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과 어울리기/외부 칼럼

정권유지? 정권교체?...'닫힌 프레이밍'은 전환사회의 적

by 이성근 2021. 8. 2.

누구를 위한 종부세 후퇴인가 프레시안 2021.07.01.

'이준석' 같은 '공정론자'들이 겨냥한 '공정 사회'란 무엇일까? 창작과 비평 2021.06.30.

억만장자는 지구를 떠나라는 경고 경향 : 2021.07.01.

감히 구국을 논하지 말라 경기신문 2021.07.01.

동업자 봐주기가 만든 언론 비리의 역사미디어오늘 2021.07.05.

이 땅의 검사들에게 묻는다 프레시안 2021.07.05.

정권유지? 정권교체?...'닫힌 프레이밍'은 전환사회의 적 프레시안 2020.07.05.

학력이 능력이라는 오해 경향 : 2021.07.06

조선일보의 대선 놀이, 놀아나는 정객논객들 경향 : 2021.07.07.

세대 문제에 대한 단상 경향 : 2021.07.07.

서세원과 유재석, 그리고 윤석열 한겨레 : 2021.07.07.

여론조사로 정치가 망가지고 있다 한겨레 :2021-07-07

기후정의법'이 아니면 그만두라 프레시안 2021.07.09.

 

https://ecosophialab.com/tag/%EA%B3%B5%EC%9C%A0%EC%A7%80/

 

대한민국은 ○○공화국이다

저 썩은 강을 다음 정권에 넘기지 마라 경향 : 2021.07.10.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한겨레 2021-07-11

윤석열과 조선일보의 '색깔론', 그리고 진중권 프레시안 2021.07.12

MZ세대 권력의 본질 경향 : 2021.07.13

혐오로 먹고사는 사람들 한겨레 2021-07-13

노회찬이 그리운 이유 경기신문 2021-07-13

박정희의 공과넘어 경향 : 2021.07.14.

자본의 가치, 저널리즘의 가치 mediatoday 2021.07.15

능력주의를 보는 좀 다른 시각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경향 : 2021.07.21.

꼰대들의 대학, 환골탈태하라 경향 : 2021.07.21

편협한 이타성 경향 : 2021.07.21

중국을 주적으로 삼자는 정치 한겨레 2021.07.22.

이재용과 한국 자본주의, 결정적 순간 한겨레 :2021-07-26

이석기, 이재용, 그리고 문재인 경향: 2021.07.26.

자아의 영토 경향: : 2021.07.30

2020년대에 필요한 대통령의 자격 경향 : 2021.07.31

 

 

누구를 위한 종부세 후퇴인가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국회의원들이 사는 그들만의 세상

누구나 사람은 자기가 서 있는 위치에서 세상을 본다. 주변에 대학에 다니는 친구들만 있으면 고등학교 졸업 후 취업하는 청년들의 어려움을 알기가 어렵다. 지인들이 모두 대기업 또는 공공기관에 다니거나 전문직에 종사하고 있으면, 중소기업 취업자의 힘든 사정이나 취업 준비생의 아픔에 공감하기 쉽지 않다.

 

자기가 서 있는 자리를 규정하는 요인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소유한 부() 또는 자산의 크기만큼 큰 영향을 주는 것을 찾기는 쉽지 않다. 일정 기간의 소득이 누적된 결과라는 점이나 점점 돈이 돈을 버는 사회가 되어 간다는 점을 고려하면, 소득보다도 부() 또는 자산의 크기가 개인의 시야를 결정하는데 더 중요한 영향을 줄 수 있다.

 

21vs 4

경실련이 분석한 '21대 국회의원 신고재산 분석결과'에 따르면 21대 국회의원이 신고한 재산의 평균은 218000만 원이었다. 반면, 2020년 가계금융복지조사에 나온 전 국민 가구당 평균 자산은 45000만 원이다. 5배 차이가 난다. 집권당인 더불어민주당을 기준으로 하면 평균 재산이 152000만 원 정도로 역시 4배의 차이가 난다. 4~5배라는 숫자의 차이만큼 국회의원들이 보는 세상은 일반 국민들이 보는 것과 참 다른 것 같다. 서로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보이는 세상이 다르기 때문인지, 여당은 지난 618일 종합부동산세(이하 '종부세') 대상 축소, 양도세 비과세 범위 확대 등을 골자로 하는 부동산 세제 완화 방안을 당론으로 확정했다. 특히, 종부세 대상자는 2%에 한정하도록 매년 과세대상을 조정한다는 세법 원칙에도 맞지 않고 적용하기도 어려운 이상한 개정안을 만들어냈다.

 

한 번도 쓰이지 못한 채 쓰레기통으로

이번에 누더기가 된 종부세가 이번 정부에서 어떠한 과정을 거쳤는지 짚어보자. 2017년부터 부동산 시장이 불안하자 정부와 여당은 20189.13 주택시장 안정화 대책을 내놨다. 이 대책에서 종부세율이 전체적으로 조금씩 인상되었는데, 특히 3주택 이상 보유자(조정대상지역 2주택 이상)에 대한 세율이 기존 0.5%~2.0%에서 0.6%~3.2%로 인상되었다. 종부세 세율의 첫 번째 인상이었다.

 

그럼에도 부동산가격이 안정되지 않자, 2019년에 다시 12.16 주택시장 안정화 방안이 발표되어, 3주택 이상 보유자(조정대상지역 2주택 이상)에 대한 세율을 0.8%~4.0%로 인상하기로 했다. 하지만 201912.16 대책은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해 입법화되지 못했다. 종부세율 인상의 두 번째 시도가 무위로 돌아가자 당시 여당 내에서는 12.16 대책만 입법화되면 부동산 시장을 안정화시킬 수 있었는데 야당의 비협조로 실패했다는 불만이 자자했다.

 

2020년 들어 부동산 가격의 상승세가 확대되자, 정부와 여당은 7.10 주택시장 안정 보완대책을 관계부처 합동으로 발표했다. 이 대책에 따라 3주택 이상 보유자(조정대상지역 2주택 이상)에 대한 세율이 1.2%~6.0%로 대폭 인상되었다. 12.16 대책을 넘는 수준이었다. 종부세 세율 인상 이외에도 다주택자에 대한 양도세율과 취득세율도 인상되었는데, 그 시점에 여당의 홍보 현수막을 보면 '투기를 근절하고 집값을 안정'시키겠다는 결기가 느껴졌다.

20207.10 대책 이후 더불어민주당의 부동산 입법 홍보 현수막. 민주당

 

7.10 대책은 2020년 종부세 부과에 적용되지 않았다. 대책에 따라 개정된 종합부동산세법의 시행일이 202111일이었기 때문이다. 20207.10 대책에 따른 종부세율 인상이 처음 적용되는 것이 바로 올해였다. 여당이 당내 부동산특별위원회의 부동산 보유세 후퇴안을 당론으로 확정함에 따라 부동산 보유세 정상화로 투기 수요를 잠재우겠다고 공언했던 그 개정안이 한 번도 적용되지 못하고 쓰레기통으로 가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보유세 부담의 불편 vs 거주지 이전의 고통

불과 1년 사이에 부동산 보유세 대한 정책을 180도 바꿀 만큼의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을까? 오히려 반대다. 코로나19로 인한 경기 침체, 그에 대응한 금리 인하와 유동성 공급으로 모든 자산 가격이 폭등했다. 주식, 아파트에 심지어 가상화폐까지 폭등했다. 자산시장 폭등은 그 흐름을 잡은 사람과 그 흐름을 잡지 못한 사람 사이에 커다란 양극화를 만들어냈다.

 

운이 좋게 또는 적극적인 판단에 의해 아파트 가격 폭등에 올라탄 사람들의 불만은 이런 것이다. 그냥 집 한 채를 가지고 있었을 뿐이고, 어디로 이사 갈 생각도 없이 그냥 살고 있는데 집값이 오른 것이다. 그 집값 때문에 보유세를 더 내야 하는 것이 짜증 난다. 보유세라는 것이 자산에 부과되는 세금이다 보니 소득과 무관하게 늘어나는 종부세를 마련하느라 힘들다는 것이 자산 가격 폭등의 수혜를 입은 사람들의 불만이다.

 

반면, 아파트 가격 폭등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어려움은 훨씬 절실하다. 원래 살던 곳에서 계속 살기가 어렵다. 지역을 옮기거나 빌라, 다세대 등 더 열악한 주거 환경으로 이사해야 한다. 주거 불안의 어려움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졌는데, 이것은 매일 직면해야 하는 고통이다.

 

똑같이 팬데믹을 지나가고 있지만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나 프리랜서 그리고 영세 자영업자가 짊어져야 하는 삶의 무게는 같지 않다. 부동산 폭등이 지나간 자리에서 자산 가격 상승의 일부에 해당하는 보유세를 부담해야 하는 불편함과 주거지를 떠나야 하는 고통도 그 무게가 같을 수 없다. 하지만, 여당 국회의원들 눈에는 전자의 불편함이 주로 보였던 것 같다. 그들만의 세상에 갇혀 있지 않았다면 이런 선택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구를 위한 종부세 후퇴인지 되돌아봐야 한다.

홍순탁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운영위원장, 회계사/ 프레시안 2021.07.01.

 

'이준석' 같은 '공정론자'들이 겨냥한 '공정 사회'란 무엇일까?

'이준석 현상'은 지속될 수 있을까

지난 611일 제1야당 국민의힘은 30대 청년 이준석을 당 대표로 선출했다. 한국 정치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파격적인 사건인 만큼 '이준석 돌풍'을 이끈 원인과 향후 미칠 파장을 분석하려는 시도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보수야당의 근본적인 체질 변화는 불가능하기에 이준석의 당선은 일회성 ''에 지나지 않는다며 애써 그 의미를 격하하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신선하고 개혁적인 젊은 정치인이 한국 보수정치의 일대 혁신을 가져올 거라며 기대감을 부풀리기도 한다. 이처럼 정치적 성향에 따라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지만 서로 공유하는 대목이 없지는 않다. 이준석이 새로운 사회적 정의의 기준으로 내세운 '실력''공정'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다는 진단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런 진단은 이준석이 실력과 공정을 강조한다는 점만 부각할 뿐, '실력''공정'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분석은 빠진 경우가 많다.

 

이준석은 바른미래당 최고위원 시절인 2019년 펴낸 대담집 <공정한 경쟁>(나무옆의자 펴냄)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한국은 산업화도 민주화도 태동기를 지나 안정기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시대정신에 맞는 새로운 리더십이 부상하리라고 믿습니다. () 저는 그런 시대정신은 다름 아닌 실력, 실력주의라고 생각합니다."(67)

 

이는 얼핏 상식적인 얘기처럼 들리지만 기왕의 정치가 쌓아 올린 모종의 합의를 뒤엎는 급진성을 내포하고 있다. 예컨대 이제까지 정치인들은,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최소한 겉으로는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온정주의적' 태도를 표방해왔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소수와 약자를 따뜻이 배려하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더 많은 여성이 의사결정의 지위에 오를 수 있도록 기회를 늘"릴 것을 약속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 역시 취임사를 통해 "여성이나 장애인 또는 그 누구라도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안전한 사회를 만"들 것을 다짐했다. 하지만 이준석은 그와 같은 온정주의를 '위선'으로 치부하면서 오직 '실력'이 사회적 자원을 배분하는 데 제일의 잣대가 되는 냉혹한 사회적 규준을 도입할 것을 주장한다.

 

'줄 세우기'가 공정인가?

이준석은 '시혜적 온정주의'를 부정하고 '가학적 실력주의'로의 이행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 대표적인 정책이 할당제 폐지론이다. 여성과 지역, 청년 할당제 등은 소수자의 사회 진출을 독려하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지만 동시에 구조적인 차별의 현실을 은폐하는 면도 없지 않다. 할당제를 둘러싸고 '역차별' 논란이 불거지는 것도 할당제에 내재한 근본적인 한계와 관련이 있다. 할당제는 약자와 소수자들이 취약하고 결핍된 존재로 재현되는 한에서만 온정적인 배려를 받을 수 있다는 편견을 강화시킨다. 약자와 소수자들이 틀에 박힌 피해자의 이미지를 거부하고 주류 사회의 시혜적인 태도에 맞서 주체적인 목소리를 낼 때, 이제까지 불쌍해서 봐줬더니 감사한 줄도 모른다는 식의 분노가 터져 나오는 것도 그런 고약한 편견 탓이다. 할당제의 이런 한계가 곧 할당제 폐지론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구조적인 불평등을 치유하려는 치열한 노력 없이 할당제 하나로 할 일 다 했다는 식의 태도라면 '할당제 폐지론'이라는 백래시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다는 점은 다시 살펴볼 일이다.

 

할당제에 대한 분노에는 세상은 평등하지 않고 사람들은 각자가 가진 재능과 실력, 능력 등에 따라 위계적인 서열을 갖는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이때 '공정'은 서로 다른 삶의 조건에 놓여 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처지를 포용적으로 고려하지 않고 단지 각 개인에게 정확한 서열을 부여하는 문제로 축소되고 만다. 이준석이 외치는 공정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내세우는 '실력''공정'은 사람들이 위계화된 서열 체계하에서 자신에게 부여된 위치를 체념적으로 수용하게 만들기 위해 요청되는 객관적인 근거에 가깝다. 관련해 앞서 언급한 대담집에서 이준석이 국공립대가 학생을 철저하게 수능 점수로 줄 세워 선발해야 한다고 주장한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준석은 그런 '줄 세우기'야말로 가장 공정한 것이라고 보는데 그 이유는 간단하다. 단일한 기준을 잣대로 삼은 '줄 세우기'는 각 개인이 놓인 상이한 처지와 삶의 조건, 미래의 가능성과 잠재력 등을 복잡하게 평가하는 수고 없이도 타인들에게 명확한 사회적 위계를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런 '줄 세우기'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준석 자신 같은 '엘리트'는 예외다. 이준석이 스스로 밝히듯 그 자신은 하버드대 입학사정관 제도를 통해 잠재력을 인정받은 경우다. 만약 하버드대가 시험 하나로 학생들을 줄 세웠다면 영어가 부족했다고 밝힌 바 있는 그가 합격증을 받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준석은 미국 대학의 입학사정관제가 바깥에서 보기엔 불공정해 보일지 몰라도 다양한 기준으로 학생들을 선발하므로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는 모순적인 주장을 내놓는다. 누구에게나 보이는 이 모순을 이준석만 모른다. 왜냐하면 그는 뛰어난 소수의 엘리트와 평범한 다수의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룰이 달라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준석은 서울과학고 재학 시절 경쟁이 없어서 마음에 여유가 있었다며 "구성원 전부의 실력이 다 같이 월등하면 그 집단에서는 경쟁이 무의미"(204)하다고 말한다. 이준석은 이렇게 '우수한' 사람들을 구별하고 그보다 열등한 사람들을 무한경쟁의 무간지옥으로 빠뜨리는 데 거리낌이 없다. 이준석이 말하는 '공정한 경쟁'은 뛰어나지 않고 우수하지 못한 죄로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이 받아야 하는 사회적 형벌에 가깝다.

 

'공정'을 정말 소중한 가치로 여긴다면

이처럼 엘리트주의적이고 가학적인 이준석의 실력주의 담론이 별다른 견제와 비판 없이 추인되는 듯 보이는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여기에 대한 내 대답은 '이준석의 실력주의와 공정한 경쟁론은 제대로 된 정치적 검증을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관련해 특히 이준석의 페미니즘 비판이 남성 청년들의 맹목적인 지지를 이끌어내면서 정작 그의 담론에 내장된 모순과 결함에 대한 검증을 막아선 면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이준석이 내세우는 '실력주의'가 새로운 사회적 정의의 기준으로 적합한지를 놓고 제대로 된 논쟁이 벌어진다면 그 과정에서 그의 주장에 내재한 모순과 가학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이준석 현상'이 거품처럼 사라질 거라고 믿는 것도 성급하다. 이준석 현상의 배후에는 계층적 유동성이 제한되고 경제적 자산과 문화적 지위를 세습화하는 오늘날 한국 사회의 불평등한 현실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성 정치권이 날이 갈수록 악화되는 불평등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한다면 거기서 발생하는 대중들의 분노와 원한을 손쉽게 이용하려는 세력은 얼마든지 얼굴과 구호를 바꿔가며 등장할 가능성이 크다. '실력''공정'은 대중들에게 긍정적이고 매력적으로 다가서는 기표이지만 주장하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그 속을 임의로 채울 수 있는 여지가 큰 개념이기도 하다. '공정'에 대한 규범적인 탐구를 의도적으로 생략하고 모종의 원한과 혐오의 감정으로 그 개념을 전유하려 든다면 이준석처럼 서열화와 줄 세우기가 곧 공정이며 다양성의 추구는 공정성의 교란에 불과하다는 식의 단순한 주장도 그럴듯한 것으로 포장될 위험이 여전히 우리 곁에 상존해 있다.

 

얼마 전 KBS에서 벌인 세대 인식 집중 조사 설문 결과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설문 내용 중 하나는 '모 편의점의 페미니스트 채용 거부 논란에 대한 의견'으로 이 조치가 공정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묻고 있었다. 무려 47.3퍼센트의 청년 남성들이 채용 거부가 '공정하다'라고 답한 것에 많은 이들이 주목했지만(같은 질문에 '공정하다'라고 답한 50대 남성은 11.5퍼센트, 50대 여성은 5.4퍼센트에 불과했다) 내가 처음 든 생각은 이것은 공정의 잣대로 접근할 문제가 아니지 않나 하는 것이었다. 페미니스트라는 이유로 채용을 거부하는 일은 '공정'이라는 규범이나 도덕의 영역으로 굳이 끌고 올 필요가 없는, 그 자체로 위법적 소지가 있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요새는 '동성애에 대해 찬성합니까?' 같은 질문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건 동성애가 찬반의 영역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어느 정도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찬반의 문제가 아닌 것을 찬반의 프레임으로 묻는 것이 사안의 본질을 흐리는 것처럼 세상만사에 관습적으로 '공정'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도 공정에 대한 사회적 감수성을 높이기는커녕 오히려 퇴락하게 만든다.

 

어쩌면 이준석과 같은 '공정론자'들이 겨냥하는 건 '공정한 사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엄밀하고 규범적인 탐구가 아니라 우리가 계발해야 할 공정에 관한 사회적 감수성의 퇴락인지도 모른다. 공정에 대해 진지한 애착을 갖는 사람은 어디 화풀이하듯 "이건 공정이냐? 그러면 저건 공정이냐?" 하는 식으로 공정을 조자룡 헌 칼 휘두르듯 함부로 내던지지 않는다.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가 타인에 대한 교묘한 비난이나 저열한 공격의 수단으로 활용되는 일을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만약 '이준석 현상'이 한국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바꾸는 동력으로 기능하기를 이준석 자신이 바란다면 평범한 사람들을 정확하게 줄 세우는 일이 곧 공정이라고 강변할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삶의 가능성을 마주한 이들에게 공정의 이름으로 제시할 수 있는 희망의 세목을 만들어나가려는 태도의 전환이 절실히 필요하다.

한영인 문학평론가 | 창작과 비평 2021.06.30.

 

억만장자는 지구를 떠나라는 경고

세계 최고 부자 제프 베이조스가 이달 20일 우주여행을 떠난다. 자신의 우주탐사 업체 블루오리진이 만든 우주관광 로켓 뉴 셰퍼드를 타고 상공 100부근에서 11분간 머물다 돌아올 계획이다. 성공하면 또 하나의 역사가 만들어진다. 인류가 달에 첫발을 디딘 지 52주년이 되는 날, 우주관광시대의 문이 열리는 것이다. 영국의 괴짜 억만장자리처드 브랜슨이 선수를 칠 것이라는 말도 있어 장담할 순 없다. 그런 그에게 저주가 날아들었다. 우주로 간 베이조스가 지구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자는 지구 귀환 반대청원이다. 지지자들은 베이조스를 전 세계를 지배하려고 작심한 사악한 지배자라며 억만장자는 지구 또는 우주에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비판했다. 물론 실현 가능성은 ‘0’이다. 다만 억만장자를 향한 반감과 분노가 이보다 더 섬찟할 수 없다는 점에서 충격이다.

 

베이조스뿐 아니다. 세계 2위 부자 일론 머스크와 4위 부자 빌 게이츠도 도마에 올랐다. 머스크는 지난 5월 초 국제해커집단 어나니머스로부터 공격 대상으로 삼겠다는 경고를 받았다. 그가 트윗으로 비트코인의 시세를 조종했다는 이유에서다. 그의 트윗에 놀아난 많은 이들이 피해를 봤다. 비슷한 시기 이혼 발표를 한 빌 게이츠는 과거 직원과의 부적절한 관계, 미성년자 성착취범 제프리 엡스타인과의 친분 등이 드러났다. 이 때문에 그동안 쌓아온 명성도 한꺼번에 날아갔다.

 

설상가상으로 이들을 포함한 미국 최고 부자 25명이 유리한 세제 덕에 엄청난 혜택을 누려온 사실도 드러났다. 탐사전문 매체 프로퍼블리카가 국세청 납세 자료를 입수해 지난달 초 폭로한 걸 보면 25명의 보유재산은 2014~20184010억달러 증가했다. 반면 이들이 낸 연방 소득세는 총 136억달러였다. 평균 3.4%꼴이다. 일반인의 소득세율 14~37%에 비해서도 턱없이 낮다. 특히 오마하의 현인으로 불리며 부유세를 지지해온 워런 버핏은 자선활동에 대한 세금 공제 덕에 실제로 납부한 세율이 0.1%에 불과했다. 물론 코로나19 상황은 반영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목숨 걸고 일해야 하는 미국인들이 안전하게 집 안에서 지낸 부자들보다 더 큰 비율의 세금을 낸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세계 최고 갑부들에 대한 비호감과 반감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이들은 막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초국가적 권력을 휘두르며 세계를 주물러왔다. 혁신이니 자선이니 하는 것은 미명일 뿐이다. 코로나19는 그 반감을 극대화시켰다. 부의 불평등이 심화된 탓이다. 세계은행은 하루 1.9달러 이하로 생활하는 절대빈곤층이 연말까지 최대 15000만명 늘어나 75000만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했다. 반면 지난해 억만장자는 3228명으로, 전년에 비해 607명 증가했다. 이틀에 3명꼴로 늘어난 셈이다.

 

이런 반감과 분노는 그들이 자초한 측면이 크다. 베이조스가 만든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 아마존의 열악한 노동환경은 코로나19로 더 부각됐다. 베이조스는 나흘 뒤 아마존 최고경영자(CEO)에서 물러난다. 그런다고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전기자동차 테슬라를 만든 머스크에겐 정부 보조금으로 배를 불리면서 비트코인 시세 조종으로 막대한 부를 챙겼다는 비난이 따른다. 어나니머스의 지적대로 그의 행태는 평범하게 일하며 사는 사람에 대한 조롱이었다. 세계 최대 자선단체를 통해 보건과 교육, 기후변화, 코로나19 백신 등 글로벌 현안을 이끌어온 게이츠의 영향력은 국가를 넘어선 지 오래다. 오죽하면 게이츠재단과 적이 되지 말라는 말이 나오겠는가.

 

억만장자들에 대한 반감과 분노는 정부의 실패를 보여준다. 이는 민주주의의 위기로 이어진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때처럼 고삐 풀린 거대 자본에 대한 경고등이 다시 켜졌다. 미국만의 문제도 아니다. 하지만 그때처럼 월가점령운동을 펼 처지도 아니다. 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불매운동 정도다. 마냥 정부에 기댈 수도 없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법인세와 부유세 인상을 밝혔지만 최고 부자들이 빠져나갈 만큼 세제에 구멍이 나 있는 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최근 페이스북의 시장 지배력을 억제하려는 미 정부의 시도가 실패했다. 억만장자들의 초국가적 힘을 또다시 보여준 것이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지구 귀환 반대 청원이나 어나니머스의 경고가 부질없어 보일지언정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선한 의도로 포장한 억만장자들의 모습을 끝없이 들춰내 경고를 보내야 한다. 그래야 세상이 더 나빠지지 않는다. /조찬제 논설위원 경향 : 2021.07.01.

 

감히 구국을 논하지 말라

학기가 끝나고 성적을 입력하면서 젊은 친구들에 대한 교육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다행스럽게도 이번 임시 교편과정에서 좋은 학생들을 만났다. 한 번도 출석에 빠지지들 않았고 과제를 거른 적도 없으며 비대면 수업이지만 학습 태도들도 좋았다. 모두들 훌륭한 점수를 받기에 충분했다.

 

과제 명은 올리버 스톤의 영화로 본 미국 현대사 1954~1974’이다. 올리버 스톤 감독이 변방의 한국에서 자신의 영화가 역사 공부에 쓰이고 있음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영화감독으로서 나름 자부심을 느낄 만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영화 중 플래툰‘74일생그리고 하늘과 땅은 베트남전쟁사와 그와 연관된 미국 국내사를 들여다보는 데 있어 최적의 텍스트다. 특히 플래툰은 미군에 의한 미라이양민학살사건을 그리고 있고 이로 인해 미국 국내에서 반전 운동이 어떻게 확산되는지, 거기에 CBS TV 기자이자 앵커였던 월터 크롱카이트 등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올리버 스톤의 베트남 3부작은 통킹만 사건에서부터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반정부 게릴라가 연합한 구정 공세, 치열했던 다낭 전투 등 전쟁 전사(全史)를 복기하며 그려 낸다.

 

한편 그의 또 다른 영화 ‘JFK’닉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쿠바 미사일 사태를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고 또 그러기 위해서는 1959년의 쿠바 혁명 과정과 흐루시초프 시대의 소련을 뒤져 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역사는 씨줄 날줄로 연결된다. 그 모든 일들은 존 F. 케네디의 암살이 누구의 손에 의해서 자행됐는지 린든 B. 존슨 대행 체제에서 어떻게 베트남전은 확전 됐고 또 어떻게 말콤 X가 살해되는 길로 연결됐으며, 민권법(흑인 참정권을 전면 보장하는 법안)이 통과됐음에도 불구하고 마틴 루터 킹은 왜 앨라배마 셀마 시에서 평화행진을 벌였는지, 그러던 그가 왜 결국 암살될 수밖에 없었고 같은 해 로버트 케네디는 또 왜 죽어야 했는지를 연결, 연결, 또 연결해서 공부해야 한다.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에 영향을 받은 체 게바라가 아프리카와 볼리비아를 다니며 또 다른 혁명을 꿈꾸다 사살되는 과정은 덤이자 외전(外傳)의 역사 이야기다. 역사는 방법이 없다. 특정 연대와 사건의 기록들은 무조건 외워야만 한다. 역사는 암기를 통해 기초가 형성되며 그럼으로써 전체 드라마를 그려 낼 수 있게 된다. 역사의 나무만 보느냐, 숲까지 다 볼 수 있느냐는 어쩌면 학생보다는 선생의 몫이다. 그렇게 가르치고 인도해야 한다.

 

학생들은 처음 듣는 지명(심지어 니카라과 같은 국가 이름), 처음 들어 보는 사건(이란-콘트라 사건), 처음 알게 된 인물(다니엘 오르테가나 올리버 노쓰)이 많다고들 했다. 무엇보다 이런 일들을 꼭 알고 살아야 하는 건지 몰랐다고 했다. 그러나 배워 놓고 보니 앞으로는 더욱 알고 살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했다. 그런 지점에서 이번 특별 학기는 꽤나 성공적이었다는 생각이다. 역사적 인지 능력을 시공간적으로 확대시키는 것이야 말로 지금 젊은 세대들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 되기 때문이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박근혜로 이어지는 근 7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남한에서 이루어진 반공 역사관은 한편으로는 이른바 순화교육을 동시에 진행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김구와 윤봉길의 역사적 거사(巨事)에서 전투적이고 공격적인성향 혹은 그 정신을 숨기기에 급급한 면이 있다. 김원봉·김산 등은 아예 삭제시켰다. 그들을 공산주의자로 둔갑시켜 그 역사성을 거세시켰다. 그러나 이들 모두 아나키스트이자 극렬테러리스트였다. 그들의 테러가 없었다면 한국의 역사는 씨가 말랐을지도 모른다. 일제에 의해 완전히 편입됐을 가능성이 높다.

 

폭탄 테러를 위해 택시를 불러 떠나는 윤봉길을 향해 김구가 말했다고 한다.

지옥에서 만납시다.”

 

학생들은 그때의 사건을 넘어 김구와 윤봉길의 마음속에 일던 그 광풍(狂風)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역사의 바람에 머리가 흩날릴 수 있어야 한다.

 

김구와 김원봉, 윤봉길의 격한 투쟁이 독립의 정신과 애국의 정신을 이어가게 했다. 그런데 남한의 오랜 반공 정권은 폭탄을 던지던 윤봉길의 실천적 모습보다는 그의 생애 등등이나, 그가 파평 윤씨 가문 출신이라는 점 등등 일상적 이미지로만 그리고 남기는데 급급했던 감이 적지 않다. 우리가 가슴에 새겨야 하는 것은 폭탄을 던지는 순간의 그의 행동, 그의 마음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것은 일종의 순화된 애국주의다. 국민을 그쯤에서 멈추게 하려는 의도된 역사교육이다.

 

윤석열이 윤봉길 기념관에서 대권 도전 선언을 한 것을 그냥 지나치면 안 될 일이다. 이건 역사를 욕보이는 일이다. 역사는 한번 욕보이면 버릇처럼 계속 욕보이게 되고, 결국 왜곡되기 때문이다.아이들이 친일파도, 혹은 친일적 사고를 가진 사람도, 윤봉길 기념관을 아무렇게나 사용할 수 있는 걸 보면서 기념관은 이제 그냥 공원이나 강당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윤봉길이 보여 준 그 격렬한 독립운동의 정신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독도가 우리 땅이라고 해도 그렇게 되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 되겠는가. 역사를 곡해시키려는 자, 구국을 논하지 말라. 구역질이 나는 일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경기신문 2021.07.01.

 

동업자 봐주기가 만든 언론 비리의 역사

사과 상자로 인사하던 시절이 있었다. 기업이 사과 상자에 돈을 두둑이 넣어두고 핵심 권력층을 찾아가면, 이는 단연 최고로 정중한 인사였다. 압권은 1991년 이용식 세계일보 기자의 특종으로 알려진 수서 비리다. 수서지구는 무주택 서민에게 분양될 땅이었지만,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의 로비로 정 회장과 결탁한 택지조합에 특혜분양으로 넘어갔다. 당시 정 회장은 이 특혜분양을 성사시키기 위해 수백억이 넘는 돈을 사과 상자에 나눠 남아 정·관계 실세에게 뿌렸다. “아주 특별한 사과니까 잘 드십시오라는 정중한 인사와 함께였다.

 

이 과정엔 여러 언론인도 연루돼 있었다. 언론을 장악하고자 한 장태수 회장이 서울시청 기자들을 상대로 수백, 수천만원씩 촌지를 돌린다는 소문이 퍼졌다. 1997년 동아일보는 중견 언론인 40명이 포함된 한보 리스트를 보도했지만, 검찰은 이 사건을 조용히 덮었다. 언론계의 자정 노력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이후에도 달라진 건 없었다. 한보의 계속된 극진한 대접에 언론은 1996년 한보건설 현장에서 일어났던 사고도 외면하며 보도하지 않았다.

 

언론인이 나서서 돈을 거뒀던 사례도 있다. 1991년 보사부(보건사회부, 현 보건복지부)에 출입했던 기자들이 추석 떡값과 해외여행을 명목으로 제약·제과·화장품 업계와 대우재단, 아산재단, 약사회 등에 8850만원을 받았던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두 명의 기자가 파면됐고, 언론사들은 1면에 사과와 반성의 글을 실었다. 이후 기자윤리강령이 제정됐지만, 한번 뿌리박힌 촌지 관행은 사라지는 데까지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거슬러 올라가 2019, ‘박수환 문자 사건이 터졌다. 청탁금지법이 제정된 지 약 4년이 흐른 뒤였다. 뉴스타파가 입수한 박수환 문자 내역에서, 여러 언론인과 박수환 뉴스컴 대표 사이에서 기사 거래 흔적이 발견됐다. 언론사 전·현직 간부가 접대골프, 초호화 해외여행, 에르메스 등 명품 가방, 자녀 채용 특혜 등을 받고 기업에 협찬 기사를 써주거나 불리한 기사를 빼줬다. 박수환 씨는 기업과 언론을 잇는 로비스트였다. 연차가 낮은 기자들에게도 아주 깍듯하고 공손한 말투를 썼고, 고급식당에서 식사와 선물을 대접했다. 그러니 기자들은 그가 전달하는 기업의 청탁을 쉬이 거절하지 못했을 테다.

 

이런 대형 비리에도 언론은 둔감했다. 언론과 기업의 부적절한 관계는 일상화한 관행이란 인식이 강했다. 뉴스타파 보도에도 언론은 후속 보도를 하지 않았고, 이에 민주언론시민연합이 31개 언론사 편집·보도국장, 보도본부장에게 무보도 이유를 묻는 질의서를 보내기도 했다. “언론이 아닌 사법부, 국회, 청와대 등에서 일어난 것이었어도 보도하지 않았겠냐라는 질문과 함께였다.

 

반성이 없었기에 비리는 또 반복된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 대변인을 맡았던 이동훈 조선일보 전 조선일보 논설위원과 엄성섭 전 TV조선 앵커가 수산업자에게 금품을 받은 혐의로 지난달 입건됐다. 이동훈 전 논설위원은 수백만원 상당의 골프채를, 엄성섭 전 앵커는 아우디, K7 등 차량과 접대를 받은 혐의다. 이번에도 역시 반성은 없었다. 민주언론시민연합에 따르면 조선일보, TV조선, 한국경제는 이 사건을 보도하지 않았다. 특히 조선일보와 TV조선은 자사 언론인이 연루된 일임에도 사과 한 줄 없었다.

이동훈 전 조선일보 논설위원(왼쪽)와 엄성섭 TV조선 앵커(오른쪽)

 

권력 주변엔 늘 아부와 접대가 따라붙는다. 펜의 권력을 쥐는 언론도 예외는 아니다. 촌지로 오가던 노골적인 아부는 부동산 정보, 주식 로비, 호화 외유와 골프 접대 등으로 점점 발전하며 지금에 이르렀다. 문제는 지금의 언론 환경이 과거보다 비리가 이뤄지기 더 쉽다는 데 있다. 언론사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회사가 나서서 협찬·광고성 기사를 장려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문화가 일상화하면 뒷돈을 내 지갑에 받아 챙기는 개인적 일탈도 더 쉽다. ‘경언유착이 뭐가 문제냐란 안이한 인식이 도덕적 해이를 낳는다.

 

빌 코바치·톰 로젠스틸의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에서 나오는 열 번째 원칙은 편집국 기자에서부터 이사진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자들은 반드시 개인적인 윤리 의식과 책임감, 도덕적 나침반을 지녀야 한다. 언론인의 정체성을 이룰 만큼 윤리와 도덕성이 강조되는 이유는, 권력을 감시하고 부정부패를 고발할 정당성이 거기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언론은 철저하게 자정하고 또 반성해야 한다. 수서 비리 때 기자들이 들었던 언론이 비판할 자격이 되느냐란 질타를 다시 듣지 않도록 말이다. 단순히 윤리강령과 규범을 제정하는 거로는 부족하다. 언론이 나서서 언론인 비리를 감시하고 비판해야 한다. ‘동업자 봐주기식으로 언론인 비리를 더는 눈감아줘선 안 된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지난한 언론 비리의 역사는 또 반복될 것이다. 권력을 감시하라며 시민이 넘겨준 이 권력은, 언제 다시 거둬질지 모른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김수지 월간 신문과방송 기자 미디어오늘 2021.07.05.

 

이 땅의 검사들에게 묻는다

"그의 선택이 우리 회사에 어떤 오명을 덧입혔는지는 삼척동자도 알 일이다. 자신은 영예를 누릴지 모르나, 우리는 그가 남긴 오명을 피할 도리가 없다."

 

"정치부 기자가 정당 공천을 받아 총선에 출마하기 위해 회사를 그만둔 것은 공정성을 생명으로 하는 회사의 이미지를 심각하게 훼손한 중대한 사태다."

 

어느 방송과 신문의 현직 기자가 갑자기 정치권으로 직행하는 사태가 벌어졌을 때 해당 언론사 기자들이 발표한 규탄 성명의 한 구절이다. 기자들이 느끼는 당혹감과 분노가 성명에서 고스란히 전해진다. 현직 언론인이 곧바로 정치권으로 옮겨가는 것은 어떤 명분으로도 합리화될 수 없다는 게 언론계 안에서는 상식이다. "일부 언론인의 시대착오적 행보는 언론 전반에 심대한 폐해를 가져온다. 언론의 신뢰, 기자 집단의 자기 정체성과 직업윤리 등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며, 남아있는 언론인들의 긍지를 무너뜨리고 조롱과 비난의 대상으로 만든다." (김세은 강원대 교수, '언론인의 정치직행에 대한 비판과 대안')

 

현직 검찰총장이 옷을 벗자마자 곧바로 대선에 뛰어드는 것은 어떤가? 뉴스 제작의 최고 사령탑인 편집(보도)국장이 갑자기 어떤 정당의 대변인으로 변신하는 것에 비유하면 쉽게 설명이 될까. 그런 사태가 벌어지면 해당 언론사의 그동안 보도는 곧바로 불공정 시비에 휩싸이게 된다. 정치권 진입을 준비해온 편집·보도국장이 지휘해 만든 언론 보도의 공정성과 객관성을 누가 믿어줄 것인가. 사실 이것도 적당한 비유가 되지 못한다. 검찰총장의 대선 출마는 비슷한 예를 찾기 힘들 정도로 비상식의 극치다.

 

그런데도 이 땅의 검사들은 쥐죽은듯이 조용하다. 그동안 곧잘 검찰의 중립성이 침해됐다며 평검사 회의 소집 등 집단행동을 불사하던 용감한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검경 수사권 조정 등 검찰 조직이 위협받는 상황에 분연히 일어나 검찰 내부통신망에 열심히 글을 써대던 검사님들도 자취를 감추었다. 위에 인용한 현직 언론인의 정치권 직행 비판 글에서 언론을 검찰로, 기자를 검사로 바꾸면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대선 출마 폐해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의 시대착오적 행보는 검찰 전반에 심대한 폐해를 가져온다. 검찰의 신뢰, 검사 집단의 자기 정체성과 직업윤리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며, 남아있는 검사들의 긍지를 무너뜨리고 조롱과 비난의 대상으로 만든다." 하지만 지금 검찰은 물속처럼 고요하다. 검사들이 그처럼 자랑하던 자존심과 긍지는 어디로 갔는가. 검사 집단의 직업윤리는 애초부터 존재라도 했던 것인가?

 

'권력의 사유화'. 윤 전 총장이 현 정권을 비판하며 대선 출마 명분의 하나로 내세우는 말이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야망 실현을 위해 검찰 조직과 권한을 사유화한 사람은 윤 전 총장 본인이었다. 선택적 수사, 선택적 기소라는 막강한 권력을 휘둘러 몸값을 올리고 급기야 수구보수 진영의 대선주자로 출사표를 던진 것을 두고 권력의 사유화라는 말 외에 달리 뭐라 표현할 것인가?

 

"지지율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검찰 중립성 침해가 아님은 윤 전 총장에 대한 국민의 높은 지지로 확인된다." 윤 전 총장의 정치 행보가 검찰 중립성 훼손이 아니라는 근거로 내세우는 논리다. 얼토당토않은 궤변이다. 윤 전 총장은 '장모 구속'이라는 악재를 만나 벌써 지지율이 출렁일 조짐을 보인다. 만약 지지율이 계속 하락해 바닥으로 내려가면 그때는 검찰의 중립성 훼손이라고 판정할 것인가? 지지도 숫자를 끌어다가 검찰 중립성 문제를 설명하는 게 논리적으로 얼마나 하자투성이인지는 머리 좋은 검사들이 더 잘 알 것이다. 윤 전 총장에 대한 지지는 검찰의 중립성이나 수사의 공정성 등에는 관심이 없이 현 정권에 대한 증오와 반감으로 가득 찬 사람들의 무조건적 박수갈채에 불과하다.

 

지금 대다수 검사들은 윤 전 총장의 정치 행보에 부끄러움과 자괴감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있는 듯하다. 그동안에도 "대한민국은 검찰공화국"이라는 말이 무성했으나 이제는 '명실상부한 검찰공화국'이 목전에 도래했다는 기대감도 느껴진다. 윤 전 총장이 대선 출마 선언 직전 가까운 후배 검사들에게 전화를 걸어 "흔들리지 말라"고 격려한 것은 해당 검사들만이 아니라 전체 검사들을 향한 메시지로 읽힌다. ”이제 명실상부한 우리 검찰 세상이 온다. 흔들리지 말고 일치단결해 나를 밀어다오!" 윤 전 총장이 대통령이 되는 것은 지금까지 유구하게 이어진 '검란' 역사의 대미를 장식하는 일이며, 검찰이 완벽하게 대한민국을 장악하는 신천지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이니 어찌 검사들로서는 가슴 뛰는 일이 아니겠는가.

 

검사들 중에는 윤 전 총장의 정치 행보가 잘못됐다고 느끼는 사람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모두 침묵의 카르텔에 동조한다. '신성가족'의 찬란한 미래에 조금이라도 누를 끼쳐 조직의 배신자로 왕따 당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상식과 이성을 배반하고, 검찰의 정치적 중립에 대한 국민의 열망을 배반할지언정 검찰 조직을 배반할 수 없다는 눈물겨운 충정이다.

 

"그의 선택이 우리 조직에 어떤 오명을 덧입혔는지는 삼척동자도 알 일이다. 자신은 영예를 누릴지 모르나, 우리는 그가 남긴 오명을 피할 도리가 없다. 그의 행보는 정치적 중립성과 수사의 공정성을 생명으로 하는 검찰 조직의 이미지를 심각하게 훼손한 중대한 사태다." 정신이 올바로 박힌 검사라면 당연히 이렇게 외쳐야 한다. 언론계도 이 사회에서 적지 않게 손가락질을 받는 조직이지만, 현직 기자의 정치권 직행에 곧바로 규탄 성명을 발표하는 최소한의 양식과 상식이 작동한다. 검사들은 평소 기자들을 은근히 눈 아래에 두는 경향이 있는데, 이번에 보니 직업윤리, 자기 정체성, 긍지, 자존심 등이 언론계 사람들에도 훨씬 못 미친다.

 

검사들은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윤 전 총장의 대선 출마는 명실상부한 검찰공화국의 도래가 아니라 검찰 조직의 완벽한 몰락의 서막으로 다가온다. 오염된 공기에서 오랫동안 호흡하고 살다 보면 뇌의 정상적인 판단 기능이 마비된다. 지금 검찰의 모습이 그렇다. 비상식의 극치라 할 검찰총장의 정치권 직행, 이런 비상식적 행동을 용인하고 응원하는 검사들의 비이성적 행태가 이를 웅변한다. 잘못된 조직문화의 오염된 공기가 자신들의 이성과 상식을 얼마나 마비시켰는지를 검사들만 모른다.

김종구 언론인 | 프레시안 2021.07.05.

 

정권유지? 정권교체?...'닫힌 프레이밍'은 전환사회의 적

전환사회와 그 적들

최근 대선 출마 선언이 잇따르고 있다. 20대 대통령은 20225월부터 5년간 임기를 수행한다. 시기적으로 기후위기 시나리오의 한가운데 있는 셈이다. 하지만 대선 후보 누구도 기후위기를 말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 선거운동 기간에는 정책공약으로 뭔가 들어가겠지만, 출마 비전과 의지를 밝히는 무대에서 그 흔한 '위기''비상'이라는 레토릭조차 언급되지 않는다. 2050년 탄소중립과 2030년 감축계획을 재수립하고 있는 현 정부를 신뢰해서일까. 아니면 기후위기의 레토릭과 리얼리티의 괴리를 보인 정부보다 느슨한 상황인식을 공유해서일까.

 

기후위기는 사회적 드라마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주류 모델링은 목표설정과 정책설계에 필수불가결한 과정이 되었지만, 비판적 사고를 불필요하게 만들었다. 복잡한 현실을 시장과 기술로 재현함으로써 대안적 구상은 변방에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추상적 숫자를 보정하는 수준에서 보완대책이 나열될 뿐이다. 성장률이 아니라 감축률을 국정운영의 주요지표로 삼고, 탈탄소 정의로운 전환의 조건을 창출하는 생성-전환적 정치는 채굴-착취적 시스템의 '올드 노멀'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파워 엘리트들의 고요 속의 외침은 '뉴 노멀' 담론을 적극적으로 배제하거나 소극적으로 차용할 뿐이다. 정권 유지냐, 교체냐의 닫힌 프레이밍은 전환 사회의 적이다.

 

과거로 회귀할 때가 아니다. 자유, 평등, 연대의 가치를 실현할 생태민주주의의 영역을 확장할 시점이다.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수준의 에너지와 자원을 사용면서도 인간의 기본적, 사회적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다는 주장은 현실 정치에서는 변방의 북소리지만,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저에너지 사용으로도 우리에게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충분히 향유할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인간 필요와 에너지 사용 간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연결고리를 확인하면 일정한 해답이 나온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공공서비스 질, 소득 평등, 민주주의, 전력 접근성 등의 요소들은 인간의 필요를 높이지만 에너지 사용량을 줄인다. 반면, 적정 충분성을 초과하는 채굴주의와 경제성장 등의 문제적 요소들은 인간의 행복과 만족도를 떨어뜨리면서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다(Jefim Vogel et al., 2021). 확대할 것과 축소할 것을 선택하는 전환전략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생태적 한계와 사회적 기초 사이의 균형을 찾는 <도넛 경제학>(학고재, 2018)과 지구 한계(planet boundaries) 개념을 영상화한 <브레이킹 바운더리>(넷플릭스, 2021)가 바로 이런 내용을 담고 있다.

 

시스템 전환을 위한 전략적 선택은 전환 지향의 정치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불행히도 2022년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큰 기대를 갖긴 어려워 보인다. 의회권력과 행정권력의 합작품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법()'의 색깔은 그린(green)이 아니라 블루(blue)와 그레이(grey) 사이에 자리한다. 탄소중립위원회의 활동을 통해 10월 국무회의 의결될 2030-2050년 감축 시나리오가 당면한 교착상태를 타개할 거의 유일한 제도적 방법인 것 같다.

 

탄소중립위원회는 다양성을 제한하지 않고 전환과정에서 대안 레짐 형성을 가능케 하는 경계 확장자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감축 수치를 높이는 만큼 전환정책의 너비와 깊이에 대한 검토 방식 또한 바꿔야 한다. 개별 정책 차원의 '공정전환' 접근을 뛰어넘는, 비전과 목표, 전략과 정책, 소통과 협치를 포괄하는 광의의 '정의로운 전환'이 요구된다. 이와 동시에 맥락과 대상에 따라 향상 프레임과 예방 프레임을 구분하는 접근법을 통해 맞춤형 해결책을 도출할 수 있도록 기획해야 한다. 그리고 아일랜드(Ireland’s Citizens’ Assembly on Climate Change, 2016~2018)와 영국(Climate Assembly UK, 2020), 프랑스(France’s Convention Citoyenne pour le Climat, 2019~2021) 등의 '시민총회'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정해진 선택지에서 자유로운 상황에서 위기 탈출 솔루션을 학습하고 토론하고 합의하는 경계 작업이 가능해야 한다.

 

탄소중립위원회의 국민정책참여단 운영을 포함해 다양한 전환 주체 혹은 대상과의 공론화에 집중해야 한다. 육하원칙(5W1H)에 맞춰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에 대한 내러티브 없이 '퍼센트'''이 의미하는 바를 파악하기 어렵다. 이 지점에서 2017년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의 오류와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그때와 비슷한 과정과 결과라면, 올해 제도권에서 가능한 카드는 더 이상 없다. 결국 공론화로 시작해서 공론화로 끝나게 되는 5년 동안 에너지전환, 그린뉴딜, 탄소중립 패키지는 의지도, 실력도 없음을 철저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기록될 듯 싶다. 어쩌면 거대 양당의 적대적 의존관계라는 올드 노멀에서 반복되는 정상상태 시나리오일지 모른다. 지배적 정치경제적 조건에서 전면적 시스템 전환의 어려움을 입증하는 또 하나의 사건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기후위기보다 정치위기가 더 큰 문제라고 보는 게 맞다. 준비가 너무 늦었고, 그만큼 탈탄소 이행에 난관이 예상된다. 코로나 팬데믹에서 시스템 전반의 취약성이 고스란히 노출되었지만, 그 피해와 손실은 불평등하게 전가되었다. 기후위기의 메커니즘도 마찬가지다. 특히 시장 기반의 감축수단은 탄소 불평등을 심화시킬 수밖에 없다. 지불능력이 있으면, 감축하거나 상쇄하면서 다른 사람과 먼 나라의 탄소예산을 자기 것으로 취할 수 있다. 상대적으로 안전한 주거공간으로의 이동도 자유롭다. 오염 엘리트(polluter elite) 빌 게이츠가 구상하는 "기후재앙을 피하는 법"의 탈정치가 가져올 미래의 단면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치형 배출은 대폭 줄여야 하지만 생존형 배출은 적극 보장해야 한다.

 

부자만 오염 엘리트가 아니다. 잉여 가치를 추구하면서 잉여 배출을 활용하는 경제시스템이 근본 원인이다. 국가와 시장의 균형을 통해 "새로운 기후전쟁"을 제안하는 저명한 대기과학자 마이클 만은 나름 합리적인 관점을 보여주는데, 그의 정치적 메시지는 초당적 지지를 바탕으로 한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와 달리 실제로 초당적 협력을 유지하는 한국의 기후정치 상황에서는 비현실적으로 읽힌다. 나아가 소비자 영역인 소비 기준 배출과 함께 생산자 영역인 생산 기준 배출도 중요하며, 국가 경계 기준의 영토적 배출 계산에서 국제무역의 탈영토적 배출도 고려해야 한다. 인권과 정의의 관점에서 기후위기의 동학과 쟁점을 파악하는 데 조효제의 <탄소사회의 종말>(21세기북스, 2020)과 한재각의 <기후정의>(한티재, 2021)가 도움이 된다.

 

민주화 이후 자유민주주의의 경계가 확인된 마당에 그 한계를 넘어서려는 노력은 선거 국면에서도 중요하다. 그러나 전환 사회에 좋은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다. 때마다 기념하는 민주화처럼 탈탄소화를 기념할 때가 올까.

이정필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연구기획위원 프레시안 2020.07.05.

 

학력이 능력이라는 오해

편을 가를 때 내가 살던 지역은 이렇게 했다. 하늘과 땅이다~ 기울어도 모르기~ 이번엔 진짜~ 못 먹어도 소용없기~. 어느 한편으로 실력이 기울어 편을 잘못 먹어도 볼멘소리 없기다. 조금 다르게, 두 사람을 먼저 뽑아놓고 가위바위보를 하는 방법도 있다. 이긴 쪽부터 선수를 지목해 데려간다. 먼저 선발되면 우쭐하고 늦게까지 남겨지면 머쓱하다. 그래도 잠깐이다. 어울려 놀다 보면 저마다 제 역할을 찾아서 힘을 모은다. 그런데 기껏 가위바위보를 이긴 사람이 시험성적에 따라 편을 짜면 어떻게 될까? 비난받을 것이다. 성적과 놀이 실력은 전혀 상관없기 때문이다.

 

직무 실력과 학력도 마찬가지다. 학력(學歷)은 특정 교육기관이나 과정을 졸업하거나 이수한 이력일 뿐이다. 출신학교를 포함한 학력은 직무능력에 대해 설명해주지 않는다. 교육부가 차별금지법안에서 학력 삭제 의견을 낸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일었는데 의견서에서 교육부도 고백했다. “학력을 대신하여 개인의 능력을 측정할 수 있는 표준화된 지표의 사용이 일반화되지 않은 상황이라 과도한 규제라는 주장이 제기될 수 있다는 것이다. 2007년 법무부가 차별금지법안에서 성적 지향을 삭제할 때 슬쩍 학력도 뺐는데, ‘기업의 인력운용 전반에 중대한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경총의 반대 의견이 그랬나 보다.

 

학력이 직무능력과 비례하지 않음은 블라인드채용을 시행한 기업들에서도 확인된다. 굳이 필요하지 않은 학력 요건을 붙인 모집공고가 관행처럼 반복될 뿐이다. 고졸·초대졸·대졸의 직급을 구분하여 모집하거나 배치하는 경우도 많다. 서류전형에서 특정 대학 출신자에게 가산점을 주거나 우대하기 위해 면접점수를 조작하는 사건도 있었다. 어떤 학교 어떤 학과를 거쳤는지의 이력을 연줄댈 능력으로 환산해주는 건 아닌가. 일에 적합한 사람을 가려서 뽑을 줄 모르는 기업의 무능력 탓에 학력이 능력이라는 오해는 더욱 굳어진다. 그리고 피해는 애꿎은 사람들에게 돌아간다.

 

학력이 능력이라는 오해가 커지는 만큼 고졸자나 지방대 졸업생은 능력 없는 사람’ ‘노력하지 않은 사람으로 치부된다. 취업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의 전 영역에서 낙인효과에 처하고 있다. 대학진학률이 70%에 이르는 독특한 문화를 가진 한국사회에서 대학 비진학을 결정하는 중요한 이유는 원가족의 경제적 상황이다. 일찍 돈을 벌기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고졸 학력으로 취업할 수 있는 일자리는 제한적이고 임금도 낮으며 직장에서도 경력을 쌓을 기회가 잘 주어지지 않는다. 이 모든 불리한 처우는 손쉽게 고졸인 탓으로 돌려진다. 대졸자라고 상황이 크게 다르지는 않다. ‘대졸 프리미엄이라 불릴 만한 것이 희미해진 지는 오래고 서울 소재 4년제 대학 졸업정도가 되어야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 ‘지잡대와 같은 말이 등장하는 이유다. 한국사회에서 학력은 신분이다.

 

직원을 몇 명 뽑을지, 어떤 방법으로 모집하고 어떤 기준으로 채용할지 정하는 것은 기업의 몫이다. 그러나 기업에 차별할 자유를 주지는 않는다. 1994년 제정된 고용정책기본법은 출신학교 및 학력 차별을 이미 금지하고 있다. 별다른 규제 조치가 없으니 기업이 스스로 바꾸지 않을 뿐이다. 차별받은 사람이 차별에 대항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던 한계도 있다. 어쨌거나, 기업이 여태껏 학력 차별을 없앨 방안을 찾지 못한 게으름이 차별금지법의 차별금지사유에 학력을 명시하지 못할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사람을 데려갈 때, 사람대접하며 모시는 예의쯤은 갖출 줄 아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능력을 따지느라 전전긍긍하기보다 기울어도’ ‘못 먹어도함께하면서 서로 능력을 키울 줄 아는 사회라면 더욱 좋겠다. 놀이와 다르다고? 그래서 더욱 하늘과 땅의 차이가 하늘과 땅만큼 크지 않은 사회가 되어야 한다.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경향 : 2021.07.06

 

조선일보의 대선 놀이, 놀아나는 정객논객들

해괴한 풍경이다. 여러 조사에서 가장 불신 받는 신문이 의도적으로 설정한 의제에 내로라하는 정객과 논객들이 줄줄 놀아나고 있다. 더욱이 그 신문 논설위원과 TV조선 앵커가 금품수수 혐의를 받고 있는 상황이다. 주필 송희영의 비리가 드러나자 돌연 방대한 윤리규범을 만들었다며 한국 언론의 품격을 높이겠노라 호들갑 떨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문제의 논설위원은 윤석열 대변인으로 직행도 했었다.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대선 출마를 선언한 다음날이다. 조선닷컴은 오전 11시에 대한민국, 친일세력·점령군 합작깨끗하게 출발 못해제목으로 그의 발언을 큼직하게 머리로 올렸다. 기사는 그 발언으로 대선 과정에서 역사 논쟁이 불거질 전망이라고 보도했다. 그때까지 어떤 신문도 그 대목을 부각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딱히 기사 쓸 사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재명은 고향 안동의 이육사문학관을 방문해 대한민국이 다른 나라 정부 수립 단계와는 좀 달라 친일 청산을 못하고 친일세력들이 미 점령군과 합작해 그 지배체제를 그대로 유지했다며 독립운동으로 옥사한 이육사 시인에 충분한 예우나 보상을 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방점은 독립운동가 충분한 예우에 있다.

조선일보 731

 

조선닷컴에 이어 조선일보가 다음날 친일·미 점령군이 대한민국 수립이라는 제목을 1면에 내걸었다. ‘친일세력과 미 점령군이 합작해 지배체제를 유지했다는 발언을 대한민국 정통성 부정으로 깜냥껏 몰아갈 의도였다. 조선일보와 TV조선에 나오고 싶은 정객들이 너도나도 나섰다. 윤석열까지 등판했다. 이재명이 상식을 파괴하는 세력이자 역사 단편만 부각해 맥락을 무시하는 세력이란다. “용납할 수 없다고 으름장 놓았다. 공안검사 뺨치는 천박한 인식이다.

 

뒤늦게 중앙일보도 대선 역사전쟁이라고 대서특필했다. 사설 제목도 이재명의 위험한 인식이 촉발한 역사 논쟁이다. 최장집 교수까지 끌어왔다. 인터뷰에서 여권의 유력 대선주자조야한 역사의식과 함께 현대사의 이데올로기적 갈등을 다시 불러들인 것은 진정 실망스럽다고 말했다. 인터뷰가 최 교수의 진의를 담지 못했으리라 믿으면서도 궁금하다. 대체 이데올로기적 갈등을 다시 불러들인 것이 이재명인가, 조선일보인가.

 

이참에 또박또박 묻는다. ‘대한민국이 다른 나라 정부 수립 단계와는 좀 달라 친일 청산을 못하고 친일세력들이 미 점령군과 합작해 그 지배체제를 그대로 유지해 깨끗하게 나라가 출발하지 못했다는 말에 문제가 무엇인가. 그 말에서 대한민국 정통성 부정이라는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는가. 독립운동가 후손을 만나 제대로 예우하지 못했다며 배경을 설명하는 말이 조야한 역사인식이란 말인가.

 

친일파가 미군정과 손잡고 지배체제를 유지했다는 역사적 진실을 누구 감히 부정하려는가. 다름 아닌 조선일보의 어제와 오늘이, 백범 김구의 암살이 생생한 증거다. 대체 누가 상식을 파괴하는가. 누가 단편적 지식으로 맥락 잃은 인식을 자랑하고 있는가. 누가 극우 신문이 공직자의 사상을 검증하는 놀이에 용춤 추는가. 오해 없도록 명토박아둔다. 이는 특정후보에 대한 찬반이나 호오 문제가 아니다. 민주주의와 공론장 문제다. ‘과거 농단은 과거 문제도 아니다. 미래 문제다.

 

깨끗하지 못했던 출발을 4월혁명, 5월 민중항쟁, 6월 항쟁, 촛불혁명으로 지며리 가꾸어 온 것이 대한민국 정통성이다. 더 나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친일반민족 언론이던 신문의 불순한 의도에 들꾀어선 안 된다.

 

가장 불신 받는 언론이 작심하고 덤벼든 대선 놀이를 경계해야 할 섟에 되레 숱한 정객과 논객이 놀아나고 심지어 명망 있는 학자까지 동원하는 언론 행태는 단순히 안타까운 일이 아니다. 살풍경이다./손석춘 건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미디어오늘 2021.07.06.

 

윤석열의 우파본색

예상보다 강경 보수본색을 드러낸, 문재인 정부를 향한 격문을 방불케 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대선 출사표가 환기시킨 장면이 있다. 201978문재인 정부 검찰총장윤석열 인사청문회에서 정치 성향이 도마에 올랐다. 야당이 코드 인사를 집중 문제 삼자 백혜련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방어에 나섰다. “사회의 점진적 변화를 중시하고, 주적은 북한이고, 국가보안법도 필요하고. 실질적으로 평가하면 보수 쪽에 가까운, 문재인 대통령의 정치적 성향과는 오히려 먼 부분이 많다고 생각한다.” 웃음으로 대신하려는 윤석열 후보자에게 백 의원은 한 번 더 묻는다. “본인의 성향이 민주당과 일치하거나 문 대통령과 일치하는 건 아니죠?” 윤석열의 대답은 간명했다. “그렇습니다.” 윤석열은 애초 민주당이나 문재인 정부와 친연성이 없는 보수다.

 

자유라는 말을 여러 번 하는 것을 듣고 윤석열 이분이 이렇게 보수적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승민 전 의원조차 놀랄 정도로 윤석열의 대선 출마선언문은 강한 보수색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국민약탈, 독재, 부패완판, 망상, 역사의 죄 등 문재인 정부를 향한 핏빛 언어가 즐비한 출마선언문을 관통하는 것은 보수우파의 자유민주주의이데올로기다. 출마선언문에서 23차례나 자유를 언급했다. 빈약하지만 경제, 공정, 청년, 미래 등을 말할 때도 자유가 등장했다. 문재인 정부 공격 지점에서는 어김없이 자유민주주의의 위기가 동원됐다. 한마디로 출사표를 요약하면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문재인 정권은 헌법의 근간인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빼내려 합니다. 자유가 빠진 민주주의는 진짜 민주주의가 아니고 독재요 전제입니다. 도저히 이들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습니다.” 경제나 사회 정책의 입장으로 자유민주주의 철학을 제시한 게 아니다. 뉴라이트 사관에 뿌리를 둔, 박근혜 정부의 국정 역사교과서 추진 동기였던 그 자유민주주의를 대선 출마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윤석열은 정치로 진입하면서 제일 먼저 진짜 보수가 맞느냐는 의구심을 품은 보수 지지층에게 자유의 깃발을 펄럭이며 나는 보수다라고 선언한 셈이다. ‘공정정의가 브랜드가 되어 중도·무당파와 2030세대의 지지를 확보한 정치인 윤석열의 근육이 휘어지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보수 정체성을 분명히 했다. 정권교체 지수가 50%를 넘나드는 정치 지형에서 집권을 위한 전략으로 보수색을 분칠했다기보다는 뼛속 깊은 우익의 DNA가 정치참여선언을 하면서 발현되었다고 보는 게 타당할 터이다.

 

실제 윤석열의 자유민주주의 신봉은 뿌리가 깊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질서의 본질을 지키는 데 법 집행 역량을 더 집중시켜야 한다”(20197월 검찰총장 취임사) “자유민주주의는 민주주의라는 허울을 쓰고 있는 독재와 전체주의를 배격하는 진짜 민주주의다”(20208월 신임검사 신고식) “어떤 위치에 있든 자유민주주의와 국민을 보호하는 데 온 힘을 다하겠다”(34일 검찰총장 사퇴의 변) “자유가 빠진 민주주의는 진짜 민주주의가 아니고 독재요 전제이다”(629일 정치참여선언문). 검찰총장 취임사부터 대선 출마선언까지 연결해보면 윤석열의 노선이 확연히 그려진다. 2018년 개헌 추진 당시 헌법 전문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서 자유를 빼려고 했던 것에 윤석열은 꽂혀 있다. 검찰총장 재임 시절부터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정권을 그냥 놔둘 수 없다는 이념적 도그마에 빠져 있었던 셈이다. 그게 날것으로 표출된 게 대선 출마선언문이다.

 

국민의힘은 진보적 의제인 기본소득을 정강정책 1호로 삼고, ‘036세 당대표를 내세울 정도로 진화했다. 윤석열의 자유민주주의는 국민의힘보다 자유한국당, 아스팔트 우파에 가까운 강경 보수노선이다.

 

이재명 경기지사의 미 점령군발언을 기화로 불붙은 역사 논쟁이 윤석열의 극우성을 드러냈다. ‘미 점령군이라는 이 지사의 발언을 두고 대한민국 정통성을 부정” “잘못된 이념을 추종등 대대적인 이념공세·색깔론을 펼쳐든 윤석열의 모습은 낯설지 않다. ‘건국 논쟁때 기승을 부린 극우의 역사관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이번 역사 논쟁은 음울한 예고편이다. 문재인 정부의 안티 테제로 매우 이념적인 자유민주주의를 세우고 등판한 윤석열의 존재는 내년 대선이 진영 간의 증오 정치와 함께 이념 전쟁이 될 수도 있음을 가리킨다. 진보와 보수의 이념적 대립이 뾰족해질 경우, 국가 미래를 위한 경쟁은 설 땅이 없어진다/ 양권모 편집인 경향 : 2021.07.07.

 

 

세대 문제에 대한 단상

최근에 이대남이니 이대녀라는 신조어가 자주 등장한다. ‘386’이나 ‘586’으로 지칭되는 세대 문제와 관련된 조어가 등장한 지는 제법 오래되었다. 새로 등장한 이 조어가 남녀를 구분해 사용된다는 점에서는 과거와 다르다. 최근 한국 사회의 정치사회적 변화와 밀접한 연관 속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은 쉽게 감지할 수 있다.

 

일상적으로 자주 언급되는 세대교체처럼 세대는 우선 사회적 변화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생물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사회 문제의 핵심으로 일찍부터 등장한 계급이나 계층 문제보다 세대 문제는 성(젠더) 문제와 함께 비교적 뒤늦게 학문적 연구 대상이 되었다.

 

유럽에서 세대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된 배경에는 프랑스혁명 이후 과거 사회질서와의 단절 과정에서 인간의 삶의 과정을 합리적으로 나누어 보려는 강한 욕구가 자리하고 있었다. 특히 젊음과 낭만이 분출해 내는 힘에 초점을 둔 세대에 대한 여러 생각은 문학과 예술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세대를 자연과 문화 사이에 걸린 복합적인 문제로 보고 본격적인 사회학의 연구 대상으로 삼았던 사회학자는 카를 만하임(1893~1947)이다. 그의 <지식사회학>에 수록된 논문 세대 문제’(1928)는 세대 문제 연구에서 지금도 여전히 비켜갈 수 없는 고전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유대계로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교수였지만 나치 집권으로 영국으로 망명했다.

 

세대를 단순하게 30년 또는 15년 등으로 구분하려는 생물학적 접근과 달리 만하임은 우선 세대 문제와 사회 변화를 상호작용 속에서 파악했다. 세대는 개인들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지만 구체적인 조직의 성원이 아닌, 단순한 관계라고 파악했다. 이 점에서 세대 문제는 계층 문제와도 유사성을 지닌다.

 

사람은 모두 어떤 세대에 속하기 마련이다. 조직에서 탈퇴하는 것처럼 마음대로 벗어날 수 없지만 문화적으로 구성된 어떤 의식과 기억계층에 속하기 마련이다. 이로 인해 어떤 사건에 대하여 동년배와 함께 비슷한 관점에 서게 된다. 세대는 장기간에 걸쳐 형성되는 문화의 틀 속에서 동시적으로 움직이는 하나의 기억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공간적인 의미의 고향이 뿌리를 같이한 사람들 사이에 친근감을 자아내듯이 특히 정치사회적인 큰 격변기에 얻은 체험과 기억은 일종의 시간적인 고향을 위한 자양분을 제공한다. 이 때문에 정치적 세대는 항상 세대 문제의 중심이 되었다. 1차 세계대전과 그 이후의 극심한 혼란기를 겪었던 만하임이 세대 문제를 제기하게 된 동기도 마찬가지였다.

 

세대 문제에 있어서 ‘68세대는 자주 논의되는 대상이다. 전후의 권위주의와 반공주의의 두꺼운 벽을 부순 이 세대의 저항 중심지 중 하나였던 프랑크푸르트에서 20대 중반을 보낸 나에게도 ‘68’은 특별한 숫자로 기억에 남아 있다.

 

그러나 같은 체험공간에서 비슷한 기억을 나눈 세대라고 해서 모두 한 무리로 취급할 수 없다. 세대갈등의 표현방식이 다른 문화권에서 성장한 내가 쉽게 동의할 수 없는 사건도 있었다. 19694,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거두 아도르노(1903~1969)의 강의실에 세 여학생이 상의를 벗은 채 꽃을 들고 제도로서 아도르노는 죽었다고 그를 희롱했다. ‘유방 저격이라고도 불렸던 이 사건은 하나의 해프닝이었다고 하지만 나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교수를 만나려면 정장을 해야만 하던 시절이었다. 이 사건이 직접적 원인은 아니었겠지만 아도르노는 넉 달 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뒤에 오는 세대는 이전 세대보다 더 과격하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같은 세대에 속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똑같은 방식으로 기억문화를 공유하지 않는다. ‘사회주의 독일 학생동맹’(SDS)1968년 저항운동의 핵심이었지만 이의 노선을 비판한 보수적인 학생운동도 있었고, 지식인 중심의 저항운동이다 보니 동년배의 노동자는 당연히 소외감을 느끼게 되었다.

 

같은 기억을 나누었던 세대의 대표적이거나 상징적인 인물이 자신을 포함해서 그의 세대가 함께했던 정서, 경험 그리고 행동양식을 적극적으로 부정하는 예도 적지 않다. 서독 68세대의 정치적 성향 가운데 가장 극좌적이었던 적군파를 법정에서 변호했던 호르스트 말러(1936~)는 후에 1990년대부터 반유대적인 극우주의자가 되었다. 미국 신보수주의(네오콘)의 대부 격인 두 인물, 어빙 크리스톨(1920~2009)과 네이션 글레이저(1923~2019)도 젊은 시절에는 트로츠키주의자였다. 그러나 점차 우경화하면서 1960년대 신좌익의 반전운동을 앞장서서 비난했다. 두 사람 다 유대계로서 가난한 자의 하버드라 불리는 뉴욕시립대학 출신이다.

 

한국 사회의 세대 논쟁을 뒤돌아보아도 이와 비슷한 현상을 볼 수 있다. 이른바 386(586)세대로서 민주화와 통일운동의 선봉에 섰던 인물 가운데도 자신의 이력서에서 젊은 날의 흔적을 깡그리 지우는 경우가 적지 않다. 또 과거의 가치관에 갇혀 있으면서 기득권을 독점하고 도덕적으로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위선적인 세대라는 비난도 받는다.

 

세대 문제와 관련된 이런저런 내용을 염두에 둘 때 한국에서 세대라는 개념은 분석적이고 객관적이라기보다는 다분히 주관적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개인 이력을 확대 해석해서 집단화하는, 이력서에 근거한 은유(隱喩)로서 세대 문제를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386(586)세대와 관련된 중앙일보의 한 여론조사(2019927)와 이른바 이대남이대녀문제를 다룬 KBS세대 인식 집중 조사’(2021624)가 있다. 앞의 여론조사는 설문에 이미 답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20대 응답자의 3분의 1가량이 ‘386(586)세대의 뜻을 모르기에 설문에 앞서 이를 설명했다고 한다.

 

그만큼 이들에게는 관심 밖의 주제였다. ‘386세대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단어를 하나만 꼽아달라는 설문에서 1위가 민주화 투쟁이었고 이어서 내로남불이었다. ‘386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을 꼽아달라는 설문에서는 1위가 조국이었고, 이어 안철수였다. 그러나 조국과 안철수가 함께 선정될 수 있을 정도로 이들 사이에 정치적 세대의 이력에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뒤에 언급된 KBS의 집중 조사를 둘러싸고 특히 논란이 많다.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드러난 20대의 투표 성향의 의미를 재확인하는 문항의 응답 결과에 대한 해석을 일부 매체는 특별히 문제 삼았다. ‘기회가 되면 내 것을 남에게도 나눌 것이다라는 설문에 청년 남성의 대부분이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해석 때문이다. 보수 야당에 몰표를 던진 반공동체적이고 이기적이라고 생각되는 이대남을 겨냥한 해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 역시 늙음과 젊음을 정적-동적, 닫힘-열림, 만족-욕구 등 다른 관계 안에서 보려는 20대를 과거처럼 보수-진보 또는 우익-좌익이라는 이분법으로 재단하기는 마찬가지다. 스마트폰과 함께 성장한 세대는 과거와 달리 한 사회에만 갇혀 있는 20대가 아니라 자기실현을 극대화하려는 세대다. 열린 지구촌에서 오늘을 함께 사는 이른바 ‘M세대의 성원이기도 하다.

 

세대 문제 접근에 있어서 흔히 자기과시가 강한 그 세대의 상징적인 인물에게 초점을 맞추게 된다. ‘이준석 돌풍도 이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체험공간을 같이했으나 다른 경험과 기억을 갖게 된 이른바 조용한 세대의 이야기는 쉽게 잊는다. 또 다른 문제는 세대 문제 접근이 주로 단절에 방점을 두다 보니 세대 간 갈등만 강조되고 세대 간 소통 문제에는 별로 눈을 돌리지 않게 된다. 최근 들어 심리분석과 교육학이 세대 간의 지속적인 감정유산(感情遺産)’을 특별히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공공성(公共性)’을 위한 세계는 오로지 한 세대를 위해 만들어졌거나 또는 살아있는 자들을 위해서만 계획된 것이 아니다. 유한한 인간의 짧은 삶의 구간을 넘어서야 한다고 한나 아렌트(1906~1975)<인간의 조건> 속에 남긴 경고가 생각난다.

 

한국 사회에서 세대 간 갈등은 아직 정치적 이념 갈등처럼 첨예하게 표출되지 않지만, 최근 페미니즘 논쟁과 더불어 세대 문제도 심각하게 제기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떠오르는 생각을 간단히 적어보았다.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경향 : 2021.07.07.

 

서세원과 유재석, 그리고 윤석열

예측대로였다. ‘거침없는 스타일공허한 콘텐츠’.

29일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국민 기자회견을 본 개인적 소감이다. 대통령선거 아니라, 작은 조직이라도 선출직에 나서는 사람은 세가지 물음에 답을 갖고 있어야 한다. ‘왜 나오나’, ‘무엇 하려 하나’, ‘왜 당신이어야 하나등이다. 기자회견에서 나타난 윤 전 총장 답변은 반문(문재인) 정권교체 하러 나왔다’, ‘자유민주주의 하겠다’, ‘국민들이 나를 원한다(여론조사 1)’로 요약된다.

 

한가지 분명히 드러낸 점은 자신을 보수 후보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했다는 것이다. 회견에서 자유민주주의와 법치, 호국 등을 강조한 것도 보수층 마음을 얻겠다는 나름의 전략으로 보인다. 그러나 추가적 설명이 부족한 탓에 그가 말하는 자유민주주의가 오래전 자유대한’, ‘멸공통일용어처럼 들렸다.

 

이전까지 윤석열은 이념적 색채가 상대적으로 옅었다. 평소 나는 원래 보수주의자라고 말해왔다곤 하나, 윤석열은 그저 좌든 우든 가리지 않고 걸리면 수사하는전형적 특수부 검사일 뿐 이념적으로 경도된 이미지는 상대적으로 약했다. 그러나 이날 기자회견을 기점으로 윤석열은 국민의힘 안에서도 오른쪽으로 깊숙이 들어간 모양새다. 국민의힘 주자들 가운데에도 유승민, 원희룡보다 홍준표, 황교안 쪽에 가까워졌다.(공교롭게 3명 모두 검찰 출신이다)

 

윤 전 총장이 보수 본색을 드러낸 건 별문제 아닐 수도 있다. 엑스파일이나 도덕성 검증도 어쩌면 엠비(MB·이명박) 때처럼 그래서, 어쨌다고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보수든 진보든 준비되지 않은후보는 곤란하다. “월드컵이 경험 쌓기 위해 가는 곳이 아니라는 이영표의 말처럼, 대통령은 훈련하는 자리가 아니다. 대선을 불과 몇달 남겨두고 깜짝쇼처럼 등장해 벤처 투자노리는 전문가 규합하고, 팬클럽 형성하고, 민심 탐방하고, 세몰이하는, 마치 오락 프로그램 서바이벌 게임처럼 대선이 진행되는 건 이제 그만두어야 한다. 미국의 경우, 대통령은 거의 다 상원의원 또는 주지사 출신이다. 오랜 기간 학습이 아닌, 정치적 훈련과 경험을 축적한 이들이다. 예외가 도널드 트럼프다.

 

그리고 29일 회견에서 더 우려되는 건 빈약한 콘텐츠보다 넘치는 자신감이다. 자신감이 넘치면, 준비가 소홀해진다. 온라인에서 화제가 된 도리도리’(좌우로 머리를 흔드는 것) 등을 보면, 예행연습도 별반 하지 않은 듯하다. 윤석열은 아마 평생 단 한번도 꿀린 적이 없었을 듯하다. 교수 아버지 밑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고, 덩치도 커 어디 나가 맞아본 적 없었을 것이고, 공부 잘해 서울 법대 갔고, 사법시험에서 비록 9수를 했다 하나 신림동 고시촌 맏형으로 지냈고, 검찰에서도 저는 사람에 충성하지 않습니다라는 말처럼 가오 한평생을 살았을 수 있다. 그래서 무섭다.

 

윤 전 총장은 문재인 정부와의 불화로 컸다. 그가 추천한 이들은 검사장 인사에서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2019년 그가 막 검찰총장이 됐을 때는 정반대였다. 대검찰청 검사장급 인사 7명 중 3명을 이른바 윤석열 사단으로 채웠다. 또 고위간부 인사 39명 중 80% 정도를 특수통으로 채웠다. 검찰 내부에서 윤석열 스타일이라 하면, ‘목표 정하면 어떻게든 결과물을 이뤄낸다는 것과 맏형 리더십’, ‘자기 식구 잘 챙기기로 일컬어진다. 다른 총장들도 다 내 새끼챙기고 싶었겠지만, 주위 눈 의식해 그렇게 못 하고, 안 하고, 덜 했다. 그런데 윤석열은 좀 달랐다 한다. 최근에도 (인사 물먹은) 검찰 후배들에게 전화를 걸어 위로했다는데, 검찰을 떠나 대선 후보로 나선 이로선 매우 부적절한 처신이다. 거침없는 윤석열 스타일이란, 다른 말론 제어와 절제가 부족하거나 없는 것으로도 읽힌다. 만일 검사 윤석열 스타일이 국정 운영에 그대로 옮겨진다면 큰일이다.

 

과거 리더란 대범하고, 거침없고, 추진력 있는 이여야 했다. 그러나 무데뽀의 시대는 갔다. 오히려 섬세한 소심함이 시대정신에 더 가깝다고 본다. ‘서세원이 아닌, ‘유재석이 필요한 때다./권태호ㅣ에디터부문장 한겨레 : 2021.07.07.

 

여론조사로 정치가 망가지고 있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629일 대선 출마를 발표한 다음날 국회 기자실을 찾아와 <세계일보> 기자들에게 그때 그 조사 아니었으면 내가 여기까지도 안 왔다고 말한 2020131일치 <세계일보> 기사. 아이서퍼 갈무리

 

차기 대선 주자 여론조사에서 윤석열 전 검찰총장 지지도가 조금 떨어졌다. 부실한 출마 선언과 장모 구속이 단기 악재로 작용했을 것이다. 대선 정국, 특히 야권의 지형은 당분간 윤석열 전 총장 지지도가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 같다.

 

첫째, 지지도가 오르면 윤석열 전 총장이 국민의힘을 제치고 정국 주도권을 쥘 것이다. 정당을 새로 만들어 국민의힘을 흡수하거나 선거 직전 후보 단일화를 시도할 가능성이 있다.

둘째, 지지도가 내려가면 정국 주도권은 국민의힘으로 넘어간다. 윤석열 전 총장은 국민의힘에 입당해서 홍준표, 유승민, 원희룡 등 당내 주자들과 경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셋째, 지지도가 급속히 떨어지면 대선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 빈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야권 주자들의 각축이 벌어질 것이다. 최재형 전 감사원장이 대체재로 약진할 수도 있겠다.

어떤 경우든 앞으로 계속 쏟아질 여론조사 수치에 윤석열 전 총장과 보수 야권의 운명이 달린 셈이다.

 

정치인 윤석열의 시작도 여론조사였다. 629일 대선 출마 선언에 이런 내용이 있다.

공직 사퇴 이후에도 국민들께서 사퇴의 불가피성을 이해해주시고 끊임없는 지지와 성원을 보내주셨습니다. 저는 그 의미를 깊이 생각했습니다. (중략) 정권을 교체하는 데 헌신하고 앞장서라는 뜻이었습니다.”

 

다음날 국회 기자실을 찾았다. <세계일보> 부스에서 그는 기자들에게 그때 그 조사 아니었으면 내가 여기까지도 안 왔다고 했다. 2020131일치 윤석열, 새보수·무당층 지지 업고 급부상기사를 얘기한 것이다.

 

당시 <세계일보> 여론조사는 이낙연 32.2%, 윤석열 10.8%, 황교안 10.1%, 이재명 5.6%, 박원순 4.6% 순서였다.(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누리집 참고) 현직 검찰총장이 제1야당 대표를 따돌리고 2위로 올라선 첫번째 여론조사였다. 윤석열 전 총장의 발언은 여론조사 때문에 정치적 야심을 갖게 됐다는 고백인 셈이다.

 

여론조사는 밴드왜건 효과를 수반한다. 밴드왜건 효과는 대중적으로 유행하는 대세를 따라 상품을 구매하는 소비 현상이다.

 

그런데 현실 정치에서 여론조사의 폐해는 바로 이 밴드왜건 효과 때문에 발생한다. 특히 반정치주의에 기대어 정치에 진입하는 정치 문외한들을 막기 힘들다. 당사자의 착각 때문이다.

2011년 박원순 변호사에게 서울시장 보궐선거 후보를 양보하고 인기가 치솟자 2012년 대선에 나섰던 안철수 대표가 그런 경우였다. 2017년 탄핵으로 폐허가 된 보수세력의 대안으로 떠올랐던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도 그런 경우였다.

하긴 명예욕과 권력욕은 인간의 원초적 욕구다. 멀쩡했던 사람도 여론조사 수치가 갑자기 올라가면 눈이 돌아간다. ‘내가 바로 하늘이 낸 대통령일지도 모른다거나 나는 워낙 똑똑하기 때문에 대통령 정도는 얼마든지 잘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렇지는 않다. 고건·정운찬 전 국무총리는 여론조사 호출에 응하지 않고 물러서는 바람에 체면을 지켰다.

민심을 읽어야 하는 정치에서 여론조사는 필수다. 그러나 참고만 해야 한다. 여론조사는 기본적으로 무책임하다. 단순한 선호도 조사가 열의를 가진 진짜 관심층의 고뇌에 찬 정치적 선택을 대체할 수 없다.

 

정권 교체 여론이 정권 유지보다 높은데 이재명 경기지사가 윤석열 전 총장을 이긴다. 같은 조사에서 그런 결과가 나온다. 모순이다. 당내 경선과 후보 단일화를 여론조사로 하는 것은 사실상 도박이나 다름이 없다. 그게 우리 정치의 현실이고, 수준이다. 부끄럽다. 대안이 없는 것도 아니다. 선거인단을 모집해서 모바일로 투표하면 된다. 과거처럼 돈 주고 당원을 모집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조직 동원을 아무리 해도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민심을 이기지 못한다.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선거인단 투표 50%, 여론조사 50%를 반영해서 선출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100% 여론조사로 바꾸자는 의견이 있다. 홍준표 의원이 그럼 뭐 하러 직접 투표하나. 여론조사 기관하고 해버리지라고 일갈했다. 홍준표 의원의 말이 옳다.

선출직 공직자를 뽑는 투표는 주권자인 국민이 권력을 행사하는 신성한 절차다. 당내 경선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여론조사 경선은 하면 안 된다.

성한용 정치부 선임기자 shy99@hani.co.kr/ 한겨레 :2021-07-07

 

 

기후정의법'이 아니면 그만두라

가짜 기후위기 법만 만지작거리는 국회, 차라리 가만히

국회에서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법안 논의가 이제야 진행 중이다. 작년 하반기, 정부가 그린뉴딜과 탄소중립을 천명하였고 국회는 9월에 결의문을 통해서 기후위기 비상상황을 선언하였다. 8월에 일찍 법안을 발의한 정의당을 시작으로, 작년 말에는 민주당과 국민의힘 의원들도 관련 법안을 여러 개 발의하였다. 민주당 측에서는 올해 2월까지는 이 법안들을 처리하여 탄소중립을 법제도적으로 뒷받침하겠다고 각오를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국회는 이 법안들을 제쳐두고, 부산 재보궐 선거를 앞두고 가덕도 신공항 특별법만을 서둘러 처리했을 뿐이다. 비상상황이라고 아무리 천명하더라도, 선거를 앞둔 보수정당들에 기후위기는 언제든 무시해버릴 대상이라는 '진실'을 새삼 확인했다. 국회가 결의문에서 약속한 기후위기특별위원회 설치 논의도 시작되지 않았다. 그 탓에 법안 심의는 기존의 환경노동위원회에서 진행되고 있는데, 그나마 기획재정위원회에 발의된 관련 법안을 환경노동위원회로 이관하여 논의하기로 한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상황이다.

 

현재까지 7건의 관련 법안이 발의되어 있고, 정부는 이를 종합한 대안 법안을 제시하고 있다. 이 법안들에는 수많은 쟁점이 놓여 있지만, 정부여당이 터무니없이 서두르고 있어서 충분한 논의 없이 날림 통과가 걱정된다. 5월말 P4G 회의 개최에 맞춰 법적 기반 없이 탄소중립위원회를 출범시킨 후에, 사후적으로 법적 지위를 부여하기 위해 서둘고 있기 때문이다. 기후위기 대응법이 필요하다고 지속적으로 주장해온 입장이지만, 이렇게 날림으로 법안을 통과시켜서는 안 된다.

 

먼저 불거진 쟁점은 이명박 정부 때에 만든 '저탄소녹색성장기본법'(이하, 녹색성장법)을 폐지하고 새로운 법령을 만들 것이냐, 말 것이냐다다. 국민의힘 소속 법안심사소위 위원장, 임이자 의원은 녹색성장법을 개정해도 탄소중립 추진의 법적 기반으로 충분하다고 고집하고 있다.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정하고서도 석탄발전소를 새로 짓는 모순적인 행동을 한 정부가 내세운 '녹색성장'을 되살리자는 주장에 많은 이들이 황당해하고 있다. 정부여당은 국민의힘의 고집에 밀려 '탄소중립 녹색성장법'이라는 대안을 제시해놓고 있다. 이런 타협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민주당은 '녹색성장'을 거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좀 긴 설명이 필요하기 때문에, 뒤에서 다시 짚어보겠다.

 

다음으로 부각된 쟁점은 2030년 감축목표(NDC)를 얼마로 정할 것인지, 또 그것을 법에 명시할 것인지에 있다. 대통령이 여러 번 NDC를 상향하겠다고 국제사회에 공언했고, 송영길 민주당 대표는 (2017년 대비) 40% 내외의 감축목표를, 그리고 홍정기 환경부 차관은 2018년 대비 37.5% 감축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정의당과 기후위기 비상행동은 2010년 대비 50% 이상 감축을, 청소년기후행동은 2017년 대비 70% 감축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차이는 기후위기의 심각성과 기후정의 관점에서 한국이 져야 할 책임이 어느 정도인가를 둘러싼 논쟁을 불러온다. 송영길 대표와 홍정기 차관의 발언은 IPCC 전지구적 감축 권고치(2010년 대비 50% 감축)에도 부합하지 않을뿐더러, 기후정의 원칙을 감안한 청소년기후행동의 요구와도 거리가 한참 멀다. 하지만 정부여당은 민주적 토론보다는 기술관료적 결정을 더 선호하고 있는데, 관료들이 쉽게 주무를 수 있는 시행령에 감축목표치를 담자고 제안하고 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 은근슬쩍 시행령을 바꿔서 후퇴시켰던 역사를 쉽게 잊을 수 없다. 아직껏 아무런 해명과 사과도 없다.

 

이외에도 잘 부각되지 않았지만 짚어야 할 쟁점은 너무 많다. 특히 탄소중립목표 및 흡수원의 활용에 대해 엄격한 토론이 필요하다. 2050년 탄소중립은 여야가 이견이 없지만, 기후정의의 관점에서는 잘못되었다. 온실가스를 감축하는 대신 흡수원을 이용할 수 있다는 접근은 화석연료 채굴과 이용 금지 목표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또한 탄소환원주의 아래 숲과 나무를 단순히 이산화탄소를 빨아들이는 흡수원으로만 간주하는 경향을 강화한다(산림청의 30억 그루 사업을 상기하라). 무엇보다도 위험하고 효과성도 의심되는 탄소포집이용저장(CCUS) 기술을 정당화한다. 정부의 탄소중립 전략과 시나리오, 그리고 대안 법안에도 CCUS가 상당한 비중으로 포함되고 있다. 비상행동이 제안한 기후정의법안은 배출제로와 탄소중립을 구분하고 있고, 화석연료 사용을 중지하는 탄소제로를 원칙으로 하되, 제한적인 수준에서 국내의 숲에 대한 흡수원만을 인정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철저히 무시되고 있다.

 

탈탄소 전환을 추진하면서 버려야 할 에너지원으로 화석연료 이외에도 핵에너지를 명확히 포함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문재인 정부의 탈핵 정책을 지속적으로 방해하였던 국민의힘, 그리고 그 후보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윤석열 씨는 핵발전을 기후위기 대안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기후선진국들은 EU에서 핵발전은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명확히 밝히고 있을 뿐더러, 국내 기후위기 비상행동 역시도 단호히 거부하고 있다. 반대로 지향해야 할 에너지원으로 신에너지를 제외한 재생에너지임을 분명히 해서 혼란을 없애는 것도 중요하다. 특히 석탄에 기반을 두고 있는 IGCC(석탄가스화복합발전)이나 천연가스를 개질해서 얻는 수소(소위 그레이수소)를 제외해야 한다.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에너지를 기후위기 대응 법안에 담을 수 있다는 발상은 그 기술을 둘러싼 기존 이해관계가 얼마나 강고한지 보여준다. 분쇄해야 한다.

 

다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녹색성장 프레임에서 벗어날 것이냐다. 필자는 지난 1월에 칼럼을 쓰면서 논의중인 기후위기 대응법은 "'탈탄소경제법'이 아니라 '기후정의법'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기사 바로 보기). 긴박한 탈탄소 사회로의 전환은 경제성장에 대한 집착 속에서 기업들을 해결 주체로 삼아 보호하고 지원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후위기의 책임이 적지만 그로 인해 피해를 떠안고 있는 민중들을 해결 주체로 세워 정부와 기업의 책임을 묻는 방식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늑장인 기후위기 대응법안 논의는 새로운 길을 거부하고 있다. 민주당과 국민의힘 의원들이 발의한 법안들이 애초 녹색성장기본법에 토대를 둔 것이어서 녹색성장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민주당에서조차 이명박에 의해서 녹색성장 개념이 오염되었을 뿐, 국제사회가 추구하는 개념이라는 옹호가 나오고 있다. 야당 시절 녹색성장 비판은 당시 정권에 대한 반대였을 뿐, 새로운 길을 열기 위한 노력이 아니었던 셈이다. 여전히 기업은 보호하고 육성하여 기후위기를 해결하겠다는 지배적인 접근 위에 기후정의니 정의로운전환이니 하는 유행하는 장식품만을 올려두고 있다.

 

민주당의 대표적인 법안인 이소영 의원안의 경우, "탈탄소경제의 실현"이라는 장을 두고 "국가경제의 건성성과 경쟁력을 강화하고 성장잠재력이 큰 새로운 탈탄소산업을 발굴육성"하기 위해 9개 조항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는 기업들의 탄소배출량, 감축실적 및 감축계획의 공개등과 같은 기업이 부담으로 느낄 만한 내용이나 일자리 창출과 같은 사회적 관심사도 언급되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기업들이 반길만한 선물들로 가득차 있다. 몇 가지만 꼽아보면 아래와 같다.

 

탈탄소기술 연구개발 및 사업화 등의 촉진을 위한 금융지원(51), 탈탄소경제 및 탈탄소산업 지원을 위한 재원의 조성 및 자원 지금, 기반시설 구축 사업에 대한 민간투자 활성화(52), 탈탄소기술탈탄소산업에 대한 보조금 지급, 우선적인 신용보증 혹은 보증조건의 우대, 소득세법인세취득세재산세등록세 등의 감면, 고충을 조사하고 불합리한 규제 등의 시정(53), 집적지 및 단지 조성, 그 소요 비용의 전부 및 일부를 출연(55), 자산가치 하락의 위험이 있는 기업의 조기 전환 지원(57)

 

당연한 이야기지만, 국민의힘의 법안에도 들어가 있는 조항들이다. 정부 대안 법안에서도 거의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이런 조항을 통해서 그동안 온실가스를 거대하게 배출해오던 기업들은 친환경 기업들로 전환할 것을 약속하고 막대한 정부 지원을 얻고 기존의 막강한 권력을 계속 유지하게 될 것이다. 온실가스는 줄일지 모르지만 사회적 불평등은 여전한 세상이 예고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원하는 미래가 아니다.

 

반면에 기후행동과 정의당이 제안하고 있는 정부와 기업의 책임을 묻는 조항은 거부했다. , 대안 법안에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정책 추진 과정에서 발생한 기후위기 피해와 손실에 대해 보상해야 할 책임을 가진다""온실가스 배출로 인한 기후위기의 책임을 지닌 사업주는 기후위기에 따른 피해와 손실에 대해 보상해야 할 책임을 가진다"는 문구는 거부되었다. 환경부는 책무규정에는 실체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인 손실보상은 담을 수 없다는 법리적인 이유를 제시하고, 정의로운 전환을 통한 포괄적 지원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정의로운 전환 요구는 민중들의 권리일 뿐, 정부와 기업의 책임을 추궁하는 것과는 별개다. 행동하지 않아서 위기를 유발하고 가속화한 책임을 묻지 않고, 오히려 선물을 잔뜩 안겨다 주는 법은 기후정의법이 아니다. 또 기후위기를 벗어날 과감한 온실가스 감축도 불가능해진다.

 

제대로 기후위기를 대응할 수 있는 법이 아니라면, 하는 척하는 것이 더 위험하다. 게다가 잘못된 해결책을 담고 있는 법이라면 차라리 만들지 않는 것이 낫다. 기후정의법이 아니라면 그만두라./ 한재각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연구기획위원 | 프레시안 2021.07.09.

https://ecosophialab.com/tag/%EA%B3%B5%EC%9C%A0%EC%A7%80/

 

대한민국은 ○○공화국이다

세종시청에서 뜻밖에 멋진 연극을 보았다. 2021년 대한민국연극제(안동·예천)에 오를 작품, ‘마음의 준비. 제목만 봐도 어떤 내용인지 궁금하다. 누군가 임종 직전, 의사가 가족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 연극은 평소에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귀띔한다. 스토리는 크게 두 갈래다. 하나는 투렛증후군 탓에 말을 더듬고 욕을 해대는 여고생 하늘이얘기다. 다른 하나는 출생의 비밀을 숨기려 돈과 명예에 매달리는 의사 서 박사얘기다. 하늘이는 부모의 무관심, 불화와 폭력으로 얼룩진 분위기 탓에 투렛증후군에 시달린다. 서 박사는 뒷돈을 받고 방송에서 특정 건강식품 과장광고를 한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는다. 나중엔 메디테이너 서 박사가 하늘이의 난치병을 치료하는 특별쇼까지 한다. 흥미롭게도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의 대화가 지속되는 가운데 서로 마음의 문이 열린다. 둘 다 자기 내면과 마주친다. 지금까지 속에 꼭꼭 감추었던 것들, 남에게 말하고 싶지 않은 것들, 드러나면 체면을 망치게 될 것들, 이런 것들까지 용기 있게 드러낸다. 치유·회복의 과정이다. 이 연극은 우리에게 묻는다. 속마음을 드러낼 마음의 준비가 됐냐고.

 

그러고 보니 대한민국은 은폐공화국이다. 하늘이가 우리다. 우린 어릴 적부터 상처를 받으며 자란다. 무엇보다 폭력적 관계, 사랑의 결핍이 핵심 뿌리다. 생활고와 애정 부재로 다투는 부모, 가정폭력, 공감·소통 부재, 입시 중압감, 막연한 불안, 이런 게 겹쳐 하늘이는 태어난 것자체를 가장 후회한다. 이 정도면 삶의 의미도, 기쁨도 없다. 그 고통이 (수시로 욕을 하는) 투렛증후군으로 집약됐다. 욕이라도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다. 이 난치병은 원래 현실의 고통에 기인하지만 그걸 솔직히 드러내고 풀기보다 은폐·억압, 회피·묵인했기에 발병한다. 두려움 때문이다.

 

서 박사 또한 상처가 깊다. 왜냐하면 누나가 미혼모가 되면서 이를 감추고자 막냇동생으로 출생신고한 것! 이 아기가 커서 군사부일체란 폭력과 맹훈련으로 의사가 됐는데, 그게 서 박사다. 즉 외할머니를 엄마라 착각했고, 엄마를 누나라 부르면서 자란 것! 비밀은 언젠가 밝혀진다! 그러나 땅밑 진실이 드러나는 것 자체는 고통이다. 그래서 애써 숨기려 했다. 그런데 서 박사는 이미 상당한 돈과 지위를 가진 의사라, 하늘이만큼 무력하진 않다. 그러나 그 역시 자신의 치부를 감춘 채 강자 동일시심리 속에, 갈수록 돈과 명예에 중독된다. 하나 모든 중독은 마침내 심리적·사회적·물리적 죽음을 부른다. 서 박사 역시 돈이란 중독물에 걸려 감옥행 직전! 이 위기를 돌파하려고 쇼까지 벌인다. 하늘이의 난치병을 대화로 치유하는 쇼!

 

솔직히, 대한민국은 중독공화국이다. 재벌(기업가)은 물론 정치가, 행정가, 금융인, 판검사 등 파워 엘리트들이 돈과 권력에 중독됐다. 공권력이나 조폭이 그 뒤에 있다. 심지어 교육자, 언론인, 예술인, 종교인 등 사회가 타락할 때 진실을 말하고 빛을 밝혀야 할 존재들마저 내부자들로 변질됐다. 실상이 이러니, 그 어떤 보통사람이 돈과 권력을 둘러싼 경쟁을 피할 수 있는가? 큰손들이 먹고 튀면, 잔챙이들이 떡고물이라도 챙기려 든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일중독, 돈중독, 권력중독, 경제성장 중독에 빠져드는 배경이다.

 

이게 또 대한민국을 투기공화국으로 내몬다. 새마을운동 정신, ‘근면·자조·협동은 그 자체로는 좋은 가치지만, 지난 60년간 한국 사회의 맥락에서 보면, 모두 배신당했다. 보통사람들, 즉 민초들은 나라가 시키는 대로 했지만, 과로까지 하며 근면·성실할수록 나중엔 바보가 된다. 배운 자, 높은 자, 가진 자, 약삭빠른 자들이 자기들끼리 다 해먹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탕주의에 기대고, 주식, 부동산, 가상통화에 쏠린다. 이른바 ‘LH 사태LH만의 문제가 아니다. 나라 전체가 문제다. 만일 마지막 희망도 없다면 자살도 감행한다. ‘자살공화국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마치 하늘이와 서 박사가 비록 치유의 를 벌였지만, 뜻밖에 자아와 접촉하는 바람에 마음의 문을 열었듯, 대한민국도 이제 과거에 숨겼던, 어둡고 부끄러운 역사와 진실을 정면 응시하며 말문을 열어야 한다. ‘광복절이 있지만 여전히 해방은 없고, ‘민주화가 되었으나 여전히 민주주의는 부진하다. 이 연극은 현재가 혼미할 때, 을 보면 실마리가 보인다 한다. 어른이나 성공한 자들이 아이나 보통사람들을 훈육, 통제할 필요가 없다는 암시도 한다. 이제 당신도 마음의 준비가 됐나요?

강수돌 전 고려대 교수·세종환경연합 난개발방지특위 위원장

 

 

저 썩은 강을 다음 정권에 넘기지 마라

캐나다 서부 지역의 기온이 49.5도까지 치솟았다. 마른하늘에서 번개가 떨어졌고, 산불이 수백 건이나 발생했다고 한다. 에어컨이 필요 없었던 마을이 잿더미로 변했다고 한다. 기상지식이 얕아서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국지성 폭염이 이글거렸다면 바람에 실려온 열파(熱波)가 아닐 것이다. 게릴라성 폭우처럼 하늘에서 떨어졌을 것이다.

 

하늘에서 수만 갈래의 번개가 치고 화염이 주택을 삼키는 광경을 상상해보라. 종말론이 어른거린다. 가본 적이 없지만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 작은 마을 리턴은 그렇게 사라져버렸다. 이는 불벼락과 다름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런 기후 재앙은 신이 내린 벌이 아니라 인간들이 불러온다는 것을.

 

먼 나라의 사변이지만 머잖아 우리에게도 닥칠 것이다. 새삼 우리 주변을 살피게 된다. 2020년 세계 환경위기 시계는 오후 947분을 가리키고 있다. (인류 멸망의 시간은 자정) 그런데 한국은 오후 956분이라고 한다. 민주정부에서도 환경오염지표가 급속하게 악화되고 있다. 생명, 환경, 생태라는 단어를 보면 불현듯 지난 평창 동계올림픽 때 무참히 짓이겨진 가리왕산이 떠오른다. 단 며칠간의 경기를 치르려 수백년 동안 손을 타지 않았던 원시림을 베어버렸다. 비난 여론이 들끓자 행사 후 전면복원을 약속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났지만 가리왕산은 흉측하게 널브러져 있다. 이것이 바로 기후악당들의 나라라는 징표이다.

 

4대강 복원사업은 왜 질척거리고 있는가. 금강과 영산강 일부 보의 수문만 겨우열어 놓고는 뒷짐을 지고 있다. 수문 개방만으로도 멸종위기의 물고기들이 돌아오고 새들이 다시 찾아들었다. 그렇다면 강은 흘러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시절 4대강 복원을 공약했고, 집권초기에는 수문 개방과 보 철거에 의욕을 보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 멈춰버렸다. 강을 살려달라며 오체투지와 단식기도를 했던 사람들의 간절한 염원을, 자신의 몸을 사른 문수 스님의 자연을 향한 순교를 잊었는가. 아직도 개발 이권으로 뭉쳐있는 기득권 집단의 요설에 농락당하고 있다면 분노를 넘어 서글픈 일이다.

 

“4대강사업을 만들어낸 것은 이명박이라는 하나의 괴물이 아니다. 그는 토건사업을 대변해온 수많은 정치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4대강사업 역시 강을 개발하고 착취해서 이익을 보려는 수많은 이들의 욕망을 담아낸 하나의 그릇이었을 뿐이다.”(신재은 <대한민국 녹색시계>)

 

그러면서도 정부와 여당은 또 다른 악수를 두었다. 바로 가덕도신공항 건설계획이다. 오로지 표만을 구걸하기 위해 가덕도신공항 건설을 밀어붙였다. 이는 새만금·4대강 사업과 다르지 않다. 두고두고 민심의 손가락질을 받을 것이다. 가덕도는 7000년 전 신석기 문화가 피어난 문화·생태계의 보고이다. 하지만 여당 누구도 이를 말하지 않았다.

 

네 번 국회의원 하면서 낯부끄러운 법안과 선심성 공약이 난무하는 것을 보아왔지만 이번처럼 기막힌 법은 처음 본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렇게 밀어붙이는 것이 선거를 위한 매표공항이 아니고 무엇인가. 21대 국회에 가장 큰 오점을 남길 것이다.”(심상정 의원)

 

이로써 정부의 환경정책 기조는 이명박 정권의 개발우선 정책과 다를 바 없어졌다. 관변단체와 어용학자들을 동원하여 4대강을 파헤치며 녹색 뉴딜을 외쳤던 이명박 정권을 우리는 얼마나 경멸했는가. 요즘 정부와 여당이 선진국으로 지위변경이 되었다고 연일 대한민국을 자랑하지만 그들 머릿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것 같다. 산과 강이 신음하고 산하가 쓰레기로 덮여가는데 인간들만이 선진국 속으로 들어가서 무얼 하겠다는 것인가. 저 썩은 강이 우리 마음이다.

 

여전히 케이블카에 산악열차를 놓겠다고 산을 노려보고, 새 나무를 심겠다고 산과 숲을 뭉개고 있다. 막아야 한다. 바른길을 놔두고 엉거주춤 좌고우면만 하고 있다. 가야 할 길임에도 그냥 멈춰서 있음은 소신이 없거나 철학이 빈곤하기 때문이다. 추진력 없는 정의는 무능이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가장 큰 관심사는 기후위기이다. 그들은 우리 사회가 다음 세대에도 지속 가능하냐고 묻고 있다. 자신들이 살아가야 할 세상을 오염시키지 말라고, 기후위기 문제를 다음 세대에 떠넘기지 말라고 외치고 있다. 그렇다. 문재인 정권도 환경과 생태 문제를 다음 정권에 떠넘기지 마라. /김택근 시인·작가 경향 : 2021.07.10.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올해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뉴질랜드 오클랜드가 꼽혔단 소식에 안경을 고쳐 쓰고 짧은 기사를 두번이나 다시 읽어봤다. 매번 유럽 도시들이 상위권이었던 것 같은데, 이렇게 지형도가 바뀔 수도 있구나 싶어 내심 놀랐다. 영국 유수의 연구소에서 안전성과 기반시설, 교육, 의료시설 접근성 등을 수치화하여 평가한 결과라지만, 정작 키위(뉴질랜드인을 이르는 말)들은 우쭐하기는커녕 믿을 수 없다며 투덜대더라 친구가 전한다.

 

뉴질랜드는 천혜의 자연이 큰 자산인 나라이다. 인간 오염원으로부터 비교적 잘 보호된 야생의 자연은 전통적 문화 강국들이 따라잡기 힘든 자원이다. 여성이 최초로 참정권을 획득하고 강이 처음으로 인간과 똑같은 법적 권리를 부여받은 곳이며,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들이 무참히 쓸려버렸던것과 달리 마오리어가 영어와 함께 공식 언어가 된 흔치 않은 전 영국 식민지이기도 하다. 재임 중 아이를 낳은 총리가 2019년 이슬람 사원에 대한 테러가 있었을 때 히잡을 쓰고 나와 혐오는 결단코 용납되지 않을 것이라 엄중히 경고했던, 내게는 언제나 맨발에 시원하게 닿던 풀과 검은 모래의 부드러운 감촉으로 남아 있는, 호빗의 나라이다.

 

하지만 내가 20년 전 경험했던 오클랜드는 사람들로 넘쳐나는 도시가 늘 그렇듯 주택난, 교통난, 주차난이 심각했다. 키위 친구와 하나하나 따져보니, 주택은 공급량이 부족할 뿐 아니라 투기상품화되어 가격이 비대하게 상승하였고, 근래 교사와 간호사들의 파업도 잦았다. 그래도 안전하진 않냐 하니 가정폭력 비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높은 편이라며 급기야 화를 참지 못한다. 내 기억에도 매주 내야 하는 집세가 살인적이었다. 대중교통은 비쌀뿐더러 노선이 좋지 않았으며 차가 고질적으로 막히는 구간들이 있었다. 왜 이리 비좁게 밀집해 있어야 하는지, 왜 조금만 벗어나면 그만 아무도 없는 것만 같은 풍경이 되고 마는지, 머릿속에서 수차례 도시를 허물었다 새로 지어보곤 했다.

 

한번은 누군가 내 고물 차의 창문을 부수고 오디오를 훔쳐 가 한동안 창에다 테이프를 붙이고 다녔다. 몇년 전 짧은 재방문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역에 따라 그러한 가벼운 우범지대가 있으니 조심하라는 경고를 들었다. 좀도둑이 창궐하는 동네와 그렇지 않은 동네의 사람들은 서로 마주칠 일이 드문 그런 구조의 도시가 되어가는 듯하여 슬펐다. ‘그렇지 않은 동네는 일면 살기 좋을 수 있다. 재작년 1위였던 오스트리아 빈에서도, 그리고 서울에서도 대략 마찬가지일 것이다. 도시의 그늘진 구석을 직접적으로 대면하는 순간들을 지속적으로 피할 수 있다면(간접적으로까지 피할 순 없을 거다, 연결되어 있으므로), 다시 말해, 어느 도시에서건 살기 좋음의 기준이 되는 지표를 배타적으로 누릴 수 있는 동력과 자원을 갖추었다면, 특히 올해는, 작년의 초강력 셧다운 정책으로 인해 더는 마스크가 강제되지 않는 자유에 매혹될 수 있다. 연구는 불완전할 뿐 아니라, 정확하고자 한다면 대상자, 누구에게살기 좋은 것인지 솔직하게 명시해야 한다는 것이 친구의 결론이었고, 일부 뉴질랜드 언론에서도 의미 없는 난센스라는 헤드라인이 바로 떴다.

 

빨간 머리 앤과 체로키 소년 작은 나무는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에서가 아니라, 숲속 그들만의 비밀 장소에서 마음을 키웠다. 일거수일투족을 염려하는 부모는 없었지만, 성장을 지켜봐주는 사람들이 있었고, 존엄을 위협받지 않는 상수리나무, 버드나무, 울새, 부엉이, 시냇물, , , 바람, 구름, 메추리, 두더지, 딱정벌레들이 있었다. 정치인의 수사와 공학자의 설계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좋은것을 찾아다니는 자본의 지표에는 다양한 존재들의 관계에 대한 고민이 곧잘 빠져 있다. 인간 중심의 위계적 도시 공간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평등한 주체들의 경이로운 조우를 이루어내는 장소, 공동체, 생태계에 대한 상상이 절실하다. 요즘 새로운 도시에 집을 구하려 발품을 조금씩 팔고 있다. 집이 좋을 필요도 없고, 학군을 생각할 일도 없는데다, 인구밀도가 높은 곳은 아니니 쉬울 것 같지만 실은 막막하다. 걸어갈 수 있는 시장과 침엽수림이 있는 동네, 찾을 수 있을까?

정나리 대구대 조교수 한겨레 2021-07-11

 

윤석열과 조선일보의 '색깔론', 그리고 진중권

한때 사상적 친구였던 장 폴 사르트르와 알베르 카뮈의 불화와 결별은 지금도 세계 지식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지성사의 역사적 사건이었다. 카뮈는 공산주의의 전체주의적 속성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마르크시즘에 대한 사르트르의 태도를 자유를 위한 앙가주망이 아니라 "굴종에의 열망"이라고 비판했다. 사르트르는 카뮈의 주장이 사회주의 혁명을 역행시키려는 우파 언론들에 의해 이용당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카뮈가 역사의 바깥으로 물러앉아 역사에 대해 훈계하려 한다"고 비판했다. 두 사람은 카뮈가 출간한 <반항하는 인간>의 서평을 둘러싼 갈등으로 결국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이때 사르트르가 한 유명한 말이 있다. "우리를 가깝게 했던 것들은 많았고, 우리를 갈라놓았던 것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서로 '공통점'이 많았는데도 '사소한 차이점' 때문에 결별하게 됐다는 아쉬움의 토로다. 카뮈가 1960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때 사르트르는 추도사에서 "카뮈는 아마도 나의 마지막 좋은 친구였다"고 말했다.

 

한때 진보진영 인사로 분류됐으나 지금은 문재인 정부로부터 등을 돌린 사람들(진중권·서민 교수, 김경율 회계사 등)을 지켜보면서 문득문득 사르트르의 이 말이 떠오르곤 한다. 물론 시대와 상황, 맥락은 다르다. 그들이 카뮈도 아니고, 그들이 공격하는 대상이 소련도 아니다. 그럼에도 사르트르의 말은 진중권 교수 등과 진보진영 간의 불화와 결별을 음미해보는 데 유용해 보인다.

 

진 교수 등이 진보진영과 멀어진 것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에 대한 검찰 수사가 발단이다. 그 뒤 사사건건 현 정권과 진보진영을 향해 날선 공격을 해 왔다. 여기까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진보에 대한 쓴소리는 필요하고, 현재의 민주당 정부가 진보적 가치를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지적은 아무리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데 그가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대변인'을 자처하는 대목에 이르면 '이해 불능'이다. 그는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민주당을 향해 "너희들이 표방하고 있는 정치이념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경고를 하고 싶다"고 말했는데, 진 교수에게도 묻고 싶다. 애초 진 교수가 표방한 정치이념은 도대체 무엇이며, 지금 자신의 행보는 그 정치이념에 가까운 것이냐고.

 

'반공주의, 지역주의, 성장주의, 사대주의.' 오랫동안 한국 정치를 지배해온 네 가지 키워드다. (안재원 서울대 교수, <아테네 팬데믹>). 점차 모습이 드러나는 윤 전 총장의 정치적 지향점, 국정운영 철학도 결국 이 네 기둥 위에 서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검찰총장을 떠나기 직전 대구를 방문해 환호하는 대구 시민들에게 "고향에 온 것 같은 느낌"이라고 말한 데서는 지역주의의 망령이, 탈원전 정책에 대한 맹공에서는 생태와 환경, 미래세대의 안전과 건강보다는 당장의 성장지상주의 그림자가, '미군 점령군' 발언 논란 키우기에서는 반공주의와 사대주의 신봉자로서의 진면목이 확인된다. 앞으로 드러날 남북 정책에서도 평화와 공존이 아닌 대결과 냉전의 논리에 기초한 정책이 될 확률이 높다. 진 교수는 윤 전 총장의 대권 야망에 대해 "결과를 생각하지 말고 그냥 옳은 길을 가는 것 자체가 희망을 실현하는 길"이라고 덕담을 아끼지 않는다. 그런데 구태의연한 색깔론, 단정적이고 편협한 역사관, '반문 정서'에 기댄 강경보수 정책으로의 회귀가 우리 사회의 미래를 밝혀줄 희망의 가치이고, 시대정신인가?

 

윤 전 총장의 가장 열렬하고 강력한 후원자는 다름 아닌 <조선일보>. 반공주의, 지역주의, 성장주의, 사대주의 등 이념적 지향점이 비슷한데다, '반문'이라는 핵심적인 공약수를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미군 점령군' 발언 색깔론 공세에서도 조선일보와 윤 전 총장의 이념적 동질성, 찰떡공조가 잘 확인된다.

 

요즘 '조선일보가 가장 사랑하는' 논객을 꼽으라면 당연히 진 교수다. 진 교수가 대중들에게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린 계기가 '안티조선' 활동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매우 역설적이다. "하루에도 300만부씩이나 찍어 전국을 '거짓말'로 도배하는 조선일보"라고 질타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진 교수였다. (<조선일보를 아십니까?> 도서출판 개마고원, 1999).

 

"왜곡과 편견, 냉전적 대결 의식을 부추기는 반통일적 언론, 이념을 내세운 메카시즘적 발상의 포로, 청산되어야 할 역사를 미화하는 파시즘 언론." . 당시 진 교수 등이 앞장서 외쳤던 조선일보의 속성이다. 그런 조선일보가 그사이 개과천선해 '정의롭고 훌륭한 언론'으로 탈바꿈했는가? 안티조선 운동은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최장집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장에 대한 조선일보의 '사상 검증'을 계기로 시작됐다. 이번에 다시금 확인됐듯이 "이데올로기적 오만에 사로잡혀 사정권에 들어선 인사는 모두 이념의 처형장으로 끌고 가려는 습관"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런데도 진 교수는 "이제까지 운동권 내에서 아무 검토 없이 사실이나 진실로 받아들여져 온 이데올로기적 망상에서 아직 자유롭지 못한 것"이라고 이재명 경기지사에 대한 비판에 가세했다. (75NEWS더원 칼럼 '이재명은 언제 철드나'). 반면에 조선일보와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색깔론 공세에는 침묵으로 응원했다. 그가 "이재명 언제 철드나?"라고 말하려면 똑같이 "조선일보(윤석열) 언제 철드나?"라고 물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전체주의에 대한 카뮈의 비판은 '정오의 사상'으로 이어진다. 치우치지 않는 "중용의 가치, 한계와 절도, 관용과 대화, 조화와 통일성에 대한 사랑"이 바로 정오의 사상이다. (윤정임, '카뮈-사르트르 논쟁사'). 세기적 지성의 사려깊고도 웅혼한 사고를 진 교수 등에게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지금 사상의 시계가 어디를 가리키고 있는지는 명확히 해야 한다. 그의 사상은 '정오의 사상'이 아니라 '한밤중의 사상'이다.

김종구(언론인) | 프레시안 2021.07.12

 

MZ세대 권력의 본질

미국 밀레니얼의 42%는 자본주의보다 사회주의를 선호한다고 말하지만,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정의할 수 있는 밀레니얼은 16%밖에 없다. 기성세대에게는 앞뒤가 안 맞는 것으로 보인다. 워싱턴에 있는 케이토 연구소의 여론조사 책임자인 에밀리 에킨스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인터넷이라는 풍요의 화수분 속에서 자란 사람들이다. 150개의 케이블 채널과 성적 정체성을 분류하는 50가지 방법, 그리고 31가지 종류의 아이스크림에 익숙하다. 그들이 어떻게 두 개의 정당에 만족할 수 있겠는가?” 기성세대의 눈에 앞뒤가 맞지 않게 보이는 것은 어쩌면 사람들의 태도를 분류하는 축이 부족해서일 수 있다.

 

이대남은 정치적으로 보수화했다고들 한다. 가로축에 연령, 세로축에 보수성향을 놓고 그림을 그리면 U자 형태가 나타난다. 20대는 60대와 생각이 같은 것일까? 아닌 것 같다. 고령층의 보수는 “ ‘니들이 공산주의를 겪어봤어? 니들이 가난을 알아?”라는 삶의 경험에 그 뿌리가 있다. 이대남의 보수는 니들이 경쟁을 알아?”라는 삶의 경험에 뿌리를 둔 것으로 보인다. 고령층의 보수와 이대남의 보수가 같아 보이는 것은 2차원 평면에 표시했기 때문이다. 3차원 그래프를 그린다면 이 둘은 확연히 다를 것이다.

 

그들은 베이비 부머와 그 앞세대에게 산업화를, 86세대에게 민주화를 선점당했다. 하지만 그들은 단군 이래 최고의 교육과 문화자본을 가진 세대다. 따라서 그들의 정체성은 문화적 영역에 있다. 이 세련된 문화소비자들에게 민주화 담론의 부산물인 과도한 정치적 올바름은 극혐의 대상이다. 그들에게 문화는 곧 정치다. 앤서니 그르진스키는 <해리 포터와 밀레니얼>에서 해리 포터를 읽고 성인이 된 밀레니얼의 정치적 선택은 그렇지 않은 이들과 체계적인 차이를 보인다는 점을 입증했다.

 

86세대 정치인들은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판은 이미 바뀌고 있다. MZ세대 정치인의 약진은 이준석만의 현상이 아니다. 36세의 핀란드 총리 산나 마린을 비롯해 전통적으로 젊은 정치 지도자를 배출해온 유럽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이나 동남아시아에서도 이들은 속속 도약하고 있다. 이들이 힘을 가지면 86세대에게 물러나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 그냥 그들의 자리를 차지하면 되니까.

 

요즘 미국 정치의 최고 스타는 31세의 민주당 재선 하원의원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다. 뉴욕 브롱크스에서 푸에르토리코계 3세로 태어났고, 어려운 형편을 딛고 뛰어난 학업성적으로 명문 보스턴대에서 국제관계와 경제학을 복수 전공하고 우등으로 졸업했다. 대학 재학 중에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인 테드 케네디 상원의원의 인턴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런 그였지만 대학 졸업 후 건물 청소를 하며 생계에 허덕이는 어머니 곁으로 돌아가 웨이트리스와 바텐더로 일해야만 했다. 그가 다시 도약의 발판을 얻은 것은 2016년 민주당 경선에서 버니 샌더스의 조직 관리자로 이름을 알리면서였다. 2년 후인 201829세의 오카시오코르테스는 민주당 경선에서 10선의 조셉 크롤리를 누르고 본선에서 공화당의 앤서니 파파스를 멀찌감치 따돌리며 의회에 입성했다.

 

오카시오코르테스의 깨달음 중 하나는 세상에 대한 자신들의 비판을 권력으로 무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비판 그 자체는 무의미하다. 이겨야 한다. 선거에서는 앞세대라면 하지 않았을 무지막지한 전투를 피하지 않는다. 그들 세대의 경험칙은 딱 한 걸음만 잘못 디디면 절벽으로 추락한다는 것이다. 엘리트 교육을 받은 수재였던 오카시오코르테스는 2008년 금융위기 직전에 부친이 사망하자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가 바텐더를 해야만 했다. 문화적 정체성을 권력으로 번역하는 것이야말로 MZ세대 정치인의 힘이다.

 

2017년에 문재인 후보에게 투표했던 밀레니얼이 돌아선 것은 그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올바름 때문에 내 편의 잘못에 눈감는 것은 투명성과 책임이라는 밀레니얼의 정치적 신념과 정면으로 상충한다. 그들은 스윙보터가 아니라 자신들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쪽으로 일관된 투표하고 있고, 이준석과 오카시오코르테스는 그들이 직접 권력을 장악하는 쪽으로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이준석과 박성민의 차이는 이것이다. 박성민은 기성세대 체제에 발탁됐고, 이준석은 기성세대 체제를 점령했다.

 

MZ세대는 왜 유튜브에서 춤추는 대선후보들에게는 싸늘하면서 전원일기와 이순재와 윤여정에게 열광할까. 오래된 것은 당당하게 그 자리에 있을 때 뉴트로의 대상으로 비로소 소비되기 때문이다./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경향 : 2021.07.13

 

혐오로 먹고사는 사람들

혐오는 힘이 세다. 사람을 연민하고 용서하고 품어주는 마음은 밀물처럼 서서히 몰려오지만, 누군가를 혐오하고 의심하고 배척하는 감정은 불화살처럼 쏜살같이 날아든다. 혐오는 일방통행이다. 듣지 않고 보지 않는다. 혐오는 논리와 실증을 거부하고 불신하며 음모론으로 덮어씌운다. 혐오는 또 다른 혐오를 낳는다. 혐오하는 자들의 주장에 대항하다가 또 다른 혐오의 숙주가 되기 십상이다. 좀비와 싸우다 물리면 좀비가 되듯이 혐오에 감염되면 스스로 혐오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 격렬한 혐오에 맞서 내겐 꿈이 있습니다라는 아름다운 평화의 언어로 대항한 마틴 루서 킹은 그래서 위대하다.

 

대한민국 전체가 혐오 바이러스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근본적 원인은 사회적으로 누적된 불안과 절망일 것이다. 물려받을 자산이 없으면 아무리 노오력해도 삶이 더 나아지지 못할 거라는 절망과 분노, 한 발만 헛디디면 내 자리를 빼앗기거나 추락할지 모른다는 절박함과 불안감이 압력밥솥 안의 뜨거운 수증기처럼 도처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다. 혐오는 억눌린 불안감을 터뜨리는 기폭제이자 배설구가 된다. 이주민, 장애인, 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를 이단시하는 것으로 심리적 우월감을 얻고, 여성은 남성을, 남성은 여성을 혐오의 대상으로 삼아 화풀이하는 사람들이 생긴다. 혐오는 사회 구조적 문제를 사회적 약자끼리의 갈등으로 치환한다. 모두가 가해자이자 모두가 피해자인 세상은 지옥이다.

 

이런 반인륜적인 혐오가 가속되는 이유는 혐오로 돈을 버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소셜미디어 환경에서 혐오는 중독성이 강하고 전파력이 높은 콘텐츠다. 강용석이 진행하는 유튜브 채널 가로세로연구소는 유튜브 후원금인 슈퍼챗 순위에서 2019년 세계 2위로 36000만원의 수입을 올렸고, 2020년에는 그 두배가 넘는 76500만원을 벌어들였다. 검증되지 않은 막말과 가짜 뉴스, 무분별한 차별과 혐오는 그 강도가 심할수록 수익이 커진다. 2019년 발표된 서울대 김지수의 논문 인터넷 개인방송에서 혐오발언은 어떻게 비즈니스가 되는가?’에 따르면 여성 혐오 발언이 등장할 때 후원 수익금은 107% 증가하고 그 발언의 공격성이 높을수록 수익률도 높아진다. 혐오에 중독된 이들은 점점 더 강한 혐오를 갈구하고 심리적 배설을 위해 더 많은 돈을 지불한다.

 

그런데 왜 혐오산업은 제지당하지 않고 날로 번성하는 걸까? 혐오로 돈을 버는 사람들과 이해관계를 함께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혐오로 권력을 유지하려는 자들, 그들이 혐오 양산의 주범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가짜 뉴스를 인용해서 국정 질의를 하는 정치인들이 있고 그 발언을 여과 없이 보도하는 제도언론이 있다. 팩트는 중요하지 않다. 아니면 말고! 뒷골목에서 무허가로 제조된 혐오성 가짜 뉴스는 제도권 정치와 주류 언론의 공생 메커니즘 속에서 공적 인증마크를 단 정보로 둔갑한다.

 

정치인들이 혐오를 애용하는 이유는 강력한 팬덤과 충성도를 가진 내 편을 만들기 유리하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부질없는 패싸움에는 진보와 보수의 구분도 확연치 않다. 거대양당의 강성 지지층이 내거는 레토릭은 놀랍도록 유사하다. 고독한 선지자처럼 비장하고 엄숙하다. 이들에게 정치는 제로섬 게임이다. 내 편의 과오를 인정하는 것은 상대편의 승리를 돕는 이적 행위이기 때문에 절대로 타협하거나 사과하지 않는다. 내 편은 늘 옳고 상대는 늘 불의하다. 내 편은 늘 각성되어 있고 상대는 늘 무지몽매하다. 극한적 선악 구도에서 공화주의적 평등과 공공선은 실종된다.

 

양당의 대선후보를 선출하는 중차대한 시기에, 우리 사회의 미디어 어젠다는 고작해야 바지 논쟁’, ‘표절 논쟁에 머물러 있다. 조국의 자녀 입시비리 의혹에 시달려온 여당은 윤석열 부인의 논문 표절 의혹을 제기하기에 여념이 없고, 야당 신임대표는 여성 혐오와 젠더 갈등을 부추기는 여성가족부 폐지론으로 구시대적 회귀를 선도한다. 발등에 떨어진 기후위기, 부동산 대책, 불평등 해소의 난제 앞에서 후보 간, 정당 간 의미 있는 쟁점을 찾기는 힘들다. 저마다 공정을 입에 달고 나오지만 혐오와 차별의 폭주기관차를 제어할 최소한의 방어장치인 차별금지법 제정을 전면에 내세우는 후보는 보이지 않는다. 철학 없는 정쟁과 의미 없는 공방 속에서 상대 후보를 향한 혐오 공세만 치열하다. “그들이 저급하게 가도, 우리는 품위 있게 간다는 걸 말이 아니라 몸으로 보여줄 정치인이라야 도긴개긴의 후보각축전에서 빛을 발할 것이다. 유권자들은 아직도 그런 리더를 기다리는 중이다.

이진순 재단법인 와글 이사장 / 한겨레 2021-07-13

 

 

노회찬이 그리운 이유

현재의 한국정치 사회구조, 조금 좁혀서 정치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1970년대~1990년대의 미국 민주당의 흐름을 복기하면 조금 도움이 된다. 그 학습을 위해 출판사 모던 아카이브가 출간한 카툰 북 버니를 참조했음을 미리 밝힌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하야하기 전 닉슨은 월남전의 여파로 재선이 불투명한 상태였다. 때문에 1972년 그가 재선에 성공한 것은 꽤나 놀랄 만한 일이었는데, 그건 베트남전을 비롯해서 중남미에서 연이어 일어난 좌파 혁명의 성공과 그 분위기로 인해 미국 사회가 오히려 보수화된 결과이기도 했다. 미 국내에서의 지난(至難) 했던 반전 시위가 피로감을 가져온 것도 일부 사실이다.

 

이때부터 미국 민주당은 급격하게 우클릭한다. 민주당 내 우파 그룹은 처음엔 DNC (Democratic National Committee : 민주당 전국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이후엔 CDM(Coalition for a Democratic Majority : 민주적 다수를 위한 연합), 혹은 DLC(Democratic Leadership Council : 민주당 지도자회의)라는 이름으로 민주당을 끊임없이, 그리고 줄곧, 우경화된 상태로 밀어 넣는 역할을 한다. 이들의 한결같은 논조는 이것이었다.

 

여론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중도파를 끌어들이고 계속해서 중앙으로 외연을 확장해야 한다

 

어디서 많이 들은 소리이고 우리에게서 툭하면 나오는 소리이다.

어쨌든 이들로 인해, 루스벨트 이후 줄곧 가난한 이들을 위한 큰 정부 정책을 추진했던 민주당은 결국 무늬만 민주당(DINO : Democratic in Name Only)’으로 전락했다. 레이건 시절, 민주당 당내에는 레이건 민주당원이라고 명명되는 인물들이 판을 쳤을 정도다. 사람들은 그런 민주당을 가짜 보수라고 봤고 가짜 보수에 표를 주느니 진짜 보수를 뽑겠다며 공화당에 표를 몰아주는 기 현상이 벌어졌다. 어리석지만 화나고 욱하는 마음에 찍은 결과이기도 하다. 월터 먼데일, 마이클 듀카키스 등 민주당 후보들이 잇따라 선거에서 진 이유다.

 

가장 큰 문제는 미국 정치권 내에 일종의 고질병을 만들어 냈는데 정책 대결의 스펙트럼이 중도우파에서 우파의 범주로만 극히 좁아졌다는 것이다. 민주당이 오랜 기간 우편향화한 결과다. 빌 클린튼이 됐든 버락 오바마가 됐든 미국의 양극화 사회의 깊은 골을 극복하지 못했던 건 그 때문이다. 우와 우만의 싸움으로는 정치는 사회의 올바른 균형자가 되지 못한다.

 

미국의 현대 정치사를 반면교사로 삼는다면(미국의 정치와 한국의 정치는 그 사이즈와 콘텐츠가 다르다는 지적을 예상한다 해도) 지금의 우리 역시 중도우파와 우파 간의 선거구도에 함몰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현대사회의 최대 이슈인 양극화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 지긋지긋한 부동산 논란은 영영 잠재울 수가 없게 된다. 누군가 핏대를 올려 토지공개념을 밀고 나 갈 때가 돼도 한참 지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주당을 비롯한 이른바 개혁정당은 중도로 외연을 확장한다는 둥의 헛소리보다는 자신들의 정치적 정체성을 더욱더 확실하게 밀고 나가는 것이 옳다. 앞으로의 대선후보 중에 한 명이라도 확실하게 좌 클릭된 인물이 나와야 하는 이유다.

 

대선 과정에서 후보들로 하여금 양극화 해소/토지공개념/차별금지/환경/성평 등 같은 진보적 어젠다를 전면에 내세우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일명 샤이 좌파들과 냉소적인 지식인들을 광장으로 모으게 해야 한다. 아르헨티나의 페론처럼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포퓰리스트가 아니라 대중의 요구와 바람을 대변하려는 진정한 포퓰리스트를 밀어야 한다. 지난 미 대선 당시 민주당 후보로 나왔던 엘리자베스 워렌이나 버니 샌더스 같은 인물이 대표적이다. 우리에게 노회찬이 살아 있었다면 한국의 버니 샌더스가 됐을 것이다. 정작 필요한 사람들을 많이 잃었다. 그게 참 아쉽다. 불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경기신문 2021-07-13

 

박정희의 공과넘어

박정희 시대의 경제적 성과를 평가하는 일은 최근까지 정치의 계절이 올 때마다 논쟁거리가 되었다. 민주화 이후 이른바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이 교차하여 집권하는 과정에서 산업화 세력은 박정희 시대의 고도성장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킴으로써 집권하려는 전략을 구사했고, 민주화 세력은 유신독재라는 커다란 정치적 과오와 그것이 경제에 남긴 부정적 유산을 부각했다.

 

경제학자들도 진영 대립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참여적 학자들은 자신이 속한 정치집단의 논리로 경제 자료를 채색하는 일에 능숙했고, 분석가들은 박정희 체제의 경제 성과를 강조하면 한나라당 지지자가 되고, 부정하면 민주당 지지자가 되는 상황을 기피했다.

 

외국의 석학들도 경제학 내부의 이데올로기 싸움의 포로가 되었다. 박정희 집권 기간 1인당 국내총생산의 연평균 성장률은 7%를 기록했다. 지금은 중국의 눈부신 성과로 다소 빛이 바랜 수치지만 당시로는 전후 패전국을 제외하면 관찰하기 힘든 높은 성장률이었다. 세계의 경제학자들은 이를 기적이라고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의 경제발전 방식은 주류 경제학자들이 추천하는 방식을 크게 이탈한 것이었다. 정부가 육성할 기업을 선택하고, 국유화된 은행을 통하여 저금리로 자금을 몰아주고, 높은 무역장벽으로 보호하며 동시에 각종 보조금으로 집중 지원하는 체제였다. 2차 세계대전 기간 일제의 산업정책과 닮았고, 국가자본주의라고 불리는 현재의 중국 체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시장에 맡기고 자유무역을 해야 성장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시장주의 경제학자들은 경제 기적과 국가자본주의의 공존에 당황했다. 그래서 희한한 주장을 만들어냈다. 한국의 경제 기적은 국가의 강력한 개입에도 불구하고 달성된 것이며 시장에 맡겼더라면 더 높은 성장률을 이룩했을 것이라고. 동시에 한국은 오랫동안 보호무역을 유지했지만 동시에 수출보조금을 지급했기 때문에 둘의 효과가 서로 상쇄되어 사실상 자유무역을 했다는 신기한 이론도 개발했다. 이러한 주류 경제학의 입장은 국내의 학자들에게 가치충돌의 상황을 만들었다. 시장주의를 받아들이면 박정희 체제를 칭찬할 수 없는 우파와 시장주의를 공격하다 보면 박정희 체제의 성과를 인정하게 되는 좌파의 상황을.

 

필자는 박정희 체제에서 경제 기적이 발생한 핵심 원인은 해외자본을 차입하여 선진국의 중간재와 자본재를 수입하고 수출 산업을 단계적으로 육성하면서 수출 대금으로 차입금 이자를 지불하고 더 많은 중간재와 자본재를 수입하는 순환 체제를 구축한 것이라고 믿고 있다. 최근의 경제성장 이론은 중간재와 자본재의 종류와 질을 확대하고 개선하는 것이 성장의 원동력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핵심 소재, 부품, 장비, 설비의 생산은 그때나 지금이나 선진국이 장악하고 있다. 차입과 수출은 신흥국이 이들을 서둘러 확보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이러한 해외의존형 개발 체제는 1950년대와 1960년대의 과거 식민지 국가가 선택하기 매우 어려운 체제였다. 과거의 식민지 본국에 의존하는 체제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미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선진국 시장은 아직 닫혀 있는 상태였다. 따라서 대부분의 독립 국가들은 해외의존형 개발을 피하고 민족주의적 자립경제의 길을 택했고 그 결과 저성장의 길을 밟았다. 우리의 대부분 지식인들도 마찬가지 입장에 있었다. 집권자의 강력한 개발 의지, 전택보와 이병철 같은 선구적 기업인, 동아시아 경제를 반공의 전선으로 키우려고 했던 미국의 안보 전략이 마주하지 않았다면 아마 우리도 같은 길을 갔을 것이다.

 

비록 박정희 체제가 높은 성장을 제조했다 하더라도 후대의 기업 양극화, 노동 양극화, 지역 양극화의 깊은 뿌리가 되었기에 공보다 과가 더 많다는 주장은 많은 지지자를 갖고 있고, ‘경로 의존성이라는 학문적 개념으로 뒷받침되기도 한다. 그러나 박정희 사후 40여년이 지난 현재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젊은 세대들은 후대의 정부들이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물을 것이다.

 

한국의 산업화 세력은 고도성장을 이룩하면서 태어났고, 민주화 세력은 고도성장을 탄생시킨 독재 체제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성장했다. 세월이 흘러 산업화와 민주화의 신화를 이룩한 두 세력은 모두 기득권이 되었다. 이제 상대편의 역사적 과오나 우리편의 역사적 공로가 저절로 나의 표로 연결되는 시대는 지났다. 서로의 역사적 공로를 인정하고 우리의 미래에 놓인 벅찬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경쟁을 해야 할 때다.

송의영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 경향 : 2021.07.14.

 

자본의 가치, 저널리즘의 가치

여기 한 건설업체가 있다. 1989년 광주에서 직원 5명으로 시작한 이곳은 2000년대 광주 전남권에서 사업을 확장하다 2005년 서울 역삼동으로 본사를 이전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대기업 건설사들이 해외로 나간 국내 건설시장 공백은 기회였다. 전국 도처의 신도시 및 택지개발에 뛰어들었고, 역세권 도시개발지구도 마다하지 않았다. 건설업 뿐이 아니었다. 이 업체는 2011년 광주방송(kbc)을 인수했고 리조트와 골프장 등 레저사업과 농산물 유통업에도 뛰어들었다. 2017년 대기업 집단 지정 직후 상장(IPO)를 준비하는 등 행보가 더 넓어졌다. 결국 이 곳은 2019년 서울신문 지분 19.4%를 인수하고 2021년 올해 자산 10조원 이상의 상호출자제한 기업으로 지정됐다.

 

광주방송 매각이 규제때문인가

이 업체는 바로 호반건설이다. 호반건설이 약 17년 동안 비약적으로 성장한 배후에는 토목과 건설로 경기를 부양시켜 온 정부와 금융자본이 있었다. 광주방송을 인수했던 2011년은 호반건설의 급성장기였다. 사업 지역 내 지자체와 공기업에 영향력을 확보하고 호반건설과 김상열 회장 관련 이미지를 제고하며 신도시·택지 입찰의 지원 역할까지 떠 맡긴 곳이 광주방송이었다. 올해 4, 자산총액 10조를 넘은 호반건설이 지상파 방송사 소유지분 제한을 적용받자 신속히 광주방송 지분을 매각한 이유는 규제때문이 아니었다. 지역방송의 유효기간은 끝났고 대기업에 걸맞는 또 다른 매체가 필요했다. 호반건설은 전자신문과 인터넷 경제신문인 EBN을 인수했다. 업계에서는 호반건설이 앞으로도 케이블 유료채널 세 곳을 더 인수할 것이라 전망하고 있다.

 

호반건설 사옥. 사진=호반건설 홈페이지

 

호반건설이 공격적인 미디어 업체 인수에 나선 것을 결코 투자로 볼 수 없다. 최근 호반건설은 서울신문 지분을 매각하겠다고 나섰다가 역으로 2대 주주인 우리사주조합의 지분을 전량 매입하겠다고 한다. 매각에서 매입으로 순식간에 태세를 전환하는 호반건설에게 서울신문의 역사와 언론사로서의 가치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오직 서울신문의 중앙일간지라는 영향력과 사옥의 자산가치만 중요할 뿐이다. 전자신문은 또 어떠한가. 신문의 편집권은 2대 주주에게 주되, 사옥을 역삼동 본사로 이전하고 전자신문TV’와 같은 미디어사업부문에 투자하겠다고 한다.

 

아파트 전망은 있으나 언론의 미래 전망은 없다

종합일간지, 경제 전문지, 인터넷 신문, 유료방송채널 등 외형만으로는 호반건설이 미디어사업에 뛰어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건설업이 주력인 대기업에게, 기업 상장과 사회적 지위에 더 몰두하는 사주에게, 급변하는 미디어 시장과 저널리즘 원칙이란 소귀에 경 읽기일 뿐이다. 광주방송 지분 보유와 서울신문 구성원과의 지분 협상은 이들에게 학습효과만을 주었다. 임금 인상, 인센티브 제공, 부채 상환, 사옥 이전 등의 당근을 줌으로써 언론으로서의 가치보다 자본으로서의 가치가 더 우월하다는 과시욕의 발현이 그것이다.

 

호반건설이 최근 서울신문 우리사주조합의 지분을 290억원에 매입할 대가로 임직원 특별 위로금 지급, 2022년 임금 10% 인상, 복지제도 개선, 편집권 독립 보장을 제안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자신문과 EBN을 인수할 때도 그랬듯, 경제적 보상만 있을 뿐 각 언론사가 거쳐온 역사와 지향할 가치에 대한 언급은 한 마디도 없다. 호반 베르디움, 호반 써밋 등 자사 브랜드에 내세우던 화려한 장밋빛 전망조차 미디어 부문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저널리즘과 독자는 존재하지 않는 호반건설의 미래

결국 호반건설에게 지역방송, 중앙일간지, 유료방송, 인터넷 신문 등 어떤 미디어든 경제적 수익이 아닌 다른 이익을 얻기 위한 기회비용일 뿐이다. 언론 종사자·기자로서의 자존감과 가치는 불안한 생계와 미래에 대한 금전적 보상 앞에 언제라도 위태롭다. 그래서 호반건설의 매력적 제안은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텔레스의 거래를 떠올리게 한다. 차라리 거대한 왕국을 주었던 메피스토텔레스가 더 나을지 모른다. 호반건설 뿐 아니라 한국 토건 재벌들이 보여줄 미래에 저널리즘과 독자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네이버, 호반건설, SM삼라 등 미디어 시장에 지분을 가진 사업자가 자산총액 10조원을 초과하니 규제를 완화하자는 정부부처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순진한 발상이다. 노동자와 콘텐츠에 대한 투자 한 푼 없이 10조원의 자산을 이룩한 토건, 건설, IT 자본에게 미디어의 이용가치란 무엇인지 모르는 전형적인 관료의 상상일 뿐이다.

 

서울신문 우리사주조합은 지난해 722일 저녁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만민공동회를 열었다. 사진=서울신문 우리사주조합 제공

 

서울신문 우리사주조합 지분의 호반건설 매각은 한 언론사의 문제가 아니다. 10조원이든 그 이상이든 돈만 있다면 언론과 미디어에 대한 어떤 고민과 전망도 없는 자본이 언론사를 소유할 수 있다는 언론계의 암묵적 동의이기 때문이다. 저널리즘의 가치란 펜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자본의 유혹에 맞선 거부라는 행동, 바로 그 행동의 가치에서 저널리즘이 시작된다. 서울신문과 전자신문 노동자의 건투를 빈다.

김동원 전국언론노동조합 정책협력실장 mediatoday 2021.07.15

 

 

능력주의를 보는 좀 다른 시각

능력주의(meritocracy)’를 둘러싼 찬반 논쟁이 뜨겁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능력주의를 내세움으로써 논쟁의 확산에 기여한 점은 있지만, 사실 논쟁은 이미 오래전부터 진행돼 온 것이다. 지난해에 출간된 <능력주의와 불평등>이란 책이 그런 논쟁의 대표적인 성과물이다. 10명의 필자가 참여한 이 책은 능력에 따른 차별은 공정하다는 믿음에 대하여라는 부제가 시사하듯이, 능력주의를 심도 있게 비판한 탁월한 작품이다.

 

 

나는 그간 능력주의에 대해 많은 글을 써왔는데, 내 입장 역시 단호한 비판이었다. 그런데 능력주의와 관련된 갈등이나 사건이 터졌을 땐 좀 다른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이론적이고 일반론적인 비판을 현실 세계의 개별 사례에 곧장 적용해도 괜찮은가 하는 의문 때문이었다.

 

우리는 이미 능력주의의 철저한 지배하에 살고 있다. 한국은 세계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시험 공화국이 아닌가. 그게 잘못됐다고 비판할 순 있지만, 그런 비판이 이미 현실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능력 겨루기 경쟁의 공정성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어느 나라에서건 전근대, 근대, 탈근대의 특징이 공존하는 비동시성의 동시성이 나타나긴 하지만, 압축성장을 겪은 한국에선 그런 현상이 두드러진다. 이는 능력주의 비판을 균일하게 적용하기 어려운 주요 이유가 되고 있다.

 

능력주의는 한때 세습 귀족주의에 대항하는 진보적 이데올로기였다. 하지만 이후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계급 역시 세습되며 계급이 개인의 능력에 미치는 영향이 절대적이라는 게 확인되면서 보수 이데올로기로 전락하고 말았다. 우리 모두 이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 다른 대안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능력 겨루기 경쟁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능력주의에 대해 맹공을 퍼부은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 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가>라는 책에 그런 고민이 잘 녹아 있다.

 

예비고사는 대학입학 자격시험이었다. 일단 이 시험을 통과해야 각 대학의 본고사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다. 1974년부터는 예비고사 성적이 대학 본고사 성적과 함께 입학시험 성적에 반영되었지만, 1973년까지는 통과 여부만 중요할 뿐 성적은 알려주지도 않았다. 샌델은 바로 이런 유형의 시험을 실시한 후 대학 본고사는 추첨제로 하자는 제안을 하고 있다. 그는 이 대안은 능력주의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는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능력이 있는 사람만 합격 가능하다. 그러나 능력을 극대화되어야 할 이상으로 보기보다 일정 관문을 넘을 수 있는 조건으로만 본다. 그렇게 함으로써 능력의 폭정과 맞설 수 있다. 일정 관문을 넘는 조건으로만 능력을 보고, 나머지는 운이 결정토록 하는 일은 고등학교 시절의 건강함을 어느 정도 되찾아줄 것이다.”

 

이 대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꽤 그럴듯하다고 보시는가? 아니면 초라하고 황당하기까지 하다고 보시는가? 최소한의 능력주의를 수용하면서 타협책을 찾아보려는 샌델의 고민이 인상적이긴 하지만, 큰 설득력을 얻긴 어려울 것 같다. 예비고사라는 능력주의에 대한 반발도 있겠지만 예비고사를 통과한 응시생들의 추첨제에 대한 반발이 더 거셀 것 같다. 세상이 확 바뀌어 모든 선출직 공직자를 추첨으로 뽑는 추첨 민주주의가 도입된다면 모를까.

 

대안이 없다고 해서 비판을 멈출 필요는 없지만, 동시에 능력주의의 수요에 대해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2030세대에서 능력주의 지지도가 비교적 높은 것은 기존의 능력 겨루기 경쟁이 공정하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지식인들은 주로 능력 겨루기 경쟁자체가 구조적으로 불공정하다는 점을 강조하지만, 구조의 한계를 인정하는 선에서 보더라도 불공정한 일이 너무 많이 자행되고 있다는 게 중요하다.

 

예컨대 기업 입사 시 응시자의 출신 학교에 등급제 서열을 매겨 가산점을 주는 방식으로 차별하는 게 능력주의인가? 아니다! 그건 능력주의가 아니다. 기업이 명문 학교를 나온 사람이 우수할 것이라는 통계적 차별을 암묵적으로 저지르는 것까지야 막을 순 없다 치더라도 채용 과정에서 공개적으로 밝힌 합리적인 기준과 절차를 준수하지 않는다면, 이때 불이익을 받을 수 있는 응시자들이 외칠 수 있는 무기가 바로 능력주의다.

 

도널드 트럼프는 나는 덜 배운 사람들을 사랑한다()능력주의를 자신의 대선 전략으로 삼아 큰 재미를 보았지만, 한국에서 이런 선거 전략이 먹힐 거라고 보긴 어렵다. 한국과 미국의 능력주의 양상이 좀 다르다는 뜻이다. 한국처럼 시험에 의한 공채 제도가 발달하지 않은, 아니 발달할 필요가 없었던 미국이나 영국에선 meritocracy를 학벌주의를 포함하는 개념으로 쓰기도 한다. 하지만 시험이라는 객관성을 절대적으로 중요하게 여겨 온 한국에선 능력주의가 학벌주의를 넘어서자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런 용법이 옳건 그르건, 그런 현실이 능력주의 비판에 대한 광범위한 지지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건 분명하다.

 

우리는 그 어떤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능력주의의 대안이나 해결책을 모색하는 일을 포기할 수는 없다. 나는 수년 전 발표한 논문에서 능력주의에 따른 특권과 특혜의 규모와 수준을 줄여나가는 것이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해법이라며 민심 또는 여론의 중요성을 역설한 바 있다. 능력을 무엇으로 보건, 어떻게 평가하건 능력 격차에 따른 사회적 보상, 즉 불평등의 크기를 줄여나갈 걸 요구하는 여론을 확산시켜 나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범 교육평론가가 지난 610일 경향신문에 기고한 “ ‘능력주의 비판을 비판한다는 칼럼에서 비슷한 주장을 한 걸 보고 반가웠다. 그의 결론은 이렇다. “결국 해법은 지위의 격차’, 즉 결과의 불평등을 줄이는 데에서 나온다. 이 지점에서 진보는 실패했고, 여기서 공정 열풍과 이준석 신드롬이 싹튼 것이다. 그러니 섣불리 능력주의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진보를 무덤으로 재촉할 뿐이다.”

 

그대가 말한 능력주의는 쉽게 말해 1등만 살아남는 사회를 추구하자는 것을 비롯해 이 칼럼에 달린 몇 개의 비판 댓글을 보고서 어이가 없었다. 칼럼을 읽기는 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마지막 두 문장이 거슬려서 반감을 표출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진보 정치세력이 결과의 불평등을 줄이는 데에 실패해놓고 불평등의 원인이 아닌 증상에 집중하는 것에 대한 강한 이의 제기로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부동산 가격 폭등에 의한 서민 약탈은 능력주의와 무관한 게 아니다. 능력주의는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데에 동원되지만, 우리가 분노하면서 타격해야 할 지점은 불평등의 원인이 되어야 한다. ‘거시적 공정미시적 공정이 충돌할 때에 미시적 공정을 외치는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훈계하거나 비판하는 건 옳지 않다. “구조의 책임을 나에게 묻지 말라2030세대의 항변처럼, 이 세상을 그렇게 만든 기성세대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능력주의 신봉자나 지지자들에겐 그들의 능력을 칭찬해주면서 더불어 같이 살면 안 되겠느냐고 부드럽게 설득하는 게 좋다. 이들까지 지원 세력으로 끌어들여 불평등을 줄여나가는 것이 능력주의의 폐해에 대처하기 더 쉽거나 나은 해법일 수 있다는 것이다.

 

스위스 작가 알랭 드 보통은 능력주의 체제하에서는 가난이라는 고통에 수치라는 모욕까지 더해진다고 말한다. 옳은 말이지만, 정직한 말은 아니다. ‘능력주의보다는 자본주의라는 말이 더 들어맞기 때문이다. 글로벌 시장을 무대로 활동하는 작가에게 자본주의 비판은 위험하지만 능력주의 비판은 안전하다. 탁월한 능력을 가진 이들의 능력주의 비판은 겸양의 표현이겠지만, 지금과 같은 식의 자본주의가 지속되는 한 자본의 요구에 부응하는 능력을 갖추기 위한 2030세대의 전쟁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능력주의는 증상이지 원인은 아니다. 서둘러 포기하지 말고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 우리 모두 애써보자.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경향 : 2021.07.21

 

꼰대들의 대학, 환골탈태하라

일본 도쿄대에서 조교수를 하던 1997, 공동연구를 위해 과학 선진국인 스위스에서 한 달, 그리고 스웨덴에서 반년을 체류하며 문화충격을 경험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는 대학원생·연구원·교수가 크게 다르지 않은 연구실을 사용하고, 같은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다. 같은 휴게실에서 차를 마시고 토론하고 대부분 오후 5시 정도에 칼퇴근한다. 처음에는 이렇게 연구해서 어떻게 좋은 성과를 내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지만 실제로 매우 뛰어난 연구를 하는 곳이었다.

 

그로부터 20여년이 흘렀다.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부의장을 맡아 기초연구를 확대하고 연구자 중심의 연구제도를 만들어 젊은 과학자를 육성하자고 외친 지 4년째다. 하지만 이공계 대학원생들이 과학을 좋아하고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에는 큰 진전이 없다. 오랜 시간 동안 징그럽게도 변하지 않고 발전이 없는 곳이 대학이다.

 

학생·연구원·교수를 나누는 권위적인 문화는 여전하다. 연구제안서며 보고서를 학생에게 맡기는 교수들도 아직 주변에 널려있다. ‘월화수목금금금이 일상인 연구실은 부지기수인 데 반해 학생들에게 정해진 휴가를 보장해주는 연구실은 별로 없다. 외국인 유학생들이 가족을 만나러 귀국하기 어렵다고 하소연할 정도다. 대학원생들의 연구 공간을 가보면 좁고 열악함에 아연할 때가 많다.

 

이뿐이 아니다. 학생들이 연구비 정산 같은 행정업무를 하고, 학위 주제와 관계없는 프로젝트, 심지어 사적인 업무에도 동원된다. 적절한 지도를 받지 못하고 방치되는 학생도 여럿 있으며, 언어폭력뿐 아니라 성희롱·성폭행을 당하기도 한다. 학생에게 주는 인건비를 연구실 운영비로 쓰거나 사적으로 편취하는 교수들도 없어지지 않는다.

 

나 스스로도 대학원을 다니며 치를 떨었고 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았던 1990년대 초반 대학원의 모습과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다. 몇 년 전 교수평의회 의장을 하며 이런 문제를 제기하고 교수사회 내부에서 자정 노력을 촉구해도 관심을 갖는 교수들이 별로 없었다. 익명 게시판에 막말로 비판을 하는 교수들도 있었다.

 

한국 대부분의 교수들이 공부한 미국의 대학에는 학생에 대한 교수들의 부당한 행위를 엄하게 처벌하고 학생을 보호하는 대학 차원의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 앞서 언급한 유럽 과학 선진국들의 경우는 학생을 근로기준법으로 보호하며,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교육당국과 국가가 즉각 개입할 수 있다.

 

2년 전 이탈리아에서 스위스로 스카우트된 유명 과학자가 대학원생을 비인격적으로 지도하자, 교육당국이 지도행위를 즉각 중지시키고 해당 과학자와 연구소에 대한 조사를 벌인 바 있다. 과학자는 파면됐고 연구소는 중징계를 받았다. 최근에는 성차별적인 행정이 지속되어 당국의 조사를 받고 연구소 자체가 폐쇄된 스위스의 또 다른 사례도 있다. 한국에서라면 아무도 징계받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대학을 운영하는 당국과 대학교수들에게 묻고 싶다. 이런 반인간적이고 반교육적이며 심지어 범죄행위가 이루어지는 곳에 어떤 부모가 자녀를 보내고 싶어할 것인가. 어떤 창의적인 인재들이 스스로 배움을 찾아오려고 할 것인가. 권위주의적인 갑질문화 속에서 어떻게 창의적인 생각이 자란다는 것인가. 대학은 변화에 대한 의지와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대학과 정부는 대학원생들이 정상적으로 교육받고 연구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 부당한 대우를 받은 학생들을 보호하는 강력한 시스템이 필요하다.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에서도 촉구해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건강한 연구실 문화 확립에 나선다고 하지만 알맹이 없이 변죽만 울릴 뿐이다. 이미 외국에서 시행하고 있는 제도들을 도입해 실천하기만 해도 충분할 텐데 말이다.

 

과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대학에서 창의적이고 수준 높은 연구가 이루어지길 간절히 바란다. 교권이란 좋은 교육을 할 수 있는 권리이자 의무이지, 나쁜 교육을 강요하면서 침해받지 않을 권리가 아니다. 대학이 구시대적인 권위주의를 버리고 창의적인 인재들에게 매력적인 곳이 되길 바란다. 이것이 인공지능(AI) 교육 확대보다 더욱 시급하고 중요하다. 꼰대들의 대학, 환골탈태하라!

염한웅 |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부의장·포스텍 물리학과 교수 경향 : 2021.07.21

 

편협한 이타성

우리는 대개 어린 시절부터 부모의 종교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기독교인의 절반 이상이 어머니로부터 종교를 물려받는다. 열 명 중 여덟 명의 불교인이 어머니와 종교가 같다. 종교는 어느 정도 초깃값이다. 종교의 선택을 유보하다가, 19세가 되어서야 여러 종교 중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하라는 문화는 없다. 역사적으로 종교는 가족의 전통이자 집단의 의무였다. 개종은 목숨을 건 행동이었다. 광장에 목이 내걸리거나 황야로 추방될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지금도 일부 문화에서는 여전히 그렇다.

 

하지만 이제 대부분의 사회에서 종교는 개인의 자유다. 조금 옛날 자료이지만, 2005년 한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종교인의 16.2%가 개종한 종교인이었다. 지금은 훨씬 높을 것이다. 기존 종교의 입장에서는 배교요, 새 종교의 입장에서는 회심이다. 교세가 약화하는 입장에서는 배교자를 간단히 화형에 처하던 과거를 추억할지도 모르지만, 이제 그럴 수 없다. 종교는 개인적 선택이 되었다.

 

국적도 그렇다. 매년 1만명이 한국 국적을 얻는다. 국적을 잃는 사람은 매년 2만명이 넘는다. 국적 규정이 까다롭다는 우리나라가 이 정도다. 미국이나 유럽연합에서는 매년 7~80만명이 새로 국적을 얻는다. 종교도, 국적도 쉽게 바꾸는 세상이다. 이들을 배교자 혹은 반역자라고 비난하면 곤란하다.

 

그런데 정당이라면 어떨까? 정치는 자원 할당에 관한 집단적 결정 과정이다. 따라서 진화인류학적으로 자신과 친족, 집단에 가장 이득이 되는 정책을 가진 정당을 그때그때 지지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종종 우리는 특정 정파를 무조건지지한다. 종종 명백하게 잘못된 정책을 펴거나 심지어 자국민에게 심각한 손해를 끼치어도 말이다. 아니, 일반인이 정당에 충성해서 도대체 뭘 얻는가? 막상 국회의원도 맨날 정당을 바꾸는데 말이다. 그런데도 임 향한 일편단심이다.

 

만약 지지하던 정당이 기존 정책을 정반대로 바꾸면, 지지자들은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바꿀까? 아니면 지지 정당을 바꿀까? 플로리다대 토머스 카시의 연구 결과가 놀랍다. 대개는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바꾸고, 지지 정당에는 변함없는 박수를 보냈다.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이 갑자기 목탁을 두드리는데, 신자들은 이제 절이 된 교회에 여전히 출석하는 꼴이다. 정책의 실질적 이득보다는 정치적 동맹 집단의 결속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왜 이런 이상한 일이 발생할까? 인류는 오랜 세월 동안 작은 규모의 집단을 이루고 살았다. 군 복무를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소부대 전투의 핵심 원칙은 무조건 단결이다. 소대장이 영 미흡해도, 소대 작전이 영 허술해도 말이다. 전투가 한창인데, 소대원이 소대장을 배반한다면 필경 전멸할 것이다. 인류학자 리처드 랭엄의 <침팬지 모델>에 의하면, 인간은 작은 소속 집단을 위해 자신이나 가족의 이득을 희생하는 본성이 있다. 게다가 더 큰 집단, 즉 국가나 인류 전체의 이득도 기꺼이 희생한다. 이른바 편협한 이타성이론이다.

 

편협한 이타성은 변절을 막는 원시적 본성이다. 작은 무리를 이루고 살던 때에는 유용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국가의 운영은 소대의 운영과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자신의 소집단에 편협한 이타성을 보인다. 스탠퍼드대 제프리 코헨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우리는 지지 정당의 정책은 무조건 지지하고, 반대 정당의 정책은 무조건 반대한다. 사실 반대 정당의 지지자보다 더 미운 녀석은 바로 변절자. 화형까지 당하지는 않겠지만, 오랜 벗들은 떠나고 삶은 무척 외로워질 것이다.

 

한때는 종교도, 국가도 바꿀 수 없었다. 이제는 아니다. 뭔들 못 바꾸겠는가? 자신과 가족이 정파보다 중요하고, 국가와 인류 전체가 정당보다 중요하지 않은가? 편협한 이타성은 좋아하는 야구팀을 응원할 때나 발휘하자.

박한선 정신과 전문의·신경인류학자 경향 : 2021.07.21

 

중국을 주적으로 삼자는 정치

오스트레일리아(호주)의 클라이브 해밀턴 교수는 최근 국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중국의 눈치나 보는 한국 정치인들은 정신 차리라고 윽박지른다. 그는 한국인들이 어렵게 쟁취한 자유와 독립이 지금 (한국의) 친중 정치인, 재계 엘리트, 여론 형성자들에 의해 팔려가고 있다고 진단한다. “한국은 중국의 돈을 받아먹고 계속 머리를 굽신거리든가, “반대로 중국이 부과하는 경제적 처벌을 감내하면서 자유와 독립을 얻기 위한 값을 치르든지선택하라는 주장이다. 야권의 정치인들은 중국이 한국의 독립을 위협하며, -미 동맹을 해체시키고, 다가올 대통령 선거에 개입하려 한다는 해밀턴 교수의 주장에 공명한다.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는 최근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홍콩 문제를 언급하며 중국의 잔인함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정치인 중 가장 강경한 반중 발언을 했다. 유력 대선주자 윤석열은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중국이 사드 배치 철회를 주장하려면 국경 인근에 배치한 장거리 레이더를 먼저 철수해야 한다며 봉합되어 있던 한-중 사드 갈등을 후벼 팠다. 이들은 문재인 정부가 중국의 눈치를 보고 굽신거린다고 비난한다.

 

사실을 제대로 말해야 한다. 지금 동아시아 국가 중에 문재인 정부뿐만 아니라 그 어떤 나라 정부도 중국이 영향력을 앞세워 다른 나라를 압박하는 강압정책(Coercive Policy)에 굴복한 적이 없다. 이와 관련하여 미국의 싱크탱크 랜드 연구소가 최근 발간한

 

보고서가 주목된다.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은 영향력의 딜레마에 처해 있다. 중국이 다른 나라에 군사력과 경제력이라는 하드파워를 앞세워 영향력을 행사하면 동아시아 국가들은 전부 반발하기 때문에 오히려 중국이 고립된다. 딜레마 상황에서 중국은 동아시아 어떤 국가에도 미국과의 안보협력을 포기하고 동맹에서 탈퇴하라고 요구하거나 압박하지 못하고, 실제로 그런 적이 없다. 동아시아 국가들은 중국과의 경제관계를 유지하기 원하지만 중국의 자본과 기술과 인프라로 구성되는 소위 중국 모델에 전면적으로 흡수되는 걸 원하지도 않는다. 중국은 다른 나라에 우호적인 여론매체와 엘리트를 동원하여 중국에 대한 인식을 바꾸게 만들거나, 친중 인사들을 매수하여 중국에 대한 정책을 바꾸게 만들 수도 없다. 그럴 의도가 없어서가 아니라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관광, 외국인 교환학생 프로그램, 그리고 중국에 투자하는 외국 기업들에 대한 규제에서 중국의 영향력 행사가 위협적이라는 게 랜드 보고서의 진단이다.

 

홍콩이나 신장 지역에서 중국의 권위주의 행태는 분명히 비판받아야 한다. 대만해협에서의 안정도 우리에겐 매우 중요한 문제다. 그러나 팬데믹으로 세계가 고통받는 상황에서 중국과의 문명충돌이나 전략경쟁과 같은 담론을 우리가 수입해서 분쟁을 지향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특히 정당의 지도자나 대선주자 정도의 유력인사라면 이 점에 매우 신중해야 한다.

 

북한의 도발이 진정된 지난 3, 한국의 보수는 주적의 존재감 공백에 몹시 당황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생존을 위협하는 공포가 있어야 보수정치는 활기를 띠는데 북한이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으니 답답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주적의 지위에 중국을 올려놓게 되면 중국은 실제로 적이 되어 나타날 것이고, 이는 한반도 문제 해결에도 매우 어려운 상황을 자초하게 된다. 지금 국가 지도급 인사들이 한반도 주변 정세에 대해 제대로 통찰하고 있는지 매우 의문이다.

 

해밀턴 교수는 호주가 중국의 위협에 농락당했다는 피해의식을 한국에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그러나 중견 국가 한국은 호주처럼 중국에 만만하지도 않을 것이고, 쉽게 농락당할 만큼 허약한 국가가 아니다. 우리가 중국과의 무역으로 벌어들이는 돈은 중국에 굴복한 대가가 아니라, 혁신국가 대한민국의 역량에 대한 보상이다. 지금 한국 내에 중국의 속국이 되자는 정부는 없다. 지금은 국제관계에서 불필요한 피해의식과 공포를 걷어내고 팬데믹 이후까지 고려하는 자세, 회복탄력성’(Resilience)을 지향하는 데 우리 외교의 중심을 세워야 한다.

연세대 통일연구원 객원교수 한겨레 2021.07.22.

 

이재용과 한국 자본주의, 결정적 순간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몇해 전 꽤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던 드라마 <상속자들>이 구호로 쓴 셰익스피어의 경구다. 재벌 등 특권 가문 이야기를 만화적 설정으로 풀어간 이 드라마는 화려한 성채 안에서 왕관의 무게에 짓눌리는 금수저들의 불행을 그려 눈길을 끌었다.

 

드라마가 아닌 현실에서 왕관의 무게에 시달리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을 찾는다면 아마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일 것이다. 그는 30대 초반이던 2000년 법학교수 40여명이 회사 재산을 자녀에게 편법 증여한 혐의로 이건희 당시 삼성 회장을 고발하면서, 대중의 눈총이 쏟아지는 무대에 등장했다. 이른바 에버랜드 전환사채 저가발행 사건이다. ‘왕관을 쓰려는 자고통 시작이었다. 그는 2007년 삼성 법무팀장 출신의 김용철 변호사가 폭로한 비자금 사건의 등장인물로 다시 그 무대에 소환됐다.

 

그런데 당시 비자금 사건의 주범이던 이건희 회장은 수조원의 차명계좌, 1000억원대 탈세 등이 드러났지만 구속도, 징역형도 겪지 않았다. 그는 집행유예를 거쳐 이명박 대통령의 원포인트사면을 받았고, 경영에 복귀했다. ‘대한민국 1등 재벌은 죄를 지어도 벌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각인시켰다. 이 회장이 수사와 재판, 사면을 받는 동안 대다수 언론은 범죄 사실을 모른 척하거나 국가 경제와 올림픽 유치를 위해 사면하라고 외치며 부쩍 늘어난 삼성 광고를 챙겼다. 반면 비판적 보도를 이어간 <경향신문> <한겨레>는 삼성 광고가 뚝 끊겨 월급 줄 돈을 걱정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삼성공화국이라는 한탄이 퍼져나갔다.

 

지금 이재용 부회장이 국정농단 사건으로 실형을 사는 것은 개인적으로 불행한 일이지만, 이 나라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는 의미 있는 진전이라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이 드디어 ‘1등 재벌도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 나라가 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거세지는 사면 혹은 가석방론은 이런 성취를 위협한다. ‘재벌의 부패 범죄를 엄벌하고 사면권을 제한하겠다고 한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이 풍전등화가 되고 있다. 경제정의를 내세우던 여야 정치인과 각료들이 사면·가석방 필요성을 떠벌리고 여러 언론이 북과 장구를 치는 모습은 금권정치’(plutocracy)의 교과서를 보는 듯하다. 글로벌 반도체 전쟁에서 이겨야 하니까 석방하자고? 그건 돈이 아~주 많으면 벌을 면할 수 있다유전무죄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이재용 부회장은 무엇보다 자신과 삼성을 위해 26개월의 형기를 채워야 한다. 그는 국정농단 재판 과정에서 삼성 준법감시위원회를 만들고 법을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최종심의 선고를 존중하는 것은 이 약속의 진정성을 보여주는 일이다. 많은 이들은 지금 삼성이 정치권을, 정부를, 언론을 총체적으로 움직여 사면 혹은 가석방을 얻어내려 한다고 의심한다. 이 부회장이 풀려나면 역시 삼성공화국이었어” “삼성은 대한민국을 뒤집을 수 있어하는 인식이 굳어질 것이다. 그러면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재판 등 다른 곳에서 더 강한 응징 요구가 이어지고, 삼성 계열사의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경영도 위선으로 치부될 것이다. 이 부회장이 지금이라도 사면이나 가석방을 바라지 않으며, 형기를 채우겠다고 선언하면 어떨까. 앞으로는 대주주로서, 어떤 임직원도 교도소에 보내지 않을 윤리적 기업을 만드는 데 전념하겠다고 다짐하면 어떨까. 그것이 자신의 미래에 왕관의 무게로 인한 고통을 덜고, ‘법의 지배를 요구하는 이 땅의 자본주의도 살리는 길이 될 텐데.

 

문재인 대통령은 재벌개혁과 법치 존중의 공약을 지켜야 한다. 잘하려던 정책이 실패로 돌아가는 것은 이해해도, 핵심 가치를 내던지는 것까지 용납할 지지자는 없다. 지난 61056개 시민단체가 이재용 사면·가석방 반대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박정은 참여연대 사무처장은 이 정부가 마지막 강을 건너선 안 된다고 경고했다. 지난 18일 지식인 781명은 사면·가석방이 법치주의의 근간과 공정의 시대가치를 무너뜨리는 처사라고 일갈했다. 자칫하면 개혁 지지층이 거리로 나설 수도 있다. 법무부의 8·15 가석방 심사 대상에 이 부회장이 포함됐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재용과 문재인, 한국 자본주의가 지금 결정적 순간을 맞고 있다.

제정임 l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장 한겨레 :2021-07-26

 

이석기, 이재용, 그리고 문재인

종종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운동하다 감옥에 갔다 온 사람들한테. 주먹질하다 들어온 깡패들도 정치범은 존경하고, 국가보안법 위반자는 감옥에서도 다른 수감자들한테 우대받았다는 이야기. 감옥에서 제일 대접 못 받는 이들은 경제사범이고, 특히 사기범들은 천하의 잡범취급을 받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세상이 변해서 독재 정부 시절의 정치범 이력이 명예가 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그런 사람들이 권력을 잡고 다수당이 되어도 자신을 정치범으로 만들었던 악법은 폐지되지 않고, 독재자 아버지가 만든 국가보안법을 부활시켜 정치보복에 이용한 대통령이 촛불시위로 무너지고 사법적 심판을 받고도 그에 의해 정치사상범이 된 사람은 여전히 감옥에 있으며, 반대로 경제사기범은 이제 천하의 잡범이 아니라 구국의 기업인이 되어 감옥을 드나들며 민주화 세력의 파트너가 되어 함께 국정을 의논한다.

 

우리가 다 아는 두 사람의 이야기다.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박근혜 정부의 적폐를 상징하는 두 사람은 지금 감옥에 있다. 한 사람은 정치사범, 한 사람은 경제사범, 한 사람은 전 정권의 피해자고, 한 사람은 공범이다. 광복절이 다가오자 감옥 밖에서는 사면 요구가 뜨겁다. 누구일까 그 사람은. 이 나라가 제대로 된 나라라면 사면을 청원하는 목소리는 이석기를 향해 터져나와야 한다. 그러나 정·재계, 법조·학계 등 각계 유력인사들이 연일 광복절 특사를 요청하는 대상은 국정농단 피해자 이석기가 아니라 공범이자 주범인 이재용이다. 언론은 그런 목소리를 집중 보도하면서 이재용 사면 여론을 증폭시키는 확성기 노릇을 하고 있다.

 

대통령과 정부 여당은 어떤가? 얼마 전 박수현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이재용 사면에 대해 묻는 질문에 아는 바, 들은 바, 느끼는 바 없다고 답했다. 집권 기간 내내 중대한 정치적 결정이 필요할 때마다 정치 철학보다는 그때그때의 표 계산과 여론 뒤에 숨어 책임을 회피해왔던 정부답게 모호하고 비겁한 답변이다. 사면은 대통령과 정부·여당에도 정치적 부담이다. ‘이재용 석방하라는 지난 4년간 박근혜 무죄를 외쳤던 태극기 부대의 외침과 공명하는 목소리고, 그것은 이 정권의 근거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결정이 아니라 법무부 장관이 결정할 수 있는 가석방을 검토하는 것도 책임론을 회피하려는 전략이다. 그럴수록 재계는 향후 경영활동이 제한된다며 더 강력하게 사면을 촉구한다.

 

언론은 이석기 사면에 대해선 질문조차 하지 않는다. 박근혜-양승태 사법농단 사건의 실체는 명백하게 드러났고, 관련자들도 사법적 판결을 받았다. 진보통합당에 대한 사상 초유의 정당해산 명령과 이석기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은 박근혜 정부의 가장 추악한 재판거래 중 하나였다. 시민사회·종교계 등에서 수년째 사면청원이 이어지고 있지만 보도하는 언론은 소수일 뿐이다. ‘선진국의 지위에 오른 것을 치적으로 삼고 G7정상회의에 초대받는 국격을 자랑하는 친정부 자유주의자들은 이 정치적 후진성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진보적 지식인들도 정치적 입장에 따라 언급을 회피한다. 그동안 이석기의 수감기간은 박근혜 정부에서보다 문재인 정부에서 더 길어져 8년째 이어지고 있다. 지배 권력에 반하는 생각을 갖고, 그런 생각을 대중 앞에서 공표하고 설득하는 행위가 죄가 된다면, ‘세상 바꾸자, 갈아엎자라고 외치며 촛불을 들었던 이들도 전부 내란선동죄에 해당한다.

 

나는 이번 결정이 앞으로의 사회적 권력 관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 생각한다. 현재의 기업은 과거 독재 정부에 부역하며 뇌물을 상납하고 특혜를 얻던 기업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국가 경영의 주체로서 공동권력을 구성하는 주요 정치행위자이다. 그런 자본의 독재 시대에 급진적 사회운동과 노동운동, 진보정치는 삼성공화국으로 상징되는 자본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중요한 세력이자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다. 정부는 이 힘들을 탄압하면서 지배계급 내부의 견제력까지 무력화하고 있다. 이번 결정은 정부가 외쳐온 검찰개혁이 어떤 검찰을 향하는지도 똑똑히 보여줄 것이다. 이석기를 내란음모죄로 기소한 검찰인가, 이재용을 횡령과 뇌물공여죄로 기소한 검찰인가. 광복절 특사를 결정할 사람은 문재인 대통령 자신이다. 누구에게도 미루지 말고 결정권을 행사하라. 촛불시위로 터져나왔던 사회 개혁의 열망을 완전히 무화시켜 민주주의와 진보정치를 압살하고 자본독재의 재벌왕국을 만들겠다고 하면 이재용을 석방하라. 그게 아니라면, 이재용이 아니라 이석기를 사면하라. 그리고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라.

채효정 오늘의 교육편집위원장 경향: 2021.07.26.

 

자아의 영토

신분증 사본, 통장 사본, 명함 스캔본 또는 이력서, 개인정보 활용동의서. 논문 심사를 했더니 심사비를 지급한다며 개인정보를 요청한다. 별생각 없이 보내려다, 주소와 주민등록번호를 포함한 내 개인정보를 알려주자니 왠지 찜찜하다. 심사비 안 받을 테니 봉사한 셈 쳐달라고 했다. 더는 연락이 없다. 얼마 전 동료가 들려준 에피소드다. 현장 연구를 위해 다니고 있는 교회에서 전화가 왔다. 교인 수첩을 만들려고 하니 주소, 전화번호, 직업을 확인해 달라고 했다. 왜 그래야 하냐고 물으니, 당황한 듯 같은 교인끼리 그것도 안 알려주냐고 되물었다. 교인 수첩이라고 교인만 보라는 법이 어디 있냐고 맞받자, 별 까탈스러운 사람 다 있다며 투덜댔다.

 

치과에서 흔히 겪는 일 하나. 한 달 전 예약이지만, 손님이 많은지 이삼십분은 족히 기다린다. 약간 짜증이 난 상태에서 간호사의 안내를 받아 치과 의자에 눕혀진다. 금방 온다던 의사는 오지 않고 한동안 멍하니 드러누워 있다. 고개를 드니 바로 눈앞에 커다란 모니터가 일어선다. 성별, 나이, 이름, 환자 번호. 방금 치료받고 나간 환자의 개인정보다. , 잇몸이 내려앉아 치아 상태가 좋질 않군. 어금니 위아래로 임플란트를 8개나 하다니. 사십대 중반 여성이면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한창 청년인데 도대체 어떤 고단한 삶을 살았길래 치아가 이렇게나 망가졌을까? 이런저런 상상을 하다, 치료를 마치고 떠나면 누군가 내 진료 모니터를 감상할 걸 생각하니 씁쓰름하다.

 

오피스텔에서 혼자 사는 20대 직장인 여성. 퇴근 후 평소처럼 쓰레기를 버리려고 현관문을 연다. 두 명의 낯선 남자가 앞을 가로막는다. 경찰이라며 다짜고짜 현관문을 제치고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오려고 한다. 놀란 가슴에 경찰 신분증을 제시하라고 요청한다. 신분증을 보여주는 시늉만 할 뿐 소속과 이름도 제대로 밝히지 않는다. 112에 신고한 끝에 낯선 두 남자가 경찰임을 확인한다. 그런데도 불쾌한 심정을 떨칠 수 없어 국민권익위원회에 검문 방식이 적절했는지 판단해달라고 요청한다. “단속 현장에서 범죄로 의심할 만한 정황이 확인되지 않았음에도 관찰, 대화 등 사전 절차를 소홀히 한 채 불심검문을 하고, 그 과정에서 신분증 제시, 소속 및 성명 고지 등을 소홀히 한 경찰관의 행위는 부당하다는 판단을 끌어낸다.

 

최근 경찰이 옛 동거녀의 중학생 아들을 살해한 혐의로 구속한 피의자 2명의 이름, 나이, 얼굴을 공개했다. 애초 신상 공개 지침상 잔인성공공의 이익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신상정보를 공개하지 않기로 했었다. 청와대 국민청원에 비난 글이 올라오고 대중의 관심이 고조되었다. 뒤늦게 변호사, 정신과 의사, 교수 등 외부전문가 4명과 경찰 내부 전문가 3명이 모였다. 국민의 알 권리 보장, 재범방지, 범죄예방 등 공공의 이익을 위해 신상 공개가 필요하다고 ‘7인의 전문가가 판단했다.

 

굳이 널리 알릴 필요까지는 없는 내 신상정보를 누군가 마음대로 접근한다면? “그것이 알고 싶지 않다는 데도 사익이나 공익의 이름으로 남의 신상정보에 강제로 노출된다면?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이 정의한 자아의 영토개념은 궁금증을 풀어준다. 동물은 자신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는 다른 동물에게 영역권을 주장한다. 인간도 예외는 아니다. 다만 이 영역이 자아의 영토일 뿐이다. 아무리 세속화된 현대사회라지만, 민주주의 덕분에 개인의 자아는 성스러운 대상으로 올라섰다. 자아의 영토는 겹쳐지는 경우가 많아 그 경계를 함께 돌볼 때만 성스러움이 보장된다. 고프먼은 저서 <수용소>에서 비록 영역권 주장을 상실한 죄수라 하더라도 그들 자아의 영토가 무차별적으로 짓밟힐 때 얼마나 참혹한 일이 벌어지는지 잘 보여준다. 민주주의가 수용소로 굴러떨어지지 않으려면, 너나 할 것 없이 자아의 영토에 대한 인식을 다잡아야 한다./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경향: : 2021.07.30

 

 

2020년대에 필요한 대통령의 자격

연일 30도가 넘는 폭염으로 일상생활이 쉽지 않다. 전방을 지키던 군인, 가난한 노부부를 비롯해 온열질환으로 쓰러진 이들의 뉴스를 접하며 마음이 아파온다. 그나마 더위는 피할 수라도 있지만, 유럽의 홍수 피해를 보면 언젠가 서울 도심에도 물폭탄이 쏟아져 아수라장이 되지 않을까 두렵다. 사람들은 늘 날씨 이야기를 하며 살아왔는데 그것이 기후 이야기로 바뀌면서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코로나19 다음에는 분명 기후위기가 우리 일상을 점령할 것이다.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지켜보면 작년과 올해 사이 상황이 극적으로 변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2050 탄소중립선언을 한 지난해 10월로 시계를 돌려본다. 2008년부터 2020년까지 발효된 교토의정서 체제가 끝나고 파리협정 체제가 시작되기 두 달 전이다. 교토의정서는 선진국 37개국만을 대상으로 했지만 파리협정은 참가국이 195개로 늘어났다. 그사이 지구 평균기온과 탄소 배출량은 가파르게 상승했고, 박근혜 정부 때 기후악당국가로 지목된 한국에 가해지는 압력은 상상 이상으로 커졌다. 코로나19 이후 K방역의 성공으로 세계적인 지도국가가 된 우리에게 2050 탄소중립선언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올해 4월 미국 주도로 유엔 기후정상회담이 열렸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한국에 국가탄소감축목표(NDC)의 상향조정을 요청했다. 2050 탄소중립선언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이에 맞는 2030년까지의 감축목표를 아직 밝히지 못한 상황이다. 6월에는 P4G 서울정상회의가 열렸다. P4G는 녹색경제를 중심으로 2030 지속가능발전목표와 파리협정 이행을 촉구하는 국제협의체다. 문 대통령은 이때 탄소중립기본법 마련을 약속하고 감축목표 설정을 위한 탄소중립위원회를 발족시켰다. 같은 달, 런던에서 G7 정상회의가 열렸다. G7 국가가 아님에도 높아진 위상으로 초청받은 한국에 다시 감축압력이 가해졌다. 우리는 10월 영국에서 열리는 COP26(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에서 설득력 있는 2030NDC를 발표해야 한다.

 

한국의 탄소 배출량은 201872800t으로 정점을 찍었다. 같은 해 IPCC(유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 1.5도 특별보고서는 2030년 감축량을 2010년 대비 45%로 제안했다. 이에 따르면 한국은 203041700t까지 줄여야 한다. 당초 문재인 정부의 감축목표는 2030년까지 2017년 대비 24.4% 감축이었고, 이는 박근혜 정부가 만든 2030년 배출전망치 대비 37% 감축, 53600t을 숫자만 바꾼 것이다.

 

이렇게 복잡한 계산법과 짐작하기 어려운 수치가 가리키는 지점은 우리가 탄소 감축을 현실적 목표로 삼아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목표를 정하더라도 그것을 이룰 의지와 수단이 부족했다. 이명박 정부는 교토의정서 당사국이 아님에도 2009년 스스로 탄소감축목표를 제시해 국제사회의 칭송을 받았지만 약속을 지키기는커녕 석탄발전소 7기의 신축을 결정했다. 늦어도 2050년에는 문을 닫아야 할 발전소를 지금도 짓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심각성을 인식했으나 답을 내놓지 못한다. 탄소 감축 목표와 에너지 공급계획의 마찰로 탈원전 정책은 사방에서 공격받고 있다.

 

이제 에너지 문제는 짧아도 향후 30년을 좌우할 생존의 문제가 됐다. 소극적으로 보면 마지막 시험의 답안지를 제출할 시점이며, 적극적으로는 1960년대 이후 화석연료를 기반으로 발전한 경제사회구조의 틀을 다시 짜야 하는 시점이다. 디지털 중심의 4차 산업혁명을 넘어선 이야기로, 문명의 전환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전히 갈림길에 있다. 대통령이 약속한 탄소중립 기본법은 국회를 통과하지 못한다. 녹색성장을 넣느냐 마느냐, 탄소감축 목표치를 넣느냐 마느냐의 공방이다. 법제화되고 정책이 정비되지 않은 채 정권이 바뀌면 무효로 돌아갈 수 있다.

 

기후위기 대응의 성패는 전적으로 다음 대통령에 달려 있다. 비유하자면, 트럼프와 바이든의 차이다. 지난 27일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들의 기후공약을 밝히는 온라인 토론회가 열렸다. 모두 문재인 정부의 탄소중립정책을 이어받는다고 했다. 유력 후보인 이재명·이낙연 후보는 환경부와 산업자원부의 업무를 쪼개서 기후에너지부를 만들겠다고 공약했다. 짧은 토론회로는 알 수 없지만, 후보 간 차이가 보였고 여전히 녹색성장을 강조하거나 탈원전을 뒤집어 핵융합기술을 지지하는 후보도 있었다. 신기술은 파국을 막기 위한 것이지, 또 다른 성장을 위한 것이면 안 된다. 이 문제에 대해 철저한 인식과 철학을 가진 후보만이 대통령 자격이 있다.

한윤정 전환연구자 경향 : 2021.0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