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제주 4·3 책임져야"…10만인 서명 美대사관에 전달
"'나는 사태의 원인에 관심 없다.나의 사명은 오직 진압뿐이다.' 제주 4·3 사건 당시 제주지구 미군사령관 로즈웰 브라운 대령의 이 발언이 대비극의 출발점이었습니다.미국은 4·3 학살에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해야 합니다."
제주4·3 희생자유족회,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는 31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제주 4·3 사건에서 미국의 책임을 묻는 기자회견을 하고 주한미국대사관에 10만인 서명을 전달했다. 이들 단체는 지난해 10월부터 제주 4·3사건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촉구하는 캠페인을 벌였고 5천명은 온라인에서, 나머지는 오프라인에서 서명을 받아 총 10만 9천996명의 서명을 받았다.
이들 단체는 "미군정은 1948년 4·3 직후 브라운 대령을 파견하고 제주 현지의 모든 진압 작전을 지휘·통솔하면서 제주 4·3이 대량학살로 비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며 "이제 미국은 4·3의 진실을 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 단체와 함께 서명운동을 벌인 서울 강서구 마곡중학교 2학년 서지혜양은 "그동안 제주의 안타깝고 슬픈 역사를 모르고 있었다는 게 부끄러웠다"며 "제주도민들에게, 한국인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미국은 사과하고 책임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후 이들 단체는 세종문화회관 아띠홀에 제주 4·3 유족 100여명을 초청해 기록사진을 촬영하는 행사를 하고, 제주 4·3 제70주년 전국화사업의 성과 등을 유족들에게 보고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그러면서 "제주 4·3은 냉전체제가 구축되는 과정에서 한반도 남쪽에 친미정부 수립을 위해 반대세력을 억압한 반인륜적 인권유린 사태"라며 "인권과 평화에 기초한 정의로운 세계를 구축하려면 미국은 냉전 시대의 어두운 유산부터 정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쪽 뺨에 동백꽃을 그려 넣은 채 마이크를 잡은 김춘보 제주4·3 희생자유족회 행불인의회 호남위원장은 "동맹국 미국이 그 당시에 있었던 일에 더 더하지도, 빼지도 말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밝혀서 우리나라 역사가 바로 섰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10.31 한국경제
정방폭포 처형장 끌려가던 엄마는 주먹밥을 내게 건넸다
제주4·3 동백에 묻다 2부 ④ 정방폭포, 그 속에 감춰진 피울음 11.2 한겨레
4·3으로 온 가족이 해체된 김복순씨 가족사
처형장으로 가던 부모가 준 주먹밥 잊지 못해
오빠는 형무소에서 병사…남은 가족들 흩어져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눈물로 베개가 다 젖어”
김복순씨가 제주4·3 당시 가족이 겪은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내고 있다.
1949년 1월27일. 겨울치고는 따뜻한 날이었다. 서귀면사무소 부근 수용소에 갇혀있다가 어디론가 끌려가는 아버지(김이수)와 어머니(박순여)를 복순(당시 12살)과 복남(당시 8살)은 울면서 쫓아갔다. 부모들 손에는 식은 주먹밥이 들려 있었다. 군인들은 큰 소리로 우는 동생이 시끄럽다며 개머리판으로 내려쳤다. 왼쪽 눈에서 피가 철철 쏟아졌다. 복순은 피 흘리는 동생을 끌어안고 서럽게 울었다. 동생은 얼마 안 가 후유증으로 실명했다.
제주4·3 당시 정방폭포 주변은 울음의 바다
“아버지가 ‘이제 가면 죽을 텐데 우리가 이것을 먹어 무엇하겠느냐’며 복남이에게 주먹밥을 건넸어. 나는 어머니를 붙들고 ‘나도 같이 갈래. 어머니가 죽으면 같이 죽겠다’라고 매달렸지. 어머니는 ‘너희는 괜찮을 테니 내 말을 들으라’며 나한테 주먹밥을 줬어. 그게 마지막이었어.”
김복순(82·서귀포시 서홍동)씨는 69년 전 부모의 마지막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가끔 그 길을 지나다 보면 주먹밥을 쥐여주고 정방폭포 쪽으로 끌려가던 두 분 모습이 어제 일처럼 선해.”
아버지는 입고 있던 미녕(‘무명’의 제주어) 두루마기를 접어 딸에게 건넸다. “어디 가서 몸뻬(일바지)라도 만들어달라고 해서 네가 입어.” 김씨는 “어머니가 가난한 살림에 처음으로 아버지한테 지어준 두루마기였는데, 그걸 죽으러 가던 아버지가 내게 준 것”이라고 했다.
정방폭포 위에 있는 건물들이 제주4·3 당시 전분 공장이 있던 곳이다. 지금은 서복전시관이 들어서 있다.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이날 수용됐던 주민들은 정방폭포 근처로 끌려갔다. 당시 서귀면사무소에는 대대본부(2연대 1대대)가 설치됐고, 현재 서복전시관이 들어선 곳에 있던 전분 공장은 수용소로 사용됐다. 폭포 일대 해안가는 1948년 11월부터 이듬해 1월 사이 수시로 총살형이 집행되던 처형장이었다. 제주4·3 제50주년 학술·문화사업추진위원회가 펴낸 <잃어버린 마을을 찾아서>(1998)를 보면, 김씨 가족이 살았던 동광리 주민 가운데 정방폭포 근처에서 총살된 사람이 45명에 이른다.
밤새 눈길 헤치며 산속으로 피했으나 토벌대에 발각돼
김씨의 부모는 전남 영암 출신이었다. 김씨가 3살 때인 1940년 제주도로 들어왔다. 같은 해 동생이 태어났다. 아버지는 제주에서 공사판 십장으로 일하다가 사고를 당해 지팡이를 짚어야 했다. 4·3 당시 김씨 가족은 중산간 오지인 안덕면 동광리 조수궤에 살았다. 4·3 당시 토벌대가 불을 질러 없어진 무등이왓과는 멀지 않은 마을로, 10여 가구가 모여 살았다. 4남매를 뒀던 김씨 가족은 끼니를 잇기 어려울 만큼 가난했다. 부모님은 4살 위 언니(김복례)를 일찌감치 제주시 한림으로 입양 보냈다. 언니 위에 오빠(김복용·당시 17)가 있었지만 4·3 때 붙들려 광주형무소에 갇혔다가 병으로 죽었다.
2015년 4월11일 서순실 심방이 집전한 서귀포시 서복전시관 안에서 열린 정방폭포 해원상생굿의 모습이다. 제단에는 희생자 246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제주4·3연구소 제공
1948년 11월 중순께 토벌대의 소개령에 이어 마을이 불타자 제주도에 연고가 없던 김씨 가족은 마을 주민들을 따라 자연동굴인 동광리 ‘큰넓궤’로 몸을 피했다. 오빠는 이미 친구들이 있는 무등이왓으로 간 뒤여서 네 식구만 함께 갔다. 김씨는 “굴에 있다가 밤이 되면 어머니와 같이 기어 나와 불탄 집으로 가 불을 피워 밥을 해먹거나 보리밥을 지어 질구덕에 담아와 먹기도 했다”고 말했다.
한동안 동굴에서 생활하던 김씨 가족은 짐을 꾸려 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갔다. 굴이 발각돼 곧 토벌대가 들이닥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던 것이다. 한밤중에 굴을 나온 주민들은 어른 무릎 높이까지 눈이 쌓인 산길을 헤치며 해발 1300m가 넘는 한라산 영실 부근 볼레오름 지역으로 향했다.
“토벌대가 온다니까 주민들을 따라 (산으로) 올라갔어. 하루라도 더 살아보려고 그랬지. 지팡이를 짚은 아버지를 어머니가 부축하고, 우리는 눈더미에 푹푹 빠지면서 그 뒤를 쫓아갔어.”
주민들은 밤새 눈길을 걸어 한라산 깊숙이 들어갔지만, 반나절을 못 넘기고 뒤쫓아온 토벌대에 붙잡혔다. “춥고 피곤해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데 ‘팡팡’ 총소리가 났어. 해가 환하게 뜬 아침이었지. 중문까지 끌려왔는데, 앞뒤에 선 총 든 군인들이 힘이 들어 처지는 사람이 있으면 마구 때렸어.”
동굴에 숨어 있을 때 나이 든 부부가 출산한 아기를 버려두고 오는 장면도 목격했다. “새벽녘에 이불 속에서 보니 한 아주머니가 거적을 들고 밖으로 나가더니 한참 있다가 갈옷에 벌겋게 피가 묻은 채 들어오더라고. 사람들이 ‘애기 낳고 왔구나’라고 수군거리는 걸 들었지. 그 부부에게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았어.”
김복순씨의 자녀들이 어머니의 팔순을 맞아 ‘자랑스러운 어머니상’이라는 이름으로 어머니한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똑똑히 봤다. 정방폭포에 널린 시신들을”
중문으로 끌려간 주민들은 다시 서귀면사무소 인근 수용소로 옮겨졌다. 수용소는 정방폭포 들머리에 있었다. 1996년 제주도의회의 <제주4·3피해보고서>에 나온 김씨 남동생(작고)의 증언은 구체적이다.
“중문에서 하룻밤을 자는데, 어른들을 불러가 머리가 터져 피로 얼룩질 정도로 초주검을 만들었다. (서귀포에) 가서도 어른들을 한 사람씩 불러서 마구 때렸다. 거기서 3일째 되던 때 그들이 하는 말이 아이들을 살릴 사람은 손을 들라고 했다. 아버지가 손을 들었고, 이를 본 사람들이 절반 이상 손을 들었다. 죽어도 다 같이 죽겠다는 사람도 많았다. 이날 아침 마지막 주먹밥을 든 아이들과 어른 86명을 정방폭포 옆에 세우고…나는 똑똑히 봤다. 시체는 정방폭포에 많이 깔려 있었다.” (김복남의 증언)
김씨도 부모의 죽음을 먼발치서 목격했다. “수용소로 쓰는 창고 밖으로 나오니 따뜻하고 좋은데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어. 한 아주머니가 ‘야, 저기 해 뜨는 쪽을 봐. 네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죽이고 있어. 모두 세워놓고 총 쏘고 있어’ 하는 거야. 그때는 나무들이 크지 않고 집들도 없어서 다 보였어. ‘팡팡’
총소리가 나고 사람들이 쓰러지는데, 어머니 아버지가 죽고 있다는 생각에 울기만 했어.”
김씨는 부모 시신을 찾을 생각도 못 했다. 동생과 살아갈 앞날이 더 큰 문제였다. 수용소에서 한달여 정도 생활하다 남동생은 강정마을로, 김씨는 서귀포에서 남의집살이를 하다 한림으로 입양됐다. 김씨는 서귀포에 살 때 천지연에 빨래하러 다녀오다가 돌을 나르는 오빠를 만났지만, 주변 사람들 때문에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지나쳤던 것이 지금도 한으로 남아 있다. 남의집살이를 하며 ‘폭도 새끼’라는 말을 듣던 상황이라 오빠를 보고도 말 한마디 건넬 용기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 뒤 오빠가 광주형무소에서 형기를 다 마칠 무렵 이질에 걸려 숨졌다는 말을 오빠 친구로부터 전해 들었다.
아파트 창가로 내려다보는 김복순씨.
이산가족 찾기로 극적 상봉한 남매
1952년 육지로 떠난 언니를 찾으러 무작정 부산행 배에 몸을 실었다. 15살 때였다. 그 뒤 전국을 헤매며 생활하다 25살 무렵 고향에 내려와 동생을 만났다. 삼남매는 1980년대 초 방송국의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통해 30년만에 극적으로 재회했지만, 지금은 모두 고인이 돼 홀로 남았다.
김씨는 지난 2015년 4월11일 제주민예총이 당시 총살현장인 서복전시관에서 연 4·3해원상생굿에 갔다가 설움을 참지 못 하고 대성통곡했다. “이곳이 어머니 아버지가 죽은 곳이로구나. 저곳이 부모님이 우리한테 주먹밥을 주던 곳이로구나 라는 생각이 계속 맴돌았다”고 했다.
“지금도 밤에는 부모님 생각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 베개가 다 젖을 때도 있어.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당시 기억이 점점 흐려져 가.” 김씨가 아파트 창 너머로 70년 전 가족과 함께 토벌대에 이끌려 내려왔던 곳을 가리켰다.
12살 소녀의 몸에 새겨진 제주4·3의 기억
제주4.3 70주년 기획 동백에 묻다 2부 ③ 1023
강정마을 12살 소녀에 가한 서청 출신 군인들 고문
3살 위 언니는 법환지서로 끌려가 가혹한 고문받아
오빠는 행방불명…어머니는 자매 앞에서 총살돼
“고양이만 보면 그때가 떠올라 지금도 몸이 떨려”
많은 주민이 희생된 강정마을은 해군기지로 고통
12살 때의 고문의 기억을 말하는 정순희씨.
“고팡(소규모 식량 창고)에 있는 곡식을 먹으려고 쥐들이 들락거리잖아. 그걸 본 고양이가 내 등을 밟고 ‘파다닥’하면서 쫓아. 전기도 안 들어오는 고팡에 있는 것도 겁이 났지만, 내 몸 위로 쥐와 고양이가 뛰어다니는 게 더 무서웠어. 혼자 웅크리고 바들바들 떨었지.”
지난 20일 정순희(82)씨를 만나러 제주올레 7코스에 있는 서귀포시 강정마을을 찾았다. 지난 5월에 이어 두번째 방문이었다. 정씨는 마당의 나뭇가지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제주4·3이 일어난 1948년 당시 12살 소녀였던 정씨는 70년이 지난 지금도 공포스런 고문의 기억을 떨쳐내지 못하고 산다. 작은 오빠 정동호(당시 17)를 찾아내라며 집을 포위한 군인들이 작은 언니는 인근 법환지서로, 정씨는 강정초등학교로 끌고 갔다. 정씨는 학교 앞 초가의 고팡에 구금됐다. 10평도 채 되지 않은 초가의 안방에는 서북청년들로 구성된 군인들이 묵고 있었고, 다른 방은 고문실이었다. 이들은 “오빠를 숨겨두고 너희 자매가 음식을 갖다 주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며 정씨에게 모진 고통을 가했다.
12살 소녀에게 물고문·전기고문까지
“두꺼운 끈으로 다리와 허리, 가슴과 팔을 결박하고선 문짝에 다시 묶어. 그리고는 거꾸로 세워놓고 바닥에 콱콱 찍어. 머리가 어떻게 되겠어?” 정씨가 자신의 정수리를 매만지며 “그때 머리가 빠져 여기가 다 벗겨졌다”고 했다. 그들은 주전자에 담아온 물을 정씨의 코와 입으로 마구 들이붓기도 했다.
당시의 기억에 북받친 듯한 정순희씨.
“물을 들이마시다 보면, 이제 죽는구나 싶을 만큼 숨이 막혀. 바른말 하라며 쇠꼬챙이를 이 사이에 집어넣어 강제로 입을 벌리게 해. 그때부터 오랫동안 이 두 개 없이 살았어.” 치아를 보여주며 당시 모습을 재현하는 정씨의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패어 있었다.
“그것도 좋아. 물을 들이켜 배가 차오르면 배를 콱콱 눌러. ‘컥’하고 숨이 넘어가지. 그 다음에는 양동이에 물을 길어다 와락 끼얹어. 그러면 ‘추물락’하며(깜짝 놀라) 깨어났어.”
군인들은 어린 소녀의 몸에 전기고문까지 했다. “그것도 좋아. 댓가지에 쇠붙이를 매달아서 다리를 콱콱 찔렀어. 그러면 ‘찌르륵 찌르륵’했어. 다리에 고름이 좔좔 흘렀지. 가슴과 어깨도 찔러서 부풀어 오르고 말이야.” 정씨는 ‘그것도 좋아’라는 말을 반복했다. 점점 강도를 높인 고문이 이어졌다는 뜻이다.
1948년 겨울, 제주에는 유독 많은 눈이 내렸다. 고문에 늘어진 정씨가 찬바람이 쌩쌩 들어오는 고팡 틈새로 바라본 바깥은 온통 하얀 눈에 덮여 있었다. 추위는 정씨를 더욱 고통스럽게 했다. 고문을 가하는 이들은 추운 겨울에도 정씨를 젖은 홑옷 차림으로 방치했다. 먹을 것이라곤 하루에 한 번씩 던져주는 어린아이 손바닥만 한 밥 한 덩어리가 전부였다. 법환지서에 끌려간 세 살 위 언니도 비슷한 고문을 당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왔지만…
정씨 자매가 끌려간 것은 1948년 11월21일 인근 중문리의 도로변 정비작업에 동원되어 나간 중학생 오빠가 서청 군인들에게 구타당하고 총을 맞은 뒤 행방불명된 직후였다. 정씨는 “오빠와 비슷한 또래 5명이 트럭에 탔는데 한 아이가 이런 차를 처음 타 본다며 웃으니까, 비웃는다고 총 개머리판으로 때렸다고 해. 우리 오빠가 ‘아이들이 웃을 수도 있지 않으냐’고 말리자, 군인 여러 명이 ‘넌 뭐냐’며 오빠를 총 개머리판으로 마구 두드려 팼대. 중문의 한 냇가에 이르러 오빠가 다리 아래로 떨어지니까 군인들이 총알이 다 떨어질 때까지 쏘았다고 해. 그 뒤로는 오빠를 보지 못했지.”
정씨는 오빠와 같이 트럭에 탔던 ‘웃은 아이’가 나중에 찾아와 “나 대신 죽었다”며 얘기해줘 그때 상황을 알게 됐다고 한다.
정순희씨가 당시 밧줄에 묶일 때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정씨는 “주민 한 사람이 우리 자매가 오빠를 숨겨두고 먹을 것을 갖다주고 있다며 거짓 고자질하는 바람에 그 고문을 당했다”고 했다. 정씨는 군인들에게 고자질한 주민과의 대면을 요구했다. 모진 고문에도 오빠의 행방을 이야기하지 않자 군인들은 그 주민을 초가로 불렀다. 정씨는 그에게 달려들어 “오빠가 보고 싶다. 어디 있느냐. 알려달라”고 울부짖었다. 군인들은 “아이가 거짓말하는 것 같지 않다. 사실대로 말하라”며 때리자 그는 ‘잘못 본 것 같다’고 말을 바꿨다고 한다. 얼마 뒤 정씨 자매는 풀려나 집으로 돌아갔지만, 서청 군인들은 이들 자매를 ‘폭도 새끼’라고 손가락질하며 동태를 감시했다. 며칠이 지난 1948년 12월16일, 서청 군인들은 정씨의 어머니와 정씨 자매를 포함한 많은 주민들을 학교 서쪽 매모루동산으로 끌고 갔다. 그때 다가오던 한 군인이 “아이들은 죄가 없다. 너무 하는 거 아니냐”며 정씨 자매의 손을 잡고 나오게 했다. 그렇게 죽음의 문턱에서 생환했다.
고문 후유증에 중단한 해녀 생활
“갇혀 고문받는 동안에도 어머니가 너무 그리웠다”는 정씨에게 어머니(당시 54)와의 인연도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폭도가족이라며 사람들을 세웠어. 똑바로 눈 뜨고 보라면서 총을 쏘는 거야. 우리 눈앞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셨어.” 정씨의 집에서 50여m도 채 떨어지지 않은 매모루동산은 수풀만 무성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정순희씨.
언니의 고통도 컸다. 정씨는 “언니가 나보다 세 살 위여서 나보다 모질게 고문받았다. 나와 말을 맞출까 봐 다른 곳으로 끌려갔던 언니는 나중에 그때 이야기만 하면 누가 잡아갈까 봐 말을 하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언니는 정씨에게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온갖 일을 당했다”고만 했을 뿐,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 뒤 정씨의 삶은 팍팍했다. 20살 때 ‘남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고 살려고’ 군에서 갓 제대한 동네 청년과 결혼해 억척스럽게 살았다. 17살 때 배운 물질로 훗날 집도 지었다. 물질을 해 거둔 해산물을 등에 지고 시장에 내다팔고, 채소, 계란장사 등 안해 본 일이 없다. 그러나 고문의 후유증으로 물에 들어가면 온몸이 쑤셨고, 나오면 경련이 심하게 일어나는 바람에 물질도 오래 하지 못했다. 오른쪽 눈이 보이지 않아 두 차례나 수술했고, 왼쪽 눈도 한 번 수술했다.
강정초등학교 입구에는 기념비 3개가 있다. 그 중 하나는 1964년 2월 주민들이 세운 ‘육군 소령 서봉호 기념비’다. 뒷면에 1948년 학교 건축 때 도움을 줬다고 적혀 있다. 제주도교육청이 펴낸 <학교가 펴낸 우리 고장 이야기>(2014)에는 “당시 제주지구 계엄사령부 중문 파견대장이었던 서봉호 소위가 (교실 신축사업의 어려움을) 알고 부하 사병들을 동원해 경비하게 해 한라산의 나무를 베어올 수 있었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그해 겨울 강정마을에서는 많은 주민이 군인들에게 희생됐다. 강정마을회가 펴낸 <강정 향토지>(1996)에 이름이 나온 희생자만 94명이다. 매모루동산 등 세 곳에서만 59명이 집단학살됐다. 실제 희생자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강정초등학교에 세워진 ‘육군 소령 서봉호 기념비’.
물과 쌀이 좋아 ‘제주에서도 제일 간다’는 뜻의 ‘(제)일 강정’이라고 불렸던 강정마을 주민들은 4·3의 회오리가 몰아친지 6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 제주해군기지 건설로 갈등의 회오리에 휘말렸다.
“밤에 누우면 그놈들이 생각나”
지난 5월26일 정씨는 제주4·3평화재단이 주는 ‘제주4·3어버이상’을 받았다. 그러나 정씨는 4·3 후유장애인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장애 인증을 받기 위해 진단서를 발급받기 위해 병원에 갔으나, 상처가 70년 전 생겼다는 것을 어떻게 인정받을 수 있겠느냐며 발급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밤에 누우면 지금도 어릴 때 한 달 가까이 겪었던 일들이 떠올라. 눈 감으면 쥐와 고양이가 파들락 거리는 것이 생각나고, 그놈들이 생각나. 지금도 고양이가 마당에 어슬렁거리면 섬뜩해서 물을 갖다가 지쳐(끼얹어). 음식물도 밖에 놔두질 않아. 고양이가 올까 봐.”
제주 학생들은 왜 ‘양과자 반대운동’을 벌였나
제주4·3 동백에 묻다 2부 ② 10.8
해방공간 제주 학생들이 전개한 양과자 반대운동
“우리는 거지가 아니다, 양과자 대신 식량을 달라”
친척 집에 20일 숨었다가 어머니 강권에 일본으로
“4·3 완전한 해결은 희생자에 차별이 없어야 한다”
“해방 당시 제주도민들이 얼마나 굶주렸나. 제주도에 먹을 양식이 없었어. 미군정이 식량을 줘야 살아갈 텐데 양과자를 주는 거야. 그래서 초코레토(초콜릿)를 막고 양식을 배급하라고 호소한 거지.”
미군정기인 1947년 초 제주도 내 학생들의 양과자 반대운동은 식량문제와 결부되면서 도민들의 호응 속에 제주도 전역으로 퍼졌다. 당시 양과자 반대운동의 주역 가운데 한 명인 현정선(91·일본 도쿄·제주 함덕리 출신)씨가 양과자 반대운동에 대해 입을 열었다. 그는 당시 20살의 제주농업중학교(농업학교) 3학년(6년제) 학생이었다.
지난 1월 일본 도쿄에서 만난 현씨는 “일제시대 때 농업학교 학생들은 농촌에 공출 감시요원으로 나가 부모 형제들이 피땀 흘려 생산한 곡식을 공출하는 것을 지켜봤다. 식량을 빼앗긴 도민들은 굶주렸다. 그런 경험 때문에 해방 뒤 식량이 아니라 미국의 양과자가 들어오자 반대운동에 나서게 됐다”고 말했다.
“도라꾸(트럭)에 학생 대표 10여명이 탔어. 제주중, 오현중 대표도 있었고, 나는 농업학교 대표로 참가했지. 마을마다 차를 세우고 종이로 만든 마이크를 손에 잡고 연설했어. ‘우리는 거지가 아니다’, ‘양과자를 먹지 말자’, ‘먹을 것을 달라’고 했어.” 망백의 나이에도 현씨는 그때를 생생하게 기억해냈다.
1947년 초의 제주에서 일어난 양과자 반대운동에 대해 말하는 현정선씨.
양과자 문제는 전국적으로 좌·우익 가릴 것 없이 심각한 국내의 경제·사회문제로 인식됐다. 좌·우익 단체들도 1947년 1월 일제히 성명을 내고 ‘양과자를 먹지 말자. 신개화와 함께 들어온 눈깔사탕을 먹다 망해버린 경험을 상기하자’, ‘미국은 조선을 상품 시장화하려고 한다. 양과자는 달콤한 것이지만 우리 민족의 번영과 독립에는 관계가 없다’며 양과자 수입을 반대했다.
학생들로 이뤄진 제주도 내 중등학교연맹은 1947년 2월10일 제주 미군정청이 있는 제주시 관덕정 광장에서 ‘조선의 식민지화는 양과자로부터 막자’는 구호를 내걸고 양과자 수입 반대 시위를 벌였다. 미군 정보보고서에는 “350여명의 학생이 미군정 부대 앞에서 시위를 벌이자 이를 강제 해산해 시내 밖으로 내쫓았다”고 기록돼 있다. 현씨는 “미군정청 앞에서 시위를 벌일 때 선두에 섰다. 미군이 지프에 기관총을 설치해서 위협했다. 기관총을 쏠까 봐 더는 나가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양과자 반대운동이 일어나기 직전인 1946년 하반기에는 제주농업중학교 학생들이 ‘일제 잔재 교육’과 ‘파쇼 교육’에 반대하며 동맹휴업운동을 전개했다. 이와 관련해 현씨는 “1년 위 선배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일제 때의 나쁜 관습이 그대로 이어져 후배들을 많이 때렸다. 그래서 제주시 사라봉에 모여 이른바 ‘사라봉 회의’를 열고 동맹휴업에 들어간 것이다”고 말했다.
<제주신보> 1947년 2월10일치에 보도된 제주지역 학생들의 양과자 반대 시위 기사.
해방을 맞은 현씨와 그의 동료들에게 미군은 ‘해방군’이었다. 미군이 처음으로 제주도에 상륙한 것은 해방된 지 44일만인 1945년 9월28일이었다. 이날 제주농업학교에서 열린 제주도 주둔 일본군 제58군사령부와의 항복조인식에 참가차 미군 제24군단 항복접수팀이 제주에 왔다. 현씨와 동료 학생들은 “해방군이 온다며 성조기를 만들어 환영하러 나갔지만 미군들이 다른 길로 지나가 버렸다”고 떠올렸다.
현씨는 “미군을 해방군으로 봤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이상하다. 우리를 해방해준다고 했는데 그런 움직임이 없지 않은가’는 생각이 들면서 차차 대립하게 됐다”고 했다. 현씨는 양과자 반대운동 때 ‘삐라’(전단)를 붙이다 경찰에 붙잡혀 이른바 ‘구쟁기 작살고문’(잘게 부순 소라껍데기 위에 꿇려 앉혀 무릎을 밟는 고문) 등을 받고 구금되기도 했다. 이어 1947년 3·1절 기념대회에서 경찰의 발포로 6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데 대한 항의로 전개된 3·10 총파업 관련 전단을 불이다 국방경비대원에게 붙잡혔다가 도망쳤다.
현씨가 조천의 친척 집 마루방 밑에 숨어 지낸지 20일째 되던 날 밤, 함덕의 어머니가 수소문 끝에 찾아왔다. “내 뒤를 따라와라. 여기 있으면 죽는다. 일본에 형이 있으니 그곳에 가면 밥은 먹을 수 있다.” 어머니 뒤를 따라 한밤중 길을 나선 현씨는 함덕리의 포구에서 밀항선을 탔다. 어머니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는 일본에서 밀항해 오는 고향 사람들로부터 제주도에서 벌어지는 4·3의 참상을 전해들었다. 현씨의 형과 조카도 4·3 때 희생됐다.
주한미군사령부 주간정보보고서(1947. 2.16)에는 학생들이 미군정 부대 앞에서 시위를 벌여 강제 해산한 뒤 시내 밖으로 내쫓았다고 기록돼 있다.
형이 사는 오사카에서 2년 남짓 머무르던 현씨는 도쿄로 가 일본대학 공학부를 졸업하고 플라스틱 제조업체를 운영했다. “운명이란 게 이상해. 선배 한 분이 도쿄에서 양과자 장사를 하고 있었어. 거기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대학을 다닐 수 있었고, 주인까지 됐거든. ‘우리는 거지가 아니다. 우리에게는 프라이드(자존심)가 있다’고 하던 내가 양과자로 먹고 산 거지. 허허.”
한밤 중 몰래 밀항선을 탔던 현씨가 다시 고향 땅을 밟은 것은 54년만인 2001년이었다. 4·3항쟁 60주년 행사가 열린 2008년에도 제주를 찾아 제주 4·3평화공원의 위패봉안소를 둘러봤다.
“위패봉안소에 가보니 어떤 이는 희생자로 인정해 위패를 모시고, 어떤 이는 모시지 않았어. 4·3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자면서 희생자에 차별을 둬서는 안돼. 모두 희생자로 올려야 해.” 현씨의 소원은 이뤄질까.
제주4·3의 도화선…1947년 3·1사건의 목격자들
제주4·3 70주년 기획, 동백에 묻다 2부 ①] 9. 23
제주북교 운동장엔 발 디딜 틈 없을 정도로 인파 넘쳐
항의 군중에 위협 느낀 군정 경찰 발포로 6명 사망
미군정은 책임자 처벌과 진상규명 요구에 강경 대응 일관
희생자 유족 “4·3, 용서는 하되 잊지 말아야 인간의 도리”
제주시 옛 식산은행 터에서 바라본 관덕정(왼쪽). 오른쪽의 제주목관아터에 제1구경찰서와 망루가 있었다.
1947년 3월1일 제주시 관덕정 광장을 뒤흔든 경찰의 발포는 제주4·3으로 가는 도화선이 됐다. 이날 경찰의 발포로 6명이 숨지고 6명이 다치는 이른바 ‘3·1사건’이 일어났다. 희생자 가운데는 초등학생부터 젖먹이를 안은 20대 부녀자도 있었다. 그러나 경찰은 진상조사는커녕 강경대응에 나서면서 제주사회는 혼돈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계기가 됐다. 이들 희생자는 제주4·3의 첫 희생자들이다. 당시의 3·1사건 현장에 있던 체험자와 유족들의 기억을 통해 71년 전의 사건을 재구성했다.
이날 오전, 제주도민들은 ‘제28주년 3·1기념 제주도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제주시 북초등학교로 몰려들었다. 제주시 동쪽으로는 조천, 서쪽으로는 애월 주민들까지 걸어서 학교로 향했다. 대회장은 인파로 넘쳐 각종 기록에는 2만5천~3만여명이 모인 것으로 추정했다. 오라리의 강상순(83)씨와 강씨의 동생 강상돈(80)씨도 학교로 갔다. 20일 만난 강상돈씨는 “그때 같은 마을 허두용(당시 16) 형님을 포함해서 4~5명이 같이 갔다. 이미 운동장에는 사람이 가득 차 있었다. 두용 형님이 ‘너희들은 안에 들어가면 밟혀 죽을 수 있다’면서 밖에 있으라고 했다. 울타리에 서서 인파를 구경하다가 흩어졌다”고 말했다. 강상순씨는 “관덕정 쪽으로 나와 구경하는데 총소리가 나더니 바로 옆에 서 있던 두용 형님이 쓰러졌다. 총소리에 놀란 사람들이 흩어졌다”고 말했다. 허두용은 3·1사건 희생자 가운데 가장 어린 나이였다.
3·1사건 최연소 희생자 허두용의 묘비에는 3·1절 기념식에 참석 뒤 귀가하다가 경찰의 발포로 숨졌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날 오전 11시부터 시작한 3·1절 기념대회는 제주의 좌파단체들이 주도했으며, 참가자들은 집회가 끝난 뒤 거리시위에 들어갔다. 그러나 참가자들은 좌파만이 아니라 일반인과 학생들도 많았다. 오후 2시45분께 관덕정 앞 광장에서 말을 탄 기마경관이 바로 옆 경찰서로 가던 중 6살가량의 어린이가 말굽에 채였다. 그러나 경찰은 이를 몰랐는지 그대로 가려 했고, 주변에 있던 참가자들이 이에 항의하며 쫓아가자 당황한 경찰들이 경찰서를 습격하는 것으로 알고 일제히 발포했다.
이 발포로 허두용(당시 16·오라리·제주북교6), 박재옥(21·여·도두리), 양무봉(50·오라리), 오영수(34·건입리), 김태진(40·도남리), 송덕윤(49·도남리) 등 6명이 숨지고, 6명이 다쳤다. 희생자들은 3·1절 기념대회를 구경하러 간 이들이었다.
‘미군 부대가 군중 해산을 지원했다’는 제24군단사령부의 1947년 3월3일자 일일정보보고서 내용.
3·1사건 현장에는 당시 제주도 주둔 미군 제59군정중대가 집회 참가자들의 해산을 지원했다. 당시 제주북교 5학년 양유길(83·여)씨는 “3·1절 기념대회가 있던 북교에서 마지막으로 나오는데 총소리가 나고 난리가 났다. 미군이 하늘로 공포를 쏘고 식산은행 앞에서 어린아이를 안은 아줌마(박재옥)가 쓰러지는 것을 숨어서 지켜봤다”고 말했다. 이날의 미군 활동은 주한미군사령부의 일일정보보고서(1947년 3월3일)에 기록됐다. 박재옥은 도립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몇 시간 뒤 숨졌다. 총알은 옆구리에서 왼쪽 둔부 쪽으로 관통했다.
3·1사건 바로 전날 일본에서 가족을 데리러 온 오영수는 관덕정으로 갔다가 주검으로 돌아왔다. 그의 딸 오추자(80·경기)씨는 “동네 어른이 아버지한테 ‘관덕정 마당에서 행사가 있으니까 같이 가자'라는 말을 듣고 오후 1시께 점심을 먹고 나간 지 얼마 없다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렸다”고 기억했다.
3·1사건 희생자 오영수의 제적등본에는 ‘관덕정 앞에서 사망’했다는 문구가 적혀있다.
오씨는 “어머니가 ‘죽으려고 이렇게 왔느냐’고 통곡했던 게 기억난다. 그 다음달 동생이 유복자로 태어났지만 앓다가 4살이 되는 해 죽었다. 남동생도 병으로 죽었다”고 말했다. 오씨는 “바닷가 동네에 살았던 어머니가 잠도 자지 않은 채 바다만 바라보며 멍하게 앉아 있던 모습이 잊히질 않는다”고 말했다.
송덕윤의 아들 송영호(83)씨는 당시 남초등학교 4학년으로, 3·1절 기념대회에 참가했다. 북교에서 산지다리, 공덕공원을 거쳐 동문통으로 행진하던 길에 총소리를 들었다. 송씨는 “총소리가 나자 남문통으로 빠져 학교를 돌아왔다가 집으로 가는데 우리 형님과 동네 분들을 만났다. 그때에야 아버지가 총에 맞아 도립병원에 계시다고 해서 같이 갔다”고 말했다
송씨는 71년이 지났지만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달려가서 보니 아버님이 12촌 형님뻘 되는 분의 손을 잡고 ‘살려달라’고 하고 애원하고 있었어. 물을 찾았지만 물을 줄 수가 없었지. 결국 돌아가셔서 도남 청년들이 들것으로 옮겨와 장례를 치렀어.” 송씨는 “총알이 팔에서 허리 쪽으로 관통했다. 당시 경찰서에 망루가 있었는데 망루에서 표적 사격한 것”이라고 말했다. 송씨는 9살 위 형님이 이듬해 도남마을이 불탈 때 행방불명되고, 3살 위 누님도 병으로 숨진 뒤 신산한 삶을 살아야 했다.
3·1사건 당시 아버지를 잃은 송영호씨가 3·1사건을 이야기하고 있다.
“너나 할 것 없이 우리 세대는 정말 힘든 시대를 살았다”는 송씨는 4·3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세월이 흘러서 이제는 서로가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아야 해. 자손 이전에 인간의 도리로서 절대로 4·3을 잊어서는 안 돼.”
3·1사건 이후 미군정은 책임자 처벌은커녕 ‘정당방위’라고 강변했다. 이에 항의해 제주도 내 좌·우파단체들도 참여하는 3·10 민관총파업이 일어났고, 미군정은 강경대응으로 일관했다. 1948년 4월3일 무장봉기가 일어날 때까지 제주도민 2500여명이 무차별 검거됐다.
글·사진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Sailing (Rod Stew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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