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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근 .현대사 이야기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윤태옥

by 이성근 2023. 12. 10.

손가락질 하나로 총살 확정... 검사도 교장도 못 비켜간 잔혹한 죽음

'중앙선데이'에 실리지 못한 여순 10.19사건 원고... 75년만에 탄생한 여순 특별법

지난해 1'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여야 합의로 제정됐다. 나는 특별법 소식을 듣고는 전남 순천행 티켓을 끊었다.

나에게 순천의 첫 인상은 밥상이었다. 학창시절 배낭여행을 하는데 순천에서 밑반찬이 떨어졌다. 식당에서 백반을 주문하고는 반찬을 싹 쓸어 반찬통에 담았더니 주인장이 웃으면서 다시 한 상을 넉넉하게 차려줬다.

두 번째 순천은 30여 년이 훌쩍 지난 2013년이었다. 순천만 넓은 갯벌의 풍광에 취해 그 이후 매년 대여섯 차례 순천만에 머물렀다. 내게는 제2의 홈그라운드가 됐다. 세 번째 순천은 낯설었다. 한국전쟁과 여순 특별법을 상기하며 순천시가 설치한 열네 개의 여순10.19 표지들을 하나씩 찾아봤다. 그날 저녁 답사일기는 이랬다.

산골마을신전은굶주린빨치산심부름소년문홍주를잠시돌봐준것을구실삼아총을난사하여 모두22명이희생되었는데4세이하어린이가3명이나되었다.구상마을에서는국군이반군으로주민을속여밥을요구하고이를받아들인주민150여명을학살했다.서면월곡에살던송영종유족은국가보상금으로선산아래에비석을세웠다.비석에는서면희생자200여명의이름이새겨져있다.월치재에서3월에100 여명을집단학살했고12월에는11명을1월에는12명을살해했다.기동보아구지에서는입산자가족이라고아들을끌어내고불지르고판교리뒤편으로끌고온사람들에게구덩이를파게하고밀어넣고사살했고2세아이는돌로찍어죽였다.

다섯 개의 표지에서 하나씩 따온 것이다. 띄어쓰지 않아 보기에 어색하다. 읽기도 거북하다. 내용을 이해하면 더욱 거북하다. 학살에도 띄어쓰기는 없었다.

여수 신월동 14연대 주둔지 무기고 동굴 윤태옥

그 다음날 여수 신월동으로 갔다. 일본해군기지에 국방경비대 14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지금은 한국화약 여수 공장인데, 정문 안쪽의 동굴 하나는 개방돼 있다. 여순10.19 당시 무기고였다. 동굴 내부는 서늘했고 역사는 싸늘했다.

여수 14연대는 194810월 초부터 제주4.3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고 출동을 준비해왔다. 미군으로부터 신무기를 보급 받고 시가전 훈련도 했다. 그러나 적지 않은 14연대 사병들은 동향인들을 진압한다는 것에 당혹스러워 했다. 광주 4연대, 제주 9연대, 여수 14연대 모두 광주 5여단 소속이었다. 이들은 모병제로 충원한 향토사단이라 사병들 대부분은 호남 출신이었던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살벌한 숙군(肅軍)이었다. 당시 군내에서는 좌익 계열을 솎아내는 사상 검열과 숙청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제주4.3으로 인해 숙군의 칼날이 더 날카로워졌다. 4.3을 잔혹하게 토벌하자 제주 9연대의 사병 41명이 탈영하는 등 심하게 동요했다. 급기야 강경 토벌의 주역인 11연대장 박진경이 부하들에게 피살되기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숙군은 더욱 거칠어졌고, 10.19 직전 14연대 본부 하사관 김영만이 체포되면서 이곳의 남로당 조직은 위기감에 사로잡혔다.

1019일 지창수 상사 등 14연대의 남로당 당원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제주4.3 진 압을 동족상잔이란 이유로 거부하면서 총부리를 돌린 것이다. 순식간에 여수 주둔지의 25백 병력 가운데 2천여 병력이 가담했다. 경찰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거짓말도 먹혀들었다.

미군정기에 대한민국의 경찰과 군대는 사이가 아주 나빴다. 국방경비대는 경찰을 '일본 앞잡이'라고 폄하했다. 경찰은 군대를 '빨갱이 소굴'이라고 비난했다. 19476월에는 여수 14연대의 모부 대인 광주 4연대 장병들이 영암의 경찰들과 총격전까지 벌였다. 군인만 여섯이 죽었는데 경찰은 총격전에서 이겼다고 표창까지 했다. 군경의 감정대립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모른다.

소수 남로당 조직이 명분을 내세우고 사병들의 감정까지 파고들자 봉기는 폭발적이었다. 봉기군은 여수 경찰을 제압했고 여수 인민위원회가 재조직됐다. 이때 적지 않은 경찰과 우익계 인사들이 살해됐다. 이틀 만에 경찰관 59, 의용경찰 20, 의용소방대원 5, 우익계 인사 10, 기독교인 7, 경찰관 가족 40명이 죽었다. 봉기군의 일부는 1020일 김지회의 지휘 아래 순천으로 진출했다. 순천에 주둔하던 14연대의 2개 중대가, 곧이어 광주 4연대의 1개 중대가 봉기군에 합류했다.

이승만 정부는 1021일 반군토벌 전투사령부를 설치했다. 대전 이남의 육해공 전 력을 총동원하다시피 했다. 1027일 여수를 탈환했다. 광양 방면의 봉기군은 진압군에 막혀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이들이 소위 '구빨치산'의 시작이었다. 여수 잔류 봉기군은 5연대의 상륙을 저지하고 미평리에서 일시 승전하기도 했으나 결국 진압군에 밀려 백운산으로 들어갔다.

진압군은 봉기군을 추적하며 부역자를 색출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재판도 없이 죽어나갔다. 봉기군들이 밥을 먹고 간 것만으로 마을이 집단학살을 당했다. 그들이 봉기군의 일부로서 밥을 한 것인지, 밥을 빼앗긴 피해자인지는 따지지 않았다. 부역 혐의자가 잡히지 않았다고 가족 한 명을 대신 끌어가기도 했다. 구례군 산동면에는 오라비 대신 죽은 백순례가 끌려가며 불렀다는 '산동애가'라는 비참한 노래가 전해진다.

여수의 부역자 색출에서는 또 다른 끔찍한 상황이 벌어졌다. 진압군이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운동장에 주민들을 모아놓고는 부역 혐의자들을 그 사이로 걷게 했다. 누군가 손가락질 하면 그는 부역자로 확정됐다. 말없는 '손가락 총질'은 곧 총살이었다. 여수의 서초등학교와 중앙초등학 교의 정문 옆에 세워진 10.19 표지는 손가락 총질의 잔혹한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여수 만성리 형제묘 윤태옥

여수의 만성리에서는 부역혐의자들을 해안에서 집단 총살하고는 시신더미에 불까지 질렀다. 뒤엉킨 채 타버린 시신들을 일일이 수습할 수 없어 한꺼번에 묻은 것이 형제묘(만흥 동 162-2)이다. 송욱 여수여자중학교 교장이나 박찬길 순천지검 검사 등 지역유지들도 증거나 재판 없이 처형될 정도였다. 1949년 전남도청의 조사 결과 피해자는 11131명이었다. 실제 피해자는 그 이상일 것이다.

제주에 이어 여수 순천 구례에서, 그리고 전쟁 발발 직후의 전국적인 보도연맹 학살까지, 왜 이렇게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토벌과 학살이 벌어졌을까. 좌우의 차이를 비롯해 생각의 차이와 이해관계의 갈등은 어느 사회에나 있지만, 갈등이 곧 학살은 아니지 않은가.

한 가지는 장교 집단의 전력과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당시 진압군 장교들은 일본군 과 만주군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만주에서 조선인과 중국인 등의 반일 무장그룹을 토벌한 실전경험을 갖고 있었다.

일제는 잠정징치도비법(暫定懲治盜匪法)으로 군경 책임자에게 임진격살(臨陳格殺)이라는, 재판 없는 즉결처형 권한을 부여했다. 잔인한 학살을 정당화시키며 무수한 생명을 땅바닥에 패대기쳤었다. 이승만 정부의 구호는 자유와 민주주의였지만 군경의 행동은 일제의 강압통치에서 습득한 거의 그대로였다.

학살이 아닌 사형집행도 많았다. 그러나 하루에도 수백 명씩 무더기로 판결하는 군법 회의는 재판이라기보다는 총살자 명단작성 수준을 벗어나기 어렵다. 게다가 당시는 계엄법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계엄령으로 설치한 고등군법회의 자체가 무법 내지 불법이란 비판도 피할 수 없다. 이것은 70여 년이 지난 오늘 그때의 진상을 조사하고 명예를 회복해주라는 특별법을 제정한 근거의 하나가 되었다.

제주4.3과 여순10.19는 한국전쟁이란 전면전으로 가는 경유지였다. 대한민국 국가건설 과정에서도 중대한 표지석이 됐다. 이승만 정부는 여순사건 이후 1948121일자로 국가보안법을 제정했다. 실정법으로 극우반공 체제를 구축했고 그것은 지금까지 유효하다.

또한 두 사건을 통해 군대는 가장 강력한 국가기구가 됐다. 군의 명령은 종종 법보다 먼저였다. 대내로는 숙군을, 대외로는 진압작전을 벌이면서 일반 민간인은 물론 국회의원이나 공무원까지 연행했다. 헌병대가 벌인 국회프락치사건(1949~1950)도 그렇다. 한국전쟁 이후에 벌어진 5.16이나 시월유신, 10.26, 12.12, 5.17 모두 군이 가장 강력한 권력기구로 작동한 사례들이다.

다음 주제인 창군의 현장으로 발길을 돌리면서 75년 전의 사건을 되짚어 보았다. 여순10.19는 반란이란 항목에는 작은 점이 찍혀 있고, 학살에는 커다란 방점이 찍혀 있다. 수십 년 동안 강요된 침묵 속에 상처는 아물지 못했고, 결국 75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여순 특별법을 목도하고 있다. 그래, 그때는 그랬지만 앞으로는 절대 그러하지 않아야 한다.

 

윤태옥의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 ㅣ 1

<중앙>이 삭제한 여순사건 원고... 나는 왜 '연재 망명'을 택했나

PDF 파일까지 확인, 결국 다른 기사로 대체... '여순은 건너뛰라'는 중앙선데이 통보 받아

전남 여수 오동도의 여순사건 기념관에 있는 손가락총조형물. 당시에는 손가락질만으로도 빨갱이로 몰려 무고한 민간인이 불법학살되는 일이 빈번했다. 이돈삼

나는 여행을 많이 하는 편이고 여행의 일부는 글로 기록하고 정리한다. 코로나19로 국경이 막히자 나는 90일가량 휴전선 인접 지역에서 한국전쟁의 흔적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관련 자료를 찾아 늦깎이 공부를 하면서 글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연재 글의 제목은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 처음에는 24편으로 구상했지만, 한국전쟁 전후 흐름을 담아보자는 과욕으로 36편으로 늘어났다. 이 여행기는 <중앙일보>의 주말신문 격인 <중앙SUNDAY(선데이)>에 지난해 4월부터 연재를 시작했다. 이미 앞선 3년 동안 <변방의 인문학>을 중앙선데이에 연재한 인연이 크게 작용했다. 한 달에 한 편씩 4주 간격으로 9회까지 실렸다.

중앙 측 "여순은 다루지 말아달라" 주문

그런데 지난해 12월 말에 실려야 할 10회차 원고가 빠져버렸다. 한국전쟁 전 일어난 여순 10.19 사건을 다룬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묻지마 총살, 1만여명이 사라졌다'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인쇄 직전에 PDF 파일을 받아 내가 최종 확인까지 했는데 그날 밤 인쇄에서는 빠져버린 것이다. 내 원고가 실려야 할 28면에는 다른 필자의 연재가 들어갔다.

 

미국과 소련이 손잡고 그은 선... 아직도 남한 곳곳에 있다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 2] 미군과 소련군이 설치한 38선 표지

 한반도에 남아있는 38선 표지석 위치 ⓒ 봉주영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2919700&SRS_CD=0000016396

 

피붙이 하나 없는 결혼식 사진... '38 따라지' 남자의 일생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 3] 38선을 일곱번 넘고 결국 남한에 남은 남두용의 이야기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2922297&SRS_CD=0000016396

 

북한이 싫어서 목숨걸고 월남?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4] 백화점까지 있었던 월남 루트 도시 고랑포

폐허가 흉하게만 보이는 건 아니다. 폐허의 미학이 작동하여 사진기를 꺼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자기 고향도 아니지만 뭔지 모를 회고감을 끌어내기도 한다. 소양호 조망이 참 좋은 곳에 있는, 지금은 폐업한 38선쉼터(춘천시 북산면 소양호로 650)도 그렇다. 소양호로는 소양강댐의 북안을 따라 꼬불꼬불 흘러가는 길이다. 예전에는 춘천에서 양구로 가는 외길이었으니 이 휴게소는 장사가 괜찮았을 것이다.

그러나 2006년 수인터널이 개통되면서 통행량이 거의 없어졌고 38선쉼터는 폐업을 지나 폐허가 되어 있다. 나의 휴전선 답사여행에 동반했던 화가 윤지원은 이곳 풍광에 자신을 얹은 <38선쉼터>(130cm×89cm)라는 작품을 전시회에 출품했다. 한국전쟁이란 현대사를 밟아보는 자신을 그린 것 같다.

38선 쉼터에서 본 소양호 전망. 윤태옥

38선쉼터는 소양호 전망은 아주 좋지만 교통은 좋지 않다. 멀리 둘러싸고 있는 첩첩의 능선과 발 아래의 급경사를 보면 쉽게 짐작이 간다. 한국전쟁 이전 시기는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깊은 산과 강에도 38선은 어김없이 그어졌다. 누군가는 숨 가쁘게 산길을 오르고 숨 고르며 강물을 건넜다. 그걸 월남이나 월북이라 했다.

월남이란 말은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잊힌 말이 아닐까 싶다. 경로는 달라졌지만 북에서 남으로 당국의 허가없이 자의적으로 이동하는 것으로는 탈북이란 말이 있을 뿐이다. 반대 방향으로 가는 월북은 군사분계선을 넘어간 사람을 둘러싼 뉴스와 논란 때문에 기억이 되는 말이다.

남쪽으로 가는 아홉개의 길

아홉 개의 월남 루트 봉주영

한국전쟁 이전의 월남 루트는 동서에 걸쳐 아홉 개가 있었다. 해상루트는 동해와 서해에 하나씩 있었고, 철도(해주선, 경의선, 경원선, 동해북부선)를 따라가는 네 개의 루트, 그리고 철도노선 사이로 세 개의 루트가 있었다.

서해에서는 황해도 북부와 평안도에서 배를 타고 연안(황해도)이나 인천 또는 한강하구에 하선했다. 동해에서는 원산 등지에서 주문진, 묵호, 포항, 방어진(울산), 부산으로 연결되었다. 철도를 따라 이동하는 루트 가운데 경의선은 북쪽의 금교역과 남쪽의 토성 구간을 걸어서 통과했다. 해주선을 이용할 때에는 학현역까지 와서는 청단까지의 산길 20km를 건너기도 했다. 경원선은 북에서는 복계역(철원역의 북쪽 세 번째 역)까지만 운행했기 때문에 복계역부터 걸어서 포천, 동두천 또는 고랑포구(연천)로 남하했다. 동해북부선의 종착역이었던 양양과 남쪽의 주문진 사이 28km 구간을 걸어서 월남하기도 했다.

철도노선이 아닌 루트는, 해주선과 경의선 중간의 산길을 거쳐 연안에 이르는 루트와, 경원선의 서부 산간 지역을 통과하여 이천(강원도), 고랑포, 장단, 개성으로 이어지는 루트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경원선 동부 지역으로 북쪽의 준양(강원도)을 경유해 춘천으로 연결하는 경로가 있었다. 이 루트가 바로 폐허가 된 38선쉼터가 있는 지역으로 북한강 건넌 다음에 다시 소양강을 건너야 했다.

백화점이 있을 정도로 번화했던 1930년대 고랑포. 윤태옥

고랑포 모습(2022년 봄 촬영). 윤태옥

월남 루트라고는 하지만 이미 누구나 이동하고 어떤 물자든 운송이 되는 기존의 교통망이었다. 다만 38선에서는 소련군과 북한 내무기관(남한의 경찰에 해당)의 초소를 피하기 위해 현지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의 안내가 필요했다.

이로 인해 직업적인 월남 안내인과 짐꾼이 생겨났으니 이들이 월남루트의 핵심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안내비는 300~500원 정도, 당시 북한의 노동자 월급이 1천원 수준이었으니 상당히 짭짤한 돈벌이였다. 짐꾼의 보수는 더 컸다. 북한에서는 38경비대 38보안대 자위대와 소련군이 월경을 통제했지만 월남 시도는 대부분 성공했다. 강원도 인제군의 경우 한국전쟁 이전에 노동당원 288명이 월남을 시도했는데 체포된 당원은 4명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례가 당시의 현실을 말해주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38선이란 남북의 인위적인 구분선은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소련과 미국이 합의하여 우리도 모르게 그어졌다. 당장은 눈에 보이는 것도 없었다. 그러나 소련군이 진주하고 그해 8월 하순 38선에서 열차 운행을 차단하면서 행동의 제약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곧이어 미군이 들어왔고 미군과 소련군이 만나 곳곳에 38선 초소를 세우면서 지리적인 구분선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이제 월남과 월북이란 특별한 용어가 사람들의 이동에 크고 작은 제약을 주기 시작했다.

미군이든 소련군이든 처음부터 엄격하게 통제하지는 않았다. 중국의 내지나 만주 또는 소련의 연해주 등에서 귀국하거나, 북한 지역에 살다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많았다. 재산을 포기하고 맨몸으로 귀국하는 일본인도 적지 않았다. "모든 월남자는 즉각 ○○ 경찰에게 신고하여야 한다."38선의 남쪽 도로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일본어, 영어, 한글 순으로 쓰여 있었다. 많은 일본인이 귀국하기 위해 월남했음을 보여준다. 1946년 여름의 한 통계에는 47일간 38선을 통과한 사람 가운데 조선인 177명에 일본인 214명이었다.

1946년 초에는 미군과 소련군이 '수송력이 허락하는 한도'에서의 왕래를 허용한다는 원칙에 합의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실행 방안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점차 봉쇄국면으로 기울어갔다. 19463월 북한에서 토지개혁이 시행되자 북한을 탈출하는 망명이라 할 수 있는 정치적 월남이 급증했다. 334,670, 450,450명이었다. 이것은 한국전쟁 이전의 월별 월남인 숫자로는 1, 3위에 해당한다.

월남 루트 중 하나인 고랑포구에서 본 북녘. 윤태옥

월남하려다가 체포되면 군인이나 군속은 소련군에게 인계되고, 그 외에는 구호소에 수용되었다. 북한은 내무기관의 지침으로 월경 행위를 처벌했다. 그러나 정치적 상황이 악화되면서 19465월 미군정은 무허가 월경을 금지했다. 그해 6~8월 콜레라가 전국에 퍼지자 북조선인민위원회는 38선의 육상해상 교통을 차단한다고 발표했다. 질병마저도 38선을 점점 더 얼어붙게 했던 것이다. 1947년에도 월남은 갈수록 어려워졌으나 월남 시도는 계속됐다. 그해 여름에는 북한의 식량난으로 인해, 12월에는 북한 화폐개혁으로 월남인이 일시적으로 급증하기도 했다.

19489월 북한이 공화국 수립을 선포한 후에는 아예 형법에 불법월경죄가 명시됐다. 직업적으로 월경을 돕거나, 공무원이 월경을 도운 것도 처벌대상이었다. 남북이 제각각 정부를 수립하자 점령 지역 구분선을 넘어 적대국 국경이 되었다. 월남은 본인은 물론이요 가족의 안위가 걸린 결단이 되고 말았다.

남한과 미군은 북한과 소련군의 월경 통제에 비해 관대한 편이었다. 당시의 '삐라'에는 "국군 정방 50m까지 와서 무기를 내려놓고 '이승만 박사' 만세를 외치면 귀순으로 인정해 보호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조건이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허술했으나 무작정 금지하기보다는 월남인들을 수용하는 태도이다.

그렇다고 파란불에 횡단보도 건너듯 월남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남쪽에는 38선을 따라 황해도의 청단, 경기도의 토성, 개성, 동두천, 의정부, 강원도의 주문진과 춘천에 수용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서울에도 수용소가 하나 있었다. 수용소의 위치는 위에 나열한 월남 루트와 조응한다. 월남자들은 일단 수용소에서 개인별 심문을 거쳐야 했다.

정치적 월남보다 많았던 경제적 월남

민간인 출입통제구역임을 알리는 표지판. 윤태옥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넘어왔을까. 학계의 추정치는 월남 150, 월북 30~35만이다. 19476~7월에 개성 수용소에서 조사한 결과를 보면 조사대상 31,859명 가운데 생활난(20,73165.1%)과 귀향(9,40029.5%)이 많았다. 구직과 진학이 각각 82(0.3%), 892(2.8%)이었고 상행위가 252(0.8%), 가장 많을 것 같은 사상적 이유는 502(1.6%)에 지나지 않았다. 정치적 사상적 이유가 있어도 굳이 발설하지 않은 월남자도 적지 않을 것이다.

정치적 월남은 조사에서는 소수지만 영향력은 강력했다. 북한에서 인민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민주개혁과 토지개혁으로 친일 그룹과 지주층을 궁지로 내몰았다. 남한으로 와서는 군대 경찰 서북청년단 등 강렬한 반북한 조직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에게는 이미 원한과 복수라는 데칼코마니가 강렬하게 새겨져 있었다.

북한의 우익은 남으로, 남한의 좌익은 북으로 이동했다. 서울과 평양의 두 권력은 강력한 구심력과 원심력을 휘둘렀다. 자기편이 강화되면서 동시에 자신의 반대편도 강력해지는 역설적인 과정이 계속됐다. 월남과 월북을 통해서 남한의 우익은 극우로, 북한의 좌익은 극좌로 치달았다.

통계로 잡힌 정치적 월남은 상대적으로 소수였고 생활난으로 월남한 빈농층이 가장 큰 비중을 점했다는 것이 연구자들의 분석이다. 실제로 38선을 가장 많이 넘나든 것은 통계에 잡히지 않는 전문 38꾼들, 곧 밀무역 상인과 월경 안내인이었을 것이다.

상인들은 월경 안내와 짐꾼을 겸하기도 했다. 하나의 경제공동체였던 조선을 남북으로 분리하자 물자의 수요공급에 큰 문제가 발생했다. 작게는 38선으로 집과 논밭이 갈리기도 하고 시장이 38선 건너편에서 열리기도 했다. 크게는 남한에서는 중공업 화학제품이나 전기가 부족했고 북한에서는 경공업 생필품이 부족했다. 수요와 공급의 차이는 곧 이윤이었고, 이윤이 커질수록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은 늘어갔다.

전쟁 전이라지만 처벌 가능성이 상존하는 38선 지역에서도 생업이 활발했다는 게 어색하게 느껴지는가. 일제가 패망하고 38선으로 느닷없이 갈라진 후에도 백성들은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아가야 했다. 반면 38선을 긋거나 그것에 기댄 상하좌우의 권력은 (미국이든 소련이든, 남한이든 북한이든) 시국을 폭발의 임계점으로 밀어가고 있었다.

월남이라는 격렬한 인구이동은 국가로서나 개인으로서나 핏물이 배어나오는 살벌한 현실이었다. 그 서사는 오랫동안 반공 웅변대회의 주된 소재가 되었었다. 그러다가 1990년대부터 젊은 역사학자들이 한국전쟁을 포함한 현대사를 역사학의 연구주제로 삼아 세밀하게 사실을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상당한 연구 결과가 쌓여왔으나 대중적으로는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쌓여온 반공을 위한 반공교육 덕분인지 넓고 두꺼운 공포심이 무의식까지 적시고 있다.

그런데 남한과 미군은 월남자를 수용하는 입장이었지만 북한은 월북을 반겼을까. 다음 편에서는 대개 이념을 찾아 간 것으로 생각하는 월북자들의 발자국이 남은 곳을 찾아가려고 한다.

무심히 강물이 흐르는 고랑포구. 윤태옥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은 왜 월북을 택했나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5] 월북루트로 이용되던 강화 연미정... 목숨건 월경, 왜 계속돼야 하나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2926905&SRS_CD=0000016396

 

똑똑한 사람은 다 평양 가고 서울엔 쭉정이만 남았다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6] 월북 택한 조선 최고의 문장가 상허 이태준의 삶

휴전선 일대에서 한국전쟁 흔적을 찾아다니면서 만난 가장 인상적인 월북자는 철원 태생의 이태준이었다. 철원읍 대마리에 있는 두루미평화관 마당에는 그의 탄생 100주년인 2004년에 세운 '상허이태준문학비'가 흉상과 함께 세워져 있다. 문학비 기단에는 이태준의 문학 인생을 요약한 뒤에 이렇게 맺고 있다.

"조국과 고향을 잃어버리고 떠도는 이 위대한 문학자의 자취는 지금도 묘연하다. 이제 그의 나이 100, 하루속히 통일이 이루어져 이 고독한 '경계인'의 문학과 생애가 우리 모두에게 알려지길 바랄 뿐이다"

철원의 노동당사 옆에는 컨테이너 하우스로 만든 소박한 이태준 문학관이 있다. 관장은 철원 이야기를 시로 담아내고 있는 시인 정춘근. 그는 오랫동안 철원에 살면서 이태준을 연구하며 관련 자료들을 모았다.

그는 이태준의 단편소설 <촌뜨기>의 배경을 하나하나 찾아내 촌뜨기길도 만들었다. 촌뜨기길은 이태준이 살던 용담마을에서 노동당사와 관전리로 이어지는 5.4km의 길이다. 13개 표지를 따라 걸으면서 소설 <촌뜨기>의 한 대목씩 짚어볼 수 있다. 최근 철원군은 19억 원의 예산을 확보해 이태준 문학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이 정도면 이태준은 부활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의 체호프' 이태준

이태준은 '우리나라 단편소설의 완성자''조선의 체호프'라고 칭해질 만큼 훌륭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시는 정지용, 소설은 이태준'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러나 그는 월북이라는 이유로 대한민국 문학사에서 오랫동안 희뿌연 그림자였다. 이름 석 자 가운데 한 글자는 ×로 복자(伏字)를 당하는 신세였다. 한국전쟁이 멈춘 지 50년이 지났고, 소식이 끊어진 지 30년이 넘은 2004, 다른 곳도 아닌 그의 고향에 이태준 문학비를 세울 때도 '월북 빨갱이 절대불가'를 외치는 일부 철원 사람들 때문에 꽤나 애를 먹기도 했단다.

1904년 출생한 그는 고아와 다름없는 불행한 소년기를 거쳐 힘들게 문인으로 등단했다. 이태준은 1933년 이효석, 이상, 김유정 등과 함께 구인회를 만들고 주도했다. 구인회는 사회주의 참여문학인 카프(KARF) 계열과는 대조되는 순수문학 그룹이었다. 태평양전쟁 이후 일본 제국주의의 강압은 거세졌고 문인들의 목을 억세게 졸랐다. 조선의 식자나 문화예술인 대부분은 "님의 부르심을 바뜰고서"와 같은, 억지로 짜내는 친일매국에 허덕였다. 이태준도 이런 광풍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결국 이태준은 1943돌다리까지 내고는 철원군 안협으로 낙향했다. 펜을 놓고 낚시로 시간을 흘려보내려고 했으나 <해방전후>에서 묘사했듯이 그의 이름값은 계속해서 그를 경성으로 끌어내곤 했다.

일제가 패망하고 건국이라는 시대적 과제와 마주친 이태준은 일제강점기의 문학경향과는 달리 현실참여로 자세를 전환했다. 해방 직후 조선문학가동맹 부위원장, 민주주의민족전선 선전부장 등 진보진영에 적극 가담했다. 그 내밀한 속내는 1946년 발표한 <해방전후>에 녹아 있다. 작중 인물 ''에게 자신을 투영한 이 작품에서 이태준은 좌익에 대한 경계심도 드러냈지만 우익에 대해서는 환멸감을 쏟아냈다.

그는 19467월 장편 <불사조> 연재 도중에 8월 조선쏘련문화협회 시찰단의 일원으로 소련을 방문했다. 두 달간의 시찰을 마치고는 북한에 눌러 앉아 <쏘련기행>을 썼다. 소련 기행문은 12월부터 몇몇 잡지에 게재되다가 19475월 서울의 백양당 출판사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쏘련기행> 이후에도 <혁명절의 모스크바> <위대한 새 중국> 등 두 편의 기행집을 더 냈다. <혁명절의 모스크바>는 북한의 정부수립 후인 194910, 볼셰비키 혁명 32주년 축하 사절단으로 다녀온 기록이다. <위대한 새 중국>19519월 중국 베이징에서 건국 2주년 행사를 참관하고 중국 각지를 2개월 가량 여행한 기록이다.

유임하(한국체육대학 교양과정부 교수)는 세 편의 기행에 대해 이태준이 고심 끝에 건국의 방략으로서 사회주의 체제를 선택했고, 그 결행을 문장으로 구체화시킨 정치적 문학적 전향서라고 분석했다. 이태준은 소련이 전후복구를 거쳐 일궈낸 선진문물과 함께 조선이나 일본, 중국에서 보지 못했던 '제도의 승리'에 시선을 집중했다. 특히 소련의 축제를 문화 정책을 통해 다양성의 조화를 구현한 선진적 사례로, 소수민족 전통과 평화와 문화가 합치된 것으로 평가했다.

혹자는 이태준이 스탈린 독재의 이면이나 그 한계를 읽어내지 못하고, 훗날 소련의 해체도 예견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기도 한다. 이태준과는 반대로 결론을 내렸던 앙드레 지드의 <소련기행>(1936)에 빗대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앙드레 지드와는 판이한 처지였다. 용광로가 쏟아지듯 화급하게 닥쳐오는 과제를 직면한 식민지 출신의 문인이었다. 이태준과 동시대의 문인들에게, 영미불일의 제국주의를 몸소 겪거나 관찰했던 앙드레 지드와 동일한 결론을 기대하는 것은 훗날의 허무한 탄식에 지나지 않는다.

월북 후 달라진 작품 세계

이태준의 <쏘련기행>(시인 정춘근 소장) 윤태옥

월북 이후의 작품은 일제강점기와는 완전히 달라졌다. <농토>(1948)에서는 억쇠 부자가 계급적으로 각성해 가는 과정을 집중적으로 묘사했다. 이태준은 <쏘련기행>에서 상찬했던 '제도의 승리'<농토>에서 북한의 토지개혁으로 재현하면서도 북한 체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는 노인을 내세워 폭력적인 분단현실을 고심하도록 만들었다. <호랑이 할머니>(1949)는 문맹퇴치 운동과 인민대중의 계도를 집중적으로 묘사했다. <고귀한 사람들>(1951)은 이태준이 항미원조전쟁이란 명분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인 병사를 등장시켰다. 그는 조선과 중국의 국제적 연대, 국가 사이의 혈맹과 개인의 인류애를 연결시켰다.

유임하 교수는 <먼지>(1950)에서 북한 문학의 변화 속 이태준의 처지를 읽어내고 있다. 이 작품에서 이태준은 북한체제의 우월성을 인정하면서도 주인공인 한뫼 선생이란 인물을 문제적으로 구성하여 단일한 민족국가 건설의 꿈이 사라지고 분단이 고착되는 현실을 서사화했다는 것이다. 북한문학은 1950년대 중반까지는 다양한 사유와 목소리가 존재했다. 1953년 정전 이후 북한에서는 한국전쟁 실패에 대한 살벌한 책임논쟁이 전개됐고, 외부적으로는 소련에서 시작된 스탈린 격하 운동이 김일성을 압박했다. 북한이 자신들의 체제와 권력을 세워가는 과정이었으나 그 과정에서 거친 갈등과 충돌로 인해 다양한 사유는 자리를 잃었고, 이태준은 북한의 제도권 문학에서 바깥으로 밀려났다.

카프 출신의 한설야와 이기영은 이태준 작품을 평가절하하고 비판했다. 그들은 이태준의 월북 이전에 이미 북한 문단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한설야는 1945년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을 시작으로 교육문화상에 이르는 북한 문학권력의 정점이었다. 이기영은 19462월에 월북하여 조선문학예술총동맹을 이끌면서 북한문예계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이런 인물들이 이태준을 비판한 것은 문학토론이 아니라 정치적 박해였다. 한설야와 이기영은 이태준의 저격수였고 기소검사였고 판사였고 간수였다.

이들은 전쟁 이전의 이태준 작품들을 사상이 약하고 부르주아 반동이 잔존한다고 비판했다. 월북 이후의 작품도 그대로 두지 않았다. 빨치산 대원을 냉혈동물로 묘사했다든가, 미국의 풍요를 노래했다면서 자연주의적 퇴폐나 반동적 태도라는 꼬리표를 붙여버렸다. 광복 후 북한 최고의 작품이라던 <호랑이 할머니>마저 문맹퇴치사업이 별 성과가 없는 것으로 묘사했다고 비난하는 정도였다.

이들이 이태준을 비판한 것은 그들만의 체제를 만들어가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젊은 시절부터 쌓여온 조선 최고의 문장가에 대한 질투가 아니었을까. 권력투쟁에 질투가 가미된 비판은 총알이 되어 이태준을 쓰러뜨렸고 결국 북한 문단에서 퇴출됐다. 한설야는 이태준을 정치적으로 죽인 다음에는 이태준과 같은 정치적 죽임에 빠졌으니 그의 정치와 문학은 자기부정이라 할 만하다.

이태준은 1956년 함흥노동자신문의 교정원으로 추방당했고, 다시 함흥콘크리트블록공장의 파철 수집 노동자로 배치되어 집필조차 박탈당했다. 1964년 조선노동당 중앙당 문화부 창작실 전속작가로 복귀했으나 그곳에서 이태준의 문장이 살아나올 수도, 권력을 만족시킬 수도 없었다. 몇 년 후 강원도 장동탄광 노동자지구로 추방되었고, 그 곳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지지만 분명하지는 않다.

월북 예술가들의 말로

이은영

이태준만이 아니었다. 전쟁 이전에 월북한 사람들 가운데 학자나 문화예술가들이 적지 않았다. "남한엔 공산주의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더 많고, 남한의 정치적 성향은 의심할 나위 없이 좌익적"이라는 1946년도 미군정의 보고서가 당시의 현실을 잘 말해준다.

이런 상황에서 38선이 남북을 갈라놓자 지식인들과 문화예술인들의 월북이 많아졌다. 북한의 김일성대학이 교수진을 적극적으로 초빙하자 서울의 당대 최고 학자들이 적지 않게 평양을 선택했다. 이를 두고 똑똑한 사람은 전부 북으로 가고 서울에는 쭉정이만 남았다는 말이 돌았다. 문화예술인도 그랬다. 성혜랑(1996년 프랑스로 망명한 탈북인)에 따르면 "서울에서 온 작가, 예술가들로 넘쳐나는 평양을 보며 예술가들은 다 빨갱이였던가 생각될 정도"였다.

그들은 월북 이후 당장은 좋은 위치에 있었으나 인생 후반은 대부분 좋지 않았다. 극작가 신고송과 이서향, 만담가 신불출, 연출가 안영일, 연극배우 배용, 극작가 추민 등은 복고주의니 종파분자니 하는 명목으로 숙청당했다.

반면 북한체제가 불편했던 사람들은 월남하여 혈혈단신 객지에서 갖은 고생을 피할 수 없었다. 그래도 정치적으로 집단학살을 당하진 않았고 일부는 크고 작은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그에 비해 월북의 결과는 대부분 불행이었다. 북한은 처음부터 월북자를 남한과 미국의 스파이로 경계하는 시각이 강했다.

학계나 문화예술가 가운데 자기 발로 38선을 넘어간 월북자는 중산층 이상이 많았고, 일본 제국주의의 갖가지 친일동원에서도 완벽하게 벗어나기 힘들었다. 이런 사람들은 북한이 사회구성의 기본으로 삼는 성분심사, 곧 출신성분과 사회성분 모두 부정적인 평가를 디폴트로 안고 있었다. 게다가 1956년 종파사건 이후 북한의 권력투쟁은 단순한 자리싸움이 아니라 죽고 사는 또 하나의 내전이었으니.

혁명은 인민을 끌어당겨 권력을 쟁취하는 과정이지만, 권력을 잡는 순간 혁명은 사라지고 권력만 남는다. 이태준은 이런 냉혹한 권력에 추돌당했다.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겠다는 이상과 열정은 그의 문장과 함께 사그라졌다. 그래도 철원에 그를 문학의 역사로 부활하고 있으니 대한민국으로서는 참으로 잘한 일이다. 한국전쟁의 직접 책임은 전범을 특정하여 그들에게 물을 일이고, 타버린 재처럼 흩날린 귀한 것들은 이제라도 하나하나 챙겨볼 일이다. 건져낼 역사가 이태준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던 거인, 열한번째 테러에 스러지다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7] 여운형의 죽음에서 본 해방전후 좌·우익의 패착

몽양 여운형의 묘소 윤태옥

펜스와 정문이 1미터 남짓으로 야트막해 다가서는 사람을 편하게 맞아준다. 더 가까이 다가서면 눈에 들어오는 휘호는 血濃於水(혈농어수, 피는 물보다 진하다). 보는 이의 마음속에 작은 돌을 던지는 듯하다. 서울 강북구 우이동 106-1에 있는 여운형의 묘소다.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623-2에는 여운형의 생가와 기념관이 있다. 여운형의 남겨진 생과 사의 거리는 직선으로 35킬로미터밖에 되진 않지만 역사에서 그의 삶과 죽음 사이에는 훨씬 깊고 아픈 골짜기가 놓여있다.

여운형은 1886년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신학문을 공부해 애국계몽운동에 뛰어들었고 솔선하여 집안의 노비를 풀어주었다. 나라가 망하자 1913년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다가 1929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다. 1932년 석방된 이후 그의 족적은 조선중앙일보, 조선농구협회, 조선축구협회로 이어졌고 일제강점기 후반에는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했다. 일제가 패망하던 바로 그날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세웠고 이후 조선올림픽위원회, 좌우합작위원회를 이끌다가 1947719일 테러로 사망했다. 그날의 죽음은 해방 이후 그가 당한 열한 번째의 테러였다. 여운형은 해방과 건국의 공간에서 좌우합작의 대표 인물이었다. 여운형의 당한 열한 번의 피습일지를 펼치면 1945~47'우리'가 무슨 짓을 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일제 패망 이후 26, 운명의 시간

1947524일 근로인민당 창당식에서의 여운형 선생. 몽양여운형기념사업회

일제가 패망한 그해 815일부터 미군이 중앙청에 성조기를 게양한 99일까지의 26일은 식민지에서 점령지로 운명이 바뀐 조선에겐 절체절명의 기회였다. 길윤형 한겨레 기자는 이 시기를 집중 분석해 <26일 동안의 광복>(2020)을 펴냈다. 그는 "당대를 살았던 이들은 자신의 양심과 손익 계산에 따라 최선의 판단을 내렸지만, 결과는 끔찍한 파국"이라고 탄식했다. 파국의 하나는 건준의 좌우합작 실패다.

일본의 항복이 결정되자 조선총독부는 중도좌파인 여운형과 우파인 송진우에게 각각 치안협조를 요청했다. 송진우는 거절했지만 여운형은 중도우파인 안재홍을 부위원장으로 하여 815일 당일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발족시켰다. 여운형은 그날 송진우를 두 번 만났고, 16일 우파의 이인이 여운형을 찾아 다시 논의했으나 성과 없이 끝났다. 일제강점기 좌파와 우파는 갈등의 골이 깊었다. <동아일보>의 송진우와 <조선중앙일보>의 여운형은 견원지간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와중에 18일 새벽 1시경 여운형은 1차 테러를 당해 시골로 요양을 가야 했다. 일제의 탄압이 패전으로 급정거를 하자 '우리들 사이의 테러'가 시작된 것이다.

여운형 부재 중에도 부위원장 안재홍은 우파 영입방안을 강구했다. 그러나 건준의 좌파, 특히 박헌영의 재건파가 강하게 반발했고 824일 미군이 38선 이남을 접수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를 계기로 좌파에 눌리고 밀리던 우파는 건준을 향해 거친 반격을 시작했다. 94일 건준의 좌우합작은 실패를 선언했다. 항일투쟁이란 명분과 조직력에서 앞선 좌파는 미군 진주에 대처해, 96일 조선인민공화국을 선언했다. 헌법 초안도 없었고 공중의 합의절차나 과정도 없다시피 했다. 미군은 99일 서울에 들어왔고 오후 4시 조선총독부의 항복문서를 접수했다. 중앙청에는 일장기가 내려오고 성조기가 올라갔다.

그렇게 조선은 자신의 단일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창구를 갖추지 못한 채 패전국 영토를 전리품으로 취하러 온 점령군을 맞았다. 이때 건준이 좌우합작의 단일한 정치조직으로서 미국과 소련을 상대했었어도 우리는 한국전쟁으로 치달았을까. 안재홍은 당시를 회고하며 몹시 안타까워했다. "좌우 쌍방이 국제정세에 너무 우원(愚遠)했고 사대주의적이었다". 이런 순간에 97일 저녁 여운형은 두 번째 피습을 당했다. 운 좋게 행인들의 도움으로 구출됐다.

미군이 진주하고 우여곡절 끝에 임시정부는 1123일 뒤늦게 귀국했다. 김구는 미군에게 '정부나 정치기구로 활동하지 않는다'는 굴욕적인 각서를 써야 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여운형은 세 번째 피습을 당했다. 12월 초 휴양 차 들른 백천 옥천여관에 괴한이 침입했다. 누군지 알 듯 모를 듯한 그들은 집요했다.

여운형 생가 기념관 전시물 윤태옥

19451216일부터 열흘 동안 모스크바에서 미영소 3국 외상회담이 열렸다. 신탁통치 5년 방안이 알려지자 조선인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동아일보>'소련은 신탁통치, 미국은 즉시독립을 주장'이라는 대형 오보를 내는 바람에 '반탁'은 어처구니없이 반소 감정으로 폭발했다. 우파가 좌파에게 찬탁이라는 딱지를 붙이면서 정국은 요동쳤다. 그런 와중에 19461월 여운형을 대상으로 네 번째 테러가 있었지만 출타 중이라 모면했다.

미국은 19462월 우익 인사 중심으로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을 설치했다. 미국은 여운형을 초치했으나 불참했다. 그에 맞서 좌익은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의장단 여운형, 박헌영, 허헌, 김원봉, 백남운)을 결성했다. 민주의원-민전이라는 좌우대립 구도를 증강시켰다.

3월말 서울에서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지만 애초 합의는 불가능했다. 미국은 "1차 목표는 소련의 한국 지배를 막는 것이고, 수년 내로 한국이 완전한 독립을 하는 것은 미국의 국익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다. 친소정부 수립이 확고한 목표였던 소련 역시 임시정부 각료 명단(1946.3.15)까지 훈령으로 내려보냈다. 수상 여운형, 부수상 김규식 박헌영. 소련이 임시정부 수반으로 거론했기 때문일까. 여운형은 1946418일 관수교 위에서 괴한들에게 또 습격을 당했다.

미군정은 19465월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터뜨려 당시 최대 정당이었던 조선공산당을 불법화했다. 검거령, 체포, 피신, 월북이란 말이 남한에 불꽃처럼 튀었다. 민전도 지하로 들어갔다. 혼란 속에 민전 공동의장 여운형은 북으로 가서 조만식, 김일성 등을 만나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한 임시정부 수립을 모색했다. 이후에도 다섯 차례 방북해 어떻게든 좌우-남북 합작을 이루어보려 했다.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됐고 이승만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외치고 나왔다. 여운형은 통일은 자율적으로 하되 정부는 국제협조 하에 수립하자며 525일 중도우파 김규식과 우파 원세훈과 함께 좌우합작을 위한 회동을 가졌다. 그리고 5월 하순 밤 10시경 종로에서 여섯 번째 습격을 당했다. 격투가 벌어졌고 행인들이 여운형을 구출했다. 좌우합작은 죽임을 당할 일이라는 뜻이었을까.

여운형과 김규식은 허헌 김원봉과 회동하며 좌우합작의 외연을 넓혀가던 중 717일 일곱 번째 테러를 당했다. 이번에는 괴한들이 신당동 야산으로 납치했으나 벼랑에서 뛰어내려 탈출했다. 미군정 경무부는 암살 미수범 3명을 체포했으나 이들의 처리는 오리무중이었다.

좌우합작의 여정

여운형이 피살 당시 입었던 피묻은 옷. 윤태옥

여운형은 725일 좌우합작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우파에서 김규식·원세훈·안재홍··최동오, 좌파에서 성주식·정노식·이강국이 참여했다. 양측을 중재해 좌우합작 7원칙을 107일 발표했으나 이날 여운형은 여덟 번째 테러를 당했다. 자택 문 앞에서 4명에게 납치돼 2일간 감금됐다가 스스로 결박을 풀고 탈출했다. 영화라 해도 이렇게 지겹도록 반복되는 테러 스토리를 연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운형을 향한 테러는 픽션보다 지독했다.

이어 1947317일 여운형의 자택 침실이 폭파됐으나 무사했다. 512일 저녁 서울 혜화동에서 그가 타고 있던 자동차에 총탄이 날아들었다. 범인은 체포됐으나 처리는 또다시 흐지부지됐다.

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520일 서울에서 열렸다. 7월까지 협의단체에 반탁 단체를 넣느냐 마느냐로 입씨름만 질리도록 했다. 미소건 남북이건 좌우건 누구도 양보하지 않았다.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두 점령국의 정책이 그러했으니 합의될 리 없었다.

운명의 날이 닥쳤다. 1947719'좌우합작 파괴'만이 민족의 살 길 또는 자신들의 생존 필수조건이라고 여긴 누군가가 열한 번째 테러를 가했고 여운형은 숨을 거두었다. 여운형의 죽음으로 좌우합작위원회는 구심점을 잃었다. 917일 미국은 한국 문제를 유엔에 상정했고 좌우합작위원회는 12월에 해체됐다. 끈질긴 테러에도 여운형은 끈질기게 살아났지만 결국 그렇게 죽었다. 그리고 좌우합작도 죽었다.

누가 여운형을 죽였나

봉주영

내부가 단합해야 외부적인 분단압력에 그나마 버텨봤을 것이나 내부가 이리도 심하게 대립했으니 결과가 좋을 리 없었다. 크게 보면 통합 정치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조선 말기는 차치하더라도 독립운동에서도 그랬다. 국내외 민족유일당 운동도 실패했다. 신간회 해체는 트라우마로 남았을 것이다. 임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분열이었다. 오죽하면 1944년 목숨 걸고 일본군에서 탈영해 임정을 찾아간 장준하는 "다시 일본 항공대가 되어 임정 청사를 폭격하겠다"며 절규를 했을까.

항일투쟁을 피로 물들이며 조선의 좌파는 선명성과 조직력이 몸에 배었다. 좌파의 진짜 조직력은 우파를 끌어당겨 품는 것이어야 했다. 우파는 지식과 교양과 재산이 있었으나 투쟁을 우회하거나 아예 친일로 붙어버렸다. 우파의 진짜 목소리는 기득권을 절제하면서 공감대를 확장하는 것이어야 했다. 그러나 좌파는 투쟁실적을 발판으로 우파의 친일을 공격했다. 우파는 재산의 기득권에 눌러앉아 좌파를 빨갱이라고 공격했다. 양쪽 모두 통합의 구심력이 아니라 대결의 원심력만 진저리치듯 쏟아냈다.

여운형을 누가 죽였는지는 명확하다. 우리가 죽였다. 일본도 미국도 소련도 아닌, 바로 우리가 우리 손으로 죽였다. 죽여 버리고 말겠다가 아니라, 서로 살아서 밀고 당기기를 해야 했다. 그러지 않은 결과는 적대적 공멸이었다. 한국전쟁이 준 가장 크고 아픈 교훈이다. 여운형의 묘소 정문에 장식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다시 쳐다본다. 여운형의 죽음은 피가 물보다 진하지 않았다는 당시의 역사를 직설적으로 말해준다. 그래도 나는, 멈칫멈칫하면서도 그의 말에 공감한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최소한 수백만이 죽어나가는 공멸에 빠지지 않을 만큼은 진해야 한다.

"개가 떠나자 돼지가 왔다" 소름끼치게 닮은 두 섬의 비극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8] 제주4.3과 타이베이2.28, 아름다운 풍광 속 슬픈 역사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2937928&SRS_CD=0000016396

발굴된 시체만 382, 제주공항 자리에서 가장 많이 죽었다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9] 현대사 생생한 흔적 마주할 수 있는 제주 다크투어리즘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2941709&SRS_CD=0000016396

국군의 뿌리가 적나라하게... 육사 안 표지석의 씁쓸한 다섯글자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10] 대한민국 성장사와 성장통의 현장, 국방경비대 창설지

 여순당시 국군 배치(지도 참고 : 주철희의 여순항쟁 답사기) ⓒ 박종현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2945216&SRS_CD=0000016396

 

국군의 뿌리가 적나라하게... 육사 안 표지석의 씁쓸한 다섯글자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10] 대한민국 성장사와 성장통의 현장, 국방경비대 창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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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골의 반은 남한에 묻어달라'... 월북한 동생의 상상도 못할 유언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11] 북한의 건국과 허씨 삼부자

왕산의 묘 윤태옥

1945년 가을 어느 날 경북 구미시 임은동, 열일곱의 앳된 청년이 할아버지 무덤 앞에서 절을 올렸다. 아들과 큰 손자보다 작은 손자가 먼저 돌아왔다. 할아버지는 의병장 왕산 허위(1855~1908), 손자는 허웅배(1928~1997). 허위의 묘는 훗날 지금의 왕산기념관 옆으로 이장했다.

나는 2018년 여름 허위 기념관을 처음 찾아갔었다. 그때는 목적지 허위 기념관을 한번에 알아듣지 못하는 택시 기사에게, 그것도 택시를 운전하니 구석구석까지 샅샅이 알 만한 구미 사람이 그곳도 모르냐고 타박했었다. 지금은 택시기사는 알 정도로 방문객이 조금이나마 늘었을까.

허웅배는 중국 하얼빈시 외곽의 상즈현 마자뎬이란 시골에서 일본의 패망을 맞았다. 강압적인 일본군 지원을 피하기 위해 소학교의 임시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해방이 되자 아버지 허준과 형 허광배는 바쁘게 움직였다. 할아버지는 의병운동 세대였으나 아버지는 시대변화에 따라 무장투쟁에 힘을 보탠 민족주의자였다. 조소앙, 이완구, 이시영, 이청천, 이범석, 오광선 등 가까운 동지들만 봐도 알 수 있다. 김좌진과는 절친이었다. 광배·웅배라는 두 아들의 이름은 배달의 빛, 배달의 영웅이란 뜻으로 김좌진이 지어줄 정도였다.

박정희 동기 허웅배의 미래를 바꾼 한 마디

허광배·허웅배 두 아들도 자신의 시대에 맞춰갔으나 아버지가 할아버지와 달랐던 것처럼 자신들도 아버지와는 결이 달랐다. 허광배(1921~?)는 사회주의자였다. 이상조(훗날 모스크바 주재 북한 대사, 김일성과의 갈등으로 소련으로 망명함)가 이끄는 조선독립동맹 북만주특위의 지하 공작원이었다.

어린 허웅배는 소학교에서 일하면서 형인 허광배를 따랐다. 조선독립동맹(김두봉)의 강령과 규약, 이상조가 쓴 '쏘독전쟁과 국제정세' '정의의 전쟁과 부정의의 전쟁'과 같은 문건을 등사기로 찍어 배포하는 일을 도왔다.

구미로 돌아온 허웅배는 그 시대 어느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나라 세우기에 나섰다. 1946924일 서울 태릉에서 육군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교했다. 2기라면 박정희와 김재규가 동기였다.

그런데 채병덕, 정일권, 최경록, 백선엽 등 육사 교관이 전부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이란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허웅배는 첫 휴일에 외출을 나와서는 아버지의 친구 오광선과 함께 장도빈(1888~1963, 건국훈장 독립장)을 만나러 갔다. 오광선은 일제패망 후에 만주에서 광복군의 확군에 애썼던 인물이고 장도빈은 훗날 단국대학 초대 학장을 지낸 역사학자. 장도빈은 허웅배에게 말했다. "거기는 자네가 있을 곳이 못 되네."

왕산기념관 윤태옥

왕산기념관의 허위 윤태옥

허웅배는 육사로 돌아가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향 구미를 떠나 아버지와 형이 있는 평양으로 월북했다. 삼부자가 평양에 모인 1946, 북조선 인민위원회 선거가 113일 시작됐다. 중앙주권기구로서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정식 인민위원회로 업그레이드를 하는 절차였다.

일제 패망 당시 북한의 정국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대략 반분하는 정도였다. 서부인 황해도 평안도는 농업지대로 지주와 소작인이 다수였고, 기독교인와 천도교도가 많았다. 조만식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주의가 상대적으로 강했다. 함경도 지역은 공업지대로서 노동조합이 강세였고 사회주의가 우세했다.

해방이 되자 각 지역별로 건국준비위원회나 인민위원회 등의 자치기구가 빠르게 만들어졌지만 이곳에서도 가장 큰 변수는 점령국 소련이었다. 1945890시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했고, 9월 초에는 미국보다 앞서서 38선 이북 점령을 마쳤다.

일제 패망 후 항일그룹의 움직임

일제가 패망하자 많은 조선인들이 귀국했다. 일제의 식민통치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고 항일 그룹들이 전면에 나섰다. 북한에서 주요한 세력의 하나는 김일성이 이끄는 조선공작단. 이들은 일제의 강력한 토벌에 밀려 1940년 여름부터 만주에서 소련의 연해주로 피신했던 동북항일연군 출신들이었다.

피신한 조선인 중국인 전사들은 소련 군복을 입고 소련의 88여단(동북항일연군 교도려라고도 한다)으로 개편됐다. 이 가운데 조선인들을 모아 조직한 것이 조선공작단이다. 이들은 919일 소련군과 함께 원산으로 귀국했고 곧바로 소련군의 시·도 경무사령부의 부사령관이나 고문, 지역방위 담당 등으로 배치됐다. 처음부터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에 입장한 셈이었다.

또 한 갈래는 소련 국적의 한인들이었다. 이들은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했던 사람들 가운데 우수인력으로 차출돼 소련군의 점령정책 기구에 투입됐다. 허가이가 대표적인 인물로 꼽힌다. 이른바 소련파라고 하지만, 이들은 조직화된 정치세력은 아니었다.

세 번째는 김두봉을 수장으로 하는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 이른바 연안파였다. 이들은 1940년 국민당과의 제휴를 벗어던지고 황하를 건너 타이항산(太行山) 지역에서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과 합작했다. 그들은 해방 직전에 만주까지 진출해서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지하공작을 벌여왔다. 북한에서는 머릿수가 가장 많았다.

소련은 2차 세계대전 중에는 한반도 정책이라야 추상적인 기본방침 정도만 있었다. 한반도에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정부를 수립한다는 아주 일반적인 것이었다. 소련군은 일본의 총독부 행정기구를 일체 부정하고 각지의 건국준비위원회나 인민위원회와 같은 조선인들의 자치기구에 주목했다. 소련은 이들을 끌어당기면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반씩 차지하게 유도했다. 함경도에서는 우세한 사회주의 진영을 다소 눌렀고, 평안도에서는 아직 약세인 사회주의 계열에게 성장할 기회를 열어주었다.

소련군은 북한에 친소국가 건설을 준비해나갔다. 각 지역의 인민위원회를 정비하고 통합하면서 10월에는 북조선5도 인민위원회 연합회의를 열었다. 11월에는 각지의 인민위원회 활동을 총괄하는 중앙행정기구로 북조선 행정국(11.19)을 설치했다.

그 다음은 중앙주권기관으로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1946.2.8)를 세웠다. 대표단을 137명으로 구성해 인민위원회 위원(장관) 23명을 선거로 뽑고 위원장에는 김일성을 선출했다. 임시라고 하지만 행정은 물론 입법과 사법까지 망라하는 명실상부한 북한의 국가최고기관이 설립된 것이었다. 그리고 임시가 아닌 정식 인민위원회를 세우기 위해 194611월 선거를 시작했다.

미군정은 일본 총독부의 행정기구와 경찰을 부활시킴으로써, 소련군은 각지의 인민위원회를 통합해 남북 각각의 행정기구를 세웠다. 한반도에 하나의 국가를 세우기 위한 미소공동위원회가 1차 회의(1946.3.20)가 북한에서 임시인민위원회가 만들어진 이후였으니 미소는 물론 국내사정 역시 합의가 도출되기 어려운 상태로 흘러가고 있었다.

조선독립동맹 봉주영

왕산의 생가 터 윤태옥

가속화하는 남북 분할점령

북한이 급진적인 토지개혁은 남북의 분할점령을 분단으로 가속화했다.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의 주요정책인 20개조 정강(1946.3.23)을 발표하기도 전인 36일 전격적으로 토지개혁을 실행했다. 사회경제적으로 상당히 큰 충격이었다.

북한의 토지개혁은 소련의 구상보다 급진적이었다. 중소지주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5정보 이상 경지를 소유한 지주에 대해서는 토지는 물론 가축과 주택까지 몰수하고 아예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경지면적 183만 정보 가운데 55.4%103만 정보가 몰수돼 96만 정보가 빈농과 소작농들에게 분배됐다.

현장에서 실제 개혁조치를 집행한 것은 동·리별로 조직된 농민위원회였다. 이들은 종종 임시인민위원회가 당황할 정도로 거칠었다. 극좌를 넘어선 맹동이라고 비판을 받는, 사적인 보복 사례도 발생했다. 그러나 소농과 빈농의 지지가 깊고 넓게 퍼져갔고, 일제의 식민통치에 협조적이었던 중상계층은 일거에 몰락했다. 이로써 북한의 사회경제적 기반은 사회주의로 튕긴 먹줄에 맞춰 정렬돼 갔다. 미국도 남한 사회의 안정을 위해 토지개혁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있었지만 북한에 선수를 빼앗기고 말았다.

정치권 역시 같은 방향으로 전개됐다. 조선공산당(북조선 분국)과 조만식의 조선민주당, 연안파의 조선신민당, 천도교의 청우당 등이 결성돼 활발하게 움직였다. 이들은 아래로는 대중의 지지를 확대하며 단계적으로 구축돼 가는 권력기구에 촉각을 세우며 경쟁했다.

그러나 194512월 신탁통치 논쟁은 남에서도 북에서도 판세를 뒤흔들었다. 미국은 자신들이 제시한 신탁통치가 조선인들의 격렬한 반발을 야기했지만, 정작 한반도에서는 소련의 주장인 것으로 오인되자 이를 묵인하면서 시국을 움직여갔다. 소련은 애초 반탁에 가까운 입장이었으나, 연합국 합의인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것을 반소련 행위로 규정해 강하게 억눌렀다.

반탁으로 입장을 정리한 조만식은 연금을 당했다. 조선민주당은 찬탁반탁 논쟁에 당권투쟁까지 벌어지며 민족주의 계열은 급속히 위축됐다. 이들에게 토지개혁은 결정타였다. 북한의 우익계열은 북한에서 투쟁하기보다는 재산도 포기한 채 남쪽으로 내려갔다.

이들이 빠져나가자 북한은 좌측으로 더 기울었고, 남한은 원한을 품고 월남한 이들로 인해 우측으로 거칠게 쏠려갔다. 서북청년단이 대표적이다. 분할점령 일 년여 만에 북한은 소련이란 철제 담장 안에 자기들의 집을 공고하게 지어가고, 남한은 미국이란 기둥에 사방으로 끈을 걸어 텐트를 쳐나갔다.

삼부자는 각자의 앞날을 짐작이나 했을까

허웅배 자료사진

1946년 가을, 평양에서 다시 모인 허준과 광배·웅배 삼부자는 각자의 앞날을 어느 정도 짐작했을까. 허준은 장남의 뜻을 존중해서 평양으로 갔으나, 자신의 동지였던 민족주의 그룹이 남한으로 귀국하거나 월남했으나 미군정에 밀착한 친일파들에게 밀리는 것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젊은 사회주의 활동가 허광배는 김일성의 리더십이 동족상잔으로까지 몰아갈 수 있다는 것을 낌새라도 챘을까. 하나의 조국을 위해 투쟁했으나 연안파와 갑산파 사이에 권력의 칼부림이 터질 것이라고 잠직이라도 했을까.

허웅배의 묘. 가평에 있다. 윤태옥

허웅배도 그렇다. 그는 월북해서는 북한 내무성 선전과에서 일을 했다. 우연이기는 했지만, 그는 1950625일 새벽 4시 옹진반도 북쪽의 38선에 전개한 인민군 포병부대에게 남쪽의 국군 17연대를 향해 전면전 개전포격을 개시하라는 신호총의 방아쇠를 손수 당겼다. 1946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자신이 죽어서는 유골의 반은 모스크바에, 반은 북한이 아닌 남한 땅에 묻어달라고 유언하리라고는 더욱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김일성도 1952년 전쟁 중이라는 힘든 상황에서도 모스크바에 유학까지 보내준 허웅배의 훗날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정전협정 몇 년 후에 유학생 신분의 허웅배가 유학을 보내준 자신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소련으로 망명했고, 사회주의 종주국이자 자신의 가장 큰 후원자인 소련이 청년 허웅배의 망명을 받아 주리라고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북한 인민군 막사가 대한민국 땅에 남아 있다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12] 조선인민군의 창설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다목리에 남아 있는 인민군사령부 막사 윤태옥

북한 인민군사령부의 막사가 대한민국 땅에 남아 있다는 사실은 내가 휴전선 답사여행을 시작하고도 한참 지난 뒤에야 알게 됐다.

인민군 막사를 찾아간 것은 지난해 10월 하순. 강원도 철원에서 화천으로 가는 56번 도로(김화~춘천)로 남하하다가 461번 도로(철원~화천)로 옮겨 타고는 동으로 1.3킬로미터 정도 진행하니 인민군사령부 안내 표지가 길가에 설치된 것이 눈에 띄었다.

차를 길가에 세우고는 경사로를 따라 걸어 올라가니 군부대가 있고, 조금 더 올라가니 인민군사령부 막사가 나타났다. 주소로는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다목리 361-1. 현장의 안내판 설명에 따르면 북한이 1945년 신축했고 한국전쟁 당시에 막사로 사용했다고 한다.

건물 앞에 표지판이 하나 있을 뿐 아무것도 없다. 건물 안도 텅 빈 공간뿐이다. 건물이 낡은 터라 전시관과 같은 용도로 사용하기도 쉽지 않아 보였다. 정전협정으로부터 이미 70년이 지났고, 우리 군이 여러 용도로 사용해왔으니 선제공격의 전면전은커녕 일반적인 흔적조차 남아 있을 리 없다.

19506월에는 인민군 2군단이나 화천-춘천 축선에 담당한 인민군 2사단의 막사였을 것이다. 최전선인 38선에서 20킬로미터 떨어졌으니 후방부대가 사용했을 수도 있고, 전투부대가 주둔하다가 625일 직전에 38선으로 이동했을지도 모른다. 다만 북한 지역의 거의 모든 건물이 미군의 폭격으로 무너졌음에도 불구하고 원형이 남아 있다는 게 조금은 의외였다.

전쟁 후에는 국군이 여러 용도로 사용하다가 최근 들어서 등록문화재 27호로 지정했다. 역사 유적지답게 군부대 안에 있던 것을 따로 통로를 만들어서 일반인에게 개방하고 있다. 역사의 흔적은 가능한 범위에서 남겨두는 게 바람직하다.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흔적이든 한국전쟁의 상처든 마찬가지다. 역사적 의의가 있고 보존가치가 있다면 인민군 막사라도 굳이 철거할 이유는 없다.

마침 시월 하순이었던 터라 막사 중간에 있는 잘 생긴 단풍나무의 빨간 잎사귀들이 눈에 들어왔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런 기억을 꺼내게 되는 인민군사령부 막사를 보러 왔는데 막상 단풍만 이토록 아름답다니. 자연은 인간의 비극에 냉소를 던지는 것만 같았다.

인민군 막사 위치 봉주영

북한의 군대조직, 조선인민군

북한의 군대는 조선인민군, 인민군이라고 한다. 대한민국은 국군을 창설했고 같은 시기에 북한은 인민군을 만들어갔다. 한국전쟁은 국군 대 인민군의 대결이자 충돌이었다. 전쟁의 참극으로 가는 가장 진하고 굵은 화살표가 바로 인민군이었다.

남북 모두 창군이라는 국가적 과제는 건국을 주도하는 정치세력과 밀접한 연계를 갖고 진행됐다. 남한에서는 미군의 이니셔티브 아래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들이 주류를 이뤘다. 이에 비해 북한은 동북항일연군, 조선의용군, 소련이 보낸 고려인, 국내의 사회주의자 네 그룹이 연립하면서 경쟁하는 구도였다.

일제가 패망하고 조선 각지에서는 아래로부터 자발적인 치안조직과 군사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남한이든 북한이든 치안확보가 우선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한반도를 점령한 미군과 소련군은 조선인들의 자발적인 치안조직이나 군사단체를 용인하지 않았다. 남한의 미군정은 조선총독부 경찰 조직을 그대로 부활시킨 반면, 북한에서는 소련군사령부는 19451012일 북한의 모든 무장단체들을 해체해 이들을 각 지방인민위원회 산하의 새로운 보안대로 조직했다.

치안 다음은 군대였다. 북한에서도 1945년 말부터 구체적으로 군대의 창설을 준비했다. 북조선5도행정국(소련 군정의 중앙행정기관)은 군사담당 부서로 보안국을 설치했다. 보안국 중심으로 육··공군의 모체가 되는 각종 보안기구를 육성하고, 훗날 정규군의 기간이 될 군사간부를 양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남한에서 조선총독부 경찰 조직을 치안의 골격으로 부활시킨 다음 군사영어학교를 개설한 것과 비슷한 행보였다.

서울 덕수궁에서 열린 미소공동회의장에서 소련 측 스티고프 수석대표가 연설하고 있다(1946. 3.). 박도/NARA

북한은 당장의 국경 경비를 위해 1946년 초에서 그해 중반까지 38경비보안대와 국경경비대를 창설했다. 한반도의 독자적인 정부를 세우기 위해 소집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1946320)에 앞서 북한은 토지개혁과 군대창설을 추진함으로써 향후 독립정부의 토대로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북한에서 본격적인 군대조직은 19468월 보안간부훈련소를 개편해 창설한 경보병 사단에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이 바로 인민군 보병부대의 모체다. 창설 초기의 경비대 보안대 보안간부훈련소의 간부는 대부분 동북항일연군 출신들이 맡았다. 그 이후 본격적인 창군과정이 확대되면서 조선의용군 출신, 고려인 출신, 국내공산주의자들 모두 참여했다.

동북항일연군 출신들은 해외의 정치세력 중에서 가장 먼저 입북했다. 그들은 소련군 위수사령부의 부사령관직을 도맡았기 때문에 훗날 인민군 창설을 주도할 수 있는 위치를 선점한 셈이었다.

반면에 조선의용군 출신들은 일제 패망 직후 만주에서 조선인 부대를 창군해 조선혁명의 무력기반으로 삼으려 했으나 이것은 소련군의 지지를 받지 못해 실현하지 못했다. 게다가 중국의 제2차 국공내전에 참여해 국민당 군대와 전투를 벌이는 바람에 북한에 새로운 정치질서가 형성된 뒤에야 입북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가장 많은 인적 자원을 보유하고 있었고 병종부대에서 다수를 차지했지만 인민군 창설과 성장에서 확고한 주도권을 쥐지는 못했다. 고려인들은 독자적인 조직이나 창군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대부분 소련군 신분이었기 때문에 창군사업에 가장 늦게 참여했다.

군대창설의 주도권은 처음에는 소련군사령부에 있었지만 19462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임시 행정부)가 성립되면서 점차 북한의 정치세력에게 이양되기 시작했다. 정부의 군사담당 부서는 여전히 보안국이었다. 보안국에 대한 행정지휘권은 1947222'임시'라는 명칭을 떼어낸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수립되면서 북한의 정치세력에게 완전히 넘어갔다.

'김일성 유일체제'의 탄생

북한의 인민군에 대해서는 김선호 박사(현대사)가 우리나라에서는 대표적인 학자다. 그는 북한의 인민군 창설 과정을 세밀하게 분석하는 논문을 많이 발표했고, 이를 간추려 일반인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조선인민군>이란 두툼한 단행본을 내기도 했다.

김선호 박사는 이 보안국 시기에 향후 북한 정규군의 정치사상 체계의 원형이 출현했다고 분석했다. 하나는 중국군과 소련군의 정치간부 제도를 차용해서 인민군의 문화간부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보안국이 북한의 기관·단체 가운데 처음으로 194511월부터 검열을 통해 반제국주의투쟁을 전개했다.

한마디로 북한의 인민들을 혁명세력과 반혁명세력으로 구분해 반혁명세력을 군대에서 솎아냈다. 인민군의 인적구성에서 친일 지주 부르조아 등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노동자 농민 사무원과 같은 혁명친화적인 계층으로 채운 셈이다. 인민군이 반혁명세력을 솎아낸 것은 남한에서 국방경비대에서 좌익 성향의 장병들을 축출한 숙군사업과 유사하게 군의 정체성을 더욱 좌편향으로 몰아갔다.

세 번째는 보안국이 북한지역에서 처음으로 김일성의 영도사상을 기관의 지도사상으로 채택하고, 동북항일연군의 혁명전통을 유일한 것으로 내세우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향후에 수립된 김일성 유일체제의 역사적 맹아였다는 게 김선호 박사의 분석이다.

당시 북한은 여러 세력이 연합하는 통일전선을 추구했지만, 군대에서만큼은 통일전선이 아니라 노동당 중심의 단일조직으로 구축해갔다. 인민군은 '조선로동당 규약'에 분명히 당의 혁명적 무장력이라고 명시돼 있다. 국가의 군대인 우리 국군과는 제도적 위상이 다르다.

<한국전쟁2>에 실린 북한 인민군 사진 박도/NARA

조선인민군의 창설은 19472월 북조선인민회의(입법부)와 북조선인민위원회(행정부)가 출범하면서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이제는 입법부의 입법절차를 거쳐 행정부가 집행하는 방식이 된 것이다.

그해 5월에는 보안간부훈련대대부를 개편해 조선인민집단군총사령부를 창설했다. 이 시기에 인민군은 노동당에 비해 더 철저하고 지속적으로 소위 반제반봉건투쟁을 전개했다. 군을 앞장세우고 군을 중시하는 선군(先軍)정치의 전통은 이미 인민군 태동기에 발아한 셈이다. 북한의 선군정치는 김정일 시대는 물론 지금의 김정은까지 이어지고 있다.

194710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남북은 본격적으로 단독정부를 추진했다. 그 중대한 결과물의 하나가 바로 194828일 공식적인 조선인민군의 창설이었다. 인민군은 전체 한반도에서 조직된 최초의 무력조직이었다. 이날이 북한의 건군절, 곧 인민군 창설일이 됐다. 최초의 인민군 사령관은 최용건, 부사령관은 김책이었다. 한국전쟁을 개전한 1950년에는 김일성이 총사령관, 최용건이 부사령관이었다.

참고로 북한의 건군절은 한동안은 425일이었다. 1978년 김일성은 자신이 1932년 항일 빨치산 부대를 조직한 425일이 진짜 조선인민군 창설일이라면서 바꿨다. 그러다가 김정은이 다시 28일로 환원했다.

이 시기의 인민군에서 주목할 만한 현상은 창군이념의 정립이었다. 북한은 인민군의 창군이념에서 조선의용군이나 고려인 또는 국내의 사회주의자들의 항일운동이나 무장투쟁 역사는 배제하고 김일성의 항일운동과 항일유격대로 단일화했다.

당시의 북조선로동당 지도부는 19483월 이후 각 정치세력이 분점하고 있었지만, 인민군에서는 동북항일연군 출신들이 우월한 지위를 차지했을 뿐 아니라 창군이념을 김일성이 독점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훗날 북한이란 국가가 김일성 유일체제로 귀결되는 정치적 군사적 기반이었다.

두 개의 군대... 일촉즉발 위기에 놓인 한반도

<한국전쟁2>에 실린 인민군 기갑부대 박도/NARA

창군 작업이 본격화하면서 민족 전체의 진짜 심각한 문제는 시시각각 전쟁으로 다가선다는 점이었다. 북한은 정부수립 이후에 한반도를 무력으로 통일하려는 국토완정론(國土完征)을 주장하면서 지속적으로 인민군 확군사업을 전개해 나갔다.

1948년 말부터 1949년 초까지 미군과 소련군이 철수하고 중국공산당이 만주를 최종적으로 점령하자 북한은 확군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그 결과, 19506월 당시 인민군은 7개 정규 보병사단, 3개 예비 보병사단, 1개 기계화여단(탱크여단), 해군, 항공부대(비행사단), 그리고 직속부대를 보유한 공격형 정규군으로 완성됐다. 공격형 정규군이 완성된 가장 큰 무장의 토대는 철수하는 소련군이 놓고 간 잉여무기였고, 인력 확충과 전투력 증강의 가장 큰 전기는 만주조선인 부대의 입북이었다.

1948년 남북에 각각 정부가 수립되면서 한반도는 승전국의 분할 점령지가 아니라 두 개의 국가로 완전히 분단되고 말았다. 군대를 창설하는 것은 일반적인 국가건설에서는 당연하고도 중요한 과제지만, 분단이란 상황에서는 분단을 적대적 대결로 굳혀버리는 결정적인 고갯마루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근원적으로 적이라는 존재를 상정하고 적과의 대결에 대비하는 군대조직이 양쪽에 적대적으로 세워졌다. 실제 북한의 국토완정과 남한의 북진통일은 김일성과 이승만의 정치적 지향이었지만 국군과 인민군의 현실적인 무력이 뒷받침되면서 더욱 강력한 힘으로 남북의 충돌을 추동해간 것이다.

분단이란 말은 서로 다른 것으로 나뉘고 갈린다는 뜻이다. 그러나 데칼코마니처럼 방향만 반대일 뿐 형태는 똑같아지는 과정이기도 했다. 북한은 북한지역을 민주기지로 강화시켰다지만, 그것은 역설적으로 남한지역을 반공기지로 굳혀주는 강력한 외부의 힘이 됐다. 조선인민군은 국토완정을 실현할 혁명무력으로 성장했다지만, 그로 인해 남한의 국군은 북진통일을 부르짖는 반공무력으로 육성됐다.

서로가 상대방의 지배영역을 '빼앗긴 국토'로 인식했고, 상대방 정부를 미국과 소련의 꼭두각시로 규정했다. 북한에게 남한은 반혁명세력의 결집체였고, 남한에게 북한은 극도로 위험한 공산집단이었다. 이렇게 분단은 상대방을 압박하면서 이념으로는 반대라고 주장하지만 전쟁이라는 하나의 구덩이로 몰아가고 있었다. 그 한복판에 한국전쟁에서의 선제공격, 곧 남침의 주역으로서의 인민군이 있었던 것이다.

 

시작은 독립운동, 끝은 한국전쟁... 조선의용군의 비참한 최후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13] 조선의용군

한단시 진기로예열사릉원 조선의용군 기록 윤태옥

출발은 조국의 해방과 독립운동이었으나 전장은 시대의 격랑에 따라 항일 무장투쟁에서 중국 국공내전으로, 다시 조국의 한국전쟁으로 바뀌어갔다. 동족상잔의 전면전에서 선제공격의 주역이었으나 정전 이후 북한의 권력투쟁에서 토사구팽을 당했다. 참극의 한국전쟁을 관통하는 굵직한 비극의 하나가 바로 이들, 조선의용군이다.

내가 처음 조선의용군의 흔적을 마주한 것은 201210월 중국 섬서성 옌안의 뤄자핑(羅家坪)이란 작은 마을이었다. 건축기행으로 황토고원의 동굴집을 찾아갔다가 우연에 가깝게 마주쳤다. 1944~1945년 그곳에 주둔해 있던 조선의용군 군정학교 옛터의 표지와 허물어지다시피 한 허름한 동굴집을 찾아볼 수 있었다.

그렇게 내 머릿속에 깊은 인상을 남긴 조선의용군과의 인연은 20162월 이어졌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어느 날 중국 허베이성 스좌장을 거쳐 타이항산을 찾아갔다. 윤세주, 진광화, 무정, 김학철, 정율성, 박일우, 박효삼, 김두봉... 황베이핑촌, 후자좡촌, 난좡촌, 윈터우디촌, 좡쯔링...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역사라서 더욱 진하게 다가왔다. 코로나19가 막아서기 전까지 세 번이나 더 찾아다녔다.

시작은 '조국해방'이었지만... 지옥문 열어젖힌 그날

한국전쟁의 비극이 시작된 그날, 38선에는 북한 인민군 보병 21개 연대가 동서로 늘어서 있었다. 개전포격이 끝나자 자주포와 탱크를 앞세우고 일제히 남쪽으로 진공하기 시작했다. 기습적이고 전면적인 공격이라 남침 또는 침략이란 말로 압축되곤 한다.

그 전에 국지적인 충돌이 있었지만 전면전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들은 조국해방 국토완정(完征)이라고 외쳤지만 그것은 곧 대량살상 동족상잔이란 지옥의 문을 열어젖힌 것이었다. 모든 것을 그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게 한, 요즘 말로 불가역적인 일대 사건이었다.

21개 연대 가운데 10개 연대는 1949년과 1950년에 입북한 만주의 조선인 부대였다. 인민군 5·6·12사단의 9개 연대와 4사단 18연대가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조선의용군의 직계 후신들이었다. 독립운동이 한국전쟁으로 이어진 비극의 역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조선의용군 이동로(타이항산 유적지) 윤태옥

중국 공산당 팔로군 사령관인 주더(朱德)의 명령문 윤태옥

조선의용군과 관련해서 중국 답사에서 따로 스크랩을 해둔 것이 있었다. 타이항산의 우즈산(五指山)에 있는 조선의용군 옛터에서 본 전시물이었다. 하나는 일제 패망 후 조선의용군 이동과 연안파 간부의 입북경로 지도였고, 또 하나는 조선의용군에게 하달한 중국 공산당 팔로군 사령관인 주더(朱德)의 명령문이었다.

그의 명령은 "소련 홍군의 중국과 조선 경내로의 진입작전을 돕고 조선 인민을 해방하기 위해, 지금 화베이에서 대일 작전을 하고 있는 조선의용군 사령 무정, 부사령 박일우, 박효삼은 즉시 소속부대를 통솔해 팔로군과 동북군 각 부대를 따라 동북으로 진격해 적 괴뢰군을 섬멸하는 동시에 동북의 조선인민을 조직해 조선을 해방하는 과업을 달성"하라는 것이었다.

이동경로 지도에 따르면 옌안을 떠난 조선의용군 본부는 허난성에서 북상해온 부대와는 타이위안에서 합류했고, 그 다음 안후이성과 장수성에서 출발해온 의용군과는 장자커우에서 합류했다. 그곳에서 청더와 진저우를 거쳐 선양에 도착했다.

조선의용군은 당연히 조국으로 들어가고 싶었으나 새로운 점령군인 소련군에 길이 막혔다. 이들은 3개 지대로 나누어 남만주, 북만주, 동만주로 이동했고, 조선독립동맹의 간부들은 단둥을 거쳐 평양으로 먼저 들어갔다. 이들이 바로 연안파다.

'힘을 키워 일본군 격파하자'... 조선인들의 연합

조선의용군 정율성 부부 윤태옥

조선의용군 옛터 전시물 윤태옥

조선의용군은 193810월 김원봉의 주도로 조선민족전선연맹이 중국 국민당과 제휴해 우한에서 '조선의용대'란 명칭으로 창설했다. 조선민족전선연맹은 계급이 아닌 민족을 앞세운 조선인들만의 독립운동 단체였다. 김원봉(민족혁명당), 김성숙(조선민족해방동맹), 유자명(조선혁명자연맹, 무정부주의자 단체), 최창익, 김학무(조선청년전위동맹)가 연합했다.

조선의용대 창설 초기에는 대원들이 국민당의 화중·화남 전선에 배치돼 일본군과의 전선에서 정치선전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조선인이 없는 지역에서 벌이는 정치선전 활동에 젊은 대원들이 회의를 품게 됐고 장제스의 항일의지에 대해서도 의심했다.

이들은 화북(華北)를 거쳐 만주로 진출하면서 그곳의 조선인들을 흡수해 힘을 키우고 일본군을 격파해 조국의 해방을 이루자는 주장을 했다. 김원봉은 이들의 '북상(北上)전략'을 받아들였다. 1941년 김원봉과 본부 인원을 제외한 대다수의 조선의용대의 주력은 국민당의 감시를 피해 뤄양에서 황하를 건너 타이항산의 중국 공산당 팔로군 지역으로 들어갔다.

조선의용대는 팔로군이라는 스스로 선택한 환경 속에서 적응하고 변화해갔다. 처음에는 창설을 주도한 것은 김원봉이었으나 북상한 이후에는 북상을 주도한 최창익으로 주도권이 옮아갔다. 그 다음에는 중국 공산당의 대장정에도 참여했으며 마오쩌둥의 신뢰를 받는 무정이 합류하면서 주도권을 장악했다. 이때 명칭도 조선의용대에서 조선의용군으로 바뀌었다.

조선의용대로 출발한 무장조직의 상급기관, 곧 군사적 명령을 하달하는 주체도 변경됐다. 창설 당시에는 국민당과 공동으로 구성하는 지도위원회가 상급기관이었으나 북상 이후에는 화북청년연합회로, 다시 조선독립동맹으로 변경됐다. 최종적으로는 중국 공산당이 주도하는 동방각민족반파쇼동맹의 무장대오로 규정됐다.

만주로 진공한 조선의용군은 만주의 조선인들에게 상당한 환영을 받았다. 조선의용군은 1·3·5지대로 나눠 만주의 조선인 밀집지역으로 신속하게 뻗어갔다. 조선의용군에 대해 환상에 가까운 존경심을 품고 있던 조선인 청년들이 대거 입대하면서 비약적으로 몸집이 커져갔다. 같은 시기, 같은 지역에서 임시정부의 광복군이 확군하려다가 실패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중국 공산당과 제휴해온 조선의용군은 1946년 초 동북민주연군으로 개편되면서 조선의용군이란 명칭도 해소됐다. 동북민주연군은 1948년 동북인민해방군으로 개편됐다.

1천명에서 5만여명으로... 조선의용군의 성장

조선의용군의 전개와 변신 박종현

이들의 확군 과정은 3지대 경우만 봐도 쉽게 이해할 할 수 있다. 3지대는 194511월 주덕해(훗날 옌볜조선족자치주 주석)가 이끌던 조선의용군과 이상조(조선독립동맹 북만주특위)가 이끌던 조선인 부대가 합쳐진 것이었다. 3지대는 하얼빈 지역의 국민당 지방부대 토벌전에 참가했다. 이들의 첫 전투는 19462월의 무란현 전투. 3지대는 빠른 속도로 연대 규모로 성장했다.

19485월 무단장(牧丹江)의 조선인들로 이루어진 1개 연대, 그리고 조선의용군 7지대와 합쳐 3개 연대가 편제되는 독립11사단이 됐다. 이들은 화전현의 도시방어와 치안유지를 맡았고 인근 지역에서 몰려든 조선인 청년들을 흡수했다. 독립11사는 194811월 중국 인민해방군 164사단이 됐다.

1지대와 5지대 역시 3지대와 비슷한 과정을 거쳐 성장했다. 남만주의 1지대는 독립4사단을 거쳐 166사단이 됐다. 동만주로 향한 5지대는 옌볜의 조선청년들을 흡수하면서 독립15사단을 거쳐 156사단이 됐다. 194511월 선양에 집결했을 때 1천 명 수준이었던 조선의용군은 그 다음해에는 1만 명 규모로, 1949년에는 5만여 병력으로 확군했다. 실로 엄청난 성장이었다.

만주조선인부대는 중국혁명에 참가해 간부를 양성하면서 조국혁명을 위한 역량을 키우겠다는 전략이었지만 상층 간부와 일반 사병의 정서는 좀 달랐다. 중국 공산당이나 조선의용군 상층부는 이념적 동지와의 국제연대를 대단히 중시했다.

그러나 일반적인 중국인들에게 조선인이란 일본제국주의에 충성했던 앞잡이거나 밀정들이었다. 심지어 '아편 삐끼'들이라는 부정적인 인상도 있었다. 안중근과 같이 양쪽에서 존경받는 투사가 있기는 했으나 일상은 그렇지 않았다.

중국의 사회주의 진영 안에서도 민족갈등이 있었다. 옌볜에서 벌어진 토지개혁과 청산운동의 경우 중국인 간부들이 현지의 조선인 간부들을 차별적으로 숙청하기도 했다. 중국 인민해방군으로 편제를 바꾼 다음에 만주조선인군대의 정책임자는 항상 중국인이었고 조선인은 부책임자에만 보임하는 것도 그랬다.

이런 기류 속에 국공내전의 만주지역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조선인 대원들 사이에선 '이제는 조국으로 돌아가자'는 정서가 생겨났다. 만주의 승리 후에 베이징과 톈진까지 진공한 다음에는 '이제 할 만큼 다 했다'는 기류가 강해졌다. 창강을 넘어서자 이런 기류는 더욱 팽배했다. 중국 공산당 지휘부 역시 조선인 부대는 귀국해야 한다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북한이 1949년 이들의 귀국을 요청했고 한국전쟁 전에 보병 10개 연대가 입북한 것이다.

그들은 왜 한국전쟁 전면에 나섰을까

19497월 중국 인민해방군 166사단은 북한으로 들어가 즉시 인민군 6사단으로 개편됐다. 164사단도 인민군 5사단으로 개편됐다. 1950년 봄 156사단이 입북해 인민군 12사단이 됐고, 중국 4야전군의 조선인들을 집결시켜 편성한 부대는 정저우에 집결해 기차를 타고 신의주를 통해 입북해 인민군 4사단의 18연대가 됐다.

이들은 입북하자마자 즉시 북한 국적을 취득했고 중국 공산당 당원은 조선노동당의 당원으로 심사 없이 전환됐다. 심지어 군복도 한꺼번에 인민군 복장으로 일제히 갈아입었다.

이 시기의 귀국은 일제의 패망 직후의 귀국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때는 38선을 분단으로 인식은 했지만 아직 전쟁은 아니었다. 그러나 1948년 남북의 정부가 따로 세워지면서 한반도의 분단은 기정사실화했고 1949년부터는 국토완정이란 구호 아래 전쟁으로 성큼성큼 다가가고 있었다.

이승만은 북침을 감행하고 성공시킬 역량을 갖추지 못했지만 구호로는 '북진통일'을 줄기차게 외쳤다. 목소리는 컸으나 속은 부실했다. 김일성은 대외적인 공간에서는 화평(和平)을 외치면서도 내밀하게는 전면전을 준비해가던 하던 국면이었다. 만주조선인부대의 귀국준비도 달랐다. 귀국 직전의 군사교육은 돌격이나 폭파 등이 중점이었다. 그들의 귀국은 곧 전쟁이었다.

조선의용대 후자좡촌 전투기념비 윤태옥

조선의용군 지휘부는 왜 전면전에 동의하고 주력으로 나섰을까. 한국전쟁은 김일성이 주도해 중국과 소련을 설득해서 감행했다. 그러나 조선의용군만의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망국기에 자신들을 지원해준 동맹국 중국의 국공내전에 참가했다. 거기서 그들은 성공체험을 했다. 내전에서 이기면 그것이 혁명의 성공이라는 것.

혁명이라는 수사 아래 내전은 백성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사병들은 또 얼마나 죽어나가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성공했다. 성공체험으로 인해 혁명은 전쟁이고 전쟁은 혁명의 지름길이라는 인식이 그들에게 더 강해진 것은 아닐까. 그것이 김일성의 전면전을 확고하게 받쳐준 것이 아닐까. 조선의 독립운동은 직접 성공하지 못했으나 중국 국공내전에서 승리했다. 실패 뒤의 성공이 다시 동족상잔이란 극단의 실패까지 몰고 간 게 아닐까.

다시 타이항산을 떠올린다. 산과 산은 멀리서 보면 첩첩이라 한 덩어리 같지만, 가까이 보면 계곡으로 나뉘고 능선 따라 이어지기가 복잡하게 얽힌다. 38선의 만주조선인부대 10개 연대는 타이항산의 조선의용군과 정치적으로도 인맥으로도 직접 이어진다. 그와 동시에 일제의 패망과, 조국의 해방, 미소의 분할점령, 중국의 국공내전이라는 연접한 계곡들로 나뉘기도 한다. 하나인 듯 둘이고 둘인 듯 하나다.

앞뒤로 이어진 연봉들에 익숙한 이름들이 겹친다. 김원봉, 최창익, 무정, 방호산, 이상조, 주덕해, 김일성... 한국전쟁은 우리의 모든 것을 파괴했다. 역사마저도. 독립운동의 여러 갈래는 분단이란 강요된 상황과 통일이라는 당위를 두고 서로 충돌하거나 연합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조선의용군이다. 한국전쟁 역사를 읽어가면서 참담한 마음을 금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다.

한단시 진기로예열사릉원 조선의용대 윤세주의 묘 윤태옥

한단시 진기로예열사릉원 조선의용대 진광화의 묘 윤태옥

후자좡촌 항일문학비 김학철과 김사랑 윤태옥

 

비극의 시작, 실패로 귀결될 길로 돌격한 인민군 세 청년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14] 1950625일 새벽, 최전선에 섰던 청년 인민군들의 굴곡진 삶

195611월 북한 국비 유학생인 정린구(왼쪽부터) 김순자, 허웅배, 한대용(한진), 리경진, 김종훈, 리진황이 소련 전연맹국립영화대학 기숙사 앞에서 찍은 사진. 자료사진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2959070&SRS_CD=0000016396

 

오죽했으면 국방장관 간첩설까지... 이승만·신성모·채병덕이 부끄럽다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15] 압도적 전력의 인민군... 나라를 구한 6사단

1948510이 모진교에 위치한 23전초중대 로이드 스탠클리프 중위가 38 경계표시 위에서 찍은 사진 자료사진

대양 건너 남의 땅의 지도에 자를 대고 간편하게 '찌익' 그은 선이 38선이다. 바다와 섬과 강과 산을 넘어가며 남과 북을 깔끔하게 갈랐다. 그 가운데 북한강 다리 하나의 바로 북쪽을 지났다. 남쪽을 점령하기로 한 미군은 다리 북단의 공간이 초소를 만들기에는 너무 밭아서 다리 남단에 초소를 세웠다. 다리 중간에 38이란 숫자를 페인트로 큼직하게 써놨다.

이 다리는 모진교. 이곳의 북한강은 오래도록 모진강으로 불려왔기 때문에 1930년대에 세워진 이 다리는 모진교라고 명명했다. 춘천댐에서 물길을 따라 5킬로미터 정도 올라간 지점이다.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춘천시 사북면이다. 다리의 북단은 사북면 원평리 산70-5 이고, 남단은 인람리 산56-2이다.

모진교는 지금은 지상에나 공중에서는 보이지는 않는다. 춘천댐이 물을 가두자 수몰된 것이다. 모진교의 북쪽에는 말고개가 있다. 지금은 말고개 터널이 뚫려 대부분의 차량은 터널로 통행하고 말고개 산길은 한적한 옛길로 남아 서서히 잊혀가고 있다.

1950625일 새벽 4(북한은 5), 운명의 그날 그 시각, 북한 인민군의 개전포격은 말고개 후방에서 시작됐다. 모진교 남쪽에는 국군 6사단 7연대 3대대 9중대가 배치돼 있었다. 포격 목표의 하나는 모진교 남쪽의 372고지의 관측소. 한 시간 가까이 포격이 계속됐다. 관측소 대원들은 전원이 전사했다. 대기하고 있던 인민군 보병이 자주포를 앞세우고 모진교를 건넜다.

그날 그 시각,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동족상잔의 전면전은 이렇게 시작됐다.

압도적 전력의 인민군, 모진교를 건너다

모진교  그래프 박종현

내 평생 쌓여온 기억에서 한국전쟁 개전 초기의 서사는 대략 이렇다. 적화야욕에 불타는 소련의 사주를 받은 북한 괴뢰 김일성은 불법적으로 기습적으로 남침을 했다. 우리 국군은 조국을 지키기 위해 폭탄을 안고 적의 탱크에 뛰어들어 산화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화력과 병력에서 절대적으로 열세였기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하나하나 짚어 봐도 틀린 것이 없다. 참담하다. 그들이 희생한 땅에서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으니 고개가 숙여지지 않을 수가 없다. 고개를 들면서 그들을 희생시킨 인민군과 국군의 절대적인 전력 차이의 안팎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것은 병력이다. 개인의 싸움이든 정규군의 전쟁이든 병력의 차이는 승패를 가른다. 당시에 국군은 8개 사단으로 병력은 95천 수준이었다. 인민군은 10개 보병 사단을 비롯하여 탱크와 자주포로 무장한 105기갑여단, 포병연대, 706기계화연대, 공병연대, 유격연대 등을 포함해 총 18만여 명이었다. 남북에 정부가 각각 수립된 이후 확군의 속도와 성과는 북한이 두 배가 될 정도로 우세했다.

가장 중요한 차이는 1949~1950년에 이루어진 만주 조선인부대의 대거 입북이었다. 앞의 글에서 살펴본 대로 3개 사단(9개 연대)과 별도의 1개 연대가 무장한 그대로 입북하여 인민군에 편제됐다. 인민군 5사단, 6사단, 12사단과 4사단 18연대가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남북을 통틀어 가장 최근의 실전 경험을, 그것도 승전 경험을 갖고 있었다. 장제스의 중화민국이 중국 공산당과의 화평을 깨고 시작한 내전, 곧 제2차 국공내전에 깊숙이 참전했고 승전했다. 2차 세계대전에서 독소전을 포함해 소련군에서 활약한 조선인들도 소련군과 함께 또는 그 이후에 입북해서 북한 인민군으로 편입됐다.

남한의 국군은 어떠했을까. 단적으로 말하자면 교육훈련과 실전 경험에서 정규군으로서 현대전을 수행할 최저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다. 중국과 소련이 북한에 보냈듯이 실전 경험을 갖고 있는 조선인들을 보내줄 동맹국도 없었다. 패전국의 군인이었던 조선인들은 애초에 계급도 낮았고 지휘관도 거의 없었다.

중국에서 일본군을 탈출했던 조선인들은 다수가 공산당 쪽으로 갔다. 일제 패망 이후 광복군은 만주로 가서 확군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채 귀국해야 했다. 뒤늦게 귀국해보니 국방경비대는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중화민국 국민당 군대 출신도 일부 있었으나 역시 실전 경험은 거의 없었고 숫자도 적었다.

'미들급' 인민군을 상대한 '플라이급' 국군... 예상됐던 KO

모진교 전투 전적지 윤태옥

사정이 이러하니 건군 초기에는 일본에서 군사교육을 받았거나 약간의 군대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 국방경비대 장교가 되었고 이들이 곧 국군의 핵심 간부가 됐다. 경력으로 보면 중대장이나 대대장급이었으나 연대장이나 사단장에 보임됐다. 지휘관부터 병사들까지 실전 경험은 물론 기본적인 교육 훈련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 실전 경험이라야 제주도와 지리산에서의 반정부 무장대를 토벌하거나 38선에서 소규모 충돌을 감당한 정도였다.

결과적으로 국군의 사단장급 지휘관으로서 정규전에서 소총 중대급 이상의 부대를 실전에서 지휘해본 경력자는 한 명도 없었다. 총참모장인 채병덕부터 병기병과 출신으로 작전지휘에는 부적합하다는 평가가 따라 붙었다. 남한에서는 말로 하는 정치 지도자는 많았으나, 몸으로 전쟁을 감당할 군사지도자는 전무하다시피 했던 것이다.

교육훈련도 차이가 심했다. 국군에게 무기를 제공하며 교육훈련을 담당하던 주한 미군은 1949년 철수하면서 마지막으로 한국군에게 대대작전 시범훈련을 보여 주었을 뿐이었다. 이에 비해 인민군의 교육훈련은 다양했고 나름 체계적이었다. 북한군은 사단 단위의 야외 기동훈련을 마치고, 각 부대별로 남한의 목표 지역에 대한 지형 분석과 도상 연습까지 실시했다.

국군은 1950615일에 가서야 수도경비사와 7사단과 8사단의 일부만이 대대훈련을 완료했고, 대개의 경우 중대급 훈련에 그쳤다. 심지어는 소대급 훈련도 안 된 부대도 있었다. 국군은 장갑차 운전병, 통신병 등 특과병 교육과정을 설치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신병 기초교육을 이수한 특과병들을 실무현장에서 가르치는 수준이었다. 인민군은 1948년부터 1년 동안 걸쳐 1만여 명의 청년을 선발하여 소련의 극동군사학교에 파견하여 전차, 항공, 통신교육을 받게 했다.

병력뿐 아니라 부대의 배치에서도 남한은 불리했다. 국군은 8개 사단 가운데 4개 사단만이 38선에 배치됐고, 나머지 4개 사단은 후방에서 반정부 게릴라를 상대해야 했다.

무기 역시 말하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국군의 장갑차는 총 27대였다. 이에 대응하는 인민군의 무기는 T-34 전차 242, SU-76 자주포 168, 장갑차 59, 모터사이클 500대 정도다. 소련이 잉여 군수물자를 북한에게 적극 지원한 것과 대조적으로 미국은 남한에게 무기를 충분히 제공하지 않았다.

이 정도가 링에 올라가기 전에 계체량에 나선 두 선수의 간략한 비교다. 북한이 미들급이라면 남한은 미들급보다 네댓 급은 떨어지는 플라이급 정도랄까. 경기를 해봐야 미들급 선수가 플라이급 선수를 일방적으로 두드리다가 1라운드도 끝나기 전에 KO패 또는 몰수패로 끝날 형국이었다.

실제 한국전쟁 초기의 양상이 그랬다. 38선에서부터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고, 적지 않은 부대는 대오가 흩어져 말로는 작전상 후퇴이지만 패잔병과 다를 바 없이 지리멸렬하기까지 했다. 다만 미국이란 헤비급 선수가 서둘러 개입하여 완전한 패전으로 끝나지 않았을 뿐이다.

'신성모 간첩설'이 푸념 반 의심 반으로 떠돌았던 이유

말고개 옛길의 38선 표지 윤태옥

선수의 승패는 곧 구단의 성패다. 선수인 국군이 패퇴를 거듭하자 국가의 존망은 휘청거렸고 백성들은 전후방 어디든 커다란 고통의 나락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한국전쟁 역사를 돌이켜보면서 음미할 것의 하나는, 선수의 체급 문제는 선수가 아니라 구단과 구단주의 문제란 것이다. 미들급 선수와 맞붙는데 플라이급 선수를 내밀 수밖에 없는 구단이라니.

대한민국 군번 1번으로 유명한 이형근(1920~2002)은 그의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면서 군지휘부에 통비(通匪)분자가 있었던 게 아니냐고 탄식할 정도였다. 기습남침 직전의 모든 상황은 그나마 갖고 있는 국군의 방어력을 스스로 가장 낮은 수준까지 끌어내렸다는 것이다.

19504월말 총참모장으로 다시 부임한 채병덕은 전방부대와 후방부대를 대대적으로 교체했다. 작전지역에 익숙해진 부대를 뒤로 빼고 낯선 부대를 투입했으니 북한의 기습공격을 알아서 도운 꼴이 됐다. 지휘관도 전부 교체하고 육군 지휘부도 새로 구성했다. 정보국장과 군수국장을 제외한 모든 참모와 사단장들이 바뀐 것이다.

이와 함께 624일 비상령도 해제됐다. 토요일 아침에 비상령이 해제되자 자연스레 병력의 반 정도에게는 휴가·외출·외박이 주어졌다. 농번기인데다가 가뭄 끝에 비가 오자 농사일을 거들려고 귀가한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북한 인민군의 남침에 맞춰 적들에게 가장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서 바친 꼴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물론 하나하나는 다 나름의 이유는 있다. 그러나 지휘관이 해야 할 종합적인 판단은 어디에도 없었다.

가장 큰 문제는 38선의 일선부대는 북한의 남침 징후를 계속 보고했는데 군 수뇌부는 이를 묵살 내지 무시했거나, 대단히 안이하게 대처했다는 것이다. 적이 기습을 한다고 해도 그에 대비하고 있으면 기습의 효과가 반감할뿐더러 역습의 기회까지 잡을 수 있는 법이다. 그러나 남한의 정부와 국군 수뇌부는 이를 충분히 알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도 제대로 대비하지 않았다.

그 가운데 어처구니없는 사건은 624일 저녁 용산의 장교클럽에서 전군의 주요 지휘관들이 모여 파티를 열었다는 것이다. 남침 징후가 곳곳에서 보고되고 있는데 겨우 육군 장교클럽 오픈기념이란 이유로 댄스파티 술자리를 열었다니. 이것은 몇몇 장교들의 사적인 모임이 아니라 국방장관 신성모가 호스트가 되어 전방의 사단장들과 주요 간부들을 전부 호출한 자리였다.

채병덕 총참모장은 술자리가 길어져 2차까지 하고는 새벽 2시에 귀가했다. 그는 새벽 5시 술기운이 가시지 않은 시간에 육군본부 상황실 근무자의 보고를 받고서 전군에 비상조치를 발동했다. 비상시국의 핵심보직인 육본 작전국장 장창국 대령은 이사한 지 며칠 되지 않아 전화연락도 되질 않았다.

채병덕은 신성모 국방장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영국 경험이 있는 신성모는 자신의 휴무에 충실한 것으로 유명했다. 긴급한 전화였으나 일요일 새벽이라서 그랬을까, 연결조차 되지 않았다. 채병덕이 신성모의 비서와 함께 지프를 타고 집으로 달려간 것이 오전 7시 정도. 나라가 침략을 당하고 있는데 전화연락도 되지 않는 국방장관이라니.

대통령이라고 다를 바가 없었다. 이날 아침부터 비원에서 낚시를 즐기던 이승만은 오전 10시쯤에야 경찰 보고를 받고 경무대로 돌아왔다.

인민군은 38선 후방에서 38선으로 발소리를 죽이며 조용히 접근하여 개전포격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남한의 국방장관은 전방의 주요 사단장들을 전부 불러 댄스파티를 벌였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 때문에 '신성모 간첩설'이 푸념 반 의심 반으로 떠돌았던 것이다.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허언 일삼은 권력 엘리트들

모진교가 수몰된 지점 윤태옥

전쟁은 양쪽의 총사령관이 일대 일로 링 위에서 싸우거나, 양쪽의 사단장들이 미식축구를 하듯이 스크럼을 짜고 일렬로 맞붙는 게임은 아니다. 그러나 운명의 625일 새벽, 숙취에 젖어 있다가 부대도 아닌 서울의 집에서 비상령을 전달받은 국군 사단장들과, 두 눈을 부라리고 일격에 적을 제압하려고 기습공격을 감행해온 인민군 사단장들의 표정을 비교해서 상상해보라.

플라이급밖에 되지 않는 국군이 링에 끌려 올라가 피투성이가 되고 수많은 젊은이들을 쓰러지게 한 이승만이, 신성모가, 채병덕이, 그들로 대표되는 당시의 권력 엘리트들이 부끄럽다.

이승만은 대통령으로서 국가를 안전하게 지킬 모든 방책을 사전사후에 강구해내야 했다. 선제공격을 하든, 미국이나 중국 소련을 상대로 외교적 술수를 쓰든, 김일성을 구워삶든, 무슨 수단을 쓰든 그는 그것을 해내야 하는 자리에 앉아있지 않았는가. 어떤 방법이든 북진 이전에 남침을 막아낼 병력과 무기를 끌어다 군에 공급해야 하는 게 그의 의무였다.

이승만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으나 1925년 탄핵당한 것보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서 1960년 또 다시 국민들의 피를 보고서야 하야한 것보다, 북진통일을 외치면서도 북한의 무모한 남침을 막아낼 준비를 하지 못한 것이, 그래서 수많은 장병들이 죽었고 훨씬 더 많은 국민들이 극악한 고통에 빠진 것이, 나는 더 부끄럽다.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라는 어처구니없는 허언으로 요약되는 무능한 국방장관 신성모가 부끄럽다. 총참모장으로서의 책임은커녕 급박한 상황에 후들대면서 성급하게 한강다리를 폭파시켜 국군 3개 사단을 적 앞에 고립시키고 수많은 서울시민을 적군 치하에서 고통을 당하게 한 채병덕이 부끄럽다. 그가 일본군 장교 출신이란 사실보다 더 부끄럽다.

술 파티 참석 거부... 부대 지킨 단 한사람

그런데 그날, 남침 징후가 있다고 보고를 했을 뿐더러 장교클럽 파티에 참석하라는 호출을 무시하고 자리를 지킨 사단장이 딱 한 사람 있었다. 춘천의 6사단장 김종오(대령)였다. 다른 사단들이 기습공격에 무너지고 뚫릴 때, 6사단만은 춘천을 통해 수원으로 진공하려는 인민군 2군단을 3일 동안 완강하게 저지했다.

이승만이 공급한 병력과 무기는 빈약했으나 자신의 방어선을 지켜냈고 거꾸로 인민군에게 상당한 피해까지 안겨줬다.

이로 인해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고도 한강도하를 3일이나 지연하게끔 만들었다. 625일 운명의 그날에 인민군에게 뚫리지 않은 유일한 전선이 바로 춘천이었고 그래서 나는 모진교부터 찾아온 것이다. 이제 모진교에서 춘천시내의 치열한 전장으로 갈 차례다.

6사단이 나라를 구했다는 자부심의 현장이다.

 

3일 버틴 6사단, 허무하게 무너진 1사단... 왜 성찰은 없나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16] 6사단의 춘천전투 전적지에서 던지는 질문들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2968016&SRS_CD=0000016396

이승만은 왜 목포 거쳐 부산 갔나... 그것도 19시간 걸리는 배로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 17] 철수작전 없이 폭파된 한강다리...대통령의 이상한 피란 동선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2971687&SRS_CD=0000016396

개전 초기 연전연패 부른 국군의 무능함과 미군의 오만함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18] 격전지 오산 죽미령·동락전승비·개미고개를 가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2975605&SRS_CD=0000016396

포로가 된 미 사단장이 전쟁 영웅? 대전전적비에서 발견한 사실 왜곡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19] 이승만이 훈장 준 딘 소장, 그를 둘러싼 '기억 전쟁'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왼쪽)24단장 딘 소장. 강성현 제공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2979895&SRS_CD=0000016396

영국 뒤집은 한국발 보도, 기자는 망명... 미국은 극비로 묻었다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 20]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의 시작, 대전형무소 학살

구 대전형무소 우물 윤태옥

우물은 식수로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샘이다. 마른 목을 축이는 음용수는 물론, 한 끼를 준비하는 식수와 땀을 씻어내는 생활용수까지 일상에 생기를 불어 넣는다. 생명의 줄로 생명의 물을 길어 올리는 게 우물이다. 그런데 이런 우물에 산 사람을 빠뜨려 죽이거나 시신을 던져 넣어 죽음의 구덩이가 된 것을 상상해보라. 이 얼마나 끔찍한 반생명의 패악이고 반인륜의 악행인가. 우리나라에 이런 우물이 한둘이 아니다.

옛 대전형무소(대전 중구 중촌동 16번지 일대)의 우물이 그랬다. 지금은 투명판으로 덮인 우물 옆에서 6.25 당시 북한군이 대전형무소 수감자들을 학살했다. 유엔군이 대전을 수복한 후에 취사장 우물에서 171구의 시신을 인양했다. 우물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대전형무소의 담장 일부가 남아 있다. 그곳의 안내판은 인민군에 의해 1557명이 학살당했다고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 '1557' 옆에는 또 다른 '수천 명'의 학살이 기록돼 있다.

'우리'가 저지른 학살

6.25전쟁 발발 직후 대전형무소에 수감돼 있었던 여순사건 관련자들과 국민보도연맹원 등이 한국정부의 지시에 의해 학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체포 또는 소집된 보도연맹원들은 경찰의 심사와 분류에 의해 'A, B, C' 또는 ', , '으로 나뉘어져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다. 'A''' 등급은 대전 인근 산내에서 대전형무소 일부 수용자들과 함께 모두 학살됐으며 그 수가 수천에 이른다고 한다.

1557명과 수천 명. 대전형무소를 장악한 자들은 그해 7월과 8월 남북을 가리지 않고 민간인들을 무지막지하게 학살했다. 북한이 전면전을 일으키자 남침을 막지 못한 남한은 남으로 퇴각하면서 권력에게 순종하지 않는다고 낙인찍은 자국민 수천 명을 학살했다. 미군에게 북으로 쫓겨 가던 인민군 역시 자기들이 해방시켰다는 인민 1557명을 학살했다. 이렇게 싹 쓸어 죽이고 저렇게 싹 쓸어 죽이는 두 번의 학살, 바로 '우리'가 저지른 학살이다.

대전형무소 수감자에 대해 한국의 군과 경찰은 골령골(당시 산내면 낭월리, 현재는 대전 동구 낭월동 13번지. 인터넷 지도에는 산내골령골이라는 지명도 올라 있다)로 끌고 가서 학살했다. 북한 인민군은 형무소 안팎에서 학살했다. 두 번의 학살이 발생한 터라 한국 군경에 의한 학살과 북한 인민군에 의한 학살로 구분하기도 한다. 한국 군경에 의한 학살은 장소성을 담아 골령골 학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당시의 기록에는 산내, 낭월, 골린골, 곤령골 등의 지명이 사용됐으나 최근에는 골령골이란 말이 주로 사용된다.

19507월 대전 산내골령골 민간인집단희생 당시 현장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골령골 살해현장. "더 올라가면 이승만 대통령이 아니고 누가 그런 명령을 내릴 수 있겠어." 19506.25 당시 골령골 총살집행책임자 중 한 사람이었던 변홍명(가명)의 주요 증언, 충남도경찰청 소속 사찰 주임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1950928일 미군 24사단이 대전을 탈환하고는 대전형무소 안팎의 학살현장을 발굴하고 시신을 수습했다. 미군이 기록한 인민군 학살의 현장사진이 국내외 언론에 의해 보도했다. 대전형무소 안쪽의 밭고랑에 즐비하게 묻혀 있는 시신들, 발굴하며 드러난 시신, 부패한 시신의 악취 때문에 입과 코를 막은 채 발굴하는 민간인 등의 사진이다.

이런 사진은 미군 전쟁범죄조사국의 전쟁범죄문서에 첨부되기도 했다. 말 그대로 전쟁범죄다. 인민군의 학살은 전쟁 중은 물론 전쟁 이후에 지속적인 반공교육의 소재가 돼 전국민에게 잘 알려졌다. 지금도 대전형무소 터에서 반공애국지사 영령추모탑이 있다.

골령골 학살은 인민군의 학살보다 먼저 발생했고 먼저 알려지기 시작했다. 북한은 전쟁 중에 언론사 기자 이외에 문학인들을 전선에 보내 종군기를 쓰게 했다. 그 가운데 한설야가 '골린골 학살'을 송고했다. 김남천은 7천 명이라는 구체적인 숫자를 종군기에 썼다. 이런 종군기들은 당시에 인민군 점령지역에서만 보도됐을 것이다.

골령골 학살이 국제적으로 알려진 것은 <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마거리트 히긴스의 손에서 시작됐다. 그는 인민군의 위장전술을 보도한 713일자 기사에서 민간인 학살로 의심되는 내용을 덧붙였다. 김태선 내무부 치안국장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한국전쟁 발발 이후 1200명 이상의 공산군 스파이와 게릴라들을 한국 경찰이 처형했고, 총살이 많아 초과근무를 해왔다고 보도한 것이다.

히긴스의 기사는 그날로 소련 타스통신이 인용했고 북한의 조선통신사가 다시 받아서 보도했다. 헤럴드 트리뷴 통신원에 의하면 남조선 괴뢰 잔당들이 조선의 진보적 평화주민을 12백 명이나 학살했다는 것이다. 이 기사 때문이었는지 미군 당국은 716일 간호사를 제외한 모든 미국 여성을 한국에서 퇴거시킨다며 히긴스를 일본으로 추방했다. 당시 한국전쟁을 취재하다가 일본에서 휴식을 취하던 AP통신의 톰 램버트와 UP통신의 피터 갈리셔도 '미군을 나쁘게 보이게 했다'는 이유로 한국에서의 전선 취재가 금지됐다.

당시 미국은 712·13일 인민군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손이 뒤로 묶인 채 처형된 미군 21연대 병사들의 사진을 보도함으로써 북한의 잔학행위를 규탄하는 정치적 공세에 나선 시점이었다. 그런데 히긴스의 보도가 미국의 공세를 흔들어버린 셈이 됐다.

·영에 파장 일으킨 한국 민간인 학살 사건... 기사 낸 언론사는 폐간

영국에서도 민간인 학살사건의 보도는 파장이 컸다. 영국의 <픽처 포스트>(Picture Post)729일자 '한국에서의 전쟁'(War in Korea)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미군과 국군의 퇴각, 피난민, 부상병을 비롯한 군경의 사진과 함께 겁에 질린 채 트럭에 실린 사람들의 사진을 실었다. 트럭에 실린 사람들은 '반역자로 의심돼 처형되는 한국인'이라는 것이다.

전쟁 초기에 흔히 볼 수 있는 양측의 잔혹성을 지적하는 기사였지만 영국은 유엔군의 일원으로서 자신들에게 불리한 기사로 인식했다. 이 기사를 실었던 <픽처 포스트>의 편집장 톰 홉킨스는 나중에 '유엔이 지지하고 있던 한국 정권의 정치범들에 대한 잔혹한 처리를 실었다'는 이유로 해고당했고, <픽처 포스트>는 결국 폐간되고 말았다. 이 사진은 훗날 195079일 공주 CIC 분견대의 지휘 하에 공주파견헌병대와 공주경찰이 공주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보도연맹원들을 공주 왕촌의 살구쟁이 인근에서 총살한 사건으로 확인됐다.

영국 <데일리 워커>(Daily Worker)의 앨런 위닝턴 기자가 쓴 기사 강성현 제공

골령골 학살 보도로 가장 큰 파문을 일으킨 기자는 영국 <데일리 워커>(Daily Worker)의 베이징 특파원인 앨런 위닝턴이었다. 그는 북한으로 입국해 716일부터 5주 동안 한국전쟁을 취재했다. 평양 사리원 서울 수원을 거쳐 730일 대전에 도착했고, 골령골 현장을 취재했다. '한국에 있는 미국 벨젠'(US Belsen In Korea, 벨젠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수용소와 가스실이 있던 곳)라는 제목의 기사는 89일자 <데일리 워커> 1면에 실렸다. 9월에는 '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봤다'(I Saw the Truth in Korea)라는 16쪽의 팜플렛으로도 발행했다. 기사에 실린 사진들은 참혹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서서히 땅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살점과 뼈들을 볼 수 있었다. (중략) 커다란 죽음의 구덩이를 따라 창백한 손, , 무릎, 팔꿈치 그리고 일그러진 얼굴, 총알에 맞아 깨진 머리들이 땅 위로 삐죽이 드러나 있었다. 구덩이들은 깊이 6피트에 폭이 6~12피트였고, 가장 긴 것은 200야드, 2개는 100야드 정도였다.

위닝턴은 대전을 재탈환한 미군이 반박하지 않은 것은 자신의 기사가 사실임을 증명한다고 강조하면서 한편으론 골령골을 취재하지 않은 서방 언론도 비판했다. 위닝턴의 보도는 반미 적대감이 들어있고 과장도 있었지만 사실에 가깝다는 것이 훗날의 진상조사 과정에서 확인됐다. '나치의 벨젠수용소보다 더 참혹하다'는 위닝턴의 보도가 나가자 주영 미국대사는 본국에 보도내용을 알리고 상세한 반박문을 요청했다.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은 주한 미국대사에게 학살부인 성명서를 받아서 보내라고 지시했다. 무초 대사는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신성모 국방장관은 대사관의 질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 "89일자 영국의 데일리 워커에 보도된 수천 명의 정치범들을 7월 초 대전 인근에서 한국 경찰이 학살했다는 주장은 명백한 허위사실이다. 어떠한 민간인 죄수들도 적법 절차를 거치지 않고 처형한 바 없다. 소송과 판결은 법률 규정에 따라 법정에서 이루어진다. 어떤 전쟁 포로들도 처형되지 않았고 오히려 제네바 협약에 따라 잘 대우받고 있다."

유엔군이 대전을 수복한 이후 사십여 년 동안 골령골 학살은 엄혹한 반공정책으로 인해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사라진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언론은커녕 피해자의 유가족조차 발설하지 못하고 숨죽여야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민주화되면서 암흑 속의 통곡소리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첫 걸음은 19922<월간 말>의 보도였다. 1995년에는 대전충남 지역에서 골령골 학살에 대해 자체 진상조사를 시도했으나 보고서를 내지는 못했다. 골령골 학살을 충격적으로 환기하게 된 것은 태평양을 건너온 문서 한 뭉치였다. 1999년 말 재미학자 이도형 박사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NARA)에서 '한국 정치범처형 보고서'를 발굴해낸 것이었다.

이 보고서에는 학살의 실상이 구체적으로 기술돼 있었고, 현장의 사진 18장이 첨부돼 있었다. 주한 미국대사관의 육군 무관 에드워즈 중령이 보고서를 작성했고, 사진은 미군 극동사령부의 연락장교 애버트 소령이 촬영한 것이었다. 보고서는 1950923일 워싱턴의 육군 정보부로 보내졌고, 정보부는 정보원이 완전히 믿을 만하며, 정보가치는 의심할 바 없는 진실이라고 평가했다.

보고서의 핵심은 한국이 7월 첫째 주 3일간 1800명의 정치범을 처형했고, 명령자는 대한민국의 최고위층(top level)이란 것이다. 18장의 현장사진은 처형 대상자들의 이송에서부터 준비, 처형, 확인사살, 매장까지 구체적인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정보부대의 비밀 보고서가 전쟁특파원이나 한국의 언론 누구도 포착하지 못한 장면을 후세에 사료를 남긴 셈이다.

군인보다 민간인이 더 많이 죽은, 이상하고도 참혹한 전쟁

골령골 1학살지 B구역 발굴현장 ()한국선사문화연구원

골령골 유해발굴 현장 윤태옥 / 오마이뉴스 

이 보고서가 알려지자 학살의 진상규명과 희생자 추모는 힘을 받았다. 그 다음해인 200078일 첫 번째 위령제를 학살현장에서 지냈다. 위령제를 준비하면서 조심스럽게 유족들이 모여 유족회가 결성됐다. 유족회와 시민단체는 정부에게 유해발굴과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우여곡절 끝에 진실화해위원회가 2007년 여름 70여 일에 걸쳐 유해발굴을 했다. 시신이 가장 많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점은 사유지라서 건드리지 못했다. 그 옆의 다른 지점을 소규모로 발굴했는데 2곳에서 34구의 유해와 각종 유품 그리고 다수의 탄피가 출토됐다. 그러나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가 해산되면서 유해발굴은 중단됐다.

유족과 시민단체들이 대통령과 국회에 후속조치를 건의했으나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 이들은 정부에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20142'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을 조직한 뒤 자체적으로 유해발굴에 나섰다. 공동조사단은 2015년 골령골에서 발굴을 진행했으나 시간과 예산의 제약으로 20여 구의 유해를 수습하고는 또 다시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유족회와 시민단체들의 끝질긴 노력 끝에 2020년부터 3년 동안 다시 유해발굴을 진행해 지금까지 총 1441구가 수습됐다. 유해는 세종시 추모의 집(세종시 전동면 봉대리 산30-9)에 안치했다. 골령골에는 아직도 유해가 남아 있겠지만 발굴은 금년으로 종결됐다. 발굴지점은 평평하게 복원됐고 내년부터 한국전쟁 민간인희생자 위령시설이 들어설 예정이다.

유족회와 시민단체들의 끝질긴 노력 끝에 2020년부터 3년 동안 다시 유해발굴을 진행해 지금까지 총 1441구가 수습됐다. 유해는 세종시 추모의 집(세종시 전동면 봉대리 산30-9)에 안치했다. 윤태옥

골령골 학살현장의 오늘 윤태옥

골령골 학살사건의 진상은 진실화해위원회의 보고서에 이렇게 기록돼 있다.

대전형무소는 전쟁 발발 당시 재소자 수는 약 4000, 이중 2000명 정도가 정치사상범이었다. 또 전쟁 발발 후 대대적인 예비검속으로 보도연맹원 등이 대전형무소에 대거 수감되었다. 195071일 대전지검 검사장은 '공산당 우두머리를, 좌익의 극렬분자를 처단하라'는 전문을 대전형무소 당직주임에게 하달한 후 피난길에 올랐다. 마침 이날 임시감방에서 미결수들이 감방문을 여는 등 소동을 일으켰고 2사단 헌병대와 5연대 헌병대가 재소자 인도를 요구하며 처형 작업이 시작되었다.

대전형무소 재소자들은 3차례에 걸쳐 산내 골령골에서 처형되었다. 1차는 628일부터 30일까지 여순사건 관련 재소자와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들이 희생됐다. 헌병대가 총살하고 헌병 지휘자가 확인사살을 했다. 2차는 73일부터 5일까지 4.3사건과 여순사건 관련 재소자, 정치사상범, 징역 10년 이상의 일반사범, 보도연맹원 등 약 1800명이 군경에 의해 희생됐다. 3차는 76일부터 17일까지 서울을 비롯한 경인지구 형무소에서 풀려났다가 다시 검거된 재소자, 청주형무소에서 이감된 재소자,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충남지역 보도연맹원들이 희생됐다.

국권을 상실해 식민지가 됐고, 식민지 백성들은 제국주의 전쟁에 동원됐고, 패전국의 식민지 처지로 독립이 아닌 분할점령 신세가 됐다. 그들이 만든 분단에 내부가 자석에 끌리듯 두 개의 분단정부를 세웠다. 북한이 남침 전면전을 벌였고 남한은 자국민 학살로 응대한 꼴이 됐다.

혹시라도 극복할 수도 있었을 외세에 의한 분단을, 돌이킬 수 없는 내부의 대결로 굳힌 것이 바로 전면전과 민간인 학살이다. 군인보다 민간인이 훨씬 더 많이 죽은 이상하고도 참혹한 한국전쟁, 그것이 우리의 현대사, 그저 망연자실할 뿐이다.

골령골 학살 현장에서 해설하는 임재근 박사 윤태옥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고 불리던 대전 골령골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위령과 추모와 위안과 답사란 이름으로 다녀갔다. 지금까지 골령골 학살의 진상규명과 유해발굴 그리고 방문자들에게 현장을 안내해온 임재근 박사(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 교육연구소장)는 이렇게 마무리했다.

"산내 골령골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국가폭력의 현장입니다. 이러한 국가 권력에 의한 학살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평화와 인권 교육이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임재근 박사의 긴 이야기를 듣고 대전을 떠나 다음 답사지로 가기 전에, 내 뒷덜미에 들러붙은 한 가지 질문을 덧붙인다.

영국의 위닝턴은 자신의 기사로 커다란 시련을 당했다. 영국 정부는 그가 북한에서 인민군의 협조를 받았다는 이유로 배신자로 낙인찍고는 귀국하면 반역죄로 기소하겠다고 위협했다. 위닝턴이 몇 차례 한국전쟁 취재를 계속하자 영국 정부는 그의 여권을 말소시켰다. 이로 인해 위닝턴은 귀국도 하지 못하고 독일로 가서 거의 20년 동안 고독한 망명생활을 해야 했다. 그의 기사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고, 그의 취재가 표현의 자유에 속하는지도 무관했다. 오직 아군과 적군이라는 진영논리로 박해해 한 개인의 삶은 파탄지경에 빠졌다.

인민군이 미군 포로를 처형한 것에 대해 미국이 비난하자 북한은 유엔 사무총장에게 제네바 협정을 준수하고 있다(1950.7.13)고 거짓말을 했다. 골령골 학살에 대해 남한은 국방장관 신성모의 입으로 학살을 전면 부정하고 제네바 협정을 준수하고 있다(1950.9.22)고 거짓말을 했다. 영국은 거짓말이 아닌 기사에 반역죄로 협박하다가 자국민을 버렸고, 미국은 학살 전 과정을 세밀하게 기록하고도 극비로 분류해 문서고 깊은 곳에 감췄다.

전쟁이 국가를 거짓말쟁이로 만든 것인가, 국가는 원래 거짓말을 잘하는 존재인가. 권력과 권력기구는 최소한의 신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허망한 질문이지만 다시 한 번 묻는다. 이들 정부는 모두가 거짓말 면허장을 받았는가.

골령골 현장에 많은 방문객이 다녀갔다. 윤태옥골령골 현장에 걸린 현수막 윤태옥

https://blog.naver.com/kimyto/222544165502

윤태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