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 행동주의, 명분만큼 의무도 중요 에너지경제신문 2021.08.31.
재난은 평등하게 오지 않기 때문에 매일노동뉴스 2021.09.01.
나이와 역사 경향 2021.09.02.
대학 서열은 돈의 서열이다 경향 2021.09.02.
대선, 진보가 답해야 할 세 가지 질문 매일노동뉴스 2021.09.02.
뭉개면 그만? '탈당쇼'가 돼버린 부동산 투기 징계 CBS노컷뉴스 2021-09-02
배달노동자가 안전할 권리를 매일노동뉴스 2021.09.02.
탄소중립 시나리오가 실현 될 수 없는 이유 에너지경제신문 2021.09.03.
용산공원 구하기 한겨레 2021-09-03
탈진실 시대와 대통령 선거 한겨레 2021-09-03
헌법에 비춰본 대선 후보의 자격 경향 : 2021.09.03.
게임 속 은행은 망하지 않는다 경향 : 2021.09.04.
도둑맞은 농촌, 정의란 무엇인가? 경향 : 2021.09.04
사설] 여성 10명 중 2명만 ‘안전하다’고 느끼는 사회 한겨레 :2021-09-05
당신들의 노동귀족 매일노동뉴스 2021.09.07. 07
보이지 않는 가치 경남도민일보 2021-09-08
GTX는 정의로운가 경향 : 2021.09.08.
문재인 정부 부동산정책의 실패학 경향 : 2021.09.10.
역사를 보는 눈 매일노동뉴스 2021.09.10
이낙연이 이재명을 못 이기는 이유 한겨레21 : 2021.09.11
논리적 오류’와 윤석열의 ‘억지 주장’ 한겨레 2001.9.12.
윤리 지키겠다는 기업들, 이 세 가지만 기억해라 시사인 2021.09.12.
참 이상한 나라의 ‘지방’에서 살기 한겨레 2021.9.14.
심재륜의 검찰, 윤석열의 검찰 한겨레 2021.09.15.
선진국 한국을 가로막는 '자료 권력' 프레시안 2021.09.16.
대선판은 지금 ‘나쁜 남자’ 전성시대 한겨레 2021-09-17
파죽지세 35살 칠레 대권주자..."신자유주의 고향을 신자유주의의 무덤으로" 프레시안 2021.09.16.
생태전환교육은 최소한의 생존교육 경남도민 2021년 09월 17일
추석 상차림이 감춘 것들 경향 : 2021.09.2.
참을 수 없는 홍준표의 가벼움 김민아 논설실장 경향: 2021.09.27.
발전소로 변해가는 농촌 들녘 이용기 영남대 명예교수 경향 : 2021.09.27
약자 무시'의 위험한 정신세계 프레시안 2021.09.27.
국제뉴스로 보는 강대국·선진국 민낯
ESG 경영과 ‘에코사이드’ 경향 : 2021.09.28
고통 호소가 협박이 된 사회 경향 : 2021.09.29.
대장동의 ‘오징어 게임’ 경향 : 2021.09.29.
이제는 대학원 시대를 준비해야 경향 2021.09.30.
한·일 대학생 ‘일본 인식의 덫’ 넘어서기 경향 2021.09.30.
기후 행동주의, 명분만큼 의무도 중요
기후 행동주의가 들불과 같이 무서운 기세로 전지구로 확산되고 있다. 그 어떤 것도 이들의 위세당당한 전진을 막을 수 없을 듯하다. 마치 18세기 말 프랑스 대혁명 당시 프랑스 시민들이 자유·인권·박애를 외쳤던 것처럼, 그리고 20세기 공산주의 혁명 당시 프롤레타리아들이 모순·계급투쟁·평등을 외쳤던 것처럼, 21세기의 인류는 기후위기·탄소중립·그린 뉴딜이라는 새로운 신조(credo)를 외치고 있다. 이 운동은 필시 후세에 ‘기후 행동주의 혁명’이라는 용어로 역사의 한 페이지에 그 족적을 남기게 될 것이다.
기후 행동주의 혁명은 결코 폭력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하지만 너무나도 강렬하게, 그리고 눈부시게 전세계 국가의 법률과 정책에 불가역적인 파급력을 미치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환경정책, 에너지정책 그리고 산업정책의 주도권이 이미 기후 행동주의 혁명군의 손에 맡겨진 상태이다. 정부뿐만 아니라 산업계와 에너지 업계의 거물들도 재생에너지, 수소산업, CCUS(탄소 포집·활용·저장) 등 실행계획을 발표함으로써 혁명군의 뜻에 따르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기후 행동주의 혁명은 프랑스 대혁명이 퍼트린 자유와 인권처럼 인류의 영원한 가치로 승화될 것인가, 아니면 공산주의 혁명처럼 경제법칙과 그 기저에 존재하는 인간심리를 무시한 탓에 실패한 실험으로 귀결될 것인가.
필자는 아마도 기후 행동주의가 최종적으로는 역사의 승리자로 기억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기후변화를 막아야 한다는 그 숭고한 대의에 대해 어느 누가 감히 시비를 걸어 신성모독죄를 저지를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런 승리의 순간을 맞이하기까지 기후 행동주의는 머지 않은 시점에 닥칠 상당한 역풍과 반발을 극복해야만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현재의 기후 행동주의자들은 탄소중립 이행을 위해 요구되는 막대한 비용에 대해 애써 눈감고 있다. 재생에너지가 풍부한 나라, 그리고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수소를 생산하거나 배출된 탄소를 포집·저장할 수 있는 나라라면, 탄소중립은 비교적 큰 무리 없이 이행될 것이다. 하지만 재생에너지가 화석연료만큼이나 귀한 나라, 종전에 비해 훨씬 많은 비용을 들여야 수소를 생산하거나 탄소를 포집·저장할 수 있는 나라라면, 기후변화 그 자체가 야기하는 사회경제적 비용보다 급격한 탄소중립 이행과정에서 지불해야 하는 사회경제적 비용이 훨씬 클 것임이 분명하다.
이때 사회경제적 비용의 의미를 단순히 기업의 비용 증가, 물가 인상, 국가 국내총생산(GDP) 감소의 문제 정도로 축소 해석해서는 안 된다. 탄소중립 이행에 따른 기업 손익, 지역경제, GDP와 같은 숫자놀음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누군가의 일자리가 걸린 일이고, 그들 가족의 생계가 달린 문제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먼저 그 누군가가 될 사람들은 탄소중립의 이행을 위해 또는 그 결과로 경쟁력을 상실해 문을 닫아야 하는 공장이나 발전소의 근로자들, 전기료 걱정으로 에어컨조차 갖추지 못한 빈곤층과 같은 사회적 약자일 것이다.
탄소중립 사회의 실현은 전통적 에너지와 원료의 원천인 석유, 천연가스, 석탄에 의존하고 있는 탄소사회로부터의 철수, 즉 후퇴와 탈출을 의미한다. 그것이 주도면밀하게 수립된 계획에 따라 질서 있게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벌어질 사태는 최근 아프가니스탄 탈출의 비극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입법과 행정을 책임지는 관계자들이 기후변화가 전세계 각국이 함께 해결해야 할 절체절명의 지상과제라는 이유로 이들 계층의 생존적 이익을 중요하게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기후 행동주의자들이 자신의 숭고한 도덕적 이상을 달성하는 것에만 주안점을 둔 채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을 끈기 있게 설득하면서 여러 가치들과 이익들 사이에서 균형(balance)을 모색하지 않는다면, 아울러 제대로 된 탄소사회 탈출 전략을 마련하지 않은 채 강압적 수단으로 탄소중립을 이행하려 한다면 어떤 결과가 초래될까. 언젠가는 그들이 국가주권의 원천인 국민들에 대한 ‘충실의무(fiduciary duty)’를 저버린 기후 행동주의 엘리트로 평가받아 댓가를 치르는 시점이 올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박진표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 에너지경제신문 2021.08.31
재난은 평등하게 오지 않기 때문에
코로나19 상생 국민지원금(5차 재난지원금)이 지급된다. 전체 가구의 약 88%를 대상으로 1인당 25만원이 지급될 예정이다. 건강보험료를 기준으로 가구소득 하위 88%에 해당하는 경우(맞벌이 가구 및 1인 가구는 별도 기준을 적용, 재산세 과세표준 합계액이 9억원을 초과하는 등 제외기준 적용)에 해당한다. 이를 위한 예산은 11조원으로, 약 4천472만명이 지급 대상이다. 1인 가구 직장인의 경우 약 월 483만원(연소득 5천800만원, 건강보험료 17만원)이 기준점이라 한다.
88%에게 동일하게 25만원이 지급되지만, 그 의미는 동일하지 않다. 계속해서 직장을 유지하며 월 소득이 480만원인 사람에게 25만원의 의미와, 그보다 적은 소득 또는 무소득으로 코로나 시기를 버티고 있는 사람들에게 25만원의 의미는 다르다. 보편적으로 지급했던 지난 재난지원금의 결과는 어땠는가. 전 국민에게 지급한 재난지원금이 코로나 시기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든든한 지원이 되기에 충분했나? 재난지원금을 받은 모든 소득계층의 사람들이 필요한 부분에 재난지원금을 사용했나? 기본소득이 진보적인 가치인지, 미래를 위한 대안인지 의문이다.
코로나 시기 동안 재난은 평등하게 오지 않는다는 말이 회자됐다. 미국 전 노동부 장관 로버트 라이시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드러난 4계급을 <가디언>을 통해 설명했다. 첫 번째 계급인 원격근무로 일하는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거의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고, 두 번째인 필수노동자의 경우는 고용은 유지되나 여러 위험에 노출된다. 세 번째 계급은 무급휴가나 실직 등의 이유로 임금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뜻하며, 마지막은 노숙인·수감자 등의 사람들로 잊힌 사람들이라고 설명했다. 경제적으로 코로나 전후에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는 사람들에게 25만원은 어떤 의미일까.
재난지원금과 보편·선별 논란을 보며 실업급여가 떠오른다. 실업급여는 사회를 같이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서로를 돕기 위한 사회연대이지, 내가 낸 만큼 돌려받겠다는 적금이 아니다. 고용보험 가입의 의미는 타인이 실업으로 고생을 겪을 때 우리가 함께 모은 기금으로 그 사람을 돕고, 내가 계약만료나 해고 이후 일자리를 구할 동안 도움을 받는 것이다. 세금을 냈으니 나도 그만큼 보상을 받겠다는 건 사회연대가 아니다. 실업급여를 마치 적금처럼 생각하면 안 되듯이, 기본소득을 납세자의 권리로 이야기하는 것도 타당하지 않다.
기본소득과 2011년 무상급식도 다르다. 무상급식은 ‘교육’에 대한 것이다. 학교 급식은 학교생활·교육에 포함되는 범위이므로, 학교 급식비 지원은 공교육으로서 국가가 국민의 교육을 일정 부분 책임지겠다는 교육권의 일환이다. 무상급식은 기본소득과는 달리 ‘교육권’이라는 명확한 취지와 의미를 갖는다.
재난은 평등하게 오지 않으므로, 지원도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지원이 가야 한다. 지원금액이 평등하다고 평등한 사회를 위한 정책인 것이 아니다.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지원이 가는 것이 평등을 만드는 데 더 일조할 수 있다. 뭐든 지원은 시행하면 좋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원해서 안 좋은 일이 얼마나 있겠나. 문제는 모든 일은 기회비용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시행함으로써 무언가는 재정적 그리고 행정적으로 시행할 수 없게 된다. 코로나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소상공인에게 희망회복자금과 손실보상을 일부 지원한다고는 하지만, 대상 자격도 금액도 현실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11조원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 25만원이 더 가치 있게 쓰이는 25만원이길 바란다.
이가현 노동활동가 매일노동뉴스 2021.09.01.
나이와 역사
역사를 읽을 때 등장인물의 나이를 염두에 두려고 노력한다. 보통 나이는 안 쓰여 있기 때문에 따로 신경을 써야 한다. 살다보면 한 인간의 생각이나 행동을 결정하는 데 나이나 그가 속한 세대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끼게 된다. 역사상의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는 몇 살이었는지, 이하응은 대원군으로 집권할 때 어느 정도 나이였는지를 감안하며 책을 읽으면 더 실감난다. 이하응은 44세에 그 자리에 올랐으니 권력욕은 끝을 몰랐을 것이다. 명성황후는 이때 23세. 이 나이로 시아버지에게 대들었으니 그 배짱과 캐릭터를 짐작할 만하다.
갑신정변 당시 두령 김옥균은 33세였고 박영효(23), 서광범(25), 홍영식(29) 등 쿠데타 멤버들은 모두 20대였다. 당시의 평균수명을 감안하여 지금으로 치더라도 30, 40대들의 정변이었다. 고종(32)이 개화정책에 관심을 보이고 잠시 이들에게 동조했던 것도 ‘세대담론’ 차원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위정척사파 어르신(꼰대)들이 봤을 때 갑신정변은 ‘꼬마들의 불장난’이었을 게다.
‘꼬마들의 불장난’이 멋지게 성공한 경우도 있다. 메이지 유신 발발(1868) 당시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 등 유신 삼걸은 모두 30대 중후반이었다. 유신의 스승으로 널리 알려진 요시다 쇼인은 1859년 처형당할 때 29세, <료마가 간다>의 사카모토 료마는 1867년 암살당할 때 31세였다. 이토 히로부미가 1870년 공부경(工部卿)으로 내각의 한 축을 차지하게 되었을 때에도 불과 28세였다. 당시 기성세대의 정치가·학자들은 이들의 주장을 ‘신기지설(新奇之說)’이라고 일축했지만, 이 젊은이들의 무모해 보이는 모험과 도전이 세상을 움직였다.
나이를 생각할 때 흥미가 가는 것은 일찌감치 인생의 정점을 찍은 사람들의 후반생이다. 젊은 날에 퇴위한 왕, 실각한 권력자, 패배한 정치가들이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에 대해 역사학자들은 거의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 삶이 더 이상 역사적 의미를 갖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48세의 한창 나이에 폐위된 광해군은 1641년 67세로 죽기까지 거의 20년을 더 살았는데, 그사이에 강화, 태안, 제주도로 유배지를 옮겨가며 역모사건에 연루되기도 하지만, 역사에서는 더 이상 그를 주목하지 않는다. 이 20년간 광해군이 과연 무슨 생각과 감정으로 살아갔는지, 생각하면 기막힌 인생이 아닐 수 없다. 역사학에서는 외면한다 해도 문학이나 다른 분야에서 좀 다뤄주면 어떨까.
역사의 현장에서는 사라졌지만 그 후 인생이 이 사람만큼 행복했던 사람은 없을 것이다. 도쿠가와 막부 마지막 장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다. 유신 삼걸과 건곡일척의 권력투쟁을 벌이던 당시, 그의 나이는 31세로 유신 삼걸보다도 어렸다. 1860년대는 이 30대 청년정치가들이 불꽃 튀는 머리싸움을 벌이던 시기였다. 기도 다카요시는 “마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재림한 것 같다”며 요시노부의 정치력에 혀를 내둘렀지만, 결과는 막부의 패배였다. 요시노부는 시즈오카에 은거했고 세상은 유신 삼걸이 지배했다. 그러나 권불십년이라 했던가, 유신 발발 후 10년 만에 삼걸은 모두 죽었다.
반대로 요시노부는 세상 즐겁게 살았다. 수렵, 매사냥, 투망에서부터 바둑, 장기, 그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취미에 빠져들었다. 사진 찍기에 맛을 들이고부터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온천과 사진촬영에 여념이 없었다. 물론 측실들과 동행이었고 그들 사이에서 스무 명이 넘는 아이를 낳았다. 유신 삼걸의 비명횡사에 감개를 느낄 틈도 없었을 것 같다.
유신발발 30년 만인 1898년에는 마침내 메이지천황을 배알했고, 공작 작위도 받아 귀족원 의원이 되었다. 그러나 정치에는 눈 돌리지 않았다. 자전거가 나오면 사이클을 하고, 자동차가 수입되면 드라이브를 즐겼다. 그가 죽은 것은 1913년으로 향년 76세. 유신 삼걸은 물론이고 메이지천황도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누가 인생의 승자일까.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경향 2021.09.02.
대학 서열은 돈의 서열이다
‘사교육 걱정없는 세상’에서 개최한 대입 토론회에 초청된 적이 있다. 내 앞의 발제자는 수능 폐지를 주장했다. 수능 점수 1, 2점 차이로 학생을 변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뭔가 정곡을 벗어난 이야기였다. 경쟁은 수능시험 때문이 아니라 대학서열 때문에 생기기 때문이다. 나는 발제를 시작하면서 도발적으로 물었다. “서울대와 연·고대 중 어디가 더 좋은 대학인가요?” 좌중은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대학 서열을 노골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금기였기 때문이다. 나는 태연하게 말했다. “서울대가 더 좋은 대학입니다.”
왜일까? 서울대가 1년에 학생 1인당 투입하는 교육비는 무려 4800만원대다. 연세대·고려대는 평균 2700만원대다. 서성한(서강대·성균관대·한양대) 평균 2300만원대, 중경외시(중앙대·경희대·한국외대·서울시립대) 평균 1500만원대, 4년제 대학 최저는 800만원대다. 대학서열은 곧 ‘돈의 격차’인 것이다.
‘학벌 때문에 대학 서열이 생긴다’는 말은 틀렸다. 1980년대 생긴 포항공대와 1990년대 생긴 한국예술종합학교가 결정적인 반례다. 신생 대학이어서 학벌이 없는데도 바로 최상위권에 올랐다. 왜? 넉넉한 재정을 기반으로 우수한 교육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성균관대가 1990년대 후반 이후 삼성그룹의 지원으로 위상이 높아져 ‘서성한’이라는 표현을 낳은 것도, 최근의 GIST·DGIST·UNIST(광주·대구경북·울산과기원), 곧 개교할 한전공대도 비슷한 사례다. 대학서열이란 재정 격차로 인한 ‘교육의 질’의 서열인 것이다.
학벌은 대학서열을 강화하는 피드백 효과를 일으키기는 하지만, 결코 대학서열의 ‘원인’이 아니라 오히려 ‘결과’다. 재정→교육의 질→서열→학벌이라는 인과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니 이상한 해법이 난무한다. 대입경쟁의 원인을 ‘그릇된 학벌의식’이나 ‘학부모의 욕망’으로 여기고 계몽주의에 빠지거나, 심지어 ‘능력주의’에 원죄를 묻기도 한다. 지역 거점 국립대의 1인당 교육비가 서울대의 3분의 1에 불과한데도 이들을 서울대와 통합하면 위상이 서울대급으로 올라간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학생 1인당 교육비 통계에도 약점이 있다. 이공계·의약계 비중이 큰 대학일수록 이 수치가 큰 경향이 있다. 또한 학부생과 대학원생을 합쳐 계산한 수치이고, 대학원 교육비에는 실질적으로 연구비가 중복 계산된다. 즉 학생 1인당 교육비가 ‘학부 교육’ 여건을 정확히 반영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OECD 통계도 동일한 방식이고, 이 순위가 ‘설연고 서성한 중경외시…’라고 읊는 서열과 거의 일치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것이 교수 대 학생 비율, 실험·실습비 등 핵심적인 교육 여건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한국 대학에는 또 하나 놀라운 특징이 있다. OECD 평균 고등학생 1인당 교육비의 1.5배를 대학생에 쓰는데, 한국은 겨우 0.8배만 쓰는 것이다. 서울대의 교수 대 학생 비율이 OECD 전체 평균치에 불과하다(1 대 15). 즉 한국은 대학 간 격차가 극심함과 동시에 평균적인 대학 교육의 질은 낮은 것이다. 대학에 대한 국고 지원이 선진국 대비 매우 적기 때문이다.
대구에 강연하러 가면 ‘옛날에는 경북대가 연·고대 수준이었는데 지금은 왜 이러냐’며 분개하는 분들을 보게 된다. 그러면 나는 카이스트나 포항공대처럼 투자하면 지방에 있어도 명문대가 된다고, 그런데 현재 경북대 학생 1인당 투자되는 돈은 중경외시 수준이라고 답한다. 얼마 전 한 대선 후보가 ‘지역 거점 국립대의 학생 1인당 교육비를 연·고대 수준으로 높이겠다’는 공약을 발표했다. 계산해 보면 소요 예산이 1조원을 훌쩍 넘어간다. 여태까지 거점 국립대를 육성하겠다면서 겨우 수십억~수백억원을 나눠준 것은 체면치레에 불과했던 셈이다.
‘재정을 늘려달라’는 대학 측의 요구와 ‘대입 경쟁을 줄여달라’는 일반 시민의 요구를 결합하면 ‘학부 교육 여건의 상향 평준화’라는 방향이 도출된다. 최근 각 대선 캠프를 살펴보니 주류 담론은 ‘균형발전을 위해 비수도권 대학을 키우자’는 것이다. 대체로 동의하지만, ‘수도권 아이들은 입시지옥에 시달려도 어쩔 수 없다’는 식의 편향이 엿보인다. 좀 더 포괄적인 관점에서 ‘균형발전’과 ‘경쟁완화’의 교집합을 넓혀가야 한다.
이범 교육평론가·<문재인 이후의 교육> 저자 경향 2021.09.02.
대선, 진보가 답해야 할 세 가지 질문
정의당 심상정 의원이 8월29일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4선의 심 의원은 제도 정치권에서 진보를 대표한다. 그의 출사표는 진보가 대선에 나서는 이유를 대중에게 설명하는 상징적 글이 될 수밖에 없다. 나는 이번 칼럼에서 심 의원의 출사표를 소재로 삼아, 진보 진영이 20대 대선에서 답해야 할 질문을 추려 보고자 한다.
첫째, 문재인 정부 평가와 관련한 질문이다. 야당 후보의 기본 중 기본은 여당과 대통령에 대한 비판적 평가다. 그런데 심 의원 출사표에는 문재인 정부 평가가 매우 짧게, 그것도 두루뭉술하게 담겨 있을 뿐이다. 심지어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더 구체적이다. 20대가 아니라 19대 대선 출사표가 아닌지 착각이 들 정도다.
정의당이 어려움에 빠진 이유 중 하나로 ‘민주당 2중대’가 자주 거론된다. 조국 사태에 대한 태도가 대표적이었다. 그런데 따져보면 정의당의 더불어민주당과 관련된 결함은 그것에 국한되는 게 아니다. 현 정부 전반기 정책 기조였던 ‘소득주도 성장론’은 정의당의 강령에 포함돼 있다. 대북정책, 반일외교도 정의당이 공유하는 바다. 문 정부 후반기 핵심인 검찰개혁 역시 마찬가지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는 정의당의 적극적 역할 덕분에 패스트트랙으로 국회를 통과할 수 있었다. 요컨대 정의당이 여당과 정책 또는 사상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 진짜 문제란 것이다.
하지만 심 의원의 출사표에는 이에 대한 어떤 의견도 담겨 있지 않다. 민주당 2중대란 평가를 비껴가려고 “낡은 양당 체제의 불판을 갈아야 한다”는 식의 뜬구름 잡는 선언만 나온다. 나는 이번 대선에서 진보가 넘어서야 할 가장 중요한 지점이 바로 여기라고 생각한다. 진보는 도대체 어떤 점에서 현 집권세력과 근본적으로 다른가? 진보정당은 좀 더 과격한 더불어민주당일 뿐인 건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 말이다.
둘째, 정치 개혁과 관련한 질문이다. 한국에서 대통령 선출은 단지 행정부 수장을 뽑는 것에 제한되지 않는다. 군부독재를 끝내긴 했지만, 한국의 정치 민주화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대통령을 탄핵하고, 구속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을 겪고도 제왕적 대통령제로 불리는 한국의 정치 제도는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문민화 이후 대선은 정치 민주화의 방향을 항상 다뤄 왔고, 이번에도 그래야 한다. 심 의원이 ‘정치 교체’라는 프레임을 제시한 건 이런 점에서 적절하다. 다만 문제는 그 방향이다.
심 의원은 의회중심제와 다당제 기반의 책임 연정을 이야기했다. 서유럽의 정치를 따라가자는 주장이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 봐야 하는 게 있다. 한국의 국회는 조용하면 식물, 시끄러우면 동물로 비난받는 존재란 점이다. 무능과 무용의 대명사가 바로 국회의원이다. 왜 이럴까? 정치학자들은 국회가 무능해진 핵심 원인으로 대통령의 제왕적 권력을 꼽는다. 예산·법률·인사 등 정부의 모든 권한이 대통령에게 주어지다 보니 국회의원은 대통령의 부하거나, 대통령을 물어뜯는 사냥개가 될 수밖에 없다. 제왕이 국회를 무능하게 만들고, 무능한 국회는 국민이 대통령만 바라보도록 만든다. 이게 영원회귀처럼 나타나는 국회 무능의 악순환이다. 같은 대통령제라도 막강한 권한을 가진 의회가 정치의 중심을 차지하는 미국과 비교된다.
이런 점에서 심 의원은 대통령제 개혁 방향을 먼저 밝혀야 했다. 그리고 당연히 이는 문재인 대통령과 170여석의 더불어민주당이 과연 제왕적 권력을 개혁했는지, 개혁하지 못했다면 이유가 무엇인지 분석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국정농단으로 불리는 전 대통령의 권한 오남용을 심판해 집권에 성공한 게 현재의 대통령과 여당이다. 과연 그들은 얼마나 이전 대통령들과 달랐는가? 참고로 제왕적 대통령제를 개혁하지 못하면 다당제 기반의 연합정치도 개혁이 아니라 개악이 된다. 강력한 제왕과 군소정당으로 분열하는 국회가 바로 부패와 무능의 상징인 라틴 아메리카 정치의 특징이다.
셋째, 부동산·탈탄소 같은 정부가 즉각 대응해야 하는 문제와 관련한 질문이다. 심 의원은 이 문제들을 직접 언급했고, 대책도 제시했다. 그런데 대책에 도덕적 당위만 있다. 현 행정부가 내놓은 정책이 실패한 원인을 분석하지 않고, 됐으면 참 좋았을 것이란 희망만 꺼내 놓았기 때문이다.
심 의원은 토지공개념을 강화해서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지금 문제가 되는 건 수도권이다. 자본과 인구가 수도권으로 집중되다 보니,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주택과 토지를 소유하는 프리미엄이 크게 높아졌다. 이건 토지공개념이 없어서 문제가 된 게 아니다. 그런 틀에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희소성과 집중 탓에 문제가 된 것이다. 현 정부는 이런 원인을 무시하다 부동산 정책에서 실패했다. 현 정부의 실패를 발본적으로 평가하지 않고 대책을 제시하니, 비슷한 오류가 심 의원에게서 반복되는 것 같다.
탄소제로 전략도 마찬가지다. 탄소제로는 에너지의 전기화, 전기 생산의 탈탄소화가 핵심이다. 전기 생산은 증가할 수밖에 없는데, 발전소 80%를 차지하는 화석연료를 없애야 한다. 2030년에 절반 이상, 2050년까지 완전히 없애는 게 목표다. 문제는 의지가 아니라 과학적 방법이다. 이런 속도로 재생에너지를 늘리는 건 불가능하다. 해결 가능한 방법으로는 둘이 알려져 있다. 1인당 에너지 소비(소득)를 줄이는 탈성장 전략 또는 핵발전을 유지하면서(또는 늘리면서) 시간을 버는 에너지 전환 전략. 당연히 둘 다 상당한 부작용을 동반한다. 심 의원은 이런 곤란한 질문은 덮어 두고, 이번 대선이 기후위기 대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정의당은 자신이 실제로 집권했을 때, 부동산과 탄소 문제 해결을 가로막는 장벽들을 제거할 수 있을까? 상호 충돌하는 요소를 직시하면서, 그 곤란을 감당할 준비가 돼 있는가? ‘내로남불’에 지친 시민들에게 진보가 지지를 받으려면, 도덕적 당위로 실제 답해야 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질문들을 숨기지 않는 게 필요하다.
나는 정의당과 심상정 의원이 대담한 구상과 진취적 기세로 20대 대선을 정면에서 돌파하기를 오매불망 희망한다. 위의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이 힘이 돼 줄 것이라 믿는다.
한지원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매일노동뉴스 2021.09.02.
뭉개면 그만? '탈당쇼'가 돼버린 부동산 투기 징계
더불어민주당 송영길 대표가 투기 의혹이 제기된 소속 의원 12명 전원을 출당 조치할 때만 해도 음참마속(泣斬馬謖)으로 보였다.
육골참단(肉斬骨斷)의 심정으로 야당의 공세를 사전에 꺾어버리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두 달이 지난 지금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 비례대표 의원 2명만 의원직을 유지한 채 당을 나갔을 뿐이다.
5명은 탈당계를 제출했지만 5명은 탈당계 제출을 끝까지 거부했다. 그 사이에 우상호, 윤재갑, 서영석 의원은 경찰수사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민주당은 탈당계를 일괄 조치하겠다며 처리를 미뤄왔기 때문에 실제로 탈당한 의원은 아무도 없다. 결국, 송영길 대표의 출당 조치는 정치적 선언에 불과했던 것이다.
국민의힘은 아예 뭉개고 가려는 분위기다.
권익위원회로부터 소속 의원 12명의 부동산 투기 의혹이 제기됐지만, 윤희숙 의원만 정치적 책임을 지겠다며 의원직 사퇴를 선언했을 뿐이다. 비례대표인 한무경 의원에 대한 제명 절차는 감감 무소속이고 탈당을 요구받은 5명의 의원들은 저마다 억울하다고 반발하고 있다.
"민주당보다 가혹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이준석 대표의 말은 그저 호기(豪氣)였을 뿐이다.
한국 헌정사에 수많은 탈당과 징계의 역사가 있었지만, 탈당을 둘러싼 이같은 징계쇼는 없었다. 탈당을 요구하는 당 지도부나 이를 무시하는 의원들이나 국민의 따가운 시선은 안중에도 없다.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탈당 권고 조치는 강제성이 없는 쇼였다. 권익위원회에 조사를 의뢰한 것 자체가 처음부터 '보여주기'였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야당의 역사를 오래가진 민주당은 항상 도덕성의 우위를 자처해왔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 들어 수많은 내로남불과 선택적 정의는 위선의 증거로 남았다. 그렇다고 국민의힘이 민주당의 도덕적 공백을 대체할만큼 신뢰를 얻는 것도 아니다.
국회의원 평균 재산에서 국민의힘은 지난 3월 기준 30억 원으로 민주당 의원들의 평균재산의 곱절에 가깝다. 소속 의원들의 부동산 취득 과정에 불법과 위법 의혹이 제기됐지만 경찰수사가 나오기 전에 6명에 대해서는 면죄부를 줬다.
윤희숙 의원 사퇴안 처리는 윤 의원이 위법 사실을 시인했음에도 그 공을 민주당에 넘긴 상태다. 민주당은 자당 의원들에 대한 뭉개기가 민망한 듯 의원직 사퇴 처리에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다. 서로 폭탄 돌리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송영길 대표와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 윤창원 기자
민주당과 국민의힘은 서로 죽일 듯이 싸우지만 이번 부동산 투기 의혹에 대해서는 약속한 듯 적대적 공생관계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국민에게 여당이든 야당이든 어느 한쪽이라도 자신있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정치다.
그러나, 부동산 투기를 둘러싼 여야의 이처럼 무책임한 뭉개기는 정치적 냉소주의를 초래하고 국민 전체를 적대적으로 돌릴 수 있음을 정치권은 인식해야 할 것이다.
김규완 기자 CBS노컷뉴스 2021-09-02
배달노동자가 안전할 권리를
지난달 26일 서울 강남구 선릉역 인근에서 발생한 교통사고로 한 배달노동자가 생을 달리했다. 음식 배달노동자였던 그는 신호대기 중이던 화물차에 깔려 목숨을 잃었다. 그의 죽음에 진심으로 애도를 표한다. 생전에 고인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꿈을 꿨는지, 일면식도 없는 사이이기에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 사회를 구성하고 함께 숨 쉬며 살아 내던 동료시민의 안타까운 죽음이기에 아리고 아프다.
사고가 알려진 후 고인의 죽음을 추모하는 공간이 선릉역 8번 출구 앞에 마련됐다. 고인의 오토바이와 헬맷이 놓여진 곳에는 술병들과 국화꽃이 빼곡했다. 포스트잇에는 많은 방문객들의 추모글이 남겨졌다. 더불어 고인에 대한 ‘도넘은 비난을 자제해 달라’는 당부의 문구 또한 한켠을 차지했다.
한 노동자의 죽음에 대해 한쪽에선 애도와 추모가, 또 한켠에선 날선 비난이 자리 잡았다.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배달노동자들의 위험천만한 도로주행 관행이라고 할 수 있다. 일상 속에서 누구나 한 번쯤은 마주했을 도로 위를 전속력으로 내달리는 배달노동자. 중앙선을 위태롭게 넘나들고, 보행신호쯤은 가볍게 뒤로한 채 건널목을 가로질러 질주하는 모습에서 위태로움을 느껴 봤음 직하다. 그렇게 쌓인 경험들이 한편에서 배달노동자들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배달노동자들의 아찔한 질주에는 이유가 있다. 기본급이 없기 때문에 건당 수수료로 창출되는 수입(평균 2960.6원)에 의존해야 하고, 일주일 중 주말을 포함 꼬박 주6일 10시간의 장시간 노동을 해야 한다. 하루 평균 34.1건의 배달을 완료해야 세전 평균 256만6천원을 거머쥘 수 있는 현실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출처: 2020. 11. 19 ‘전국 배달노동자의 노동실태 분석과 정책 대안 마련을 위한 국회토론회’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자료집).
주행 중 다음 콜을 받기 위해 핸드폰을 수시로 확인해야 한다. 신호를 다 지키면서 8시간 근무하면 하루에 20건도 채우지 못해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수입을 받는다. 이들은 ‘시간 압박’을 배달앱에서도, 음식점에서도, 주문 후 음식을 기다리는 고객에게서도 받는다. 꼬박꼬박 매겨지는 평가점수는 덤이다. 라이더유니온 노동자들이 한 언론사 취재진과 준법운행 실험을 해 보니, 신호를 지키며 쉬지 않고 내달려도 인공지능 배달앱이 그들에게 계속적으로 ‘지각’이라는 메시지를 울려 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코로나19의 급격한 확산으로 배달노동 수요도 더불어 증가했지만 척박한 노동조건은 변함이 없었다. 이런 현실은 고스란히 배달노동자들의 희생으로 나타났다. 올해 7월 도로교통공단이 발표한 지난해 교통사고 사망자수 현황이 이를 잘 보여준다. 지난해 오토바이 사고 사망자가 최근 5년 사이 처음으로 전년보다 증가했다. 사망자수만 눈에 띄는 것이 아니다. 경찰청에 따르면 이륜차 교통법규 위반 건수는 2018년 26만3천760건에서 2020년 55만5천345건으로 2년 동안 2배 이상으로 크게 늘었다. 이렇듯 급격한 수요 증가와 코로나19 팬데믹이 불러 온 경제위기 상황에서, 먹고 살기 위해 배달노동에 나선 이들이 거리에서 희생되고 있는 것이다. 불안정한 상태의 노동자들이, 불안전한 노동에 편입되고 있는 현실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되는 구조적인 희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사고가 알려지면서 여러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에서 배달노동자를 혐오하는 날선 목소리들이 자리 잡고 있어 우려된다. 특정한 노동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어떤 집단이 혐오의 대상이 되거나 존중받을 자격이 없는 이들로 평가되면, 그들이 마땅히 보장받고 누려야 할 권리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감각 또한 박탈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더욱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배달노동 과정에서 ‘희생당하지 않을 권리’ ‘안전할 권리’를 요구하고 있는 배달노동자들의 목소리라고 생각한다. 안전하게 일할 권리를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목소리, 당사자들의 목소리에 주목해야 한다.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서비스일반노조는 안전하게 일할 조건을 마련하기 위해 배달오토바이공제조합 설립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라이더들의 노동조합인 라이더유니온은 ‘라이더보호법 통과를 위한 10만 라이더 서명운동’에 나섰다. 기존의 노동법이 포괄하지 못하는 새로운 고용형태 창출, 그 과정에서 아무도 보호해 주지 않는 권리의 사각지대에 놓인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 나선 것이다. 이들이 외로운 싸움을 벌이지 않도록 힘을 보태야 한다.
손진우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 매일노동뉴스 2021.09.02.
탄소중립 시나리오가 실현 될 수 없는 이유
8월 한 달은 참 정신없이 갔다. 8월초에는 2050 탄소중립 시나리오 초안이 발표되었다. 2050년에 온실가스 순배출량을 2540만톤, 1870만톤, 0톤으로 줄이는 세 가지 시나리오다. 8월 25일에는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2018년 배출량의 35% 이상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하는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법안’이 법사위를 통과하였다. 탄소중립 시나리오를 짜고 유엔기후변화협약 사무국에 제출할 우리나라 2030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안 작성으로 8월초와 8월말이 시끄러웠다. 8월초와 8월말의 두 사건은 앞으로 우리나라가 진행해야 할 에너지의 미래에 대한 내비게이션을 찍고 우리가 나가야 할 길을 보여준 셈이다. 그런데 이 길은 우리가 갈 수 있는 길인가.
우리가 갈 길은 세 측면에서 큰 도전을 준다. 첫째는 기술적인 타당성이다. 2050 탄소중립 시나리오와 2030 NDC 목표는 기술적인 타당성을 전제로 하고 있지 않다. 가정만 하고 있다. 일례로 탄소중립 시나리오는 아직 제대로 기술이 확인되지 않은 수소와 암모니아와 같은 무탄소 신전원의 비중을 14.1∼21.4%로 잡고 있다. 원자력(6.1∼7.2%)과 LNG(0∼8.0%)보다 높다. 전기·수소차 등 무공해차가 76∼97% 이상 보급될 것으로 전제하였다. 또한 CCUS(탄소 포집 및 활용·저장) 기술로 탄소배출량을 5790만∼9500만톤 줄인다고 가정하였다. 그냥 ‘기술적으로 가능하다면’이라는 전제를 단 것이다.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지만 에너지분야에서는 기술은 가정하는 대로 쉽게 진전되지 않는다. 기계공학과 에너지 열역학 분야는 컴퓨터·반도체·AI(인공지능)·인터넷보다 훨씬 그 진보 속도가 느리다. 새로운 기술의 개념도 잘 탄생하지 않는다.
두 번째 도전은 경제적 타당성이다. 기술적으로 타당하더라도 경제적으로 너무 큰 돈이 든다면 이를 추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2050 탄소중립 시나리오 중 그나마 상대적으로 가장 온건한 1안은 화력발전소를 최소 7기만 유지하는 것이다. 현재 70개가 넘는 화력발전소의 10%만 남기고 나머지 대부분을 재생에너지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태양광과 풍력발전을 얼마나, 어디에, 어떻게 설치할지, 계통을 어떻게 운영할지, 전력을 얼마나 저장할지는 모르지만 이런 전력생산 및 송배전방식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상상할 수 없는 돈이 들어갈 것은 명약관화하다. 그리고 그 돈을 누구에게, 얼마나, 어떻게 거둬낼 수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시나리오에서 지금까지 에너지다소비 업종의 제조업 국가로 살아온 우리나라의 주력 산업은 무엇이 될 것이며 어떻게 5000만 인구를 먹여 살릴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철강·석유화학·자동차·조선·반도체산업 모두 유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세 번째 도전은 정치적인 타당성이다. 이런 시나리오를 위한 기술적·경제적 좌표를 찍었다고 하더라도 승객이 그 길로 가지 않겠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에너지전환을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에너지 가격을 올리는 것이다. 그래야 기술개발을 할 수 있는 의욕과 인센티브가 발생하며 이를 위한 연구개발(R&D) 자금도 모을 수 있다. 에너지 가격을 올려야 엄청난 경제적 비용을 감당할 수 있다. 에너지가격을 올려야 에너지다소비형 제조업 중심에서 고부가가치 서비스산업으로 이행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정부가 에너지 가격을 올릴 수 있을까.
현 정부는 전기요금을 연료비에 연동시키겠다고 해놓고 전기요금을 동결하였다. 벌써 대선국면이다. 코로나로 국민들이 어려운 상황이다. 필자가 보기에는 4분기 전기요금 인상도 물 건너갔다. 이 역시 많이 보던 그림이다. 이명박 정부에서, 박근혜 정부에서 또 문재인 정부에서 계속 되풀이된 장면이기 때문이다. 시나리오는 썼지만 어디까지나 시나리오일뿐이다. 정치현실은 별개다. 굳이 하려면 다음 정부에서 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계속해서 역대 정부가 폭탄돌리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중간과정이 어떻게 되고, 그사이 어떤 우여곡절을 겪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 세 측면을 모두 고려했을 때 2050 시나리오와 2030 NDC안이 우리가 갈 수 있는 가능한 길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지도상에 두 점을 잇는다고 다 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조성봉 숭실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에너지경제신문 2021.09.03.
용산공원 구하기
외세와 식민지, 분단과 냉전 체제가 남긴 질곡의 땅 용산 미군기지(서울). 120년 만에 귀환하고 있는 불운한 땅의 상흔을 공원으로 치유하기 위해 문재인 정부는 다각적인 노력을 펼쳐왔다. 국립중앙박물관과 용산가족공원, 전쟁기념관을 공원에 추가 편입했고, 해방촌에 맞붙은 옛 방위사업청과 군인아파트 부지도 공원 경계 안에 포함해 공원 면적을 243만㎡에서 무려 300만㎡로 넓혔다. 기지 동남쪽 장교 숙소 5단지를 개방해 시민 누구나 자유로운 산책을 즐길 수 있게 됐다. 용산공원 국민참여단 300명의 숙의 토론과 워크숍을 지원했고, 참여단이 제출한 ‘7대 제안’은 올 연말까지 공원 조성계획안에 반영될 예정이다.
그러나 반년 앞으로 다가온 대선이 미래 세대를 위한 희망의 여백, 용산공원을 위협하고 있다. 지난 5월, 더불어민주당 강병원 최고위원은 용산공원 부지의 20%만 용적률 1000%로 초고층 초고밀 개발하면 분당 신도시에 맞먹는 8만 가구의 공공 임대주택을 지을 수 있다며 용산기지 개발론에 불을 지폈다. 앞뒤 돌아보지 않는 정치권의 여론몰이는 끝내 법안 발의로 이어졌다. 강 의원을 비롯한 여당 의원 15명은 8월3일, 반환 본체 부지 중 60만㎡에 주택 공급을 허용하는 ‘용산공원 조성 특별법’ 개정안을 냈다. 법안은 입법예고 기간을 거쳐 현재 국회 국토교통위원회에 회부된 상태다.
용산공원에 아파트를 지어서는 안 되는, 그리고 지을 수도 없는 이유가 차고 넘치지만, 적어도 세 가지 문제만큼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아파트 개발 주장과 특별법 개정은 용산기지 공원화 역사 30년을 한순간에 뒤엎는 근시안적 매표 포퓰리즘이다. 기본구상, 기본계획, 설계공모, 기본설계로 이어진 30년간의 장기 계획, 기지 이전과 반환을 위한 지난한 협상, 전문가와 시민사회의 토론과 공론화를 거쳐 이미 사회적 합의의 강을 건넌 용산공원을 부동산 광풍의 희생양으로 삼을 수는 없다.
둘째, 공원 부지의 20%인 60만㎡에 1000% 용적률로 8만 가구를 공급한다는 구상은 물리적으로 절대 실현할 수 없는 비전문적인 발상이다. 공급론자들은 삼각지의 청년주택 베르디움을 벤치마킹 사례로 내세운다. 베르디움은 용적률 900%, 37층짜리 두 동에 1000여 가구를 수용한다. 8만 가구를 용산공원에 욱여넣으려면 베르디움과 똑같은 열악한 거주 조건의 건물을 160동 넘게 지어야 한다. 상상조차 불가능한 그림이다. 국내 최대 규모 아파트 단지는 송파구 가락동의 헬리오시티인데, 부지 면적 40만㎡, 용적률 285%, 최고 35층 85개 동의 영구 음지 초과밀 환경이다. 그래 봤자 9500가구다.
셋째, 만약 용산구 전체 가구수 11만에 육박하는 8만 가구 아파트를 용산공원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도, 멈추지 않고 폭등하고 있는 현재의 주택 가격을 잡을 수 없다. 미군기지의 평택 이전이 완료될 시점은 아무리 빨라야 2025년으로 전망된다. 부지 반환 절차, 환경 및 토양오염조사, 지하수와 토지 정화가 끝나려면 적어도 5년은 걸린다. 2030년대 초반에나 공원 조성을 시작할 수 있는 땅에 언제 무슨 수로 아파트를 가득 채워 2021년의 춤추는 부동산 시장을 잠재울 수 있을까.
용산기지 공원화는 단순히 300만㎡ 대형 녹지를 서울에 공급하는 차원을 넘어서는 국가적 프로젝트다. 근현대사의 공간적 상처를 치유하는 일이자 왜곡된 도시 구조를 교정하는 일이며, 기후위기에 대처하는 탄소중립 실험장을 구축하는 일이자 도시의 소중한 여백을 미래 세대에게 양보하는 일이다. 용산공원을 뿌리째 뒤흔드는 특별법 개정안에 반대한다. 어느 기사에 달린 댓글이 눈에 밟힌다. “차라리 43만㎡ 경복궁에 아파트를 짓자.”
배정한|서울대 조경학과 교수·‘환경과조경’ 편집주간 한겨레 2021-09-03
탈진실 시대와 대통령 선거
최근 방영된 한국방송(KBS) 시사기획 <창>의 ‘회장님의 슬기로운 감빵생활…컴백홈 비밀은’ 편의 마지막에 문재인 대통령의 국회의원 시절 발언이 나온다. “재벌이나 대기업의 총수나 임원쯤 되면 국가 경제에 기여해온 공로라든지 국가 경제에 차지하고 있는 비중 때문에 법원 형량을 정할 때부터 엄청난 고려를 받고 있고 국민이 볼 때는 특혜를 받고 있거든요. 형량에서 특혜를 받고 있는데 가석방에서도 또 특혜를 받는다면 그것은 저는 경제정의에 반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2015년, 국회의원 문재인)
이재용씨가 결국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그의 2년6개월 형량은 정경심씨의 4년형에 견줘도 무척 가벼워 보였다. 슬라보이 지제크는 “알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를 탈진실 시대의 현상의 하나로 지적한 바 있는데, 그 전형적인 예를 문 대통령이 보여준 셈이다. 청와대에서는 “국익을 위해”라는 말이 나왔다. 경제정의보다 국익이 우선한다는 논리는 본디 수구세력이 애용해온 것이었다. 지난해 정년을 앞둔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의 복직 요청에는 법 규정을 내세워 끝내 외면했던 문 정권이 이재용씨를 위해서는 법 규정을 수정하면서 가석방을 관철시켰다. 이석기 전 의원은 이번에도 가석방에서 제외되었다. 그가 분단체제 아래 과도한 형량의 희생자라는 것은 인권변호사 출신이 아니더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수구세력은 북한이라는 공포를 앞세워 반대세력에 대한 마녀사냥을 해왔다. 통제될 듯했던 코로나19 팬데믹이 델타 변이로 확진자가 늘어나자 김부겸 총리는 수구세력과 보조를 맞추어 7·3 노동자대회 때문에 델타 변이가 유행한 양 민주노총을 겨냥했고 경찰은 위원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집행했다. 대회에 참여한 노동자들이 방역지침을 지켰고 관련 확진자가 한 사람도 나오지 않았다는 점은 간단히 무시되었다. 한때 민주화 운동에 나섰던 인물도 권력을 잡으면 반(反)공화주의적 퇴행에 이끌리는 것인가. 알베르 카뮈에 의하면, “사회정의가 질서에 우선한다”라는 명제는 공화국의 기틀이 되는 원칙이다. 오늘 한국에서는 국익의 이름으로 경제정의를 배반하고, 질서의 이름으로 사회정의를 배반하는 반공화주의적 정권이 자칭 타칭 진보정권, 촛불정권이다. 탈진실 시대를 웅변해주는 한국 정치의 단면이라 하겠다.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은 현상으로는 서로 다투지만 본질에서는 다투지 않는다. 현상이 본질을 감추고 있는 점에 대해 한겨레신문도 제대로 짚지 못한다는 게 평소 내 생각이다. 두 당은 둘 사이의 권력쟁취 게임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치는 사안에서는 열심히 다툰다. 공수처법안 앞에서, 그리고 최근 언론중재법안 앞에서 두 당은 치열하게 다투었다. 잠시 돌아보자. 법을 재개정하면서 밀어붙였던 공수처법보다 더불어민주당이 더 열성을 보인 법안이 있는가? 그런데 그 공수처가 애당초 기대했던 바와 같은가? 이런 현상만 뒤쫓으면 본질을 놓칠 수 있는 것이다. 두 당은 민생 현안 앞에서는 치열하게 다투지 않는다. 설왕설래하거나 더불어민주당 쪽에서 간혹 립서비스가 나올 뿐이다. “안전 때문에 눈물짓는 국민이 단 한 명도 없게 만들겠습니다”(2017년 4월13일, 문재인)라는 대선 공약에 수많은 사람이 감동했는데, 두 당은 중대재해(기업)처벌법안 앞에서 별로 다투지 않았고 법은 누더기가 되었다. 우리는 어제도 오늘도 또 내일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노동자들에 관해 서사 없는 숫자로 들어야 한다. 두 당은 또 부동산 양극화가 극도에 달하면서 집값이 치솟자 집 부자들을 위한 감세에 0.1%의 차이로 함께 나섰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질식시킨 위성정당을 만드는 데에도 두 당은 똑같았는데, 부동산 투기에 있어서도 호형호제하는 사이라는 게 드러났다. 반면에, 노동권 입법, 의료 공공성 확충, 조세 개혁, 교육 개혁 등 중대한 민생 사안은 그들의 주요 관심 대상이 아니고 다툼거리가 되지 않는다. 법안 자체가 성립되지 않고 성립되어도 회기가 만료되면서 자동 폐기되기 일쑤다. 당장 10만 시민이 청원한 차별금지법이 또 그럴 위험에 처해 있다.
실상 두 당 사이에 실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점을 김종인씨의 행보만큼 적실하게 증언해주는 게 없을 것이다. 그는 4년을 사이에 두고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와 미래통합당(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을 지냈다. 영국처럼 여야 의원들이 마주 보는 국회 회의장 구조라면 이쪽에 앉았던 당대표가 갑자기 반대쪽에 앉게 되는 형국이다. 이는 분단체제 아래 탈진실 시대 이전부터 한국 정치를 규정한 골격구조인데, 두 당이 함께 위성정당을 만들었던 배경과 속내를 설명해준다. 영국 의회로 치자면, 한쪽에 나란히 앉아 있어야 할 두 당이 지금까지처럼 계속 마주 보면서 의회를 장악하려면 영국노동당과 같은 진보좌파정당의 진입을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정치권력을 교대로 차지하는 기득권 세력으로 정립되는 데 있어서 두 당은 공동의 이해관계가 있는 것이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많은 후보자들이 나섰다. <한겨레>를 비롯하여 언론은 그들이 경쟁 상대에 대한 네거티브 선거전을 펼친다고 비난한다. 공약을 제시하고 토론하라고 주문한다. 하지만 공약(公約)은 집권할 때까지만 유효할 뿐, 집권한 뒤에는 그 대부분이 공약(空約)이 된다는 것을 문재인 정권이 충분히 보여주었다. 4년여 전에 우리가 들었던 촛불은 지금 무엇으로 남았나? 당시에는 개헌 논의도 활발했고 시민의회 등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열망도 표출되었다. 그러나 모든 게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성소수자들에 대한 “나중에”도 계속 나중에로 남았다. 그런데 정치인이 손바닥 뒤집듯 자기 말을 뒤집어도, 공약이 공약(空約)이 되어도, 지지를 철회하지 않는 것 또한 탈진실 시대의 현상 중 하나다. 정치인에 대한 호오 감정이 옳고 그름의 판단을 압도하는 것이다. 콘크리트 지지층은 수구기득권 세력의 전유물이 아니다. 기득권 세력을 형성케 하고 굳게 하는 것이 콘크리트 지지층이다. 대선 후보자들은 네거티브로 달려가게 돼 있다. 탈진실 시대에는 나의 정책 공약을 홍보하기보다 상대방을 어떻게든 깎아내리는 쪽이 훨씬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기후위기, 불평등의 극대화, 심각한 교육 현실이라는 질곡 아래, 청년들이 미래를 설계하기 어려운 ‘헬조선’에서 합계출생률이 0.8 밑으로 곤두박질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 중첩된 위기 상황에 비해 한국의 정치권은 그 지형상으로 대처하기 어렵다는 또 하나의 위기가 있다.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엄중한 시기에 대선을 앞두고 변혁성과 급진성이 화두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다시금 강조하는 까닭이다.
홍세화|장발장은행장·‘소박한 자유인’ 대표 한겨레 2021-09-03
헌법에 비춰본 대선 후보의 자격
국민의힘 대선 경선 후보로 15명이 등록하면서 대선 정국이 본궤도에 올랐다. 대선일까지 일곱 달밖에 남지 않았다. 그런데 국민들의 관심도가 예전 같지 않다. 코로나19 때문에 대중활동이 제한되고 있는 것이 영향을 주었을 수 있다. 그래도 심드렁한 대선 분위기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혹여나 민주화과정에서 ‘광장정치’를 통해 고비마다 주권자의 안목을 갈고 닦아온 국민들의 정치수준에 후보들이 부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국 사회를 ‘정치과잉’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정작 우리 사회에서 ‘과잉’되었다는 정치의 내용이나 질에 대한 성찰은 잘 드러나 있지 않다. 정치과정에서 원천적으로 배제되고 있는 계층이나 집단은 없는가? 정치과정에서 사회적 공론이 효과적으로 반영되고 있는가? 가장 정치적인 과정인 선거과정에서 정당 또는 후보자 간 정책논쟁이 얼마나 심도 있게 그리고 평등한 조건 속에서 전개되고 있는가?
민주공화헌법의 프리즘에 비추어보기에 한국 정치현실에서 과잉된 것은 국민생활과 국가의 명운에 관한 비전이나 공적 현안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라기보다 후보자의 신변잡기에 대한 감상적 인상론으로 보인다. 신변잡기 위주의 정치담론은 ‘권력의 의인화’에 따른 한계를 쉽게 노출하게 된다. 베버가 통찰하였듯이 ‘카리스마적 권위’가 매우 유력한 지배의 방식이고 지도자의 리더십이 정치과정의 유효한 변수임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근현대정치사에서 이승만이나 박정희 신드롬, 3김 신화론의 오랜 그림자가 걷힌 이후에도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와 같이 대통령 중심의 정치서사가 지배적인 경향이 있다. 심지어 ‘새 정치’를 내세운 반정치·탈정치운동마저도 ‘안철수 현상’과 같은 인물 중심의 서사로 소비되기도 했다. 그러나 신변잡기 정치는 숙의와 토론보다는 권력이나 세력만으로 정치가 좌우되던 권위주의시대에서나 통할 수준이다.
이번 대선은 민주화 2기를 여는 헌법적 의미를 가질 것으로 전망된다. ‘직선쟁취’를 구호로 탄생한 87년 헌법은 유신헌법과 5공헌법의 제왕적 대통령직을 민주공화적 대통령직으로 전환한 민주헌법이다. 그러나 권위주의시대의 유산은 헌법적 전환에도 불구하고 적폐로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하면서 현행 헌법의 권력구조에 제왕적 대통령제의 헛된 이미지를 덧씌우는 원인이 되었다. 교원이나 공무원, 청소년의 일상적 정치활동은 물론 예비후보와 유권자의 선거활동을 극도로 통제하고 유권자의 지지에 비례한 정당의석 배분에 역행하는 선거제도를 고집하는 선거법은 그 빙산의 일각이다. 검찰, 경찰, 정보기관 등 권력기관의 정치화는 헌법이 제도화한 민주적 대통령직에 제왕적 이미지를 덧씌우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한 세대에 걸친 제1기 민주화의 지난한 여정은 제왕적 대통령을 실제로 복원하려던 시대착오적 국정농단을 겪으면서 독재적 대통령직의 유산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제 한국 민주주의의 수준은 대선에서 백마를 탄 왕자나 공주를 기대하는 반민주공화적 환상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 국민적 관심이 떨어지는 와중에도 주요 정당들에서 후보들이 전례없이 난립하고 있는 현실이 시사하는 바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정치보다는 법집행에 익숙한 정치신인들이 너도나도 대선에 뛰어드는 상황도 맥을 같이한다. 이번 대선의 초반전에서 감지되는 심드렁함은 급조된 대선 후보들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신변잡기 중심 정치담론의 공허함과 저급함에 있다. 국민들은 어느덧 민주공화국 헌법이 전제하듯이 영웅서사의 지배자로부터 시민의 대표봉사자로 대통령직을 제대로 인식하기 시작했음에도 대선 후보나 정당은 아직도 철지난 신변잡기 정치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권교체나 정권유지의 일차적원적 구호만으로 진영을 구축할 수만 있다면 승자독식의 대통령제에서 해볼 만한 베팅이라는 오만한 결기는 헌법이 요구하는 시민적 덕성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허위적 정치공학이 낳은 신기루에 불과하다. 이제 한국 사회 모든 영역에 있어 현안들이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정보화시대의 민주공화국에서 어설픈 공약이나 개인사적 미담만으로는, 대통령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공화적 권력관계의 이치를 체득하기 시작한 깨어 있는 국민의 마음을 얻기에는 역부족이다.
이제 대한민국은 양차대전 후 독립한 나라 가운데 가장 성공적으로 민주공화제를 이룬 나라다. 이런 국격의 나라에서 국가원수이자 정부수반인 대통령으로 봉사하겠다는 후보들은 주권자 국민이 기대하는 것이 헌법이 요구하는 민주공화적 대통령직에 걸맞은 비전과 능력임을 한시바삐 직시해야 할 것이다.
김종철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경향 : 2021.09.03.
게임 속 은행은 망하지 않는다
20세기 초반 미국 철도부설 시기를 다루는 건설경영 시뮬레이션 게임 ‘레일웨이 엠파이어’에서 플레이어는 철도회사 하나를 맡아 역과 철로를 깔고 여객과 화물을 실어나르며 돈을 벌어야 한다. 철도는 인프라 산업으로 막대한 초기투자 비용이 들어가는지라 초기에 주어진 자본만으로는 빠르게 철도망 확장을 가져갈 수 없기에 대부분의 플레이에서 플레이어들은 은행으로부터 크게 대출을 받아 자금을 운용한다. 말 그대로 대출이기 때문에 매달 이자가 줄줄 빠져나가는 관계로 적절한 초기 투자를 통해 수익 창출을 제때 이뤄내지 못한다면 큰 대출은 오히려 게임을 망치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다. 게임 안에서 은행과 대출의 존재는 비단 이 게임 하나에서만은 아니다.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게임이라면 ‘심시티’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도시를 건설하고 운영하는 시뮬레이션게임의 대표작인 ‘심시티’에서도 은행은 플레이어의 중요한 파트너로 등장한다. 발전소나 공항, 고속도로 같은 단일 인프라뿐 아니라 대규모로 거대한 신도시 계획을 잡을 때 필요한 자본을 플레이어들은 게임 속 은행을 통해 조달한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대규모 대출은 높은 기대효과만큼의 높은 위험을 가진다. 공들이고 돈들인 새 구역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늘어나는 이자와 줄어드는 세수가 겹치며 순식간에 파산에 이르러 게임오버가 되는 일을 보는 것이 어렵지 않다.
흥미로운 점은 플레이어에게 돈을 빌려주는 은행이 망하는 경우는 게임에서 보기 드물다는 점이다. 현실을 100% 동일하게 담아낼 수는 없지만, 현실의 모사와 재현이라는 점에서 게임 속 은행이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현실의 은행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드러내는 효과를 갖는다. 심지어 은행이 망할 때에는 사회 전반의 금융체계 붕괴라는 이름으로 막대한 금액의 공적자금을 투여해 살려내었던 기억을 우리는 IMF 금융위기 이후로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다.
무적의 불패신화로서 은행은, 모든 것을 멈춰세워야 한다는 전제가 최우선순위에 올라온 팬데믹 시국에서도 멈추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생업이 걸린 동네의 작은 골목식당과 허름한 대폿집들까지도 팬데믹이라는 위기 앞에 수익활동을 멈추는 상황에도 여전히 대출이자는 고스란히 나간다. 매 순간 돌아오는 대출이자는 하루 영업시간이 얼마가 깎였건 전혀 깎이지 않는다.
건물주들도 ‘착한 임대료’라는 이름으로 눈총을 받지만, 그 건물주들 또한 대출이자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고통분담이라고 꺼내든 대책이라는 것이 겨우 만기와 납입기한의 연장인데, 기한연장도 금리상으로는 혜택이라고는 하지만 글쎄, 2021년 상반기 은행 실적을 한번 보기를 권한다. 신기한 것은 공적 담론에서 이들 금융권의 고통분담에 관한 이야기는 수면 위로 잘 올라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팬데믹 극복의 희생양으로 자영업자의 손발을 묶었지만, 그들의 등에 꽂힌 빨대는 팬데믹이건 뭐건 멈추지 않는다. 게임 속 은행이 망하지 않는 이유는 매우 명백하다. 현실의 은행이 손해보지 않기 때문이다. ‘심시티’의 은행은 좀비가 창궐해 도시가 폐허가 돼도 망하지 않는다. 현실의 팬데믹에서도 그러한 듯싶다.
이경혁 게임칼럼니스트 평론가 경향 : 2021.09.04.
도둑맞은 농촌, 정의란 무엇인가?
미국 토양학자 프랭클린 킹은 1909년경 조선, 일본, 중국을 방문하면서 흙을 유심히 관찰했다. 1911년에 나온 <4천년의 농부>에서 동북아 벼농사 나라들이 4000년 이상 살아 있는 토양을 보존해왔다며 경탄했다. 그는 그 비결이 ‘똥’에 있다 했다. 사람이 밥을 먹고 싼 똥을 퇴비로 잘 삭혀 다시 땅으로 돌렸기에 흙을 살렸다.
나는 시골에서 아내랑 ‘밥이 똥이고, 똥이 밥’이라며 세 아이를 키웠다. 아침마다 생태 뒷간에 똥오줌을 누고 잘 삭혔다가 텃밭으로 보낸다. 그렇게 20년 이상 땅을 살리니 제초제나 살충제 없이도 작물이 잘 큰다. 물론, 상품으로 팔 건 없다. 자급용이라 못생겨도 좋고 벌레가 좀 먹어도 행복하다.
최근 윤모 국회의원 부친이 5년 전 서울에 살면서 세종시 전의면 논 3000여평을 산 게 알려졌다. 헌법(121조)엔 경자유전 원칙과 소작제 금지가 있다. 농사짓는 자 아니면 농지를 소유 말라! 그 정신 아래 농지법도 “농지는 국민에게 식량을 공급하고 국토 환경을 보전하는 데 필요한 기반”이기에 투기를 금한다. 이런 면에서 윤씨만이 아니라 전국 농지의 모든 ‘부재지주’가 문제다. 게다가 그 땅은 위치상 ‘개발 호재’와 내부 정보 없인 외지인이 관심 갖기 어렵다. 현장에 가보면 안다. 이렇게 우리는 농촌을 도둑맞았다!
여기선 투기와 투자 간 경계가 없다. 그 뭐든 실제로 농사를 짓지 않으면 농지법 위반이다. 또 농업소득보전법에 따르면 실제 농민이 직불금을 수령할 자격이 있다. 사실상 소작인에게 농사를 대행한 것도 문제고 직불금을 누가 받았는지도 문제다. 경상도 창녕의 유기농 농민 한 분도 “이 부근 농지의 70% 이상은 투기”라며 “순수한 농사로는 평당 1만원을 건지기도 힘들다” 했다. 그러니 전국이 투기꾼 놀이터다. 투기 농지는 농어촌공사가 공시지가로 강제 매수할 수 있다.
한편 법제처가 2009년 개정 발표한 농지개량 기준은 “성토는 연접 토지나 해당농지 용수로보다 높지 않을 것”과 “절토는 토사의 유출 붕괴 등 인근 농지의 피해 발생이 없을 것”을 명시한다. 전북 남원에서 2000평 사과농사를 짓는 농민이 전화를 해왔다. 도시의 투기꾼이 몰려와 사과농장 주변 5필지를 매입, 너무 높이 성토해 피해가 막심하다 했다. 행정 당국도 민원을 무시한다. 요즘은 산업폐기물 처리나 태양광·산림개량 명분으로 온 국토가 난도질당한다. 결국, 농토·농촌을 없애고 건물을 짓거나 도시화하는 게 ‘돈 중독’ 경제다.
그러나 사람이 배고프면 밥을 먹어야지 돈 자체를 먹을 순 없다. 밥을 위해선 논밭이 살아야 한다. 논밭이 살려면 농민이 땅을 지키고 똥오줌을 순환해야 한다. 흙 1그램 속엔 미생물이 수천만마리나 살아, 지렁이와 함께 양분을 만든다. 한 줌의 흙조차 수천년에 걸쳐 생성됐다. 그런 흙이 지구를 살리고 사람을 살린다. 투기 심리로 땅을 봐선 안 된다는 얘기!
대한민국은 지난 60년간 ‘수출 산업화’란 구호 아래 농촌과 농사, 농민과 농심을 체계적으로 죽였다. 지금 한국을 지배하는 심리는 황금만능주의다. 나는 초등생 이후 선생님들로부터 ‘땅 파고 살지 않으려면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박사까지 공부를 하고 나니 ‘땅을 가까이 하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는 느낌이 왔다. 그래서 손톱 밑에 흙이 들어가도 즐겁게 밭을 일군다. 똥오줌을 버리지 않고 퇴비로 순환하니 기분도 좋다. 실은, 이런 텃밭 정도야 재미다.
반면, 농사가 생업인 농민들은 농사를 지을수록 한숨만 나온다. 세상은 농민의 땀과 눈물을 알아주지 않고, 도시의 투기꾼들과 개발업자, 금융업자들만 고급 승용차를 몰고 다니며 폼을 잡는다. 세종시 같은 신흥 개발도시가 대표적이다. 수도권 분산 효과는 거의 없고, 투기 심리만 코로나 바이러스처럼 창궐한다. 투기 팬데믹!
현재 한국의 곡물자급률은 20%다. 그 터무니없던 새만금 간척 사업의 목적도 식량생산 명분이었다. 실제론 농사·농촌·농민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눈곱만큼도 없으면서 땅 투기와 난개발이 만연한 현실, 여기서 과연 정의란 무엇인가?
이제, 땅 갖고 치는 장난, 제발 그만! 농사 목적이 아니라면 농지 소유를 엄히 규제하고, 투기꾼이 가진 땅은 농민에게 돌려주자. 땅 파고 살지 않으려면 농지를 그대로 두라. 그리고 유기농 농민을 공무원 대우하라! 곡물자급률을 90% 이상으로 높이자. 그래야 땅도 살고 농민도 산다. ‘땅의 정의’를 회복해야 사회 정의도 바로 선다. 사람이 땅을 닮아야지, 땅이 사람을 닮아선 안 된다. 프랭클린 킹이 제대로 보았듯, 밥이 똥이고 똥이 밥이다!
강수돌 고려대 명예교수·세종환경연합 난개발방지특위 위원장 경향 : 2021.09.04
사설] 여성 10명 중 2명만 ‘안전하다’고 느끼는 사회
우리 사회가 범죄에서 안전하다고 느끼는 여성은 10명 중 2명뿐이라고 한다. 여성가족부가 5일 발표한 ‘2021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 보고서를 보면, 사회가 전반적으로 안전하다고 느끼는 여성 비율은 27.6%였으며 특히 ‘범죄 안전’ 항목에선 ‘매우 또는 비교적 안전하다’고 답한 여성은 21.6%에 그쳤다. 여성 10명 중 8명은 언제든 범죄의 타깃이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느끼며 살아간다는 뜻이다. 여성이 안전하지 못한 사회, 여성 스스로에게 자신을 지키라고 말하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여성의 안전 체감을 높이는 일은 평등 사회로 나가는 데 가장 핵심적인 부분 중 하나일 것이다.
여성가족부 보고서를 보면, ‘범죄 안전’ 항목에서 안전하다고 느낀 남성 비율은 32.1%로 남녀 간 격차는 10.5%포인트였다고 한다. 여성가족부와 경찰청의 여러 통계를 보면, 남녀 사이의 이런 격차 추세는 2010년대 초반 이래 별로 줄어들지 않고 꾸준히 유지되고 있다.
물론 여성 대상 범죄에 대한 사회 인식은 바뀌었고, 수사와 처벌 역시 엄격해지고 있는 건 사실이다. 이번 보고서를 보면, 2011년 6848건이던 가정폭력 검거 건수는 2019년 5만277건으로 7배 이상 늘었고 데이트폭력·스토킹 검거 건수(2019년)는 2013년에 비해 각각 36.2%, 86.2% 증가했다. 이는 여성폭력 범죄 자체가 늘어난 점도 있겠으나, 과거엔 드러내길 꺼렸던 여성폭력에 대한 감수성이 높아지고 사회적 인식과 경찰 대응 수준이 올라간 데 기인한 측면이 클 것이다. 실제로 경찰청은 여성의 범죄 안전 체감도가 매년 높아지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강력범죄 피해자 중엔 여전히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은 게 현실이다. 대검찰청 자료를 보면, 살인·강도·강간 등 강력 범죄에서 여성 피해자 비율은 2000년 71.2%였으나 2017년엔 90%를 넘었다고 한다. 강력 범죄를 당하는 사람 10명 중 9명은 여성인 셈이다. 이래선 여성들이 안전하게 사회생활을 하면서 행복한 삶을 추구하기 어렵다.
우리나라는 세계 다른 나라와 비교해서 치안이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이런 평가와 체감에서 남녀 간 차이가 있다면, 그건 우리가 추구하는 바람직한 사회의 모습이 아니다. ‘안전’은 젠더 차원에서 접근할 일이 아니며, 시민의 행복 추구권 중 가장 기본적인 부분으로 봐야 한다. 경찰과 정부기관뿐 아니라 사회 구성원 모두가 관심을 갖고 함께 대응해야 할 사안이다. /한겨레 :2021-09-05
당신들의 노동귀족
1. 요샌 싸잡아 노동귀족이라 비난이다. 보수와 진보, 자본과 노동을 가리지 않고 비난이다. 내년 대통령선거를 앞두니 당내 경선에 나선 후보들까지도 한마디씩 내뱉고 있다. 국민의힘 경선후보들이 앞다퉈 비난하더니 더불어민주당 경선후보까지 동참하고 있다.
5일 청주 CJB컨벤션센터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세종·충북 경선 합동 연설회에서 박용진 후보는 노동계에 제안한다면서 “대공장·정규직·고임금 노동자만을 위한 노동운동이 아닌 노동조합조차 없는 90% 노동자들을 위한 노동운동, 플랫폼 노동자들·초단기 노동자들 등 새로운 노동형태의 종사자들을 포괄하기 위해 노력하는 노동운동이 돼야” 한다고 연설했다. 계속해서 민주노총은 “대화 테이블을 박차고 나가고 총파업만 부르짖으면서 스스로 정치적 영향력을 축소시키는 일은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다면서, “사회적 책임을 저버린 투쟁조끼가 노동자의 이익을 지켜주지 못”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저버린 투쟁의 머리띠가 민주노총의 권위와 국민적 신뢰를 묶어 주지 않”는다며, “전태일의 풀빵 정신으로 돌아가야 민주노총과 노동운동의 권위와 신뢰가 살아”난다고 강조했다. 박용진 후보의 연설 취지는 오늘 이 나라 노동운동이 대공장·정규직·고임금의 10% 노동자를 위한 것으로서, 중소기업·비정규직·저임금 노동자를 위해서 활동하고 있지 못하다며 사회적 책임을 저버린 투쟁만 일삼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택배대리점주가 택배노조 불법파업과 집단 괴롭힘를 견딜 수 없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이와 관련해 1일 국민의힘 대선 경선후보인 홍준표 의원과 최재형 전 감사원장은 “귀족노조의 횡포”라며 비난했다. 홍준표는 “경남도지사 시절 강성귀족 노조와 싸워 이겨낸 그 경험을 바탕으로 다시는 이 땅에 강성귀족 노조의 횡포로 억울하게 희생당하는 사람이 없도록 할 것”이라 했다. 최재형은 “귀족노조의 특권과 치외법권을 없애고 노동자를 위한 노조로 되돌려놓을 것”이라고 말했다. 부친 땅투기 의혹으로 의원과 대선후보직을 사퇴하기 전에 윤희숙 국민의힘 의원은 노동개혁을 대선 1호 공약으로 내세우며 “굴뚝시대 투쟁만 고집하는 귀족노조가 죽어야 청년이 산다”고 밝혔다. 요즘 이런 비난의 말을 듣다 보니, 정말로 ‘이 나라에서 노동운동을 주도하는 민주노총 등 노조는 귀족노조로서 온갖 횡포를 부린다’고 여길 지경이다.
2. 그런데 뒤죽박죽이다. 비정규직 투쟁에 대해서도 민주노총 소속 노조가 하는 것이라는 이유로 비난이고, 최저임금 인상투쟁에 대해서도 민주노총 차원의 투쟁이라고 비난이다. 민주노총의 투쟁이기만 하면 언제나 귀족노조 운운하며 비난하고 있다. 그러니 현대자동차·기아자동차 등 대공장 노동자들의 임단투에 대해서는 너무도 당연하게 이 나라에서는 귀족노조의 투쟁이라는 비난이 쏟아진다. 하도 비난을 해 대니 이제 이 나라에선 귀족노조란 말이 색다르게 정의되고 있다.
‘이미 충분한 대우를 누리면서도 지나치게 많은 요구를 하는 노동조합을 일컫는 명칭’이라며, ‘본래는 노동귀족이라고 하는 노조 상층부 간부층, 고임금 노동자를 말하던 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이 나라에서는 귀족노조가 정의되고 있다. 이는 나무위키에 기재돼 있는 것이다. 동아일보·문화일보·조선일보에서 보도한 이 나라 노동운동에 대한 비난 기사가 이렇게 나무위키에서 귀족노조의 뜻으로 기록된 것이다. 심지어는 “민주노총이 대한민국 귀족노조의 대표적인 예시로 평가받는다”며 “힘없는 일반 노동자들(특히 비정규직)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으며, 대화는 없고 오로지 총파업으로만 이를 해결하려 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있”고, “현대자동차그룹 노조는 그야말로 해당 논란의 끝판왕”이라며, “사실상 ‘현기까’가 탄생하게 된 원흉 1순위 중 하나. 현대차의 영업이익률과 시장점유율이 하락하는 가운데서도 노조는 임금과 고용·복지에 대한 상승을 요구하고 있으며, 기아차 노조는 사내하도급 비정규직 직원들의 조합원 자격을 상실시켜 그들만의 이익을 위한다는 비판을 받는다”고 나무위키는 기록해 놓고 있다. 이런 이 나라에서의 귀족노조의 의의를 읽어 보면, 사용자 자본의 편에 선 언론들이 쏟아 낸 기사들로 채운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박용진 후보 등 대선경선 후보들의 공약과 말로 재생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난 7월 말 민주노총에 대해 불법집회투쟁을 한다고 비난을 쏟아 냈던 투쟁은 국민건강보험공단을 상대로 정규직 전환을 요구한 외주용역업체 노동자의 투쟁, 즉 비정규직 투쟁이었다. 이 투쟁 등으로 민주노총 위원장 양경수에 대해 구속영장이 청구돼 최근 구속됐다. 현대차·기아차 등 대기업·정규직의 임단투로 구속된 것이 결코 아니다. 코로나19 확산을 내세운 집회시위 금지를 위반한 데 대해 비난이 쏟아졌지만, 그 집회시위는 “감염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일터에서의 죽음과 해고, 차별의 불평등 세상이며 이를 호소하고 해결을 요구”하기 위한 것이었으니(2021년 7월2일 민주노총 논평), 노동귀족을 위해서 한 투쟁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민주노총이 투쟁하기만 하면 귀족노조 운운하며 비난이다. 오늘 현대차·기아차 등에서의 임단투를 위해서 민주노총이 불법집회 등 투쟁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현대차·기아차 등 대기업노조의 임단투가 있으면, 싸잡아서 민주노총을 비난한다. 노동자들이 파업과 집회·시위 등을 하기만 하면 그 상급단체가 민주노총이면 비난인 것이다. 도대체가 노동귀족을 위한 귀족노조의 투쟁이 아님이 명백한데도 노동자투쟁이면 뒤죽박죽 비난인 것이다.
3. 노동귀족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나는 찾아봤다. 포털 사전에는 두 가지 의미로 규정하고 있었다. 그 하나는 “노동자계급 가운데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을 받고 사회적·정치적 특권을 누리며 소부르주아화돼 부르주아의 사회적 지주가 되는 계층”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조합, 사회민주주의 정책당 및 기타 노동자 단체가 확대되고 기구가 관료화함에 따라 그 지도적 지위에 서서 부르주아의 신임을 받고 노사협조주의·기회주의에 의해 노동자계급을 관료적으로 지배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빗댄 말”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어느 것도 고임금을 받는 대기업 정규직이라고 해서 노동귀족에 해당한다고 규정하고 있진 않다. 가만히 살펴보면 노동귀족이란 계급적 의의로 파악돼 정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사회적·정치적 특권을 가진 소부르주아화한 노동자들을 말하고,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저버리고 사용자 자본과의 노사협조하는 노동관료를 말하는 것이다. 단순히 고임금의 정규직이라고 해서 노동귀족인 것은 아니다. 그러니 귀족노조도 이런 노동귀족이 주도하는 노조여야 하는데 도대체가 이 나라는 아니다. 오늘 이 나라에서 말하는 귀족노조란 특권을 가진 노동귀족도 찾아보기 어렵다. 기껏해야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을 받고 비교적 고용이 안정돼 있는 걸 두고서 사회적·정치적 특권 운운할 수는 없다. 현대차·기아차 등 이 나라에서 대기업노조 조합원이라도 해 봐야 단체협약에서 보장된 고용안정이 대단한 것도 아니다. 근로기준법 등 노동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것을 조금 상회하는 정도로 단체협약에서 규정하고 있을 뿐, 수십년 동안 노조활동을 통해 거둔 것으로 내세우기에는 부끄러울 지경이다. 냉정히 그 조합원의 노동자권리 수준으로 보자면, 특권은 고사하고 도대체가 그 동안 무엇을 해 온 것이냐고 묻고 싶을 정도이다. 그리고 현대차·기아차 등 대기업의 노조를 두고서 감히 이 나라에서 자본과 계급적 타협을 주도하는 노동관료라고 말할 수는 없다. 2년 임기를 다하면 현장에 복귀해서 일하는 노조간부를 두고서 노동관료라고 말할 수는 없다. 독일 등 한 나라 자본의 신임을 받아 계급타협을 주도하는 노동관료라는 노동귀족과는 너무도 멀다. 금속노조 등 산별노조나 총연합단체인 민주노총 등을 두고서도 노동귀족을 말하기에는 너무도 멀다. 도무지 계급적 타협 운운하기에는 이 나라에서 노동자계급의 대표로서 지위도 인정받고 있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노동귀족이나 귀족노조가 되고 싶어도 이 나라에서 오늘 노동운동은 너무도 보잘 것이 없다. 그런데도 귀족노조를 말하며 이 나라 노동운동을 비난하고 있다.
4. 물론 노동운동 내부에서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노동귀족이니 귀족노조니 하며 비난할 수는 있다. 이는 어디까지나 어용노조를 경계하는 말, 사용자 자본과 협잡해서 노동자의 이해를 배신하는 자들을 비난하는 말이지 앞에서 본 사전적 의미로, 본래의 말로 하는 것일 수는 없다. 그야말로 사회적·정치적 특권을 누리면서 자본의 사회적 지주가 돼 계급적 타협을 주도하는 노동관료를 말하기에는 이 나라 노동운동의 사회적·정치적 지위가 너무도 낮은 것임에도 노동운동 내부에서 하는 이런 말을 가져와서 비난은 타당하지 않다. 사실 이 나라에서 노동운동은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지위가 너무도 낮아서 귀족노조라 비난을 받는 것인지 모른다. 사회적·정치적으로 노동자를 계급적으로 대표할 최소한의 지위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당신들은 이구동성이 돼 함부로 비난하는 것 아닐까.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매일노동뉴스 2021.09.07. 07
보이지 않는 가치
배가 고픈 한 사람이 있었다. 그가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떠돌아다니며 그때그때 먹고살았다. 개미와 베짱이에 나오는 그 베짱이처럼. 잠시 고민에 빠졌다 싶더니 무릎을 탁 쳤다. 그러고는 마을의 한 집에 무작정 들어갔다. "이보시오. 지금 배가 무척 고픈데 밥을 좀 주시오." 그는 당당하게 말했다. "밥을 얻어먹으려면, 예의를 갖추어서 말하시오." 집주인은 황당했다. "내가 먹는 밥에 대한 사례를 넉넉하게 하겠다는 말이오." 그는 더욱 의기양양했다."무엇으로 사례를 한다는 말이오? 혹시 양이나 말을 가졌소?" 주인은 가축 한 마리를 얻을지 모른다는 욕심이 들었다. "저기 산 중턱에 있는 커다란 바위가 보이시오? 저 바위가 바로 내 바위요. 밥을 주면, 내 저 바위를 당신께 드리리다. 그러면 저 바위의 주인은 당신이 되는 것이오." 그는 자신있게 말했다.
집주인은 커다란 바위가 자기 것이 되었다고 좋아했다. 며칠 후 집주인은 말 한 마리가 필요했다. 그래서 이웃에게 가서 커다란 바위가 자기 것이니 말과 바꾸자고 했다. 이웃은 기뻐하며, 말과 바위를 바꾸었다. 이웃은 다른 사람에게 가서 바위가 꽤 귀한 것이니, 이득이 될 것이라며 바위와 소 두 마리를 바꾸었다. 바위 가치는 점점 커졌다. 여전히 산 중턱에 그대로 있는 바위인데도 말이다.
또 다른 한 사람은 작은 돌멩이들을 모았다. 그러곤 돌멩이를 '구슬'이라고 불렀다. 그는 구슬이 꽤 가치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다니며 소문을 내는 데 힘썼다. 배추 한 포기는 구슬 하나와 바꿀 수 있고, 닭 한 마리는 구슬 세 개와 바꿀 수 있다고 했다. 돌멩이를 가진 사람들은 구슬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자랑을 했다. 돌멩이를 몇 개나 가졌는지가 그 사람 능력이 되었다. 돌멩이가 더 많아지자 일일이 셀 수 없어 숫자를 붙였다. 돌멩이를 보관할 곳이 마땅치 않아지자,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한 장소에 돌멩이를 차곡차곡 모아두고 몇 개가 자기 것인지 숫자만 매겼다. 그 이후로 사람들은 숫자로만 거래를 했다. 어느 장소에 가면 내 돌멩이가 몇 개 있으니, 당신이 가지면 된다고 하면서 말이다. 또 다른 한 사람은 내가 가진 '별'이 있는데, 그 수가 적으니 아주 귀하다고 했다. 사람들은 희귀한 것이라며, 보이지도 않는 그 '별'에 너도나도 돌멩이 숫자를 내밀고는 바꾸려고 했다. 보이지 않는 '별'은 엄청난 숫자의 거래를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거래에 무작정 뛰어들었다.
싹쓸바람이 불고 있다. 수많은 이들이 '보이지 않는 가치'를 잡으려 대열에 합류한다. 영혼까지 끌어서 투자한다는 '영끌'부터 '빚투'가 연일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 부동산, 주식, 가상화폐는 일상 언어가 되고 말았다. 도대체 이런 싹쓸바람이 어디에서 불어왔는가? 신성한 노동과 실물 가치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와 반대로 인간 욕심을 채우는 '보이지 않는 가치'와 '통장의 숫자'가 새로운 가치로 자리를 잡고 있다. 물가가 오른다고 난리다. 농산물이 비싸다고 난리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상화폐, 그 숫자 1이 몇 천만 원을 오가는 세상에, 나를 살찌우고 가족을 살리는 실물은 비싸다고 난리다. 쌀 한 줌을 키우려고 노동과 시간과 정성을 들이는 그 가치는 얼마일까. 내 삶을 풍요롭게 하는 진정한 가치는 무엇일까.
장진석 작가 경남도민일보 2021-09-08
GTX는 정의로운가
벚꽃이 피는 순서대로 대학이 망한다고 한다. 벚꽃은 따뜻한 남쪽 끝 마을부터 피기 시작한다. 남쪽부터 망해 올라간다는 말이다. 인구가 줄어드는 데다 지원자들이 수도권을 선호하면서다. 어디 수도권 집중 현상이 교육계뿐이겠는가. 일자리와 생활 인프라가 좋은 수도권으로의 집중은 중단된 적이 없다.
얼마 전 정부가 발표한 3차 신규 공공택지 대상지인 경기 의왕·군포·안산 일대의 부동산 가격이 크게 올랐다. 정부가 추진하는 수도권 광역급행철도(GTX) 노선에 의왕역을 신설한다는 게 큰 호재로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서울·수도권에 GTX가 연결된다고 하면 예외 없이 부동산 가격이 급등한다. 올 들어 주택 가격이 크게 오른 수도권 대부분은 GTX와 관련이 있다.
GTX는 현재 4개 노선이 추진 중이다. A노선은 동탄~파주, B노선은 송도~마석, C노선은 수원~양주, D노선은 장기~용산 구간이다. 그러나 원안대로 된 노선은 한 곳도 없다. A노선의 북부 종점은 일산 킨텍스역이었으나 파주 운정역까지로 연장됐다. B노선은 청량리~마석 구간이, C노선은 당초 금정~의정부 구간에서 남쪽으로는 수원, 북쪽으로는 양주 구간으로 늘어났다. D노선은 장기~부천 구간에서 연장된 것이다.
정부 재정이 대규모로 투입되는 사업에는 경제성을 따지는 예비타당성조사(예타)를 벌인다. 비용편익(B/C) 비율이 1을 넘지 못하면 사업을 할 수 없다. 선심성 사업 등을 무리하게 추진했다가 ‘돈 먹는 하마’가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GTX 노선이 수차례에 걸쳐 연장된 것은 사업의 경제성과 관련이 있다. 계획 노선 가운데 예타 결과 기준선을 넘어선 곳은 A노선 하나다. B노선과 C노선은 경제성이 없다고 평가됐다. B노선은 2014년 조사에서 비용편익 비율이 0.33에 그쳤다. 정부는 수익성이 떨어지자 2017년 청량리~마석 구간을 연장했다. 그런데 2019년 조사 결과도 0.97로 기준치 미달이었다. 그러자 3기 신도시 가운데 하나인 왕숙신도시 개발까지 반영했다. 그래서 간신히 턱걸이(1.0)로 사업성을 획득했다. 이른바 재수해서 떨어지고 삼수해서 조건부로 합격한 것이다. C노선도 당초 비용편익 비율이 0.66에 그쳤으나 노선 연장을 통해 2018년 기준선을 통과했다. 주민들을 위해 GTX를 연결하겠다는 당초 취지는 물 건너가고, GTX를 건설하기 위해 주민이 필요했고 신도시까지 넣어 연장에 연장을 거듭한 것이다. 경제성이 있을지 아직도 미지수다.
당초 GTX 구상은 경기도에서 나왔고 목표는 수도권을 1시간 내 생활권으로 만들자는 것이었다. 공사가 마무리되면 서울과 수도권이 하나의 생활권으로 탈바꿈한다. 경기 주민이 서울의 인프라를 공유하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이를 선반영해 GTX 신설역이 생긴다고 하는 지역은 서울 접근성이 좋아진다는 이유로 집값이 급등했다.
이것이 마냥 좋은 일일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자. 수도권 이외 지역은 어떻게 될까. 지방에서도 수도권 주민들과 유사한 혜택을 받고 있을까. 수도권 주민에게 사회기반시설을 제공하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가 아니다. 수도권에 거주한다는 이유만으로 각종 혜택을 싹쓸이하는 게 정당한가이다. GTX 건설 초기 ‘수도가 국토의 절반을 차지하는 날이 온다’거나 ‘대한민국에는 수도권만 있나’라는 말이 나왔다. 이것이 점차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앞으로 수도권과 기타 지역의 격차는 확대될 것이다. 살기 좋은 수도권으로 사람들이 몰릴 것은 자명하다. GTX는 수도권 집중을 가속화시키는 급행열차다.
문재인 정부는 수도권과 지방 간의 균형발전을 역설했다. 노무현 정부 당시 만들어진 국가균형발전위원회가 다음 정부에서 ‘지역발전위’로 격하되자 원위치로 복귀시킨 바 있다. 균형발전위의 존재 목적은 수도권 집중 완화에 있다. 그러나 수도권 쏠림 현상은 심화되는 것 같다. GTX 노선 연장을 통해 거대 수도권 공동체 탄생을 부채질한 게 이번 정부에서 일어난 일이다.
아마도 인구 증가로 신도시를 세워야 했고 주민 편의를 위해 GTX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말할지 모른다. 수도권 주민의 혜택은 좋은 일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묻고 싶다. 좌초될 GTX 노선을 살리는 데 들인 노력만큼 소외받는 지방을 위해 노력한 흔적은 무엇인가. 지난 4년간 수도권 인구가 36만여명 증가할 때 부산·대구·광주·경남북·전남북 모든 지역의 인구가 감소했다. 수도권 집중화를 완화할 의지는 실종된 것 같다.
박종성 논설위원 경향 : 2021.09.08.
문재인 정부 부동산정책의 실패학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5월 취임 4주년 회견에서 밝힌 것처럼 부동산정책의 성과는 ‘부동산 가격의 안정’이다. 이 잣대로 보면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정책은 실패다. 바닥에 떨어진 신뢰 등을 감안하면 남은 임기 안에 집값이 잡힐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다음 정부에 기대를 걸어야 하는 심정은 편치 않다. 여야 대선 후보가 확정되면 본격 논쟁이 시작되겠지만 현 정부의 부동산정책을 되돌아보고 반면교사로 삼지 않는 한 누가 집권하더라도 시장 안정을 장담할 수 없다.
문재인 정부 부동산정책이 실패한 주요 원인은 보유세 강화를 걷어찼기 때문이다. 투기를 억제하기 위한 보유세 강화에 첫발을 뗀 정부는 종합부동산세를 도입한 참여정부였다. 하지만 종부세는 이명박 정부 때 강만수 전 경제부총리로부터 ‘질투의 산물’이란 비난을 들으며 종이호랑이가 됐다. 박근혜 정부 시절의 부동산정책은 “빚내서 집 사라”는 최경환 전 경제부총리의 ‘초이노믹스’가 떠오를 뿐이다. 당연히 문재인 정부 출범 후 무력화된 보유세가 과연 정상화될 것인지 여부가 주요 의제로 부상했다. 집권 초부터 부동산시장은 불안조짐이 나타나던 차였다.
하지만 청와대와 정부에서 보유세 강화 목소리는 예상외로 약했고, 결국 ‘문재인 정부도 별수 없다’란 신호가 시장에 전달됐다. 대통령 지지율이 떨어지고 시장이 요동치면 부랴부랴 급조한 대책이 나오다 보니 부동산 세제는 누더기가 됐다. 종부세 최고세율을 2.0%에서 점차 올려 현재 최고세율이 6%에 달하지만 핀셋 증세, 시장 조절을 위한 일회용 대책에 그쳤다. 양도세 세제는 ‘양포세’(양도세 상담을 포기한 세무사)라는 말이 나오게 할 정도로 복잡해졌다. 보유세 강화 없이 다주택자 양도세 중과를 시행해 ‘똘똘한 한 채’로 투기 수요가 집중되는 결과도 낳았다. 지난 4월 재·보선에서 참패한 여당이 최근 종부세 과세기준선을 공시가격 9억원에서 11억원으로 완화한 것은 보유세 강화 실패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대선 주자들이 부동산 공약 중 가장 신경을 쓰는 분야는 공급으로 보인다. 일부 야권 주자들 사이에서는 종부세 자체를 재검토해야 한다거나 양도세와 보유세를 없애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보유세 강화는 부동산 공화국의 해체를 위해 보수도 외면해선 안 되는 과제다. 종부세를 폐지하고 재산세 체계로 통합하든, 국토보유세 같은 다른 형태의 보유세를 도입하든 다양한 논의가 앞으로 이뤄져야 한다.
지난달 이재명 경기지사가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정책 실패 원인으로 ‘관료들의 저항’을 언급한 것은 가벼이 흘려 넘길 수 없다. 문재인 정부 초기 대통령 직속 재정개혁특별위원회가 종부세 최고세율 인상, 공제 축소를 주문했지만 기획재정부가 반대한 것은 널리 알려진 얘기다. 관료들은 전통적으로 재정건전성과 낮은 세율에 집착한다. 보유세 강화와 관련된 관료들의 저항은 노무현 정부 때도 있었다. 건설 경기 침체를 이유로 종부세 도입 연기를 주장한 것은 당시 재정경제부였다. 부동산이 살아야 경제가 산다는 근시안적 부양책에 집착해선 부동산 거품을 뺄 수 없다. 관료집단과 정치권에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은 결국 대통령이다. 대통령이 경제 문제 전부를 챙길 수 없지만 한국에서 대통령의 리더십이 있어야 해결될 수 있는 대표적 분야가 부동산이다.
결과론적 이야기일 수 있겠지만 시장과의 소통에도 문재인 정부는 실패했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지방으로 부임하는 수령에게 “오늘에 들떠서 날뛰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 새 정부가 출범하면 곳곳에서 비정상이 바로잡히고 개혁이 이뤄질 것처럼 떠드는 소리가 들리기 마련이다. 돌아보면 “불로소득을 척결하겠다” “투기와의 전쟁” 등 책임지지 못할 말은 신중했어야 한다. 절제된 용어로 시장과 소통하되, 우직하게 원칙대로 밀고 나가는 정부를 경제주체들은 더 신뢰한다. 과도한 차입에 의한 부동산 투기도 경제적 행위일 뿐이다. 이를 제도적으로 제어해야 할 책임이 바로 정부에 있는 것이다.
최근 어지러울 정도로 쏟아지는 공급확대 방안도 따지고 보면 소통 실패의 산물이다. 솔직히 어떤 정부가 공급대책 없이 수요억제책만으로 부동산정책을 펴겠는가. 그럼에도 이 정부는 공급에 무신경한 정부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보유세 강화를 일관되게 시행하고 적절한 공급대책과 균형을 맞추는 것, 그리고 시장을 존중하되 아부하지 않는 것이 문재인 정부가 남긴 교훈이다./오관철 경제에디터 경향 : 2021.09.10.
역사를 보는 눈
<한국공산주의운동사> 1~3권은 70년대 초 미국에서 먼저 나왔다. 로버트 스칼라피노 교수와 이정식 교수가 공동으로 썼다. 이후 이 책은 해방 정국과 한국전쟁을 논하는 남북관계 연구서의 바이블이 됐다. UC버클리에서 스칼라피노에게 배운 이가 이정식과 한승주다. 한승주는 김영삼 정부의 외무부 장관을 거쳐 노무현 정부의 주미 대사를 지냈다.
스칼라피노 교수는 2011년 92세를 일기로 숨졌다. <한국공산주의운동사>의 공저자 이정식 교수도 지난달 17일 미국에서 90세를 일기로 숨졌다. 1930년생 이정식 교수는 일제가 만든 만주국 말단관리였던 아버지를 따라 열다섯 살에 거기서 해방을 맞았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귀국도 못 하고 만주 면화공장에서 일하다가 해방 후 48년 초 평양으로 돌아왔다. 소년가장 이정식은 평양에서 친척의 쌀가게 점원을 하다가 한국전쟁 통에 부산으로 월남해 미군부대 통역을 맡았다. 능숙한 중국어 실력으로 중공군 포로 심문에 동원됐다.
전쟁이 끝나자 54년 미국 유학에 나서 UCLA를 졸업하고 석사학위를 받은 뒤 61년 UC버클리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63년부터 펜실베이니아대 교수로 일했다.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수많은 자료와 여러 사람을 만나 퍼즐 맞추듯 기술한 <한국공산주의운동사>는 해방 정국의 혼란스러운 한국사를 잘 정리했다. 김일성이 항일무장투쟁을 했던 게 맞고, 한국에서 공산주의는 항일 독립운동의 한줄기였음을 증명해 냈다. 현준혁·송진우·여운형·장덕수·김구 암살을 놓고 분분했던 야사와 설화 속에서 과학과 논리로 원인을 분석했다.
이 책은 잘 어울리지 않는 여운형과 안재홍, 두 사람이 어떻게 해방 그날 바로 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할 수 있었는지 밝혔다. 45년 8월14일 밤 11시에 이뤄진 조선총독부 엔도 정무총감과 여운형·안재홍·송진우의 면담이 그 원인이었다. 여운형과 안재홍은 엔도 총감의 제안을 수락했고, 송진우는 거절했다.
선수를 놓친 박헌영은 8월19일 서둘러 공산당을 만들었다. 9월19일 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 창간호에 조선공산당 4대 강령이 실렸는데, 그 첫째가 노동자와 농민·도시빈민·병사·인텔리겐치아의 이익 옹호였다. 한 줌도 안 되는 ‘병사’ 대부분이 일제에 부역했는데 왜 넣었을까. 인텔리겐치아는 왜 들어갔을까. 당시 이 말뜻을 알아듣는 조선인이 몇이나 된다고. 조선공산당은 100만 당원을 주장했지만 1945년 문맹률이 78%였다는 사실에 비춰 보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45년 조선공산당은 이상주의 학생, 이론을 갖고 노는 부유한 인텔리, 당을 출세의 새로운 기회로 여기는 일제 때의 건달, 불법을 가장하려는 깡패, 소수의 노동자·농민의 기묘한 혼합체였다. <한국공산주의운동사>는 이런 엄정한 사실을 학자적 양심을 걸고 서술했다. 그러나 두 학자가 늘 옳았던 것만은 아니다.
해방 후 좌우 대립의 첫 고비였던 신탁통치를 앞두고 하지 장군은 46년 1월1일 서울에서 박헌영을 만나 신탁통치 지지를 요청했지만, 박헌영은 격하게 반대했다. 책 내용대로 하면 박헌영은 하지를 만난 당일 밤 비밀리에 급히 평양에 가서 공산당 북조선 분국과 소련측을 만나고 다음날 다시 서울로 돌아온다. 아무리 남북 왕래가 가능한 시절이라도, 당시 교통편을 생각하면 불가능한 얘기다. 사실 박헌영이 북으로 간 날은 45년 12월28일 밤이었다.
이 책에서 가장 불편한 건 서구 우월주의 시선이다. 공산주의는 권위주의로, 자본주의는 민주주의로 규정해 놓고, “권위주의(공산주의) 정치체제가 서구식 민주주의보다 한국에서 훨씬 더 손쉽게 뿌리를 내렸다. 이는 한국 사회의 보수성과 정치적 후진성이 서구식 민주주의자들보다 공산주의자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써 놓았다. 스칼라피노는 서양 사람이니 그렇다 해도, 이정식까지 이런 사고에 기반을 두고 한반도를 해석했다. 이 왜곡된 시선은 지금도 한국의 외교 당국자들 혈관 속에 뿌리 깊게 자리 잡았다.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매일노동뉴스 2021.09.10
이낙연이 이재명을 못 이기는 이유
저잣거리 정서를 몰라서… 쉽게 ‘해주려는’ 이보다 어렵게 ‘해내려는’ 이에게 감정이입
네거티브를 하지 않았다면 이낙연이 이재명과의 표차를 줄일 수 있었을까.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의 첫 순회투표지인 충청에서 거의 더블스코어로 차이가 나자 다들 놀랐다. 이낙연이 제일 놀란 듯하다. 그는 9월8일 국회의원직을 내놓겠다고 했다. ‘갑자기 분위기 사퇴’라니. 실례지만 그가 현직 의원인지 모르는 국민이 더 많을 터인데…. 더블스코어의 원인을 정녕 모르는 것일까.
최근 이낙연 캠프에서 이재명의 과거 변호사비 대납 의혹 등을 제기한 것이 평소 후보 이미지와 맞지 않는 네거티브 공세로 여겨졌기 때문이란 평가가 많았다. 나는 평소의 후보 이미지 자체가 더 큰 이유라고 생각한다.
이낙연 캠프 한 관계자의 말에 단서가 있다. 그는 이재명은 “작업복을 입은 후보”이고 이낙연은 “모시옷을 입은 후보”라고 했다. 같은 싸움을 해도 이낙연이 불리하고 이미지도 훨씬 더 망가진다는 뜻이리라. 글쎄. 모시옷은 아름다우나 실용적이지는 않다. 게다가 모시옷 입는 국민보다 작업복 입는 국민이 훨씬 많다.
대통령은 더는 나라의 ‘얼굴’이 아니다. 나 대신에 빛내줄 이가 필요한 게 아니다. 그건 이미 우아한 김연아가 해줬고, 파워풀한 김연경이나 유능하고 성실한 손흥민이 해주고 있다. 국격이나 외교적 이미지는 결과일 뿐, 대통령은 일하는 사람이다. 기왕이면 나와 같은 눈높이에서 비슷한 정서로 일해주기를 바란다. 이는 문재인 정권을 계승하겠다는 이낙연에게 문재인 지지자들조차 마음을 모아주지 않는 이유와 연결된다. 그가 준비가 안 된 건 아니다. 정책도 국정 전반을 망라해 체계가 잘 잡혀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낙연에게 감정이입을 못한다. 틈만 나면 시대착오적인 말을 하며 허풍 떠는 국민의힘 홍준표 후보에게보다 마음이 덜 간다. 동일시되지 않아서다.
경쟁자인 이재명에게는 품위나 안정감이 없다. 때론 비겁하고 치사하다는 인상도 준다. 낯 내는 일에 몰두하고 재빨리 뻥튀기해 포장하기 바쁘다. 그런데도 높은 지지를 얻는 것은 아등바등 기를 쓰고 뭔가를 하려는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작게라도 내 삶을 바꿀 그 무엇을 기대하게 말이다.
이낙연에게는 그런 ‘저잣거리 정서’가 안 느껴진다. 싸울 때도 자기 옷이 구겨질까 신경 쓰는 것 같다. 상대의 마음보다 일관된 자기 스타일을 지키는 게 더 중요해 보인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당시의 처신이 논란이 됐을 때 이낙연은 “나는 반대했다”며 당시 ‘유이’하게 나온 반란표 중 하나가 자신의 것임을 밝혔다. 그게 전부였다. 소회도, 설명도, 하다못해 변명도 없었다. 지지자들은 물론 국민에게 큰 상처를 남긴 일이고 이낙연 스스로 민주정부의 ‘적통’을 강조하면서 불거진 논란이었는데, 지나치게 말을 아꼈다. 괜한 시비를 더할까 조심하고 선을 지키는 자세는 2인자인 ‘총리’에게 맞는 태도이지 국민의 마음을 얻어 미래를 이끌겠다는 ‘대통령 후보’가 취할 태도는 아니다.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발탁돼 호남에서 내리 4선, 전남도지사를 거쳐 문재인 정부에서 전폭적인 신임 속에 총리를 했다. 당력이 총동원된 서울 종로에서 5선 배지를 달고 총선 압승 뒤 당대표도 했다. ‘지는 싸움’을 해본 적이 없다. ‘쉬운 선거’만 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에 ‘성공 방정식’ 또한 그 한계에 갇힌 건 아닐까.
이낙연은 국회의원직 사퇴 의사를 호남권 공약발표장인 광주에서 알렸다. 배수의 진을 치겠다고 했다. 그런데 왜 결연하기는커녕 난데없어 보일까. 뾰족수가 없으니 이거라도 던져 호남의 동정표를 모아보겠다거나 이재명의 경기도지사직도 덩달아 내놓게 하려는 의도로 보이는 건 그의 깊은 뜻을 몰라서일까. 혹시라도 ‘쉬운 정치’를 이어가려는 건 아닌지 자문해봤으면 좋겠다. 그의 선의와 섬세함, 반듯함을 모르지 않는다. 그런 대통령 한 번 가져봤다. 지금은 우아하게 ‘해주려는’ 사람보다 아등바등 ‘해내려는’ 사람이 훨씬 가깝게 느껴지는 시대이다.
김소희 칼럼니스트 한겨레21 : 2021.09.11
논리적 오류’와 윤석열의 ‘억지 주장’
일상적으로 범하기 쉬운 논리적 오류로 ‘전건 부정의 오류’와 ‘후건 긍정의 오류’가 꼽힌다.
전건은 어떤 판단의 조건부를, 후건은 귀결부를 말한다. 예를 들어 ‘기차를 타면 멀리 갈 수 있다’란 문장에서 ‘기차를 타면’은 전건, ‘멀리 갈 수 있다’는 후건이다. 여기서 ‘그는 기차를 타지 않았다. 그러므로 멀리 가지 않을 것이다’라는 결론을 내리면 전건 부정의 오류를 범한 것이 된다. 기차를 타지 않고서도 멀리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문장에서 ‘그는 멀리 여행을 갔다. 그러므로 기차를 탔을 것이다’라는 결론을 이끌어내는 건 후건 긍정의 오류에 해당한다. ‘멀리 갔다’(후건)를 긍정한 데서 틀린 결론을 끌어낸 것이다.
둘 다 특정한 조건에서만 참인 문장을 한계를 넘어 무리하게 확대 적용하려는 욕심에서 비롯된 오류이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이른바 ‘고발 사주’ 의혹과 관련해, 지난 3일 “고발 사주했으면 왜 고발이 안 됐냐”라며 “사주한다는 것이 상식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국민의힘 차원의 고발이 없었으니 ‘고발 사주’도 성립이 안 된다는 논리다.
그러나 사실 이건 논리적 오류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억지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주장에서 대전제는 ‘고발을 사주하면 고발이 이뤄진다’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고발을 사주한다고 모두 고발로 이어지진 않는다는 점에서 대전제 자체가 참이 될 수 없는 주장이다. 고발을 사주해도 다른 이유로 고발이 안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애초 논리 전개의 기본은 ‘대전제는 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전제가 ‘사람이면 죽는다’처럼 완전한 참이거나 적어도 ‘기차를 타면 멀리 갈 수 있다’ 정도의 높은 개연성을 가져야만 주장의 논리를 논할 수가 있는데, 윤 전 총장 주장은 기본을 벗어났다.
법률에도 ‘미수’ 개념이 있다. 의도와 다른 결과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는 것이다. 누구보다 전문가일 윤 전 총장이 이런 억지를 부리는 건 ‘고발 사주’ 의혹을 어떻게든 부인하고 싶은 욕망의 발현 때문은 아닐까 궁금해진다.
더구나, ‘고발 사주’ 의혹 4개월 뒤인 지난해 8월 야당이 검찰이 전달했다는 고발장과 거의 똑같은 판박이 고발장을 대검에 낸 사실 또한 확인되고 있다. 윤 전 총장의 주장이 논리로나 사실로나 억지이자 거짓이라는 정황이 짙어지고 있는 셈이다.
손원제 논설위원 wonje@hani.co.kr 한겨레 2001.9.12.
윤리 지키겠다는 기업들, 이 세 가지만 기억해라
공정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사회에 만연한 분노·스트레스·화·무차별 공격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윤리가 필요하다. 윤리는 행복의 출발점이고 좋은 삶 그 자체다.
2016년 9월8일 오후 서울 여의도 전경련회관에서 열린 김영란법 관련 '기업윤리학교 ABC'에서 참석자들이 청탁금지법의 주요 내용 및 기업의 대응 전략에 대한 강의를 듣고 있다.
ⓒ연합뉴스
새롭지는 않다. 진부하기까지 하다. 그렇지만 윤리가 다시 돌아왔다. 그것도 시대의 핵심 가치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심상치 않다. 결정적인 증거는 기업이 윤리를 핵심 가치로 말한다는 점이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세계적인 기업은 모두 기업윤리를 표방하고 있다. 한국의 기업도 앞다투어 윤리를 핵심 가치로 내세운다. 기업윤리는 다양한 이름으로 등장한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 사회적 가치 실현, 환경윤리 실천, ESG 경영, 기업시민 등. 모두 기업윤리의 다른 이름이다. 특히 기후변화는 탄소중립화를 중심으로 기업윤리를 이끌어가고 있다. 환경·사회·거버넌스로 구성되는 ESG 경영 역시 모든 기업이 적극 추구한다. 공공기관의 중요 평가 항목에는 사회적 가치가 포함되어 있다. 윤리가 기업의 핵심 가치가 되고 있다.
기업윤리를 정착시키기 위해 필요한 세 가지
기업과 윤리는 잘 어울리는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대립되는 개념이었다. 기업은 이윤추구를 위해 환경·정부·사람을 착취하거나 희생시킨 역사가 있다.
한국 역사에서 기업은 주로 정경유착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기업의 이미지는 음습한 범죄자에 가까웠다. 그러던 기업이 윤리를 핵심 가치로 내세운다. 사회 구성원의 행복이 기업의 존립 이유이고 이윤추구 과정에서 윤리를 지키겠다고 모두 나서고 있다. 놀라운 변화다.
기업에 비해 정부나 공공기관의 윤리의식은 오히려 낮아진 듯하다. LH 사태, 인사청문회에 선 장관 후보자들의 윤리 수준 등을 보면 정부·공공기관의 윤리의식은 위기 상황이다. 윤리는 법률 준수 이상을 요구한다. 법률만 지켰다고 윤리적인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 공손, 품위, 예의를 준수하고 상대방을 존중하고 공감하며 신뢰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여야의 갈등, 이익집단의 갈등, 개인의 갈등이 심각해지면서 윤리는 위기에 처했다. 자본 중심의 인간관에 기초한 욕망 추구가 초래한 결과다.
기업의 윤리 강조와 정부·공공기관의 윤리 위기는 지금이 다시 윤리의 시대임을 의미한다. 단군 이래 가장 풍요로운 삶을 살지만 윤리의 위기로 현대인은 행복하지 않다.
윤리가 없으면 사람들은 공동체와 타인을 착취한다. 공정이 위기에 빠지는 것이다. 공정이 위기에 빠지면 상대방을 공격해서라도 자신의 몫을 찾아야 한다. 분노와 스트레스 과잉 상태가 된다. 분노와 스트레스는 고통을 초래하고 고통스러운 삶은 윤리를 요구한다. 그것도 아주 많이 요구한다. 공정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분노·스트레스·화·무차별 공격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윤리는 필요하다. 윤리는 행복의 출발점이고 좋은 삶 그 자체다.
기업이 윤리를 핵심 가치로 실천하는 것은 환영할 일이다. 기업윤리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최소한 세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최고경영자의 의지. 최고경영자는 자신의 임기 동안 윤리를 최고의 가치로 삼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표명해야 한다. 윤리경영은 최고경영자의 의지가 없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둘째, 윤리경영의 공식화. 윤리경영을 선언하고 정책·메시지·매뉴얼·지침 등을 공유해야 한다. 기업의 최상층부터 현장까지, 공식조직부터 비공식조직까지, 기업 내부부터 외부까지 윤리경영 가치를 공유해야 한다. 셋째, 윤리경영 조직의 상설화. 윤리경영을 하려면 이를 전담하는 조직이 필요하다. 전담 조직은 윤리경영 가치를 현장까지 전파해야 한다. 안전보건 조직이 현장 단위에 필요한 것처럼 윤리 조직 역시 현장의 윤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현장 단위까지 구성되어야 한다. 이 세 가지를 갖추면 최소한 기업윤리에 후퇴는 없을 것이다. 김인회 (인하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시사인 2021.09.12.
참 이상한 나라의 ‘지방’에서 살기
한국은 참 이상한 나라다. 종종 문화예술위원회 지원사업 심사라도 할라치면, 광주 사는 나는 서울로 ‘올라간다’. 문화예술위는 인근 나주 혁신도시에 있어서 굳이 말하자면 ‘내려가야’ 하는데 말이다. 이해 못 할 바 아니다. 심사위원을 맡을 만한 인사들이 주로 수도권에 거주하고 있다니까. 직원들도 나주 서울 왕복하느라 고생이 많다니까. 지방분권제가 나주를 유령 도시로 만든 셈이다. 그런데 비단 그런 공무만이 아니다. 잡지 일도 서울 가서 하고, 원고도 주로 서울로 보낸다. 괜찮다는 공연도 전시도 서울에서 열리고, 전화도 이메일도 서울에서 많이 온다. 딸을 서울로 ‘유학’ 보냈는데, 이제 아들도 반드시 서울 가서 음악 하겠단다. 부와 문화와 일자리와 두뇌 태반이 모여 있는 곳, 거기가 ‘중앙’이니까.
‘중앙’이란 말을 곱씹어 본다. 언어학적 상식에 따르면 한 단어의 의미는 다른 단어와의 관계 속에서만 정해진다. 가령 ‘나’란 대명사는 ‘너, 그, 우리’라는 대명사와의 관계가 아니라면 아무 의미도 없다. ‘나’는 ‘너’나 ‘그’가 아님이다. 그렇다면 ‘중앙’이란 ‘중앙 아닌 것이 아님’이겠다. 그리고 그 중앙 아닌 것을 우리는 ‘지방’이나 ‘지역’이라고 부른다. 그러고 보니 지방이 중앙을 정의한다. 지방은 중앙에 대해 구성적이다.
궤변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매년 명절, 저 말은 저절로 증명된다. 텅 비는 중앙, ‘내려가는’ 차들, 북적거리는 지방. 그럴 때만, 지방은 그 이상한 중심과 주변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한 가족’이 된다. 중앙 사는 사람들 태반이 실은 지방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이런 사태의 기원이야 물론 도성이 한양이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태의 ‘근대적 책임’은 박정희 정권 시절의 ‘개발독재’에 있다. 저곡가 정책에 따른 이촌향도 현상, 도시빈민의 폭증과 위성도시의 생성. 서울로 서울로, 그렇게 수십년이 지나는 동안 수도권의 밤은 불야성을 이뤘고, 시골의 밤은 인적이 끊겼다. 저녁 식사 시간만 지나면 불도 거의 꺼진 골목에 들고양이만 돌아다닌다.
한겨레에 감사하다는 말을 하려다 보니 푸념이 길어졌다. ‘한반의반도’는 바로 그 ‘중앙 아닌 곳’에 사는 이들에게 목소리를 주려는 기획이었다. 그것도 취재나 진단이 아니라 직접 발화의 형식으로. 내가 좋아하는 서양의 한 철학자는 몫이 없던 자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상태, 그래서 끊임없이 유지되는 ‘계쟁’의 상태, 그것을 일러 ‘민주주의’라고 했다. 한때 언론의 사명이었다던 바로 계쟁이 없다면 ‘치안’이 성공한 것일 테니까.
한반의반도’ 전체 기사를 통독하면서, 나는 바로 그 계쟁을 기대했다. 과연 대표적인 두 ‘지방’에 뿌리내리고 사는 신진 연구자들답게 다양한 문제의식들을 읽을 수 있었다. 20편의 기사를 읽고 키워드들을 뽑아봤다. 5·18과 당사자주의, 재개발과 젠트리피케이션, 대안공간, 학력차별과 지방대학 위기, 지역 차별과 여성 차별, 탈원전, 지역 출산·육아 정책, 지역 예술가 지원정책 등등. 실로 다양한 의제들이 부산과 광주에 기반을 둔 독립 연구집단 구성원들에 의해 공론장에 올랐다. 실은 도마에 올랐다.
매섭고 논쟁적인 목소리들이 많았다. 가령 “시티와 마을. 부산의 도시재생사업은 이 두 용어 사이에서 진자운동을 하며 증식하고 있다. 에코, 델타, 메가, 스마트라는 이름으로 쌓아 올린 미래 시티와 예술과 문화라는 이름으로 펼친 마을 구축이 부산 곳곳을 종횡무진한다”(18회)와 같은 발언은 굳이 부산만 아니라 현재 한국 사회 전체의 변화를 집약한다. “뜨거운 여름, 이 글자를 실어 나르는 전력조차 누군가의 생명을 싣고, 그 생명에 기대어 흘러간다”(14회)라는 기사의 마지막 문장은 방사능에 노출되기라도 한 것처럼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광주가 이런 ‘꼬라지’가 된 건 공교롭게도 5·18 때문이다. 아니, 5·18 이후 형성된 분위기가 광주의 생태계를 학연, 지연으로 통칭되는 ‘인맥사슬’의 구조 안으로 몰아갔다”(11회)라는 문장은 다소 거칠고 과장되어 있었으나 후련했고, 10회 기사의 ‘생각다방 산책극장’ 이야기는 겨울밤 겨우 남아 있는 불씨를 보는 것처럼 훈훈하고 안쓰러웠다.
흥미로웠던 것은, 부산 ‘젠더·어펙트 연구소’ 필자들이 주로 다룬 주제가 “시티와 마을”, 즉 재개발과 젠트리피케이션 문제였다면, ‘광주모더니즘’ 필진이 거의 예외 없이 다룬 주제는 5·18이었다는 점이다.
나는 부산을 잘 모른다. 그러나 부산이 인구도 건물도 초고령화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해한다. 도시에도 생애사가 있는 법이고, 부산은 그 생애의 한 주기를 넘길 만큼 오래된 도시일 테니까. 그리고 ‘인구와 환경에 대해’, ‘통계와 효율성’을 근거로 작동하는, 이른바 ‘생명권력’이 그 호기를 놓칠 리 없다. ‘생명권력’이란 말이 낯설다면, 말을 바꿔도 좋겠다. 미셸 푸코라는 프랑스 철학자는 그것의 현대적 형태를 ‘신자유주의’라고 불렀다.
나는 평생을 광주에서 살았고 5·18에 대해 적지 않은 발언도 해 왔으니, 광주 얘기는 좀 길게 해 보자. 반성부터 한다. 혹시나 나 역시 “항쟁이라는 말을 너무나 신성하게 여기는 담론들이 많아”지는 데 일조하지 않았는지, 그래서 5·18 담론이 “도리어 사람들을 짓누르는 속박과 두려움이 되고 있는”(15회) 상황에 책임은 없는지 말이다. 그럼에도 광주의 신진 연구자들이 ‘예외 없이’ 5·18을 발언 주제로 삼거나, 곁가지로라도 언급하는 현상은 내게 징후적으로 읽힌다. 아마도 두 가지 경우를 상정해 볼 수 있겠다.
하나, 5·18이 ‘마르지 않는 샘’이기 때문. 나는 언젠가 5·18을 두고 ‘무한 텍스트’란 명명법을 사용한 적이 있다. 이런 의미였다. 5·18에는 흔히 말하는 ‘민주·평화·인권’보다도 ‘항상 더 많은’ 것들이 들어 있다고. 사회학자 최정운이 ‘절대공동체’라고 부르기도 했거니와, ‘완전히 다른’ 공동체의 가능성이 그 안에 있을 수도 있다고. 심지어 기념과 보상 과정에서 벌어진 부정적 행태들까지도 반면교사의 형태로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 많다고.
둘, ‘광주모더니즘’의 필자들 또한 부정적인 방식으로나마 5·18에 연루되어 있기 때문. 가령 나는 이런 문장을 발견했다. “국가폭력과 같은 외부의 강제에 더이상 당하지 않고 살겠다는 논리가 한편으로 배타적인 관계 네트워크가 내부에 똬리를 틀도록 만든 것이다. 5·18과는 아무 상관 없이 이루어진 이런 분위기는 그저 파워엘리트의 ‘파워’를 강화하고 ‘자리’를 꿰찬 자들의 지위와 권력을 강화하는 논리만을 제공하게 만들 뿐이었다.”(11회) 최근 광주 학동 건물 붕괴사고의 전말을 아는 사람이라면 저 말의 충심을 의심하기 힘들다. 그러나 설사 어떤 환자의 의처증에 마땅한 증거가 있다 하더라도, 그가 과도한 감정 지출로 고통스러워한다면 그 또한 증상이라고 말한 사람은 지제크다. 나는 저 문장의 어투에서 어떤 ‘원한’ 같은 것을 감지한다. 그러나 다행히도 기사의 이어지는 문장은 이렇다. “5·18은 다시 발명되어야만 한다.” 나는 ‘광주모더니즘’이, 원한 없이 그 일을 해냈으면 좋겠다.
글을 마치면서 조그마한 바람 하나쯤은 얘기해도 되겠지 싶다. 20회분의 기사를 읽으면서 이런 지면이 향후에도 어딘가에서는 이어졌으면 싶다. 굳이 한겨레가 아니라도 말이다. 광주와 부산에서 시작했지만 따지고 보면 이 두 대도시가 한국의 가장 ‘지방적’인 특성을 갖춘 장소라고 말하기는 힘들 듯하다. 할 말이 더 많은 ‘지방’이 한국에는 많다. 그리고 누가 될지는 알 수 없으나 어딘가에서 이런 작업을 이어갈 다음 필자들께서는 부디 저 모든 ‘지역적인 문제들’이 결국에는 ‘신자유주의’로 수렴한다는 사실에 좀 더 주목해 주었으면 한다. 지역에 대한 우리의 오래된 감각은 존재하나, 신자유주의는 지방과 중앙을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즐겁게 많이 배운 경험이었다. 진심이다.
김형중ㅣ조선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문학평론가. 한겨레 2021.9.14.
심재륜의 검찰, 윤석열의 검찰
특수부 검사의 전설로 불렸던 심재륜 전 고검장은 소탈한 사람이었다. 부장검사 시절 기자들과 술을 자주 마셨다. 오후 5~6시쯤 그의 사무실에 취재하러 가면 붙잡히는 경우가 많았다.
방배동 허름한 카페로 몰려가 마른 멸치 몇 개를 놓고 ‘30분 게임’을 했다. 참석자 5~6명이 30분 동안 폭탄주를 돌렸다. 잔을 받으면 내려놓지 않고 바로 마시는 것이 규칙이었다. 해가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술자리가 끝났다.
법조를 두번째 출입하면서 서울지검 3차장이던 그에게 인사를 갔다. 전날 저녁 술이 덜 깬 표정으로 그는 이상한 얘기를 했다.
“성형, 나는 내가 좀 무서워.”
온 세상에 두려울 것이 하나도 없을 것 같은 사람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궁금했다.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내가 남들을 죽였다 살렸다 하고 있더라고. 내가 하나님도 아닌데···”
그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심재륜 전 고검장은 퇴임 뒤 ‘수사 10결’을 내놓았다.
“칼은 찌르되 비틀지는 마라.”
“피의자의 굴복 대신 승복을 받아내라.”
“수사하다 곁가지를 치지 마라.”
“칼엔 눈이 없다. 잘못 쓰면 자신도 다친다.”
검찰이 직접 수사를 할 경우 지켜야 할 원칙과 금도를 정리해서 후배 검사들에게 남긴 것이다. “언론과의 관계는 불가근 불가원 하라”는 내용도 있다. 그의 후배들이 수사 10결을 잘 지켰더라면 검찰이 개혁 대상으로 전락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불행하게도 수사 10결을 거꾸로 지킨 검사들이 있었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그랬다. 피의자는 샅샅이 털었다. 나오는 혐의는 몽땅 다 기소했다. 무죄 판결을 걱정하지도 않았다. 검찰에서 그의 선배였던 인사는 “특수부 검사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참 특이한 검사였다”고 평가했다. 그랬던 윤석열 전 총장이 이른바 고발 사주 의혹 사건에 휘말렸다. 지난해 총선 직전 손준성 대검 수사정보정책관이 김웅 미래통합당 후보에게 텔레그램을 통해 고발장과 자료를 보냈다는 내용이다. 범죄다.
손준성 검사는 “저로서도 어떤 경위로 이와 같은 의혹이 발생됐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그럼 누가 안다는 것일까? 김웅 의원은 여전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막무가내로 버티는 잡범들과 무엇이 다른가? 증거가 있으니 두 사람은 빠져나가기 어려워 보인다.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윤석열 전 총장의 반응이다. 수사정보정책관은 검찰총장의 핵심 참모다. 윤석열 전 총장도 인정했다. 그렇다면 윤석열 전 총장은 신중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옳다. 검사는 팩트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하지만 윤석열 전 총장은 “정치공작”이라고 목소리부터 높였다. 그리고 “어떻게 저쪽 주장에 벌떼처럼 올라타느냐. 계속 야당의 기득권 정치인으로 남아 누리겠다는 거냐”고 당내 경쟁자들을 비난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반응이다. 사실관계보다 여론조사 지지도를 더 의식하는 것 같다. 정치인들도 이 정도로 무모하지는 않다.
검사는 정의로운 직업이다. 영화 ‘공공의 적 2’에 나오는 서울지검 강철중 검사만큼은 아니겠지만, 우리나라에는 멋진 검사들이 참 많다.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범죄 수사의 최종 수문장 역할을 마다치 않는다. 경찰 수사에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뀐 사건을 귀신 같이 찾아내서 바로 잡는 검사들이 종종 있다. 무엇보다도 검사들은 부끄러움을 알고 명예를 소중히 여긴다.
그런데 윤석열 전 총장이 지금 그런 검사들의 명예를 짓밟고 있다. 검찰총장을 했다는 사람이 대한민국 검사들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있다.
심재륜 전 고검장이 <월간조선> 2012년 11월호에 이런 글을 썼다.
“권력과의 관계를 놓고 볼 때 검사는 세 부류로 나뉜다. 첫째, 언제나 권력과 거리를 두면서 원칙과 소신에 따라 검사 임무를 수행하는 검사, 둘째, 원칙과 소신에 충실하지만 상황에 따라 권력과의 거리를 조절하며 운신을 달리하는 검사, 셋째, 출세를 위해 늘 권력에 빌붙는 출세 지향적 검사다.”
윤석열 전 총장은 어디에 속할까?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아예 권력을 잡으려고 달려드는 검사”이기 때문이다. 윤석열 전 총장의 권력 쟁취 기도는 과연 성공할까?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 한겨레 2021.09.15.
선진국 한국을 가로막는 '자료 권력'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은 관료제 개혁에 달려있다
2019년 2월에 쓴 시평에서 나는 촛불정권의 개혁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관료제 혁신이 중요하다고 얘기했었다. 그리고 문재인 정권의 임기가 7개월 남짓 남은 지금 우리는 다시 한번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념이나 가치 지향, 정치적 입장에 따라 촛불의 상징, 의미에 관해 서로 다른 생각을 할 것이고, 그래서 촛불정권에 대해 서로 다른 평가를 할 것이다. 그렇지만 문재인 정권이 초기에 적극성을 보였던 불평등 개선과 비정규직 문제 해결, 부동산 안정, 4대강 재자연화, 탈핵과 에너지의 생태적 전환, 교육개혁 등의 개혁 과제에서 아쉬움이나 불만이 커지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심각하게 평가해야 할 지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불만과 실망의 화살이 대통령과 정부로 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물론 개혁이 후퇴하거나 지연되는 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민주당 정권의 계급·계층적 지지기반으로 인한 한계도 있을 것이고, 인사의 실패로 인한 문제도 있을 것이며, 절차의 민주성이나 합리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추진력이 떨어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문재인 정권이나 민주당이 자신의 정치적 지지기반을 외면하기도 절차적 합리성을 무시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며, 특정 자리에 꼭 들어맞는 사람을 찾고 임명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는 점을 이해할 수도 있다. 이들에 대해서는 시민들이 정치적 심판을 내리게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관료조직의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서로 다른 이념, 가치, 정책을 내세우는 정당들이나 정치인들이 서로 경합하고, 주권자인 일반시민들은 선거를 통해 정치적 선택을 하며, 여기서 다수를 대표하는 정치세력이 집권하여 정부와 의회를 통해 선거에서 내걸었던 공약을 실행하고, 그 성과에 따라 정권이 유지되거나 바뀌는 정치적 과정을 반복한다. 민주주의가 발달한 미국이나 유럽의 선진국들을 보면, 선거에서 승리한 정당은 자신의 이념이나 가치 지향에 따라 공약한 정책을 실행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한다. 우파정권이 등장하면 사적 소유권과 시장 자유를 옹호하는 시장친화적 신자유주의 정책들을 적극적으로 실행하며, 좌파정권이 등장하면 보편적 복지와 평등을 지향하는 복지국가 정책들을 적극적으로 실행한다. 또한 생태주의 정당과 연합한 정권은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에너지 전환 정책들을 적극적으로 추진한다.
그렇다면 국제적으로 선진국 반열에 들어섰다고 인정받고 있으면서 정치적 민주주의도 공고해진 한국사회의 모습은 어떠한가? 촛불 저항에 힘입어 집권한 문재인 대통령은 종종 국민들 앞에서 개혁 정책의 적극적 추진을 약속해왔다. 그런데 이런 정책들조차도 막상 각 실행부처로 가면 이런저런 제동이 걸리고 애초의 취지가 훼손되고 있는 현실을 자주 목격한다. 다른 선진 민주주의 나라들과 달리 신속한 정책 전환을 방해하는 관료조직의 벽이 그만큼 높기 때문이다.
4대강 보 철거와 재자연화를 추진해온 물관리위원회가 왜 정권 말기가 다 되어가도록 보 하나도 철거하지 못하고 있는지, 탈원전 및 탈석탄 에너지 전환 정책을 모색하고자 한 국가에너지위원회가 여전히 탈원전 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또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에너지 전환전략을 좀 더 적극적으로 제시하지 못했는지, 왜 기재부는 대통령이 코로나로 인해 영업손실이 큰 몇몇 업종의 자영업자들에 대한 실질적 보상을 선언했음에도 여전히 초라한 수준의 보상안을 제시하며 자영업자들의 몰락을 방치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자.
물론 위원회는 일반적인 관료조직과 달리 거버넌스의 이름으로 다양한 전문가들이나 시민사회 활동가들, 그리고 일반시민들까지도 포함하는 논의틀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왜 위원회에서 정부의 정책 방향에 맞는 의사결정이 신속히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일까? 많을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누가 참여하는가?', '참여자를 누가 결정하는가?' 하는 점이다. 그동안 전문가의 이름으로 위원회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이 사실상 이해관계자였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어떤 정책 전환도 이루어낼 수 없다. 위원회에 참여하는 관련 부처 상급 관료들의 역할이 중요한데, 이들이 새로운 정부의 정책 방향에 따라 새로운 전문가들을 참여시키고 적극적인 정책 전환을 추구하지 않으면 신속한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사실 정년이 보장된 공무원인 관료들의 주된 관심은 정권이 바뀌어도 자리를 유지하고 승진하는 것이며, 이들 중 일부는 퇴직 후의 일자리를 모색하거나 정치적 야심을 품기도 한다. 그래서 상급 관료들일수록 승진이나 퇴직 후 진로를 생각하며 누가 차기 정권을 차지할 것인지 계산한다. 그러니 이들은 특별한 공적 책임감이 강한 경우가 아니라면 정책 전환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동기가 없거나, 행정을 통해 특정한 정책적 지향을 암묵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정치적 명성을 쌓으려고 하기도 한다.
정년이 보장되는 관료 권력은, 주어진 임기 동안 새로운 정책을 펼치려고 정무직 관료들을 동원하는 선출 권력에 고분고분 자신의 권력을 내놓으려 하지 않는다. 5년마다 바뀌는 선출 권력이 관료 권력과의 싸움에서 이기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정책을 지향하는 권위주의 성향의 보수정권이 관료들의 통제에 더 성공적이었다는 사실이 이 점을 잘 보여준다. 관료들은 자신의 승진이나 기득권 유지에 도움이 되지 않는 정책 전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으며, 가능하면 기존 정책과 규정을 유지함으로써 그동안 누려온 각종 권한과 이권을 유지하기를 원한다. 사회계층으로 중상층에 속하는 상급 관료들은, 군사독재정권을 포함한 보수정권의 장기집권 과정에서 보수 기득권층이나 권력층의 요구에 부응하는 정책들을 형성하고 또 정당화하는 데 기여해 왔는데, 이것은 관료들의 조직 이익과 보수 정치세력의 기득권 간의 친화성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관료 권력이 개혁적 정책 전환을 추구하는 선출 권력에 맞서는 방식은 대체로 자료를 통제하는 방식과 절차를 내세우는 방식이 있다. 새로운 정책을 지향하는 정부가 합리적 정책 전환을 하려면 기존의 정책자료들을 재해석하고 재평가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을 거쳐야 한다. 이것은 정책의 기본틀을 바꾸는 과정이다. 그런데 이런 실무를 담당하는 상급 관료들이 기존 자료를 재탕하면서 이를 새롭게 재구성할 의지나 능력을 보여주지 않으면 실질적인 정책 전환의 근거를 마련하는 길은 요원해진다. 이것이 바로 관료들이 '자료 권력' 또는 '정보 권력'을 행사하는 방식이다.
관료들은 또한 정책 논의 절차를 내세워 정책 전환을 지연시키거나 훼손시킬 수도 있는데, 각종 규정에 따라 이런저런 절차를 거치다 보면 어느새 정책의 취지가 뒤틀어져 정책 목표를 수행하기 어려운 상태에 놓이게 된다. 물론 이 과정에는 기존의 정책을 정당화해온 온갖 자료들이 동원된다. 이것은 관료들이 '절차 권력'을 이용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각종 위원회의 운영에서도 상급 관료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위원회가 정부가 공약한 정책 방향을 실현하려면, 이를 지지하는 전문가들과 상급 관료들이 의사결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이해당사자들 간의 이견을 조율하면서 정책 전환을 끌어내야 한다. 개혁 정권에서 이 과정은 기득권자와 기존 체제의 저항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탈원전과 탈탄소를 위해서는 원전 관련 업계와 탄소에너지 업계를 설득하며 반발을 이겨내야 하며, 부동산 누진세 부과와 복지 강화를 위해서는 부동산 소유층이나 부유층의 저항을 이겨내야 한다. 이것은 강력한 정책 전환의 의지를 지닌 관료조직이 있을 때 가능하다.
그런데 지금 코로나 사태가 지속되고 대다수 국민의 고통이 커지고 있는 현실에서 기재부가 국가재정정책을 집행해온 과정을 돌아보면, 역시 선출 권력이 관료 권력의 벽을 넘어서기가 쉽지 않음을 느끼게 된다. 물론 현 기재부 장관은 대통령이 임명한 관료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그는 정통 관료 출신으로서 상급 관료 시절에 형성해온 재정정책에 대한 기존 사고틀을 전혀 바꾸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개혁 정권의 정책 방향에 어울리지 않는다. 특히 코로나 사태가 지속되어 많은 국민이 고통받고 있는 상황에서도 재정 균형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태도는, 선출 권력에 맞서는 관료 권력 대변자의 태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전문성과 공정성을 기대하며 임명했던 감사원장이 사적인 출세욕을 숨기며 정부의 탈원전 정책에 맞서 감사 권력을 남용한 사례도 보았다. 기대를 안고 임명된 장관들이 상급 관료들의 도움을 받지 못해 약속했던 정책들을 펼쳐보기도 전에 물러나기도 했고, 전문성이 부족한 장관들이 상급 관료들을 통제하지 못해 적극적인 정책 전환에 실패하기도 했다. 더구나 대통령의 의지조차 관료의 벽에 막혀 쉽게 실현되지 못하고, 국가 예산편성의 최종 결정권을 지닌 국회의 의원들조차 기재부 장관에게 몸을 낮추고, 기재부가 예산편성 권한을 앞세워 다른 모든 정부 부처들 위의 상급 부처 행세를 하는 부조리한 현실 앞에서, 선출 권력을 통해 정책 전환을 기대한 시민들의 민주적 의지는 점점 더 실망과 좌절에 빠져들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부의 정책 방향을 바꾸고 정책의 틀을 바꾸는 것이 정권교체의 의미인데, 지금 한국사회의 관료제는 정권교체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있다. 그러니 한국사회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관료제 개혁이 시급하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관료제 개혁의 방향은 다음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 우선 정년이 보장되는 일반 공무원의 최고 승진 직급을 제한하고, 다양한 정책적 지향을 지닌 실국장급 전문 관료 인재 집단을 키워, 집권 정당이 자신의 정책 방향에 맞는 인재를 임명하여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이렇게 선출 권력이 상급 관료에 대한 폭넓은 인사권을 가지고 있어야 정권교체와 함께 신속한 정책 전환을 추진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행정고시와 같이 고위 공무원을 시험으로 선발하는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 고시 공부에 몰두하느라 현실 경험이 부족한 사람들이 시험을 통해 정책 생산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도록 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고위 공무원은 정책 결정을 뒷받침하기 위한 자료 생산 및 해석 능력, 이해당사자들 간의 이견조율 능력을 지녀야 하는데, 이런 능력은 다양한 실무 경험 없이는 형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관료들의 현실 경험의 중요성은 사법부나 검찰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민주당이 정부의 개혁 정책을 저지하는 관료들의 태도에 진정으로 분노를 느낀다면, 무엇보다도 의회에서 관료제를 개혁하는 법을 만드는 작업에 당장 나서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아마도 한국 사회는 선출 권력의 공약, 특히 개혁 정권의 공약이 번번이 관료조직의 벽 앞에서 지연되고, 왜곡되고, 좌절되는 악순환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정태석 전북대학교 교수 | 프레시안 2021.09.16.
대선판은 지금 ‘나쁜 남자’ 전성시대
1987년 노태우 민주정의당 후보는 ‘보통사람의 시대’라는 구호를 앞세워 대통령에 당선됐다. 1992년 김영삼 민주자유당 후보는 ‘변화와 개혁’을, 1997년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는 ‘정권교체와 외환위기 극복’을 내세웠다. 노태우 대통령은 1980년 전두환 쿠데타 세력의 일원이었다. 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은 그에 맞서 싸운 대중 정치인들이었다. 그때는 그런 사람들이 대통령이 됐다. 어떤 면에서는 낭만의 시대였다.
21세기가 시작되자 전혀 다른 유형으로 개성이 강한 인물들이 대통령에 줄줄이 당선됐다. 2002년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후보는 정치판의 ‘아웃사이더’였다. 지역주의를 깨기 위해 온몸을 던졌다. 2007년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는 ‘월급쟁이 출세 신화’, 2012년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는 ‘박정희 신화’의 상징이었다. 2017년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구호는 ‘적폐청산’이었다. 어쨌든 역대 대통령들은 이처럼 뭔가를 내세우거나 상징하는 사람들이었다.
2022년 3월9일 대한민국 20대 대통령 선거를 향해 대선주자들이 질주하고 있다. 전과 다른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이른바 ‘나쁜 남자’들이 잘나간다. 도덕적인 엘리트 출신들은 맥을 추지 못한다. 둘째, 서로 헐뜯기에 바쁘다. 이른바 네거티브 캠페인만 난무한다. 가치와 노선과 정책 경쟁은 찾아볼 수 없다.
끝까지 이럴 것인지는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참 특이한 양상이다. 왜 이럴까?
더불어민주당 경선은 9월25일 광주·전남, 26일 전북 대의원·권리당원 개표 결과가 2차 고비다. 호남에서도 이재명 경기지사가 과반 득표를 하면 민주당 경선은 사실상 끝이라고 볼 수 있다. 반대로 이낙연 전 대표가 약진하면 10월3일 2차 슈퍼위크, 10월10일 3차 슈퍼위크 결과를 봐야 한다. 결선 투표로 가면 역전할 수 있을까? 표차가 크면 뒤집기 어렵다. 하지만 정치는 알 수 없다. 끝까지 지켜볼 수밖에 없다.
어쨌든 호남 민심이 민주당 경선을 좌우하는 상황이다. 역시 호남은 민주당의 성지다. 역대 대선에서 호남이 선택한 후보가 민주당 후보가 됐다. 민주당 경선에서 이재명 경기지사가 압도적으로 선두를 달리는 배경에는 지역주의 원리와 확증편향 원리가 함께 작용하고 있다. 지역주의 원리는 ‘호남이 지지하는 영남 후보’ 모델이다. 영남보다 인구가 절대적으로 적은 호남 유권자들의 전략적 선택이다. 2002년 노무현 후보, 2017년 문재인 후보가 그랬다, 피케이(부산·경남)가 티케이(대구·경북)로 달라졌을 뿐이다. 이재명 지사는 경북 안동 출신이다. 호남 후보들에게는 서글픈 현실이다.
확증편향 원리는 “통합형 정치인보다 분열을 조장하는 포퓰리스트가 더 잘나간다”는 가설이다. 21세기 정보화 혁명으로 유권자들이 진실보다 믿음을 중시하면서 정치판의 스핀 닥터들은 분노를 조직화해 유권자들을 투표장으로 끌어내고 있다. 우리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다. 어느 나라든 ‘이성보다 감성’에 따라 ‘경력보다 매력’을 보고 투표하는 추세가 강해지고 있다. 2000년 미국 대선에서 텍사스 카우보이 스타일의 아들 부시가 정치 엘리트 앨 고어를 꺾은 것이 신호탄이었다. 2016년 장사꾼 도널드 트럼프가 힐러리 클린턴을 이긴 것도 같은 현상이다.
이재명 지사의 형수 욕설 사건, 여배우와의 불륜 의혹은 2018년 지방선거에서도 제기됐다. 당시 이재명 지사를 찍은 민주당 지지 성향의 유권자 중에는 “경기지사까지는 시켜주겠지만, 대통령은 안 된다”고 다짐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3년 만에 그런 다짐이 깨졌다. 왜 그랬을까? 첫째, 보수 야당에 맞서 대통령 선거에서 이길 후보가 필요했다. 둘째, 도덕적 후보보다는 매력 있는 후보가 더 필요했다.
이낙연 전 대표로서는 기가 찰 것이다.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의문의 1패’를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낙연 전 대표는 말도 잘하고 글도 잘 쓴다. 그는 광주일고, 서울대 법대, 동아일보 기자 출신의 엘리트다. 그런데 그게 바로 그의 약점이다. 중도 사퇴한 정세균 전 국무총리도 마찬가지다. 그는 장관·국회의장·국무총리까지 했으니 대한민국 최고의 ‘스펙’이다. 한때 직업이 당대표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또 점잖은 사람이다. 욕을 할 줄 모른다. 그런데 그게 바로 그의 약점이다. 안타깝지만 현실이다.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일단 안상수·원희룡·유승민·윤석열·최재형·하태경·홍준표·황교안 8명으로 압축됐다.(가나다순) 10월8일 발표되는 2차 컷오프에서 또다시 4명으로 압축된다. 지금까지 여론조사 결과를 기준으로 추리면 홍준표·윤석열·유승민 세 사람은 들어가고, 마지막 한 자리를 놓고 원희룡·최재형 두 사람이 다툴 것으로 보인다. 11월5일 발표되는 본경선의 최종 승자가 누가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선두를 달리던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고발 사주 의혹 사건에 휘말려 추락하기 시작했고, 홍준표 의원은 상승세를 타고 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국민의힘 경선에서도 ‘나쁜 남자’ 이미지를 가진 홍준표 의원과 윤석열 전 총장이 선두 다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홍준표 의원은 막말 전력과 돼지흥분제 사건 논란을 이미 넘어선 것 같다. 그가 본래 가진 마초 이미지 때문에 그런 정도 약점은 큰 흠결로 보이지 않는다.
윤석열 전 총장은 건들거리며 걷는 모습이 매우 거만해 보인다. ‘도리도리 윤’, ‘쩍벌남’이라는 비난도 쏟아진다. 그런데 바로 그런 모습 때문에 그를 좋아한다는 유권자들이 꽤 있다. 이유를 물었더니 “문재인 정부 사람들을 제대로 혼내줄 것 같아서”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유승민 전 의원과 원희룡 전 제주지사, 최재형 전 감사원장이 고전하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너무 엘리트거나 점잖다는 것이다. 당사자들로서는 기가 막히는 일이다.
여야의 선두권 주자들 사이에 비방전이 가열되는 것은 ‘나쁜 남자들의 대결’이라는 구도의 필연적 결과물인지도 모른다. 최근 정치 뉴스의 대부분을 ‘이재명 대 홍준표’, ‘홍준표 대 윤석열’, ‘윤석열 대 이재명’의 격돌이 차지하고 있다. 물고 물리는 접전이다.
언론도 싸움을 자꾸 부추긴다. 하지만 이제 자제시켜야 한다. 대통령 선거는 싸움꾼을 뽑는 선거가 아니다. 5년 동안 대한민국 국정을 잘 이끌어 갈 정치 지도자를 뽑는 선거다. 정의당은 공직 후보자를 당원 총투표로 선출한다. 10월1일부터 5일까지 온라인 투표, 6일 자동응답전화 투표로 후보를 확정한다. 과반 득표자가 없으면 바로 결선 투표를 한다. 심상정·이정미 전 대표와 김윤기 전 부대표, 황순식 경기도당위원장이 나섰다. 2017년 대선에서 심상정 정의당 후보는 6.17%를 득표했다. 이번에는 정의당이 득표율을 얼마나 끌어올릴 수 있을까? 진보정당 집권의 길은 요원하다. 제3지대에서 뛰는 주자들도 있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와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싸움이 격화하면서 중간 지대가 거의 사라졌다. 이들의 생존 공간도 좁기만 하다. 두 사람은 내년 2월13~14일 후보자 등록 직전까지 상황을 보다가 여야 어느 한쪽과 막판 ‘딜’에 나설 가능성도 있다.
추석 연휴 이후 대선 국면을 좌우할 가장 큰 관심사는 역시 윤석열 검찰총장 시절 검찰의 ‘고발 사주’ 의혹 사건이다. 지난해 4월 손준성 대검 수사정보정책관이 김웅 미래통합당 후보에게 고발장을 보냈다는 것은 이제 거의 ‘팩트’로 굳어져 가고 있다. 손준성 검사가 윤석열 검찰총장의 핵심 참모였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윤석열 전 총장이 고발을 사주했다고 자동으로 입증되는 것은 아니다. 고발 사주 의혹 사건의 핵심 열쇠는 손준성 검사의 입이 될 것 같다. 그의 진술에 따라 2022년 3월9일 대통령 선거의 판도가 완전히 뒤바뀔 수 있다. 손준성 검사가 침묵을 지킬 경우 고발 사주 의혹은 미제 사건으로 남을 수도 있다.
홍준표 의원과 윤석열 전 총장의 싸움에서 누가 승자가 될까? 최근 여론조사 흐름은 홍준표 의원이 확실히 유리해 보인다. 그러나 윤석열 전 총장 뒤에는 이른바 보수 신문의 논객들이 있다. 그에게 이미 줄을 선 국민의힘 전·현직 의원들도 있다. 승부를 섣불리 예측하기 힘들다.
정작 중요한 것은 홍준표와 윤석열의 대결이 아닐지도 모른다. 국민의힘 후보가 된다고 내년 3월9일 대선에서 무조건 이기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국민의힘 실무 관계자가 얼마 전 이런 분석을 내놓았다.
“‘조국 사태’, ‘인국공 사태’, ‘엘에이치 사태’ 등 부정-불공정 사례 등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정권에 대한 직접적인 부정적 이미지로 바로 치환되지는 않는다. 국민의힘은 여전히 ‘탄핵-적폐’ 등에 대한 정서적 반감과 이미지를 해소하지 못한 상태다.”
“야권이 ‘수구-기득권’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대중의 기본 인식이 현재의 여권에 비해 야권이 ‘도덕적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보지 않을 것이다. 윤석열 전 총장이나 국민의힘이 확고한 ‘중도-개혁적’ 이미지를 보여주지 못하는 한 윤석열 전 총장과 국민의힘에 대한 지지는 당연히 흔들릴 수밖에 없다.”
국민의힘뿐만 아니라 더불어민주당 전략 참모들이나 정치 분석가들도 내년 3월 대선에서 이재명 경기지사가 당선될 가능성이 조금 더 크다고 본다. 2002년 김대중-노무현, 2012년 이명박-박근혜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당 후보가 현직 대통령과 차별화된 정체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정권교체 여론을 상당 부분 흡수할 수 있다는 것이 근거다.
그러나 선거는 알 수 없는 것이다. 1997년 12월 대통령 선거가 1주일만 늦게 치러졌어도 당선자는 김대중이 아니라 이회창이었을 것이다. 선거 결과는 우연적 요소에 의해 상당히 좌우되지만, 선거 결과는 국가와 국민의 운명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2022년 3월9일 대선은 6개월 가까이 남았다.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 한겨레 2021-09-17
파죽지세 35살 칠레 대권주자..."신자유주의 고향을 신자유주의의 무덤으로"
젊은 대중운동이 아옌데의 뜻을 되살리다
해마다 9월 11일이 되면, 많은 이들이 2001년 미국 뉴욕 세계무역센터 빌딩을 무너뜨린 테러 참사를 떠올린다. 올해는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철수 탓에 지난 20여 년 동안 이어진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 시대를 연 이 사건을 되새기는 언론 기사들이 유독 많았다.
그러나 9월 11일이라고 하면, 또 다른 비극, 미국이 악랄한 가해자가 된 비극을 떠올리는 이들도 많다. 바로 1973년에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이 이끄는 칠레 좌파 정부를 무너뜨린 군부 쿠데타다. 이후 라틴아메리카 군부독재의 상징이 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육군참모총장이 지휘하고 미국이 배후 조종한 이 쿠데타는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방식으로 사회주의 개혁을 추진하던 칠레 민중의 노력을 압살해버렸다.
이 실험 대신 들어선 것은 세계 최초의 신자유주의 실험이었다. 쿠데타 성공 이후 경제 위기에서 좀처럼 헤어 나오지 못하던 피노체트 정권은 밀턴 프리드먼의 통화주의 이론을 따르는 미국 유학파 경제학자들을 기용해 영국, 미국보다 더 먼저 시장지상주의 경제 체제를 수립했다. 이후 거의 반세기 동안 전 지구를 지배한 반동의 시대는 이렇게 시작됐다.
그런데 이 나라, 칠레가 11월 21일 대통령 선거를 맞이해 들썩이고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대선만이 아니다. 칠레는 대선과 하원의원 전원의 선거, 상원의원 절반 가량의 선거를 동시에 치른다. 그리고 지금 대선 여론조사에서 줄곧 1위를 기록하는 후보는 출마 일성으로 이렇게 외쳤다.
"신자유주의의 고향인 이 나라를 신자유주의의 무덤으로 만들겠다." 이 외침의 주인공은 '존엄을 인준하라'라는 이름의 선거연합에 속한 가브리엘 보리치다.
▲가브리엘 보리치 SNS에 올라온 지지 호소 이미지
신자유주의의 고향을 신자유주의의 무덤으로 만들겠다
이번 선거를 이야기하기 전에 잠시 그 전사(前史)를 짚어봐야겠다. 군부독재정권이 들어선 뒤에 칠레에서는 치열한 민주화운동이 벌어졌다. 한국에서 1987년 6월 항쟁이 폭발한 그때에 칠레에서도 시위가 절정에 이르렀고, 1989년에 20여 년만에 다시 국민의 손으로 대통령을 뽑게 됐다. 한국에서 제6공화국이 시작될 무렵, 칠레에서도 민주화가 시작된 것이다.
민주화 이후의 상황도 우리와 비슷한 데가 많다. 본래 아옌데 정부를 이루던 정당연합 '인민연합'의 양대 축은 사회당과 공산당이었다. 그런데 아옌데 대통령이 속했던 사회당은 군부독재 시기에 공산당 대신 기독교민주당과 손을 잡았다. 기독교민주당은 아옌데 정부의 개혁 정책을 계속 방해하다 끝내는 쿠데타에 동조한 정당이었다. 그럼에도 군부정권이 기독교민주당마저 탄압 대상으로 삼자 사회당은 기독교민주당과 정당연합을 결성했다. 오랫동안 '콘세르타시온(합작)'이라 불려온 이 연합은 (비록 명칭은 바뀌었지만) 지금까지도 이어진다.
1989년 선거의 승자는 콘세르타시온이었다. 이후 칠레에서는 군부독재 계승 세력과 콘세르타시온이 양대 정치 세력이 되어 권력을 주고받았다. 반면에 공산당은 의회에 진출하기도 힘든 처지가 됐다. 구리 광산 국유화와 농지개혁을 단행하던 과거 사회당-공산당 연합의 기억은 역사책 속 한 장면으로 사라지고, 새로운 기독교민주당-사회당 연합은 피노체트 정권이 수립한 시장지상주의 체제를 고스란히 이어갔다. 민주화가 신자유주의화와 동의어가 되어버린 지구 반대편 나라와 너무나 닮은 궤적이었다.
한데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부터 칠레 사회와 한국 사회는 사뭇 다른 양상을 보이기 시작한다. 우선 칠레는 2000년대에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처럼 '분홍색 물결'이 덮친 나라로 분류됐다. 콘세르타시온 안에서도 기독교민주당이 아니라 사회당에 속한데다 아옌데 정부 시절에 열혈 청년 운동가였던 미첼 바첼레트가 2006년에 대통령에 당선됐으니, 그리 불릴 만도 했다. 그러나 1기 바첼레트 정부에서도 피노체트 이후 칠레 사회의 골격은 수술대에 오르지 못했다.
진정한 변화의 조짐은 2010년대에 나타났다. 칠레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가장 약한 고리 중 하나는 교육제도다. 1973년 쿠데타 이후 신설된 교육기관은 대부분 사립학교이고, 대학은 오래된 일부 국공립대학을 빼면 모두 사립대학이다. 정부의 교육 투자는 미미한 반면 가계의 등록금 부담은 해가 갈수록 늘기만 했다. 이 때문에 이미 몇 차례 중고등학생 시위가 있었고, 2011년에는 바로 그 세대가 대학생이 되어 당시의 우파 정부(이때 대통령이 현 대통령 세바스찬 피녜라다)에 맞서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 시위는 고등학생까지 결합하며 거의 2년간이나 계속됐다. 한국의 반값 등록금 운동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2013년까지 이어진 이 운동을 통해 칠레의 현 20-30대가 민주화 이후 가장 정치적으로 능동적인 집단으로 떠올랐다. 또한 카밀라 바예호, 조르조 잭슨 같은 학생운동가들이 젊은 세대의 정치 지도자로 부상했고, 보리치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이런 분위기를 업고 바첼레트가 2013년 대선을 통해 두 번째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때 들어선 2기 바첼레트 정부는 2000년대의 1기 때와는 사뭇 다른 면모를 보이는 듯했다. 색깔로 따지면, 이번이 더 '분홍색 물결'이란 말에 어울렸다. 콘세르타시온은 명칭을 '새로운 다수파'로 바꾸면서 30여 년만에 처음으로 공산당을 연합 대상으로 받아들였다. 덕분에 공산당은 오랜만에 원내정당으로 돌아왔고, 바예호 같은 20대 학생운동가가 공산당 소속으로 하원에 입성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한국의 2016-17년 촛불항쟁이나 이후 문재인 정부 초기에 '촛불연합'이라는 이름으로 정의당이 더불어민주당과 협력하던 모습과 비슷한 데가 있기도 하다. 그러나 다른 면이 더 많았다.
우선 우파뿐만 아니라 '새로운 다수파'까지 포함해 양대 정치 세력 모두를 비판하며 제3의 대안이 되고자 하는 흐름이 대두했다. 잭슨처럼 공산당에 속하지 않은 학생운동가들은 시위가 한창이던 2012년에 벌써 '민주혁명'이라는 독자정당을 결성했다. 여기에 여러 좌익 정파들이 결집한, 보리치가 속한 또 다른 조직 '사회적 결집' 등이 함께 하며 새로운 정당연합 '확대전선'이 출범했다.
젊은 좌파 세대를 오롯이 대표하는 확대전선은 2017년 대선에 베아트리스 산체스를 후보로 내세우며 바람을 일으켜 20.27%를 득표했다. 동시에 실시된 하원 선거에서도 16.49%를 얻었고, 한국과 달리 비례성이 강한 선거제도 덕분에 원내 제3세력으로 급부상했다. 스페인의 포데모스와 비슷하면서도 그보다 더 인상적인 신진 좌파의 돌풍이었다. 나는 4년 전에 이 지면에서 이러한 확대전선 바람을 소개한 바 있다("70년생 여성 대선 후보의 돌풍, 이유는?: 칠레판 포데모스, '확대전선' 바람이 불다", <프레시안> 2017. 12. 5).
이후, 확대전선이 진출한 의회에서 공산당도 점차 기독교민주당-사회당 연합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2017년 대선에서 피노체트 노선의 적자인 피녜라 전 대통령이 다시 당선된 것은 2기 바첼레트 정부도 애초에 공약한 사회 개혁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사회경제정책에 관한 한 똑같이 신자유주의 정책 합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양대 정치 세력에 맞설 대안의 자리를 놓고 공산당과 확대전선이 서로 경쟁했다.
이 상황에서 2019년 가을, 대중교통 요금 인상을 계기로 격렬한 대중투쟁이 폭발했다. 처음에는 중고등학생이 거리에 나섰지만, 경찰이 폭력 진압을 벌이자 다수 시민이 시위에 합류했다. 시위는 다음해 봄까지 이어지며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피녜라 정부는 고육지책으로 헌법 개정 카드를 내밀었다. 처음에는 기존 의회에서 헌법안을 논의해보자는 수준이었지만, 원내에서 확대전선과 공산당이 압력을 넣고 국민투표에서 민심이 명확히 확인됨에 따라 헌법제정시민회의를 따로 선출해 새 헌법안을 마련하는 것으로 가닥이 잡혔다.
연말로 예정된 대선에 반년 앞서 열린 헌법제정시민회의 선거 결과는 칠레를 넘어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집권 우파는 20.6% 득표에 그쳤고, 확대전선과 공산당이 함께 결성한 선거연합 '존엄을 인준하라'가 기독교민주당-사회당 연합을 제치고 제2의 정치세력으로 부상했으며, 무소속 당선자들까지 합치면 급진좌파와 사회운동의 대표자들이 의석의 절반 가량을 차지했다. 이런 헌법제정시민회의 선거의 여진 속에서 지금 '존엄을 인준하라' 소속 보리치 후보가 여론조사 1위를 달리는 칠레 대선 정국이 전개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불가능한 35세의 유력 대선 주자
실은 보리치가 '존엄을 인준하라'의 대통령 후보가 된 것도 이변이었다. '존엄을 인준하라'에 속한 공산당, 확대연합 등이 공동 대선 후보를 선출하기 전까지만 해도 다들 공산당 소속인 레콜레타 시장이자 팔레스타인 민족해방운동가 출신 다니엘 하두에가 후보가 되리라 여겼다. 헌법제정시민회의 선거가 있기 전에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이미 하두에는 우파나 기독교민주당-사회당 연합 쪽 후보군을 제치며 1위를 달렸다.
그러나 7월에 실시된 '존엄을 인정하라' 예비선거에서 확대전선 소속 하원의원 보리치가 거의 60%를 받으며 후보로 선출됐다. 보리치는 피녜라 정부의 헌법 개정 카드를 받아들인 것 때문에 확대전선 안에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처음에는 이게 시위를 중단시키려는 정부 측 의도에 넘어간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헌법제정시민회의 소집이 오히려 체제 변혁파의 기회임이 드러나면서 분위기가 뒤바뀌었다. 예비선거에 참여한 대중은 1967년생인 하두에보다 훨씬 더 젊은, 대한민국에서는 아예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없는 1986년생 보리치를 선택했다.
이는 또한 보리치가 내건 비전의 선택이기도 했다. 하두에도 물론 신자유주의를 끝장낼 급진적 구조개혁 비전을 제시했지만, 보리치는 특히 '여성권 확대'와 '기후위기 대응'을 강조했다. 보리치의 공약 가운데 한 축은 여성 일자리와 여성 노동권 확대이고, 다른 한 축은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생태 전환(물론 핵심은 에너지 체제 전환이다)을 경제 구조 개혁과 새 일자리 창출의 기회로 삼는다는 것이다. 아옌데가 약속했던 인민연합 강령과는 많이 달라 보이지만, 시대 변화에 맞게 갱신된 급진적 개혁 비전이라 할만하다.
보리치가 후보로 선출되는 이변에도 불구하고 하두에와 공산당은 보리치 선거운동을 중심으로 굳건히 단결하겠다고 약속했다. 당적은 각기 다르지만 '존엄을 인준하라'에 함께 모인 2010년대 학생운동 지도자들, 바예호, 잭슨 등이 보리치와 한 팀을 이루며 단결을 과시했다. 인민연합 정부를 낳았던 나라에서 그 시절 연합의 성취를 되살릴 뿐만 아니라 한계까지 정확히 기억하며 명쾌히 극복하려는 새 실험이 시작되는 광경이다.
기세가 이미 이러하다. 그렇기에 우파조차 이번에는 달리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피노체트주의자 피녜라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던 우파 연합은 기독교민주당에서 당적을 옮긴 1977년생 세바스찬 시켈을 후보로 선출했다. 기독교민주당-사회당 연합도 원주민 후손인 1969년생 여성 야스나 프로보스테를 후보로 내며 변화의 분위기에 나름 대응하려 하고 있다. 2019-20년의 대중투쟁, 헌법 개정 정국, '존엄을 인정하라' 연합의 바람 등을 통해 칠레 정치의 왼쪽 중심이 강화되자 칠레 정치의 오른쪽 경계마저 왼쪽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의 고향을 신자유주의의 무덤으로 만들겠다"는 보리치의 일성은 결코 허언은 아닐 것이다. 아니, 긴 혁명이 이미 진행 중이며 그 제2막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한때 스페인의 포데모스가 전 세계 대표 주자로서 상징하던 변화의 방향이, 우리에게도 절실히 필요하지만 아직 이 땅에서 살려내지 못한 정치적 가능성이 지금 칠레에서 가장 앞선 모습으로 전진하고 있다.
그래서 11월 칠레 선거는, 인민연합 정부가 그랬듯이, 칠레인들만의 사건이 아니다. 인간의 역사가 다시 새로운 시대를 향해 꿈틀거리고 있다.
장석준 출판&연구집단 산현재 기획위원 |프레시안 2021.09.16.
생태전환교육은 최소한의 생존교육
아이들과 지역주민 그리고 람사르환경재단, 낙동강유역환경청 등이 협력해 따오기를 기르는 논 모내기를 해 3개월 만에 첫 수확을 했다.
모내기에 참가한 아이들과 주민들은 유기농으로 생산한 쌀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따오기를 비롯한 다양한 야생동물들이 사람과 함께 살아갈 땅에서 주민은 소득을 얻고, 생물다양성도 회복하는 기회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추수한 논에는 추석이 되면 기러기류 등 오리들이 이 논에서 겨울을 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아이들은 벼베기 하기 전에 논에서 사는 생물들을 관찰하면서 벼를 심은 논에서 숱한 생명들이 살아가고, 추수를 통해 사람들이 먹거리를 생산하는 현장에서 농업체험과 자연과 더불어 사는 지혜를 스스로 알아가는 셈이다.
유기농 쌀이 생산된 곳에 어둠이 내리면 까랭이(반딧불이) 등 빤짝이며 춤추는 모습에 아이들은 즐거워한다. 소음이 없는 자연에서 귀뚜라미와 방울벌레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별보기를 하면서 도시의 생활과는 전혀 다른 체험을 통해 앞으로 살아갈 삶에 다양한 선택지를 제공하는 것은 어른들의 몫이다.
코로나로 많은 사람들이 자연에 기대어 살아가는 생활을 찾고 있다. 우포나 주남저수지 같은 자연뿐만 아니라 집 가까운 공원과 식물원 등에는 코로나 전보다 평일에도 그냥 걷거나, 맨발로 걷는 이들이 유난히 많이 늘어났다. 특히 식물이나 곤충 등에 관심을 보이며 사진을 찍으며 관찰하는 방문객도 많아졌다. 늘 그래왔지만 부모들이 자연 관찰학습을 아이들에게 나누는 모습도 늘어났다. 다만 소위 생태적 감수성을 기르는 느낌 학습으로 진화하는 모습은 보기 힘들다. 이것은 제도교육에서 그런 학습경험이 없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렇다면 코로나 시대, 기후재난 시대에 맞게 입시중심 교육에만 무게를 둘 것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 공생공존을 위한 배움 나누기 전환이 시급하다. 어릴 때부터 집 근처 흙과 숲에서 맨발로 걷고, 자연놀이터에서 친구들과 다양한 상상과 창의력을 통해 스스로 들꽃처럼 살아내는 법을 터득하도록 교육내용과 여건을 마련해 어떻게 제도화할 것인가를 깊이 고민할 때다. 아이들은 모래와 흙, 낮은 나무 몇 그루, 작은 연못 등만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그렇게 놀다가 배고프면 스스로 간식도 만들고, 친구들과 나누어 먹는 공동체 프로그램을 먼저 설계했거나 실천 중인 사람들이 교육계 안내자로 나서면 좋겠다.
지금은 기후위기와 탄소중립 사회로 가야 한다는 것에 대해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아이들이 나서서 기성세대에게 기존 사회 질서를 혁명적으로 바꾸기를 요구하고 있다. 이제 교육은 경쟁과 속도가 아니라 다양한 시선으로 집중력과 인내력을 스스로 길러 지구촌에서 살아내는 기초 학습을 탄탄하게 다지는 기회로 만들어야 할 때가 아닐까? 환경교육은 지구생태시민교육의 기초이고 평화교육이다.
그동안 경남교육청이 앞장서서 교육부와 환경부 등이 협력해 생물다양성 교육을 통한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담론들을 현장에서 만들고 토론한 결과물들을 교육과정에 적용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을 지켜보아 왔다.
다행히 기술적 총화보다는 담론을 통하여 우리 삶의 가치를 전환하자는 것에 방점을 두고 있는 것 같다. 생태전환교육은 학교와 지역사회가 결합하는 과정이 필요하고 학생 참여형 범교과 프로젝트 수행으로 전환할 때다. 학교 현장 교원부터 인간의 한계를 인식하고 반성적 사유로 변혁적 역량을 축적해 가야 한다. 더불어 학생들은 자기 주체성을 강화해 '세계민주생태시민'으로 우뚝 서야 미래가 보이지 않겠는가.
이인식 우포자연학교 교장 (webmaster@idomin.com) 경남도민 2021년 09월 17일
추석 상차림이 감춘 것들
추석 상에 빼곡히 올라온 고기며 전이며 생선을 보면서 씁쓸한 기분을 감추기 어려웠다. 몇 년간 채식을 지향하다 포기한 후로 여전히 고기를 꺼리는 마음이 남아 있어서일까? 지키지도 못하는 나의 도덕을 남에게 강요할 생각은 없지만, 유별나게 고기를 탐하는 젊은 조카들이 보기 싫은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우리 세대와 달리 고기를 맘껏 먹고 자란 젊은 세대는 채소와 나물에는 젓가락도 대지 않고 그저 고기를 찾는다. 사실 고기가 더 맛있지 않나? 하지만 나는 ‘입맛’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고약한 북유럽의 청어절임, 전라도 홍어도 몇 번 먹다보면 그 맛을 알게 되며, 채식을 하던 즈음 고기 굽는 냄새가 역겨웠던 적도 여러 번이기 때문이다. 입맛도 관념도 사실은 모두 만들어지는 것이다.
육식을 줄여야 하는 이유로는 죽어서 상에 오르는 동물의 고통 외에 최근에는 사회적 이유가 더 강조된다. 밀림 개간으로 얻은 콩과 옥수수가 주로 육류 생산을 위한 것이고, 이로 인해 탄소 배출이 늘고 식량의 불평등한 배분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내가 먹는 고기는 가난한 이들이 먹어야 할 곡물이다.
예전보다 훨씬 풍족하게 고기를 먹게 된 지금, 이런 풍요는 확실히 불평등을 가린다. C S 루이스는 일찍이 “우리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라 부르는 것은 사실, 일부 사람들이 자연을 도구 삼아 다른 사람들에게 행사하는 권력이다”라고 말한 바 있거니와,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넓은 간선대로가 뚫린다고 좋아하던 시골사람들은 오히려 버스가 끊긴 구 도로를 선물로 받는다. 자가용이라는 부와 힘을 소유한 이들에게 이동능력을 바치는 것이다. 이처럼 풍요와 성장은 늘 자연이라는 매개체를 거쳐 불평등의 구조를 심화한다. 여기서 기후위기는 오히려 부차적이다. 이런 성장의 구조를 수십년 또는 한 세기 넘게 지속한 결과를 지구는 기후위기라는 형태로 되돌려주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위기의 진짜 원인은 개발과 성장보다는 불평등한 분배에 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현실 정치는 기후위기 앞에서 기술주의와 성장주의라는 해법을 주머니 쌈짓돈처럼 버리지 못한다. 내게는 ‘대체에너지’라는 말조차 이 두 가지에 포획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생각 있는 사람들마저 화석연료를 대신할 대체에너지를 빨리 개발하여 성장을 지속하는 것이 해법인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대체에너지와 같은 완충적 해법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에너지 소비를 획기적으로 줄이고 분배의 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이 위기가 멈출까? 나는 이런 얘기를 하다가 지인들에게서 ‘에너지 탈레반’이라는 말까지 들은 적이 있다.
티머시 미첼의 <탄소 민주주의>는 특정 에너지와 결합된 사회 구조의 특성을 면밀하게 추적한 책이다. 에너지를 주로 석탄에 의존하던 시절, 석탄 채굴과 운송에 따른 특성 때문에 탄광, 철도노동자들은 자본에 대한 저항권과 단결권을 상당 수준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화석연료의 중심이 석유로 옮겨간 다음, 채굴보다는 운송과 정유가 훨씬 중요해짐에 따라 기술력과 자본력을 갖춘 거대기업과 국제금융이 힘을 가지게 되었고 산유국보다 자본 선진국이 에너지를 좌우하는 강자로 등장한다. 마찬가지로 사회가 온통 대체에너지에 의존하는 시대가 되면, 가령 태양광 발전의 부산물은 차치하더라도 또 어떤 사회구조를 요구할지 모른다. 에너지 과식상태는 해소될 것인가?
개인의 소비 자제와 에너지 절감으로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에너지에 저당 잡힌 삶을 끊어내자고 호소하는 정치가 없는 한, 분배 정의가 성장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자각이 일지 않는 한, 에너지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하루도 버티지 못하는 삶의 방식을 바꾸고 절제와 고통에서 삶의 가능성을 찾는 기풍이 자리잡지 않는 한, 해법은 없어 보인다.
안희곤 사월의책 대표 경향 : 2021.09.2.
참을 수 없는 홍준표의 가벼움
홍준표 국민의힘 의원(이하 호칭 생략)은 솔직하다. 톡 쏘는 매력이 있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과 비교해보면 더 선명하다. 홍준표는 주택 청약통장이 뭔지는 알 것 같다. 동문서답했다면 나중에라도 ‘잘 몰랐다’고 인정은 할 것 같다. 무야홍(무조건 야당 후보는 홍준표)·컴백홍(홍준표로 돌아오라) 등의 조어가 나오는 배경일 터다. 실제로도 그는 ‘핫’하다. 지난 16일 발표된 9월 3주 전국지표조사(NBS) 결과를 보면, 보수진영 대선 후보 적합도에서 29%로 윤석열(24%)을 제쳤다.
뜨는 홍준표에게도 고민은 있다. 냉담한 여성들이다. 한국갤럽이 지난 17일 공개한 ‘차기 정치지도자 호감도 조사’를 보면, 홍준표에 대한 여성의 호감도는 19%, 비호감도는 72%를 기록했다. 남성은 각각 38%, 55%였다. 청년층에선 성별 격차가 더 크다. 20대 남성의 47%, 30대 남성의 50%가 호감을 표시했다. 반면 20·30대 여성의 호감도는 각각 14%, 21%에 그쳤다(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홈페이지 참조).
홍준표는 억울해 보인다. “사소한 말 몇 마디로 오해하고 있는 여성들…”(페이스북), “여성층에서 부진한 것은 몇몇 말꼬리 시비 때문”(서울경제 인터뷰)이라고 한다.
‘사소한 말 몇 마디’의 역사를 보자. “할 일 없으면 집에 가서 애나 봐라”(2009년 추미애 의원에게), “이대 계집애들 싫어한다”(2011년 대학생 간담회), “너 그러다 진짜 맞는 수가 있다”(금품수수 여부 물은 여성 기자에게), “분칠이나 하는 최고위원은 뽑아선 안 된다”(2011년 나경원 의원을 겨냥해), “설거지를 어떻게 하나. 여자가 하는 일을 남자한테 시키면 안 된다”(2017년 방송 인터뷰)….
돼지흥분제 사건도 빼놓을 수 없다. 2005년 자서전 <나 돌아가고 싶다>에서 소개한 일화다. 대학 시절 하숙집 친구가 좋아하던 여학생이 있었고 “그 여학생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야겠다”고 한 친구에게 “하숙집 동료들은 궁리 끝에 (돼지)흥분제를 구해주기로 했다”는 내용이다. 2017년 대선 때 논란이 되자, 자신이 공모한 것이 아니며 다른 하숙생들이 한 일을 말리지 못했을 뿐이라고 해명해왔다. 하지만 원문에는 “다시 돌아가면 절대 그런 일에 ‘가담’하지 않을 것”이라고 나와 있다. 모두가 ‘말꼬리 시비’에 불과한가.
과거 일이라 치자. 사람은 변하니까. 2021년의 홍준표는 달라졌을까?
지난 6월 청년정책 토크쇼. “휴머니즘을 따져야 할 시점에 무슨 페미니즘을 따지냐. 집안 경제권은 집사람이 다 갖고 있다. 나는 밖에 나와서 세상일 하는 사람이다.” 여성의 집안일과 남성의 세상일을 구분하는 건 휴머니즘이 아니다. 안티 페미니즘이다. ‘성인지 감수성’을 언급한 대법원 판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속된 말로 ‘여자가 당했다고 하면 당한 것’이라는 건데, 잘못된 판결이다.” 성인지 감수성은 무조건 피해자를 믿으라는 의미가 아니다. 피해자 진술을 재판부가 사회적 통념만으로 배척하지 말라는 뜻이다.
홍준표는 27일 여성정책을 발표하겠다며 시간까지 공지했다가 연기했다. 예고편은 이미 나와 있다. “여성가족부는 보건복지부와 통합할 것이다. 행정비용을 줄이기 위함이다”(시사저널 인터뷰). 좀 그럴싸한 명분을 대라. 2021년 여가부 예산은 1조2000여억원으로 정부 전체 예산의 0.2%에 불과하다.
홍준표의 문제는 젠더 이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조국 전 장관 가족에 대한 수사를 “과잉 수사”라 했다가 ‘조국수홍’(조국 수호+홍준표) 비판을 받자 말을 바꿨다. “국민들이 수사가 가혹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면 제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다.” 대통령이 된 뒤에도 ‘대중이 아니라고 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국정운영 기조를 바꿀 텐가.
국민의힘이 실시한 ‘국민 시그널 면접’도 홍준표의 현재를 드러냈다. 경남지사 시절 진주의료원을 폐쇄한 것과 관련한 질문이 나오자 “그런 억지를 부리는 사람들은 저를 안 찍는다”며 가볍게 피해갔다. ‘돼지발정제 때문에 여성들이 못 찍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는 “그렇습니다”라고 인정했다. 면접관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나는 웃지 못했다.
2017년의 ‘막말준표’는 4년 만에 ‘홍카콜라’로 돌아왔다. 홍준표는 눈앞의 허들을 정면돌파하는 대신 특유의 가벼움으로 비켜간다. 경쾌함 뒤에 숨어 검증을 피하려 한다. 성찰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임기응변이 화려하다. 그가 검증으로부터 안전해지는 만큼 공동체는 위험해질 수 있다. 대선 후보는 가벼워질 자유가 없다. 얼렁뚱땅 넘어갈 권리도 없다. 진지함은 주권자에 대한 의무다.
김민아 논설실장 경향: 2021.09.27.
발전소로 변해가는 농촌 들녘
농촌 태양광 발전사업을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일부 지역에서는 농민들의 반발도 이어지고 있다. 2030년까지 10GW 발전목표를 세우고 있는 정부는 ‘영농형’ 방식으로의 전환과 농가 소득 증가를 이유로 사업을 밀어붙이고 있고, 국회에서는 같은 논리로 농지법 개정을 다시 추진하고 있다.
재생에너지 확대의 필요성에는 모두 공감하면서도 논란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농업이 갖는 공공적 특성에 있다. 개별 농가들의 소득 증가나 농촌경제 활성화가 문제의 본질은 아니다. 농업은 기본적으로 땅, 물, 공기 등 자연적·환경적 요소를 이용하여 생명체를 만들어내는 산업이다. 다량의 금속성 발전설비들을 논밭 한가운데 설치하는데 토양과 수질이 오염되지 않을 수 없다. 농작물이 제대로 생장할 리 없고 생산은 당연히 감소할 것이다. 발전설비와 각종 구조물들로 인해 자연경관이 훼손되는 건 말할 나위 없다. 주변의 생태계와 생물다양성 등 환경조건에도 악영향을 줄 것이다. 평화로운 농촌사회가 발전사업으로 분쟁과 갈등에 휘말릴 수도 있다. 발전수익으로 농가소득이 늘어난다지만 과연 어떤 농가들이 혜택을 볼 것인가. 농지는 결국 농사보다는 전력생산을 위한 공간으로 변질될 것이고, 발전시설이 확대될수록 다수의 중소 임차농 소득은 줄고 지주와 업체들의 배만 불릴 것이다. 최근엔 발전수익을 노린 투기로 농지값이 크게 오르고 있다는 보도도 나오고 있다.
4년여 전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우리나라의 농정기조는 크게 변했다. 과거 생산성이나 효율성 중심 농정에서 환경과 생태계가 잘 보존되는 지속 가능한 농업·농촌의 발전을 지향하는 농정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작년부터는 공익형 직불제가 본격 시행되면서 우리도 머지않아 유럽의 선진국들처럼 살기 좋고 아름다운 농촌을 가질 수 있겠다는 희망을 품게 했다. 논밭에 발전설비를 들여놓는다는 건 이런 새 농정기조에 정면 배치되는 것이다. 농촌 태양광 발전사업이 현 정부 들어 급격히 확산되었다는 점은 그래서 아이러니다. 한편에서는 농업·농촌의 공익기능 증진을 위해 많은 예산을 투입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영농형’이라는 이름으로 논밭에 발전설비 건설을 확대하고 있다. 소득을 올릴 수 있다면 다 좋다는 식의 근시안적인 무원칙 농정이 아닐 수 없다. 근원을 찾아가 보면 농업·농촌에 대한 경시와 닿아있다. 많은 면적이 필요한 사업이니 쉬워 보이는 농촌이 표적이 된 것이다.
농업·농촌의 경시는 생명, 자연, 환경의 가치에 대한 경시이다. 우리나라의 1인당 경지면적과 식량자급률은 OECD 국가들 중 최하위 수준이다. 얼마 되지 않는 이 땅은 5200만 국민 먹거리의 최후 보루이자 미래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소중한 자산이다. 잘 가꾸고 보존해야 한다.
최근 5년간 태양광 사업으로 감소한 농지가 1만㏊에 이른다. 심지어 우량농지로 분류되는 농업진흥지구에까지 태양광 시설이 들어서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농지는 농업·농촌 고유의 공익적 기능이 잘 발현되도록 이용되어야만 한다. 그것이 태양광 발전에 이용되는 것보다 국가적으로 훨씬 큰 이익이다. 주민 수용성이나 참여도를 높이는 게 능사가 아니다. 농지 소유주나 주민의 동의 문제를 넘어 환경과 생태, 식량안보, 국토의 균형발전 등 공공의 이익과 직결된 문제다. 더구나 농업의 산물은 기본적으로 탄소 흡수원이며 바이오연료를 생산할 수 있는 중요한 재생에너지원이기도 하다. 에너지 소비 비중 1.5%, 온실가스 배출 비중 2.9%에 불과한 농업이 태양광 사업으로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 대안을 찾아야 한다. 농촌 이외의 도시나 산업단지 같은 에너지 다소비 지역에 집중해야 하고, 발전효율 향상을 위한 기술혁신도 필요하다. 우리나라 여건상 태양광 비중이 높게 설정된 건 아닌지도 살펴야 한다.
기후위기 극복은 인류가 직면한 최대의 당면 과제다. 그래서 우리도 속도를 내야 한다. 하지만 방향은 더 중요하다. 얼마 안 되는 전국의 농지가 태양광 패널과 각종 발전 관련 시설들로 뒤덮일 모습을 상상해 보자. 기후위기 잡으려다 정작 식량 위기, 생태계 위기에 직면할 것이다. 탄소중립을 내세운 농촌 난개발을 멈춰야 한다. 10GW 목표치를 향해 지금도 농촌의 들녘은 발전소로 변해가고 있다. 지금 잘못 뿌린 씨앗은 결국 미래 국민과 후손들의 재앙으로 돌아올 것이다./ 이용기 영남대 명예교수 경향 : 2021.09.27
약자 무시'의 위험한 정신세계
법학은 보통 사회과학으로 분류되지만 그 뿌리는 인문학에 있다.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분화가 본격화한 20세기 이전에 '지식인'은 인문학적 통합적 지식의 소유자를 일컫는 말이었다. 법의 영원한 주제인 '정의'는 철학, 문학 등 인문학의 중요한 주제이기도 하다. 1970년대 후반 미국에서 일어난 '법과 문학 운동'은 법의 인문학 전통을 부활하자는 운동이었다. 미국 '증거법의 아버지'로 불리는 존 헨리 위그모어는 "모든 법률가가 숙지해야 할 문학작품 100권의 리스트"를 발표하면서 "법률가는 자신이 담당한 사안이 일반적 사상과 문학작품 속에 어떻게 반영되는가를 숙지해야 할 특별한 직업적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법과 인문학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잘 보여주는 것은 헌법이다. 헌법에는 역사와 철학을 비롯해 인류 정신과 삶의 거의 모든 영역이 응축돼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에서 시작해 '신체의 자유' '법 앞의 평등' '인권' '행복 추구' 등 각 헌법 조문을 구성하는 핵심 사상에는 인문학 고전의 숨결이 녹아 있다. 우리 헌법의 인문학적 뿌리를 탐색한 <헌법의 발견>의 저자 박홍순씨는 헌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인문학 필독서로 플라톤의 <법률>,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루소의 <사회계약론>, 존 롤스의 <만민법> 등 7권을 추천한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지난 13일 안동대 학생들을 만난 자리에서 "인문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대학 4년과 대학원까지 공부할 필요는 없다"고 말해 구설에 올랐다. 조선 성리학의 태두인 퇴계 이황의 고향에서 '인문학 경시' 발언을 한 무신경도 놀랍지만, 평생 법을 직업으로 삼아 살아온 그의 정신세계가 고작 그 정도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현대사회는 과거의 법학 지식이나 법기술만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수많은 문제들에 봉착하고 있어 인문학적 탐구 필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정의, 인권, 평등, 인간의 존재 가치 등에 대한 깊은 고민과 성찰이 없는 법 운용은 한낱 기계적 장치로 전락하게 된다. 그것도 매우 위험한 기계다.
우리나라에는 '인문학 및 인문정신문화의 진흥에 관한 법률'(약칭 인문학법)이 있다. 기초학문인 인문학이 실용학문에 밀려 점차 대학과 사회에서 찬밥신세가 된 상황에서 '인문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만든 법이다. 이 법은 인문학의 진흥을 위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여러 책무와 역할을 명시하고 있다. 나라의 지도자가 학술, 문화, 예술 등 모든 방면에 해박한 지식을 가질 수는 없지만 최소한의 기본적인 인식은 갖춰야 한다. 그런데 윤 전 총장은 '인문학법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높은 자리 윗분이 인문학을 경시하면 교육당국과 대학들도 덩달아 영향을 받아 인문학의 고사는 더욱 가속화할 수밖에 없는 게 우리의 풍토다.
"손발 노동은 아프리카나 하는 것"이라는 발언도 마찬가지다. 윤 전 총장의 이 발언을 접하면서 맨처음 떠오른 것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아프리카 등을 향해 "거지소굴(shithole)"이라고 한 발언이었다. 윤 전 총장의 발언은 트럼프의 극단적 막말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그 속에 흐르는 우월감, 인종적 편견, 못 사는 나라에 대한 경멸 등은 대동소이하다.
그런데 과연 아프리카는 손발 노동이나 하는 수준인가.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이 지난해 10월 펴낸 자료를 보면, 아프리카는 최근 몇 년 사이에 모바일 금융, 전자상거래, OTT 서비스 시장 규모가 급격히 커지고 있다. 디지털 선도국인 나이지리아, 남아공, 케냐 등에서는 핀테크, 교육, 전자상거래, 농업 등에 디지털 기술을 접목한 스타트업이 많이 생겨나면서 스타트업이 2019년에 받은 벤처캐피털 투자 총액이 약 13억~20억 달러에 이른다고 한다. 가나가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한 토지등록제 시행을 준비하는 등 정부 서비스에 블록체인을 도입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하다. 이쯤 되면 아프리카가 손발 노동이나 하는 곳으로 무시하는 것이 얼마나 무지와 편견의 소치인지 알 수 있다. 자칫 '글로벌 망신'을 당할 수도 있는 위험한 발언이다.
아프리카는 오히려 우리가 본받아야 할 대목도 많다. 성 소수자 차별 금지를 헌법에 가장 먼저 명시한 국가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이다. 남아공은 성별과 장애를 이유로 한 어떤 차별도 금지하고 있다. '프리덤 하우스'가 매년 발표하는 '세계자유지수'에서 아프리카의 카보베르데와 모리셔스는 자유와 민주주의 순위에서 한국보다 앞서 있다. 전 세계 국가들이 난민수용을 꺼리는 상황에서 우간다 정부는 남수단 난민 100만명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난민 이동의 자유, 경작지 제공, 공공서비스 이용 허용 등 획기적인 정책을 펼치고 있다. 난민에 대한 불관용과 편견이 만연한 한국과는 확연히 다르다. 정치 지도자가 특히 경계해야 할 것은 쓸데없는 우월감이나 교만함이다. 타자에 대한 존중, 이해, 배려의 정신은 나라 안은 물론 밖을 향해서도 발휘돼야 한다.
잦은 말실수는 단순히 한순간의 착각이나 생각의 회로가 꼬인 결과물이 아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인식 수준과 사고의 민낯이며, 확신과 신념의 다른 표현이다. 주목할 점은 윤 총장의 말실수에서는 일관된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약자에 대한 경멸과 무시다. '고발청부' 의혹과 관련한 소규모 언론사 무시 발언을 비롯해 '120시간 근무', '부정식품' 발언에다 최근의 인문학과 아프리카 발언에 이르기까지 약자 무시가 학문과 글로벌 차원까지 영역이 확대되고 있다.
약자에 대한 보호와 배려는 정권의 향배와 관련 없이 우리 사회가 추구해야 할 지상과제다. 약육강식, 승자독식의 정글에서 벗어나 힘없는 계층과 소수자를 보듬고 배려하는 일은 어떤 세력이 정권을 잡아도 내릴 수 없는 깃발이다. 그런데 야권의 가장 유력한 대선후보가 전방위적으로 약자를 무시하고 기득권층과 강자 쪽 사고에만 젖어있으니 참으로 우려스럽다.
김종구 (언론인) | 프레시안 2021.09.27.
국제뉴스로 보는 강대국·선진국 민낯
추석 연휴를 보내면서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국제 뉴스 몇 건이 있었다. 소위 '선진국' 민낯을 보여주는 소식들은 세계인을 충격에 빠뜨렸다. 에마뉘엘 마크롱이 지난 7월 현직 프랑스 대통령으론 처음으로 남태평양 프랑스령 폴리네시아를 방문했다. 작은 섬들로 이뤄진 이 나라에서 프랑스가 1966년부터 30년간 193번이나 핵실험을 자행했다는 사실도 부각됐다. 핵실험에 의해 당시 거의 섬 전체 인구에 해당하는 약 11만 명이 방사능에 노출됐고, 40~50세 폴리네시아 여성 갑상선암 발병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연구·조사 보고도 있다. 그런데 마크롱은 공식 사과를 하지 않았다. 보상 문제를 언급하고, 긴밀하고 투명한 대화를 바란다고 말했을 뿐이다. 프랑스 정부가 2009년 보상을 시작했지만, 지금까지 실제 보상을 받은 폴리네시아인은 63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캐나다에선 학대·학살 결과로 보이는 원주민 아동 유골이 잇따라 발굴됐다. 서스캐처원주 남동부 메리얼 인디언 기숙학교 등 원주민 학교 3곳에서 무려 1100구에 이르는 무연고 무덤이 발견된 것이다. 유해는 1800년대 이후 캐나다 정부가 원주민을 대상으로 강제 동화정책을 펴면서 부모로부터 격리된 아동들로 추정됐다. 기숙학교는 대부분 가톨릭교회가 운영했다. 설립 시기는 캐나다가 대영제국 식민지에서 독립했던 무렵부터 1901년까지인 빅토리아 여왕 재임기간과 겹친다. 이에 따라 빅토리아 여왕과 현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동상들이 시위대에 수난을 당했다.
캐나다 진실·화해위원회에 따르면 원주민 아동 최소 15만 명이 부모 품을 떠나 강제로 기숙학교에 배정됐다. 원주민이 살던 곳을 빼앗은 것도 모자라 유럽 문화를 주입하기 위해 저지른 짓이다. 명백한 인종차별이자 지역문화 말살정책이었다. 저스틴 트뤼도 캐나다 총리는 즉각 사과했다. 그러나 교황은 '애도'만 표시했을 뿐, 사과하지 않았다.
이들은 우리가 알고 있던 인권 선진국이나 강대국, 종교 이미지와 전혀 다른 충격적 뉴스인가, 아니면 감춰졌던 속성을 우연히 드러낸 것인가.
또 하나, 중국 신장 위구르의 대규모 인권유린 사태를 두고 서구사회는 '집단학살'로 규정하며 비난한 바 있다. 이 지역 강제노동에 의한 상품 유통 제재도 거론했다. 거짓이라고 반박한 중국은 캐나다 원주민 아동 유해 등을 거론하며 맞대응했다.
한국도 선진국에 진입했다곤 하나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서 식민지배와 문화말살, 집단학살 등 끔찍한 경험을 겪었다. 아직도 집단적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지역에 살면서도 국제 뉴스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는 이유는 많다. 이미 SNS와 플랫폼으로 전 지구가 연결된 시대, 세계 어디서 일어난 일이든 우리나라와 무관할 수 없고 나아가 순식간에 지역사회에도 영향을 미치는 시대가 됐다. 충북 진천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에서 생활 중인 아프가니스탄 특별기여자 390명이 한국에서 첫 추석을 맞았다는 뉴스는 단적인 사례다.
그 와중에 또다른 뉴스가 날아들었다. 미군이 아프간에서 잘못된 드론 공습으로 어린이 7명을 포함한 민간인 10명이 희생됐다는 것. 여기에다 공습 당시 민간인 존재를 알지 못했다는 미군측 주장과 달리 미국 정보당국(CIA)이 오폭 직전 현장에 민간인이 있을 가능성을 긴급 경고했다는 놀라운 소식이 추가됐다.
정학구 전 연합뉴스 경남본부장, 언론학 박사 (webmaster@idomin.com) 2021년 09월 27일
ESG 경영과 ‘에코사이드’
지난 24일은 ‘세계 기후행동의날’이었다. 스웨덴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가 독일 베를린에서 수천명의 기후활동가와 함께 기후파업 집회에 나섰다. 독일 총선을 앞두고 기후위기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정치권을 향해 일침을 가하는 압박 행동이다. 수백명의 목숨을 앗아간 홍수와 산사태를 지난여름 목격하고도 독일 정치권이 정신 차리지 못하자 거리로 나온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청소년기후행동이 곳곳에서 집회를 열고 1인 시위도 벌이고, 정부 주도의 기후위기 대응판을 전복하기 위한 ‘기후시민의회’ 구성도 제안했다. 정부와 정치권이 더 적극적으로 기후위기에 대응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안타깝게도 널리 퍼지지는 못한 것 같다. 과감한 탄소 감축, 미흡한 탄소중립기본법 당장 폐기 등의 주장은 정치권의 ‘대장동·고발 사주’ 공방으로 묻히고 말았다.
전 세계가 직면한 기후위기와 생태계 파괴로 엄청난 대가를 치르거나 경험하고도 기후위기는 여전히 관심 밖이다. 정부나 개인이나 모두 위기를 위기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의 일상이 위협받고 있지만 당장 먹고사는 문제만 위기로 느낀다. 살아갈 날이 많이 남은 미래세대의 일이라고 치부해 버리고 미뤄놓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이다. 기업들이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했다. 서서히 생존과 지속 발전을 위한 경영 패러다임의 전환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필수 덕목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서 ESG 경영은 기업의 장기적인 생존을 위한 핵심적인 가치로 자리 잡을 것으로 전망된다. 친환경 경영 노선을 지향하면서 ESG 전담부서를 설치하고 있다. 친환경 에너지 관련 산업에 대한 투자 비율을 확대하고 탄소 등 유해 물질을 배출하는 사업 비중을 줄이는 기획도 보이기 시작했다. 대선을 앞둔 상황도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알리는 기회이자 대응을 압박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기후위기를 선거 의제로 삼는 기후 감수성 대통령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들린다.
기후 변화에 대한 리더십에는 진보·보수가 따로 없다.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생존 문제이기 때문이다. 젊은 세대의 표심을 잡으려면 공정성과 집값도 중요하지만, 기후 정책도 잘 짜야 한다. 탈원전은 논란이지만, 탄소중립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분위기가 확산하고 있다. 인류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서는 화석연료를 대체하는 신재생에너지의 보급과 개발이 절실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탄소 배출로 인한 기후재앙을 피하려면 감축의 속도가 문제일 뿐이다. 베를린 시위에 등장한 ‘석탄 대신 자본주의를 태워라’라는 손팻말이 우리 모두에게 와닿는 절박함이다.
국경을 초월하여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기후재앙을 피하려면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국내법과 국제법상 환경 범죄에 대한 응징이 필요하다. 지구온난화와 오존층 파괴를 일으키는 탄소 배출과 같은 행위는 그 결과가 초래될 개연성이 있음을 알면서 감행한 때에는 중대한 범죄로 정의되어야 한다. 에코사이드(echocide·생태 학살)가 그것이다. 제노사이드(genocide·집단 학살)에 빗댄 용어다. 둘은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다는 점에서 똑같다. 지금은 생태계를 파괴하는 행위가 범죄는 아니지만, 국제범죄화되어야 한다. 국제형사재판소가 형사 처벌하는 국제범죄는 집단 학살, 전쟁 범죄, 반인도적 범죄와 침략 범죄 4가지다. 다섯 번째 범죄로 에코사이드를 추가해 국가나 기업을 처벌하자는 제안이 12월에 열리는 국제형사재판소 연례회의에서 결정된다고 한다.
기후 변화를 저지하고 감소시키려면 국내법상으로도 기후 파괴적 행태에 형법이 투입되어야 한다. 형법은 형벌이라는 강력한 수단을 갖고 있으므로 최후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원칙은 지켜져야 하지만, 지금이 바로 기후재앙을 막을 수 있는 최후 순간이다. ‘100년 만의 유럽 폭우’ ‘캘리포니아의 대규모 산불’ ‘중국의 기록적 홍수’ 등 더는 기후 변화의 진행을 놔둘 수는 없는 심각한 상황이다. 사후적인 손해배상이나 과태료, 과징금으로 대처하기에 부족함이 있다. 대기오염, 토양오염, 산림파괴, 생태계 교란 등을 범죄화하고 형벌을 예고해서 형법이 기후 예방 형법으로 작동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개인과 기업의 행태와 사고가 친환경적으로 변화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지든 당장 오늘을 사는 데 급급하다. 환경과 기후라는 주제를 언급할 때 자주 인용되는, “오늘 우리가 하는 행동은 내일 아침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를 결정한다”라는 19세기 오스트리아 작가 에브너에셴바흐의 명언이 떠오른다.
하태훈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경향 : 2021.09.28
고통 호소가 협박이 된 사회
우리 사회에서 2019년 말부터 발생한 코로나19는 2020년 1월3일부터 사망자 집계가 시작되었다. 9월25일 현재 중앙방역대책본부에 따르면 그간 코로나 누적 사망자는 2434명이다. 한편, 지난 23일 대한신경과학회는 4년 동안 자살한 이들이 하루 38명으로 총 5만2950명에 달한다고 발표했다. 통계청 결과도 비슷하다. 지난해 하루 평균 자살한 환자 수는 37.8명. 작년에만 1만3797명(37.8명×365일)이 자살로 사망했다는 얘기다
1년간 1만3000여건의 자살과 코로나 이후 1년10개월 동안 2400여명의 사망자. 기간 차이가 두 배에 가까운데도, 자살이 코로나 사망보다 약 5.6배 많다. 이조차 정확한 통계는 아니다. 자살 관련 보고는 실제와 큰 차이가 있다. 은폐되기 때문이다. 교통사고, 심장마비, 실족사, 폭행 치사 등으로 보고되거나 유자녀에게 “엄마가 미국 갔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우울과 자살 관련 책을 보면, 인간이 계량할 수 있는 영역에 대해 인식론적 충격에 빠질 것이다. 나는 실제 자살 건수는 최소 두 배 이상이라고 생각한다.
알려진 대로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2위와 압도적인 격차를 보이는 자살률 1위국이다. 20~30대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이며, 증가 속도도 1위다. 탈북민의 자살률은 10%에 이른다. 열 명 중 한 명이 자살한다는 얘기다. 코로나로 인해 많은 이들이 생명, 생계, 진로, 일상을 빼앗겼지만, 우울증 같은 정신과 계통의 질병사인 자살도 유전되고 전염성이 있다. 코로나와 ‘비슷하다’는 얘기다.
나는 ‘자살 생존자’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자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해서 살아남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시도는 의지의 발로가 아니다. 그 자체가 질병의 증상이다). 그러나 이 말은 자살한 이들로 인해 고통을 받은 고인의 주변 사람을 일컫는다.
우리는 고통에 대한 철학이 없다
그것은 사회 수용력의 문제다
타인을 대신해 아플 수는 없어도
누군가 아픔을 터놓고 말하면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줘야 한다
그래야 타인을 수용할 수 있다
이 표현은 잔인하다. 암처럼 다른 질병으로 인한 사망의 경우는 간병의 어려움과 사별의 슬픔 등 아무리 남은 자의 아픔이 있더라도, 최소한 공식적으로는 사망 당사자의 고통을 우선시한다. 또한 ‘암 생존자’는 암을 극복한 사람을 의미하지, 환자 주변에서 스트레스를 받은 사람을 가리키지 않는다. 예전에 비하면 자살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변했다. 낙인도 예전 같지 않다. 그러나 ‘자살 생존자’는 여전히 자살한 사람의 고통을 공감하는 데 얼마나 인색한지를 보여준다.
이런 말이 나오는 문화, 즉 자살에 이르는 고통에 대한 몰이해 때문에 자살률이 높은지도 모른다. 우울증 환자는 자기 질병보다 주변 사람들의 오해와 투쟁하는 데 더 많은 기력을 쏟는 경우가 많다. 그 과정에서 사회적 인간이 가진 자원의 전부인, 인간관계를 잃는다. 자신의 고통에 무지하고 적대적인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확률은 당연히 낮다. 지구가 네모라면 그 끄트머리에서 떨어지는 것이다.
다른 사인과 마찬가지로 자살은 투병을 계속할 수 없을 만큼 몸이 아픈 것이다. 살아갈 의지, 기운, 기분에 문제가 생겼는데, 어떻게 의지로 극복하라는 말인가. 계속 암을 예로 들어 암환자인 독자들에게 예의가 아니지만, 암 세포가 몸 전체에 전이된 이에게 “마음을 강하게 먹고” 암을 없애라는 말과 같다. 정신과 계통의 질병에 도움을 주어 해피 메이커라고 불리는 세로토닌이라는 물질은 통념과 달리 뇌가 아니라 장(腸)에서 생산, 분비된다. 그러므로 정신건강을 위해서는 장에 좋은 음식을 먹으면 된다. 이처럼 신체적 질병과 정신적 질병을 상호적이다.
우리말에는 “죽겠다”는 표현이 많다. “배고파 죽겠다” “좋아 죽겠다” “힘들어 죽겠다” “더워 죽겠다”…. 여기서 ‘죽겠다’는 부사, 형용사처럼 강조의 표현이다. “이렇게 사느니 죽고 싶다” “살기 싫다”는 말도 삶이 고되다는 한탄으로 여겨져서 흔히 오고가는 말이다.
그런데 “자살하고 싶다”고 호소하면, 그때부터 듣는 사람은 당황한다. 이때는 놀라거나 의심하지 말고 “힘드시겠네요, 혹 제가 도움이 될 만한 일이 없을까요?” 이 정도로만 말해도 되지 않을까. 이 몇 초의 감동노동이 그렇게 엄두가 안 나는 일일까. 아무리 마음에 없는 말이라도, 비난이나 의지 강조보다는 낫다. 그러나 현실은 이렇다. “네가 우울증이면 나는 말기 암이다” “나는 더 힘들어” “우울증이라며 어떻게 직장에 다녀?”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해?” “지금 나한테 협박하니?”….
나 역시 타인의 호소에 이런 식으로 응답한 적이 많다. 다만 조금 조심하는 편이다. 질병뿐만 아니라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믿어주는 (척이라도 하는) 표정을 가질 수 있는 삶의 긴장이 필요하다.
“자살 협박” 표현은 ‘흥미롭다’. 우리는 살면서 타인과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그중에 자신의 처지에 대한 호소가 있다.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지 못하는 자영업자, 학교폭력 피해자, 가족 관계나 직장 생활에서의 갈등, 만연한 성폭력, 파산…. 인생이 고해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사건과 그 이야기가 우리의 일상이다.
그런데 왜 타인이 “죽고 싶다”고 말하면 그토록 부담스러워할까. 자기 부담까지 투사하여 “협박”이라고 말할까. 우울증이 아니더라도 참을 수 없는 육체적 통증과 소진, 무의미, 비참함으로 삶이 지속 가능하지 않을 때 누구나 “죽고 싶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특히 우울증에 대해서만은 극단적 선택, 단호한 의지처럼 인식하고 “그 힘으로 살라”는 황당한 조언을 한다.
지혜로운 치료자들은 협박에 대해 다음과 같은 간단한 해석을 내린다. “협박은 기본적으로 거래입니다. 네가 뭔가를 주지 않으면, 나는 너에게 이렇게 (나쁘게) 하겠다가 협박이죠. 그러나 죽고 싶다는 호소는 상대방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요구가 있다면 들어주고, 이해해달라는 정도일 것이다. 이것이 협박인가. 이는 고통 호소를 협박이라는 강력한 의지의 산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는 고통에 대한 철학이 없다.
듣는 이가 더 놀라서 “나한테 앓는 소리 하지 마” “그런 얘기 무서워” “나한테 왜 이래” 같은 반응은, 청자 역시 취약한 상태라는 의미다. 그리고 이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한 사회의 수용력 수준을 반영한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파트너, 동료, 가족, 친구 등 어떤 관계든 상대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려는 노력이다. 친밀성과 안전감은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 상대방을 수용하는 첫 단계는 이야기를 듣고 당신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다고 알려주는 것이다.
내 주변에는 우울증 환자가 많다. 대개 아침이 가장 힘들다.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이, 지구를 들어 올리는 일 같다는 이들이다. 일어나지 못하고 침대에서 나오는 데 몇 시간이 걸리거나 못 나온다. 나는 죽고 싶다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난 찬성이야! 얼마든지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뒷일은 나한테 다 맡겨, 대신 조건이 있어. 내일이어야 해”. 죽어도 좋은데, 하루만 미루라는 얘기다. 그리고 내일은 또 내일… 또 내일…. 그렇게 삶을 연기(延期)하면 된다. 어차피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
우리는 타인을 대신해 아플 수 없고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지만, 들어줄 수는 있다. 특별히 ‘용한 멘트’도 필요 없다. 충분히 들어도 두 시간 이상 걸리지 않는다. 그런데, 왜 어려운 처지의 이들의 호소가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할까. 해결해주어야 한다는 부담감일 수도 있고, 나한테 도움이 안 되는 이야기는 듣기 싫다, 알고 싶지 않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청와대 국민청원 홈페이지에는 아우성이 넘친다. 주변에서 해결이 가능하다면, 간단한 절차로 공권력이 정의의 편에 서 준다면, 가능성은 적지만 얄미운 가해자 혹은 정말 저질 가해자가 벼락을 맞는다면…. 청와대에 호소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피해자들도, 투병하는 이들도 인생이란 ‘돌이킬 수 없음, 어쩔 수 없음, 불평등’의 연속이라는 것을 안다. 특히 이 시대, 마상(마음의 상처)이 없는 이는 없다. 그걸 한번이라도 터놓고 말하면 안 되는 것인가.
자해는 말하지 못하는 몸속의 말을 밖으로 흘러 보내는 행위일 수도 있다. 말은 몸 밖으로 나와야 한다. 다양한 말이 들려야 한다. 이는 공중보건의 문제다. 혐오, ‘관종’의 자기도취, 페이크 뉴스는 마구 들린다. 반면 필요한 논쟁이나 고통의 호소는 결단을 해야 들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정희진 여성학자 경향 : 2021.09.29.
대장동의 ‘오징어 게임’
최근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넷플릭스에서 대박을 쳤다. <오징어 게임>은 빚으로 벼랑 끝에 몰린 456명의 ‘밑바닥 인생’들이 456억원이라는 일확천금을 두고 목숨을 건 경쟁에 참가하는 데스 게임물이다. 데스 게임물은 그동안 여러 나라에서 여러 형태로 제작되었지만 <오징어 게임>의 관전 포인트는 한국식 변주이다. 딱지치기, 달고나뽑기, 구슬치기 같은 추억의 놀이들, 암호로 사용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각 인물의 절절한 신파적인 사연까지, 모두 우리에게 친숙한 것들이다.
<오징어 게임>은 출연자들의 의상, 세트, 조명을 비롯해 많은 부분을 비현실적으로 설정함으로써 시청자에게 드라마의 내용은 현실이 아님을 강조한다. 게임의 진행도 외딴 무인도, 매우 인공적인 세트 안에서 진행시킨다. 하지만 비현실 속의 <오징어 게임>은 한국 자본주의의 민낯을 너무도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준다. 내가 살려면 경쟁자를 가차없이 짓밟아야 하는 승자독식, 일확천금을 위해 비열한 짓을 넘어 목숨까지 거는 수많은 ‘게임의 말’들, 그리고 그러한 데스게임을 재미있다는 듯이 쳐다보며 때로는 판돈을 거는 VIP들 등등. ‘(게임장) 밖에 나와보니 여기가 더 지옥이야’라든지 ‘당신은 아직도 사람을 믿나?’라는 드라마 속 대사는 처절하다. <오징어 게임>은 드라마에 등장하는 수많은 어릴 적 골목놀이들이 사실은 한국 사회를 살아나가기 위해 필요한 적자생존의 논리를 배우게 만드는 게임이었음을 상기시켜 준다.
경제학의 주류학설은 경쟁과 이기심을 호모사피엔스의 전형적 특징으로 가르친다. <오징어 게임>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세상과 인간은 원래 그런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래서일까? 경제학 전공자들이 다른 전공자들보다 훨씬 더 이기적이고 경쟁적인 행동과 태도를 보인다는 실험결과들이 많다.
하지만 영장류학자와 진화심리학자들은 세상과 인간은 원래 그렇지 않다고 가르친다. 이들은 호모사피엔스의 생래적 특징은 경쟁이 아니라 협동임을 역설하고 있다. 영장류학자인 마이클 토마셀로는 침팬지, 보노보, 고릴라, 오랑우탄, 인간 등과 같은 유인원들 중 인간만이 협동할 줄 안다고 주장한다. 토마셀로는 협동을 가능케 하는 인간의 독특한 특징으로 세 가지를 언급한다. 첫째, 유인원들 중 인간만이 안구에 흰자위를 가지고 있고 둘째, 인간만이 손가락이나 몸짓으로 무언가를 가리킬 줄 알며 셋째, 인간만이 언어를 구사할 줄 아는데 이 특징들은 모두 협동하는 종에게 나타나는 진화적 특징이라는 것이다. 안구에 흰자위가 있으면 다른 사람이 내 동공의 움직임을 판별하기 쉽다. 사냥감을 놓고 나와 다른 사람이 경쟁관계에 있다면 내가 어디를 응시하는지를 상대방에게 굳이 드러낼 필요가 없지만 반대로 협동하여 사냥을 한다면 내가 어디를 응시하는지를 상대방이 알도록 하는 것이 유리하다. 흰자위의 생성이라는 안구 변이는 협동하는 종에게서 선택될 확률이 높다. 손가락이나 몸짓으로 무언가를 가리키는 것이나 언어의 사용도 협동하여 사냥하는 종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토마셀로의 실험에 의하면 인간의 어린아이들은 즉각적으로 협동하는 법을 배우지만 침팬지는 싸우기만 하고 협동하지 않았다. 실제로 사냥할 때 협동하지 않는 침팬지에게는 위의 세 가지 특징들이 없다. 토마셀로의 연구로부터 유추해보면 결국 이기심과 경쟁심은 인간의 본성이라기보다는 <오징어 게임>처럼 치밀하게 설계된 게임이 인간에게 강요한 것일지 모른다.
한국 사회는 그동안 치밀하게 설계된 오징어 게임들을 수없이 만들어 냈다. 수많은 오징어 게임들 속에서 탈락한 말들은 죽거나 도태되어 나갔다. 무수한 오징어 게임들 중 압권은 부동산 게임일 것이다. 게임의 탈락자는 벼락거지가 되고, 승자는 막대한 부를 거머쥔다. 지난 3월 폭로된 LH직원들의 땅투기가 하나의 오징어 게임이었다면 최근 대장동개발사업을 둘러싼 논란은 또 다른 오징어 게임이다. 게임의 설계자와 참가자가 모두 의문투성이이고 게임의 참여자는 여야를 가리지 않고 있다. 29세의 청년노동자가 아파트 외벽을 닦다가 밧줄이 끊어져 죽음에 이를 때 비슷한 나이 또래의 청년은 ‘일하다가 몸 상한’ 대가로 50억원의 퇴직금을 산재보상금으로 받았다. 화천대유가 참여한 성남의뜰이 시행업체로 선정된 경위, 소수에게 엄청난 개발이익이 집중된 설계 경위 등은 미스터리이다. 정치권은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면서 프레임 전환을 시도하고 있지만 프레임 전환으로 오징어 게임의 냉혹함이 사라지지 않는다. 누군가는 죽어야 끝이 나는 부동산 오징어 게임은 이 사회에서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할까?
이우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 경향 : 2021.09.29.
이제는 대학원 시대를 준비해야
우리나라 사람들의 고등교육 이수율은 얼마나 될까? 지난 16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교육지표 2021’을 발표했다. 교육부가 은근히 자랑하는 것처럼 한국의 25~64세 인구층의 고등교육 이수율은 약 50%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편이다. 그런데 수준별 고등교육 구성비를 보면 따져볼 점이 좀 있다.
먼저, 우리나라 고등교육 이수율은 2년제 전문대(14%)와 4년제 대학(32%), 그리고 대학원 과정(4%)을 합한 개념이다. 한국은 일본, 캐나다 등과 함께 2~3년 단기 전문대 졸업자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큰 편이다. 반면 독일, 영국, 스웨덴, 이탈리아, 미국 등은 우리보다 대학원 졸업자가 훨씬 많다. 만일 전문대를 제외하고 4년제 대학학위와 석사학위 취득자만을 합하여 비교하면 양상은 많이 달라진다. 한국이 36%인 데 반해 스위스 43%, 네덜란드 40%, 룩셈부르크 44%, 아일랜드 43%, 핀란드 37%, 영국 38%, 미국 37% 등으로 우리보다 높다.
유럽의 경우 전통적으로 학부가 아니라 석사학위를 기준으로 고등교육 프로그램이 짜여 있는 경우가 많아서 전체 인구 가운데 석사학위 소지자들이 많다. 예컨대 핀란드는 4년제 학위소지자가 20%인 반면, 석사 소지자는 17%에 달한다. 룩셈부르크는 학부졸업자가 16%인 반면, 석사학위자는 28%이다. 우리나라 고등교육 이수율이 상당부분 전문대 졸업자로 채워져 있는 반면 석사학위 이상 졸업자가 적은 구조는 결코 첨단지식경제와 잘 조응하는 학위생산구조라고 말하기 어렵다 할 것이다. 즉 그 수준과 질에 있어서 약간은 과대포장된 셈이다.
다행히 지난 10년 동안 대학원 입학정원은 상당히 늘어났다. 1980년 약 3만명 수준이던 석사 정원은 이후 점점 증가하여 1995년부터는 10만명 선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 4년제 대학 입학정원이 31만명 정도이니 학부 졸업생의 3분의 1가량이 대학원에 진학하는 셈이다. 양적으로 상당히 증가된 추세이다. 앞으로 산업 4.0, 인공지능, 문화산업, 생명공학, 상시적 직업전환 등의 키워드에 비추어 본다면 대학원의 규모는 더 늘어나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양적 팽창에 비해 내용의 부실은 처참하다. 또한 규모와 비중에서의 재배치가 필요하다.
대학원에는 학문후속세대를 양성하는 일반대학원과 전문 직업역량 향상을 위한 전문대학원 혹은 특수대학원이 있다. 일반대학원 정원은 전체의 40% 정도이며 나머지는 직업 전문역량 개발을 위한 기술·실무에 특화된 대학원들이다. 후자에 입학하는 연령도 33세 이상이 전체의 36%를 차지한다. 이 중 특수대학원의 정체성과 구조적 문제는 생각보다 심각하다. 교육과정의 부실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정원 구성비에서 STEM 분야, 즉 공학·자연·의약계열 등을 합한 석사 입학정원이 전체의 17%에 불과하다. 차제에 ‘특수대학원’이라는 명칭도 바뀔 필요가 있다. 대학원생 절반이 특수대학원생이라고 본다면 ‘특수’라는 명칭은 더 이상 분류명칭으로 어울리지 않는다.
일반대학원의 부실과 왜곡은 제대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질 낮은 박사를 양산하는 대학들이 산재해 있고, 영문초록 하나 스스로 작성하지 못하고 표절하는 박사들이 넘쳐난다. 학술학위와 전문학위가 구분되지 않고, 연구자 프로그램과 전문역량 프로그램이 혼재되어 있다. 세계적 연구중심대학을 표방하면서도 학사운영은 학부 조직에 예속되어 있다. 학부가 대학원을 쥐고 흔든다.
이제 고등교육정책의 중심이 학부에서 대학원으로 이동해야 할 시기가 왔는지 모른다. 학문·기술 분야 등 더 이상 학사학위로 전문성을 보장하기 어려운 분야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인공지능, 데이터 사이언스, 건축,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제 대학원은 필수가 되어가고 있다. 학부에서는 교양과 지성을 교육받고 전문성은 대학원에서 수련하는 분업체계가 일반화되어가고 있다. 재직자들이 대학원을 통해 평생학습에 참여하는 경향성은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고등교육정책에서 대학원이 학부에 더부살이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온전히 독립적으로 진화하는 새로운 체제가 설계되어야 한다. 또한 유럽의 경우 박사과정을 국가에서 월급을 받으며 다니는 것처럼 선발과 재정지원을 결합하는 방식도 참조할 만하다. BK21사업을 하고 있지만 충분하지 않다. 정부는 내년부터 전문대학에서도 첨단·전문기술 석사과정을 배출할 수 있도록 하였다. 반가운 일이다. 전문대가 응용학문 분야에서 대학원까지 운영하는 것은 유럽 등에서는 일반화된 일이다. 고등교육 체제 개편의 작은 불씨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한숭희 서울대 교육학 교수입력 : 경향 2021.09.30.
한·일 대학생 ‘일본 인식의 덫’ 넘어서기
지난 9월17일 한·일 대학생들 간에 한·일관계를 주제로 한 토론이 있었다. 서울대 동아문화연구소와 포니정재단이 마련한 자리였다. “일본 학생들이 역사문제에 대한 인식은 없이 K팝이나 한류 드라마를 그냥 소비하는 건 우려할 만한 일”이라고 한 학생이 말하자, 바다 건너(온라인 회의) 한 학생이 대답했다. “그렇긴 합니다만 그런 학생들도 존중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역사의식이 없다고 비판하는 것은 또 하나의 가해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일본 청년들이 BTS를, 한국 젊은이들이 유니클로를 자유롭게 소비하면 안 되나요?”
뜻밖에도 전자는 일본 학생, 후자는 한국 학생의 발언이다. 이날 대화는 시종 이런 틀에서 이뤄졌다. 일본 측 히토쓰바시 대학 학생들은 얼마 전 <한·일관계의 ‘답답함’과 대학생인 나>라는 책을 공동집필하여 한국 언론에도 소개된 바 있다. 이들은 시종일관 일본의 책임과 한국에 대한 사과를 주장했다. 이런 입장은 대체로 전후 일본 사회의 진보진영(사회당, 진보지식인, 아사히신문)이 견지해오다 최근 우경화 분위기로 세력이 약해졌다. 일본 학생들은 여기에 ‘피해자 인권의 존중’이라는 측면을 더 얹으면서 일본 사회의 분위기에 강인하게 대항하고 있었다. 그들의 ‘고군분투’가 기특하고 든든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입장이 그 도덕적 고결함에도 불구하고 일본 보통사람들의 입장과 심정을 세심하게 고려하지 않은 탓에 지금처럼 수세에 몰리게 됐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이 일본 시민들의 눈높이에서 보면 지나치게 이상적인 것이어서 현재의 고립을 더 강화시키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도 들었다. 물론 우리에게는 고맙고, 또 연대를 표해야 할 입장이다.
지금까지 한·일 간 대화에서는 대체로 일본 측이 이런 입장을 표명하면 한국 측이 호응, 격려(?)하면서 함께 일본제국주의나 현재의 일본 정부를 비난하는 형태가 반복되어 왔다. 이날도 이런 싱거운(?) 회의가 되겠구나 했는데, 아니었다. 한국 학생들이 이런 금과옥조 같은 말씀들에 까칠하게 반응한 것이다. 졸던 귀가 깼다. 북한 문제와 관련해서 ‘민족끼리’를 강조하는 일본 측(일본 진보세력은 북한에 대해 비교적 우호적이었다)에 대해 한국 학생 A는 한국전쟁의 참화를 겪은 한국인들의 북한에 대한 감각을 잘 모르는 거 같다고 지적했다. 아마 지금껏 한·일 간 대화에서 일본 측이 잘 접해보지 못한 반응이었을 거다. 일본 학생이 일본의 미진한 역사교육을 비판하자, A는 한국도 역사교육에 관한 한 피차일반이라며 쿨하게 반응했다. 이에 일본 학생이 그렇더라도 가해자 일본과 피해자 한국은 다르게 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어디까지나 한국은 비판 대상에서 제외하려는 의지가 강하게 느껴졌다.
일본 측이 가해자-피해자 프레임을 강조하며 가해자 일본을 강하게 비판하자, 한국 학생 B는 그걸 부정하진 않으나 그와 동시에 ‘식민주의’ 자체를 비판해야 하고, 그것이 당시 일본의 보통사람들에게 끼친 폐해, 더 나아가 현재 일본의 국가주의 강화에 미친 악영향을 함께 시야에 넣어야 한다고 발언했다. 역사 문제를 한·일 양국의 틀에 가두지 않고 제국주의 시대를 같이 겪은 전 인류의 반성 소재로 삼고자 하는 대담한 제언이었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식민종주국에 사과를 요구하고, 그걸 외교 문제로 삼고 있는 유일한 나라다(본 칼럼 3월8일자 ‘식민지는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문제?’).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이 문제를 보다 설득력 있게 만들기 위해서는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사과하라’보다는 식민주의라는 괴물에 대한 공동의 투쟁을 촉구하는 것이 훨씬 좋은 전략일 것이다. 그것은 자유주의나 민주주의에는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식민주의에는 상대적으로 둔감한 일본의 지식인을 일깨우는 길이 될 수도 있다(이에 대해서는 필자가 일본의 국민작가 시바 료타로를 비판한 ‘너를 보니, 내 옛 생각이 나서 좋다’, ‘서울리뷰오브북스’ 3호 참조).
우리 20대 학생들이 기성세대가 걸려 있는 ‘일본 인식의 덫’을 이렇게 장대높이뛰기로 넘어서고 있는 줄 미처 몰랐다. 그들의 지성에 박수를 보낸다.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 경향 2021.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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