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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근 .현대사 이야기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기-역사를 망각하면 역사의 보복을 당한다

by 이성근 2023. 9. 1.

 

역사를 망각하면 역사의 보복을 당한다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기 특집 ① 개괄-잊혀진 통한의 100년

 

누군가 의도를 갖고 감추려는 100년 전 역사의 진실을 파헤치는 건 어렵고도 힘든 일이다.

더군다나 국가권력이 자신들이 저지른 참혹한 죄상을 덮기 위해 오랜 세월에 걸쳐 조직적으로 은폐해온 사건이라면 더욱 그렇다.

 

100년전 일본 도쿄도와 6개현, 즉 간토지역에 닥친 대지진과 그 와중에 벌어진 전대미문의 조선인 대학살은 그 엄중한 실례이다. 메이지유신의 후예들인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일찌기 겪어보지 못한 자연재해에 직면해 심각한 정치 사회적 위기에 봉착하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열흘 남짓한 기간에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잔혹한 방법으로 식민지 조선에서 건너 온 '노동자'들을 무참하게 학살했다.

 

대지진과 도시 전체를 삼킨 화재속에 관헌의 사주를 받은 자경단은 흡사 피에 굶주린 악귀들인 것 처럼 '조선인 사냥'에 광분했다. 지금까지 널리 알려진 조선인 6천여명 희생설은 그 지옥같은 상황에서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사체를 헤집고 다니며 조사한 최소한의 파악일 뿐이다.

 

그것은 명백히 일본 정부와 군대, 경찰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인 국가 개입에 의한 대학살이었다.

192391일 오전 1158. 리히터 규모 7.9의 강진이 발생하면서 수십만채의 가옥이 순식간에 무너지고 강풍을 타고 무서운 기세로 불길이 번져갔다. 숱한 사람이 깔려 죽고 불타죽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지진 발생 당일 도쿄 궁성앞 광장에 30만 여명의 피난민이 모여드는 등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1차 세계대전 종전 후 경제공황의 와중에 1918년 전역을 뒤흔든 쌀폭동으로 흉흉한 민심을 겪은 바 있는 일본 정부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19193.1운동을 계기로 조선은 물론 재일 조선인 사회에서도 사회주의 노선에 입각한 혁명운동이 고양되고 있었고 무력투쟁으로 전환한 세력과 격돌을 경험한 일본 군부는 깊은 좌절감과 함께 '적화 조선인'에 대한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

 

지진발생 당일 오후 임시각의를 열어 나온 긴급 대책은 뜻밖에도 '재일 조선인을 적으로 규정'하고 '학살을 법제화'한 계엄령이었다.당시 일본 법률에 따르면 계엄령은 전시 또는 그에 준하는 사변이 발생한 경우, 그것도 반드시 내란 또는 폭동이 발생할 때만 공포할 수 있었다.

 

계엄령 공포 요건을 갖추기 위해 '조선인 폭동설'이 고안됐다. 그것은 민족배타주의를 부추기는 또 다른 범죄행위였다.

92일 천황 칙령 401호로 계엄령을 공포하고 3일 내각비상회의에서 계엄사령부를 설치해 4만명에 달하는 군대와 경찰을 간토 일대에 집결시켰다.

 

경찰서와 파출소 게시판에 '조선인이 봉기했다', '반항하면 죽여도 좋다'는 게시물이 붙었다. 일본 당국이 직접 계획하고 집행한 일이다.

 

계엄사령부에는 내무대신 미즈노 렌타로(3.1운동 당시 정무총감, 최고지휘관), 도쿄 경시총감 아카이케 아쓰시(3.1운동 당시 경무총감, 경찰책임자), 도쿄부지사 우사미 가쓰오(조선총독부 내무장관), 군사 참의관 오바 지로(간도 작전 당시 조선주둔군 사령관), 1사단 사단장 이시미쓰 미오미(3.1운동 당시 헌병사령관), 계엄사령부 참모장 아베 노부유키(시베리아 출병군 참모장) 등이 자리를 틀고 앉아 조선인 학살을 위한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동원돼 동학농민군, 독립의병과 전투를 벌이고 3.1운동을 진압하다 귀환한 재향군인들이 이에 적극 호응했다. 억압된 전쟁체험으로 트라우마를 겪고 있으나 불안정한 사회에 던져진 이들은 3,000여개에 달하는 자경단의 주축이 되어 망설임없이 무기를 들고 '불령선인'들을 살해하기 시작했다.

 

"참살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어린 아이들을 줄 세워놓고는 부모들이 보는 앞에서 목을 자르고 그 다음 그 부모들도 찔러 죽였다. 살아남은 조선인들의 팔을 톱으로 켜는 자도 있었다. 그것도 도중에 팽개치고 또 다른 사람을 톱질하는 광경은 보기에도 끔찍했다. 죽은 사람들의 눈을 식칼로 도려내는 것도 보였다...경찰서 구내는 피바다를 이루어 장화를 신지 않으면 걸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조선 사람들의 비통한 울부짖음은 그후 오래동안 나의 귀전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전 혼죠 경찰서 아라이 순사의 증언,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

 

"자경단원들은 조선사람을 붙잡아 몸을 전주대에 묶어 놓고 눈알을 도려내고 코를 벤 다음 배를 찔러서 죽였으며 기차칸에서 여러명의 조선사람을 순식간에 창문밖으로 내던졌다."(현대사자료6)

 

'납작한 뒤통수''넓적한 얼굴', '작은 발'을 비롯한 외형상의 특징과 일본인이 아니면 정확히 내기 어려운 '1555(고엔 고쥬고센)' 발음 등. 조선인을 식별하기 위해 자경단이 사용한 방법은 1913년 내무성 비밀자료 제1542호에 바탕을 둔 것으로, 관헌의 전수없이는 활용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타민족을 적대시한 야만적 '민족배타주의'의 발로이고, 이를 국가가 나서 부추긴 인류사에 기록될 범죄행위이다.

 

간토대지진 발생 40주년인 지난 1963현대사자료6-관동대지진과 조선인이라는 기념비적 사료를 발표한 재일사학자 강덕상은 '간토대지진 당시의 학살은 우연히 일어난 조선민족의 비극이 아니라 조선을 지배하기 위해 벌인 일본의 선전포고없는 전쟁이었으며, 계엄령은 조선인에 대한 몰살선언과도 같다'고 말했다.

 

점차 지진이 수습되면서 잔혹한 대규모 학살에 대한 책임 문제가 대두되자 일본 정부는 자경단이 지진 발생 후에 돌연 만들어진 것으로 조작해 책임을 전가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공공연하게 자행된 대규모 학살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할 수는 없었다. 또 책임을 뒤집어 쓰게 된 민간 자경단의 반발도 심했다.

 

책임을 회피하면서 골치아픈 사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고안된 것이 사실을 모호하게 만드는 '가짜뉴스'였다. 당시 일본 신문을 보아서는 사건의 진상이 무엇인지, 왜 그런 사태가 벌어졌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 관련 연구자들의 일치된 의견이다.

 

'조선인이 방화를 한다거나 샘물에 독을 탄다'는 등의 보도는 뒷날 실체없는 유언비어였다는 것이 확인되지만, 조선인 관련 기사를 일절 게재하지 못하게 한 정부의 통제에 따라 시정 보도는 나오지 않았다. 이미 확산된 거짓소문을 그대로 보존하도록 하려는 일본 정부의 의도는 그렇게 관철됐다.

 

언론은 정부의 요구대로 통제에 순응했고, 일본 정부는 책임모면을 위해 70%에 가까운 보유자료를 파기하고 철저히 사실을 감춰왔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당시 학살당한 조선인이 몇명이나 되는지 정확히 확인되지 않는 것이다.

그나마 유일한 사료로 평가되는 것이 1963년 미국이 압수한 자료를 일본 정부에 넘길 당시 히토츠바시(一橋)대학교 강덕상 교수가 관동계엄령 사령부의 수집정보철인 '계엄사령부 정보'에 접근해 이를 토대로 남긴 현대사자료6-관동대지진과 조선인정도이다.

 

현재 통용되는 6천여명 희생설은 간토 대학살 당시 중국 상하이에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 사장 김승학이 나고야에 있던 한세복을 도쿄로 파견하여 조선인 학살 진상을 보고하도록 한 뒤 1923125일자에 6,661명이라는 숫자를 발표한 것이 중요한 근거이다.

 

국내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그렇게 적혀있고 일본 도쿄시 요코아미초 공원내 '간토대진재 조선인 학살자 추도비'에도 6천여명 희생설이 기록되어 있다.

 

북측은 줄곧 간토대지진 당시 23천여명의 조선인이 학살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독립신문이 그해 1226일자 기사에서 참살당한 전체 조선인이 2만여명에 달한다는 당시 현지 체류 독일인 브르크하르트 박사(Dr. Otto Bruchhardt)의 외지 기고문 전언 기사를 참고한 것으로 추정하지만 분명치는 않다.

 

당시 간토지방에 살던 조선인이 14,100명이라는 인구통계를 바탕으로, 이중 1천명의 학생은 여름방학이었으므로 고향에 있었고 불에 타 사망한 800여명의 조선인을 제외한 나머지 12,300명 중 귀국한 5,700명을 빼면 모두 살해되었다고 해도 6,600명이 된다는 계산을 근거로 하여 조선인학살 피해자는 '0'에서 최대 6,600명이라는 의견도 제시된다. '위안부는 매춘부'라는 발언으로 물의를 빚은 존 마크 램지어(John Mark Ramseyer) 하버드대학교 교수의 주장이다.

 

이같은 혼선은 진상규명에 소극적인 걸 넘어 적극적으로 자료를 폐기하고 은폐해 온 일본 정부의 탓이 가장 크다.

모든 걸 자신들의 의도대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무모한 자신감 때문일까. 그때도 그랬고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일본 정부는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에 대한 진상규명과 사죄, 배상 요구를 진지하게, 정면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192391일의 참상을 망각하지 않고 기억하는 일, 기억을 다짐으로 이어 가는 일.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기를 맞아 새로운 미래를 일궈나가려는 이들에게 요구되는 자세이다.

 

기록으로 본 간토대지진과 조선인학살

간토대지진 발생과 대규모 피해

간토 대지진으로 인한 지각 변동 기록. 도쿄시가 편찬한 "THE RECONSTRUCTION OF TOKYO"의 기록이다. 빨간색이 짙을수록 융기량이 크고 파란색이 짙을수록 침강량이 크다.

192391일 오전 1158, 간토(關東)지방 남부에 대지진이 발생했다.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간토대지진이다. 그 규모는 M7.9. 진원은 사가미만(相模灣) 서북부(동경139.3, 북위 35.2)로 계측되었다. 지진은 오다하라(小田原)네부카와(根府川) 방면이 가장 격렬했지만, 도쿄와 요코하마(橫浜)에서는 지진에 의한 화재가 겹쳐 최대의 피해가 발생했다.

 

도쿄는 3일 아침까지 불이 계속되었고 시타마치(下町)에서 야마노테() 일부에 걸친 전 시가지의 3분의 2가 소실되었다. 그 중에서도 혼죠(本所)의 피복 야적장은 불바다가 되어 한꺼번에 38천명이 사망했고 요코하마에서는 벽돌로 만들어진 양관(洋館, 서양식 건물)이 무너져 압사자가 속출했고 전 시가지가 거의 소실 내지는 반파되었지만 4일까지도 고립무원의 지경이었다.

간토대지진 진원지인 됴쿄 일대 [사진-이규수 제공]

지진에 의한 피해는 사망자 99,331 , 부상자 103,733 , 행방불명 43,746 , 가옥전파 128,266 , 가옥반파 126,233 , 소실가옥 447,128, 유실가옥 868 호이며 이재민은 약 340만명이다. (국사대사전(國史大辭典)3, 요시카와 홍문관(吉川弘文館), 198212)

 

도쿄의 피해는 이재민 세대수 325,139, 이재민 총수 324,254명인데, 그 내역을 보면 사망자 60,420, 부상자 31,051 , 행방불명 36,634, 기타 이재민 1,196,129명으로 총인구의 34%이다. (계엄령에 관한 연구(戒嚴令スル硏究), 19417)

 

강한 지진과 폭풍, 그로인한 화재로 69만여 세대의 주민들이 이재민으로, 사상자는 무려 166,000여 명에 달했다. (고지엔, 1991년판)

 

192391일 전후 상황

191931운동을 계기로 식민지 독립운동에서 사회주의 노선에 대한 지지가 급격히 높아졌다. 재일조선인의 운동도 예외는 아니었다. '조선노동동맹' 등이 결성돼 재일 조선인들은 동맹기를 흔들며 일본 메이데이 행진에 선두에 나설 정도였다. 재일 조선인이 사회주의운동, 노동운동의 중심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일본 정부, 특히 군부는 이미 1894년 동학농민혁명과 1918년 시베리아 출병 과정에서 조선의 동학농민군과 의병을 무력으로 진압하며 조선인과 전투를 벌인 경험으로 인해 '내선일체'에 불응하는 '불령선인'에 대한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

 

192391일 간토대지진이 발생하자 즉시 전시계엄령을 공포하고 계엄사령부를 설치했다. 또 지진 피해수습을 위한 '임시진재구호사무국'을 구성하고 그안에 치안담당 총사령부인 경비부를 설치한 일본은 처음부터 조선인에 대한 학살을 계획했다.

 

계엄사령부와 경비부에는 내무대신 미즈노 렌타로(3.1운동 당시 정무총감, 최고지휘관), 도쿄 경시총감 아카이케 아쓰시(3.1운동 당시 경무총감, 경찰책임자), 도쿄부지사 우사미 가쓰오(조선총독부 내무장관), 군사 참의관 오바 지로(간도 작전 당시 조선주둔군 사령관), 1사단 사단장 이시미쓰 미오미(3.1운동 당시 헌병사령관), 계엄사령부 참모장 아베 노부유키(시베리아 출병군 참모장) 등이 자리를 틀고 앉아 조선인 학살을 위한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했다. (시무의 역사학자 강덕상, 강덕상기록간행위원회, 어문학사, 2021.10)

 

당시 경찰은 '요시찰 조선인 편입부'(要視察朝鮮人編入簿)를 만들어 등급에 따라 5~3명의 미행을 붙이고는 이들 '불령명부'를 경비부에 제출하는 등 '불령선인' 일소가 매일의 업무일 정도였다.

 

일각에서 그 시기 사회주의 활동을 한 일본인과 중국인, 오키나와인들의 참변을 조선인학살과 함께 다루려는 흐름이 있으나, 이같은 맥락에서 볼 때 "조선인 학살은 일본 관민 일체의 범죄이고, 민중이 동원되어 직접 학살에 가담한 민족적 범죄이자 국제문제"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재일 사학자 고 강덕상의 일관된 입장이다.

 

또 간토대지진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일본에서는 1990년대 이후 발호한 역사수정주의와 넷우익의 대두에 기대어 학살부정론이 세력을 키우고 있지만 당시 조선인 학살이 계엄령 아래 자행되었다는 구체적인 실상은 계속 밝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같은 '학살부정론'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짓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인 범죄는 없었고, 조선인 학살은 있었다

간토대지진 당시 화재를 피해 우에노역 앞으로 몰려드는 피난민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먼저, 지진 발생 당시 조선인 폭동과 독 살포, 방화 등 유언비어의 실체와 학살의 상관관계부터 살펴보자.

와타나베 노부유키 전 아사히신문 기자는 관동대지진, 학살부정의 진상(도출판 삼인, 2023.8)에서 간토대지진과 조선인학살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과 관련해 2008년 내각부 중앙방재회의가 구성한 '재해 교훈 계승회 관한 전문조사회'에서 정리한 보고서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보고서는 19231115일 조사 결과를 중심으로 작성되었으며, 12월 제국 의회 개회에 대비해 의회에서 문제삼을 만한 내용에 대한 사법성의 견해를 미리 정리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평가했다.

 

일본 정부가 '방재에 관한 교훈'을 계승하겠다는 취지로 발행한 것으로서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평가를 다룬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당시 상황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객관적 자료로 평가했다. 이 보고서의 결론은 '유언비어의 내용처럼 조선인의 조직적인 범행으로 특정할 수있는 것은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조선인이 저지른 살상사건은 살인 2, 상해 3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모두 피의자 미상이고, 살해당한 피해자도 미상이라고 밝히고 있다. 조선인이 범인이라고 하지만 그가 누구인지 불분명하고 살해당한 사람이 누구인지도 알 수 없다. 즉 형사사건에서 조선인의 범행으로 사실관계를 규명할 수 있는 것은 단 한건도 없었다. 또한 소문으로 떠돌던 무장봉기, 방화, 독 살포 등에 대해서는 '일정한 계획아래 맥락있는 비행을 저지른 흔적을 확인하기 어렵다"고 결론내렸다. 4장 제2절에는 '학살이라는 표현이 타당한 사례가 많았다'는 표현이 나온다. ( 내각부 중앙방재회의 '재해교휸의 계승에 관한 전문조사회 보고서', 관동대지진, 학살부정의 진상에서 재인용)

 

학살의 규모와 당시 보도

조선인 학살의 규모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정리되지 않은 채 혼재돼 있다.

 

통용되는 6천여명 희생설은 간토 대학살 당시 중국 상하이에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 사장 김승학이 나고야에 있던 한세복을 도쿄로 파견하여 조선인 학살 진상을 보고하도록 한 뒤 1923125일자에 6,661명이라는 숫자를 발표한 것을 근거로 삼는다.

 

북은 200891일자 [노동신문]에 발표한 역사학학회 비망록에서 조선총독부의 자료에 의해 밝혀진 것이라고 하면서 23,000여명 학살설을 주장하고 있다. 출처는 일본 도서 조선총독부 진재관계문서, '현대사자료 6345페이지를 들고 있다.

 

와타나베 기자는 일본 정부가 추정하는 400명보다는 많고 5,100명보다는 적을 것이라고 희생자 규모의 범위를 정리했다.

 

당시 수도권(간토지역)의 조선인 수는 14,100(야마다 쇼지), 피난민의 수는 7,200(1924년 포함한 조선총독부 집계), 보호 구속되어 있던 조선인 수는 7,200(기록물의 중간값)으로 기준을 정한 후 여름방학중인 학생 1,000명과 화재로 사망한 800명을 빼면 살해 가능성이 있는 조선인은 최대 5,100이라고 가정한데 기초한 결론이다. 일본 정부가 당시의 혼란 상황에서 희생자를 모두 파악하기도 어려웠을 것이고 자경단이 남아있던 조선인을 모두 특정해 살해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당시 조선인 희생에 대해서는 지역별로 산발적인 언론 보도가 여러 건 남아 있다. 일부 기사의 제목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호송중인 선인을 빼앗아 학살/ 지바현 히가시가쓰시카군의 자경단 청년단(가호쿠신문 1923. 10.22) 구마가야 혼정에서는 58명 참살(도쿄 아사히신문 1923.10.17) 200명의 자경단원이/ 경찰서에 난입 16명 참살/ 군마현 후지오카정 폭행사건(호치신문 1923.10.16) 미국 기선위에서/ 선인 6명을 죽이다(도쿄 아사히신문 1923.10.21)

 

계엄령 공포와 간토계엄사령부 설치

일본 정부는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키려 한다는 유언비어를 대대적으로 유포하는 한편 이를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전시계엄령'을 공포했다. 주인공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지내면서 3.1운동 참가자들을 학살한 내무대신 미즈노 렌타로.

 

그의 명령에 따라 내무성 경보국장과 도쿄경시청 총감 등을 통해 조선인 폭동설이 전국에 퍼지게 됐다. 이들은 후나바시 해군무전국을 이용해 조선총독부와 각 지방 행정책임자들에게 허위사실을 담은 전보를 보냈다. (관보 호외 19231216, 중의원 의사속기록 제5)

 

전시계엄령은 심의를 거쳐 관보를 통해 발포되어야 하지만 일본 정부는 조선인 폭동설을 먼저 퍼뜨리고 92일과 3일 천황의 칙령으로 도쿄부와 가나가와현까지 포험하는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간토계엄사령부를 발족시켰다.

 

계엄령은 조선인이 도쿄를 목표로 폭동과 방화, 습격 등의 방식으로 침공하고 있다며 '', '폭도'로 규정했고, 계엄사령부는 이들에 대한 전투개시를 명령했다. 계엄사령부는 고노에사단과 제1사단을 비롯해 간토지방에 있던 육해군 벙령을 도쿄와 요코하마에 집중배치했다.

 

98일 계엄지구에 집결한 군대만 35,000여명, 10일에는 52,000여명으로 늘어났다.

 

일본 정부는 자경단과 청년단을 조직하도록 하여 군대, 경찰과 협동작전을 펼칠 것을 지시했다. 도쿄에 1,595, 가나가와 현에 603, 사이다마현에 300, 지바현에 366, 이바라기현에 336, 군마현에 469, 도치기현에 19개 등 총 3,688개에 달했다. (현대사자료 6)

 

일본 정부의 범죄 실상

조선인 학살은 지진 직후 대혼란 시기에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혼란이 수습되고 사후처리가 활발해지면서 일본정부는 군대와 경찰, 자경단이 협력하면서 '보호'라는 미명아래 조선인을 수용소에 가두고 집단 학살사건을 벌여나갔다.

 

95일 이후 치바현(千葉縣) 나라시노(習志野)에 있었던 조선인 수용소 부근에서 일어난 학살사건은 이를 잘 보여 준다.

 

군대의 개입

조선인수용소가 나라시노에 설치된 것은 94일 오전 10, 1사단 사령부의 기병 제2여단장에게 보낸 다음 명령에 의거했다.

 

도쿄 부근의 조선인은 나라시노 포로수용소에 수용한다.

각 부대는 그 주변의 조선인을 적당한 시기에 모아 코쿠부타이(國府臺) 병영으로 수송한다.

귀관은 나라시노 위수지 잔류부대를 이끌어 고쿠부타이에서 조선인을 인수하여 막사에 수용, 감시한다.

조선인의 급식은 하루 주식 쌀, 보리 0.2되 이내, 일급 15전 이내로 군인에 준해 취급한다.

 

기병 제2여단은 기병 13, 14, 15, 16연대로 구성된 계엄군의 실전부대이며 고토(江東)지구를 비롯해 도쿄를 평정한 여단이었다. 이 명령은 계엄군이 연행한 조선인 등을 나라시노에 보낼 것을 지시하는 조치였다.

 

조선인 연행을 위해 군대와 경찰, 자경단은 어떻게 움직였을까?

'()은 제국 수도의 조선인이다'라는 인식으로 출동한 계엄군의 행동을 기병 및 수송연대의 움직임을 통해 살펴보면, '이 날(2) 오후 5시경부터 시나가와(品川), 메구로(目黑), 이케지리(池尻), 시부야(澁谷) 방면에서 불령선인이 타마가와(多摩川)를 넘어 습격한다는 정보가 있다. 이에 사단은 기병 및 수송부대로부터 척후병을 보내 수색시킴과 동시에……메구로, 세타가야(世田), 마루센(丸千) 방면에 출동시켜 조선인을 진압하고, 조선인 습격에 관한 근본적 조사를 실시해 동 방면의 인심을 수습하였다'(도쿄진재록(東京震災錄))

 

경찰의 조선인 학살

계엄령이 발령된 후 경찰의 행동은 계엄사령부의 지시를 받게 된다. 93일 이후 경무부장은 매일 계엄사령부에 출두해 군경협의회에 출석, 지시를 받았다. 경찰의 최대 임무는 간토 일대 주요 철도와 도로, 시내에 검문소를 설치하여 통행인을 검문하는 것. 요령은 다음과 같다.

 

순사 5, 감독자 1명을 배치해 군대와 협력해 검문에 종사할 것.

검문은 군대의 원조를 얻어 경찰관이 실시할 것.

검문 시 통행인의 복장, 휴대품에 주의하고 야간에는 모든 통행인에 대해, 주간에는 수상하다고 인정되는 자에 대해 주소, 이름, 출발지, 목적지 등 통행요건을 충분히 취조하고 용의자는 곧바로 검속해 소속 경찰서로 송치할 것.

검문 시 병기나 흉기를 소지한 자는 일시적으로 이를 영치할 것.

 

경찰은 군의 보완기관으로서 철벽 봉쇄체제를 펼쳤다. (도쿄진재록(東京震災錄))

 

자경단에 의한 조선인 학살

자경단은 군경일치 체제를 보조하는 민간단체였다.

계엄사령부는 경비부대에 '헌병 및 경찰관과 밀접한 연락을 갖고 특히 아직 경찰권이 부활되지 않은 지방에서는 자경단에 대한 원조를 태만해서는 안된다. 또 재향군인회, 청년단을 이용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라고 지시했다.

 

즉 자경단은 재향군인회와 청년단을 모체로 한 실질적인 민간경찰이었다. 자경단에 일반시민이 적극적으로 참가하는데에는 관헌의 지시가 개입되었다.

 

다음은 92일 사이타마현(埼玉縣) 지방과장이 내무성과 협의한 후 오후 5시경 돌아와 현 내무부장에게 보고하고, 그 정보를 토대로 내무부장이 각 군()사무소에 전화로 통지하고 시()()()에 이첩했던 문서이다.

 

"도쿄에서 진재(지진)에 편승해 폭행을 저지르려는 불령선인 다수가 가와구찌(川口) 방면으로부터 혹시 우리 현에 들어올 지 모른다. 또 그 사이 과격 사상을 지닌 무리들이 이에 부화뇌동하여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려 한다는 소리도 들리고, 점차 그 위험의 여파가 닥쳐오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경찰력만으로는 미약하기 때문에 정촌 당국자는 재향군인분회, 소방수, 청년단원 등과 일치 협력해 경계에 만전을 기하고, 유사시에는 신속하게 적절한 대응책을 강구하도록 빨리 수배전단을 만들고 이를 정식문서에 의해 단계를 밟아 이첩하도록 할 것" (간토대진재와 조선인(關東大震災朝鮮人))

 

이 통첩이 사이타마현의 시촌에 이첩되어 구마가야(熊谷), 혼죠(本庄), 진보바라(神保原)를 위시한 각지에서 자경단원이 중심이 된 대학살사건의 도화선이 된다.

 

자경단은 경찰이 정한 곳 외의 도로에 검문소를 설치하고는 모든 통행인에게 '1555(1555)이라 말해보라', '기미가요()를 불러라', '도도이츠(ドドイツ-주로 남녀간의 사랑을 다룬 구어조의 일본속요)를 읊어 보라'고 강제했다. '이 놈은 넓적한 얼굴이다', '홑눈꺼풀이다', '납짝한 뒤통수이다', '장발이다' 등 외견상의 차이를 조선인 식별의 근거로 삼아 거리에서 사형(私刑)을 집행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자경단이 칼이나 죽창을 들고 통행인 누구를 막론하고 조금 다른 말과 행동을 트집잡아 사람을 오인하거나 하여 선량한 시민이 많은 피해를 받았다.'(경시총감 훈시 自警團イテ)

 

계엄사령부의 적극적 학살 개입

도쿄와 요코하마에서도 계엄사령부는 재향군인회, 청년단, 소방단 뿐만이 아니라 '일반인의 자위능력을 적극적으로 발휘시켜 재해의 방지에 힘쓸 것을 요망함'이라는 지시를 통해 국민 전체의 참가를 널리 촉구했다.

 

지시사항은 유인물, 회람, 포스터 형식으로 일반에게 전달되었다. '이것을 붙여 주세요'라는 제목으로 등사된 유인물에는 "오늘 밤 고이시카와(小石川) 소학교를 중심으로 방화, 약탈을 마음대로 자행하려는 불령의 무리가 있으니 각자 경계하기 바란다"'는 무시무시한 경고가 담겨 있었는가 하면, 나중에는 '경찰 조사에 의하면 조선인들이 백묵으로 옆집의 문이나 담벼락에 표시해 놓은 부호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ヤヤ"는 살인, ""는 폭탄, ""는 방화, ""는 우물에 독약투여' (도쿄대진재일기(東京大震災日記))이 첨부되기도 했다.

 

당시 자경단이 주로 사용한 '1555' 발음은 앞서 관헌들이 사용하던 조선인 식별법이었다. '조선인 식별자료에 관한 건'이 자경단에 배포되었는데 얼굴 형태는 일본인과 다르지 않지만 모발은 유연하고 적으며 밑을 향해 자란 것이 많다. 얼굴에 수염이 적어 속칭 '넓적한' 얼굴이 많다. △ ……후두부는 목침을 사용하기 때문에 대개 평평하다. 발은 버선과 신발을 꽉 조여 신기 때문에 작은 편이다. 발음은 탁음인 가(), (), (), (), ()가 가장 힘들다. 발음할 때 라()행인 라(), (), (), (), ()가 잘 판명되지 않는다 등이다.

 

이 식별법은 1923'내무성비(內務省秘) 1542', 즉 경보국장이 하달한 통첩이었다. 계엄군은 자경단으로 하여금 군.경의 작전을 보완할 수 있도록 관헌들의 노하우를 전수했던 것이다.

 

일본 정부의 학살 은폐

관동대지진정보, 진재기록 등 관련 자료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대지진으로 인한 피해가 어느 정도 수습되고 안정을 되찾게 되면서 일본 정부는 조선인 학살의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진상을 은폐하기 위해 눈을 돌렸다.

공공연하게 자행된 조선인 학살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먼저 군대와 경찰을 비롯한 국가기관은 뒤로 빠지고 민간 자경단에 책임을 돌리는 일이 시작됐다.

 

경비부는 93일 이후 조선인학살이 간토 일대에 급격히 확산되자 치안담당 기관들을 통해 그 책임을 자경단에 전가하도록 지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식보도를 통해 자경단은 조선인학살에 자중할 것을 호소하기도 하면서 앞으로는 군대와 경찰의 지휘를 받아야 한다는 경고를 하는 등 술책을 벌였다.

 

그렇지만 자경단은 그 후에도 군대, 경찰과 협력하며 학살을 이어갔고 경비부는 정부 책임을 감추기 위해 또 다른 한편으로 조선인의 범죄행위가 공산주의자들의 조종에 의한 것이라는 왜곡 선전을 강화하기로 하고 언론통제를 본격화했다.

 

95일 극비문서인 '조선인 문제에 관한 협정'이 대표적 결정이다.

'조선인에 관한 기사는 일체 게재하지 않도록 하며 그와 같은 기사가 실린 출판문에 대해서는 판매배포를 금지한다'는 것인데, 얼핏보면 유언비어 확산을 막기 위한 조치인듯 하지만 실은 이미 알려질대로 알려진 가짜뉴스를 그대로 보존하면서 대혼란상태에서 발생한 오보를 시정하려는 기사는 보도되지 못하도록 하는 지능적인 언론 통제였다.(와타나베 기자)

 

그 결과 94일부터 10월 중순까지 신문지면에는 조선인에 의한 범죄와 폭행사건이 사실무근이라는 기사는 실을 수 없고 반대로 조선인이 불안을 야기하는 관급 기사만 게재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일본정부는 이와 함께 자신들이 조선인을 보호하고 있다는 선전을 펼치면서 생사의 고비를 넘긴 조선인들을 강제연행해 '수용소'에 가두고는 전쟁포로로 다루었다. 그 숫자가 무려 23,715명에 달했다.(현대사자료6)

 

간토계엄군사령부의 수집 정보철 '계엄사령부 정보' [통일뉴스 자료사진]

현대사자료 6- 관통대지진과 조선인 [통일뉴스 자료사진]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에 대한 연구는 사건발생 40주기인 1963년 강덕상이라는 재일사학자가 친구인 금병동과 함께 편찬해 미스즈쇼보에서 출간한 현대사자료6-관동대지진과 조선인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는 것에 이견이 없다.

 

2차세계대전 승전 이후 대일본 점령정책을 실시하기 위해 설치된 연합국총사령부(GHQ)가 압수해 간 일본 공문서를 뒤져 찾아낸 관동대지진 공문비고(公文備考)가 포함되어 있는 독보적인 자료집이다.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40주기에 나온 이 자료집은 그 뒤 일본내에서 관련 연구를 촉발시킨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당시 일본정부의 공문서가 추가 공개되지 않는 상황에서 거의 유일한 자료로 열람되고 있다.

 

발간 60년이 지났지만 아직 한국어로 번역조차 되지 않은 것은 대단히 아쉬운 일이다.

 

 

인류사에 찾아볼 수 없는 살육만행

자료와 증언-일제는 조선인을 어떻게 학살했나

 

 

조선인 학살의 증언


간토계엄지역 내 경비배치도(9월 10일 현재)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경비부대 배치 개요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자경단원들이 행인을 단속하는 모습을 그린 화첩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계엄군과 경찰이 행인을 검문하는 모습을 그린 화첩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계엄사령부 앞의 후쿠다 대장(왼쪽)과 아베 참모총장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나는 1923년 7월 7일, 8일경, 오사카(大阪)에서 왔는데 9월 1일 진재를 만났습니다. 그 때 당한 일은 평생 잊을 수 없습니다. 폭동이란 것은 전부 거짓말입니다. 1일부터 2일까지 도망치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마음속으로 잡힐지 모른다는 공포감 때문에 안심할 수 없었어요. 어딘가에서 잡히면 큰 일이라 생각하고 주먹밥을 먹으며 도망쳤습니다. 

그러다가 3일 아침 조선인 사냥꾼들을 만나고야 말았습니다. 게이세이(京成) 전차의 아라가와(荒川) 제방 부근에서 당했습니다. 거기에서 14~15명이 죽는 것을 보았습니다. 머리 위로 기관총을 난사해서 도망치려 했는데 발각되어 갑자기 일본도가 날아 들었습니다. 왼손으로 막으려고 했는데 새끼손가락으로부터 손바닥을 관통하고 왼팔까지 잘렸습니다. 

갑자기 의식을 잃었습니다. 산 채로 사체수용소에 집어넣어졌는데 그 때 쇠갈고리가 끼어져 지금도 다리에는 구멍이 두 개씩 뚫려 있습니다. 사체 안에서 나는 신음소리를 동생이 듣게 되어 겨우 살아났지만 몸 여덟 군데에 상처를 입었습니다.
   
일본적십자 병원에 1년 반, 치료라고 해야 머큐로크롬을 발라 주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입원해 있어서 겨우 살았습니다. 한 방에 16명 있었는데 한 달 사이에 9명이 죽었습니다. 당시 저는 22~3세로 젊고 건강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 남게 되었지만, 그 때는 도망치고 싶어도 일어설 수 조차 없었습니다. 천재(天災)도 천재이지만, 인간이 인간을 죽인 것이었습니다.
-신창범(「나의 체험(私の體驗)」1963년 7월 17일, 간토대지진 조선인 희생자에 대한 강연회)


휴식중인 계엄군. 착검상태이다.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검문소에서 경비하는 계엄군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 9월1일부터 15일까지의 2주일동안에 걸쳐 간토지방에서 왜족이 조선인들에게 감행한 학살만행이야말로 인류사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살육만행이었다. 우리 동포 수만명을 도살한 그 처참한 정형에는 요귀, 악마도 눈을 감고 낯을 돌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일제는 두개 부와 여섯개 현에 포치한 군대와 경찰관을 조선인 박멸에로 내몰았다. 장총, 단총, 장검, 단도, 철창, 죽창, 몽둥이, 쇠갈구리 등을 휘둘러대는 이른바 청년단, 자경단의 '조선인을 박멸하라'는 외침은 천지를 진동하였다. 놈들은 벌떼처럼 무리를 지어 촌락, 시가는 말할 것도 없고 산, 들, 강, 초원까지 샅샅이 뒤지면서 조선사람을 찾아내기에 피눈이 되어 날뛰었으며 조선사람을 발견만 하면 그 자리에서 사정없이 도륙했다. 형편이 이러했으니 피와 양심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던 우리 동포들이 어떻게 죽음을 면할 수 있었겠는가 
-살육만행을 현지에서 조사한 한 동포의 증언,([노동신문] 1970.9.12 '일본군국주의의 야수적 죄행을 고발한다(2)')


자경단. 군복을 입은 자는 재향군인. 죽창과 곤봉으로 무장하고 있다(이자부 방면 추정)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개를 끌고 죽창과 총으로 무장한 자경단(요코하마시 추정)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가구라자카 경찰서에서 압수한 자경단의 무기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9월 4일 아침 2시경이라고 생각된다. '조선인을 끌어내라', '조선인을 죽여라'라는 따위의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나에게는 왜 조선사람을 죽이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조선사람이 나쁜짓을 하였다고 하는데 지진과 그로인한 대화재로 말미암아 목숨을 건지기에 필사적이었던 조선사람들이 나쁜짓을 저지를래야 저지를 수 없다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이윽고 저쪽으로부터 무장단이 피난민들을 한 사람씩 눈여겨보면서 조선사람들을 찾아내고 있었다. 우리들 15명의 조선사람들 거의 전부가 일본말을 몰랐었다. 놈들이 가까이에 오면 조선사람이라는 것이 당장 알려지게 될 것이었다. 무장한 자경단원들은 조선사람인줄만 알면 일본도로 내리쳐 그자리에서 죽여버렸다. 림선일 동포는 자경단이 다가와서 심문을 하자 나의 이름을 부르면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통역을 해달라'고 소리쳤다. 그의 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경단원의 손에서 일본도가 번쩍이더니 그는 학살되고 말았다. 

림선일 동포의 다름 자리에 있던 동포도 학상당하였다. 이대로 앉아있으면 나도 학살당하리라는 것은 틀림없었다. 나는 옆에 있던 동생과 매부와 함께 철교에서 결사적으로 뛰어내렸다. 뛰어내리고 보니 거기에는 우리와 같은 운명에 처해있던 5~6명의 동포들이 있었다. 우리가 뛰어내린 것을 보았으니 자경단원들이 찾아오리라는 것은 명백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헤엄을 쳐서 강을 건너기로 하였다. 날은 이미 밝아와서 20~30미터 떨어져 있는 사람들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헤엄쳐서 강을 건너는 것이 보였다. 우리도 바야흐로 강을 건너려고 하는데 다리 위에서 총소리가 연이어 들려오더니 강을 건너던 동포들이 탄알에 맞아 강물속에 쓰러지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니 건너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총소리는 끊임없이 들려왔다. 나는 가까이에 있는 갈대숲속에 숨으려 하였다. 갈대를 휘어잡고 몸을 강물속에 잠그려  하였으나 만조때가 되어서 발이 땅에 닿지 않았다. 이윽고 3명의 자경단원이 배를 타고 우리한테로 다가왔다. 저마다 일본도와 쇠갈구리를 휘두르고 있는 놈들의 몰골은 피에 주린 악마의 모습 그대로였다. 죽음에 맞다들었을 때는 도리어 용기가 나는 법이다. 이때까지의 공포심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적개심이 불타올랐다. 그때 나의 머리에는 '죽을 바에야 한 놈이라도 제끼고 죽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나는 다가오는 놈들의 배를 뒤집어 엎어버렸다. 강물속에서 놈들과의 격투가 벌어졌다. 그런데 놈들의 배가 한 채 또 쫓아와서 편들었기 때문에 나는 놈들에게 붙들려 강기슭에로 끌려가고 말았다. 강물에 흠뻑 젖어 기슭에 올라서자마저 한 놈이 일본도로 나를 내리치려고 했다. 나는 왼손을 내밀어 그놈을 칼을 붙들었다. 그때 내 새끼 손가락이 떨어져 나갔다. 나는 그놈의 칼을 빼았아 놈들을 제끼려고 사정없이 내리쳤다. 내가 그때 의식한 것은 여기까지 뿐이었다. 나는 그후 의식을 잃었다. 

나는 놈들의 일본도에 맞아 중상을 입고 쓰러졌으며 정신을 잃었던 것이다. 지금도 나의 몸에 남아있는 이 수많은 상처자리는 그때 입은 상처의 흠집이다. 후에 들은 이야기인데 아라까와의 돌뚝에서 학살당한 조선사람은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놈들은 우리 동포들을 쇠갈구리로 찍어서 질질 끌고다녔다. 지금 나의 오른 발에 남아있는 흠집은 내가 의식을 잃은 후 놈들이 나를 쇠갈구리로 찍어 경찰서까지 끌고 가면서 남겨놓은 것이다. 이리하여 나는 죽은 사람으로서 도쿄 데라지마 경찰서 시체직치장에 쌓여있게 되었다. 
-한 재일동포의 체험담([노동신문] 1970.9.12 '일본군국주의의 야수적 죄행을 고발한다(2))

△우리 동포들로서 살아남은 사람은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그것은 마루바닥밑에 숨어 10여일 동안 굶주림과 추위를 이겨낸 사람들이었으며, 며칠동안 물속에 잠겨 있던 사람들이었으며, 건설장의 나무상자속에 숨어있던 사람들이었다. 그것은 우리 동포들의 주검속에 파묻혀있던 사람들이었으며, 왜놈들의 살인마수에 걸려 상처를 입고 정신을 잃은 채 쓰러진 사람들이었다.(소책자 '학살')


계엄군이 조선인들을 체포한 상황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계엄군들이 연행한 조선인을 눕혀 놓고 박해하는 모습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경시청이 뿌린 전단지. 쌀 60만석이 온다거나 폭동설은 유언비어라는 글자가 보인다.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자경단원들은 조선사람을 붙잡아 몸을 전주대에 묶어놓고 눈알을 도려내고 코를 벤 다름 배를 찔러 죽였으며 기차칸에서 여러명의 조선사람을 순식간에 창문밖으로 내 던졌다.(현대사자료6)

△ 참살 정형은 도저히 입으로 표현할 수 없었다. 일본 군국주의의 잔인성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어린애들도 많았는데 화물차에서 아이들을 먼저 끌어내려 할 줄로 세워 놓고는 부모들이 보는 앞에서 목을 자르고 그 다음엔 그 부모들도 찔러 죽였다. 살아있는 조선사람들의 팔을 톱으로 켜는 놈도 있었다. 그것도 도중에서 팽개치고 또 다른 조선 사람을 톱질하기도 했다. 그 참혹상은 보기에도 끔찍하였다. 시체의 눈을 식칼로 도려내는 것도 보았다. 무도장에 갇혔던 43명의 조선인들도 모두 학살되었다. 경찰서 구내는 피바다가 되어 장화를 신지 않으면 걸을 수 없을 지경이였다. 조선 사람들의 비통한 울부짖음은 그후 오래동안 나의 귀전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전 혼죠(本所) 경찰서 아라이 순사의 증언(일조협회 '사이따마현 내에서의 간또대진재 조선인학살 사건 자료')


학살된 조선인 사체 2구. 삼을 꼬아서 만든 가는 줄로 묶여 있다.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학살된 조선인 사체 5구. 말둑에 묶여 있다. (에이다이바시 부근)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학살당해 강물에 버려진 조선인 사체들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 석탄재로 메운 빈터가 있었는데 여기에 주검이 널려 있었다. 그 수는 250구나 되어 보였다. 주검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목구멍을 잘려 기관과 식도의 경동맥이 하얗게 보이는 것도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참혹한 것은 젊은 여자가 배를 갈려 창자에 6~7개월 정도의 태아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더우기 그 여자의 음부에 참대창이 푹 박혀 있는 것을 본 나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우리 일본사람들이 이렇게까지 참혹하게 사람들을 죽였단 말인가. 말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일본인이라는 것을 그처럼 치욕으로 느낀 적은 없었다.
-일본 여성 다나베 사나노스케의 증언(*기까와 사까구마의 목격담 증언)


조선인 학살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조선인 학살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조선인 학살(데라시마, 9월 7일 오후 촬영)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조선인 학살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 "고향에 처자식이 있고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일본에서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능숙하지 않은 일본어로 빌고 있는 조선인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잠깐 보았더니 텐트 밑에는 10명 정도의 사람이 피를 흘리며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내 생각으로는 장작인가 무언가로 심하게 두들겨 맞아서 상처를 입고 거의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텐트 안에서는 "빠(パ), 삐(ピ), 뿌(プ), 뻬(ペ), 뽀(ポ)"라던가 무언가를 조사하고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혼죠의 오쿠라바시(おくら橋)근처에서 자경단의 린치 장면을 목격했던 시노하라 게이코(篠原京子)의 증언(『민족의 가시나무(民族の棘)』 28쪽)
 
△ 스미타가와(隔田川)에 위치한 시라히게바시(白髭橋)의 양쪽 난간에는 머리띠를 두르고 일본도, 죽창, 엽총 등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피난민을 쏘아보며 "모자벗어!"라고 호령하자, 자경단원 한 명이 "저 놈 수상한데"라며 마흔 다섯이나 여섯 쯤 되어 보이는 남자를 가리켰다. "그래 저 놈 뒷통수는 절벽이야"라고 크게 소리쳤다. "조선놈이 틀림없다"며 왁자지껄 떠들면서 일본도, 죽창, 곤봉을 이 남자에게 휘둘렀다. 남자는 아무 말도 못하고 벌벌 떨고만 있었다. "너, 어디에서 왔어", "……", "이봐, 어디에 가느냔 말야", "……", "이 새끼야, 대답하란 말이야", "너, 조선놈이지", "……", "가기구게고(ガギグゲゴ) 말해봐", "……", "이 자식, 수상해", "조선놈이야", "죽여, 해치워, 죽여버려라", 어느새인가 그 남자는 굵은 새끼줄로 온몸이 묶였다. -지마사 다카시(和知正孝)의 증언(『민족의 가시나무』 38쪽)


조선인 연행과 체포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강물속 학살당한 사체(아즈마다리 추정)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조선인 연행 (스다초 부근 추정)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 14일째 되던 날 장교가 오더니 "내일은 모두 치바(千葉)로 가야한다. 거기에 가면  하루 3끼의 식사가 보장되어 있다. 우리들이 말하는 대로 따르면 죽지 않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죽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다음 날 주먹밥 두 개를 지급받고 50명씩 나누어 출발했다. 군대가 주위를 둘러싸고 문 밖으로 나갔는데, 조선인이 치바로 보내진다는 소문을 들은 부근의 자경단이 많이 몰려들었다. 지나가는 우리들을 보고 자경단은 "죽여라", "없애버려라"라는 소리를 질렀다. 우리들은 맨발로 카메이도(龜戶)의 정거장까지 줄행랑쳤다.
-테라지마(寺島) 경찰서에서 살아남은 조인승(曺仁承)의 증언 (조선대학교 『간토대진재에서의 조선인 학살의 진상과 실태(關東大震災における朝鮮人虐殺の眞相と實態)』,159쪽)

△ (9월 1일은 지진으로) 집이 위험하다고 해서 아라카와(荒川) 둑으로 가니까 이미 사람들로 가득했다. 불이 타들어오기에 요쓰기(四ツ木) 다리를 건너서 1일 저녁에는 동포 14명과 함께 있었다. 그곳에 소방단원 4명이 와서 밧줄로 우리들을 염주알 꿰듯이 묶어서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이 자리를 뜨지만 밧줄을 끊으면 죽이겠다!"라고. 가만히 있으니 밤 8시경 건너편의 아라카와 역(현재 야히로(八広) 역) 방면의 둑이 소란스러웠다. 설마 조선인을 죽이고 있다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다음날 5시경, 소방단원 4명이 다시 와서 데라시마(寺島) 경찰서로 가기 위해 요쓰기 다리를 건넜다. 그곳에서 3명이 끌려와서 일반인들에게 뭇매를 맞고 살해당하는 것을 우리들은 옆 눈으로 보면서 다리를 건넜다. 그때 내 발에도 쇠갈고리가 와서 박혔다. 다리는 시체로 가득했다. 둑에도 장작더미가 쌓여 있듯이 여기저기에 시체가 쌓여 있었다.
-조인승의 증언(『風よ 鳳仙花の歌をはこべ』(바람이여 봉선화의 노래를 들어라))

△내가 있던 나라시노 기병연대가 출동한 것은 9월 2일 정오경이었다. '적은 제국 수도(도쿄)에 있다'고 소리치며 실탄과 총검으로 무장하고 실탄과 총검으로 무장하고 도쿄시에 진입하였다...연대는 첫 행동으로 먼저 열차를 검열하였다...어느 열차도 초만원으로서 기관차에 쌓인 석탄더미위까지 사람이 파리떼처럼 뒤덮여 있었다. 그곳에 섞인 조선인은 모두 끌어내어 즉시 총검으로 찔러 죽였다...연대는 저녁부터 본격적인 조선인사냥을 개시했다.
-조선인학살에 가담한 일본군인의 증언(日잡지 '일본과 조선', 1963년 9월호) 


강제노동에 동원된 조선인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가구라자카 경찰서에 수용된 조선인(9월 14일 추정)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경찰 지휘 아래 지진피해지 정리에 동원된 조선인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 자경단이란 것은 아주 세력이 강했죠. 직접 자기가 한 사람을…… 젊은 사람은 재미로 죽이지 않았을까요. 오오구보(大久保)의 술집 뒤에 S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는 15연대 조교사(調敎師)였죠.……그 사람도 좋아했죠, 죽이는 것을……아직 살아있어요. 75세인가 76세 쯤 되었을 거예요. 그 때는 혈기왕성해서 칼을 휘두르고 싶어서 어찌할 줄 몰랐죠. 누구나 죽이라는 명령을 받아 칼을 휘두르는 것은 싫어했어요.……좋아하지 않으면 죽일 수 없었지요
-14연대 본부서기 아이자와(相澤安)의 증언 (「나라시노 기병연대와 그 주변」)

△ '우리들이 부대로 돌아온 날이 13일인지 14일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9월 15일부터 나라시노의 중국인, 조선인 수용소에서 근무했지요. 심한 상처를 입은 자는 없었어요. 사상이 의심가는 사람은 헌병이 이것저것 묻고 영창에 가두었어요. 거기에 간첩을 집어넣었지요. 스파이예요. 그 중에는 공산당도 있었을 테이니까요……나는 헌병이 끌고 가는 데에는 관계하지 않았지만, 영창 안에 몇 명인가 있는 것을 보았어요. 그 안에는 헌병이 함께 들어가 사상 등에 대해 조사했을 겁니다. 그리고 악질은 죽였다던가 어쨌다던가……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고 들었을 때, 나는 진짜라고 믿었어요. 군인 전부가 믿었을 거예요. 군인은 단순해서 위로부터의 명령에 곧바로 그렇다고 믿으니까요.……' 
-제15연대에서 근무한 군조(軍曹, 하사관) 츠메오 타케시(爪生武)의 증언(「나라시노 기병연대와 그 주변」)


아오야마 수용소의 조선인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오지경찰서에 수용된 조선인(9월 10일 추정)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센주경찰서에 수용된 조선인(9월 10일 추정)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센주경찰서 수용 상황(9월 10일 추정)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 '구호'할 목적으로 데리고 왔지만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킬 것 같다고 하기에 조선인을 끌어내라는 것이었죠……연대가 4개 있었는데, 우리 연대에서도 16명을 영창에 넣었어요.……이상한 것은 모두 연대에 끌고 와서는 조사를 했어요. 그것도 군대에서요. 그래서 의심가는 사람들을……모두 처단하고 말았어요……처형한 곳은 오구보 공민관 뒤의 무덤이었지요. 여기로 끌고 와서 이 자리에서 죽였지요……나는 죽이지 않았어요. 30명 정도였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 연대뿐만이 아니었어요. 다른 모든 연대도 그랬어요.……나는 두 번인가……거의 칼을 내리칠 뻔 했지만 싫어서 그만두었어요. 하루 밤에 3명 정도 죽이지 않았을까요. 영창 안에 있는 사람들은 사람들이 불려가 돌아오지 않는 것을 이상하다고만 생각했을 겁니다. 
-14연대 본부 서기 아이자와의 증언(「나라시노 기병연대와 그 주변」)

△ 9월 4일 오전 11시경, 18살쯤 되어보이는 남자와 조선옷 차림을 한 여자 2명이 샘물에 독약을 뿌렸다는 말이 있기에 조사해 보았다. 그에 의하면 그들은 샘터에서 쌀을 씻고 있었는데 독약을 던진 사람들로 오인되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일본헌병대 보고)

△ 9월 4일, 게이힌 전차정류장 부근에서 약병에 넣은 독약을 가지고 있는 조선사람 1명이 나나났다는 말이 있어서 조사해 보았는데,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그 자신이 먹기 위해서 가지고 다니는 약병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일본해군성 문서 '공문비고')


경시청 메구로 수용소의 상황(9월 17일 추정)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경시청 메구로 수용소의 상황(9월 13일 추정)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경시청 메구로 수용소의 상황(9월

13일 추정)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경시청 메구로 수용

소의 상황(9월 13일 추정)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경시청 메구로 수용소의 상황(9월 13일 추정)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나라시노 포로수용소. 야마나시 계엄사령관과 조선인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나라시노에서 도쿄로 철수하는 조선인. 머리에 붕대를 감고있는 사람이 많다.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조선총독부 아오야마(靑山) 수용소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조선총독부 아오야마(靑山) 수용소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가와사키 다지마마치 수용소의 조선인(10월 4일 추정)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 하나의 례를 들기로 하자. 동경 가메도 경찰서에서는 일본의 혁명적 로동자 9명과 조선인을 비롯한 중국인 7백 70여명을 체포하여 수시노 기병 련대에 넘겨주었다. 그들은 수시노 련병장 혹은 아라까와 방수로에서 혁명가를 부르며 참살, 혹은 사살을 당하고 말았다. (강재언, '관동대진재와 재일동포의 대참변'중 [조선신보 1962년 0월 1일])

* 강재언은 이어 "어떠한 표현방법으로써도 도저히 형언할 수 없는 야만 무쌍한 이와 같은 대참변은 로씨야에서의 10월혁명 이후 아세아 및 일본에서 급속히 일어난 혁명적 앙양을 꺾기 위하여 <동양의 한 구석에 자리잡은 일본은 식민지 혁명운동의 무대로 된 동양에서의 반동, 반혁명의 지주(支柱)이며 중국, 조선, 대만을 억압하고 쏘베트 로씨야에 대한 동방으로부터의 진격>(이찌가와 '일본공산당 소사')을 획책하는 일본 지배층의 반동정책에 의하여 조작된 결과이다."라고 쓰고 있다.

간토대지진의 참상


간다 스다쪼 부근의 참상(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화물기차에 넘치는 피난민(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불에 휩싸인 경시청(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불타버린 간도 진보쪼 부근(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긴자 대로의 대참상(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우에노 미츠자카야 부근의 참상(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니혼바시 마루젠 부근의 참상(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혼조 피복창 화재로 죽은 희생자의 유골(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혼조 료코쿠 국기관 부근(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히비야 공원 교차로의 참상(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화재를 피해 우에노역 앞으로 몰려든 피난민(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니혼바시 닌교쪼의 참상(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붕괴된 요코하마역(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요코하마 시청 잔해(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난킨마치의 참상(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요코하마 역 철로(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무너진 그랜드호텔(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요코하마 후로쪼 공원의 균열(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요코하마 야마시타쪼의 참상(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요코하마 야마시타쪼의 붕괴된 오리엔탈 호텔(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요코하마 마나토마치 하안의 대균열(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먹을 것을 찾아 방황하는 요코하마의 이재민들(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간토대지진 피해지도(붉은색이 피해지역)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도쿄 인근 현 지역 지지피해 정황(9월 13일까지 확인)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간토학살은 조선민족말살 정책의 극치..정부의 대량학살범죄

은 간토대학살을 어떻게 보고 있나

일본에서 1963년 열린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40주기 추모제 [통일뉴스 자료사진]

 

민족배타주의 고취..국가범죄

192391일 오전 1158분 도쿄를 포함해 관동지방 일대를 휩쓴 '간토대지진'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조선인학살'과 동의어로 인식되고 있다.

 

리히터 척도 7.9의 대지진이 몰고온 피해복구와 이재민 구호대책에 매달렸어야 할 일본 정부가 그 대신 '조선인'을 희생양으로 삼아 '학살'을 자행하는 전대미문의 대참극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간토대지진을 계기로 감행된 조선인 살륙만행은 결코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우발적인 사건이나 몇몇 고위인물들에 의하여 꾸며진 개별적인 테러행위가 아니라 정권유지를 위한 출로를 타민족에 대한 배타주의를 고취하는데서 찾은 일본정부에 의해 계획적으로, 조직적으로 감행된 무차별적인 대량학살범 죄였다."

 

지난해 91일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99주기를 맞아 북한의 '조선인강제련행피해자, 유가족협회'가 발표한 담화의 일부이다.

 

일본의 과거사 범죄에 대해 '절대로 회피할 수 없는 역사적 의무', '과거청산은 가해자인 일본앞에 부과된 법적, 도덕적 책임이며 력사적 과제'라는 입장을 일관되게 유지해 온 북한은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에 대해서도 한결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

 

피해 당사자의 입장에 선 역사인식에 철저하다.

북한의 역사 관련 학술저널인 력사과학20154호는 간토대지진시 조선인대학살만행은 일본 반동정부에 의하여 감행된 국가적 범죄(박사 위광남)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에 대해 "일본 반동정부의 직접적인 지시하에 감행된 민족배타주의적인 인간살륙이었으며 국가적인 대범죄"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에 앞서 간토학살 85주기인 지난 200891[노동신문]'간토대진재때 감행된 조선인학살만행은 일본의 국가적인 테러행위'라는 제목으로 전날(8.31) '력사학학회'가 발표한 비망록을 보도했다.

 

비망록은 "19239월 일본 간토지방에 발생한 대진재를 조선인탄압의 좋은 기회로 삼은 일본 정부는 내무성, 군대, 경찰과 자경단을 비롯한 극우익단체들까지 동원하여 열흘 남짓한 기간에 무려 23,000여명의 무고한 조선사람들을 무참히 학살하는 대참극을 빚어냈다. 이 천인공노할 조선인대학살 만행은 당시 일본 정부의 주도하에 조직적으로 감행된 민족배타주의적인 인간살륙이었으며 국가적인 테러행위였다"라고 규정한다.

 

모두 일본 정부의 직접적인 지시에 의한 국가범죄라는 점과 '민족배타주의'주의가 배경이 되는 대량학살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더 나아가 북한은 "20세기 전반기 일제가 우리 나라에서 감행한 조선민족말살책동이 반인륜적인 극악한 범죄로 되는 것은 우선 그것이 조선민족을 영원히 없애버리기 위한 대량적인 학살만행으로 일관되었기 때문"(김일성종합대학학보(력사, 법학) 2018.4)이라며, 조선인 학살이 식민지 통치시기에 일시적으로 있었던 일이 아니라 이미 중세부터 추구해온 뿌리깊은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학보는 1592'임진조국전쟁'(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해마다 출병해 조선인을 모두 죽이고 조선을 빈땅으로 만든 뒤, 일본 '서로'(간사이)의 인구를 조선에 옮겨 살게하고 '동로'(간토) 인구를 '서로'에 옮겨 살게 하면 10년 후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는 계획아래 전쟁기간 무려 100여 만명의 조선인을 학살했다는 점을 실증 사례로 제시했다.

 

학보에 따르면, 중세때부터 조선민족말살을 추구한 일본은 1868년 명치유신으로 자본주의 발전의 길에 들어선 후 '정한론'을 앞세우고 '조선 침략'을 국책으로 내세워 '을사5조약'으로 조선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 확립을 실현했다.

 

1910'한일합병조약'으로 조선을 완전 병탄한 일제는 강점 초기부터 "'총독정치'의 목적은 해마다 넘쳐 나는 일본의 인구를 조선에 이주시키고 자본의 방출에 의한 단순한 이익이나 얻자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신구동포'를 합쳐서 일본 황제의 지휘밑에 '건전한 발전'을 이룩하는데 있다"(시정 25년사, 조선총독부 발행)며 식민통치의 목표가 '조선민족말살'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조선통치의 근본방침은 내선의 일체화, 궁극의 목표는 조선의 '시코쿠'(일본 4대 본섬 중 가장 작은 섬), '규슈'(세번째 큰 섬)'라며, 조선인의 민족성말살과 완전한 영토합병을 꾀한 것.

 

간토 학살에 앞서 일제는 19193.1운동기간에 10여 만명, 192010월 중국 훈춘의 일본 영사관 습격 사건을 조작한 뒤 자행한 간도참변으로 3만여명 등 야만적인 방법으로 조선인을 계속 학살해 왔다.

 

따라서 "일제의 조선인학살만행은 그 어떤 우발적인 사건을 계기로 벌어진 것이 아니라 식민지통치 전 기간 국가정책으로 감행된 조선민족말살책동의 극치였으며 일제의 이러한 야만적인 행위로 인하여 식민지통치기간에 100여만명의 무고한 조선사람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것이 북의 역사인식이다.

 

일제가 저지른 강제징용과 일본군 성노예제도 등에 대해서도 조선인 학살외에 조선민족 말살을 위한 인구증대 억제책이라고 해설하고 있다.

 

1940년에 실시된 '국세조사'에 따르면 조선의 인구는 2,354만명이었고 194110월 발표된 16~40살까지 남성은 421만명, 이중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조선의 청장년 840만 여명이 일제의 전장과 노역장에 끌려갔다. 20만명의 조선여성에게 강요된 성노예만행도 생식능력 쇠퇴와 민족성을 빼앗기 위한 범죄행위로 풀이했다.

 

결론적으로,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문제는 '조선민족 말살을 노린 전무후무한 반인륜적 범죄' 그 자체인 일제의 식민지통치 과정에서 벌어진 사건이라는 인식이다.

 

조선인학살, 국가 범죄는 어떻게 자행되었나

1920년대의 일본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승리에 자극받은 국내외 혁명적 분위기로 인한 정치적 위기와 1920~1921년의 경제공황, 1923년 간토대지진, 그리고 1927년 금융공황과 같은 연이은 경제위기에 부딪혔다.

 

위 비망록에 따르면, 자연재해 앞에 속수무책인 정부에 대한 일본인의 불만은 폭발직전이었고, 1차 세계대전 후 경제공황속에서 1918'쌀폭동'과 같은 반정부폭동을 겪었던 지배권력은 소요사태를 우려해 혼란의 책임을 재일 조선인에게 뒤집어 씌우고 일본인들에게 민족배타주의 사상을 불어 넣어서 그들을 조선인 살해에 나서도록 부추겼다.

 

이렇게 사전에 준비된 유언비어를 기초로 발표된 것이 '전시계엄령'.

 

조선인 폭동설을 조작해 유포한 최종 책임자는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으로 3.1운동 참가자들을 살해한 전력이 있는 내무대신 미즈노 렌따로였고, 내무성 정보국장과 도쿄경시청 총감이 실행에 옮겼다.

 

학살에 대한 기본 인식은 "일본 정부는 '대진재'(대지진)로 인한 일본 인민들의 반정부적 진출을 조선인학살에로 돌려놓기 위하여 무근거한 '조선인 폭동'설을 퍼뜨린 다음 '전시계엄령'을 공포하였으며 적수공권의 재일 조선인들을 ''으로 간주하고 학살하기 위한 '전투' 준비를 갖추어 갔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극우익분자들로 '자경단', '청년단'을 비롯한 살인단체들을 조직하게 하고 군대, 경찰과 협동할 것을 지시하였다"는 것.

 

력사과학20154호 논문에서는 일본 정부가 간토 일대의 통신소가 모두 파괴된 상황에서 93일 후나바시 해군 무전국을 통해 발송한 3건의 전신문건에 주목했다. 일본정부가 조선인학살을 직접적으로 지시한 명령서이기 때문이다. 아래 출처는 모두 현대사자료-6, 미스즈서방 1963이다.

 

93815분경 결찰기관인 내무성 경보국장 명의로 각 지방 장관들 앞으로 보낸 전신문이 첫번째. '조선인이 각지에서 방화하고 도쿄시내에서 폭탄을 가지고 석유를 뿌리며 방화하고 있다. 도쿄에서는 일부 계엄령이 실시되고 있지만 각지에서는 충분하고 조밀한 시찰을 하여 조선인들의 행동에 대해 엄격히 '취체'(규칙, 법령, 명령 따위를 지키도록 통제)하라'는 명령이다.

 

두번째는 93830분경 내무성 경보국장이 조선총독부 경무국 경무국장 앞으로 발송한 전신문. 도쿄의 일부 계엄령 실시 사실과 함께 '조선에서 조선인들의 동정에 대해 엄중히 단속하고 일본에 건너오는 것을 저지시키라는 것'이다.

 

세번째 전신문은 931210분경 내무성 경보국장이 야마구치현 지사 앞으로 보낸 것으로, '일본으로 건너오는 조선인들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고 조금이라도 의심스럽다면 상륙을 불허하고 신분을 위장한 것으로 보이면 충분한 경계를 취하며 해당 조치를 취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엄격한 취체, 해당 조치''조선인에 대한 학살'로 이해됐다.

 

3건의 전신문건은 대지진으로 모든 교통과 통신이 끊어진 상황에서 전국에 전신문을 타전할 수 있는 유일한 권한을 갖고 있던 일본정부와 관계자들이 후나바시 해군무전국 시설을 이용해 '조선인 폭동설'을 만들어 유포하고 이를 대부분의 중하층 일본인 관리들과 일반인들이 사실로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국가권력이 유언비어 조작과 조선인 학살에 직접적으로 개입했다는 증거로 판단했다.

 

최근 일본에서 위 첫번째 전신문을 방위성 방위연구소가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지면서 지난 615일 참의원 법무위원회가 열렸으나 일본 정부는 '추가조사를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기존 입장을 되풀이하며 학살에 대한 국가책임을 한사코 부인하고 있다.

 

북한 최고인민회의 및 내각 기관지인 [민주조선]은 지난 75일자에서 '당시 경찰기관이었던 내무성 경보국 국장이 일본 각지의 지방장관에게 보낸 문서를 방위성에서 관리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연이어 하달된 3건의 무전문은 일본정부가 조선인대학살을 직접적으로 지시한 명령서였다. 후나바시 해군 무선송신소에서 전국에 타전하는 전보문을 발송시킬수 있는 권한은 오직 일본정부에만 있었다. 결국 이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간토대지진시 감행된 조선인대학살 만행이 왜왕의 지시밑에 감행된 특대형 반인륜범죄였다는것을 똑똑히 알수 있다"고 강조했다.

 

당시 허위정보를 담아 일본 전국에 조직적으로 전신문을 타전한 최고책임자는 내무대신 미즈노 렌타로였다.

 

조선인 희생자 23,000?..남북 공동연구 절실

 

위 비망록은 간토대지진 당시 학살된 조선인 수를 23,000여명에 달한 것으로 발표했다.

 

력사과학20182호에 실린 논문 간토대지진시 조선인대학살 만행의 진상을 은페하기 위한 일제의 책동(정진철)에서는 당시 조선총독부가 비밀리에 작성한 조선총독부 진재관계문서를 인용해 "간토대지진때 학살된 조선사람들의 수는 23,059명이며 그중 경찰이 살해한 수는 577, 일본군 기병들이 살해한 수는 3,100"이라고 구체적으로 밝히면서 그 출처를 현대사자료-6(345)이라고 제시했다.

 

그러나 남측 역사학계에서는 해당 출처를 살펴보아도 북측 주장이 명확히 확인되지는 않는다고 설명하고 있다. 다만, 당시 독일대사관의 정보보고, 체류하던 독일인의 해외언론 기고문 등에서 비슷한 규모의 희생자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노동신문]에 본격적으로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문제가 다뤄진 197095일자 '일본군국주의의 야수적 죄행을 고발한다(1)' 기사에서는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이 2주일 남짓한 사이에 66백여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보도하고 199291일자에서도 6,160(9.1~18. 도쿄지역)으로 전했으나, 1998122일 기사에서부터 희생자 수는 2만여명으로 보도되기 시작한 것으로 파악된다.

 

력사과학20001호에 실린 고정봉의 논문도 23천여명의 조선인이 무참히 학살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국과 일본에서는 당시 간토지방 체류 조선인이 12,000여명이라는 통계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사 결과, 기타 연구 등을 통해 조선인 희생자 수를 '최소 6,000여명'으로 정리하는 설이 유력하다.

 

일본 정부의 적극적인 은폐시도로 정확한 진상이 파악되지 않는 가운데, 남북의 공동연구가 절실한 대목이기도 하다.

 

이처럼 100년의 시간이 지나도록 희생자 수조차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게 된 주된 이유는 당시부터 지금까지 일본 당국이 조선인학살에 대한 국가책임을 피하기 위해 언론에 대한 보도통제는 물론 공문서를 극구 은폐하고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지진으로 인한 위기가 어느 정도 진정되면서 일본 정부는 '임시진재구호사무국'을 만들고 그 안에 치안을 담당하는 총사령부인 '경비부'를 설치하여 특히 '조선인 학살'문제에 대한 방침을 시행했다.

 

'간토 일대에서 벌어지는 조선인 학살행위를 뒤에서 직접 조종하면서 그 진상이 절대로 세상에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한 방도'를 강구하는 것이 최대 경비부의 최대 관심사였다.

 

일본 정부는 조선인 학살을 주도한 것이 군대와 경찰 등 정부기관은 아니며, 공산주의자들의 배후조정에 따라 재일 조선인들이 '범죄행위'를 저질렀기 때문에 '자경단'이 그걸 저지한 것이라는 선전지침을 만들어 10월 중순까지 대도시 일간신문 등에 대한 엄격한 보도통제를 시작했다.

 

당시의 신문보도만 보아서는 사건의 전개과정과 전말을 이해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 주요 일지

91-정오 2분전, 간토지방에 대지진 발생(매그니튜드 7.9). 사망자 91,344.

-극도의 혼란상태를 목격한 경시총감 아카이케 아츠시를 비롯한 일본 치안당국은 '예사로운 경비를 가지고서는 산생되는 인심의 불안을 침정시켜 질서유지가 곤난'하다고 판단, 군의 출동을 요구함과 함께 내무대신 미즈노 렌타로와 협의하여 '계엄령' 포고 준비를 추진.

-미즈노와 아카이케, '계엄령' 공포 이유를 찾기 위해 도쿄 시내 순회.

-이 무렵부터 '사회주의자와 '선인'(조선인)의 방화가 많다'는 유언비어가 발생.

 

2-도쿄부와 부내 5군에 '계엄령' 9, 14조를 적용하고 간토지역을 임전지역으로 결정.

-'이날 아침이 되니 인심이 공포에 찔려있을 때 어디서인지는 모르나 뜻밖의 조선인소동이 일어났다. ···어떻게 대처해야 하겠는가, 경우가 경우이니만큼 여러가지로 생각해보았지만 결국 '계엄령'을 시행할 수 밖에 없다고 결정했다.'('계엄령'을 시행하기 위한 구실, 미즈노 렌타로의 증언)

-도쿄와 요코하마 등의 여러 곳에서 '조선인 폭동', '조선인이 방화하였다', '우물에 독약을 친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구체성을 띠고 확대.

-미즈노 렌타로는 지바현 후나바시의 해군무전국을 통해 '조선사람들을 학살할 것'을 전국에 지시.

-사이다마현 내무부장, 재향군인 분회, 소방단, 청년단 등과 협력하여 '조선인폭동'에 대처하도록 군정촌장에 통보.

-이날 밤부터 각지에 있는 '자경단'들이 일본도 또는 몽둥이를 휘두르면서 조선사람을 찾아내어 때리거나 살해.

-지바현의 나라시노공장 건물안에 구금되어 있던 조선인 300명이 매를 맞아 중상 또는 사망.

-도쿄 가메이도경찰서에 연행, 구금되어 있던 조선인 700여명 중 400명을 아라카와에서 기관총으로 살해.

-야마모도 곤베이 신내각 출범, 비상 징발령 발표.

 

3-내각비상회의를 열고 '계엄사령부'를 조직, 간토지방에 약 35,000명의 군대 집결.

-'계엄령' 적용지역을 도쿄부와 가나가와현으로 확대. 각 사단에서 센다이, 히로시마, 도요하시 등으로 잇따라 연대 파견.

-도쿄부청은 전신문으로 군대, 경찰, '자경단'들에 '도로상에 나타나거나 주택, 기타 장소에 숨어있는 조선인들을 남녀노소 구별함이 없이 살해하라'는 명령 하달.

-명령을 접수한 '자경단'들은 총검, 소방용 갈구리, 도끼, 몽둥이, 죽창 등 여러가지 살인무기를 들고 도로, 가옥, 산림, 강기슭, 야산 등을 돌아치면서 조선인을 찾아내어 참혹하게 살해.

-특히 '쥬고엔 고줏센(1550)'이란 말을 발음시켜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조선사람들을 '인차'(바로) 그 장소에서 살해.

 

4-'계엄령' 적용지역을 지바현, 사이다마현으로 확대.

-사이다마현의 혼죠정 경찰구내 진보바라에서 무저항 상태의 조선인 100명 살해(그 안에는 여성과 어린이들도 있었음)

-간토계엄사령부와 '임시진재구호사무국'내 치안담당 총사령부역할을 하는 경비부, '조선인보호'를 위해 자경단의 핵심인 재향군인회와 청년단 등에 무기를 절대로 휴대하지 말고 조선인학살에 자중할 것, 앞으로 군대와 경찰의 지도밑에 행동해야 한다'는 내용의 '지시문' 발표(3~4)

-이는 조선인학살에 대한 사회 여론의 항의가 빗발치자 그것이 군대, 경찰 등 국가권력에 의한 소행이 아니라는 점을 내세우기 위해 치안담당기관에 그 책임을 '자경단'에 전가시킬 것을 강하게 지시한 것임.

 

5-'임시진재구호사무국 경비부', '조선인이 폭행 혹은 폭행하려 한 사실을 극력 수사하여 이를 인정하도록 하는데 노력할 것'이라고 한 극비문서 '조선문제에 관한 협정'을 작성.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에 의해 조선사람들에 의한 '폭행'이 많이 일어났으며 이 때문에 일본인들이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는 날조된 사실을 적극 유포시켜 조선인 대학살을 정당화하고, 동시에 국가 책임을 벗어나기 위한 것이 목적.

-일본정부, 완전한 보도관제 실시. '조선인 폭동은 있었다'고 억지로 몰아 붙이려고 함.

-94일부터 10월 중순까지 도쿄, 요코하마, 오사카 등 대도시 일간신문들은 강한 보도통제를 받았고, 전국 모든 출판물에는 '불령선인의 배후에 주의자', '선인과 주의자가 강탈, 강간을 저질렀다', '폭탄가진 선인 수십명 총살' 등 허위, 과장, 날조 기사 넘침.

-조선인을 보호한다는 명분아래 군대 및 경찰에 수용된 조선인들을 불탄 자리 정리작업 등에 강제로 동원.

 

6-일본 전국의 각 사단에 추가로 상경(上京) 명령 하달.

7-'치안유지령'을 긴급칙령으로 공포.

 

8-6일부터 8일에 걸쳐 도쿄와 그 주변에 전국의 사단파견부대 도착.

 

11-'임시진재구호사무국'내 사법사무위원회 제2차회의 개최, 조선인살해사건과 관련이 있는 자경단원들에 대한 검거를 진행하여 그들을 사법처리하고 동시에 조선인의 '불령행위'에 대해서도 엄중 조사할 것을 결정.

-결정에서 일본 정부는 조선인학살의 주범인 군대, 경찰을 사법처리대상에서 고의적으로 제외시키고, 그 하수인이었던 자경단원들만 법적처리 대상으로 삼아 조선인학살 만행에 대한 국가책임에서 벗어나려고 시도. 또 조선인의 '불령행위'를 강조함으로써 계엄령 실시와 조선인학살을 정당화하고 향후 자경단원들에 대한 처벌을 완화하려는 여건을 조성하려고 함.

 

15-'계엄령'해제.

 

17~20-도쿄(9.17), 군마, 사이다마(9.19), 요코하마, 지바(9.20) 등지에서 자경단원들에 대한 '검거', 그리고 형식적 재판 진행.

 

1020-'조선인 학살사건'에 대한 신문보도 해금.

 

101~19242월말-일본 [법률신문] 종합 결과, 재판을 받은 125명의 피고인 중 무죄 선고 2, 집행유예 91, 실형 선고 32(최고형인 4년은 2). 징역형을 언도받은 자들은 1924126일 일본 황태자 결혼 대사면(실제 복역은 3개월정도)

1926-일본 정부, 징역형 선고받은 자경단원들에게 훈장과 상금 수여

 

*재일 [조선신보] 1993.9.1 기사를 중심으로 북측 신문 보도내용 보완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에 대한 북한의 입장은 북의 대일 대표부 역할을 하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 기관지인 [조선신보]의 전신인 [해방신문] 194691일자에서 처음으로 확인된다."누구의 죄인가? 학살동포의 피를 살이라"는 제목으로 91일 추모대회를 알리는 기사에서 "192391일 일본 관동지방에는 대진재가 생기였다. 그때에 일본의 관헌과 군벌, 자본가와 지주들은 자기들에게 몰여오는 천벌을 일본에 있는 우리 조선동포에게 OO기 위하여 사실이 근거없는 여러가지 유언비어를 지여서 얼토당토 않은 수작으로 소위 '不逞鮮人殺!(불령선인을 죽여라)'하라고 불안한 인심을 선동하여 수만의 동포를 살해한 비극을 일으킨 날이다"라는 내용의 기사가 보인다.북한이 간토 학살 문제를 직접 다룬 첫 기사는 [노동신문] 19651227일자로 파악된다. 일조협회 자료를 인용해 '처참한 간토대지진 학살사건'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추모 기사는 45주기인 1968831일 일조협회와 일본종교인평화협의회가 공동주최한 '대지진시에 일제에 의하여 학살된 조선인희생자들을 위한 위령제' 소식이 그해 96일 도쿄 조선통신발로 처음 실렸다.사진은 해방 후 처음으로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소식을 보도한 [해방신문]. [통일뉴스 자료사진]

 

일본의 과거청산과 국제법적 책임

북은 과거청산이야말로 북일관계 정상화를 실현하는 기본 열쇠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렇지만 지난 2002년 고이즈미 총리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조인한 북일 평양선언에서 일본이 국가명의로 과거 식민지지배로 조선인에게 많은 손해와 고통을 준데 대하여 반성과 사죄의 뜻을 표명하고도 이후 납치자 문제를 빌미로 선언을 부정적으로 대하고 있다는 뿌리깊은 불신을 갖고 있다.

 

북이 생각하는 과거 청산은 '조선강점통치기간 우리 인민에게 저지른 전고미문의 범죄행위에 대하여 성실하게 인정하고 자기의 국제법상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일본이 식민지강점기간에 조선인을 대량학살한 것은 조선민족의 자주권과 '인민'의 생존권을 무참히 침해함으로써 국제법적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마땅히 그 국가는 정치적 책임,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

 

여기서 '정치적 책임'이란 국가권력에 의해 조직적이고 집단적으로 저지른 국제법상의 범죄에 대해 국가 자체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정치법률연구20033호의 논문 '조선강점시기 우리 인민을 대량 학살한 일본의 국제법적 책임'(로금철)에서는 국제법의 규범으로 제2차세계대전 후 독일과 일본의 주요 전범자를 다룬 '뉴렌베르크 국제군사재판소 규정''극동국제군사재판소 규정'을 기준으로 삼았다.

 

논문은 위 두가지 규정을 1950년 유엔국제법위원회 제2차위원회가 국제법의 원칙으로 정식화한 것으로 인정했다. 이에 따라 "일제의 조선인학살은 '국책'으로 작성되고 국가권력에 의하여 감행된 조직적이며 집단적인 국제법상의 범죄"임을 분명히 하고 "일본은 저들의 반인륜적 범죄에 대하여 인정하고 조선 인민앞에 국가자신이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 19681126일 유엔총회가 채택한 '전쟁범죄 및 인도주의에 반하는 죄에 대한 공소시효 부적용에 관한 협약'을 추가로 적용해 "조선강점기간 조선인민에 대한 대량학살을 계획, 준비, 조직, 명령한 자들, 그 집행자들 모두는 직위여하를 불문하고 자기가 감행한 범죄행위의 엄중성 정도에 따라 해당한 형사적제재를 받아야 한다"고 못박고 있다.

 

집단학살 범죄자를 처벌하기 위해 국가는 헌법에 의거하여 필요한 법률을 의무적으로 제정하도록 한 '집단살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1948129일 유엔총회 채택) 5조 규정을 준수하는 것은 '전쟁범죄의 근원을 청산하고 그러한 범죄가 다시는 감행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중요한 법적담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 당국은 과거 청산은 커녕 침략 과거사를 정당화하고 전범자들을 영웅으로 취급하여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등 끊임없이 과거 군국주의의 부활과 확대를 기도하고 있다.

 

북은 '일제의 전대미문의 죄악은 세기와 세대가 바뀌고 산천이 변한다 해도 영원히 지워 질 수 없으며 우리 인민은 일제에 대한 피 맺힌 원한의 대가를 반드시 받아 내고야 말 것'이라고 말한다.

 

논문은 '집단살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 6"집단학살에 책임 있는 자들은 행위가 감행된 국가의 합법적재판소에서 재판을 받는다"는 규정을 적용해 "조선인민은 일본 전범자들을 우리 공화국법에 의거하여 형사적 책임을 추궁할 당당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관동대지진 100년과 한 청년의 죽음

91일은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날이다. 일본 정부는 조선인 학살에 국가가 관여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일본의 시민, 재일조선인, 관련 연구자들이 진실을 밝히려 한다.

 

지난 717일 정오, 도쿄 근교 사이타마시 미누마구 조센지(常泉寺)의 한 묘지 앞에 시민 30여 명이 모였다. 그곳은 강대흥씨의 마음을 새기고 미래에 살리는 모임 실행위원회가 마련한 답사의 종착지다. 묘비의 정면에는 조선인 강대흥 묘라고 쓰여 있다.

1923년부터 세워진 비에 선인(鮮人)’이 아니라 조선인이라는 민족명과 개인의 이름, 94일 관동대지진 때라는 사망 시기, ‘소메야 일반이라고 묘를 만든 주체까지 기재되어 있다. 이렇게 다 적혀 있는 예가 없다고 한다.다나카 마사타카 제공

 

192391일 오전 1158, 규모 7.9의 강진이 관동(간토) 지방을 강타했고 92일까지 여진 다섯 차례가 이어졌다. 이로 인해 가옥 30만여 채가 무너졌다. 사망자와 행방불명자가 105000명 이상이며 200만명은 집을 잃었다. 모두 살길을 찾아 피난을 떠났다.

 

고향에 임신한 아내를 두고 도쿄에 와 있던 조선인 청년 강대흥(당시 24)도 피난을 떠났다. 그가 어디서 출발해 얼마나 걸어 어디로 가려 했는지 알 길이 없다. 확실한 것은 강대흥이 192394일 새벽 2시께 당시 가타야나기촌(지금은 사이타마시 미누마구 가타야나기 지구) 소메야 구역 자경단 5명에게 잡혀 살해되었다는 사실이다. 93일 밤늦게 우라와를 지나 걸음을 재촉하던 강대흥은 땡땡땡외부인이 나타났다는 것을 알리는 자경단의 종이 울리자 도망친다. 허겁지겁 도망쳐 도착한 두 번째 마을에서도 자경단에 들켜 다시 도망치지만 결국 소메야 지구의 자경단에 붙잡힌다. 그들은 강대흥을 칼과 죽창으로 20곳 이상 찔러 죽였다.

 

사이타마(도쿄 근교 지역)의 자경단은 왜 조선인을 경계하고 잔인하게 살해했을까? ‘불령선인(제국 일본이 자기네 말을 안 듣는 조선인을 불온하고 불량한 조선 사람이라 부르던 말)이 우물에 독을 탔다, 살인 방화를 저지른다라는 유언비어 때문일까? 아니다. 답사 해설을 담당한 세키하라 실행위원회 공동대표에 따르면, 가타야나기 지역의 경우 피난민들의 입을 통해 퍼진 유언비어보다 사이타마현 측이 각 군정촌 사무소에 보낸 통지문이 더 빨랐다. 이 통지문은 92일 오후 5시 사이타마현 지방과 과장이 내무성과의 회의를 마치고 현청으로 복귀한 뒤 현청의 내무부장에게 보고했고, 그 정보를 기초로 내무부장이 경찰부장과 협의해 작성했다. ‘불령선인 폭동에 관한 건 이첩이라는 제목의 이 문서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다. 도쿄에서 불령선인의 망동이 있고 또한 그 기간 과격한 사상(사회주의)을 가진 자들이 함께 일본인을 살해하려 드니 당국자는 재향군인분회, 소방대청년단 등과 일치단결하여 이를 경계하고, 공격을 받으면 재빨리 적당한 방책을 강구하라는 내용이었다.

 

100년 전 강대흥을 살해한 소메야 자경단의 후신인 자경소방단 앞에서 해설하는 세키하라 씨.이령경 제공

 

사이타마현에 도착한 피난민이 92일 새벽 무렵 500명에서 93일 오후에야 3만명으로 늘어난 것을 감안하면 이들을 통해 92일과 93일 사이 사이타마현 전역에 유언비어가 확산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미 92일 저녁 사이타마현은 관할 군청에 전화를 해서 통지문을 전달했고 군청이 다시 관내 각 마을사무소에 문서나 전화로 알렸다. 그저 입소문이 아니라 관청이 나서서 유언비어를 생산하고 그것의 신빙성을 보증하고 빠르게 전달했다. 그 결과 93일부터 각 지역에서 야경 보초를 서던 자경단이 불령선인을 경계하기 위한 조직으로 바뀌거나 새로이 조직된다. 가타야나기촌 소메야구도 오후 3시께 통지문을 전달받고 소방, 재향군인청년단이 공동으로 야간 경비를 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약 12시간 후인 94일 새벽 2시께 강대흥을 죽였다.

 

학살에 대한 국가 책임과 민중 책임

일본 역사학자 야마다 쇼지는 각지의 신문, 공문서, 자경단의 재판 판결문 등 문헌 조사를 통해 간토대지진(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의 학살에 대한 국가 책임과 민중의 책임을 규명해냈다(이하 2023년 재발간한 관동대지진 재해 당시 조선인 학살과 그 후-학살의 국가책임과 민중 책임참조). 지진 발생 당일인 91일 저녁부터 경찰관들이 조선인이 방화와 살인을 저지른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하고, 다음 날부터는 군인들도 적극적으로 유언비어를 유포하며 내무성 경보국장과 사이타마현 내무부장이 조선인 경계 지령을 내린다. 게다가 경찰관이 조선인 학살을 용인하는 발언까지 하기 때문에, ‘조선인을 여러 명 죽였다고 자랑하는 일본인이 나올 정도였다.

 

관동대지진 60주년 조선인 희생자 조사 추도사업 실행위원회가 엮은 책(숨겨진 역사-관동대지진 재해와 사이타마의 조선인 학살사건, 1987)에 따르면, 강대흥을 살해한 소메야 마을 사람들도 마을 사무소에서 지령을 내렸기 때문에 불령선인을 잡으면 훈장이라도 받을 줄 알았다고 말했다. 당시 신문은 마을 사람 두 명이 자기 발로 오미야 경찰서를 찾아가 악한을 잡아 못된 짓을 못하게 막았으니 상을 달라고 했다고 보도했다. 야마다 선생은, 소메야에서처럼 자경단원이 된 당시 일본 사람들은 천황제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투철했기 때문에 국가를 위해주저하지 않고 사람을 죽일 수 있었으며, 그 대상이 조선인이었던 것은 19193·1 독립만세운동 이후 조선인의 독립운동을 음모·암살·방화·강도라고 폄훼해 보도한 언론의 영향이 크다고 분석했다. 더해서 내무성 경보국장과 사이타마현 내무부장의 조선인 경계 지령, 군대의 출동과 92일 도쿄를 시작으로 94일 사이타마 지바현까지 확장된 계엄령 선포는 조선인에 대한 일본인 민중의 박해와 학살에 기름을 부었다.

 

강대흥이 걸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길을 안내하던 세키하라 대표는 답사 참가자들을 마을의 러일전역종군기념비앞으로 데려갔다. 이 기념비는 러일전쟁의 승리에 공헌한 사람들에 대한 감사와 출정한 사람들의 긍지를 후세에 전하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일본 각지에서 볼 수 있다. 뒷면에 이름이 새겨진 참전군인들 중 한 사람이 강대흥을 살해한 자경단의 지휘관이었다. 그는 20대에 러일전쟁에 참전해 타민족을 살해한 적이 있으며, 조선의 민중들과 싸우면서 조선 민중들의 저항과 반감에 직면했다. 그는 조선인에 대한 차별의식이 내재화된 제국 일본의 신민이었다.

세키하라 씨가 러일전역종군기념비 앞에서 자경단 지휘자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이령경 제공

 

더 심각한 문제는 학살 그다음이다. 국가권력은 국가책임을 피하기 위해 조선인에 의한 일부 폭행을 다수의 사실로 선전했고, 학살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자경단에게 전가했다. 그렇다고 자경단이 제대로 된 처벌을 받았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정상참작을 통한 집행유예가 많아 실제로 투옥된 비율이 낮았다. 강대흥을 죽인 소메야의 자경단 5명도 살인죄가 아닌 상해치사죄로 집행유예를 받았을 뿐이다. 야마다 선생은 자경단에 대한 재판은 보여주기식 재판이라고 비판한다.

 

재판 이후 특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조사한 세키하라 대표는 1924315일 소메야 자경단 5명도 특사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밝혀냈다. 당시 일본 정부가 단행한 황태자의 결혼 기념 특별 특사로 이 5명의 유죄 사실마저 깨끗이 지워졌다. 이 특사로 조선인 학살의 원인이 된 사이타마현 당국의 이첩에 대한 책임은 은폐되고 강대흥 학살 사건은 종료되었다.

 

관동대지진 당시 학살당한 조선인 피해자 명부가 없다. 누가, 어디서, 어떻게, 얼마나 학살되었는지 알 수 없다. 당시 일본 정부는 조선인인지 아닌지 구별하지 못하게 조선인 피해자의 사체를 재빨리 화장했다. 그리고 직접 진상 조사에 나선 조선인 유학생들의 활동을 방해했다. 1945년 패전 이후에 새롭게 들어선 일본 정부의 태도도 다를 게 없다. 19231215일 제국의회 중의원 본회의에서 나가이 류타로 의원이, 후나바시 해군 무선전신송신소에서 타전한 내무성 경보국장의 전보 등 정부기관이 유언비어를 퍼뜨린 증거를 내보이며, 정부 책임을 밝히고 학살 피해자와 유족을 위로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을 강구하라고 촉구했다. 당시 정부는 조사 중이라고만 답했다.

 

100년의 공백을 메워온 시민들

그리고 2023523일과 615일 일본 입헌민주당과 사회민주당의 의원이 직접 대정부 질의를 했다. 대정부 질의에 앞서 2015년부터 8차례에 걸쳐 야당 의원들은 정부에 질의서를 제출했다. 국립국회도서관 등에 소장된 사료를 근거로 조선인과 중국인 학살 사실 인정과 그 후 조사, 당시 정부 대응에 대한 현 정부 인식 등 견해를 물었지만, 정부는 정부 내에 사실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기록이 없으므로사실에 대한 평가와 조사를 할 생각이 없다는 답변만 되풀이했다. 그래서 결국 100년 만에 국회에서 대정부 질의를 하게 된 것인데, 서면과 같은 궤변을 늘어놓으며 조선인 학살에 국가가 관여한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지금까지 진행된 연구와 운동을 통해 밝혀진 사료와 성과를 외면한 채, 지금 자신들 손(정부 내)에 사료가 없다면서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기만적 태도로 일관했다.

 

이런 일본 정부를 대신해 일본의 시민, 재일조선인, 관련 연구자들이 100년의 공백을 메우며 진실을 향해 전진한다. 이들은 도쿄도·가나가와현·지바현·사이타마현·군마현에서 발생한 일부 학살 실태와 군대·경찰·주민들의 관여 사실을 밝혀냈다. 해방 후 재일조선인들이 시작한 위령제는 각지로 번져 이어지고 있다. 100년을 맞은 올해 각종 관련 행사들은 조선인과 중국인 학살에 대한 국가책임과 함께 일본 민중의 책임을 거론한다.

관동대지진재해 조선인 중국인 학살 100년 희생자 추도대회 전단지. 추도회 실행위원회 제공

 

일본 민중에게는 과거 학살에 가담한 책임을 반성하는 것은 물론 지금의 일본 정부에 진상규명을 요구해야 할 책임이 있다. 100년 동안 그것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일본 사회에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을 부정하거나 학살을 정당화하는 책자가 버젓이 발간되고 있다. 이 주장을 근거로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는 조선인 학살에 대한 여러 설이 있다2017년부터 조선인 희생자에게 추도문 보내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일본 정부의 조사 거부와 고이케 도지사의 행동이 역사를 왜곡하는 세력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

 

강대흥씨의 마음을 새기고 미래에 살리는 모임 실행위원회는 우리가 가야 할 미래를 향해 움직인다. 실행위원회는 오는 94일 강대흥의 손자를 일본에 초청해 함께 추도식을 지낸다. 그날 조센지에 잠든 강대흥과 고향에 가묘를 만들어 100년 동안 제사를 지내온 후손이 만난다.

시사인 도쿄이령경 편집위원

 

조선인 대학살 그때 그 사진들

기록사진 연구가 정성길씨는 1974년부터 간토대지진 당시 자행된 조선인 학살 관련 사진을 수집해왔다. 그는 아베 정권의 만행 축소기도를 저지하고, 위령탑 건립을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성길씨(77·대구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는 기록사진 연구가다. 8·15 광복절, 정씨는 40여 년간 수집해온 간토대지진(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 관련 사진 자료를 들고 시사IN편집국을 찾았다. 정씨가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관련 사진을 수집하기 시작한 때는 1974년이다. 독일에 출장을 간 그는 베를린 도서관에 소장된 희귀 기록사진을 발견했다. 구한말 조선의 풍물사진과 일제가 저지른 만행의 흔적이 담겨 있었다. 프랑스·영국으로 사진 수집 범위를 넓혔다.

 

당시 조선과 일본에 파견된 유럽 각국 선교사 또는 군 장교의 카메라에 담긴 흑백사진이 적지 않았다. 수집한 사진으로 전시회도 열고 사진집도 냈다. “영국 군인의 눈에 비친 간토대지진과 조선인 학살 관련 사진은 그동안 어디서도 볼 수 없던 희귀 사진이라 소중히 보관해왔다.”

192391일 일본 도쿄·요코하마 등 간토 지역에서 7.9 규모의 강진이 일어났다. 사망자 10만여 명, 부상자 5만여 명이 발생했다. 일본 정부는 계엄령을 내렸다.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키고 방화와 강간을 저지른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푼다따위 유언비어가 퍼졌다. 일본 전역에 불안이 고조되면서 광기가 난무했다.

 

간토대지진이 일어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는 일본 현지에 비밀조사단을 파견했다. 조선인 학살을 확인한 임정은 외무대신 조소앙 명의로 일본 총리에게 항의 서한을 보냈다. 일본은 물론 묵살했다. 당시 독립신문은 조선인 피학살자 수가 6661명으로 집계되었다고 보도했다. 19243월 독일 외무부 문서는 조선인 피학살자 수를 23058명으로 기록했다.

 

일제는 조선인 시신을 암매장하거나 화장하고 언론에 보도 금지령을 내렸다. 군대와 경찰이 저지른 학살을 은폐한 뒤, 흥분한 민간인 자경단 소행으로 돌렸다. 조선인 학살 사건은 모조리 자경단이 공황 상태에 빠져 자행한 민간인 단순 범죄로 처리되었다. 조선인 학살 혐의로 재판에 회부된 자경단원도 대부분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됐다.

 

군대와 경찰의 조선인 학살 은폐

하지만 학살 현장을 목격한 양심적 일본인들의 입마저 막을 수는 없었다. 일본 패망 뒤 그들이 증언에 나서면서 부분적으로나마 학살의 참상이 알려졌다. 일부 지역에서는 희생된 조선인의 넋을 기리는 위령탑도 세워졌다. 전후 일본의 중·고교 역사 교과서에도 간토대지진을 설명하면서 조선인 수천명이 군경과 자경단에 학살당했다는 내용이 수록됐다.

 

하지만 아베 정부 이후 간토대지진 때 일본이 저지른 만행을 축소하려는 시도가 계속됐다. NHK 보도에 따르면, 2013년 요코하마시 교육위원회는 중학생용 부교재에서 군대와 경찰이 조선인 학살을 자행했다는 내용을 삭제했다. 대신 학살살해라는 표현으로 바꿨다. 2019326일 일본 문부과학성 검정을 통과한 도쿄서적은 다수의 조선인과 중국인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있었다라고만 적었다.

 

한국 정부도 간토대지진 조선인 대학살에 둔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임정은 사건 당시 실사를 했지만 이승만 정부는 이를 제대로 조사하거나 기록하지 않았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과정은 진상규명을 위한 기회였지만, 포괄적인 청구권협정 타결을 밀어붙이는 일본 앞에서 박정희 정부는 간토 대학살을 언급하지 않았다.

 

2006년 한·일 시민단체 대표가 대통령 직속의 독립기관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화위)’에 간토대지진 조선인 대학살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를 신청했다. 일본 정부에 책임을 묻기 위한 절차였다. 진화위는 일본 내에서 발생한 사건이라 조사 권한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간토 대학살에 대한 국가 차원의 조사와 해결의 길은 또다시 좌절됐다.

 

정성길 관장은 2013년부터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을 널리 알리기 위해 사진 전시회를 열고 위령탑 건립운동을 벌였다. 일제의 만행이 담긴 사진을 모아 일제침략시대를 펴냈다. 그는 우리가 외교적으로 엄중히 대응해도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 기록이 부족하면 결국 외교 마찰로 끝날 뿐이다라고 말했다. 역사 사진과 영상기록 수집 및 관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했다. 그는 청소년들이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을 얼마나 아는지도 조사했다. “중고생 대부분이 모른다고 했다. 혹은 1930년대 말 일제가 간도 거주 조선인을 상대로 벌인 학살인 간도 사건과 혼동했다.”

시사IN 신선영 정성길 관장이 간토대지진 학살 당시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 오른쪽에 있는 일본인은 시신에 소변을 보고 있다.

정 관장은 조선인 대학살 위령탑 건립에 정부 지원을 기대하고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일본 아베 정부와 위안부 합의 및 강제징용 재판 거래를 물밑에서 추진하던 박근혜 정부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는 국회로 발길을 돌렸다. 마침 제19대 국회에서 유기홍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주도해 여야 의원 103명의 서명을 받아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발의해둔 상태였다. “정부에 간토대지진 학살에 대한 별다른 자료가 없다 보니, (유 의원 쪽에서) 내가 그동안 수집한 희귀 사진 자료를 매우 반가워했다. 그런데 20대 총선에서 대표 발의자인 유기홍 의원이 낙선해, 국회에서 이 법안에 다시 불씨를 살릴 사람이 필요하다.”

 

그는 정부가 하지 못하면 시민들이 나서야 한다. 독일 총리가 나치의 유대인 학살 추모비에서 묵념하는 것처럼 일본 총리가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위령탑 앞에서 추모하는 게 소원이다라고 말했다.

 

20143월 일본 작가 가토 나오키는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을 소재로 책을 냈다. 9, 도쿄의 길 위에서라는 제목이다. 가토 작가는 도쿄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집필 동기를 이렇게 밝혔다. “도쿄에서 혐한 시위대가 불령조선인(不逞朝鮮人:일본에 불복종하는 조선인)’이라는 글자가 적힌 플래카드를 든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도로에서 조선인을 죽이자는 말이 나온 것은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이후 요즘이 처음이다. 과거와 현재가 직결돼 있다.”

시사인 정희상 기자 2019.09.13

 

간토대지진 100년 은폐된 조선인 학살 특별전 포스터 [고려박물관]

 

 

남북이 하나되어 민족을 되찾는 것!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강요된 망각과 시무(時務)의 역사연구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기를 돌아보는 모든 이가 필연적으로 만날 수 밖에 없는 한 인물이 있다. 일본 히토츠바시 대학 교수를 거쳐 시가현립대학 명예교수를 지내면서 일본제국주의와 조선민족이 얽혀든 근대사를 필생의 업으로 삼아 탐구한 강덕상 선생이다.

그중에서도 1963년 강덕상 선생이 친구인 금병동 선생과 함께 펴낸 현대사자료 (6)-관동대지진과 조선인(미스즈서방)은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문제를 탐구하려는 이들에게는 대체 불가능한 결정적 자료의 보고이다.

 

일본이 극구 감추려 했으나 2차 세계대전 패전 후 미국에 압수당한 공문서 상당수를 찾아내어 연구자들을 위한 기초자료로 공개했기 때문이다.

 

강덕상 선생의 제자인 이규수 전북대 연구교수는 "단순한 사료 영인본이 아니라 뚜렷한 관점을 가지고 해제한 독보적 자료집"이라고 설명한다.

 

20216월 타계 직전 강덕상기록간행위원회가 일본에서 먼저 발행하고 그해 10월 국내에서 번역 출간된 시무의 역사학자 강덕상(어문학사)에는 강 선생의 육성으로 평소 알고 지내던 일본 국회도서관 사서로부터 미국에서 돌아온 반환문서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GHQ'(General Headquarters, 연합국 최고사령부)가 압수해 간 자료를 접하게 된 경위가 기록되어 있다.

 

2차세계대전 승리 후 미국은 GHQ를 통해 일본의 공문서를 압수해 갔으며, 뒷날 반환된 문서에는 육군 관련 자료는 많이 소각되어 없었지만 해군 자료는 상당히 남아 마이크로 필름으로 보존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걸 열람하다 발견한 것이 관동대지진 공문비고(公文備考).

강 선생은 평소 아버지로부터 많이 들었던 '관동'(간토)대지진 자료임을 알아채고 대단한 자료라는 걸 직감했다. 이걸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하면서 "이것은 나에게 '시무(時務)의 역사', 하나의 자료로 남겨야 한다는 걸 그때 다짐했다"고 술회했다.

 

일찍이 선배이자 스승인 재일 사학자 박경식 선생이 시무란 '시대의 의무', '지금 역사가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라는 깊은 뜻을 알려주었지만, 전적으로 동감은 하면서도 선뜻 갈피를 잡지못했던 마음이 그때 바로 섰다. 말 그대로 평생의 연구 주제를 잡은 것이다.

 

대출이나 복사가 되지 않는 상황이어서 음식점을 하며 가계를 책임지던 부인 문영자 여사까지 불러내 자료 필사에 매달렸다.

 

친구인 금병동이 간다(神田) 헌 책방에서 수집한 자료를 내놓았다. 두 사람은 2~3년간 관헌문서를 비롯해 간토대지진과 관련된 자료 등을 모아 함께 정리했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것이 현대사자료. 1963년엔 미스즈서방에서 현대사자료6-관동대지진과 조선인이 출간됐다.

 

1945년 일본의 패전과 조선의 해방 전까지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문제는 일절 논의된 바 없었다. 그러다 1960년대 박경식과 강덕상 등 재일 조선인 사학자들이 연구를 시작했으나 대중적 역사서는 50주기가 되는 1973년 소설가 요시무라 아키라가 쓴 관동 대지진이 최초였다.

 

그리고 2년이 흐른 1975년 강 선생의 관동대지진(공중신서)이 출간됐다.

요시무라는 도무지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간토학살의 원인을 ''대지진에 의한 사회적 혼란, 집단적 정신이상'이라고 분석했고,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국가 범죄를 인정하지 않는 일본 사회의 일반적 인식은 '미증유의 사태에서 발생한 집단적 정신이상'이라는데 머물러 있다.

 

강 선생의 결론은 이와 달랐다.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에는 일본 국가권력, 군대와 자경단의 책임이 크다는 것. 조선인 폭동설 등 유언비어는 자연발생적으로 퍼진 것이 아니라 지진 당일부터 논의된 전시계엄령과 계엄사령부에 의해 의도적이고 조직적으로 유포되었으며 조선인 학살을 명령한 주체도 국가권력이었다는 것이다.

 

이성시 재일한인역사자료관장은 지난 18일 오후 관동대지진 '학살부정'의 진상(도서출판 삼인) 저자인 와타나베 노부유키 전 아시히신문 기자 초청 북토크에서 "(간토학살의 원인과 관련해 일본에서는 ) '일본인의 집단적 정신이상설''제물이 된 조선인'이라는 두가지 유력한 가설이 50년 전에 나왔다. 그후로는 아무런 학술적 발전이 없었다. 사고정지 상태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일본 사회의 변화도 별반 없었다"고 말했다.

 

한국사회에서는 불과 10년전부터 간토학살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생기는 수준이었고 매우 가슴 아프게 받아들이지만 일본에 있는 동포들의 문제이기 때문에 조금은 외부화되는 경향이나 서로 차이가 많은 학살의 기억을 되새기는데 대한 부담스러움 등이 은연중 남아있다.(조경희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부교수)

 

그래서 1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역사적 사실을 밝히고, 그런 과정에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기억의 사회화'가 좀 더 나아가야 하는 상황이다. 100년이 지났지만 이제 다시 시작해야 하는 시점이 아닐까?(위 조경희 부교수)라는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다시 강덕상 선생의 회고이다.

1945815일 일본에 거주하던 230만명의 조선인은 불과 반년만에 65만명으로 줄어들만큼 일본 사회는 조선인에게는 살기 어려운 외국이었다.

 

"2의 간토대지진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조심하라."

똑같이 당한 대지진의 참혹상 앞에서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군경과 자경단에 의해 무차별한 죽임을 당해야 했던 트라우마는 지금까지 이어지는 역사가 되어 한일관계의 심연에 자리잡고 있다.

 

일본의 진보적 학자들이 간토대지진 당시 소위 3대학살사건(일본인 사회주의자 학살, 중국인 학살, 조선인학살)을 동열에 놓고, 특히 일본인 사회주의자 학살에 대해서만 연구하는데 대해 강 선생은 단호히 반대한다.

 

본질에 있어 일본인 사회주의자의 학살은 일본내 계급문제이며, 당시 중국은 중화민국이라는 국가가 조사도 하고 그에 따른 배상과 유해 송환도 진행했지만 조선인 학살은 의도적으로 잊혀졌다는 것.

 

식민통치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는 '불령선인'의 역습에 대한 두려움이 일본내에 집단적으로 공유된 상황에서 조선인 학살은 벌어진 일이며, 700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진 중국인 학살도 사실은 조선인으로 오인한 죽음인 경우가 있었다는 점에서 한데 섞어서 말할 일이 아니라 구별해서 분명히 '조선인학살'을 다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왜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에 대한 집단적 학살, 제노사이드가 발생했는가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어떨까?

 

"지진의 위험성으로부터 시작해서 차별, 편견, 유언비어를 내보내고 학살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침략과 저항이 낳은 민족대결의 산물이다. 이것이 내 결론이다."

지난 2013620일 서울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교육원에서 열린 간토학습회에서 발표에 나선 강덕상 선생. [자료사진 통일뉴스]

 

지난 2013620일 한국을 방문해 '1923한일재일시민연대'가 주최한 간토학습회에서 강 선생이 강조한 결론이다.

 

2013년 발표한 논문 한일관계에서 본 관동대지진(관동대지진과 조선인학살동북아역사재단)에서는 "지진에서 어떻게 계엄령이 나왔는가를 생각할 때,...30년에 걸친 전사(前史), 즉 갑오농민군과의 전쟁, 그리고 러일전쟁 후 일본의 강점에 반대해서 전 국토를 피로 물들게 한 7년에 걸친 의병전쟁을 포함한 '적대시' 사상의 형성을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간토학살의 본질인 민족 적대시대결 관계는 1894년 청일전쟁부터 19193.1운동을 거쳐 1923년 간토학살로 나타났으며, 식민지통치기간 내내 이어지다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게 1894년 청일전쟁은 갑오(동학)농민혁명을 압살하기 위해 출병한 청일 양군의 무력충돌로 발생한 일이다. 갑오농민군에게는 반혁명적 내정간섭과 침략이었다. 갑오농민군과 일본군의 대전쟁, 즉 죽창을 든 농민군을 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이 대살륙한 '1차 한일전쟁'이라고 풀이했다.

 

10년이 지난 1904년 벌어진 러일전쟁 역시 1906년부터 1911년사이 국권 회복을 위해 무장투쟁에 나선 의병들이 일본군에 의해 살해당한 민족 참극이었다.

 

1910년 조선총독부가 생겼고 총독은 현역 육해군대장이 아니면 될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총독정치는 군사적 대응을 필수적으로 동반하는 헌병통치였다.

 

비폭력 만세운동이라는 측면이 부각된 19193.1운동은 일본의 쌀 폭동과 중국의 5.4운동과 달리 엄청난 사망자가 나왔다. 일본의 조선지배에는 '적시' 정책과 전쟁상태라는 인식이 저변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자료가 있다. 경신참변((庚申慘變)이라 부르는 간도참변이다. 간토학살 3년전 일본군은 만주를 침략해 간도에 거주하며 활발한 독립투쟁을 벌이던 조선인들을 최소 3,469명 이상 무차별 학살했다.

 

19201029일 일본군 수백명이 연길현 세린하 방면에 이르러 조선인 가옥 수백호를 불태우고 주민 다수를 총살했다. 다음 날 오전에는 약 5km 떨어진 청구천 부근에서 조선인 부락 70여 호가 불탔고 500여발의 총탄을 발사하며 마을을 포위 공격했다. 거주 조선인 300여명 중 간신히 달아난 자는 불과 4~5명이었다.

 

일본군 작전의 특징은 독립군과 일반 주민을 구별하지 않는 것이다. 조선 그 자체가 불령한 적이었던 것이다. 일본이 정한 질서를 따르지 않는 모든 것들은 즉시 처형한다는 것이 그들의 원칙이었다.

 

"가혹한 지배를 하는 일본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이는 일본이라는 나라의 나약함의 표현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다." 강 선생이 도달한 또 다른 결론이다.

 

이규수 교수는 시무의 역사학자 강덕상옮긴이의 말에서 강 선생의 요지를 이렇게 정리했다.

 

'일본의 길모퉁이에는 반드시 조선이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조선사는 일본사의 왜곡을 바로잡는 거울이다'로 축약되는 연구의 시작.

 

강 선생은 '일본인이 귀를 막고 눈을 감은 역사! 가만히 두고 언급하지 않으려 한 숨겨진 역사!'의 규명이 재일사학의 본령이라고 후학들에게 강조했다.

 

결론은, "역시 민족을 되찾는다는 것! 이것은 사상이 아니다. 남북으로 나누어지게 한 것은 좌와 우이다. 이것은 사상이다. 그 뒤편에는 공통의 민족체험이 있다. 이것을 회복한다는 것! 이게 가장 중요하다"라는 것이다.

 

 

1923간토 조선인 대학살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기 특집 특별기고-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들어가는 말

 

간토(關東) 조선인 대학살이 있은 지 올해가 100년이다. 가해자인 일본 정부와 군경은 애써 이를 외면하고 있으며, 피해자측에서도 정부나 국회 모두 이에 대한 역사적인 책임을 묻지 않고 있다. 간혹 한일관계의 아픈 상처를 씻어내야 한다고 양념삼아 들먹이고는 있지만, 두 나라 사이에는 이 문제를 정식 의제로 상정하여 이 큰 상처를 풀어보려고 하는 의도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도 역사의식이 있는 한일 양국의 인민들 가운데는 저 비극의 역사를 그냥 방치해 둘 수 없다고 하면서 그 비극의 실상을 밝히고 역사 앞에 사죄해야 한다고 꾸준히 주장해온 이들이 있다. 1963년 재일사학자 강덕상(姜德相)과 금병동(琴秉洞)<현대사 자료 6: 간토대진재와 조선인>을 출간, 이 문제에 대한 학문적인 정리에 힘썼다.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사건을 규명하려는 한국측 시민운동과 관련해서는 김종수가 언급한 것이 있다. 일본의 시민단체도 간토지역에서 자행된 조선인 학살을 잊어서는 안된다면서 추도행사를 계속하는 이도 있다. 일본 시민단체들도 관심을 갖고 추모행사를 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일조협회는 197391, 도쿄 요코아미쵸 공원에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를 세우고 50년 동안 추도식을 열고 있으며, 니시자키 마사오 봉선화 이사는 1982년 이래 학살 장소인 아라카와 강변에 자리잡고 진상규명과 추도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비극의 역사를 잊지 않으려는 일본 시민과 단체들에 대해 감사의 말을 먼저 전하지 않을 수 없다.

 

간토조선인학살은 그것을 치유하지 않는 한 언제나 간헐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아픈 상처다. 그 비극이 일어난 지 100년을 맞아서도 일본은 이 상처를 아물게 할 조치를 선제적으로 취하지 않는다. 동양에서 가장 일찍이 근대국가로 발돋음했다는 일본이 왜 이 야만적인 제노사이드를 없는 듯이 방치해 왔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이 탈아입구(脫亞入歐)의 호기를 부리며 자기들은 동양의 야만인들과는 다르다고 하면서, 유럽인들이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를 상대로 야수적인 학살을 자행했던 것과 같이, 이같은 학살행위를 국가 공인 하에 거리낌 없이 자행했던 것일까.

 

일본이 간토대학살과 관련하여 지금까지 보여준 자세는 근대국가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야수적이었다.

 

그 동안 간토대지진 때의 조선인대학살에 대해서는 당시 일본 정부나 조선총독부가 이를 정직하게 밝힌 바 없다. 그 원인이나 진행과정, 가해자와 희생자들, 특히 당시 일본의 군(自警團)에 의해 희생된 이들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공식적으로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는 그 사건의 전말과 관여자 및 희생자들의 전모를 파악하고 있을 일본 정부가 제대로 이 사실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19239, ‘간토대진재(關東大震災)를 계기로 조선인대학살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중국인, '류구인'(琉球人, 오키나와인)에 대한 학살도 있었고, ‘대역(大逆) 사건이라 하여 무정부주의자(혹은 공산주의자)들을 소탕하려는 계획도 있었다. 박열과 가네코후미코(金子文子)와 관련된 사건도 이 때 일어났다. 여기서는 <간토 조선인 대학살>에 국한해서 언급하겠다.

 

간토대지진 전체 지역 조감도.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한국이민사박물관 기획특별전 재촬영]

 

1. 1923간토대지진과 조선인 대학살

192391일 토요일 1158, 도쿄(東京)를 중심으로 한 간토 일대에 진도 7.9의 대규모의 지진이 발생했다. 진원지는 가나가와(神奈川) 현 앞바다인 사가미(相模) 만에서부터 도쿄 만, 지바(千葉) 현이 있는 보소(房總) 반도까지 간토 지역 남쪽 바다를 아우르는 넓은 지역이었다. 이 지진은 간토 지역의 (), 6()에 걸쳐 있었으며 이로 인해 99,331명이 사망하였다. 가옥 파괴로는, 128,266 가옥이 전파되었고 126,233 가옥이 반파되었으며, 소실된 가옥 수는 447,128호에 달했다.(피해규모는 여러 형태로 알려져 있어서 그 숫자는 주장하는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다.)

 

수치에 차이가 있지만 2015년에 번역된 가토 나오키(加藤直樹)구월, 도쿄의 거리에서-1923년 간토대지진 대량학살의 잔향-에서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썼다.

 

도심은 거의 괴멸상태였다. 지진이 점심 무렵 일어난 탓에 화재 피해는 더 컸다. 무너진 가옥에서 새어 나온 불길이 동시다발적인 화재를 일으키며 강풍을 타고 퍼져 나갔다. 화재는 93일 아침에야 완전히 진압되었다. 도쿄 시의 약 44%가 소실되었고, 요코시마의 경우 80%에 달하는 지역이 소실되었다. 도심의 광범위한 지역이 불타 허허벌판이 된 탓에 다음 날, 구단자카 언덕 위에 서면 도쿄 만이 보일 정도였다고 한다. 파괴된 가옥은 약 293천동, 사망자와 행방불명자는 10만 오천명을 넘었다. 피해 총액은 당시 국가 예산의 3.4배에 달했다.”

그 무렵 오산을 졸업하고 일본 유학길에 나섰던 함석헌은 지진 당일 간토대지진을 경험하고 뒷날 내가 겪은 관동대지진(함석헌전집 6, 255-296)이란 긴 글을 남켰다. 당시 그는 정주 오산학교를 마치고 유학차 도쿄 유시마(湯島)에 하숙하면서 간다(神田)에 있는 세이소쿠(正則)학교에 다니다가 그 무렵 하숙집을 혼고구(本鄕區) 사카나마치(肴町)로 옮겼다. 그는 91일 아침, 유시마에 있는 지인 함덕일(咸德一)을 만나러 갔다가 그곳에서 지진을 당하게 되었다. 함석헌은 그 때 직접 경험한 간토대지진을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만세 부르고 헤어진 후 못만나고 있던 그[함덕일]5년만에 여기서 만나 그런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 동안에 정오가 거의 다 됐습니다. 그래 시계를 끄집어내 보며 일어서 가려고 하니 덕일이가 붙잡으며 점심 때가 됐으니 점심을 먹고 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앉을까 말까 망설이는 순간 갑자기 우르르 하고 진동이 왔습니다. 입에서마다 지진이다!’하고 외침이 나왔습니다.그래 우리도 첨엔 상당히 강하기 때문에 지진이다하면서도 나가려고는 아니 했습니다. 그러나 웬걸, 조금 있다간 흔들흔들 또 조금 있다간 흔들흔들 점점 심하게 오는데 보통이 아닙니다. 순간 겁이 번개같이 머리들을 스쳤습니다. ‘나가야 한다!’황급히 층계를 달려내려와 현관을 썩 나서니 지붕에서 떨어지는 기왓장이 비오듯 합니다. 빈 곳으로 달려가려 하니 어찌 심이 흔들리는지 걸음을 옮겨놓을 수가 없습니다. 전신주를 바라보니 노대(태풍) 만난 뱃대처럼 누웠다 일어났다 합니다.조금 뜸해지는 것을 타서 사방을 바라보니 사람마다 집앞에 서서 두 손을 싹싹 비비며 오 가미사마(神樣), 오 가미사마하고 부르는 것입니다.조금 있노라니 사람들이 모두 이삿짐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첨에는 무슨 영문인지를 몰랐습니다. 후에 들으니 지진이 심하면 반드시 화재가 난답니다.후에야 안 일이지만 그때가 바로 정오 직전 모든 집에서 점심 준비를 하고 있던 때이므로 불을 많이 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강한 지진이 왔기 때문에 모두 집이 무너지고 치어 죽을 생각만 하고, 미처 불을 끌 생각을 못하고 그냥 놓고 달려나갔기 때문에 사방에서 불이 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지진으로 수도관이 모두 끊어진 데가 많기 때문에 불끌 물을 구할 수가 없어져서 더 심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의 전 시가 다 타버렸습니다.”(함석헌전집6 268-270)

 

함석헌의 술회는 더 계속된다. 그는 자기 하숙으로 돌아오지 않고 친구와 함께 간다쿠(神田區)가 활활 붙타는 것을 보면서 우에노(上野) 공원으로 가서 거기에 있는 시노바츠노이케(不忍池)라는 넓은 연못을 의지, 불길을 피하면서 수많은 사람과 함께 몇 시간 동안 피난하다가 자기 하숙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밤에 바람이 연못 쪽으로 불어 불길이 연못가의 피난민들을 덮치게 되자, 연못가의 피난민들은 불길을 피하려다 대부분 연못에 빠져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함석헌은 자기 하숙으로 돌아와 생명을 건졌지만 그 뒤 이제 진짜다!’라고 표현한 조선인 사냥, 즉 조선인 학살을 경험하게 되었다.

 

간토대지진45만여의 가옥을 파괴했고 10여만명의 이재민을 냈다. 대지진은 생명과 주거를 잃은 민중들의 이성을 마비시켰고, 이를 수습해야 할 정부는 책임전가를 위한 유설(流說)을 퍼뜨렸다. 책임전가 음모의 일환으로 나온 것이라고 밖에는 해석될 수 없는 유언비어가 난무하기 시작했다. ‘조선인이 방화하고 있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풀고 있다’, ‘조선인이 부녀자를 강간하고 있다는 등 사회불안을 조성하는 내용이었다. 자연재해에 의한 사회불안을 인위적으로 그 사회의 약자에게 전가시키려는 수작이었다. 이 내용이 조선인과 관련된 것이 많다는 점에서 일본 사회는 이 엄청난 자연재해에 대한 희생양을 찾았던 것이다. 당시 일본 사회에서 사회적 약자라 할 조선인이 주 타깃이 되고 지나’(중국)인과 류구인, 공산주의자들도 희생 대상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정부는 치안을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계엄령을 발포, 도쿄부 전 지역과 가나가와 현으로까지 확대시켰다. 일본 헌법 제 8조에 규정되어 있는 계엄령은 전쟁 또는 사변시에 대외방비를 목적으로 일반 행정권을 정지시키고 군에 의해 국민생활을 통제하도록 한 것이다. 계엄령법 제 1조는 계엄령은 전시 혹은 사변 시의 병비(兵備)로서 전국 혹은 한 지방을 경계하는 법이다라고 명시하여 전쟁 또는 사변이 일어났을 때에 발하는 것이다. 그 전에는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 등 모두 전시하에서 선포되었던 것이다. 강효숙은 당시 발포된 계엄령이 전시가 아닌 상황에서 발포되어 계엄법을 따르지 않았고 추밀원 고문의 자문도 받지 않아 절차상의 하자도 있었다고 지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엄령이 발포됨으로 계엄령이 아니면 다스리지 못할 위기 상황이 발생했다는 잘못된 신호를 일본 사회에 주고 있었다.

 

계엄령을 유발한 유언비어에 대해서는 그 진원지를 두고 내각설, 군벌설, 경시청설, 사회주의자설 등이 있다. 당시 도쿄의 히비야(日比谷)공원이나 궁성 앞에 50, 우에노(上野)공원및 야스쿠니(靖國) 신사 등에 10여만명 등이 모여 극도의 혼란과 사회불안이 조성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무대신 미즈노 렌타로(水野鍊太郞)와 내무성 경보국장 고토 후미오(後藤文大), 경시총감 아카이케 미노루(赤池濃) 등이 사실상 치안대책을 총괄하면서 비상수단으로 계엄령 선포를 논의했고 군 당국자에 대해서도 군대의 출병을 요청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가 91일 오후 2시경이었다.

 

문제는 전시나 내란에만 선포토록 된 계엄령을 선포할 명분이었다. 당시 내무대신이었던 미즈노 렌타로는 계엄 선포이유를 조선인 내습이라는 폭동설 때문이라고 밝혔다. 일본 정부는 92일 오후 6시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 무렵이면 일본 정부가 조선인 폭동에 대한 유언비어를 조직적으로 유포하고 있었다.

 

강덕상은 간토대학살 당시 계엄사령부에 관련된 인사들 중에는 식민지 조선에서 활동한 이들이 많았다고 지적한다. 지진이 일어났을 때 내무장관이었던 미즈노 렌타로는 조선 정무총감으로 있다가 영전해 왔으며, 조선의 내무장관을 역임한 우사미 가쓰오(宇佐美勝夫)는 지진 당시 동경부지사였다. 관동대지진 당시 군사참의관 4명 중 가장 우수한 우쓰노미야 미야타로(宇都宮太郞)3.1운동 당시 조선주둔군 사령관으로 7천 수백명을 살해했고, 오바 지로(大庭二郞)3천 수백명을 죽인 간도사건 침공군 총사령관이었다. 간토대지진 때 도쿄 주둔의 제1사단장 미시미쓰 나오미(石光眞臣)3.1운동 당시 헌병사령관이었고, 간토대지진 때 계엄사령부 참모장인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는 뒤에 조선 총독이 되었다.

 

따라서 강덕상은 이 때 계엄령을 발동한 원인으로 식민지 반란과 사회주의적 항일세력의 출현, 시베리아 출병과 패배, 청산리전투의 대패 등에 따른 위기감과 관련시켜 설명했다. 강덕상, 한일관계에서 본 관동대지진」『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33-35, (동북아역사재단, 2013)

 

일본에서도 계엄령 선포는 전쟁 또는 사변을 전제로 한 것으로 대외 방어를 위해 행정권을 정지시키고 군이 국민생활을 통활토록 한 것이다. 그래서 일본군의 통활 하에서 이뤄진 조선인 학살은 일본 내에서 발생한 일본 민족과 조선민족 사이에 발생한 민족전쟁과 다를 바가 없었다.

 

눈여겨볼 것은 계엄령이 발포되기 전에 군대가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일본군 보병여단 제1연대가 91일 밤 10시에 출병했을 때는 계엄령 반포 전이었다. 피난민 구호가 출병목적이었다고 하지만 그들이 치바현 나라시노(習志野)와 이치가와(市川)의 고노다이(国府台)에서 도쿄로 진군한 후 92일 오전 9시경부터는 도쿄 고토(江東)지역 거주 조선인 학살로 그 목적이 변경되어 있었다. 재일조선인은 단지 조선인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유 없이 일본군에게 일방적으로 학살당한 것이다.

 

당시 경시청 자료에서도 유언비어가 처음 관내에 유포된 것은 91일 오후 1시경인 것같고, 2일부터 3일에 걸쳐 가장 심했으며, 그 종류도 또한 다종다양하였다”, “조선인 폭동의 비화(蜚話)는 홀연히 사방으로 전파되어 그 유포 범위 또한 대단히 넓었다”. 뒷날 일본 변협이 보고서를 통해 적절하게 지적한 바와 같이, “당초 조선인이 방화, 폭탄소지 및 투척, 우물에 독물투입 등의 불령행위를 했다는 선전은 객관적 사실이 아닌 유언비어였다.

 

조선인이 음해를 가하고 있다는 비화 혹은 유언은 대지진 발생 후 한 시간 정도 후인 1시경부터였는데, 도쿄 지역에서는 이미 유언비어가 퍼져가고 있었고, 경시청도 조선인 폭동”, “불령행위등의 언설이 적어도 객관적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점은 당시 자료에 비화혹은 유언이라는 말로 기술되어 있다는 것이 당시 경시청조차도 조선인 폭동”, “불령행위등을 객관적 사실로 보지 않았음을 보여줄 뿐아니라 경시청 관내의 각 경찰서가 조선인에 대한 살해 등에 대해 상세히 기록한 자료인 대정대진화재지초(大正大震火災誌抄)에도 조선인 폭동에 대한 유언이 기세 좋게 퍼져”, “조선인 폭거 유언이 퍼져”, “유언비어가 처음으로 관내에 전파되어등으로 기재되어 있다는 데서도 확인된다.

 

이처럼 자료에 일관되게 '유언'이란 표현으로 기술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경시청도 이미 조선인의 '폭동' 등이 유언비어임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확인시켜 준다고 할 것이다.

 

이렇게 조선인 폭동의 실체가 의심스러웠지만, 95일 임시진재사무국 경비부에 각계 관리들이 모여 선인(鮮人)문제에 대한 다음과 같은 결정을 했다. “조선인 폭행 또는 폭행하려고 한 사실을 적극 조사해서 긍정적으로 노력할 것. 동시에 아래 사항에 대해서 노력할 것. 1. 풍설(風說)을 철저하게 조사하고 이를 사실로 할 수 있는 한 긍정할 수 있도록 힘쓸 것. 2. 풍설선전의 근거를 충분히 조사할 것등이었다. 이렇게 진재 관리를 맡은 관청이 풍설의 근거 없음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철저히 조사하라고 조심스런 반응을 보였지만, 조선인에 대한 학살은 지진 당일부터 시작되었다.

 

일본 사법관청이 불령선인에 대한 범죄여부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가는 이 해 1020일 사법성의 발표에서 보인다. 지진이 있은 지 한참 후에 발표된 것은 아마도 사법적 절차를 밟은 후에 이뤄진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법성은 금회의 변재(變災)에 즈음하여 조선인에게 불법행위를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 널리 알려졌는데, 지금 그 진상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일반 조선인은 대체로 양순하다고 인정되지만, 일부 불량 조선인 무리들이 있어 일정 범죄를 저지르고 그 사실이 유도되기에 이른 결과, 변재로 인한 민심 불안에서 공포와 흥분이 극에 달해 왕왕 무고한 조선인 혹은 내지인을 불령조선인으로 오인하여 자위의 수단으로 위해를 가한 사범이 생겼기 때문에 당국은 이에 대해서도 엄밀히 조사하고 이미 기소된 것이 수십건에 이르고 있다. 요컨대 일부 불량조선인이 범죄를 일으켰기 때문에 오살(誤殺)되었다고 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그들의 조사에서도 조선인들은 양순하지만 일부 불량조선인 무리들이라고 함으로써 이미 저지른 그들의 조선인 학살을 정당화하고 있다. 사법성 조사에 따른 관동대지진시 조선인 범죄의 신빙성 분석표에 따르면, 범죄 유형은 유언비어, 방화, 협박, 강간, 강도, 상해, 강도살인, 강간살인, 교량파괴, 절도, 독살예비, 절도, 횡령, 절도횡령, 장물운반 등이었다.

 

여러가지 정황에 비춰볼 때, 당시 정부 당국은 근거없이 떠도는 조선인에 대한 악의적인 비난들이 유언비어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 당국은, 의도했는지는 모르지만, 천재지변에서 오는 국민들의 좌절감을 카타르시스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 같다. 조선인을 포함한 중국인 유구인 등이 유언비어의 대상이 되었을 때 그들은 방조하거나 더 부추겼고 조선인 희생자가 나타났을 때 오히려 이를 방치함으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제노사이드가 자행되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정부 당국의 직접적인 통제하에 있는 군대와 경찰, 그리고 관청의 방조하에 조직 활동한 자경단(自警團)이 있었다.

 

계엄령 공포와 조선인 학살 명령을 내린 주범으로 꼽히는 내무대신 미즈노 렌타로(왼쪽)과 아카이케 아쓰시 도쿄 경시총감. 3.1운동 당시 각각 조선총독부 정무총감과 경무총감의 지위에 있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한국이민사박물관 기획특별전 재촬영]

2. 조선인 학살의 양상과 규모

 

일본 정부의 방조하에 생산된 유언비어는, 간토대지진의 혼란을 틈타 조선 사람들이 폭행, 약탈, 방화, 폭탄투척, 집단습격, 부인능욕 및 우물에 독극물을 투입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조선인들이 내습하여 일종의 폭동을 일으킨다는 유언비어는 일본 정부에 의해 조직적으로 유포되었고, 일본 언론들 또한 이 근거없는 유언비어를 확인 절차 없이 보도했다. 일본 정부의 고지(告知)와 신문들의 허위 보도에 흥분한 일본 민중은 91일 저녁부터 조선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고 학살이 본격화된 것은 4일 전후해서다. 일본의 군과 경찰은 물론 흥분한 민간인들도 관청의 묵인 하에 자경단을 조직, 조선인들을 학살하였다.

 

그러니까 이 학살사건은 관동대지진을 빌미로 일본 정부의 유언비어 방관에 일본 민족이 현혹되어 저지른 일종의 집단학살 제노사이드라고 할 것이다.

 

조선인을 학살하는 과정에서 일본인과 혼동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체포된 사람들 중에서 자신은 일본인이라고 항변해도 구출받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이런 경우를 미리 대비할 필요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일본정부는 식민지 초기(1913)부터 전국 경찰서나 관청에서 조선인을 쉽게 식별할 수 있도록 조선인 식별 자료에 관한 건(朝鮮人識別資料する)이라는 일종의 메뉴얼을 내무성 경보국(警保局)에서 작성한 바 있다. 이 중 언어 부분이 특히 강조되어 있는데 조선인은 탁음 발음이 곤란하다든가, 발음할 때 일본어의 라행()’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것을 들었다.

 

예를 들면 당시 조선인이 일본의 탁음 발음에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자경단원들도 통행인을 검문하면서 ‘1555’(쥬고엔 고쥬고센)을 연속으로 말해보라고 하고 탁음 발음이 제대로 나오지 않으면 조선인으로 간주, 그 장소에서 살해되곤 했다. 조선인은 탁음이 없기 때문에 쥬고엔 고쮸 고센으로밖에는 발음이 되지 않았다. 라행()’을 발음하도록 유도했는데 그들은 한국인이 라()는 나(), ()는 이()로 발음한다는 것을 알고 조선인들에게 라리루레로를 해보라고 반복적으로 유도하여 발음이 의심스러우면 처단했던 것이다.

 

간토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에 대한 진상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연구자들에 의하면 피살된 조선인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아직도 없는 실정이라고 한다. 일본 당국과 조선총독부가 강력한 언론통제를 시행했기 때문에 실상이 밝혀질 수가 없었다. 때문에 학살 당시의 일제 당국의 발표는 축소지향적일 수밖에 없었다.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는 간토 지방에 살고 있는 조선인은 노동자 3천명, 학생 3천명 도합 6천명인데 조사 결과 조선인 피살자는 2명 뿐이라 했고, 일본 정부도 19231113일 현재 조선인 피살자 233, 중상 15명 경상 27명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최근까지 밝혀진 것은 당시의 발표가 얼마나 허구였는가를 보여준다. 최근에 간행된 가토 나오키(加藤直樹)구월, 도쿄의 거리에서-1923년 간토대지진 대량학살의 잔향-는 공공 기록은 아니지만 민간 기록들에서 밝혀진 학살상을 구체적으로 적시했다. 이 책 앞부분에 제시된 몇 몇 사례들만을 예시코자 한다.

 

지진이 발생한 91일 저녁, 오이마치 거리에는 이미 일본도나 도비구치, 톱 따위를 든 사람들이 나타나 조선인을 죽여라라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37, 전석필)

 

그리하여 자경단이 통행인을 붙들고 “‘바 비 부 베 보라고 말해 보라거나 “‘1550이라고 말해 봐라며 조선인들이 발음하기 어려운 말을 시키고 힐문하는 광경이 각처에서 벌어졌다. (40)

 

요쓰기바시 다리를 건너는데 거기서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 셋을 두들겨 패 죽이고 있더라구. 우리는 그걸 곁눈질로 보면서 다리를 건넜어.(41, 조인승)스무 명에서 서른 명의 사람들이 소총이나 칼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것이다.(44)

 

도쿄 부 내에만 그 수가 1천개 이상이었던 자경단은, 거리 모퉁이에서 길가는 사람을 붙들어 신분을 조사하고 조선인으로 의심되는 경우 마구 폭행을 저지른 후 맘에 내키는 대로 죽이거나 경찰에 넘기거나 했다.(48) 경찰이 자경단과 함께 조선인을 뒤쫓는 경우마저 있었다고 한다.경시청 간부들도 수많은 보고가 밀어닥치자 점점 유언비어를 믿게 된다.(51)

 

하지만 도쿄로 습격하러 온다던 선(조선)인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뭔가 이상하다 싶더니 10시쯤이 되어서는 그 정보가 허위인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정말 우스꽝스러운 일이었습니다. (50, 쇼리키 마쓰다로 正力松太郞)

 

유언비어를 사실로 받아들이고 명령을 내린 경시청이었지만, 2일 밤과 다음날인 3일에 이르러서는 조선인 폭동이 과연 실재하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조사를 해 봐도 유언비어를 뒷받침할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어었다.(54)

 

가메이도에 도착한 것은 오후 2시쯤이었다.그 안에 섞인 조선인은 모두 끌려내려왔다. 그리고는 즉시 칼과 총검 아래 차례차례 쓰러져갔다. 일본인 피난민 속에서 만세를 외치고 환호하는 소리가 폭풍우처럼 끓어나왔다. “나라의 원수! 조선인은 모두 죽여라!”그들을 첫 제물로 삼아 우리 연대는 그날 저녁부터 밤에 걸쳐 본격적인 조선인 사냥을 시작했다.(56, 엣추야 리이치 越中谷利一)

 

아마도 3일 점심때였어. 아라카와 강의 요쓰기바시 하류에 자경단들이 줄에 묶인 조선인 몇명을 끌고 와서 죽였지, 정말 잔인했어. 일본도로 자르거나 죽창이나 쇠막대기로 찌르거나 해서 죽였어. 여자, 그 중에는 배부른 사람도 있었지만 다 죽였어. 내가 본 것만 30명 정도 죽였어.(67-68, 아오키-가명)[이하 268쪽까지는 생략]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자들의 수가 얼마나 되었을까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견해를 밝혔으나 아직도 그 정확한 수자를 알 수 없다. 앞서 언급했듯이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처음에는 2, 나중에는 813명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일본 사법성이 230명을 발표했으나 그것은 터무니 없는 수자이며 그 무렵 일본 신문들은 40여명으로 추산하고 있었다. 일본인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가 처음에는 724, 뒤에는 2,613명을 발표한 바 있고, 재일본 관동지방 이재조선동포위문단 조사발표에서도 1,781명이라고 발표한 바가 있었다.

 

간토대학살이 일어나자 당시 상해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여기에 가장 깊은 관심을 보였다. 임정은 그 기관지 독립신문(1923125)에서 6,661명을 제시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으나 현재 한국사 개설서나 고등학교 교과서 등에서는 6천여명이 희생되었다는 이 주장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장세윤의 관동대진재시 한인학살에 대한 독립신문의 보도와 최근 연구동향(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에 밝힌 바 있어서 이를 중심으로 간단히 소개하겠다.

 

'관동대학살당시 독립신문사 사장은 김승학. 그의 술회에 의하면 학살 소식을 듣고 그는 나고야(名古屋)에 있던 한세복을 도쿄로 파견, 조선인 학살의 진상을 보고토록 했다. 한세복의 활동은 재일본관동지방 이재조선동포위문반의 도움으로 가능했다. 이 해 105일에는 상해거류 한인들이 독립신문 사장 김승학과 윤기섭, 여운형 등 7명을 집행위원으로 선정했다. 그 뒤 독립신문에는 조선인학살과 관련된 기사들이 오르는데, 기사의 정확도에는 문제가 있으나 기사화된 사항 중 몇 개를 소개한다.

 

1923.9.19: 천재지변의 화를 조선인에게 전가, 군경(軍警)에 수금된 한인 15천명이 조선인 참살(慘殺) 등 항의, 15천 조선인 석방

 

1923,10.13: 군에서 동포 13,000인 별도 수용 후, 기관총으로 사살 조선인 사망자 6,7천인

 

1923.11.10: 우리 동포 수천명이 학살되었는데 그 원인은 일본 당국이 일본인들의 민원을 한인 동포들에게 전가한 데 있다고 파악, 보도함

 

1923.12.5: 본사 피학살교일(僑日)동포 특파조사원 제 1<1만의 희생자>, 각 지역의 희생자 통계를 적시하고 합계 6,661명이 피살되었다고 보도함

 

1923.12.26: “적에게 희생된 동포 횡빈(橫濱)에만 15”-총계 216백여명/ 독일인 부르크하르트 박사의 증언을 토대로 21,600여명 피살로 종합 보도

 

1226일자 기사에서 “'덕국'(德國, 독일) 뿌 박사가 발표한 바에 의하면, 횡빈(橫濱, 요코하마)에서만 15천의 학살이 잇섯다 한즉 본사 특파원이 조사한 바는 횡빈의 분()이 포함되지 아니한 모양이니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 보도되는 바를 종합하면 전부 2만여명이라는 가경(可驚)할 다수로 산정되더라는 기사가 있다. 이는 그동안 연구자들이 놓치고 있던 부분이다.

 

부르크하르트(Dr.Otto Bruchardt)는 동양미술 전공자로 192391일부터 8일까지 일본에 체류했는데 이 때 한국인들이 일본인들에게 참살당하는 것을 보았고, 이 해 109일자로 [Vossiche Zeitung]지에 'Japanische Blutherrschaft in Korea'(한인에 대한 일본의 대량학살)이라는 글을 썼다. 또 상해의 [독립신문](19231226)은 부르크하르트가 귀국한 후 그를 방문한 한국유학생 고일청(高一淸) 황진남(黃鎭南)에게 이 참상은 나만 보고 들을 뿐아니라 일본이 발표한 영자보(英字報)에 공보(公報)로 발포한 것이 있고 '서서국'(瑞西國, 스위스) 친구 한 사람은 나보다 더 자세히 보았습니다,”라고 보도했다. 부르크하르트가 독일 신문에 기고한 것을 본 한인 유학생들은 <유덕(留德)고려학우회> 이름으로 1012한인학살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고 한다. 부르크하르트의 목격과 관련된 부분은 그 동안 학계에서 놓친 부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여기서 당시 간행되고 있던 국내 민족지로 출발한 [동아일보][조선일보]는 관동대진재 시기의 조선인 학살과 관련해서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91일부터 11일까지 학살사건과 관련해서는 게재금지 602, 18건의 차압조치를 당했다. 당시 언론의 노력에 대해서는 과소평가할 수 없으나 여기서는 더 언급하지 않겠다.

 

간토대학살 때 희생된 조선인들의 숫자가 독립신문에 발표된 6,661명설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근거와 관련, 강덕상의 연구를 참고하는 것이 좋겠다.

 

그는 조선인대학살 당시 간토(關東)지방에 약 2만명의 조선인이 살았는데, 간토대진재 때 일본 관헌이 조선인을 강제수용한 숫자는 11천여명이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11천명 이외의 9천여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의문을 제시할 수 있다. 그 차이 9천명이 모두 살해되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이로 보아 66백이란 숫자가 근거없는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적어도 6천여명 설은 소홀하게 생각할 수 없다고 본다.

 

또 앞서 언급한 독일인 부르크하르트가 제기한 문제를 좀 더 조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는 제 3자적 위치에 있던 학자로서 근거없이 요코하마(橫濱)에서만 15천여명이 희생되었다고 언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북한에서 1980년대 초반에 23천여명 피살설(조선전사연표, 1983, 478)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이 수치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를 제시하지는 않았으나 아마도 [독립신문]등에 나타난 부르크하르트의 기록을 참고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당시 관동지방에 거류했던 조선인들의 숫자가 적게는 6천여명에서 많게는 2~3만명이었다는 세론이 있었던 만큼, 여러 자료를 이용하여 좀 더 면밀하게 조사가 진행된다면 조선인 학살 상황도 더 정확한 수치에 이를 것으로 본다.

 

지난 28일 열린 간토학살100주기 추도문화제에서 한일 시민들은 일본 정부에 더 이상 국가책임을 회피하지 말고 간토학살의 진상규명과 희생자들에게 사죄하라고 촉구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나가는 말

간토대지진조선인학살192391일부터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간토대지진으로 불안감을 갖고 방황하던 일본인에게, 조선인에 대한 유언비어는 그들의 허탈감을 카타르시스시켜주는 효과를 가져왔을 지도 모른다. 일본 정부는 군경과 자경단의 조선인 학살을 방조하고 있었다. 명백한 제노사이드였다. 일본 정부는 풍설을 조장하고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군민이 합심하여 이 범죄를 저지를 수 있도록 멍석을 깔아주었다. 의도적인 것이라고 밖에는 해석할 수 없다.

 

이같은 대학살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어가는 데도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죄표명이 없다. 그러나 일본변호사연합회가 이 문제를 제기했던 것은 고무적이다. 그들은 2003825일자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에게 국가는 관동대지진 직후에 조선인과 중국인에 대한 학살사건에 관해 군대에 학살된 피해자와 유족, 허위사실의 전달 등 국가의 행위로 자경단에게 학살된 피해자와 유족에 대해 그 책임을 인정하고 사죄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지진을 틈타 불온한 조선인에 의한 방화, 폭탄투척, 우물에 독극물 투입 등의 불법행위와 폭동이 있었다는 잘못된 정보를 내무성이라는 경비당국의 견해로 전달하고 인식시켰다면서 이런 허위사실과 유언비어의 전달에 대해 국가는 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이런 권고를 외면하고 있다. 간토대지진의 발생과정이나 그 피해에 관한 통계는 일본의 중앙방재회의에서 2006년부터 공식보고서를 간행하고 있다. 지금에 와서 남북한 당국이나 인민을 향해 사죄하는 것이 낯부끄러운 일이라면 굳이 한국 인민을 향해서가 아니라도 좋다. 이런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역사 앞에라도 솔직하게 고백하고 사죄받아야 한다.

 

19239월 간토대진재 때에 조선인 학살 문제와 관련하여 부끄러운 것은 남북한 정부와 국회다. 남북한 정부가 간토조선인대학살에 대해 그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간토대학살이 자행된 때가 국권이 상실된 때였기 때문이라는 변명이 가능할 듯하지만 이런 제노사이드는 천부적인 인권사상에 의해서도 그 책임을 물을 수 있다. 오히려 남북한 정부가 그 책임을 방기하고 있는 것이다.

 

1965622일에 체결된 한일기본조약2“19108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already null and void)임을 확인한다는 조문에 의거해서라도, 비록 그 조문의 이미 무효라는 시기를 양국이 달리 해석하고 있지만, 정부는 일본에 대해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이 문제 해결을 위해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에서는 어떤 노력을 했는가. 만시지탄이 없지 않지만, 19대 국회에서 유기홍 의원 등 103인이 20144월에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안을 제출한 적이 있다. 그러나 19대 국회는 이 문제를 처리하지 않고 미적거리다가 201652919대 국회가 임기만료됨에 따라 이 법안은 자동 폐기되고 말았다. 19대 국회에서는 또 20153, 이명수 의원 등 11인이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 일부개정법률안을 제안되었으나 이 역시 2016519대 국회의 임기만료로 폐기되었다.

 

20대 국회에 들어와서도 이명수 의원 등 10인이 20169,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 일부개정법률안을 제안했다. 그러나 이조차도 20205월 임기만료로 자동폐기되고 말았다. 국회가 이렇게 몇 번 시도했지만 법률로써 성사시키지 못한 이 현실, 이게 대한민국 국회의 민낯이다.

 

간토대학살 100주년을 맞아 올해도 여야 의원 100명의 이름으로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안을 제출했으나 언제 의결될 것인지 부지하세월이다. 간토조선인대학살 100주년을 맞아 정부와 국회가 이 지경이라면 시민단체라도 이 문제에 적극 나서지 않을 수 없다.

 

올해 9월이면 간토조선인대학살이 있은지 꼭 100년이다. 우선 한일 양국민은 그 실체를 알아야 한다.

 

민족적인 차별로다른 민족을 대량학살한, 문명인으로서는 해서는 안될 야만적인 행위다. 나치의 홀로코스트에 앞서 자행된 이민족 대학살 제노사이드다. 우리는 먼저 그 만행의 실체를 알아야 한다. 실체에 대한 책임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용서와 화해는 책임을 통감한 데서 가능하다.

 

이 문제로 한일 양국이 언제까지 적대시해야 하는가. 그렇다고 이런 껄그러운 과거를 도외시한 채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화해와 용서가 이뤄지면 망자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일도 열릴 것이다. 이 또한 양국민의 몫이다. 우리는 이 수치스런 유산을 후세에 물려주어 그들의 짐이 되게 해서는 안된다. 양국은 정부든 민간단체든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정직해져야 한다. 아직도 제 본향을 찾지 못하고 구천을 헤매는 혼령들에게 한일 공동의 이름으로 안식처를 마련해 주는 것도 미룰 수 없는 과제다.

 

*이 글은 202196() 오후 1, 국회 의원회관 제1간담회의실에서 개최된 학술회의 -1923년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학술토론회: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과 대역사건’-의 기조발제를 보완한 것이다.

 

*이 글은 일일이 그 참고문헌의 출처를 밝히지 않고, 다음의 책과 논문들을 주로 참고했음을 밝힌다.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동북아역사재단, 2013)/ 가토 나오키(加藤直樹),구월, 도쿄의 거리에서-1923년 간토재지진 대량학살의 잔향-(갈무리, 2015)/ 강효숙, 1923년 관동지역 조선인학살 관련 향후 연구에 대한 고찰-일변협(日辯協)의 보고서를 중심으로-」 『전북사학 제 47수록

 

통일뉴스 이만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