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를 앞두고 몸에 이상이 왔다. 업무 스트레스에 더하여 감기 몸살이 난 것이다. 연휴관계로 병원이란 병원은 죄다 문을 닫았다. 약국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밤새 앓는 소리를 냈다. 편두통이 동반된 상황이라 신음 소리가 컷나 보다. 막내가 안타까웠는지 자다말다 팔 다리를 주무르기도 했다. 그믐날 약이 효과가 없어 부시시한 몰골로 다시 약국을 찾아 몸이 반응할 수 있는 처방을 요구했다. 약사도 어제밤 약을 사갈 때의 내모습과 다르다는 것을 확인했는지 효과가 남직한 약으로 조제해주었다. 자리보전하고 누워 있다 몸을 추스려 저녁늦게 본가로 향했다. 부모님은 아들의 쾌유를 위해 안방을 비워주고 당신들은 마루에서 주무셨다.
그러고도 마음이 써였는지 꼭두새벽 어머니께서 배와 생강을 삶아 우려낸 물을 주셨다. 역시 어머니시다.
설날
권영우
뒤뜰 청솔 더미에서 목욕한 해묵은 석양이 동쪽 하늘 붉은 때때옷으로 치장하고
대청마루에 새해 복(福), 한 광주리 걸어 놓는 다
날마다 맞이하는 무덤덤한 햇살이
오늘 아침은 가난한 가슴에 부푼 꿈을 가득가득 안겨온다
섣달그믐 묵은 때를 열심히도 벗기시던 어머니는
밤새도록 지극 정성 차례상을 준비하셨다
설빔하는 어머니 무릎에 누워 자지 않으려 용쓰다 깜박 잠든 새해 새 아침
설날 어둑새벽 개구쟁이 동생이 찬물에 세수하고 할아버지 할머니께 넙죽 세배를 드린다
큰 누나가 지어준 색동 주머니에
깜박깜박 하시는 할머니의 손때 묻은 무지개 알사탕이
주머니를 두둑하게 채우는 오늘은 설날이다
소식 없는 대처의 둘째형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애끓는 정성이 담긴 떡국 한 그릇
삼신할미에게 공양 되는 오늘은 설날이다
동네 어귀를 들어오지 못해 망설이던
떠돌이새가 하얀 눈밭에 걸린 청솔가지에서 밤새 울다가,
일 년 365일 눈물로 지새운 어머니
치마폭에 용서를 비는 오늘은 설날이다
그렇다, 먹지 않아도 배부르고
모든 걸 용서해주고 용서받고
그리운 가족 사랑을 주고받으며
정겨운 희망의 닻을 올리는 오늘은 설날이다
시집『하루걸이』(그림과책, 2006)
먼동이 틀 무렵 새벽 어머니 늘 하시듯 신주단지에 정한수 바치고 가까운 조상님들께 떡국을 올렸다.
설전날 음식준비로 고단했던 아내는 두 정거장 거리에 있는 집에서 휴식을 취하고 아침 일찍 와서 차례상을 준비했다. 앞서 세배를 드리는 큰아들과 아내, 며느리로서의 역할이 크고 과하다만 묵묵히 치루어 낸다. 그런 아내에게 늘 고마움을 느끼지만 종내 음식의 마무리는 어머니가 하신다는 것도 안타깝다. 예컨데 아내는 열 시경이면 집으로 가서 쉬지만 어머니는 밤 늦도록 나머지 준비해야 할 음식을 마무리하시기 때문이다. 먼 훗날 언제인가 어머니 가시고 아내가 어머니 자리를 대신할 때, 아내도 어머니처럼 저럴까 문득 긍금해졌다.
친척들의 방문이 마무리 될 즈음 산책을 나섰다.
문현동 해안사에서 이 절의 창건이야기를 들었다. 40년 전 황령산 코굴 위에 해안사의 원터가 있었다. 40여 년 만에 요사채며 종각 종무소를 준 어엿한 절집으로 발전했다. 40년전이라면 1970년대 초쯤 될려나 ... 이 골짝에 집이라고는 서너채,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던 스님은 절집 앞은 죄다 논밭이었다고 했다.
40년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 허나 이 도시는 겨우 기억할 수 있는 산봉우리 몇 개만 남겨둔 채 다 바뀌었다. 나 또한 이 골짝에 깃든지 오래이다만 변화를 다 기억해내지 못한다. 순식간에 변했다고나 할까. 부대를 가로지르던 물길이며, 그 물길따라 부대가 떠난 뒤 이골짝의 가난한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부대가 남기고 간 고철수집에 북새통을 이루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날인가 불도저가 사방에서 보이더니 주택가가 형성되었고, 어느날인가 시내버스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80년대 중후반부터는 아파트들이 들어섰다. 그리고 90년대를 지나면서 아파트들은 고층화되면서 낯선 곳처럼 변해버렸다.
스님 말에 의하면 해안사 앞집은 염소막이었다고 한다. 도로 아래 성냥갑같은 빌라들 옆 슬레이트집은 살기 위해 무작정 이골짝으로 찾아든 사람들의 흔적으로 마을에는 아직도 우물터가 있다고 했다. 내 기억 속의 이 동네는 90년대 초 강하게 각인되어 있다. 현대아파트 2차가 들어서면서 언덕배기에 살던 세입자들의 권익을 위해 대책위 활동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최후까지 남은 사람들도 결국은 어찌해 볼 방도가 없어 서푼 보상으로 떠나갔지만 그들과 같이 했던 시간은 또렷하다. 당시 공추협(환경운동연합의 전신)에서 선전부장으로 일 할 때 였다. 공추협 일도 많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현장이었기에 스스로 찾아갔더니 다른 분야에서 활동중인 후배들이 반겨주던 기억도 생생하다.
문현동 세대위
백이십 가구에서 칠십 가구로
칠십 가구에서 사십가구로
사십가구에서 열두 가구로
열 두 가구에서 아홉가구로 버틴지 일년
두 명이 죽고 한 명이 구속되었다
어쩌다 거리에서 만나는 떠난 사람들
고개를 들지 못하고
떠날 수 밖에 없었다며
이런 저런 변명을 하지만
한 번도 욕하거나 비난할 수 없었다
다시 만날 수 밖에 없는
이 도시의 가난한 유민들기에 (1992)
용대장 2
협상론이 다시 고개를 들고
주민들의 눈치를 살필 무렵
위원장을 제외한 집행부 일부의 행방이 묘연했다
다저녁 박영감이 소식을 물어 왔다
김씨 구멍가계에서 대포 한잔 걸치자니
전에 없이 친근한 태도로
자기도 문현동 사람이라며
문현1파 상록회 권형사가 넌즈시 알려주는 말
집행부가 미림사람들과 만나고 있다고
의심스런 제보였지만 근거있는 말에
분노한 주민들 다독거려 진정시키고
조심스런 확인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윽고 늦은 밤 술에 만취되어 돌아 온 이씨, 최씨, 차씨
다그쳐 묻는 말에 횡설수설 어긋나는 정황들
그때 침묵을 지키고 있던 용대장
조방앞 석화그릴에서 미림상무와 만났다고
액수를 제시하며 협조해달라고 노골적으로 말 할 때
그래는 못한다고 버티다가 1차 2차 3차
취하도록 마시고 이제사 왔다고
그리곤 영 떠난간 사람 (1991)
봄이 오면 해안사 뒷편 대숲에 오동꽃이 필 것이다. 그 봄을 기다린다. 그 전에 해결해야 할 것이 많다. 매듭짓지 못한 것들은 언제나 시방처럼 발목을 붙집는다. 편두통에 감기몸살이 온 것은 매듭을 짓는 과정이 너무 피곤해서 일 것이다. 대개 이맘때면 사업 계획으로 빠쁠 시기이건만 아직도 2013년 보고서를 정리하다 보니 몸과 마음이 지쳤다고나 할까. 사실 이런 적은 올해가 유일하다. 더는 되풀이 하고 싶지 않다. 다 내 부족에서 비롯된 일이다 여기고 이를 앙 다문다.
다저녁 처가집으로 향했다. 아내는 중고차가 고장이 날까봐 걱정하기도 했지만 별 탈없이 도착할 수 있었다. 사실 신정때 차를 교체하는 것을 심각히 고려했다. 잦은 고장이 날 정도로 차가 노후됐기 때문이지만, 다시 차를 구입할 여유가 안되다 보니 생각 뿐이다. 그런 현실에 아내는 갑갑해하고 ... 그런 현실에 부응하지 못하는 나도 피곤하고
이런저런 걱정 또 양가 어른들께 자식된 도리로서 제대로 해드리지 못하는 것이 가슴 이프다. 특히나 명절이면 그 괴리감은 더욱 커진다. 공익과 대의를 위해 헌신?하는 삶은 왜 불우해야만 할까. 그 문제가 내게만 국한되지 않고 가족의 희생을 덤으로 강요하는 현실 앞에 너무도 무력할 뿐이다.
물가에 선 버드나무처럼 살려고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 내가 행복해야 한다고 했는데 나는 행복하지 못하다.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 나는 뭘 해야 하는가
처가집 논이다. 곤포사일리지 따위는 없다. 물가에 오리류들이 언제든지 날아와 낱알갱이를 주워 먹을 수 있다. 안타깝게도 건너편 고수부지가 무선비행기 마니아들의 놀이터가 된 이후 새들이 잘 깃들지 않는다. 처남들의 기억에 따르면 겨울이면 새떼로 바글거렸다고 했든가. 죄송스러운 일은 이 논에서 거둔 쌀로 우리 네식구 일년을 지내지만 제대로 고마움을 표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고작 한다는 말이 애들 밥 먹을 때 이 쌀이 할아버지 노고로 먹는 밥이기에 밥알 흘리지 말것이며 밥알 남기지 말라는 훈계가 다 였다. 이제는 장인도 쇄잔하여 더는 농사를 짓기가 힘든 상황이다.
장인어른 전상서
세상 돌아가는 일이 뒤죽박죽인 세월에
어김없이 가을이 당도했습니다
당신이 흘린 땀방울이 그대로 대지에 스며들어
그 정성으로 나락꽃 피어 알이 여문 이 가을
들녁 가득한 금물결은 그저
바라만 봐도 배가 불러 옵니다
안타깝고 분한 일은
이 아름다움이 당신 혼자만의 것이 되어
더는 농사짓는 일이 못할 짓이라
담배 한 대로 풀어 내는 한숨이
저물녘 눈물나도록 슬픈일이 되었습니다
어쩌다ㅣ 이 지경이 되었는지
개망초, 달맞이꽃, 칡덤불 우거진 비탈의 묵정밭
이농(離農)의 폐가에 칭칭 드리운 거미줄
집도 사람의 온기를 나누어야 온전하거늘
평생을 허리 굽혀 가꾼 들이
쭉쟁이 처럼 버림받아 근심이 깊습니다
어둠 깊어 화포천은 흘러 바다로 가지만
정작 당신이 갈 곳은 더는 없어
망연히 어둠처럼 서 계신 당신
흙과 더불어 살아 온 지난 날
한번도 농사짓는 일이 대접받지 못했다는 사실 앞에
하마 화가 납니다. (이하 략-2004)
2010년 4월 초 이 철길 자갈밭을 개간하고 있던 할머니가 생각났다. 아직도 살아계실려나 궁긍했다.(녹나무 한 컷 78 /2010.4.12에서 옮김 ) 장인 생신 때였나 보다 . 아흔 셋 할머니니 한분이 폐선부지 자갈밭을 호미로 개간하고 계셨다. 흰민들레 같았다.
할머니 한분 만났습니다. 올해 아흔 셋, 김해 한림 금곡에서 생림 마사간 폐선 철도부지에 밭을 만들겠다고 자갈을 걷너내고 계셨습니다.
할머니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 뭐라고? 나이가 어떻게 되냐고요? 아, 구십 셋. 잘 안들려요. 뭘 심을려고 하세요? 깻잎 쪼매.
평생을 땅을 일구며 살아오신 할머니, 당신께서는 이 철도 폐선 부지를 놀려두는 것이 죄가 되나 봅니다. 당신의 영토입니다.
이 봄날 조선 민들레 한 송이, 그 끈길긴 생명, 다시 생각합니다.
철길 아래 골 안마을, 아침저녁으로 밥짓는 연기가 자욱했을 것이다. 난방과 취사가 더이상 나무 땔감을 사용하지 않다 보니 더는 볼 수 없는 풍경이 되었다.
그 길에 있는 작은 닭장 속 계란들, 전북 고창에서 시작된 AI가 전남 해남, 부안, 나주를 비롯해 충남 천안과 경기 안산의 시화호 등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양성 판정이 난 지역의 농가에서 살처분되고 있는 수백만 마리의 오리와 닭들을 생각했다. 탐욕의 결과다. 더많은 수익과 더많은 육류를 먹기 위한 탐욕이 만들어 낸 결과가 조류인플루엔자 아니든가 .
처가집 와서 몸 추스리고 했던 산책은 이렇듯 많은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살 것인가.
부산으로 출발하기 전 처가집 마당에서 바라 본 화포천, 화포천의 중상류에 고 노무현 대통령의 생가가 있는 봉화마을이 있다. 얼마전 개봉한 영화 <변호인>이 천만을 넘었다고 했든가. 부림사건을 토대로 1980년대를 비춘 영화다. 대통령이 되기 전 잘나가던 세무 변호사로서의 노무현이 시국사건을 맡으며 변혁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내용이다. 천만명이 이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감동, 그 다음은 뭐가 되어야 할까. 강물은 쉼없이 흐르는데, 그 도도한 흐름을 거스르고 거부하는 졸열하고도 더러운 입들이 마구 떠들어 댄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거짓에 놀아나는 사람들이 퍼붓는 증오에 가까은 악담을 이제는 그만 듣고 싶다.
T.Badarzewska (1834~18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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