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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다시 쓰는 인구론 外

by 이성근 2019. 2. 2.

[다시 쓰는 인구론]주민 흩어진 속빈 도시인구 소멸 빠르다124 경향

 

사람은 떠나고지방을 지키는 빈집 경북 군위군 의흥면사무소 근처의 집이 벽은 무너지고 마당은 폐허가 된 채 버려져 있다. 인구가 줄고 있어 외곽으로 팽창하는 지역에선 이 같은 빈집들이 속출할 수 있다. 박용하 기자

 

우리 마을엔 서른 가구쯤 있는데 절반은 비었어. 젊은이들은 다 나가고 이제 늙은이밖에 없지. 예순 살 먹어도 여기선 막내야.”

 

지난달 19일 경북 군위군 의흥면 금양리에서 만난 김노수씨(81·가명)는 마을 분위기를 묻는 기자에게 이같이 말했다. 김씨가 사는 행골마을은 조선시대 기록이 있을 정도로 오랫동안 주민들이 살아온 곳이다. 하지만 주민 수가 계속 줄어들며 현재는 마을 절반이 폐가가 됐다. 한 집은 관리되지 않아 추녀와 서까래가 통째로 무너져 내렸고, 또 다른 집은 마당의 잡초가 무릎 위까지 자라 있었다. 채소가 심어진 채 말라버린 밭도 곳곳에 보였다. 낮에 온 게 다행이다 싶을 정도로 마을 풍경은 을씨년스러웠다.

 

저출산·고령화와 인구 감소의 위협을 앞서 겪고 있는 곳은 지방이다. 대다수 지방 도시들이 옛 정취를 보존하는 건 둘째치고, 주민 수가 급격히 감소하며 생존마저 위태해지고 있다.

 

한국고용정보원은 지난해 내놓은 한국의 지방소멸보고서에서 전국 시··구의 40%가량은 소멸위험지역으로 30년 뒤 사라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소멸위험지역은 65세 이상 인구수가 20~39세 여성의 수보다 2배 이상 많은 곳을 뜻한다. 위험도 순으로 경북 의성, 전남 고흥, 경북 군위 등 89개 지역이다. 인구가 크게 줄어든다는 뜻에서 20개 지역은 축소도시로 분류됐다. 특히 전북 남원과 경북 상주, 강원 태백 등 8개 축소도시는 가장 발전했던 시기에 비해 인구가 절반 이상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다수 지방자치단체들은 현실을 부정한다. 인구는 급감하고 있지만 개발사업을 늘려야 주민들이 좋아하고, 인구가 늘어난다고 믿고 있다. 이 때문에 현재 지방의 어느 도시를 가더라도 외곽에는 늘 새로 짓는 아파트가 올라가고 있다. 소멸위험도시도 예외가 아니다. 인구가 줄고 있는데, 주택개발 등으로 외연을 넓히면 주민들이 드문드문 살게 되면서 각종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사람이 흩어져 있으니 장사는 장사대로 안되고, 생활 필수 시설들도 수익성이 줄어 문을 닫는다. 이는 인구가 다시 빠져나가는 원인이 된다.

 

경향신문은 지난달 18~20소멸위험지역인 경북 군위군과 축소도시인 전북 남원, 도시재생 사업이 이뤄진 경북 문경 등 3개 지역을 찾아 인구 감소에 따른 지방도시의 실태를 살펴보고, 대안을 고민해 봤다. 이곳들 모두 누군가에게 소중한 고향이지만 주민 수가 줄어들며 풍경은 크게 달라졌다. 어린이집과 병원들은 문을 닫고, 오후 6시에도 거리에선 사람들을 보기 힘들었다. 황량한 도심의 모습은 이들 도시의 불안한 내일을 보여주고 있었다.

 

지난해 휴원한 군위군 의흥면의 어린이집. 잡초가 자라 미끄럼틀을 뒤덮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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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곽으로만 팽창하는 지방, ·구도심 모두 썰렁

인구가 줄어 소멸 위기에 진입한 지역에서 볼 수 있는 공통적인 풍경은 빈집이 많고 마을이 활기를 잃은 모습이다. 이런 모습은 지난달 19일 찾은 경북 군위군 의흥면 행골처럼 작은 마을뿐 아니라 사람이 그나마 모여 사는 행정청사 소재지에서도 나타난다. 의흥면사무소 근처에서도 벽이 무너지고 우편물이 쌓인 빈집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의흥면 관계자는 빈집도 많아졌지만, 인구가 줄면서 동네가 예전에 비해 확실히 조용해진 걸 느낀다저녁에 어두워지면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을 찾기 힘들 정도라고 말했다.

 

아이 울음 끊긴 군위의 변화

군위군은 소멸위험 지수가 전국에서 세 번째로 높다. 노인은 많은데 태어나는 아이는 없어 시간이 지나면 마을 전체가 사라질 수 있다는 뜻이다. 군위군 고로면은 지난해 3분기에 태어난 아이가 단 1명에 불과했다. 의흥면의 경우 5년 전 2700여명이던 인구가 현재는 2500여명으로 줄었다.

 

인구가 줄면 생활에 꼭 필요한 시설들도 하나둘 사라질 수 있다. 특히 민간에서 운영하는 어린이집들은 아이들이 줄면 수익이 떨어지며 휴원이나 폐원으로 내몰린다. 의흥면에서도 유일하게 있던 어린이집이 지난해 초 휴원했다. 기자가 찾아간 이곳 마당에는 현재 잡초가 어른 키 높이까지 자라 있었고 알록달록한 미끄럼틀은 잡초에 묻힌 상태였다. 한때 아이들이 신나게 타고 놀았던 유아용 자전거들은 주인 없이 나뒹굴었다.

 

소멸위험 지수 3군위군

의흥면사무소 근처 빈집 수두룩

의료기관·어린이집·학교 등

인구 줄면서 편의시설도 사라져

 

흩어지는 사람들

인구 유출과 서남대 폐교 영향

남원, 5년간 인구 3000여명 감소

외곽은 새 아파트 대규모 공급

 

 

환경·시설 좋아져도 떠난다

점촌역 구도심 재정비한 문경시

청년 창업 지원 등 갖은 대책에도

사람들 다시 모으기에는 역부족

 

 

무의미한 시소게임 멈춰라

정부, 도시재생 5년간 50조 투입

제한된 인구 두고 신·구도심 경쟁

확장지향형개발 정책 벗어나야

 

어린이집과 같은 필수시설이 사라지면 주민들의 생활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의흥면에서도 어린이집 휴원 뒤 이곳에 다니던 15명가량의 아이들은 갈 데가 없어 곤란을 겪었다. 일부는 가정에서 돌보기로 했지만, 상황이 마땅치 않던 4명의 아이들은 차로 30여분 걸리는 영천군의 어린이집을 가기로 했다. 하지만 이 중 2명은 결국 가족과 타지로 이사간 것으로 전해졌다.

 

휴원한 어린이집에서 10분쯤 걷자 폐교한 군위정보고등학교건물이 보였다. ·유아 인구가 감소하면 향후 학교에 갈 아이들도 줄어들게 된다. 지방 소도시 학교들이 폐교 위기에 몰린 이유다. 의흥면에서는 군위정보고가 2017년 문을 닫았고, 우보면의 중학교 한 곳도 조만간 폐교할 예정이다. 남한호 의흥중 교무부장은 소규모 지역사회에서는 학교가 커뮤니티 역할을 하고 있다인구가 줄어 학교가 사라지면 지역이 더욱 급속히 쇠퇴할 수 있다고 걱정했다.

 

인구가 줄면 의료기관도 버티기 힘들다. 군위군에서는 유일한 응급의료기관이었던 군위병원2014년 경영난으로 문을 닫고 건물만 흉하게 남아 있었다. 보건소가 응급의료를 대신 하고 있으나 처치에는 한계가 있다. 보건소 관계자는 오후 6시부터 시작하는 당직진료를 응급실 개념으로 쓰고 있지만, 공중보건의가 1명 남아 간단한 진료나 약 처방을 하는 사정이라 수술이나 중요한 대응은 할 수 없다고 말했다. 현재 중대한 응급상황이 발생하면 군위 주민들은 차로 40여분 걸리는 구미나 칠곡으로 가야 한다.

 

이처럼 인구 감소는 생활 필수시설의 부족으로 이어지고, 지방 도시를 젊은 부부가 정착하기 힘든 곳으로 만들고 있다. 군위군청 근처의 한 카페에서 만난 30대 주부는 이곳에서는 갑자기 애가 아프면 갈 데가 없고, 아기용품도 인터넷 없이는 사기 힘들다당분간은 살겠지만 향후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면 떠날 생각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쇠락한 남원의 구도심 하정동의 상가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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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대학 퇴출에 인구 분산까지

인구 감소로 사라지는 시설 중 지역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대학이다. 저출산 여파로 입학할 학생들이 줄어들고, 사학재단들의 비리도 적발되며 2000년 이후 서남대와 한중대, 명신대 등 16개 대학이 문을 닫았다. 정부는 2021학년도 이후 38개 대학이 더 문을 닫을 것으로 전망했다. 수천명의 학생을 수용하는 대학이 사라진다면 지방의 쇠퇴는 빨라질 수 있다.

 

전북 남원은 대학 소멸로 타격을 입은 지방 도시들 중 하나다. 지난달 20일 찾은 서남대 남원캠퍼스 일대의 풍경은 쓸쓸했다. 이곳에는 한때 5400여명의 학생들이 오갔으나 현재 아무도 없는 상태다. ‘미래를 여는 젊은 대학이란 문구의 광고판만 녹슨 채 서 있었고, 대학 곳곳에는 잡초가 무릎까지 자라 있었다. 운동장에는 칠이 다 벗겨진 축구 골대와 농구대가 흉물스레 방치됐다.

 

무엇보다 피해를 입은 곳은 학교 주변 마을이다. 서남대 정문과 후문에는 한때 당구장만 9개가 생기는 등 상점 40여곳이 활발히 운영됐다. 하지만 현재 대다수 폐업하고, 가게를 팔지 못한 상인들은 상가 건물을 집처럼 쓰며 살고 있었다. 사진관을 하는 50대 남성은 학교가 있을 땐 졸업사진을 맡아 수입을 올렸는데, 갑자기 폐교해 너무 힘들다사진을 주로 찍는 학생들이나 아이들이 남원 전체적으로도 줄어 이제는 시내로 간다 해도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서남대 학생들의 자취방이 모여 있던 율치마을도 상황은 비슷하다. 마을 전체가 대부분 원룸인 이곳은 학생들이 많을 때는 거대한 기숙사를 방불케 했다. 하지만 절반 이상의 원룸이 공실 상태이고, 마을을 돌아다니는 주민도 찾기 힘들었다. 이곳에서 임대업을 하는 60대 여성은 학교가 있을 때는 찾는 사람이 많았지만 지금은 사람 찾기가 힘들어 한 달 10만원에 방을 내놓고 있다고 말했다.

 

폐교된 서남대 남원캠퍼스 운동장에 자라난 잡초들과 방치된 축구 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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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은 지속적인 인구 감소에 대학 폐교 등 문제가 겹치며 지난 5년간 3000여명의 주민이 줄었다. 하지만 이처럼 인구가 줄어도 도시는 외곽으로 여전히 팽창하고 있었다. 그간 많은 지방자치단체와 개발업자들은 인구가 감소하는데도 외곽 토지를 개발해 공공기관을 이전하거나 새 아파트를 대규모로 공급해왔다. 이는 싸고 깨끗한 아파트를 찾는 일부 주민들을 만족시켰지만, 가뜩이나 줄어든 인구가 넓은 지역으로 흩어지게 되며 도심 공동화 등 부작용을 일으켰다. 새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도통동이 남원의 신도심이 되자 과거 도심이었던 하정동은 행인이 줄어들고 상권이 쇠락했다.

 

기자가 찾은 하정동 일대는 옷가게가 많았지만 손님들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페인트칠이 벗겨지고 수리되지 않은 건물들, 폐업해 임대 딱지를 붙인 곳들이 이어졌다. 아동복 매장을 운영하는 30대 여성은 이쪽은 그나마 월세가 싸 젊은이들이 가게를 열고 있는데, 사람이 없어 줄줄이 폐업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골프의류 매장의 40대 여성은 도통동에 사람이 몰리고 음식점도 많이 들어서며 상권이 나뉜 것 같다. 나뉘지 않았다면 더 잘될 수 있을 텐데 아쉬운 부분이라고 했다.

 

주민들이 새로 이주한 신도심도 장사가 잘되는 것은 아니다. 오후 2시쯤 들른 도통동 일대는 새 건물이 많다는 점을 빼면 한적한 분위기는 하정동과 차이가 없었다. 인구가 흩어져 살게 되니 구도심과 신도심의 상권 모두 피해를 입는 것이다. 하지만 남원 외곽에는 현재도 새 아파트들이 지어지고 있었다. 하정동에서 구두 매장을 운영하는 50대 남성은 지금도 사람이 줄어드는데 외곽에 웬 아파트는 저렇게 지어놓느냐아파트 다 지으면 손님들이 저쪽으로 더 빠질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도시재생 뛰어들지만 버거운 현실

구도심 공동화 현상은 쇠퇴하는 대다수 지방 도시들이 겪고 있는 문제다. 경북 문경시도 마찬가지다. 문경은 과거 석탄이 운반됐던 점촌역 근처에 도심이 형성됐는데, 1989년 시청이 이전하면서 외곽의 모전동이 신도심이 됐다. 그 뒤 모전동에 대규모 택지가 개발되고 병원과 경찰서도 이곳으로 이전하며 1만명가량의 인구가 옮겨갔다. 문경의 전체 인구는 약 7만명. 사람이 빠져나간 구도심은 급속도로 황량해졌다.

 

문경시는 공동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약 40억원을 들여 점촌역 근처에 차 없는 문화거리를 만들고 구도심을 살리려 했다. 현재 점촌역 일대는 예쁘게 꾸며진 상태다. 차 없는 문화거리에선 분수대와 인공개천, 형형색색의 조명등, 문경 특산물인 사과를 형상화한 각종 조형물들을 볼 수 있었다. 전선을 땅에 매설하면서 오래된 전신주들은 깔끔하게 정리됐다. 거리가 만들어진 직후 주민들의 만족도는 상당히 높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기본적인 인구가 줄어들고 생활 반경도 외곽으로 확장되면서 구도심의 환경 개선 효과는 한계가 있었다. 문화거리는 오후 6시에도 오가는 이들이 매우 적었다. 청년들이 많이 나오는 시간대지만 300m가량 뻗어 있는 거리 양쪽을 다 합쳐도 10명 안팎에 불과했다. 이곳에서 2년째 장사를 하고 있는 30대 남성은 이 정도면 그래도 사람이 나온 편이라며 문화거리를 조성했다고 하지만 젊은 사람들은 다 모전동에 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화거리에는 폐업·임대 딱지가 붙어 있는 상가도 많았다. 근처에서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50대 남성은 이 근처 상가의 2층은 공실률이 80%나 되고, 1층도 30%가량 된다외관을 말끔히 꾸민다고 동네가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문경시는 공동화 현상으로 피해를 겪는 전통시장을 살리기 위해 청년몰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청년들에게 지원금을 주고 시장의 남는 공간에 가게를 열게 하는 사업이다. 하지만 이 사업 역시 불안하다. 한 청년 상인은 시에서는 열심히 하지만 워낙 오가는 이들이 적어 들어온 상인들 중 적자나는 이들이 꽤 생기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상인도 아무래도 청년들이 신도심 쪽으로 몰리니 여기서는 장사하기 쉽지 않다청년몰에 마련한 창업 공간도 공실이 있는 상태라고 했다.

 

정부는 인구 감소로 쇠퇴하는 전국의 도시들을 살리기 위해 향후 5년간 50조원가량을 도시재생 사업에 투입할 예정이다. 구도심의 거주시설과 전통시장 등을 정비해 활기를 불어넣겠다는 취지다. 하지만 지방 도시의 인구가 줄고 생활 반경은 넓어지는 상황에서 시설 정비만으로 구도심이 활성화될지는 미지수다. 제한된 인구를 두고 구도심과 신도심이 경쟁하는 구조라 한쪽(구도심)을 살리면 다른 쪽(신도심)이 침체될 가능성도 있다. 문경에서도 구도심 살리기 이후 신도심 상권이 일부 위축돼 주민들이 반발한 바 있다. 마강래 중앙대 교수는 이 같은 일종의 시소게임은 생활 권역이 나눠진 전국의 지자체가 겪고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쇠퇴하는 지방 도시를 제대로 살리기 위해서는 인구 감소 시대에 맞는 도시계획부터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구형수 국토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이제는 지자체가 확장지향적인 정책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생활 환경의 규모를 줄이고 남아 있는 사람들의 삶의 질을 유지시켜주는 일종의 도시 다이어트전략을 추진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목차

1. 인구 감소, 위기인가 기회인가

2. 다 인구 때문일까

3. 세대게임을 넘어

4. 우리 모두는 일할 수 있을까

5. 아이 키우기에 정말 필요한 것은

6. 지방은 지속가능한가

7. 우리는 이방인을 품을 수 있을까

8. 돌봄은 어떻게 재구성될까

 







 

경북 군위에 삼국유사 테마파크’ 8월 개장 1.24 한겨레

일연스님 머물며 삼국유사 집필한 곳

전시관·영상관·숙박시설 등 갖춰

 

경북 군위군 의흥면에 들어설 삼국유사 테마파크의 전시관 모습과 야외광장에 설치될 조형물. 군위군 제공

 

전시관, 영상관, 썰매장에다 숙박시설까지 갖춘 군위 삼국유사 테마파크가 오는 8월쯤 문을 연다. 경북 군위군은 16“2010년부터 조성해온 군위군 의흥면 이지리 일대에 삼국유사 테마파크 건설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오는 8월 임시개장을 거쳐 내년 1월부터 본격적인 운영에 들어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군위는 일연스님(12061289)1284년부터 입적할 때까지 5년 동안 고로면 인각사에 머물면서 삼국유사를 집필한 곳이다. 삼국유사 테마파크에는 주전시관인 가온누리관과 교육연구 시설, 썰매장, 물놀이장 등이 들어선다.

 

삼국유사를 테마로 한 지상 2층 전시시설인 가온누리관은 보각국사 일연 문화계승관’, 삼국유사 속 인물들을 영상으로 만나는 셔틀 영상관’, 삼국유사 속에 나와있는 여러 교육적인 이야기를 체험으로 배울 수 있는 히스토리관’, ‘설화문화체험관등으로 이뤄져 있다. 야외광장에는 신화를 품고 있는 17m 높이의 신화목’, 나라의 모든 근심과 걱정을 풀어준다는 만파식적’, 전망대로 만들어진 신라 지철로왕의 사자상등이 세워져 있다. 이밖에 테마파크 안에는 32㎡∼44크기의 돔하우스형 숙박시설 20채도 건설된다.

 

권지영 군위군 삼국유사사업소 주무관은 지난해 연말 큰 공사는 대략 끝이 나고 현재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다. 오는 8월쯤 임시개장으로 주말에만 문을 열고, 내년 3월쯤 정식개장을 해 평일과 주말 모두 문을 열 계획이라고 말했다. 군위군은 7월쯤 군위문화관광재단을 출범시켜 삼국유사 테마파크의 운영을 맡길 계획이다. 군위군 관계자는 임시개장 때는 관광객들이 무료로 입장할 수 있지만 정식개장을 하면 입장료를 받을 것이다. 입장요금은 5천원1만원선에서 결정될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군위군은 삼국유사의 고장이란 사실을 국제사회에 널리 알리기 위해 5월쯤 현재 국보로 지정돼있는 삼국유사를 아시아태평양지역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등재 신청하는 작업을 추진 중이다. 김영만 군위군수는 삼국유사 테마파크가 군위와 경북을 넘어 전국적 명성을 얻어 많은 관광객이 찾을 수 있도록 랜드마크로 키워내겠다고 말했다.

 

[다시 쓰는 인구론]흩어진 인구와 도시 기능 압축도시전략으로 모아라

소멸위기 지방도시의 해법

 

지방소멸에 대한 보고서를 쓴 뒤 한 지방자치단체 관계자에게서 전화가 왔더라고요. 왜 자기 지역을 소멸 위험 지역으로 못 박느냐는 항의였죠. 사실 지방에서는 인구가 줄어든다는 얘기 자체를 좋아하지 않아요. ‘표 떨어진다고 생각하거든요.”

 

국토교통부 산하 연구기관의 한 관계자는 인구감소에 대한 지자체의 분위기를 이같이 전했다. 인구감소는 피할 수 없는 지방의 현실인데, 대다수 지자체들은 현실을 인정하기를 주저한다는 것이다. 물론 지자체도 인구감소 대책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이는 인구감소에 적응하는 계획이라기보다 장밋빛 미래를 상상한개발계획인 경우가 많다.

 

소멸 위험에도 개발 욕심은 여전

대다수 지자체들은 새롭고 저렴한 아파트를 공급한다는 취지로 도심보다 땅값이 싼 외곽에 아파트를 지어 공급했다. 인구가 늘어나던 시기에는 바람직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했음에도 개발을 멈추지 않았다는 데 있다. 땅을 소유한 지방의 자산가들과 건설업자들의 이익이 들어맞아 개발계획은 그치지 않았고, ‘도시가 커져야 발전하는 것이라 생각한 지자체들도 관공서를 대거 이전해 개발붐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이런 추세는 통계에서도 드러난다. 국토연구원이 통계청 자료를 분석한 결과, 2005~2015년 문경 등 축소도시’ 20곳 중 17곳에서 녹지나 자연환경보전지역의 개발 행위가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남원이나 삼척, 경주 등 8곳의 축소도시에서는 개발 면적 증가율이 연평균 10%가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방도시들은 개발에 앞장서며 일부 주민들의 만족을 얻어낼 수 있었지만, 인구감소를 막을 순 없었다. 구도심에 있던 인구가 신도심으로 일부 이동했을 뿐이다. 반면 부작용은 심해졌다. 인구가 줄어드는 도시에서 주택 개발로 외연을 넓히게 되면 신도심에 인구를 빼앗긴 구도심은 오가는 사람이 없는 공동화 현상을 보이고, 상가에는 폐업이 속출하게 된다. 구도심에는 빈집 등 이용하지 않는 땅도 많아진다. 1995년 약 36000호를 기록했던 전국의 빈집 수는 지속적으로 늘어 2015100만호를 넘어섰다. 이런 빈집은 범죄에 악용되는 등 남은 주민들의 생활에 악영향을 끼친다. 또 사람들이 흩어져 살면 주민들끼리 교류하는 횟수도 줄어들고, 1인 노인가구의 경우 고독사확률도 높아질 수 있다. 지방정부의 재정에도 부담을 줄 수 있다. 구도심에 남아도는 시설들을 관리하는 비용은 계속 발생하는데, 외곽에 새 기반시설까지 공급하느라 재정 부담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인구감소에 적응하는 전략, ‘압축도시

전문가들은 지자체들이 이 같은 악순환에서 벗어나려면, 인구감소를 인정하고 새로운 국토·지역정책을 세워야 한다고 지적한다. ‘압축도시 전략이 대표적이다. 도시가 무분별하게 외곽으로 팽창하는 것을 막고, 흩어져 사는 인구와 주거·상업 등 도시기능을 주요 거점에 모으는 것이 압축도시 전략의 핵심이다. 생활 반경을 압축하면 공동화 현상도 줄일 수 있고, 인구가 집약돼 상권도 살아날 수 있다. 지방정부가 관리해야 할 지역의 범위도 줄어 재정 부담도 덜 수 있다.

 

압축도시 전략은 도시 외곽에 새로운 개발 사업을 제한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도시 내에 빈집이 다수 생기는 것은 인구가 한계점에 왔다는 신호인데, 새로 집을 더 지으면 또 다른 빈집을 양산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국토의 계획 및 이용에 관한 법률상으로는 과다한 개발 행위를 제한할 수 없다. 조득환 대구경북연구원 연구위원은 법에 개발을 허가하지 않는 사유가 있긴 하지만 모호하기 때문에 민간에서 신청하면 지자체가 대부분 허가하는 게 현실이라며 법을 개정해 불허 사유를 세부적으로 정하거나, 지자체에서 조례를 만들어 과다한 개발을 자중시키는 방법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새로운 개발 사업을 제한할 수 있다면, 그 뒤에는 사람들이 모여 살기 좋은 생활거점을 정하고 도시 기능을 장기간에 걸쳐 한곳에 모을 필요가 있다. 생활거점은 위치상 지역의 중심부에 있는 구도심이 될 수도 있고, 새로 도시의 핵심이 돼 버린 신도심일 수도 있다. 구형수 국토연구원 책임연구원은 모여 살기 좋은 곳이 구도심일 경우 빈집이나 쓰지 않는 땅을 최대한 활용해 주택이나 상권, 문화시설 등이 들어서게 해야 할 것이라며 이 경우 외곽에 생기는 남는 시설물들은 철거한 뒤 녹지로 만들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드문드문 살고 있는 주민들을 생활거점으로 어떻게 유도할지는 쉽지 않은 과제다. 원래 살던 곳에서 강제로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인센티브 등의 간접적인 방법이 필요하다. 민성희 국토연구원 연구위원은 건설업자에게는 생활 거점의 공동주택 건설비 등을 보조하고, 주민들에게는 해당 지역의 주택을 구입할 때 대출금, 상가 임대료 등을 지원하는 등의 방법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압축도시 전략, 한국에는 언제?

압축도시 전략은 일본과 미국 등에서 시도됐으며, 인구감소를 줄이는 등 일부 효과를 보기도 했다. 일본 아오모리시의 경우 역 앞에 상업시설과 공공시설을 섞은 빌딩을 지어 도시기능을 집약했으며, 도야마시는 흩어져 사는 주민들을 대중교통이 모이는 곳에 살도록 유도한 뒤 교통을 활성화하는 전략을 폈다. 시설 재배치 등으로 재정 부담이 늘어나기도 했으나, 인구감소세가 줄어드는 등 긍정적 효과도 있었다.

 

압축도시 전략을 두고 학계 일각에서는 선택과 집중에 따라 소규모 마을들은 완전히 설 자리를 잃어버릴 수 있다는 반론도 있다. 하지만 지방 소멸이 워낙 급격히 진행되며 부작용이 커지고 있기에 학계나 정부 모두 압축도시 전략의 필요성은 인정하는 편이다. 박윤미 이화여대 교수는 생활거점이 아니라 개발되지 않는 외곽 마을이 생긴다 해도 이곳에 생활 필수 시설을 충분히 지원한다면, 압축도시의 부작용은 충분히 줄여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한국의 지방도시에 압축도시 전략이 적용되기엔 시간이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정부는 압축도시 전략을 직접 추진하지 않고, ‘도시재생 뉴딜사업에 집중하고 있다. 일부 지자체들이 압축도시 전략을 도시계획에서 일부 언급하기도 했으나, 본격적으로 현실에 적용하는 사례는 나오지 않았다. 지자체 대다수는 개발을 제한하는 전략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구 책임연구원은 인구감소가 심해지고 있는 만큼, 지자체들이 도시계획 방식을 스스로 바꾸길 기다리는 것보다 새로운 전략을 힘있게 추진할 수 있는 국가 차원의 조직을 마련할 필요도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최소한의 생활 위한 시설 얼마나 필요한지, 가이드라인 만들고 지원해야

생활시설 부족 개선하려면



경영난으로 폐업한 군위군의 옛 군위병원 건물. 박용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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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주택뿐 아니라 보육과 교육, 의료, 문화 등 기초생활에 필요한 시설(생활SOC)들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인구가 줄어들면 이런 시설들은 수익성이 줄어 운영하기 어렵게 된다. 생활SOC가 하나둘 사라지면 주민들의 불편은 가중되고 인구도 빠져나갈 수 있다.

지방에서 생활SOC가 부족해 주민들이 불편을 겪는 사례가 늘고 있다. 지난해 국토연구원이 10가지 생활SOC(보육시설, 노인복지시설, 응급의료시설, 일반 병·의원, 보건시설, 공공도서관, 체육시설, 공원, 문화시설, 공공주차장)에 닿는 시간을 지역별로 측정한 결과, 전국의 약 664000명은 10분 안에 이들 시설을 이용할 수 없는 곳에 살고 있었다. 도시 근교와 농어촌 지역, 특히 축소도시에 사는 주민들이 이 같은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다.

 

현재의 상황을 개선하려면 근본적으로 압축도시전략 등을 통해 드문드문 사는 주민들을 모여 살도록 유도해야 하고, 생활SOC도 이 지역에 모아줄 필요가 있다. 이렇게 되면 주민들이 생활필수 시설을 더 손쉽게 이용할 수 있고, 각 시설들도 운영·유지가 가능한 원동력을 얻을 수 있다.

전국 지방도시의 약 664000명생활

SOC 10분 안에 이용 불가능

 

정부·지자체 예산으로 지원 필요

민간 위탁해 지원금 주는 방법도

 

덜 필수적인 시설은 폐쇄하더라도

소수 주민 사회적 배려를 고려해야

문제는 압축도시 전략은 현실화되지 않는 반면, 생활SOC 부족에 따른 불편은 현재진행형이란 점이다. 이런 상황에선 생활SOC가 줄어들어 최소한의 삶을 유지하기 힘들어진 지역을 찾아 지원할 필요가 있다. 정부가 지난해 12월 발표한 생활SOC사업 추진방안은 이런 맥락에서 만들어졌다. 정부는 지방의 생활SOC 확충에 8조원 이상을 투입하기로 하고, 구체적으로 어떤 지역에 어떤 SOC를 보완할지를 정해 오는 3월 중·장기 계획을 발표할 예정이다.

 

도시계획 전문가들은 생활SOC를 효과적으로 확충하려면 우선 적절한 가이드라인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소멸위기지역에 사는 주민들이 최소한의 삶을 영위하려면 어떤 종류의 SOC가 얼마나 있어야 하는지 기준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국무조정실 생활SOC사업 추진단관계자는 지역의 인구수와 분포, 주요 시설까지의 거리, 주민들의 요구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가이드라인을 만들 예정이라고 밝혔다.

 

가이드라인에 따라 생활SOC가 부족한 것으로 나타난 지역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예산을 투입해 시설을 지원해야 한다. 충분하지 않아도 생활SOC를 이용할 수요가 있다면 시설을 새로 마련해 관에서 운영하거나, 민간에 위탁하고 지원금을 주는 방법이 가능하다. 근처에 유휴시설이 있다면 정부가 시설을 사들인 뒤 개·보수해 이용할 수도 있다. 다만 주민들이 이용하기 편리한 지역은 여전히 땅값이 비싼 경우가 많다는 점, 또 인구가 줄어드는 지자체의 재정 상황이 튼튼하지 않다는 점은 풀어나가야 할 과제다.

 

수요가 적어 생활SOC를 새로 짓기 힘들다면 주민들이 다른 지역의 시설을 최대한 편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셔틀버스나 저렴한 공공형 택시를 운영해 이동의 불편함을 줄이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현재 섬이나 산간 지역에는 영화상영이나 도서대여, 의료 서비스를 배달하는 식으로 운영하고 있다. 인구감소로 생활SOC로부터의 거리가 멀어졌는데, 개선이 쉽지 않다면 이런 배달 서비스를 운영할 필요도 있다.

 

이용하는 주민이 적은데도 생활SOC가 운영돼 비용만 나간다면, 시설을 닫거나 옮길지의 여부도 판단해야 한다. 특히 다른 생활SOC보다 상대적으로 덜 필수적이고, 재정 부담만 가져오는 시설이 있다면 폐쇄하는 게 낫다. 구형수 국토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지방에는 이용객이 없는 곳에 대형 종합체육관이나 전시관 등을 지어놓아 지자체의 재정 부담만 주는 경우가 꽤 있다. 향후 지자체 스스로 지역 상황과 맞지 않는 시설들을 객관적으로 가려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생활SOC를 폐쇄하는 과정에선 소수의 주민을 위한 사회적 배려가 필요하다. 폐교의 경우 아이들의 교육받을 권리를 침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멸위기지역에서 만난 한 교사는 경제논리로만 보면 사람을 위한 교육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있다농촌 지역이 다른 도시 지역보다 낙후됐다고 교육받을 권리가 없어도 된다고 생각하면 안된다고 말했다.

 

대학 폐교 문제도 마찬가지다. 학령인구 감소 등으로 지속 가능성이 없어진 대학들은 정부의 방침에 따라 폐교되고 있으나, 지역사회에선 대학이 지역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폐교에 신중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정부도 최근엔 대학 폐교에 따른 부작용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교육부는 올해 업무보고에서 대학을 지역혁신 및 지역발전을 위한 거점으로 육성할 방침이라며 대학 폐교가 지역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는 방안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다시 쓰는 인구론]어쩌다 자식은 부모에게 행복 아닌 이 되었나

출산부터 취업까지 돈에 눌린 양육

남는 건 자녀와 나의 불안한 미래

차라리부모가 되지 않는 선택

 

그래픽 | 윤여경 기자 tigeryoonz@kyunghyang.com

 

주변 사람들이 하는 대로 몇백만원짜리 유모차를 태우고, 아이에게 좋다는 것을 찾아 먹이고 입힌다. 유아기 때부터 취업준비생 때까지 최소한 남보다는 뒤처지지 않게 하기 위해 수천만원의 사교육비를 댄다. 그래도 자녀의 미래는 불투명하고, 아이 키우기에 올인한 나의 미래도 불안하다. 아이 키우는 데 돈은 필요조건일 뿐이지만, 아이 키우기의 8~9할을 가족 책임으로 여기는 사회에선 돈의 무게가 다른 조건을 압도한다. 아이를 키우는 일이 돈으로 다 되는 것도 아닌데 개인에게 모든 책임이 넘어오니 결국 돈 문제만 크게 부각된다. 자녀 가치에 대해 생각할 여유는 없다. 쏟아부었는데 아이의 미래가 불안하다면 부모는 어떤 선택을 내리게 될까. 부모가 되지 않는 것이다.

 

아이는 줄었는데 상품은 늘어났다

김미희씨(34·가명)는 지난해 8월 첫아들을 낳고 사진 공유 SNS인 인스타그램에 아들 계정을 만들었다. 친구들이 아기의 성장 과정을 올리는 것을 보면서 아이 크는 모습을 따로 기록해주고 싶었다. 아이 계정을 만드니 우리 소통하고 지내요라는 댓글과 함께 모르는 사람들이 팔로를 하기 시작했다. 광고 업체들이었다. 찜찜했지만 한편 익숙했다. 정보가 모이는 곳에는 언제나 장사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김씨는 인스타그램에서 또래들이 아이를 기르는 모습을 엿보며 육아 아이템을 자연스럽게 습득해갔다. 보습에 좋은 로션, 씻기기 편한 욕조부터 몇백만원짜리 유모차까지 절로 눈길이 갔다. 많은 육아용품을 주변 사람들에게 물려받았지만 빠진 것이 있으면 찾게 됐다.

 

인스타그램에는 우리 사회 부모 되기역할을 수행하는 다양한 소비 활동이 게시된다. 육아 관련 해시태그(정보 검색을 쉽게 해주는 메타데이터 태그)를 검색해보면 15일 현재 #맘스타그램(1353만여개), #육아스타그램(2188만여개), #딸스타그램(1684만여개), #아들스타그램(1406만여개) 등이 무수히 쏟아진다. 인스타그램에서 엄마들의 모습을 연구한 강혜원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미디어연구소 연구위원은 인스타그램에서 모성 실천은 육아 지식 생산자와 습득자의 경계, 정보와 광고 사이의 경계, 기록과 전시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특징을 보인다소비문화가 진화하면서 얼마를 쓸 것인지, 소비문화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해지고, 엄마들이 할 일이 더 늘었다고 말했다.


자녀가 성인 돼도 끝없는 부모 노릇청년 격차 더 벌린다

아이 키우기에 정말 필요한 것

본격적으로 육아 시장이 열리는 것은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다. 임신 확인을 위해 산부인과에 가면 연계 조리원, 성장앨범 촬영 업체들을 접하게 된다. 만삭사진, 50일 사진을 무료로 촬영해주면서 성장앨범을 패키지로 판매하는 식으로 업체들은 진화했다. 초보 엄마들이 육아와 상품 정보가 뒤섞인 정보를 받아들이는 곳은 조리원이다. 김씨도 몬테소리 수업과 분유 업체 수업을 참관했다. 아기 울음소리 익히는 법을 배우며 분유 상품을, 아기 모빌을 만들며 몬테소리 교재를 자연스럽게 접했다.

 

개인이 육아 책임 모두 떠맡으며

뒤처지지 않기위해 돈 쏟아부어

신조어 식스 포켓도 이젠 옛말

이모·삼촌까지 지원 에잇 포켓

 

백일잔치, 돌잔치도 이벤트가 되었고 상차림, 답례품 모두 상품으로 거래되고 있다. <엄마의 탄생>을 쓴 여성학 연구자 김향수는 전통적 통과의례인 돌잔치 준비나 진행을 전문업체의 서비스가 대체했다성장앨범과 같은 상업 의례들이 새로운 관습으로 자리 잡으면서 상업 의례들을 비교해 현명하게 소비해야 한다는 새로운 사회적 압력이 생겨났다고 밝혔다. 아이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는데 왜 상품의 개수는 계속 늘어날까. 유아용품 시장은 19905000억원 수준에서 201838000억원 수준에 이르렀다. 아이가 귀해지니 아이 하나를 위해 부모, 조부모, 외조부모 6명이 주머니를 연다는 식스 포켓이라는 신조어가 나왔고 이제 이모, 삼촌까지 붙어 에잇 포켓이 됐다.

 

0세부터뒤처질까 두렵다

놀이 형태를 띤 교육0세부터 시작된다. 백화점·마트 문화센터에서는 0~3개월짜리에게 하는 베이비 마사지 수업, 6개월 내외 영아들의 오감 자극 활동 등부터 찾을 수 있다. 사교육의 시기는 계속 내려와 유아 시장도 장악했다. 최근 전국보육실태조사를 보면 어린이집·유치원 시기 특별활동 프로그램 수는 평균 2.4개로 나타났다. 영어학원 형태나 놀이학교, 체육센터 등 기관을 다니는 아이들은 월평균 434300원을 쓰는 것으로 나타났고 영어학원 비용은 가구소득 대비 11.8%를 차지했다. 기관 이용으로 인한 비용이 부담되는 편이라는 의견은 53.5%, 매우 부담된다는 의견은 20.6%로 나타났다. 영아의 6.7%, 유아의 24%가 시간제 학원을 이용하고 있었는데 시간제 학원 중 부모 부담 비율은 영어가 119200원으로 가장 높았다.

 

딸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박미경씨(39·가명)는 영어학원이 고민이다. 유아기에는 영어유치원을 보내거나 학습지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해 왔지만 초등학교에 가서는 상황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구글 번역, 네이버 파파고 서비스가 나왔는데 영어학원을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 싫지만 여기는 한국이니까라며 마음을 다잡는다. “부모들은 다 아이의 적성과 흥미를 고려해 아이가 원하는 삶을 살도록 도와주고 싶어 하죠. 임금 격차가 크고 비정규직을 차별하는 사회라는 것을 부모가 알고 있는데 그럴 수 있나요?”

 

부모들이 원하는 것은 최고가 되는 것이 아니다. 평범해지는 것이다. <결혼과 육아의 사회학>을 쓴 사회학자 오찬호는 사교육의 효과는 부귀영화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평범하게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투자라고 말한다. “헬조선에서 평균치로 살아간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우니 사교육을 멈출 수 없다. 모두가 멈추지 않으니 모두가 시작점을 앞당긴다는 것이다. 오찬호는 사교육 없이 평범하기조차 힘든 세상은 누가 만들었나라고 묻는다.

 

2015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9개국 대상 자녀가치 국제비교 조사에서 한국의 부모들은 자녀에 대해 양면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녀는 부모에게 기쁨을 준다는 긍정적 답변도 많았지만, ‘부모의 자유를 제한한다’ ‘재정적 부담이 된다는 부정적 인식도 다른 나라에 비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은기수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한국 부모들은 자녀에 대한 가치가 서양 사람들과 다르다아이가 하루하루 자라는 것만 봐도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 귀한 자식을 얼마나 잘 가르쳐서 사회에서 성공시킬까를 생각한다고 말했다. 자녀와 함께하는 현재의 기쁨보다는 자녀의 앞날, 일생을 고려하면서 출산을 결정하다 보니 아이 낳기가 점점 힘들다는 말이다.

 

1명당 사교육비 6427만원 써야

겨우 보통사람수준 될 수 있어

대학 입학 후엔 취업 활동 지원

 

신한은행이 20183월 만 20~64세 금융거래 소비자 2만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2018 보통사람 금융생활 보고서를 보면 자녀 1명의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드는 교육비는 총 8552만원이다. 사교육비가 6427만원으로 75.1%를 차지했다. 대학 등록금까지 고려하면 다른 비용은 뺀 교육비로만 1억원 이상 든다는 말이다. 월평균 소득이 1000만원 이상인 가구의 자녀 1인당 총교육비는 14484만원으로 300만원 미만인 가구의 교육비 4766만원보다 3배나 많았다.

 

부모들이 책임지는 기간 점점 늘어

대학 입학 후엔 오히려 본격적으로 돈이 들어간다. 대학 등록금, 자녀 용돈 및 생활비부터 취업이 늦어지면 취업 준비를 위한 활동도 지원해야 한다. 청년실업률이 높아지고 청년이 갈 만한 일자리가 적으면 결국 부모 부담이 되는 구조다. 취직한다고 끝도 아니다. 결혼이 남았다. 신혼부부들이 자기 힘으로 구하기 힘든 서울의 집값은 결국 부모 부담이다. 김윤희씨(56·가명)는 딸이 대학 졸업 후 취업하는 데까지 3년이 걸렸다. 3년 동안 매달 용돈을 주고 토익학원을 다녀야겠다고 하면 학원비를 내줬다. “취업이 늦어졌는데 취업한 곳도 너무 월급이 적어 가끔 제가 도와주고 있어요. 아직 결혼도 남았는데 결혼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걱정이에요. 서울 아파트가 몇억이라는 얘기 들으면 기가 질려요. 부모 노릇은 언제 끝나는 건가요.”

 

취업포털 인크루트가 상장사 571곳의 인사담당자를 대상으로 일대일 전화조사를 한 결과 2018년 상반기 대졸 신입직원 최고령은 30.9, 최저령은 24.4세로 집계됐다. 1997년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30세를 넘은 신입사원이 증가하기 시작했고 인크루트 조사 결과 10년 사이 30세 이상 늦깎이신입사원 비율은 두 배 이상 늘어났다. 취업이 늦어지니 캥거루족’(자립할 나이가 됐는데도 부모에게 경제적으로 기대는 청년)부메랑 키즈’(대학·사회생활 등으로 수년간 부모 곁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청년)도 늘고 있다. 2018년 인크루트가 성인 남녀 3086명에게 설문조사한 결과, 정신적 독립과 경제적 독립 두 가지 모두에 대해 독립 전이라고 대답한 비율은 18.2%에 달했다.

 

청년들의 경제적 독립, 결혼도 모두 지연되고 있다. 2017년 초혼 연령은 남자 32.94, 여자 30.24세로 1997년 남자 28.59, 여자 25.71세에 비해 늦어졌다. 한국에서 성인기 이행의 비용은 가족이 책임지는 구조로 부모의 부양을 받는 청년 집단이 늘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부모의 양육 부담도 늘어난다는 의미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 결과 국민건강보험 가입자 중 25~34세 청년이 부모 피부양자로 있는 비율은 2002년에서 2015년까지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25~29세는 200225.3%였지만 201530%로 늘었고, 30~34세는 20029%에서 201512.8%로 늘어났다.

 

부모 자산으로 벌어지는 격차

한국 사회는 자녀 부양 책임의식이 높다. 2015년 가족실태조사를 보면 부모는 자녀의 대학교육비를 책임져야 한다49%, ‘자녀가 취업할 때까지 책임져야 한다33.7%가 동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러한 자녀 부양 책임의식은 역으로 부모 지원을 받지 못하는 청년들에게 격차를 만들고 있다. 김수민씨(33·가명)은 지난해 10월 결혼했다. 아내는 대학원에서 공부 중이고 김씨도 노무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지금은 구청 산하기관에서 일하면서 세전 230만원 정도 번다. 대전에 사는 김씨 아버지는 일용직으로 용접 관련 일을 하고 어머니는 일을 하다가 그만뒀다. 대학 때부터 과외를 해 자취 비용을 벌었다. 아내도 스무살 때부터 장학금을 받아 학비를 조달하고 생활비는 스스로 벌었다. 지금은 은행의 전세 대출 승인을 기다리고 있다.

 

친구들 중 부모 자산이 넉넉한 경우를 보면 부러움을 느낀다. “주변에 드라마 <SKY 캐슬> 같은 집안이 많은데 63빌딩에서 결혼식 하는 걸 보면서 부러웠죠. 원룸 구하러 다닐 때 빌라 건물주가 1988년생인 것도 봤어요. 그런데 계약은 50대인 아주머니랑 한단 말이에요. 88년생의 엄마겠죠. 속으로 서류상 건물주는 좋겠다고 생각하죠.” 김씨는 퇴근하면 오후 7시부터 3~4시간 동안, 새벽 630분에 일어나 2시간 정도 공부한다. 올해 꼭 합격하고 싶다. ‘억울함은 김씨의 동력이다. “ ‘라이선스 사회잖아요. 한국 사회에 억울함이 있기 때문에 열심히 해요. 자산에 따른 무시를 당하지 않으려면 전문 자격증을 따야겠다고 생각해요.” 아이는 2명 낳는 게 목표지만 당분간은 아이 낳는 것을 미루고 있다.

 

이지현씨(34·가명)의 경우 부모의 빚이 짐이 된 경우다. 남편 부모가 IMF 경제위기 때 빚보증 서준 게 잘못돼 채무 문제가 터질까봐 혼인신고도 안 하고 있다. 회사원인 이씨의 소득이 보험판매사인 남편보다 더 많다. 두 사람 소득을 합치면 월 500만원 정도. 10년 동안 연애한 사이지만 남편의 채무 문제를 전부 알지는 못했다. 결혼하고 더 알게 됐고 출산 계획은 미루게 됐다. “남편의 채무는 제 선택이니까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만 제가 감당할 부분에 2세까지는 안 들어 있는 듯해요.”

 

실제 부의 대물림을 목격할 때 속상하다. “시댁에서 집을 해줘 적어도 5~7억원 하는 서울 역세권 아파트에서 시작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경우 출발선이 이미 다르게 되는 거죠.”

 

부모 자산이 청년 세대의 격차를 만들고 가족이 사회적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도구가 됐다. 2017년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한국노동패널조사 9차 연도(2006)부터 18차 연도(2015) 자료를 통해 부모와 떨어져 사는 19~39세 미혼인과 이들의 부모를 분석한 결과 부모와 자녀 모두 경제적 지원을 주고받는 경우는 다른 집단에 비해 정규직이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세대 간 자원 이전이 계급적 위치를 강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부모 자산 따른 격차 대물림 막고

아이 키우기 불안감 해소하려면

개인 단위로 복지 제도 다시 짜야

 

·창업 준비활동 비용 지원 여부에서는 현재 부모의 경제적 지위가 영향을 주는 변수로 나타났고 하층에 비해 중간층과 상층일수록 부모가 경제적으로 더 많이 지원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또 고교 졸업자보다 대학 졸업자가 취업 지원을 더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부모의 계층은 자녀의 소득에 일관되게 정비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나타났다. 대학 학비 지원의 경우 자산 5억원 이상일 때 학비를 지원하는 비율이 더 높았다. ·창업 준비활동 비용 지원 여부에서는 현재 부모의 경제적 지위가 영향을 주는 변수로 나타났고 하층에 비해 중간층과 상층일수록 부모가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격차 확대의 악순환을 끊으려면 성인기 이행까지의 지원 구조를 총체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김영란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가족이 아니라 개인 단위로 복지 제도를 다시 짜야 한다“20대가 되면 부모의 경제 지원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 북유럽처럼 가야 부모 자산 격차로 인해 청년들 격차가 생기지 않고 사람들이 아이를 낳고 싶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부모 지원 없이도 홀로 서도록유럽 주요국, 20대 청년층까지 포괄하는 보장제도 갖춰

유럽의 청년보장 제도

교육지원에 생활비·주거지원까지

부모의 경제력에 의존하지 않고도

교육에 전념하도록 하는 게 핵심

·유아 지원 머무른 한국과 대조



초저출산 현상은 감당하기 어려운 높은 양육부담의 결과이다. 한국 사회도 아동·청소년 지원정책이 틀을 갖춰가고 있지만 주로 영·유아를 대상으로 한 가족지원정책의 틀에 머물러 있다청년은 정책의 대상에서 소외돼, 부모의 경제적 지원에 의존하거나 부모의 경제력에 따라 교육·취업 기회가 불평등하게 나타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유럽이 대학생과 직업을 구하지 못한 20대 청년층까지 포괄하는 보장제도를 폭넓게 갖춘 것과 대조적이다.

 

유럽의 청년보장제도는 유엔 아동권리협약에 있는 성인 이전의 존재들은 개인으로서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정신을 근거로 한다. 유엔헌장 등에서 아동은 18세까지로 규정되지만 시대 변화에 따라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시기가 늦어짐에 따라 20대 후반까지 포괄하는 다양한 정책이 만들어지는 추세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청년실업률이 급상승하면서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각국의 현실에 맞는 청년보장제도를 만들 것을 권고했다. 청년보장제도는 교육지원과 공공부조, 고용지원, 주거지원, 의료지원으로 구성돼 있다. 교육지원에는 생활비와 주거지원까지 포함된다. 공공부조는 실업급여와 장애·빈곤 청년에게 주는 지원이다. 부모의 경제력과 무관하게 불안에 내쫓겨 질 낮은 일자리로 섣불리 취업하지 않고 교육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다.

핀란드에서는 교육비가 무료이며 17세 이상 학생에게 학업보조금이 부모 소득에 따라 차등 지급된다. 독일에는 바펙이란 주거비를 포함한 생활비 지원제도가 있다. 고등학생까지는 전액 무상지원이며, 대학생은 반액만 상환한다. 대졸 취업준비생도 12개월간 저리융자 형태로 바펙을 이용할 수 있다.

 

아일랜드는 주거급여 대상자의 경우 사회주택과 임대료 보조금을 지급하며, 연간 소득 15000유로(1918만원) 이하 저소득층의 경우 주택 구입 시 국가가 40%, 50%, 60%씩 지원한다. 단 한 번도 직장생활 경험이 없거나 불안정한 일자리에 있는 사회초년생을 위한 생계지원도 발달해 있다. 독일, 핀란드는 직장생활 경력이 없는 취업준비생을 위한 실업급여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프랑스에는 니트(직장에 다니는 것도 아니고 교육이나 직업훈련을 받는 상태도 아닌 청년)가 구직활동에 뛰어드는 것을 지원하는 수당이 있다. 네덜란드에서는 21~26세는 취업했더라도 불안정 노동에 종사하거나 사회에 안착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소득에 따라 차등적으로 수당을 지급한다.


한국에서 근로장려금이나 실업급여는 직장 경력이 있어야 수혜를 받을 수 있다. 직업훈련 보조금인 취업성공패키지 프로그램은 대학 4학년(전문대 2학년)에게만 적용된다. 올해부터 19만명을 대상으로 청년구직활동지원금 지급이 시작되지만 지급 요건을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건강보험료 기준 소득 인정액이 중위소득 120% 혹은 150% 이상 가구에 속한 청년은 제외되는데 부모가 서울에 아파트 한 채만 있어도 적용 대상에서 제외될 소지가 크다. 19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는 취약계층을 위한 맞춤형 정책이 부족하다는 것도 특징이다. 결국 미취업 청년 대다수는 부모의 뒷바라지 없이는 생활이 불가능하다.

 

부모가 청년 자녀에게 경제적 지원을 하는 구조는 정책 설계에도 어려움을 준다. 형편이 어려우면 취준생 기간이 오래 걸리는 게 아니라 좋지 않은 일자리, 비정규직으로 취직하기 때문에 오히려 취업 준비기간이 짧다. 반대로 대학 때 전폭적으로 지원받아 바로 취업되는 경우 등을 보면 계층 간에 취업 준비기간이 제각각이다. 부모의 계층이 높을수록 취업 준비기간이 길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집안 사정이 안돼서 바로 취직해 구직활동지원금을 못 받는 경우도 생겨난다. 신혼부부 주거지원도 개인 소득을 근거로 보는데 부모 자산을 받는 경우에 역전될 수도 있다. 가령 부부가 합쳐 연봉 8000만원을 받으면 신혼부부 주거지원을 못 받지만 부모가 생활비를 지원해주는 대학원생 부부는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김기헌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유럽 청년보장제도의 기본은 국가와 시민 간의 계약이라며 청년 개개인에 대한 보편적 지원이 한국에서도 확산되려면 청년의 교육과 훈련에 대한 지원은 공공성을 위한 일이라는 의식이 강화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천재도 울리는 AI시대, 재능 죽이는 사교육은 왜 할까요

다른 인생 전략을 찾아서

 

지난 4일 전진한 알권리연구소장, 서울 오디세이학교 수료생인 양연주양, 안혁군(왼쪽부터)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전 소장은 사람이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찾을 때까지 기다려주는 사회, 양양과 안군은 실패해도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20163월 이세돌 9단이 구글의 알파고에 처음 패한 날. 언론 헤드라인은 이렇게 장식됐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이겼다.” 알파고는 거침없는 행보 끝에 세계랭킹 1위였던 중국의 대표 바둑기사 커제 9단까지 3 0으로 물리쳤다. 커제 9단은 알파고와의 마지막 대국 중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터트렸다.

 

커제의 울음은 사람의 두뇌가 인공지능에 패배한 상징적인 장면이 될 거예요.” 전진한 알권리연구소장(45)은 그 장면을 보고 며칠간 멍하게 보냈다. 이어 그해 전 소장은 모교인 대구대에 강의를 갔다가 충격을 받았다. 후배들이 희망이 없다고 느끼는 모습에 우리 때보다 더 처참해졌구나라고 생각했다. “지방 사립대라는 낙인이 찍혔다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4차 산업혁명 시대라면서요. 기껏 20대 초반인 친구들이 그렇게 위축돼 있는 게 맞는 시대냐고요.”

 

후배들에게 성공 모델이 있다고 소개하고 싶었다. 강의를 하기 시작했다. 전국 평생학습관에서 요청이 왔고 강의 횟수가 70회를 넘어서면서 <4차 산업혁명 시대, 우리 아이의 미래는>이라는 책을 냈다. “교육 전공자가 아니에요. 내 얘기를 한 것뿐이죠. 저도 학원 엄청나게 다녔지만 하나도 안 남았거든요.” 그는 고등학교 때까지 공부를 못했지만 법학과에 진학해 법의 이해수업을 들으면서 잘하는 걸 알게 됐다. ‘법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논리적으로 생각을 전개하는 시험이었다. A+를 받았다. “그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책 쓰는 게 꿈이었고 지금은 책을 공저까지 6권 냈으니 꿈을 이룬 거죠.”

 

그는 2002년 참여연대에서 처음 정보공개운동을 시작했고 2008년 정보공개 및 기록관리 전문 단체인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를 만들었다. 2015년에는 협동조합 알권리연구소를 출범해 현재 대통령기록관리 전문위원, 청와대 정보공개 심의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시민단체를 스타트업에 비유한다면 2개의 스타트업을 만들어냈고 성공시킨 셈이다.

 

스스로 깨어날 때까지 기다려라

두 아들 키우는 전진한 알권리연구소장

 

공부로 상처주지 말고 아이들이 무언가 하고 싶을 때까지 기다려야

다르게 산다는 자부심만 있으면 늦게 일 시작해도 재밌게 살 수 있어

 

전 소장은 16, 11세 아들 둘이 있지만 사교육을 거의 시키지 않는다. 작은아들이 태권도학원을 다니는 정도다. 공부는 재능이라고 생각한다. 재능이 없으면 학원을 아무리 보내도 안 한다는 것이다. “공부로 상처주지 말고 무언가 하고 싶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때까지 아낀 돈을 줘야겠다고 생각 중이죠.” 한 달 학원비 70~80만원을 1년 모으면 1000만원이다. 5년만 학원에 안 다녀도 5000만원이 생긴다. “아이들 공부시키는 목적이 재능을 발견하는 것인데 우리는 재능을 죽이는 데 돈을 쓰고 있는 거예요.”

 

알파고가 이세돌을 물리칠 때 깨달았다. “그전에는 강남의 유치원 보내고 학원 보내고 차로 데려오고 똑같았어요. 한 달에 70만원 넘게 썼죠. 2016년부터 아무것도 안 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에게 대학은 물론 고등학교도 안 가도 된다고 말해줬습니다. 서른살 될 때까지는 기다릴 생각입니다. 저도 스물세살부터 공부하기 시작했으니까요. 공부 안 하고 장사해도 되고요.”

 

큰아들은 집 앞 고등학교에 진학하겠다고 밝혔다. “저는 그게 에너지라고 생각해요. ‘내 인생은 내가 책임져야 하는구나라는 불안이 에너지가 되겠죠.”

 

스스로 동기부여가 안되면 어떤 공부를 해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선 초··, 대학교까지 한 번도 자기 인생을 실존적으로 고민해보지 않는다. ‘유튜버라는 직업을 몇 년 전에는 상상할 수 있었을까. 취업 포털 잡코리아가 직장인 및 취업준비생 4147명을 대상으로 미래에 사라질 직업에 대해 설문조사한 결과 1위는 번역가(31%)였고 2위는 계산원(26.5%)이었다. 5위는 비서(11.2%), 8위는 약사(9.3%)로 조사됐다. “제가 어릴 땐 말 잘하는 아이는 주의가 산만하다고 했어요. 지금은 말 잘하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다양한 일들이 있죠. 저도 대중 강연을 하면서 느꼈어요.”

 

인공지능이 사람의 노동을 대체하고 있다. 학교 교육의 80%는 앞으로 필요 없는 교육이 될 것이라고 본다. 대학도 구조조정되고 있다.

 

전 소장은 원시적이고 자연적인 것, 사람과 교감하고 나누는 능력이 주목받을 것이라고 본다. 그는 집 주위에 있는 평생학습센터에 등록하라고 조언한다. “산업화 시대에는 20세까지 교육시켜서 60세까지 일을 시키는 게 목표였죠. 그런데 학교 지식 사용기간이 10년도 안돼요. 저는 마흔 넘어서도 책 읽는 사람들이 인생을 지배한다고 생각해요. 어릴 때는 놀고 나이 들면서 더 공부해야 해요.” 인생은 맞고 틀리고가 없다. ‘다른 것이다. “다르게 산다는 자부심만 있으면 얼마든지 재밌게 살 수 있어요. 마흔 정도에 본격 일을 시작한다고 생각하고 40부터 80까지 일하면 되니까 청년들에게 초조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실패할 기회가 있어야죠

서울 오디세이학교 수료한 양연주양·안혁군

사람을 등급화하는 학교는 싫어교육은 실패할 기회를 만들어줘야

사회가 말하는 길을 못 따라갈까 걱정하지 않고 내 길을 찾는 법 배워

 

스스로 자기 길을 찾아나서는 청소년들도 있다. 안혁군(17)과 양연주양(17)은 지난해 12월 서울 오디세이학교를 수료했다. 오디세이학교는 중학교 3학년 졸업생을 대상으로 자유학년제를 운영하는 1년 과정의 서울 공립학교다. 덴마크의 애프터스콜레를 본떠 만들었다. 애프터스콜레는 덴마크 의무교육인 9학년 졸업 후 10학년 진학 전 학생들이 1~2년 정도 기숙사 생활을 하며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는 학교다. 오디세이는 그리스 신화에서 온갖 위협과 유혹을 물리치며 난파와 표류의 고비를 넘기고 고향으로 돌아온 영웅 오디세우스의 항해처럼, 고등학교 1학년 과정에서 새로운 도전과 경험을 통해 삶의 의미와 방향을 찾아가는 교육원정대를 뜻한다.

 

일반고나 자율형공립고에 학적을 둔 상태에서 1년간 배움을 거친 후 원적 학교 1학년 또는 2학년으로 진학할 수 있다. 하자센터, 꿈틀, 서울혁신파크, 민들레 등 오랫동안 교육의 본질을 고민해온 민간 대안교육기관들이 협력운영기관으로 참여한다. 학생들은 이 4곳 중 원하는 곳에서 수업을 받는다. 1년에 90명 선발한다.

 

양양은 중학교 때 사람을 등급화하는 게 싫었고 공부를 왜 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는 3 때 성적이 잘 나오니까 친구들이 너는 시험 못 봐도 되지 않느냐고 묻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어차피 오디세이학교 갈 건데 학교 활동 열심히 한 게 아깝지 않으냐는 것이었다다들 학생회·동아리 활동을 스펙 쌓으려고 한 건데 저는 혼자 거기서 놀았구나 싶었다고 했다. 학교에서도 오디세이학교를 추천하지 않았다. 안군은 “3학년 때 학생회장을 했다. 스펙을 위해서가 아니라 봉사하려는 의미가 컸는데 오디세이학교 간다니까 선생님들이 많이 반대했다고 말했다.

 

안군이 오디세이학교를 알게 된 것은 중3 때 오디세이학교 체험의날을 다녀와서다. 선생님 중 한 명이 말했다. “100년의 인생 중 한줄기 빛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 처음으로 100세 시대라고 하는데 1년 정도는 아무것도 못 찾더라도, 놀아도 되는 것 아닌가 생각했다. 양양은 다들 그저 안정적으로 대학 가면 되겠지 생각하는데 오히려 교육은 실패할 기회를 만들어줘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했다.

 

오디세이학교에서는 사람과 세상을 넓게 보는 법을 배웠다. 오디세이학교는 분절적 지식 체계에서 벗어나 통합적으로 배우는 넘나들며 배우기’,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 배우는 실행하며 배우기’, 협력과 상호작용을 통해 배우는 더불어 배우기’, 노작과 수행으로 배우는 몸으로 배우기로 교육과정이 구성돼 있다. 양양은 서울혁신파크에서 전기와 화학물질로부터 자유로운 제품들을 만드는 비전화(非電化) 공방운영진을 만난 연계수업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함께 카페 벽면을 흙으로 메우는 작업을 했는데 손으로 하는 것의 즐거움, 같이 노동을 한다는 것의 소중함을 느꼈다. “다 같이 쪼그려 앉아 몇 시간씩 흙을 바르고 있는데 뭉클한 마음이 느껴지더라고요.”

 

미래가 명확하진 않다. 입시는 여전히 숙제다. “오디세이학교를 마치면서 선생님이 수능이나 입시에 대한 의미를 찾으려 하지 말고 수단으로 생각하라고 하셨어요. 열심히 하면 재밌는 걸 찾을 수 있을 거라는 뜻이었죠. 기존에 사회가 말하는 길을 못 따라갈까 걱정하지 않고 제 길을 찾으러 간다고 생각하려고요.”(안혁)


[다시 쓰는 인구론]사회·경제문제가 다 내 탓? ‘인구는 억울하다

그래픽 | 성덕환·윤여경 기자

 

국가 소멸 등 공포 신조어에도

인구 51635256명 역대 최대

예측 빗나가 특별추계 또 시행

 

2018년 말 현재 대한민국 인구는 51635256. 인구가 줄어든 적 없으니, 우리는 역사상 가장 인구가 많은 시대를 살고 있다. 2016년 발표한 통계청 추계대로라면 적어도 10년 이상은 해마다 최대 인구 기록을 새로 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례없는 인구 풍요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역설적으로 해마다, 분기마다 인구감소를 걱정하고 있다. 인구절벽, 인구붕괴, 지방소멸, 국가소멸이라는 신조어들이 뿜어내는 음울한 공포가 사회를 휩쓸고 있다.

 

인구 4000만명을 막 넘긴 1980년대 초만 해도 정반대였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한참 여유로운 상황인데도 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이라며 인구팽창과 인구폭발을 걱정했다. 아이 많이 낳는 것이 눈총 받던 시기였다.

 

인구추계도 곧잘 현실과 엇가고 있다. 2006년 통계청 추계대로라면 지난해 한국은 4934만명으로 총인구수 정점을 찍고 이미 인구감소가 시작됐어야 한다. 그러나 10년 후인 2016년 발표한 인구추계에선 인구감소 시점이 14년 후인 2032년으로 늦춰졌다. 인구감소는커녕 2012년 인구 5000만 시대를 연 이래, 8년째 인구증가세가 지속되고 있다.

 

또 합계출산율(중위수준 기준)2016년 통계청은 20171.20, 20181.22 등으로 계속 증가해 2065년엔 1.38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지만 현실은 거꾸로다. 20161.17, 20171.05를 기록했고, 2018년 잠정수치는 1 밑으로 떨어졌다.

 

상식적인 궤적을 벗어난 출산율 하락에 통계청은 오는 3월 기준을 조정한 특별추계 결과를 다시 발표할 예정이다. 앞으론 2년마다 인구추계를 내기로 했다. 얼어붙은 심리에 숫자는 이탈하고, 현실을 뒤따라 다시 기준이 바뀌는 상황이다.

 

인구는 숫자가 아닌 다른 이유로 움직이고 다른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합계출산율 얼마가 무너지고, 인구가 얼마나 줄어들 것이며, 인구 얼마는 꼭 지켜야 한다는 과도한 공포나 협박, 구호가 아니다. 냉정한 현실진단이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 얘기해야 할 때다. 냉철한 분석과 진단에 따라 한 발씩 믿고 따라갈 수 있는 미래계획서가 우리에겐 필요하다.

 

대체출산율 무너져도 산아제한’, 뒤늦게 출산장려헛발질만

인구정책에 관한 한 한국은 계속해서 헛발질을 해왔다. 미래를 읽지 못한 채 현상만 보고 잘못된 진단, 잘못된 처방을 반복했다. 극심한 미스매치 형국이었다. 돌아보면 현재의 장기적인 초저출산 상황은 정부의 실기와 정책 실패가 만들어낸 합작품이다.

 

여성 한 명이 낳는 자녀 수가 평균 6명을 넘던 1960년대, 정부는 인구 증가가 경제에 위협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1961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맞춰 강력한 인구 증가 억제정책을 도입했다. 전국적인 조직과 전 국민적인 계몽으로 군사작전하듯 펼친 산아제한의 결과 20년이 채 되지 않은 1970년대 말의 합계출산율은 2명 중반대까지 극적으로 떨어졌다.

 

1983년은 인구 규모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합계출산율 2.1이 무너진 중요한 해였다. 그러나 당시 정부는 오히려 더욱 강력한 산아제한을 펼쳤다. 그해 7월 인구가 4000만명을 돌파하자 산아제한 정책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정부는 전국 주요 도시에 인구 증가의 경각심을 알리는 인구시계탑까지 세우며 역주행을 계속했다.

 

전두환 정권은 임기인 1988년까지 합계출산율을 인구대체 수준 2.1명으로 저하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밀어붙이기식 정책을 추진해 목표치는 5년이나 앞당겨 초과 달성했고, 1984년엔 합계출산율이 1.76으로 뚝 떨어졌다. 그러나 1980년대 내내 둘도 많다’(1982), ‘하나로 만족합니다. 우리는 외동딸’(1986) 등 자녀 한 명 출산을 강조하는 포스터가 계속 나붙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출산율은 곤두박질하며 위험신호를 보냈지만, 아무도 이 징후에 주목하지 않았다. 1994년 합계출산율 1.66을 기록한 이후 19991.43, 20021.18까지 떨어졌다. 1996년 정부는 인구 자질 및 복지 증진정책을 발표했지만, 이 역시 당시의 낮은 수준 출산율 유지를 목표로 설정했다는 점에서 출산 억제정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1997년 이후부터 낮아진 출산율은 외환위기의 영향으로만 인식됐다.

 

저출산 돌입 못 읽어낸 정부

30년 허송세월 후 정책 전환

장기 저출산 터널 입구에 들어섰다는 시그널을 읽지 못하고 30년을 허송세월한 정부는 결국 2005년 합계출산율이 당시 최저치인 1.08을 기록하며 바닥을 치고서야 정책을 전환한다. 2006년 제1차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이 시행되며 출산율 회복을 위한 방향으로 인구정책을 틀었다.

 

인구정책의 주기는 길다. 효과가 나타나려면 오래 기다려야 하고, 한번 시작된 흐름을 바꾸려면 그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어떤 대책을 내놔도 백약 무효인 극심한 저출산 상황은 오랜 기간, 인구정책의 전환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출산 대책으로 전환할 시기도 놓쳤지만, 인구정책 전환 초기 방법마저 잘못됐다는 게 더 큰 문제다.사실 저출산이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선진국 대부분이 저출산으로 고민하고 있다.

 

인구학자들에 따르면 의학 발달로 기대여명이 늘고, 노동력으로서의 인구 중요성이 감소되는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얽히며 고출산·고사망에서 저출산·저사망으로 가는 것이 인류의 공통된 인구변천 과정이다.

서유럽, 합계출산율 1.5명 이상

가족친화적 제도 정착 노력 등

인권 중심 대책, 성과로 나타나

그러나 같은 인구변천 과정을 겪으면서도 선진국은 우리와 달랐다. 서유럽의 많은 국가들이 인구변천을 겪으면서도 합계출산율을 1.5 이상으로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수십년간 가족친화적 제도와 정책들을 만들고 뿌리내리며 사회변화가 가족과 개개인에게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최소화하려 노력했다는 점이 꼽힌다.

 

우해봉 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은 인구변동의 국제 동향과 중장기 인구정책 방향보고서에서 “1994년 카이로 국제인구개발회의는 인구정책의 초점이 인구통제를 강조한 전통적인 인구와 발전 패러다임에서 개인의 건강과 복지, 인권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전환된 중요한 계기였다고 짚었다.

 

위에서 아래로의 일방적인 하향식 인구정책은 한계에 직면했고, 선진국의 경우 사회구성원들의 동의를 얻는 공감대 형성이 인구정책에서 매우 중요한 과제로 등장했다고도 설명했다.

 

한국은 인구통제형 대책 계속

국가주의·가부장적 태도 여전

반면 우리는 외피만 저출산 대책으로 갈아입었을 뿐 개인과 인권을 강조하는 선진국형 인구대책 대신, 산아제한하듯 아이를 많이 낳으라고 몰아붙이는 인구통제형 대책이 계속돼왔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다. 1960년대 ‘3명 자녀를 3년 터울로 35세 이전에 단산하자‘3·3·35’ 표어는 2000년대에 결혼 후 1년 내 임신하고 2명의 자녀를 35세 이전에 낳아 건강하게 잘 기르자‘1·2·3’운동으로 바뀌었다.

 

최슬기 한국개발연구원(KDI) 교수는 “1983년에 대체출산율 아래로 내려간 이후 저출산 추세가 지속됐지만 정부나 학계에서 이 부분을 고민하지 않았다. 세계는 일찌감치 인구정책에서 인권을 강조하는 쪽으로 방향 전환이 이뤄졌는데 우리는 그 흐름을 놓쳤고, 아직도 인구정책에서 국가주의의 틀, 가부장적 태도를 버리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출산과 관련된 젊은 세대의 반감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고도 했다.

 

개인보다 집단을 앞세우며 가부장제의 틀이 공고한 동아시아 국가들이 공통적으로 저출산의 늪에 빠져 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인구전문가들은 선진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저출산 추세를 바꾸긴 어렵지만, 한국의 비정상적인 초저출산 문제는 접근 방식에 따라 해결 여지가 충분하다고 말한다. 그러려면 출산율을 목표로 하는 정책은 잊으라고 공통적으로 조언했다.

 

 

인구를 얘기할 때 알면 유익한 지식들

인구의 3요소는 출산, 사망, 이동이다. 3가지 요소들의 조합으로 인구의 규모(크기), 인구구조가 달라진다.

 

한국에서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는 출산과 관련해선 합계출산율이 기준이 된다. 합계출산율은 여성 1명이 가임기간(15~49)에 낳을 것으로 기대되는 평균 출생아 수를 의미하는데, 현재의 인구 규모를 유지하기 위한 대체출산율은 2.1명이다. 한국은 2002년 이후 합계출산율이 평균 1.3을 넘지 못하는 초저출산국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사망과 관련해 중요한 기준은 기대여명이다. 기대여명이란 특정 연령의 사람이 앞으로 생존할 것으로 기대되는 평균 생존 연수를 말한다. 특히 출생 시의 기대여명을 평균 수명이라 한다.

 

2017년 태어난 출생아의 평균 기대수명은 82.7(남성 79.7, 여성 85.7)이었고, 201760세 성인은 남성이 22.8, 여성이 27.4년을 더 살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됐다.

 

저출산·고령화가 심화되며 인구의 수 못지않게 중요해지는 것이 인구의 연령구조다. 국제 공통으로 0~14세를 유소년, 15~64세는 생산가능인구, 65세 이상은 고령인구로 나눈다. 생산가능인구 100명당 부양할 유소년인구, 고령인구 수를 각각 유소년부양비, 노인부양비라 하고 이를 합한 수를 총부양비라 한다.

 

한국의 총부양비는 201736.8(유소년 18.0, 노인 18.8)이지만, 2065년엔 108.7(유소년 20.1, 노인 88.6)으로 급증할 것으로 추계된다. 총인구를 연령순으로 나열할 때 한가운데 있는 사람의 연령을 뜻하는 중위연령도 201742.0세에서 2065년엔 58.7세까지 수직상승할 것으로 전망된다.

 

<가족과 통치: 인구는 어떻게 정치의 문제가 되었나>의 저자인 조은주 명지대 조교수는 우리는 흔히 인구를 원래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지만, 인구는 근대 이후에 생긴 매우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개념이라고 말한다. 근대에 들어 통계학이 발전하면서 인구는 객관적 데이터로 변했으며, 근대국가는 그 인구를 통제, 조정하면서 사람들을 통치하기 시작했다는 설명이다.

 

전광희 충남대 사회학과 교수는 인구는 근대국가가 생기며 영토, 국민, 주권이라는 국가의 3요소 중 하나로 부각됐다. 조세와 징집을 위한 인구는 부국강병의 일환이었고, 통치자의 입장에서는 힘의 표현이었다고 설명했다.

 

우리나라에선 1960년을 기준으로 1964년에 첫 장래 인구추계 통계가 나왔다. 1996년부터는 국가통계로 5년마다 50년간의 인구추계가 작성돼, 이를 기준으로 재정전망과 국민연금 추계, 병역자원과 교원수급을 계획한다.

 

생산·경제·국력, 인구 탓만 말고 한 명의 가치·삶의 질높여야

 

모든 게 인구 때문? 인구는 억울하다

최근 몇년간 우리 사회에서는 거의 종말론적인 인구위기론이 쏟아지고 있다. 신호탄은 미국의 한 경제학자가 2014년 인구절벽이란 말을 앞세운 책을 펴내면서다. 저자가 말한 인구절벽이란 생산가능인구(15~64)의 비율이 급속도로 줄어드는 현상이다. 저출산과 고령화가 계속되며 생산가능인구 비율이 줄고, 소비도 위축돼 경기가 침체될 것이라는 것이 우려의 골자다.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는 초저출산은 우려할 만한 상황이지만, 그렇다고 인구 문제에 모든 화살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적인 지적이다.

 

저출산 등 인구 문제 풀린다고

빈곤·청년실업·양극화 해결되나

인구 탓하는 건 문제 회피 수단

사회·경제 문제 풀어야 답 나와

황명진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인구 문제가 풀리면 우리 사회의 다른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이냐고 되물었다. 그는 현재 빈곤과 청년실업, 양극화 문제 등이 심각한데, 출산율이 오른다고 해서 아무것도 해결되는 것은 없다. 인구 문제 탓을 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문제를 회피하기 위한 수단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은기수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도 인구가 적어도 노동생산성이 높으면 괜찮은데 인구 줄어드는 것만 걱정하고 있다. 인구 문제보다 전체 인구 중 비율이 줄어드는 청년층의 실업률이 높다는 게 더 문제라고 말했다.

 

인구를 탓하기 전에 사회경제적인 문제에 대응해야 답이 나온다고 강조했다.

 

한 세대 전인 1988년 인구 규모는 현재보다 1000만명 가까이 적은 4200만명 정도였다. 당시 경기가 호황이었고, 인구 문제가 별반 거론되지 않았던 걸 보면 인구의 절대치인 인구 규모 자체가 사회발전과 크게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인구와 투자의 미래>를 쓴 홍춘욱 키움증권 팀장은 나라 망한다고 목소리 높이는 자들은 소비자로서의 인구를 걱정하는 경우가 많다. 분명 인구가 감소하면 교육·유아 사업 등 내수시장만 바라봐야 하는 소비 쪽 일부 부문에 부정적 영향을 주는 건 사실이지만, 모든 것에 인구 감소를 끌어들이는 건 말이 안된다고 지적했다. 현재의 인구도 제대로 살지 못하는데 인구가 줄어드는 게 뭐가 문제냐는 말이다. 홍 팀장은 위기다, 위기다 말하면서 자꾸 불안하게 하지 말고 현재의 상황을 판단하고 차분히 대응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인구학의 시조로 불리는 맬서스는 1798<인구론>을 쓰면서 인구의 폭증과 이에 따른 비관적 미래를 예측했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것이 그 유명한 구절이다. 자손을 많이 낳으려는 인간의 속성을 그대로 방치할 경우 식량이 인구 증가를 따라잡지 못할 것이라는 예측이다. 그러나 기술 발전으로 식량은 남아돌고, 선진국에서는 인구 감소가 걱정거리다. 맬서스 이후 모든 인구 관련 가설이나 추계는 빗나갔다. 맬서스는 인간이 적응의 동물임을 간과했다.

 

앞으로는 어떨까. ‘인구절벽의 저자는 노동력 감소를 걱정했지만, 기업 입장에선 인구가 줄어도 기계와 인공지능의 시대에 노동력은 그리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생산을 해도 팔리지 않는 소비절벽이 기업의 솔직한 우려일 수 있다. 국가 입장에선 납세자가 줄어든다는 문제가 있다. 개인의 입장에서는? 서용석 카이스트(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교수는 인구고령화가 문제라면 사회적으로 이것을 해결하려는 노력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 명 한 명이 중요해지는 사회

인구가 줄면 국가적 위기일까. 인구는 여전히 국력과 연관되어 떠오르는 말이지만, 전문가들은 앞으로는 인구의 규모보다 인구의 질이 중요해질 것이라고 한목소리로 전망했다. 경제력과 군사력으로 국력을 따졌던 시대에서 이제는 한 차원 다른 국가경쟁력을 갖춰야 선진국 대접을 받으며 국제사회의 발언권을 높일 수 있다는 얘기다. 또 인구 감소는 좁은 땅에서 치열한 경쟁을 겪어야 했던 우리 사회가 한 명 한 명의 가치를 되돌아보게 하고, 그리하여 한 단계 성숙할 수 있는 체질개선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서용석 교수는 체력이 국력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앞으로는 인구의 질이 곧 국력이 되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서 교수는 우리 사회는 인구가 늘어나며 소비와 생산을 견인하는 성장 중심의 시스템에 맞춰져 있다. (인구수)이 다시 안 찐다면 몸에 맞게 옷을 조정해야 하는데, 우린 아직 과거와 결별하지 못했다. 인구도 경제도 양보다 질로 승부하는 체질로 바뀌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몇가지 숫자만 봐도 확연하다.

 

삶의 만족도 OECD 상위 13개국

상대적빈곤율 대부분 낮지만

한국, 국민소득 3만불 시대에도

분배·복지 취약해 빈곤율 높아

선진국이라 꼽히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여개 회원국 중 인구 1000만명을 넘는 나라는 절반 정도다. 전 세계 인구의 76%를 차지하는 27개국 명단을 보면 인구수와 국제사회에서의 발언권이 그다지 큰 연관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행복도와 1인당 국민소득 순위는 인구수와 더욱 관계가 없다. 오히려 분배수준과 연관이 깊다.

 

조현 외교부 차관은 지난해 초 ‘21세기 국력의 세 가지 축: 자유, 효율, 공정이라는 글을 통해 새로운 국력의 세 축으로 정치적 자유, 경제적 효율성, 사회적 공정성을 꼽았다. 조 차관은 “21세기 국력의 개념은 강성권력, 연성권력 및 국가적 결집력을 총체적으로 고려하여 국제사회의 보편적 가치를 이끌어가는 가치지향적 권력(normative power)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현재 국제사회가 실현하려는 인간 중심적 가치와 포용적 사회를 이끌어 갈 수 있는 힘이 강국의 지표가 된다는 의미다.

 

한국은 어디에 서 있나. 경제성장과 민주화는 이뤘지만 사회적 공정성은 선진국 중 하위권이다. 국민소득 3만달러 시대에 접어들었지만, 삶이 나아지지 않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다. 소득이 중위소득의 절반에 미치지 못하는 상대적 빈곤율이 14.4%에 이른다. OECD 조사 대상 34개국 중 10번째다. 성장의 온기가 아래로 퍼지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OECD 삶의 만족도 점수가 7점 이상인 상위 13개국 중 상대적 빈곤율이 10%를 넘은 나라는 3개국뿐이었다.

 

치열한 경쟁사회 속 출산율 하락

사회 가치관 대전환 요구하는 신호

쥐어짜는 표준적 삶의 기준 벗어나

개개인 존중하는 환경 마련해야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출산율의 급격한 하락은 인간 사회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의 대전환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고 짚었다. 신 교수는 출산율이 주는 공포에서 벗어나 인간보다 돈과 권력이 위에 있는 사회의 가치가 바뀌고 인간들을 쥐어짜는 표준적 삶의 기준 대신 개개인을 존중하는 환경이 마련된다면 출산율은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라고 말했다.

 

현실적 기준, 색다른 시나리오

 

저출산·고령화 추세 속에서 생산가능인구의 급감과 치솟는 노인부양비를 생각하면 미래는 공포로 다가온다. 대신 미래 전망에 사용되는 기준을 살짝만 현실적으로 바꿔보면 어떨까? 좀 더 낙관적인 미래가 그려진다. 이미 해외에서는 새로운 기준과 관련된 연구가 활발하다. 인구와 세대 문제를 연구해온 계봉오 국민대 사회학과 교수와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의 도움말로 국내외에서 논의돼온 색다른 시나리오 4가지를 소개한다.

 

실제 평균 출생아 수는 합계출산율보다는 높다

합계출산율은 여성 1명이 평생 동안 낳는 평균 자녀 수라고 설명되지만, 실제로 한 명 한 명이 몇 명을 낳았는지 추적해서 나오는 숫자가 아니다. 해당 연도에 연령별 출산율을 구해 더한 값이다. 이는 실제와 차이가 있다. 자녀를 늦게 출산하는 분위기가 확산되는 추세라면 출산율 하락기에는 합계출산율의 하락을 과장해서 보여주게 된다. 2015년의 합계출산율은 1.24로 발표됐다. 그러나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 표본자료를 이용해 연령별 출생아 수 평균을 계산하면 출산이 완결되는 나이인 49(1966년생)48(1967년생)의 실제 출생아 수 평균은 각각 1.844, 1.822명으로 합계출산율보다 훨씬 높았다.

 

새 고령화 지수를 사용하면 인도와 미국의 노인부양비가 역전된다

연령만 기준으로 삼아 고령인구 부양비를 조사했더니 조사 대상 7개 지역 중 젊은 인구가 많은 인도의 부양비가 가장 낮고 멕시코, 중국, 미국, 북유럽 등의 순으로 높았다. 그러나 인지능력을 감안한 CADR이라는 새로운 인구고령화 지수로 고령인구 부양비를 계산하면 노년의 인지능력 상태가 좋은 미국, 북유럽의 부양비가 가장 낮아진다(2011‘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학회지, 베가드 스커벡 외).

 

교육수준을 고려하면 노인부양비는 3분의 1로 줄어든다

2000년을 기준으로 삼아 1이라고 했을 때 연령 기준으로만 하면 2060년 한국의 노인부양비는 8배 수준으로 급증한다. 그러나 생산가능인구인 15~64세의 교육수준 향상과 노인의 건강수준 향상을 조정한 노인부양비를 대입해 계산하면 2060년의 노인부양비는 2.54배 수준으로 훨씬 완만한 증가세를 나타낸다(2016년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Development and Society’, 계봉오).

남아 있는 수명개념으로 계산하면 노인부양비는 대폭 낮아진다

기존의 물리적 연령 대신 기대수명의 변화와 의료 발전에 따라 실질적인 활동이 가능한 나이(ADDRs) 계산 방식이나, 통상 사망 전 10~15년의 수명이 남은 시기부터를 부양 시기로 계산하는 추계고령화예상비율(POADRs) 방식을 사용하자는 논의가 제기됐다(2010Science, 워렌 샌더스 외).

잔여수명을 반영한 추계고령화예상비율로 계산하면 한국, 대만, 일본, 마카오, 홍콩 등 동아시아 지역의 부양비 변화 추이는 훨씬 완만하게 나타난다(2016‘Australasian Journal on Ageing’, 세르게이 셰르보프 외)./ 송현숙 전국사회부장 song@kyunghyang.com 19.1.7

 

 

[다시 쓰는 인구론]현재의 청년이 미래의 기성세대세대 게임은 없다

일자리·노후 불안 갈등 키울 우려

부양·돌봄 부담 사회가 함께해야

저출산·고령화 충격 줄일 수 있어

인구 감소와 저출산·고령화를 말할 때 빠지지 않는 말이 있다. ‘세대갈등이다. 2017년 처음으로 65세 이상 고령인구가 15세 미만 유소년 인구보다 많아졌다. 지난해 14.3%였던 노인인구 비율이 2060년엔 41%로 높아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와 있다. 현재 청년실업률은 전체 실업률의 2배 이상이다.

 

세대갈등은 이런 지표들을 보고 상상하는 데서 출발한다. 미래 청년층이 노년층을 먹여 살리느라 막대한 부담을 질 터인데, 지금의 기성세대는 자신의 몫을 지키기 위해 청년에게 일자리를 내어주지 않아 청년의 고통이 가중된다는 내용이다.

 

세대갈등은 필연일까. 지표를 뜯어보자. 20185월 경제활동인구조사 고령층 부가조사 결과 오래 근무한 일자리를 그만둘 당시 평균 연령은 49.1세인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의 노동자들이 실질적으로 은퇴하는 연령은 72.9세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다. 한국의 중장년층은 안정된 일자리에서 일찍 퇴직하지만 질 나쁜 일자리에 남아 가장 늦게까지 일한다는 의미다. 청년세대가 질 좋은 소수 일자리에 목맬 수밖에 없는 구조다.

 

세대갈등론에 가려져 잘 부각되지 않은 사실도 있다. 우리 사회가 부양해야 할 인구 비율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고령인구가 늘어나는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청소년인구도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노인과 유소년을 합한 총부양인구 비율은 1960년대 80~90%대였지만, 지속적으로 감소해 2018년에는 37.4%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럼에도 청년과 노인 모두 쌍봉형으로 불안하거나 가난하다. 개별 가족이 부양과 돌봄의 부담을 지고 있는 탓이다. 미래는 불안하기만 할까. 우리에겐 40년 후 불안정한 인구구조 위험이 닥치기 전 이에 대비할 수 있는 10~20여년의 세월이 먼저 온다. 이 기간 지금의 청년들이 안정적인 소득과 자산을 갖출 수 있도록 돕고, 노인에 대한 지원을 늘린다면 변화의 충격은 누그러진다.

무엇보다도 사회적 위험이 될 것이라는 2060년 노인인구는 지금의 2030세대이다. 노인을 혐오하는 혐로(嫌老)’의 담론은 지금의 젊은층이 부메랑처럼 되돌려 받을 가능성이 크다.

 

학자들은 우리가 가진 자원과 상황을 꼼꼼하게 들여다보면 고령화에 대비할 여력이 있다고 말한다. 가장 효과적인 대비는 구성원들이 세대 간 갈등 대신 한배를 탄 운명공동체임을 자각하느냐에 달렸다.

 

태어나니 낀 세대’ 1992년생을 구하라

(3)세대 게임을 넘어

1991~1996년 태어난 에코붐 세대

그중 ‘1992년생인구구조상 낀 세대

출생 몇년 뒤 IMF 터져 긴 불황 겪고

지옥 입시뚫고 졸업하니 취업 지옥

 

세대갈등을 얘기할 때 대표적인 젊은 집단이 있다. 구직난으로 신음하는 소위 에코붐 세대’(1991~1996년생).

 

인구가 많은 2차 베이비붐 세대(1968~1974년생)의 자녀 세대로, 에코(메아리)붐 세대라는 별칭이 붙었다. 1981867409명이던 출생아 수는 이후 내리 감소해 60만명대로 떨어졌다가, 이들이 등장한 1991~19955년 연속 70만명대를 기록했다. 1991~1996년대생들이 태어날 때만 해도 한국사회에 가득 차 있던 낙관적 전망은 오래가지 않았다. IMF 외환위기 이후 질 좋은 일자리들은 인구감소 속도보다 빠르게 사라지고 한국은 구조적 저성장 사회에 돌입했다. 이런 상황에서 1991년생 대학 졸업자가 배출되면서 청년실업률은 9% 이상으로 치솟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베이비부머 세대가 대규모로 은퇴하며 노인인구의 급증이 예상된다.

 

취업 연령은 늦어지고 일자리의 질은 나빠지는 반면 취직하면 노인인구 부양 때문에 힘겨워질 것. 1990년대생의 미래에 대한 암울한 진단이다. 기회를 빼앗긴 1990년대생들의 분노가 성·세대갈등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그러나 이 같은 갈등은 에코붐 세대에 대한 집중적 지원으로 예방 가능하다는 진단도 있다.

 

에코붐 세대는 저성장 국면에서 고령화의 유탄을 맞는 첫 세대가 될 것인가. 에코붐 세대의 분노는 정말 윗세대를 향하고 있을까. 본격적 고령사회 진입을 앞두고 청년세대의 고민과 세대갈등 가능성을 살펴봤다.

 

죽음의 트라이앵글 거쳤는데죄다 계약직

경기도의 한 공공기관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는 정현봄씨(27·가명)는 요즘 직장 분위기에 숨이 막힌다고 전했다. 봄철 정기인사를 앞두고 계약직의 정규직 전환 심사가 이뤄지는 기간이기 때문이다. 200명가량 일하는 곳에서 절반 이상이 계약직이고, 계약직의 70%20대들이다. 인사권을 쥔 상사에게 밉보였다가 느닷없이 원하지 않는 부서로 발령 나거나 계약이 해지되는 모습도 제법 봤다.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1992년생인 정씨는 대학에 갈 무렵 번잡하게 바뀐 입시제도가 적용돼 수능, 내신, 논술을 모두 힘겹게 준비해야 한다는 의미로 죽음의 트라이앵글 세대로 불리기도 한다. IMF 외환위기가 수습된 이후 7~8%를 오가던 청년(15~29)실업률은 정씨가 대학 4학년이던 2014년부터 내리 9%를 넘겨 지난해에는 9.5%를 기록했다. 체감 청년실업률은 지난해 22.8%로 통계 작성 이후 최고치였다. 죽음의 트라이앵글을 뚫고 사회에 나왔는데 일자리 전망이 꽉 막힌 것이다.

 

정씨는 어릴 적부터 청년실업 40만 시대같은 말을 늘 듣고 자랐다. 취업하기 좋았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더 열심히 공부했는데, 대부분 계약직 일자리뿐이고 친구들 대부분 계약직이며 회사에서 정규직은 대부분 40대 이상이다. 불공평한 느낌마저 든다고 전했다.

 

취업을 손쉽게 했던 윗세대가 ‘1992년생들을 계속 힘들게 하고 있는 것일까. 정씨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직장에서의 상하관계로만 보면 세대갈등이지만 우리 가족을 보면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중소 무역업체에 다니던 정씨의 아버지는 IMF 외환위기 때 잠시 해고됐다 재취업했다. 어머니가 교사라서 어려운 시절을 버틸 수 있었다. 두 분이 등록금을 대줘서 대학을 무사히 졸업했다. 정씨는 불안했던 어른들의 모습을 봐 왔기에 나는 공공기관에서 어떻게든 버텨서 정규직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지난해 20대 비정규직 비율은 32.3%30(21%)40(25%)보다 월등히 높다. 그러나 50대 비정규직 비율(34.2%)20대보다도 높고, 60대 비정규직 비율은 67.9%로 치솟는다. 30~40대의 고용률은 높다. 30대 남성의 경우 90%에 달한다. 그러나 20185월 경제활동인구조사 고령층 부가조사 결과를 보면 55~64767만명 가운데 가장 오래 근무한 일자리를 그만둘 당시 평균 연령은 49.1(남성 51.4, 여성 47.1)에 불과했다. 실질적으로 은퇴 연령은 72.9세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 가장 높다. 65~79세 고령자의 직업적 분포를 보면 단순노무 종사자가 36.1%로 가장 많았다. 소위 취업하기 쉬웠던 세대도 30대 장시간 노동을 하다 40대 후반에 안정된 직장을 일찍 그만두고 50대에 비정규직으로 재취업하며 노인이 되어서까지 일하는 패턴이 고착화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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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트랙 올라타지 못하면 캄캄한 미래

에코붐 세대들이 느끼는 미래는 불안하다. 김현수씨(28)는 지난해 3월 첫 취업을 한 이래 직장을 1년에 4차례 옮겼다. 모두 10명 이하의 소규모 회사에서 광고디자인 일을 했다. 180만원 남짓한 월급에 60만원에 달하는 방세와 건강보험료 등을 내고 나면 생활은 늘 빠듯하다. 이직도 잦고, 4대 보험 없이 연봉제로 계약해 국민연금 가입은 엄두도 못 낸다.

 

김씨는 졸업 후 빨리 등록금 빚을 갚고 싶었고, 워낙 취업이 어렵다고 하니 되는 대로 취업을 했다. 막상 일을 해보니 더 좋은 직장에 도전하고 싶어졌지만 비용도 걱정되고, 있는 직장마저 없어질까봐 불안해 또 되는 대로 취업하는 걸 반복하고 있다고 말했다. 고만고만한 직장 사이에서 이직이 잦아질수록 한 곳에서 못 버티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만 덧입혀지는 것 같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운 탓인가 걱정스럽다.

 

고용난 원인, 질 좋은 일자리 감소인데

청년·기성세대 간 갈등 모는 건 잘못

청년들이 버틸 수 있는 지원 더 늘려야

 

‘1992년생들은 인구구조상 낀 세대이기도 하다. 1992년 한국의 출생아 수는 73678명으로 9년 만에 최대를 기록했다. 1990년대 전반생들은 1980년대 후반생보다 인구가 많다. 전반적으로 저출산 추세가 계속됐지만 일시적으로 인구가 증가한 세대이다. 2014년 이후 청년실업률이 치솟은 이유는 이 같은 인구구조의 영향도 일부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이 때문에 2026년쯤에는 극심한 취업난에 숨통이 트일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2002년 이후 출생아 수가 50만명 아래로 급감한 데다, 2차 베이비붐 세대가 은퇴할 시기이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도 생산가능 인구가 급감하고 단카이세대(1947~1949년생)2010년부터 은퇴에 들어가면서, 20039%에 달하던 청년실업률이 지난해 4.6%까지 떨어졌다.

 

인구구조의 변화로 상황이 마냥 좋아질 것이라고 낙관할 수 없다. 일본에서 청년실업이 극심했던 2000년대에 단기 아르바이트로 일을 시작했던 프리터들은 40대가 된 지금도 좋은 일자리에 진입하지 못하고 있다. 기업에서 원하는 경험이나 경력을 쌓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결혼과 출산에도 소극적이라 고령 빈곤층이 될 위험이 높다고도 한다. 한국에도 유사한 사례가 있다. 김희삼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30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유독 타격을 입었다이들 상당수는 IMF 외환위기 시절 합격했으나 채용이 취소되는 일 등을 겪으며 비정규직으로 20대 첫 커리어를 내디디면서, 소위 좋은 일자리에 안착하지 못하고 부유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사회적으로 대책이 없을 때 에코붐 세대의 미래가 될 수도 있다.

 

에코붐 세대의 취업난은 사회갈등의 불씨로도 여겨진다. 최근 가장 고용상황이 악화된 집단은 20대 남성이다. 20대 남성 고용률은 200066.2%에서 201856.1%로 떨어졌다. ·연령별로 봤을 때 고용률이 가장 크게 감소한 집단이 20대 남성이다. 20대 여성 고용률은 같은 기간 54.9%에서 59.6%로 올랐다. ‘된장녀란 조어가 나왔던 200520대 남녀 고용률이 역전됐다. 하지만 여성 고용률은 30대부터 급감한다. 지난해 30대 여성 고용률은 60.7%30대 남성(89.7%)을 크게 밑돈다. 소득주도성장특위 특별위원인 신현호 경제평론가는 “20대 고용률은 여성이 남성보다 높지만 30대 이후 여성이 출산·육아로 경력이 단절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컨설팅 등 연봉이 높은 고급 일자리 분야에선 여성 채용을 기피하는 현상이 나타난다고 전했다. 현재 20대 남녀 간 극심한 젠더 갈등의 원인 중 하나로 이 같은 고용현실이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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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글부글 청년이용 세대 게임, 답 아니다

에코붐 세대가 처한 현실의 원인을 세대갈등에서 찾는 시각이 있다. 저성장 국면에서 청년세대가 기성세대와의 일자리 경쟁에서 패해 극심한 실업 고통을 겪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2015년 노동자의 해고를 자유롭게 하는 법안을 추진하면서 극심한 청년실업을 이유로 들었다. 문형표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은 공무원연금 개혁에 맞춰 국민연금도 덜 받는 방향으로 개편을 추진하면서 반발여론이 일자 세대 간 도적질이라고 표현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지난 720대 비정규직이 줄어드는 동안 50대 정규직 비율이 늘어났다고 발표했다. 비정규직 비율 자체는 50대가 20대보다 높지만, 50대 정규직 증가가 20대 비정규직 감소의 원인인 것처럼 들리는 대목이다.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 같은 접근을 세대 게임이라고 불렀다.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된 사회문제를 특정 세대의 책임으로 떠넘기고 세대 간 갈등을 부추겨 진짜 원인과 해법을 가린다는 의미다. 전 교수는 노인세대의 연금지급을 위해 청년세대가 지금 세금을 내는 것을 세대착취인 것처럼 언급하지만, 청년세대가 노인세대가 예전에 낸 세금으로 공교육을 받았다는 사실은 은폐한다고 말했다. 세금과 가족 간 지원을 매개로 한 세대 간 연대의 해법이 있음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하며, 공공정책을 추진하는 당사자들의 책임을 면제하는 수단으로 쓰인다.

 

세대담론이 부각되는 까닭은 청년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2015년 기준 고용이 불안정하거나 근로빈곤을 겪는 청년은 전체 청년의 3분의 1가량(32.6%)이라는 수치가 말해준다. 청년을 위한 지원도 적다. 2018년 아동·청소년 보건복지 예산 총액은 약 16779억원이다. 노인 보건복지 예산 총액은 117677억원으로 아동·청소년 예산에 비해 10배 넘게 많다. 그러나 노인빈곤율(46%)이 말해주는 것처럼 노인복지 예산조차도 충분하지 않다. 기획재정부의 한 관계자는 고령화가 진행되면 발생하는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면 재정의 사이즈를 늘려야 하고 국민소득도 늘었기 때문에 늘리는 것도 가능한데, 세대갈등보다는 대상이 노인이든 청년이든 재정지출을 낭비라고 보는 시선이 더 근본적 걸림돌이라고 말했다.

 

에코붐 세대의 취업난은 외환위기 이후 인구가 줄어드는 속도보다 질 좋은 일자리의 숫자가 더 급격하게 줄어들어서 생겨났다. 홍민기 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일자리 구조가 불리하게 바뀐 데다가 산업구조조정까지 진행되고 있어 청년세대의 고용 문제는 단기적으로 풀리기 어렵다청년들이 버틸 수 있도록 사회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유석 한림대 교수는 <세대 간 연대와 갈등의 풍경>에서 공적 투자를 통한 연대와 질 좋은 일자리를 주는 접근법으로 청년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19.1.9

 

[다시 쓰는 인구론]표류하는 지공거사존엄한 노후를 허하라

지하철에 의지하는 노인들

 

지하철 일반석을 가득 채운 노인들이 지난달 23일 온양온천역에서 서울로 돌아가고 있다. 박용하 기자

 

공짜 지하철서 추위와 더위 피하고

저렴하게 시간 보낼 곳을 찾아다녀

고령사회에 대비 못한 사회의 책임

노인들 탓으로 돌리기엔 한계 있어

 

지공거사(地空居士).’ 한국의 노인들은 언젠가부터 이렇게 불리기 시작했다. ‘지하철 공짜의 줄임말인 지공, 놀고 먹는 사람을 뜻하는 거사를 붙여 노인을 비꼰 말이다. 이들은 공짜 지하철에 몸을 실어 더위와 추위를 피하고, 저렴하게 시간을 보낼 곳을 찾는다. 이들이 한낮의 지하철을 차지한 지는 오래됐다. 노인들이 일반석까지 점령한 모습은 고령화된 한국의 먼저 온 미래이기도 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빠른 한국의 고령화를 감안하면, 지하철을 탄 지공거사들은 향후 더 많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 때문에 젊은 세대의 근심은 커졌다. 사람이 많아 지옥철로 불리는 수도권 지하철을 더 불편하게 했다는 원망이 늘어났고, 노인들의 무임승차가 늘어나며 전국 도시철도공사들의 영업손실은 커졌다. 일각에서는 노인들의 지하철 무료승차를 폐지할 것을 정부에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공거사 현상엔 인구변화와 고령사회에 대비하지 못한 한국 사회의 문제가 총체적으로 녹아 있다. 고성장시대에 오직 앞만 보고 달려온 남성들은 은퇴한 뒤 가정이나 지역사회에 자연스럽게 어울리지 못했고, 공적연금과 같은 노후보장 수단은 이들의 삶을 받쳐주지 못했다. 몸을 둘 곳도 없고 돈도 부족한 노인들은 결국 공짜로 움직이는 지하철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경향신문은 한국에서 노인 문제, 세대 문제의 상징적 공간인 지하철을 중심으로 노인의 삶을 개선하고 세대 갈등을 줄이려면 어떤 준비가 필요할지 모색해봤다.

 

지하철로 추위 피하고 식사까지

크리스마스이브였던 지난달 24일 종로3가 지하철역에서 만난 김춘광씨(88·가명)는 역사 안에 자전거를 끌고 와 안장에 앉은 채 TV를 보고 있었다. 종로3가에 자주 놀러 온다는 김씨는 겨울이 되면 지하철역으로 추위를 피하러 온다고 했다. 몇 년 전까지는 TV 맞은편 계단에 노인들이 걸터앉아 추위를 피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앉을 곳이 없어졌다. 노인들이 많아진 게 문제였다. 술 마시는 사람부터 성매매를 하는 박카스 할머니까지 등장하자 서울교통공사 측은 계단 앞에 가림막을 쳐 노인들이 앉는 걸 막았다.

 

같은 시각 종로3가역 환승 통로에서는 5명의 노인들이 역무원들 눈치를 보며 추위를 피하고 있었다. 일행 중 80대 남성은 탑골공원에 놀러 왔다 날씨가 추워 역으로 들어왔다주변의 다른 노인들도 덥거나 추울 때 지하철로 피할 때가 많다고 말했다. 실제 지난해 폭염이 왔을 때 냉방시설이 없는 집에서 살던 노인들은 인천공항 등 먼 곳으로 지하철을 타고 다니며 더위를 피하곤 했다.

 

무료 급식소 향하는 교통 수단 활용

지하철 택배로 돈벌이에 나서기도

춘천·온양온천 등으로 지하철 여행

풍족하진 않아도 나름의 여가생활

 

지하철은 노인들에게 끼니를 해결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종로3가역에서 만난 박영배씨(78·가명)오직 밥을 먹기 위해 화곡동에서 지하철을 타고 왔다며 역사 바깥의 원각사 무료급식소로 향했다. 영하의 추위에도 이곳에는 60여명의 노인들이 줄을 서 있었고, 어떤 이들은 1시간 이상 기다려 밥을 먹고 가기도 했다. 급식소를 운영하는 사회복지원각의 고영배 사무국장은 “2년 전쯤에는 170명가량이 점심식사를 하러 오셨다면, 지금은 200명도 훨씬 넘는 분이 오고 있다형편이 안 좋고 혼자 사는 노인들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급식소에는 빈곤 노인뿐 아니라 용돈을 아끼고 싶은 중산층 노인들도 온다. 박씨도 젊은 시절 전기회사에 다니며 어느 정도 재산을 모았으나, 아들에게 물려주고 지금은 하루 1만원의 용돈을 받는다고 했다. 용돈을 아껴쓰려다 보니 밥을 무료로 해결한다는 것이다. 경기 파주에서 온 86세 남성은 자식들한테 용돈을 받긴 하지만 충분치 않은 게 사실이라며 이 근처에는 급식소뿐 아니라 싸게 이용할 수 있는 영화관이나 노래방도 있어 좋다고 말했다.

 

이날 종로3가 지하철역과 탑골공원 인근에서 만난 대부분의 노인은 남성이었다. 최인희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여성 노인들은 동네 경로당이나 복지관을 찾는 경향이 많다여성들은 본인이 연금을 받는 경우가 적어 남성 노인보다 빈곤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노후소득 부족, 지하철 택배로

지하철은 노인들의 용돈벌이를 돕기도 한다. 노인들이 아르바이트로 많이 하는 지하철 택배는 무료 지하철 탑승의 이점을 활용한 사업이다. 업체마다 차이는 있지만 참여 노인들은 1건당 지하철 2시간가량을 왕복해 5000원 안팎을 벌며, 정부 지원금이 나오는 업체에 속해 있다면 하루 2~25000원을 번다.

 

지하철 택배의 메카인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근처를 찾았다. 택배업자들이 야외에 허름한 책상을 갖다놓고 공책을 펴놓으면, 그 앞에 노인들이 줄을 서 일감이 들어오길 기다렸다. 줄을 서 있던 하상수씨(75·가명)는 오전 8시에 일어나 지하철 택배로 하루 종일 돌아다닌다고 했다. 하씨는 이렇게 짐을 들고 오가면 운동도 잘되고 건강해질 수 있다며 주변 노인들에게 일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하지만 택배 일이 늘 적당한 것만은 아니다. 일부 노인들은 자신의 허리춤까지 오는 크기의 원단봉을 여러 개 옮겨야 했는데, 낮 시간 지하철은 노인들로 가득 차 있어 수십 정거장을 서서 오가야 했다. 올해 80세가 됐다는 한 택배 노인은 연금을 받는다 해도 30만원가량인데 노후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느냐정부에서 괜찮은 노인 일자리를 만들었다지만 내가 찾기는 힘들었다고 말했다. 사실 연금만으로는 노후생활이 힘들어 은퇴 뒤 별도의 일자리를 알아보는 게 노인 대다수의 상황이다. 2017년 기준으로 40만원 미만의 연금을 받는 이들은 108만명으로 전체 수령자 220만명 중 절반에 달했다. 여성 노인의 경우 돌봄 일자리를 많이 찾고, 남성들은 환경미화 등 공공일자리를 주로 알아본다.

 

노후 대비가 안된 이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노인들의 일자리 상황은 더 팍팍해지고 있다. 지하철 택배가 처음 시작할 땐 한 달 100만원까지도 벌 수 있어 생계 유지가 가능했지만, 경쟁이 심해지며 이제는 한 달 수입이 50만원 안팎으로 떨어졌다. 한 지하철 택배업체 관계자는 요즘에는 경제가 안 좋아 동대문 일대의 의류업체도 많이 폐업하고 있다일감도 줄고 받는 돈도 줄어드니 일하는 노인들도 점점 힘들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지하철은 가성비 좋은 여행수단 되기도

노인들의 여가생활에도 공짜 지하철이 큰 역할을 한다. 수도권 노인들의 경우 무료 지하철로 강원 춘천과 경기 양평, 충남 온양까지 갈 수 있다. 돈이 부족한 이들은 가는 길에 차창 밖에 펼쳐진 풍경만 구경하고, 돈이 좀 더 있는 이들은 현지에서 식사나 목욕을 하기도 한다. 경로우대가 되는 시티투어버스를 이용해 지역의 명소를 둘러보는 이들도 있다.

 

공동체와 단절, 소득도 없는 이들

지하철 사용 제재로 발만 묶는다면

사회적 고립 심화, 건강에도 악영향

다른 세대의 부담 줄이기 위해서도

최소한의 삶 영위할 여건 마련해야

 

휴일인 지난달 23일 노량진역에서 충남 온양온천으로 향하는 지하철 1호선 열차에 올랐다. 차량 안에는 노인들이 가득했다. 친구 2명과 함께 온 박명국씨(75·가명)는 평소에도 소요산과 북한산 등 지하철로 갈 수 있는 곳을 즐겨 찾는다고 했다. 그는 우리가 한창 일하던 시절엔 주 5일도 없었고, 거의 365일 일하느라 여행은 꿈도 못 꿨다그나마 은퇴한 뒤에야 여행에 재미를 붙였는데, 국내여행도 워낙 돈이 드니 부담 없는 지하철 여행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열차가 온양온천역에 도착하자 노인들이 쏟아져 나왔다. 지인들과 여행 온 이들도 있었지만, 혼자 시간을 때우러 온 이들도 많았다. 포장마차에서 혼자 어묵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있던 88세 남성은 경상도에서 교편을 잡았고 현재 서울에서 살고 있는데, 자녀들이 다 외국에 있어 외로움을 느낄 때가 많다고 말했다. 그는 오직 목욕을 하러 왕복 4시간이 넘게 걸리는 이곳에 온다고 했다. 외로움에 빠져 있는 것보다는 시간을 보내는 게 더 낫다는 것이다.

 

경기 일산에서 혼자 온 78세 남성도 칼국수 한 그릇을 먹기 위해 일주일에 서너 번, 왕복 6시간의 지하철 여행을 한다고 했다. “식사만 하고 가도 하루가 뚝딱 걸리니 시간을 금방 보낼 수 있어 좋다는 것이다. 그는 집에 가만히 있으면 몸도 더 아프고 식구들이랑 갈등만 생기는 것 같다집 근처 경로당이나 복지관도 가봤지만 노인들이 모이면 화투나 치고 싸움만 난다. 혼자 조용히 다니는 게 편하다고 말했다.

 

노인들이 건강해야 다른 세대도 이득

지난해는 베이비붐 세대인 ‘58년 개띠들이 정년을 맞는 해였다. 1958년 국내에서 태어난 아이는 993628명이었다. 수가 워낙 많다 보니 한국 사회가 고령화에 적응할 수 있을지는 ‘58년 개띠들의 노후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이 빈곤으로 떨어진다면 지공거사는 더 늘어나고 세대 갈등도 심화될 것이다.

 

지공거사의 증가에 대비해 노인들의 혜택을 줄이는 게 세대 갈등의 해결책일까. 전문가들은 노인들의 과도한 지하철 사용을 제재하기에 앞서 무료 지하철에 삶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노인들의 문제를 살펴야 한다고 말한다. 노인들의 지하철 생활은 노후 대비가 부족한 한국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이들은 가정에서 단절돼 있었으며, 여가를 보내기엔 연금을 비롯한 노후소득이 변변치 않았다. 경로당·복지관 위주로 이뤄진 지역의 노인공동체에 적응하지 못해 떠도는 이들도 있었다. 이처럼 노후 대비가 안된 상황에서 노인들의 발만 묶는다면 사회적 고립이 심화되고 건강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실제 지난해 김수영 경성대 교수팀 연구에서는 노인의 사회·경제적 박탈 경험이 건강에 직접적인 악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요한 건 한 세대의 삶이 건강해야 다른 세대들의 부담도 줄어들 수 있다는 인식이다. 건강보험 재정 문제가 대표적이다. 향후 노인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는데 이들의 건강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는다면 전 세대가 져야 하는 보험료 부담이 크게 늘어나게 된다. 노인들이 최소한의 삶을 영위하고 적절한 여가활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면 노인들이 건강하게 지내는 기간이 늘어나 다른 세대의 부담을 덜어줄 수 있다.

 

세대 간의 연대로 갈등을 예방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최근 청년들 사이에선 노인들을 틀딱충등으로 부르며 혐오하는 모습이 보여 문제가 됐다. 고현종 노년유니온 사무총장은 노인들도 가치관이 각자 다른데, 고집이 심하거나 의존적이고 혜택을 받으려고만 한다는 고정관념이 생겨가는 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노인 스스로도 다른 세대를 위해 좀 더 기여하는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다최근에는 주거 문제로 어려운 청년들을 위해 노인들이 출자한 사례도 있었다. 이런 모습들이 이어진다면 혐오가 존중으로 바뀌는 것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1.10


[다시 쓰는 인구론]어릴 때부터 실업 공포언제부터 꿈은 직업이 됐을까

우리 모두는 일할 수 있을까

 

13일 서울의 한 대형서점에서 구직자로 보이는 청년이 국가직무능력표준(NCS)과 자격증 관련 서적 코너에서 책을 둘러보고 있다. NCS는 현장에서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요구되는 지식, 기술, 태도 등의 내용을 국가가 체계화한 것이다. 민간분야에서 발급하는 자격증은 201812월 기준 약 33000개이다. NCS와 자격증을 준비하는 것은 구직활동의 첫 단계로 여겨진다. 김창길 기자 cut@kyunahyng.com

 

모두 일할 수 있도록 사람을 키우고 있나

고령화 인한 위기론 쏟아지지만

우선 현재 인구로 생산성 높이기

·교육·일터 총체적 변화가 답

 

통계청이 지난달 발표한 ‘2017년 생명표는 그해 태어난 아이들이 평균 2099(82.7)까지 살 것으로 전망한다. 2007년생에 비해 2017년생은 3.5년 더 오래 살 정도로 평균수명이 늘고 있다. ‘100세시대가 조만간 도래한다고 해도 놀랍지 않지만 한 사람의 인생으로 100년의 시간이 주어진다는 것은 두렵다. 평균 49세에 퇴직하는 일반적인 시스템에서 ‘100년의 시간은 공포다. 퇴직하고 저임금 단순 일자리를 전전해야 한다면 생명의 연장을 축복으로 느낄 수 없다.

 

고령화로 인해 사회가 무기력해질 것이라는 불안도 크다. 20177월 한국은행 경제연구원은 급속한 고령화 추세가 그대로 이어진다면 연간 경제성장률은 2000~2015년 연평균 3.9%에서 2036년에 0% 안팎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놨다. 언론들은 ‘10년 후 0% 성장등 위기론만 쏟아냈다. 당시 보고서는 은퇴 시기 연장, 여성의 경제활동 확대, 생산성 향상 등 고령화의 부정적 효과를 완화해줄 대책을 제시했고 적절하게 대응하면 생산성 향상 등으로 개개인의 후생은 오히려 향상될 수도 있다고 밝혔지만 이 문장은 주목받지 못했다.

한국의 생산성은 매우 낮다. 피고용인 1인당 노동생산성은 2015년 기준 66800달러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85000달러)보다 낮고, 비교국 29개국 중 17위다. 다들 힘들게 오래 일하고 생산가능인구(15~64)가 줄어든다고 아우성이지만 정작 먼저 해야 할 일은 현재 인구로 생산성을 높이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해답은 사회의 총체적인 변화다. 일의 의미도, 교육도, 일터도 달라져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세계적인 추세와 거꾸로다. 좋은 직업을 얻기 위해 학창 시절 내내 스펙을 쌓고 각종 자격증을 취득하지만 막상 직장에 들어가면 뭘 위해 일해야 하는지 의미를 찾지 못한다. 교육은 안정적인 직업을 얻는 순간 멈추고, 일터는 이제까지의 방식만 고수할 뿐 새로운 문화와 흐름을 거부한다. 인생 3모작, 4모작 시대에 배워야 할 것은 (직업)’이 아니라 그리고 관계. 평생 자신의 관심사에 귀 기울이고 흥미 있는 주제를 탐구하며 그것을 직업과 연결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일할 수 있도록 사람을 키우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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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수는 줄어들고 사람들은 오래 산다. 적은 이들이 더 똘똘하게 일해야 하며, 평생 교육과 노동을 오가며 살아갈 시대가 온다. 한국의 교육은 개인들이 이런 미래를 대비하도록 하는 디딤돌의 역할을 잘하고 있을까.

 

정부는 세계화와 정보화 추세에 맞춰 1990년대 중반부터 직업교육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교육부 산하 교육개혁위원회는 1995정보화·세계화 시대 대응이라는 취지를 내걸고 직업교육개편안을 발표했다. 청소년기에 일찍 직업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고, 전문 직업인의 능력을 향상시킨다는 것이 핵심이다.

 

외환위기 후 청년실업 대두

2001년부터 유망직업소개

학교선 빨리 진로 선택 압박

 

초등생 진로컨설팅 전문가

상상력 가로막힌 아이들

집단적인 무력감에 빠져

 

한국의 진로교육은 자신만의 꿈과 끼를 가능한 한 일찍 발견하라고 강조한다. ‘청년실업 50만 시대를 듣고 자란 청소년들도 일찍진로를 결정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낀다. 미래를 자유롭게 상상하는 대신, 현재의 직업목록 중에서 근사해 혹은 가능해 보이는 것을 골라 서둘러 이라 적어내고 미래를 준비한다. 교육은 미래를 위한 디딤돌 대신 직업에 대한 편견과 불안을 전달하는 통로가 됐다. 무엇보다 청년인구가 급증하던 시대 만들어진 대책은 현재 인구구조의 변화와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역설적이지만 그래도 답은 배움이다. 배움의 본질이 문제의 원인을 찾고 해결책을 상상해 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이 두려움에 압도당하지 않고 미래를 꿈꿀 수 있으려면 지금까지의 교육이 바뀌어야 한다.


빠른 진로 결정일찍의 배신

장래희망 없이 자란 학생들도

떠밀리듯 취업전선 뛰어들어

혹시 몰라서 자격증 공부

 

청년들은 진로를 빨리 선택해야 한다는 압박을 어느 정도 느끼며 살까. 올해 항공사 취업이 확정된 이다연씨(26·가명)는 진로를 비교적 일찍 선택한 사례다. 반면 취업준비는 오래 걸렸다.

 

이씨는 고1 때 영문과에 지망하기로 결정했다. 입학사정관제 입시에서는 지망 학과를 일찍 정해 관련 있는 활동을 꾸준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들었다. 영어과목을 잘해서 영문학과를 선택했다. 현직 국제회의 전문 통역사에게 멘토가 되어 달라고 편지를 쓰고 답장도 받았다. 영문학과 상관있는 대표적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국제회의 전문가는 2000년대 내내 한국고용정보원이 추천한 유망직업이기도 했다.

 

대학에서 동아리 활동을 하며 예술이나 공연 쪽이 더 관심사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다. 해외에서 일하는 것도 좋아 보였다. 대학교 2학년 마치고 통역사, 해외근무와 조금씩 관련이 있는 승무원이 되기로 결심했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취업준비에 들어가는 것이 유리해 보였다.

 

취업준비에는 5년이 걸렸다. 아르바이트를 할 때도, 책을 읽을 때도, 취미로 운동을 배울 때도 대학입시 때와 마찬가지로 일상의 모든 것을 취업을 염두에 두며 선택했다. 하지만 번번이 떨어졌다. 낙방을 거듭하면서 치아교정을 하는 등 세상이 원하는 승무원상에 나를 맞추려 노력했다. 자기소개서를 검토해 준 지인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평가했다.

 

항공사에 기어이 합격했지만 이씨는 진로 선택을 조금 늦게 했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고 했다. 자신과 일에 대해 잘 모른 채 무작정 일찍 시작하는 것이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외국 친구들은 직업보다 에 대해 고민하더라고요. 25세에 하고 싶은 일을 못 결정해도 나는 너무 늦었어라고 자신을 자책하지 않아요. 그게 부러웠어요. 그런데 잘 안돼요. 집에 부담 주기도 싫고. 10대 중반부터 불안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어요.”

 

올해 취업 확정된 이다연씨

“10대 중반부터 항상 불안

알바·취미 등 모두 취업 중심

내가 좋아하는 것고민 부족

일이 적성에 맞을까 걱정돼

 

요즘 가장 두려운 것은 승무원 블라인드앱에 올라오는 괴롭힘 사례다. 막상 승무원 일이 적성에 맞지 않을지 모른다는 걱정도 들고, 승무원에 대한 폭력 사건을 뉴스에서 접하니 두렵다. ‘나에게 이런 일이 닥치면 어떡하지?’ 청소년기에 배워야 할 것들을 제대로 배우지 않았다는 느낌이 새삼 든다.


책임 떠넘기는 자격증 공화국

일찌감치 할 일을 정해두지 못한 학생들도 특정 나이가 되면 떠밀리듯이 취업준비에 나선다. 경영학을 전공하는 대학생 박진수씨(26)는 이번 겨울방학 때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을 대비해 공부하고 있다. “혹시 모르니 공기업 입사에 필요한 자격증들은 미리 따두려고 합니다.” 한국사 지식이 일과 관련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니 고개를 저었다. 불안해서, 그리고 익숙한 공부방식이라, 그리고 다른 공부나 훈련이 제공되지 않아서 자격증부터 시작한다.

 

정부는 1997년 자격기본법을 만들고 민간자격증 제도를 도입했다. 2013년부터는 민간자격 사전등록제를 시행해 생명·건강·안전·국방 등의 분야가 아니라면 어떤 법인·단체·개인이라도 쉽게 자격증을 만들 수 있게 했다. ‘내실 있는 직업교육을 통해 청년실업을 해소하고 우수인력을 양성하겠다는 취지였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에 따르면 협회나 민간 업체에서 발급하는 민간자격의 등록 건수가 20123378개에서 201812월 기준 약 33000개로 늘었다.

 

드론지도사, 코딩지도사, 요가·스트레칭지도사, 앙금플라워 떡케이크 전문가, 경영데이터 분석사 등 내용은 다양하다. 민간시장에서의 자격증 발급은 정부 정책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참여정부 시절 사회복지서비스, 이명박 정부 시절 녹색성장 및 한식, 박근혜 정부 시절엔 콘텐츠 관련 자격증이 급증했다. 최근에는 지난해 정부가 8대 신성장산업으로 선정한 빅데이터, 인공지능, 드론 관련 자격증이 부쩍 늘었다. 빅데이터 자격증만 해도 한국인터넷진흥원 발급 2종과 통계청 발급 1종을 비롯해 민간자격증 등 다양하다. 그러나 정부가 유망산업과 직종을 선정해 소개하는 데 그친다는 문제가 있다. 임운택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는 정부와 교육기관이 내실 있는 직업훈련을 만드는 데 투자하지 않고, 자격증 시장으로 대체하며 면피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민간 교육기관을 통해 다양한 자격증 과정을 이수시킨 것으로 할 일을 다했다고 실적을 보고하고, 자격증 과정 학원이나 자격증을 발급하는 협회는 정부의 지원과 수험생들의 응시료로 돈을 번다. 그러다 보니 내실 있는 기술을 가르치는 곳보다 쉽고 빨리 딸 수 있는 허울 좋은 자격증 시장이 범람하고 있다. 무자격 강사가 가르치거나 취업에 도움되지 않는 자격증이 많아 소비자 피해 호소도 많아지고 있다.

 

정부가 직업정보 전달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외환위기로 청년실업이 사회문제가 될 무렵이었다. 1997년 미국 노동부의 직업전망서를 번역해 냈고, 2001년부터는 한국형직업안내서를 개발했다. 민간자격증 제도를 정비한 것도 그 연장선이었다.

 

고용노동부 산하 한국고용정보원은 2001년부터 매년 직업정보 책자를 발간한다. 8000여종의 직업을 분석하고 전문가들을 인터뷰해 향후 3~5년간 고용이 크게 늘어날 분야를 소개한다. 언론에는 미래 유망직업으로 주로 소개된다.

 

유망직업 선정과 자격증 위주의 직업정책이 사회 및 인구구조의 변화와 맞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어떻게 경영을 공부할 것인가>의 저자 신승훈씨는 브런치 매거진에 쓴 칼럼 자격증 공화국에서 자격증이 필요한 경우는 인재 시장에서 수요보다 공급이 너무 많아 면접관들이 일일이 지원자들의 역량을 평가할 시간이 없고, 최소한의 노력으로 직무능력을 판단할 때라고 설명했다. 노동인구가 쏟아져나오고 표준화된 기술을 가진 인력을 대량으로 채용할 때 적합한 방식이다. 오호영 직업능력개발원 선임연구위원은 정부가 유망직업이라고 발표하고 자격증 과정이 쏟아져나온 직업 중 실현되지 않은 것이 많다정부가 유망산업을 선정하는 것 역시 정보를 움켜쥐고 미래를 가장 잘 내다보는 주체가 정부라는 발상에서 나오는 건데 현대사회와 맞지 않다고 말했다.

 

인구가 줄어드는 만큼 한 사람 한 사람 세심하게 교육하는 정책으로 전환해야 한다. 구직자들이 교육에 느끼는 갈증이기도 하다. 충청권의 한 사립대를 졸업한 홍승원씨(31)는 지난해 군 복무를 마치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컴퓨터공학 전문학교에 다니기 위해서다. 홍씨는 미국에선 컴퓨터공학과 관련한 이공계를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도 다닐 수 있는 학교가 많고 교육과정을 이수하면 전문 능력이 있는 것으로 본다언제든 새로 배울 수 있고 형식적인 자격증 과정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내실 있는 교육이 제공되지 않는 현실이 인재 유출의 원인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초등학생에게까지 내려온 불안

학창시절 자신이 누군지 고민할 틈도 없이 내쫓기며 진학한다. 막상 일을 구해야 할 때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비용을 써가며 각종 시험과 자격증의 바다를 헤맨다. 구직자들의 불안감은 중·고등학생을 넘어 초등학생으로, 점점 더 어린 연령대로 전파되고 있다. 전파되는 불안은 미래세대를 도전적이기보다는 움츠러들게 만든다.

 

신동하 경기교육연구소 연구실장은 진로교육이 개인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논리로 설계돼 있다고 말했다. 청년실업은 저성장 등 구조적 문제의 결과다. 그러나 1995년 진로교육의 틀이 잡힐 때부터 정부는 청소년 개개인이 빨리 진로선택을 하는 것으로 청년실업 문제의 돌파구를 찾고,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것을 개개인의 책임으로 돌렸다는 것이다.

 

청년과 대학생이 중장년층의 불안한 진로경로를 보며 쫓기듯, 초등학생은 청년들을 보며 불안과 무력함을 학습한다는 것이 교사들의 전언이다. 경기의 한 초등교사 박선영씨(34)국가가 유망직업이란 걸 발표하고, 교사와 부모가 네 꿈이 뭐니?’ ‘장래희망이 뭐니?’라고 반복적으로 물어보면 아이들은 어른들이 원하는 질문에 답하는 것을 더 고민한다. 그리고 그런 직업을 가질 수 없는 아이들은 일찍 자신을 포기한다고 전했다.

 

익명을 부탁한 한 중학교 교사는 교육부에서도 중학생 단계에서는 자신의 소질을 탐색하라고 하고, 고등학교에 가서 구체적 진로교육을 하라고 한다. 동시에 실적을 강요한다. 진로교육시간 대부분은 변호사, 의사 등 유명 직업인을 불러 이야기를 듣거나 잡월드 등을 견학하면서 보내는데, 대부분 학생들이 갖지 못할 직업들이고, 정말 중요한 직업의 의미, 가치 이런 수업은 뒷전이 된다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초등생 진로 및 학습 컨설팅을 하는 이혜민 마리아코칭연구소 소장은 아이들이 집단적 멘붕 상태라고 할 정도로 무력감에 빠져 있다. 진로에 대한 강박이 자신과 세상에 대한 상상력을 제약해 창의와 도전정신을 가로막고 있다고 말했다. 김용성 한국개발연구원(KDI) 선임연구위원은 어린 시절 배움 자체를 즐겁게 여길 수 있어야 성인이 되어서도 평생교육을 할 수 있다어릴 적 배우는 법자체를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별을 좋아하지만 천문학자 대신 밤하늘을 찍는 사진가가 될 수도 있고, 엔지니어나 SF소설가가 될 수도 있다. 별 관측은 취미로만 할 수도 있다. 어떤 삶을 택하든 긍정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배우는 게 필요하다. 포기하거나 탈락했다는 좌절감이 우리를 배움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청년실업은 구조적인 문제

직업 교육의 굴레 벗어나

배움의 본질서 해결책 찾아야

전문가들은 유망직종의 틀에 갇히지 않고, 자신을 사랑하고, 남과 대화하는 방법 자체를 배워야 한다고 하는데, 아직도 우리 교육은 빨리 진로를 발견해 준비하라는 틀에 갇혀 있다. 빠르게, 많은 일자리가 창출되는 데 집중해 징검다리를 놓았던 국가의 전략도 달라져야 한다. 빨리 다음 단계로 건너가라는 징검다리 대신 언제든지 돌아와 배움 자체를 배우는 디딤돌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1.14

 

[다시 쓰는 인구론]“좋은 성과 내는 곳은 동료 간 대화와 협동 많은 직장

평생 노동시대, 생산성이 답

모두 일할 수 있도록 사람을 키우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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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 인한 위기론 쏟아지지만

우선 현재 인구로 생산성 높이기

·교육·일터 총체적 변화가 답

 

통계청이 지난달 발표한 ‘2017년 생명표는 그해 태어난 아이들이 평균 2099(82.7)까지 살 것으로 전망한다. 2007년생에 비해 2017년생은 3.5년 더 오래 살 정도로 평균수명이 늘고 있다. ‘100세시대가 조만간 도래한다고 해도 놀랍지 않지만 한 사람의 인생으로 100년의 시간이 주어진다는 것은 두렵다. 평균 49세에 퇴직하는 일반적인 시스템에서 ‘100년의 시간은 공포다. 퇴직하고 저임금 단순 일자리를 전전해야 한다면 생명의 연장을 축복으로 느낄 수 없다.

 

고령화로 인해 사회가 무기력해질 것이라는 불안도 크다. 20177월 한국은행 경제연구원은 급속한 고령화 추세가 그대로 이어진다면 연간 경제성장률은 2000~2015년 연평균 3.9%에서 2036년에 0% 안팎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놨다. 언론들은 ‘10년 후 0% 성장등 위기론만 쏟아냈다. 당시 보고서는 은퇴 시기 연장, 여성의 경제활동 확대, 생산성 향상 등 고령화의 부정적 효과를 완화해줄 대책을 제시했고 적절하게 대응하면 생산성 향상 등으로 개개인의 후생은 오히려 향상될 수도 있다고 밝혔지만 이 문장은 주목받지 못했다.

 

한국의 생산성은 매우 낮다. 피고용인 1인당 노동생산성은 2015년 기준 66800달러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85000달러)보다 낮고, 비교국 29개국 중 17위다. 다들 힘들게 오래 일하고 생산가능인구(15~64)가 줄어든다고 아우성이지만 정작 먼저 해야 할 일은 현재 인구로 생산성을 높이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해답은 사회의 총체적인 변화다. 일의 의미도, 교육도, 일터도 달라져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세계적인 추세와 거꾸로다. 좋은 직업을 얻기 위해 학창 시절 내내 스펙을 쌓고 각종 자격증을 취득하지만 막상 직장에 들어가면 뭘 위해 일해야 하는지 의미를 찾지 못한다. 교육은 안정적인 직업을 얻는 순간 멈추고, 일터는 이제까지의 방식만 고수할 뿐 새로운 문화와 흐름을 거부한다. 인생 3모작, 4모작 시대에 배워야 할 것은 (직업)’이 아니라 그리고 관계. 평생 자신의 관심사에 귀 기울이고 흥미 있는 주제를 탐구하며 그것을 직업과 연결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일할 수 있도록 사람을 키우고 있는가.

 

회사에 들어가면 자기계발은 더 꿈꾸기 어렵다. 의미 있는 일을 해보겠다고 애쓰지만 할수록 자신을 갉아먹는 구조다. 연공서열 구조에서 자기 주도적으로 일하기는 쉽지 않고 쓸데없는 야근, 회식 문화를 보면 과연 회사에서 이렇게 오래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 의심스럽다. 일의 진행과정에서 필요 없는 절차를 줄이면 생산성을 높일 수 있을 것 같지만 발언권은 연차가 쌓이는 만큼 생긴다. 한국 회사는 생산성 향상은 꿈꾸기 어려운 구조다. 그 구조에서 개인은 발전이 전혀 없다고 느낀다.

 

일터 진입 후 사축이 되는 사회

회의는 팀장 의견 듣는 자리

직장에서 학습 경험한 비율

OECD 회원국 33개국 중 꼴찌

문제 해결 능력·협력도 최하위

 

사축’. 한국에서 회사원으로 일한다는 것은 회사의 가축처럼 일한다는 뜻이다. 직장인들이 자신의 현실을 자조하는 표현으로 이 신조어는 확산됐다. 10년차 직장인 이용철씨(37·가명)는 지난해 이직했다. 회사를 다니면서 자기 시간은 없었지만 적응하려고 노력했다. 그 노력이 무너진 것은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였다. 아내가 제발 야근 좀 하지 않을 수 없냐고 호소하면서 갈등이 심해졌다. 다들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기 때문에 먼저 나갈 수 없었던 그는 그때부터 퇴근하겠습니다라며 손 들고 집에 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상사가 면담을 하자고 했다. “일도 잘하는데 그렇게 육아 중심으로 살면 도태된다는 경고를 하기 위해서였다. 이씨는 좌절했다. 72년생으로 아직 40인 여자 상사가 한 말이라는 점에서 좌절감은 더 컸다. “자신의 아이를 돌보지 말고 회사에 희생하라는 얘기를 하는 곳은 더 다니고 싶지 않았습니다. 10여년 후면 퇴직을 걱정하면서 살아야 하는 회사에서 그렇게 살아야 할까요?”

 

한국에서 회사원이 된다는 것은 일과 가족, 일과 여가의 균형을 포기한 삶을 산다는 뜻이다. 가족과 보낼 시간을 빼앗겨 결국 인생에 회사만 남지만 20185월 경제활동인구조사 고령층 부가조사 결과 오래 근무한 일자리를 그만둘 당시 평균 연령은 49.1세다. 신입사원들의 절망감은 더욱 크다. 입사 2년차인 김지현씨(26·가명)는 사직서를 써놓고 고민 중이다. 김씨는 회의 시간이 토론이나 논의의 시간이 아니라 팀장의 의견을 일방적으로 듣는 자리라며 친구들은 다른 회사들도 다 그러니까 참으라고 하는데 회사에서 성장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201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제성인역량조사(PIAAC) 결과 한국 성인(16~65)들의 읽기, 쓰기, 수리, 정보통신기술(ICT) 스킬 활용은 OECD 평균을 상회하거나 큰 차이가 없지만 직장에서 문제 해결을 위해 다양한 스킬을 활용하는 정도는 33개국 중 29위를 기록했다. 동료 간 협력은 33개국 중 가장 낮았다. ‘동료나 상급자로부터의 학습이나 업무를 통한 학습을 경험한 노동자의 비율이 OECD 평균을 크게 밑돌았고, 직장에서 학습을 경험한 노동자의 비율은 33개국 중 꼴찌였다. 김용성 한국개발연구원(KDI) 선임연구위원은 소통은 넌 왜 이렇게 생각하느냐고 얘기하다가 , 그렇게 생각하면 다를 수 있겠구나라고 깨닫게 하는 것이라며 근로자들이 좋은 퍼포먼스를 내는 곳은 동료 간 대화가 많고 협동이 많은 직장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일터혁신지수는 감소 중

워라밸실현 전제는 생산성

아이디어 공유 제안제도

일하는 방식과 문화 바꿔야

 

한국 일터의 숙제는 생산성 향상이다. 2017년 한국의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34.3달러로 201130달러를 넘어선 뒤 계속 증가하고는 있지만 선진국에 비하면 여전히 낮다. 비교 가능한 OECD 회원국 22개국 중 17위다. 생산성을 높이려면 일하는 방식과 문화를 바꾸는 것이 급선무다. 혁신은 개인의 능력의 합이 아니라 신기술부터 일하는 방식, 조직 구성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개인에게서 나오는 힘과는 다른 조직에서 나오는 힘, 무형의 자산이다.

 

이 무형 자산이 개인에게 부정적으로 발휘될 수도, 긍정적으로 발휘될 수도 있다. ‘학습된 무기력증은 조직에 똑똑한 사람이 들어온다 해도 조직 문화가 사람을 무기력증에 빠지게 한다는 뜻이다. 반면 조직의 다양한 힘에 의해 노동자가 자기효능감을 느낄 수도 있다. 오계택 한국노동연구원 임금직무혁신센터 소장은 똑같은 사람을 뽑아도 학습된 무기력증을 심어줄 수 있고, ‘자기효능감을 심어줄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 회사들은 단체로 학습된 무기력증을 앓고 있는 걸까. 한국의 일터혁신지수는 떨어지고 있다. 2005~2013년 한국노동연구원 사업체패널 자료의 일터혁신 변수들의 추이를 분석한 결과 직무 분석, 제안제도, 소집단 활동, 정기적인 업무 로테이션 등 대부분의 일터혁신 관련 지표들이 정체되거나 하락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노동자들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제안해서 제품 생산과정을 개선할 수 있는 제안제도를 운영하는 사업체 비중은 200562%에서 201344.9%로 감소했고 일터혁신에 필요한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논의하는 소집단 활동200544.6%에서 201333.6%로 줄었다.

 

1990년대 미국 기업의 생산성 성장률은 1.7%까지 감소했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 4%대 이상의 가파른 성장세를 보였다. 1990년대 초 미국의 제조업체들이 작업 조직을 개편하고 일터혁신을 꾀했기 때문이다. 유럽연합(EU) 기업들의 경우 60% 이상의 노동자들이 자신의 직무 방식을 바꾸거나 기업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참여 기회를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50% 이상 노동자들이 자신의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 선진국이 일과 가정, 일과 여가의 균형을 누릴 수 있는 이유는 이와 같이 생산성을 높일 수 있도록 다양한 방식의 일터혁신을 꾀했기 때문이다.

 

고령인구를 생산가능인구로 만들려면

실질 은퇴연령 70대인 사회

배움·성장 없는 퇴직 대신

고령 노동자들의 노하우 살려

모든 연령 상생하는 일터 모색

 

청장년 인구의 생산성 혁신도 숙제지만 고령화 사회에서는 고령인구를 어떻게 활용할지 찾는 것이 더 급한 숙제다. 생산가능인구(15~64)가 감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고령인구를 어떻게 활용할지 우리 사회는 답을 찾지 못했다. 한국은 201765세 이상 고령층의 경제활동참가율이 31.5%OECD 평균(14.5%)2배에 달한다. 실질은퇴연령은 남성 72.9, 여성 70.6세로 OECD 회원국 중 가장 높다.

 

청년층의 부양 부담, 연금 갈등 문제만 생각해봐도 노인들이 일하며 함께 부양할 방법을 찾는 것이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중요한 숙제다. 노인에게 저임금 일자리만 던지는 방식이 아니라 살아온 경력을 살리면서 새로운 것을 학습해 조직 속에서 다른 세대와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모든 연령대가 상생하는 지점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의사결정권을 50대 이상이 점유하는 시스템을 민주적으로 바꾸고 ‘40대 팀장 밑에서 60대 팀원이 일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경력이 긴 고령 노동자들이 일하는 시간 동안 쌓은 암묵지(暗默知)’를 활용하는 것도 중요하다. 암묵지는 개인에게 체화되어 있지만 말이나 글로 남에게 전달되기 어려운 지식이고 명시지(明示知)’는 말이나 글의 형태로 표현, 전달 가능한 지식이다. 일본 도요타의 사례를 참고할 만하다. 도요타는 암묵지를 명시지로 바꿔 다음 업무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손실을 줄였고 작업 시간 중 쓸데없이 버리는 시간을 체계적으로 없애면서 생산성을 높였다. 오계택 소장은 핵심은 같은 8시간을 일하더라도 쓸데없이 버리는 시간이 없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사회의 고령 일자리 논의는 정년 연장, 임금피크제 등 물리적인 부분만 강조되고 있다. 모두가 일할 수 있는 일터를 만들기 위해 전형적 연공서열 구조에서 일하는 방식을 바꾸는 논의는 미진하다. 결국 고령자의 모습을 어떻게 바꾸느냐가 숙제다. 위기를 부추기는 사람들은 당장 노동력이 줄어든다고 아우성이지만 OECD 평균(66%)보다 현저히 낮은 여성 고용률(56.8%)을 어떻게 끌어올릴지를 고민하지 않고 있다. 한국노동연구원 이규용 연구위원은 물리적인 구조 혁신이 아니라 기업 문화를 바꾸고 작업 방식의 혁신을 고민할 때라고 말했다.

 

“‘50세 이후삶 위해 공부 시작내 안에서 이런 에너지 나올 줄 생각 못했죠

52세 문효숙씨의 새로운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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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효숙씨가 지난달 26일 백석대 서울캠퍼스 앞 조형물 앞에서 웃고 있다. 문씨는 이날 백석대 상담대학원에 합격했다.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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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3모작 시대 일자리 패러다임이 바뀌려면 국가가 시기별로 자연스럽게 일자리를 바꿀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한국노동연구원 장인성 연구위원은 안정된 일자리를 만들고 사람들의 경력을 컨설팅해 둘을 연결하는 정부의 역할이 점점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노동부 일자리 컨설팅 강좌 듣고

자신감 붙어 상담대학원 진학도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간 느낌

 

52세인 문효숙씨는 2019년 새로운 출발을 앞두고 있다. 남은 삶에서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대학원에 진학한다. 그의 출발 뒤에는 고용노동부의 중장년 일자리 컨설팅 서비스가 있었다. 2010년부터 영어보습소를 운영하던 문씨는 주변에 대형 영어학원이 들어오면서 6년간 운영해오던 교습소를 그만둬야 했다. 고등학교 기숙사 사감으로 다시 취직했지만 밤샘 근무로 건강이 나빠졌고 결국 일을 그만뒀다. ‘공연예술 코디네이터양성과정에 대해 들은 것은 친구에게서였다. 친구는 대학 때부터 뮤지컬, 오페라에 관심이 많았던 문씨에게 너를 위한 일이 있다며 노사발전재단 서울센터가 2017년 기획한 공연예술 코디네이터 양성과정을 소개했다. 외국처럼 중장년층 고객의 요구에 대응하는 중장년 일자리를 발굴하고자 재단이 만든 교육이었다.

 

문씨는 떨리는 마음으로 면접을 봤다. 황영희 서울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 컨설턴트는 교육 과정 내내 늘 한발 앞서서 참여했고 면접 때도 어떤 질문을 받아도 웃는 얼굴로 대답을 했던 분으로 뽑힐 수밖에 없는 분이라고 말했다. 문씨는 교회에서 안내팀장을 5년간 했다. 종교단체 자원봉사는 보통 이력서 경력이 되기 어렵지만 파워 이력서양식에서는 그동안 해온 다양한 경력을 기록할 수 있었다. 그는 사회에서 말하는 이력만이 아니라 스스로가 갖고 있는 능력, 지원하는 회사에 필요한 능력을 접목시켜 쓸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컨설턴트 선생님들의 강연과 조언이 큰 힘이 됐다. 문씨는 “ ‘50 이후의 삶을 준비하라는 말을 교육을 통해 처음 들어봤다. 그 말이 큰 용기가 됐다고 말했다. 문씨 등 지원자들은 공연과정 및 공연콘텐츠 이해, 고객서비스 기술 등 실무 중심의 직무교육을 받았고 대형 공연장에서 현장실습을 했다. 블루스퀘어에서 일했던 10개월. 그가 얻은 것은 단순히 경력만이 아니었다. 자신감이었다.

문씨는 이 경험을 통해 계속 마음에 품고 있었던 진짜 꿈을 펼칠 용기를 얻었다. 기독교상담학을 공부하기 위해 대학원 진학 공부에 매진했고, 인터뷰 날이었던 지난달 26일 상담대학원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대학원 입학 준비 3개월 동안 코피 터지게공부했다고 했다. 걸어가면서도 공부 내용을 녹음한 파일을 들었다. 그는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가 구름 위로 걷는 느낌이었다“50대인 제 안에서 이런 에너지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 못했다고 했다. 대학원 공부 이후에는 임상심리사가 되기 위한 국가고시 준비를 할 계획이다. “심리학 공부를 하면서 나를 들여다보게 됐고 나를 치유하는 과정도 됐다고 생각해요. 이 에너지로 현장에서 뛰며, 다른 사람을 살리는 상담사가 되고 싶어요.”

노동부는 40대부터 자신의 경력을 진단하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생애경력서비스를 제공 중이다. 노사발전재단(https://www.nosa.or.kr/portal)은 전국 광역 단위에 13개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를 운영한다. 서울시50플러스재단(https://50plus.or.kr/)에서도 ‘50 이후의 삶을 준비하는 곳을 모토로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황영희 컨설턴트는 “40대 이후에는 주 경력 외에 스스로 잘할 수 있는 다른 경력, 병행경력을 차근차근 쌓아 가는 것이 중요하다재직기간 직무 전문성을 높이면 생산성 높은 인력이 되고 현 직장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직업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를 위한 공부를 해야 궁극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황 컨설턴트는 평생 공부하고 평생 일하는 시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를 아는 힘, 평생 새로운 것을 배우는 힘이라고 말했다. 임아영 기자 layknt@kyunghyang.com

 

다시 쓰는 인구론]파독 노동자 잊었나인간다운 삶기본권 보장 않는 한국

체계·방향성 없는 이민정책

 

1970년대 독일에서 체류권을 보장받기 위해 서명운동을 하고 있는 파독간호사들(왼쪽 사진), 지난해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세계이주노동자의 날기자회견에서 노동권 보장을 촉구하는 플래카드를 펼쳐 들고 있는 이주노동자(오른쪽). 서울역사박물관 제공·경향신문 자료사진

1970년대 독일에서 체류권을 보장받기 위해 서명운동을 하고 있는 파독간호사들(왼쪽 사진), 지난해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세계이주노동자의 날기자회견에서 노동권 보장을 촉구하는 플래카드를 펼쳐 들고 있는 이주노동자(오른쪽). 서울역사박물관 제공·경향신문 자료사진

 

최장 98개월까지 체류하는데

가족동반은 허용 안돼 생이별

가건물·비닐하우스에 기거하며

산업재해 건수는 내국인의 6

사업장 이동 횟수 제한에 걸려

회사 옮기는 것도 마음대로 못해

 

한국이 감당 가능한 규모 파악해

적정 규모로 유입 제한도 필요

이민 정책 초점 노동자에 맞추고

이민처 설립해 긴밀하게 조정해야

 

1970년대 독일로 건너가 일한 한국인 간호사 중에는 한쪽 소매가 잘린간호복을 간직한 이들이 있다. 이 간호복은 그들이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 싸운 흔적이다. 노동력 부족 문제를 겪던 독일은 당시 한국에서 다수의 파견 노동자를 데려왔지만, 석유파동으로 경제가 흔들리자 이들에게 더 이상 체류허가를 내주려 하지 않았다. 피폐한 조국을 벗어나 희망을 찾으려 한 파독 노동자들에게 이런 독일 정부의 입장은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간호사들을 비롯해 독일 각지의 한인들은 시위를 벌였다. “우리는 당신들이 필요로 해서 당신들을 도와줬다” “우리는 상품이 아니며, 우리가 돌아가고 싶을 때 다시 돌아가겠다는 외침이었다. 이들은 독일인들에게 지지서명을 받았고, 간호사들은 독일 정부 방침에 항의하는 의미로 간호복의 한쪽 소매를 자르기도 했다. 그 결과 영주권 획득, 시민권 신청 등이 가능한 외국인법 시행령 개정을 이끌어냈다.

 

파독 노동자들이 사람으로 인정받으려 싸운 지 50, 한국은 이제 사람을 받는 나라가 됐다. 열악한 작업장에서 한국인 대신 일할 사람을 찾기 위해, 저출산으로 줄어드는 인구수를 채우기 위해 한국은 수많은 이주민과 유학생을 받고 있다. 이들 중 일부는 코리안드림을 꿈꾸며 이곳에 정착하려 한다. 제대로 된 권리를 달라고 외치는 이들도 있다. 이젠 한국도 그들에게 답을 내놓을 차례다.

 

하지만 이주민들을 포용하고 그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과정은 그리 간단치 않다. 현재 한국은 이주민 인권 보장을 위해 필요한 제도적 장치가 부족하고 이민정책 체계가 잡혀 있지 않다. 또 이주민들의 권리를 제한 없이 보장하기에는 일자리 문제 등을 두고 벌어진 내국인과의 갈등도 심상치 않다. 이주민들의 권리를 보장하고 사회통합을 돕기 위해 체계적인 준비가 필요한 이유다.

 

이주민 생이별해결 못하는 한국

스위스 극작가 막스 프리슈의 희곡 <시아모 이탈리아니>(우리는 이탈리아 사람이다)에는 노동자를 불렀지만, 사람이 왔다는 구절이 있다. 과거 서독이 이탈리아 이주노동자들을 데려오면서도 사회통합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을 지적한 말이다. 이주노동자들은 초청한 국가 입장에선 노동력이지만, 이들도 사람이기에 기본적인 권리는 보장돼야 한다.

 

현재 한국은 이주민들에게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하고 있을까. 가족과의 생이별문제를 보면 그렇지 않다. 비전문직 취업비자로 들어온 이주노동자들은 당초 3년이던 체류기간이 사업주들의 요청으로 길게는 98개월까지 늘어났다. 하지만 가족동반은 허용되지 않고 있다. 설동훈 전북대 교수는 가족을 동반할 수 있는 권리는 무엇보다 앞서 보장해줄 필요가 있다체류기간이 10년 가까이 늘었는데 가족동반을 허용하지 않는 건 문제라고 말했다.

 

노동여건도 여전히 열악하다. 이주노동자의 산업재해 건수는 내국인의 6배에 달하고, 매년 6000건 안팎의 사건이 발생한다. ·축산·어업 분야에서 일하는 이들은 작업장에 딸린 가건물이나 추운 비닐하우스에서 사는 경우도 많다. 회사를 옮기고 싶어도 고용허가제 규정상 횟수가 3년간 3차례로 제한되고, 옮기는 것도 사업주 눈치를 봐야 한다. 정영섭 이주공동행동 집행위원은 사장에게 문제를 지적하다 직장에서 쫓겨나는 경우도 있고, 좀 더 나은 직장을 찾아 전전하다 미등록 신세가 되는 이들도 있다이렇게 늘어난 미등록 이주민이 4~5만명가량일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고용허가제를 일부 완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창원 IOM이민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현재 사업장 이동을 제한하는 규정이 한계기업으로 하여금 노동자들을 붙잡아두는 수단이 될 수 있다이런 규제는 좀 더 느슨해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주노동자들이 일할 수 있는 업종을 제한하고 한국인과의 일자리 경쟁만 예방한다면 이동 횟수 제한 규정은 풀어도 크게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한국산업안전공단이 2017년 실시한 조사에서는 이주노동자의 52.6%가 차별받은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하지만 한국은 독일·일본 등 다른 국가들과 달리 외국인 차별·인권침해에 대한 정의와 판단 기준, 구제 방법을 구체적으로 정해놓지 않고 있다. ·축산·어업과 예술 분야 등에서 이주노동자들의 인권침해를 살펴보거나 보호할 수 있는 체계도 부족하다.

 

이주민들에 대한 차별을 예방하는 체계는 부족한데, 한국인들의 시선은 날이 갈수록 따가워지고 있다. 일자리 경쟁 등을 이유로 이주민들을 위협으로 느끼는 이들이 증가하고 있으며, 이주민 포용 정책을 반대하는 집회도 늘고 있다. 이는 이주민들의 소외감으로 이어진다. 산업안전공단의 조사에서 이주민 응답자의 17.8%이 나라에 정착하여 사는 것을 한국인들이 싫어한다고 답했다.

 

이주민 규모에 대한 판단도 면밀해야

이주민들과의 공존을 위해서라도 한국이 감당할 수 있는 이주민 규모를 파악하는 것은 중요하다. 인구 변화를 보면 향후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수요는 큰 편이다. 한국의 생산가능인구는 20163763만명을 정점으로 2020년대는 연 30만명 이상 급격히 줄어들게 되며, 노인 비중이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강도 높은 체력이 요구되는 직종이나 간병인 수요가 크게 늘어날 수 있다. 현재도 내국인들이 기피하는 일부 제조업이나 농·축산·어업 분야에선 이주노동자에 대한 수요가 많다.

 

하지만 산업적 수요만 보고 이주노동자를 대폭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이주노동자들 중 고용허가제 적용을 받지 않는 재외동포나 미등록 체류자 일부는 한국인들이 몰리는 분야에 진출해 일자리 경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창원 부연구위원은 재외동포 비자나 비전문 취업비자로 들어온 이들이 실제 내국인 일자리를 얼마나 대체하는지 면밀히 조사하고 정책에 반영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주노동자를 필요로 하는 업체 중에는 경쟁력을 잃은 한계기업들이 많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이들 업체는 이주노동자를 낮은 임금으로 쓰며 버티고 있고,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을지 불확실한 상황이다. 산업구조가 향후 어떻게 변화될지 고려해 중·장기적인 이주노동자 수요를 판단해야 하지만 이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오정은 한성대 교수는 이주민들도 사람인데 무작정 많이 들어오게 한 뒤 필요 없어지면 나가라고 할 수 없다산업구조 변화 등을 감안해 신중히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주민을 적정 규모로 유지하려면 유입 관리도 강화해야 한다. 출입국 제도를 보완하고, 무비자나 취업 목적이 아닌 비자로 들어와 일하는 사례는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 태국의 경우 과거부터 무비자로 한국에 들어올 수 있었는데, 최근 미등록 체류자로 국내에 남아 취업하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그간 이주노동자 문제를 인권 중심으로 판단하던 진보진영에서도 최근에는 일자리 문제를 감안해 이주민들의 유입 제한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여당의 싱크탱크인 민주정책연구원부원장을 맡았던 이범 교육평론가는 국내에 들어와 있는 이주민들의 권리를 보장하고 온정적으로 대하는 것과, 이주민의 유입을 어느 정도로 통제할지는 다른 문제라며 자본의 국경 간 이동은 통제하는데, 노동이 국경을 넘어가는 것을 놔둬도 된다고 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체계 없는 이민행정, 변해야 할 때

한국에는 이주노동자, 결혼이주자, 유학생 등 이주민 전반을 아우르는 정책이 없다. 전체를 포괄하는 정책은 법무부의 사회통합 프로그램 정도다. 한국의 이민정책은 과거 농촌 총각 장가보내기운동에서 저출산 문제 해결을 위한 다문화가정 정책으로 이어졌다. 이에 따라 주된 정책은 주로 다문화가정에 집중돼 있다. 이주노동자의 경우 등록된 인원만 약 50만명으로 결혼이민자(15만명) 수를 크게 앞섰는데, 정책에서 소외됐다는 평가가 많다.

 

부처별로 정책 조정도 원만하지 않다. 이민정책은 교육·복지·산업·문화 등 여러 부처와 이어져 있어 긴밀한 정책 조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제까지 각 부처와 지방자치단체들은 개별적으로 다문화 예산을 짜고 정책을 수립했다. 이 과정에서 특정 부처가 세를 늘리기 위한 목적으로 과도하게 주도권을 잡으려 하거나 부처·지자체 간 조정이 안돼 예산이 중복 지원된다는 지적이 나왔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이제까지 해왔던 것처럼 다문화가정 중심의 정책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해 이주민 전체를 포괄하는 이민정책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책을 조정하는 컨트롤타워도 명확히 해야 한다. 이민정책을 입안·심의·조정하는 중앙정부 부처로서 이민처()’ 설립이 필요하다는 말도 여러 차례 나왔다. 하지만 아직 정부는 뚜렷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설동훈 교수는 부처들 사이에 있는 칸막이를 없애지 못하면 이민정책은 실패할 것이라며 현재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가 이민정책을 주로 다루긴 하지만 검사들이 쉬다 가는 조직이 됐다. 향후 총리실 산하로 이민처를 출범하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주민 정책의 추가 재원이 마련돼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그간 국내에서는 아직 국민이 안된 이주민을 위해 국가 예산을 사용할 수 있느냐는 반발이 있었기 때문이다. 강동관 IOM이민정책연구원 연구교육실장은 출입국관리 수수료나 범칙금 등 외국인으로부터 발생하는 세입을 재원으로 하는 이주민 사회통합기금을 설치할 필요가 있다수익자 부담 원칙에 따라 이민대책을 위한 예산도 확보할 수 있고 국민들의 반감을 줄이는 데도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주자들의 적응만 바라지 말고, 한국인들도 우리 문화에 관심 가져주세요

한국인 향한 이주민들의 한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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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25일 마리아 페 아바바오를 비롯한 필리핀 이주여성들이 다문화가정 아이들과 함께 지역의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고 있다. 마리아 페 아바바오 제공

지난해 1225일 마리아 페 아바바오를 비롯한 필리핀 이주여성들이 다문화가정 아이들과 함께 지역의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고 있다. 마리아 페 아바바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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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출신 노동자 리스

명절에도 고향 못 가고 노동 한국인과 어울릴 기회 없어

 

한국에는 더워’(여름)추워’(겨울) 있어요. ‘더워에는 휴가 있고, ‘추워엔 계속 일하죠. 추워는 좀 힘듭니다.”

 

인도네시아 출신 이주노동자 리스(30)는 서투른 한국어로 한국에서 처음 겪은 사계절과 노동의 고충을 표현했다. 인도네시아에서 버스 운전기사였던 리스는 지난해부터 경북 김천의 한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낮과 밤이 바뀌는 것은 고된 일이지만, 그는 일주일 단위로 주·야간 근무를 교대해 하루 10시간 반에서 12시간 반을 일한다.

 

리스는 월 260~290만원가량 벌지만 워낙 노동시간이 길어 다른 한국인과 어울릴 기회가 없다고 했다. 가족과 영상통화를 하거나 친구를 만나 고향 음식을 먹으며 모국어로 이야기하는 것이 유일한 낙이다. 그는 고향에 아내와 7세 된 아들이 있다. 한국인은 명절이 되면 가족을 찾아가지만 그는 불가능하다. 한국인들에게 즐거운 명절이 그에게는 일하는 날이다.

 

필리핀 결혼이주여성 마리아

한국인 다 됐다는 칭찬 들어도 필리핀인 정체성 잃어가 서운

충북 괴산에 사는 마리아 페 아바바오(49)1995년 정착해 다문화가족지원센터 양육지도사와 인근 고교의 다문화강사, 유치원·경로당 영어강사 등을 맡고 있다. 마리아는 정착 초기에는 고향이 그리워 힘들었다고 했다. 그는 임신하고 아이 낳을 때는 친정엄마가 너무너무 보고 싶었다그나마 고향 사람들에게서 친정엄마의 정을 느끼는데, 시어머니들은 며느리들끼리 몰려다니는 것을 안 좋게 생각했다고 말했다.

 

다행히 마리아를 비롯한 이주여성들이 헌신적으로 활동하며 결혼이주여성 모임을 보는 시선도 좋아졌다. 필리핀 이주여성 모임은 지난해 괴산고추축제에서 필리핀 음식을 팔아 90만원을 벌고, 이를 군민장학회와 괴산군에 기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마리아에겐 또 다른 고민거리가 생겼다. 그는 예전에는 한국인 다 됐다는 말을 들을 때 기분이 좋았는데, 지금은 필리핀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이 사라지는 것 같아 서운하다고 했다. 이주민들만 한국에 적응하기를 바랄 게 아니라, 한국인들도 이주민들의 문화적 배경에 관심을 갖고 교류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즈베키스탄 유학생 딜노자

이주자를 다문화라고 부르면 진짜 다문화 상상하기 어려워

우즈베키스탄 유학생인 갈라노바 딜노자(30)는 한국의 다문화 정책을 비판했다. 다문화교육을 전공한 딜노자는 다문화가 다양한 문화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 이주노동자와 결혼이주여성, 탈북자, 유학생을 묶어 부르는 말이란 사실을 알고 의아했다고 했다. ‘다문화로 불리는 사람들은 사회의 주류와 분리된 존재로 여겨지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딜노자는 이주자를 다문화라고 부르는 이상 진짜 다문화를 상상하기 어렵다다문화란 말은 궁극적으로 사라져야 하지 않을까라고 반문했다.

 

그들이라 불렀던 이주민, 이젠 우리

우린 이방인을 품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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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인난 시달리는 중소제조업

외국인 노동자 없으면 마비돼

농축어업도 이주민 손 빌려야

아이들 없어 생기 잃었던 농촌

결혼이민자들 덕에 지탱되기도

 

외국인주민 11년 새 3.5배 증가

69개 시··구에선 5% 이상 차지

고학력자 비중 74.5% 달하는데

대부분 질낮은 단순일자리 종사

 

지난달 8일 밤, 일본 참의원(상원)에서는 격한 몸싸움이 벌어졌다. 아베 정권이 추진하는 출입국관리 및 난민인정법과 법무성설치법의 일부 개정 법률안’(이하 출입국관리법)을 통과시키려는 여당 측과 이를 막는 야당이 대립했기 때문이다. 여당의 강행으로 통과된 개정 법률은 오는 41일 시행될 예정이다.

 

외국인들을 위한 새로운 체류자격(특정기능 1, 2)을 신설하고, 단순노동직에도 사실상 영주권의 문을 활짝 열었으며, 224억엔의 예산을 배정해 교육·생활·금융 등 다각적인 외국인 지원책을 마련했다.

 

이 법의 지향은 한마디로 적극적인 외국인 끌어안기.

보수적인 국가 일본이 외국인 노동력 문제논의를 시작한 지 10개월도 안돼 법안 통과까지 강행한 것은 계산기를 두드린 끝에 내린 결론이다.

 

이민 문제 전문가 설동훈 전북대 교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취업지역을 골라서 가는 시대에 대한 절박함의 표현이라며 한국은 긴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뿐 아니다. 미국, 캐나다, 호주 같은 전통적 이민국가와는 달리 한국처럼 국가를 중시하던 독일도 2005년 이민·난민청을 설립하며 이민자의 사회통합정책을 강력 추진하고 있다. 1999년부터 21세기 인력 유치계획을 발표하고 외국인에게 각종 혜택을 준 싱가포르는 현재 이민자들이 전체 인구의 약 3분의 1을 차지한다.

 

한국은 이주민에 어떤 사회인가.

다인종·다문화로의 진전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며 외국인·이민 정책들을 통합·조정하기 위한 총괄기구를 설치할 것을 지시한 이는 20064월 국정과제 회의장의 노무현 대통령이었다.

 

이후 10여년. 다문화 사회로 가야 한다는 당위는, 늘 시기상조론에 막혔다. 이주민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뭘 위해 얼마나 받아들일 것인지 논의 없이 갈팡질팡하던 사이 이미 이들은 우리 안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경향신문이 취재 과정에서 인터뷰한 기업인, 농부, 상인들은 외국인 없이는 장사할 수 없다” “공장 운영이 안된다고 했다. “고향을 이들이 지킨다고도 했다. 이들은 이미 한국 사회에 꼭 필요한 존재가 됐다.

 

세계는 다양성의 가치를 적극 내세우며 함께 발전해 가는 윈윈 전략을 세우고 있는데, 우리는 막연한 혐오와 두려움, 불안감이 뒤범벅된 채 어정쩡한 내일을 맞고 있다. 이민 관련 전문가들은 이젠 그들이 아닌, ‘그들을 품은 우리를 고민해야 할 때라고 말한다.

 

이미 한 공동체안에이주민들 없인 대한민국이 멈춘다

 

노래반주기 생산업체인 ‘TJ미디어에서 외국 노래들을 수록하기 시작한 건 2002년부터였다. 올해 1월 기준으로 업소용 외국곡 수량은 중국 3000여곡, 필리핀 1300여곡, 베트남 1300여곡, 태국 500여곡, 러시아 700여곡, 스페인 100여곡 순이다. 국내 거주 이주민 수가 많은 국가들과 비슷하다. 대부분 고용허가제로 국내에 인력을 송출하는 나라들이기도 하다. 고향을 그리워하며 노래방을 찾는 이들이 이어지자 시장이 먼저 움직였다.

 

인구가 늘어나며 외국인들은 노동자이자, 소비자로, 주민으로 역할을 넓혀가고 있다. 이들이 멈추면 대한민국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불편함을 겪게 되는 상황이 왔다.

 

이들 없인 대한민국이 멈춘다

경기 김포시에서 아버지에 이어 2대째 소규모 PVC 공장을 운영 중인 장민준씨(37·가명)외국인 노동자가 없으면 한국의 제조업은 마비된다고 말했다.

 

현재 공장에서는 공장장(본인)을 제외하면 세 사람이 일하고 있는데 한국인(68), 중국인(47·조선족), 인도네시아인(35)이다. 공장이 해외로 갈 형편은 되지 않으니 외국인 노동자를 쓸 수밖에 없다고 했다.

 

내 기억에 1992~1993년쯤 네팔인들이 일하기 시작하면서 우리 공장도 외국인을 쓰기 시작한 것 같아요. 그 전엔 주로 아버지나 어머니 고향(칠곡) 사람들에게 알음알음 물어서 중학교 졸업하고 집에서 놀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우리 공장에 와서 일하라고 했는데, 다들 학력이 높아지면서 더 이상 그 말이 불가능한 상황이 됐죠. 월급이 적으니까.”

 

장씨는 한국의 제조업은 이미 2000년대 초부터 외국인 없이는 안 돌아갔다고 했다. 지방 공장엔 서울 사람들이 안 가려 해 더더욱 사람 구하기가 어려워서 외국인을 쓴다는 걸 들었다고 했다.

 

우리들의 식탁도 농축어업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이주민들의 땀으로 차려진다. 딸기를 따고, 쌈채소를 키우고, 돼지를 치고, 원양어선을 타는 많은 이들이 이주노동자들이다.

 

경기 포천시에서 양계장을 운영하는 김모씨(56)는 남편과 태국, 베트남, 캄보디아 노동자들과 함께 양계장에서 일을 한다. 3만마리나 되는 닭을 키우는데 닭진드기가 사람에게도 들러붙고 옷 속으로도 들어온다. 여름에는 극도로 덥다. 이런 환경에서 한국인은 구할 수 없어 대부분 태국이나 베트남 쪽 사람들을 쓴다.

 

2018년 이민자 체류실태 및 고용조사 결과를 보면 외국인 산업별 취업자는 광·제조업(45.8%)이 가장 많고, 도소매·음식·숙박업(18.5%), 사업·개인·공공서비스업(16.0%), 건설업(12.5%), 농림어업(5.6%) 순이었다.

 

기울어 가는 농촌은 때론 결혼이주민들의 힘으로 지탱되기도 한다.

 

충북 괴산 출신으로 안산에 사는 박관봉씨(63)는 고향 부모님댁 옆집에 사는 필리핀 여성 나은 엄마가 고향을 다 지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2015년 작고한 박씨의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나은이가 보고 싶다고 말했다. 옆집 나은이는 5세 여자아이다. 나은이는 박씨의 어머니를 까까(과자) 할머니라 부르며 매일 놀러왔다. ‘나은 엄마가 오고 나서야 마을에 20여년 만에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딸 둘, 아들 하나를 낳았다. 명절에 가도 매번 죽은 동네 같더니 아이들 소리가 들리니 역시 활기가 생겼다. 나은 엄마는 소 키우는 일, 괴산 특산품인 청결고추 재배 등을 도맡았고, 왔다 갔다 하면서 어머니 안부까지 묻는 등 멀리 사는 자식들보다 더 어머니에게 잘했다고 했다. 박씨는 살가웠던 나은이와 나은 엄마 덕분에 어머니가 5년을 더 산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에 나은 엄마들은 많다. 행정안전부가 발표한 ‘2017년 지방자치단체 외국인 주민 현황을 보면, 지난해 111일 기준 외국인 주민은 모두 1861084명이고, 이 중 외국인 노동자가 496000, 결혼이민자가 161000, 유학생이 117000명으로 주요 유형이었다. 1990년대 초·중반 농촌 총각 장가보내기로 많아졌던 결혼이민자들의 2세들도 이제 성인이 됐다. 3세대 진입을 앞두고 있다.

 

외국인 주민 수는 최초 조사 연도인 2006536627명에서 20171861084명으로 약 3.5배 증가했다. 186만명이라는 숫자는 17개 시·도 가운데 주민 수 2162000명인 충남 다음, 9번째 광역지자체 규모에 해당한다. 외국인 주민이 1만명 이상 또는 인구 대비 비율 5% 이상인 외국인 주민 집중거주지역은 전국 69개 시··구다. 외국인이 많이 사는 지역은 내·외국인이 자주 만나고 부딪치며 관계와 문화도 바뀐다.

 

부천 도당동의 부천강남시장에서 새마을정육점을 하는 제대성 상인회 회장(65)그 친구들(외국인) 없으면 장사를 못한다고 했다. 도당동의 외국인 주민은 10% 남짓이지만 손님 비율은 내·외국인 반반 정도다. 내국인들은 시장보다 대형마트를 즐겨 찾기 때문이다. 야간작업을 많이 하는 외국인 주민들은 주말에 멀리서도 택시를 타고 장을 보러 온다. 가벼운 주머니 사정상 가장 많이 찾는 건 돼지 부산물이나 뒷다리다.

 

초창기엔 우리도 이 친구들 많이 무시하고 밥 먹었어?’라며 반말하고 그랬죠. 지금은 달라졌어요.”

 

아이가 큰 병에 걸렸다는 집은 어떻게든 복지센터와 연결해주고, 가족 얘기, 친구끼리 유원지 놀러가고 벼룩시장 행사 간다는 얘기도 하는 친한 단골이 많다. 상인회와 주민들은 매년 강남시장 마을축제를 열고 있다. 축제가 끝나면 소주도 함께 기울인다.

 

우리도 예전에 설움받은 시절 있었잖아요. 이들도 지금은 한국에 사니 대한민국, 도당동의 주민이죠. 저희 시장에선 그 친구들에게 편견 없습니다. 모두들 다 지식인들이에요. 술 마시고 지나친 행동하는 건 되레 한국 사람들이고요.”

 

휴일인 27일 오후 경기도 부천 강남시장 상인회장인 제대성씨(왼쪽)가 시장 안에서 단골 손님들인 동네 외국인 노동자들을 만나 즐겁게 얘기를 나누고 있다. 김정근 선임기자 jeong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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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에 대한 시선, 서서히 변해간다

1980년대 후반부터 외국인 노동자가 들어왔고, 1990년대 초부터는 결혼이민자가 그 대열에 합류했으며, 2000년 이후에는 외국인 유학생들이 가세했다.

 

1991년부터 2006년까지 한국 정부는 중소기업에 인력을 공급하고자 노동자가 아닌 연수생이라는 편법으로 외국인 산업기술연수제도를 채택했다.

 

산업기술연수제도는 불법체류와 인권침해 등 문제점만 노출했고, 정부는 대신 2004년부터 외국인 고용허가제도를 도입했다. 고용허가제는 내국인을 구하지 못해 인력난을 겪고 있는 사업장에 일정한 요건하에 외국인 노동자를 합법적으로 고용할 수 있도록 허가해주는 제도다.

 

동남아지역 등 16개국에서 외국인력(비자종류: E-9)을 도입하는 일반 고용허가제와 중국·구소련 국적의 동포(비자종류: H-2)를 도입하는 특례고용허가제로 구분한다.

 

고용허가제를 통해 한국땅을 밟는 이들은 고국에선 상대적으로 고학력자들이다. 특히 한국에 오는 이들의 학력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고 수준으로 조사됐다. 조사 결과를 발표한 이민정책연구원 측은 15~64세의 이주민 고학력자(대졸 이상) 비중이 약 74.5%, 한국인의 고학력 비중보다 15%포인트가량이나 더 높다고 밝혔다.

 

이민정책연구원 측은 질 낮은 단순일자리가 여전히 많아 이주노동자들도 고생이고, 국내 산업의 구조조정도 늦어지고 있을 가능성이 있는 만큼 이 부분을 좀 더 고민해 장기적으로 바꿔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도 했다.

 

이주민들을 보는 시선은 느리지만 서서히 변해가고 있다. 이란주 아시아인권문화연대 공동대표는 지난해 10월 경기 고양시 저유소에서 발생한 화재사건의 피의자로 경찰이 스리랑카 노동자를 지목했지만 희생양 만들기라며 경찰 발표에 반대하는 여론이 일어 결국 석방된 일, 종교적 이유로 난민을 신청했지만 거절당했던 이란 출신 중학생이 동급생 친구들의 국민청원 활동으로 난민으로 인정받은 일 등을 보며 희망을 발견했다고 했다.

 

이 대표는 중학생 친구들의 자발적 연대의식과 풍등사건 때 시민들이 보여준 시민의식이 우리 사회의 행복과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화두라는 생각이 들었다풍등사건의 훈훈한 뒷얘기도 함께 전했다. 풍등을 맨 처음 날린 학교의 학부모들 사이에서 스리랑카 노동자가 벌금을 물게 된다면 우리가 모금하겠다는 움직임이 있었다는 얘기다.

 

우리 사회가 공정성을 지향하고 있구나감동받았다고 했다.

이 대표는 한걸음 더 나아가 이주민을 다양성의 관점에서 보자고 했다. 관용(Tolerance)이 있는 사회에 다양한 재능을 가진 인재(Talent)가 모여들고, 이를 통해 기술(Technology)이 발전하며 발전과 혁신이 일어난다는 리처드 플로리다 토론토대 교수의 3T 이론이다.

 

연말정산 하고 세금 꼬박꼬박 내는데근거 없는 외국인 혐오는 이제 그만

 

국내 이주민 문제를 이야기할 때 항상 빠지지 않는 논쟁들이 있다. 대표적인 쟁점들에 대해 사실관계를 확인해 봤다.

 

일자리 뺏는다? 필요 의한 초청

우리 사회가 고용허가제를 통해 16개국과 양해각서(MOU)를 맺고 노동자들을 초청하는 이유는 일손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인력부족 업종인 중소 제조업과 농축산업, 어업, 일부 서비스업 등이 대상이다. 실업난이 심각하지만, 내국인들은 소위 3D 업종에 가려 하지 않아 이들 업종은 만성적인 구인난을 겪고 있다. 지난해 9외국인 고용 애로 해소 중소기업인 간담회에 참석한 중소기업 관계자들의 요구도 고용허가제 인력 쿼터 확대” “외국인 숙련기능인력 쿼터 확대등 대체로 외국인 노동자를 늘려달라는 것이었다. 강동관 IOM이민정책연구원 연구교육실장은 외국인 노동자의 노동대체탄력성(외국인이 들어옴으로써 내국인이 얼마나 대체되는가의 정도)은 일부 제조업과 일반서비스 업종 몇 개에 존재하긴 하지만 미미하고, 오히려 보완적인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고용허가제 적용을 받지 않는 재외동포나 미등록 체류자 일부는 건설업이나 서비스업에서 제한적으로 한국인과 경쟁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범죄 많다? 내국인보다 비율 낮아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의 공식통계에 나타난 외국인 범죄의 발생 동향 및 특성보고서를 보면, 외국인 범죄율은 내국인의 절반 정도인 것으로 조사됐다. 통상적으로 범죄율이 높은 20~59세 남성 인구가 많은 국내 체류 외국인의 인구 특성을 반영한 외국인 인구 추정치와 내국인의 주민등록인구 기준 연령 보정 자료를 사용해 내·외국인의 인구 10만명당 검거인원지수를 계산했다. 2011~2015년도 매년 내국인의 검거인원지수가 2배 이상 높았다. 다만 살인은 기수와 미수를 합쳐 외국인이 2배가량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를 작성한 최영신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살인범죄 건수는 아주 적고 피해자, 가해자, 원인 등 세부내용이 파악되지 않아 조심스럽다. 대체로 외국인 범죄는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동일 국적이 많다고 말했다. 이어 오히려 내국인을 대상으로 한 범죄는 차별과 무시가 쌓여 분노감정으로 표출되는 범죄가 많은 만큼 이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세금 덜 낸다? 그만큼 지원도 안 해

국세청이 2013년에 낸 외국인 노동자의 연말정산 현황을 보면 2013년에 연말정산을 신고한 외국인은 48만명, 이들이 낸 세금은 6025억원이었다. 아시아인권연대 등 시민단체에서 노동자 증가를 고려해 국세청 발표처럼 노동자 수와 총급여 등으로 결정세액을 추계해보니 2014년엔 6964억원이 나왔다. 2016년 법무부 외국인정책본부가 발표한 중앙과 지방의 외국인 정책 예산 규모는 6758억원이었다. 외국인 정책 예산의 상당 부분이 다문화지원센터 인건비 등 내국인 일자리 만들기와 조직운영비다. 외국인들이 낸 세금만큼 외국인에게 직접 지원되진 않는 셈이다.

물론 외국인 노동자들이 수입의 상당 부분을 본국으로 송출하는 것은 사실이다. 이에 대해 설동훈 전북대 교수는 가족들이 다 본국에 있는데 당연하지 않으냐. 최장 10년 가까이 한국에 머무를 수 있는 반면 가족 초청을 불허하는 것은 선진국 어느 곳도 없다인권은 물론 경제적으로도 손해인 만큼 제도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다시 쓰는 인구론]우리가 원하는 가족은? ‘느슨한 점선 같은 가족

가족과 돌봄을 다시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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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만들고 싶은 가족은 어떤 모습입니까?”라고 물었다. 사람들이 꿈꾸는 가족은 더 이상 하나의 모습이 아니었다. 결혼도 출산도 선택이며 독신과 입양도 소망인 것으로 나타났다. 필수로 여기는 것은 서로에 대한 존중이었다. 응답자들은 나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가족이 아니라 가 있는 가족이어야 사랑도 가능하다라고 말했다.

 

당신이 만들고 싶은 가족은 어떤 모습입니까?”라고 물었다. 사람들이 꿈꾸는 가족은 더 이상 하나의 모습이 아니었다. 결혼도 출산도 선택이며 독신과 입양도 소망인 것으로 나타났다. 필수로 여기는 것은 서로에 대한 존중이었다. 응답자들은 나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가족이 아니라 가 있는 가족이어야 사랑도 가능하다라고 말했다.

 

한국서 가족은 애정의 결합이 아닌

국가에 동원된 정치경제적 유닛

결혼·출산에 대한 거부감 불러

 

한국인에게 가족은 한때 따뜻한 이미지를 주는 대명사였다. 명절이면 민족대이동이 일어난다.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어머니는 우리가 고향에 가야만 하는 이유였다.

 

또 하나의 가족처럼 기업 이미지 광고에도 가족이 등장했다. 가족은 서로 보듬고 돌보는 공간이란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대이동 끝에 모인 친척들이 각자의 재산과 자녀의 학업성취나 결혼상대방을 비교하다 상 차리라며 며느리를 부른다. 나이가 들었는데도 결혼을 하지 않거나 싱글맘 등 정상가족의 범주에 들지 못하는 사람들은 가족의 공동체 내에 편입되지 못하고 숨는다.

 

딸 같아서” “아들 같아서는 직원에 대한 성범죄나 착취를 정당화하는 대표적인 변명이 됐다. ‘또 하나의 가족들은 위기 때마다 가족이라 부르던 이들을 잘라 살아남았다. 돌봄은 사교육 압박과 막대한 가사노동의 모습으로도 나타난다. 가족은 누군가에게 대가 없는 희생을 요구할 때 빌려오는 표현이 됐다.

 

지난해 합계출산율은 처음으로 1명 이하로 떨어질 것으로 예측된다. 더 이상 가족을 구성하지 않겠다는 환멸이야말로 초저출산 현상의 근본 원인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특히 가족을 구성하는 이유였던 돌봄이 여성에게만 집중되면서 대가 없는 희생이 돼 버렸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출산율이 아니라 가족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인에게 가족은?

상류층 가정의 사교육 경쟁을 그려낸 JTBC 드라마 <SKY캐슬>은 현대 한국인들의 가족관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으로 평가받는다. 드라마에서 가족은 자녀교육을 위한 베이스캠프(기지)처럼 운영된다. 아버지는 자녀들의 교육비용을 대는 투자자, 어머니는 자녀들을 관리하는 경영자이다. 사교육의 목적은 아버지가 가진 권력과 부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캐슬가족들은 자녀를 위해 반칙도 불사하지만, 결국 살인자살이라는 파국이 가족 때문에 벌어진다.

 

이영미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과거 드라마에서 가족은 지켜져야 할 따뜻한 곳, 사회로부터 받은 상처를 치유하는 공간이었다고 말했다. 1991년 방영된 <사랑이 뭐길래>의 경우 갈등의 원인은 가부장적 아버지, 억눌린 어머니, 철없는 아들, 신세대 며느리 등 가족 개개인의 캐릭터에서 비롯된다. 가부장제에 반기를 드는 며느리가 등장하는 등 사회상을 반영하지만 가족 바깥의 사회는 극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SKY캐슬>에서 교육과 불평등이란 사회문제는 적극적으로 가족으로 침투하고 영향을 준다. 이 교수는 “<SKY캐슬>에서 가족은 그 자체로 갈등의 원인이자 죽음이라는 형태로, 사회문제로 인한 피해가 돌아가는 최종적인 곳으로 묘사된다사람들이 더 이상 가족에게서 위로를 찾지 못할뿐더러, 사회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가족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인식을 드러냈다고 말했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는 한국인의 가족관을 변화시킨 계기다. 외환위기 이후 이혼율이 치솟고 자녀를 먼저 살해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는 형태의 가족범죄가 급증했다. 반면 살아남은 가족들은 사교육과 부동산 투자에 더 힘을 쏟는다. 외환위기 이후 재벌 2세와의 결혼을 통해 사랑과 신분상승을 동시에 얻는다는 신데렐라스토리가 부쩍 증가했다. 가족은 권력과 부를 승계하는 공간이지만 그래도 사랑의 결합체라는 환상으로 포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교수는 신데렐라 드라마마저도 어느 순간 사라져버렸다고 말했다. 포장지로 덮어도 대중의 마음을 속일 수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한국은 개인 아닌 가족으로 이뤄진 사회

장경섭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국은 사회를 이루는 기본 단위가 개인이 아닌 가족이라며 한국을 가족 자유주의 체제로 규정했다. 장 교수에 따르면 한국에서 가족은 애정의 결합체가 아니라 국가의 필요에 의해 동원되고 역할을 수행하는 정치경제적 유닛(단위)”이다.

 

서구에서 국가와 시민 간 계약으로 사회가 탄생했다면 한국 사회는 국가의 가족 동원으로 탄생했다. 이 가족은 저임금에도 장시간 노동을 하는 아버지, 이 아버지와 미래의 노동자인 자녀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는 어머니로 구성된다. 교육·주거·의료 역시 가족이, 가족 내에서 어머니가 수행해야 할 의무가 된다. 국가의 역할은 개발을 통해 아버지에게 일을 나눠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국가는 복지지출에 비용을 들이지 않고 손쉽게 개발에 국민들을 동원할 수 있다. 기업은 노동자의 돌봄에 신경 쓰지 않고 장시간 노동을 시킬 수 있게 된다. 가족은 아버지와 어머니 각각의 헌신을 통해 경제성장의 과실을 따서 자녀에게 전달한다.

 

문제는 아버지의 일자리가 불안정했다는 점이다. 장 교수는 한국의 산업화는 장수가 말을 갈아타듯 진행됐다고 했다. 농업에서 도시경공업, 도시경공업에서 중공업, 중공업에서 IT와 첨단산업으로의 격변이 30~40년 만에 일어났다. 한 개인이 도무지 적응할 수 없는 속도이다. 1932~1961년 출생한 남성들은 결혼할 무렵의 직업을 만 45세가 될 때까지 유지하는 비율이 40%에 불과했고, 나머지 60%는 자영업 등 더 불안정한 일자리로 밀려나는 직업의 이동을 겪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남성이 불안정한 직업으로 이동하는 동안 안전망은 없었다.

 

가족의 불안은 기혼여성의 맞벌이로 문제를 해결했다. 대부분 남편보다 더 불안정한 일자리였다. 2017년 기준 직장인 평균소득은 남성이 337만원, 여성이 213만원이었다. 20대 남성(206만원)과 여성(190만원)은 엇비슷했지만 40대 남성은 416만원, 여성은 251만원으로 격차가 크다.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율이 높아져도 남녀의 가사노동시간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2014년 조사에 따르면 맞벌이 부부에서 여성의 가사노동시간은 남성보다 3배 높다. 가사노동은 아내·어머니의 역할이라는 관념이 여전히 확고한 탓이다. 기업은 이 과정에서 비용을 아끼고 국가는 방관한다.

 

돌봄의 가치를 무시하는 사회에서

여성에게 돌봄의 의무가 집중되고

남성 가장은 돌봄에 극히 무능해져

 

가족의 동원은 돌봄의 불균형으로, 돌봄의 불균형은 결혼과 출산에 대한 거부로 이어진다.

 

장 교수는 미혼여성에게는 갈수록 결혼이 불안정 고용 상태에서 가사 참여도 저조한 남편과 다양한 돌봄 의무와 본인의 고강도 직장생활 사이의 황당한 결합으로 다가올 수 있다고 말했다.

 

개인을 대신하는 가족은 개인에게 억압으로 다가온다. 장세현씨(33·가명)는 가족을 떠나기 위해 비혼과 유학을 택했다. 장씨는 어릴 적부터 너 그거 하면 안돼’ ‘네가 그런 것 할 때야?’라는 말을 가장 많이 하는 공간이 가족이었다사랑하는 사이에서라면 오히려 할 수 없는 말들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김영란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저출산과 결혼거부 등의 가족해체는) 개인존중의 개념이 없고, 공사 구분 불명확한 가족이라는 이름의 폭력, 가족이라는 말로 개인이 사라지는 것이 싫은 것이라고 말했다.

 

드라마 속 가족의 변화

<사랑이 뭐길래>

 

가족은 상처를 치유하는 곳. 갈등의 원인은 사회가 아닌 캐릭터에 한정된다.

<SKY캐슬>

 

교육과 불평등이라는 사회 문제의 해결 없인 가족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마더>

 

혈연이 아닌 방식으로 맺어진 가족 등장, 연대와 친밀함에 대한 욕구를 드러낸다.

 

·돌봄의 불균형, 불행한 가족

남성의 노동, 여성의 돌봄 역할을 강조하는 사회에서 가족을 구성한다는 건 남녀 모두에게 억울함과 부담을 지는 일로 인식된다. 대학생 장현석씨(24·가명)아버지는 평생 4인분의 몫을 했지만 나는 1인분의 몫을 할 자신도 없다고 말했다. 유치원생 아들을 둔 이은희씨(33·가명)사내커플이었지만 아이를 낳고 더 이상 일할 수 없어서 전업주부의 길을 택했는데, 부부싸움할 때 남편이 생활비를 주지 않겠다고 들먹거려 애정이 식는다. 남편도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건 안다주변인에게 결혼하지 말 것을 권한다고 말했다.

 

일과 돌봄이 불균형한 상태에서 유지되던 가족들은 평상시에도 불행하지만 노후가 되면 극적인 위기를 맞는다. 지은숙 한림대 일본학연구소 연구원은 지난해 한국여성민우회를 통해 부모를 돌보는 비혼여성 20명을 인터뷰하며 알게 된 사실을 들려줬다.

 

돌봄과 가족의 문제 해결 하려면

돌봄의 재구성을 정치의 목표로

끊임 없는 논의 과정 만들어야

 

 

스무 명 모두 네 어머니가 쓰러졌다는 아버지의 연락을 받고 바로 어머니를 돌보기 시작했다. 아버지로부터 돌봄을 넘겨받은 경우는 한 건도 없었다. 아버지는 자녀에게 연락한 것으로 역할을 다한 것이다. 일본이라면 아내를 돌볼 책임은 우선 남편에게 있다. 남편이 혼자 돌보다 힘에 부치면 자녀들을 찾는다. 일본과 비교해서도 한국의 가족이 부부간 애정보다, 친자관계 중심으로 구성돼 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돌봄의 위기는 돌봄의 가치를 무시하는 데서 출발한다. 지 연구원은 가족은 임금, 회사는 성과 중심으로 운영된다. 돌봄은 중요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가족 중에서도 밖에서 높은 임금을 받는 남성 가장은 돌봄에서 제외되고, 돌봄에 무능해진다. 결국 돌봄은 여성에게 집중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극단적 불균형 상태에 놓인 돌봄에 대해 무지, 무관심, 무인정의 ‘3무 돌봄이라고 표현했다. 지 연구원은 부부돌봄이 일반화되면 함께 살던 남편이 돌보면 노후를 집에서 보낼 수 있고 지역 커뮤니티 중심으로 돌봄체계를 짤 수 있다. 부부돌봄이 없는 문화라면 결국 시설을 택하게 된다고 전했다.

 

돌봄을 극단적으로 저평가하는 사회는 돌봄의 사회화를 통한 해결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지난해 기준 요양보호사의 월 평균 급여는 60만원이다. 일본의 요양보험격인 개호보험료가 약 5만원 수준인데, 한국에서는 몇천원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돌봄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는 사회에서, 가구의 주소득원들은 돌봄을 위해 사회보험료를 지출하는 데 인색하고, 돌봄서비스의 질은 나빠진다. 돌봄종사자들에게 학대당하는 일까지 발생한다. 돌봄 비용을 대기 위해 장시간 일하는 남성, 일도 하면서 돌봄도 병행하는 여성, 열악한 돌봄시설에 맡겨진 노인과 아이 모두에게 돌봄의 위기는 피할 길이 없다.

 

돌봄의 재정의·돌봄의 재구성

돌봄은 부담이지만 한편으로 권리이기도 하다. 오는 4월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직 예정인 교사 이보라씨(32)는 아이를 기르며 육아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고 했다. “처음에는 한 아이의 엄마가 될 수 있을까 고민스러워 낳지 않을 것도 생각했다. 막상 낳아보니 젖 먹고 잠든 아기 모습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다. 아기에게는 가족의 손길이 꼭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 하지만 이런 고민을 말하는 것이 네가 직장을 그만둬야 한다’ ‘아이는 전적으로 엄마가 키워야 한다는 대답으로 돌아올까봐 꺼내지 못한다고 말했다.

 

해결책은 돌봄을 재구성하는 일이다. 지은숙 연구원은 과거에는 성평등을 위해 여성도 남성처럼 노동시장에 내보내는 전략을 택했지만, 여성은 일과 돌봄 두 가지 의무를 떠안게 되고, 인간은 친밀함과 애정에 기초한 비공식 돌봄이 필요하다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남성이 여성처럼 돌봄의 영역으로 적극 들어와야 한다고 말했다.

 

보다 민주적인 가족관계도 필요

친밀하되 정서적 부담은 줄이고

남성이 적극적으로 돌봄 참여해야

 

김희강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는 돌봄의 재구성을 정치의 주된 목표로 삼고 헌법 차원에서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기존의 정치이론에는 돌봄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지 않다. 자유주의 관점에서는 돌봄은 알아서 해야 할 일로 여겼고, 공동체주의 관점에서는 가족에 헌신적으로 전담해야 할 일이 됐다. 이러한 관점으로는 돌봄과 가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정치권부터 나서 우리 사회의 주된 원리가 돌봄이라고 선언하고, 돌봄의 가치에 대해 끊임없이 논의하는 과정을 국가가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돌봄을 재구성하려면 가족관계도 변해야 한다. 2014년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발행한 <가족의 미래와 여성가족정책 전망 보고서>에서는 가족을 실선과 점선으로 비유했다. 친밀하지만 정서적·경제적인 부담이 적은 가족은 느슨한 점선으로 네트워크처럼 연결된 가족이다. 신경아 한림대 교수는 가족관계는 보다 민주적이 돼야 한다. 민주적인 가족은 느슨하게 점선으로 네트워크처럼 연결된 가족의 모습으로 표현될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방영된 tvN 드라마 <마더>는 모녀가 3대째 입양으로만 이뤄진 가족을 다뤄 반향을 일으켰다. 따뜻하고 지켜져야 할 보금자리로서 가족을 묘사하지만 혈연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맺어진 가족이란 점이 화제가 됐다. 가족붕괴, 가족피로 등 얼음장 같은 환멸 아래에서도 돌봄과 친밀감에 대한 욕구는 흐르고 있다. <경향 다시 쓰는 인구론 시리즈 끝>



2019 빈곤 리포트 <>대물림되는 빈곤극빈층 10명 중 4조부모대부터 가난

극빈층의 절반은 부모 때부터 가난한 것으로 조사됐다. 가난이 대물림되면서 빈곤의 덫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중앙일보는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130명의 빈곤 실태를 설문조사 했다. 상당수는 대면 조사했고, 14명은 심층 인터뷰 했다. 서울의 지역자활센터 네 군데 등록자 100, 시립병원 입원 환자 30명이다.

기초수급자 130명 설문

생활수준 개선 가능성 없다” 52%

“10년 이상 기초수급자 생활” 27%

저성장 고착화로 빈곤 더 악화

조사 결과 65(50%)이 청소년 시절 부모가 하위 계층에 속했다고 응답했다. 하위 계층을 상중하로 나누면 아래쪽에 더 몰려 있다. 부모가 하하(下下) 계층이었다고 응답한 사람이 25(19.2%), 하중(下中)26(20%), 하상(下上)14(10.8%)이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중앙일보의 20037월 기초수급자 조사(420가구)에서 가난 대물림 비율이 59.7%였는데, 16년 지난 지금과 큰 차이가 없다. 한국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사회복지지출 비율이 10.4%.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자료를 제출한 29개국 중 꼴찌다. 하지만 20004.5%에서 급격히 늘고 있다. 그런데도 빈곤 대물림은 끄떡없다. 이번 조사에서 130명 중 40.8%는 부모가 중류층이었고, 9.2%는 상류층이었다. 응답자의 42%는 조부모대부터 가난했다고 답했다.

지난 8일 오후 서울 남대문 쪽방에서 만난 전형용(42)씨가 대표적이다. 할아버지는 강원도에서 소규모 농사를 지었다. 어머니는 어릴 때 가출을 반복했다. 전씨는 초등학교를 마치고 14살 때 상경해 봉제공장에서 일했다. 16세에 아버지가 숨졌다. 꽃게잡이 선원, 폐지 수집, 펌프공장 근로자, 건설 일용직 등을 전전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전씨는 3대째 이어지는 지긋지긋한 가난을 떠올렸다. 42년 사는 동안 가난에서 벗어날 기회가 없었다. 배운 것도, 밑천도, 돌봐주는 사람도 없었다. 2007년 남대문 쪽방으로 들어와 지금까지 벗어나지 못한다. 2008년 폭력에 연루돼 감방을 들락거렸고 지난해 말 만기 출소하면서 석 달짜리 단기 기초수급자가 됐다. 8일 오후 바깥은 영하 2, 쪽방은 14도였다. 전기 패널을 켰지만 외풍 탓에 추웠다. 재떨이, 빈 소주병, 널브러진 위장약 봉지, 먹다 남은 찌개, 상담소가 나눠준 빵. 전씨는 내 삶이 더 나아지겠어요?”라고 말했다. 그에게 희망은 사치처럼 보였다. 29일 오전 다시 쪽방을 찾았다. 방이 비었다. 수소문했더니 알코올 중독 때문에 입원했다고 한다. 이번이 세 번째다. 병원으로 찾아갔다. 알코올 탓에 지방간 진단을 받은 지 오래지만 위·간 상태를 진찰한 적이 없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극빈층이 계층의 사다리를 타고 오를 수 있을까. 중앙일보 조사에서 기초수급자 130명의 52.3%생활수준이 지금보다 나아질 가능성이 없다고 응답했다. 20%현재수준을 유지할 것으로 전망한다. 나아질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26.2%. 정부 생계비 보조금 등을 포함한 월 소득은 51~75만원인 사람이 36.2%로 가장 많다. 기초수급자에서 좀체 빠져나오지 못한다. 전체 기초수급자 가구(1032998가구, 2017)27%가 수급자가 된 지 10년 넘었다.

1998년 외환위기 이후 양극화가 심화됐고, 최근에는 최저임금 인상 여파로 저소득층의 일자리가 줄고 소득이 악화했다. 저성장이 고착화하고 사교육이 만연하면서 80, 90년대처럼 개천에서 용 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송다영 인천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부모 세대도 가난하고 지금 세대도 가난하고 자식 세대도 가난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다. 90년대 미국과 비슷하다고 진단한다. 안상훈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복지 천국인 스웨덴에도 빈곤이 대물림된다. 자본주의가 성숙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며 교육 기회를 균등히 해 이들이 일자리를 잡아 빈곤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보편복지 확대로 오히려 빈곤층 복지 지체돼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운영위원장은 보편복지 확대가 취약계층을 어렵게 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29일 오후 대통령 직속 소득주도성장특별위원회가 주최한 포용국가로 한 걸음 더, 소득격차 원인과 대책토론회에서다. 이날 토론자로 나선 오 위원장은 “2010년 이후 보편복지 담론이 부상하면서 복지의 양이 늘어났지만 무상급식·보육, 아동수당 등 보편·준보편 방식으로 늘어났다반면 취약계층 복지는 상대적으로 증가가 완만하거나 정체됐다고 말했다. 중간계층의 복지 혜택은 크게 증가했지만 하위계층은 상대적으로 혜택이 적었다는 것이다. 오 위원장은 이를 복지가 확대됐음에도 취약계층이 상대적으로 주변화되는 복지의 불균등 발전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보편복지는 흔히 모두에게 제공되는 복지로 이해하지만 보편복지의 핵심은 시민으로서 복지에서 배제되지 않고 적정한 급여를 보장받는 것이라며 특정 제도가 모두에게 항상 적용돼야 한다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다고 말했다. 보편복지 개념엔 취약계층을 위한 선별복지도 포함돼 있다는 것이 오 위원장의 설명이다. 그는 보편복지엔 아동수당, 보육료 지원 등 모두에게 제공되는 복지도, 기초생활급여나 공공임대주택 등 특정계층을 위한 제도도 포함된다빈곤계층이 올라갈 수 있는 영양분을 제공하기 위해 이젠 가난한 사람을 위한 복지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빈곤 여파는 통계수치로도 확인된다. 이날 토론회 발표자인 김태완 한국보건사회연구원 포용복지연구단장에 따르면 2017년 분기별로 19~20%대이던 가구 빈곤율은 지난해에 20~24%까지 올랐다. 김 단장은 빈곤율 상승은 노인과 청년을 중심으로 저소득 1~2인 가구 비율이 높아지기 때문이라며 이들의 주요 일자리인 임시·일용직이 감소한 것이 원인이라고 설명했다. 김 단장은 소득 하위 5% 미만 계층엔 공적이전소득(정부의 소득 지원)을 강화하고 노인층에선 다양한 일자리 사업을 지원하는 등 맞춤형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기초수급 창피한데 벗어날 길 없는 49

이 고시원에서 저 고시원으로, 20년 가까이 그렇게 옮겨다니며 살았어요.”

3대째 가난 대물림 윤귀선씨

배달·일용직하다 병까지 얻어

삼형제 모두 장가도 못 갔다

그래도 탈수급 꿈은 안 접었어요

17일 오후 5시 서울 이대역 앞에서 만난 윤귀선(49)씨는 씁쓸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윤씨의 집은 4층 건물 꼭대기 고시원이다. 길 건너엔 내년 입주를 앞둔 고급 신축 아파트가 올라가고 있다. 고시원은 한 층에 28개의 방으로 빼곡했다. 복도는 두 명이 비켜가기 힘들 정도다. 윤씨 방은 3.3(1) 남짓. 책상·TV·침대로 꽉 찼다. 천장에는 빨랫대가 거미줄처럼 걸려 있고, 외투와 빨래가 주렁주렁 널려 있다. 침대는 다리를 간신히 뻗을 만큼 작고 좁다. 4년째 살고 있고 보증금 없이 월세 23만원을 낸다.

윤씨는 2년 전 조건부 기초수급자가 됐다. 재산·소득이 거의 없지만 근로 능력이 있어 조건부가 됐다. 월 생계비·주거비 지원금 70만원이 유일한 수입이다. 월세 내고 47만원으로 한 달을 산다. 기자가 기초수급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네요라고 물었다.


아직 젊은데, 나이 마흔아홉에 이렇게 기초수급 받고 사는 게 창피하고 부끄럽죠. 아직 젊잖아요.”

윤씨는 기자가 처음 명함을 건넸을 때부터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 “창피하다는 말을 할 때는 더욱 움츠러들었다. 그는 왜 젊은 나이에 기초수급자가 됐을까.

윤씨는 2016년 건설 현장 일용직으로 일하다 허리를 심하게 다쳤다. 침을 맞고 물리치료를 받는 게 전부다. 자기공명영상촬영(MRI)비만 65만원이라는 얘기를 듣고 급히 병원을 되돌아 나왔다. 기자가 디스크냐고 몇 차례 물어도 답을 피했다. 한두 시간 서 있으면 심한 통증이 온다. 그래서 2017년 기초수급자가 됐다. 윤씨는 나보다 나이 많고 힘들게 사는 사람도 많은데 기초수급자 신청을 하는 게 꺼려졌고 부끄러웠다몸만 아프지 않으면 언제든지 일할 수 있는데, 수급자 되기 싫어서라고 털어놨다. 그의 바람과 달리 다친 허리로 더는 건설 현장 일을 구할 수 없었다. 일을 못 나가니 고시원비마저 밀리기 시작했다.


그는 월~목 매일 아침 1시간 거리에 있는 자활센터로 출근한다. 지역 청소와 콘센트 조립 등 단순 작업을 한다. 이걸 이행하지 않으면 지원금이 끊긴다. 그는 하루에 12000원 정도를 쓴다. 버스비 3000, 구내식당 점심 3500, 나머지는 저녁용 김이나 김치 구입에 쓴다. 이런 반찬으로 고시원에서 주는 밥을 먹는다. 일을 쉬는 주말엔 거의 고시원 안에 틀어박혀 지낸다. 한 달에 한두 번 바깥 식당에서 5000원짜리 점심 뷔페 특식을 사먹는 게 유일한 낙이다.


주말엔 방에서 유튜브로 음악을 들으면서 멍하니 있죠. 나가면 1000원이라도 돈을 쓰니까.”

언젠간 자립해야죠 70만원 수입서 월 10만원 청약저축

윤씨의 집은 대대로 가난했다. 그는 전남 나주에서 3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조부모는 무학(無學)으로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고 재산 한 푼 남기지 못했다. 윤씨의 부모도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어머니는 노점상을 하다 윤씨가 7세 때 원인 모를 병으로 숨졌다. 윤씨는 아버지는 평생을 특별한 직업 없이 한량처럼 살았다고 기억했다. 자식들 앞으로 남긴 건 아무것도 없다.


어린 윤씨 형제를 키운 건 큰누나(72). 윤씨는 초등학교까지만 다녔다. 15세 때 식당 배달 일을 해주면 먹여주고 재워준다는 고향 이웃의 말을 듣고 상경했다. 그는 중국집 배달원으로 일했던 10대 후반을 인생의 전성기로 여긴다. 그는 그때 돈으로 월 10만원 정도 벌었는데 먹고 싶은 거 먹고 나름대로 풍족하게 살았죠.” 일하면서 악착같이 공부해 고졸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윤씨는 누나가 기술을 배우라고 조언했는데 철이 없어 뭘 몰랐다. 특별한 꿈을 가져본 적도 없었다. 이제 와서 후회된다고 말했다. 젊은 시절 그는 건설 현장, 음식점, 자동차 정비소 등에서 닥치는 대로 일했다. 모은 돈으로 2005년 수원에서 식당을 열었지만 1년 만에 망했다. 남은 돈 100만원을 손에 쥐고 서울로 돌아와 고시원 생활을 이어 왔다.


결혼 생각은 안 해봤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윤씨는 진작포기했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어릴 땐 중학교도 못 나왔다는 생각에 이성을 만나는 걸 망설였다. 20대 이후로는 남의 집 귀한 딸 고생시킬 바엔 결혼을 안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형제들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 모두 결혼을 못 했다. 큰형(65)은 고향에서 동네 농사일을 돕고 일당을 받아 먹고 살았고 지금은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다. 작은형은 24세에 상경해 공장일을 해오다 3년 전 술병으로 숨졌다. 그나마 큰누나는 결혼해서 23녀를 낳았다. 형편이 어려워 오래전 기초수급자가 됐다. 나머지 두 누이는 연락이 끊긴 지 오래다.

그는 가난에서 벗어나겠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윤씨는 지난해 가을부터 주택청약통장에 매달 10만원씩 넣고 있다며 웃었다. 그는 탈()수급의 꿈을 꾸고 있다.

앞으로 10년을 살더라도 부끄럽지 않게 살 거예요. 가진 게 없어 돈으로 남을 돕진 못하겠지만 어서 건강을 회복해서 몸으로라도 남을 도우며 살고 싶습니다.”

 

2019 빈곤리포트 <>월소득 50만원···수급자보다 더 어려운 삶 사는 93만명

비수급 빈곤층의 고단한 삶

 

김정자씨는 부양의무자 기준에 걸려 기초수급자에서 탈락해 화병이 났다. 기초연금 25만원으로 산다. 보일러 안 틀고 하루 1시간만 TV를 켠다. 최정동 기자

 

.5일 낮 12시 김정자(77·)씨가 사는 서울 근교 임대 아파트는 오가는 사람으로 제법 북적였다. 주차 차량도 평소보다 많았다. 노모를 휠체어에 앉혀 외출하는 가족, 양손 가득 설 선물을 들고 어린 자식과 아파트에 들어서는 가족도 보였다. 하지만 김씨는 혼자였다. 김씨는 이날 점심을 평소만큼 먹지 못했다. 밥과 김치 반찬이 전부였다. 평소엔 멸치를 우려 국을 만들어 먹는데 이날은 이마저 힘들었다. 겨우 두 숟갈 떠다 그만 먹었다. "딸이 어젯밤 12시까지 일해서 오후에나 온다고 했는데." 김씨는 경기도 북부에 사는 딸을 기다리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했다. 딸도 힘들게 사는데 설이라고 집으로 오라고 한 게 미안하다고 했다.

 

부양의무자 있으면 수급자 제외

정부서 기준 완화했지만 역부족

 

77세 할머니 월 25만원으로 생활

"연락 끊긴 며느리 재산 있어 탈락"

한 달에 25만원으로 살 수 있을까. 김씨의 수입은 기초연금 25만원이 전부다. 복지관에서 부정기적으로 3만원의 후원금을 줄 때가 있다. 기초수급자 1인 가구 생계비(512102)의 절반이 안 된다. 지난달 21일 김씨는 컴컴한데도 불을 켜지 않았다. 방바닥이 차갑다. 온도를 재보니 14도다. 웬만한 추위가 아니면 보일러·전기장판에 손대지 않는다. 패딩을 입고 양말을 신고 있다. TV는 하루 1시간만 켠다. 세탁기는 안 쓴다. 손빨래로 다 한다. 휴대전화가 없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계란 몇 개, 복지관에서 갖다 준 반찬이 전부다. 몸무게는 40. ·허리 디스크 증상과 만성 장염 때문에 잠을 깊게 못 잔다. 혈압이 150을 넘은 지 오래다. 귀가 먹어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도 의료비 때문에 병원 진찰은 엄두를 못 낸다. 25만원으로 전기·전화 요금을 내고, ·계란 등을 사려면 TV를 덜 보고 고기 반찬을 사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김씨 할머니는 기초수급자일까. 아니다. 소위 '비수급 빈곤층'이다. 기초수급자와 다름없이 가난하지만, 국가 지원을 받지 못하는 극빈층을 말한다. 김씨는 남편과 사별한 뒤 소득과 재산이 거의 없는 데다 아들·딸의 형편이 어려워 30년 가까이 기초수급자로 지냈다. 그런데 아들과 별거 중인 며느리가 3년 전 친정에서 자그마한 집을 물려받으면서 기초수급자에서 탈락했다. 소위 부양의무자 기준에 걸린 것이다. 김씨는 며느리는 재작년부터 아들과 별거 중이라며 연락도 없는 며느리의 재산 때문에 탈락한 게 너무 억울하다고 말했다.

 

[그래픽=조혁 인턴기자]

 

.김씨와 같은 처지의 비수급 빈곤층은 93만명(2015년 기준). 이들은 기초수급자보다 더 어렵게 산다. 보건복지부의 2017년 기초생활 실태 조사 자료에 따르면 비수급 빈곤가구의 월 평균 가처분소득(세금 등 비소비지출을 공제하고 연금 등 이전소득을 보탠 돈)50~681000원이다. 생계·의료·주거급여 등 각종 정부 지원을 받는 기초수급자는 가구당 957000원이다.


비수급 빈곤층이 생기는 가장 큰 이유는 부양의무자 기준 때문이다. 연락을 끊고 살거나 도움을 못 주는 자녀가 있으면 기초수급 혜택을 받기 어렵다. 자격이 되어도 직접 신청하지 않아 지원을 못 받는 경우도 적지 않다. 지난달 3일 서울 중랑구 망우동의 한 반지하 주택에서 숨진 채 발견된 모녀도 비수급 빈곤층이었다. 기초수급 혜택을 받으려면 본인이나 주변인이 직접 신청해야 한다. 본인과 가족의 소득·재산 파악을 위해 동의서를 제출해야 한다. 하지만 모녀는 신청하지 않았다. 비수급 빈곤층 하모(·83)씨는 주민센터에 가서 기초수급 대상자로 신청하는 절차나 과정이 부담스러워 가지 않고 있다자식의 재산·직업까지 조회해야 하는데 부담 주기 싫어 앞으로도 신청하지 않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용케 기초수급자가 돼도 자녀의 살림살이를 따져 조금이라도 부양능력이 있다고 판단(부양 미약자)하면 부모의 생계지원금을 삭감한다. 자녀의 부양 능력을 따지지 않을 수는 없지만, 너무 깐깐하다 보니 자녀도 덩달아 가난해지고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결과를 낳는다. 송다영 인천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부모와 자녀 양 쪽 다 가난한데 부양의무자 기준 때문에 자녀가 부모를 봉양하다 보면 자기 노후를 준비하기 어렵게 되는 경우가 많다""떵떵거리며 잘 사는 자식이 부모를 팽개친 경우도 있겠지만, 자식도 진짜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빈곤 대물림을 끊는 근본적 해결책은 부양의무자 기준을 폐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기초수급자 4개 급여 중 교육비·주거비 대상자 선정에는 부양의무자 기준을 보지 않는다. 현 정부 들어 폐지했다. 또 생계비·의료비 대상자를 정할 때 부양의무자 기준을 일부 완화했지만, 부양의무자 가구가 소득 하위 70%이면서 노인·중증장애인일 경우에만 그리했다. 정부는 생계비·의료급여의 부양의무 기준 폐지에 연 6~7조원이 들어 난색을 보인다. 또 효 사상을 해칠 수 있다고 걱정한다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운영위원장은 비수급 빈곤층과 기초수급자를 양자택일해 복지 혜택을 줄 문제가 아니다라며 기초수급자의 지원을 강화하되 부양의무자 기준을 완화해 비수급 빈곤층까지 포괄해야 한다"고 말했다.

2062% "계층 상승 못해"4년전보다 15%P 늘었다

 

[그래픽=조혁 인턴기자]

 

.20대 청년이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을 믿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보건사회연구' 최신호에 실린 청년층의 주관적 계층의식과 계층이동 가능성 영향요인 변화 분석보고서에 따르면 2017년 통계청 사회조사에서 30세 미만 청년 약 1만 명 중 61.5%가 계층 이동 가능성이 작다고 답했다. 2013(46.8%)보다 14.7%포인트 증가했다. 반면 매우 높다비교적 높다로 본 비율은 3.7%포인트, 10.8%포인트 줄었다.

계층 상승 요인으로 부모의 경제적 자원이 꼽혔다. 부모의 월 소득이 100만원 미만인 청년보다 400~500만원인 가구의 청년은 계층 상승 가능성이 3.09, 500~700만원은 3.15배 높게 본다. 이용관 한국문화관광연구원 부연구위원은 부모의 자원이 계층을 결정한다는 수저 계급론이 존재함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2019 빈곤리포트 <> 49세 공황장애 실직빈곤 15년 시작됐다

질병 앓는 수급자 27% 정신질환

 

.서울 강북구 김모(64·)씨는 15년 전까지만 해도 빌딩 청소 일을 하는 평범한 가장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청소일을 하다 지하 식당에서 밥을 먹으러 계단을 내려가던 도중에 난생 처음 이상한 일을 겪었다.

 

"조현병 아들 키우려 막일 20년 뒤 내게도 그 병이 왔다"

"벽이 막 이상했어요. 벽이 나한테 다가오는 듯한 공포를 느꼈어요. 공포영화도 그렇게 무섭지 않을 거예요. 그때 상황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워요. 영화 필름이 착착 끊기고 길이 막히는 것 같았죠. 가슴이 두근거리고 숨이 찼고, 고함을 질렀으며, 그러곤 쓰러졌어요."

김씨는 빌딩 보안요원에게 업혀 병원 응급실로 갔다. 그는 "병원에서도 무섭고 힘들어 고함을 질렀던 것 같다"고 회상한다. 그는 가운에 정신과라 새긴 의사가 옆에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저는 정신과 환자가 아니에요"라고 소리쳤다. 주사를 맞고 이내 편안한 상태가 됐다. 의사는 '공황장애' '불안장애'로 진단했다.

청소 용역회사 사장이 병원에 와 "그냥 치료 받고 집에서 쉬세요. 몸을 보살피는 게 가장 중요하죠"라며 해고를 통보했다. 김씨는 눈앞이 캄캄했다. 당장 방세·쌀값·난방비·공과금 등을 내야 하는데, 딸과 할머니를 부양해야 하는데. 김씨는 "그게 말이나 돼요? 병원 마당에서 막 울었어요"라고 당시를 회상한다.

 

김씨는 그렇게 정신질환자가 됐고, 처음 몇 년간 일자리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받아주는 데가 없었다. 발병 이후 일을 한 적이 없다. 김씨는 "아프기 전엔 기초수급자가 뭔지도 잘 몰랐다. 여유 있지는 않았지만 정부 보조금에 의지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말한다. 결국 기초수급자가 됐다. 딸은 결혼했고 김씨는 혼자 산다. 지난해까지 술에 취해 살았지만 요즘엔 많이 줄였다. 병세가 많이 호전됐으나 가끔 심해질 때도 있다. 김씨는 "약 없으면 일상생활을 정상적으로 할 수 없다. 약을 안 먹으면 불안해진다""평생 정신과 진료를 받아야 할 것 같다"고 말한다. 그는 매달 약 타러 병원에 가는 것을 잊지 않는다. 김씨는 월 50만원의 생계급여 정부 지원금으로 살아간다. 이걸로 공과금을 내고 생활하는데 살림살이가 매우 빠듯하다고 한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김씨는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어머니가 외가에 의탁했다. 얼마 안 지나 집안을 돌보던 외할머니가 숨지며 가세가 기울었다. 어머니가 잘 돌보지 않았고, 술 장사를 한다고 김씨를 고아원에 보냈다. 중학생 언니는 어디론가 가버렸다. 2년 후 고아원에서 도망쳐 나와 빵집에서 일했다. 빵집이 문 닫자 일자리를 구하러 직업소개소에 갔다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다. 김씨는 서울 외곽 도시의 기지촌으로 끌려갔다. 지금도 소개소 직원이 부모 없는 어린애라는 사실을 알고서 입이 찢어지던 게 생각난다고 한다. 그는 처음엔 이런 사실을 말하지 않다가 두 번째 인터뷰에서 털어놨다. 그때 나이 15세였다. 거기서 14년을 보냈다. "고생 많이 했어. 너무 힘들게 살았어"라며 계속 한숨을 내쉬었다. 가슴 깊은 곳의 한의 일부를 토해 냈다.

김씨는 "아무리 못살더라도 명절에 집에 가고 그래야 마음이 안정되는데, 막 떠돌아다니니까 병이 생긴 것 같아요. 제 생각에"라고 말한다. 그의 넋두리는 계속됐다.

"의사에게 물어보니까 맞대요. 너무 어릴 때부터 돌아다니면서 그렇게 병이 생긴 거라고, 고생해서 생긴 거라고. 돈이 없어도 평범한 가족 사이에서 태어났으면 이런 병이 생기지는 않았을 텐데. 열 다섯 살이면 아직 애기인데, 세상에 부모 없다고 그런 데다 팔아먹어서. 한창 배울 나이인데, 제대로 못 배워도 사람 대하는 예절은 배웠어야 하는데, 제대로 배우지 못해 내가 사람이 그래요. 제대로 못 컸어요."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의료급여(기초수급자) 대상자 중 김씨와 같은 정신질환자(치매 포함)가 가장 많다. 7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2017년 진료를 받은 의료급여 대상자 1591000명 중 정신 및 행동장애 환자가 428051명으로 26.9%를 차지한다. 고혈압(21.1%), 관절염(19.9%)보다 많다. 기초수급자가 아닌 일반인 중 정신 및 행동장애 환자는 6%에 불과하다. 2017년 기준으로 정신병원 입원 환자는 84000명이다. 이 중 의료급여 환자가 6만 명(71.4%)에 달한다. 빈곤과 정신질환이 밀접하다는 뜻이다.

정신질환이 빈곤을 야기한다. 이소희 국립중앙의료원 정신건강의학과장은 "정신질환이 있으면 업무 수행력이 떨어질 수 있는데, 이로 인해 취업이 어렵거나 해고되고 대인관계가 어려워진다""일자리를 갖더라도 소득이 낮은 단순 업무를 하게 된다"고 말했다. 반대로 빈곤이 정신질환을 야기하기도 한다. 이 과장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면 불안증세나 불면증을 겪게 되고 사업 실패로 인해 공황장애가 오거나 장기적으로 취업이 안 되면 우울증이 오기도 한다""이런 악순환이 세대를 넘어 전해지는 '트랜스제너레이셔널 트랜스미션(transgenerational transmission·세대 간 전이)이 일어난다"고 진단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세대간 역() 전이도 있다. 경기도에 사는 김모(84·)씨는 35세에 이혼했다. 1989년 어느날 갑자기 멀쩡하던 아들(현재 54)이 성질을 내고 난리를 피웠다. 조현병이었다. 아들은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고 김씨는 아들에게 매달렸다. 김씨는 "그때부터 죽지 못해 살았다"고 말한다. 막노동을 비롯해 안 해 본 일이 없다. 10년 전 김씨에게도 조현병이 찾아왔다. 머리에 벌레가 있는 것처럼 이상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몇 년 지나 기초수급자가 됐다. 김씨는 그런 과정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서울 성북구 김모(63)씨는 사업에 실패하면서 빚 청산에 날아간 건물에 물끄러미 서 있었다. 오후 9시만 되면 멍청히 바라보면서 소주 두세 병을 마셨다. 그런 세월이 계속되면서 알코올에 중독돼 갔다. 입퇴원을 반복했다. 안 먹겠다고 맹세하고 나와서 또 먹는 일이 반복됐다. 가족에게 폭력을 휘둘렀고 혼자가 됐다. 지금은 기초수급자가 돼 월 50만원 정부 지원금으로 산다.

최재영(청아의료재단 이사장) 대한정신의료기관협회 회장은 "정신과 환자는 경제력이 약하고 사회생활이 힘들다""정신질환자의 사회 복귀를 돕는 재활시설이나 적응시설이 부족한데, 이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건강보험 환자와 진료 수가 차별을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의료급여 환자의 하루 진료 수가는 건강보험 환자의 54.5%에 불과하다◆중앙일보 특별취재팀=신성식 복지전문기자, 이에스더·이승호·김태호 기자 sssh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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