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작 엎드리다 -나태주
어머니 친상을 당해
찾아오는 손님마다 큰절을 드렸다
옛날 예법 그대로 미안하고
죄스런 마음에서 그랬을 것이다
처음엔 머리를 바닥에 조아리긴 했지만
궁둥이를 조금 들고 큰절을 했다
자세도 불편하고 마음도 불편했다
보는 사람들도 그랬을 것이다
왜 사람은 절을 할까?
나는 당신의 적수가 아닙니다
나는 당신에게 이미 졌습니다
나는 온전히 나를 내려놓습니다
그런 뜻으로 절을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하다
절을 하는 동물은 인간밖에는 없다
생각 끝에 궁둥이를 더욱 내리고
납작 엎드려 절을 하기로 했다
마음이 점점 편해지기 시작했다
될수록 납작 엎드려 절을 드려라
그것이 사는 길이고 이기는 방법이란다
어머니 가시는 마당에 한 수
가르쳐주고 가셨다.
귀가 예쁜 여자 -나태주
맞선을 본 처녀는 별로였다
살결이 곱고 얼굴이 둥글고
눈빛이 순했지만
특별히 이쁜 구석이라고는 없었다
두 번째 만나던 날
시골 다방에서 차 한 잔 마시고
갈 곳도 마땅치 않아
가까운 산 소나무 그늘에 앉아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산길을 내릴 때
앞서가는 처녀의 뒷모습
조그맣고 새하얀 귀가 예뻤다
아, 귀가 예쁜 여자였구나
저 귀나 바라보며 살아가면 어떨까?
그렇게 살아, 나는 이제
늙은 남자가 되었고
아내 또한 늙은 아낙이 되었다.
[시집] 어리신 어머니 / 나태주 시인|작성자 공시사
네가 사는 세상이 좋아/너를 생각하는 내가 좋아/내가 숨 쉬는 네가 좋아.--- 본문 중에서
지금은 또다시 저녁/어둠이 우리의 피곤한 몸과 마음/감싸 안아 쉬게 한다/쉬어라 쉬어라 타일러준다/밤이 가면 다시금/해가 뜨고 새 아침/다시 잠에서 깨어 배를 타고/세상 깊숙이 떠나야지/그것이 오늘은 옹색한 대로/우리의 소망이고 꿈이다.--- 본문 중에서
다만 세상 한 귀퉁이/내가 좋아하는 한 사람/아직도 숨을 쉬며 살아 있음만/고맙게 여기며/아침과 저녁을 맞이하고 싶다.--- 본문 중에서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너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다시 한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어딘가 네가 모르는 곳에/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 쉬고 있는/나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다시 한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 본문 중에서
스스로 편안해져라/너 자신을 쉬게 하고/위로하고 기꺼이 용서하라/지난여름은/또다시 싸움판/힘든 날들이었다--- 본문 중에서
꽃은 나무나 풀에만/피는 것이라고 말했다/아이들은 아니라고 그랬다/사람도 꽃그림에 들어 있는/옷을 입으면 사람에게도/꽃이 피는 것이고/예쁜 여자아이/두 볼이 빨개지면/그것도 꽃이 된다고/그랬다--- 본문 중에서
지금껏 우리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보다는/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에 목을 매고 살았다/기를 쓰고 무엇인가를 이루려고만 애썼다/명사형 대명사형으로만 살려고 했다--- 본문 중에서
세상 사람들/힘들고 고달픈 마음/쓰다듬어주는/감정의 서비스 맨--- 본문 중에서
오늘 나는 많이/네 목소리가/듣고 싶었다//들릴 듯/들리지 않을 듯//지구 혼자/돌아가는 소리가/문득 궁금해졌다.--- 본문 중에서
바람이 있었던 거야/무엇보다 먼저 부드럽고/향기로운 바람이 있었던 거야--- 본문 중에서
쓸쓸해져서야/보이는 풍경이 있다/버림받은 마음일 때에만/들리는 소리가 있다 --- 본문 중에서
가랑잎처럼 가벼운 숲 -허형만
숲길 누리장나무 아래
검정 상복을 입은 개미들이
참매미의 장례식을 치르고 있다.
이미 여름은 끝났는데
한순간의 작렬했던 외침은
지금쯤 어느 골짜기를 흘러가고 있을까.
오후 여섯 시, 햇살이 서서히 자리를 뜨는 시간
부전나비 한 마리
누구 상인가 하고 잠시 기웃거리다 떠나가고
이제 곧 가을이 깊어지리라.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게
숲을 끌고 가는 개미들의 행렬
숲은 가랑잎처럼 가볍다.
미세먼지와의 전쟁-김중일
ㅡ 무명시인
지난밤에 끄지 않은 텔레비전에서 환경부 장관이 나와 아침부터 미세먼지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허상과의 전쟁이다. 굳이 말한다면 스스로와의 싸움이랄까.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난 너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말했다. “밤사이 지구가 12센티쯤 풀썩 내려앉았어.” 왜 12센티냐는 물음에는 명확한 증거는 제시하지 못하겠는지, 너와 나의 키 차이, 라며 얼버무렸다. 그러나 무척 진지한 표정에 나는 믿기로 했다. “건물이 조금씩 무너질 때 구석구석 켜켜이 스며들어 쌓여 있던 묵은 먼지들이 피어오르잖아.” 알기 쉬운 예를 들며, 너는 단호히 이 미세먼지의 이유가 바로 지구가 조금씩 내려앉고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심각한 상황이라고 했다. 이제 나도 잠을 자기 무섭다. 지구가 또 12센티쯤 내려앉을까 봐. 물론 하루에 12센티쯤의 속도로 바닥에 완전히 떨어지기까지 충분한 시간이 남아 있을 것으로 추정되나, 솔직히 알 수 없다. 멸망의 이유가 이 한 가지만은 아니지만, 당장 지구가 털썩, 털썩 내려앉을 때마다 피어오르는 이 미세먼지는 어쩔 것인가. 짧더라도 공기처럼 투명하게 살고 싶다는 너와 나의 바람은 어쩔 것인가. 그것은 문제였다. 우리는 게릴라 잔당처럼 낙오한 민병처럼 또는 배고픈 용병처럼 약속이나 한 듯 거리로 나왔다. 혹시나 미세먼지로 가득한 공중을 피해 땅바닥을 뚫고 날아가려다 정신을 잃은 새가 없는지 찾았다. 온종일 한 마리도 발견하지 못하고 쓸쓸히 귀가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지구상의 새―정확히는 지구처럼 둥근 알을 깨고 태어난 사실상 모든 족속들, 그중에 특히 새―를 지구 속으로 되돌려 보내야 지구가 간신히 우주에 부유할 수 있다. 훨훨 하늘을 날아다녔던 새를 땅에 보내 다시 생전만큼 날아다니게 하면, 지구는 꼭 그만큼의 부력을 유지하게 된다. 지상으로 나온 생명들보다 땅에 묻힌 수가 적으면, 지구는 그만큼의 부력을 잃고 조금씩 떨어지게 된다는 허상에 가까운 이야기로,
며칠째 허탕을 치고 돌아와 너는 시를 한 편 쓰고, 이면지에 출력해서 다음 날 새벽 해가 뜨기 전 화단에 묻었다. 온전한 새 한 마리를 대신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하지만, 깃털 하나만큼이라도 시간을 벌기 위해서다. 그것도 모르고 지구의 독자들은 참 속 편하게 먹고 자고 싸우며 살 것이다. 자욱한 미세먼지 속에서 서서히 훈제되며 아무것도 모른 채. 지구가 여전히, 겨우 떠 있는 이유와 그 부력의 근원에 대해, 차라리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은 채.
마당의 풀을 뽑다 -이상국
1908년 옥천에서 태어난 김기림은
도호쿠 대학을 나와 시인이 되었다
바다를 청보리밭으로 알았다거나
무슨 산맥들이 아라비아 옷을 입었다든지 하는
구라파 풍의 시를 남기고 북으로 붙들려 갔다
같은 해 양양에서 태어난 나의 아버지는 시골 유생으로
필사본 만세력과 주역을 가지고 담배벌이를 하거나
비오는 날 공회당에서 자아비판을 했고
세필 끄트머리에 침을 발라가며
나에게 축문 쓰는 법을 가르쳤다
김기림은 북조선에서 인민으로 죽었고
아버지는 수복지구에서 촌부로 생을 마치는 동안
자빠지고 엎어지고 그 사이가 백년이 넘었다
시인은 넘쳐나고 노래는 많아도
아버지가 부르던 학도가를 나는 지금도 부른다
사회진보 깃대 앞에 개량된 자 임무가 중하다지만
봄은 짧고 나라는 힘이 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인민은 죽어나고
그렇게 개고생한 아버지들은 가고
아무것도 아닌 아들만 남았다
북에 있는 김기림의 아들은 뭘 하며 사는지
며칠째 미세먼지가 하늘을 뒤덮은 날
마당의 풀을 뽑다가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지금 가슴에 품고 있는 시는 무엇인가요?
저자 : 김선경 (엮음) 30년간 글을 쓰고 책을 만든 출판 에디터. 월간 [좋은생각], [좋은친구], [행복한동행], [문학사상] 등 월간지와 단행본을 두루 만들었다. 직접 쓴 책으로는 20만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서른 살엔 미처 몰랐던 것들》이 있고, 이근후 이화여대 명예교수를 인터뷰해 그의 철학을 글로 풀어 낸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는 40만 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또 세계적인 심리학자 타라 브랙의 《자기 돌봄》의 엮은이로 참여했다.
어려서부터 잠이 많은 아이였다. 초저녁에 잠들어 남들 다 자는 새벽에 홀로 일어나면 하릴없이 다락방에 올라가 아버지가 헌책방에서 사다 준 김소월과 윤동주의 시집을 뒤적이곤 했다. 자잘한 고뇌들로 적당히 외롭던 학창 시절, 문예지에 실린 ‘이 달의 신작시’와 랭보, 예이츠, 헤세, 김지하의 시를 편지지에 베껴 친구와 나누며 막막한 마음을 달랬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으나 단지 책이 좋아 잡지사에 자리를 얻었다. 사장 부부와 직원 두 명, 넷이서 시작한 잡지가 월 발행 부수 백만 부를 돌파할 때까지 열심히 만들었다. 매달 천여 명의 독자가 보내오는 편지 사연을 읽으며 삶이 때때로 시보다 아름다울 수 있음을 깨달았다. 또 달마다 다섯 편의 시를 잡지에 싣기 위해 심마니의 심정으로 시를 찾아 읽고 고르면서 마음 돌보는 법을 배웠다. 그래서일까. 퇴직을 하고 의기양양하게 시작한 잡지사가 경영난으로 문을 닫을 때에도, 또 아이가 아파 우울과 자책의 나날을 보낼 때에도, 순간순간 ‘아, 힘들다’ 소리가 나올 때마다 어떤 시의 한 문장을 떠올리며 힘을 내곤 했다.
‘하늘의 별을 바라보게 하고 발밑의 꽃을 잊지 않도록 하는 것’이 시가 가진 힘이라고 그는 믿는다. 그동안 가까이 곁에 두고 읽어 온 시들을 묶어 보기로 한 데는 ‘누구나 나처럼 가슴속에 넣어 둔 시 한 편 있다면, 그 시를 모두 꺼내 놓고 함께 읽으면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면서다. 삶의 고단함이야 서로 뻔히 아는 것, 나는 이렇게 살아왔노라 대신 나는 이런 시를 읽어 왔다고 고백한다면 좀 멋지지 않을까. 스물의 시, 서른의 시, 마흔의 시…. 저마다 시 이력서를 만들어 가면 좋겠다는 상상도 해 본다. 시인을 대접하고 시를 읽는 마음을 귀하게 여기는 세상을 꿈꾼다.
누구에게나 삶은 어렵고 힘들다. 별일 없어 보이는 사람도 늘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각자 견디며 살아가고, 나 역시 망설이거나, 피하거나, 참거나, 아주 조금 용기를 내면서 그 시간들을 지나왔다. 그 삶의 갈피마다 나에게는 시가 있었다. 시는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나의 어설픈 욕망들을 이해해 주었고, 괜찮은 척했지만 괜찮지 않았던 나의 모멸감을 달래 주었다. 그리고 뜻대로 풀리지 않은 일에 화가 날 때 나를 다독여 주었고, 인정받기 위해 기를 쓰는 나에게 너무 애쓰지 말라 위로해 주었다.
--- 「프롤로그」 중에서
정말 그럴 때가 있을 겁니다. 어디 가나 벽이고 무인도이고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겁니다. 그런 때에는 연필 한 자루 잘 깎아 글을 씁니다. 사소한 것들에 대하여, 어제보다 조금 더 자란 손톱에 대하여, 문득 발견한 묵은 흉터에 대하여. --- 「정말 그럴 때가, 이어령」 중에서
그때, 나는 묻는다. 왜 너는 나에게 그렇게 차가웠는가. 그러면 너는 나에게 물을 것이다. 그때, 너는 왜 나에게 그렇게 뜨거웠는가. --- 「고마웠다, 그 생애의 어떤 시간, 허수경」 중에서
사십대 들녘에 들어서면 땅바닥에 침을 퉤, 뱉아도 그것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안다. 다시는 매달리지 않는 날이 와도 그것이 슬픔이라는 것을 안다.--- 「사십대, 고정희」 중에서
울지 말게. 다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어. 날마다 어둠 아래 누워 뒤척이다, 아침이 오면 개똥 같은 희망 하나 가슴에 품고 다시 문을 나서지. --- 「소주 한잔 했다고 하는 얘기가 아닐세, 백창우」 중에서
주변에도 시름시름 아픈 사람들이 많다. 이런 저런 이유로 아파 죽음까지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나는 하나도 아프지 않다. 직장도 잘 다니고 아부도 잘 하고 돈벌이도 아직 무난하다. 내가 병든 것이다. --- 「병, 공광규」 중에서
함부로 상처받지 않겠다. 목차들 재미없어도 크게 서운해하지 않겠다. 너무 재미있어도 고단하다. 잦은 서운함도 고단하다. 한계를 알지만 제 발목보다 가는 담벼락 위를 걷는 갈색의 고양이처럼 비관 없는 애정의 습관도 길러보겠다.
--- 「오늘의 결심, 김경미」 중에서
고독하다는 건 아직도 나에게 소망이 남아 있다는 거다. 소망이 남아 있다는 건 아직도 나에게 삶이 남아 있다는 거다. 삶이 남아 있다는 건 아직도 나에게 그리움이 남이 있다는 거다.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건 보이지 않는 곳에 아직도 너를 가지고 있다는 거다.--- 「밤의 이야기 20, 조병화」 중에서
육교 아래 봄볕에 탄 까만 얼굴로 도라지를 다듬는 할머니의 옆모습이 나를 멈추게 한다. 굽은 허리로 실업자 아들을 배웅하다 돌아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은 나를 멈추게 한다. 나는 언제나 나를 멈추게 한 힘으로 다시 걷는다.
---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 반칠환」 중에서
매일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이렇게 말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눈이 보인다. 귀가 들린다. 몸이 움직인다. 기분도 그다지 나쁘지 않다. 고맙다! 인생은 아름다워.--- 「인생은 아름다워, 쥘 르나르」 중에서
삶이 쓸쓸한 여행이라고 생각될 때 터미널에 나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싶다. 짐 들고 이 별에 내린 자여, 그대를 환영하며 이곳에서 쓴맛 단맛 다 보고 다시 떠날 때 오직 이 별에서만 초록빛과 사랑이 있음을 알고 간다면 이번 생에 감사할 일 아닌가. --- 「발작, 황지우」 중에서
'시(詩) > 괜찮은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화엄에 오르다 外 (0) | 2020.09.01 |
---|---|
가을 저녁의 시 -사랑 혹은 그리움 (0) | 2020.09.01 |
그리움 (0) | 2020.08.11 |
수몰 지구-전윤호 外 (0) | 2020.07.19 |
시인은 모름지기 (0) | 2020.05.05 |