은 그로부터 한 달 이상이 지난 622일이었다. 그 기간 동안 예비검속된 사람들은 아무런 근거 법률이 없는 상태로 불법구금돼 있었던 셈이다.

 

탄압은 주요 인사들에 대한 처벌로만 끝나지 않았다. 유족회가 세운 합동묘와 위령비까지 훼손했다. 거창양민학살사건 유족회는 희생자들의 유골을 남자, 여자, 어린이로 나눠 3기의 합동묘를 만들었다. 그러나 5·16 쿠데타 직후 경남도지사가 개장 명령을 하달해 경찰이 합동묘를 훼손했다. 위령비 역시 정으로 쪼아 글자를 지운 뒤, 비석 허리를 끊어 땅에 묻어버렸다.

 

한국전쟁 중 국군이 양민을 살해한 잘못을 은폐하려고 억지를 부린 것이며 예부터 묘는 함부로 손대지 않는데 국가기관이 강제로 억울한 희생자들의 무덤을 파헤친 것이며 이는 부관참시에 해당하는 야만행위입니다.”(거창양민학살사건 유족 문병현 진술, 위 보고서)

 

경남 김해시 진영읍 설창리(금창피학살자장의위원회)에서도, 부산 연제구 거제동 화지산(동래피학살자유족회)에서도 같은 일이 자행됐다. 제주 서귀포 백조일손지지의 위령비가 산산이 조각난 것도 이때였다. 이후 유족들은 묘역 근처에 버려진 위령비 조각들을 찾아 다시 한곳에 모아뒀다. 지금은 새로 건립된 위령비 옆에, 유리함에 담긴 모습으로 보존되고 있다.

 

빨갱이로 몰려 죽은 가족들의 한을 풀어달라 외치던 사람들마저 빨갱이로 몰렸다. 전국 곳곳에서 유족회 인사들이 잡혀 들어갔다. 거창에서, 김해에서, 부산에서, 서귀포에서 묘가 파헤쳐지고 묘비가 깨어졌다. 겁에 질린 유족들은 뿔뿔이 흩어져 평생 입을 열지 못하고 원한 속에 살았다. 62년 전 그해 여름, 학살의 진실은 또 한 번 살해당했다.

 

1961년 당시 혁명재판소 심판관이었던 이□□이 훗날 남긴 말 한마디가 마음에 남는다. 비록 수십 년 세월이 흐른 뒤에 한 증언이지만, 지금까지도 많은 것을 돌아보게 하는 말이다.

 

학살행위 그 자체가 비극인데 그것을 법대(法臺)에 올려놓고 평가한 것은 불행이며,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될 일로 국가는 유가족들의 마음을 달래줄 수 있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2009년 진실화해위원회 ‘5·16 쿠데타 직후 인권침해 사건 조사보고서’)

최규화 전 진실화해위원회 언론홍보팀 주무관 2023.08.14ㅣ주간경향 1540

 

 

식어버린 생일밥머리 센 소년들은 괭이바다가 서럽다

마산형무소터임을 알리는 안내판 / 진실화해위원회 제공

 

그때는 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땐데, 언젠가는 (아버지가) 돌아올 끼다, 생일날 되거든 밥이라도 한 그릇 떠놓고 기다려보자. 그렇게 살아 있다하는 희망만 가지고 살다가.”(경남 창녕군 보도연맹 학살사건 유족 노원렬 인터뷰, 유튜브 <다큐몹> 2023. 6. 8.)

 

정성껏 지은 생일밥 한 그릇이 다 식어가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 해, 그다음 해도 마찬가지였다. 주인 없는 생일밥을 한쪽에 챙겨두고, 가족들은 텅 빈 그리움만 수저로 떠올렸다. 세월이 약이라는 말도 소용없었다. 할아버지는 아들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이제 생일밥이 아니라 제삿밥을 올려야 하는 것 아니냐는 소리는 차마 아무도 꺼내지 못했다.

 

1950년 여름. 노원렬은 열세 살, 아버지는 서른 살이었다. 이들이 살던 곳은 경남 창녕군 고암면 우천리. 아버지가 논에서 구슬땀을 쏟고 있을 때, 아버지를 찾아온 남자들이 있었다.

 

알고 지내던 순경과 형사들이 데려간 뒤

아버지는 면사무소에서 일하다가 6·25사변 나기 전에 그만두고 농사를 지었죠. 면 직원으로 있었기 때문에 지서 순경들도 잘 알고 형사들도 친분이 있었어요. 아버지가 논에서 일하는데 형사 세 사람이 찾아와서 경찰서에 좀 갈 일이 있다했답니다. 다 아는 사람들이니까 의심도 없이 가신 거죠. 그런데 돌아오지도 못하고, 끝이라, 그게.”(앞 인터뷰)

 

아버지를 잡아간 이유는 나중에야 알았다. 국민보도연맹.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여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받아들인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국민보도연맹은 법률에 근거한 단체는 아니지만, 당시 내무부 장관이 총재를 맡는 등 정부가 주도한 관변단체였다. 가입 대상은 좌익 전향자라 했지만, 실제로는 공비들에게 밥을 해줬다고 해서, 과거 징역을 산 적이 있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 도장 한번 잘못 찍어서 가입된 사람도 많았다.

 

19506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전국에서 보도연맹원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들이 적군에 동조해 후방을 교란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 때문. ‘국민으로 받아들이겠다던 보도연맹원 명단은, 오히려 국민과 비국민을 구분하는 살생부(殺生簿)가 돼버리고 말았다.

 

가족들은 아버지가 왜 잡혀갔는지 아무 이유도 듣지 못했다. 경찰서에 있다고는 하지만 면회조차 할 수 없었다. 열흘 남짓 시간이 흐르고, 할아버지 앞으로 쪽지 하나가 왔다.

 

아버지가 쪽지를 보냈다 카는 거라. 내용이 아버지(노원렬에게는 할아버지), 돈을 좀 써서 나를 나가게 해주세요그런 연락이 왔대. 그런데 쪽지는 받았는데, 돈을 어디로 줘야 하는지 통로를 알아야 할 거 아이가? 면회도 안 시켜주는데. 그래서 또 하루하루 흘러가 버려서 돈을 못 부쳤다 이러더라꼬, 우리 할아버지가. 그게 너무 원통한 기라.”(앞 인터뷰)

 

창녕경찰서에 구금된 사람 중 일부는 창녕읍 송현동 솔터마을 뒷산으로 끌려가 총살당했다. 많은 수는 그에 앞서 군용트럭에 실려 마산형무소로 이송됐다. 이들은 마산형무소에서 괭이바다’(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 원전마을과 거제시 장목면 칠천도 사이의 바다)로 다시 한 번 옮겨졌다. 그리고 그곳에서 수장(水葬)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매년 생일밥을 떠놓고 기다렸지만, 노원렬의 아버지가 돌아오지 못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19507월부터 9월까지, 마산형무소 재소자와 인근 지역에서 잡혀온 보도연맹원들이 마산지구CIC(첩보부대), 마산지구헌병대, 마산경찰서 경찰들에 의해 괭이바다에서 희생됐다. 2009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는 최소 717명의 희생자를 확인했다.

 

학살에는 LST, ‘전차양륙함까지 동원됐다. 당시 목격자의 진술이 책 <토호세력의 뿌리-마산현대사를 통해 본 지역사회의 지배구조>(김주완, 불휘, 2006)에 실려 있다.

 

“GMC 트럭이 줄줄이 해안가로 들어왔다. 평소처럼 동양주류 건물 벽에 피란민들이 죽 기댄 채 누워 있었는데 헌병들이 이들을 일으켜 쫓아버렸다. 트럭이 열몇 대는 족히 돼 보였다. () 상륙함(LST) 두 척이 왔다. 1개 연대병력이 탈 정도로 큰 배였다. 트럭에서 내린 사람들은 곧장 LST에 옮겨 탔다. 나중에 들으니 괭이바다에서 총살 수장했다고 했다.”(2009년 진실화해위원회 <부산·경남지역 형무소 재소자 희생사건 조사보고서> 재인용)

 

괭이바다 아래 그대로 잠든 사람들

일부 시신들은 파도를 타고 바닷가로 떠밀려왔다. 마을 사람들은 이름도 고향도 알 수 없는 그들을 수습해 바다 가까운 땅에 묻어줬다. 시신들이 멀리 쓰시마섬(대마도)까지 떠내려갔다는 증언도 있었다. 대부분은 괭이바다 아래에 그대로 가라앉아 잠들었다.

 

717명이라는 희생자 수는 19601023일 마산매일신문에 실린 피학살자 282명의 명단과 마산형무소 관련 자료를 종합한 것. 하지만 1960년 피학살자 명단은 불과 일주일간 유족들의 신고를 받아 만든 것임을 생각하면, 실제 희생 규모는 그보다 훨씬 클 것이다.

 

산 사람을 갖다가 바로 물에 집어넣는 이것은 짐승들이 하는 짓입니다, 짐승들이. 인간으로서 왜 사람을 물에 잡아넣습니까?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을 갖다가 보도연맹 가입시키고 수장시키는 그것은 야만인입니다, 야만인. 정부가 절대적으로 책임져야 합니다.”(거제시민간인학살유족회 서철암 인터뷰, 영화 <레드툼>, 구자환 감독, 2013)

 

진실화해위원회는 괭이바다학살을 비롯한 부산·경남지역 형무소 재소자 희생사건을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하는 국가가 형무소에 수감된 재소자와 보도연맹원들을 집단살해하고 () 적법절차를 거치지 않은 군법회의를 통해 사형시킨 범죄행위로 봤다.

 

그리고 비록 전시였다고는 하나, 국가가 좌익사범이라는 이유로 수감된 재소자들을 적법한 절차 없이 집단처형한 행위는 정치적 살해라고 그 불법성을 분명히 밝혔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우리 아버지 이름을 부르면서 와 이리 안 돌아오노자식을 못 보고 내가 죽는갑다하셨던 말씀이 가슴에 남고. (아버지가 잡혀가신 뒤에) 어머니가 한평생 홀로 지내면서 고생하신 게, 그런 게 가슴에 남아가지고.”(노원렬, 앞 인터뷰)

 

이제야 생일밥 대신 제삿밥을 올립니다

이제야 아들은 아버지의 생일밥 대신 제삿밥을 지어 올린다. 돌아가신 날짜도 정확히 알 수 없으니 음력 99, 무주고혼이나 객사혼령을 모신다는 구구절에 제사를 모신다.

 

지난 610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창원위령탑’(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가포동 산73번지) 앞에서 합동추모제가 열렸다. 소년들의 몸은 73년 세월만큼 늙어버렸지만, 마음속 그리움은 그대로였다. 추모제에 모인 머리 하얀 소년들이 아버지를 목 놓아 부르며 운다. 울음을 삼킨 바다는 73년 전 그때처럼 말없이 일렁일 뿐이다.

최규화 전 진실화해위원회 언론홍보팀 주무관 2023.09.18ㅣ주간경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