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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근 .현대사 이야기

본헌터 : 나 A4-5, 63만시간을 쪼그려 앉아 당신을 기다렸네

by 이성근 2023. 7. 17.

A4-5, 63만시간을 쪼그려 앉아 당신을 기다렸네 [본헌터]

] 나는 누구인가

어둠의 땅이 빛을 만나던 날, 쪼그려 앉은 채로 당신들을 만나던 날

어둠의 땅이 빛을 만났다. 2023310일 오전, 나의 머리가 땅 위로 솟았다. 이게 얼마 만인가. 몇십년 만의 햇빛인가. 사진 주용성 작가 제공

 

*편집자 주: ‘본헌터70여년 전 국가와 개인 사이에 벌어진 집단살해사건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이야기다. 아무 데나 버려져 묻힌 이들과, 이들의 행방을 추적하며 사라진 기억을 찾아 나선 이들이 주인공이다.

 

나는 앉아 있었다.

얼마 동안 앉아있었냐면, 아주 오래 앉아 있었다. 날짜로 말해야 한다면, 26440일 이상 앉아있었다. 시간으로 환산하면, 634560시간 이상 앉아 있었다. 분으로 쪼개 말하자면, 38073600분 이상 앉아있었다. 2284416000초 이상 앉아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 시간이 얼마나 숨 막혔는지, 의식할 수 없었다. 쪼그려 앉은 채로 숨이 끊어졌고, 머리 위로 흙이 덮였지만, 자세를 고치지 못했다. 한 번 고치지 못한 이상 내 힘으로는 영원히 고칠 수 없었다. 쪼그려 앉아 흙과 하나가 되었다. 땅과 하나가 되었다. 산과 하나가 되었다. 자연의 일부가 되었다.

 

이 자세로 100년 더 있었을 수도 있다. 1000년 더 있었을 수도 있다. 1만년, 10만년, 100만년 뒤 불현듯 나타나 후대의 고고학자들에게 연구 거리를 제공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거대하고 육중한 콘크리트 구조물이 두개골을 쑤시고 들어와 일찌감치 가루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오르던 산 위에서 굴삭기와 덤프트럭, 타워크레인의 소음이 숲을 흔들던 시절이 있었다. 1996년 북쪽으로 340지점에 공장이 들어섰다. 2017년 남쪽 470지점에 공장이 들어섰다. 나는 두 공장의 가운데 지점에서 철근 아래 처박히거나 배려 없이 버려지는 운명은 피했다.

드디어 나의 전체 윤곽이 드러났다. 나는 고개를 떨군 채 앉아있었다. 쪼그려 앉아있었다. 나는 서서히 드러나 바깥으로 나올 준비를 했다. 사진 주용성 작가 제공

 

기회가 왔다. 산에서 빠져나올 천금 같은 기회. 20224, 나를 찾기 위해 사람들이 왔다. 일본제 바이오35 4t 굴삭기를 앞세우고 왔다. 굴삭기는 내 옆을 지나 북쪽 산등성이 높은 곳에 올라, 불로초라도 찾으려는 심마니처럼 3일간 땅을 뒤지고 다녔다. 120에 이르는 구간에서 너비 80, 깊이 60의 땅을 팠으나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내가 산등성이 높은 곳에 있을 거라고 판단한 게 문제였다.

 

굴삭기는 산 아래로 내려왔다. 이번에는 내가 있는 곳 아래 지점에서 35도 각도의 비탈을 올라왔다. 굴삭기 앞에 달린 버킷이 땅을 가볍게 파낼 때 나뭇잎 속에 감추어져 있던 무언가가 걸렸다. 두 개의 어떤 조각이었다. 사람의 조각인가 동물의 조각인가. 알 수 없었다. 다음날 그 답을 얻기 위해 또 다른 사람들이 왔다. 그것은 사람의 조각으로 판명 났다. 두 사람의 허벅지 뼈와 정강이뼈였다. 그 옆에서도 계속 조각이 나왔다. 그들은 이제 나를 찾을 수 있을 거라 확신하는 듯했다. 조각이 발견된 곳에 현장보전 조처가 내려지고 하얀색과 빨간색이 칠해진 폴대가 꽂혔다. 하지만 그들은 한동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절차를 기다려야 했다. 산에는 침묵이 찾아왔다. 300여일간 그 침묵은 지속했다. 자동차들이 산 아래 왕복 2차선 도로를 무심하게 달렸다.

굴삭기여, 나의 냄새를 맡은 기계여. 그대는 왜 산 높은 곳에 올라 헛물을 켜고 인제야 내려왔는가. 나는 이 낮은 산 아래 언덕에 있었노라. 사진 고경태

 

사계절이 순환하고 봄이 돌아왔을 때, 다시 그들이 왔다. 이번에는 작정한 듯 매일 왔다. 202336. 산 위로 오른 굴삭기가 내 북쪽 2m 부근에서 움직였다. 동쪽에서 서쪽 방향으로 땅을 건드리며 45도 각도의 비탈 아래로 내려오는 데 무언가가 걸렸다. 반대편에서는 호미질이 한창이었다. 며칠 간의 작업 끝에 남쪽과 북쪽을 연결하는 어떤 라인이 포착되었다. 2023310일 오전 930, 그들의 용어를 빌리자면 나는 노출되었다.

 

굴삭기의 무한궤도 소음이 잦아들면서 호미질 소리가 아득한 곳에서 점점 가까워졌다. 내 머리 위를 짓눌렀던 두꺼운 표토층이 벗겨졌다. 호미는 그 옛날 나를 덮었던 흙 사이로 부드럽게 침투해 들어왔다. 흙더미가 쓰레받기와 양동이에 실려 버려진 뒤 내 머리뼈가 삐죽 돌출되었다. 나머지 흙들도 떨어져 나갔다. 나의 전체 윤곽이 드러났다. 처음 목격한 사람들은 동굴 속의 불상을 연상했는지도 모른다. 호미는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대신 정교한 기구들이 접근해 왔다. 대칼이, 스파출라라 부르는 주걱이 주변을 조심스럽게 긁더니 내 몸 사이사이를 헤집었다. 몸을 채웠던 흙과 모래가 조금씩 빠져나갔다.

멀리 산기슭을 찾아준 이들이여, 나와 내 동료들을 위해 땅을 파헤쳐준 이들이여. 나와 동료들은 당신들을 기다렸노라. 사진 주용성 작가 제공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나는 일어서지 못했다. 이 산을 함께 오른 동료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어둠 속의 땅에 박혀 누운 채였다. 쪼그려 앉아있는 이는 나 혼자였다. 누워있는 이들도 하나씩 형체를 드러냈다. 그들을 가렸던 흙들도 밖으로 퍼 날라졌다. 얼마만의 달콤한 햇빛이던가. 그 빛을 어둠이 밀어낼 시간이 되면 사람들은 돌아갔다. 서너장의 신문지가 나와 동료들을 감쌌다. 그 위에 다시 두꺼운 방수포가 얹혀졌다.

 

아침 이슬이 맺혔다가 사라지면 사람들이 산으로 올라왔다. 나와 동료들은 다시 밖으로 몸을 드러내고 작업 대상이 되었다. 낮과 밤이 반복되는 동안 누워있던 동료들이 하나둘 떠났다. 사람들은 그것을 수습이라 불렀다. 끝내 나 홀로 남았다. 328일 오전 11. 기자들이 나를 만나러 왔다. 누워있다 수습되었던 동료들도 다시 나와서 그들을 맞았다. 카메라 셔터와 플래시가 쉴 새 없이 터졌다.

처음으로 내가 땅 밖으로 노출되자 사진작가는 조용히 카메라를 들이댔다. 사진 박꽃님 제공

 

산을 떠나는 날이 왔다. 2023329일 아침 9. 나는 일어서는 대신, 분리되었다. 머리뼈가 먼저 내 몸과 이별했다. 두 팔이, 흉부가, 골반이, 척추가, 허벅지가, 정강이가 각자 떠났다가 한자리에 모였다. 나의 팔을 애초에 묶었으나 헐렁해진 전화선도 떨어져 나갔다. 하나였던 나는 플라스틱 모판 위에서 206개로 나누어졌다. 이제서야 누운 것인가. 아니다. 놓인 것이다. 붓의 솔이 머리뼈에서 발가락뼈 끝까지 마디 사이를 간질였다. 흙과 잔여물을 털고 목욕을 할 시간. 무색의 아세톤 용액 속에서 206개의 나는 하나씩 담가졌다. 세척을 마쳤다. 그늘을 찾았다. 바람을 맞았다. 물기를 털었다.

 

나는 측정되고 감식되고 분석되었다. 머리뼈는 어떠한가. 최대 길이는 170, 최대 너비는 142, 광대사이 너비는 145㎜…. 기초조사가 하나씩 진행되었다. 나는 남자인가, 여자인가. 어른인가, 아이인가. 내 키는 몇인가. 또 얼마나 성한 상태인가. 그보다 가장 중요한 질문이 있다.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이렇게 묻기까지 몇년이 걸린 것인가.

 

73.

 

나는 A4-5.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사회부 기자. 진실화해위원회를 맡고 있다.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라는 책을 썼다. 2000년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관한 미국 비밀문서를 최초 보도했고 <베트남전쟁 1968212> 한국어판과 일본어판, 베트남어판을 냈다. 베트남전에 이어 이번엔 한국전쟁이다.

 

왜 나만 특별하게 앉혀놓고 죽인 것일까 [본헌터]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098451.html

 

당신은 내 얼굴 뼈를 본 것이 아니다 [본헌터]

 

나는 참호 속에서 오래도록 쪼그려 앉아있던 A4-5 옆에서 엎드린 채 발견되었다. 당신은 지금 내 얼굴뼈가 아니라 머리뼈 밑면을 보고 있다. 구멍 3개 덕분에 뭉크의 절규라는 호칭을 얻었다. 사진 주용성 작가 제공.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099407.html

 

 

신경쓰지 마셔, 여기 땅 파면 다 시체야” [본헌터]

20233월 충남 아산 배방읍 공수리(순천향로) 110에서 62구의 참혹한 유해가 발굴되었다. 그곳으로부터 북쪽으로 340미터 떨어진 배방읍 공수리 883에 신도리코 아산공장이 있다. 28년 전 이곳에서 나는 무언가를 보았다. 사진 네이버 지도 갈무리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100422.html

 

“신경쓰지 마셔, 여기 땅 파면 다 시체야” [본헌터⑦]

[역사 논픽션 : 본헌터⑦] 신도95-1, 신도95-2신도리코 직원들도 전혀 모를, 28년 전 아산공장 건축현장의 비밀

www.hani.co.kr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100795.html

 

임신한 부인의 배를 갈랐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 [본헌터⑧]

[역사 논픽션 : 본헌터⑧] 피와 모란폐결핵의 시대, 비참하게 살던 사람들이 관공서에 불을 지르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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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년 만에 흙덩이로 발굴된 내 머리, 그 옆의 녹슨 낫

19509월에 묻혀 20225월 새지기 시험발굴 현장에서 출토된 낫. 사진 홍남화 제공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101415.html

 

우리 가족 죽이고, 우리집에서 살았는가?

충남 아산시 염치읍 대동리에서 백암리로 가는 산길이다. 오른쪽 큰 나무 그늘 밑에서 나는 발견되었다. 황골 마을에서 100여미터의 언덕을 오르고 나면 여기서부터 아래로 경사진 길이 나온다. 지나가는 사람 한 명 없이 서늘하다. 누군가에게는 사람 죽이기 딱 좋은 곳이었다. 고경태 기자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102365.html

 

왜 소리 없이 도망갔을까, 역사상 빛나는 겁쟁이 [본헌터]

나는 판사다

일등으로 도망간 이들의 거짓말에 속아 피난을 안 갔더라면

전쟁이 터지자마자 수원으로, 대전으로, 대구로, 다시 대전으로, 이리로, 목포로, 부산으로 도망간 이승만 대통령. 1950815일 대구에서 열린 국회 개회식에서 연설하고 있다. 사진 국가기록원 제공

 

내 이름은 병진이다.

공산주의를 싫어한다. 금덩이를 준다 하더라도 공산 지배 아래서 살고 싶지 않다. 운명의 날인 1950628, 나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한강을 건널 것이냐 말 것이냐. 서울에 남으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어느덧 거리에선 붉은 기를 매단 자동차가 달리고 있었다.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나를 붙잡고 이렇게 물어볼 것만 같았다. “혹시 판사님 아니시오?” 나는 결단했다. 차라리 생명을 걸고 모험을 택하는 편이 낫다고. 오늘 밤 한강을 건너 수원까지 가리라 결심했다. 한남동 나루에 다다랐다. 한강은 유달리도 아름답게 흐르고 있었다. 나는 배에 몸을 던졌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103271.html

 

 

희비극의 범죄인 시장사색 없이 사형, 사형

재판관의 고민

재판받고 극형 당해도 억울했던 부역자 심판재판조차 안 받은 백배, 천배의 사람들은

부역자 재판을 받기 위해 줄지어 걸어가는 사람들. 맨 오른쪽 사람의 완장이 두렷하다. 사진 한국전쟁 사진의 역사사회학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104207.html

 

 

나는 프락치가 됐고, 그들은 부역자가 됐다 [본헌터]

잊혀진 아산의 거물

고향의 대학살 비극을 닮은, 끝내 재기하지 못한 어느 정치인의 이야기

용길은 1967년에 총선에 출마했지만 떨어졌다. 국회 프락치 사건에 걸려 구속과 재구속을 되풀이한 이후 재기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사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105079.html

 

 

아침에 머리를 만지던 그 여인들은[본헌터]

은비녀의 독백

쪽진머리속의 장신구들은 어떻게 설화산 구덩이에서 나왔나

머리카락은 짓뭉개져 사라진 머리뼈와 이별하였으나, 나를 놓지 않았다. 나는 비녀에 꽂혀 은귀이개를 동생처럼 데리고 세상에 나왔다. 사진 아산시·한국전쟁기민간인학살유해발굴공동조사단 제공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106022.html

 

 

오빠가 보내준 머리털 한 가닥, 나는 아직 유효하다 [본헌터]

오빠의 환청

엄마 품에 안겨 끌려간 나, 돌쟁이 주화는 지금 어느 산 어느 구덩이에

극적으로 살아남은 오빠 주성(왼쪽)과 사촌오빠 주호. 당시 7살이던 주성 오빠는 가족들이 갇혀있던 창고에서 어리다는 이유로 나왔고, 5살이던 주호 오빠는 죽으러 끌려가던 중 큰엄마와 함께 탈출해 살았다. 본인 제공

 

내 이름은 주화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106980.html

 

아버지 만나러, 7부 능선까지 포클레인 끌고 왔습니다 [본헌터]

유족회장 장호

진실규명 신청하고, 유족회 만들고, 유해발굴 예산 지원받고, 드디어

발굴단은 산 비탈 전체에서 길이 10m, 1.5m의 표토층 12곳을 파헤치며 단 하나의 뼈라도 찾아보려고 했다. 사진 주용성 작가 제공

내 이름은 장호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107940.html

한 집에 한 명만 살려준다그렇게 일가족 11명 끌려가 [본헌터]

맹씨네 이야기

생존자는 학군단 제적성재산에서 또 유해를 찾아

웅재의 대학 학생증. 4학년 ROTC(학생군사교육단) 임관을 앞두고 특무대의 조사를 받은 뒤 학군단으로부터 즉시 제적됐다. “부역자, 빨갱이의 가족이라는 이유였다. 본인 제공

내 이름은 없다.나는 카운트되지 않았다.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 숙부, 숙모, 고모, 누나 또는 언니들이 포함된 몰살자 명단 속에 나는 없다. 부당하다. 나도 한 생명으로서 그 자리에 있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나는 태아다. 세상에 나와 엄마 젖을 먹어보지도, 울음을 터뜨려 보지도 못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른다. 그저 하나의 수정란 세포가 되어 엄마의 자궁 내벽에 착상된 지 36주였다. 자궁을 찢고 세상에 나가기 딱 한 달전, 나를 뱃속에 품었던 엄마는 처형당했다.

태어났다면 맹씨네 일원이었다. 73년 된 태아의 신비로운 힘을 빌려, 나와 함께 몰살당한 가족을 소개하고자 한다. 살아남은 가족을 소개하고자 한다. 살아남았으나 국가에 버림받은 가족을 소개하고자 한다. 고난과 감시 속에서도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가족을 소개하고자 한다.

195114, 북한군이 서울을 재점령한 바로 그날이었다. 충남 아산군 배방면 휴대리 65번지에 살던 할아버지 무섭(46), 할머니 중희(47), 엄마 규옥(27), 규옥 뱃속의 나, 숙부 용재(18), 숙모 우순(18), 고모 숙재(15) 은재(7), 삼촌 웅재(11), 누나(또는 언니) 만호(4), 삼촌 복재(1), 이렇게 11명이 배방면 모산역 곡물창고에 끌려가 갇혔다.

창고 안에는 200여명이 바글바글했다. 19509·28 수복 뒤 죄 없는 마을 사람들이 부역 혐의로 끌려가자 할아버지가 연판장을 돌리고 진정서를 면사무소와 경찰서에 보낸 게 화근이었다. 동네 목숨줄을 쥐고 있는 향토방위대 부위원장 김씨의 눈밖에 완전히 나버린 것이다. 그것은 멸족의 불씨가 되었다.

이틀 뒤 10명의 가족이 곡물창고에 있던 사람들과 함께 모산역 철길을 따라 성재산으로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 11살 웅재 삼촌만 살아나왔다. 가해자들이 한 집에서 10살 아래로 한 명씩만 살려준다고 했기 때문이다. 고모 은재와 언니(또는 누나) 만호, 삼촌 복재도 각각 7, 4, 1살이었지만 나가지 못했다. 세는 나이로 12살이었던 웅재는 아버지 무섭에게 떠밀려 10살 아래 행세를 했다. 웅재는 동네에서 함께 놀던 주성(본헌터 21회 참조)등과 함께 곡물창고 밖으로 내보내졌다.

웅재의 천안농고 학생증. 부모를 모두 잃은 뒤 웅재는 큰할아버지집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본인 제공

아빠 갑재(26)와 형(또는 오빠) 억호(1)는 아예 곡물창고에 가지 않았다. 갑재는 인민군 점령기때 초등학교 선생 일을 쉬지 않고 했다는 이유로 배방지서 유치장에 끌려갔다가 온양경찰서를 거쳐 대전형무소에 있었다. 갑재의 아버지 무섭이 연판장 건으로 찍힌 뒤 생긴 일이었다. 억호는 엄마 등에 업혀 칭얼대는 바람에 곡물창고로 끌려가기 직전 작은할머니 집에 맡겨졌다.

살아서 고통이었다. 한 달 뒤 대전형무소에서 무죄로 석방된 아빠는 초등학교 교사로 복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온가족이 학살되어 증발된 현실을 견디기 힘들었다. 주검이 어디 있는지 몰랐다. 집은 가해자들이 불태워 잿더미가 되었다. 제정신으로 살 수 없었다. 6개월 뒤 울화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우리집의 희생자 수는 도합 11명으로 늘었다.

이제 두 생존자, 웅재와 억호의 인생이 펼쳐질 차례다.

웅재는 큰아버지, 즉 나의 큰할아버지집에, 억호는 작은할아버지 집에 맡겨졌다. 죽은 할아버지 무섭은 삼형제 중 둘째였는데, 나머지 두 집안은 다행히 화를 면한 터였다.

사건 직후 배방국민학교 6학년이 된 웅재는 공부를 잘했다. 천안중학교와 천안농고를 모두 수석으로 졸업하고 고려대 법학과에 입학했다. 인근에서 수재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법조인을 꿈꿨다. 2학년이 되던 1962년에는 학교에 ROTC(학생군사교육단)가 만들어져 지원했다. 학교 성적도, 학군단 성적도 좋았다.

국가는 앞길이 창창한 수재의 날개를 부러뜨렸다. 4학년 장교 임관을 앞두고 있는데 특무대(CIC)에서 조사가 나왔다. 얼마 뒤 대령 계급의 학군단장이 웅재를 불렀다. “넌 안된다고 했다. “부역자, 빨갱이 가족이라서 안된다고 했다. 담당 교관인 소령은 함께 눈물을 흘려주며 안타까워했지만 상황을 되돌릴 수 없었다. 그날부로 학군단복을 벗어야 했다.

학군단에서 제적되면서 병적도 사라져 일반 군입대조차 불가능해지는 일이 벌어졌다. 취직 길이 막혔다. 사법고시도 볼 수 없었다. 웅재 앞의 세상이 와르르 무너졌다. 모든 걸 포기하려고 했다. 서울 덕수궁 앞에서 법무사를 운영하는 일가친척 한 분이 손을 내밀어 주었다. 그곳에 사무장으로 들어갔다. 모든 걸 숨기고 고졸 행세를 하며 살았다. 그 친척분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42년을 그곳에서 일했다.

1974년 경찰의 신원조사회보서에 기록된 억호. 울화병으로 죽은 아버지를 처단된 자임이라고 잘못 적어놓았을 뿐 아니라 억호에 대한 사찰 기록을 적어놓았다. 본인 제공

억호도 공부를 잘했다. 처음에는 작은할아버지가 중학교도 못 가게 해 애를 먹었다. “농사일도 바쁜데 무슨 공부냐면서 학교 대신 들로 나가게 했다. 억호가 나온 동방국민학교 교장 선생님이 찾아와 내가 중학교 보낼테니 억호를 우리 집에 달라고 했다. 작은할아버지는 우리새끼 내맘대로 못하냐며 소리소리 질렀다.

우여곡절 끝에 1년 늦게 진학해 천안중학교와 천안농고를 졸업했다. 친구들은 버스 타고 다니는데 버스비가 없어 1시간 거리를 걸어서 통학했고, 농사일도 병행했다. 대학 진학은 언감생심이었다. 그렇다고 작은할아버지 집에 매여있기는 싫었다. 3 때인 196810월 경기도 9급 공무원 공채시험에 합격했다. 일부러 먼 지역을 택했다. 포천군 영북면 사무소에서 사회 첫발을 디뎠다.

억호는 아산 쪽으로는 쳐다도 보기 싫었다. 1972년 병석에 누운 작은할아버지가 불러 아산에 내려갔다. “미안하다, 강하게 키우려 한 거지 미워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면서 사과했다. 희한하게도 그동안 쌓여있던 나쁜 감정이 스르르 녹았다. 작은할아버지는 3개월 뒤 세상을 떠났다. 1973년에 고향에 내려왔다. 배방면사무소에서 공무원 생활을 이어갔다.

억호는 삼촌 웅재와 달리 연좌제는 피한 줄 알았다. 그러나 아산군청에 근무하던 1990, 우연히 책상에 놓여있던 인사기록카드 문서철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1974년 경찰이 작성한 신원조사회보서에 억호에 대한 사찰 기록이 있었다. “부 맹갑제는 6·25 당시 리인위 위원장으로 활약타 9·28 수복 당시 처단된 자임.”

리인위는 리 인민위를 뜻했다. 사실과 다른, 엉뚱한 내용이었다. “처단운운도 마찬가지였다. 울화병으로 죽은 사람을 학살했다고 한 것은 경찰의 실적 부풀리기였을까, “사상관계 : 용의점 발견치 못함, 성질 소행 : 온순 단정한 편임.” 자신도 모르게 감시당했다고 생각하니 머리칼이 쭈뼛 섰다. 다행히 억호는 2009년 아산시의회 국장까지 무사히 공직생활을 마쳤다.

억호가 2023513일 충남 아산시 배방읍 공수리 산110 성재산 교통호 발굴 현장 앞에 있는 컨테이너에서 유해들을 리무진 장례차로 옮기기 전 플라스틱 상자에 담긴 유해들 앞에서 절을 하고 있다. 사진 고경태 기자

삼촌 웅재는 참 감사한 사람이다. 곡물창고에 끌려가 죽은 가족의 수가 9명이 아니라 10명이라고 말해주는 사람이다. 만삭이던 엄마 배 안에서 죽은 나까지 특별히 셈해 기억해주는 사람이다. 웅재가 슬하에 둔 삼남매 자식들은 아빠의 이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 없을 것이다.

웅재는 1951년 곡물창고의 살풍경과 1964ROTC에서 제적당하던 순간을 되새길 때마다 목이 메다 못해 통곡을 한다. 원혼들이 너무 불쌍하고, 꿈을 못 이루고 썩은 듯한 자신이 애처롭고 또 애처로워서다. 얼마 전 어느 기자와 통화를 할 때도 눈물을 철철 흘렸다. 다른 가족들은 국가에 의해 생명을 학살당했고, 웅재는 살아남았으나 역시 국가에 의해 사회적으로 처형당했다. 2의 학살이었다. 84살인 지금은 폐암과 싸운다. 누가 그의 눈물을 닦아줄 것인가.

오빠(또는 형) 억호도 참 감사한 사람이다. 2020년부터 아산유족회장을 맡고 있는 억호는 성재산에 묻혔으리라 추정되는 가족의 유해를 찾고 있다. 2020년 봄 배방읍 공수리 965번지 변전소 주변(크라운 제과 건물 인근)의 한 지점을 판 적도 있다. 어느 포크레인 기사가 1980년대 중반 변전소 터파기 공사를 하다 서너 마대 분량의 유골을 발견해 다른 곳에 묻어주었다고 증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건축물 쓰레기들만 잔뜩 나왔다.

충남 아산시 배방읍 공수리의 유해 발굴 현장. 올해 10월부터 공수리 883, 643, 653번지 지점을 다시 발굴할 예정이다. 네이버 지도 캡처

억호는 다른 곳에 기대를 걸고 있다. 옛 신도리코 공장 부지인 배방읍 공수리 883번지다. 1995년 공장을 지을 때도 유골이 나왔다고 했다. 그곳으로부터 남쪽 340m 지점에 있는 공수리 110번지에서는 2023362구가 나왔다. 발굴 뒤 감식 결과 모두 남자였다. 이번에 만약 883번지에서 여자가 한 명이라도 나온다면 1·4후퇴 시점에 가족 단위로 끌려간 사람들일 가능성이 있다. 물론 나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태아의 뼈는 약해서 금방 부스러진다. 나를 임신했던 엄마가 나온다면 엉덩뼈에 나의 미세한 흔적이 남아있을지는 모르겠다.

, 맞다. 드디어 몇 주 뒤 883번지 그 지점을 판다.

73년 전 못다 피어난 9개월짜리 태아가 응원을 보낸다.

처형자들 끌고 가던 청년 머릿속우리 가족은 살아야지’ [본헌터]

조사관의 나날

3만여장의 경찰 신원조사기록을 보고 수십여명의 신청인과 목격자를 만나

이 사람들이 무슨 죄인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고 가해 관련 참고인은 말했다. 20233월 충남 아산시 배방읍 공수리 110 성재산 유해발굴 현장에서 나온 머리뼈. 사진 주용성 작가 제공

내 이름은 지윤이다.

역사를 좋아한다. 고교 때 인기짱이었던 남자 역사 선생님 때문일지도 모른다. 정말 좋아했다. 우리반 사고뭉치들과 함께 얽힌 추억도 많다. 그래서 대학 전공을 역사학으로 골랐다. 석사과정도 밟았다. 논문 주제는 해방직후 북한의 친일파 청산이다. 졸업 뒤 역사의 현장을 누빌 기회까지 얻게 된 것은 행운이다. 조사관으로서 말이다. 나는 독립된 국가기관의 조사관이었다.

20087월이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홈페이지에 뜬 모집공고를 보고 전문위원 나급에 지원했다. 728일 첫 출근을 했다. 서른 한 살, 첫 직장이기도 했다. 집단희생사건을 조사하는 제2국에 배정되었다. 첫 근무지는 미군 폭격 조사팀이었는데 오래 못 갔다. 팀이 원활하게 굴러가지 않는 눈치였다. 얼마 뒤 팀은 와해됐고, 나는 민간인 학살을 조사하는 5팀으로 옮겼다. 막내인 나에게 미션이 떨어졌다. 아산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충남 아산 부역혐의 희생 사건.

진실화해위는 한시 기구다. 예정된 종료일이 1년여 남은 상태였다. 부지런히 조사해 보고서를 써야 했다. 2005121기 진실화해위가 출범하자마자 사건 조사 신청을 하고 진실규명을 기다려온 이들이 있었다. 2008년 하반기까지 아산 사건은 1차 신청인 조사와 주요 참고인 조사만 돼 있었다. 여러 명의 조사관을 거쳤지만 보고서가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거의 마지막 인수인계자였다. 부역혐의 희생 사건은 조사관들에게 인기가 없는 편이었다. 품이 많이 들었다. 대전 골령골 학살이나 청도 보도연맹은 피학살자 명부가 나왔다. 상대적으로 조사가 수월했다. 언론의 조명도 받았다. 아산은 고생길만 훤해 보였다.

아산 사건의 신청인은 꼴랑 11. 출장 계획을 세우는 데 자료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진실화해위 내에서 전국의 경찰기록물을 조사해 만든 목록이었다. 목록 안에 아산 것도 있었다. 아산경찰서 신원조사기록. 아산경찰서에 전화를 했다. 안된다는 이야기만 돌아왔다. 대출, 반출 다 안된다고만 했다. 기록물관리법상 파쇄해야 하는데 방치해놓은 자료였다. 아산경찰서로 직접 내려갔다. 형사들은 허를 찔린 표정이었다. 문서고를 관리하는 정보보안과 담당 형사들이 그럼 눈으로만 보라고 했다. 복사? 사진촬영? 노노.

저 곳으로 올라가 죽였다. 저 곳으로 올라가 죽었다. 충남 아산시 배방읍 공수리 110 성재산의 처형 현장. 남북으로 이어진 2.2km에 이르는 교통호에 사람들을 묻은 것으로 추정된다. 고경태 기자

신원조사기록이란 겁나게 민감한 자료다. 관내에서 반정부 활동을 할 소지가 있다고 본 사람들의 동태를 경찰이 일일이 관찰해 보고해 놓은 것이다. 20명이 하나의 파일로 묶여 분류돼 있었다. 그중에서 총 22323명의 기록을 검토했다. 분량은 무려 3만여장. 1977년부터 1982년까지의 기록이다.

내가 눈에 불을 켜고 본 것은 부역혐의 처형이라는 문구였다. ‘누구누구는 아버지가 6.25때 부역혐의로 처형됐다.’ 그 부분들만 잡아내 일일이 손으로 적었다. 부역혐의 희생자 사건 신청인 명단과 대조했다. 신청인이 아니어도 처형된 기록이 있으면 희생자로 잡아놓았다. 하루이틀로 택도 없었다. 3만장을 보는데 한 달이 걸렸다.

매일 아산경찰서 2층 정보보안과로 출근했다. 사무실에 여자는 나 하나였다. 형사들은 불편해했지만, 곧 친해졌다. 한 달간 들여다본 결과 부역혐의 처형으로 적힌 희생자들만 120명이었다. 이제 그들을 포함해 증인들을 만나러 가야 했다. 사건 신청인, 목격자, 가해자들을 찾아.

나는 혼자 다녔다. 아산경찰서에 갈 때도, 증언을 듣기 위해 아산의 마을을 뒤질 때도 혼자였다. 덩치 큰 사건 지역의 조사관들은 21조로 움직였다. 부러웠지만, 상관없었다. 맨땅에 헤딩이어도 좋았다. 출장을 갈 때면 늘 두려우면서도 설렜다. 23, 또는 34일 몰아서 일정을 잡았다. 소나타 관용차엔 내비게이션이 없어 전국 지도를 늘 갖고 다녔다. 노트북, 카메라, 녹음기를 챙기고, 휴대용 프린터도 가져갔다. 진술을 받아 친 뒤 핵심 내용을 요약해 프린트해서 증언자에게 보여주고 지장을 찍게 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아산의 농촌 마을을 헤집고 다니며 초인종을 누르고 사람을 찾아다녔다.

피해자들만 50명 넘게 만났다. 참고인까지 포함하면 70~80명은 될 거다. 입을 잘 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기억이 나지 않거나, 이야기하기 싫거나. 그래서 마사지를 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불만과 넋두리를 오랜 시간 들어주고, 에둘러 주변 이야기들로 바람을 잡느라 진땀을 흘렸다. 어느 순간 아하 맞아라는 말과 함께 증언의 봇물이 터지기도 했다. 가해집단 쪽에 가담한 참고인들은 늘 소극적으로 증언에 임했다. 기록을 남긴다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구나 절감했다. 이 일이 어마어마하게 숭고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시간이었다.

성재산.

설화산.

새지기.

탕정.

신창.

선장.

사건이 일어났던 아산의 지역 이름이다. 성재산과 설화산 피해자들을 가장 많이 만났다. 가해 관련 참고인도 이 지역이 많았다. 증언 하나가 떠오른다. 그는 처형자들을 지엠시(GMC) 트럭으로 이동시킨 청년단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말했다. “이 사람들이 무슨 죄인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나와 내 가족은 절대 이렇게 손가락질 당하면서 죽으면 안돼. 나는 살아야지. 내 가족은 살아야지라는 오직 그 생각 뿐이었다고.

또 다른 증언도 잊히지 않는다. 갓난아기를 업고 일행과 함께 끌려가던 젊은 엄마가 어둠을 틈타 옆 콩밭에 잽싸게 숨었다. 갓난아이가 울면 끝장이었다. 그러나 아기조차 울지 않더라고 했다. 정적, 갓난아이조차 입을 닫게 만든 그 정적은 얼마나 두렵고 공포스러웠을까. 21세기를 사는 현대인들은 상상할 수 없는 공포다. 이 콩밭 이야기는 새지기 사건이다. 그러나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마을 사람 중 아무도 나를 만나주지 않았다. 비협조를 넘어 적대적이었다. 날이 서 있었다. 다른 지역의 참고인들이 새지기에 관해 진술해줘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날을 기억한다. 유족 김 선생님과 그 분의 아버지가 처형당한 산을 올랐다. 해질 무렵이었다. 김 선생님도 어릴 때 일이고, 어른들한테만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탕정 용두리의 뒷산이었다. 정확한 지점을 찾기 어려웠다. 산길을 오르는데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중이었다. ‘아마도 여기가 아닐까?’ 어떤 지점에서 김 선생님이 우두커니 서더니 큰 절을 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나도 울었다. 석양이 불타고 있었다. 붉은 산비탈에서 김 선생님이 말했다. 고맙다고.

그렇게 고생해 보고서를 만들었다. 2009511, 진실화해위 전체위원회에서는 이 보고서를 토대로 아산 부역혐의 희생 사건의 진실규명이 이뤄졌다. 첫 단추일 뿐이지만, 보람에 겨워했다. 당신도 그 보고서를 볼 수 있다. 진실화해위 홈페이지에 있는 1기 위원회 사건별 조사보고서에서 아산을 검색해보시라.

그러나, 보고서엔 한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