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수사’의 오염된 증거가 말하는 것 한겨레 :2021-07-29
죽인 힘으로 살지 않겠다 경향 : 2021.08.02.
조중동의 색깔몰이, 철학교수들의 용춤 프레시안 2021.08.02
한미 연합훈련과 '삐뚤어진 보수' 프레시안 2021.08.02.
이준석의 '기후 위기'에 대한 입장은 대체 뭘까? 프레시안 2021.08.04.
‘사람을 전시했던’ 도시, 도쿄 2021-08-06
투기꾼이 농민 되는 나라, 농지법 개정해야 뉴스민 2021-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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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과 불평등의 사회 어떻게 바꿀 것인가 경향 : 2021.08.09
경계청년을 착취하는 사회 경향 : 2021.08.09
2022 대선을 보면서 2021.08.09.매일노동뉴스
치명적인 특권 사랑 매일노동뉴스 2021.08.09.
반론: ‘탄소중립과 노동전환’ 민주주의 없는 거버넌스 한겨레 :2021-08-09
양심수 없는 나라야말로 진짜 선진국이다 한겨레 2021.08.10
한미연합훈련에 강력 반발한 북한, '자가당착'에 빠지지 말라 프레시안 2021.08.10.
일본, 그 ‘반성 없음’의 구조 한겨레 2021.08.13
누가 부동산공화국 혁파의 선봉장이 될 것인가 미디어오늘 2021.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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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사냥에 어떻게 맞설 것인가 주간경향 2021.08.16.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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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 반대론과 우주적 피해망상 한겨레 :2021-08-16
이재용 부회장이 억울하다”는 조선일보 한겨레 2021-08-16
미성숙한 철인들 그리고 원전 보수 경향: 2021.08.16
한겨레사설] ‘아프간 미군 철수’ 둘러싼 무책임한 아전인수 주장들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평화의 꿈'이 실패한 진짜 이유 프레시안 2021.08.23
아프간 난민, 한국 오지 마라 경향 2021.08.23.
고독사가 아니라 고독살인이다 조선 2021.08.23.
펜트하우스 경향 2021.08.23
언론권력 옹위도 ‘가짜뉴스’로 하나 경향 : 2021.08.24.
동의하지 않지만 반대할 수 없다 경남도민 2021. 08. 26
생태인지 감수성 한겨레 :2021-08-27
그리움이라는 능력 한겨레 :2021-03-11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 경향 : 2021.08.30
일본인 제자 이야기 경기신문 2021.08.30
오래된 미래, 간호사 처우개선 매일노동뉴스 2021.08.30
정의당이 민주노총을 때리는 이유 매일노동뉴스 2021.08.30
유해물질에 무너지는 작은 사업장 노동자 매일노동뉴스 2021.08.31.
부동산 개평’을 주겠다는 공약이 무섭다 한겨레 :2021-08-31
“평생 여당 할 것 같은가” 경향 : 2021.08.31
조국 수사’의 오염된 증거가 말하는 것
A는 절도 혐의로 수사를 받는다. 혐의를 완강히 부인한다. 절도가 벌어진 시각에 다른 장소에서 파티에 참석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알리바이를 증언해줄 사람을 찾지 못한다. 그러던 중 파티 참석자 한 명이 검찰에 와서 조사를 받는다. 파티에서 A를 봤다는 말을 잠깐 언급한다. 검사는 이 진술을 사건 기록에만 넣어두고 변호인에게는 알리지 않은 채 A를 기소한다.
미국에서는 검사의 이런 행위는 직권남용으로 위법이다. 검사는 피고인의 무죄를 입증하거나 형량을 낮추는 데 도움이 되는 증거·증언을 확보했을 때 피고인 쪽에 알려줘야 할 의무가 있다는 1963년 연방대법원 판결(브레이디 판결)로 확립된 원칙이다. 이를 어겼을 때는 무죄가 선고되거나, 기존 검찰 쪽 증거를 배척하고 재판이 진행된다. 미국변호사협회의 윤리강령도 ‘검사는 무죄나 감경 사유가 되는 증거 및 정보를 얻었을 때는 지체 없이 변호인과 법원에 알려야 한다’고 규정한다. 검사도 한 명의 변호사로서 변호사협회의 규율을 받는 미국에서는 이 규정을 심각하게 위반할 경우 변호사 자격이 박탈돼 검사직을 잃을 수도 있다.
‘브레이디 판결’은 미란다 원칙을 정립한 ‘미란다 판결’(1966년)과 함께 형사절차의 현대적 원칙을 빚어낸 최고의 판결로 평가된다. 캐나다 대법원도 1991년 ‘국가는 피고인의 혐의 입증에 대한 유불리를 떠나, 법정에 제출할지 여부와도 상관없이, 수집된 모든 증거를 피고인 쪽에 제공할 의무가 있다’고 판결했다. 캐나다 대법원은 “수사를 통해 얻은 정보는 유죄 판결을 얻기 위해서만 사용하는 국가의 소유물이 아니라,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사용해야 할 국민 모두의 소유물이다”라고 밝혔다. 우리 대법원도 2002년 “검사가 수사 및 공판 과정에서 피고인에게 유리한 증거를 발견하게 되었다면 피고인의 이익을 위하여 이를 법원에 제출하여야 한다”고 판시했다. 검사는 피고인에게 유리한 증거도 제출해야 한다는 건 이렇게 문명국가의 보편적 형사절차 원칙으로 자리잡았다.
지난 23일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부부의 재판에서 나온 조 전 장관 딸 친구들의 증언을 보며 이 원칙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조 전 장관 딸 조아무개씨의 서울대 공익인권법센터 인턴십 확인서가 허위라는 게 검찰의 기소 내용이고, 이와 관련해 2009년 공익인권법센터 세미나에 조씨가 참석했는지 여부가 핵심 쟁점의 하나다. 이는 공범으로 기소된 조 전 장관의 부인 정경심 교수 재판에서도 쟁점이 됐다. 1심 재판부는 세미나에서 조씨를 봤다는 여러 증언을 배척하고, 당시 세미나에 참석했던 조씨의 친구 박아무개·장아무개씨의 ‘현장에서 조씨를 본 기억이 없다’는 증언을 받아들여 유죄 이유로 삼았다. 정 교수는 세미나 장면을 찍은 동영상 속의 여학생이 딸 조씨라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런데 23일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박씨가 “검찰 조사에서 동영상을 보자마자 ‘저건 조씨다’라고 말했다”며 “검사가 ‘증거들을 보면 아니지 않겠느냐’고 질문해, ‘그럼 아닐 수도 있겠다’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또 “명확하게 조씨를 그(세미나) 자리에서 봤다는 기억이 있다면 검사 질문에 ‘아니다, 조씨다’라고 말했겠지만, 10여년 전 상황이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아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답했다”고 밝혔다. ‘저건 조씨다’라는 진술과 ‘그 자리에서 봤다는 기억이 없다’는 진술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같은 자리에 있었어도 보지 못했을 수 있다. 더구나 ‘조씨가 세미나에 참석했는지 여부’를 증명하는 데 있어, 당시 현장을 찍은 동영상 속 인물이 조씨인지 여부와 그 자리에서 조씨를 본 기억이 있는지 여부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명확하고 객관적인 증거인가.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전자라고 판단할 것이다. 그런데 검찰은 동영상을 ‘보자마자’ 나온 친구 박씨의 ‘저건 조씨다’라는 진술은 기록조차 남기지 않은 채, 검사의 추가 질문 끝에 나온 희석된 진술들만 증거로 제출했다. 박씨의 애초 진술을 변호인 쪽에 알려주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또다른 친구 장씨도 이번 재판에서 “동영상에서 확인된 여학생이 99% 조씨가 맞다”고 증언했다. 장씨는 이후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현장에서 조씨와)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저는 없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조씨가) 아예 오지 않았다’라고 한 것”이라며 “저의 증오심과 적개심, 인터넷으로 세뇌된 삐뚤어진 마음, 즉 우리 가족이 너희를 도와줬는데 오히려 너희들 때문에 내 가족이 피해를 봤다라는 생각이 그날 보복적이고 경솔한 진술을 하게 한 것 같다”고 했다. 장씨는 조씨를 논문 제1저자로 등재한 단국대 장아무개 교수의 아들로, 장 교수는 검찰 조사를 받고 출국금지를 당하기도 했다.
조씨가 세미나에 참석했다는 진실을 덮은 것이 박씨나 장씨의 잘못은 아니라고 본다. 검찰이 피고인에게 유리한 증언도 객관적으로 다루는 공정한 태도를 지녔다면 이 사안은 기소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저건 조씨다’라는 진술이 기록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부터가 검찰의 객관성을 허문다.
조 전 장관 수사는 이 밖에도 여러 형사절차적 문제를 노정했다. 검찰이 주요 증거인 동양대 강사휴게실 피시(PC) 포렌식 결과를 일부만 선별 제출해 논란이 되고 있는데 이는 또다른 ‘피의자에게 유리한 증거의 제출 원칙’ 위반일 수 있다. 이 피시에서 증거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형사소송법 절차를 위반했다는 법원의 판단도 나온 바 있다.
이러한 문제는 조국 개인에 대한 비난과 옹호로 열뜬 논란에서 한발 떨어져 봐야 할 다른 차원의 사안이다. 누구나 맞닥뜨릴 수 있는 형사절차의 원칙과 실행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박씨와 장씨처럼 친구 부모의 수사·재판에서 사실대로 진술하는 게 어떤 이유로든 어려웠다면 그것은 문명사회의 형사절차가 아니다. 동영상이 증거로 남아 있는데 거기에 찍힌 인물이 조씨라는 기초적인 사실을 확인하는 데 결과적으로 2년 가까운 법정 공방이 필요했다는 이 비합리성을 어떻게 설명할 건가. 조 전 장관의 딸은 지난달 법정 증인으로 나와 “재판에 유리한 정보를 줄 수 있는 친구들도 연락을 받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회적 분위기의 영향으로 형사절차가 객관성을 잃어버린다면 전근대적 여론재판과 다를 게 없다.
이럴 때 중요한 게 형사절차를 개시하고 끌고 가는 능동적 주체인 검사의 역할이다. 사회적 지탄을 받는 피고인일지라도 검사는 그와 대립하는 상대방의 위치에 머물지 말고 객관성과 공정성의 담지자가 돼야 한다. 그런 검찰의 역할에서 바로 ‘피고인에게 유리한 증거의 제출 원칙’이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경험 속에서 검찰은 결과를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수사를 하는 집단이고, 그 전형의 하나가 조 전 장관 수사였다. 이번에 박씨와 장씨의 ‘오염된 증언’이 바로잡힌 것은 조씨의 세미나 참석이라는 단편적 사실을 확인했다는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 검찰이 이 사건 수사에 임한 태도의 문제점을 극명히 드러내줬다. 수사는 사냥에 비유되기도 하지만, 형사절차는 야수의 본능이 아닌 인간의 이성이 지배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두 젊은이의 고백적 증언은 조 전 장관 부부의 유무죄에 미치는 영향보다 아직 야만의 티를 벗지 못한 우리 형사사법제도의 현주소에 대한 경종으로 더 큰 울림을 준다.
/ 박용현 논설위원 한겨레 :2021-07-29
죽인 힘으로 살지 않겠다
“인간은 죽을힘을 다해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인 힘으로 산다.” <절멸>에서 옮겨 적은 문장이다. 정확히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원인으로 지목된 박쥐의 입장에서 쓰인 글의 일부다. 여기까지 말해놓고 나는 방금 사용한 ‘박쥐의 입장에서’라는 표현을 몇 번이나 썼다 지운다. 감히 어떻게 대변할 수 있겠는가. 박쥐의 입장을 말이다. 동물을 의인화하려는 시도는 대부분 유치한 실패로 돌아간다. 동물 예능 프로그램의 우스꽝스러운 내레이션처럼 의인화 뒤에 남는 건 동물의 분위기를 이용해 간접적으로 드러낸 인간의 욕망, 더 정확히는 자본의 욕망뿐이다. 이야기에 동물을 등장시킬수록 동물이 아니라 착취의 구조만이 명확해진다. 우리 중 동물을 침범하거나 괴롭히지 않는 자는 아무도 없다. 우리는 공장식 축산과 수산의 소비자이거나 거대한 동물산업의 관계자이거나 최소한 구경꾼이다.
그중에는 의인화의 한계를 알면서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지 묻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웃음기 없이 동물의 자리에 선다. 의인화를 실패한 곳에서 시작되는 ‘의동물화’도 있다는 걸 그들이 쓴 글을 보고 배웠다. 도입부에 인용한 문장은 작가 정혜윤이 자신을 박쥐로 의동물화한 시도다. 의동물화 역시 필연적으로 실패다. 그러나 적어도 의인화보다는 멀리 간 실패다. 올여름 워크룸프레스에서 출간한 책 <절멸>은 의인화를 넘어선 의동물화를 향해 움직인다. 동물이 최대한 덜 죽는 세계를 마련하고 싶어서다.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동물의 자리에 선 35명의 작가가 이 책에 참여했다. 정세랑, 홍은전, 김하나, 요조, 김한민, 현희진 등이 같은 주제로 글을 썼으며 창작 집단 이동시가 쓰고 엮었다.
전염병이 돌면 축산업의 동물들은 빠르게 살처분 당한다. 코로나19 이전부터 그런 일은 비일비재했다. 밀집 사육 시스템 속에서 키워지고, 도살 당해 고기나 사료나 의류가 되고, 때때로 산 채로 구덩이에 묻히는 게 소, 돼지, 닭, 그리고 오리의 삶이다. <절멸> 집필에 함께한 소설가 정세랑은 오리의 자리에서 서서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20년을 살 수 있습니다. 20년이면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애정을 알고 포옹을 좋아합니다. 우정은 종종 존재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착취가 이 세계의 보편입니다. (…) 우리는 사료가 됩니다. 우리를 죽여 먹이는 개와 고양이에게, 당신들은 더 나은 친구입니까? 그 우정마저도 굴절과 왜곡이 아닌지 우리는 죽어가며 궁금해합니다. (…) 구덩이를 향해 걷는 우리를 보고 울던 사람들은 마음을 다치고, 마음을 다치지 않는 사람들은 다음 해에 같은 일을 반복합니다.” 이런 문장을 읽으면 나는 마음을 다칠 줄 아는 능력을 가진 이가 몹시 그리워진다.
공장식 축산과 전염병뿐 아니라 기후위기로 죽는 동물도 무수하다. 코알라의 개체수 역시 30%나 줄었다. 기후위기로 잦아진 초대형 산불 때문이다. 김하나 작가는 코알라의 자리에 서서 다음과 같이 썼다. “코알라는 ‘노 워터’라는 뜻이다. 물을 잘 마시지 않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당신들은 산불 속에 검게 그을린 우리 코알라들이 인간이 건넨 물을 벌컥벌컥 마시는 장면을 보았을 것이다. 당신들은 그 코알라를 목마름으로부터 구해주었다며 안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구에 불을 지른 것은 애초에 당신들이다. 당신들은 나의 귀여움을 누릴 자격이 없다.” 김하나 작가의 말대로 우리는 동물의 귀여움에 관심이 많다. 하지만 그들의 서식지를 어떻게 사라지게 했는지 정확히 아는 자는 드물다.
<절멸>에는 감염병과 관계된 동물들 또한 주연으로 등장한다. 인간에게 병을 옮기는 매개자 동물, 감염병 때문에 살처분 당하는 동물, 감염병 치료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희생 당한 동물 등 팬데믹 시대에 특히 고난을 겪는 종에 집중한다. 코로나19의 근본 원인을 직시하자는 제안은 동물에게 주목한다는 의미다. 알려졌다시피 이 바이러스는 인간이 동물의 서식지에 침투하여 감염 접점을 확대시키면서 시작되었다. 지금까지의 전염병이 그랬듯 다가올 질병 X 역시 동물에게서 나올 확률이 높다. 동물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질병 X의 예방을 바랄 수는 없다. 동물을 덜 죽일 방법을 찾아야 인간도 덜 죽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고민해야 할 것은 재난지원금과 공공의료 확충뿐만이 아니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맺는 관계를 재검토하지 않고 살던 대로 산다면 사라지게 될 것들이 눈에 선하다. 그 풍경에는 당연히 우리 인간동물의 모습 또한 포함되어 있다.
이야기와 동물과 시는 세 가지 단어이면서도 하나의 의미라고 이동시는 말한다. 동물은 살아 움직이는 시니까. 이야기 그 자체인 동물의 자리에 서보았다가 사람이 하는 일을 보고 마음을 크게 다친 나는 이제 이렇게 말하겠다. 더 이상 죽인 힘으로 살고 싶지 않다. 살린 힘으로 살고 싶다./ 이슬아 ‘일간 이슬아’ 발행인·글쓰기 교사 경향 : 2021.08.02.
조중동의 색깔몰이, 철학교수들의 용춤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면서 조중동의 색깔공세가 늘어나고 있다. 기실 신방복합체인 조중동은 문재인 정부 출범 때부터 ‘좌파 딱지’를 붙여왔다. 임기 말을 앞두고는 ‘좌파정권의 실패’로 몰아친다. 그 색깔몰이를 견제해야 마땅한 철학 교수들마저 용춤 추는 풍경은 을씨년스럽다.
“애국의 國은 대한민국… 나라 파괴한 이들 애국자라 불러선 안돼.”
조선닷컴이 지난 주말 내내 부각한 철학교수 최진석 인터뷰의 제목이다. 기사는 그를 “석학(碩學)이자 스타 철학자”로 소개했다. 기사가 전한 그의 발언은 놀랍다. “대통령이 대한민국 헌법 수호자로서 역할은 하려고 하지 않고, 대한민국 헌법을 넘어선 역할을 하려고 한다”면서“상당히 위험한 일”이라고 거침없이 주장한다. 심지어 “현 집권세력이 기본적으로 북한에 민족적 정통성이 있고, 북한을 민족 이익을 수호하는 국가로 여기다 보니 한마디로 ‘종북굴중혐미반일(從北屈中嫌美反日)’로 흐르고 있”다며 “몽환적 통치 때문에 대한민국은 지금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가 아니라 ‘아무나 흔들 수 있는 나라’가 되어버렸다”고 부르댄다.
▲ 8월1일 조선일보 홈페이지 “최진석 “애국의 國은 대한민국… 나라 파괴한 이들 애국자라 불러선 안돼”” 인터뷰 화면 갈무리.
과연 그러한가. 조선일보의 색깔몰이를 뺨친다. 철학교수의 주장이라고 보기 민망할 정도로 ‘몽환적 논리’다. 조선일보가 “석학이자 스타철학자”라고 소개한 이유가 짐작된다.
기실 조선일보만도 최진석만도 아니다. ‘100세 철학자’로 조중동이 합창하듯 추어올린 김형석 교수는 “문재인 정부는 왜 실패했는가” 제목의 칼럼(동아일보 7월30일)에서 원인은 “산업혁명 시대 사회주의적 경제관을 절대시하는 과오”라고 주장했다. 그는 두 달 전에도 같은 신문에 똑같은 제목 “문재인 정권은 왜 실패했는가”(5월7일)를 기고해서 “150년 전 계급투쟁의 폐습을 계승하면서 국제정세를 위한 거시경제는 외면하고 국내적인 사소한 과제에 몰입하는 동안 실패를 거듭했다”고 강조했다. 심지어 지난 “4년간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대한민국 전체를 오늘과 같은 중증 환자로 만들었다”고 개탄했다(7월2일).
100세가 넘은 분의 칼럼을 굳이 따따부따하고 싶지는 않다, 케케묵은 색깔몰이에 앞장서는 모습, ‘100세 철학자’를 자사의 정파적 이익에 이용하는 조중동 두루 개탄스러울 따름이다.
해괴하게도 조중동이 즐겨 소개하는 철학 교수들은 ‘생각’과 ‘공부’를 강조한다. 자신도 촛불을 들었다는 최진석은 인터뷰에서 시종일관 “생각하는 능력”을 강조하고 다음 대통령 자격도 “인문적 능력”을 중시했다. 그가 “훨씬 더 깊고 복잡하고 존재론적인 인간의 문제”를 거론한 대목은 충격적이다. 친일청산 문제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묻는 기자의 질문에 “국가 자체에 대한 기억이 없고, 국가의 보호를 받아본 기억도 없이 식민지가 된 지 이미 20년이나 흐른 시점”에서 조선일보의 ‘철학 석학’은 “나는 죽어도 간도특설대 장교는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하지는 못하겠다. 저는 노력하여 흥남시청의 농업계장이라도 하려고 했을 것 같다”라고 언죽번죽 말했다. 대체 그는 간도특설대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는 있는 걸까. 알고도 그런 말을 했으리라 믿고 싶지 않다. 틈날 때마다 공부하라고 훈계하는 그에게 그 말을 돌려주고 싶다. “노력”하여 농업계장이라도 하겠다는 말에선 그다운 ‘진정’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런 말은 일기장에나 쓸 일이다. 행여 ‘존재론적 인간 문제’라고 자부는 말기 바란다.
▲ 4월13일 중앙일보 유튜브에 업로드된 “최진석 “문재인 대통령, 남은 1년 잘못 수정할 가능성 없어”” 인터뷰 화면 갈무리
최진석은 앞서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도 ‘586집권세력’을 비판하며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게 염치와 부끄러움”이고 “이걸 모르는 것 역시 ‘생각하는 능력’이 없어서”라고 꾸짖었다. 어떤가. 이쯤이면 ‘철학적 내로남불’ 아닌가.
철학이 강단의 교수들에 의해 시정의 우스개로 전락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란 가슴 아픈 일이다. 강단철학 밖에서 애면글면 철학적 고투에 몰입해온 철학자들을 떠올리면 더 그렇다. 성찰을 촉구한다./ 손석춘 건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mediatoday 2021.08.02
국민의 힘 강령 '1조 1항'과 그 반대자들
국민의 힘 강령 1조 1항은 “국민 누구에게나 건강하고 행복한 삶의 기회를 보장하며, 자율적인 개개인의 넓은 선택을 가질 수 있도록 다양한 정책을 추진한다. 국가는 국민 개개인이 기본소득을 통해 안정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도록 적극적으로 뒷받침하여 4차 산업혁명시대를 대비한다” 고 명시되었다. 마치 도올 김용옥 선생이 노자 도덕경 81장의 소국과민 절을 읽는 듯하다. 선남선녀 평범한 인민들이 감(其食)미(其服)롭고 안(其居)락(其俗)한 삶을 사는 것, 그 심미적 삶의 느낌에 있다. 그 느낌을 정치적으로 보장받고자 하는 것이며, 그 보장을 위해 철학적으로 의식의 변화를 모색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20대 대통령선거 유력후보 이재명 지사가 소망하는 억강부약 대동 세상과 닿아 있다.
국민의 힘에서 기본소득은 김종인 전 국민의 힘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재직하던 당시 억지로 강령 1조 1항으로 밀어 넣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그렇더라도 단 한 명도 당 강령을 따르거나 찬성하는 자가 전혀 없다는 것이 매우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의 힘 정치인들은 자기 당 강령 1조 1항에 무조건 반기를 들고 그 반대 전선의 길 맨 앞에 서서 울부짖고 기본소득을 무력화시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어 매우 씁쓸하다. 그 대표적인 당원이 이준석 당 대표, 윤희숙 의원, 유승민 전의원이 강령 1조 1항 기본소득 반대 3인방이다. 30대 젊은 당 대표는 기본소득에 대해 “저는 기본소득은 불로소득인지 근로소득인지 물었다”며 “근로소득 아니면 그냥 불로소득이라고 하시면 된다”고 기본소득을 선점한 대선 유력후보 이재명 지사에게 물어와 이 지사는 기본소득이란 국민이 낸 세금으로 국민에게 지급하는 것이니 ‘공적 이전소득(정부로부터 현금급여)’이라고 친절하게 답한다. 사실 젊은 야당 대표식 이런 말을 하면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하지”라는 표현과 소위 무조건(공부 없이) 헛말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젊은 30대 당 대표에 질세라 자기 당 강령 1조 1항을 아주 강력하게 무조건 반대하는 두 분이 바로 대선 출마를 선언한 초선 현직 윤희숙 의원과 잠재적 대선 유력자 후보인 4선 출신 유승민 전 의원이다.
윤의원은 기본소득에 대해 “인류의 축적된 경제상식을 뒤집는 제도”라고 자기 당 강령 1조 1항에 맹공을 펼치면서 7월 2일 대권 도전을 선언하였다. 윤의원은 여권 유력 대선후보인 이 지사에게 "정부가 돈을 뿌리면 경제 성장을 지속한다는 말인데 인류 역사상 그런 일은 없었다"고 지적했다. "재난지원금 등을 통해 일시적으로 경기 변동을 막을 수 있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윤의원은 경제학자 다운 면모를 한껏 멋진 폼이라도 보여주려 애쓰고 있지만, 당 강령 1조1항을 강력하게 거부하는 소속의원일 뿐이다. 더 나아가, 윤의원은 기본소득을 소주성(소득주도성장)의 쌍둥이 동생의 신조어를 생산해내고 있지만, 국민의 힘 강령 1조1항을 마치 현 정부 정책의 쌍둥이 동생이라 표현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심지어, 강령 1조 1항인 기본소득을 아주 나쁜 포퓰리즘이라고 폄훼하기에 이르렀다. 기본소득은 선거 때 선심 쓰는 선거공약이 아니라 모두에게 실질적 자유이자 포퓰리즘이 아니라 진정한 민주주의다.
국민의 힘 강령 1조 1항 반대 3인방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게 돋보이면서 나름의 노련한 에이스라 할 수 있는 분이 4선 출신 유승민 전 의원이다. 노련한 에이스 답게 공정소득을 주장하면서 공정소득과 안심 소득은 마이너스 소득세인데도 불구하고 에이스답게 그 용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을뿐더러, 마이너스 소득세는 기본소득과 그 사촌이라고 이론적으로 정초한 판 파레이스의 주장에 정면으로 맞대결하고 있는 모양새다. “공정소득은 기본소득의 사촌이 아니라 남남이다”라는 새로운 담론을 만들어 냈으나 그 반향은 크지 않은 듯하다. 필자 정도만 언급해주니 불편하지 않았나 싶다.
유 전의원은 판 파레이스에게 끝장토론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이재명 지사를 택하였다. 물론 코로나19의 팬데믹 상황 때문에 판 파레이스를 초청하기 어려워 이 지사를 택하지는 않았는가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사보다는 국민의 힘 강령 1조 1항에 기본소득을 억지로 넣었다고 하신 김종인 전 비상대책위원장에게 끝장토론을 요청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나 싶기도 하다. 안타까운 소식은 이재명 후보가 기본소득은 우선순위 상 제 1공약이 아닐 뿐 핵심정책이라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밝혔음에도 기본소득이 공약이 아니다라고 했다고 말을 바꾼 것처럼 허위 사실을 악의적으로 공표하였다는 이유로 기본소득 국민운동본부로부터 유 전의원을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고발하는데 이르렀다. 참고로, 이재명 지사는 지난 7월 22일 목요일 임기 내 모든 청년(19세-29세)에게 1년 2백만 원, 2023년 25만 원으로 시작하여 모든 국민에게 임기 내 1인당 1년 100만 원을 소멸성 지역 화폐로 지급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담은 기본소득 정책을 발표하였다.
3인방까지는 아니지만, 국민의 힘 소속 오세훈 서울시장도 꼽지 않을 수 없다. 오 시장 또한 안심 소득을 들고 당 강령 1조 1항에 쌔게 반대하다가 뒷걸음치더니 기본소득 무대에서 사라지는 듯하다. 다만 오 시장은 “안심소득 실험 대상을 소득하위 25%(중위소득 50%) 이하로 낮추는 방안을 전문가들과 논의 중”이라고 한다. 안심 소득은 오 시장의 복지 아젠다로서 중산층 이하 가구를 대상으로 소득이 적을수록 많이 지원하고 소득이 늘어나면 지원금을 줄이는 선별 복지제도다. 안심 소득은 마이너스 소득세이고 마이너스 소득세는 기본소득과 그 사촌이다. 그러나 기본소득은 빈자들을 대상으로 삼는 세련된 복지정책이나 경제정책 하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이 자기 발로 독립적으로 굳건히 설 수 있도록 하는 사회경제적 발판이자 모두에게 민주적으로 실질적 자유를 누리게 할 수 있는 튼튼한 사회정책이다. 기본소득은 복지 사각지대와 낙인효과가 없는 새로운 분배체계의 공정성이자 공공성 확보의 첫 걸음이다.
끝으로, 정당 강령이란 정당의 이념과 정체성, 기본적 정책과 방침 등을 요약하여 열거하는 것을 뜻한다. 국민의 힘 윤리 규칙 제 3 조 (법규와 당명 준수)는 당원은 법규와 당헌·당규를 준수해야 하며, 당의 강령과 기본정책, 그리고 당명을 따라야 한다. 국민의 힘 강령 1조 1항의 반대 3인방과 오세훈 서울시장은 기본소득이 아니더라도 기본소득과 그 사촌이라도 따라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지 않다면 강령을 변경하거나 정체성에 맞는 당으로 탈당하거나 출당시키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정책 없는 갈지(之)자 무한 행보, 지지율 뒷걸음질, 역사 인식(이한열열사, 부마항쟁?)까지 부족한 것으로 유명세를 혹독하게 치르고 있는 윤석렬 후보는 지난 7월 30일 국민의 힘에 부랴부랴 급히 입당하였는데, 과연 그는 국민의 힘 강령 1조 1항이 기본소득이라는 것을 알고나 있을까? 알고 있다면 따를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김상돈 고려대 겸임교수 | 프레시안 2021.08.02
한미 연합훈련과 '삐뚤어진 보수'
군사 훈련과 북핵 문제 '악순환 30년'
한미 연합훈련 실시 여부가 한반도 정세는 물론이고 한국 정치에도 중대 이슈로 부상하고 있다. 7월 27일 남북 통신연락망 복원, 한미 당국 차원의 연합훈련 논의, 북한의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의 담화 등이 맞물리면서 연합훈련의 방향에 초미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는 것이다.
이 와중에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는 8월 2일자 사설을 통해 문재인 정부를 맹비난하고 나섰다. <조선>은 연합훈련 연기를 고려해야 한다는 문재인 정부 일각의 입장을 '대선용'으로 규정하면서 공세를 펴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한미 연합훈련 연기를 통해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함으로써 대선에서 유리한 국면을 조성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정부·여당을 향해 "선거만 이길 수 있다면 나라 안보가 망가져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사람들"이라고 맹비난했다.
<중앙> 역시 "한·미 연합훈련을 대북 협상의 카드나 지렛대로 삼겠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발상"이라며, "안보를 팔아 대화를 살 수는 없는 법"이라고 주장했다. "남북대화와 한미 연합훈련을 별개"라는 것이다.
이들 언론이 한미 연합훈련 실시를 주장하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사회의 공기(公器)로써 연합훈련 실시에 따른 득실을 차분히 따져보지 않고 문재인 정부를 공격하는 악습에 빠져 있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우선 이들 언론은 코로나19 방역이 시급한 당면 과제임에도 불구하고 유독 연합훈련만 예외로 여긴다. 최근 미국에선 '델타 변이'의 급격한 확산으로 인해 코로나19 확진자가 급증하고 있다. 특히 백신 접종 1억6200만 명 가운데 돌파 감염자가 매주 3만 명 이상씩 나올 정도로 상황이 심각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한국에서도 4차 대유행이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전개는 실내에서 진행되는 한미 지휘소 훈련도 안심할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정확한 훈련 규모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과거 지휘소 훈련에도 한미 양국군 수만 명이 참여했었다. 여기에는 한반도 역외에서 오는 미군들도 상당수 포함된다.
그런데 <한겨레>가 2일자 사설에서 지적한 것처럼, 지휘소 훈련은 "냉방기를 가동한 지하벙커에서 수백 명의 한-미 군인들이 교대로 근무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3밀(밀접·밀폐·밀집) 환경이라 코로나19 집단감염에 취약하다"는 지적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오는 것이다. 과연 이러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연합훈련을 강행해야 할 시급한 이익이 있는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보수 언론에선 코로나19 방역 차원에서 연합훈련의 축소 실시나 연기를 검토해온 문재인 정부를 비난하기에 급급하다.
연합훈련 문제를 대선과 결부시키는 <조선>의 논조도 지나치다. 정부가 남북관계 회복과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재개를 도모하고 이를 위해 연합훈련 조정을 고려하는 것은 선거와 관계없이 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평가의 몫은 유권자들에게 있다. 우리 유권자가 '대선용 남북 정상회담'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아둔하지도 않다.
<중앙>의 상황 인식도 매우 공허하다. <중앙> 역시 대화 재개의 필요성은 인정한다. 그런데 연합훈련에는 손을 대서는 안 된다는 논조이다. 오히려 문재인 정부를 향해 "진정성 있는 대화 재개를 위해서는 훈련 연기를 내세울 게 아니라 북한의 핵 고도화 행위들을 먼저 중단하라고 요구해야 한다"고 권고한다. 대화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 대화 재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주문을 하고 있는 셈이다.
기실 북핵 문제와 한미 연합훈련 사이의 오랜 악연을 떠올려보면 반성하고 자성해야 할 당사자는 '삐뚤어진 보수'이다. 적어도 대북정책에선 '합리적인 보수'라고 할 수 있는 노태우 정부와 조지 H.W 부시 행정부는 1992년 초에 연합훈련 '팀 스피릿' 중단 결정을 내리고 이를 공식 발표하기에 앞서 북한에 통보했었다. 이에 대해 북한도 남북기본합의서 및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체결과 국제원자력기구(IAEA) 안전조치협정 서명으로 화답했었다.
북한이 이들 합의를 지키지 않았다고 비판할 수는 있다. 하지만 북한의 약속 불이행에는 미국의 원조 네오콘과 한국의 삐뚤어진 보수의 합작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이들이 1992년 12월 대선을 앞두고 중단키로 했던 '팀 스피릿'을 재개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국내 냉전 세력이 한미 연합훈련을 선거에 악용한 대표적인 사례였다. 만약 이때 팀 스피릿 중단 결정이 번복되지 않았다면, 북핵 문제도 초기 단계에 해결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어느덧 북핵 문제가 불거진 지 30년이 지나가고 있다. 다양한 각도에서 이를 평가할 수 있지만, 한미 연합훈련 강행과 북핵 문제의 악순환도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이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이다. 연합훈련을 연기하면 대화 재개를 통해 북핵의 추가적인 악화를 막을 수 있는 가능성은 높아진다. 반면 연합훈련을 강행하면 그 반대의 현상이 벌어질 수 있다.
한미의 대북 강경파들은 어떤 시나리오를 원할까? 남북관계와 한반도 정세가 중대한 갈림길에 선 상황에서, 그리고 2022년 3월 대선이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 던져보는 질문이다.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 프레시안 2021.08.02.
이준석의 '기후 위기'에 대한 입장은 대체 뭘까?
기후위기 앞에 우리 모두 공동운명체다
올해도 어김없이 폭염이 이어지고 있다. 기후위기 문제에 관심이 많은 필자는 매일 관련 기사들을 자세히 훑어 본다. 그러면서 그 기사에 달린 댓글도 최대한 읽어보려 한다. 기후위기 문제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알고 싶어서다.
“기후위기에 개의치 않고 기존 관행 그대로 가겠다”가 보수 정치인들의 본심?
그 댓글들을 보면, 기후위기의 심각성에 크게 공감하면서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모색하는 글들이 많다. 하지만 적지 않은 댓글들은 기후위기가 순전히 현 정부 탓이라든가 아니면 중국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는 “신념 아닌 신념”을 펼치고 있다. 기후위기는 꾸며낸 얘기일 뿐이며 심지어 ‘좌파들의 음모론’이라는 어이없는 주장까지 나온다. 본래 댓글 중에는 전혀 신빙성 없는 무책임한 주장도 적지 않지만, 이런 어이없는 주장들을 접할 때마다 어떻게 하면 이들의 생각을 바꿀 수 있을까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오늘 인류에게 닥친 이 심각한 기후위기 문제는 지금 우리 시대에서 가장 시급한 과제다. 솔직히 말하면, 이 문제에 대한 진보진영의 시각이나 대응도 영 마뜩잖다. 그런데 특히 보수진영은 지나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대부분 기후위기 문제에 매우 소극적이고 아예 입장이 없는 경우도 적지 않다. 아니, 기후위기 같은 문제에는 개의치 않고 기존 관행 그대로 계속 가겠다는 심산인 듯 보인다. 기후위기에 대해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의 발언은 좀처럼 들을 수 없다. 국민의힘 대선 주자들도 기후위기에 대해선 입장 표명이 거의 없다. 이들이 집권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참으로 걱정스럽다.
기후위기 기사에서도 ‘정치적 자극’에 집착하는 보수언론
그렇다면 보수언론들은 기후위기 관련 기사들은 어떻게 다루고 있을까? 필자는 보수언론들의 기후위기 기사들을 찾아 읽던 중 한 가지 묘한 현상을 발견했다. 바로 ‘재앙’이라는 용어가 기후위기 기사 제목에 빈번하게 출현한다는 사실이었다. 8월 1일자 중앙일보는 <대재앙 시계 70년 빨라졌다, 기온 3도 오르면 생길 끔찍한 일>이란 제목의 기후위기 관련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에는 댓글이 무려 1400개도 넘는 댓글이 달렸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 댓글 중에는 “우리는 이미 4년 전에 재앙이 시작되었다”거나 “문재앙” 등 특별히 ‘재앙’이란 용어를 둘러싼 댓글이 상당한 비율을 점했다는 사실이었다.
중앙일보는 얼마 전에도 <과학자 “대규모 사망” 경고…코로나 다음에 닥칠 재앙>(7.12)이라는, ‘재앙’이라는 용어를 제목에 포함시킨 기후위기 관련 기사를 게재한 바 있었다. 조선일보도 <“한번도 못본 재앙” 100년만의 폭우에 독일·벨기에 150여명 사망>(7.17)이라는 기후위기 관련기사를 실었다. 여기 제목에도 ‘재앙’이라는 용어가 포함되고 있다. 동아일보는 <세계 곳곳 폭염, 인간이 가져온 기후재앙>(7.14)라는 기후위기 기사를 실으면서 역시 ‘재앙’이란 용어를 제목에 포함시키고 있다.
이렇듯 보수 언론의 기사 제목에서 유독 ‘재앙’이라는 용어가 많이 출현하는 것은 우연적 현상이 아닌, 의도적인 것으로 해석된다. ‘재앙’이란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현 정부에 대한 비난 내지 ‘조롱’을 분명히 드러내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인류공동체 전체에 닥친 이 심각한 기후위기 문제를 기사화하면서 정권에 대한 증오와 조롱 표현에 집착하는 모습은 ‘사회의 목탁’인 언론으로서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기후위기 앞에 우리 모두 공동운명체다
기후위기라는 문제 앞에 우리 모두 공동운명체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진보와 보수라는 범주를 뛰어넘는 중대사이며, 당연히 정권이라는 차원도 훨씬 넘어서는 절체절명의 문제이다. 기후위기 해결이라는 이 중차대한 시대적 과제에 대해 보수진영도 관성적 사고방식을 벗어나 문제의 심각성을 직시해야 할 일이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의 전체 구성원과 함께 적극적으로 대응책을 마련해나가야 한다. 그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회구성원으로서 당연히 지녀야 할 공동 책무다./소준섭 국제관계학 박사 | 프레시안 2021.08.04.
‘사람을 전시했던’ 도시, 도쿄
일본 수도인 대도시 도쿄에는 우에노 공원이 있습니다. 땅값 비싸고 개발하기 바쁜 대도시 안에 꽤 큰 규모의 공원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미술관, 호수에 동물원까지 갖춘 규모 있는 공원입니다. 공원으로 개발된 것은 1924년이었지만, 이미 1873년 일본 최초의 공원 중 하나로 지정되면서 점차 규모가 커진겁니다.
동물원이 특히 인기가 좋았던 이 우에노 공원에서 1907년 일왕 재위 40주년을 기념하는 박람회가 하나 열립니다. 이미 청일전쟁 승리, 러일전쟁 승리를 통해 완전히 조선을 식민지화하게 되었고, 연이은 대국과 전쟁에서 승리는 일본인들의 탐욕과 야욕으로 가득한 자신감을 한 없이 상승시켜 주게 되었습니다. 폭주하는 제국주의 국가로서 욕망과 아시아 맹주라는 겁 없는 자신감을 형상화한 것이 이 도쿄 세계박람회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보여주고 싶은게 너무 많던 박람회였습니다. 이제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일본 박람회의 최고 목적은 일본이 아시아에서 최고 국가이자 민족임을 증명하고 전 세계에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우선 최고의 흥행이 필요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뭐든 자극적인 것이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 수 있는 법이죠. 20세기에 갓 진입한 일본 땅에서 각종 선진산업 생산물부터 대관람차, 각종 진기한 동식물까지 그야말로 온갖 것들이 전시되었습니다.
그 수많은 진귀한 것들, 볼거리 중에는 사람도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대만관, 조선관 등의 이름으로 이미 일본의 식민지가 된 국가의 사람들이 전통 복장을 한 채 울타리 속 전시물이 되었습니다. 꽤 인기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어른은 10전, 아이는 5전에 유료로 관람토록 했다고 합니다. 4개월간 이어지고 80만 명이 다녀간 박람회였습니다.
당시 조선에서도 꽤 충격이었는지, 대한매일신보에서는 연일 이 사건을 보도하기도 합니다. 원시생활 재현도 아니고, 지금 이웃 나라에 버젓이 생활하는 이들을 잡아 와서 가두어두고 전시케 하는 일은 지금 생각이나 그 당시 생각이나 참 모질고 가혹한 행태겠지요.
‘오호통재라 우리동포여 예전에 우리가 아프리카 토인종을 불쌍히 여겼더니 오늘에 이르러서는 어찌 그들이 우리를 더욱 불쌍히 여기게 될 줄 알았으리오’ <대한매일신보 1907년 6월 21일자>
‘슬프고 애달픈 기색이 얼굴에 비치니 보는 우리가 참혹함을 느낀다.’ <대한매일신보 1907년 6월 27일자>
일본뿐만은 아니었습니다. 우리와 다른 인종이라는 이유로 ‘전시’된 역사는 많았습니다. 유럽에서는 개인 동물원이 유행하던 시절 흑인이 앵무새와 원숭이와 함께 동물처럼 사육되었고1, 미국의 브롱스(Bronx) 동물원에서도 20세기 초반까지 아프리카 콩고에서 납치된 흑인이 오랑우탄 우리에 함께 갇혀 구경꾼들이 던져주는 음식을 받아먹었습니다. 도쿄 박람회 이전 1903년에 개최된 오사카의 국내권업박람회에서도 조선인을 비롯한 여러 인종들이 전시되었습니다.
일본 자국민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전시하는 이유는 ‘일본과 다름’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일본이라는 국가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고 뛰어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다름을 이유로 차별이라는 선을 그은 다음, 편견을 심어줍니다. ”일본과 다른 아시아 민족은 다르다. 저 모양과 행태를 보라. 미개하기 그지없구나. 그러니 일본인이 아시아의 대장 역할을 할 수 밖에 없고, 이 전쟁도 아시아를 위해, 저 미개한 아시아 동포를 위해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아시아 동포들은 함께 희생해줘야 해!“라는 메시지가 가득 담긴, 그 이름이 무색한 ‘만국 박람회’의 한 단면이었습니다.
100년이 훌쩍 지난 지금 도쿄에서는 올림픽이 개최되고 있습니다. 차별의 대상이던 다른 인종이 전시되지도 않고, 하나의 공간에서 동등하게 겨루고 승리하고 혹은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성별이 다른 이들도, 혹은 성적지향이 다른 이들도 지금 도쿄에서는 차별이라는 선을 넘어 함께 하고 있습니다. 다만, 아직 일본에서 국가의 위상을 위한다는 목적으로 인류의 가장 큰 축제이고 화합의 행사인 올림픽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수단으로 활용하는 일이 100여년 ‘만국박람회’에서처럼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박민경 비정기 뉴스민 칼럼니스트 2021-08-06
투기꾼이 농민 되는 나라, 농지법 개정해야
프랑스의 농지가격은 우리의 6.6%에 불과하다.(2015년 기준) 아무리 국토 크기가 다르고 농지면적이 충분하다 하더라도 1인당 GDP가 우리의 1.7배인 점을 감안하면 놀랍다. 그만큼 농지를 농업생산수단으로 철저히 관리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유럽 전체적으로 농지가격이 매우 낮다. 농지가격이 세계에서 가장 비싼 나라는 대만이다. 산지뿐인 섬나라로 농지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이유도 있지만 경자유전 원칙을 폐기했다가 농지가격이 폭등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다음이다. 일본도 비싼데 최근 우리가 워낙 많이 올라 순위가 바뀌었다.
우리 농지가 왜 이렇게 비쌀까? 농업생산성이 높아서? 아니다. 농지가 농업생산수단이 아니라 투기수단으로 변질하였기 때문이다.
현행 농지법은 여러 차례 개정을 통해 농지구입과 보유의 요건을 완화했다.
우선 누구든지 농지를 살 수 있다. ‘경자유전 원칙’은 헌법 조항으로만 남아 있을 뿐 영농계획서만 제출하면 진흥지역이든 아니든 농지를 살 수 있다. 단지 계획만으로. 헌법의 ‘경자’가 서류를 작성해 제출하는 것으로 증명된다. 농민이 되는 것이 이렇게 쉽다.
주말농장이나 텃밭을 목적으로 할 때는 1,000㎡(303평)까지 누구든 살 수 있다. 이때는 텃밭을 하자는 것이므로 서류상의 영농계획서마저 필요 없다. 나중에 개발되면 100평짜리 주택을 세 채나 지을 수 있는 면적이다.
구입도 자유로울 뿐 아니라 농업인이 아니더라도 상속받은 농지는 얼마든지 보유할 수 있다. 일인당 10,000㎡까지. 우리나라 농가 호당 평균경작 면적이 15,000㎡에 불과한 점을 감안하면 굉장히 큰 면적이다.
법의 허점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농사를 짓다가 이농한 사람들의 농지도 그냥 갖고 있을 수 있다. 이때는 면적 제한마저 없다. 그래서 결국 전체 농지의 50%가 부재지주 소유가 되었다. 해방 후 농지개혁 이전보다 못해졌다.
농지에 대한 보유세는 사실상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8년 경작조건만 갖추면 양도세 또한 특혜 적용이 된다. 그러니 부재지주들이 농지를 시장에 매물로 내놓을 리 없다. 보유 부담은 없고 미래의 개발이익에 대한 기대는 확실한데 누가 포기 하겠는가.
농지가 투기대상이 될수록 농지가격은 오르고 시장의 매물은 줄어들게 마련이다. 우선 청년들이 귀농을 하려해도 토지에 접근 자체가 안 된다. 현장에선 청년들이 ‘땅을 구할 수 없다’고 아우성이다. 나라에서 공익형직불제를 도입하고 직불금을 올려도 임차농들은 그림의 떡이다. 부재지주가 그 이익을 임차료 인상 등의 방법으로 중간에 가로채 간다. 당연한 얘기지만 토지가 규모화되지 않으니 농업생산성의 향상에도 걸림돌이 된다. 부작용이 한둘이 아니다.
우선 부재지주가 소유하고 있는 50%의 농지가 시장에 매물로 나오도록 농지법을 개정해야 한다. IT 기반이 최고인 국가답게 토지에 관한 정보를 디지털화해야 한다. 농민에 대한 규정, 자격을 정비하고 소유와 경작관계에서 경자유전을 명확히 하고 불가피한 용도전환 시에도 이익의 환수를 분명히 해야 한다.
사실 이런 일들은 기득권층의 이해관계를 넘어 서야 하므로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LH 건으로 국민들의 관심사가 집중된 이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농지법 개정은 대한민국의 심각한 자산 불평등 문제 해결의 첫 걸음이다. 청년들은 꿈과 희망을 가질 수 있고, 지구상에서 가장 먼저 없어질 나라라는 오명을 벗는 길이다.
김현권, 20대 국회의원, 대통령직속 농어업·농어촌특별위원회 탄소중립위원회 위원장-뉴스민 2021-03-19
나의 무지로부터 타인을 보호하기
영국 소설가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1843)에서 비정한 수전노 스크루지의 회심을 돕기 위해 등장하는 유령 중 하나는 기괴한 모습의 소년과 소녀를 데리고 다닌다. 이름이 각각 무지(Ignorance)와 궁핍(Want)인 두 아이는 인간 사회의 두 난제를 상징하는데, 유령이 특히 강조하는 것은 소년(무지)의 위험이다. “무엇보다 더 이 소년을 경계하라. 소년의 이마에 적힌 파멸(Doom)이라는 글자가 내게는 보인다.” 영국에 디킨스가 있었다면 프랑스에는 위고가 있었다. 20년쯤 후에 쓰인 <레미제라블>(1862) 3권에서 빅토르 위고는 말한다. “무지라는 굴을 파괴하면 범죄라는 두더지도 파괴된다.” 무지는 개인의 불행과 사회의 파멸을 초래하는 범죄의 원인이니 일종의 교육 안전망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두 작가의 호소였다.
이것은 19세기의 공부다. 삶의 목적은 개인의 긍정적 잠재력을 계발하여 행복을 성취하고 공동체에 기여하는 것인데, 공부를 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방치, 학대, 파괴하게 된다는 것. 이를 ‘나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한’ 공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공교육이 인간의 보편적 권리이자 의무가 되면서부터는 공부의 성격이 변했다. 이제 공부는 정신적 자기 구원이 아니라 물질적 기반 구축을 위한 것이 되었고, 출세의 사다리에서 상층부에 올라가기 위한 경쟁 수단이 됐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관용구가 보여주듯, 이런 공부는 누구에게도 무시당하지 않겠다는 집념의 한 표현이다. 이를 ‘타인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한’ 공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아이들에게 이런 공부를 시킨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의 공부는 또 달라졌다. 그동안 우리가 놓친 것들에 대한 공부. 나를 구원하고 너를 이기는 공부를 하는 동안 내 안에 뿌리내린 맹목과 편향에 대한 자기 교정으로서의 공부. 그 맹목과 편향으로 발생한 역사적 폭력의 재발을 저지하기 위한 집단적 노력으로서의 공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폭력의 주체가 될까 두려워하며 자기를 성찰하는 공부. 그러니까 ‘나로부터 타인을 지키기 위한’ 공부 말이다. 이런 공부는 대선을 앞둔 정치인들에게도 중요할 것이다. 한 예비후보는 공부를 이유로 출마선언을 미루기도 했고, 다른 예비후보는 출마선언 자리에서 이후의 공부를 약속한 바가 있다. 공부를 하겠다는 각오는 반갑다. 그러나 문제는 ‘얼마나’가 아니라 ‘어떤’ 공부를 하느냐다.
윤석열 예비후보가 “필요하다면 1주일에 120시간씩 2주를 바짝 일하고 그다음에 쉬는” 것을 이야기했을 때 이것이 특별히 절망적이었던 것은, 이런 가치관이 발설되는 동안, 지난 150년 동안 수많은 학자와 활동가들이 축적해 놓은 노동인권 담론이 그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안타깝기로는 최재형 예비후보도 마찬가지다. 가족모임에서 국민의례를 행하는 것이 본인에게는 뿌듯한 자랑인데 왜 사람들은 그토록 불편해하는지, 그 낙차가 당사자에게는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우선돼야 할 것이 개인의 존엄이자 자기 결정권이라는 근대적 인권 담론에 힘입어 이제 많은 이들이 도대체가 개인이 국가에 ‘충성’한다는 발상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자각하게 되어서다.
이 두 사람의 교집합 중 하나는 ‘탈-탈원전’이다. 탈원전을 제대로 시작조차 못했는데 이미 대한민국이 망해가고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 일부 언론은 언제나 그렇듯 보도라기보다는 투쟁을 하고 있는 것이니까 논외로 하자. 예비후보들의 입장은 차원이 다른 서글픔을 안긴다. 2011년 일본 원전 사고에서 방사능 누출이 없었다는 윤 후보의 오해가 알려주는 것은 그가 하겠다던 공부가 원전산업의 경제적 효율성에 대한 것이지 그로 인해 일어난(또 일어날) 비극에 대한 성찰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세계 제1의 원자력산업 생태계가 무너졌다”는 최 후보의 일갈 속에서도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이후 인류에게 원전이 갖는 의미에 대해 세계의 석학들이 고뇌한 내용들은 들어설 여지가 없다. 오로지 돈, 돈, 돈뿐이다.
무지는 조롱의 대상이 아니다. 누가 감히 그럴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무지가 무시의 결과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역사적 폭력과 그것이 인류에게 가한 상처에 대한 무신경함, 바로 그것이 나는 무지해도 된다는 자기 관용을 허락한 것이라면 말이다. 120시간 노동 발언은 노동착취의 역사가 남긴 상처에 대한 무시이고, 국민의례에 대한 자부심은 국가가 개인에게 희생을 강요한 국가주의의 불행한 역사에 대한 무시이며, 탈원전의 문제를 산업적 측면에서만 접근하는 것은 원전 사고로 인류가 겪은 비극에 대한 무시다. 이런 무시로서의 무지는 과거와 현재의 모든 피해자들에 대한 폭력이 된다. 우리는 어떤 공부를 해야 하는가. 이제는 나로부터 타인을 지키는 공부의 시간이다. 나의 무지로부터 타인을 보호해야 한다.
신형철 문학평론가 경향 : 2021.08.09
빈곤과 불평등의 사회 어떻게 바꿀 것인가
작년 봄, 등 뒤에 앉은 한 직장인의 대화를 들었다. “코로나19로 경제위기가 온다고 호들갑이지만 별일 없을 거야. 생각해봐. 외환위기 때도 나라가 망할 것처럼 난리였지만 아무 일 없었잖아? 이번에도 무난히 지나갈 거야.”
그리고 1년 반이 지났다. 그의 말은 사실이다. 세상은 무탈하다. 코로나19로 기근에 시달리는 세계인구가 6배 늘어났다지만 한국은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 청년 실업이 높다만 괜찮다. 골프업계는 2030 유입으로 올해는 골프 이용객 5000만명 시대가 열린다며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
서울의 집값은 지난 1년간 21%, 전셋값은 27% 올랐다. 집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이 숫자는 총성이 아니라 축포다. 집값이 올라 세금이 늘어난다고 하니 수개월 동안 세금 걱정에 입을 모았다. 진통, 논란, 폭탄, 공방을 거쳐 여당은 상위 4% 부동산자산가의 걱정을 2%의 것으로 줄이기로 약속했다. 모두가 힘을 모아 부자의 문제를 해결해주니 대한민국 만세다.
그러나 오른 집값이 두려운 이들의 고민은 이런 취급을 받지 못했다. 코로나19 방역지침은 거리 두기를 강조하며 그 책임을 개인에게만 떠넘겼다. 대형 백화점은 인원 제한을 받지 않는 반면 소규모 자영업자일수록 더욱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최대한 집에 머물라’면서도 집이 없거나 쫓겨나는 이들의 문제도 중요한 사회문제로 취급되지 않았다. 해고와 불안정한 일자리로 실업급여 수령자가 늘어나니 정부는 실업과 불안정 일자리 해결이 아니라 실업급여 삭감에 나섰다. 나라가 돈을 쓰지 않으니 사람들이 빚을 지고 있다. 코로나19 재정지출이 선진국 최저수준인 사이 가계부채는 한 해 GDP를 넘는 1936조원에 이르렀다.
빈곤은 분배에 실패한 사회의 결과다. 집이 아니라 방에 사는 사람들, 방조차 없는 사람들의 문제는 매년 늘어나는 다주택자, 증여로 주택을 마련하는 청년과 그렇지 않은 청년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불평등을 양산한 사회에 빈곤의 책임이 있지만, 우리는 빈곤을 개인의 실패로 미루는 데 노련하다.
그래서 빈곤 문제를 말할 때 정치인들은 불평등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대선을 앞두고 모두 빈곤과 불평등을 현안으로 꼽으면서도 불평등과 대결하고자 하는 후보는 보이지 않는다. 기업이 알아서 임금을 높이거나, 건물주가 월세를 내리는 일은 없기 때문에 불평등의 구조는 빈곤에 대해 말할 때보다 갈등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엔 외환위기와 코로나19가 무난히 지나가는 일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이 둘의 이해관계는 대부분 동일하지 않다.
그래서 다시 정치에 묻는다. 임금과 자산 격차는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잘사는 나라 한국의 사람들은 왜 노인이 되면 절반이 가난해지는가? 빈곤과 불평등을 양산하는 사회구조 전체의 변화는 어떻게 도모할 수 있는가?
김윤영 빈곤사회연대 활동가 경향 : 2021.08.09
경계청년을 착취하는 사회
폭염주의보가 발령됐던 지난주 인천에서 전단 아르바이트 중 사망한 20대 청년의 사인은 열사병이라고 했다. 성실했으나 가난했던 이의 죽음은 청년들이 내몰린 취업도 실업도 아닌 ‘경계’의 고단함을 드러낸다. 네모난 음식가방을 짊어진 배달원들, 편의점 계산대의 청년들, 공장과 물류창고에서 일하는 많은 단기노동자들이 더 나은 일자리와 미래를 희망하며 코로나19의 무게까지 가중된 불확실성을 버텨내는 중이다. 이 같은 경계청년들의 규모는 지난해 기준 청년 확장경제활동인구 약 482만명 가운데 실업자를 포함해 121만명에 달한다. 청년 4명 가운데 1명이다. 올해 취업준비생은 85만9000여 명으로 역대 최고치다.
우리 사회는 이들을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해법을 모색하고 있는가. 말잔치만 화려하다. 기득권은 절박한 경계청년들이 내몰린 현 구조에 별다른 각성이 없는 것일까.
대선을 앞둔 정치권은 청년층에 현금살포를 앞다퉈 공약하고 있다. 연간 100만원 청년기본소득, 군 전역 장병에게 3000만원 지급, 스무살 때 1억원 지원 등이 쏟아져 나왔다. 청년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미래를 꾸리고 안정감을 얻을 일자리인데, 정치권에는 나라곳간을 지렛대로 선거 승리를 꾀하는 포퓰리즘만 난무한다. 어려운 청년에게는 사회안전망이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일자리 문제 해결 없이는 찢어지고 곪은 상처에 작은 반창고를 붙이는 격이다.
줄어든 일자리를 놓고 경쟁이 격화된 청년세대에서 분노는 구조가 아닌 엉뚱한 타깃을 향하고 사회통합은 흔들리는데, 이 와중에 일부 정치인들은 혐오를 지렛대로 자신의 지지기반 다지기를 꾀한다. 논의의 장에서 ‘갈라치기’가 요란해지면 진짜 문제는 간편하게 은닉되고 정치는 일하지 않아도 비판받지 않는다. 분열을 먹고 자란 정치의 대가는 결국 그 사회를 사는 청년들이 치르게 된다. 로마 시민을 정치적으로 우민화한 ‘빵과 서커스’와 점점 비슷해지는 양상이다.
안정적 일자리 부족에 따른 숨은 경제비용이 전가되는 것은 청년과 그들의 가족이다. 부모가 돈을 벌어 자녀의 취준비용을 댄다. 과거 한국의 가족이 유아·아동·노인 돌봄의 국가복지 공백을 메워왔던 것처럼 현재는 산업격변기의 청년 일자리 감소와 고용유연화에 따른 충격을 대신 받아내는 중이다. 기업들이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기존 정해진 기간에 한꺼번에 뽑는 공개채용 방식을 필요인력만 수시채용하는 쪽으로 바꾸면서 취준기간은 길어지고 돈은 더 많이 든다. 일반기업 일자리가 줄어들자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공시생’은 올해 취준생 10명 중 3명꼴인 32.4%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가족의 경제력에도 기대기 어려운 청년들은 고독사로까지 내몰린다. 전국 17개 광역지방자치단체 집계에서 10~30대 무연고 사망은 2017년 63건에서 지난해 100건으로 2배 가까이 늘었다고 최혜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은 전한다. 실제로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N포세대’ 청년문제가 제기된 지 올해로 10년인데 논의는 왜 부진했을까. ‘젊을 적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고도성장기의 케케묵은 고정관념, 그리고 ‘공장에 일자리가 넘친다는데 청년들이 힘든 일을 기피한다’는 기성세대의 편견도 한몫했을 것이다. 하지만 본지 ‘경계청년’ 기획취재 과정에서 확인한 것은 대기업 하청에 재하청으로 내려갈수록 미래도 기술도 보이지 않기에 청년들이 기피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였다.
노동시장 경계에 있는 약자들의 목소리가 좀처럼 전달되지 않는 것 또한 문제다. KBS 미디어비평에 따르면 언론에 등장하는 청년 70% 이상이 서울 거주로 분석됐다. 전체 청년의 10% 미만인 서울 소재 유명 4년제 대학 학생이 일반 청년을 과다대표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권과 언론에 유명대학 출신의 ‘엘리트’ 비율이 높아지면서 나타나는 부작용이다. ‘가진’ 사람들이 자기 주변의 사람들만 보고 그들을 표준으로 삼는 것이다. 능력주의가 팽배한 사회에서 약자들이 좀처럼 자기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것 역시 원인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다.
하지만 목소리가 없다고 그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코로나19의 터널 끝에 양극화가 본격적으로 드러날 때, 희망고문에서 깨어난 경계청년들은 외쳐 질문할지 모른다. “내 일자리는 어디 있는가? 기성세대는 무엇을 했는가?” 미안하다는 말은, 해야 마땅한 일을 하지 않은 어른들이 할 말은 아니다.
최민영 경제부장 경향 : 2021.08.09
2022 대선을 보면서
촛불혁명으로 박근혜가 탄핵된 지 만 5년이 되는 날인 2022년 3월9일 20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다. 그런데 그날이 기다려지지 않는다. 촛불 이전과 똑같이 또다시 그 나물에 그 밥인 두 보수 정치세력이 여야로 나눠 힘겨루기할 게 뻔하다. 게다가 나서는 인물들도 뻔하다. 대부분이 국가행정기구나 의회기구에서 한자리하던 자들이다. 선거전은 정치 쟁점은 없고 권력 쟁탈만 남았다. 내세우는 것은 없고 상대편 흠집 내기만 난무하는 ‘네거티브’ 전으로 치닫고 있다.
국민의 최대 관심사가 무엇이고, 우리 사회 가장 심각한 문제가 무엇인가. 누구도 사회 양극화라는 이름의 빈부 양극화라는 점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천문학적 규모의 자본집중 다른 한쪽에 상대적 과잉인구의 누진적 생산 즉 노인빈곤·청년실업·집값 폭등과 주거난 같은 노동자·민중의 생존문제가 있다. 대선판에 이런 문제를 인식하는 바탕인 철학, 그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인 비전, 그 비전을 실현할 전략 또는 정책은 들리지 않고 앙상한 권력소유 욕망과 의지만 보인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저질 선거판에 냉소를 보낸다.
여론조사기관은 열심히 정당과 후보자의 지지도를 조사해 발표한다. 신뢰도가 95%라고 하지만 그 신뢰도 수치를 신뢰하기 어렵다. 조사기관의 질문에 응답하는 사람의 비율은 5% 안팎이다. 그런데 조사기관은 이런 점은 쏙 빼고 누구 지지율이 얼마라고만 발표한다. 별 관심도 없는 대선전에 국민을 관중으로 끌어들이려는 꼼수로 보인다.
언론에서는 그래도 누군가를 선택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새로운 사람이 마땅하지 않으면 옛 사람을 찍으면 된다고, 최선이 아니면 차선을 찍으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 국민은 어째서 매번 차선은커녕 차악이나 최악에 불과한 정치세력과 인물을 마지못해 선택해야 하는가.
이 지점에서 우리는 왜 선거판이 이렇게 흘러가는지 의문을 갖게 된다. 이승만 치하의 대통령 선거가 이렇게 밋밋했나? 아니다. 그때 “못 살겠다 갈아 보자”는 구호가 터져 나왔다. 3선 개헌 이후에 치러진, 김대중 후보가 나선 71년 대선에는 박정희 군사독재의 영구집권이냐 아니냐가 걸려 있었다. 87년 대선과 92년 대선에는 전두환·노태우 신군부의 군사파쇼를 청산하는 문제가 걸려 있었다. 그러나 이른바 ‘민주화 이후’의 대선들은 그런 큰 의제가 없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또는 부드러운 파시즘 안에서 우파와 좌파가 다투는, 그래서 별 대차 없는 선택을 하는 선거가 되었다. 2017년 대선은 그래도 “촛불혁명을 어떻게 완수할 것인가”라는 의제라도 있었지만 촛불혁명이 사기당한 이번 선거에는 그런 의제조차 없다. 그러니 부르주아 정치로서는 앙상한 권력쟁탈전과 그 수단으로서의 인신공방밖에 할 게 더 있겠는가?
한편 이른바 ‘민주화 이후’의 대선은 주목할 특징을 보인다. 정치인은 이제 상품으로 간주된다. 후보가 ‘상품성’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공공연히 사용되고, 각 정치세력에서 후보자를 선정할 때 ‘상품성’이 중요한 기준이 된다. 상품이란 무엇인가? 타인에게 “팔기 위해” 생산하는 사용가치가 상품이다. 이때 내용물의 실체보다 이미지가 중요하고, 성능보다 디자인·포장 같은 외관이 중요하다. 예컨대 오이와 참외의 상품성에는 오이와 참외의 육질이나 맛보다 매끈한 모양새와 색깔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상품을 고르듯이 정치인을 고른다면 정치인을 내용 위주로 깊이 판단하지 않고, 착하게 보인다든지 멋지게 보인다든지 하는, 겉으로 보이는 기준으로 판단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상품생산자 사회’다. 한국사회의 자본주의화가 성공 궤도에 오르면서 언제부턴가 이 자본주의 원리가 경제영역을 넘어 정치영역에까지 주무른다. 상품생산자 사회에서 소비자는 주인이 아니라 주인인 자본의 고객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정치인이 상품인 사회에서는 국민은 주권자가 아니라 주인인 정치인의 고객에 불과하다. 군사독재 시대에 군홧발에 짓밟혀 주인이 되지 못한 국민은 자본독재 시대에는 상품인 정치인의 고객이 됨으로써 주인이 되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정치인을 주식상품으로 취급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1999년 정치인을 인터넷에서 주식처럼 가상 거래하는 포스닥이라는 사이트가 만들어지기도 했고, 최근에는 정치인 테마주라는 말이 성행하고 있다. 정치인은 인간인 동시에 상품이며, 상품 가운데서도 이윤을 낳는 상품인 자본이다.
그런데 이 인간 자본이 잘 팔리지 않는다. 왜 그럴까. 정치인들의 인간성이 하나같이 한국 자본주의 사회를 지배하는 천민독점자본의 인격화로서 쉽게 말하자면 같은 물질의 꼭두각시들인데, 그 꼭두각시들 사이에 무슨 큰 차이가 있겠으며, 차이가 없는데 무슨 흥행이 되겠는가?
다른 한편 사회적 관계의 산물에 불과한 상품이나 자본을 사회적 관계로부터 독립된 자율적인 존재로 간주하는 것이 물신숭배다. 물질인 상품과 자본은 스스로를 신비화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물적 상품과 자본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쉽게 물신숭배에 빠진다. 그러나 인적 상품과 자본은 그런 물신숭배가 잘 통하지 않는다. 민중은 그들이 자본과 임노동관계에서 독립돼 있는 것이 아니라 종속돼 있으며, 독점재벌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조만간 알아차린다. 그때 정치인 상품, 정치인 자본은 신비화된 힘을 잃어버린다.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자본의 한국적 형태인 독점재벌의 꼭두각시가 아닌, 주권자를 고객이 아니라 주인으로 받드는, 이를 위해 노동자·민중에서 독립되지 않고 노동자·민중과 불가분적으로 일체화된, 그러한 정치세력과 정치인이 무대에 등장하는 것이다. 그런 세력과 인물은 제도정치권 밖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전태일을따르는사이버노동대학 대표: 2021.08.09.매일노동뉴스
치명적인 특권 사랑
사랑 훈련
우리는 선호한다. 땡볕 일터보다 쾌적한 사무실을. 기계 소음을 들으며 온몸으로 일하는 것보다 조용한 사무실에서 일하고 싶다. 좁은 일반실보다 안락한 의자가 널찍하게 놓인 특실에 앉아 여행하고 싶다. 북적거리는 병실보다 시설도 좋고 더 자주 보살펴주는 병실에서 치료받고 싶다. 더 넓은 방과 멋진 풍경이 보이는 비싼 집에서 살고 싶다.
대부분이 원하는 이런 욕구를 탓할 수 있을까. 그러나 어떤 이는 쾌적한 곳에서 폼나게 일하며 고소득을 올리는데 누군가는 언제든 죽을 수도 있는 불안한 노동을 하며 생존해야 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어떤 이는 대형 병원에 언제든 즉각적으로 입원 치료를 받을 수 있지만 누군가는 한참 대기하다가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 죽는다면 생사를 가르는 차별이다.
특권은 평범한 욕구에서 탄생한다. 일반적 욕구들이 사회적으로 구획되고 차별화되는 것에서 특권이 시작된다. 우리는 차별 인정과 특권 사랑을 훈련받는다. 교육 시스템은 문맹을 퇴치하고 삶에 필요한 지식을 위한 제도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늘 특권 사랑이 숨어있다.
교육이 보편적 권리의 학습 과정이라면 학교는 차별에 저항하는 기지다. 하지만 학교는 우등과 열등을 가르는 변별력 높은 시험을 만들고, 좋은 학군과 나쁜 학군을 가르며, 명문대와 ‘지잡대’를 갈랐다. 유치원 이전부터 차별하는 교육시스템은 순응하는 시민 훈련소에 가깝다. 교육이 문제가 아니다. 교육은 산업의 요구와 체제 재생산에 필요한 인력 공급 압박을 늘 받기 때문이다. 문제는 산업이고 사회다.
정당한 특권이 있을까
합법적인 특권은 정당하고 불법적인 특권은 문제가 있는 것일까. 노예제 사회에서 인간을 노예로 삼는 것은 합법이었고 노예 소유자의 특권은 정의였다. 특정 종교가 지배하는 곳에서 이교도 차별은 합법이고 사제의 특권은 정의다. 신분제 사회에서 혈통에 따른 차별과 폭력은 합법이었고 양반이나 귀족의 특권은 정의였다. 자본주의에서 시장경쟁에서 뒤진 자들에 대한 차별도 돈 많은 부자들이 누리는 특권도 합법이고 정의다.
자본주의가 개발한 비정규직은 계급투쟁을 계층상승 경쟁으로 바꿀 만큼 강하다. 외주화로 탄생한 비정규직은 첨단 기술과 결합해 플랫폼 노동으로 진화했다. 정규직이냐, 비정규직이냐는 선택에 빠진 노동운동은 해방의 꿈을 잃고 정규직 되기에 묶인다. 정규직이 되려 열공에 빠진 학생에게 학생운동은 없다. 그런 청년들이 사회에 진출하자 언론은 ‘MZ세대’라는 이름을 붙여 ‘세대팔이’에 활용한다. 이 사태들 속에서 “대기업 노동자들은 귀족노동자”라는 ‘가스라이팅’을 통해 특권층으로 간주된다. 이젠 그런 노동자들이 특권층의 논리로 차별을 찬성한다.
정당한 특권은 없다. 인류는 혁명을 통해 노예제와 신분제를 해체하고 특권을 제거해 왔다. 민주주의는 특권을 없애고 소수가 가진 특권을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권리로 만드는 길이었다. 특권으로 보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언제나 ‘공헌’과 ‘교체’라는 전제 위에서만 정당하다.
국회의원의 면책특권이나 대통령의 특권은 언제나 ‘반특권을 위한 장치’다. 그 권한들은 시민 권리를 보호하는 ‘공헌’에 대한 ‘감사’다. 그 권한들은 특권을 없애고 시민의 일반적 권리를 지키고 넓히라는 반특권을 위한 장치다. 그렇지 않은 권력은 탄핵하거나 타도해야 한다. 사장이 사장으로 인정받는 것은 직원의 일자리와 생계를 보장할 때다. 직원의 권리를 침해하는 사장은 자격이 없다.
관료, 정치인, 사장에게 주어진 권한은 교체되어야 한다. 소유하면 상속된다. 관료, 정치인, 사장에게 주어진 권한을 소유해선 안 된다. 그런 권한이 소유되는 순간 돈으로 사고팔게 될 뿐만 아니라 상속된다. 권력이 교체되지 않으면 썩어서 독재가 된다. 권한이 상속되면 세습 신분 사회다.
골디락스 존의 위기
금발 머리 소녀 골디락스가 곰들의 집에서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적정온도의 수프를 먹고 딱딱하거나 출렁거리지 않는 적당한 침대에 잤다는 영국동화에서 ‘골디락스 존’이라는 말이 나왔다. 태양과 너무 가까워 뜨겁거나 너무 멀어 차가우면 생명이 살 수 없다. 생명이 살기에 적절한 곳이 ‘골디락스 존’이다.
그것이 그것이게 하는 것이 본질이라면, 인간의 본질은 생태계다. 인간이 존재하는 것은 ‘골디락스 존’ 때문이다. 그런데 골디락스 존이 무너지면서 인간은 본질적 위험에 빠지고 있다. 태양이 식은 것도 아니고 지구가 공전 궤도를 이탈했기 때문도 아니다. 자연을 정복해 자원을 수탈해온 인간의 자연에 대한 특권 때문이다. 자연은 인간의 특권을 견딜 수 없는 상태다.
지구 양극에서 빙하가 녹고 사회 양극에선 생태계 파괴를 추동한다. 특권층과 선진국은 더 많은 이윤을 위한 욕망을 버리지 않는다. 탄소를 뿜어대는 석유산업을 비롯한 산업의 부자들은 자신들의 더 많은 이윤을 위해 탄소배출을 멈추지 않는다. 특권의 반대편에 생긴 생존에 허덕이는 계급은 환경 파괴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다. 세계적 차원에서는 저개발국가의 발전권이 등장한다. 탄소를 배출하며 선진국 된 너희가 왜 우리의 개발을 막냐고 한다. 가난은 생태계 파괴를 지지하게 만든다.
생태계를 구하기 위해서도 빈부격차 해소는 중요하다. 인류와 생태계의 조화가 필요하고 일과 삶의 균형을 위한 ‘워라벨’이 필요하듯 양극화된 사회는 균형이 필요하다. 균형은 적정성을 잃은 양극이 아니라 새로운 중심을 요구한다. 양극화된 사회의 중간층이 아니라 인류의 미래를 위해 균형을 만드는 핵심층을 요구한다. 특권 사랑에 빠지지 않고 생존권에 허덕이지 않는 중심층은 기회주의적 방관자가 아니라 특권을 비판하고 자신과 동료 시민의 권리를 확장하는 시민이다.
보편적 스토리
부모 찬스를 혹독하게 비판하면서 공정성을 외치는 사람들이 특권을 추구하는 자신의 실체를 잘 들여다보지 않는다. 부모 찬스를 비판하면서 그보다 더한 부의 대물림과 재벌 특권 세습에 대해 눈을 감는다.
새로운 중심층의 보편적 스토리를 쓰려면 탄탄한 자기관이 필수다. “나는 특별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타인을 무시하고 타인의 노동을 차별한다. “난 아무것도 아니야”라는 열등감에 젖으면 자기와 자기 노동을 비하하며 생존권에 허덕인다. “모두가 평등하지만 대체 불가한 소중한 존재”로 여기면 모든 인간과 노동을 존중하는 보편적 권리 지지자다.
자신의 권리를 지키고 싶다면 타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노동윤리가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가 휴대폰을 들여다볼수록 데이터 센터 탄소배출은 늘어난다. 골디락스 존을 위협하는 기술 권력은 위험하다. 모든 생명과 생태계의 지속성을 존중하는 산업윤리가 절실하다.
대통령 후보 경선과 보도가 넘친다. 그러나 보편적 시민 형성을 위한 비전을 찾기 어렵다. 국민을 부자로 만들겠다는 정치인과 가난을 구제하겠다는 정치가는 많다. 그러나 시민의 상호작용을 촉진해 적정사회로 나아가려는 후보는 없다. 특권이 되거나 그 곁에서 특권을 누리려는 대선캠프 얘기를 자주 듣는다. 보편적 시민 형성을 위한 비전을 보고 싶다.
조건준 산업노동정책연구소 기획실장/매일노동뉴스 2021.08.09.
반론: ‘탄소중립과 노동전환’ 민주주의 없는 거버넌스
8월5일 대통령 직속 탄소중립위원회가 2050년 탄소중립 시나리오를 발표했다. 8월7일에는 탄소중립시민회의가 출범했다. 그러나 시민사회의 평가는 매우 비판적이다. 문재인 정부가 ‘민관협력’과 ‘시민참여’를 말하며 두 기구를 출범시켰지만, 구성과 운영이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97명으로 구성된 탄소중립위원회에 농민과 빈민을 대표하는 사람이 한명도 없다. 노동자 몫으로 한국노총 위원장 1인이 포함되었었을 뿐이다. 반면 포스코, 현대차, 에스케이(SK) 등 대기업 인사들은 10명이 포함되었다. 다수의 탄소중립위원은 교수와 연구원, 친정부 성향 인사들로 매번 관성적으로 정부의 거버넌스 기구에 초대받던 사람들이었다.
탈탄소 사회로의 전환은 우리 미래를 근본적으로 바꿀 중장기 과제로 모든 국민에게 중차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 비전을 마련하는 과정에 시민 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 농민, 빈민을 대표할 사람들이 배제되었다. 세계 기후정의운동의 제일 원칙은 큰 영향을 받는 시민과 영역(MAPA: Most Affected People and Areas)이 기후위기 해결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주체들을 배제하고 만든 탄소중립위원회는 애초에 잘못 구성된 것이다.
또한 탄소중립위원회의 논의는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져 있다. 탄소중립위원회의 회의 내용은 공개되지 않는다. 이렇게 중요한 기구의 기본 정보를 알 수 있는 홈페이지도 없다. 탄소중립위원회는 97명의 논의를 위해 두꺼운 장막을 두르고, 5000만 국민을 밖으로 내몰고 있다.
세가지 탄소중립 시나리오를 두고 한달간 토의한다는 탄소중립시민회의도 비민주적이긴 마찬가지다. 탄소중립시민회의의 500명 시민위원은 통계적 절차에 따라 무차별로 뽑혔다. 기후위기와 기후재난에 가장 많은 영향을 받는 노동자, 농민, 빈민, 주민은 5000만분의 1의 가능성으로 탄소중립시민회의에 포함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개별화된 시민이 민주주의의 주체인 집단적 시민을 대신할 수 없다.
시민위원이 논의할 주제는 탄소중립위원회가 제시한 세가지 탄소중립 시나리오다. 세 시나리오는 탄소포집·이용·저장(CCUS)과 같은 기술낙관주의, 배출권 거래제나 탄소금융과 같은 시장낙관주의로 가득 차 있어, 탈탄소 사회로의 전환에 부적절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릇된 선택지 중 하나를 선택하는 여론조사와 다를 바 없는 절차로 정당성을 얻을 수는 없다.
정부가 지난달 22일 발표한 ‘산업구조 변화에 대응한 공정한 노동전환 지원방안’도 같은 문제가 있다. 탈탄소 사회로의 전환은 커다란 산업구조의 변화를 수반하는데, 그 과정을 기업과 시장에 맡겨둘 경우 약자에게 피해가 전가된다. 녹색전환이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악화시키는 것이다. 이런 가능성을 막고 녹색전환을 더 평등한 전환으로 만들자는 약속이 ‘정의로운 전환’이다.
정부가 발표한 노동전환의 두 기둥은 ‘직무전환 교육’과 ‘재취업 지원’이다. 그러나 과거 구조조정 시기마다 발표된 이 정책은 작동하지 않았다. 고용과 소득이 기업에 달려 있어 일자리가 곧 생존권인 노동자들에게 아무런 보장 없이 일자리 상실을 받아들이라는 대책은 대책이 될 수 없다. 기업 이윤을 위해 노동자를 쥐어짜는 노동착취 구조, 민주노조를 탄압하는 노동배제 구조를 그대로 두면 정의로운 전환은 불가능하다. 정부는 한국의 노동체제를 바꾸기 위한 커다란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이런 비전 없이 사회적 대화를 강조하는 것은 불평등한 노동체제를 전제로 한 대화, 즉 무의미한 대화로의 초대다. 더군다나 정부는 민주노총이 참여하지 않는 경제사회노동위원회를 통해 사회적 대화를 하겠다고 밝혔다. 현상 유지라는 그릇된 대안에 절차적 정당성을 얻으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탄소중립 정책과 노동전환 정책에는 공통점이 있다. 절차와 대화를 강조하지만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또한 기후위기와 사회경제적 위기에 대한 현 정부의 무대책을 보여준다. 구준모 | 사회공공연구원 연구위원 한겨레 :2021-08-09
양심수 없는 나라야말로 진짜 선진국이다
요즘 한국은 잔칫날 기분이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가 한국을 ‘선진국’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사실 굳이 이 발표가 없어도 세계체제론적 차원에서 한국이 이미 준핵심부가 아닌 핵심부 국가가 되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구매력 기준으로 계산된 한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이미 일본을 추월해 유럽연합의 평균과 비슷해졌을 뿐만 아니라, 한국은 자본의 수입국에서 수입국이자 수출국이 되었다. 지금도 국내 은행업 등 금융계에서 외국 자본은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지만, 동시에 삼성 같은 국내 대기업들의 현지 법인은 예컨대 베트남 수출액의 3분의 1이나 생산하고 현지에서 15만명 이상을 고용하는 등 동남아시아와 같은 주변부 지역에서 ‘지배자’로 군림한다. 자국 경제 영토의 해외로의 확장이야말로 핵심부 국가들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인데, 그런 의미에서는 한국도 그 그룹에 속한다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마냥 기뻐만 하기 전에 한번 생각해보자. 세계체제론 차원의 ‘핵심부 국가’나 유엔무역개발회의가 말하는 ‘선진국’은 순전히 경제력에 대한 평가일 뿐이다. 이 평가는 해당 국가의 사회나 정치 등과 무관하다. 단지 세계 경제의 ‘먹이사슬’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이야기할 뿐이다. 흑인들에게 사실상 시민권을 불허했던 1950년대 미국이나, 재일 조선인들을 ‘비국민’으로 취급했던 고속 성장 시대의 일본 역시 핵심부 국가였다. 1년에 경찰이 약 1천명의 시민을 사살하는 미국도, 경찰들도 무기를 평상시에 휴대하지 않는 노르웨이도 경제적으로 똑같이 핵심부에 속한다. 그런데 그들의 사회적 일상은 서로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한국의 일반에서 쓰이는 ‘선진국’이라는 명칭은, 짐작건대 무장한 경찰들이 소수자들을 언제든지 사살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회라기보다는, 차라리 일상이 비폭력화되어 있는 북유럽의 복지국가 같은 곳을 의미할 것이다. 일상 언어에서 사용되는 ‘선진국’이란 단어는, 경제적 범주의 용어라기보다는 ‘바람직한 사회’의 의미가 더 강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살았으면 하는’ 사회를 뜻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아직 샴페인을 마시고 자축하기에는 이르다. 일상이 비폭력화되어 있고 평화롭고 안정적인 북유럽 복지사회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은 이념이나 사회·문화적 ‘톨레랑스’이기 때문이다. ‘톨레랑스’는 종족적 내지 종교, 생활, 문화적 소수자에 대한 ‘관용’을 의미하며, 무엇보다 특히 이념적 내지 정치적 소수 의견, 조직에 대한 존중을 의미한다. 하지만 양심수가 여전히 감옥에 갇혀 있는 한국과 같은 나라를 ‘톨레랑스의 나라’로 여기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이 차원에서 한국과 북유럽이 얼마나 다른가를, 내가 노르웨이에서 속해 있는 정당 이야기를 하면서 설명해보고자 한다.
나는 한국에서는 노동당 소속이지만, 노르웨이에서는 이와 동시에 적색당의 지역위원회에서 활동한다. 적색당은 2007년에 창당된 급진 좌파 정당으로, 현재 지지율은 6% 정도 된다. 국회의원은 아직 1명이지만, 곧 2~3명으로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즉, 현재로서 전형적인 의회주의 좌파 정당이다. 그러나 본래 적색당의 모체는 노르웨이의 노동자 공산당(1973년 창당), 즉 노르웨이의 마오주의 운동이었다. 노동자 공산당의 전성기에 그 당의 정식 당원은 3400명 정도였지만, 마오주의자의 전체 수는 약 2만명으로 추산되어 유럽 최강의 마오주의 운동이었다. 노르웨이의 마오주의자들은 의회주의 전략을 부정하면서 무장혁명과 무산계급의 독재 정권을 지향했다. ‘무장혁명을 준비한다’는 말을 대놓고 당 강령에 쓰기도 하고, 기관지인 <계급투쟁>(Klassekampen)에도 거의 매호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당의 출판사인 ‘시월사’(Oktober)에서 스탈린과 마오의 저서를 번역해 지속적으로 출간했다. “제3세계를 착취하는 제1세계”에 속한다는 것에 엄청난 자책감을 느꼈던 노르웨이의 마오주의자들은, 제3세계 민중을 자본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킬 세계 혁명을 노르웨이에서 일으키려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소련과 국경을 접하며 냉전의 최전선에 선 노르웨이의 국가는 이 운동에 어떻게 대응했을까? 물론 마오주의자들을 비밀리에 감시하긴 했다. 한데 마오주의자들이 실질적인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이상 국가 역시 그들을 탄압할 생각은 안 했다. ‘무장혁명’에 대한 이야기는 ‘표현의 자유’ 차원에서 관용되며, 노동자 공산당은 여느 정당처럼 합법적 활동을 마음껏 할 수 있었다. 결국 중국의 자본화와 소련의 몰락으로 ‘무산계급 독재’에 대한 이야기는 저절로 족적을 감추게 되고 당은 1990년대 초부터 여성주의와 환경운동, 반전평화로 활동의 초점을 바꾸었다. 오늘날 그 후속 정당인 적색당은 복지국가 노르웨이의 자본이 외국에서 착취하는 현지 노동자나 노르웨이에서 고생하는 외국인 노동자의 권익을 옹호하고 복지시설의 민영화를 반대하며 노르웨이 군대의 아프가니스탄 파병 같은 해외 파병에 맞서 싸운다. 대표적인 기후정의 옹호와 군사주의, 신자유주의 반대의 정당이 된 것이다. <계급투쟁>은 노르웨이 지식인이면 꼭 봐야 할 ‘지식인 신문’이 되었고, ‘시월사’는 노르웨이 시, 소설 문학의 가장 우량한 출판사가 되었다. 만약 국가가 ‘무장투쟁’을 주장했던 1970~80년대 마오주의자들을 탄압하여 양심수들을 양산했다면, 과연 오늘날 그들은 이와 같은 생산적이며 사회적으로 매우 필요한 역할들을 맡을 수 있었을까? 결국 정치적 소수에 대한 톨레랑스는 끝에 가서 노르웨이 사회와 문화, 정치를 더 풍요롭게 만든 셈이다.
북유럽의 어느 선진국에서도 지금 8년째 옥고를 치르고 있는 이석기 전 의원의 투옥과 같은 상황을, 죽었다 깨어나도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이석기 전 의원의 유죄 판결의 근거가 된 그 ‘90분 연설’에 설령 다소 과격한 언사들이 포함되어 있었어도 그 어떤 ‘선진국’도 (특정 종족 등을 겨냥하는 혐오 표현이나 구체적인 특정인을 위협하는 협박, 아니면 모욕이나 명예훼손 등을 제외한) ‘언어’ 그 자체를 처벌하지는 않는다. 소수 의견을 표현할 자유가 있어야, 다양성을 자랑하는 진정한 민주 사회가 만들어진다. 이석기 전 의원이 사면, 석방되어야 우리 사회가 톨레랑스가 있는 진정한 사회·정치적인 선진국이 되는 길목에 들어설 수 있을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양심수 없는 나라, 모든 의견이 존중받는 선진국을 함께 만들어나가자는 의미에서 이번 광복절 특사에 이석기 전 의원을 포함시키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 한겨레 2021.08.10
한미연합훈련에 강력 반발한 북한, '자가당착'에 빠지지 말라
북한이 여기서 멈춰야 할 이유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대규모 한미연합훈련 중단이나 유예를 주장해왔다. 적어도 3월과 8월에 실시하는 전구급 훈련을 유예함으로써 교착상태에 빠진 남북관계와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에 활력을 불어넣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북한이 요구하기에 앞서 한미 간의 긴밀한 협의를 거쳐 선제적인 결단을 내려야한다고도 촉구해왔다.
하지만 또다시 연합훈련을 실시키로 한 한미동맹의 결정과 이에 대한 도를 넘어선 북한의 반발을 보면서 착잡함을 지울 수 없다. 남북한은 7월 27일을 기해 통신연락선을 복원하면서 "남북관계 개선과 발전에 긍정적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밝힌 바 있다. 남북 정상 간의 친서 교환을 통해 이뤄낸 성과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정상 간의 소통을 통한 관계 회복 다짐이 한미연합훈련을 둘러싼 이견과 갈등 앞에서 초라해지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대선이 다가오면서 한미연합훈련이 급격히 '정치화'되고 있다. 여당 내에선 연합훈련 연기 시 대선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정무적 판단이 고개를 들고 있다.
보수 야당과 언론은 "김여정 하명" 운운하면서 문재인 정부에 맹폭을 가하고 있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연합훈련 축소가 불가피하다는 판단은 5월부터 나왔는데, 마치 문재인 정부가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의 담화가 나오자 연합훈련 축소 결정을 내린 것처럼 여론을 호도한다.
그런데 이는 내년 2~3월에 벌어질 정쟁의 예고편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이번 대선은 2022년 3월 9일에 치러진다. 시기적으로 3월 한미연합훈련과 겹치거나 바로 직전이다. 한미연합훈련에 대한 대선 후보들의 입장이 핵심 쟁점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다.
북한의 자가당착과 아전인수
한미연합훈련 강행과 비생산적인 정치화도 유감이지만, 북한의 반응도 매우 실망스럽다. 오늘(10일) 나온 김여정의 담화는 "위임에 따라" 발표한 것인 만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뜻이 반영된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데 짚고 넘어갈 부분들이 있다. 우선 북한 스스로 핵무력에 기반을 둔 국가방위력에 힘입어 "어느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전략 국가"가 되었다고 자랑해왔다. 반면 한미연합훈련은 대폭 축소되었다. 이번 훈련뿐만 아니라 2019년 이후 훈련에도 미국의 전략 자산 투입이 없었고 또 야외 기동훈련도 제외되었다. 컴퓨터 시뮬레이션 방식으로 치러지는 이번 훈련의 규모는 더더욱 축소되었다.
그런데도 북한은 "전쟁시연회, 핵전쟁 예비연습"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마치 한미동맹이 "북침"이라도 준비하고 있는 것처럼 과장된 인식을 내비치고 있다. 이러한 과도한 위협 인식은 북한이 주장하는 "전략 국가"와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북한이 국가 핵무력 완성을 선언하기 전에 한미연합훈련의 강도와 규모는 훨씬 강했다. 반면 북한이 전략 국가를 선언한 이후 한미연합훈련은 크게 누그러졌다. 북한의 국가 방위력은 강해졌고 한미연합훈련은 약해졌는데 북한이 과거보다 더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것을 두고 '자가당착'이라고 지적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또 김여정은 이번 담화에서 "남조선 당국자들의 배신적인 처사에 강한 유감을 표한다"고 했다. 이 역시 아전인수다. 문재인 정부가 한미연합훈련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적이 없기에 "배신"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오해는 없길 바란다. 위의 지적이 한미연합훈련이 불가피하다거나 북한의 "전략 국가" 주장을 옹호하기 위함은 결코 아니다. 한미동맹과 북한의 경직된 태도가 선순환을 차단하고 악순환만 부채질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구실을 찾지 말고 길을 찾아라
나는 북한이 자신감을 찾길 바란다. 돌이켜보면 2018년의 봄날은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한미연합훈련을 '연기'하기로 한 문재인 대통령의 결단과 연기를 양해한 김정은 위원장의 용단이 맞물리면서 찾아왔었다. 만약 당시 김정은이 연합훈련 '연기'가 아니라 '중단'을 요구했다면 봄날은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봄이 온 데에는 김정은의 통 큰 결단이 주효했던 것이다.
하지만 2019년 이후 북한은 한미연합훈련에 대해 더욱 예민하고 거친 반응을 보여왔다. 물론 북한의 입장을 전혀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남북 정상 간에는 4.27 판문점 선언도 있었고 9.19 평양공동선언도 있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연합훈련 중단을 거듭 약속했었다.
그러나 이를 근거로 북한이 꼭 한미연합훈련 실시에 과민 반응을 보일 필요는 없다. 문제를 키우려면 구실을 찾고 문제를 해결하려면 길을 찾기 마련이다. 실망스럽게도 북한의 행태는 문제를 키우는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연합훈련은 축소되었는데 북한의 반발은 확대되고 있기에 그렇다.
이러한 악순환이 반복되면, 북한으로서도 '혹 떼려다 혹 하나를 더 붙이는 격'이 될 수 있다. 이미 한미 양국 내에선 연합훈련을 예전 수준으로 회복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김여정이 담화에서 밝힌 것처럼 북한이 "국가 방위력과 강력한 선제타격 능력을 보다 강화해나가는데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면, 한미연합훈련의 규모와 강도도 강화될 수 있다.
문제 해결의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북한은 이번 연합훈련에 대한 반발을 비난 담화를 낸 수준에서 멈춰야 한다. 코로나19 방역과 경제 및 홍수 피해 회복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북한에게도 불필요한 군사적 긴장 고조는 결코 이롭지 않다. 오히려 북한은 냉각기를 거쳐 남북대화와 북미대화에 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대화를 통해 풀어야 할 숙제를 대화의 조건으로 삼는 것은 악순환만 반복할 뿐이기 때문이다.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프레시안 2021.08.10.
일본, 그 ‘반성 없음’의 구조
2년 전의 이맘때 나는 ‘전범국의 자기기만’이란 제목으로 일본의 국가적 ‘반성 없음’에 대한 비판을 주제로 이 칼럼을 썼다. 스스로 일으킨 전쟁에서 결국 미군에 투항하면서 자신들을 원폭 피해자로 자처함으로써 전범국이란 책임에서 벗어나며 그 역사적 과오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선배 언론인 최정호 선생의 지적에서 배운 관점이었다. 그 후 나는 내 글의 책임을 지기 위해 일본의 한국에 대한 태도에 좀 유심했고, 그 관점은 오히려 더 강조되어야 한다는 쪽으로 발전했다. 일본은 반성은 고사하고 부끄러운 역사를 지우는 데 급급하다는 사실을 잇달아 확인한 때문이었다.
그들은 미국과 독일에 세워질 ‘평화의 소녀상’ 건립을 맹렬하게 반대하며 ‘일본군 위안부’란 운명이 안겼을 인간의 보편적 슬픔을 읽지 못한 채 자신들의 비행에 대한 비난으로만 여겨 그 증거를 지워버리려 했다. 이어, 군함도의 유네스코 인류사 유적 지정 문제가 제기되었다. 어느 나라든, 인권의 나라인 영국과 미국에도 개발과 개척 시대에 소년공 학대와 원주민들에 대한 폭력이 자행되었고 그 사실을 부끄러워하면서 잘못을 분명하게 인정하고 보상에 나서기까지 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군함도 개발을 자랑하면서 거기에 자행된 식민백성에의 강제와 고통을 인정하지 않았고 유네스코의 권고에도 그 기록을 기피하며 자신들의 역사를 미화하려고만 했다.
그리고 우리 법원이 한국인 징용공에 대한 일본 기업의 보상을 지시한 판결을 내리자 일본은 기업들의 대한국 부품 수출을 제한하는 보복조처를 취했다. 국제간의 사법부 판결 적용에는 복잡한 의견들이 개입하겠지만, 사법 차원의 문제를 경제 영역의 보복으로 전환한 궁상은 마땅히 비판받아야 할 일이었다. 이어, 주요 7개국(G7) 회의 확대에 미국이 한국도 포함시키려 하자 일본이 노골적으로 반대한 것. 그럼으로써 그들은 아시아적 ‘사대선린’ 체제를 깨트리며 ‘대동아공영권’의 패권국이란 화려한 수식을 지키려 했다. 그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으로 응징되어야 했는데, 원자탄의 피폭국이란 명분으로 오히려 전쟁 피해국으로 분장하여 그 책임을 회피했다. 그러고서 미국의 비호 아래 50년대의 한국전쟁, 60년대의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의 병참기지가 됨으로써 전후 복구에서 더 나아가 세계 2위의 부국으로 크게 성장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한국에 대해, 그 발전에 대해, 더 억누르지 못해 안달하는 듯 보였다.
드디어 외교관으로서 인격과 국격을 의심케 한 소마 히로히사의 극우적 망언. 나는 여기 이르러 일본의 한국에 대한 억지가 혹 한때의 자기네 식민지였던 나라의 비약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수준 전반에서는 아직 우리가 일본에 따르지 못하고 있다는 판단이긴 하지만, 지난 60년 동안 조금씩 일본을 추격해왔고 어떤 부분은 추월했다고 자부해도 좋을 점들이 보였다. 1980년의 한국 개인소득은 일본의 6분의 1이었지만 지금은 일본이 4만달러 남짓이고 한국은 3만달러를 넘었으며 일본이 자랑하던 자동차 산업도 미국과 동남아에서 한국에 추격당하고 21세기 산업으로 각광받는 반도체와 배터리에서는 오히려 우리가 크게 앞선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에서 ‘선진국’으로 만장일치 공인받은 한국의 역동적 성장에 그들은 놀라고 질시하며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내 생각을 확인시켜준 것이 미국인 학자 태가트 머피의 <일본의 굴레>란 저서였다. 일제 식민시대에 태어났기에 일본우월주의를 아직 벗지 못한 내게 이 책은 일본이 ‘한국으로부터 도전’당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알려준다. 미국에서 신세대 정보기술(IT) 기업들이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 “일본의 전자기기 거인들이 한국의 대기업 삼성에 밀려 골동품이 되어간다”며 “한국의 기업들이 소비자 가전제품에서 대중문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에서 일본을 압도하고 있다”고 평하고 그럴 만큼 한국이 유리한 점 세가지를 꼽는다: “한국에는 국제화된 엘리트가 더 많다; 한국의 정치경제 기관들은 훨씬 더 명확한 권력 구조와 뚜렷한 책임 소재를 갖고 있어 빠르고 과감한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있다; 남북 대치와 북한의 위협이란 ‘실존적 위협’ 때문에 실수가 허용되지 않는다.”
쓰쿠바대학 교수로 일본에 누구보다 정통해 보이는 저자는 일본의 이러한 사양(斜陽)은 “일본의 전범들은 원치 않은 재난에 마지못해 끌려들어 간 수동적 피해자처럼 행동했다”고 비판한 사상가 마루야마 마사오를 인용하면서 ‘다테마에’(겉태도)와 ‘혼네’(속마음) 간의 오웰식 이중사고를 적용한다. 그 겉과 속의 다름이 책임지지 않는 태도를 가져오고 그 무책임이 반성도, 비판도 희석시키며 혁명이란 생각도 못 할 일로 만든다. 우리나라가 지난 60년 동안 몇차례의 혁명 혹은 그 비슷한 유사 변혁과 권력 교체를 통해 국민적, 정치경제적, 사회문화적 도약을 이루어 오늘에 이르렀는데 돌이켜보면 일본은 천황의 ‘만세 일계’를 자랑하며 전후 60여년 동안을 중국과 별로 다름없는 ‘일당독재’적 자민당 체제 속에서 ‘갈라파고스 현상’에 갇혀 온 것이다. 게다가 상징적 표상인 천황, 문벌로 나뉜 내각, 완강한 관료로 삼분된 권력 구조 때문에 새로운 정책 선택 결정권과 그 결과론적 책임을 서로 미룬다.
“일본은 미국의 품 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판단에서 세계 3대 부국임에도 정상회담에서는 미국 눈치를 보며 기를 못 펴는 ‘소국 근성’의 일본을 보고, 메이지 유신에서 오히려 ‘왕권 강화의 복고주의를 통한 근대화’에 이른 역설을 성취한 대신 “1930년대의 제도적 결함들을 1945년 이후 고치려 하기보다는 감추기에 급급했다”는 머피의 날카로운 비판에 나는 공감했다. “한국인들이 세계화에 일본보다 훨씬 더 우월하게 대응”하고 있다는 그의 인식이 미국 학자의 ‘다테마에적 발림’은 결코 아니었다. 그 무력감, 무책임, 무반성의 실재가 무더위 속에서 펼쳐진 2021년의 ‘2020 도쿄올림픽’에서 재현된 것이다. 세계 최대의 행사를 유치했음에도 정작 그 유치 공로자는 개회식에 불참하고 천황은 ‘축하’를 전하지 못하는, 그럼에도 8월 땡볕과 코로나 델타의 긴급사태 속에서 무관중 경기로 강행하는 책임을 아무도 묻지도, 지지도 않았다. 세계를 위한, 미래를 향한 어떤 비전도 보이지 않은 폐회식에서 나는 왜소해진 왜국을 또 보았다. 이런 일당 장기정권 체제의 정치적 무책임 구조가 한국을 오염시키지 않기를 나는 바란다. 우리 양당체제의 정책 선택과 그 책임 담당이 일본보다 앞서 있다는 자부 때문이다.
김병익 문학평론가 한겨레 2021.08.13
누가 부동산공화국 혁파의 선봉장이 될 것인가
이번 대선의 승패를 결정할 공약은 무엇일까? 부동산 공약이 아닐까 싶다. 2014년부터 시작된 부동산 가격 폭등이 자산 불평등 및 소득 불평등 심화, 임대차 시장 불안에 따른 주거비용의 폭증, 소비 여력 위축, 전 사회적 지대추구 경향 확산, 저출생 심화, 연대 의식과 사회적 일체감의 형해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폐해를 양산 중이기 때문이다.
여야 후보들이 앞다퉈 부동산 공약을 주요 공약으로 쏟아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요한 건 말이 아니고, 부동산 문제를 해결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가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부동산공화국 혁파의 선봉장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다음 제시하는 세 가지 기준으로 후보들의 부동산 공약을 자세히 살펴보면 ‘부동산 공화국’을 혁파할 적임자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부동산 공약이 총체성과 유기성을 확보하고 있는가
부동산 공약을 볼 때 가장 중요한 건 공약이 총체성과 유기성을 담보하고 있느냐다. 다른 부문도 그렇겠지만, 특히 부동산은 항공모함과도 같이 규모가 너무 큰 데다 모든 사람이 이해관계자이고, 매매시장·임대차시장·주거복지 부문 등 커버해야 할 범위가 전방위적이며 부동산 시장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허다하다. 부동산의 이런 특성을 고려할 때 ‘부동산 공화국’을 혁파하고, 모든 시민이 주거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공약의 총체성 및 유기성 확보가 필수적이다.
부동산 공약의 총체성과 유기성 확보가 무엇인지 감이 잡히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어떤 후보가 부동산 문제 해결에 관한 명확한 철학과 비전을 공표하고, 이 철학과 비전을 실현할 수 있는 사람과 조직의 구성 방안을 제시하며, 이 철학과 비전을 제도화 할 수 있는 정책 패키지를 자신 있게 제안한다면 이 후보의 공약은 총체성 및 유기성을 확보하고 있다 할 수 있다.
또 하나 확인해야 할 대목이 있다. 특정 후보가 제안하는 정책 패키지 역시 총체성과 유기성을 담보하고 있어야 한다. 부동산 정책이 소기의 정책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세제, 공급, 금융, 임대차, 주거복지 등 전 부문을 포섭하면서도 각 정책 간 유기적인 연관성을 확보하는 정책 패키지의 존재가 아주 절실하다.
보유세에 대한 관점이 중요한 시금석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보유세에 대한 입장과 관점이다. 보유세만으로 부동산 문제를 해결할 순 없지만, 보유세 없이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건 연목구어(緣木求魚)에 가깝기 때문이다. 부동산 문제의 핵심은 토지에서 발생하는 불로소득이다. 이 불로소득을 사유화하고자 하기 때문에 투기가 일어나며,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고 시장이 불안해지는 것이다. 보유세는 토지에서 발생하는 불로소득의 상당 부분을 사회화하기 때문에 시장참여자 입장에선 부동산 소유 및 처분에 따른 기대수익률이 낮아지고 투기 유인도 줄어든다.
대한민국의 부동산 보유세 실효세율은 2019년 기준으로 0.17%에 불과하다. 미국(아파트 1.61%, 일반주택 1.38%, 상업용 부동산 1.95%, 산업용 부동산 1.41%), 캐나다(0.87%), 영국(0.77%), 프랑스(0.55%), 일본(0.52%)에 아득히 미치지 못한다. 보유세가 이렇게 낮다 보니 투기가 기승을 부리고 천문학적인 부동산 불로소득이 사유화될 수 있는 것이다.
토지+자유연구소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대한민국에서 지난 13년 동안(2007~2019년) 발생한 부동산 불로소득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평균 16.2% 수준이며, 2019년엔 무려 352.9조원이 발생한 것으로 추산됐다. 서울에서 발생한 부동산 불로소득은 2019년에 무려 105.4조원이다.
후보들이 제시하는 다른 어떤 정책보다 보유세에 관한 공약을 살펴보라. 보유세는 보편과세이며 피할 수도 숨길 수도 없는 세금이다. 보유세를 강화하려는 후보는 ‘부동산 공화국’ 혁파의 의지가 확고한 후보이며, 보유세 강화에 미온적이면서 보유세 이외 방법을 동원하려는 후보는 ‘부동산 공화국’ 혁파 의지가 미심쩍은 후보다.
정책도 사람이 한다
정치도, 정책도 다 사람이 하는 일이다. 하여 인사가 만사라는 말은 영원히 옳다. 부동산이라고 다를 리 없다. 각 후보 캠프에서 부동산 공약을 책임진 참모들의 면면을 살펴보는 건 그래서 중요하다. 부동산 투기와 거리가 먼 참모, 부동산 문제 해결의 확고한 의지와 출중한 역량이 있는 참모, 토건자본과 아무 연관이 없는 참모 등으로 구성된 캠프의 후보라면 신뢰할 만하다.
지금까지 ‘부동산 공화국’ 혁파의 선봉장 심사기준 3가지를 살펴보았다. 세 가지 기준으로 후보들의 부동산 관련 공약과 정책을 평가해보면 누가 진정으로 ‘부동산 공화국’을 혁파할 사람인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이태경 토지+자유연구소 부소장 미디어오늘 2021.08.14
20대 대선, 증세를 말하다
“표를 먹고 사는 정치인은 보통 선거 전에 증세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 그럼에도 내년 대선에서 단연 화두는 복지 강화다. 보수언론으로부터 포퓰리즘과 세금살포 중독증으로 진단된 여당 측 후보가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야당조차 관점에 따라서는 기본소득과 큰 차이가 없는 안심소득, 공정소득을 주장한다. 다들 증세 없이 논하기 어려운 과거와는 차원이 다른 복지 방식이다.
이런 과감한 복지정책이 화두가 되는 것은 분명 한국사회가 질적으로 변화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양극화 완화를 위해 복지 강화가 진행됐지만 실상 지난 10년간 그다지 개선되지 못했다. 한국의 사회복지지출 비율은 2018년 11.1%로 OECD 평균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최악의 자살률, 낮은 행복지수, 출산율 감소, 높은 청년실업률을 목도하면서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더욱이 코로나19 사태로 더 심각해진 양극화가 코로나만 안정되면 해소될까? 코로나19는 4차 산업혁명으로 대표되는 변화를 더 빨리 촉진시킨 것뿐이며, 경제가 발전할수록 실업률과 양극화가 심화되리라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이다. 최고의 복지는 성장이라는 말이 설득력을 잃고 있다. 이제는 성장을 희생하더라도 평등과 안정을 지향해야 함에 국민들이 더 많이 동의하게 된 것이 아닐까? 실제 청년은 연봉을 희생하더라도 더 안정적인 직장을 원한다. 하지만 그런 안정도 100 대 1을 넘나드는 경쟁을 뚫어야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개인의 노력만으로 불안한 사회를 헤쳐 나가기에 버겁다.
<정의란 무엇인가>로 널리 알려진 마이클 샌델은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시장주의의 다른 말인 능력주의 분배질서가 지닌 불공정성을 지적했다. 2020년 서울대·고려대·연세대 신입생 55%가 소득 상위 20% 가구에 속해 있다. 뛰어난 부모의 뛰어난 자녀들이 만든 당연한 결과일까? 능력주의를 말하기에 우리 사회는 불평등하고, 공정하지 않다.
폭넓은 사회안전망과 그를 통한 양극화의 해소는 안정적인 삶,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고 사회의 분열을 막기 위한 시대적 과제다. 이제 대선,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됐다. 어느 선거에서나 경제성장과 일자리, 모두가 잘사는 사회라는 구호가 넘쳐난다. 그러나 증세 없는 새로운 약속은 윗돌 빼서 아랫돌 괴는 것일 뿐이다. 정치인이라면 다들 두려워한다는 증세 논의를 빼고 나면 향후 5년도 비슷한 과거가 되풀이될 뿐이다. 북유럽 복지국가 수준은 아니더라도 복지지출 비율이 OECD 평균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재원 마련 문제로 공격받으며 기본소득 공약에서 후퇴한다는 의심을 받던 이재명 후보는 최근 증세를 통한 재원조달 계획을 제시했다.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나갔지만 그래도 명확히 한발을 뗐다. 일부에서는 그의 기본소득 공약을 ‘기본 용돈’ 공약이라고 조롱한다. 연 100만원, 200만원이 누구에게는 용돈이겠지만 누구에게는 절실한 돈일 수 있고, 그 돈이 지역소상공인한테 돌아가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효과이다. 무엇보다 그렇게라도 시작해 보는 것이 큰 의미가 있다. 방법적인 면에서는 국토보유세가 집값을 올릴 터이니 안 되고, 탄소세는 기업들이 힘들어질 터이니 안 된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국토보유세로 집 가진 사람들이 돈을 낸다면 소득 재분배 효과는 분명 있다. 또 그런 재분배 효과 때문에 집의 보유가 불리해지고 집값을 잡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탄소세는 우리 사회의 또 다른 중요한 화두인 기후변화와 연관된 문제이다. 기업부담을 문제로 탄소세 도입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기후변화에 어떤 대안을 갖고 있는가? 탄소배출 억제를 위해서는 탄소를 배출하는 산출물의 가격이 올라야만 하고 그것이 기업에, 최종적으로 국민에게 부담되는 것은 명확하다. 그에 따른 정치적 부담이 탄소배출 억제를 차일피일 미루는 이유가 되어왔다. 탄소세를 지우고 그만큼 기본소득 형태로 배분해 국민 부담을 환원해 주는 것은 기후변화에 대응하고 불평등도 완화하는 좋은 방법이 아닐까?
이미 심각해진 양극화를 완화하기 위해, 그리고 4차 산업혁명과 기후위기와 같은 변화가 몰고 올 사회적 불안정성에 대응하기 위해 폭넓은 사회안전망 구축은 필수적이다. 재원 마련을 위한 증세도 필연적이다. 한정된 재원을 두고 다투는 방식으로 근본적 변화는 가능치 않다. 국민 개개인이 단기적 손익을 따져 변화에 저항한다면 이는 단지 숙제를 뒤로 미루는 것일 뿐이다. / 송재도 | 전남대 교수 / 경향 : 2021.08.11.
페미니즘 사냥에 어떻게 맞설 것인가
백래시가 몇개월째 난동을 부리고 있다. 페미니즘을 증오하는 남성들이 손가락 고리 모양을 찾아 헤매고, 이른바 ‘페미’를 색출한답시고 여성에 대한 낙인찍기를 시도한다. 이제는 도쿄올림픽 양궁 국가대표 안산 선수를 겨냥하고 있다. 이번에는 양상이 다르다. 그들의 주장과 행동이 워낙 황당한 수준이다 보니 대중의 피로가 상당히 누적됐다. 공격 대상이 ‘태극전사’라는 사실은 페미니즘에 대한 증오를 압도한다. 그럼 이번 사건을 계기로 반페미니즘 난동이 소멸하게 될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이번 사건의 의미는 역설적이다. 올림픽 3관왕 정도의 ‘역사적 인물’이 피해자가 될 경우에만 백래시를 반격할 여론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더구나 지금 주류 여론을 주도하는 것은 안산 선수 개인에 대한 지지와 열광일 뿐 백래시 그 자체에 대한 반대라고 하기도 어렵다. 허약한 먹잇감이 등장하면 페미니즘 사냥은 언제라도 재개될 것이다. 그것의 사회·정치적 조건을 해체하는 일이 중요하다.
‘남성혐오’라는 착각
‘혐오’라는 문제적 개념을 살펴보자. 이 개념은 다음 두가지를 뒤섞는다. 첫째는 차별과 폭력이라는 사회구조적 실재이고, 둘째는 타인을 미워하거나 경멸하는 감정의 표현이다. 민주주의 체제는 이 두가지를 엄격히 구별한다.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폭력과 차별은 무조건 나쁜 것이지만, 타인을 모욕, 비하, 조롱하는 행위는 때에 따라 다르게 평가된다. 그런 행위가 차별을 지지하고 강화한다면, 차별 행위의 일종이므로 허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여성을 향한 비하와 조롱이 성차별 구조 내에서 발생할 때, 규제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반면 사회적 약자가 지배집단을 향해 적대감을 드러내거나, 시민이 권력자를 조롱하거나, 개인이 다른 개인을 모욕하는 경우, 다양한 평가기준이 적용된다. 그럼 남성 집단 일반을 비하하고 조롱하는 행위는 어떻게 평가돼야 하는가?
세상은 남성 중심 권력이 지배하고 있으며, 이 권력은 여성을 차별하고 배제한다. 사회의 특정 영역에서 남성 개인이 차별받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거시적 관점에서는 그 역시 남성 중심 체제의 한 부분으로 존재한다. 사회 전체의 수준에서 차별받는 것은 여성이고, 성차별은 증오심, 적대감, 경멸, 조롱, 비하 따위를 동반한다. 반면 남성이 남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고, 구조적 폭력의 희생자가 되지는 않는다. 즉 ‘남성에 대한 역차별’은 없다. 정말 심각한 문제는 이 기본적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어떤 여성이 온라인에서 한국 남성 일반을 비하하고 조롱할 경우, 그 개별 행위의 성격에 따라 제재의 대상이 될 수 있겠지만, 적어도 성차별적 행위라고 말할 수는 없다. 남성을 차별하는 사회구조 내에서 발생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컨대 남성비하, 남성조롱, 남성증오 등의 행위는 존재하지만, 남성차별이라는 것은 없다. 바로 이 지점에 ‘남성혐오’라는 기호가 개입한다. 이 말의 기능은 실재하는 대상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적 혼동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즉 ‘남성 전체를 비하하고 조롱하는 여성이 있으므로 남성이 여성에게 차별받고 있다’는 착각을 만든다. 이제 자신이 차별의 피해자라는 믿음으로 무장한 남성들이 페미니스트 사냥에 나선다. 하지만 비하와 조롱의 피해자라고 해서 차별의 피해자인 것은 아니다. 더구나 비하와 조롱은 그 대상과 내용에 따라 허용될 수도 금지될 수도 있다.
안산 선수를 향한 공격은 명백한 차별 행위다. 그것은 여성의 외모와 언어에 ‘남성혐오’라는 낙인을 찍고, 남성 중심 권력에 순종하기를 요구한다. ‘혐오’라는 모호한 언어의 사회적 사용법에 이런 낙인찍기의 가능성이 내포돼 있다. 이 말은 차별적 사회구조, 그 안에서 벌어지는 차별 행위나 발언을 모두 의미한다. 그것을 쓰면 쓸수록 전자의 의미는 희미해지고 후자만 강조되는 효과가 발생한다. 이런 경향은 ‘여성혐오’의 사용에서도 드러난다. ‘여혐’이 ‘성차별’이나 ‘여성에 대한 차별 표현’ 같은 개념을 대체할수록 차별이라는 사회구조적 실재는 잊히고, 여성을 공격하는 개별 발언이나 행위에만 초점이 맞춰진다(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맥락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 ‘성차별 이슈’가 아니라, ‘젠더 폭력’, ‘젠더 이슈’라고 쓰는 경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결국 누군가 타인을 미워하고 조롱하면, 사회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혐오’라는 딱지를 붙일 수 있다. 그냥 ‘인터넷 트롤’ 수준의 말이 돼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여혐 논란’, ‘남혐 논란’ 따위의 언어가 넘쳐나고, ‘타인을 경멸하고 비하하는 행위는 혐오라 나쁜 것이다’라는 앙상한 믿음만 남는다. 이런 조건에서 ‘남성이 여성을 혐오하는 것이 나쁘다면, 여성이 남성을 혐오하는 것도 똑같이 나쁘다’라는 착각이 힘을 얻는다.
모호한 언어와 무능한 제도
이는 단지 언어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성차별을 다룰 공동체의 규범 자체가 매우 허약하다는 것이 문제다. 그런 규범을 만드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지만, 한국의 국가기구와 제도는 성(性)에 관련된 모든 영역에서 무능하다. ‘손가락 고리 모양을 사용했으니 남성혐오’라는 황당한 주장을 반박하기는커녕 해명하고 사과하느라 바쁘다. 논란이 된 사건과 최대한 빨리 결별하고 비난 여론을 피하는 것이 제도의 기본적인 작동 방식이다. ‘미투 운동’이 여론을 주도하고, ‘n번방 사건’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폭발했을 때는 모두가 여성의 목소리에 집중하지만, 반페미니즘 난동이 힘을 얻으면 기업과 국가기관 모두 ‘남성혐오’라는 낙인을 피하려 노심초사한다.
정상과 비정상, 상식과 비상식의 구분은 공동체의 유지를 위한 필수 조건이다. 그 구분을 만들고 실행하는 것이 국가의 첫 번째 임무다. 이런 구분이 단지 억압의 수단인 것만은 아니다. 진보란 정상성의 기준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재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현재 미국에서 성소수자는 정상이지만, 의사당을 점령한 백인 우월주의자는 비정상이다. 한국에는 “여성이 숏컷을 하고 ‘웅앵웅’, ‘오조오억’ 같은 말을 쓰면 남성을 혐오하는 페미니스트다”라고 주장하는 남성 집단이 있다. 이들은 정상인가, 비정상인가. 한국의 국가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한 입장도 언어도 없다. 그래서 황당한 음모론이 판치고, ‘여성혐오’와 ‘남성혐오’, ‘이대녀’와 ‘이대남’이 대결하는 식으로 사회적 논의가 전개된다. 우리편을 모아 상대편을 공격하는 것이 시민적 정치 참여의 유일한 방법이다. 언젠가 ‘여혐’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주류 여론이 되더라도, 그후에는 백래시가 다시 등장할 것이다. 해법은 이미 나와 있다. 국가기구와 제도가 제 역할을 하면 된다.<박이대승 정치철학자> 주간경향 2021.08.16.ㅣ
백신 반대론과 우주적 피해망상
세상은 왜 위험한가? 종교학자 조너선 Z. 스미스의 용어를 따르면,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상상력에는 크게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위치지정적(locative)인 것이다. 이 세계관에 의하면 위기는 질서의 혼란에서 온다. 모든 것은 저마다 마땅한 자기 자리에 있어야 한다. 국가보안법이 폐지되거나, 성소수자의 인권을 인정하면 사회가 엉망이 되어버릴 것이라 믿는 근본주의적 종교의 인식은 여기에 속한다. 반면 유토피아적(utopian) 세계관에 의하면 현재의 질서는 거짓된 것이다. 따라서 위험은 현재의 억압적 체제 그 자체에 있다. 헤르만 헤세가 <데미안>에 썼듯이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누구든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관점은 영적, 사회적 해방을 추구하는 문화적 실천 속에서 폭넓게 나타난다.
이렇게 말하면 유토피아적 세계관 쪽이 보다 긍정적이고 진보적인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 세계관은 수많은 종교적, 유사과학적 음모론과 관련되어 있기도 하다. 이를테면 정부나 권력 집단이 개개인의 체내에 마이크로칩을 심어서 시민을 통제, 감시하거나 심지어 정신과 신체를 조종하려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정보기술을 이용한 시민 감시는 조지 오웰이 상상한 ‘빅브러더’를 꿈꾸는 전제적인 권력자들이 바라 마지않는 일이다. 그러나 고작 반려동물 관리를 위해서나 사용되는 현재의 생체칩 기술로 그런 일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하기는 어렵다. 이 음모론을 신봉하는 종교 집단들은 이야말로 신약성서의 <요한계시록>(묵시록)이 말하는 “짐승의 표”라고 주장하지만, 그들은 바코드 기술이 처음 등장했을 때에도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현재의 세계를 불신하는 인식은 공공보건을 위협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이 백신 반대 운동이다. 백신 반대론자들은 백신이 효과가 없거나 심지어는 해롭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에서 백신을 맞게 하는 것은 “제약회사의 음모”이거나, 백신으로 “유전자를 변형”시켜 인류를 조종하려고 하는 사악한 세력의 책략이다.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 속에서도 이런 주장은 지속적으로 퍼져나가며 방역 상황을 악화시켜왔다. 한국은 상대적으로 백신 거부론의 영향이 약한 지역에 속하지만, 종교인들을 비롯한 백신 반대론자들의 목소리는 지금도 온라인 공간에 울려 퍼지고 있다. 그 가운데에는 백신을 맞으면 자석이 몸에 붙는다거나, 좀비가 된다는 주장까지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적극적으로 백신 반대를 외치는 이들 가운데에는 종교적 극단주의자만이 아니라 진보적 인사로 분류되는 이들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들이 말하는 백신 마피아의 국제적인 카르텔이라든지, 백신 맞은 사람과 접촉하면 유산을 한다는 등의 주장에 대해서는 굳이 말을 섞고 싶지 않다. 그러나 ‘좌파 백신 거부론’이 전제하고 있는 세계 인식에는 흥미가 있다. 백신 접종을 포함한 정부의 방역 정책을 전체주의적 통제와 동일시하는 논자들의 비평은 의학적 토론의 영역을 넘어서 있다. 한편으로 그들의 언어는 급진적 생태주의나 문명비판의 논리와 많은 점에서 닮았다. 자본주의와 관료제, 근대과학이 구축한 현대 문명이 한계에 도달했으며 지구환경과 인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필요하다는 관점 말이다.
이성과 과학을 기반으로 하는 근대적 사유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시도들은 포스트모더니즘 운동의 일부로 지속되고 있다. 물론 문명의 위기에 대처하는 대안의 탐구는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성, 과학, 근대가 아직 알지 못하는 비밀스러운 지식을 누군가 독점하고 있다는 주장은 대단히 의심스럽다. 백신을 비롯한 현대 의학에 한계가 있다고 하여 검증되지 않은 자연식품 섭취나 대체요법들이 그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과학은 그 자체만으로는 어떤 형식의 세계관도 제공하지 않는, 축적된 정보를 바탕으로 지식을 확장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스미스가 “우주적 피해망상”(cosmic paranoia)이라고도 이른 유토피아적 세계관은 과학을 바탕으로 한 근대적 지식을 위치지정적 세계관이 강요하는 억압적인 질서와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 기존의 지식체계와 지배체제에 대한 비판 정신은 더 나은 세계로의 혁신을 위해 필수적이다. 그러나 의심과 불신은 그 자체로는 정의가 아니다. 맹목적인 믿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또 다른 기괴한 것들을 믿을 필요는 없다.
한승훈 | 종교학자·원광대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한겨레 :2021-08-16
이재용 부회장이 억울하다”는 조선일보
삼성 총수 일가의 대를 이은 불법·비리를 가능하게 한 주요한 원인 중 하나가 언론이 제 역할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언론이 감시와 비판을 제대로 했다면 불법·비리는 일찌감치 중단됐을지 모른다. 삼성 앞에선 입도 뻥끗 못 하면서 입만 열면 ‘언론 자유’를 외치는 언론의 모습은 정상이 아니다.
언론 비평 매체 <미디어오늘>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가석방 결정 다음날인 10일 ‘사법 정의 포기한 이재용 가석방 결정, 언론 역할 컸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이 부회장이 가석방되는 과정에서 극히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언론이 보인 보도 행태를 비판한 것이다. 미디어오늘은 “언론은 ‘이재용 부회장을 풀어줘야 한다’ 는 신호를 올해 상반기 내내 퍼트렸다. 여론조사 결과를 활용해 재벌의 사법 특혜를 ‘국민 동의를 받는 문제’로 치환했다. 이 부회장을 조선시대 이순신 장군에 빗대는 등 미화· 왜곡도 서슴없이 나왔다. 사법 정의와 평등의 문제는 이 같은 보도 홍수 속에서 ‘삼성 총수 구하기’로 축소됐다”고 지적했다. ‘법 앞의 평등’이라는 헌법 정신을 훼손한 이 부회장의 가석방은 일차적으로 문재인 정부의 잘못이지만 언론의 책임 또한 무겁다는 점에서 시의적절한 기사였다고 본다.
그런데 <조선일보>를 비롯한 몇몇 언론의 보도는 이 정도 수준이 아니다. 이 부회장의 가석방을 환영하고 합리화하는 것을 넘어 아예 이 부회장이 처음부터 죄가 없었다고 강변한다. 문재인 정부가 이 부회장에게 억울한 옥살이를 시켰다는 것이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조선일보는 10일 사설 ‘5년 공백끝 복귀 李부회장, 경영 성과로 억울함 입증하길’이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처음 수사했던 검찰조차 “박 전 대통령의 강요에 의한 것”으로 보았지만 박영수 특검이 뇌물 사건으로 바꾸었고 결국 강요를 당했다는 이 부회장이 뇌물 공여 범죄자가 됐다. 이 과정에서 문 정권은 고비마다 재판에 개입했다. 청와대는 이 부회장의 범죄 혐의를 입증하는 앞 정권의 캐비닛 문건을 찾아냈다며 법원에 제출했고, 공정거래위원장은 이례적으로 증언대에 서 이 부회장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다. 문 정권이 이 부회장을 감옥에 보내려 작심했었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 청와대가 민정비서실 공간을 재배치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박근혜 정부 문건 300여건 중 ‘삼성그룹 경영권 승계 지원 방안’ 등이 들어 있었고 이를 검찰에 제출한 일이 있다. 나중에 확인된 사실이지만 이 문건은 우병우 민정수석의 지시로 작성됐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이 부회장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적이 있는데, 교수 시절 삼성 고위관계자가 수시로 주요 경영 현안에 관한 의견을 구해와 조언해준 내용을 공개했다. 이걸 ‘문재인 정부의 재판 개입’ 근거라고 들어 이 부회장이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고 사설을 쓰는가? 어처구니가 없다.
<문화일보>는 ‘ 이재용 가석방 … 文 정권의 전방위 삼성 옥죄기 돌아봐야’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국정농단 사건’에 경영권 불법승계와 분식회계 재판 등까지 더해 “정권이 총출동해 전방위 옥죄기를 하는 셈이다”라고 주장했다 . <한국경제>는 ‘사면 아닌 가석방…경제보다 정치적 계산 앞선 것 아닌가’ 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이 부회장의 수감 사유가 국정농단이라는 정치색 짙은 재판이란 점도 되돌아봐야 한다. 이전 대통령과의 관계에서 수동적으로 행한 경영행위에 정치적 이해관계를 덧씌워 장기 수감하는 것이 정의인지 의문이다”라고 주장했다 .
이들 신문에 묻는다. 대법원 판결마저 부정하는 건가? 이 부회장에 대한 대법원 판결을 돌아보자. 이론의 여지없이 명확하다. 이 부회장이 경영권 승계에 도움을 기대하며 박 전 대통령에게 적극적으로 뇌물을 줬다고 판결했다. 국정농단 사건의 본질을 대한민국 최고 정치권력인 대통령과 최고 경제권력인 삼성 총수가 결탁해 거액의 뇌물과 경영권 승계 지원을 주고받은 정경유착이라고 본 것이다. 대법원은 이 부회장이 회사 자금을 횡령해 건넨 뇌물 액수도 36 억원이 아닌 86 억원으로 판단했다.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은 횡령액이 50 억원 이상이면 무기징역 또는 5 년 이상 징역에 처하도록 돼 있다. 그런데도 파기환송심에서 최저 양형기준에도 못 미치는 2년6개월 징역이라는 ‘봐주기 판결’을 했고, 법무부는 가석방 기준까지 낮춰가며 이 부회장을 풀어줬다. 이게 어느 하나 보태지도 빼지도 않은 ‘이재용 유죄와 가석방’의 실체적 진실이다. 조선일보 등을 보면 우리 대법원의 일제 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판결을 트집잡는 일본 정부가 떠오른다. 이들 신문의 주장은 대한민국의 삼권분립을 부정하는 아베와 스가 정부의 억지와 다르지 않다.
거듭 강조하지만 이 부회장의 불법행위는 삼성의 일상적인 기업 활동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개인 범죄’다. 자신의 경영권 승계라는 사익을 위해 회사에 막대한 피해까지 입힌 횡령·뇌물 범죄다. ‘삼성 위기론’이니 ‘반도체·백신 기여론’이니 호들갑을 떨 일이 아니다.
삼성 총수 일가의 대를 이은 불법·비리를 가능하게 한 주요한 원인 중 하나가 언론이 제 역할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만약 언론이 삼성 총수 일가에 대한 감시와 비판을 제대로 했다면 불법·비리는 일찌감치 중단됐을지 모른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법을 어겼으면 그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한다고 기사와 사설을 쓰면 된다. 삼성 앞에선 입도 뻥끗 못 하면서 입만 열면 ‘언론 자유’를 외치는 언론의 모습은 정상이 아니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언론 자유’인지 이재용 부회장 관련 보도부터 성찰하기를 권한다.
안재승 논설위원실장 jsahn@hani.co.kr 2021-08-16
미성숙한 철인들 그리고 원전 보수
니체는 철인을 기다렸다. 굳이 니체 얘기를 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대선이 가까워지면 철인을 기다리는 것처럼 새로운 영웅이 도래하기를 희망한다. 위대한 누군가가 와서 지금과는 전혀 다른 공화국으로 방향을 이끌어주기를 바라는 집단적 무의식이 있는 것 같다. 좀 멀리 올라가면 1956년 3대 대통령 선거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어서 무려 30%의 득표를 했던 진보당의 조봉암을 생각해볼 수 있다. 당시 민주당은 “못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로 나섰지만 후보인 신익희가 선거 도중 사망하는 변고가 생겼다. 이승만을 이길 뻔했던 조봉암은 1959년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된다. 당시의 제3지대는 민주당보다 더 왼편에서 형성되었다. 그 뒤 현대그룹의 정주영, 유한킴벌리의 문국현 그리고 안철수까지는 민주당보다 좀 더 오른쪽에서 제3지대가 형성되었다. 잠시 있다가 사라진 ‘행정의 달인’ 고건과 유엔 사무총장 반기문도 기억 난다. 이제는 갑자기 등장한 윤석열과 최재형이 철인의 바통을 이어받았다.
한국의 보수에도 정말 괜찮은 사람이 등장해서 뭔가 멋지고 그런 일을 하기를 나도 기대했다. 그런데 이 인간들이 출마를 선언한 이후로 영 이상하다. 윤석열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전언 정치를 선보이더니 급기야 주당 120시간 일을 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 해서 깜짝 놀라게 했다가, “후쿠시마에서 방사능이 유출 안 되었다”는 얘기는 도대체 제대로 아는 게 뭔가, 얼떨떨하게 만들었다.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고 말을 조심하던 최재형도 윤석열과 난형난제다. “국가가 삶을 책임져서는 안 된다”는 얘기를 해서 그야말로 ‘깜놀’. 근대 국가 이전의 얘기 아닌가. 한 명만 그러고 있어도 정신이 없는데, 두 사람이 돌아가면서 거의 매일 술자리에서나 할 법한 얘기들을 여과 없이 막 꺼내놓는 걸 보면서 정신이 아득해졌다. 최재형 측에서 자랑이라고 꺼내놓은 가족 모임 국민의례 사진은 보너스다. 이들을 보면서 이회창이 얼마나 ‘고품격 인간’이었는가, 새삼 뒤돌아보게 된다.
한국의 남성 엘리트들 중에는 세상 물정 전혀 모르고, 버스나 지하철 타는 법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윤석열과 최재형, 미안한 얘기지만 손에 물 한번 안 묻히고 일상생활 같은 것은 한번도 안 해본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의 삶을 너무 모르고, 복지는 물론이고 정책 혹은 제도의 역사 같은 것에 대해서 너무 해맑아서 뭐라고 하기가 어렵다. 어디까지 아는지를 알아야 어디서부터 이상하다고 얘기를 할 텐데, 도대체 뭘 알고 있는지 알기가 어렵다. 공부 말고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다. 둘 다 거대 캠프들을 꾸렸으니까 옆에서 조언해주는 사람들도 많이 있을 텐데. 성숙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아주 좁은 엘리트들 사이의 삶 속에서 그냥 나이 먹은 미성숙들, 어쩌면 이렇게 두 사람이 똑같은지 모르겠다. 성숙한 자본주의를 운용하기에는 좀 나사 빠진 미성숙들 아닌가!
두 사람의 공통점이 또 하나 있다. 원전에 대한 심각한 편향성이다. 영국이나 독일도 지금 보수 정부가 집권 중이지만, 탈원전 정책을 각자의 방식으로 나름대로 추진하는 중이다. 윤석열과 최재형이 원전에 대해 가지는 입장은 10여년 전 미국의 네오콘과 비슷하다. 그렇지만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 때에도 강하게 원전 정책을 추진하지는 않았다. 반북 보수와 경제 보수를 이어 이제는 ‘원전 보수’라는 새로운 단계로 간다. 아무리 보수라도 에너지 및 물질 전체를 놓고 입장을 정하는데, 이 두 사람은 원전 정책이 에너지 정책의 전부인 것처럼 친원전 인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 같다. 정치가 원전 정책을 끌고 가는 게 맞는데, 이제는 원전이 정치, 아니 보수 정치를 끌고 간다. 기형적인 상태인데, 아마 윤석열과 최재형은 이게 기형적이라는 사실도 모를 것 같다.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 혹은 영국의 데이비드 캐머런 전 총리나 보리스 존슨 총리에 비하면 같은 보수라고 하기에도 너무 이상할 정도로 좁은 얘기들만 한다. ‘원전 보수’, 그렇게 좁은 시각으로는 절대로 집권 못하고, 미래로 못 간다. 원전 인사들의 좁은 로비에 갇혀 사는 원전 보수, 보고 싶은 것만 보는 폐쇄적 보수가 되어버렸다.
너무도 편협한 ‘원전 보수’가 야권 1, 2위 후보라는 걸 보면 한국의 미래가 아득하다. MB 심지어 박근혜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 사람들은 정치만 모르는 것이 아니라, 법전 바깥의 한국 사회 자체를 아예 모르는 것 같다. ‘문재인 반대’, 이 하나만 가지고 집권하고 통치하기에는 한국은 이미 커졌고, 복잡해졌다. 부디 이제라도 무엇을 위해서 그리고 누구와 정치할 것인가, 잠시라도 깊게 생각하는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다.
우석훈 성결대 교수·경제학자 경향: 2021.08.16
한겨레사설] ‘아프간 미군 철수’ 둘러싼 무책임한 아전인수 주장들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하고 친미 정부를 세웠던 미군이 20년 만에 철수하고 탈레반이 아프간을 장악하면서 벌어진 혼란과 그 후폭풍이 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비판에 휩싸인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철수를 후회하지 않는다며 “미국의 국익이 걸려 있지 않은 전쟁에서 무한정 싸우지 않겠다”는 ‘바이든 독트린’을 선언했다.
미국의 아프간 철군은 오래 전부터 예고된 것으로, 미국 외교전략의 근본적 방향 전환 신호라는 의미가 있다. 냉전이 끝난 이후 유일 초강대국으로서 미국식 질서를 전세계에 무리하게 이식하려다 너무 많은 힘을 소진한 미국이 중동과 유럽 등에서 역할을 축소해 중국 견제에 역량을 집중하려는 현실주의의 요소를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새 전략에서 한국을 비롯한 인도·태평양 지역 동맹국들의 위상은 훨씬 커졌다.
이런 상황에서 엉뚱하게 세계 6위 군사력과 10위의 경제력을 가진 한국을 무너진 아프간 정부군에 비교하면서,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버림받지 않으려면 한미동맹에 더욱 밀착해야 한다는 아전인수식 주장들이 난무하고 있다. 미국 부시 행정부 관리 출신의 보수 논객이 “한국도 미국의 도움이 없었으면 아프간과 같은 운명이 됐을 것”이라고 주장을 한 데 이어, 18일 <조선일보>는 ‘아프간 떠나는 미국 보며 한국 처지를 생각한다’는 사설에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쿼드 전략 등에 협력하지는 않으면서 북한의 위협만 막아달라는 한국의 애매한 입장은 지속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중앙일보>도 ‘아프간 사태가 한·미 동맹 중요성 보여줬다’는 사설에서 “정부와 군은 아프간 사태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한·미 동맹 강화와 강군 유지에 전력을 다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한국이 아프간처럼 되지 않으려면, 한미동맹을 강화해 미국의 중국 견제에 밀착해야 한다는 근거 없는 주장들이다.
우선 바이든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 정부 관계자들이 한국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우려를 잠재우려 애쓰고 있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18일 방송에 출연해 한국과 일본, 나토 등 동맹과 대만은 아프간과 근본적 차이가 있다면서, 동맹이 침략당하면 상호방위조약에 따라 대응할 것이라고 확인했다. 전날엔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주한미군 철수나 감축 가능성을 일축했다.
물론 바이든 대통령이 강조하는 미국 국익 중심의 외교전략 변화가 시사하는 의미를 면밀히 주시하고 대비할 필요가 있다. 한국을 비롯한 동맹국들이 중국 견제 역할을 확대하고 비용 분담도 늘려야 한다는 미국의 요구가 강해질 것이다. 한국은 원칙과 위상에 걸맞는 국제적 역할을 확대하되, 미국의 요구를 무작정 수용해 중국과 군사적 긴장과 대결로 나아가는 상황은 피해야 한다.
상당 기간 한미동맹은 중요한 역할을 하겠지만 한국의 안보를 미국에만 의존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원칙이자, 아프간 사태가 주는 진정한 ‘교훈’일 것이다. 한미동맹을 잘 관리하면서도 자주국방을 강화해야 하고 전시작전권 환수도 더이상 미루지 말아야 한다.
조선 사설] 아프간 떠나는 미국 보며 한국 처지를 생각한다
바이든 미 대통령은 대(對)국민 연설에서 아프간 철수 결정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미국의 국익이 걸리지 않은 분쟁에 무한정 개입할 수 없다”는 것이다. 20년 전 미군이 아프간을 점령한 것은 미국 본토를 겨냥한 9·11 테러 집단을 응징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그 목적은 이미 달성됐다는 의미다. 바이든 대통령은 “우리의 전략적 경쟁자인 중국과 러시아는 미국이 천문학적 재원을 쏟아부으며 아프간에 계속 묶여 있기를 바랄 것”이라며 “그것은 미국의 안보 이익이 아니며, 미국 국민이 바라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미국 정치인과 전문가들은 바이든 대통령이 미국의 치욕이었던 베트남 사이공 함락의 악몽을 재현시켰다고 비판하고, 당초 철군을 지지했던 국민 여론도 요동치고 있다. 그러나 어차피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미국은 2차 대전과 냉전 때처럼 두 개의 전면전을 치르거나 대비할 만한 힘을 더 이상 갖고 있지 않다. 바이든 아닌 다른 대통령이라도 뾰족한 대안이 없었을 것이다.
바이든은 “아프간군이 스스로 싸우지 않는 전쟁을 미국이 대신 싸워 줄 수 없다”고 했다. 미국의 칼럼니스트는 “한국도 미국의 도움이 없었으면 아프간과 같은 운명이 됐을 것”이라고 했다. 국내에도 그런 시각이 있다. 하지만 한국과 아프간의 국력과 전략적 위치를 동일 선상에서 비교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이자 비약이다. 국방장관이 일곱 번이나 국민에게 사과해야 할 만큼 엉망인 국군의 기강이 걱정스러운 것도 사실이지만, 아프간 사태가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따로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20년에 걸친 미국의 대(對)테러 전쟁은 끝났으며, 미국 중심 국제 질서에 도전하는 중국에 맞서는 것을 첫째 국가 이익으로 삼아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바이든이 “미국이 돌아왔다”며 복원을 선언한 동맹 관계 역시 중국의 도발과 위협을 억지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북한을 공동의 위협으로 설정했던 한미 동맹도 성격 변화를 요구받을 가능성이 높다.
중국을 겨냥한 지역 안보 협력체인 쿼드(Quad)나 대중 반도체 수출 규제에 한국이 동참해야 한다는 미국의 압박은 보다 거세질 것이다. 이런 미국의 전략에 협력하지는 않으면서 북한의 위협만 막아달라는 한국의 애매한 입장은 지속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아프간에서 한국 대사관 직원과 현지 주민이 무사히 빠져나오는 과정에서도 미국과 미리 맺어 뒀던 양해각서가 결정적 도움이 됐다고 한다. 오로지 힘의 논리만 작동하는 국제사회 정글 속에서 국가와 국민을 지켜 내려면 믿을 수 있는 강대국과의 우호 관계가 필수적이다. 남북 이벤트 정치에 앞서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대응하는 입체적 국가 전략이 절실한 시점이다.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평화의 꿈'이 실패한 진짜 이유
유신모 기자 칼럼에 대한 반론
문재인 정부의 임기가 막바지에 다다르면서 정부의 '한반도 평화정착'이 실패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 다양한 분석과 비판이 나오고 있다. 최근 눈에 띤 글은 <경향신문>의 유신모 외교전문기자의 '문재인 정부 '한반도 평화의 꿈'은 왜 실패했나'이다.(☞ 전문 보기)
유 기자는 이 글에서 "북핵 문제는 차원이" 달라졌는데, 정부·여당은 "고민도 전략도 없이 과거의 패턴에 의존해" 왔다고 비판한다. 나는 이 대목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구체적인 근거 제시에 있어서는 유 기자가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를 하나씩 보자.
그는 먼저 "북핵 문제는 '2017년 11월29일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며 "북한이 이미 핵·미사일 능력을 모두 갖춘 상황에서 쌍중단이라는 거래는 성립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쌍중단은 북한은 핵실험과 탄도미사일 시험 발사를 중단하고 한미동맹은 연합훈련을 중단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정작 "쌍중단이라는 거래는" 북한이 핵무력 완성을 선언한 직후에 이뤄졌다. 문재인 대통령은 평창 올림픽을 계기로 한미연합훈련 '연기'를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제안했고 트럼프도 이에 동의했다. 그리고 2018년 6월 12일 북미정상회담을 마친 트럼프는 쌍중단을 공식화했다. 미국 대통령이 한미연합훈련 중단을 공식 발표한 것은 27년만의 일이었다. 그만큼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평화의 꿈'이 실패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합의한 쌍중단은 2019년 3월부터 위기를 맞이하기 시작했다. 한미 양국이 그해 3월에 연합훈련을 실시한 것이다. 그 이후 쌍중단은 '축소된 형태의 쌍개시'에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한미동맹은 축소해서 연합훈련을 계속해왔고 북한은 단거리 발사체 시험발사로 응수해온 것이다.
기실 미국 대통령이 연합훈련 중단을 선언한 것은 문재인 정부에겐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였다. 질문을 던져보자. 만약 문재인 정부가 트럼프와 의기투합해 한미연합훈련을 자제했다면, 한반도 평화의 꿈의 현주소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트럼프가 2019년 6월 30일 판문점 회동에서 연합훈련을 중단하겠다고 거듭 약속한 것이 지켜졌다면 이후 상황이 이렇게까지 나빠졌을까?
유감스럽게도 정부·여당은 "고민도 전략도 없이 과거의 패턴에 의존"하고 말았다. 한미연합훈련을 계속해야 대북 억제력 및 연합방위태세를 유지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에겐 또 하나의 꿈이 있었다. 바로 전시작전권 환수이다. 이걸 위해서는 연합훈련이 불가피하다는 인식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친 핵심적인 이유이다. 미국 대통령이 연합훈련을 하지 않겠다고 한 만큼, 전작권 환수 조건에서 이걸 떼어내려고 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반도 평화의 꿈'도 '임기 내 전작권 환수의 꿈'도 아련해지고 있다.
유 기자는 또 "계산법이 틀린 것은 미국이 아니라 북한"이라고 주장한다. "북한은 핵·미사일 실험을 중단했는데 왜 미국은 제재를 풀지 않느냐"는 북한의 항변이 잘못된 것이라는 지적이다. 이 역시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 팩트부터 틀렸다.
북한이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에서 제안한 것은 핵·미사일 실험을 중단했으니 제제를 풀어달라는 것이 아니었다. 영변 핵시설을 통째로 폐기하고 장거리 로켓 발사 중단을 문서화된 형태로 보장할 테니 제제를 완화해달라는 것이었다. 미국 국무부에 따르면 영변 핵시설이 북한의 전체 핵능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50% 안팎에 달한다. 그리고 북한이 해제를 요구한 2016년 이후 유엔 안보리의 대북 제재 가운데 민생경제와 관련된 제재는 전체 대북 제재에서 절반 정도를 차지한다고 나는 추정한다. 2016년 이전 안보리의 대북 제재와 미국의 독자적 제재도 상당히 강하기 때문이다. 이걸 맞바꾸자는 북한의 제안이 과연 잘못된 계산법일까?
나는 북한의 잘못된 계산법은 다른 곳에 있었다고 본다. 이미 졸저 <한반도 평화, 새로운 시작을 위한 조건>을 비롯한 여러 글에서 주장한 것처럼, 북한의 잘못된 셈법은 "단계적 접근"에 대한 집착에 있었다. 이 접근은 트럼프의 정치적 야심을 충족시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현상유지를 선호하는 세력들에게 너무나도 좋은 반격의 빌미가 될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유신모 기자는 문재인 정부가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고 평화협정으로 항구적 평화를 정착시켜 북한의 변화를 유도하고 비핵에 이르게 하는 방법"을 택했다고도 했다. 이 역시 실제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정부가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군사적 긴장 완화를 시도하고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단계적 군축"을 추진키로 합의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사상 최대 규모의 군비증강도 해왔다.
또 유 기자는 정부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통한 비핵화'를 추구한 것처럼 주장한다. 그러나 대통령과 고위 관료들이 일관되게 해왔던 발언은 '한반도 비핵화를 통한 평화체제 구축'이었다. 특히 평화협정은 비핵화가 완료되거나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을 때 체결한다는 것이 정부의 기본 방침이었다. 나는 정부의 이러한 정부의 인식과 정책이야말로 "과거의 관성"이었고,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일장춘몽으로 끝날 위기에 처한 또 하나의 이유라고 본다.
내가 반론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유 기지의 마지막 문장에 있었다. 그는 "차기 대선 주자들은 '군사적 긴장을 완화한다, 평화협정을 체결한다, 한반도 평화가 정착되고 핵은 무용지물이 된다'는 식의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3단계 방법'과 같은 탁상공론이나 과거의 관성적 정책이 아닌 새롭고 정교한 국가전략을 고민하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이러한 권고는 의도 여부와 관계없이 국가전략 논의를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게 할 수 있다. 이미 문재인 정부 안팎에선 이토록 진정성과 성의를 보여왔는데 북한은 호응하지 않는다는 좌절감이 커지고 있다. 그릇된 자기연민이다. 보수 진영에선 대북 제재를 더욱 강화하고 어떠한 형태로든 우리도 핵을 가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 역시 잘못된 처방이다.
그래서 묻게 된다. 군사적 긴장 완화와 전구급 한미연합훈련은 양립할 수 있는가? 평화협정 체결은 고사하고 협상조차 제대로 시작된 적이 있는가? 제대로 해보지도 않았던 정책을 "과거의 관성적인 정책"으로 치부해도 좋은가? 정부·여당의 진짜 관성은 '어려운 북한을 돕겠다고 하면 북한이 호응하지 않을까'하는 철지난 희망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말은 풍요롭고 실천은 비곤했던 것은 아닐까?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프레시안 2021.08.23
아프간 난민, 한국 오지 마라
조국을 떠나 절박한 심정으로 다른 나라의 문을 두드리며 하소연할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이여. 아무리 조급해도 대한민국으로는 오지 마세요. 사는 게 먼저이니 다른 건 나중에 생각하고 싶겠지만, 인생 최대의 실수가 될 수 있어요. 동방예의지국, 글로벌 선진국 등의 수식어에 희망의 끈을 걸어둔 것이라면 당장 끊으세요. 한국에서는요, 난민 수용에 인도적인 태도가 필요하다는 논의에 반론이 언제나 이 수준이죠. “너희 집에서 받아주면 되겠네.”
당신들은 근본주의자의 피해자이지만, 한국인들은 철조망에 매달리며 필사의 탈출을 하는 장면을 뉴스로 볼 때만 동정해요. 여기로 오겠다는 순간, 당신들은 ‘어찌 되었든 탈레반하고 종교가 같은 사람들’에 불과하죠. 저들처럼 테러를 저지를 것이고, 저들처럼 여성을 노예처럼 대한다면서 수군거리겠죠. 그런데 핵심은요, 저들처럼 행동하지 않은들 소용없다는 거죠. 한국 헌법에는 종교의 자유가 명시되어 있지만 이슬람은 기본값이 아니랍니다. 낯섦은 공포로 이어지고 혐오를 정당화하죠. 이슬람의 ‘이’ 자만 들어도 막말을 뱉는 사람 정말 많아요. 난민을 받으면 한국이 이슬람‘화’가 된다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이 부유하는 곳에서 사람 취급받길 기대하지 마세요. 인간의 존엄성조차 버릴 순 없잖아요.
그럼에도 희망을 품고 한국으로 온다면 유의할 것이 있어요. 먼저, 뗏목을 타고 와야 해요. 20인승 정원 크기의 배에 200명 정도 타고 오다가 100여명이 바다에 빠져 죽는 게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난민의 모습이죠. 예멘 사람들이 제주도에 체류하면서 난민으로 인정받기 원한 적이 있었는데 이들이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게 특종, 단독보도, 르포라면서 신문에 나올 정도죠. 그러니 한국에 오시면 근처 산에 올라가 봉화로 소식을 전하셔야 해요.
난민지위를 신청하고 대기하는 기간에는 극단의 금욕주의를 실천하세요. 무조건 참으시고 무조건 입을 다무셔야 해요. 사람이 모이면 발생하게 되는 일상 속 사소한 갈등조차 한국인들은 이슬람 종교의 폭력성이 드러났다면서 여기저기 소문내죠. 돼지고기 안 먹는다고 하면 난민 주제에 별 요구를 다 한다면서 빈정거릴 거예요. 기도도 절대 하지 마세요. 한국에선 이주노동자들끼리 모여서 연대하기 위해 작은 사원 하나 만드는 것도 어려워요. 도시미관을 해치는 교회는 우후죽순인데 말이죠. 아! 개종을 하겠다고 하면 일사천리로 일이 풀릴지도 모르겠네요. 여긴 차별을 금지하는 게 차별이라는 망상조차 인정받는 곳이니, 살려면 인간의 기본권은 다 버리고 ‘뼛속까지’ 한국인이 되셔야 해요.
학자들은 삼면이 바다라는 지리적 특성, 그나마 한쪽은 분단으로 막혀버린 정치적 상황, 단일민족이라는 역사성 등을 언급하며 한국인의 배타성을 분석하는데, 좀 우스워요. 한국인들은요, 공정하게 차별하지 않거든요. 총기사고와 미국 백인을, 훌리건의 폭력과 영국 백인을 연결시키지 않죠. 그런 사람들이 한국에서 마약을 반입하고 성범죄를 저질러도 이를 특정한 인종, 지역, 문화, 종교로 확대하지 않아요. 하지만 당신들은 코만 풀어도 어떻게든 그 이상의 것과 연결되어 공동체에서 배제되어도 마땅한 이유로 둔갑할 거예요. 그러니 오지 마세요. 믿기 힘들다면, 이 글에 달린 댓글을 보세요.
오찬호 <세상이 좋아지지 않았다고 말한 적 없다> 저자 경향 2021.08.23.
메가쏘닉한 시간 전-문장 하나하나가 다 뼈를 때리는 촌철살인들인데 이걸 읽고도 저자의 예측대로 댓글을 달아주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이 21세기 한국 아닌가. 해외 나가서 똥양인이라고 차별받으면 누구보다 길길이 날뛸 사람들이 자국에서는 겁없이 다른 사람 차별하고 말야. '난 차별주의자는 아니지만' 이라고 운을 떼며 차별하는 발언을 하는 것이 정당한 의사 표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한트럭인 21세기 헬조선.
이밀(현생처돌이)-하지만 당신들은 코만 풀어도 어떻게든 그 이상의 것과 연결되어 공동체에서 배제되어도 마땅한 이유로 둔갑할 거예요. 그러니 오지 마세요. 믿기 힘들다면, 이 글에 달린 댓글을 보세요.
완-벽-참고로 아프간 난민들은 탈레반에 극단 이슬람적 - 여성폭력적인 상황에서 반대하고 벗어나기 위해 피난을 오는 사람이죠. 비율도 여성과 아이들이 대다수고요. 그 나라의 종교에서 가장 차별받는 여성과 아이들이 살기위해 피난 오는건데, 이들이 여성폭력적인 종교를 믿는 국가에서 왔다고 거부하는건 앞뒤가 안맞지 않나요?
k971****-난민 구조, 참 어려운 일입니다. 나는 경제적 지원은 몰라도 난민이 한국 오는건 반대합니다. 현재 난민은 대부분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발생하죠. 대부분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 같은 국가들이 길게는 200여년 전부터 가깝게는 몇십년 전부터 식민통치해서 이익을 빨아먹고, 석유와 천연가스를 얻기 위해서 분할해서 분쟁을 부추긴 결과입니다., 강대국 식민통치기관, 군대, 정보기관 들이 수많은 공작을 했어요, 불리한 정치인을 암살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멀쩡한 정부를 전복시키고 등등
한국이 언제 중동가서 석유한방울, 천연가스 한통, 천연자원 한주먹 공짜로 얻어본 적 있나요. 전부 뼈 빠지게 일해서 번돈으로 국제시장에서 정상가격으로, 어떨때는 국제적 영향력이 부족해서 석유나 천연가스는 추가요금까지 지불하면서 사온겁니다. 한세대 앞선 부모님 세대가 중동가서 열사의 사막에서 뼈빠지게 일해서 돈번거고요.
아프간 사태가 왜 생기고 오사마 빈라덴이 왜 나왔나요. 미국은 철저한 이스라엘 편입니다. 정권유지가 필요한 중동 왕정국가 정부는 강대국 미국이 필요한지 몰라도 아랍의 일반국민은 미국을 증오합니다. 1400년간 이술람법으로 살아온 국가에 비키니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외국인들로 싫고
거기가 1979년 소련의 아프간 침공후 거기에 대항하려고 무자헤든을 키워서 무기를 주고 군사훈련 시킨게 미국이죠. 오사마 빈라덴도 거기서 경험을 쌓고 힘을 키웠고.
현재의 중동사태는 유럽 강대국의 오랜 식민통치와 미국의 친이스라엘 정책과 군사개입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돈을 엄청 벌었지요. 식민지 수탈과 석유와 천연가스로. 그결과 반미 테러가 생기고 중동국가들의 내정이 엉망이 되어서 난민이 생긴겁니다.
물론 중동국가들이 민주주의는 아니죠. 군부독재아니면 왕정국가예요. 그렇다고 질서가 없는 건 아니예요. 나름 그럭저럭 살아왔어요. 걸프만 산유국이야 돈이 많으니 그걸로 유지하고, 요르단 같은 국가도 나쁘지 않아요. 그런데 1400년간 이슬랍의 샤리아법으로 살아온 사람들에게 미국식 민주주의를 만든다고 난장판을 만들었으니 군부독재보다 더 어려운 상황이 만들어 졌죠.
미국이나 유럽 강대국이 중동에서 꿀빨때는 나눠주지도 않고 인권이야기 하지도 않아요. 아프간도 정 빈라덴 잡고싶으면 특수부대나 조금 보내서 처리하고 빨리 나와야 되는데 만명씩 미군과 나토 연합군까지 엄청나게 들어가서 난장판을 만들고 거기다 아무연고 없는 한국같은 나라까지 파병하라고 압력을 넣었잖아요, 거기서 20년간 전쟁하고 나면 그결과가 이렇게 될줄 몰랐나요.
요즘도 유럽국가중에 오스트리아, 그리스, 폴란드, 체코, 헝가리 같은 국가들은 난민 못받는다고 버티고 있어요. 그들은 아무책임이 없거든요. 중동사막 구경도 못했는데 이익은 다른 힘센놈들이 먹고, 나중에 쓰레기 치울때만 나오라고 하니 누가 좋다고 하겠어요.
결론은 간단합니다. 똥 싼놈이 자기똥 치워아죠. 원인 제공자가 결과를 책임져야 되요. 그래야 함부로 엄한 짓 안하죠. 한국오는 반대합니다. 이런식이면 앞으로도 미국이나 유럽이 여기저기 난장판 만들때마다 뒷치다까리 다 할겁니까? 우리는 무슨 죄로...
굳이 해야한다면 한국과 관련된 사람은 한국이 책임지죠. 얼마 안되겠지만 한국 군부대나 대사관 등과 관련있는 사람은 한국 데리고 와서 북한 탈북민 수준으로 도와주는 건 찬성합니다. 이만 끝.
신의명동-육갑하네. 니 생각이 정답이냐? 너와 생각이 다르면 생각이 짧고 무식한 건가. 대체로 보면 너 처럼 확신에 차서 사카스틱하게 말하는 것들이 가장 무식하더라.
Blade-종교의 자유라는 미명 하에 어떤 사상과 행동양식도 정당화 가능하다면, 무제한적으로 남들을 억압하고 피해를 입힐 자유를 종교화해서 무슨 행동이든 정당화할 수 있다. 이슬람은 그것을 종교든 사회적 규칙이든 무엇으로 규정하든간에 대단히 비 인간적이고 억압적, 여성혐오적이며 침투주의적, 팽창주의적, 독선적 이데올로기라는 실체는 변하지 않는다. 종교의 자유와 평등이라는 얄팍한 미명하에 그 무엇보다도 불평등한 이데올로기의 타지역 침투를 옹호하고 방관하고 조장하는 정치권과 언론계는 부끄러운줄 알아야 한다.
Chacha-오찬호님 선민의식 오지시네요 그렇게 같은 국민 내리깔고 본인은 고고한척 하면 기분 좋아지나봐요 첫줄부터 막줄까지 비꼬기 시전이라 아프간 난민 우리집에서 재워주고 싶다가도 빈정상해서 오찬호님네 집으로 가라고 내쫒고 싶어지네요 글은 그렇게 쓰시는거 아니예요
Jay Shim-우선 제일 중요한건: 미국이 문정부에게 받으라는데 받아야겠지요? 이재Xdl 가석방 그냥 해 준것처럼. 이젠 완전 미국 속국입니다. 헌데 일본은 아직 아무 소리 없네요.
똑같은 미국 속국인데. 하여간 미국의 한 주라고 인정도 못 받고 그냥 하라는대로 해주며 퍼 줍니다. 허나 뭐라해도 난민은 난민. 도와줘야 겠지요. 그런데 아프칸 국민들 만만치 않을겁니다.조화를 이루며 살기 무척 힘든 민족입니다. 어쨋든 잘 되길 바랍니다.
고독사가 아니라 고독살인이다
지난 18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파이낸스센터빌딩 앞. 점심시간을 맞은 직장인들이 바쁘게 걸음을 옮기는 와중에 길 한켠에 작은 분향소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분향소에는 검은 실루엣 그림을 넣은 영정 두개와 국화 몇 송이뿐이었다. 한참을 지켜봤지만 발걸음을 멈추는 사람은 없었다.
빈곤사회연대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등으로 구성된 공동장례위원회는 전날 ‘장애인과 가난한 이들의 합동 사회장’을 하면서 이곳에 분향소를 차렸다. 합동 사회장이 열렸을 때만 해도 시민단체 관계자와 언론이 몰려 북적거렸지만 불과 하루 만에 분향소는 아무도 찾지 않는 외딴 섬이 됐다. 가난과 장애로 힘든 삶을 버티다 외롭게 죽어간 이들을 추모하는 공간인데, 이 공간마저도 쓸쓸하고 외롭게 버려진 것만 같았다.
분향소 풍경은 고독사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식을 보여주는 작은 무대였다. 고독사한 누군가의 사연이 알려지면 추모 열기가 달아오르지만 정작 바뀌는 건 없다. 하루이틀 반짝 관심을 가지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외면한다. 취업을 하지 못한 청년, 코로나에 무더위 쉼터를 뺏긴 쪽방촌 노인, 악취 민원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죽음조차 알려지지 않는 가난한 이들은 여전한데 말이다.
조선비즈는 지난달 청년 고독사 문제를 짚었다. 고독사한 서른한 살 청년의 원룸에선 이력서 150장이 나왔다. 우리 사회가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지켜봤으면 살릴 수 있는 목숨이었다. 이 청년의 사연이 알려진 뒤 대선 후보까지 청년 고독사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달라진 건 없다. 말의 성찬뿐이었다. 고독사예방법이 올해 4월 시행됐지만 가난한 이들의 죽음은 그대로다. 코로나 사태 이후 더 많은 사람이, 더 젊은 사람이 죽고 있다. 그런데도 정부는 실태조사를 한 뒤에 그 결과를 바탕으로 고독사 예방 기본계획을 세우겠다고 한다. 실태조사 결과는 내년에 나온다. 기본계획이 나오는데는 또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까. 정해진 매뉴얼대로 차근차근 일하는 게 공무원의 방식인가. 절망과 좌절, 무더위와 배고픔 속에 조금씩 죽음에 가까워지는 이들에게는 매뉴얼을 기다릴 시간이 없다.
고독사 현장을 청소하는 특수청소업체는 올해 들어 실적이 급성장하고 있다고 한다. 실적이 좋아지면 반가워할 일이지만 이들 업체 관계자들은 웃을 수 없다. 그들이 바빠질수록 사회에서 외면당한 이들의 죽음이 많아지고 있다는 뜻이다.
분향소를 차린 장례위는 “살아서는 짐 취급하다가 죽음만을 애도하는 사회라면 그 추모는 기만”이라고 했다. 슬퍼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지금 당장 우리 사회가 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1년씩 걸려서 실태조사까지 할 필요도 없다. 거리에서, 원룸에서, 쪽방촌에서 누군가의 연락을 기다리는 이들을 찾기만 하면 된다.
그들의 죽음을 고독사로 부르는 건 공평하지 않다. 우리 사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기에 누군가가 죽음으로 내몰린 것이다. 고독사가 아니라 고독살인이다. 피고인은 우리 사회다./ 이종현 기자 조선 2021.08.23.
펜트하우스
2022년 12월 완공을 목표로 서울 청담동에 건축 중인 ‘에페르노 청담’ 컨셉트 이미지. 최상층 슈퍼 펜트하우스 분양가격은 300억원에 이른다. 에페르노 청담 홈페이지 캡처
국내 아파트 거래가격이 100억원을 넘어섰다.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공개시스템을 보면 올해 들어 전국에서 가장 비싸게 팔린 아파트는 지난 3월 거래된 서울 청담동 ‘PH129(더펜트하우스 청담)’ 전용면적 273㎡형으로 115억원이었다. 2014년 65억6500만원을 시작으로 지난해 77억5000만원까지 7년 연속 전국 아파트 매매가격 최고를 기록했던 서울 한남동 ‘한남더힐(전용 243㎡형)’은 4위권으로 밀려났다. 더펜트하우스 청담 273㎡형의 2017년 분양가는 80억원대 중반에서 130억원대 초반이었다. 분양가 200억원으로 알려진 최상층 407㎡형 펜트하우스 2가구는 올해 공시가격이 163억2000만원으로 국내 아파트 중 최고가였다.
고층 건물 꼭대기층에 위치한 펜트하우스는 웬만한 자산가는 넘보기 힘든 고가 주거지다. 단독에 비해 관리하기 편하고 사생활도 철저히 보호된다는 장점이 있다. 그 덕분에 빌딩 한 채에 맞먹는 초고가임에도 유명 연예인과 스포츠 선수, 고소득 개인사업자 등이 찾는다.
한국 부자의 자산 구성은 보통 부동산이 전체의 절반을 약간 웃돈다. 100억원짜리 주택에 산다면 금융자산도 그만큼 될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KB금융경영연구소의 ‘한국 부자보고서’를 보면 금융자산이 100억원 이상인 부자는 3만명을 웃돈다. 현재 매매가격이 100억원 이상인 아파트는 더펜트하우스 29가구와 한남동 ‘파르크한남’ 17가구 등 46가구뿐이다. 자금력을 갖춘 유효수요가 훨씬 큰 셈이다.
서울 중소형(전용 60㎡ 초과 85㎡ 이하) 아파트 평균 매매가격이 지난 6월 10억원을 넘어섰다고 언론이 요란하게 보도했다. 국토부의 주거실태조사에서 무주택 세대주가 처음 집을 마련하기까지 걸리는 기간이 7.7년으로 늘었다는 결과도 비중 있게 전했다. 언론이 전한 사실은 보통사람의 삶과 관련된 것이고, 펜트하우스는 그와 동떨어진 드라마 같은 이야기일 수 있다. 내년에는 더펜트하우스 청담 가격을 뛰어넘는 아파트가 나온다. 그 인근에 짓는 ‘에테르노 청담’ 최상층 슈퍼 펜트하우스 469㎡형 가격이 300억원이라고 한다. 평범한 젊은이는 펜트하우스에서 살 꿈조차 꿀 수 없는 세상이 돼 가고 있다./안호기 논설위원 경향 2021.08.23
언론권력 옹위도 ‘가짜뉴스’로 하나
2008년인가, 기자 출신 언론학과 교수들이 고려대에서 세미나를 한 적이 있는데, 나는 세계 일류 언론과 한국 언론을 비교하는 기조강연을 했다. 수많은 슬라이드와 수집한 신문을 보여주며, 국내외 신문·방송을 모니터링하느라 하루 대여섯 시간은 보낸다고 했더니 한 교수가 질문했다. “선생님은 언제 공부해요?” “전 수십년간 이걸로 개인 DB 만들어 칼럼 쓰고 학생들 가르치고 취미생활도 하는데요.” 그 교수에게 신문·방송 보는 건 공부가 아니었다. 저널리즘을 가르치는 교수 중에도 국내외 언론을 자세히 모니터링하는 이는 아주 적은 듯하다. 문학 전공 교수가 텍스트인 소설과 시를 보지 않는 격이다.
대학의 저널리즘 교육과 초·중·고의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이 겉돌거나 ‘역교육’을 하는 현실은 교수와 교사가 미디어를 열심히 보지 않은 데서 비롯한다. 미디어 비평을 제대로 하는 이가 드문 이유도 같다. 선진국 언론에는 성행하는데 우리 언론에는 없다시피 한 게 미디어 자체 비평과 상호 비평이다. 족벌신문이 수구화하고 스스로 권력이 된 이유도 자기 성찰과 외부 비판이 없는 무풍지대에 오래 있었기 때문이다.
언론개혁 논의 과정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언론 상황을 꾸준히 성찰해온 전문기자는 극소수이고, 다른 기사를 검증하지 않은 채 베끼거나 비난을 일삼는 기사와 주장이 난무한다. 언론중재법 개정안 추진 의원이나 메신저를 비난하는 기사도 쏟아지는데 논리가 달릴 때 쓰는 수법이다. 보수신문은 ‘언론재갈법 5적’ ‘언론징벌법 5인방’ 등으로 낙인찍는 기사들을 대서특필했다.
한국일보 한 논설위원은 “민주당이 키우는 ‘언론 혐오’ 독버섯”이란 칼럼에서 나를 겨냥해 ‘친여 교수’ 낙인을 찍었다. 언론 혐오를 민주당이 키웠다는 주장에 동의할 국민이 얼마나 될까? 국민은 ‘언론 혐오’를 언론 스스로 키웠다고 본다. 여당이 징벌적 손배제를 추진하기 훨씬 전인 세월호 참사 때 ‘기레기’란 멸칭을 얻었고, 신뢰도는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가 조사를 시작한 박근혜 정권 이래 5년간 부동의 꼴찌였다.
페이스북 등에서는 언론노조 위원장 등이 틀린 내용을 담아 심한 인신공격을 했지만 지면으로 반박할 가치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법안이 후퇴해 징벌효과마저 미약해진 상황에서 현업단체장들의 원점 재검토 주장이 회원들 뜻을 온전히 대변한 건지 묻고 싶다. 미디어오늘은 기자들이 예상 외로 징벌적 손배제에 동의하는 여론이 높다고 보도했는데, ‘동의하지 않는다’ 50.1%, ‘동의한다’ 34.4%였다. 반대 여론의 다수는 보수·수구 성향이 대부분인 전국종합일간지와 종편보도채널에서 나왔다.
상당수 기자들이 ‘중과실 주의 의무’를 지켜야 하는데도 징벌적 손배제에 동의한 것은 ‘존중받고 싶은 희망’으로 해석하고 싶다. 2017년 언론인 의식조사에 따르면 기자의 85.9%는 가짜뉴스가 심각하다고 느꼈다. 그때부터 현업단체들이 보도 행태를 자성하고 국민 피해 구제에 앞장섰더라면 국민의 신뢰는 진작 회복했을 터이다.
보수신문이 1면 머리 등으로 징벌제 반대에 ‘해외 언론도 나섰다’며 여론몰이를 했지만 성명서를 낸 단체들의 성격을 살펴봐야 한다. 세계신문협회는 한국신문협회가 가입한 사주·발행인 단체이고 중앙일보 홍석현씨가 회장을 맡은 바 있으며 한국신문협회는 언론단체들과 함께 프레스센터에 있다. 국제기자연맹에도 한국기자협회와 언론노조가 가입해 있다. 국제 언론단체는 한국에 오래 머물면서 한국 언론을 신랄하게 비판한 기자들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낙인찍기와 왜곡이 동원되는 여론몰이는 보수정당과 화답하면서 계속 증폭된다. 윤석열 예비후보는 지난 22일 “진영을 가리지 않고 국내 언론계와 학계 등이 반대하고 있다”며 견강부회한 뒤 “언론재갈법을 통과시키려는 진짜 목적은 정권 말기 권력 비판 보도를 틀어막아 집권 연장을 꾀하려는 데 있다”고 말했다. 이 법은 대선 이후에나 적용되니 가짜뉴스에 근거한 발언이다.
가짜뉴스를 줄이고 국민의 피해 구제를 확대하자는 법안마저 ‘가짜뉴스’를 이용해 저지하려는 게 우리 언론과 정치의 현실이다. 언론학자, 보수 언론인, 언론단체, 국제 언론단체, 수구 정치인을 ‘언론 피해 구제 방해 5적’이라고 부르지는 않겠다. 옥석이 섞여 있는 데다 낙인찍는 건 피하고 싶어서.
이봉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교수 경향 : 2021.08.24.
동의하지 않지만 반대할 수 없다
권력자는 굳이 탄압이나 통제 욕구를 세련되지 않게 드러내지 않아도 됐다. 미간만 조금 찌푸려도 주변에서는 알아서 기었다. 능력 있는 심복은 그럴 때 더욱 돋보였을 테다. 보도를 지시하고 검열하며 통제하는 것은 국가정보기관 주요 업무였다. 제도 따위가 필요했을 리 없다. 아주 오래전 이야기다.
촛대뼈? 쪼인트? 어쨌든 일 처리가 시원찮았던 지상파 방송사 사장이 청와대에 불려가서 까였다는 부위인데, 정강이 근처쯤 되겠다. 별 관련 없겠지만 우연히도 그 방송에서 시사 프로그램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우연에 우연이 또 겹쳤겠지만 이른바 '개념 발언' 유명인도 지상파에서 점차 보기 어려워진다. 한 대 까버리면 그만이지 귀찮게 제도 따위가 필요했을 리 없다. 조금 오래된 이야기다.
이미 고인이 된 청와대 민정수석은 비망록에 함께 일한 비서실장이 내린 엄중한 지시를 기록해뒀다. 아주 인상적이다.
"비판 언론에 상응하는 불이익을 주라."
2014년 국무총리 후보자가 잇따라 낙마한 게 불쾌했던 비서실장은 시건방진 언론부터 흘겨봤다. 국무총리 인사를 비판한 언론을 겨냥해 언론중재위 제소, 고소·고발, 손해배상청구 등 철저한 대응을 주문했다고 한다. 밟아버릴 방법이 허다한데 시끄럽게 제도 따위가 필요했을 리 없다. 꽤 지나기는 했지만 그렇게 오래된 이야기도 아니다. 그래서 이 권력과 궤를 같이하는 정당이 최근 '언론자유'를 부르짖는 것은 느닷없고 뜬금없다. 오롯이 저널리즘을 위한 게 아닐 테니 그렇게 심각한 표정으로 구호를 외치지 않아도 괜찮다.
더불어민주당이 '언론중재법'을 거세게 밀어붙이고 있다. 법안 추진 배경은 이해하지만 규제로 저널리즘 공공성을 성취한 사례는 안타깝게도 없다. 규제로 따지면 지난해 방송 자격을 잃었어야 할 한 종합편성채널은 여전히 활개치고 있다.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규제 적용이 언론판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섣부른 규제는 미약한 저널리즘을 규제 안에서 끙끙거리게 할 것이다. 반면 포악한 매체는 규제 밖에서 으르렁거리며 이를 드러낼 것이다. 그래서 선의를 앞세운 규제에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하지만 비극은 동의하지 않는 규제를 반대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과거 권력이 규제 없이 저질렀던 패악질 앞에서도 언론은 외롭지 않았다. 최근 10년만 훑어봐도 언론계가 자랑하는 의미 있는 투쟁 곁에는 늘 시민이 서 있었다. 시민은 권력이 언로를 막으려 할 때마다 어떻게든 기발하게 맞섰다. 저널리즘에 충실한 매체와 기자에게 선뜻 어깨를 빌려주곤 했다. 지금 당장 문제는 저널리스트와 저널리즘이 외롭다는 데 있다. 시민은 지금 규제가 저널리즘을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을 언론 스스로 증명하라고 요구한다. 어느 정도 손해와 위험도 기꺼이 감수하면서 구호 말고 보도로 말이다.
이승환 뉴미디어부장 (hwan@idomin.com) 경남도민 2021. 08. 26
생태인지 감수성
나는 젊은 시절 연못 낚시터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다. 어떤 어린이가 큰 잉어를 들고 와서 바늘을 빼달라고 했다. 그런데 낚싯바늘이 잉어의 입이 아니라 눈가에 꽂혀 있었다. 낚싯대를 이리저리 휘두르다가 잉어 눈에 바늘이 꽂힌 모양이었다. 물고기라 해도 눈 가장자리에 바늘이 꽂힌 모습은 보기에 너무 측은하여 빨리 바늘을 빼주려 했으나 잘 빠지지 않았다. 잠시 낑낑댄 끝에 겨우 바늘을 뽑아주었다. 그런데 그때 잉어가 고통스러워하며 ‘끼륵’ 하는 신음 소리를 내었다. 나는 생전 처음 물고기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물고기가 얼마나 아프면 소리까지 내어 울까 하고 놀랐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후로는 누가 낚시를 가자고 권해도 간 적이 없고 앞으로도 갈 마음이 없다.
역사와 더불어 인간의 감수성은 상당한 변화를 겪어왔다. 고대인들은 전쟁에서 포로로 잡힌 이들을 노예로 삼아 강제노역을 시키고 쓸모가 없어지면 시장에 내다 팔아도 되는 재산 목록으로 알았다. 시대가 흐르면서 사람들은 노예들의 고통과 슬픔을 인지하고 노예도 같은 인간임을 깨달으면서 노예제도를 폐기하였다. 그래도 피부색이 다르고 생김새가 다른 종족은 여전히 열등한 종으로 간주하고 노예 취급을 계속했다. 현대에 이르러서야 세계인들은 어떤 종류의 인종차별도 인간으로서는 용납되지 않는 비인간적인 소행임을 공감하게 되었다. 최근에는 다른 종족에 대한 차별만이 아니라, 같은 종족 안에서도 여성·성소수자들에 대한 차별, 사회계층 간의 다양한 차별이 모두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적폐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그만큼 인류의 의식이 진화하고 성숙했다는 표지다. 그러나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에 대해서는 우리 의식은 아직 대단히 닫혀 있다.
최근 정부가 마련한 민법 개정안에서는 ‘동물은 물건이 아니다’라고 규정되었다고 한다. 기존의 동물보호법에서는 ‘개’, ‘고양이’, ‘토끼’, ‘기니피그’, ‘햄스터’, ‘패럿’ 여섯 종류에 한해서만 고통을 가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민법 개정안은 동물의 종류에 제한을 두지 않고 모든 동물이 생명체로서의 법적인 권리를 누리는 존재로 격상된 것이다. 우리에게 인간 아닌 다른 존재의 고통과 의식을 감지하는 인지능력과 다른 존재와의 소통 능력이 개발된 것이니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의 다른 생명체에 대한 인지력과 소통 능력은 겨우 첫걸음을 뗀 정도다. 우리는 그동안 만물의 영장이라는 오만한 자의식으로 자연생태계 전체를 인간이 개발해주기를 기다리는 물건들의 창고로 간주하며, 마음대로 파헤치고 꺼내 쓰고 폐기해도 되는 줄로 인식하고 다루어왔다. 그 결과 모든 생명체의 보금자리인 지구가 비명을 지르고 신음하는 기후위기를 맞게 되었다. 빙하가 녹아내리고, 바다가 오염되고, 생명의 원천인 물과 산소를 공급해주는 원시림이 불타오르고 사막화가 급속도로 진행되어 많은 인간이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 난민이 되고 많은 종의 동식물이 멸종되고 있다.
어린 시절 나는 언덕길에서 무거운 수레를 끌고 올라가는 소들을 볼 때마다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송아지가 어느 정도 자라면 코에 구멍을 내고 고삐를 끼운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아플까 하고 마음이 아렸다. 시골에서 소를 키워본 이가 하는 말을 들었다. 소도 들판에서 풀을 실컷 뜯어 먹고 돌아오는 길에 냇가에서 물을 가득 마시면 배가 빵빵해지고 아주 기분이 좋아져서 흥얼흥얼 노래를 한단다. 여러 해 키운 소는 가족 같아서 장에 팔려갈 때 소도 주인도 눈물을 흘리고, 도살장에 끌려갈 때도 눈물을 흘린다고 한다. 소, 양, 염소, 돼지 같은 가축은 고대사회에서 신에게 바치는 제물이었다. 고대인들이 가축을 도축하는 첫째 목적은 신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함이었다. 제물로 바쳐진 고기를 먹는 것은 고기를 먹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제사에 참여한 이들이 신의 축복에 동참하기 위함이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의 주식은 본디 곡식에서 만든 ‘밥’이나 ‘빵’이다. 성서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친 유일한 기도문 중간에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며 청원하는 표현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양식’이라고 번역하여 기도하고 있지만, 원문은 ‘빵’이다. 소나 말 같은 가축은 곡식농사를 짓기 위한 노동의 조력자이지 인간의 먹잇감이 아니었다. 그런데 인류는 고기맛을 알기 시작하면서 차츰 가축을 노동의 조력자가 아닌 먹잇감으로 키우기 시작했다.
오늘날 인간은 가축들을 옴짝달싹 못하는 좁은 우리에 가두어 집단으로 사육하고, 유전자까지 변형하여 입에 맞는 살코기를 최단시간에 최대한 생산한다. 2020년 한 해 동안 수입육을 제외하고 우리나라에서만 도축된 소가 88만7천두, 돼지가 1832만두, 닭이 10억7천만마리, 오리가 6600만마리에 달한다. 1980년대 초에 비해 지금 우리 국민 1인당 육류 소비량이 5배 이상 증가했다. 어린 시절 우리나라는 어딜 가나 맑은 시냇물이 흘러 즐겨 물놀이하고 송사리와 가재를 찾으며 놀았다. 이제는 어딜 가나 가축들이 쏟아내는 오물로 산과 강이 다 오염되어 발 담글 생각도 안 든다. 가축들의 탄소배출이 온실가스의 절반을 차지한다. 우리의 욕심이 지구 생태계를 벼랑 끝으로 몰아가고 있다.
인류는 같은 인간들과의 관계에서는 소통과 공감 능력을 꾸준히 계발해왔다. 피부색과 종족과 성적 다양성과 모든 사회적 계층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존중과 연대를 확대해왔다. 이에 비하여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체에 대한 우리의 인지감수성은 아직 너무나 미성숙 단계에 있다. 모든 생명체가 영양분을 공급받고 수명이 다하면 되돌아가야 하는 대지는 50억년의 세월을 두고 뜸을 들여 창조된 최고의 걸작이다. 우주 태초의 대폭발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137억년이란 까마득한 세월이 있었다고 한다. 그 아득한 영겁의 세월이 걸려서 아주 서서히 빚어지고 숙성된 땅덩어리는 온갖 생명체뿐 아니라 헤아릴 수 없는 무생물들, 생명체들에게 영양분을 공급해준 무기물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고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이 거대한 생명체의 생애에 비하면 우리 인간은 마치 찰나와 같은 짧은 순간에 출현하고 셋방살이하는 티끌 같은 존재다. 이 티끌 같은 존재가 오만방자한 폭력을 행사하여 우리를 낳고 키워준 어머니 같은 지구의 온몸에 시퍼런 멍이 들게 하였다. 우리는 이제 자신의 분수를 알고 인간 아닌 다른 존재들, 생명체들만이 아니라 비생명체들에 대해서도 각 존재의 고유한 역할과 가치를 인지하고 존중할 줄 아는 생태인지 감수성을 키워나가야 한다. 이것이 우주와 함께 사는 길이다.
강우일 베드로 주교 한겨레 :2021-08-27
그리움이라는 능력
코로나 때문에 지인들과의 만남이 격감했다. 코로나 확진이 비교적 적은 제주에 살다 보니 비행기 타고 섬 밖으로 나가는 일이 망설여진다. 은퇴 후에 전에는 일 때문에 만나던 사람들도 만날 일이 많이 줄었다. 일로 만나던 사람들은 굳이 그립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데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어 만났던 사람들을 오래 못 보니 얼굴들이 아른거리며 그리움이 솟아오른다.
나는 성격이 본래 활달하거나 적극적이지 못한데다 34년이나 되는 세월 동안 교회의 주교직에 몸담고 살다 보니 나 자신도 조심스럽고 상대방도 부담을 느껴, 개인적인 친분을 쌓는 인간관계를 많이 만들지 못했다. 그래도 여러 가지 인연으로 몇십년 전부터 알고 지내며 정을 나누던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보고 싶고 그립다. 얼굴도 보고 싶고, 아프진 않은지, 별일 없는지 물어보고 싶고 쌓인 이야기 나누고 밥도 같이 먹고 싶다. 그런데 누구보다도 제일 그리운 것은 미국에 이민 가신 아흔도 훌쩍 넘기신 어머니와 형제들이다. 바빠도 해마다 한번은 시간을 내서 가뵈었는데, 작년에는 코로나 때문에 꼼짝을 할 수 없어 출국을 못 한 지 2년이 다 되었다. 코로나가 어느 정도 진정되거나, 적어도 백신을 맞은 다음이 아니면 가지 않는 것이 도리인 것 같아 자제해왔다. 최근에는 내 마음속에서 ‘그리움’의 꽃망울이 자꾸 몽글몽글 솟아오른다. 그런데 이 그리움의 에너지는 오히려 영혼 내면의 혈액순환을 촉진해주고 물리적 거리, 사회적 거리를 뛰어넘어 내 혼이 혈육에게 달려가게 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요즘 내 안에서 도대체 ‘그리움’이란 뭘까 하는 물음이 자꾸 떠오른다. 우리가 그리워하는 대상은 여러 가지가 있다. 어린 시절 살던 고향이 그립다, 옛날 포장마차에서 먹은 멍게, 해삼이 그립다고도 한다. 그러나 물건이나 장소가 대상인 경우는 마음속에서 작동하는 그리움의 에너지가 그리 간절하지 않다. 그리움이 불쑥불쑥 솟구치는 대상은 아무래도 사람이다. 그것도 그냥 스쳐 지나간 사람이 아니라 오랜 세월 정분을 나눈 사람, 내게 은혜를 베푼 사람, 사랑한 사람을 향한 그리움의 에너지가 훨씬 강력하다. 우리말 그리워하다는 말을 한자에서 찾으면 연(戀)이라는 글자로 그리워할 연이다. 일본어에도 그리워하다는 말을 ‘고이시이’라고 하는데 ‘고이(戀)=사랑’이라는 명사에 ‘시이’라는 어미를 붙여서 형용사화한 것이다. 즉, 그립다는 말의 뿌리에는 ‘사랑’이 자리 잡고 있다. 인간에게 그리움의 능력이 있음은 대단한 긍정적인 에너지다. 그리워함은 사랑하는 존재를 향해 나아가는 영혼의 에너지다. 시련과 도전에 시달려 좌절하고 의기소침해 있다가도 사랑하는 이에 대한 그리움의 에너지가 작동하면 포기하지 않고 원기를 회복할 기력이 생긴다. 임종을 맞아 체력이 다하고 생의 마지막 숨을 몰아쉬던 병자도 그리운 혈육이 돌아와 이름을 부르면 감고 있던 눈을 뜨고 마지막 사랑의 시선을 보낸다.
최근에 청소년들의 고충을 상담하는 한 수녀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그리움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움의 긍정적인 에너지가 사람에게 활기를 주고 다시 일으켜 세워준다는 내 이야기를 들은 수녀님은 자신에게 상담하러 오는 청소년들에겐 그리워할 대상이 아무도 없는 것 같다고 했다. 요즘 자신에게 상담하러 오는 중고생들 중에는 아무리 용기와 활력을 불어넣어 주려고 해도 영혼이 철벽처럼 닫힌 아이들이 있다고 한다. 이들은 이미 몇번씩 자살을 시도해본 아이들이라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 결손가정의 자녀로 살아오면서 어릴 때부터 부모에게 사랑과 관심을 받아본 기억이 없고 그리워할 대상이 없는 아이들이라고 했다. 아직 몸과 마음 모두 연약하고 힘없는 아이들에게 학교나 사회 모두 치열한 경쟁과 싸움만을 강요하니, 부모의 따뜻한 사랑을 한번도 제대로 맛보지 못한 이들은 자존감도 자신감도 상실하여 세상을 살아갈 의욕과 의지가 없고, 쉽게 자해하거나 삶을 포기해버린다. 최근 일본에서는 고독담당 장관이 임명되었다고 한다. 코로나 사태로 인한 고독과 고립현상의 배가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젊은이들이 급증한 데 대한 대응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2020년 코로나로 인해 문을 닫거나 직원을 해고하는 중소, 영세 업체가 급증하자 임시직, 일용직, 비정규직 종사자들이 제일 먼저 타격을 입었다. 사회의 가장 약한 고리가 먼저 부서져 나가면서 청년 여성들의 자살시도가 급증하였다. 상담기관에 걸려온 상담건수가 폭증하고, 상담내용도 과거에는 청년들이 문제해결을 위한 정보를 얻으려 하거나, 그냥 답답한 마음 상태를 털어놓는 정도였는데, 코로나 이후에는 “죽고 싶다” “삶의 의지가 없다” 등의 극단적인 표현이 굉장히 늘어났다고 한다.
이 시대의 젊은 세대 중에는 자라면서 그리움의 대상을 별로 만나지 못한 이들이 많은 것 같다. 아파트 같은 콘크리트 공동주택에서 자라다 보니 눈을 감으면 아련히 떠오르는 그리운 마을 뒷동산이나 친구들과 함께 뛰어놀던 동네 공터가 없다. 학창시절은 어려서부터 대학 입시라는 골라인을 향해 옆에 선 주자를 제치고 한걸음이라도 앞서야 하는 경쟁의 나날이니, 그리운 친구도 별로 없다. 아버지는 일찍 나가서 늦게 귀가하니 얼굴을 제대로 보거나 말을 섞은 기억도 별로 없고, 어머니도 맞벌이하면 크게 다르지 않다. 부모가 이혼하면 가정은 황량한 벌판과 같아 그리움의 샘이 바닥부터 말라버렸다. 그리움의 결핍은 아이들이 안고 있는 가장 큰 결격이요 공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그리움이란 영혼의 능력과 에너지가 있다. 나는 해마다 모국을 방문하는 해외입양인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부모로부터 버림받고, 세계 여러 나라에서 얼굴 생김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말도 다른 이들에게 입양된 이들이다. 이들은 성인이 된 후에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으며 자신의 뿌리를 찾으려고 모국을 방문한다. 이들은 우리말을 모르고 통역을 통해서만 의사소통이 된다. 그래도 이들은 자신이 태어난 곳이 어떤 곳인지 알고 싶고 자신을 낳은 부모와 친지가 그리워 찾고 만나고 싶어 한다. 처음엔 부모는 만나고 싶지 않다는 젊은이들도 있다. 그러나 정작 친부모를 만나게 되면 영혼의 밑바닥에 꼭꼭 숨겨두었던 그리움이 폭포처럼 쏟아져 눈물바다를 이룬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그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그리움의 원천이 있다. 현대의 물질문명은 사람들의 이러한 그리움의 능력을 잠재우고 그 에너지를 질식시켜왔다. 오늘의 젊은 세대가 그리움의 에너지를 회복하도록 돕고 싶지만 어떻게 도와야 할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들 안에 그런 그리움의 능력을 심어주신 분이 계시니 그분께서 그들을 도와주시기를 기도하는 마음이다. /강우일 베드로 주교 한겨레 :2021-03-11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
그들의 애국심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른다는 최재형 전 감사원장 가족들의 국민의례 모습을 담은 사진을 본 감상이다. 하지만 불편했다. 좀 더 솔직해지자면, 섬뜩했다. 국가주의 때문이다. 건국 후 전쟁과 산업화를 거치면서 국가주의는 우리 사회의 모든 영역을 뒤덮었다. 유신체제에선 폭압으로 흘렀다. 영화 <국제시장>의 한 장면처럼 애국가가 길 가던 시민들을 부동자세로 묶게 된 것도 그 국가주의의 외설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셈인지 그 후 최 전 원장의 발언은 반대 방향으로 갔다. “국민의 삶을 국민이 책임져야지 왜 정부가 책임집니까?” 기이하기 짝이 없다. 그는 국민의 삶에 책임지지 않는 정부의 수장이 되려고 대권 주자에 나선 것인가. 논란이 일자 그는 “정부가 모든 국민의 삶을 책임진다는 건 전체주의로 가겠다는 것”이라며 맞섰다. 이번엔 엉뚱하다.
헌법에 관한 최 전 원장의 인식도 야릇하다. 헌법가치를 가장 잘 지킨 대통령이 누구냐는 질문에 그가 답으로 내놓은 이는 이승만이었다. 초대 대통령으로서 쌓은 공적은 인정해야 하지만, 부정선거 책임으로 임기 중에 하야한 인물이 헌법가치를 가장 잘 지킨 것은 아닐 게다. 기자의 물음에 “준비되지 않았다”고 자주 답하더니, 노동문제엔 자신이 있었는지 “청년들의 일자리를 뺏는 최저임금 인상은 범죄와 다름없다”는 말도 했다. 이 발언 역시 정치적 언사임을 감안하더라도 노동문제에 대한 그의 인식이 근본적으로 잘못 잡혀 있다는 느낌을 준다. 현행 헌법이 이미 30여년 전에 최저임금제 시행을 국가의 책무로 규정하였던 것을 그는 몰랐을까. 몰랐으면 딱한 일이고 알고도 그랬다면 위험하다.
노동문제라면 주 120시간 노동을 운위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인식도 별반 다르지 않다. 게다가 재난지원금을 놓고 “세금 걷어서 일반적으로 나눠줄 거면 세금을 안 걷는 게 제일 좋지요”라고 한 말은 어떤가. 부동산보유세에 대해 “생필품을 갖고 있다고 세금을 때리면, 이 조세가 정의에 부합하고 공정하다고 생각하느냐”라는 발언까지 합쳐 볼 때, 혹시 그는 조세제도와 재정정책의 기본적 얼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본디 세금이란 걷어서 나눠 주는 것이다. 문제는 누구에게서 얼마나 걷고 어디에 얼마를 쓰는지다. ‘건강한’ 페미니즘의 필요성을 말하거나 저출생 문제의 원인 중 하나로 페미니즘의 정치적 악용을 지목한 그는, 그런 인식의 출처를 “얼마 전에 무슨 글을 봤다”라고 밝혔다. “농업이 경자유전이란, 시대에 뒤떨어진 사고에 갇혀 있다”고 한 것은 또 누구의 무슨 주장을 듣고 한 발언이었을까. 심지어 어떤 이슈는 기본적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서 “방사능 유출은 기본적으로 안 됐다”라고 한 게 그 예다. 실언 이후 논란이 일면 그때마다 해당 발언이 본의와 다르다는 식으로 변명하지만, 과연 그의 본의는 무엇일까.
대통령 노릇을 해보겠다면, 시대정신에 기반을 둔 미래에 대한 비전과 통합이라는 기술로서의 정치력을 갖추어야 한다. 법률가 출신이 비전을 말하지 말라는 법은 없겠지만 이들의 사고체계는 우선 미래지향적이지 않다. 더 큰 문제는 두 사람이 특정 분야를 넘어, 경제·사회·외교 등 국정의 여러 면에 접할 기회를 가지지 못했고 또 정치 현장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훈련을 쌓아본 일이 없다는 점이다. 시험 점수와 권력자의 낙점으로 그럴듯한 자리에 오르는 일과 사람들의 마음에 공감하며 통합의 리더십을 발휘하는 일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더욱이 나라의 앞날에 대한 비전은 어느 날 몇 권의 책을 읽고 몇 사람 전문가를 과외선생으로 모셔서 속성으로 갖출 수 있는 게 아니다. 비전은 암기가 아니라 상상력과 통찰력에서 나온다. 지금까지의 발언으로 보아 이젠 상투어처럼 들리는 “공정과 상식”이나, 어디선가 많이 들었던 “대한민국을 위하여 나를 던질 것” 따위의 말로 국정 철학을 대신할 수는 없다.
제왕학(帝王學)은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교육체계다. 그런데도 그것이 ‘학’이라는 꼬리를 달고 있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국정 최고책임자의 식견과 리더십이 막중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미담도 아니고 우스꽝스럽거나 감동 없는 홍보영상도 아니다. 겸손으로 포장한 무지나 겸손하지조차 않은 무지도 물론 아니다. 정권 교체를 진정으로 바라는가? 그렇다면 문재인 정부에 대한 비난만 뇌지 말고, 이 나라의 미래를 어떻게 꾸려갈지 국정 의제와 그에 대한 철학을 제시해 보라.
정인진 변호사·법무법인 바른 경향 : 2021.08.30
일본인 제자 이야기
저녁 먹고 유튜브를 보다가 우연히 이바라기 조선학교 여학생 합창단의 노래를 들었다. 제목은 <저고리>. 화면 중간중간에 옛날 흑백 필름이 나온다. 8.15 일본 패망 직후 동포들이 조선학교를 개교하던 시기. 일본 정부의 폐교 압력과 경찰의 물리적 탄압을 뚫고 (온전히 자력으로 설립한) 학교를 지키기 위해 안타깝게 싸우는 장면들.
위는 흰 저고리 아래는 검은 한복 치마 입은 소녀들이 머리를 질끈 묶었다. 하나의 입으로 ‘우리 학교’에 대한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 티 없는 아이들의 표정 아래에는 그러나 모국을 떠나 떠도는 디아스포라의 슬픔이 어쩔 수없이 배어있다. 가슴 한 구석이 싸했다.
그러다 갑자기 몇 달 전 기억이 떠올랐다. 작년부터 우리 학과에 일본에서 여학생 2명이 유학을 왔다. 한 명은 아키다견(犬)으로 유명한 열도 북쪽의 아키다 현에서. 다른 한 명은 한반도와 마주보는 동해 연안의 도토리 현에서. 부모형제 떠나 먼 땅 기숙사에서 먹고 자며 공부하는 이 아이들이 안쓰러울 때가 많았다. 첫 학기 초에는 아직 외국인등록증이 나오지 않은 탓에 카드도 없고 휴대폰도 없는 아이들 대신해서 교재를 사주기도 했다. 그중 한 학생 A와 면담을 한 게다.
A는 한국어 등급이 (외국인이 시험에서 받을 수 있는) 최고등급인 6급이다. 발음이 약간 어색하다 싶을 뿐 거의 완벽한 우리말을 구사한다. 공부 마치고 돌아가면 한국어 가르치는 선생이 되고 싶어 한다. 연구실에서 이것저것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평소와 달리 얼굴이 밝지 않았다.
물어보니 그날 오전에 충격적인 일을 당했다는 게다. 휴게실 의자에 앉아 일본에 있는 친구와 문자를 주고받고 있었단다. 당연히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를 써서. 근데 옆 자리에서 그 모습 지켜보던 여학생 하나가 다짜고짜 입에 담을 수 없는 쌍욕을 퍼부었다는 게다. “일본년...”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A는 저항도 못하고 그저 당하기만 했단다.
아이가 울 것 같은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순간 마음이 아득해졌다. 말문이 막히며 내 낯이 붉어졌다. 그리고 뒤를 이어 속에서 뜨거운 무엇이 솟구쳤다. 분노였다.
“어떤 녀석인지 기억하니?”
“처음 보는 학생이었어요.”
고개를 숙인 A에게 애써 위로를 건넨다. 어느 나라에서건 짐승 같은 것들이 있다. 일본에도 한국인 차별하고 혐한 부르짖는 재특회(在特会)가 있지 않느냐. 한국에도 사람 그 자체가 아니라 그가 속한 인종, 나라, 민족, 언어의 껍데기만 보고 나쁜 말과 행동하는 부류가 있다. 무시하고 잊어버려라. 그리고 혹시라도 다음에 그 녀석 마주치거든 바로 내 연구실로 뛰어와서 누군지 알려 주거라.... 그렇게 건네는 내 말이 자꾸만 더듬거렸다.
아이가 나간 다음 소파에 한참이나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가슴속에 지펴진 불씨가 점점 커진다. 일본인 아니라 일본인 할아비라도 그렇지, 갓 스물 넘은 대학생이 제 나라에 공부하러 찾아온 외국 친구에게 이런 행동을 할 만큼 비뚤어져 있다니.
프란츠 파농과 에드워드 사이드 등이 본격화시킨 것이 인종적 타자화(他者化) 개념이다. 아비투스와 선동에 의해 이런 관념을 내재화시킨 동일자(the same)들은 자신의 열등감을 투사하고 문화적, 도덕적, 존재적 우월감을 높이기 위해 늘 타자(the other)에 대한 배제와 편견을 구축한다. 유럽인이 아랍인에게 그랬고, 백인이 흑인에게 그랬고, 식민지 시대 일본인이 조선인에게 그랬듯이.
요 몇 년 간 한일관계가 크게 악화된 것은 사실이다. 멀리는 역사교과서 왜곡에서 가까이는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둘러싼 충돌에 이르기까지 연이어 악재가 쌓이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대일관계가 악화되었다 해도 해당 국가체제와 실존으로서 인간은 분리되어야 한다. 이런 행동을 하고도 재일동포들이 일본에서 민족차별받는다고 분노할 자격이 있을까. 그 나라의 저질 극우세력을 욕하고 비판할 자격이 있을까.
학생처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전체 학생에게 특별교육을 시켜서라도 국적불문 외국인 학생 대상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요청을 했다. 서로 걱정을 나누었다. 보직자회의에서 사건을 알리고 대책을 만들겠다고 답을 했다. 그것이 사건의 자초지종이었다.
인종적 편견은 물론 계급배경, 심지어 지역균형선발 같은 입학경로에 따라 같은 학교 안에서조차 차별과 배제의 악행이 시도된다는 소문이 오래전부터 파다하다. 자기와 다른 것은 모두 틀리다고 확신하는 마음들. 최소한 상식과 인간애조차 짓밟는 극우의 광기가 대학으로 서서히 밀려오고 있는 것이다. 며칠 전 입국한 390명의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생각 안 날 수 없다. 지금은 환영 일색이지만 이 분위기가 언제까지 지속될까. 입국 조건은 다르다지만, 이들은 제주도에서 겪었던 예멘 출신 난민들의 고통을 완전히 비껴갈 수 있을까.
수업 들어갔을 때 맨 앞줄에 앉은 A의 표정이 여전히 어두웠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 얼굴이 몇 달을 지나 불현듯 눈앞에 떠오른 것이다. 조금 전 인터넷에서 마주친 조선학교 여학생들 모습 위로./ 김동규 동명대 교수 경기신문 2021.08.30
정의당이 민주노총을 때리는 이유
류호정이 ‘반노동-친자본’ 신문인 중앙일보를 통해 민주노총을 ‘저격’했다.
비정규직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다면서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일어나고 있는 정규직 조합원과 비정규직 조합원의 갈등을 수습하지 못하는 민주노총의 ‘꼰대’스러움을 비난했다. 류호정은 일개 당원이 아니라 당을 대표하는 의원이다. 류호정의 발언은 개인의 발언이 아니라 당의 발언이다.
노동조합운동의 지지를 받던 진보정당이 의석을 챙긴 후 칼날을 ‘조직노동(organised labour)’으로 돌린 일은 민주노동당 시절에도 있었다. 당의 정책 라인이 ‘대기업 정규직 노조’를 두고 한국 사회를 망가뜨리는 10대 세력의 하나로 낙인찍은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2004년 총선거에서 노동조합운동의 지원과 비례대표제도 덕분에 10석을 차지하자마자 민주노총을 포함한 조직노동을 공격하면서 자기 발판을 스스로 허물기 시작했다.
이후 당대표 선거에 나온 후보들은 너도나도 ‘비정규직의 당’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민주노동당은 민족해방파(NL) 세력의 주도로 당 강령에서 ‘사회주의’라는 말을 지우고 이를 ‘진보적 민주주의’로 갈아 치웠다. 2007년 대선 국면을 거치면서 당권 투쟁에서 승산이 없다고 느낀 민중민주파(PD) 세력의 주류는 민주노동당을 조직적으로 탈당해 진보신당을 만들었다. 진보신당 역시 스스로를 ‘비정규직의 당’으로 선언했지만 별 볼 일 없었다.
당의 일부 세력이 ‘조중동’을 자신들의 입지 강화에 활용하는 행위도 새로운 일은 아니다. 민주노동당 시절 중앙당의 당직자가 민감한 문제를 논의하는 당 공식기구의 회의 내용을 실시간으로 조선일보 기자에게 전화로 전달하기도 했다. 당권을 둘러싼 NL과 PD의 대립과 갈등으로 민주노동당이 내파(implosion)되던 때에는 당내 PD계열을 중심으로 ‘종북’이라는 프레임이 만들어졌다. 그중 일부는 민주노총을 대체하는 ‘제3노총’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것을 조선일보가 받아 정치적으로 증폭시켰다.
이렇듯 ‘진보’정당 관계자가 ‘조중동’을 이용할 수 있다는 자만심에 빠져 조직노동을 공격한 것은 류호정이 처음이 아니다. 민주노동당이 국회로 진입하면서 언론과의 접촉면이 넓어지던 시절부터 계속되던 일이다. 지난 일들을 돌아볼 때 류호정이 ‘조중동’을 “이용”하여 민주노총을 때린 것은 전혀 새롭거나 놀랄 만한 일이 아닌 것이다.
물론 민주노동당 시절과 비교할 때 다른 점도 있다. 당시 조직노동을 공격하는 데 앞장선 의원은 없었다. 이번에는 당의 의원이 ‘조중동’과 합작해 조직노동을 때렸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사회 경험과 운동 연륜, 무엇보다 의식 수준이 모자라다 보니 ‘조중동’이 활용하는 대상으로 쉽사리 전락한 것이다.
류호정이 민주노총을 때리는 이유, 다시 말해 정의당이 민주노총을 때리는 이유는 정의당이 자유주의 정당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권과 문재인 정권을 거치면서 진보와 좌파가 동일한 시대는 막을 내렸다. 두 정권을 거치면서 자유주의가 진보의 자리를 차지했다. 2016년 총선과 2020년 총선의 판도를 보면 정치 지형은 극우 40%, 자유민주 40%, 사회(민중)민주 10%, 부동층 10%로 나눠진다. 극우반공냉전 세력이 역사의 박물관으로 사라지지 않고 성공적으로 살아남아 보수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 결과, 진보의 자리는 당연히 자유민주주의 세력이 차지하게 됐다.
민주노동당으로 대표되던 사회(민중)민주 세력은 분당과 합당을 거치면서 강령에서 사회주의 색깔을 지우고 중도를 지향하는 국민정당(a national party)이 됐다. 이런 점에서 정의당을 ‘민주당 2중대’로 칭하는 것은 현실에 근거한 것이다. 자유주의적 국민정당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인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권 들어 노동자의 안전과 건강 문제에 관심을 보여 온 소설가 김훈은 “계약의 자유, 경쟁의 자유, 직업 선택의 자유, 보통선거, 대의민주주의 같은 자유의 푸른 깃발이 펄럭이고 약탈당하는 개인은 개별적 존재로 흩어져서 무력화된다”고 일갈한 바 있다. 지금까지 정의당이 보인 모습은 “자유의 푸른 깃발” 아래 안주하는 자유주의 정당에 다름 아니었다.
우리가 당면한 사회경제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정치적 틀을 깨야 한다. 한국 사회를 옥죄고 있는 권력구조는 낡은 자유(민주)주의에 기반한 것이다. 이 틀을 깨지 않고서는 “약탈당하는 개인이 개별적 존재로 흩어져서 무력화되는” 상황을 개선할 수 없다.
노무현 정권과 문재인 정권을 거치면서 자유는 진보와 동의어가 됐다. 진보는 더 이상 평등을 자신의 가치로 여기지 않는다. 자유주의가 진보인 세상이 되면서 평등주의(egalitarianism)는 ‘꼰대’의 넋두리로 치부되고 있다. 자유가 넘쳐나는 시대에 윤석열과 홍준표가 ‘기회의 평등’을 외치고, 이재명과 이낙연이 ‘기회의 평등’을 외치고, 정의당이 ‘기회의 평등’을 외친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결과의 평등’을 외치지 않는다. 당연히 ‘결과의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정치체제와 권력구조를 고민하는 정당은 대한민국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사정들을 종합할 때, 류호정의 민주노총 때리기는 자유주의 정당인 정의당 의원으로서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개인주의와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자유주의는 노동조합으로 대표되는 무식하고 가난한 자들의 집단주의(collectivism)를 늘 혐오해 왔다.
비정규직 문제를 조금이라도 개선하고 싶었다면 정의당의 류호정이 “중앙일보를 이용해” 때려야 할 대상은 민주노총이 아니라 중앙일보여야 했다. 여러 가지 부족함에도 비정규 노동자를 가장 많이 조직(집단화)하고 있는 게 민주노총 산하의 ‘꼰대’ 노동조합들이다. 자유주의적 차별 담론인 ‘청년팔이’를 통해 평등주의 담론을 공격해 온 중앙일보야말로 비정규직 착취 체제를 일관되게 옹호해 온 독점자본의 나팔수에 다름 아니다. 이걸 때려야 했다.
윤효원 아시아노사관계(AIR) 컨설턴트 매일노동뉴스 2021.08.30
오래된 미래, 간호사 처우개선
보건의료노조 8만 조합원이 90%의 압도적 찬성으로 총파업을 결의하자 핵심 요구인 ‘공공의료·인력 확충과 간호사 처우개선’이라는 핵심 요구가 주목을 받고 있다.
사실 인력충원과 간호사 처우개선은 지난해 ‘덕분에 캠페인’ 이후 문재인 대통령이 이미 수차례 약속했고 최근 보건의료노조가 여야 대표를 면담하는 과정에서도, 25일 국회 보건복지원회 특별결의문에서도 빠지지 않으면서 최우선 해결과제로 부상했다. 그런데 과연 정부와 국회는 간호사들의 ‘처우’가 어떤지, ‘개선’ 내용의 핵심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코로나19가 이어진 1년8개월의 이면에는 치매환자와 화투를 치는 간호사 미담도 있지만 장시간 근무로 뇌출혈로 쓰러진 전담병원 간호사, 헌혈자가 부족해 스스로 헌혈하는 헌혈의 집 간호사 등 피눈물 나는 사연들이 숨어 있다.
간호사의 ‘처우’를 잘 보여주는 통계가 있다. 전체 간호사 43만6천명 중 의료기관에 근무하는 간호사수는 22만5천명으로 51.4%에 불과하다. 그나마 열악한 근무환경으로 간호사 5명 중 4명은 사직을 고려하고 있다. 1년 미만 간호사 사직률이 무려 42.7%다. 이는 전체 산업 이직률 4.8%보다 9배 높은 수치다. 간호사들이 병원근무를 기피하는데 그나마 들어와도 1년을 못 버티고 나가는 숫자가 절반 가까이 된다는 것이다. 대형병원들은 매년 수백명의 간호사가 밀물처럼 들어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정년퇴임식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꾸고, 입사 후 100일만 버텨도 기쁘고 1년 버티면 감동이다. 그래서 현장은 백일잔치, 돌잔치가 수시로 열린다. 이런 직장을 과연 정상적인 직장이라고 할 수 있을까? 환자안전은 보장될까?
매년 2만5천명의 간호사가 배출되는데도 병원마다 간호사가 부족하다고 난리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간호사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병원이 제시하는 임금 수준과 노동조건에서 구할 수 있는 간호사가 부족한 것이다. 그래서 간호인력 확충의 핵심은 단순히 채용 숫자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간호사가 환자 곁을 떠나지 않도록 처우를 개선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런 간호 현실의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그 어떤 처우개선 대책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다.
70년 전 의료법 제정 이후 수십년 이상 누적된 간호인력 문제가 코로나19 장기화로 기존의 불합리한 균형이 깨지면서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고 있다. 이번 파업투쟁은 미국 캘리포니아주를 뒤흔든 99년 ‘Ratios’(간호사 대비 환자 인력비율법) 쟁취투쟁과 일본의 68년 ‘니파치 투쟁’(2·8 투쟁 : 2인 야근·월 8일 이내로서 야근을 제한하는 투쟁), 89년 ‘간호 물결투쟁’(nurse wave) 이상의 역사적 맥락을 가진 시대 전환적 투쟁이 될 것이다.
보건의료노조의 인력확충, 간호사 처우개선 요구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점에서 ‘오래된 미래’다. 따라서 단순히 파업을 막기 위한 처우개선 대책을 넘어 방역대책 전환을 통한 위드 코로나 대책, 초고령사회 지역균형발전을 위한 의료인력 준비라는 큰 그림에서 접근해야 한다.
간호사 처우개선은 1999년 간호등급차등제, 2016년 간호간병통합서비스 시행, 2019년 보건의료인력지원법 제정 등을 통해 조금씩 발전해 왔다. 하지만 더 이상 단편적인 대책만으로는 떠나가는 간호사를 붙잡을 수 없다. 이제는 미국 1 대 5, 일본 1 대 7처럼 국제 수준의 간호사 대비 환자비율을 법제화해 환자 보는 비율을 대폭 줄이고, 최악의 밤근무 교대제를 규칙적이고 예측 가능한 교대제로 개선하면서 주 4일제 노동시간단축으로 나아가야 한다. 정신·육체·감정노동에 시달리는 의료기관 교대근무자들에게 주 4일제는 다른 산업의 주 5일제에 다름 아니다. 올해 보건의료노조 슬로건 공모에서 1등을 받은 작품이 “환자 보다 환자 된다! 주 4일제 도입하라!”이다.
간호인력 확충과 처우개선은 보호자 없는 병원인 간호간병통합서비스 전면 확대로 나아가야 한다. 하루 10만~15만원씩 월 300만~400만원, 연간 2조~4조원이나 되는 개인 간병 부담을 획기적으로 줄이기 위해서는 간호간병국가책임제로 나아가야 한다. 간호간병통합서비스 사업은 고용창출 효과도 크다. 지출 10억원당 43.3명 고용으로 전체 산업 대비 고용창출 효과는 3.7배나 된다. 이번 기회에 의료기관 전 직종 인력기준 등 환자안전을 위한 최소인력기준이 마련돼야 하고, 의사인력을 확충해 불법의료 근절과 지역·공공·필수 분야에 적정한 의사인력이 배치되도록 해야 한다.
노사관계발전 측면에서 올해 코로나 의제 중심의 보건의료노조 노정교섭·산별교섭 결과는 금속노조의 산업전환, 택배와 플랫폼노동 사회협약과 함께 정체상태에 있는 초기업 교섭의 새로운 가능성 모색에 시금석이 될 것이다.
이주호 보건의료노조 정책연구원장 매일노동뉴스 2021.08.30
간호사와 간호조무사
간호사는 대학에 진학해서 4년간 기본부터 심화 과정까지 공부하고 실습하고, 국시 합격해야 취득할 수 있는 의료면허인 반면 간호조무사는 고졸이상 학력이 있어야 하고, 간호학원에서 필수 교육이수시간 동안(이론 740, 병원실습 780시간) 기초적인 이론과 실무를 숙달하고 국시 합격하면 취득할 수 있는 의료보건분야 자격증이다.
간호조무사는 간호사나 의사를 보조하는 역할이라 볼 수 잇고 임격 격차도 그만큼 크다
간호사 대학병원 초봉 300~400 인데 간호조무사는 업무가 힘들고 더러운 일 또는 잡일을 주로하고 급여도 200미만이다
유해물질에 무너지는 작은 사업장 노동자
부산광역시에는 지역의 한 공단 노동자들의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활동하고 있는 단체가 있다. 그리고 이 단체는 지난해 10월부터 약 2개월 동안 공단 내 도금사업장의 노동환경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지만 나도 조사에 함께했다. 설문지는 공단 내 이주노동자가 많다는 점을 고려해 한국어 포함 총 12개의 언어로 작성했고, 설문조사는 점심시간에 공단 내 공동식당을 이용하는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진행했다. 38개 사업장 93명의 노동자가 설문에 참여했다. 설문조사 이후에는 도금사업장에서 근무하다 퇴직한 노동자를 포함해 총 6명의 노동자와 심층면담을 진행하기도 했다.
결과는 참혹했다. 크롬·니켈·염산·황산 등 인체에 유해한 금속·화학 물질을 직접 취급하지만 정작 자신이 취급하는 물질의 종류가 무엇인지 모른다고 답변한 노동자는 전체의 30%에 이르렀다. 화학물질에 노출되거나 폭발이 발생할 경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는 답변이 약 25%나 됐다. 그도 그럴 것이 화학물질 등의 위험성에 대해 교육을 받았다고 답변한 노동자는 약 65%, 작업환경측정 후 그 결과에 대한 설명을 들은 적이 있다고 답변한 노동자는 약 55%에 그쳤다. 분기별 6시간의 산업안전보건교육을 받았다고 답변한 노동자조차 약 55%에 불과했다. 또 설문에 참여한 노동자의 61% 이상이 타국 출신의 이주노동자인 반면, 사업장 내 안전보건에 관한 표지가 각국의 언어로 번역돼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노동자들의 위험은 자신이 취급하는 물질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설문에 응한 노동자 중 약 67%는 공정별 칸막이가 설치돼 있지 않아 유해물질을 직접 취급하지 않아도 냄새나 연기 등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고 답변했다. 하지만 정작 이들에게 지급되는 보호구는 연기 같은 유해물질을 차단하는 기능이 없는 방진마스크 등이었고, 방독마스크를 지급한다는 답변은 약 28% 수준에 그쳤다. 사업장 내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유해물질에 그대로 노출돼 있었던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자신이 사용하는 보호구가 유해요인을 차단하기에 적절한 것으로 알고 있는 노동자가 60% 이상이었다는 점이었다. 노동자들은 이미 ‘피로·현기증·두통·기억력 저하’ ‘피부 붉어짐·피부 반점·발진·가려움’ ‘기침 등 호흡기계 불편함’ ‘시력 저하 및 결막염’ ‘비염 등’ ‘가슴 답답함, 흉부 압박감 등’ ‘메슥거림 및 구토 등’의 증상을 호소하고 있었다.
이 같은 결과를 보고 도금사업장의 노동환경이 열악한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했다. 사업장의 노동안전보건 체계와 재해발생률과의 관련성에 대한 연구자료를 찾아봤다. 그리고 한 연구 결과를 통해 안전관리자를 자체적으로 선임해 그 업무를 전담하도록 하는 사업장의 재해발생률이, 대행기관에 안전관리업무를 위탁하는 사업장과 안전관리자를 자체적으로 선임하고 있지만 다른 업무와 겸직하도록 하는 사업장보다 낮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또한 산업안전보건위원회를 운영하면서 노동자들에게 안전교육을 적극적으로 실시하고 있는 사업장의 재해발생률이 그렇지 않은 사업장의 재해발생률 보다 의미 있게 낮다는 점도 확인했다. 결과적으로 연구진은 재해발생률을 낮추려면 안전·보건관리자를 자체적으로 선임해서 그 업무를 전담하게 하고 산업안전보건위원회가 활발하게 운영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나 현행 산업안전보건법으로는 안타깝게도 이 연구 결과를 도금사업장과 같은 작은 사업장의 현실에 반영하기 어려울 듯했다. 현행 산업안전보건법은 상시 노동자 50명 미만의 작은 사업장에 관리·감독자 선임 외에는 안전관리자·보건관리자 선임을 의무로 규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20명 이상 제조업이나 하수·폐수 및 분뇨 처리업 등에 안전보건관리담당자를 한 명 이상 선임하도록 규정하고는 있으나, 이마저도 관리·감독자와 겸직이 가능해 사실상 안전보건관리담당자를 추가로 한 명 더 두는 것의 실효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또한 현행 산업안전보건법에서 50명 미만 사업장은 산업안전보건위원회 설치가 의무사항이 아니다. 30인 이상 사업장에서는 노사협의회가 산업안전보건위원회의 역할을 담당하도록 규정하고는 있다. 하지만 노사협의회는 그 특성상 노동안전보건 문제를 주요 안건으로 취급하기 어렵고, 안건으로 상정한다 해도 형식적으로 다루기 쉽다.
이 같은 문제들이 빚어낸 당연한 결과인지 모르겠으나, 중대재해 발생 사업장 중 상시 노동자 50명 미만의 작은 사업장이 차지하는 비중은 80%가 넘는다. 뿐만 아니라 동종업의 평균 사망만인율을 웃도는 사업장 중에서도 50명 미만의 작은 사업장이 차지하는 비중은 80% 이상이다. 다시 말해 대한민국에서 일하다 죽고 다치는 노동자 대부분은 상시 노동자 50명 미만의 작은 사업장에서 일하고 있는데, 법은 이들의 안전을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법이 작은 사업장까지 구속력을 미칠 수 없는 이유는 당연히 작은 사업장의 인적·물적 구성이 열악하기 때문일 것이다. 쉽게 말해 작은 사업장은 안전 관리업무를 전담할 인력도 없고 그런 인력을 배치할 금전적인 여유도, 시간도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작은 사업장 노동자의 생명과 비교적 큰 사업장 노동자의 생명의 가치는 다르지 않다. 나는 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업주로부터 안전을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고 배웠다. 그런데 현재의 법은 작은 사업장에서 일한다는 이유만으로 노동자들의 건강권을 외면하고, 오히려 생명보다 이윤과 효율을 더 중요하게 고려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부디 작은 사업장에도 안전보건관리 체계가 제대로 확립돼 노동자들이 안전하게 일할 권리가 보장되는 세상이 되길 바란다.
김남욱 공인노무사(노노모 회원) 매일노동뉴스 2021.08.31.
부동산 개평’을 주겠다는 공약이 무섭다
2012년 대통령 선거를 두달 앞두고 10월에 ‘부동산 투기는 죄가 아니다’라는 제목의 칼럼을 쓴 적이 있다. 집값 하락으로 ‘하우스푸어’가 생겨나 있을 때다. 당시 박근혜 후보가 주택담보대출 상환이 어려운 집주인의 주택 지분을 공공기관이 사주자고 한 것을 비판하는 글이었다. 범죄가 아니라서 정부가 투기 행위를 막지 않았듯이, 실패한 투기를 구제해서도 안 된다는 글이었다. 그런데 제목이 과격했던지, 전국철거민협의회가 연말에 ‘올해의 투기 조장꾼 10명’에 내 이름을 5위로 올렸다.
10년이 흘렀다. 부동산 문제는 40년 묵은 뿌리가 50년 묵으며 더 굵어졌다. 부동산 정책은 더 많아졌지만, 현실은 ‘집이나 땅을 사는 사람이 결국 승자가 된다’는 부동산 불패 신화를 더욱 굳게 했다. 그리고 안정책이 실패로 돌아갈 때면 정치인들은 ‘투기꾼’을 그 원흉으로 거듭 불러낸다. 이번에는 여야가 소속 국회의원과 가족의 부동산 전수조사를 국민권익위원회에 의뢰까지 했고, 그 결과를 놓고 정치권이 한바탕 요란했다.
위장 전입, 불법 농지 매입 등은 불법행위다. 처벌해야 한다. 그러나 단지 매매 차익을 노려 위험을 감수하고 부동산을 사는 ‘투기 행위’에서 원인을 찾거나, 공직자의 도덕적 솔선수범을 요구하는 방식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나는 본다. 진정으로 국민의 주거 불안을 해결하고 싶다면, 투기가 싹트고 번성하는 온상을 제거하는 게 중요하다.
우리는 부동산 불패 신화를 깨뜨릴 답을 알고 있다. 필요 이상 보유한 부동산에 세금을 무겁게 매기고, 차익을 적절히 환수하며, 투기수요를 억제할 수 있게 정부가 공공주택을 적극적으로 공급하는 것이다. 이런 정책을 일관되게 시행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투기꾼에게 온갖 화살을 돌리던 여야가 최근 합의해 종합부동산세를 대폭 깎아준 것은 위선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여야 대선 후보들은 어떤 부동산 공약을 내놓고 있는가?
이재명 경기지사는 ‘기본주택’을 공약했다. 고품질의 장기임대주택 100만호를 지어, 건설원가에 관리비를 더한 수준의 임대료로, 누구나 입주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다. ‘로또 아파트’ 분양 정책에서 벗어나 좋은 임대주택 대량 공급으로의 전환은 획기적이다. 재정을 효율적으로 써서 장기 지속할 수 있느냐에 성패가 달렸다고 본다. ‘로또 아파트’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실망스러울 것이다.
이낙연 전 총리는 법인의 택지 소유를 제한하고 개인에게는 상한선을 두는 택지소유상한법, 환수율을 20%에서 50%로 올리는 개발이익환수법, 방치하거나 적극 사용하지 않는 토지에 가산세를 매기는 종합부동산세법 제정·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투기 심리’의 싹을 자르겠다는 것이다.
여당 후보들은 집값을 안정시키지 못했다는 무주택자들의 질책에 대답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최재형 전 감사원장은 청년·신혼부부에게 토지임대부 주택을 민간 분양가의 반값으로 공급하는 ‘반값 주택 ’을 내놓았다. 국공유지와 재개발·재건축 사업에 용적률을 높여주고 , 기부채납받은 주택을 청년·신혼부부에게 싸게 공급하겠다는 것이다. 이른바 ‘반값 아파트’ 창시자인 홍준표 국민의힘 의원은 서울 강북 지역의 대규모 재개발을 통해 시세의 4분의 1 수준인 ‘쿼터 아파트’를 공급하겠다고 했다. 값을 낮추는 방식은 최 전 원장의 구상과 비슷하다. 개발이익을 늘려주고 개평을 받아다 주는 듯한 모양새가 찜찜하다. 원희룡 전 제주지사는 9억원 이하의 주택을 생애 첫 주택으로 사면 정부가 집값의 50%를 공동 투자하는 ‘반반 주택 ’을 내놨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주택 공급을 획기적으로 늘리겠다면서, 대출 규제 완화와 세금 인하를 공약했다. 또 무주택 청년 가구에 3기 신도시 등에서 공공택지의 국민주택(85㎡) 규모 이하 주택을 시세보다 싼 원가로 분양하고, 5년 이상 거주한 뒤 국가에 매각하면 차익의 70%까지 가져가게 하는 이른바 ‘원가 주택’을 30만호 공급하겠다고 했다. 사실상 나라에서 당첨금을 주는 ‘청년 로또 아파트’다.
야당 후보들은 ‘당신에게도 시세차익을 얻을 기회를 주겠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런데, 그게 가능하려면 집값이 계속 올라야 한다. 그래서 나는 무섭다.
정남구 논설위원 한겨레 :2021-08-31
“평생 여당 할 것 같은가”
이해찬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20년 집권론’은 괜한 허장성세가 아니다. 뼈아픈 좌절을 거름삼아 절치부심 다져온 소신이다. “국민의정부, 참여정부 10년 만에 정권을 뺏긴 후 우리가 만든 정책과 노선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보고 정권을 뺏기면 절대 안 되겠구나 각오를 다졌다.” 그럴 만했다. 이명박 정부에서 전임 정부의 정책과 노선은 죄다 뒤집히고 초토화됐다. 오죽하면 임기 내내 펄럭거린 깃발이 ‘ABR’(Anything but Roh·노무현과 반대라면 무조건 괜찮다)이었다.
대체로 집권세력의 이념과 가치가 투영된 ‘개혁’ 정책은 반대 정부에서 1순위로 청산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설득과 광범위한 동의를 얻어 제도적으로 추진된 ‘개혁’이어야 반대 정부라도 되돌릴 수 없게 된다. 독선으로 밀어붙인 개혁은 정권교체가 이뤄졌을 때 오히려 반동의 도구로 이용되기 십상이다. 정권마다 의욕적으로 추진한 ‘교육개혁’이 한 번도 뿌리내리지 못하고, 아직도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는 이유다. 역사에서 반복되는 개혁의 역설이다.
문재인 정부의 개혁은 어떠한가. 사실상 방치된 노동개혁, 재벌개혁, 교육개혁 등의 성과는 짚어볼 것도 없다. 최고의 업적으로 꼽는 검찰개혁과, 돌연 임기말 속도전으로 추진하고 있는 언론개혁이 대상이다.
검찰개혁의 알파와 오메가였던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의 현재 실상은 부실하기 짝이 없다. 도입 취지는 찾을 길 없고 제대로 된 기능과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무소불위의 검찰 견제를 위한 공수처의 대의는 충분히 공감한다. 하지만 야당의 반대를 뚫기 위해 무리하게 밀어붙이다 보니 공수처의 막강한 권한을 제어하고 중립성을 담보할 장치를 마련하지 못한 채 공수처법이 통과되었다. ‘야당 비토권’도 삭제되었다. 권력의 운용에 따라 ‘선한’ 공수처, ‘악한’ 공수처도 될 수 있는 판이다. 언제든 ‘우병우 공수처’가 등장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공수처가 ‘1호 사건’으로 권력형 범죄나 검찰 비위가 아니라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의 특별채용 의혹을 삼았을 때 ‘멘붕’에 빠진 여당 의원들은 이미 개혁의 부메랑을 직감했을 터이다. 정치적 의도와 정략에 오염된 개혁이었기에 빚어진 현상이다. “개혁이 특정 세력의 전유물이 되어 있는 한 그것은 갑의 악을 을의 악으로 바꾸는 움직임에 지나지 않는다.”(G 마치니)
돌연 언론개혁의 전부인 양 등장한 언론중재법도 개혁의 역설을 떠올리게 한다. ‘닥치고 공수처’가 검찰개혁의 전부가 아니듯이, 언론중재법이 언론개혁의 유일한 해법이 될 수는 없다. 언론의 책임 강화와 가짜뉴스·허위보도로 인한 피해 구제 강화는 응당 필요하다. 그 명분을 앞세워 언론의 권력 감시와 비판을 옥죌 독소조항이 가득한 언론중재법을 통과시키는 것은 다른 문제다. 언론중재법 개정안의 골간인 징벌적 손배제 자체가 정치·경제 권력의 ‘전략적 봉쇄소송’의 수단으로 악용될 가능성이 높다.
언론중재법의 위험성을 새삼 열거할 필요는 없겠다. 국민의힘과 정의당 등 야당은 물론 학계, 법조계, 언론단체, 시민단체 등 이념과 정파를 넘어 한목소리로 반대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기둥인 언론자유”와 직결된 사안이기 때문이다. ‘개혁’을 내세운 특정 사안에 대해 이토록 광범위한 반대가 형성된 것을 본 적이 없다. 속전속결로 강행처리하려던 여당이 개정안의 본회의 상정을 유예하고 추가 논의의 길을 튼 것도 이런 여론의 부담 때문일 터이다.
송영길 민주당 대표가 언론중재법에 반대하는 야당을 향해 “평생 야당 할 생각이냐”고 물었다고 한다. 실은 집권여당에 최적화된 언론개혁임을 드러낸 꼴이다. 그러니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 같은 진짜 언론개혁 사안은 외면한 채 독소조항이 가득한 언론중재법에 목맬 터이다.
무엇보다 언론중재법의 가장 심각한 하자는 반민주적 정치권력에는 이보다 좋을 수 없는 언론 통제, 압박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다음 대선에서 민주당 정부가 등장하든, 국민의힘 정부가 등장하든 ‘언론재갈법’으로 악용할 소지를 완전히 없애야 한다. 정권의 성격에 따라 천사가 되기도 하고, 괴물이 될 수도 있는 법은 ‘개혁’이라 이름할 수 없다. 여야의 ‘8인 협의체’가 반드시 정돈해야 할 지점이다. 독소조항 손보기를 주저하며 “평생 야당 할 생각이냐”는 민주당의 대표에게 되물어야 한다. “평생 여당 할 것 같은가.”(이정미 전 정의당 대표)
양권모 편집인 경향 : 2021.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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