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로소득의 시대, 부자들의 정체>, 앤드류 세이어 지음, 전강수 옮김, 여문책 펴냄.
지은이: 앤드류 세이어 영국의 저명한 사회학자인 그는 스스로 사회이론·정치경제학 교수라고 말해왔다. 도덕경제에 관해 오랫동안 탐구해왔으며, 그 외에도 사회과학 방법, 윤리, 불평등, 계급 등 다양한 주제에 관해 중요한 연구 성과를 다수 남겼다. 2005년에 출간한 『계급의 도덕적 중요성The Moral Significance of Class』(Cambridge University Press)은 사람들이 계급 불평등을 경험하면서 어떤 윤리적 태도를 취하게 되는지를 분석한 역작이다. 그는 윤리와 도덕의 관점에서 사회를 분석하는 연구를 더 진행해 2011년에는 『어떤 일이 사람들에게 중요한 이유: 사회과학, 가치, 윤리적 삶Why Things Matter to People: Social Science, Values and Ethical Life』(Cambridge University Press)을 출간했다. 이는 오늘날 사회과학이 왜 사회현상에 대한 사람들의 규범적 평가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지를 탐구한 뛰어난 책이다. 여기서 그가 주목한 원인은 가치란 순전히 주관적이거나 관습적이며 이성의 범위를 넘어선다고 여기는 근대주의적 세계관이었다.
『불로소득 시대 부자들의 정체』는 지난 수십 년간의 불평등 확대가 부의 추출을 통한 불로소득 취득에서 비롯됨을 밝혀 현대 자본주의 분석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전강수는 경제학자다. 단, 시장만능주의를 신봉하며 낙수효과를 외치는 여느 경제학자와는 결이 다르다. 그렇다고 시장을 부정하고 정부의 무조건적 개입만을 주장하는 쪽도 아니다. 시장을 시장답게, 자본주의를 자본주의답게 만들어 땀 흘려 일하는 노동자·농민과 열심히 사업하는 기업가·자영업자가 노력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도록 해야만 경제정의와 효율이 달성된다고 믿는다. 시장을 시장답게, 자본주의를 자본주의답게 만들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토지제도를 정의롭게 만들어 토지 불로소득을 차단?환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다.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으며,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실련 토지주택위원장, 토지+자유연구소 소장, 지식인선언네트워크 운영위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1987년부터 2022년까지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가르쳤다
목차
그림 목록 | 옮긴이 서문 | 추천사
1장 도입부
1부 부의 추출에 대한 안내
2장 위험한 세 단어: ‘벌이’, ‘투자’, ‘부’
3장 노력소득과 불로소득
4장 지대, 무엇에 대한 대가인가?
5장 이자, 무엇에 대한 대가인가?: 고리대에 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6장 생산에서 나오는 이윤: 자본가와 불로소득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7장 고양이 가죽을 벗기는 다른 방법
8장 부자는 일자리를 창출하지 않는가? 그 외 다른 반론들
2부 부자들을 제자리에 두기: 무엇이 사람들의 수입을 결정할까
9장 우리의 부는 어디서 나올까? 공유부의 중요성
10장 그러니까 무엇이 보수를 결정하는가?
11장 평평한 운동장의 신화
3부 부자는 어떻게 더 부유해지는가: 위기 발발에서 그들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12장 위기의 뿌리
13장 핵심 승자들
14장 요약: 경제위기와 불로소득자의 귀환
4부 부자들을 위한 부자들의 지배
15장 부자들의 지배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16장 숨기기
17장 법의 부패: 법 위에 군림하든지 아니면 법을 만들든지
18장 자선사업은 어떤가?
19장 계급: 전쟁을 말하지 말라!
5부 나쁘게 벌어서 나쁘게 쓴다: 소비에서 이산화탄소로
20장 부자들의 지출
21장 반전: 지구 온난화가 모든 것을 압도한다
22장 ·결론: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후기 | 감사의 말 | 미주와 출처 | 찾아보기
불로소득’이라는 주제로 현대 자본주의 분석에 새 지평을 연 역작!
◆ 부자들의 부는 얼마나 정당한가?
많은 사람이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사실이 있다. 슈퍼리치(억만장자)를 포함한 부자들은 그럴 만한 능력과 자질을 갖고 있으며, 일반인은 상상할 수도 없는 막대한 부를 누리면서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나아가 솔직히 누구나 부자가 되고 싶어 안달인 게 현실이라고.
하지만 정말 그럴까? 영국의 저명한 사회학자인 앤드류 세이어는 이 물음에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영국은 산업혁명의 발상지이자 근대 자본주의의 아버지, 특히 신자유주의의 어머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나라다. 그 나라에서 한창 혈기왕성한 시기에 흔히 ‘불만의 겨울’이라고 불리는 1970년대를 보낸 세이어는 불같이 일어난 노조의 파업과 극심한 노조 탄압, 대처 행정부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의 탄생을 지켜보았다. 세이어야말로 현대 자본주의의 심장부에서 그 굴곡을 온몸으로 겪은 인물이다.
그런 그가 『불로소득 시대 부자들의 정체』라는 책을 통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하다. ‘글로벌’한 대다수 부자는 ‘불의의 정치’를 등에 업고 어마어마한 ‘불로소득’을 통해 지금의 부를 빨아들였으며 이 지구는 물론 민주주의까지 위험에 빠뜨리는 주범이므로 절대 그들을 부러워하면 안 될 뿐 아니라 더는 그들을 지원해서도 안 된다는 것!
“부자를 부러워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들의 과도한 소비를 부러워하면 모방할 수밖에 없다. 또 다른 사람들이 창출한 부를 추출하기 위해 자산을 지배하는 것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불의할 뿐 아니라 자본주의의 기능을 떨어뜨린다.” (451쪽)
“부자가 더 부유해진 것은, 상위 계층이 더 진취적이고 역동적으로 부를 창출했기 때문일까? 오늘날의 자본가들(또는 기업가라고 해도 좋다. 그들은 그렇게 불리길 원한다)은 전후 호황기에 그들보다 적게 받고 일했던 선배들보다 경제발전을 훨씬 더 잘 이끌고 있을까? 경제 통계를 보면 그 반대가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다. 경제성장률은 전후 호황기 때보다 낮다. 부자들이 부유해진 것은 빠른 경제성장의 효과가 아니라 경제성장이 둔화했음에도 더 많은 몫을 가져가기 때문이다. 도대체 그들은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 부자들은 국민총소득에서 더 많은 몫을 가져갈 뿐 아니라 최고세율의 현격한 하락 덕분에 가져간 몫을 더 많이 지킬 수 있게 되었다.” (26~27쪽)
요즘 같은 금융화 시대에 너도나도 ‘투자’라는 ‘마술적 단어’ 앞에서 대중으로 하여금 부동산이냐 주식이냐 비트코인이냐를 놓고 고민하게 만드는 현실은 확실히 비정상적일 뿐 아니라 개인의 시야를 ‘돈/부’에 묶어두는 신자유주의의 교묘한 술책이다. 지금 우리는 날마다 이 폐해를 온몸으로 겪고 있다. “경제권력은 정치권력”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세이어는 우리가 매우 심각한 문제에 봉착해 있다고 우려의 목소리를 높인다. 경제위기는 물론이고 기후위기까지 우리를 옥죄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이중위기’를 과연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 워싱턴도 아니고 모스크바도 아니다!
세이어는 책의 앞부분에서 분명히 밝힌다. 자신은 현대 자본주의의 첨단을 달리는 미국이나 구소련의 공산주의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는다고(여기서 ‘기계적 중도’를 상상하면 곤란하다). “돈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우리의 삶을 돈 모으는 데 바치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설파한 아리스토텔레스부터 “불로소득자의 안락사”라는 명제를 던진 케인스까지 비판적 학자들의 저작에 기대 자신의 논의를 전개하겠다고. 그러므로 부자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인 이 책의 저자 세이어가 정치적으로 어느 편인지를 따지는 일은 부질없는 짓이다. 그는 영국의 이름난 학자로서가 아니라 지구라는 하나뿐인 행성에서 사는 ‘인류’의 한 구성원으로서 현재뿐 아니라 미래세대를 위해 우리가 무엇을 알아야 하고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를 열정적으로 안내해주는 ‘가이드’ 역할을 자처한 것이므로.
◆ 신자유주의가 감추고 있는 더러운 비밀
주택 소유자들은 자기 집을 단순한 주거 공간이 아닌 ‘투자’로 간주하도록 권유받고 있다. 그들은 심지어 모기지 부채를 ‘투자’로 여기기까지 한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자기 힘으로 불로소득자가 되기 위해 밟아야 하는 한 단계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도 집값이 오를 것이라고 기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중고 자동차나 중고 자전거를 살 때는 원래 가격보다 낮은 가격을 낼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는가? 왜 주택은 그렇지 않을까? 혹자는 집값 상승 덕분에 보통의 주택 소유자가 국가의 경제성장에 동참할 수 있다는 말로 이를 정당화하려고 했다. 가끔은 그랬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는 필요에 기반을 둔 이전지출처럼 민주적 의사결정에 따라 이뤄진 잉여의 분배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생산한 부를 일부 계층이 사유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156쪽)
많은 사람이 집값 인플레이션 덕에 불로소득을 얻었다는 점에 비추어, 피고용인이면서 동시에 영세 불로소득자인 사람들이 많다고 해야 한다. 그들은 불로소득 게임에서 단역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들이 소극적이기는 하지만 대대적으로 이 게임에 참여한다는 사실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중요하다. ‘평범한’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지대 추구를 소득원으로 삼으며, 부자들에게 주로 혜택이 돌아가는 것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만들어지고, 부유한 불로소득자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착각이 생기는 것은 그 때문이다. 신문의 경제면은 지대 추구를 신중하고 현명한 행동으로 여기도록 평범한 사람들을 부추긴다. 마치 신중함과 현명함만이 불로소득을 정당화하는 듯 말이다. 게다가 많은 사람의 재산이 탐욕스러운 금융기관의 전략에 묶여버린다는 점도 중요하다. 금융기관들은 평범한 사람들의 저축을 이용하고 수수료와 비용을 챙기면서도 그들의 연금을 보호하지는 않는다. (180쪽)
세이어는 이와 같은 금융과 신자유주의의 부상으로 생산적 자본에서 불로소득자에게로 권력이 크게 이동했다고 밝힌다. 또한 1980년대 이래 신자유주의 정부가 공식적으로는 물가 안정을 바라는 소비자의 이해를 지원함으로써 은밀하게 불로소득자를 도왔는데, 바로 이 자산 인플레이션이 신자유주의가 감추고 있는 더러운 비밀이라고 폭로한다. 자산 인플레이션은 자산이 없어서 노력소득에 의존해야만 하는 사람들에게서 자산을 소유하고 그것으로 불로소득을 얻는 사람들에게로 부를 재분배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끝내 “지갑이 투표용지를 이긴다.”
◆ 경제가 사람을 지원해야지, 그 반대는 아니다
코로나 사태 이후 전 세계는 경제적으로 극심한 불황에 직면했다. 이때 달러라는 막강한 뒷배를 가진 미국은 무한정 돈을 풀어 경기를 부양했고, 그 영향으로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야기되자 대출금리를 가파르게 높이며 인플레이션을 잡겠다고 선언했다. 이 와중에 다른 나라들은 황새 쫓아가기 바쁜 뱁새들이 되어 여전히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런데 전 세계의 슈퍼리치들은 이 위기를 활용해 ‘공유부’에서 더 많은 부를 빨아들이고 있다!
부자들이 부를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추출한다extract고 주장하면, 반드시 반론이 제기된다. 그와 같은 반론에 대답하는 것이 이 책의 최대 과제이며, 따라서 책의 상당 부분은 그런 내용으로 채워진다. 물론 다른 반론에 대한 답도 들어 있다. 책을 읽어가다 보면, 이 책은 질투의 정치가 아니라 불의의 정치the politics of injustice를 다룬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 사실 질투의 정치라는 말은 논리와 증거를 회피하고자 하는 자들이 입에 올리는 값싼 비방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부자들을 시기하지 않는다. 사실 나는 그런 시기심을 완전히 엉터리라고 여긴다. 하지만 나는 부자들에게 다른 사람들이 생산한 부를 추출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사회를 지배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불의한 체제에 대해서는 분노한다.
이 체제는 불의할 뿐 아니라 심각하게 고장 나 있고 비효율적이다. 그 결과 극심한 생존경쟁이 벌어지는 비인간적인 사회가 만들어진다. (19~20쪽)
세이어는 작금의 불평등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꼼꼼하게 짚어준다. “상위 1퍼센트와 99퍼센트 간의 불평등보다는 상위 1퍼센트 내의 불평등이 훨씬 더 심하다.” 그리고 “자산(개인이 축적한 재산에서 부채를 뺀 값)의 불평등은 소득 불평등보다 훨씬 더 심하다.” 한마디로 자산 분배는 소득 분배보다 훨씬 불평등하다! 이 책의 번역자 전강수 교수는 세이어가 불평등 확대의 핵심을 정확하게 짚어준 공로가 크다며 다음과 같이 평한다.
1980년대 이후 불평등이 심화했음은 토마 피케티의 방대한 연구로 밝혀졌지만, 그것이 주로 부자들의 불로소득 취득에 따른 것임을 논증한 것은 세이어가 처음이다. 이 책이 출간된 다음 현대 자본주의를 불로소득의 관점에서 분석한 저작들이 이어졌다. 가이 스탠딩Guy Standing의 『불로소득 자본주의』(여문책, 2019), 마리아나 마추카토의 『가치의 모든 것』(민음사, 2020), 브렛 크리스토퍼스의 『불로소득 자본주의 시대』(여문책, 2024)가 대표적이다. 바야흐로 ‘불로소득 자본주의론’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이를 현대 자본주의 분석에 새 지평이 열린 것으로 평가하고 싶다. (7~8쪽)
거의 10년에 한 번 꼴로 찾아오는 ‘경제위기’는 경제적 불의의 산물이기도 하다. 지대, 이자, 부채, 신용, 부동산, 주식・채권 등의 금융상품, 분업, 민영화, 조세회피와 탈세, 불로소득과 노력소득, 시장 자유화, 자본 이동, 노동시간과 최저임금/최고임금, 지속 가능한 에너지 시스템, 단순한 ‘혜택’이 아닌 ‘필요’를 기반으로 한 복지 등의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를 재건해야 한다.
거대 기업이 파산하는 경제위기 때마다 구제금융이라는 단어가 뉴스를 독차지하는 와중에도 CEO와 임원들이 막대한 보너스를 챙기는 현실은 크게 잘못되었다. 다수 국민의 세금으로 극히 일부의 경제(경제인)를 떠받치기보다 “코로나 때보다 더 힘들다”고 아우성치는 서민이 많은 지금 같은 때는 경제가 사람을 지원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시장은 만병통치약도 아니고 모든 악의 근원도 아니다. 신자유주의라는 정치체제는 1퍼센트를 위해 99퍼센트를 희생시킴으로써 불로소득자의 이해를 옹호한다. 그러므로 이 체제는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으며, 이제 우리는 그동안 주류 경제학이 주입해온 ‘능력주의 사회’라는 신화에서 벗어나 보수・분업・자산・인종・젠더 등의 불평등을 극복하고 근본적으로 다른 삶의 방식을 모색해야 한다.
◆ 우리는 왜 부자들을 감당할 수 없는가?: ‘녹색’ 관점의 자본주의 비
세이어는 우리가 지금 같은 삶을 지속하려면 지구가 세 개는 필요하며, 전 세계 모든 사람이 미국식 삶을 살려면 지구 같은 행성이 다섯 개는 있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한마디로 지금의 자본주의는 지속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대로 살아갈 수는 없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논점이다. 우리가 더 평등하고 공정하며 환경적으로 지속 가능한 사회를 만들고자 한다면, 부자들뿐만 아니라 불평등과 무한한 복합성장에 토대를 둔 경제체제도 감당할 수 없다. 자본주의가 지속 가능하다고 여기는 ‘녹색성장’의 꿈은 평화를 위해 총을 팔아먹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끝없는 탐욕이 아니라 충분함을 토대로 작동하는 경제가 필요하다. 사회가 평등하면 평등할수록 모든 사람이 자신의 역량을 발전시키고 상호 존중과 공공선・연대・배려 등의 감각을 개발할 수 있으므로, 그런 사회는 그 자체로 바람직하다. 그러나 우리가 극심한 생존경쟁에서 매우 불평등한 지위들을 놓고 경쟁해야만 하는 압박을 계속 받는다면,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일부의 사람들이 지구가 감당할 수 있는 한도보다 더 많이 소비하는 자유를 누린다면, 다른 사람들이 좀 더 검소한 소비 수준을 받아들이리라 기대할 수도 없다. (488쪽)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부자들을 지원하는 일을 멈추고 새로운 ‘경제정의’를 확립해야 한다!
책속에서
긴축정책의 부담은 최하층에 가장 무겁게 돌아가는 반면, 상위 10퍼센트, 특히 상위 1퍼센트는 오히려 보호받는다. 일반적으로 위기에 책임이 적은 사람일수록 소득 대비 희생은 더 크다. 청년 실업도 급증하고 있다. (중략) 이는 청년들의 인생이 터무니없이 낭비되고 있음을 뜻한다. 많은 나라에서 청년층은 자기 부모 세대가 경험한 번영을 누리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우리 시대의 경제문제에 대한 해답을 가장 소중한 자산인 사람을 더 낭비하는 데서 찾고 있으니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P.17~18
1930년대 이후 한동안 부자에게 적용하는 세율은 치솟았는데, 영국・미국・프랑스・독일에서는 무려 90퍼센트까지 올라갔다. 부자에게 적용하는 세율이 50퍼센트 이하로 떨어진 지금, 이는 믿기지 않는 사실이다. 많은 나라의 정부들은 이를 더 낮추려고 계속 노력하고 있다. 최고세율이 높았을 때 하늘은 무너지지 않았다. 그런 나라들은 오히려 호황을 누렸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부자에게 과세하면 성장이 저해된다는 말을 늘 들으며 살고 있다. / 우리는 지금 1920년대, 1930년대의 대공황 이래 가장 깊은 경기침체를 경험하고 있다. 1930년대에는 미국이 뉴딜정책을 펼치며 했던 것처럼 부자들에게 부과되는 세금을 높이고 금융을 엄격하게 규제하는 방식의 대응이 이뤄졌던 반면, 지금은 대서양 양쪽 어디에서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부자들은 교묘하게 그런 일을 피했고, 금융 부문은 아무렇지 않게 더 큰 피해를 안겨주고 있다. P.27~28
우리가 부자들을 감당할 수 없는 이유를 밝히려면, 그들이 얼마나 부유한지, 어떻게 돈을 벌었으며 어떻게 돈을 쓰는지를 묘사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 부자들과 금융위기를 다루는 많은 책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해야만 한다. 그것은 바로 부자들이 가진 부의 정당성legitimacy을 따지는 일이다. 하지만 부자들이 얼마나 부유한지 인식하는 것도 중요하다. 나는 일반인이 소화하기 어려운 통계 수치들로 독자들을 괴롭히고 싶지 않다. 하지만 몇 가지 통계는 제시할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불평등한지, 부자들이 얼마나 부유한지 인지하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P.29
경제조직의 기본 특징에 대한 도덕적 정당화를 평가하는 것이 나의 목적이다. 이 책은 받을 수 있는 것과 받을 자격(또는 필요)이 있는 것 간에 엄청난 격차가 생겼다는 사실을 중시한다. 받을 자격의 문제를 생각할 때, 얼마나 받아야 하는지는 정하기 어려운 문제다. 그러나 부자들의 경우 실제로 받는 것이 그들이 누리는 권력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사실만큼은 쉽게 입증할 수 있다. 부자들이 얻는 소득은 대부분 토지와 화폐 등의 자산을 운용해서 다른 사람들이 생산한 부를 뽑아낸 것이다. 그런 소득은 불로소득이다. 더욱이 지난 35년 동안 금융의 경제 지배, 곧 ‘금융화’가 강화되면서 부자들은 불로소득의 원천을 확장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예전보다 훨씬 더 부유해졌다. / 이 책은 화폐와 재화뿐만 아니라 경제생활에서 쓰이는 언어도 다룬다. 근대 경제의 역사는 경제적 실천을 어떻게 표현하고 범주화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벌어진 투쟁의 역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P.44
투자는 분명히 좋은 것이다. (중략) 우리는 사람들을 훈련하고, 더 좋은 인프라와 통신망을 만들고, 기술을 개선하는 등 미래를 위해 투자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투자는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이나 기술의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자원의 제공을 수반한다. 그러나 상찬의 의미를 담고 있는 이 용어는 부의 원천을 위장한다는 점에서 경제용어 중 가장 위험하고 애매한 단어다. (중략) 투자는 첫 번째 의미로는 부를 창출하는 행위를 뜻하지만, 두 번째 의미로는 부를 추출하는 행위를 뜻한다. 개인이나 기관이 진정한 투자를 위해 돈을 대는지, 아니면 단지 ‘투자자’에게 자금을 제공하는 수단에 돈을 대는지를 구분하지 않는 것은 자본주의의 비합리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관행이다. 우리가 투자라는 단어를 쓰는 방식 때문에, 이 사실은 드러나지 않고 은폐된다.P.65~67
지난 30년 사이에 신자유주의가 부상하면서, 젊은이들은 자신을 시장에서 거래되어야만 하는 존재로 인식하고 고용주를 설득하기 위해 취업용 이력서를 잘 작성하라는 충고를 받게 되었다. 한편, 교육기관은 학생들이 노동시장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게 되었다. 고용주에 대한 노동자의 의존성이 문화적으로 강화된 것이다.P.134
케인스의 용어로 말하자면, 부자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한계소비성향’이 낮다. 따라서 다른 조건이 동일한 경우, 부자들에게 소득을 재분배하면 총수요는 감소하고, 저소득층에게 소득을 재분배하면 총수요는 증가한다. / 이는 ‘낙수효과’론이 틀렸음을 뜻한다. 물론 부자들은 하인을 고용하고 회계사, 세무사, 그리고 사치심을 충족시키는 서비스에 대한 수요를 창출하지만, 거기서 생기는 일자리는 소비성향이 아주 높은 서민층에게 소득이 재분배되는 경우보다 훨씬 적다. 부자들에게서 하위 계층으로 돈이 흘러내리도록 하는 방법 가운데 최선은 부자들에게 세금을 부과하거나, 애초에 불로소득을 추출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P.184
주류 경제학자와 비즈니스 미디어가 통상 써먹는 수법은 자본주의적 배분 효율성이 초역사적인 첫 번째 버전과 다르지 않다고 믿게끔 만드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배분 효율성은 부의 창출을 돕는 한에서만 유익하다고 말할 수 있다. 단, 그 경우에도 우리는 누구에게 이익이 돌아가야 할지 결정해야 한다. / 민간임대에 대한 일부 옹호론의 논리도 이와 비슷하다. 지대가 토지와 부동산을 최선 사용자에게 배분함으로써 배급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도시에서 가장 인기 있는 토지는 접근성이 가장 좋은 중심부에 있으므로, 가장 많이 필요로 하고 가장 여유가 있는 사용자가 최고의 입찰가를 제시할 것이며, 지주들은 그들에게 부동산을 임대할 것이다. 이 논리는 희소한 도심 토지가 ‘최고・최선의 용도’에 배분된다는 결론을 내리기 때문에 얼핏 보면 합리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부자들은 필요의 상대적 강도나 토지 용도에 상관없이 가난한 사람들보다 더 비싼 가격을 낼 수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이것은 교묘히 속이는 말임을 알 수 있다.P.200~201
내가 지금까지 펼친 주요 주장은 자본주의 역사의 모든 단계에 적용되며,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는 자본주의가 호황인지 위기인지와는 관계가 없다. 자산 지배에 토대를 둔 불로소득은 늘 문제였지만, 지난 40년 동안은 두드러지게 증가했다. 금융화는 20세기 중반 밀려났던 불로소득자가 설욕하는 수단이었다. 이들은 수동적이지 않고, 지대 추구를 통해 경제체제에서 부를 추출하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는 능동적인 불로소득자(이른바 일하는 부자들의 일부)였다. 금융화는 부의 창출이 부의 추출로 전환되고 그와 더불어 부가 부자들에게 이동하게 된 원인이자 결과였다. 위기를 설명할 때,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쉽게 간과한다.P.267~268
금융화한 자본주의는 생산이 아니라 구매와 판매를 우선시하는 주류 경제학의 환상을 현실화한 것으로 보인다. 주류 경제학은 마치 대출하고 기존 자산과 미래 자산을 사고팔기만 하면 부를 무한히 창출할 수 있는 것처럼 여긴다. 또 계속해서 수익성이 더 높은 수입원을 찾아가는 것이 재화와 서비스에 대한 실물투자의 대체물이 될 수 있으며, 불로소득을 노리는 주주들의 압력과 과도하게 활성화한 기업 지배권 시장이 경제발전을 보장하는 것처럼 여기기도 한다. 기업 지배권 시장이 극도로 활성화되면 기업들이 더 나은 제품을 더 효율적으로 생산하게 될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너무도 순진한 생각이다..315
미국에서 주류 경제학을 선도하던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그 이론의 진정한 신봉자로서 자신들의 학계 자격증을 상징자본으로 활용해 대학교수 자리, 대형 금융기관의 일자리, 규제 당국자와 정부 자문의 직위 사이를 오가며 활동했다. (중략) 스스로 금융 시스템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주류 경제학자들이 그 시스템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P.392
변화를 가져오려면 많은 전선에 행동이 필요하다. 우리가 진보하고자 할 때, 필요한(그러나 충분하지는 않은) 조치는 부자들에게 책임을 묻고, 그들의 부가 대부분 불로소득에서 생겼음을 폭로하고, 그들의 권력이 부당하고 비민주적이며 착취적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사실을 널리 이해시키고, ‘부 창출자’나 정상적인 사업을 운운하는 헛소리를 버리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개선의 기회는 없다.
아울러 자산을 기반으로 하는 불로소득을 차단하고, 필요를 기반으로 하는 복지를 개선하며, 임금 불평등을 줄이고, 노동자와 사용자를 경제조직의 핵심 이해관계자로 만들며, 정치를 민주화하고, 지속 가능한 에너지원과 생활방식 쪽으로 투자를 전환하면, 우리와 다음 세대의 삶은 훨씬 나아질 것이다.P.523
富는 富를 낳고…불로소득은 불평등을 낳는다
토지 등 존재하는 자산만으로
생산없이도 화폐 얻는 사람들
1970년대 경제 글로벌화 이후
자본주의 금융화 심각해져
부자들의 과소비·자원 낭비
기후변화까지 가져와 '비판'
0.01 대 99.99, 불로소득 이대로 두면 자본주의가 망한다
"우리는 왜 부자들을 감당할 수 없는가?(Why we can't afford the rich?)"
경제적 불평등 문제는 새삼스러운 이슈는 아니지만, 이 불평등을 바라보는 관점은 돌아볼 이유가 충분하다. 돈이 돈을 낳는 금융자본주의 시대, 부자들은 '불로소득'을 통해 재산을 눈덩이처럼 불려가고 있다. 99대 1의 격차만이 아니라 상위 1%안에서 0.01%대 0.99%의 격차도 갈수록 크게 벌어지고 있다.
<불로소득 시대 부자들의 정체 : 우리는 왜 부자들을 감당할 수 없는가?>를 쓴 영국의 사회학자 앤드류 세이어는 부자들이 부를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추출'(extract)한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생산 활동을 통해 만들어진 부가 아니라 부동산, 자금을 통제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부를 빨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10년에 한번 꼴로 찾아오는 경제위기에서 부자들은 더 부자가 된다. 정부는 구제금융(국민들이 낸 세금)을 통해 대기업들을 회생시킨다. 이 과정에서 경제위기를 야기한 부자들은 더 부자가 되고, 노동자들은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일자리를 잃는다. 최근 100년만에 찾아온 팬데믹인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똑같은 일을 경험했다. 부자들은 더 부자가 됐고, 가난한 이들을 목숨을 잃었다.
'주린이', '동학개미'라는 말이 언론에 고유명사처럼 등장하고, 매일 한두건의 '리딩방 초대 문자'가 날라올 만큼 소위 '투자'는 일반화됐다. 이런 흐름을 혼자 거부하다가 나만 '벼락 거지'가 되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세이어는 약탈에 가까운 불평등에 기인한 경제위기와 기후위기가 더해진 '이중 위기'는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이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말해준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끝없는 탐욕이 아니라 충분함을 토대로 작동하는 경제가 필요하다. 사회가 평등하면 평등할수록 모든 사람이 자신의 역량을 발전시키고 상호 존중과 공공선·연대·배려 등의 감각을 개발할 수 있으므로, 그런 사회는 그 자체로 바람직하다. 그러나 우리가 극심한 생존경쟁에서 매우 불평등한 지위들을 놓고 경쟁해야만 하는 압박을 계속 받는다면,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부의 집중, 1대 99가 아니라 0.01대 99.99
프레시안 : 책 원제목이 "우리는 왜 부자들을 감당할 수 없는가"입니다. 역자 서문에서 이 책이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경제학>의 한계를 넘어서는 책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그 이유는요?
전강수 : 세이어는 사회학자이고, '도덕경제학'에 대해 오랫동안 탐구해왔습니다. 경제학에서는 가능하면 가치 판단을 배제하라고 하는데, 이 분은 그 가치 판단에 천착했습니다. 불평등의 대가인 토마 피케티가 2010년대에 전 세계에서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는 것을 방대한 데이터를 가지고 밝혔습니다. 불평등 심화 정도를 밝혔는데, 세이어는 도덕경제학의 관점에서 그 불평등 가운데 부를 축적하고 있는 사람들의 부가 정당한가에 대해 아주 끈질기게 추척했습니다. 이 책은 이렇게 부당한 부를 계속 집중하는 부자들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나, 용납할 수 있나를 문제제기하는 책입니다.
세이어는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중요한 원인이 '불로소득'이다, 재화나 서비스를 생산하는 과정을 통해 부를 축적한 게 아니고 그냥 기존 자산을 취득해 가지고 그걸 이용해서 이 부를 빨아들이는 식으로 부를 축적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토마 피케티가 보지 못했던 부분을 보고 있고, 불로소득 자본주의라는 개념이 나오기 시작한 거죠.
프레시안 : 현재의 빈부 격차가 어느 정도 수준일까요?
전강수 : 이 책이 2015년에 나와서 조금 지난 통계이긴 하지만, 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1%가 가진 자산이 110조 달러에 달한다.이는 하위 50%가 가진 자산의 65배라고 밝혔습니다. 또 세계 인구의 70%는 지난 30년 동안 경제적 불평등이 증가한 나라에 살고 있다.전 세계 인구의 70%가 그 불평등의 와중에 살고 있다는 겁니다.
이 책이 나오고 난 다음에 사태가 개선이 됐냐 하면 그렇지 않고 더 심해졌어요. 피케티의 최근 조사에 의하면, 2010년에는 미국의 상위 10%가 차지하는 비중이 전체의 45%였는데 2020년에 48%로 증가했습니다. 또 세이어는 상위 1% 중에서도 차이가 있다, 0.01%로의 집중이 두드러진다는 점도 지적했습니다.
부자들은 부를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추출한다
프레시안 : 세이어가 부를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추출한다'고 표현한 것도 매우 새롭습니다.
전강수 : 원래 부라고 하는 것은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자원에다가 인간의 노동을 가해서 새롭게 뭔가 유용한 물건을 만들어서 창출이 됩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새로운 생산활동이 없이 다른 쪽에서 만들어진 부를 빨아들여서 부를 증가시키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세이어는 고전경제학에는 있던 불로소득이라는 개념을 복원시켜서 이 부의 창출과 추출을 구분했다는 건 굉장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프레시안 : 불로소득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전강수 : 전통적으로 불로소득은 토지에서 발생한다고 보죠. 세이어는 그 범위를 넓힙니다. 그래서 돈을 가지고 돈벌이를 통해서 소득을 얻는 것, 생산 현장에서 뭔가 노동자들에게 불리한 조건에 처하게 만들어서 과도한 이익을 취하는 것, 기술의 독점, 특허권을 활용해서 과도한 부를 취득하는 것, 자산의 가치를 증식해서 생기는 소득, 기업 인수합병 등을 통해 발생하는 커미션 등 불로소득의 범위를 굉장히 확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이어는 부자들이 토지, 기술, 자산 등을 '독점'해서 불로소득을 얻고 있다. 불로소득은 독점에 기초해 과도한 소득을 얻는 방식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프레시안 : 우리나라에서 코로나를 거치면서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벼락 거지라는 말이 유행했다고 하는데요.주가 부동산 가격 이런 것들이 폭등하면서 노동 소득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갑자기 가난해진 거죠. 요즘 한국 사회에선 코인, 주식, 부동산 등을 통해 돈을 버는 것이 조금 당연해진 것 같습니다.
전강수 : 그런 분위기가 많이 퍼지고 있죠. 근데 늘 그랬던 건 아니고요. 예전엔 돈을 벌고 싶어 하는 심리는 비슷한데 그때는 열심히 공부하거나 기술을 익히고 가능하면 좋은 직장에 들어가서 월급 받아서 덜 쓰고 저축하고 몇년 지나고 나면 집 사고 등 그렇게 보통 사람들이 살았어요. 그럼 왜 이렇게 평범한 사람들이 땀 흘려 일해서 노력 소득을 얻고 그것을 통해 생활하고 재산을 형성하는데 관심이 없고 불로소득 취득을 통해 돈을 벌려고 할까?. 땀 흘려 일해서 노력 소득을 벌려고 하는데 일자리도 만만치 않고, 취직해서 일을 하면 막 힘들고 괴로워요. 거기다가 주택 문제를 생각을 해보면 자기 월급 받아서 저축해서는 도저히 살 수가 없어요. 오죽하면 '이생망'이라는 말이 나왔겠어요?
근데 돈을 많이 번 사람들이 어떻게 벌었나 봤더니 전부 주식, 부동산 등을 통해 엄청나게 손쉽게 돈을 벌었다고 해요. 그럼 나도 해야지 이렇게 되죠. 여기에 금융기관들이 이런 평범한 사람들에게 대출을 해주네요. 그러니까 은행에서 돈 빌려가지고 이 슈퍼리치들이 하는 행위를 따라서 지금 하고 있어요.
문제는 이게 성공 가능성이 높지 않아요. 또 국가 전체적으로도 보면 사회 구성원들이 땀 흘려 일하고 생산하는데 관심이 없고 코인이나 주식, 부동산을 통해 돈을 벌겠다고 하면 경제가 돌아가겠습니까?
1930년 대공황 때는 부자도 망했는데, 2007년 금융위기 때는 부자만 돈 벌었다
프레시안 : 부자들이 경제 위기를 만들고 위기를 통해서 또 돈을 번다고 지적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전강수 : 세이어는 1980년경부터 '금융화' 현상이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그전까지만 해도 금융은 생산을 보조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부터 금융이 주도하는 현상이 나타났어요.
저임금 구조로 노동자들이 돈이 없어지니까 시장이 위축되고 투자할 곳을 찾지 못한 부자들과 기업들이 이런 부동산, 금융에 투자를 하기 시작했죠. 위험한 금융상품에 부자들이 돈을 투입하면서 위험이 커지고 그래서 발생한 것이 2007년 세계 금융위기였습니다. 미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 은행들이 망하고 여러 국가가 영향을 받고 우리나라도 피해를 입었습니다.
1930년대 대공황 때는 부자들도 망했습니다. 그런데 2007년 금융위기 때는 부자들이 오히려 돈을 벌었습니다. 국가가 나서서 국민들의 세금으로 이루어진 막대한 자금을 구제금융으로 금융기관들한테 다 투입했고, 그 돈으로 위기에 책임 있는 사람들이 보너스 받고 월급 엄청나게 받았습니다. 세이어는 이에 대해 부자들의 위한 사회주의라고 비판합니다.
프레시안 : 책에 "지갑이 투표용지를 이긴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부자들은 어떤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오작동하게 만드나요?
전강수 : 돈이 있으면 법과 제도를 자기들한테 유리하게 만들고자 국가기관에 여러가지 방식으로 침투하고, 이를 금권체제라고 부릅니다. 돈과 권력이 유착한 거죠. 그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이 정치자금 기부입니다. 그리고 이 부자들과 정치권 사이에 아주 밀접한 네트워크를 형성합니다. 정치인과 부자들 사이에 뭐 자식들을 결혼을 시키기도 하고, 정치인 자신이 부유층 출신이기도 합니다.
프레시안 : 부자들이 언론이나 연구소 등을 활용해서 부의 신화를 퍼뜨리기도 합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이에 포섭되기도 합니다.
전강수 : 부자들은 학자들을 동원해 내가 이렇게 돈을 많이 버는 것은 내가 능력이 있어서 그런 것이라고 포장하는 이론을 만들어내게 합니다. 그 학자들이 만들어낸 대표적인 논리가 낙수효과 아닙니까? 파이를 키워야 나눠먹을 것이 많아진다, 그래서 파이를 키우려면 부자들을 더 부자가 되도록 해야 하고, 이들이 획득한 부 가운데 일부가 아래로 떨어져서 저소득층도 잘 살게 된다는 논리인데, 이건 정말 엉터리 논리입니다. 현실에서 입증된 바 없습니다.
이런 이론들을 만들어내고 그걸 학자들 사이에 유통을 시킬 뿐만 아니라 언론을 통해서 일반인들에게도 유포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대중 문화까지 장악합니다. TV 드라마, 영화 등을 통해서 자기들에게 유리한 메시지를 담은 내용을 방송하게 하죠. 이런 현상이 정말 두드러지는 데가 우리 한국 아닙니까?
경제위기 + 기후위기, 이중위기를 심화시키는 부자들
프레시안 : 저자는 우리가 지금 같은 삶을 지속하려면 지구가 3개 필요하고 미국 사람들처럼 살려면 지구가 5개가 필요하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부자들은 이런 기후 위기를 얼마나 더 심화시키고 있나요?
전강수 : 세이어는 이 부자들의 소비 행태를 분석을 하죠. 요트를 산다든지, 가족용 비행기를 산다든지, 집안에 극장을 설치한다든지, 이런 부자들의 과도한 소비가 탄소 배출량을 굉장히 늘립니다.
이 부자들이 단순히 소비를 통해서만 그렇게 하는 게 아니고 이들 가운데는 화석연료와 이해관계가 걸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경제를 성장시켜야 부를 늘릴 수 있는 사람들이 많죠.
그래서 이들은 기후위기를 부정하는 이론을 아주 세련되게 만들어내고 있죠. 지금 이대로 가도 큰 문제 없다는 논리를 학자들을 통해서 만들어냅니다. 또 문제가 되면 시장을 통해서 해결하면 되지, 이래서 탄소배출권을 거래할 수 있는 시장을 만들자고 하는데 별로 성공 가능성이 없어요. 또 문제가 된다면 공학적으로 해결하면 된다. 우주에다가 반사경을 설치한다든지 화학약품을 뿌려서 바다가 오염된 걸 해소한다든지 등. 그러니까 기후위기 문제를 해결하기가 굉장히 어려워지는 것이죠.
프레시안 : 윤석열 대통령도 최근 포항에 석유가 묻혀있다면서 '산유국의 꿈'을 이야기하면서 이게 엄청난 경제 성장을 가져올 수 있다고 이야기했는데요, 우리나라 뿐 아니라 미국 트럼프 전 대통령도 그렇고 보수 성향의 정치인들도 이런 기후위기 부정론을 퍼뜨리는데 앞장서고 있습니다.
전강수 : 그렇습니다. 기후위기 문제에 있어서도 금권정치의 문제가 잘 드러납니다.
나는 시장주의자, 불로소득 이대로 두면 자본주의가 망가진다
프레시안 : 저자는 경제위기와 기후위기라는 '이중 위기'를 지적하면서 이제 부자들을 지원하는 일을 멈추고 새로운 경제정의를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부분에서는 조금 회의감도 들었습니다. 부자들이 이미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다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대중들은 좌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안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전강수 : 세이어가 제시한 방안으로는 여러가지가 있는데요, 토지나 부동산에 대해서 보유세를 강화한다, 환경오염을 막기 위해 탄소세를 부과를 하자, 지나친 세계화를 규제하기 위한 토빈세 등도 얘기합니다. 금융이 생산을 앞서나가는 것을 막기 위한 금융 규제도 필요하다는 입장입니다.
또 이 모든 것들을 유발하는 근본 원인이 금권체제이므로 민주주의를 회복해서 부자들의 국가 포획을 못하게 막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굉장히 방대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이미 부자들이 정치, 경제, 사회를 다 장악하고 있는데 가능할까 하는 좌절감이 있을 수 있는데, 노르웨이나 핀란드에서는 모든 국민의 소득과 순자산, 납세액 등이 다 공개가 됩니다. 한국에선 상상하기 힘든 일인데, 이렇게 투명하게 공개가 되면 부자들이 장난을 칠 여지가 확 줄어듭니다. 정부 정책의 투명성도 높아지구요. 핀란드나 노르웨이에도 부자들이 있을텐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돌아가신 노무현 대통령이 얘기했지만 결국은 시민들이 깨어서 대안을 요구하는 것이 희망의 통로라고 생각합니다.
프레시안 : 한국도 빈부격차가 굉장히 큰 나라 중 하나인데요, 지금 정치권에선 오히려 종부세 폐지가 논의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전강수 : 종부세가 지금 논란거리가 갑자기 됐는데, 그걸 왜 민주당이 앞장서서 1주택자에 대해 폐지를 하자 이런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건 자기 부정 아닌가요? 종부세는 우리 사회에 건강함을 지켜나갈 수 있는 핵심 수단이기 때문에 잘 지켜야 됩니다.
프레시안 : 세이어는 본인의 이런 주장을 하면 많은 사람들이 좌파, 사회주의자라고 비판하는데,나는 워싱턴 편도, 모스크바 편도 아니라고 얘기합니다.
전강수 : 부자들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이를 개선하자고 하면 당장 튀어나오는 얘기가 좌파라는 비난인데요, 세이어만이 아니고 저한테도 그럽니다. 그런데 사실 저는 시장을 존중합니다. 시장을 시장답게 만들어야 된다, 자본주의가 진정한 자본주의가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이를 위해선 불로소득 문제를 놔두고는 안 됩니다.
전강수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
부동산공화국 경제사 전강수 저자(글) 여문책 · 2022년 03
목차
프롤로그
1부 해방과 함께 평등지권 사회가 도래하다
들어가는 말 | 평등지권이 중요한 이유
1장 나라의 땅 vs 지주의 땅
2장 농지개혁으로 도래한 평등지권 사회
+ 추미애의 연설, 조봉암과 노무현이 보였다
2부 대한민국, ‘부동산공화국’으로 추락하다
3장 박정희가 열어젖힌 부동산공화국의 문
4장 자꾸 부는 투기 광풍, 어설픈 정부 정책
5장 슬픈 종부세
6장 부동산공화국의 실상
+ 서민경제를 강타한 이명박 정부의 부동산 정책
3부 땅이 아닌 땀이 대우받는 세상을 향하여
7장 소득주도성장인가, 불로소득주도성장인가
8장 부동산공화국 해체를 위한 제언
+ 기본소득 연계형 국토보유세의 탄생
보론 | 한국 토지정의운동사-헨리 조지 사상, 한국에서 만개하다
에필로그
미주 | 용어해설 | 참고문헌
출판사 서평
◆ 부동산 문제를 중심으로 살펴본 대한민국 경제사
2018년 한국 사회를 뒤흔든 최대의 유행어는 바로 ‘똘똘한 한 채’였다. 엄청난 기세로 불어닥친 투기 광풍에 전국이 들썩였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서울, 특히 강남의 아파트값에 대한 기사가 연일 보도되면서 평범한 시민들을 상대적 박탈감과 불안으로 몰아넣었다. 화들짝 놀란 정부가 부랴부랴 9ㆍ13대책을 내놓으면서 투기 바람은 어느 정도 잦아들었지만 근본적 대책이라기보다 땜질식 단기처방에 가까워 언제 또 화약고가 터질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1960년 무렵 전 세계에서 토지분배가 가장 평등한 나라였던 한국이 어쩌다 너도나도 불로소득에 목을 매는 사회로 전락했을까? 한국의 대표적인 조지스트 학자이자 부동산 전문가로서 실천적 지식인의 역할을 꾸준히 수행해온 전강수 교수가 이 물음에 명확한 답을 내놓았다.
전 교수에 따르면, 1970년대 이후 한국이 부동산공화국으로 전락한 데는 농지개혁의 한계, 다시 말해 도시토지와 임야를 개혁 대상에서 제외했고 토지 소유 불평등의 재현을 방지할 제도적 장치를 충분히 갖추지 못했다는 한계에다 박정희 정권이 밀어붙인 무분별한 강남개발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평등지권 사회가 성립하고 후퇴한 과정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유례없는 고도성장, 부동산 투기, 기득권세력 형성, 불평등과 양극화, 경제위기 등이 모두 그것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19세기 말까지 미국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세계적 명저 『진보와 빈곤』의 저자 헨리 조지의 사상에 큰 영향을 받은 학자답게 전강수 교수는 기득권세력ㆍ투기세력, 뉴라이트 사학자들의 논리에 맞서 27년간 꾸준히 토지정의를 설파해왔다. 이번 신간 『부동산공화국 경제사』는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부동산 문제와 그 해법의 완결판이라 할 수 있다. 다양한 시각자료와 친절한 용어해설을 넣어 내용의 이해를 돕는 한편, 쉽고 명징한 문체와 논리로 그동안 일반에 잘못 알려져 온 부동산 문제 관련 신화를 해체하고 진실을 알리는 데 역점을 두었다. 또한 노도와 같은 ‘촛불민심’을 등에 업고 출발한 문재인 정부가 반드시 성공하기 위해 취해야 할 구체적인 정책 제안까지 담았다. 지지부진한 개혁에 점차 민심이반이 일어나고 있는 이때가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저자가 내놓은 해답에 일반인은 물론 정책 관계자들도 귀를 기울여 사회개혁의 근본인 부동산 문제를 획기적으로 해결해주기를 기대한다.
◆ 부동산 문제를 둘러싼 거짓 신화와 진실
전강수 교수는 그동안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부동산 문제와 관련한 거짓 신화를 먼저 다음과 같이 일목요연하게 지적한다.
〈신화 1〉 해방 이후의 농지개혁은 불철저해서 개혁이라 부르기 어렵다.
〈신화 2〉 농지개혁은 이승만의 작품이다.
〈신화 3〉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은 박정희의 리더십 덕분이다.
〈신화 4〉 박정희의 강남개발은 우국충정에서 비롯됐다.
〈신화 5〉 노무현 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실패했다.
〈신화 6〉 문재인 정부는 부동산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신화 7〉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참여정부의 재판再版이다.
〈신화 8〉 토지공개념은 반헌법적 또는 사회주의다.
〈신화 9〉 보유세 강화는 조세저항이 강해서 시행이 불가능하다.
이어서 본문과 에필로그를 통해 위의 신화들이 어떤 면에서 거짓인지를 구체적인 근거를 토대로 조목조목 밝힌다.
〈진실 1〉 농지개혁은 개혁 후 자작농 비율이 일본보다 높을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지주제를 해체해 경제성장의 장애물을 제거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크다.
〈진실 2〉 이승만이 농지개혁을 추진한 목적은 완전히 정략적인 것이었다. 그는 한때 농지개혁 시행 중지를 지시하기도 했다. 농지개혁의 주인공은 조봉암 초대 농림부 장관과 농림부 관료들, 그리고 소장파 국회의원들이었다.
〈진실 3〉 한국은 공평한 고도성장을 이룬 것으로 유명한데, 그 동력은 농지개혁이 달성한 평등성에서 나왔다.
〈진실 4〉 박정희는 경부고속도로 용지 확보와 정치자금 조달을 위해 강남개발을 밀어붙였다.
〈진실 5〉 노무현 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한국 부동산 정책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기념비적 업적이었다.
〈진실 6〉 이상하게도 문재인 정부는 근본 부동산 정책인 보유세 강화를 극구 회피하고 단기 시장조절과 주거복지에 치중해왔다.
〈진실 7〉 노무현 정부는 부동산 불패신화와 정면대결을 펼친 반면, 문재인 정부는 단순한 관리에 그치고 있어서, 두 정부 사이에 큰 유사성은 없다.
〈진실 8〉 현행 헌법은 토지공개념 조항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토지공개념 정책은 친헌법적이다. 또 토지공개념은 불로소득 차단ㆍ환수 효과를 발휘해 노력하는 만큼 대가가 주어지는 사회를 실현한다. 이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진정한 자본주의다.
〈진실 9〉 보유세 강화에는 조세저항이 뒤따르지만, 기본소득과 결합하거나 국가재건 프로젝트 시행을 표방하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
◆ 농지개혁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한국 사회가 한때 ‘공평한 농지개혁’을 이룬 적이 있다는 사실에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이승만 정부 당시 초대 농림부 장관을 지낸 조봉암의 공산주의 활동 전력을 문제 삼고 조봉암의 업적을 이승만의 작품으로 둔갑시키는 세력도 있다. 하지만 이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어불성설일 뿐이다. 우리 사회에서 평등지권을 실현한 일대 사건이었던 농지개혁은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일제 강점기 당시 극심한 수탈에 시달리다 해방을 맞이한 조선 농민들은 무엇보다 지주의 압박과 수탈에서 벗어나 마음 놓고 생산하고 수확물을 자유롭게 처분하며 식량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는 날이 왔다고 생각했다. 그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해방 직후 농지개혁의 문제는 좌우를 막론하고 어떤 정치세력도 외면하기 어려운 중대한 사회경제적 이슈로 부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한국의 농지개혁에 관한 많은 연구가 축적되어왔는데, 전강수 교수는 그 성과들을 종합해 다음의 요인들이 결합해서 한꺼번에 작용한 결과라고 말한다.
첫째, 미국의 역할이다. 미국은 남한을 반공의 보루로 삼고자 했고, 그래서 공산주의 세력의 확산을 막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농지개혁은 이런 미국 한반도 정책의 일환이었다. 실제로 미국은 미군정기에 귀속농지를 일반에 팔아 농지개혁의 흐름을 되돌릴 수 없게 만들었으며, 한국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각종 채널을 통해 농지개혁을 강력히 요구했다.
둘째, 이승만의 정치 전략이다. 이승만은 기본적으로 미국의 입장에 순응했고, 지주세력을 약화하면서 농민들의 지지를 받기 원했다. 극우 보수주의자였던 이승만이 농지개혁 같은 급진적 개혁조치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셋째, 농민층의 강력한 요구다. 일제 강점기에 지주들에게 고율의 소작료를 수탈당했던 농민들은 해방 후 식민지 지주제의 철폐와 농지개혁의 시행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이들의 요구를 무시하고서는 건국과정이 순조로울 수 없었다.
넷째, 북한 토지개혁의 영향이다. 북한은 1946년 3월 한 달 만에 무상몰수ㆍ무상분배를 골자로 하는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남한 정부가 농지개혁을 실시하지 않는다면 남한 농민들의 마음이 북한과 공산주의 쪽으로 쏠릴 위험성이 있었다.
이런 배경 아래 마침내 한국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대지주의 나라’를 ‘소농의 나라’로 변모시키는 엄청난 개혁을 이루어낼 수 있었고, 이는 시대적 상황이 만든 일종의 기적이었다. 나아가 저자는 전 세계가 알아주는 한국인 특유의 높은 교육열에 농지개혁이 큰 몫을 한 것으로 본다고 덧붙인다. 농지개혁으로 기본적인 평등이 실현된 상태에서 다수의 민중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교육에 사활을 걸게 되었고, 이후 사회에 부패가 만연해 점점 더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상태로 악화될수록 더욱 교육에 기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지 않았을까. 저자의 말대로 이는 “실증 연구가 필요한 흥미로운 주제”다.
◆ 평등지권은 사회주의적 개혁이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농지개혁으로 평등지권 사회를 실현한 세 나라가 있다. 바로 대만ㆍ한국ㆍ일본이다. 이들 세 나라는 유상몰수ㆍ유상분배 방식의 농지개혁을 단행해 공통적으로 높은 장기 경제성장률을 달성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토지독점이 심각했는데도 이를 개혁하는 데 실패한 중남미 여러 나라, 즉 페루ㆍ베네수엘라ㆍ콜롬비아ㆍ파라과이ㆍ과테말라 등의 장기 경제성장률은 극히 낮다(20쪽 [그림 1] 참조). 이렇듯 각국의 토지분배 상태와 그 후의 장기 경제성장률 사이에는 뚜렷한 상관관계가 존재한다.
땅은 본디 거저 주어진 ‘천부자원’이기에 한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땅에 대해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평등지권’을 거론하면 사회주의적 토지개혁부터 떠올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평등지권은 시장경제와 토지의 배타적 이용을 인정하는 반면, 사회주의적 토지개혁은 양자를 모두 부정하고 궁극적으로 토지의 국공유화와 집단적 이용을 지향하기 때문에 이 둘의 성격은 전혀 다르다.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 후 동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인민민주주의 혁명의 일환으로 평등지권의 한 방법인 토지의 무상몰수와 무상분배를 내용으로 하는 토지개혁을 실시했지만, 그 후 농업 집단화 정책을 추진해 평등지권의 이상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사회주의적 토지공유제를 성립시키고 말았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작년 한 해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부동산 투기 광풍으로 ‘토지공개념’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졌다. 토지공개념의 시조는 헨리 조지이며, 우리나라는 1987년 민주화운동의 열기에 힘입어 토지 소유의 집중과 토지 불로소득을 방지하기 위해 토지공개념 조항을 헌법에 명시해놓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사실은 아직까지 일반에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어쨌든 한국의 현행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고 2018년에 문재인 대통령이 발의했으나 무산된 개헌안에도 들어 있는 토지공개념은 대만에 비해 시기적으로 30년 이상 늦은 데다 내용도 추상적이고 애매해서 그 정신을 담은 법률을 시행할 때면 효력을 제대로 발휘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토지공개념 정신을 담은 법률은 늘 반反헌법적이라는 비난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러나 현행 헌법은 여러모로 이미 시효를 다했고 개헌의 필요성이 날로 대두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대다수 서민이 집값, 임대료 걱정 없이 살 수 있도록 근본적 사회개혁을 단행해야 할 소임이 ‘촛불정부’에 주어져 있음을 생각할 때, 문재인 정권은 이제부터라도 더 적극적으로 토지공개념 사상을 널리 알리고 이전보다 진일보한 평등지권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 부동산에 대한 근본 철학을 재정립해야 할 때
한국에서 부동산 불로소득 차단ㆍ환수 정책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한 원인은 무엇일까? 저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농지개혁 이후 수십 년이 지나는 동안 부동산 불로소득에 사활을 거는 부동산 부자와 토건족이 형성되었고 보수 언론, 경제관료, 부동산 시장만능주의 학자가 이들과 결탁해 강력한 부동산공화국 지배 동맹을 구축했다는 사실을 꼽는다. 연이어 “달랑 집 한 채 가지고 자식들 공부시키며 빠듯하게 살아가는 중산층과 서민층은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 지배 동맹과 동류의식을 느끼며 지원군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노무현 정부 때의 종합부동산세 반대운동은 어처구니없게도 부동산을 소유한 중산층과 서민층이 부동산공화국 지배 동맹의 조세저항에 동조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꼬집는다.
2018년 10월 한 탐사보도 프로그램에 소개된 부동산 관련 세금에 대한 내용은 충격 그 자체였다. 공시가격 12억 원인 목동 아파트를 한 채 가진 사람과, 총 공시가격이 270억 원에 달하는 가양동 소형 주택 100채를 소유한 임대사업자의 세금을 비교한 내용이었다. 목동 1주택자는 재산세 연 30만 원, 10년 보유 후 매도할 경우의 양도소득세 2,900만 원, 종부세 연 75만 원을 납부하는 반면 가양동 100채 소유자는 재산세와 양도소득세 면제, 종부세 비과세로 관련 세금을 한 푼도 안 낸다는 사실에 경악하지 않은 사람은 그 임대사업자와 같은 불로소득자들뿐이었을 것이다.
‘조물주 위에 건물주’, ‘갓물주’라는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회자되고 자라나는 세대의 장래 희망 1순위가 ‘건물주’라는 기막힌 현실을 이제라도 바로잡으려면 부동산을 불로소득 창출의 도구인 소유권이 아닌 주거권ㆍ사용권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하며, 과도한 불로소득주의자들을 백안시하는 사회 풍토 위에서 근본적인 제도개혁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땀 흘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잘사는 사회가 되어야 비로소 ‘정의로운 사회’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전강수 교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평등지권의 이상을 실현하려면 세 가지 방법을 활용할 수 있다고 밝힌다. 토지 그 자체를 균등하게 분배하는 방법, 국공유지를 확대하고 그것을 민간에 빌려줘서 임대료를 걷는 방법(토지공공임대제), 토지사유제를 유지하되 토지보유세를 높여서 토지 불로소득을 환수하는 방법(토지가치세제)이다. 문제는 정책 담당자들이 이런 사실을 모를 리 없으면서도 노무현 정부 때의 ‘종부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인지 근원적인 개혁에는 눈을 감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 희망은 있다. 우선 그때의 시민들과 지금의 ‘촛불시민’은 많이 다르다. 그리고 대다수 ‘촛불시민’은 문재인 정부가 남북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 정착 못지않게 확실한 적폐청산과 사회개혁을 이뤄내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것이다.
◆ ‘기본소득 연계형 국토보유세’의 제안자가 밝히는 부동산 문제의 근본 해법
전강수 교수는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지난 대선의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로 출마했을 당시 ‘국토보유세, 기본소득, 지역상품권’을 3종 세트로 결합한 대표 공약을 만든 주역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자신이 이재명 후보를 적극적으로 도운 이유는 이 후보가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될 가능성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라고 밝힌 부분이다. 여러 우여곡절과 힘든 과정을 감내하며 그가 끝까지 이 후보를 도왔던 것은 ‘대형 스피커’를 통해 평소 지론을 마음껏 알릴 수 있는 기회라는 절박함 때문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런 부분이 전강수 교수가 학자의 본분을 망각한 일부 비양심적 ‘폴리페서’들과 구분되는 지점이다.
이런 전 교수는 노무현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기념비적인 것이었다고 단언하면서도 종부세가 가진 한계를 명확히 지적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종부세는 극소수의 부동산 과다보유자에게만 부과되기 때문에 증세 여지가 적어서 보유세 강화를 의미 있게 추진하기에는 부적절한 수단이다. 응집된 소수의 격렬한 조세저항을 유발하기도 쉽다. 또한 형평상의 문제도 심각하다. 따라서 전 교수는 이를 보완하기 위해 종부세 대신 국토보유세를 도입하자고 주장한다.
[국토보유세는] 종부세와 달리 토지에만 부과하고, 극소수의 부동산 과다보유자가 아니라 전체 토지 보유자에게 부과한다. 건물에 과세하지 않는 것은 건물보유세가 건축 활동을 위축시키는 비효율을 낳기 때문이다. 조세저항 문제를 염려하겠지만 그것은 국토보유세 세수 순증분을 모든 국민에게 1인당 n분의 1씩 분배하는 토지배당으로 해결한다. 국토보유세는 현행 보유세 제도의 근본 문제로 지적되는 용도별 차등과세를 폐지하고 모든 토지를 인별 합산해서 누진과세한다. (232쪽)
국토보유세 세수 순증분으로 지급하는 토지배당은 생애주기별 배당이나 특수배당 등 다른 기본소득과 결합할 수도 있다. 그럴 경우 순수혜 가구 비율은 더 늘어나고 수혜액도 증가할 것이다. 게다가 토지배당을 비롯한 모든 기본소득을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그것이 지역경제 활성화의 마중물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중략)
국토보유세를 기본소득과 결합해서 도입할 경우 예상되는 사회경제적 효과를 한번 생각해보자. 국토보유세 도입은 부동산공화국과 부동산 특권에 직격탄이 된다. 이 세금이 본격적인 효과를 발휘할 단계가 되면, 현재 우리 사회에 만연한 지대추구 경향은 줄어들고 그만큼 생산적 경제가 활성화된다. 투기 목적으로 토지를 보유한 사람들은 필요 이상의 토지를 매각하므로 토지 소유 불평등이 완화된다. 2000년대 후반 이후 토지 매입에 몰두해온 재벌ㆍ대기업도 필요 이상의 토지를 처분하면서 생산적 투자에 관심을 기울인다. 부동산 소유 불평등이 완화되면 자연히 소득 불평등도 줄어든다. 더욱이 지가와 부동산 가격의 하향 안정화로 주거비용과 창업비용도 하락한다. 이렇게 되면 임금 부담과 높은 토지비용 때문에 해외로 나갔던 기업들의 회귀 가능성이 높아진다. 모든 국민이 토지배당을 받게 되면, 국민의 주권의식에도 큰 변화가 일어난다. 자신이 민주공화국의 실질적 주인이라는 의식이 생겨나는 것이다. 어떤가? 실로 놀라운 변화가 아닌가? (236~237쪽)
그 밖에도 저자는 ‘특권이익 있는 곳에 우선 과세한다’는 것을 조세제도의 제1원칙으로 수립해서 실행하자고 제안한다. 국토보유세 도입 외에 동원할 수 있는 정책 수단으로 재벌ㆍ대기업 법인세 중과, 누진소득세 최고세율 인상, 상속세ㆍ증여세 최고세율 인상, 자연자원 이용료와 환경오염세 정상화 등을 꼽는다. 이 모든 것은 사회적 공론화 과정과 구성원들의 합의를 전제로 하며 더욱 세밀한 정책 개발이 선행되어야 한다. 수십 년간 누적된 고질적 사회문제를 한 방에 해결할 특효약은 없으며, 그 어떤 정책도 모든 국민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다만 각계 전문가와 정책담당자들이 민주공화국의 대다수 성원을 위한 정책을 개발ㆍ제안하고 널리 알림으로써 사회적 대타협을 토대로 더 나은 미래를 개척해나갈 수 있을 뿐이다. 심각한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고 미래 세대를 위해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는 명약관화하지 않은가.
책 속으로
발전국가론 지지자들과 뉴라이트 학자들은 한국이 역사상 유례없는 고도성장을 이룩한 원인을 박정희의 리더십에서 찾는다. 이들은 모름지기 중대한 경제적 변화는 아래로부터의 동력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간단한 원리를 간과하고 있다. 게다가 발전국가론 지지자들과 뉴라이트 학자들은 5ㆍ16쿠데타 이전에는 엽관주의가 만연해 능력을 중시하는 전문 관료제가 자리를 잡지 못한 반면, 박정희가 집권해서 비로소 엽관주의를 퇴치하고 능력주의에 입각한 전문 관료제를 확립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시험으로 관료를 임용하는 능력주의 관료제는 이미 이승만 정권 때 농지개혁으로 평등지권 사회가 실현되고 교육이 발달하면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국가가 강력한 이익집단으로부터 자율성을 확보하고 성장에 유리한 정책을 펼칠 수 있는 기반을 갖춘 것도 그때부터다. 그러니 한국의 성장 경험을 배우려는 개발도상국들에는 박정희를 가르칠 것이 아니라 농지개혁의 경험을 나누는 것이 더 중요하다. (50~51쪽)
노무현 정부의 부동산 정책에 대해서는 실패로 보는 견해가 많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노무현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실패했다고 보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이유는 오로지 집값을 못 잡았다는 것 하나인데, 당시 유례없는 유동성 확대로 전 세계 국가들에서 부동산값이 폭등했고 한국은 상대적으로 가격 상승 폭이 낮았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은 비판이다([그림 5] 참조). 게다가 정책의 내용은 대한민국 어느 정부도 감히 시도하지 못한 뛰어난 것들이어서 노무현 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실패로 규정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노무현 정부는 보유세 강화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한 것을 비롯해서 불황에도 부동산 경기부양책을 쓰지 않은 것, 부동산 과다보유자에 대해 양도소득세를 중과한 것, 실거래가 제도를 도입해서 부동산 거래의 투명성을 획기적으로 높인 것, 서민용 장기 공공임대주택 공급을 확대한 것, 토지 소유 분포 통계를 사상 최초로 공개한 것 등 기념비적인 정책을 펼쳤다. 그럼에도 노무현 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기득권층의 집요한 공격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으니 역사의 비극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143~144쪽)
자영업자가 아우성이고 청년 실업률이 10퍼센트를 넘을 정도로 심각한데 확장적 재정정책을 펼치지 않은 것도 큰 실책이다.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 정책이 옳은 방향임에도 효과를 거둘 수 없었던 것은 과감한 복지정책과 거시경제정책을 펼치지 않은 탓도 크다. (187쪽)
문재인 정부에 책임을 돌린 야당과 보수 언론의 주장은 문재인 정부의 정책 혼선과 이전 정부 때보다 훨씬 빠른 부동산값 상승세를 지적했다는 점에서 일견 타당하다. 하지만 이명박ㆍ박근혜 정권이 9년 동안이나 노골적인 부동산 경기부양을 시도했다는 명백한 사실과, 박근혜 정권 때의 재건축 규제 완화와 금융 규제 완화가 강남지역 부동산 광풍의 시발점이었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했다는 점에서 문제가 크다. 재건축 규제 완화는 투기 광풍의 원인으로 작용했던 정책임에도 그것을 해법으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논리적 결함도 심각하다. (201쪽)
불평등 시대의 부동산 정책 서울사회경제연구소 엮음 한울아카데미 · 2022년 03월
출판사 서평
혼란에 빠진 부동산 정책, 어디로 가야 하는가
부동산은 국민의 주거공간이자 중요한 투자자산이다. 따라서 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가계의 기본 주거수요를 충족시켜야 하며, 사람들의 수요에 맞추어 적절한 신·개축의 공급을 허용해야 한다. 또한 정부는 부동산 가격의 과도한 하락이나 침체를 막아야 하며, 과도한 상승도 경계해야 한다. 부동산 가격을 안정시키는 것이 정부 정책에서 중요한 이유는 부동산 가격이 과도하게 상승하면 자산 불평등과 소득 양극화도 심화되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이후 부동산 가격 안정을 위한 대책이 연이어 발표되었지만, 대부분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서울과 지방, 아파트와 빌라 가릴 것 없이 주택 가격과 전월세가 폭등했고, 뒤늦게라도 부동산 가격 상승에 편승하려는 부동산 투기의 광풍 때문에 새로운 금융 불안이 야기되었다.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자 계층 간, 지역 간, 세대 간 자산 불평등이 심화되어 성실한 근로자가 일할 의욕을 크게 잃기도 했다.
이 책은 부동산 시장과 정책을 근본적이고 객관적인 시각에서 탐구·분석한 결과를 모은 것으로, 불평등을 심화시키지 않으면서 가격과 공급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방안에 대해 아홉 개의 주제로 나누어 탐구한다. 부동산 정책이 불평등을 심화시켜서는 안 된다는 대전제에서 출발한 이 책을 통해 바람직한 부동산 정책 대안을 보다 깊이 있게 탐구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의 구성 및 내용
이 책은 부동산 정책에 대한 진단과 처방으로 구분할 수 있다. 진단과 관련된 세 편의 글은 1부에 싣고, 처방 중 논쟁이 많은 보유세는 2부에서 다루며, 3부에서는 부동산 대출과 공공임대에 대해 논한다.
제1부 ‘부동산 정책, 평가와 방향 설계’는 주택시장의 전망, 부동산 정책의 평가, 부동산 정책의 방향을 다룬 세 편의 글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 ‘2021년 주택시장 진단 및 주택시장 전망’에서는 2019년 이후 전국적으로 매매가격이 상승한 원인이 이례적으로 풍부한 유동성으로 인한 수요 압력과 신규 주택의 공급 부진 때문이었다고 분석한다. 또한 ‘주택임대차법’ 개정에 따라 2020년 하반기부터 임대가격이 시장가격, 규제가격, 협상가격으로 삼중화되면서 전월세 가격이 크게 상승했다고 분석한다. 하지만 주택시장의 추가적 불안 요인이 크지 않기 때문에 2022년 이후에는 주택가격이 안정화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제2장 ‘문재인 정부 부동산 정책의 경제적 평가 및 설계’에서는 문재인 정부가 기존 자유주의적 시장체계의 부동산 정책을 유럽식 체계로 전환시키려 했지만, 그 과정에서 매매가격과 임대차가격이 폭등하고 공급이 부족해지는 문제가 발생했다고 평가한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무주택자와 생애최초구입자 중심의 내 집 마련 주택공급과 대도시권의 우량 임대주택 공급을 제시한다.
제3장 ‘불평등 시대 부동산 정책의 방향’에서는 부동산 정책의 최우선 순위를 불로소득 차단과 환수에 두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 장은 토지보유세 강화, 양도소득세 정상화, 개발부담금제 강화, 토지초과이득세 부활, 부당이득의 환수 장치 마련 등을 제안한다. 이밖에 공공 강제수용 토지에서 이루어지는 땅 장사를 중단하고 이를 공공성에 부합하는 주택공급에만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2부 ‘부동산 조세 정책 과제’는 보유세 개편의 방향, 보유세 국제 비교, 보유세 부담 효과의 분석, 보유세 과표로서의 공시가격 개편 등 네 편의 글로 구성되어 있다.
제4장 ‘부동산 보유세제 개편의 쟁점과 기본 방향’에서는 보유세에 관한 여러 가지 쟁점을 정리하면서 평균 세부담의 점진적 인상, 사회적 합의에 따른 보유세의 부유세 기능 수용, 과세 대상에 대한 공정한 평가체계 마련, 토지 고율 과세, 건축물 세부담 완화를 주장한다. 덧붙여 보유세를 시장안정화 수단으로 사용하는 정책 당국의 관행을 비판하면서, 이런 관행에서 탈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제5장 ‘부동산 보유세 세부담에 대한 국제 비교와 시사점’에서는 부동산과 관련된 조세의 크기를 OECD 자료로 비교 분석한다. 이 장은 한국의 부동산 가격이 GDP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며 전체 재산세 또한 OECD 평균보다 높다고 평가한다. 따라서 국제사회가 부동산 보유세 강화를 권고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 보유세를 강화하고 거래세를 인하하는 재산세의 전면적인 개편을 제안한다.
제6장 ‘가계의 부동산 분배 현황과 보유세 개편의 계층별 세부담 효과’에서는 정부의 보유세 강화 정책이 가계의 부동산 실효세율과 담세율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추정한다. 이 장에서는 우리나라의 보유세 실효세율이 OECD 국가의 절반 수준이므로 공시가격을 현실화해도 과도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한다. 다만 고령 계층의 경우 과세이연제도나 주택연금을 활용해 납부 부담을 줄여야 한다고 말한다.
제7장 ‘부동산 공시가격제도의 문제점과 개선 방안’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수긍할 수 있도록 부동산 공시가격 체계를 개편할 것을 요청한다. 시장가치와 정책가치를 구분하되, 시장가치는 실거래가 등을 참조해 전문기관이 독립적으로 평가해서 구하고, 정책가치는 조세, 복지, 보상, 지역개발 등 부처의 정책 목적에 따라 시장 가치에 가중치를 주어 구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제시한다.
제3부 ‘부동산 금융 및 공급 정책 과제’는 부동산 담보대출과 공공임대주택 제도의 개혁 방안에 관한 두 편의 글을 싣고 있다.
제8장 ‘금융 불균형과 가계부문 건전성 관리’에서는 한국에서 정부부채비율보다 민간부채비율이 더욱 많이 상승했는데 그 원인이 부동산 시장에 있다고 지적한다. 이 장은 금융 불균형과 가계부채 문제를 완화하기 위해 차주 단위 DSR 규제의 조기 도입, 갭 투자용 대출의 통제 등 거시건전성 관리를 제안한다. 다만 기준금리 인상 속도를 조절해 신용위험의 급격한 확대와 시장 경착륙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9장 ‘공공임대주택제도 개혁 방안’에서는 주택 정책은 반값 아파트 분양 같은 소수 무주택자에게 혜택을 집중하는 데서 벗어나 대다수 무주택자의 주거비용을 안정화시키는 정책으로 전환해야 하며, 공공임대주택은 핵심 입지에, 시장가격으로, 단기전세 방식으로, 대규모로 공급해야 효율적이고 공정하며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책 속으로
주택임대시장은 저금리 기조가 지속되는 가운데 신규 공급물량 부진, 실거주요건 강화, 국회의 ‘주택임대차보호법’ 통과 등으로 시장가격 상승 압력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으며, 시장가격, 규제가격, 협상가격 등 삼중가격이 본격화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주택매매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한 정책인 세법 및 금융 규제, 청약제도 등에서 실거주요건을 강화한 것은 임대시장에서 기존 임차인의 계약갱신청구권 효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_23쪽
부동산 정책은 부동산 문제 해결을 목표로 해야 한다. 예컨대 저소득층을 지원해 주거비 부담을 줄여주고, 주택가격을 안정시켜 생애 주거사다리를 마련하는 등 부동산 문제 해결에 충실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부동산 정책을 설계해야 한다. 부동산 정책은 생애주기 동안 주거사다리를 마련하는 것이 핵심이며, 그중에도 내 집 마련이 가장 중요한 정책이다. 자기자본만으로는 고가의 주택을 구매할 수 없기 때문에 내 집 마련에서는 주택구입자금을 원활하게 조달하는 것이 필수적인 사안이다. 현재 심화되는 부동산자산의 양극화를 막으면서 임대차시장의 안정을 기하기 위해서도 주택금융은 반드시 변화해야 한다. _43쪽
문재인 정부는 보유세 강화에 실기했다는 책임과 함께 종부세를 왜곡시킨 책임도 져야 한다. 한껏 왜곡되어 버린 종부세를 다시 고쳐서 쓰는 것보다는 아예 더 좋은 국세 보유세를 설계해서 도입하는 편이 더 나을지 모른다. 사실, 원래의 종부세에도 결함은 있었다. 극소수 부동산 과다 보유자에게만 부과해 전반적인 보유세 강화 정책을 추진하기에 부적절했다든지, 수혜자가 드러나지 않아서 조세저항에 맞설 사회세력이 형성되기 어려웠다든지, 별도합산 과세대상인 상가·빌딩 부속토지를 우대했다든지, 최선의 세금(토지보유세)에 최악의 세금(건물보유세)이 결합해 있었다든지 하는 것 등이다. 그래서 필자는 오래전부터 종부세의 대안으로 국토보유세를 제안해 왔다. 국토보유세는 종부세의 여러 결함을 해소하는 세금이다. _65~66쪽
보유세 개편에서 확인해야 할 첫 번째 쟁점은 조세 형평성(tax equity) 측면에서 ‘평균’ 세부담이 적절한지 여부에 대한 것이다. 조세 형평성은 부담능력이 동일한 경우에는 동일한 세액을, 부담능력이 다른 경우에는 다른 세액을 부과하는 조세의 기본원칙이다. 보유세 강화론은 부동산이 우리나라 가계가 부를 축적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임에도 불구하고 부동산 과세가 ‘경제적 능력’에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부담능력에 따라 부과하는 공평과세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이러한 주장이 타당한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담세력으로서 소득의 크기에 상응하는 자산의 크기가 정의되어야 한다. 하지만 실현되지 않은 잠재적 소득원이자 저량변수인 부동산자산과 유량으로 측정되는 실현 소득의 ‘경제적 능력’을 직접 비교하는 것은 개념적으로 한계가 있다. _91~92쪽
주택 등 부동산은 단순히 높은 가격 수준, 주거 불안을 넘어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계층·지역·세대 갈등, 비혼 및 저출산, 과도한 가계부채 등 경제적·사회적 주요 난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그 밑바닥에 있는 요인이기도 하다. 이에 반해 부동산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투기수요 근절, 공급 확대 등 부동산 시장 안정에 그치고 있는 것 같다. 부동산에 대한 국제사회의 인식과 우리가 안고 있는 경제적·사회적 난제는 우리 정책 당국이 부동산에 대해 보다 근본적이고 넓은 시각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음을 시사한다. 즉, 정책 당국은 부동산에 대해 경제 불평등을 완화하고 경제적·사회적 주요 난제를 해결해서 포용성장 및 지속가능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인 정책 대상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_130쪽
우리나라의 보유세 부담이 다른 OECD 국가들에 비해 매우 낮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러한 정책 변경은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에 대한 신뢰를 약화시키고 모처럼 보유세가 부동산을 안정화시키는 역할을 하려는 상황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라는 점에서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저소득 고령 계층에 대해서는 과세이연제도를 도입하고 주택연금을 쉽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하지만, 이것을 제외한다면 희소한 부동산 자원에 대해 적정한 보유세를 부담하는 것은 1세대 1주택이더라도 예외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사회적 약속이 지켜져야만 투기에 휘둘리지 않는 시스템이 부동산 시장에 정착될 것이다. _165~166쪽
현행 부동산 공시가격제도의 문제점으로는 이원적인 공시가격체계에 내재한 공시가격의 오류 또는 부정확성, 평가기준의 이원화로 인한 가격 역전 현상, 정책 가격으로서의 부동산 공시가격,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실거래가 정보, 외부 검증 부재, 공시가격의 일원적 적용으로 인한 가치평가의 다원성 저해, 공시가격의 낮은 현실화율과 불형평성 등을 지적했다. _212쪽
금융규제를 지금보다 더 강화한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주택가격 상승세를 억누르기 어려울 가능성이 크다. 금융규제는 사후적으로 거시경제 건전성을 관리하는 수단이지, 한국 사회의 부동산 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하는 수단은 아니다. 문재인 정부의 규제 강화책 역시 주택거래량을 줄일 수는 있겠지만 주택가격을 잡는 데에는 적지 않은 곤란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답은 금융 규제가 아닌 보다 근본적인 해법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레버리지 투자가 가능한 사각지대는 온존시키면서 임차인의 거주권을 보장하지 못하는 현행 제도는 바로잡아야 한다. _252쪽
현재의 공공주택 임대 및 분양 등의 공급 방안은 대부분 사회복지 관점에서 설계·운영되어 비효율적이고 불공정한 소지가 많다. 토지와 주택은 근본적으로 입지의 제약으로 인해 공급이 제한되므로 공급 간에 대체효과가 발생한다. 복지 목적으로 공공주택을 공급하면 시장의 주택자원이 소비되어 공급이 대체된다. 그리고 현재의 대다수 공공주택 공급 방식은 시장의 수요를 충분히 흡수하지 못한 채 공급대체 효과만 유발하기 때문에 주택가격 안정화 효과가 미미한 것으로 판단된다. _2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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