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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근 .현대사 이야기

언 땅, 질퍽한 흙... 그 사이에서 뼈와 유품이 나오기 시작했다

by 이성근 2023. 10. 28.

언 땅, 질퍽한 흙... 그 사이에서 뼈와 유품이 나오기 시작했다

[다시 만날 그날까지 ]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유해발굴현장과 첫 만남

진주 집현면 봉강리 발굴장 모습김영희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올해로 73주년이다. 한국전쟁으로 사망한 국군 전사자는 608천 명. 하지만 민간인 피학살자는 이보다 많은 106968명이다. 이러한 사실은 암암리에 알려져 있을 뿐 자세히 아는 국민은 많지 않다. 그 이유는 그동안 국가가 민간인학살은 은폐해왔기 때문이다. 또한 정부는 현재까지 사과는커녕 피학살자와 유족들에게 배보상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

고 노무현 대통령 시절인 200512'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아래 진화위) 1기가 발족했다. 전국에서 사건이 7922개 접수됐고, 유형별로 조사한 결과 16572명의 피학살자를 확인했다.

이후 168개 지역에 지표조사를 통해 13개소를 발굴했고 1617구의 유해와 5600여 개의 유품을 수습했다. 부분적이긴 하지만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에 대한 진실규명이 이루어진 셈이다. 그러나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국가 차원의 과거청산 작업을 전면 중단했다.

이에 2014218, 전국민간인학살유족회의 요청으로 시민사회단체(민족문제연구소 주관)가 뜻을 모아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아래 공동조사단)을 결성했다. 공동조사단은 제1(2014224) 발굴지를 진주시 명석면 명석고개 산 241-1로 선정했다.

1차 발굴지 진주시 명석면 명석고개 산 241-1, 417-2김영희

공동조사단과의 인연

공동조사단은 2014220일경 사전답사를 했다. 필자는 이날 첫 발굴단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며칠 후 발군단원인 민문연 회원,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1차 발굴을 시작했다. 필자도 첫 발굴작업을 시작했다. 유해 발굴은 쉽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 유해가 노출될지 모르기 때문에 흙을 살금살금 파야 했다. 유해 상태가 좋지 않아 조금만 방심하면 유해가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발굴 현장에 도착해 현장을 접하는 순간 충격에 사로잡혀 말문이 막히고 가슴 멍해졌던 것 같다.

진주 지역에는 학살지 24개소 중 11개소가 명석면에 위치하고 있다. 당시 진주형무소(진주시 상봉서동 1098번지)는 명석면에서 10km 이내 거리에 있었고 명석면은 산지로 둘러싸여 학살지로서는 좋은 환경과 조건이었던 것 같다. 그중 용산고개는 세 개의 골짜기로 이루어져 있고 골이 아주 깊다. 고개는 2000년 초 경남대 사학과 고 이상길 교수가 시굴, 유해를 발견해 덮어둔 곳이다.

발굴 이튿날, 본격적인 유해 발굴 현장에 참여했다. 뼈와 유품들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2월 말 추운 날씨로 땅의 상태가 얼어붙고 군데군데 흙이 질퍽질퍽하여 조건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용산고개는 지형이 아주 습한 곳이라 유해들이 많이 훼손된 상태였다. 조금만 건드리면 부서지고 깨져 안타까운 마음에 더욱 조심스럽게 작업했다.

이날은 유해의 뼈 중 가장 강한 부위인 대퇴골과 정강이뼈 위주로 노출되기 시작했다. 두개골은 약하기 때문에 거의 손상된 상태였다. 유해를 보는 순간, 가슴이 멍해졌다. '인간은 이념의 동물인데 왜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법적 절차 없이 학살한 후 처참하고 참혹한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죽을지도 모른 채 잡혀 온 이들이 64년 만에 밝은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현재 임시안치소 모습김영희

보도연맹원이 가장 많이 학살된 진주, ?

진주는 조선 말에 임술농민항쟁(1862)이 최초로 일어났고, 일제강점기인 1923년에는 백정 해방운동인 형평운동과 소년운동의 3대 발상지다. 진주사범학교 등 4곳의 중등학교가 있어 교육받은 인력이 많이 배출됐고, 이를 바탕으로 민중운동과 사회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반면 지리적 조건으로는 빨치산의 근거지인 지리산 인근 지역에 위치해 있어 빨치산들로부터 진주형무소 습격을 자주 당했다. 이러한 배경으로 국민보도연맹(아래 국보연)의 좌익활동이 활발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19481019일 여순항쟁 이후, 정부는 좌익인사를 전향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1949420일에 국보연을 결성한다. 당시 남로당 등 좌익단체 가입자들은 자수와 동시에 국보연에 가입한다. 경남도연맹에서 발표한 자수전향자는 5548명이었다.

진주연맹의 결성선포대회는 1949128일 진주극장에서 사상전향자와 자수자 1000여 명과 진주경찰서장(이정용)이 이사장, 진주인민당 위원장(박진환)이 간사장으로 참석한 가운데 개최됐다. 이후 보도연맹원증을 발급하고 지서별로 이들을 훈련, 교육 등 조직적으로 관리했다. 특히 쌀, 보리 등 식료품을 준다고 회유해 보도연맹이 어떤 단체인지도 모르던 농민들까지 가입시켰다.

19507월 하순부터 진주는 하동에서 진격해 오는 인민군 제6사단과 함양으로 진격하는 인민군 제4사단에 의해 점령 위기에 처한다. 이에 진주는 진주지구 육군특무대(CIC)5사단 소속 진주지구 헌병대진주경찰에 의해 731일 진주가 함락되기 전인 721일부터 26일까지 진주형무소 재소자와 예비검속자, 보도연맹원 등 집단학살을 단행한다.

송진근(해방일보 특파원) 기자에 따르면 피학살자는 애국자(독립운동가) 2000명과 보도연맹원 1500명 등 3500명이다. 진주는 현재 학살지 24개소 중 10차 발굴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운명의 논문 한 권

발굴작업 진행 중 어느 날, 당시 강병현 진주유족회장이 논문 한 권을 필자에게 건넸다. 아무 생각 없이 받아 들고 집으로 왔다. 집에 와서 읽어 보니 대학교 은사이신 고 이상길 교수의 논문이었다. 이 교수는 생전에 경남지역 학살지마다 시굴과 발굴 조사를 진행했다. 마산합포구 여양리와 문산 진성고개, 산청 외공리, 경상 코발트 등 유해 발굴에 혼신을 다 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논문을 통해 이 교수가 생전에 유해발굴을 통해 역사적 진실을 밝히려 헌신과 노고를 다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용산고개의 참혹한 학살 현장에서 집단학살범죄(제노사이드)를 은폐한 역사적 사실을 목격한 순간, 필자는 내가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에게만이라도 사실을 알려야겠다고 결심했다. 역사 교사로서 아픈 역사를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쥐구멍에 숨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또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 8종 중 모두 한국전쟁 단원은 있지만 민간인 학살과 보도연맹 관련 내용이 서술된 교과서는 1종도 없다는 걸 알게 됐다. 그 후 지금까지 20차 전국유해발굴 자원봉사를 다니고 있다.

1차 발굴지 현장 및 유해 노출 모습김영희

드디어 첫 발굴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머리뼈 조각 20, 허벅지뼈 78, 정강이뼈 15, 위팔뼈 6개 등 129점의 유해가 수습됐고, 출토된 유해는 최소 39명이다. 탄두와 탄피가 유해 내에서 발견된 점으로 보아 근접 내지, 확인 사살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유해에서 발견된 안경은 고급스러웠고, 버클인 경우도 앞면에 지리산의 배경이 그려져서 좌익활동자로 추정됐다. 또 지식층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유품은 피학살자의 신분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용산고개 학살지의 기막힌 사연

4차 발굴을 마쳤을 때, 구수회 어르신이 당시 상황을 기억하신다기에 찾아뵈었다. 어르신은 용산고개 학살지 건너편 오미마을 주민이다.'용산고개 학살 현장의 상황이 기억나느냐' 묻자 그는 이렇게 증언했다.

"10살 정도 됐을 때 오미마을 주민들을 매장지를 묻기 위해 동원했는데 아버지도 함께 갔어. 구덩이에 시신을 넣고 차곡차곡 쌓았고, 언덕 풀밭에는 시신의 검붉은 피가 있었고 산골짜기는 핏물로 물들어 있었어. 구덩이에 넣지 못한 시신이 풀밭에 널브러져 있어 고랑에다 던져놓고 흙을 덮었다는 말을 들었어. 그리고 내가 용산고개에 소 먹이러 자주 갔는데 뼈들이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것은 예사였어.

어느 날 친구들과 용산고개 산으로 놀러 가는데 동네 저씨가 포대기에 뭔가를 가득 넣어 들고 산에서 내려오더라고. 내가 '아재 그거 뭡니까?' 하니까 '아가들은 몰라도 돼'라고 하고 내려갔어. 알고 보니 해골과 뼈들을 주워 인근 시장에 팔았다는 거야."

1951, 큰 홍수가 나 용산고개 계곡에 유해들이 많이 떠 내려왔다. 당시 뼛가루가 간질에 효험이 있다고 하여 한약방에서 주문하면 몰래 거래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럼에도 어찌 유해를 팔아먹을 수 있단 말인가. 진주지역만 그런 소문이 있는 것은 아니다. 전국 학살지 주변은 뼛가루를 팔아 삶을 지탱하며 산 사람이 많았다.

용산치 건너편 임시 안치소 컨테이너 모습김영희

컨테이너에 안치된 넋들의 아우성

어느 날 발굴단 중 한 명의 지인이 발굴지를 방문하겠다고 했다. 발굴단은 오전 8시에서 오후 5시까지 발굴한다. 그런데 방문객이 오후 6시에 도착했다.

발굴지까지는 길에서 200m 정도 올라가야 있어 우리 세 사람은 주소를 가지고 발굴장을 찾아 올라갔다. 조그마한 천막 하나 있고 사람도 아무도 없어 두리번거리다가 결국 못 찾고 길을 내려오는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 컨테이너 쪽으로 올라갔다. 건너편에서 분명 소리가 들렸는데 아무도 없었다.

순간 해는 저물어 어둑어둑하고 겨울의 끝자락이라 차갑고 매서운 추위와 날씨까지 흐렸다. 어둠이 바닥에 깔리자 웅성거렸던 사람 소리는 온데간데없고 컨테이너만 덩그러니 있었다. 그때부터 우리는 뒷골이 당기고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무섭고 두려웠다. 서로 손을 꼭 잡고 간신히 길가로 내려왔다.

뒷날 사연을 강병현 전 진주유족회장께 말씀드렸더니 당장 위령제를 지내셨다. 그 후 현재까지 필자는 진주 민간인 학살 답사 해설을 맡아 그곳에 갈 때마다 막걸리 한 병과 다과를 준비해 "안녕하세요, 저 왔어요"라고 인사하며 다닌다.

23.09.07 김영희(history62@)

 

유해 안치된 컨테이너의 등장, 그 중심엔 한 남자가 있었다

[다시 만날 그날까지] 민간인 학살피해자 유족 찾아주고자 했던 이상길 교수의 노력

20143차 발굴을 마친 후 1차 때 잠깐 언급한 '컨테이너 박스 유해가 왜 명석고개에 있는 것인지' 그 사연이 궁금해졌다. (관련 기사: 언 땅, 질퍽한 흙... 그 사이에서 뼈와 유품이 나오기 시작했다 https://omn.kr/25j4w)

이상길 경남대 교수 논문자료를 찾아 보고 진주유족회의 입장도 좀 더 상세히 알아봤다. 경남대 박물관장 조호연 교수를 통해 당시 입장을 확인한 결과, 2014219일에 대학 내 10년간 보관 중이던 여양리 유해 163구를 용산고개 컨테이너로 옮긴 것을 확인했다.

우선 이상길 교수에 대한 소개가 필요하다. 2004년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지인 여양리와 인연을 맺은 이 교수는 같은 해 창원 여양리, 2007년 경산 코발트, 2008년 산청 외공리·원리, 2009년 진주 문산 진성고개 등 유해를 발굴하였다. 8년 여간 유해 발굴에 혼신을 쏟아부었던 그는 2012년 한국전쟁 전후 진주지역 민간인 집단학살 유해 매장지 탐색조사와 유해 매장지 현황조사 중 생을 마쳤다. 지금부터 그 사연으로 들어가 보자.

여양리 발굴장 왜 중요한가

백골은 당시 진주형무소 재소자와 보도연맹원들로 확인되었다. 증언에 의하면 민간인 180여 명, 군인 40여 명이 쓰리쿼터 1(지휘차량)와 트럭 4대를 타고 여양리 골짜기로 진입했다. 트럭 1대에는 가해자가 10명 내외 탑승했으며, 이것을 기준으로 골짜기에 끌려온 인원은 180~200명 정도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여양리 학살지는 진주형무소에서부터 약 54km 정도로, 1시간 정도 소요된다. 당시에는 비포장도로라 2~3시간 이상 걸렸을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이렇게 먼 그곳을 왜 학살지로 선택했는지 궁금해졌다. 이는 차후 연구 대상이다.

1960419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장면 정권(2공화국 정권)이 들어서자 숨죽이고 살아가던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유족들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당시 장면 정권은 유족들의 매장지 확인, 발굴 사업을 모두 인정하였다.

하지만 발굴사업은 1961516 쿠데타로 중단되었고, 박정희 정권은 발굴 사업을 추진했던 유족들을 모두 구속하고 무기징역을 선고하기도 했다. 심지어 군인과 경찰은 발굴 유해 합동 묘지를 파헤치고 화형으로 부관참시한다. 이 결과, 민간인학살 유족들은 50여 년을 숨죽여 지내게 된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20029월 태풍 루사가 여양리 매장지 3개소(숯가마, 폐광, 너덜겅)를 흔들어 놓았다. 하늘이 구멍 난 듯 쏟아지는 장대비와 거칠게 몰아치는 태풍에 땅에 묻혀 있던 숯가마 속 백골들이 인근 고추밭으로 내려와 '나 여기 이렇게 죽었노라'라고 모습을 드러냈다. 민간인학살 매장지가 최초로 세상에 드러난 것이다.

좌측 위부터 너덜겅, 폐광, 숯막 발굴지와 필자가 관리하는 모습.김영희

여양리 발굴사업 경남대학교 박물관에서 맡기로

이상길 경남대 교수는 2004426일 여양리 민간인 학살유해가 인부들에 의해 수습되었다는 걸 언론을 통해 알게 된다. 유해를 수습하는 데 체계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그는 대책위원회와 접촉 후 현장을 방문한다.

그러나 당시 여양리 숯가마 수습 작업은 인부들에 의해 완료된 상태였다. 현장을 돌아본 이 교수는 무질서한 작업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 인부들을 철수시킨 후 현장 일체와 수습한 유골 전부를 경남대 박물관으로 인수한다. 그리고 향후 수습 작업에 드는 비용 일체는 발굴팀에서 부담하기로 하였다.

필자는 발굴작업 때 사진이 보고 싶어졌다. 진주 유해발굴 행사에 꼭 참석하는 유족 정영우씨의 "여양리 발굴 때 내가 사흘이 멀다하고 다녔어"라는 발언이 떠올랐다.

"어르신, 사진 있습니까?"

"사진기를 가지고 다니면서 내가 다 찍었어."

"어르신 제가 찾아뵐게요. 제가 여양리 사진 자료가 필요합니다."

2023823, 정 어르신의 집으로 찾아갔다. 아니나 다를까, 사진 자료가 제법 있었다.

경남대 박물관에서 발굴사업을 맡기 전 숯가마에서 밀려 내려온 유해와 유품을 묻기 위한 모습김영희

"어르신 왜 여양리 발굴 때 자주 다니고 사진을 찍었습니까?"

"진주형무소에서 호명한 후 사람들을 트럭에 태웠는데 여양리 가는 트럭에 아버지가 탔다는 걸 들었어."

정씨는 여양리가 아버지 학살된 곳이기에 열심히 다녔고 사진을 보관해 뒀다고 했다. 정영우 유족의 사연은 차후 기사화할 것이다.

유전자 검사 통한 유족 찾기는 여전히 희망 사항

2004630, 발굴사업은 무사히 막을 내렸다. 이 교수는 보고서에 앞으로 처리되어야 할 유전자 검사 통한 유족 찾기 등 6가지 사항과 기대를 기록했다.

이상길 교수가 보고서에 남긴 6가지 앞으로 처리되어야 할 사항과 기대김영희

그러나 때아닌 갈등에 부딪히고 만다. 당시 마산시는 발굴사업과 차후 추모시설, 교육 현장 건립을 염두에 두고 발굴지 주변 산지 8천 평을 매입하였다. 시는 발굴을 마치자 여양리에 합동묘 조성을 요청하였다.

이 교수와 진주유족회는 회의를 통해 '여양리 유해 163구에 대한 화장과 합동묘 조성을 반대한다. 가장 큰 이유는 유전자 검사를 통해 유족에게 유해를 돌려주어야 해서다.

하지만 당시 상황은 유전자 검사는커녕 민간인 발굴로 인해 유해와 유품이 공개되고, 가해자 신원이 밝혀지다 보니 언론이나 정부의 반응이 좋지 않았다. 살벌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이 교수는 유해를 관리, 보관해야 한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합동 묘지 조성을 반대하고 난 후 여양리 유해는 갈 곳을 잃었고, 진주유족회 입장은 유해를 보관할 여력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백방으로 고심한 결과 경남대 교정 내를 선택한다.

학교 측의 반대를 무릅쓰고 학생들이 자주 다니지 않은 숲속에 유해 컨테이너를 보관한 그는 경남대 박물관 연구원을 찾아 매일 유해의 습도와 온도를 측정하며 소중하게 관리할 것을 지시하였고, 2012년 그가 생을 마치기 전까지 유해는 10여 년간 잘 보존되었다.

필자가 전국으로 유해발굴 봉사를 10여 년간 다녔지만 차후에라도 유전자를 검사하여 유족의 품으로 찾아드려야 한다는 보고서 내용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의 희망과 달리 19년이 지난 지금, 발굴 비용 예산조차 편성되기 어려운 상황에서 유전자 검사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진화위도 유족의 유전자 검사 요구를 검토 중이라고 한다.

백골의 귀향

진주이송안치식 경남도청 앞김영희

진주이송안치식 명석고개김영희

어느 날 경남대 측에서 진주유족회에 컨테이너 유해 이관을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2014219일 여양리 유해는 이 교수의 품에서 진주유족회 품으로 귀향했다. 진주유족회의 인사 말씀을 보니 가슴이 미어진다.

"죽어서도 서러운 떠도는 넋

편히 누워 잠들 한 뼘의 땅도 얻지 못한 채

차디찬 컨테이저 박스 플라스틱 상자 속에

기억과 함께 하얗게 바래져 가는 백골들의 서글픈 귀향을

여양리 산태골 노출 유해를 수습하고

발굴과 안치를 위해 모든 노력과 헌신으로 아껴주신

고 이상길 교수님의 영전에

산태골의 유해들이 고향 진주로 모셔감을 삼가 고합니다.

2014219

한국전쟁전후 진주민간인희생자유족일동

이 교수가 유해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인지하고 관리, 보존한 덕분에 현재 용산고개 컨테이너가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유해와 유품은 역사적 실증적 자료로 활용할 뿐만 아니라 실체를 직접 보고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여양리 유해가 명석고개로 옮겨진 후 2~10차 발굴된 유해 즉, 산태골 3개소, 진성고개 2개소, 명석고개 2개소, 관지리 2개소, 집현면 봉강리, 관지리 삭평 등이 발굴되었다. 이중 진성고개는 진화위 예산으로 발굴사업 한 결과, 111구를 세종 추모의 집에 안치하였다. 9차 발굴한 유해수 329구와 유품 1080여 점도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

현재 유해를 관람할 수 있는 곳은 진주가 유일하다. 용산고개 답사를 방문한 분들 중 대다수는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실증적 증거를 만나고 충격을 받는다. 그럼에도 '역사의 진실'을 확인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본다. 다만 안전한 여건 속에서 보존되지 못한 상태를 관람하고 있다는 것에는 마음이 아프다.

에어컨 2대에 의지하는 유해는 21년의 세월 동안 많이 훼손되었다. 법적 절차 없이 참혹하게 학살된 것도 억울한데 영혼들의 안식처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한 채 진실을 밝히는 데 유해를 활용하는 것에 마음이 편치 않다.

그럼에도 필자는 유해를 관리, 보관하여 민간인학살의 진실을 밝히고자 한 이 교수의 노력이 헛되지 않기를 바란다.

산태골, 집현면, 진성고개에서 발굴된 유해들은 개체수가 잘 맞게 노출돼 유전자 검사가 용이하다. 이를 통해 그가 간절히 바라고 호소했던 유족 찾기가 꼭 이루어지길 바란다. 필자도 그의 염원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아픈 역사, 잘못된 역사를 잊지 않으리라 다짐해 봐야 할 때다.

이상길 교수가 남긴 마지막 글귀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고 이상길 경남대 교수김영희

"70여 년 넘게 지나 지금 드러난 하얀

백골을 보면 저 뼈에 좌우 이념이 있을까 싶다.

저 뼈를 가지고 오늘날 또다시

좌우를 논해야 되는지 자문해 본다.

지금까지 수백구의 유골을 발굴해 보았지만

나는 아직 뼈에서 이데올로기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저 죽어서 잊힌 인간일 뿐이었다."

23.09.14 김영희(history62@)

 

18, 200, 163... 이 숫자가 밝혀낸 핏빛 잔혹사

[다시 만날 그날까지] 마산 여양리 발굴지

2012년 고인이 된 이상길 경남대학교 사학과 교수는 2004년 여양리를 시작으로 2007년 경산 코발트, 2008년 산청 외공리, 원리, 2009년 진주 문산 진성고개 등을 발굴했다.

네 지역의 발굴지에 담긴 사연도 매우 중요하지만, 이 교수가 8년간 혼신을 바쳐 발굴했던 장소들이기에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여양리 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관련 기사: 유해 안치된 컨테이너의 등장, 그 중심엔 한 남자가 있었다 https://omn.kr/25n0o)

여양리 발굴장을 찾아서

필자는 마산 여양리 발굴 10년 후인 2014년 유해 발굴 봉사를 시작했다. 자원봉사 활동을 하면서 여양리 발굴지를 답사하고 싶었는데, 2021912일 진화위 조사관 2, 진주 유족 3명과 함께 답사할 기회가 주어졌다.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여양리 발굴지로 출발했다. 국도 2번 도로를 타고 45km 정도를 가다가 1029번 도로로 들어섰다. 도로는 아주 좁고 골짜기 폭은 200m 남짓이었다. 차장 밖은 초가을 벼들이 고개를 숙일 듯 말 듯 한 들녘과 꽤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마을은 드문드문 보였고 8km 정도를 더 달려 여양리(산태골)에 도착하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한적하고 고즈넉한 곳으로 느껴졌다. 발굴장 입구에는 여양 저수지의 잔잔한 물결이 펼쳐졌다.

이 교수가 깊은 관심을 가졌던 곳이라는 생각에 복잡한 마음을 가지고 발굴지를 향했는데, 입구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무성한 풀밭이 뒤엉켜 우리를 반기고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유족분들이 낫을 가지고 앞장서 풀을 쳐준 덕분에 뒤를 따라 천천히 올라갔다.

여양리 발굴장 숯막 입구 모습김영희

산길은 아주 가파르고 험했다. 500m 이상 올라가니 너덜겅(돌무지무덤)들이 계곡을 끼고 널브러져 있었다. 너덜겅 바윗덩어리가 커서 발굴 작업의 난이도가 예상될 정도였다.

그런데 폐광이 보이지 않았다. 유족들도 자주 오지 않으니 방향이 헷갈리는 듯 보였다. 발굴할 때 사흘이 멀다 하고 다녔지만, 발굴한 지 17년이 지난 곳이라 한참을 헤맸다. 한참을 올라가는데 유족회 회장님이 "여기 있다"고 외친다. 우리 앞에 폐광이 모습을 드러냈다. 숲으로 덮어져 숯가마 발굴지는 현장을 볼 수 없었지만, 너덜겅과 폐광 2개소의 발굴지를 무사히 찾을 수 있었다.

발굴장이 살아 숨 쉬다

필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발굴 현장이 살아 숨 쉬고 있는 게 아닌가. 대부분의 발굴 현장은 1~2년만 지나도 참혹한 그날의 흔적을 감추어 버린다. 초라한 표지판 하나로 지탱하고 있을 뿐이다.

위에서 언급했듯 숯가마(36)는 흔적이 대부분 사라졌다. 움푹 파인 숯가마의 위치만 남아 있었고, 유해는 토사와 함께 고추밭으로 휩쓸려 내려왔다.

너덜겅 무덤과 폐광 입구 모습

반면 너덜겅(104)과 폐광(23)은 발굴한 흔적이 여기저기 조금씩 남아 있었다. 천막을 쳤던 흔적을 보니 발굴단이 이곳에서 옹기종기 모여 발굴한 모습이 눈에 선했다. 이상길 교수의 발자취도 느껴졌다. 큰 키에 깡마른 체격, 허스키한 목소리로 발굴단을 지시하고 다녔을 모습이 스쳐 지나가면서 그리움이 밀려왔다. '2개월 동안 발굴하면서 고생이 많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장을 살피고 간단히 촬영한 후 내려오면서 '가해자들은 과연 누구를 위해 총부리를 겨눴는지', '피맺힌 절규를 뒤로한 채 산태골을 유골 밭으로 만들어 놓고 은폐하고자 했는지' 생각이 이어졌다. 이윽고 여양리 발굴지가 '역사와 진실이 밝혀진 교훈의 장'이 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18명의 여양리 발굴단 용사들

왼쪽에서 두 번째 이상길 교수 와 세 번째 김미영김영희

200454일로 시계를 돌려 여양리 발굴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여양리 발굴단은 이상길 교수와 그의 제자들, 박물관 연구원 등으로 구성되었다. 필자가 발굴에 참여하지 못했기에 먼저 발굴단을 수소문했다. 김미영 경남연구원 조사연구위원이 있는 경남 함안군을 방문했다. 따뜻한 음식을 대접 받으며 폐광 발굴 사연을 들었다.

여양리 3개소 발굴 중 발굴하기 가장 힘든 폐광 발굴은 경력이 많은 연구원 2명이 선정되었다고 한다. 그중 한 명인 김미영은 발굴 당시 폐광에는 회색빛 유기물과 시꺼먼 물이 가득했다고 회상했다.

물에 잠긴 유해를 발굴하기 위해 물을 바가지로 퍼내고 스펀지로 물을 짜냈으나 난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동굴 안에는 유해가 꽉 차 있어 발 디딜 곳조차 없었다. 조사단은 폐광 내 양쪽 벽면에 철골을 세우고 그 위에 떡판처럼 판을 얹은 후 엎드리거나 낮은 자세로 앉아 떡판 사이로 손을 넣어 수습 작업을 시작했다. 이를 몇 차례를 반복하면서 무사히 수습 작업을 마쳤다고 한다.

필자는 순간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밀려왔다. 그동안 발굴한답시고 돌아다녔지만 평평하고 언덕진 곳이 발굴 현장이었기에 이렇게 힘들 줄 감히 상상도 못 했다. 김미영 연구원은 이때 임신한 몸으로 발굴에 참여하였다. 저절로 고개 숙여 지지 않을 수 없었다.

험난했던 발굴

너덜겅 1호 유해 노출 상태김영희

너덜겅을 걷어내자 유해들이 드러났다. 물이 잘 빠지고 통풍이 잘되는 환경 탓에 너덜겅 속 유해의 상태는 양호한 편이었다. 그러나 이를 드러내고 발굴하는 것은 고난도 작업이었다.

우선 가파른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어 올라가는 내내 숨이 찼다. 또 포크레인으로 돌을 제거한 후 사람의 손으로 발굴이 시작되는 일반적인 발굴장과 달리, 포크레인도 올라갈 수 없는 험한 곳에 있어 사람이 일일이 바위를 옮긴 후 작업을 하였다고 한다. 당시 경남대 사학과 남학생들이 총동원돼 바위를 걷어내었는데, 상상하기 힘든 작업임을 감히 짐작해본다.

폐광 속에서 걷어낸 유해김영희

폐광 속 유해는 물속에 잠겨 공기가 들어가지 않은 덕분에 유해가 덜 부패해 형체가 온전히 남아 있었다. 상의와 함께 발견된 유해(고 정태인)는 우선 상의 속에서 뼈를 끄집어내었다. 머리카락이 머리에 붙은 채 발견되었고, 주변에 떨어진 흔적도 볼 수 있었다.

수습 후 계곡물과 폐광 내 물로 유해를 세척하였다. 유해들의 옷은 무명옷, 삼베옷이라 삭아서 너덜너덜하고 실 가락처럼 뒤엉켜 흩어져 버렸다. 유해에 붙은 유기물과 진흙, 녹아 붙어있는 살점을 때어내는 작업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상상해 본다.

MG50 기관총과 쇠사슬

M1, 카빈탄피, 탄클립김영희

유해 발굴장에서 유해와 함께 발굴되는 유품은 아주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것은 피학살자들의 신분과 직업 판단을 유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각종 군용품 중 MG50의 유품은 전국 어디에서도 발굴되지 않은 유일한 군용품이다.

2004년 경남대에서 작성한 '마산 여양리 유해발굴 보고서'에 따르면, MG50은 사람에게 직접 쏘는 것이 아니라 비행기를 맞추는 대공용(對空用)으로, 탱크나 차량에 부착되는 것이 보통이다. 더구나 부피가 크고 무거워 이동이 불편하며, 2인 이상(사수와 조수)이 함께 사격해야 한다. 총으로서는 최대 크기이며, 이것보다 큰 것 포()로 분류된다.

각종 군용품 MG50 설치 때 필요한 쇠사슬 흔적김영희

상수리나무에 묶여 있는 이 쇠사슬은 MG50 기관총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 '기관총을 설치할 때 고정 보조기구로 이용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당시 이곳은 낙동강 방어진 전투의 격전지였다. 그때 사용한 것일까? 무거운 기관총을 들고 500m 이상 가파른 골짜기를 올라갔을까? 만약 여양리 학살지에서 MG50 기관총을 사용했다면 총을 맞은 사람의 형체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여양리에서 학살된 인원은 200여 명으로 추정된다. 지금까지 발굴된 유해는 163구다. 나머지 유해는 이 총에 맞아서 산산조각이 났을까? 대부분 학살할 때 구덩이나 동굴 같은 장소에 데리고 가 총살한 후 묻어 확인 사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유해 발굴장에서 발굴된 M1, 카빈 탄피는 16개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사살된 사람의 수에 비해서 탄피의 수가 적고, 매장지 내부에서 출토된 점도 의문을 품게 한다. MG50 사용에 대해서는 의문투성이고 장기적인 연구 대상이다. 필자는 발굴한 이 교수가 그립다. 증언자인 그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 막막하기만 하다.

너덜겅 1호에서 노출된 유품 반지김영희

너덜겅에서 노출된 반지들김영희

유해 발굴 시 반지도 여러 점 나왔다. 유품을 보면 하트모양, 은반지 무늬, 사각 무늬 등 고급스럽고 일반적인 사람들이 낄 수 있는 반지의 유형이 아니었다. 이를 통해 학살된 자들이 부유층으로 보이며, 지식인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23.09.21 김영희(history62@

70년만 찾은 형의 유품, 동생은 찾아가지 않기로 했다

[다시 만날 그날까지] 마산 여양리 민간인 피학살자 정태인씨 사연

버클에 새겨진 무늬김영희

전국 유해발굴지에서 버클은 빠지지 않고 출토되고 있다. 모양은 구멍에 꽂는 버클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여양리에서 나온 버클에는 다양한 문양과 의미가 담겨있다. 요즘 시대에도 보기 어려운 독특한 무늬를 지니고 있다.

독립(KOREA), 여자하키선수, W, 부엉이 그림, 새 그림, 자유(LIBERTY) 등이 새겨진 버클을 통해 유해의 당시 신분과 경제적 여건을 짐작하고도 남을 정도다. 발굴단장의 말에 따르면 버클은 수입품으로, 외국에서 유학 시절 구매했거나 유학을 다녀왔던 사람에게 선물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진주형무소는 재소자들을 학살지로 보내기 전 A, B, C 등으로 구분하였다. 사상범 중 요주의 인물이 A로 분류됐으며 가장 먼저 사살당했다. 여양리로 끌려가 학살된 자들이 A 분류 인물들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측해본다. 이유인즉 여양리 발굴장에서 노출된 유품이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폐광에서 발굴된 유해와 유품 중 완벽한 모습

폐광에서 발굴된 유해김영희

페광 안 물 속에서 발굴된 유해 한 구는 머리카락부터 두개골, 어깨뼈, 갈비뼈, , 다리, 등 인체 형태가 개체수를 맞출 수 있을 정도로 상태가 양호하였다. 그 유해가 입고 있었던 양복 상의 주머니에서는 태인(泰仁)이라고 적힌 도장과 젓가락, 구두칼이 나왔다.

'태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피학살자는 엎드린 모습으로 물속에 있었기에 부패가 덜 되었다. 키는 165cm 정도로, 하의는 부패돼 없어지고 상의 양복만 남아 있었는데 상당히 고급스러운 옷이었다. 학살당한 날짜가 1950721일부터 26일임을 감안하면, 무더운 여름 날씨에 긴 팔 양복을 입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멋쟁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폐광 속에서 발굴된 상의 옷김영희

폐광에서 발굴된 태인 도장, 젓가락, 구두김영희

양복 안 쪽에는 '대송(大松)'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대송은 진주 중앙시장 근처에 있었던 양복점으로 추정된다. 이를 통해 여양리에서 학살된 자들이 진주지역 보도연맹원이라는 것을 추정할 수 있었다. 특히 유해 발굴 현장에서 도장이 나온 것은 대단히 고무적이다. 유전자 검사를 하지 않고도 유족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유품이기에 어느 유품보다 소중하지 않을 수 없다.

과거 진주지역 10차 발굴 중 도장 2개가 노출돼 유족을 찾은 바 있다. 유족 중 한 분은 모 고등학교 교사의 아버지로 확인됐다. 유족회장이 몇 차례 연락했지만 아들은 "아버지를 찾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다"면서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고 극구 거절했다. 연좌제로 인한 피해의식이 남아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폐광에서 발굴된 태인 도장김영희

사람을 찾습니다

발굴을 진행한 이상길 교수는 "태인(泰仁)'이라는 이름을 가진 도장의 주인을 찾기 위해 몸부림쳤다. '피해자들이 진주교도소에서 수감 중 끌려왔다'는 증언을 토대로 진주와 하동 등지에 전단 1만여 장을 뿌렸다.

이윽고 '피해자가 자신의 외삼촌인 것 같다'며 여수에 사는 송아무개(66)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동일인일 가능성이 높았다. 태인의 누나인 송씨의 어머니가 생존하고 있는 사실도 알아냈다.

발굴된 유해에 대한 가족을 찾는 글경남대학교 박물관 제공

인골 전문 고고학과 교수에게 '태인'의 얼굴 복원 작업을 시도하는 한편 송씨 아버지의 젊은 시절 사진을 입수해 두개골 등을 대조했다. 그 결과 남매가 분명하다는 의견을 들었다. 하지만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진행된 DNA 분석 결과는 불일치였다.

이 교수는 DNA 검사 결과를 가지고 태인 선생의 유족을 찾는 데 동분서주하였다. 수소문 끝에 태인이란 이름을 가진 인물이 세 명 나왔는데, 두 명은 DNA 확인 결과 불일치했다.

나머지 한 명인 태인 선생의 여동생과 통화를 하고 당시 조현기 진주유족회 대책 위원장, 민간인 학살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구자환 감독과 함께 만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약속 전에 이 교수가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 이후 유족과는 연락이 두절되었다.

드디어 찾다

필자는 논문 '마산 여양리 민간인 학살의 실상과 성격'을 읽게 되면서 태인 선생의 유족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여양리 발굴에 관련된 분들의 근무지를 찾아 고성, 함안 등을 다녔다.

당시 진주유족회장, 진주유족 대책위원장, 박물관 연구원들을 만났지만 대부분 "기억이 안 난다",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참으로 암담했다. 마지막으로 구자환 감독께 연락하니 이 교수가 태인 선생 누나와 만날 약속을 해놓고 안타깝게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러면서 "태인 선생의 5촌 동생 연락처가 있다"며 잠시만을 외친다. 그 짧은 순간동안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찾았어요!"

"감독님 진짜 고맙습니다!"

전화 끊고 바로 태인 선생의 5촌 동생께 전화했다. "여보세요." 목소리가 들린다. 필자를 소개한 후 태인 선생에 대해 조심스럽게 안내했다. "저는 잘 모르고 태인 형 막냇동생이 서울에 살고 있으니 동생한테 연락을 해보세요"라고 한다. 연락처를 받고 너무나 기뻐서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하고 전화를 끊었다.

필자는 한숨을 돌리고 이 교수가 그토록 애타게 찾고 싶고 했던 태인 선생 유족과 연결이 되었다. 가슴이 두근거리면서도 동생에게는 70여 년 전 응고의 세월을 다시 되새기게 하는 것 같아 죄스럽고 황송한 마음이 들었다.

필자를 소개한 후 '이상길 교수가 대학 은사입니다' 하니 "그 교수님, 잘 알지요" 하면서 반갑게 인사 하신다. 그 후 여러 차례 걸쳐 통화한 결과, 태인 선생의 유족이 확인되었다. 몇 개월이 지나 20219월 어느 날, 정태인씨의 동생 정상중씨와 진화위에서 만날 약속을 잡았다.

태인 선생의 진실규명 신청도 할 겸 정상중 어르신을 충무로역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얼굴을 모르니 사진을 찍어서 옷차림을 알려주신다. 출구로 나오니 키가 크고 건장한 어르신이 서 계셨다. 느낌이 온 건지 우리는 눈빛만 보고도 서로를 알아왔다. 오랜만에 만난 벗처럼 반갑고 또 반가웠다.

어르신과 함께 진화위 사무실로 향했다. 조사관을 만나 접수처에서 준비한 '호적초본'을 확인했다. '정태인' 이름 세 글자가 장남으로 기재되어있는 걸 보는 순간, 소름이 끼쳤다. 정상중 어르신은 정태인 선생의 막냇동생이었다. 접수를 마친 후 우리는 휴게실로 이동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가 형의 유해를 보고 싶지 않아 한 이유

정상중 어르신에게 형에 대해 물었다.

"형은(당시 25)은 아주 미남이었어요. 32녀 중 장남으로 당시 미혼이었어요. 부모님이 진주 나동(내동)에서 양조장을 운영해 상당히 부유하게 살았어요. 다섯 살 때부터 천자문을 습득할 정도로 형은 동네에서 신동으로 불렸어요. 외가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외삼촌 두 분은 일본 유학에 다녀올 정도로 똑똑하고 지식인이었어요. 두 분의 사회주의 사상을 많이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제가 대여섯 살 때, 형이 진주고등학교 운동장에서 한복을 멋지게 입고 관중 앞에서 연설을 했어요. 박수 받는 모습을 보며 제가 엄마에게 '형이 너무 멋있어 보여' 라고 한 기억이 있어요. '형이 좌익활동을 적극적으로 했고 인민군 부위원장을 맡고 있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우리 누나들도 좌익활동을 많이 했어요. 경찰이 형을 잡아 가려고 우리 집 근처에서 매일 잠복해 있었어요. 이 때문에 하루도 편히 집에서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옆집이나 친구 집에서 자는 일이 태반이었고, 가족들이 고통과 수모도 많이 당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형이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그동안 했던 좌익활동을 면제해 준다'는 통보를 받았어요. 지서로 찾아갔더니 그 자리에서 바로 체포돼 형무소 감옥에서 며칠간 구금되었다가 학살당했어요. 형이 학살된 후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어요. 양조장과 전답을 처분하고 부산으로 이사했어요. 지금은 누나 둘과 서울에서 거주하고 있어요."

마지막으로 '형의 유해를 보고 유품을 찾아갈 생각은 없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유해와 유품을 보면 그 당시 엮어진 형제의 영혼이 생각날까 보고 싶지 않다"며 거절의 뜻을 밝혔다.

잠시 침묵의 시간을 가진 그가 필자에게 '형의 사진을 보고 싶다'고 청했다.

"지금 형 사진 가지고 오셨어요?"

"물론이지요."

"어디 한번 봐요."

필자는 얼른 사진을 보여드렸다. 상의 옷과 구두칼, 젓가락, 도장 등이 담긴 유품 사진을 보자 그가 "형이 그때 이런 옷을 입고 갔네요"라며 착찹한 심정을 내비쳤다. 그러면서도 그는 형을 마음 속에라도 품고 싶은 듯 사진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형의 유해를 어디에 안치하고 싶습니까?"

"국가에서 운영하는 추모시설에 모시고 싶어요."

"만약에 유해를 보존 처리하여 교육 현장에 전시용으로 활용할 기회가 된다면 활용해도 될까요?"

"교육자료로 활용한다면 유해와 유품을 위임하겠습니다."

현재 정태인 선생의 유해는 명석골 컨테이너에 보관되어 있다. 유품은 경남대학교 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유족을 찾은 유일한 분인데도, 유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했지만 이 사실을 이 교수가 알면 크게 기뻐할 거라고 생각에 잠겨본다.

23.09.28 김영희(history62@)

둘째 형은 이민, 누나는 이혼... 맏형의 죽음은 큰 상흔을 남겼다

[다시 만날 그날까지] 역사가 남긴 진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20229,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화위)에서 고 정태인 선생에 대한 결정문 각하 통보가 왔다.

각하 통보 이유를 알아보니, 정태인 선생의 가족은 진화위 1기 때 신청하여 결정통지서를 받았다. 통지서를 받을 시 민사소송을 해야 하는데 소송에서 승소할 가능성이 낮고 형의 죽음을 배상받는 것 자체가 싫어 고민 끝에 민사소송을 진행하지 않았다고 한다.

'1기 때 결정문 받고 3년 이내 소송 하지 않으면 2기 때 재신청을 해도 각하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다'는 게 정부의 방침이라고 진화위는 설명했다. '손해배상청구권 3년 공소 시효 소멸'을 적용한 것이다.

세계사적으로 국가 공권력에 의한 '제노사이드(genocide·집단학살범죄)'는 장기소멸시효를 적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부는 3년 공소 시효를 적용했다.

결국 고 정태인 선생의 유족은 배상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73년을 기다려서도 끝내 원하는 배·보상을 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막냇동생인 정상중 어르신은 "배상 안 받아도 된다"며 안타까워하는 필자를 위로했다.

남은 가족의 상흔

정상중 어르신은 통화할 때마다 "그 상흔을 어찌 말로 다 할 수가 있겠어요"라고 말한 후 한숨을 쉰다. 긴 이야기지만 독자 여러분과 함께 들어보고자 한다.

"큰형이 학살되고 둘째 형은 큰형의 좌익활동 기록으로 경찰한테 온갖 수모를 겪었어요. 한국이 싫다며 미국으로 떠나서 오지 않아요. 누나 둘은 시집 가기가 쉽지 않았어요. 부모님은 '큰누나를 경찰한테 시집 보내면 고통당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남편이 좌익활동을 한 여자와 결혼했다는 소문에 경찰 생활이 어려워지자 이혼했어요.

저희는 진양호 수몰 지역 마을 이주 문제 당시 전답과 양조장등을 보상받아 부산으로 갔어요. 본가는 언덕 높은 곳에 있어 팔지 않았고, 대신 어머니가 부산과 진주를 오가며 살았어요. 그런데 큰 문제가 생겼죠. 진주 보상금을 큰누나가 친구한테 빌려줬는데 사기를 당했어요. 온 가족이 무일푼 신세로 더욱 고난의 세월을 보냈어요.

외가도 쑥대밭이 되어버렸어요. 외삼촌(김석대)이 육군 대위로 근무했는데 맡고 있던 중대원들을 데리고 월북하다가 잡혀서 다리에 총을 맞고 형무소에서 25년간 감옥살이를 했어요. 노후에는 순댓국 장사를 해 돈을 잘 벌었어요. 또 다른 외삼촌(김석종)은 일본 유학까지 다녀왔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당시 경찰서장 자리도 거절할 정도로 똑똑하셨나 봐요. 속으로 '왜 서장 자리를 거절하지'라고 생각했어요. 국회의원 출마까지 할 정도의 능력과 실력이 뛰어난 분이었다고 해요.

안타깝게도 외가에서 도움받은 기억은 없어요. 부산에서 서울로 이사 오면서 거의 연락이 두절됐어요. 2000년 초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석종 삼촌의 아들(외사촌형)이 서울대를 졸업하고 포항제철 이사로 근무하며 잘살고 있는 모습을 보니 화가 치밀어 올랐어요.

그래서 외사촌 형한테 '형 아버지가 우리 형과 누나들 세뇌해 집안 망하게 했던 거 알고 있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이제 지난 일이니 다 잊고 살자'고 하데요. 어찌나 속상한지 그게 잊자고 잊히는 겁니까? 끔찍한 수난과 상흔을 어떻게 다 말할 수 있겠어요.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도 못하고 단돈 3만 원 가지고 부산에서 서울로 상경했어요. 모진 고생하면서 안 해본 일 없고 끼니 굶은 건 애사 일이었어요. 1982년 결혼했지만 자식들 핫도그 하나 사줄 형편이 안 될 정도로 힘들었어요. 모진 고통과 상흔을 이겨내고 83세인 지금, 광장동에서 동네 유지가 돼 잘살고 있어요."

정상중 어르신이 필자와 헤어질 때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무엇이냐고 묻자 '작은 성의'라고 한다. 정중히 거절한 후 헤어진 우리는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그 후 어르신으로부터 주소를 알려달라는 연락이 왔다. '왜 그러냐'고 여쭤보니 '미역 조금 보내드리면 안 되겠냐'고 하신다. 성의를 무시하는 듯싶어 주소를 드렸더니 미역과 멸치를 보내주셨다.

정 많고 따뜻한 어르신을 뵙고 나니 그의 형인 고 정태인 선생도 어질고 넉넉하고 멋있는 분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25세 나이에 꿈 한 번 펼쳐보지 못한 채 학살된 게 얼마나 억울했으면, 52년 만에 본인이 누구인지 명백하게 밝히는 도장과 젓가락, 구두칼을 품고 우리에게 왔나 싶었다.

뼈에는 좌우가 없다

여양리 발굴 중간 보고회 때 이상길 교수는 무릎까지 구부리고 유족들에게 유해와 유품을 설명했다.김영희

이상길 교수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여양리 발굴 관련 연구와 민간 학살 문제를 꾸준히 제기했다. 이 교수는 '2005년 한국전쟁 55년 기획발표-한국전쟁기 경남지역 민간인 학살 문제' 학술발표대회에서 '마산 여양리 민간인 학살의 실상과 성격'이란 주제로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논문에서 보상이나 배상, 책임자 처벌보다 중요한 것은 억울한 학살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는 역사의 교훈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졸지에 가족을 잃은 유족들의 문제는 좌우 이념을 떠나 도민의 애환이자 민원 사항이라고 주장했다.

이 교수의 여양리 발굴에 대한 애정은 바로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발굴사업의 최우선 목적이 유해를 유족에게 돌려주는 것이었기에 더욱 뜻깊게 다가온다.

컨테이너 속 플라스틱 상자에 공기와 노출된 상태로 머리카락, 손가락, 옷감 등이 보관된 모습.김영희

필자는 2023년 어느 봄날, 여양리 유품과 유해를 점검하기 위해 컨테이너를 열었다. 21년 동안 컨테이너 안에서 에어컨 1대에 의지한 유해들을 펼쳤는데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머리카락, 손가락, 발가락 대부분이 발굴된 모습 그대로 보존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2004년 발굴 당시 상황이 눈에 선하다. 유해 발굴을 전국적으로 다녔지만 머리카락, 손가락 등 유해 상태가 이렇게 좋은 걸 본 적이 없다. 여양리 발굴 유해 163구를 모두 확인한 후 52년만에 세상 빛을 보았지만 여전히 안식처를 찾지 못한 영혼들이 맴돌고 있다는 사실이 후손으로 죄송스러울 따름이다.

살아 숨 쉬고 있는 여양리 발굴장

지금까지 전국 발굴지 중 견학이나 답사가 가능한 곳은 경상 코발트, 고양시 금정굴 등 두 곳이다. 발굴 후 표지판 하나로 방치하기 때문이다. 또 발굴장의 특성상 산속이기 때문에 1, 2년 지나면 무성한 초야(草野)로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여양리는 다르다.

마산시는 사유지였던 여양리 발굴지 8천 평을 매입했다. 발굴 사업을 하기 위해 내린 결정이었다. 또 이 교수가 여양리는 지리적으로 서부 경남 중심지이므로 추모시설과 위령탑을 만들고, 역사교육 현장으로 활용하도록 제안했는데 마산시가 수용하여 매입을 결정했다.

마지막으로 발굴 현장인 폐광과 너덜겅, 숯가마 3개소는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왜곡된 역사를 후대에 알릴 교육의 현장으로 활용될 수 있는 가치와 조건을 충족하고 있다.

20154월 추모논문집, 2023410주기 추모논문집김영희

필자는 2021년 여름, 여양리 유품 확인차 경남대학교 박물관에 방문한 바 있다. 박물관장인 조호연 교수는 필자가 사학과를 다닐 때 계셨던 마지막 교수이다. 그런 그가 이렇게 말한다.

"동료와 제자들이 2015년 추모 논문집을 발간했어요. 이 교수는 행복한 사람이에요."

올해 4, 이상길 교수 추모 10주기가 열렸다. 이번에도 고고학 동료와 제자들은 그를 기리며 '10주기 추모논문집'을 간행했다. 이 교수의 제자인 홍성우가 필자에게 추모사를 부탁했다. 추모사를 하는데 마냥 눈물이 났다.

23.10.05 김영희(history62@)

극단적 선택·월북·보육원... 한 가족에게 남겨진 불우한 단어들

[다시 만날 그날까지] 3년 만에 다시 찾은 용산고개, 그 안에서 마주한 아픔

용산치 4(공동조사단 기준) 현수막 모습김영희

이번에 소개할 발굴지는 제4차 경남 진주 명석면 용산고개(용산치)이다. 발굴된 유해와 유품은 아래 표와 같다.

4차 용산고개에서 발굴된 유해와 유품들김영희

3년 만에 다시 찾은 용산고개

2(2015) 대전 골령골, 3(2016) 홍성군 광천읍에서 발굴을 마친 공동조사단은 3년 만에 용산고개를 다시 찾았다. 전국유족회에서 서로 발굴해달라고 요청하는 상황이었지만, 이들이 용산고개를 다시 찾은 이유는 '유해가 고스란히 드러나 시굴이 필요 없는 곳'이라는 전 진주유족회장 강병현의 간절한 요청 때문이었다.

유해발굴은 시굴이 중요하고 경비도 많이 든다. 사실 그렇게 시굴해도 유해가 나오지 않은 곳이 태반이다. 공동조사단은 시민단체 후원금으로 발굴을 하기에 경비가 넉넉지 않아, 파면 나오는 발굴지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공동조사단은 2017224, 용산고개에서 제4차 발굴을 시작했다. 4차 발굴지는 제1차 발굴지에서 100m 정도 아래로, 지금의 컨테이너가 놓여 있는 곳 바로 위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필자는 2, 3차를 거쳐 4차 발굴지로 향했다. 발굴지에 가면 가장 먼저 도착해 움직이는 이가 있다. 바로 구자환 감독이다. 그는 자신의 체중보다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산속 골짜기를 헤매고 다닌다. 이번에는 드론으로 발굴장을 촬영하고 있었다.

구 감독은 민간인학살 관련 영화 3(레드툼, 해원, 태안)을 제작했다. 그러나 이런 부류의 영화는 수입이 거의 없어 공공기관에서 상영해 주지 않으면 개봉 자체가 어렵다. 그럼에도 그는 30여 년 넘게 이 일에 매진하고 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드론을 샀으니 참 대단한 열정이다 싶다.

구 감독과 인연도 9년이 넘어가고 있다. 구 감독은 2기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으로 근무했다. 틀에 박힌 직장이 맞지 않았던 그는 1년 근무 후 퇴사를 결심했다. 당시 1년간 번 월급으로 영화 3편에 쏟아부은 빚을 갚을 거라고 말을 던진 게 생각이 난다.

마냥 착하고 마음씨 고운 사람이 아니면 이 일에 평생을 바칠 수 없다. 강의, 답사 해설 등 10여 년간 자원봉사를 한 필자는 그의 헌신에 누구보다 공감한다. 이 기회를 빌려 많은 이가 구 감독의 영화를 봐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조그마한 돌무덤 하나의 정체

발굴 작업은 주로 봄방학을 시점으로 시작한다. 발굴 경비가 부족해 자원봉사자의 도움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2월의 날씨는 언 땅이 서서히 녹아 질퍽질퍽하다. 얼어붙은 토양에서는 유해가 잘 부서진다. 심지어 용산고개는 토양이 질고 묘지 조성으로 파헤친 상태였으며, 훼손도 많이 돼 유해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나마 뼛속에 흙이 가득 차 있어 유해의 형체가 유지되고 있었다. 유해 표피에 묻어있는 흙을 조심스럽게 솔로 쓸어냈다. 그래야 유해가 도출되면서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패한 유해는 결국 안타까운 상황을 만들어 냈다. 이번 4차 발굴지에서는 부서진 유해들이 많았다. 특히 '사지(四肢) 뼛조각'들이 많이 나왔다.

노출된 유해들김영희

필자는 이때 잔뼈 부스러기 처리 방법을 처음 보았다. 안경호 발굴팀장(4.9통일평화재단 사무국장)은 이날 구덩이를 사각으로 판 후 그 속에 화선지로 싼 유해 조각을 넣어 고이 묻었다. 이어 흙을 덮고 꼼꼼히 발로 밟았다.

안 팀장은 주변 여기저기서 받침대 돌 4개를 주어와 세운 후 넓적한 돌을 그 위에 얹었다. 이어 작은 비석처럼 생긴 돌을 그 위에 세워 '자그마한 돌비석'을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돌비석에 깍듯이 절을 했다.

형태가 정확한 유해는 플라스틱 박스에 넣어 위령제를 지낸 후 컨테이너에 안치된다. 그러나 이들은 이마저도 누리지 못한 채 자그마한 돌비석 아래 묻혔다. 억울한 죽음도 슬픈데 사지가 갈기갈기 흩어져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팠다.

9년이 지난 지금, 조그만 돌비석은 아직도 있을까? 아마 무성한 풀숲으로 뒤덮여 흔적이라고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됐을 것이다.

조그마한 돌무덤김영희

발굴장에 궂은일 하는 사람들

발굴단이라고 해서 발굴만 하는 것은 아니다. 발굴 장소를 결정했다면, 먼저 산속에 사무실 천막을 설치하고 임시 화장실을 만든다. 구덩이를 파고 나무를 베어와 난간을 만들고 사방에 기둥을 세워서 천막지로 막는다. 다음 할 일은 계단씩 길을 만드는 것이다.

이 궂은일을 누가 하는지 궁금해 사방을 둘러보았다. 필자의 눈에 한 분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디에서 오셨어요?"

"강원도에서 자원봉사 차 왔습니다."

강원도에서 경남까지 봉사를 위해 오다니, 순간 15분 거리에서 온 필자가 부끄러워졌다.

유해 발굴은 어떤 봉사보다 쉽지 않다. 70여 년간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학살된 분들이 '어둠에서 밝은 빛을 보게 하는 순간'이기에 혼신을 다 할 수밖에 없다. 그만큼 의미와 보람이 크다.

4차 발굴 현장 모습김영희

착하고 성실했던 아버지의 죽음

이쯤에서 가슴 아픈 사연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피학살자 강종호씨의 가족은 진주중앙시장에서 잡화상을 운영하며 단란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1950년 음력 618, 외사촌 부부가 찾아왔다. 가게 문을 일찍 닫고 외사촌 부부와 함께 집에 들어온 강씨는 갑자기 들이닥친 군인 두 명에 의해 끌려갔다. 군인들은 가족들에게 보도연맹 관련 조사가 끝나면 돌려보내 준다고 했지만, 강씨의 모습은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이후 가족들은 강씨가 건국준비위원회(아래 건준위) 활동과 보도연맹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총살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강종호씨는 20살 때 결혼해 11녀를 낳고, 진주시 평안동 237번지에서 살았다. 아버지 강종호씨가 잡혀갈 당시 아들 강성헌은 1살이었고, 누나는 4살이었다. 당시 강씨는 친구의 권유로 건준위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건준위는 몽양 여운형 선생이 해방 후 정국의 혼란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전국으로 조직된 단체이다. 당시 강씨는 단체에 가입해 서북청년단과 싸움도 하고 살벌한 전투도 했다. 당시 당숙들은 가정을 돌봐야 한다며 강씨의 건준위 활동을 반대했고, 강씨도 가장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뜻을 굽히기로 했다. 그러나 보도연맹에 가입하게 된 것이 화근이 되었다.

아버지의 죽음, 남겨진 가족의 삶

아들 강성헌씨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큰고모(강달순)는 시집을 가고 작은고모(강종순)는 도립병원에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죽음은 주변인들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식음을 전폐하고 울면서 지내던 작은고모는 착하고 성실한 오빠를 쥐도 새도 모르게 학살해 버린 남한 정부에 대한 분노와 회의로 인민군으로 자원입대했다. 인민군에서 간호사로 종사하던 작은 고모는 인민군이 퇴각할 때 월북하여 소식이 두절 되었다.

시집 간 큰고모는 어느 날, '삶이 괴로워 더는 살 수가 없다'는 유서 한 장 남겨놓고 집을 나갔다. 이후 남강에서 경찰에 의해 숨진 채 발견됐다. 남겨진 가족의 삶도 순탄치 않았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학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시신이라도 찾기 위해 학살지를 찾았다. 어머니가 본 장면은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구덩이에 시체가 가득했고, 땅은 붉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오뉴월이라 시신 썩는 악취도 진동하였다. 어머니는 그 많은 시신 더미에서 아버지를 찾고 또 찾았지만, 결국 찾지 못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중앙시장에서 노점상으로 겨우 생활하였다. 강성헌이 7살이 됐을 때, 어머니는 주위 권유로 자식을 대학까지 공부시켜 주겠다는 임아무개와 재혼한다.

의부는 결혼 전 약속대로 누나와 강성헌에게 잘해주었다. 두 오누이는 마산 진동에 있는 태봉초등학교에 다녔다. 학교가 집에서 10(4km) 정도 떨어져 있었지만, 두 오누이는 시냇물이 흐르는 개울을 보고 경치가 아름다운 산을 보며 걷고 또 걸었다. 강성헌씨는 그 시절이 유년기 중 가장 행복했던 시기라고 회상했다.

어느 날, 의붓동생(○○)이 밤새 경기 하다가 병원도 못 가 보고 그만 죽고 말았다. 풍수 일로 자주 집을 비운 의부가 집에 돌아와 제 자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친자식이 죽은 것은 우리 아버지 귀신 때문'이라며 누나와 강성헌을 외가로 보내버렸다.

그러나 외할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네 새끼, 네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키워야 한다'며 다시 어머니께 돌려보냈고, 그 길로 의부는 누나를 남의 집 가정부로, 강성헌은 보육원으로 보내버렸다. 홀로 삶을 책임지던 강성헌은 26살이 되어서야 어머니, 누나와 함께 살게 되었다. 어머니는 항상 "세월 잘못 만나서 그렇지, 너희 아버지 같은 사람이 없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강성헌은 어머니의 말을 제대로 귀담아듣지 않았다. 아버지 원망도 많이 했다. 강성헌씨는 아버지가 빨갱이라는 이유로 피해를 당할까 호적에도 혼자 올려져 있었다. 강씨 문중에서도 친인척들에게 불이익이 있을까 아버지 이름을 호적에서 삭제해 버렸다.

그는 현재 부산에서 외식업을 한다. 참으로 어려운 환경에서도 성공한 것을 보니 필자의 마음이 기쁘다.

23.10.12 김영희(history62@)

할머니 과수밭에는 사람들이 묻혀 있다

[다시 만날 그날까지] 경남 진주 문산읍 진성고개 학살사건, 이봉춘 할머니의 제보

경남 진주에는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지가 24군데 있다. 2009, 이상길 경남대 교수는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제시한 11군데 학살지(매장지) 대상 지역의 시굴 조사와 발굴에 착수하기로 하고, 같은 해 12월 진성고개 발굴 작업을 시작한다. 경남 진주시 문산읍 상문리 진성고개에서는 19507월 민간인들이 집단 학살되었다.

발굴지는 상문리 274번지(아랫법륜골)와 상문리 312번지(웃법륜골), 까치골 3군데다. 이곳은 문산읍과 진성면을 잇는 고개로 진성고개, 문산고개, 애대고개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2번 국도에서 150m 들어가면 발굴장 옆에 있는 비닐하우스김영희

월아산(해발470m)과 장군봉(해발482m)의 산으로 단절되어 있어, 문산읍과 진성면을 이어주는 통로는 진성고개가 유일하다. 고개의 가장 높은 지점이 해발 128m인데, 문산 쪽 골짜기는 비교적 완만하고 긴 반면, 진성 쪽은 짧고 가파른 편이다. 문산읍은 남강지류인 영천강 주변에 펼쳐진 작은 평지에 자리 잡고 있다.

골짜기를 따라 동쪽으로 올라가면 북쪽 편에 크고 작은 골짜기가 3개 있는데, 아랫법륜골 매장지는 구 2번 국도에서 골짜기를 따라 150m 안쪽으로 들어가야 나온다. 도로변 입구에서는 매장지(학살지)가 보이지 않아 학살행위나 매장 사실을 은폐하기에 적절한 장소로 보였다.

진성고개 웃법륜골, 아랫법륜골, 가치골 매장지 원경김영희

진성고개 아랫법륜골 매장지 근경김영희

19604.19혁명 후 유족회 운동이 전개되자 <영남일보> <대구일보>에는 '한국전쟁기 학살사건에 대한 보도'가 줄을 이었다. 유족들의 기세에 눌려 이승만 하야 후 자유당도 양민학살진상조사특위를 만드는 작업에 들어간다. 하지만 학살 사건을 관장한 경찰국장이나 국회의원 등이 현직에 근무하고 있었던 터라 조사는 가해자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뤄졌다. 이에 유족들은 전국적으로 조직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19615.16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유족들의 입을 틀어막고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자를 '빨갱이'로 취급하고, 각 지역 유족회장 등을 감옥에 수감한다. 살벌한 분위기에 40여 년간 조용히 지내던 이들은 19999<AP통신>'노근리 민간인 학살사건' 보도를 계기로 2000120'경남유족대책위원회(대책위)'를 결성한다. 노근리 사건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725일부터 29일까지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학살사건이다.

대책위는 같은 해 3, 마산역에서 대대적인 위령제를 거행한다. 당시 경남 곳곳에서 관심 갖기 시작하면서 학살지의 증언이 속속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후 200453, 경남대 발굴팀은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지인 마산 여양리 발굴 상황이 언론에 보도되자, 경남 서부지역 내 학살지를 알고 있거나 학살당한 자의 유족들이 가슴 속에 품었던 응어리를 풀고 제보에 나선다. 이상길 교수는 이들의 증언과 대책위에서 제보한 11군데의 매장지에 대해 사전 조사를 실시, 자료를 참고로 발굴 대상을 선정한 후 작업을 시작하였다. 발굴이 시작되고 해당 사건이 언론에 알려지기 시작하자, 문산읍에 거주하던 이봉춘 할머니도 발굴 소식을 접하게 된다.

이 할머니는 "우리 밭(상문리 274번지, 아랫법륜골)은 왜 빠졌노!" 하면서 아들에게 전화해 진실화해위원회에 알리라고 한다. 진성고개는 처음 조사에서 제외된 곳이었으나 할머니의 제보를 통해 발굴이 시작되었다.

이봉춘 할머니를 찾아 나서다

이상길 교수의 논문에는 '이봉춘 할머니를 오랫동안 기억해야 한다'는 글이 남겨져 있었다. 이에 필자는 이 할머니를 찾아뵙기로 마음먹고, 일부 유족분들께 근황을 여쭤봤다. 돌아온 답변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돌아가셨어요."

"치매 걸리셨어요."

'정말 돌아가셨으면 어떡하지'하는 마음이 조급해졌지만 문제는 할머니가 과수원 소유자라는 것 외에 집도, 전화번호도, 주소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일단 몸으로 부딪쳐 보기로 하고, 무작정 진성고개(아랫법륜골) 발굴장을 찾아갔다. 발굴지는 거의 사람이 다니지 않는 묘한 골짜기에 위치해 있었다.

한국국제대학교 옆 구 2번 국도 도로변에서 150m 정도 올라간 입구에 법륜사라는 사찰 표지판이 눈에 띄었다. 10m 정도 더 들어가 차를 세운 후, 인기척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2번 국도에서 150m 들어가면 발굴장 옆에 있는 비닐하우스김영희

사실 발굴장을 혼자 가는 건 쉽지 않다. 겁이 났지만, 할머니를 만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골짜기 쪽을 바라보았다. 저만치 비닐하우스 안에 한 남자가 거름을 흩고 계셨다. 안심되는 순간이다. 한숨을 돌리고 인사를 건넸다. 잠시 후 아저씨가 하우스 안에서 나오셨다.

"민간인 학살지 유해 발굴 다니는 김영희입니다. 혹시 이봉춘 할머니를 아십니까?"

"제가 아들입니다."

"정말입니까? 할머니께서 좋은 일을 하셨다길래 제가 꼭 한번 만나 뵙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할머니를 찾았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할머니의 근황을 전혀 모르는 상태라 아드님이 어떤 마음인지 몰라 걱정이 되었다. 걱정과 달리 아드님은 친절하게 자신의 전화번호와 할머니의 전화번호, 문산 할머니 댁 주소와 약도를 그려주셨다.

"지금 집에 혼자 계시니 찾아봬도 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전한 후 진성고개 발굴지에서 차를 돌렸다. 이봉춘 할머니 댁으로 향했다. 할머니 댁 앞 텃밭에는 마늘과 파, 양파, 당근, 상추 등이 가지런히 심겨 있었다. 할머니의 차분하고 꼼꼼한 성격이 느껴졌다. 현관문 앞에서 할머니를 불렀다. 인기척은 있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귀가 좀 어둡다'는 아들의 조언에 따라 할머니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제야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필자가 "할머니 문 좀 열어주세요" 하니 문이 드르륵 열렸다.

'어디서 왔냐'는 할머니의 물음에 "진주서 왔다"며 방 안으로 들어가 인사하길 청했다. 이후 할머니랑 따뜻한 방에 마주 보고 앉았다. 자초지종을 말했더니 '그때가 12년 전이지' 하면서 할머니가 기억을 더듬어 나가셨다. 할머니가 책장에서 4권의 책을 갖고 나오셨다. 진성고개 발굴보고서와 산청 외공리 보고서 등이었다.

"내가 이상길 교수한테 받은 책이 있어요. 검은색 볼펜으로 한번 줄을 긋고 그 위에 다시 빨간색 볼펜으로 강조 표시까지 하면서 정독했어요. (웃음)"

이봉춘 할머니와 그가 작성한 서예김영희

"사람의 도리를 했을 뿐이야"

1936629일생인 이봉춘 할머니는 경남 산청군 금서면에서 12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할머니의 어머니는 '태릉참봉(泰陵參奉)'을 지낸 김상규 공의 장녀다. 이후 할머니는 20살에 남편 김윤기와 결혼, 51녀의 자녀를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할머니가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참봉 가문의 자녀'라서 그랬나 보다.

할머니는 자녀를 모두 출가시킨 후 학문에 뜻을 품어 한학과 서예 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전국 서예대전에서 상을 받는 등 수상 경력도 화려하다.

"내가 한국전쟁 때 15살이었어. 우익 편은 이승만, 좌익 편은 김일성이었지."할머니는 보도연맹에 관한 내용도 잘 알고 계셨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사회적 분위기를 설명하며 말을 이어 나가셨다. 필자가 15살 때 저렇게 총명하게 기억했을까 싶을 정도로 똑똑해 보였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1982년경 과수원을 만들기 위해 진성고개(아랫법륜골)에 있는 산을 매입하였다. 당시 산주(山主)께서 이곳에 매입한 땅 부지 한가운데에 매장지가 있다고 알려주셨다.

그 말을 듣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매장지를 그대로 남겨 놓고' 다른 곳에만 과수원 나무를 심기로 했다. 할머니는 선량한 농민들이 억울하게 끌려가 학살당했다는 걸 짐작하고 계셨다.

"조상 모시는 입장에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영혼들을 달래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것이 사람의 도리니깐.

여름철에 장맛비가 장대처럼 쏟아지면 유해가 쓸려내려 갈까 봐 벌초도 못 했어. 장마가 물러가는 매년 늦가을쯤에 했지. 벌초 후 수확한 과일 한 박스와 막걸리, 꽃 등을 올렸어. 억울한 영혼들 오셔서 드시라고.

하루는 아들이 매장지 위에 있는 벚나무를 베어버리자고 하더라고. 근데 내가 묘지에 꽃나무가 있으면 좋으니 그냥 두라고 했어. 할아버지도 돌아가시면서 나한테 부탁했어. 매장지가 언젠가는 발굴이 될 것이니 그때까지 잘 관리해달라고."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두 분 모두 정말 따뜻하고 아름다운 마음씨를 갖고 계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장지 매입 후 과수를 심기 위해 밭을 둘러보는데 정말 큰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어. 큰 나무를 보면서 '시신의 피와 살을 먹고 자라 저렇게 컸을까' 생각했어. 주위 사람들에게 소나무를 베어가라고 했더니 가지 하나 남기지 않고 가져가 버리더라고. 땔감이 많이 필요할 때라 서로 가지고 가려 했지."

할머니 소나무 사연을 듣고 필자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소나무는 총부리 쏘는 소리처럼 콩 볶듯이 타타타탕! 앞에 육신은 난자된 채 검붉은 선혈 흘러 핏빛이 여명을 헤치고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노라! 보았노라! 느꼈노라!'라고 묵묵히 바라보며 서 있었을 것이다. 23.10.19 김영희(history62@)

"두 명씩 묶어 결박 후 총살", 고스란히 드러난 그날의 진실

[다시 만날 그날까지] 이봉춘 할머니의 지극 정성, 역사를 증언하다

이봉춘 할머니는 이상길 경남대 교수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 교수팀이 발굴을 시작하자, 할머니는 물과 음료수를 준비하여 발굴장을 다니셨다. 이 교수는 매장지 관리에 관한 내용을 전해야 할 때마다 할머니를 한쪽으로 모시고 가서 비밀리에 이야기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발굴을 시작했지만, 2009년도만 해도 사회 통념상 유족들에게 안 좋은 소문이 들어갈까 봐 말 한마디도 조심하는 분위기였다. 필자가 찾아갔을 때도 할머니는 집에 요양보호사가 있다며, 다른 방으로 안내해 조용히 이야기하셨다. 그 정도로 철저하셨다. 발굴을 마친 후 이 교수는 할머니를 초대해 간단한 제례를 지냈다.

"유해를 실은 영구차에 주렁주렁 달린 돌감나무와 과수원 주변에 있는 꽃을 한 아름 꺾어서 유해에 대한 마지막 작별의 예를 올렸어요. 그때 이 교수가 내 머리 위에 얹어있는 지푸라기를 때어줬어요. (웃음). 교수님은 성격도 좋으시고 참 다정한 분이었다고 꼭 뵙고 싶어요."

그러면서 또 하나의 사연을 공개한다.

"발굴장 건너편의 법륜사라는 절이 있어요. 그곳 스님께서 밤이 되면 건너편 학살지 골짜기에서 웅성거리는 사람 소리가 매일 들린다며 억울한 영혼들을 위한 기도를 올렸어요.어느 날 꿀 장수가 지나가다가 그곳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저녁이 되니까 사람들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더래요. 그 뒷날 동네 사람들한테 저 안쪽에 동네가 있냐고 물었더니 없다고 하니 참 이상하다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갔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영문도 모른 채 트럭에 실려 와서 두 사람씩 결박 상태 자세로 손이 묶인 채 머리가슴에 총구멍 뻥뻥 뚫려서 붉은 피 쏟아지진 계곡에 원한의 목소리가 울렸거늘 어찌 조용하겠는가. '산 자여! 우리 여기 있소! 어서어서 찾아 영혼이라도 달래주시오'라는 메아리가 아니었을까 싶다.

진성고개 발굴장은 세 지점이 있다. 추정되는 피학살자는 150명 정도다. 학살지 있는 곳곳에서는 '악독한 사람들이 학살지를 몰래 찾아가 머리뼈만 골라 포대기에 담아 간질병 고치는 데 팔아넘겼다'는 일화가 종종 들린다.

할머니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 "어찌 사람으로서 그런 끔찍한 일을 할 수 있느냐""정말 독한 사람들"이라고 하셨다. '다른 매장지에서도 그런 일이 비일비재합니다'라고 했더니 "아이고! 그래요" 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신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갈림길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할머니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이런 고마우신 할머니가 또 어디 있을까 싶었다. 그리고 할머니가 따뜻하고 다정하셔서 마음이 푸근했다. '할머니 가끔 찾아뵐게요' 하니 웃으시면서 "바쁜데 무엇 하려고" 하면서도 "나를 찾아오는 건 선생님 마음이지요" 하신다. 그때 할머니가 "교수님은 잘 계시는가요? 한번 뵙고 싶어요"라고 하신다.

필자는 조금 망설이다가 이 교수의 묘지 사진을 보여드렸다. 순간 할머니 얼굴이 우울해지면서 깜짝 놀라신다. "왜 그렇게 좋으신 분이 아직 젊으신데 빨리 돌아가셨냐"며 할머니는 대화 중 몇 번이고 이 교수님에 관해 물으셨다. 결국 필자와 할머니는 멍하니 눈물만 흘렸다.

"할머니, 교수님 묘비가 진주 대곡 삼강문화재연구소에 있습니다"

"! 그래요. 교수님 묘지에 한번 가보고 싶다."

"할머니, 진짜 교수님 묘지에 가시고 싶으세요?"

"그래요!"

"우리 손녀가 경남대학교에 다녀 이 교수를 찾아갔었어요. 그때 이 교수가 '내가 진주 가면 할머니 꼭 찾아뵙겠다고 전해라' 해서 3년 동안 교수님을 기다렸는데 안 오셨어요."

"! 그러셨습니까! 지금은 겨울이라 추우니 내년 봄에 꼭 모시고 (이 교수 묘지에) 갈게요."

이 말에 할머니가 근심스러운 얼굴로 "내가 내년 봄까지 살아있을까"라고 하신다. "할머니 당연히 살아계셔야죠"라고 인사를 하고 할머니 댁을 나섰다.

몇 개월 후, 할머니께 연락드려 이 교수한테 갈 수 있겠냐고 여쭤봤다. 아드님이 거동도 불편하고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길까 봐 정중히 거절하여, 결국 봉춘 할머니는 이 교수를 참배하지 못했다.

할머니의 정성, 발굴을 수월하게 하다

발굴 조사 작업이 들어가기 전에 시굴 조사 작업을 실시한다. 여러 증언과 자료를 수집하여 시굴하게 된다. 59년이라는 세월과 자연재해로 인한 지형의 변화에 따라 증언자는 꼭 여기가 맞다고 하지만, 실제로 시굴해 보면 실패하는 경우가 많아 증언에 완전히 의존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이곳저곳 시굴해야 하는 작업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진성고개 발굴은 3지구 중 1지구는 할머니의 제보로 아주 쉽고 정확하게 발굴이 시작될 수 있었다. 2지구도 시굴이 어려웠고, 3지구는 실패로 끝났다. 1지구 소유자인 이봉춘 할머니께서 원상 그대로 유지하고 관리해 왔기에 발굴 작업이 쉬울 수밖에 없었다. 현장에서 육안으로 확인한 결과, 야트막하게 15m 이상 길게 뻗어 내린 흙더미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길게 뻗은 흙더미를 중심으로 횡으로 몇 개의 트렌치를 설정하였다. 표토를 살짝 제거하니 초기 단계에서 높은 부분 위치한 유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유해는 길이 13.5m, 최대 폭 4m 범위에서 확인되었다.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 때문에 패인 얕은 골짜기에 매장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노출된 54(경사면 높은 쪽에서부터 18, 27, 34, 44, 56, 66, 78, 86, 95) 유해는 모두 전신이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는 상태였다.

결박 자세가 뚜렷하게 노출된 유해전국민간인학살 전시장

학살 당시 결박 자세 재연김영희

그리고 2명씩 짝을 지어 손목을 뒤로 묶였는데, 두 사람이 팔이 서로 결박 자세로 손목을 묶은 것이 특징이다. 손목을 묶었던 재료는 출토되지 않았다. (증언에 의하면 죄수복을 찢어 만든 천으로 묶었다.)

아랫법륜골 매장지는 둔덕에 사람을 엎드리게 한 상태에서 학살이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학살의 순서는 1~9열로 한 줄씩 차례대로 진행되었던 것 같다. 탄피의 수로 보아 1명당 1발씩 정조준하여 쏜 것으로 추정된다. 유해들은 대체로 20~30대의 남성들로 파악되었고 여성이나 어린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진주지역에서 일어났던 민간인 집단학살사건 대부분은 진주형무소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허리띠 11, 버클, 38짝의 구두, 작업화, 지퍼 등이 출토됐을 뿐 재소자가 입었던 죄수복으로 판단할 만한 근거가 나오지 않았다.

당시 진성고개에 매장된 사람들이 재소자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근거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고, 적어도 25명 이상이 민간인 복장임이 확인되었다. , 학살된 사람들은 진주형무소 재소자가 아니라 보도연맹과 관련해 예비 검속된 민간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스란히 드러난 학살 과정

웃법륜골·아랫법륜골 학살지김영희

웃법륜골·아랫법륜골 학살지전국민간인학살 전시장

진성고개(아랫법륜골) 발굴장에서 노출된 유해의 위치와 형태가 잘 보존돼 있어서 가해자들의 학살 과정과 행위 절차 등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기해자들은 피학살자들을 2명씩 짝지어 1~9열까지 횡렬 시켰다. 땅바닥에 엎드려서 왼쪽에 엎드린 사람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오른쪽에 엎드린 사람은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서 약간 마주 보게 했다.

피학살자들의 팔을 뒤로해 X자 모양으로 교차 되게 한 후 손목을 묶었다. 그리고 위에서부터 차례대로 엎드리게 한 뒤 뒤에서 총을 쏘았다. 총을 맞은 신체 부위는 상체가 많은 편이며, 이 중에는 머리에 총을 맞아 머리뼈가 부서진 경우도 상당했다.

가해자들은 높은 쪽의 흙을 긁어서 시신을 덮었다. 이들을 시신을 덮는 과정에 마을 주민들을 동원했다. 아랫법륜골은 문산 주민을, 웃법륜골은 진성주민을 동원하여 매장 묻는 부역을 시켰다.

한국전쟁 민간인 집단학살사건의 가장 큰 문제점은 가해자들의 집단학살 행위와 매장지 은폐다. 그러나 진성고개(아랫법륜골)는 지극 정성으로 매장지를 관리해 온 이봉춘 할머니 덕분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가해자(군인, 경찰, CIC)들의 집단학살 행위와 매장지 위치가 구체적으로 드러난 유일한 매장지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인 발굴장에는 유해 노출 상태가 얽히고설켜 가해자들의 행위를 판단하기 쉽지 않다. 유품, M1 소총이나 카빈총의 탄환 개수에 따라 몇 명을 사살했는지 짐작한다. 그러나 이곳은 유해 형태가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유해 조사와 기록을 정확하고 상세하게 알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봉춘 할머니의 온정 덕분'이 아닐지 싶다.

전국으로 발굴 지역을 다니면 암암리에 매장지를 아는 분들이 많다. 학살 후 군인과 경찰은 대부분 뒤처리를 동네 이장에게 명령한다. 주민들을 동원하여 매장지를 덮고 묻는 작업을 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니 동네 분들이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나 "빨갱이 새끼들은 죽어도 싸, 죄인이고 흉측한 일을 했는데 이제 와서 왜 파느냐"고 하는 훼방꾼이 대부분이다.

그렇기에 매장지를 직접 제보하고 27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조상처럼 관리했다는 것은 정말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겨야 할 사연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용서와 화해 아니겠는가. 또한 이 교수가 봉춘 할머니를 고마운 분으로 논문에도 남긴 것은 바로 봉춘 할머니를 향한 온정 아니겠는가. 이봉춘 할머니! 고상한 할머니! 고마운 할머니! 멋진 할머니 사랑합니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장수 하세요.

진성고개 유해를 만나다

진주 문산 진성고개 발굴장 구역(아랫법륜골)에서 54, 지구(웃법륜골)에서 57, 지구(까치골)은 실패, 모두 발굴한 111구의 유해는 현재 '세종 추모의 집'에 안치되어있다.

필자는 2021112, 대전 산내 골령골 민간인 피학살자 유해발굴(1240) 안치식에 다녀왔다. 그때 진성고개 유해를 만나고 싶어 관리인에게 부탁하여 유해 안치실을 보기로 했다.

"멀리서 오셨네요. 진주유족회는 멀어서 못 와 매년 우리가 제사를 지냅니다."

"!"

그리곤 안치실 문을 열어주며 "이쪽 라인과 이쪽 라인이 진성고개 유해입니다"라고 하신다.

세종 추모의 집에 안치된 진성고개 유해김영희

유해 안치소를 둘러보자, 기분이 묘했다. 진주서 여기까지 와 계시는구나! 그리곤 경남대학교 박물관 E-4 등 유해 표지를 보는 순간, 이 교수가 생각이 났다. 이렇게 잘 발굴하셔서 여기에 보내셨구나! 이 교수를 뵙는 듯했다.

사실 진주유족회 측에서는 진성고개 유해(111)를 진주로 모시고 싶어 한다. 그러나 정부와 합의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듯하다.

23.10.26 김영희(history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