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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외부 칼럼

공감할 수 없는 대선 주자

by 이성근 2021. 10. 31.

떠오른 분식, 사라진 밀밭 경향 : 2021.10.01.

드라마 ‘ D.P. ’ 단상 법률저널 2021.10.01

성장의 카르텔 한겨레 2021-10-03

노조 악마화와 친자본 언론’ mediatoday. 2021.10.05.

2의 김만배 기자가 나오지 않도록 하려면 미디어오늘 사설

대장동에 약탈당한 미래 경향 : 2021.10.07.

상위 12%’의 눈에 비친 대장동 사태한겨레 : 2021.10.07.

선진국이라는 착각 한겨레 : 2021.10.07.

너무도 정치적인 선택적 분노경향 : 2021.10.08.

체게바라를 좋아했던 청년 매일노동뉴스 2021.10.08

처음으로 40% 넘은 1인 가구, 복지 등 맞춤형 정책 필요하다 향 사설 2021.10,8

코로나 시대, 식탁을 바꾸는 4가지 변수 경향 : 2021.10.

대장동 대박과 원주민의 울분 한국 2021.10.08.

자본이 설계한 게임의 경주마, 인간이고 싶은오징어 게임한겨레 2021.10.08.

오징어게임과 금융자본주의 경향 : 2021.10.09.

기후위기, 세상을 멈추는 노동자 참세상 2021.10.13

누가 교회를 공화국 위에 두고 있나 경향 : 2021.10.15.

국민의힘 대선 경선 관전기 경향 : 2021.10.18

메르켈이라면 어땠을까? 한겨레 : 2021.10.19.

문재인과 민주노총 어떤 사이일까 미디어오늘 2021.10.19

구조적 담합과 부패 경향 : 2021.10.20

흙수저 우대는 가난의 존중과 배려인가 경향 : 2021.10.20.

지금까지 우리는 '성장'에 중독된 '코리안 드림'의 수인이었다 프레시안 2021.10.20.

지식인과 지식 기술자 부산일보 2021.10.21.

집단의 폭주 한겨레 :2021-10-21

한 걸음씩 전진하는 민주주의 매일노동뉴스 2021.10.22

()으로 쓰인 리포트 미디어오늘 2021.10.24.

감시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사라질 수 있을까? 시사인 2021.10.24.

법치가 괴물이 되어갈 때 한겨레 2021.10.24.

한식에 죽으나 청명에 죽으나' 어차피 죽은 검찰 cbs 2021-10-25

공감할 수 없는 대선 주자 경향 : 2021.10.27.

진영을 넘나든 정치가들의 활극, 메이지유신 경향 : 2021.10.28

이재명·윤석열은 적대적으로 공생한다 프레시안 2021.10.29

손님이 사라졌다 농민신문 2021.10.29.

검사 선서의 배신과 권력욕망 경향 : 2021.10.30

녹취록의 사실과 진실, 그리고 언론  미디어오늘 2021.10.30

 

 

떠오른 분식, 사라진 밀밭

통계만 한 문헌도 없다. 한강 이북과 강원도 지역에서 벼 수확이 시작된 즈음에 숫자를 더듬는다. 2021년 통계청이 발표한 ‘2020년 양곡소비량 조사 결과에 따르면 2020년 가구 부문의 1인당 쌀 소비량은 57.7으로 2019년 소비량 59.2보다 2.5% 감소했다. 이는 역대 최저치이며 1990년 소비량 119.6에 견주어 절반 수준이다. 이를 다시 1인당 하루 쌀 소비량(평균)으로 따져보면 158.0g, 그러니까 하루에 밥 한 공기 분량의 쌀을 먹는 정도라는 뜻이다. 이렇게 먹고 어떻게 사나? 어떻게라니, 여러분의 짐작대로다. 밀가루가 있다. 2019년 통계에 따르면 한국인 1인당 밀가루 소비량은 34.2이다. 1965년도의 11.5에 견주어 세 배쯤 뛴 셈이다. 최근의 밀가루 연간 소비량은 약 200t으로 추산한다(한국제분협회).

 

오늘날 한국인에게 밀가루는 쌀 못잖은 존재이다. ‘밀가루 음식의 어마어마한 위세를 숫자로 다시 보자. 세계즉석라면협회(WINA)에 따르면 2019년 현재 인스턴트 라면의 소비는 한 해에 중국 414억개, 인도네시아 125억개, 인도 67억개, 일본 56억개, 베트남 54억개, 미국 46억개, 한국 39억개 등의 순이다. 그런데 1인당 소비량은 한국이 75개로 세계 1위이다. 2016년 한국인은 라면을 빼고도 한 사람이 5일에 한 번은 다른 면류를 먹었다는 조사도 있었다. 20161인당 연간 면류 소비량(국내 판매량수입량)7.7이고, 이를 그릇 단위로 환산(1인분 110)하면 69.9그릇이다.

 

빵류는 어떨까. 조금 지난 보고이지만 2016년 기준 국민 1인당 연간 빵류 소비량은 90개로, 201278개보다 12개 늘어났다. 나흘에 한 번은 빵류를 먹었다는 이야기다. 2016년 우리나라 빵류 생산 규모는 21308억원 규모였다(농림축산식품부,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이때 가장 많이 소비되는 빵류는 찐빵·단팥빵 등이 포함된 기타 빵류였으며 케이크, 식빵, 도넛, 카스텔라, 파이가 그 뒤를 이었다. 이 흐름이 2021년에도 이어지고 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닐 테다. 이상의 숫자는 한국인이 더 이상 밥심으로만 살지 않음을 단박에 드러낸다. 한국인의 식생활에서 밀가루 음식, 곧 분식은 당당한 2의 주식이다. 여기까지, 공개된 숫자를 확인하기란 어려운 노릇이 아니다. 하면 그다음은?

 

역사적으로 한반도에서 단 한 번도 오곡에 든 적 없던 밀 농업은 어떻게 재구성되어야 할까. 오늘날 북미건, 호주건, 그 어느 지역의 밀 수출국이건 밀을 가지고 한국을 겁박할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안심하고, ‘자급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라고 하면 그만일까. 여기 이어져야 할 말은 식량 안보인가, ‘식량 주권인가. 이는 작고 좁은 한반도의 밀밭 한쪽에 고여 있어서는 안 될 엄중한 시무이다. 여기 걸린 말과 생각이 농촌과 농민과 농업의 지속 가능성’, 그 상상력과 기획력에 잇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더욱, 이 정치의 계절이 불만의 계절이다. 관련한 어떤 의논도 보이지 않는다. 다시 야박한 숫자를 본다. 1980년 이후 떨어지기만 한 밀 자급률은 2019년에는 0.7%에 지나지 않았다. 식량은 오늘 밤에 주문해 내일 아침에 배달받을 수 있는 사물이 아니다. 숫자는 또렷한데 머릿속은 하얘진다.

고영 음식문화연구자 경향 : 2021.10.01.

 

드라마 ‘ D.P. ’ 단상

넷플릭스에서 사람들의 관심이 오징어게임으로 넘어가고 있지만, D.P.의 인기도 만만찮다. D.P.Deserter Pursuit의 약자라고 하는데 군대에서 탈영병체포조를 말한다. 이 드라마는 탈영한 군인들의 이야기면서 그들이 탈영을 하게 된 군대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다. 이 드라마는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아직도 몸과 마음에 자리잡고 있는 상처를 후벼파고 있다고 한다. 환갑이 넘어서도, 이민을 가서도 군대 꿈을 꾼다 하니 군복무 중 겪은 고통은 단지 시간이 흐른다고 당연히 낫거나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 드라마의 배경은 2014년 무렵으로 짐작된다. 이 해에는 흔히 윤일병 사건임병장 사건이라 불리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구타와 가혹행위, 왕따와 인격모독적 행위가 만연하던 시기다. 2005년 연천 내무반 총기난사사건 이후 인권증진을 위한 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군의 모습은 많이 바뀌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시청자의 연령대와 상관없이 자신의 군복무 시절을 보는 듯하다 하니 ‘1953제작된 수통처럼 우리 군대는 아직도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필자도 D.P.를 보면서 관물대에 발을 올리고 원산폭격을 한 거며, 아스팔트 위에서 깍지 끼고 엎드려뻗쳐 하고 나중에 손가락에 박힌 모래알을 문구용 칼로 파내던 기억이 난다. 목을 주먹으로 패던 K대 수학과 출신의 조교나 전도사 하다 입대했다던 황똘이라 불리던 이들도 불가피하게 떠올리게 되었다. 그들은 선생이나 목사가 되었을 것이다. 지금은 그저 담담히 되새기는 옛날이야기가 되었지만 이들의 행태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그들도 어쩌면 폭력의 순환구조에서 피해자일 테니까. 그런데 그 시절 함께 근무하던 이들 가운데 누구는 지금이라도 만나면 패 죽이고 싶다는 말을 하는 이들이 있는 것은 새삼 놀랄 만한 일이었다.

 

국방부장관은 이 드라마에 대해 극화된 부분이 분명히 있다고 했다. 그는 애써 지금의 군대는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 지금의 군대는 불과 7년 전의 모습이라는 드라마 D.P. 속의 군대의 모습과는 상당히 달라졌다. 생활관의 모습도 바뀌었다. 부대마다 편차가 있지만, 부대 안에 독서실이 있고 책 읽는 병사가 강군을 만든다는 표어도 붙어 있는 곳도 있다. 구타와 가혹행위도 많이 사라졌다. 이 점은 통계가 말해준다. 그러나 군대가 가지고 있던 폭력성이 근본적으로 변하였다고 할 수 있을까? 언어폭력은 증가하고 공개적으로 하는 모욕적 언사는 증가하고 있다. 맞는 것만큼 또는 그보다 힘든 게 인격을 모독하는 말이라고 하면 말로 입는 상처를 가볍게 볼 수 없을 것이다. 조직적으로 이뤄지는 왕따도 문제이다. 최근 발생한 여중사의 자해사망사건도 성폭력과 함께 집단적인 따돌림과 괴롭힘이 가까운 원인이다. 게다가 문제를 드러내고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가 의심되는 군수사기관의 카르텔은 군에 내재하는 폭력성을 더욱 위험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군인들은 왜 그렇게 군의 이상한 폭력의 순환구조에 쉽게 따르게 되었던 것일까? 처음부터 왜 맞는 걸 당연히 참아야 한다고 알고 있었을까, 부당한 명령이라도 군대에서는 따라야 한다고 왜 믿고 살았을까, 안 참으면 또는 신고하면 정말 손해보는 것이라고 왜 당연하게 생각했을까? 범죄행위인데.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현실이었기에 그러한 행태가 지혜로운(?)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몰라도 어쩌면 그것은 우리들이 그러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데에 너무나 익숙해진 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대학 신입생 엠티에서 복학생들이 후배들을 굴리고, 회사 신입사원 연수에서는 군대보다 더 강한 PT체조를 한다. 군말이 없다. 사회의 군기(?)가 군대보다 더 강한 것일지 모른다.

 

변화는 마땅히 없어져야 할 것을 거부하는 데에서 시작된다. 범죄행위라 할 행위들을 그대로 두지 말고 고소·고발하고, 특히 제대한 다음에도 처벌받게 해야 한다. 폐쇄적인 군 내부에서의 문제도 사회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리고, 군인과 함께 사회에서도 함께 군의 문제를 감시하고 있음을 알도록 해야 한다. 꼭 닫힌 군대의 문을 안에서도 밖에서도 자꾸 열려고 해야 한다.

송기춘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 전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법률저널 2021.10.01

 

성장의 카르텔

하나의 커다란 서사가 전국을 휩쓰는 일이 이 나라에서 드물진 않지만, 최근 특히 잦은 폭풍이 있다. 부동산, 개발, 집값, 폭리. 이 단어들 없이 동시대 한국의 시대정신 혹은 시대-정신없음을 설명할 수 있을까. 터지는 이슈마다 디테일은 달라도 양상은 비슷하다. 부동산 개발 사업, 정보·연줄을 이용해 폭리를 취한 자들, 분노하는 여론, 몇몇 피라미만 처벌하고 흐지부지되는 수사. 교훈 하나는 확실히 남겼다. 세상에서 가장 깨기 어려운 게 이권 카르텔이란 것.

 

카르텔은 담합하는 동종 업계를 뜻하지만 이해관계로 얽힌 배타적 성향의 파벌이란 의미로 느슨하게 쓰겠다. 실제로 법의 경계를 넘나들며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밥그릇을 챙기는 집단이 횡행하니 무리한 개념 확장은 아니다. 이렇게 보면 온 세상이 카르텔 천지 같다. 범죄자·재벌·정치인 카르텔에서부터 토건 카르텔, 엘리트들의 스펙 품앗이 카르텔, 공무원 카르텔까지. 이들이 공동체의 미래를 위협하고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건 물론이다. 이 중에서도 가장 깨기 힘들고 큰 것이 바로 성장과 개발의 카르텔이다. 너무도 흔하고 너무도 많은 이들이 속해 있어 딱히 카르텔이라 의식하지도, 그렇게 부르지도 않는 카르텔. 이들의 정체는 뭘까? 오로지 (양적) 경제 성장만이 답이고 대안은 고려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며, 전체 파이가 커지면 온다는 낙수효과의 복음을 믿고, 경제 성장을 저해하는 모든 것을 제거할 장애물로 여기며, 인류를 위협하는 기후위기의 원인이 성장에 기반한 고도 산업 사회라는 사실이 입증돼도 끝내 성장 강박을 못 버려 녹색 성장이라도 해야 성이 차는 무리다. 탈성장 담론 따윈 거들떠보지도 않다가도, 누군가 진지하게 얘길 꺼내면 반드시 한수 가르치려 달려드는 이들은, 개발의 건수가 생기면 좌우 할 것 없이 똘똘 뭉쳐 순식간에 한 팀을 이룬다. ‘개발판가까이 붙으면 떡고물이 떨어질 것을 확신하기에. 한국토지주택공사(LH) 투기 사태, 화천대유 사건 등을 욕하긴 쉽지만, 비슷한 기회가 주어질 때 혹하지 않을 한국인은 생각보다 적다. 말로만 전지구적 환경 파괴에 분노하고 자본주의의 폐해를 비판하지, 사생활에선 개발이 되고 땅·집값 오르길 갈망하는 성장주의자. 이것이 우리 대부분의 모순적 초상이다.

 

이 카르텔을 깰 방법은 뭘까? 우두머리를 제거해봤자 또 다른 머리가 생겨나고, 워낙 견워낙 견고하게 짜인 방어논리 때문에 쉽지 않다. 내부 균열과 이탈자들에게 기댈 수밖에 없는데, 그러려면 철석같이 신봉해온 카르텔의 장밋빛 약속이 허구임을 깨닫게 해줘야 한다. 지난 수십년간 낙수효과는 미미했다. 불평등과 빈곤은 심화됐다. 생태계는 돌이키기 힘들 만큼 파괴됐다. 매년 3%씩만 성장해도, 글로벌 경제는 24년마다 두배씩 커져 세기말엔 10배가 된다. 그걸 감당할 지구는 없다. 굳이 만들려면 차라리 탈성장의 카르텔을 결성하는 편이 미래세대에 이익이다. 11월의 유엔 기후정상회의를 앞두고 전세계적으로 그린뉴딜에 상응하는 거대한 전환이 불가피하다는 공감대는 형성되었다. 하지만 기후변화를 정말로 막기 위해서는 총 에너지 사용량 감소와 경제성장 없는 그린뉴딜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자세한 내용은 최근 번역된 저서 <디그로쓰>를 추천함)까지 받아들인 사람들은, 주로 회의장 바깥에 있는 당신과 나 같은 시민들이다. 그래서 더 크게 외쳐야 한다. 지금 당장 필요한 건 녹색 성장이 아닌 탈성장! 성장을 넘어 성숙으로! 사실 탈성장은 어려운 개념도 아니다. 현재의 경제적 역량을 좀 더 필수적인 식량·주거·교통·교육·의료에 집중하는 건 성장 없이도 가능하다. 그러나 지금 같은 척박한 토양에서는 엄청나게 담대한 상상처럼 들린다. 이것이 상상력을 치명적으로 고갈시키는 부동산과 개발 얘기의 힘이다./김한민ㅣ작가·시셰퍼드 활동가 / 한겨레 2021-10-03

 

노조 악마화와 친자본 언론

노조 악마화. 한국 언론이 오래 휘둘러온 칼이다. SPC그룹과 민주노총 화물연대 사이에 노사 갈등이 이어지면서 그 칼날이 다시 춤추고 있다.

 

더러 오해하지만 나는 언론이 늘 민주노총 편들기에 나서야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편 가르기를 질타하면서 정작 자신이 편 가르기로 일관해온 언론의 위선을 더 쓸 뜻도 없다. 다만 언론의 생명인 공정의 잣대로 SPC그룹과 화물연대의 쟁의를 짚고 싶을 따름이다.

 

공정은 공평하고 올바름이다. 공평은 어느 한쪽에 치우침 없는 1차적 공정이다. 노사의 주장을 공평하게 소개하고 무엇이 올바른가를 담은 보도가 언론의 정석이다. 작금의 보도는 최소한의 공평조차 없다. 틈날 때마다 민주노총을 막무가내로 훌닦는 조선일보의 막무가내는 접어두자. 정의당 국회의원까지 동원한 민주노총 저격에 자신감이 붙었을까. 중앙일보도 사설 제목으로 민주노총 패악질을 거침없이 내걸었다.

 

이른바 빵 파업이라는 자극적 접근을 서슴지 않는 언론의 문제점은 세 가지다. 첫째, 파업 원인의 편파 보도다. 중앙일보를 비롯해 숱한 언론이 파업의 원인을 “SPC와 무관한 노조 간 이권 다툼으로 단언한다. 철저히 SPC자본의 시각이다. 지난 10SPC 그룹의 매출이 가파르게 성장했지만 노동인들은 10년 째 동일운임을 받으며 밤샘 노동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노동조합의 호소는 신문과 방송에서 접하기 힘들다. 자본이 노노갈등으로 몰아간다는 노조의 주장도 마찬가지다. 좋은 언론은 노사의 주장을 공평하게 보도한 뒤 누가 사실에 가까운지 현장 기자가 진실을 취재할 때 이뤄진다. 유감이지만 그런 보도가 보이지 않는다.

 

927일 민주노총 화물연대 조합원들이 청주시 흥덕구 송정동 SPC삼립 청주공장 앞 도로에서 경찰에게 과잉진압을 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둘째, 파업 피해의 편파 보도다. 언론은 파리바게뜨 점주들 피해를 선동적으로 부각한다. 문제는 노사의 교섭 실패로 인한 피해의 책임을 왜 노조에게만 묻느냐에 있다. 합의가 되지 않은 책임을 최소한 노사 양쪽에서 찾아야 옳지 않은가. 그럼에도 가맹 점주들 피해를 모두 노조 탓으로 돌린다. 언론이 자본의 대변자인가? SPC 자본이 을과 을의 싸움을 부추기고, 싸움의 피해를 가맹점주에게 전가하고 교섭을 거부하며 시간을 끌고 있다는 노조의 호소에는 왜 모르쇠를 놓는가. 이미 SPC자본은 대화를 거부하고 해고의 칼날을 휘두르고 있다.

 

셋째, 부당노동행위 외면이다. SPC 파리바게뜨 시민대책위에 따르면 올해 파리바게뜨에선 민주노총 조합원 0%’를 목표로 탈퇴 및 와해 공작이 전사적으로 전개됐다. 지역본부장들이 앞장서서 민주노총을 탈퇴할 때도 한국노총에 가입할 때도 각각 현금을 지급했다. 민주노총 조합원을 빨간색으로 표시한 명단으로 실적을 관리했고, 대표이사가 한국노총 가입 현황을 확인했다는 충격적 주장을 왜 언론은 보도하지 않는가. 왜 진실을 취재 하지 않는가.

 

언론이 노조를 패악질로 몰아가는 상황을 SPC자본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파업하는 노동인들과 굳이 대화에 나설 필요가 있을까. 가맹 점주들이 받고 있는 고통의 책임을 자본은 물론 그들의 대변자 언론도 마땅히 져야 옳은 까닭이다. 던킨도너츠의 위생관리를 둘러싼 보도 또한 편파적이다. 안양 공장의 위생 상황을 고발한 동영상에 조작 의혹을 제기한 자본의 논리를 기정사실화하며 노조를 악마로 몰고 있다. 하지만 식약처 조사 결과는 안양 공장만이 아니다. 던킨도너츠의 공장 4곳 모두 위생관리가 미흡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오랜 세월에 걸쳐 언론이 노조 악마화에 나선 결과다.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는 더 나아가지 못하고 부익부빈익빈의 정치경제 체제는 굳어가고 있다(더 자세한 논의는 <미디어리터러시의 혁명> 참고). 언론개혁의 논리가 정파의 틀에 갇혀서는 안 될 이유다.

 

기실 친자본 언론이란 현상은 형용모순이다. 자본이 권력인 사회에서 언론이 친자본이라면, 그 언론을 언론이라 할 수 있을까. 노조 악마화에 곰비임비 동참하는 언론인들에게 묻고 싶다./손석춘 건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mediatoday. 2021.10.05.

 

2의 김만배 기자가 나오지 않도록 하려면

대장동 개발 의혹의 설계자를 중심으로 특혜와 대가가 있었는지 밝히는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이다. 유력 대선주자인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연관성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인 만큼 정치권 공방도 한창이다. 현재까지 드러난 의혹과 검찰 수사에 집중하는 언론 보도는 타당하다.

 

다만 머니투데이 기자였던 화천대유 대주주 김만배씨가 고위 법조인들을 좋은 형님으로 부르는 등 인맥을 어떻게 쌓았고, 어떤 연유로 부동산 개발에 뛰어들었는지 이를 자세히 추적한 보도는 잘 보이지 않는다. 김씨는 부동산 개발의 주체이면서 지분에 따라 수백억원의 배당금을 거둬간 수혜자다. 그의 과거 행적이나 인맥 네트워크를 구체적으로 따져 묻는 언론 보도를 찾을 수 없는 이유가 이번 사건의 핵심 당사자인 언론인을 애써 외면하고 싶어서인지 의심스럽다.

 

김씨를 지칭하는 언론 보도에도 문제가 있다. 머니투데이는 자사 소속이었던 김만배씨 이름을 김씨라고만 보도하다가 발화자가 이름을 언급한 경우 큰따옴표 안에 김만배씨라고 표기했다. 부동산 개발 당시 자사 매체 소속이었다는 설명은 없고, 전직 기자 표기도 하지 않는다. ‘화천대유 대주주 김만배씨라고만 표기하는 건 타 언론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김만배씨는 머니투데이 소속 기자로서 법조 출입을 할 당시 부동산 개발 컨소시엄의 자산관리회사 대주주였다. 현직 기자가 부동산 개발에 뛰어든 데다가 기자로서 넓혀온 법조 인맥을 개인 사업에 활용했다는 의심까지 받는다. 부동산 개발 당시 김씨가 현직 기자였다는 사실을 보도하거나 그를 기자 출신이라고 표기하는 것은 이번 사건의 여러 본질 중 하나를 드러내는 일이다. 김씨를 화천대유 대주주로만 표기하는 건 은폐 행위일 수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출입기자단에 문제를 제기한 목소리도 주목된다. 이진동 뉴스버스 발행인은 기자단과 출입처가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 진입장벽을 높이고, 폐쇄적으로 운영해온 시스템의 응축된 결과가 이번 일이라고 생각한다장기간 법조기자단 간사나 법조팀장을 하지 않았다면, 대법관실을 이렇게 드나들 수는 없다. 거물급 법조인들로 화천대유 방어막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도 같은 이유라고 주장했다. 김만배씨가 법조기자단 일원이 아니었다면 과연 법조인들이 그의 든든한 뒷배가 됐을까라는 의문은 지극히 합리적이다.

 

임의단체인 기자단이 가입조건을 내세워 정부 부처 출입을 막고 있는 문제는 현재 미디어오늘이 제기한 행정소송에서도 논박 중이다. 기자단 카르텔 문제를 공론화하고 법정에서 출입기자단 지위와 권한을 따져 보자는 취지다.

 

그러나 서울고등법원이 지난달 28일 서울행정법원에 제출한 준비서면에 따르면 기자실 사용허가와 출입증 발급 권한을 출입기자단에 사실상 위임한 바 없다고 주장하면서도 18개 부처 기자단이 가입 여부를 투표로 정하고 비기자단의 기자실 출입을 제한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말로는 기자실 출입 권한을 기자단에 위임한 적 없다고 하지만 현실은 기자단 가입 투표를 거쳐야 법조에 출입할 수 있다는 모순된 입장을 밝힌 것이다.

 

행정소송 법리 싸움의 전제는 왜 임의단체가 기자단 가입을 결정하고 그들이 정부 부처 내 공용 장소를 독점하는지, 나아가 출입기자단 존재 이유를 묻는 것이다. 언론계는 제2의 김만배 사례가 나오지 않도록 이번에 출입기자단 문제를 짚고 가야 한다.

 

머니투데이의 침묵도 문제가 크다. 자사 기자의 부적절한 행위를 용인한 것과 저널리즘 가치 위배에 책임 있는 입장을 표명했어야 했다. 해외 유수의 언론은 조그마한 이해충돌 문제도 윤리강령에 어긋난다고 판단하면 독자에 알리면서 매체 브랜드 신뢰를 회복하는 계기를 만들고 있다. 전 국민적 분노를 일으킨 자사 소속 기자의 윤리 문제에 최소한의 입장 표명이 없는 건 무책임하다 못해 비겁하다./ 미디어오늘 사설

 

대장동에 약탈당한 미래

대장동 폭풍이 닥쳤다. 예측 불허의 풍향 속에서 여야는 거친 공방을 벌이고 있다. 사회적 자원의 약탈과 정쟁을 지켜보는 국민들의 상심이 깊다. 미래 의제가 실종되면서 공동체의 앞날이 어두워지고 있다. 대장동 사태의 본질을 미래 관점에서 되돌려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현재 국회미래연구원은 학술 데이터베이스를 분석하는 알고리듬을 개발하여 미래에 떠오를(이머징) 키워드를 발굴하는 연구를 진행하는 중이다. 연구팀은 최근 20년간 전례 없는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문헌 5만건에서 200개 키워드를 도출했다. 그러고는 미래적 의미를 따져서 20개 키워드를 압축한 후 각계의 전문가들에게 검토 의견을 구하고 있다.

미래학자 짐 데이터는 성장, 붕괴, 유지, 전환 등 네 가지 미래 경로를 논한 바 있다. 나는 이 네 가지 시나리오를 붕괴-유지와 성장-전환의 두 개 계열로 재구성할 수 있다고 본다. 붕괴와 성장 경로는 극단의 길이고, 유지와 전환 경로는 여기에서 완화·변형된 길이다. 붕괴-유지는 위기의 길이고, 성장-전환은 위기에 대한 적응과 혁신의 길이다.

 

내 판단으로는, 국회미래연구원이 추출한 미래 키워드 20개 중에서 미래 경로를 보여주는 핵심 키워드는 인류세(人類世), 침체, 지속가능발전, 회복력 등이다. 인류세·침체는 붕괴-유지의 위기 추세를 보여준다. 지속가능발전·회복력은 성장-전환의 실천 방향을 보여준다.

학술문헌에서 추출한 미래 키워드에 지금 여기의 관심사를 반영해보면, 핵심적 미래 이슈는 기후파괴 위기, 글로벌 지정학 위기, 사회-인구학 위기, 도시팽창(지역소멸) 위기로 추출해볼 수 있다. 이 중 경제사회 정책과 깊이 연관된 이슈는 사회-인구학, 도시팽창 문제이다. 사회-인구학, 도시팽창 문제는 2008년 세계경제 위기 이후 한국경제 내부에서 전개된 새로운 구조변동 양상이다.

 

미래 위기라는 관점에서 사회-인구학 이슈는 세대적 분열의 추세와 연관이 있다. 지금은 미래세대의 성장이 막혀 있고 기성세대가 미래를 약탈하는 것이 화두가 된 시대이다. 도시팽창은 지역 간 분열의 추세와 연관되어 있다. 그간 한국경제의 성장 축은 제조업이 맡아왔는데, 신산업은 수도권에 더욱 집중되고 있는 상황이다. 농업과 중화학공업 전환의 비전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지역 소멸의 압력이 가중되고 있다.

 

대장동 사태는 세대 분열, 지역 분열의 위기 추세의 일부이자 위기를 가속화하는 동력이다. 대장동 사업은 성남시 공기업이 민간과 함께 프로젝트회사를 설립해 5903호의 주택을 건설한 개발사업이다. 성남시는 5500억원의 선순위 확정이익을 가져가고, 그 이상의 이익은 민간사업자가 가져가는 사업구조를 만들었다. 민간사업자는 4040억원의 배당금에 직접 택지를 분양받아 얻은 개발 수익을 합해 8000억원 이상을 취한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토지를 수용당한 원래 지주들은 개발 이익에서 배제되었다고 억울해할 것이다. 주택을 분양받은 이들은 원가보다 훨씬 높은 분양가를 부담했다. 물론 이들은 분양가 이상의 시장가격이 형성되면 프리미엄을 기대할 수 있다. 현시점에서 보면, 대장동 개발 이익은 원 지주와 입주민들로부터 온 것이다.

그러나 미래 시점에서 보면, 현재 이익은 미래를 약탈해서 가져온 것이다. 이런 식의 개발은 지구 행성에 깊은 상처를 낸다. 그 이익은 무주택자, 미래 세대, 비수도권 주민을 경제적·정신적 붕괴-침체의 길로 몰아간다.

 

당초 성남시의 사업능력으로는 대형 개발사업을 주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대장동 개발을 LH가 주도하게 했다면, 개발 이익은 교차보전을 통해 주거복지 사업으로 이전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LH 같은 거대 공기업도 내부자 일탈의 시스템 문제가 있다. 근본적으로는 청년과 비수도권 지역을 위한 공유지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미래를 지키는 회복·발전의 길이다./ 이일영 한신대 경제학 교수 경향 : 2021.10.07

 

상위 12%’의 눈에 비친 대장동 사태

추석 연휴 때 일이다. 한달에 두어번 불가피한 용무에 쓰는 16년 된 소형차를 타고 집을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호대기에 걸렸는데, 매캐하게 타는 냄새가 차 안으로 스며들었다. 조수석 뒷바퀴 쪽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차를 길가로 빼려고 사방을 둘러봤다. 검게 선팅된 독일산 고급차들이 에워싼 한가운데 우리 차가 투명한 탁상용 어항처럼 오도카니 놓여 있었다. 초보운전인 둘째 딸은 운전대 앞에서 놀란 금붕어마냥 얼어붙었다. 아비는 어떻게든 용기를 주고 싶었다. “쫄지 마! 우리 차는 상위 12%!”

 

나는, 정확히 말해 우리 가구는 정부가 공인한 대한민국 상위 12%. 25년 된 20평대 초반 아파트에 사는데, 윤희숙 전 의원과 다른 순수 임차인이다. 전세 대출금은 5년 만에 끝이 보인다. 암호화폐는커녕 주식 하나 없다. 소득 수준으로 말할 것 같으면, 어쩌다 귀띔을 받은 이들이 설마!”(의심)는 아니어도 에이!”(반신반의) 하고 반응하는 정도다. 일산 새도시 언저리에 사는 덕에 경기도에서 챙겨주는 재난기본소득을 받았지만, 내 살림 형편을 꿰는 이들은 정부가 내게 부여한 정체성에 분개하거나, 더러 의아해한다.

 

정부 산식이 맞다면, 나와 큰딸의 건강보험료 합계가 2인 가구 중에 상위 12% 안에 들었다는 얘기다. 큰딸은 헤어 디자이너로 불리는 특수고용노동자로, 지역보험에 들어 있다. 작은딸은 주소가 학교 기숙사여서 가구원 수에서 빠진다. 정부 보기에 우리 집은 2인 맞벌이 가구다. 상대적으로 경제력이 과평가될 여지가 없지 않다. 그걸 알면서도 큰딸의 소득이 하릴없이 궁금해져 뒤통수를 긁적이며 캐물었다. 우리 가구의 드높은 지체에 미치는 기여도는 나보다 현저히 낮은 거로 확인됐다. 괜히 가정불화만 빚을 뻔했다.

 

나는 정부가 꼼수를 부렸을 거라 생각지는 않는다. 아니, 나는 주관적 느낌보다 부유할 수도 있다. 양극화 시대의 구도를 1 99로 볼지 20 80으로 볼지 논쟁하는 시대다. 평균이 아닌 백분위로 줄을 세우면 20%를 넘어 12%에 든다 해도 경악할 일은 아니다. 코로나로 벼랑 끝에 몰린 400만 자영업자는 내 뒤로 꼬리별처럼 늘어설 터이다. 단체 활동가나 젊은층이 많은 인적 네트워크 탓이 크겠으나, 사적 모임에서 비용을 낼 때 스스로 정규직 가중치를 부여하곤 한다. 요컨대, 우리 국민 상당수는 나보다 빈곤하다.

 

그럼에도 정부가 나를 재난지원금 지급 대상에서 제외한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수식이 아무리 정확한들 타당성이 없으면 숫자놀음일 뿐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복지예산 규모로는 보편복지입네 선별복지입네 하는 논쟁 자체가 기만적이다.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공공사회복지 지출 비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코로나 재정 지출을 보면 사정은 더 딱하다.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 대비 지출은 3.4%. 미국은 16.7%, 일본은 15.6%에 이른다. 비교하는 게 무색할 지경이다.

 

얼마 전 <주간경향>이 그 차이를 피부에 와닿게 비교했다. 프랑스 파리, 미국 애틀랜타, 캐나다 토론토, 일본 도쿄에서 식당을 하는 동포 4명이 받은 코로나 지원금이 우리 돈으로 치면 11천만~28천만원이었다. 같은 기간 충남 천안에서 대형 카페를 운영하는 이는 600만원을 받았다. 지난 7월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만장일치로 한국의 지위를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격상했다. 이런 사례는 이 기구 역사상 유일하다. 그러나 동시에 한국은 코로나 위기에 국민의 생존을 외면한 유일한 선진국이다.

 

사회복지학자 윤홍식은 근작 <이상한 성공>에서 한국의 성공 요인과 미래의 덫이 되는 요인이 하나라고 역설한다. ‘각자도생이다. 우리 국민은 국민연금보다 개인연금에 훨씬 많은 돈을 낸다. 정부의 역할이 결정적이다. 사보험에 들면 따박따박 소득공제를 해주는 것이다. 몇해 전 나는 급여에서 미리 떼는 소득세를 회사 기준의 120%로 올렸다. 연말정산 때마다 100만원 안팎을 토해내다 못해 찾은 궁여지책이다. 아는 세무사에게 물으니 사보험이 전무한 것부터 짚었다. 국가는 각자도생에 무심한 나를 징벌한다.

 

우리 국민에게 각자도생의 최전선은 단연 부동산이다. 노인부터 청년까지 만인 대 만인이 벌이는 이 투쟁에서 계급이 결정된다. 무주택자는 임차인이라는 법률적 신분도, 지대에 무관심한 숙맥도 아니다. 유주택자가 되기 전까지는 끝없이 수탈을 당하는 식민지 하층 계급이다. 박근혜 정부 경제부총리였던 최경환은 국민에게 빚 내서 집 사라고 부추겼다. 국민의 주거 생존권에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상징적 선언이었다. 정부가 아무리 내게 상위 12%’라는 면류관을 씌운들, 나는 이상한 선진국의 빈곤층이다.

이런 나라에서 대장동 사태는 과연 기함할 일인가. 내 눈에는 토건 카르텔이 변칙적인 기술을 선보인 조금 특이한 사례일 뿐이다./안영춘논설위원 한겨레 : 2021.10.07.

 

선진국이라는 착각

한국은 선진국이다. 국내총생산(GDP) 규모로 봐도 그렇고, 케이(K)팝과 <오징어 게임>의 성공을 봐도 그렇다. 심지어 명품 소비에서도 대한민국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오해할까봐 밝혀두지만, 이 말에 냉소와 경멸은 섞여 있지 않다. 물질문명은 구성원의 수명과 건강을 증진하고, 나아가 이들의 평균적 고통을 경감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다. 이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문제는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점이다.

사회학자 로널드 잉글하트와 동료들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질수록 인류의 관심사는 즉자적 생존에서 삶의 질민주주의의 심화로 옮겨간다고 선언했다. 쉽게 말해 경제 수준이 올라가면 타인에 대한 배려, 약자에 대한 관용도 커지며 나아가서 민주주의의 내실도 깊어진다는 것이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그들은 40년 동안 백 수십 국가에서 세계가치관조사를 진행했고, 많은 나라에서 이러한 경향이 관찰되었다. 그들은 이를 조용한 혁명이라 불렀다.

 

민주주의는 잉글하트와 동료들의 주된 관심사였다. 민주주의의 심화, 즉 민주주의가 깊어진다는 말의 의미는 형식적 민주주의에서 효과적 민주주의로 옮겨감을 뜻한다. ‘형식적 민주주의는 자유와 평등이 표면적·제도적으로 보장된 민주주의다. 그런데 민주주의가 형식적으로 구비되어 있다고 해서 모든 나라가 실질적으로 민주주의 사회인 건 아니다 효과적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제도로 존재할 뿐 아니라 실제로 개인이 일상에서 자유를 충분히 누리고 평등하게 존중받는 민주주의다. 우리가 흔히 선진국이라 부르는 북유럽과 서유럽 몇몇 나라들은 이 효과적 민주주의가 높게 나타나는 사회다.

 

한국은 어떨까? “케이-민주주의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한국인의 민주화 자부심은 강하다. 촛불시위는 한국인의 높은 시민의식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한국 민주주의도 심화된 것일까? 바꿔 말해 한국은 효과적 민주주의사회로 이행했을까? 유감스럽게도 그러지 못했다. 한국은 형식적 민주주의에서 거의 서유럽 선진국들에 근접해 있으나 효과적 민주주의에서는 큰 격차를 보이며 아래로 처져 있다. 일본은 물론 대만보다 낮다.(잉글하트·웰젤, <민주주의는 어떻게 오는가>, 2011)

 

이들의 연구가 무슨 절대적 진리는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일관된 기준은 있다. 민주주의와 관련해 중요한 요소는 자기표현 가치’(self-expression values)엘리트 고결성이다. 자기표현 가치는 후기산업사회로 갈수록 짙어지는 특징으로서, “친족관계와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유대와 관용, 자유를 향한 열망, 타인에 대한 신뢰, 인류 전체의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가리킨다. 잉글하트는 동성애 관용성을 특별히 강조하는데, 이것이 자기표현 가치와 가장 밀접한 연관을 보이는 지표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2019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조사 결과를 보면, 한국은 동성애 관용성에서 36개국 중 32위로 최하위권이었다. 대다수 나라들과 달리 한국은 아무리 경제수준이 올라가도 관용이나 신뢰가 크게 늘어나지 않았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속담이 한국엔 잘 통용되지 않는 것이다.

 

엘리트 고결성은 쉽게 말해 엘리트가 얼마나 부패하지 않고 청렴한가. 효과적 민주주의 지수 자체가 형식적 민주주의엘리트 고결성의 곱으로 계산될 정도로, 엘리트 고결성은 민주주의 수준에 결정적이다. 한국의 엘리트 고결성은 어떨까? 다들 짐작하듯 처참한 상태다. 최근 대장동 게이트는 한국의 법조 엘리트가 얼마나 철저히 썩어 있는지 다시 확인해주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는 틈만 나면 한국 최고위층 부패가 심각하다고 경고하지만, 이 나라는 늘 그대로다. 이러니 효과적 민주주의 지표가 높게 나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덧붙여 제기하고 싶은 건 능력주의다. 한국의 능력주의는 불공정에만 몰입하면서 불평등은 외면하는 결과를 낳았다. 우리는 특권을 쟁취하는 과정의 공정에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특권 자체를 줄이는 데는 놀라울 정도로 무관심하다. 하지만 특권을 그대로 둔 채 부패와 불공정에 분노하는 일은, 음식을 한곳에 쌓아 두고 벌레가 꼬인다고 역정 내는 짓이나 다름없다. 한국 사회가 형식적 민주화에 머물 뿐 사회경제 민주화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 있는 건 아닐까. ‘선진국에 붙은 따옴표를 떼기 위해선 갈 길이 멀다.

박권일사회비평가 한겨레 : 2021.10.07.

 

너무도 정치적인 선택적 분노

처음 시작은 공부의 신 강성태유튜브 채널에서였다. 이 채널은 교육 전문 유튜브로, 구독자 수가 101만명에 이른다. 수험생, 취업준비생들에게 좋은 교육 콘텐츠로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채널로도 유명하다. 일부 유튜브 이용자들이 운영자 강성태의 침묵을 선택적 분노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그들은 유튜브 댓글로 강성태가 곽상도 국회의원의 아들이 화천대유에서 퇴직금 50억원을 받은 것에 침묵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장제원 국회의원의 아들 힙합가수 로엘이 집행유예 기간에 다시 음주운전을 하고 경찰관을 폭행한 것에도 침묵하고 있다고도 했다. 이런 문제제기가 이뤄진 이유는 강성태가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딸의 입시 부정 의혹에 강하게 비판을 했고, 박성민 청와대 청년 비서관이 25세의 나이에 1급 공무원으로 임용된 것에 대해 공정성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택적 분노에 대한 비판은 여기서 더 나아갔다. 20대 청년세대가 조국 전 법무장관 딸의 입시 부정 의혹에 대해서는 시위까지 조직했었는데, 곽상도 아들 50억원 퇴직금 문제와 장제원 국회의원 아들의 사건에 대해 침묵한다고도 했다.

과연 20대 청년들이 선택적 분노를 한다는 주장은 정당한 것일까? 20대 보수화는 타당한 판단일까? 20대에게 공정한 분노를 요청하는 것은 올바른 것일까?

 

20대 청년들은 선택적 분노라는 말이 의도적인 편가르기라고 반박한다. 청년세대는 한국사회의 공정성에 더 예민하고 민감하다. 평등의 감수성은 청년세대의 공통감각이다. 진보라고 자부했던 586세대가 과연 현재를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로 만들었는가? 586세대는 개인이 자유롭고 평등한 인격체로 대우받을 수 있는 사회 시스템을 만들기보다는, 가족에게 되물림되는 경제적이고 문화적인 불평등 분배를 묵인하지 않았는가? 청년세대는 최근 아파트 값 폭등과 같은 비정상적 상황도 기성세대의 욕망이 초래한 효과라고 본다. 같은 맥락에서 조국 전 장관 사건과 곽상도 국회의원 사건도 바라본다. 조국 전 장관 딸의 입시비리 의혹은 입시 과정의 공정성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한다. 20대의 입장에서 한국사회가 과정과 절차에서 공정한가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공통의 문제이다. 하지만 곽상도 국회의원 아들의 50억원 퇴직금 문제는 뇌물 비리라고 생각한다. 사회의 공정한 운영을 일탈하는 부정행위는 제도와 시스템의 문제이기보다는 도덕적 위반행위이기에 개별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20대가 더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은 기성세대가 분노로 청년세대를 호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선택적 정치성이 개입되어 있다고 판단한다. 특정 정당의 진보성과 보수성만으로, 청년세대를 보수와 진보로 편가르기를 한다. 진보는 위험스럽지만 새로운 것을 향한 도전을 감수하겠다는 것이다. 보수는 낡았더라도 검증된 안전함을 지키겠다는 것이다. 청년세대는 미래를 향해 있기에 진보적 성향을 지닌다. 청년세대의 진보는 기성세대의 진보에 대한 진보다.

 

분노는 너무도 위험한 감정이지만, 역사적으로 혁명과 변화의 에너지이기도 했다. 공적인 영역에서 분노는 공정과 정의가 훼손되었을 때 느끼는 강한 거부이다. 격렬한 분노는 미래의 희망을 부정하는 파괴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 스토아학파의 철학자 세네카는 분노라는 감정에 대해 강하게 경계했다. 그는 분노는 이성을 위험에 빠뜨리는 감정이며 징벌하고자 하는 욕망이라고 보았다. 세네카는 분노로 인해 이성이 마비되는 상태를 두려워했다.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비슷하면서 다른 이야기를 한다. 그는 분노에 사로잡혀도 노예지만, 모욕을 당했는데도 분노를 참으면 노예라고 했다. 그는 당연히 화낼 일에 올바른 방법으로 분노하는 것은 중용의 미덕으로 칭찬할 만하다고도 했다. 분노 그 자체는 대상에 대한 미움이기에, 악한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 높다. 하지만 분노가 참여와 실천의 의지로 연결되면 변혁의 힘이 된다. 경계해야 할 것은 누군가가 분노의 감정을 부추기거나, 그 분노의 에너지를 기성 권력의 이익에 동원하려 하는 부조리한 상황의 발생이다.

 

공정과 정의를 실현하려는 노력의 바탕에는 분노한 주체들이 있었다. ‘의로운 분노참여와 실천과 연결되어 있다. 누군가가 분노를 동원하려고 하면, 단호하게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20대가 선택적 분노를 하고 있다는 비판은 온당하지 않다. 그 비판의 이면에는 20대의 분노를 동원하려는 선택적 정치성이 개입되어 있다.

오창은 중앙대 대학원 문화연구학과 교수 경향 : 2021.10.08.

 

체게바라를 좋아했던 청년

막장드라마 같은 대선판에서 반가운 이름을 발견했다. ‘정진상 등 대장동 토건세력 4인방은 이재명 패밀리라는 문화일보 928일자 기사였다. 정진상은 80년대 말 부산의 경성대 법정대 재학 시절 학생운동을 했다. 혁명가 체게바라가 좋아 가명에도 를 사용했다. 같은 대학 동료 박효석은 지리산 파르티잔에서 따온 치산을 가명으로 썼다.

 

정진상은 2019년 대장동 아파트를 7억여원에 사 지금도 산다. 실거래가는 2년 만에 4억 원이 뛰었다. 정진상은 이재명 변호사 시절부터 사무장을 맡았다니 측근이다. 정진상이 주목받는 건 그가 대장동 개발 때 이재명 성남시장의 6급 정책비서관이라서다. 이후 그는 이재명을 따라 경기도 정책실장을 거쳐 지금은 대선 캠프 총괄 부실장이다.

 

지금 성남시가 된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은 68년엔 농민 2600명이 사는 궁벽한 시골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서울 철거민 50만명을 수용하려고 중부면에 성남출장소를 세웠다. 남한산성 남쪽이라 성남이었다.

 

서울시는 695월 청계천 판자촌을 강제 철거하고 쫓아낸 도시 빈민 48세대 154명을 트럭에 싣고 와 버렸다. 첫 강제 이주였다. 불모지에 버려진 주민들은 정부가 배정한 임시 천막에서 살았다. 무모한 선 이주 후 건설은 철거민을 극단으로 몰고 갔다. 70년 봄엔 전염병까지 돌아 많은 사람이 죽었다.

 

불모의 땅에도 쇠파리는 어김없이 꼬였다. 부동산업자는 공무원과 결탁해 부정 추첨으로 좋은 분양지를 차지했다. 철거민 중 3분의 1이 택지분양증을 팔고 서울로 되돌아갔다. 분양증이 있어도 입주비를 마련할 길이 없었다. 철거민에게 분양증은 빛 좋은 개살구였다. 정부의 공공개발은 100원에 땅 사서 만원에 팔아먹는 폭리였다. 급기야 정부는 707분양증 전매금지 조치를 발표했다.

 

분노한 3만여 주민이 71810일 오전 10시 빗속에서 시장 면담을 기다렸다. 시장은 몇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주민들은 폭발했다. 주민들은 광주대단지 개발사업소 난입을 시작으로 사흘 동안 공권력을 밀어내고 도시를 점령했다. 부랴부랴 박정희는 내무부 장관과 서울시장, 경기도지사를 파견해 주민에게 사과하고 요구를 수용하는 척했다. 경찰은 석 달 뒤 주동자 21명을 구속했다. 정부는 73년 중부면을 성남시로 승격시켰다.

 

이후 성남엔 공업단지가 들어서 공업도시로 변모하는 듯했다. 공업도시 성남은 김해성 목사가 전도사 시절 성남 1·2·3공단을 뛰어다니며 86년에 쓴 <성남지역 실태와 노동운동>(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민중사)에 고스란히 담겼다. 최저임금선인 월 10만원도 못 받는 노동자가 8544%에 달했고, 남녀 격차도 심했다. 노동강도가 높고 작업환경이 열악해 산재도 빈발했다.

 

주택 200만호 공약을 내걸었던 노태우 정부는 성남 분당에 신도시를 만들어 오늘날 천당 위의 분당을 낳았다. 이렇게 성남은 서울서 쫓겨난 도시빈민과 강남에서 이주해 온 알부자들이 혼재했다. 판교개발까지 겹쳐 21세기에 와선 혼돈의 도시가 됐다.

 

이주노동자의 아버지로 불렸던 김해성 목사는 30년 넘게 노동자와 도시빈민을 위해 헌신해 2004년엔 한겨레신문이 뽑은 한국의 미래를 열어 갈 100에도 선정됐다. 김 목사는 20169월 성추행 의혹이 불거지자 잘못을 시인하는 글을 교회 홈페이지에 올린 뒤 담임을 맡은 중국동포교회와 ()지구촌사랑나눔 대표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석 달 뒤 활동을 재기해 자숙하는 게 맞냐는 지적을 받았다. 김 목사의 책을 펴낸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원장 손학규는 여야를 오가며 4선 의원과 경기도지사까지 지냈다.

 

체게바라처럼 혁명을 꿈꾸던 청년 정진상에게 30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러나 모든 정진상이 꼰대가 되진 않았다. 그의 동료 박효석은 부산의 한 폐교를 인수해 다문화 학생들이 다니는 대안학교 교장으로 아름답게 살고 있다.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매일노동뉴스 2021.10.08

 

처음으로 40% 넘은 1인 가구, 복지 등 맞춤형 정책 필요하다

1인 가구 비중이 처음으로 40%를 돌파했다는 통계가 나왔다. 행정안전부가 6일 발표한 3분기 주민등록 인구통계 발표에 따르면 지난달 말 주민등록상 1인 가구는 9367439가구로 전체 23383689가구의 40.1%를 차지했다. 이어 2인 가구가 23.8%였고 4인 가구 이상 19.0%, 3인 가구 17.1% 순으로 나타났다. 1인 가구는 해마다 1%포인트 이상씩 늘고 있다. 1, 2인 가구를 합한 비중은 63.9%에 달했다. 부부와 미혼 자녀를 기준으로 마련한 정책의 기본 틀이 유효하지 않다는 뜻이다. 1인 가구 급증에 대비한 정책 재설계가 필요하다.

 

눈여겨볼 대목은 단순 1인 가구의 비율만이 아니다. 1인 가구는 연령대별로 70대 이상(18.6%)이 가장 많고 60(17.7%), 50(17.2%), 30(16.5%), 20(15.7%), 40(13.9%) 순이었다. 남자는 30, 여자는 70대 이상에서 1인 가구가 가장 많았다. 노년층의 1인 가구 비중이 높은 것은 인구 고령화와 수명 증가에 따른 것으로 해석된다. 20~30대에서는 직장과 학업을 위한 가구분리가 보다 일반화되고 있는 추세를, 40~50대에서는 비혼과 이혼 인구 증가로 1인 가구가 느는 상황을 반영한다.

 

행안부 통계는 통계청 가구 조사와는 방식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통계청 조사 결과도 지난해 말 1인 가구가 사상 처음 30%를 넘어서는 등 1인 가구 급증은 분명한 사회적 추세다. 속도 또한 날로 빨라지는 만큼 그에 맞춘 대책이 시급하다. 1인 가구 급증에는 다양한 사회·경제·문화적 변화가 반영돼 있어 다층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 주거·복지 정책은 물론 의료와 문화, 사회, 가족, 지역 정책 등에서 광범위하게 맞춤형 대응이 이뤄지지 않으면 정책의 실효성이 떨어진다. 청년층은 주거와 취업, 노인들은 의료나 돌봄 위주의 정책이 주가 되는 것이 맞다. 그러나 같은 연령층에서도 성별이나 지역, 재정 여건 등 개인별 상황이 다르다. 생애주기별 복지를 확대하는 방향을 기본으로 하되, 각 개인 상황에 따른 복지 수요를 최대한 충족할 수 있는 세심한 설계가 필요하다.

 

당국은 오랜 기간 4인 가구를 기준 삼아 정책을 설계해 왔다. 이제 달라진 현실을 제도가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일은 최소화해야 한다. 가구 구성원의 숫자가 얼마든, 모든 사회 구성원이 개인으로서 만족하는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정책의 사각지대를 줄이는 것은 정책 당국의 책무다. 경향 사설 2021.10,8

 

코로나 시대, 식탁을 바꾸는 4가지 변수

코로나19는 소행성 충돌에 비유될 만큼 우리 삶에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충격이 가장 큰 분야 중 하나는 음식이다. 코로나는 식탁을 어떻게 바꾸고 있을까? 전문가들은 4가지 변수로 설명한다.

 

첫 번째 변수가 비대면 소비의 증가다. 국제 여론조사기관인 입소스가 지난 2월 발표한 조사 결과를 보면, 코로나 이후 전 세계 소비자들의 63%가 외식 빈도를 줄였다. 칠레·멕시코·아르헨티나는 이 비율이 무려 80%에 이른다. 대신 온라인 배달 음식 소비는 늘었다. 리서치앤드마켓은 지난해 전 세계 온라인 음식 배달 시장 규모는 1113억달러(133조원)였으며, 2023년에는 이보다 약 39% 증가한 1543억달러(182조원)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한국도 상황은 비슷하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지난해 온라인 식품 시장 거래액은 434000억원으로 전년보다 62% 늘었다. 이 가운데 온라인 배달 음식 거래액은 174000억원으로 전년에 견줘 77%나 증가했다.

 

비대면 문화는 집 나간 집밥을 돌아오게 했다. ‘집밥의 귀환이 두 번째 변수다. 무엇보다 미국의 변화가 눈에 띈다. 패스트푸드 종주국으로 1970년 이후 집밥이 가장 먼저 해체된 나라가 미국이었다. 미 식품안전정보협회의 ‘2020 식품과 건강을 보면, 미국인 85%가 코로나 이후 음식과 그 준비 방법을 바꿨다. 바뀐 방법의 60%가 집밥이었다. 같은 조사를 보면, 미국인들이 추구하는 음식의 핵심 키워드는 면역(40%)이었고 이를 위해 채소, 과일, 식물성 단백질 등의 섭취를 늘렸다. 맛과 효율에서 영양과 안전으로 음식의 무게중심이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안전이 세 번째 변수다.

 

그런데 이번 변화의 추세는 기존 변화와는 다른 특징이 있다. 기존에는 경제구조 혹은 기술혁명 같은 거대 담론이 등장하면서 음식이 바뀌었고, 대중은 수동적으로 끌려갔다. 음식은 사회적 관계를 통해 집단적 자아를 형성하는 사회적 매개물이기 때문에 대중은 역사적으로 수동적이었다. 하지만 이런 꽉 짜여진 음식과의 관계에서 자유로운 개인들이 등장했다.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의사소통 공간이 엄청나게 다변화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지막 키워드가 경험·재미. 영국 온라인 식품배송 업체인 웨이트로즈의 지난해 통계를 보면, 영국에서 조개·홍합·굴을 포함한 해산물 소비가 3배 이상 증가했다. 또 와인 주문이 늘었는데 이 가운데 로제 와인 판매가 급증했다. 맛의 모험을 즐기려는 소비자가 늘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달고나 커피에 이어 올해 달고나가 드라마 <오징어 게임> 덕분에 전 세계에 유행 중인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코로나 이후 반조리된 밀키트 판매가 급증한 것도 요리를 재미있는 경험으로 여기는 MZ세대의 문화 덕분이라는 해석도 있다. ‘식량위기같은 난제도 있지만, 코로나에 따른 음식의 변화가 예전의 사례들보다 더 흥미로운 이유기도 하

권은중 음식 칼럼니스트 경향 : 2021.10.

대장동 대박과 원주민의 울분

판교의 남쪽인 성남시 대장동은 조선 인조의 태()를 묻은 곳으로 알려져 태장리로 불리다가 지금의 이름이 됐다. 입증할 기록은 없지만 청계산 자락의 남향 터라 예전부터 길지였다는 게 지역 설명이다. 이런 땅을 물려받은 원주민은 투기꾼과 개발꾼이 땅을 팔라 해도 꿈쩍하지 않았다. 그런데 성남시가 돌연 땅을 강제 수용하겠다고 나섰다. 공익을 위한 일이란 명분에 원주민은 오랜 삶의 터전을 헐값에 넘길 수밖에 없었다. 3.3300만 원도 못 받은 이가 많다. 이후 이 땅에 지은 아파트의 분양가는 3.32,500만 원까지 치솟았다.

 

원주민 땅을 사 들여 용도를 변경한 뒤 아파트를 지어 파는 부동산개발사업은 큰돈을 벌 수 있지만 위험도 적잖다. 통상 3대 리스크를 꼽는데, 첫째 리스크는 '땅작업' 토지매입이다. 일단 소문이 나고 어느 선을 넘으면 땅을 사 들이는 게 쉽지 않다. 수십만 원이던 땅값이 수백만 원이 되고 나중엔 수천만 원을 줘도 안 판다고 한다. 땅작업은 10% 계약금만 현금으로 준 뒤 이를 담보로 대출을 받아 그 다음 땅 계약금을 치르기 마련인데 이 과정이 끊기면 돈줄이 말라 파산할 수도 있다. 둘째 리스크는 인허가다. 부동산 개발은 시간이 돈이다. 해당 지자체가 인허가를 늦추거나 갑자기 도로나 학교, 공원을 더 지으라고 하면 청천벽력이다. 셋째 리스크는 분양가다. 분양가상한제가 적용되면 높은 값을 받을 수 없다.

 

대장동은 이런 3대 리스크를 민관공동개발이란 이름으로 모두 피해갔다. 땅작업이 지지부진하며 자금난에 빠졌을 때 지자체가 구세주로 나서 골치 아픈 원주민의 땅을 단숨에 강제 수용해줬다. 인허가 과정도 일사천리였다. 분양가상한제도 적용되지 않았다. 싸게 사 비싸게 파니 일확천금은 땅 짚고 헤엄치기였다.

 

대장동 원주민들은 개발꾼과 성남시에 사기를 당하고 호구가 됐다며 분노하고 있다. 소송도 준비 중이다. 이들의 눈물로 7,000억 원의 수익을 거둔 이들은 이후 700억 원, 350억 원, 50억 원, 30억 원의 뭉칫돈을 법조와 관가의 실세 '형님들'은 물론 그 아들딸과 나누며 돈잔치를 벌였다. 이젠 돈이 돈 같지 않다. 일할 맛 안 나는 세상이다.

박일근 논설위원 한국 2021.10.08.

 

자본이 설계한 게임의 경주마, 인간이고 싶은오징어 게임

 

잠시 후 두번째 게임이 시작됩니다. 참가자들은 진행요원의 안내에 따라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초록색 단체복을 입은 참가자들이 인간의 감정을 느끼기 어려운 안내 방송에 따라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들의 목표는 단 하나,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456억원을 차지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 즐겼던 각종 놀이가 참가자들의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생존 게임으로 전유된 현장은 죽음의 공포와 상금을 차지하고 싶은 탐욕이 충돌하는 아수라장이다. 게임에서 탈락한 참가자들은 목숨값 1억원의 화폐로 교환되어 돼지저금통에 안치된다. 게임 탈락은 어린 시절 놀이에서처럼 더 이상 참가할 수 없다는 상징적 선언이 아니라, 진짜 죽음을 의미했다.

 

애들 놀이를 시켜놓고 사람을 죽이, <세상에 이런 일이>에도 나오지 않을 생존 게임에 참가할 사람들이 누가 있을까 싶지만, 목숨 걸고 달려들어야 하는 절박한 처지의 사람들이 적지 않다. 예를 들면, 사채업자에게 빚 독촉을 받다가 신체 포기 각서까지 써야 하는 경제적 약자들이 그렇다. 돈 때문에 죽음까지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딱지치기같은 놀이 몇번으로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제안은 거절하기 쉽지 않은 유혹이다. 지극히 예외적인 상황 같지만, 자본이 인간을 압도하는 현실에서는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이처럼 <오징어 게임>은 수백억원의 상금이 걸린 생존 게임을 매개로 자본주의의 무한 생존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들의 참혹한 현실을 우화적으로 풍자한다.

 

열심히 일해서 번 돈으로 가족과의 행복을 꿈꾸었던 성기훈(이정재)은 경제적 약자로 전락한 인물이다. 그는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자동차 회사에 취직하여 성실하게 일했지만, 경영진의 무능에서 비롯한 구조조정 여파로 희망퇴직을 하면서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갓 태어난 딸과 아내를 부양하기 위해 치킨집에 이어 분식집을 열었지만 모두 실패했고, 결국은 아내와 이혼하면서 아이 양육권마저 넘겨주었다. 돈이 원수였다. 늙은 어머니가 성치 않은 몸으로 번 돈마저 도박으로 탕진하고 사채업자에게 시달리던 상황에서 게임 제안을 받았다. 애들 놀이에 거액의 상금이 걸려 있다는 제안에 황당해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참가 신청을 했다.

 

그러나 456명의 참가자들에게 주어진 첫 번째 게임이 어린 시절 친구들과 즐겼던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놀이라는 것에 당황할 겨를도 없이, 규칙을 어긴 참가자들이 탈락과 동시에 사살되는 현장을 목격하면서 그는 자신이 아비규환의 생지옥에 들어왔음을 깨닫는다. 지옥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게임에 참가했는데, 게임장은 또 다른 지옥이었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로 시작한 게임이 설탕 뽑기’(달고나), ‘줄다리기’, ‘구슬치기’, ‘징검다리 건너기를 거쳐 오징어게임으로 이어지는 동안 수많은 참가자가 죽었고, 돼지저금통에는 그만큼 거액의 현금이 쌓였다 .

 

정해진 규칙에 따라 죽고 살기를 반복해도 마냥 재미있기만 했던 어린 시절의 낭만적인 놀이가 살해 도구로 전유된 게임장에서 성기훈은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쳤다. 술래 인형의 눈을 피해 혼신의 힘으로 달렸고, 우산이 새겨진 달고나 뽑기에는 간절한 심정으로 침을 묻혔다. 그리고 구슬을 공유하는 동지 관계를 맺은 노인을 속이면서 마침내 최종 승자를 가리는 오징어 게임까지 살아남았다.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한 게임에 참가하면서 그는 돈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최후의 승자가 되어 456억원의 상금을 받았지만 행복하지 않았고, 오히려 회한에 잠겼다. 456명의 참가자 중에서 마지막 번호인 456번으로 불렸지만, 성기훈은 항상 중간지대로 숨고 싶어 했다. 그의 번호가 1부터 9까지를 3등분했을 때의 가운데 숫자인 ‘456’이었던 것도 우연만은 아니다. 한국에서의 게임을 가장 흥미롭게 관전하고 있는 전세계 브이아이피(VIP)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성기훈은 두려움을 느낄 땐 무리들 가운데로 숨고 싶은동물의 본성에 충실한 경주마일 뿐이다.

 

오징어 게임에 참가할 일은 절대 없으리라 확신하는 사람들일수록 자본이 설계한 게임의 경주마일 가능성이 높다. 게임에서 탈락하지 않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기훈에게서 어렴풋이나마 자신의 모습을 본 사람들일수록 그의 존재를 강하게 부정한다. 비록 자본에 포획되어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에 상처를 입은 채 살아간다 해도 결코 성기훈처럼 밑바닥까지 떨어지고 싶지 않아서이다. 그러나 한국적 상황과 거리를 두고 있는 외국인들에게 오징어 게임은 흥미로운 관전 대상일 뿐이다. 외국인 관전자들이 오염된 자본주의 생태계 최고 포식자가 설계한 게임의 경주마가 될지도 모른다는 한국인의 공포 심리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나만 아니면 경주마가 누구든 무슨 상관이냐는 이기심을 버리고 난 말이 아니야! 사람이야!”라는 성기훈의 경고를 새겨듣는다면, 훼손된 공동체 의식이 조금이라도 회복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윤석진 대중문화평론가 한겨레 2021.10.08.

 

 

오징어게임과 금융자본주의

다들 <오징어게임>이 자본주의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난리다. 세계인들은 자본시장의 노예로 전락한 자신들을 표출한 것에 열광한다. K드라마로 한국문화는 상종가를 쳤다. 그럼에도 이 드라마가 이 사회에서 출현했다는 것은 비극이다. 자본의 축적이 단기간에 이루어지고, 미국을 축으로 하는 신자유주의의 진격방식인 돈 놓고 돈 먹기식 카지노자본주의의 횡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가 유포되는 것 또한 거대자본의 힘이다.

 

게임의 말에 불과한 인간의 목숨 값으로 천장에 매달린 통에 쏟아지는 돈은 과연 악마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1900년에 게오르크 지멜은 <돈의 철학>(김덕영 옮김)에서 돈은 가장 추상적인 것의 구체화다. 돈은 근본적으로 초개별적인 것에서 의미를 갖는 개별적 구성물이다. 그러므로 돈은 인간이 세계와 맺는 관계의 적절한 표현이다라고 돈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 돈에 대한 신뢰는 전 인류를 하나로 묶어주는 매개 역할을 한다. 그러니 종이와 쇳덩어리에 불과한 돈을 죄의 근원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좌든 우든 돈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쏟은 인류야말로 물신의 통일 왕국을 지구상에 최초로 건설했다.

 

문제는 왕국의 통치이념인 돈이 가장 비생산적인 금융자본의 무기라는 점이다. 산업과 상업자본에 비해 금융자본은 이자놀이에 기반한 기생계급이다. IMF체제에서 겪었던 것처럼 단기적 이익만 취하고 빠지는 바람에 수많은 실업자가 일상에서 추방당해 겪은 트라우마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포획당하지 않기 위해 개인이든 국가든 돈을 끌어 모은다. 게임의 참여자들은 자본의 먹잇감으로 신체포기 각서를 쓴 벼랑 끝 인간이다. 마우리치오 라자라토가 <부채인간>에서 말하듯 자본시장에서 인간은 부채를 감당하는 자일수록 부자가 된다. 이미 인류는 지구 자원의 한계를 넘어선 무한대의 화폐를 찍어냄으로써 지구에 대한 빚쟁이이자 약탈자가 되었다. 화폐 속으로 인간의 감정과 유대, 그리고 존재의 의미마저 종속시키고 있다. 삶의 다양성은 화폐의 동일성으로 용해되어 단순명료해진다.

 

사실 돈은 환상일 수도 있다. 어릴 때 종이돈을 가지고 놀이했던 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화폐 숫자의 가치는 끊임없이 변한다. 가치를 상실하는 순간 불쏘시개로 전락하기도 한다. 발달심리학에서 말하듯 인간 욕망의 변주에 불과하다. 어릴 때는 인형에, 커서는 돈에, 늙어서는 명예에 집착하는 투사된 욕망의 단위에 불과하다. 욕망의 상징으로 신격화된 돈은 모든 갈증을 다 해소해 줄 것 같은 권능이 부여된다.

 

드라마 속에서 게임 판을 짠 노인은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공통점을 삶에 재미가 없는 것이라고 한다. 속임수다. 부자는 돈을 소유했지만 그 권능으로 존재의 신성함에는 영원히 다가갈 수 없음을 깨달았을 뿐이다. 소유와 존재는 등가의 위치에 있지 않다. 소유에 집착함으로써 실존의 감각을 잃어버린 것이다. 돈으로 지구를 소유한 뒤에 욕망은 달과 화성으로 향할 것이다. <오징어게임>은 극한의 스릴을 통해 멈출 줄 모르는 욕망을 배출한다. 그가 말하듯이 보는 것보다 참여하는 것을 어릴 때의 놀이에서 찾은 것은 욕망의 헛됨을 증명하는 것이다.

 

게임은 고의 연쇄를 불러일으키는 집착과 정복의 심리를 이용한 교묘한 장치다. 현실에서는 돈의 패권자가 설정한 게임에 욕망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종속된다. 주식, 보험, 채권 등 숱한 금융상품들도 게임에 베팅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누군가 따게 되면 누군가는 잃게 된다. 화천대유가 그렇듯 쩐주인 금융은 판돈을 빌려주거나 판을 깔아 이득을 취한다. 그리고 비가시적인 권력의 좌에서 금융자본은 부채인간을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며 공포를 내면화시킨다. 절망의 벽 속에 갇힌 현대판 노예의 탄생이다.

 

게임 판을 뒤엎고 저항해야 한다. 사자가 먹이가 아닌 먹이를 주는 주인을 노리듯 돈의 뒤에 숨은 금융자본에 맞서 싸워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말한 바처럼, 돈은 최고선에 도달하는 수단이지 인생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돈은 문명의 진화과정에서 삶의 편리함을 위해 고안된 기호에 불과하다. 결코 정복될 수 없다. 어릴 때부터 생활의 도구인 돈을 다루는 방법을 교육에 도입해야 한다. 객체가 주체를 지배하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 주인이 노예가 될 수는 없다. 물신(物神)은 허약한 우리의 심성이 만든 환상일 뿐이다/ 원익선 교무·원광대 평화연구소 경향 : 2021.10.09.

 

기후위기, 세상을 멈추는 노동자

멈춰진 노동자

신자유주의는 노동자의 행동을 어떤 방식으로 통제하고 억압하는가? 노동인권센터를 찾는 내담자들은 노동법 지식이 상당 수준임에도 유독 휴업수당에 관한 내용은 잘 숙지하지 못한다. 휴업수당을 설명하면 많은 노동자로부터 그런 것도 있냐?”라는 반문이 돌아온다. 휴업수당은 사용자의 귀책 사유로 휴업하는 경우, 휴업한 노동자에게 지급하는 평균임금 70% 이상의 수당’(근로기준법 제46)이다. 돈만 받고 일은 안 한 경우 임금 공제 내지는 징계를 고려하는 것처럼, 약속한 날에 일감을 주지 않으면 사업주는 휴업수당을 지급해야 한다. 그러나 실상은 휴업수당을 아는 노동자가 적고, 알아도 (임금체불만큼) 요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임금을 주지 않는 문제는 사업주 책임이라는 과녁에 꽂혀있지만, 일감을 주지 않아 일하지 못하게 된 책임은 어슴푸레한 무엇을 가로지르다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 꽂힌다.

 

이러한 현상은 사업장에서 노동자의 시간이 어떻게 취급되고, 근로계약 당사자로서 마땅히 지녀야 할 시간에 대한 통제력과 권리가 박탈되는 현실을 보여준다. ‘소정근로시간은 서로의 권리-의무를 충족시키는 시간이 아닌, 노동자가 사업주의 지휘·감독 권한에 따라 통제받는 시간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계약 상대방인 사업주가 약속한 날에 일감을 주지 않고, 오히려 출근하지 말 것을 명령하더라도 이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 휴업에 대한 책임은 사업주가 아닌 다른 이유(기상이변, 전염병 확산, 시장 동향 등등)로 전가되고, 결국엔 아무도 책임지지 않게 된다. 심지어 휴업 기간은 연차유급휴가로 대체되곤 하는데, 겉으로는 노동권이 실현되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이중적으로 권리가 박탈된다(휴업수당 미지급+연차휴가청구권). 그만큼 시간은 노동자에게 탈-정치화되면서 노동자의 행동마저 발목 잡는다. 이런 양상은 탄력근로제, 연장근무, 조기출근이 제대로 된 절차와 정당한 대가 없이 요구되는 상황에서도 동일하게 드러난다. 신자유주의는 노동자의 시간과 함께 (권리주체로서) 행동을 빼앗는다.

 

전환메시지의 허점, 멈추라는 메시지

한편에선 코로나19, 기후위기를 둘러싼 담론들이 전환이라는 키워드로 등장하고 있다. 전환은 정부 정책(공정한 전환, 에너지 전환), 운동 구호(정의로운 전환 just transition)에서 모두 등장한다. 전환은 연속성을 담보하되 새로운 규범과 조건으로 이행하는 움직임으로 읽힌다. 심지어 기업은 ESG 경영이라는 새로운 규범으로 빠르게 이행(전환)하고 있다. 이처럼 전환은 사회적 위기에 대응하는 언어로 등장하고 있지만, 우리가 경험하고 있고 더 극심한 형태로 경험하게 될 위기의 진폭을 담아내는 언어인지는 잘 모르겠다. 오히려 전환은 위기를 관리하고자 하는 지배 권력의 용어에 가깝지 않은가? 지배 권력은 위기 관리자이자 갈등 관리자로서 조율된 시기(연도에 따른 감축 목표), ‘예측 가능한사회상, ‘관리된전환 경로(시나리오)를 민중에게 제시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당면한 위기는 우리 사회에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가? 위기 관리자가 아닌 위기에 노출된 민중이 취할 수 있는 방식은 모순적이게도 멈추기떠나기같은 수동적인 방식이었다. 이는 민중이 지녀온 가장 오래된 방식이기도 하다. 통제 불가능한 재난이 닥치면 사람들은 해오던 일을 멈추거나, 안전한 곳으로 피했다. 그리고 모두가 공존하기 위해 지혜를 모으고 실천했다. 그러나 무한경쟁, 경제성장, 팽창을 신봉하는 신자유주의 체제는 이런 수동적인 방식을 죄악시한다. 그린스마트 산업단지를 만들고’, 재생에너지로 전환하고, 그린수소를 개발하는 것과 같은 능동-긍정의 언어는 환영받지만, 기업의 생산 활동을 규제하고, 에너지 사용량 자체를 감축하고 자동차 이용을 억제하는 수동-부정의 언어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지만 기후위기는 우리 사회를 향해 수동성’-‘부정성을 계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한계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고 있다. 멈춰 서서 다른 방식으로, 다른 방향으로 살아갈 것을 요구하고 있다.

 

세상을 멈추는 노동자

멈춤이 노동 현장에서는 지극히 능동적인 투쟁이 된다는 사실은 노동 운동과 기후 운동이 긴밀히 연결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멈춤은 신자유주의 사전에 없는 단어다. 멈춤, 교란, 전복. 새로운 체제로 이행하기 위한 운동량(모멘텀)을 담아내는 단어란 이런 말들이 아닐까? 작업중지권, 태업, 파업 등 노동자가 멈추는 행위는 신자유주의가 왜곡하고 있는 시곗바늘을 다시 비틀면서 감춰진 현실을 드러낸다. 이때야 비로소 사회의 작동자(operator)로서, 사회계약상 권리/의무 당사자로서 노동자의 지위가 드러난다.

 

실제 사회의 방향타를 잡은 사람은 다양한 직업을 가진 익명의 노동자들이다. “시스템을 전복하라 Uproot The System”(9.24 글로벌 기후파업), “지금 당장 기후정의”(기후위기비상행동 9.25 집중행동)를 외치는 민중과 노동자가 기계를 멈출 수 있다. 지금은 STOP 버튼을 누르고 멈출 때다. 지구의 조절시스템이 붕괴하고 인간과 다양한 생물 종의 존재 기반이 파괴되고 있다. 민중은 노동자와 함께 작업중지권’(산업안전보건법 제52근로자는 산업재해가 발생할 급박한 위험이 있는 경우에는 작업을 중지하고 대피할 수 있다)을 발동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린 어떻게 멈출 수 있을까?

 

노동 현장에는 아직 기후위기와 노동자를 연결할 언어들이 궁색하다. 기껏해야 산업 전환’, ‘일자리 위기와 같은 경제용어일 뿐, 노동자의 권리와 책임을 담보하는 언어로 기후위기를 설명하지 못한다. 기후재난과 산업재해’, ‘산업안전을 연결하고, 기후위기 대응과 단체협약’, ‘근로계약’, ‘취업규칙을 연결 짓는 과제가 남아있다. 이를 위해 노동자와 민중의 만남을 부단히 도모해야 한다. 만남 속에서 녹색과 적색 언어의 연대를 일궈낼 수 있을 것이라 희망한다. 얼마 전 사회변혁노동자당에서 주최한 토론회에서 충북지역 금속노동자가 노동운동의 과제로 근로시간 단축, 일자리 지키기를 넘어선 투쟁, 기후단체협약 요구안, 민주노총 내 기후정의 부서 설치”(김성민 금속노조 대전충북지부 유성기업 영동지회)와 같은 목소리를 낸 점을 상기해본다.

 

상담을 통해 만난 노동자 대부분은 50~60대 이상, 노동조합 없는 작은 사업장 노동자들이었다. 권리 침해에 쉽게 노출되는 조건에서 그들은 자주 분노하고, 참아내기를 반복하다가 상담실 문을 두드렸다. 그들은 회사의 부당한 요구에 그냥 순응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마지못해참았고, 버티다가 스스로 그만두는 걸 선택했다. 그만두더라도 최소한의 저항을 하고자 했고, 남겨진 동료들을 위해서라도 위법행위를 고발하고자 했다. 물티슈 제조 공정에서 잘못된 라벨링을 감독청에 알려 영업을 정지시킨 생극산업단지 노동자, 폐수 무단방류를 고발한 금왕하수처리장 노동자, 사업주의 보조금 횡령 혐의를 알려낸 환경미화원들, 그리고 노동조합 결성을 이유로 10개월째 임금을 체불하고 있는 택시회사에서 파업을 시작한 충주 하나로택시 노동자들. 단지 개인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는 저임금 노동착취의 고리를 끊기 위해, 누군가는 시민의 안전을 위해, 또 누군가는 지역사회 변화를 꿈꾸며 용기를 내고 행동한 사람들이다. 이처럼 노동자들은 이미 다양한 방식으로 기업 활동과 지역사회에 곪아있는 시스템에 제동을 걸고 있다.

 

행동하는 소수의 노동자가 있다고 해서 신자유주의 체제하에 시간과 행동을 박탈당하는 노동 현실이 저절로 해결되지 않는다. 오늘도 멈춰지고 있는 그들이 스스로 벽을 무너뜨리는 건 어렵다. 이 장벽은 사회의 작동자, 오퍼레이터로의 지위를 회복시키기 위해 민중이 노동자와 함께 싸우는 공동 투쟁의 장이 되어야 한다. 그 연대의 장에서 서로의 투쟁 동기를 확인하고 연결하는 상호 작용을 기대할 수 있다. 그때야 세상을 멈추는, 체제를 전복시키는 운동이 가능해지지 않을까./박윤준(음성노동인권센터, 충북기후위기비상행동) 참세상 2021.10.13

 

누가 교회 공화국 위에 두고 있나

국민의힘 대선 주자인 윤석열의 손바닥발 무속 논란이 뜨겁습니다. 무속신앙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밝힌 황교안은 윤석열 전도를 외쳤고, 유승민은 천공 선생과의 관계를 추궁했습니다. 천공 선생을 손으로 암을 치유했다는 등 황당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으로 몰았죠. 당황한 윤 후보는 성경책을 들고 여의도 순복음교회를 찾았습니다. 이런 논란 뒤에 무속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있습니다. 윤 후보 본인 말처럼 여자들이나 하는 것이라거나, 황교안처럼 진짜 종교가 아니라는 등이 그것이죠. 하지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무속은 무당을 중심으로 하여 전승되는 종교현상입니다. 굿을 하건, 통성기도를 하건 사람의 지식이 닿지 않는 영역을 초인의 행위로 설명하는 점은 똑같습니다.

 

보통 종교인은 무속을 종교로 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한 무리의 일부를 선택적으로 배척하는 일을 종종 봅니다. 비행을 저지른 목사는 진짜 목사가 아니라고 하거나, 이단 교회는 진짜 교회가 아니라는 식이죠. 문제가 있는 주장입니다. 공부를 못하면 학생이 아니라는 식이니까요. 그래서 앞선 예는 모두 결과와 정의를 혼용하는 오류입니다. 무속은 종교가 아니라는 지적은 옳지 않죠.

 

무속이 논란이 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논란은 무속이어서가 아니라 종교여서야 하죠.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이 전문가나 시민이 아닌, 천공 선생의 조언을 받았다는 실망은 당연한 겁니다. 하지만 그 실망의 정도는 목사나 스님의 조언을 받는 정치인을 볼 때와 비슷해야 합니다. 기도와 믿음으로 병을 낫게 한다는 목사는 한둘이 아닙니다. ‘황당한 이야기는 성경책에도 수도 없이 많죠. 반대로 천공 선생의 가르침에는 어느 종교지도자나 할 법한, 평범한 소리가 많습니다.

 

윤석열 후보는 손바닥에 왕 자를 썼고, 조언을 구했을 뿐 종교를 정치화하지는 않았습니다. 반면, 윤석열 후보를 정조준한 황교안은 전광훈 목사와 공모해 극우정치를 부활시켰습니다. 절차를 따르고 결과에 승복한다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었죠. 우파교회의 정치세력화는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1987년 여의도광장 대형기도회를 시작으로 교회의 대규모 집회가 이어졌습니다. 이름은 기도회지만 주장은 재벌 지지, 주한미군 철수 반대, 북한 핵 포기 등 정치적 성격이 강했죠. 2008년 조용기 목사는 광우병 괴담은 국민을 혼란에 빠뜨리고 (이명박) 정부를 무력화하는 사탄의 계략이다라고 일갈하기도 했습니다. 퀴어축제에 저주를 퍼붓기도, 부처님오신날 조계사 앞에서 행패를 부리기도 했습니다. 기독정치세력은 우익 이데올로기 몰이로 사회를 경직시키고 나라를 분열하는 데 일조해왔죠. 정치인들은 종교의 정치화를 막기는커녕, 비위를 맞추며 표몰이를 이어갔습니다.

 

정치와 종교의 파괴적 공조는 동서고금에서 흔합니다. 미국의 2003년 이라크 침공에도 기독교 세력이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전쟁은 이슬람 과격화를 불러왔고 종교전쟁화됐습니다. 이슬람국가(IS)도 여기서 탄생했죠. 미국 국내정치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널드 트럼프의 파시스트적 정치 행태도 교회의 지지가 있어 가능했죠. 중동, 미국, 한국을 가릴 것 없이 이들은 정치와 종교 분리의 원칙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30년 전쟁 등 피비린내 나는 희생을 내고 가까스로 세운, 현대국가 모델의 근간을 흔드는 셈이죠.

 

무속도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한국에서 사회안정을 위협하는 종교 세력은 무속이 아니라 보수교회입니다. 그렇다면 논란의 대상은 윤석열이 아닌 듯합니다. 누가 교회를 공화국 위에 두고 있는지 살펴보는 게 더 급하지 않을까요. 한국에 종교분쟁이 없어 다행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청정구역으로 남으려면 보다 적극적인 시민의 감시와 관심이 필요합니다./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정치학 교수경향 : 2021.10.15.

 

 

국민의힘 대선 경선 관전기

지난 15일 국민의힘 대선 후보 경선 토론은 양강윤석열 전 검찰총장·홍준표 의원(이하 호칭 생략)1 1 대결로 주목받았다. 백전노장 홍준표가 정치 신참 윤석열을 몰아붙일 것으로 예상됐지만, 윤석열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자신에 대한 공격 포인트를 미리 체크해온 듯, 홍준표를 향해 반사(反射)!’를 외쳤다. 1심에서 실형 받은 장모를 홍준표가 거론하자 후보님 처남이 교도소 공사 준다고 해서 실형 받은 건 본인의 도덕성과 관계없느냐고 역공했다.

맞수 토론이 남긴 소득은 무엇보다 윤석열의 고백이다.

검찰 외에 (경험이) 전무한데 어디에 자신 있습니까?”

한 분야의 정점까지 올라가면 어떤 일을 맡더라도 일머리라는 게 있습니다.”

검찰총장까지 했기 때문에 어느 분야 맡겨놔도 잘할 수 있다?”

. 일하는 데는 제가 자신 있고요.”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와 토론하면 자신 있습니까?”

자신 있습니다. 검사 생활 하면서 많은 경제 사건도 처리하고 그러면 이런저런 공부를 또 많이 하게 되고.”

 

윤석열은 대통령을 검찰총장 이후 인생 2모작쯤으로 여기는 모양이다. 그러나 대통령은 직업이 아니다. 5182만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자리이자, 시대의 흐름을 내다보며 공동체가 나아갈 방향을 설계하는 자리다. 검찰총장이 터득한 일머리와 대통령에게 요구되는 일머리는 차원이 다르다. 뇌물·횡령·조세포탈 사건 수사 경험은 재정·금융·산업정책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홍준표는 어떤가. 당대표를 지냈고 지난 대선에 출마했다. 커리어만 보면 손색없다. 발언을 들으면 의문이 든다. 1 1 토론 내내 “(윤석열은 이재명과 도덕성에서) 피장파장” “(윤석열 정치경력은) 4개월” “(내 정치경력은) 26만 되풀이했다. 26년간 정치하며 이룬 성과는 말하지 않았다.

유승민. 콘텐츠만 따지면, 모든 주자 가운데 그를 따를 이가 없다. 그런데 지난 5일 토론회에 이어, 11일 광주·전남·전북 합동토론회에서도 윤석열을 상대로 천공스승만 물고 늘어졌다. 유력 대선 주자가 주술이나 미신에 과도하게 의존한다면 문제다. 그렇다고 귀한 토론 기회를 천공스승에게 헌납하는 건 안타깝다. 자신의 콘텐츠를 보여주기에도 부족한 시간 아닌가.

 

원희룡. 이른바 대장동 1타 강사영상으로 떴다. 물 들어온 김에 노 젓자는 생각인지, 18일엔 원희룡의 이재명 압송작전이라는 유튜브 생방송을 진행했다. 경기도 국정감사에 출석한 이재명의 발언을 팩트체크하겠다는 의도였다. 대장동 의혹은 매우 중요한 이슈이며, 이재명을 포함해 모든 관련자들의 의혹은 낱낱이 규명돼야 한다. 하지만 대선 후보 경선에서 최종 단계까지 오른 후보가 남의 국감 생중계라니. 경선 기간을 이렇게 흘려보내도 되나.

후보들은 반박할지 모른다. 경선은 당원과 지지층을 상대로 한다, 다른 후보를 깎아내려서라도 앞서는 게 우선이다, 당의 후보가 되고 나서 가치와 비전을 밝히면 된다.

지금 비전을 말하지 않는 사람은 나중에도 말하기 어렵다. 각 주자가 경선 과정에서 정책공약을 공개하면 상호 토론이 이뤄지고, 전문가와 시민의 검증을 받는다. 이 과정을 통해 뼈대만 앙상하던 정책에 살과 근육이 붙는다. 본선에선 살과 근육이 붙은 튼실한 정책을 놓고 일전을 벌여야 한다.

모든 선거의 목표는 승리다. 하지만 승리에만 매몰돼선 승리하지 못한다. 내년 대선은 사실상의 1 1 구도가 될 테니, 정책이나 비전 따위는 무용하다고 할 텐가. 2002년과 2012년 대선도 사실상 양자 구도로 치러졌다. 승부는 간발의 차로 갈렸다. 승자에겐 시대정신을 담은 비전이 있었다. 노무현의 행정수도 이전, 박근혜의 경제민주화다.

혹시 검찰총장 이후, 당대표 이후, 원내대표 이후, 제주지사 이후 새로운 직업을 찾는 게 목표라면? 지금처럼 해도 된다. 정권교체 여론이 높은 만큼 당선 가능성도 있다. 다만 이렇게 대통령이 탄생한다면, 본인을 위해서나 주권자를 위해서나 바람직하지 않다.

 

정말로 하고 싶은 게 없나. 해체’(윤석열)나 비례대표 폐지’(홍준표), 여성가족부 폐지’(유승민) 같은 것 말고, 한국 사회를 성큼 나아가게 할 그 무엇을 기다린다. 경선이 끝나고 난 뒤 조명이 꺼진 무대에 천공스승만 기억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김민아 논설실장 경향 : 2021.10.18

 

 

메르켈이라면 어땠을까?

화려한 웅변술로 상대를 악마화하고 유일선을 자처하는 지도자들이 판을 치는 정치의 장에서 개인의 카리스마를 앞세우지 않고 오로지 성과로써 입증하는 메르켈의 문제 해결형 리더십이 높은 신뢰를 받는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지금 우리에게 대선 후보 중에 옳은 일을 한다고 믿을 만한 사람은 누굽니까?’라고 묻는다면 우린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

 

테스토스테론으로 들끓는 남성 클럽과 같았던 독일 정치를 정책 토론의 장으로 변화시켰다.”

지난달 23<비비시>(BBC)메르켈 총리의 정치적 유산이라는 제목의 뉴스에서 전문가의 논평을 인용해 이같이 보도했다. 메르켈은 정치적 이슈를 정쟁의 대상으로 삼아 상대를 공격하기보다 문제 해결을 위해 치밀한 정책 토론을 벌이는 것에 중심을 두었고, 이를 통해 포퓰리즘과 극단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세계 정치에 조용한 혁명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앙겔라 메르켈. 2005년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이자 최연소 총리로 선출되어 지난 16년간 독일과 유럽연합을 이끌어온 사람. 보수 성향의 기독교민주당 출신이지만 색깔이 다른 정치세력과 연정을 구성해 원전 폐지, 모병제, 동성 결혼 등 진보적 이슈를 수용하고, 시리아 난민 100만명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독일의 도덕적 리더십을 확립한 정치인. 자신을 중용한 헬무트 콜 총리의 비리 의혹에 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재임 중 단 한건의 비리나 부패 스캔들도 용납하지 않은 원칙주의자.

 

케이티 마튼의 <메르켈 리더십>을 보면, 메르켈은 주중에는 베를린의 월세 아파트에 머물면서 직접 쇼핑카트를 끌고 장을 봐 음식을 해 먹고 주말에는 티브이도 없는 동독 지역 시골집에서 지낸다. 사생활 노출을 극도로 꺼리고 가족을 공적 영역으로 끌어들여 정치적 선전의 들러리로 삼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사회주의자인 그의 부모는 유권자로서 메르켈의 정당에 한번도 표를 던지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메르켈은 정치적 팬덤에 의지하거나 리더십을 인격화하는 것에 진저리를 친다. 정적 타파를 위해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트럼프나 푸틴은 물론, 동시대 정치 아이돌로 등극한 오바마나 마크롱과도 확연히 구분되는 행보이다.

 

메르켈은 2020년 퓨 리서치센터가 수행한 여론조사에서 세계에서 가장 신뢰받는 지도자로 평가받았다. 질문지 원본을 찾아보니 ‘(그를) 얼마나 지지하는가?’를 묻는 게 아니라 ‘(그가) 옳은 일을 한다는 신뢰를 어느 정도나 가지고 있는가?’였다. 화려한 웅변술로 상대를 악마화하고 유일선을 자처하는 지도자들이 판을 치는 정치의 장에서 개인의 카리스마를 앞세우지 않고 오로지 성과로써 입증하는 메르켈의 문제 해결형 리더십이 높은 신뢰를 받는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지금 우리에게 대선 후보 중에 누구를 지지합니까?’가 아니라 대선 후보 중에 옳은 일을 한다고 믿을 만한 사람은 누굽니까?’라고 묻는다면 우린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

 

대장동 사태의 근원적 책임이 누구에게 있고, 투기로 인한 폭리의 수혜자가 누구인가를 놓고 연일 여야 간 정치공방이 뜨겁다. 그러나 정작 사건을 보는 유권자들의 마음은 냉담하고 허탈하다. 치열하게 물고 뜯는 대선 후보 간의 폭로전이 아니었다면, 대장동 사태가 이토록 세간의 관심을 끄는 사안으로 부각될 수 있었을까? 투기 전문가와 권력층이 결탁해 천문학적 이권을 챙기는 부패의 사슬은 화천대유 하나뿐일까? 대선 후보와 직접 연관되지 않아 조용히 넘어간 대장동은 더 없을까? 결국 누군가는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겠지만, 차기 정부가 부동산 비리를 발본색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토지와 주택을 불로소득의 꿀단지로 삼는 이들은 정권이 어떻게 바뀌든 대대손손 부동산 불패 신화를 이어왔다. 부동산 경기가 침체할 때는 부동산 부양책을 부르짖고 부동산 가격이 폭등할 때는 주택 공급 확대를 주장했다. 부수고 짓고, 헐어서 올리고를 반복하면서 주택 공급률은 104%에 이르지만, 집 없는 사람은 줄어들지 않았다. 198059%였던 자가점유율은 2019년에도 58%를 기록해 40년째 제자리를 맴돈다. 지금도 양당 주요 후보는 입을 모아 250만호 주택 공급을 약속한다. 그러나 노태우 정부가 경기도 분당, 일산, 평촌 등에 신도시 조성으로 공급한 물량이 200만호였던 점을 감안하면 그 현실성도 실효성도 신뢰하기 힘들다. 해법은 없고 비방만 난무한다. 이럴 때 메르켈이라면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어떤 상황을 고민할 때 결말을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바람직한 결과부터 생각하고 역방향으로 일을 진행하는 거죠. 중요한 것은 내일 우리가 신문에서 읽을 내용이 아니라, 2년 후에 달성할 결과입니다.”

우리가 그려야 할 결말은 자명하다. 임대든 자가든 누구나 안정적인 삶의 공간을 보장받는 것이다. 신뢰할 수 있는 정치인이란, 그 결말을 향해 치밀한 로드맵을 제시하는 사람이다. 상대가 올바르지 못하다는 것으로 자신의 올바름을 증명하려 드는 사람이 아니다./이진순ㅣ재단법인 와글 이사장 한겨레 : 2021.10.19.

 

문재인과 민주노총 어떤 사이일까

세상은 늘 꿈꾸는 바보들이, 강도 만난 이웃에게 손 내미는 선한 사마리아인들이 구원해왔다. 청소부든, 막일꾼이든 각자의 노동이 존중받고, 자신의 존엄을 지키며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꿈꿨던 전태일처럼, 조영래처럼.”

 

한 신문사 중견언론인이 쓴 칼럼(1019)의 일부다. 어디일까. 전태일 정신을 줄곧 지켜온 듯 칼럼을 내보낸 이 신문은. 뿐만 아니다. 같은 날 사설은 대장동 개발에서 민간의 초과이익 환수를 격렬하게 부르댄다. 공영개발의 마지막 지킴이처럼 다가오는 이 신문은 어디일까.

 

조선일보다. 모두 민주당 대선 후보 이재명을 조준하고 있다

의혹을 따따부따하고 싶진 않다. 다만 사실은 분명히 짚자. 이 신문에서 반세기 넘도록 일관된 방향은 각자의 노동이 존중받고, 자신의 존엄을 지키며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었다. 정반대다. 그 세상을 이루려고 애면글면 앞장선 사람들을 내내 마녀로 사냥했다. 조금이라도 공공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에겐 거침없이 붉은 색깔을 칠해왔다.

 

조선이 앞장서고 동아와 중앙이 따라가는 지록위마의 억지는 하나 둘이 아니다. 이재명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끈질기게 훌닦인 마녀가 있다. 다시 사실부터 살펴보자. 현재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불평등 심화다. 비정규직과 5인 미만 사업장 차별은 인권 유린 수준이다. 모든 노동인이 노조를 할 권리도 온전히 구현되어 있지 못하다. 젊은 세대가 곧 부딪쳐야 할 일터의 현실이다. 산업 전환기를 맞아 국가가 일자리를 책임지지 않을 때, 실업자는 양산될 수밖에 없고 그만큼 자영업도 어려워진다. 아파트 값 폭등처럼 주거 문제는 새삼 말할 나위 없다. 대학 등록금은 여전히 세계적 수준이다. 의료와 돌봄의 공공성도 풀어야 할 숙제다.

 

동시대를 살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묻고 싶다. 그 국가적 의제들을 풀자며 가장 열정을 쏟고 있는 조직은 어디인가. 문재인 정부인가? 민주당인가? 국민의 힘인가? 정의당인가? 아니면, 전국경제인연합인가?

 

선뜻 정답이라 할 조직이 없을 터다. 그렇다면 어디인가. 현실적으로 아무런 정치권력도, 경제권력도 지니지 못한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다. 앞서 나열한 시대적 과제들이 바로 민주노총이 총파업에 내건 요구들이다.

 

그런데 어떤가. 많은 사람이 민주노총을 귀족노조로 인식하고 있다. 조중동 신방복합체의 무서운 세뇌 결과다. 가장 교활한 세뇌는 세뇌당한 사람이 의식하지 못한 세뇌다. 조중동은 틈날 때마다 민주노총을 귀족노조로 몰아쳐왔다.

 

과연 그러한가? 거듭 사실을 짚자. 민주노총 조합원의 30퍼센트가 비정규직이다. 그 통계도 믿어지지 않는다면 거꾸로 살필 일이다. 민주노총을 귀족노조로 비난하는 조중동은 비정규직 차별에 어떤 보도를 해왔는가. 민주노총을 귀족으로 비난할 정도라면 조중동은 비정규직은 물론 산업재해 줄이기에 앞장서야 했다. 하지만 조중동은 비정규직 차별을 의제화하지 않았다. 중대재해 처벌을 둘러싼 조중동의 보도와 사설들을 들춰보면 추악한 민낯이 드러난다.

 

기막힌 기만극의 압권은 민주노총과 문재인 대통령 사이. 조중동은 문재인과 민주노총의 관계를 동맹’, 심지어 실세로 보도해왔다. 정부가 위원장을 구속한 뒤에도 언죽번죽 같은 논리를 폈다. 이유는 확연하다. 민주노총과 문재인 모두 그들의 이해관계와 맞지 않아서다. 그들 논리에 정부는 점점 말려들었다. 정부는 반년 전부터 총파업을 예고한 민주노총의 대화 요구를 묵살해왔다. 민주노총에 끌려 다닌다는 조중동 논리가 먹혀든 꼴이다.

 

민주노총의 총파업을 지지하는 시민사회단체나 진보정당들의 목소리는 조중동은 물론 공영방송에서도 잘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진보언론에서도 그렇다. 조중동, 특히 조선일보가 한껏 활개 치는 까닭이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바보들은 어디 있을까./건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미디어오늘 2021.10.19

 

 

구조적 담합과 부패

카르텔은 같은 업종의 기업들이 가격 결정 혹은 생산량 결정과 같은 공동행위를 통해 독점 이익을 획득하려고 할 때 형성된다. 독점 가격을 책정하거나 공급량을 제한하는 공동행위는 카르텔에는 이익이 되지만 소비자나 다른 기업에 더 큰 손해를 입혀 사회적으로는 해악을 끼친다. 카르텔은 담합의 일종이다. 담합의 통상적 의미는 여러 사람이 부당한수익을 목적으로 협력하는 것을 말한다. 공정거래법에서 부당성의 기준은 경쟁제한과 효율성이다. 담합으로 공동행위자들 간의 경쟁 혹은 다른 시장 참여자들과의 경쟁이 제한되면 공동행위자들의 이익은 커지지만, 시장의 총잉여는 감소하여 비효율성이 발생한다.

 

공권력을 필요로 하는 시장에서 권력기관의 전·현직 관료들이 뭉치면재화(권력)의 독점 공급자의 지위를 얻을 수 있다. 검찰카르텔, 사법카르텔, 토건카르텔 등의 표현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학술적으로 적법한 표현이다. 공권력은 만인에게 공평하게 행사돼야 하니 사적으로 거래돼서는 안 된다. 따라서 공권력 시장은 마땅히 불법 암시장이 돼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고위직 검사로 퇴임한 전관 변호사가 한 사건에서 10억원의 수임료를 받고 한 해 100억원에 가까운 소득을 버는 것은 별일 아닌 것이 됐다. 지금 온 나라를 시끄럽게 하는 대장동 토건비리 사건에서도 검찰 출신 의원의 아들이 받은 50억원을 푼돈같이 취급한다. 전관이 파는 것이 뭐길래 그렇게 비쌀까? 바로 공권력이다. 이런 몰상식한 관행이 상식이 돼버렸다.

 

공정거래법이 규제하는 담합이나 카르텔에는 검찰, 사법, 토건 등 이른바 권력기관 엘리트들의 카르텔은 포함되지 않는다. 공권력을 사고파는 시장은 존재하지만 그 시장을 인정하는 순간 합법은 불법이 되고 불법은 합법이 되는 자기모순에 빠지니 당연하다. 그래서 공권력 시장은 부패에 관한 법이 규제하지만 허술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검찰과 사법부를 아우르는 법조계가 힘을 합치면 법의 잣대는 고무줄이 된다. 부패가 부패를 낳는 악순환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금융카르텔의 금융사기 수입이 토건카르텔의 종잣돈이 되고, 토건비리의 거금이 법조카르텔의 종잣돈이 된다. 바로 대장동 토건비리에서 드러난 팩트다.

 

오랜 관행, 허술한 법과 제도, 시장과 권력의 편향적 구조 등의 영향 속에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도덕적 책임을 느끼거나 느끼지 않거나, 소속 집단에 이익이 되는 공동행동들이 이루어진다. 이런 담합은 개인이 의도하지 않더라도 그 개인을 지배하는 사회구조에 기인하므로 구조적이다. 이런 구조적 담합이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 검찰카르텔, 토건카르텔, 모피아, 관피아, 이런 조어들이 필요할 만큼 권력형 비리 사건·사고가 흔하게 일어난다. 한국이 아직도 다른 선진국들보다 부패한 사회라는 국제기구의 조사결과도 이런 구조적 담합이 만연하기 때문이다.

 

전직 대통령 두 사람이 중형으로 감옥에 갇힌 것도 바로 중대부패 때문이다. 수백만명의 국민들이 분노의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일 수 있었기에 대통령의 중대부패를 처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회 곳곳에서 공권력을 매매하는 중대부패는 아랑곳하지 않고 성업 중이다. 수억, 수십억원의 전관 수임료는 그 권력의 가격이고 부패로 겪는 국민 고통의 크기다. 권력형 부패사건이 발발하면 무엇을 탄핵해야 할지 정치는 국민을 오리무중으로 이끈다.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주 목적이다. 그래야 정치권력도 사고팔 수 있기 때문이다.

 

구조적 담합과 부패 척결이 우리 사회의 중대과제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검찰, 사법 등 권력기관에 대한 개혁이 지속돼야 한다. 검사와 판사들에 대한 징계는 다른 공직자들과 비교할 때 터무니없이 허술하다. 권력기관의 인사제도에 대한 전면적인 개정이 필요하다. 아울러 강력한 독립 반부패기구를 만들어야 한다. 고위관료의 퇴임 후 취업활동과 소득에 보고 의무를 강화하고 이를 데이터베이스화하여 전관예우에 대한 상시적인 실태조사가 이루어지고 공개돼야 한다.

 

개발사업과 부동산투기, 금융투기 등 불로소득은 구조적 담합과 부패의 온상이다. 공공의 토지수용권이 동원된 개발사업의 이익을 공공이 최대한 환수할 수 있도록 개발이익환수법을 강화해야 한다. 토지는 공공이 소유하고 건물은 민간에 분양하는 토지임대부 주택공급을 대폭 확대하는 것도 부동산 투기과열을 막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근본적으로는 헌법에 토지공개념 조항을 명시하여 부동산 투기와 불로소득에 보다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길을 열어야 한다./주병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경향 : 2021.10.20

 

흙수저 우대는 가난의 존중과 배려인가

지난 10월 초순 때아닌 어린 시절 옷 사진공방이 있었다. 이재명 캠프의 대변인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재명과 윤석열의 어린 시절 사진을 올린 뒤 이재명의 옷과 윤석열의 옷 사진을 보며 생각은 각자의 그릇만큼이라는 글을 적었다. 이는 부잣집 아이 같아 보이는 윤석열의 어린 시절 사진을 이용해 이재명이 흙수저 출신임을 강조하겠다는 뜻으로 읽혔다.

그러자 홍준표 캠프의 대변인은 가난을 스펙’, ‘패션으로 활용하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취약계층을 욕보이는 일 아닐까라고 비판했다. 시사평론가 김수민은 이재명 쪽은 조국을 속으로 싫어하나 봄이라는 짧은 글과 함께 조국의 어린 시절 사진을 공개했다. 이는 깔끔한 정장을 입고 나비넥타이를 한 사진 속 조국이 윤석열보다 더 유복하게 자랐다는 뜻으로 해석되었다. 이재명 사진의 원본은 컬러였음에도 흑백으로 올렸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또 한번 작은 논란이 일었지만, 이 또한 이재명의 가난을 강조하는 효과를 내기 위한 것이었을 게다.

이 공방은 웃어 넘겨도 좋을 해프닝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한국사회와 한국인에 대해 의외로 많은 것을 말해주는 중요한 사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렇게 가난 경험을 강조하는 걸까? 부자보다는 서민 유권자가 더 많기 때문일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조금 다른 해석도 가능할 것 같다. 이제 그런 이야기를 해보련다.

 

누구나 다 인정하겠지만, 정치인이 흙수저 출신이라는 건 큰 정치적 자산이 된다. 아니 훈장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대선 후보들 가운데 최고의 흙수저는 단연 이재명이다. 홍준표도 그 자신의 말처럼 뼛속까지 흙수저였지만, 이재명의 수준엔 미치지 못한다. 이재명은 공장 생활 6년 동안 4년을 남의 이름으로 살아야 했다. 겨우 13세의 나이에 소년공으로 세상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이재명의 지지자들이 쓴 이재명 예찬서들엔 어김없이 이재명이 겪은 최악의 가난과 그걸 이겨낸 이재명의 불굴의 투지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런 인간승리 스토리에 호감을 갖는 건 비단 이재명 지지자들에게만 국한된 게 아니다. 문자 그대로 파란만장한 근현대사를 겪어왔거나 그 경험을 가족을 통해 전수받은 한국인들은 그런 스토리를 사랑하며, 이는 대중문화에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다.

 

드라마 작가들이 말하는 성공 공식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 승리. 시청자들은 가진 것 없는 사람이 잘되는 이야기”(김정수), “신분상승을 다룬 성공 스토리”(정하연)를 사랑한다. 대중은 삶 자체가 성공 스토리인 연예인들을 우대한다. TV의 예능 토크쇼에선 성공한 연예인들이 나와 무명 시절 고생담을 이야기하는 게 주요 메뉴가 되었다. 그래서 급기야 한 어린이는 아버지에게 아빠, 연예인이 되려면 어릴 때 반지하 방에 살아야 해?”라고 묻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렇듯 가난 경험을 우대하는 대중의 정서적 토대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면, 앞서 거론한 어린 시절 옷 사진사건도 일어나지 않았을 게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다. 과거의 가난을 그렇게 높게 평가하는 한국인들이 어쩌자고 현재의 가난한 사람들에겐 등을 돌리는 걸까? 아니 왜 모멸까지 하는 걸까? 대중의 일상적 영역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오는 각종 갑질사건을 보라. 갑질을 당하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낮은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어떤 곳에 사느냐에 따라 벌어지는 가난 차별은 징그러울 정도로 심하다. 20203월 한겨레21이 서울에 300가구 이상 공급된 공공임대아파트 158개 단지와 서울시 616개 초등학교 통학구역을 한 달간 분석한 기사에 따르면, 임대아파트 아이들에게 쏟아진 차별과 혐오의 시선, 분리와 배제의 시도가 매우 심한 것으로 나타났다. 임대아파트뿐만이 아니다. 201911월 사회비평가 박권일은 다음과 같이 개탄했다.

 

어느 초등학교 옆을 걸어가다 들었다. ‘, 걔 빌거잖아. 차도 엄청 구림.’ ‘진짜?’ 그 뒤로도 뭔가 재잘댔지만,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빌거란 말이 유리 조각처럼 콕 박혀서, 종일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빌거또는 빌거지빌라 사는 거지. ‘월거지월세 사는 거지. 한국사회에서 계급은 신분을 넘어 인종적 표지가 되었다. 영화 <기생충>반지하 냄새는 그렇게 자연화된 계급차별에 대한 하이퍼리얼한 묘사였다. 가난한 이에 대한 차별과 모욕은 이미 인종차별처럼 벌어지고 있다.”

 

이런 사례들을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우리는 정치라고 하는 공적 영역에서는 전혀 다른 자세를 취한다. 대선 후보에게 이렇다 할 스토리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건 성패를 결정하는 요인처럼 여겨지는데, 이런 스토리의 최상급이 바로 가난 경험이 아닌가. 이 두 개의 다른 얼굴이 의미하는 건 무엇일까?

흙수저 출신 우대가난 존중과 배려라기보다는 오히려 정반대의 현상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개천에서 난 용의 스토리이다. 가난 탈출을 위해 국민적 차원에서 전쟁 같은 삶을 살아온 우리에게 가난은 멸시와 혐오의 대상일 뿐이다. 그런 감정이 강할수록 오히려 개천에서 난 용의 스토리 파워는 강해진다. 이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차별과 모욕을 없애거나 개선하는 데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가난 경험이 가난한 사람들을 배려하는 국정운영의 동력이 된다는 것도 꼭 들어맞는 이야기는 아니다. ‘개천에서 난 용이었던 역대 대통령들을 보라. 그들은 거의 대부분 개천을 배신했으며, 이는 개천의 대명사로 통하는 지방의 소멸 현상이 그걸 잘 증명해주고 있지 않은가. 개천에서 더 많은 용이 나와야 한다고 외쳐봐야 지방소멸만 가속화할 뿐이다. 이게 바로 지난 반세기 넘게 우리의 정신과 몸에 각인된 각자도생 문법이다.

 

최근 동아일보의 통계청 자료 분석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영양실조와 영양결핍으로 숨진 사람은 345명이었다. 코로나19 유행 전인 2019(231)1.5배로 늘었다. 통계에 잡히지 않은 사망자와 죽음 직전의 상태에까지 이른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결코 무심하게 넘어갈 수 없는 사건이다. 이는 흙수저 출신 우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 아닌가.

 

인하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윤홍식은 지난 8월에 출간한 <이상한 성공: 한국은 왜 불평등한 복지국가가 되었을까?>에서 노인 중 절반이 빈곤에 신음하고 세계 최고의 자살률과 최저의 합계출산율을 기록할 정도로 한국사회가 불행에 빠진 이유를 탐구했다. 그는 한국이 이상한 선진국이 된 이유는 한국이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성공했기 때문이라는 역설적인 답을 제시한다. , 지금 우리의 불행이 실패의 결과가 아니라 성공의 결과라는 것이다.

 

우리가 성공할 수 있었던 건 잘살아 보세라는 구호로 대변되는 가난 탈출을 위한 필사적인 노력과 집념 덕분이었다. 그 방식은 각자도생의 전쟁 같은 삶이었다. 고성장 시대가 끝나면서 그마저도 어렵게 되자 희망으로 극복해온 불행이 한꺼번에 터져나온 게 아닐까?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전 세계적인 성공은 자랑스럽게 생각할 일인 동시에 부끄럽게 생각할 일이다. 드라마가 탁월한 예술적 감각으로 사회현실을 포착하고 고발한 문화적 역량은 자랑이지만, 그 사회현실이 우리가 이룬 이상한 성공의 결과라는 점은 수치다.

한국인처럼 우리라는 말을 즐겨 쓰는 사람들도 없지만, 동시에 한국인처럼 에 충실한 사람들도 없다. 우리는 우리의 관점보다는 의 관점으로 세상을 살아가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건 우리의 관점과 의 관점의 균형이다. 달리 말하자면, 사회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관심을 의 문제로 여길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어린 시절 옷 사진사건의 경우처럼 인간 승리의 이미지 소통보다는 빈곤층을 위한 실질적인 정책에 관심을 가지면서 각자도생의 관성에 균열을 내려는 시도가 필요하다. 각자도생형 평등주의는 우리의 삶을 전쟁으로 만들면서 불평등을 심화시킬 뿐이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호구지책 문제로 인해 투표할 시간조차 없는 빈곤층은 정치인들의 관심 밖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흙수저 출신 우대가 가난한 사람들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키우는 쪽으로 이루어지면 좋겠다./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경향 : 2021.10.20.

 

지금까지 우리는 '성장'에 중독된 '코리안 드림'의 수인이었다

좌파가 탈성장론에서부터 다시 출발해야 하는 이유

이제 기후 위기를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2050년까지 기후 급변의 주 원인인 탄소 배출을 제로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는 목표에 대놓고 반대하는 이도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지중해의 산불, 동아시아의 호우, 가을이 사라진 한반도 날씨 등등을 보고도 위기를 부인하고 전환을 불온시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논쟁이 끝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치열한 제2라운드가 시작됐다. 한편에는 경제의 양적 성장을 지속하면서도 탈탄소 사회로 전환할 수 있다는 '녹색 성장'론이 있다. 물론 그 안에는, 여전히 성장에 더 강조점을 찍으며 위기의 책임자인 대기업을 전환의 주역으로 내세우는 우파적 버전도 있고(문재인 정부가 그 전형이다), 이들에 비해서는 전환 쪽에 더 강조점을 찍지만 일자리를 창출하려면 일정한 양적 성장은 불가피하다고 보는 좌파적 버전도 있다. 어쨌든 지금 기후 위기 대책의 주류는 이 흐름이다.

 

이들의 반대편에는 '탈성장'론이 있다. '탈성장'은 프랑스어 decroissance, 영어 degrowth의 번역어다. 탈성장론자들은 경제의 양적 성장을 지속하면서 탄소 배출을 줄이겠다는 녹색 성장 노선의 시도가 시시포스의 노동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비록 전력 생산을 재생가능에너지 중심으로 바꾼다 하더라도 경제가 계속 성장하면 전력 사용량이 늘어나게 마련이고, 그럼 탄소 배출은 줄기는커녕 오히려 늘어나기 쉽다.

 

사실 탈성장론의 녹색 성장 비판은 너무나 강력하고 탄탄하여 수긍하지 않기 힘들다. 그러나 논의가 "그래서 무엇을 하자는 이야기냐"로 넘어가면, 분위기가 전혀 달라진다. '마이너스 성장'을 연상시키는 '탈성장'이라는 번역어부터가 대중의 접근을 차단한다

 

또한 탈성장론은 GDP 같은 수치에 집착하는 경제 성장 논리를 비판하자는 것인데, 이야기가 "탈성장하려면, 성장률 제로여야 하느냐, 아니면 마이너스 몇 % 성장(역성장)이어야 하느냐"로 흐르는 순간 탈성장론 자체가 숫자 물신주의의 일부인 양 희화화되고 만다. 녹색 성장론이 모순으로 가득 찬 만큼이나 탈성장론은 의심과 몰이해, 관성과 반발의 장벽 안에 단단히 갇혀 있다.

 

탈성장론의 한 뿌리 코르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의 사상

나 자신 아직은 뭐가 답이라 장담하기 힘들다. 계속 공부하고 고민하는 처지다. 열정적인 탈성장론자 요르고스 칼리스 등이 쓴 <디그로쓰: 지구를 식히고 세계를 치유할 단 하나의 시스템 디자인>(산현재, 2021)을 우석영 작가와 함께 우리말로 옮겨 낸 것도 이런 작업의 일환이다. 이 책을 옮기면서 비로소 나는 탈성장론자들이 비판 논리만이 아니라 나름의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려고 노력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러면서 우리 시대에 탈성장이 제창될 수밖에 없는 근거를 더욱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게 됐다.

 

특히나 2000년을 전후해 프랑스에서 탈성장론이 처음 체계적으로 발전할 무렵의 주된 고민이 인상적이었다. 흔히 프랑스 탈성장론의 대표적 사상가로 평가받는 세르주 라투슈는 여러 저작에서 당시 고민을 반복적으로 언급한다. 그리고 그때마다 빠뜨리지 않는 이름이 있다. 코르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 그리스에서 나서 프랑스에서 활동한 20세기 사상가다. 이미 몇 년 전에 나온, 요르고스 칼리스 등의 또 다른 책 <탈성장 개념어 사전>(강이현 옮김, 그물코, 2018)에서도 라투슈는 주로 카스토리아디스의 사상을 돌아보며 탈성장론의 원점을 짚는다.

 

카스토리아디스는 본래 트로츠키주의자였다. 그러나 전후 프랑스에서 공산당노선과 현실사회주의 체제를 비판하면서 정통 트로츠키주의(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자체)를 넘어서는 독창적인 사상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일단 그는 탈자본주의 사회의 요체를 노동계급의 자율성에서 찾았다. 생산 현상에서부터 노동자가 자율적으로 결정을 내리고 사회 전체가 이런 아래로부터의 결정들에 따라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기준으로 보면, 현실사회주의는 결코 바람직한 대안이라 할 수 없었다. 아니, 본질적인 면에서 자본주의와 별 차이가 없었다. 여기에서부터 카스토리아디스 사상의 모험이 시작된다. 자본주의와 현실사회주의는 겉보기에 서로 다른 대목도 많지만, 가장 근본적인 점에서 일치했다. 둘은 동일한 사회적 상상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 상상이란 인간과 자연을 합리적으로 지배하여 끝없는 진보를 이뤄낼 수 있다는,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신화였다.

 

노동계급의 자율성이 살아 있는 사회라면, 이런 신화가 지배해선 안 된다. 해방된 사회라면, 사람들이 좋은 삶이란 무엇인지 스스로 물음을 던지고 그 답을 찾아나가야 한다. 물론 그 답은 쉽게 찾을 수 있는 게 아니고, 애당초 답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다. 좋은 사회는 단지 각자가 스스로 좋은 삶에 관해 물음을 던지고 답을 구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기에 가장 좋은 제도들을 갖추려고 노력할 뿐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현실사회주의는 모두 이런 상상력의 분출을 가로막았다. 사람들이 자신의 상상력을 발휘하도록 북돋기는커녕 하나의 신화로 상상계 전체를 식민화했다. 두 체제 다 진보의 신화로 상상계를 획일적으로 지배하려 했다. 진보의 신화에 맞춰 좋은 삶을 상상하도록 강요했고, 이 상상계 안에서 얼마나 표준에 가까워졌는지에 따라 삶을 평가하게 만들었다. 단지 소련과 동유럽은 이를 더욱 세련된 게임으로 만드는 데 실패한 반면 자본주의는 중국까지 끌어들이며 지금껏 이를 지속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현실사회주의는 모두 이런 상상력의 분출을 가로막았다. 사람들이 자신의 상상력을 발휘하도록 북돋기는커녕 하나의 신화로 상상계 전체를 식민화했다. 두 체제 다 진보의 신화로 상상계를 획일적으로 지배하려 했다. 진보의 신화에 맞춰 좋은 삶을 상상하도록 강요했고, 이 상상계 안에서 얼마나 표준에 가까워졌는지에 따라 삶을 평가하게 만들었다. 단지 소련과 동유럽은 이를 더욱 세련된 게임으로 만드는 데 실패한 반면 자본주의는 중국까지 끌어들이며 지금껏 이를 지속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이것은 카스토리아디스 사상의 소개로는 지나치게 간단하고 일면적이다. 그는 우리말로 아직 그 전모가 소개되지 못한 대작 <사회의 상상적 제도(The Imaginary Institution of Society, 1975)>에서 자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동시에 비판하며 장대한 사상 체계를 구축했다. 이 책을 포함한 그의 사상 전반에 관한 본격적인 소개와 음미가 꼭 필요하지만, 이는 미래의 과제로 넘겨야 하겠다.

 

다만 여기에서 확인해야 할 것은 탈성장론의 출발점이다. 카스토리아디스의 사상이 무르익을수록 그는 상상계를 획일적으로 지배하는 성장 신화와 대결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래서 그는 20세기 말의 선구적인 생태주의 사상가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의 영향을 받은 라투슈 같은 이들은 이를 '상상계의 탈식민화' 과제라 불렀으며, 그들이 결국 합의한 더 짧은 표어가 다름 아닌 '탈성장'이다.

 

탈성장론의 여러 계보들 가운데 이 한 가닥을 짚어보는 것만으로도 탈성장론의 인상은 훨씬 더 다채로워진다. 탈성장론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살아가고자 하는 '좋은 삶'에 관해 우리 스스로 제대로 생각해본 적이 있는지 자문(自問)하자는 호소다. 이렇게 자문하면 누구나 마주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생각은 분명 아닌, 그리고 더 이상 의미를 찾기도 힘든 낯선 신앙이다. 도대체 왜 내가 여태껏 이 신앙에 맞춰 살아왔지? 카스토리아디스 자신은 이렇게 말한다.

 

"아무도 더 이상 진보를 진짜로 믿지 않는다. 모두가 내년에 조금 더 가지고 싶어 하지만, 행복이 연간 3%의 소비 성장에 달려 있다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성장의 상상계는 분명 여전히 존재한다. 이는 서구에서 유일하게 유효한 상상계이기도 하다. 서구인들은 곧 해상도가 높은 텔레비전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탈성장 개념어 사전> 216쪽에서 재인용)

 

"과거와 비할 수 없는 규모의 새로운 상상계를 창조하는 데 필요한 것은 생산과 소비의 확장 외의 의미들을 삶의 중심에 놓는 것이다. 즉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삶의 다른 목표들을 중심에 놓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마주해야 할 매우 어려운 과제이다. 우리는 경제적 가치가 더 이상 중심에 (혹은 유일하게) 있지 않는 사회, 즉 경제를 궁극적 목표가 아닌, 단지 삶의 수단으로 되돌리는 사회, 다시 말해 계속해서 증가하는 소비를 향한 광란의 질주를 포기하는 사회를 바라야 한다. 이는 자연 환경 파괴를 피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현대 인간의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빈곤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더욱 필요하다." (위의 책, 214쪽에서 재인용)

 

좌파가 탈성장론에서부터 다시 출발해야 하는 이유

흔히 중국을 자본주의와 국가사회주의의 끔찍한 혼종이라고 하지만, 이 방면에서 대한민국이야말로 성공적인 선구자였음을 잊어선 안 된다. 상상계의 식민화에 관한 한, 한국은 자본주의의 역량에 국가사회주의식 수단까지 더하여 세계사적 극한을 실험한 나라다. 단지 숱한 기업의 광고만 진보의 신화를 퍼뜨린 게 아니라, 지금도 40대 이상 시민의 뇌리에 강렬히 남아 있는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라는 노래 가사 등을 통해 국가까지 나서서 이 신화를 주입했다.

 

한국 사회의 경로를 가장 급격하게 바꾸겠다고 장담한 세력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한국에서 좌파가 실패한 것은 개량주의에 빠져 혁명을 저버렸기 때문도 아니고 혁명의 미망에 사로잡혀 현실적 개혁을 등한시했기 때문도 아니다. 문제는 훨씬 더 근본적이었다. 한국의 좌파는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와 그 변주에서 사람들을 깨우지 못했다. 깨우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못했다. 단지 저 꿈의 실현 범위를 넓혀 달라고 청원했을 뿐이다. 좌파 역시 '코리안 드림'의 수인(囚人)이었다.

 

탈성장의 문제제기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탈성장론이 요구하는 과제와 대면하고 나서야 우리는 오늘날 이 땅에서 진정한 변혁운동의 방향과 내용을 깨달을 수 있다. 그것은 '사는' 것이다. 이제야, 제대로, 말이다. 우리 시대의 좌파가 탈성장론에서부터 다시 출발해야만 하는 까닭이다./장석준 출판&연구집단 산현재 기획위원 | 프레시안 2021.10.20.

 

 

지식인과 지식 기술자

대선 정국·국정감사까지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대장동 개발 사업 특혜·로비 의혹을 지켜보면서 참담했다.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부동산 개발이익 규모가 수조 원대에 달한다는 사실과 공공에 돌아가야 할 막대한 이익은 토건 세력과 권력자들의 배만 불려 주었다는 불편한 진실이 그랬다. 그리고 니가 거기서 왜 나와라는 유행어가 생각날 만큼 법조·언론·정치 카르텔이 호명되는 현실이 서글펐다.

 

일찍이 장 폴 사르트르는 지식인의 변명이란 책에서 지식인의 기능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어떻게 특정 분야의 지식만을 쌓은 사람들이 보편적인 선을 대변할 수 있느냐는 도전적인 질문을 던졌다. 만약 그 지식인이 기능적 지식인의 위치에 머무른다면 부르주아라는 특정 계급의 이익에 복무하는 것일 뿐 보편적인 지식인이 되지는 못한다는 의미였던 것 같다. 그래서였는지 대장동 핵심 4인방의 이름과 직업이 불릴 때마다 괜히 뜨끔뜨끔했다. 부끄러움 때문이다.

 

그런데 국민의힘 대선 경선 후보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한술 더 떴다. 지난 19일 부산을 찾아 전두환 대통령이 군사 쿠데타와 5·18만 빼면 정치를 잘했다고 말하는 분들이 많다고 했다. 각계에서 비난이 빗발쳤지만,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고 버티다가 등 떠밀리듯 이틀 만에 사과가 아닌 유감의 뜻을 밝혔다. ‘가방 끈과 지식의 정도가 비례하는 건 아니지만, 명색이 서울대 법대를 나와 검찰총장까지 지낸 분이지 않던가. ‘서울의 봄5·18 광주민주항쟁을 짓밟고 들어선 전두환 신군부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저지른 온갖 악행과 인권 탄압의 역사를 알고도 그런 말이 나오는가 말이다.

 

언젠가 페이스북 지인도 대한민국에선 시험 잘 치는 것 말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무능한 자들에게 자유선택권이 너무 많이 주어지는 게 문제라고 토로한 적이 있다. 그때도 윤 후보의 주택청약 통장이나 부정식품 같은 실언이 잇따르고 있었는데, 틀린 말도 아닌 듯해서 속으로 맞장구를 쳤다. 솔직히 실언도 한두 번이지, 본성을 감추는 것도 한계가 있다.

 

한때 개인적인 관심이었지만, 조선시대 신분 계급인 중인에 대해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본 적이 있다. 철저한 유교 사회였던 조선시대만 해도 사회를 주도했던 핵심 지배층은 대부분 문과 출신의 사대부였다. 한데, 풀리지 않은 의문 가운데 하나가 의료(의원), 법률(율관), 금융(계사), 외교(역관), 천문지리(음양과) 같은 전문직은 왜 중인이란 계급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가였다. 그렇다. 중인은 평생 한 분야에만 종사했기 때문에 전문성은 강했지만, 문사철을 겸비한 사대부에는 미치지 못했다. 자기 분야에 갇혀서 상황을 종합적으로 보는 시야가 좁았다. 그래서 한낱 기술자로 치부한 측면도 없지 않았다. 지금이 조선시대는 아니지만, 한낱 기술자에 불과한 행태를 보이지 않으려면 개인적으로 더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지식인을, 혹은 기술자를 깎아내릴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지식인이 지식인답지 못할 땐 경우가 다르다. 그러니까 지식인은 지식 전문가 그룹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그 지식이 특정 계급을 위해 쓰이는 것이 아니라 전 인류를 위한 보편성을 획득할 때만이 비로소 효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무릎을 치며 읽었던 지식인과 학자를 구분한 예시가 생각난다. 완벽한 핵무기를 제조하기 위해 핵분열에 대해서 연구하는 학자들을 우리는 지식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들은 단순히 학자일 뿐이다. 그러나 이 학자들이 그들의 연구로 만든 핵무기의 가공할 만한 위력에 놀란 나머지, 핵무기의 사용을 억제하는 여론을 조성할 목적으로 회합을 갖고 선언문에 서명하면 비로소 그들은 지식인이 된다.

 

중요한 대목이다. 전문직업인이자 기술자로서의 지식인이 아닌, 철저한 비판 의식을 지닌 지식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요구이다. ‘행동하는 지성놈 촘스키는 지식인은 왜 이성이라는 무기로 싸우지 않는가란 화두를 던진 인터뷰에서 우리가 희망을 포기하면, 그래서 체념하고 소극적으로 처신하면 최악의 결과가 닥치는 걸 자초하는 셈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러한 혼란을 바로잡을 주역은 국민이고, 국민의 지혜로 현실을 바꿔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내년 39일 제20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다. 대선 후보 못지않게 국민들도 더욱더 공부하고, 현실을 직시할 수 있어야 제대로 된 대통령을 뽑을 수 있다. 그래야 군사 쿠데타와 5·18만 빼면 (전두환이) 정치는 잘했다고 말하는 분들이 많다고 하는 발언에도 당당하게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괴물이 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써도 될 둥 말 둥 한 데, 가만히 넋 놓고 있다가는 우리도 모르게 지식 기술자의 꾐에 넘어갈 수 있다. 경계해야 한다.

김은영 논설위원 부산일보 2021.10.21.

 

집단의 폭주

194485일 오스트레일리아 카우라의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던 일본군 병사 1104명이 사상 최대의 집단탈출을 감행하였다. 그 와중에 234명의 일본군 병사가 죽고, 감시하던 오스트레일리아 병사도 4명 희생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 당국은 일본군 포로들의 집단탈출 이유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카우라 포로수용소는 제네바 협정을 충실히 지켜 포로들에게 관대한 처우를 보장하고 있었다. 부상자나 영양실조 병사들에게는 충분한 치료와 간호가 이루어졌고, 수용자 전원에게 부족함 없는 식사와 일본인들이 즐기는 생선도 지급되었다. 포로들은 평소 토마토와 포도 등을 재배하며 농사일로 소일하였고, 연극 야구 씨름 마작 등의 오락도 허용되었다. 그들이 탈출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어떠한 폭력 사태나 위해 행위도 없었다. 탈출에 성공해도 포로수용소가 위치한 카우라는 시드니에서 250킬로미터나 서쪽 내륙으로 들어간 오지였고, 주변에 몸을 숨길 만한 피신처도 없어 금방 붙잡힐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군 포로들은 새벽 2시에 진군 나팔소리를 신호로 일제히 밖으로 뛰쳐나가 철조망에 모포를 걸쳐놓고 기어올라 탈출을 시도했다. 경비병이 위협 사격을 가했으나 이들은 몸을 숨기지 않았고, 어떤 이들은 오히려 경비병을 향해 정면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빨리 쏘라고 외쳤다. 이들이 지닌 무기는 기껏해야 식사용 나이프와 포크, 그리고 야구방망이 정도였다. 오스트레일리아 군의 기관총에 대항할 수 있는 무기는 아무것도 없었다. 탈출이 실행되던 밤은 보름달이 떠 있었고 조명 없이도 사물의 윤곽이 다 드러나 보이는데, 이들은 스스로 막사에 불을 질러 주변을 대낮같이 환하게 밝히고 자신들의 모습을 송두리째 노출시켰다. 일본군 병사들은 의도적으로 오스트레일리아 경비군의 총탄에 표적이 되도록 자신들의 몸을 노출시키고 스스로 전사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철조망을 넘어서 탈주한 이들도 체포되기 전에 자결한 병사가 많았고, 나머지도 8일 만에 모두 잡혔다.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다른 수용소로 이감되었다가 전쟁이 끝난 후 19463월 일본으로 모두 귀환하였다.

 

도대체 이들이 탈출을 감행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오스트레일리아인들에게 스스로 죽음을 재촉한 일본 군인들의 집단탈출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괴이한 집단의 폭거였다. 일본 국내에서도 이 사건은 거의 알려지지 않다가 지난 8월 이 사건을 소재로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카우라는 잊지 않았다>(미쓰다 야스히로 감독)가 개봉되면서 비로소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다. 당시 카우라에는 정원을 초과하는 포로들이 수용되어 있었고, 오스트레일리아 군 당국은 이들 중 일부를 타 수용소로 이감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통보를 받고 카우라의 일본군 포로 간부들이 모여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어떤 포로는 구사일생으로 얻은 소중한 목숨이 아닌가, 어떻게든 살아서 귀국하여 가족을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에 적극 동조하는 병사는 없었고, 모두 무거운 침묵에 빠져들었다.

 

결국 이들은 이감을 받아들일 것인지 아닌지를 투표한 결과, 80%가 이감 거부를 선택했다. 이감 거부는 봉기와 탈출을 의미했다. 생존자들은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 증언하였다. 카우라의 일본군 병사들은 모두 부족함 없는 편안한 수용소 생활 속에서도, 가슴 밑바닥에는 항상 살아서 포로가 되는 치욕을 받지 말고, 죽어서 죄과의 오명을 남기지 말라!’는 군인 의식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이는 도조 히데키 육군대신이 내린 훈령이었다. 수용소에서 포로로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일본군들에게는 죄책감이 되어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이들은 살아서 멀쩡한 몸으로 조국에 돌아갈 수는 없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총 맞아 죽을 목적으로 폭동을 일으키고, 몸 숨길 건물도 아무것도 없는 수용소 밖으로 탈주를 계획하였다.

 

생존자들 모두 살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였으나, 포로들 사이에는 죽기 위한계획에 찬성할 수밖에 없는, 거부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압도하고 있었다고 한다. 일본제국이 전쟁에 광분하던 시절, 누구도 표현은 못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빨간 딱지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일단 소집영장이 당도하면 동네 사람들 앞에서 국가를 위해 목숨 바쳐 멸사봉공하겠다고 외치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온 가족이 비국민이 되어버리는 분위기가 온 나라를 지배했다. 카우라의 어떤 생존 포로는 자신이 목숨을 바치지 못하고 몸 성히 일본으로 송환될 경우, 자신이 주변으로부터 받게 될 손가락질과 가족들이 겪게 될 따돌림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고 토로하였다. 이 다큐 영화의 대본을 쓴 작가 나카조노 미호는 대학생 시절 자신의 종조부의 인도로 카우라를 함께 여행하고 처음으로 폭동 이야기를 들었다. 이 종조부는 전쟁이 끝난 후 수십년이 지나도록 가족 누구에게도 자신이 카우라에서 포로로 살았다는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종손이 다큐의 대본을 쓴다고 하자 할아버지는 이렇게 중얼댔다고 한다. “정말 하느님이 계신다면, 하늘에서 내려다보시고 우리에게 그런 바보 같은 짓거리는 집어치우라고 호통을 치시지 않았을까?” 다수 집단의 착각과 오류는 개인의 양심의 소리를 이렇게 수십년 동안 질식하게 하였다.

 

개인 또는 소수가 집단의 분위기를 거슬러 자기 소신을 관철하기는 쉽지 않다. 집단의 구성원 다수가 어느 한쪽으로 생각과 감정이 기울어질 때, 이와 반대되는 개인의 소신을 지켜내는 일은 보통 용기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국민 다수가 선택하는 길을 간다. 그러나 다수가 찬성한다고 반드시 옳은 길은 아니다. 소수의 권리와 인권이 보호받고 존중되는 사회에서 비로소 성숙한 민주주의가 실현된다. 민주주의의 꽃인 선거철이 다가오면 언론기관들이 다양한 보도와 여론조사 결과를 쏟아낸다. 많은 대중이 여론의 추이에 관심을 갖고, 여론의 향방에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여론은 반드시 객관적, 윤리적인 가치 기준에 연동하여 작동하지 않는다. 또한 오늘의 시대에는 개인적 홍보 수단들이 아무런 이성적 판단과 윤리적 식별의 여과 장치 없이 강한 목소리와 주장들을 세상에 쏟아낸다. 이 시대는 난무하는 목소리와 주장들 중에서 무엇을 택할지 우리에게 자유를 허용하지만, 판단은 각자의 책임이다. 우리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한다. 바람과 분위기에 부화뇌동하지 말고 진리와 정의의 시선으로 식별하고 판단해야 한다.

강우일베드로 주교 한겨레 :2021-10-21

 

한 걸음씩 전진하는 민주주의

85년생 이준석이 지난 611일 국민의힘 당대표가 되자 조선일보는 다음날 아침 신문 1면 머리에 ‘2030, 판을 뒤집다는 제목으로 반겼다. 동아일보도 ‘30, 낡은 정치 뒤엎다고 평가했다.

 

이준석 대표와 같은 85년생 산나 마린은 이미 2년 전에 핀란드 총리가 됐다. 벌써 세 번째 여성 총리였으니, 핀란드에선 놀랄 일도 아니었다. 놀랄 일은 마린의 첫 내각 지명 때부터다. 19명의 장관 가운데 12명을 여성으로 뽑았다. ‘총리가 제 입맛대로 장관 지명하는 게 뭐 대수냐라고 되묻겠지만, 연합한 5개 정당을 설득한 정치력은 평가받아야 한다. 더구나 마린은 자신이 속한 사민당의 대표도 아니었다. 그러나 의원 200명 가운데 93명이 여성인 핀란드 정치에선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그런 정치판을 만든 국민이 더 놀랍다.

 

스웨덴 의회도 여성 의원이 47%나 된다. 지난달 25일 치러진 아이슬란드 총선에서 전체 63석 가운데 33석에서 여성 의원 당선이 예상돼 유럽에서 처음으로 여성의원이 과반을 넘긴 나라가 됐다는 보도도 나왔다. 그러나 재검표 결과 여성 후보 30명만 당선됐다. 그래도 아이슬란드는 47%가 넘는 여성 의원을 보유한 나라다.

 

1990년에 와서야 모든 지역에 여성의 투표권을 인정했을 만큼 꼴보수의 나라 스위스도 지난달 26일 국민투표에서 64.1%가 찬성해 세계 30번째 동성결혼 합법화 국가에 올랐다.

 

지난해 말 스위스에서 동성결혼을 인정하는 법안이 의회를 통과하자, 반대 시민 5만명이 서명해 국민투표에 부쳤다. 투표를 앞두고 찬반 논쟁이 뜨거웠지만 투표 결과 26개 모든 주에서 찬성이 과반을 넘었다. 전 국민 셋 중 두 명이 찬성하는 놀라운 결과로 이어졌다. 이처럼 민주주의는 국민이 정치권을 압박해 가며 한 걸음씩 전진한다.

 

프랑스 하원은 지난 5월 기차로 2시간30분 안에 있는 거리의 국내선 항공운항을 금지하고, 에너지효율 등급이 낮은 주택의 임대사업을 금지했다. 전자제품에 탄소배출량 표기를 의무화하는 기후 복원 법안을 가결했다.

 

독일 베를린 시민은 서민 숨통을 죄어 온 주택 임대료 폭등에 항의해 지난달 26일 총선 때 주택 공공화 찬반 주민투표를 벌였다. 투표 결과 베를린의 주택을 공공소유로 전환해야 한다는 안에 시민 56.4%가 찬성했다. 베를린 시민은 2019년부터 베를린에서만 11만채의 아파트를 소유한 도이체보넨 등 부동산 임대회사들이 베를린 집값 폭등의 주범이라며 강제수용 운동을 벌여 온 끝에 이번 국민투표로 결실을 맺었다. 물론 강제할 권한을 놓고 시비가 예상되지만, 베를린시는 납득할 만한 대책을 마련해야만 한다.

 

11월 대선을 앞둔 칠레에선 지난 4일 여론조사 결과 35살의 가브리엘 보리치 후보가 1위를 차지했다. 2위와 7%포인트 차이가 났다. 보리치는 이준석 대표보다 한 살 어리다. 보리치는 10년 전 칠레대 총학생회장으로 교육 공공성 강화를 요구하는 전국적 시위를 주도하면서 칠레 사회의 근본개혁을 주창했다. 지금 하원의원인 그는 여전히 줄무늬 티셔츠와 헝클어진 머리에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채 대중 앞에 선다. ‘독재자의 나라’ ‘신자유주의의 고향같은 부정적 수식어가 따라다녔던 칠레가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나이 여든의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16일 연설에서 부자 증세를 주장했다. 바이든은 통계가 분명히 말한다. 지난 40년간 부자는 더 부자가 됐고, 너무 많은 기업이 노동자와 지역사회, 국가에 책임감을 잃었다고 지적했다. 바이든은 코로나19 팬데믹이 불러온 양극화를 해소하려면 엄청난 예산이 필요함을 안다. 바이든은 35천억달러(4천조원)에 달하는 사회안전망 강화 예산을 추진 중이다. 부자 증세 없이, 대기업 증세 없이, 사회안전망을 말로만 주워섬기는 우리 대통령과는 다르다./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 매일노동뉴스 2021.10.22

 

()으로 쓰인 리포트

학교 폭력 논란으로 국내 배구 리그에서 사실상 퇴출당한 배구선수 이재영, 이다영이 그리스 리그에 합류하기 위해 출국했다. 한 발짝도 걸어 나가기 힘들 정도로 많은 취재진이 자매를 에워쌌고, 둘은 고개를 푹 숙인 채였다. 앞서 쌍둥이 자매는 피해자들을 떠올리면 마음이 무겁다며 평생 사죄하고 반성하겠다고 했다가, 학교 폭력을 인정한 지 두 달 만에 피해자들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조용히 출국한 선수들이 또 있다. 2021-2022 국제빙상경기연맹 쇼트트랙 월드컵 1차 대회가 열리는 중국 베이징으로 떠난 쇼트트랙 대표팀이다. 2018 평창 올림픽 당시 동료 최민정 선수와 고의 충돌했다는 의혹에 휩싸인 심석희 선수가 빠졌다. 고의충돌 의혹은 심석희의 메신저 대화 내용이 폭로되면서 불거졌는데, 문제의 대화 내용은 심석희를 3년여간 성추행,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을 받는 조재범 전 코치 측에서 2심 선고를 앞두고 공개했다. 고의충돌 사실 여부는 지난주 꾸려진 조사위원회에서 규명될 예정이다.

 

여기까지가 이재영, 이다영 쌍둥이 자매와 심석희를 둘러싼 논란에 대해 알아야 하는 전부다. 하지만 우리 언론은 지나치게 많이 알려주고, 도를 넘어 분노하도록 부추기고 있다.

 

쌍둥이 자매의 출국 기사를 다룬 기사들 제목 상당수가 출국장에서 자매를 엄호하며 고개 들라라고 외친 모친에 초점이 맞춰졌다. 방송사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콘텐츠는 말할 것도 없다. 이걸 정확히 의도했다 싶을 정도로 여지없이, 달린 댓글 대부분이 쌍둥이 자매와 엮어 그의 모친을 비난하는 내용이다. 쌍둥이 자매들의 사생활도 무차별적으로 보도됐다.

 

이다영이 이혼 소송 중이며, 트로트 가수 임영웅에게 SNS로 메시지를 보낸 적도 있다는 사실이 대중이 응당 알아야 하는 사안일까. 그는 더 이상 대중의 인기를 전제로 하는 프로 리그에 소속된 선수조차 아니다.

 

심석희 선수를 둘러싼 논란은 시작부터 한참 도를 벗어났다. 한 매체에서 조 전 코치 측이 법원에 제출한 변호사 의견서를 입수해 보도했다. 피해자의 사생활이 여지없이 담겨있었을 것이다. 심석희의 언행이 우리 기대를 벗어나는 것이었고 그것이 국가대표로서의 자질에 모자라는 것이었다고 한들, 성범죄 피해자의 사생활을 드러내는 결정이 이렇게 쉬워서는 안 됐다.

 

이후 조 전 코치가 빙상연맹에 보낸 대화 내용이 공개되면서 거의 모든 미디어가 이 사안을 보도했는데, 그러면서 문제의 본질이 더 흐려졌다.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이 고의충돌여부인지, 확정되지도 않은 조 전 코치의 무고인지 혼란스러웠다. 그럴 때마다 조 전 코치의 혐의는 만 17세에 불과했던 미성년자를 상대로 한 일이었다는 걸 상기시켜야 했다.

 

나는 학교 폭력 논란의 쌍둥이 자매와 고의충돌 의혹을 받는 심석희 선수를 지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결집된 분노에 동참해 이들을 짓밟아버리고 싶지도 않다. 이들이 그 모든 텍스트를 다 읽고도 꿋꿋이 지낸다면 다행이지만, 혹시라도 나쁜 선택을 하면 그땐 누가 어떻게 책임질 것인지 마음 깊이 우려스럽다.

 

내가 접하고, 전하는 기사들은 무엇으로 쓰인 걸까. 오래전 꿈꿨던 것처럼 예리한 촉을 가진 멋들어진 펜일까, 아님 바짝 날이 선 검()일까. ()으로 쓰인 리포트는 사람들에게 닿을 때마다 더 아슬하게 갈려 치명적 흉기로 거듭난다. 누군가를 사회적으로 완전히 숨통 끊어버리는 일에 나도 모르게 동참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렵다. 이런 서늘함을 나만 느끼는 게 아니길 바랄 뿐이다./ 이선영 MBC 아나운서 / 미디어오늘 2021.10.24.

 

감시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사라질 수 있을까?

마누 룩쉬 감독의 영화 페이스리스의 한 장면

 

2007년 상영된 영국 영화 페이스리스(Faceless:Chasing Data Shadow)는 영화 속 주인공이 실제로 찍힌 CCTV 영상으로만 만들어졌다. 이 영화의 감독이자 주인공인 마누 룩쉬는 지하철·버스·직장·거리·공원·백화점 등에 설치된 수많은 CCTV가 다양한 각도에서 촬영한 영상들만 편집해 영화를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은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들이 CCTV에 기록돼 있는 것을 확인한다. 영화는 “2007년 현재 런던에만 총 450만여 대의 CCTV가 설치돼 있으며, 런던은 전 세계에서 감시용 CCTV가 가장 많이 설치된 도시라고 지적한다.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요원이었던 에드워드 스노든의 폭로로 알려진 프리즘(PRISM)’2007년부터 이어져온 미국의 국가 보안 전자감시체계 중 하나다. NSA프리즘프로그램을 통해 수십억 명 이용자들의 이메일, 동영상, 사진, SNS, 채팅 등 모든 인터넷 활동 자료와 은행·신용카드 거래 내역까지 수집한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미국 정부는 이에 대해 국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감시 및 지시체계라고 설명했다.

 

디애틀랜틱보도에 따르면 중국 정부는 일종의 알고리즘 감시체계를 구축하여 자신들이 우려하는 시민들을 가려내고 감시하는 용도로 활용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시민들의 비디오 게임, , 주류 등 구매 내력과 SNS 활동 내역 등을 수집해서 시민들의 신뢰 점수를 자동 계산하고 있다. 이 점수는 일반적인 금융 신용도가 아니라 정치적 신뢰도로, 그 사람이 정부에 대해 정치적으로 어떤 성향을 갖고 있는지 점수화한다.

 

디지털 세상의 특징 중 하나는 우리의 일상적 행위들이 시간·공간적으로 물리적 정확도를 갖춘 채 기록된다는 것이다. 디지털화된 모든 것은 기록이 가능하며, 기록은 당연히 추적 가능하다. 추적 가능함의 다른 말은 감시다. 디지털화로 인해 모든 것이 감시될 수 있고 모든 것을 감시할 수 있는, 이른바 사라짐이 사라진세상을 우리는 살아간다. 감시는 우리에게 안전함편리함을 강조한다. 국가 혹은 권력은 안전함을 명분으로, 자본주의 기업은 편리함을 명분으로 감시를 수행한다.

 

불법적 이용 행태 알면서도 방치하는 플랫폼 기업

플랫폼 기업들이 골목상권 침해 논란까지 빚어가며 우리 일상의 세세한 분야까지 진출하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더 많은 것을 기록하게 하거나 수집해 더 많은 것을 추적하기 위해서다. 플랫폼 기업들은 우리 행위를 감시해 수익으로 연결시킨다. 하버드 경영대학원 쇼샤나 주보프 교수가 명명한 감시 자본주의. 감시 자본주의 기업들은 우리가 얼마나 편리해질지 끊임없이 강조한다. 실제로 우리는 편리해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편리해지는 만큼 더 많은 기록을 만들거나 제공하기 때문에 사라지기 어렵게 된다. 게다가 최근 월스트리트저널페이스북에 대한 탐사보도에서 보듯이 우리의 기록이 올바르게 사용되고 있는지도 불분명하다. 보도에 따르면 페이스북은 유명 인사들을 특별 관리하고 인스타그램이 10대들의 정신건강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내부 보고서를 무시했으며, 마약 카르텔과 인신매매 조직 등의 불법적 이용 행태를 알면서도 방치했다.

 

조금은 불안하고 불편하더라도 우리는 어느 정도 사라질 필요가 있다. 일상적으로 만나는 약관에 쉽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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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욱 (한국언론진흥재단 책임연구위원) / 시사인 2021.10.24.

 

법치가 괴물이 되어갈 때

장면1. 2021629,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법치와 공정을 내세우며 정치참여를 선언했다. 천명 가까운 지지자들이 윤석열 대통령을 연호한다. 빼곡한 군중이 서로 부대끼며 함성을 질러댄다. 코로나19 걱정 따위는 없다. 경찰도, 방역당국도, 언론도, 원수가 된 여당도 시비 걸지 않는다.

장면2. 1010, 여당의 대선 후보로 선출된 영상 속의 이재명 후보는 열광하는 군중 속을 주먹악수로 헤쳐 가고 있다. 한 지지자는 마스크도 벗고 목 놓아 이재명을 외친다. 서로 문제 삼지 않는다.

거대 정당들의 경선 현장에 지지자들이 운집하고 있다. 후보들은 사람 많은 곳만 골라 다닌다. ‘턱스크코스크가 난무하고, 비말 날리는 환호성도 요란하다. 노마스크 후보도 있다. 거리 유지도, 체온 측정도, 명단 작성도 없지만 지지자도, 경찰도, 방역당국도, 언론도 믿는다. 여기선 절대 코로나가 퍼지지 않는다고. 기적이다.

 

힘센 정당들의 밀집 집회가 자유롭게 열리는 동안 노동자나 자영업자들의 생존권 요구 집회는 방역수칙을 아무리 잘 지켜도 금지된다. 민주노총은 집회 때마다 마스크 착용, 명단 작성, 체온 측정, 거리 유지까지 온갖 방역수칙을 다 준수해왔다. 그동안 한명의 확진자도 나온 적이 없다. 그래도 늘 불법이다. 수십명이 과로사한 택배노조의 살려달라는 집회도, 누차 영업제한을 당한 자영업자들의 손실보상 요구 집회도 불법이다.

 

권력을 잡아 기득권화됐다고는 해도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만큼은 지키리라 믿었던 정권이다. 약자들의 생존권 요구를 가로막는 데 고뇌가 안 보인다. 코로나 확산 방지가 명분이니 이해할 수 있을까? 코로나라고 해도 집회와 시위의 권리 등 기본권의 본질은 침해하면 안 된다는 유엔과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를 상기해본다. 민주정권이 차벽을 쌓아 집회를 원천봉쇄하는 풍경이 아득하다. 민주노총 위원장은 구속됐고, 택배노조 관계자 30명은 검찰에 송치됐다. 1020일의 민주노총 총파업 집회 관계자들에 대한 엄정수사 방침도 나왔다. 국제노동기구 사무총장을 내겠다는 정부의 태도다. 국정농단 사건으로 복역 중이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규정까지 고쳐가며 합법적으로 풀어준 정부의 준엄한 법치(!).

 

부회장님의 자유를 촉구하던 <중앙일보>1020일의 집회를 보도하며 법치를 파괴하는 괴물 노조라는 표현을 썼다. 누가 진짜 괴물일까? 하지만 보수언론의 패륜적 표현에는 제 나름의 자신감이 있다. 작년 5월과 11월에 실시된 <시사인><한국방송>(KBS)의 여론조사를 보면 박근혜 정권 시절이던 2016년에 비해 한국 사회의 권위주의 성향이 오히려 높아졌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을 지지할수록 권위주의 성향이 일관되게 높았다. 인권 보장보다는 법질서가 중요하고, 정부에 비판적인 집단들은 척결해야 한다는 강경한 태도가 이 층에서 가장 높다. 누구보다 민주주의 의식이 높을 것 같은 사람들이 왜? 위기에 맞서 정권을 중심으로 뭉쳐야 한다고 생각할 법하다. 방역 성과가 훼손되어 정권의 책임이 커질까 걱정스러울 법도 하다. 지지하는 정권이 생기면 나도 저럴까? 묻고 돌아본다. 위기를 빌미로 권위주의를 강화하던 독재정권에 맞서, 위기를 넘는 힘조차 민주주의에서 나온다고 부르짖던 그때 그이들을 추억한다.

 

위기의 와중에 소득이 늘고 집값도 폭등한 중상층 이상은 왜 이 시기에 사람들이 굳이 거리로 나오는지 공감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 얼마 전 발표된 코로나19와 직장생활 변화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코로나 이후 비정규직의 실직 경험은 정규직의 다섯배에 가깝다. 자영업자의 처지는 말해 무엇하랴. 이 정부는 코로나 피해가 가장 작았던 나라들과 비교해도 4분의 1 수준의 재정지출에 그쳤다. 그 차이만큼 서민의 고통이 깊다. 불법이라는데도 거리로 나오는 이유다.

 

법치의 화신 자베르 경감은 굶주린 조카들을 위해 빵을 훔치는 장발장식 연민의 도덕률을 혐오했다. 그리고 법치는 괴물이 됐다. 범속한 사상가들이 가진 자들의 불법과 반칙을 비판할 때,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합법적 규칙이야말로 진짜 괴물이라고 폭로했다. 저항이 불법인 이유는 착취가 합법이기 때문이라고. 힘센 자들의 규칙을, 그들의 법치를 목도하며 이 낡은 19세기 서사들이 생생해지는 요즘이다. 이편도 저편도 아닌, 아래편의 눈으로 보니 그렇다.

조형근 ㅣ 사회학자 한겨레 2021.10.24.

 

한식에 죽으나 청명에 죽으나' 어차피 죽은 검찰

2014년 상설 특검법이 제정된 이후 대형 사건이 터질 때마다 으레 검찰은 뒷전이 됐다. 정치적 논리가 힘을 얻으며 국회 국정조사나 특검 수사가 검찰수사보다 앞장에 섰다. 이는 검찰수사에 대한 불신 때문이지만 검찰 스스로 자초한 자업자득이다.

 

문재인 정부의 가장 강력한 견제자 역할을 한 윤석열 검찰은 정의의 마지막 보루로 보였다. 조국 일가와 월성원전 수사 등 살아있는 권력에 대한 가차 없는 수사는 검찰 역사에 '레전드'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수사를 지휘한 검찰총장이 현재 권력에 대한 수사를 훈장 삼아 정치권에 직행한 것은 검찰사에 돌이킬 수 없는 오점이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언제부터 대통령이 되고자 했는지 알 수 없지만, 현직 검찰총장의 대선 출마는 검찰의 중립성을 뿌리째 흔들어버렸다. 검찰조직은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사전 선거운동 조직이 된 셈이고 그를 응원했던 전국 22백여 명의 검사는 선거운동원이 됐다. 그토록 검찰권을 추상처럼 행사한 윤석열 전 총장이지만 이른바 본부장(본인, 부인, 장모) 비리 의혹으로 자신이 검찰수사 대상이 된 것은 아이러니하다.

 

심지어 윤석열 전 총장은 재직 시절 처가와 측근들의 각종 비리 수사를 뭉개왔다는 의심도 받고 있다. 고발사주 의혹이 사실로 확인된다면, 이는 국가 기강을 흔드는 일로 국민은 '윤석열 시대 검찰'의 순수성을 의심할 수 밖에 없다.

 

그런 윤석열 검찰시대가 막을 내리고 김오수 검찰시대가 왔다고 해서 검찰이 새로운 옷을 입은 것은 아니다. 윤석열의 뒤를 이은 김오수 검찰은 앞선 검찰총장의 역사지우기에 나선 것처럼 보인다. 월성원전 수사 관련자 기소를 아직까지 결정하지 않고 있고 현 정권 수사는 외면으로 일관하고 있다.

 

대장동 개발 비리 의혹에 여당 대선후보인 이재명 전 경기지사의 개입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지만 꼬리자르기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유동규 전 본부장을 구속할 때 영장에 적시했던 배임 혐의가 빠지고 뇌물 명목이 바뀐 것은 그 윗선을 차단하려는 의도로 보기에 충분하다. 화천대유 대주주 김만배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성급하게 청구했다가 기각당한 것은 고의적인 부실수사라는 지적도 나온다. 결국 대장동 의혹 수사는 '알맹이 빠진 반쪽기소'로 막을 내릴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쯤 되면, 검찰무용론과 특검 불가피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번 대통령 선거는 역대급 비호감 후보 선거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지난 21일 한국갤럽 조사에 따르면, 이재명 여당 후보의 비호감도는 60%이고 야권 유력 후보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비호감도가 62%나 된다. 국민들은 비리와 의혹 투성이 도긴개긴 후보를 놓고 누가 덜 나쁜지를 선택해야 하는 참으로 황당한 대선으로 가고 있다.

 

결국에는 검찰이 결정을 내려줘야 한다. 누군가 정치생명이 끊어지더라도 성역없는 수사로 결론을 내려야 한다. 그 시기는 12월을 넘겨서는 안 된다.

 

'한식에 죽으나 청명에 죽으나 매일반'이라는 속담이 있다. 사심으로 검찰을 망가뜨린 윤석열 검찰과 권력눈치 보는 김오수 검찰이나, 어차피 한식에 죽으나 청명에 죽으나 같은 날이거나 하루 차이다. 검찰수사는 진작에 신뢰를 잃었고 공수처가 등장하고 경찰에 수사권까지 상당 부분 넘어갔다. 그나마 남은 칼로 풀을 베려고 하지만 그 칼이 무디다. 이번에 또다시 특검이 시행된다면 검찰은 더 이상 설 곳이 없다.

 

'청명에는 (생명력이 다한) 부지깽이를 꽂아도 싹이 난다'라고 한다. 검찰이 내년 청명에 부지깽이라도 꽂을 생각이라면 엄정 수사밖에 없다./CBS노컷뉴스 김규완 기자 2021-10-25

 

공감할 수 없는 대선 주자

왜 쏘았지? 왜 찔렀지? 트럭에 싣고 어딜 갔지?” 80년대 군부독재의 탄압 속에서 삼삼오오 어깨동무하고 부르던 이 노랫말이 아직도 귀에 먹먹하다. 국립 5·18 민주 묘지의 원혼들은 많은 시간이 흘렀건만, 아직도 편히 잠 못 들고 있다. 유가족은 새우잠으로 어깨를 들썩이며 울먹이길 반복하는데, 전두환과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해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가 보여준 행태는 실망을 넘어 대통령을 준비하는 사람의 언행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릇된 역사관과 정치관을 지닌 그가 자유민주주의를 지켜야 하는 검찰의 총수였다는 사실이 참으로 부끄럽다.

 

입에서 나오는 세 마디 말을 들으면 그 사람의 어품(語品)을 알 수 있다. 정성을 다해 잘 만드는 명품이 있듯 언어에도 품격이 있다. 사람이 내뱉는 말 한마디는 얼었던 가슴을 녹이기도 하고, 어려운 시기를 이겨내는 힘이 되기도 하지만, 때론 가슴에 비수처럼 꽂혀 평생 상처가 되기도 한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세 치 혀를 놀리는 것보다 나을 때도 있다. 곰은 쓸개 때문에 죽고, 사람은 잘못 놀리는 혀 때문에 죽는다고 했다.

 

말은 인식과 사유의 결정체로, 입을 벗어나는 순간 사람의 격을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말은 담는 그릇에 따라 품격이 달라진다. 좋은 그릇에 담긴 음식이 맛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국가 경영을 위임받은 대통령이 하는 말 한마디의 소중함은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말 한마디에 군대가 움직이고, 국가 간 분쟁의 씨가 되기도 하고, 화해의 물꼬를 트기도 한다.

 

유감 표명 후 나온 윤석열의 인스타그램 돌사진 사과와 반려동물 계정을 통해 그가 키우는 반려견에게 사과를 주는 장면은 저질 코미디를 넘어, 그 마음가짐의 진정성을 의심케 한다. 그에게 국민은 조롱의 대상이란 말인가? 국민을 우습게 보지 않고서야 이런 오만을 곁들인 몰상식함은 나올 수 없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2항을 잊은 것일까? 자유민주주의 칼은 헌법이요, 그 칼을 휘두를 자는 국민이라는 이름의 무사다.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이자, 재임 기간 16년의 최장수 총리였던 앙겔라 메르켈은 갈등 사이에 다리를 놓아라는 연설을 했고, 스스로가 원칙과 포용력을 지닌 국내외 갈등의 중재자로 나섰다. 리더란 이런 것이다. 스스로 갈등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만들어진 갈등을 중재하여 엉킨 실타래를 푸는 사람이어야 한다. 지난 22일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영상 메시지를 통해 메르켈에게 윤리의 나침반을 내려놓지 않고, 함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어서 자랑스럽고, 친구가 될 수 있어서 행복했다라고 마음을 전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이상주의적 국가론에 맞서 실현 가능한 현실적 국가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윤리와 정치를 따로 떼내어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윤리학은 인간의 행복이 어디에 있는가를 찾는 것이었고, 어떤 국가가 국민의 이러한 행복한 생활 방식을 찾아 보증해 줄 수 있을까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정치학이었다. 그래서 정치의 목적은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것이라 보았다.

 

물어볼 것 없이 대통령의 역할이란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등에 업고, 국민에게 비전과 목표를 제시하고, 실현함으로써 구성원의 행복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대선 흐름을 보면 초등학교 반장 선거보다도 못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변변한 선거 공약도 없이 반여권 혹은 반야권을 통한 정권 획득의 목표만으로 유권자들은 공감할 수 없다. 시장에서 어묵 한 입 깨문다고 서민경제가 읽히는 것도 아니다. 어린 시절의 가난함이 훈장이 될 수도 없다. 특히 윤석열 후보에게는 주 120시간을 사과 농장에서 손발로 일해보고, 윤봉길 혹은 안중근 의사에게 고요히 질문을 해보길 권한다./엄치용 미국 코넬대 연구원 경향 : 2021.10.27.

 

진영을 넘나든 정치가들의 활극, 메이지유신

도쿠가와 막부가 무너져가던 1860년대 막부에는 가쓰 가이슈(勝海舟)라는 인물이 있었다. 낯선 이름이지만 일본에서는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의 멘토로 유명하다. 최하급 신분이었음에도 출중한 능력으로 요직에 발탁되었다. 당시는 사쓰마, 조슈를 중심으로 한 반막부 세력이 막부에 도전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가쓰는 이 진영 대립의 시기에 진영 논리에 갇히지 않았다. 그는 막부가 권력을 독차지하던 시대는 지났다며 권력 공유를 주장했다. 대정봉환(大政奉還·대권을 천황에게 돌려준다)을 구상하고 막부 측 인사들을 설득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권력을 나눠 갖는다는 건, 예나 지금이나 어려운 일이다. 막부 실세들이 그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적진에 뛰어들어 사쓰마번의 실세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를 만나 막부와 사쓰마, 조슈번 등이 천황 밑에 연합정권을 구성하자고 제안했다. 사이고는 이를 공화정치라고 호명했다. 메이지유신(1868)이 일어나기 3년여 전이었다.

 

사이고는 가쓰를 만나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실로 놀라운 인물이다. 두들겨 패줄 심산으로 만났지만 완전히 머리를 숙이고 말았다. 얼마나 지략이 있는지 모를 정도였다. 학문과 견식은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이 발군이지만 실제 일을 다루는 솜씨는 가쓰 선생이 최고다. 정말 반해버렸다.” 사쿠마 쇼잔은 당대 최고의 양학자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과 사카모토 료마 등을 가르쳤던 인물이다. 반하기는 가쓰도 마찬가지였다. “그를 만나봤더니 식견과 논리 면에서는 내가 나았지만, 천하대사를 짊어지는 것은 결국 사이고가 아닐까라고 내심 생각했다.

 

이처럼 가쓰는 정적이라도 말이 통하면 광범위하게 교류하면서 자신의 구상을 숨김없이 피력했다. 그럴수록 막부 핵심에서는 멀어져 갔지만 사쓰마, 조슈 측의 평가는 점점 높아져갔다. 교토에서 왕정복고 쿠데타가 발발하고 천황 군대가 에도성을 공격하기 하루 전, 결국 막부는 가쓰를 육군총사령관으로 삼아 전권을 부여하고, 사이고와 협상하도록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마음으로 맺어져 있던 두 사람은 단번에 타협책을 찾아냈다. 이로 인해 에도 100만 시민은 전쟁의 참화를 면했고, 일본은 전면적인 내전을 피할 수 있었다. 정치인이란 결국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어야 하지 않을까.

 

천황 군대가 에도에 무혈입성한 후에도 역사에서 보기 드문 일이 벌어졌다. 에도 점령을 보고하기 위해 교토로 돌아가는 사이고가 에도의 치안 유지를 가쓰에게 맡긴 것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적군의 총책임자였던 사람에게 말이다. 그 담대함에 가쓰도 기가 막혔던 모양이다. “대담한 사이고는 뜻밖에도, 정말 뜻밖에도 이 난국 타개를 내게 맡겨버리고는 어떠십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지금부터의 일은 가쓰 선생께서 어떻게든 해주시겠지요라고 하고는 에도를 떠나버렸다. 이 막연한 해주시겠지요라는 말에 나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졸저 <메이지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

 

가쓰 덕분에 목숨을 부지한 줄도 모르고 과격파들은 그를 배신자라고 공격했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평화적 정권 이양이라는 대업을 마쳤다. 그러고는 메이지 정부의 출사(出仕) 요청을 뿌리치고, 유신(遺臣)이 되어 살길이 막막해진 도쿠가와 가신단의 취업과 생계 지원에 남은 생을 바쳤다.

 

특이한 것은 그가 흥선대원군과 교류가 있었다는 점이다. ··3국의 연대를 강조하며, 메이지 정부의 공격적인 아시아 정책에 비판적인 그였던 만큼 조선정계에도 관심이 있었던 모양이다. 대원군이 죽자 가쓰는 대원군이 마침내 죽었구나. 이 인물에 대해서는 갖가지 평가가 있지만 어쨌든 일세의 위인이다. 나는 대원군이 나를 알아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추모했다(<氷川淸話>). 둘은 선물도 교환했고 일본에 있던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은 가쓰를 여러 번 찾았다. 권력의 정점에서 물러난 두 사람은 무슨 맘으로 교분을 나눴던 것일까.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경향 : 2021.10.28

 

이재명·윤석열은 적대적으로 공생한다

문제적 정치와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

민주화 이후 역대 대선은 200717대 대선을 제외하곤 박빙으로 치러졌다. 199715대 대선, 200216대 대선에서는 각각 39만 표, 57만 표 차이로 승패가 갈렸고, 새누리당이 승리한 2012년 대선에서도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의 표차는 3.5%포인트 차이에 불과했다.

 

박근혜 탄핵 선거였던 지난 19대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가 당선됐지만 보수 쪽의 홍준표, 유승민, 안철수 후보의 표를 합치면 진보진영의 문재인, 심상정 후보의 표보다 오히려 많이 득표했다. 그러나 52% 47%로 역시 차이가 크지 않았다. 그만큼 선거지형은 양 진영으로 첨예하게 나뉘어져서 치러진다는 사실을 방증하고 있다.

 

선거일반에서 구도의 중요성은 비단 한국에만 적용되진 않는다. 그러나 한국에서 선거구도는 결정적으로 승패에 영향을 끼친다. 이러한 정치구도는 근본적으로 분단과 냉전 상황에서 형성된 '독재 대 민주', '산업화 대 민주화' 등의 구도와 무관치 않다.

 

내년 대선이 양자대결로 치러질지, 다자구도로 치러질지 예측키 어렵지만 당위론의 관점에서 선거 프레임보다 중요한 것은 인물과 정책임은 말 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이는 한국 선거에 잘 적용되지 않는다. 국민의힘 대선 후보로 누가 결정될지 알 수 없지만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와 국민의힘의 유력주자가 여타의 후보보다 결정적 하자가 있음에도 견고한 지지를 보인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이 후보의 장점으로 거론되는 유능함, 추진력 등에도 불구하고 대선 후보 선출 이후에 컨벤션 효과가 없는 것은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 사건 때문이다. 그러나 여야 다자대결 구도에서는 여전히 1, 2위를 다툰다. 진영구도에서 여당 후보이기 때문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망언과 결정적 흠결이 터져 나와도 지지율이 출렁이지 않고, 경우에 따라서는 지지율 하락을 우려해서 더욱 지지층이 결집하는 역설이 양 진영의 지지층 모두에게 존재한다. 물론 이마저도 유권자의 행태이므로 비난할 수는 없지만 바람직하다고 할 수 없다.

 

특히 문재인 정부 들어서 진영논리는 재작년 조국 사태를 거치면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화석처럼 굳어졌다. 야당 유력주자인 윤석열 후보의 동력은 문재인 정권과 대척에 있었던 상징자산에서 나온다. 그의 정책과 역사 인식, 공감 능력이 보편적 수준에 미달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야권의 경쟁 후보들이 정책에서의 상대적 우월성과 결점의 부재로 오히려 본선 경쟁력이 있어 보여도 윤 후보에 대한 당심의 지지는 난공불락이다. 이는 인물과 정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고전적 선거론과는 부합하지 않는다. 여당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이 후보의 대장동 사건 연관성 의혹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은 이 후보를 여당의 대선 후보로 선택했다. 이 후보와 윤 후보는 진영정치의 양극에 존재한다는 공통점으로 그 과실을 톡톡히 누리는 셈이다. 이른바 적대적 공생의 수혜자다.

 

정치는 현실과 이상, 실리와 명분, 사실과 가치 사이에서 접점을 찾아가는 작업이다. 그러나 선거정치에서 이상과 명분, 가치는 점점 왜소해지고 있다. 이는 결국 민심과 표심의 왜곡을 낳는다. 양대 극단 세력이 정치의 판을 좌우하고 중립지대가 사라진 선거에 실질적 민주주의가 들어설 공간은 협소해진다. 편향을 동원해서 정치권력을 탐하는 반민주 세력들이 득세하는 유사민주주의에서 민주주의의 공고화는 언감생심이다.

 

역대 어느 대선보다 문제적 인물들이 격돌할 가능성이 높은 선거에 중간지대의 유권자들이 기권으로 정치적 의사를 표시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선거가 다가올수록 중도층이 양대 진영으로 수렴하는 것이 일반 선거의 흐름이지만 여전히 줄지 않는다는 조사들이 이를 방증한다.

 

지난 주말 국민의힘의 김태호, 심재철, 유정복, 박진 등 당의 중진들이 윤 캠프에 합류했다. 전두환 시대를 미화하고, 사과의 진정성조차 보이지 않는 역사인식의 빈곤을 드러낸 후보에게 당내 중진들이 몰려가는 퇴행적 현상은 가치와 규범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권력정치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준다. 대장동에서 단군 이래 최대의 개발 특혜를 민간 비리 세력이 누렸음에도 이와 연관성이 의심되는 후보를 선택한 집권당 역시 다를 게 없다. 바야흐로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다.

최창렬 용인대 교양학부 정치학 교수 | 프레시안 2021.10.29

 

손님이 사라졌다

내가 나고 자란 마을은 면 소재지였지만 변변한 숙박 시설이 없었다. 마을 초입에 있던 우리 집은 대문도 없고 울타리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한겨울 늦은 밤, 문밖에서 인기척이 나곤 했다. “계십니까?” 아버지가 문을 열면 검은 실루엣이 하룻밤 묵어갈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등잔불을 밝히고 생면부지의 나그네를 안방으로 들였다. 어머니는 부엌으로 나가 밥상을 차렸고. 자정이 가까운 시간. 나그네는 연신 고맙다며 밥그릇을 비웠다. 불청객은 우리 집 안방에서 우리 식구와 함께 잠이 들었다. 1960년대 초반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요즘 아이들에게 들려주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당연하다. 낯선 사람이 초인종을 누르면 절대 문을 열어주지 말라는 가르침을 뼈에 새겨놓은 아이들 아닌가. 그러고 보니 나도 남의 집에서 하룻밤 묵은 기억이 삼삼하다. 1980년대 초반만 해도 통행금지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남의 집에서 자는 경우가 흔했다. 친구네 집, 선배네 집, 선생님 댁. 나는 못해 봤지만, 동네 형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남쪽으로 무전여행을 다녀왔다. 일종의 성년식이었다.

 

호모 사피엔스가 정착 생활을 시작한 이래, 수천년 넘게 지구촌 곳곳에서 이어져 오던 환대의 문화가 사라지고 말았다.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가 낯선 손님이 설 자리를 앗아갔다. ‘남의 집은 이제 발을 들여놓으면 안되는 성역이다. ‘손님이 오지 않는 집은 천사도 오지 않는다는 아랍 속담이 생각난다. 어디 우리가 사는 집만 그럴까. 우리 마음의 집도 마찬가지다. 마음 안에 절망, 슬픔, 부끄러움, 억울함, 외로움 같은 낯선 손님이 쉬어 갈 거처가 없다. 감정을 조절하는 감정이 고장 나고 말았다./ 이문재 (시인) 농민신문 2021.10.29.

 

검사 선서의 배신과 권력욕망

가난한 농어촌 출신 청년이 있었다. 아버지가 양아치에다 힘깨나 썼기에 아들도 학교에서 어깨로 통했다. 어느 날 집에 왔는데, 그 위대한 아버지가 한 신사 앞에 무릎을 꿇고 목숨만 살려 달라며 빌고 있었다. 검사였다. “저게 진짜 권력이다!” 그 순간, 청년이 바뀐다. ~력 끝에 서울법대를 거쳐 검사까지 됐다. 그러나 검사라고 모두 있는 건 아니었다. 99%는 하루 30건 이상을 처리하는 ‘3D 노동자일 뿐, 힘은 오로지 1%에 있었다. 이른바 정치검사’! 그들은 마치 김치를 익히듯, 사건 또한 비밀 창고에 잘 삭혔다가 필요시 꺼냈다. 이슈로 이슈를 덮기! 언론도 동조했다. 그렇게 그들은 재벌도 정치도 맘대로 했다. 대통령조차 그들이 선택한다. 혹 차질이 생기면 재빨리 충성하듯 새 이슈를 꺼냈다. 그런 식으로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정권을 두루 요리했다. 영화 <더 킹>이다! 문제는 이게 허구가 아니라 현실이란 점!

 

경영학자 D 맥클리랜드는 사람의 고차 욕구를 성취욕, 권력욕, 친교욕으로 나눴다. 모두 비슷하지만, 1% 정치검사들은 권력욕망에 목을 맨다. 물론, 이는 재물욕망과 쌍둥이다. 그 공통점은 상호 자극하면서도 영원한 불충족 상태란 것! 이들을 불 지피는 건 성취욕망이다. 법을 매개로 한 기득권의 성취! 결국 이 세 욕망은 쉽게 중독이 된다! 한국은 지난 70년 이상, 반공 이념을 토대로 재벌, 금융, 정치, 언론, 검찰, 조폭이 일종의 권력동맹을 맺었다. 엘리트 집단에 유달리 일중독, 권력중독, 재물중독이 심한 배경이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검찰총장 출신의 후보가 손에 왕() 자를 새긴 것도, 또 대장동 개발 의혹과 관련해 내가 대통령 되면 철저히 잡아넣을 것이라 한 것도, 광주 학살 주범 전두환을 옹호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고 보니 조직에 충성하지,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던 말도 상명하복의 검사동일체일 뿐, 정의나 민주주의와는 멀다. 청년들이 독재 타도민주 쟁취를 외치던 시절, 오직 독서실에서 고시 공부만 했던 대다수도 마찬가지! ‘고발 사주의혹을 받는 손준성 검사가 공수처 제1호 구속감이었던 것은 시사적이다.

 

의사의 맹세인 히포크라테스 선서와 마찬가지로, 검사들 역시 검사 선서를 한다. “공익의 대표자로서 정의와 인권을 바로 세우고 범죄로부터 내 이웃과 공동체를 지키는 사명을 띤다. 그래서 모두는 불의의 어둠을 걷어내는 용기 있는 검사,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따뜻한 검사, 오로지 진실만을 따라가는 공평한 검사, 스스로에게 더 엄격한 바른 검사가 될 것, 그리고 국민을 섬기고 국가에 봉사할 것을 다짐한다. 물론 이 선서를 충실히 지키는 이도 많다. 하지만 정치검사들은 이를 가벼이 배신한다.

첫째, 범죄로부터 이웃과 공동체를 지키기보다 권력을 위해 이웃을 희생시키는 죄를 범한다. 1990년대 초 노태우 정권에 저항하던 민주화 운동의 열기 속에서 김기설이 분신자살하자 당시 곽모 검사는 강기훈에게 유서 대필자살 방조를 했다고 조작했다. 이는 단순히 한 개인의 삶만 짓뭉갠 게 아니라 민주화 운동 전반을 박살냈다.

 

둘째, 불의에 맞서는 용감한 검사가 아니라 감히 불의를 저지르기도 한다. (여성) 피의자를 심문하다가 음흉한 생각에 잘 봐주는 대가로 성 상납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 재벌 비리를 조사하러 갔다가 느닷없이 그 법무실의 고위직으로 변신한다. <삼성을 생각한다>를 쓴 (검사 출신 변호사) 김용철도 처음엔 그랬다가 나중에 내부고발자가 됐다.

셋째, 진실만을 따라가는 공평한 검사라기보다 권력·재물욕망을 위해 진실 배반도 한다. 노동운동가는 구속 수사나 엄벌하면서도, 재벌 회장은 유죄도 무죄로 만든다. 심지어 영화 <자백>의 유우성 사례처럼, 정치적 국면 전환을 위해 정보기관과 공조해 국가보안법에 따른 간첩도 제조한다.

이런 맥락에서 이번 대장동 화천대유비리 사건에 다수의 검사 출신 인사들이 이래저래 연루된 건 놀랄 일도 아니다. 따라서 대선 후보들 사이에 아무 말 대잔치로 저질 코미디만 연출할 일이 아니라, 차제에 검찰개혁과 언론개혁을 철저히 해서 정의와 인권, 진실을 바로 세워야 한다.

 

대통령 선거건 국회의원 선거건, 선거란 최소한의 민주주의라도 하자는 것이지 1%의 권력 욕망을 채우려는 게 아니다. 권력은 한순간이지만, 민주주의는 영원하다! ‘정치검사들이여, 이제 제 자리(검사 선서)로 가시라!! 그들에게 미안하지만, 또다시 외친다. 민주주의여, 만세!!! 그런데, 도대체 이 외침을 언제까지 해야 하나?

강수돌 고려대 명예교수·세종환경연합 난개발방지특위 위원장 경향 : 2021.10.30

 

녹취록의 사실과 진실, 그리고 언론

대선 판이 본격화되면서 정치권과 언론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언론을 통해 정치권의 움직임이 소개되고 있어 정치권은 당선이라는 지상목표를 향해 가동할 수 있는 방법과 수단을 총동원하고 있다. 정치권이 득표에 도움이 된다면 언제 든 사실과 진실을 구분해서 정치적 행동을 하는 것이 체질화되어 있지만 중요한 것은 언론이다. 언론은 사실과 진실을 동시에 제시해주어야 할 책무가 있다는 점에서 제 4부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다.

 

언론이 만약 사실과 진실을 정치권처럼 분리해서 할 일 다 했다는 식이면 제 4부의 자격을 유지할 수 없다. 그러면 우리 언론은 과연 그렇게 하고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대단히 실망스럽다. 첫째, 오늘날 언론은 이른바 정치인의 입만을 주시하거나 녹취록을 중계방송하기 바쁘다. 정치인의 말이나 녹취록은 사실일 수 있지만 그것이 진실인지 여부는 판단키 어렵다. 특히 정치인의 말이나 전체 녹취록 가운데 일부분만을 공개하할 경우 더욱 그러하다.

 

이번 선거는 여야 유력후보 두 사람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어 있어서 정책 공약보다 그 수사와 진실공방이 지속되고 있다. 대장동 특혜사건의 경우 녹취록이 최고의 관심거리가 되고 있어 주목된다. 대장동 특혜와 관련된 인물들이 녹취록을 앞세운 경향을 보이는데 이는 언론이 대단히 경계해야할 부분이다. 녹취록을 내놓거나 인터뷰를 언론에 자청하는 사람들이 언론보도의 abc를 잘 아는 이른바 선수일 경우 언론이 그 프레임에 갇혀 사실과 진실을 혼동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언론이 탐사보도를 중시해야 할 이유가 바로 이런데 있다 하겠다. 언론이 받아쓰기나 중계방송을 하는 식의 경쟁이 심화되면서 이런 약점은 언론을 이용하려는 세력에 의해 최대한 악용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두 번째는 방송사의 정치관련 대담프로다. 지상파, 공중파할 것 없이 현안에 대한 여야 정치인이나 그 쪽 출신들을 대담자로 앉혀놓고 발언하도록 하는 형식이다 보니 제 각각 자신의 정치적 소속 집단의 시각에서 가공된 정보만을 주로 이야기 하게 된다. 대단히 복잡해서 갈피잡기 어려운 난제일 경우 특정 정당의 공보관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정보만이 쏟아지기 마련이다. 그들은 사실을 열심히 주장하고 있지만 그것이 진실과 얼마나 부합하는지에 대한 결론은 제시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러니 그 프로를 시청한 일반시청자들을 혼란 속에 빠뜨리거나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확증편향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피하기 어렵다.

 

언론이 사실과 진실을 동시에 보도하는 것이 오늘날 더 중요시 되고 있다. 정치권이나 사법기관 등이 언론의 속보경쟁 체질을 이용하거나 특정 프레임을 제시하기 위해 구조적으로 편향되거나 오도된 정보를 양산할 경우 언론이 이에 휘말리고 그로 인한 피해는 막중할 것이다. 언론이 제 4부의 위상을 유지하지 못하고 언론의 속성을 꿰뚫는 세력에 의해 이용당할 경우 민주주의 자체를 위협할 수 있다. 정치권력 등이 의도적으로 사건 사고를 어느 방향으로 몰아가려 할 경우 그것에 제동을 걸 수 있는 또는 그래야 하는 주체가 바로 언론이다.

 

세 번째 언론이 경계해야 할 것은 가짜뉴스의 범람이다. 가짜뉴스는 미국 등의 큰 선거에서 이미 확인되었듯이 돈벌이를 위한 수단으로 양산되고 있다. 가짜뉴스의 개념을 넓게 잡을 경우 언론이 경계해야 할 대상은 나날이 확대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점 때문에 미국 주요 언론은 대선과 같은 큰 이벤트에는 후보자들이 생산하는 정보를 액면그대로 보도하기 전에 팩트체크를 우선하는 작업을 정례화하고 있다. 우리 언론은 내년 3월 대선을 유권자들이 최대한 잘 치르도록 얼마나 보도를 통한 책무를 다 하고 있는지 자성해야 할 것이다. 얼마 전 우리 언론은 입법부가 징벌적 배상제를 도입하려 했을 때 보수, 진보언론 또는 보도준칙이나 윤리를 지키거나 그렇지 않은 언론 모두 한 목소리로 반대했다. 그러면서 언론이 자율적 통제를 하겠다고 다짐했지만 아직 그로 인한 박수갈채를 받을만한 어떤 유의미한 결과도 나오지 않고 있다

 

언론이 제 4부의 위상을 유지하려면 그 구성원들이 언론윤리와 전문성 두 가지를 겸비해야 한다. 그래야 사회의 소금과 파수견이 될 수 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내로남불인 경우가 너무 많다. 언론이 남의 허물만 손가락질 할 뿐 정작 자기의 잘못된 점을 바로잡으려 하는데 인색하다. 방송사의 비정규직 문제가 법정으로 가거나 국가기간통신사가 광고형 기사를 남발하고 신문발행부수를 속이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개개 언론사 차원을 넘어서는 이런 문제는 전체 언론계가 공동 대처해서 대국민 사죄와 함께 재발 방지약속이나 개선실적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언론이 서로 혼탁하다는 공통점에 안주하려는 경향이 깊어진 탓인지도 모를 일이다.

 

언론은 21세기 정보사회를 맞아 양과 질적인 차원에서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다. 언론은 정치, 자본과 함께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체제를 받치는 중요한 요인의 하나로 정착했었는데 오늘날 그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 전통적인 대중매체는 그 시장, 영향력이 축소되고 포털, 플렛폼과 같은 첨단미디어들이 공룡으로 등장했다. 인터넷의 발달과 보급으로 1일 미디어도 가능한 시대다. 이런 변화는 언론이 감내해야 하고 그리고 제 위상을 확립하기 위해 전략과 전술을 과거와 달리 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아직 그렇지 못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언론 대부분은 그 체질이나 시각이 과거의 좋았던 시절에 머물러 있으면서 정보환경의 변화를 제대로 보려고도 하지 않고 대처하는데도 여전히 구시대적이다. 언론은 이런 과도기적 상황을 빨리 벗어나야 한다. 그래서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데 기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론 자율적 규제의 첫 단추를 언론윤리와 전문성 확립으로 삼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고승우 언론사회학 박사/ 미디어오늘 2021.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