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경의 옐로하우스 悲歌]①
[출처: 중앙일보] ①그녀의 가장 비싼 옷은 7만원 점퍼였다 19.1.24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aseokim@joongang.co.kr
.인천 미추홀구 숭의동에는 속칭 ‘옐로하우스’라는 집창촌이 있다. 인천항에 있던 업소들이 1962년 이전하면서 터를 잡았다. 한때 33개 업소에서 700여명이 일하던 이곳은 2004년 성매매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사양길에 들어섰다.
지난해 재개발이 추진되면서 현재 남아있는 업소는 10개 정도. 40여명의 성매매 여성과 20여명의 업소 직원(주방 이모)이 있다. 이들에게 ”이번 달 안에 업소를 비우라“는 통첩이 날아들었다. 57년을 이어온 현장에 마지막 시간이 다가왔다.
대구 ‘자갈마당’ 등 다른 지역 집창촌 역시 부동산 개발, 문화 재생사업을 이유로 폐쇄 수순을 밟고 있다. 남아있는 여성들은 ”갈 곳이 없다“며 이주 대책을 요구한다. 오늘의 이 상황이 온전히 그들만의 잘못이냐는 억울함이 가슴에 담겨있다.
외부 사람을 철저히 경계하는 여성들을 설득해 평생 마음에 묻어온 얘기들을 끄집어냈다. 인터뷰에 응한 다섯 명의 여성은 때론 서러움에, 때론 분노로 눈물을 쏟았다. 그들의 이야기를 시리즈로 싣는다.
인천 미추홀구 숭의동 집창촌 '옐로하우스'. 재개발 사업으로 철거를 앞두고 스산한 기운이 감돈다. 김경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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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옐로하우스의 성매매 업소 4층 방에서 만난 여성 A씨(45)는 이곳 생활이 11년째다. 오랜 설득 끝에 취재에 응한 그는 자신이 사는 방으로 기자를 데려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시츄 한 마리가 주인을 반겼다. 방은 깔끔했다. 분홍색 커튼과 침대 위 캐노피가 눈에 들어왔다. 쿠션과 인형이 유난히 많았다. 요즘 유행하는 카카오프렌즈 인형도 보였다. 아기자기한 소품과 직접 그린 듯한 유화, 화분들, 애견용품이 눈에 띄었다.
A씨가 이곳에 발을 들인 이유는 장애인인 어머니 때문이라고 했다. 갑자기 쓰러져 당장 수술을 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 닥쳤다. A씨 부모는 모두 장애인으로 돈을 벌지 못한다. 조금 나오는 연금으로는 병원비와 생활비를 대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형제들도 모두 형편이 빠듯했다.
살던 방을 빼도 수술비에서 700만원이 모자랐다. 돈을 구할 곳이 없을 때 유일하게 현금을 내준 곳이 옐로하우스다. 그의 말을 빌자면 “다행히” 아는 언니를 통해 선불을 받았다. 그렇게 나이 서른둘에 제 발로 ‘○호 아가씨’가 됐다.
서른둘에 ‘○호 아가씨’가 되다
성매매 업소 4층에 있는 여성 A씨의 방. 2평 남짓 방에 직접 그린 유화가 걸려 있다. 서랍장 나무 그림 역시 직접 그린 것. 파스와 수면제가 없으면 일을 하지도, 잠을 자지도 못 한다. 최은경 기자
.나이가 적지 않은 데다 지병(신우신염)이 있는 A씨가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돈을 벌기란 쉽지 않았다. 신우신염은 신장에 세균이 감염돼 생기는 병으로 완치가 어렵다. 그래도 매달 적게는 100만원, 많게는 350만원을 손에 쥘 수 있었다. 고향 집에 보내는 돈은 한 달에 100만~200만원. 1년 넘게 고생해 선불을 갚았다. 그러나 무리해 일한 탓에 신우신염이 심해져 입원하게 됐다.
그걸 계기로 이곳을 떠났다. 한편으로 기뻤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까지 장애 판정을 받았다. 돈이 필요했다. 성치 않은 몸으로 다시 옐로하우스의 문을 두드려야 했다. 그렇게 8년이 흘렀다.
“솔직히 여기밖에 없었어요. 제가 돈을 못 벌면 부모님이 생활할 수 없었으니까요. 다른 일 하면서 집에 보내는 돈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지금도 전동 휠체어를 해드리고 싶은데 못 해 드려 마음이 너무 아파요.”
A씨가 일어나 옷장 문을 열었다. 가장 비싼 옷이 7만원 짜리 패딩 점퍼라고 했다. 인터넷에서 이들을 욕하는 글에 자주 등장하는 명품백은 보이지 않았다. 가난은 오랜 세월 A씨를 쫓아다녔다. 미술을 좋아했지만 집안 형편상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학교 공부를 하면서 하루 8시간씩 일했다. 이런 생활이 너무 힘들어 학업을 포기했다. 고등학교 중퇴 학력의 A씨가 일할 곳은 많지 않았다. 어렵게 들어간 공장에서 다리를 심하게 다쳤다. 다음 직장인 회사에서 사장은 A씨에게 보증을 서라고 했다. “지나고 보면 바보 같은데 회사니까 믿었어요.”
몇 년 뒤 집으로 5000만원을 갚으라는 통지가 왔다. 회사 사장은 외국으로 도망쳤다고 했다. 돈을 갚을 방법이 없었다. 고민 끝에 파산 신청을 했다. 어머니가 쓰러졌을 때 단돈 100만원도 빌릴 수 없었던 이유다. 통장·휴대전화도 만들 수 없었다. A씨는 지난해 보험에 처음 가입했다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엄마·아빠는 내 직업을 모른다”
회사를 그만둔 뒤에도 병 때문에 일을 구하기 힘들었다. 그러다 아는 언니가 카운터 보는 일을 도와달라고 해 인천에 왔다. 혼자 그럭저럭 자리를 잡았다 싶었을 때 어머니가 쓰러졌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이야기를 들으며 자꾸 되묻는 기자의 태도에서 의심의 마음을 읽었던 것일까. 그는 “믿기 어려우시겠지요. 잠깐 부모님과 통화를 할게요”라며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 저예요. (오냐.) 몸은 좀 어때요. (그냥 그렇지.) 아버지 아픈 데 무리하지 마세요. 제가 다 해드릴게요. 엄마 바꿔주세요. 엄마. (○○아.) 아픈 데 없어요? (괜찮아.) 드시고 싶은 건 없고? (많지.) 사서 보내드릴게요.”(※신상 노출을 막기 위해 대화 내용을 간략히 줄임.)
전화를 끊은 뒤 A씨는 어깨를 들썩이며 한참을 울었다. 기자도 눈물이 자꾸 나는 걸 억지로 참았다.
홍등은 더 이상 찬란하지 않다. 숭의역이 생긴 뒤로 옐로하우스 홍등은 가게 밖으로 새어나오지 못하게 됐다. 김경록 기자
.이 일을 하면서 허리 디스크를 얻었다. 옐로하우스 여성 대부분이 앓는 일종의 직업병이다. 서랍에는 파스가 가득했다. 진통제를 먹으면 급격하게 살이 쪄 수입이 줄 우려가 있어 파스로 버틴다고 했다. 병원에서 시술을 권했지만 일을 쉴 수 없어 미루고 있다.
“사실은 한두 달이라도 정말 쉬고 싶어요. 처음 왔을 때는 조금만 있다가 나가려고 했는데 부모님 상태가 점점 안 좋아져서.”
또 다른 서랍에는 하얀 알약이 든 통이 있었다. A씨는 보통 오후 7시쯤 일어나 영업을 준비하고 오후 9시부터 오전 7시까지 10시간을 일한다. 퇴근 뒤 청소하고 오전 11시쯤 자는데 잠이 안 올 때가 많다고 했다.
“요즘 철거 걱정 때문에 수면제 양을 두 배로 늘렸어요. 조합에서는 업주에게 아가씨들 다 내보내면 돈을 준다고 했다는데 저희는 한겨울에 갈 곳이 없어요. 다른 집과 다르게 주인 언니가 힘들 때 많이 도와줬는데 참 난감해요. 어떻게 해야 할지….”
A씨는 허리 디스크 때문에 오래 서 있을 수 없어 마트나 공장에서 일하기 어렵다고 했다. 조금씩이나마 저축을 했지만 방 한 칸 마련하지 못할 돈이다. 그는 밖으로 나가면 당장 뭘 할 수 있을지 고민이라면서도 “이곳에 온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여기 와서 어머니를 살렸잖아요. 제 생활하면서 집에 도움도 주고요. 식당·마트에서 일하면 저 혼자는 살 수 있었겠지만 부모님 병원비는 못 드렸을 거예요. 분명 사치하는 성매매 여성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렇지 않은 여성도 있어요. 흙수저를 물고 살아남으려고 아등바등하는 게 바로 저희예요.”
옐로하우스에서 만난 여성들은 대개 가족 부양을 위해 성매매에 발을 들였다고 했다. 이 일을 그만두고 서빙 점원, 계산원, 텔레마케터 등 다른 일도 해봤지만 한 달 100만원이 안 되는 돈으로 가족 뒷바라지하고 본인 생활비·병원비를 쓰다 보면 빚이 쌓이고 다시 여기로 돌아오게 된다고 했다.
오랜 시간 대화하는 동안 A씨는 “이 일이 좋아서 하는 여성은 한 명도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노력 없이 쉽게 돈 벌려는 것 아냐" 성매매 여성 항변
인천 성매매 집결지 옐로하우스 골목. 재개발 사업으로 철거를 앞두고 33곳 업소 가운데 11곳이 영업하고 있다. 최은경 기자
.지난 8일 오후 6시 인천 미추홀구 지하철 숭의역 출구 앞. 인적 없는 골목에 들어서자 외부 유리 전체에 노란 시트지를 붙인 건물이 드문드문 보였다. 각각 ‘○호’라는 간판을 걸고 있는 이곳은 인천의 마지막 성매매 집결지 ‘옐로하우스’다. 1962년 인천항 주변에서 이전해 조성된 이후 1~33호가 영업했지만 재개발 사업 추진으로 현재는 11개 업소만 문을 열고 있다.
[르포]지자체 탈성매매 여성 자활지원금 논란
대구·전주·아산·광주서 61명 지원 받아
전문가 “성매매 금지주의 국가에서 필요”
지난해 6월 숭의1구역 지역주택조합은 아파트·오피스텔 건설을 위해 이 지역의 철거를 예고했다. 보상을 받은 건물주 겸 업주들은 모두 떠났지만 30~60대 성매매 종사 여성 40~50명은 퇴거를 거부하며 영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골목 한쪽에 철거된 주택 자재가 보였다. ‘빨래 이모’‘현관 이모(호객 역할)’들이 살던 곳이다.
불 켜진 업장 홀에 여성 4명이 앉아 쉬고 있었다. 영업시간은 오후 8시부터 오전 5시. 성매매 종사 여성 A씨(50)는 “수십 년을 살면서 일한 터전인데 조합과 업주가 사전 예고 없이 이주비 한 푼 안 주고 나가라고 한다”며 “주변 포장마차·식당·세탁소·고물상 모두 같은 처지다. 건물주·업주·조합 누구도 우리를 인간적으로 대하지 않는다”고 답답해했다.
8일 오후 7시 옐로하우스 골목. 일부 업소가 8시부터 시작하는 영업을 준비하고 있다. 최은경 기자
.조합은 보상금을 건물주에게 모두 지급했으며 성매매 종사 여성에 대한 보상 계획이 전혀 없다고 밝혔다. 조합 관계자는 “성매매 종사 여성들이 구청에서 나오는 자활지원금을 기다리며 안 나간다”고 말했다. 이에 관해 A씨는 “지원금 제도는 실효성 없는 탁상공론이고 조합 측의 보상을 원한다”며 “구청에서 지원금을 줄 거라고 홍보만 잔뜩 해 욕을 많이 먹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인천 미추홀구는 지난해 9월 ‘성매매 피해자의 자활 지원 조례 시행규칙’을 공포했다. 탈성매매를 조건으로 한 명당 1년씩 연 최대 2260만원을 지원한다는 내용이다. 주거지원비 700만원과 생계비 월 100만원, 직업훈련비 월 30만원이 지원금에 포함된다. 인천 미추홀구의회 등에 따르면 올해 관련 구 예산이 9040만원 편성됐다.
지원은 탈성매매 여성이 신청하면 선정위원회 심사를 거쳐 이뤄진다. 지원금을 받은 뒤 다시 성매매를 하면 지원금을 환수당한다. 이 시행규칙이 발표된 뒤 거센 반대 여론이 일었다.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꾸준히 반대 청원이 올라오고 있다. 한 청원인은 “열심히 일하며 사는 사람을 돕진 못할망정 불법으로 일하는 사람에게 나라에서 돈을 준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비판했다. 성매매 종사 여성 B씨(35)는 “국민의 비난을 이해한다. 하지만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쉽게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호프집 서빙, 편의점 알바 같은 다른 일도 해봤지만 월 100만원이 안 되는 돈으로 가족 뒷바라지하고 생활비·병원비를 충당하다 보면 또 빚이 쌓이고 다시 이 일을 찾게 된다”고 토로했다.
옐로하우스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지원 인원이 한정된 데다 신분 노출 걱정에 신청이 어렵다"면서 "구청이 지원 제도를 마련하면서 실태조사나 상담을 충분히 하지 않았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전국에서 대구·전주·아산·광주시가 성매매 피해자 지원 조례를 시행하고 있다. 대구시는 2017년 7월부터 성매매 종사 여성 110명 가운데 75명을 상담해 성매매를 그만둔 여성 43명을 지원하고 있다. 1인 연 최대 2000만원이다. 대구시 여성가족정책과 관계자는 “지원 단체가 현장을 찾아 여성들을 설득하고 신분 비밀 보장을 철저히 했다”며 “탈성매매를 하는 여성 모두를 지원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7명은 보건의료·생산·안내서비스직에 취업했다. 다른 지역은 아직 성과가 미미하다. 전주시는 2017년 12월부터 60여 명 대상자 가운데 신청자 12명에게, 아산시는 같은 해 6월부터 80명 가운데 4명에게 지원금을 지급했다. 집창촌 재개발이 이뤄지는 이들 지역과 다르게 광주시는 탈성매매 여성을 위한 시설에서 대상자를 선정해 각 500만원씩 2명을 지원했다.
탈성매매 여성 자활지원금 논란을 잘 보여주는 청와대 국민청원 사이트. [웹사이트 캡처]
.탈성매매 여성 자활지원금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지난달 20일 더불어민주당 소속 홍준연 대구 중구의회 의원은 “이 지원금 정책은 토지 개발에 방해되는 성매매 종사자를 처리하려는 성매매 사업자, 토지개발 사업자, 대구시 공무원의 농간으로 이뤄졌다”며 “여성들이 또다시 성매매를 안 한다는 확신이 없다”고 말했다.
이에 여성 단체가 항의하자 대구시당은 징계 절차를 밟겠다고 밝혔고,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홍 의원 징계 반대 청원이 잇따라 올라왔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성매매를 금지하는 많은 국가에서 성매매 여성을 사회구조의 희생자로 보고 탈성매매 여성이 정착할 수 있게 지원하는 것을 바람직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탈성매매 지원 프로그램은 피해자를 보호하는 국가의 의무를 지는 것”이라며 “자활지원금이 적어 현실성이 부족하고 성구매자보다 성매매 여성에 대한 낙인이 심한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논란 속에서 숭의1구역 지역주택조합은 다음주 말쯤 옐로하우스의 빈 업장부터 철거를 시작할 계획이다. 19.1.9
②전자발찌 찬 손님···봉변 당할지 몰라 모른척만
옐로하우스에서 11년째 일하고 있는 여성 A씨(45)의 이야기가 보도된 뒤 기사에 많은 댓글이 달렸다. 일부 “마음 아프다. 힘내라”며 응원하는 사람도 있지만 비난하고 조롱하는 내용이 많았다. A씨는 “내 얘기를 기자에게 털어놓을 때 어느 정도 욕먹을 각오는 했지만 ‘부모를 버리라’는 둥 아무것도 모르는 가족을 비난하지는 않았으면 한다”며 울먹였다.
네티즌들은 성매매에 대한 시각도 다양하게 표출했다. 매춘을 뿌리 뽑아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지만 다른 시각을 던지는 사람들도 있다. 한 네티즌은 ‘접대부들에게는 철저하게 성병 예방 및 검사를 하게 하고 성 소외자들에게도 관심을 갖도록 하면 서로 윈-윈이고 성범죄 예방도 된다’는 생각을 올렸다. 옐로하우스 사람들에게 많이 들었던 얘기와 맥이 닿아있다.
전자발찌 무서웠지만 별도리 없어
‘환락가’라는 단어가 등장한 건 이곳에 즐거움만 가득할 것 같은 선입견 때문이리라. 그러나 이곳 여성들의 마음엔 두려움과 공포의 경험들이 깊이 새겨져 있다.
A씨는 1년 전쯤 전자발찌를 찬 남성이 가게에 왔을 때의 송연함이 생생하다. A씨가 1층 대기실에 앉아 있을 때였다. 한 남성과 함께 방으로 올라간 동료가 사색이 돼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겁에 질린 얼굴로 남성이 전자발찌를 차고 있다고 했다.
“너무 무섭잖아요. 이모가 올라가 남성에게 물었더니 성범죄가 아닌 다른 이유로 차게 됐다고 해명했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범죄 조회를 해보지 않는 이상 어떤 죄인지 알 수 없잖아요.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어찌 대처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 동료는 얼마 못 가 가게를 그만뒀다.
옐로하우스에서 만난 여성이 일하며 흉포한 남성을 마주했을 때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취재 과정에서 전자발찌를 찬 남성과 마주했다는 또 다른 여성을 만날 수 있었다. 여성 C씨(37)의 말이다.
“처음엔 가리고 있어 몰랐습니다. 그런데 발에 검은 게 보이는 거예요 말로만 들었던 전자발찌였습니다. 가슴이 철렁했지요. 알아차린 내색을 하면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몰라 모르는 척할 수밖에 없었어요. 방문을 닫고 나가니 그때야 살았구나 싶었습니다. 심장이 벌렁벌렁했지요.”
전자발찌를 부착한 사람은 이미 몹쓸 죄를 저지른 전력이 있다는 얘기다. 우리 주변엔 전자발찌를 차고도 범죄를 감행하는 사례도 많다. 지난해 9월 경기도 성남시의 한 PC방에서 전자발찌를 착용한 30대 남성이 여고생을 추행하다 신고당하자 전자발찌를 끊고 달아나는 사건이 있었다. 부산에서는 지난해 4월 전자발찌 착용자가 한 오피스텔에서 술에 취한 여성을 성폭행하려다 미수에 그치자 역시 전자발찌를 끊고 도주하는 일이 벌어졌다.
“성범죄 억제 효과” VS“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러니 이곳 여성들이 두려움에 떠는 건 당연하다. 실제로 전자발찌를 부착한 사람이 성매매 업소를 드나드는 게 가능할까. 법무부에 확인해보니 전자발찌 착용자에겐 특정 지역 출입을 금지한다. 아동 성폭력 사범에겐 어린이 보호구역을 못 가도록 하는 등의 조치다. 윤락 업소의 경우 불법이니까 성매매 자체가 위법이지만 일률적으로 출입을 금지하긴 어려운 상황이다. 결론적으로 전자발찌 부착자가 성매매 업소에 드나드는 건 얼마든 가능해 보인다.
문제는 이곳 여성들이 우범자를 손님으로 맞닥뜨렸을 때 어떤 선택지를 가질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인터뷰한 여성 중에는 ”흉포한 모습이 보여도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는 대답이 의외로 많았다.
옐로하우스 한 업소에 붙어 있는 부착물. 김경록 기자
.이곳 여성들은 자존감이 낮다. 스스로 하류 인생이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도 우리 사회에 뭔가 작은 역할은 하는 게 아니냐고 조심스럽게 항변한다.
“성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는 우범자들이 이곳을 다녀가는 것만으로도 우리 사회에 성범죄가 줄어드는 효과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53세 여성 B씨)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비슷한 주장이 나온다. 성매매 업소 수사 경험이 있는 전직 경찰 간부는 “집창촌이 현행법에 어긋나는 건 분명하지만 성범죄를 억제하는 역할을 하는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물론 정반대 의견도 많다.
성매매 문제 해결을 위한 전국연대 측은 “성매매가 한국 사회에서 엄연히 불법인 상황에서 성범죄를 줄이는 효과가 있다고 주장하는 논리는 부적절하다”고 말했다. 한만규 인천미추홀경찰서 생활안전과장은 “집창촌이 있다고 성범죄가 줄어든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일축했다.
성매매가 불법인 현실에서 이런 논쟁은 무의미할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도 학교 주변 주택가에 뿌려지는 성매매 전단과 명함들을 보면서 누구의 말이 옳은지 고민이 깊어진다. 1.24
③ 매 맞고도 빌어야 했다···법이 외면한 '악몽의 밤'
1962년 생겨난 인천 미추홀구 숭의동의 집창촌 속칭 ‘옐로하우스’가 재개발된다. 이미 많은 곳이 문을 닫았고 남아 있는 10여개 업소의 성매매 여성 40여 명은 이달 안에 나가라는 최후통첩을 받은 상태다. 여성들은 “갈 곳이 없다”고 하소연한다.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온 이들을 설득해 가슴에 품어온 얘기들을 끄집어냈다. 그들의 이야기를 시리즈로 싣는다.
조성 초기 근처 미군부대에서 얻은 노란색 페인트로 외벽을 꾸며 옐로하우스로 불리기 시작했다. 지하철 숭의역이 개통하면서 안이 보이지 않게 노란 시트지를 붙였다. 김경록 기자
.성매매 종사 여성들에게 우범자들이 손님으로 찾아온다는 23일 보도(②전자발찌 찬 손님···봉변당할지 몰라 모른 척만)가 나가자 온라인상에서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전자발찌는 기본이 강간범인데 얼마나 무섭겠느냐’며 여성들이 느끼는 공포에 공감하는 댓글도 있었지만 ‘성매매가 불법이니 이에 종사하는 여성도 성범죄자’라는 비난 의견이 많았다.
지난 22일부터 연재한 여성 A씨의 이야기는 더 이상 쓰지 않기로 했다. A씨는 기자의 오랜 설득에 난생 처음 마음을 열었지만 네티즌들의 비난 댓글이 쏟아지자 “더 이상 내 얘기를 쓰지 말아달라”고 기자에게 말했다. 자신을 욕하는 건 감내하겠지만 아무 죄 없는 가족을 비난하는 건 견디기 어렵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나를 이해해주는 일부 댓글에 큰 고마움을 느낀다”고 했다. 특히 행정적 지원 절차를 댓글로 알려준 네티즌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이 여성들에게 우범자를 거부할 자격이 있느냐는 비난이 많았지만 실제로 옐로하우스 여성들은 심각한 폭력 피해를 경험해왔다.
숭의역 부근 재개발 대상 건물의 절반이 철거됐다. 김경록 기자
.여성 B씨(53)는 손님으로부터 당하는 신체적·언어적 폭력은 일상이라고 했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잡지에서 카페 여종업원을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서울에 갔다가 성매매에 발을 들이게 됐다. 역시 가족을 책임지다 보니 이 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했다. 고등학생 때 아버지 사업이 기울어 빚이 쌓였다. 어머니는 몸이 아파 일을 못 했다. 아래로 동생이 셋. 하루 벌어 하루 사는 형편에서 돈을 벌 수 있는 사람은 B씨뿐이었다. 공장과 매점에서 일했지만 수입이 적었다. 이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지금까지 가장 역할을 해왔다.
옐로하우스에 온 지는 15년 정도 됐다. 그는 지금도 술 취한 남성들이 가게에 찾아오면 가슴이 덜컥 한다고 했다.
“10명이 오면 7~8명은 술 취한 사람이에요. 우리에게 돈 벌기 쉽다고 하는데 진짜 아닙니다. 술 취한 사람들이 하는 이X, 저X, XXX 이런 거는 너무 많아서 욕으로 치지도 않아요. 밖에서 그런 일 당하면 신고하잖아요. 폭력을 행사한 사람은 처벌을 받고. 우린 웃으면서 그걸 받아줘야 해요. 이 일 하면서 안 맞아본 여성은 없을 거예요.”
또 다른 여성은 몇 년 전 무방비 상태에서 발길질을 당했던 악몽을 떨치지 못한다. 남성이 방에 들어오자마자 욕을 심하게 하며 자꾸 때리려고 해서 “돈을 돌려 드릴 테니 가시라” 하고 욕실에 들어갔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아채지도 못한 채 몸이 공중에 붕 떴다 떨어졌다. 남성이 발로 걷어찬 것이었다. 폭력을 가한 남성은 이모와 다른 여성들이 말리는 과정에서 발이 까졌다며 오히려 합의금을 요구했다.
이 여성은 “맞은 건 나인데 오히려 ‘죄송하다’고 사과를 해야 했다”며 “남성들의 스트레스 해소용이라는 생각에 자괴감이 들어 펑펑 울었다”고 말했다. 여성은 당시를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신발장에 가득하던 신발은 다섯 켤레만 남았다. 김경록 기자
.B씨에 따르면 남성들은 주로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할 때 폭력을 쓴다. 대기실에서는 괜찮다가 방에 들어오면 돌변하기도 한다.
“동료 머리채를 잡고 침대 모서리에 머리를 세게 몇 번이나 박은 남성도 있었어요. 말리는 이모까지 때리려 하더군요. 방에 있는 TV·조명을 부수는 남성, 같이 술 마시다가 여성에게 술병 집어 던지는 남성 등등 어떤 날은 하루에 몇 번이나 그런 일이 벌어져요. 폭행을 하고선 그냥 태연하게 사라져요.”
이들이 무방비로 당하는 건 신고를 못하기 때문이다. 신고했다가 성매매로 적발되면 업주는 물론 이모·여성들까지 벌금을 내야 한다. B씨는 “가해 남성의 인적사항도 모르는데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며 답답해했다. 이들이 손님에게 폭행을 당하면 신고를 해도 괜찮을지 수사기관에 물었다. 인천경찰청 관계자는 “신고 시 현장조사 과정에서 성매매했다는 진술과 증거가 나오면 폭력 피해와 별개로 처벌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말했다. 다만 “폭력 피해가 크면 우선 피해자부터 챙기기는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런 상황에서 신고는 요원할 수밖에 없다. 성매매 여성들을 많이 돕는 여성인권지원상담소 에이레네의 오선민 사무국장은 “이들이 노출을 꺼리고 폭력 피해를 호소하는 데 미숙해 상담소에 신고가 들어온 것은 연 10건 미만”이라고 말했다. 에이레네는 경찰 조사에 동행하거나 변호사 선임을 돕는다.
오 사무국장은 “폭력 증거가 확실하면 잘 처리되기도 하지만 여전히 성매매 종사자라는 낙인 때문에 곤란을 겪는 일이 많다”며 “피해를 본 즉시 상담소에 신고하면 그래도 해결에 도움이 된다”고 조언했다.
성매매 종사 여성의 폭력 피해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는 파악하기 어려웠다. 여성가족부가 3년마다 성매매 실태조사를 하지만 2016년 조사에 폭력 항목은 빠져 있다. 여가부 관계자는 “설문지를 업소에 보내 조사하는데 폭력 항목을 넣으면 업주가 설문에 응하지 못하게 할 우려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 많은 사람들이 때리는 손님들보다 이 여성들이 나쁘다고 탓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 시대에 매를 맞고 도리어 빌어야 하는 사람들이 우리 곁에 있다는 사실을 언제까지 받아들여야 할까. 1.24
④수건에 감춘 렌즈…그는 '몰카'가 목적이었다
‘옐로하우스 비가 (悲歌) ’ 시리즈가 나가면서 다양한 반응이 잇따른다. 무차별적인 욕설을 하는 분들이 많지만 여성들이 겪는 고통을 따뜻한 마음으로 이해해주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24일 보도(③매 맞고도 빌어야 했다…법이 외면한 ‘악몽의 밤’)로 이곳 여성들이 심각한 폭력에 노출돼있지만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많은 독자들이 ‘노르딕 방식’을 도입하자는 제안을 했다. 성매매를 적발하면 성 구매자와 알선자만 처벌하는 방안이다. 스웨덴을 중심으로 일부 북유럽 국가에서 채택하고 있다.
2010년 스웨덴 정부 보고서에 따르면 노르딕 모델을 도입한 1999년 이후 성매매 여성이 절반으로 줄었으며 성 구매 남성 비율은 13.6%에서 7.6%로 줄었다.
우리나라 인권 수준을 고려할 때 여성들을 때리는 성 매수자는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는 댓글이 지금도 계속 달리고 있다. 한 네티즌은 ‘동물도 때리면 동물 학대죄로 처벌받는데 인간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는 글을 통해 성매매 여성이 반려견보다도 폭력에 취약한 현실이라고 꼬집었다.
성매매 여성 인권, 노르딕 방식 대안 될까
취재를 하면서 놀란 건 이 시대 여성이 당하는 모든 종류의 억업과 폭력이 성매매 여성들에게 집중적으로 가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불법 동영상 촬영이다. 많은 남성들이 이들을 ‘몰카’ 대상으로 삼고 있다.
여성 B씨(53)는 “여성들을 몰래 촬영하려 하는 손님들이 많아 정신적 불안을 겪고 있다”며 “그 사람들은 우리 얼굴이 나오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찍어서 동영상 사이트 같은 곳에 파는 것이 목적”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렌즈가 보일 때마다 여성으로서의 수치심에 더해 아는 사람들에게 신분이 노출될지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힌다.
여성 C씨(37)의 말이다.
“욕실에서 나왔는데 느낌이 이상하더라고요. 개어놓은 수건 사이에 휴대전화를 끼워놓고 동영상을 촬영하고 있었습니다. 한번 당하고 나니까 들어가면 무조건 휴대전화부터 찾게 돼요. 불안하니까요.”
30년 가까이 이곳에서 여성들과 함께해 온 포장마차. 이곳 주인 역시 갈 곳 없이 건물을 비워야 하는 처지다. 김경록 기자
.여성들이 겪는 몰카범의 수법은 다양했다. 가장 흔한 방법의 하나가 옷걸이에 옷을 거는 척하며 윗옷 주머니에 카메라 렌즈를 내놓는 것이다. 휴대전화뿐 아니라 안경·가방·단추·사원증 등에 숨긴 위장형 초소형 카메라도 여러 번 봤다고 했다. C씨는 “발견하면 장난이라며 넘어가고, 발견을 못 하면 어떻게 유출될지 모르는 것 아니냐”며 “파일 저장 경로가 복잡해져 영상을 삭제해도 이미 다른 곳에 저장한 건 아닌지 늘 불안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들은 시간이 날 때마다 동영상 사이트 등을 뒤지곤 한다. 검색창에 ‘업소녀’ 같은 단어를 넣어 찾아 보기도 한다.
몰카 피해가 워낙 자주 발생하다 보니 다양한 피해 방지 요령을 마련했다. 우선 휴대전화를 끄라고 하거나 몰래 끈다. 옷가지는 수건으로 덮는다. 가방과 신발은 방 밖에 둔다. 이들은 인터넷에서 몰카 탐지 방법을 검색하기도 한다. 공포감을 유발하는 상대에게는 몰래카메라 렌즈를 가린다.
B씨는 “유출이 무서워서 살겠느냐며 업소에 폐쇄회로TV(CCTV)를 달아야 하나 고민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아예 대놓고 촬영하는 남성도 많다. 이들은 갑자기 욕실에 들어와 사진을 찍거나 신체 일부를 촬영하게 해달라고 집요하게 요구한다. 대기실에서 얼굴 바로 앞에 휴대전화를 들이대고 한 명씩 얼굴을 찍는 사람도 있다.
여성들은 극심한 피해에 시달리면서도 신고를 잘 못한다. B씨는 “휴대전화에 남은 사진이나 영상이 몰카 피해의 증거이기도 하지만 성매매의 증거가 되기 때문에 삭제가 우선”이라고 하소연했다.
코 앞에 카메라 들이대고 ‘찰칵 찰칵’
인천 미추홀구 여성·가정문제 시민단체인 강강술래 측은 “관련 상담과 제보를 받은 적이 없다”고 밝혔다.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관계자는 “성매매 중 불법 촬영으로 불법 유포가 된 사례가 있다”고 말했다. 신고는 미미하다. 2017년부터 현재까지 이곳에 접수된 성매매 여성 몰카 피해 사례는 10건 미만에 불과하다.
성매매 근절을 위해 노르딕 방식을 도입하자는 청와대 국민청원. 비슷한 청원이 지난해 4월부터 꾸준히 올라오고 있다. [사진 웹사이트 캡쳐]
어렵게 상담을 요청해도 처벌까지 이어지긴 어렵다. 박성혜 여성인권진흥원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센터 팀장은 “가해자가 불특정 대상인 경우가 많은 데다 조사 과정에서 신상정보가 알려져 포기하는 여성이 많다”고 말했다. 결국 이 여성들에게도 최소한의 인간적 권리를 보장해줄 수 있는 대책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피해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지난해 11월 청와대 국민청원에 노르딕 방식을 도입하자는 글이 올라와 20여 일 만에 1만8000여 명의 동의를 얻었다. 청원자는 “성매매 여성을 함께 처벌하면 심각한 학대를 당해도 처벌이 두려워 신고하지 못한다”고 지적하며 “성 매수자와 포주만 처벌해야 탈성을 원하는 여성들이 성 산업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나라에서도 19대 국회에서 성매매한 아동ㆍ청소년과 성인 여성을 형사처벌에서 제외하는 내용의 법안 3건이 발의됐지만 모두 관련 상임위원회에 계류된 채 임기만료로 폐기됐다.
윤덕경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여성단체와 학계에서 노르딕 방식이 필요하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며 “이 방식은 성매매 여성을 피해자로 보는데 왜 피해자로 봐야 하는지, 왜 한쪽만 처벌하는지 의문이 제기되기 때문에 공감대를 형성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성매매 여성들은 성매매 중에 일어나는 폭력 등으로 트라우마를 겪는 피해자인 경우가 많다”며 “성매매 알선자 처벌, 성매매 여성 자활 지원 등이 선결돼야 도입 논의를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1.25
⑤ "우리도 바바리맨 처벌 원하지만…"
재개발을 앞두고 옐로하우스 일대가 점점 황폐해지고 있다. 법에 어긋나지만 사회의 묵인 속에 57년을 이어온 이곳엔 범죄자들도 꼬였다. ‘불법’이라는 굴레가 씌워져 숨소리도 내기 힘든 이곳 여성들은 손쉬운 범죄 타깃이다. 이들을 노리는 사람 중엔 공연음란죄 사범들, 일명 ‘바바리맨’이 있다.
이곳에 정기적으로 출몰하는 그들의 존재는 취재 도중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 영상 촬영을 위해 카메라 기자와 함께 온 날 문제의 인물이 나타났다.
성매매 여성 B씨(53)의 얘기다.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고 왔던 날 바바리맨 한 명이 나타났어요. 골목 입구 슈퍼 앞에 있었습니다. 이를 목격한 이모가 무서워서 문을 잠그고 있었다고 하네요.”
바바리맨’들은 2016년 지하철 수인선 숭의역이 생기기 전에는 일주일에 5~6명 찾아왔다고 한다. 통유리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던 시대였다. 지하철 승객의 시선을 고려해 유리에 노란색 시트지를 붙이면서 이런 사람들이 줄어들긴 했지만 지금도 매주 2명 정도는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곳 여성들은 보통 1층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바바리맨은 밖에서 이들을 향해 온몸을 노출하고 몹쓸 행동을 한다. 현관 이모들이 내쫓으려 물을 뿌리는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지만 꿈쩍 않고 버티는 부류도 있다.
성도착증 환자를 만나는 게 얼마나 끔찍한지 잘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직접 겪어보면 공포를 알게 된다. 여성들은 대개 한 번쯤 이런 부류의 남자를 본 경험이 있다. 기자는 비가 오는 날 “우산 있어요?”라는 남자 목소리에 뒤를 돌아봤다가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 검은 우산으로 얼굴만 가린 남성을 본 적이 있다. 중학생 때였는데 소리도 못 지르고 다리를 덜덜 떨며 간신히 도망갔다. 그 일은 아직도 무서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업주와 여성들이 떠나고 폐허가 된 일부 업소. 김경록 기자
.옐로하우스 여성들도 다르지 않다. C씨(37)의 얘기다.
“이런 사람 나타나면 당연히 싫고 무서워요. 요즘은 휴대전화로 우리를 찍기도 해서 이모와 함께 쫓아가 보지만 날쌔게 달아나요. 하도 많이 찾아오니까 그러려니 하는 마음이 들 때도 있지만 처음에는 정말 놀랐어요. 저도 모르게 소리를 꺅 질렀다니까요. 여기 여성들이 직접 얘기해보면 의외로 겁도 많고 순진해요. 다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온 것뿐이지요. 무서운 남자 만나면 공포를 느끼죠. 당연히.”
몰래 들어와 등 뒤에서 음란행위
이곳 여성들도 대부분 바바리맨을 처벌해주기를 바란다. 실제로 몇 년 전엔 경찰에 신고한 적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경찰관이 도착했을 때 이미 범죄자는 사라졌고 추적 수사를 하는 것도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바바리맨들은 갈수록 대범해지는 경향도 나타난다고 한다. B씨의 얘기다.
“바바리맨이 여학교보다 더 많이 올 걸요. 자기들끼리 구역을 정하는 것 같은 현상까지 나타납니다. 누구는 1호부터 5호까지, 누구는 6호부터 10호까지 이런 식으로요. 기가 막히지요.”
이곳을 성범죄 해방구라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별의별 행각을 다 벌인다. 놀라운 것은 이들 중 상당수는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30~40대라는 사실이다. 역시 B씨의 증언이다.
“비만 오면 옷을 다 벗고 동영상을 찍는 남성이 있어요. 멀쩡한 차림으로 나타나는 걸 보면 돈이 없어서 그런 건 아닌 거 같아요. 자기들 욕심을 채우고 나서 보수를 주면 죄가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인지 1만원짜리를 놓고 가기도 하고, 작년 겨울엔 가게 앞에 눈을 치우고 가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러나 우리는 큰 모욕감을 느낍니다.”
법률전문가들은 이들의 행동이 모두 형사처벌 대상이라고 말한다. 우선 공연음란죄에 해당한다. 불특정 또는 다수인이 지각할 수 있는 상태에서 사람에게 수치감·혐오감을 주는 행위를 하는 죄다. 공연음란죄를 범하면 1년 이하의 징역이나 500만원 이하의 벌금·구류에 처한다.
공공장소에서 신체적 접촉 없이 몸을 노출하는 행위는 강제추행죄가 성립하지 않지만 엘리베이터 같은 밀폐된 공간에서 성기 노출 등의 음란 행위를 했을 때는 성적 자기결정권이 침해되기 때문에 심리적 압박에 따른 강제추행죄가 성립한다. 따라서 가게 뒷문으로 몰래 들어와 여성 바로 뒤에 숨어서 몹쓸 짓을 하는 옐로하우스바바리맨들의 행위는 강제추행죄로 처벌도 가능해 보인다.
최성민 변호사는 “음란행위의 피해자가 성매매 여성이라고 해도 법의 보호를 받아야 하며 바바리맨은 충분히 처벌이 가능하다고 본다”며 “음란 행위를 한 뒤에 여성에게 돈을 준다고 해도 이미 범죄행위가 완료됐기 때문에 처벌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바바리맨의 경우 성매매 여성이 신분을 노출하지 않고도 처벌할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도 나온다. 서울경찰청 송현건 경정은 “집창촌이라도 공연음란죄 신고가 들어오면 조사한다”며 “성매매 종사 여성이 아닌 제삼자가 신고했을 때 잠복해서 가해자가 특정되면 입건해 수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송 경정은 “피해를 본 성매매 종사 여성이 직접 신고해도 마찬가지”라며 “신고인의 직업을 밝힐 필요 없기 때문에 성매매 여성이 제삼자인 것처럼 신고해도 된다”고 알려줬다.
경찰 “신분 밝히지 않고 신고 가능”
이들에 대해선 다른 차원의 우려도 나온다. 이들의 범죄가 정신적인 문제와 연결된 경우가 많아 옐로하우스가 사라진다면 다른 곳에서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김수창 전 제주지검장처럼 사회지도층 인사가 공연음란죄로 체포되는 일도 있었다. 성의학클리닉을 운영하는 강동우 원장은 “바바리맨은 대개 성도착증 환자이기 때문에 집창촌이 없어지면 다른 곳에 가서 같은 행위를 할 우려가 있다”며 “전문가의 치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성매매 여성들 사이에서도 비슷한 우려가 나왔다. D씨(36세)의 얘기다.
“사실 그들을 보면서 차라리 여기로 오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우리야 무섭고 불쾌하지만 이곳을 못 온다면 여학교 같은데 갈 수 있잖아요. 혼자 있는 여성을 범행 대상으로 한다면 더 무서운 범죄로 이어질 수도 있겠지요. 그래도 우리는 여럿이 있으니 흉악한 범죄로 연결될 가능성은 작다고 생각해요.”
옐로하우스 취재 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우리 사회의 그늘진 단면들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새롭게 나타난다. 지금 동시다발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집창촌 폐쇄가 새로운 범죄 가능성에 대한 대비를 충분히 마련한 상태에서 진행되는 것인지 점검이 필요하다. 1.26‘
⑥성매매女 2260만원씩 지원? 예산 9040만원뿐
지난 22일부터 ‘옐로하우스 비가(悲歌)’를 연재하는 동안 많은 댓글이 쏟아졌다. 이 중엔 돈과 관련한 얘기가 적지 않았다. ‘인천 성매매 여성들에게 2000만원씩 지원해 준다고?’ ‘성매매는 불법인데 처벌을 해야지 웬 지원금?’ 등의 내용이다.
1년 4명만 가능···신분노출 불안도
네티즌이 언급하는 2000만원은 옐로하우스가 있는 인천 미추홀구가 추진하는 ‘성매매 피해자의 자활 지원’을 의미한다. 미추홀구는 지난해 9월 ‘성매매 피해자의 자활 지원 조례 시행규칙’을 공포하며 2019년부터 4년 동안 여성 한 명당 1년씩 연 최대 2260만원을 지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대구·전주·아산·광주시 역시 성매매 피해자 지원 조례를 시행하고 있다. 숭의1구역 지역주택조합 측은 “성매매 여성들이 구청에서 나오는 자활지원금을 기다리며 안 나간다”고 밝혔다.
자활 지원금 제도에 거센 비난
이 제도가 알려진 뒤 비판 여론이 들끓었다. 인천에서 자영업을 하는 손모(30)씨는 “미추홀구가 부자 동네도 아닌데 성매매 여성들에게 저소득층 지원보다 더 큰 금액을 줄 필요가 있느냐”며 “인터넷에 그 돈을 받고 다시 성매매하자는 글이 올라온다”고 비판했다. 그런데 정작 옐로하우스 여성들도 지원금을 신청하지 않겠다는 얘기를 많이 한다. 지원 절차가 그들의 현실과 안 맞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옐로하우스 골목길에 쌓여 있는 연탄. 기름 값을 감당하지 못해 연탄을 때는 집이 여럿이다. 최은경 기자
.
.성매매 여성이 탈성매매 각서와 자활 계획서를 내면 선정위원회가 심사해 지원 대상을 정한다. 지원금은 주거지원비 700만원과 생계비 월 100만원, 직업훈련비 월 30만원 등이다. 탈성매매가 조건이며 활동가와 교육 담당자가 상황을 점검해 다시 성매매하면 지원금을 환수당한다. 주거비는 일정 기간 뒤 갚아야 한다. 인천 미추홀구의회 등에 따르면 올해 이를 위한 예산이 9040만원 편성됐다.
옐로하우스 여성들은 “이런 방식의 지원금을 받는 건 비현실적”이라고 말한다. 여성 B씨(53)의 얘기다. “지원금 제도는 우리에게는 그림의 떡입니다. 1년에 4명만 지원 가능하다면 나머지 여성은 몇 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대기해야 합니까. 정말 이곳 여성을 생각한다면 실태조사를 해야 하잖아요. 정부 사람 단 한 명도 만난 적 없고 이와 관련한 설문조차 한 적 없습니다.”
더 큰 이유가 있다. 신분 노출에 대한 불안이다. B씨는 “수십 년 동안 가족 모르게 이곳에 있었다”며 “우리끼리 본명을 숨길 만큼 신분 노출에 민감한데 개인정보를 등록하고 매달 구청에 가서 지원금을 받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말했다. 이는 여성들이 제도를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라는 반론도 있다. 이 조례를 대표 발의한 이안호 인천 미추홀구 의원은 “현재 예산으로 4명을 지원할 수 있지만 지원자가 많으면 추가 예산 확보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구청 담당자와 위원회 인원을 최소로 하는 등 신분 노출을 최대한 줄이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성매매를 중단해야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여성들의 인식도 지원 제도를 꺼리게 한다. 지자체나 여성단체들이 이들을 지원할 때 대부분 탈성매매를 조건으로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부모 병원비 등 당장 시급한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대부분 여성이 집창촌 이탈을 시도하다 실패하는 것도 이 때문이라는 증언이다. 여성 D씨(36)는 여성단체의 도움을 받아 탈성매매를 했다가 다시 집창촌으로 돌아온 경험이 있다. 월 60만원 정도의 지원금으로 금융권 빚을 갚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D씨는 오래 투병하다 세상을 떠난 어머니 병원비로 큰 빚을 졌다.
“탈성매매 해봤지만…”
“수입을 떠나 무언가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 한두 달 정도는 좋았어요. 그런데 성매매 근절 캠페인에 참여해야 하는 등 시간이 갈수록 광고 선전용으로 이용당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굴이 다 알려진다는 것이 가장 두렵거든요. 정말 우리 삶을 염려해주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지난해10월 옐로하우스 여성들이 인천 미추홀구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연합뉴스]
.잘 준비하면 이들의 걱정을 불식시키면서 탈성매매를 돕는 것이 가능하다는 의견도 있다. 여성인권지원센터 살림의 활동가 변정희씨는 “스웨덴의 ‘말뫼 프로젝트’는 업소에 있는 여성이 탈성매매로 갈 수 있게 생계비 등을 지원해줘 수백 명을 탈성매매 하는 데 성공했다”고 말했다. 변씨는 “탈성매매 여성이 성매매 근절 캠페인에 동원됐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 없지만 이 여성들의 정보를 유출하는 것은 형사처벌할 수도 있는 대상”이라고 말했다.
옐로하우스 여성들은 비난 댓글을 볼 때마다 또 다른 걱정을 한다. 이들은 자신이 하는 일을 부모와 형제에게도 철저히 숨기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자신에게 욕설 댓글을 다는 사람 중에 친지나 친구가 있을 수 있다는, 괴로운 상상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하는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지만 범죄자라고 몰아붙이는 욕설에는 서운함을 감추지 않았다. B씨의 얘기다. “우리가 악인처럼 된 것은 사회 구조의 문제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성매매를 처음 만든 것도 아니고 이 동네를 조성한 사람도 아니지 않나요. 우리가 다른 별에서 온 외계인인가요? 우리도 알고 보면 똑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댓글 단 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자신들을 범죄자라고 비난한다면 인터넷에 사실과 다른 댓글을 달고 가족을 욕하는 사람들도 형사처벌 받을 수 있고 범죄자가 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항변이다.
기사가 나간 직후 악플에 상처받은 D씨가 보내온 문자는 이랬다.
“누구나 남이 알지 못하는 상처가 있을 겁니다. 다른 사람이 그 상처를 건드리면 ‘네가 뭘 알아’ 이런 생각이 들겠지요.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환한 조명이 꺼진 뒤 진한 화장을 지우고 나면 남들과 다를 게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를 범죄자라고 욕하는 당신, 악플 다는 당신도 범죄자 아닌가요?”
댓글
봄**** 2019-01-28 09:54:59 신고하기
올해 가장 웃겼던 반전 드라마. 예산 9000만원..
goen**** 2019-01-27 21:30:05 신고하기
공식적인 매춘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보통여성들이 혼자 혹은 자녀와 살면서 국가나 지자체로부터 지원금 수십에서 백여만원 매달 받으며 비공식적인 매춘으로 매월 수백만원에서 많게는 1천만원정도 뭇남성들 등쳐먹으며 살아가는자들이 부지기수다. 알고는 있는가.
qqqq**** 2019-01-29 16:22:15 신고하기
안타갑다~~수요가있으면은 공급이~있기마련인데~지금은 더흉학한~성폭력 범죄가~일어나구있네요~~?
57있는**** 2019-01-28 13:57:36 신고하기
궁금하면 인터넷 검색을 좀 해보세요. 인터넷 검색 조금만 해도 성매매를 다시 할 경우 전액 반환해야 된다는걸 알 수 있습니다.
jjjs**** 2019-01-27 19:31:31 신고하기
죄앙정권이 항상 하는짖거리가 그러네요
lily**** 2019-01-27 19:30:54 신고하기
대한민국 쓰레기 정치꾼들을 비난하라~~ 차라리 그대들이. 대한민국에 충성하는 사람들이다~ 최소한 민폐는 끼지지는 않는다고요~~!!! 누가 누구를 나무라는. 가..?! 정치판이. 여기저기. 썩은 냄새가. 진동을 하는 데..?!
유**** 2019-01-27 19:12:32 신고하기
똑같이 성매매인데 남성은 깜빵가고 여성은 우리피같은 세금받아쳐먹고 이런 뭣같은나라는 우리나라밖에없다 하...
kyni**** 2019-01-27 18:15:36 신고하기
자기 딸을 창女로 만들어가면서 까지 부지해야 할 목숨 따위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 사실을 너희 창女들도 똑바로 인지해라. 니넨 그냥 비겁한 범죄자들일 뿐이다. 니네도 얼굴 예뻤으면 텐프로 뛰면서 억대 받았을텐데 단지 얼굴이 못생겼을 뿐 아닌가? 얼굴 못생겼으면 착하고 불쌍한 범죄자 되는건가? 그런 논리라면 돈 못버는 조폭은 칼로 사람 찔렀을 때 기업형 조폭보다 죄가 덜한가? ㅋㅋ 드루킹한테 2천만원 받은건 1억짜리 피아제보다 죄질이 덜 불량하냐? 정말 이 기사 시리즈 읽을때마다 같잖아서 못봐주겠네.
kyni**** 2019-01-27 18:11:37 신고하기
자기들을 비판하는 정당한 시선까지 범죄로 몰며 자신들과 동급의 찌꺼기들로 내려 앉히려는 개수작을 보니, 창女들이 왜 창女가 됐는지 알겠다 쯧쯧.. 유영철 욕하면 같은 연쇄살인범이고, 조두순 욕하면 같은 아동강간범이냐? 그게 가능하면 사람들이 빌게이츠나 워렌버핏을 욕하는게 낫지 않겠냐? ㅋㅋㅋㅋ 평생 가랑이 벌리면서 살아라. 피해자 코스프레 하면서. 어쩔 수 없이 내몰린 직장이라고 입으로는 떠들지만 내가보기엔 천직인데? ㅋㅋ 그런 정신상태면 몇번을 다시 태어나도 창女 아니면 男창이다.
김**** 2019-01-27 17:29:20 신고하기
이게 나라냐? 불법을 저지르고도 나라에서 돈을 준다니 이게 미친 짓 아니고 무엇이냐? 성매매 하는 잡 년들도 똑같은 한표라는거지? 교활한 공산주의 빨갱 이들아...
⑦"TV서 가족 모습 나오면 눈물 나" 마지막 설 보내는 여성들
설 연휴는 집창촌 여성들에게 대목이라고 한다. 명절을 맞아 고향에 가기 힘든 남성들이 찾아온다. 손님 수가 평소의 두 배 정도 된다는 것이다. 외롭고 소외된 사람들이 명절이 되면 여기에 모이는 셈이다. 성매매 종사 여성 B씨는 “이맘때가 되면 집창촌이 번창했던 옛 생각이 난다”며 “옛날엔 설에 방이 모자라 업주들이 근처 여관을 다 예약했었다”고 말했다.
특히 주변 공단의 외국인 근로자들이 이곳을 많이 찾는다. B씨의 말이다. “새해에는 서로 복 많이 받으라며 인사 하니까 시비 붙는 일이 거의 없어요. 주로 부모님이 없는 사람, 고향에 가고 싶어도 사정이 있어 못 가는 사람들 하소연 들어주는 게 이 무렵 저의 일이지요.”
대부분 여성은 설날 고향 집에 가지 못한다.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B씨는 “여기 있는 여성들도 남들 다 쉬는 설에 여유를 가져보고 싶지만 돈을 벌어야 하니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명절에 외롭고 소외된 사람 모여
여성 D씨(36) 역시 올해 설 옐로하우스에 있을 계획이다. 아픈 어머니를 매년 찾아뵙고 설을 함께 보냈지만 몇 년 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로는 이곳을 지킨다. 또 다른 여성은 이곳에서 지낸 15년 동안 명절에 고향을 찾은 것은 딱 한 번이라고 했다. 이들은 주방 이모가 끓여준 떡국을 먹으며 명절 기분을 냈다. 그는 “명절은 나에게 마음 아픈 단어”라며 “TV에서 가족이 일출을 보러 가거나 모여 앉아 밥 먹는 장면이 나오면 너무 부러워 눈물이 난다”고 말했다.
그러나 올해는 이곳 분위기가 좀 다르다. ‘옐로하우스 비가’를 연재하는 동안에도 여성들은 집을 비우라는 압박을 계속 받고 있었다. 지난달 31일 오후 옐로하우스를 찾았다. 설 연휴가 코앞이지만 정적만 감돌았다. 조합 측이 지난달 “설 이후 철거를 시작하겠다”고 통보한 탓에 뒤숭숭한 분위기였다.
B씨는 “이날 오전 철거업체 대표가 찾아와 특정 업소를 지목하며 설 연휴가 끝나면 바로 철거하겠다고 했다”면서 “빈 곳부터 허물겠다고 했었는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명절을 앞두고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고 걱정했다. B씨가 말한 곳은 옐로하우스 ○호다. 이곳은 옆의 여관 건물과 보일러관·수도관 등이 연결돼 있다. 여관 건물은 주인이 떠나 이미 한 달 전 내부 철거작업을 시작했다. ○호에는 현재 이모와 종사 여성 등 7명이 산다.
조합 “설 지나 철거하겠다” 통보
○호의 한 여성은 “철거업체가 옥상 구멍을 막아 놓은 알루미늄 새시를 가져가 비·눈이 샌다”며 “거기다 여관까지 철거하면 보일러·수도를 못 쓰게 되는 것 아니냐. 이 추운 날에 당장 어떻게 견딜지…”라면서 울먹였다. 이어 이 여성은 “한 달 전만 해도 철거업체가 이곳은 사람이 있으니 마지막에 철거하겠다고 약속했다”고 주장하며 “그런데 갑자기 설이 지나면 바로 허물겠다고 윽박지르니 여자들끼리 너무 무섭다”고 말했다.
상황 변화가 궁금해 옐로하우스 일대를 재개발하는 숭의1구역 지역주택조합 측에 물었으나 철거 일정과 관련해 아무런 답변을 해줄 수 없다고 밝혔다. 인천 미추홀구청에 확인한 결과 지난해 10월 ○호와 옆 여관 건물에 대한 철거 신청이 접수됐다. 접수 3일만 지나면 언제든 철거할 수 있다. B씨는 “구청에서는 (조합이) 법적으로 잘못한 게 없다는 말만 하고 여성단체도, 인권단체도 도와줄 수 없다고 한다”며 “우리를 염려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했다.
여성들은 조합이 강제 철거를 시도할까 봐 겁먹고 있다. 지난달 이곳 주민이 철거업체 관계자에게 떠밀려 다친 사건도 있었다. 2016년 12월 서울 전농동 집창촌 ‘청량리588’에서는 강제 철거 과정에서 성매매 업소 종사자 등 일부 주민과 재개발추진위원회 간 물리적 충돌이 발생했다. 허선우 미추홀경찰서 정보보안과장은 “돌발사태에 대비하고 있다. 철거 시 충돌이 벌어지면 인원을 배치하겠다”고 말했다. B씨는 올해 명절 당일 차례를 지내고 올 계획이었지만 철거 걱정에 업소를 비울 수 없게 됐다. 그는 “설 분위기가 전혀 나지 않는다”며 “내가 처음 집창촌에 발을 들인 30년 전과 세상이 너무나 달라졌다”고 말했다. 2.2
⑧"한 명 데려오면 200만원"···성매매 시작은 인신매매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aseokim@joongang.co.kr
.1962년 생겨난 인천 미추홀구 숭의동의 집창촌 속칭 ‘옐로하우스’가 재개발된다. ‘1월 말까지 모두 비우라’는 최후통첩을 받았지만 10여 개 업소의 성매매 여성 40여 명은 갈 곳이 없다며 버티고 있다. 설연휴가 끝나면 강제 철거가 시작될 것이라는 얘기가 돌면서 불상사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벼랑에 몰린 여성들이 마음속 깊이 담아뒀던 그들만의 얘기를 꺼냈다. 집창촌에서 긴 시간을 보낸 B씨(53)의 증언을 ‘옐로하우스 비가(悲歌)’ 시리즈에서 소개한다.
인천 미추홀구 숭의동 집창촌 '옐로하우스' 업소의 내부. 두 평 남짓한 방에 침대, TV, 에어컨 등이 있다. 김경록 기자
.‘옐로하우스 비가’에 관한 다양한 의견 가운데 한 독자의 댓글이 눈에 띄었다. ‘(자활비) 지원이고 뭐고 다 떠나서 저 여성들은 어떤 사연이 있기에 젊은 나이에 저기에 있는지 궁금하다’는 내용이었다.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하기 위해선 집창촌의 역사부터 짚어봐야 한다. 그래야 이 문제를 심도 있게 고민해볼 수 있다.
성매매를 전업으로 하는 집창촌에는 30대 이상의 생계형 여성이 많다. B씨 역시 돈을 벌기 위해 30여 년 동안 전국의 집창촌을 떠돌았다. 처음 발을 들인 것이 1980년대 중반이다. 격동의 시기라 불리는 80년대의 집창촌은 말 그대로 무법천지였다. 이곳에서 온갖 범죄가 일어났지만 바깥세상은 모르는 척했다.
4남매의 맏이인 B씨는 막냇동생과 나이가 10살 이상 차이 난다. 사업을 하던 아버지 때문에 집에 빚이 조금씩 쌓이더니 어느새 5000만원까지 불어났다. 원래 몸이 약했던 어머니는 늘 아파 일을 할 수 없었다. 하루하루 버티다 B씨가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아버지가 쓰러졌다. 누워 있는 아버지와 어린 동생들을 돌봐야 하는 상황에서 B씨는 학교를 온전히 다니기 어려웠다. 결국 중퇴를 하고 가발공장과 작은 상점에서 일했다. 18세 소녀가 하기엔 힘든 일이었다. 받는 돈도 적었다. 다른 직장을 알아봤지만 취직이 어려웠다. 그때 친구가 술집에서 돈을 번다며 같이 가자고 했다. “저처럼 가정 형편이 어려웠는데 술만 따르면 된다는 거예요.” 큰돈은 아니지만 선불금을 준다는 말에 B씨는 유흥업소에 발을 들였다.
“다른 친구가 그런 데 가지 말라면서 울기까지 했는데…, 너무 어려서 뭐가 뭔지 모르고 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카페 서빙 구인광고에…
계속 이 일을 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런데 빚쟁이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집은 매일 쑥대밭이 됐다. 어머니는 울기만 했다. 본격적으로 돈을 벌어야겠다고 결심한 것이 그때쯤이다. 잡지에서 ‘카페 서빙 여종업원 구함, 월 300만원, 침식 제공’이라는 구인광고를 봤다. 고향인 경기도를 떠나 대구로 향했다.
대구 도심의 성매매 집결지였던 중구 도원동 ‘자갈마당’. [연합뉴스]
.막상 가보니 카페가 아니었다. 시뻘건 불이 켜진 홍등가 앞에서 B씨는 고민에 빠졌다. “꼭 돈을 벌어 돌아가겠다는 생각뿐이었어요. 식구들을 떠올리면서도 한편으론 겁이 나 망설이고 있으니 업주가 ‘조금 일해보고 마음에 안 들면 나가라’고 하는 거예요. 하지만 마음대로 나갈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어요.” B씨가 한스러운 듯 울음을 터뜨렸다.
B씨가 간 곳은 대구 도원동 집창촌 ‘자갈마당’이었다. 이곳에는 인신매매로 끌려 온 여성들이 많았다.
“알선책들이 건달을 시켜 나이트에서 여성을 납치하거나 술에 몰래 마약을 타 끌고 왔어요. 한 명을 데려오면 200만~300만원을 받아요. 그때와는 많이 달라졌지만 여성들을 데려오는 알선책들을 요즘은 소개소 매니저라고 하더군요. 처음 이런 곳에 오면 너무 무서워 방 안에서도 막 도망 다녀요. 그러다 결국은 시키는 대로 하게 돼요. 업주가 언니들에게 향정신성 약을 한 주먹씩 먹였습니다. 이걸 먹으면 비틀비틀하고 정신을 못 차리거든요. 넋이 나가죠. 그렇게 몇 년 지내면 나갈 계획은커녕 자포자기하고 짐승처럼 사는 거예요.”
80년대에 여성이 납치, 취업 사기 등으로 집창촌에 팔려 가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90년대 후반까지도 신문 사회면에서 관련 기사를 볼 수 있었다.
87년 서울지검 김수철 검사가 롤러스케이트장 주변의 여중·고생이나 신문의 ‘관광 안내원 모집’ 등의 허위 구인광고를 보고 찾아온 미성년자 500여 명을 서울·부산·대구 등지의 윤락가에 팔아넘긴 인신매매 조직 15개 파 46여 명을 적발했다. 롤러스케이트장에 놀러 갔다 유인책에게 속아 가정집에 감금, 4개월여 동안 강제로 히로뽕 주사를 맞은 상태에서 윤락 행위를 한 김모(16)양은 조직에서 풀려난 뒤 후유증으로 전신 마비 증세를 보이는 등 피해가 심각했다는 기사도 있다.
80년대 납치, 취업 사기 인신매매 성행
이듬해 8월에는 서울 신정경찰서가 길을 가던 가정집 처녀, 미성년자 등을 납치해 광주 등 집창촌에 팔아넘긴 인신매매단과 윤락 업주를 붙잡았다. 이들은 경기도 한 디스코텍 앞에서 김모(19)양과 양모(19)양을 붙잡고 “드라이브나 하자”고 속여 여관에 데려가 폭행한 뒤 1인당 40만원을 받고 집창촌에 파는 등 17명을 납치했다.
88년 6월 서울시경에 따르면 가출 소녀를 납치해 윤락가에 팔아넘기는 인신매매 조직이 서울에만 3000명 이상이었다. 범인들은 3∼4명이 조를 이뤄 서울역·용산역 주변의 상경한 여성, 오락실·롤러스케이트장 등에서 방황하는 10대 소녀를 납치해 집단 폭행한 뒤 팔아넘겼다. “좋은 일자리를 주겠다”는 말로 꾀는 것이 보통이었다.
중앙일보 1988년 8월 28일자에 실린 인신매매범 구속 기사. [사진 중앙일보 캡처]
.이런 엄청난 인권 유린의 이면에 군사독재 정부가 도사리고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박정미 충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1985~91년 인신매매 형사 사건을 분석한 결과 여성 피해자의 84%가 성 산업에 매매(성매매 업소로 팔려갔다는 의미)됐다”며 “80년대 전두환 정부의 유흥·향락 산업에 대한 규제 완화로 업계 규모가 커지면서 여성을 공급하기 위한 인신매매가 증가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당시 정부의 규제 완화가 내수 확대 정책의 일환이었지만 사실은 시민의 정치적 자유와 민주화 열망이 유흥으로 옮겨가게 하기 위한 전략이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B씨가 있던 자갈마당에 인신매매로 끌려온 여성을 찾으러 오는 이는 없었다. 경찰도 찾지 않았다. 항상 호객하는 ‘현관 이모’가 여성들을 감시했다. 이곳에서는 누가 죽어도 죽은 줄 몰랐다는 게 B씨의 말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집창촌은 ‘성매매가 사실상 허용된 곳’으로 시민들 삶의 공간에 뿌리를 깊게 뻗을 수 있었고 돈이 필요한 여성들을 불러모으며 오늘까지 이어져 온 셈이다. 2.3
최은경의 옐로하우스 悲歌] ⑨
성매매 여성 종착지는 섬···"모두 한통속, 죽어야 나온다" 2.4 중앙
.B씨가 발을 들일 무렵 집창촌 여성들은 자유롭지 못했다. 어쩌다 감시를 피해 도망가도 금방 잡혀 오기 일쑤였다. 잡혀 온 여성은 며칠 동안 골목에 보이지 않았다. 업주가 도망간 벌로 이들을 감금해 때리고 굶겼기 때문이다. B씨는 “무자비하게 폭행을 하면서도 손님을 받는데 지장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얼굴은 손대지 않았다”고 말했다. 가게 일을 봐주는 폭력배 ‘삼촌’들은 “또 도망가면 식구들에게 알린다”고 협박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동네 주민들이 집창촌에서 벌어지는 착취와 유린을 방조하거나 심지어 여기에 일조했다.
“같이 일하던 언니가 손님을 가장한 인신매매범에게 속아 전라도 외진 마을로 잡혀갔어요. 울면서 내보내 달라니까 속옷만 입혀 다락에 가둬놓더래요. 나중에 보니 담뱃불로 지진 자국이 한가득이에요. 겨우 속옷만 입은 채 도망 나와 택시를 탔는데, ‘아무 경찰서나 가자’라니까 한 바퀴 돌더니 다시 업소에 내려주더라는 거예요.”
이 여성은 어쩔 수 없이 몇 개월 동안 업주가 시키는 대로 따랐다. 겨우 외지에서 온 손님에게 신고를 부탁해 탈출했지만 오랫동안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업주·단골·경찰 모두 한통속”
“특히 섬 있잖아요. ○○도 같은 곳은 우리끼리 얘기로 죽어야 나올 수 있다고 했어요. 도망치려면 배를 타야 하는데 업주·선장이 모두 한통속이거든요. 경찰도 믿을 수 없다는 얘기도 했어요. 단골손님도 못 믿어요.”
○○도는 성매매 여성들 사이에서 마지막 가는 곳으로 여겨졌다. 육지의 항구에서 배를 타고 2시간 정도 들어가야 나오는 섬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폐쇄적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섬에서는 범죄를 당해도 도망가지 못한다는 두려움이 강하다. 2016년에는 한 섬에서 주민들이 새로 부임한 초등학교 여교사를 성폭력 한 사건이 일어났다. 2014년에는 전남의 한 섬에서 장애인들을 감금해놓고 몇 년 동안 노동력을 착취한 사건이 알려져 공분을 샀다. 섬은 호젓한 낭만이 있지만 때론 약자들에게 감금의 공포를 유발한다. 공개적으로 도움을 청하기 힘든 성매매 여성들 사이에선 섬에 대한 두려움이 종종 화제에 오른다.
1990년 9월 24일 경찰에 붙잡힌 인신매매범들. 서울시경은 인신매매범 일제 단속에서 84명을 적발해 58명을 구속하고 26명을 입건했다. [중앙포토]
.때론 성매매 여성들이 집창촌에 사실상 감금된 미성년자를 탈출시키기도 한다. B씨는 다달이 집에 돈을 보내야 하는 형편이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집창촌에 머물렀다. 그러나 성매매를 강요받는 16세 소녀의 탈출을 도운 기억이 뿌듯하게 남아있다.
“딱 봐도 어린앤데 스무 살이래요. 맨날 아프다면서 우는 거예요. ‘도망가면 다시는 이런 데 안 올 거냐’고 물으니 절대 안 온대요. 친한 언니들과 짜고 목욕탕에서 이모의 관심을 딴 데로 돌리게 하고 그 틈을 타 도망가게 했어요. 차비를 주고 무조건 기차역으로 가라 했지요.”
업주들은 여성들이 딴생각을 못 하도록 늘 혹사하고 폭력을 행사했다. 물론 돈 욕심도 컸다. 한 달 가운데 쉬는 날은 이틀. 소개소를 끼고 온 여성은 소개비를 갚아야 해 한 달 내내 일했다.
“생리할 때 솜을 틀어막고 일해 몸이 망가진 여성들이 많았어요. 중절 수술한 다음 날도 바로 일해야 했어요. 그때는 피임을 제대로 못 해서 몇 번이나 임신하는 여성도 많았습니다. 아프면 일 못 한다고 때리고, 도망가다 잡혀 오면 때리고. 말 안 들으면 감금하고요. 요즘도 휴대전화 뺏고 도망 못 가게 지키는 곳이 있다고 들었어요.”
성매매 여성들의 감금·폭행 피해가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것은 2000년 9월 전북 군산시 대명동의 윤락가 속칭 ‘쉬파리 골목’ 화재 사건 때였다. 한 유흥업소에서 불이 나 빠져나오지 못한 20대 여성 5명이 질식사했다. 이후 조사에서 이들이 인신매매로 잡혀 와 감금된 채 성매매를 강요당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큰 충격을 줬다. 업소 창문에는 쇠창살이 있었으며 두꺼운 철제문으로 된 출입문은 밖에서 잠겨 있었다.
불나자 감금된 채 질식사한 여성들
1년여 뒤 쉬파리 골목과 가까운 군산시 개복동의 한 윤락업소에서 또 불이 나 여성 14명이 숨지는 대형 참사가 벌어졌다. 이들 역시 감금된 채 성 착취를 당한 것이 밝혀졌다. 두 사건은 2004년 성매매 특별법(‘성매매 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과 ‘성매매 방지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2002년 군산시 개복동 유흥업소 화재 현장을 화재 감식반이 점검하고 있다. [중앙포토]
.이후에도 집창촌 내 인권 유린은 계속됐다. 2008년 대전 유천동 성매매 업소에서 탈출한 종사 여성들이 여성단체와 언론 등에 업주의 감금과 갈취 등을 폭로해 파문이 일었다. 이어 2009년에는 성매매 여성이 달아나자 업주가 붙잡아와 감금한 채 마구 때려 숨지게 한 사건이 발생했다. 강현준 전국한터연합회(성매매 종사 여성 인권 단체) 회장은 “요즘도 전국 집창촌에서 여성의 휴대전화 명의를 업주나 삼촌으로 해 친구 맺기, 위치 추적 등으로 감금 아닌 감금을 한다”며 “신체 구속이 아니더라도 선불금 지급 등을 법에 어긋나지 않게 교묘하게 바꾸는 등 여성이 벗어나지 못하게 올가미를 친다”고 말했다. 아직도 이런 범죄가 가능한 이유는 성매매 여성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불법 행위자의 낙인이 찍힌 이 여성들은 도움을 청하려는 생각도 못 하고, 숨죽인 채 갖은 협박과 폭력에 시달릴 뿐이다.
B씨는 자갈마당에서 업주와 갈등이 있을 때마다 “○○도에 넘겨 버리겠다는 말이 제일 무서웠다”고 기억했다. 국가도, 수사기관도 집창촌에 사는 여성들에게는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최은경 기자 choi.eunkyung@joins.com
⑩ "이렇게 영업하는데 왜 불법?" 외신기자 놀라게 한 집창촌
‘옐로하우스 비가’ 연재에 가장 많이 올라오는 댓글 중 하나가 ‘차라리 일본강점기 공창제처럼 성매매를 합법화하라’는 내용이다. 공창제는 1916~48년 일본이 우리나라에서 실시한 성매매 제도다. 국가가 성매매를 법으로 관리한 이 제도는 해방 이후 미 군정 때 폐지됐다. 80년대 중·후반 대구 도원동의 집창촌 ‘자갈마당’에서 일했던 B씨는 “워낙 사람이 붐비고 번성해 당연히 국가가 관리하는 줄 알았다”고 말했다. 당시 자갈마당의 업소는 방에 딸린 욕실도 없는 판자촌이었다. 그래도 늘 북적였다는 게 B씨의 말이다. 홍성철 작가의 『유곽의 역사』에 따르면 88년 서울올림픽을 전후해 이곳에서 성매매에 종사하는 여성은 1000명에 가까웠다. B씨가 화려한 거리를 보며 집창촌이 허가받은 곳이라고 여긴 것도 무리는 아니다.
‘88 올림픽’ 전후로 번성
“의사가 상주하는 보건소가 가까운 곳에 있었어요. 산부인과 검사는 일주일 1회, 간염·에이즈·매독 등을 알 수 있는 피 검사는 3개월에 1회, 보건증 검사는 6개월에 한 번 했습니다. 검진은 무료였어요. 다 나라에서 해준 것이지요. 다만 몸에 이상이 있으면 치료는 개인 돈으로 했어요. 심한 성병에 걸리면 다 나을 때까지 보건소에서 치료받게 했는데 몇몇 업주가 보건소에 돈을 주고 여성들을 빼가곤 했어요. 피임기구를 주면서 또 일을 시킨 거죠.”
당시 집창촌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모두 행정기관에서 보건증을 발급받아야 했다. 대부분 이름과 나이를 속여 적었지만 훗날 실명제로 바뀐 뒤에는 본명을 적었다고 한다.
B씨가 자갈마당이 허가받은 집창촌인 줄 알았던 이유가 또 있다. 그는 이곳에 있었던 2~3년 동안 경찰이 단속하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고 했다.
“솔직히 법적 허가를 받지 못한 곳이란 걸 알고 나서도 반(半)공창이라고 생각했어요. 간혹 술 취한 손님이 ‘돈 낸 만큼 못 놀았다’며 가까운 파출소에 신고했는데 업주나 이모가 갈 필요도 없어요. 파출소에서 전화로 ‘몇 호 누구’ 이렇게 호출하면 가서 앉아있기만 하면 돼요. 경찰관이 손님에게 ‘그만 하면 잘 노셨다’면서 조서도 안 쓰고 알아서 다 처리해줬으니까요.”
대형화, 산업화한 성매매업. [중앙포토]
.정부는 61년 ‘윤락행위 등 방지법’을 제정해 성매매를 법적으로 금지했지만 이듬해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가 전국 집창촌 104곳에 특정 지역을 설치하면서 사실상 성매매를 허용했다. 국가의 묵인은 계속됐다. 홍 작가는 책에서 “5공화국 군부정권은 3공화국의 특정 지역 설치를 흉내 내듯 윤락 여성 집중 관리지역을 설정했다. 그리고 윤락 여성 등록을 받아 보건증을 발급하고 정기적인 건강진단을 설치했다. (…) 올림픽을 앞두고 86년에는 외국인들의 미관을 위해 윤락가 시설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사업에 나섰다. 비좁은 인도 대신 널찍한 소방도로가 뚫리고 커다란 유리창을 갖춘 ‘유리방’이 본격 등장했다”고 썼다.
지난해 2월에는 국가가 불법적으로 미군을 대상으로 한 기지촌을 조성해 관리했다는 판결이 나오기도 했다. 서울고법 민사22부는 이씨 등 기지촌 성매매 여성 116명이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항소심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했다. 1957년부터 90년대까지 기지촌에서 성매매를 한 이 여성들은 정부가 기지촌을 조성하고 관리하면서 성매매를 조장해 신체적·정신적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했다.
권영진 대구시장, ‘자갈마당’ 폐쇄 공약
대구 중구 도원동 자갈마당 안에 있는 '자갈마당 아트스페이스' 전경. [사진 대구 중구청]
.화려했던 자갈마당은 2004년 성매매 특별법이 시행된 뒤로 쇠락의 길을 걸었다. 성매매 종사 여성은 350여 명으로 줄었다. 2014년 권영진 대구시장이 취임하면서 자갈마당 폐쇄를 공약으로 내걸며 본격적으로 개선 작업에 들어갔다. 대구시와 경찰은 집중 단속을 벌이면서 2017년 집창촌 골목에 CCTV와 가로등을 설치했다. 이어 성매매 업소 사이에 전시공간인 아트스페이스를 열었다. 그럼에도 홍등이 꺼지지 않던 이곳이지만 인천 옐로하우스처럼 부동산 개발을 통해 어두운 역사 속으로 사라질 전망이다. 대구시는 민간개발 시행사인 도원개발이 아파트 개발 사업승인 신청을 해 심사하고 있다고 지난달 밝혔다. 심사를 통과하면 이 일대 집창촌은 사라지고 오는 11월 대규모 아파트 건설 공사가 시작된다. 현재 자갈마당에는 10여 개 업소에 30여 명 여성이 남아 있다.
B씨는 “지난해 미국인 외신기자가 옐로하우스에 취재하러 와 ‘이렇게 공개적으로 영업하는데 불법이라는 것이 놀랍다’고 하더라”며 “집창촌에서는 수십 년 동안 국가의 암묵적 동의 아래 성매매가 이어져 왔으며 앞으로도 어디서든 성매매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80년대 후반 여성 업주의 학대를 못 이겨 자갈마당에서 나와 부산 완월동(현 서구 충무동) 집창촌으로 갔다. 부산에선 또다른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다.
70년대 일본인 기생관광 붐…정부는 "애국 행위" 장려도
B씨가 쓴 일기 내용. 그는 글 쓰는 것을 좋아해 가끔 일기를 쓴다. 최은경 기자
.옐로하우스 업소 내부에 들어가면 무릎 높이의 온돌방이 있다. 여성들이 ‘현관 이모’의 손에 이끌려 오는 남성들을 기다리는 대기실이다. 이곳에서 여성들과 수 차례 인터뷰한 후, 어느 날 B씨가 공책 한 권을 보여줬다. 글쓰기를 좋아해 가끔 일기를 쓴다고 한 것이 떠올랐다. 일기장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기자가 영상 촬영 기자와 함께 옐로하우스를 다녀간 뒤 B씨가 쓴 일기 내용이다.
“기자님들이 우리들 얘기를 들으러 오셨다.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같은 사람들인데 우리들 역시 많은 것들을 외면하며 살아온 것 같다. 우리들 이야기가 신문에 실리고 이야기들을 뱉어내고, 상상도 못 했던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관심을 가져준 기자님들이 고맙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우리를 알려야 할까.”
그는 그날 이후 묻어놓은 기억을 계속 더듬었다. B씨는 대구 자갈마당에서 인천 옐로하우스에 오기까지 20여 년 동안 전국의 여러 집창촌을 경험했다. 부산 완월동(현 서구 충무동) 집창촌 역시 그 가운데 한 곳이다. 부산 완월동 집창촌은 우리나라 최초의 성매매 집결지다. 1900년대 일제가 항구 근처인 이곳에 집창촌을 조성한 이후 80년대까지 번성했다. 당시 업소가 150여 개, 종사 여성이 2500명을 넘었다. 성매매 여성이 2500명이라면 얼마나 많은 남성들이 매일 여기로 몰려들었던 것일까. 2004년 성매매 특별법 시행 후 규모가 대폭 줄었다. 2015년 부산시와 서구청이 도시 재생사업에나섰지만 45개 업소, 220명이 여전히 영업하고 있다.
한국 최초의 집창촌, 부산 완월동
부산발전연구원의 보고서에 따르면 이곳 역시 ‘의상실 종업원 구함’, ‘가정부 구함’ 같은 구인광고에 속아서 오거나 가정 폭력·성폭력 등을 겪은 뒤 가출해 업소생활을 하다 빚이 쌓여 온 여성이 많았다.
부산 완월동 성매매 업소와 여성 종사자 수. 자료: 부산발전연구원 '완월동 창조적 재생 연구용역에 따른 보고서' (2015년)
.B씨는 완월동에서 10년 넘게 일했다. 80년대 후반~90년대 후반을 이곳에서 보낸 셈이다.
“완월동이 워낙 규모가 컸어요. 잘 되는 업소는 거의 기업이었어요. ○○장·○○관 이렇게 불렀는데 업주들이 TV에 나오는 연예인들과도 잘 알고 재산이 몇십 억원대였어요. 이 세계에서 완월동 출신이라고 하면 우리끼리는 알아줬다니까요.”
이곳에서는 주로 일본인 단체관광객이나 야쿠자(일본의 조직폭력배)를 상대했다. 손님 10명 가운데 9명은 일본인이었다. 3박 4일 동안 함께 부산 남포동, 경기도 용인 민속촌, 제주도를 다니며 관광 가이드 노릇도 했다.
“야쿠자가 오면 부산의 폭력 조직이 접대했어요. 우리는 기생파티 하듯이 한복을 갖춰 입고 그들을 맞았습니다. 차밍스쿨과 함께 외부 사설학원에 다니며 일본어는 물론 다도·예의범절·걸음걸이까지 배웠어요. 일종의 외화벌이지요.” B씨는 아직도 일본어를 제법 한다. 이런 형태의 성매매는 하나의 산업으로 자리 잡았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저서 『매매춘, 한국을 벗기다: 국가와 권력은 어떻게 성을 거래해왔는가』에서 이런 내용을 밝혔다. “1970년대 일본인을 주 고객으로 하는 관광 기생업이란 명칭이 보편화했다. 일본인 관광객 수는 71년 9만6000여명에서 79년 65만여명으로 늘었으며 이 가운데 85% 이상이 남성이었다.”
부산 완월동 집창촌의 2014년 모습. [사진 부산발전연구원]
.또 강 교수는 같은 책에 “박정희 정권은 73년부터 매춘부들에게 허가증을 주어 호텔 출입을 자유롭게 했고 통행금지와 관계없이 영업할 수 있게 했다. 또한 박 정권은 여행사들을 통해 ‘기생 관광’을 해외에 선전했을 뿐만 아니라 문교부 장관은 73년 6월 매매춘을 여성들의 애국적 행위로 장려하는 발언을 하였다”고 썼다.
강 교수는 책에서 78년 한국이 매매춘으로 일본인에게 벌어들인 수입이 700억원 정도라고 했다. 그는 『동맹 속의 섹스』(캐서린 문), 『한국의 여성운동: 어제와 오늘』(이효재), 『한국의 매춘』(박종성) 등을 참고했다.
무소불위의 힘을 가졌던 정권의 관리 아래 여성의 성은 상품으로 거래됐다. 수출이 최고의 애국이었던 시절, 그들은 음지에서 외화를 벌어들였다. 집창촌은 법의 사각지대로 공인 받았기 때문인지 인신매매범이 활개를 쳤다. 어린 여자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늪으로 끌려들어가 평생 빠져나오지 못하는 일이 예사였다. 그들 중 일부는 현재도 포주로, 현관 이모로, 성매매 여성으로 살아간다. 구렁텅이에 묶여 있던 30년 세월이 그들에게서 바깥 세상과 어울릴 용기를 앗아갔다.
일본인을 상대로 한 ‘기생 관광’이 성행하다 보니 완월동 성매매 여성과 부산 태종대 신선바위에 간 일본인 관광객이 여성의 사진을 찍어주려다 벼랑 아래 떨어져 숨지는 사고도 났다(1976년). 95년 부산지검 강력부가 일본 야쿠자 100명에게 성매매를 해주기로 계약한 요정 업주를 구속하기도 했다. 이 업주는 4개월 동안 일본인 관광객에게 1인당 3만 엔을 받고 윤락 행위를 알선해 1500만 엔(당시 약 1억2000만원)을 벌어들였다.
“60대 일본인 노인 희롱에 ‘치 떨려’”
동네 건달들은 B씨를 비롯한 완월동 여성들이 지나가면 ‘쪽발이(일본인을 비하해 부르는 말)’와 논다고 놀려댔다. “솔직히 자존심 상했지요.” 자존심 때문이었을까. 3월 1일에는 영업을 쉬었다. 이날 일본인 관광객이 오면 “오늘이 무슨 날인 줄 모르냐. 어딜 올라오느냐”며 욕하면서 돌려보냈다. 허탈한 사실은 얼마 지나고 나면 “‘이랏샤이마세(어서오세요의 일본말)’를 외치며 다시 분주하게 일본인을 맞았다는 것이다.
중앙일보 1989년 6월 29일자에 보도된 경찰의 요정 일제수사 기사. [중앙일보 캡처]
.서울 명동 근처에서도 일본인을 상대하는 성매매 업소가 성행했다. 속칭 ‘다찌’라 불리는 이곳 여성들은 알선책에게 연락을 받고 호텔 같은 숙박업소에서 성매매를 했다. 이 다찌는 2012년까지도 언론에 등장했다. 서울 중구의 유명호텔인 ○○○호텔·○○호텔의 지배인이 ‘기생파티’를 한다며 다찌 여성들을 유명 고급 요정에 데려가곤 했다.
89년에는 서울시경이 기생파티 영업이 의심되는 유명 요정들을 대상으로 일제 수사(윤락행위방지법 위반)를 벌였다. 서울에서 여행사 회장, 요정 마담, 조직 폭력배 등이 ‘엔 벌이’ 성매매를 알선해 구속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제주도 역시 70·80년대 일본인을 상대로 한 기생관광이 활발했다.
“일본인들이 한국에 ‘현지처’를 많이 뒀어요. 저도 마담에게 60대 일본인 골프장 사장을 소개받았는데 솔직히 치가 떨렸어요. 쭈글쭈글한 노인이 제 코앞에서 ‘가와이네, 가와이네(귀엽다의 일본말)’ 하는데 나라 힘이 약하니까 어린 한국 아가씨들이 이런 일을 겪는구나 싶었어요. 그 서러움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하지 못할 겁니다. 높으신 분들은 몰랐을 테지요.” 최은경 기자 choi.eunkyung@joins.com 2.6
기지촌 위안부 생존자에서 증언자로 거듭났던 박언니
⑦ 미군 기지촌 위안부 소송
미군 기지촌 위안부 국가배상 소송
공개 법정 증언 나선 박언니
열다섯에 직업소개소에서 팔려가
“경찰도, 보건소도 나이 안 물어
경찰서 가면 다시 포주에게 데려가”
공무원은 ‘외화 벌어주는 애국자’라
부르며 ‘미군 잘 대하는 법’ 가르쳐
“국가가 책임지라” 당당하게 요구
2심까지 승소…국가가 해결해야
일러스트 조재석
2019년 1월28일은 김복동 할머니(생전에 할머니로 불리는 걸 좋아하셨다)께서 영면하신 날이다. 할머니는 1992년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겪은 잔학상을 증언하였다. 그는 만 14살이던 1940년 공장에 일하러 가야 한다는 말에 속아 위안부로 끌려갔고 1947년 7년 만인 21살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 45년 만의 고백이자 증언이었다.
처음 그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요 생존자였다가 증언자가 되었고, 우리나라는 물론 전세계 전시 성폭력 피해 여성과 연대하여 싸우는 여성인권운동가로, 평화운동가로 평생을 살았다. 그러나 그는 끝내 일본 정부의 사과를 받지 못하고 떠났다. 아니, 용서하지 못하고 떠났다.
유대인으로서 아우슈비츠에서 기적처럼 살아남은 시대의 증언자 프리모 레비를 떠올려본다. 레비는 누구도 살아남아 증언하지 못할 것이라는 독일군의 비웃음 속에서, 증언하기 위해 살아남았고 자살로 생을 마칠 때까지 평생을 증언자로 살았다. 레비는 생환 뒤 22년 만에 우연히 아우슈비츠 실험실에서 만났던 독일인 뮐러 박사를 만나게 되었다. 레비는 그에게 옛일을 기억하는지 묻는 편지를 보냈으나 그는 자신은 아무것도 몰랐고 거대한 역사 앞에서 어쩔 수 없는 개인일 뿐이었다는 답장을 보내왔다. 진실한 반성과 참회를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이었다. 그 뒤 레비는 뮐러 박사에게 보내지 못한 편지 초고에 이렇게 적었다.
“적을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아마 그들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것은 그들이 후회의 표시를 보이는 경우에만, 그러니까 그들이 적으로 남아 있기를 포기한 경우에만 가능했다. 반대의 경우 여전히 적으로 남아 있고 남에게 고통을 가하려는 고집스러운 의지를 고수하는 사람이라면 그를 용서해서는 안 되었다.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고, 그와 대화를 나눌 수 있겠지만(나누어야만 한다) 우리에게 의미 있는 일은 그를 심판하는 것이지 용서하는 것이 아니다.”
진심으로 참회하는 적을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김복동 할머니는 끝내 참회하는 적을 마주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할머니는 적의 진정한 사과를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가엾은 피해자가 아니었다. ‘화해·치유재단’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참회와 반성이 아닌 용서와 화해를 강요하는 세상에 맞서 단호히 저항하고 싸우면서 심판자로서 용감하게 생을 마감한 것이다.
박언니의 당당한 증언
나는 법정 증언 준비를 위해 박언니(선생님 말고, 편하게 언니라고 불러달라고 하셨다)를 처음 만났다. 우리(기지촌 위안부 소송 대리인단)는 2014년 사상 처음으로 미군 기지촌 위안부 국가배상 소송을 제기한 상태였고, 박언니는 소송 당사자인 원고였다. 국가배상 소송의 원고는 100명이 넘었는데, 어렵게 결심을 하고 소송을 제기하였는데도 그들은 여전히 대중 앞에 얼굴을 드러내는 것을 꺼려, 법정에 올 때나 기자회견장에서 마스크를 쓰고 모자를 눌러쓰는 분이 많았다.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조차 피해 사실을 드러내지 못한 분이 대다수(최대 40만명까지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다는 연구가 있으나 남한에서 피해자 239명만이 일본군 위안부였다고 밝혔다)였으니, 피해자라기보다는 양공주, 양색시 등으로 불리며 멸시당하던 기지촌 위안부는 오죽하겠는가.
이러한 이유로, 우리가 국가배상 소송을 제기할 당시 ‘위안부’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미군 위안부’는 국가의 공식 문서와 조례 등의 법령에 등장하는 용어인데도 일각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있는데 “감히” (양공주가) 위안부라는 용어를 쓰느냐는 것이었다. 소송 중 국가 쪽 대리인도 비슷한 주장을 하면서 위안부라는 용어를 사용하여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하였다. 그런데 정작 김복동 할머니 등과 함께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제기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는 ‘기지촌여성인권연대’에 소속되어 같이 활동하였고, 국가배상 소송도 적극 지원하였다. 일본군 위안부의 경우 일본 제국이 식민지의 수많은 여성을 강제로 끌고 가 성매매를 강요하였다는 점에서 기지촌 위안부와 다르다 하여도, 위안부 문제는 ‘군인들의 성욕은 해소되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합의하에 이루어지는 ‘군사화된 성매매’의 문제라는 점에서 일본군 위안부든 기지촌 위안부든 본질적으로 여성인권의 문제라는 점을 가장 잘 이해한 것이다.
박언니는 이처럼 미군 위안부가 ‘위안부’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조차 논란이 되는 상황에서 용감하게 법정 증언을, 그것도 공개된 법정에서 하겠다고 나선 분이다. 법정 증언 때 판사조차도 여러번 정말로 공개 증언을 하겠냐고 물을 정도였다.
내가 박언니를 만난 곳은 이제는 쇠락한 의정부 기지촌(이었던 곳)이었고, 그는 여전히 그곳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1975년 열다섯 어린 나이에 시골에서 상경하여 일자리를 구하러 찾아간 직업소개소에서 기지촌으로 팔려 갔고, 미군이 빚을 갚아준 40살까지 미군 위안부로 살았다. 그는 법정에서 왜 기지촌에서 나오지 못했냐는 질문에 반문했다.
“도망가면 잡아오고 잡아오면 때리고 돈 얹어서 다른 데로 팔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자포자기가 되었어요. 그리고 나중에는… 내가 15살 어린 나이부터 기지촌에서 쭉 살았습니다. 아는 것도 없고, 배운 것도 없고,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고 몸은 망가지고, 그래서 그게 싫어서 자살 기도도 여러번 했어요. 감시 안 한다고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제 삶이 망가졌는데 제가 어디로 갈 수 있어요?”
그는 15살 어린 나이였는데도 포주가 만들어준 가짜 신분증으로 성인으로 둔갑되었다. 확연히 어린 얼굴이었는데도 경찰도, 성병검사를 하는 보건소도 그에게 나이를 묻지 않았다. 박언니의 증언에 따르면 그와 함께 일하던 미군 위안부 가운데 많은 이가 미성년자였고, 심지어는 교복을 입은 채로 팔려 온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도와달라고 경찰서에 찾아가면 경찰이 다시 포주에게 데려다주는 경우도 많았고, 도망갔다 잡혀오면 소개비를 빚으로 얹어서 다른 곳에 팔아버리는 일이 반복되니 자포자기하게 되었고, 결국에는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양공주’ 신세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경찰, 보건소 직원, 공무원 등은 위생 청결 교육을 명목으로 그들을 모아놓고 외화 벌어 주는 애국자라 칭하면서 미군을 잘 대하는 법을 가르치기까지 하였다.
박언니의 증언은 오래전 언론 기사 및 보존되어 있는 공문서에서도 확인된다. 공문서에 따르면 기지촌을 조성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외화 획득과 국가예산 절약’이었고, 위안부들에게 ‘외화 벌어주는 애국자라고 치켜세우면서 성병 검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미군 앞에서 ‘가랑이를 벌리지 말라’든가 ‘다리를 꼬고 무릎을 세워 이렇게 앉으라’는 등의 교육을 하였다. 미군을 잘 접대할 수 있도록 영어회화도 가르쳤다. 용산경찰서장이 1971년 6월14일 발표한 내용을 보면 ‘위안부들이 과거에 미군의 불쾌감을 조장한 일을 반성’하고 시정할 것을 요구하면서 ‘이러한 일들이 우리의 적인 북한을 돕고 있으며 이로 인해 국가안보가 악화되니 당면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협조하여달라’는 내용이 적시되어 있다. 또한 고위 공무원들까지 나서서 기지촌 위안부들에게 전용아파트 건립, 노후보장 등의 각종 혜택을 약속하면서 미군 상대 성매매를 독려한 사실이 확인된다. 국가는 기지촌 위안부들에게 미군이 안심하고 성매매를 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미군을 상대로 한 성매매를 요구하고 이를 통하여 미군의 사기를 ‘진작, 앙양’함으로써 국가안보에 필수인 군사동맹 유지에 기여하는 한편, 외화 획득과 같은 경제적 목적으로 기지촌을 운영·관리해온 것이 공적인 기록들을 통해 확인되는 것이다.
누굴 위한 성병관리였나
박언니가 가장 억울해하는 것 중 하나는 지독한 성병관리였다. 부당한 성병관리 자체도 억울한 것이지만 더욱 억울한 것은 도대체 누굴 위한 것이냐였다. 국가는 기지촌 위안부들의 성병관리를 지독하게 하였다. 그들의 건강을 위한 적법한 관리였다면 그게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토벌’과 ‘콘택트’라는 이름으로 보건증을 소지하지 않거나 보건증에 성병 검진 도장이 없다는 이유(토벌)만으로, 또는 성병에 걸린 미군이 성행위 상대로 위안부를 지목(콘택트)하기만 하면 무조건 낙검자(落檢者)수용소로 끌고 가서 감금하고 성병에 감염되었는지조차 확인하지 않고 지독한 페니실린 주사를 놨다. 성행위 상대방으로 여성을 지목한 미군이 ‘내가 너를 지목하였다. 의무대에서 상대 여성이 누군지 생각이 나지 않아 아무나 지목하였다’고 고백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페니실린 주사는 그 자체로 매우 고통스러운 통증이 따르는데다 부작용도 심하여 쇼크사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이 때문에 의사들조차 페니실린 주사를 놓는 것을 꺼렸는데, 이에 보건사회부는 법무부에 의사의 면책을 요청하는 공문을 보내기도 하였다. 국가의 성병관리는 미군이 안심하고 성매매를 할 수 있도록 깨끗한 몸을 준비시키려는 목적이었을 뿐, 결코 그들의 건강을 위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박언니는 증언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하였다.
“꼭 말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우리는 태어난 이 나라에서 버려졌습니다. 우리나라가 개입하여 만든 기지촌 거기서 우리는 폭력과 갈취, 이용만 당했습니다. … 국가는 기지촌으로 들어가게 만든 직업소개소와 포주들을 다 묵인해주었습니다. 몸을 버렸으면 돈이라도 벌었어야지 돈 버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포주들만 상상 이상의 돈을 벌었고, 그런 구조를 만든 나라가 우리를 이용만 해먹고 버린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그곳에 갔다고 합니다. 빚은 돈을 벌수록 더 오르고 10대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도와주는 어른은 없습니다. 억울합니다. 옛날에 박정희 경제개발 했다고 하지만 우리가 애국자 소리 들으면서 달러 엄청 벌어들인 거예요. 우리나라는 미성년자라고 집에 보내는 것도 없고 나라에서 다 버린 거잖아요. 그럼 책임을 져야죠, 달러 누가 다 벌었는데요. 아가씨들이 다 벌어들인 건데, 아파 죽어가도 의사 하나 안 보내고 오로지 성병검진만 했습니다. 성병검진을 미군을 위해서, 미군 요청에 의해서 해준 것이지 우리를 위해서 해준 것은 아니잖아요. 나라의 무관심에 우리의 몸은 병들고 돈도 못 벌고 이용만 당했습니다. 그러니까 나라가 책임을 져야죠. 이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승소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모두의 우려를 뒤로하고, 비록 일부 승소였지만 우리는 2심까지 승소하였다. 법원은 기지촌 위안부들이 경제적 곤궁에 못 이겨 스스로 기지촌에 들어와 성매매를 시작하였거나, 무허가 직업소개소 등을 통해 속아서 기지촌에 유입되었다는 점에서 국가(일본)가 직접 여성들을 강제로 끌고 가 성매매를 강요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는 다르다고 하면서도 국가가 적극적으로 위법한 성매매를 정당화·조장하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강제적인 성병치료를 행함으로써 기지촌 위안부들의 성, 나아가 그들의 인간적 존엄성을 군사동맹의 공고 및 국가안보 강화, 그리고 기지촌 내 성매매 활성화를 통한 외화벌이 수단으로 삼았다면서 기지촌으로의 유입 경로와 무관하게 국가는 기지촌 위안부들의 정신적 피해에 대해 배상하라고 판결하였다.
박언니의 삶은 내가 상상하기 어려운 어떤 나락의 끝이었을 것이다. 그의 삶은, 우리 모두가 빚진 그의 삶은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박언니는 그 큰 대법정에서 주눅 들지 않고 어려운 이야기를 긴 시간 담담히 증언하였고 이제는 국가가 책임지라고 당당히 요구하였다. 기지촌 위안부 생존자에서 증언자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성들은 전쟁이 있는 곳, 군대가 있는 곳에 전쟁 승리와 군대 유지를 위해 동원되었고, 이용되었으며, 버려졌다. 30만명으로 추산되는 기지촌 위안부 문제는 해결되지 못한 과거사의 문제이자, 해결해야 할 현재 진행형의 문제이다. 그들은 자기들을 이용하고 버린 국가를 용서하고 싶어 한다. 박언니의 외침처럼 국가는 책임을 져라! 철저히 진상을 밝히고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게 하라! 그것이 국가가 용서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한겨레 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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